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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회 전국체육대회가 30여 일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15년 만에 전북을 다시 찾은 이번 전국체전은 다음 달 12~18일 열린다. 이어 제38회 전국장애인체전이 10월 25일부터 닷새간 계속된다. 전국 17개 시도 및 전 세계 18개국에서 선수와 임원 등 2만5000여 명이 참가하는 올 전국체전은 주경기장이 있는 익산을 중심으로 도내 14개 시군 73개 경기장에서 종목별로 진행된다. 특히 이번 체전은 올해 전라도 정도 1000년을 맞아 전북의 품격과 멋을 다시 한 번 대내외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인식된다. 전국체전과 장애인체전을 주관하는 전북도는 양대 체전을 기폭제 삼아 지역경제 활성화와 체육 저변 확대, 국민 화합을 끌어낸다는 구상이다. 제99회 전국체전과 제38회 장애인체전 조직위원장을 맡은 송하진 전북도지사를 만나 양대 체전을 준비하는 자세와 구체적인 대회 준비 상황 등에 대한 얘기를 들어봤다. - 이번 체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주안점을 둔 부분은 무엇입니까. 전라도 정도 1000년을 맞은 해에 양대 체전을 개최하게 돼 매우 감회가 새롭습니다. 온 국민이 하나되는 체육 대제전을 만들기 올해 초 대회 조직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일찍부터 체전 준비에 매진했습니다. 앞서 지난해 5월에는 실질적인 대회 준비 업무를 위해 유관기관인 전북교육청, 전북체육회, 전북지방경찰청 등과도 집행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이번 대회의 정체성과 상징성은 개폐회식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전북의 정체성과 도정 비전인 아름다운 산하, 웅비하는 생명의 삶터 천년 전북을 비롯해 새로운 천년 전북의 비상을 알리는 데 중점을 뒀습니다. 또 삼락농정 농생명산업, 융복합 미래산업, 여행체험 1번지, 새만금시대 잼버리, 안전복지환경균형 등 도정 5대 비전을 소재로 전북 대도약의 비전이 개폐회식에서 펼쳐질 것입니다. 양대 체전의 시작을 알리는 성화도 동시 봉송을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벽을 넘어 대국민 화합의 장으로 연출할 계획입니다. - 대회 홍보에도 역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국체전 D-30일인 12일 익산 솜리문화예술회관에서 대회 성공 개최를 위한 행사를 열 예정입니다. 양대 체전이 국민 화합을 이끄는 축제의 장으로 성황리에 열릴 수 있도록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등을 활용한 적극적인 홍보 활동을 펼칠 계획입니다. 도민이 함께하는 참여체전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체전에 참가하는 선수임원과 함께 각 시도 응원단 등 수많은 사람들이 전북을 찾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거의 한 세기에 걸쳐 이어온 전국체전을 15년만에 다시 개최하게 되면서 전북이란 브랜드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습니다. 양대 체전에 선수와 임원 등 모두 약 4만명이 참가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를 계기로 전주 한옥마을, 새만금 등 각 시군 관광지를 포함한 전북만의 특색있는 명소들을 널리 알리겠습니다. 또, 전라도 정도 1000년의 의미를 다른 지역 선수임원 등과 공유함으로써 전북의 미래 천년 비전을 제시할 것입니다. 이처럼 양대 체전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기 위해서는 전북도민의 자발적인 참여와 지지가 필요합니다. - 익산을 중심으로 도내 모든 시군에서 경기가 치러지는데, 지역별 특색이 두드러질 것 같습니다. 전국체전의 47개 전 종목이 도내 전역에서 경기를 펼칩니다. 경기장은 신축보다는 기존 체육시설을 활용해 개보수하는 방향으로 대회를 준비했습니다. 특히 체전을 밝힐 익산종합운동장 내 성화대는 미륵사지석탑 등을 형상화해 제작했습니다. 우선 양대 체전의 개폐회식이 치러지는 익산종합운동장을 주경기장으로 하고, 축구 등 47개 종목의 73개 경기장의 경우 시군 특화 종목 등을 고려해 종목을 배치했습니다. 익산에는 펜싱배드민턴, 고창은 유도, 진안은 역도 등의 특화 종목이 배정됐습니다. 이를 통해 도내 전역으로 대회 분위기가 확산되는 것은 물론 도민 화합과 지역경제 활성화를 꾀하겠습니다. - 체전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도민들에게 당부할 말이 있습니까. 도민 스스로가 내가 성공체전을 이끌 주역이다라는 생각을 갖고 다른 지역에서 오는 손님들을 따뜻하고 친절하게 맞이하길 바랍니다. 또 교통숙박음식 등 위생업소 업주들께서는 깨끗하고 친절하게 손님을 대하고, 바가지요금을 근절해 전북을 다시 찾고싶은 곳으로 각인시켜야 합니다. 특히 비인기 종목에 대한 따뜻한 관심이 필요합니다. 선수들이 힘이 낼 수 있도록 도민 모두가 힘찬 박수를 보내주길 기원합니다. -최근 이번 대회에 출전하는 전북 선수단을 격려했다고 들었습니다. 지난 5일 대회 주경기장이 있는 익산을 찾아 대회 준비상황을 점검했습니다. 또 폭염 속에서도 지역의 명예를 위해 땀흘려 훈련에 매진한 선수들을 만났습니다. 선수와 지도자들의 결의에 찬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번 체전이 단순한 체육행사가 아닌 전북의 우수한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전북의 잠재력을 대외적으로 널리 알리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선수들에게 당부했습니다. 선수들이 흘린 땀과 노력이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끝까지 최선을 다해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환경운동의 역사를 만들어온 1세대 환경운동가 최열 환경재단 이사장의 인터뷰를 읽었다. 이런 대목이 있었다. 환경운동을 하겠다고 들어온 똘똘한 젊은이가 3년이 지나면 머리가 빈다. 5년이 지나면 파김치가 된다. 7년이 지나면 무감각해진다. 그렇게 지쳐서 나가고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활동가들이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기 위해 창립한 환경재단의 취지를 설명하는 인터뷰였다. 한 사람이 떠올랐다. 3년이 지나면 머리가 비고 5년이 지나면 파김치가 되고 7년이 지나면 무감각해져 조금 거칠게 표현하자면 지쳐 나가떨어진다는데, 50대를 눈앞에 둔 지금도 여전히 똘똘한 젊은이로 현장을 누비고 다니는 활동가. 전북환경운동연합 이정현 사무처장(49)이다. 20대 후반, 환경운동을 돕다가 아예 직업으로 환경운동 활동가를 선택해 20년 한길을 걸어온 그의 도무지 지치지 않는 열정이 궁금했다. 예상대로 일주일 내내 환경 관련 행사와 세미나와 민원현장과 출장까지 촘촘히 엮어져 있는 그의 일상을 비집고 들어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오후 한나절 시간을 얻었다. 검게 그을린 얼굴이 올 여름도 만만치 않았을 민원 현장의 면면을 짐작하게 했지만 그는 지치지도 무감각해 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환경운동의 생명은 현장성에 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열정이 더 새로웠다. -어제까지 에너지의 날 행사가 있었죠. 태풍 솔릭 때문에 준비과정에 어려움이 있었겠습니다. 해마다 해오는 일이어서 특별히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는데 아무래도 태풍으로 행사장이 야외에서 실내로 바뀌면서 역동성이 떨어지긴 했습니다. 어제는 환경 다큐영화 알바트로스 상영회가 있었는데, 눈물겨운 영화였어요. 과소비사회의 이면을 그대로 고발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많은 분들이 생태위기 상황의 심각성을 절감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알바트로스라면 전설의 새로 불리죠. 해양 생태계 문제가 워낙 심각한 때여서 관객들의 관심이 컸을 것 같습니다. 바다 위를 날면서 3~5년 동안 땅을 딛지 않는다는 새죠. 영화는 새들의 천국이라고 알려진 태평양의 미드웨이 섬에 서식하고 있는 알바트로스가 주인공입니다. 이 섬은 알바트로스의 최대 번식지이기도 하죠. 영상을 찍은 크리스 조던은 논리적으로 해결책을 모색하는 환경운동의 과제를 다른 관점으로 제시하더군요. 보여지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워낙 컸습니다. -환경운동을 오랫동안 해오셨죠. 저보다 오래 활동해 오신 분들이 더 많습니다. 제가 전북환경운동연합 운영위원으로 참여한 것이 99년이고, 상근한 것이 2002년부터니까 20년이 채 안됩니다. -20년도 짧지는 않지만 그보다 훨씬 더 길게 일해오신 것처럼 느껴지는데요. 제가 1년차 되었을 때 주위에서 10년은 된 줄 알았다고 했어요. 멋모르고 뛰어다니니 그렇게 보였나봐요.(웃음) 그때가 사실 지역의 민감한 환경 이슈가 불거질 때였거든요. 새만금, 부안 핵폐기장 등 굵직한 현안들이 몰려오니 저도 그때는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르고 현장에서 일했던 것 같아요. - 똘똘한 젊은이의 열정이 때를 만났던 것이군요. 운영위원 시절에도 거의 활동가처럼 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당초 환경운동에 뜻이 있었습니까. 그렇진 않습니다. 환경운동가가 되어야겠다는 것보다 학생운동으로 보낸 대학시절의 경험과 인식이 자연스럽게 시민운동으로 이어졌어요. 사실 저는 군대 다녀온 직후 취직을 해서 어느 정도 생활 기반을 다져놓고 싶었어요. 그때 함께 학생운동을 했던 친구들 중 시민운동, 노동운동에 투신하는 친구들이 꽤 많았는데 오래 버티지 못하더라고요. 아무래도 경제적 문제나 결혼 등 맞부딪쳐야 하는 현실적 문제 때문이었겠죠. 그것을 보면서 저는 어느 정도 사회경험도 쌓고 경제적으로 좀 자유로워진 이후 그 친구들이 그만둔 빈자리를 채우는 역할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결과는 달라졌지만요. -2002년이던가요. 지방선거에 환경연합 녹색 후보로 출마 했었지요. 그때 환경운동 쪽에서 녹색정치 실현을 내세웠을 때인데 전국적으로 33명이 출마했어요. 15명이 당선되었는데 주로 수도권이었죠. 녹색운동의 성과가 컸습니다. 저는 서신동 시의원에 도전했다가 꼴찌로 낙선했지만 두 달 채 안 되는 선거운동으로 2000표 가깝게 얻었습니다. 비록 떨어졌지만 녹색운동의 희망을 그때 만났어요. -정치 쪽에 뜻이 있었습니까. 대학시절 민중당 청년학생위원회 활동을 했었어요. 돌아가신 노회찬의원이 중심이 됐던 진보정당 추진위원회 학생 대의원으로도 활동했고요. 진보정당 출신이니 정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잘 알죠. 그런 경험이 2002년 지방선거에 나서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늘 뭔가 바꿔볼 생각도 있었지만 제 역량은 아니라는 판단을 했습니다. 정치선거는 아니지만 이런 저런 선거 경험이 있고, 선거도 재미있게 경험하는 편이긴 한데 쓰이는 역량이 따로 있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가끔 주위에서 출마 권유를 받기도 하지만 이 길은 제가 갈 길은 아닌 것 같아요. -시점으로 보자면 활동가가 된 직후부터 지역의 환경이슈가 부상했습니다. 아까 말씀하신대로 제대로 시기를 만난 셈이었겠습니다. 당시 여건은 어땠습니까. 외부적으로는 환경운동 영향력이 커 보였었어요. 환경연합이 꽤 일찍 만들어졌는데 그만큼 역할과 의미가 컸었죠. 전교조 해직교사와 인권변호사, 시민운동 활동가들이 탄탄하게 조직을 다지고 있어서 영향력은 지금 못지않았는데 막상 상근 활동가로 들어가 보니 회원이 너무 적은 거예요. 총선 시민연대 등을 꾸려 능동적인 시민운동을 보여주기도 했었지만 시민 없는 시민운동 이라는 이야기가 그래서 나왔구나 싶더군요. -과제가 생겼겠군요. 그래서 우선 과제로 삼은 것이 시민들과 소통을 넓히는 일이었어요. 회원도 늘려야했고요. 소식지부터 만들었죠. 정기 간행물을 만들어 우리 활동을 알리기 시작했어요. 저도 지역사회를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일이 필요했고, 환경 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그즈음 고창 핵폐기장 문제가 불거졌어요. 부안 핵폐기장 문제 이전에 2003년 2월 4일, 핵폐기장 예비후보 4개 부지 발표를 했거든요. 초짜 활동가였지만 학생운동 시절부터 연대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경험으로 시민사회네트워크가 있어서 자연스럽게 그 일을 맡게 되었는데 환경운동연합이라는 단체의 연관성과 비중이 있어서인지 도 단위 연대기구 집행위원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새만금, 핵폐기장 문제는 지금 돌아봐도 정말 뜨거운 이슈였습니다. 그때 중심에서 반대를 주도했던 입장으로 후회 없는 선택이었습니까. 2006년, 핵폐기장이 경주로 가면서 일단락이 되었지만, 고창에서 시작해 부안 그리고 군산까지 이어진 핵폐기장 유치 갈등은 우리 지역의 긍정적 에너지를 엄청나게 소진시켰습니다. 마치 그것이 지역경제 낙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의 모든 것인 것처럼 개발담론을 확산시고 언론도 그것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여론에서 우위에 설 수 있도록 이끌었던 분위기는 지역사회의 발전을 후퇴시키는 계기가 되었죠. -현재의 여건으로 보더라도 그런 판단이 옳았다고 보시는 거죠. 이번에 발표된 통계청 자료를 보니 핵폐기장을 유치한 경주도 지방소멸도시군에 들어가 있더군요. 그때 정부가 3000억 원을 지원하고 한수원 본사 이전 같은 혜택이 주어졌지만 실제 경주 주민들에게 경제적 이익이나 효과가 얼마나 있었는지 밝혀지거나 확인된 것은 없지 않습니까. 여전히 방폐장 문제는 지속되고 있고, 그래서 주민들의 불안은 커지고. 게다가 국민들의 환경의식이 지금은 얼마나 높아졌습니까. -이미 지난 일이지만 당시 정부나 자치단체에 맞설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무엇이었습니까. 지역 주민들이었죠. 지역 주민들이 동의하지 않았는데 그 결정권을 무시하고 자치단제장이나 의회 의원들의 일방적 결정으로 주민들의 의사가 무시된다면 그것은 잘못된 일이잖아요. 우리가 정부의 원자력 정책을 반대하는 것은 핵폐기물의 안전한 처리를 위해서는 안전한 지점에 설치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정부가 일방적으로 결정한다던지 어떤 정당한 절차 없이 선호도 투표로만 결정할 사안이 아니기 때문에 반대한 것이지 대한민국 어디에도 핵폐기장 시설을 설치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편 것은 아니거든요. -화제를 좀 바꾸겠습니다. 말씀하셨던 것처럼 국민들의 환경의식이 높아졌습니다. 과잉소비사회에 살면서 저희가 맞닥뜨리게 되는 환경문제가 생존을 위협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 그만큼 운동의 영역도 넓어지고 있겠죠. 일이 너무 많아집니다. 저희에게 들어오는 민원은 가능한 해결해보려고 노력하는데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넓은 영역에서 많은 문제들이 불거집니다. 사실 저희는 수달을 지키고 보호하는 일이라든지 숲을 지키고 보호하는 일 같은 전통적인 자연생태계 보존운동이 중심이고 본령입니다. 가장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일이기도 하죠. 그러나 최근에는 환경보건분야 영역이 급속도로 넓어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미세먼지나 생활화학제품 문제 같은 것들이죠. -듣다보니 환경문제의 심각성과 구조적 문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는 도시계획의 영역도 무관하지 않을 듯싶은데요. 도시계획 영역도 중요해졌지요. 개발과 건설은 여전한 환경파괴의 대척점에 있으니까요. 도시환경 영역에서 천변의 바람 길을 막는 고층건축물 같은 것도 저희가 일정한 역할을 해야 하는 거죠. -영역이 넓어지면 그 못지않게 지식과 전문성도 요구될 텐데요. 그것이 늘 과제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전문가들과의 네트워크 구축이예요. 전문가들의 의견을 구하고 그 내용을 정리해 합당한 논리를 만들어 설득하고 해결하는 역할, 이를테면 건강한 코디네이터가 저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선은 활동가 스스로가 전문성을 쌓아야하는 것이 필요하고요. -돌아보니 지난 20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환경운동연합도 많이 변화했겠습니다. 회원도 많이 늘었죠. 처음 1-2년은 주어진 일을 정신없이 했어요. 핵폐기장이나 새만금이나 결국은 시민들을 설득해야하는 문제이고, 시민들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문제거든요. 시민들의 인식이 변하지 않으면 지역 정치권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막상 시민들을 우리가 어떻게 만나고 있는가 들여다보니 통로도 별로 없고 시민들은 시민운동에 대한 편견이 있었어요.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할 방법으로 생각해낸 것이 회원확대였어요. 환경과 관련한 행사를 늘려 회원들을 직접 만나는 통로를 넓혔습니다. 회원 확보를 위한 릴레이 운동도 했고요. 환경 분야 뿐 아니라 인문학까지 아우르는 초록시민강좌 개설도 그 연상이었어요. -성과는 있었습니까. 54개 환경연합 지역조직 중에서는 저희 회원 수가 가장 많습니다. 전북의 사례가 전국으로 확장되었어요. -환경운동연합의 이슈가 궁금합니다. 전국적으로는 사대강 문제예요. 자연성을 회복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을 실천하는 일이고 최근에는 탈핵 원자력발전소 문제가 부상하면서 에너지 전환문제도 집중하고 있습니다. 지역에서는 마이산케이블카 문제가 있고, 곧 창립되는 새만금도민회의를 통해 새만금 해수유통을 통한 부분 조기 집중개발을 이뤄내는 일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지치지 않고 일 해온 동력이 놀랍습니다. 늘 즐겁게 일하지만 갈등이나 고민도 물론 있겠지요. 성실한 직업인으로서 정년퇴임하는 활동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어떻게 실현할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노동안식년을 얻어 공부도 하고 싶고요. 제 장점이 넓고 얕은 지식이었는데(웃음) 이제 그것마저도 잘 충전이 안 되거든요. 현장 경험을 통해 축적된 지식으로 버텨 왔는데 한계가 분명하니까요. 그동안 절집으로 이야기 하자면 행정스님처럼 조직을 운영하는 것에 방점을 두어왔다면 이제는 오래 제대로 집중해 성과를 내는 일에 전념하고 싶습니다. /김은정 선임기자 ■ 전북환경운동연합 이정현 사무처장은 전북환경운동연합 이정현 사무처장 정읍 태인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때부터 신문읽기와 책읽기를 즐겨해 성장과정에서 현실정치나 사회문제에 관심이 컸다. 고등학교 때 이미 진보학자들의 저서를 섭렵했고 한국사회의 민주화 여정에 남다른 인식을 갖게 됐다. 삼수에 전기 후기 대학 시험을 다섯 번이나 실패하고 전주대 국문과를 들어갔으나 학생운동 현장에서 대학시절을 보냈다. 학생운동의 동력을 준 사람은 사촌누나였다. 사회를 바꾸어야 한다는 인식은 그를 투사로 만들었다. 민중당 청년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전국적인 조직체를 만들어 활동했던 진보정당 추진위원회 학생대의원에 참여했다. 주변의 조력까지 받고서야 5년 만에 계절 학기까지 거쳐 겨우 졸업장을 땄다. 군대에 다녀와서는 시민운동이나 노동운동에 투신하는 대신 취업을 했다. 사회 경험도 쌓고 경제적으로도 기반을 닦은 다음 사회운동 현장으로 돌아가겠다는 계획이 있었다. 첫 직장은 마을금고, 두 번째 직장은 골프장이었다. 전북환경운동연합에 운영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삶의 길이 바뀌었다. 그즈음 시민운동가로 사회에 기여하고 싶다는 의지가 더 확고해졌다. 한때는 영화에 관심을 두어 전주시민영화제 사무국장을 맡아 두 번의 영화제를 치루기도 했다. 2002년, 아예 직장을 그만두고 환경운동연합 상근직 활동가로 자리를 옮겼다. 그해 환경운동연합의 녹색운동에 참여, 시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2002년부터 본격적으로 환경운동의 실질적인 활동을 엮고 실천하는 일에 나섰다. 운동의 대중화를 가장 큰 과제로 안고 있었던 그는 회원을 늘리고 소통하는 일에 역량을 몰두했다. 소식지를 만들고 지역사회를 읽어내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썼다. 활동가로 현장에 섰던 초반, 핵폐기장 유치와 새만금 개발이 지역사회의 최대 이슈로 떠올랐다. 자연스럽게 핵폐기장 반대 도 단위 연대기구 집행위원장(부안방사성폐기물처리장 백지화 및 에너지전환운동)을 맡게 됐다. 2~3년 지속됐던 핵폐기장 문제가 일단락되는 즈음 환경운동연합의 역할은 더 커지기 시작했다. 환경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쏟아지는 민원과 곳곳에서 터지는 환경문제가 그를 현장으로 이끌었다. 책과 전문가들의 자문에만 의지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늘어났다. 대학원에 들어가 도시계획을 전공한 것도 지식에 대한 갈증 때문이었다. 환경운동의 지평이 보이기 시작했다. 안으로는 회원 참여 사업을 늘려나가면서 만경강생태하천가꾸기민관학협의회, 전북지속가능발전협의회 전라북도강살리기추진단, 전북환경교육네트워크 등 거버넌스를 구축하는 일을 꾸렸다. 덕분에 전북 지역 환경운동의 지형은 새롭게 바뀌었다. 도심의 생태복원운동을 주도해 멸종위기종인 맹꽁이 서식지 복원에 성공했고 환경관련 전문성을 살려 지역의 환경이슈나 생태자원을 소개하는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만경강과 동진강을 비롯해 전북의 생태보고 현장을 탐사해 널리 알리는 기고 활동에도 남다른 역량을 쏟았다. 20여년 전북지역의 환경운동을 주도해온 그는 현재 전북시민사회연대회의 운영위원장, 전북환경교육네트워크 운영위원장을 거쳐 에너지시민연대 운영위원과 환경운동연합사무부총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아시아에서 유일한 무형유산을 주제로 한 영상영화제가 6일 개막을 시작으로 9일까지 전주 국립무형유산원에서 열립니다. 올해는 전북일보가 2018 국제무형유산영상축제(IIFF)의 현장을 영상으로 생생하게 담아낼 예정입니다. /촬영편집 = 한승정윤정아
청년실업은 주로 15세에서 29세 또는 34세 사이 청년세대의 실업을 의미한다. 2000년 우리나라 경제는 만성적인 청년실업의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고 2018년 현재 대한민국은 청년실업률이 9.9%이며 체감실업률은 20%가 넘어간다고 한다. 이런 청년실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제성장의 장기안정 성장세를 유지해야 한다거나, 직업훈련 및 취업알선 프로그램을 강화 하고 중소기업 및 청년층 창업 지원, 지식경제 발전을 위한 교육개혁, 취약 청년층 직업능력 제고 등 여러 가지 방안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나라 전체가 경제적으로 난항을 겪고 있는 지금의 시대에 뜬구름과 같은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은 가슴 아픈 현실이기에 더 마음에 와 닿는 듯하다. 더군다나 이런 현실 때문인지 대학 시절의 꽃, 대학 시절의 낭만이라 할 수 있는 동아리 활동이 많이 줄어들고 그 명맥을 이어 나가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학 시절의 꽃, 대학 시절의 낭만, 극예술연구회 80~90년대 도내 대학 중 연극동아리의 활동은 대단했다. 전북대학교의 기린극회를 비롯해서 원광대학교의 멍석, 궤도수정, 무한대, 한자리, 군산대학교의 마당, 해왕성 서해대학교의 적토마 등. 사실 이 시대에 활동했던 학생들이 지금 현재 전라북도 연극계 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계층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은 청년의 때에, 대학 시절에 해볼 만하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군산대학교 해왕성에서 활동했던 노승재 씨는 말했다. 연극은 무대를 만들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대학생이 무슨 돈이 있겠어요? 그래서 무대를 만들기 위해 쓰레기장을 돌아다니며 버려진 씽크대, 메트리스를 주워서 무대를 만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는 힘들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좋은 추억이 되었어요. 덧붙여 선배들한테는 자문을 구할 수 있어서 좋았고 동기들 간에는 끈끈한 정을 만들어 졸업한 후에도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원광대 의대 연극 동아리 궤도수정의 고한석씨는 무대에 오르기 직전 뒤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의 그 떨림과 공연이 끝났을 때의 짜릿함이 좋다며, 연극 자체의 즐거움도 있지만 연극 외적으로 화해하는 법에 대한 공부를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개인적인 성향이 강한 요즘 시대에 누군가와 함께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자신들에게 조금은 힘든 일인데 오랜 시간 함께 하는 과정을 통해서 서로 감정이 상하는 상황이 생길 때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역지사지를 직접 배울 수 있는 기회도 되지만 감정소비가 싫어서 연극의 4대 요소에 배우가 들어간다. 배우는 연극 안에서 역할을 맡게 되는데 자신이 맡은 역할을 잘 표현하기 위해서는 인물에 대한 다각도의 연구가 필요하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서 하나의 역할이 완성되어 가는데 바로 이 과정을 통해서 배우나 관객들은 역지사지를 배우게 된다. 노승재 씨는 가장 좋은 점은 역지사지를 배울 수 있었다는 점이라며 나와 다른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할 수 기초를 마련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와 덧붙여 취업을 준비하면서 면접을 볼 때 면접관의 대답에 순발력 있게 대답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연극 무대에 섰던 경험이 도움이 된 것 같다고 했다. 고한석씨는 사실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는데 연극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발표하는 것에 익숙해지다 보니 일명 무대 공포증은 사라졌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몇 년 전 멍석에서 활동했던 홍영근 씨는 반론을 제기했다. 연극은 시간을 많이 투자해야 하는 동아리 중 하나에요. 그러다 보니 연극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자격증 공부, 토익, 성적을 신경 쓰다 보면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더욱이 사람들과 부딪히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감정소비를 하고 싶지 않아 동아리 활동을 꺼린다는 것이 큰 이유로 제기됐다. △전라북도 대학극 페스티벌의 새로운 장을 열 수 있기를 기대하며 얼마 전 현대차그룹과 (사)한국공연프로듀서협회가 주최하는 2018 현대차그룹 대학 연극 뮤지컬 페스티벌이 열렸었다. 전국 최대 규모의 대학 공연예술의 경연대회였다. 물론 대부분의 참가 팀이 연극과 뮤지컬을 전공하는 학생들이었다. 도내에서도 전국 최대 규모는 아니어도 대학극 페스티벌이 있었다. 엄청난 상금이 주어지는 것도 외국으로 연수를 갈 수 있는 특혜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었지만 순수하게 연극을 통해서 만나고 서로 교류하며 소통할 수 있는 자리였음에는 틀림없다. 노승재 씨는 20대 때에 내가 미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은 인생을 살면서 참 중요한 것 같아요. 라고 말했다. 무언가에 미칠 수 있다는 것은 전 세대에 걸쳐서 중요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처한 환경이나 상황만을 바라보다 놓쳐 버린다면 우리만의 낭만의 시대는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년 차 직장인 A씨는 종종 점심때 혼밥(홀로 밥을 먹음)을 즐긴다. 직업의 특성상 고객과 입씨름 할 일이 많은 A씨는 점심을 먹을 때 만큼은 눈치 볼 필요가 없는 편안한 시간을 만들고 싶어 몇 달 전부터 혼밥을 즐기기 시작했다. 식사도 사회생활의 일종인 만큼 자주 혼밥 기회를 가지지는 못하지만 가끔 가지는 이 시간이 너무나도 즐겁다. A씨는 일할 때는 고객 눈치, 상사 눈치를 보고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밥 먹는 시간도 그렇게 보내니 미칠 것 같다면서 가끔 혼밥이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밥을 먹을 때는 당연히 다른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관계를 이어가야 한다는 기존의 고정관념 아래에서 혼밥은 외로움, 쓸쓸함과 같은 의미로만 쓰였다. 하지만 식사시간을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오롯이 자신을 위한 시간으로 쓰겠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혼밥은 쓸쓸함의 동의어에서 자유의 동의어로 바뀌고 있다. 오랫동안 비주류의 이미지로만 남아있던 혼밥문화가 이제는 오히려 주류가 되어가고 있다. △혼밥러가 식당을 바꾸다 다양한 가격대와 여러 종류의 음식을 찾을 수 있는 대학가에서 가장 붐비는 곳 중의 하나가 도시락 전문점이다. 동시에 혼밥을 가장 쉽게 즐길 수 있는 곳도 도시락 전문점이다. 넉넉지 않은 20대의 주머니 사정에 맞춰 저렴한 가격에 양질의 식단을 갖춘 이곳에는 식사시간만 되면 사람들의 발길이 구름같이 몰려든다. 종종 두 세 명씩 무리를 지어 몰려드는 손님들이 보일 때도 있지만 이곳을 찾는 대부분 손님은 혼밥러(혼밥하는 사람을 뜻함)이다. 점심이 시작하는 정오부터 점심이 끝나가는 오후 2시에 이르기까지 매장에는 언제나 약 2~3명 가량의 혼밥러들이 가벼운 식사를 즐긴다. 도시락 판매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정지은 씨(20)는 혼밥이 차지하는 비중이 지대함을 얘기한다. 하루에 250인분에서 300인분 정도가 나가요. 그중에 단체주문을 제외하면 거의 다 혼밥이에요. 비중으로 따지면 대략 80% 정도는 될 거에요. 도시락의 가성비가 좋아서 방학 중에도 특별히 판매량이 줄어드는 일도 없죠. 도시락이 아닌 일반음식을 취급하는 곳 중에서는 아예 혼밥환영이라는 표지판을 걸어 놓은 곳도 보인다. 부대찌개를 판매하는 한 식당은 혼밥환영이라는 표지판을 걸어 놓은 것은 물론 식단도 혼밥러를 타깃으로 맞췄다. 원래 2~3인 단체 손님을 기준으로 만드는 것이 부대찌개의 정석이지만 이곳은 1인분씩 뚝배기에 나눠서 파는 방식으로 문턱을 낮췄다. 그 결과 매출의 큰 부분이 혼밥에서 나오고 있다. 식당 단골 B씨는 전문음식점이 혼밥을 고려해 주는 것에 만족을 표한다. 찌개 잘하는 곳은 대부분 혼밥하기 어려운 곳인데 여기는 혼밥에 맞춰 찌개를 만들어줘요. 가볍게 먹기에 부담이 없고 또 분식점 같은 곳에서 먹는 찌개보다 맛도 깊어요. 혼밥 식당은 대학가를 벗어난 곳에도 이어진다. 객사 인근에 자리 잡은 한 식당은 혼밥을 위한 공간을 따로 만들었다. 마주보기 위해 만든 4인용 탁자를 대신해 폭이 좁고 기다란 탁자를 놓고 거기에 칸막이를 설치해 1인용 식사공간을 만들었다. 식당 한쪽에 만들어 놓은 소소한 공간이지만 아직 시선을 의식하는 혼밥러들에게는 꽤 쓸만한 공간이다. 모 식당 서민호 대표(38)는 상가 쪽에서는 혼밥이 그렇게 낯선 일이 아니라고 얘기한다. 상가 쪽에서 일할 때 약속을 잡고 밥을 먹기가 어렵죠. 그래서 주변 상가에 계시는 분들이 오셔서 혼밥을 즐기시는 경우가 많아요. 그분들 중에 혼밥코너에서 식사하시는 분들도 조금 있어요. △혼밥, 어떻게 봐야할까? 건설 관련 업종에 종사하는 C씨는 자신을 프로 혼밥러라 평한다. 경기가 좋지 않을 때 일상이 불규칙했고 그러다 보니 사람들과 점심 약속을 잡기가 어려웠다. 그때 처음 혼밥을 하게 됐는데 그러던 것이 어느덧 혼밥의 최고 난이도라 불리는 고깃집에서도 거리낌 없이 혼밥을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자신의 혼밥 경험을 꺼낼 때 C씨는 패스트푸드 전문점에서 시작하는 혼밥 등급론을 설파하며 고깃집 혼밥에 익숙해지는 노하우까지 전수했다. C씨는 초보자가 고깃집 혼밥을 시도할 때는 칸막이가 있는 고깃집에서 시작하고 차차 칸막이가 없는 곳으로 나오면 부담을 줄일 수 있다고 말한다. 이렇듯 충분한 경험을 쌓은 프로 혼밥러 C씨지만 여전히 딱 한 곳 만큼은 밥 먹기가 어렵게 느껴진다. 그곳은 바로 뷔페. 뷔페는 혼밥을 하기에는 여러모로 애로사항이 많은 곳이다. C씨는 혼자만 있다 보니 음식이나 음료를 가지러 가면 자리를 치워버리는 일이 생겨서 곤란했다며 그렇게 몇 번 흐름이 끊기면 밥맛도 없어졌다고 뷔페 혼밥에 대한 후기를 남겼다. 또 다른 혼밥 고수 D씨는 본인의 경험을 말하기보다는 초보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몇 가지 충고를 전했다. 우선 큰 식당을 피한다. 눈총을 받는 것과는 별개로 큰 식당은 최소 2인분씩 음식을 파는 경우가 많아 혼자 가기에는 적절치 않다. 큰 길가에서 조금 벗어난 식당, 특히 분식 종류를 파는 곳이 좋다. 분식을 선택하면 주문 후에 음식이 나오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아 지겨운 시간을 줄일 수 있다. 그리고 밥이 나왔을 때는 별다른 일이 없다면 그냥 먹기만 하길 권한다. 뻘쭘하다는 이유로 이어폰을 끼고 뭔가를 듣거나 보면서 먹으면 더 위축돼 보이고 실제로도 더 위축된다. D씨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혼밥하는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며 혼자 먹을 때는 그저 당당하게 먹기만 하면 된다고 조언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지난 2015년 7월 당선된 전주농협 임인규 조합장이 취임 3년을 넘겼다. 선출직인 지역농협 조합장의 임기는 4년이다. 임 조합장은 인터뷰에서 그간 해왔던 일들에 강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그는 농민이 주인인 농협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아쉬움도 많이 남는다고 회상했다. 임 조합장은 임기 내내 파격적인 공약과 행보로 화제를 모았다. 조합장 급여 절반 삭감, 조합원에게 농사연금 지급 등은 일각의 비판에도 강력하게 추진해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제 조합장 임기의 절반이상이 지났습니다. 그간 전주농협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하는데요. 우선 전주농협은 예금 1조원 최초 달성, 조합장 보수 절반 삭감, 전국 최초 농사연금 도입 등으로 많은 혁신을 이뤄왔다고 자부합니다. 6,000여명의 농민조합원들에게 약속한 공약은 꼭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일각의 비판도 많은 것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저의 고민은 예나 지금이나 딱 하나에요. 못사는 농촌을 어떻게 하면 잘 사는 농촌으로 만들 것인가입니다. 이 고민하나로 모든 일을 추진해왔습니다. 급격한 변화가 싫은 사람들도 있겠지요. 그러나 저는 전주농협이 혁명 수준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조합원들의 지지아래 소신 있게 추진해나갈 생각입니다. -1억 원이 넘는 자신의 연봉을 반으로 자진 삭감한 것에 여러 말들이 많았습니다. 존경스럽다는 반응부터 인기를 얻기 위한 쇼라는 비판까지 혼재했는데요. 연봉을 반으로 삭감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비판을 위한 비판은 생산성 없는 비난에 불과합니다. 선출직 공무원 중에 재선을 위해서 자신의 연봉이나 활동비를 반으로 삭감하겠다는 인물이 있던가요. 제가 조합장 연봉을 삭감한 것은 딱 하나의 이유입니다. 농민들은 힘들고 가난해지는데 조합장과 농협만 배부른 상황을 타개하겠다는 의지였죠.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고들 합니다. 그래서 조합장 자신부터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우리 농촌의 현실을 돌아보면 1년에 수익이 1000만원도 안 되는 농민이 대다수입니다. 그런데, 농민을 대표하는 조합장이 1억 원이 더 되는 돈을 받아서야 되겠습니까. 조합원들과 고통을 함께 해야지요. 그래서 봉급을 반절 삭감하자는 공약을 걸고 조합장 선거에 나섰고 당선 후 대의원과 임직원이 참석한 정기총회에서 조합장 연봉을 절반인 5500만원으로 조정한 것입니다. -조합장실에 선거당시 사용했던 벽보가 걸려있는데요. 벽보를 왜 폐기하지 않고 계시는지. 먼저 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입니다. 두 번째로는 제가 선거출마 당시 약속했던 공약을 얼마만큼 이행했는지 점검하는 차원에서도 후보자 당시 사용했던 벽보는 유용한 도구입니다. 벽에 걸려있는 선거벽보를 보며 그때의 저와 지금의 제가 달라지진 않았는지 항상 반성하고 있습니다. -조합장님이 가장 자부심을 느끼는 사업인 농사연금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는데요. 농사연금의 효과는 어떠했습니까. 제가 추진하길 제일 잘했다고 생각하는 게 농사연금 지급입니다. 우리 전주농협 사업장을 이용하는 농민 조합원에게 한 달에 3만원을 지급하는 거에 말들도 많았습니다만 농협이 조합원의 기본적 생활을 보장하고 소속감을 높이자는 의미에서의 농사연금을 강력하게 관철시켰죠. 효과는 기대이상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조합원과 조합원 가족들의 소속감이 커졌어요. 예전에는 농민조합원이 전주농협 하나로마트와 로컬푸드를 이용하지 않고 대형마트를 가서 장을 봤습니다. 그런데 연금 지급 이후로 농민조합원은 물론 이들 가족까지 하나로마트를 이용합니다. 이로써 농민이 다른 농민이 생산한 상품을 이용하고 이는 다시 수익금으로 연결돼 농민을 위한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선순환 구조가 마련된 셈이죠. -전주농협은 외형적으로도 많은 성장을 해왔는데요. 특히 은행지점과 하나로마트 로컬푸드 매장이 늘어난 모습입니다. 전주농협은 2015년 이후 해마다 1000억 원 이상의 상호금융대출 실적을 올리며 성장세를 이어왔습니다. 신용사업 부문의 성과 중 상호금융 예수금 잔액은 전년대비 약 1200억 원 증가한 1조1600억 원을 기록했지요, 대출금 또한 1200억 원 증가한 1조4000억 원을 달성하며 전북 관내에서는 최초로 상호금융 사업 2조원 시대를 열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쌓은 실적을 자축하고 성과를 기뻐하는 것보다 실적을 바탕으로 농민에게 더 필요한 경제 사업을 활성화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벌어들인 금융수익을 농민 판로 확대를 위해 투자했습니다.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도 은행지점과 마트 등을 늘렸습니다. 실제 비대면 거래 확대로 다른 은행들이 점포를 줄여나가는 상황에서도 전주농협은 올해 초 전주 서부신시가지에 17번째 점포인 전주 홍산지점을 개설하기도 했어요. 이는 유동인구와 소상공인이 많은 곳에서 더욱 편리한 금융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청년 일자리를 늘리고자 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를 토대로 전주농협은 로컬푸드마켓 활성화를 통한 농가소득 증대와 판매농협을 구현하고자 했습니다. 농산물 판매를 잘하는 농협으로 거듭나야 농촌이 잘살 수 있다는 믿음에서입니다. -남은 임기동안 포부와 계획을 말씀해주십시오. 제가 내건 공약들의 추진상황을 점검하는 한편 내실을 기할 계획입니다. 가장 추진이 급한 공약 중에는 대형 APC(농산물유통센터) 건립이 있습니다. 센터는 현재 만성동에 준공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최신 설비를 이용해 농업인들이 생산한 농산물의 선별 포장 상품성을 제고한다면 농가소득 증대와 판매중심 농협으로서의 위상이 한 단계 더 도약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지난 3년간 겪으면서 조합장이라는 자리가 참 무겁고 어려운 위치라는 것을 새삼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첫째도 농민 둘째도 농민이라는 가치를 가지면 못할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조합원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응원도 필요합니다. 조합의 경영은 조합장 혼자만의 힘으로 끌어갈 수 없습니다. 조합원의 참여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대외 여건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시기인 만큼 조합원 스스로 주인의식을 갖고 전주농협을 사업 이용에 적극 활용해 주길 바랍니다. ● [임인규 조합장은] 사업추진력솔직함 겸비, 조합원 민원 빠른 피드백 임인규 전주조합장은 완주출신으로 전주농림고(현 전주생명과학고)와 호원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이후 1980년 전주농협에 입사해 송천신성완산 지점장 등을 역임하고 2011년 1월 명예 퇴직했다. 2015년 조합장에 당선된 그는 사업추진력을 강점으로 평가받는다. 농민조합원의 민원에 대한 빠른 피드백과 솔직함도 임 조합장의 특징으로 거론된다. 임 조합장은 농부가 존중받아야 잘 사는 나라가 될 수 있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농민지위 향상을 위해 남은 임기에도 최선을 다 하겠다고 강조했다.
억울함이 없게 하라 법의 올바른 판결에 대한 태도이다. 조선 시대에는 일어나는 모든 살인사건의 경우 왕의 심리(審理)를 받고 최종 판결을 받았는데, 특히 정조는 죽은 자나 살아 있는 범인이 억울한 일이 없도록 진실을 밝히고, 오래전 판결 난 사건에도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면 재수사를 명령해 한 치의 억울함이 없도록 했다. 유독 살인사건 심리에 관심이 많은 정조는 본인이 심리한 사건을 모아 『심리록(審理錄)』을 편찬하게 했다. 『심리록』에는 전주(全州) 옥사(獄事)의 살인사건에 대한 기록이 있다. 물 대기를 다투다가 구타하여 죽게한 신적문 사건과 절을 하지 않은 광대를 때려 죽게한 주갑득 사건, 놋그릇을 잃어버리고 의심하여 불로 지져 죽게한 이기석 사건, 싸움 말리는 여인을 때려 죽게한 김명옥 사건 등이다. 모두 작금에도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의 유형이다. 그 중 양시돌이란 자가 한설운을 살해하고 목을 매어 자살한 것으로 위장한 사건에 대한 기록이 있다. 목을 매어 죽었다는데 목을 매었다는 시렁의 높이가 목을 매기에 낮고, 시신에 목을 맨 자국이 없었으며 얼굴 등에 상처가 있는 것에 주목했다. <상처> 두개골이 붓고 딱딱했으며, 뺨에 구멍이 뚫리고 자암색(紫黯色)이었다. <실인> 얻어맞은 것이다. 범인인 양시돌이 진술을 번복하다 술을 마시고 다투다가 구타하여 살해한 것을 자백해 자살로 처리될 뻔할 사건의 진실을 밝혀낸 것이다. 당시에는 살인사건이 일어나면 원나라 왕여(王與)가 시신을 검시(檢屍)하는 방법과 규정에 관해 쓴 『무원록(無寃錄)』을 토대로 세종시기에 조선의 상황과 법률에 맞도록 개편한 『신주무원록』과 영조시기의 『증수무원록』을 수사 지침서로 활용했다. 정조는 『증수무원록』을 보완해 한글본도 제작, 배포하여 철저한 검시와 체계적인 수사를 통해 억울한 희생이나 피해자가 없도록 엄정하게 진행토록 하였으며 이를 기록에 남겼다. 양시돌 사건 기록을 검토한 정조는 『무원록』에 죽은 뒤에 목을 맨 것은 빛깔이 백색이다라는 내용이 있는데, 애초 검험 때에는 어찌하여 이것을 기준으로 증거로 삼지 않았는가? 사실을 조사하여 장문하라고 지적을 하여 체계적인 수사를 하고 자살로 위장된 사건의 억울함을 풀게 했다. 정조의 『심리록』에는 살인범임에도 불구하고 왕이 그 뜻을 기리게 하고 무죄 판결을 내린 이례적인 기록이 있다. 강진(康津) 김은애의 옥사이다. 천하에 살이 에이고 뼈에 사무치는 원한으로는 정숙한 여자가 음란한 짓을 하였다는 모함을 받는 것보다 심한 것이 없다.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은 잘못이 없고 원수는 갚아야 한다는 것을 환히 알게 하였으며, 평범한 부녀자가 살인죄를 범하고 도리어 이리저리 변명하여 요행으로 한 가닥 목숨을 부지하길 애걸하는 부류를 본받지 않았다. 윤리와 강상이 없고 기절이 없는 자는 금수와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게 한다면 반드시 풍교에 일조가 될 것이다. 정조가 김은애 옥사를 판결하며 내린 말이다. 정조는 당시 이덕무(1741~1793)에게 김은애 옥사의 내막과 판결을 기록하게 하여 후세의 본보기로 삼고자 하였다. 그 서문에 상감(정조)께서 모든 옥안(獄案)을 심리하시다가 김은애를 살리게 하시고, 나에게 명령을 내려 「은애전(銀愛傳)」을 지어 『내각일력(內閣日曆)』에 싣게 하셨다고 되어 있다. 제목의 은애는 범인 김은애를 가리킨다. 전라도 강진에서 노파가 참혹하게 살해되었다. 범인은 18세의 새댁 김은애로 밝혀졌다. 은애에게 목숨을 잃은 노파는 기생 출신의 몸에 부스럼이 있는 자로, 집이 가난하여 은애네 집에서 먹을 것을 자주 빌렸는데 은애의 어머니가 때로 거절하자 앙심을 품게 되었다. 노파는 친척인 최정련이 은애에게 마음이 있자 부스럼약 값을 받기로 하고, 정련에게 은애와 사통했다고 발설하면 혼인을 성사시켜 주겠노라고 약조한다. 이에 정련은 은애의 오빠에게 은애와 통정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노파는 은애와 정련에 관한 헛소문을 퍼뜨리고 다녔다. 마을에 소문이 퍼졌지만, 김양준이라는 사람은 거짓 소문임을 확신하고 은애를 아내로 삼았다. 은애가 혼인을 한 후에도 노파와 정련은 추잡한 말로 은애를 모함했다. 살해되기 전날 노파는 사람들 앞에서, 은애가 배반하고 다른 데로 시집가는 바람에 정련이 약값을 주지 않아 자신의 몸이 더 망가졌으므로 은애는 원수라고 하였다. 그들의 계속된 시달림을 받은 은애는 인내심이 한계에 이르자 칼로 노파를 무참히 살해했다. 그런 후 정련도 죽이려 했지만, 그의 집이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어머니가 말리는 바람에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살인 후 관아에 자수한 김은애는 그동안 쌓였던 원한과 사건 내막을 밝히며 자신이 노파를 죽이긴 했지만, 관에서 자신을 무고한 노파를 벌한 것이 없으니 대신 최정련을 죽여 줄 것을 청하였다. 조사를 마친 강진 현감은 상황은 이해가 되나 사람을 죽였기에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고 했으며 좌의정에 이르기까지 같은 의견을 갖고 정조에게 최종 판단을 청했다. 하지만 정조의 생각은 달랐다. 정숙한 여인을 모함했으니 그 원통함이 살인에 이르게 한 것으로 판단했다. 정조는 김은애를 무죄판결하고 석방하도록 명한 후, 지방관에게 김은애가 최정련에게 복수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후 관련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최정련은 정조의 세심한 지시 덕분에 은애로부터 목숨은 부지했던 것 같다. 정조와 뜻을 같이했던 정약용은 살인사건에 대한 법의학과 판결을 종합해 『흠흠신서(欽欽新書)』를 유배지에서 남겼다. 한자 흠(欽)은 공경하다 존경하다는 뜻과 삼가다 구부리다의 뜻을 품은 것으로 『흠흠신서』는 법을 집행함에 있어 그 누구도 억울함이 없도록 정의롭게 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이는 법을 존중하면서도 죗값을 치르게 함에 있어 신중하고 공정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공정함과 마음까지 어우르는 판결을 주장하면서도 정약용은 관대한 처벌을 반대했다. 특히 술김에 벌어진 살인에 대해 관대하게 처벌하는 경향을 비판하면서 타고난 어리석음은 하늘이 만든 재앙이지만 술주정의 재앙은 스스로 지은 것이므로 이를 똑같이 용서할 수 없으며 이른바 주사(酒邪)로 인한 감경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술김에 지은 죄와 관대한 판결도 그렇지만 억울한 상황들은 과거의 일만이 아니다. 김은애 옥사와 양시돌 옥사처럼 원통함을 풀어주고 진실을 밝혀야 하는 일들은 시대만 달라졌을 뿐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 성추행범으로 모함을 받고 억울함을 이기지 못해 자살한 사건과 수많은 미투 사건 그리고 약촌오거리 사건과 삼례나라 슈퍼사건 등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었다가 무죄로 밝혀진 사건들이 있다. 불공정한 판결이나 적폐에 의해 신뢰가 무너진 일들은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통해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하며 선조들의 현명한 판결을 살펴보고 복기하여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지난겨울 조금 여유롭게 덴마크를 여행했다. 코펜하겐은 몇 번 방문했지만 매번 경유지여서 관광의 시간이 짧기도 했지만 제대로 둘러볼 여력이 없어서 지나치곤 했었다. 이번엔 일주일간 숙소를 잡고 구석구석 둘러보는 재미가 있었다. 유명하다는 콜렉티브 커피에서 맛있는 커피도 맛보고 주변 경치가 아름다운 루이지아나 미술관에서 그림도 감상하고 로컬 마켓인 토르브할렌에서 매일밤 맥주를 한잔씩 마시는 기간은 마치 현지인이 된 듯 했다. 삶의 만족도가 높다는 북유럽의 휘게(Hygge.일상 속의 소소한 즐거움이나 안락한 환경에서 오는 행복을 뜻하는 단어)라이프를 제대로 느껴 본 셈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장소는 초미니 국가로 알려진 대안도시 크리스티아나(Christiania) 라는 곳이었다. 사실 주권을 인정받지 못했기에 국가라 칭할 수도 없지만 그들 나름은 총회를 열어 정원 합의를 원칙으로 하는 직접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자치 공동체를 유지 하고 있다. 또한 공동체의 국기와 화폐까지 만들어 통용되고 있다. 그리고 스스로 EU에 소속되지 않은 독립된 자치국가로 공표했다. 이런 역사를 지닌 곳이 우리나라 관광객들에게 그다지 인기가 없는 것은 주민 구성원들의 대다수가 부랑자와 노숙자 및 마약중독자들이기 때문이다. 그 도시를 가로질러 지나칠라 하면 여기저기 마리화나 냄새가 진동을 하고 곳곳에서는 마약거래상들이 마약을 판다. 그러니 마음 편하게 도시를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많은 관광객들이 오는 이유는 골목 어귀부터 알록달록한 마을의 장식과 모드 집들을 직접 손으로 짓다보니 창의성 넘치는 주택들을 만나고 모든 금지를 금지한다 는 슬로건에 걸맞게 자유스러움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크리스티아나가 이런 독특한 모습을 하게 된 것은 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베트남전의 영향으로 확산된 반전 운동인 68운동의 주축세력들은 대부분 2차 세계대전의 전후세대들이다. 명분이 없던 전쟁의 화살이 부모세대가 일으켰던 세계대전까지 확장되며 들불처럼 일었던 반전의 중심엔 우드스탁으로 대표되는 히피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또한 이러한 움직임들은 각국에 다른 양상으로 반응하였는데 마침 덴마크에서는 1971년 코펜하겐에 있던 해군기지가 폐쇄되었다. 10만평이 넘는 버려진 이곳에 자유를 갈망하는 히피들과 노숙자, 부랑아, 동생애자, 미혼모 등 사회 취약계층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무질서한 와중에 그들 나름의 법칙 세 가지를 정했다. 첫째, 일체의 폭력을 금지한다. 둘째, 중독성이 강한 마약을 금지한다. 셋째, 오토바이와 자동차 금지한다. 이 세 가지를 제외하고는 공동체 내에서 어떤 일을 하든 개인의 자유다. 그렇게 나름의 규칙을 갖고 50여년이 흐른 지금,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들고 자유를 찾아 떠난 이들의 종착역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다른데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광경으로 전 세계의 수많은 관광객을 끌어 모으고 있다. 일반적이진 않던 문화도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만들어가니 볼거리가 된 것이다. 국내를 둘러보면 우리나라도 꽤 흥미로운 마을들이 많다. 수백년 된 전통을 간직하고 정신을 계승하여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까지 지정된 안동의 하회마을과 양동마을은 전 세계인들이 와도 감탄해 마지않는 우리나라의 자랑이다. 한때 탤런트 류시원의 생가가 있다는 사실로, 배우 배용준이 하루 기거했다는 이유로 수많은 한류 관광객들로 몸살을 앓았을 정도이다. 또한 서울 북촌과 전주의 한옥마을 처럼 근대에 만들어진 한옥마을도 젊은 트랜드에 맞게 변모하여 관광객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이렇게 기백년이나 되는 전통마을이 아닐지라도 관광객들은 모여든다. 통영의 동피랑 마을이나 부산의 감천마을처럼 언덕배기의 오밀조밀 힘들게 살던 마을조차 관광꺼리가 되고 있다. 물론 무분별하게 벽화를 남발하고 자체 컨텐츠 없이 베껴내기만 한다면 오래가지 못 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마치 유행처럼 번질 모양새이다. 그런 하드웨어를 갖추지 않더라도 대안 마을이나 체험마을, 주민 자치적인 컨텐츠 생산 마을 등도 뜨고 있다. 최근엔 공해 없는 자연 속에서 전통문화와 자연을 잘 보호하면서 자유로운 옛 농경시대로 돌아가자는 느림의 삶 을 추구하는 슬로시티의 영향으로 많은 슬로시티들이 국내에도 생겨났다. 담양 창평의 삼지내 마을은 가이드를 할때 여러번 방문하였는데 2007년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로 지정된 곳이다. 꿀초, 한과, 쌀엿등 다양한 만들기와 다례체험, 주민들이 운영하는 밥상 등 작지만 볼거리, 먹을거리가 가득한 마을이다. 주말이 되면 전국에서 몰려온 버스들이 줄을 서있어서 예약을 하지 않고는 식사를 못 할 정도이다. 이런 곳들을 보며 크기와 전통에 상관없이 컨텐츠로도 충분한 관광이 된다는 것을 체감했다. 전북에 살다보니 아무래도 같은 지역의 작은 마을들을 눈여겨 본다. 얼마전 완주에 비비정마을이란 곳을 방문했는데 이름만 듣고는 최근에 새로 지어진 마을인 줄 알았다. 하지만 무려 1573년에 처음 지어진 비비정(飛飛亭)은 이 정자에서 바라본 한내천 백사장에 내려앉은 기러기가 유명하여 비비낙안이란 이름으로 조선시대부터 유명하던 마을이다. 그런 곳을 같은 이름의 카페도 언덕위에 지어놓아 낙조를 감상하게 만들어 놓았고 마을 할머니들이 쉐프가 되어 음식을 대접하는 비비정 농가 레스토랑도 있다. 조금 떨어진 만경강에는 철교위에 오래된 열차를 리모델링하여 예술열차라는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화려하고 오래된 관광지만이 능사는 아니다. 이처럼 아기자기 한 마을에서 한가롭게 식사도 하고 차도 마시며 마을을 둘러보는 여행이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준다. 해외와 국내의 여러 마을 들을 관통하며 들었던 생각은 어째든 꺼리다. 볼꺼리든 먹을꺼리든 할꺼리든 사람들에게 만족감을 주는 한 포인트만이라도 갖춘다면 찾아간다. 남들과 똑같지 않은 마을만의 고유한 그 무엇을 발견하구 발굴한다면 이미 그 마을은 관광지이다. /장재영 세계여행가(순창 방랑싸롱 대표) *이 기사는 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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