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 역사 이야기] ④지진
새해 벽두부터 지구촌을 강타한 아이티 강진 소식. 사망자가 12만명으로 확인되면서 지구촌이 또 다시 지진 공포에 휩싸이고 있다. 우리나라도 2005년 인도네시아 쓰나미, 2007년 파키스탄 지진에 이어 아이티에 의료진을 보내는 한편 정부와 민간이 지원금과 인력을 보내며 아이티 재건에 동참하고 있다.자칫 지진은 한반도와는 머나먼 나라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한반도의 지진 역사를 살피고 나면 우리나라도 지진 영향권에 상당히 깊숙이 포함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진도 7 이상의 강진이 수차례 발생했고, 2000년대 이후에도 진도 4 이상의 지진이 아홉차례에 달했다. 소방방재청도 25일 '범정부 지진방재 종합대책회의'를 열고, 건축물 내진설계 대상을 모든 건물로 확대하는 대책을 추진키로 결정하며 지진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있다. 지진의 역사를 시대별로 나누어 되돌아 본다.▲ 삼국시대우리나라 문헌 가운데 지진을 기록으로 남긴 최초의 책은 '삼국사기'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지진 발생건수는 모두 107건이다. 당시엔 지진계 등 지진을 측정할 수 있는 기기가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직접 느낄 수 있는 수준 이상만 대상에 포함되었다. 또 삼국사기 내용도 삼국의 수도를 중심으로 기술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 지진은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대표적인 지진은 779년 후신라시대 경주에서 발생한 지진. 이 지진으로 100여명이 사망했고, 후세 전문가들은 당시 진도가 9 정도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려시대 고려시대에 발생한 지진에 대한 역사는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자료에 따르면 194건의 지진이 발생, 삼국시대보다 잦은 땅울림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는 고려시대의 한반도에서 지진 활동이 갑자기 활발했던 것이 아니고, 시대가 발전하면서 지진에 대한 관측 시스템이 좀 더 체계화된 데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한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지진에 대한 기록은 큰 폭으로 늘어난다. 1392년(태조 1년)부터 1863년(철종 15년)까지 472년간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지진 건수는 무려 1967회에 이른다.대표적인 사례가 1518년 7월 서울 지진. 조선왕조실록은 '유시(酉時)에 세차례 크게 지진이 있었다. 그 소리가 마치 성난 우레 소리처럼 커서 인마(人馬)가 모두 피하고, 담장과 성첩이 무너지고 떨어져서 동성 안 사람들이 모두 놀라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밤새도록 노숙하며 제집으로 들어가지 못했다'고 적었다. 황해도 배천군에서는 땅이 갈라지고 물이 솟아올랐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전문가들은 이들 기록을 근거로 당시 진도가 7 정도일 것으로 추정한다.진도 7 정도의 지진은 1597년(선조 30년)에도 찾아왔다. 선조 30년 9월 16일에는 함경도에서 이틀간 여덟 번이나 지진이 일어나 담벽이 모두 흔들리고, 새와 짐승들이 놀랐으며, 사람들이 병들어 일어나지 못했다고 조선왕조실록에 쓰여있다. 선조 30년 9월 18일에는 충청도에서도 지진이 발생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당시 하루에 3-4번, 어떤 곳은 하루 6-7번 지진이 발생했으며 기왓장이 진동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643년 울산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지진도 규모 7 정도로 추측된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1643년(인조 21년) 5월 30일 지진이 산골짜기와 해변 등 모든 곳에서 발생, 담벽이 무너지고 마른 하천에서 탁수가 솟았다는 내용의 경상감사 보고서가 올라왔다고 적었다. 당시 지진은 전국적으로 일어났으며 전라도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으로 추정된다.1681년(숙종 7년) 강원도, 1810년(순조 10년) 함경도에서 발생한 지진은 무려 규모 7.3 정도로 추정될 만큼 강력했다. 조선왕조실록엔 산사태가 일어나 사람과 가축이 깔려 죽었다고 적혀 있다.▲ 근대이후 우리나라에서 계기를 이용해 지진을 측정하기 시작한 때는 1905년. 이후 발생한 규모 5.0 이상 강진이 발생한 사례는 1936년 쌍계사 지진, 1978년 충남 홍성 지진, 1978년 속리산 지진, 1980년 평북 의주 지진, 2003년 백령도 지진, 2004년 경북 울진 지진 등이다. 규모 5.2를 기록한 홍성 지진은 건물 100여채가 무너지는 피해를 안겼다. 관측장비의 발달로 한반도 지진 숫자는 통계상 크게 늘고 있다. 1978년 기상대에 첨단장비가 들어온 이후 이 장비에 포착된 지진은 연평균 24차례에 이른다.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을 기준으로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지진은 2000회를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지난 2000년 동안 한반도에서 지진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15세기부터 18세기이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에 규모 7 이상의 지진으로 추정되는 지진이 수차례 기록된 사실에서도 간접적으로 확인된다.일부 전문가들은 진도 8이상의 지진이 조선시대에 40여차례 발생했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고, 1643년 울산지역서 발생한 지진의 경우 규모 10으로 판단된다는 학자들도 있다. 당시 지진은 서울과 전라도에서도 감지할 정도로 강력했다.▲ 지진, 과학으로 분류…실학자들부터 시작돼지진은 정치·경제·사회·문화·과학 중 어느 분야에 속할까. 현세를 사는 사람들은 지진이란 과학 분야에 속한다고 생각하지만, 고대와 중세 사람들의 생각은 지금과 확연히 다르다. 지진은 초자연적인 힘에 의한 것으로 정치 분야에 속했다. 고려사를 펼치면 지진에 대한 기록은 정치를 기록한 '세가(世家)'에서 만날 수 있다. 당시 일반적인 천문 현상은 '오행지(五行志)'로 분류했다.조선시대에도 지진은 자연현상이 아닌 하늘과 땅의 뜻으로 정치 분야에 속했다. 1518년(중종 13년) 서울에서 일어난 지진과 관련 조선왕조실록은 '땅은 고요한 물건인데, 그 고요함을 지키지 못하고 진동하니 이보다 큰 변괴는 없다'며 '음이 양을 이겨서 그 질서가 순탄하지 못할 것 같으면 그 보응(報應)이 반드시 크게 나타나는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하늘의 뜻을 암시하는 구절을 명시했다. 임진왜란이 진행중인 1594년 서울에서 지진이 발생하자, 선조는 자신의 부덕을 하늘이 꾸짖는 것으로 판단해 왕세자인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줘야 한다는 생각까지 했었다.지진은 과학의 세계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생각은 조선시대 실학자들에게서 싹텄다.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을 통해 '지진풍뇌는 일본에서 잦으며, 지진은 하늘의 뜻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강조하며 정치와의 분리를 주장했다. 이어 이익은 지진은 땅속의 빈곳에서 생겨나는 진동이며 땅이 꺼지는 지함(地陷)이라는 과학적 견해까지 덧붙였다.▲ 관동대지진1923년 9월 일본 관동지역서 발생한 자연발생적인 지진이 당시 일본에 거주했던 조선인들에겐 한 맺힌 사회적·정치적 현상으로 둔갑했다. 독립신문에 따르면 관동대지진 사태에 따른 일본인들의 만행에 희생당한 조선인은 6661명.얼핏 관동대지진이란 천재지변과 조선인 사이엔 인과관계가 전혀 성립되지 않지만, 당시 일본 정부와 일본인들은 대지진으로 인한 흉흉한 민심을 조선인에 대한 학살로 풀어내는데 악용했다.진도 7 이상의 강력한 지진이 휩쓸며 관동지방의 민심과 사회질서가 정상 괘도를 벗어나 수습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지자, 당시 일본 내무성은 계엄령을 선포하는 한편 각 경찰서에 '재난을 틈타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조선인들이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이 공문 내용이 빌미가 되어, '조선인들이 폭도로 돌변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 약탈을 하며 일본인들을 습격하고 있다'는 헛소문으로 번졌다.흥분한 일본인들은 자경단을 구성하고 길거리에서 검문에 나서며 조선인으로 확인된 사람은 죽창이나 일본도로 마구잡이 학살했다. 한복을 입은 사람은 현장에서 살해했고, 기모노나 유카타로 위장한 사람은 조선인에게 어려운 일본어 발음을 시키는 방법으로 색출했다. 피비린내 나는 대량 학살이란 광기 속에 사투리를 사용하는 타지역 출신 일본인들도 희생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