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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감 2018 시민기자가 뛴다] 순창 청년활동 - 공정여행·콘서트·라디오까지…서울청년의 순창 정착기

고추장을 빼곤 딱히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던 순창에 필자가 정착한지 2년 가까이 된다. 재미난 것을 만들어 보자는 단순 무식한 생각으로 연고도 없던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실향민 아버지 밑에서 평생을 방랑자처럼 살아가는 나에게 고향이란 개념은 희박하다. 전 세계 어디나 정 붙이고 사는 곳이 저의 터전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순창은 이미 나의 고향이 되어 가고 있다. 많은 곳을 여행 하며 경험으로 잠재되어 있던 아이디어들을 지역에 실험하고 녹여 내는 것이야말로 나의 적성이라는 것도 얼마 안가 깨달았다. △ 소담한 순창 배경으로 한 공정여행 필자는 순창에서 방랑싸롱이라는 카페를 열고 2년 째 운영 중이다. 카페를 열고 제일 먼저 해보고 싶었던 시골에서의 재즈콘서트는 고즈넉한 한옥에서 두 번이나 열었다. 많은 분들의 호응으로 가능성을 봤고, 2017년 공정여행 프로젝트 [BOVO순창]으로 확장시켰다. 여행작가의 강연과 여행자 벼룩시장, 재즈콘서트를 엮었던 2박3일의 상품은 300여명이나 참가하며 큰 반응을 이끌어 냈다. 두번째 [BOVO순창]은 전라북도 문화관광재단과 행자부 한국지역진흥재단의 지원으로 더욱 성대하게 치러 냈다. 방문객 500여명, 숙박객만 100여명 이르며 순창에 작은 소란을 만들었다. 올 가을에는 굿네이버스와 한국타이어에서 주관하는 드림위드 사업으로 조금 더 완성된 형태로 세 번째를 행사를 진행 중이다. 이번엔 다양한 군민들이 참여 하는 뮤직페스티벌을 목표로 차근차근 준비 하고 있다. 지역민들도 즐기고 소상공인들이 혜택을 받고 관광객은 건전한 소비를 함으로 주최 측은 다음번 축제를 만들 수 있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 간다. △ 비영리단체 통해 청년 활동 확장 지난해엔 조금 더 다양한 활동을 위하여 비영리단체인 [BOVO문화관광연구소]를 설립하였고 지역 청년들의 발굴을 시작했다. 오는 7월 5일 전북의 각지에서 활동하는 청년들을 초대하여 순창의 청년들과 만나는 청년 허브 컨퍼런스를 개최한다. 다른 지역의 청년들은 어떤 활동을 하며 살아가는지 들어보고 지역 청년들의 네트워킹도 만들어 가자는 취지다. 컨퍼런스를 위해 순창 귀농 청년들이 유기농 밥상을 준비하며 손님맞이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이번 모임을 통해 장수지역인 순창에서 오히려 역 소외 받고 있는 청년들만의 문화를 만들어 갔으면 한다. 또한 BOVO문화관광연구소는 문화체육관관부가 주최하고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주관하는 2018년 독서문화캠프의 전라권 청소년 시행사업자로 선정됐다. 순창군립도서관과의 컨소시엄으로 진행되는 이번 행사는 도서관을 제외하곤 책을 접하기 힘든 지역의 청소년들을 위하여 섬진강변에서 반짝 열리는 6개의 책방으로 작은 기적을 꿈꾸어 보려 한다. 전국의 청소년들이 참가 가능한 캠프는 7월 23일부터 25일까지, 8월 8일부터 10일까지, 두 번에 걸쳐 선착순 50명씩 모집한다. 무료로 진행되는 이번 행사는 본인이 추천하는 책 1권만 가지고 오면 된다. △ 군민과 함께 하는 라디오영상 사라져 가는 것들을 기록하는 마을 미디어는 중요하다. 마을을 디지털로 기록하며 재미난 콘텐츠를 만들고 싶었던 차에 마침 순창에서 올 초부터 마을미디어 교육을 시작했다. 순창군 마을공동체지원센터에서 주관하였고 전주 시민미디어센터 [영시미]에서 교육을 맡았다. 순창 라디오를 시작으로 신문, 방송까지의 목표를 두고 마을미디어 활동가 양성교육을 하는 것이다. 총 5주간의 교육으로 마을미디어의 이해와 라디오 녹음장비 사용법, 녹음후의 편집 프로그램 사용법등을 배우며 짧은 프로그램 제작까지 마쳤다. 교육생들이 주축이 되서 팟 캐스트를 제작하는 우리만의 라디오, 순창FM을 시작했다. 순창의, 순창에, 순창을 위한 방송을 만들기 위해 보다 많은 순창 분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지역 각계각층의 주민들과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의 인터뷰를 녹음했다. 100명도 넘는 군민들의 인터뷰를 만들었는데 이런 것이 마을 미디어의 힘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순창FM의 개국방송을 마쳤고 지금은 군민들이 성우로 열연한 드라마 라디오등 여러 편이 온라인 사이트에 게재됐다. 팟방에서 순창FM을 검색하면 된다. △ 군민 자체적으로 즐기도록 교육도 ▲ 장재영 세계여행가순창 방랑싸롱 대표 라디오를 넘어 추후 영상 콘텐츠 제작을 위하여 직접 교육프로그램도 만들었다. 순창군귀농귀촌지원센터에서 지원하는 나만의 생업찾기 프로그램이다. BOVO문화관광연구소에서 청년영상콘텐츠제작과 마을영상 만들기 20강의 강좌를 운영하고 있는 것. 지역민과 함께 콘텐츠를 만들어 순창을 알리고 마케팅하는 것이 목표다. 작지만 재미난 문화를 만들어 가는 순창을 눈여겨 봐주길 바란다. 고추장 말고도 무언가 있다는 걸 보여줄 것이다. /장재영 세계여행가순창 방랑싸롱 대표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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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30 19:51

[참여&소통 2018 시민기자가 뛴다] 반달가슴곰의 귀환 - 파괴하고 복원하는 과오의 사슬, 언제쯤 끊어낼까

물관리일원화를 포함한 드루킹 특검으로 여야간 신경전이 한창이던 5월 중순, 한편에서는 반달가슴곰 KM53의 수술이 진행됐다. 버스에 치이는 교통사고를 당했던 KM53의 수술은 12시간 가까이 소요됐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종복원기술원 야생동물의료센터와 전남대 의료진이 달라붙어, 왼쪽 앞다리 어깨부터 팔꿈치 사이 복합골절을 고정시켜야 했다. 다행히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KM53은 현재 의식을 회복했고 다시 야생으로 돌려보낼지는 회복 경과를 지켜보며 판단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90년대 말부터 진행해온 반달가슴곰 복원사업에 대한 최근의 성과는 무척 고무적이다. 국내에서 구할 수 없어 멀리 러시아와 북한에서 들여온 20마리로 시작해서, 2004년 첫 방사가 시작된 이래 올해 초 태어난 8마리의 새끼를 포함해 총 56마리까지 늘었다. 애초 2020년으로 예상했던 최소 존속개체군 50마리의 목표치가 앞당겨졌다. 현재 추이라면, 10년후 쯤에는 약 100마리 규모 이상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개체 수 증가에 따라 서식지도 확대될 것인데, 지리산을 거점으로 백두대간을 따라 퍼져나갈 것으로 짐작된다. 이미 2014년 광양과 곡성, 김천 수도산까지 100㎞를 이동했던 사례가 있다. 조만간 지리산과 덕유산 일대 남원과 무주, 진안, 장수에서도 곰을 만났다는 소식을 접하게 될 것 같다. 단군신화에도 등장할 만큼 곰과 호랑이는 오래 전부터 한반도에 서식해왔다. 우리는 아직 지난 평창 패럴림픽과 동계올림픽의 마스코트였던 반다비와 수호랑을 기억하고 있다. 분명 특별한 인연을 맺은 동물이다. 그래서일까. 이들의 수난사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 과거에는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전국에 서식하였으나 일제강점기 해수구제(害獸驅除) 명목으로 대량 포획되었다. 조선총독부통계연감 기록에 따르면 1915년~1943년 사이 곰 1076마리가 포획되었고, 1950년대 이후 수렵에 의해 설악산, 오대산, 태백산, 지리산 등에서 개체수가 급감하였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절멸되었다. 그간의 서식분포조사에서 중동부 민통선부터 지리산까지 약 20여 마리 정도가 겨우 생존해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멸종 위기는 비단 반달가슴곰만의 문제가 아니다. 흔히 꽃사슴으로 불리는 대륙사슴과 사향노루, 황새, 따오기, 소똥구리 등 정겨운 이름들이 남획과 서식처 파괴 등의 이유로 이미 멸종했거나 심각한 위기에 놓여 있어서, 반달가슴곰처럼 종복원사업 대상이다. 국가가 이들을 보호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89년 관련 법이 제정되면서부터다. 지난 해 말까지 지정된 멸종위기야생생물은 모두 267종(I급 60종, II급 207종)이다. 전라북도의 상황도 예외가 아니다. 전라북도지속가능발전협의회가 지난 2014년 조사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반달가슴곰을 비롯한 77종이 목록에 올라있고, 우리 지역에서만 살고 있는 임실납자루나 부안종개 같은 종도 있다. △파괴와 복원을 반복하는 아이러니 멸종 우려와 보전에 대한 목소리는 우리보다 앞서 국제사회에서도 꾸준히 있어왔다. 세계적인 과학지인 네이처(Nature)는 2200년에 현재의 포유류 25%가 사라질 것이라고 내다보며, 기후변화와 인간에 의한 생태계 파괴가 지금처럼 지속될 경우 우리 후손들은 표범과 코끼리, 펭귄을 박물관에서나 만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또한 전 세계 자원 및 자연보호를 위하여 국제연합(UN)의 지원을 받아 1948년에 국제기구로 설립된 국제자연보전연맹(IUCN) 멸종위기종들에 관한 적색목록을 작성하여 전 세계국가들의 협력을 끌어내고 있다. 『오리진』의 저자 리차드 리키는 공룡의 멸종에 필적하는 상상 이상의 대규모 멸종이 이미 진행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희망을 놓지 못하게 하는 이야기도 있다. 한때 회색늑대는 북미대륙 전역에 분포했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 양과 소를 치는 농장주와 사냥꾼들에 의해 약 200만 마리가 사라졌다. 그들에게 늑대는 악마 같은 존재였고, 마녀사냥 같은 늑대사냥이 벌어졌던 것이다. 1973년 미국 의회가 멸종위기종에 관한 조례를 통과시킬 즈음 겨우 400~500마리 만이 남게 되었다. 뒤늦게 복원사업이 추진되었고, 1990년대 중반 캐나다와 인근 지역으로부터 66마리의 늑대가 옮겨졌다. 그리고 약 10년 후, 옐로우스톤 국립공원 167마리를 포함하여 복원지역에 총 301마리의 늑대가 확인되었다. 늑대의 수가 늘어나면서 예상대로 로키산맥 북부 지역주민들의 피해도 늘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일도 벌어졌다. 최상위 포식자의 증가는 풀을 뜯는 엘크(Elk)와 가지뿔영양의 감소로 이어졌고, 황폐해졌던 초원의 식생이 점차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개울가의 사시나무와 버드나무의 군락이 점차 회복되면서 물길이 안정되고 토양침식이 줄었다. 비버들이 다시 댐을 지어 다양한 서식기반이 마련되자, 물고기와 새의 개체수도 늘었다. 늑대가 먹다 남긴 엘크의 사체는 회색곰들을 살찌웠고, 절반으로 줄어든 코요테 때문에 다람쥐와 여우같이 작은 동물들이 늘면서 독수리와 매의 출현도 빈번해졌다. 전문가들은 늑대 복원 이후 훨씬 다양한 생물종이 서식하게 된 국립공원의 생태계가 건강해졌다고 진단했다. △언제까지 반복할 것인가 반달가슴곰은 겨우 멸종의 위기를 모면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문제는 이제 시작이다. 현실에서 먹이사슬의 최상위를 차지하고 있는 곰과의 공존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까치나 멧돼지와 같은 동물들과의 공존이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충분히 알고 있다. 과수농가나 지역주민들의 피해도 증가할 것이고, 더러는 한밤중에 쓰레기통을 뒤지는 곰과 맞닥뜨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일이 빈번해질수록 낭만적인 동화 같은 상상이나 민족의식 고취의 의미는 뒷전으로 밀려나게 마련이다. 건강한 한반도 생태계 회복의 징표라고 설명하는 학자들의 설명조차 달갑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1차 복원사업의 성공소식에도 불구하고, 반달가슴곰의 미래를 낙관할 수만 없는 이유다. 바로 엊그제, 물관리일원화와 관련된 3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하천관리법을 국토부에 존치시키기로 한 부분에 시민사회단체들은 반쪽짜리 물관리일원화라고 반발하고 나섰다. 성명서에는 4대강 사업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피해가기 위한 꼼수이며, 지난 과오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없다면 4대강 재자연화도 난항을 겪게 될 것이라는 우려도 담겨있다. 위기를 만들어 내고, 또 다시 복원을 반복하는 과오를 언제까지 되풀이 할 것인가. 몇 해 전, 국립수산과학원에서 집 나간 명태를 찾는다며 마리당 50만원의 사례금을 내건 적이 있었다. 그런가하면 소똥구리 50마리를 5천만 원에 구한다는 입찰공고가 지난 3월, 환경부 홈페이지에 떴다. 한 마리당 백만 원이다. 어른들의 추억 속에 발에 밟히도록 지천이었던 소똥구리가 어쩌다 멸종위기 II급에 지정되고, 종복원 대상 목록에 오르게 된 것일까. 학자들은 1970년대 이후 사료와 항생제로 소를 사육하기 시작하면서 소똥구리들이 급감했다고 원인을 밝혔다. 이미 우리의 산, 들, 바다에서 무엇 하나 멀쩡한 것이 없어 보인다. /신진철 전 전북자연환경연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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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29 18:46

[최진석의 노장적 생각] 철학의 시선과 야성 - 미래를 활짝 열기 위해 마음속에 야수 한 마리 키우자

<탁월한 사유의 시선>을 출간하고 나서 나온 몇 가지 반응들이 나를 상념에 들게 한다. 철학자가 이제 중진국을 넘어 선진국으로 올라가자고 하는 말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다. 철학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고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만든 매우 고효율의 장치다. 철학과 비슷한 높이에 수학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동안 철학을 추상적 이론으로만 간주해왔다. 철학을 생산한 것이 아니라 수입하였기 때문이다. 철학이 생산되는 바로 그 순간은 육체적이고 역사적이다. 거기에는 피 냄새, 땀 냄새, 아귀다툼의 찢어지는 음성들, 긴박한 포옹들, 망연자실한 눈빛들, 바람소리, 대포 소리가 다 들어있다. 망연자실한 눈빛들 속에서 쓸쓸하지만 강인한 눈빛을 운명처럼 타고난 한 사람이 역사를 책임지려 앞으로 튀어나가면서 인간으로서 발휘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의 시선을 화살처럼 써서 철학 이론이 태어난다. 이처럼 철학 생산 과정에는 역사에 대한 치열한 책임성과 헌신이 들어 있다. 우리가 배우는 플라톤, 데카르트, 칼 맑스, 니체, 공자, 노자, 고봉 기대승, 다산 정약용이 다 이랬다. 철학 수입자들에게는 애초부터 육체적이고 역사적인 울퉁불퉁함이 지적 사유 대상이 되기 어렵다. 그런 울퉁불퉁함은 특수하다. 공간과 시간에 갇혀 개별적 구체성으로만 있다. 이런 개별적 구체성에서 잡다하고 번잡한 것들이 모두 제거되고 나서 보편 승화의 절차를 거친 다음에 창백하고 추상적인 이론으로 겨우 남는 것이다. 당연히 철학 수입자들은 창백한 이론을 진실이라고 하지, 울퉁불퉁한 역사와 육체를 진실이라고 하기 어렵다. 그들은 사유를 사유하려 들지 세계를 사유하려 들지 않는다. 이와 달리 철학 생산자들은 직접 세계를 사유한다. 사유를 사유하지 않는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구체적으로 울퉁불퉁한 것을 보편으로 승화하는 일이지, 다른 데서 생산된 창백한 보편을 가져와 그것으로 자신의 울퉁불퉁함을 재단하는 일이 아니다. 울퉁불퉁함이라 선진국 시민으로 사느냐 후진국 국민으로 사느냐, 독립적으로 사느냐 종속적으로 사느냐, 전략적으로 사느냐 전술적으로 사느냐, 주인으로 사느냐 노예로 사느냐, 영혼의 높이에서 사느냐 그 아래서 사느냐하는 문제들이 다양한 굴곡을 그린 것이다. 수입된 창백한 이론을 내면화하거나 자세히 따지는 것을 철학 활동으로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선진국이니 독립이니, 주인이니 종이니 하는 것은 철학이기 어렵다. 그들에게는 이데아니, 정신이니, 물질이니, 초인이니, 도(道)니, 기(氣)니, 인(仁)이니 하는 것들만 철학이다. 그러다보니 이 땅에서도 주자학을 닮은 것만 철학이라 하고, 동학 같은 자생적 고뇌는 철학으로 치지도 않는 자기 비하가 오히려 당당해지는 지경이다. 자신의 삶을 철학적으로 다루지 않고, 기성의 철학 이론으로 삶을 채우려고만 한다. 그래서 자기 삶을 철학적으로 살려는 도전보다는 천년이 두 번 이상이나 지난 지금도 공자나 노자처럼 살려 하고, 플라톤이나 니체를 살려내려 한다. 자기도 버리고, 자신의 역사도 버린다. 자기를 플라톤화, 맑스화, 공자화, 노자화 하려 하지, 플라톤 등을 자기화 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을 철학화 하지 못하고, 정해진 철학을 이념화해서 그것으로 자신의 삶을 지배하고 평가한다. 쉽게 이념이나 신념에 빠진다. 스스로 문제를 발견해서 해결하려는 야성을 잃고, 남이 정해준 정답을 찾아 얌전히 실현하려고만 한다. 결국 세련되고 정밀한 이론이 그들의 구세주다. 아직 거칠고 정리 안 된 자신의 현실은 깎여야 할 미숙한 어떤 것일 뿐이다. 세련되고 정밀한 이론은 그들을 매혹시킨다. 그래서 절절한 마음으로 기꺼이 그것의 충실한 종이 된다. 종은 지켜야 할 것이 많다. 지켜야 할 그것은 자신이 만들지도 않았다. 자신이 만들지 않은 기준으로 자신의 삶을 인도하는 모순적 상황은 내면의 불균형을 가져온다. 그 분열적 상황을 이겨내는 방법이 있다. 선명성과 불타협의 철저함을 발휘하여 마치 주인인 것처럼 자기기만을 해낸다. 목에 힘줄을 세우고, 눈에 핏발을 감추지 않으며, 팔뚝을 휘젓고 목소리를 높인다. 타협이 없는 선명성을 내세워 진실한 주체로 드러나려 하지만, 아무리해도 자신이 얼마나 충성스런 종인가 만을 드러낼 뿐이다. 이는 눈 어두운 사람들끼리는 알 수 없다. 눈 밝은 사람은 안다. 기준을 신념처럼 가진 사람은 이 세상을 모두 참과 거짓이나 선과 악으로 따지기 좋아한다. 그런 사람에게는 세상이 기준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가 중요하다. 기준에 맞으면 선이고 맞지 않으면 악이다. 기준에 맞으면 참이고, 맞지 않으면 거짓이다. 기준을 만들거나 기준을 지키는 일을 당연시 하고 중요하게 다룬다. 무엇이나 기준을 만들어 윤리적 접근을 하려 한다. 윤리적 행위에 익숙해지면, 열심히 규제를 만든다. 세계가 새로운 유형의 산업으로 재편되는 데에도 온 나라가 규제로 가득차서 움직이질 못한다. 새로운 세계를 구시대의 규제로 다루고 있다. 바보짓을 하면서도 워낙 확신에 차 있기 때문에 윤리적 부담은 전혀 없다. 4차 산업혁명을 다루는 일에서도 비중 있게 다뤄지는 것 가운데 하나가 윤리 문제다. 인공지능 때문에 야기되는 직업의 상실 문제도 윤리 문제 가운데 하나다. 인공지능을 윤리적으로 어떻게 대할 것인가, 인공 지능을 가진 로봇에 대해서 인간은 어떤 윤리적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하는 점들이다. 선악의 문제를 다뤄야 진실하게 사는 느낌을 갖도록 훈련받았기 때문에, 당장은 해당 사건의 주도권도 갖고 있지 못하면서 윤리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자기 착각이거나 자기 착시다. 우리는 아직 인공지능의 주도권을 갖지 못했다. 로봇도 그렇다. 그것들을 윤리적으로 다룰 수준에 아직 도달해 있지 않다. 구체적인 현장이 펼쳐지고 나서 윤리가 있다. 주도권을 가진 선진국에서는 다 그렇다. 거친 야성이 먼저 있고 나서야 순하고 질서 잡힌 행위가 요청된다. 드론 시장을 윤리(규제)가 필요할 정도로 키워놓지도 못한 상황에서 그것을 윤리적(규제적)으로 다루다가 드론 시장에서 주도권을 상실했다. 윤리적 주도권보다 시장의 주도권이 더 세고 중요하다. 윤리는 시장 성숙 다음의 일이다. 이 말이 나쁜 말로 들리면, 전략적이거나 선도적인 높이를 아직 모르거나 거기에 서본 경험이 없어서다. 선한 규제가 악을 생산한다. 이런 맥락에서 노자도 지켜야 할 것이 적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늘의 그물은 구멍이 촘촘하지 못해 엉성하지만 오히려 빠져나가지 못한다.”(天網恢恢 疏而不漏) 적은 규제가 오히려 제대로 된 효과를 낸다는 말이다. 『장자』 「변무」편에 나오는 대목 하나. “곡선이나 동그라미를 그리는 그림쇠, 직선을 긋는 먹줄, 네모꼴을 만드는 곱자를 들이대면 본래의 활동성이 손상된다. 밧줄이나 갖풀이나 옻칠로 세상을 꼭 묶거나 고정시키면 세상이 제대로 전개되지 못한다.” 여기서 그림쇠, 먹줄, 곱자, 밧줄, 갖풀, 옻칠은 모두 윤리적 신념이나 규제들이다.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신념을 세상에 선제적으로 부가하는 한, 세상의 효율성은 극도로 약화된다는 뜻이다.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잣대를 먼저 가져다 대면 세상 전개가 위축된다. 게다가 윤리 관념이라는 것이 상대에 따라 유동적으로 쓰인다. 칼을 의사가 잡으면 생명을 살리고 폭력배가 잡으면 생명을 상하게 하는 예는 너무 단순하다. 윤리 도덕은 선과 악을 임시적으로 나눌 뿐이다. 여기서 정의가 저기서는 불의다.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행하는 선이 결국은 해가되기도 한다. 어디선가 강의를 하고 나니 주최자가 청중들에게 내 강의 내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선진과 창의와 독립과 모험심 등등을 연결하는 강의를 했다. 주최자는 선진이라는 말이 거슬린듯했다.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선진은 경제적이고 군사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의미에서의 선진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꼭 선진국이 될 필요가 있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후진국이 차라리 더 가치 있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경제와 군사와 윤리와 도덕은 한 몸이다. 윤리적 기준이나 이념을 가지고 윤리 영역 밖에 자리 한 것으로 보이는 것들을 적대적으로 대하는 한, 스스로 세상을 좁히는 결과를 가져온다. 『장자』 「거협」편에는 이런 얘기도 나온다. “도둑질에도 윤리가 있다. 방안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알아맞히면 성스럽고, 앞서서 선두에 서서 침입하면 용기가 있다하고, 나올 때 맨 나중에 나오면 정의롭다 하고, 도둑질에 성공할지 못할지를 아는 것을 지혜롭다 하며, 분배를 공평하게 하면 인간답다고 한다.” 윤리 도덕을 매개로 해서 성인과 도둑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교차될 뿐이다. 선과 악도 분리되지 않고 교차된다. 장자의 얘기는 다음처럼 이어진다. “성인이 생기면 큰 도둑도 따라 생긴다. ... 성인이 죽으면 큰 도둑이 일어나지 못하게 되고, 천하가 평화롭고 무사하다. 성인이 죽지 않으면 큰 도둑이 없어지지 않는다. 비록 성인을 존중하고 천하를 다스린다 해도 결국 그것은 도둑의 우두머리인 도척 같은 인간을 존중하고 이롭게 하는 꼴이다.” 성인은 윤리 도덕의 집행자고 사회를 효율적으로 만드는 주인공이다. 도척은 윤리 도덕의 파괴자로서 사회를 비효율로 몰고 가는 주범이다. 이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장자는 좀 달리 말한다. 윤리 도덕의 내용을 담고 있는 규제가 많고 조밀할수록 선한 기풍과 효율이 커질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정반대다. 세상에 대하여 윤리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습관이 되면 넓디넓은 이 세상에서 얼마나 좁고 비효율적으로 헤매게 되는지를 알아야 한다. 윤리 강령이나 윤리적 접근 습관에 깊이 빠질 일이 아니다. 윤리도 스스로의 힘으로 지배해야 한다. 윤리를 지배할 정도로 함량을 키우는 일이 시급하다. 당연히 짐승처럼 과감하게 덤비는 것이 윤리적 인간이 되는 것보다 훨씬 실속 있다. 짐승처럼 덤비면 짐승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큰 인간이 된다. 너무 인간적이면 자잘한 인간으로 남는다. 과거에 잡히지 않고 미래를 활짝 열기 위해 마음속에 야수를 한 마리 키우자. /건명원 원장·섬진강 인문학교 교장·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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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2018.05.28 20:13

항공 독과점 행태 경종 울려 대기업 독과점 개혁도 관심

▲ 취임 100일을 앞둔 중소기업진흥공단 이상직 이사장이 이달초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전북의 경제구조 재편에 대해 말하고 있다. 조현욱 기자 이스타항공을 설립하고, 19대 국회의원을 지낸 이상직 중소기업진흥공단 이사장이 취임 100일을 앞두고 있다. 이상직 이사장은 최근 전주와 군산을 찾아 도내 중소기업의 열악한 현실을 피부로 느끼고 대책을 세우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전북의 경제구조 재편과 중소기업 시장의 반전을 꾀하기 위해서는 공항 유치로 하늘 길을 열어 경제구조를 재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터뷰는 이달 초 중소기업진흥공단 전북지역본부에서 진행됐다. -현재 전북은 중소기업들의 사정은 물론 경제전반에 걸쳐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기업 현장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까. 저는 문제해결의 실마리는 항상 현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전북지역 특히 군산 중소기업들의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이들이 얼마나 절박한지는 현장을 꼭 찾아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봐야 알 수 있죠. 일단 군산지역 중소기업들은 군산조선소와 한국지엠 사태의 피해를 보상해줄 자금지원이 시급하다고 촉구했습니다. -국회의원 시절과는 다른 문제해결 방식이 요구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국회의원은 법안발의로 전반적으로 국민에게 필요한 제도를 만들고, 예산을 따내 지역구의 경제를 책임져야 한다면, 중소기업진흥공단 이사장은 더 전문적인 분야에서 국내 중소기업들의 성장을 도모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중소기업진흥공단은 주로 자금지원 등을 통해 어려운 중소기업들의 숨통을 터주는 기관입니다. 자금이 필요한 곳에 제대로 분배되고 실제 기업들의 니즈에 맞춘 시스템 개발이 시급하다고 보고 업무를 추진 중입니다. -이사장님은 줄곧 우리지역 중소기업과 경제가 살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늘 길을 열어야 한다고 주창하고 계시는데. 세계경제 역사를 살펴보면 이는 당연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경제라는 것은 길을 따라 발전하기 때문입니다. 고대에는 육로를 통해 경제활동이 이뤄졌습니다. 후에는 바다를 지배한 자가 경제를 지배한 대항해시대가 열렸지요. 그 다음은 철도입니다. 영국을 비롯한 서유럽 국가들이 아직까지도 경제선진국이 될 수 있었던 비결도 철길에 있다고 봅니다.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하늘 길 뿐입니다. 길을 단순히 사람이 오가는 것이 아닌 물건이 오가는 통로입니다. 자동차, 열차, 비행기는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닙니다. 경제를 창출하는 길을 빠르게 열어주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입니다.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하늘 길을 열지 못하는 국가와 지역은 결국 도태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때문에 제가 새만금 국제공항 유치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제구조 개편은 구호로만 이뤄질 수 없습니다. -일각에서는 청주공항, 무안공항도 있는 데 전북에까지 국제공항이 들어서면 국가예산 낭비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한 주장이 전북의 하늘 길을 열 수 있는 골든타임을 놓치게 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다 시피 공항은 그 자체로 수요를 창출하고 물류를 통하게 하며, 기업을 유치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다른 선진국을 가보면 전북보다 인구가 적은 도시에도 공항이 있습니다. 공항의 특성에 대해 더 정확한 분석과 파악이 필요합니다. 청주는 바다를 끼고 있지 않은 내륙지역임에도 공항이 들어서자 경제가 살아나고 있습니다. 전에 청주공항이 들어선다고 했을 때 얼마나 많은 회의적 시각이 있었습니까. 청주공항의 경우 첫 개항 당시 연간 이용객이 37만 명에 불과했어요. 이후 중국 노선을 정기 취항하면서 최근 연간 이용객이 270만 명을 돌파했습니다. 반면 국제공항이 없는 전북은 무역수지 등 각종 경제 지표에서 다른 시도에 크게 밀리고 있는 현실이죠. 실제 청주의 지역내 총생산은 전주의 두 배를 상회합니다. 이런 지역 불균형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전북권 공항이 꼭 필요합니다. 새만금 신공항은 지역 발전을 넘어 국내 항공산업의 도약을 위한 전초기지로서 성공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 입니까. 일단 전 세계 주요공항은 바다를 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변국가와의 인접성도 좋지요. 새만금과 전북은 바다를 끼고 중국과도 가까워 지정학적으로 이 두 가지를 모두 충족하고 있습니다. 새만금 신공항은 미래 전북의 가치와 지역 경제를 살릴 수 있는 마중물이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새만금신공항을 중심으로 전북을 공항금융문화도시로 육성해 소외와 낙후의 역사를 청산해야 하며 관련 중소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해 새 전기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변화를 꾀하기 어렵습니다. 대 혁신의 계기가 필요해요. -공항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직접적인 기업경제 인프라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국제공항이 완성되면 항만, 철도, 도로에 공항까지 갖춘 경제권이 완성됩니다. 일단은 항공기 MRO산업이 활성화 될 것입니다. 국제공항시대 도래에 발맞춰 항공 MRO 및 보잉 R&D센터, 조종사 훈련센터 등을 유치하고 국내외 선진 공항도시 사례를 벤치마킹해 관광, 물류, 문화, 쇼핑, 레저 등을 기반으로 하는 공항도시를 설계한다면 경제구조 재편도 꿈이 아닙니다. 제 연고지라서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전북을 잘 만 활용한다면 경제적으로 큰 가치가 있는 곳이며, 많은 중소벤처 기업들이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의 땅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도민들과 지역 중소기업 관계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호주도 GM공장 협상에 실패했지만, 호주 정부는 이 부지를 차세대 미래차 공장으로 활용해 위기를 기회로 바꿨습니다. 전북도 자율차, 전기차 이어 공항유치와 금융도시 지정으로 새롭게 바뀔 수 있습니다. 이럴 경우 관련 사업의 핵심인 배터리와 부품을 생산하는 기업이 올 수 있도록 앞장서겠습니다. 세계 길을 기반으로 한 소통의 역사입니다. 전북 중소기업과 경제 전반에 길을 열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김윤정 기자이상직 중소기업진흥공단 이사장은 2008년 국내 저비용 항공사(LCC) 이스타항공을 창업해 항공 독과점을 깼다는 평가를 받는다. 19대 국회의원을 재임시절에는 대기업의 중소기업에 대한 갑질 문제를 심도 있게 다뤄 을의 눈물을 닦아주는데 노력했다. 현장소통에 능하며, 강력한 추진력이 최대강점으로 꼽힌다.

  • 기획
  • 김윤정
  • 2018.05.27 22:03

[여행] 올해는 아무래도 연둣빛, 그래도 내년엔 '노란 맛' 볼 수 있겠지

분명 거의 다 왔는데, 이쯤이면 노란 물결이 보일 때가 됐는데, 차창 밖으로 보이는 건 연둣빛이었다. 긴가민가, 자갈을 밟아대며 다가가자 그제야 마치 에어브러시로 멀찍이서 뿌려놓은 듯한 노란 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진가 한 무리가 그 점묘화 속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진안군장애인종합복지관 사진반 일행이었다. 작년에 왔을 때는 예뻤는데, 꽃들이 활짝 안 피고, 노랗지도 않고 작년엔 예뻤거든요. 전정준 씨(72)의 말에는 실망이 묻어났다. 김순자 씨(78)는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했다. 가서 걍 겁나게 찍어갖고요 하면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진안군 상전면 금지배넘실마을은 지난 2016년부터 해바라기로, 지난해부터는 또 유채로 유명해졌다. 용담댐이 건설되면서 생긴 호숫가 땅을 이춘식 축제위원장(60)과 이 마을 사람들이 개간해 해바라기유채밭을 만들었다. 그 넓이가 14.2ha에 달한다. 이렇게 봄에는 유채, 가을엔 해바라기가 노란 물결을 이루며 여행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이곳. 그러나 유채밭 하면 연상되는 압도적인 노란 맛은 올해는 찾아보기 힘들다. 냉해 때문이란다. 일군의 사진가들이 떠나자, 유채밭은 한산해졌다. 전주에서 온 강혜리 씨(48) 부부와 취재진 정도가 남았다. 작년엔 좋았는데, 올해는 실망이 컸어요. 관리가 잘 안 된 것처럼 보이네요. 여긴 전주에서 바람 쐬러 오기도 좋고, 잘만 하면 괜찮을 것 같은데. 아쉽네요. 그래도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나태주의 풀꽃에서)고 했던가. 노란 점들을 향해 뽀짝 다가가니, 멀찍이서 대충 본 것과는 또 다르다. 옳지, 옳지, 보이, 하. 꽃마차 한 대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곳곳에서 흰 바탕에 까만 글씨가 적힌 팻말들이 말을 건다. 나는 참 예쁘다거나,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이라거나. 꽃을 향한 말도 보인다. 노랑이들아 올해도 예쁘게 피어나주렴. 곳곳에 노랑이들을 탐하는 나비와 벌들이 날았다. 유채 이파리들이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것을 보니, 이 밭에서 태어나 자란 녀석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상수원인 용담호에 닿아 있는 곳이니 농약이나 제초제는 전혀 쓸 수 없어서 가능한 일이다. 이 꽃밭의 가장 큰 포인트는 바로 뒤쪽의 용담호다. 파란 물과 그 파란 물을 감싸는 초록 산줄기가 노란 꽃과 어우러져 특별한 분위기를 선사한다. 진안군장애인종합복지관 사진반을 담당하는 강양선 씨(48)도 저 용담호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좋다고 귀띔해 줬는데, 역시 사람 생각은 다 비슷한 것인지, 꽃이 피면 예쁠 것 같은데 너무 안 피었네라며 실망한 표정을 짓던 여행객 한모 씨(50)도 저 위에 저수진가 호순가, 되게 괜찮네라고 말했다. 배넘실마을의 유채꽃 축제는 올해가 두 번째다. 지난해 축제 때 5만여 명이 방문하는 성과를 거둔 뒤, 올해는 겨울과 봄의 한파로 유채가 제대로 자라지 못하면서 지난해에 한참 못 미치는 성적표를 받았다. 1000원씩 받을 예정이던 입장료도 폐지했지만, 이춘식 위원장의 계산으로는 방문객이 1만 명도 채 되지 않는다고. 그래도 이 위원장은 자신감을 내비쳤다. 이제 매뉴얼을 정립하는 단계죠. 실패의 과정은 일종의 섭리라고 보고. 내년에는 다를 겁니다. 노하우가 쌓였거든요. 배넘실마을의 올해 유채꽃 축제는 26일로 막을 내린다. 축제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은 유채 씨를 받고 땅을 갈아엎을 예정이다. 그리고 다시 씨앗을 심을 것이다. 내년에는 다시 노란빛이 가득한 유채밭을 볼 수 있을까? 유채의 꽃말은 '쾌활'이라고 한다.

  • 기획
  • 권혁일
  • 2018.05.25 13:28

[전라도 정도 1000년, 창조와 대안의 땅 '전라북도'] 완전한 땅, 후삼국 통일수도 전주 꾸민 견훤왕 - 신앙으로 왕도 보호하고 책으로 지식문화 수도 완성

(견훤왕은) 삼한을 경략하고, 백제의 옛 나라를 부흥하였다. 도탄을 물리쳐내시니 백성들이 편안함을 찾아 모여드는 것이 바람처럼 일어나 원근의 백성이 말이 달리는 것처럼 모였다. /삼국사기견훤전 △견훤왕, 후삼국 통일 수도 전주를 만들다 후백제 견훤왕은 892년 무진주(현재의 광주)에서 거병하고 독자적인 정치행보를 유지하다가 900년 전주로 도읍하여 후백제의 공식적인 출발을 진행하였다. 이 후 936년 신검왕대에 후백제가 망하기까지 전주는 37년동안 후백제의 수도로서 기능하였다. 이 기간은 한 국가의 도성구성과 관련하여서는 충분한 시간으로서 전주의 도시구성과 관련하여 중요한 기간이 되었다. 특히, 927년 신라 경주를 공격하고 경순왕을 옹립하고 특히, 공산에서 고려군을 대패시킨 견훤은 후삼국 통일을 목전에 둔 상황이었다. 이때부터 견훤은 전주를 통일수도에 걸 맞는 체계를 갖추게 하였으며 화려하고 사치스럽다는 당시 평가가 들 정도로 전주를 꾸몄다. 특히, 신라에서 데려온 여러 분야의 뛰어난 기술자(백공지교자百工之巧者)를 활용한 전주 도성건축이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종래 후백제 왕도 전주의 공간에 대해서는 다양한 공간설정과 가능성이 검토되었다. 가장 최근 전주박물관은 전주를 둘러싼 고토성의 흔적과 현재 구도심을 중심으로 한 도성공간들에 대한 기본안을 발굴과 연구를 통해 확인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국가적 목표와 방향이 후삼국 통일이었고 그 지향점이 고구려 옛 영토까지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는 점이다. 이 같은 목표 구현을 위해 견훤왕은 종교 신앙적 보호체계를 구상하고 이를 실천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유교의 신령한 네 마리 동물 사령(四靈), 전주를 지키다 견훤왕이 후백제 왕도 전주를 지키기 위한 종교신앙적 흔적으로 주목되는 것이 유교의 경전 예기(禮記)에 나오는 네 마리 신령스런 동물인 사령(四靈) 관념이다. 이는 인간을 먹이는 가축의 원형인 기린용거북봉황으로 점차 도성수호의 신령한 상징으로 자리잡았고 도교와 연결되어 도성 방위의 사신(四神)신앙으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후백제 왕도 전주를 둘러싼 지명에 이들 명칭이 남아있어 주목된다. 즉, 전주를 둘러싼 산줄기에 부여된 명칭인 기린봉(麒麟峯)의 기린, 용머리고개의 용, 거북바위의 거북, 옛 지도에 표현된 봉황암(鳳凰巖)의 봉황이 그대로 전주에 나타나고 있다. 한편, 이들 대응내용을 살펴보면 기린봉과 봉황암이 서로 인접하여 산림에 위치하는 형세이고 용과 거북은 전주천과 연결되어 연못에 깃들여 사는 형세와 연결되는 지형적 형세를 보여주고 있다. 이 같은 사령은 상서로운 동물로서 인간을 먹이는 존재이자 어진 정치를 상징하고 태평성대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이같은 존재가 도시수호 및 구성에 존재한다는 것은 국가통치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이념체계였다. 그런데 이같은 표현은 전주에 적용될 수 있는 시점은 후백제 왕도이던 시기에 가장 가능성이 높다. 결국 견훤왕은 사령신앙에 입각한 관념을 전주의 공간에 대응시켜 후백제 전주를 명실상부한 완벽하고 온전한 최고의 땅으로서 만들려고 하였다. △불교의 사고사찰 배치로 전주를 지키다 전주에는 독특한 동서남북 사방을 지키는 사고사찰이 존재하고 있다. 먼저 남고사는 창건 당시 남고연국사(南高燕國寺)라 불렸는데 여기서 연국이란 나라를 편안하게 한다는 뜻의 말로 산성에 있는 사찰 이름으로 전주를 지키는 남고산성(南高山城)에 자리하고 있다. 특히, 문헌비고(文獻備考)에 따르면, 남고산성은 901년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쌓았으며 견훤산성고덕산성이라고도 한다는 점이 주목된다. 또 동고사는 승암산에 위치하고 있는 데 사적기에 의하면 신라말 경순왕의 아들이 출가한 사실이 전해져 후백제 견훤과의 관련이 추정된다. 한편, 서고사는 동국여지승람에 등재되어 있는 사찰로 만성동 황방산(黃尨山)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또 북고사란 명칭은 존재하지 않지만 진북동 어은터널과 서신교 사이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진북사(鎭北寺)라는 사찰은 1790년대 경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호남읍지의 전주부에 등장하고 있는데 명칭이 북쪽을 지킨다는 뜻으로 북고사와 같은 개념이다. 이같은 전주를 지키는 4개 사찰의 개념은 전주를 불교적 수호관념을 투영해 보호하려한 불교적 신앙을 계승 발전시킨 견훤왕의 의지일 가능성을 보여준다. △후삼국 최대 서적을 보유한 전주, 문화수도를 보여주다 후백제왕 견훤은 수도 전주를 최대의 지식문화수도로 만든 문화군주였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덕무가 지은 청장관전서에는 전주가 후삼국 시기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책을 보유한 지역이었음을 서적이 당한 참변에 대한 기록을 통해 알려주고 있다. 즉, 그는 우리나라에 매우 많은 서적이 있었는 데 이들 3천년 역사중 서적이 사라지게 된 역사상 2대 참화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당(唐) 나라 장수 이적(李勣)이 고구려를 평정하고는 우리나라의 문물이 중국에 뒤지지 않는 것을 시기하여 동방의 모든 서적을 평양에다 모아놓고 모두 불태워버렸으며, 신라 말엽에 견훤이 완산(完山) (지금의 전주)을 점령하고는 삼국(三國)의 모든 서적을 실어다 놓았었는데, 그가 패망하게 되자 모두 불타 재가 되었으니, 이것이 3천년 동안 두 번의 큰 액(厄)이었다. 이덕무, 청장관전서 ▲ 조법종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사료에 나타난 서적의 참화 첫 번째 사건은 고구려의 책이 당나라 장수 이적에 의해 불탄 사건이고 두 번째 사건은 견훤이 후백제 왕도 전주에 모은 책이 당한 참화를 설명한 것이다. 비록 서적이 사라진 안타까운 사건이지만 역설적으로 이 사실은 전주가 우리역사에서 서적의 도시임을 보여주고 있다. 즉, 후백제 견훤왕이 후삼국통일 수도를 꿈꾸며 전주를 화려하게 조성하고 이에 부응하는 학문과 문화도시로서의 품격에 걸맞는 서적을 모아 당대 최대의 도서관을 만들어 기록을 보존한 전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같이 후백제 왕도 전주는 유교의 사령 즉, 기린, 거북, 용, 봉황이 먹이고 지켜주는 도시이자 불교의 사방수호 사찰인 남고사,동고사,서고사,진북사(북고사)가 수호하는 공간이었다. 또한, 견훤왕은 삼국의 모든 책을 전주로 모아 우리나라 최대의 지식문화 수도로서의 위상을 만들어낸 문화군주였다. 또한 당대 최고의 기술자들을 모아 후삼국시기 최고의적 공간구성을 이루어 통일수도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제 후백제 견훤왕의 의지와 포부가 우리시대로 계승되어 새로운 아시아문화심장, 기록과 지식문화의 수도로서 전주가 거듭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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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 2018.05.24 20:06

[문화&공감 2018 시민기자가 뛴다] 완주군 ‘청년키움식당’ - "우리도 식당으로 돈 벌 수 있어요"…푸른 꿈들의 '맛있는 도전'

맛있게! 건강하게! 그녀의 음식철학만큼이나 맛있고 건강한 목소리를 지닌 박수연 씨는 한창 양배추를 다듬고 있는 중이다. 초여름 연초록 나무향이 수연 씨가 운영하고 있는 식당 일면식으로 들어와 손님처럼 앉아 있다. 덩달아 앉아서 한우 육개장칼국수를 시켜놓고 있으려니, 주방 안으로 하루 장사 준비에 바쁜 수연 씨가 들여다보인다. 움직일 때마다 초록초록 싱그러운 소리가 따른다. 수돗물 흐르는 소리도 초록초록, 그릇 부딪는 소리도 초록초록. 우석대학교 외식산업조리학과 박사과정에 있는 32세의 수연 씨. 같은 학교 친구들 4명과 팀을 이루어 일면식 창업을 한 건 지난달 4월 23일이다. 겨우 보름 남짓 해온 장사지만 여느 식당 주인 못지않은 자신감이 배어 있다. 겨울부터 메뉴 개발에 힘써온 노력과 열정 때문이다. 그리고 도전이 두렵지 않은 젊음이 있어서다. 농림축산식품부 공모사업에 완주군이 선정되어 운영하게 되는 청년키움식당. 말 그대로 청년들의 꿈을 견인하는 곳이다. 외식창업 아이디어를 가진 청년들이 직접 창업 기획을 하고 매장을 운영해봄으로 해서 실전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지원이 따른다. 외식업설비가 갖춰진 사업장에서 자기부담금 고민 없이 역량을 키울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탐나고 매력적인 일인가. 마음껏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외식분야 스타트업의 성장을 위한 공간인 것이다. 완주군은 그 동안 외식창업인큐베이팅 추진단을 운영해 총 10개 팀의 참가팀을 모집했다. 그 중 수연 씨 외 4명으로 구성된 일면식 팀이 첫 번째 참가팀이다. 인큐베이팅 추진단은 메뉴개발과 경영, 회계, 구매 등 외식창업에 필요한 전문가를 운영위원과 자문위원으로 위촉해 참가팀들에게 집합교육은 물론 개별 컨설팅을 진행해왔다. 그리고 지역 내 우수 로컬푸드를 활용하여 청년들의 첫 외식창업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청년키움식당은 인큐베이팅 사업이에요. 10개 팀 총 38명의 청년들이 1년 간 각 기간별로 운영하도록 하고 있죠. 기간이 두 달밖에 안 되어 식당 운영을 하기에는 너무 짧다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이곳은 단순한 식당 개념은 아니에요. 자기 적성을 찾아 나갈 수 있는 곳이라고 해야 할까요? 직접 운영을 해봄으로 해서 자신이 외식업 창업에 자질이 있는가, 이 일이 생각했던 것처럼 자신과 맞는가. 자기점검이 되기도 하거든요. 인큐베이팅 추진단 차경옥 팀장은 말한다. 덕분에 수현 씨는 자금에 쪼들리지 않고 여유 있는 마음으로 식당을 운영할 수 있어 재미가 있다. 학교 수업 마치고 와서 팀원들과 돌아가면서 운영하는 식당 일이 힘들기는커녕 아주 신이 났다. 아무래도 수연 씨에게는 외식업 운영이 적성에 맞는가보다. 그래서일까. 시켜놓은 한우 육개장칼국수 면이 불었다고 다시 내오겠다며 들고나가는 수연 씨 발뒤축에서도 연신 초록초록 소리가 난다. 소심한 마음을 극복하고 용기를 낼 때, 편안함을 추구하려는 마음을 극복하고 모험을 주저하지 않을 때 나는 소리. 마음의 상태이며, 의지의 결과인 젊음의 소리이다. 자기부담금이 없기 때문에 매출 고민은 안 해도 돼요. 그보다는 어떻게 하면 더 맛있고 건강한 음식을 해낼 수 있을까를 우선으로 생각하게 되지요. 그러니 생각이 더욱 발전할 수밖에 없고, 더 높은 차원의 꿈을 키울 수 있어 좋은 것 같아요. 저는 나중에 일면식을 브랜드화 하고 싶거든요. 우리도 돈 벌 수 있어요. 젊은 사람이 창업을 하면 경험이 없어 미숙할 거라고 보는 것이 사회적 관례이다. 수연 씨는 창업 청년을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선이 더 너그러워졌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어린 나이에 창업을 하였다며 되레 실력 있게 보는 이들도 많이 생겼다. 사무실이나 관공서가 많은 주변 여건으로 인해 점심 손님이 많다더니,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이 금세 왁자지껄해진 걸 보면 의심할 여지가 없다. 수연 씨는 직접 개발한 두부 까르보나라, 홍시 간장볶음면, 한우 육개장칼국수, 매콤 닭고기볶음면을 차례로 야무지게도 내어간다. 메뉴들이 모두 지역 내 로컬푸드를 활용하여 신선하고 이색적이다. 두부는 소양, 닭고기는 삼례읍, 홍시는 동상면 특산품. 어쩌면 청년키움식당을 운영하는 청년들과 함께 지역도 함께 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함께 고민하고 함께 넓어지는 것은 아닐까. 젊음이란 어떤 일정 기간을 말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일정 기간을 살았다고 해서 늙은 것도 아닐 것이다. 이상이 없을 때, 존재의 믿음과 염원이 없을 때 생의 저 밑바닥에서부터 영혼의 주름이 생기는 것일 테다. 수연 씨의 생각에도 식당을 맡는 두 달 기간이 경험을 쌓기에는 턱없이 짧다. 하지만 이 두 달간의 경험을 토대로 장차 삼례읍에서 본격적으로 창업을 해볼 생각이다. 한 달에 한 번 메뉴를 바꾸는 먼슬리(monthly) 메뉴 도 고안하고 있는 중이다. 여름에는 배국수를 만들고, 가을과 겨울에는 또 다른 계절음식을 내놓아 찾는 손님들의 건강까지 책임지고 싶다고. 물론 재료를 순수 로컬푸드로만 활용하자니 음식의 단가가 적은 편은 아니다. 지금까지 장사를 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느냐는 질문에 수연 씨는 서슴없이 경험담 하나를 꺼내놓는다. 구두 형식의 셀프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일면식에, 어느 날 연세가 있는 손님이 오셔서는 글쎄, 미국 스타일 한국에서 안 먹혀. 하더란다. 음식은 맛있네. 결국 남은 국물까지 다 먹고 가더라는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한우 육개장칼국수를 먹어보니, 조미료 없이 신선한 재료를 사용해서인지 깔끔하고 가뜬한 느낌이 든다. ▲ 김형미 전북작가회의 사무처장 팀원이나 손님을 가족같이, 뭐든 아끼지 않고 내어주어야 한다는 경영마인드가 확실한 수연 씨다. 각양각색의 손님들이 보이는 즉각적 반응을 살핌으로 해서 음식 연구를 더 깊이 해보고자 하는 의욕을 얻는다고 한다. 과연 청년키움식당을 수료하고 나면 메뉴 개선이나 마케팅 등 지원 프로그램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볼 만하다. 문화 행사 연계 시스템을 갖추어 청년들이 만든 음식과 문화가 함께 어우러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도 꿈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인큐베이팅 추진단은 이렇게 당차고 도전정신이 있는 청년들을 위해 창업대출 지원을 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할 계획이다. 우리는 믿는 만큼, 자기 확신에 찬만큼, 희망을 가지는 것만큼 젊을 수 있다. 의심하고, 두려워하고, 절망하면 열 살 먹은 아이도 여든 살의 얼굴이 되어 있겠지. 완주군은 청년키움식당에서 이 청년들이 움직이고 있는 한 여름에도 초록초록, 여름 너머 가을에도 겨울에도 초록초록 잎 싱그러운 소리가 날 모양이다. 젊음을 품어 안기로 했으니, 갈수록 젊어지는 건 당연한 일일 터.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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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23 19:49

[참여&소통 2018 시민기자가 뛴다] 시민이 만들어가는 '우리동네 선거방송' - "우리 동네 진짜 일꾼 찾기…토론회 보고 옥석 가려요"

613 지방선거가 다가오고 있지만 누가 후보자로 나왔는지, 어떤 공약을 제시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시민이 얼마나 될까? 또 시민들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의제를 정확히 알고, 이를 자신의 정책이나 공약에 반영하고 있는 후보자들은 얼마나 될까? 시민들의 삶과 밀착되어 있는 기초의원들의 경우는 더 알기 어렵다. 그저 선거사무소 앞에 펼쳐진 현수막과 출퇴근길에 사거리에 서서 인사하는 모습만 볼 뿐이다. 후보자들 역시 지역주민의 삶의 현장의 내용을 담아내려는 노력들이 부족하다. 정당의 공천만 받으면 선거는 끝났다는 의식이 팽배하다. 이러한 선거현실을 바꾸려는 시도가 있다. 바로 시민들이 만드는 우리동네 선거방송이다. 우리동네 선거방송은 이번 613 지방선거에서 시민이 주체적 역할을 하는 풀뿌리 민주주의 선거방송 모델을 만들고자 하는 실험이다. 특히 그동안 선거과정에서 소홀히 다뤄졌던 기초의원 및 광역의원 선거에 대한 유권자들의 관심과 참여를 높이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우리동네 선거방송은 크게 세 영역의 방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하나는 기초 및 광역의원 소개와 공약검증 프로그램이다. 이를 위해 평화동과 송천동마을신문과 함께 두 지역의 기초 및 광역의원 후보자 기본 프로필과 인터뷰 영상, 해당 선거구 현안에 대한 시민들의 의견을 담은 찾아가는 시민마이크 영상을 제작하고 SNS와 케이블방송을 통해 방영했다. 두 번째로 유권자 의제 토론회도 열었다. 지난 5월 16일 지역 케이블 방송에서 열린 토론회에서는 지방선거를 관통하는 키워드를 분석하고, 분야별 유권자 의제를 제안했다. 지방선거 키워드로는 지방선거와 지방분권, 선거구도, 청년 등 유권자 참여, 교육감선거 등 4개 키워드를 선정해 분석하고, 지방선거 의제는 지역/자치/문화, 환경/복지/교육, 여성/언론, 생활 분야로 나눠 발굴된 유권자의제를 제안하고 설명했다. 특히 생활분야 유권자 의제는 시민들의 삶의 현장에 직접 찾아가 영상으로 담아냈다. 토론회 촬영과 녹화는 우리동네 선거방송에 참여하고 있는 전주시민미디어센터와 티브로드 전주방송이 함께 했다. 토론회 패널로 참여한 이상민 사무처장(익산참여연대)은 후보자가 많고, 잘 알지 모르는 지방선거 환경에서 검증되고 제대로 된 인물들이 의회에 진출할 수 있도록 이런 방송이 활성화 되어야 한다고 이번 우리동네 선거방송의 중요성을 평가했다. 유권자 의제 토론회는 티브로드 전주방송(채널 1)과 페이스북 페이지(우리동네 선거방송)를 통해 방영된다. 티브로드 전주방송의 경우 23일 오후 2시와 자정(12시), 24일과 25일은 각각 오후 10시에 시청할 수 있다. 우리동네 선거방송은 또 기초의원과 광역의원 후보자 토론회를 준비하고 있다. 이는 도내에서는 처음으로 진행되는 것으로 광역의원(전주 제8선거구, 송천 12동)과 기초의원(전주 카선거구, 우아12동/호성동)을 대상으로 하는 후보자 초청 토론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후보자 토론회는 선거방송 기획단에서 제시하는 공통질문과 후보자 상호토론, 그리고 시민들로 부터 받은 유권자 질문 형식으로 진행된다. 유권자 질문은 공모를 통해 발굴하고 있다. 후보들에게 질문하고 싶은 시민들은 우리동네 선거방송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의견을 제시하면 된다. ▲ 최성은 전주시민미디어센터장 기초의원과 광역의원 후보자 토론회는 그간 미디어선거에서 배제되었던 지방의회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준비되었다. 또한 유권자들에겐 후보자들의 능력을 검증할 수 있는 기회를, 후보자들에겐 유권자들에게 자신의 정책과 자질을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후보자 토론회 역시 티브로드 전주방송(채널 1)과 SNS를 통해 방영될 예정이다. 광역의원 토론회는 티브로드 전주방송의 경우 5월 31일 오후 9시 30분, 6월 1일 오후 10시 30분에 방영된다. 기초의원 토론회는 6월 1일 오후 9시 30분, 6월 2일 10시 30분에 각각 방영될 예정이다. 이번 우리동네 선거방송의 기획을 맡고 있는 박민 소장(참여미디어연구소)은 그동안 지상파방송과 지역일간지를 중심으로 진행되던 후보자 초청토론회는 광역 및 기초단체장에 국한되어 왔다며 지방의원 후보자 토론회는 지방의원 후보자에 대한 검증과 함께 지방분권 개헌 등 지역자치권 확대에 걸맞은 책임 있는 지방의회 구성에서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또한 그동안 사각지대에 놓여있던 기초 및 광역의원에 대한 검증작업이 마을미디어들과 케이블방송에 의해 시도된다는 점은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이번 유권자 의제 토론회를 준비하고 직접 참여하신 소감은? 이번 6.13 전국동시지방선거는 시민들의 촛불로 세워진 정부에서 치르는 첫 번째 선거이다. 그래서 어떤 후보를 지역의 일꾼으로 뽑을 것인가가 매우 중요하다. 일 잘 하는 후보를 뽑으려면 출마 후보의 정책과 비전을 봐야 한다. 그런데 유권자들이 생각하는 정치인에 대한 상과 거리가 먼 후보가 당선이 된다. 그 위험성을 줄이고자 유권자가 직접 뽑은 지역의 문제들과 현안을 가지고 유권자 의제 토론회를 준비하게 되었다. 유권자가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지방자치가 실현된다고 본다. -지역주민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선거의제는 어떤 것들인가요? 송천동은 거주 인구가 7만이 넘는다. 에코시티까지 입주가 끝나면 8만이 가까울 것이다. 도시가 팽창하면서 개발 중심으로 가는 것에 대한 불만이 있고, 삶의 질이 지속적으로 떨어지는 환경에 불안감을 토로한다. 전주시에서 주장하는 생태도시와는 거리가 먼 아파트 밀집지역의 녹지공간 부족과 주차공간 부족으로 인한 상시 불법 주차와 사고 위험에 시달리고 있다. 또한 기반 시설이 없는 상태에서 지어지는 아파트도 송천동 주민들에겐 풀어야 할 숙제다. -후보자 초청 토론회를 준비 중에 있는데, 후보자들의 반응은 어떤지? 처음 섭외 단계에서부터 어려움이 있었다. 토론회는 후보자들이 자기 소신을 밝히고, 지역민에게 정책과 비전을 제시하는 자리이다. 유권자의 알권리를 위해 토론회가 반드시 필요하지만 기초, 광역의원 선거는 그동안 토론회가 많지 않았다. 후보자들이 거리에서 인사를 하는 선거 방식에 익숙해있다 보니 토론회 출연에 거부감이 있었다. 하지만 시민 촛불을 거치면서 유권자들의 의식이 높아진 만큼 후보자들도 그 점을 인식해 광역의원 토론회에 모두 참여하기로 했다. -지방선거에서 마을미디어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마을미디어는 지역민과 가장 밀접한 거리에서 기사를 쓰고 취재를 한다. 이번 지방 선거는 마을을 대표하는 일꾼을 뽑는 것이니 만큼 우리 지역에 출마하는 후보자들을 유권자에게 알리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그동안 묻지 마 선거를 해 온 유권자들에겐 후보자를 꼼꼼하게 살필 수 있게 하고, 정당을 보고 투표한 분들에겐 후보자들의 정책을 따져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마을신문이 후보자들의 신상과 정책을 담아내고, 토론회를 준비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마을미디어의 역할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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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22 19:21

최근 '지역의 시간' 출간한 황태규 우석대 교수 "패배의식·중앙 의존 버리고 전북 강점인'농생명'힘 실어야"

전북이 낙후를 면치 못하는 이유는? 전북에 대해 좋지 않은 통계가 나올 때마다 중앙정부의 홀대, 전북 출신 중앙관료 부재등의 이유가 고개를 든다. 지역 정치인들조차 자신들이 힘이 없는 이유를 남탓으로 돌린다. 물론 국가경제발전과정을 볼 때 전북이 다른 지역에 비해 소외된 측면이 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낙후의 원인을 찾아보려는 노력조차 부족했다. 황태규 우석대 교수는 지난달 이같은 문제의식을 토대로 『지역의 시간』이란 책을 냈다. 청와대균형발전비서관을 지냈던 경험을 토대로 전북의 낙후원인을 분석하고, 지역균형발전 실행 모델을 제시했다. 황 교수로부터 저서의 내용과 1년여 사이에 터진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 가동중단과 한국지엠 군산조선소 문제, 지방선거 등에 대해 폭넓게 들어봤다. -책 소개 부탁드립니다. 전북이라는 자치단체를 사례로 해서 낙후 원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쓴 책입니다. 지역이 회생하기위한 조건을 제시했으며, 지역 회생전략을 지역문화관광산업교통글로벌교육으로 나눠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14개 자치단체의 특화성장전략도 있습니다. -저서를 보면 1부에 지역회생 골든타임이라는 제목을 달고, 좋은 시간인데 밑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있다는 취지로 글을 쓰셨습니다. 인재를 등용하거나 예산에 대한 배려를 볼 때, 전북을 이렇게 생각하는 대통령을 만나기는 어렵습니다. 새만금특별법국가균형발전특별법혁신도시특별법이 개정되고 교통SOC관련 정책의 틀도 마련되면서 지역균형발전정책의 틀이 마련됐습니다. 문재인 정부의 지역균형발전 밑그림을 어떻게 현장에 접목할 것인지 고민해야 할 시기라는 것입니다. 정권의 시간은 유한합니다. -그렇다면 청와대에서 바라보고 있는 전북의 위상은 어떻습니까. 이명박박근혜 정부에 비해 많이 높아졌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정부도 전북에 호의적입니다. 하지만 전북이 청와대에 건의하는 현안사업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있습니다. 중앙정부 공무원들은 새만금과 같은 공간개발사업에 대한 비중을 줄이길 원합니다. 국토개발사업이 지역발전을 선도하던 시대는 지났고 성과가 언제 날지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새만금에 대한 집중도를 줄이고 지역이 당장 할 수 있는 사업안을 제시하길 원합니다. 개인적으로도 동의합니다. 새만금 간척사업 벤치마킹 대상인 네덜란드의 주다치도 한꺼번에 개발하지 않습니다. 필요한 만큼 개발하고 즉각적으로 공간을 활용합니다. 새만금도 공간개발에 집중하는 형태를 벗어나 매립한 공간을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합니다. 즉 공간정책을 산업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동안 전북이 낙후한 원인을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산업자원개발에 집중하지 않고 공간개발에 청사진만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새만금 사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전북은 지난 30년 동안 새만금사업에 얽매여 많은 정책을 포기했습니다. 둘째, 실용학문과 실용적인 문화가 정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소리축제와 같이 상당히 관념적인 부분이 많습니다. 모든 음악을 다 아우르겠다는 뜻이겠지만, 정체성도 불분명해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지도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전북의 고질병, 패배의식과 중앙의존도가 심하다는 것입니다. 해방 이후 단 하나의 새로운 산업생태계를 만들지 못한 유일한 지역이 바로 전북입니다. 문제가 생기면 스스로 해결하려는 방법을 찾지 않고 오로지 중앙정부에 요구만 합니다. 지역의 조선소를 정부에서 책임지고 살려달라는 공약은 전국 어디에도 없습니다. 산업구조조정기에 있는 조선업은 어느 지역이나 다 어렵습니다. 스스로 만들어내는 산업군도 없이 기존의 산업만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방법론을 구체적으로 얘기해주신다면. 지역이 가진 장점을 토대로 먹거리를 고민해야 합니다. 문제는 전북은 지역이 갖고 있는 장점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역별로 자세히 살펴보면 지역 문화산업사측면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는 정책이 많습니다. 21세기 문화관광지 한옥마을 관광정책, 농가 70%를 중산층으로 끌어올린 장수군의 목표소득정책, 고령농과 한계농 30%를 위한 로컬푸드정책, 불모지에서 자산을 만들어낸 임실치즈 육성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런 우리의 자산을 발전시키는 게 지역이 융성할 수 있는 조건입니다. -책을 보면 농생명 산업 육성 쪽에 무게를 실으셨습니다. 전북만큼 농생명자원이 풍부한 지역은 없습니다. 농촌진흥청, 식품연구원, 생물산업진흥원 등 농생명기관이 집적돼 있으며, 연구인력도 3000여명에 이릅니다. 전북은 농생명산업연구단지를 중심으로 산업화에 집중할 수 있는 조건입니다. 종자산업과 농기계산업, 농업약품산업, 식품영양제 산업, 농자재산업 등 특화할 수 있는 분야가 많습니다. 다만 기업을 유치하기 위한 현명한 전략을 세워야 합니다. -청와대 사직 후 613지방선거에 출마한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난해 12월 지방선거에 직접 출마하기 위해 청와대를 사직했습니다. 청와대에서 균형발전비서관으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현장에서 성과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직 후 새만금 등 대통령공약사업지를 방문했고, 지역주민들과 도당의 의견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특정지역에 출마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대신 문재인 정부의 국정철학을 함께 하는 후보들이 지역혁신성과를 낼 수 있도록 공약개발을 도울 계획입니다 -공약개발을 돕는다고 하셨다. 지방선거 입지자들이 어떤 공약을 내놔야 한다고 보시는지. 실용적인 공약을 내놔야 합니다. 하지만 전북에는 관념적인 공약이 많이 나옵니다. 주로 사업과 예산과 관련된 부분들이 그렇습니다. 범위가 두루뭉술하고 구체적이지 않습니다. 이유는 전라북도에 정책관련 지식인들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향후 총선이나 지방선거에서 후보가 제대로 된 공약을 내기 위해서는 지역의 발전정책을 조언하고 끌어갈 수 있는 조직이 있어야 합니다 -앞으로 활동계획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요. 지역혁신성장포럼을 결성하려고 합니다. 목적은 현장중심의 지역혁신성장 모델을 개발하고 개발된 모델의 성과를 공유하고 확산하는 데 있습니다. 지역 혁신성장포럼에서는 지역의 아이디어를 받아 연구하고, 그 결과를 지방정부나 중앙정부에 전할 것입니다. 필요한 경우에는 여론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다양한 지원요청도 할 계획입니다. 새로운 지역혁신성장이 흐름을 타면 대학 내 혁신성장연구센터 개설하려는 생각도 있습니다. ● 황태규 교수는 - 국가균형발전정책 분야 현장에서 답 찾는 전문가 ▲ 황태규 우석대 교수는 지역이 가진 장점을 토대로 미래 먹거리를 고민해야 한다며 전북의 실용학문실용문화 정착을 강조했다. 임실 출신인 황태규 우석대 교수는 전주고, 외국어대를 졸업한 뒤, 연세대동국대에서 경영학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또 미국 로욜라메리마운트대학교(Loyola Marymount University)에서 문화콘텐츠학 최고경영자과정을 수료했다. 황 교수는 지역산업전략이나 문화관광, 지역마케팅 분야에서 오랜기간 활동해왔다. 관련 저서도 올해 4월에 출간한 『지역의 시간』을 비롯해 『살기좋은 지역 만들기』, 『브랜드코리아』, 『신사고로 펼치는 지방시대』 등 10여 권에 달한다. 특히 지난 2005년부터 2008년까지 대통령자문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정책연구실에 근무하면서 혁신도시정책, 지역전략산업게획수립, 지역개발에 대한 종합적인 정책을 만들었으며, 현재는 한국콘텐츠진흥원 심사위원, 광명시 등 30개 자치단체의 마케팅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지난해 2017년 5월부터 12월까지 대통령비서실 정책실 균형발전비서관을 지냈다. 황 교수는 지역 현장에서 답을 찾는 전문가로 정평이 나 있으며, 청와대에서 두 번이나 국가균형발전정책과 관련한 일을 했을 만큼 능력을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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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세희
  • 2018.05.20 20:03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33. 폐허로 남은 그 터, 고군산진 - 지친 이순신 장군 품어준 곳, 이젠 주춧돌만 덤불 밑 흙 속에

“이봐, 자네들 수로대장(이순신)은 어디로 갔나?” 왜군 신칠량이 통역을 통해 강항(姜沆, 1567-1618)에게 물었다. “알고 싶소? 태안 안행량(安行梁)은 예로부터 물길이 험한 곳으로 유명한 곳이야. 이름이라도 좋아야 한다고 안행량이라 한 거지. 그곳으로 말하자면 배가 가는 대로 꼬꾸라지는 망나니 같은 물길이지. 그러기에 그곳을 피해 그 옆길로 명나라 장군이 수만 척을 끌고 내려오는데 벌써 군산포에 와 있다 하더이다! 우리 통제사(이순신)는 워낙 수가 모자라 한때 물러섰지만, 명나라 수군과 합세하여 곧 내려올 걸세!” 명량해전에서 참패를 당한 왜군들은 전열을 다시 가다듬은 후 설욕하기 위해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들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포로로 잡힌 자들 중에 의복과 처신이 벼슬아치 같다고 여긴 강항을 골라 취조하며 물었다. 그러자 강항은 왜군을 따돌릴 양 반 협박조로 명나라 수군에 대한 풍문을 부풀려 보탰고 지레 겁먹은 왜군들은 결국 뱃머리를 돌렸다. 당시 기지 있는 답변을 한 강항은 강희맹의 5대손으로 문과로 급제해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호조참판의 종사관으로 남원에서 호남 지방의 군량을 모으고 보내는 일을 했다. 그러다 남원이 왜군에 함락되자 격문을 띄워 함평, 순창에 이르기까지 의병을 모았지만 고향 영광마저 왜군들의 손에 넘어가자 식솔들을 데리고 피난을 가던 중 왜군에게 생포되었다. 그리고는 일본으로 끌려가 1600년 귀국하기까지 3년여의 포로 생활을 했다. 강항은 “적지에서 임금에게 올린 글로 주상전하께 엎드려 아뢰나이다”라고 하고 자신이 겪은 일들과 적국의 실태를 국익을 위해 세세히 기록하여 비밀리에 본국에 보냈다. 앞선 대화도 그 안에 수록된 글로 강항은 적지에서 체험한 기록을 『건차록(巾車錄, ‘건차’ 죄인이 타는 수레)』이라 책명을 지었으나 후에 제자들이 『간양록(看羊錄)』으로 고쳐 놓아 지금껏 전해지고 있다. 당시 왜군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던 이순신 장군은 명량해전 직후 서해를 거슬러 올라와 고군산진이 있는 선유도에 정박하고 12일간 머물렀다. 이곳에서 이순신 장군은 명량해전의 승전보를 장계로 꾸며 조정으로 올려보냈으며 수군들과 휴식을 취하고 배를 수리하며 전열을 가다듬었다. 스스로 ‘천행(天幸)이었다’라고 한 명량해전에 온 힘을 쏟은 후 긴장이 풀린 탓인지 이순신 장군은 고군산에 있는 동안 자주 아팠다. “21일 맑다. 일찍 떠나서 고군산도에 이르렀다. 호남 순찰사는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배를 급히 타고 옥구로 갔다고 한다. 늦게 바람이 미친 듯이 불었다… 23일 맑다. 싸움에서 이겼다는 장계 초본을 수정하였다… 몸이 좋지 못하여 끙끙 앓았다… 밤에 몹시 좋지 않고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다… 몸이 좋지 않아 하루 내내 나가지 않았다…” 『난중일기(원명 정유일기)』에 기록된 말이다. 일기에서도 엿보이듯이 반년 남짓한 기간에 투옥과 고문, 모친의 죽음, 목숨을 건 전투를 연이어 겪다 보니 몸이 급격히 쇠약해졌을 것이다. 비로소 한숨 돌리듯 자신을 추스르며 수군과 휴식을 하는 동안 가족을 챙기려 아들 회를 아산으로 보낸다. “2일 맑다. 아들 회가 배를 타고 올라갔는데 잘 갔는지 모르겠다. 이 마음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으랴! 3일 맑다. 새벽에 배를 띄워 변산을 거쳐 법성포로 내려가는데 바람이 부드러워 따뜻하기가 봄날 같았다…” 이순신 장군이 고군산에 머무르던 12일의 시간은 몸을 추스르는 시간이었으나 아산의 본가가 왜적들의 분탕질로 잿더미가 됐다는 비보를 들으며 마음과 몸이 아팠던 시간이었다. 『간양록』에도 기록되었듯이 당시 왜적들의 만행은 해안가는 물론이고 조선 내륙을 쑥대밭으로 만들며 백성들을 무참히 살육했다. 이순신 장군의 행방을 놓친 왜군의 수군들은 육지의 왜군들과 합세하여 보복하며 아산의 이순신 장군 본가에 화풀이했다. 육지 쪽 사정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이순신 장군은 10월 3일 12일간의 휴식을 마치고 고군산진을 출발해 남하했고 이듬해 1598년 11월 지금의 남해 앞바다인 노량해전에서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한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고군산’으로 처음으로 등장한 고군산진(古群山鎭)은 조선 후기 1624년(인조 2)에 군산 지역의 해상 방어를 위해 군산도(현재 선유도)에 설치한 수군진이다. 고려와 조선 전기에 이르기까지 군산도(群山島)라고 불린 이곳은 고려시대 대외 교류의 관문으로 외교사절이 머무는 객관(군산정(群山亭))을 운영했으며 조선 태조 6년에 수군 만호영을 설치했고, 선조 2년에는 수군절제사가 파견됐다. 임진왜란 이후 군산 지역의 군사적, 경제적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자 군산진은 운송을 전담하게 하고, 군산도에 수군 진을 하나 더 설치하여 방어를 전담하도록 하는 조치가 취해지게 된다. 이에 따라 1624년(인조 2) 별장(別將)을 파견하고, 진의 이름을 기존 진포에 설치된 군산진과 구별하고자 ‘고군산진’이라고 칭한다. 군사적 중요성에 비해 고군산진이 설치된 초기에는 방패선 1척만 배치될 정도로 그 규모나 전력이 미약하였지만, 점차 필요에 의해 강력한 진이 되었다. 전성기에 1,000명 이상의 수군이 주둔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고군산진은 크게 번창을 하였고, 고군산진 부근의 주민들도 돈을 받고 수군 역에 종사하게 되면서 타 지역의 사람들보다 훨씬 풍요로운 생활을 누린 것으로 보인다. 1864년에 편찬된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는 고군산 주민들의 경제적 상태를 “주민들은 모두 부유하고 집과 의복, 음식의 호사스럽고 사치스러움이 성읍(城邑)보다 훨씬 더하다.”라고 기록하였고 고지도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1872년 만경현 고군산진지도』에서 건물의 종류와 배치 살펴볼 수 있고 『호남진지』와 『여지도』에서도 규모를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번창하던 고군산진은 설립한 지 271년 만인 1895년 해체되고, 수군진이 없어진 1909년에 내각 총리 대신이었던 이완용의 주도 하에 지방 관청 건물들과 함께 고군산진터 역시 일반인에게 매각되었다. 당시 매각된 선유도 진말의 수군진은 일제강점기인 대략 1930년경 커다란 노거수에서 시작된 불이 번져나가 소실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순신 장군이 전쟁을 치른 뒤 지친 마음과 몸을 쉬인 그 고군산진터는 이제 도자기 파편과 주춧돌만을 남긴 채 덤불 속에 애달프게 남아있다. 이순신 장군의 행로를 추적하지 못하게 한 강항 선생의 『간양록』도 일제강점기 금서였다가 해방 후 빛을 보며 수록된 시가 조용필의 노래 ‘간양록’으로 불리고 있지만, 아직 그 진가가 덜 알려진 책이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는 말이 있다. 전쟁의 피폐한 환란 속에서 세세한 기록을 남긴 『난중일기』와 『간양록』을 살펴보며 선조가 알리고자 한 과거를 복기해봐야 한다. 고군산진터의 소실에 관한 이야기도 들리는 바에 의하면 땅 주인이 진터를 포크레인으로 다듬은 후 산사태가 났고 남아있던 주춧돌과 진터의 흔적들이 민가 위 밭으로 보이는 곳까지 밀려 내려와 묻혔다고 한다. “그 진말의 집들이 나무의 불에 옮겨 탔는지 부서졌는지 잘 모르겠지만, 불 난 그 큰 나무의 밑동을 잘랐는디 이무기 같은 큰 구렁이가 있었댜~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지다 귀경하고 그랬댜~ 그기 진터 원쥔이 그 뭐가 되려던 이무기였던 것 갑소. 이래 봐도 여그가 이순신 장군이 대승하고 쉬었던 진말이여!” 아름다운 선유도의 해변 길을 앞에 둔 고군산진터는 수많은 사연을 품고 거친 모습으로 남아있지만 진말 어르신의 기억 속에 전설이 되었고 지역의 자부심임엔 분명하다. 특별한 안내판도 없이 언덕에 자리해 모르면 지나칠 곳이다. 폐허 안에 묻힌 그 터를 감히 지역의 자원이라고 말하기가 참으로 송구하고 마음이 아프다. 해상교량으로 섬들이 이어지며 고군산을 찾는 방문객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봄을 지나 여름이 되면 고군산 일대가 휴가객들로 북적이게 될 것이다. 그곳에 가거든 아름다운 풍광 뒤꼍에 있는 고군산진터를 살펴보자. 오래전 전쟁에 지친 이순신 장군을 품고 우리를 지켜낸 고군산진터를 올곧게 돌이켜야 한다. 그리고 선조들이 남겨둔 치유의 장소인 그곳에서 우리도 살아갈 힘을 얻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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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17 20:38

[문화&공감 2018 시민기자가 뛴다] 연극 '군산 8월의 크리스마스' - "시민과 함께 놀면서 시민이 먼저 행복한 연극 구상"

▲ 김형태 연출가 8월의 크리스마스는 1998년 개봉한 영화로 작은 도시에서 초원사진관을 운영하고 있는 정원(한석규)과 주차단속원인 다림(심은하)과의 사랑을 절제된 감정으로 잔잔하게 풀어낸 작품이다. 영화평이 좋았고 그래서인지 20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영화의 주 배경이 되는 군산 초원사진관을 보기 위해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군산을 사랑하는 연극인들이 군산 문화살리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영화를 모티브로 한 연극, 군산 8월의 크리스마스를 준비하고 있다. 군산 문화살리기 프로젝트가 벌써 다섯 번째를 맞이했는데요, 올해 가장 포인트를 둔 점은 바로 놀자입니다. 우리가 연극을 영어로 play라고 하는데 그대로 해석하면 노는 거죠. 그런데 그냥 놀지 않고 거기에 재미와 감동을 더하게 된다면 노는 것이 훨씬 재미있지 않을까요? 시민과 함께 놀면서 시민과 함께 하는 예술, 시민이 먼저 행복한 연극을 만들어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작품이 바로 우리에게 친숙한 8월의 크리스마스였습니다. 이번 연극을 연출하고 있는 김형태 연출가가 말한 프로젝트의 목적이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를 연극으로 직접 각색하면서 군산에 대해서 잘 알게 됐다고 말한 김형택 연출가는 문화예술에서 절대 낙후되지 않은 군산, 그래서 군산 시민들이 좀더 많은 자부심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말도 전했다. 이렇게 시민과 함께, 그리고 행복한 작품을 만들고 싶은 간절함 때문인지 연극으로 탄생한 8월의 크리스마스는 몇 가지 재미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철저하게 군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작품을 준비하면서 자료를 모으다 보니, 배경은 군산의 초원사진관이었지만 실제 촬영지는 서울의 변두리더라고요. 그래서 연극으로 각색하면서는 작품 전체를 군산을 배경으로 만들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래서 군산에서 활동했던 극단(적토마), 살고 있는 사람들, 추억을 자극하는 가게 등을 소개하는 장면을 넣게 되었습니다. 거기다 이 작품을 본 관객들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장소를 찾아 볼 수 있게 된다면 관광과 예술이 함께 할 수 있는 대표적인 공연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분 좋은 상상도 해봤습니다. 실제 공연을 보면서 입가에 미소를 짓게 했던 몇 장면이 기억 나는데 무대 배경으로 사용한 공간의 이름 때문이다. 한일옥, 빈해원, cafe 8월의 정원. 관객들에게 친숙한 느낌과 함께 마음 속에 간직해 뒀던 추억이 소환되는 느낌이다. 특히 영화와 달리 새로운 인물(강맹숙, 마성용)은 실제 대학 연극 동아리 적토마에 소속이 되어서 활동을 했던 인물들로 극의 재미를 더해주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김형태 연출가의 바람이 이루어지기라도 한 듯, 실제 극단 적토마 선배였던 사람들이 서로 연락이 닿아 공연을 관람하러 오고, 근처에 여행을 온 여행객들이 연극을 보고는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곳을 직접 찾게 되는 일이 생겼다고 한다. 역승무원 복장을 한 스태프가 직접 열차표로 된 티켓을 끊어주는 장면은 신선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작품 곳곳에 숨어 있는 지역에 대한 사랑과 소소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장치는 연극으로 보게 되는 8월의 크리스마스에 색다른 재미와 감동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영화와 다른 또다른 특징은 배우들이다. 작품에 출연한 배우들 중에는 이 영화가 개봉된 1998년에 태어난 배우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20년 이라는 세월의 간격, 조금은 답답하고 느린 시대인 1998년의 사랑과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2018년의 사랑에 대한 간격을 어떻게 좁히고 공감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그들에게 질문을 던져 보았다. 이 작품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어떤 단어로 표현 할 수 있을까요? 여운이라는 단어가 떠올라요. 역할을 맡고 연습하면서 다림이라는 역할을 통해서 느꼈던 다양한 감정에 대한 여운이요.(문선아 배우) 필름입니다. 사진을 찍으면 그 사진 안에 있는 기억, 추억들이 필름에 남잖아요. 물론 지금은 필름을 잘 사용하지 않지만 이 작품을 통해서 필름이라는 것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알게 되었습니다.(정지훈 배우) 음정이 아닐까요? 그런데 1998년은 약간 딱풀 같은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강력본드 같은 느낌의 정이요!(김하늘 배우) 사진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한 장의 사진이 주는 옛 추억과 과거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연결 시켜 주는 연결고리가 사진이니까요.(백종민 배우) 추억이요. 추억에 대한 여운이 남는 작품이에요.(박다혜 배우) 가족이요. 사실 아버지가 사진사세요. 그래서 이 작품을 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는 가운데 아버지의 직업에 대한 공감대로 형성되었거든요. 그래서 가족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서무영 배우) 아련함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90년대 이야기를 2018년 현재에 공연하면서 옛 추억을 떠오르게 하니깐요.(임채은 배우) 그리움입니다. 이 작품은 과거와 현재를 왔다 갔다 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요, 현재에 살고 있는 제가 과거를 생각한다는 것은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요?(안태현 배우) 질문에 대한 답을 하는 배우들의 표정은 시종일관 진지한 모습이었다. 자신이 맡은 역할에 충분히 공감하고 뭔지 모를 자신감을 품고 있는 배우들에게 있어서 20년 이라는 세월의 간격은 충분히 뛰어 넘을 수 있었던 것이다. ▲ 한유경 연극연출가 공연을 보는 내내 무대 위의 배우들에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행복이었다. 이것은 1998년의 사랑을 절제된 감정으로 잔잔하게 풀어낸 영화를 20년 후 연극으로 공연 되면서배우와 관객 모두에게 재미와 감동을 품은 행복이라는 단어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 행복이라는 단어는 그냥 만들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20년이라는 세월의 차이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배우들은 자신이 맡은 역할에 집중했고, 집중하는 가운데 역할을 이해하게 됐으며 이해를 통해서 배우와 역할간의 행복한 소통이 만들어 낸 결과이리라. 시민들이 행복한 play, 이 작품을 보게 되는 시민들 또한 배우들이 공감했던 여운, 필름, 정, 사진, 추억, 가족, 아련함, 그리움이라는 다양한 단어로 해석되어지는 행복을 충분히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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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16 21:13

[참여&소통 2018 시민기자가 뛴다] 20대 주식 도전 '명과 암' - '삼포세대' 청년들, 푼돈으로 '일확천금' 꿈 꾸는 사회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A교수는 종종 주식시장에 뛰어드는 제자들을 본다. 굳이 신경써서 찾아본 적은 없지만 강의시간마다 힐끔힐끔 휴대폰으로 주가를 확인하는 모습이 보인다. 학생들이 강의시간 마다 그렇게 딴 짓을 하는 모습이 좋게 보일리가 없지만 A교수는 주식투자를 하는 제자들을 진심으로 격려한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전업투자자에 도전한 제자가 생각난다고 한다. 주식으로 성공해서 밥을 샀던 제자가 있어요. 몇 년 후에 만났더니 전업투자가가 됐더군요.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친구였어요. 최근 들어 중장년과 직장인의 전유물이었던 주식에 유난히 20대가 많이 몰려들고 있다. 스마트폰이 보급된 이후 어플을 통한 비대면 계좌 개설이 활발해지고 동시에 지난해 주식시장이 역사적인 활황을 기록하면서 20대의 주식시장 신규 유입을 부채질하고 있다. 20대의 주식투자는 사회 현상이 됐지만, 그 이면의 명암도 잘 살펴야 한다는 지적이다. △수수료로 증권사 고르기 주식투자의 첫 걸음은 증권사 선택이다. 증권사를 선택할 때, 수많은 증권사가 다양한 강점을 내세우면서 고객을 끌어들이지만 절대적으로 증권사를 고르는 최우선 기준은 수수료다. 매매빈도가 높다면 단 돈 10원이라도 수수료를 아끼는 편이 좋다. 스켈핑(초단기거래)과 데이트레이딩(하루 단위 매매)을 매매기법으로 삼는 B씨는 올해 S증권에 계좌를 개설하며 기존의 계좌를 정리했다. S증권의 서비스가 뛰어나지도 않고, 신뢰도는 다른 곳보다 떨어지지만, 비대면 계좌를 통해 주식수수료 없이 서비스를 제공하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스켈핑의 특성상 하루에 많게는 백단위로 거래를 하는데 종종 수익을 거두고도 정작 수수료 때문에 손실이 나는 경우가 있어요 수수료가 없으니 이제 그 부분을 신경쓰지 않아도 됩니다. 주식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은 수수료에 따라 증권사를 결정했지만 의외로 오래된 사람들은 수수료와 상관없이 K증권사에 대한 높은 충성도를 보였다. 수년 전만해도 K증권이 가장 저렴한 수수료에 적당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어서 사람들이 몰려 들었고 K증권의 서비스에 적응돼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않고 있었다. △테마주 위주의 매매, 외자도 외자나름 대부분 20대는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만큼 운용하는 자금규모가 크지 않아 단기투자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지금은 지방선거와 정상회담으로 인해 모든 자금이 테마주에 쏠려있는 상황이라 특정 테마주로 엮이기만 하면 움직임이 무겁다는 평가를 받던 종목들도 하루에 10%씩 널뛰기를 반복하고 있어 말 그대로 테마주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시기다. 따라서 평소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테마주에 몰려있다. 하지만 테마주는 주가가 실적에 바탕을 두지 않고 근거 없는 기대와 군중심리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하기 때문에 기회와 위험이 상존하는 곳이다. 주식경력 2년차의 C씨는 정상회담 테마주로 10%의 수익을 기록했지만 아직까지 지방선거 테마주의 손실을 메우지 못하고 있다. 안희정 테마주로 분류되는 주식을 사놨었는데 뜬금없이 사건 터지는 바람에 15%정도 손해봤어요. 비중을 제일 크게 준 주식이었는데 아직까지 손실 복구가 안됩니다. 하소연과 함께 C씨는 본인이 매수한 종목을 보여줬다. 외국계 자금이 며칠째 유입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자금 유입을 확인한 C씨의 표정은 어두워 졌다. C씨는 일반적으로 외국계 자금과 기관 자금이 유입되는 것은 주가상승의 신호지만 모든 외국계 자금이 환영받는 것은 아니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특정 거래원의 외국계 자금이 들어올 때는 오히려 개미들이 몸을 사려야 할 때라고. 우리 같은 개미들은 M사를 메루치라고 불러요. 얘들 들어오면 비리비리한게 힘도 못쓰고 주가가 떨어지는게 멸치같다고 해서 붙인 별명인데 저도 어지간하면 M사를 호가창에서 보면 자금을 빼요. △의심하고 조심하라 주식을 시작해 부침을 겪었지만 그래도 오래도록 주식시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생존에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의심을 꼽았다. 무언가를 믿고 신뢰하는 순간 위험이 시작되는데 그 위험을 눈치채지 못한다면 돈은 이미 잃은 것이란다. 이와 관련해 20대부터 주식을 시작해 10년 가까이 거래를 이어오고 있는 D씨는 주식 할 때 만큼은 제발 멘토를 찾지 말라고 충고한다. 저도 20대부터 주식을 시작했지만 20대에는 먼저 성공한 멘토를 찾는 경향이 있어요. 근데 주식판은 멘토를 찾거나 의존하기 어려운 곳입니다. 사기치는 사람들만 주의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가능한 한 혼자서 길을 찾으세요. 덕목을 충실히 따르면서 조심성과 비밀이 많아지는지, 경력이 쌓인 투자자들은 자신이 주식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주변에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직장 동료나 친구에게 비밀로 하는 것은 물론이며 배우자에게 알리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이에 대해 E씨는 주변에서 알고 있을 때 실익은 없고 신경쓰이는 일만 생긴다고 말한다. 주변 사람들이 제가 주식을 한다는 사실을 알면 꼭 추천을 해달라고 하는데, 제가 추천해준 종목으로 벌면 자기들 덕이고 잃으면 제 탓을 해요. 마음만 불편해지데 뭐하러 얘기를 하겠어요. △노동혐오? 노동불신! 일각에서는 다수의 20~30대가 주식이나 비트코인에 뛰어드는 지금의 사회현상을 노동혐오의 일종으로 표현하고 있다. 주식시장이 노동이라는 건실한 수단을 포기하고 일확천금의 꿈을 꾸는 사람들이 모인 도박판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주식에 뛰어든 당사자들은 본인의 선택이 단순한 노동혐오나 일확천금의 꿈과는 거리가 있음을 얘기한다. 오히려 현실의 지엄함을 마주하기 때문에 주식시장을 찾을 수 밖에 없다고. 노동에 대한 혐오가 아니라 노동에 대한 신뢰의 하락이자 불신이죠. 이제는 일만 해서는 평생 벌어먹어도 그 다음이 없는 시대라는걸 다들 알아요. 그렇다고 푼돈 밖에 없는 사람들이 건물을 사겠어요? 땅을 사겠어요? 주식밖에 길이 없죠. △청년 실업 10%, 주식에 몰리는 20대 국내 주식시장에서 20대 주식투자자가 늘면서 젊은 바람이 불고 있다. 최근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결산 상장법인 1975개사의 실질주주 분석 결과 20대 주식 투자자는 전년(34만명) 대비 31.9% 증가한 45만4626명으로 집계됐다. 같은 기간 30대는 10.7% 증가한 117만여명, 40대는 5.5% 늘어난 137만여명으로 나타났다. 반면 50대는 2.6% 증가하는 데 그쳤고, 60대 이상은 오히려 투자자 수가 줄었다. ▲ 이민욱 전북대 신문사 전 사회부장 20대 주식 투자자는 최근 5년간 매년 증가세를 나타낸 가운데 지난해 증가폭이 가장 컸다. 지난 2011년 20대 주식 투자자 수는 29만4000명을 나타냈다. 2012년은 전년 대비 8.2% 증가한 31만8000명을 기록했다. 2013년은 전년 대비 6.6% 늘어난 33만9000명, 2014년은 전년 대비 소폭 증가(1.8%)한 34만5000명을 나타냈다. 2011년 이후 매년 한 자리대 증가세를 나타냈던 20대 주식 투자자 수는 지난해 45만5000명으로 큰 폭으로 증가하며 최근 5년래 최대 증가치(31.9%)를 기록했다. 청년 실업이 10%에 육박한데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삼포세대로 일컬어지는 청년층이 적은 돈으로 투자할 수 있는 주식시장에 눈을 돌리는 것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민욱 전북대 신문사 전 사회부장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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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15 18:24

전북버스운송사업조합 장정익 이사장 "근로기준법 개정에 버스업계 최대 고비…준공영제 확대 필요"

전북버스운송사업조합은 상당기간 시외버스 업계에서 이사장이 선출돼 운영됐으나 최근 시내 버스업계에서 이사장이 선임돼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이용 수요 감소와 미흡한 재정지원 등으로 버스업계가 경영난에 직면한 가운데 올해는 오는 7월부터 주 52시간 근무적용대상이 됨으로써 인력 채용은 물론 인건비 부담으로 사상 유례없는 어려움에 직면할 것으로 우려된다. 이같은 난관을 어떻게 풀어 나가면서 대중교통의 활성화를 이끌어 나갈 지 군산 우성여객 장정익 신임 이사장(64)과 대화를 나눠 봤다. -과거와는 달리 시내버스 업종에서 전북버스운송사업조합 이사장에 선임됐는데 소감과 각오는. “버스조합은 그간 시외버스 업체에서 이사장을 역임했으나 이번 시내버스 업체 이사장을 선임한 것은 매우 특이한 사례이며 더욱이 군산지역 업체 선임은 앞으로 조합 발전에 큰 의미와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특히 금년은 근로시간 단축으로 더욱 어려운 시기로서 도내 19개 업체 1500대를 대표하는 이사장이라는 중책을 맡은 만큼 도민들의 충실한 손과 발이 돼 대중교통의 사명과 활성화에 최선을 다할 계획입니다.” -취임한지 한 달여가 지났는데 조합의 역할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조합은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에 의거, 설립된 특수법인입니다. 조합원의 사회적 지위와 권익을 보호하고 대중교통이라는 사회적 책임이 매우 큰 만큼 시내버스, 시외버스, 농어촌버스의 각 업종에 맞도록 대중교통 기능과 발전을 도모함이 매우 중요합니다. 도내 노선버스 업체가 친절을 기반으로 질 높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고객이 만족하는 대중교통이 될 수 있도록 ‘승객을 내 가족같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모셔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역할은 현재 버스업계 현실을 보면 구조적 악순환으로 고질적인 경영난에 상당한 어려움을 안고 있지만 이의 극복을 위해 강력한 원가절감 등 업체 경영개선도 병행 추진돼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근로기준법 제59조 노선버스의 특례업종 제외에 따른 문제점과 앞으로의 대비책은. “올해 버스업계는 사상 유례가 없는 최대 고비를 맞고 있습니다. 지난 3월 근로기준법이 개정돼 오는 7월 1일부터 주 52시간제를 적용해야 합니다. 도내 시내, 시외, 농어촌버스 업체에서 약 1200명의 운전자를 추가로 채용해야 하고 이에 따른 임금 등 제반 비용이 연간 약 550억원이상 추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나 현재 대책은 전무한 실정입니다. 운전자 수급에 당장 애로 사항이 발생하고 예산 미 수립으로 추가 인건비 부담은 현재로서는 방안이 없는 상황이죠. 특별한 대책이 없는 경우 오는 7월 1일 시행과 동시에 교통대란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이같은 문제점을 해결키 위해서는 우선 버스요금 현실화 및 조정 시기의 정례화가 선행돼야 합니다. 버스 요금은 정부의 생활물가 억제정책 등으로 운송원가 상승 비용이 요금에 적기에 반영되지 못하고, 반영 시기에 대한 예측도 어려워 경영상 어려움이 많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시외버스요금은 2013년 3월 이후 동결상태이나 운전자 임금은 현재까지 24%까지 인상돼 시외버스 업체 경영난이 심각한 상태입니다. 시내, 농어촌버스 요금 또한 지난 2017년 1월 인상됐으나 운송원가에 미달하는 요금을 수수하고 있어 경영난은 나날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운송사업자가 예측 가능한 중장기적 경영계획을 수립해 운전자의 근로여건을 개선하고 안전한 운송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버스요금 조정시기가 택시와 같이 2년 단위로 정례화돼야 합니다. 준공영제의 도입도 확대돼야 하죠. 운전자 추가채용 등에 따른 비용을 버스요금에 반영할 경우 국민 특히 서민들의 부담은 매우 클 것으로 판단됩니다. 요금인상에 따른 국민부담 최소화, 대중교통 서비스 정상적 공급, 안전한 운송서비스 제공 및 운전자 근로여건 개선 등이 동시에 이뤄질 수 있도록 노선버스 운영의 준공영제 도입이 전면 확대돼야 합니다.” -광역도시에서는 버스준공영제를 실시하고 있는데 중소도시에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현재 시내버스 운영은 전적으로 민간업체가 담당합니다. 영세성을 면치 못한 상태에서 운송원가에 미달되는 요금수수와 적정한 손실을 보전하지 않는 재정지원으로 경영수지가 악화돼 있습니다. 서비스 수준은 지속적으로 저하되고 있으며 교통 불편 및 민원이 증가 되는 등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게 현실이죠. 중소도시에서 준공영제를 도입해야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사회적 교통약자는 버스교통에 의존할 수 밖에 없어 버스노선 감축과 운행중단 등이 매우 곤란한 대중교통 기능에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버스가 민영제로 지속되기 어려운 한계상황에 직면하는 등 버스산업의 상황이 더욱 악화되고 있어 공공부문의 역할강화에 대한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준공영제 도입이 이뤄지면 버스 노선권이 민간에서 행정으로 이관돼 시내버스 노선개편 등 노선체계가 이용자 위주로 전환됨으로써 서비스가 개선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또한 운전기사 등 직원들의 처우가 개선되어 친절성, 안전성 등에서 시민들의 만족도가 높아지고 안전운전으로 교통사고가 크게 감소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당연히 대중교통활성화가 이뤄질 것으로 봅니다.” -농어촌지역의 인구감소와 자가용 및 학원 지입 차량의 증가로 시외, 시내, 농어촌버스 업계가 많은 적자에 허덕인다고 들었는데 이에대한 극복 방안은. “최근 노선버스 업계는 이용수요 감소와 운송 비용 증가로 어려운 경영난에 처해 있습니다. 시외버스는 KTX 확대 운행 등 다른 교통수단의 발달로 이용 승객이 감소하고 있고 시내, 농어촌버스는 농어촌 인구감소, 자가용 차량 증가, 학원지입차량 증가 및 행복택시 등 수요응답형 교통수단의 도입으로 인한 수송수요 감소로 심각한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버스업계는 고정비가 매우 높은 산업이죠. 타 산업과 달리 원가절감 및 구조조정에 한계가 있고 운송수입 만으로 운송원가를 감당하지 못하는 있어 정부와 지자체의 재정지원은 필수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재정지원율을 보면 적자손실액의 80%에 불과하고 나머지 20%는 업체의 자구책으로 해결하도록 함으로써 뾰족한 방안이 없습니다. 따라서 운행노선과 운행시간 등은 철저히 승객 이용에 불편이 없도록 개선돼야 하며 이에 따른 시행에 차질이 없도록 재정지원이 반드시 수반돼야 합니다. 철저한 회계 투명성 확보로 도민의 신뢰를 확보함은 물론 강도 높은 자구책을 통한 운송원가 절감과 운전자의 친절도 향상 및 서비스와 시설 개선으로 고객의 편익을 증진시켜 이용수요를 확보해야 합니다.” ● 장정익 이사장은 - 불의 못 지나치는 강직함 교정대상·국민포장 수상 군산고교와 홍익대를 졸업했으며 재소자들의 교화에 큰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2003년에 교정대상, 지난 2017년에 국민포장을 수상했다. 불합리한 일에는 쓴소리를 서슴지 않는 강직한 성격이다. 지난 1988년부터 현재까지 군산우성여객자동차 대표이사직을 맡고 있으며 소리없이 많은 사회활동을 해 오고 있다. 청소년 선도위원, 범죄예방위원, 교정위원, 청년회의소 특우회장, 법원 소액분쟁조정위원, 군산시 체육회 부회장, 도정자문위원, 군산상공회의소 상임위원 등을 역임하거나 현재 맡고 있다.

  • 기획
  • 안봉호
  • 2018.05.15 17:52

취임 3개월 맞은 한승 전주지방법원장 "사법 현실과 국민 여망 사이 아직 틈 있어…메우는 데 최선"

▲ 한승 전주지방법원 법원장이 도민들이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제50대 한승 전주지방법원 법원장(5517기)이 13일 취임 3개월을 맞았다. 전북출신으로 고향에서 첫 법원장을 맡게 된 그는 도민들이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한 법원장은 대법원 수석 및 선임 연구관으로 근무하고 특히 일본식 표기가 만연했던 민사소송법 한글화 등 사법제도 개선에도 앞장서는 등 손꼽히는 법이론가로 정평이 나있으며, 법원 내부에서 신망이 두텁다. 그는 자신에 대한 평가와 업적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 국민 개개인이 좋은 재판을 받을 권리를 최우선 가치로 삼고 그로 인한 사법부의 발전을 이끌어야한다는 신념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신념을 토대로 사건의 본질에 들어가 고민하고 고심하는 법관의 모습을 꿈꾸고 행동하려한다고 했다. 실제 그는 전북일보와의 인터뷰 내내 열악한 법원 청사에서 재판받는 지역주민, 국민들에게 죄송하다. 조금만 기다려주시라라는 말을 되풀이 했다. 취임 3개월을 맞은 한 법원장을 만나 그간의 소회와 향후 계획 등을 들어봤다. -취임 3개월을 맞으셨습니다. 고향이자 법조 3성의 고장에서 법원장으로 근무하시게 된 소감은 어떠신지요. 법관 생활 27년만에 법원장, 그것도 고향 전주의 법원을 책임지는 자리에 앉게 돼 영광이고 무거운 책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전주지법은 제가 사법연수생 시절판사 시보로 법조인 생활 첫 발을 내디딘 곳이기도 합니다. 법조인이 될 때의 초심으로 업무에 임하고 있습니다. 저는 전북의 많은 도시와 인연이 있습니다. 공무원(검찰)이셨던 선친을 따라 군산에서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남원으로 전학을 갔다가 전주에서 초중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진안에는 선친의 묘소가 있습니다. 전북 전체가 제 고향 같습니다. 1995년 1년간 전주지법에서 단독판사로 근무했으니 23년 만에 돌아왔습니다.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 선생, 사도법관 김홍섭 판사, 익산 출신인 최대교 검사 등 법조 삼성은 우리 지역의 자랑이기도 합니다. 취임 첫 날 덕진공원 법조 삼성 동상을 참배했습니다. 법조 후배로서 옷깃을 여미고 다시 한 번 그분들의 뜻을 마음속에 되새겼습니다. 자랑스러운 선배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법원이 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대법원 재판연구관과 법원 행정처 근무, 대법원 수석재판 연구관 등 사법부 요직에서 근무하셨습니다. 일선 법원 업무에 어떻게 그 경험을 접목시키실 것인지 궁금합니다. 그곳에서의 근무경험은 사법부 전체의 시각에서 생각할 기회였습니다. 재판연구관은 대법관의 재판 보조 조사 연구를 하는데 가장 어렵고 치열한 사건들에 대한 연구를 합니다. 무엇이 법이고 정의인지 최종적으로 선언하는 일에 참여했기에 보람이 큽니다. 수석재판연구관 근무시에는 사법 사상 최초로 이뤄진 대법원 전원합의체 공개변론 생중계 실무작업을 총괄하기도 했습니다. 법원행정처에서는 주로 정책개발과 인사업무를 담당했습니다. 민사소송과 민사집행에 관한 법률 개정작업도 한 기억이 납니다. 또 법원을 찾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우선지원 창구설치 작업도 했었는데, 법관이 아닌 민원인의 입장을 달리해 보는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사법사상 처음으로 현직판사로서 방송 출연도 했었구요.(웃음) 그런 저를 법원장으로 임명한 것은 그동안 배운 것을 고향 법원에서 봉사하라는 뜻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론스타의 외환은행 주식취득 공개와 민간세입자에게 주거이전비 지급 판결, 일제고사를 거부한 전교조교사들의 해고 무효 판결 등 공공, 서민들을 위한 판결을 많이 내리신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법원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입니다. 헌법과 법률의 역사는 개개인의 인권 보호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겁니다. 소수자와 약자는 법의 보호에서 소외되거나 억울함을 당할 가능성이 큽니다. 이를 지키고 보호하는 것, 소수자에와 약자에 대한 권리 보호는 사법부의 존재이유이자 본질적 역할의 하나입니다. -최근 국민들의 법률 지식이 높아진 만큼 사법부에 요구하는 국민 법감정이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견해가 있으시다면. 증거재판주의와 죄형법정주의에서 나온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혐의가 크게 언론에 보도되더라도 증거나 처벌법규가 없다면 무죄가 되는 한계인 것이죠. 그에 대한 보완책으로 최근 범죄에 대한 양형기준제 도입으로 객관화 되고 투명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사회지도층 부패범죄와 성범죄의 양형 등 국민의 건전한 상식과 시대의 인식변화를 반영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돼야한다고 봅니다. 법과 제도를 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맞추어 제대로 만들고, 국민의 시각에서 올바르게 운영했는지 되돌아볼 필요성은 분명히 있다고 봅니다. -6.13지방선거가 있습니다. 전북지역 선거 관련 사무를 총괄하는 전북도선거관리위원장, 선거사범 처분을 하는 법원장으로서 맡은 역할이 크실 것 같습니다. 선거는 우리 가족과 이웃, 우리 아이들을 위한 일꾼을 선출하는 중요한 일입니다.선거관리위원회는 공정하고 투명한 선거관리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아울러 불법 선거중 금품수수 및 매수행위와 공무원 선거관여행위, 흑색선전행위 허위 비방은 3대 범죄로 규정하고 엄정 대응할 예정입니다. 선거사범 재판은 선거전담재판부가 법정기한을 준수해 신속하게 재판할 예정입니다. 불법선거운동으로 당선된 공직자가 공직에 오래 머물러 있는 것은 용납되어서는 안됩니다. 적정한 양형을 선고할 예정입니다. 위법행위가 있다면 엄정 단호하게 대처할 것입니다. -전북도민들에게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법원을 찾아오는 지역 주민들은 각자 말 못할 사연과 아픔, 마음의 짐을 안은 채 절박한 심정으로 법정과 민원 창구의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법원은 그런 이들에게 투명하고 공정하며, 적정하고 충실하고 쉽고 편안한 재판을 할 의무를 갖고 있습니다. 촛불로 확인된 민주공화국은 바로 국민이 주인인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말합니다. 그곳에서 독립된 법원이 공정한 재판을 내리는 것이 요체입니다. 국민의 신뢰가 없는 사법부는 존재 의미가 없습니다. 아직도 국민의 사법에 대한 신뢰는 만족할 수준이 아닙니다. 사법부의 현실과 국민이 여망하는 사법부 사이에는 아직도 틈이 있습니다. 이 틈을 메우는 치열한 노력을 할 것입니다. 도민 여러분께서도 법원의 판단을 존중해 주시고 법원의 변화에 지지와 성원을 보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법원도 도민 여러분의 다양한 목소리를 경청하겠습니다. ● 한승 지법원장은 - 법제용어 한글화 작업 등 민원인 편의 제고에 앞장 한승 법원장은 검찰 공무원인 아버지를 따라 어린시절 전북 곳곳을 옮겨다녔다. 전주 신흥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에 합격했을 때 네가 가고싶은 길을 가라는 아버지의 말에 법관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그는 1999년부터 2년 간 법원행정처 사법정책담당관으로 근무할 당시 민사소송법 전면개정과, 민사집행법 제정 실무작업을 담당했다. 일본식으로 표현된 용어들을 한글로 순화하는 작업이었다. 한글학자들에게 자문을 얻어 될수있는대로 우리말을 사용하고 누구든지 법조문의 뜻을 쉽게 알수 있도록 힘썼다. 사법사상 최초의 전면적 한글화 작업이었다. 그의 노력을 통해 법조문의 자는 사람으로, 공무소는 공공기관으로, 농자나 아자인때는 듣거나 말하는데 장애가 있으면 등으로 쉽게 바뀌었다. 당시 그는 현직판사로는 처음으로 지상파 방송 정기 패널로 출연하기도 했고 각급 법원의 민원실 창구를 민원인 편의 위주로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한 법원장은 선배 판사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고 했다. 후배 판사들에게는 대법원 판례가 맞는 거냐. 우리가 맡고 있는 사건에 적용이 잘 되는 것이냐. 세상이 변화하고 시대가 변화하는데 정말 정답인 것이냐는 질문을 많이 던진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후배 판사들이 실체적 진실이 무엇이고 공정한 재판을 내릴 수 있는 숙고의 자세를 가지도록 도움을 주는데 노력하고 있다. 한 법원장은 법원에 오는 사람은 무거운 돌덩이를 안고 마지막 하소연을 하는 이들이라며 법원은 그들에게 응답해야할 의무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국민들은 좋은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는 것이고 법원은 거기에 대답할 의무가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 법원장은 군사권위주의 정부시절 법원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스스로 반성해야할 부분이 없지 않다면서 법원은 초심으로 돌아가 국민이 준 재판권을 위임받아 행사하는 곳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 기획
  • 백세종
  • 2018.05.13 18:27

전통악기 제작 50년 외길 고수환 명장 "새로운 악기 요구 커질수록 전통 원형 지키는 일 절실해"

공후는 우리나라 고대 현악기 중 하나다. 지금은 묻혀버렸지만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공후가 모두 문헌으로 전해지고 있으니 오랜 세월 활발하게 사용되었던 우리 악기임에 틀림없다. 공후 연주가로는 고조선의 음악가 여옥이 이름을 알렸는데, 그가 남편으로부터 들은 백수광부와 그의 아내 이야기를 듣고 작곡했다는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를 연주한 공후가 문헌상으로는 가장 오래된 현악기로 꼽힌다. 그러나 공후는 오늘에 이르러 살아남지 못했으니 잊혀진 악기다.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시대에 편찬된 음악서적 악학궤범에도 더 이상 그 이름은 없다. 미루어 짐작컨대 공후는 조선시대부터 연주에 사용되지 않은 악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시대를 함께 건너지 못하고 잊혀진 악기 공후를 현대에 복원하겠다고 나섰던 악기장이 있다. 실제로 그는 문헌과 국립국악원에 전시된 공후를 연구해 그 실체를 살려내는데 성공했었다. 덕분에 잊혀진 악기 공후 복원에 국악계의 관심이 모아졌다. 당시 공후 제작으로 특허까지 냈던 악기장은 공후를 오늘의 무대에 살려내는 악기로 완성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의 표현대로라면 10% 부족한 악기로 다시 묻히고 말았다. 악기장 고수환 명장(69)의 이야기다. 열여섯 살에 악기를 만들기 시작해 50년 넘는 세월을 현악기 제작으로만 살아온 그를 만났다. 갈수록 자리가 좁아지는 국악기 제작의 현장을 지키며 다음세대에까지 남을 수 있는 악기를 만드는 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아온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연주자가 내고자 하는 음색을 제대로 내주는 악기가 좋은 악기입니다. 악기장은 어떤 음색이라도 그 빛깔을 연주자가 쉽게 낼 수 있도록 악기를 만들어야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아요. 좋은 악기를 만들기 위해 가야금을 배우기도 했는데 50년이 지난 지금도 부족함이 많습니다. 나무를 고르는 일부터 시작해 악기를 만드는 모든 과정을 직접 해내는 그는 전주시 덕진구 호성동, 온전히 작업만을 위해 마련한 공간에서 하루 여덟 시간 이상 나무를 깎고 줄을 꼬고 걸어내는 악기 제작으로 수십 년을 보내왔지만 아직도 이것이라고 스스로 만족할만한 악기를 갖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의 악기는 음색이 맑고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특성으로 연주자들에게 명기로 꼽힌다. 악기 제작 방식의 원형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음색이 빗겨가는 일을 절대 놓치지 않는 그의 철저한 태도가 바탕이 된 덕분이다. 많은 악기를 만들어내는 일보다 생명력 긴 악기를 만들어내고 싶다는 그의 소망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연주자들이 고수환 가야금 고수환 거문고를 찾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쉬운 길 보다는 어려운 길을 스스로 택한 이 악기장의 선택이 빛나보였다. -작업실에는 날마다 출근하십니까. 직장이니까요.(웃음) 지켜보는 사람은 없어도 아침 9시쯤 나와 오후 6시쯤 퇴근합니다. -전수자는 없나요. 이수자도 있고 전수조교도 있는데 덕진동에 있는 작업장에서 일합니다. 전시공간이 함께 있거든요. 여기에서는 주로 저 혼자 작업합니다. 전수자 중에는 제 둘째 아들도 있습니다. -아드님이 같은 길을 가고 있으니 든든하시겠습니다. 저는 사실 왈칵 반갑지 않았어요. 공부를 웬만큼 하는 편이어서 새로운 분야로 나갔으면 했습니다. 그런데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대학을 그만두더니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이 일을 시작하더라고요. 예전에 애 엄마가 결혼하기 전에 사주를 봤는데 둘째아들이 가야금을 들고 나오더래요. 타고난 운이구나 싶어서 받아들였습니다. 제법 잘 따라주고 있어서 지금은 마음이 편합니다. -악기 제작은 어떻게 시작하셨습니까. 대를 물려온 일인가요. 저의 집안은 대대로 농사를 지었어요. 형제가 5남 3녀인데 먹고 살만큼은 되었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환갑에 낳은 늦둥이여서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어요. 그런데 초등학교 졸업할 무렵에 형들이 사업에 실패하면서 집안이 몰락했죠. 중학교 가는 것을 포기하고 서당에 다니면서 한문공부를 했어요. 어릴 때는 총명하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천자문이나 사자소학 등을 남들보다 빨리 뗐어요. 그럭저럭 지내다가 누나가 전주에 일할 자리를 소개했는데 가야금 거문고를 만드는 곳이었어요. 남갑진 조정삼씨라고 악기장들이 함께 일하는 곳에서 심부름을 하기 시작했죠. -첫 스승들이군요. 그렇죠. 그런데 당시 참 어렵게 살았어요. 그때 저까지 세 사람이 일하면 한 달 내내 일해도 다섯 대 정도 만들었거든요. 구멍 하나까지도 손바닥으로 뚫어야 했으니 참 고단한 일이었어요. 지금은 드릴이라도 있지만 60년대에는 대패 칼 끌 조선톱, 이런 것이 전부였으니까요. 악기가 팔려나가기는 했지만 주문을 해놓고 악기만 갖고 도망가는 사람도 있고, 고정적인 주문이 이어지지 않으니 먹고 살기도 빠듯했던 시절이죠. -그래도 악기 만드는 일만은 탄탄하게 배우셨던 것 같습니다. 그랬던 것 같아요. 제 위로 한두 명 더 있었는데 일단은 악기를 만드는 사람 숫자가 적었어요. 제게 일을 가르쳐주신 분들은 20대였고, 저는 10대였는데, 제가 일을 그만둘까봐 군대 가면 제게 공장을 인계해주겠다는 약속을 했었지요. 월급이랄 것도 없이 명절 때면 약주 한 병 들고 부모님 찾아뵌 것이 전부였지만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몇 년 동안 일하셨습니까. 열아홉 살까지 3년을 배웠어요. 손재주가 있었던지 금세 기술을 익힐 수 있었죠. 그즈음 형편이 좀 나아져 전주 시내로 나오게 되었는데 그때 기술이 쑥쑥 늘었던 것 같아요. 70년대 들어서면서 박정희대통령이 국민교육헌장을 발표했잖아요. 거기에 조상의 얼을 오늘에 되살려라는 부분이 있죠. 그때부터 갑작스럽게 우리 것을 찾기 시작했어요. 우리 악기 만드는 일도 덩달아 바빠지게 되었죠. -좋은 시절이었겠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죠. 그때가 70년대 초반이었는데, 5급 공무원 월급이 2만 5천원, 그런데 저는 4만 5천원을 받았습니다. 갑자기 부자가 된 겁니다.(웃음) 게다가 여기저기서 저를 빼가려는(?) 사람들이 월급을 배로 주겠다고 꼬셨어요. -어떻게 하셨습니까. 제가 그래도 서당 공부를 했잖아요. 공자 말씀을 새기며 살아왔는데 배신은 못하겠더라고요. 제가 나가면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래서 제 밑에 기술자를 붙여 일하면서 가르치고 저는 세 곳을 다니며 일을 했어요. 한 곳에서 4만 5천 원씩 받았으니 벌이가 컸죠. 그 시절 투자란 것을 알았으면 변두리 땅이라도 사놓아서 지금쯤 갑부가 되지 않았을까요.(웃음) -결국은 그렇게 벌었어도 부자가 되지 못했다는 말씀이군요. 집안이 워낙 어려워서 제가 식구들을 건사해야 했거든요. 공자님 말씀에 충효가 들어가 있잖아요. 공자님 말씀이 제 인생을 이렇게 만들었어요.(웃음) 많이 벌었지만 가족이 워낙 많은데다 형들도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조카들까지 껴안게 되었죠. 형편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어려움에 처해있는 가족들을 외면할 수 없더라고요. 어차피 콩나물시루인데 콩하나 더 넣어 같이 물주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덕분에 평생 큰 짐을 지고 살아왔지만 지금 생각하면 좋은 일을 한 것 같아요. -서울에서도 일하셨지 않습니까. 군대 제대하고 전주에 와보니 제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웬만큼 일을 하고 있었어요. 그렇다보니 제가 오히려 부담이 되겠더라고요. 그때 중요무형문화재였던 이영수선생님이 올라오라고 권유하셨어요. 지금 생각하면 악기장 기능의 계보가 이어지는 좋은 기회였죠. 이 선생님 밑에서 일하면서 기술을 거의 완벽하게 익혔어요. 그런데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서울에서 지내는 것보다는 내 고향을 빛내고 싶다는. 좋은 악기를 만드는 명장이 되겠다는 생각을 그때부터 한 것 같아요. -서울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훨씬 많았을 텐데요. 물론 그랬죠. 그런데 이상하게 전주로 돌아오고 싶었어요. 스물일곱 살에 다시 왔는데, 그때부터 제 악기를 찾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어요. 고수환이 만든 악기를 가지려고 전국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고마웠어요. 자긍심을 갖게 되었죠. -그때의 선택에 후회가 없으신 건가요. 솔직히 말하면 약간의 회한은 있습니다. 지금 상황이 워낙 열악하니 그런 생각이 더 드는 것 같아요. 제 뒤로 일을 배웠던 후배들은 서울에 살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거든요. 그래도 제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제가 하는 일로 전주라는 도시가 조금 더 빛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이 클 뿐이죠. -아무래도 서울과 지방은 물량으로도 비교가 되지 않겠네요. 사실 악기 제작 같은 분야는 전주 같은 지방에서 전통을 갖고 이어지는 것이 좋습니다. 악기로 이름을 알리는 도시가 되면 더 좋겠죠.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좋은 악기를 제작해도 시장성에 제약이 있으니 환경이 갈수록 나빠집니다. 모든 것이 서울로 몰리고 있지만 악기 같은 경우는 시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런데도 굳이 서울에서 악기를 구하는 환경이 안타깝습니다. -유통의 문제도 있겠습니다. 물론이죠. 좋은 악기를 제 값 주고 살 수 있는 통로가 얼마든지 있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건강하지 못한 유통과정 때문에 좋은 악기가 양산되지 못하는 환경을 만들기도 하지요. 그렇다고 악기를 만드는 사람이 영업에 매달리는 일도 바람직하지 않고요. -연주자들은 좋은 악기가 생명일 텐데 유통과정이 잘못되어 있으면 가격 면에서도 그렇고 좋은 악기를 갖는 일도 한계가 있겠군요. 국악계를 들여다보면 웃지 못 할 일이 참 많습니다. 악기는 연주자마다 잘 맞는 악기가 있기 마련이지요. 각자 연주의 특성이 있으니까요. 특히 공부하는 과정에 있는 학생들에게는 악기가 중요해요. 그런데 국악 관련 학교의 경우 악기를 단체로 구입하는 경우가 많아요. 예전부터 행해져 온 관행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겁니다. 그런 관행에서 오는 문제점은 그동안 수없이 불거졌었죠. -화제를 좀 돌려보겠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조금은 쉽게 악기를 제작하는 방법이 있을 텐데요. 이를테면 분업이라든가 기계를 활용한다던가. 그렇게는 할 수 없지요. 저는 악기를 만들 때 지금 당장이 아니라 얼마나 오랫동안 변하지 않고 처음의 음색을 유지하느냐를 생각합니다. 그러려면 악기 제작의 과정을 원형으로 지켜내야 해요. 요즘은 분업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저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제가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자존심이죠. 우리는 실도 사다가 직접 꼬아 씁니다. 오동나무와 밤나무도 직접 사다가 건조과정과 숙성과정을 모두 거치지요. 시작부터 완성까지를 내 손으로 직접 하지 않으면 그것은 내가 만든 악기라고 볼 수 없습니다. -선생님 말씀 들으면서 악기장이 앞으로 살아남는 직업이 될 수 있을까 걱정이 됩니다. 특히 음악이 변하는 시대에서 개량악기나 새로운 악기가 계속 만들어지다 보면 손으로만이 아니라 기계가 악기를 만드는 시기가 올 것도 같은데요. 실제로 서울 쪽에서는 기계가 악기를 만듭니다. 악기는 원판을 깎아 만들어야 하는데 프레스로 눌러서 대량 양산을 하지요. 그런 악기는 소리부터 다릅니다. 금세 변하죠. 처음에는 모르지만 1년을 못갑니다. 값이 싼 악기를 선호하니 이제는 중국에서 만들어온다고 하더군요. 전통악기만큼은 이런 상황을 막아줬으면 좋겠어요. -개량악기 쪽은 관심이 없나요. 국악의 영역이 넓어지면서 악기의 변화가 요구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전통악기로는 연주가 한계가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도 시대에 따라 악기가 변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매력을 갖지 못하는 악기는 창고에 묻히게 될 테니까요. 그러나 그런 새로운 악기에 대한 요구가 높아질수록 전통악기의 원형을 지키는 일은 더 절실해집니다. 변화는 기본이 제대로 되어 있어야 의미와 가치가 있으니까요. 인터뷰는 예상보다 길었다. 갈수록 인간의 손을 대체할 수 있는 기계와 첨단 과학의 기능이 앞세워지고 있는 시대. 우리 음악의 온전한 음의 빛깔을 지키는 악기를 만들기 위해 아직도 어느 한 부분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손으로 모든 공정으로 수행해내는 그의 철학은 변하지 않았다. 손의 가치를 다시 깨닫게 하는 명장의 삶이 반갑다. ● 고수환 명장은 - 분업기계 힘 빌리지 않고 전 과정 스스로 만드는 원칙 고수 악기장 고수환 명장은 정읍이 고향이다. 5남 3녀 중 늦둥이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진학 대신 서당을 다니며 학문을 익혔다. 어린 시절, 총명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그는 천자문과 사자소학, 동문선습, 격몽요결 등을 떼면서 자연 이치에 눈을 떴다. 그때 익힌 고전은 그의 반듯한 삶을 지키는 결이 되었다. 갑자기 몰락한 집안형편으로 열여섯 살 어린 나이에 전주로 나와 악기 제작을 하는 공방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전주가 제 2의 고향이 된 것은 그 덕분이다. 그때부터 군대 입대로 떠나있던 시절을 빼고는 온전히 악기 제작하는 일로만 살아왔다.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에 이르는 동안 그의 이름은 악기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악기를 만드는 사람들의 숫자가 적어서이기도 했지만 그의 손재주가 남달랐던 덕분이다. 전주에서 활동했던 남갑진 조정삼씨가 그의 첫 스승들이라면 기술을 완성하고 기능의 계보를 잇게 해준 스승은 중요무형문화재인 이영수 명장이다. 이영수 명장은 그를 서울로 불러 올려 현악기 제작 기능을 완성하게 해주었다. 스물아홉 살 되던 해, 그는 전주로 다시 돌아왔다. 같은 일을 해도 전주를 빛나게 하는 역할을 하고 싶었다. 시대를 건너는 명기를 만드는 명장이 되겠다는 꿈이 귀향을 부추겼다.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를 건너 90년대까지 그의 삶은 남부럽지 않았다. 이른바 전성기였다.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전국 각지에서 고수환의 악기를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던 까닭이다. 그때 안았던 경제적 풍요로움은 그 이후 이어진 재정적 결핍을 메워주는 기반이 되었다. 일을 배우기 시작해 지금까지 그는 악기 만드는 전 과정을 자신의 손안에서 해낸다. 분업이나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그 원칙을 지켜온 덕분에 그의 악기는 좋은 음색과 쉽게 변하지 않는 생명력을 갖게 되었다. 내로라하는 연주자들이 고수환의 악기를 하나쯤은 꼭 갖고 있는 이유다. 90년대 말, 가장 오래된 우리의 현악기인 공후복원으로 화제를 모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완성시키지 못한 공후 복원은 그에게 상처로 남았다. 마흔 일곱 살에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가야금 악기장)로 지정되었으며 전승공예연구회를 만들어 전통 기능 분야에 몸담고 있는 장인들의 기능을 잇기 위한 활동을 주도해왔다. 전라북도무형문화재기능보존협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전주국악기전수관을 운영, 후대에도 남을 수 있는 악기 제작을 위해 연구하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 기획
  • 김은정
  • 2018.05.10 18:59

[문화&공감 2018 시민기자가 뛴다] 남원 '청년문화협동조합 놀자' - 남원 사는 청년들 "우린 문화로 놀아요"

바야흐로 청년공화국 시대이다. (많은 기관에서 청년의 나이를 만 39세 미만으로 정하고 있다) 중앙정부의 기조(基調)에 따라 모든 지자체에서는 청년 일자리 창출을 위해 노력하고, 어떠한 유무형의 지원이라도 아끼지 않을 태세이다. 선거를 앞두고는 대부분의 후보자들이 갖가지 청년 정책을 내놓으며 청년 표심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 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필자는 청년의 나이가 지난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사실 서울이라는 거대한 인구 집합소에서 거주할 때에는 스스로가 청년이라는 인식이 없었다. 죽마고우들이 같이 나이를 먹고, 또래 집단들의 모임이 무수히 많다보니 딱히 청년 문제나 일자리 등에 큰 관심이 없었던 듯하다. 하지만 인구 3만의 소읍인 순창에 정착해 살아가다 보니 주변에 이야기를 나눌만한 또래들이 드물다. 재미난 일을 기획하려 해도 도와줄 친구가 전무하다시피 하고 농사나 공무원 이외에는 비슷한 일을 하는 친구를 찾기 힘들 정도로 직업의 다양성이 빈약하다. 2016년에 순창에 정착해 지역으로의 공정여행과 청년 모임을 만들어 가고 있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여러가지 어려움이 많아 문득 비슷한 여건의 다른 지역 청년들의 삶과 네트워크가 궁금해졌다. 남원에서 재미난 일을 기획하는 청년문화협동조합 놀자 를 만났다. 과연 남원에도 청년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어요. 만약에 있다면 그 친구들은 무엇을 하며 지내고 노는지 궁금해서 2016년 5월부터 네트워킹을 위한 정기적인 모임을 만들었어요. 남원 청년문화협동조합의 대표인 서진희씨는 청년을 모으는 것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알음알음 몇몇의 청년들은 그렇게 모여 네트워킹을 만들어 갔다.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혼밥파티도 하고 혼술파티도 하면서 친목을 다지던 그들은 남원 구도심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구도심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기록하고 공유하면서 콘텐츠를 만들어 가던 그들은 남원문화도시 문화예술전문인력 양성프로그램 꾼 사업에 '구도심 시간을 걷다'로 참여했다. 남원시민 누구에게나 열려있던 영상박물관 남원 구도심 시간을 걷다 프로그램은 2017년 4월 24일부터 3개월간 14회차의 교육으로 남원 잊혀져 가는 것들을 아카이빙하며 구도심으로의 소풍을 유도했다. 청년들은 많은 프로젝트들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조직적인 운영체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남원 청년문화협동조합 놀자는 <건축공간연구소 랄라>의 서진희씨가 대표로 조직을 이끌고 <롤링필름>의 영화감독 함경록씨, 디자인을 담당하는 <추냔이네>의 김민화씨, 여행과 사진은 <슈백의 사진일기>의 김다운씨가 이사를 맡는다. 또한 <밀알농장>의 이강영씨가 조합원으로 참여하며 협동조합의 면모를 갖췄다. 2018년 2월 설립된 남원 청년문화협동조합 놀자는 다양한 활동을 통해 지역청년들을 연결하고 세대 간의 교류를 통해 청년을 이해하도록 하며 지역에 청년이 정착할 수 있도록 일하고 즐기고 놀 수 있는 청년문화 창출을 목적으로 한다. 조합이 만들어지고 처음 진행했던 프로젝트는 남원철도 999이다. 구 남원역 옆에 90여 년간 자리를 지켜왔던 역무원 합숙소가 철거 된다는 소식에 건물 철거 전, 마지막을 기억하고 새로운 기억으로 기록하는 철거 전(展) 을 기획했다. 서진희 씨는 일제강점기부터 한 자리에 서있던 합숙소 철거가 안타까웠는데 정작 남원시민들은 건물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고 남원시도 관심을 보이지 않던 것에 화가 났다고 말했다. 단 하루만이라도 남원시민들과 이 공간의 기억을 공유하고 싶어 지역의 예술가들을 모았다. 11명의 참여 작가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만들고 그리고 찍고 표현하며 합숙소의 구석구석을 미술관으로 만들었다. 지난 3월 30일 금요일 하루만 열기로 했던 본 행사는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고 연장 요청까지 이어져 일요일이 돼서야 끝이 났다. 건물을 매입했던 건물주도 덕분에 전시를 관람 후 철거를 결정하지 못하고 고민 중이라 한다. 존폐여부를 지켜 볼 따름이다. 철거전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놀자에서는 남원시 청년문화기획자 아카데미 사업을 진행한다. 대부분의 청년지원 정책은 대상화된 청년을 위한 프로그램이 많아 다양한 개성을 가진 청년들의 이야기에 부합되지 않는 측면이 많고 외부 전문 강사들의 주입적인 교육 보다는 지역의 문제는 스스로 찾아 해결하는 남원만의 청년 문화를 만들어 가자는 게 핵심이다. ▲ 장재영 세계여행가순창 방랑싸롱 대표 올해 말까지 진행되는 본 아카데미는 협업 활동을 함께 할 다양한 청년 자원을 모집하고 인터뷰하는 찾아보고서, 목적을 공유하고 협업 팀도 구축하며 팀별 맞춤 교육이 진행되는 만나보고서, 최종적인 팀별 결과물과 시제품 시연이 목적인 만들어보고서로 나누어져 있다. 활력 넘치게 남원에서 청년 문화를 만들어 가는 서진희 씨는 인터뷰를 하는 내내 바빴다. 대화를 나누던 춘향골시장 내의 2층 사무실은 남원 신협에서 진행했던 공유오피스에 자문을 해주다가 덜컥 운영을 맡아 버렸단다. 청년들을 끌어 들이고 진짜 공유가 이루어지려면 카페와 복합 문화 공간의 필요성을 느껴 공사가 한창인 그곳은 5월에 개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 청년들의 날개를 활짝 펴게 될 다양한 남원 청춘 브랜드들이 기대된다. /장재영 세계여행가순창 방랑싸롱 대표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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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09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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