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시대 개막 서둘러야
국립공원 제1호 지리산은 우리 민족의 영산이다. 3개 도, 5개 시·군에 걸쳐 지정면적 471.758㎢ 800리 둘레길이 사방팔방으로 거미줄처럼 얼켜있다.대표적인 태극종주코스는 남원땅 덕두산에서 S자 커브를 따라 노고단, 반야봉, 세석을 거쳐 산청땅 웅석봉까지다. 걸어서 갈수 있는 길은 인문학을 생산하는 기반이다. 길은 또 오늘의 이슈인 소통을 위한 구체적 통로이다. 우리는 이 길을 통해 막힌 것을 뚫고 길을 통해 정신문화를 새롭게 변화시키려 하고 있다. 길중에는 눈으로 보이는 길도 있고 정신적인 길, 상상의 길, 도인의 길, 도학자를 만나러 가는 길, 큰 근원을 찾으러 가는 길, 하늘에 오르는 길도 있고 답답함을 풀기위해 무릉도원을 찾으러 가는 길도 있다. 이런 길은 자연경관만 빼어난 길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조식, 김일손, 정여창, 양대박 등 선인들께서도 일찍이 지리산을 유람했었다. 지리산길에는 역사와 문화가 가는곳마다 스며있다. 우리는 이제 그 길을 연구하며 대중화와 세계화를 위해 국민적 통합의 길 아니 소통의 길로 만들어가야 한다.지리산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영산이라하여 신격을 사전(祀典)에 올려 제사했을뿐만 아니라 신라때는 오악(五嶽)중 남악(南嶽)으로 신사(神祀)가 있었다. 신사에는 산신을 상징하는 신상(神像)이 안치되었다. 이처럼 지리산에 대한 숭배의 역사가 이어지면서 지리산은 신령(神靈)스러운 산으로 여겨왔다. 이러한 지리산은 산신신앙의 역사적인 전개와 산신숭배의 전형적인 모습을 살피는데 빠뜨릴수 없는 중요한 산이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고려시대때부터 산신신앙에 관한 연구는 부분적이나마 각계각층에서 계속되어 왔다.첫째 지리산 산신의 실체에 대한 연구, 둘째 신사가 처음에는 천왕봉, 고려때는 노고단, 조선시대는 남악사로 셋째 황산대첩이후에도 지리산 산신신앙은 계속 섬겨왔다. 이상과 같이 정치적 배경이나 사상적 기반에 주목할 필요는 없지만 한국인들에게 지리산은 속세의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질수 있는 하나의 탈출구 내지 해방구로 인식되어 왔다. 지리산은 쫓기는 자들이 마지막으로 숨어지냈던 은둔지이기도 하다. 지리산 산신에게 제사를 올린 때는 신종 5년(1202) 윤12월이었다. 경주지역에서 일어난 민난을 진압하기위해 정부군을 파견하였다. 정부군은 삼군으로 나누어서 반민을 공격하였다. 이때 여러신에게 33차례 제사지냈다. 산신에게도 제사를 올려왔을 뿐만아니라 청학동 삼성궁(도인촌이라고도 함)에는 우리 배달민족의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건국이념을 바탕으로 한 삼화경과 삼륜(三輪), 오계(五戒), 팔조(八條), 구서(九誓)의 덕목도 가르치고 지리산 생명사상과 탐방순례 또한 계속되어왔다. 이상과 같이 지리산은 인간이 관계를 맺으면서 형성된 의미체계에서 나온 개념이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창출하고 결정한 의미에 의해서 규정 이해되는 것이므로 성격이 고정되는 경우보다 변화를 겪는 존재이므로 결국 영산은 공간과 시간, 인간이 다층적 관계속에서 빚어낸 사회적 생물의 성격을 띠고 있어 문화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지리산이라는 구체적 공간을 통해 형성된 인문학을 총체적으로 접근하여 문학, 철학, 지리, 교육, 산신신앙, 산촌문제연구 등 지리산권역 전반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실정이므로 지리산시대 개막을 위해 지리산태극종주코스 등반로 일부구간 정비 등 세계복합유산지정을 서둘러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