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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소통 2019 시민기자가 뛴다] 사회적기업의 가치 평가 달라져야 한다

사회적기업은 영리기업과 비영리기업의 중간형태로 사회적목적을 우선적으로 추구하면서 재화, 서비스의 생산, 판매 등 영업활동을 수행하는 기업(조직)을 말한다. 전북 지역에 인증 사회적기업은 127개소로 서울 389개소, 경기 354개소, 경북 133개소에 이어 4위이지만 인구 대비로 보면 가장 많은 사회적기업이 운영되고 있는 곳이라고 볼 수 있고 수익을 내고 있는 사회적기업이 10개 중 1.5개로 분석되고 있을 정도로 경제적 수익을 내는 사회적기업 비율이 매우 적다. 그러나, 사회적기업이 경제적 수익보다 사회적가치를 중심으로 운영하고 있는 점을 중심에 두고 평가해야 한다. △사회적 가치에 대한 평가와 보상 필요 사회적 가치란 사회적가치란 사익을 초월해 공공의 이익과 공동체의 발전에 기여하는 복지, 안전, 봉사, 연대, 협력, 균형, 생태, 윤리, 인권, 공정 등의 가치를 의미한다. 사회적가치 구현은 고도성장 과정에서 소외된 분야나 배제된 사람을 지원하는 일에 최고의 우선순위를 부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물론 재무적가치와 사회적가치를 둘 다 창출해야 하지만 사회적가치를 중심에 두고 운영을 하기 때문에 일반 기업에 비해 재무 성과가 높게 창출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런 이유로 사회적기업이 창출한 사회적가치를 재무 성과로 평가하도록 화폐가치로 환산해서 인센티브를 주는 움직임이 시도되고 있다. 민간기업인 sk에서 시도하고 있는 사회 성과 인센티브(spc, social progress credit)가 그 대표적인 움직임이다. SPC는 사회적기업이 창출하는 사회적 성과에 정당한 가격을 매겨 경제적으로 보상하는 시장 시스템을 통해 사회적기업에게 새로운 현금 흐름이 생기고, 투자자에게 매력적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드는 제도다. 사회 성과 인센티브에 대해 다른 사회적기업 정보가 공개되지 않기 때문에 필자가 일하고 있는 전주빵카페(천년누리)를 예로 들어 설명해본다. 전주빵카페는 고령자를 비롯한 장애인, 청년, 다문화여성 등 경제적 취약 계층의 지속 가능한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을 목표로 빵을 굽고 있는 사회적 기업이며 약 36명의 직원들이 일하고 있다. 전주빵카페(천년누리)는 spc를 통해서 사회생태계 가치 창출 효과 2억원, 고용성과 2억5000만원, 사회서비스 성과 540만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 2017년도에 약 2000만 원, 2018년도에 약 6000만 원의 인센티브를 받았다. 그 인센티브로 사회적 약자들을 더 고용했다. spc는 주로 고용 부분에서만 사회성과를 화폐가치로 인정해주고 있지만 다양한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지난 4년 동안 고군분투하면서 로컬 브랜들 가치 경쟁력을 키워왔고 지금도 치열하게 골리앗을 대상으로 다윗의 전투를 하고 있다. spc가 평가항목과 관계없이 전주빵카페가 창출하는 중심적인 사회적 가치는 사회적 약자 고용 가치, 사회생태계 가치, 환경생태계 가치, 사회서비스 가치라는 4가지 영역이다. 그 영역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용사회생태계 가치 높아 첫째, 고용 가치다. 일자리를 구하기에 어려운 사회적 약자, 노인과 장애인, 지역 청년, 경력단절 여성, 다문화 여성 등을 위한 일자리 마련을 통한 가치 창출이다. 전주빵 카페(천년누리)는 빵을 구워 판매한 수익 즉, 재무성과를 취약계층들의 일자리 창출로 돌려 고용이라는 사회적 가치를 만들고 있다. 2015년 4명으로 시작한 할머니들의 일자리가 2019년 6월 36명의 일자리로 늘어났다. 19세부터 80세까지 일하고 있고 할머니, 장애인들을 포함하여 직원들 평균 급여는 약 220만원 정도이다. 성과 공유제도 실시하고 있어서 목표 달성 시 전체 직원들이 재무성과를 공유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영리 기업의 목표인 주주에게 이익을 돌려주는 것은 두 번째 목표가 되는 것이다. 둘째, 사회생태계 가치이다. 일거리가 없는 동종업계의 사회적기업이나 자활 단체 등과 공동 생산하여 판매함으로써 그 수익으로 경쟁력이 약한 동종업계 사회적기업에게 일거리를 주면서 사회생태계를 튼튼하게 연계하고 있다. 지역의 자활단체(3개소)와 사회적 기업(1개소)이 전주빵이라는 브랜드로 제품을 생산하고 있고 천년누리는 그 수익을 사회적경제 업체들을 위해 배분하고 있다. 이렇게 콘텐츠 경쟁력이 있는 전주빵이라는 로컬 브랜드로 제품을 함께 생산하면서 내부 고용 효과뿐 아니라 외부 고용 효과도 톡톡히 내고 있는 셈이고 폐업 위기에 있는 사회적 경제 업체들의 생존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 셋째, 환경생태계 가치이다. 전주빵카페는 우리밀과 로컬 농산물 사용을 통해서 탄소배출을 줄이고 환경 가치를 창출하고 로컬 농산물을 생산하는 소농들의 소득증대에 기여하면서 로컬 생태계의 지속가능성이라는 가치를 높이고 있다. 우리밀은 약 100톤, 팥, 감자, 보리, 채소 등 로컬 농산물은 약 50톤 정도를 사용하고 있다. 밀가루가 수입해오기 까지 이동 거리는 미국, 캐나다산 1만1949km, 호주는 6948km이다. 우리나라가 한해 수입하는 400만 톤인데, 약 1억9600만 g의 이산화탄소를 배출시키면서 수입하고 있다. 넷째, 사회서비스 가치이다. 전주빵카페는 사회복지기관, ngo, 학교, 농촌, 시골 교회, 예술인, 청소부, 폐지 줍는 노인, 택시운전사 등 지역을 위해서 일하시는 다양한 분들과 빵이 필요한 곳에 무료로 빵을 보내고 후원하면서 그들의 삶을 응원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공공과 민간 등 모든 부문의 동참 필요 사회 성과 인센티브 같은 제도를 통해서 사회적기업이 사회문제 해결에 집중하며 동시에 지속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사회적 기업 생태계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정부와 지자체가 사회적 경제를 활성화시키겠다고 하지만 현장에서는 시장경제 안에서 생존을 위해 외롭게 분투하고 있다. 공공기관 상업시설 입점 시 사회적 기업 인센티브는 전혀 받지 못하고 영리 기업과 똑같은 조건에서 경쟁하고 과도한 수수료를 내고 있으며, 또 다른 공공기관 휴게소 매장의 경우에는 우리의 매출이 생각보다 많이 나오니까 계약 체결 시 수수료보다 더 인상해야 하는 현실이다. 지자체 공식 대외 행사 때 사회적기업 우선 선정보다는 가격 경쟁으로 제품을 선정하기 때문에 최저가 입찰을 할 수밖에 없고 각종 자자체 행사에는 로컬 브랜드와 사회적 기업 제품보다는 스타벅스 기프티콘으로 프로모션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 다반사이다. 정부와 지자체가 하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 고용을 사회적 기업이 대신하고 있다면 보다 실효성 있는 정책이 나와서 사회적기업들이 돈 벌기보다 사회문제 해결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사회적기업이 경쟁력을 갖도록 비용 절감 평가와 더불어 사회적 가치 평가도 함께 구성하도록 공공기관이 앞장서야 한다. /장윤영 천년누리 전주빵 대표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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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6.17 17:1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58. 찾고픈 전북 특산품 순채

순갱노회(蓴羹鱸膾)란 중국의 고사가 있다. 진나라의 재상이었던 장한이 고향에서 먹던 순챗국과 농어가 생각난다며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가버린 것에서 유래한다. 주로 고향을 그리워하거나 벼슬과 권력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산다는 의미로 쓰이는 말이다. 그 고사 속의 순채(蓴菜)는 그리 낯선 존재가 아니다. 순채는 오랜 세월 우리 지역의 특산품으로 알려진 식재료이자 약재였다. 순나물이라고도 불리는 순채는 순(蓴), 수채(水菜), 금대(金帶)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다년생 수초이다. 연(蓮)과 비슷하고 자생하는 곳 또한 얕은 물이나 방죽이다. 물 위에 떠 있는 잎은 둥그런 연잎에 비해 타원형이고 크기가 5~10㎝이며, 봄철에서 여름 사이 탱글탱글한 투명막에 싸인 줄기와 돌돌 말린 어린잎을 채취하여 식재료로 쓴다. 5월에서 늦게는 8월까지 꽃을 볼 수 있는데, 특이하게도 암수 두 가지 모습으로 하루는 암꽃으로 피고 다음 날에는 수꽃이 되어 자색의 꽃을 피운다. 은은한 향과 매끄러운 식감의 순채는 왕의 수라상에 오르고 선비들의 사랑을 받던 고급 식재료로 산에서 나는 송이, 밭에서 나는 인삼과 더불어 물에서 나는 순채가 으뜸이라는 찬사를 듣던 신비로운 식물이다. 고려 말 학자 이색은 순채의 생김새를 용의 침이라 비유했고, 이익은 『성호사설』에 순채를 맛보는 것을 신선의 취미라 소개했으며, 서거정은 아예 <순채가>를 지을 정도로 순채를 좋아했다.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편에 순채를 각도(各道)에 진상하도록 했는데, 경상도와 전라도 같은 먼 도는 물에 담아 오게 되니 녹아버리기 쉬울 뿐 아니라...하며 승정원에서 순채에 대한 진상을 아뢴 기록이 있다. 왕의 진상품이었던 순채에 대한 기록은 자생지를 비롯하여 조리법과 순채에 대한 시구로 남아 귀한 대접을 받았던 흔적을 다양한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순채는 『음식디미방』과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을 비롯한 각종 조리서에 차와 무침, 국, 탕으로 조리하는 방법들이 기록되었고, 『본초강목』과 『동의보감』 등에는 해독과 해열을 하는 데 쓰이는 약재로서의 효능이 기록되었다. 위의 기를 보하고 이뇨작용이 있다고 알려진 순채는 특히 술독을 풀어주는 효험이 있다 하여 민간요법에 사용되었다. 이렇듯 여러 문헌에 등장하는 순채는 고대 중국의 시집인 『시경』에 그 이름이 순(蓴)자로 실린 것을 최초의 기록으로 보고, 우리나라에서는 고려문인 이규보(1168-1241년)의 문집 『동국이상국전집』에 실린 <친구 집에서 순채를 먹다>외 몇 수의 시에 등장하는 순채가 최초의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얼음을 삶는다는 건 예로부터 못 들었는데 / 그대는 어찌하여 삶는다고 자랑하는가 / 불러와 자세히 보니 / 곧 순챗국을 말한 것 / 얼음 같지만 풀리지 않고 / 삶을수록 더 또렷또렷하여 / 이것이 바로 얼음 삶는다는 것인데 / 나를 놀라게 했구료... 투명한 막으로 쌓인 새순을 얼음에 비유하여 얼음을 삶는다라 하였고, 씻고 삶아도 막이 잘 벗겨지지 않는 순채의 특성을 잘 표현한 시구이다. 이규보가 당시 전주목에서 근무하며 순채를 접했음과 고려 시대 순채의 인기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또한, 허균도 함열에서 저술한 팔도음식 소개서인 『도문대작』에 호남에서 나는 순채가 가장 좋다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강원과 충청도 등을 비롯하여 당시 전라도였던 제주의 두 곳을 포함한 순창, 함열, 만경과 김제 등을 전라도 순채의 산지로 기록했다. 순채가 많이 나는 지역은 순채의 순(蓴)자를 아예 지명에 썼는데 철원 순담(蓴潭)계곡, 의성 순호리(蓴湖里)와 더불어 김제의 순동(蓴洞)에는 지명에 순자가 들어간다. 순담계곡은 순조 때 우의정을 지낸 김관주가 요양하면서 연못을 파 순채를 심고 순담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김제의 순동은 특히 소못(牛堤, 금이제)에 순채가 지천이었고, 여러 못에 자생하는 순채가 많아서 생겨난 지명이다. 1934년 6월 매일신보에는 김제 순채 공장에서 불이 난 기사가 실렸다. 김제를 비롯한 지금의 익산, 전주, 완주의 방죽에서 순채가 나다 보니 일본으로 수출하기 위해 순채를 채집하여 병에다 넣는 순채 제조공장이 김제에 있던 것이다. 일본에서 준사이(じゅんさい)라 불리는 순채는 특히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식재료이다. 순채 채집을 위해 일본인들이 순채 산지를 수소문하면서 순채를 마구잡이로 채취하며 수탈을 했다. 그러다 보니 기존 못이나 방죽에서 부족한 생산량을 채우기 위해 논에다 물을 대 재배를 했다고도 전해진다. 그러다 해방 이후 순채에 대한 관심이 사라졌다가 1970년 한일국교가 정상화가 되면서 수출길이 열리자 일제시대 순채 채집기록들을 들고 일명 순채꾼(혹은 수채꾼)들이 찾아왔다. 한동안 수중전이라 불리는 순채 쟁탈전이 일어났어요. 순채가 돈이 되었응께~ 동네 아주머니들도 함석판을 배처럼 타고 순채를 따며 돈벌이를 했어요. 순채가 난다는 곳에 힘께나 쓰던 사람들이 몰려들다 보니 망을 보며 순채를 지켰지요. 그러던 것이 1990년대 들어서며 일본 수출 생산지가 중국으로 넘어가고, 어느 순간인가 수질이 나빠지자 오염에 약한 순채가 사라졌어요. 그러면서 방죽도 메꿔지며 그 땅에 건물이 생기고 어디는 쓰레기 매립장이 되어 이제 이런 기억을 하는 사람도 몇 없게 되번졌어요 70년대부터 우리 지역에서 순채의 흥망을 함께 겪은 전병태(1948년생)어르신의 생생한 증언이다. 어쨌거나 청정한 환경에서 자라는 순채는 김제 순동에 이름만 남겨두었다. 현재 순채는 멸종위기 식물로 보호되며 전국에 몇몇 자생지만이 남아있고, 과거 전라도였던 제주의 한라습지생태원에 가야만 군락을 이룬 순채를 만날 수 있다. 지금도 우리 지역 어딘가에는 황토물이 흘러들고 송홧가루가 날리는 청정한 물 위에 투영한 줄기를 올려 고운 꽃을 피워내는 순채가 분명 있을 것이다. 숨은 듯 자리 잡은 그 토종 순채가 찾아지면 귀히 여기며 지켜나가 지역의 생태자산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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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6.13 16:31

[문화&공감 2019 시민기자가 뛴다] 전주부채, 전통을 이어가다

지난 7일은 우리나라 4대 명절 중 하나인 단오(端午음력 5월 5일)였다. 설날, 추석, 한식과 함께 단오는 일 년 중 양기가 가장 왕성한 날로 우리 선조들은 씨름, 탈춤, 그네뛰기 등의 놀이를 즐기며, 여자들은 창포물에 머리를 감으며 풍만한 양기를 온 몸으로 즐겼다. 단오선물은 부채요, 동지 선물은 책력이라는 속담이 있듯 단오하면 떠오르는 게 왕이 신하들에게 선물로 하사했다는 부채다. 일반 서민들도 서로 부채를 선물하며 더운 여름을 시원하게 보낼 수 있는 도구로 사랑받았다. △선조들의 예술작품에 등장하는 단오와 부채 단오날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 선조들의 문학과 그림에도 등장한다. 춘향전에서 이도령과 성춘향의 만남은 단오에 이루어졌다. 단오날 광한루에 그네를 타고 있는 춘향에게 이도령이 첫 눈에 반하면서 그들의 사랑이 시작되었다. 우리가 잘 아는 조선시대 화가 신윤복, 김홍도의 풍속화에서 단오와 부채를 담은 작품을 살펴보자. 신윤복의 풍속화첩 중 하나인 단오풍정은 단오날 여인들이 그네를 타고 머리를 감고 있는 풍경을 담은 그림이다. 그와 더불어 신윤복의 풍속화첩 30점 중 5점에서 부채가 등장한다. 무녀신무, 쌍검대무, 쌍춘야흥, 청금상련, 춘색만원에 무당이 들고 있는 무선, 양반이 들고 있는 합죽선을 담은 장면이 담겨 있다. 어찌 보면 요즘 시대에 핸드폰처럼 여름에는 항상 들고 다녔던 일상용품이 부채였다는 생각이 든다. 씨름하는 풍경을 담은 단원 김홍도의 씨름도에는 단오날 씨름을 하는 풍속을 담고 있다. 흥겨운 씨름판에서 부채를 들고 관람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단오 즈음 씨름판이 벌어졌음을 추측할 수 있다. 씨름도 외에 그림감상, 나들이, 담배썰기, 빨래터, 시주, 평안감사향연도, 마상청앵도 등 다수의 작품에서 부채가 등장해 부채가 일상에서 얼마나 자주 사용되었는지를 보여준다. △1970년대 후반 부채 소비량 감소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였던 부채가 자리를 빼앗긴 건 전력을 사용해 바람을 만드는 선풍기와 에어컨이 큰 역할을 했다. 국내에서 1960년대까지는 선풍기는 부유층이나 가질 수 있는 물건이었다. 1970년대 후반 삼성전자에서 삼성 컴퓨터 선풍기라는 선풍기를 출시했고 당시 가격이 2만2500원인 고가의 제품이었다. 1977년 7월 5일자 경향신문 기사 생활에서 의식까지 탈바꿈 현장을 가다를 보면 부채 대신 더위를 식히는 선풍기에어컨에 대한 기사와 함께 전주에서 부채를 만드는 장인의 수가 줄어들고 있다고 이야기가 실려 있다. 아이러니 하게도 기사 속 사진에는 부채 장인이 선풍기를 틀어놓고 부채를 만드는 사진과 함께 선풍기로 아기재우고 엄마는 들로. 옛 정 물씬 합죽선은 토산품점에나라는 문구가 실려 있다. 더위를 식히기 위해 선풍기를 틀어놓고 부채를 만나는 장면과 함께 합죽선의 명성이 사라진다는 사진은 아이러니 하지만 1970년대 후반에는 선풍기가 보급화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자료로 부채가 일상생활용품에서 토산품으로 밀려난 현실을 보여준다. △대를 이어 부채 만드는 선자장들 부채산업의 하향세에도 부채 만들기를 멈추지 못하고 대를 이어 부채를 만드는 장인들이 있다. 전주에는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선자장 1인(김동식), 전라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선자장 4인(박인권, 방화선, 엄재수 조충익), 故 이기동 선자장의 아들 낙죽장 1인(이신입)과 선자장으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50년 이상 부채를 만들어온 노덕원, 유춘근, 이완생, 박상기 등 15명 이상이 부채를 만들고 있다. 김동식 선자장은 지난주 단오를 맞아 서울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합죽선을 만든지 60년의 온 정성을 쏟은 전시를 준비하는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는 바쁜 와중에 택배로 집에 온 오래된 부채를 손보고 있었다. 10년 전에 전주에서 샀는데 종이가 낡고 부채살이 깨져서 수선을 맡겼다고 했다. 10년 전에 만든 건데 모양이 참 좋네. 이번에 고치면 10년은 더 쓸 수 있겠어라며 낡은 부채살을 빼내고 새로운 부채살을 깎고 있었다. 산업화에 의해 사라진 것들은 부채뿐만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전주에서 부채가 만들어지는 것은 10년이 지난 부채를 곱게 싸서 수선을 맡기는 사람들의 애정과 그 부채를 고치는 장인들이 아직도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고형숙 전주 부채문화관 기획팀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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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6.11 16:31

[참여&소통 2019 시민기자가 뛴다] 전주 버스, 땅 위의 지하철 시대를 연다

나는 심각한 미세먼지를 줄이고 에너지 문제에도 도움이 되며, 우리 미래 세대들에게 당당한 어른이 되기 위해 자동차를 버리기로 했다라고 멋지게 페이스북에 올리고 싶다. 기후변화에 대응해야 한다며 청소년들이 스쿨 스트라이크를 하는 마당에 이 얼마나 명분 있고 지지받을 결정이겠는가? 그러나 몇 년째 그 결단을 하지 못하고 부끄러운 자가운전자로 살아가고 있다. 내가 자동차에서 내렸을 때 그다음 선택지가 마땅치가 않아서이다. 사실 자동차의 증가는 지구 환경문제를 떠나서도 우리 도시 내에서 다양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어린이들의 놀이터였던 골목길을 자동차에 내어준 지 오래되었고, 차 사고의 위험 때문에 놀이터도 맘대로 못 내보내는 실정이 됐다. 청소년들이 안전하게 자전거 탈 공간도 모두 자동차가 점령하고 있다. 휠체어로 이동하는 장애인도, 유모차를 끌고 가는 부모들도 불법 주정차로 인해 걷는 것을 포기한 지 오래다. 노인들도 여유롭게 산책하고 쉴 수 있는 공간을 빼앗겼고 우리가 만나고 소통하던 많은 공간이 도로와 주차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동네경제가 무너지는데 큰 공을 세운 것도 자동차였다. 도시민들의 삶은 점점 개인화되고 고립되고 있다. △편리함 뒤에 숨겨진 자동차의 역습 자동차의 역습을 당한 유명한 세계도시들이 POST-CAR-CITY를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다. 북유럽 도시들에 이어 보고타, 꾸리찌바, 메데진 등 남미의 도시들이 도전했고 런던, 뉴욕, 파리, 바르셀로나와 같은 유수의 도시들도 가세했다. 도심의 심장부에 자동차 통행을 금지하고 보행자 광장으로 만들었던 뉴욕 맨해튼의 사례나 시클로 비아와 같은 차 없는 거리 사업은 대다수의 도시들이 채택하고 있다. 자동차에게 빼앗겼던 공공 공간을 사람들에게 돌려주기 위해 사람을 위한 교통시스템도 유행처럼 도입하고 있다. 자전거, 전기자전거, 킥보드 등 공유 모빌리티 시스템으로 사람의 이동에 활력을 불어넣고 대중교통과 연계를 통해 자동차의 이용 억제를 유도하고 있다. 전주시민들도 자동차 문화의 혁신을 필요로 하고 있다. 지난 2015년 지속 가능한 생태도시 종합계획 수립 시 전주시민들이 도시에서 가장 불편한 요소로 자동차의 증가를 뽑았고, 전주시민이 꿈꾸는 도시 1위가 대중교통이 잘 발달된 도시였다. 자동차가 아닌 보행자 및 자전거 중심도시도 6위에 올랐었다. 지구의 날이었던 지난 4월 22일, 교통혁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잠재적 시민의견이 적극적 행동으로 표출되었다. 전주의 47개 단체(기관)가 모여 전주시내버스의 개혁을 요구하는 토론회를 개최했다. 여기에는 시민단체, 환경단체는 물론이고 교육단체, 장애인단체, 문화단체들까지도 참여하고 있다. 자동차 중심 문화를 혁신하기 위해서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대중교통의 혁신이며 전주시는 이를 위해 시내버스가 편리한 도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이 토론회를 개최한 단체들의 요구였다. 노사갈등과 버스회사의 재정 불안정 문제를 해결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던 전주시 버스정책의 전환이 필요하다는데 한목소리를 내었다. 전주시는 2018년 전주시내버스회사에 310억 원의 보조금을 지급했고 2019년에는 450억의 보조금이 지급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시민들은 450억이라는 세금이 들어가는 만큼 그에 합당한 시내버스 서비스를 제공받고 싶어하고 있다. 출퇴근길에, 아이의 등하굣길에, 오랜만에 신시가지에서 친구를 만날 때도 버스를 이용하는데 불편이 없었으면 한다. 택시나 자가용을 타면 20분 만에 갈 수 있는 거리를 돌고 돌아 50분이 걸려야 하는 지금의 버스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매년 보조금을 늘릴 수만은 없다는 입장이었다. 지난 토론회 이후 시민단체들과 전주시민의 버스위원회, 전주시 버스정책추진단은 기존 수요를 만족시키는 수준의 버스 개편을 넘어 전주시내버스를 획기적으로 혁신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지하철은 빠르고 편리한 교통수단임에는 틀림없지만 막대한 재원이 필요하고 건설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건설 한다한들 한 두 개의 노선으로 모든 시민에게 혜택을 주기도 어렵다. 지표면 위에 지하철과 동일한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수십 년 전 꾸리찌바시가 도시교통의 문제를 해결했던 것처럼 지하철을 놓는 대신에 버스의 노선을 지하철처럼 쉽고 편리하게 만드는 방안을 시민들과 함께 찾아가는 사업이 시작되었다. 7월 말까지 버스 혁신안 마련을 위한 시민디자인단을 모집하여 8월 중에 전주시 전체 노선개편의 기본 방향과 원칙을 결정하고 9월~11월까지는 권역별 지선버스노선을 만드는 과정을 진행할 계획이다. 버스 시민디자인단은 보편적 시민들의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신청자 중 지역별, 버스 이용자와 비이용자별, 연령대별, 성별 등을 고려하여 선정한다. 환승거점형 노선개편방안, 지하철 노선형 노선개편방안 등 그동안 전주시를 두고 제안되었던 버스 혁신의 방안들을 전문가들과 시민디자인단의 충분한 공유와 토론의 과정을 거쳐 우리 도시에 적합한 시내버스 혁신안으로 만들어갈 것이다. △땅 위의 지하철 버스는 전주 전역을 순환하는 10여 개의 간선노선을 구축한다. 마을 곳곳을 누비는 마을버스를 타고 간선버스정류장에 도착하면 5분마다 버스가 도착한다. 구불구불하던 노선은 직선화하여 최단거리를 달려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팔달로에 집중되었던 버스를 백제로, 00로, 00로로 분산하여 10분이면 갈 거리를 50분씩 걸려야 했던 문제를 해소한다. 간선노선은 버스노선과 정류장을 색깔로 구분하여 누구든지 금방 버스를 식별할 수 있고 버스정류장은 휠체어나 유모차도 빠르게 승하차할 수 있도록 개선하여 눈치 보지 않고 시내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버스전용차로를 강화하여 자가용보다 편리하고 자가용만큼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 우리보다 후진국이라고 이야기하는 남미의 도시들이 버스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다. 뛰어난 기술력과 시민역량을 가진 전주시가 도전하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중세시대의 어린이들이 늑대를 두려워했던 것처럼 오늘날 도시의 어린이들은 자동차의 공포 속에서 성장하고 있다. 사람은 새와 달리 가능한 한 자유롭게 걸을 수 있고, 달릴 수 있을 때 더 행복해질 수 있다. 도시교통의 혁명을 이룩한 보고타 페냐로 사 시장의 이야기이다. 전주의 아이들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고 달릴 수 있는 도시를 땅 위의 지하철 버스가 열어주기를 기대한다. /강소영 전주지속가능발전협의회 사무국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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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6.10 17:51

[전북의 재발견] 순창 요일부엌 '마슬' : 시골에서 만나는 특별한 요리 공간 "시골집에 온 손님들께 대접해드리는 식사를 준비하는 곳"

순창 창림마을 당산나무 뒤에 있는 주황색의 독특한 건물은 최근에 오픈한 요일부엌 '마슬' 이라는 곳이랍니다. 네 명의 농부요리사가 정성껏 요리를 준비하는 곳인데요. 땅심을 살리는 작은 농부들이 순창에서 키운 작물로 밥을 짓고 빵을 만들어 손님께 내어놓기 때문에 이색적이고 특별한 것 같아요. 화요일 : 백발소녀의 쌀밥 수요일: 니나의 밀밥 목요일: 지선의 빵식탁 금요일 : 시아의 파스타 토요일 : 토요스페셜 그날 그날 메뉴도 달라지고 메뉴판도 달라집니다. 저는 순창 요일부엌마슬을 두 번 방문해보았는데요. 처음 방문했던 금요일은 시아의 파스타 요일이었어요 가격이 한 끼 먹기에 부담스럽다 하실 수도 있는데요.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고 정성 들여 키운 작물을 수확하여 재료로 내어놓고 있습니다. 육수부터 소스까지 시간이 필요해도 모두 다 직접 만들어내기 때문에 그 수고를 아시는 분들이라면 저처럼 기분 좋게 찾아가실 것 같아요. 시아의 파스타, 손이 많이 가도 직접 치댄 생면을 고집하는 이유는 부드러우면서 쫄깃한 맛이 좋기 때문인데요. 시아님께서 대접해드릴 요리를 정성껏 준비 중인 모습입니다. 식당안이 넓지 않기 때문에 웨이팅이 있을 수도 있어요. 어떤 요일은 예약하고 가야 하고 어떤 요일은 예약을 받지 않기도 해요. 그래서 미리 연락 드리고 방문하길 권장합니다. 신선함이 가득 담긴 샐러드! 누룽지의 구수함과 새우의 만남인 이름도 독특한 '누구새우' 메뉴가 애피타이저로 제공되었어요. 이렇게 큰 접시에 메인 요리가 나오면 함께 온 사람들과 개인 접시에 음식을 나눠 먹어요. 모두 직접 만들기 때문에 그 수고를 알기에 감사한 마음으로 맛있게 그릇을 비워냅니다. 그리고 일주일 뒤 다시 찾은 요일부엌 마슬 토요스페셜이 진행되었던 날이었어요. 니나의 농촌제철 파스타와 치아바타 메뉴가 있는 토요스페셜~ 매주 토요일은 스페셜이기에 랜덤으로 메뉴가 제공되니 참고하세요. 사진찍어도 될까요~? 라는 말에 밝게 웃어 주신 토요스페셜의 주방장님이신 니나 님입니다. 매장 오픈 시간보다 조금 일찍 방문했는데 손님께 제공될 차를 정성껏 준비 중이셨어요. 캐모마일차 보기에도 너무 예쁘고 물에 우러나니깐 향도 너무 좋더라고요. 여러 농부가 함께 사용하는 식기류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궁금해서 양해를 구하고 살짝 주방 안으로 들어가 보았답니다. 소박한 모습의 정감 가는 그릇들. 오늘의 메뉴는 어떤 접시에 담아질까요? 오늘 준비중인 메뉴는 생면 오일파스타로 메뉴를 참고하면 텃밭에서 자란 분홍꽃완두와 마늘쫑과 감자(하나로마트) 그리고 우리집 닭이 낳은 달걀과 우리밀로 치대어 만든 생면 오일 파스타 입니다. 이름도 참으로 정겹죠? 그리고 래디쉬 루꼴라 등등을 허니(김현희)가 벌을 키워 얻은 생애 첫 꿀로 만든 드레싱을 얹어서 먹는 메뉴입니다. 80프로 수분율 치아바타를 혀니의 햇아카시아꿀과 함께 모았어요. 그리고 따뜻한 캐모마일 차 한잔. 분위기 있는 식사입니다. 제철 음식과 건강한 식재료로 구성된 계절 메뉴는 요일부엌의 소중한 선물인 것 같아요. 처음 맛보는 마늘쫑 생면 오일 파스타는 이색적이기도 했지만 너무너무 맛이 있었답니다. 특별히 이 시기에만 맛 볼 수 있다는 밀을 불에 구워 주셔서 밀알을 손바닥으로 비벼가며 후~후 입김을 불고 껍데기를 날려 보내 밀도 먹어 보았답니다. 톡톡 입안에서 씹히는 탱탱 쫀득한 밀의 식감이 재밌더라고요. 손바닥이 까매져도 하하 호호 웃으며 아이들과 즐겁게 먹었답니다. 나오는 길에는 우리 밀 천연발효종으로 만든 건강한 빵도 구매해서 돌아왔답니다. 기분 좋고 마음 편하게 따뜻한 한 끼를 하고 싶으시다면 농부의 고집이 담긴 건강한 재료로 만들어지고 요일마다 다른 메뉴가 제공되는 순창 요일 부엌 마슬로 방문해보세요. 순창 요일부엌 마슬 예약전화 : 063-653-5983 영업시간 : 11시~15시 일.월 휴무 주소 : 전북 순창군 순창읍 순창9길 8-3 (코코앤카카 뒤편 당산나무집) 인스타그램 : https://www.instagram.com/village_dailykitchen/ /글사진 = 박은영(전라북도 블로그 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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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6.10 14:43

한동호 우석대 LINC+사업단장 “지역사회와 기업 보듬는 산학협력 모델 완성 위해 최선”

개교 40주년을 맞는 우석대학교에 낭보가 잇따르고 있다. 우석대학교가 교육부 사회맞춤형 산학협력 선도대학(LINC+) 육성사업 단계평가에서 우수사업단으로 선정됨에 따라 2021년까지 약 100억 원으로 산학협력 고도화 사업을 추진하게 됐다. 교육부는 지난 3월 2017~2018년도 LINC+ 육성사업을 수행한 전국 55개 대학을 대상으로 단계평가 결과를 발표하고 우석대학교를 2021년까지 지원한다고 밝혔다. 이번 단계평가에서 우석대는 13개 핵심성과지표인 정량 부분과 1단계(2017년 3월~2019년 2월) 추진실적 및 2단계(2019년 2월~2022년 2월) 사업 계획에 대한 정성 분야에서 우수한 평가를 받았다. 이에 따라 우석대는 LINC+사업단을 중심으로 개방형 산학협력 선도모델인 WOORI의 고도화를 위한 WE-ART 전략을 수립해 나갈 계획이다. 또한 산학일체형 교육시스템을 바탕으로 현장적합형 창의적 인력을 양성하고 산학협력 선도형 기업들을 지원해 산학협력 허브 벨트를 구축할 예정이다. 우석대 LINC+사업단 한동호 단장으로부터 계속지원대학으로 선정된 배경과 대학의 내재가치 등을 들어본다. - 우석대가 LINC+ 계속지원대학에 선정에 되기까지 준비과정이 궁금합니다. 6000여 명의 참여학과 학생, 1200여 개에 달하는 가족기업, 180여 명의 참여학과 교수들이 연구실실험실기업현장 등에서 밤낮없이 같이 생활할 정도로 협업한 결과입니다. LINC+사업의 핵심은 교수학생가족기업이 협력해서 교육하고 기술을 개발하는 것인데, 우석대는 LINC+의 기본정신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차별화된 청사진을 제시하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석대는 이미 LINC+사업의 전 사업인 LINC사업을 2012년부터 5년간 수행했고, 산학협력의 우수성을 인정받아 2017년부터 LINC+사업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지난 2년간의 LINC+사업에 대한 평가에서 전북대전남대원광대 등과 함께 우수사업단으로 선정돼 앞으로 3년간 매년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로부터 40억원을 지원받게 된 배경도 우석대의 청사진에 대한 후한 평가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합니다. - 우석대 산학협력 선도모델의 비전과 청사진이 궁금하군요. 우석대학교는 WOORI형 WE-ART모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WOORI는 Wonderfully Operated Open university for Regional Innovation의 약자입니다. 지역혁신과 지역사회 개방에 집중하는 대학이라는 방점이 담겨 있습니다. WE-ART는 Woosuk Entrepreneurship(기업가정신)과 Advance(지역선도), Relationship(지역개방), Transformation(지역혁신)의 약자입니다. 지역에 개방하고 지역을 선도하여 지역을 혁신하는 우석 기업가정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비전을 이루기 위해 산학이 모여서 교육과 기술개발을 하고 지역사회의 어려움을 찾아 풀어보자는 취지입니다. - 사업단의 향후 발전전략이 궁금합니다. 현장실무자와 함께 교육하고 기술개발하는 것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석대 LINC+사업단은 현장경력이 풍부한 교수들을 초빙해 교육과 기술개발을 담당하고 있으며, 여기서 그치지 않고 현장에서 현업으로 근무하고 있는 전문가들을 교육과 기술개발에 참여시키고 있습니다. 현재 50여 명의 현장전문가가 교육과 기술개발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를 더욱 확대해서 모든 학생들이 현장전문가의 교육을 받고 이를 이용해서 현장전문가와 같이 기술개발을 하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할 계획입니다. 또 철저하게 지역사회 수요중심으로 산학협력 교육과 기술개발에 나서고 있습니다. 이를 자체적으로는 적자생존형 산학협력 생태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기업이 필요로 하는 정도가 커서 기술협력과 교육협력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분야에 대해 현장전문가 초빙과 기술개발 지원을 집중하는 한편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력을 양성하고 기업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기술을 개발하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 대학기업자치단체간 긴밀한 산학관 협력 모델을 구축하기 위해 필요한 전제조건이 있다면요. 산학이 협력해 교육하고 기술을 개발하도록 자치단체가 장기적인 시각에서 도와야합니다. 산학협력의 성공 여부는 산업체가 적극적으로 호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산업체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당장 수익창출이 급한 상황입니다. 장기적인 시각에서 대학과 함께 공동으로 교육과 기술 개발에 참여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기업들이 대학과 함께 교육하고 기술개발을 할 수 있도록 자치단체의 장기적인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산학이 같이 교육하고 기술개발을 해야 맞춤형 인력양성으로 젊은이들의 일자리가 생길 것이고 지역기업의 경쟁력이 강화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기업들에게 산학협력에 참여할 수 있도록 자치단체가 장기적인 차원에서 도움을 주는 것이 절실합니다. 대학의 재정으로는 기업들을 지원하는 것이 한계가 있습니다. - 4차 산업혁명시대를 맞아 우석대 LINC+사업단의 혁신적 인재 양성 방안은 무엇입니까. 4차 산업혁명시대에는 융합적 지식과 문제해결형 능력 그리고 팀단위 업무수행에 적합한 소통능력을 갖춘 인재가 필요합니다. 이런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전체 학생이 ICT(정보통신기술)에 대한 기초지식을 갖출 수 있도록 학교 본부에서 제공하는 정규교과목외에 다양한 ICT 관련 비교과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또 문제해결형 팀단위 업무수행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산업체 전문가와 대학교수가 공동으로 지도하는 팀별 프로젝트 수행 교과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사업단에서는 이를 OECD(Open Expanded Capstone Design개방확산형 캡스톤디자인)이라고 부릅니다. 학생들이 이렇게 인연을 맺은 산업체 전문가를 따라가 현장실습을 함으로써 현장실무 중심 교육을 완성하고 취업으로 연계하는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 도민에게 당부의 말씀 있다면요. LINC+사업단은 전국에서 평가를 통해서 선발된 55개 대학에서 교육부의 지원을 받아 운영하는 교육사업단입니다. 그중에서도 우석대학교 LINC+사업단은 우수사업단으로 선정됐습니다. 도민들께서도 관심을 갖고 지켜봐 주시고 성원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특히 우수 학생들이 많이 지원할 수 있도록 지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지역의 인재들이 수도권으로 유출되고 있지만, 지역에도 중앙정부로부터 역량을 인정받은 대학이 있습니다. 우리 대학이 지역 구성원들을 사회에 꼭 필요한 인재로 키워내겠습니다. ◆ 한동호 단장은 한동호 LINC+사업단장은 재무관리를 전공한 경영학과 교수로 30년 가깝게 우석대학교에 재직중이다. 한국재무학회 이사 등을 역임했으며, 2017년 8월부터 LINC+사업단장을 맡고 있다. 경영학자의 시각에서 LINC+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우석대학교만의 LINC+철학을 정립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전주고와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 기획
  • 김보현
  • 2019.06.09 17:42

[전북의 재발견] 익산 여름밤 마실 산책 : 익산 배산체육공원, 원광대학교

하루가 다르게 다가오는 여름에 맞춰 기온도 쑥쑥 올라가는 요즘입니다. 그리고 곧 찾아 올 열대야. 이런 밤, 찻집이나 커피숍도 좋지만 시원한 밤바람을 맞으며 아름다운 밤 풍경을 즐기며 여유롭게 거닐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익산시 동서로 21에 위치한 익산배산체육공원은 축구장, 농구장, 테니스장 등을 갖춘 종합 야외 체육공원입니다. 또한 유아들을 위한 생태학습장과 작은 도서관 그리고 야외음악당이 있어 사시사철 많은 분들이 찾습니다. 특히 요즘 같은 계절에 가면 정말 좋은 곳인데요. 그 이유는 바로 체육공원에 조성되어 있는 장미꽃 길 때문입니다. 체육공원 주차장에서 생태학습장까지 농구장과 풋살 경기장을 따라 조성 된 장미꽃 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만나게 되는 장미꽃 터널. 아름다운 조명 아래 예쁘게 피어있는 장미꽃과 함께 인생 샷 한 컷 남기는 것도 잊지 마세요. 장미꽃 길 중간에는 장미 정원 분수가 있는데요. 가동 시작 시간은 11시, 2시, 4시, 6시, 8시이며 1시간씩 가동한다고 합니다. 장미꽃에 둘러 싸여 시원하게 내뿜는 분수를 보며 잠시 쉬어가는 여유를 느껴보셨으면 합니다. 장미꽃 길을 거닐다보면 경기도 용인에 있는 놀이공원이 부럽지 않을 만큼의 형형색색, 크고 작은 다양한 장미들이 아름답게 피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색깔의 장미를 좋아 하시는지요? 여기서 잠깐! 장미꽃 색깔별로 다양한 의미가 있다는 것 알고 계시나요? 빨간 장미 - 욕망, 열정, 기쁨, 아름다움, 절정 하얀 장미 - 존경, 빛의 꽃, 순결, 순진, 매력 분홍 장미 - 맹세, 단순, 행복한 사랑 노란 장미 - 질투, 완벽한 성취, 사랑의 감소 파란 장미 - 얻을 수 없는 것, 불가능한 것 빨간 장미 봉오리 - 순수한 사랑, 사랑의 고백 하얀 장미 봉오리 - 나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출처 : DAUM 백과) 전라북도 명문 사학 중 한곳인 원광대학교는 아름다운 캠퍼스로 이미 전국에 정평이 나있습니다. 주간 풍경은 물론 야경도 아름다운 사실을 알고 계신 분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원광대학교 중앙도서관 앞 수덕호에서 바라보는 주변 야간 풍경은 한 폭의 수채화 같습니다. 또한 수덕호 주변을 따라 나무 사이를 여유롭게 거닐다보면 녹음 짙은 여름과 그 안에서 학문에 열중하고 있는 아름다운 풍경도 보실 수 있습니다. 무더위가 시작되는 6월. 꽃도 보고 운동도 즐길 수 있는 익산배산체육공원이나 드넓은 캠퍼스를 여유롭게 거닐며 짙어가는 녹음을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밤마실 코스 원광대학교캠퍼스.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시며 여름밤의 추억을 한 장의 사진으로 남겨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익산시 문화관광 : http://www.iksan.go.kr/tour/index.iksan 원광대학교 페이스북 : https://www.facebook.com/WonkwangUniversity /글사진영상 = 김찬권(전라북도 블로그 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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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6.07 17:12

[이 사람의 풍경] 조각가 강용면 씨 "공공조형물 제작에만 집중된 현실 안타까워…확고한 철학 중요"

오래전부터 오며 가며 마주치는 조각 작품이 있다. 문화단체 사무실에 있는 나무 조각상이다. 긴 통나무를 각 지게 깎아 기둥을 만들고 그 위에 빨간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를 세워놓은 조각. 매끄럽지 않은 투박함과 원색의 토속적 분위기가 특별한 느낌을 주는 이 작품의 작가는 조각가 강용면씨(62, 아리울조형연구소 대표)다. 아마도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전에 제작 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이 작품은 그의 작업을 상징하는 연작 <역사원년>의 연상에 있다. 그런데 이 작품 참 독특하다. 단단한 어깨가 돋보이는 이 여성은 서있는 그 자세가 당당하다. 거친 세상 속에 던져졌으나 스스로 당당하게 걸어가는 여성을 표현한 작가의 메시지는 그래서 더 분명하다. 그는 한국적 전통을 현대적으로 해석해 자신의 작품에 들여놓은 조각가다. 늘 소재와 형식은 새로운 변화로 출렁였으나 시대와 소통하고 싶어 하는 그의 견고한 언어는 시간과 시간을 넘어서면서도 인간과 인간의 삶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았다. 나무 작업으로 시작해 모자이크와 아크릴, 피시와 에폭시 등 다양한 소재를 아우르며 한국적 정신의 근원을 추적해온 그의 조각은 그 자체로 한국적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상징적 언어가 됐다. 미술계가 중진작가의 반열에 우뚝 선 그를 여전히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역사원년> <응고> <현기증> 등 굵직한 주제의 연작으로 한국 조각에 자극을 불어넣어온 작가의 삶이 궁금했다. 때마침 완주군 소양면의 갤러리 아원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회 <전통을 품다>가 감동으로 대중들을 만나고 있었다. 인터뷰는 군산시 옥산면, 너른 들판 사이로 난 길가의 오래된 창고를 개조한 그의 작업실에서 있었다. 80년대 후반, 전업 작가의 길을 택한 이후 지금까지 40년 가까운 시간을 도전과 기다림으로 이어온 그의 흔적은 작업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조각 작품들로 빛났다. -작업실이 넓습니다. 오래된 창고 같은데, 쓸모 있게 변신을 했군요. 쌀을 쌓아두던 창고였는데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어요. 예전 만경강 근처 갯벌 옆에 있던 작업실도 쌀 창고였는데 작품이 많아져 15년 전에 이쪽으로 옮겨왔습니다. -쌀 창고와 인연이 깊군요.(웃음) 모든 작업을 여기서 하십니까. 작업이 워낙 대작이다 보니 우선 큰 공간이 필요하고 천장이 높을수록 제게는 장점이어서 늘 이런 창고만 찾게 됩니다. 그래서 시간이 있을 때마다 틈틈이 군산 근방의 서천 장항 김제까지 창고가 있을만한 곳을 돌아다녔어요. 처음에는 100평 정도만 되어도 좋겠다 싶었는데, 벌써 이곳도 거의 채워졌네요. 여기서 대부분의 작업을 하지만 공공 조형물은 소재에 따라 공장에 제작을 맡기기도 합니다. -조각의 특성상 아무래도 작업 공간과 환경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동안 다양한 소재 뿐 아니라 다양한 기법을 시도하셨지만 시간으로나 양적으로나 나무 작업이 많았던 것 같은데요. 나무 조각은 제 작업의 뿌리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나무를 택했던 것은 어려웠던 경제적 환경과도 관련이 있어요. 모교에서 조교생활을 할 때였으니 아무래도 여건이 녹록치 않았습니다. 그때 마침 학교 건물을 새로 짓고 있었는데 학교 뒤에 버려진 소나무가 많았어요. 임자가 따로 없으니 톱만 갖고 가면 다 내 것 이었죠. 좋은 재료를 쉽게 얻을 수 있었으니 다른 소재에 눈을 돌릴 필요가 없었어요. -그런 이유가 있다 해도 재료가 표현의 기법이나 주제와 맞지 않으면 한계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물론입니다. 마침 제가 작업을 시작했던 80년대 미술계의 화두는 한국 전통성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저 또한 전통을 주목하고 있었는데 그러다보니 민화나 불상 조각, 무신도 같은 그림이 지니고 있는 전통적 요소에 마음이 갔습니다. 제가 얻은 나무 조각의 형태와 색감은 거기서부터 시작된 것이지요. 나무에 채색을 하는 것은 그 당시 낮선 기법이어서 우려도 있었지만 한국적 전통을 현대적으로 구현해내는 방식이 제게는 매우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었어요. 제가 나아갈 길을 그 안에서 찾기도 했으니까요. 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인물상 작품들은 그런 점에서 제 작업의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가 나왔으니 인물상 연작인 <역사원년>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습니다. 그 작업을 10년 이상 지속하셨던 것으로 아는데요. 오래전 인터뷰에서 역사원년의 인물상이 꼭두각시 인형으로부터 영감을 얻으셨다고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맞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김제 고향마을은 한학의 전통이 깊은 곳이었어요.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풍습과 무속적 환경이 일상에 배어 있었죠. 알게 모르게 오래된 풍습과 문화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안타깝게도 전통이란 옷을 입은 대부분의 것들이 훼손되거나 단절되었지만 우리의 정신적 근원이 되었던 문화의 바탕을 찾고 싶었습니다. 꼭두각시 인형은 제가 주목했던 전통적인 요소 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영감을 안겼어요. 오방색을 작업의 중심에 들여놓게 된 것도 그 덕분이지요. -어찌됐든 채색된 나무 조각은 강용면의 작업을 상징하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나무의 채색은 우리의 오랜 전통이기도한데 오히려 미술작업에서는 그러한 정체성을 외면해온 경향이 있었지요. 맞습니다. 제 작업이 관심을 모으면서도 한편에서는 우려도 있었던 이유가 그 때문이에요. 저는 여러 가지 이유로 나무를 만나게 되었지만 그중에서도 나무를 놓지 못했던 이유는 나무의 성질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꽃 새 등 자연을 소재로 하는 조각품에 채색은 매우 중요한 과정이었어요. 전통 물감을 비롯해 다양한 재료를 섭렵하면서 저만의 언어를 찾을 수 있었지요. 그 작업을 이어갔던 90년대가 작가로서 성장하는데 가장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30대 후반부터 40대에 이르는 시기가 되겠군요. 시간 강사에 더 이상 매이지 않고 전업 작가의 길에 들어선 직후부터인데, 말씀대로 선택이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제 작업에 대한 절실함이 깊어지니 그야말로 열심히 하게 되더군요. 작업에만 온전히 매달리게 되는. 지역에서 활동하는 작가 중에서는 가장 열심히 작업하는 작가로 꼽히기도 했어요. 지방대학에서 제 이야기가 회자 될 정도였으니까요.(웃음) -조각 분야는 특히 지역에서 활동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활동 영역을 넓히는 일도 그렇고요. 그런 어려움이야 조각뿐이겠습니까. 한국의 화단은 특정한 학교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잖아요. 지역적으로는 서울 경기 쪽에 집중되어 있고요. 그 한계와 경계를 뛰어넘는 일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확고한 철학을 갖고 노력하면 길이 열립니다. 그 길은 오로지 작품으로만 열 수 있는 길이죠. 저 또한 좌고우면하지 않고 작업에만 집중해오면서 그 길을 찾고자 했습니다. 지방대 출신으로 지역에서 활동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 한계를 인정하는 작가들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작업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스스로 확신이 없으니 작업의 동력을 찾기 어렵고 좋은 작품도 나올 수 없죠. -예전과 달리 지금은 창작 지원 형태도 다양하게 열려있어서 의지만 있다면 작가들이 활용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 것 아닌가요. 지원 시스템이 넓어진 것은 사실이에요. 주어지는 기회를 굳이 외면할 필요는 없죠. 그런 시스템을 활용해서 작업을 힘 있게 할 수 있는 기회도 얻고 예술세계를 넓혀 작가적 역량을 키워가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다시 작업 이야기로 돌아가 보죠. 나무 이후 아크릴 작업으로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당시 개인전 뿐 아니라 초대나 기획전 등 참여하게 되는 전시회가 1년에 20개가 넘었습니다. 그런데 나무 작업은 노동력도 그렇고 시간도 오래 걸렸어요. 오로지 혼자 힘으로 완성해야하는 작품의 특성상 어려움이 컸습니다. 그즈음 새로운 표현 방식에 대한 갈망이 생겼어요. 현대적인 감각을 담아 낼 수 있는 방식을 찾고 싶었죠. 구리선과 모자이크를 활용한 작업을 먼저 시도했어요. 막혀있는 공간이 아닌 열려있는 투각 공간을 형상화하는 것이었죠. 그 과정에서 매달려 움직이는 것, 키넥트적인 구조를 해보고 싶더군요. 바람에 흔들리거나 소리를 낼 수 있게 하는 작업에 마음을 두면서 공간의 확장과 조명을 들여왔어요. LED를 쓰는 대신에 피시와 아크릴을 활용하기 위해 가마까지 제작했죠. 새로운 소재와 기법을 얻으려면 그만큼 비용이 필요한데 다행히 그즈음 공공 조형물 작업이 많이 들어왔어요. 열심히 벌어 열심히 투자했지요.(웃음) -성과는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았어요. 저는 40대 후반 의욕적으로 시작한 이 작업이 나의 작업 노정에 큰 변곡점이 될 것이란 기대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반응이 그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나무 작업에 대한 아쉬움을 많이 이야기 했지요. 그러나 제가 진행하는 공공 조형물 작업에 매우 유용하게 이 기법과 소재들이 활용될 수 있게 되었으니 굳이 찾자면 성과가 없다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선생님은 공공 조형물과 개인적인 작품을 별개로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실 그것이 명쾌하게 정리하기 어려운 문제인데 공공성을 앞세운 조형물과 작가 개인의 작품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거든요. 가장 좋은 방식은 작가의 예술성을 온전히 반영하는 공공 조형물을 제작하는 것이겠으나 건축주와 주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담아내야 하는 과정에서 작가의 개인적인 예술세계는 훼손되거나 묻히기 십상이지요. 저 역시 그러한 과정에서 빚어진 갈등요소 때문에 포기했던 경험이 많습니다. -미술 장르의 경계가 허물어졌다고는 하지만 공공조형물 작업은 아무래도 조각 분야와 긴밀한 관계가 있죠. 그래서인지 젊은 작가들도 공공조형물 제작에 많은 관심을 두게 되는데 선생님 말씀 듣다보니 예술관 구축이 필요한 젊은 세대들에게는 이러한 요소가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그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들은 경제력이 있어야 다음 작업을 할 수 있게 되니 무조건 외면 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공공조형물에만 매달리는 젊은 작가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예술적 완성도를 향한 치열한 과정이 없이 목적을 앞세운 조형물 제작에 익숙해진다면 좋은 작가로 성장할 수 있는 길은 막힐 수밖에 없거든요. 요즘 미술계에서 좋은 조각가를 찾기 어렵다는 한탄도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그런 갈등을 어떻게 극복하십니까. 다행스럽게 제가 작업을 시작했을 때는 공공조형물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높지 않았습니다. 기회도 별로 없었고요. 개인적으로는 절박하게 제 작업에 매달려야 했던 시간의 축적이 있었기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공공조형물을 제작하거나 제 작업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는 공공 조형물에 쏟는 에너지 또한 의미 있게 하기 위해 2년에 한번 개인전을 갖습니다. 경계에 탄력도 주고 스스로 중심을 잡게 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2014년에 처음 발표한 <현기증>이 떠올랐습니다. 그동안 지향해왔던 예술의 역할과 철학을 더 깊이 있는 언어로 확장시킨 작품이 아닌가 싶은데요. 재료나 형식, 특히 화려한 원색의 색이 없어진 자리에 모노톤의 색채를 들여온 것이 놀라웠습니다. 인물은 초기부터 제 작업의 중심이었습니다. 다만 형식과 내용의 폭이 크게 변화한 결실이라고 할 수 있겠죠. 처음 시작은 고은시인의 <만인보>로부터 영감을 받았습니다. 저 역시 줄곧 인물에 대해 천착해왔는데 그 시를 읽으면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의 인연을 생각하게 되었어요. 2000년부터 한사람씩 만들기 시작해 쌓아두었습니다. 2014년 서울 자하문 미술관 개인전에서 처음 발표를 했지요. 14년 만에 공개하는 것이었는데 기대 이상으로 관심과 호평이 집중되었습니다. 에폭시를 활용한 모노톤 검은 인물상 부조에 왜 주목하는지 저 또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작품에 왜 현기증이란 제목을 붙였는지 궁금합니다. 살아오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이 인간관계였습니다. 그런데 60년 넘게 살아오면서 기억에 남는 것은 좋은 관계보다 섭섭했거나 대립된 관계가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게다가 현대사회에서는 의도와 관계없이도 수많은 만남이 이루어지잖아요. 갈등적 요소도 그만큼 깊어지죠. 그러나 결국 이 수많은 사람들이 이어내는 복잡한 관계가 곧 역사라는 것을 이야기 하고 싶었습니다. ■ 강용면 조각가는 강용면은 김제시 백산면이 고향이다. 한학자들이 많이 살고 있던 요교마을에서의 어린시절은 그의 예술적 정신을 키우는 자양분이 됐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사주신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렸다. 다른 그림을 그대로 따라 그린 것이었는데 담임선생님이 어쩌면 이렇게 똑같이 잘그렸냐고 칭찬해주셨다. 그 때의 칭찬이 그가 가고 있는 길을 만들었다.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 서울예고를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도전이 무모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무조건 말리는 대신 낙방하면 아버지가 권하는 학교에 들어간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낙방을 하고는 아버지와 약속을 지켜 이리공고를 들어갔다. 고등학교 3년 동안 학교 수업에는 관심도 취미도 없었던 그는 이 시간을 자신의 인생에서 없어진 시간으로 생각한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연거푸 떨어져 실의에 빠져있을 때 영장이 나왔다. 3년 꼬박 군대생활을 거치고 제대를 했으나 집안 형편은 더 어려워지고 입시에도 자신이 없었다. 다행히 군산대에 장학생으로 발탁되어 4년 동안 학비 없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늦게 들어간 대학은 그에게 많은 것을 안겨주었다. 작가로서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을 그때 쌓았다. 대학 시절에는 학원 강사를 겸하며 독립할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을 마련했다. 졸업 직후 돌공장 한 켠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의욕적인 출발을 했지만 모든 재산을 투자한 기자재와 도구들을 도난당하고 말았다. 실의에 빠져 있는 그를 스승이 일으켜주었다. 조교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거의 주말 없이 학교에 나갔다. 학교의 공간이 그의 작업실이었다. 학교 건물을 신축중이었던 덕분에 잘려져 나간 소나무들이 몽땅 그의 재료가 되었다. 홍대 대학원을 마치고 시간 강사로 9년을 보냈다. 광주에서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김제평야 저편으로 붉은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너는 지금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더 이상 강의를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30대 후반에 전업작가가 되었다. 그때의 선택을 살아오면서 가장 잘한 일이라고 여긴다. 나무 조각으로 시작한 그의 작업은 한국적 전통을 바탕으로 시대 정신을 담아내는 독창적인세계로 확장되어 나갔다. 소재는 다양해지고 형식은 늘 새로운 것을 향한 도전으로 이어졌다. 그 과정은 1991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가진 22회 개인전에 고스란히 담겼다.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한 국공립미술관과 전국 각 도시의 수많은 갤러리들이 그를 불러 이름을 알렸다.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 중앙미술대전 우수상, 전북청년미술상, 한국일보청년작가초대전 대상 등 주목받는 수상으로 작가적 역량을 인정받았으며 2014년, 14년 만에 공개한 대작 현기증 으로 미술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으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중진조각가 반열에 우뚝 섰다. 그 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이 전시를 2014년 우수전시로 선정했다. 내년 미국 전시를 준비하고 있는 그는 지난해 외교통상부 문화외교자문위원으로 위촉돼 활동 중이다.

  • 기획
  • 김은정
  • 2019.06.06 15:00

[생활의 흔적, 역사가 되다] 사진에서 근대도시의 탄생을 엿보다

전주 민간기록물 정신의 숲으로 들어온 빛바랜 가족사진 앨범에는 근현대 시기에 대한 역사와 문화에 관한 정보가 적지 않게 들어있다. 일제 식민지 시기 그리고 그 이후, 사진 속 주인공들의 모습과 함께 당시 도시 경관과 당대인들의 라이프스타일이 담겨 있다. 사진 속 주인공들이 어디에서 사진을 찍었는지? 누구와 사진을 찍었는지? 왜 사진을 찍었는지 등등을 헤아려 보면, 전주의 근현대 사회문화사가 어렴풋이 엮어진다. 이때가 바로 개인과 가족의 사적 기록이 공적 기록으로서 의미를 가지게 되는 순간이다. △도시인의 욕망, 경제적 생활인 모습 담겨 18~19세기부터 시작된 서세동점(西勢東占)의 시대는 마침내 조선을 멸망시키고, 일본의 식민 세력의 지배 아래 들게 했다. 서양으로부터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면서 조선말 개화운동이 시작되었지만, 성공하지 못한 채 일제의 식민 정권 아래서 근대사조가 물밀 듯이 들이닥치게 되었다. 근대 도시가 생겨나면서 과거 조선의 전통적인 도시도 탈바꿈이 시작되었다. 사회의 총체적인 변혁은 각별히 도시인의 삶을 크게 바꾸었다. 도시 경관에 나타난 변화가 눈에 두드러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속에 살던 도시인들의 삶은 소리 없는 아우성 속에서 지축이 흔들리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 근대 도시가 형성되어가는 길목에서 사진의 배경이 된 건물, 간판, 휘장, 길거리 풍경, 자연경관, 사진관의 키치(kitsch) 등이 미장센으로만 볼 수 없는 요소들이다.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는 지나간 시간 속에서만 훔쳐볼 수 있는 흥미로운 증거물이기 때문이다. 외형적인 구조물이나 경관을 포함한 지리적인 정보가 도시의 역사를 전부 말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증거임에는 틀림없다. 미장센을 실증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고 잃어버린 시간과 인물을 찾아내게 되면 이 사진들은 과거의 이야기를 되살려내는 훌륭한 역사문화 자료가 된다. 식민정부는 근대적인 개념의 도시계획을 실행하면서 과거의 도시를 변용했고, 때로는 전혀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서구적 외형의 관공서, 상공업용 건물이 세워지고, 주거지가 구획되었으며 도로가 정비되었다. 이러한 신도시 건설이 이루어졌던 증거 자료들이 사진 속에 들어 있다. 또한 도시에 형성되기 시작한 새로운 공간 속에서 만들어지는 관계의 구조도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이 근대 도시에 어느 사이 조선인들이 모여 사는 지역과 일본 거류 민촌이 확연하게 구분되어, 민족적 차별이 공간적으로 상징화되어 가고 있었다. 달라진 도시 경관 속에서 우리는 도시의 근대성을 바라본다. 식민주의나 민족주의와 같은 거대 이념이 아니라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실천성, 욕망, 그리고 경제적 생활인의 모습이 앨범 속에 담겨 있다. △전주 바로보기, 도시와 농촌 오가는 사람들 행적 봐야 근대 도시로 부상한 전주에는 토박이들 보다는 이주해온 이들이 더 많았다. 우리는 근대시기 도시 이주민이 크게 증가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노동인구의 증가로만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는 상업인구의 증가, 지식인층의 증가가 두드러지며, 이 계층의 활동이 근대 도시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기능을 한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근대 도시 전주를 제대로 들여다보려면, 우리의 눈을 크게 떠서 이 도시와 주변 농촌을 오가는 사람들의 행적을 살펴야만 한다. 당대인들-기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도시와 농촌을 넘나들고, 여전히 농촌과의 질긴 끈을 가지고 도시의 삶을 이어왔다. 도시와 농촌, 근대와 전통을 넘나들던 이 경계인들의 의식과 인식을 통해서 도시의 삶을 역동적으로 그려 보아야 한다. 많은 농촌 거주인들이 새로운 생계 수단을 찾아서 기회가 많은 도시로 나왔다. 과거와는 다른 경제사회생활이 전개되면서, 지금까지 자신들이 지켜온 직업관, 생활관 등이 뿌리 채 뽑히는 경험을 했어야만 했다. 이들은 스스로가 변화의 소용돌이 속 주인공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난한 이든, 부유한 이든 도시 속에 자리를 잡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에 대한 기록은 충분하지 않고, 생생하지도 않다. 기록은 있으되 파편적이다. 그래서 추론하거나 기록의 조각들을 맞출 수밖에 없는데 반해서 한 개인의 연작 생애 사진 그리고 그에 관한 이야기는 생생하며, 촘촘하다. 도시의 외형에서 경험의 내면으로, 도시인의 삶을 순환적이며 포괄적인 관점을 가지고 볼 수 있는 지점이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의 사진 속 주인공은 우리 곁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단지 사진 속에서 우리에게 이야기를 건네려고만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귀는 있으되 들을 수는 없다. 우리는 무성영화 시대 변사를 만나듯, 사진의 변사를 만나야만 한다. 그래야 그가 건네려고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사진 속 주인공의 후손들이 변사가 되어서 선친의 목소리를 대변해 준다. 근대 도시로 이주해서 살았던 선친과 자신들의 이야기를 구성지게 풀어낸다. 그렇지만, 이제 가족 앨범을 보면서 구성지게 읊어 줄 변사들도 하나 둘 무대를 떠나고 있다. 떠나기 전에 변사를 만나야 하나, 우리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의 가치를, 존재의 가치를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기증된 사진과 앨범이 중요하듯,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변사들과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청자(聽者)가 필요하다. 서 말의 구슬도 꿰어야만 보석이 되듯 수천, 수만 장의 사진과 그 이야기들을 꿰어야만 자료로서의 보물이 되지 않을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 일을 우리가 부지런히 시작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함한희 전주시 민간기록물관리위원회 위원전북대학교 전북대 명예교수

  • 기획
  • 기고
  • 2019.06.06 14:56

[문화&공감 2019 시민기자가 뛴다] 용오정사, 우리 것의 정수를 쓸어 담아 고이 피워낸 몇 송이 꽃

걸음을 딛는 발의 감촉, 땅은 아직 마지막 봄의 기색을 머금고 촉촉하게 우리 몸의 무게를 견디어주고 있다. 하루이틀 사이 이 숲의, 들의 기운이 바뀌어 걸음은 먼지를 흩트리는 겨운 여름을 맞을 것이다. 고창 무장 용오정사(龍塢精舍) 가는 길은 100여 년 전 망국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머금었던 신산한 숨을 차분히 뱉어내는 길이다. 허파 깊이 닿는 투명한 공기에, 여린 초록이 무성한 길이다. △용오정사에 깃든 한 시대의 의기, 용오 정관원(鄭官源) 선생 우리 집이 무장현 사랑방이여. 용오정사를 지키는 정계석 무장향교 유림회장 이야기다. 정사(精舍)의 내력을 청하는 짧은 시간에도 그의 거처는 몇 차례 지나는 손님들 맞는다. 대를 이어 향교 일을 도맡아온 그가 지금의 행정구역을 넘는 옛 시간을 소환한다. 무장현은 현재 고창군의 무장면을 비롯해, 대산, 해리, 심원, 상하, 성송, 공음면을 포괄하는 넓은 개념이다. 그 무장현의 사랑방을 지키는 정 회장은 용오정사의 용오 정관원(鄭官源) 선생의 증손이다. 용오 선생은 1894년 37세 나이로 성균관 진사에 올랐다. 1896년에는 일본에 맞서 장성의 기삼연(寄三衍) 선생과 의병을 일으켜 항일투쟁에 나선 의병장이기도 했다. 그는 고종의 석연찮은 죽음을 두고, 마을 뒤편 바위에 단을 쌓고 곡을 이어가다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64세, 1920년의 일이다. 그가 단을 쌓고 세상의 울분을 울음으로 터뜨린 자리가 지금 용오정사다. △뒤틀어지면서 균형을 이루는 곡선의 기둥, 사선으로 비껴 배치한 연기막이 용오정사는 대문으로 쓰인 외삼문을 지나, 강당으로 쓰인 경의당(敬義堂), 서재와 숙소로 쓰인 홍의재(弘毅齋)에서 내삼문 상운루(祥雲樓)를 거쳐 사당으로 용오 선생을 모신 덕림사(德林祠)까지 모두 다섯 건물을 이르는 통칭이다. 이 다섯 채 건물을 감싸고 채마다 허리께가 보일락말락 야트막한 담장을 두르고 있다. 경의당 현판은 이광사(李匡師)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들보와 기둥에 편액과 주련이 촘촘하다. 불가무차소(不可無此所)는 추사의 스승 옹강방의 글씨로, 구수산방(求壽山房)은 추사, 금성옥진(金聲玉振)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이강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글씨만으로도 용오 선생과 이 가문의 초연결을 가늠하고 남는다. 앞 다섯 칸 옆 두 칸 팔작지붕 경의당 곁에는 홍의재가 있다. 글씨를 통해 세계의 구현을 읽었다면, 홍의재는 형태다. 다섯 채 건물에 솜씨로 혼을 불어넣은 이가 누구일까? 문득 궁금이 일어날 정도다. 그만한 집의 꼴, 용오정사의 첫글자 용(龍)의 꼴을 머금고 있기 때문이다. 건물의 기둥이 그야말로 자연 그대로이다. 용틀임으로 구불구불하기 이를 데 없는 나무기둥으로도 놀라울만치 가지런한 수평이 선을 이루었다. 100년을 넘도록 들보와 서까래의 직선을 지탱해온 곡선의 구부러진 힘 앞에 탄성이 터진다. 이 홍의재에서 핵심은 연기막이예요. 광주 아시아문화의전당 전문위원을 지낸 대목 조전환의 이야기다. 한국을 넘어 아시아, 세계 어느 건축물에서도 찾을 수 없는 형태라고 한다. 사선으로 기울어져 아궁이 연기가 건물에 올라 섞이지 않게 배치한 연기막이는 뒤틀어지면서 균형을 이루는 곡선의 기둥과 어쩌면 이렇게 적절하게 어울리는지. △시대의 의기를 담고, 새로운 문화의 싹을 심은 솜씨가 만난 덕림사 용오 선생과 극재 정방규(鄭枋珪) 선생이 배향된 사당 덕림사는 용오정사를 대표하는 공간이다. 홍의재와 경의당을 지나 사당으로 가기 위해 내삼문인 상운루를 거쳐야 한다. 앞 세 칸 옆 단칸으로 솟을대문 맞배지붕 형태 건물이다. 가운데 문 양 옆으로 사다리 구조를 타고 눈을 옮기면 모정형태의 작은 누각이 있다. 드문 형태다. 누각의 난간 한편에는 오르는 거북이, 다른 한편에는 내려오는 거북이 있다. 덕림사는 용오정사를 대표하는 다포계 건축물이다. 갖가지 장식과 단청이 100년 세월을 머금고 화려를 버티어내고 있다. 사당 외벽을 둘러 절의 탱화 같은 벽화를 그려 그 화려에 점정을 보태는데, 그 안에 다른 문화의 싹을 심어두고 있다. 여느 벽화와 마찬가지 연꽃과 모란 그림 사이에서 서양 자동차며, 유럽 고풍스런 양식의 건축물 그림을 찾을 수 있다. 사당 내부 벽화에는 맥주병도 그려 넣었다. 파격이다. 홍의재를 만나며 건축가는 누구일까, 일었던 의문이 더 깊어진다. 사그라드는 시대의 한끝에서 모든 힘을 쏟아 수천 년 일궈온 문명의 일단을 담아, 꽃으로 피워낸 이는 또 누구일까? 그가 바로 대목장 유익서다. 유익서는 용오 선생과 비슷한 시기, 같은 공간을 살아낸 고창 사람이다. 1920년대 한 시대를 풍미한 정읍 입암의 보천교 십일전(十一展)을 지었던 사람이다. 그가 지은 보천교 십일전 가운데 하나는 서울 조계사에 옮겨져 대웅전이 되었고, 또 하나는 2012년 화재로 소실된 내장사 대웅전이 되었다. 유 대목의 솜씨가 용오 선생의 의기와 만나 이루어진 용오정사는 다른 건축물과 달리, 그 자리에서 같은 모양으로 100년을 버티어 의연하다. △예술로부터 건축까지 우리 문화의 정수를 읽는 한권의 책, 용오정사 망국의 한을 당하여, 의병의 이름으로 저항을 수단으로 삼기도 하고 책을 모으고 후학을 통해 시대의 정수를 내려잇도록 안간힘 쓰던 한 시대는 이렇게 용오정사에 고스란하다. 용오정사 덕림사 벽에는 보수한 흔적이 남아있다. 누군가 벽을 뜯어내고 유물을 훔쳐간 흔적이다. 그 유물 가운데 하나가 선생의 초상이다. 선생을 닮은 물건이야 삿된 욕심으로 훔쳐가더라도 그의 의연한 정신이야 어찌 도둑질할 수 있을까. 매년 음력 9월 15일 정사에 모여 지역 유림들이 선생을 기리는 제를 올리고 있다. 건축에서부터 예술, 한 선비의 곧은 정신에서 우리 문화의 정수를 더불어 읽을 수 있다. 저문 한 시대를 비추어, 우리시대를, 다음 시대를 견주어 볼 수 있으니. /이영남 버들눈도서관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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