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5-11-08 22:41 (Sat)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문화 chevron_right 문학·출판

전북문학상 시상식…서정환·김계식·이경아씨 수상

전북문인협회(회장 정군수)가 주최한 제25회 전북문학상 시상식이 11일 전주시 완산구청 대강당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이날 시상식에는 김완주 도시사, 조배숙 전 국회의원, 선기현 전북예총회장, 허소라 전 석정문학관장, 소재호 석정문학관장, 전북문인협회 회원 등 250여 명이 찾아 수상자들을 축하했다. 제25회 전북문학상은 수필가 서정환씨와 김계식이경아 시인이 수상했으며, 수상자들은 각각 상패와 창작지원금 200만 원을 받았다. 정군수 회장은 전북문학상을 수상한 세 분은 치열한 창작력과 사려 깊은 화합정신으로 전북문단의 발전에 큰 빛이 되는 분들이라며 앞으로도 더욱 정진하여 한국문학의 찬란한 지평을 열어가는 문인이 되시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서재균 심사위원장(아동문학가)은 심사평을 통해 많은 후보자들 가운데서도 이날 수상하게 된 수상자들은 워낙 돋보이는 문인들이었다면서 이목윤김경희안도정군수 심사위원 모두의 의견일치로 수상자를 선정했다고 밝혔다. 전북문학상을 수상한 순창 출신의 수필가 서정환 씨는 1970년 신아문예사와 신아출판사를 설립, 명문기업장수상을 받은 문인이면서 출판인으로, 1994년 계간 <문예연구>지 수필부문 신인상으로 수상하며 등단했다. 수필집 <황의순 추모문집> <동백꽃 사연>등이 있다. 정읍 출신의 김계식 시인은 전주교육장을 지냈다. 2002년 <창조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시선집 <자화상> 등 13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군산 출신의 이경아 시인은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했으며, 1965년 성원문학상으로 등단했다. 시집 <물 위에 뜨는 바람> 등 5권을 냈다.

  • 문학·출판
  • 김원용
  • 2014.01.13 23:02

"임실은 옛부터 전략요충지였다"

육군 35사단을 받아들이면서 임실이 최근 새로운 군사도시로 부상했지만, 임실은 이미 고대부터 전략적 요충지였다. 백제와 고려를 거쳐 조선으로 이어지는 동안 임실에 14개의 산성과 13개의 봉수대가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임실문화원(원장 최성미)이 군산대박물관의 도움을 받아 지표조사를 토대로 발간한 <임실의 산성과 봉수>에서 산성과 봉수의 구체적 위치와 규모 등이 밝혀졌다.지표조사는 지상에 분포되어 있는 정도만 정리하여 놓았기에 완벽할 수는 없지만 이를 근거로 대대적인 발굴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고대 임실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주위에 산재되어 있는 모든 유물유적을 알고, 알아야 잘 보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최정미 원장은 <임실의 산성과 봉수>이 또 하나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며, 임실의 역사 문화유산에 대한 자긍심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전북도 기념물로 지정된 임실 성미산성에 대한 발굴조사만 이루어졌을 뿐 다른 산성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가 미미한 실정에서 임실문화원은 2012년 군산대박물관과 지표조사 계약을 체결하고 조사를 진행했다.이번에 발간한 이 책은 그 성과물. 임실군의 역사고고학적 배경과 함께, 주변 마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면담조사를 바탕으로 현지 조사를 통해 산성의 축조기법규모잔존 현황내부 시설들을 정리했다. 14개 산성은 성미산성 외에 관촌면 방현리신평면 대리관촌면 슬치리성수면 월평리덕치면 장암리삼계면 덕계리삼계리 2곳세심리흥곡리오수면 둔덕리 산성 등이다. 또 변방의 급한 소식을 가장 신속하게 중앙에 전달하는 통신방법인 봉수가 임실군에서 10여개소 발견됐으며, 더 많은 봉수가 조사될 가능성도 있다고 조사단은 밝혔다.임실군에 산성과 봉수가 밀집 분포된 것과 관련, 조사단은 삼국시대 때 교통의 중심지와 전략상 요충지라는 고고지리적인 요인과 관련이 깊다고 보았다.

  • 문학·출판
  • 김원용
  • 2014.01.10 23:02

우리 고장 큰 인물의 겨레사랑 '물씬'

사람이 세상에 나 가장 귀한 소치는 인륜이 있음으로서다. 군신 부자는 인륜의 으뜸이니 임금은 어질고 아비는 인자하고 자식은 효도하고 그런 연후에 나라를 이룩하고 능히 무량한 복록을 누리는 것이로다. (동학농민혁명 무장포고문 중에서, 1894년)국가의 성립 조재의 총괄적 기초는 무엇일까요. 종교이겠습니까. 권력이겠습니까. 정의이겠습니까. 이것이 모두 국가 존립에 관한 근본적 사실의 일부를 표징함에 불과한 것이요, 전적 근본관념을 천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적 진리를 통일하여 어떠한 국가제도에 있어서도 그 성립과 존재의 사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려면 민중의 장유활동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김병로 국가의 근본의와 민중의 자유중에서, 1932년)대개 한 지방의 성격은 그 지방의 민요에 나타나거니와, 전라도 민요의 대표적인 홍타령은 아이고 어쩔거나하는 비창한 가사와 아이고 대고 흥 성화가 났네의 후렴곡으로 맺는다. 이것은 백절불굴의 굳센 이지로서 자기의 역경을 극복해 나가겠다는 굳은 신념이 없는 까닭이다. 우리는 새해부터 굳센 의지를 갖도록 노력해야겠다.(고형곤 전라도적인 것중에서, 1960년)사단법인 전북향토문화연구회(회장 이치백)가 발행한 전라문화연구24집이 전북인 근대 명논설 20선을 특집으로 다뤘다. 여기에는 구 한말 한글전용과 의무교육 실시를 주장한 이기의 일부벽파론, 의병장 임병찬의 대마도 유배일기,의병장 이석용의 日主 睦仁에게 보내노라, 김영상의 항일단식 절명사, 이병기의 시조와 그 연구, 김상기의 동학란, 박한영의 一言訛傳害濫洪水, 김환태의 비평문학의 확립을 위하여, 하경덕의 연합군 환영사, 이영춘의 농촌위생연구소 설립 취지서, 김성수의 부통령 사퇴서, 윤제술의 민주국국 선언문, 정인승의 민족사적으로 본 조선어학회 사건, 이강오의 한국의 신흥종교, 송준호의 택리지와 이중환, 이규태의 한국인의 의식구조가 포함됐다.이치백 회장은 이들은 각계 각층에서 나라와 겨레의 발전을 위해 가장 선두에서 활동했던 우리 고장의 큰 인물들이다며, 그 명성으로나 내용에 있어서 그야말로 우리 국가를 대표할 만한 자랑스런 명논설로 우리 고장 선각자들의 겨레사랑의 정신을 새삼 느꼈다고 간행사를 통해 밝혔다. 명 논설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를 기점으로 삼았고, 생존인물의 글은 제외했다. 장명수 주명준 허소라 오하근 박순호 최병운 이희환 소재호 김남곤 이경재 박명규 이치백씨가 선고위원으로 참여했다.

  • 문학·출판
  • 김원용
  • 2014.01.10 23:02

재치있는 언어로 풀어낸 로맨스 소설 〈앙트레로 시작할까요?〉

전주 출신의 우지혜 씨는 인터넷 로맨스 소설 사이트(로망띠끄)에서 꽤 유명한 ‘인사’다. 지난해 7년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습작삼아 올린 ‘소설’이 독자들로부터 인기를 끌면서 전자책 발간으로 이어졌다. 〈여름, 찬란한 그들〉. 감독의 입장이 아닌, 팬과 배우의 관계로 배우의 외국 팬 미팅 자리에서 만나 드라마 제작을 하면서 진행되는 사랑 이야기다. 독자들의 반응과 탄탄한 글 구성력을 인정받아 전자책으로 발간한 데 이어 종이 책 발간을 앞두고 있다.이에 자신감을 가진 우 씨가 인터넷 연재소설과 별도로 장편소설 〈앙트레entree로 시작할까요?〉를 냈다(다향). 종이책 소설로는 첫 저서며, 역시 로맨스 소설이다. 매력적인 레스토랑 셰프와 위대(胃大)한 여자간 사랑 이야기다. 일상에서 펼치는 청춘남녀간 사랑의 줄다리기가 유쾌하면서도 재치 있는 언어로 전개된다. 저자는 두 소설 모두 자신의 경험담을 모티브로 삼았단다. 실제 한 남자 배우가 좋아 회사를 그만 둔 뒤 그 배우가 외국에서 팬 미팅 행사를 갖는다는 사실을 알고 그 나라로 여행을 갔으며, 그 추억을 모티브로 소설로 만들었다. “여유 있고 능력 있는 남주인공에 청순가련형의 여주인공을 등장키는 게 로맨스 소설의 정형인 데, 여주인공의 캐릭터를 똑똑하고 잘 난 쪽으로 잡아보았습니다. 정형화 된 틀을 벗어난 그런 변화 때문에 좋아들 하는 것 같습니다.”성균관대에서 유전공학을 전공한 저자는 학창시절부터 책읽고 글쓰기를 좋아했지만 이렇게 단숨에 소설책까지 낼 줄은 본인도 생각지 못했단다. 전주에서 세무사로 활동하는 우찬도 씨가 아버지다.

  • 문학·출판
  • 김원용
  • 2014.01.10 23:02

[14. 홍규권장가 (하)] 가난 이겨낸 조선 여인의 슬기

한심하다 이내몸이금의옥식(錦衣玉食) 쌓였을 제전곡(田穀)을 몰랐더니일조(一朝)에 빈천(貧賤)하니이대도록 되었는가이목구비 같이 있고수족이 성성하니제 힘써 치산(治産)하면어느 누가 시비하리저런 욕(辱)을 면하리라분한마음 깨쳐먹고치산범절(治産凡節) 힘쓰리라김 부자 이 부자는씨가 근본 부자리오밤낮없이 힘써 벌면낸들 아니 그러할까오색 당계(唐系) 오색실을줄줄이 자아내어 육황기 큰 베틀에필필(匹匹)이 끊어내니한림(翰林) 주서(注書) 조복(朝服)이며병사(兵使) 수사(水使) 융복(戎服)이며녹의홍상(綠衣紅裳) 처녀치장청사폭건(靑絲幅巾) 소년의복 원앙금 수(繡) 놓기와봉황단 문채(文采)놓기(중략)딸아 딸아 아기 딸아시집살이 조심하라 어미 행실 본을 받아괴똥어미 경계(警戒)하라딸아 딸아 아기 딸아어미 마음 심란하다여자의 유행(有行)에부모 형제 멀었으니 명춘(明春) 3월 봄이 되면너를 다시 만나리라나이 15세가 되자 고르고 또 골라서 강 절강의 반가(班家) 손부(孫婦)로 출가를 하게 되지만, 끼니를 이을 수 없는 가난의 극한상황에 처한다. 매파의 말이나 집안만을 보고 혼인한 경우 민요나 규방가사에서 흔히 대할 수 있는 상황이다. 가난의 어려움을 겪어보지 못한 화자는 난생 처음 배고픔의 고통이나 슬픔을 극복할 수 없는 절망에 갇혀 어찌할 바를 모르지만, 이내 슬기롭게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적극적인 방편을 제시한다. 이것이 인고와 인종을 바탕으로 하여 어려운 현실을 타개해왔던 조선조 여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미덕이요, 슬기였다.이 단락에선 비단 옷과 기름진 밥을 먹으며 유복하게 살아 왔던 화자는 거친 밭곡식의 음식이 어떤 것인지 꿈에서라도 몰랐는데, 하루아침에 가난에 처한 자신을 보며 한심하다 이 내 몸이 금의(錦衣) 옥식(玉食) 쌓였을 제/ 전곡(田穀)을 몰랐더니 일조(一朝)에 빈천(貧賤)하니라며 가난의 서러움을 절절히 토해낸다. 가난의 극한상황에 처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 서러움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는 법이다. 그러나 작중화자는 이런 가난에 머무르거나 절망을 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이를 극복하는 방편으로 치산의 방법을 선택한다. 즉 수족(手足)이 성성하니 제 힘써 치산(治産)하면/ 어느 누가 시비(是非)하리라며 극한의 가난을 탈출하기 위한 피땀 어린 고된 살림살이를 꾸려나감으로써 집안을 일으켜 치부(致富)할 수 있다는 여장부의 모습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베를 한 필 두필을 짜서 팔며, 관복이나 여성의 녹의홍상(綠衣紅裳) 옷 짓기, 소년의복과 노인핫옷 만들기, 원앙금침 수놓기를 하되, 낮엔 육행기(肉杏機) 베틀에서 두 필(匹)의 베를 짜고 밤엔 바느질 다섯 가지를 해서 돈을 모은다. 이 외에도 누에치기와 닭이나 개, 돼지 기르기 등 육축(六畜)짐승을 길러내어 장에 내다팔아 돈을 번다. 그리고 전답을 사들여 농사짓기로 부를 일구어서 시집온 지 10년 만에 가산이 10만에 이르는 큰 부자가 된다. 치부한 재산으로 훌륭한 스승을 모셔다가 아들 형제 잘 가르쳐서 과거에 급제시킴으로써 내외 해로(偕老) 부귀(富貴)하니 팔자도 거룩하다라 만족해한다. 시집가는 딸에게는 아름다운 부부금술과 바른 행동거지, 처신범절과 칠거지악을 조심해야하고 가산을 탕진해 거지신세를 면치 못한 괴똥어미를 언제나 경계 삼으라고 훈계하고 있다. 내 나이 쉰 살이나 남편에게 조심하기 화촉동방(華燭洞房) 첫날밤과 일분(一分)인들 다를소냐라며 지천명의 나이에도 부부는 언제나 신혼 첫날밤처럼 살아야 한다고 초심(初心)을 강조한다. 정성스런 손님맞이(接賓客)와 절약과 검소를 바탕으로 한 올바른 세간 살이 방법을 이르며 무당 같은 미신에 빠져서도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하루아침에 가산을 탕진하고 거지로 전락해버린 괴똥어미를 상기시키며 착하게 살면 복을 받고 음란하면 재앙이 온다는 복선화음(福善禍淫)을 경계하고 있다. 결사에 이르러 금지옥엽 같은 딸을 연이어 안타깝게 부르며 시집살이 조심하고 어미의 행실을 본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은 어머니는 또 한 번 괴똥어미와 같은 나태하고 허랑한 여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시집가는 딸에게 간곡하게 호소하며 심란한 어미의 심사를 술회한다. 여자의 행실 여하에 따라 부모 형제간의 정의(情誼)가 달렸음을 경계하고 내년 봄이 되면 다시 딸을 만나기 위해 올 것이라 위로하면서 자신과 시집가는 딸의 위안의 방편으로 장형의 홍규권장가를 맺고 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14.01.10 23:02

소재호 신임 석정문학관장 "시인 해변학교 개설 문학토론"

“석정 선생님은 문학적으로 한국문단에 우뚝 섰을 뿐아니라 전북문단을 기름지게 만들었습니다. 석정을 기리는 것은 개인의 영예가 아니라 전북문학, 나아가 한국문학을 곧추 세우는 일입니다.”초대 허소라 시인에 이어 제2대 석정문학관 관장직을 맡은 소재호 시인(68)은 석정 시인의 전국 문학사적 위상과 이미지를 바탕으로 문학관의 외연을 넓히는 데 관심을 갖겠다고 말했다.이미 석정문학회 회장을 맡아 석정 관련 활동에 깊숙이 발을 디딘 소 시인은 고교시절(전주고) 석정으로부터 직접 수업을 받았던 제자이기도 하다. 작고한 이병훈·황길현·김민성 시인을 비롯, 허소라 전 회장·이기반·최승범·김남곤·정군수·안도 시인, 홍석영·오하근 원광대 명예교수 등이 석정 선생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전북의 대표적 문인들이다.“석정문학회에서 발간하는 문학지에 게재할 원고를 청탁하면 전국 각지의 문인들이 기꺼운 마음으로 응해줍니다. 석정의 문학적 위상을 말해주는 것이죠. 석박사 학위 논문과 문학평론으로 석정 선생의 시가 지금도 연구되고 새롭게 조명될 만큼 석정이 남긴 문학적 발자취는 넓고 깊습니다.” 석정 시가 이미지적으로도 현대시의 흐름에 빛을 바래지 않으며, 세류에 영합하지 않은 선비 정신·민족정신을 고스란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추앙받는다고 설명했다.실제 지난해 10월 한 달간 석정문학관을 찾은 방문객이 2000명에 이르는 등 문학관을 찾는 이들의 발길일 끊이지 않고 있단다. 소 관장은 이런 에너지들을 모아 부안지역의 특성을 살려 여름철 시인 해변학교를 개설해 문학기행과 토론, 심포지엄 등의 행사를 열 계획이다. 또 석정 시 달력과 작은 책자의 시집 발간을 준비중이다.석정의 대표작인 ‘촛불’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게 대형 초를 제작해 문화 상품으로 내놓을 구상도 내놓았다.소 관장은 석정문학관이 석정의 문학을 기리는 데 머무르지 않고 부안 출신 문인들을 모으고, 미술관의 역할까지 겸해 부안의 문화를 아우르는 공간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미당 문학관과 최대 고인돌 군이 있는 고창과 연계할 경우 국내 최고의 문학벨트가 될 것이란 점도 강조했다.남원 출생의 소 관장은 1984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전북문단 주간·전북문인협회장·원광문인협회장·전북예총 이사 등을 맡았다. 전주완산고 교장을 지냈다. 시집 ‘이명의 갈대’, ‘용머리 고개 대장간에는’ 등을 냈다.석정문학관은 부안읍 선은리 고택 주변 1만6870㎡(5300여평)의 부지에 들어서 있다.‘촛불’을 비롯한 석정의 5개 대표시집과 유고시집, 친필원고, 생활유품 등이 상설전시실에 전시되고 있으며, 서한·도서 등 5000여점의 유물이 보관된 수장고, 시비(詩碑)가 설치된 시비 공원 등이 들어서 있다.

  • 문학·출판
  • 김원용
  • 2014.01.07 23:02

2014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자들 뒷 이야기

문학인의 등용문인 신춘문예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수 천편의 응모작 속에는 다양한 사회 군상과 삶의 애환들이 담겨 있다. 전북일보 2014년 신춘문예에 접수된 1400여편의 작품들 중에도 정치적 혼란, 분단 상황, 소외계층의 힘든 생활, 경제적 모순, 왕따 문제, 가족의 해체, 사회부조리 등의 문제들이 시와 소설수필 등으로 분출됐다.참여자들은 초등학교 어린이부터 80대 노인까지, 국내뿐 아니라 미국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 등 해외에서도 본보 신춘문예에 관심을 보였다. 습작으로 재미삼아 신문사 여기저기에 제출한 사례도 있고, 매년 단골손님으로 내는 응모자도 있다. 당선 연락이 되지 않을까봐 외국에 나갔을 때 연락처를 알려주려는 응모자, 외국 거주 응모자를 대신해 연락처를 남긴 국내 친지 등은 당선에 대한 믿음과 기대를 가진 경우다. 예선과 본선 심사위원들의 심사평을 종합하면 올 본보 신춘문예 본선에 오른 작품들의 경우 대체로 수준급이었으며, 특히 당선작으로 뽑힌 당선 작가들에 대한 앞으로 활동에 큰 기대를 걸었다. 본보 당선자 4개 부문에서 시와 동화 부문은 20대에서, 수필과 소설은 40대에서 당선자가 배출됐다. 나이 든 당선자가 많았던 때에 비해 극적이지는 않지만, 당선되기까지 뒷이야기와 사연이 많은 것은 마찬가지다. 시 당선자인 노동주씨(29, 김제)는 전주교대를 졸업하고 현재 김제 진봉초등학교 교사로 재직중이다. 대학시절 문학동아리에서 활동하던 그의 재능은 동아리 선배들이 먼저 알아보았다. 선배들이 용돈을 모아 본격적인 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지원했단다. 2010년 본보 신춘문예 본선에 오른 적도 있으며, 3번 도전 끝에 당선의 영예를 안았다. 군대에 있는 동안 공백이 오히려 에너지를 응축하는 계기가 된 것 같다고 할 만큼 신춘문예를 앞두고 집중적으로 시를 썼다. 당선작인 시소가 있는 풍경역시 시가 잘 안돼 학교 교무실에 앉아 밖을 바라보다 영감을 얻어 응모 이틀 전에야 완성시킨 작품이란다. 시를 건축물에 비유해 기둥을 손질하면 모든 얼개를 다시 짜야 하듯 퇴고 과정이 가장 어렵다고 했다.수필 당선자인 한경희씨(43, 김제)는 원광대 사회복지학과와 군산대 영문과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인터넷신문 시민기자로 활동했다. 수필에 본격적으로 입문한 것은 2년 전 원광대 평생교육원에 적을 두면서부터며, 방송문화진흥원 주최 방송비평상, 홍천문인협회 주최 해가람여성문예공모전 '큰상'을 받은 경력을 갖고 있다. 한씨는 삶에 회의가 들거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으로 수필을 접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노년 혹은 퇴직자들도 수필을 통해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수필예찬을 곁들였다.개인적으로는 기존의 수필 형식을 고집하지 않고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싶단다. 기성 문단에서 부정적으로 볼 수 있겠지만, 시 혹은 소설을 접목시키는 작업이 그 예다. 당선 소식이 준비운동을 채 끝내기 전에 울린 마라톤 출발 신호 같았다는 소감으로 더 많이 공부하겠다는 각오다. 동화 당선자 김정미씨(29)는 제주도에서 대학까지 졸업한 후, 현재 서울에서 사보기자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본보 신춘문예와 함께 연말 〈어린이동산〉잡지에 중편 동화가 뽑히는 겹경사를 맞았다. 전북과는 특별한 인연이 없지만, 사랑의열매사보 취재차 전북을 방문해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단다.어려서부터 글짓기대회를 휩쓸었던 그는 동화가 좋아 직장을 접고 2년 전부터 동화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사보 기자는 생업이며, 동화를 쓸 때 참 즐겁고 행복하단다. 무난하게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동화를 쓰면서 어린 시절 상처를 문득 발견하고 치유받기도 한다고 동화의 매력을 설명했다. 아직 미혼인 그는 멀리 보고 결혼 후 자녀에게 들려줄 수 있는 좋은 작품들을 쓰고 싶다고.소설 당선자 고동현씨(44, 경기 화성)는 성균관대 산업공학과 출신으로, 대학시절 문학동아리 활동을 하며 소설가의 꿈을 키웠다. 그 꿈을 향해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7년 전 자신이 다니던 한국까르푸가 한국에서 철수한 게 계기가 됐다. 소설탄생동인 모임에서 활동하며 전업 작가의 길을 모색했으나 문단과 현실의 벽 앞에 힘든 시절을 겪었다. 그는 그 과정을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했다. 2편의 장편소설과 1편의 중편, 20여편의 단편소설을 습작하는 과정이 그의 문학적 역량을 키웠다. 철도문학상 수상과 대한민국 디지털작가상을 수상하면서 그 가능성을 열었다. 그의 소설에는 아프거나 소외받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많이 등장한다. 앞으로 카프카의 소설처럼 환상과 현실의 경계 사이에서 고민하고 삶의 본질을 묻는 글들을 쓰고 싶다고 했다.본보 신춘문예 시상식은 15일 오후 2시 본사 7층 회의실에서 열릴 예정이다.

  • 문학·출판
  • 김원용
  • 2014.01.03 23:02

문학평론가 이경호 에세이집 〈사랑의 황금률〉

국내에서 한 해에 시상하는 문학상은 어림잡아도 수백 개에 이른다. ‘동인문학상’이나 ‘이상문학상’처럼 유명 언론사나 문예지에서 제정한 문학상도 있고 문학 동호인들끼리만 조촐하게 수상자를 선정해 서로에게 알리는 문학상도 존재한다.지방자치제가 시행되면서 문학상은 더 늘어나는 추세다. 지역의 발전을 도모하려면 문화행사에 대한 투자가 필요하다는 취지로 해당 지역 출신 문인을 기리는 문학상이 활발하게 제정되고 있는 것이다.문인들의 처지를 감안하면 등단의 기회를 제공하고 개개인의 문학적 성취를 대내외에 알리는 역할을 하는 이런 문학상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것 같지만, 문학평론가 이경호 씨는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문학상에 유감을 표한다.이씨는 에세이집 〈사랑의 황금률〉에서 그 많은 문학상이 제각기 독특한 위상과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황금알).문학상의 내실보다는 명분을 앞세우기에 급급해서 빚어진 결과라고 그는 지적했다.이씨는 무엇보다도 각각의 문학상이 자기만의 색깔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특히 작고 문인의 유업을 기리는 취지에서 문학상이 제정된 경우에는 작고 문인의 문학관을 계승하거나 그것과 유사한 문학 작업을 선보이는 작품들 속에서 수상작을 선정해야 한다고 했다.“문학의 다양한 가치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일에 ‘소월문학상’과 ‘김수영문학상’의 역할이 구분되지 않는다면 구태여 두 가지 문학상이 함께 존재할 이유가 없다. (중략) 이러한 유명무실의 결과가 어쩌면 문학에 대한 관심의 위축과 결부된 것 같아서 마음은 더욱 착잡하기만 하다.”(60~61쪽)이씨는 문인 지망생들에게 등단을 미끼로 금품 헌납과 같은 뒷거래를 알선하는 ‘등단 뚜쟁이’, 편협한 기준 또는 상업적인 목적을 위해 작가들의 작품을 평가해주거나 홍보해주는 역할을 하는 문학평론가 등 문학 현장의 어두운 현실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다.더불어 우리 문학계의 그릇된 ‘청탁과 투고’ 관행이 창작의 열정과 능력을 갖춘 문인들에게 돌아갈 기회를 앗아가는 부작용을 낳는다고 꼬집는다. 연합뉴스

  • 문학·출판
  • 연합
  • 2014.01.03 23:02

[13. 홍규권장가] 혹독한 시집살이 이겨낸 여인의 미덕

이 가사는 전북 완주 봉동에서 살아온 소두영 씨의 부인인 광산김씨가 소장해 오던 규방가사를 전북대의 김준영 교수가 수집한 것으로 자신이 1983년에 편찬한 <고전문학집성>에 소개한 가사작품이다. 그는 김씨 부인의 말에 따라 시집오기 전 익산 왕궁에서 외조부가 홍규권정가를 필사해주었다고 그 내력을 밝히고 있지만 작자는 미상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김익주의 손녀라는 구체적 진술과 배행(陪行) 온 오라비조차 돌아가자 할 정도로 어려운 시집살이 등이 괴똥어미전과 너무도 혹사한 규방가사로 복선화음가(福善禍淫歌)와도 상통된 부분이 많은 부녀가사이다. 복선화음가는 조선조 말 김한림의 종손 부인이 지은 규방가사로 이 홍규권장가와도 유사한 작품이다.규방(閨房)가사는 내방(內房)가사, 부녀가사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주로 시집가는 딸에게 어머니가 자기 친정의 문벌이나 혼전생활을 말하고 출가한 시가의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도 자신의 처신, 치산(治産), 태교, 교육 등을 훈계하는 것을 목적으로 창작 유전되어 온 여류작품이다. 주로 부부생활과 시부모 모시기(事舅姑), 제사보시기(奉祭祀), 손님접대(接賓客), 태교, 육아, 교육, 치산(治山), 행동거지(行身), 항심(恒心) 등을 중요덕목으로 삼고 있어 현대여성들에게도 귀감이 될 만한 온고지신의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가사들은 주로 여성을 가르치기 위한 계녀(誡女)형이 주종을 이루고 있지만, 과부가 되어 독수공방의 외로움을 한탄한 상사형(相思型), 화전놀이 같은 야유형(野遊型), 남편을 따라 바깥세상을 유람하는 기행형 등으로 대별된다. 본디 규방가사는 국문학계에선 영남지방 양반가에서 시작되고 분포된 문학장르로 알려져 왔지만, 호남에서도 창작, 유전되고 있는 작품들이 근년에 발굴됨에 따라 그러한 주장만을 인정하기 어렵게 되었다. 김준영 교수의 홍규권장가를 비롯해 필자가 졸저 옛시 옛노래의 이해(2008)에 소개한 고창 지역의 상사별곡(相思別曲), 동명이작(同名異作)의 치산가(治産歌) 1, 2가 그것이다. 어화 세상 사람들아 이 내 말씀 들어 보오 불행하다 이 내 몸이 여자가 되어나서김익주의 손녀 되어 반벌(班閥)도 좋거니와금옥(金玉)같이 귀히 길러 오륙 세 자란 후에 여공(女工)을 배워내니 재주도 비범하다월하(月下)에 수(繡)놓기는 항아(姮娥)의 수법(手法)이오월지예의 깁 짜기는 직녀(織女)의 솜씨로다 (중략)백화(百花)방초(芳草) 화원상(花園上)에 춘경(春景)도 구경하고청풍명월 옥규(玉閨)중에 달빛도 구경하고신신(新新)별미 다담상(茶啖床)도 입맛 없어 못 다 먹고 원앙금침 홍규 중에 책자도 구경하고세시(歲時)복랍(伏臘) 좋은 때에 쌍륙(雙六)도 던져보고설앙 옥비 시비(侍婢)들과 투호(投壺)도 던져보고즐거이 지내더니 십 오세라 연광(年光)차니고르고 다시 골라 강호(江湖)에 출가하니가산(家産)이 영체(零替)하여 수간두옥(數間斗屋) 청강상에사벽(四壁)이 공허하니 우린들 있을 손가 홍규권장가는 모두 252행 504구의 장형 규방가사이다. 서사와 본사 결사의 3단 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서사엔 여자로 태어난 한 많은 자신의 삶의 사연을 들어 보고 후세에 경계삼기를 바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방년 15세가 될 때까지 반벌(班閥) 좋은 김익주의 손녀로 태어나서 금옥같이 귀하게 자라나서 오륙 세에 수놓기와 비단 짜기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10세에 열녀전과 효경편(孝經編)을 익히니 행동거지와 처신범절을 칭찬하지 않는 자가 없는 아름다운 규수, 즉 어엿한 아름다운 아가씨인 홍규(紅閨)로 성장함을 발단으로 하였다. 비단 옷과 좋은 음식이 많으니 굶주림을 어찌 알며, 온갖 꽃들이 가득한 화원에서 봄날을 마음껏 즐기고, 청풍명월 아름다운 규방에서 달빛을 맞으며 그림처럼 아름답게 살아가는 규방여인의 모습이 더욱 선연하다. 새롭고 맛있는 다담상(茶啖床)도 맛보고 원앙 비단금침 규수 방에서 서책도 읽어가며 섣달 제야엔 쌍륙(雙六)도 던지며 즐긴다. 설앙과 옥비같은 계집종들과 투호(投壺)도 던져가며 즐거이 보내다보니 어언 15세 성년이 되어 출가할 때가 당도했다는 것이다. 친정의 부모들이 고르고 또 골라서 출가하여 반벌좋은 강절강의 손부가 됐지만 시가는 한 두간 밖에 안 되는 가난하고 초라한 집이었다. 배행(陪行) 온 오라비조차 눈물을 흘리며 되돌아가자고 했으나, 누이동생은 마땅히 남편을 좇아야 한다는 여자의 운명적인 삼종지의(三從之義)를 말하며 그건 오라비의 실언(失言)이라 강변(强辯)하는 아름다운 여인의 미덕이 이 작품 내면에 흘러내린다. △전일환 교수 한국문학의 원천, 전북문학의 미학기획칼럼을 새해부터 매주 금요일 책과 세상면으로 옮겨 연재합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14.01.03 23:02

김명한 보훈처 전주지청장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전주천변 산보객들의 양태는 다양하다. 자전거를 탄 사람, 힘차게 팔을 휘두른 사람, 부부간 손을 꼭 잡고 걷는 사람,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고 걷는 사람 등등. 이들 누구에게나 천변의 풍광은 보행로를 따라 흐르른 물이다. 김명한 국가보훈처 전주지청장은 전주천에 흐르는 물을 아름다운 교향곡으로 주목했다. 한벽루쪽으로 막 지나면 징검다리에서 돌을 피해가는 잔잔한 물결의 음악이 흐르고, 완산교 앞에서는 물결이 두 갈래로 나뉘면서 돌멩이 사이로 출렁일 듯 말듯 한 음악이 연주된다. 매곡교를 지나 새벽시장에서 채소 파는 아낙네들의 목소리와 자갈 사이를 통과한 물결들이 급하고 높은 소리로 클라이맥스를 예고한다. 싸전다리 밑에서는 그 규모와 웅장함이 절정을 이룬다. 그는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 교향곡은 덤으로 듣는다고 했다.김 처장이 이렇게 일상의 소소함 속에서 특별한 상식으로귀띔 100선을 모았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신아출판사).여기에는 숙면하는 방법운동은 언제 해야 하는가의사들의 건강 4대 비법 등 건강강식, 고위자가 축하받는 이유연설기법동반자 관리와 인맥 형성부탁의 요령즉흥 연설 이렇게 한다등 직장상식, 남자 여자 절하는 방법자녀에게 권하고 싶은 최상의 직업전원주택 이런 곳에 지어라등 가정상식 등을 저자 나름의 경험이 담긴 비법들이 소개됐다.상식과 함께 저자가 언론에 기고한 칼럼 50편을 함께 엮었다.전북대 초빙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는 저자는 <미디어와 쾌락>(강준만 교수 공저)와 <당신이 잠든 곳에 우리마음 함께 있네> 등을 냈다.

  • 문학·출판
  • 김원용
  • 2014.01.03 23:02

[2014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청바지 백서 - 고동현

Y가 실종된 것은 12월 말, 해가 바뀌기 사흘 전이었다. 작업실에 있어야 할 그가 오후 네 시부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사무실의 한 쪽 귀퉁이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은 투명 유리로 둘러쳐져 있었는데, 그가 사라진 것을 의식한 직원은 아무도 없었다. 그를 관리하는 전산부장은 하루 종일 이어진 마라톤 회의에 진이 빠진 나머지 그를 신경 쓸 틈이 없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타 부서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Y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그가 수리해야 할 컴퓨터는 밀려 있었다. 전산 부장은 Y를 파견한 외주 업체에 따졌다.Y가 소속된 외주 업체는 부랴부랴 대체 직원을 보냈다. 작업실에는 컴퓨터 두 대가 분해 된 채 바닥에 널려 있었고, 프로그램을 설치하다 만 노트북이 작업대 위에 놓여 있었다. 전산부장은 몹시 화를 냈다. 임시로 갈음된 직원은 밤늦도록 일해야 했다. 외주 업체는 Y와 연락할 길이 없었다. Y의 인사기록부에는 가족 사항이 공란이었고 관계자의 연락처는 단 하나만 적혀 있었다. 그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지만 없는 전화 번호라는 메시지가 흘러나올 뿐이었다. 평소 그와 가깝게 지내는 직원들도 없었기에 그의 행방을 찾기란 묘연했다. 그 업체에서는 이틀을 넘기지 않고 Y와 연락하기를 포기했다. 언제나 임시직으로만 인원을 뽑아 왔기에 인사 처리는 간단했다. 새 직원을 뽑는 것으로 이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Y의 부재가 가져다 준 혼란은 잠시였다. 그 뒤로 Y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은 없었다. Y 대신 작업실을 차지하게 된 새 직원은 어디부터 손대야 할지 몰랐다. 실내는 몹시 어질러져 있었다. 바닥에 나뒹구는 온갖 전선과 키보드, 마우스 따위를 상자에 담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공구를 모아 서랍에 넣으려고 했다. 그런데 서랍 속에는 노란색 표지의 노트가 한 권 있었다. 작업일지나 매뉴얼일거라 생각하며 무심코 펴보았는데, 의외로 그것은 Y의 개인 노트였다. 그는 노트를 덮고 표지를 보았다. 작은 글씨로청바지 백서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용을 훑어보았다. 수많은 도표와 차트, 그리고 상표별 청바지 정보가 눈에 들어왔다. 간간이 청바지 사진을 프린트해서 붙여 놓은 데도 있었다. 무슨 마케팅 보고서를 연상시키는 노트였다. 그것은 불과 서너 장을 남기고 끝맺어져 있었는데, 마지막 페이지에는 멋을 내듯 쓴 붉은 문구가 한 가운데 적혀 있었다.「무한한 선택의 자유는 최고의 구속이다.」Y의 불행은 넉 달 전에 선물로 받은 셔츠 한 벌로 시작되었다. 그것은 전산부 직원들이 마련한 Y의 생일 선물이었다. 그 회사 직원들은 생일을 맞으면 케이크와 상품권을 받았다. 그 회사 소속이 아닌 Y에게는 그런 혜택이 돌아오지 않았다. 선물은 그의 처지를 감안한 배려였다.Y는 당황하며 선물을 받았다.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선물 상자를 책상에 올려놓았다. 상자 뚜껑에는 금빛 리본이 달려 있었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선물을 받아 본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친척도 없이 홀어머니와 단둘이 살아 왔던 그는 누군가에게 관심을 받을 처지가 못 되었다. 생일 선물이래야 어머니가 요리해준 도미찜이 전부였다. 어머니가 죽은 뒤 혼자 살게 되면서부터는 아예 생일이라는 날을 달력에서 지워버렸다. 그를 축하해 줄 친구도 없었다. 온갖 간섭을 늘어놓는 사람들과 엮이기 싫었던 그는 혼자 지내는 게 편했다.그는 상자를 열고 안에 담긴 셔츠를 펼쳤다. 회사에서 언뜻 보았을 때와 달리 무척 고급스러워 보였다. 원단은 푸른빛이 어린 쥐색 니트였다. 두 팔에는 흰색으로 줄무늬가 새겨져 있고, 가슴은 명치까지 지퍼가 내려오는 스포티한 디자인이었다.청바지에 잘 어울릴 거예요. 이번 야유회 때 입고 오실 거죠?선물을 건네던 여직원이 한 말이 문득 떠올랐다. 마음이 불편했다. 선물이란 언제나 그것에 상응한 무언가를 요구하는 법이었다. 여직원의 말은 야유회에 너저분한 모습으로 오지 말라는 뜻인 것 같았다.청바지라.그는 비키니 옷장의 지퍼를 열고 속을 들여다봤다. 한 가운데에는 검은 양복 두 벌이 자리 잡고 있었다. 두 벌 다 낡은 정장이었다. 바지의 엉덩이 부분은 닳을 대로 닳아서 반질거렸다. 허름한 베이지색 남방이 두어 벌 옷걸이에 걸려 있었고, 그 안으로는 비슷한 색상의 면바지가 있었다. 그는 겨울옷을 넣어둔 비닐 봉투를 풀어 속을 뒤졌다. 두툼한 겨울옷가지를 모두 끄집어내자 그가 찾던 청바지가 보였다. 그것은 무릎 부근에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고 표백제로 빤 것처럼 색이 바랬다. 그는 청바지를 하나 사야겠다고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그날 밤, 그는 쉬이 잠들지 못했다. 원치 않은 선물 때문에 청바지를 사야 한다는 사실이 성가셨다. 그는 생각을 접기로 했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궁상떤다는 말을 들어 온 터라, 그런 이미지를 벗어버릴 기회라고 여겼다.그주 일요일, 그는 청바지를 사러 갔다. 그가 들른 곳은 그의 집 근처에 있는 상설 할인 매장이었다. 그는 옷을 거의 사지 않는 편이었고 한 번 산 옷은 너덜거릴 때까지 입었다. 매장에 들어선 그는 한 번도 청바지를 사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청바지는 학창시절에나 입어보았을 뿐이었다. 더구나 그때는 어머니가 옷을 사다주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서른여덟이 될 동안 그에게 필요한 옷이라고는 많지 않았다. 양복과 와이셔츠가 각각 두 벌씩, 면바지와 남방 한두 벌 정도로 충분했다.그는 청바지 코너로 가서 상품을 훑어보았다. 하나같이 사이즈가 작고 굴곡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전부 여성 청바지였다. 그는 점원에게 남성 청바지는 없는지 물었다. 점원은 고개를 저었다.그는 밖으로 나오면서 조금 짜증이 났다. 필요한 옷은 언제나 그 매장에서 구할 수 있었다. 옷을 사러 다른 곳까지 가자니 귀찮았다. 그는 버스 정류장을 향했다. 네 정거장 거리에 있는 할인 마트에 가기로 했다.마트에 도착한 그는 사 층에 있는 의류매장에 발을 들여 놓았다. 벽을 따라 이어진 가게는 대부분 여성복을 파는 곳이었다. 매장 가운데에는 낮은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가게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었다. 그는 그곳에 다가가 둘러보았다. 모두 캐주얼 의류를 파는 곳이었다. 언뜻 훑어보기에는 가게마다 옷이 그게 그거인 것 같았다. 두리번거리는 그에게 한 가게에서 나온 여점원이 다가왔다.- 어떤 옷을 찾으세요?Y는 단발에 눈 화장이 짙은 여점원의 눈을 들여다봤다. 여점원은 바로 코앞에 서 있었다. 그는 청바지를 찾는다고 대답했다.- 둘러보시겠어요? 어떤 스타일을 원하시죠?여점원이 묻자, Y는 순간 당황했다. 스타일이라니? 그런 것까지 염두에 둔 적은 없었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그냥 평범한 것을 찾는다고 했다. 여점원은 잠시 생각하다가 미소를 떠올리며 진열대에서 청바지 한 벌을 꺼냈다.- 어때요? 요즘 가장 인기 있는 부츠컷이에요. 다리가 길어 보이거든요.Y는 여직원이 가져 온 청바지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무릎 부분이 약간 좁고 그 아래로 내려갈수록 넓어지는 나팔바지 같은 형태였다. 그는 집에 있는 청바지를 떠올려 보았다. 그것은 선이 밋밋하고 특색이라고는 없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보다 평범한 것은 없냐고 물었다. 여직원은 다른 청바지를 꺼냈다. 이번 것은 선이 곧게 빠졌으나 군데군데 물을 뺀 것 같은, 어떻게 보면 얼룩이 진 것처럼 보이는 색상을 띠고 있었다. 여직원은 한 번 입어보라며 청바지를 넘겨주었다. Y는 탈의실에 들어가 자신의 허름한 면바지를 벗고 청바지로 갈아입었다. 헐렁한 느낌이었다. 밖으로 나와 거울에 비추어 보았다. 허리 사이즈는 맞았지만 통이 너무 넓었다.- 기장은 줄이지 말고 그냥 힙합 스타일로 입으셔도 돼요.힙합이라는 말을 듣자, Y는 얼굴을 찌푸렸다. 왠지 학생들, 그것도 자유분방한 학생들과 어울리는 말일 것 같았다. 그는 청바지 진열대로 가서 직접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그가 예전에 입었던 청바지와 같은 디자인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하나같이 선물 받은 셔츠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이마에 맺힌 땀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가게에서 나왔다. 복도의 자판기에서 청량음료를 뽑아 들고 벤치에 앉았다. 캔을 따는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는 것을 보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곳에 있는 모든 가게에 들러보아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려면 자신이 좋아 하는 TV 프로그램을 포기해야 했다. 그것은 신작 영화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고작 청바지 한 벌을 사느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음료수를 비우고 일어나 매장을 둘러보았다. 캐주얼 의류를 파는 가게는 모두 일곱 개였다. 그는 일찍 집에 돌아갈 생각으로 서둘렀다. 하지만 가게에 들를 때마다 첫 번째 가게에서 겪었던 경험을 되풀이해야 했다. 두 군데는 청바지를 팔지도 않았다. 그의 겨드랑이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마지막 가게에 들어 설 때는 신에게 기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행히 그럭저럭 무난한 청바지가 있었다. 그는 숨을 고르며 그 청바지를 입어 보았다. 느낌이 이상했다. 탈의실에서 나와 거울에 서기까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마음에 드세요?점원은 Y 옆에 서서 이를 드러내며 환한 표정을 지었다. Y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왜 이상한 느낌이 드는지 원인을 알아내었다. 바지의 허리가 배꼽보다 한참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바지를 걸치다 만 기분이었다.- 이 허리부분이.Y는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몰라 말끝을 흐렸다. 점원은 잠시 생각하다가 무언가 떠올랐는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골반 바지에요. 요즘은 거의 이런 디자인으로 나와요.Y는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정장이건 캐주얼이건 배꼽 부분에 허리가 있는 바지만 입어 왔기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그는 마지막 가게에서도 청바지를 고르지 못했다. 온몸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뒤돌아서는 그에게 점원이 말했다.- 배바지를 찾으시나보죠? 길 건너편으로 조금 올라가면 청바지 전문 매장이 있거든요. 거기에 한 번 가보세요.Y는 기분이 복잡했다. 전문 매장이라면 확실히 다양한 종류의 청바지가 있을 터였다. 하지만 청바지 하나를 사기 위해 또 다른 매장에 들러야 하다니 무척 짜증나는 일이었다. 게다가 의식처럼 행해온 영화 관람은 포기해야 했다. 일요일 오후가 되면 그는 낮잠을 자다가 영화관을 향했다. 영화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영화관에 있는 시간이 좋았다. 그곳에서는 모두가 스크린을 향해 바라보지만 아무도 서로를 의식하지 않았다. 그는 그 어둠 속에서 묵은 피로를 씻어 낼 수 있었다.그는 복도에서 왔다 갔다 하며 골똘히 생각했다. 그의 시선을 끄는 것은 창가에 쏟아지고 있는 햇볕이었다. 그것은 흐릿하고 지저분한 느낌을 주었다. 탁한 햇볕. 그는 창가로 다가갔다. 먼지투성이 같은 공간 속에서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이 용해되고 있었다.중학교 졸업식이 있던 날이었다. 같이 참석할 수 없었던 어머니는 그에게 돈을 내밀었다. 무엇을 해도 좋으니 의미 있게 쓰라고 했다. 적지 않은 액수였다. 그는 그런 큰돈을 처음 만져보았다. 졸업식을 마친 뒤, 그는 번화가로 갔다. 몇몇 친구들이 신고 있는 운동화를 생각했다. Y가 가진 돈이면 그런 운동화를 사기에 충분했다. 신발 가게에는 생각보다 많은 운동화가 진열되어 있었다. 그는 차례로 신어 보다가 가게를 빠져 나왔다. 자신이 입고 있는 남루한 옷과 어울린 만한 운동화는 없었다. 그는 장난감 가게에서 멋진 모형들을 보면서 꽤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막상 사려고 하면 그것이 의미 있는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옷가게에도 들러보았고 가방을 파는 곳도 거쳤다. 그럴 때마다 시계, 음반, 장식물, 축구공이나 어머니를 위한 선물 같은 대안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번화가를 다 둘러보았지만 한 푼도 쓰지 못했다. 어머니가 차라리 무엇을 사라고 꼬집어 주지 않은 게 원망스러웠다. 그 날, 늦겨울의 햇살은 무척 탁해 보였다.거리를 배회하던 그는 졸업식에 오지 않은 한 친구를 만났다. 수업을 빈번하게 빼먹던 친구였다.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던 Y는 별 생각 없이 친구를 따라 갔다. 친구가 이끈 곳은 전자오락실이었다. Y는 친구와 함께 신나게 버튼을 눌러대었다. 자정이 가까워져서야 그곳에서 나왔고, 남은 돈은 친구가 빌려갔다. 그제야 그는 전기가 만들어 낸 영상의 흐름 속에 자신의 돈을 탕진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밤중에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그는 절도범으로 잡혀 있는 친구를 경찰서에서 보아야 했다. 친구는 Y가 빌려준 돈으로 절단기 따위를 구입해 그 오락실을 털은 모양이었다. 그 일이 있은 뒤로 Y는 물건을 고르는 일이 피곤했고 가능하면 돈을 쓰지 않았다.- 어머, 미안해요.Y의 엉덩이에 묵직한 느낌이 와 닿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한 중년 여자가 쇼핑 카트를 밀며 지나가고 있었다. 카트는 넘칠 듯이 가득 차 있었다. Y의 기준으로는 한 달 내내 먹어도 남을 만큼의 식료품이었다. 그는 그 여자가 저 많은 상품을 사기 위해 얼마나 시간을 들였을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그러고는 창가에 바싹 붙어 길 건너편을 응시했다.청바지를 지금 사지 않으면 언제 사야 한담? 평일에는 안 돼. 평일에 무리해서 돌아다니면 다음 날 힘들어질 거야. 무엇보다 여기까지 나오는 게 부담이잖아. 여기 나온 김에 끝장을 봐야 해. 그러지 않으면 오늘 써버린 세 시간이 아깝잖아? 영화는 어쩐담? 그래. 포기하자. 세탁소에 마름질을 맡기려면 오늘 사는 게 좋아. 야유회는 다음 주잖아.그는 발걸음을 재촉해 건너편 매장을 향했다. 내리쬐는 초가을의 햇볕은 묵직했다. 매장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입구 위에 진 마니아라는 글자가 네온사인으로 밝혀져 있었다. 제법 큰 이 층 건물이었다. 유리벽 안으로 온갖 포즈를 취하고 있는 마네킹이 보였다. 그는 이 피곤한 싸움이 곧 끝날 거라고 기대하며 문을 열었다. 다가오는 남자 점원에게 청바지를 골라 줄 수 있겠냐고 말했다. 점원은 마치 녹음테이프를 틀어 놓은 듯이 물었다.- 어떤 스타일을 원하세요? 부츠컷? 일자? 스키니? 힙합? 아니면.Y는 점원의 말을 자르며 일자바지를 원한다고 말했다.- 색상은요? 인디고? 연청? 블랙? 그레이? 와싱된 것으로 원하시나요? 아니면 그냥 단색으로?Y는 잠시 망설였다. 청바지는 말 그대로 청색 바지 아닌가. 청바지의 색상을 고른다는 것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 예기치 못한 생각들이 가지를 쳤다. 그가 찾고 있는 청바지라고 해봐야 이십 년 전의 스타일이었다. 그렇다면 현대식 셔츠에 복고풍 청바지를 받쳐 입는 꼴은 아닐까? 스포티한 셔츠가 평범한 청바지와 잘 어울릴까?그는 점원에게 쭉 둘러보고 싶다고 했다. 이제 자신이 어떤 청바지를 원하고 있는지도 헷갈렸다. 점원은 이 층으로 안내하며 물었다.- 원하시는 브랜드는 있나요?브랜드. Y는 그 말을 듣고서야 아차 싶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청바지의 브랜드를 알고 있다면 지금처럼 고생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고개를 젓자 점원은 천천히 둘러보라며 물러갔다.이 층에 오르자 청바지가 벽을 두르며 빽빽이 채워져 있었다. Y는 숨이 막혔다. 이 많은 청바지를 모두 둘러봐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진저리가 났다. 그는 심호흡으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진열대에 다가갔다. 두세 벌의 청바지를 살펴보던 그는 한숨을 쉬었다. 청바지 한 벌의 가격이 그렇게 높을 줄은 몰랐다. 어떤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싸구려 정장보다 비쌌다. 청바지를 입을 일이 거의 없는 그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새로 등장한 이 가격 문제까지 따지려면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다행히 브랜드별로 가격 차이가 컸다. 그는 가격이 낮은 브랜드일수록 꼼꼼히 살폈다.매장 한 쪽 벽에 걸린 시계는 두 시 사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초조했다. 잔인한 휴일의 오후가 그를 짓밟는 기분이었다. 그는 구석에 있는 간이 의자에 앉았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생각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매장에서 옷을 고르는 사람들은 저마다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 젊은 여자는 두 명의 친구와 함께 재잘거리며 옷을 골랐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거울에 비추어 보기를 반복했다. 그녀를 지켜보던 친구들은 잘 어울린다며 한마디씩 던졌는데, 그녀는 매번 고개를 흔들었다. 조금 나이 들어 보인다든지, 디자인이 튄다든지, 쉽게 싫증날 거라든지 하는 이유로 반대했다. 그녀는 많은 시간을 썼지만 아무것도 사지 않고 돌아갔다. 그 여자는 그렇다 쳐도 같이 따라온 두 친구는 불필요하게 시간을 허비한 셈이었다. Y는 그것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뒤이어 한 무리의 남학생들이 몰려왔다. 그 중 한 명은 처음부터 생각해 둔 청바지가 있었는지 곧장 한 쪽으로 걸어갔다. 다른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청바지 하나를 꺼내들었다. 통이 넓고 뒷주머니가 엉덩이보다 훨씬 밑에 달려 있는 청바지였다. 그 학생은 가격표를 만지작거리며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나머지 학생들은 그 학생더러 과감하게 지르라며 부추겼다. 그 학생은 결국 청바지를 손에 쥐고 내려갔다. 들어올 때보다는 표정이 어두웠다. 맞은편에는 젊은 부부가 옷을 고르고 있었다. 여자가 이것저것을 꺼내들어 남자의 몸에 대어 보았는데, 남자 쪽은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했다. 이건 어때? 하고 여자가 물으면 남자는 그저 괜찮네,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둘은 가끔 낄낄거리곤 했다. 여자는 열 벌이 넘는 청바지를 남자더러 입어보라고 했다. 남자가 옷을 갈아입고 나올 때마다 여자는 남자의 의견을 물었다. 남자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들은 남자가 제일 처음에 입어 보았던 청바지를 들고 아래층을 향했다. Y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은 남자 쪽의 취향이 아닌, 여자의 취향에 맞는 옷을 고른 것 같았다. 그럴 거면 남자에게 왜 의견을 물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는 해도 그 남자는 별 고민 없이 청바지를 고른 셈이었다. 뒤이어 Y와 비슷한 연령대로 보이는 남자가 미소를 띠며 걸어왔다. 남자는 진열대를 한 번 훑어보는가 싶더니 두 벌의 청바지를 꺼내 번갈아 입어보고는 그 중 하나를 들고 돌아갔다. Y는 그 남자가 부러웠다.그는 이제 무언가를 계산하고 따지는 일에 지쳤다. 점찍어 놓은 일곱 벌의 청바지 중 하나를 선택해 이곳에서 빠져 나가고 싶었다. 그는 인내심을 가슴에 꼭꼭 누르며 일곱 벌을 차례로 입어 보았다. 결정을 내리기는 쉽지 않았다. 하나를 입어보면 그 전 것이 더 나은 것 같았고, 그 전 것을 다시 입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아 보였다. 좀처럼 딱 이거다, 하고 마음을 끄는 청바지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선물 받은 셔츠와 어울리는 청바지란 어떤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탈의실에서 나올 때마다 땀이 뻘뻘 흘렀다. 시야는 점점 더 좁아지고 있었다. 거울을 들여다봐도 입고 있는 청바지만 눈에 들어올 뿐, 자신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눈이 침침했다. 바지의 색상조차 구분하기 힘들었다. 짧은 현기증이 일기도 했다. 허기를 잊은 위장은 그대로 굳어 버린 것 같았다. 숨은 점점 거칠어졌다. 그는 창가로 다가가 이마를 유리에 대고 숨을 가다듬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휴일의 오후는 부풀렸던 열정을 식혀가고 있었다. 옆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마네킹이 입술을 실룩이는 것 같았다.거리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아래층으로 내려온 그는 점원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밖으로 나온 그는 빈손이었다.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몸은 땀투성이였다. 도대체 저렇게 많은 청바지 중에 사람들이 어떤 기준으로 선택하는지 알 수 없었다. 거리를 걸으며 그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휴일의 소중한 한나절을 몽땅 날려버려 속상했지만 좋은 경험이었다고 애써 자위했다. 금전적으로는 크게 손해 보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어쨌거나 셔츠에 어울리는 청바지를 찾아내야만 했다.집으로 돌아온 그는 냉장고를 열고 반쯤 남아 있는 소주병을 꺼내들었다. 생수를 마시듯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매트리스에 몸을 던졌다. 온몸에 쌓여 있던 피로가 혈관을 타고 심장에 몰려드는 것 같았다. 잠이 드는가 싶었지만 옅은 잠이라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았다.인터넷, 인터넷이 있었지.어쩌면 인터넷 쇼핑몰에서 맘에 쏙 드는 청바지를 찾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는 인터넷 쇼핑몰을 이용해 본 적은 없었다. 회원으로 가입하고 신용카드 번호를 입력해야 하는 등 개인 정보를 노출시키는 일은 꺼림칙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컴퓨터를 켜고 웹 브라우저를 띄운 뒤, 포털 사이트에 청바지라고 입력했다. 검색 결과를 본 그는 좌절하고 말았다. 수십 개의 청바지 판매 사이트가 앞 다퉈 광고를 하고 있었고, 청바지와 관련된 수많은 질문과 대답이 쌓여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를 질리게 한 것은 이십만 건이 넘는 비교 쇼핑 리스트였다. 남성 의류로 카테고리를 좁히자 육만 건 정도로 줄었으나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는 숫자였다. 카테고리를 좁혀가자 리스트는 점점 줄어들었다. 남성 의류도 남성 일반 의류와 캐주얼 브랜드 의류로 나뉘었다. 그런데 문득 캐주얼이 무슨 뜻일까 궁금했다. 셔츠와 어울리는 스타일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캐주얼의 정확한 뜻을 알아야 했다. 그는 인터넷으로 캐주얼과 관련된 정보를 검색해보았다. 그러다가 흥미로운 사실과 마주쳤다. 그것은 뉴요커라는 잡지에서 다룬 기사였는데, 캐주얼에는 적어도 여섯 가지 이상의 종류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활동적 캐주얼, 남루한 캐주얼, 스포티한 캐주얼, 정장식의 캐주얼, 깔끔한 캐주얼, 비즈니스적 캐주얼 등이었다. 그렇다면 Y가 추구하는 캐주얼은 도대체 어떤 것이란 말인가. 야유회라면 분명 스포티한 캐주얼이 어울릴 터였다. 그런데 스포티하다는 것과 활동적이라는 것의 차이는 무얼까?Y는 인터넷에 매달려 수없이 이어지는 의문을 풀며 노트에 정리했다. 곧 끝날 것 같았던 의문은 자정이 지나도록 더 많은 가지를 뻗어 내렸다. 언제나 자정이 되기 전에 잠자리에 들었던 그는 애가 탔다. 새벽 두시를 넘겨서야 겨우 컴퓨터를 끌 수 있었다. 노트는 스무 장 정도가 메워져 있었다.새벽 여섯 시가 되기까지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에게는 무척 긴 밤이었다. 잠시 잠이 들면 긴 꿈을 꾸었고 깨어나 시간을 확인하면 겨우 십여 분이 지나 있었다. 그렇게 토막난 잠을 이어갔다. 꿈속에서는 어머니의 모습이 자주 보였다. 어머니는 Y에게 규칙적이고 성실한 생활과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삶을 강요했었다. 그는 엄격한 어머니에게 불만을 가질 처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끊임없이 이어진 가난은 그럴 수밖에 없는 틀로 그의 삶을 얽매었다. 그는 성적이 나쁘지 않았지만 국비로 운영되는 전문대학에 입학해야 했다. 대학 시절에는 수업과 아르바이트로 이어지는 삶 외에는 관심을 가질 틈이 없었다. 그는 삶이란 주어진 환경에 몸을 맡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직장을 골라야 하는 일은 어려웠다. 홈페이지를 제작하는 첫 직장은 적성을 떠나 자신에게 맡겨진 일이 명확하지 않은 곳이었다. 그는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입사했는데, 영세한 곳이라 디자인도 맡아야 했다. 그 디자인이라는 것이 무척 까다로웠다. 팀장은 활기찬 느낌이나 고급스러운 느낌을 요구하기도 했고, 또 어떨 때는 안정감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어떤 색상을 써야 하는지, 어떤 크기의 이미지들을 사용해야 하는지 판단하기 힘들었다. 결국 그는 주어진 매뉴얼대로 일하는 생산직이 자신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대학까지 보내놨더니 기계 밥 먹을 생각밖에 못하냐며 울먹였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사무직 쪽의 일자리를 알아보아야 했다. 그것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었다. 컴퓨터를 수리하는 일은 사무실에서 일하기는 하나 사실상 생산직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손에 금전이 쌓여갔지만 그는 필요한 액수를 제하고는 고스란히 적금통장으로 옮겼다. 여행, 취미생활, 쇼핑, 연애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삶이 그저 톱니바퀴처럼 잘 짜여 굴러가기를 바랐다.어머니가 세상을 떴을 때, 그는 완전히 홀로 남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스스로 가정을 꾸리지 않는 한 가족도 친척도 없을 것이었다. 그는 잠시 묘한 해방감에 빠졌다. 그러나 곧 현실적인 문제가 그를 괴롭혔다. 신경 써야 할 자질구레한 일들이 널려 있었다. 식사 때마다 무슨 반찬을 해야 하며 요리 재료는 어디에서 어떤 요령으로 구해야 하는지, 세제는 어떤 것을 써야 하는지, 속옷 따위는 어디서 사는지 등의 문제가 그를 괴롭혔다. 그는 어머니의 습관을 떠올려 그 문제를 해결해 왔다.그런데 청바지 하나 구입하기가 이렇게 어렵다니. 그는 차라리 그에게 옷을 골라줄 애인이나 아내, 또는 억지로라도 그의 등을 떠밀어 줄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알람시계가 요란히 울려대며 그를 어수선한 잠자리에서 일으켰다. 그는 개운하지 않은 몸을 이끌고 세면대 앞에 섰다. 솔이 양옆으로 누워 납작해진 칫솔에 치약을 묻히고 양치질을 했다. 세숫비누로 거품을 내어 머리를 감고 얼굴을 씻은 뒤 토스터기에 식빵 두 개를 넣었다. 평일 아침마다 기계적으로 밟았던 순서였다. 그런데 그의 머릿속에 갑자기 떠오른 낱말이 그 리듬을 깨뜨렸다. 회귀분석.그래. 내가 선택하기 어렵다면 내가 어떤 선택을 할지 미리 분석하면 되는 거야.그는 책꽂이에 꽂혀 있는 몇 안 되는 책들 가운데서 회귀분석론이라는 책을 뽑아들고 집을 나섰다. 대학교재로 쓰였던 책인데,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데이터나 영향 등을 통계적으로 예측하는 이론이 담겨 있었다. 그는 전철을 타고 회사에 가는 동안 자신의 성향에 대한 데이터를 떠올렸다. 그 모든 데이터로 분석하면 자신이 선택하게 될 청바지가 가려질 것 같았다.그는 회사에서 짬짬이 분석에 몰두했고, 점심까지 거르며 시간을 썼다. 현재 판매되고 있는 청바지의 종류와 브랜드별 특성에 대한 정보, 그리고 구매자의 평도 인터넷으로 수집했다. 분석 작업은 수요일 오전까지 이어졌다.수요일 오후, 직원들이 점심을 마치고 되돌아 올 때였다. Y의 작업실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그것은 비명이라고 하기엔 소리가 짧았다. 차라리 순간적인 신음 또는 감탄에 겨워 내뱉는 소리에 가까웠다. 사람들은, 무슨 소리가 났던가? 하고 지나쳐 갈 뿐이었다. Y는 작업실에서 손가락으로 볼펜을 굴리며 입을 헤벌린 채 미소 짓고 있었다. 그의 앞 컴퓨터 모니터에는 한 청바지 업체의 사이트가 펼쳐져 있었다. 그를 나흘 동안 옥죄던 갈등이 걷히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미소를 잃었다. 그 업체는 청바지를 온라인으로는 판매하지 않았다. 그는 조바심을 달래며 업체에 전화했다. 전화를 받은 여자는 동대문과 강남에 납품하고 있다며 두 군데의 가게를 알려주었다. 회사에서 가까운 곳은 동대문이었다. 그는 전산부장에게 사정해 잠시 외출할 것을 허락받았다. 동대문에 도착한 그는 상인들에게 여러 번 물어 가게를 찾았다.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를 어린 여점원이 놀란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다짜고짜 청바지의 모델명을 말했다. 여점원은 청바지가 진열된 곳을 뒤적거리더니 사이즈를 물었다.- 28입니다. 아니, 28이나 30이면 됩니다.Y가 대답하자 여점원은 32 사이즈 이상만 남아 있다고 했다. Y는 여점원의 말을 못 믿겠다는 듯이 눈을 끔뻑이며 서 있었다.- 이, 이것 봐요. 저는 그 청바지를 사야 하거든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저는 그 청바지가 꼭 필요합니다.여점원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어디인가로 전화를 걸어 사무적인 어투로 통화한 뒤 Y를 바라봤다.- 강남 매장에도 사이즈가 없네요. 수입하는 거라 물량이 수시로 있지는 않거든요.Y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낡은 구두를 바라보았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았다.- 제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들은 모양인데, 저는 그 청바지가 없으면 안 됩니다. 이건 심각한 문제에요. 청바지를 내 놓으란 말입니다. 제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썼는지.여점원은 어이없다는 듯 Y를 바라보았다. Y는 굽히지 않고 매서운 눈빛을 보냈다. 점원의 눈은 이제 두려움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Y의 시선을 피해 맞은편 가게의 청년에게 눈길을 돌렸다. Y는 떨고 있는 그녀의 두 손을 보았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우스운지를 깨달았다. 그는 뒤돌아 고개 숙인 채 터벅터벅 걸어 나갔다.금요일까지 그는 평소처럼 일했다. 가끔 노트를 펼쳐 자신의 분석이 틀린 곳은 없는지 되짚어 보기도 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청바지를 포기하고 있었다. 비슷한 가격과 디자인의 청바지도 있었지만 성에 차지는 않았다.토요일, 회사는 예정대로 야유회를 가졌다. 그는 모이기로 한 시간보다 사십 분 늦게 나타났다. 하의는 낡고 색 바랜 그의 유일한 청바지였다. 선물 받은 셔츠를 입기는 했지만 검은 점퍼를 걸쳐 보이지 않았다.전산부장은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다른 직원들도 흥에 겨워 담소를 나누었고, 아이들은 잔디밭에서 큰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녔다. 초가을의 햇살은 따뜻했고, 하늘은 깊었다. 직원들은 Y에게 한마디씩 던지기는 했지만 건성이었다. 셔츠를 건네준 여직원도 Y에게 다가와 밝게 인사했을 뿐, 주로 젊은 남자 직원들과 어울렸다. 한 번도 웃음을 띠지 않은 사람은 Y뿐이었다. 여직원은 기억을 못하는지 그에게 셔츠를 입은 모습을 보여 달라고 하지 않았다. Y는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평소답지 않게 술을 많이 마셨다. 지금까지 누구와 인연을 맺는 것은 성가신 일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가족이 있고, 관심을 두는 사람이 있고, 소속된 조직이 있는 그들은 무척 편하게 삶을 사는 것 같았다. 그는 그들이 입고 있는 옷 하나하나를 둘러보았다. 하나씩 따져보면 모두가 개성 있거나 평범해 보이는 옷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평범하거나 점잖은 옷이 밝고 활동적인 옷을 잘 견제하고 있었다. Y는 인상을 찌푸렸다. 가장 자유로워야 할 사람은 Y 자신이어야 하지 않은가. 가족과 조직과 인간관계 속에서 서로 간섭하고 간섭받는 저 사람들이 더 자유로워 보이는 까닭은 무엇인가.그때였다. 그의 눈앞에서 사람들의 옷이 잿빛으로 변해 갔다. 그 위로는 수많은 곡선이 그려졌다. 그의 노트에 통계를 내기 위해 그렸던 그래프와 흡사했다. 그것은 하늘을 향해 뻗어 가며 다양한 수식과 기호들을 뿜어냈다. 그가 노트에 정리했던 모든 작업들이 옷가지 하나하나마다 되풀이 되었다. 그럴 때마다 옷은 바래졌다. 그와 동시에 그들을 등지고 있는 나무들과 잔디밭과 하늘은 점점 뚜렷하고 맑은 색을 띠었다.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는 차츰 작아지더니 귓속에서 한 점으로 뭉쳐버렸다. 곡선들이 다가와 그의 머리를 칭칭 감는 것 같았다.야유회 이후로 Y는 가능한 모든 걸 잊고 업무에 열중하려 했다. 물론 일주일 동안 쏟아 부었던 헛된 노력이 떠올라 진저리를 치기도 했다. 다행히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생각은 뜸하게 떠올랐다. 그렇게 청바지 사건은 잊히는가 싶었다.마침 추석 연휴가 그를 기다리고 있어서 그는 여유를 되찾을 기회로 여겼다. 명절이라고 해도 혼자 지내야 하는 그는 특별한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다만 그토록 혹사시킨 자신을 위로라도 해주었으면 했다. 여행을 떠나볼까 생각하다가 그만 접고 말았다. 어디로 떠나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계획을 세우자니 머리가 아팠다. 고민 끝에 그는 음식이라도 배불리 먹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연휴 첫날, 그는 거의 정오까지 잠을 자다가 일어났다. 마음은 가벼운 흥분 속에 싸여 있었다. 양치질도 하지 않은 채 얼굴만 대충 씻고 모자를 눌러썼다. 자전거를 끌고 거리에 나선 그는 한산한 거리를 기분 좋게 달렸다. 날씨는 조금 흐렸으나 바람은 부드러웠다. 이십여 분을 달려 대형 할인 마트에 도착한 그는 일 층 식품 매장을 향했다. 거리와 달리매장 안은 북적거렸다. 그가 물건을 사러 마트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백 원짜리 동전을 넣고 카트를 뽑아 느긋하게 매장을 둘러보았다. 그의 머릿속에 그려 놓은 리스트는 잡채, 아귀찜, 돼지갈비, 그리고 정종이었다. 잡채에 들어갈 재료는 손쉽게 구했다. 시금치와 양파, 느타리버섯과 당근이면 충분했다. 그는 아귀찜에 쓸 미나리와 콩나물, 그리고 대파 한 단을 카트에 넣고 수산물 코너로 갔다. 미더덕 한 팩과 큼지막한 아귀 한 마리를 사고 육류 코너를 향할 때였다. 서너 명의 판촉점원이 서로 자기 상품을 홍보하느라 열을 올리고 있었다. 어떤 점원은 할인을 강조했고, 어떤 점원은 맛과 신뢰성, 신선도 등을 강조했다. 순간 그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같은 국내산 고기가 서로 다른 브랜드로 팔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는 동네 정육점을 떠올렸다. 그곳에서 돼지고기는 그냥 돼지고기였다. 그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마음 속 깊은 곳에 눌러두고 싶었던 노트가 펼쳐지고 있었다. 야유회에서 경험했던 이상한 그림들이 또다시 그려질 것 같았다. 그는 그 덫에서 벗어나고자 뒤돌아섰다. 그런데 빠져 나오는 길에 이어진 쌀 코너를 보며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수많은 브랜드의 쌀과 마주했다. 가격과 기능과 지역과 작농 방법에 따라 각기 다른 포대에 나뉜 쌀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는 숨을 쉬기 어려웠다. 쌀 한 톨 한 톨마다 싹을 틔워 곡선을 뿜어낼 것 같았다.그는 카트를 내팽개치고 마트에서 나왔다. 앞으로 쇼핑 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연휴 내내 즐겁지 않았다. 식사는 대부분 라면으로 때웠고, 남아도는 시간은 지루했다그의 비극에 정점을 찍은 것은 집 문제였다. 갑작스럽게 쌀쌀해진 늦가을, 그는 자신의 집이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에게 집은 그냥 집이었다. 이사를 해 본 적도, 계획해 본 적도 없었다. 어려서부터 살아 온 지금의 집이 있을 뿐이었다. 집 문제는 그에게 가혹한 판단을 요구했다. 크기와 가격, 위치와 교통편, 주변 환경과 소음 등 따져야 할 점이 너무 많았다. 이 문제에 비하면 청바지를 구입하는 일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맘에 들지 않는 청바지는 입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집은 옷 갈아입듯 바꿀 수는 없지 않은가. 결국 그는 또다시 노트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청바지 백서의 몇 갑절에 달하는 분량이었다.그는 휴일마다 집을 알아보느라 발이 퉁퉁 붇도록 걸어야 했다. 휴식을 취해야 할 휴일은 직장에서 일하는 평일보다 피곤했다. 차츰 그는 식사 시간에 메뉴를 고르거나 간단한 생필품을 사는 데에도 떠오르는 곡선들을 보았고, 그것과 싸우느라 하루하루가 끔찍했다. 그는 가끔 먼 산을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선택할 필요가 없는 동물들의 삶이 부러웠다. 주어진 환경에 적응만 할 뿐인 그것들이 자신보다 더 행복할 것 같았다. 그는 아무도 없는 숲을, 그 속에서 동물처럼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종종 떠올렸다.그가 실종되었을 때, 그의 집은 깔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다만 현관 앞에는 여러 권의 노트를 불태운 흔적이 남아 있었다.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4.01.02 23:02

[2014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소감] "좌절의 수렁 속에서 글로써 희망 찾아"

7년 전, 젊음을 바쳤던 직장을 정리하고 집에 돌아 왔을 때였습니다. 창문을 열고 의자에 앉아 창가에 시선을 고정했습니다. 바람에 출렁거리는 블라인드 사이로 부드러운 햇살이 흘러나오는 모습을 보며 그 리듬에 맞춰 제 삶을 회고했습니다. 그러다 잠이 들었습니다. 꿈을 꾸었는데, 무척 생생했습니다. 배경은 미국이었고 두 남자가 조직의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속이고 배신을 거듭하다가 마지막 반전을 일으키는 내용이었습니다.어쩌면 그 꿈은 아직도 진행형일지 모릅니다. 그때 잠든 뒤로 나는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처럼 글쓰기를 시작한 시점부터 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됐습니다.처음에 글을 쓰겠다고 결심했을 때, 모든 것이 막막하고 무모해보였습니다. 문학에 대해 아는 게 없었으며 읽은 책도 미천했습니다. 소설을 쓰는 일은 흉내 내 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꾸었던 꿈을 복기하며 의문을 떠올렸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긴 내용이, 그것도 제가 접해보지 않았던 경험이 하나의 스토리를 구성하며 꿈이 되었을까.생각해보니 제가 글을 전혀 쓰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십여 년간 꿈을 기록해왔습니다. 꿈의 내용은 일반적인 논리로 재구성하기 힘든, 언어화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제가 해왔던 작업은 그것을 어떻게 해서든 꿰맞춰 글로 재탄생시킨 것이었습니다.그렇게 생각하자, 놀라운 용기가 솟았습니다. 나는 쓸 수 있다. 내 내면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풍부한 글감도 가지고 있다.지난 7년 간, 숱한 좌절의 수렁 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오늘로서 내면의 열정은 끝이겠구나 하고 포기하려는 마음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면서도 다음 날이 되면 작은 희망이 샘솟았고 그것을 붙잡고 써야하는 것이 제 운명이라고 느꼈습니다.제 글에서 가능성을 발견해주신 심사위원께 감사드립니다. 그간 여러 선생님께 지도를 받았는데, 가장 긴 시간 동안 인내하면서 이정표를 제시해 주신 김기우 교수님께 특별한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을 쫓기보다는 먼 길을 내다보게 하신 그의 지도는 탁월했습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활발한 문집 활동을 하고 있는 소설탄생의 모든 선생님들과 함께 영광을 나누고 싶습니다.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4.01.02 23:02

[2014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심사평] "현대사회 개인 소외 치밀하게 다뤄"

신춘문예는 문학인의 추억을 불러오고, 문학 지망생들이 꿈을 꾸게 한다. 등단 작가 치고 신춘문예 때문에 가슴 설레지 않았던 이가 누가 있겠는가. 작가를 지망하는 사람이라면 신춘문예를 통해 문학의 길로 들어서고자 하는 꿈을 꾸게 마련이다. 우리 심사위원은 응모작을 추억보다는 꿈에 중점을 두고 읽었다. 김경락, 서귀옥, 고동현, 김만성, 황지호, 성보경 등의 작품을 살펴보았다. 일상사를 평상적으로 다룬 작품들은 문학을 지망하는 이들의 꿈과는 거리가 있다고 판단해서 제쳐놓았다. 그 결과 김경락의 〈폭설 내린 날〉, 서귀옥의 〈낙화(烙畵)〉, 고동현의 〈청바지 백서〉 세 편을 놓고 검토했다. 김경락의 〈폭설 내린 날〉은 개척교회 목사가 겪는 현실의 문제와 목회자로서 성찰과 내면의 갈등을 무난하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착한소설로 평가할 수 있는 안정성이 돋보이기는 하지만, 치열한 내면의 고뇌는 스쳐갔다는 허전함이 남는 작품이다. 일상에 매몰된 작품은 의식의 지평을 열기 어렵다. 폭력과 마모되는 육체와 인간의 도덕적 타락을, 인간에 대한 증오심과 함께 그리고 있는 〈낙화〉는 응축된 플롯 속에 사태를 다루는 솜씨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심리묘사가 치밀하고 플롯 구성이 탄탄하다. 그러나 소설적 자유라는 점에서는 작가의 자기해체나 자기분석이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보았다. 소설적 근성이라는 것을 살려 보기 바란다.〈청바지 백서〉는 현대사회에서 개인이 소외되는 메커니즘과, 결국은 실종에 이르고 마는 보이지 않는 구조적 억압을 치밀하게 그린 작품이다. 외주업체에서 어느 회사 전산실로 파견된 주인공이 생일선물로 받은 셔츠 한 벌이 계기가 되어, 그 셔츠에 맞는 청바지를 구입하러 돌아다니다 끝내 실패한다. 선물로 받은 티셔츠에 맞는 청바지를 끝내 찾지 못하고, 상표로 헝클어져 존재하는 현실의 톱니바퀴에 물려 실종하고 만다. 그것이 단편양식이란 점을 감안한다고 해도, 소설은 개인 이야기를 넘어 사회적 관심으로 확장되는 이야기값을 지녀야 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소설미학의 어느 수준에 이르렀다고 보아도 좋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소설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장치에 대해서는 새로운 감각을 살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 현대 사회의 중요한 문제를 소설로 다루어 나가는 진지한 추구를 기대한다. 응모한 분들이 문학적 열정을 부단히 지펴올리고 소설작업에 정진하기를 빈다.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4.01.02 23:02

[2014 전북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작] 붕어빵 잉어빵 형제 - 김정미

남동생 승하가 우리 학교 병설유치원에 입학했다. 그래서 요즘 엄청 신경 쓰인다. 동생을 챙기는 게 힘들어서 이러는 건 절대 아니다. 내가 얼마나 듬직한 형인지 알 사람은 다 안다. 승하도 나를 굉장히 잘 따르고 말이다.하지만 승하랑 등교하는 건 정말 조마조마한 일이다. 오늘도 친구들이 성가신 질문을 할까봐 가슴이 콩닥 거렸다. 친구들이 동생 이름표를 못 보도록 숨기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언젠가는 모두 알게 될 것이다. 승하도 언젠가는 물어볼 텐데, 그땐 뭐라고 말해야 하지? 머리가 다 지끈거린다.3교시 수업이 끝났을 때, 누가 나를 불렀다.박준하, 네 동생 왔어!나는 화들짝 놀라 문을 쳐다봤다. 복도에 노란색 유치원복을 입은 승하가 서 있었다. 나는 재빨리 복도로 뛰어갔다.여기 왜 왔어?말도 없이 찾아온 승하를 보니 화가 났다. 승하는 뭐가 좋은지 헤벌쭉 웃고만 있다. 친구들이 승하 이름표를 보면 어쩐담? 나는 승하 손을 잡고 계단으로 끌고 갔다.승하가 내 걸음을 따라잡지 못하고 철퍼덕 넘어졌다. 승하는 바보처럼 엉엉 울고만 있었다.빨리 안 일어나?나는 승하를 일으켜 세우면서 엄마가 말할 때처럼 또박또박 무섭게 말했다.형 미워! 엄마가 크레파스 안 챙겨줘서 빌리러 왔단 말이야.그러게 진즉에 준비를 했어야지!크레파스를 꺼내러 사물함에 다녀왔는데 우리 반 송이가 승하를 달래고 있었다. 송이는 3학년 중에서 제일 예쁘다. 공부도 잘하고 말도 잘해서 인기도 많다. 혹시 송이가 승하 이름표를 본 건 아닐까 걱정이 됐다.둘이 붕어빵이다.송이가 승하랑 나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생글거렸다. 송이 오른쪽 볼에 보조개가 움푹 파였다. 가슴이 쿵쾅거렸다.승하랑 내가 붕어빵이라고? 나는 승하 얼굴을 오래 들여다봤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시커먼 눈썹, 낮은 콧대랑 까무잡잡한 피부가 나랑 닮은 것도 같았다.승하를 돌려보내고 송이랑 함께 반으로 들어갔다. 송이가 눈을 깜빡거리며 내게 질문을 했다. 준하야,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마음속에서 새 한 마리가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았다. 나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자신 있는 수학 문제를 물어보면 좋으련만. 그럼 멋지게 대답해 줄텐데.너는 왜 남동생이랑 성이 달라?송이의 질문에 노래 부르던 새가 포르르 날아가 버렸다. 아까 승하 이름표를 봤나 보다. 갑자기 머릿속이 함박눈 내린 운동장처럼 새하얘졌다.내 성은 원래 남동생이랑 똑같은 김씨였어. 그런데 어릴 적 시골 할머니 댁에서 오래 살아서 성이 바뀌었어. 할머니 성함이 박 복자 순자시거든. 그래서 내 성도 박이 되어 버린 거야.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 내 입에서 술술 흘러나왔다. 다행이도 송이는 내 말에 속아 넘어가는 눈치였다.와, 부럽다. 나도 성 바꾸고 싶어.송이는 양 씨다. 그래서 별명이 양송이버섯이 됐다. 친구들이 아무리 놀려대도 송이는 늘 당당했다. 그런데 많이 힘들었나 보다.나도 할머니랑 오래 살면 성이 바뀔까?글쎄. 그, 그럴 지도.나는 대충 둘러대고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꾹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송이가 내 말을 믿어줘서 정말 다행이었다. 승하랑 내가 왜 성이 다른지 말하려면 마음속에 꼭꼭 담아뒀던 비밀을 다 끄집어내야 한다. 내가 아주 어릴 적에 친 아빠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것, 엄마가 지금 아빠랑 결혼해서 남동생 승하를 낳았다는 것, 그래서 승하랑 내가 성이 다르다는 것 모두 말이다.내가 말을 배운 후 아빠라고 부른 사람은 지금 아빠 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한 번도 아빠를 가짜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친구들에게 사실을 말해주려면 지금 아빠를 새 아빠라고 불러야 한다. 그 말을 꺼내는 순간 나도 가짜 아들이 돼버릴 것 같아 무섭다.내 성을 김씨로 바꿔달라고 졸라댔던 적도 있다. 하지만 시골에 계신 할머니가 반대해서 바꿀 수 없었다. 친 아빠를 낳은 할머니는 내가 박씨 가문의 삼대독자라서 성을 바꾸면 절대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하늘에 계신 조상님들이 화가 나서 벌을 내린다는 거다. 할머니가 아주 무서운 표정으로 말했기 때문에 더 이상 조를 수가 없었다.쉬는 시간, 이번에는 유치원 선생님이 나를 찾아왔다.승하가 아직도 안 와서 찾으러 왔어.네? 아까 크레파스 줘서 보냈는데.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선생님 표정도 어두워졌다.선생님과 나는 서로 흩어져서 승하를 찾기로 했다. 먼저 4층을 돌아봤다. 4층에는 3학년 교실과 어학실, 과학실이 있다.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아이들 사이에 승하는 보이지 않았다. 3층으로 내려갔다. 2학년 교실과 컴퓨터실, 방송실 순으로 둘러봤지만 승하는 없었다.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2층으로 내려갔다. 화장실까지 샅샅이 뒤져봤지만 승하가 없다. 눈물이 찔끔 삐져나오려고 했다.나는 한숨을 쉬며 창밖을 내다봤다. 그때 생태 연못에 노란색 옷을 입은 꼬마가 쪼그려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등을 돌리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승하가 분명했다.나는 재빨리 연못으로 뛰어갔다.승하야, 김승하!승하가 뒤돌아봤다.형!너 여기서 뭐해?유치원에 가려는데 길을 잃어버렸어. 형! 이거 봐봐. 잉어들 정말 크지? 새끼도 있어!연못 안에는 알록달록 고운 옷을 입은 잉어들이 헤엄치고 있었다.그때, 승하가 뜬금없이 이렇게 말했다.잉어들은 좋겠다. 이름도 없으니까 성이 왜 다르냐는 질문도 받지 않을 거 아냐.갑자기 머리가 띵했다.왜? 친구들이 형이랑 왜 성 다르냐고 물어봐?승하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승하에게도 사실을 말해 줄 때가 되었나 보다. 하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머리가 뒤죽박죽 했다.이따 집에 갈 때 형이 왜 그런지 말해줄게.나는 승하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얼른 유치원으로 데려다 줬다.수업을 받는 내내 승하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걱정이 됐다.학교 수업을 마치고 유치원으로 가면서 머리를 굴려봤지만 뾰족한 답이 생각나지 않았다.유치원에서 날 기다리는 승하와 함께 집으로 향했다. 학교에서 집까지는 30분이 걸린다. 승하 혼자서 다니기엔 정말 먼 거리다.약국 사거리에 도착했을 때 승하가 내 팔을 당기며 말했다.형! 붕어빵 사 줘.약국 앞 포장마차에서 턱수염이 숭숭 솟은 아저씨가 붕어빵을 굽고 있었다. 승하랑 나는 붕어빵을 가장 좋아한다. 달달한 팥을 혀로 살살 녹여먹으면 정말 맛있다.아저씨는 숟가락으로 팥을 떠서 틀 안에 열심히 담고 있었다. 노릇노릇 구운 붕어빵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나는 용돈으로 받은 2천원을 주머니에서 꺼냈다.아저씨 붕어빵 주세요.이건 붕어빵이 아니라 잉어빵인데?아저씨가 손가락으로 종이봉투를 가리켰다. 황금 잉어빵 출시라고 써있었다. 잉어빵은 붕어빵이랑 생김새가 똑같았다. 뱃속에도 단팥 앙금으로 꽉 차있다. 냄새도 붕어빵처럼 고소하다. 그런데도 왜 잉어빵이라고 부르는 건지 모르겠다.붕어빵이랑 똑 같이 생겼는데 왜 잉어빵이라고 불러요?그냥 이름만 다르지, 둘이 형제야 형제.아저씨가 붕어빵, 아니 잉어빵을 뒤집으면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생김새도, 뱃속에 팥을 품고 있는 것도 똑같은데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잉어빵이 나처럼 느껴졌다.우리는 붕어빵을 한 손에 들고 집으로 걸어갔다. 내가 잉어빵의 바삭바삭한 테두리를 깨작깨작 뜯어먹으니까 승하도 날 따라했다. 갑자기 승하가 나를 불렀다.형아, 형아.응?붕어빵이랑 잉어빵도 아빠가 다른 가봐. 둘 다 이름은 어빵인데 성이 붕이랑 잉인 걸 보면 말이야.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너 알고 있었어?옛날에 형이랑 시골에 놀러갔을 때 할머니가 하는 말 다 들었다 뭐.승하가 나에게 혀를 쏙 내밀었다. 나는 승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곤 잉어빵을 한입에 넣어 버렸다. 승하도 나를 따라 잉어빵을 입속에 욱여넣었다. 우리는 복어처럼 빵빵해진 서로의 볼을 쳐다보며 키득거렸다. 달달한 팥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4.01.02 23:02

[2014 전북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소감] "외롭고 쓸쓸한 아이들에 힘이 되길"

어느 날 불쑥, 제 안의 작은 아이가 말을 걸어왔습니다. 그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떠드는 동안 무척 신났습니다. 이 즐거움을 다른 사람에게도 나눠주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동화를 쓰기 시작했습니다.동화를 쓰면서 알게 됐습니다. 제가 만난 그 아이가 바로 제 자신이었다는 것을요. 어른이 되는 순간, 어릴 적 제 모습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잊고 싶었을 지도 모르겠어요. 어린 시절 저는, 사랑스럽지도 귀엽지도 않은 불만에 가득 찬 심술쟁이였거든요.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심술을 잔뜩 부린 이유가 외로움을 숨기기 위해서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작고 외로운 아이를 꼬옥 껴안아주었습니다.지금도 어딘가에 살고 있을 외롭고 쓸쓸한 아이들에게 제 동화가 힘이 되어 준다면 참 기쁠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가 자신이라는 걸 이 땅의 아이들이 모두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른들이 내미는 볼품없는 잣대로 아이들의 가치가 나뉘지 않는 세상이 오길 꿈꿔 봅니다. 그때까지 저는 열심히 동화를 쓸 것입니다. 부족한 작품을 기꺼이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과 전북일보사에 감사드립니다. 저를 동화의 세계로 이끌어주신 정해왕 선생님, 윤정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나와 평생 함께할 글벗 파란의자, 화동요 식구들과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4.01.02 23:02
문화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