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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탕과 선진 대한민국

언제부터인가 우리 곁에서 사라져 가던 국내산 대구가 근자에 겨울 밥상에 자주 오르곤 한다. 그 비결인 즉슨 수십년간 수천만 마리의 대구 치어를 꾸준히 방류한 덕분이다. 경제도 똑 같은 이치다. 일찌감치 도로, 항만, 통신망과 같은 사회간접자본(SOC)에 과감한 투자가 있었기에 고속성장할 수 있었다. SOC 축적은 국가경제의 기초체력, 즉 국가경제의 뼈대와 혈관을 튼튼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시대적 과제는 선진국 진입이다. 경제는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 그런데 문제는 경제만으로는 선진국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돈만으로 명문집안이 될 수 없듯이 말이다. 명문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존경받을 만한 가풍과 예의범절을 갖추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한 나라가 선진국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경제적 풍요만으로는 부족하고 정신적, 문화적 품격까지 함께 갖추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다. 돈만 있지 정신적 가치체계가 제대로 서있지 않은 나라는 졸부국가일 뿐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의 사회적 자본은 미약한 수준이다. 사회적 자본의 출발점은 법치다. 공동체의 약속인 법을 지켜야 한다는 시민적 규범의식은 여전히 취약하다. 사회적 자본의 보다 고차원적인 형태인 신뢰, 배려, 공감, 관용, 사랑이라는 가치의 측면에서 본다면 더더욱 갈 길이 멀어 보인다. 미국의 한 대법관은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주먹을 휘두를 권리는 타인의 코 앞에서 끝난다고 말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 사회를 들여다 보면 주먹을 마구 휘두르는 바람에 다른 사람의 코피가 터지는 일이 생겨도 아랑곳하지 않는 현상이 곳곳에서 시도때도 없이 일어난다. 천박한 성공지상주의와 탐욕적 이기주의가 횡행하는 세상속에서 더불어 사는 데 필요한 공동체 의식과 미덕은 모두 어디로 숨었는지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부족한 사회적 자본을 어떻게 하면 키울 수 있겠는가. 사회적 자본과 같은 정신적, 문화적 인프라는 하루 아침에 쌓을 수 없다. 오랜 기간 인내를 가지고 지속적인 투자가 관건이다. 수십년간 대구 치어를 쉬지 않고 방류했던 것처럼. 우선적으로 범정부차원의 전략적이고 지속적인 투자가 필수적이다. 현재 법무부에서 운영하고 있는 법사랑 사이버랜드, 솔로몬 로파크와 같이 어렸을 때부터 공동체의 룰을 지키는 시민적 규범의식이 몸에 배게 하는 법교육인프라의 확충이 절실히 필요하다. 하지만, 이 일은 정부의 노력만으로는 될 수 없다. 신뢰, 배려, 공감, 관용, 사랑이라는 가치는 시민 한사람 한사람의 마음에서 스스로 샘솟아야 하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시민을 지켜주고, 시민은 함께 사는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기여한다는 “all for one, one for all”의 성숙한 공동체의식을 우리 모두 회복해야 한다. 그리스에 이런 격언이 있다. 나이 든 노인이 자신의 남은 생애 동안 나무그늘의 혜택을 누릴 수 없음을 알면서도 한 그루의 나무를 정성을 다해 심는 사회가 위대한 사회라는 말이다. 사회적 자본의 축적은 대구치어 방류 이상으로 힘겨운 일일 수 있다. 하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비록 우리 당대에 돌아오는 것은 없더라도 언젠가 선진 대한민국이라는 큰 물고기가 되어 돌아오리라 꿈꾸면서 법치SOC, 안전SOC의 치어를 오늘도, 내일도 이 땅을 떠나는 날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방류해야 하는 것이 우리 세대의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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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2.13 23:02

일과 가정이 양립하는 사회

지난 주는 설 명절로 온 가족이 오랜만에 보게되는 기쁨이 있었다. 가족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고 앞날을 걱정해 주면서 덕담을 나눈다. 가족은 식구라 하여 밥을 같이 먹고 지내는 것을 기본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평소에는 동거하는 가족이라도 식사는 커녕 서로 얼굴조차 보기 힘든 경우도 많다. 저녁 늦게 업무에 지쳐 파김치로 집에 들어가면 소중한 가족간 대화나 행복을 나누는 시간을 갖기 어렵다. OECD 선진국 중에서 우리나라처럼 장시간 근로에 시달리는 나라도 드물다 한다. 지난 2012년은 우리나라 연간 근로시간은 2092시간이었다. 그에 비해 이웃 일본만 해도 1765시간, 특히 유럽은 프랑스 1402시간, 독일 1317시간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녀양육에 대한 열망이 대단히 큰 나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부모역할을 할 시간이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 현실 때문인지 부모 되기를 포기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 10년간 우리나라 합계출산율은 2000년 1.467명에서 2010년 1.226명으로 초저출산 국가(합계출산율 1.3이하)를 면치 못하고 있다. OECD국가 중 최하위 수준이며 OECD 국가 평균은 1.70이다. 심각한 저출산 문제는 기업에서 필요한 젊고 우수한 인력을 확보할 수 없게 하며, 인력수급의 문제로 이어져 지속가능한 사회를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일과 가정생활이 조화롭게 병행 가능한 사회가 된다면 부모들이 아이를 낳는 선택을 늘릴 것이고, 부모들이 출산 육아후 다시 재취업하게 될 수 있다면 충분한 근무경력과 능력을 갖춘 여성이 육아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지 않게 될 것이다. 그 만큼 우수한 인력손실이 줄고, 많은 결원발생을 메우기 위한 신규 인력 채용에 투자해야 하는 비용도 기업입장에서 절감할 수 있게 된다. 일-가정 양립은 일하는 근로자 개인의 문제를 넘어 기업에도 필수적인 것이다. 최근 민간기업의 경우 신세대 직장인들의 요구사항을 반영해 ‘야근 금지령’이 새로운 직장문화 코드로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모 대기업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초과근무 제로’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직원이 야근을 하면 상급자인 팀장에게 보너스나 인사상 불이익을 주는 제도이다. 모 백화점은 야근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도록 저녁 7시 이후엔 직원들의 PC를 작동되지 않게 만든다고 한다.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 불굴의 정신으로 한강의 기적까지 일구어온 우리나라의 장시간 근로관행은 이제는 다시 생각할 때이다. 맞벌이 부부가 많은 현실에서 장시간 근로는 자녀출산을 기피하고 인구감소로 인한 인력수급의 문제 등 심각한 저출산의 재앙이 우려되며, 우리나라의 미래가 걱정되는 것이다. 여성가족부 조사에 따르면 가족친화적 직장문화를 가진 기업들은 창의성과 생산성이 오르고 입사경쟁율도 높아진다고 한다. 임금이 높진 않아도 직장을 떠나지 않고 오히려 타 직장에서 오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우리 전북지역에도 인구감소로 인한 걱정이 많다. 전북에서부터 지역사회운동으로 시작하여 일-가정 양립이 가능한 문화, 저녁을 가족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삶을 만들어 나가면 좋겠다. 그러면 많은 인재들이 전북에 살고 싶어할 수 있고, 가족들도 행복하여 사회문제도 줄고 오히려 창의성과 생산성이 높은 문화가 발달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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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2.06 23:02

내 고장 지역발전의 미래

지금 세계는 지난 일세기 동안을 이어온 경제 질서를 근원적으로 파괴하고 21세기를 이끌어갈 새로운 경제 질서를 모색하고 있다. 기존체제가 붕괴하면 변화의 필요성은 필연적으로 대두한다.이제 우리 전북도 오직 역사적 방법으로 새 시대를 열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미래를 열기 위해 미래 안으로 뛰어든 실존은 불확실한 성패에 대한 결과적 비판의 관람자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고향 발전의 새로운 역사적 도전에 앞서 새로운 경제혁명에 뛰어드는 산고를 치러야 한다. 한 나라 지방자치단체가 발전하는 데는 전기가 있기 마련이고 그 전기를 맞는 지역 지도자들의 의지와 진취성에 따라 지역 발전의 역사가 바뀐다. 우리는 지역발전의 변혁기 중심에 서서 깊이 생각해 보자. 새 시대에 대비하여 지역 경제혁명을 위하여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스스로 찾아 나서야 한다. 그것은 우리들의 권리이며 사명이다. 우리나라 지역 경제는 이제 새 시대에 대비하여 새로운 시작으로 지난날의 우상을 깨뜨리고 부수고 우리의 의지를 새롭게 경제하려는 용광로에 투입해야 한다.변혁의 실체는 창조적 혼란과 창조적 해체를 경험하는 아픔을 통해서만 나타난다. 마치 산고의 아픔을 통해서 새 생명이 태어나는 것처럼.이제 오늘이 있게 된 원년 즉, 1960년대 초의 개발연대로 되돌아가자. 그때 우리는 반만년을 지탱해온 끈기와 저력의 역사와 교육받은 지적자원 외에는 자연자원이 거의 없는 좁은 국토, 밀도 높은 인구, 청산되지 않은 일제의 잔재, 한국전쟁 때문인 폐허, GNP 80달러뿐이었다.이로 말미암아 배고픔, 허무주의, 그리고 폐허가 출렁이던 실낙원 황토밭 한가운데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으로 시작했는지.우리도 잘살아보자는 희망적 공감대, 오직 이 하나를 붙잡고 시작하지 않았던가.꿈과 희망이 없는 사람에게는 내일이 없으며 내일이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만 있다. 믿는 사람은 꿈과 희망을 기다리지 않고 그것을 찾는다.내일을 이겨내는 우리 지역 경제의 명제는 주식회사「한국주의」를 새롭게 다져가는 길이다. 경제주체로서의 지역주민과 공직자 모두가 한국적 자본주의 체제의 공동체로서 임무와 책임을 분담하고 내일의 성숙한 지역 경제를 재정립해야 한다. 지역 경제의 경제발전은 미래를 바라보는 지역 주민들의 기대가 얼마나 긍정적인가 하는 문제에 귀착된다. 경제의 활성화는 바로 미래에 대한 비전과 자신감, 기대감이 성패를 좌우한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려고 하는 경제정책이나 지역 발전의 미래를 얼마나 밝게 보고 경제 활성화를 진작시키는 지역 주민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느냐 따라 성장 동력의 성패 여부가 결정된다.지역 발전은 결국 지역주민의 기대감을 반영한 적극적인 생산 활동이다. 지역주민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우리 지역경제 활성화에 참여하고 경제가 나아질 수 있다는 기대를 하고 있느냐 하는 여부가 성장 동력에 불을 지필 수 있는 기본적인 에너지가 되는 것이다.진정으로 우리나라 지역 주민과 우리 지역을 사랑하는 공감대를 만들어야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무엇을 지금 소유하고 있는가는 의미가 적다. 무엇을 어떻게 남겨줄 것인가가 중요하다. △백영훈 원장은 한국중견기업연합회 정책자문위원장, 한국질서경제학회 명예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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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1.23 23:02

아직도 먼 '집으로 가는 길'

작년 세모에 ‘집으로 가는 길’을 보았다.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에 등장하는 주프랑스대사관의 행태에 분노한다는 몇 분의 권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신파조에 불과하다고 하였고, 다른 분은 대사가 국민 보호를 소홀히 하는 장면이 많아 크게 실망하였다고 하였다. 대사가 국가간의 사건도 아닌데 사건의 추이를 추적하고 있었을 같지는 않았기에 그 아래 영사의 잘못일 것으로 짐작하였다. 여성감독 방은진에 전도연 주연이었다. 어려운 환경에 처한 주부가 유혹에 빠져 남미에서 파리까지 마약을 운반했다가 공항에서 체포되고 카리브해 한 섬의 구치소에서 재판도 못 받고 2년간 수감되었던 얘기였다. ‘국가의 외면에 국민은 절망’이라는 구호하에 수백만이 관람하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영사가 파리 구치소에서 수감자를 면회한 후에는 선진국이라 법대로 잘 처리될 것으로 믿고 잊어버린 사건으로 보였다. 주인공이 마르티니크섬의 구치소로 옮겨진 후, 통역을 구해주지 못한데서 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거기에 교민이 한 명 있었는데 이를 몰랐고, 한국에서 마약운반책이 체포되어 그녀는 마약인지 몰랐었다고 증언한 기록을 마르티니크 법원에 제출토록 우리 대사관에 보냈으나 담당이 서류를 분실함으로써 재판이 1년이나 지연되고 구치소 생활을 1년간 더 했다는 것이다.서류처리 결과를 외교부를 통해 추적했으면 분실했더라도 다시 보낼 수 있었을 것이었다. 당사자들이 불친절한 공무원들을 상대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겠지만 대사관 책임과 함께, 자신의 권리는 스스로 지켜야 된다는 점도 부각하였으면 좋았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대사관의 책임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닐 것이나, 피해자의 불필요한 고통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국가는 범죄자일지라도 인권에 더 관심을 가지고 공무원들의 책임을 더 엄격히 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인권은 국가가 그냥 보호해 주는 것이 아니고 각자가 적극적으로 투쟁하고 쟁취해야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과거 프랑스도 민주화 혁명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피와 반전을 겪었던가. 4.19, 5.18, 6.29를 겪었다고 지금 이 땅에 민주주의가 정착했다고 믿어도 좋을까? 지난 대선에 국가기관들의 개입과 그 수사 과정의 문제점, NLL을 둘러싼 남북정상회담록 공개사건 등이 그 답이 될 것이다. 그런 엄청난 일에 대해서도 우리 사회가 그 힘없는 영사에 대한 만큼의 분노를 느끼고 있는가? 또 엄청난 양의 마약(1억불)을 운반하다 체포된 것인데 대사관의 잘못만 크게 부각시키는 교각살우의 우를 범하지 않았을까? 즉 어려운 환경에서는 어떤 일도 할 수 있고 동정을 받을 수 있다고 오도될 우려이다. 판단력이 부족한 학생 등에게는 조심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사회는 각종 비리나 엄청난 사건도 금방 잊어버리고 처벌도 매우 관대하지 않은가? 중대한 범죄행위에 대해서는 그 결과의 엄중함을 보여주고, 영사의 잘못은 별개의 문제로서 그 비중의 차를 잘 구별하여 더 좋은 영화를 만들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한 입에 배부를 수는 없는 일이니 이 정도라도 정부기관의 잘못을 지적하는 용기를 가진 제작진과 감독에게 질책이나 유감이 아닌 격려를 보내고 싶다. 우리에게 ‘집으로 가는 길’은 아직도 멀기 때문이다. △ 최병효 전 LA총영사는 외교부 본부 대사, 노르웨이 대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우석대 초빙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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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1.16 23:02

새해와 지리산 포수

이 세상에는 세 가지의 귀중한 ‘금’이 있는데, 그것은 ‘황금’ ‘소금’ ‘지금’이라는 글을 읽고 감동한 어떤 사람이 아내에게 문자를 보냈다. “여보 이 세상에 세 가지 귀중한 금이 있는데, 그게 뭔지 맞춰 봐!” 잠시 후 아내에게서 답이 왔다. “현금, 지금, 입금” 잠시 후 남편이 아내에게 답장을 보냈다. “방금, 쪼금, 입금” 신년 시무식에서 직원들과 나눈 인터넷 유머다. 2014년 한해 “지금”, 곧 현재를 황금같이 소중히 여기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하자는 다짐과 함께 한 말이다. 최근 시간을 소재로 한 외국영화를 감명깊게 보았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남자가 주인공이다. 주인공은 후회되거나 지우고 싶은 과거로 되돌아가는 시간여행을 하게 되고, 그 과정을 통해 매 순간 순간 최선의 선택을 해야만 후회없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인생의 진리를 차츰차츰 깨달아 간다는 감동적인 줄거리다. 그렇다. 이 영화가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처럼, 후회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매 순간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한다. 그런데, 어떠한 선택이 과연 “최선의 선택”인가. 그 해답은 결국 무엇이 소중한 것인가라는 가치판단의 문제에 달려 있다. 지리산 포수의 예화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준다. 지리산 포수는 노루 사냥의 달인이었다. 그의 눈에 한번 띈 노루는 이미 죽은 목숨이라 할 만큼 노루 잡는 데 둘째 가라면 서러운 그였다. 오십 평생을 지리산을 누비고 다닌 그였지만, 안타깝게도 바래봉의 황홀한 철쭉, 노고단의 창망한 운해, 천왕봉의 장엄한 일출은 그의 것이 되지 못했다. 평생을 노루 엉덩이만 쫓아 다니다 보니 지리산의 멋진 산천경개를 음미하고 누릴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물론, 노루를 잡아 돈을 버는 일도 중요하다. 하지만, 지리산 자락에 피어 있는 이름 없는 들꽃의 향기에 취해 보고 풀벌레 소리를 벗삼아 밤하늘에 휘영청 떠 있는 보름달을 바라보는 것도 그 못지 않게, 아니 그보다 더 소중한 일일지 모른다. 비교와 경쟁이 맹위를 떨치는 세상에 사는 현대인들은 어찌 보면 지리산 포수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언제나 무엇인가를 성취하는 일에 정신없이 바쁘다. 그러다 보니 매일매일의 삶속에서 만나는, 소박하고 자잘해 보이지만 진정으로 소중한 가치들을 놓치기 십상이다. 시한부 암환자들에게 남은 시간을 어떻게 쓰고 싶냐고 물으면 백이면 백 예외 없이 돈을 더 벌고, 더 크게 출세하는 데 시간을 쓰겠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성취적인 일보다는 가족과 시간 보내기, 친구와 화해하기 등과 같이 관계를 맺은 사람들끼리 사랑을 주고 받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고 싶어 한다. 죽음앞에 인간은 진실해지는 법이다. 시한부 환자에게 남은 시간은 1초도 허투루 쓸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다. 그런 사람들이 한결같이 남은 시간을 성취보다는 사랑에 쓰겠다고 말한다면, 우리네 삶에서 사랑이 성취보다 정말로 더 소중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동안의 삶을 돌이켜 보면 나 역시 지리산 포수의 신세와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부터라도 내 앞에 끊임없이 밀려오는 “지금”의 시간을 가장 소중한 것들에 바치기로 다짐해 본다. 어느 노랫말처럼 저 높이 솟은 산보다는 여기 오름직한 동산같은 삶, 내가 가는 길만이 아닌 동행하는 사람들의 길도 함께 비추는 삶을 살고 싶다. 그러기 위해 나 스스로에게 매일 매일 이런 질문을 던져야겠다. “그대, 오늘이 당신 삶의 마지막 날이라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 △김희관 고검장은 익산출신으로 부산지방검찰청 검사장, 의정부지검 검사장, 법무부 범죄예방정책국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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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1.09 23:02

전북의 미래와 양성평등

최근 반가운 소식이 많았다. 지난 9월 새만금개발청이 출범하고, 국민연금 기금운영본부의 이전과 농업기술실용화재단의 이전 확정, 첨단 소재 분야 글로벌 기업인 일본 도레이사 등의 새만금 투자 등 소식이 있었다. 그리고 그간 전라북도 인구 감소세가 주춤하고, 앞으로 새만금 개발이 제대로 되면 인구 300만이 되는 시대도 얼마남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지역의 특색인 농업은 6차 산업으로 활용 나름에 따라 얼마든지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또한 여의도 면적의 140배(401㎢)에 달하는 광활한 새만금과 청정지역인 동부의 아름다운 관광자원 등을 활용하면 도약의 희망을 가질 수 있다.그런데 그러한 희망은 전북도민 모두가 힘을 합쳐서 역량을 발휘할 때 가능한 일이다. 여성, 청소년, 고령자 할 것 없이 모두가 각자의 개성과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최근 저출산 고령화 시대로 생산가능인구는 줄어들고 있다. 출산율을 올리는 것이 당연히 중요하지만 당장 해결될 사안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그간 출산 육아로 아까운 잠재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부터 늘려야 한다고 본다. 2013년 11월 말 현재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56.2%로서 국민소득이 3∼4만 달러 되는 나라들의 60∼70%에 비하면 아직 크게 부족한 실정이다. 우리 전북 지역에서부터 먼저 인구의 절반인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을 높이기 위한 노력에 앞장섰으면 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여성대통령 시대이다. 최초의 여성 은행장도 탄생했다. 각 분야에서 그간 여성의 진출을 가로막는 유리천장이 서서히 무너지는 것 같다.그런데 우리나라 현실은 어떠한가? “산기슭에는 봄이 왔지만, 산 정상은 아직도 만년설이다” 매년 여성지위와 관련한 성격차지수(GGI)를 발표하는 세계경제포럼(WEF, 2013년 11월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세계 136국 중 111위로 최하위권이다. 2013년 3월말 현재 중앙행정기관 21개의 실국장급 고위공무원과 30개 공기업 중 상임임원에 여성은 1명도 없다. 전북도 관내 지자체의 장이나 부단체장, 실국장급, 관내 기관들의 임원급을 통털어서 아직 여성은 극소수이다.우리 부모들이 애써 공부시켜서 키운 여성인력의 재능이 육아와 가사에만 매몰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보아야 할 때이다. 얼마전 독일에서는 국방장관에 여성을 임용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우리나라도 여성이면 안될 것이라는 선입관으로 주저하고 있지는 않은지, 특히 우리 지역이 앞장서서 양성평등한 인력 활용에 보다 적극 나설 수 있는 방안은 없는지 생각해 볼 때이다. 혁신도시나 산단 주변에 직장어린이집을 만들어 주면 육아에 큰 신경쓰지 않고 일할 수 있는 데 도움될 것이다. 그리고 맞벌이가 많은데, 육아는 형편에 따라 남성도 할 수 있는 육아휴직제가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본다. 금년 6월에는 지자체 선거가 있다. 여성을 부시장· 부지사로 발탁하고, 실국장 등 간부급에 여성을 많이 발탁할 수 있는 선거공약도 나올 법 하다. 그리고 양성 균등한 인재 활용 외에도 각계 민간 전문가의 공직 기용과 중앙부처와 지자체간 폭넓은 인사교류를 통해 다양한 인재를 육성할 필요가 있다. 인력구성의 다양화는 창의적이고 상상력 풍부한 사회를 만드는 데에도 기여할 것이다. 전북의 미래를 위해 다양한 인재의 육성과 활약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라고 본다. △ 심 실장은 행정자치부 인사혁신팀장, 전북도 기획관리실장, 행안부 정책기획관, 지역발전정책국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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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1.02 23:02

다시 쓰는 주례사

어깨위에 세월의 두께가 쌓여 가면서 주변의 지인들로부터 종종 주례를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새 인생을 시작하는 신혼부부 앞에서 모범이 될만한 삶을 살아왔다고 이야기할 자신이 없어 극구 고사를 하지만 불가피한 인연으로 아주 가끔 주례자리에 서게 됩니다. 제가 준비한 주례사라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두고 두고 새길만한 거창한 교훈은 아니고, 두 사람이 살아가면서 잊지 말고 실천해 갔으면 하는 몇가지 당부사항들입니다. 첫째, 신랑은 신부에게, 신부는 신랑에게 존댓말을 쓰고 상대방을 존중해 줄 것을 당부합니다. 지금까지 친구처럼 사귀면서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부터 한마디씩 존댓말로 바꾸십시오. 상대방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키우기 위해서는 평소의 대화에도 품위가 담겨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원래 한 몸이었던 인간의 지혜와 용력을 두려워 한 신들이 인간이 잠든 사이에 두쪽을 내고 뒤섞어서 사방으로 던져 버렸다고 합니다. 따라서, 결혼은 헤어진 나의 반쪽을 찾았음을 확인하는 의식입니다. 잃었던 짝을 찾았어도 상처가 아물어 하나가 되기에는 치료와 적응을 위한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상대방을 소홀하게 대하다 보면 미운 마음도 생기고 자기가 손해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본전 생각도 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자신을 곰곰히 살펴 보십시오. 내 상처는 얼마나 크고 흉측하며, 자신은 얼마나 부족한 사람입니까? 당신과 함께 상처를 치유하고, 당신이 거들어 내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음을 자각하면 저절로 감사하는 마음이 들 것입니다. 나보다 더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 이것이 부부가 항상 지녀야 할 마음가짐입니다.둘째, 두 분은 양가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렇게 소중한 남편과 아내를 길러주신 부모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효도라는 이름으로 부담스러워 하지 말고 부모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찾으십시오.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지 말고 몸짓과 행동으로 실천하십시오.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제가 권하는 것은 자주 뵙고, 이야기를 나누라는 것입니다. 명절이나 생신 때만이 아니라 평소에도 찾아 뵙고, 그럴 여건이 안되면 전화라도 자주 드리십시요. 저의 생모는 제가 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돌아가셨는데 살아계실 때, 좀 더 자주 찾아뵙지 못하고, 전화드리지 못한 게 지금도 마음에 걸립니다. 아울러, 양가 부모님께도 당부 드리겠습니다. 지금 이 식장을 나가는 순간부터 두 사람은 한 가정의 가장이고 어른들입니다. 더 이상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 마시고 둘이서 살아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만 봐 주십시오. 부모님 뜻을 앞세우지 마시고 자식들의 의견을 존중해 주십시오. 양가 부모님께서는 사랑만 주십시오. 혹여 더 주실 것이 있으시면 아무런 대가 바라지 말고 그냥 주십시오. 마지막으로, 한 달에 책 한권씩을 꼭 읽으십시오. 어떤 친구는 한 달에 한권씩만 읽으라고 했다고 꼭 한권씩만 읽겠다고 하던데 한달에 한권은 최소한의 기준이지 더 많이 읽을수록 더 좋다는 사족을 붙입니다. 두 분의 발전을 위해서도 그렇고, 앞으로 갖게 될 2세를 위해서도 이 약속을 꼭 실천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모는 텔레비전보고, 컴퓨터 게임하면서 자식들한테는 공부해라, 책 읽어라하는 것은 부모로서의 권위가 서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자식교육도 성공하지 못하는 사례를 많이 보았습니다. 무슨 책이라도 좋습니다. 고전이면 더욱 좋겠지만 자기계발서나 수필도 좋고, 소설이나 만화책도 좋습니다. 기왕이면 두 분이 번갈아가면서 한 권씩 준비하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이 달부터 당장 실천하라는 뜻으로, 이번 달분은 오늘 주례를 맡은 제가 선물로 이렇게 한권을 준비해 왔습니다.행복은 살아가면서 만나는 시련과 장애 그리고 고통을 극복한 후에 얻는 결실입니다. 인생의 풍랑을 만날 때 흔들리거나 포기하지 말고 상대방 손을 마주 잡고 함께 극복해 가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혼사에 증인으로 동참하신 하객 여러분의 축복속에서 두 분의 세상인연이 끝나는 날까지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 꾸려 가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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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2.12 23:02

50회 무역의 날을 축하하면서

오늘은 제 50회 무역의 날이다. 1964년 11월 30일,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수출 1억 불을 달성한 날을 기념하여 수출의 날을 제정한지 만 50년이 된 것이다. 1990년에 수출과 수입을 균형적으로 발전시킨다는 취지에서 수출의 날을 무역의 날로 변경하였고, 2011년에는 무역 1조 원 돌파를 기념하여 무역의 날을 11월 30일에서 12월 5일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렀다. 우리나라 수출이 걸어온 길은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역사와 다름이 없다. 60년대에 본격적으로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면서 수출을 통해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전략을 채택하였다. 수출의 날에 대대적인 포상을 통하여 수출역군을 격려하고, 수출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높이는 것도 이러한 전략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60년대는 풍부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가발, 의류 등 노동집약적 상품의 수출에 주력하여 수출 1억 불을 돌파한 후 7년만인 1971년에 수출10억 불을 달성하였다. 70년대는 중화학공업 육성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던 시절이었는데 ‘국민소득 1000불, 수출 100억 불’이라는 문구가 다니던 중·고등학교 곳곳에 걸려있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수출을 통한 경제성장에 총력을 쏟았던 결과로 1977년 수출이 100억 불을 돌파했고, 국민소득도 1000불을 넘어섰다. 또 수출 1000억 불을 달성하던 1995년에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도 1만 불을 넘어섰다. 1977년부터 1995년까지 수출이 10배 증가하면서 국민소득도 10대 증가하였던 것이다. 수출 증가가 국민생활 수준 향상과 직결되던 시절이었다. 수출에 좋은 것은 대한민국에 좋은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었던 시기라고 생각된다.그러나 수출이 국민소득과 이어지는 고리는 최근에 들어 크게 약화 되었다.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처음으로 2만 불을 넘어섰던 2007년 수출은 3715억 불이고, 국민소득은 2만1632불이었다. 5년이 지난 2012년, 수출은 5479억 불로 47% 증가했지만 국민소득은 2만2708불로 약 5% 증가에 그쳤다. 즉 수출이 늘어나도 이제는 그만큼 국민생활이 넉넉해지지는 않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초래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중소기업중앙회가 발표한 「2013 중소기업 위상지표」를 보면 시사점을 찾을 수 있다. 먼저 우리나라 총 수출 중 중소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2006년 31.9%에서 2012년 18.7%로 대폭 감소하였다. 거꾸로 말하면 대기업의 수출비중이 68.1%에서 81.3%로 대폭 증가한 것으로 최근의 수출 증가는 전적으로 대기업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반면에 수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제조업의 종사자 수를 보면 대기업 비중이 2006년 24.2%에서 2011년 23.3%로 오히려 비중이 감소하였다. 대기업의 수출비중은 크게 증가하면서도 제조업에서 고용 비중은 오히려 감소한 것은 크게 우려되는 상황이다. 대기업이 수출로 벌어드린 막대한 외화를 고용, 원자재 및 부품 구입, 투자, 세금 납부 등의 채널을 통하여 국민경제에 나누어주어야 국민경제도 같이 성장할 수 있다. 그런데 “국내 10대 그룹의 82개 상장 계열사의 사내 유보금이 지난 6월 말 현재 477조원으로 3년 전보다 43.9% 늘어났다”는 언론보도나, “한국 대기업들의 해외직접투자규모는 2003~2007년 470억 불에서 2008 ~2012년 1050억불로 크게 증가했다”는 언론보도를 보면 우리 대기업은 수출로 돈은 많이 벌고 있으나, 국민경제에 대한 기여는 그리 크지 않다는 비판이 근거 없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또 수출 증가가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느냐는 국민의 냉소적인 시각도 이해가 된다. 무역의 날 50주년을 맞이하여, 이제 앞으로 다가올 50년에 대한 새로운 청사진을 그려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특히 수출이 국민경제 활성화로 이어질 수 있도록 대기업의 투자 및 고용확대, 중소기업의 수출 경쟁력 강화, 대기업의 하청기업에 대한 정당한 대가 지불 등이 이루어져야 하겠다. 그래서 무역의 날이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소기업, 나아가 우리국민 모두가 함께 축하하고 기뻐하는 날이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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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2.05 23:02

자화상

지난 주말엔 불현듯 가을이 다가기 전에 단풍을 꼭 보아야만 할 것 같아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차를 몰고 집을 나섰다. 두 아들은 자기들 세상에 묻혀 바쁘게 살면서 잠만 집에서 자는 처지라 집사람만 동행이다. 전부터 가보고 싶었지만 여태까지 못가본 영동의 민주지산을 목표로 출발한다. 가는 길가에도 단풍처럼 선명하지는 않지만 야트막한 산들을 단장하고 있는 은행나무, 참나무, 회화나무, 이팝나무, 오리나무들의 붉은색, 노란색, 갈색, 자주색, 연분홍색 잎들의 소박한 아름다움이 좋다. 모처럼 둘만의 호젓한 드라이브라서인지 평소 별로 말이 없는 집사람의 수다가 많아 졌다. 가끔씩 보내는 내 맞장구에 집안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주변 지인들의 동정하며, 세상사는 이야기까지 그 스펙트럼이 점점 커진다. 대화의 종착역은 지금 우리가 어디에 와 있으며, 은퇴하면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 것인지에 이르렀다. 가만히 뒤돌아 보니 직장생활을 시작한지 30년이 지났다. 이젠 60을 바라보는 나이에 내가 지금껏 추구해왔던 삶이 무엇이었는지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제대를 앞두고 내무반 벽난로 옆에 누워 내 인생의 대차대조표를 그리며 앞으로 어떻게 내 삶을 꾸겨갈까 고민하던 후부터 삶의 궤적을 반추해 본다. 공정하지 않은 세상에 대한 젊고 순수한 영혼의 분노와 좌절, 혼자서라도 사회정의를 지켜보겠다고 세상을 향해 덤벼들었던 무모한 열정과 만용, 그러다가 한 살씩 더 먹어가며 세상과 타협하고 일상을 합리화해온 자신에 대한 회한과 부끄러움. 이런 상처와 얼룩으로 내 자화상은 형체도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추상화가 되어 버렸다. 갑자기 콧날이 시큰해지면서 눈가가 촉촉해진다. 집사람 눈치 챌까 봐 헛기침을 한다. 내가 그리고 싶었던 그림이 이게 아니었는데…. 이런 참담한 심정을 잘 담았던 박인환님의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진정코 내가 바라던 하늘과 그 계절은/푸르고 맑은 내 가슴을 눈물로 스치고/한 때 청춘과 바꾼 반항도/이젠 서적처럼 불타버렸다(부드러운 목소리로 얘기할 때)나이가 들면 눈물이 많아지는 이유가 신체에 호르몬 변화가 생기기 때문이라고 하던데, 점잖은 한 선배는 사람들이 나이 먹으면서 철이 들기 때문이란다. 보통 사람도 인고의 세월을 보내면서 세상과 공감할 여유와 품격을 갖추어 간단다. 그 때까지 살아오면서 방황, 사랑, 이별 그리고 죽음을 다 경험했기에 인생의 참뜻을 알아서란다. 그래서 눈물은 따뜻한 마음의 표현이니 남 앞에서 눈물 흘리는 것을 너무 부끄러워 말라고 격려한다.그러나, 사무실과 가정의 현실에서 추상을 걷어낸 민낯의 나는, 이해해주고 여유있는 상사와 가장은 아닌 것 같다. 한 세대가 넘게 같은 직장에서 봉직하다 보니 일머리도 제법 알고, 벼슬도 제법 높아졌으니 겉으로는 내말을 귀담아 들어 주는 주변사람들이 많아졌다. 내가 다 경험해본 것 일이라는 생각에 상대방 이야기를 듣기보다는 내말을 앞세우게 된다. 해봐서 아는데 이렇게 저렇게 해라라고 단정적으로 지시하는데 익숙해진다. 그러나 조금 깊이 들여다 보면 내가 안다는 것이 나한테 익숙해진 세상 살아가는 방식일 뿐이다. 물론 이제는 내가 의사결정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대놓고 반대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해서 언제 조직이 발전하고 새로운 제도를 도입할 수 있을 것인가? 아이들에게는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생활하고 공부하며 세상을 살아가길 원하는 독선적인 아빠는 아니던가?그래도 자신을 너무 자학하지는 말 일이다. 적어도 내게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는 알고 이것을 고치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가? 어디를 가나 주인이 되고 하는 일마다 허물이 없는 경지야 임제스님같은 도인의 경지니 언감생심이요, 지금 당장 내가 실천할 수 있는 일부터 하나씩이라도 찾아서 할 일이다. 원효스님은 이렇게 현실에서 왔다갔다하는 중생들의 마음도, 무변 무외의 마음, 절대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고 했으니 이 말씀에서 약간의 위안을 얻는다. 지금부터라도 남은 생은 매일매일 과오를 조금씩 덜어내고 덜 후회하는 날들을 만들어 가자. 내 마음속에 본래적으로 갖추어져 있다는 진여법신을 찾는 공부를 열심히 해 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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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1.14 23:02

수능시험 날의 짧은 생각

오늘은 201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일이다. 65만 명 수험생뿐만 아니라 가족, 친지까지 초조한 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다. 이번에 수능시험 수험생의 아버지로서 처음 경험을 하게 되어서인지 직접 대입예비고사를 보던 37년전 보다 더 긴장되고, 신문지상을 장식하는 수험생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의 모습에 더욱 마음이 끌리게 된다. 수능 점수 1-2점을 올리려고 애쓰는 것을 보면 그것이 아이의 인생에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애처롭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이렇게 수능시험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수학능력 시험의 결과가 수험생의 긴 인생여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수능 결과가 대학입시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고, 좋은 대학을 졸업한 것이 취업이나 그 후 사회생활에서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것이다. 적지 않은 사회생활 경험에서 볼 때에 이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주위사람을 둘러보면 좋은 대학을 나온 것과 인생을 의미 있고,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대학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도 자수성가한 훌륭한 기업인들을 많이 볼 수 있고, 근무성적이나 평판과 출신대학과의 상관관계는 그리 크지 않다는 것도 직장생활 경험에서 잘 알 수 있다. 좋은 직장을 다니기 위해 좋은 대학에 진학하려는 경우가 많은데, 이 보다 고향에서 부모, 친지,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여유 있게 생활하는 것이 훨씬 나은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종종 하게 된다. 크게 보면 우리 사회가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는 삶이 존중되는 방향으로 건전하게 발전하고는 있지만, 아직도 우리가 스펙 중심의 기존의 사고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수능시험의 중요성이 아직은 줄어들지 않는 것 같다.이번 수능에 전북에서는 전국 수험생 65만의 3.3%인 21,640명이 응시하였다. 전북 인구가 전국의 3.7%인 것에 비하면 젊은 층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을 알 수 있다. 경제발전이 정체되어 있는 전북으로서는 우수한 인재 양성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요즘은 학력이 경제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경우가 많아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지난해 전북의 수능시험 성적이 전국 8개 도권역중 상위를 차지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반갑고, 안심이 되었다. 지난 공직생활 중에서 고향 후배들을 적지 않게 만날 수 있었는데 대부분 자질이 우수하고 성실하여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이렇게 우수한 인적자원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제대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직장이 전북에는 많지 않다는 사실이 매우 아쉬운 점이다. 지역의 유능한 인재가 지역대학에 진학하고, 지역대학은 산학협력을 통하여 지역기업의 경쟁력을 높여주고, 지역기업은 지역인재에게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는 선순환체제가 전북지역에 만들어진다면 얼마나 좋을 가 생각해 본다. 이를 위해서는 우수한 제조업체를 전북에 유치하는 것이 선결과제가 될 것이다. 이미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한 우리나라 제조업은 수출을 통하여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하며, 물류, R&D 등 관련 서비스업의 발전도 도모할 수 있다. 특히 제조업의 생산성, 임금수준, 정규직 비율 등이 타산업보다 높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괜찮은 일자리가 제조업분야에서 만들어 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업 유치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제조업 입지로서의 전북의 강점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전략적인 관점에서 타겟 업종과 기업을 선정하여 치밀하고, 일관성있게 추진해 나가야 한다.수학능력시험은 대학입시의 첫 번째 과정이고, 대학입시는 길고 먼 사회생활을 준비하기 위한 첫 걸음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수능결과는 출발점에서의 조그마한 차이이므로 앞으로의 노력과 의지에 의해 얼마든지 극복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동안 시험 준비에 열심히 매진해 온 고향의 후배들에게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며, 격려와 응원을 보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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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1.07 23:02

조금만 양보하면 편안해집니다

낮에는 한여름처럼 햇볕이 따갑던 주말에 직장산악회 동료들과 강원도 방태산줄기에 있는 아침가리골에 다녀왔다. 부부가 동행하는 원정산행을 나보다 집사람이 더 즐거워한다. 아침 6시 50분 집결지에 모여서 버스를 타고 7시 정각에 출발했다. 이른 시간인데도 많은 차량들로 경춘고속도로는 가다서다가 반복되었지만 마음은 느긋하다. 홍천에서 고속도로를 빠져나가니 정체도 풀리고 한가로운 산길에서 편안한 드라이브다. 북위 38도 경계를 지나 구비길을 한참 돌아서 11시 10분경에 인제군 기린면 방동리 산행기점에 도착했다. 가볍게 몸을 풀고, 방동약수터에 들러 유명한 탄산약수 한 모금을 마시고 산행을 시작했다. 쭉쭉 뻗은 소나무, 전나무와 함께 잘 가꾸어진 자작나무 숲도 참 좋다. 억새풀과 들국화 위로 하늘거리는 고추잠자리의 고운 날개 짓은 가을이 깊어졌음을 알리는 전령사다.약 한시간 정도 걸어 계곡트레킹 기점인 고경동교에 도착하니 총무가 간단하게 요기를 하잰다. 날씨가 화창한 덕분에 모두들 그늘을 찾는데 다리 밑이 제일 좋단다. 편편한 곳은 먼저 도착한 다른 팀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 건너편 물가로 건너려는데 가게 앞에 자리가 났다고 부른다. 다리 밑을 되돌아가니 길위에도 이미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좁은 틈을 비집고 지나가는 게 미안한 마음에 "죄송하지만 조금 지나가겠습니다" 했더니만, 나이 좀 드신 분이 "물쪽으로 돌아가면 될텐대 굳이 이리 지나 간다."면서 언찮은 표정을 짓는다. 다시한번 미안하다고 했지만 조금 아쉬운 생각이 든다. 다리밑에 있는 길도 행인들 통행이 우선이어야 할진대, 그늘을 차지하려고 길을 막고 앉아 있는 사람들이 더 미안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생각끄트머리에 큰 도로에서도 양보하면서 작은 샛길조차 선뜻 양보 못하는 내가 갑자기 부끄러워진다.필자는 자동차 운전을 영국에서 시작했다. 운전면허는 국내에서 취득했지만 장롱면허로 유지하다가 유학가서야 처음으로 자동차를 구입했다. 운전한 경험도 없었고 또 우리와는 반대방향으로 운전하는 영국시스템에 적응도 해야겠기에 비싼 수강료를 내고 도로연수를 받았다. 안전벨트를 먼저 매고 시동을 걸고, 핸들은 반드시 두 손으로 잡으며, 차선을 바꿀 때는 방향표지 신호를 먼저 넣고, 정차시 기어는 중립으로 변속하라는 등등 이론과 실습을 거친 후에 드디어 혼자 차를 몰고 도로에 나섰다. 우리의 초보운전에 해당하는 L(Leaner driver)자 표지를 앞뒤범퍼에 붙이고 배운 대로 한다지만 운전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차는 물론이고 골목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자전거며 행인들도 공포의 대상이다. 그러나 조금 익숙해지니까 처음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방향을 바꿀 땐 바꾸는 방향을 손으로 표시해 준다. 행인들이야 교차로와 상관없이 도로를 가로 질러 다니니까 자동차 전용도로가 아닌 시내길은 저속으로 가면 된다. 서행한다고 재촉하지 않으니까 속도에 신경쓸 일 없다. 미숙한 운전으로 좌우회전 타이밍을 놓쳐 도로에서 전진 후진을 거듭해도 뒤에서는 기다려 주었고, 골목에서 차머리를 내밀고 있으면 오히려 큰 길에 지나가는 차가 양보신호를 보낸다. 이렇게 시작한 4년간의 영국운전경험은 초보운전자 시절의 긴장을 제외하고는 편안했다.서울에 와서 가장 당혹스러웠던 것은 노상이나 주차장에서 차를 빼기 위해 후진할 때, 지나가던 차가 경적을 울려대는 경우다. 주택가나 주차장내에서는 서행 운전해야 할 텐데 기다려 주기는커녕 경고음을 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침 바쁜 시간에 몇 십초 양보하는 것도 쉽지는 않겠지만 기다려주지 않는 것이 꼭 바빠서 만은 아닌 것 같다. 내 앞길에서 걸리적거리지 말라는 마초심리의 발로는 아닐까? 도로가 합류하는 지점에서 교대로 한 대씩 진행하고 있는 데 갑자기 차머리를 들이밀 때도 황당하다. 화가 나서 끝까지 비켜주지 않았고 접촉사고의 위험을 무릅쓰고 정의를 지키려고 애를 썼다. 어느날, 분을 삭이지 못해 씩씩거리는 나를 쳐다보던 집사람이 "상대방 잘못만 탓하지 말고 당신이 양보하면 안되나요." 한다. 부끄럽지만 수양이 부족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때부터 여건이 허락하는 한 양보했더니만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때로는 뒷차로부터 빵빵거리는 질책을 듣기도 하고 드물게는 종주먹 세례도 받지만 양보한 날은 기분이 좋다. 비상등을 켜거나 손을 들어서 고맙다는 의사표시를 해도 좋고, 그냥 지나가도 마음은 여유로워 진다. 내 작은 배려가 상대방에게 전달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날은 의미있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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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0.17 23:02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다녀와서

지난달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방문했다. 아시아생산성기구(APO)가 지원하는 회원국간 교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생산성진흥기관을 방문해 우리나라와의 협력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방문 목적이었다. 양 국가를 처음 방문하는 기회였기에 여러 가지로 흥미로웠는데 특히 현재의 경제상황과 전망에 대해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다.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경제는 여러 가지 지표로 볼 때에 우리나라의 70년대 후반, 80년대 초반수준인 것으로 보인다. 가령 1인당 GNP는 베트남이 2012년 약 1500달러, 캄보디아가 900달러 정도인데, 우리나라는 1인당 GDP가 1977년에 1000달러를, 1983년에 2000달러를 넘어선 바 있다. 양 국가 모두 70년대 우리나라처럼 저렴한 인건비를 바탕으로 수출을 늘려 나가면서 경제성장을 적극 추진해 2000년대 7%가 넘는 고도성장을 기록했다. 캄보디아는 최근에도 7%대의 높은 경제성장을 지속하고 있는 반면 베트남의 경우 장기간 고도성장의 후유증과 세계경기침체의 영향으로 경제성장률이 5%대로 조정을 보이고 있다. 산업구조 면에서도 캄보디아는 아직도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70%에 이르고 제조업도 식품가공업과 섬유산업이 대종을 이루고 있는 반면, 베트남은 수출을 중심으로 제조업이 빨리 성장하면서 경공업을 넘어 중화학공업까지 진출하고 있었다.그러면 이들 국가의 경제전망은 어떠할 것인가? 현지에서 만나본 사람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성장잠재력은 상당히 크나, 장애요인도 만만치는 않다는 것이다. 첫 번째로 드는 장점은 낮은 인건비다. 급격한 임금상승으로 중국의 1인당 소득이 5000불을 넘고, 인도네시아도 3000불을 넘는 상황에서 베트남과 캄보디아는 노동생산성면에서 확실히 경쟁력이 있다는 것이다. 현지에서도 중국 인건비의 큰 폭 상승으로 중국을 떠나 베트남이나 캄보디아로 진출한 기업을 볼 수 있었다. 최근 두 나라의 임금도 가파르게 상승하고는 있지만 대체할 국가를 찾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미얀마 정도가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으나, 인프라나 각종 제도 면에서 아직 이들 국가보다 더 매력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둘째는 내수시장의 잠재력이다. 캄보디아는 인구가 1500만 명에 불과하나, 베트남은 9000만 명이 넘는다. 더구나 월남전 종전 이후 태어난 젊은 세대의 비중이 매우 높다. 이들이 노동시장에 진입하면서 생산뿐만 아니라 소비의 주체로 발전할 여지가 크다. 마지막으로는 베트남의 교육열이다. 베트남의 경우 전통적으로 유교의 영향이 있어서 그런지 교육열이 대단해 우리나라와 같이 교육이 가계소득 중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작년에는 수도 하노이의 명문 초등학교에서 입학원서를 얻으려고 학부모들이 한꺼번에 몰려 학교의 철제 정문이 넘어지는 등 큰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이러한 밝은 면이 있는 반면 경제성장을 저해하는 요인도 한두가지가 아니다. 첫째는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이다. 베트남이나 캄보디아 공무원들은 봉급은 아주 작은데 비해 생활수준은 상대적으로 높다고 한다. 이번 현지 방문에서 공무원들이 외제차를 모는 것을 적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내가 만난 한국기업의 대표도 현지 경영에서 대표적인 애로사항이 관련 공무원들을 접대하는 것이라고 불평하고 있었다. 공직이 부패하면 공익보다 사익이 앞서게 돼 건전한 경제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둘째 문제점은 부정부패와도 밀접히 연관되는 점점 커져가는 빈부격차이다. 그동안의 경제성장으로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세계은행에서 규정하는 1일 1.25달러를 벌지 못하는 극빈층의 비중이 두 나라 모두 15%를 훌쩍 넘고 있다. 반면에 부동산 가격상승 등으로 신흥부자 들이 양산되고 있다. 빈부격차의 확대는 근로 의욕을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사회불안요소가 돼 경제발전에는 큰 장애요인이 되는 것이다. 이번 방문을 통해 국가경제가 발전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사회지도층의 의지와 솔선수범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누구나 노력하면 땀 흘리는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는 경제시스템이 구축돼야만 국민의 경제하려는 의지를 모을 수 있고, 지속가능한 경제발전도 가능하지 않나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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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0.10 23:02

효도하는 사람과 불효하는 사람

민족의 명절 추석이 지났다. 아직도 추석을 맞아 고향을 찾고, 부모 친척을 찾는 이들이 많다. 인심이 각박해지고, 자신 밖에 모르는 세상이라고 한다. 귀향행렬이 줄지 않는 걸 보면, 우리나라는 공동체정신이 살아있는, 아직은 살만한 나라인 것 같다. 추석이면 제일 생각나는 분이 어머니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제대로 효도하지 못했다는 자괴심이 언제나 가슴에 사무친다. 나름 할만큼 했다는 생각도 하지만, 어머니가 내게 베풀어주신 사랑에 비하면 내가 한 게 얼마나 될까? 9남매를 키우셨던 어머니는 내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 어렸을 때 집이 가난해서 거의 구걸하다시피 살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남에게 베풀고 살라는 큰 가르침을 주셨다. 어머니는 매년 쌀 100가마를 동네에 내놓으셨다. 한번도 빠트리지 않으셨다. 동네 사람들은 어머니가 빨리 돌아가시면 안된다고 했다고 한다. 돌아가시면 그 쌀이 없어질 것같아서였다고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동네사람들은 모두 나와 상여를 매고 만장을 드는 등 따뜻하게 어머니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배웅했다. 은혜 갚겠다고 나서주었다.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내가 죽더라도 쌀 100가마 주는 것을 그치지 말라"고 유언 하셨다. 내가 그 유언을 지키고 있다. 죽을 때까지 그 유언을 지킬 생각이다. 내가 죽으면, 내 자식들이 그 유언을 지킬 것이다.사람은 경제적으로 잘 살 수도 있고, 못 살 수도 있다. 물질본위의 자본주의사회에서 남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군들 자기 노력으로 벌어놓은 게 아깝지 않으랴. 누군가 말했다. "돈 있다고 누구나 베푸는 건 아니다"라고. 베푸는 것을 감히 '예술'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머니 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구니오 나카무라, 태평양의 작은 섬나라 팔라우의 대통령이다. 1996년 중반 팔라우에 갔을 때 만났다. 대화중 어머니가 95세라고 얘기하니, 그가 놀라서 "우리는 70 밖에 못사는데, 95세에도 살아계신다고요? 한번 뵙고 싶다"고 했다.1997년 6월 내가 작사하고 노래 부른 '오래오래 살아주세요' 노래비 제막식 때 그를 초청했다. 처음에는 참석하겠다고 했는데, 갑자기 못오겠다는 연락이 왔다. 15일 제막식에 참석하려면, 13일에는 비행기를 타야 되는데, 하필 그날은 '13일의 금요일', 움직여서는 안되는 불길한 날이었다. 못오겠구나 했는데, 15일 아침 7시에 도착하면 되겠느냐는 연락이 14일에 왔다. 그는 15일 아침에 도착해서 정부가 내준 방탄리무진으로 2시간만에 정읍에 도착했다. 12시의 제막식에 참석해서 나와 함께 테이프를 끊었다. 덕분에 제막식은 더욱 성대하게 끝났다. 작은 나라라고는 해도 쉽게 몸을 뺄 수 있는 위치가 아니기에 그런 정성을 보여준 것이 정말 고마웠다.나이 들수록 어려진다고 했던가? 추석 같은 명절이 오면 어머니가 더욱 그립다. 내가 다못한 효도를 다른 사람들은 꼭 했으면 하는 생각이 절실해진다. 부모에 효도하는 사람은 남에게 악한 일을 하지 않고, 부모에게 불효하는 사람은 남에게 선한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게 내 믿음이다. '효',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살만한 사회를 만드는데 필요한 마음가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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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9.26 23:02

추석단상

1주일 후면 추석연휴가 시작된다. 매년 어김없이 추석은 찾아오건만 세월이 흐르면서 추석의 의미도 시간의 무게와 함께 달라짐을 느끼게 된다. 나의 기억에 아른거리는 먼 어릴 적 추석의 모습은 새 옷, 새 신발에서 시작된다. 어머니는 일년에 두 번, 추석과 설날에 새 옷을 사주셨다. 추석 전날쯤 전주 남부시장에서 사 오시는 보따리에는 우리 4남매의 옷과 신발이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아이들 옷을 입혀 보면서 미소 짓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옷 선물을 받던 우리보다 더 흐뭇해하시던 마음을 지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추석에 차례를 지내고, 송편과 평소 먹지 보지 못했던 음식에 즐거워했던 기억도 새롭지만, 추석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새 옷에 대한 기대였던 것이다. 너무나 쉽게 새 옷을 사는 요즈음 아이들은 추석 때 무엇에 가슴 설레일까 궁금하기도 하다. 또 하나 어린 시절 추석을 생각할 때에 빠지지 않는 것이 영화관이다. 성묘에 빠지고 어떻게 해서든지 영화를 보러 가려고 이리 저리 궁리했던 것이 기억에 생생하다. 새 옷과 영화, 이 두 가지가 어릴 적 추석을 돌아볼 때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인 것이다. 또한 추석 둥근 보름달을 보고 남몰래 소망을 빌었던 모습도 잊혀지지 않는다. 아마도 중학교 때일 것이다. 중학교까지는 무시험으로 진학하고 고등학교부터 입학시험을 보는 시절이었으니까. "추석 보름달을 보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덧없는 말에 의지하여 추석날 늦은 밤에 혼자 나와 달을 보고 많은 이야기를 했었는데,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아도 그때의 간절함만은 지금도 느껴진다. 대학 시절부터 추석의 모습이 서서히 변화되었던 것 같다. 생활의 근거지는 서울이지만 거의 대부분의 추석은 부모님이 계신 전주에서 보내게 됨에 따라 추석은 쉽지 않은 명절이 되었다. 기차표나 고속버스 승차권을 구하기 위하여 밤새워 기다리기도 했고, 승용차로 10시간 넘게 운전하여 집에 오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전주집에 머무르는 시간보다 오고 가면서 운전하는 시간이 많았던 적도 적지 않았다. 특히 결혼 후에는 추석때 집에 가는 문제로 아내와 갈등을 일으킨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몸이 약한 아내는 추석때 전주를 다녀오면 몇일을 끙끙 앓는 것을 알고 있지만, 추석 귀향을 미룰 수는 없었다. 이렇게 추석이면 으레 집으로 향하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부모님과 추석을 같이 보내고, 성묘를 해야 한다는 의식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 물론 가장 큰 이유일 것이지만, 힘든 타향생활을 벗어나 고향의 품에서 위안을 받고자 하는 바람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좋은 친구들, 다정한 친척들, 어려서부터 알고 지내 익숙한 이웃 등 이해관계에 억매이지 않는 편한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세상사에 피곤해진 심신을 달래보고 싶었던 것이다. 나이를 먹고, 세월이 흐르면서 이러한 추석의 의미도 점차 흐려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친척 어른분 들은 돌아가셔 안 계시고, 전주에 부모님이 살고 있지 않은 친구들은 추석이 되도 전주에 오지 않는다. 따뜻한 정을 같이 나눌 사람이 하나 둘 사라지니 전주에 와도 옛날 같은 고향의 내음을 맡기 쉽지 않다. 내가 간직해왔던 소중한 것이 사라져 가는 것 같은 허전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추석 귀향이 없었다면 이제까지의 타향에서의 30년 넘는 삶이 얼마나 삭막했을까를 생각해 본다. 그래서 옛날의 정겨웠던 추석 귀향을 다시 찾고 싶다. 그러려면 내가 먼저 정성을 쏟아야 한다. 어머니 안 계신 추석을 처음 맞이하시는 아버지의 쓸쓸함을 달래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 또 그 동안 못 보았던 친구, 친척을 찾아보아야겠다. 가능하면 내가 어릴 적 살던 추억이 깃든 곳도 천천히 걸어보겠다. 내 삶의 밑바탕이 되어준 고향의 따뜻함을 느끼면서 종반부로 들어선 인생의 다음 설계를 해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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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9.12 23:02

문화융성시대와 무주 태권도원

한국 사회에서 '문화산업'이라는 의제가 시대정신으로 거론된 지도 10년이 넘었다. 21세기 전후 김대중 정부의 막대한 지원으로 문화는 이제 예술을 넘어 산업의 영역으로 확장됐다. 이후 역대 정부도 문화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다각적인 정책을 벌여왔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태권도 진흥 사업이다. 오늘날 태권도는 단순히 체육 종목 중 하나가 아닌, 한반도 반만년 역사의 무술 혼을 상징하는 기호로 통한다. 더욱이 한국의 대표 문화브랜드로 자리매김하며 '강남 스타일' 이전의 원조 한류로 재조명되고 있다. 70년대 아그레망 없는 외교사절로 활약했던 태권도 사범들의 역사는 이제 고전이 됐다. 과거 국가대표 사격선수로 활동하며 외국을 방문했을 때에도 이국인들이 태권도를 통해 한국을 알아보았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내세울 게 없던 가난했던 그 시절, 한국인의 자부심을 세워준 것은 바로 '태권도'였다.그리고 지난 7월 '태권도원'이 완공됐다. 2009년 9월 4일 '태권도의 날'에 전라북도 무주군의 광활한 대지에서 첫 삽을 뜬지 5년 만이다. 세계에 유례없는 대규모 태권도 전문 시설의 탄생이 있기까지 많은 이들의 땀방울이 모였다. 태권도원 건립·운영사업의 주체인 태권도진흥재단은 올 하반기 시범운영을 거쳐 2014년 3월 개원을 향해 막바지 힘을 쏟고 있다.태권도원의 부지면적은 231만 4천 제곱미터(m²)로 여의도 면적의 1/3에 이른다. 백두대간을 연상케 하는 기다란 조성 공간은 체험과 수련, 상징 등 3개 구역으로 나뉜다. 체험과 수련 공간에는 세계 유일의 태권도 전용 경기장과 박물관 외에도, 최첨단 과학기술을 적용한 태권도 체험관과 연수시설 등이 들어선다. 태권도 원로들을 기리는 상징 공간은 아직 용의 눈으로 남아있다. 이곳의 핵심시설인 태권전과 명인관이 기부금으로 조성되는 까닭이다. 그 동안 국내·외 많은 태권도인들의 정성을 모아 왔지만 두 시설을 완성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지난 4월 태권도원을 직접 방문했을 때에도 그 부분이 안타까웠다. 상징지구는 태권도원의 시작과 끝이다. 태권도 역사의 무게와 미래의 영광이 공존하는 곳이다. 상징지구 조성에 차질이 없도록 다각도의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태권도원을 채울 콘텐츠의 역할도 중요하다. 태권도원에서 선보일 운영 프로그램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태권도 전공자를 위한 전문 프로그램과 비전공자를 위한 일반 프로그램이다. 특히 태권도 전문 수련생을 대상으로 한 세계태권도아카데미(World Taekwondo Academy, WTA)는 국기원이 맡아 전문성을 책임진다. 태권도 수련생은 태권팝스(태권체력측정평가)와 폭포 수련, 고단자·국가대표 선수와의 만남 등 다양한 심신 수양 교육을 받을 수 있다. 일반인들도 태권도 수련·체험은 물론 이를 접목한 문화·치유 프로그램 등을 선택해 즐길 수 있다. 박근혜 정부는 지난 달 문화융성위원회를 출범시켰다. 태권도원은 문화융성사업을 중시하는 새 정부의 국정기조와 통하는 중요한 사업이다. 태권도원이 새로운 태권도 문화 창출의 장이 될 가능성도 여기에 있다. 개원 후 태권도원이 태권도 문화 콘텐츠 개발의 허브가 되어 태권도인 뿐만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태권도 문화를 전파하는데 기여하길 바란다. 이를 위해선 전 세계 태권도인의 관심과 참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전북도민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 예부터 전라도에는 나라를 지키려는 의로운 투쟁이 많았다. 무주에 태권도원이 들어서게 된 역사적 배경에도 조선시대 호국 승려의 얼이 깃든 '안국사'와 '설천면 전설'이 있다. 이제는 종주국의 자부심을 지켜줄 '태권도원'에 앞으로도 많은 애정을 부탁드리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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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9.05 23:02

추석, 감이 주렁주렁 달린 고향길을 걷노라면…

나이가 들면 생각이 많아진다는 어른들의 얘기를 젊은 시절에 들었다. 처음엔 그 말의 의미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한창 일 하는 나이 때에 고민도 많고 생각이 많지, 은퇴한 나이에 무슨 하실 일이 있다고 생각이 많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혹시 잠이 없으시다보니 가진 게 시간 밖에 없어 괜히 이런저런 생각을 하시는 게 아닌가 하는 시건방진 진단을 내리기도 했다.이제 내가 그런 나이가 됐다. 생각이 많아졌다는 걸 느낀다. 할 일은 없는데, 시간이 많아져서 생각이 많아진 걸까? 그 건 아니다. 살아온 세월의 축적을 반추하면서 눈 앞의 일을 바라보면 생각이 많아질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모든 언행은 살아온 인생의 총화(總和)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이 든 사람들의 언행은 대개 그 사람의 인생궤적과 일치한다. 나이가 들면서 고향에 대한 애착이 예전보다 더 커졌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요즘은 고향에 가도 내가 거의 최고령층에 속한다. 인생이 이렇게 흘러가는가 하는 생각과 함께 고향을 위해, 또 나라를 위해 내가 할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간 고향을 위해 나름대로 작은 일들을 해왔다고 생각한다. 이름을 남긴다거나, 사람들이 나를 기억했으면 하는 생각에서 한 건 아니다. 고향을 다니면서, 고향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게 뭘까를 생각하고 작은 실천을 했을 뿐이다. 남들보다 조금의 성취가 더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에, 받은 만큼이라도 돌려줘야 될 의무도 있다.특히 변변한 자원도, 뒷배경도 없는 고향 전북을 위하는 일이 뭘까를 고민하는 시간도 길어졌다. 전북의 미래는 사람 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재경전라북도민회장 취임 후 제일 먼저 한 일이 도민회 장학금 대폭 확충이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나도 작은 기여를 했지만, 여러 향우들의 협조가 정말 고마웠다. 그 분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장학금 혜택이 비약적으로 늘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또 5년 전부터 고향 마을과 이웃 마을에 가구당 1주씩 감나무를 심어 드렸습니다. 작은 나무가 자라 감이 열리면, 적지만 소득도 가능하고 고향을 찾는 후손들이 작은 추억이라도 만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감나무를 선택한 것은 기르기 쉽고, 소출이 있다는 점 외에도 임실과 우리 동네가 감이 잘 된다는 조사 덕분이다. 또 태인-칠보-산외까지의 10km 국도변에도 감나무를 가로수로 심었다. 처음에 큰 나무를 심었는데, 활착률이 나빠 2011년부터는 어린 묘목을 심었다. 50% 정도만 제대로 커도 큰 수확이 아닐 수 없다. 곧 추석이다. 많은 향우들이 고향을 찾을 것이다. 사랑하는 부모형제들과 친척 친구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낼 것이다. 내 경우, 고향에 가도 반갑게 맞아주던 친구들 보기도 힘들다. 같이 뛰놀던 친구들 대부분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이제는 여린 가지를 꿋꿋하게 내민 감나무들이 나를 반겨준다.우거진 감나무 사이로, 또 감이 주렁주렁 매달린 고향길을 걷는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그 감나무들이 거목으로 자라나 고향의 상징이 되고, 그 나무 밑을 넉넉한 마음으로 걸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더 흐뭇해진다. 그렇게 클 때까지 잘 키우고 싶다. 도민과 향우들이 모두 나서서 고향집, 고향길에 나무 한그루씩 심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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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8.29 23:02

예를 갖춘 리더인가?

얼마전 모일간지에 게재된 탤런트 최수종씨의 인터뷰기사를 읽고 적지 않은 감동을 받았다. 부인인 하희라씨는 물론이고, 14살, 13살짜리 두 아이에게도 존댓말을 사용하고 이름도 민서씨, 윤서씨라고 부른다고 한다. 또, 아이들에게 "공부해라, 이것해라."라고 강요하지 않고 뭐든지 아이들하고 상의를 해서 결정한단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부인과 어린 자녀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한 사람의 인격체로 인정한다는 것은 일상에서 말과 행동을 참으로 조신하게 한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세상살이라는 것이 사람과 관계를 맺고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일진대 살아오면서 내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자문화권에서 인간이해의 핵심은 인(仁)이다. 인의 개념이 어질고, 연민하며, 수양하고, 너그러운 마음등을 포괄하는 의미로 확장되었지만 본래 뜻은 두 사람이다. 즉, 사람 인(人) 둘 이(二) 모였으니 관계가 형성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공자님은 인간관계를 다양한 방법으로 설명하지만, 그 중 으뜸은 자기가 하기 싫은 것은 남에게도 시키지 말라는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慾 勿施於人)'이다. 상대방이 싫어하는 일을 시킬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겠지만, 적어도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자는 얘기다. 얼마전 IMF등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우리사회 도덕윤리의 기둥인 예(禮)의 본질을 수직적 상하관계로만 파악하고, 왕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 선생님과 학생으로 나눠 규율하는 명령과 복종의 굴레를 없애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이 크게 주목받은 적이 있다. 예라는 형식의 껍데기를 벗어 던지고 인간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겸손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커피나 진통제 같은 순간적인 위로와 아름다운 말만으로 우리의 아픔과 상처를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는 없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문제의 본질에 가까이 다가서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사회의 속성을 인정하고 사태를 객관적으로 보자는 것이다. 우리보다 이 문제를 앞서 고민했던 선각자들의 성찰은 인간사회에서 제기되는 문제의 핵심을 '나'라고 파악했다.'너 자신을 알라'고 했고,'모든 만물은 너로 인해 존재한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했으며, '개인적 삶에 충실한 연후에야 훌륭한 정치인이 될 수 있다고도 했다.공직자로서의 첫 보직이 구청 민방위과장이었다. 24명의 직원들 가운데 여직원만 한 살 아래고 나머지는 모두 연장자였다. 리더십이론을 열심히 공부했지만 현장에서 활용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물론, 공직생활을 시작하면서 관리자로서 나름의 생활철학을 마련했다. 첫째, 직원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목표와 비전을 제시할 것. 둘째, 직원들에게 존댓말을 쓰고 의견을 끝까지 들어 줄 것. 셋째, 솔직하고 공부하는 공무원이 될 것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소박한 잣대로 재단하기엔 세상이 그렇게 녹녹치 않았고 하루해가 지면 오늘도 무사했구나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하루는 동향선배 한분이 '모르는 것을 아랫사람한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아라'라는 공자님말씀을 인용해서 조언해 주셨다. 이때부터 모르는 것은 완전히 이해될 때까지 물었다. 공자님은 '군주는 신하를 예를 갖추어 부리고 신하는 군주를 충성으로 섬긴다는 군사신이예신사군이충(君使臣以禮臣事君以忠)' 라고 했다. 아랫사람으로부터 마음에서 우러나는 충성을 기대하기 위해서는 왕이 먼저 예를 갖추어서 신하를 부려야 한다는 말이다. 내가 아랫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할지 이 구절에 비추어 다시 자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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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8.22 23:02

현명한 기후변화 대응법

길게 만 느껴졌던 중부지방 장마가 끝나자 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장마가 짧았던 남부지방은 무더위가 더욱 기승을 부리는 것 같다. 지난 주말에 전주에 갔었는데 말 그대로 찜통 더위였다. 기온이 37도를 넘었다고 하니 과거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더위인 것이다. 저녁에는 앞마당 평상에 모여 수박을 먹고, 누워서 시원한 바람에 몸을 맡겼던 어릴 적 여름이 그리워진다. 이제 우리는 기후변화의 한 복판에서 살고 있다. 남의 일처럼 여겼던 지구온난화 문제가 이제 생활 깊숙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지구촌 전체가 가뭄과 홍수, 이상 고온 등 기상 이변으로 신음을 앓고 있고, 빙하가 녹으면서 해수면이 올라가고 있어 앞으로 또 무슨 일이 있을지 전전긍긍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면 기후변화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까? 지구 온난화를 방지하려면 대기 속의 이산화탄소를 줄이면 되는데 그것이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다. 이산화탄소는 화석연료를 연소할 때에 주로 배출되는데 석유, 석탄과 같은 화석연료는 인류의 대표적인 에너지원이고, 특히 우리나라는 대부분의 에너지를 화석연료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이산화탄소를 줄이려면 에너지 소비를 줄여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냉난방 같은 생활 속의 에너지보다는 산업계에서 사용하는 에너지가 월등히 많다. 즉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이려면 산업생산이 줄고, 경제성장이 낮아지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중국 등 개발도상국이 온실가스에 대한 국제적인 규제에 적극 반대하는 것도 경제성장에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에서이다. 특히 중국은 세계 제일의 이산화탄소 배출국가로서 2010년 72.6억톤을 배출하였는데 이는 우리나라 배출량의 13배 수준이다. 중국과 인도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전 세계의 1/3 가까이 되는 상황에서 이들을 제외하고 온실가스 배출을 규제하는 것은 실효성이 없다. 교토기후협약 이후 새로운 기후변화협약을 위한 협상에 진전이 없는 것도 탄소규제에 대한 선진국과 개도국간 첨예한 이해관계 대립이 주요 원인인 것이다.지난 이명박정부는 저탄소 녹색성장을 핵심 국가 아젠다로 추진하였다. 지구를 살리기 위한 저탄소를 선도하면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자는 것이었다. 녹색성장위원회가 만들어지고 녹색성장기본법이 제정되는 등 각종 정책이 쏟아졌고, 홍보도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2020년까지 BAU 대비 온실가스 30% 감축이라는 의욕적인 감축목표도 세계에 제시하였다. 그러나 각종 구호와 정책에도 불구하고 2010년 우리나라 온실가스 배출양은 전년대비 9.8% 증가하여 2000년대 들어서서 가장 높은 증가율을 기록하였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GDP당 온실가스 배출량이 2002년부터 지속적으로 줄어왔는데, 저탄소 녹색성장 정책이 추진된 2008년부터 오히려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경제가 내세우는 것과는 달리 더욱 화석연료 의존적인 경제구조로 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볼 때에 국제사회에 제시한 온실가스 감축목표는 달성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우려되는 것은 이러한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국제사회에 제시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무리한 정책이 추진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변화된 여건을 점검하여 국가감축 목표를 현실성있게 재산정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재산정한 감축목표와 어려운 경제여건 등을 감안하여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정책과 규제도 국민과 산업계의 의견을 반영하여 재설계 할 필요가 있다. 특히 중국·미국 등 온실가스 과다 배출국가가 자국의 경제성장을 고려하여 온실가스 규제정책에 적극 나서지 않는 상황에서 우리만 앞서 갈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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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8.15 23:02

한국 스포츠 발전과 국가 브랜드

국가대표선수 출신으로 최초로 체육 주무부처 차관을 맡기까지 필자는 평생을 스포츠와 함께 해 왔다. 우리나라 스포츠가 발전하고, 이를 통해 국가 브랜드가 높아지는 역동적인 순간을 늘 함께 해 왔다. 때로는 현장의 선수였고, 때로는 선수들을 지원하는 감독이나 체육 행정가였다. 돌이켜보면, 맡은 역할은 시기에 따라 달랐지만, 스포츠를 통해 국민들에게 기쁨과 감동을 선사하고, 세계 무대에서 우리나라의 위상을 드높이겠다는 각오만은 늘 한결같았던 것 같다.익산에서 태어난 필자는 어린 시절에는 학교 선생님을 꿈 꿨으나, 이리동중, 이리농림고 등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군인의 길에 매력을 느껴 해병학교를 거쳐 해병대 장교가 되었다. 체육인과는 거리가 먼 길이었다.그런데, 1970년 베트남전 참전을 앞두고 갑자기 국가대표 사격선수로 발탁되면서 운명처럼 체육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우리나라가 '제 2회 아시아사격선수권대회(1971년)'를 유치하면서, 당시 경호실장이자 대한사격연맹회장을 맡고 있던 고 박종규씨가 몇 차례 군대 사격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던 필자를 사격선수로 지목한 것이다. 이후 국가대표 사격선수로 78년 방콕, 82년 뉴델리, 86년 서울 등 아시안게임 3연속 금메달을 기록하는 등 적지 않은 수상의 영예를 누렸고, 선수생활을 은퇴한 뒤에도 국가대표 사격팀 감독, 대한체육회 임원 등으로 체육인의 삶을 떠나지 않았다. 2011년부터는 2년여 간 태릉선수촌장을 맡기도 했다. 지난해 런던올림픽에서 한국선수단 총감독을 맡아 역대 원정 대회 최고 성적인 종합 5위를 달성한 것은 가장 뜻 깊은 기억이다.오늘날 세계적인 무한경쟁 시대에 스포츠는 국가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중요한 수단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스포츠를 통해 통해 국가 브랜드를 세계에 각인시킨 대표적인 나라다. 88년 서울올림픽과 2002년 한·일 월드컵은 우리 국민들의 통합된 힘과 우리나라의 발전된 모습을 세계에 널리 각인시키면서 국가브랜드 가치를 획기적으로 높인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동·하계올림픽, 월드컵,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등 4대 스포츠 축전을 모두 여는 세계 6번째 국가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올림픽을 비롯한 각종 국제스포츠대회에서의 경기력도 세계 상위권에 섰다. 아마 우리나라가 스포츠 강국이라는 데는 아무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그러나, 스포츠를 통해 국가브랜드를 한 단계 더 높이기 위해서는 이제 스포츠 강국을 넘어 스포츠 선진국으로서의 면모를 세계에 보여주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러면, 스포츠 선진국은 어떤 모습일까? 필자는 '국민 누구나 스포츠를 통하여 건강하고 즐거운 삶을 누리는 나라'가 스포츠 선진국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이는 국정의 중심을 국가가 아닌 국민 개개인에 두고 국민행복을 추구하는 박근혜정부 체육정책의 핵심이기도 하다.새 정부는 생애주기별 맞춤형 스포츠 프로그램을 보급하고, 종합형 스포츠 클럽과 스포츠 교실은 물론 각종 생활체육시설을 연차적으로 늘려나가는 등 100세까지 누구나 집 가까이에서 건강하게 스포츠를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필자는 국민 모두가 1인 1기 이상의 스포츠를 즐기며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를 제안한다. 이는 새 정부 체육정책의 지향점이며, 우리나라가 스포츠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지름길이다. 스포츠를 통해 또 다시 국가브랜드를 높일 새로운 기반이기도 하다.△ 박 차관은 고려대 교육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쳤으며 국가대표 사격감독, 대한체육사 이사, 태능선수촌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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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8.08 23:02

사무치게 그리운 어머니, 그리고 고향

누구에게나 어머니란 단어는 남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시고, 홀어머니 사랑 속에서 나이 먹은 나에게는 그 느낌이 더욱 남다를 수밖에 없다. 칠순이 넘은 이 나이에도 어머니라는 단어를 접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어머니가 세상을 뜨신지 벌써 12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서울에서 내려오는 아들을 기다리시던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무너진다. 더 잘 모셨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가 가슴을 친다. 내가 온다는 날이면, 어머니는 새벽부터 마당에 나와 대문만 쳐다보셨단다. 기다리는 어머니가 안계시는 지금은 귀향길도 바쁘지 않다. 어머니를 모시고 홍콩과 일본을 다녀오기도 했다. 비행장에 도착하면 구순의 어머니를 내가 업었다. 길게 늘어선 입국장 줄 뒤에 서면 사람들이 어서 먼저 가라고 자리를 양보해줬다. 내 등에 업히신 어머니 덕분에 일찍 수속을 마쳤다. 그 걸 노리고 한 일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이 고마웠다. 나라는 달라도 효도하는 마음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가 95세 되시던 1997년 6월, 나는 어머니가 살고 계신 곳이자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시기마을)에 노래비를 세웠다. 어머니가 저 돌처럼 100세까지 건강하게 살아계셨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전문 음악인은 아니었지만, 내가 작사하고 노래도 직접 불렀다. 평상시 나와 어머니와 주고 받던 말씀을 갖고 작사한 노래 「오래 오래 살아주세요」가 바로 그 노래다. 그 후 어머니 앞에만 서면 그 노래를 불렀다.'세상살이 고달프고 괴로울 때면 마음은 달려가네 어머님 품속으로/사랑스런 눈빛으로 나를 보며 두 손으로 안아주었죠/세월따라 변해가는 어머님의 그 모습이 이 자식의 가슴 속을 울려줍니다// 흐르는 세월을 아쉬워하며 나를 사랑하고 키워주신 어머님/이 몸이 잘 되라고 두 손 모아 그 얼마나 빌었습니까/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어머님 그 은혜를 무엇으로 갚으리까/어머님 어머님 오래 오래 살아주세요/어머님 어머님 오래 오래 살아주세요'좀 면구스러운 일이지만, 내가 가수라고 하면 사람들이 잘 믿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엄연히 가수다. 사단법인 한국연예협회 회원증(가수분과 380호)을 가진 진짜 가수다. 회원증이 있어야 정식 가수로 인정된다.나는 요즘도 작사료를 받는다. 방송이나 노래방에서 내 노래를 틀면 사후 70년까지 보장되는 작사료가 나온다. 금액이야 얼마 되지 않지만, 받을 때마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게 되고 매우 재미가 있다. 작사자가 죽으면 그 권리는 배우자와 후손에게 귀속된다. 집사람에게, 또 자식들에게까지 상속되는 '돈벌이' 권리다. 내가 직접 부른 노래이기도 하지만, 내가 작사했기에 더욱 값지고, 자랑스럽고, 재미 있다.노래비를 세운 것은 내가 한 일중 가장 보람 있는 일로 생각된다. 덕분인지, 어머니는 102세까지 건강하게 사시다 돌아가셨다. 102세도 자식 입장에선 아쉽지만, 병원 한번 안가시고 돌아가신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다. 하늘에서 어머니를 돌봐주셔서 그리 된 것같다. 그로하여금 나는 나라에서 국민훈장을 받게 됐다.어머니 얘기를 하는 것은 내가 효자라서가 아니다. 누구나 비슷하겠지만, 대개의 경우 스스로를 불효자라고 생각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다만 모든 사람이 가지는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이다. 효도하는 마음은 고향사랑 마음과 통하고, 이웃사랑 마음과도 통하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이 있을 때 이웃과 고향을 더욱 따뜻하게 대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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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8.01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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