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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성 사건에 직면한 현대인 모습

종교와 역사에 천착했던 소설가 이선구 씨(58)가 발칙한 상상력과 아련한 그리움을 들고 돌아왔다.그는 신간 단편소설집 <욕망을 팝니다> (도서출판 청어)를 통해 후기 산업사회에서 예외적인 사건을 직면한 현대인의 모습을 그렸다. 지난 2011년 장편소설 사자춤를 펴낸 뒤 3년 만이다. 이번 소설집은 그가 평소에 쓰는 스타일을 벗어나 스펙트럼을 넓혔다. 책 제목과 같은 이름의 단편소설 욕망을 팝니다는 전세계 남성이 무성욕자가 된다는 설정으로 시작한다. 일명 후천성 관음증 해체 증후군이다. 자본주의의 꽃으로 불리며 욕망을 파는 광고기획사는 하루 아침에 부도가 난다. 성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광고를 만들어온 주인공은 거래처 상품의 매출이 곤두박질치면서 도피하는 신세가 된다. 남성의 성욕이 사라지자 이내 화장품과 의류 매출은 급락하고 성욕을 높이는 약과 민간 요법의 재료들은 날개 돋친 듯 팔린다. 남성의 관심을 끌기위한 여성의 대담한 시위가 이어지고 신혼부부의 이혼율이 높아지는 등 그야말로 요지경의 풍경이 펼쳐진다. 그는 성적인 문제가 사회문제화된 뉴스를 보고 한국의 성적 규범과 함께 왜 생물학적으로 남성만 능동적으로 인식하게 됐는가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해 이를 뒤집어봤다고 말했다. 이선구 작가는 전주 출신으로 전북대 의대를 졸업했다. 소설은 문학적인 일탈이고 자신의 폭로다는 그는 의대에 다니면서도 시를 써 최승범 시인에게 보이며, 문학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 그가 소설가의 길을 결심한 것은 15년 전이다. 그는 몇 달을 사이에 두고 친구 2명이 잇따라 세상을 뜨면서 인생을 고민하게 됐고 어느날 눈 앞에 문장이 떠올랐다며 스스로 놀라 그날 펜을 잡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들려주었다. 그는 지난 2007년 계간문예로 등단한 뒤 소설 시의 갈레누스베네치아 코덱스왕롱의 잔유리병 속의 코끼리사자춤(전 3권)등의 장편소설과 단편집을 발표했다. 계간문예소설문학상, 아시아황금사자문학상, 하이네 문학상, 대한민국디지털작가상(장려상)을 수상했다.

  • 문학·출판
  • 이세명
  • 2014.03.28 23:02

고향과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 풀어내

“현실 속에서 꿈을 잃은 영혼들이 있다.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때로는 분노하고 울분을 토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울분을 토할 수 없어 늘 삼키고 침묵하는 마음들이 있다. 그 마음이 만드는 시어는 지극히 단단한 절벽, 혹은 절규의 냄새가 난다.”민용태 고려대 명예교수(스페인 왕립 한림원 위원)는 최인호 시인의 시가 그런 범상스럽지 않은 벼랑 위의 꿈, 절벽 위에 핀 꽃이다고 했다. 최 시인이 낸 시집 <서정의 분노>에 대한 작품해설을 통해서다<문학시티>.군산 출신으로, 계간 <문학미디어>로 등단한 최 시인의 시에는 정지용 못지 않는 고향에 대한 향수로 가득차 있다고 민 교수는 보았다. ‘심청가 감미로운 진양조에 / 외조부님 눈시울 뜨겁다 /(중략)/둔덕길 돌아오는 길 뜨락에 서면 / 초가지붕 처마 기슭 따라 조여진 듯 / 색감으로 꼬옥 다음어진 이엉 아래 / 섬돌 위 흰 고무신’.고향 냄새 물씬 풍기는 정스러운 이미지를 ‘섬돌 위 흰 고무신’으로 그렸고, 고향을 연상시키는‘어머니’를 곳곳에 등장시켰다. 시인은 또 시장에 나온 춥고 배고픈 사람들, 등굽은 할매의 모습에 남다른 연민을 가졌고, 나무를 보며 생명의 눈길을 노래했다. ‘꽃비 날리는 날이면’‘서투르니 고아라’‘수긋함이 좋다’‘평안의 빛’‘분노’5부에 걸쳐 100편의 시를 수록했다.문학미디어 작가회장을 지냈으며, <눈부신 바다> <꽃향기가 말했다> <달항아리> 등의 공저가 있다.

  • 문학·출판
  • 김원용
  • 2014.03.28 23:02

[(22) 신경준의 시론서 시칙(詩則)] 일상속 사물 사실적 관찰…고전 한시 기존틀 깨

여암 신경준(1712~1781년)은 1455년 세조찬탈의 정란 이후 전북 순창 남산대로 낙향하여 귀래정을 짓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신말주의 11대손이다. 영조 30년(1754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휘릉별검, 정언, 장령, 서산군수, 좌승지, 순천부사, 제주목사 등을 지냈다. 〈문헌비고〉 편찬에서 〈여지고〉를 담당했고, 〈훈민정음운해〉, 〈평측운호거(平仄韻互擧)〉, 〈산수경(山水經)〉 등 비중 있는 많은 저술을 남겼다. 이 가운데 〈산수경〉은 일제의 산맥 지리서보다 앞선 것으로 우리나라 산줄기를 백두산을 시원으로 날과 씨로 구분하여 과학적으로 그려낸 지리서로도 유명하다. 시의 창작과 이해에 관한 이론서 〈시칙〉도 서구의 이론서에 못지않은 저작이라고 할 수가 있다. 〈시칙〉은 〈여암유고〉 권 8에 전하는데 그의 나이 23세 때 고서에서 읽은 것과 스승으로부터 들은 바를 바탕으로 한시의 이해와 작법을 5개의 도표와 그에 관한 해설로 엮은 것으로 시 창작기법을 겸한 시론서이다. 시의 근본적 기본요소를 체와 의(意), 성(聲)의 세 골격으로 나누고, 성은 다시 가(歌), 사(辭), 행(行), 곡(曲), 음(吟), 탄(歎), 원(怨), 인(引), 요(謠) 등의 장르로 분류하여 대개 5언과 7언을 기본 음수율로 하고 있다. 그리고 궁상각치우의 5음은 황종(黃鐘), 대려(大呂), 태족(太簇), 내종(來種), 고세(姑洗), 중려(中呂), 임종(林鐘), 이칙(夷則), 남려(南呂), 무사(無射), 응종(應鐘) 등 12율과 밀접한 관계를 이룬다고 했다. 의는 주의(主意)와 운의(運意)의 둘로 나누고, 다시 주의는 송미(頌美), 기자(奇字), 우애(憂哀), 희락(喜樂)으로, 운의는 점배(占排), 취사(取捨), 활축(闊蹙), 구결(口訣)로 나누어서 시의 내면적 서정의 표현방식을 구체화했다. 말하자면 여암은 시창작의 원리와 방법론에서 사(事)와 물(物), 정(情)의 문제를 제기하여 이에 대한 시창작의 상관관계를 설명했고, 전체적인 시의 짜임도 기승전결의 일반적 구조로부터 기(起), 승(承), 전(轉), 식(息), 숙(宿), 결(結), 졸(卒)로 세분화하여 풀이했다는 특성을 지닌다. 이는 시가 본디 음악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강조한 것으로 시에 있어 외형률의 음악성 외에 내면적 운율성을 강조한 것으로 시의(詩意)는 5성과 12율이 가지는 정취와 조화시키려했다는 점이 남다르다. 시어마다 성을 다시 5성(五聲)으로 배분해 보려는 시도한 것을 보면 당대로서는 전례가 없는 독창적인 시도였다고 할 수가 있고, 5음과 12율의 배합 속에 시에서의 음악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시에 있어서 시의 강령(綱領), 시의 재료, 시격(詩格), 시례(詩例)의 대강, 시작법총(詩作法叢), 시의 기품, 시의 대요, 시의 형체 등 8항목으로 분류하여 그러한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도 했다. 그리하여 시의 강령은 다시 체와 의, 성과 시격 48표현방법, 시례는 14표현기교의 예증, 시의 기품은 10가지, 시의 대요엔 생각에 사악함이 없어야 한다는 〈시경〉의 사무사(思無邪)의 정신을 시창작의 표준으로 삼아야 하며, 마지막으로 시의 형체는 8가지 격식의 작시법을 금기와 바람직한 방법으로 나누어서 설명했다. 그가 남긴 「여암유고」 권 1에는 시 62제하에 145수의 시가 남아 있는데, 그가 관직에 있을 때나 일상생활 속에서 느껴지는 것들을 놓치지 않고 자신의 시세계를 구축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신경준의 시세계는 대개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는데, 첫째, 그가 53세 때 장현현감으로 부임한 시절 백성들의 어려운 삶 속에서 우러난 민은시(民隱詩) 10장과, 둘째, 자연의 미물 - 개구리, 개똥벌레, 개미, 매미, 귀뚜라미, 거미, 파리, 모기 -까지 현미경적인 분석관찰을 통한 야충(野蟲)과 소충(小蟲)의 10장, 셋째, 전통적인 한시의 형식을 깨뜨리면서 실질을 추구한 고체시 65수로 대별할 수 있다. 박명희 교수는 ‘여암 신경준의 생애와 학문관’에서 이러한 신경준의 시세계의 성과를 신경준 개인의 사유와 학문적 지향 및 성과와 무관치 않다고 보고 이를 ‘박(博)’과 ‘실(實)’이라 했고, 특히 시를 통해 실질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 ‘무실(務實)’이었으므로 그의 시작태도를 무실적인 시작태도라 정의했다. 신경준은 관직생활에 안주하지 않고 〈강계지〉, 〈동국문헌비고〉, 〈여지고〉 등의 저서 외에 〈여암유고〉에 전해지는 ‘일본증운(日本證韻)’, ‘언서음해(諺書音解)’, ‘평측운호거’, ‘거제책(車制策)’, ‘수차도설(水車圖說)’, ‘논선거비어(論船車備禦)’, ‘의표도(儀表圖)’, ‘산수고(山水考)’, ‘도로고’, ‘사연고(四沿考)’, ‘가람(伽藍)고’ 등 실로 다양하고도 많은 저술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잡학이라고 홀대했던 천관(天官), 직방(職方), 성률(聲律), 의복(醫卜)에 이르는 학문과 기벽한 서책 등 정통 사대부들이 기피했던 분야까지 통달했던 선비였기 때문에 그의 학문의 요체를 ‘박학(博學)’이라고 하는 의미에서 ‘박(博)’이라고 줄여서 말한 것 같다. 신경준의 한시는 일상생활에 밀착되어 있거나 사물에 대한 사실적 관찰을 바탕으로 고전적인 한시의 기존형식을 깨뜨리면서 실질을 추구했으므로 이러한 시문학적인 자세를 ‘무실(務實)’이라는데 이의를 달수가 없다. 홍양호가 쓴 서문을 보더라도 결국 신경준의 시칙은 전 시대인들의 시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았다. 구차히 기존의 일정한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정통시의 율격을 자유자재로 깨뜨리면서 나름의 개성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고, 야충이나 소충에서처럼 하찮은 미물 가운데에서 문학적 의미를 캐낸 시인으로서의 여암의 남다른 시 철학을 엿볼 수가 있다. 호미를 들고 청산에 가서(提鋤去靑山)맑은 물 논밭에 대고(白水稻田)달 밝은 밤 호미 들고 돌아오니(提鋤歸月明)앞마을엔 푸른 안개 끼었어라(前邨翠烟)하얀 호미자루 겨우 세치(白木柄强三咫)일년 삼백육십오일(一歲三百六十五日)내 생명 너에게 맡겼네(我命托子) - 호미를 들고(提鋤)-시제는 ‘제서(提鋤)’ 즉 ‘호미를 들고’이다. 4구까지는 청산에 있는 밭에 나가 달이 동산에 떠오를 때까지 일하다가 푸른 안개가 내려깔리는 달밤에 집으로 돌아오는 한가로운 농촌의 정경을 노래했고, 나머지 시구에서는 비록 작은 호미로라도 농사를 지어야만 우리의 삶을 이어갈 수 있다는 노동과 농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는 여암의 무실의 시세계를 그대로 대변해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또한 4언과 5언, 6언, 8언 등 정격의 형식을 깨뜨리는 변칙의 운율적 효과를 실험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향은 신경준의 ‘잡언고시’ 중 10구의 ‘우양약(雨陽若)’이나 6구의 ‘앙양(仰陽)’ 등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있다. 여암 신경준은 전북이 낳은 실용성을 중시한 선비로 관직생활과 시문학을 통해 박학(博學)과 무실(務實)의 학문과 시세계를 구축하여 국가 사회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나라에 큰 족적을 남긴 분이다. 1934년 암담한 일제하에 국학운동을 벌였던 위당 정인보가 아니었다면 자칫 실학적인 여암의 훌륭한 박학과 무실의 족적이 사라질 뻔했다. 1939년 위당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여암전서〉가 활자본으로 간행하면서 정인보는 ‘여암이 만약 국정을 담당하는 중요한 자리에 있었다면 우리나라가 일본에 망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일본을 능가했을 것’이라고 평한 것처럼 신경준의 다양한 저술활동은 우리나라를 위해 절대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여암의 학문은 사승(師承)관계가 미미해 후대에 이어지질 못했고, 자신이 스스로 자득한 학문에 그쳤지만 기술과 실용을 중시한 실질적인 학문이었다는 점에서 조선 후기 사상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고 할 수 있다. 실로 신경준의 저술 가운데는 실용적인 학문과 과학기술은 어느 누구도 추종할 수 없는 독자성을 구축한 업적들, 예컨대 천문관측기구를 비롯한 도로와 강하의 연구, 독창적인 조선의 지리의 정리, 수레와 선박, 화차 등의 기술적 탐구, 탁월한 언어학적 연구 등은 모두 우리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려 했던 그의 실사구시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전근대적인 성리학의 학문과 문학정신에서 의고주의적인 사고나 몰개성적인 철학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실용적인 측면을 몸소 실천궁행했던 근대지향의식을 지향한 실험자요, 선각자였다고 할 수가 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14.03.28 23:02

팔만대장경에 숨겨진 진실 파헤치다

역사담론과 한국문학의 원류를 찾는 데 천착해온 소설가 김종록 씨(51)가 장편소설 <붓다의 십자가>로 돌아왔다(감영사). 시대를 초월하는 인문정신과 문학, 역사, 철학의 융합을 시도해온 작가는 몽골군의 말발굽에 처참히 유린되던 상황에서도 대대적인 판각불사를 벌여 오늘날 세계문화유산이 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판에 주목했다.해인사 장경판전은 천 년의 숨결이 흐르는 나무도서관입니다. 2010년 판전을 취재하면서 오래된 경판들이 내게 말을 걸어왔으며, 그 속삭임은 수천, 수만의 음성이 되어 나를 들볶았고, 그 시절을 날아다녔습니다.소설은 격동하는 역사 속에서 사라진 초조대장경의 숨겨진 진실과 새로운 경판사업 이면의 감춰진 이야기를 추적한다. 하나의 진리를 지키려는 자와 또 다른 구원을 꿈꾸는 자의 쫓고 쫓기는 대결, 고려 최대 국책 프로젝트 팔만대장경에 새겨진 낯선 상징과 이교도의 것으로 보이는 괴이한 문장을 두고 벌이는 전쟁, 진정한 구원과 이상세계를 찾아가는 모험을 그린 대장경의 미스터리 소설이다.저자는 이 소설을 위해 3년간 집요하게 사료를 파헤치고 소설의 현장인 강화도와 부안 변산반도 일대를 누볐단다. 소설의 중심에는 팔만대장경에 고대 동방기독교인 경교 관련 내용이 포함될 수 있었다는 가설에서 출발한다. 도발적인 소설 제목인 <붓다의 십자가>도 이런 작가의 상상력에 바탕을 뒀다. 작가는 1956년 불국사에서 발견된 돌 십자가나, 발해의 수도였던 만주 훈춘에서 발견된 가슴에 십자가 문양을 단 삼존불상 등을 들어 터무니없는 가설이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이 소설을 팩션 소설로 분류했다.대장경에 경교 문헌들을 담았다면 대장경의 가치는 지금보다 훨씬 더 컸을 것이라고 작가는 작품 후기에서 아쉬워했다.진리의 등불을 전하기 위해 별을 보고 눈을 밟으며 동쪽으로 온 사람들, 그 기억을 찾아 서쪽으로 간 사람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경전을 목판에 새겨 후세에 남기려 했떤 고려 지성들에게 바치는 찬사입니다.김 씨는 전북대 국문학과와 성균관대 한국철학과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소설 <풍수> <장영실은 하늘을 보았다> <달의 제국>과 산문집 <바이칼> <근대를 산책하다> 등을 냈다. 1987년 <파수병 시절>로 삼성문학상을, 1988년 장편소설 <칼라빈카>로 불교문학상을 수상했다.

  • 문학·출판
  • 김원용
  • 2014.03.24 23:02

안도현 산문〈나는 당신입니다〉

시인이 문학판이 아닌 재판정에서 더 각광(?)을 받는 현실은 시인 개인에게는 물론 사회 전체적으로도 안타깝고 불행한 일이다. 지난해 절필 선언과, 현재도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돼 법정 공방을 벌이고 있는 안도현 시인(우석대 교수)의 이야기다. 안 시인은 지난해 7월 박근혜가 대통령인 나라에서는 시를 단 한 편도 쓰지 않고 발표하지 않겠다며, 30년 넘게 시를 써 왔고 10권의 시집을 냈지만, 현실을 타개해 나갈 능력이 없는 시, 나 하나도 감동시키지 못하는 시를 오래 붙들고 앉아 있는 것이 괴롭다고 절필을 선언했다.절필 선언 후 실제 그의 신작 시를 접할 수 없게 된 팬들에게 최근 발간된 산문집 <나는 당신입니다>가 다소 위안이 될 것 같다. 10년 전 <100일 동안 쓴 러브레터>라는 제목으로 기존에 발간한 두 권을 다듬어 낸 책이다(느낌이 있는 책).<러브레터>는 안 시인이 평소 읽은 책에서 밑줄을 그어두고 싶은 구절들을 고르고, 그 글마다 자신의 느낌을 평지 형식으로 하나씩 서서 붙인 책이다. 이 책을 본 많은 독자들이 마치 러브레터를 한 통씩 받는 듯했다고 격려해줬으나 출판사 사정으로 절판된 것을 이번에 새롭게 정리해서 다시 빛을 보게 됐다는 것.국내외 유명 문인들의 시와 소설산문을 중심으로, 탈무드판소리민요동화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원전들을 간접적으로 만날 수 있고, 이에 대한 안 시인의 느낌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이 책의 매력이다.

  • 문학·출판
  • 김원용
  • 2014.03.21 23:02

김계식 시인, 15번째 시집 〈어둑새벽〉

밤새 손질한 갑주에 / 튼튼한 방패를 챙겨 들고 / 적진의 한복판에 뛰어들어가 //(중략)// 뼈마디 하나 굳히려면 / 열 달을 채우고도 이루지 못하는데 / 삽시간에 남의 뼈 내 것 되려니 / 다른 오진 뼈 바스러지는 아픔 // 오죽하면 의붓아비도 아비이랴 / 욱신거리는 열기를 얼음 팩에 넘기고 // 문 틈새 /어른거리는 희망에 눈길 주며 / 체념으로 받아들이는 / 인공치아 지주.(임플란트중)김계식 시인은 매일 새벽에 일기를 쓴단다. 그 일기는 시의 바탕이 된다. 그에게는 일기가 시가 되고, 시가 일기가 되는 셈이다. 시인은 어느 날 임플란트 시술을 했고, 그 날의 일기는 임플란트와 관련한 심정을 적었을 것 같다. 시술 직전과 시술 과정에서의 두려운 마음, 그 속에서도 새로운 이를 갖는다는 희망이 임플란트라는 시를 통해 그대로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김 시인의 15번째 시집 〈어둑새벽〉 역시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그날이 그날 같은 나날을 허투루 흘리지 않고, 진솔한 삶의 일상을 담아낸 시집이다(신아출판사). 시집 〈뭇별 속에 묻어두고〉를 펴낸 후 1년만이다. 예전의 시집과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정경, 마음에 꽃 피우는 그리움과 가슴 뜨거운 사랑, 못내 아쉽고 안타까운 한스러움, 마음을 새롭게 북돋우는 용기, 그리고 저 크고 작은 바람을 담은 것들, 제 나름의 성근 어레미로 꼴사나운 것들 한 번 걸러내고, 촘촘한 어레미로 모자란 아래의 것들 걸러낸 글을 골랐습니다.올 연초 전북문인협회로부터 전북문학상을 수상했던 시인은 수상 소감에서열심히 시를 썼다고 개근상을 받았으니, 앞으로 우등상을 받도록 노력하겠다는 약속을 뒤로 미루고 또 한 권의 시집을 서두르는 발걸음을 내딛었다고 시집 머리에 적었다.시집은 흐르는 물 위에 눈금 매기다믿는 바탕 있음에소삽한 마음 고샅길그 자리에 서다믿음이 안기는 불굴 5부로 나눠 93편의 시를 담았다.전북도교육청 중등교육과장과 전주교육장을 지낸 김 시인은 2002년 한국창조문학으로 등단했으며, 한국예술총연합회장상전북PEN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 문학·출판
  • 김원용
  • 2014.03.21 23:02

[(21) 김구의‘떨어지는 배꽃’낙이화(落梨花)] 심미적인 7언절구 '시부의 표준' 칭송

사뿐히 춤추며 날아가다 도로 되돌아와서는거꾸로 나부껴 다시 가지에 올라 꽃 피우려다무단히 꽃잎 하나 거미줄 그물에 걸리니거미 때마침 나비인줄 알고 잡으러 오네 문정공 김구(1211- 1278년)의 시 가운데 가장 서정적이고 심미적인 시로 떨어지는 배꽃 낙이화(落梨花)라는 시제의 7언절구를 꼽을 수 있다. 이 시는 화사한 봄날, 불어오는 바람에 떨어지는 배꽃 잎이 윤무를 그리다가 거미줄에 걸려 흔들거리는 것을 보다가, 마치 나비가 걸린 것으로 착각한 거미가 먹이인줄 알고 엉금엉금 기어오는 곤충들의 먹이사슬을 섬세하고도 희화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희짓는 봄바람과 무수히 떨어지는 배꽃잎, 거미줄과 거미를 소재로 낙이화가 다시 개이화(開梨花)하려는 역리(逆理)성을 꼬집는 지포(止浦)의 시작법이 놀랍다. 그러기에 고려대의 문장가인 문충공 이제현은 이 시를 아름답기가 둘도 없는 작품이라 극찬하였고, 고종대의 문청공 최자는 시부의 표준이요, 모범이라 칭송하였다. 당대의 문호로 추앙받는 문순공 이규보(1168- 1241)는 고려의 문장을 저울질 할 사람이라 경탄을 하였고, 고려의 국왕인 고종도 동쪽 우리나라 대신의 정기를 타고나 서쪽 중국의 문장가들을 자유로이 주무르는 사람이라 칭찬했던 당대 문장가였을 뿐만 아니라, 원나라와의 외교에도 능한 정치가였다.김구는 이규보나 이제현처럼 고려대의 다른 문장가들보다 잘 알려지지 않았던 당대의 유명한 시인이요, 외교가였다. 고려 고종조 대몽 항쟁기의 한 복판에 서서 민중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몽고를 오가며 감동적인 외교문서를 만들어서 그들을 설득하고 고려와의 관계를 회복시켰던 애국적인 사대부였다. 이는 당 희종 8년(881)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24세의 젊은 나이로 토벌장수 고병(高騈)의 종사관이 되어 황소에게 격문을 써서 반란을 평정함으로써 이름이 천하에 높아진 신라의 최치원과도 비교되는 인물이라고 할 수가 있다. 최치원은 12세의 어린 나이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17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선주표수현위를 거쳐 승무랑시어사내공봉의 벼슬에 올라 중국에 문명을 떨친 문장가였다.김구도 어려서부터 경사(經史)에 능통하고 시와 문을 잘 지어 칭송이 자자하였고, 여름에 절에 들어가 50일 동안 고문과 율시, 당송시를 공부하고 시와 부를 짓는 하과(夏課)에서는 여러 동료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 모두들 과거에 나가면 장원을 할 것이라 평판이 높았다는 기록이 지포의 행장에 나와 있다. 하지만 나이 20살에 문과에서 2등으로 뽑히자, 지공거(知貢擧)인 정숙공 김인경이 장원으로 뽑히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겨 자신도 제 2등으로 뽑혔다고 위로하니 김구도 장문의 병려체 계문(啓文)를 지어 사례를 하였다.문정공 김구는 무신정변이 일어난 지 40여년이 지난 희종 7년(1211) 비교적 정치가 안정기에 접어든 최충헌 집권기에 태어났다. 〈고려사〉 열전에는 부녕현(현 부안)인이라 되어 있지만 역사가들은 부안에서 태어났는지 확실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부친인 김의(金宜)가 중앙관료로 개경에 거주했으므로 부안이 아닌 개경에서 출생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 숙종 2년(1836)에 발간된 〈부령김씨족보〉에 의하면 김구의 선대가 부안에 거주하게 된 것은 경순왕의 후손인 김경수가 고려 문종 때 과거에 올라 이부상서 우복야에 이르고 아들 김춘이 부녕부원군에 봉해지면서 부녕을 식읍으로 받았기 때문에 본관이 된 것으로 보인다. 김구의 아버지 김의는 고려 신종 7년 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여 당시 최씨무단정권을 장악한 최충헌에 의해 발탁됨으로써 중앙관료로 진출하였고, 최충헌은 이규보, 최자, 진화, 김극기 등 당대 문신들을 우대하여 무신정권과 학문의 세계를 조화롭게 이끌어간 것으로 보인다. 김구는 당시 제일의 문호인 이규보의 천거에 의해 집권자 최우에게 발탁되어 관직에 올랐음을 〈고려사절요〉에서 엿볼 수 있다. 고종 21년(1234)부터 6년간 제주판관으로 있을 때 제주의 땅은 돌이 많고 메말라서 논농사를 지을 수 없고, 밀, 보리, 콩, 조 등 밭곡식만 재배하는데 소와 말, 노루, 사슴들 때문에 수확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다 땅의 경계도 없어 포악한 무리들이 남의 땅을 잠식하는 일이 많은지라 지포가 부임하자마자 많은 돌을 모아 담을 쌓게 함으로써 이러한 어려움을 단번에 해결한 관리로서 제주에서 이름을 날렸다는 사실이 〈동문선〉과 〈탐라지〉에 기록되어 전하고 있다.6년간 제주판관을 마치고 내직으로 자리를 옮겨 한림원에 들어가 문사로 활동하면서 나이 30세에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갔을 때 〈북정록(北征錄)〉이란 기행록을 남겼다. 그리고 가는 행로에 〈과철주(過鐵州)〉, 〈과서경(過西京)〉, 〈출새(出塞)〉, 〈분수령도중(分水嶺途中)〉 등 여러 수의 시를 지었는데 그들 작품 속에는 약소국의 한과 원나라에 대한 강렬한 항몽의식이 작품의 내면에 오롯이 담겨 전한다.당년에 성난 오랑캐들이 국경문을 막으니40여성이 불타오르는 요원같구나산에 기댄 외로운 성 오랑캐길목이구려일만군의 북과 함성 단 한 번에 삼키려 해도백면서생이 이 성곽을 굳게 지켜내어 나라에 몸 바치길 기러기 털처럼 가벼이 하였네.(중략)하룻밤 관아의 창고 붉은 화염 타오르니처자와 함께 기꺼이 불 속에 사라져갔네.충성스런 장한 혼백 가는 곳 어디 멘가.천고에 고을 이름만 철(鐵)이라 허공에 쓰네.〈철주를 지니며〉〈과철주〉의 시제 아래에 지포는 고종 18년 신묘 8월에 몽고 장수 산례탑이 함신진을 포위하고 철주성을 도륙했다. 이 때 그 고을 수령인 이원정이 성을 지키다가 결국 창고를 불사르고 처자와 함께 불에 뛰어들어 장렬하게 전사했다는 주를 붙여 이 작품의 서사적인 창작배경과 역사적 사실을 밝혀놓았다. 그러므로 이 시는 1231년 몽고의 침략에 보름동안 항거하다 장렬하게 산화한 고을 수령 이원정과 그 처자에 대한 역사적 전쟁서사시임을 알 수 있다. 장수도 아닌 백면서생인 이원정이 인(仁)과 신(信)을 바탕으로 인심을 결속하여 몽고 장수 산례탑과 항전을 할 때 뼈를 태워 밥을 지어먹으며 싸웠던 전장의 참담한 극한상황이 떠오른다. 김구는 이런 용맹한 군사들을 용호(龍虎)로 비유하며 그들의 함성에 천지가 기울었고, 마지막 궁지에 몰린 이원정은 결국 처자와 더불어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서 산화했다는 비장미를 이 시에 담아내었다.김구는 원종조 몽고와 강화가 성립된 이후, 대몽관계에서 중요한 외교문서를 전적으로 담당하여 몽고의 무도한 요구와 압박을 해결했던 표전문의 대문장가였다. 원종도 지난번 몽주(蒙主)의 조서에 올린 글의 뜻이 간절하고 관곡하였다는 말까지 했으니, 그대가 지어올린 표문의 사연과 문장이 곡진하여 몽주를 감동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이러한 칭찬이 있었겠느냐고 기뻐할 정도였다. 확실히 지포는 대몽관계에서 외교관계의 훌륭한 표문을 작성하여 고려를 구함과 동시에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를 다짐으로써 재상의 반열인 평장사에 오른 문장가였다.18대손 동호가 동문선과 고려사에에서 김구의 유문(遺文)을 뽑고, 16대손 홍철이 편찬한 연보를 추가 편찬하여 3권 2책의 〈지포집(止浦集)〉을 순조 1년(1801)에 발간했는데, 7언고시 2수, 7언절구 4수, 7언율시 6수, 계 1, 소 5, 서 3, 비명 2, 표전 69 등이 실려 전한다. 만년에 부안 변산 지지포(知止浦)에 지지재(知止齋)란 서당을 짓고 많은 후학을 길러냈다. 부안군 산내면 운산리에 묘소가 있고, 도동서원에 배향되어 오늘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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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3.21 23:02

4. 안도현 시인 ‘그에게 바란다’ - 안도현 시인, 그의 시가 듣고 싶다

그가 들려주던 시는 늘 힘 있고 건강하고 따뜻했는데그는 지금시를 쓰지 않고 있다의사로서의 안락한 삶을 기꺼이 마다하고 성직자의 고된 길로 들어섰던 사람.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땅, 아프리카 남수단 톤즈로 가서 가난하고 소외되고 상처받은 모든 이들의 친구가 되었던 사람. 세상에 환한 빛을 밝혀주고 마흔여덟 젊은 나이에 하늘로 떠난 사람. 이태석 신부다. 선종 직전 그의 야윈 볼에서, 한겨울밤을 꼬박 새워가며 온몸을 뜨겁게 불태워 사람들에게 온기를 나눠준 뒤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녘, 볼품없는 모습으로 골목길에 버려진 연탄재를 발견한다.세상에는 이태석 신부처럼 남에게 도움을 주면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피해를 끼치면서 사는 사람도 있다. 또 있다. 남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을 온갖 트집을 잡아가며 비난하고 폄하하는 부류다. 골목길에 버려진 연탄재를 함부로 발로 차는 이들에게서 안도현 시인은 일찍이 그런 수많은 너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너에게 묻는다〉를 통해 따지듯 혹은 나무라듯 물은 바 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그가 쓴 〈연어〉의 주인공 눈맑은연어처럼 따뜻한 눈을 가진 시인은, 비록 한때나마 세상의 수많은 너들을 향해 곱지 않은 눈길을 보냈던 게 마음에 걸렸던가 보다. 그래서 그림처럼 〈너에게 묻는다〉를 집필실 한쪽에 두고 것이리라. 일찍이 〈연탄 한 장〉을 통해 자기 성찰의 자세로 돌아가 바로 그 너들 앞에서 어깨를 낮추었으면서도.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삶이란 나 아닌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중략생각하면 삶이란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네, 나는산란을 위해서 초록강을 향해 헤엄쳐가는 은빛연어와 눈맑은연어의 지느러미처럼 그가 들려주던 시는 늘 힘 있고 건강하고 따뜻했으므로, 비유컨대 그가 쓴 〈연어〉의 초록강은 그에게 시작(詩作)의 터전 같은 것이었으리라. 그런 그가 안타깝게 떨리는 목소리로, 그러나 힘주어 말했다. 구더기와 똥물이 우글거리는 지금의 초록강은 더 이상 초록강이 아니라고, 이런 초록강에서는 그 어떤 희망을 찾을 수도 꿈을 꿀 수도 없다고, 그런 곳에 알을 낳을 수는 없는 일이라고.그 옛날처럼 햇살이 강바닥의 조약돌에 곧장 내리꽂힐 만큼 맑은 물이 흐르지 않는 한 초록강으로 다시 돌아오는 일은 없을 거라고, 초록강 아닌 그 어느 곳에도 알을 낳지 않겠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의 결기를 뉘라서 말릴 수 있으랴만, 〈너에게 묻는다〉에 빗대어 이제 그에게 바라노니, 훗날 그가 초록강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은빛연어와 눈맑은연어가 그랬던 것처럼 온몸이 누더기가 되어 있는 일은 없기를, 주둥이에서 핏물 따위를 흘리는 일도 생기지 않기를. △안도현 시인은 지난 18대 대통령 선거기간에 당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에게 안중근 의사가 남긴 유묵의 출처를 묻는 글을 몇 차례 트윗했다고 검찰에 기소되어 1심 국민참여재판에서 만장일치로 무죄 평결을 받았으나 그에 반하는 재판부의 벌금형에 불복하여 상고했다. 그와 관련해서 시인은 현 정권에서는 시를 쓰지도 발표하지도 않겠다고 트윗한 바 있다. 현재 그 사건의 상고심이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시를 쓰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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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3.19 23:02

〈문예연구〉 창간 20년…우리시대 문학 재조명

계간 〈문예연구〉 창간 20주년 기념 행사가 지난 15일 전주 최명희문학관에서 열렸다. 1993년 11월 창간호를 낸 〈문예연구〉는 3월 봄 호까지 통권 80호를 발행한 종합문예지.시, 소설, 시평, 소설평, 서평, 영화평, 미술평, 수필 등 다양한 분야를 소개하는 종합문예지로서의 전통을 이어온 〈문예연구〉는 특히 기획특집으로 문인들에 대한 조명과 우리시대의 문학적 이슈나 논쟁을 집중조명하여 전문 문학연구지로서 차별화된 기획을 시도했다. 염상섭 이문열 조정래 박경리 이청준 박완서 공지영 최인훈 오정희 송기숙 송하춘 백석 이상 김영랑 오규원 신동엽 박재삼 이용악 등의 국내 작가와 톨스토이 오스카와일드 도스토예프스키 등의 외국 작가의 문학세계를 작가 시리즈에 담았다.또 한국사의 분수령이 되었던 역사적 사건 속에서 문학이 차지하는 역할에 관해 대형 특집과, 디지털 시대를 맞아 영상매체가 출판문화를 잠식하는 문학의 위기를 맞아 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 또 사회적 담론이 필요한 현안을 문학과 접목시켜 마련한 특집 한국사회와 다문화문학과 문화컨텐츠 노인문학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같이 지역문학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다양한 기획특집과 우수한 필진의 작품 발표로 한국문학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제정한 우수잡지에 4차례 선정되기도 했다.문예연구는 또 문예연구 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한 작가들이 창작의 지평을 확대하고자 1998년 한국문예연구문학회(회장 임희종)를 창립, 동인지 〈텃밧〉 16집까지 발간했다.한편, 이날 기념행사에서는 강남주(소설부문)서철원(소설부문) 김상미(시부문) 유미숙(시부문) 황점숙(시부문) 씨가 〈문예연구〉 신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이전안 시인과 한호철 수필가는 제1회 문예연구작가상을 수상했다.〈문예연구〉는 서정환 신아출판사 대표가 발행인이며, 강연호 시인(원광대 교수)가 주간을 맡고 있다. 정 양 시인 전정구 전북대 교수, 문학평론가, 유성호 한양대교수, 공종구 군산대 교수, 문학평론가 최명표 씨가 편집위원으로, 이종호 시인이 편집장을 맡고 있다.

  • 문학·출판
  • 김원용
  • 2014.03.18 23:02

김제출신 이오장 시인 시집 '고라실의 안과 밖' 출간

써레질홀태코뚜레다듬이도고통두엄금줄확독구들장베틀고지작두부지깽이등잔풍구젖둠벙40~50대 이상이면 기억하고 이해할 수 있는 용어지만, 20~30대 젊은 도시인들에게 이 정도의 농사 용어도 생소하고 낯설 것 같다. 기계화에 따라 농사짓는 방법이 바뀌고 옛 농사 도구도 사라지고, 농사일의 풍속도 크게 바뀌면서다.김제 출신 이오장 시인(62)이 농경문화를 테마로 한 시집 <고라실의 안과 밖>을 냈다(시문학사). 시를 통해 잊혀져가는 농경문화를 조명하고, 김제지역의 방언들을 거침없이 시에 풀어놓은 이 시집은 농촌 민속문화의 보물창고로 이태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는 평가했다.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의 기구가 필요하고 거기에 따른 언어와 행동이 발생한다. 이것이 농경문화 즉 인간의 기본적인 문화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우리는 그것을 잊고 산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이 시인은 인간 생존의 기본인 농경문화를 잊어서는 안 되며, 현재 쓰지 않는다고 그 시절의 물건이나 말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과거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곧 근본을 지우는 것이고 조상들의 정신을 끊어버리는 것이다고 했다. 농경생활에 관한 시에 주목한 배경이다.이번 시집은 시인이 <시문학>에 2013년 1월부터 12회에 걸쳐 발표한 것을 시집으로 묶었다. 자신이 직접 체험한 농경생활을 바탕으로, 전통농기구박물관을 찾아다니고 사전적인 내용도 참고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후대의 지표를 위해 약 1천개의 주석을 달아 주가 있는 시집이 됐단다.모내기써레질못자리와 같은 농사일을 하는 풍경, 홀태쟁기가래와 같이 농사일을 하는 도구, 씨오쟁이넉가래훑이매통과 같이 농사와 관련된 문화를 시로 읊었다. 코뚜레배메기소부리망 등을 통해 농사일을 하는 소를 노래하고, 따비씨아딸개에서 밭농사의 모습을 그렸다.다듬이모시삼기옹탱이고지갈퀴치기베나르기베틀물레의 시로 농촌의 생활문화를 노래하고, 채반확독디딜방아에서 여인의 고된 삶을 이야기 했다. 달코다리단골네솟대터줏가리는 전통신앙과 민속신앙을, 쑤기새잡기서리연자세는 옛 놀이를 떠올리게 한다.이태영 교수는 이를 종합해 가장 한국적인 농촌의 일, 풍경, 일상, 문화를 담은 시집이다. 농촌의 풍경 사진을 보는 듯하고, 농춘의 풍경을 여러 색으로 칠한 수채화를 보는 듯하다고 평했다. 또 지역어와 지역문화적 관점에서, 농경문화의 중심지인 김제지역의 언어와 문화 및 정서를 시적으로 형상화해 전북지역의 시문학에 소중한 기여를 하고 있다고 보았다. 지역의 언어와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깊이 있는 탐색을 통해 전북지역 시문학의 외연을 넓히는 동시에, 한국의 시문학의 미래를 성찰케라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이현복 서울대 언어학과 명예교수는 김제지역의 농촌시를 지으면서 문학자와 어학자의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해냈다며, 방언적인 공헌과 문학과 어학의 융합을 높이 평가했다. 이 시인은 한국문인협회 중앙위원한국현대시인협회 상임이사<사상과 문학>편집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바람꽃을 위하여> <꽃과 나이테> 등 10권을 냈다.

  • 문학·출판
  • 김원용
  • 2014.03.17 23:02

[22. 장복겸(張復謙)의 연시조 고산별곡] 세상 시름 잊고 자연 아름다움 노래

필자가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았던 「옥경헌유고(玉鏡軒遺稿)」를 접하게 된 것은 1987년 전주대학교 도서관에 근무했던 김종진 씨로부터다. 마침 호남을 중심으로 수집한 고서의 해제작업을 준비하고 있던 그로부터 이 문집에 실려 있는 고산별곡가사를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옥경헌 유고에 실려 있는 것처럼 가사문학작품이 아니었다. 거개의 고전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창(唱)으로 향유하기 위한 가사(歌詞)였지, 문학장르상으로 통칭되는 가사(歌辭)문학 장르가 아니라 10수의 연시조였다. 이 고산별곡은 필자의 작품연구를 거쳐 1988년 「국어국문학」 102집에 실리게 되었다.광해군 9년에 전북 임실군 지사면에서 태어난 장복겸(張復謙 1617- 1703)은 영천 위에 있는 고산(일명 독뫼)의 승경과 아래로 아름다운 서호의 중간에 외롭지 않다는 불고정(不孤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가사(歌詞) 10장이라는 연시조 〈고산별곡〉 10수를 지었다. 강호한정을 노래한 이 〈고산별곡(孤山別曲)〉은 조선중기의 은일처사 옥경헌 장복겸이 남원부 거녕현(현 임실군 지사면)에 살면서 지은 연시조이다. 아버지 흥성(현 전북 흥덕)인 장사랑 담(膽)과 효령대군 2세손인 어머니 석성(石城)의 정증손녀 슬하에서 태어났으나, 7-8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외조모의 슬하에서 외롭게 자랐다. 고산 윤선도가 6세의 어린 나이에 친부모의 슬하를 떠나 물설고 낯설은 전남 해남의 백부댁에 양자로 입양된 고독한 문학적 환경과 동질적이다.그래서인지 장복겸은 고산 윤선도보다 30년 후세인으로 자신이 지은 〈고산별곡〉은 윤선도(1587 -1671)의 〈산중신곡〉이나 〈어부사시사〉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옥경헌은 그가 양육되었던 외가에 후사가 없고 서자만 있으므로 국전에 따라 전답을 고루 분배함으로 제사를 지낼 서자를 위해 자신에게 분배된 재산을 내놓을 정도로 당시의 서얼제도에 대해 비판적인 선각자였을 뿐만 아니라, 핍박받던 민중에 대해서도 남다른 애정을 지닌 사대부였다. 그는 현종 11년(1670년) 극심한 흉년으로 기근이 심해지자, 백성들을 위한 환상(還上)제도가 오히려 고리(高利)의 이식(利殖)으로 민생고를 부추기는 원인이 되며, 사농공상 중 농사짓기가 가장 힘든데 선비는 무위도식하는 계층이기 때문에 소학과 사서를 터득한 업유(業儒), 활과 말타기를 익힌 업무(業武), 나머지 무리를 업농(業農) 등 3등급으로 분류하고 유의유식(遊衣遊食)하는 무리들을 없애야 한다는 구폐소(救弊疏)를 올린 민주적인 의무론을 제기한 선각자였다는 것이다. 실제 이 당시에는 굶주림에 시달리는 백성들에게 높은 이율로 국고의 쌀을 대여하고 가을에 수확한 곡물을 무자비하게 착취하여 자신의 재산을 축적하는 가렴주구의 지방관들이 많았다. 그래서 지방 곳곳에서 민란이 자주 일어났고, 마침내 동학혁명의 농민전쟁이 일어난 도화선도 되었다.옥경헌은 지배계급인 사대부 계층을 혁신하여 각자 소임을 다함으로써 공정한 사회를 이루어야 하고, 민중들을 이러한 지배자의 부당한 수탈로부터 벗어나게 함으로써 백성들이 잘 살 수 있는 좋은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선진사상의 소유자였다. 그런 사대부였기 때문에 고리의 환상제도의 폐해를 없애야 하고 무위도식하는 유학자들을 각자 소양에 따라 업유, 업무, 업농의 3부류로 나누어 일하게 해야 한다는 혁신적인 구폐소를 왕께 올리기도 했다. 이러한 사대부들이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나면 분연히 의병에 가담하여 나라를 위기로부터 헌신적으로 구해낸 선진 지배자나 민중들이 많았고, 이로써 조선사회의 삶의 문화가 세계적인 선진대열에 설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옥경헌은 집문 밖 시냇가 독뫼(일명 고산)에 불고정(不孤亭)을 짓고 수많은 시문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도 아름다운 우리말과 글로 〈고산별곡〉 10수의 연시조를 남겼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이 작품은 「옥경헌유고」 가사(歌詞)편에 〈고산별곡〉이라는 제하에 실었는데, 고산과 서호의 절경에 옥경헌과 불고정을 짓고 달 밝은 밤, 서늘한 바람, 흐드러지게 핀 꽃들 속에서 자연처럼 살아가는 자신의 삶이 그 연시조에 담겨있다, 거개의 강호류의 시가들이 자의든 타의든 환로(宦路)에서 벗어나 자연에 묻혀서 그 아픔을 달래고 자위하는 수단으로 음풍농월한 것과는 달리 장복겸의 〈고산별곡〉은 애당초 벼슬길과 무관한 순연한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 가치 있는 처사적 인생을 노래했다는데 남다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1]청산(靑山)은 에워들고 녹수(綠水)는 돌아가고 석양(夕陽)이 거들 때에 신월(新月)이 솟아난다일존주(一尊酒)가지고 시름 풀자 하노라 (중략)[5]옥경헌(玉鏡軒) 잠을 깨어 눈유장(嫩柳莊) 안니다가 청계석(靑溪石) 흩디디어 불고정(不孤亭) 올라가니아이야 일호주(一壺酒) 가지고 날을 찾아 오너라(중략)[10]국 안주(安酒) 깊은 잔 좌상(座上)께 나소오고 노래 춤 장고 북은 젊은이 맡겨두고아이야 종이 붓 먹 들여라 연구(聯句)한 작 하옵세[1]의 청산은은 여타 은일류의 작품이 그러하듯 청산, 녹수, 석양, 신월, 일존주를 주된 소재로 하고 있다. 청산은 첩첩이 안으로 에워싸고 있지만 녹수가 돌아서 주야장천 흘러가는 공간을 제공하는 가운데 한낮이 지나면 석양이 오고 석양이 지나면 동녘에 청신한 새달이 솟아오른다는 만유불변의 이법을 제시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왜소하고 변화무쌍한 인간들에 대한 서글픔을 노래하고 있다. [5]의 옥경헌은 하루의 일상을 압축하여 마치 일기 쓰듯 서술하고 있다. 옥경헌에서 잠을 깨어 눈유장에 있다가 푸른 이끼가 낀 징검다리를 지나 불고정에 올라서 술과 벗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10]의 국안주는 고산별곡의 마무리 장으로서 시주(詩酒)와 벗, 달, 거문고로서 위안을 삼아 보지만 그것만으로 자위할 수 없는 화자는 고려속요 청산별곡의 마지막 8연과 같이 깊은 잔(盞)많은 술에 자신을 의지하여 현실의 아픔을 달래었고, 더욱이 노래, 춤, 장고, 북소리를 즐기며 인간 본연의 고독을 치유하려 안간 힘을 쓰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고산별곡은 청산, 녹수, 석양, 신월, 술, 삼척금(三尺琴) 등 자연을 주요 소재로 삼아 시를 읊조리는 가운데 세상시름과 번뇌를 잊고 자연과 더불어 소일하면서 자오자락(自娛自樂)하는 게 작자의 주된 정서다. 옥경헌의 작품도 이념을 앞세운 정제된 소재나 공식화된 소재로서 시조작품을 생산하는 일반적인 고시조와 마찬가지로 작품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출세하여 세상에 나가지 아니하고 초야에 묻혀 지절을 노래할 때 으레 관례적으로 물이나 달을 등장시키면서 더욱이 인간이 아닌 달을 유일한 벗으로 노래하고 있는 것은 고산 윤선도가 수석송죽월의 자연을 오우(五友)로 삼고 있는 경지와도 동질적이어서 이 두 작품의 상관성이 있었음직도 하다. 옥경헌의 문학적 배경이 된 불고정은 남원부 거녕현(현 전북 임실 지사면 영천리)에 장복겸이 세운 정자이다. 집문 밖에 독뫼라 부르는 작은 고산(孤山)이 있는데, 그 산 위에 정자를 지어서 불고정(不孤亭)이라 하였다. 이는 정극인이 전북 정읍 칠보 동진강 가에 초옥을 짓고 근심 걱정을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불우헌(不憂軒)이라 이름한 것과 궤를 같이 한다. 고산(孤山)과 불고(不孤)의 아이러니는 옥경헌 스스로의 심회를 드러낸 것이지만, 그 행장을 보면 소동파가 산은 외롭지 않다라고 한 말에서 취의(取義)했다고 기록되어 전한다. 장복겸은 때로 이 정자에 노닐며 스스로 외로움을 달래고 외롭지 않음을 읊조리기도 했고, 달 밝은 창가에 고요히 앉아 도의를 강론하고 학문을 닦는 즐거움을 스스로 누리며 살았는데 바로 이러한 것들이 불고정이라고 명명한 작자의 의취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산별곡〉 10장의 연시조가 300 여 년 전에 전북 임실 영천에서 장복겸에 의해 생산되어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나 〈산중신곡〉과 더불어 나란히 어깨를 겨루고 우리 국문학 의 시가작품의 질량을 높였다는 사실은 자못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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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3.14 23:02

양해완 김제시 청하면장, 4번째 시집 〈어머니의 눈물〉 발간

양해완 시인(김제시 청하면장)이 4번째 시집 <어머니의 눈물>을 발간했다.애절한 사랑과 이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나태한 자신을 다스리는 자아성찰, 이웃에 관심을 보이는 이타적 사랑 등 4부에 걸쳐 실린 시집은 자신이 5년간 쓴 79편의 시(詩)를 곰삭여 놓았다가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삶을 묶어 시로 구성했다.안 도 전북대 평생교육원 교수는 시평을 통해“양해완 시인의 시를 마주하면 우리를 순수한 존재의 세계로 데려다 주는 것 같다”면서 “우리가 얼마동안 살았는가에 상관 없이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이 우리의 가슴에 와 닿으리라고 생각한다. 영혼의 방향과 삶의 지혜를 선물한 것 같다”고 평했다.양 시인은 “금번 시집을 통해 독자들의 안에 있는 사랑을 일깨우고 깊어져서 자신을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고 타인과 세상을 사랑하길 희망한다”면서 “우리들 영혼의 고향인 어머니에 대한 아릿한 그리움을 시에 담고 싶었다”고 말했다.2005년 중앙문예 월간지 ‘문예사조’신인상으로 등단했으며, 전북도·전주시·김제시 문인협회, 전북문학포럼 회원, 전주시인협회 이사로 활동 하고 있으며, ‘그대는 내 영원한 그리움’, ‘어머니’ 등의 시집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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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대우
  • 2014.03.14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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