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5-11-09 17:05 (Sun)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기획

[익산에ON多] '익산 아트센터' : 문화예술을 느끼다!

익산역 앞 100m, 옛 영정통, 문화와 예술이 꽃피는 거리, 1970년대 익산 중심지였던 이곳은 바로 익산 문화예술의 거리인데요. 이리 영정통이었던 문화예술의 거리에 들어서면 색다른 풍경이 펼쳐집니다. 고양이, 커피잔, 미용실까지 바닥과 벽면에는 감성 가득한 길거리 그림들이 가득하고 거리는 화려한 근대문화거리를 조성한 영화 세트장처럼 볼거리가 많아 눈이 즐거워지기 때문이죠. 오래된 골목길 사이에 설치된 영정통을 부탁해 모음 사진판에는 과거 영정통 거리에서 펼쳐진 다양한 행사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어 슬며시 미소가 지어집니다. 젊음의 거리로 통하며 인기를 끌었던 영정통은 작은 명동이라 불리며 약속 장소로도 인기였는데요. 지금은 익산 아트센터 앞이 만남의 장이자 길거리 공연장으로 등극하고 있답니다. 교복 입은 모습을 흥미롭게 전시한 조형물과 근대문화거리를 상징하는 간판들이 눈을 즐겁게 하는 이곳은 뉴딜 사업 활성화를 위해 주민지원사업도 활발하게 펼쳐지는 곳인데요. 도심재생으로 문화예술거리가 정착되자 거니는 사람들도 작가들도 즐겁기만 합니다. 이곳에 처음 오면 벽을 타고 내려오는 스파이더맨들을 보고 놀라면서 감탄하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행인들의 시선까지 사로잡는 설치미술들! 익산문화예술의 거리를 거니는 또 다른 맛이기도 합니다. 문화 예술의 거리 영정통은 문화복덕방 라디오 방송도 인기 오픈 중인데요. 월, 화 목요일 정오부터 오후 1시까지 나른한 시간대 모두의 귀를 번쩍 뜨이게 하는 프로그램은 또 다른 재미를 준답니다. 자 이제 익산문화에술의 거리 중앙에 자리한 익산아트센터에 들어가 볼까요? 참고로 오전 9시부터 오후 8시까지 문을 여는 곳입니다. 익산아트센터는 익산문화관광재단이 익산문화예술의 거리 활성화를 위해 만든 곳인데요. 익산역과 가까워 이를 주축으로 문화예술이 펼쳐지는 젊음의 장소랍니다. 1층은 문화예술의 거리에 상주하는 공방작가들의 작품이 모인 아트홀과 포토존이 있고요. 2층은 다양한 배움터, 창작소, 전시 공간으로 마련되어 있어요. 매주 토요일에는 토요문화 상설공연도 진행되고 있답니다. 익산아트센터는 1층에서는 다양한 교복과 복고풍 옷들을 체험해볼 수 있는데요. 1977 교복체험을 원하는 분들은 아트센터 맞은편 두리패션을 방문하면 된답니다. 친구들과 교복이나 복고의상을 입고 영정통 한 바퀴를 돌아봐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또한, 익산 문화예술의거리 작가들의 작품을 맘껏 구경할 수 있는데요. 전 목공예, 도자기, 뜨개질 등 수작업으로 만든 작품들과 캘리 글씨가 맘에 쏙 들더라고요. 문화예술의 거리 이리 영정통에서는 sns이벤트도 실시 중이랍니다. 두리패션, 고운팬션, 노블 패션에서 의상을 빌려 입고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어 올리면 사은품을 증정하고 있어요. #익산 #익산문화예술의거리 #익산아트센터 #익산역앞100m #포토존 해시태그도 잊지 마세요! 또한, 센터 안에서도 복고풍 의상을 입고 사진 촬영을 할 수 있는 포토존도 있으니 맘껏 이용해보세요. 아트센터 안에 상주하고 계신 사진작가님이 사진도 무료로 찍어준답니다. 익산 아트센터 안에서는 다양한 작품들도 만날 수 있는데요. 저는 시간여행 작품이 너무 매력적이더라고요. 과거 속 시간 여행을 떠난 듯한 작가의 작품들이 시선을 머물게 했는데요. 영화에서 보았던 주인공들을 흥미롭게 묘사한 작가의 기법에 정말 반해버렸어요. 예술가들의 공용작업공간 아트로드 예술 프로젝트는 익산문화예술의 거리 활성화를 위해 예술가와 방문자들이 함께 예술창작활동을 하며 소통하는 프로젝트랍니다. 미술관보다 더 개성 있고 다양한 작품들이 많아 자유로운 창작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익산을 알리면서 더불어 익산의 예술을 함께하고자 만들어진 익산아트 센터! 이곳의 여러 스튜디오와 배움터는 대관도 가능하다고 하니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홈페이지를 참고하시거나 문의해보셔도 좋겠습니다. 익산문화관광재단 누리집 : http://www.iscf.or.kr/2017 /글사진 = 박현숙(익산시 블로그 기자단)

  • 기획
  • 기고
  • 2019.07.03 15:25

[찾아가는 군산이야기] '군산 짬뽕의 맛' 근대문화재로 지정된 중국음식점 짬뽕의 맛은?

6월 4일 일제강점기 군산역사관이 동국사 옆에 개관했는데요. 취재를 마치자 점심때가 되었습니다. 군산에 왔는데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까 생각하니 딱 떠오른 것이 짬뽕이더군요. 여기저기 유명한 짬뽕집이 많지만, 앞으로 전국 최초로 짬뽕특화거리가 조성될 동영길로 가봅니다. 아 참. 동영길로 가기 전에 하나 만나고 갈 곳이 있군요. 바로 군산화교역사관입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조선과 청나라 간 맺은 '조중 상민수륙무역장정' 조약으로 중국인들이 조선으로 많이 들어와 장사했는데요, 현재는 10여 곳밖에 안 되지만, 많을 때는 60개가 넘는 화교 중국음식점이 군산에 있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짬뽕이 중국음식이다 보니 먼저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올해 10월쯤 짬뽕특화거리가 들어설 동령길입니다. 장미길과 더불어 군산만의 특색 있는 짬뽕을 육성해 근대문화도시 관광객 연계를 통한 관광도시 시너지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조성된다고 합니다. 앞서 화교역사관에서도 봤지만, 동령길과 장미길에는 수많은 중국음식점이 있었습니다. 현재도 성업 중인 중국음식점은 10여 곳이라는데요, 화교의 군산 역사가 군산 근대문화유산거리를 더 예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짬뽕페스티벌을 개최하고 맛 지도를 제작, 키오스크 설치, SNS 등을 통해 짬뽕특화거리를 적극적으로 홍보한다고 하니 군산 여행에서 새로운 먹거리와 즐길 거리가 생길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오늘 점심은 근대문화유산의 보고답게 군산에서 가장 오래된 중국음식점에서 하려고 하는데요, 현재 성업 중인 관계로 상호는 지웠습니다. 영화 촬영지로 유명한 군산의 영화 역사 속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리고 있는 곳인데요, 들어가 보면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빨간 벽돌도 같은 건물인데요, 올해로 67년째 되는 중국음식점입니다. 외형도 오래되었지만, 내부의 독특한 공간구조가 보존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제72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2010년 군산시에서 군산 개항 111주년을 기념한 <2010 군산기네스>에도 선정되었는데요, 겉은 동화 같은 풍경인데 내부도 그럴지 한번 들어가 보겠습니다. 입구는 보통의 중국음식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있는데요, 하지만, 가운데 카운터를 두고 매장이 양쪽으로 두 군데나 되는군요. 대게 입구에 카운터가 있지만, 이곳은 특이하게도 한가운데 있습니다. 2층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영화 포스터가 하나 붙었군요. 황정민 주연의 영화 <남자가 사랑할 때>를 이곳에서 촬영했다는데요, 황정민이 도박하는 장면을 찍었다고 합니다. 2013년 6월 5일 촬영하고 황정민이 남긴 사인이 있군요. 건물이 워낙 넓다 보니 빈 여백을 중국풍의 물건들로 채웠습니다. 여백을 중요시하는 한국과는 조금 다른 문화죠? 2층 홀은 굉장히 넓습니다. 기자가 업무차 광동성 요리의 중심인 중국 광저우로 여러 번 출장을 다녀왔는데요, 당시 초대받은 중국음식점보다는 작지만, 지금까지 본 국내 중국음식점 중 가장 큰 규모인 것 같습니다. 2층도 가운데 카운터 비슷한 게 있군요. 좌우로 여러 개의 방이 있습니다. 모두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공간인데요, 구조가 참 특이하죠? 가운데 2층 천장까지 툭 터진 공간을 두고 빙 둘러 2층엔 방이 있습니다. 중국 영화를 보면 가끔 나오는 건물 구조입니다. 2층 오른쪽은 개방되었지만, 왼쪽은 개방하지 않았는데요, 너무 넓어 관리의 필요성 때문으로 보입니다. 천장에 매달린 커다란 네모 갓이 등인 줄 알았더니 그냥 장식품이군요. 조명을 안 켜도 자연채광으로 실내는 비교적 밝습니다. 탁자는 꽤 넓어 양쪽에 앉아 손을 내밀면 겨우 잡을 정도로 멉니다. 이게 대륙 스타일일까요? 짬뽕특화거리가 조성될 중국음식점이니 짬뽕을 시켜봅니다. 홍합과 바지락이 가득 들어간 짬뽕인데요, 단무지하고 깍두기가 기본 반찬입니다. 처음에 나올 때 밑반찬하고 빈 접시에 수저를 하나 올려주던데 이유가 있었군요. 홍합을 깔 때 손가락으로 요긴하게 쓰고 빈 홍합을 놓을 앞 접시입니다. 짬뽕 맛은 여느 중국음식점과 비슷합니다. 1952년 개업해 67년 된 여기도 그동안 먹었던 중국음식점 짬뽕 맛과 크게 다르지 않아 아무래도 요리 방법이 짬뽕은 비슷하나 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렇기도 합니다. 한국 음식의 김치찌개나 된장찌개가 거의 비슷하지 않나요? 면발도 굵고 국물 맛도 짬뽕답게 매콤하고 시원합니다. 등록문화재에서 먹는 짬뽕 맛은? 오랜 역사에서 오는 분위기에 취한 것이 특별한 맛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변에서 드시는 분들 보니 짬뽕보다 물짜장을 드시는군요. 아하. 아무래도 이 집은 물짜장이 유명한가 봅니다. 오늘도 한 그릇 깨끗하게 비웠습니다. 말갛고 빨간 짬뽕 국물은 다 마시기엔 조금 위가 부담스러울 것 같아 남깁니다. 붉고 자줏빛이 감도는 것이 중국음식점 다워 보입니다. 2대 사장 조카가 카운터를 보면서 주말이면 줄을 서야 할 정도로 사람이 붐빈다고 하는데요, 버스 몇 대로 와도 다 앉을 정도로 넓다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건물 구조가 특이해 앞으로도 계속해서 영활 촬영장소로 이용할 것 같은데요, 앞으로도 군산을 대표하는 영화 촬영지로 오래오래 유지되었으면 합니다. /글사진 = 심인섭(군산시 사이버기자단)

  • 기획
  • 기고
  • 2019.07.02 15:59

[문화&공감 2019 시민기자가 뛴다] 어린이부터 청소년까지…새로운 기록세대의 탄생

기록은 우리 인류가 지금 문명을 이루어온 긴 여정에서 빠뜨릴 수 없는 핵심 고리이다. 우리가 읽고 있는 이 신문과 같이 수많은 사람들의 기록의 결과물로 태어난 매체야말로 시대를 견인하고 인류를 인류답게 자리매김하도록 쉴새없이 영감을 불러일으킨 주인공이기도 하다. 기록의 주체는 누구였을까? 기록의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해왔다. 왕조시대는 사관이 임금의 곁에서 그 기록의 일을 수행했다. 조선왕조실록이야말로 그 기록의 정수이다. 지금은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인 그 실록을 우리 지역 선조들이 지키고 오늘에 이어지도록 애를 쓰기도 했다. 기록은 사람을 넘어 시대를 담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그 기록자의 역할을 얻지 못했다. 투철함으로 무장한 일단의 사람들에게 부여된 책무였다. 무시무시한 책임이 뒤따르는 일이었다. 신문, 방송, 출판 같은 우리시대를 대표하는 매체를 살펴보면, 여전히 기록자로서 책무는 흔들림 없다. 매체의 위상이 변화하고 있다, 하는 시대상에 대한 고찰은 조금 뒤로 하더라도 우리 곁에 새로운 기록세대가 출현하고 있는 현상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그 새로운 기록세대는 바로, 우리 다음세대인 어린이 청소년들이다. △흔들리며 스스로 흔들리지 않으려는 세대의 기록 새로운 기록세대의 등장을 알리는 몇 가지 사례를 살피려고 한다. 먼저 고창지역 여덟 명의 청소년들이 쓴 책, 『흔들리며 흔들리지 않고』이다. 2016년 9월 12일 일어난 경주지진(규모 5.8)으로 온 나라가 지진의 공포에 휩싸였다. 이 사건으로 온 국민은 대한민국이 더 이상 지진의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고, 지진을 비롯한 재난에 대비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흔들리며 흔들리지 않고』는 미래를 만들어갈 청소년들이 지진과 재난에 대처하는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다. 한창 흔들리는 열일곱, 열여덟 살의 청소년들이 흔들리며 흔들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자기보고서인 셈이다. 이 책은 2017년 200종을 가려 뽑는 세종도서에 선정되기도 했다. 청소년들이 직접 쓴 책이 세종도서에 선정되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어서 화제가 되었다. 『아직은, 혹은 이미』는 전라북도 청소년들이 직접 쓴 청소년생활백과이다. 이 책은 우리들 청소년의 삶이라는 주제 아래 자신들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담고 있다. 청소년들의 고민과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청소년고민상담소 잘 지내고 있나요?, 아직은 혼란스러운 와중인지, 아니면 스스로 안에서 뭔가 갈피를 잡아가고 있는지 살피는 청소년문화론 아직은 혹은 이미, 마지막 대한민국 청소년 생활의 꿀팁으로 가득한 대한민국 청소년 잡학사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 세대를 읽고 기록하는 자서전 써드리기부터 어린이 시집까지 지난 고창한국지역도서전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있었다. 어린이, 청소년 출판전시회와 어린이, 청소년 작가와의 만남이다. 고창지역 어린이, 청소년들이 출판한 책 『요리 통, 조리 통, 통통셰프와』, 『톰 소여의 아지트』, 『이미지로 엮는 사람책』 등의 어린이, 청소년들이 출판과정을 이야기하며 독자와 만났다. 군산 푸른솔초 친구들은 쓴 시를 모은 어린이시집 『호박꽃오리』 꼬마시인들은 독자들 앞에서 직접 쓴 시를 낭독하는 시간을 가졌다. 상기된 얼굴로 자작시를 읽어 내려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관객들의 얼굴엔 흐뭇한 미소가 가득했다. 군산 회현중 친구들은 지난 3년간 회현지역 어르신들의 자서전 써드리기를 진행하며 출간한 『찬란하고 쓸쓸한』(1,2,3)으로 독자들을 만났다. 자신의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지역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자서전을 대신 써드리는 작업은 아이들에게 지난 세대를 이해하게 하고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어르신들이 살아온 날들이 현재와 미래의 바탕이 되고, 영웅과 위인들뿐 아니라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역사가 오늘을 만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저자소개글을 통해 한 친구는 어르신의 일생 이야기를 들으며 내 인생을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도 늙어서 내 인생을 되돌아보는 나만의 자서전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고백한다. 경기도 평택시립장당도서관에서도 지난 4년간 꾸준히 마을인물백과사전을 만들어 왔다. 『오성을 기억하다, 오성을 기록하다』(1,2,3,4) 역시 청소년들이 대신 써드린 어르신 자서전이다. △다양한 스펙트럼 어린이청소년 저자의 탄생 버들눈도서관이 있는, 책마을해리는 매년 어린이, 청소년들과 출판작업을 꾸준히 진행중이다. 『파도는 내 발이 좋은가 봐』, 『강아지풀은 다 커도 강아지풀』 등 다섯 권의 어린이시집과 『넌 너, 난 나』,『아무 것도 안 할래』등의 만화책, 『열두 살 고민해결서』, 『고양이별』 등 4권의 그림책, 『손그림생태도감』, 청소년서평집 『내가 믿는 사람은, 나』 등 다양한 책을 출간하고 있다. 이외에도 어린이, 청소년 친구들은 <마을신문> 기자로도 참여하며 글과 이미지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또한 출판캠프를 통해 어린이, 청소년들이 저자가 되어보는 체험과 실험을 계속 진행 중이다. 올해 초 바닷가 작은 학교 동호초등학교 6학년 친구들은 졸업을 앞두고 초등학교 6년의 이야기를 글로 써 졸업앨범을 직접 만들었다. 전교생이 20여 명에 졸업생 네 명, 시골 작은 학교에서는 졸업앨범을 만들기 쉽지 않다. 턱없이 높은 제작비 때문이다. 책마을해리에서 기획하고 친구들과 선생님, 후배들이 합심하여 만든 동호초등학교 74회 졸업앨범 『자, 이제 날아올라』는 뜻 깊은 선물이 되었다. △새로운 감성으로 함께 읽기 함께 쓰기하는 우리의 다음 세대에 거는 희망 어린이, 청소년들은 출판을 통해 스스로 세상의 중심이 되고 있다. 그런데 그 중심을 혼자서 이룩하는 것이 아니다. 대개의 어린이 청소년 출판은, 혼자 한권의 책을 완성하는 방식이 아니다. 함께 쓰기 통해 또래 여러 친구들이 생각을 모아, 품을 모아 한권의 책을 완성하는 것이다, 여럿이 함께 하나의 세계를 완성하는 길 위에서 친구들은 나도 중심, 너도 중심, 우리 모두가 함께 사회를 이뤄가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책의 주인공이라는 자존감 형성과 더불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서로 기대어 함께 사는 존대, 하나의 공동체임을 자각하게 된다. 출판이 어렵고, 출판시장이 점점 위축되고 있지만, 다양한 작가군의 등장이 출판계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활력을 불어넣어줄 것으로 기대한다. 새로운 감성으로 무장한, 함께읽기, 함께쓰기를 통해 공동체의식까지 버무릴 줄 아는 우리의 다음세대, 어린이 청소년 작가, 새로운 기록세대의 출현이 반가운 까닭이다. /이영남 버들눈도서관 관장

  • 기획
  • 기고
  • 2019.07.02 15:54

[한바탕 전주 즐기기] 지속 가능한 지구를 위한 의미 있는 한 걸음, 객리단길 제로 플라스틱 캠페인

완연한 여름이 되어가고 있는 요즘, 뜨거워진 날씨 때문일까요? 길에 버려진 일회용 플라스틱 컵들과 빨대들이 더욱 자주 보이곤 합니다. 이러한 플라스틱 쓰레기들에는 불편한 진실을 담겨 있는데요. 플라스틱 쓰레기 중 재생되는 비율은 매우 적어 많은 비율이 반영구적 쓰레기가 되어 지구를 아프게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전라북도 지속가능발전협의회는객리단길 주변 14곳의 카페 업주분들과 함께 민관협의체를 구성해 매우 의미 있는 한 걸음을 시도하고 있는데요. 바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공유 컵을 만들어 플라스틱 줄이기에 힘을 보탠 것입니다. 이 공유컵이 제작 중이었을 시기엔 14곳의 카페에서는 180일 이내에 생분해가 가능한 컵과 빨대를 제공하고 있었다고 하네요. 객리단길 제로 플라스틱 캠페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동참해주신 객리단길 와플집 카페 사장님과의 인터뷰를 통해 들어 볼 수 있었습니다. Q1. 현재 객리단길 14곳의 카페에서 진행 중인 제로플라스틱전북 이라는 캠페인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A1. 일단 슬로건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환경오염의 주범인 플라스틱 사용을 줄임으로써 지구를 살리자는 의미로 진행되고 있는 캠페인이고요. 현재 손님분들이 테이크 아웃 해가실 때 이 객리단길 공유 컵으로 음료를 제공해드리고 있습니다. 다 드신 후에 이 컵은 여기 적혀 있는 카페 중 아무 곳에나 반납해주시면 도장을 찍어드려요. 그리고 도장 10개를 모으시면 반납하지 않아도 되는 소장용 텀블러를 손님들께 제공해드릴 예정입니다. Q2. 그렇다면 공유 컵 제작 전 제공했던 1회용 컵이 보통 카페에서 제공하는 플라스틱 컵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요? A2. 일단 빨대에도 적혀있듯이 이건 플라스틱이 아니에요. 버릴 때도 플라스틱 류가 아닌 일반 쓰레기로 분류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활용되는 비율이 매우 적고, 분해가 된다 해도 매우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기존 플라스틱과 달리 이것들은 180~200일이면 생분해가 된다는 면에서 확연히 다르죠. Q3. 이렇게 좋은 캠페인에 어떤 계기로 동참하시게 되었나요? A3. 이 캠페인이 이미 외국에서는 시도된 바가 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이곳 전주에서도 좋은 취지를 가진 캠페인을 진행한다고 하더라고요. 지구를 살리는 일인데 안 할 이유가 없었죠. ​Q4. 이 객리단길 제로 플라스틱 사업으로 하여금 바라시는 효과가 있으시다면요? A4. 지금은 국내 최초로 전주 객리단길 몇 개의 카페에서만 진행하고 있는 작은 사업이잖아요. 앞으로는 이러한 제로플라스틱 캠페인이 많이 보편화하여서 객리단길에서 전주, 전주에서 전북, 전북에서 한국 전체로 뻗어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손님들께도 진행 중인 캠페인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해 드리기도 해요. ​객리단길 제로 플라스틱 사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시민분들의 많은 관심과 응원이 필요할 텐데요.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렇게 지구를 위한 의미 있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모이다 보면 엄청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시간 나실 때 객리단길 제로 플라스틱 사업에 동참하고 있는 카페에 들려 시원한 음료 한 잔 즐겨보시는 건 어떨까요? /글사진=김도희(전주시 블로그 기자단)

  • 기획
  • 기고
  • 2019.07.02 15:43

[참여&소통 2019 시민기자가 뛴다] 제주 제2공항 건설 논란과 오버투어리즘

지금 제주도는 갈림길에 서 있다. 제주도는 섬 자체로 한국의 보물이다. 300개가 넘는 오름과 한라산, 성산일출봉과 자연동굴, 곶자왈과 숲, 해안을 따라 걷는 올레길 등 섬 곳곳이 관광지다. 갈림길은 이 보물과 같은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생겼다. 자연을 개발할 것인가? 보존할 것인가?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 논쟁의 전장은 제주 제2공항 건설 사업이다. 지난 2015년 국토교통부가 서귀포시 성산읍 일대에 제2공항을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면서 시작된 논쟁은 최근 제주의 화두라고 할 수 있는 오버투어리즘(과잉관광)과 맞물려 있다. 국토부와 제주도청 등 행정은 제2공항은 늘어나는 제주 관광객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반대 측은 오버투어리즘으로 이미 상당히 망가져버린 제주의 자연환경이 더 훼손될 것이라는 우려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필자는 지난 6월 14일 제주 현지에서 제2공항 반대 운동을 하고 있는 주민을 만나고 왔다. 오버투어리즘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곳이 제주와 바로 전주다. 오버투어리즘에 대한 해법이 정확히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제2공항 반대 주민의 이야기 속에서 전주도 고민해야 하는 지점을 찾았다. 바로 공론이다. △제주 제2공항, 논의는 사라지고 강행 중 제2공항이 생기면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지 그들은 설명해준 적이 없어요 제주 성산읍 난산리에서 만난 주민 김경배 씨는 제2공항이 삶의 질을 높여 준다는 말에 대해 치를 떨며 말했다. 그의 집이 위치한 난산리는 제2공항이 건설되면 활주로가 예정된 부지다. 굴삭기 기사로 30여 년을 일하며 장만한 집이다. 넓게 펼쳐진 마당은 야트막한 돌탑과 작은 연못을 꾸몄다. 공사판에서 버려진 큰 돌을 이용했다. 돌탑에는 작은 성산이라는 이름도 지어줬다. 돌탑에 올라 보는 성산 일출봉의 모습은 그야말로 절경이다. 그에게 행복은 그것이면 됐다. 작은 연못을 찾아오는 철새들의 지저귀는 소리와 작은 성산에서 바라보는 제주. 큰돈보다 나이가 들어도 살 수 있는 이 집, 터전이면 됩니다. 하지만 제주도청은 제주 발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제2공항이 필요하다고 설파한다. 제2공항 추진은 도민의 숙원이자 제주의 미래를 위한 필수 사업입니다 지난 2월 원희룡 제주도지사는 제2공항 추진에 대해 이와 같은 생각을 밝혔다. 국토부는 사전 타당성 조사를 통해 2030년 제주공항 이용객이 연간 4424만 명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 수요 예측은 지나치게 부풀려졌다는 논란이 있는 상황이지만, 설령 맞다고 하더라도 대한민국 인구와 맞먹는 관광객을 섬 제주가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의문을 던져줬다. 제주는 현재 포화 상태의 관광객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요. 연간 4000만명의 항공 수요가 발생한다는 예측이 실제 맞아도 큰일입니다. 김경배 씨를 비롯해 반대 측이 가장 강하게 우려하고 있는 점은 바로 이 점이다. 섬 제주가 과연 얼마만큼의 관광객을 감당할 수 있는지다. 오버투어리즘에 대한 고민이다. 지난해 시장조사 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전국의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오버투어리즘에 대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제주와 전주 한옥마을은 문제 해결이 시급한 시역으로 각각 24.4%, 24.2%로 2위와 3위를 기록했다. 제주의 오버투어리즘 문제는 바깥의 인식도 그렇지만 실제 주민들의 생활 자체를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다. 제주가 수용 가능한 쓰레기 양은 이미 한계를 넘어서 매립장에서 처리가 힘들어 지표면에 노출된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하수종말처리장이 하루에 처리할 수 있는 오폐수는 한계를 초과해 매일 상당 양의 정화되지 못한 오수가 버려지고 있다. 그래서 제주 인근 바다 오염으로 이어지고 이는 곧 해녀 등 제주민들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있다. 그래서 해마다 해녀들의 문제 제기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땅값의 상승과 물가 상승은 전국 최고 수준이다. 그러나 제주도청과 국토부는 제주 개발을 멈추지 않고 있다. 비자림로 확장을 위해 비자림로 숲을 개간하고 있으며, 중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해 제주 남부권의 송악산 개발과 예래관광단지 개발을 추진 중이다. 영리병원과 영어 도시 조성, 동물테마파크 등 크고 작은 개발이 제주 곳곳에서 진행 중이다. 제주의 오버투어리즘은 국토부의 공항 이용 수요 예측을 빗나게 만들 확률을 높게 만들고 있다. 당장 2016년 약 1500만 명으로 정점을 찍은 제주 관광객 수는 해마다 소폭 감소 중이다. 김경배씨는 제주를 찾는 관광객도 느끼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공론화 과정은 사라진 채 개발이 이뤄지고 있다. 제주에 와서 화려한 건물을 보고 싶은 것이 아니잖아요. 그건 서울에 가면 더 많이 볼 수 있어요. (관광객이 줄고 있다는 것은) 제주가 신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거예요. 관광객 2000만 명을 찾게 하겠다고 카지노를 짓고, 건물을 올리고, 대형 휴양시설을 짓는 식의 자연을 죽여야 하는 개발은 제주와 맞지 않아요. 천혜의 자연, 숲과 오름, 이런 것을 느끼고 싶어서 찾는 건데. △오버투어리즘에 대한 논의 시작되어야 제주도 역사상 최대 규모의 토목 사업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 제주 제2공항. 하지만 공론화 과정은 터무니없이 부족하기만 하다. 제2공항 건설을 사실상 확정하고 주민들이 요구하는 공론화 과정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공론조사 거부와 함께 타당성 용역에 대한 재검토위원회도 최종 보고서 작성 단계에서 결렬된 상황이다. 그리고 지난 26일 국토부는 제주가 아닌 정부세종청사에서 제주 제2공항 기본계획 수립용역 최종보고회를 가졌다. 공론화 과정이 부족했다는 것은 민심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한때 70%가 찬성한 제2공항에 대한 주민 여론은 이제 절반 이하로 내려갔고, 공론화 과정의 필요성과 현재 진행 방식에 대해서는 80% 이상이 문제가 있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이후 제2공항 건설 추진은 상당한 진통을 겪을 전망이다. 오버투어리즘은 주민들의 생활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진지한 토론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결국 그 과정을 제대로 밟지 않는다면 갈등은 커질 수밖에 없다. 제주 제2공항 건설을 둘러싼 문제는 전북에도 시사점을 준다. 전주 한옥마을 내 경기전 방문객은 2014년부터 꾸준히 120~130만 명 대를 유지하다 지난해 90여만 명으로 대폭 줄었다. 큰 폭의 한옥마을 땅값 상승과 월 임대료 증가, 상업주의의 획일화된 상품 등 상당수의 전주를 찾은 관광객이 실망을 하고 부정적인 이야기로 전주 이미지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다. 무엇보다 오버투어리즘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리고 그 논의는 어는 한쪽의 의견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행정이 주도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문주현 자유기고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기획
  • 기고
  • 2019.07.01 17:30

[전북의 재발견] 남원 만인의총, "남원은 슬프다. 그러나 찬란하다"

출발할 때부터 날씨가 찡그리고 있었습니다. 비가 곧 쏟아질 듯한 하늘을 자꾸 쳐다봐야 했다. 만인의총으로 가는 길은 그래서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어찌 마음뿐이겠습니까. 역사의 짐을 지고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는 오늘의 역사의 짐도 동시에 져야 하는 까닭에, 역사의 유적을 찾는 길은 늘 이렇게 몸이 가라앉곤 했지요. 만인의총, 어렸을 때는 만인의 총으로 생각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의 무덤이라는 생각이 앞섰던 게지요. 그러나 오늘 제가 찾아가는 무덤은 만인의총(萬人義塚)입니다. 만 명의 의로운 지사들이 묻힌 무덤이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만인의총은 띄어쓰기해서는 안 되는 고유명사이지요. 만인의총은 정유재란(1597) 때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민관군 1만여 의사들의 호국 얼이 서려 있는 성스러운 곳입니다. 만인의총을 새긴 석비(石碑)를 돌아 정문으로 들어서니, 잘 정비된 너른 터가 가슴에 와 닿습니다. 그렇지요. 죽은 이가 숨 쉬는 무덤의 뜰은 슬픈 곳이지만, 찾는 후손들은 오히려 늘 마음이 푸근해지는 모순의 공간이 여기에도 그대로 적용되나 봅니다. 잘 정비된 길을 따라가다 왼쪽으로 보이는 만인의사 순의탑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묵념을 드렸습니다. 비 양쪽에는 장렬한 전투 장면이 부조되어 있었습니다. 홍살문 오른쪽의 기념관에 들어갔습니다. 만인의총이 새롭게 정비되기까지의 과정을 화상으로 볼 수 있고, 기록화를 비롯하여 당시의 유품과 남원부 옛지도, 그리고 왜군 남원성 침공 작전도, 임진왜란상황도, 순절한 충신들의 교지와 관련된 책자, 당시의 화포를 비롯한 여러 유물이 소박하게 전시되어 있습니다. 만인의총에 대한 역사를 읽다 보면 가슴이 메어 옵니다. 1597년(선조 30) 화의의 결렬로 재침한 일본군은 호남호서 지역을 점령한 뒤 북상할 계획을 세웠다. 같은 해 7월 28일부터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를 대장으로 한 1대(隊) 5만 병력은 사천으로부터 하동을 거쳐 구례로 들어오고, 그 일부는 함양을 거쳐 운봉으로 들어와 남원을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당시 조선명 연합군도 남원을 경상도전라도충청도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 여겨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 방어사 오응정, 조방장 김경로(金敬老), 별장 신호, 남원부사 임현의 군사 1,000여 명과 명나라 부총병 양원의 군사 3,000여 명이 함께 방어하고 있었다. 8월 13일 일본의 주력군이 남원성을 포위하자, 동문은 양원, 서문은 모승선, 남문은 장표, 북문은 이복남이 지켰다. 14~15일 군관민이 합심하여 싸웠으나, 16일에 중과부적으로 함락되고 말았다. [다음 백과 발췌] 임진왜란 때 호남 점령의 실패가 임진왜란의 패인이라 판단한 왜적은 11만 대군으로 1597년 전라도를 침공하기 위하여 우군은 전주성을 좌군 5만6천은 남원성을 공격하였다. 조정에서는 남원성을 사수하기 위하여 전라병마사 이복남 장군이 이끄는 1천여의 군사와 명나라 부총병 양원의 3천병사로 하여금 남원성을 지키게 하였다. 적은 8월 12일 남원에 당도하여 성을 겹겹이 포위하였으며, 13일부터 16일 밤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성민 6천여 명을 포함한 1만여 의사들은 혈전 분투하다가 장렬하게 모두 순절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 피난에서 돌아온 성민들이 시신을 한 무덤에 모시고 1612년(광해군4년) 사당을 건립하여 전라병마사 이복남 등 7충신을 모셨으며 1653(효종4년)에는 충렬사액이 있었고 1675년(숙종원년)에 남원역 뒤 동충동으로 옮겨 세운 뒤 1836년(헌종 2년) 사헌부지평 오흥업을 추배하니 8충신이 되었다. 그러다 1871년(고종 8년) 사우 훼철령에 의거 사당이 철폐되어 제단을 설치하고 춘추로 향사하여 왔다. 그러나 일제가 제단을 파괴, 재산을 압수하고 제사마저 금지하였다. 그러다 광복과 더불어 다시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모셔오다가 1963년 사적 제102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다가 1963년 고 박정희 대통령이 만인의총(구 남원역) 방문 당시 허술한 묘역을 보고 이장을 검토하도록 하여 1964년 남원시민들이 현 위치에 이전하였다. 사적 제102호였던 이곳은 이전으로 사적에서 해제되었다가 1981년 사적 제272호로 재지정 되었다. [만인의총 홈페이지에서 발췌] 치열한 전투, 중과부적(衆寡不敵)의 현장이 그려졌습니다. 그 많은 왜적을 감당하기에는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 초라했습니다. 왜 그랬을까. 역사를 생각하면, 그중에서도 치욕스러운 역사를 보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감추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왜 그러한 상황에 이르도록 방치하고 있었을까. 그러한 상황이 오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 결과는 또 어떠했는가. 백성, 가련한 백성들이 감당했었지요. 이 남원성 전투에서도 당시 우리 관군과 명나라의 군사가 4,000여 명 남원 성민이 6,000여 명이나 순절했다고 하니, 이 죽음을 누가 온전히 보상해줄 수 있었을까요. 만인이기는 하나 그들의 영혼의 울부짖음은 어찌 만인에 그치겠습니까. 그야말로 만인(萬人)은 모든 사람의 뜻으로 확대되어 있지 않을까요. 이제 후손인 우리가 기억하고 다시는 이러한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각오만을 다지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한 민족과 나라에는 미래가 없다고 합니다. 잦은 전란에도 우리가 이렇게 오늘의 역사를 쓸 수 있는 데는 이러한 선열들의 희생과 헌신이 바닥에 깔려 있지 않은가요. 그래서 만인이 묻혀 있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만인의총에 서면 이렇게 숙연해지나 봅니다. 그리고 가슴이 울먹여지나 봅니다. 내려오는 길에 잔디 위의 작은 꽃을 봅니다. 올라갈 때 보지 못했던 꽃, 내려올 때 보았다는 시인 고 은의 시구가 눈에 아립니다. 그리고 다박솔을 봅니다. 우람한 소나무가 아니라 뒷산에 흔히 볼 수 있는 볼품없는 나무도 가꾸어 심으면 저리 아름답고 의젓하다는 것도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 꽃도 그 나무도 만인의 순국 의사의 넋과 교감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습니다. 이제야 깨닫습니다. 왜 오늘의 날씨가 이렇게 찌푸리고 있었는지를. 나무람이겠지요. 가까운 곳에 살면서도 사실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던 나그네에 대한 하늘의 꾸중이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다는 것. 다시 한번 뒤돌아 묵념을 드리는데, 호국의 달 6월이 손을 흔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이 오늘이소서 노래탑을 지납니다. 이곳도 슬픈 사연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고려 말부터 조선 중기까지 한민족이 즐겨 부르던 노래. 일반 평민들이 평안한 날이 계속되기를 바라면서 부르던 노래로 추정된다. 전라북도 남원 지역에서 채보(採譜)되어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는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거의 사라져가던 것을 1610년 남원의 양덕수(梁德壽)가 《양금신보(梁琴新譜)》를 만들면서 이 노래를 채보해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다.이 노래가 무엇보다도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남원에서 납치되어 일본으로 끌려간 수많은 사기장이 이 노래를 부르며 망향의 한을 달래던 것이 그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져 400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사기장의 후예들은 1673년 일본 땅에 조선의 건축양식으로 단군을 모시는 옥산궁(玉山宮)이라는 사당을 짓고, 해마다 추석에 제례를 올리면서 매일의 평안을 비는 뜻으로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노랫말은 다음과 같다. 오나리 오나리쇼셔 마일에 오나리쇼셔 졈그디도 새디도 마라시고 새라난(나난) 마양 당직에 오나리쇼셔 (오늘이 오늘이소서 매일이 오늘이소서 저물지도 새지도 마시고 새나마 주야장상에 오늘이소서) / 네이버 지식백과, 오늘이오늘이소서 (두산백과 인용) 아, 늘 오늘이 오늘이소서 늘 오늘이 오늘이게 하소서! 그렇게 되도록 오늘 하루도 늘 새롭게 태어나게 하소서!!! 남원은 슬펐습니다. 그러나 찬란했던 것은 그것 또한 오늘의 우리를 우리이게 하는 역사의 현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주소 : 남원시 향교동 636 만인의총 전화 : 063)636-9321 누리집 : http://www.cha.go.kr/manin/ManinIndex.do 승용차 이용 시 서울출발 대전 호남고속도로 전주 남원 향교동 방향 만인의총 도착 부산출발 진주-통영 간 고속도로 88고속도로 남원 농협오거리 향교동 방향 만인의총 도착 버스 이용 시 서울출발 대전 호남고속도로 전주 남원고속버스터미널 농협오거리 향교동 방향 만인의총 도착 서울출발 대전 호남고속도로 전주 남원시외버스터미널 농협오거리 향교동 방향 만인의총 도착

  • 기획
  • 기고
  • 2019.07.01 15:55

[전북의 재발견] 한적한 시골여행 장수 주촌마을, 시골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하룻밤 어떠세요? 이야기만 들어도 설레는 분이 많을 겁니다. 각박한 도시에서 벗어나 개구리 우는 시골 마을에서 보내는 하룻밤, 그리고 아침 산책길까지 완벽한 곳. 전북 장수에 여러분이 원하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주촌 마을이죠. 주촌 마을은 임진왜란 때 적장을 안고 남강에 투신, 의절한 주논개가 태어난 마을입니다. 논개 생가 마을로도 알려진 주촌마을은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 논개생가길 21-5(장계면, 주촌마을회관)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주촌 마을은 논개 생가와 대곡 관광지가 함께 이루어져 있습니다. 주촌 마을 민박이나 대곡 관광지 한옥 펜션에서 하루 머물며 마을 한 바퀴만 걸어서 돌아도 논개 생가와 대곡 관광지, 도깨비 박물관 등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구조입니다. ● 주촌 민속 마을 한 바퀴 둘러보기만 해도 힐링 되는 마을이죠. 특히 이른 아침 자연 공기를 마시며 산책하기 제격입니다. ● 대곡 관광지 대곡 관광지는 자연 한옥 펜션과 주촌마을 그리고 논개 생가를 잇는 산책길이 있습니다. 주촌 마을에도 민박이 있지만, 대곡 관광지에는 최근에 생긴 자연 한옥 펜션이 있습니다.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깔끔한 한옥 펜션. 예약은 장수군 홈페이지에서 가능합니다. ● 의암 주논개 생가지 넓게 조성된 의암 논개 생가지는 우리의 역사를 알고 그때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생가 및 논개기념관 그리고 연못까지 넓게 조성되어 있어 힐링 산책길로도 좋습니다. ● 도깨비 전시관 아이들과 함께 왔다면 빠질 수 없는 곳이 주촌 마을엔 있죠. 바로 도깨비 전시관입니다. 어렸을 적 많이 보고 들었던 도깨비. 우리에게는 참 친숙한 이름인데 아이들에게는 조금 낯설 수 있죠. 이곳에서는 도깨비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볼 수 있고, 친근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도깨비에 대한 정보뿐만 아니라 여러 게임까지 준비되어 있습니다. (입장료는 성인 1,000원이며 대곡 관광지 숙박 시 무료입니다.) 깔끔한 한옥 펜션을 찾는다면 대곡 관광지의 한옥 펜션을 추천합니다. 지어지지 얼마 되지 않아 깔끔함은 물론, 동마다 정자가 설치되어 있어 자연 바람을 쐬며 쉬기 좋습니다. 대곡 관광지 펜션 예약 홈페이지는 현재 공사 중입니다. 예약은 전화 예약만 가능하며(063-353-3533) 가격은 아래와 같습니다. 평일 열심히 일한 후 자연 속에서 쉬는 시간을 갖는 일 역시 우리가 살아가며 필요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저는 주기적으로 자연 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오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번 주말은 도시에서의 바쁜 일상은 잊어버리고 자연 가득한 전북 장수로 가보는 건 어떨까요? /글사진 = 윤병훈(전라북도 블로그 기자단)

  • 기획
  • 기고
  • 2019.07.01 15:43

정덕환 전주기상지청장 “위험기상에 안전지킴이 역할 하겠다”

7월 1일로 정덕환 전주기상지청 지청장(59)이 취임 1년을 맞았다. 정 지청장 취임 후 전주기상지청은 폭염 피해가 없도록 폭염 영향예보 정규서비스를 제공하고, 도내 농업인들을 위해 들에서 콜을 운영하는 등 도민들 일상에 필요한 최상의 기상 서비스에 노력하고 있다. 정 지청장을 만나 그동안의 성과와 도민들에게 제공되는 다양한 기상 서비스에 대해 들어봤다. -기상청이 어떤 기관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먼저 전주기상지청에 대해 소개해주십시오. 전주기상지청은 1918년 5월에 전주관측소로 창설되어, 올해 101주년이 됐습니다. 창설 당시 옛 터는 남노송동에 있으며, 2018년에 100주년 기념 표지석을 설치했습니다. 2013년 12월 덕진동 현 청사로 이전했습니다. 전주기상지청은 전주관측소, 전주측후소, 전주기상대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기상업무를 수행했고 2015년 7월부터는 전주기상지청으로 승격돼 현재까지 전북지역의 기상 예특보 생산과 기상기후서비스를 총괄하고 있습니다. 365일 한시도 불이 꺼지지 않는 전주기상지청은 위험기상으로부터 전북도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안전지킴이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취임 1주년이 되셨습니다. 취임 후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이 있다면. 취임 후 지금까지 예보업무에 최대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예보업무는 기상청의 기본업무임과 동시에 국민의 안전과 직결되므로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1980년 기상청에 입사한 이후 39년간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광주지방기상청 예보관, 목포기상대장, 광주지방기상청 예보과장, 국가태풍센터장 등을 역임하면서 예보에 대한 다양한 경험과 노하우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의 예보 실무 경험을 예보관들과 소통하는 시간을 통해 공유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보분석을 전문으로 담당하는 예보지원팀을 꾸려 위험기상을 더 잘 예측할 수 있도록 분석을 강화했습니다. 그리고 정기적인 예보기술 세미나를 통해 국지예보기술을 연구하는 등 예보관들의 역량 강화에 힘쓰고 있습니다, -기상청에서는 기상재해로 인해 사회경제적인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각종 기상 영향예보를 하고 있습니다. 올해부터는 폭염 분야 영향예보가 정식 시행 중인데 어떤 내용입니까. 전주기상지청에서는 폭염으로부터 국민의 건강한 삶을 지원하기 위해 지난달 1일부터 폭염 영향예보 정규서비스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이 서비스는 폭염특보와 함께 시군 단위의 위험수준을 고려한 폭염영향과 전망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한눈에 폭염 위험을 인지할 수 있도록 위험수준과 대응 요령을 그림과 함께 전달합니다. 전날 오전 11시30분에 폭염 위험수준을 4단계(관심, 주의, 경고, 위험)로 표시하여 발표합니다. 관심단계는 일 최고기온이 31℃ 이상인 상태가 3일 지속 예상될 때, 주의단계는 33℃ 이상인 상태가 2일 지속 예상될 때(폭염주의보 발표), 경고단계는 35℃ 이상인 상태가 2일 지속 예상될 때(폭염경보 발표), 위험단계는 38℃ 이상인 상태가 2일 지속 예상될 때입니다. 분야별 대응요령에 있어서는 관계부처와 사전 협의를 통해 일관적인 폭염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폭염 영향예보는 위험수준에 따라 기상정보문과 문자서비스로 관계기관 및 지자체의 담당자들에게 전달되며, 기상청 홈페이지와 모바일 웹을 통해서 일반 국민에게도 제공됩니다. 폭염 영향예보로 국민이 안전하게 여름을 보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전주기상지청에서 추진하고 있는 지역 맞춤형 서비스가 있으시다면. 전라북도는 전체인구의 11%(21만명)가 농업에 종사하며 삼락농정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농도입니다. 전주기상지청에서는 이와 발맞추어 농업인을 위한 맞춤형 서비스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기상청에서는 다양한 기상정보를 생산하여 제공하고 있으나, 농업인 대부분이 고령자로서 정보를 얻는데 많은 제한이 있습니다. 고령의 농업인은 131안내전화와 방송을 통해서 단편적인 기상정보만을 얻습니다. 관측정보, 기후자료, 실시간 급변하는 기상정보 등을 확인하는 방법은 쉽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전주기상지청에서는 작물 생산 중심에서 농업인의 삶 중심으로 서비스 패러다임을 전환하고, 기상정보 전달방법도 쉽고 간편하게 개선한 들에서 콜서비스를 개발하여 운영 중입니다. 들에서 콜서비스는 농업인의 안전한 영농활동을 위해 논, 밭, 축사 등 영농현장에서 필요한 기상기후정보를 편리하게 활용하도록 전달하고 상담해주는 서비스 콘텐츠입니다. 알림서비스(LMS, 알림톡)로는 날씨이슈, 농사정보, 10일간 기상정보 등 핵심 기상정보를 요약해 문자, 알림톡(카카오톡), 모바일 웹을 통해 평일 1회 이상 제공하며, 위험기상이나 예보변경 사항 등이 있을 경우 추가 제공합니다. -정보화시대 웹서비스에도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웹 서비스(http://들에서콜.kr)로는 읍면동 단위의 실시간 기상정보와 농업인 영농작업 기상지수, 10일 최저최고기온, 비눈구름 영상, 천둥번개 영상, 과거관측정보 등을 제공합니다. 이 모든 것을 사용자인 농업인이 스마트폰만 있으면, 문자와 함께 전송되는 웹 사이트를 터치 한 번으로 한 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례로 올해부터는 정부혁신 과제인 협업 촉진을 위해 고창군농업기술센터와 협력, 들에서 콜서비스를 고창군 수박생산농가 200여 명을 대상으로 6월부터 10월까지수박 따기 좋은 날(℃) 알리오서비스로 시범 운영합니다. 이 서비스는 수박 생산부터 유통까지 필요한 기상정보를 제공하는 지역 특화 서비스입니다. 이를 활용하여 재배한 농가와 일반농가와의 생산량 비교연구를 수행하고, 그 결과를 토대로 기상정보서비스 이용고객에 대한 재해보험 할인율 적용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도민들께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전북도민들이 저희 전주기상지청을 항상 아낌없이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희 전주기상지청은 앞으로도 여러분께 기상 모니터링을 통한 발 빠른 기상정보를 제공하고 이를 통해 도민 여러분이 기상으로부터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게 더 나은 기상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항상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과 애정으로 저희 전주기상지청을 지켜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덕환 전주기상지청 지청장은 1960년생인 정 지청장은 전남 곡성에서 태어나 1980년 11월 26일 전주측후소에서 기상관측 업무를 시작했다. 그는 기상관측의 전문성을 기르고 인정받아 2005년 광주지방기상청 흑산도대장을 역임했다. 흑산도대장을 역임하고 광주지방기상청의 기후정보과와 예보관, 목포기상대장, 예보과장을 역임하는 등 기상관측에 대한 이해와 관측 장비의 최신화 등을 위해 노력했다. 2018년 1월 예보국 국가태풍센터장에 부임해 태풍 예보에 대한 전문성을 높였고, 2018년 7월 현재의 전주기상지청에 부임했다. 39년만에 기상관측 업무를 시작한 곳에서 다시 책임자가 돼 감회가 새롭다고 했다. 정 지청장은 가장 기초적인 기상관측 업무부터 예보업무 등 기상 분야에서 두루 섭렵한 전문가로 조직 내에서 신망이 높다. 그가 부임한 이후 전주기상지청의 예보 정확도가 더욱 높아졌다는 평을 받고 있다.

  • 기획
  • 엄승현
  • 2019.06.30 17:21

[위병기 논설위원이 만난 사람] 2. 공익 활동 앞장서 온 이홍훈 전 대법관 "전북 더 발전하려면 지도자들 낮은 곳 바라보며 헌신해야"

국내 대형로펌 중 매출액 순위 6위권에 해당하는 법무법인 (유)화우는 최근 화우공익재단 초대 이사장을 지냈던 고창 출신 이홍훈 전 대법관(73)의 재직을 기념하는 첫 공익논집을 발간했다. 우주일화(宇宙一花)라고 이름지은 이 공익논집은 국내 법조인 중 대표적으로 공익 활동에 앞장서 온 이홍훈 전 대법관의 삶과 인생 철학을 가장 잘 보여준다. 법조비리 등으로 인해 전 대법원장이 구속되는 등 초유의 파동속에서도 법조계 안팎에서 그는 요즘 더 많은 존경을 받는다. 주말이면 그는 고향인 고창 흥덕에서 생활하면서 후학들에게 특강을 하는 등 평생의 노하우를 전수하고 있다. 지난 21일 고창 석정온천에 있는 한 식당에서 그를 2시간 가량 만나 삶의 궤적을 들어봤다. △요즘 근황은 어떠십니까. 법무법인 화우 고문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데요, 화우공익재단 고문, 대법원 사법발전위원회 위원장, 평화 법제포럼 대표 등을 맡으면서도 서울 강남에 있는 화우에서 주 3일가량 보내고요, 금요일부터 월요일까지 4일은 제 고향인 흥덕 신송리에서 아내와 꽃이나 나무를 가꾸면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주4일 고향에 머물기에 농담으로 주사파(週四派)라고나 할까요.(하하) 8년전부터 고향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는데 인재양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고향 젊은이들의 꿈을 키워주는데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얼마전 고창북중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특강을 했는데 주로 나 아닌 공동체의 행복한 삶을 주제로 얘기를 나눴습니다. △현 정부 출범 후 대법원 사법발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셨는데 요즘 사법농단 등 여러가지를 보면서 느낌이 크게 다를 것 같습니다. 전직 대법원장이 구속되고 대법관 2명이 조사받는 상황을 보면서 법조인의 한사람으로서 무척 마음 아픕니다. 국민들은 오랫동안 재판권 독립이 훼손됐다고 보고 있고요, 누적된 폐해에 대해 국민불신이 분출한 것이 사법농단 사태의 본질이라고 봅니다. 안타깝지만 우리 사회가 성숙하려면 정의롭지 못한 재판에 대해 한번은 거쳐야 할 과정으로 보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법관은 체제 보호를 위한 역할을 오랫동안 해왔는데 솔직히 시대적 한계가 있다고는 하지만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제대로 하지 못한 측면이 많습니다. 대다수 변호사들 또한 돈이 되는 개별사건에만 관심을 가졌던게 사실이구요, 이젠 법조계가 크게 달라져야 한다는 시대적 사명이 분출된 것으로 이해합니다.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순창), 서울 고검장을 역임한 화강 최대교(익산), 서울 고등법원장을 지낸 사도 김홍섭 선생(김제) 등 법조 3성을 배출한 고장임에도 그동안 전북 출신 법조인이 별로 많지 않았어요. 전북 출신 역대 대법관중 현재 생존해 있는 사람은 헌재소장을 지냈던 이강국, 윤영철(가인 손녀사위)을 비롯해 김지형, 김선수, 김재형, 그리고 저까지 6명으로 기억됩니다.광복직후에는 호남 차별이 별로 없었는데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무척 심화됐지요. 법조 영역에서도 앞으로는 지역균형발전에 기반한 인재 육성을 해야만 결국 국가 경쟁력도 강화할 수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전북출신 법조인이 나올 것으로 기대합니다. 전주 만성동에 새롭게 법조타운을 조성해 올 연말에 법원과 검찰이 이전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를 계기로 도내 법조인들도 시민들에게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합니다. △학창 시절부터 줄곧 엘리트 코스를 밟으셨는데 나만 못한 주위의 어려운 이를 되돌아보고 공익활동에 관심을 갖게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서울대 법대에 다닐때 우연히 신문에서 경기고 재학생중 가정 형편 때문에 등록금을 못낸다는 기사를 보고 시골에 계시는 아버님께 쌀 한가마니 정도 되는 등록금 좀 해주시면 어떻겠느냐고 말씀드려 도운게 제 삶의 궤적을 바꾼 것 같습니다. 저도 판사 발령받은뒤 박봉에 자녀가 4명이나 되다보니까 생활이 어려워 사표를 낸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해서 법관을 그만두면 결국 인권보장이라는 목적도 달성할 수 없게되기에 참고 이 자리까지 온 거지요. 학창 시절 친구인 조영래 변호사를 가까이 지켜보면서 제대로 된 재판을 해야겠다는 각오를 수없이 했습니다. 황인철, 홍성우, 이돈명 변호사 등 인권변호사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날 이만큼의 법치 실현도 가능했다고 봅니다. △경쟁이 치열한 우리사회에서는 공익을 돌아보는게 배부른 이의 사치에 가깝게 여기는 풍토가 있습니다. 시간이 없다, 돈이 없다는 일종의 핑계에 불과합니다. 가진게 없지만 짬을 내서 자원봉사 하는건 돈으로 하는 것보다 훨씬 값진 거죠. 월급 30만원 받았던 김수환 추기경 다른사람 선물 사고 나면 10원도 안남았다고 합니다. 능력있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는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 능력을 자신만을 위해 쓰면 안됩니다. 모두가 하나라는 인식에서 출발해야 우리 모두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전북이 앞으로 더 살기좋은 고장이 되려면 좀 있는 사람이나 지도자들이 혼자 잘 먹고쓰는데만 신경쓰지 말고 더 낮은 곳을 바라보며 헌신해야 합니다. ● 이홍훈 전 대법관은 고창군 흥덕면 신송리가 고향인 이홍훈 전 대법관은 흥덕초, 전주북중, 경기고, 서울법대를 졸업했다. 1977년 서울 영등포지원에서 판사로 시작해 수도권 주요 보직을 거친뒤 제주수원서울중앙지방법원장을 지냈다. 2006년부터 6년간 대법관을 지낸 그는 한양대, 전북대에서 석좌교수로 활동했으며 삼수회 회장도 역임했다. 법무법인(유)화우 공익위원회 위원장, 법조윤리협의회 위원장, 화우공익재단 이사장, 한국신문윤리위원장, 서울대 법인이사장, 대법원 사법발전위원장, 화우 고문변호사 등으로 활동했다. 화우공익재단 초대 이사장을 맡아 국내 법조계에 체계적인공익의 개념을 뿌리내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 기획
  • 위병기
  • 2019.06.26 18:38

[문화&공감 2019 시민기자가 뛴다] 전북의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를 걷다 ④ 완주군 상관면 신리~임실군 임실읍

4월 23일(癸未계미) 맑다. 일찍 출발하여 오원역(烏原驛)에 이르러 역관에서 말을 쉬게 하고 아침밥을 먹었다. 얼마 후 도사(都事)가 왔다. 저물녘 임실현으로 가니 현감이 예를 갖추어 대접했다. 현감은 홍순각(洪純慤)이다.[난중일기] 4월 22일 전주 남문(풍남문) 근처에서 하룻밤을 보낸 이순신 장군은 다음날 완주군(상관면)과 임실군(관촌면)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인 슬치(瑟峙)를 넘어 오원역에 도착하였다. 오전에 20여km에 이르는 짧지 않은 거리를 이동하여, 이곳에서 아침식사를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초여름(양력 6월 7일)에 오원역에서 불과 12km 거리에 있는 임실현 치소에 저물녘에 도착하였다고 하니 이곳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낸 듯하다. 오원역은 삼례도 소속의 역으로,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에 역마 10필, 역리역노 등 180여 명의 인원이 배속되었다고 나오는 것으로 보아, 교통과 숙박 등의 업무를 담당하는 비교적 큰 규모의 역원(驛院)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역이 있던 곳은 본래 상북면이었는데, 일제강점기 때인 1914년 오천면 선천리로 되었다가, 1935년 지금의 이름인 관촌면 관촌리로 바뀌었다. 그리고 일기 끝부분에 현감이 예를 갖추어 대접했다라는 내용은 규례대로 쌀쌀맞게 대하였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번 답사구간은 완주군 상관면 신리를 출발하여 임실군 임실읍 임실보건의료원에 이르는 약 25km 거리로, 대체적으로 17번국도(춘향로)를 따라 진행하게 된다. 6월 15일 오전 10시 경, 신리에 있는 상관면행정복지센터를 출발하였다. 지난 답사 후 약 한 달이 지나는 사이, 여름으로 들어선 산자락은 온통 밤꽃 세상으로 바뀌었다. 약 10여분 진행하여 춘향로를 만나면, 전라북도 도로관리사업소(북부지소) 맞은편에서 횡단보도를 건넌다. 백의종군로는 도로관리사업소 정문 앞을 지나 상관천(전주천) 왼쪽으로 나있는 좁은 포장도로로 이어지고, 편백나무 숲길로 이어지는 공덕교에 닿으면 다리를 건너 상관천의 오른쪽 길(죽림반월길)로 진행한다. 상관교 아래를 지나 죽림온천 단지 뒤편 상관천과 철길 옆으로 이어지던 한적한 길은 북치교 앞에서 17번국도 쪽으로 이동하여 통로를 지난다. 이제 다소 위험한 국도 갓길을 걷게 된다. 상관면(上關面)의 관關은 빗장을 의미한다. 군사장 중요한 지역으로 진(鎭)을 두어 방어하거나 검문소 역할을 하는 곳이다. 상관면은 신리 약 9km 남쪽에 협곡을 이루며 옛 전주부의 관문 역할을 하던 만마관(萬馬關)의 위(북쪽)에 있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남관진은 상관의 남쪽에 있는 군진을 뜻한다. 남관초등학교 교차로 서쪽에는 1873년(고종10)에 세워진 남관진 창건비가 있다. 남관진 창건비 있는 곳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도로 왼쪽으로 진행 방향을 잡는다. 만마관의 역사를 짤막하게 기록해둔 안내판을 만나기 위함이다. 남관 아울렛 매장을 지나 원용암마을에 닿으면 만마관 안내판이 지척에 있다. 18세기 실학자 성호 이익이 쓴 절영마가(絶影馬歌) 중에 지리산 앞 대방(남원)의 북쪽 마을에는 아직도 만마의 이름이 전해지네라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만마동이 존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인근을 둘러보면 협곡을 이루는 도로 건너편 군데군데 만마관의 축성에 쓰였을지도 모를 돌무더기가 보인다. 이내 길은 왼쪽으로 휘어지며 산정마을 앞으로 이어진다. 슬치(瑟峙)에 이르러 이제 임실군으로 들어선다. 고개이름에는 대체로 비파 슬瑟을 시용하고 있으나, 조선후기 김정호가 지은 청구도 등에는 소치(掃峙)로도 표기하고 있다. 슬치는 만경강과 섬진강의 물길을 가르는 호남정맥 산줄기 상의 고개이다. 이제 드디어 섬진강 수계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백의종군로는 모텔 건너편 슬치마을 쪽으로 횡단보도를 건너 마을 안쪽으로 들어와, 석장승과 솟대가 서있는 곳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며 내려선다. 국도와 나란히 이어지는 길이다. 관촌시장이 마주 보이는 곳에서 국도로 내려서며 관촌면 소재지로 들어서니 신리에서 약 14km 걸었다는 메시지가 나온다. 관촌리 시가지를 벗어나면 섬진강의 상류인 오원강을 건너야한다. 제법 큰 물길을 이루는 이곳에는 인도가 있는 오원교가 놓여있다. 다리를 건너 사선문에서 완만한 내리막길을 내려서면 저만치 관촌역이 보인다. 백의종군로는 관촌역에서 횡단보도를 건너고, 제2오원교 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며 창인로로 이어진다. 섬진강의 강폭이 꽤 너르게 펼쳐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곳에서는 대체로 약 11시 방향에 있는 예원예술대학교를 이정표 삼아 진행한다. 창인교를 건너면 시골마을 답지 않게 깔끔하게 정돈된 창인리로 들어서고, 예원예술대학교 정문 앞을 통과한다. 이어서 철길이 있는 군사시설의 담을 따라 잠시 진행하다가, 초소 앞에서 왼쪽 언덕으로 올라 용은마을과 두실교를 차례로 지난다. 다시 17번 국도와 만나는데, 임실읍으로 들어서는 용은교에는 갓길도 거의 없어 매우 위험하였다. 백의종군로는 임실휴게소 있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호반로로 이어진다. 두곡저수지 옆을 지나 고갯마루를 내려서면 임실읍 시가지가 시야에 들어온다. 삼거리를 만나면 원불교 교당이 보이는 왼쪽 길로 진행하고, 임실문화원을 만나면 다시 오른쪽으로 잠시 이동하여 왼쪽에 보이는 코아루아파트 방향으로 나아간다. 아파트 앞의 천변길을 거쳐 임실등기소에 이르러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정면 큰 교차로에 있는 임실보건의료원이 지척이다. 구간거리 약 25km, 식사 및 휴식시간 포함 약 8시간 소요되었다. /조용섭 협동조합 지리산권 마실 대표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기획
  • 기고
  • 2019.06.25 16:39

[참여&소통 2019 시민기자가 뛴다] 일상 속 환경보호 의식 갖춰야

최근 30여년이 지난 2050년에는 전 세계 대부분의 주요 도시가 생존이 불가능한 환경으로 변할 것이라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호주 연구팀의 기후와 관련된 잠재적 안보 위협이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급격한 기후변화로 지구면적의 35%가 생존이 불가능한 환경으로 변하며, 세계 인구의 55%가 현재 거주하는 지역에서 생활이 불가능할 것으로 예측했다. 이번 연구는 환경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내용이지만, 이와 비슷한 연구와 보도 등은 과거부터 반복돼 온 탓에 현재로서는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또한 어디까지나 예측일 뿐이며, 지금 당장 눈앞에서 일어나는 상황이 아니기에 무신경하게 지나치기가 쉽다. 하지만 그냥 지나치기엔 지난해 발생한 전주시의 쓰레기 대란과 올해 초부터 유난히 심했던 초미세먼지의 습격이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 맑은 하늘을 마주한 날보다 그렇지 않은 날이 더 많았고, 미세먼지가 심한 날 학교에서의 운동장 활동이 죄악시되었던 그때를 생각하며 환경이라는 키워드에 다시 한번 주목을 해야 할 때다. △일회용 사용 줄이기사후 관리점검 필요 대한민국은 2016년 기준 연간 플라스틱 소비량 1위 국가이다. 유럽의 플라스틱고무 생산자협회인 유로맵은 2020년 우리나라의 플라스틱 소비량을 53만 900톤, 1인당 연간 플라스틱 소비량을 약 145kg으로 추정하고 63개 조사대상 국가 중 3위라는 수치를 내놓았다. 이러한 오명을 만회하고 지구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정부도 플라스틱을 포함한 일회용품 사용 감축을 위한 규제책을 내놓았다. 지난해 8월부터 커피전문점 등 매장 안에서 일회용 컵 사용을 금지하고 있으며, 올해 4월부터는 자원 재활용법 시행규칙에 따라 대규모 점포와 슈퍼마켓 등에서 비닐봉지 사용이 금지됐다. 또한 정부는 지난해 5월, 재활용의무대상 품목을 확대하고 택배 포장 기준 신설 등을 통해 과대 포장을 억제하고 폐비닐 등 재활용 제품을 조기 상용화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재활용 폐기물 관리 종합대책을 내놓았다. 제조 생산 단계에서부터 재활용 단계까지의 대책을 통해 일회용 제품 생산과 사용은 줄이고, 재활용은 늘려 지속 가능한 자원순환사회를 통해 환경을 보호하는데 모두가 동참하자는 것이다. 현대인의 삶 속에 이미 깊숙하게 파고든 플라스틱과 비닐봉지, 종이컵 등의 제품 생산 및 사용을 제로로 만들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이러한 일련의 정부의 노력들은 생산자, 판매자, 소비자들에게 환경보호에 적극적으로 함께 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들이 결과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보다 더 세심하고 강력한 정책들과 함께 확실한 사후 관리와 점검이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우리 생존과도 연결되는 사안이라는 점에서 일상에서의 의식적인 다양한 노력들 또한 더욱 요구된다. △환경교육 강화돼야 본질적으로 소비자의 소비행위의 변화는 생산자의 변화가 담보되지 않고는 큰 효과가 없다는 지적은 맞다. 당연히 제품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단계에서부터의 변화가 필요하다. 하지만 제품을 구입하고 소비하는 소비자는 쓰레기 배출을 줄이려는 노력과 함께 친환경적이고 재활용이 쉬운 제품들을 사용해야 한다. 이미 전 세계적인 흐름으로 개인 소비행위의 변화를 통해 자원의 낭비를 줄이고 재활용을 통해 환경오염을 줄이려는 행동들은 생활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음료를 테이크아웃하려는 손님에게 텀블러를 빌려주고 돌려받는 방식으로 운영하는 카페가 있고, 매장에 있는 모든 식료품을 비닐봉지가 아닌 천주머니나 장바구니에 담아 갈 수 있도록 운영하는 식료품점도 있다. 또한 기존의 버려지는 제품을 단순히 재활용하는 차원에서 더 나아가 새로운 가치를 더해 새로운 제품으로 다시 생산하는 업사이클링 사업이 각광을 받고 있다. 자동차에서 나온 폐가죽으로 만든 업사이클링 백팩은 방탄소년단이 착용해 큰 이슈가 되기도 했다. 군산 청소년 문화의 집의 경우도 우유팩을 활용한 밀키 프로젝트를 비롯해 다양한 업사이클링 사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문화의 집 정훈 관장은 청소년들과 함께 환경보호에 대한 고민을 하다가, 서울에 있는 새활용 센터를 방문하면서 업사이클링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라고 한다. 또한 그는 지역주민 및 청소년들과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가정에서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분리수거 및 환경교육의 강화 필요성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다 는 말을 전한다. 실제 더불어민주당의 박찬대 의원이 환경부와 교육부로부터 받은 중고등학교 환경교육 과목 채택 현황에 따르면, 채택 비율이 2007년 20.6%에서 2017년 9.8%로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중등 교육과정에 환경 교과목이 선택과목으로 마련됐지만 환경 교과목 채택률은 매년 감소하고 있으며, 2009년 이후 환경교육 교사 신규임용 실적은 전무하다. 대부분의 일선 학교에선 과학 과목 교사들이 환경교육 업무를 병행하는 실정이며 전북지역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모 초등학교의 한 교사는 초등학교의 경우 창의적 체험 활동시간을 통해 환경교육시간이 배정진행되고는 있지만 이를 통해 효과를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말을 전한다. 현실적으로 학교에서 환경교육을 정규 과목으로 편성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심각한 환경문제가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현실에서 공교육에서 환경의 중요성을 다루는 교육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한 교육에 우리 학생들을 끊임없이 노출시켜야 함이 옳다. 이와 더불어 기업, 가정, 학교를 비롯해 자신들이 속해있는 공동체나 다양한 분야에서 각자가 할 수 있는 환경보호 방식을 의식적으로 실천하는, 대대적인 노력 또한 필요하다. △일상의 작은 것부터 변화해야 호주 연구진이 내놓은 기후와 관련된 잠재적 안보 위협 보고서에는 현재 지구의 환경오염 수준을 전시 상황과 맞먹는 것으로 보고 있다. 기후변화로 인해 지구의 온난화를 가속화시키는 지구 온난화 되먹임 현상이 발생하게 되면 기후는 인간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기존의 연구들은 북극의 빙하가 녹는 시기를 2040~50년으로 봤지만 이 보고서에서는 2030년으로 보고 있다. 어느 때보다 강력하고 위협적인 내용들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많은 전문가들이 지구의 기후변화를 막을 방법을 말한다. 첫째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절약하는 것, 둘째 깨끗하고 안전한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 셋째 아마존 산림과 주변 녹지를 잘 보호하는 것, 마지막으로 현재 우리의 생활양식 및 행동을 바꾸는 것이다. 정말 상식적인 말들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식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다. 나 하나 바뀌어서 변화가 있겠어?가 아닌, 일상의 작은 것부터 나와 내 주변을 바꾸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영화에서 볼법한 기후변화로 인한 재해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어느 때보다 경각심을 가지고 의식적으로 생활해야 할 때다. 미래세대를 위해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양심이라는 생각으로 작은 것 하나부터 시작해보자. /박연수 전북교육자치시민연대 사무국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기획
  • 기고
  • 2019.06.24 16:35

[전북의 재발견] 임실 사선대, "선녀들도 반한 국민 관광지 관촌 사선대를 가다!"

전라북도 임실군 관촌면, 이곳에는 국민 관광지라 불리는 사선대가 있습니다. 하늘에서 4명의 선녀가 그 경치에 반해 지상으로 내려와 노닐다 갔다 하여 붙은 이름 사선대! 지난 1985년에는 국민 관광지에도 선정되어 전국의 많은 관광객을 불러들이는 곳입니다. 사선대는 거대한 유원지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은데요. 전북도민의 젖줄과도 같은 섬진강 상류의 오원천 기슭에 조성된 사선대는 넓은 공원과 광장, 무대, 놀이터 등 여가를 보내기 좋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사선대 주차장에 내리자 통일을 기원하는 단군상이 맞이해 주고 있습니다. 혹시 단군 할아버지도 이곳의 풍경에 반해 이 땅에 터전을 잡으셨던 걸까요? 사선대에 들어서니 굉장히 넓고 광활한 잔디공원이 맞이해 줍니다. 이곳은 일종의 광장과 같은 기능을 하는 곳으로, 아이들이 맘껏 뛰어노는 잔디마당이지만 무대가 갖춰져 있어 축제나 행사가 있을 때는 노천 무대로 이용된다고 합니다. 넓은 공원을 따라 걷다 보니 사선대 정자가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과거부터 전해진 건축물은 아니지만, 그 정갈함과 위용이 주변의 소나무들과 잘 어울려 한 폭의 그림 같은 모습을 연출해내고 있습니다. 공원을 가로지르는 섬진강의 지류가 공원의 운치를 더하고 있는데요. 공원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이 강물 곳곳에는 분수도 설치되어 시원함을 더 해주고 있습니다. 곳곳에 있는 다리를 이용해 건너편 공원으로 넘어가면 사선대 조각공원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도내 다양한 작가들의 조각상을 전시해둔 이곳은 작가들의 예술상을 볼 수 있는 미술관 같기도 합니다. 돌과 철, 쇠 등 다양한 재료를 이용해 로봇, 사랑, 연인, 슬픔, 기쁨 등 다양한 작품들이 공원 곳곳을 가득 채우고 있어 보는 재미가 쏠쏠한 곳이었습니다. 사선대를 돌며 가장 크게 느낀 것이 바로 나무가 정말 많다.라는 것인데요. 오랜 시간 조성된 공원인 만큼 고목들도 많고, 나무와 다양한 식물들이 많아 수목원 같은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곳곳에는 아직 미완이기는 하나 장미 덩굴로 만들어진 장미 터널이나 다양한 꽃들의 향연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선대에는 다양한 꽃들은 물론 벚나무도 많아 봄에 오면 더 좋다고 합니다. 사선대 한편에는 임실군 청소년 수련원이 있었습니다. 드넓고 자유로운 사선대 공원 내에 수련원이 있으니 청소년기 학생들이 마음껏 뛰어놀면서 스스로에 대해 알아 가는데 좋을 것 같습니다. 공원 곳곳에는 평상이나 개수대 등 공원을 이용하는 시민들이 편하게 쉴 수 있는 시설들이 잘 조성되어 있었는데요. 실제로 도시락을 싸 와서 평상에 앉아 피크닉을 즐기는 시민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습니다. 이곳 사선대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건축물도 있는데요. 사선대에서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면 산 위에 덩그러니 위치한 정자, 바로 운서정입니다. 운서정은 1928년 당대 부호였던 승지 김양근의 아들 김승희가 아버지의 덕을 기리기 위해 당시 쌀 3백 석을 들여 6년간에 공사 끝에 지어 올린 건물입니다. 정각과 동서재, 가정문 등으로 이뤄져 있으며, 지방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전통 조선 양식의 건축물이라 지난 1990년 전북유형문화재 13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붉은 기둥과 석기둥 그리고 용을 형상화한 조각들이 운서정의 품격을 드높여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운서정 정각에 올라서면 사선대는 물론이고 임실군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데요. 그 경치가 워낙 장관이라 선녀들이 반해서 지상으로 내려왔다는 말이 이해가 갔습니다. 시작된 여름, 시원한 섬진강 바람을 맞으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싶다면 지금 도시락을 싸서 임실 사선대로 피크닉을 떠나보는 것을 추천해 드립니다!

  • 기획
  • 기고
  • 2019.06.24 16:21

마재윤 전북소방본부장 “골든타임 확보 위해 소방국가직화 반드시 필요”

마재윤 전북소방본부장(55)이 취임 8개월을 맞았다. 마 본부장이 재임하는 동안 전북소방은 눈부신 성과를 거뒀다. 노후화 된 장비를 신식으로 교체하고, 구급 사각지대에 있던 완주소방서가 개소됐다. 마 본부장을 만나 그동안의 성과와 앞으로 전북소방의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들어봤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취임 8개월이 지나셨는데, 그동안의 성과는 무엇이 있는지 말씀해주십시오. 우선 가장 최근에 전국적으로 이슈가 되었던 고(故) 강연희 소방경의 위험직무 순직인정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소방은 일반 기업이나 일반 공무원 단체처럼 노조가 없습니다. 고 강 소방경의 경우 근무했던 익산소방서 모든 직원들이 힘써줬고 본부 차원에서도 TF팀을 구성해 위험직무순직이 인정될 수 있도록 체계적이고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소방청도 행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이렇게 일선 소방서와 본부, 그리고 소방청 등 모두가 합심해 이루어낸 결과라 더 뜻깊게 생각됩니다. 또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한 소방공무원의 숭고한 희생정신에 대해 이에 맞는 국가적 예우를 통해 보상받을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이 밖에도 전북소방본부는 그동안 소방청에서 주관한 소방정책 종합 평가에서 전국 2위의 성적을 거뒀고, 친환경자동차 화재 대응기술을 주제로 전국 현장대응역량 강화방안 연구발표대회에서 전국 1위에 오른 성과도 일궜습니다. -최근 전북에서 활동하는 소방관들이 전국 최초로 매뉴얼을 만들거나, 어플 개발을 해 화제가 됐습니다. 제도 중에 개인의 직무를 평가하는 BSC(성과관리) 평가 제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동안은 자격증 취득이나 개인의 자기개발 차원에서 가점을 얻는 것이 주된 평가였는데, 개인주의적인 부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방은 단체입니다. 공동으로 하는 일이 많고, 혼자만 잘한다고 해서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듯 기존 평가제도를 전북소방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기존엔 전국대회 입상 시 1등에게만 가점을 주었던 것을 3등까지로 확대했고, 가점뿐만 아니라 해외벤치마킹이나 모범공무원 포상 등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 주는 인센티브를 늘렸습니다. 전북소방의 명예를 높인 사람을 대우해줄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개선한것인데요. 이런 것들이 직원들로 하여금 열심히 일하는 역동적인 직장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최근 현장 소방관들의 처우개선 문제가 가장 화두입니다. 처우개선을 위해 우선적으로 선행되어야 하는 부분은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예산적인 측면에서는 복지 측면에서 어느 정도 경지에 와있다고 봅니다. 2015년부터 소방안전교부세가 생기면서 옛날 근무해 온 소방 선배들은 상상하기 힘든 소방장비나 피복, 센터 등 기본적으로 어려움을 겪어 왔던 것들은 어느정도 개선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소방관들의 식사문제 등 사람을 고용해야 하는 문제도 있기 때문에 관련 부서와의 긴밀한 협의가 필요하지만 쉽지 않은 부분이 있고요. 또 소방관들은 24시간 동안 현장근무나 대기근무를 하고 있기 때문에 하루 기본 삼시세끼를 제외하고 중간중간에 간식도 섭취할 필요가 있는데, 이에 따른 출동 간식비 예산이 필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소방공무원들의 건강관리도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부분인데, 현재 전국에는 소방병원이 한 곳도 없는 실정입니다. 현재 충북 음성에 소방병원 건립을 추진 중에 있는데, 이러한 병원 문제가 조속히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처우개선과 관련에 무엇보다도 최근 소방관들에 대한 국가직 전환의 목소리가 큽니다만. 항간에서는 소방 국가직화가 소방관 처우 개선과 연결된다는 목소리가 많습니다. 하지만 소방 국가직화의 핵심은 국민들에게 더 이익이 된다는 것입니다. 국가직이 되면 오히려 소방관 처우는 후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장전문가인 소방은 국가를 중심으로 일원화되어서 재난에 대응해야합니다. 또한 소방은 근본적으로 화재, 구조, 구급 현장에 골든타임 확보를 위해 모든 정책이 집중돼야할 필요가 있죠. 이에 따라 미국처럼 분소개념으로 소방서보다는 센터나 구조구급대를 늘려야 합니다. 특히 고령화사회로 갈수록 구급대가 더 필요한 부분이 있고 화재보단 구급수요가 폭증하는 추세인데, 국가직화가 되면 그런 실질적인 부분들을 파악해서 신속한 정책 결정과 추진이 유리합니다. 요즘 시대는 지방자치 분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소방업무는 다릅니다. 과거의 소방업무는 지방사무 성격인 화재 등에 관한 사무가 핵심을 이뤘지만 최근에는 구조구급, 재난관리 등 국가사무의 색채가 짙어지고 있죠. 지난 강원도 산불에서도 보았듯이 소방조직의 재난대응 성격상 민주성보다는 효율성이 강조될 필요가 있습니다. -앞으로 전북소방을 이끌어나가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을 진행할 예정이신지요. 소방이 국가직 전환이라는 큰 변화의 기로에 놓인 만큼 소방 본연의 목적 달성을 위해 소방청과 소방본부, 소방서, 그리고 일선 안전센터까지 서로가 일체감을 가질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퇴직소방관과의 유대관계, 퇴직예정인 소방관과의 긴밀한 유대관계를 형성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향후 장수군에 소방안전타운이 조성이 되면 전라북도에서 순직한 소방공무원 7명의 명예를 기리기 위한 별도 충혼탑을 설치해서 국민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의 예우를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도록 할 계획입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하나 이루어진다면 단합된 모습은 자연스레 생기게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또 전북소방 소방인들의 복지나 처우가 타 지역에 비해 뒤지지 않도록 세심히 챙겨나갈 계획입니다. ● 마재윤 전북소방본부장은 1964년생인 마 본부장은 전남 강진군 출신으로 조선대학교 경영학 학사, 전남대학교 경영학 석사를 취득했으며, 1990년 소방간부후보생 6기로 소방에 입문했다. 2010년 광주 광산소방서장으로 최일선 소방현장의 총괄 지휘관에서부터 2012년 소방의 여러분야를 분석하고 연구하는 소방과학연구실장을 맡으면서 전문적인 식견을 넓혔고, 2013년 소방방재청 소방상황실장으로 부임해 현장상황을 통제 관리했다. 이를 계기로 소방현장이 돌아가는 안팎의 사정을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됐다. 이후 2014년 새내기 소방관을 육성하는 중앙소방학교 행정지원과장으로 부임해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방에 적합한 현장 중심의 인재육성을 위해 힘썼고, 2015년 고향인 광주에서 소방본부장 임무를 수행한 후 2017년 경기도 소방학교장을 거쳐 2018년 10월 전라북도에 부임했다. 최일선 소방업무부터 전문적 소방과학 분야, 소방교육까지 두루 섭렵한 전문가로 조직내에서 신망이 높다. 그가 취임한 이후 열악한 전북소방본부의 장비와 인력 등이 한단계 업그레이드 됐다는 평을 받고 있다.

  • 기획
  • 최정규
  • 2019.06.23 16:43

[생활의 흔적, 역사가 되다] 언론 창달의 중심지, 전주

전주시가 지난해 2월 21일부터 3월 30일까지 실시한 2018 전주기록물 수집 공모전에서 전주시 완산구 노송동에 거주하는 김용철씨(73)는 전주지역에서 발행된 신문과 잡지 등의 창간호 40여점을 내놓아 대상인 꽃심상을 수상했다. 김용철씨는 당시 신문 등 출판물에 대한 애정이 많아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다. 그것들이 전주의 의미 있는 기록물로 남게 된다니 영광이다 고 수상 소감을 피력했다. 그가 제4회 전주기록물수집공모전에 내놓은 자료는 1988년 전북도민신문과 전라일보, 전주일보 등 전주에서 발행된 지역신문 소식지와 창간호는 물론 당시 세상에 나온 생활정보지인 번영로와 까치고을 창간호였다. 또 함께 출품한 전주예술, 소년문학, 더불어 사는 전주 등 전주지역에서 쏟아진 다양한 종류의 신문잡지류도 포함됐다. 지난 30년간의 전주 언론과 출판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였다. 김용철씨의 출품작을 중심으로 1988년 이후 전북 신문 상황을 들여다본다. 김용철씨의 수집 출판물 중 단연 눈길을 끄는 신문은 전북도민일보와 전라일보, 전주일보의 소식지 및 창간호다. 1987년 민정당 노태우 후보의 6.29선언은 언론출판계 판도에 격랑을 일으켰다. 1988년 하반기 전북에서는 전북도민신문과 전라일보가 창간됐다. 1973년 5월 이후 유지되던 전북일보 1도1사 체제가 무너지고 전북일보-전라일보-전북도민일보 3사 경쟁체제가 됐다. △전북도민신문 창간 전북도민신문은 1988년 8월 8일자 전북도민신문 창간 소식지(타블로이드 4면)를 냈다. 송주인 사장이 취임사를 통해 창간을 알렸고, 새 신문의 주인이 됩시다란 공고를 통해 도민들이 주주로 참여해 줄 것을 요청했다. 열기는 뜨거웠다. 소식지는 도민주 20만 주를 돌파했고, 주주는 5000명에 육박한다고 썼다. 또 소식지 4면에서는 전라일보와의 통합 추진 작업이 결렬됐다는 소식도 전했다. 전북도민신문이 지난 5월 13일 자본금 7억5000만원, 전라일보가 5월 17일 자본금 3억2000만원으로 각각 법인회사를 설립한 뒤 3개월동안 통합협상이 시도되어 왔으나 통합사 제호부터 의견이 맞섰을 뿐만 아니라 도민주, 사원 정원 등 의견 접근을 보지 못해 통합은 요원한 실정에 놓이게 됐다고 알렸다. 전북도민신문의 발행인인쇄인은 송주인, 편집인편집국장은 서흥석씨가 맡았다. 1988년 10월14일 문공부에 등록(등록번호 가-78호)한 이 신문은 전주시 고사동 1가 340-1번지에 둥지를 틀고 11월22일 창간호 20면을 시장으로 출발했다. 창간호 1면에서 함께 열자! 위대한 전북이라고 주창했다. 송주인 사장은 창간사에서 군사독재가 물러가고 민주화, 지방화의 새로운 시대의 장이 열리는 이때 3500여 명의 주주들 출자금을 근간으로 창간, 지역발전을 위해 노력해 사랑받고 신뢰받는 공기(公器)로 발전시키겠다.고 했다. 창간 축하 메시지는 민정당 윤길중 대표, 평민당 김대중 총재, 민주당 김영삼 총재, 공화당 김종필 총재가 했고, 박권상 자유기고가 는 창간 특별기고를 통해 여론의 힘으로 국회를 움직여 명실상부한 지방자치를 구현해야 한다고 했다. 특집기사에서는 낙후 전북의 탈피, 판소리, 지방자치제를 맞는 도민의식조사 등을 다뤘다. 당시 도지사는 강현욱, 전주지검장은 유순석, 교육감은 홍태표, 전주시장은 육종진이었다. 주요 창간 축하 광고는 문화연필, 호남식품 보리음료 보리보리, 쌍방울 등이었다. 1989년 2월 27일 주총에서 김재호 이사가 회장으로 추대되면서 경영권을 장악했고, 1990년 10월 10일 새롭게 출범한 경영진이 제호를 전북도민일보로 변경,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94년부터 김택수 사장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전라일보 창간 전라일보는 1988년 7월 29일 등록번호 가-69호로 문공부 등록을 전북도민신문보다 먼저 마쳤지만, 약 1개월 뒤인 1988년 12월 20일 36면에 달하는 묵직한 창간호로 출범했다. 전라일보는 1988년 8월 12일과 10월 10일 등 중간 중간에 소식지인 전라일보 뉴스판(대판 4면)을 통해 전라일보 창간이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고 알렸다. 전라일보 창간에는 기업인 황온성씨의 자본금 3억2000만 원 투자가 결정적이었다. 이치백 발행인 겸 사장은 창간사에서 주어진 언론 사명에 입각, 역사의 창조가 어느 선택된 소수가 아닌 무언의 다수라는 진리를 새로이 인식하고 그 속에 뛰어들어 그들과 더불어 존재하는 실존의 밑거름이 될 것을 만천하에 거듭 천명한다고 했다. 창간 축사는 민정당 박준규 대표, 평민당 김대중 총재, 민주당 김영삼 총재, 공화당 김종필 총재 등이 했다. 당시 전라일보는 창간호를 36면 발행하며, 지역발전의 선두주자임을 선언했다. 창간특집 1(13~24면)과, 창간특집 2(25~36면)으로 구분, 창간특집 1의 1면에는 백두산 천지에 전라일보 사기를 꽂은 사진을 게재했다. 창간특집 2의 1면에는 비상을 주제로 한 송수남 화백의 한국화와 고은 시인의 시를 올렸다. 또 최승범 전북대 교수(시인)는 전라감사 연재를 시작했다. 본지 3면에서 지역발전을 위한 장기 시리즈 연재에 들어갔다. 두산그룹이 백화양조, 두산유리, 베리나인을 광고했는데, 당시 군산지역 향토주류사인 백화가 두산에 인수됐음을 보여준다. 전라일보는 1994년 6월 전라매일, 1999년 10월 전북제일신문으로 변경되는 우여곡절 끝에 2002년 2월25일 전라일보 제호를 회복했다. 그해 8월 현 유춘택 사장 체제가 됐다. △전주일보 창간 전주일보도 1991년 7월 31일 창간호(7월20일 등록번호 가-116) 34면을 발행, 종합일간지 경쟁에 뛰어들었다. 사옥은 전주시 우아3동 747-65번지다. 회장 이윤근, 발행인 편집인 인쇄인 박계훈, 편집국장 서재철 체제로 출범했다. 창간호 1면 사진으로 전주시 인후동 330-1번지 맹종죽 밭에서 김영채 사진부장이 촬영한 맹종죽(孟宗竹) 사진을 굵직하게 실었다. 박계훈 발행인은 창간사에서 본격 지자제 원년에 탄생하는 신문으로서 정치경제사회문화 각 분야에 걸쳐 지역사회 발전의 선도적 역할을 수행하겠다고 했다. 강암 송성용은 창간 축하 휘호 논정필직을 썼다. 또 벽천 나상목 화백의 산수화 하산고은(夏山高隱), 조병화 선생의 민주를 이끌어가는 힘으로란 축시가 눈에 띈다. 1988년 5월 8일 타블로이드 28면으로 창간된 주간 서도신문의 발행인 이윤근씨가 주간 전주신문으로 제호를 변경해 발행하다가 일간종합신문으로 업그레이드한 것이 일간 전주일보였다. 적자를 견디지 못하고 1996년 9월 13일 자진 폐간했다. △지방 일간지 난립 시대 2000년 10월 25일 새전북신문 창간 이후 전주를 기반으로 한 지방일간지는 우후죽순 격으로 늘어났다. 전주 기반 지방일간지는 2019년 6월 현재 전북일보(서창훈), 전북도민일보(김택수), 전라일보(유춘택), 새전북신문(박명규), 전북매일신문(전은경), 새만금일보(이재춘), 전북타임스(송민순), 삼남일보(고종승), 전주일보(신영배), 전주매일(조봉성), 전라매일(홍성일), 전민일보(이용범), 전북연합신문(조광래), 전북중앙(강현민), 호남제일신문(김만중), 전북금강일보(김병학) 등 16개사이다. /전주시 민간기록물관리위원회 위원, 전북일보 선임기자 김재호

  • 기획
  • 김재호
  • 2019.06.20 15:20

[최진석의 새 말, 새 몸짓] 종속성의 극복과 자유로운 삶

인간의 독립성은 근본적으로 생각, 즉 사유의 독립으로 보장된다. 정치적 독립도 사상과 사유의 독립이 뿌리다. 지금의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왕조인 과거 조선시대를 들여다봐도 우리는 우리의 사유로 살지 못했다. 중국이란 땅에서 중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생산된 주자학을 우리는 우리의 땅에 그대로 적용하려 무던히 애를 썼다. 정치 외교적으로도 중화질서를 지키고 수행하는 데에 치중했다. 이것이 당시 세계 질서의 큰 판이었고, 어쩔 수 없었으며, 생존의 한 방식이었고, 형식적으로는 그리 보여도 내용적으로나 실질적으로는 독립적이었다는 등의 여러 얘기들을 할 수 있겠지만 총체적으로는 종속적이었다. 중화 질서 속에서 형성된, 그것도 긴 시간동안 형성된 종속성은 아직도 다양한 방면에서 지속되고 있다. 우리는 과연 이것을 자각하고 있는가. 종속성의 끝은 식민지다.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로 36년을 살았다. 종속성을 내면화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해방 후에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이데올로기를 수용했고, 우리는 미국의 그것을 수용했다. 북한과 남한 사이에 서로 더 독립적이고 주체적인지를 다투곤 한다. 그러나 오십보백보다. 종속성에 갇혀 있으면 나타날 수 있는 대표적인 심리 현상이 주도적인 사고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이 한 생각을 추종하거나 따라하는 것이다. 자신이 사라지고 외부의 어떤 것이 들어와 자기 대신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이 종속성이다. 더 나아가서, 외부의 것에 지배되어 나타나는 종속성에 익숙해지면, 자기 안에 내면화된 기존의 이념이나 신념을 반성 없이 그대로 수호하려고만 하고 세계의 흐름에 맞춰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못한다. 이것도 종속성의 한 표현이다. 종속성은 외부의 것을 추종하는 형식으로도 있지만,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이념을 변화 없이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형식으로도 있다. 지금 우리는 이 두 형식 모두에 사로잡혀 있다. 독립적이면 부드럽고 유연하지만, 종속적이면 뻣뻣하고 경직된다. 독립적이면 주도적인 사고력을 갖지만, 종속적이면 사고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독립적이면 자기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자각하고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스스로 만들려고 덤비지만, 종속적이면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을 그대로 들여와 쓴다. 종속적이면 자기 필요를 각성하지 못한다. 남의 필요에 의존한다. 자기는 남의 그 필요를 내면화 한다. 독립적이면 자기가 직접 보고 만지는 것이나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그리지만, 종속적이면 타인이 좋아하는 것을 좋은 것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그린다. 독립적이면 나를 그리지만, 종속적이면 남이나 우리를 그린다. 독립적이면 나를 노래한다. 그러나 종속적이면 남이나 우리를 노래한다. 자신이 경험한 사실을 그리지 못하고, 주입된 관념을 그리는 것이다. 독립적이면 선례를 만들려 하고, 종속적이면 선례를 찾는다. 독립적이면 벤치마킹의 대상이 되고, 종속적이면 습관적으로 벤치마킹을 시도한다. 독립적이면 내 언어와 내 문자를 쓰지만, 종속적이면 외부의 그것들로 나의 그것들을 흐트러뜨린다. 독립적이면 지적인 경향을 보이고, 종속적이면 감각과 본능에 더 의존한다. 독립적이면 전략적이 되고, 종속적이면 전술적 단계에 머문다. 독립적인 나라에서는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좋은 명분이고, 종속적인 나라는 명분을 추구하는 것이 좋은 명분이다. 독립적이면 선진국까지 올라서고, 종속적이면 중진국이 오를 수 있는 최고 높이다. 독립이 습관이 된 나라의 정치는 사실에 의존하고, 종속성이 팽배한 나라의 정치는 도덕에 붙잡힌다. 독립적이면 몸이 앞으로 기울어 미래를 향하지만, 종속적이면 뒤로 기울어 과거에 갇힌다. 독립적이면 본질을 선택하고, 종속적이면 기능을 선택한다. 독립적인 나라의 정치는 국가 전체를 조망하며 나아가고, 종속적인 나라의 정치는 극히 편향적이거나 진영을 위주로 한다. 그래서 박정희 비판하다가 김일성을 향하게 되고, 미국 일본 비판하다가 중국으로 기울어 버린다. 박정희 비판할 때 사용하는 도구를 김일성한테는 적용하지 않고, 미국 일본 비판할 때 쓰는 기준을 중국에는 적용하지 않는 비이성적 감성에 함몰된다. 독립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내 이야기로 내 노래를 하지 않는 일이나, 내가 본 것보다는 다른 사람이 본 것을 그리는 일이나, 내 물건을 내가 만들지 못하는 일이나, 정치가 진영에 갇히는 일이나, 외교가 객관적 사실보다는 심리적 기대에 의존하는 일이나, 실용보다는 이념에 빠지는 일이나, 정치에 협치가 실현되지 않는 일들이 다 같은 틀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현상들일 뿐이다. 종속적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의 번영과 생존은 독립을 다시 생각해야만 보장되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종속적인 방식으로는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까지 이미 도달했다. 새로운 도전은 종속성을 극복하여 한 번 독립적 단계로 올라서는 일로만 의미를 가질 것이다. 독립성은 독립적 사고와 독립적 생활 방식으로 훈련된다. 일상에 가까운 일부터 먼저 돌아보자. 일상부터 독립적인 태도로 살아야 사유의 독립이 가능하다. 일상이 종속적이면 삶이나 공동체가 독립적일 수 없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우리를 외부의 어떤 것과 비교하면서 존재 가치를 확인하려 드는 경우가 많다. 송도, 통영, 김포, 부산, 평택이 모두 한국의 베니스라는 간판을 경쟁적으로 앞에다 건다. 송도가 송도면 되지, 왜 꼭 베니스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가. 월악산, 노고단, 대관령이 서로 한국의 알프스라고 한다. 영남에는 아예 영남 알프스가 있다. 대관령이 대관령으로 존재해야 진정한 가치를 부여받지, 알프스에 인정받음으로써만 대관령이 될 수 있다면, 대관령은 위대해지기 어렵다. 걷는 길을 만들어놓고는 서로 한국의 산티아고 길로 불리려고 안달이다. 이런 일들은 거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난다. 한국의 스티븐 호킹, 한국의 나폴리, 한국의 간디, 한국의 파바로티. 한국의 마돈나, 한국의 퓰리처상, 한국의 센트럴 파크, 한국의 조르바, 한국의 라이온 킹, 한국의 히말라야, 한국의 이치로, 한국의 아인슈타인, 한국의 호날두, 한국의 알랑드롱, 한국의 로버트 파커, 한국의 로버트 타우니, 한국의 로버트 드 니로, 한국의 톰 크루즈, 한국의 톰 행크스, 한국의 톰 포드, 한국의 마이클 볼튼, 한국의 마이클 잭슨, 한국의 마이클 조던드버그, 한국의 에디슨, 한국의 슈바이처, 한국의 페스탈로치, 한국의 다빈치, 한국의 헐리우드, 한국의 만델라, 한국의 빅토르 위고, 한국의 레이 찰스, 한국의 주윤발, 한국의 테일러스위프트, 한국의 샤론스톤, 한국의 아브라함 링컨, 한국의 MIT.. 등등. 다 셀 수가 없다. 자신을 자신의 특징으로 증명하려는 의도가 거세된 종속적 습관이다. 남의 이름에 연관되어야만 비로소 자기가 된 느낌. 자기를 자기의 눈으로만 보면 왠지 부족한 감이 드는 느낌. 모두 종속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느낌에 빠져 있다는 것은 독립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정서적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아름답기로 유명한 어느 섬에서 걷기 대회를 하는데 이름이 슬로우 걷기 대회라고 한다. 느리게 걷기 대회라고 못하는 우리는 도대체 누구인가. 지방자치단체도 옐로우 시티, 판타지아, 국제 슬로 시티 등의 표어들이 앞에 붙어 있다. 공공 기관의 표어치고는 너무 외부 의존적이다. 자주성과 독립성의 최후 보루라고 할 수 있는 국방부도 국방 헬프콜을 운용한다. 국방 도움전화는 왜 안 되는가. 어떤 부대는 구호 자체가 필승이나 단결이 아니라 아이 캔 두(I can do.)인 것을 보았다. 자기가 자신의 언어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면, 자신이 자신의 언어로 확인되지 않을 것이다. 용기는 자기가 자신의 존엄을 지키며 자기로 살기 위해 발휘하는 주체적인 활동이다. 자기 언어에서 스스로 소외된 주체가 용기를 발휘할 수 있을까? 이처럼 우리나라는 지금 일상의 종속성까지도 심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외부의 것에 의존해서만 비로소 가치를 인정받는 지경이고, 더욱이 외국말로 포장해야 만 더 권위 있게 보이는 줄 안다. 언어를 다루는 방송도 마찬가지다. 프로그램 제목들에서 종속성이 습관이 되어버린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마이베이비, 배틀트립, 시니어 토크쇼, 돈워리스쿨, 미스터리 키친, 애니멀 레스큐, 맨인블랙박스, 나이트 라인, 모닝 와이드, 스포츠 다이어리, 해피 투게더, 스포츠 투나잇 등등. 굳이 이래야만 하게 된 우리는 누구인가. 언어가 주체의 독립을 지키는 근본 장치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 언어를 소외시키는 방송은 또 우리에게 무엇인가? 조선 전기부터 중기까지 조선의 화가들은 조선을 그리지 않았다. 산천도 조선의 산천이 아니라 중국 산천을 그리고, 옷이나 집이나 물건들도 모두 중국의 것을 그렸다. 조선의 그림에 나오는 소도 조선의 소가 아니라 긴 뿔이 난 중국 남방의 소였다. 그림을 매개로 나를 표현하는 예술 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머리 속에 주입된 종속적 관념을 재현하기만 했다. 자기 세계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관념을 그린 것이다. 지금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남이 주입한 관념을 그리면서도 그것을 보고 감탄을 하고 서로 칭찬을 주고받으며 산 것이다. 그런 태도를 주입한 사람들이 볼 때는 얼마나 우스웠을지 짐작이 된다. 조선 후기에 와서야 비로소 조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소위 겸재의 진경산수이다. 외부에서 주입된 관념을 그리는 것도 진경산수가 아니지만, 내게 만들어진 이념을 수십 년 간 바꾸지 못하고 계속 그리던 것만 그리는 것도 진경산수가 아니다. 수십 년 간 변한 세상과 호흡하지 못하고, 정해진 자기 이념만을 고집하는 것도 자신의 세계를 그리지 못하고 주입된 관념을 그리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독립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그리지 못하고, 장기간 내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정해진 관념이나 외부에서 온 관념만을 그리는 종속적 태도는 본질보다는 기능에 빠진 삶을 살게 한다. 이것이면 어떻고 저것이면 어떤가. 멋있게만 보이면 되지.나 오마이베이비면 어떻고 애니멀 레스큐면 어떤가. 멋있게만 들리고 시청률만 높으면 되지.라는 경박함에 빠진다. 이것은 인성이 좀 나쁘면 어떤가, 공부만 잘하면 되지.라고 하는 말과 완전히 일치한다. 기능에 빠진 삶으로는 독립적 단계에 오를 수 없다. 기능에 빠진 태도를 가진 사람은 독립을 모른다. 독립을 모르면 창의가 없다. 독립과 창의가 없다면, 부강하고 자유로운 삶을 이룰 수가 없다. 이제는 종속성을 자각하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해야할 때다. 그러지 않으면 생존이 위협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건명원 초대원장

  • 기획
  • 기고
  • 2019.06.19 20:33

[문화&공감 2019 시민기자가 뛴다] 다른 역사와 공감의 예술, 그리고 전주

지난 6월 7일부터 10일까지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이하 전주대사습놀이)가 성대하게 치러졌다. 전주한옥마을과 경기전, 국립무형유산원 등지에서 전통예술의 향기가 진하게 피어올랐다. 전주대사습놀이가 한창 진행 중이던 8일, 한옥마을 인근 풍남문 광장에서 다른 색깔의 공연이 올려졌다. 제4회 초록바위진혼제. 과거 초록바위에서 죽어간 민초들의 넋을 달래기 위한 공연이었다. 전주대사습놀이는 연구자로 참관하였고 초록바위진혼제에는 공연자로 참여했다. 같은 오늘, 다른 역사가 느껴졌다. 전주대사습놀이는 그 유래에 대해서 몇 가지 의견이 있으나 전라감영의 통인들과 전주부의 통인들이 깊이 관련되었다는 점은 공감을 얻고 있다. 18세기 중엽에 이루어진 전주 통인청 대사습이 명창 배출의 등용문 역할을 했고 그 전통을 고증하여 오늘날의 전주대사습놀이로 계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통인은 조선 시대에 관아의 벼슬아치 밑에서 일을 보던 사람들을 말하며, 통인청은 이들이 일을 보던 관사다. 통인은 최근 모 지상파 방송의 동학관련 드라마에서 백가네 거시기로 묘사되기도 했다. 극적인 전개 상 악인으로 설정된 점은 고려해야 하겠지만 관아에서 통인들의 지위나 생활을 이해하는 데 참고삼을 만하다. 전주 통인청 대사습은 경연대회 성향을 가진 서민 중심의 판소리 감상회였던 것 같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전주대사습을 조사한 홍현식의 면담자료에는 전주 통인청 대사습을 직‧간접 적으로 경험한 전주 노인들의 증언이 다양하게 실려 있다. 양반들은 경연장에 오지는 않고 행사가 마무리된 후 명창들을 자신의 집에 따로 불러 판소리를 듣곤 했다는 증언이 있다. 양반들이 있었나, 없었나가 중요한 건 아니다. 주된 관객층은 서민들이었던 것 같다. 또한 분명한 건 전주의 통인청대사습이 관아에서 주관한 행사였다는 점이다. 국문학자 유영대는, 전주 대사습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전주에서 이방이나 통인들이 판소리 명창을 초청하여 일종의 소리잔치를 했던 역사는 300년이 더 되었을 것이라고 봤다. 이는 20세기 초까지 지속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시기를 떠올려 보면 전주에 아로새겨진 또 하나의 역사와 중첩된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초록바위는 전주천 싸전다리 부근에 있다. 정확하게는 동완산동 곤지산 자락에 있는 바위언덕을 말한다. 조선시대에 죄인을 효수하던 곳이었고, 동학농민군과 천주교 신자들도 이곳 초록바위에서 처형당했다.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김개남 장군이 초록바위 근처 서교장에서 참수당했다는 기록이 있고, 초록바위에서 전주천 물속으로 떠밀려 죽어간 15세의 두 소년 천주교 신자들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권력을 개혁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역사의 기운이 핍박당한 상징적인 곳이다. 칸타타 형식의 이번 초록바위진혼제에서 작곡과 음악감독을 맡은 피아니스트 이형로 씨를 만났다. 공연 며칠 후였다. 초록바위진혼제의 내력에 대해 들었다. 그가 초록바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건, 10년 전 한옥마을에서 서학동으로 이사를 오면서부터라고 한다. 초록바위의 사연을 접하고 초록바위가 있는 곤지산 자락을 여러 번 올라갔다고 한다. 수풀만 우거져 역사의 흔적은 사라지고 찾아볼 수 없었다. 뜻을 함께하는 지인들과 많은 의견도 나누고 행정에 찾아가 길도 정비해 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면 진혼제도 열어보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행정에서 길을 정비해주고 서학동 주민들과 자발적으로 참여한 진보적 예술단체의 힘이 모아져 4년 전에 초록바위진혼제를 시작했다고 한다. 첫 회 때는 초록바위 정상에서 직접 풀을 깎고, 전기를 끌어오고, 악기를 짊어지고 가서 했고, 2회 때는 장소가 여의치 않아 인근 동물병원 주차장에서 했다고 한다. 3회 때는 국립무형유산원 야외 마당에서, 4회는 풍남문 광장에서 열게 되었다. 동학농민군의 전주입성일인 음력 4월27일을 기념하여 그 인접한 날에 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진혼제를 준비한 주민과 예술가들이 더욱 힘을 모아서 시민들의 잔치로 만들어 가면 좋겠다고 했다. 과거를 용서하는 것이 현재의 위로가 될 수 있고, 현재의 위로가 내일의 문화자산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초록바위진혼제가 봄에 이팝나무가 흐드러지게 피듯이 전주에 뜻있는 봄의 문화행사로 자리 잡으면 좋겠다.고 했다. 다소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통인청 대사습을 주관했던 통인들은 무엇을 했을까? 관의 역사와 민의 역사가 부딪히는 현장 어디쯤에 그들은 있었을까? 백가네 거시기처럼 역사의 넓은 스펙트럼을 유영하며 파란만장한 행보를 했을까? 전주대사습놀이와 초록바위진혼제가 필자에게 다른 결의 역사로 다가온 건 이런 모습이었다. 전주대사습놀이는 관의 역사로 다가왔고 초록바위진혼제는 민의 역사로 다가 왔다. 전주대사습놀이는 통인청 대사습 이전에도 전주대사습놀이보존회에서 유래로 소개하고 있는 숙종, 영조 대의 사습놀이, 영조 대의 지방 재인청 및 가무 대사습청 설치와 소리광대에 대한 벼슬 제수, 명창 칭호 하사 등에서도 관과 닿아 있는 역사를 볼 수 있다. 초록바위진혼제는 동학농민이나 천주교 신자와 같이 관에 맞서거나 그 뜻을 거스르다 죽어간 민초들을 위한 진혼제다. 민의 역사와 함께 할 수밖에 없다. 두 행사에는 공통점이 있다. 근간은 모두 서민, 백성이라는 점이다. 통인청 대사습의 소리판을 가득 메우고 명창의 탄생을 좌우했던 것도 결국은 서민들이었다. 초록바위의 애끓는 사연들도 백성들의 것이었다. 그것이 오늘날 전주에서 시민의 예술로 표출되고 있는 것 같다. 색깔은 달라도 서로 공감하면서 말이다. 다른 역사지만 공감의 예술을 품고 있는 곳, 전주를 말할 때 이런 점도 꼭 빠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조세훈(문화인류학 연구자)

  • 기획
  • 기고
  • 2019.06.18 16:48

[전북의 재발견] 전봉준 장군 생가와 뚜라조각공원 : 전봉준 장군을 기억하기 위해 가볼만한 곳

전라북도 고창 여행을 다녀오고 난 뒤, 녹두꽃이라는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전봉준 장군 태어난 생가터가 바로 이곳, 고창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고창읍성부터 뚜라조각공원 도 있고 철마다 열리는 고창의 흥미진진한 축제 소식까지 접하고 나니 고창이 좀 더 특별한 곳으로 기억되었답니다. 넓은 공원 가득 대규모 고인돌이 보존되어있는 고인돌공원도 꼭, 함께 가보시길 추천해 드리며 전봉준 장군 생가로 향해보아요. 전봉준 장군 생가는 동학농민혁명을 이끈 전봉준이 태어난 생가터에 조성된 가옥이에요. 새야 새야 파랑새야 는 누구나 아는 노래죠. 뮤지컬로도, 여러 성악가들이 부르기도 하였고 최근 방영되는 드라마 녹두꽃의 OST로도 들을 수 있는 노래로 아이들의 입으로 불리는 동요일 때와 달리 다양한 느낌으로 접해볼 수 있는 노래에요. 학생 때는 동학농민운동으로 배웠던 것 같은데 동학 농민혁명으로 바뀌었다고 해요.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봉건체제의 개혁을 위해 1차 봉기하였고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을 수호하고자 2차 봉기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들의 혁명이라고 해요. 이는 조선 봉건사회의 부정, 부패를 척결하고 항일을 위한 민중항쟁이었고 피지배계층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이후 의병항쟁, 3.1 독립운동, 항일무장투쟁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끼친 중요한 사건이라고 해요. 요즘 방영되는 녹두꽃은 전봉준이라는 역사적인 인물보다 거시기라고 불리는 이강이 주인공인데요. 동학농민혁명이 전봉준이 이끌긴 했지만 수많은 이름 없는 민중들, 거시기들의 혁명이었다는 점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해 좀 더 의미 있는 여행지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곳이에요. 사실 생가터라고 하는 곳은 실제로 살았던 건물도 아니고 복원하여 올린 곳이지만 녹두꽃이라 불리는 전봉준의 생가를 찾아 전봉준의 일생과 동학농민혁명의 이야기를 한 번씩 더 되새겨 보고 알아가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특별한 시간이 될 것 같아요. 생가터는 생각보다 크지 않고 작은 가옥만 있을 뿐인데요. 가까운 곳에 뚜라 조각공원이 있어서 두 곳을 함께 둘러보러 다녀오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참고로 전라북도 정읍엔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있다고 해요! 이곳에 방문하면 가슴을 울리는 녹두꽃 OST 새야새야 파랑새야 한 곡 들어보시기를 추천해 드리며 뚜라 조각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겨봅니다. 뚜라조각공원은 전봉준 생가터 바로 옆이에요. 고창 출신 조각가 부부가 조성한 공간으로 싱그러운 잔디밭과 수목 사이로 알록달록하고 멋진 조각들이 조성되어 있는 건데요. 곳곳이 모두 포토존일만큼 좋았고 날이 푸르렀던 날이라 더욱더 멋졌던 곳이에요. 조각들은 남녀노소 누구나 흥미로울 만큼 다양한 주제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고 생각보다 넓은 곳 구석구석에 조각들이 놓여 있어서 둘러보는 재미가 있는 곳이었어요. 조각가 부부는 이곳 뚜라조각공원에서 결혼식을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고창의 팜팜시골버스 코스로 들르기도 했다고 하는데 멋진 작품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한 곳이에요. 조각공원을 둘러보다 보면 원래 사물과 크기가 다르게, 기발한 배치와 상상력이 동원된 작품들을 볼 수 있어요. 아이들과 함께한다면 작품을 보면서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다양한 자세와 다양한 재료로 인체를 표현한 작품들도 많고 캐릭터처럼 귀여운 것도, 기하학적이라 모호한 것도 모두 저마다 매력을 갖고 있었고 그래서 조각공원을 보는 내내 지루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곧 다가오는 여름. 이미 시작된 여름의 더위엔 시원한 수박 한입이 절실할 텐데요. 아기자기한 수박 조각과 함께 고창 전봉준 생가와 뚜라조각공원 산책기를 마무리해 보아요 . 주소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86-5 /글사진 = 배유미(전라북도 블로그 기자단)

  • 기획
  • 기고
  • 2019.06.18 16:36

[전북의 재발견] 농가체험 고창 토굴된장 : 건강한 발효밥상과 농가 민박을 체험하기 좋은 곳

봄비처럼 쌀쌀한 일교차에 아침저녁 가볍게 걸치던 윗옷도 이제는 가벼워진 걸 보니 여름이 다가온 걸 느끼게 되는 날씨죠? 무더워질 날만 남은 이 무더위에 어른이나 아이들의 입맛 또한 날씨 탓에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바람에 엄마인 저로서는 아이들의 매끼 식사메뉴와 건강에 관심이 생기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인스턴트나 패스트푸드 음식에 길들어져 있는 아이들에게 건강하고 바른 먹을거리를 알려주고 싶은 것이 엄마 마음인데요. 그래서 주말 가족들과 함께 가까운 바닷가에 들러 조개도 잡고 건강한 발효 밥상체험을 할 수 있다는 토굴 된장& 농가민박 체험장에 방문했습니다. (영)토굴된장 발효식품 특화농장 주소 : 전북 고창군 상하면 선운대로 734-10 고창군 상하면에 있는 영농조합법인 토굴 된장은 농업인과 계약 재배한 엄선된 콩을 원료로 하고 있습니다. 심각한 기후변화로 인한 미세먼지와 중금속 오염 등 각종 유해물질이 차단된 직접 구축한 안전한 토굴 속 항아리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된장이 발효되는 최적의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여 저온 숙성된 저염식 토굴 된장을 생산하고 있는 곳인데. 가장 안전한 전통 발효식품 먹거리 보급에 힘쓰고 있는 전통식품 체험시설이라고 합니다. 건강하고 몸에도 좋은 전통발효음식인 장류를 만들어 발효건강밥상체험과 전통식품체험을 할 수 있다고 하니 체험하시는 모든 분에게 유익한 시간을 보낼 듯해요. 유기농 볏짚에서 띄운 메주로 빚어낸 공해 없는 토굴에서 저온 숙성 시킨 토굴 된장! 된장을 저장하는 저온 창고의 토굴이라고 해서 냄새도 많이 날 줄 알았는데 쾌적한 환경에 또 한 번 놀랍니다. 주차장 옆으로 길목에 꽂아둔 바람개비와 나무 그네를 보고 있으니 시골의 고즈넉한 풍경과도 느껴져 아이들과 함께 산책하기도 좋을 것 같습니다. 큰 장독대의 이정표를 지나 체험관으로 들어서는데 보이는 밭에는 사장님 내외분이 직접 농사짓고 계신다는 고창의 특산품인 복분자와 블루베리가 영글어 붉은빛을 띄고 있었어요. 복분자와 블루베리는 익으려면 날씨가 지금보다 더 더워져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무더운 날씨에 어렵게 얻는 특산품인 만큼 몸에도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발효 체험장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넓은 체험공간! 깨끗하고 넓은 체험공간이 꾸며져 있어서 많은 사람이 체험할 수 있어요. 내국인뿐 만 아니라 외국인분들도 많이 방문하셔서 높은 만족도로 극찬을 받는 곳이기도 해요. ■ 원데이클라스로 체험할 수 있는 과정* # 과정당 4OH 코디얼 음료 교실 도깨비 고추장 교실 만능 간장 교실 견과류 쌈장 교실 복분자 와인 교실 수제식초 비누 교실 건강한 기능성 소금 만들기 교실 # 체험 수강료 : 체험당 2만원(실습재료 포함) # 문의 : 063- 562- 6800 # 블로그 : ksg2101.blog.me # http://www.facebook.com/ksg2101 체험장 안 한쪽으로는 발효식품인 된장과 간장을 판매하는 곳이 따로 마련되어 있어요. 사람들이 체험하고 다른 여러 종류의 장과 소스, 식초들을 직접 맛보고 구매할 수 있습니다. 영농조합법인 토굴 된장에서 운영하는 고창 농가민박은 가족과 함께 추억을 만들 수 있는 곳이에요. 체험장에 오셨다가 숙박까지 할 수 있으니 인근 관광지를 돌아보고 오셔도 될 만큼 가까운 곳에 있어서 많은 관광객의 선호도가 높은 곳이기도 합니다. 민박 이용 시 조식은 농가에서 직접 키우는 닭의 신선한 달걀과 계절과일로 간소하게 제공된다고 해요. 그리고 숙소&체험을 함께 검색하고 예약하는 4억만 뷰의 솔직한 후기를 볼 수 있는 유니크한 여행 사이트인 에어비앤비에서도 토굴 된장을 찾아볼 수 있어요. 한번 왔다 가면 또다시 찾아오고 싶다는 고창 토굴된장 농가민박은 벌써 입소문을 타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큰 호평을 얻고 있답니다. 전라북도를 대표하는 안전하고 맛있는 식품 생산 농가인 영농조합법인 토굴 된장에 가족들과 시골 할머니 댁에 놀러 오는 기분으로 체험하고 추억 쌓으러 오세요. 우리 것이 좋은 것이라고 하잖아요. 요즘 우리 아이들이 배달음식이나 외식 음식에 길들어져 정작 몸에 좋은 음식은 멀리하고 있어 안타깝죠.곧 다가올 여름방학을 계기 삼아 건강한 체험활동 하러 오셨으면 좋겠어요. /글사진 = 최유정(전라북도 블로그 기자단)

  • 기획
  • 기고
  • 2019.06.18 15:26
기획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