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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주례사

어깨위에 세월의 두께가 쌓여 가면서 주변의 지인들로부터 종종 주례를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새 인생을 시작하는 신혼부부 앞에서 모범이 될만한 삶을 살아왔다고 이야기할 자신이 없어 극구 고사를 하지만 불가피한 인연으로 아주 가끔 주례자리에 서게 됩니다. 제가 준비한 주례사라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두고 두고 새길만한 거창한 교훈은 아니고, 두 사람이 살아가면서 잊지 말고 실천해 갔으면 하는 몇가지 당부사항들입니다. 첫째, 신랑은 신부에게, 신부는 신랑에게 존댓말을 쓰고 상대방을 존중해 줄 것을 당부합니다. 지금까지 친구처럼 사귀면서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부터 한마디씩 존댓말로 바꾸십시오. 상대방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키우기 위해서는 평소의 대화에도 품위가 담겨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원래 한 몸이었던 인간의 지혜와 용력을 두려워 한 신들이 인간이 잠든 사이에 두쪽을 내고 뒤섞어서 사방으로 던져 버렸다고 합니다. 따라서, 결혼은 헤어진 나의 반쪽을 찾았음을 확인하는 의식입니다. 잃었던 짝을 찾았어도 상처가 아물어 하나가 되기에는 치료와 적응을 위한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상대방을 소홀하게 대하다 보면 미운 마음도 생기고 자기가 손해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본전 생각도 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자신을 곰곰히 살펴 보십시오. 내 상처는 얼마나 크고 흉측하며, 자신은 얼마나 부족한 사람입니까? 당신과 함께 상처를 치유하고, 당신이 거들어 내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음을 자각하면 저절로 감사하는 마음이 들 것입니다. 나보다 더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 이것이 부부가 항상 지녀야 할 마음가짐입니다.둘째, 두 분은 양가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렇게 소중한 남편과 아내를 길러주신 부모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효도라는 이름으로 부담스러워 하지 말고 부모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찾으십시오.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지 말고 몸짓과 행동으로 실천하십시오.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제가 권하는 것은 자주 뵙고, 이야기를 나누라는 것입니다. 명절이나 생신 때만이 아니라 평소에도 찾아 뵙고, 그럴 여건이 안되면 전화라도 자주 드리십시요. 저의 생모는 제가 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돌아가셨는데 살아계실 때, 좀 더 자주 찾아뵙지 못하고, 전화드리지 못한 게 지금도 마음에 걸립니다. 아울러, 양가 부모님께도 당부 드리겠습니다. 지금 이 식장을 나가는 순간부터 두 사람은 한 가정의 가장이고 어른들입니다. 더 이상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 마시고 둘이서 살아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만 봐 주십시오. 부모님 뜻을 앞세우지 마시고 자식들의 의견을 존중해 주십시오. 양가 부모님께서는 사랑만 주십시오. 혹여 더 주실 것이 있으시면 아무런 대가 바라지 말고 그냥 주십시오. 마지막으로, 한 달에 책 한권씩을 꼭 읽으십시오. 어떤 친구는 한 달에 한권씩만 읽으라고 했다고 꼭 한권씩만 읽겠다고 하던데 한달에 한권은 최소한의 기준이지 더 많이 읽을수록 더 좋다는 사족을 붙입니다. 두 분의 발전을 위해서도 그렇고, 앞으로 갖게 될 2세를 위해서도 이 약속을 꼭 실천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모는 텔레비전보고, 컴퓨터 게임하면서 자식들한테는 공부해라, 책 읽어라하는 것은 부모로서의 권위가 서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자식교육도 성공하지 못하는 사례를 많이 보았습니다. 무슨 책이라도 좋습니다. 고전이면 더욱 좋겠지만 자기계발서나 수필도 좋고, 소설이나 만화책도 좋습니다. 기왕이면 두 분이 번갈아가면서 한 권씩 준비하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이 달부터 당장 실천하라는 뜻으로, 이번 달분은 오늘 주례를 맡은 제가 선물로 이렇게 한권을 준비해 왔습니다.행복은 살아가면서 만나는 시련과 장애 그리고 고통을 극복한 후에 얻는 결실입니다. 인생의 풍랑을 만날 때 흔들리거나 포기하지 말고 상대방 손을 마주 잡고 함께 극복해 가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혼사에 증인으로 동참하신 하객 여러분의 축복속에서 두 분의 세상인연이 끝나는 날까지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 꾸려 가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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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2.12 23:02

50회 무역의 날을 축하하면서

오늘은 제 50회 무역의 날이다. 1964년 11월 30일,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수출 1억 불을 달성한 날을 기념하여 수출의 날을 제정한지 만 50년이 된 것이다. 1990년에 수출과 수입을 균형적으로 발전시킨다는 취지에서 수출의 날을 무역의 날로 변경하였고, 2011년에는 무역 1조 원 돌파를 기념하여 무역의 날을 11월 30일에서 12월 5일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렀다. 우리나라 수출이 걸어온 길은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역사와 다름이 없다. 60년대에 본격적으로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면서 수출을 통해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전략을 채택하였다. 수출의 날에 대대적인 포상을 통하여 수출역군을 격려하고, 수출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높이는 것도 이러한 전략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60년대는 풍부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가발, 의류 등 노동집약적 상품의 수출에 주력하여 수출 1억 불을 돌파한 후 7년만인 1971년에 수출10억 불을 달성하였다. 70년대는 중화학공업 육성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던 시절이었는데 ‘국민소득 1000불, 수출 100억 불’이라는 문구가 다니던 중·고등학교 곳곳에 걸려있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수출을 통한 경제성장에 총력을 쏟았던 결과로 1977년 수출이 100억 불을 돌파했고, 국민소득도 1000불을 넘어섰다. 또 수출 1000억 불을 달성하던 1995년에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도 1만 불을 넘어섰다. 1977년부터 1995년까지 수출이 10배 증가하면서 국민소득도 10대 증가하였던 것이다. 수출 증가가 국민생활 수준 향상과 직결되던 시절이었다. 수출에 좋은 것은 대한민국에 좋은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었던 시기라고 생각된다.그러나 수출이 국민소득과 이어지는 고리는 최근에 들어 크게 약화 되었다.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처음으로 2만 불을 넘어섰던 2007년 수출은 3715억 불이고, 국민소득은 2만1632불이었다. 5년이 지난 2012년, 수출은 5479억 불로 47% 증가했지만 국민소득은 2만2708불로 약 5% 증가에 그쳤다. 즉 수출이 늘어나도 이제는 그만큼 국민생활이 넉넉해지지는 않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초래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중소기업중앙회가 발표한 「2013 중소기업 위상지표」를 보면 시사점을 찾을 수 있다. 먼저 우리나라 총 수출 중 중소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2006년 31.9%에서 2012년 18.7%로 대폭 감소하였다. 거꾸로 말하면 대기업의 수출비중이 68.1%에서 81.3%로 대폭 증가한 것으로 최근의 수출 증가는 전적으로 대기업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반면에 수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제조업의 종사자 수를 보면 대기업 비중이 2006년 24.2%에서 2011년 23.3%로 오히려 비중이 감소하였다. 대기업의 수출비중은 크게 증가하면서도 제조업에서 고용 비중은 오히려 감소한 것은 크게 우려되는 상황이다. 대기업이 수출로 벌어드린 막대한 외화를 고용, 원자재 및 부품 구입, 투자, 세금 납부 등의 채널을 통하여 국민경제에 나누어주어야 국민경제도 같이 성장할 수 있다. 그런데 “국내 10대 그룹의 82개 상장 계열사의 사내 유보금이 지난 6월 말 현재 477조원으로 3년 전보다 43.9% 늘어났다”는 언론보도나, “한국 대기업들의 해외직접투자규모는 2003~2007년 470억 불에서 2008 ~2012년 1050억불로 크게 증가했다”는 언론보도를 보면 우리 대기업은 수출로 돈은 많이 벌고 있으나, 국민경제에 대한 기여는 그리 크지 않다는 비판이 근거 없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또 수출 증가가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느냐는 국민의 냉소적인 시각도 이해가 된다. 무역의 날 50주년을 맞이하여, 이제 앞으로 다가올 50년에 대한 새로운 청사진을 그려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특히 수출이 국민경제 활성화로 이어질 수 있도록 대기업의 투자 및 고용확대, 중소기업의 수출 경쟁력 강화, 대기업의 하청기업에 대한 정당한 대가 지불 등이 이루어져야 하겠다. 그래서 무역의 날이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소기업, 나아가 우리국민 모두가 함께 축하하고 기뻐하는 날이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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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2.05 23:02

자화상

지난 주말엔 불현듯 가을이 다가기 전에 단풍을 꼭 보아야만 할 것 같아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차를 몰고 집을 나섰다. 두 아들은 자기들 세상에 묻혀 바쁘게 살면서 잠만 집에서 자는 처지라 집사람만 동행이다. 전부터 가보고 싶었지만 여태까지 못가본 영동의 민주지산을 목표로 출발한다. 가는 길가에도 단풍처럼 선명하지는 않지만 야트막한 산들을 단장하고 있는 은행나무, 참나무, 회화나무, 이팝나무, 오리나무들의 붉은색, 노란색, 갈색, 자주색, 연분홍색 잎들의 소박한 아름다움이 좋다. 모처럼 둘만의 호젓한 드라이브라서인지 평소 별로 말이 없는 집사람의 수다가 많아 졌다. 가끔씩 보내는 내 맞장구에 집안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주변 지인들의 동정하며, 세상사는 이야기까지 그 스펙트럼이 점점 커진다. 대화의 종착역은 지금 우리가 어디에 와 있으며, 은퇴하면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 것인지에 이르렀다. 가만히 뒤돌아 보니 직장생활을 시작한지 30년이 지났다. 이젠 60을 바라보는 나이에 내가 지금껏 추구해왔던 삶이 무엇이었는지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제대를 앞두고 내무반 벽난로 옆에 누워 내 인생의 대차대조표를 그리며 앞으로 어떻게 내 삶을 꾸겨갈까 고민하던 후부터 삶의 궤적을 반추해 본다. 공정하지 않은 세상에 대한 젊고 순수한 영혼의 분노와 좌절, 혼자서라도 사회정의를 지켜보겠다고 세상을 향해 덤벼들었던 무모한 열정과 만용, 그러다가 한 살씩 더 먹어가며 세상과 타협하고 일상을 합리화해온 자신에 대한 회한과 부끄러움. 이런 상처와 얼룩으로 내 자화상은 형체도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추상화가 되어 버렸다. 갑자기 콧날이 시큰해지면서 눈가가 촉촉해진다. 집사람 눈치 챌까 봐 헛기침을 한다. 내가 그리고 싶었던 그림이 이게 아니었는데…. 이런 참담한 심정을 잘 담았던 박인환님의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진정코 내가 바라던 하늘과 그 계절은/푸르고 맑은 내 가슴을 눈물로 스치고/한 때 청춘과 바꾼 반항도/이젠 서적처럼 불타버렸다(부드러운 목소리로 얘기할 때)나이가 들면 눈물이 많아지는 이유가 신체에 호르몬 변화가 생기기 때문이라고 하던데, 점잖은 한 선배는 사람들이 나이 먹으면서 철이 들기 때문이란다. 보통 사람도 인고의 세월을 보내면서 세상과 공감할 여유와 품격을 갖추어 간단다. 그 때까지 살아오면서 방황, 사랑, 이별 그리고 죽음을 다 경험했기에 인생의 참뜻을 알아서란다. 그래서 눈물은 따뜻한 마음의 표현이니 남 앞에서 눈물 흘리는 것을 너무 부끄러워 말라고 격려한다.그러나, 사무실과 가정의 현실에서 추상을 걷어낸 민낯의 나는, 이해해주고 여유있는 상사와 가장은 아닌 것 같다. 한 세대가 넘게 같은 직장에서 봉직하다 보니 일머리도 제법 알고, 벼슬도 제법 높아졌으니 겉으로는 내말을 귀담아 들어 주는 주변사람들이 많아졌다. 내가 다 경험해본 것 일이라는 생각에 상대방 이야기를 듣기보다는 내말을 앞세우게 된다. 해봐서 아는데 이렇게 저렇게 해라라고 단정적으로 지시하는데 익숙해진다. 그러나 조금 깊이 들여다 보면 내가 안다는 것이 나한테 익숙해진 세상 살아가는 방식일 뿐이다. 물론 이제는 내가 의사결정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대놓고 반대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해서 언제 조직이 발전하고 새로운 제도를 도입할 수 있을 것인가? 아이들에게는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생활하고 공부하며 세상을 살아가길 원하는 독선적인 아빠는 아니던가?그래도 자신을 너무 자학하지는 말 일이다. 적어도 내게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는 알고 이것을 고치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가? 어디를 가나 주인이 되고 하는 일마다 허물이 없는 경지야 임제스님같은 도인의 경지니 언감생심이요, 지금 당장 내가 실천할 수 있는 일부터 하나씩이라도 찾아서 할 일이다. 원효스님은 이렇게 현실에서 왔다갔다하는 중생들의 마음도, 무변 무외의 마음, 절대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고 했으니 이 말씀에서 약간의 위안을 얻는다. 지금부터라도 남은 생은 매일매일 과오를 조금씩 덜어내고 덜 후회하는 날들을 만들어 가자. 내 마음속에 본래적으로 갖추어져 있다는 진여법신을 찾는 공부를 열심히 해 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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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1.14 23:02

수능시험 날의 짧은 생각

오늘은 201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일이다. 65만 명 수험생뿐만 아니라 가족, 친지까지 초조한 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다. 이번에 수능시험 수험생의 아버지로서 처음 경험을 하게 되어서인지 직접 대입예비고사를 보던 37년전 보다 더 긴장되고, 신문지상을 장식하는 수험생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의 모습에 더욱 마음이 끌리게 된다. 수능 점수 1-2점을 올리려고 애쓰는 것을 보면 그것이 아이의 인생에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애처롭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이렇게 수능시험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수학능력 시험의 결과가 수험생의 긴 인생여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수능 결과가 대학입시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고, 좋은 대학을 졸업한 것이 취업이나 그 후 사회생활에서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것이다. 적지 않은 사회생활 경험에서 볼 때에 이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주위사람을 둘러보면 좋은 대학을 나온 것과 인생을 의미 있고,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대학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도 자수성가한 훌륭한 기업인들을 많이 볼 수 있고, 근무성적이나 평판과 출신대학과의 상관관계는 그리 크지 않다는 것도 직장생활 경험에서 잘 알 수 있다. 좋은 직장을 다니기 위해 좋은 대학에 진학하려는 경우가 많은데, 이 보다 고향에서 부모, 친지,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여유 있게 생활하는 것이 훨씬 나은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종종 하게 된다. 크게 보면 우리 사회가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는 삶이 존중되는 방향으로 건전하게 발전하고는 있지만, 아직도 우리가 스펙 중심의 기존의 사고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수능시험의 중요성이 아직은 줄어들지 않는 것 같다.이번 수능에 전북에서는 전국 수험생 65만의 3.3%인 21,640명이 응시하였다. 전북 인구가 전국의 3.7%인 것에 비하면 젊은 층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을 알 수 있다. 경제발전이 정체되어 있는 전북으로서는 우수한 인재 양성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요즘은 학력이 경제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경우가 많아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지난해 전북의 수능시험 성적이 전국 8개 도권역중 상위를 차지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반갑고, 안심이 되었다. 지난 공직생활 중에서 고향 후배들을 적지 않게 만날 수 있었는데 대부분 자질이 우수하고 성실하여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이렇게 우수한 인적자원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제대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직장이 전북에는 많지 않다는 사실이 매우 아쉬운 점이다. 지역의 유능한 인재가 지역대학에 진학하고, 지역대학은 산학협력을 통하여 지역기업의 경쟁력을 높여주고, 지역기업은 지역인재에게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는 선순환체제가 전북지역에 만들어진다면 얼마나 좋을 가 생각해 본다. 이를 위해서는 우수한 제조업체를 전북에 유치하는 것이 선결과제가 될 것이다. 이미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한 우리나라 제조업은 수출을 통하여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하며, 물류, R&D 등 관련 서비스업의 발전도 도모할 수 있다. 특히 제조업의 생산성, 임금수준, 정규직 비율 등이 타산업보다 높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괜찮은 일자리가 제조업분야에서 만들어 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업 유치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제조업 입지로서의 전북의 강점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전략적인 관점에서 타겟 업종과 기업을 선정하여 치밀하고, 일관성있게 추진해 나가야 한다.수학능력시험은 대학입시의 첫 번째 과정이고, 대학입시는 길고 먼 사회생활을 준비하기 위한 첫 걸음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수능결과는 출발점에서의 조그마한 차이이므로 앞으로의 노력과 의지에 의해 얼마든지 극복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동안 시험 준비에 열심히 매진해 온 고향의 후배들에게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며, 격려와 응원을 보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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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1.07 23:02

조금만 양보하면 편안해집니다

낮에는 한여름처럼 햇볕이 따갑던 주말에 직장산악회 동료들과 강원도 방태산줄기에 있는 아침가리골에 다녀왔다. 부부가 동행하는 원정산행을 나보다 집사람이 더 즐거워한다. 아침 6시 50분 집결지에 모여서 버스를 타고 7시 정각에 출발했다. 이른 시간인데도 많은 차량들로 경춘고속도로는 가다서다가 반복되었지만 마음은 느긋하다. 홍천에서 고속도로를 빠져나가니 정체도 풀리고 한가로운 산길에서 편안한 드라이브다. 북위 38도 경계를 지나 구비길을 한참 돌아서 11시 10분경에 인제군 기린면 방동리 산행기점에 도착했다. 가볍게 몸을 풀고, 방동약수터에 들러 유명한 탄산약수 한 모금을 마시고 산행을 시작했다. 쭉쭉 뻗은 소나무, 전나무와 함께 잘 가꾸어진 자작나무 숲도 참 좋다. 억새풀과 들국화 위로 하늘거리는 고추잠자리의 고운 날개 짓은 가을이 깊어졌음을 알리는 전령사다.약 한시간 정도 걸어 계곡트레킹 기점인 고경동교에 도착하니 총무가 간단하게 요기를 하잰다. 날씨가 화창한 덕분에 모두들 그늘을 찾는데 다리 밑이 제일 좋단다. 편편한 곳은 먼저 도착한 다른 팀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 건너편 물가로 건너려는데 가게 앞에 자리가 났다고 부른다. 다리 밑을 되돌아가니 길위에도 이미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좁은 틈을 비집고 지나가는 게 미안한 마음에 "죄송하지만 조금 지나가겠습니다" 했더니만, 나이 좀 드신 분이 "물쪽으로 돌아가면 될텐대 굳이 이리 지나 간다."면서 언찮은 표정을 짓는다. 다시한번 미안하다고 했지만 조금 아쉬운 생각이 든다. 다리밑에 있는 길도 행인들 통행이 우선이어야 할진대, 그늘을 차지하려고 길을 막고 앉아 있는 사람들이 더 미안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생각끄트머리에 큰 도로에서도 양보하면서 작은 샛길조차 선뜻 양보 못하는 내가 갑자기 부끄러워진다.필자는 자동차 운전을 영국에서 시작했다. 운전면허는 국내에서 취득했지만 장롱면허로 유지하다가 유학가서야 처음으로 자동차를 구입했다. 운전한 경험도 없었고 또 우리와는 반대방향으로 운전하는 영국시스템에 적응도 해야겠기에 비싼 수강료를 내고 도로연수를 받았다. 안전벨트를 먼저 매고 시동을 걸고, 핸들은 반드시 두 손으로 잡으며, 차선을 바꿀 때는 방향표지 신호를 먼저 넣고, 정차시 기어는 중립으로 변속하라는 등등 이론과 실습을 거친 후에 드디어 혼자 차를 몰고 도로에 나섰다. 우리의 초보운전에 해당하는 L(Leaner driver)자 표지를 앞뒤범퍼에 붙이고 배운 대로 한다지만 운전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차는 물론이고 골목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자전거며 행인들도 공포의 대상이다. 그러나 조금 익숙해지니까 처음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방향을 바꿀 땐 바꾸는 방향을 손으로 표시해 준다. 행인들이야 교차로와 상관없이 도로를 가로 질러 다니니까 자동차 전용도로가 아닌 시내길은 저속으로 가면 된다. 서행한다고 재촉하지 않으니까 속도에 신경쓸 일 없다. 미숙한 운전으로 좌우회전 타이밍을 놓쳐 도로에서 전진 후진을 거듭해도 뒤에서는 기다려 주었고, 골목에서 차머리를 내밀고 있으면 오히려 큰 길에 지나가는 차가 양보신호를 보낸다. 이렇게 시작한 4년간의 영국운전경험은 초보운전자 시절의 긴장을 제외하고는 편안했다.서울에 와서 가장 당혹스러웠던 것은 노상이나 주차장에서 차를 빼기 위해 후진할 때, 지나가던 차가 경적을 울려대는 경우다. 주택가나 주차장내에서는 서행 운전해야 할 텐데 기다려 주기는커녕 경고음을 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침 바쁜 시간에 몇 십초 양보하는 것도 쉽지는 않겠지만 기다려주지 않는 것이 꼭 바빠서 만은 아닌 것 같다. 내 앞길에서 걸리적거리지 말라는 마초심리의 발로는 아닐까? 도로가 합류하는 지점에서 교대로 한 대씩 진행하고 있는 데 갑자기 차머리를 들이밀 때도 황당하다. 화가 나서 끝까지 비켜주지 않았고 접촉사고의 위험을 무릅쓰고 정의를 지키려고 애를 썼다. 어느날, 분을 삭이지 못해 씩씩거리는 나를 쳐다보던 집사람이 "상대방 잘못만 탓하지 말고 당신이 양보하면 안되나요." 한다. 부끄럽지만 수양이 부족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때부터 여건이 허락하는 한 양보했더니만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때로는 뒷차로부터 빵빵거리는 질책을 듣기도 하고 드물게는 종주먹 세례도 받지만 양보한 날은 기분이 좋다. 비상등을 켜거나 손을 들어서 고맙다는 의사표시를 해도 좋고, 그냥 지나가도 마음은 여유로워 진다. 내 작은 배려가 상대방에게 전달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날은 의미있는 날이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3.10.17 23:02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다녀와서

지난달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방문했다. 아시아생산성기구(APO)가 지원하는 회원국간 교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생산성진흥기관을 방문해 우리나라와의 협력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방문 목적이었다. 양 국가를 처음 방문하는 기회였기에 여러 가지로 흥미로웠는데 특히 현재의 경제상황과 전망에 대해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다.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경제는 여러 가지 지표로 볼 때에 우리나라의 70년대 후반, 80년대 초반수준인 것으로 보인다. 가령 1인당 GNP는 베트남이 2012년 약 1500달러, 캄보디아가 900달러 정도인데, 우리나라는 1인당 GDP가 1977년에 1000달러를, 1983년에 2000달러를 넘어선 바 있다. 양 국가 모두 70년대 우리나라처럼 저렴한 인건비를 바탕으로 수출을 늘려 나가면서 경제성장을 적극 추진해 2000년대 7%가 넘는 고도성장을 기록했다. 캄보디아는 최근에도 7%대의 높은 경제성장을 지속하고 있는 반면 베트남의 경우 장기간 고도성장의 후유증과 세계경기침체의 영향으로 경제성장률이 5%대로 조정을 보이고 있다. 산업구조 면에서도 캄보디아는 아직도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70%에 이르고 제조업도 식품가공업과 섬유산업이 대종을 이루고 있는 반면, 베트남은 수출을 중심으로 제조업이 빨리 성장하면서 경공업을 넘어 중화학공업까지 진출하고 있었다.그러면 이들 국가의 경제전망은 어떠할 것인가? 현지에서 만나본 사람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성장잠재력은 상당히 크나, 장애요인도 만만치는 않다는 것이다. 첫 번째로 드는 장점은 낮은 인건비다. 급격한 임금상승으로 중국의 1인당 소득이 5000불을 넘고, 인도네시아도 3000불을 넘는 상황에서 베트남과 캄보디아는 노동생산성면에서 확실히 경쟁력이 있다는 것이다. 현지에서도 중국 인건비의 큰 폭 상승으로 중국을 떠나 베트남이나 캄보디아로 진출한 기업을 볼 수 있었다. 최근 두 나라의 임금도 가파르게 상승하고는 있지만 대체할 국가를 찾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미얀마 정도가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으나, 인프라나 각종 제도 면에서 아직 이들 국가보다 더 매력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둘째는 내수시장의 잠재력이다. 캄보디아는 인구가 1500만 명에 불과하나, 베트남은 9000만 명이 넘는다. 더구나 월남전 종전 이후 태어난 젊은 세대의 비중이 매우 높다. 이들이 노동시장에 진입하면서 생산뿐만 아니라 소비의 주체로 발전할 여지가 크다. 마지막으로는 베트남의 교육열이다. 베트남의 경우 전통적으로 유교의 영향이 있어서 그런지 교육열이 대단해 우리나라와 같이 교육이 가계소득 중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작년에는 수도 하노이의 명문 초등학교에서 입학원서를 얻으려고 학부모들이 한꺼번에 몰려 학교의 철제 정문이 넘어지는 등 큰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이러한 밝은 면이 있는 반면 경제성장을 저해하는 요인도 한두가지가 아니다. 첫째는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이다. 베트남이나 캄보디아 공무원들은 봉급은 아주 작은데 비해 생활수준은 상대적으로 높다고 한다. 이번 현지 방문에서 공무원들이 외제차를 모는 것을 적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내가 만난 한국기업의 대표도 현지 경영에서 대표적인 애로사항이 관련 공무원들을 접대하는 것이라고 불평하고 있었다. 공직이 부패하면 공익보다 사익이 앞서게 돼 건전한 경제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둘째 문제점은 부정부패와도 밀접히 연관되는 점점 커져가는 빈부격차이다. 그동안의 경제성장으로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세계은행에서 규정하는 1일 1.25달러를 벌지 못하는 극빈층의 비중이 두 나라 모두 15%를 훌쩍 넘고 있다. 반면에 부동산 가격상승 등으로 신흥부자 들이 양산되고 있다. 빈부격차의 확대는 근로 의욕을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사회불안요소가 돼 경제발전에는 큰 장애요인이 되는 것이다. 이번 방문을 통해 국가경제가 발전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사회지도층의 의지와 솔선수범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누구나 노력하면 땀 흘리는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는 경제시스템이 구축돼야만 국민의 경제하려는 의지를 모을 수 있고, 지속가능한 경제발전도 가능하지 않나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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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0.10 23:02

효도하는 사람과 불효하는 사람

민족의 명절 추석이 지났다. 아직도 추석을 맞아 고향을 찾고, 부모 친척을 찾는 이들이 많다. 인심이 각박해지고, 자신 밖에 모르는 세상이라고 한다. 귀향행렬이 줄지 않는 걸 보면, 우리나라는 공동체정신이 살아있는, 아직은 살만한 나라인 것 같다. 추석이면 제일 생각나는 분이 어머니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제대로 효도하지 못했다는 자괴심이 언제나 가슴에 사무친다. 나름 할만큼 했다는 생각도 하지만, 어머니가 내게 베풀어주신 사랑에 비하면 내가 한 게 얼마나 될까? 9남매를 키우셨던 어머니는 내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 어렸을 때 집이 가난해서 거의 구걸하다시피 살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남에게 베풀고 살라는 큰 가르침을 주셨다. 어머니는 매년 쌀 100가마를 동네에 내놓으셨다. 한번도 빠트리지 않으셨다. 동네 사람들은 어머니가 빨리 돌아가시면 안된다고 했다고 한다. 돌아가시면 그 쌀이 없어질 것같아서였다고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동네사람들은 모두 나와 상여를 매고 만장을 드는 등 따뜻하게 어머니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배웅했다. 은혜 갚겠다고 나서주었다.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내가 죽더라도 쌀 100가마 주는 것을 그치지 말라"고 유언 하셨다. 내가 그 유언을 지키고 있다. 죽을 때까지 그 유언을 지킬 생각이다. 내가 죽으면, 내 자식들이 그 유언을 지킬 것이다.사람은 경제적으로 잘 살 수도 있고, 못 살 수도 있다. 물질본위의 자본주의사회에서 남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군들 자기 노력으로 벌어놓은 게 아깝지 않으랴. 누군가 말했다. "돈 있다고 누구나 베푸는 건 아니다"라고. 베푸는 것을 감히 '예술'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머니 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구니오 나카무라, 태평양의 작은 섬나라 팔라우의 대통령이다. 1996년 중반 팔라우에 갔을 때 만났다. 대화중 어머니가 95세라고 얘기하니, 그가 놀라서 "우리는 70 밖에 못사는데, 95세에도 살아계신다고요? 한번 뵙고 싶다"고 했다.1997년 6월 내가 작사하고 노래 부른 '오래오래 살아주세요' 노래비 제막식 때 그를 초청했다. 처음에는 참석하겠다고 했는데, 갑자기 못오겠다는 연락이 왔다. 15일 제막식에 참석하려면, 13일에는 비행기를 타야 되는데, 하필 그날은 '13일의 금요일', 움직여서는 안되는 불길한 날이었다. 못오겠구나 했는데, 15일 아침 7시에 도착하면 되겠느냐는 연락이 14일에 왔다. 그는 15일 아침에 도착해서 정부가 내준 방탄리무진으로 2시간만에 정읍에 도착했다. 12시의 제막식에 참석해서 나와 함께 테이프를 끊었다. 덕분에 제막식은 더욱 성대하게 끝났다. 작은 나라라고는 해도 쉽게 몸을 뺄 수 있는 위치가 아니기에 그런 정성을 보여준 것이 정말 고마웠다.나이 들수록 어려진다고 했던가? 추석 같은 명절이 오면 어머니가 더욱 그립다. 내가 다못한 효도를 다른 사람들은 꼭 했으면 하는 생각이 절실해진다. 부모에 효도하는 사람은 남에게 악한 일을 하지 않고, 부모에게 불효하는 사람은 남에게 선한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게 내 믿음이다. '효',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살만한 사회를 만드는데 필요한 마음가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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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9.26 23:02

추석단상

1주일 후면 추석연휴가 시작된다. 매년 어김없이 추석은 찾아오건만 세월이 흐르면서 추석의 의미도 시간의 무게와 함께 달라짐을 느끼게 된다. 나의 기억에 아른거리는 먼 어릴 적 추석의 모습은 새 옷, 새 신발에서 시작된다. 어머니는 일년에 두 번, 추석과 설날에 새 옷을 사주셨다. 추석 전날쯤 전주 남부시장에서 사 오시는 보따리에는 우리 4남매의 옷과 신발이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아이들 옷을 입혀 보면서 미소 짓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옷 선물을 받던 우리보다 더 흐뭇해하시던 마음을 지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추석에 차례를 지내고, 송편과 평소 먹지 보지 못했던 음식에 즐거워했던 기억도 새롭지만, 추석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새 옷에 대한 기대였던 것이다. 너무나 쉽게 새 옷을 사는 요즈음 아이들은 추석 때 무엇에 가슴 설레일까 궁금하기도 하다. 또 하나 어린 시절 추석을 생각할 때에 빠지지 않는 것이 영화관이다. 성묘에 빠지고 어떻게 해서든지 영화를 보러 가려고 이리 저리 궁리했던 것이 기억에 생생하다. 새 옷과 영화, 이 두 가지가 어릴 적 추석을 돌아볼 때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인 것이다. 또한 추석 둥근 보름달을 보고 남몰래 소망을 빌었던 모습도 잊혀지지 않는다. 아마도 중학교 때일 것이다. 중학교까지는 무시험으로 진학하고 고등학교부터 입학시험을 보는 시절이었으니까. "추석 보름달을 보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덧없는 말에 의지하여 추석날 늦은 밤에 혼자 나와 달을 보고 많은 이야기를 했었는데,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아도 그때의 간절함만은 지금도 느껴진다. 대학 시절부터 추석의 모습이 서서히 변화되었던 것 같다. 생활의 근거지는 서울이지만 거의 대부분의 추석은 부모님이 계신 전주에서 보내게 됨에 따라 추석은 쉽지 않은 명절이 되었다. 기차표나 고속버스 승차권을 구하기 위하여 밤새워 기다리기도 했고, 승용차로 10시간 넘게 운전하여 집에 오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전주집에 머무르는 시간보다 오고 가면서 운전하는 시간이 많았던 적도 적지 않았다. 특히 결혼 후에는 추석때 집에 가는 문제로 아내와 갈등을 일으킨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몸이 약한 아내는 추석때 전주를 다녀오면 몇일을 끙끙 앓는 것을 알고 있지만, 추석 귀향을 미룰 수는 없었다. 이렇게 추석이면 으레 집으로 향하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부모님과 추석을 같이 보내고, 성묘를 해야 한다는 의식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 물론 가장 큰 이유일 것이지만, 힘든 타향생활을 벗어나 고향의 품에서 위안을 받고자 하는 바람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좋은 친구들, 다정한 친척들, 어려서부터 알고 지내 익숙한 이웃 등 이해관계에 억매이지 않는 편한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세상사에 피곤해진 심신을 달래보고 싶었던 것이다. 나이를 먹고, 세월이 흐르면서 이러한 추석의 의미도 점차 흐려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친척 어른분 들은 돌아가셔 안 계시고, 전주에 부모님이 살고 있지 않은 친구들은 추석이 되도 전주에 오지 않는다. 따뜻한 정을 같이 나눌 사람이 하나 둘 사라지니 전주에 와도 옛날 같은 고향의 내음을 맡기 쉽지 않다. 내가 간직해왔던 소중한 것이 사라져 가는 것 같은 허전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추석 귀향이 없었다면 이제까지의 타향에서의 30년 넘는 삶이 얼마나 삭막했을까를 생각해 본다. 그래서 옛날의 정겨웠던 추석 귀향을 다시 찾고 싶다. 그러려면 내가 먼저 정성을 쏟아야 한다. 어머니 안 계신 추석을 처음 맞이하시는 아버지의 쓸쓸함을 달래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 또 그 동안 못 보았던 친구, 친척을 찾아보아야겠다. 가능하면 내가 어릴 적 살던 추억이 깃든 곳도 천천히 걸어보겠다. 내 삶의 밑바탕이 되어준 고향의 따뜻함을 느끼면서 종반부로 들어선 인생의 다음 설계를 해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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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9.12 23:02

문화융성시대와 무주 태권도원

한국 사회에서 '문화산업'이라는 의제가 시대정신으로 거론된 지도 10년이 넘었다. 21세기 전후 김대중 정부의 막대한 지원으로 문화는 이제 예술을 넘어 산업의 영역으로 확장됐다. 이후 역대 정부도 문화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다각적인 정책을 벌여왔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태권도 진흥 사업이다. 오늘날 태권도는 단순히 체육 종목 중 하나가 아닌, 한반도 반만년 역사의 무술 혼을 상징하는 기호로 통한다. 더욱이 한국의 대표 문화브랜드로 자리매김하며 '강남 스타일' 이전의 원조 한류로 재조명되고 있다. 70년대 아그레망 없는 외교사절로 활약했던 태권도 사범들의 역사는 이제 고전이 됐다. 과거 국가대표 사격선수로 활동하며 외국을 방문했을 때에도 이국인들이 태권도를 통해 한국을 알아보았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내세울 게 없던 가난했던 그 시절, 한국인의 자부심을 세워준 것은 바로 '태권도'였다.그리고 지난 7월 '태권도원'이 완공됐다. 2009년 9월 4일 '태권도의 날'에 전라북도 무주군의 광활한 대지에서 첫 삽을 뜬지 5년 만이다. 세계에 유례없는 대규모 태권도 전문 시설의 탄생이 있기까지 많은 이들의 땀방울이 모였다. 태권도원 건립·운영사업의 주체인 태권도진흥재단은 올 하반기 시범운영을 거쳐 2014년 3월 개원을 향해 막바지 힘을 쏟고 있다.태권도원의 부지면적은 231만 4천 제곱미터(m²)로 여의도 면적의 1/3에 이른다. 백두대간을 연상케 하는 기다란 조성 공간은 체험과 수련, 상징 등 3개 구역으로 나뉜다. 체험과 수련 공간에는 세계 유일의 태권도 전용 경기장과 박물관 외에도, 최첨단 과학기술을 적용한 태권도 체험관과 연수시설 등이 들어선다. 태권도 원로들을 기리는 상징 공간은 아직 용의 눈으로 남아있다. 이곳의 핵심시설인 태권전과 명인관이 기부금으로 조성되는 까닭이다. 그 동안 국내·외 많은 태권도인들의 정성을 모아 왔지만 두 시설을 완성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지난 4월 태권도원을 직접 방문했을 때에도 그 부분이 안타까웠다. 상징지구는 태권도원의 시작과 끝이다. 태권도 역사의 무게와 미래의 영광이 공존하는 곳이다. 상징지구 조성에 차질이 없도록 다각도의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태권도원을 채울 콘텐츠의 역할도 중요하다. 태권도원에서 선보일 운영 프로그램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태권도 전공자를 위한 전문 프로그램과 비전공자를 위한 일반 프로그램이다. 특히 태권도 전문 수련생을 대상으로 한 세계태권도아카데미(World Taekwondo Academy, WTA)는 국기원이 맡아 전문성을 책임진다. 태권도 수련생은 태권팝스(태권체력측정평가)와 폭포 수련, 고단자·국가대표 선수와의 만남 등 다양한 심신 수양 교육을 받을 수 있다. 일반인들도 태권도 수련·체험은 물론 이를 접목한 문화·치유 프로그램 등을 선택해 즐길 수 있다. 박근혜 정부는 지난 달 문화융성위원회를 출범시켰다. 태권도원은 문화융성사업을 중시하는 새 정부의 국정기조와 통하는 중요한 사업이다. 태권도원이 새로운 태권도 문화 창출의 장이 될 가능성도 여기에 있다. 개원 후 태권도원이 태권도 문화 콘텐츠 개발의 허브가 되어 태권도인 뿐만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태권도 문화를 전파하는데 기여하길 바란다. 이를 위해선 전 세계 태권도인의 관심과 참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전북도민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 예부터 전라도에는 나라를 지키려는 의로운 투쟁이 많았다. 무주에 태권도원이 들어서게 된 역사적 배경에도 조선시대 호국 승려의 얼이 깃든 '안국사'와 '설천면 전설'이 있다. 이제는 종주국의 자부심을 지켜줄 '태권도원'에 앞으로도 많은 애정을 부탁드리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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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9.05 23:02

추석, 감이 주렁주렁 달린 고향길을 걷노라면…

나이가 들면 생각이 많아진다는 어른들의 얘기를 젊은 시절에 들었다. 처음엔 그 말의 의미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한창 일 하는 나이 때에 고민도 많고 생각이 많지, 은퇴한 나이에 무슨 하실 일이 있다고 생각이 많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혹시 잠이 없으시다보니 가진 게 시간 밖에 없어 괜히 이런저런 생각을 하시는 게 아닌가 하는 시건방진 진단을 내리기도 했다.이제 내가 그런 나이가 됐다. 생각이 많아졌다는 걸 느낀다. 할 일은 없는데, 시간이 많아져서 생각이 많아진 걸까? 그 건 아니다. 살아온 세월의 축적을 반추하면서 눈 앞의 일을 바라보면 생각이 많아질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모든 언행은 살아온 인생의 총화(總和)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이 든 사람들의 언행은 대개 그 사람의 인생궤적과 일치한다. 나이가 들면서 고향에 대한 애착이 예전보다 더 커졌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요즘은 고향에 가도 내가 거의 최고령층에 속한다. 인생이 이렇게 흘러가는가 하는 생각과 함께 고향을 위해, 또 나라를 위해 내가 할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간 고향을 위해 나름대로 작은 일들을 해왔다고 생각한다. 이름을 남긴다거나, 사람들이 나를 기억했으면 하는 생각에서 한 건 아니다. 고향을 다니면서, 고향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게 뭘까를 생각하고 작은 실천을 했을 뿐이다. 남들보다 조금의 성취가 더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에, 받은 만큼이라도 돌려줘야 될 의무도 있다.특히 변변한 자원도, 뒷배경도 없는 고향 전북을 위하는 일이 뭘까를 고민하는 시간도 길어졌다. 전북의 미래는 사람 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재경전라북도민회장 취임 후 제일 먼저 한 일이 도민회 장학금 대폭 확충이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나도 작은 기여를 했지만, 여러 향우들의 협조가 정말 고마웠다. 그 분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장학금 혜택이 비약적으로 늘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또 5년 전부터 고향 마을과 이웃 마을에 가구당 1주씩 감나무를 심어 드렸습니다. 작은 나무가 자라 감이 열리면, 적지만 소득도 가능하고 고향을 찾는 후손들이 작은 추억이라도 만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감나무를 선택한 것은 기르기 쉽고, 소출이 있다는 점 외에도 임실과 우리 동네가 감이 잘 된다는 조사 덕분이다. 또 태인-칠보-산외까지의 10km 국도변에도 감나무를 가로수로 심었다. 처음에 큰 나무를 심었는데, 활착률이 나빠 2011년부터는 어린 묘목을 심었다. 50% 정도만 제대로 커도 큰 수확이 아닐 수 없다. 곧 추석이다. 많은 향우들이 고향을 찾을 것이다. 사랑하는 부모형제들과 친척 친구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낼 것이다. 내 경우, 고향에 가도 반갑게 맞아주던 친구들 보기도 힘들다. 같이 뛰놀던 친구들 대부분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이제는 여린 가지를 꿋꿋하게 내민 감나무들이 나를 반겨준다.우거진 감나무 사이로, 또 감이 주렁주렁 매달린 고향길을 걷는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그 감나무들이 거목으로 자라나 고향의 상징이 되고, 그 나무 밑을 넉넉한 마음으로 걸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더 흐뭇해진다. 그렇게 클 때까지 잘 키우고 싶다. 도민과 향우들이 모두 나서서 고향집, 고향길에 나무 한그루씩 심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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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8.29 23:02

예를 갖춘 리더인가?

얼마전 모일간지에 게재된 탤런트 최수종씨의 인터뷰기사를 읽고 적지 않은 감동을 받았다. 부인인 하희라씨는 물론이고, 14살, 13살짜리 두 아이에게도 존댓말을 사용하고 이름도 민서씨, 윤서씨라고 부른다고 한다. 또, 아이들에게 "공부해라, 이것해라."라고 강요하지 않고 뭐든지 아이들하고 상의를 해서 결정한단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부인과 어린 자녀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한 사람의 인격체로 인정한다는 것은 일상에서 말과 행동을 참으로 조신하게 한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세상살이라는 것이 사람과 관계를 맺고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일진대 살아오면서 내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자문화권에서 인간이해의 핵심은 인(仁)이다. 인의 개념이 어질고, 연민하며, 수양하고, 너그러운 마음등을 포괄하는 의미로 확장되었지만 본래 뜻은 두 사람이다. 즉, 사람 인(人) 둘 이(二) 모였으니 관계가 형성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공자님은 인간관계를 다양한 방법으로 설명하지만, 그 중 으뜸은 자기가 하기 싫은 것은 남에게도 시키지 말라는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慾 勿施於人)'이다. 상대방이 싫어하는 일을 시킬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겠지만, 적어도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자는 얘기다. 얼마전 IMF등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우리사회 도덕윤리의 기둥인 예(禮)의 본질을 수직적 상하관계로만 파악하고, 왕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 선생님과 학생으로 나눠 규율하는 명령과 복종의 굴레를 없애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이 크게 주목받은 적이 있다. 예라는 형식의 껍데기를 벗어 던지고 인간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겸손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커피나 진통제 같은 순간적인 위로와 아름다운 말만으로 우리의 아픔과 상처를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는 없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문제의 본질에 가까이 다가서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사회의 속성을 인정하고 사태를 객관적으로 보자는 것이다. 우리보다 이 문제를 앞서 고민했던 선각자들의 성찰은 인간사회에서 제기되는 문제의 핵심을 '나'라고 파악했다.'너 자신을 알라'고 했고,'모든 만물은 너로 인해 존재한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했으며, '개인적 삶에 충실한 연후에야 훌륭한 정치인이 될 수 있다고도 했다.공직자로서의 첫 보직이 구청 민방위과장이었다. 24명의 직원들 가운데 여직원만 한 살 아래고 나머지는 모두 연장자였다. 리더십이론을 열심히 공부했지만 현장에서 활용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물론, 공직생활을 시작하면서 관리자로서 나름의 생활철학을 마련했다. 첫째, 직원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목표와 비전을 제시할 것. 둘째, 직원들에게 존댓말을 쓰고 의견을 끝까지 들어 줄 것. 셋째, 솔직하고 공부하는 공무원이 될 것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소박한 잣대로 재단하기엔 세상이 그렇게 녹녹치 않았고 하루해가 지면 오늘도 무사했구나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하루는 동향선배 한분이 '모르는 것을 아랫사람한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아라'라는 공자님말씀을 인용해서 조언해 주셨다. 이때부터 모르는 것은 완전히 이해될 때까지 물었다. 공자님은 '군주는 신하를 예를 갖추어 부리고 신하는 군주를 충성으로 섬긴다는 군사신이예신사군이충(君使臣以禮臣事君以忠)' 라고 했다. 아랫사람으로부터 마음에서 우러나는 충성을 기대하기 위해서는 왕이 먼저 예를 갖추어서 신하를 부려야 한다는 말이다. 내가 아랫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할지 이 구절에 비추어 다시 자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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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8.22 23:02

현명한 기후변화 대응법

길게 만 느껴졌던 중부지방 장마가 끝나자 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장마가 짧았던 남부지방은 무더위가 더욱 기승을 부리는 것 같다. 지난 주말에 전주에 갔었는데 말 그대로 찜통 더위였다. 기온이 37도를 넘었다고 하니 과거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더위인 것이다. 저녁에는 앞마당 평상에 모여 수박을 먹고, 누워서 시원한 바람에 몸을 맡겼던 어릴 적 여름이 그리워진다. 이제 우리는 기후변화의 한 복판에서 살고 있다. 남의 일처럼 여겼던 지구온난화 문제가 이제 생활 깊숙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지구촌 전체가 가뭄과 홍수, 이상 고온 등 기상 이변으로 신음을 앓고 있고, 빙하가 녹으면서 해수면이 올라가고 있어 앞으로 또 무슨 일이 있을지 전전긍긍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면 기후변화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까? 지구 온난화를 방지하려면 대기 속의 이산화탄소를 줄이면 되는데 그것이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다. 이산화탄소는 화석연료를 연소할 때에 주로 배출되는데 석유, 석탄과 같은 화석연료는 인류의 대표적인 에너지원이고, 특히 우리나라는 대부분의 에너지를 화석연료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이산화탄소를 줄이려면 에너지 소비를 줄여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냉난방 같은 생활 속의 에너지보다는 산업계에서 사용하는 에너지가 월등히 많다. 즉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이려면 산업생산이 줄고, 경제성장이 낮아지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중국 등 개발도상국이 온실가스에 대한 국제적인 규제에 적극 반대하는 것도 경제성장에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에서이다. 특히 중국은 세계 제일의 이산화탄소 배출국가로서 2010년 72.6억톤을 배출하였는데 이는 우리나라 배출량의 13배 수준이다. 중국과 인도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전 세계의 1/3 가까이 되는 상황에서 이들을 제외하고 온실가스 배출을 규제하는 것은 실효성이 없다. 교토기후협약 이후 새로운 기후변화협약을 위한 협상에 진전이 없는 것도 탄소규제에 대한 선진국과 개도국간 첨예한 이해관계 대립이 주요 원인인 것이다.지난 이명박정부는 저탄소 녹색성장을 핵심 국가 아젠다로 추진하였다. 지구를 살리기 위한 저탄소를 선도하면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자는 것이었다. 녹색성장위원회가 만들어지고 녹색성장기본법이 제정되는 등 각종 정책이 쏟아졌고, 홍보도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2020년까지 BAU 대비 온실가스 30% 감축이라는 의욕적인 감축목표도 세계에 제시하였다. 그러나 각종 구호와 정책에도 불구하고 2010년 우리나라 온실가스 배출양은 전년대비 9.8% 증가하여 2000년대 들어서서 가장 높은 증가율을 기록하였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GDP당 온실가스 배출량이 2002년부터 지속적으로 줄어왔는데, 저탄소 녹색성장 정책이 추진된 2008년부터 오히려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경제가 내세우는 것과는 달리 더욱 화석연료 의존적인 경제구조로 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볼 때에 국제사회에 제시한 온실가스 감축목표는 달성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우려되는 것은 이러한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국제사회에 제시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무리한 정책이 추진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변화된 여건을 점검하여 국가감축 목표를 현실성있게 재산정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재산정한 감축목표와 어려운 경제여건 등을 감안하여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정책과 규제도 국민과 산업계의 의견을 반영하여 재설계 할 필요가 있다. 특히 중국·미국 등 온실가스 과다 배출국가가 자국의 경제성장을 고려하여 온실가스 규제정책에 적극 나서지 않는 상황에서 우리만 앞서 갈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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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8.15 23:02

한국 스포츠 발전과 국가 브랜드

국가대표선수 출신으로 최초로 체육 주무부처 차관을 맡기까지 필자는 평생을 스포츠와 함께 해 왔다. 우리나라 스포츠가 발전하고, 이를 통해 국가 브랜드가 높아지는 역동적인 순간을 늘 함께 해 왔다. 때로는 현장의 선수였고, 때로는 선수들을 지원하는 감독이나 체육 행정가였다. 돌이켜보면, 맡은 역할은 시기에 따라 달랐지만, 스포츠를 통해 국민들에게 기쁨과 감동을 선사하고, 세계 무대에서 우리나라의 위상을 드높이겠다는 각오만은 늘 한결같았던 것 같다.익산에서 태어난 필자는 어린 시절에는 학교 선생님을 꿈 꿨으나, 이리동중, 이리농림고 등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군인의 길에 매력을 느껴 해병학교를 거쳐 해병대 장교가 되었다. 체육인과는 거리가 먼 길이었다.그런데, 1970년 베트남전 참전을 앞두고 갑자기 국가대표 사격선수로 발탁되면서 운명처럼 체육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우리나라가 '제 2회 아시아사격선수권대회(1971년)'를 유치하면서, 당시 경호실장이자 대한사격연맹회장을 맡고 있던 고 박종규씨가 몇 차례 군대 사격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던 필자를 사격선수로 지목한 것이다. 이후 국가대표 사격선수로 78년 방콕, 82년 뉴델리, 86년 서울 등 아시안게임 3연속 금메달을 기록하는 등 적지 않은 수상의 영예를 누렸고, 선수생활을 은퇴한 뒤에도 국가대표 사격팀 감독, 대한체육회 임원 등으로 체육인의 삶을 떠나지 않았다. 2011년부터는 2년여 간 태릉선수촌장을 맡기도 했다. 지난해 런던올림픽에서 한국선수단 총감독을 맡아 역대 원정 대회 최고 성적인 종합 5위를 달성한 것은 가장 뜻 깊은 기억이다.오늘날 세계적인 무한경쟁 시대에 스포츠는 국가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중요한 수단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스포츠를 통해 통해 국가 브랜드를 세계에 각인시킨 대표적인 나라다. 88년 서울올림픽과 2002년 한·일 월드컵은 우리 국민들의 통합된 힘과 우리나라의 발전된 모습을 세계에 널리 각인시키면서 국가브랜드 가치를 획기적으로 높인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동·하계올림픽, 월드컵,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등 4대 스포츠 축전을 모두 여는 세계 6번째 국가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올림픽을 비롯한 각종 국제스포츠대회에서의 경기력도 세계 상위권에 섰다. 아마 우리나라가 스포츠 강국이라는 데는 아무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그러나, 스포츠를 통해 국가브랜드를 한 단계 더 높이기 위해서는 이제 스포츠 강국을 넘어 스포츠 선진국으로서의 면모를 세계에 보여주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러면, 스포츠 선진국은 어떤 모습일까? 필자는 '국민 누구나 스포츠를 통하여 건강하고 즐거운 삶을 누리는 나라'가 스포츠 선진국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이는 국정의 중심을 국가가 아닌 국민 개개인에 두고 국민행복을 추구하는 박근혜정부 체육정책의 핵심이기도 하다.새 정부는 생애주기별 맞춤형 스포츠 프로그램을 보급하고, 종합형 스포츠 클럽과 스포츠 교실은 물론 각종 생활체육시설을 연차적으로 늘려나가는 등 100세까지 누구나 집 가까이에서 건강하게 스포츠를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필자는 국민 모두가 1인 1기 이상의 스포츠를 즐기며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를 제안한다. 이는 새 정부 체육정책의 지향점이며, 우리나라가 스포츠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지름길이다. 스포츠를 통해 또 다시 국가브랜드를 높일 새로운 기반이기도 하다.△ 박 차관은 고려대 교육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쳤으며 국가대표 사격감독, 대한체육사 이사, 태능선수촌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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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8.08 23:02

사무치게 그리운 어머니, 그리고 고향

누구에게나 어머니란 단어는 남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시고, 홀어머니 사랑 속에서 나이 먹은 나에게는 그 느낌이 더욱 남다를 수밖에 없다. 칠순이 넘은 이 나이에도 어머니라는 단어를 접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어머니가 세상을 뜨신지 벌써 12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서울에서 내려오는 아들을 기다리시던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무너진다. 더 잘 모셨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가 가슴을 친다. 내가 온다는 날이면, 어머니는 새벽부터 마당에 나와 대문만 쳐다보셨단다. 기다리는 어머니가 안계시는 지금은 귀향길도 바쁘지 않다. 어머니를 모시고 홍콩과 일본을 다녀오기도 했다. 비행장에 도착하면 구순의 어머니를 내가 업었다. 길게 늘어선 입국장 줄 뒤에 서면 사람들이 어서 먼저 가라고 자리를 양보해줬다. 내 등에 업히신 어머니 덕분에 일찍 수속을 마쳤다. 그 걸 노리고 한 일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이 고마웠다. 나라는 달라도 효도하는 마음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가 95세 되시던 1997년 6월, 나는 어머니가 살고 계신 곳이자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시기마을)에 노래비를 세웠다. 어머니가 저 돌처럼 100세까지 건강하게 살아계셨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전문 음악인은 아니었지만, 내가 작사하고 노래도 직접 불렀다. 평상시 나와 어머니와 주고 받던 말씀을 갖고 작사한 노래 「오래 오래 살아주세요」가 바로 그 노래다. 그 후 어머니 앞에만 서면 그 노래를 불렀다.'세상살이 고달프고 괴로울 때면 마음은 달려가네 어머님 품속으로/사랑스런 눈빛으로 나를 보며 두 손으로 안아주었죠/세월따라 변해가는 어머님의 그 모습이 이 자식의 가슴 속을 울려줍니다// 흐르는 세월을 아쉬워하며 나를 사랑하고 키워주신 어머님/이 몸이 잘 되라고 두 손 모아 그 얼마나 빌었습니까/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어머님 그 은혜를 무엇으로 갚으리까/어머님 어머님 오래 오래 살아주세요/어머님 어머님 오래 오래 살아주세요'좀 면구스러운 일이지만, 내가 가수라고 하면 사람들이 잘 믿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엄연히 가수다. 사단법인 한국연예협회 회원증(가수분과 380호)을 가진 진짜 가수다. 회원증이 있어야 정식 가수로 인정된다.나는 요즘도 작사료를 받는다. 방송이나 노래방에서 내 노래를 틀면 사후 70년까지 보장되는 작사료가 나온다. 금액이야 얼마 되지 않지만, 받을 때마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게 되고 매우 재미가 있다. 작사자가 죽으면 그 권리는 배우자와 후손에게 귀속된다. 집사람에게, 또 자식들에게까지 상속되는 '돈벌이' 권리다. 내가 직접 부른 노래이기도 하지만, 내가 작사했기에 더욱 값지고, 자랑스럽고, 재미 있다.노래비를 세운 것은 내가 한 일중 가장 보람 있는 일로 생각된다. 덕분인지, 어머니는 102세까지 건강하게 사시다 돌아가셨다. 102세도 자식 입장에선 아쉽지만, 병원 한번 안가시고 돌아가신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다. 하늘에서 어머니를 돌봐주셔서 그리 된 것같다. 그로하여금 나는 나라에서 국민훈장을 받게 됐다.어머니 얘기를 하는 것은 내가 효자라서가 아니다. 누구나 비슷하겠지만, 대개의 경우 스스로를 불효자라고 생각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다만 모든 사람이 가지는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이다. 효도하는 마음은 고향사랑 마음과 통하고, 이웃사랑 마음과도 통하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이 있을 때 이웃과 고향을 더욱 따뜻하게 대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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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8.01 23:02

거울 하나를 더 걸면서

이른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침실을 나와 거실에 걸려있는 거울에 얼굴을 비춰본다. 엊저녁에 모처럼 만난 예전 동료들과 늦은 시간까지 회포를 푼 덕에 얼굴이 푸석하다. 각자들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며 사회 돌아가는 이야기들 나누다가 모의원이 했다는 귀태(鬼胎) 이야기가 화제로 등장했다. 평소 손빠르고 재치있는 친구가 잽싸게 인터넷을 검색하더니만 번역서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라는 책에서 인용한 '태어나지 않아야 할 사람'이라는 뜻이란다. 박정희 전대통령은 태어나지 않았어야 할 사람이라는 뜻으로 한 얘기란다. 글쎄 아무리 이념과 지향하는 정치적 소신이 다르다고 공인이 그렇게까지 험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고 혀를 찬다. 그 사례를 계기로 본인들의 말실수 경험과 구설수에 올랐던 동서고금의 일화들로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헤어져 돌아온 기억이 아침까지 새롭다.요즈음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말을 너무 쉽게 많이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우리 주변에 난무하고 있는 현란하고 저속한 말들이 정치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들은 물론이고 방송인, 운동선수, 연예인들도 심심치 않게 지상에 오르내린다. 보통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지인들과 얼굴 맞대고 얘기하는 것도 모자라 모르는 사람에게 문자까지 보낸다. 그 중에는 상대방을 위로하고 감동을 주는 따뜻한 말도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 상처와 피해를 주는 막말도 적지 않다. 막말의 경우 사회적 책임과 지위가 낮은 사람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지도자일 경우엔 한 조직이나 국가의 운명이 달라질 수도 있다. 힐링전도사로 귀감이 되는 말만 골라서 하기 위해 노력하던 혜민스님이 너무 많은 말을 했다며 당분간 묵언수행을 하시겠다니 참 아이러니하다. 한마디 말로 천냥 빚을 갚기도 하지만, 말 한마디로 살인도 할 수 있는 것이니 '말의 무서움'을 새겨서 조심하고 또 삼가해야 할 일이다. 불가에서는 사람에게 네 개의 거울이 필요하다고 한다. 첫째는 얼굴과 몸등 보이는 것을 비추어 보는 거울이다. 집, 사무실, 자동차, 버스정류소나 지하철역, 상가건물에 비치된 거울은 물론이고 휴대폰에도 거울앱을 다운받아 들고 다니면서까지 사용하고 있다.둘째는 우리가 사용하는 말과 언어를 비추어 보는 거울이다. 이 거울은 유형의 거울일 수도 있고 아니면 각자의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무형의 거울일 수도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정제되어 있는지, 그 상황에 적정한지, 거짓말하거나 속이는 것은 아닌지 등을 점검하는 그런 거울이다. 우리얼굴에 때가 묻어 있거나 옷이 지저분하면 주위사람들을 불쾌하게 하거나 조금 기분 나쁘게 할 수는 있다. 하지만 막말은 타인의 가슴에 못을 박거나 때로는 온 나라를 시끄럽게 만든다. 셋째는 내재된 의식세계, 다시 말하면 프로이드가 이야기한 에고의 표상을 살펴보는 거울이다. 말이 입밖으로 나오기 전에 자의식이 생성하는 마음씀씀이가 고약하지는 않은지, 상대방에게 편견이나 악감정을 품고 있지는 않은지를 점검하는 거울이다. 낯설은 상대방을 첫인상이나 감각으로만 평가하지는 않는지 경계하고 또 살펴볼 일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볼 수는 없지만 각자가 살아온 삶의 자취를 비추어 보는 거울이 그것이다. 업경대라고 해서 우리같은 보통사람들은 죽은 뒤에나 확인해 볼 수 있다고 하니까 언감생심 현생에서 이 거울까지 갖자고 욕심낼 수는 없는 일이다. 무의식세계야 우리가 어찌할 수 없을 테고 의식세계인 마음만이라도 점검해 볼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이 또한 적지 않은 욕심이다. 그래서 집과 사무실에 매일매일 얼굴을 비추어 보는 첫 번째 거울 옆에 두 번째 거울을 걸기로 했다. 이제부터라도 정말 좋은 말만 골라서 사용했는지 얼굴 볼 때마다 점검할 것이다. 내 가족들은 물론, 주위에 아프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한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고 희망을 줄 수 있는 말들로 골라서 해야겠다.△ 김 위원장은 리버풀대학교대학원 행정학 석사를 마쳤으며 제주특별자치도 행정부지사,행안부 대변인, 정부청사관리소 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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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7.25 23:02

창조경제는 생산성 혁신으로

요즘 창조경제가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우리경제는 선진국의 원천 기술을 도입하여 이를 개량하고, 저렴한 인건비와 우수한 생산기술을 접목하여 발전해 왔다. 그러나 임금상승과 중국 등 개도국의 빠른 추격으로 이러한 방식으로는 더 이상 국제경쟁력을 가질 수 없게 됐다. 경쟁력 약화로 수출이 부진하고 가계 빚 등에 내수마저 어려워져 지난해부터 2%대의 저성장 기조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한 처방이 창조경제다. 우리 경제를 추격형·모방형에서 선도형·창조형으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창조경제가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정부 각 부처마다 창조경제를 하겠다고 정책을 쏟아내고 있고, 언론계·학계 등에서도 창조경제에 대한 제언이 잇따르고 있지만 주장하는 바는 제 각각이다. 일부에서는 창조경제는 민간의 자유롭고, 창의로운 사고와 활동을 기반으로 하는 만큼, 정부의 직접적인 개입은 최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이 창조경제는 의미하는 바도 다양하고, 해석도 입장에 따라 여러 가지로 이뤄지고 있다.필자는 창조경제가 생산성 혁신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생산성이라는 용어가 우리사회에서 종종 잘못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하여 특근을 한다"는 말은 잘못 사용된 대표적인 사례이다. 생산성이란 제품생산이나 서비스 제공에 있어 투입 대비 얼마만큼의 산출이 이루어졌는지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특근을 하면 생산은 늘어나도 생산성이 높아진다고는 할 수 없다. 생산성 혁신은 생산성이 획기적으로 높아지는 것으로 우리경제가 노동, 자본 등의 생산요소 투입에 비하여 제품 산출이 훨씬 많아지는 경제로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투입 대비 산출이 많아질 수 있을 것인가?. 첫째, 새롭고 획기적인 기술이나 공정, 디자인 등을 적용하는 것이다. 새로운 기술로 부가가치가 높은 신제품을 생산하거나, 공정혁신으로 원가를 절감하는 것, 그리고 매력적인 디자인으로 제품의 가치를 높이는 것 모두가 투입량 이상으로 산출량을 증가시키는 경우다.둘째로 인적자원의 질이 높을 때에 생산성이 높아진다. 교육, 직무훈련 등을 통한 인적자원개발과 함께 조직에서 의욕을 가지고 창조적으로 일할 수 있는 여건조성이 생산성 혁신의 중요한 조건이 된다. 셋째로 기업이나 사회시스템이 효율적이고 공정해야 한다. 기업의 경우 경영자가 리더십을 발휘하여 경영혁신을 이루고, 노동자가 경영성과에 대하여 정당한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하여 의욕과 사기가 높을 때에 생산성이 높아진다. 정부는 합리적이고 예측가능한 규제와 효율적인 자원배분 등으로 기업의 경영활동을 뒷받침해야 한다. 중소기업도 대기업과 정당한 거래관계를 보장받을 때에 의욕을 가지고 기업활동에 전념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시스템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 신뢰이다. 경제주체 간 신뢰관계가 확고히 구축되어야만 사회적 거래비용이 최소화되는 가운데 활발한 경제활동을 기대할 수 있다. 창조경제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지금이 우리경제 각 부문의 생산성 혁신전략을 치밀하게 수립하고, 일관성 있게 실천해 나갈 시점이다.△ 진 회장은 전주고와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했으며 지경부 무역위원회 상임위원 정책기획관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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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7.18 23:02

전북인으로 산다는 것

내 고향은 정읍 칠보다.지금까지 한번도 고향을 잊은적이 없다. 벌써 60년도 더 지난 이야기지만, 칠보초를 다닐 때 가슴에 새겼던 꿈과 희망은 지금도 생생하기만 하다.그때는 지금 우리가 TV에서 보는 최빈국의 모습보다도 훨씬 더 심한 가난이 어린이들의 마음을 훑었다.하지만, 춥고 배고프면서도 가족간에는 깊은 사랑과 정이 있었고, 교정에서 함께 뛰놀던 친구들과는 잊을 수 없는 우정을 나눴다.지난달 28일, 나는 서울에 있었지만 소리없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바로 그날, 내 모교인 칠보초에 '송현섭 도서관'이 건립됐기 때문이다. 고향을 찾을때마다 "도서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을 들으면서 뭔가 후배들에게 기여했으면 하는 생각에서 기꺼이 건립 결심을 해서 결실을 맺었다. 자칫 선배가 얼굴을 내기 위해 그런일을 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개관식에는 일부러 참석하지 않았다.손자뻘되는 후배들이 멋 훗날 지역은 물론, 국가의 큰 인재로 성장해주기를 바라는 마음만은 간절하다. 사실 개인적으로 보면 나는 너무나 많은 복을 받았다. 서울에 있는 유수의 대학을 다닐 수 있었고, 공직을 거쳐 남들이 한번 하기도 힘든 국회의원을 3번이나 지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나를 낳아주신 소중한 어머니와 나를 키워주신 든든한 고향이 있었기 때문이다.국회의원이 돼서 맨 먼저 받은 세비를 어머님께 드리고, 두번째 받은 세비는 모교인 전주고 동창회에 쾌척했던 것도 바로, 나를 있게했던 근본이 무엇인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나름의 노력을 다하고, 고향을 위해 남다른 기여를 했다지만, 더 헌신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350만 재경 전북인들의 모임인 재경전북도민회는 부족한 본인을 두 번씩이나 회장으로 뽑아줬고, 전북인들은 또 과분하게도 첫 명예도지사의 직함을 안겨줬다.이러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고향을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다시금 다져본다.대학시절 이후 나는 줄곧 서울에서 생활했다. 오랫동안 수도권에서 생활하면서 '전북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 수없이 많은 고민을 했다. 전라도 사람이라면 무조건 내려다보는 '전라도 하와이'란 말이 있는 시대상황에서 살아남고, 더 성장하기 위해서 남보다 잠을 줄이고, 땀을 더 흘렸다. 국회의원 시절엔 전북의 자존심을 곧추세우기 위해 목청을 돋우기도 했다.DJ정권때는 사상 첫 여야 정권교체의 주역이라는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하지만 요즘 전북의 위상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미래 성장동력을 마련하기 위해 뭔가 한번 해보려하지만, 중앙무대에서 전북은 항상 뒷전임을 실감하기 때문이다.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던가.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법이다. 지역에서 생활하는 200만 도민과 수도권의 350만 출향인은 그야말로 이와 입술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굳이 각종 통계 수치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오늘날 전북은 왜소하다.그래서 서울에서 전북인으로 산다는 것은 고단한 일이다.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지금 이 순간 우리 전북인들이 하나로 뭉치고, 새로운 사고로 무장해야 하는 이유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이들과 출향인들은 결코 남일 수 없다.부모형제요, 선후배며, 친구들이다.전북도라는 큰 울타리에서 정을 나누며 살자.전북이 더 번창했으면 좋겠다.전북인들이 서울에 있건, 전북에 있건 어깨 좀 쭉펴고 멋지게 사는 풍토를 만들어가자.△송 회장은 전주고, 성균관대를 졸업했으며, 3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현재 초대 명예도지사와 재경전북도민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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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7.04 23:02

카르페디엠, 하쿠나마타타

재작년 12월, 32년에 걸친 공직생활을 마치고 백수생활을 하게 되었다. 마지막 자리가 대통령을 모시며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힘든 자리여서 그랬는지 공직을 그만 두게 되었다는 아쉬움 보다 큰 짐을 덜었다는 홀가분한 마음이 더 컸었다. 그만 둔 다음날은 일어나자마자 배낭을 메고 전철을 타고 나홀로 산행을 갔다. 평일 출근시간이어서 전철 안에는 직장인들과 학생들이 가득하였고 나처럼 등산복 차림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 시간에 등산복 차림으로 나섰다는 게 나는 백수요 라고 알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민망하였다. 다음부터는 조금 늦게 움직였지만 산에 가지 않는 날에는 늦은 아침을 먹고 동네 골프 연습장에 가서 몇 년 동안 손대지 않던 골프채도 휘둘러보고 오후에는 피트니스 센터에서 운동을 하는 게 일과였다. 친구나 지인들이 밥이나 한 끼 하자고 해서 점심, 저녁 약속이 많았다. 이렇게 한 달여를 지내다보니 앞으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공직에 있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대학교수 한 분과 언젠가 시간이 되면 히말라야 트레킹을 같이 가자고 약속을 하였었는데 그 때가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여 해발 4130미터 높이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목적지로 열흘 일정의 트레킹을 가게 되었다.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보고 앞으로의 삶을 구상해보는 성찰의 시간을 갖는다는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길을 떠났다. 열흘간의 일정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식사시간과 중간 중간 휴식시간외에 하루 6,7시간을 계속 걷는 것이었다. 평소 산행으로 단련된 사람에게는 크게 힘든 일정이 아니겠지만 나로서는 수천 개의 돌계단을 오르내리고 해발 3천 미터 이상의 눈길을 오르는 것이 만만치가 않았다. 자기 성찰은 고사하고 이리 힘든 길을 왜 왔나 하는 후회를 하기도 하였다. 숙소에 도착해 저녁식사를 마치면 8시도 안돼서 곯아떨어지기 일쑤였다. 힘든 일정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따뜻한 노천 온천에 몸도 담그고 여유를 찾게 되면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이번 여정에서 답을 얻고 가는가라고. 열흘간 걷고 또 걸으면서 끼니 때 되면 밥 먹고 해 떨어지면 자는 단순한 생활을 해보니 인생이란 게 별개 아닌데, 하루 세끼 밥 먹고 살아가는 것인데 왜 복잡하게 생각하고 미래를 걱정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까지 살아 온 수준에 맞게 품위 있게 살고 체면도 유지해야 하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의식해 가면서 살려니 고민을 하게 되고 걱정이 많아지는 것이 아닌가? 집착과 욕심을 버리면 된다. 물론 그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고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네 인생도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이다. 현재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만족하고 사는 것이 현명한 삶이 아닐까? 두 달간의 짧은 백수생활 후 다시 공직의 길을 걷고 있지만 이때 얻은 교훈은 앞으로도 나의 삶의 지표가 될 것이다. "카르페디엠!" (오늘을 즐겨라 또는 오늘에 충실하라), "하쿠나마타타!" (걱정 하지 마 다 잘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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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6.20 23:02

반딧불로 하나 되는 세상

소백산맥의 덕유산에서 발원한 구리향천이 금강으로 흘러드는 산자수려한 명승의 고장 무주에서 천연기념물 제322호인 반딧불이를 소재로 한 자연 축제이자 2013년 문화체육관광부 최우수축제로 선정된 반딧불 축제가 지난 1일부터 9일까지 개최되었다. 깨끗한 환경보존과 녹색 생명의 존엄성을 전파하고 반딧불이와 함께 농촌을 알차게 체험하며 지역민과 관광객이 함께 어우러지는 추억의 감동축제이기도 했다.연분홍, 연자주 빛을 띠며 무리를 지어 주변을 맴도는 개똥벌레를 잡으러 뛰어다니던 어릴적 생각이 난다. 옛날에는 반딧불이가 개똥처럼 흔하다고 해서 개똥벌레라 불렀다. 밤하늘의 별과 함께 반짝이던 개똥벌레 생각에 밤을 새우며 개똥벌레가 밝히는 빛으로 호롱불 삼아 책을 읽어 보는게 꿈이던 나에게 반딧불이 이야기 "형설지공"을 들려주시든 어른들의 말씀이 생각난다. 개똥처럼 흔하던 반딧불이가 요즘은 청정지역에서만 볼 수 있고 아주 귀한 대접을 받으며 천연기념물 제322호로 지정 받았으니 반딧불이를 지키고 보호하려는 지역주민들의 자부심이 대단하다."자연의 빛, 생명의 빛, 미래의 빛"이라는 주제와 "사랑의 반딧불! 축제의 불을 밝히다" 를 부재로 삼은 이번 축제는 반딧불 빛으로 범지구적 네트워킹 체제를 구축하여 세계를 하나로 결속하고 무주가 구심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의미에서 그 의미가 깊다.반딧불이가 밝히는 불빛으로 그동안 도시화, 산업화로 인해 무분별하게 파헤쳐지고 소외 되어버린 지구환경을 복원, 보존하고자 하는 노력과 몸부림을 하나의 축제로 승화시켰다.특히 환경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형성하고자 마련한 축제라고 한다.반딧불이 신비탐사와 낮에도 반딧불이의 발광 모습을 관찰할 수 있도록 마련한 반딧불이 주제관, 반디워터파크, 불 ·물벼락 페스티벌, 남대천 워터파크, 낙화놀이와 섶 다리 행렬, 남대천 송어 잡이와 뮤지컬 형식의 주제 공연 등이 마련됐다.그리고 반디극장 등 다양한 환경, 문화, 체험, 전시 행사도 진행됐다. 지구환경 보전 및 인류평화에 기여하는 의미에서 맑은 물, 깨끗한 공기, 무공해 청정지역 특성을 살린 환경 축제, 꿈과 고향과 추억 만들기가 피어나는 희망축제가 됐다.또한 재미와 테마가 살아 숨 쉬는 이미지축제, 자연과 함께 얘기하며 살아가는 사랑의 만남축제, 형설지공의 역사성에 바탕을 둔 역사축제, 차별화된 문화+환경+관광+경제의 복합 축제였다.앞으로 있을 후손만대에 복된 세상을 물려주고자 하는 우리들의 생존문제와 직결 되어있는 환경문제를 범지구적 차원으로 한 단계 격상시키고자 출발한 무주반딧불 축제가 이제 새천년 의 빛, 반딧불이! 그 생명의 불빛이 생명의 시대를 앞으로 열어 갈 것이라 의심치 않는다.하늘과 땅, 물이 때 묻지 않은 아름다운 무주의 대자연 품 속에서 반딧불이와 더불어 소중한 추억을 간직하고 반딧불 하나로 하나 되는 세상을 만들고자 마련된 환경의 축제에 내년에도 그 후년에도 온 국민의 온 세계 사람들의 축제의 장이 되길 바란다.풍요롭고 알찬 결실을 거두는 대축제의 한마당이 되어 더욱 발전 될 수 있는 관광전북의 견인차 역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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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6.13 23:02

갑을 문화

대기업 임원이 항공사 승무원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다가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가 하면 식품회사가 대리점에 밀어내기를 강요하고 폭언을 퍼붓다 소비자의 불매운동으로 매출이 급락하는 등 비뚤어진 갑을관계에 대한 사회적인 분노가 고조되고 있다. 사실 비뚤어진 갑을 문화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오래된 병폐지만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경제민주화와 관련해 여론이 더 크게 들끓고 있는 것이다. 갑을이라는 말은 본시 계약서를 작성할 때 쌍방의 이름을 일일이 반복해 적기가 불편해서 이를 간략하게 대체하고자 사용한 것에서 비롯됐다. 계약이란 것이 집이나 물품의 거래를 하거나 공사계약을 하거나간에 쌍방이 필요에 의해서 서로의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어느 일방이 우위에 있고 다른 일방은 열위에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 정상이다. 그래서 합리적인 계약문화가 정착된 서양사회에서는 우리와 같은 약탈적 갑을문화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외국의 기업들은 납품업체가 적정이윤을 확보해 거래관계를 지속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서로 간에 이익이 된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납품업체가 기술적·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할 경우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는 경우도 많이 있다.우리의 잘못된 갑을문화는 비즈니스 관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일상생활에서 자기보다 약자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함부로 대하고 횡포를 부리는 일이 빈번히 일어난다. 최근 대통령의 방미시 성추행 물의를 빚은 전 청와대 대변인 사건도 개인의 품성 탓도 있겠지만 인턴여직원 정도는 막 대해도 된다는 비뚤어진 갑을문화 의식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발생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런 특별한 사건이 아니더라도 보통 사람들도 음식점에서 또는 매장에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애꿎은 종업원에게 행패를 부리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콜센터 상담원이나 114 안내직원들에게 희롱과 폭언을 해 괴롭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인간관계에서는 갑과 을이 언제 어느 때나 고정돼 있는 게 아니다. 직장에서 비정규직으로 을의 입장에 있는 사람도 식당에 가서는 종업원에게 갑으로서 상처를 줄 수 있다. 현대차의 사내하청 근로자도 정규직과 비교하면 스스로를 을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들보다 처우가 열악한 3차·4차 협력업체 직원들과 비교하면 갑의 입장에 있는 것이다. 사용자를 갑으로, 자신들을 을이라 생각하는 정규직 근로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에 맞지 않는다 해 주말특근을 거부함에 따라 또 다른 을인 협력업체 근로자들이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갑이라고 생각하는 공무원들도 사무실에 와서 막무가내로 행패를 부리는 민원인들에게는 을이 될 수밖에 없다. 정치인들도 선거 때가 닥치면 국민들을 갑으로 모시는 시늉을 한다. 비즈니스석을 타는 고객은 우월한 인간이고 승무원은 열등한 인간인가? 그렇지 않다. 인간 자체가 갑과 을로 나눠져 있는 것이 아니고 때와 장소에 따라 서로의 역할이 다를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행동해야 비뚤어진 갑을문화를 바로 잡을 수 있다. 계약서에 갑과 을이라는 표현을 안 쓴다 해서 갑을문화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격이 고매해서가 아니라 내가 을의 입장에 있을 때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기 위해서 갑의 위치에 있을 때 상대방을 배려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 역지사지의 정신이 절실히 필요하다. 물질적으로 잘 살고 못사는 것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서로를 배려하는 따뜻한 인간관계는 우리가 마음먹기에 따라 충분히 가능하다. 우리 고향에서 부터 잘못된 갑을문화를 떨쳐 버리고 이웃과 약자를 배려하는 살 맛 나는 세상을 만드는데 앞장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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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5.23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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