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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신뢰의 첫 걸음, 서명확인제도

최훈 행안부 지방행정정책관 1950년대 세계 최초 신용카드 회사인 다이너스 클럽을 창업한 프랭크 맥나마는 다이너스 클럽이란 카드 판에 식사금액과 자신의 서명을 남기고, 나중에 한꺼번에 식사비를 결제하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캐나다에서는 입출식 계좌 오픈과 동시에 퍼스널 체크라고 하는 개인수표를 받게 된다. 월세를 낼 때도, 학비를 낼 때도 신용카드보다는 개인수표를 사용하는 문화가 보편화되어 있는데, 지불을 원하는 금액을 적고 서명을 해서 건네면 계좌에서 돈이 인출되는 방식이다. 이처럼 대부분의 서구 선진국은 공적사적 거래에서 서명을 사용하는데 미국독일스웨덴에서는 신분증에 서명을 기재해 이용하고 있고 영국프랑스는 전자서명제도를 활용하고 있다. 서명이 자신의 신용을 보증하는 주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우리나라는 부동산자동차 매도 등 재산권 처분과 관련한 거래에 행정관청에 사전에 등록한 인감도장으로 발급받을 수 있는 인감증명서가 쓰이고 있다. 이러한 인감증명제도는 일제강점기인 1914년 식민통치 수단으로 강제 도입됐다. 조선총독부가 인감을 신고한 사람에게만 인감증명을 발급했고 이것이 없으면 토지 등의 재산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인감증명제도는 지난 100여년간 폭넓게 활용되었는데, 이제 인감증명제도를 운영하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일본대만 정도다. 인감도장은 개인의 신용과 거래의사를 담보할 수 있는 확실한 수단일까. 얼마 전 증평 모녀 사망 사건의 당사자인 언니의 신분증과 도장, 휴대전화 등이 담긴 가방을 동생이 훔쳐 달아난 뒤 언니의 인감증명서를 부정 발급받아 언니 소유의 차량을 판매한 사건이 있다. 한편, 자신의 빚을 갚을 목적으로 평소 자신이 가지고 있던 배우자 인감 및 아파트 등기권리증을 이용하여, 배우자 인감증명 위임장 등을 도용해 배우자 아파트를 담보로 억대 대출을 받은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신용의 증표로 여겨지는 도장이지만, 가장 가까이에 있는 누군가에 의해 내 의사와는 다른 행위가 이루어질 수 있는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감증명서 부정 발급으로 인한 개인의 재산 피해 등을 예방하고 서명이 보편화한 시대 흐름에 맞춰 인감증명제도를 대체하기 위해 2012년 본인서명사실확인제도가 도입되었다. 인감증명서가 사전에 인감을 신고해야 하는 것과 달리 본인서명사실확인서는 사전에 별도로 서명을 등록할 필요 없이 본인이 신분증을 지참하여 전국 읍면동 주민센터에서 서명을 하고 바로 발급받을 수 있다. 또한 인터넷으로도 발급이 가능하여 편리하다. 주소지 관계없이 가까운 읍면동 주민센터를 방문하여 이용승인을 받으면 2년 동안 직장이나 집에서 정부24에 접속해 전자본인서명확인서를 발급받을 수 있다. 2년이 지나기 전에 갱신신청이 가능하며, 전자본인서명확인서 제출 기관이 2017년부터 전 국가기관으로 확대되어 더욱 편리하게 이용 가능하다. 다만, 본인서명사실확인서는 인감증명서에 비해 부동산 관련용도가 세분화(소유권 이전, 제한물권 설정 등)되어 있으며, 일반용의 경우도 구체적 용도를 기재해서 발급받아야 한다. 또한 수요처에 대리인이 제출하는 경우 수임인을 기재해서 발급받아야 하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사전 신고 절차가 없고, 본인이 직접 발급하므로 부정발급 위험성도 적으며, 인터넷으로도 이용이 가능한 편리한 제도인 본인서명사실확인제도가 널리 알려져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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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1.28 19:50

이재철 목사의 아름다운 은퇴

윤승용 남서울대학교 총장 추수감사절 주일인 17일 서울 마포구 양화진의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에서는 한국 교회사에서 이정표가 될 만한 설교가 열렸다. 이날 설교는 이 교회 담임인 이재철목사가 퇴임하는 고별설교였다. 이 목사는 신약성서 사도행전의 마지막 구절인 28장30~31절,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를 소재로 퇴임의 변을 설파했다. 이 목사는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사도행전의 마지막 구절을 기록하면서 특별히 강조한 두 단어가 있는데, 첫 번째가 담대하게이고 두 번째가 거침없이이다라고 전제하고, 사도 바울처럼 담대하고, 거침없이 세상이 기억해주지 않아도 하나님이 기억해주시니 사랑하며 섬기는 삶을 살아내자고 당부했다. 이 목사의 이날 설교는 퇴임사를 가름하는 셈이어서 이 교회 신도들에게 각별한 의미로 다가왔을 터이지만 기독교계 내부에서는 그 절실한 내용 못지않게 퇴임에 담긴 의미도 주목을 받았다. 보수와 진보 양 진영을 모두 아우를만한 목회자를 물색하던 선교100주년기념교회에 발탁돼 2005년 7월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 13년 4개월간 사역해온 이 목사는 만 70세 정년 7개월을 앞당겨 이날 조기 퇴임했다는 점에서 단연 화제를 모았다. 통상 한국 교회에서는 퇴임시기도 가변적인데다 정작 퇴임 후에도 원로목사 등의 직함으로 교회에 대한 영향력을 지속하는 게 관례다. 또한 이 목사는 기독교계에 공공연한 이른바 퇴직금을 한 푼도 받지 않았다. 웬만한 규모의 교회에서는 10억 여 원이 넘는 퇴직금이 지급되는 게 현실이다. 이 목사는 또한 등록교인 1만5000명이 넘는 규모로 성장시킨 이 교회를 2세 등 친인척에게 넘겨주지 않아 주위를 놀라게 했다. 요즘 대형교회들이 잇달아 교회 세습 문제로 물의를 일으키는 풍조에 견줘보면 분명 돋보이는 행보다. 이 목사는 이어 영성총괄, 목회총괄 등 4분야를 담당하는 목사를 4명 선임해 이들이 공동목회를 담당하도록 했다. 이 목사는 이전에도 여러모로 기독교계에서 주목을 받았다.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설교자인 이 목사는 매년 신학생들이 가장 만나고 싶어하는 목회자로 꼽혀왔다. 한국외국어대 불어과 졸업 후 홍성통상과 출판사 등을 설립해 경영인으로 두각을 나타냈으나, 회사와 개인 삶에 닥쳐온 위기를 계기로 기독인으로 거듭난다. 이후 30대 중반을 넘긴 나이에 신학대학원에서 신학공부를 마친 후 1988년 주님의교회를 개척했다. 이 목사는 개척 당시 약속대로 10년 임기가 끝나자 곧바로 사임해 눈길을 끌었다. 이 목사는 100주년기념교회에서 헌금의 무기명화, 모든 교회 재정의 50% 이상을 교회 내부가 아닌 외부 사회를 위해 사용하는 등 사회적 영성확대에도 앞장섰다.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목회자임에도 불구하고 교인들에게 탈세하지 말라고 하고, 본인 스스로 자진 납세하는 모범을 보였다. 이 목사는 이날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참 행복했습니다라고 설교를 마무리하고 경남 거창의 벽지에 소박하게 지은 우거로 부인이 모는 준중형 승용차를 타고 낙향했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세속화한 교회를 개혁하고자 종교개혁을 주창한 지 500년이 지났지만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기보다는 세상이 교회를 걱정해야하는 이 시대에 이 목사의 은퇴는 아름답다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뭔가 부족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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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1.21 19:49

전북의 판근(板根)을 키우자

민경중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사무총장 얼마 전 제주특별자치도 초청으로 1박2일 명예제주도민우정의날에 처음 다녀왔다. 제주에서의 근무 인연으로 수년 전 제주의회의 의결을 거쳐 육지것에서 비록 명예지만 제주사람이 됐다. 육지것이라는 단어에는 많은 함의가 담겨있다. 타지에서 온 사람들에 대한 제주사람들의 배타적이고 이질적인 문화가 탄생시킨 단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2년 남짓 살면서 그 말이 제주사람들의 입에서 보다 오히려 우리 자신들이 더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제주대 최낙진교수(언론홍보학과)는 육지것이란 말은 뭍사람은 제주에서 가해자였다는 역사의식을 갖는 사람들이 쓰는 부채의식 언어라고 말했다. 적극 동의한다. 탐라국부터 지금까지 제주도와 사람들은 단 한번도 육지것들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는데 수많은 전란과 고초를 겪었고 지금도 진행형인지도 모른다. 그런 부채의식을 가지고 처음 참가한 명예제주도민행사는 고부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이자 이념과 지역색의 대결 속에서 피해를 입어온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컸다. 이번 행사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시간은 환상숲 곶자왈 생태탐방이었다. 곶들에 가그네 낭 해오라이, 갠디 자왈드랜 가지 말라이 (숲에 가면 나무해오고 덩굴엔 가지 말라)는 제주사투리처럼 숲을 뜻하는 곶과 가시덩굴인 자왈을 합한 곶자왈은 예전에는 쓸모없는 땅의 대명사였다. 돌무더기로 인해 농사도 짓지 못하고 소 방목지로 이용하거나 땔감을 얻고 숯을 만드는 불모지였다. 43사건 당시 무고한 희생을 당한 민초들이 겨우 자기 몸을 숨길 수 있는 고마운 장소이기도 하다. 제주도 전체면적의 6.1%를 차지하는 곶자왈이 보호받기 시작한 것은 이곳이 청정 지하수의 보고이자 동식물 생태분야의 학술적 가치가 뛰어나다는 사실이 밝혀진 최근의 일이다. 환상숲 곶자왈에는 8백여종의 식물이 산다. 그중 검붉낭이라 하는 푸조나무는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바람이 거세고 돌투성이 화산섬 제주에서 나무들은 살기위해 무척 애를 쓴다. 버티면서 치열하게 산 흔적이 바로 판근(板根)이다. 나무의 뿌리는 보통 땅 속으로 뻗는다. 그런데 나무의 곁뿌리가 평판 모양으로 되어 땅위에 노출되는 것을 판근이라고 한다. 제주의 곶자왈은 바닥이 온통 돌이다. 그래서 나무들이 아래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땅위로 판처럼 뿌리를 키운다. 사람으로 치면 금수저,은수저,흙수저가 아니라 돌수저로 태어나 바위를 뚫고 성장하는 나무다. 강인한 제주인들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 전북인들은 어떨까? 최근 모처럼 전주시 관련 기사가 중앙언론에서 주요뉴스로 다뤄졌다. 어느 기업이 전북에 초고층타워를 짓는다는 기사였다. 하지만 언론들은 한결같이 부정적이었다. 롯데타워가 123층인데...60만 도시에 143층 마천루?, 전주에 143층 타워 짓는다는데...처럼 부정적인 뉘앙스의 기사가 이어졌다. 솔직히 개인적으로 이 사업이 얼마나 사업적 타당성이 있는지는 모른다. 인허가 과정에서 철저한 검증과 시민공론화위원회를 거쳐 따져 물으면 된다. 그러나 참을 수 없는 것은 은연중에 내포된 고질적인 수도권 대도시 중심의 사고다. 서울의 남산타워는 되고 왜 전주는 안되는가? 특정지역중심의 산업화과정에서 소외되면서 과거보다 인구가 60만 규모로 줄어든 것도 억울한데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일까? 한옥마을 유지 명목으로 개발은 제한하면서 왜 143층은 안되는 것일까? 태풍에 버티고 바위를 뚫기 위해서 언제까지나 땅 속으로만 뿌리를 내려서는 안된다. 땅 위로 나무의 근육을 키워나가야 한다. 이제는 우리도 판근을 키워야 한다. 전북인의 판근을 뿌리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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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1.14 19:39

개인 사회가 가져온 유통구조의 변화

김홍규 아신그룹 회장 급격한 IT기술의 발달은 우리 삶을 많이 바꾸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게 바꾸고 있는 것은 유통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유통 구조의 변화는 한두 군데에서 감지되는 것이 아니다. 개인마다 핸드폰이 들려지면서 손안의 소비, 결제가 가능하게 되었고, 이는 유통의 판도를 온라인 중심으로 바꿔 놓았다. 밤 10시에 침대에 누워 장을 보면 다음 날 새벽에 배송해 주는 마켓도 있고, 친정 언니가 농사지어 보낸 듯 좋은 제품을 정해진 날짜에 배송해 주는 텃밭도 있다. 소비자들의 요구에 맞춰 판매자들도 발 빠르게 움직인다. 전통적인 유통 구조는 생산자에서 소비자에게 도달하기까지 적어도 서너 번의 단계를 거친다. 도매업자와 도도매업자, 소매업자 등 판매 단계를 거칠 때마다 소비자에게는 노출되지 않는 그들만의 방식이 있어서 소비자는 한정된 물품만 구매할 수 있었다. 어떤 제품이 어떤 경로를 거쳐서 어떻게 우리 집에 오는지 알 수 없을뿐더러 가격도 판매업자들이 정했다. 그러나 인터넷의 발달과 더불어 빠르게 정보가 공유되면서 전통적인 유통 시스템은 의미가 무색해졌다. 누구나 유통을 들여다 볼 수 있어서 전통적인 유통 구조는 그 수명을 다했다. 한두 개 사이트가 아닌 여러 사이트에서 내가 살 물건을 비교해 보고, 각종 혜택을 더해서 판매자가 아닌 소비자가 가격을 결정하는 시점에까지 이르렀다. 예를 들면 해외에서 물품을 살 수 있는 직구, 가격 비교에서 결제까지 원스톱으로 이뤄지는 온라인모바일 쇼핑, 중간 판매자가 필요 없는 직거래, 각종 커뮤니티에서 질 좋은 제품을 싸게 구매하는 공동구매, 소비자가 판매도 겸할 수 있는 온라인 오픈 마켓 등 예전에는 불가능했던 판매 채널들이 활성화되면서 유통 단계는 축소되었으나 범위는 훨씬 더 넓어져 생산자 중심이 아닌 소비자 중심의 가격이 형성되는 것이다. 여기에 1인 가구에 초점을 맞춘 제품과 유통도 성황을 이루고 있다. 가전제품도 대형 가전보다는 쓰다가 버리는 스몰 가전이 시장 점유율을 높이고 있고, 식재료도 미니 소포장이 각광받고 있다. 직접 고급식당에 가지 않아도 집에서 만끽할 수 있는 맛집 재료들이나 레토르트 식품이 배송되는 것이 유행이고, 그마저도 귀찮을 때는 맛집 요리를 그대로 시켜먹을 수 있는 세상이다. 이 모든 것이 제품 간접경험에서 배송까지 1대1로 이뤄지는 IT 기술의 발전 덕분이다. 이러한 유통 구조의 변화는 사실 개인주의 사회로 진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급격하게 공동체 문화가 무너지면서 유난히 빨리 유통의 변화가 일어났다. 아무도 만나지 않아도 업무를 볼 수 있고,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지구촌 저 너머의 일까지 알 수 있는 빠른 정보의 유입은 협업하지 않아도 생존이 가능한 개인 사회를 앞당겼다. 식당에서 남이 먹는 메뉴를 살펴보는 촌스러움, 옆집에 새로 들여온 가구를 구경하는 재미, 남의 집 자식자랑에 샘솟는 질투 이런 것들은 사라져 간다. 그 자리를 요리 재료를 레시피대로 파는 온라인 유통업체, 취향까지 컨설팅하는 가구업체, 대치동 유명 강사의 인터넷 강의 등이 채웠다. 유통의 변화가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를 불러온 것인지, 라이프스타일의 변화가 유통의 변화를 불러온 것인지 모르겠으나 우리 사회는 이제 혼자 살기에 여념이 없는 개인 사회를 맞이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 오피니언
  • 전택수
  • 2018.11.07 20:51

10월 29일, 지방자치의 날

최훈 행정안전부 지방행정정책관 대한민국의 지방자치는 1949년 7월 지방자치법 제정으로 시작했다. 이후 1952년 지방의원 선거, 1960년 주민직선에 의한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통해 지방자치가 시행되었다. 그러나 1961년 5월 지방의회를 해산하고 지방자치법의 효력을 정지시켰다. 지방행정은 중앙정부에서 임명한 관료에 의해 운영되었고 지방의 자율성은 사라졌다. 이후 1987년 10월 29일 헌법을 개정하여 지방자치에 관한 조항의 효력을 되살렸다. 이를 기초로 1991년 주민직선 지방의회 구성, 1995년 민선 지방자치단체장 선출을 통해 지방자치는 부활했다. 지방자치 부활의 계기를 마련한 헌법 개정을 기념하여 매년 10월 29일을 지방자치의 날로 지정하고 지방자치박람회를 개최하고 있다. 올해 10월 29일부터 31일까지 경북 경주시에서 개최한 제6회 지방자치박람회는 자치분권 새바람, 주민과 함께 만들어갑니다!를 슬로건으로 전시마당, 정책토론, 우수사례 발표, 참여마당 등 다채로운 행사로 채워졌다. 지방자치를 통해 다양한 지역주민의 요구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실제로 행정기관의 주민서비스에 대한 인식이 개선됐으며, 민원서비스를 제공하는 주민센터가 2,605개(09년)에서 3,500개(17년)로 증가했다. 주민들의 문화여가생활 여건도 개선되었다. 체육시설은 12,345개(08년)에서 24,303개(16년)로, 공공도서관은 600개(07년)에서 1,042개(17년)로 각각 두 배 수준으로 증가했다. 또한 지방자치단체 의사결정의 근거인 조례는 30,358개(95년)에서 92,104개(18년)로 지방자치가 부활한 지 23년 만에 3배로 증가했다. 민선7기 출범에 따라 지방자치에 대한 인식과 기대가 높아진 만큼 정부는 지방자치를 한 단계 도약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정부는 올해 9월 「자치분권 종합계획」을 확정하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지방자치법 개정과 본격적인 재정분권을 추진해 나갈 계획이다. 지방자치법의 전면적인 개정을 추진하여 주민중심의 새로운 지방자치 시대를 열어나갈 것이다. 주민이 직접 조례안을 발의할 수 있도록 하며, 주민소환 요건 완화하고 주민투표 대상을 확대하여 실질적인 지역민주주의를 구현하고자 한다. 지방자치단체의 조직, 인사에 대한 자율성을 확대하고 윤리특별위원회 설치를 의무화하여 책임성을 확보한다. 또한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간의 협력기구를 통해 국가와 지방의 관계를 협력적 동반자관계로 전환시킬 것이다. 중앙과 지방 간, 그리고 지역 간 재정격차와 불균형은 지방자치를 어렵게 하는 걸림돌이 되어왔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국세-지방세의 비율을 22년까지 7:3으로 개선해 나가고자 한다. 특히, 지방소비세율을 기존 11%에서 21%로 확대하고, 현재 담배에 붙는 개별소비세의 20%인 소방안전교부세율을 45%까지 단계적으로 인상해 나갈 계획이다. 나아가 지방재정 및 지방교육재정의 혁신을 통해 지역자율성과 균형발전의 토대를 마련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세계적인 저성장 추세, 저출산고령화 현상, 다양한 시민들의 요구에 직면하고 있다. 이는 국가의 효과적인 정책방향 설정과 지역의 특성을 살린 정책을 통해 함께 극복해 나가야 한다. 지방자치가 부활한지 23년, 대한민국과 지역사회의 더 나은 발전을 위해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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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0.31 19:46

신한청년당의 젊은 그들을 보고 싶다

윤승용 남서울대학교 총장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이던 1918년. 그해 8월 20일 중국 상하이 프랑스 조계의 협화서국(協和書局)이라는 서점에 여운형, 선우혁, 장덕수 등 조선 열혈 청년 6명이 은밀히 모여들었다. 일본 유학 등을 통해 국제정세에 밝았던 이들은 조만간 동아시아에서도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그해 초 주창한 민족자결주의라는 신국제질서가 도래할 것이라는 판단아래 비밀결사체를 조직하기로 결의하고 그 첫 모임을 가진 것이었다. 이 모임의 리더는 32세의 헌헌장부 몽양 여운형이었다. 그는 1914년 중국에 망명, 금릉대학을 졸업하고 이 서점에서 근무 중이었다. 그는 상하이에서 조선독립을 염원하던 청년들과 논의 끝에 청년독립운동 단체를 결성하기로 결의하고 당시 상하이에 유학중이던 터키 청년들이 터키청년당을 창당해 활동하고 있는 점을 본 따 신한청년당(이하 신청당)이란 청년결사체를 발족했다. 바로 이 신청당이 내년이면 100주년을 맞는 31운동과 상해임시정부 수립 기념 행사를 앞두고 새롭게 조명 받고 있다. 그간 신청당의 활약상은 일부 독립운동사 전공학자와 관련 유족들 외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었다. 하지만 신청당의 활동이 31운동과 상해임시정부수립에 결정적인 계기가 됐음이 알려지면서 재조명을 받게 된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1918년 11월 종결되자, 윌슨 미국 대통령은 찰스 크레인을 중국에 특사로 파견하여 종전 후의 미국의 입장을 중국에 설명하도록 했다. 크레인으로부터 파리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논의될 것이다는 소식을 들은 여운형은 그에게 파리평화회의에 한민족 대표 파견 가능성을 타진했고, 지원약속을 받아냈다. 신청당은 천신만고 끝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했다. 이 사실은 밀사 등을 통해 국내와 재일본 유학생들에게도 전해졌다. 28독립선언문을 작성한 춘원 이광수도 신청당의 밀사였다. 국내에 파견된 밀사들은 비밀리에 서울은 물론 전국을 돌며 열성적으로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바로 이들의 헌신적인 암약에 힘입어 그해 31운동의 횃불이 요원의 들불처럼 번졌다. 신청당은 31 운동 직후인 4월10일 상하이에서 조직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에도 주도적 역할을 했다. 31 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국내로 잠입했던 당원들이 3월 하순에 모두 상하이로 돌아오자 신청당은 프랑스 조계 안에 임시 독립사무소를 차리고 4월1일 임시정부 수립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했다. 이 결과 상하이 임정 초대 임시의정원 회의 멤버 29인 가운데 9명이 신청당원일 정도로 중심역할을 했다. 당시 신청당원들은 모두 2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의 청년들이었다. 이 젊은 그들의 가슴에는 초개같이 스러져간 구한말 의병들의 기개와 1909년 침략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청년 안중근의 단심이 서려있었을 것이다. 최근 암살, 밀정, 미스터 션샤인 등 근대 독립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와 드라마 등이 크게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신한청년당의 혁혁한 활약은 일반인들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31운동 백주년을 앞두고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등이 이들의 활동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려 애쓰고 있으나 예산부족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다고 한다. 애국선혈들의 헌신에 힘입어 독립에 성공, 세계 10위권대의 경제대국을 이루었음에도 자금부족으로 1세기가 지나도록 이들의 활약을 재조명하는 영상물하나 내놓지 못한다는 사실은 부끄럽기 짝이 없다. 내일이면 109주년을 맞는 안중근 의사 의거기념일을 앞두고 떠오르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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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0.24 19:37

내 인생을 바꾼 선생님의 한마디

민경중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사무총장 얼마 전 사무실에 작은 소포가 하나 배달됐다. 사랑으로 가는 길 이라는 제목의 작은 시집이었다. 책에 적힌 시인의 이름을 보는 순간 마치 타임머신을 탄 것처럼 시간여행에 빠졌다. 이제는 팔순을 바라보시는 고3시절 담임선생님께서 보내주신 자작 시집이었다. 쉰 중반을 넘길 때 까지 뭐가 그리 바빴는지 시 한편 제대로 음미하지 못하고 타향살이에 지친 내게 선생님의 시 한편 한편은 위안과 함께 인생을 반추해보는 가르침을 주셨다. 아마 누구에게나 학창시절 인생의 향도가 되었던 은사 한 두 분은 있을 것이다. 세계적인 전자 상거래 회사인 알리바바를 창업해 손꼽히는 거부가 된 중국의 마윈회장은 학창시절 지리선생님의 한마디에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는 성적이 신통치 않았지만 영어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지리선생님이 항저우 시후(西湖)주변에서 외국인 관광객들을 상대로 유창한 영어로 길을 알려줬던 경험담을 들려주며 지리공부뿐만 아니라 영어도 열심히 하라는 말을 귀담아 듣고 영어공부에 매진했기 때문이다. 자본도 인맥도 없이 맨손으로 시작한 마윈이 자신의 집에서 탄생시킨 알리바바닷컴으로 미국와 영국 등 해외 곳곳을 누비며 고객을 확보하고 투자자를 유치한 것도 영어를 습득한 것이 큰 힘이 됐다. 그는 가슴 한편에 일말의 실현 가능성 있는 이상을 품고 있다면 쉬지 말고 노력하라!라는 명언을 남겼다. 故김대중 전 대통령도 자서전에서 목포상업학교 시절 3학년 담임선생님의 한마디가 일생의 가르침이 되었다고 한다. 원칙을 포기하는 것은 삶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원칙을 고수한다고 방법에서 유연하지 못하면 승리자가 되지 못한다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방법에서는 유연한 이른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삶을 그때 배웠다고 회고했다. 시집을 보내 주신 선생님도 내게는 그런 분 중의 한 분이다. 대학 입학시험을 몇 달 앞두고 방황하던 내게 전체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엄한 체벌을 하셨다. 반장을 맡았던 내게 가지셨던 기대가 무너졌기 때문이셨던 것 같다. 집에 돌아오니 아버지께서 벌써 알고 계셨다. 선생님께 정말 고맙다고 말씀드렸다. 언제든 더 엄하게 혼내 달라고 부탁드렸다. 정신이 번쩍 들게 해주셨던 그 순간이 그나마 지금 조금이라도 사람구실하고 살 수 있게 해주신 덕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대여 석삼년을 기다려도 철쭉꽃 피면 오겠노라하던 언덕엔 올해도 환한 봄빛이 웃고 있다오/서울은 멀고 세월은 참 빠르지요 빠른 세월을 원망한들 하루해가 쉬엄쉬엄 갈 리 있겠소만/축축한 눈물의 별사(別辭)도 없이 서울행 열차로 그대를 떠나보내고 어둠이 묻어나는 차창에 얼굴을 기대며 돌아오는 언덕 위로 별들이 뜨더이다 그 별이 다 질 때까지 걷고 또 걸었지요/철쭉꽃이 지고 세월도 지고나면 그대와 나 무엇이 남으리오 먼데서 들려오는 새소리에 돌아보면 풀잎을 스치고 지나는 바람소리뿐(세월이 지고나면 오삼표 작) 이 시를 읽으면서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신 선생님의 애틋한 제자사랑이 오롯이 담겨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제멋대로의 해석을 하며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마음에 죄송할 따름이었다. 시의 궁극의 목표는 인간과 세계를 변화시키는데 있다고들 하거니와 더 나은 삶과 사회를 꿈꾸는 것이 시의 권리이자 책무다라고 하는 등단시인들의 말씀을 되새기며 지금과 다른 세상을 꿈꾸는 내게도 이러한 시적표현이 들어갔는가 반성해본다 라는 선생님의 시집 발제문은 갈수록 나태해지려는 나 자신에게 다시 주시는 엄한 가르침으로 이 가을에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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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0.17 20:45

미래 산업의 연구 대상 액티브 시니어들

김홍규 아신그룹 회장 통계청이 지난달 8월 27일 발표한 2017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기준 우리나라 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 고령인구 비율은 14.2%에 도달했다. 고령화가 아닌 고령 사회가 되었다. 전문가들은 2025년에는 고령인구 비율이 20%인 초고령사회에 진입한다고 예측한다. 7년 뒤면 우리나라 사람 5명 중 1명이 노인이라는 소리다. 625 전쟁 직후 출생된 베이비 부머들은 인구 증가와 함께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을 이끌어 왔고, 지금은 은퇴하고 있다. 이들은 그간 이뤄놓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비교적 여유로운 은퇴생활을 누리며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젊었을 때는 돈 벌고 가정을 돌보느라 자신을 돌보지 못했지만 이제 여러 가지 취미, 문화, 학습활동을 통해 자아실현을 성취하고 있다. 기존의 실버세대와는 확실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 지금의 50-60대들은 실버세대라고 하지 않고 액티브 시니어라고 부른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의 보고서에 의하면 고령친화산업 시장 규모는 2012년 27조, 2015년 39조 정도였는데 2020년 72조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였다. 2025년을 기점으로 로봇, 3D프린팅, AI 등이 생활 속의 기술로 확실하게 사용될 것이라고 하는데, 그때에는 그 누구보다 지금의 액티브 시니어 세대가 이 첨단 과학기술을 활용하는 산업의 주요 소비자가 될 것이다. 사별이나 비혼 등을 이유로 혼자 사는 액티브 시니어들에게는 의료적 기능보다는 정서적 기능이 더 필요하다. 먹지도 죽지도 아프지도 않지만 반려동물보다 더 똑똑한 로봇 강아지가 있다고 생각해 보자. 3D프린터로 예전 어릴 때 키우던 강아지와 똑같이 생긴 녀석을 내 마음대로 살 수 있고 여기에 학습 기능을 추가한다면 액티브 시니어들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필수품이 될 것이다. 길을 알려주고, 간단한 외국어 통역을 겸할 수 있는 인간이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을 도와주는 기능을 계속 추가해 나간다면 스마트폰이 필수가 되듯 로봇 강아지가 필수가 되는 그런 날들이 올지도 모른다. 한 발 더 나아가 소외된 지역의 독거노인 복지 사업에 로봇을 활용하면 훨씬 더 효율성이 높을 수도 있다. 이미 미국이나 일본 등은 홀몸 노인과 고독사 증가에 대비해 IoT기반의 실버용품을 대거 출시하고 있다.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사업도 있다. 현재 여성용품 회사들은 유아용 기저귀 시장을 대신해 성인용 제품의 시장 선점을 위해 사활을 걸고 있다. 기저귀 시장은 위생 인식 향상, 노년 인구 자체의 증가, 경제력을 갖춘 액티브 시니어의 증가 등이 맞물리면서 영유아에 초점이 맞춰졌던 산업군과 마케팅이 노년층으로 옮겨가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미국의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이었던 앨런 그린스펀은 전 세계가 은퇴하는 중이라고 했다. 바야흐로 전 세계가 늙어가는 중이다. 여기에 맞물려 액티브 시니어들이 원하는 기술들이 4차 산업혁명의 결과물로 속속 출시되고 있다. 고령사회와 미래 산업은 서로 잘 맞는 수요공급의 파트너로 다음 세상을 열고 있다. 우리가 어떤 산업에 공을 들여야 할지 충분히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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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0.10 19:49

보다 나은 주민등록, 보다 나은 주민의 삶

최훈 행안부 지방행정정책관 영화 완득이에서 남들보다 키는 작지만 자신에게만은 누구보다 큰 존재인 아버지와 어렵게 생활하는 완득이가 집을 나간 외국인 어머니와 우연히 재회하게 되는데... 완득이가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된다면, 외국인 어머니는 주민등록표 등본에 어떻게 표시될까? 두 아이의 싱글 대디와 세 아이의 싱글맘이 사랑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드라마 아이가 다섯에서 싱글 대디와 싱글맘이 결혼하여 같이 살게 되면 각자의 아이들은 주민등록표 등본에 어떻게 표시하여야 할까?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엿보이는 가족 형태의 다변화가 주민등록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지만, 국내에 체류하는 국민의 외국인배우자가 증가하고(2001년 2만5182명 2017년 15만5457명), 전체 혼인 중 재혼의 비율이 늘어나는(1997년 남 10.6%, 여 11.3% 2017년 남 15.8%, 여 17.9%) 등 사회변화에 따라 주민등록도 변화하고 있다. 첫째, 다문화 가정의 차별 해소를 위한 외국인배우자 관련 주민등록표 등본 표기 방안 마련이다. 외국인 배우자는 주민등록표 등본이 필요할 때마다 배우자와 함께 주민센터를 방문하여 등본을 신청하여야 하고, 주민등록표 등본 하단에 외국인배우자만 별도로 표기되어 한부모 가정으로 오해를 받는 경우 등이 있었다. 이와 같은 오해 등을 해소하기 위해 국민인 세대주나 세대원과 거주하는 외국인 배우자가 주민등록표 등본 표기를 신청하면 주민등록표 등본에 세대원과 함께 표기할 수 있도록 주민등록법 시행령을 개정하여 올해 3월부터 시행하고 있다. 둘째, 재혼가정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에 발맞추어 가기위한 세대주와의 관계 표시 개선이다. 주민등록표 등?초본의 세대주와의 관계에 계모, 계부가 표시 되어 재혼여부를 확인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사생활 및 인권 침해 우려가 제기되었다. 사생활 침해 우려 등을 해소하기 위해 계모, 계부 등의 용어가 표시되지 않는 세대주와의 관계 표시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셋째, 주민등록번호 변경 제도 도입이다. 지난 2014년 대량 개인정보 유출 사태로 인한 2차 피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주민등록번호 유출로 인하여 생명?신체?재산, 성폭력 피해 또는 피해가 우려되는 사람에 대해 심의를 거쳐 주민등록번호를 변경할 수 있도록 개선하였다. 넷째, 해외체류자의 국내 주소 관리 방안 마련이다. 유학, 취업 등의 이유로 해외에 나가는 해외체류자에 대한 국내 주소 관리 방법이 없어 부모?친척집의 주소로 신고하는 경우 거짓 신고가 되거나 거주불명자로 등록되는 불편이 있었다. 이러한 불편 해소를 위해 부모나 친척 등 국내에 주소를 둘 세대가 있으면 해당 세대에 주소를 둘 수 있도록 하고, 국내에 주소를 둘 곳이 없는 경우에는 읍?면?동 주민센터에 주소를 두도록 하여 유학생이나 주재원 등이 해외에 체류하는 기간 동안 거주사실이 불분명한 것으로 확인되어 거주불명 등록되는 불편을 해소할 수 있게 되었다. 흔히 주민등록하면 주민등록표 등초본 발급이나 주민등록증만을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주민등록 정보는 주거복지, 보육, 건강보험, 세금관리 등 주민 삶의 기반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행정안전부는 앞으로도 주민생활과 밀접한 주민등록 제도의 끊임없는 혁신을 위해 노력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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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0.03 19:04

‘전언회' 30주년과 전북 발전

윤승용 남서울대학교 총장 1988년1월30일, 서울 여의도 양지탕 설렁탕집에 전주고 출신 국회 출입기자 9명이 모였다. 서로 잘 아는 사이였던 이들은 1달여 전에 끝난 13대 대통령선거에서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면서 사실상 전두환 군사정권이 연장된 시국 등을 소재로 대화하다 자연스레 전주고 출신 언론인 모임을 결성하기로 의기투합했다. 이들이 주축이 돼서 그해 6월3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창립된 전언회가 올해로 창립 30주년을 맞았다. 전언회는 30년 동안 초대 회장이었던 박권상씨 등 일부는 벌써 고인이 됐고 창립 당시 전주북중전주고출신 재경 언론인만을 대상으로 했던 모임은 전북소재 고교출신으로까지 회원이 확대되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다. 특정지역 출신 재경언론인 모임이 30년 동안 거의 매월 빠짐없이 회원의 날 행사 등을 이어오며 존속해온 것은 전언회가 유일하다. GRDP(지역총생산)이 46조원으로 제주도와 강원도 다음으로 열악한 전북의 도세를 감안하면 대단한 일이라 할 것이다. 지난 12일 열린 창립기념식에서 한 참석자는 전언회원인 김화성씨가 올해 펴낸 책 <전라도 천년>의 글을 인용해 느긋하면서도 솔찬히 아그똥한 전주 양반네들에서 그 한 배경을 찾았다. 전북인들이 평소엔 느긋하지만 막상 일에 부닥치면 아그똥한(전북인들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 뜻을 알리라) 성정이 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참석자는 지역차별이 극심하던 과거에 그나마 차별이 덜해 실력으로 겨뤄볼만한 직역이 언론과 법조계여서 이 분야에 실력있는 인재들이 몰렸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과거 전북은 도세에 비해 상대적으로 언론인과 법조인이 다수 배출돼서 주목을 받았다. 전언회 창립당시에도 전주고 출신 언론인은 200여명이 넘어 단일 고교로는 전국 최다였다. 전북에선 언론인과 법조인이 양적으로만 다수 배출된 게 아니었다. 중견 언론인 단체인 관훈클럽의 창립멤버 10명 가운데 절반인 5명, 즉 박권상, 조세형, 임방현, 정인량, 김인호씨가 전주고 출신이었고, 가인 김병로 전 대법원장과 도시락 검사장 최대교 전 서울고검장, 사도법관 김홍섭 전 서울고법원장 등 해방 후 한국 법조계를 바르게 이끈 이른바 법조 3성(聖)도 모두 전북출신이다. 하지만 전언회가 명맥을 잘 이어오긴 했지만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회칙에는 언론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회원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한다고 목적이 나와 있지만 회원들 마음속에는 고향 전북 발전에 기여한다는 정신도 배어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점에 비추어보면 과연 제대로의 역할을 했냐는 점에서 반성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최근 중앙언론은 물론 월스트리트 저널 등 해외언론까지 나서서 국민연금관리공단 기금운용본부장의 장기 공백사태 등에 대해 전주패싱,돼지와 이웃, 논두렁 본부 등으로 사실을 왜곡하며 폄훼할 때 전언회는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특히 같은 언론단체인 전북기자협회가 왜곡보도 중지 등의 성명을 내며 고군분투할 때 전언회는 성명은 커녕 기자 개인차원에서도 중앙언론의 왜곡보도에 팩트 체크 등을 통해 대응도 못했다. 이런 사례는 과거 새만금사업이나 호남선 KTX사업 등에서 전북이 홀대당할 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른 살을 맞은 전언회, 이제부터라도 언론인 특유의 기계적 중립에서 벗어나 고향발전을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활동해야 할 것이다. 물론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 저널리즘 정신을 지키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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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9.26 18:30

문재인과 김정은 그리고 운동화

민경중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사무총장 젊은 사람들과 대화중 옛날에 우리는~이라고 하면 금방 꼰대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래도 919 평양남북정상회담을 지켜보면서 옛날 얘기 한번 해보려고 한다. 60년대 말 운동화 한 켤레는 우리 세대에게도 작은 사치였다. 삼형제 중 막내였던 난 형들에 비해 고무신을 신었던 기억이 별로 없다. 그런데 전주 오목대에서 삼형제가 찍은 사진에 큰 형과 난 고무신인데 둘째형만 낡은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언젠가 부모님께 왜 둘째형만 운동화 사주고 저는 고무신 신겨주셨느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그 운동화는 큰형이 신던 것을 물려 준 것이고 한 번도 둘째에게는 새신을 신겨 본 적이 없다. 큰형은 장남이라고, 넌 막내라고 항상 새 운동화, 새 교복만 사줬다. 언젠가 추석 명절에 그 얘기가 나왔을 때 둘째 형은 나도 새 운동화를 한번만이라도 가져봤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지만 차마 속내를 말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같은 형제간이라도 형편에 따라 입고 신는 것이 이렇게 다르다. 하물며 한민족인 남북한의 지금 처지가 크게 다르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보면 마치 이제는 잘 살게 된 형이 어릴 적 가정 형편 때문에 마음에 독기와 상처만 받고 자란 동생을 오랜만에 만나 달래고 치유해 가는 과정을 보는 듯하다. 2000년대 초 평양에 남북고위급 경제회담을 취재하러 간적이 있다. 당시 북한 시골에서는 굶어 죽는 사람들이 많이 발생하고 생활고로 탈북이 줄을 이을 때였다. 어스름한 저녁에 평양 순안공항에 내려 고려호텔로 가는 동안 사방이 어두컴컴해 도로 양측에 건물이 전혀 없는 줄 알았다. 나중에 낮에 돌아올 때 보니 전기사정으로 아파트들이 불을 켜지 못한 것이었다. 고난의 행군속에서도 유독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다. 평양 거리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어린 아이들은 남한의 또래아이들에 비해 체격이 무척 왜소했다. 그 무리 속에서 내 눈길을 끈 것은 당시 유행하던 만화캐릭터가 붙어 있는 새 운동화였다. 나중에 북측에서 나온 관계자와 밤늦게 술한잔 기울이며 낮에 본 운동화 얘기를 조심스럽게 꺼내자 이렇게 말했다. 우리 민족은 원래 자식사랑이 유별나지 않습네까? 부모가 아무리 배곯아도 자식에게 좋은 것 입히고 먹이고 싶은 마음은 북남이 다 똑같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남북 경제회담은 북측이 경제적 지원을 받는 회담이라고는 해도 자격지심이 큰 그들이 순순히 어려운 사정을 인정하는 것은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한편으로는 자식들을 걱정하는 그 마음을 엿보며 가슴이 아렸던 기억이 있다. 김대중 대통령 재임시 햇볕정책에 따른 경제지원을 퍼주기고 결국 식량이 아이들보다는 군대에 들어간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그 북측 관계자의 말이 떠오르는 것이 사실이다. 정말 그럴까? 하는 마음이다. 우리 속담에 곳간에서 인심난다라는 말이 있다. 사흘 굶으면 아무리 선비라도 담 넘지 않을 사람이 없다라는 속담도 있다. 성장기에 충분한 영양공급을 받지 못하고 자란 북측 아이들은 남측 아이들에 비해 체격이 왜소할 수 밖에 없다. 더군다나 제 때 배불리 먹지 못한 어릴 적 상처는 커서도 결국 강퍅한 마음만 들게 할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때마침 19일, 한반도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를 위한 평양공동선언이 발표됐다. 연내에 김정은 위원장이 서울도 답방하다는 희망적 소식도 나왔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김 위원장이 김일성과 김정일이 생전에 그렇게 가고 싶어했던 34대 전주 김씨(全州金氏) 시조인 태서(台瑞)묘가 있는 전주 모악산에 와서 성묘도 하고 전주 한옥에서 하룻밤 묵으며 가면 어떨까 하는 발칙한 상상도 해보게 된다. 그리고 이번 추석에는 형에게 새 운동화 하나 사서 선물해 드려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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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9.19 19:23

전북의 예술적 기질을 미래 육성 산업으로

김홍규 아신그룹 회장 전북에 오는 이들에게 한 상을 잘 차려 내면 사불여(四不如)라고 관리는 아전만 못하고, 아전은 기생만 못하고, 기생은 소리만 못하고, 소리는 음식만 못하다는 말을 꺼내며 감격스러워 한다. 예법을 중시하는 종가에는 아주 고급스런 제기 세트를 갖추고 있는데 대개 남원 공방에서 장인이 예닐곱 번 옻칠해서 정성스레 만든 것이다. 거기에 방짜 유기 수저와 전주 한지에 그린 병풍까지 더하면 한 집안의 품격이 한껏 올라가게 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사람이 살기 좋은 곳으로 지리, 산수, 인심, 생리 4요소를 꼽고 있는데, 그 중 한 곳이 전북(남원)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전북은 침선장, 소목장, 선자장, 악기장 등 전국에서 가장 많은 무형문화재를 보유한 예향이다. 전북은 지금의 판소리 전통이 살아있게 만든 수많은 명창들이 태어나고 묻힌 소리의 고장이며, 한량무나 살풀이 춤, 시조창, 가야금 산조 등등 한국 전통 예술의 산실로 대한민국의 혼을 보여주는 창문이 되고 있다. 이런 어마어마한 예술적 기氣를 살려 연예계나 스포츠계에서 맹활약중인 많은 분들을 만날 수 있다. 예술적 기질, 그 가운데에서도 음악적 기질은 긍정적 요소를 기본으로 한다. 슬퍼도 노래하고, 기뻐도 춤을 추면서 풀어내는 무한한 긍정성이 우리 도민의 기질과 가치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전북 도민의 예술적 기질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인물로 꼽으라면 단연코 방탄소년단을 키워낸 방시혁을 들 수 있다. 그의 부모님은 두 분 다 전주 출신으로 아버지는 전주고등학교를 나와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을 졸업하고 행정고시로 공무원에 입신했다. 서울지방노동청장, 근로복지공단 이사장을 지냈고, 어머니는 전주여고를 나와 서울대를 졸업하였다. 그분들은 엘리트 출신임에도 자녀들의 예술적 기질을 포기시키거나 만류하지 않았다. 방시혁은 서울대 미학과를 갔으나 결국은 음악인의 길로 들어서서 지금의 한류 열풍의 핵 방탄소년단을 키워냈다. 이는 갑자기 툭 튀어나온 행운 같은 게 아니라 오랜 세월 맥을 이어온 전북의 예술 혼이 알게 모르게 몸에 배어있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멋과 흥을 내는 법을 부모님과 주변 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게 아닌가. 여기에 우리가 한 가지 더 주목해 볼 것은 이러한 전북의 예술적 기질이야말로 미래 4차산업의 근간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방시혁의 친척인 방준혁은 게임회사 넷마블의 의장이고 방시혁은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대표이다. 세계적으로 한류 열풍이 있는 곳에 두 회사의 게임과 노래가 진출하지 않은 곳이 없다. 두 회사의 공통점은 인간의 희노애락을 파는 문화 기업이라는 점이다. 이런 세계적인 문화 기업은 한국 예술의 전통과 맥을 전승하고 육성해 온 전북이라는 토양이 있었기에 탄생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예측하기 어려운 시대 상황 앞에서 희노애락을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열고 있다. 거듭되는 불황에도 영화, 음악, 게임 등이 성장세를 달리고 있다. K-pop을 비롯한 문화산업이 미래 4차 산업의 주역이 되는 필연적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를 위해 전북의 예술적 기질을 이어받은 인재를 양성하는 데 여러 전북인들의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멋과 풍류의 전북 예술로 미래 산업을 선도할 청사진을 다 같이 그릴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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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9.12 19:26

‘드라이브 스루’ 어디까지 아니?

최훈 행안부 지방행정정책관 길을 걷다 보면 DT라고 적힌 문구를 볼 수 있다. DT는 드라이브 스루(Drive-Through)의 약자이다. 차에 탄 채로 햄버거나 커피를 주문하는 방식을 말한다. 주차난이 심각한 요즘, 주차에 따른 번거로움을 줄이고 시간을 단축할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드라이브 스루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건 1992년 맥도날드 부산 해운대점이니 벌써 25년이 넘었다. 미국은 훨씬 오래 전인 1930년대 미주리주 그랜드내셔널 은행에서 최초로 도입했다. 당시에는 고객이 승차한 채 별도로 설치된 창구에서 입금만 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패스트푸드 음식점에 도입된 것은 1947년 미국 스프링필드의 레드자이언트 햄버거에서 시작해서 1969년 웬디스, 1970년 맥도날드를 거치면서 폭발적으로 확산된다. 지금은 드라이브 스루가 외식업계를 넘어서 편의점, 약국, 투표, 장례식장 등 다양한 곳에서 이용되고 있다. 2017년 3월 네덜란드 총선에서는 드라이브 스루를 이용한 투표를 도입했고, 이전 총선에 비해 투표율이 8%p나 증가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2017년 일본에서는 문상(問喪)을 드라이브 스루로 하는 장례식장이 등장했다. 조문객이 차에 탄 채 태블릿 PC 방명록에 이름을 적고 조의를 표하는 방식인데, 고령자나 시간적 여유가 없는 조문객들의 편의를 위해 계획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행정서비스에 도입한 사례가 있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첨단2동 주민센터에서 운영하고 있는 드라이브 스루 민원센터가 그것이다. 차에 탄 채로 주민등록 등초본, 가족관계증명서 등 21개의 민원을 즉시 발급받을 수 있다. 2017년 이용건수가 전체 민원발급 건수의 16%인 20,000여건에 이르렀고, 그 수는 매년 증가한다고 한다. 이처럼 주민의 삶을 더 편리하게 바꾼 행정혁신은 주민의 불편을 지나치지 않고 세심하게 바라 본 한 공무원의 관심에서 시작되었다. 주민센터 내 주차공간이 10면밖에 되지 않아, 민원인들이 주차 공간을 찾느라 빙빙 돌다 돌아가야 되는 경우가 많았다. 담당 공무원은 어떻게 하면 그 불편을 해소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과정에서 이 아이디어를 생각했다고 한다. 관심에서 시작된 아이디어로 주차난이 해소됨은 물론, 노약자나 장애인 등 거동이 불편한 분들이 민원을 발급받는데 훨씬 편리해졌다. 이러한 공로 덕에 행정 및 민원제도 개선 우수사례 경진대회에서 행정안전부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행정혁신이라 하면 흔히들 거창하고 어려운 것을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실제로 주민이 체감하는 변화는, 드라이브 스루 민원센터와 같이 생활 속 불편을 해결해주는 것이다. 주민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 지방행정혁신을 위해 지난 3월 정부혁신전략회의에서 정부혁신 종합 추진계획이 확정되었고, 자치단체도 실행계획을 수립해서 주민과 호흡하며 실천하고 있다. 행정에 사회적 가치를 반영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주민의 참여와 협력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고 있다. 낡은 관행을 개선하고 신뢰받는 지방행정을 구현함은 물론이다. 지방행정혁신은 주민의 삶에 대한 관심과 애정에서 시작한다. 드라이브 스루처럼 공무원이 주민의 불편을 외면하지 않고 관심을 기울인다면, 혁신은 어디에서나 가능하다. 주민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제2, 제3의 드라이브 스루가 전국 방방곡곡에 펼쳐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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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9.05 19:42

체육인 병역특혜제도 전면 재검토 시급하다

윤승용 남서울대 총장 대한민국의 은메달을 기원합니다.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게임이 한창인 가운데 한국 야구팀의 졸전을 바라는(?) 온라인이 뜨겁다. 댓글의 골자는 체육인의 병역특혜, 특히 야구팀의 병역면제 특혜를 둘러싼 찬반이다. 온라인 상에서는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야구팀이 우승을 하지 않기를 바라거나 설사 금메달을 따더라도 병역면제 혜택을 줘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압도적이다. 특히 대만과의 1차전 경기에서 2대1로 충격패를 당하면서 여론은 더 악화중이다. 야구팀에 비난이 집중된 것은 지난해 군 입대를 앞뒀던 오지환, 박해민 선수가 입대를 포기한 것이 아시안게임 출전 후 병역면제를 노린 꼼수였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이러한 주장이 설득력을 더해가면서부터. 운동선수의 병역면제 특혜 시비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운동선수에 대한 병역특혜는 1973년 유신정권이 엘리트 체육 육성을 통한 국위선양을 구실로 올림픽 입상자들에게 병역특혜를 주면서 도입됐다. 그 이후 혜택 범위를 놓고 확대, 축소를 반복하다 현재는 올림픽은 동메달이상, 아시안게임은 금메달리스트로 한정됐다. 이번에 논란이 예년에 비해 가열된 것은 과거의 문제점을 미봉한 채 다시 야구 등 일부 단체종목에서 누가 봐도 뻔한 병역특혜용 대표팀 구성을 노골화했기 때문이다. 야구의 경우 이번 아시안 게임도 과거처럼 일본, 대만 등 8개 팀이 참가했지만 두 나라를 제외하고는 한국의 중학교 수준정도의 전력이다. 그나마 일본 등은 실업팀이 참가해서 프로 최정예가 참가한 한국을 제외하고는 그야말로 동네야구수준이다. 체육인의 병역특혜에 여론이 비우적인 이유는 스포츠 정신에 위배된다는 점과 대외적인 체면의 문제가 거론된다. 아마추어리즘에 비춰보면 병역특혜는 엄청난 보상이다. 또한 세계적으로 징병제를 실시하는 국가 중에서 올림픽 메달리스트에게 병역면제 혜택을 주는 나라는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 이 때문에 한국의 체육인 병역특혜 제도는 종종 해외언론의 조롱거리가 돼왔다. 다음으로는 종목간의 형평성의 문제다. 이미 8년 전의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도 지적됐지만 당시 야구팀의 금메달과 수영 박태환 선수의 금메달, 그리고 육상에서의 메달을 색깔로만 비교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 동네야구대회서 우승한 것과 육상, 수영 등의 비인기 기본종목에서 획득한 메달은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또 지적할 점은 병역면제 덕에 인기 종목의 프로선수들이 누리는 과다한 금전적 혜택이다. 특히 프로야구와 축구선수들은 병역면제라는 날개를 다는 순간 천문학적으로 몸값이 치솟고, 면제기간에도 억대의 연봉혜택을 누린다. 같은 젊은이인데 누구는 전방 철책선에서 근무하며 월 30~40만원을 받지만 누구는 병역면제 덕에 그 기간에 수십, 수백억 원의 수익을 올린다는 것은 분명 문제다. 병역문제는 우리 국민에게는 가장 민감한 이슈다. 가장 첩경은 병역혜택을 없애는 것이다. 하지만 기왕의 혜택과의 형평성이 문제된다면 거액의 연봉을 받는 선수들의 경우에는 수익의 일정 정도를 환수해서 해당 종목의 발전기금 등으로 활용하는 방안도 고려해볼 수 있다. 손흥민의 연봉은 442만파운드(한화 63억원)이고 오지환과 박해민의 연봉도 억대가 넘는 2억9천만 원이다. 이들이 입대할 경우 겨우 매월 수십만원 밖에 받지 못한다. 이를 감안하면 적어도 이들이 군 면제혜택을 받을 경우 군입대시 포기해야하는 연봉과의 차액 중 합리적인 금액을 징수해서 체육발전기금 등으로 활용하는 방안 등을 추진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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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8.29 19:56

메모리얼 벤치

민경중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사무총장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 100년 기상관측 기록을 연일 갈아치우던 폭염이 사라지고 아침 저녁으로 제법 서늘하다. 겨울 옷 챙겨야하는 것 아니냐는 농도 이상하지 않다. 무더위와 싸우던 고통의 기억은 점차 사라지고 추위와의 대비를 벌써 얘기하고 있으니 말이다. 인간에게 기억은 편리한 장치다. 기억과 망각은 신이 우리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만약 우리가 경험했던 모든 일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면 과부하 걸린 기계 장치처럼 뇌는 견디지 못할 것이다. 인간의 뇌는 정보가 들어오면 전두엽에서 판단해서 측두엽과 해마의 도움으로 오래 기억할 수 있게 한다. 세계적 뇌 과학자 한나 모니어와 철학자 마르틴 게스만이 함께 쓴 <기억은 미래를 향한다>라는 책에서 기억은 과거를 보존하는 능력이 아니라 미래를 계획하는 능력이라고 말했다. 최근 뇌 과학자들은 집단기억(collective memory)을 뇌 과학의 새로운 연구방향으로 설정하고 연구가 한창 진행 중이다. 미국에서는 911 테러사건과 관련한 사회적 충격과 집단 기억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 우리의 경우 2014년 발생한 세월호 침몰사고가 대표적이다. 흔히 트라우마로 표현되는 정신적 외상 충격은 사고 당사자나 가족뿐만 아니라 사회 저변에 심각한 영향을 끼친다. 이런 사고를 기억하는 방식은 동서양이 많이 다르다. 우리는 고통스런 기억일수록 이제는 잊어라!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고 말한다. 이 말이 얼마나 남은 가족들에게 상처를 주는 말인 지 당사가가 되어보지 못하면 모른다. 그런데 외국은 오히려 우리는 당신을 영원히 기억하고 있어! 끝까지 함께 할게라고 위로한다. 얼마 전 여름휴가 때 캐나다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부러웠던 것이 있다. 바로 시가 운영하는 메모리얼 벤치제도다. 가장 뷰가 좋은 도심 공원이나 의미 있는 장소에는 꼭 시민들이 기증한 메모리얼 벤치가 있다. 캔모어라는 작은 마을의 호숫가 풍경이 너무 좋아 한 시간 동안 의자에 앉아 혼자서 풍광을 즐기고 있었다. 의자에는 어린아이의 이름과 출생, 사망연도와 함께 이런 문구가 적혀있었다. A Hero remembered never dies (너를 기억하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아). 그때 어느 젊은 부부가 와서 조약돌을 의자 옆에 놓고 기도를 드렸다. 사연을 물어보니 짐작대로 하늘나라로 간 아이의 부모였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보낸 시간들을 벤치나 공공물에 기록하는 것은 미국과 캐나다, 영국 등에서는 오래 전부터 시행된 일이다. 시민들이 신청하면 일정한 심사를 거쳐 5년에서 길게는 10년까지 작은 태그를 붙인 의자를 설치해준다. 지역마다 비용이 다르지만 적게는 수십만원에서 1천만원까지 기부를 한다. 전라북도와 전주에는 좋은 풍광과 의미 있는 장소들이 적지 않다. 전주시 민원과에 물어보니 메모리얼 벤치에 대한 시민들의 정책적 제안은 없었다고 한다. 각자가 기억하는 방식은 다르겠지만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 스승, 희생과 헌신을 한 공무원, 의인 등 그들을 잊지 않는 장을 펼쳐 준다면 의미 있지 않을까? 그렇게 모아진 돈은 소외된 이웃들과의 나눔에 쓰인 다면 더욱 빛날 것이다. 수구지심인지 타향에서 살다보니 나이들 수록 고향 생각이 자주 난다. 이 제도가 받아들여진다면 나부터 우선적으로 하고 싶다. 어릴 적 우리 삼형제가 놀던 오목대에 사고로 돌아가신 큰 형의 이름과 함께 이렇게 적고 싶다. 작은 동산에서 키운 꿈이 큰 산이 되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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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8.22 21:10

미래 4차산업은 고향 전북에서

▲ 김홍규 아신그룹 회장 내 고향은 폐항.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건 노을밖에 없네. 이준익 감독이 영화 <변산>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려서 읊은 시다. 계속 떠올리게 되는 여운이 남는 문장이다. 고향에 대한 애증이 이보다 잘 묻어날 수가 있나. 요즘 고향 전북을 바라보는 전북인 심정이 이러하다. 변산이 아니라 전북 전체가 보여줄 거라고는 노을밖에 없는 그런 곳이 될까 봐 마음이 적잖이 쓰인다. 아름다운 산하로 천년이나 지속되는 동안 나라에 필요한 인재들을 수도 없이 배출한 고장인데 왜 지금은 육지 속의 섬처럼 소외되고 가난하고 꼴찌를 면치 못하는 그런 대접을 받고 있는지. 재정자립도가 22.1%로 전국 광역자치단체 중 꼴찌, 도 전체 경제력이 수도권의 어느 중견 도시 하나만도 못하다고 평가받고, 가까운 대전과 광주가 인구를 흡수하고 있어서 광역시를 배출 못한 불운을 안고 있기도 하다. 625 전쟁 직전인 1949년 인구보다 2018년 인구가 줄어든 지역은 전북뿐이다. 이런 실정을 극복하기 위해 무언가 해야 하는데 고향을 떠나온 지 오래되었다, 바쁘다 등 여러 핑계로 고향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할 따름이다.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또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이른 때라고 하니 지금이라도 내 고향 전북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여러 재경 전북인들과 함께 고민하고자 한다.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와 GM자동차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군산지역 경제가 초토화된 것은 상상을 초월한다. 유령도시처럼 변해가는 군산이 희망을 건 것은 새만금, 새만금 특별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서 앞으로 전북 향방은 이들의 성공 여부에 달린 상태라고는 하지만 새만금에만 기대고 있기에는 전북의 청사진이 너무도 열악하다. 새만금은 방조제를 완공하는 1차 마무리 단계까지 무려 20년이 넘게 걸렸다. 앞으로 안정이 되어서 수익을 창출하기까지 얼마의 세월이 더 걸릴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또한 연간 500만 명이 찾는다고는 하지만 전주한옥마을 관광산업에 몰두하기에는 산업 규모 면에서 한계가 있다. 여론조성이 시급하다. 유난히 전통 깊은 지역이어서 그런지 우리 지역 출신들은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좀 나서야 할 때이다. 전북이 텅텅 비지 않았는가. 군산 지역에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와 GM자동차 공장이 빠져나간 자리에 그만한 규모의 기업을 다시 유치해 오는 데 목소리를 내서 힘을 보태야 한다. 삼성그룹의 전자장비산업 단지를 군산에 유치해 오자는 움직임이 솔솔 일고 있다. 군산상공회의소에서 나서서 삼성그룹에 건의를 했다고 하나 무슨 뾰족한 대답을 들은 건 아니다. 삼성은 전장사업팀 신설과 함께 전기차 분야 세계 1위인 중국 BYD사에 5000억 원을 투자하고, 전장사업 분야 글로벌 선두 기업으로 손꼽히는 미국 하먼사를 인수하는 등 미래산업 경쟁력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는데 그런 신사업을 군산 지역에 이미 마련된 기반을 토대로 시작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삼성 내부에도 전북 출신은 있을 테고, 중앙 정부에도 전북 출신은 많다. 삼성이 결단을 내릴 수 있게 전북인이라면 다 같이 나서서 삼성그룹 전장사업은 군산에서라는 여론을 조성해 나가야 한다. 외지에서 온 이들에게 보여줄 거라고는 노을만 있는 전북이 아니라 노을도 아름답고, 사람도 아름답고, 산업도 꽃 피는 전북을 보여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영화 <변산>이 흥행만 했어도 올여름 전국에 전북 여행이 강타했을 텐데, 아쉽다. 여수는 노래 하나로 밤마다 바다에 사람이 넘친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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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8.15 20:02

지방세의 고디바, 납세자보호관

▲ 최훈 행안부 지방세제정책관 벨기에산 수제 초콜릿 회사명인 고디바(GODIVA)는 신의 축복이라는 뜻이다. 초콜릿이 주는 달콤함을 신의 축복이라 칭한 걸까? 이 회사의 로고는 말을 타고 있는 여성의 형상을 이미지화한 것이다. 이 여성은 11세기 영국 잉글랜드 중부 지역에 위치한 코벤트리(Coventry) 영주의 부인인 고디바(Godiva)이다. 고디바가 말을 타고 달렸던 11세기 코벤트리 마을의 백성들은 무거운 세금에 지쳐 있었다. 백성들은 영주의 부인 고디바를 찾아가 백성들의 현재 상황을 호소하며 세금을 경감해줄 것을 간곡히 요청하였고, 고디바 부인은 남편에게 백성들이 세금 부담에 지쳐 있는 모습을 알려주며 징수액을 줄여줄 것을 부탁한다. 이에 영주는 부인이 절대 시행치 못할 만한 조건을 내건다. 나체로 말을 타고 마을을 한 바퀴 돈다면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부인 고디바는 백성들을 위해 기꺼이 마을을 나섰다. 영주는 고디바의 행동에 깜짝 놀라 본인이 백성들의 무거운 세금부담을 생각하지 못하였음을 깨닫는다. 이러한 고디바의 용기와 사랑을 초콜릿의 달콤함으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 곁에도 고디바가 있다. 납세자의 권익 찾기를 도와주는 지방세 납세자보호관이다. 기존 법에는 임의 규정이었던 납세자 보호관 제도가 운영된 지방자치단체는 2개뿐이었고 이마저도 실적이 미미했다. 그러나 2018년부터 지방세기본법을 개정하여 모든 지방자치단체에 배치할 것을 의무화하고 세무부서가 아닌 별도의 부서에 배치되도록 하여 독립적으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등 그 권한을 대폭 강화하여 이용 활성화에 힘쓰고 있다. 또한 자격기준도 공무원뿐 아니라 변호사, 세무사 등 민간 전문경력자까지 확대하여 전문성을 높였다. 바쁜 일상을 살다 보면 지방세 고지서를 받더라도 구체적인 내용들을 자세히 들여다볼 시간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때문에 납세자에게 억울한 일이 생기더라도 이를 확인하고 과세관청에 신속하게 이의를 제기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이때 지방세 납세자 보호관에게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첫째, 기존에는 이의신청 기간이 지났을 경우 소송으로 억울한 점을 해결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방세 납세자보호관 제도를 이용할 경우 복잡하고 부담스러운 소송 없이 납세자보호관이 직접 세무부서에 시정을 요구할 수 있어 납세자의 권리를 찾기가 훨씬 쉬워졌다. 둘째, 지방세 체납자의 생계형 차량을 압류 후 공매 처분한다면 체납자는 재기 가능성을 잃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지방세 납세자보호관과 세무 상담 후 체납액 분납 제도를 안내받아 분납계획서를 제출한다면 차량의 공매처분을 막고 추후에는 납세자와 과세관청이 모두 웃을 수 있다. 이와 같이 세무 상담을 통해 납세자의 고충을 듣고 납세자의 상황에 맞는 해결방안을 안내해준다. 셋째, 폭염 등 천재지변이나 산업 위기 상황에 닥쳐 사업 자금 경색으로 지방세 신고납부가 어려워지는 경우가 있다. 지방세 납세자 보호관에게 기한 연장 신청을 하면 사실을 확인한 후 지방자치단체장의 승인을 얻어 기한을 연장할 수 있다. 또한 사업이 중대한 위기에 처하여 당장 지방세 납부가 불가능하다면 납세자 보호관을 통하여 지방자치단체장에게 징수유예를 신청하고 유예기간 동안의 수익으로 지방세를 납부할 수 있어 자금융통의 어려움을 덜 수 있다. 11세기 영국 코벤트리 백성들의 세금을 같이 고민해주었던 고디바. 우리에게 지방세 납세자보호관은 고디바이다. 이제 가까운 곳에서 우리의 고디바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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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8.08 20:31

노회찬 의원이 마지막으로 주장하려던 것은?

▲ 윤승용 서울시 중부기술교육원장 노회찬 의원의 죽음이 몰고 온 후폭풍이 만만치 않다. 장례기간에 전국적으로 10만여 명의 추모객이 빈소를 찾았다. 추모제에도 수천 명의 인파가 몰려 그를 기렸다. 진보진영은 물론 보수정당 소속 의원들도 그의 죽음을 추모했다. 정치인의 죽음에 진보, 보수를 불문하고 이처럼 정서적 공감대가 일치한 것은 보기 드문 일이다. 그를 보내면서 국민들 사이에선 그가 남긴 유지를 어떤 식으로든 되살려야한다는 여론이 커지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너무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는 정치자금법을 개정해서 정치인을 정치자금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 의원이 드루킹 일당으로부터 돈을 받은 때는 20대 총선 한 달 전쯤이다. 노 의원이 삼성 떡값 검사들의 실명을 공개한 여파로 의원직을 상실한 상태, 즉 일반인 신분으로 선거를 준비하던 시점이다. 때문에 그는 당시 1년 내내 정치후원금을 모금할 수 있는 현역과는 달리 예비후보 등록을 마쳐야만 정치후원금을 모을 수 있는 처지였다. 그는 당연히 자금난에 시달렸을 터이고, 그의 고백대로 비합법적 절차로 돈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정치신인들에게 상대적으로 불리한데다 현역의원들에게도 너무 가혹한 현행 정치자금법을 현실적으로 고치자는 견해는 일견 일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가 몸을 던지면서까지 주장하고자 했던 것이 과연 정치자금법의 유연화만이었을까? 그가 몸을 던지기 전의 일련의 행보를 꼼꼼히 더듬어보면 그것만은 아닌 것같다. 내가 보기엔 그보다는 오히려 국민의 눈높이에 비해 터무니없이 공고한 국회의원의 특권을 벗어던져야한다고 주장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국회 기록에 따르면 노 의원은 17대 국회 때 47개, 19대 때 15개, 20대 때 57개의 법안을 대표발의했다. 그가 발의한 법안을 살펴보면 그가 꿈꾸던 세상의 일단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그는 2004년 9월14일 자녀의 성과 본을 원칙적으로 아버지의 성과 본만 따르도록 한 것은 어머니의 권리가 차별받는다며 이를 개정하자는 민법개정안을 처음 대표발의한 이래 국가보안법 폐지법, 대체복무제를 인정하자는 병역법 개정안 등 주로 소수자 권익과 보편적 인권을 보장하자는 법안을 내놓았다. 노 의원이 생전 마지막으로 발의한 법안은 국회의원 특수활동비 폐지를 담은 국회법 일부 개정법률안이다. 7월5일 발의된 이 개정안은 국회의장이 예산을 편성할 때 특수활동비 예산을 편성할 수 없도록 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이에 앞서 평화와 정의의 모임 원내대표를 맡으면서 한 달에 수 천만 원이 담긴 현금을 특수활동비 조로 지급받자 양심상 도저히 못 받겠다며 세달 치를 자진반납하기도 했다. 노 의원은 특활비를 반납하면서 최근 대법원은 특활비 내역을 공개하라고 판결했는데 이는 국회에 특활비 존재 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는 판단이라며 동일한 이유에서 정의당은 특활비 폐지를 당론으로 주장해 왔다고 말했다. 나는 바로 이 점을 주목하고 싶다. 그는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행적으로 국회 특활비 폐지를 필두로 한 국회의원의 특권 타파를 주장하고 싶지 않았을까? 그는 정치자금난에 시달리면서도 최근 들어 줄곧 특활비 폐지를 주장해왔다. 특히 원내대표단과 함께 미국출장을 다녀온 직후 그가 생을 마감한 것은 예사롭지 않다. 이는 여야 원내대표단간의 합의를 통해 특활비 폐지를 성사시키라는 무언의 시위가 아니었을까? 국민들은 함께 미국을 다녀온 원내대표단의 행보를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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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8.01 19:57

우리의 심장을 뛰게 하는 노래

▲ 민경중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사무총장 기상관측 이래 사상 최대의 폭염이 지구촌을 강타하고 있다. 올 여름 초입에 그래도 내게 더위를 가장 잊게 해준 일이 있었다. 바로 2018러시아 월드컵이다. 우리나라가 비록 마지막 경기에서 독일을 이겨주는 대이변을 연출했음에도 일찍 예선 탈락해주는 바람에 온전하게 다른 나라들의 수준 높은 경기를 마음 편하게 즐길 수 있었다. 이번에 내가 가장 주목했던 팀은 크로아티아였다. 유럽 최악의 빈국이자 인구 416만명에 불과한 크로아티아가 3번의 연장 승부로 결승까지 진출하는 과정은 드라마틱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결승에서 프랑스에 패했지만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라는 각국 팬들의 찬사를 받았다. 내심 프랑스를 응원한 팬들보다는 크로아티아를 심정적으로 응원한 사람들이 많지 않았을까? 인구와 경제대국인 미국과 중국은 아예 참가조차도 못하고 약소국이 강대국을 이길 수 있는 게임이 월드컵 말고 또 있을까? 자국의 참가 여부와 관계없이 축구공은 둥글다라는 명제를 새기며 열광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축구중계를 지켜보며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언제일까? 물론 짜릿한 결승 골과 마지막 승리를 확정하는 휘슬을 불 때가 당연히 감동이 크겠지만 난 경기 시작 전 선수들이 부르는 국가(國歌)를 들을 때다. 심장이 뛰고 감동이 물밀 듯 밀려온다. 노래에는 묘한 마력이 있다. 없던 힘도 솟아나게 하고 힘든 일도 잊게 한다. 패배의 순간을 환희의 승리로 바꾸기도 한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들을 위한 출정가는 오늘날 국가로 바뀐 경우가 많다. 이민자들로 구성된 다양한 인종의 프랑스 선수들이 한 목소리로 부르는 라마르세예즈(La Marse illaise)도 프랑스대혁명 당시의 출정가다. 일어서라 조국의 젊은이들 영광의 날은 왔다의 가사처럼 프랑스는 결승전에서 대단합의 힘을 보여줬다. 크로아티아의 국가인 우리의 아름다운 조국은 그대여 당신은 우리의 유일한 영광, 조국이여 당신이 있는 곳에 들판 있고 산이 있네, 도나우 강이여 힘을 잃지 말아라라고 강조한다. 치열한 유럽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처절함이 담겨있다. 태극 전사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가슴에 손을 얹고 부르는 애국가는 비장하고 때로는 우리 모두를 하나로 만든다. 내게 국가만큼 또 하나의 감동을 안겨주는 노래가 있다. 바로 고등학교 교가(校歌)다. 세월이 흐르고 반백이 되어도 부를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노래가 바로 교가다. 얼마 전 전주에서 고등학교 졸업 35주년 행사가 있었다. 600여 명의 친구 중 100여 명이 모였다. 이날 행사 마지막은 늘 그랬던 것처럼 교가였다. 노령의 푸른 줄기 기린봉 솟아 전주천 맑은 물도 굽이 도는 곳, 내 나라 내 겨레의 뻗어 가는 길 이 목숨 다하도록 이어갈 우리 마치 고교시절로 돌아간 듯 우리는 교가로 하나가 되었다. 80년 엄혹했던 전두환 군사정권과 광주항쟁이 있던 그해 고교생활을 시작한 우리 세대에게 교가는 큰 의미가 있었다. 서울로 올라와 교가 사랑은 더욱 커졌다. 대학 캠퍼스에 경찰들이 상주하던 살벌했던 때도 동문회 후 마지막은 교정에서 목청껏 부르는 교가였다. 기자 생활을 하며 고교동문 언론인 수 십명이 모여 회식을 한 후에도 광화문에서, 강남 사거리 한복판에서 교가로 대미를 장식했다. 칠레 출신의 소설가 이사벨 아옌데는 심장이 우리를 움직이며 우리의 운명을 결정한다라고 말했었다. 우리의 심장을 뛰게 하는 교가를 그래서 나는 애국가 만큼 사랑한다. 그리고 우리 친구들과 함께 운명이 다하는 그 날까지 교가를 부르고 싶다. △ 민경중 사무총장은 CBS베이징 특파원보도국장, 한국외대초빙교수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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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7.25 21:06

4차 산업혁명이 가져 올 유통시장의 변화

▲ 김홍규 아신그룹 회장 인류는 지금까지 총 세 번의 산업혁명을 겪었다. 18세기 초 영국에서 일어난 1차 산업혁명은 증기기관차 발명 덕분에 기계화라는 큰 혁신을 이루어냈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유럽에서 일어난 2차 산업혁명은 화학과 전기에너지 상용화를 가져왔다. 이는 그동안의 노동력을 대량생산으로 대체하게 되어 노동의 재분배를 일으킨 사회적 의미가 있다. 3차 산업혁명은 모두가 잘 알다시피 우리 생활에 컴퓨터가 일상화된 20세기 후반에 일어났다. 인터넷이 안 되면 잠시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만든 것이 3차 산업혁명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막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진입하고 있다. 아직까지 4차 산업혁명이 피부에 확 와 닿는 것은 아니겠지만, 자주 접하는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 모바일 등의 첨단 정보통신 기술이 우리 생활에 실제로 영향을 미치는 기술로 발전시키려는 단계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1, 2차 산업혁명은 제조 분야의 혁명을 가져온 결과물로 우리는 이를 책에서만 알 수 있으며 피부로 느끼는 것은 3차 산업혁명부터이고, 3차 산업혁명도 엄밀하게 따지면 인간의 노동력을 절약시켜 준 면에서 제조 분야의 혁명이라고 보는 게 마땅하다. 반면 4차 산업혁명은 생산자 중심 산업에서 소비자 중심 산업으로의 이동을 의미한다. 소비자의 요구를 얼마나 빨리 인식하고 대응하느냐가 기업 경쟁력의 핵심이 될 것이며 그 이면에서 가장 두각을 드러낼 분야는 유통과 창조 직능일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은 지금까지 축적된 산업혁명의 결과물을 바탕으로 초연결과 초지능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더 넓은 범위와 더 빠른 스피드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 자명하다. 간단하게 말하면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말하는 일상적인 행위들이 인터넷을 통해 다 연결되고 기록되어 빅데이터화 되면 그것을 산업적으로 활용하여 발 빠르게 움직이는 기업만이 수익을 거둔다는 뜻이다. 유통업을 예로 들어보자. 전 세계적으로 2018년 3월 기준 유통 관련 스타트업에만 총 590억 달러, 우리 돈으로 65조 8000억이 투자되었다고 한다. 알리바바, 바이두, 아마존 등 세계적인 공룡기업들이 로봇, IoT, 빅데이터, AI 이 4대 혁신 기술을 이용해서 유통을 점령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다. 과거에는 어떤 소비가 어떻게 이루어질지 몰랐지만 이제는 수 세기 동안의 기후변화와 작물현황, 소비자들의 행동 패턴, 1인 가구의 소비 형태 등이 다 빅데이터화 되어서 비가 많이 오는 7월의 어느 날 전주의 어느 마트에 OO표 부침가루 몇 그램짜리가 필요할지 예측이 가능한 시대가 되는 것이다. 과거에는 좋은 제품이 있으니 사가라는 유통의 개념이 이런 제품이 필요하니 가져와라로 변화하는 셈이다. 불행한 것은 이 예측 가능한 정보와 활용도 높은 기술을 거대공룡 기업 말고는 아무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명료한 특징이다. 팔리지 않는 물건을 구비하느라 매장을 유지하는 소매업종은 자연스럽게 소멸되는 것이다. 마치 30여 년 전 일본에서 편의점을 처음 보고 동네 구멍가게의 멸종을 직감했던 것처럼 거대한 변화의 문 앞에 서 있음을 느낀다. 하지만, 늘 그래왔듯이 큰 주머니를 더 많이 채우는 게 똑같다면, 그것에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적어도 혁명이라면 인간 삶의 걱정거리 하나는 덜어주어야 할 텐데, 이토록 눈부시게 발전하는 기술 앞에 서민들이 먹고 사는 걱정은 줄어들 줄 모르고 오히려 늘어나고 있지 않은가. 4차 산업혁명은 30년 후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 공공의 개념으로 다시 살펴보아야 할 때이다. 인간의 삶이 한 치도 달라지지 않는 4차 산업혁명이라니. △김홍규 회장은 1990년도 국내 최초로 선진국 유통물류시스템을 도입해 편의점, 슈퍼마켓 등 유통산업을 발전시킨 선구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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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7.18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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