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한자문화권의 어문생활 현실 - 김형중
세종대왕이 백성들을 위해 만들었고, 세계의 으뜸이라고 자랑하는 한글이 현대사회에서 그 원형을 잃고 야릇한 상형문자가 되어가고 있다. 물론 일부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텔레비전과 인터넷, 영화, 휴대폰 등 이성보다는 감성에 호소하는 영상매체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국어위기는 사뭇 심각한 수준이 아닐 수 없다. 한 쪽에서는 IT강국, 인터넷 강국임을 자임하며 한껏 으스대고 있는데, 다른 한 편에서 문자파괴, 언어파괴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사실은 참으로 역설적이다.어떤 이유에서든 한국 사람이 한국어를 소홀히 하거나 무시할 때, 그것은 한국 사람으로서의 생각이나 정서를 버리는 것이며, 나아가서 한국인임을 포기하는 위험천만한 일임에 분명하다.국어대사전(1961년에 간행한 이희승 편)에 실린 어휘는 257,854개인데 고유어 24.4%, 한자어 69.3%(178,745개), 외래어 6.3%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지난 50여 년 동안 제반 상황들의 변화와 함께 우리말도 다소 훼손과 변형이 이뤄진 것이 사실이다.언어의 사회성 측면에서 볼 때, 언어의 변형과 훼손은 불가피한 부분이 있다. 같은 말이라도 지역에 따라 지역사투리가 있고, 외국 문물 문화와 교류하는 과정에서 외래어가 토착어로 자리잡아 우리말로 통용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순우리말을 소중히 여기는 것 못지 않게 언어의 사회성을 인정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앞서 확인했듯이, 우리말에서 한자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하다. 우리 어휘의 69.3%에 달하는 한자어.우리는 그 한자어를 어떻게 사용하며 또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신문을 읽거나, 서예 전시장에서 한자를 읽을 수 없어, 또 단어의 의미를 몰라 내심 부끄러웠던 적은 없는가.한자어의 정확한 뜻을 몰라 겪는 부끄러움, 또 언어의 생명력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던 적은 없는가.이미 우리말이 돼버린 한자어도 제대로 이해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상황 속에서 현실은 어떤가.우리말도 아직 덜 익힌 어린이들이 부모들의 넘치는 교육열 때문에 배우고 있는 영어 학습이 제대로 될 수 있을까.전 국민이 영어를 잘하는 방글라데시, 필리핀, 인도 같은 나라가 아직은 문화면에서나 경제적으로 후진국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그 반대로 국민들이 영어를 잘 못하지만 자기네 국어를 세계 으뜸으로 자랑하는 프랑스나 일본이 경제문화 강국으로 위치하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현실을 보자. 한자(漢字)가 한국인들의 언어문화 유산임에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 종류의 언어를 2000여년의 세월동안 사용한 민족이 이 지구상에 얼마나 될까. 영국 사람들이 로마문자를 자기네 것으로 만들어 사용한 수백년여동안 로마자를 남의 나라 문자라 생각하지 않는다.이런 역사의 맥락을 짚어보더라도 우리의 교육, 생활에서 한자를 도외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자 배우기가 아무리 불편해도, 정확한 언어생활은 물론 학문과 문화생활의 발전을 위해서는 한자사용에 관한 교육제도를 개혁해야 마땅하다. 미래를 위한 변화와 개선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초등학교 때부터 기초한자를 약 1,000자 정도 익히고, 중학교 때까지 1,000여자를 더 익힌다면 우리는 불과 6~9년간의 한자 습득으로 생활속에서 한문자(漢文字)를 어렵게 느끼지 않을 것이다. 또 독서나 학교수업을 받을 때도 문장의 이해도가 높아져 한층 즐거운 일이 될 것이다./김형중(전북여고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