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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전주박물관 '전북의 역사문물전 12, 익산' 개막

고조선시대부터 근대까지 익산지역의 역사와 지리적 중요성을 되새기는 전시가 마련된다. 더욱이 백제 무왕의 것으로 추정되는 치아와 왕궁리 오층석탑에서 출토된 금강경판의 미공개 면 등이 일반인에게 선보여 기대를 모으고 있다.국립전주박물관(관장 유병하, 이하 박물관)은 익산시, 전북일보, KBS전주방송총국, 국립문화재연구소,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와 공동으로 28일 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전북의 역사문물전 12, 익산' 의 개막식을 열고 29일부터 내년 2월9일까지 전시를 진행한다.이번 전시는 구석기시대부터 근대까지 마한의 중심이자 오래된 수도로서 익산의 위상을 살펴보는데 중점을 뒀다. 백제가 멸망한 뒤 부흥을 꾀했던 10세기 초에서 일제 강점기 근대까지의 역사뿐 아니라 문화를 조명해 가치를 제고했다. 눈에 띄는 유물로 천년이 넘는 세월을 오롯이 견디며 무왕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치아 2점을 볼 수 있다. 이 치아들은 무왕의 왕릉으로 추정되는 사적 제87호 익산시 석왕등 쌍릉에서 출토됐기 때문이다. 7세기 전반에 제작돼 국보 123호로 지정된 왕궁리 오층석탑의 사리병사리함뿐 아니라 함께 나온 금강경판도 19개 중 17개를 공개한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수각형향로(獸脚形香爐)인 보물 1753호 미륵사지 금동향로, 후백제시대의 왕궁리 오층석탑 금동불입상과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보살 손, 조선시대 심곡사 칠층석탑 출토 사리호 등 가장 주목할 만한 익산지역의 유물을 한 자리에 모았다.전시는 1부 마한의 중심, 2부 백제의 고도, 3부 부흥의 터전, 4부 전라도의 첫 고을 등 모두 4개 부문으로 구성됐다. 1부에서는 고조선 준왕의 남천지(南遷地)가 금마(金馬), 즉 익산인지를 밝힐 수 있는 다양한 청동기와 철기를 살펴볼 수 있다. 2부는 백제의 지방 거점에서 새로운 왕도로 발전해가는 삼국시대 익산의 모습으로 무왕이 조성한 궁성인 왕궁리유적, 왕실사찰 제석사, 미륵사지 유물을 통해 계획도시였던 익산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3부는 익산을 근거로 재기를 꿈꾸며 보덕국을 세운 고구려 유민, 백제의 계승을 공언한 견훤의 후백제와 관계된 전시품을 살펴볼 수 있다. 4부는 불교문화, 익산이 품고 낳은 사람들, 근대도시 익산의 빛과 그늘을 주제로 다양한 불상과 지도, 문헌이 전시된다.아울러 특별전을 기념하는 강연회와 심포지엄도 함께 열린다. 다음달 6일에는 청동기 연구자인 이건무 전 문화재청장이 '한국의 청동기문화-전북을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강연하며, 같은 달 9일에는 박물관 강당에서 '익산, 마한백제 연구의 새로운 중심'을 두고 학술회의가 진행된다.박물관 진정환 학예사는 "익산은 망국의 유허가 아닌 고조선, 백제, 후백제, 조선시대에도 주요한 도시로 기능했다"며 "익산 지역 문화의 다양성을 부각시키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 문화재·학술
  • 이세명
  • 2013.10.29 23:02

'후백제 왕도 전주' 시민강좌 ⑦ 왕건의 후삼국 통일

918년 6월, 왕건은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 등의 장군에게 추대돼 왕위에 올랐다. 궁예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창업주인 태조(太祖, 918~943)가 되었다. 그는 우선 나라 이름을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고려(高麗)라 했다. 신라에 대해서도 궁예와는 달리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궁예가 새로 설치한 관계와 군현의 명칭을 다시 신라식으로 환원하였다. 신라에서 오는 사람들도 후대했다. 후백제에 대해 즉위 초기에는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다 920년(태조 3)에 견훤이 신라의 합천초계를 공격하고 신라의 구원 요청에 고려가 응하면서 둘 사이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924년에 일어난 조물군(曹物郡, 구미 부근으로 추정) 전투 이후 인질 교환으로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던 그들은 927년(태조 10)에 왕건이 용주(龍州, 지금의 예천)를 선제공격하면서 다시 대립했다. 그 후 견훤의 신라 침공 후 공산(公山, 지금의 대구 팔공산)에서 후백제군을 만나 싸웠으나 크게 패했다. 그러나 930년(태조 13)에 고창군(古昌郡, 지금의 안동) 전투에서 김선평(金宣平)권행(權幸)장길(張吉) 등의 도움으로 견훤군을 크게 무찔렀다. 승기를 잡은 왕건은 견훤과 경순왕(敬順王, 927~935)의 귀순을 받고 후백제 신검(神劍)과 선산 부근의 일리천(一利川)에서 마지막 결전을 벌였다. 여기서 패배한 신검은 황산군(黃山郡, 지금의 충남 논산군 연산면)으로 도망해 진영을 정비했다. 그러나 이를 추격한 고려는 여기서도 크게 승리, 936년에 후삼국을 통일했다. 이 기념으로 왕건은 연산에 개태사(開泰寺)라는 절을 세우기도 했다.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개인적 자질과 역량 때문이기도 했지만 '호족(豪族)'의 협조 덕택이기도 했다. 그는 호족의 딸과 결혼을 추진해 29명의 부인을 뒀다. 호족의 자제를 기인(其人)으로 삼아 수도에 올라오게 하는 조치도 취했다. 한편으로 그는 일반백성을 위한 정책적 배려도 아끼지 않았다. 우선 농민의 조세부담을 경감했다. 그리고 흑창(黑倉)이라는 빈민구제기관을 설립해 가난한 백성에게 곡식을 나눠 주기도 했다. 또 억울하게 남의 노비가 된 자들을 양민으로 풀어주는 정책도 실시했다.이러한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외부세력의 간섭 없이 진행된 것이 특징이며 북방정책을 추진해 영토를 청천강까지 확대했다. 또 경주 진골 중심의 골품제 사회가 붕괴되고 지방 호족 중심의 능력 사회로 변한 점이 특징이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동북아시아사의 전개에서 중국 및 북방민족과 함께 삼각의 축을 형성하는 계기가 됐다. 고려(高麗)-송(宋)-요(遼, 또는 金)의 삼각구도를 형성해 견제와 균형을 통해 거란(遼)의 침략과 여진(金)의 압력을 물리칠 수 있었다.

  • 문화재·학술
  • 이세명
  • 2013.10.28 23:02

무형문화유산 진수 맛보세요

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원장 이길배)은 오는 11월1일부터 이틀간'해설이 있는 무형유산 공연'을 연다. 이번 공연은 국립무형유산원 출범을 기념하기 위한 시범공연으로, 수요자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문화유산 3.0'의 취지에 따라 대중들이 무형문화유산을 쉽게 이해하고, 공연을 통해 우리 무형문화유산의 진수를 누릴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마련됐다. 공연은 한국문화의집(KOUS) 진옥섭 예술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11월 1일 오후7시 국립무형유산원 얼쑤마루(대공연장)에서는 '영남 춤, 호남 놀이'공연이 펼쳐진다. 영남지역 탈춤 중 하나인 고성오광대(고성오광대놀이 보존회) 전 과장(科場, 탈놀이에서 판소리의 마당에 해당하는 말)과 호남지역의 경문유희(진도다시래기 중 한 장면으로 거사가 장님으로 분장을 해서 경문을 읽는 대목, 강준섭 보유자), 설장구(김동언, 우도농악 보유자), 부포놀이(유지화, 정읍농악 보유자) 등 영남과 호남의 신명 나는 춤과 놀이판을 즐길 수 있다. 11월 2일 오후 3시 얼쑤마루(소공연장)에서는 '산조와 소리 이야기'공연으로 준비됐다. 이날 공연에서는 이생강 보유자(대금산조), 김무길 전수조교(거문고산조), 김일구 전수조교(판소리) 등 3인의 명인명창 이야기와 함께 연주를 감상할 수 있다. 공연은 무료. 문의 063)280-1400, 1453

  • 문화재·학술
  • 김원용
  • 2013.10.25 23:02

'후백제 왕도 전주' 시민강좌 ⑥ 궁예와 견훤

△궁예의 선구(先驅), 견훤= 889년 진성여왕은 재정 부족을 이유로 사신을 보내 농민에게 세금 납부를 독촉했다. 하지만 농민들은 이에 반발해 곳곳에서 반기를 들었다. 농민봉기는 해를 넘기면서 계속됐다. 일부 농민은 떼도적이 되어 설쳤고, 지방의 세력가들은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저마다 군사를 양성했다. 이처럼 혼란이 계속됐지만 신라 정부는 이미 통제할 힘을 잃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틈타 가장 먼저 큰 세력을 형성했던 인물이 바로 견훤이었다. 889년 반기를 든 견훤은 892년 무진주(광주)에 터를 잡고, 왕에 버금가는 지위를 누렸던 것이다. 궁예는 891년 죽주(안성 죽산면)의 세력가 기훤의 부하가 됐다. 기훤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자 다음 해에는 북원(원주)의 세력가 양길의 부하가 되었다. 승려였던 궁예가 신라 말의 혼란에 뛰어들었던 것은 혼란을 이용해서 자신의 나라를 세우려는 야망을 품은 탓이었다. 그런 그에게 견훤은 선구자로 비쳐졌을 것이다. 더욱이 892년 견훤은 양길에 비장(裨將)이라는 관직을 내려주었다. 양길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던 궁예는 견훤을 본보기로 여겼을 것이다.견훤은 900년 의자왕의 원한을 씻겠다면서 국호를 백제라고 하고 스스로 왕이 됐다. 이를 삼국시대의 백제와 구별해 흔히 후백제라고 한다. 이듬해 901년에는 궁예가 고구려의 복수를 내세우면서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하고 왕을 일컬었다. 이를 삼국시대의 고구려나 왕건의 고려와 구별하기 위해 후고구려라고 부르거니와, 후고구려의 건국은 후백제의 건국에 대응한 것이었다. 견훤이 완산주 일대에 살던 백제 유민의 백제에 대한 향수를 자극해 건국하자, 궁예도 한산주패강진 일대에 살던 고구려 유민의 호응을 기대하고 건국한 것이다. 이로써 신라와 후백제, 후고구려가 정립하는 이른바 후삼국시대가 시작됐다. 하지만 신라는 이미 정세를 좌우할 힘을 갖고 있지 못했다. 견훤과 궁예 두 영웅이 패권을 다투기 시작했다.△궁예와 견훤의 패권 다툼= 궁예와 견훤의 첫 충돌은 906년 상주에서 벌어졌다. 궁예는 이곳을 점령해 신라를 공격할 수 있는 전진기지를 확보하려고 했다. 역시 신라를 노리고 있던 견훤도 이를 막아야 했다. 상주는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가 지배하던 곳이었던 만큼 더욱 내줄 수 없었다. 여러 차례 격돌 끝에 궁예가 보낸 왕건의 군대가 승리했고, 견훤은 907년 일선군(선산) 일대를 차지하고 궁예와 대치했다. 궁예 말년에는 이흔암이 후백제의 웅주(공주)을 습격해 차지했는데 이 때 운주(홍성) 등 10여 고을도 궁예의 소유가 됐다. 공주 일대에서도 궁예와 견훤이 일전을 겨뤘는데, 궁예가 승리했다.궁예와 견훤은 금성(나주) 일대의 지배권을 두고 여러 차례 충돌했다. 나주 일대는 후백제의 배후였고, 또한 해상 교통의 요지였다. 궁예는 차지하고 싶은 곳이었고, 견훤은 잃어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909년 궁예의 명을 받은 왕건은 덕진포(영암 덕진면) 일대에 화공으로 견훤의 대군을 격파하니 견훤은 작은 배를 타고 겨우 귀환했다. 이어 왕건은 견훤 편이었던 해상세력가 능창을 잡아 궁예에게 압송했다. 910년 견훤은 몸소 보병과 기병 3000명을 이끌고 나주성을 포위했는데 궁예가 해군을 동원해 이를 물리쳤다. 912년에는 다시 덕진포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때에는 궁예가 직접 원정해 견훤을 무찔렀다. 이후 나주 일대는 궁예의 소유가 되었다. 견훤을 본보기로 삼아 세력을 모으고 건국했던 궁예였지만, 그 후 견훤과 여러 차례 격돌해 승리를 거둬 궁예는 전국의 3분의 2를 차지면서 큰 세력을 떨치게 됐다.

  • 문화재·학술
  • 기고
  • 2013.10.21 23:02

'포쇄'를 아시나요…선조의 서책 보관 지혜

역사의 생명은 기록이다. 기록은 내용뿐 아니라보관도 중요하다. 태조 이성계부터 제25대 철종 때까지 472년 동안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이 6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해진 것은 포쇄를 포함한 엄격한 보관체계가 가동됐기에 가능하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탄 춘추관, 충주, 성주 등 3곳의 사고(史庫)와 달리 유일하게조선왕조실록을 온전히 지켜낸 전주사고의 정신을 되새기기 위해 전주시가 포쇄를 재현한다. 고서인 조선왕조실록은 한지로 만들어져 습기와 책벌레 침범에 약하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장마철을 피해 봄이나 가을의 맑은 날을 택해 바람을 쐬고햇볕에 말리는 실록 포쇄(曝 日+麗)를 3년 혹은 5년마다 정기적으로 시행했다. 장마가 끝난 처서 즈음에 농부는 곡식을 말리고, 부녀자는 옷을 말리고, 선비는책을 말린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이를 담당하는 포쇄별감이 춘추관에 설치됐고 포쇄때마다 일지를 썼을 정도다. 포쇄는 매우 엄격하게 진행됐는데, 왕실에서 사관(史官)을 파견하고 실록포쇄 형지안에는 누가, 몇 명이 참여했는지 등 시행절차를 자세히 기록토록했다. 그 절차는 사관이 관복을 입고 네번 절을 한 다음 사고를 열어 책을 꺼내 포쇄하고 기름종이로 잘 싸서 천궁 혹은 창포와 함께 궤에 넣고 봉인했다. 이는 충해와 부식을 방지하기 위한 선조의 지혜였던 셈이다. 현대 일반 가정에서는 에어컨이나 제습기를 이용하면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습기를 머금은 책을 말려 포쇄를 대신할 수 있다. 책이 보관고에 있다면 20℃의 온도와 50% 안팎의 습도가 최적의 환경이다. 실내온도를 20℃로 유지하기 어렵다면 온도가 34℃ 높은 것은 문제없으나 습도는 최대한 맞춰야한다. 전국에서 처음으로 19일 오후 한옥마을 경기전(慶基殿) 안 전주사고에서 열리는포쇄행사는 이 같은 역사적 고증을 거쳐 재현된다. 먼저 송하진 전주시장 등 참여자들이 포쇄시작을 알리는 4배를 한다. 이어 사고 문을 열어 실록의 이상 유무를 확인하는 봉심과정을 거쳐 실록 궤를 개봉해 실록을 꺼낸다. 실록을 한 장씩 넘기며 바람을 쐬는 거풍을 마치면 실록을 궤에 넣고 자물쇠를 채운다. 이때 자물쇠에는 포쇄를 한 날짜와 책임자 등을 기록한 한지가 붙여진다. 마지막으로 장서 점검 기록부인 형지안을 작성하고 다시 4번의 절로써 예를 갖춘다. 송하진 전주시장은 "조선왕조실록이 수백년을 견뎌내고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었던 것은 포쇄와 같은 지혜와 정성이 깃들어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13.10.17 23:02

'후백제 왕도 전주' 시민강좌 ⑤ 전주 동고산성

전주 동고산성은 1981년에 처음으로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그 해에 전북도기념물 제44호로 지정됐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7차례 이뤄졌다. 그간의 발굴조사에서는 대형 건물터를 비롯해 전주성(全州城)이라고 찍힌 기와가 나와 명실상부 후백제 도읍임이 자명해졌고, 후백제 견훤왕에 의해 성을 다시 쌓았던 흔적들이 확인됐다. 그러나 아쉽게도 중요한 고고학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도기념물로에 머문 채 국가의 중요한 사적으로 끈을 잇지 못하고 맥없이 32년의 시간을 흘러 보냈다. 후백제 정통성의 희미한 맥은 전주 동고산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전주 동고산성은 전주도성의 일부이자 전쟁시 피난할 수 있는 배후산성으로 견훤의 정치와 군사가 살아 있던 곳이다. 지난 1990년과 1994년에 조사된 대형 건물터는 정면 22칸, 측면 4칸으로 산성의 중앙부 계단상의 대지에 자리하고 있다. 규모면에서 고구려 안학궁(남궁, 정면 11칸, 측면 4칸)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아주 큰 편이다. 안학궁은 고구려 행정부가 평상시 거주하며 정치를 의결하였던 것과 상대적으로 전주 동고산성의 대형 건물터는 유사시 임시로 사용됐던 정전이었다. 더욱이 전주성이 찍힌 기와류가 이 대형 건물터에서 출토되었는데, 기와에 그려진 문양은 신라말에서 고려초에 제작된 것으로 해당된다. 이 대형 건물터 이외에도 규모가 남달리 큰 건물터가 성벽의 남쪽을 따라 줄지어 지어졌으며, 그 중에 제 7건물터는 정면 16칸, 측면 4칸에 이른다. 이러한 건물터에서는 주로 토기와 같은 그릇보다는 기와가 많이 출토되었으며, 벼슬 관(官)이 찍힌 기와가 다수 확인됐다. 이와 똑같은 기와는 전주시내 경기전과 구도청의 발굴조사에서도 확인되고 있어 견훤의 평상시 행정을 맡은 곳은 전주시내 일원으로 볼 수 있겠다. 동고산성에는 4개 성문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에 북문터와 동문터가 확인됐다. 서문터는 아직 찾지 못했다. 다만 서문터에서는 문기둥 밑에 박았던 화금(신쇠)이 출토돼 그 빌미를 남겨주고 있다. 서문터는 동고산성의 정문으로 추정되는데 대형 건물터의 방향이 서향이고, 북문터는 어긋문, 동문터는 현문(다락문)으로 암문(비밀리 출입하는 문)인 점에서 그러하다.올해 발굴조사가 이뤄졌던 서문터에서는 성문의 흔적은 찾지 못했으나 견훤에 의해 성벽이 다시 쌓아졌던 흔적이 확인됐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전주는 신문왕 5년(685)에 완산주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견훤왕은 효공왕 4년(900) 완산주에 도읍하고 후백제왕이라 칭하고 대대적인 토목공사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 일환으로 기존의 성벽을 대신하는 성벽축조도 이루어졌던 사실이 밝혀졌다. 즉 성벽의 외부에 네모나게 잘 다듬은 석재를 사용하여 만든 성벽이 바로 새롭게 축성된 것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의 남아 있는 전주동고산성에서 후백제 견훤왕은 도읍을 정비하면서 유사시 대피할 수 있는 피난성을 견고하게 구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네모반듯한 성돌은 그의 지도력과 도도한 미적인 면도 엿보인다.

  • 문화재·학술
  • 기고
  • 2013.10.14 23:02

국립무형유산원 출범 기념 중요무형문화재 기·예능 합동공개

"이건 열쇠 구멍 덮개를 밀어서 열쇠를 넣고 오른쪽으로 한 번 왼쪽으로 한 번 돌려야 열려. 저건 7단계를 거쳐야 열 수 있는 자물쇠인데 단수를 늘린다고 좋은 게 아니고 전체적인 완성도가 중요해."지난 11일 중요무형문화제 제64호 두석장 박문열 선생(63)이 전주를 찾아 비밀 자물쇠 여는 방법을 시연하며 "조선시대에는 많았지만 일제시대와 전쟁통에 상당수가 해외로 반출돼 안타깝다"고 말했다. 두석장은 놋쇠 장석을 만드는 장인이다. 장석은 가구 등에 결합부분을 보강하거나 열고 닫을 수 있는 자물쇠 등 금속제 장식을 말한다. 두석장 맞은 편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67호 탕건장 김혜정 보유자(67)가 이수자인 두 딸과 함께 나란히 앉아 제주도산 말총을 한 올 한 올 엮어 탕건(감투)을 만들고 있었다. 김혜정 씨는 "1개 만드는데 족히 6개월은 걸린다"며 "바늘, 말총, 손 이 세가지로만 만들어진다"고 설명했다. 내년 5월 정식 개관을 앞둔 국립무형유산원(이하 무형유산원)이 출범 기념 맛보기 행사를 열었다.문화재청(청장 변영섭)이 주최하고 한국무형유산진흥센터(이사장 임돈희)가 주관한 '중요무형문화재 기예능 합동공개행사'가 지난 11일 전주시 동서학동 옛 전북도 산림환경연구소 자리에 건립된 무형유산원에서 열렸다. 합동공개행사는 오는 27일까지 매주 금토일요일에 예능과 기능 분야의 무형문화재가 일반인을 대상으로 시연체험을 병행한다. 우리나라 전통문화의 교류재현전승체험 거점공간을 표방하는 무형유산원은 전승마루 1층 교육공간에서 기능 분야의 시연 행사를 펼쳤다. 공예 관련 중요무형문화재 16개 종목의 17명의 보유자들이 참여했다. 도내 출신으로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17호 한지장 홍춘수, 중요무형문화재 제110호 윤도장 김종대가 포함됐다. 12일에는 도내 예능분야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강정열 보유자와 제12호 진주검무(진주검무 보존회)의 무대가 우석대 박희태 교수(실용무용지도학과)의 진행으로 이뤄졌다. 무형문화재 시연 관람은 무료이며, 매주 주말 오전 10시30분~12시30분, 오후 3~5시에 운영한다.시범운영 기간인 무형유산원은 이와 함께 '기증자료 특별전'을 오는 31일까지 진행한다.

  • 문화재·학술
  • 이세명
  • 2013.10.14 23:02

전주 국립무형유산원 출범 기념 '무형유산원 맛보기' 열려

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원장 이길배)은 유산원 출범을 기념하기 위해 시범행사 '무형유산원 맛보기'를 11일부터 11월2일까지 전주 국립무형유산원 공연장 등에서 연다고 밝혔다.문화재청 소속기관으로 지난 1일 정식 출범한 국립무형유산원이 마련한 이번 행사는 무형문화재 전승자들의 솜씨와 멋, 흥을 직접 보고 감상할 수 있는 자리다. 내년 확대 개관을 앞둔 국립무형유산원을 현장에서 미리 만나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무형유산, 전주에 깃들다= 문화재청이 주최하고 한국무형유산진흥센터(이사장 임돈희)가 주관하는 중요무형문화재 기예능 합동공개 행사가 11일부터 펼쳐진다. '무형유산, 전주에 깃들다'는 타이틀 공예분야와 예능분야 무화재 보유자들이 직접 시연하는 행사다. 공예분야는 궁시장, 소목장, 한지장, 단청장 등 공예분야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 17명이 직접 시연하는 자리로 꾸며진다. 행사는 11일부터 27일까지 3주간 진행된다. (매주 금토일, 오전 10시30~분 12시30분/오후 3시~7시 국립무형유산원 전승마루)예능분야 합동공개행사는 '진주검무'와 '가야금산조 및 병창' 공연은 12일 오후 3시 얼쑤마루(대공연장)에서 만날 수 있다.△'영남 춤, 호남 놀이'= 11월 1일부터 2일까지 무형문화유산 공연이 한바탕 펼쳐진다. 첫째 날 오후 7시 얼쑤마루(대공연장)에서 진옥섭 예술감독(한국문화의집)의 사회로 '영남 춤, 호남 놀이' 공연이 준비됐다. 영남의 탈춤 중 하나인 고성오광대(고성오광대놀이보존회) 전 과장(科場)과 호남의 경문유희(강준섭, 진도다시래기 보유자), 설장구(김동언, 우도농악 보유자), 부포놀이(유지화, 정읍농악 보유자) 등이 선보이며, 영남과 호남의 신명과 흥을 함께 감상할 수 있다.둘째 날에는'산조와 소리 이야기'공연이 오후 3시 얼쑤마루(소공연장)에서 열린다. 공연에는 이생강 보유자(대금산조), 김무길 전수조교(거문고산조), 김일구 전수조교(판소리) 등 우리 민속악의 진수를 선보여줄 명인명창이 참여하며, 가을의 정취와 함께 명연주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다.△대학 연계 교육과 무형유산 기증자료 특별전= 이달 20일까지 매주 주말(토일)에는 국립무형유산원 전승마루 2층에서 대학 연계 교육과정이 이뤄진다. 처음으로 이뤄지는 이번 교육에서는 이욱 전수조교(단청장)와 한서대학교 장경희 교수, 한서대학교 문화재보존학과 학생들이 단청의 역사와 의미를 바탕으로 단청의 전 과정을 습득하여 한국적 미의식을 알아가는 시간으로 진행된다. 또 지난 9월부터 시작된 '2013 무형유산 기증자료 특별전'도 누리마루(기획전시실)에서 이달 31일까지 진행된다.국립무형유산원 출범 기념 '무형유산원 맛보기'의 모든 행사는 무료로 진행되며, 무형문화유산과 국립무형유산원에 관심 있는 누구나 관람이 가능하다. 문의 063)280-1400

  • 문화재·학술
  • 김원용
  • 2013.10.09 23:02

전주서 조선왕조 의례 재현행사 잇따라

오는 12일과 19일 조선왕조 의례 재현행사가 전주에 잇따라 열린다.전주시는 오는 12일 오후 2시 30분에 '태조어진 봉안행렬'과 19일 오후 2시에 '조선왕조실록 포쇄'재현 행사가 열린다고 밝혔다.태조어진 봉안행렬은 전주시청 앞 노송광장에서 기념식 및 영접례를 진행한 후 600여명의 행렬인원과 신연(神輦, 어진을 넣은 가마), 향정자(香亭子) 등의 가마와 함께 팔달로를 거쳐 경기전까지 1시간 동안 진행된다.봉안행렬 후에는 태조어진을 경기전 정전에 봉안하는 의식과 태조어진의 경기전 봉안을 기념하기 위한 봉안례가 조선시대 예법에 따라 경기전 정전에서 거행될 예정이다.이어 19일 열리는 조선왕조실록 포쇄 재현행사는 오목대에서 태조로를 거쳐 경기전 전주사고까지 사관행렬을 진행한 후 전주부윤 및 사고참봉의 영접례를 행한 후 전주사고에서 진행된다.포쇄는 사고에 보관된 조선왕조실록의 습기를 제거하여 충해를 막을 수 있도록 책을 말리는 행위로, 조선시대 왕의 명령에 따라 3년에 1차례 진행됐다. 왕이 명령에 의해 중앙에서 사관을 파견하여 지방의 인원을 동원해 수행했다.조선왕조실록 포쇄 재현행사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시도하는 행사로서 그동안 역사기록에서만 접할 수 있던 광경을 관광객에게 보여주는 것이어서 기대가 클 것으로 예상된다.전주시는 이번 행사를 위해 지난 5월부터 전문가에 의해 봉안행렬 관련 기록을 수집정리해 전문가의 고증을 통해 행사계획을 마련하는 등 탄탄한 역사고증을 기반으로 조선시대 원형에 가깝도록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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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준호
  • 2013.10.08 23:02

1억으로 치러야 할 '동학농민혁명 120주년'

정부가 긴축 재정에 들어가면서 내년 2주갑(120주년)을 맞이하는 동학농민혁명 기념행사의 의미가 퇴색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기획재정부가 내년 예산안을 편성하면서 신규 사업과 행사비 등을 삭감한다는 원칙에 따라 동학혁명기념재단의 요구액보다 행사예산을 대폭 줄였기 때문이다. 다만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 조성사업'은 신규 사업임에도 실시설계 용역비 15억원이 반영되면서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6일 전북도에 따르면 동학농민혁명 기념재단은 내년 2주갑을 맞아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계승하는 대규모 기념행사를 기획, 문화체육관광부에 국비 16억원을 요구했다. 그러나 문체부는 7억원으로 수정된 예산안을 기재부에 올렸고, 다시 기재부는 6억원이 줄어든 1억원만 반영한 정부안을 확정했다. 기재부는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시대적 의미는 공감하지만 내년도 예산안을 편성하는 데 있어 신규 사업과 행사비 축소는 불가피했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의 기념행사 관련 예산안이 대폭 축소된 가운데 이제 공은 국회로 넘어갔다. 하지만 국회에서도 딱히 증액될 명분을 찾지 못해 지역 정가의 고심이 깊어졌다. 김윤덕 국회의원은 "세수가 부족한 상황에서 행사 관련 예산을 증액하기는 쉽지 않다"면서 "하지만 여러 관계자들과 상의해 동학농민혁명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도록 예산 증액 등 모든 가능성에 대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김대곤 동학농민혁명 기념재단 이사장은 "정부와 다소간의 시각 차이는 있으나 동학에서 2주갑의 의미는 매우 깊다"면서 "세수가 부족한 상황인 점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크게 알릴 수 있는 최소한의 기회는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 조성사업은 다행히 순항 중이다. 정부는 오는 2017년까지 국비 388억원을 투입해 정읍시 덕천면 33만5826㎡ 부지에 공동묘역, 위령탑, 추모공간, 연구소 등을 건립한다는 계획으로 우선 내년 15억원의 실시설계용역 예산안을 확정했다. 비록 기념재단과 도내 정치권이 요구한 총사업비 648억원보다는 많이 줄어들었지만, 이는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사업계획 적정성 검토가 나오기 전 상황이다. 예비타당성조사 면제를 받은 이 사업은 지난해부터 KDI의 사업계획 적정성 검토를 받아왔다. 지난달 적정성 검토를 마친 뒤 아직 공식 발표는 하지 않았으나, 중간 검토 결과와 이번 정부안이 거의 비슷한 점으로 미뤄봤을 때 이번 사업은 오는 2017년에 마무리 될 것으로 예상된다. 전북도 관계자는 "기념공원 부지는 대부분 도시유지로 매입비는 거의 들어가지 않는 가운데 오는 2015년부터 부지조성 공사와 함께 위령탑, 추모공간 등 건축공사가 시작될 예정이다"며 "이와 함께 공동묘역 등 조경공사는 오는 2016년에 들어가는 등 순차적으로 사업이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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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엽
  • 2013.10.07 23:02

중국, 한국 한지공예에 반하다

한지공예는 중국에서도 통했다. 중국 강소성 남경시에 있는 남경민속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한국한지문화공예전'에 중국 관람객들이 높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지난달 29일 중국 남경민속박물관에서 개막한 한지공예전은 사단법인 한지문화진흥원(이사장 김혜미자)이 중국과의 문화예술교류 차원에서 기획됐다. 전시회에는 한지문화진흥원 소속 한지공예 작가 50여명이 전통한지공예작품과 한지인형, 한지로 만든 원앙, 핸드백과 한지문화상품 등 50여점을 출품했다. 전시 현장을 찾은 관람객들은 한지를 갖고 항낭을 만드는 체험을 하는 등 한지공예에 많은 관심을 보였으며, 특히'심경'이라고 쓰인 한지수의에 중국 공예작가들과 관람객들의 눈길이 쏠렸다고 전시회 참가자들이 전했다.한지문화진흥원 관계자는 10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전시가 중국 국경절 연휴 등에 힘입어 100만 관람객이 예상된다고 말했다.한지문화진흥원은 이번 전시를 계기로 남경민속박물관과 교류전을 갖기로 협약을 맺었다. 협약식에는 한지문화진흥원 김혜미자 이사장과 박성만(동양한지 대표)백철희(고감한지&페이퍼 대표) 이사, 윤영선설순남 한지공예 작가가 참석했다.

  • 문화재·학술
  • 김원용
  • 2013.10.02 23:02

'후백제 왕도 전주' 시민강좌 ③ 견훤은 왜 전주에 도읍 정했나

'삼국사기'권 제50 열전 제10 견훤전에 견훤의 인물평이 기술되어 있다. 견훤은 누구인가. 그는 신라인이면서도 신라가 당나라인 외세를 끌여들여 나당연합작전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것에 매우 분개할 정도였고, 그는 신라의 변방을 지키는 방수군의 비장이면서 부패하고 타락한 신라 정부에 강한 적개심을 품고 경주에 쳐들어가 경애왕을 처형하고 경순왕을 옹립할 정도의 권세를 가진 정의로운 인물이었다. 경애왕의 처형은 흉년 기근과 도적떼 발호, 전염병이 만연하는 난리통에 백성을 돌보지 않는다게 직접적 요인이었다. 그리고 지방호족들을 끌어안는 포용력과 용맹스러운 기풍과 군사들의 선봉에 서는 리더쉽을 갖고 있었다. 견훤은 매우 정의로운 장수였고 민족 자주의 국가의식이 강한 지도자였다. 견훤은 백제가 익산 금마에서 일어났다는 일통삼한의식(一統三韓意識)을 갖고 있었으며, 백제의 국가계승 의식이 매우 투철하였다. 그가 892년에 무진주(현 광주)에서 지방호족들을 규합하여 국가창업의 기반을 조성하면서도 스스로 감히 왕이라 칭하지 못할 정도로 겸손함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견훤은 전주를 매우 좋아하였다. 그가 광주에서 후백제의 창업기반을 조성하면서도 전주에 도읍을 정할 구상을 하고 있었다. 견훤은 전주사람들에 대한 믿음이 강하였다. '삼국사기'열전에 "견훤이 서쪽을 순행하다가 전주에 이르렀는데, 전주고을 사람들이 열렬하게 맞이하자 견훤은 인심을 얻어 기뻐하였다(萱西巡至完山州 州民迎勞 萱喜得人心)는 내용에서 전주인들에 대한 호감을 드러냈다. 또한 백제 의자왕의 오랜 울분을 씻어주기 위해서 전주에 도읍하겠다(今矛敢立都於完山)고 천명하였으며, 마침내 900년에 전주에 후백제의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왕이라 호칭하였다. 그리고 국가 운영에 필요한 관제를 설정하고 사무를 분담하는 정부 조직도 갖추었다. 후백제 국호도 백제의 국가계승의식을 선언하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다. 견훤은 왜 광주에 도읍하지 못하고 전주에 도읍할 정도(定都) 구상을 하였을까?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전남지역 호족들에게서는 백제의 귀속의식이 매우 낮다는 판단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영산강 유역의 해상교통로를 장악하지 못한 것이 직접적 요인이었을 것이다. 그런점에서 전주천도가 아니라 전주정도가 맞다. 그렇다면 왜 견훤이 전주에 도읍을 정하였을까. 첫째, 전주가 백제권의 중심이라는 인식. 둘째, 전북지역 백제인들이 앞장서서 백제부흥전쟁을 치른 호국의식을 높이 평가. 셋째는 만경강 교통로의 확보를 들 수 있다. 견훤은 국가를 세운 후에 상국에 사신을 보내 국가의 외교적 승인을 받는 일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데, 대중국 해상교통로인 영산강 교통로가 왕건의 측근 세력들에게 차단당하였기 때문에 광주에 도읍을 정할 수가 없었다. 견훤에게 영산강 교통로의 차단은 숨통막히는 일이었기에 전주에 정도한 이후에도 줄곧 영산강 교통로를 장악하고자 몇차례 공략하지만 끝내 실패하고 만다. 오로지 영산강 교통로의 장악은 대중국과 대외교류를 위한 해상교통 확보가 목적이었다. 견훤은 전주에 도읍을 정한 즉위년에 중국 양자강 유역에 위치한 오월국(吳越國)에 사신을 보내고 검교태보(檢校太保)라는 벼슬을 제수받는다. 이후 줄곧 오월국과 외교관계를 유지한다. 후백제가 중국의 오대십국가운데 유독 오월국과 외교관계를 집중한 것은 백제의 국가계승에 집착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가 중국의 남조문화를 황해남부 사단항로를 통해서 받아들였는데, 전주에서 만경강 교통로를 이용하여 사단항로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갔고, 오월국의 사신도 황해남부 사단항로와 만경강 교통로를 이용하여 후백제 수도 전주로 들어왔다. 만경강 교통로는 전주 덕진에서 나룻배로 출항을 하면 회포-춘포-목천포-불포-심포-군산도-위도-죽도-소혹산도를 경유하여 중국 절강성 영파 정해현 보타산으로 건너가는 바닷길이었으며, 중국에서도 정해현 보타산에서 같은 사단항로를 따라 전주로 들어오는 바닷길이 열려 있었다. 오월국 수도 항주에서 후백제 수도 전주까지 건너오는데 1주일이면 족했다. 921년 9산선문 가운데 동리산문의 동진대사 경보스님이 중국에서 배를 타고 전주부 임피군으로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다. 경보스님이 당도한 곳은 군산시 임피면 신창진나루터였을 것이다. 후백제는 군산만, 변산반도의 황해남부 사단항로를 장악하고 있었고, 오월국도 중국 양자강 유역과 사단항로의 바닷길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후백제와 오월국은 해상교통이 매우 용이하였다. 이 사단항로의 바닷길을 통해서 불교문화와 해양신앙과 성황신앙, 도자문화 등 다양한 문물교류가 양국 사이에 이뤄졌다. 전주가 도시 면모를 갖추고 품격있는 문화능력을 갖기 시작한 것도 후백제 도읍 시기부터다. 왕도의 전통은 고려시대 내내 지속적으로 유지되었으며, 이러한 왕도의 기운으로 조선왕조의 본향이 된 것이다.

  • 문화재·학술
  • 기고
  • 2013.09.30 23:02

백제 왕도 익산 불교문화 재조명

익산의 불교문화를 중심으로 그 특징과 가치를 미술사적 측면에서 규명해보는 뜻깊은 자리가 마련됐다.27일 원광대에서는 '639년 금마저: 고대익산의 미술사적 고찰'을 주제로 익산역사유적지구 세계유산등재 추진 국제학술회의가 개최됐다.익산시와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사)한국미술사학회 등이 공동 주최한 이날 학술회의는 백제시대 금마저(金馬渚)로 불린 익산의 백제왕도 유적에 대한 미술사적 고찰을 통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 중인 익산역사유적지구의 역사·문화적 정체성과 그 가치를 규명하기 위해 마련됐다.이날 학술회의에는 중국 청화대 리징지에 교수, 대만 고궁박물원 리위민 박사, 일본 대정대 가지마 마사루 교수를 비롯한 국내외 석학 10여명의 주제발표에 이어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먼저 주제발표에 나선 원광대 이다운 교수는 "익산은 무왕의 새로운 신도경영과 왕권강화 일환으로 대사(大寺)를 창건한 곳이며, 이러한 정책은 왜에 영향을 주었다"면서 "익산의 문화유산은 동북아시아적 관점에서 그 가치를 재조명해야 한다"고 말했다.배병선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익산을 중심으로 한 백제의 건축기술은 삼국 가운데 가장 뛰어난 수준이었으며 신라와 왜 등 주변국까지 기술자의 파견요청이 끊이지 않았다"며 당시 익산의 건축기술이 뛰어났음을 밝혔다. 또한 서강대 강희정 교수는 "익산의 불교유적은 백제의 국운이 다하기 직전, 가장 찬란하고 아름답게 피어난 문화의 불꽃이다"고 강조했다.

  • 문화재·학술
  • 엄철호
  • 2013.09.30 23:02

'후백제 왕도 전주' 시민강좌 ② 후백제 궁궐 어디에 있었을까

전주는 역사적으로 두가지 코드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후백제 왕도로서의 전주와 조선왕조의 발상지로서의 전주이다. 두가지 코드를 전주는 충분히 활용하여 전통도시로서의 발전을 지속시켜야 할 것이다. 그중에서도 전주가 수도로서 기능한 시기는 후백제시기이다. 왕도의 기운을 되살리는 것은 현재의 우리 몫이다.견훤이 전주로 천도한 해는 900년이다. 후백제는 고려의 왕건에 의해 936년에 망했다. 그러니까 전주가 36년 동안 후백제의 왕도였던 셈이다. 긴 역사 속에서 보자면 너무 짧은 기간이지만, 14년간 태봉의 수도였던 철원에 비하면 배가 넘는 기간이다. 철원의 풍천원에 세워진 태봉의 도성은 외성 12.7㎞, 내성 7.7㎞이었으며, 태봉은 궁궐과 누대 등을 극히 화려하게 장식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36년 동안 전주에 세워진 후백제의 도성은 적어도 그 이상의 위용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견훤은 외교관계를 중시해 주변 여러 나라와 통교를 지속하였다. 이때 외국의 사신이 후백제를 들리기도 하였다. 이를 대비해 궁궐과 도성을 화려하게 만들었다고 해도 지나친 억측만은 아닐 것이다.화려하게 만들어졌던 도성과 궁궐은 현재 전주의 어디에 있었을까. 동고산성에 오르면 9부 능선 부근에 대단한 위용을 자랑하는 2층 건물로 축조되었다고 추정되는 터를 찾을 수 있다. 주변을 돌아보면 여러 건물지의 흔적도 찾아진다. 이 건물지를 둘러싸고 있는 성곽도 찾아졌다. 이를 근거로 이곳이 상성중성내성을 갖춘 궁궐터였다고 추정되었다. 그러나 이곳은 몇 가지 점에서 궁궐로 보기에는 주저되는 점이 있다. 먼저 이곳은 거의 동고산정상부에 위치하여 국왕의 권위를 드러내기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커다란 건물지에 추운 겨울에 대비한 온돌시설이 없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물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런 점들로 '신증동국여지승람' 전주부에서 찾아지는 견훤이 전주부의 북쪽 5리(현재의 물왕멀 일대)에 토성을 세웠다고 하는 기록을 근거로 그곳을 궁궐터로 추정한 견해도 있다. 이곳에서는 일제시대 편찬된 '전주부사'에 의하면 1만여개의 주춧돌이 찾아져, 그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 견해들은 전주천의 물길을 기준으로 해석된 견해들이었다. '완산지'에 의하면 전주천은 한벽루를 지나 오목대를 거쳐서 흘렀다고 한다. 이 견해가 '전주부사'에서 전주천이 오목대를 거쳐 구철도를 따라 북진하여 모래내를 만나고, 이어서 덕진지를 거쳐 추천으로 흘러갔다고 해석됐다. 그렇게 때문에 견훤은 전주천을 넘을 수 없어 궁궐을 물왕멀일대와 동고산에 조성했다고 주장됐다. 최근 전라감영이 발굴됐다. 이 발굴에서 뜻하지 않은 결과가 나왔다. 발굴된 지층에서 통일신라 건물지가 나온 것이다. '전주부사'의 견해에 의하면 전주천이 흐르고 있는 곳에 건물지가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이 발굴로 인하여 적어도 통일신라 시대에는 전주천이 현재와 같은 물길을 유지하고 있었음이 확실해졌다. 그리고 1912년에 만들어진 지적도에 의하면 전주는 격자형 도로 구획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도로구획은 통일신라시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통일신라 9주 5소경의 중심지였던 남원광주상주청주 등에서 찾아지는 도로구획과 거의 동일한 격자형 도로구획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격자형 도로 구획의 중심지는 대략 조선시대의 치소와 일치하고 있다. 조선의 치소는 고려의 치소를 이어받았으며, 고려의 치소는 통일신라의 치소를 이어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후백제의 궁궐도 당연 이곳에서 찾아져야 되지 않을까 싶다.※ 이 글은 전주시와 전주역사박물관이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는 〈제12기 전주학 시민강좌〉'후백제 왕도 전주'의 강좌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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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 2013.09.16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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