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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소통 2018 시민기자가 뛴다]학교폭력, 세밀한 접근 필요 - 다양한 피해·가해사례 분석 제도 보완 통해 예방법 모색

서울 고교생 자살, 대구 중학생 자살, 부산 여중생 구타, 서울 숭의초 사건, 전주의 여중생 자살 사건까지 이 사건들의 공통점은 학교폭력에 의한 사건이라는 점이다. 1990년대만 해도 학교폭력은 주로 고등학교 수준에서 발생했지만, 2000년대 이후에는 중학교와 초등학교로 확산되면서 그 심각성을 더해가고 있다. 교육부 자료에 따르면 학교폭력자치위원회가 학교폭력 사안을 심의한 건수는 2013년 1만7749건, 2014년 1만9521건, 2015년 1만9968건, 2016년 2만3678건으로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또한 초중고 학생 360만 명을 대상으로 2017년도에 실시한 학교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초등학교 1만7500명, 중학교 7100명, 고등학교 3500명으로 2만8000여 명의 학생이 학교폭력 피해를 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는 1995년 학교폭력근절 종합대책 발표, 1997년 청소년 보호에 관한 법률 시행 및 학교폭력 추방대책본부 설치, 2001년 학교폭력 국민협의회 발족, 2004년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 시행, 2015년 제3차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 5개년 기본계획을 수립했다. 학교폭력의 심각성을 인지한 정부는 이처럼 학교 폭력 근절을 위한 여러 가지 대책을 내놓고, 매년 학교폭력에 관한 실태조사도 벌이고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 채 학교폭력은 근절되지 않고 있다. 전북의 경우만 해도 해마다 도내에서 500여 건 이상의 학교폭력이 발생하고 있다. 2015년 522건, 2016년 589건, 2017년에는 584건으로 3년 동안 1695건의 학교폭력이 발생했다. 이 기간에 피해 학생 수는 2600여 명에 이르고, 가해 학생 수는 2900여 명에 달한다. 학교폭력자치위원회에서 심의되지 않고 암묵적으로 처리되는 학교폭력까지 포함하면 그 숫자는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학교폭력이 발생하는 것도 큰 문제이지만 학교폭력을 인지하고도 그 처리가 미흡하거나, 제도나 규정에 의한 제한적 조치로 더 심각한 상황을 초래하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전주지역 여중생 자살 지난해 도내 한 중학교의 여학생이 학교폭력으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있었다. 학교가 뒤늦게나마 학교폭력을 인지했지만, 당시 피해 학생 측이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학교폭력위원회가 열리지 않았다. 당시 피해 학생이 가해 학생들의 보복이 두려웠고 징벌보다는 그들을 교화시키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학교 관계자와 학교전담경찰관 등을 만나 사과하는 자리로 마무리지으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사과의 자리를 통해 진심 어린 사과도 받지 못했고, 피해 학생은 자신의 왼쪽 손목을 긋는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 병원으로 옮겨진 피해 학생은 몇 주 뒤 퇴원해 다시 학교에 갔지만 그 후 또 학교폭력이 발생했고, 피해 학생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가해 학생들은 유족의 요청으로 뒤늦게서야 열린 학교폭력위원회에 회부돼 징계를 받았다. 학교현장에서는 학교폭력과 관련한 모든 사안이 학교폭력자치위원회 회부에 따른 처벌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 경우는 학교를 포함한 주변 모두가 피해 학생의 학교폭력을 인지하고 있었고, 피해 학생이 자해까지 시도한 상황에서 극단적인 결과를 막을 수 없었다. 또래 아이들과의 관계의 중요성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청소년 시절의 경우 이런 상황은 제3자인 성인이 생각하는 것 이상의 삶의 무게로 다가올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학교폭력이 발생했을 때는, 그것을 기필코 해결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고 세밀한 접근이 필요한 이유이다. △무주의 중학교, 반복되는 학교폭력 지난 3월 무주의 한 중학교에서 학교폭력이 발생했다. 이 가해 학생의 학교폭력은 처음이 아니다. 학교폭력으로 강제전학을 당했고, 세 번째 학교에서 또다시 폭력이 발생한 것. 가해 학생은 일정 기간 출석정지 조치를 받았고, 해당 교육지원청에서는 학교와 지역사회 요구를 반영해 관외 전학을 요청했다. 하지만 관내 전학이 원칙인 상황이어서 교육청에서는 교육부에 유권해석을 의뢰해 해당 지역의 학교장, 교육장 등의 동의와 함께 학부모 동의가 있으면 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이 학생의 경우 부모의 동의를 받기도 쉽지 않은 상황으로, 현재 해당 학생은 결석을 반복하며 피해 학생과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다. 정부는 지난 2004년 피해 학생의 보호, 가해 학생의 선도교육 및 피해 학생과 가해 학생 간의 분쟁조정을 통해 학생의 인권을 보호하고 학생을 건전한 사회구성원으로 육성함을 목적으로 하는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을 시행했다. 이 법률에는 피해 학생에 대한 보호조치로써 심리상담 및 조언, 일시 보호, 치료 및 치료를 위한 요양, 학급교체, 그 밖에 피해 학생을 위해 필요한 조치가 제시돼 있다. 그리고 가해 학생에 대한 조치로는 피해 학생에 대한 서면 사과부터 전학, 퇴학처분의 조치를 취하도록 돼 있다. 의무교육의 대상인 중학생의 경우는 법률의 절차에 따라 강제전학이 가해학생에게 취할 수 있는 가장 큰 징계이다. 강제전학 조치는 가해 학생과 피해 학생을 분리해 2차 피해를 차단하려는 취지이다. 하지만 가해 학생에 대한 효과적인 치료나 선도 조치가 선행되지 않는 상황에서의 강제전학 조치는 또 다른 피해자를 양산할 수 있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해당 교육지원청 관계자는 가해 학생에 대한 다양한 상담과 치료, 대안학교로의 전학 조치 등을 시도했으나 당사자나 학부모가 거부할 경우 강제할 방법이 없는 한계가 있다고 토로했다. 가해 학생이 반복적인 학교폭력을 저지르며 전학을 다니는 동안 학교현장과 교육 당국은 이 학생의 선도와 교육을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는지, 혹시 자신들도 모르게 문제아라는 낙인을 찍은 것은 아닌지 뒤돌아봐야 한다. △학교폭력 근본적 예방 대책 필요한 시점 박연수 전북교육자치시민연대 사무국장 학교폭력은 예방할 수 있으면 가장 효과적이다. 그런데도 학교폭력이 발생했을 경우 빠른 조치를 통해 피해 학생을 보호하고, 가해 학생이 더 이상 폭력 행위를 저지르지 않도록 선도교육해 신속히 교실로 복귀토록 하는 접근이 필요하다. 학교폭력법에 따른 일련의 조치와 절차들이 학생의 인권을 보호하고, 학생을 건전한 사회구성원으로 육성하기 위한 목적 실현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법에 따라 정해진 보고와 조치 절차를 따름으로써 학교폭력에 대한 처리의 형식적 책임을 다했다는 면피 수단이 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또한, 현재의 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갈수록 다양화되는 학교폭력의 사례들이 모두 다뤄질 수 있는지 의문이다.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전국적으로 여러 정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모든 분야, 어느 하나 소홀히 할 부분이 없다. 하지만 학교폭력의 경우는 한창 예민한 시기의 아이들에게는 평생 커다란 상처로 남을 수 있기 때문에 보다 더 신중하고 적극적인 정책들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학교에서는 학생관리에 보다 심혈을 기울이고, 교육청은 그런 학교를 지원하고, 교육부와 정부는 보다 나은 정책을 통해 학교폭력 예방 및 사후대책에 대한 커다란 틀을 제공해야 할 것이다. 또한, 더욱 세밀하고 다양한 사례관리와 제도보안을 통해 어느 하나의 학교폭력 사안도 놓치지 않겠다는 태도로 접근해야 한다. 학교폭력은 피해를 보는 당사자만의 문제도, 가해자만의 문제도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생각으로 우리 아이들이 더욱 건강하고 안전한 교육환경 속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모두가 머리를 맞대야 한다. /박연수 전북교육자치시민연대 사무국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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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08 19:47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32.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땅의 힘 - 산 많은 진안·장수, 18·19세기 조선시대 최상품 담배 재배지 명성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 아주 먼 옛날 옛적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단골 구절이다. 어린 시절 할머니가 으레 시작하는 그 말로 옛날이야기 들려주시면 재미있었지만, 호랑이가 진짜 담배를 먹었는지 피웠는지가 늘 궁금했다. 아주 오래전 짐작도 할 수 없는 옛날 이야기란 의미를 담아 호랑이 담배 피우던 이야기로 시작되었다고도 하고, 담배가 유행인 시대에 남녀노소를 따지지 않고 담배를 즐기니 호랑이도 담배를 피운다 할 그 시절을 의미했다고도 하며, 전북지역을 중심으로 구전된 효자 황팔도란 담배 피우는 호랑이로 변신한 효자 이야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호랑이 변신에 관한 이야기는 중국 문헌에도 많이 수록된 이야기로 당나라의 장위가 엮은 『선실지(宣室志)』에도 등장한다. 중국에서 호랑이의 변신하는 이야기에 대한 이유가 아무 설명 없이 도교적 느낌이 강한데 반해, 우리나라의 호랑이 변신 이야기는 효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변신설화인 효자 황팔도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어머니 병환을 위해 스님이 일러준 비법에 따라 주문을 외워 호랑이로 변신해 황구를 잡아 어머니의 병구완을 했던 효자가 황팔도이다. 비책을 보며 밤에 몰래 나가 호랑이로 변하는 남편을 무섭고 못마땅하게 여긴 아내가 비책을 불태워 버려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화가 난 황팔도가 아내를 해치고 호랑이 모습으로 다녔다. 그 호랑이를 두려워 한 사람들이 궁리를 내었고 가까이 간 어릴 적 친구인 포수를 만나자 호랑이가 친구에게 담배를 얻어 피우며 신세 한탄을 했다는 이야기이다. 한 번쯤 들어봄직한 호랑이 이야기도 그렇지만, 전북 일대에 호랑이 담배 피우는 이야기가 구전된 이유 중의 하나는 진안과 장수가 조선 최고의 담배 산지로 유명하니 담배 피우는 이야기가 섞여 전북과 충남 일대까지 퍼져나갔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담배 도입 시기를 살펴보면 그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기란 것이 생각했던 것보다 아주 오랜 옛날이 아닌 빨라야 16세기나 17세기 경 임을 알 수 있다. 연초, 남령초, 남초, 담바고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 담배의 유입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임진년(1592)이나 광해군 때인 16081618년 왜초(倭草)란 이름으로 일본에서 들어왔거나, 중국을 내왕하던 사람들에 의하여 서초(西草)로 도입된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15년(1623)의 기록을 보면 동래 왜관에서 화재가 발생해 80칸을 모두 태웠다.라고 나와 있는데, 화재 원인에 대해 실록의 사관은 왜인이 담배를 즐겨 피우므로 떨어진 담뱃불로 화재가 일어난 듯하다라고 진단하고 있다. 또한 <인조실록>에서는 담배가 우리나라에 도입된 해를 병진년(1616년)부터로 처음에는 피우는 사람이 많지 않다가 신유년(1621)부터는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어 손님을 대할 때면 술과 차 대신 담배를 내놓을 만큼 급속하게 확산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 표류해 와 당시 생활상을 기록한 하멜의 표류기에도 현재 그들 사이에는 담배가 매우 성행하여 어린아이들까지도 4, 5세부터 담배를 배우기 시작하고, 남녀 간에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고 기록되어 있다. 담배가 유행함에 따라 재배지에 대한 관심도 많았는데, 당시 최상품의 담배 생산지로는 지금의 전북 진안과 장수, 그리고 평안도 지방을 꼽았다.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에서도 진안이 담배의 명산지로 나온다. 진안은 마이산 밑에 있는데 땅이 담배 가꾸기에 알맞다. 진안 경계 안이라면 비록 높은 산꼭대기에 심어도 무성하게 자라 많은 주민이 이것을 업으로 삼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영향을 받은 조선 후기 지도를 보면 진안지역에 남초(南草)라는 두 글자가 함께 적혀 있다. 지도에 특별히 특산물을 표시한 것으로 보아 진안을 대표하는 지역의 상징물이 남초로 불린 담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산지가 많아 벼농사가 수월치 않았던 진안과 장수에서는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담배를 집중적으로 재배하였고, 호랑이 담배 피우는 일화 및 진안 친구 망한 친구란 속어 등 담배에 얽힌 일화가 진안 지역 담배 재배의 역사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문헌뿐만 아니라 그림에서도 담배의 유행을 확인해 볼 수 있다. 담배 썰기는 김홍도가 조선시대의 갖가지 풍속 장면을 종합한 화첩인 <단원풍속도첩>에 실린 그림 중 하나다. 이 그림에서도 볼 수 있듯이, 조선시대에는 담배가 널리 보급되어 서민들도 즐겨 피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신윤복의 풍속화에도 긴 담뱃대를 문 기생과 양반들이 종종 등장할 만큼 담배가 애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서당에서는 훈장과 학도가 맞담배를 피웠다는 기록도 남아있으며, 조정의 공신들도 마찬가지여서 조회를 하는 정전이 담배 연기로 가득했다고 한다. 광해군은 이에 분노해서 자신의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그 이유로 임금 앞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되었고, 이것이 민간으로 퍼져 어른 앞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이 예의로 여겨졌다는 설이 있다. 당시 담배의 유행은 편두통, 배앓이뿐만이 아니라 매독에도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민간요법에서 만병통치약으로 쓰였던 까닭도 있다. 박세당은 담배처럼 귀한 약초가 세상에 있는 줄은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라 했으며, 박지원은 <양반전>에 식후에 담배를 피우면 위가 편안해지고, 새벽에 입안이 텁텁할 때 피우면 씻은 듯 가신다. 걱정근심이 많을 때 피우면 술을 마신 듯 가슴이 씻은 듯하다. 과음으로 간에 열이 날 때 피우면 답답한 폐(肺)가 풀리고, 시구(詩句)가 생각나지 않을 때 피우면 연기에 따라 시(詩)가 절로 나온다. 뒷간에 앉아 피우면 똥 냄새를 없애준다고 극찬했다. 반대로 <인조실록>에서 담배는 요망한 풀로써 요초(妖草)라 등장한다. 담배 뇌물로 벼슬을 샀다가 파직되는 사례도 있었다. 담배가 조선 사회를 병들게 한다고 한탄했고, 담배의 경작으로 농토가 줄어 담배 경작을 법으로 제한해 달라고 상소한 기록이 <정조실록>에 남겨져 있다. 그러나 애연가인 정조는 그것은 각 지방의 감사에게 달린 일이라고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고 여러 가지 식물 중에 이롭고 유익한 것으로는 남령초만 한 것이 없다. 민생에 이용되는 것으로 이만큼 덕이 있고 공이 큰 것이 어디 있겠느냐?라고 했으며 책문의 시제로 남령초(南靈草)를 내걸었을 정도로 담배를 즐겼다. 그러한 연유인지 연초가란 제목으로 운을 띠우며 시를 남긴 기록이 많이 남아있고 애연가였던 정약용도 다산시문집에 담배(煙)에 관한 시구를 남겨 놓았다. 가만히 빨아들이면 향기가 물씬하고 / 슬그머니 내뿜으면 실이 되어 간들간들 차도 좋고 술도 좋지만 새로 나온 담배가 귀양살이하는 사람에게 제일 친한 물건이라고 표현했으며, 정약용은 담뱃대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머금게 할 뿐이고, 사람들에게 먹힘을 당하지는 않는다.란 의미심장한 글로 담배를 표현하였다. 시대가 흘러 300여 년간 자유 경작을 했던 담배 재배도 1921년부터 국가에서 관장하는 전매제도로 바뀌었다. 조선 제일의 담배로 유명했던 진안의 담배밭은 이제 인삼을 주로 재배하게 되었고 장수의 담배밭은 사과밭으로 바뀌었다. 땅의 힘은 세월을 품고 우리를 올곧게 서게 한다. 험지를 새로운 작물의 재배로 지혜롭게 살았던 진안의 담배 이야기를 써 내려간 여태명 선생의 글에서도 그 땅의 힘이 느껴진다. 진안과 함께 최상품 담배 재배지로 이름을 알린 평안도의 담배밭은 그대로 일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세상이 달라져 가고 있지만, 평안도 담배의 안부는 애연가로 알려진 북한 국무위원장인 김정은의 담배 피우는 모습에서 엿보고, 남편의 건강을 염려하는 리설주 여사의 마음을 보며 사람살이 매한가지 임을 새삼 느끼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평화와 번영을 기원하며 함께 심은 식수 표지석에 진안 출신 여태명 선생의 글씨가 굳게 새겨졌다. 지금의 다이내믹하게 전개되는 우리 민족의 일들을 아주 먼 훗날 볼적에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자랑스럽고 멋진 역사로 아로 새겨지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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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2018.05.03 21:03

곽병선 제 8대 군산대학교 총장 "4차 산업혁명이 요구하는 창의적 인재 기르는데 집중"

“대학의 개념이 급변하고 있지만 현재의 대학은 전통적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변화하는 대학을 만들겠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곽병선 제8대 군산대학교 총장은 유연한 교과과정을 운영하고 다양한 학기제를 도입하는 등 변화에 수동적으로 끌려가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대응하겠다고 다짐했다. ‘따듯한 천원의 밥상’ 이란 공약 이행을 시작으로 캠퍼스에 신선함을 몰고 온 곽 총장을 만나 군산대학교의 발전 방향 등을 들어봤다. -4차 산업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도전과 변화를 요구받고 있는 데 어떻게 대학을 운영할 계획인지. “대학을 둘러싼 사회 변화와 올해부터 구체적으로 가시화되기 시작한 입학자원 감소 등으로 대학은 가장 어려운 위기에 봉착해있습니다. 또한 MOOC(Massive Open Online Courses:대규모 공개 온라인 강좌)의 대중화로 대학의 외연적 경계가 조만간 사라질 것입니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 기회로 삼기 위해서는 기존의 사고방식과 같은 패턴으로 접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간의 대학 교육은 공급자 중심의 일방적 교육이었지만 사회가 점차 소통을 통해 쌍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 흐름에서 도태되지 않으려면 대학도 수요자인 학생 중심의 교육을 해야 합니다. 앞으로 학생들이 4차 산업 혁명이 요구하는 창의적 인재로 성장할 수 있는 최적의 교육 환경을 구축하는 데 집중하겠습니다.” -입학 자원의 감소는 대학을 존폐위기로 몰고 갈 수 있는데 이에 대한 대응 방안은. “올해 정부는 2주기(2017~2019) 대학기본 역량진단 결과에 따라 전국 대학교의 정원을 5만 명 감축할 목표를 세웠습니다. 현재 각 대학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는 6월 발표 예정인 2주기 대학기본역량진단 평가결과일 것입니다. 대학정원이 감축되면 대학의 수 역시 감소할 것으로 새로운 교육환경 구축이 요구되고 대학 지형에 많은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벌써부터 일부 경쟁력이 부족한 대학들이 도태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군산대는 환서해안의 중심대학이고 군산국가산업단지와 새만금자유경제지역 최인접 대학이라는 지리적 이점이 있습니다. 현재 새만금 캠퍼스에 융합 연계학과 중심의 산학융합공과대학도 설립돼 있습니다. 또한 군산대는 ICT분야, 해양바이오, 미래자동차, 3D프린틴 등 미래산업구조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분야의 역량이 우수한 편입니다. 최근에는 인문산학협력센터를 설립했고, 이를 중심으로 인문학과 IT 등 미래산업과 연계된 교육과 창업을 활성화하기 위한 기반이 닦여 있는 만큼 이를 활용하면 위기를 도약의 기회로 삼을 수 있는 여력이 충분하다고 봅니다.” -그동안 국내 대학은 ‘취업을 위한 준비소’ 역할을 해 왔지만 사실상 학생들의 취업은 그다지 쉽지 않았다. 때문에 ‘대학무용론’까지 대두되고 있는데 대응 방안은 무엇이지. “그동안 대학이 취업률에 의해 서열화되는 현상이 진행돼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역력(地域力)이 약한 지역의 대학은 취업률이 낮아지고, 상위서열에서 밀려나는 경향이 매우 두드러졌습니다. 취업률이 정부의 지원 사업과 연계되다보니 대학마다 생사를 걸고 취업률 높이기에 매달릴 수밖에 없어 ‘대학과 직업 전문학교가 다를 바가 없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대학을 뜻하는 ‘큰 학문’이 사회와 단절된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대학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인큐베이터로 한 개인, 나아가 인류의 미래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는 고등교육기관입니다. 그러한 비전을 견지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적 사고력과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지식보다는 지혜가 충만한 사회가 삶의 질이 높아지고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대학의 실용성만을 강조하다보면, 대학의 깊이가 너무 얕아지고 우리 사회의 깊이 역시 얕아집니다. 건물을 지을 때도 기초가 튼튼해야 오래 갑니다. 그런 면에서 기초학문분야와 인문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합니다. 각 분야가 가지고 있는 특수성을 보호하고 융합과 통섭을 통해 새로운 것을 창조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취업률과 대학 본연의 역할과 가치를 별개의 문제로 생각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런 면을 염두에 두고 재임기간동안 노력하겠습니다.” -군산대학교는 70여년의 역사를 가진 군산 지역의 중심 대학이다. 대학의 지역사회에 대한 역할은. “대학을 보면 한 사회의 미래를 알 수 있습니다. 대학은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수준을 가늠하는 바로미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관관계가 지역대학의 경우 더욱 강합니다. 대학은 그 지역의 랜드마크입니다. 지역대학은 특히 지역사회에 더 큰 책임감을 가져야 하고 지역사회에 대한 건강한 비전과 발전전략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앞으로 군산시와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고 지역발전을 위해 적극 노력하겠습니다. 장기적 비전을 가지고 앞으로의 변화를 예측하며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전략을 짜낼 수 있는 싱크탱크가 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군산대학교가 전국 최고의 대학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대학구성원들과의 소통과 화합이 중요하다. 이에 대한 총장의 생각은. “대학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로 새로운 형태의 대학이 태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강력한 구조개혁이 불가피합니다. 그 과정에서 각자의 입장에 따라 갈등이 증폭되고 희생되는 부분도 있겠지만, 끝까지 소통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공감대를 넓히겠습니다. 최대한 인위적인 급격한 조정을 피하고 구성원들의 입지를 최대한 고려,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사회구조 변화로 날이 갈수록 융합과 소통이 중요해지고 있고, 과거와 같은 일방적인 하방식 변화는 성공 확률이 매우 낮습니다. 쌍방적인 소통을 통해 구성원과 상황에 대한 이해를 공유해 진정한 의미의 변화를 이루어 내겠습니다.” -군산시와 시민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군산대는 도내 중요한 국립대학이자 서해안의 중심대학입니다. 세계 여러 나라를 봐도 지역사회의 격(格)은 그 지역에 있는 대학의 브랜드 가치에 따라 많이 달라집니다. 군산대는 많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고, 많은 부분이 발화되며 급성장하고 있습니다. 작지만 강하고 쟁쟁한 대학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도민들의 더 많은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 곽병선 총장은 회현면 출신 군산 토박이 한국법학회 회장 등 역임 곽병선 총장(59·사회과학대학 법학과 교수)은 회현 출생의 군산 토박이로 군산 동고와 원광대를 졸업했다. 이후 원광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7년 군산대학교 전임강사를 시작으로 군산대 교무처장, 법학연구소 소장, 교수평의회 의장 등으로 활동했고, 한국법학회 회장, 전국국공립대학 교수회 공동의장, 법무부 인권강사, 군산시 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군산지청 형사조정위원회 위원장, 전북 새만금산학융합원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곽 총장의 임기는 2022년 3월 21일까지 4년이다.

  • 기획
  • 문정곤
  • 2018.05.02 19:24

[문화&공감 2018 시민기자가 뛴다] 예술가 완주 한 달 살기 - 마을엔 활력을, 예술가에겐 영감을…'충전'하는 농촌생활

완주군 전역, 마을 곳곳에서 진행될 예술가 완주 한 달 살기가 5월부터 본격 가동된다. 지난해 완주형 레지던시로 주목받았던 파일럿 사업을 수정보완해 올해는 더 많은 예술가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규모를 키웠다. 거주기간을 한 달뿐 아니라 백 일, 열 달로 다양화하고 참가 자격도 크게 완화해 나이 제한을 없애고 인원도 12명에서 올해는 22명 내외로 대폭 확대했다. 지난해 참여했던 작가 대부분은 태어나 완주를 처음 방문했거나, 심지어 완주라는 지명을 들어본 적 없는, 완도가 완주인 줄 아는 작가도 있었다. 그만큼 예술가들에게 완주라는 곳은 관심 밖의 지역이었을 터. 그러나 올해는 사뭇 분위기가 달라졌다. 작년의 성과가 입소문 나면서 참여 작가들의 층위가 다양해졌고 미리 거주하고 싶은 마을을 조사해 신청하는 열혈 지원자들도 생겼다. 대한민국 예술지도 안에서 변방 중의 변방인 완주로 예술가들의 눈길과 발길을 이끌고 있는 건 무엇일까? 충전과 영감 두 개의 키워드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참여 작가들의 지원 신청서에는 힐링, 쉼, 영감, 창작, 자극, 집중 등의 단어가 중첩되어 나타난다. 이는 오랜 창작활동과 생업활동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시켜줄 충전과 낯선 곳에 나를 던짐으로써 새롭게 자극받는 예술적 영감을 위해 완주 한 달 살기를 선택한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1990년대 후반 들어 시작된 국내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예술가들이 특정 공간에 거주하며 초청기관 및 단체로부터 일정 부분 창작 비용을 지원받고, 창작활동과 예술가 교류, 오픈 스튜디오, 비평가 매칭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거주기간 동안 작업의 결과물을 전시하는 방식으로 대부분 진행되어 왔다. 그에 비해 완주 한 달 살기는 기존의 레지던시와는 확연히 다른 방식으로 완주군 마을 내 빈 집, 빈 방, 빈 창고 등 유휴공간을 주민들로부터 확보해 작가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완주는 농촌형과 도시형 주거양식이 혼재된 도농복합지역이다. 인구의 50%가 완주군의 면적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촌형 마을에 넓게 분포되어 있고, 또 다른 인구 50%는 이서혁신도시 및 봉동읍 둔산리 등 일부 도시형 주거지역에 밀집해 있다. 군 단위 지자체로는 드물게 인구가 줄지 않고 있는, 아니 되려 인구가 조금씩 증가하고 있는 지역이기는 하지만, 급격한 고령화와 저출산의 여파는 완주군 역시 피해 갈 수 없는 직격탄일 수밖에 없다. 농촌 지역으로 깊이 들어가면 비어있는 집들과 기능을 멈춘 공동 작업장들, 노인 1인 가구 증가로 늘어나는 빈 방들을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다. 도시는 원도심 공동화가 고민이듯 농촌은 마을의 공동화가 점점 큰 숙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완주 한 달 살기는 레지던시 사업을 위해 새로운 건물을 짓지 않고 농촌마을에 넘쳐나는 빈 집과 빈 방, 빈 창고들을 활용해 예술가의 방과 예술가의 작업실로 제공함으로써 주민은 예술을 통한 마을활력과 마을재생의 불씨를 키우고, 예술가는 아름다운 완주의 자연환경과 마을 읽기를 통해 충전과 창작의 영감을 얻는 것을 사업의 목적으로 하고 있다. ▲ 송은정 문화기획가완주문화재단 사무국장 이제 2년째에 불과하지만, 그 목적은 충실하게 달성해가고 있는 것 같다. 지난해 처음 이 사업을 경험한 마을들이 올해도 참여 신청을 하고 있고, 한걸음 더 나가 마을사업과 연계할 수 있는 예술 장르를 적극적으로 요청하고 있다. 참여 작가들도 회화, 사진, 음악, 연극, 무용, 문학, 영상, 공예, 설치미술, 문화기획 등 10개 분야로 다양해짐에 따라 지난해 용진, 봉동을 포함해 8개 읍면(13곳)으로 시작한 마을 거주 공간을 올해는 14개 읍면으로 확대하고, 입주기간이 한 달, 백 일, 열 달로 다양해진 만큼 주민들과의 커뮤니티 프로그램도 마을별 실정에 맞게 세심하게 추진할 계획이다. 무엇보다도 완주 한 달 살기에 참여한 작가들이 사업 중 또는 사업 이후 지역과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활동으로 연결되고 그렇게 축적된 역량이 지역 예술계를 풍성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될 수 있도록 구조화하는데 집중할 예정이다. 지역 예술인들과의 교류와 비평가 매칭 프로그램 등을 보완하고 복합문화지구 누에와 연계해 열 달 살기 참여 작가들은 창작 결과물을 올 10월 예정된 누에홀 개관전에 전시할 수 있도록 기획 중이다. 또한 완주로 문화귀향하는 예술인들이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지원정책과 조례 등을 제정해 지속성을 확보하는 일도 관련 분야 전문가들과 협의해 추진할 계획이다. "마을 주민들 앞 연주따뜻한 박수 기억해" ▲ 운주면 용계원마을 음악인 임자연 씨 - 운주면 용계원마을 음악인 임자연 씨 곡을 쓰고 피아노를 연주하고 공연을 만들기도 한다. 지난해 벌려놓은 이런저런 작업들로 지쳐가고 있을 때, 완주 한 달 살기라는 프로그램을 알게 되었다. 당시 미술관에서 기획 일까지 함께 하고 있을 때라 참여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완주에서의 한 달이 누구보다도 절실했던 터라 양해를 구하고 신청하게 되었다. 운 좋게 아름다운 고산면 안남마을 빨간 대문 집에 머무르게 되었고 마을 입구 가득 서있는 느티나무들, 설레는 공기 내음, 집 외벽에 붙어있는 마을 주민들의 사진까지 그림같이 다정한 동네였다. 마을 주민들 앞에서 연주했을 때의 따뜻하고 누구보다도 큰 박수의 힘으로 남은 시간을 달려갈 수 있는 힘을 얻었고 그 따뜻한 기억을 가지고 올해 다시 참여하게 되었다. 새로운 마을에서 또 다른 예술적 에너지를 주고받는 멋진 경험을 기대하고 있다. "숨어있는 세계를 끄집어내는 아지트 기대" ▲ 동상면 황조리마을 시인 송과니 씨 - 동상면 황조리마을 시인 송과니 씨 예술은 현장 속에 있다. 그래서 끊임없이 낯선 곳을 찾아다니는 것이다. 예술이란 것, 창작이란 행위는 숨어있는 세계를 끄집어내는 작업이고, 완주가 그런 아지트가 되어 줄 것이라 기대하고 이렇게 승차했다. 내가 머무는 마을의 풍경과 주민들 삶의 모습들이 창작활동에 좋은 영감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 얼마 전 마을 주민들이 마을에 예술가가 들어왔다며 환영의 자리를 마련해주셨다. 나를 포함해 8명이 함께했다. 푸짐한 안주와 막걸리, 색소폰 연주까지 곁들인 부러울 것 없는 자리였다. 근자에 이렇게 많은, 8명이나 되는, 주민들이 모인건 오랜만이라며 다들 고무되어 있었다. 입주한지 2주 남짓한 시간이 흘렀고 3편의 시를 썼다. 편안한 어느 때쯤, 마을 어르신들에게 농사만 짓지 마시고 인자 시(詩)도 함께 지어보자고 청해 볼 요량이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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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02 19:24

[참여&소통 2018 시민기자가 뛴다] 플라스틱의 습격 - 간편함 버리고 불편함 택하면 지구가 살아요

△쓰레기 더미에서 건져낸 불편한 진실들 올해도 4월은 잔인한 달이었다. 누구보다 환경부에게는 그랬다. 지난 겨울부터 봄까지 중국발 미세먼지와 황사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했던 장관은 또 다시 ‘쓰레기 대란’의 습격을 받아 고군분투해야 했다. 손톱 밑의 가시처럼, 일상의 불편은 매년 4월이면 떠올리던 모든 사회적 이슈들을 압도했다. 4.3 제주항쟁과 4.19 혁명, 그리고 6월 지방선거를 앞둔 정치권의 동향이나 지난 4년간 국민들을 분노케 했던 세월호의 진실 공방조차도 뒷전으로 밀려난 느낌이다. 발 빠른 기자들이 폐비닐 수거가 중단된 수도권지역 아파트를 취재하고, 혼란에 빠진 주민들을 인터뷰하고, 각계 기관의 통계자료와 전문가들의 의견을 숨 막히게 전송했다. 책임공방도 이어졌다. 가장 먼저 여론의 표적이 된 것은 중국의 폐비닐 수입금지 조치에 대응시기를 놓친 환경부였지만, 곧이어 생활쓰레기 수거 책임이 있는 수도권 지역 지자체로 불씨가 옮겨갔다. 오래 묵은 쓰레기정책도 도마에 올랐다.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 조명래 원장에 따르면, 분리수거 된 폐비닐 중 약 90%가 고형연료(Solid Refused Fuel, SRF)로 재활용된다. 소각이 가능한 폐기물을 땔감으로 재활용하는 사업은 이미 참여정부 때 시작되어 이명박 정부를 거치면서 녹색성장의 유망산업으로 성장했다. 지난 해 말 기준으로 263곳의 SRF 사업체가 연간 135만 톤을 생산해 열병합발전소 등 152개 시설에 연료를 공급하고 있다. 그런데 새 정부 들어서면서 미세먼지 발생 우려로 SRF 규제가 강화돼 사업성이 악화되자 폐비닐의 행로가 막히기 시작했다. 여기에 대중국 수출까지 막히면서 민간업자들이 아예 손을 놓게 된 것이라고 한다. OECD 국가 중 ‘재활용률이 독일에 이어 두 번째’라는 통계치는 허상이었다. 녹색성장의 구호 아래 폐기물을 자원화하는 방안으로 환경문제가 시장논리에 따른 물질순환으로 해결되는 듯 했다. 그러나 가려진 현실에서 플라스틱의 생산과 소비는 늘고 폐기물도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2016년 통계청이 밝힌 한국의 1인당 플라스틱 소비량은 98.2㎏으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한편에서는 폐자원을 활용한 자원화 사업 분야의 국제적 사업전망이 밝아 관련 기술에 대한 관심과 투자를 역설하는 주장이 여전하고, 이번 기회에 쓰레기 관련 정책을 전반적으로 손봐야 건전한 자원순환구조가 가능하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주장과 의견들이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될 이유를 가졌고, 비단 수도권 대도시들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우려가 타당할지라도 우선 당장 지역의 관심사로 주목받지는 못했다. 폐비닐 수거를 거부했던 업체들에 대한 긴급지원으로 급한 불은 껐다지만, 지난달 19일 중국이 추가로 고체쓰레기 32종에 대한 수입중단계획을 발표했고, 지난 20년간 전 세계 쓰레기의 절반 이상을 처리해오던 중국의 정책변화는 지속될 전망이어서 여전히 관계자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플라스틱 과잉시대 한국인은 1인당 420장의 비닐봉지를 쓴다. 하루 평균 1장 정도 수치지만, 유럽의 국가들과 비교해보면 느낌이 달라진다. 핀란드가 4장, 아일랜드는 20장, 환경 선진국으로 알려진 독일은 70장 정도로 집계됐다. 비율로 따져보면 핀란드 국민들보다 100배가 넘는 비닐봉지를 소비하고 있다. 얼핏 5125만 명이 넘는 국민 숫자로 환산해 봐도 약 216억장에 달하는 엄청난 양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플라스틱이 없는 생활을 이미 상상하기 어렵다. 편의점과 마트, 약국과 문구점 등 일상에서 가볍고 질긴 그 편리함의 유혹을 거부하기 쉽지 않다. 오히려 한 해 겨우 4장 정도로 소비하는 핀란드 국민들의 일상이 어떻게 가능할지 의심되기도 한다. 혹자는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를 지나 지금의 시대를 플라스틱의 시대라고 말하기도 한다. 가공성이 뛰어나고 금속보다 가벼우면서도 썩거나 녹슬지 않는 장점 때문에 플라스틱은 사무실의 문구들이나 주방용품에서 반도체의 내장재와 인공장기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일상 깊숙이 파고들었다. 지난 달 초에 세계적 휴양지인 필리핀의 보라카이 섬이 6개월간 전면 폐쇄를 선언했다. 이유는 쓰레기와 하수시설 불량으로 인한 환경오염 때문이었다. 2017년 한 해만도 2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다녀갔고, 한국인만 해도 35만 명 이상이 포함되어 있다. 이미 오래 전부터 곪아왔던 문제가 임계치를 넘어서자 필리핀 정부가 극단의 조치를 선택한 것이다. 뿐만 아니다. 산업혁명의 발상지 영국이 올해 1월 플라스틱 쓰레기를 없애겠다며, 향후 2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최근에는 매년 85억 개씩 버려지는 플라스틱 빨대와 면봉의 판매금지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런가하면 올해 세계 환경의날 행사를 개최하는 인도는 ‘플라스틱 공해 퇴치’를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일회용 플라스틱 생산과 소비 감축을 적극적으로 촉구하고 나섰다. 각 나라마다 부산을 떨고 있지만, 새삼스러운 문제가 아니다. 이미 20년 전인 1997년 북태평양에 남한 면적의 15배가 넘는 거대한 쓰레기 섬이 발견된 적이 있었다. 제7대륙이라고도 불리는 이 섬의 정체는 약 1조 8천억 개가 넘는 플라스틱 쓰레기였다. 조사단은 그 무게를 약 8만 톤으로 추산했고, 500대 정도의 초대형 여객기에 맞먹는 무게라고 밝혔다. 그린피스의 보도는 단순히 충격을 넘어서 위기감과 죄의식으로 우리를 괴롭힌다. △한 번 더 생각하면 서울시가 친환경에 적합하지 않다는 논란을 낳은 아리수 페트병 용기를 교체키로 했다. 페트병의 무게가 환경부 권고기준보다 무겁고 접착제로 라벨을 붙여 재활용이 어렵다는 지적을 받아들인 것이다. 박수를 받을 일이다. 그런데 한 번 더 생각하면, 굳이 수돗물을 페트병에 담아 생산해야 하는지 싶다. 연간 600만병이나 되는 적지 않은 양이다. 미세먼지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면서 경유차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 전기차나 수소차 같은 친환경자동차의 보급을 늘리기 위해 정부가 예산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그런데 한 번 더 생각해보면, 뚜벅이를 고집하는 사람들이나 자전거로 출퇴근 하는 이들에 대한 지원과 배려가 우선이 아닐까 싶다. 지금껏 살아온 관성의 패러다임을 벗어던지지 못하면, 상황을 바꿀 수도 없을뿐더러 문제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놓쳐버리고 만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른다고 말할 수 없다. 집집마다 텀블러와 머그잔, 그리고 에코백이 부족하지 않다. 대한민국 흡연자 수의 몇 배가 될지 가늠조차 어려운 일회용 라이터, 책상위에 쓰이지도 않고 버려지는 볼펜들. 필요를 넘어선 욕망의 과잉, 비록 재활용률이 56%를 웃돌고 있다지만 이것으로 면죄부를 받을 수 있을까. /신진철 전 전북자연환경연수원장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6월 5일은 환경의 날 지난 4월 22일 ‘지구의 날’이었고, 오는 6월 5일은 ‘환경의 날’이다. 1972년 6월,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는 ‘오직 하나뿐인 지구’라는 슬로건으로 세계 113개국 대표들이 참가하여 인간의 경제활동에 의해 발생한 공해, 오염 등의 문제를 범지구적인 차원에서 해결하기 위한「UN 인간환경선언」을 채택했다. ‘유엔환경계획(UNEP)’의 설치가 합의됐고, 환경의 날이 제정되었다. 올해는 인도에서 기념행사가 개최된다. 우리나라는 1996년부터 국가 기념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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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01 19:11

[길 따라 맛 따라] 9. 전주 남부시장 맛집 - 시장에서 조달한 신선한 재료로 만든 소박하고 정겨운 맛

전주 남부시장은 조선시대의 3대 시장으로 불렸을 정도로 번성했다. 과거의 화려한 명성은 사라졌지만 시장 내 곳곳에는 오랜 된 세월만큼이나 명소들이 많다. 미곡거리는 과거 1960년대 70년대 전국의 쌀 시세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번성했던 곳이다. 또한 대를 이어 운영하고 있는 철물점과 가구점, 대나무 및 목제품 상점 등이 남부시장의 연륜을 말해주고 있다. 보물 제308호로 보존되고 있는 풍남문은 남부시장의 상징이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농민군의 숨결과, 3.13만세운동 당시 태극기가 펄럭이었던 역사를 남부시장은 기억하고 있다. 세월호 사건 때 분향소가 차려지고,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외치며 촛불을 밝혔던 곳이기도 하다. 역사의 굴곡이 있을 때마다 남부시장은 이렇게 시민들과 애환을 같이 했다. 그 역사만큼이나 전주 남부시장은 여러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낮과 밤의 모습, 평일과 주말의 풍경이 다르다. 접근로에 따라 아주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무질서 속에 질서가 있다. 오래된 전통시장의 힘이다. 최근 새롭게 단장된 풍남문 광장에서는 각종 문화 공연이 수시로 열리고 있는 등 남부시장은 단순 상거래만이 아닌 문화와 함께 어우러진 복합공간으로 자리하고 있다. 특히 전주 남부시장의 청년몰과 야시장은 쇠락해가던 전통시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으며 전국 전통시장의 모델로 떠올랐다. 시장 내 2층에 마련된 청년몰은 2011년 남부시장 내 빈 공간을 재정비해 독특한 문화를 창출하고 있다. 전국 전통시장 최초로 2014년 문을 연 남부시장 야시장은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 밤을 밝히며 전주 관광객들의 필수코스로 자리 잡았다. 한옥마을의 관광 영역이 남부시장으로 넓히는 데 톡톡히 역할을 했다. 시장이 갖고 있는 큰 자산이 서민들의 먹을거리다. 남부시장 역시 순대콩나물 국밥국수 등 서민들이 한 끼 해결할 수 있는 음식을 중심으로 맛집들이 즐비하다. 한옥마을이 전국적인 관광지로 뜨면서 남부시장 맛집도 덩달아 기세를 올리고 있다. △순자씨 보리밥 줘 전주 남부시장 청년몰에 자리 잡은순자씨 보리밥 줘는 식당 이름부터 정겹다. 흔한 사람 이름에다 보리밥 메뉴, 응석 부리는 어투까지 전통시장에 똑 어울리는 이름이다. 식당 풍경과 음식 차림도 이름과 동떨어지지 않다. 주 메뉴는 보리밥이다. 왜 보리밥인가. 식당에보리의 효능을 큼지막하게 적어놓았다. 성인병과 대장암 예방, 당뇨변비각기병 예방에 좋다는 예찬론을 편다. 보릿고개를 겪으며 쌀밥이 귀했던 시절을 생각하면 별미가 된 보리밥이 새삼스럽다. 이 집 보리밥을 맛있게 먹는 방법이 식당에 걸려 있다. 양푼을 들고 보리밥을 넣은 후 여러 나물과 강된장, 고추장, 참기름을 넣고 맛있게 비벼 드시라고 친절히 안내하고 있다. 비빔밥으로 준비된 재료는 12가지. 무생채, 열무김치, 호박, 시금치, 콩나물, 버섯, 상추, 고사리 등 싱싱한 야채류가 뷔페식으로 준비됐다. 보리밥 역시 셀프며, 무한리필이다. 여기에 계란 프라이가 얹힌다. 시래기 된장국과 동태찌개가 국물로 제공된다. 2명이 1만원으로 보리밥과 다채로운 비빔재료, 찌개까지 이렇게 양껏 호사를 누리는 곳이 시장 속 아니면 찾기 힘들 것 같다. 식재료에는 주인의 정직함이 묻어난다. 모두 남부시장에서 구입한 재료들이다. 보리는 별도 유통과정을 통해 구입한단다. 오랜 연륜과 정성을 담은 음식들이 시골 밥상 느낌을 주면서 향수까지 불러일으킨다. 한옥마을에 관광객들이 몰리고 남부시장 청년몰이 뜨면서 더 유명해졌지만, 청년몰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남부시장의 명물이었다. 19년 전 이곳에 둥지를 튼 청년몰의 터줏대감이다. 집 주인순자씨가 청년몰의 가장 나이 많은 8순을 바라보는청년이다. 주인의 본래 이름은 최영숙씨지만, 딸이 만든 상호명인 순자씨로 통한다. 어머니 성품을 닮아 서글서글한 딸이 식당 일을 거든다. 한 때 새벽 4시부터 문을 열었으나 현재 영업시간은 오전 10시~오후 8시다. 보리밥 5000원, 국수 4000원, 라면 3000원, 깨죽 4000원전화 063)282-2168 △세은이네 국수는 입맛이 없을 때 점심 한 끼를 가볍게 해결할 수 있는 음식이다.후루룩먹다에 어울리는 음식이 국수다. 시장뿐 아니라 웬만한 골목이면 으레 소문난 국수집이 있다. 모악산쪽에옛날국수가, 전주 인후동에이조국수, 덕진동에여만국수, 송천동에손가네바지락칼국수가 이름값을 한다. 전주 한옥마을의 베테랑 칼국수는 관광객들로 문전성시다. 남부시장에도 숨은 국수 맛집이 있다. 노란 간판이 인상적인세은이네다. 10년 넘게 완산경찰서 부근에 있다가 지난해 남문목욕탕 1층으로 자리를 옮겼다. 집 주인이 딸 이름을 간판으로 걸 만큼 음식에 자부심이 담겼다. 질 좋은 멸치와 신선한 채소로 우려낸 진한 육수가 맛의 비결이다. 매일 뽑은 육수를 조금씩 남겨 다음날 끓일 육수의 씨앗으로 삼아 한결 같은 맛을 낸다. 직접 담근 집 간장 또한 음식의 신뢰를 더해준다. 멸치국수 전문이지만, 집밥 같은 백반도 손색이 없다. 호박무침, 멸치고추볶음, 오이소박이, 시금치, 고등어조림 등 몇 개 안 되는 반찬이지만 주인의 손맛과 정성이 듬뿍 들어있다. 청국장아욱국소고기 미역국굴 미역국 등 국내 식당 식단처럼 매일 돌아가며 나온다. 공기 밥이나 국수사리를 추가로 주문할 땐 비용을 따로 받지 않는다. 토요일은 멸치국수만 취급한다. 손님들의 주문에 따라 맞춤형 음식을 제공하기도 한다. 멸치국수 3900원, 백반 6000원전화 063)283-3376 △다올 콩나물국밥 전주 콩나물국밥이 전국적인 음식으로 자리 잡는 데는 남부시장이 큰 역할을 했다. 전국적인 체인점을 갖고 있는 현대옥의 모태도 남부시장이다. 운암콩나물국밥, 엄마손해장국, 그때그집, 대한민국 콩나물국밥, 우정식당 등 남부시장에 자리 잡은 콩나물국밥집 마다 각기 독특한 레시피로최고의 맛집임을 자부한다. 청년몰 입구에 자리 잡은 다올 콩나물 국밥집 역시 미식가들에게 잘 알려진 맛집이다. 현 주인은 현대옥 창업주의 이종 조카다. 옛 명성옥을 운영하던 현대옥 창업주 동생의 딸이 대를 잇고 있다. 전주지방법원 앞에서 영업을 해오다 8년 전에 남부시장에 둥지를 틀었다. 매콤하고 시원한 국물맛을 내는 비결은 남편도 모른단다. 즉석에서 다지고 썬 마늘과 파를 국물에 넣어 입맛을 돋우게 만든다. 열무김치도 일품이다. 갓 데친 오징어, 두 개의 수란, 싱싱한 김이 인상적이다. 집 주인은 관광객들이 그리 반갑지만은 않다고 했다. TV 방송 섭외도 거절한단다. 전주의 고객들을 중심에 둘 때 오래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술을 판매하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콩나물 국밥 6000원, 오징어 4000원전화 063)254-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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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원용
  • 2018.04.30 18:39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정도상 상임이사 "남북의 말과 글 통일 선행돼야 모든 장벽 무너뜨린다"

남북 정상회담을 기점으로 통일된 말과 글의 필요성이 재조명받고 있다. 같지만 어딘지 다른 남과 북의 언어의 장벽을 무너뜨릴 공통된 한글사전의 편찬 작업에도 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남과 북의 말과 글을 사전으로 펴내는 겨레말큰사전 편찬 작업의 중심에 익산의 정도상 작가가 남측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전북일보 칼럼진으로 활동했던 그는 이미 2003년 노무현 정부 때 편찬 작업의 실무 책임자로 활동했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중단됐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겨레말큰사전의 편찬 작업이 북한이 아닌 남측에서 일방적으로 중단시켰다는 것은 새로운 아픈 사실로 다가온다. 그는 남과 북이 같은 언어와 같은 글을 사용할 겨레말큰사전의 편찬 작업이 다시는 중단되는 아픔을 겪지 않기 위해 정치정세와 상관없이 비정치적 학술사업을 꾸준히 할 수 있도록 정부간 합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속도를 높이게 될 겨레말큰사전 편찬 작업을 3년 이내에 마무리 지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는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정도상 상임이사를 전북일보가 만났다. -남북 정상회담을 보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남북 정상회담 이게 끝이 아니라는 부분이 깊게 다가왔습니다. 북이 비핵화에 대한 의지가 크니까 비핵화에 대한 첫 번째 합의를 초보적 수준에서 해낸 것도 큰 성과입니다. 여기서 진행된 합의는 북미회담으로 넘어가는 징검다리니까 한반도 비핵화는 초보적 수준에서 합의가 되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북한만 비핵화가 아니고 한반도 비핵화라는 말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한반도 남북이 모두 비핵화 되어야 한다는 북한의 입장이 중요합니다. 북한이 한반도 비핵화 카드로 내세운 중요한 조건 중에 하나가 핵사용권이 있는 주한미군 철수 선포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핵사용권이 있는 주한미군은 철수하고, 핵사용권이 없는 미군은 주둔해도 좋다는 것이 하나의 조건입니다. 어쨌든 비핵화 합의가 이뤄진만큼 추가 논의를 통해 다양한 조율이 필요합니다. 이제는 전면적 화해 협력기로 넘어가는 단계에 놓이게 됐다고도 보입니다. 화해협력기가 있고, 남북 연합기가 있고, 통일기가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화해협력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2체제 2정부 1국가가 남북연합기가 될 것이고 이후 하나의 체제, 하나의 정부인 통일국가로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민족문학인협회에서 활동해 오셨는데, 주로 어떤 활동을 해 오셨습니까. 우리나라 작가에선 유일한 전문가죠.(웃음) 남북겨레말큰사전 상임이사로 일을 하면서 6.15민족문학인협회라고 남북 단일 문학조직을 2006년에 만들었어요. 거기에 남측 협회 집행위원장이니까 제일 많은 실무 노하우가 있죠. 북한에 대한 네트워크도 가지고 있습니다. 겨레말큰사전이라고 남북통합국어사전을 만드는 일을 국가적 사업으로 했습니다. 지금도 하고 있고요. 두 번째로는 제1회 남북작가대회를 2005년도에 평양, 백두산, 묘향산 등지에서 했습니다. 2006년도에 금강산에서 남북작가 단일조직을 결성했고, 그 다음에 남북작가단일조직이 남북 공동의 문학잡지를 발간을 3회까지 했습니다. 제2회 남북작가대회를 할 것이고 또 통일문학을 다시 발간할 것입니다. 앞으로 이런 일들을 본격적으로 다시 할 것입니다. -정상회담 이후 무엇보다 통일된 말, 글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겨레말큰사전이 그런 일 하는 일입니다. 그곳의 상임이사니까 그 중심에 서게 됐습니다. 2003년도에 노무현 대통령 살아계실 때 대통령 특사로 평양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부터 겨레말큰사전을 북한에 제안했고 2005년도에 남북공동편찬위원회가 금강산에서 결성이 되었습니다. 2005년부터 사업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해오고 있는데, 이명박박근혜 정부기간에 이 사업이 중단되었습니다. 저는 상임이사직에서 면직 당했습니다. 겨레말큰사전 편찬은 북한이 아닌 우리나라가 중단시킨 겁니다. 이제 문재인 정부 들어서 남북정상회담 이후 본격적으로 재개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겨레말큰사전 오래전부터 관련 업무를 해오셨는데, 지금 어느 단계까지 와 있습니까. 70%정도 완성되어 있습니다. 지금부터 남은 30%가 제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사전단어의 뜻풀이를 하는 시간이어서 이건 시간도 오래 걸리고 단어 하나하나를 남북이 합의를 해야 합니다. 지금부터 시간이 가장 많이 소요되는 공적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남북 협의를 원래 1년에 4번 했는데, 횟수를 늘려서 3년 이내에 사전을 편찬을 하려고 합니다. 그게 목표입니다. -남북 공통의 언어, 글을 만들기 위한 중심에 서 계신데요. 정부가 어떤 방향의 지원에 나서야 할까요. 지금 정치정세와 상관없이 비정치적 학술사업을 꾸준히 할 수 있도록 정부간 합의가 필요합니다. 그 합의를 지난번 도종환 장관이 북한에 가서 이야기 했습니다. 정말 아쉽지만 남북공동사전편찬은 북한이 아니라 남쪽 정부가 못하게 했습니다. 남북공동사전 편찬은 이번 정상회담의 세부의제에도 들어가 있습니다. 그만큼 남쪽에서도 중시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활동 계획, 구상, 그리고 국민들에게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을 재개하는 게 가장 큰 목표입니다. 두 번째는 제2회 남북작가대회하고 통일문학잡지 재발간입니다. 남북 정상회담에 국민들 관심 무척 높지만 국민들 좀 차분하게 기다리는 것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 정도상 상임이사는 - 남북 언어 통일 작업 책임 문인 교류 활성화 선봉 서 한국의 운동권 소설가로 알려진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정도상 상임이사는 남과 북의 언어와 글을 통일시키는 작업의 남측 책임자다. 전북일보 칼럼진으로 활동해 왔던 정 상임이사는 경남 함양 출신이지만 3수 끝에 전북대에 합격했고, 지금은 익산에서 생활하는 전북인이다. 1986년 평화의 댐 건설 반대시위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던 1987년 전주교도소에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십오방 이야기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는 같은 해 6월 항쟁으로 사면 복권됐다. 다작 작가로 알려진 그의 명성답게 1988년 장편소설 천만 개의 불꽃으로 타올라라, 친구는 멀리 갔어도, 여기 식민의 땅에서, 새벽 기차 등을 발간했다. 1990년 창작집 아메리카 드림과 장편소설 열아홉의 절망 끝에 부르는 하나의 노래, 그대 다시 만날 때까지와 중편소설 해 뜨는 집 등을 발표했다. 2003년 장편소설 누망으로 제17회 단재문학상을 받은 그는 2008년 연작소설집 찔레꽃으로 제25회 요산문학상과 제7회 아름다운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남북의 말과 글을 통일시킬 사전을 만들고, 문인들의 교류를 활성화시키는 선봉에 서게 된 정도상 상임이사의 어깨는 무겁기만 하다. 정 상임이사는 남북정상이 만난 화해기를 맞은 지금부터 서둘러 3년 내에 겨레말큰사전을 만들어 연합기와 통일기를 하루 빨리 맞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 기획
  • 김진만
  • 2018.04.29 20:21

[전라도 정도 1000년, 창조와 대안의 땅 '전라북도'] 8. 새로운 가야역사의 거점, 전북 - 고구려 공격에 백제 위축되자 남원·장수로 대가야 세력 확대

△가야, 한국 고대 4국시대 주역 부각 최근 한국 고대사의 새로운 화두로 가야가 떠오르고 있다. 가야는 고구려, 백제, 신라와 함께 우리 고대사의 주역이었다. 그러나 문헌사료의 절대 부족과 일제의 식민사관에 의한 왜곡에 의해 가야의 실체와 역사적 위상이 밝혀지지 않은 채 삼국 중심의 한국고대사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이 같은 가야가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이후 급증한 가야유적의 발굴을 통해서였다. 가야 관련 유적은 경상남도를 비롯해 경상북도, 부산광역시, 전라남도, 전라북도에까지 분포하지만 지금까지는 금관가야(김해지역)와 아라가야(함안지역) 그리고 대가야(고령지역)가 있었던 경상도 지역의 낙동강유역을 중심으로 파악되었다. 그런데 전라북도 지역에서도 동부지역 7개 시군(남원, 완주, 진안, 무주, 장수, 임실, 순창)에 690개의 가야유적(고분 448, 제철 129, 봉수 68, 산성 45)이 분포하고 있는 상황이 파악되었고 지난 2월 전북 가야유적으로 남원 두락리유곡리 고분군이 첫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전라북도의 가야역사 진입이 공식화 되었다. △새롭게 부각된 전북지역 가야유적 가야라는 나라 이름의 뜻은 무엇일까? 기록에 따라 광개토왕릉비문에는 가라(加羅), 삼국사기에는 가야(伽倻, 加耶), 삼국유사에는 가락(駕洛) 등으로 다양하다. 가야의 의미에 대해서는 이를 강이나 호수의 의미로 파악해 낙동강 주변지역의 의미로 보는 견해도 있고 동족을 의미하는 퉁그스어의 칼라(xala) 에서 그 연원을 찾기도 한다. 또 김수로왕의 부인 허왕후의 출신지역인 인도의 불교관련 용어인 부다가야에서 찾기도 하지만 아직 명확한 의미는 모른다. 다만 전국적으로 가야라는 지명이 강변이나 해변지역에서 나타나고 있어 바다나 강변을 의미하는 명칭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종래 가야는 삼국과는 달리 통일된 정치체를 갖지 못해 멸망 때까지 10여개 이상의 개별 소국명이 병렬적으로 존속하고 있었다. 따라서 가야 는 신라 백제와 구분되는 연맹체 국가로 보고 있다. 가야 역사에 대한 기록은 매우 소략하지만, 역설적으로 고고학 자료가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 있어서 그 문화상의 복원뿐 아니라 역사의 재구성도 시도되고 있다. 가야의 기존 영역은 경남과 경북일대로 보았으나 가야 유물이 낙동강 동쪽 일부와 호남 동부지역, 그리고 전남 광양만, 순천만 일대와 최근에는 전북 남원, 장수, 진안, 임실에서도 확인돼 영역이 상당히 넓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가야영역의 변화와 확산은 고구려의 백제 공략과 밀접히 관련있다. 즉, 400년 광개토왕의 한반도 남부지역 정벌로 김해 가락국세력이 쇠퇴하고 서기 5세기이후 가야의 구심점은 낙동강 서안 경상도 내륙지역으로 옮겨져 내륙의 철산지를 개발하면서 고령의 반파국(伴跛國), 즉 대가야가 성장해 나갔다. 또한 475년 장수왕의 백제공략은 백제가 거의 붕괴될 상황까지 몰렸고 수도를 웅진(공주지역)으로 옮겨 간신히 명맥이 유지되는 시기인 5세기 후반 대가야 세력은 백제의 영향력이 축소된 남원 및 장수 지역으로 영역을 확대하였다. 이는 섬진강과 남강 수계의 교역망을 통해 확산되었는데 5~6세기 전북 동부지역에 가야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세력권이 나타났다. △전북 가야유적 역사적 실체파악 시급 2018년 2월 남원 두락리유곡리 가야 고분군이 전북지역 가야유적으로서는 처음으로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42호로 지정됐다. 이 고분군에서는 가야계 수혈식 석곽묘(구덩식 돌덧널무덤)와 백제계 횡혈식 석실분(굴식 돌방무덤)이 확인되었다. 특히, 가야 영역권에서 최초로 청동거울, 금동신발 등 최고급 위세품이 출토되어 학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또한 남원시 아영면 월산리 고분군에서는 철제 갑주와 등자, 철제 자루 솥 및 금귀걸이와 중국 청자인 계수호(鷄首壺 닭머리 모양 주둥이 가진 주전자)등이 발견되었다. 이들 유물은 5~6세기 가야와 백제사 연구에 중요한 유적이다. 또한 2017년 장수군 동촌리 고분군에서 가야 수장층의 무덤임을 알려주는 마구류 등 유물이 다량 출토됐다. 토기들은 백제, 소가야, 대가야의 토기류와 혼재된 양상이어서 다른 지역과 교류해온 사실 등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이같이 새롭게 확인된 전라북도권 가야유적은 과연 우리 역사 기록속에서 어떤 존재의 역사유물일가 하는 것이 학계의 큰 관심이다. 전북 동부지역은 섬진강 수계인 운봉고원(남원시 동쪽)과 금강수계인 진안고원(무주,장수,진안)으로 공간 구분이 된다. 이중 남원지역은 《양직공도》에서 백제의 주변 소국인 기문국(己文國)으로 알려진 곳이었다. 아울러 철을 생산했던 대규모 야철지가 발견된 남원과 가야세력이 직접 운용했던 장수의 봉수유적을 통해 봉수 왕국 장수가야가 고고학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백제와 힘을 겨룰 만큼 강했던 가야문화권의 중심이 대가야가 아닌 장수가야라는 주장도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조법종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그런데 이들 전북지역 가야의 실체에 대해서 아직 고대사 학계는 명확한 입장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 기존 가야사를 연구한 학자들은 남원을 중심으로 기문국 등의 존재를 설정하였지만 장수지역에서 새롭게 확인된 가야유적의 실체에 대해서는 유보적 입장이다. 6세기 후반 백제에 복속된 가야세력 등에 대한 지속적인 고고학 유적조사와 발굴 및 문헌사학계와의 긴밀한 연구를 통해 우리 역사의 새로운 화두로 부각된 전북 가야의 실체와 위상 찾기 노력이 요청된다. 이를 통해 더욱 다채로운 전라북도의 역사문화적 토대와 문화자원의 확충이 기대된다.

  •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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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26 19:30

[문화&공감 2018 시민기자가 뛴다] 전주 팔복예술공장 - 회색빛 공업단지에 화사한 예술꽃 활짝

이거, 쓰레기더미예요? 아니예요. 이거 작품이에요. 이것도 작품이에요? 이니요. 그건 쓰레기더미예요. 전주 팔복동에 살고 있는 김민구 씨는 요즘 한창 신이 나 있다. 2016년부터 팔복예술공장 도슨트(docent)로 일하게 되면서부터다. 황량한 공단에서 평범한 주부로 살다가, 오래간만에 신기한 놀잇감 하나를 얻은 것마냥 즐거워한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예술가와 접할 기회가 없던 김민구 씨. 이 곳에서는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과 생활하고, 숨을 쉬고, 말을 섞는다. 예술가와의 대화 내용이란 다소 엉뚱하기도 하다. 그 엉뚱함에서 김민구 씨는 한없이 매력을 느낀다. 팔복동은 공단지구이다. 사방을 둘러봐도 규격봉투마냥 각이 져 딱딱한 느낌의 건물들이 즐비하다. 황량하고, 삭막한 기운이 감돈다. 이 건물들은 사람들에게 네모난 생각과 네모난 세계를 환경으로 제공해주는 것만 같다. 네모 외에 둥글고, 세모나고, 마름모진 생각 같은 건 어울리지 않을 법한 풍경. 하늘빛도 공단지구를 닮은 것 같고, 길과 사람들과 꽃들도 그런 팔복동을 닮아 있다. 그러나, 변화는 아주 엉뚱한 곳에서 온다. 무려 25년 동안이나 밖으로 향하는 문을 닫아건 채 시대에서 잊혀진 비일상의 공간이 문화예술교육센터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카세트 테이프 공장의 혁신적인 변모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이들도 많다. 낡은 테이프 잡음만 음산히 남아 있던 육중한 폐건물을 저들은 과연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특히 공단지역이라 늘 바쁘고, 도태된 삶의 쳇바퀴를 돌리던 팔복동 주민들에게는 더더욱 믿기지 않는 광경이다. 하지만 예술이 쓰레기더미를 작품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음을, 주민들은 몰랐다. 그리고 그 어떤 난관도 뚫고 갈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것이 예술이라는 것을 말이다. 예술창작공간과 문화예술교육센터로 또 한 번 변모의 진통을 시작한 팔복예술공장. 이 곳의 터박이로 있는 한민욱 기획팀장은, 굳이 교육이라기보다는 예술을 통한 놀이 중심의 공간을 만들어가고자 온 힘을 쏟아 붓고 있다. 산업단지 특성에 따른 예술, 과학과 인문이 결합된 상상예술놀이터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예술교육 시설이 부족한 전주 서북권의 예술교육 거점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충직히 해낼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전주는 오랫동안 예향의 도시로 자리매김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술교육 면에서는 아주 취약한 상황입니다. 하여 예술의 힘을 통해 전통과 현대 문화예술이 실험적으로 만나고 있는 문화 플랫폼을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예술교육은 삶의 질과의 관계입니다. 굳이 다른 많은 예술 공간들과의 차별성을 둔다면, 활용한 공간의 다름에 있습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예술공간은 일상적인 공간으로서의 폐교 활용이었지만, 이 곳은 일상적 공간을 넘어선 생산 현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만큼 생활문화와 예술과의 차이 규정을 정확히 해서 운영자 중심이 아닌 참여자 중심으로 운영해 가고자 합니다. 팔복예술공장 상주예술가들과 시민, 학생이 함께 만드는 예술놀이터. 무엇이든 살리려고 안간힘 쓰는 사람은 눈빛부터 다르다. 전주시 교육 관련 기관과의 협업을 통해 앞으로 예술교육 프로그램의 전문성을 기대하는 한민욱 팀장의 그것처럼. 열의가 뿜어져 나오는 건, 이곳을 찾는 주민들도 마찬가지다. 예술 공간이라는 것이 중심가도 아닌 도외지 공단에 생긴 것부터가 거리감이 느껴지던 이들. 저는 팔복초등학교 졸업생입니다. 지금껏 공단 논두렁 사이에 있는 학교를 볼 때마다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후배들에게 물려준 것이 고작 황량하고 메마른 환경뿐이어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직간접적으로 예술을 체험하고, 배우고, 느낄 수 있는 공간이 조성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이것은 기적입니다. 저부터도 예술가들과 접하게 되면서부터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점이 달라졌는걸요? 이것의 답은 이것이다,라는 일반적인 관점의 틀에서 벗어나게 된 거니까요. 그러다보니 무슨 일에서든 융통성이 생기고, 생각의 폭까지 넓어졌다는 김민구 씨. 평소 예술가라고 하면,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처럼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무엇을 보든 간에 이것도 작품이 될까?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지곤 한다. 마치 내가 예술가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한다는 민구 씨는, 이제는 제법 예술가들의 마음도 헤아릴 줄 알게 되었다. 회화를 전공한 한 작가가 밤샘 작업하는 것을 보며, 처음엔 그저 측은지심이 일었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 완성된 작품을 보았을 때는 달랐다. 세상에, 하룻밤 사이에 어둡고 칙칙한 공간이 눈앞에서 완전히 달라져 있던 것이다. 그 때부터 저마다의 개성으로 작업을 하는 예술가들이 위대해보이기 시작했다고. 볼 때마다 감동을 하게 되는 것도 그 때부터다. 별다를 게 없는 사물에도 스토리를 넣어 생명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예술가라고 말이다. 꼭 그 마음으로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작가들의 작품을, 팔복예술공장 내 공간의 내력을 안내해주는 베테랑 주민 해설사가 되어가고 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많이 생각하게 하는 예술가들. 그들의 눈높이로 민구 씨 자신 스스로 올라진 듯해 한없이 기쁘다는 말도 한다. 현재 팔복예술공장에 들어와 일하는 주민 중에는 카페 운영자도 있다. 맨 처음 예술공장이 들어서면서부터 주민들에게 가장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묻자, 카페 운영이라는 대답이 있었다고 한다. 해서 지금은 4명의 동네 주민들이 돌아가면서 운영하는 카페 <써니>가 들어서게 되었다. 공간이 넓고, 예술작품들이 많아 분위기가 남다르다. 창밖으로는 공단을 가로지르는 기찻길이며, 이팝나무가 늘어서 있다. 이곳이 공단지구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공간이다. 설령 공단이면 어떤가. 오뉴월 길가 이팝꽃이 흐드러지면, 이전의 흉물스러웠던 카세트 공장의 기억도 저 멀리 멀어 있을 텐데. ▲ 김형미 시인전북작가회의 사무처장 밤에는 캄캄해서 다니지도 못했던 길이 환하게 밝아져서는, 매일 아침 눈 뜨는 일이 기다려진다는 팔복동 주민들. 젊은 사람은 다들 떠나고 노인들만 남아 삭막했던, 매연 많은 공단이었다. 이제는 숨을 쉬는, 진짜 살아 있는 사람들의 마을이 되어가고 있다. 이렇게 차츰 팔복동 금학천까지 두루 깨끗해지고, 길이 넓어졌으면 하는 바램도 가져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보라, 이것이 바로 진짜 꿈꾸는 예술놀이터이자, 예술과 더불어 사는 최고의 삶의 현장이 아닌가. 기적은 신만이 주는 것이 아니다. 변화를 불러오는 작은 생각이, 그 생각을 들고 찾아온 사람이 기적이다. 또한 기적을 받아들일 줄 아는 마음이 또 다른 기적을 불러온다. 팔복예술공장과, 이곳을 드나드는 이들은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미 변화되었고, 변화되어가고 있는 개개인들 모두가 전주 팔복동의 큰 기적임을. 그 기적이 거시적인 흐름을 지금, 태풍처럼 몰아오고 있음을 말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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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25 19:13

[참여&소통 2018 시민기자가 뛴다] 전주국제영화제 미니FM - 라디오로 만나는 생생한 영화제, 올해도

전주국제영화제가 다가오고 있다. 오는 5월 3일부터 12일까지 열흘간 전주 일대를 다채로운 영화로 물들일 전망이다. 이번 영화제는 총 246편의 다양한 영화들이 소개될 예정이라고 한다. 올해로 19번째 영화제이니, 아마도 그동안 수천 편의 영화가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보여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영화에 담긴 각양각색의 이야기가 관객들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제에는 영화만 이야기를 담고 있지 않다. 영화제를 매개로 다양한 사람들과 만남이 존재하고 거기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소리를 통해 전달하는 매체가 있다. 바로 전주국제영화제 미니FM이다. 전주국제영화제 미니FM은 전주국제영화제만을 위한 라디오이다. 전주국제영화제 기간 동안만 운영된다. 그래서 더 특별하다. 영화제 기간 동안 매일 매일의 영화제 정보, 교통정보, 영화, 음악, 영화제 이벤트 등 다양한 주제로 영화제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올해로 여섯 번째 전주국제영화제와 함께 하고 있다. 나름 전주국제영화제 공식 라디오방송국이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싶다. 영화제 미니FM은 주파수를 통해 방송된다. 라디오 주파수 89.5㎒를 맞추면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일정 범위를 벗어나면 라디오를 통해서 들을 수는 없다. 출력이 1와트로 작다. 그래서 작은 라디오라는 미니FM 또는 소출력 라디오라고 한다. 소출력 이다보니 모든 전주지역에 전파가 미치지는 못한다. 자동차로 라디오를 들을 경우 반경 3㎞ 이내에서 청취할 수 있다. 일반 라디오를 통해서는 스튜디오를 중심으로 시내권에서 들을 수 있다. 인터넷을 통해서라면 좀 더 먼 거리에서도 들을 수 있다. 인터넷 방송 아프리카 TV나 페이스북(전주시민미디어센터 영시미 페이스북 페이지)을 통해서 실시간으로 생중계된다. 보이는 라디오 형태로 진행자들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미니FM이 특별한 라디오 방송인 또 하나의 이유는 시민들이다. 영화에 관심이 많고 영화제와 함께 하고 싶은 시민들이 직접 기획하고 진행하기 때문이다. 전주시민미디어센터 영시미(0simi.org)에서 지난 3월부터 진행된 여덟 차례의 방송 진행, 원고, 기술 등에 관한 교육을 받은 시민들이 직접 라디오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제작하고 진행한다. 또 지역에서 팟캐스트 라디오 활동을 해왔던 8개 마을공동체라디오들도 함께 한다. 라디오 교육을 받지 않았거나, 활동해보지 않은 시민들도 참여한다. 전주국제영화제 미니FM에는 시민 진행자들의 이웃이나, 영화제 현장을 찾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미니FM 라디오는 보이는 라디오로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오픈 스튜디오에서 진행된다. 전주국제영화제 메인 행사장인 전주라운지에 위치한 오픈 스튜디오에서 생방송으로 진행되어 누구나 보고 또 참여할 수 있다. 스튜디오 앞에 사연함이 있어 노래와 사연, 그리고 자신만의 특별한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다. 참여와 개방, 그리고 연결을 지향한다. ▲ 최성은 전주시민미디어센터장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여 방송을 만들어내는 것은 영화제를 이해하고 즐기는데 도움이 된다. 방송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영화제 전반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가져야 하고, 매일 매일의 영화제 소식과 영화제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미니FM에 참여하는 시민 진행자들은 누구보다 더 영화제 관련 정보와 뉴스에 관심을 갖고, 또 직접 현장 이곳저곳을 누비며 영화제 소식과 이야기를 담아낸다. 보고 즐기는 영화제에서 참여하고 함께 만들어가는 영화제가 된다. 그러면서 영화제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높아지게 된다. 공동체라디오가 활성화되어 있는 영국, 일본, 호주 등 여러 국가에서는 지역의 행사와 문화축제에 시민들이 직접 공동체라디오나 한시적 이벤트 방송을 운영하는 사례가 많다. 라디오를 통해 다양한 행사정보와 시민들의 이야기를 직접 담아냄으로써 소통의 매개가 되는 것이다. 전주국제영화제 미니FM 라디오는 오는 5월 4일 금요일 방송을 시작으로 5월 11일까지 8일간 매일 오전 10시부터 저녁 7시까지 하루 9시간 동안 진행된다. 모두 44개의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다. 방송은 모두 생방송으로 진행된다. 영화와 라디오가 만나는 현장에 참여하고 싶으신 분은 누구나 전주국제영화제 메인행사장 전주라운지에 오시면 함께할 수 있다. 온라인 참여도 가능하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슬로건은 영화 표현의 해방구다. 전주국제영화제 미니FM 라디오 역시 표현의 해방구가 될 것이다. ●시민 DJ로 참여하는 이한솔씨 "즐거운 에너지 함께 나누고 파" ▲ 시민 DJ로 참여하는 이한솔씨 이번 전주국제영화제 미니FM 라디오에 참여하는 이한솔 씨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올해 처음 시민DJ로 참여하게 되었으며, 2달간의 교육과정에 참여하고 프로그램을 기획중에 있다. 이번 국제영화제 기간 동안 3개 프로그램을 통해 영화제를 찾는 관객들과 만날 예정이다. -미니FM 교육에 참여하게 된 동기가 있나요? 목소리로 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 중에 오랜 시간동안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라디오 프로그램을 제작, 진행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습니다. 시민들이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고, 국제영화제를 더욱 풍성하게 즐길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미니FM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교육에 참여해보시니 어떤가요? 실제로 교육에 참여해보니, 마이크를 통해 다시 듣는 제 목소리가 가장 신기했습니다. 프로그램 기획을 위해 소스를 모으다 보니 일상의 소소한 시간들도 집중할 수 있고 책이나 짧은 글, 그리고 음악을 많이 듣다보니 순간순간을 풍성하게 즐길 수 있어서 즐겁게 교육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라디오 관련 경험이 있었나요? 라디오 진행은 해본 적이 없지만 영시미에서 진행한 미디어 강사교육을 받고 그때 라디오 관련 수업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번 미니FM에서 어떤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나요? 연애에 관한 프로그램을 준비중입니다. 제가 연애를 참 못하는데 연애 상담은 또 잘해주거든요. 아무래도 전문분야가 없고, 제 취미나 관심사들은 굉장히 얕은 지식들이라 제가 잘 말할 수 있는 주제로 기획을 하려고 하다보니 연애란 주제를 선택했습니다. 재밌게 이야기 할 수 있고 듣는 사람들도 가볍게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시간이 되신다면 인터뷰 기사를 보고 계시는 여러분도 듣고 가시면 좋겠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다른 시민 DJ분들도 올해는 작년에 비해 더 다양한 소스를 가지고 라디오 프로그램을 기획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편성표를 한번 보시고 애니메이션, 레트로 등 관심 있는 프로그램이 있다면 함께 즐겨주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라디오라는 매체를 통해서 하고 싶은 것이 있나요? 음어려운 질문이네요. 라디오 교육을 받을 때 무언가 거창한 것을 기대한건 아니었습니다. 그저 제가 라디오 DJ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선별해서 표현할 수 있다는 점들이 저를 즐겁게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라디오라는 매체를 통해서 만들어 나가는 제가, 진행하는 제가, 듣고 있는 제가 행복하고 즐거웠으면 좋겠고, 저의 즐거운 에너지를 함께하는 사람들이 느끼고 함께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전주국제영화제를 찾는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전주국제영화제 미니FM을 준비하기 위해 많은 분들이 바쁜 시간을 쪼개서 만나고 회의하고 연습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재밌는 라디오 프로그램들이 많이 준비되어 있으니 전주국제영화제를 방문하시는 여러분들의 이야기도 함께 나눠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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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24 19:18

[윤편의 손] 글이나 말 너머에 있는 비밀스런 진실…거기에 자유가 있다

교육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나는 무엇을 가르칠 수 있을까? 내 직업이 내게 끊임없이 들이밀던 송곳이다. 창의성에 대한 수없이 많은 주장들과 방법들을 물고 늘어져 탐색한 후에 교육으로 포장하여 전달하고자 한다. 제대로 되었다면, 창의성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등장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매우 희박하다.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다양하게 교육을 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긴 시간동안 창의성이 발휘되지 않은 것을 보면 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라는 세계적으로 많이 팔린 책이 있다. 그것을 함께 읽고 토론하여 성공하게 된 사람들은 몇 명이나 될까? 그 책 안에는 자신의 삶을 주도하라는 제목이 첫 번째로 걸쳐 있다. 이 내용을 읽었다고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바꿀 수 있을까? 또 그런 사람이 생겨날까? 공자는 인격을 완성하는 최고의 방법을 말해준다. 자기가 하기 싫은 것은 남에게 시키지 말라. 문제는 이 말을 듣고 실생활에서 정말로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않게 되는가의 여부인데, 대개는 시험지 답안에만 쓰고 끝난다. 그것을 구체적인 생활로까지 끌고 나가는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포용을 이야기 하면서 포용의 혜택을 입으려고만 하지, 자신을 양보하여 포용의 주도자가 되려 하지는 못한다. 포용에 대해서 아무리 토론하고 가르쳐도 포용이라는 가치 있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 포용 가르치기와 포용 하게하기가 밀접한 관계에 있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교육이 가능하기나 한가라는 깊은 회의에 빠지기도 한다. 포용이나 창의성이나 하는 것에 관하여 수없이 많은 글들이 있다. 논문도 있고 에세이도 있고 철학책도 있고 자기 계발서도 있다. 문제는 이런 글들과 말로는 창의성 바로 그것이나 포용 바로 그것에 접근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고민은 인간으로서의 완성이나 승화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는 고래로 가장 큰 고민 가운데 하나였나 보다. 2000년도 훨씬 더 되는 과거의 중국 어느 땅에 장자(莊子)도 이 점을 말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책을 소중히 여긴다. 책은 말을 펼쳐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데, 말은 또 귀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 말이 귀하게 여기는 것은 의미다. 의미는 또 무언가를 가리키는데, 그 의미가 가리키는 것은 말로 전해줄 수가 없다. 그런데도 세상에서는 말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책에 담아 소중하게 전한다. 세상이 아무리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해도 사실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할 만한 것이 못된다. 세상 사람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진짜 소중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눈으로 봐서 보이는 것은 형체와 색깔이고, 귀로 들어서 들리는 것은 이름과 음성이다. 슬프도다. 세상 사람들은 그 형체, 색깔, 이름, 음성으로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형체, 색깔, 이름, 음성으로는 진실에 접근할 수가 없다. 그래서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하고, 아는 자는 말로 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누가 이 사실을 알기나 하겠는가? 글이나 말로는 진실에 접근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창의성의 진실은 창의성이라는 단어 너머에 있다. 속에 감춰져 있다고 할 수도 있다. 포용의 진실은 포용이라는 단어나 말 너머에 감춰져 있다.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지만, 그것들을 직접 행하게 해 줄 수 있는 동력으로서의 진실은 은폐되어 있다. 그래서 신비하고 비밀스럽다. 인간이 인간으로 완성되고 더 높이 승화되는 길은 바로 이 신비에 접촉하면서만 가능하다. 그 신비스런 비밀에 관하여 장자는 우화 한 토막으로 설명 한다. 제(齊)나라의 환공(桓公)이 사랑채 쯤 되는 곳의 마루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윤편(輪扁)이 그 아래 마당에서 수레바퀴를 만들다가 연장을 내려놓고 올라가 환공에게 물었다. 감히 묻겠습니다. 전하께서 읽으시는 것은 어떤 말들을 엮은 것입니까? 환공이 대답했다. 성인의 말씀들이지. 윤편이 그 말을 받아 다시 물었다. 그 성인은 아직 살아 있습니까? 환공이 답했다. 이미 죽었지. 윤편이 다시 말했다. 그러면 전하께서 읽고 계신 것은 옛사람의 찌꺼기일 뿐이군요. 환공이 화가 나 말했다. 내가 책을 읽고 있는데, 바퀴나 깎는 목수 따위가 어찌 시비를 건단 말이냐! 제대로 설명하면 괜찮지만, 설명을 못하면 죽을 줄 알아라. 윤편이 대답했다. 저는 제가 하는 일로 보건대, 바퀴를 깎을 때 너무 깎으면 헐거워서 튼튼하지 않고, 덜 깎으면 빡빡하여 들어가지 않습니다. 헐겁지도 않고, 빡빡하지도 않게 하는 것은 손에서 이루어지고, 거기에 마음이 응하는 것이지, 입으로 말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비결이 있습니다만, 제가 제 자식에게 알려줄 수도 없고, 제 자식 역시도 저로부터 그 비결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70이라는 이 나이 되서도 제가 수레바퀴를 깎고 있습니다. 옛 사람도 전해줄 수 없는 바로 그것을 따라 죽어버렸습니다. 그런즉 전하께서 읽고 계시는 것이 옛 사람의 찌꺼기일 뿐인 것입니다. 진실은 전해줄 수 없는 것 바로 거기에 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거기서 모든 색깔과 음성이 출현한다. 색깔과 음성 너머의 바로 그곳을 각자의 내면에 현현(顯現)되도록 할 수 있는 장치를 가질 수 있다면, 어떤 경우에라도 적절하게 반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 현현되면 마치 비밀의 방 열쇠를 손에 넣은 사람처럼 강해진다. 그렇지 않으면 전해줄 수 없는 것을 가진 사람의 밑에서, 그 사람이 적절한 태도로 남긴 결과들을 받아먹고 그것들을 숙지하려 노력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 바로 자유가 아니라 종속이다. 그 전해줄 수 없는 것을 나름대로 갖는 것이 독립이다. 독립이나 자유로 이끌 수 있는 비밀은 환공이 읽는 책 속에 읽거나, 그 책을 쓴 사람의 말 속에 있지 않고 윤편의 손에 있다. 지식에 있어서는 생산자가 되느냐 수입자가 되느냐가 가장 분명한 정치 구도다. 지식의 생산자는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주도적이며 효율적이지만, 지식의 수입자는 결국 종속적이다.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고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만든 가장 고효율의 장치가 지식(이론)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주도권이 세계에 대한 주도권을 결정한다. 그래서 종속적인 국가의 국민들은 강대국으로 지식을 배우러 간다. 소위 유학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오랜 세월 수많은 학인들이 해외에 나가 배우고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사회의 각 분야에서 요직을 맡았다.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는 유학한 사람들이 운영해 온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유학하고 온 사람들로 인해서 도달해야 할 궁극적인 곳에 도달했는가? 도달해야 할 궁극적인 곳인 어디인가? 유학하고 온 사람들로 인해서 갈 수 있는 궁극적인 곳이란 바로 다름 아닌 지식 생산국이다. 지식을 생산하면 세계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게 되므로 결국은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국가를 이룬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그러지 못하고 있다. 물론 기능적으로는 상당히 발전했지만, 여전히 지식 수입국이며 종속적이다. 왜 아직도 이러한가? 그것은 윤편의 손을 보지 않고, 환공의 책에 적힌 글만 보고 오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만 들었지, 그들의 말이 나오는 비밀스런 그곳에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밀스런 그곳은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으므로 전해주기 어려운 곳이다. 유학 가서 윤편의 손이 만들어낸 수레바퀴만 얻어오고 전하기 어려운 윤편의 손놀림을 보지 않으면 지식의 생산에는 나서지 못한다. 그래서 지식 생산이라는 독립적인 도전 대신에 내내 습득해 온 콘텐츠를 전달하고 지키는 일 만 하다 간다. 이것은 찌꺼기에 빠져 있는 일과 같다. 지식은 모험과 도전의 결과다. 지식 생산에는 반드시 모험과 도전이라는 비밀스런 덕목이 작용한다. 지식 생산국에 가서는 생산된 결과를 습득하기 보다는 지식이 생산되는 과정을 배울 일이다. 생산된 결과는 보이고 들린다. 생산 과정에 투입되는 모험과 도전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비밀스런 활동이다. 생산된 결과는 환공의 책이며, 생산 과정은 윤편의 손놀림이다. 종속적인 삶에서 벗어나는 일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비밀을 접촉하는 일에서 시작될 수 있지, 그 사람들이 비밀스런 활동을 해서 낳은 결과를 배우는 것으로는 이뤄지지 않는다. 그래서 윤편의 손은 글이나 말에 가깝지 않고, 오히려 모험이나 도전에 가깝다. 말이나 글을 배운 것으로는 자유를 획득하지 못한다. 모험이나 도전으로는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 글이나 말은 전수할 수 있어도, 모험이나 도전은 전수할 수 없다. 모험과 도전은 오직 한 사람의 고유한 욕망으로만 세상에 드러나지, 전수하고 못하고의 차원에 있지 않다. 글이나 책 너머의 비밀스런 곳에 있다. 윤편의 손은 전달되지 못한다. 아들도 그 손 그대로 전수받지 못한다. 결국 신비스런 그곳, 전해줄 수 없는 그것은 그저 각자의 몫으로 남는다. 얼마나 안타깝고 쓸쓸한 일인가.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그 쓸쓸함의 그늘 아래서만 자유와 독립이 고개를 든다. 그 쓸쓸함의 그늘 아래서 전해줄 수 없는 그것을 모험과 도전으로 실현해 내는 일이 사는 맛 아니겠는가. 내가 나로 사는 일 말이다. 그래서 내가 또 하나의 윤편이 되거나 윤편의 대행자가 되지 않고, 내 안에서 윤편을 실현해버린다. 윤편의 내가 아니라, 나의 윤편으로 재편하는 일, 이것이 바로 자유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자유의 결과를 주우러 다니는 일을 멈춰야 한다. 내가 자유여야 한다. 나를 자유롭게 할 내 안의 신비처를 지키다 보면, 천천히 내 손이 윤편의 손을 넘어선다. 내 손, 내 손에 집중하라. 윤편도 찌꺼기다. 건명원 원장섬진강인문학교 교장 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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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23 21:03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31. 오랜 나무가 품은 세월의 숨결 - 수백년 풍상 겪으며 꿋꿋하고 고고하게 우리 곁에 우뚝

화려한 삼월인데 화창한 햇볕은 더디고 / 궁궐 둑의 버들은 실보다 푸르구나 꾀꼬리는 비를 피해 잎 속에 깊이 숨었는데 / 산책하는 여자들은 봄 구경하면서 작은 가지를 잡아 매네 정조 임금이 세손 때 쓴 시로, 음력 삼월 버드나무 가지와 어우러지는 봄 풍경을 평화롭게 그렸다. 어린 시절부터 나무에 유달리 관심이 많았던 정조는 조선의 임금 중 나무 심기와 관리에 많은 공을 들인 임금이었다. 그가 나무 심기에 관심을 가진 것은 후대와 백성을 위해서였지만 사도세자인 아버지를 위해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죽은 나무로 만든 뒤주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사도세자의 아들인 그는 푸릇한 생명이 가득한 나무를 아버지 무덤 주변에 심어 마음에 위안을 드리고자 했을 것이다. 정조는 1789년 가을부터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현 화성시 소재 융릉) 주변에 7년 동안 1,200만여 그루의 나무를 심으며 이를 문서로 정리했다. 날짜, 나무의 종류와 숫자, 가격 그리고 각각의 역할에 따라 관련된 사람과 나무 심기에 관한 포상에 이르기까지 내용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그 기록과 흔적은 정조가 심었던 나무의 후계나무로 추정되는 나무들로 숲을 이루며 아직까지도 그 정신을 계승해 주고 있다. 당시 효의 마음을 담아 나무를 심는 임금의 모습에 감동한 백성들도 나무 심기에 자발적으로 동참하였고, 정조는 백성들이 구하기 편리하고 구황에 도움이 되며 농사와 수원(水原) 확보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나무들을 마을 근처에 심도록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는 일부 숲 공간을 백성들에게 개방하여 농지를 개간하게 하고 땔감과 목재를 제공하였으며 식량을 얻게 했다. 하지만 지금과 달리 나무의 쓰임이 많다 보니 무분별하게 벌목하고 개간을 위해 숲에 불을 내 숲의 면적이 줄어들면서 민둥산이 되어가는 곳이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일부 지역에 금표(禁表)를 설치하고 나라에서 나무 베는 것을 금하는 봉산(封山)으로 지정하고 백성의 출입을 제한하며 관리를 하여왔다. 그러한 연유로 나라가 특별히 보호하고 관리한 봉산이 고지도 속에 표기되어 있고 아직까지 그 흔적이 우리 고장에 남아있다. 각각의 나무는 지역과 장소에 따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는데, 남원 운봉 람천 부근의 서림숲도 그러하다. 서림숲이 있는 서천리는 여원치에서 팔랑치로 부는 바람의 통로로 지세가 허한 곳이라 하여 석장승과 나무로 비보 및 액막이와 방제 등의 역할을 하게 조성하였다. 서목(西木)을 우리말로 서나무라고 했다가 서어나무가 된 것으로 추정된 서어나무가 숲을 이루어 서림숲 혹은 선두숲이라 부르며 마을에서 관리했다. 그러던 중 숲을 이루던 서어나무가 폭풍과 병해로 고사하기 시작하여 개체 수가 줄어들어 5그루 정도만이 남아 당산목인 느티나무 곁에서 그 이름만 걸어두고 있어 안타깝다. 오래된 나무는 마을 어귀 정자목과 표지목이 되기도 하며 당산목과 신목(神木)으로 보호를 받으며 사람들의 바람과 사연을 품고 고을을 지켜온 경우가 많다. 그중 수령이 많은 오래된 나무를 노거수(老巨樹)라 하는데, 세월을 켜켜이 담고 있는 노거수의 모습을 보고 싶어 찾아가 보면 그 사이 고사했거나 병들어 있는 경우가 있어 애석하기만 했다. 특히 천연기념물인 노거수는 오랜 세월 동안 한 장소에서 시간을 견디며 살아온 나무로 역사 문화적 가치와 생물학적 가치가 높은 생명체이다. 전북에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노거수가 14그루 있었으나 익산의 곰솔나무가 고사하면서 2008년 해제되어 전북에는 13종의 천연기념물인 노거수가 남아있게 되었다. 천연기념물 제188호였던 익산의 곰솔은 논산과 경계인 신작리에 있어 양쪽 고장 화합의 상징이었으나 피뢰침을 세우는 공사가 한창일 때 불행히도 번개에 맞은 후 고사하였다. 지금 그 자리를 찾아가 보면 익산 곰솔과 흡사한 작은 곰솔나무를 볼 수 있는데, 고사 전 유전자를 이어받은 후계목이 그 자리에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어 다행이다. 선운사의 동백이 절정인 지금 선운사 올라가는 길 초입에는 도솔천을 앞에 두고 절벽에 뿌리를 내린 천연기념물 제367호 송악이 눈길을 잡고 있다. 두릅나무과의 덩굴식물로 소가 잘 먹는다 하여 소밥나무라 불리며 상춘등, 용린, 담장나무로도 불리는 사철 푸른 나무이다. 나무 아래에 있으면 머리가 맑아지고 줄기와 잎은 지혈작용도 하며 고혈압에도 좋다고 하여 귀히 여긴 나무가 송악이다. 고창 삼인리에 있는 송악은 높이 15m에 둘레가 80㎝에 이르며 내륙에 자생하는 송악 중에서 최북방 한계선에 있는 가장 큰 거목으로 주변 경관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신비로운 노거수이다. 남원 산내면에는 지리산 천년송이라 불리는 천연기념물 제424호로 지정된 소나무가 있다. 천년송의 나이가 진짜 천년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오랜 세월 지리산의 기운을 받으며 그 자리를 지켜온 경이로운 노거수라 천년송이라 불린 듯하다. 천연기념물인 천년송은 할머니나무로 불리고 근처 20m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소나무를 할아버지 나무라 하는데 마을에서 보호하며 관리를 하고 있다. 매년 설에는 지리산 천년송 아래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열고 있고, 태아에게 소나무 바람 소리를 들려주는 솔바람 태교와 금줄과 혼례상에도 솔가지를 꽂는 풍습이 마을에 전해지고 있다. 노거수를 마주하면 수백 년 풍상을 겪어온 꿋꿋함과 고고함에 사뭇 경건해진다. 특별한 사연과 전설을 지닌 채 많은 이들의 마음속 염원을 들어주고 오랜 세월 묵묵히 우리 곁을 지켜 온 나무들은 귀한 생명체이다. 봄이 한창인 지금 봄꽃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낭만을 건넨다면 나무는 우리에게 위안이 되는 존재이다. 꽃을 피워내고 열매와 그늘을 내어주며 죽어서까지 자재로 쓰이고 아낌없이 주며 우리 곁에 있었다. 오랜 세월을 품고 견디어 온 노거수가 고사하여 사라져가기 전에 그 모습을 눈과 마음에 담아 보고, 보존할 가치가 있는 나무들의 유전자를 채취하여 후계목을 육성하여 웅혼함을 지닌 나무의 상징성을 이어 그 모습을 후대에도 살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시급하다. 오동나무는 천 년을 늙어도 항상 곡조를 품고 있고 / 매화는 일생을 춥게 지내도 향기를 팔지 않고/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본바탕이 변치 않으며 / 버들가지는 백 번을 꺾여도 새로운 가지가 돋는다라는 말이 있다. 가만히 나무에 기대어 눈을 감고 그 숨결이 전해오는 오랜 시간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그리고 변치 않을 가치를 이어가기 위해 봄의 때를 놓쳤다면 늦가을 나무 심는 시기에 나무를 심어보는 것도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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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19 20:18

[문화&공감 2018 시민기자가 뛴다] 제34회 전북연극제 - 철저하게 '과정' 중심의 예술 사람의 성장도 '연극'의 하나

이제 드디어 얼마 안 남았네! 배우들 입에서 터져 나오는 한숨 비슷한 탄성의 소리. 정말 이제 얼마 안 남았다는 말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아직은 추웠던 2월부터 시작했던 연습, 2월의 강추위에 극장 물이 얼어버려 어쩔 수 없이 근처의 커피숍에 모여 연습을 시작해야 했던 일이 어제 일 같은데 벌써 벚꽃이 만연하게 피어나는 4월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준비한 공연 날짜 또한 어느새 다가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연극하면 공연을 떠올리게 되고 공연은 결과물이기 때문에 연극을 결과중심의 예술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오랜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은 연극은 너무도 철저하게 과정중심의 예술이라는 점이다. 한 채의 집을 지을 때 맨 땅 위에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가장 기초가 되는 터 파기부터 시작해야 하듯이 연극은 매번 공연하게 되는 작품마다 항상 터 파기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다. 특히 이번 경우처럼 대한민국 연극제에 나갈 도 대표 작품을 정하는 경우가 그렇다. 이번 제34회 전북연극제는 극단 까치동 흐르는 물과 같이, 극단 작은소리와 동작 할머니의 레시피라는 두 편의 창작초연 작품과 극단 둥지 기억을 담그다, 총 3편의 작품이 경연대회를 치렀다. 극단 까치동 흐르는 물과 같이 조선후기 명필 창암의 예술세계 극단 까치동의 흐르는 물과 같이는 조선 후기 3대 명필인 창암 이삼만 선생의 필체인 유수체가 만들어진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정경선 연출가는 그 시절 전업 예술가로 치열하게 살았던 창암 이삼만 선생과 그 옆에서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이며 오로지 예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도왔던 부인, 그리고 예도의 동반자였던 판소리명창 심녀와의 예술적 교류를 통해 진정한 예인으로서의 삶과 예술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극단 작은소리와 동작 할머니의 레시피 시골할머니서울 손녀의 생활기 두 번째 작품인 극단 작은소리와 동작의 할머니의 레시피는 시골 할머니와 서울 손녀와의 시골 생활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손맛 좋은 할머니의 음식솜씨로 할머니와 손녀가 진짜 가족이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인자하고 자상한 모습의 할머니가 아니라 뭔가 다른 할머니의 모습 속에서 그 안에 숨겨져 있는 더욱더 깊은 할머니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극단 둥지 기억을 담그다 조선간장의 기억, 순박의 참 의미 세 번째 작품인 극단 둥지의 기억을 담그다는 조선간장의 기억에서부터 시작되는 작품이다. 문광수 연출가는 순박이라는 단어가 어리숙함으로 순수의 의미가 어리석음으로 퇴색되어 가는 현실 속에서 순박, 순수, 그리고 사랑의 본질적 의미를 알고 그 기억 속에 삶의 향기를 불어넣어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각 극단 마다 준비된 개성 있는 작품은 작가가 글을 쓰는 작업부터 공연이 끝나고 객석이 비워지는 순간까지 과정과 과정의 다양성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이번 연극제에 참여한 배우들은 자신이 맡은 역할을 위해서 어떤 과정을 준비하고 연습했을까. 흐르는 물과 같이에서 창암 이삼만 역할을 맡은 백호영 (극단 까치동)씨는 창암 이삼만은 조선 후기 서예가로서 추사 김정희, 눌인 조광진과 함께 조선 후기 3대 명필 중 한 분이다. 역사적인 인물인 창암에 대한 기록들이 그리 많지 않아 기본 자료를 바탕으로 마인드맵을 활용한 인물을 만들어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특히 독창적인 유수체를 만든 창암의 성격적 표현을 위해 중점을 둔 부분은 창암 이삼만선생님의 아이와 같은 천진난만함과 자유로움 그리고, 그 내면에 있는 예술가로서의 외로움과 연민을 표현하고자 노력했다고 강조했다. 처음 대본을 받을 때는 항상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울리는 떨림이 있어요. 하지만 이내 연습에 들어가게 되면 온갖 걱정거리가 떨림을 앞지르게 돼죠. 특히 이해력이나 순발력이 떨어지는 내게 있어서 대사 암기는 큰 숙제와 같았어요. 그래서 습관처럼 대본을 들고 다니고 습관처럼 연출의 요구나 지시 사항, 배우들의 의견을 적었어요. 이런 습관은 나만의 대사 외우기 필살기를 만들어 냈고 대본에 소품 그림을 그려 넣으면서 연상법을 활용해 대사를 암기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극단 작은소리와 동작의 엄미리 씨의 말이다. 엄 씨는 할머니의 레시피에서 김춘생 할매 역. 그는 할머니의 역할을 잘 만들어 내기 위해 지나가는 할머니들의 모양새를 지켜보기도 했고 경상도 사투리에 익숙해지기 위해 경상도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경상도 사투리가 나오는 방송을 찾아 시청하면서 따라해 보기도 했다고 말했다. 극단 둥지의 김강옥 씨는 어렸을 적 부모님이 바쁘셔서 외할머니댁에서 외할머니랑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이번 기억을 담그다 노모역이 어렸을 적 외할머니와 많이 비슷했다. 늘 부지런하시고 자식들 일에는 헌신적이시며 어떤 속상한 일에도 큰소리 한번 안내시던 외할머니가 많이 생각나기도 하고 외할머니의 온화함과 따뜻함을 기본으로 캐릭터를 표현하고자 많은 노력을 했다고 밝혔다. ▲ 한유경 연극연출가 인생은 연극이고 연극은 인생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건 분명 연극이 가진 특징 중 하나인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는 예술이기에 가능할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의 성장과정을 벗어나서 연극을 이야기할 수 없다. 인간의 성장이 태내기-영아기-유아기-아동기-청소년기-청년기-중년기-노년기에 이르러 마무리 된다면 과정 안에 녹아 있는 연극 또한 이런 다양한 과정을 통해서 이해되고 마무리 되어질 것이다. 이번 연극제를 이런 과정으로 바라보고 싶다. 희생-사랑-기억.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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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18 20:42

[참여&소통 2018 시민기자가 뛴다] 택배상하차 현장을 가다 - 11시간 쉼없는 밤샘노동…"차라리 인력시장을 나가는게 나아"

취업 한파가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전북지역 청년들의 취업난이 유독 심한 것으로 분석된다. 교육부와 한국교육개발원이 발표한 2016년 고등교육기관 졸업자 건강보험 및 국세 데이터베이스 연계 취업통계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일반대학, 교육대학, 산업대학, 전문대학, 일반대학원 등 도내 고등교육기관의 지난해 졸업자 취업률은 64.3%로 나타났다. 청년 고용률도 전북이 전국에서 가장 저조하다. 이같은 현상은 청년들이 일할 수 있는 일자리가 도내에 적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학업이나 군 복무를 하지 않는 청년층이 지역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해 수도권으로 떠나는 것이다. 결국 도내에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지 못해 지금처럼 전북의 청년고용률이 낮을 경우 젊은 층의 탈 전북 현상은 더욱 가속화 할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2분기(46월) 1529세 청년 고용률은 비수도권이 39.6%로 수도권 45.3%보다 5.7%포인트 낮은 것으로 집계됐다. 특히 전북지역의 청년 고용률은 34.3%에 불과해 전국 17개 시도 가운데 가장 낮았다. 이런 가운데, 청춘들이 아르바이트 현장으로 몰리고 있다. 지난해 아르바이트 포털 알바몬이 한 해 알바생들을 울리고 웃게 한 알바 시장 최고의 주 관심사를 조사했다. 아르바이트 각 분야 1위를 꼽은 결과, 시급 많이 받는 알바 1위는 피팅모델, 강도 최고! 극한 알바 1위는 택배상하차, 알바계의 스테디셀러 1위는 사무보조였다. 취업난에 허덕이며 알바시장으로 몰리는 청년들이 가장 힘들어한다는 택배상하차 알바를 직접 해봤다.처음 해보는 거죠? 남자는 9만 5000원부터 시작이고 작업은 보통 저녁 8시부터 다음날 아침 7시 30분까지 합니다. 아르바이트 알선 사이트에 올라온 물류 업체의 구인공고를 따라 전화를 거니 상하차 작업시간과 급료를 알려준다. 알선 사이트에는 10만 원이라고 올라와 있지만 막상 전화를 걸면 얘기하는 일급은 9만 5000원. 찝찝한 감정이 남았지만 그래도 일을 하겠다고 얘기하니 문자로 셔틀버스의 차량번호, 탑승 장소와 시간을 통보해준다. 문자에 적힌 대로 셔틀버스에 탑승하고 두 시간을 타고 가니 물류터미널에 도착했다. 일하게 된 곳은 충북에 위치한 모 택배사의 물류터미널. 한때 버뮤다삼각지와 비교되며 화물의 블랙홀이라 불렸던 악명높은 터미널이 바로 이곳이다. 전주뿐만 아니라 대구, 청주 등 전국에서 달려온 버스가 이곳에 사람들을 쏟아낸다. 학과 점퍼를 입고 온 대학생 무리에서부터 40대 중년에 이르기까지 연령에 상관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몰리는데 의외로 여성 작업자들도 드물지 않게 보인다. 상하차가 중노동이란 일반적인 인식에 따라 여자가 하기에 어려운 일이란 편견이 있지만 꼭 남자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한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이름을 부르는 물류회사 직원을 따라가 잠깐의 등록절차와 근로계약서 작성을 마치고 나면 저녁을 먹는다. 저녁 메뉴는 냉동식품을 그대로 튀겨 놓은 미니 돈가스와 묽은 김치찌개. 당연히 맛은 없다. 많이 먹어 놔도 일하다 보면 엄청 배고파요. 맛이 없어도 억지로라도 먹어요. 전주에서 함께 온 A씨의 충고에 억지로 입에 밥을 밀어 넣어 보지만 금새 수저를 내려놓았다. 밥을 먹고 저녁 8시가 되면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한다. 물류터미널 분류는 짐을 내리는 하차, 지역별로 나누는 분류, 다시 짐을 싣는 상차로 나뉘어 있는데 처음 오는 사람들은 대개 상차조로 배정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인원이 부족한지 초보자도 하차조로 배정됐다. 하차조 일은 간단하다. 짐칸에 실린 짐을 가능한 빨리 레일 위로 옮기면 된다. 레일이 차량 안까지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일일이 차량 밖으로 짐을 옮길 필요도 없다. 하지만 간단한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처음 맞이한 차량에 실려 있는 화물은 약재와 소화물. 중량이 나가는 화물도 제법 있었지만 첫 차인 만큼 적당히 정신 차리면서 처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 차량을 맞이하자 난관이 시작됐다. 두 번째 차량에 실려 있던 것은 대량의 업소용 세제와 기업용 화물. 그때부터 이 일에는 차량 운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3~4월에는 상하차 최대의 난관이라 할 수 있는 쌀포대를 상대할 일이 거의 없다. 하지만 20㎏짜리 콤프레셔 5대, 14㎏짜리 업소용 세제 80통을 비롯해 중량이 많이 나가는 화물을 상대하고 나면 뒤에 오는 저 트럭이 가벼운 화물을 실었기를 간절히 빌게 된다. 그렇게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면 남의 짐 챙기기 전에 내 몸부터 챙기자는 생각이 든다. 이윽고 깨지기 쉬움이라는 빨간색 스티커가 붙여진 화물을 봐도 그런 문구를 무시하고 짐을 던지게 된다. 처음에는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도 하지만 팔목과 허리에 통증이 몰려오는 현실이 무겁다. 작업장에는 고성이 오간다. 기계소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목소리를 높여 의사소통해야 하는데 그렇게 몇 번 소리를 지르다가 대략 새벽이 되면 하나같이 목이 쉬어버린다. 아울러 현장에서 나오는 먼지는 이미 쉬어 버린 목을 더욱 힘들게 한다. 포장된 상자를 던질 때마다 먼지가 쏟아지고 차량 짐칸에 들어갈 때마다 탁한 공기에 줄기침이 이어진다. 어느덧 안경에는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양의 먼지가 달라붙어 있다. 여기 공기가 너무 안 좋은 것 같아요. 방금 화장실에 갔을 때 가래침을 뱉고 왔는데 가래가 새까맣더라고요. 옆 통로에서 일하던 대학생 C씨가 하소연하지만 참고 일하는 것 외에 뾰족한 방법이 없다. ▲ 이민욱 전북대 신문사 전 사회부장 근로계약서 상에는 50분의 휴식시간이 명시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별도의 휴식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유일하게 잠깐이라도 쉴 수 있는 시간은 짐을 내린 차량이 나가고 다른 차량이 들어오는 약 2~3분간의 짧은 휴식뿐이다. 처음 쉴 때는 그 시간에 스트레칭도 하고 기지개도 켜면서 적당히 몸을 풀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냥 서 있는 것조차 힘들게 느껴진다. 어디든 앉을 수 있는 곳에 주저앉아 그 잠깐을 멍하게 즐긴다. 그리고 차량이 들어오면 다시 짐칸으로 달려간다. 그때는 이 일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10여 대의 차량에서 약 1만 건의 화물을 옮기고 나니 어느덧 아침 7시. 깜깜한 짐칸에도 햇빛이 들어온다. 너무 힘들어서 인중에 소금기가 느껴질 즈음에 드디어 끝을 본다. 작업장을 청소하고 들어왔던 길을 따라 나가면서 급료를 받기 위해 줄을 설 때, 일은 끝났고 이제 돈 받고 퇴근할 일만 남았건만 길게 늘어선 사람들 대부분의 표정이 어둡다. 한쪽에서 담배를 피우던 D씨가 꽁초를 버리면서 얘기한다 오늘로 여기 다섯 번째 왔는데 올 때마다 보는 얼굴들이 바뀌네요. 그만큼 사람이 못배기는 일이란 뜻이죠. 버스가 전주로 돌아가는 동안 11시간 고된 노동을 버텨낸 몸이 이제 더는 안 되겠다며 잠을 청한다. 잠깐의 잠을 거쳐 전주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9시. 세상이 아침의 문을 열고 출근하는 사람들을 맞이하는 그 시간에 저녁의 문을 닫아걸고서 이제야 퇴근한다. 평안했어야 할 시간을 노동으로 채우면서 그 대가로 받은 9만 5000원짜리 노란 봉투를 마주하니 헛웃음이 나온다. 최악의 노동강도와 최저시급 수준의 박봉이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끼게 해준다. 그런 표정을 읽었는지 같이 버스에서 내린 E씨가 충고를 해준다. 전주에서 인력시장을 나가도 10만 원은 줘요. 게다가 그쪽이 일도 쉽고 시간도 짧으니 굳이 이 일을 해야겠다 싶으면 차라리 새벽에 인력시장을 나가요. 그편이 나아요.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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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17 18:34

[우리고을 인물 열전] 23. 진안군 동향면 - 구용담 3대 명당 중 능길마을 으뜸…정계 큰 인물 자랑

동향면(銅鄕面)은 진안군 11개 읍면 중 가장 동단에 위치한다. 국사봉과 문필봉 등 해발 500m 전후의 산들이 고을 중심 평야부를 둘러싸고 있는 형국의 산골이다. 동향면 동편에 덕유산 자락이 남북으로 길게 늘어져 있는데, 동향의 동쪽에 인접한 고을이 무주군 안성면이고, 남쪽으로 접한 곳이 장수군 계북면이다. 동향면 북단에 안천면, 남단에 상전면과 용담호가 소재한다. 산골마을이지만 교통이 사통팔달, 인접한 대전~통영고속도로를 통해 2시간 남짓이면 수도권과 남해안권에 진입한다. 동향면의 생명수는 동에서 서로 흐르는 구량천과 양악천 두 개의 하천에서 공급된다. 구량천은 무주군 안성면의 동쪽 덕유산 자락에서 발원, 안성면소재지를 관통해 동향면 북단에 자리잡고 있는 봉화산과 국사봉에서 흘러내리는 계곡 지류들을 모아 동향면 능금리, 대량리, 성산리를 거쳐 용담호로 흘러든다. 성산리를 빠져나간 구량천은 상전면 수동리에 이르러 장수군 수분재에서 발원해 뻗어내려온 금강과 합류한다. 양악천은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 덕유산 토옥동계곡에서부터 흘러 나온 하천이다. 지방도 635호선과 나란히 길동무하며 대량리에서 구량천에 합수한다. 면적 52.83㎢, 인구 1873명인 동향면은 과거에 용담군 일동면과 이동면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될 때 진안군 동향면이란 행정명이 정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시 동향면이란 이름이 붙게 된 것은 (銅鄕所)란 명칭 때문이라고 알려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전라도 용담현 고적(古跡)조에 따르면 동향면은 고려시대 구리(銅)라는 특정 공납품을 생산했던 특수행정구역인 동향소(銅鄕所)가 있던 고장이다. 이와 관련 학계에서도 비상한 관심을 기울여 왔는데, 동향면 대량리 창촌마을 지역에 다량 노출돼 있는 구리 유적 발굴 조사가 지난해 12월부터 최근까지 진행됐다. 창촌마을에 노출돼 있는 구리 제련 부산물인 슬래그에 대한 시굴조사 결과가 나오면 고려시대는 물론 고대사회 구리 생산과 관련된 유적의 존재가 개략적으로 밝혀질 것으로 기대된다. 용담향교 성수태 전교(전 진안군의원)에 따르면 창촌 일대에 구리 제련 흔적인 쇠똥(슬러그)이 많았다고 한다. 문필봉에 구리 광산이 있었는데 20년 전 사고로 1명이 사망하면서 폐광됐다. 구리 광산이 있었다고 해서 구릿골이라는 얘기가 있는 반면 동향면 일대의 명승지 9곳을 이르러 구량(九良)이라고 불렀는데, 이게 구리향, 구릿골로 불리게 된 것 아니냐는 얘기도 있다. 구량은 문필봉, 명경대, 사미대, 주옥봉 등을 일컫는다고 한다. 동향에는 보물 제746호 성석린좌명공신왕지(成石璘佐命功臣王旨), 지선당, 용담향교 등 문화재가 있다. 동향면 대량리 창녕성씨 종중이 소장하고 있는 성석린좌명공신왕지는 조선 태종 2년(1402)에 방간의 난을 평정하고 태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공로로 익대좌명삼등공신(翊戴佐明三等功臣)이 된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성석린(13381423)에게 내려진 태종의 왕지다. 창녕성씨가 동향에 정착하게 된 것은 단종에 충성을 다한 사육신 성삼문과 관계 있다고 한다. 단종을 폐하고 왕권을 차지한 세조에 의해 희생된 성삼문의 후손들이 참화를 피해 이곳에 둥지를 튼 것이다. 용담향교는 1391년(공양왕 3)경에 현령 최자비가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지만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 이후 1664년(현종 5) 현령 홍석(洪錫)이 자리를 용담현으로 옮겨 중건했는데, 1998년 용담향교 일대가 용담댐 수몰지역이 되면서 현재의 위치로 돌아왔다고 한다. 지선당은 동향면 능금리에 있는 서당이다. 조선 중기 왜란을 피해 금산에서 이주 정착한 덕은당 박지영이 문중 자제와 지방 후학들을 위해 세웠다. 영조 48년(1772)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서당은 교육을 중시한 선인의 지혜를 오롯이 보여준다. 동향 사람들은 2009년부터 매년 8월 초 동향 한여름밤수박축제를 열어 당도 높은 동향수박맛을 자랑한다. 이 지역에서는 수박과 자두, 고추농사가 많고, 한우도 유명한데 24농가가 동향한우 작목반에 참여하고 있다. 진안 용담 일대에서는 풍수지리적으로 최고의 명당이 있다는 말이 전해진다. 성태조 진안군노인회 부회장(84)은 구용담 3대 명당 중 으뜸이 우리 동향면 능길이고, 두 번째가 주천면 주지내, 세 번째가 안천면 보안이다. 보안은 용담댐이 만들어지면서 수몰됐다고 말했다. 성태조 부회장은 실제로 능길에서는 정세균 국회의장 등 인물이 많이 났다. 터가 좋다.고 말했다. △정계 동향 토박이로서 동향면장을 14년이나 역임한 성태조 부회장은 정세균 의장은 장수 명덕리에서 태어났지만 강보에 싸인 채 아버지 품에 안겨 능금리로 이사왔다. 어려서부터 똑똑했는데, 동향국민학교 6학년 때 웅변대회에서 열변을 토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크게 될 아이라고 입을 모았던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능금리는 정세균 국회의장 외에 변호사 출신인 국회의원 안호영(52, 완주진무장)도 배출했다, 능금리 출신 사시합격자는 안호영 외에 대표적 노동변호사로 알려진 김선수 변호사(57, 법무법인 시민)도 있다. 김선수 변호사는 동향초등학교, 서울 우신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제27회 사법시험에 수석합격한 그는 1988년부터 노동자를 위한 변론의 길을 걸었다. 지난해 대법관 후보에도 올랐던 그는 국회 헌법개정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서진웅씨(52)는 경기도의원 재선을 했고, 박수우(38) 진안청년귀농귀촌센터장은 진안군수 선거전에 출사표를 냈다. △관계 대량리 출신의 이기선씨는 전북도 자치행정국장(63)을 역임했고, 이명노씨는 서울지방국토관리청장, 성균호씨(88)는 정주부시장을 지냈다. 이선노씨는 남원경찰서장과 진안경찰서장 등을 지냈다. △경제계 경기도 안양 김형근예병원의 김형근 이사장, 위더스제약 성대영 대표, 원광대 부속 장흥 통합의료한방병원 성강경 원장, CK전자 성이경 대표, 농협진안군지부 김형만 지부장 등도 동향면이 고향이다. △교육문화예술계 전주국제사진제 총감독을 지낸 성남훈(55) 사진작가는 대량리가 고향이다. 성남훈 작가는 제52회 세계보도사진(WPP) 인물사진 싱글부문 3위, 월드프레스포토상 등을 수상했다. 최근 제8회 일우사진상 올해의 특별한 작가 다큐멘터리 부문을 수상한 성 작가는 지난달 22일부터 오는 25일까지 서울 중구 일우스페이스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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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호
  • 2018.04.16 19:41

취임 100일 맞은 김성칠 전북지방우정청장 "집배원 노동시간 단축·삶의 질 향상 위한 물류혁신 추진"

▲ 김성칠 전북지방우정청장이 경영철학과 핵심가치의 실행방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조현욱 기자 디지털 시대의 도래와 스마트폰 보급 확산 이후 이메일, SNS 등을 통한 소통으로 우편물량이 전 세계적으로 감소 추세에 있는 등 우정사업이 중대한 변화의 기로에 서있다. 취임 100일을 맞은 김성칠 전북지방우정청장으로 부터 전북 우정사업의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한 경영철학과 핵심가치의 실행방안을 들어봤다. -전북 근무는 처음인 것으로 아는데 전북에 대한 인상과 색달랐던 취임식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예향의 고장인 전북은 우체국의 아날로그적인 문화와 서로 맞닿아 있고, 개인적으로도 정서적문화적인 동질감을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취임식은 전직원을 회의실에 모아 놓고 취임사를 읽으면서 하는 일방적 지시 형식이었는데, 저는 기존의 형식을 탈피해 취임사를 하지 않고 직원들과 자유롭게 둘러앉아 그들의 생각도 들어보고, 저의 경영철학인 소통혁신융합상생경영에 대해 직원들과의 소통과 공감을 이끌어 내고자 대화의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이를 통해 동료애가 생기고 경직된 조직분위기를 바꿔 생동감 넘치는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우체국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郵問現答)는 생각으로 되도록 많은 우체국 직원들과 마음을 터놓고 소통하는 시간을 갖고, 고객감동직원행복아침에 출근하고 싶은 우체국을 실현해 나가겠습니다. -전북 우정사업에 대한 소개와 사업실적에 대한 평가는. 전북지방우정청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우정사업본부의 소속관서로 도내 250여개 우체국과 2,700여명의 직원들이 우편업무와 우체국예금, 우체국보험에 관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예금사업 연도평가 대상, 보험사업 연도평가 우수상, 우편사업 연도평가 장려상을 수상하는 등 우수한 성과를 거뒀고 앞으로도 지역곳곳의 우체국 네트워크를 통해 편리한 우편금융서비스를 제공하고 지역사회와 함께해 국가 비전인 국민의 나라 정의로운 대한민국구현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평소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우체국 내외부 고객과의 열린 소통문화 조성을 위해 소통경영을 최우선 과제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먼저 우체국 조직내 비효율적인 업무추진 방식을 개선하고 자율적인 의사소통을 위해 사이버 공간에 사이다토론방을 개설했으며, 우정청 간부와 책임직들에게 큰나무가 되지 말고 직원들을 믿고 때를 기다리는 큰사람이 되어달라고 주문하면서 경청과 겸손, 신뢰를 통한 삼국지 손권의 리더십으로 직원들과의 소통을 강조했습니다. -우체국 조직문화 혁신을 위한 대책이 있는지요. 기존의 틀과 방식을 바꾸는 변화를 통해 우정사업의 성과를 일궈내는 혁신경영을 하겠습니다. 사업 분야별로 Do-dream마케터를 육성하고, Best 미소천사를 선발해 찾아가는 시상식을 통해 격려하고 있습니다. 직접 우체국 현장을 찾아 창구에서 고객을 응대하고, 배달업무를 체험하는 등 현장의 어려움을 직접 체험하고, 개선방안에 대해 고민하겠습니다. 아울러 음악과 함께하는 출퇴근 시간을 운영하고 호프day, CEO 바리스타day 등 펀경영으로 모두가 즐기면서 일하는 우체국을 만들겠습니다. -4차 산업혁명시대 우체국의 역할에 대해서 말씀해주십시오. 우체국이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선도하기 위해 융합경영을 하겠습니다. 전북지역은 우체국이 75% 이상 도시가 아닌 시골에 있어 집배원들의 배달 이동거리가 멀고 어려움이 많습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지난달 집배물류혁신팀을 만들어 집배원의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삶의 질 향상을 위하여 공동작업 축소, 무인우편함 도입 등 집배물류혁신 10대 이행과제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소포등기우편물 집배팀별 구분 등 우편집중국 물류혁신 추진방안에 대해서도 체계적이고 전사적으로 추진해 나가겠습니다. 또한 금융기술 혁신 가속화로 금융 패러다임이 급변하는 시대에 발맞춰 스마트금융팀를 구성해 국민들에게 안전하고 편리한 스마트금융 서비스를 제공하겠습니다. -우체국에서 우리지역의 농산물 판매촉진에 나서는 등 지역사회와 상생하는 경영철학을 가지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우체국이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기 위해 지자체와 협력해 지역의 우수 농특산물을 판매하는 등 상생경영에 앞장서겠습니다. 또한 국제특송 물류비 지원사업을 적극 추진해 도내 중소기업의 수출 촉진에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농어가지자체 등과 연계해서 우체국쇼핑과 오픈마켓상의 전북달팽이장터 등을 통해 지역 농산물 판로개척에 적극 나서고 있습니다. 올해에도 307개 업체, 3000여개 상품을 등록해 45억여원의 매출을 올렸으며, 앞으로도 전라북도 등 유관기관들과의 협업을 통해서 지역상품의 판로개척에 앞장서겠습니다. -우체국 집배원들의 근무여건 개선에도 관심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개인간, 우체국간 집배원들의 업무량 불균형을 해소할 수 있도록 집배업무 평준화를 통해 실질 근무시간을 단축할 계획이며, 연가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근무환경을 조성하겠습니다. 집배순로구분기의 효율적 운용, 우체국 내 대기시간 최소화 등 업무 프로세스 개선도 추진하고 있으며 안전과 친환경 배달 장비인 전기차, 드론택배를 도입해 배달환경을 혁신해 나가겠습니다.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우정사회봉사단과 집배원365봉사단 등을 중심으로 소년소녀가장 생활비 지원, 홀로어르신들에 대한 돌보미서비스 등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또한 우체국의 여유 공간을 활용해 지역 주민들에게 스마트폰 활용 과정과 신명나는 전래놀이 과정 운영 등을 통해 국가기관으로서 사회적 역할을 강화하고자 우체국 작은 대학을 전북 최초로 진안우체국에 개설하였으며, 향후 6곳의 우체국에 추가 개설할 예정입니다. 앞으로도 우체국 네트워크를 활용해 사회공헌 활동을 펼침으로써 사회안전망 역할에 우체국이 앞장서 나가겠습니다. -전북지방우정청의 미래와 도민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은. 상하 관계에 있어서는 신뢰와 믿음을, 동료 간에는 협조와 즐거움을 주는 훌륭한 일터(Great Work place)를 만들어 고객감동직원행복아침에 출근하고 싶은 전북우체국을 만들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청장 혼자서는 할 수 없고 2,700여 우체국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어울어져야 만들어 낼 수 있는 종합선물인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체국이 지역사회를 누비며 지역주민과 함께한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으며, 도민 여러분의 신뢰를 기반으로 지속적인 변화와 혁신을 통해 믿음과 함께 미래로 나아가는 정부기업구현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김성칠 청장은 - 풍부한 현장경험 바탕 우체국 혁신 이룰 적임 다양한 보직경로를 밟아온 김성칠 청장은 풍부한 행정경험을 바탕으로 우체국의 현안사항을 풀어내고 우체국 혁신을 이뤄낼 적임자로 손꼽힌다. 우정공무원교육원장으로 우체국과 처음 인연을 맺은 이후 우체국의 사회적 역할 강화와 직원들의 만족도 제공에 항상 힘을 기울여 왔고 우정사업본부 내에서도 후배들의 신망이 두텁기로 정평이 나 있다. 제주 출신인 김 청장은 서울대광고등학교와 서강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1992년 행정고시에 합격하면서 공직에 첫 발을 내디뎠다. 이후 상공자원부 통상진흥국, 산업자원부 생활산업국, 외교통상부 주홍콩총영사관, 행정안전부 중앙공무원교육원을 거쳐 우정공무원교육원장과 전남지방우정청장을 역임하는 등 각 부처를 두루 섭렵한 행정전문가로 경험과 능력을 겸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기획
  • 강현규
  • 2018.04.15 20:42

[전라도 정도 1000년, 창조와 대안의 땅 '전라북도'] ⑦ 고구려 부흥의 터전, 전북 - 백제 마지막 왕도 익산에서 고구려 재건 꿈꾼 아이러니

△고구려유민, 백제 왕도 익산에 자리잡다. 663년 백제 부흥의 거점 주류성(전북 부안 우금산성)이 함락된 후 당과 신라는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본격적으로 단행하였다. 당이 중심이 된 고구려 공략은 과거 수 양제나 당 태종 때의 대규모 공격방식이 아닌 지속적인 소규모 전투를 통한 고구려 소모전을 진행하였다. 한편 고구려의 집권세력인 연개소문 사후 연개소문의 장남인 남생이 아우 남건, 남산이 정변을 일으키자 서로 다투다 국내성 등 요동지역 거점을 이끌고 당에 투항해 고구려를 공격하는 선봉이 되었다. 결국 당과 신라의 양면 공격에 의해 분열된 고구려는 668년 9월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붕괴되었다. 고구려는 붕괴되었지만 각 지역에서 고구려 부흥전쟁이 진행되었다. 특히, 668년 황해도지역을 중심으로 검모잠이 주축이 된 고구려 부흥세력은 670년 고구려 마지막왕 보장왕의 조카인 안승을 왕으로 추대해 한성(서울 일원)지역에서 고구려를 재건하고 당과 맞섰다. 한편, 당은 백제와 고구려 멸망 후 복속지역 관할 문제로 신라와 대립하다 전쟁으로 비화하였다. 특히, 당은 신라마저 복속하여 삼국 모두를 당의 지배하에 놓고자 하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고구려 부흥군은 신라의 원조 하에 지속적인 저항을 진행하였다. 신라 문무왕은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고 금마저(익산)에 거주하게 하였다. 이후 문무왕 14년(674) 안승을 보덕왕(報德王)으로 책봉하면서 고구려 부흥세력은 신라에 의해 책봉된 보덕국 체제하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이같이 백제의 마지막 왕도 익산은 나라가 망하자 신라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역설적으로 고구려 부흥의 터전으로 바뀐 아이러니한 역사가 전개되었다. △신라와 고구려 유민의 정략적 결과물, 보덕국 백제 땅에 세워진 고구려 유민의 거점 보덕국은 신라의 고구려, 백제유민 지배정책과 당과 일본과의 국제관계를 고려해 탄생된 고도의 정략적 결과였다. 즉, 익산의 백제 도성 관련 시설을 활용하고 금강과 만경강으로 둘려진 익산의지형적 특성을 활용해 고구려 부흥세력이 군사적으로 확대되는 것도 막고 백제세력과도 차단하는 목적으로 이 지역을 활용하였다. 한편, 신라는 과거 고구려와 왜국의 친선 관계를 이용해 신라와 왜 관계 호전을 노렸고 또한 고구려 구토에 대한 지배 연고권과 논리를 마련해 당이 고구려 땅에 만든 안동도호부에 대항하는 근거도 마련하였다. △전라북도에 남겨진 고구려 문화 670년 익산지역으로 옮겨진 고구려 유민들은 15년 동안 보덕국을 유지하였다. 그 사이 신라는 고구려 부흥세력과 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자 이들 고구려 유민에 대한 태도가 변하였다. 특히, 투항세력인 안승과 가족을 경주로 이주시키자 684년 11월 고구려 유민은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으나 수개월 진행되다 종식되었다. 고구려 유민들의 반란이 토벌되자 685년 봄 신문왕은 완산주(전주)와 남원소경을 바로 설치하고 대다수 고구려 유민들을 완산주와 남원소경 등 남쪽 지역으로 사민시켜 고구려 유민의 거점을 와해시켰다. 조선시대 기록에는 익산에 보덕성이 군의 서쪽 1리에 있다고 하였는데 익산에 남은 고구려적 요소로 주목되는 것은 왕궁유적 앞을 흐르는 옥룡천과 관련된 익산 고도리 석인상 관련 기록이다. 왕궁유적 맞은 편에 있는 2구의 석인상은 고려시대 석불입상(보물 46호)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약 200m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선 이 같은 남녀석인상 형식은 고려시대 조성된 불상과도 다른 독특한 형식으로 그 연원이 명확치 않다. 그런데 이 같은 남녀가 개울을 사이에 둔 모습은 은하수를 사이에 둔 견우직녀 모습과 대응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석인상에 견우직녀설화와 유사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즉, 두 석인은 섣달 그믐날 자시(子時, 23시~01시)에 옥룡천이 얼어붙으면 서로 만나 1년 동안의 회포를 풀다가 새벽닭이 울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내용은 전형적인 견우직녀형 설화 내용이다. 주목되는 것은 견우직녀 모습으로 가장 오래된 그림이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확인된다는 점이다. 즉, 광개토왕 18년(408)에 축조된 평안남도 강서군 덕흥리고분벽화에 은하수를 가운데 두고 견우와 직녀가 그려진 벽화가 발견되어 고구려사회에 견우직녀 설화가 상당히 유포되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비록 이들 석인상이 고려시대 조성된 것으로 파악되지만 석인상의 연원과 유래가 고구려인들이 보유하였던 견우직녀형 설화인식이 고구려유민들이 이 지역으로 사민된 이후 이곳에 전래되어 유지되었을 가능성을 상정케 한다. 전주지역에 남아있는 고구려 관련 유적은 고구려 승려 보덕의 경복사 유적이다. 이는 고구려 승려가 일부러 완산주 고덕산에 비래방장 즉, 하룻밤새 날아온 것으로 묘사된 곳으로 백제 땅으로 옮겨온 고구려 사찰이 전주지역에 남아있다. 한편 남원지역의 경우 신라에 의해 많은 고구려유민이 사민되어 남원 소경성을 건설하고 남원지역 곳곳에 분산되었다고 추측된다. 특히, 남원의 만복사의 가람배치형태는 비록 고려시대 사찰이지만 가운데 목탑을 두고 동-서-북쪽 3면에 3개의 금당을 배치한 品자 모양 가람구조인데 이는 전형적인 고구려식 가람배치양식이란 점에서 매우 주목된다. 또한 통일신라시기 거문고 달인 옥보고는 고구려유민으로 남원 운봉일대 지리산 자락에 은거한 사실이 전해져 앞서 고구려 유민들을 남쪽으로 옮긴 상황과 대응된다. 특히, 옥보고와 관련된 지역이 현재 남원 동편제 소리마을과 접한다는 점은 남원 국악의 뿌리와 고구려 음악문화가 연결될 수 있는 중요한 근거이기도 하다. 또한 고구려 유민들의 흔적은 신라 불교음악과 관련된 쌍계사의 진감선사 혜소(774~850)가 고구려유민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또 고구려인의 혈통적 특성이 남한지역에서 전라북도지역에 가장 잘 남아있어 구리시에 건립된 광개토왕 동상 얼굴 표본을 만들기 위한 샘플로 활용하기 위해 전라북도 익산지역 남학생들 표준 얼굴안을 수집하였던 사실은 결국 고구려유민들이 현재의 전라북도를 중심으로 분산 배치되어 신라사회에 편입되어 갔으며 그 문화적 영향성은 고려, 조선을 거쳐 현재까지 그 흔적을 남겼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이 전북 지역 특히, 익산-전주-남원 지역은 백제의 역사와 함께 고구려 유민들이 고구려부흥을 꿈꾸며 새로운 역사의 대안을 찾았던 뜻 깊은 터전이었다. 또한 백제와 고구려 그리고 이후 신라의 역사공간으로 연결되어 삼국의 역사와 문화가 융합되어 가장 한국다운 역사 원형 문화가 이루어진 지역이었다. /조법종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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