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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초 만난 서남해안 갯벌 유네스코 등재

고창부안지역의 곰소만과 신안군 도서 일대 갯벌의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등재 추진이 암초를 만났다. 부안군, 전남 여수고흥보성 주민들이 어로활동 제한 등을 이유로 거세게 반발하고 있는 가운데 등재 예정 갯벌 면적이 대폭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면서다. 11일 전북도에 따르면 최근 부안군이 곰소만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하는 데 반대 입장을 밝혔다. 또 세계자연유산 등재를 함께 추진하고 있는 여수, 보성, 고흥 지역에서도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반면 고창, 전남 순천신안, 충남 서천은 세계유산 등재에 적극 찬성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남해안 갯벌의 세계자연유산 등재는 곰소만 갯벌(고창부안), 다도해 갯벌(전남 신안), 여자만 갯벌(전남 여수순천고흥보성), 유부도 갯벌(충남 서천) 등 3개도 8개 시군에서 공동으로 진행했던 사업이다.하지만 내륙권에 있는 자치단체 4곳이 반대 의견을 내놓음에 따라 등재 예정 면적이 대폭 줄어들었다. 반대 지역의 갯벌 면적은 85.8㎢로 전체 면적 중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먼저 세계자연유산으로 선정된 독일의 와데네 갯벌이 우리나라 서해 면적만큼의 크기임을 감안하면 서남해안 갯벌의 등재에 난항이 예상되는 대목이다. 문화재청은 섬 갯벌 지역을 먼저 등재 추진 대상지로 결정하고 만갯벌(곰소여자만) 지역은 1년 동안 유예기간을 두고 반대여론을 설득한다는 방침이나 면적이 대폭 축소되면 세계유산 등재는 어렵다는 게 전북도의 설명이다. 전북도 관계자는 "유네스코에서 세계유산을 평가할 때 중요한 항목 중 하나가 진정성이다. 현재 곰소만을 품고 있는 고창과 부안의 입장이 달라 한 쪽 지역만 등재를 추진할 경우 유네스코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면서 "더욱이 전남권에서도 반대하는 지역이 많아 이들 지역을 설득하지 않으면 사실상 등재 추진은 어렵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다양성과 경관면에서 세계적으로 고유한 가치를 인정받은 서남해안 갯벌은 지난 2010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됐고, 이듬해 문화재청은 이곳을 세계유산 우선 추진 대상으로 선정했다. 지난 5월에는 문화재청과 전북, 전남, 충남이 등재 추진과 관련해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오는 2017년까지 등재를 목표로 사업을 진행했었다.

  • 문화재·학술
  • 김정엽
  • 2013.09.12 23:02

직지사 사천왕상 조성연대와 실체 판명 의미

불교에서 사천왕(四天王)은 불국토라는 세계의네 방향인 동서남북을 분담해 지키는 네 호법신이다. 현재 한국, 중국, 일본 불교 사찰을 보면 그 구역 전체는 불국토에 비유되며,그 한복판에 부처가 자리하는 대웅전이나 극락전 등이 있다. 불교의 이상적인 관념에 따르면 사천왕은 사찰 구역 네 방향에 각각 자리해야하지만 실제는 그러지 못해 거의 예외 없이 입구를 지나서 대웅전으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 잡는다. 사천왕을 봉안한 건물이 천왕각(天王閣)이다. 이 천왕각 안 양쪽편에 불국토 사방을 관장하는 네 천왕이 적절한 방위를 차지한 채 서 있다. 이들 사천왕은 공통점이 있다. 무엇보다 인상이 험악하기 짝이 없으며, 발아래에는 악귀를 짓누르는 자세를 한다. 하지만 사천왕별로 차이도 엄연히 존재한다. 그런 차별성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대목이 지물(持物)이라고 해서 그들이 휴대하는 물건이 각기 특징이 있다는 점이다. 요즘 한국 사찰 천왕문의 사천왕상 앞에는 대체로 이름이 걸려 있다. 사찰 참배객들이 헷갈려 할까봐서다. 이들 명패를 보면 비파를 타는 천왕을 동방지국천왕(東方持國天王), 칼을 든 천왕은 남방증장천왕(東方增長天王), 용과 여의주를 든 천왕을 서방광목천왕(西方廣目天王), 탑을 든 천왕을 북방다문천왕(北方多聞天王)이라고한다. 이런 도식이 자리 잡은 데는 통일신라 때 만든 석굴암 사천왕상이 결정적이었다.하지만 이런 도식이 잘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학계에서 끊이지 않았다. 특히 조선시대 사천왕상에는 이런 공식이 곳곳에서 파열음을 냈다. 그럼에도 이런 궁금증을속 시원하게 해결할 뾰족한 도리도 없었다. 현재 남은 사천왕상 중 대부분은 극심한복장(腹藏) 도굴로 그것을 만든 내력이라든가 개별 실체를 엿볼 만한 자료가 극히제한돼 있기 때문이다. 최근 김천 직지사 소조 사천왕상에 대한 해체 수리는 이런 궁금증을 일거에 해결했다. 복장 등을 조사한 결과 이들 소조상도 도굴 피해를 보기는 했지만 첫째, 종래에는 전연 알 수 없던 만든 시기와 만든 사람을 밝혀냈으며 둘째, 개별 사천왕이각각 어느 방위를 담당했는지를 밝혀주는 자료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우선 '서방천왕'(西方天王)이라는 묵글씨가 발견된 천왕상 내부에서 강희(康熙)4년(1665)에 작성한 '중창봉안기'(重創奉安記)가 나오면서 만든 시기가 밝혀졌다. 이 문서는 서방천왕상을 만들면서 그 내력을 적은 사천왕상 조성기(造成記)다. 더구나 만든 사람들은 '전라도 전주부 동쪽 종남산 송광사의 승려 화원'(全羅道全州府東終南山松廣寺居僧人畵員)들과 '전라도 전주 송광사 화원'(全羅全州松廣寺畵員)들로드러났다. 물론 사천왕상 중에서도 서방천왕상만을 이 무렵에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같이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사천왕상 조성 시기 확정은 불교미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다른 무엇보다 조선시대 사천왕상 제작 연대가 정확히 드러난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사천왕상 중에서 국가지정 문화재로는 보물 제1254호 장흥 보림사 목조 사천왕상, 제1255호 장흥 보림사 목조 사천왕상, 제1467호 순천 송광사 소조 사천왕상 등 3점이 있다. 이 중에서 보림사 사천왕상은 천왕문에 걸린 목판의 '보림사 천왕금강 중신 공덕기'(寶林寺天王金剛重新功德記)와 '보림사 중창 불사기록'(寶林寺重創佛事記錄)을보면 조선 중종 10년(1515)에 만들었다가 1666년과 1777년에 각각 중수됐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불교미술사학계에서는 이 사천왕상을 "지금까지 조사된 조선시대 사천왕상 가운데 조성년대가 가장 빠르다"고 해서 보물로 지정됐다. 하지만 두 차례 고친 일이 기존 사천왕상을 철거하고 새로 만든 사건을 지칭할 가능성도 있다. 완주 송광사 소조 사천왕상은 서방천왕 왼쪽 머리끝 뒷면에 있는 기록을 통해조선 인조 27년(1649)에 조성됐다고 하며, 순천 송광사 소조 사천왕상은 인조 6년(1628)에 다시 만들었다(重造)는 묵글씨가 있을 뿐 그것을 누가 만들었는지는 흔적이없다. 이런 현상이 빚어진 것은 현존하는 조선시대 사천왕상 대부분이 극심한 도굴로그 내력을 기록한 조성기가 대부분 도둑맞았기 때문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이번 직지사 사천왕상 조성기 출현은 그것을 만든 연대는 물론그것을 누가 만들었는지도 정확히 알려준다. 나아가 직지사 사천왕상은 논란이 끊이지 않는 사천왕의 실체에 대한 의문을 풀어준다. 이번에 이를 조사한 불교문화재연구소는 "조선후기 사천왕상의 방위 문제를 실증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자료"를 확보했다고 말했다. 이들 사천왕상은 나무 뼈대에 흙을 붙여 제작한 소조상(塑造像)이다. 한데 그내부 등을 살피는 과정에서 천왕상 머리 내부에서 '北方天王'(북방천왕)이라든가 '西方天王'(서방천왕)이라고 적힌 종이를 확인했는가 하면, 다른 사천왕상 몸체 내부에서는 '東'(동)과 '東南'(동남)이라는 묵글씨를 발견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이런 말이 적힌 소조 작품이 해당 방위의 사천왕임을 지칭한다. 이런 통해 이들 사천왕상이 제작된 17세기 무렵 불교계가 생각한 사천왕의 구체적인 면모가 드러났다. 종래 사천왕상은 그들의 지물로 구별했다. 비파를 타면 동방천왕, 칼을 들었으면 남방천왕, 용과 여의주가 있으면 서방천왕, 탑을 들었으면 북방천왕이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직지사 사천왕상에서는 지물과 묵서를 결합해 정리한 결과 비파를 타는천왕은 북방다문천왕(北方多聞天王), 칼을 쥔 천왕은 동방지국천왕(東方持國天王),용과 여의주를 든 천왕은 남방증장천왕(南方增長天王), 탑을 든 천왕은 서방광목천왕(西方廣目天王)임을 밝혀냈다고 연구소는 말했다. 석굴암에서 보는 사천왕상하고는 많이 다르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불교미술사 전공인 강희정 서강대 동아연구소 교수는 "이번 직지사 사천왕상을보면 북방천왕이니 서방천왕이라고 해서 각 방위에 해당하는 천왕만 밝혔을 뿐 그들이 곧 다문천왕인지, 지국천왕인지, 증장천왕인지, 혹은 광목천왕인지는 확실히 알기는 어렵다"고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강 교수 "이번 직지사 사천왕상 조사를 통해 17세기 불교계가 생각한 사천왕의 개별 실체가 드러난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불교미술계의 획기적인 성과"라고평가했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13.09.09 23:02

김천 직지사 사천왕상은 1665년 전라도 장인들이 조성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경북 김천 직지사(直指寺. 주지 흥선스님)의 소조 사천왕상은 조선 현종 6년, 1665년에 전라도 장인들이 만든 것으로 밝혀졌다. 이런 사실은 최근 직지사가 훼손이 극심한 사천왕상과 그것을 보호하는 건물인천왕각(天王閣)을 수리하기에 앞서 불교문화재연구소(소장 각림스님)에 의뢰한 사천왕상에 대한 정밀학술조사 결과 드러났다고 연구소가 9일 말했다. 이번 조사 결과 서방천왕상 내부에서 강희(康熙) 4년(1665)에 이 불교조각을 만들면서 그 내력을 적은 조성기(造成記)가 발견됐다. 나아가 그 내부에서는 '전라도 전주부 동쪽 종남산의 송광사에 거주하는 승려화가들이 와서 이를 만들었다'는 내용의 '全羅道全州府東終南山松廣寺居僧人畵員來造成之也'라는 문구와 함께 '전라도 전주의 송광사 화원들이 을사년 3월에 칠(혹은진흙)을 발랐다'는 뜻을 지닌 '全羅全州松廣寺畵員乙巳年三月日塗作也'와 같은 문구가 적힌 여러 문서가 같이 발견됐다. 을사년은 1665년이다. 연구소는 이들 문서를 통해 "직지사 사천왕상이 1665년에 제작되었다는 사실과함께 작품 제작에 전라도 완주 송광사의 조각승이 참여한 사실을 알려준다"면서 "이는 호남의 조각승이 영남지역으로 진출해 불상을 제작한 과정을 알려 주는 것으로조선후기 조각승들의 활동 영역을 비롯한 불교미술 연구의 폭을 확대시켜 줄 자료로기대된다"고 평가했다. 또한 천왕상 머리 내부에서는 '北方天王'(북방천왕)과 '西方天王'(서방천왕)이라는 글자가 적힌 종이가 발견되고, 이들의 몸체 내부와 복장 마개에서는 동쪽과 동남쪽 방향을 의미하는 '東'(동)과 '東南'(동남)이라고 적은 묵글씨도 발견됐다. 이런 묵서 내용을 종합해 보면 지금의 직지사 소조 사천왕상 중에서도 비파를타는 천왕(天王)은 북방다문천왕(北方多聞天王)이며, 칼을 쥔 천왕은 동방지국천왕(東方持國天王), 용과 여의주를 든 천왕은 남방증장천왕(南方增長天王), 탑을 든 천왕은 서방광목천왕(西方廣目天王)임을 알 수 있다고 연구소는 덧붙였다. 연구소는 "이번 사천왕상 조사에서 사천왕이 차지하는 각 방위를 기록한 자료는4개 천왕상 중에서 3구에서 확인됐다"면서 "이는 조선후기 사천왕상이 통일신라 사천왕상과는 다른 도상과 방위를 갖추고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로 주목된다"고 말했다.사천왕(四天王)은 불교의 삼보(三寶, 부처부처의 가르침승려)를 수호하는대표적인 호법 방위신이라 해서 사찰 입구에 세운 천왕문(天王門)에 그 상을 만들어불국토의 동서남북을 방어하는 징표로 삼는다. 지금까지 사천왕은 통일신라 석굴암 사천왕상을 기준으로 삼아 비파를 타는 천왕은 동방천왕, 칼을 든 천왕은 남방천왕, 용과 여의주를 든 천왕은 서방천왕, 탑을든 천왕은 북방천왕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최근 불교학계에서는 과연 이런 도식이맞는지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이번 직지사 소조 사천왕상에서 17세기 무렵 방위별 사천왕의 실체가 전모를 드러냈다. 불교미술사 전공인 강희정 서강대 동아시아연구소 교수는 "조선시대 사천왕상중에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그것을 명확히 알려주는 자료가 발견됐다는 점에서 이번 조사성과는 불교미술사의 획기적인 성과로 본다"면서 "같은 17세기에 만든 순천 송광사 사천왕상이 보물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직지사 사천왕상은 그와 같은 보물급, 혹은 그 이상의 가치는 지니는성보문화재임이 확실하다"고 말했다. 직지사는 이들 자료를 추후 진행할 소조 사천왕상 보수와 복장(腹藏) 재납입의기초 자료로 활용할 예정이다. 이번 발굴 조사를 계기로 직지사 사천왕상에 대한 보물 지정 절차가 속도를 낼것으로 전망된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13.09.09 23:02

'후백제 왕도 전주' 시민강좌 ① 진훤왕은 누구인가

후백제의 역사가 객관적인 평가를 받지 못하면서 그에 비례해 후백제의 수도였던 전주도 역사의 뒤켠으로 물러나 있다. 전주시와 전주역사박물관(관장 이동희)이 지난 7일 시작한'후백제 왕도 전주'를 주제로 제12기 전주학 시민강좌를 꺼낸 배경이다. 본보는 견훤과 후백제에 대한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고 왕도(王都) 전주로서의 자긍심을 되찾는 계기가 될 수 잇도록 다음달 2일까지 8주간 매주 토요일 전주역사박물관에서 진행될 이번 시민강좌 내용을 7차례에 걸쳐 요약해 연재할 계획이다.후백제를 세운 진훤(甄萱)의 이름은 현재 '견훤'으로 읽혀지고 있다. 옥편을 찾아 보면 '질그릇 甄'에는 '견' 혹은 '진'으로 발음이 된다. 그런데 조선 후기의 대표적 역사학자인 홍여하와 안정복은 '동사제강'과 '동사강목'에서 후백제 시조왕의 이름을 '진훤'이라고 읽었다. '증보문헌비고'와 '전운옥편'및 '완산견씨세보完山甄氏世譜'에서도 이와 동일하게 읽었다. 구한 말 국사 교과서에서도 '진훤(헌)'으로 표기했다. 그 밖에 역사학자 이병도(李丙燾) 등의 저작물을 비롯하여 민족문화추진회 국역본에 이르기까지 모두 '진훤'으로 표기하였다. 그럼에도 언제부터인지 교과서를 위시하여 모두 '견훤'으로 표기하고 있지만 터무니없는 잘못이다. 진훤은 지금의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아차 마을 '갈전 2리'에서 가난한 농민의 맏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백제 유민의 후예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한 진훤이 향리를 떠나 군에서 복무했던 곳은 필자가 최초로 밝혔듯이 지금의 전라남도 순천만 일대였다. 진훤은 순천의 해룡산성과 동일한 지형구인 광양의 마로산성 일대에서 해적들을 소탕하는데 발군의 전공을 세웠다. 마로산성에서는 신라가 일본에 수출하던 동경(銅鏡) 뿐 아니라 남중국의 청자와 백자, 그리고 당나라 동경까지 출토되었다. 이러한 물증은 장보고 사후 50년만에 등장한 진훤의 서남해안 해상권 장악을 시사해준다. 진훤이 전주(全州)로 정도(定都)한 900년에 항주(杭州)에 도읍한 중원의 약소국인 오월국(吳越國)에 신속하게 사신을 파견한 것도 해상제해권 장악에 대한 열망에서였다. 진훤은 지금의 광주 광역시에서 거점을 북상시켜 전주에 도읍했다. 그와 더불어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선포하였다. 진훤은 대왕(大王)을 칭하면서 '정개(正開)'라는 연호를 반포했다. '정개'에는 '바르게 열고''바르게 시작하고''바르게 깨우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질곡과 파행의 칙칙한 과거사를 청산하고 올곧게 시작하는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연호였다. 이와 더불어 진훤은 신라보다 일렀던 백제의 역사를 재정립하겠다는 일종의 '역사 바로잡기'와 더불어 의자왕의 숙분(宿憤)을 푸는 것을 당면 과제로 내세웠다. 진훤은 정치적 이데아로서 백제에 의한 국토통일을 내걸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비참하게 몰락한 백제왕조의 부활자이자, 미륵의 대행자로서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원하고 한 세상을 건지겠다는 포부를 지녔다.신검(新劒)의 교서(敎書)에 보면 "도탄에서 구해주셨으니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게 되고"라고 하였듯이 그는 농민들을 과중한 수탈과 질곡에서 해방시켰다. 그의 위세는 일본측 문헌에 "전주왕(全州王) 진훤이 수십 주(數十州)를 격파하여 대왕이라 칭하고 있다"는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진훤은 인재 기용에도 비상한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랬기에 그 주변에는 잘 짜여진 우수한 참모들이 포진할 수 있었다. 그리고 922년에 있었던 미륵신앙의 요람인 미륵사에서의 개탑(開塔) 의식은 익산 금마산에서의 백제 '개국開國' 인식과 짝을 이루는 일대 사건이었다. 진훤은 927년에 경주에 입성하여 경주 포석정에서 신라 경애왕을 생포처단하였다. 더구나 구원나온 고려 군대를 대구 공산에서 포위궤멸시켰다. 그 직후 진훤이 왕건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의 기약하는 바는 평양성 문루에 활을 걸어두고 패강(대동강)에 말의 목을 축이는 데 있다!"라고 하였듯이 통일군주에 대한 자신감을 화통하게 피력했다.결과적으로 진훤왕은 역사의 패자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승부에 승부를 거듭하는 전쟁으로 숨도 돌릴 수 없는 난세를 헤쳐가면서, 한 시대의 종지부를 찍어 역사의 일대 전환점을 마련한 혁명가였다. 그는 말세와 같은 암울한 세상에, 그것도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농민의 아들이라는 한미한 '옷'을 입고 태어났지만, 결단코 그러한 현실에 짓눌리기를 거부했던 혁명가였다.

  • 문화재·학술
  • 기고
  • 2013.09.09 23:02

전북도립국악원, 가을 여는 목요예술무대

전북도립국악원(원장 신현창) 예술단이 5일 저녁 7시30분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명인홀에서 가을을 여는 '가·무·악의 바람'으로 목요국악예술무대 2013년 하반기 문을 연다. 도립국악원의 목요국악예술무대는 전통과 보존, 실험과 대안이 조화를 이루는 공연으로 가족과 연인, 청소년과 외국인 등 폭넓은 관객층에게 사랑받고 있는 도내 대표적 상설 공연. 1994년 토요공연을 시작으로, 2003년에는 금요무대로 진행됐고, 주 5일제 실시에 따른 생활패턴의 변화로 2004년부터 목요공연으로 정착했다. 국악원측은 올 하반기 공연의 다양한 레퍼토리 개발을 위해 보다 실험적인 작품을 중점 배치했다고 밝혔다.9월에는 춤과 소리와 음악이 조화를 이루는 가을을 여는 가·무·악을 시작으로, 창의적 창작무용의 밤인'춤, 그 자유로의 여행', 흥보전을 새롭게 해석한 단막창극 한마당 '놀보는 풍각쟁이'공연이 이어진다. 10월중에는 국악기의 아름다운 선율이 돋보이는'국악실내악과 중주의 밤', 예술단 창극단원의 첫 정년퇴임을 기념하는'이혜정(거문고)의 꿈과 여정'이, 여성소리의 멋과 섬세함이 묻어나는 여류명창 판소리 다섯 바탕, 10여년 세월 무용단을 이끌어온 문정근 무용단장의 삶과 예술을 담은 무용결에 실은 '문정근의 춤'이 10월의 마지막 밤을 수놓는다.11월에는 젊은 세대를 위한 국악관현악단의 국악콘서트, 서로 다른 춤의 매력과 동선을 한 무대에서 볼 수 있는 국립민속국악원 무용단과 함께 하는'춤의 향연'으로 다양한 무용의 아름다움을 만나볼 수 있다. 2013년 목요국악예술무대의 대미는 '천년의 소리, 천년의 몸짓, 천년의 음악'이 장식한다.5일 열리는 '가·무·악의 바람'에서는 각 지역의 대표 아리랑을 연곡의 형식으로 담아낸 북한저대와 25현 가야금을 위한 'the 아리랑', 우아한 학의 동태를 무용으로 형상화 한'양산 사찰학춤', 동편제 판소리의 백미중 하나인 '춘향 이별 후, 이몽룡 그리워하는 대목', 극적인 목의 사용과 구성이 돋보이는 남도민요 '농부가', 창작 초연곡으로 시'가을에서'를 형상화 한 해금과 거문고 2중주'열정'등이 관객들을 기다린다.공연은 무료. 예약문의 063)290-5539

  • 문화재·학술
  • 김원용
  • 2013.09.02 23:02

전주 국립무형유산원서 유품·소장품 736점 기증식…다음달 31일까지 특별전

속보= 문화재청(청장 변영섭)은 지난 30일 국립무형유산원에서 작고 보유자 유품 기증식을 개최했다. 기증식에는 변영섭 문화재청장과 정춘모 정봉섭 강덕열 양승희 조선자 김금철 등 제자와 유족 100여명이 참석해 작고한 무형문화재들의 뜻을 기렸다. (8월 29일자 1면 보도)이날 제자유족들이 기증한 자료는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갓을 만드는 일)의 故 김봉주 보유자 등 작고명예 보유자 24명이 남긴 유품소장품 736점이다.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 보유자 정춘모씨는 "국립무형유산원이 건립된 만큼 선생님의 작품이 이곳에 보관돼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무형문화재에 관심을 가지게 될 기회이자 전승자들에게는 성지와 같은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변영섭 청장은 "무형문화재들의 땀과 노력이 스며있는 소중한 자료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우리를 숙연케 한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무형문화재들의 노력은 여기에 있는 전승자와 유족들이 있기에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고 밝혔다. 문화재청은 이날 기증받은 자료와 함께 지난해 기증기탁 받은 자료를 모아 다음달 31일까지 특별전을 연다. 이번 전시에는 작고 보유자와 명예보유자 32명의 유품과 소장품, 기록물 300여 점이 나온다.

  • 문화재·학술
  • 김정엽
  • 2013.09.02 23:02

전국 중요문화재 전주 품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유족과 제자들의 아름다운 기부가 이어지고 있다. 전주에 둥지를 튼 국립무형유산원의 정식개관을 앞두고 작고한 무형문화재 보유자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 지난해부터 기증 릴레이가 펼쳐지고 있는 것. 이들의 기증품으로 유산원의 콘텐츠가 더 풍성해질 전망이다.문화재청(청장 변영섭)은 28일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갓을 만드는 일)의 故 김봉주 보유자 등 작고명예 보유자 24명이 남긴 유품과 소장품 등을 유족제자 15명에게서 기증받았다고 밝혔다. 이들이 기증한 자료는 모두 543건 736점이다. 자료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 故 정달영 보유자가 아끼며 연주하던 가야금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故 홍원기 보유자가 친필로 작성하여 제자들을 가르치던 악보 △중요무형문화재 제32호 곡성의 돌실나이('석곡지방의 길쌈'이란 의미) 故 김점순 보유자가 자신의 몸에 맞춰서 평생 사용한 베틀과 물레 △중요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 故 천상원 보유자의 유작인 이층장(미완성품) 등이 포함되어 있다.스승과 제자가족 간에 주고받은 편지도 기증됐다. 중요무형문화재 제43호 수영야류(水營野遊)의 故 태명준 보유자는 1970년대 초반에 아들 태덕수(현 명예보유자)에게 쓴 편지에서 "수양반 역할이 중요하니 더욱 춤에 정진"하라는 내용을 담았고 중요무형문화재 가야금산조 및 병창의 故 김죽파 보유자도 제자 양승희(현 보유자)에게 "지극한 긍지와 인내"로 노력하라는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이와 함께 작고 보유자와 명예 보유자의 땀이 밴 공연의상과 소품, 손때 묻은 작업도구, 생전의 활동을 기록한 사진과 영상기록물 등 중요무형문화재의 역사를 보여주는 자료들이 다수 기증된다.문화재청은 30일 오후 2시 국립무형유산원에서 이날 기증받은 자료와 함께 지난해 기증기탁 받은 자료를 모아 특별전을 연다. 10월 31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에는 작고 보유자와 명예보유자 32명의 유품과 소장품, 기록물 300여 점이 나온다.변영섭 청장은 "문화재청은 앞으로도 무형문화재 전승자와 유족들이 보관하고 있는 무형유산 자료를 기증받아 특별전시를 열어 그 가치를 널리 알리고,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에도 활용할 예정이다"고 밝혔다.

  • 문화재·학술
  • 김정엽
  • 2013.08.29 23:02

담장 허물고 시민과 소통나선 한옥마을 전북대예술진흥관

담장을 허물고 공연 무대를 설치해 새 단장을 마친 전북대예술진흥관(관장 박인현)이 한옥마을과 소통에 나선다. 다음달 15일까지 전북대예술진흥관과 전주부채문화관(29일~다음달 11일)에서 열리는 '전주 부채, 풍류와 아취' 展을 통해서다. 이번 전시는 부채문화관과 공동으로 기획됐다. 담장을 제거해 한옥마을과 눈높이를 맞춘 것을 기념해 한옥마을과 전주를 대표하는 부채를 선택한 것.이번 전시에서는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0호 김동식방화선엄재수조충익 선자장이 만든 부채에 김상철 동덕여대 교수가 자연 속 아름다움을 풍부한 감성으로 그려 넣은 작품 100여점이 선보인다. 홍익대 동양학과를 졸업한 김상철 교수는 그간 한국화 평론과 한국 미술에 관한 전문적인 글을 써오면서 작품 활동을 병행했다. 특히 부채 그림을 즐겨 그려 '부채 작가'로도 불린다. 문예를 겸비한 그가 보여줄 예술 세계에는 고상한 품격과 운치가 묻어난다.박인현 관장은 "지난 2010년 전북대 총장 관사였던 건물을 미술관으로 바꾸면서 한옥마을과 첫 번째 소통을 시작한 뒤 이번에는 담장을 허물고 속살을 내보이면서 보다 한옥마을과 가까워졌다"면서 "문기 어린 서화가 있는 부채 바람은 흐르는 땀의 무게를 덜어주는 실용성보다는 품격 있는 문화 아이콘이며 이번 전시를 통해 한옥마을과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과의 소통을 늘려가겠다"고 밝혔다.

  • 문화재·학술
  • 김정엽
  • 2013.08.29 23:02

정읍 '전국 한시 공모전' 장원에 대구 김상진 씨

정읍문화원(원장 정창환)이 주최한 '제14회 전국 한시 공모전'에서 김상진(83대구)씨가 대상인 장원을 차지했다.정읍문화원에 따르면 현재의 정읍시 칠보면(옛 泰山) 시산리 일원에서 신라말 고운 최치원(857년 ~?)이 재현하고 즐기던 유상곡수(流觴曲水) 시회(詩會)터 유상대(流觴臺)에 대한 애찬 한시공모전을 지난 5월부터 7월까지 약 3개월여 동안 실시했다.이번 공모전에는 전국 16개 시도에서 313점이 응모하여 지난16일 박금규, 오석환,박경래씨 등이 심사위원으로 고선(考選)을 진행해 김상진씨의 작품 유상대를 장원으로 선정했다.심사위원들은 "최근에 출품되는 한시들은 너무 시제(詩題)와 압운(押韻)에 따라 시를 짓다보니 염(艶)과 대(對)의 조화가 떨어지는 작품이 많았다"고 평가했다. 또 "이번 공모전에서도 장원과 차상, 차하를 비롯한 우작 몇 점을 제외하면 시제와 압운에 따라 오직 평측법(平仄法)에 맞게 시를 짓다보니 글의 운율에는 맞지 않아 옛 선인들의 절묘하고 주옥같던 한시들이 드물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한편 최치원이 재현했던 유상대는 고대 중국 동진시대의 서성(書聖) 왕희지(, 321~379)가 소용돌이치는 여울물 위에 술잔을 띄우던 유상곡수 시회를 모본으로 하여 고운이 현재의 정읍시 칠보면 여울물에 만들었던 시회 터를 말하며 현재는 유상대가 그곳에 현존했다는 비문만 남아 있는 상태다.

  • 문화재·학술
  • 임장훈
  • 2013.08.21 23:02

남원 가야시대 고분서 국보급 유물 출토

남원 아영면 두락리의 5세기 가야시대 고분에서 금동신발과 청동거울 등 국보급 유물이 대거 출토됐다. 전북대 박물관(책임자 김승옥 교수)이 남원시 의뢰로 지난 5월29일부터 남원 두락리유곡리 고분군 가운데 직경 21m 규모인 대형 고분(32호분)을 발굴 조사한 결과 백제계 금동신발과 청동거울을 비롯해 토기류 40여 점, 철기류 100여 점, 말 머리뼈 등 유물 200여 점이 출토됐다고 밝혔다. 12일 오후 3시 남원시 아영면사무소발굴 현장에서 열린 현장 설명회에서 김승옥 전북대 교수는 "32호분은 이 지역 고대 정치체제의 정체성과 백제대가야중국 남제와의 대외관계를 새롭게 조망할 수 있는 자료로 기대된다. 특히 금동신발은 가야 문화권에서 처음 출토됐고, 청동거울은 왕릉급 고분에서 발견된 삼국시대 최초의 유물로 보인다"며 의미를 부여했다. 함몰된 돌 때문에 심하게 훼손되고 깨진 상태로 발견된 금동신발은 금속 안팎을 두드려 도드라지게 만든 능형문(마름모꼴 문양)이 새겨져 있고 금으로 만든 실과 금동 못이 함께 나왔다는 점에서 1917년 전남 나주 신촌리 고분에서 출토된 백제 금동신발(국립중앙박물관 소장)과 비슷하다고 조사단은 설명했다. 무덤의 주인공 머리 위에 놓여 있던 청동거울도 형태, 크기, 구조 등에서 백제 무령왕릉 출토품인 국보 161호 수대경(獸帶鏡국립공주박물관 소장)과 비슷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사단은 "서기 490년대 제작된 이 청동거울은 무령왕 사후에 묻힌 수대경보다 30년 정도 앞서는 것"이라며 "전래품이 아니라 당대의 거울이 삼국시대 왕릉급 고분에 묻힌 것은 최초"라고 강조했다.

  • 문화재·학술
  • 이화정
  • 2013.08.13 23:02

남원 가야계 고분서 금동신발·청동거울 출토

삼국시대 가야계 공동묘지로 평가되는 전북 남원시 아영면 두락리 고분군에서 권력 최고층이 사용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금동신발과 청동거울이 출토됐다.전북대박물관은 남원시 의뢰로 유적 학술정비 차원에서 두락리 고분군 중 제32호분을 발굴조사한 결과 이 무덤이 봉분 지름 21m인 평면 타원형이며, 주인공을 매장하는 시설인 주석곽(主石槨)과 껴묻거리를 넣는 공간인 부장곽(副葬槨)을 평행하게 별도로 설치한 가야계 고분으로 드러났다고 11일 말했다.주석곽은 약 104m 크기로 마련한 구덩이에다가 7.31.31.8m 크기인 석곽(石槨. 돌로 쌓은 상자형 공간)을 안치하는 형태이며, 부장곽은 5.81.4m 깊이의 구덩이에 5.10.60.88m인 석곽을 배치하는 모양으로 마련했다. 장축 방향은 주석곽이 W25N, 부장곽이 W21N이며, 둘 사이 간격은 35cm다.이곳에서는 금동신발과 청동거울 외에도 토기류 40점, 철기류 100점 이상이 출토됐으며, 특히 봉분에서는 제사용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말 머리뼈가 발견됐다.출토유물 중에서도 금동신발은 무덤 덮개돌이 내려앉으면서 심하게 훼손된 상태지만 금속을 안팎으로 두드려 문양을 도드라지게 하는 타출 기법으로 마름모 모양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금속을 뚫는 투조 기법으로 문양을 표현한 서산 부장리 고분이나 안동 고흥고분 출토 백제 금동신발과는 다르고, 익산 입점리 고분과 나주 신촌리 고분 출토 다른 백제 금동신발과 유사하다고 조사단은 덧붙였다.가야계 고분에서 금동신발이 출토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청동거울은 지름 약 17.8cm로 무덤 주인공 머리 위에서 발견됐다. 앞면에는 주칠과 포목, 그리고 목질 흔적이 확인됐다.조사단장인 김승옥 교수는 "보존처리 전이라 현재 문양을 파악하기 어려우나 전체적인 형태, 크기, 돌기, 구조에서 무령왕릉 출토 수대경(獸帶鏡. 짐승 무늬를 테를 돌아가며 새긴 거울)과 흡사하다"면서 "하지만 무령왕릉 출토품보다 제작시기는 30년 정도 앞서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박물관 측은 "금동신발과 출토 토기로 보아 이 고분을 만든 연대는 5세기 후엽 경으로 판단된다는 점에서 청동거울 또한 그 이전부터 사용하다가 무덤을 만들면서 매납한 것이 아니라 그 당시에 제작한 것을 곧바로 넣은 것으로 보인다"면서 "고분의 규모와 위치, 출토유물로 보아 운봉고원 일대 삼국시대 정치체는 고령의 대가야, 웅진도읍기의 백제에 버금가는 강력한 고대 국가를 건설했을 것으로 판단된다"고 평가했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13.08.12 23:02

전주문화재단 기획전…부채 명인의 작품보며 시원한 바람 느껴볼까

전주부채문화관이 전주부채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는 부채명인들의 혼과 열정이 담긴 작품을 기획전으로 마련했다.'선자장 이야기展'이라는 타이틀로 초대된 명인은 전라북도무형문화재 제10호 단선명인인 방화선 선자장(8일부터 28일까지 전주부채문화관 지선실). 선자장 故 방춘근 명장(1927~1998)을 아버지로 둔 그는 어린 시절부터 가내공업으로 이어져온 단선부채를 제작하면서 계보를 이어오고 있다. 그는 단선이 민가에서 애용되며 생활 속 깊이 자리했기 더 애착이 간단다."단선은 표현할거리가 무궁무진하다는 점에서 저와 딱 맞았어요. 손잡이 부분을 전체적인 부채 디자인에 맞춰 조각하기도 하고, 예쁜 그림을 그려보기도 합니다" 아버지께 전통을 망쳐 놓는다며 불호령이 떨어지기도 했으나, 시대의 흐름을 반영해야 한다는 철학을 갖고 최고의 재료로 더 좋은 부채를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부채를 좋아하게 만들고 싶다고 했다. 현대적인 그림과 글씨도 넣어보고, 부챗살을 구부려 모양을 올리는 곡두선도 현대적으로 응용한 작품을 만들었다. 부채에 옻칠을 하면 특유의 색감이 살아나고, 내구성도 좋아지기 때문에 그가 즐겨 쓰는 방법의 하나다.그의 부채 작품의 또다른 특징은 다양한 디자인에 있다. 공간의 면 분할과 선면의 폭을 조절하면서 미적인 감흥을 높이는데 최대한 신경을 쓰고 있어 형태와 모양, 한지의 색상까지 세심한 관심을 기울인다. 부채 자루를 조각함에 있어서도 주로 활용되는 꽃봉오리가 줄기모양 외에 여러 사물을 형상으로 대입하고 있다. 이번 전시회에서 여성들의 잇(it)아이템으로 인기가 좋은 작품들과 옻칠선, 조각선, 태극선, 궁중선녀선, 부채의 선면위에 한옥마을과 부채문화관 등의 전경을 표현한 작품 등 총 30여점이 전시된다.

  • 문화재·학술
  • 김원용
  • 2013.08.09 23:02

운봉고원은 삼국시대 최대 제철단지

지난해 7월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운봉고원에 묻힌 가야무사'라는 주제의 발굴유물 특별전이 열렸다. 남원 월산리·두락리 발굴유물을 중심으로 운봉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일목요연하게 잘 담아냈다. 가야계 고총에서 최초로 그 모습을 드러낸 중국제 청자인 계수호(鷄首壺)와 쇠로 만든 자루솥을 비롯해 당시 보물급 유물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1500년 전 운봉가야의 지배자 무덤인 가야계 고총에서 담아낸 운봉고원의 정체성은 한마디로 '철의 왕국'이다.운봉고원은 삼국시대 최대 규모의 종합 제철단지였다. 최근에 지리산 국립공원 내 달궁계곡에서 3개의 제철유적이 발견됐다. 또 백두대간의 만복대에서 바래봉까지 이어진 산줄기 서쪽에도 3개의 제철유적이 있다. 종래에 제철유적의 존재가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운봉고원은 또 다른 제철유적이 더 발견될 것으로 큰 기대를 모으고 있다.2100년 전 마한의 왕이 진한의 전쟁을 피해 달궁계곡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곳에서 70년 이상 나라를 다스렸다. 100여 기의 말무덤과 가야계 고총으로 상징되는 운봉가야는 150년 넘게 가야왕국으로 발전했다. 1500년 전 백제왕이 보낸 계수호와 쇠로 만든 자루솥도 운봉고원 내 가야계 고총에서 나왔다. 운봉고원의 자원유산인 철광석을 녹여 단순히 철을 생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운봉고원만의 독자적인 주조기술도 있었음이 밝혀졌다. 인류의 역사 발전에 철의 공헌도가 매우 높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고대국가를 출현시켰고, 대가야가 후기가야의 맹주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도 철의 힘이다. 운봉고원을 무대로 찬란히 꽃피웠던 마한 왕의 달궁터도, 운봉가야의 눈부신 발전상도, 우리나라의 철불이 실상사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역사적인 배경도, 모두 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 문화재·학술
  • 김정엽
  • 2013.07.26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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