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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소통 2018 시민기자가 뛴다] 익산 춘포 - 아픈 역사의 현장에도 찾아온 찬란한 계절…'봄나루'를 가다

봄이 오는 소리를 들으러 익산의 춘포(春浦)로 달려갔다. 춘포의 우리말 이름은 봄개, 봄이 오는 물가라는 뜻이다. 순창에서 출발하여 벚꽃과 경쟁하듯 도착한 만경강의 춘포나루에는 미리 도착한 녀석들이 벌써 꽃분홍 색으로 봄을 알리고 있었다. 여기저기 봄소식을 태운 강줄기들은 그렇게 춘포를 거쳐 바다로 가고 있었다. 익산은 지난 5년간 국내가이드를 하며 무수히 들렀던 곳이다. 하지만 단체 관광객의 인솔은 보석박물관과 미륵사지를 보고 마로 요리된 식사를 하며 지나만 가야하니 참 많이 아쉬웠다. 직업으로 삼던 여행을 접고 순창에 방랑싸롱이란 공간을 오픈하여 문화를 기획하고 지역에 활기를 만들어 가던 차에 다시 한번 익산을 찾았다. 여행과 문화를 접목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익산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서다. △ 가장 긴 역사를 가진 기차역, 춘포역 춘포나루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인 춘포역이 있다. 과거 광활한 평야에 비옥하기까지 한 춘포는 일제 강점기에 쌀 수탈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 어마어마한 쌀이 생산되니 일본인들은 큰 마당이라 대장(大場)이라 부르며 군산의 쌀 저장고인 장미동(藏米)까지 보내느라 굉장히 번화하고 융성한 동네였다. 사실 호남선이 익산을 통과하게 된 것은 철도 노선을 두고 벌인 당시 일본인 농장주들의 암투 때문이다. 김제에서 삼례를 통과하기 원했던 동산농장의 이와사키와 대야를 통과하길 원했던 군산농장의 오쿠라의 대립으로 그 중간인 솜리(이리)로 열차가 통과하기로 결정된 것이다. 지금은 오두막 같은 건물 하나 뿐이지만 그마저 없애지 않고 남겨주어 감사하다. △ 익산 역사가 담긴 명소들 살랑이는 봄바람을 느끼며 춘포나루 뚝방길을 따라 춘포역으로 가는 길엔 그 옛날 기세가 등등 했을 호소가와 농장 관리인 에토의 가옥을 볼 수 있다. 개인소유로 내부관람은 불가 하지만 담장 밖으로 보기에도 그 위용에 압도 된다. 마침 집 주위로 피어난 벚꽃 때문에 문득 일본 교토의 향기가 느껴진다. 가옥의 반대편 길을 따라 가다보면 지금은 폐허가 된 정미소가 나타난다. 일본까지 그냥 가져가기엔 여러모로 불리했을 쌀들을 겉껍질만 도정했던 곳으로 당시 농장의 마름이 운영했던 곳이다. 역시나 내부관람은 금지 되어 있지만 활용가치가 높은 건물들은 무엇이 되어도 멋지겠단 생각이 들었다. 멀리서도 보이는 우뚝 솟은 빨간 건물은 대장교회로 1800년대 후반과 1900년대 초반의 치열했던 기독교 선교의 흔적이다. △ 사람 사는 곳 들여다보기 작은 동네를 종으로 횡으로 지나다니다보면 가끔은 일부러라도 방향을 잃는다. 지도에도 없는 작은 길을 걷다 마주치는 고양이와의 눈맞춤도 좋고 궁금증이 많은 동네 아주머니와의 대화도 즐겁다. 어쩌면 남들이 보지 못하는 더 많은 재미를 찾을 지도 모르겠다. 여행이 다변화 되고 세밀화 되면서 나만의 여행을 찾아 가는 사람들이 많아 졌다. 거창하고 유명한 관광지 보다는 작지만 자세하고 깊이 볼 수 있는 곳이 선호된다. 익산에서 봄바람으로는 부족해 더 많은 봄을 느끼고 싶었다. 마침 익산 북부시장의 장날(4일,9일)이라 봄내음을 맡으러 갔다. 익산장은 전북 최대의 정기장이며 전국에서는 성남 모란장 다음으로 큰 장이다. 날이 좋아 할머니들이 옹기종기 앉아 소쿠리에 한 가득 풀어놓은 봄나물들이 코를 간지럽힌다. 그 냄새가 좋아 사지도 않을 흥정을 하며 할머니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많은 나라를 여행 했지만 재래시장만큼 그 지역과 사람을 이해하기 좋은 장소는 없다. 전국의 전통장이 쇠퇴해 가는 것이 안타깝지만 다행히 익산장은 중소기업청과 시장경영진흥원이 추진하는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2016년에 선정되었다. 이 사업은 정부로 부터 내, 외국인이 문화 예술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문화체험장, 야외공연장, 문화창작공간의 설치를 지원받고, 문화,관광컨텐츠 개발의 사업 또한 지원 받는다. 비로써 전통장도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즐기는 공간이 되어 간다. 우리네 장은 싼 물건을 구매하러 가는 곳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러 가는 공간이다. △ 근대문화유산, 다크투어리즘 개발되길 ▲ 장재영 세계여행가순창 방랑싸롱 대표 전 세계 어느 나라든 오래된 것이 인정을 받고 관광지가 되어 가는데 우리나라는 일제의 잔재라 하여 없애고, 보기 싫다 부수고 남아나지가 않는 현실이 안타깝다. 어째든 작지만 가치 있는 춘포역을 철도청으로부터 무상 임대 받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컨텐츠를 입혀가는 익산시 관계기관에 박수를 보낸다. 또한 단순히 유산을 넘어 근대문화유산 박물관 춘포 사업을 통해 지역문화의 장으로 변모시키려는 익산문화재단에도 감사하다. 지난해에 진행했던 춘포 근대문화유산 도보 트래킹은 최근 여행업계에 부는 다크투어리즘(Dark Tourism)을 느껴볼 수 있는 좋은 행사였다. 폴란드의 아우슈비츠처럼 개인적으로 많은 일본인들이 전국에 산재한 침탈의 역사현장을 둘러보고 반성하는 투어가 개발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또한 지역 공동체 사업으로 진행되는 춘포문화학교는 마을공동체 회복과 문화체험 프로그램으로 4회째를 기다린다. 쇠퇴해가는 지역과 역사를 문화로 융성하게 만드는 일은 어렵지만 가치 있고 재미난 일이다. 마지막으로 익산에서 봄은 커피 한잔으로 마무리를 한다. 직업이기도 하거니와 커피를 워낙에 좋아하여 어느 지역이나 나라를 여행하든 마치 습관처럼 유명한 필터커피집을 찾는다. 마침 전북대 익산캠퍼스 근처에 직접 로스팅하는 커피집을 발견하여 젊은 사장님이 내려주신 맛있는 커피로 여행의 마침표를 찍는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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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11 18:30

[참여&소통 2018 시민기자가 뛴다] 장애인 야학 - 성인 장애인 교육권 보장 위한 실질적 지원 이뤄져야

장애인 야학은 장애인 시설의 탈시설화라는 시대적 흐름과 장애인의 독립생활 추구라는 시대적 배경과 맞물려 대두됐다. 장애인의 경우 학령기 시절 여러 가지 이유로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한 경우가 많다. 장애인들이 당당하게 사회의 한 일원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기본교육과 함께 직업도 필요하다. 이 같은 장애인 교육에 대한 절실함이 민간주도의 장애인 야학 설립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장애인 야학에 대한 정부 차원의 통계는 전무한 상태다. 전국장애인 야학협의회에 등록된 단체 기준으로는 27곳이 있지만, 협회에 등록되지 않은 야학이 전국에 산재해 있고, 전북지역에는 전주시를 포함한 4개 지역에 7개의 장애인 야학이 설치돼 있다. 2014년 보건복지부 장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장애인 교육 정도는 초등학교 28.8%, 중학교 16.2%, 고등학교 28.1%, 대학 이상 15.3%, 그리고 무학이 11.6%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우리나라 일반 국민의 학력 수준과 비교했을 때 현저한 차이가 난다. 이는 장애인이 접근할 수 있는 교육기관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일반 평생교육기관이 있다 해도 편의시설 미비와 비장애인 중심의 교육내용, 교육비 부담 등으로 교육 참여에 엄두조차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14년 장애인 실태조사중 평생교육 프로그램 참여 경험 여부를 살펴보면, 장애인 대부분이 참여 경험이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평생교육 프로그램 중 학력보완 교육에 참여한 인원은 0.3%, 성인 기초 및 문자해독 교육은 0.4%, 직업능력 향상 교육 1.4%, 인문교양 교육 0.8%, 문화체육 예술교육 2.6%, 시민참여교육은 0.3%에 불과하다. 평균적으로 97.4%의 장애인이 평생교육 참여 경험이 없는 것이다. 장애인의 열악한 교육 현실은 그대로 노동의 영역으로 이어져, 2017년 기준 장애인의 고용률은 36.5%에 불과한 수준이다. 장애인의 경우 고등학교까지 의무교육이다. 하지만 장애인들의 교육 정도는 비장애인과 비교했을 때 현저한 차이가 나고 있다. 그만큼 제도권 안에서 발생하는 사각지대 해소와 함께 평생교육 차원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헌법과 교육기본법에는 국민의 평생교육 진흥에 대한 국가와 지자체의 책임과 평생교육제도와 그 운영에 관한 내용이 규정돼 있다. 평생교육법에는 국가지방자치단체 및 시도교육감이 관할 구역 안의 장애인을 대상으로 평생교육 프로그램 운영과 평생교육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장애인 평생교육시설을 설치 또는 지정 운영할 수 있다고 규정돼 있다. 하지만 전북 도내 7개의 장애인 야학교 가운데 어느 한 곳도 평생교육시설로 등록돼 있지 않다. 야학교가 법이 정한 기준에 맞는 시설과 설비를 갖추기 힘들기 때문이다. 다온 야학교 김미아 센터장은 장애인 야학이 평생교육시설로 등록돼 예산지원을 받는다면 장애인들의 교육과 취업, 재활, 문화여가 등 다양한 활동을 지원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일반 특수학교 한 학급에 들어가는 정도의 안정적인 예산지원만 있어도 야학에는 큰 도움이 된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러면서 법과 현실은 너무 먼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다온 야학교의 경우 현재 지자체에서 일정 금액을 지원받고 있지만, 장애인 교육과 식사 제공 등에는 빠듯한 형편이라 안정적인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다. 또한, 야학교 직원의 열정 페이와 열악한 처우, 자원봉사로 구성된 교사들의 사명감만으로는 교육의 질을 담보하기 힘든 상황이다. 도내 7개 장애인 야학교 중 유급 교사가 있는 곳은 2곳뿐이며, 교사 대부분은 자원봉사로 운영 중인 실정이다. 전주시 덕진구에 위치한 새누장애인 야학교 강현석 교장도 전북지역의 나머지 장애인 야학교들의 재정상황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며 재정적인 지원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했다. 전북도내 장애인 야학교의 경우 지자체에서 운영비 일부를 지원받고 있지만 전북도교육청에서는 장애인 평생교육시설 등록을 하지 않는 한 공모방식의 민간지원 보조사업에 선정된 경우에만 지원하겠다는 입장이어서 지속적인 지원은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다. ▲ 박연수 전북교육자치시민연대 사무국장 올해 3월 초 문재인 정부는 장애인 정책과 관련한 70개 추진과제를 확정하면서 장애인의 교육권 보장을 위해 특수학교와 학급을 확충하고, 특수학교 용지확보와 설립이 쉽도록 관련 제도를 정비해 나가겠다고 밝힌 바 있다. 과거 교육 현실과 비교하면 진일보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정책은 주로 학령기 안에서 이뤄지는 교육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현재 장애인의 교육 정도가 비장애인에 비해 현저히 낮다는 상황을 고려하면 학령기 제도권 교육에서 기본적인 학력을 취득하지 못한 장애인들에게 더욱 주목해야 한다. 장애인 야학은 학령기 동안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성인 장애인들이 교육비에 대한 부담 없이 교육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찾는 곳이다. 교육 소외계층인 성인 장애인들의 교육권을 실현하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제도적 지원의 현실화가 선행돼야 하며, 평생교육의 실질적인 서비스를 통한 교육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대책 마련 또한 필요하다. ● 다온야학교 김미아 센터장이 얘기하는 장애인 야학 - 교류 속 정서적 안정감 획득사회성 배워 △학력 증진과 사회환원 장애인 야학은 한글, 수학, 영어 기초부터 시작해 검정고시 과정인 중고대입 과정을 교육하며, 검정고시 시험을 통해 상급반에 진학하고 있다. 대입과정을 취득한 학생들은 대학에 진학하거나 직업을 갖고 사회에 진출하는 효과가 발생한다. 장애인 야학을 통해 배운 학생들이 검정고시를 통해 학력을 획득하게 되면 다시 장애인 야학의 교사로 활동하는 경우도 있다. 그들 또한 같은 상황을 겪었기에 공부를 하는 학생들의 어려움과 형편에 맞게 지도할 수 있고, 때로는 동료로서 그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통해 방법론을 제시할 수 있다. 장애인 야학은 정치, 경제, 문화, 교양 면에서 제도권 교육에서 실현하기 힘든 교과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장애인 인권교육이나 장애인 문제에 대한 토론을 통해 관심을 유도하고, 동아리를 운영해 새로운 장애인의 문화형성과 여가에도 도움을 준다. 또한 이를 통해 교사는 학생과 대화를 나누며 배움과 성장을 도모하고 서로 교감한다. 장애인 야학은 단순한 지식습득이나 기술을 배우는 학교라는 기존의 역할을 넘어서, 사회운동 등으로서 새로운 삶을 꿈꾸는 공동체로 장애인들에게 다가선다. △ 정서적재활적 지원 평생 장애를 갖고 사는 경우나 중도에 장애를 입은 경우도 장애로 인해 저마다의 마음의 상처가 있으며, 장애인 스스로 위축돼 소외 당한다는 생각으로 피해의식을 갖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장애인들이 야학을 통해 교사들과 봉사자, 그리고 비슷한 또래의 장애인과 교류함으로써 정서적인 안정감을 느끼고 사회성을 배우게 된다. 학습을 통해 학력을 취득함으로써 자신감을 획득해 사회에 대한 두려움도 줄어든다. 또한, 집안에서만 생활하던 장애인들은 야학에 다니며 규칙적인 생활로 삶의 활력을 증진하고, 손이 불편한 장애인은 야학의 컴퓨터 교육을 받으며 손가락의 근력도 키우고 미세한 근육의 재활을 발달시키는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재활적 기능도 하고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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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10 18:25

부임 8개월 이철우 새만금개발청장 "민간기업 선뜻 뛰어들 '새만금 프리미엄' 구축 시급한 과제"

30여년 간 묵혀 있던 새만금 개발의 청사진이 펼쳐졌다. 새만금개발공사 설립을 골자로 한 새만금사업 추진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고, 새만금개발공사가 설립돼 국가 주도 매립이 추진되기 때문이다. 정부도 설립될 개발공사를 통해 매립공사에 속도를 내고, 2023년 새만금 세계잼버리 개최 전에 주요 사회기반시설(SOC)이 갖춰지도록 집중 투자하겠다는 입장이다. 개발공사 설립이 정부의 로드맵대로 차질 없이 진행되고, 새만금개발청이 연내 현지로 이전하면 새만금 사업 현장도 활기를 띨 전망이다. 매립공사와 SOC시설이 앞당겨지면 민간투자 역시 활발해질 것으로 보인다. 새만금 개발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이철우 새만금개발청장에게 개발공사 설립 등 향후 새만금 개발 로드맵에 대해 들어봤다. -새만금개발공사 설립이 갖는 의미와 역할은. 그간 새만금 사업은 민간 주도로 용지를 매립하고 개발하도록 계획되어 사업이 전반적으로 더디게 진행됐습니다. 매립사업의 특성상 고비용이고 자금 회수에 장기간이 소요되어 민간이 선뜻 투자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고 속도감 있는 사업 추진을 위해 공공의 역할을 강화하기로 하고, 새만금개발공사를 설립해 내부개발을 주도해 나가기로 했습니다. 개발공사가 직접 매립해 기업에 토지를 제공하고 내부 인프라를 공급하면 민간투자를 앞당길 수 있으며, 민간과 함께 재생에너지, 관광사업 등 부대사업도 적극 추진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이로 인해 발생하는 수익은 새만금 개발에 재투자해 사업의 촉매제 역할을 할 것이며, 개발공사의 신규직원 채용 시 지역 인재를 선발하는 등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많은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개발공사의 설립 절차는 어떻게 되나요. 개발공사 설립을 위해 개정된 새만금사업 추진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지난 3월 20일 공포됨에 따라 국토교통부 내 공사설립 준비단을 구성운영 중에 있습니다. 법안 공포 후 약 6개월 정도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며, 올 하반기 내 공사가 출범할 예정입니다. 설립 절차는 법률이 개정됐고, 공사 설립단이 구성돼 조직직제를 마련한 뒤 경영진 선임과 직원 선발 등을 합니다. 이후 정관 등을 제정하고, 공사 출범과 함께 국유재산을 출자하게 됩니다. -개발공사가 설립되면 새만금개발청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나요. 개발공사는 새만금개발청의 감독 아래 공공주도 매립사업을 시행하기 위한 공공기관입니다. 새만금개발청은 정책과 인허가 등을 담당하는 관리청의 역할을 하며, 공사는 매립사업 등에 대한 사업시행자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새만금개발청과 개발공사가 용지매립 이외에 부대사업에 나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개발공사가 추진하게 될 매립사업은 초기 투자비용이 크고 자금회수 기간이 장기간 소요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 때문에 부대사업의 수익을 활용해 설립 초기 공사 운영의 어려움을 해소하고, 새만금 개발에 필요한 재원을 지속적안정적으로 마련하기 위한 것입니다. 현재 새만금개발청은 부대사업으로 새만금의 장점을 활용할 수 있는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 사업과 관광레저 사업 등을 검토하고 있으며, 효율적인 부대사업 추진을 위한 연구용역(2018년 3월 30일~12월 24일)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부대사업을 통해 재원을 마련한다고 하셨는데요. 새만금 개발이나 투자유치 등에 미치는 영향은. 개발공사는 공사 단독 또는 민간과 공동사업 형태로 신재생에너지, 관광레저 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며 현재 다수의 관련 기업이 투자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업들이 가시화되면 새만금 사업 추진은 물론 투자유치 활성화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전망되며, 침체된 지역 경제에도 활력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부대사업을 통해 얻는 수익을 활용해 공사운영, 매립 등 토지조성 사업을 지원하고, 수익이 새만금에 다시 재투자되는 선순환 모델을 구축할 예정입니다. 또한 수익을 지역과 공유할 수 있는 사업 모델을 적극 발굴해 나갈 것입니다. -새만금 개발 사업이 시급히 풀어야 할 과제는 무엇입니까. 민간 기업이 투자하기 좋은 환경, 즉 새만금 프리미엄을 구축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입니다. 우선 속도감 있게 용지를 조성하고 기반시설을 확충해 기업이 생산 활동을 할 수 있는 물리적인 여건을 마련하고, 장기임대용지 제공과 세제 지원 등의 인센티브를 강화해 민간 투자를 활성화해 나가야 합니다. 이와 함께 올해 9월까지 국토부 등과 함께 새만금 개발공사를 설립하고 공사가 원활하게 내부 개발을 진행할 수 있도록 태양광 발전 등 부대사업 모델을 조속히 마련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기재부, 국토부, 전북도 등 관계 기관과 긴밀히 협의해 나가갈 예정입니다. -국제공항, 신항만, 철도 등 물류교통망 구축 사업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신항만은 해양수산부에서 부두 4선석을 건설하는 1단계 사업이 진행 중입니다. 방파제 공사는 지난 2016년 11월 완료했으며, 진입도로와 호안 공사는 지난해 12월에 착공해 현재 공사 중이며, 1단계 사업은 2023년 완공할 예정입니다. 공항과 철도는 국가 중장기 계획에 반영되어 후속 절차를 이행할 예정입니다. 공항은 올해 사전타당성조사를 통해 장래 수요와 입지 적정성, 경제성 확보 여부 등 신공항 개발에 대한 타당성을 검토할 예정이며, 철도는 올해 사전타당성조사를 실시해 개발 시기 등을 검토할 계획입니다. -도로 등 새만금 내부 SOC 건설의 계획 및 추진 사항에 대해 설명해주시죠. 새만금 내부를 동서로 연결하는 동서도로는 2020년 개통 예정으로, 올해 누적 공정률 71%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연말에는 도로의 전 구간이 육지로 드러난 형상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새만금 내부를 남북방향으로 연결하는 남북도로 1단계(2022년 개통 예정) 공사는 올해 누적 공정률 24%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2단계(2023년 개통 예정)는 기본실시설계를 거쳐 올해 말 착공할 예정입니다. 새만금 신항만, 동서도로 등과 연결되는 새만금~전주 고속도로는 올해 상반기에 착공할 예정입니다. -끝으로 부임하신 뒤 8개월여 동안 새만금청을 이끄셨는데요. 도민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현 정부의 새만금 사업에 대한 강한 추진 의지가 표명된 이후 새만금을 바라보는 전북도민의 관심과 기대감이 커진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새만금개발공사 설립 추진 등 새만금 사업이 속도를 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고 있기 때문에 모두가 체감할 수 있는 가시적인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새만금이 대한민국의 미래이자 지역의 희망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도민 여러분의 뜨거운 관심과 아낌없는 지원을 부탁드립니다. ● 이철우 청장은 - 공직 두루 거친 전문통 조직관리 역량 등 탁월 남원 출신인 이철우(59) 새만금개발청장은 전주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학과와 대학원을 졸업, 법학박사 학위까지 취득한 학구파다. 그는 행시(31회)를 통해 공직에 입문해 농림수산식품부 원양협력관, 국무총리실 평가총괄정책관, 국무조정실 총무기획관과 정부업무평가실장을 지내는 등 전문성도 갖췄다. 특히 청와대로부터 국정과제 관리와 평가에 전문성이 있는 관료로서 뛰어난 조직관리 역량과 업무조정 능력을 토대로 새만금 개발을 차질 없이 추진할 적임자로 낙점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청장은 새만금 사업이 공직생활의 마지막 자리가 돼 감회가 남다르다면서 전북의 미래인 새만금 개발이 속도를 낼 수 있게 된 만큼 새만금 개발에 제 역량을 모두 쏟겠다며 도민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응원을 당부했다.

  • 기획
  • 강정원
  • 2018.04.08 19:58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윤명로 서울대 명예교수 "자연을 상실한 시대, 본질 찾고 지키는 정신성이 예술의 힘"

제 2차 세계대전의 참상이 휩쓸고 지나간 유럽에서 한창 부상하고 있던 미술운동이 있었다. 엥포르멜(Informel). 미술가의 즉흥적이고 격정적인 표현을 중시하는 비정형의 추상미술을 지향하는 운동이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시작됐던 우리나라의 추상주의 미술운동도 이러한 흐름에 힘입어 동력을 얻었다. 60년대 초반, 한국미술의 진보적 세대들이 주도했던 모던아트협회, 현대미술가협회, 60년 미술가협회, 악튀엘(Actuel) 등 젊은 작가들이 의기투합했던 그룹들이 주도하는 도도한 물결은 한국화단에 변혁의 시대를 열었다. 그 중심에서 활동하면서 한국화단의 불필요한 권위를 없애고 미술의 본질에 천착하며 추상미술과 판화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오늘에 이르게 한 작가가 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인 윤명로 서울대 명예교수(82)다. 정읍에서 태어나 전주시 동산동에서 성장기를 보낸 윤 교수는 팔십이 넘은 지금도 새로움을 향한 창작정신으로 자신의 독창적인 세계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구축해나가는 화가다.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가장 한국적인 정신, 전통적인 정서를 독창성으로 끌어올리는 작업에 몰두해온 그를 만났다. 융합의 시대, 디지털과 미디어가 홍수를 이루고 온갖 언어와 다양한 소재들이 예술의 옷을 입고 쏟아지는 이 시대에 여전히 미술의 본질에 천착하며 추상화 한길로 60년을 걸어온 그의 작업과 삶이 궁금했다. 작업실이 함께 있는 그의 자택은 서울시 종로구 평창동에 있다. 1976년, 오직 아름다운 전경에 마음을 빼앗겨 지었다는 이 집은 200년쯤 된 소나무 한그루를 중심에 두고 ㅁ자 형식으로 자리 잡은 주택이다. 덕분에 이 집에 들어서면 회랑 형식의 마루를 따라 걷는 어느 공간에서나 이 오래된 소나무를 바라볼 수 있는데, 그 장중함과 아름다움이 묘한 조화를 이루어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게 한다. 소나무와 벗해온 까닭일까. 굽은 선까지도 도도한 소나무처럼 윤 교수가 걸어온 길 또한 도도하고 아름다웠다. -집이 참 아름답습니다. 평창동에서도 꽤 위쪽에 자리 잡은 이유가 있겠지요. 그때는 평창동이 주거단지로 막 개발되기 시작한 때였어요. 오가는 것조차 불편하기 짝이 없을 때였는데, 소나무며 아름다운 산경이 마음을 붙잡았어요. 벌써 40년이 넘었습니다. -정읍에서 태어나셨지만, 전주에서 성장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사업을 하셨는데 이사를 참 많이 다녔어요. 오형제 모두 태어난 곳이 다를 정도였으니까요. 함경도와 평안도 쪽에 살다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다시 전주로 이사를 와서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살았어요. 고향인 셈이죠. -동산동에 대한 기억이 많으시겠군요. 좋은 기억도 많지만 격변기에 겪었던 이념의 갈등이 제게는 아주 깊은 상처로 남아 있어요. 일종의 트라우마가 되었을 만큼. -교수님의 정신에 깊은 흔적으로 남아 있는 대상이 궁금합니다. 초등학교 5학년으로 기억하는데, 마을에 있던 밤나무 옆 분뇨통에 빠져 있는 죽은 사람을 보았어요. 인민군이 몰려오자 동네 청년 몇몇이 완장을 차고 돌아다녔는데 사람을 죽인 것도 그들이 한 짓이라는 것을 알게 됐죠. 더 기가 막힌 것은 그 뒤 수복이 되어 유엔군이 들어오자 완장 찬 사람들이 반대로 바뀌더라고요. 이념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고민하면서 내 그림에는 절대 이념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화가의 길을 가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어린 시절부터 그림 잘 그린다는 칭찬을 받았어요. 사범학교를 다녔는데 미술선생님이 미술대를 가라고 권하셨죠. 부모님이 반대하셨지만 서울로 올라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서울대 시험을 봤어요. -대학시절에 국전에 특선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때는 국전이 화가로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등단 통로였지요. 맞아요. 그래서 기성작가들이 몰렸어요. 대학생은 출품할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대학 3학년 되던 해에 자격이 확대되어 출품했는데 특선을 한거예요. 갑자기 유명해졌지요.(웃음) -국전 특선으로 화단의 주목을 받게 되셨는데, 그즈음 왜 반국전 운동을 시작하셨습니까. 교수님도 특선에 머물면 안 된다며 계속 출품하라고 강권하셨는데, 국전의 권위와 잘못된 질서가 저함심을 갖게 했어요. 당시 홍익대 미대가 막 문을 열었었는데 그 덕분에(?) 미술계에 두 개의 파벌이 생겼어요. 심사를 어느 쪽이 맡느냐에 따라 심사결과도 한쪽으로 쏠리는 겁니다. 수상의 등급에 따라 그림과 작가의 서열이 정해진다는 것도 너무 싫었고요. 그래서 만든 것이 60년 미술가협회입니다. 홍익대와 서울대 졸업생들을 규합해서 반국전 운동에 나선 것이죠. 시청 앞 돌 다방에 모여 선언서를 만들고 덕수궁 담에 전시를 했어요. 우리나라 최초의 야외전시였죠.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때 국전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던 선생님들이 대부분 오신 거예요. 어찌 보면 자신들을 향한 반발과 저항이었는데 오히려 격려하고 새로운 흐름을 지지해주신겁니다. -힘이 낫겠습니다. 화단의 주목을 받게 되면서 우리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자성이 일었어요. 정작 그림이 퇴행하고 있다는 반성이었죠. 그래서 스스로 해산하자 했어요. 당시 현대미협이란 단체가 있었는데 우리 윗세대 화가들이 참여하는 진보적인 그룹이었어요. 세계적인 현대미술 흐름을 들여다보면서 앞서가는 작업을 하던 분들이었는데, 저희와 지향이 맞아 악튀엘이라는 단체를 결성해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국전 특선으로 이름을 알렸지만 어떻게 보면 화가로서의 본격적인 등단은 벽전이나 악튀엘전이라고 봐야할 것 같군요. 맞습니다. 한국 추상미술을 일으키는데 이 두 단체의 역할이 적지 않았거든요. 우리 미술사에서도 꽤 의미 있는 운동이었습니다. -교수님의 판화 작업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60년대 중반 즈음입니다. 63년 5인 판화전을 처음 가진 이후 국제비엔날레에 참여하기 시작했으니까요. 국제성을 깨닫게 된 것도 그즈음인데 당시 한국에서는 판화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었던 때예요. 인구도 아주 미미했고요. 다양한 기법을 섭렵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죠. -판화를 본격적으로 공부하실 기회가 있었습니까. 이화여고에 있을 때 판화가협회를 만들었어요. 68년이죠. 당시 해외 명작을 볼 수 있는 기회가 거의 판화를 통해 이루어졌어요. 그래서 판화를 시작했는데, 기법이 실크스크린에만 거의 의존할 수 밖에 없었죠. 자연히 다양한 기법을 제대로 공부하고 싶다는 욕심을 갖고 있었는데 기회가 찾아왔어요. 록펠러 재단 지원으로 뉴욕 프랫 그래픽센터에서 판화를 공부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에칭(동판화) 리도(석판화) 기법을 모두 섭렵해 한국에 돌아와서는 판화를 대중화하는데 나설 수 있었어요. -대학에 판화과가 생기고 국제공모전도 만들어진 것도 교수님의 판화운동이 큰 역할을 했겠습니다. 69년에 이화여고를 그만두고 서울대 판화교수로 자리를 옮기면서 더 열심히 판화운동을 했어요. 돌아보면 그즈음 판화가 전성기를 맞았던 것 같아요. 70년 국제동아판화비엔날레를 만든 것도 판화 발전에 큰 힘이 되었고요. 아쉽게도 중간에 문을 닫았지만 동아판화비엔날레 덕분에 중국이나 일본의 판화가들과 교류하면서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갖게 되었죠. -국제공모전은 그 뒤 이어지지 않았습니까. 동아는 그렇게 끝나버리고 그 뒤에 공간사를 운영하던 건축가 김수근씨에게 미니어처 판화비엔날레를 만들자고 제안했어요.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캐치플레이스를 내세웠죠. 10센티의 소품이 중심이 되는 형식이었는데 텐바이텐의 판화를 공모한 겁니다. 그렇게 시작을 했는데 세계 각국에서 응모작이 몰려왔어요. 간편하게 참여할 수 있었으니까요. 공간사의 이름이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도 그 덕분이었습니다.(웃음) 작은 것에 주목했던 80년대였어요. 그 이후 미니어처 판화전이 열리기 시작하더군요. 지금 판화의 위상을 들여다보면 오랜 시간을 낭비한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우리 화단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고 우리 화단이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었다는 자긍심도 갖게 됩니다. -화제를 좀 바꾸겠습니다. 교수님은 전통을 작가들이 외면해서는 안 되는 매우 중요한 덕목으로 꼽으시던데요. 이즈음의 환경은 어떻게 보십니까. 안타까운 현실이지요. 창작의 영역에서 전통적인 방법은 귀하게 지켜져야 할 대상입니다. 지나치게 기술적 재료들이나 방식에 의존하면서 전통적인 것의 가치들이 소홀히 다뤄지는 경향이 있어요. 저는 지금도 캔버스에 작업을 합니다. 물론 한지나 다른 재료도 활용하지만 기본은 늘 캔버스예요. 그런데 그 캔버스를 구하기 쉽지 않습니다. 요즘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지 않기 때문이에요. -작년 가나아트에서 열린 회고전도 그렇고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회고전에 소개됐던 작품들이 화단의 화제가 되었습니다. 전통적인 방식을 외면했던 젊은 세대들에게도 자극이 되지 않았을까요. 디지털과 미디어에 지나치게 익숙한 젊은 세대에게 그림을 그리는 것의 의미, 그 과정의 가치를 전할 수 있었다면 좋겠어요. 시간이 나면 여행을 떠나는데 세계의 변화하는 환경을 보고 오면 우리만의 독창성에 대해 더 강한 의지를 갖게 됩니다. 요즈음은 그림을 너무 손쉽게 그리는 것 같아요. 이른바 현대를 디지털 노마드 시대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 해도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몽고의 유목민들이 사막을 헤치고 남쪽으로 내려온 것은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서였거든요. 현대의 디지털 노마드도 그런 정신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은 전통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어요. -요즈음 새롭게 시작하신 작업에 빗자루가 등장했던데요. 아주 재미있는 작업이에요.(웃음) 쓸림의 형태가 매우 흥미롭지요. 화폭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표현해나가는 과정이 새로운 즐거움을 줍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만나고 발견하시는군요. 그러한 형식에 궁극적으로 무엇을 담고 싶으신지요. 나는 전부터 구체적인 형상이 아닌 추상의 세계를 담아 왔어요. 산속에 부는 바람소리를 그리고 싶고 바람을 타고 흐르는 향기를 그리고 싶었죠. 자연의 본질을 탐구하는 과정이랄 수 있습니다. -사고의 폭을 넓혀야만 그런 대상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젊은 세대들에게는 쉽지 않은 과제일 것 같습니다. 미술 환경의 변화도 그렇고요. 지금은 비엔날레가 아니고 옥션과 아트페어의 시대죠. 미술시장의 경계가 정해져 있긴 하지만 지나치게 돈을 목적으로 하는 것들이죠. 민낯으로 드러나는 것만이 우리 앞에 놓여있습니다. 저는 이런 환경을 현대미술의 정점이자 최고의 약점으로 봅니다. 그래서 크리에이티브란 것은 무엇인가를 더 고민하게 됩니다. -교수님에게 그림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림은 예나 지금이나 내 정신의 흔적이에요. 실재하거나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것이 삶과 자연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양인들은 장점이 있어요. 서양 사람은 개구리를 보면 잡아다가 해부부터 하지만 우리는 연잎을 생각하거든요. 단순한 비교지만 그런 정신성이 우리가 지켜야할 가치입니다. 윤 교수가 인터뷰 말미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얼마 전 그의 작업실을 찾은 시카고 대학의 큐레이터가 그가 새롭게 만난 작업 도구인 빗자루를 가져가겠다고 했단다. 그가 관심을 보인 이유를 생각해보니 빗자루가 그들에게는 특별한, 우리만의 도구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고 했다. 우리가 생각하고 지향해야 할 것은 독창성입니다.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물론 그것을 지키고 또한 그 안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떤 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신성으로 지킬 수 있어요. 예술은 방법론에 빠지면 끝납니다. 원로화가가 젊은 세대들에게 꼭 전해주고 싶다는 이야기다. ● 윤명로 교수는 - 한국 판화 성장시키고 대중화한 추상미술의 대가 윤명로 교수는 1936년 정읍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함경북도 길주로 이사를 갔지만 해방이 되어 남북이 갈라지자 아버지는 가족들을 이끌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 전주의 동산동(당시는 완주군 조촌면)에 정착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조촌초등학교와 전주사범병설중학교를 거쳐 전주사범을 졸업할 때까지 살았던 동산동은 그에게 고향이 되었다.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 6.25가 터졌다. 이웃끼리 적이 되어 죽이고 죽음을 당했던 동족상잔의 비극 현장은 그의 삶과 정신을 큰 힘으로 지배하며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되었다. 초등학교 시절, 그림 잘 그리는 그를 자랑으로 여겼던 담임선생님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림을 그리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담임선생님의 칭찬덕분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줄곧 미술반장을 도맡아 할 정도로 그림에 빠져있었던 그는 취직이 보장되어 있던 사범학교를 졸업했지만 취업 대신 미술대 진학으로 길을 바꾸었다. 서울대 회화과에 입학한 그는 대학 3학년 때 서양화를 전공으로 택했다. 같은 해 국전에서 특선을 수상하면서 화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스승은 당시 화가들의 유일한 등용문이었던 국전에 지속적으로 출품할 것을 권했으나 국전의 수상 등급에 따라 작품과 작가를 서열화하는 화단 풍토에 저항심이 생겼다. 1960년 같은 생각을 가진 동료들과 반국전운동을 내세운 미술가협회를 만들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해 덕수궁 담벼락에 작품을 걸어 전시했던 60년미술가협회 창립전은 화단의 굳건한 권위와 질서에 문제를 제기하는 젊은 세대의 의미 있는 도전이었다.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우리의 전통적인 정신을 담아내는 형식을 고민해온 그는 그즈음 판화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국제전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도 판화비엔날레가 계기가 되었다. 63년 제 3회 파리비엔날레에 참여하면서 국제성에 눈을 뜨게 됐다. 올해 50주년을 맞는 한국현대판화가협회를 68년에 창립했다. 1970년 미국 록펠러 재단의 지원을 받아 유학을 떠났다. 1년이란 짧은 기간이었지만 판화를 본격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뉴욕 프랫 그래픽센터에서 판화를 전공한 그는 한국 판화의 오늘을 있게 한 선구자가 되었다. 회화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탐구하며 늘 새롭고 다양한 형식을 만나온 그는 여백으로부터 형태와 색을 찾아내는 자신만의 독창적 세계로 국제 화단이 주목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작가가 됐다. 장욱진 김환기 백남준 유영국 등 당대의 화가들과 교류하며 한국 미술의 오늘을 이끌어온 그는 제 7회 서울 국제판화비엔날레 대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보관문화훈장 등을 수상했으며 2000년대 이후부터는 거의 한해도 거르지 않고 개인전을 열어왔다.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회고전 <정신의 흔적>과 2017년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 회고전 <그때와 지금>은 개인적 삶의 궤적으로서 뿐 아니라 한국 현대추상화의 단면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전시로 화제를 모았다. 국립현대미술관, 런던 대영박물관, 덴마크 헤어닝 현대미술관, 미국 오하이오 신시네티미술관, 일본 도쿄예술대학, 베이징 중국미술관, 리움 삼성미술관 등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서울대 미대학장을 역임했으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

  • 기획
  • 김은정
  • 2018.04.05 21:11

[문화&공감 2018 시민기자가 뛴다] 완주군 문화이장 - 문화로 색칠하는 529개의 '이토록 멋진 마을' 기대해요

몇 년 전 일본을 충격에 빠뜨리며 떠들썩하게 했던 책 한 권이 있다. 2040년이면 일본의 절반, 896개 지방자치단체가 소멸할 것이라고 예측한 마스다 히로야의 <지방소멸>이다. 국내는 또 어떤가. 마강래 중앙대 도시계획부동산학과 교수는 <지방도시 살생부>라는 저서를 통해 2040년엔 전국 지자체 중 30%는 인구감소로 사실상 도시기능을 상실한 상태에 빠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2016년 한국고용정보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국내 228개 시군구 기초단체 중 85곳이 소멸위험 수준에 있다고 한다. 심지어 의성군, 고흥군은 획기적인 변화가 없다면 향후 30년 내 사라질 위험이 가장 높은 지자체 1,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쯤 되니 내가 몸담고 있는 완주군은 어디쯤 서 있나 궁금해진다. 다행히 완주군은 전라북도 14개 시군 중 군 단위 지자체로는 유일하게 위험군이 아닌 주의단계에 포함돼 있다. 농촌에 기반을 둔 도농 복합지역으로는 드물게 꾸준히 증가해 온 인구지표가 긍정적 영향을 끼쳤으리라 짐작해본다. 더불어 지난 수년간 완주군이 집중해온 귀농귀촌지원, 마을공동체활성화, 생활문화확산 등의 정책과 사업들이 조용히 뿌리내리고 싹을 틔우며 맺어온 작은 결실들 덕분이지 않을까 싶다. 최근엔 지방소멸을 연착륙시키기 위한 다양한 지원책들이 지역창생, 지역재생이라는 이름으로 중앙정부와 자치단체들로부터 쏟아져 나오고 있다. 각기 다른 배경과 목표를 외치고 있지만 결국 사람이 답이고, 지역재생은 곧 지역공동체를 회복하는 것으로 모아지는 것 같다. 우리가 완주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완주의 가장 큰 자산은 지난 10여 년간 축적해온 공동체의 역량이다. 2008년부터 시작한 공동체사업은 2015년 기준 마을공동체 61곳과 지역공동체 45곳을 발굴육성했고, 20여 명의 마을사무장을 배출해냈다. 그리고 그 축적된 역량이 토양이 되어 지난해 문화이장이라는 완주형 민간 거버넌스가 첫걸음을 뗐다. 전주의 4배, 서울의 약 1.4배에 달하는 완주의 넓은 땅덩어리는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풍부한 문화자산을 안겨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만큼 정책과 사업이 군민 한 명 한 명, 마을 구석구석 스며들기 어려운 지리적 한계 또한 숙제로 남겼다. 아무리 좋은 정책과 사업이 있은 들, 알려지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반대로 군민들에게는 가까이에서 그들의 문화적 수요를 들어주고 일상 속에서 문화생활을 향유할 수 있도록 돕는 안내자가 필요했다. 완주문화재단은 그런 현장의 니즈를 발견하고 그 수요에 가장 적합한 해답을 고민했으며 그 결과 발족한 것이 문화이장이다. 지난해 11개 읍면, 13명의 문화이장으로 시작해 올해는 13개 읍면, 26명으로 확대됐다. 참가자들의 나이도, 살아온 이야기도, 현재 업으로 삼고 있는 일들도 제각각이다. 20대부터 60대까지, 청년 미디어 스타트업 창업가부터 귀촌 5년 차의 전업주부, 귀농귀촌멘토, 문화해설사, 만경강 지킴이, 색소폰 연주가 등 완주가 제2의 고향이 된 이주민과 평생을 완주군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까지 다양한 층위의 군민들로 구성돼있다. ▲ 송은정 문화기획가완주문화재단 사무국장 문화이장의 주요한 활동은 지역주민들의 문화적 수요와 생활밀착형 문화정책 의제를 발굴하기 위한 문화반상회를 개최하고 예술가와 함께 미적 체험 및 문화적 역량을 키우는 예술워크숍 참여, 그리고 축제공연전시마을 소식 등 완주군 내 문화 소식을 전달하고 공유하는 문화예술통신사로서 활동하는 것이다. 지난해 7월 활동을 시작한 문화이장은 총 46회의 문화반상회와 6차에 걸친 예술워크숍을 진행했으며, 완주문화재단 페어플레이 주민평가단, 지원사업 선정위원, 문화포럼 발제, 기록자, 예술인실태 조사원 등 재단 사업 전반에 전방위적으로 참여했다. 문화이장이 사업의 수혜자로서뿐 아니라 숙의와 토론과 연대, 협치의 책임 있는 문화 거버넌스로 성장하고 참여할 수 있는 개방적 구조가 완주문화재단 내에 구축되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지방소멸이 과장된 공포이고 예측이었다는 주장들도 있다. 공감을 얻기도,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지나친 비관도 근거 없는 낙관도 위험한 일이겠으나, 얼마 전 매우 즐겁게 읽었던 책의 서문에 쓰인 첫 문장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할까 한다.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래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행복동네 후쿠이 리포트라는 부제가 붙은 이토록 멋진 마을이라는 제목의 책이다. 결국은 사람이고 지역공동체의 회복이 다가올 미래를 변화시킬 가장 강력한 동력이자 희망이 아닐까 싶다. 완주군에는 약 529개의 자연유래마을이 있다. 지금은 26명의 문화이장이 26곳의 마을을 찾고 싶고 머무르고 싶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씨앗을 뿌리고 있다. 그 씨앗들은 매년 싹을 틔울 것이고 머지않은 미래에 529개의 마을에는 529명의 문화이장이 이토록 멋진 마을을 위해 뿌린 결실들을 수확하는 날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 김옥자 구이면 문화이장 "선주민-이주민 잇는 가교 되고파" ▲ 김옥자 구이면 문화이장 2009년 오랜 전원생활의 꿈을 이루기 위해 완주군 구이면 하학마을로 들어올 때 마을 어르신들에게 동네에 해가 되지 않게 살겠습니다라고 약속했다. 어르신들은 이사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거요라고 화답해주셨고 그 말씀은 이웃들의 따뜻한 배려로 현실이 되었다. 어느덧 귀향 10년 차를 맞는 완주군민으로 도시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새벽 산책과 구이저수지 둑길의 물안개며, 미술관 뒤편 벚꽃 터널 길들을 내 것인양 마음껏 호사를 누리고 있다. 일상에서 문화예술을 향유하고 싶은 개인의 바람과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가장 자연스러운 매개로서 예술을 마을에서 펼쳐보고 싶었던 희망이 합해져 완주문화재단 문화이장 문을 두드렸다. 운 좋게 문화이장으로 활동하게 되었고 어느 멋진 가을날, 작은 뜨락음악회를 열어보기도 하고, 완주군 예술인 현황조사의 마을 조사원으로 참여해 우리 지역에 어떤 예술인들이 거주하고 있는지 들여다보는 기회도 얻게 됐다. 찾아가는 예술산타 프로그램도 유치해 완주에 이주한 노부부만을 위한 맞춤형 판소리 공연도 선사했다. 올해로 문화이장 2년째를 맞는다. 구이면은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풍부한 문화자산들로 귀향해오는 이주민들이 많다. 문화로 선주민과 이주민을 따뜻하게 보듬고 마음을 잇는 가교 구실을 열심히 해나가겠다. ● 전별 봉동읍 문화이장 "동네가 희망이다사람이 답이다!" ▲ 전별 봉동읍 문화이장 봉동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다. 미디어제작과 관련해 지난해 스타트업을 시작했다. 문화이장을 하기 전에는 완주의 문화예술 현황에 대해 전혀 몰랐다. 문화이장님들의 문화반상회와 활동들을 영상으로 기록하기 위해 찾아다니면서 비로소 완주군 곳곳에서 펼쳐지는 많은 문화행사와 묵묵히 헌신하고 열정을 쏟는 문화현장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해 문화이장으로 활동하며 예술농부의 영상기록자로도 참여하고, 지역문화전문인력 우수 수강생으로 선정돼 홍콩 해외연수를 다녀오는 행운도 누렸다. 지역민을 직접 찾아가는 완주문화포럼 생강의 봉동편을 협력해 진행하며 주민들의 문화예술에 대한 실질적인 수요와 지역에 대한 애착심을 느낀 건 큰 수확이었다. 문제도 해결도 답은 현장과 사람에 있다는 것을 글이 아닌 마음으로 깨달았다고 할까. 올해도 나의 카메라는 소소하지만 소중한 이웃들의 일상을 담아내고 기록하기 위해 더 낮은 곳으로 향할 것 같다. 왜냐고? 동네가 희망이고, 역시 사람에게 답이 있기 때문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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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04 19:02

[참여&소통 2018 시민기자가 뛴다] 봄의 전령사 개구리 - 남획·서식지 파괴에 슬픈 울음…'빼앗긴 들에 희망의 봄을'

기적의 계절이다. 세상은 봄에 다시 태어난다. 겨우내 죽은 것처럼 보이던 가지에도 물이 오르고 꽃이 터지기 시작한다. 꽃소식은 섬진강 줄기를 타고 북상한다. 하동의 매화가 피기 시작하면 곧이어 구례 산수유 축제가 열리고, 데미샘 발원지가 있는 진안의 고로쇠 농가들의 손길도 부산해진다. 이제 곧 섬진강 19번 국도를 따라 벚꽃들이 흐드러지면 봄맞이에 한껏 들뜬 나들이객들의 발걸음도 절정에 오른다. 비록 새해의 첫 날을 따로 정해두었다지만, 사람들은 한겨울 아랫목을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비가 적시고 남녘에서 녹아드는 바람에 몇 차례 밀고 당기기를 거듭하고서야 우리의 몸과 마음은 비로소 추위에서 풀려난다. 경칩이 벌써 한 달 전. 어디선가 익숙한 소리가 들려온다. 개굴 개굴 △봄의 전령사, 개구리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절기다. 환경부 보도자료에 따르면, 육모정이 있는 남원 지리산 구룡계곡 북방산 개구리들이 3월 초에 첫 산란을 시작했다고 한다. 섬진강 줄기로 이어진 하동과 구례에서는 이미 2월 중하순부터 알이 관찰되었다. 작년보다 20여일이나 늦은 산란이라고 하니 지난 겨울이 유난히 추웠던 모양이다. 흔히 산개구리 또는 뽕악이라고도 불리는 이들은 계절을 알리는 전령사들이다. 봄은 꽃보다 먼저 개구리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우리 곁에 찾아든다. 예전 같으면 개구쟁이 시절 추억을 찾아 동네 개울의 돌 밑을 더투기라도 할 법한데 요즘 날엔 꿈도 못 꿀 일이다. 뱀과 개구리의 상당수가 이미 포획금지종으로 지정된 탓이다. 포획만 아니라 먹는 것조차도 처벌을 받을 수 있다. 현행 야생동식물보호법은 식용으로 양식해서 유통되는 경우만을 예외로 두고 있다. 멸종을 우려해야 할 정도로 개체수가 감소했다는 조사결과에 따른 것이다. 산골 아이들의 허기를 달래거나 노인들의 심심풀이를 넘긴 지나친 보신문화가 가져온 남획의 결과다.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기억이 되고 말았다. 잠시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로부터 벗어나보면 양서류와 인간과의 오랜 인연은 보은과 애틋함으로 그득하다.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워야 했던 콩쥐를 계모의 심술로부터 구해주었던 두꺼비는 강줄기를 따라 쳐들어오던 왜구들을 물리치도록 돕기도 했다. 섬진강(蟾津江)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얻어졌다. 개구리 왕눈이와 아로미, 투투가 살던 무지개 연못을 좋아했던 선생님은 캐로로 전사들의 우주무용담을 보고 자란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액침표본병에 담긴 개구리를 들어 보이며 변온동물인 개구리는 해부를 해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지 않는다고 힘주어 말하는 과학 선생님의 설명을 아이들은 영문 몰라 할 수 있다. 대신 손안에 놓인 개구리를 마녀의 마법에 걸린 왕자님이 혹시 아닐까 하는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아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어른들의 입맛보다는 아직 아이들의 동화 같은 상상 속에서 양서류들은 훨씬 더 친근한 존재로 살아 있다. △개구리 올챙이적 시절 그런데 변신이라는 키워드로 이들의 생태를 읽어보면, 개구리를 포함한 양서류(兩棲類)의 삶은 경이롭다. 우선 양쪽에서 서식한다는 그 이름부터 심상치 않다. 물과 뭍을 오가며 판이하게 다른 생태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이들은 독특한 진화를 선택했다. 알에서 깨어난 올챙이들은 수중호흡을 할 수 있는 아가미를 가졌다. 그리고 얼마쯤 지나면 뒷다리가 생기고, 앞다리도 자라나면서 꼬리가 퇴화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 호흡기관 역시도 육상에서 공기호흡을 할 수 있는 허파를 갖춘다. 그렇지만 그 기능이 충분하지 못해 대부분이 피부호흡을 병행하며 의존도가 높다. 때문에 어른이 되어서도 물이 있는 서식지를 멀리 벗어나지 못한다. 식성 또한 변하는데, 올챙이 시절에는 주로 녹조류와 작은 물벌레들을 먹는 잡식성이지만 성체가 되면 적극적인 육식을 한다. 이웃해서 살아가는 잠자리와의 관계를 두고 보면 개구리들의 인생은 갑을의 역전 드라마 같다. 딱히 방어수단이 없는 올챙이들은 잠자리 유충들의 단골 먹잇감이지만, 일단 성체로 자란 잠자리들에게 개구리들의 날렵한 혀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서로에게 위험하면서도 또한 서로 없이는 못 사는 기막힌 애증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한 발 물러서서 보면 생태계는 이런 방식으로 전체의 조화와 균형을 맞춰간다. 이른 봄부터 초여름까지 이어지는 개구리들의 울음소리는 잠을 설치게 하는 골칫거리다. 특히 개구리들의 서식지였던 방죽을 매립해서 새로 지은 아파트 단지로 입주한 주민들이 피해자다. 그런데 막상 그들의 포접 과정을 훔쳐보게 되면 암컷을 차지하기 위한 수컷들 간의 치열한 경쟁과 절박함에 놀랄 수밖에 없다. 다른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어렵게 암컷의 등을 차지한 수컷은 암컷의 앞다리 뒤쪽, 겨드랑이 안쪽을 생식혹이 달린 앞발가락으로 힘껏 조여 잡는다. 간혹 포접과 산란과정에서 암컷들이 죽는 불상사도 생긴다. 콜링(Calling)이라 불리는 개구리들의 울음소리는 턱밑이나 양볼을 부풀려서 내는데, 주로 수컷이 암컷을 부르는 소리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소리는 어두운 밤에도 먹잇감을 찾는 너구리같은 천적들도 함께 불러들인다. 목숨을 걸고 우는 것이다. 절박하면서도 애절하다. 아마도 개구리들의 울음이 이웃 주민들의 밤을 더욱 싱숭생숭하게 만드는 이유인 듯 싶다. 변신의 극치는 개구리들의 겨울잠이다. 밤의 온도가 급격하게 떨어지는 10월 즈음이면 먹이가 되는 곤충들도 하나 둘씩 사라져 먹고 살기가 어려워진다. 더 큰 문제는 촉촉한 피부를 유지해야 피부호흡을 할 수 있는데, 물이 얼어버리는 겨울에는 숨쉬기조차 힘들어진다. 짧지 않은 겨울나기를 위한 마지막 변신을 시도한다. 땅속으로 들어가 가사상태로 겨울을 난다. 주변 온도에 따라 체온을 낮추고 에너지 소비를 극도로 줄이려고 심장 박동조차 거의 멈추어 둔다. 겨울 노지에서 살아남는 시금치나 고로쇠처럼 혈액 내 당분 농도를 끌어올려 몸이 얼지 않도록 만든다. 비록 살아 있어도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없고 그렇다고 죽었다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이 이들의 겨울잠이다. 개구리들은 새봄이 오면 다시 살아날 것을 믿기 때문에 죽음 같은 잠 속에 기꺼이 빠져든다.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通), 통즉구(通則久) ▲ 신진철 전북자연환경연수원장 흔히 궁하면 통한다는 말의 기원은 주역(周易)의 한 구절에서 나왔다. 변화와 소통 그래야 오래도록 지속가능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주는 말이다. 재작년 겨울과 지난 해 봄을 되돌아보면, 깊은 생각의 싹을 틔우는 씨앗 같다. 대한민국의 새 봄은 만년설처럼 결코 녹을 것 같지 않던 권위의 토대를 단번에 무너뜨리고 있다. 대지의 민낯이 봄볕에 드러나면서 숨 죽여 왔던 씨앗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변화는 늘 진통과 불편을 동반해왔다. 그렇게 무너지고, 그렇게 새로워지면서 세상이 바뀌어왔다. 그런데 모두가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생각하지만, 정작 스스로 변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라던 톨스토이의 말마따나 나에게 되묻는다. 겨울을 지겨워하면서도 막상 봄을 맞을 준비는 제대로 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잊지 말자. 하찮은 존재 같아 보이지만, 꽃보다 먼저 봄을 불러 오던 주역이 누구였던가를. 그들이 왜 물에서 뭍으로 올라왔는지, 추위를 견디기 위해 왜 극단적인 변신을 해마다 되풀이 하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도전과 변화를 통해 3억5천만년이나 살아남았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현실에서 돌아 본 양서류들의 운명은 무척 위태로워 보인다. 남획뿐만 아니라 서식지 파괴로 인한 멸종 위기, 더불어 지구온난화 때문에 전문가들까지 나서서 개체 수 조사를 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변신의 귀재인 개구리들이 이번에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개구리들이 빼앗긴 땅에도 봄은 찾아올까. ● 4월 28일은 '개구리 보전의 날' 올해로 벌써 10년째, 4월의 마지막 주 토요일은 개구리 보전의 날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본부를 두고 있는 SAVE THE FROGS!라는 비영리단체가 주관하는 행사다. 취지는 시민들의 참여와 작은 실천을 통해 세계적으로 멸종위기에 놓인 양서류들의 보전과 인류와 야생동물이 공존하는 더 나은 지구를 만들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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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03 19:26

남북 정상회담 앞두고 만난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 "북한 김정은 체제 보장되면 비핵화 가능하다"

한국전쟁의 포성은 멈췄지만 전쟁의 유산은 여전히 한반도를 떠돌고 있다. 이달 27일에 열리는 남북정상회담도 결국 20세기 중반에 벌어진 남북 분단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 이번 회담을 계기로 남북관계의 전환과 한반도 비핵화가 이뤄질 수 있을지 이목이 집중된다. 노무현 정부 당시 통일부장관을 지낸 정동영 국회의원은 남북정상회담 결정을 이끈 자체가 성공이라며 회담이후 남북 간의 군사적 긴장완화와 냉전체제의 해체가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전북일보는 지난달 28일 정 의원을 만나 김정은 북한 노동위원장의 중국 방문 의미와 북한체제의 변화, 정상회담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 간 역학관계의 변화, 남북관계와 전북경제 등 여러 사안을 짚었다. 대담은 백성일 부사장이 진행했다. -김정은 북한 노동위원장이 최근 중국을 방문했다. 시진핑 주석이 김 위원장을 북경에 초청했나. 공식 발표에 따르면 중국에서 북한의 제의를 수락했다고 한다. 김정은 위원장이 직접 북경 방문을 중국에 제안한 것이다. -김 위원장이 남북정상회담이나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이 같은 행보를 보인 이유는. 김정은의 시간표대로 가는 행보다. 북한은 큰 그림을 가지고 움직인다. 지난해 9월 6차 핵실험과 11월 29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핵 무력 완성선언 등도 향후 전개될 북중관계에 대한 신호탄으로 볼 수 있다. 미사일이 기술적으로는 완성되지 않았는데 정치적으로 완성했다고 선언한 것이다. 마치 전략적 결단을 한 셈인데, 결단의 양태는 올 1월 신년사를 통한 남북관계 정상화, 2월 평창올림픽 참여, 4월 남북정상회담, 5월 북미정상회담 등의 순으로 드러난다. 이후에는 북중관계와 북-러 관계 혹은 북-일 관계의 복원으로 이어질 수 있다. -중국도 김 위원장의 방문을 원했나. 중국 역시 한반도 문제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길 원한다. 지난 7년 간 중국은 북한과 불편한 관계였다. 그런데 최근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 등의 얘기가 나오면서 남-북-미 3각 구도가 급물살을 탔다. 이 때문에 중국은 한반도 문제에 대한 주도권과 영향력을 상실할까봐 불안해했었다. 때마침 김 위원장으로부터 신호가 온 것이다. -남북정상회담과 내달 있을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보인 행보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북한이 중국과 미국 사이를 오가면서 뭔가 챙기려는 다른 뜻이 있는 것 같다. 경계해야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좀 더 큰 틀에서 봐야한다. 김 위원장이 2012년 4월 처음 등장해서 내세운 게 두 가지 목표다. 하나는 핵 무력 건설, 하나는 경제 발전이다. 그 중 핵무력에 대해서는 지난해 11월 29일 완성했다고 선언했다. 이제 경제발전만 남았는데, 북한의 경제발전 의도는 지금까지의 동향만 보면 알 수 있다. 북한은 2012년부터 6년 동안 4번이나 핵실험을 하면서도 경제개발구역을 21곳이나 지정했다. 서해안 쪽에 7개, 압록강하고 두만강 쪽에 7개, 나진선봉 원산에 7개다. 특히 지난해 12월 북한에 대한 선제타격론이 논의되고 있던 시점에도 북한은 22번째로 평양시 강남군에다 강남개발구역을 지정했다. 그런데 이 지역들이 모두 외국인 투자지역이다. 즉 외국인 자본을 투자해서 기업을 유치하고 발전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세계를 위협하는 핵무력을 건설하면서 외국기업 투자를 유도한다는 게 이치상 맞질 않는다. 결국 뒤집어보면 북한은 그만큼 고립에서 벗어나 교역을 하고 싶다는 의지가 있는 것이다. 북한은 베트남의 길을 가길 원한다. 정치는 일당 독재지만 경제는 시장경제로 가는 흐름이다. 베트남이 이 체제로 성공을 거뒀기 때문이다. 이런 흐름에서 핵 무력을 완성했다는 선언은 체제안정을 위한 자구책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북한이 미국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체제안정이 담보되면 비핵화도 가능한가. 북한의 기존 행보를 보면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다. 타당한 지적이다. 북한은 지난해 7월에도 미국독립기념일에 맞춰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발사하는 등 도발행위를 계속해왔다. 누가 북한을 믿을 수 있겠는가. 비핵화는 물 건너갔다고 본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이달 들어 북한은 노선을 대폭 선회했다. 정의용 국가안보실장과 서훈 국가정보원장이 북한에 특사로 갔을 때 김정은 위원장이 했던 발언, 선대의 유훈이라는 말을 주목해야 한다. 이 말은 김 위원장의 부친인 김정일 위원장 때부터 이어져 온 말이다. 통일부 장관시절인 2005년 6월 17일, 김정일 위원장과 담판을 지어야 할 상황이 있었다. 당시에도 핵 문제가 주요 화두였는데, 북한이 6자 회담을 거부하고 있었다. 김정은 위원장에게 6자 회담에 나오라고 설득을 하면서 핵 보유가 북한의 최종 목표입니까라고 물었더니 미국이 우리를 압살하려고 하기 때문에 자구책으로 핵을 개발할 뿐 미국과 적대관계가 해소되면 핵을 가질 이유가 없다고 답했다. 그래서 남쪽 국민들은 북한을 믿지 않는다고 했더니 김정일 위원장이 조선반도의 비핵화는 김일성 주석의 유훈입니다라고 했다. 귀가 번쩍했다. 남북관계를 20년 동안 다뤄왔는데 그런 말은 처음 들었다. 북한에서 김일성 주석의 유훈은 헌법과 노동당 규약보다 더 위에 있다. 그렇지만 당시 유훈은 남북관계정상화와 북미수교가 실패하면서 국제적으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해 미국과 협상을 통해 한미군사훈련을 연기해서 북한을 안심시켰고, 북한에서도 비핵화가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는 말을 13년 만에 다시 꺼내면서 전향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남북 합의문에 비핵화 조항이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이다. 이제 본인들이 얘기한대로 체제안전보장이 된다면 핵을 가질 이유가 없다. 핵을 포기하고 정상국가의 길을 걷기로 했다면 그 모든 수순이 이해가 된다. -미 정부는 북한에 대해 여전히 강공모드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북 대화론자인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을 경질하고 대북 매파인 마이크 폼페이 오 중앙정보국(CIA) 국장을 국무장관으로 지명한데 이어, 백악관 안보사령탑에 볼턴 전 대사를 낙점했다. 전쟁 내각(war cabinet)을 완성했다는 지적이다. 그렇게만 볼 수는 없다. 북한의 비핵화를 유도하기 위한 내각을 짠 것으로 판단한다. 지난해 11월 미국에서 볼턴을 만난 적이 있다. 강성파라는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볼턴은 북한이 비이성적인 판단을 한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동맹국인 남한이 동의하지 않는 상황에서 미국이 북한을 선제공격할 일은 없다고 못 박았다. 나름의 원칙과 기준이 분명한 사람이었고 경험도 풍부했다. 선제공격이라는 극단의 상황이 발생하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남북정상회담에서 남한의 역할이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남북관계의 재정립이 필요해 보인다. 가장 핵심적인 말이다. 북미 간의 관계도 적대적이지만 남과 북은 이중적 관계이다. 통일을 향해 함께 가야 할 대화상대이면서, 동시에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적대적 상대이다. 그래서 남북 정상회담의 과제는 이 이중적 관계를 해소하는 것이다. 예컨대 1972년 동서독이 기본조약을 통해 친구 관계로 전환하면서 먼저 통행 협정을 했다. 그런 길을 트는 계기가 이번 남북정상회담에서 열려야 한다. 이와 함께 남한은 북미정상회담이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큰 역할을 해야 한다. 북한과 미국사이에는 극도의 불신이 있다. 그래서 중간에 보증인이 필요하다. 그 역할을 맡을 국가는 바로 남한이다. 남한이 현명한 보증이 돼서 북한의 비핵화, 미국의 북한체제 안정보장 카드를 이끌어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미국은 비핵화, 북한은 체제안정보장과 시장경제전환을 이룰 수 있다. -최근 한반도의 분단을 둘러싼 다자관계에서 제팬 패싱, 차이나 패싱등의 신조어가 나오고 있다. 동북아시아의 다원적인 역학관계를 고려했을 때 이런 부분들은 경계를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의 경우 삼국지를 여러 번 써야 한다. 우선 남한-북한-미국 이렇게 삼국지가 있다. 또 남한-북한-중국. 남한-미국-일본, 남한-북한-러시아 관계도 염두에 둬야 한다. 경우의 수를 따지면 3자 회담을 한 6개 정도 해야 한다. 삼국지만 있는 게 아니다. 앞서 언급한 나라들의 관계가 어떻게 구축되느냐에 따라 사국지도 될 수 있고, 육국지도 될 수 있다. 다소 복잡하고 어려운 과제지만, 단군 이래 최초로 한반도가 외교의 주역에 올라설 수 있는 조건이다. 이런 걸 보면 문재인 대통령이 운이 있는 것 같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은 북핵 이외에 경제협력, 이산가족상봉 등도 중요한 의제로 논의될 것같다. 그렇다. 특히 철길을 통한 경제협력이 가장 중요하다. 남한의 수출경로는 배와 비행기 밖에 없다. 남북 분단으로 육로가 막힌 채 70년을 살아왔다. 우선 전주역부터 출발해서 평양을 지나서 압록강을 건너서 기차만 다닐 수 있게 돼도 엄청난 기회가 열린다. 이미 10년 전에 남북 정상 간에 합의한 내용으로 충분히 실현가능하다. 이는 호남 경제의 8분의 1에 불과한 전북 경제가 살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골드만삭스와 보스턴컨설팅 그룹에서 남북교역 확대를 통한 경제효과와 관련한 보고서가 나왔는데, 이 보고서에는 남북이 철길로 북한과 교역을 할 경우 두 자릿수 고도성장율을 기록할 수도 있다고 전망한다. 북한은 베트남의 길로 가고, 남한은 고도 성장을 통해 일본경제(2040년)를 추월한다는 내용이다. 이밖에 한반도가 탈냉전, 공존의 시대로 전환하는 효과가 있다. -통일부 장관 시절에 만들었던 개성공단의 재가동에도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방금 남한의 고도성장을 전망한 보고서에도 개성공단을 사례로 들었다. 실제 산업단지 내 공장 124개 모두가 흑자 나는 곳은 개성공단밖에 없다. 현재 쫓겨난 기업들도 다시 들어가게 해달라고 줄곧 요청한다. 예컨대 매출 1조원 기업도 있다. 전북의 업체도 여섯 개나 있다. 개성공단은 북한으로 봐서는 시장경제 학습장이고, 남쪽으로 봐서는 중소기업 희망의 창구이다. -남북정상회담이 잘 끝나면 새만금도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 개인적으로 영종도에서 새만금까지 해상고속도로 건설을 구상하고 있는데, 이를 신의주까지 확대할 생각이다. 신의주, 진남포, 인천, 새만금, 목포 이렇게 연결되는 고속도로가 생기면 신 북방경제시대를 맞이할 수 있다. -보수진영에서는 남북간 대화가 북한에게 핵개발의 시간만 벌어줄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남북 정상회담이 결실 없이 맹탕으로 끝난 경우 한반도의 긴장이 더 악화될 우려가 없는가. 최근 정상회담은 실패한 정상회담 보다 성공한 정상회담이 훨씬 많다. 서로가 원하는 것이 비슷하고 절실하기 때문이다. 남한과의 북한의 교역조건, 거래 조건도 비슷한 측면이 있는데, 큰 틀에서 보면 한반도의 안정이다. 이 때문에 남북 정상회담개최 자체가 이미 성공을 예고한다고 보고 있다. 더 좋은 점은 남북 정상회담 뒤에 북미정상회담이 배치돼 있다는 것이다. 핵심은 북미관계이다.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과 적대적인 관계를 갖고는 북이 동굴속에서 나와서 광장(시장경제)으로 진출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안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북한은 남한과 협상을 벌일 것이다. -남북정상회담이 잘 되면 국가와 전북에 번영이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전북의 지지없이 민주화와 남북평화체제가 있을 수 없다. 말하자면 전북은 일찍부터 DJ의 대북 포용정책에 대해 가장 확실하고 견고한 지기기반이다. 그런 점에서 남북관계의 대전환이 호남의 새로운 길과 이익에 부합하고, 새로운 발전전략을 모색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줄 것으로 본다.

  • 기획
  • 김세희
  • 2018.04.01 20:01

[길 따라 맛 따라] 전주 아중리 - 호수 한바퀴 돌고 나니 입맛 돋아…어떤 맛난 음식 먹어볼까

전주 아중지구가 오늘의 모습을 갖춘 것은 20년이 채 안 된다. 1993년부터 5년간 택지개발을 통해 허허벌판이 신도시로 바뀌었다. 상전벽해라 할 만하다. 대단위 아파트 단지와 함께 모텔과 유흥시설, 음식점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서 한 때 난개발의 전형이라고 지탄을 받기도 했다. 2000년 중반까지도 전주의 해방구라고 할 만큼 화려했던 아중지구는 이후 전주 중화산동과 상권을 나눴고, 서부신시가지 개발로 또 한 번 상권이 흔들렸다. 그럼에도 아중지구는 여전히 전주 동부권의 핵심 상권이다. 예전만은 못하지만 모텔촌을 중심으로 유흥가들이 불야성을 이룬다. 아중지구의 매력은 무엇보다 아중호수를 끼고 기린봉을 옆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행정구역상 우아동 1가에 자리잡은 아중호수는 지난 2015년 아중저수지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다. 전주천삼천과 함께 전주를 대표하는 수자원인 아중저수지는 1952년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축조됐으며, 지금은 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전주시는 2009년부터 생태관광명소 조성을 추진해 수상산책로와 수상광장을 만들었고, 앞으로 가족숲과 야외무대, 어린이 생태놀이터 등을 만들 계획이다. 아중호수 위 남북으로 펼쳐진 기린봉 역시 전주시민들에게 소중한 명소다. 산의 형세가 상서로운 동물인 기린이 여의주, 즉 달을 토해내는 듯한 풍광을 가졌다 하여 기린토월(麒麟吐月)이라고도 불렀다. 아중호수 쪽에서 정상까지 1㎞ 남짓하며, 쉬엄쉬엄 가더라도 1시간 30분이면 왕복이 가능해 남녀노소 누구나 즐겨 찾는다. 산 정상에 오르면 전주시내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근래에는 아중역을 기점으로 전주한옥레일바이크가 운영되고 있다. 아중역 폐선 부지에 신리~왜망실까지 왕복 3.4 km를 시속 15~20km로 달리는, 이색적인 철길 자전거 체험레포츠다. 호수와 산, 레포츠 시설 등으로 관광객들을 부르는 아중지구에 맛집이 빠질 수 없다. 실제 아중지구 전체가 음식 천국이라고 할 만큼 구석구석 식당들이 포진해 있다. 아중저수지 주변만 하더라도 매운탕, 닭요리, 횟집, 고기 집, 분식집 등이 즐비하다. △화심장어 아중점 아중역 맞은편에 장어요리 전문점들이 여러 개 있다. 고창의 풍천장어가 전국적인 명성을 자랑하며 전주에도 풍천장어라는 이름을 단 장어집을 만날 수 있다. 여기에 몇 년 전부터 실뱀장어 포획이 안 돼 장어 가격이 크게 올랐다. 서민들로서는 가격 부담 때문에 선뜻 장어집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이런 여건에서 아중지구의 장어 전문점들이 제대로 생존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올 실뱀장어 채포량이 더 줄었어요. 작년에도 비쌌는데 올 채포량은 그 반절입니다. 출하 할수록 손해라며 양만장에서 출하를 꺼릴 정도니까요. 자연히 장어구이 소비자 가격이 올라 손님도 감소할 수밖에요. 화심장어 아중점을 운영하는 김인수씨(67)는 누구보다 양만업계와 장어 전문점의 어려움을 잘 꿰뚫고 있다. 완주와 익산의 2곳 양어장에서 직접 장어를 기르고, 3개의 전문점을 운영하고 있다. 부친이 지난 84년 익산에서 양어장을 시작해 4형제가 뒤를 잇고 있는 만큼 가족기업이라고 할 만하다. 화심장어의 간판은 완주 화심의 지명에서 따왔다. 화심에 양어장과 본점이 있다. 전주 아중점으로 진출한 것은 15년 전이다. IMF와 농수산물 수입개방의 파고를 겪으며 자가 생산의 판매장 확보 필요성을 절감하면서다. 수입개방 당시 양어장이 큰 타격을 받았어요. 돼지고기 값에도 못 미치는 가격 폭락으로 양만업자(본래 장어양식업을 양만업이라고 한다)가 잇따라 자살하는 일도 있었으니까요. 화심장어는 당시 어려움을 셀프장어로 극복했다. 요즘에는 단가를 낮추기 위해 한 때 붐을 일으킨 셀프장어집의 원조가 이곳이었다. 완주 화심 일대는 전국에서 셀프장어를 벤치마킹하러 온 음식점 주인들로 연일 북새통을 이뤘다고 김씨는 회고했다. 근래 몇 년사이 실뱀장어 가격이 크게 오르면서 제2의 위기를 맞고 있는 양만업계는 출하를 최대한 늦추는 것으로 대응한다. 실뱀장어 입식 이후 2년 정도에 출하하던 것을 더 키워 출하시키는 것이 사료비 부담보다 이익이기 때문이다. 김씨는 자신을 농사꾼이라고 했다. 3곳의 음식점 영업보다 30만 마리를 키우는 양어장이 주업이라는 의미에서다. 그는 장어 양식방법에 많은 연구를 했단다. 장어가 3급수에도 살 만큼 생존력이 뛰어나지만, 분비물과 항생제에 오염되지 않도록 순환여과식 방법을 창안하기도 했다. 화심장어 아중점의 상차림만으로는 두드러진 특징이 별로 없어 보였다. 다만 주인의 노하우를 담아 직접 기른 장어를 조달하기 때문에 신선함을 맛볼 수 있다. 주방에서 미리 익혀 나와 고기를 굽는 수고를 덜 수 있다. 셀프장어를 처음 도입한 이 집에서 장어를 익혀 내놓는 이유가 있었다. 숯불의 높은 온도에서 빨리 구워야 장어의 제맛을 낼 수 있는데, 손님들의 경우 시커멓게 태우는 일이 많아서다. 자가 생산한 재료를 쓰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것도 이 집의 장점이다. *구이 1㎏ 7만 8000원, 장어탕 9000원(점심 특선 6000원), 장어수제비 4000원 *전화 063)245-6592 △아중 옴팡집 화심장어 맞은편에 아중 옴팡집이 자리하고 있다. 작고 낮은 초가의 오두막집을 옴팡집이라고 한다. 옴팡집 쳐놓고 맛집 아닌 집이 거의 없다. 시설이 열악하면서도 손님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것은 그만큼 색다른 맛이 있기 때문이리라. 아중 옴팡집 또한 겉은 허름하지만 막걸리집에서 시작해 37년째 음식점을 이어가는 아중리의 터줏대감이다. 이곳은 옻닭이 별미다. 옻나무를 쪼개서 국물을 내는 방식이 아닌, 옻나무를 톱밥으로 만들어 국물을 낸다. 이렇게 할 경우 국물이 훨씬 찐하다고 한다. 옻나무는 장성에서 조달하며, 가을에 채취해 말린 후 봄에 톱밥으로 만든다. 옻닭을 찍어먹는 고추간장, 찹쌀과 녹두를 불려서 끓여주는 죽, 똥집 튀김도 별미다. *옻닭꾸지뽕 한방백숙감태나무 백숙닭도리탕 4만5000원, 옻오리 5만5000원 *전화 063)246-4767 △용진 시골아줌씨국수 기린봉, 아중호반을 산책하고 허기질 때 가볍게 한 끼를 해결하는 곳을 찾는다면 용진 시골아줌씨 국수집을 추천한다. 이 집 역시 컨테이너로 만든 작은 건물로 외형은 볼품이 없지만, 국수 맛으로는 빠지지 않는 집이다. 메뉴는 물국수와 비빔국수 2가지가 전부다. 밑반찬 또한 청양고추와 된장, 김치와 양념간장 정도로 단출하다. 그럼에도 쫄깃한 면발에 담백하고 시원한 국물에서 30년 국수집의 관록이 묻어난다. 찌그러진 양푼이 시골밥집 같이 느껴져 정겹다. 물국수는 집에서 만든 옛날 잔치국수 같아 40~50대 입맛에 제격이다. 고추장과 싱싱한 야채로 버무려진 비빔국수는 봄철 입맛을 다시게 한다. 소주병에 담긴 참기름을 곁들여서다. 국수 분량은 손님이 원하는 만큼 나온다. 화려함 대신 소박하고 푸짐한 인심을 맛볼 수 있다. 가격은 기존 4000원에서 올해부터 5000원으로 인상됐다. *전화 063)245-8384

  • 기획
  • 김원용
  • 2018.03.29 19:05

[문화&공감 2018 시민기자가 뛴다] 문화·예술 입고 찾아온, 부안 '첫사람' - 정원문화도시 계획 앞당길 수 있는 변화의 조짐

2018 시민기자가 뛴다- 문화&공감은 전북지역 문화예술계 전문가들이 지역 문화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담론을 만들어내는 공간입니다. 올해는 김형미 시인(전북작가회의 사무처장)과 송은정 완주문화재단 사무국장, 장재영 세계여행가(순창 문화카페방랑싸롱대표), 한유경 연극연출가가 참여해 도내 곳곳에서 일어나는 특색있는 문화예술 활동과 단체, 공간 등을 조명합니다. 문화&공감은 오는 10월까지 매주 목요일자에 게재됩니다.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복숭아꽃이 피고, 꾀꼬리가 울며, 제비가 날아온다는 춘분절. 정원문화도시를 꿈꾸는 부안에는 알 밴 주꾸미가 올라오고, 지장암 월인지에 개구리가 알을 슬며, 솔섬 머리 위에 뜬 달 색이 붉어지기 시작한다. 이러한 절기에 어느 손이 와 계시다는 전언을 듣고 동진강 다리 건너 부안으로 든다. 부안 IC에서 내려서는 길목 입구, 씨앗을 심고 있는 첫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퇴적된 흙과 시간의 흔적을 나타내기라도 하듯 진갈색의 그을린 피부색을 띤, 부안에서 만난 첫사람. 600년 동안 농지였던 이 땅의 주인공인 농부의 모습이라고 한다. 현 전남조각가협회 김숙빈 이사와 전남대학교 윤종호 강사, 신광훈 조형물 제작자에 의해 탄생한 사람. 사람이 올 때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구름이 비를 몰아오듯 시절은 계절을 불러오고, 사람은 때를 몰고 온다. 부안군은 군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도시재생사업에 올인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 뜻을 확고히 하겠다는 의미로, 식물의 뿌리를 보호하고 생명의 토대가 되는 토양의 상징인 진갈색 사람을 앞세운 것이다. 오복을 누리고, 오감을 느끼는 축복의 땅 부안에, 도시재생과 더불어 문화예술이라는 때를 입고 나타난 사람. 내가 바라는 손님인가. 고마제 농촌테마공원 조성지역에서 제일 먼저 반겨준 이인 것만큼은 확실하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노후화된 기존 시가지의 인프라를 재정비하자는 것이 도시재생이다. 공간적, 환경적으로 쇠퇴한 지역을 물리적으로 개선하는 것이다. 고마지구 농촌테마공원은 변산반도와 새만금 등 해안 관광명소로 치중한 관광객을 침체된 부안읍내권역으로 유입하기 위한 방안이다. 또한 부안군에 부족한 지역 주민 휴양시설을 제공하려는 의도이기도 하다. 부안군은 이런 도시재생 사업의 차별화를 문화와 예술에 접목을 두고자 한 것이다. 예술은 시간이 갈수록 그 가치는 물론 평가가 돋보인다. 아름다움에 관한 미적 감성과 사상이 영혼의 완성도를 높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막심 고리끼는, 인간은 그 본성에서부터 예술가이다. 그는 어디서든 어떤 모습으로든 자신의 생활에 미를 도입하려고 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고마제 농촌테마공원의 가장 큰 특징은, 부안의 랜드마크가 될 다양한 예술조형물에 있다. 첫사람을 비롯해 앞으로도 물고기솟대, 못줄다리 등 부안만의 색채를 지닌 조형물들이 더 들어설 예정이다. 생태체험장과 제작쉼터, 볍씨전망대, 뽕체험장, 제방길, 솟대다리와 못줄다리에 이어 방죽쉼터, 취수탑 전망대, 고마광장 등 다양한 시설로 조성될 고마제 농촌테마공원. 고마제는 한국농어촌공사에서 관리하는 농업용수 저수지이다. 인근에 축사와 돈사 및 레미콘공장이 자리하고 있어 수질이 5급수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조형물 예산만 3억 원 이상이 소요되어 첫사람이 최초의 인류인 아담을 지칭한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따른다.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와 대비되어 죄로 인해 죽을 운명에 놓인 존재가 첫사람 아담 아니었던가. ▲ 김형미 시인전북작가회의 사무처장 그러나 계절의 변화라거나, 한 나라의 흥망성쇠, 만물이 나고 죽는 것 등에는 모두 일정한 법칙이 있다. 그리고 그 법칙 속을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도 간과할 수 없는 깊은 의미가 따른다. 하물며 사람이 나는 것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자연친화적이고 지속가능한 도시재생 사업을 통해, 부안에 오면 오복을 가득 받을 수 있는 부래만복(扶來萬福)의 고장이 될 수 있기를 지역민들은 희망한다. 부안의 첫사람이 진실로 부안 사람 사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친근감 있고, 다정하며, 부안의 문화예술을 한 단계 높여놓을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바람소리가 짓드는 춘분절 부안. 가만히 첫사람을 보고 있다. 때를 몰고 온 저 사람은, 분명 부안 정원문화도시로의 계획을 앞당길 수 있는 변화의 조짐이리라. 씨앗 심은 자리에 어떤 싹이 나올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부안지역의 관광활성화는 물론, 지역주민들의 소득증대 기여에 큰 힘이 실리리라고 확신해본다. 도심과 연접한 쾌적한 생활환경의 개선과 편익시설의 확대로 주변지역 중심상권 활성화를 가져옴으로써, 지역 간 균형 발전에도 기여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것이 문화예술을 활용한 데 대한 진정한 가치이고, 도시재생의 본의 아니겠는가. 내가 바라는 손님일지 아닐지 모두가 지켜볼 일이다. <김형미 시인전북작가회의 사무처장> ● 조형물 첫사람 제작한 윤종호 전남대 강사 - "600년 지켜온 부안사람 정신 대변해줬으면" ▲ 윤종호 전남대 강사 이 조형물을 통해 오늘날 부안을 지켜온 부안 사람들이 자부심과 행복감을 느꼈으면 좋겠다. 안토니 곰리의 말을 빌려 이야기 하자면, 오늘날 미술은 머리로 구사하는 수사학이 지극히 발달했지만, 몸과 몸의 인간적 관계는 사라지고 있다. 새로운 미술에서 요구되는 것은 친밀성의 소통이다. 부안 첫사람도 그러한 작품이 되길 원하는 마음으로 제작했다. 부안군의 관문과도 같은 위치에 세워진 이 조형물이, 수만 번의 계절을 지나 6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성실하게 부안을 지켜온 부안사람의 정신을 대변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배금주의 안토니 곰리의 말처럼 당신과 내가 연결되는 친절한 조형 언어, 부안의 인격과 얼굴을 갖춘 친밀한 조형 언어가 되어 부안사람과 부안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관광자원이 되어주길 바란다. ● 도시재생 추진하는 임택명 부안군 건설교통과장 - "살고 싶은 공간 만들기 다 같이 참여하길" ▲ 임택명 부안군 건설교통과장 첫사람은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다. 부안에서 새로이 맞아들이는 문화예술이며, 반가운 소식이다. 첫사람이 세워져 있는 곳은 고마저수지 입구이다. 과거 빈농이었으나 부농으로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어준, 동진벼의 원산지인 동진면 일대에 농업용수를 공급해주고 있는 고마저수지를 테마로 첫사람이 서 있는 것이다. 이 땅의 주인공이었던 태초의 농부가 씨앗을 심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세월이 흘러서도 신성한 노동의 가치를 지니고, 부안의 역사이며 부안사람들의 사는 이야기로 저렇게 서 있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바람이 구석구석 미로(美路)가 되어 더욱 아름다운 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보다 나은 환경으로 고마제 농촌테마공원을 정비하는 데 온 힘을 다하고자 한다. 인구 감소에 고령화로 시달림이 있기는 하지만, 지역주민들이 정말 살고 싶은 공간으로 만들어가는 데 다 같이 참여하여 갈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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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28 20:25

[참여&소통 2018 시민기자가 뛴다] 삶 밀착 정보 넘치고 지역 변화 이끌 '우리 동네 스피커' 키우자

2018 시민기자가 뛴다, 참여&소통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전문가들이 직접 현장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공간입니다. 올해는 최성은 전주시민미디어센터장과 신진철 전북자연환경연수원장, 이민욱 전북대학교 신문사 전 사회부장, 박연수 전북교육자치시민연대 사무국장이 참여해 마을미디어, 생태, 청년소식, 교육현장과 관련된 다양한 이슈를 조명합니다. 참여&소통은 오는 10월까지 매주 수요일자에 게재됩니다. 이제는 마을공동체미디어다. 전북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마을공동체미디어들이 전라북도 마을공동체미디어 활성화 네트워크(전북마을미디어 네트워크)라는 연대 조직을 꾸리고 공식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이 단체는 지난 21일 전라북도의회에서 창립을 위한 대표자 회의와 기자회견을 열고 공식 출범했다. 네트워크는 풀뿌리 언론활동 및 정책대응 활동과 더불어 이번 613 지방선거에서 후보자들을 대상으로 공약검증과 토론회 등을 추진하기로 했다. 전북마을미디어 네트워크에는 마을신문이나 마을방송 활동을 하는 마을공동체미디어와 이를 지원하고 연구하는 미디어센터, 시민단체 그리고 학계 등 17개 단체가 참여했다. 삼천동마을신문, 송천동마을신문, 우리마을신문, 월간아중리, 평화동마을신문, 하가신문, 학마을 사람들(전주), 완두콩(완주), 지리산 산내마을신문 등과 같은 마을신문이 참여하고 있다. 또 노송FM, 혁신FM(전주), 순창FM, 진안TV 등 마을방송, 그리고 익산공공영상미디어센터 재미, 전주시민미디어센터 영시미, 전북민주언론시민연합, 호남언론학회 등이 함께 하고 있다. 네트워크의 실무를 담당하는 집행위원회가 꾸려졌고 김수돈 편집인(평화동 마을신문)이 집행위원장에 선출됐다. 전주시민미디어센터가 간사를 맡아 실무를 집행할 예정이다. 마을공동체미디어는 지리적으로나 생활적으로 매우 밀착되어 있는 생활공동체를 대상으로 하는 미디어를 말한다. 운영이나 제작은 주민들이 직접 참여하고 있고, 내용적으로는 공동체의 일상에서 동네의 이슈까지 공동체 구성원의 삶과 매우 밀착된 것들을 다루고 있다. 도내에는 오래전부터 마을공동체미디어가 주민들에게 밀착된 정보를 제공하고 지역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매개체 역할을 해오고 있었다. 각자의 영역에서 활동하던 마을공동체미디어 관련 단체들이 연대를 도모하고자, 지난 겨울부터 4차례의 간담회와 준비위원회를 통해 이번에 발족하게 됐다. 전북에서는 지난 2006년 전국 최초로 마을공동체미디어에 대한 행정적 지원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전라북도 마을공동체미디어 활성화 지원 조례가 제정됐지만 지난 1년 3개월 동안 선언적 의미에 그치고 있다. 마을공동체미디어 지원을 위한 위원회와 지원계획 수립, 예산 등이 제대로 확보되지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 전북마을미디어 네트워크는 창립기자회견에서 마을공동체미디어의 지속가능한 발전기반을 조성하기 위한 실효성이 제고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를 위한 도 차원의 조례에 대한 정책적 대응뿐만 아니라 시군단위의 마을공동체미디어 지원조례 제정을 위한 활동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다행히 최근 도 차원의 마을공동체미디어 활성화 위원회 구성에 속도가 붙었다. 전라북도는 4월 초 위원회를 공식화 할 예정이다. 박훈 사무관(전라북도 농촌활력과)은 앞으로 마을공동체미디어 단체를 중심으로 민관협력체계를 구축하고, 워크숍과 세미나 등을 시행하고, 전문가와 소위원회를 구성해 9월 까지 기본계획을 수립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 최성은 전주시민미디어센터장 네트워크는 도민들의 미디어 활용 능력을 높이고 지역사회의 지속적인 변화와 공동체를 활성화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풀뿌리 언론활동을 수행한다. 더불어 이번 613 지방선거에서 후보자들을 대상으로 공약검증과 토론회, 그리고 주민 중심의 선거 의제 발굴에 나설 예정이다. 손주화 국장(전북민언련)은 이번 지방선거에서 마을공동체미디어의 활동에 대해 기존매체의 한계상 잘 다뤄지지 않는 시군의원 정보와 유권자가 원하는 내용들을 기초단위를 대표하는 시도의원에게 전달할 계획이라며 지역후보자 정보 전달, 유권자 의제를 선정 발굴해 시민들에게 전달, 정책선거, 인물검증 선거, 지역민이 참여하는 선거 문화를 만들기 위해 마을공동체미디어가 함께 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그동안 지방선거의 정책토론회는 자치단체장에게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작 주민들과 가장 밀착한 기초 의원들에 대한 정책적 검증을 위한 토론회는 진행되지 못했다. 마을미디어의 이런 역할은 대의제 미디어 시스템의 한계를 보완하고 미디어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 초대 집행위원장에 선출된 김수돈 전주 평화동 마을신문 편집인 "물리적 인프라재정적 어려움 넘어 지속가능하도록" - 정책 마련지자체와 협력체계 지원 조례근거 발전 토대 구축 - 행정조직 변화조례 제정 과제 김수돈 전주 평화동 마을신문 편집인 전라북도 마을공동체미디어 네트워크는 회원단체 대표로 구성된 대표자 회의와 네트워크회의 제반 운영사항을 총괄하는 집행위원회로 구성되어 있다. 이번에 초대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된 김수돈 전주 평화동 마을신문 편집인를 만나 네트워크 창립과 활동에 대해 들어봤다. -마을공동체미디어활성화 네트워크를 창립한 배경은? 주민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마을공동체미디어의 위상을 우리 주민들 힘으로 정립하자는 뜻에서 출범했다. 우리 전라북도 지역은, 주민들의 자발적인 마을공동체미디어 활동 양상에 비해 공공의 정책적 뒷받침이 아직은 미흡한 형편이다. 이런 만큼, 마을공동체미디어 스스로가 활성화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할 수 있도록 여러 방안을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아가 여기에 전라북도와 시군의 마을공동체미디어 정책 마련을 통해서 민관협력체계를 구축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다. -마을공동체미디어 활성화를 내걸었다. 어떤 의미인가? 활동의 지속성과 성장을 도모하자는 의미다. 산발적이지만 주민들 스스로가 움직여서 만들어내고 활동하는 공동체미디어들이 물리적 인프라나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에 중단되지 않고, 또 외롭게 활동하다가 사라져가지 않고 마을 안에서 꾸준히 활동해나갈 수 있게끔 돕자는 것이다. 이런 도움에는 이웃한 공동체미디어들뿐 아니라 공공의 지원정책도 포함되겠다. -현재 마을공동체미디어들에게 가장 관건이 되는 것은? 일차적으로 재정 문제다. 일반적으로 마을공동체미디어의 운영 재정은, 주민들 스스로 모은 회비나 후원금이 주다. 마을신문을 발행할 때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광고를 의뢰하면서 광고비조로 후원하기도 한다. 이런 방식으로 자체적인 재정을 만들지 못한 마을미디어들은 초기에 공모사업 같은 데 의지해서 시작했다가도 몇 년 안에 자리를 못 잡고 중단되기도 한다. 공모사업 등의 지원을 받아 마을미디어 활동을 시작할 수는 있지만, 자체적으로 재정을 확보하지 못하면 지속되기가 어렵다. 주민들이 회비만 모아서 운영하기도 어렵다. 평화동의 경우는 후원하는 주민들이 그나마 어느 정도 있어서 후원금으로 운영하고 있지만, 좀 더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어떤 수익모델을 만들 것인가가 고민이다. - 전라북도마을공동체미디어지원조례의 실효성 강화같은 정책적 요구를 내걸고 있는데, 이런 요구는 재정 문제 해결을 위한 것인가? 자치단체의 정책적 뒷받침이 마을미디어의 재정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줄 수는 없다고 본다. 재정문제는 근본적으로 마을미디어 당사자의 자생력에 달려있다. 전라북도 조례의 핵심은, 마을공동체미디어 육성과 지원을 위해 자치단체가 가져야 할 책무다. 이 조례를 근거로 해서 다양한 공동체미디어 모델이 탄생하고 공동체미디어들이 지속가능한 발전의 토대를 구축해가자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민간의 활동을 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지방자치단체의 정책을 변화시켜내고 민관이 협력해서 마을공동체미디어 정책을 수립하고 실현하자는 것이다. -네트워크가 요구하는 마을공동체미디어정책, 우선적으로 어떤 과제가 필요할까? 현재 전라북도에는 마을공동체미디어와 직접 관련된 부서조차 없다. 행정조직의 업무분장조차 안된 상태로 어떤 정책을 펴겠는가? 민간의 활발한 움직임을 수용하고 뒷받침하게끔 행정조직이 바뀌어야 한다. 아울러 이와 관련한 정책을 수립하고 실현할 근거로 시군단위의 조례 제정도 필요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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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27 19:01

취임 한달 맞은 박병호 지방자치인재개발원장 "지방혁신·자치분권 선도하는 공무원 길러 시대적 요구 부응"

▲ 취임 한 달을 맞은 박병호 지방자치인재개발원장이 자치분권시대 공직자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박형민 기자 전북혁신도시에 첫 깃발을 세운 지방자치인재개발원(자치인재원)은 전국 30만 자치단체 공무원 중 5급 이상 간부 공무원 양성을 맡고 있는 기관이다. 자치인재원은 단순한 지방공무원 교육을 넘어 행정한류를 전 세계에 널리 알리고 있다. 자치인재원은 전북을 전파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올 2월 취임한 박병호 원장(56)은 중앙과 지방자치단체의 중요 보직을 두루 역임한 행정 전문가다. 그는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지방의 혁신과 자치분권을 선도할 수 있는 공무원 양성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국가와 지방을 잇는 허브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박 원장을 만나 자치분권시대 공직자들의 역할에 대해 들어봤다. -취임하신 지 한 달 여가 지났습니다. 그동안 지방자치인재개발원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봅니다. 지난 한달 간은 자치분권시대와 신 남방정책, 일자리경제정책 등에 맞춘 교육을 신설하고 궤도에 올려놓는 데 주력했습니다. 지방공무원들이 혁신의 주체로서 낡은 관행을 타파하고 주민에게 신뢰 받을 수 있도록 역할의 대전환과 일하는 방식의 혁신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본 것이죠. 전문성도 물론 중요하지만 급변하는 세계정세에 공직자들이 더욱 빠르게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업무를 추진해왔습니다. -전북에서 근무는 처음이신 데 취임 소감이 궁금합니다. 저 또한 호남출신이고 광주광역시 부시장 등을 역임했지만, 전북과 직접적인 인연을 맺는 건 처음입니다. 그럼에도 이곳이 낯설지 않고 느낌이 너무 좋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공무원들의 발전 원동력의 시작점인 지방자치인재개발원장으로 일하게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면서도 무거운 책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 지방자치인재개발원장으로 있는 동안 자치분권, 균형발전 등 국가적 과제가 전국 공직자들에게 성공적으로 확산되는데 맡은 바 소임을 다 할 생각입니다. 전북혁신도시로 이전한 제1호 공공기관으로서 지역발전에도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지방분권 개헌 논의에 가속이 붙고 있습니다. 자치분권 시대 지방공무원들의 역할은 어떻게 변해야 할까요. 저는 지방분권 개헌 논의가 나오게 된 배경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나라는 현재 저출산, 고령화, 청년실업 등 각종 사회적 문제에 부딪혀 발전이 정체돼 있습니다. 장기적인 저성장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죠. 이는 기존 중앙집권체제에 의존했던 국가운영방식이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우리나라 경제정체는 중앙과밀과 지방소멸문제가 맞닿아 있습니다. 이 때문에 정부가 지난해 10월 자치분권 로드맵을 발표하고, 올해부터 핵심과제들을 하나하나 구체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방분권이 구체화될수록 일선 현장 공무원들의 역할도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주민들을 위한 정책을 기획하고 집행해 나가는 지자체 공직자들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는 시점이죠. 지방정부의 권한과 자율성이 확대됨에 따라 지역을 담당하는 공직자 한 사람의 역할이 국민들에게 미칠 파급효과가 그만큼 커질 것입니다. 따라서 지자체 공직자들은 능동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핵심 역량을 길러야 합니다. 올바른 공직윤리를 가지고 주민과의 소통을 통해 사회적 가치를 반영한 수요자 중심의 정책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문재인 정부 출범 2년은 물론 지방선거 이후 지방공무원들에게 요구되는 부분도 크게 증가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자치인재원의 운영방향도 강화될 것 같은 데 향후 계획에 대해 들려주십시오. 자치인재원은 앞으로 단순한 공무원교육기관을 넘어 정부의 국정철학과 국정가치를 지방에 전파하고, 공유하는 허브역할을 수행할 것입니다. 여러 전문교육을 통해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하는 셈이죠. 자치인재원은 국정운영의 실행력을 확보하기 위해 국정과제 교육을 확대하고, 지자체 선출직들과 국정방향에 대한 인식을 공유할 생각입니다. 또한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따라 교육방법의 패러다임을 전환할 필요도 있다고 봅니다. 시대흐름과 지방행정 환경 변화에 부응하는 지자체 핵심 간부를 양성하겠습니다. -취임 이후 신 남방정책과정, 일자리정책과정 등 새로운 교육과정 개설이 눈에 띄게 많아졌습니다. 새로운 교육과정을 개설하고 기존에 있던 교육을 전문화 시킨 것은 외국공무원 교육을 내실화 하기 위해서입니다. 기존 몽골, 아프리카의 개도국 중심에서 신 남방정책 대상국인 아세안 국가로의 지원을 확대함으로써 우호 국가를 다양화할 수도 있습니다. 신 남방정책 추진은 향후 한국경제의 미래와도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자치인재원은 아세안 국가는 물론 개도국 전체에 행정한류를 확산할 계획입니다. 이들 국가에게 선진행정을 전파함으로써 투자유치를 이끌어낼 구상이죠. 지자체 국제 전문가를 양성해 국제화 역량도 강화할 예정입니다. 일자리 과정은 일자리경제정책의 전문화를 위해 마련됐습니다. 앞으로 자치인재원의 운영방향은 지역상생, 개방과 협력의 열린 교육으로 나아갈 것임을 말씀드립니다. -자치분권시대 자치인재원 역할확대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시대적 과업인 자치분권과 균형발전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핵심과제 실현을 위한 실천전략과 함께 이를 직접 수행할 인재육성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자치인재원은 권역별 워크숍을 추진하고, 소관 위원회와 협업을 통한 5대 국정 지표별 심화 교육과정 개설운영, 정부혁신과 다양한 국정과제를 반영한 전문교육을 추진해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특히 지방의원들의 역량 강화를 위한 지방의회 아카데미도 확대운영할 방침입니다. 여기에 민선7기 신임단체장들의 원활한 업무수행을 지원하기 위해 자치단체장 당선자 비전포럼을 개최해 체계적인 지방행정 교육훈련 기반을 마련하는 등 우리 인재원의 역할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자치분권시대 지역균형발전은 어떻게 나아가야 한다고 보십니까. 현재 대한민국은 수도권 집중 투자의 부작용이 곳곳에서 속출하고 있습니다. 자본과 노동, 교육과 문화 등 모든 기회가 수도권에 집중돼 수도권은 비대해지고, 지방은 저성장, 위축, 쇠퇴를 넘어 소멸을 걱정해야 되는 절박한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죠. 국가균형발전은 지역주도 자립적 성장기반을 마련하는 것을 목표로 지역사회의 개성에 기반한 특화산업 육성, 지역브랜드 가치 창출 등 혁신성장을 촉진시켜 궁극적으로는 전 국민의 삶의 질을 균등하게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전개해야 합니다. -혁신도시 이전기관이 지역상생을 넘어 혁신도시 시즌2의 주체로 부상해야 할 시점입니다. 지방자치인재개발원은 전북의 다양한 자원을 교육에 적극 활용해 지역발전과 유능한 인재 양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국제교류를 통해 연간 수백 명에 달하는 외국인들이 전북을 방문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함으로써 전북을 세계에 알리고 지역의 국제교류를 위한 협력지원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전북사회의 일원으로서 지역상생발전의 성공모델을 제시하는 등 전북도민에게 사랑받는 기관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도민들의 많은 관심과 지원을 부탁드립니다. ● 박병호 원장은 - 중앙지방 주요 보직 거쳐 '국가 균형발전'철학 확고 박병호 지방자치인재개발원장은 광주 인성고와 성균관대를 졸업하고 행정고시 30회로 공직에 입문했다. 이후 총무처와 대통령 비서실 행정관을 거쳐 광주광역시 기획조정실장, 안전행정부 제도정책관, 행정자치부 조직정책관, 광주광역시 부시장 등 중앙과 지방자치단체의 주요 보직을 거쳤다. 그는 전문성과 치밀한 계획을 바탕으로 업무성과를 극대화하는 데 특화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국가균형발전에 대한 철학도 확고해 지방분권시대 공직자 역량을 강화시킬 수 있는 적임자로도 거론된다. 그는 지역현장에서 펼쳐지는 정책들이 국민 관점에서 추진될 수 있도록 맞춤형 교육을 강화할 방침이다.

  • 기획
  • 김윤정
  • 2018.03.25 19:58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30. 선비들 유람기로 만나는 지리산 - 진시황이 애타게 찾던 그곳, 우리는 이렇게 그냥 얻고 있네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는 공자의 유명한 말과 그곳에 산이 있어 오른다라는 말이 있다. 현대에 와서는 자연을 즐기며 인증한 여행기를 SNS에 올리는 시대지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 조선시대의 선비들이 남긴 기행문을 살펴보면 수려한 풍광을 지닌 산을 찾아 유람하는 것은 산을 그저 등산한다는 의미와 달랐던 것 같다. 그 중 『어우야담(於于野談)』의 저자로 유명한 유몽인(柳夢寅, 1599~1623)이 53세 때 쓴 기행문 《유두류산록(流頭流山錄)》은 지리산 유람기의 백미로 전해져 오고 있다. 2월 초에 임지에 부임했다. 하지만 용성(현 남원)은 큰 고을이라 업무 처리에 정신없이 바쁘기만 하다. (중략) 목동에는 수춘암이 있는데 그 수석이 매우 아름답다. 진사 김화가 그곳에 살면서 집을 재간당(在澗堂)이라 불렀다. 그 집은 두류산(頭流山) 서쪽에 있어서 서너 겹으로 둘러싼 안개 낀 모습을 누대 난간에서 바로 마주 볼 수가 있다. 두류산은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불렸는데, 중국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에도 방장산은 저 바다 건너 삼한에 있네라고 한 구절이 있다. 또한 시의 주석에는 대방국의 남쪽에 있다라고 했다. 지금 살펴보니 용성의 옛 이름이 대방(帶方)이다. 그렇다면 두류산은 삼신산(三神山: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중의 하나가 되는 셈이다. 그 옛날 중국 진시황과 한무제는 배를 띄워 이 삼신산을 찾게 하느라 쓸데없이 공력을 허비했는데, 우리는 이렇게 앉아서 그냥 얻고 있으니. 남원수령으로 부임한 유몽인이 1611년(광해 3년) 지리산을 유람하고 쓴 《유두류산록》의 서문 중 일부이다.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를 모은 야담과 우리나라 산천을 두루 유람하며 기록을 남긴 유몽인은 장원급제를 하고 벼슬에 오른 뛰어난 문필가이자 외교관이였지만 역모죄에 몰려 처형되어 불행하게 생을 마감하였다. 하지만 그의 글은 많은 사람으로부터 뛰어남을 인정받았고, 임금 정조로부터 그의 곧은 지조와 문장에 대한 극찬을 받으며 사후 170년 만에 의정(義貞)이라는 시호를 받고 이조판서가 된 인물이다. 그가 남긴 글들을 순조 때인 1832년 후손들이 『어우집』에 모아 내어 당대 선비들의 진솔한 생활사와 해학과 풍류를 지금에 와서도 엿 볼 수 있게 되었다. 천생 이야기꾼인 유몽인은 그의 이름과 별칭도 남다르다. 전남 고흥 출신으로 호랑이를 상징하는 큰 꿈을 품은 이름을 아버지에게 받았다. 또한, 호인 어우당(於于堂)의 어우는 과장해서 속이거나 아첨한다는 뜻으로 공자를 비판한 장자의 『천지』에 나오는 말이다. 밭일하는 노인이 공자의 제자에게 공자를 빗대어 허망한 말로 세상을 속이고 홀로 악기를 연주하며 슬픈 노래를 불러 천하에 이름을 파는 사람이 아닌가. 밭 가는 일을 방해 말고 가라고 조롱하듯 남긴 말에서 따온 의미이다. 당시 유교사상이 만연한 조선에 유교적 규범에 얽매이지 않는 가치관과 장자를 흠모하는 마음을 담은 호이다. 그런 생각을 지닌 유몽인이다 보니 그의 글은 점잖은 선비의 글이라기보다는 온갖 군상들의 삶과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들을 흥미진진하게 그려냈다. 봄이 움트는 날 남원에서 지인들과 함께 지리산을 다녀온 글에도 근엄한 선비들의 모습보다 지역의 이야기를 나누고 수려한 풍광을 즐기며 흥겹게 유람한 모습이 담겨 있다. 유몽인보다 앞선 시기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유두류록(流頭流錄)』을 필두로 지리산은 북에 있는 금강산과 더불어 선비들이 가장 많이 찾고 유람기를 남긴 산으로 역사 속에서도 전라도와 경상도 양도의 지방 명산으로 기록된 산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지리지」 경상도 편은 주흘산, 태백산, 사불산, 가야산을 포함한 다섯 명산(名山) 중 하나로 지리산을 꼽고 있으며, 전라도 편은 방장(方丈), 또는 두류(頭流)라고도 불렸던 지리산의 다른 이름과 함께 주위의 고을과 산악경관, 기후와 속설 등 관련 정보 등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지리산의 다른 이름 두류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있다. (지리산은) 부의 동쪽 60리에 있다. 산세가 높고 웅대하여 수백 리에 웅거하였으니, 여진 백두산의 산맥이 뻗어내려 여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두류(頭流)라고도 부른다. - 이행, 윤응보 등,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제39권 「전라도 남원도호부」 두류산이란 백두대간의 산맥이 흘러왔다는 데서 생긴 이름으로 지리산에 대한 선조의 인식을 짐작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하는 이인로의 《파한집》이나 『고려사절요』 속 《옥룡기》의 문구에서는 지리산이 백두산의 맥을 잇고 있다는 언급을 보다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지리산이 백두산에서부터 시작하여 꽃 같은 봉우리와 꽃받침 같은 골짜기가 면면하게 잇따라서 대방군(帶方郡)에서는 수천 리를 서리어 맺히었는데, 산을 둘러 있는 것이 10여 주이다. 한 달이 넘게 걸려야 그 주위를 다 구경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백두산(白頭山)에서 시작하여 지리산(智異山)에서 끝나는데, 그 지세는 오행으로 보아 수(水)를 뿌리로 하고 목(木)을 줄기로 하는 땅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렇듯 두류산이란 이름도 불린 근원이 깊은데, 지리산(智異山)은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지는 산이란 뜻으로 그 이름의 지닌 의미가 다분히 철학적이다. 수려한 풍광은 물론이고 자연의 이치에서 성찰하고자 했던 선비들의 성향이 영산(靈山) 지리산의 가치를 키우고 선조들의 마음과 발길을 불러 모았을 것이다. 서두에 소개한 글에 이어 유몽인은 지인들에게 지리산 유람을 청하며 이런 문구를 이어갔다. 술이 좀 거나해질 때, 내가 술잔을 들고 좌중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나는 봄에 두류산을 마음껏 유람하여 오랫동안 묵은 빚을 좀 갚고 싶었소. 누가 나와 함께 유람하실 분이 계시오? 유몽인과 선비들은 여러 차례 편지를 교환한 후 재간당에서 모일 것을 기약한 후 만났다. 3월 28일. 처음 약속한 장소에서 다시 모였다. 기생들이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가운데 모두 실컷 취해 버렸다. 그러기를 한밤중까지 계속하다 그대로 시냇가 재간당에서 잤다. 3월 29일. 요천을 따라 내려가다 반암을 지났다. 때는 멋들어진 풍경 속에서 꽃들이 활짝 피었고, 밤사이에 내린 비도 아침이 되자 맑게 개어 꽃을 찾는 흥취가 손에 잡힐 것만 같다. 낮에는 운봉과 황상의 비전에서 쉬었다. 그리고 곳곳을 실감나고 감질나게 잘 기록하고는 그의 유람기 마지막에 두류산이 우리나라 제일의 산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만일 인간 세상의 영화를 다 마다하고 영영 떠나서 돌아오지 않으려고 한다면 오직 이 두류산만이 은거하기에 좋을 것이다라고 지리산에 대한 총평을 남겨 놓았다. 옛 선비들의 유람기 속에 생생하게 묘사된 의미 있는 흔적들을 살뜰하게 돌아보고 지역의 자산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유몽인의 지리산 유람 출발점이 되었던 남원 목동리 재간당 곳곳에는 그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고, 그 곁을 흐르는 냇물은 그 시절의 풍류를 품고 선비들의 즐거운 흥얼거림 같은 소리를 내며 흐른다. 지리산까지 이르는 길의 축으로 황산 이성계의 전설을 비롯한 지역의 이야기며 꽃들과 물고기를 비롯한 생물들의 생김새와 이름, 갖은 악기로 연주된 곡과 흥에 겨워 먹을 가며 시를 지은 기록들이 그들의 발자취를 그린다. 유몽인의 말에 선비들이 화답하여 지리산 유람을 떠났던 것처럼 저도요!라고 응답하며 선비들의 아지트였던 재간당 기둥에 기대서서 지리산을 마주 하고 싶다. 지리산이 지척에 있어 그저 얻고 있음을 새겨듣고 감사하게 여기며 《유두류산록》을 여행책자 삼아 재간당의 주변과 옛길에 남은 그 귀한 자취를 돌아보며 옛 선비들의 지리산 유람 길을 더듬더듬 찾아가고 싶다. 사라지고 희미해진 옛길과 지명이지만, 남아있는 글귀와 흔적들이 남원에서 지리산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지금도 확연하게 알 수 있다. 그의 멋들어진 안내를 따라 운봉을 거쳐 지리산의 명승지를 두루 돌고 다시 남원으로 흘러온 길을 가볼 참이다. 선비들이 지리산을 찾은 마음처럼 어리석음을 다스리고 웅혼한 지리산의 정기를 받아 진정 지혜로워진 마음으로 세상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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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22 19:17

[전라도 정도 1000년, 창조와 대안의 땅 '전라북도'] ⑥ 백제부흥·동아시아 국제전쟁의 현장 - "백제를 살려라"…전북,'백·왜 vs 나·당' 결전의 터였다

△백제를 붕괴시킨 태종 무열왕의 죽음을 알린 금마 서기 660년 7월 백제는 나당 연합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이 항복하면서 백제는 전쟁에 패하였다. 이때 신라와 당의 급습으로 15일만에 패한 백제지역민들은 의자왕과 왕세자 등 왕실과 귀족대신들이 대부분 당나라로 압송되는 상황이 발생하자 이 전쟁이 단순한 백제 공략을 통한 정치적 복속화가 아닌 백제국가의 완전한 붕괴 전쟁이었음을 확실히 깨달게 되었다. 이후 백제 각지에서 당과 신라군에 대한 부흥전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 같은 본격적인 백제의 저항을 상징하는 사건이 금마 즉 익산지역에서 발생하였다. 6월에 대관사(大官寺) 우물 물이 피가 되었고, 금마군(金馬郡) 땅에 피가 흘러서 그 넓이가 다섯 보가 되었다. 왕이 죽었다. 시호를 무열(武烈)이라 하고,.. 묘호를 태종(太宗)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상기 사료는 백제를 붕괴시킨 신라 무열왕의 죽음에 대한 기록으로 654년 50세에 왕에 즉위한 김춘추가 백제붕괴 1년 후인 661년 6월 금마 대관사(익산 왕궁리유적에 있던 사찰)의 우물물이 핏빛으로 변하고 금마군에 피같은 붉은 물이 흐르는 사건이 소개된 사건과 연결되어 왕이 죽었음을 보여준다. 이 기사는 태종 무열왕의 비정상적 죽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파악되는 데 금마지역의 반 신라적 성격과 백제부흥세력의 적극적 반격의 신호로 파악될 가능성을 보여준다. 특히, 당시 왜에서 백제부흥을 위해 원병이 처음 출발한 661년 5월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이 기록은 전라북도권의 백제 유민세력이 본격적인 부흥전쟁을 상징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 부흥의 현장 주류성, 부안 변산일대 660년 8월 의자왕이 항복한 직후 지방에 남아있던 백제의 세력들은 각 지역에서 백제부흥 전쟁을 전개하였다. 백제부흥전쟁의 거점지역은 임존성(任存城)과 주류성(周留城)으로 양분되었다. 임존성(任存城)은 백제의 서방을 관할하던 곳으로 충남 예산의 봉수산지역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곳은 유명한 흑치상지 등이 중심이 되어 초기에 당과 신라군에 대항하였다. 그런데 백제부흥군의 핵심거점은 주류성이었다. 이곳은 복신과 도침 및 일본에 있다 귀국해 부흥군의 중심이 되었던 왕자 부여 풍등이 함께 활동한 부흥의 중심이었다. 그런데 주류성 위치에 대해 충남 한산 건지산설, 홍성설, 전북 부안 우금산성설 등이 제시되고 있다. 한산의 건지산성을 주류성으로 보는 견해는 주변 지형 등이 역사기록과 부합되지 않는 문제점과 최근 발굴을 통해 축조시기가 고려후기로 파악되어 더 이상 주류성으로 보기 어렵게 되었다. △백제 부흥군 최후 거점 주류성은 부안 우금산성 최근 학계는 지형과 관련 기록의 연결성을 고려할 때 부안의 우금산성을 주류성으로 보고 있다. 일본서기등 사료를 보면 주류성의 위치는 백제부흥전쟁 수행과정에서 바닷가에 위치해 방어와 왜국(倭國)과의 통교에는 유리했지만 농토와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가 척박하여 농업과 양잠에 적합지 않아 이후 피성(避城: 현재 김제)으로 이동하였다가 다시 복귀하였다는 상황이 기록되었다. 따라서 주류성은 김제지역과의 관계도 고려되어야 하며 또한 663년 백제부흥군과 왜 원병이 신라와 당의 군대와 대규모 전투를 행한 백강구와 인접한 곳이다. △동아시아 1차 국제전쟁, 백강전투의 땅 동진강하구 660년 백제붕괴 직후 왜는 백제를 지원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준비하였고 3차례에 걸쳐 각각 1만~2만 7천에 달하는 원군을 보냈다. 특히, 663년 8월 마지막 전투가 치러져 백제-왜 연합군이 신라-당 연합군에 대패하며 부흥전쟁은 종식되었다. 이 전쟁은 동북아 한,중,일의 군대가 최초로 맞붙은 국제전쟁으로 백제가 완전히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백제유민이 대거 왜로 건너가 새로운 국가 일본을 마련하고 신라와 당이 고구려를 본격적으로 공격하는 상황이 전개되면서 동북아 역사를 새롭게 구축하게 되었다. 전쟁이 치러진 백강의 위치에 대해서는 금강설, 동진강설, 금강-동진강 합구설 등으로 크게 대비되어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앞서 주류성, 피성, 백강구로 연결되는 공간으로 가장 적합한 공간은 이후 675년 당나라의 신라장악 야욕을 꺽은 나당전쟁의 격전지 기벌포와도 연결되는 곳으로 이는 갯벌을 의미하는 계화(界火)를 화(火)의 원발음 불로 읽으면 개불(개벌)과 연결되어 현재의 동진강 하구가 된다. 이같은 동아시아 국제전쟁이 벌어진 백강은 동진강 하구일대이고 주류성의 위치는 부안 우금산성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곳은 김제지역과도 인접하고 당시에는 해수가 더 들어와 섬처럼 둘러싸인 곳으로 특히 산 정상에는 부흥군의 중심인 복신이 머물런 복신굴과 산성 성벽이 여전히 잘 남아 있다.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패하자, 복신(福信)과 도침(道琛)을 위시한 백제부흥군은 일본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일본에 체류 중이던 풍은 661년 1차 일본의 원군을 거느리고 귀국, 복신 등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어 격전을 벌여 나당연합군을 위기에 빠뜨렸다. 그러나 복신이 도침을 살해하여 전권을 장악하려 하자, 풍은 복신을 살해한 뒤 실권을 잡았다. 부여풍은 663년 백강(白江)에서 백제부흥군 및 왜국이 보낸 원병과 함께 나당연합군과 싸웠으나 1000 척의 함선 가운데 400 척이 불타는 대패를 당하자 배를 타고 고구려로 망명했다. 이 같은 지도부의 내분이 부흥운동0을 좌절케한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그리고 《일본서기》에 따르면 663년 9월에 주류성이 함락되면서 백제부흥세력은 붕괴되었다. 이때 백제 귀족들은 오늘로서 백제의 이름이 끊어졌으니 조상의 무덤도 다시 찾아뵙지 못하게 되었다며 왜로 망명길을 떠났다. △실패로 끝난 백제의 부흥 전쟁 백제의 부흥전쟁이 실패한 이후 신라 승려 원효와 신라의 토착승려인 사복이 부안 변산 일대에 나타나고 있어 주목된다. 부안지역의 원효관련 기록은 흥미롭다. 이규보의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에 나타난 신라 승려 원효(元曉)와 관련된 기록은 변산 내소사 인근에 존재하고 있는 원효방을 방문하고 남긴 기록이다. 관련 부분을 보면 원효와 사복이 함께 활동하고 있는 데 사복은 삼국유사에서 죽은 자를 지하세계로 인도하는 존재로 묘사된 존재로 이들의 활동은 백제 부흥군의 마지막 거점인 현재의 우금산성인 주류성과 밀접히 관련되었다고 생각된다. 즉, 불교신앙을 통해 극락왕생을 강조한 원효와 토착적 사후세계 인도자인 사복이 함께 백제저항의 거점 지역을 위무하고 포섭하는 방안의 하나로서 이들을 적극 활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파악된다. 또한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에는 신라장군 김유신의 사당과 조선 성종때 이 사당에 땅을 하사했다는 전첩지가 있다. 이는 백제부흥군을 붕괴시킨 후 김유신에게 이 지역을 포상으로 내린 역사의 흔적으로 파악된다. ▲ 조법종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한편, 1979년 12월 우암산성 아래 개암사에서 별기라는 기록이 발견되었는 데 내용 중 17세기경 만들어진 개암사사적기에 우금산성을 주류성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주류성설을 더욱 확인시켜주고 있다. 이같이 최근 국내외 백제관련 연구자들은 백제의 마지막 거점 주류성에 대해 대부분 부안 우금산성쪽으로 입장을 모으고 있다. 또한 이곳은 백제 유민들이 마지막 눈물을 흘리며 백제라는 이름이 사라져감을 아쉬워하며 일본으로 이주해간 곳이다. 따라서 이 같은 주류성으로 파악되는 부안 개암사 뒤의 우금산성에 대한 발굴조사와 학술연구, 지역사 교육과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부각하는 사업 등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를 통해 백제의 마지막 부흥의 꿈과 새로운 백제의 역사를 찾는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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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21 19:59

[우리고을 인물 열전 22. 고창군 성내면] 일제 강점기 수많은 독립운동가 배출한 충효의 고장

성내면(星內面)은 고창군의 동북 끝에 위치한 고을이다. 성내면을 둘러싸고 있는 고을은 동쪽 정읍시 소성면, 서쪽 고창군 흥덕면, 남쪽 고창군 신림면, 북쪽 정읍시 고부면이다. 백제시대에는 상칠현(上漆縣,) 고려시대에는 흥덕현(興德縣)에 속했다. 조선시대에 흥덕현 이동면(二東面)이었던 것이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고창군 성내면이 되었다. 성내면 면적은 고창군 전체의 5.1%인 30.84㎢이다. 이 중 논이 8.7㎢, 밭이 6.14㎢이다. 이는 성내면 전체 면적의 28.25%, 19.9%인데, 고창군 전체 논과 밭 면적 비율인 23.5%, 15%보다 높다. 성내면 바깥으로는 선운산, 두승산, 방장산 등 유명산이 솟아 있지만 정작 성내면 관할에는 높고 큰 산이 없어 임야는 전체 면적의 29.2%인 9.01㎢에 불과하다. 이처럼 논밭이 많고, 임야가 적은 것은 구릉성 산지를 따라 생긴 소하천(소성천, 용교천) 주변으로 범람에 따른 퇴적지형 발달했고, 이를 대대손손 논밭으로 개간했기 때문이다. 조상들이 물려준 비옥한 옥토에서 주민들은 요즘 복분자와 스테비아수박을 생산하며 농촌의 풍요로움을 지켜가고 있다. 인구는 1,206세대에 2,278명이다. 법정리는 덕산리, 부덕리, 신성리, 조동리, 동산리, 월성리, 옥제리, 월산리, 양계리, 대흥리, 산림리, 신대리, 용교리 등 13개이고, 30개의 행정리가 있다. 옛 한양 사람들이 어린아이를 달랠 때 불렀다는 동요 이 발로 구름산을 밟아서 영광군수로 가려느냐 안악군수로 가려느냐가 전하는 데 동요에 등장하는 구름산은 성내면 소재지가 위치하는 양계리의 운등산(雲嶝山, 해발 48.2m)이다. 지금은 4차선으로 넓게 개설된 국도 22호선이 옛날에는 운등산 중심을 지났다. 이 운등산 길을 지나야 전남 영광으로 갈 수 있었다. 운등산처럼 성내면의 산은 높지 않다. 덕산리 도덕마을 뒷산인 백갑산은 62m, 신성리와 조동리의 분수령을 이루는 고암산은 75.3m다. 성내면 동산리와 흥덕면 석우리가 경계하는 지점에 있는 동림저수지는 1935년에 준공됐다. 면적은 3.82㎢이다. 동남쪽이 높고 서북쪽이 낮은 성내면의 지형 때문에 하천 물이 북쪽이나 서북쪽으로 흐른다. 이 일대에서 가장 큰 동림저수지가 성내면의 서쪽에 위치하는 이유다. 겨울철이면 동림저수지의 풍부한 먹잇감을 찾아 진객 가창오리가 떼지어 찾는다. 성내면에서 풍수적 명당 이야기가 전하는 대표적인 곳은 신성리 칠성마을이다. 조선 태조 육대손 정략장군 이현이 1506년 중종반정에 따른 불안정국을 피해 흥덕현 사포에서 살았는데, 1556년 무렵에 현의 손자 뇌(천문지리에 능통)가 풍수지리를 따져 칠성동에 터를 잡아 영구 안착했다고 한다. 칠성마을은 배산임수(背山臨水)형, 전착후광(前窄後廣)형, 보검출갑(寶劍出匣)형이다. 보검이 한 번 갑 속에서 나오면 간사함을 진압하고 정의를 바로 세우듯, 이 터는 천하를 재단하는 위대한 인물이 탄생하는 명당이라고 한다. 실제로 칠성을 비롯, 성내면에서는 걸출한 인물들이 배출됐다. 성내면에는 소중한 문화유산이 적지 않다. 조선 후기 호남을 대표하는 유학자 이재 황윤석(黃胤錫, 17291791) 선생이 10세 때부터 쓴 6000여 장 분량의 일기 이재난고((?齋亂藁)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11호이고, 그의 생가는 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25호다.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정치인 백관수 고택(전라북도 기념물 제90호), 백관수 선생이 지인들과 함께 항일독립투쟁을 위해 만든 흥동장학당(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40호) 등이 있다. △독립운동가 100년 전 나라를 잃었을 때 성내면 사람들은 독립을 위해 음으로 양으로 뛰었다. 월산리 출신 고제만(1860~1942) 이종주(1901~1921), 대흥리 출신 노병희(1850~1918) 노진룡(1894~1950), 덕산리 출신 백인수(1856~1910), 백관수(1889~?) 비롯해 유판술, 이석열, 이종택, 황종관, 고치범 등 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이 활약했다. 대부분 그 공적이 인정돼 건국훈장 애국장 등을 서훈받았다. △정계 덕산리 도덕마을 출신인 근촌 백관수 전 국회의원은 5세 때부터 간재 전우(田愚) 문하에서 한학을, 15세(1905년) 때 군산 금호학교에서 신학문을 수학했다. 김성수 송진우와 막역했고, 월남 이상재 선생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동경 유학시절 2.8독립선언문을 낭독하는 등 민족의식과 리더십이 뛰어났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서 언론인으로 일할 때는 일제의 언론탄압에 맞섰고, 1948년 5월10일 제헌국회의원(고창)에 당선됐다. 61세 때인 1950년 인민군에 납북됐다. 이호종 전 고창군수(1929~2014)는 신성리에서 태어났다. 경기중고, 고려대를 졸업했다. 6.25전쟁 때 전공을 세워 충무무공훈장 등을 받았다. 제10대 국회의원, 대한체육회 사무총장과 부회장을 역임했다. 민선군수(1995~2002)로 일하며 고창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동산리 출신 김주섭씨(78)는 국무총리 정무수석비서관을 지냈고, 대흥리 노용수(54)씨는 제6대 경기도의회 의원을 지냈다. △관계 이연택(1936~ ) 전 장관은 산림리 출신이다. 전주고와 단국대를 졸업했다. 총무처장관(90년)과 노동부장관(92년), 국민체육진흥공단 이사장, 대한체육회장, 재경 전북도민회장 등을 지냈다. 새만금위원회 위원장을 지냈으며, 2017년 10월 국무총리실 출신 전현직 공직자 모임인 국총회 회장에 선출됐다. 산림리 출신 이길연씨(86)는 전북부지사, 이윤갑씨(86)는 고창군수를 지냈다. 역시 산림리 출신 박문재씨는 서울시 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대흥리 출신 노병일씨는 남원시장을 역임했고, 정읍시청 미래전략사업단 노영일 단장은 신대리 출신이다. 광주전주 세무서장을 지낸 이명희씨(69)와 원주세무서장 이준희씨(53)는 옥제리가 고향이다. 성내면장을 지낸 인물은 이맹근(양계리), 이권수(월산리), 고양규오병용씨(용교리) 등이다. △교육계 조동리에서 태어나 살았던 이재 황윤석 선생은 조선 후기 호남을 대표하는 학자였다. 목천현감 등을 지냈다. 양계리 이승영씨는 민선 교육감을 지냈고, 동산리 출신 김규태씨는 교육부 정책담당관을 지냈다. 국방대학원 교수를 지낸 정치학박사 황병무씨(79),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원을 지낸 정치학박사 황병덕씨(65), 고려대 교수를 지낸 농학박사 황병국씨(71) 등은 조동리 출신이다. 부덕리 백원철(공주대), 동산리 윤희중(목원대), 박근원(신학대 총장) 등도 교수를 지냈다. 전북대 작물생물학과 윤성중 교수도 동산리 출신이다. △경제계 (주)잔디로 노진구 대표는 대흥리가 고향이고, 현대건설 김종택 상무이사는 동산리 출신이다.옥제리 출신 이종숙씨(60)는 전국마을버스연합회장을 지낸 운수사업가이고, 한국농어촌공사 고창지사 황철구지사장은 신대리 출신이다. △문화예술계 중요무형문화재 제110호 윤도장 보유자 김종대의 고향은 산림리 낙산이고, 왼손 악필로 유명한 서예가 석전 황욱의 고향은 조동리다. 석전의 아들 황병근(84)은 초대 전북국악원장, 도의원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성균관 유도회 전북본부 회장이다. 한문학자인 죽강 남대희(89)의 고향은 월산리다. 조선후기 판소리 명창으로 활동한 김수영의 고향이 옥제리이고,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은 여류 명창 김여란도 성내가 고향이다. △군경 및 법조계 육사 출신 김재옥 대령은 산림리, 김영훈 대령은 동산리가 고향이다. 경찰청 이용석 총경은 덕산리 출신이다. 법무법인 정 소속 이현웅 변호사(48)는 옥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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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호
  • 2018.03.20 20:10

취임식 가진 장영달 우석대 제13대 총장 "실용주의 학풍 토대, 자신감 넘치는 명문 사학 발돋움"

▲ 장영달 우석대학교 제13대 총장이 취임식에 앞서 집무실에서 교육철학과 대학 운영 청사진을 설명하고 있다. 박형민 기자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대학의 변화와 혁신이 다시 화두다. 우리 사회는 이제 창의융합형 사고와 지식, 그리고 비판적 사고력과 소통협업능력 등의 역량을 고루 갖춘 인재를 요구하고 있다. 대학의 역할이 한층 막중해졌다. 이 같은 시대의 요구에 맞춰 내년 개교 40주년을 앞두고 새로운 도약에 시동을 건 우석대학교가 새 총장을 맞았다. 4선 국회의원을 지낸 중견 정치인 출신이자 행정학 박사인 장영달 제13대 총장이다. 신임 장 총장은 16일 취임식에서 대학의 새로운 패러다임과 명문 사학으로 거듭나기 위한 청사진을 제시했다. 취임식에 앞서 대학본부 집무실에서 장 총장을 만나 대학 운영의 밑그림과 비전, 그리고 대학이 추구하는 인재상 등을 들었다. - 4선 국회의원을 역임하면서 그동안 중견 정치인으로 활동하셨는데요. 먼저 대학 총장에 취임한 소감은. 정치활동의 경험을 대학 현장에 활용할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점도 있습니다. 대학은 우리 사회 미래발전을 위해 인재를 양성하는 기관입니다. 재목을 길러내는 역할은 교수와 교직원이 맡지만, 학생들이 대학에서 수준 높은 교육서비스를 받으려면 총장이 응원단장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교수와 교직원, 학생 등 1만여 우석 가족이 능동적으로 일하고 공부하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 총장의 역할입니다. 저는 장기독재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주도했고, 정치인으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제는 후학 양성에 매진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걸어야 할 새로운 길에서도 언제나 정정당당하게, 그리고 우직하게 직무를 수행하겠습니다. - 취임식에 앞서 직무를 시작하신 지 한 달이 됐습니다. 우석대의 현재 상황을 진단하신다면. 사실 재정적인 어려움도 있습니다만, 우석대를 내실 있는 명문 대학으로 성장시키겠다는 교수진과 교직원들의 신념이 무척 강합니다. 그 점이 가장 믿음직스러웠습니다. 우리 대학의 학훈은 실력, 신념, 봉사입니다. 이는 개혁적 실용주의 철학인 다산 정약용 선생의 실학사상과 맞닿아 있고, 각 학과에도 설립자의 건학이념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특히 우석대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김근태 민주주의연구소를 설립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는 대학이 지향하는 민주주의와 평화에 대한 신념의 상징입니다. 우리 대학은 앞으로 대한민국과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사회적인간적 가치 추구에 더욱 노력할 것입니다. 인권평화 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세계적인 석학들도 자주 대학을 찾을 것입니다. - 그렇다면 우석대의 가장 큰 경쟁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석대는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내실 있고 알찬 대학입니다. 그동안 기초학문의 바탕 위에 실증적 연구를 심화하면서 진리를 탐구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을 추구해왔습니다. 또 학생 중심의 대학이라는 자부심도 잃지 않았습니다. 대학은 학생들의 목표와 비전을 실현시킬 수 있는 역량을 스스로 배양하는 화수분이 되어야 합니다. 우석대는 높은 인격과 뚜렷한 가치관을 갖추는 교육에 최선을 다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 4차 산업혁명에 맞춰 대학의 변화와 혁신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대학 운영 청사진과 인재양성 전략은. 대학을 졸업해서 교문을 나선 학생들이 각자의 직장과 사회에서 환영받는 일꾼으로 평가될 때 우석대의 위상이 높아질 것입니다. 우리 대학 졸업생들이 인격을 갖추고 전문 식견이 풍부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교육 프로그램을 업그레이드할 계획입니다. 앞으로 우석대는 다른 대학과 등수나 순위를 다투는 어설픈 경쟁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려 합니다. 우석대 출신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높은 인격과 뚜렷한 가치관을 확립하는 교육에 충실하고 싶습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지식정보사회가 요구하는 교육, 가장 인간다운 생각, 기계가 할 수 없는 인간의 가치 지향적 판단력을 갖출 수 있는 교육으로 세계에 우뚝 서는 대학을 향해 정진할 계획입니다. - 요즘 대학생들의 가장 큰 고민은 역시 취업입니다. 취업 지원 전략을 소개해 주신다면. 학생들이 대학에서 더 나은 인생을 설계할 수 있도록 세심한 지도와 배려를 아끼지 않을 계획입니다. 교수님들에게는 제자들이 졸업장만 받고 실업자로 방치된다면 교수에게도 50%의 책임이 있으니 분발해달라는 주문을 했습니다. 우선 보편적 교양과 탁월한 전문성을 갖춘 융합형 인재 양성을 목표로 지역선도, 지역밀착, 지역상생을 앞당긴다는 비전을 내세워 대학일자리센터를 운영할 방침입니다. 더불어 대학 내에 흩어져 있던 진로 및 취창업 지원기능을 공간적으로 통합하고 기능적으로도 연결하고 있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재학생과 지역 청년들에게 특화된 원스톱 취업 지원서비스를 제공할 것입니다. 또 졸업생들을 격려하고 후원하는 평생 상담기관으로서의 역할도 주저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 지역사회에서 대학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지역에서 사랑받는 대학, 지역발전에 기여하는 대학으로 자리 잡기 위한 노력은. 고향이 남원입니다. 그래서 최근 서남대 폐교로 인한 지역 주민의 상실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전북지역 자치단체장들과 만나면서 대학이 발전해야 지역이 발전하는 만큼 지방정부 차원에서 전반적인 지원체계 확립에 관심을 가져달라는 건의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전주와 진천캠퍼스에서는 앞으로 지방자치단체를 비롯한 지역사회와의 연계협력 체계를 더욱 강화할 것입니다. 지역의 청장년층을 대상으로 하는 다양한 평생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할 계획입니다. - 아직은 정치인으로서의 이미지가 강한 데, 향후 어떤 총장으로 기억되고 싶으신지요. 우석대를 통해 전라북도가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고 싶습니다. 현재의 우석대는 역량에 비해 저평가받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대학이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도록 외부에 적극 홍보하고, 그 토대에서 모든 구성원이 자부심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생각입니다. 구성원 모두가 자신감 넘치는 대학으로 변모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면 합니다. 더불어 우리 대학에 유학생들이 많이 찾아오고 있는데, 해외에서도 어디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명문 대학으로 평가받고 싶습니다. - 대학 진학을 앞둔 수험생과 전북도민에게 한 말씀. 우석대는 현재 70% 이상의 취업률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맞춤형 취업 지원 프로그램을 더욱 강화할 것입니다. 중앙 공공기관 등에 졸업생들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총장부터 나서 백방으로 뛰겠습니다. 지역에서 정치인으로 살아왔고, 누구보다 지역발전을 염원하는 사람으로서 기업과 자치단체, 정부 기관을 찾아다니면서 대학과 지역이 상생할 수 있는 선순환 체계의 중요성을 강조할 생각입니다. 우석대가 전북을 넘어 대한민국, 세계 속의 자랑거리가 되도록 모든 역량을 모으겠습니다. 도민 여러분의 성원과 지속적인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 교내 환경미화원 초청에 정문서 신입생 맞이까지 장영달 총장 격의없는 소통행보 눈길 교수와 교직원학생, 환경미화원들까지 대학 가족 모두가 신명 나게 일하고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든든한 응원단장이 되겠습니다. 장영달 우석대 신임 총장의 격의 없는 소통 행보가 눈길을 끌고 있다. 취임식에 앞서 지난달 12일부터 직무를 시작한 장 총장은 교내 환경미화원들을 가장 먼저 집무실로 초청했다. 구성원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학생들이 미래의 꿈을 펼칠 수 있도록 땀을 흘려달라는 당부의 의미를 담았다. 또 입학식에서는 총장과 교무위원학장학과장 등이 교문에 나가 첫 등교하는 신입생들에게 손을 내밀어 새로운 출발을 응원했다. 신입생들이 대학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은 총장이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장 총장이 특별한 신입생 맞이를 제안한 것이다. 장 총장은 관사에서 대학까지의 출퇴근길에 학교 차량을 이용하지 않고 직접 자신의 승용차를 운전한다. 학교 차량은 철저하게 공무에만 사용해야 한다는 소신에서다. 남원 출신인 장영달 총장(70)은 전주고와 국민대를 졸업하고 한양대에서 행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0년대 민주화운동에 앞장서 유신반대 민청학련 사건과 긴급조치 위반으로 7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을 시작으로 제17대까지 4선 의원을 지냈으며, 국회 21세기 동북아평화포럼 대표, 국회 국방위원장, 대한축구협회 수석부회장, 대한배구협회장, 한러시아 의원 외교협의회장, 한양대 특임교수 등을 역임했다. 총장 임기는 오는 2022년 2월까지 4년이다.

  • 기획
  • 김종표
  • 2018.03.18 18:42

정해구 국민헌법자문특위 위원장 "국민 삶 나아지는 방향으로 개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

정해구 국민헌법자문특위 위원장은 국민기본권과 지방분권의 강화, 그리고 국가균형발전이 이번 개헌의 주요 쟁점이면서 서로 이견이 크지 않은 부분이라며 특위에서도 기본적으로 국민기본권과 지방분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 위원장은 또 국민의 의견은 아무리 많이 수렴해도 충분하다고 할 수 없지만, 국민헌법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을만큼 열심히 광폭적으로 의견을 수렴했다고 말했다. 13일 대통령 보고를 앞두고 정해구 국민헌법자문특위 위원장으로부터 헌법개정안의 주요 쟁점과 내용. 의미에 대해 들어봤다. 이 인터뷰는 청와대 지역기자단이 공동으로 실시했다. -정책기획위원회에서 국민헌법을 만들게 된 배경과 현재까지 추진상황을 설명해주세요. 정책기획위원회는 대통령의 국가정책 자문 및 국정과제 관리를 위한 기구로서 대통령의 자문 요청에 응할 의무가 있습니다. 국민이 참여하는 국민헌법안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받아 특위를 구성하게 되었습니다. 대통령이 본 위원회를 특정해 개헌안 자문을 요청한 것은, 국회에서 개헌 논의 중인 상황에서 범정부적 기구를 구성할 경우 대통령이 국회와 경쟁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 국회도 존중하면서 대통령 자문안을 만들기 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재 분과위별 논의 및 전체회의를 거쳐 현법개정 요강을 확정하고 있으며, 12일 최종 전체회의의 의결을 거쳐 13일 개헌 자문안을 대통령께 보고할 예정입니다. -국민헌법자문특위의 역할은 어디까지입니까. 최종 정부안을 만드는데에도 관여하게 되나요. 특위의 역할은 다양한 국민의견을 수렴한 개헌안을 마련하여 대통령께 자문 하는 것입니다. 개헌 발의권자는 대통령이므로 정부안을 최종적으로 확정하고 발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정부와 대통령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촉박하다보니, 충분한 국민의견 수렴이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우려도 있습니다. 지난 수 년간 개헌에 대한 국민들의 의사는 정당과 많은 단체들에 의해 집약되어 왔으며, 동시에 국회와 언론사들이 국민 여론을 많이 수집하여 분석해 왔기 때문에 국민 의견은 많이 축적되어 있습니다. 저희는 지금까지 축적된 의견들을 토대로 하면서 주요 쟁점이 되었던 분야에 집중하여 온라인과 오프라인 두 가지 방식으로 의견 수렴을 해왔습니다. 온라인의 경우, 홈페이지와 뉴미디어 등을 통해 약 450만명에 달하는 국민이 참여했으며, 오프라인에서는 숙의형 토론회를 5차례에 걸쳐 실시하고, 2000명을 대상으로 개인당 1시간 가까운 시간이 소요되는 심층 대면 면접 여론조사를 실시하는 한편, 16개 시도는 물론 각 단체와 개인들로부터 다양한 의견 자료를 전달받았습니다. 국민의 의견은 아무리 수렴해도 충분하다 할 수 없으나, 국민헌법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을만큼 열심히, 광폭으로 의견을 수렴했다고 생각합니다. -국민헌법을 만들어가는 기본 원칙이 궁금합니다. 일각에서는 대통령과 여당의 뜻에 맞는 헌법을 만드는 것이 아니냐는 시각도 있습니다.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개헌안을 준비하는 것이 기본 원칙입니다. 국민들이 바라는 것은 우리 삶이 나아지는 방향으로 개헌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러한 국민들의 생각을 개헌안에 담기위해 노력하였습니다. -대통령께서 그동안 헌법개정 방향에 대해 국민기본권 강화와 지방분권 및 균형발전의 원칙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국민헌법특위도 기본적으로 이 두가지를 토대로 하는 것인가요. 국민기본권과 지방분권의 강화, 그리고 국가균형발전은 이번 개헌의 주요 쟁점이면서 그 방향성에서 이견이 크지 않은 분야입니다. 특위에서도 기본적으로 국민기본권과 지방분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논의하고 있습니다. -자유한국당 등 보수야당에서도 시기만 다를 뿐 개헌에는 동의하면서 개헌안을 만들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야당의 의견은 어떻게 수렴합니까. 각 정당 대표와의 면담을 요청하여 의견을 들었고, 기존에 각 정당에서 발표한 내용을 참고하려 하였습니다. 다만, 면담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공식적인 의견이 없는 경우에는 언론 등에 보도된 의견을 참조하였습니다." -국민헌법에 반드시 반영돼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반대로 확실히 재검토가 필요한 영역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국민기본권과 지방분권의 강화는 이견이 크지 않은 분야이므로 이번 개헌안에 반드시 반영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헌법전문 수록 사항, 기본권, 정부형태, 분권의 수준 등에서 국민들의 이견이 큰 쟁점들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을 들어 숙고해야 할 것이고, 국민들의 눈높이에 맞는 지점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민헌법특위에서 여론조사와 심층면접 등 국민 여론 수렴을 위한 절차에 들어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약 여론조사 결과와 심층면접 결과가 서로 다르게 나오고, 국민헌법특위의 논의 결과와 엇갈릴 경우 이를 어떻게 반영할 계획입니까. 국민헌법자문특별위원회는 국민의 의견을 개헌자문안에 담기 위해 다양한 경로로 국민의 의사를 수렴해야 한다는 원칙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경로로 모아진 국민의견중 어느 하나가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고, 헌법은 역사성과 시대성을 반영해야 하므로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반영해야 합니다. 다만, 국민의견 수렴 결과와 기존의 축적된 여러 자료들, 위원회의 논의 결과 등에서 확고한 의견이 모아지지 않는 경우 1안2안 형태로도 제시할 예정입니다. -헌법 전문에 반드시 포함돼야 할 키워드는 무엇입니까? 예를 들면, 촛불, 지방분권국가, 균형발전 등이 있을 것 같은데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면 어떤 절차를 거쳐 정해집니까. 부마민주항쟁, 518민주화운동, 610항쟁 등 역사적 사건, 자치와 분권, 생명존중, 생태, 복지 등 다양한 가치에 대해 헌법 전문에 포함되어야 하는지 논의하고 있으며, 총강기본권 분과의 논의 내용과 국민의견 수렴 결과를 바탕으로 전체회의, 조정회의, 조문화회의 등 거듭된 논의를 토대로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 지방분권형 개헌과 관련, 자문특위에서 가장 쟁점으로 보는 이슈는 무엇입니까.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의 사무배분에 있어서 지방정부의 자치사무를 보장하는 문제(보충성의 원칙), 실질적으로 입법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자치입법권을 보장하는 경우 어느 정도의 범위까지 보장해 줄 것인지 하는 문제, 지방정부가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자주재정권을 보장함과 동시에 자주재정권의 보장이 지방정부 간의 불균형을 발생시키지 않도록 재정조정제도 등의 장치를 마련하는 문제 등이 있습니다. -국민헌법자문특위에서 지금 진행 중인 인터넷 여론수렴 관련해 20여가지 개헌 관련 쟁점 중에 유독 지방분권 관련 3개 조항에 대해서만 반대가 많습니다. 그 이유를 어떻게 분석하고 계신지, 또 이런 결과가 정부 개헌안에 어떻게 반영되는지 궁금합니다. 숙의토론과 여론조사, 홈페이지의 댓글, 지역간담회, 전문가 간담회 등을 분석해 보았을 때 지방분권 관련 3개 항목이 반대가 많은 이유는 먼저, 지방분권에 대해서는 찬성하지만 지방분권이 단체장이나 지방의원 등의 권한집중을 야기하는데 이에 대한 시민견제가 함께 되어야 한다는 우려가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지방재정 확충에 대해서는 찬성하지만 이로 인한 부익부빈익빈 우려가 있는데 이에 대해 재정조정제도가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는 우려로 반대쪽에 투표하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권력구조 개편 중 상하원 양원제 도입에 대한 논의는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는지요, 또 실제 가능할 것으로 보시는지요. 지역대표형 상원 도입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었고 그 도입 필요성도 인정됩니다. 다만, 우리 국회가 오랜 기간 단원제로 운영되어 온 점을 고려할 때, 양원제 국회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충분히 형성되어 있지 않다는 의견도 강하게 개진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따라서 지역대표의 의견이 중앙정부에 투입될 수 있는 제도적 대안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국민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주시지요. 이번 개헌을 통해 지역 주민들의 삶이 한 단계 나아질 수 있도록 자문안 마련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지역에 계신 분들께서도 개헌안이 통과될 수 있도록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 기획
  • 이성원
  • 2018.03.11 20:48

제4기 방송통신심의위원회 허미숙 부위원장 "미디어 소통방식 대변혁기…시청자 주권시대 시작돼"

지난 1월 30일 제 4기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출범했다. 위원회의 공식적인 심의활동이 중단된 지 8개월만이다. 심의위원회는 방송과 인터넷의 내용 규제 전반을 담당하는 공정성 규제 기구다. 방송 내용의 공공성과 공정성을 유지하고 보장하는 활동이 목적이니 실질적으로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그럼에도 이 위원회는 짧지 않은 기간 활동을 멈춰야했다. 대통령이 추천한 3명, 국회의장이 국회 각 교섭단체 대표위원과 협의해 추천한 3명, 국회 방송통신특별위원회가 추천한 3명 등 9명으로 구성되는 심의위원회 구성이 늦어졌기 때문이다. 방송심의 활동이 중단되면서 심의 안건은 눈덩이 불어나듯이 누적되었다. 4기 위원회가 위촉식 직후 곧바로 누적된 방송 심의 업무 처리에 들어간 것도 이 때문이다. 4기 위원회는 이전 구성과 달리 나이와 성별 폭이 넓어졌다. 아홉 명 모두 50대 이상의 남성위원으로 구성되었던 3기에 비하면 큰 변화다. 눈길을 끄는 변화가 또 있다. 부위원장으로 선임된 허미숙 위원(65)이다. 김제가 고향인 허부위원장은 80년대 CBS 언론 민주화 운동을 이끌어 지켜온 주역이다. PD로 시작해 기자, 편성국장, TV본부장을 두루 거치면서 시대를 읽고 호흡하는 방송의 역할을 지켜온 그의 삶은 굴곡진 CBS방송의 역사와 온전히 함께 있다. 상임직 부위원장인 그의 역할이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를 만났다. 새로운 일을 만나 변화된 일상도 궁금했거니와 대한민국 방송 현실을 통해 저널리즘이 지켜야할 가치를 듣고 싶어서였다. 서울시 양천구 목동 방송타운 빌딩에 있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 그의 사무실 책상위에는 심의를 기다리는 문서들이 쌓여있었다. 그 분량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위원회 활동이 너무 오랫동안 멈춰있었던 것 같습니다. 방송과 광고소위에 상정된 것만도 461건이나 된다고 들었습니다. 작년 6월 12일에 3기위원회가 이임식을 했어요. 공백이 없으려면 6월 13일에 취임식이 있었어야죠. 그런데 해를 넘겨 1월 30일 취임을 했으니 8개월이나 중단되었던 셈이예요. 심의가 시급한 안건이 너무 많아 위촉식 마치고 한 시간 후에 첫 번째 심의를 시작했어요. 원래는 일주일에 한번 심의를 하게 되는데 지금은 두 번으로 늘려 심의하고 있습니다. 심의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도 만만치 않은데, 듣기로는 직원들이 4기 취임 이후 저녁약속을 다 취소했다고 하더군요. 어쨌든 누적 안건을 조금이라도 앞당겨 처리하는 것이 당장 해결해야할 과제입니다. -심의할 안건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공공공정성이 제기되는 방송 광고물이 많다는 것일 텐데요. 방송이 지나치게 상업화되면서 지금은 우려되는 수준 그 이상이 아닌가 싶어요. 심의위의 역할은 방송의 공정성과 공공성을 지켜내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일인데, 그 기준을 벗어나는 대상이 늘고 있다는 것은 방송환경이 그만큼 위기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 아니겠어요. -이러한 위기를 심의위의 규제만으로 극복하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물론이지요. 저는 그 힘을 시청자들이 갖고 있다고 봅니다. 이탈리아의 굴리엘모 마르코니가 라디오송출을 처음으로 성공한 것이 1895년, 서울 경성방송이 개국한 것이 1927년입니다. 90년이나 지났죠. 그때는 라디오로 새로운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겠지만 지금은 환경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방송을 송출하는 사람과 이용하는 사람들 사이가 더 이상 일방적이지 않지요. 언제든 비판받고 반론을 들어야 합니다. 정보를 독점한 사람도 없고요. 누구나 스마트폰을 이용해 손쉽게 영상을 만들고 소비하고 비판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일방적인 소통이 아니라 상호 이해에 바탕을 둔 관계가 중요해진 것이죠. 저는 이미 시청자주권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산업으로서의 방송 환경 변화는 어떻게 보십니까. TV에 인터넷이 연결되면서 시청자들은 더 이상 방송 채널에 얽매일 필요가 없게 됐고, 아무 때나 원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콘텐트 업체가 각광 받고 있습니다. 음악이 더 이상 LP레코드나 CD를 거치지 않고 온라인으로 소비되듯이, TV 콘텐츠도 방송국 없이 소비자에게 직접 전달되는 시대예요. 미디어 종사자들의 품격과 수준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진 시점이지요. -공영방송의 역할과 기능도 그만큼 더 절박해진 셈인데요. 물서구의 공영방송은 공정성 문제에서 벗어나 무한미디어 경쟁 상황에서의 공영방송 역할을 고민 중입니다. 그런데 우리 공영방송들은 지난 10년 동안 공정성과 공공성이 참혹하게 무너지는 역주행을 겪었어요. 촛불혁명을 기점으로 높아진 방송환경의 변화 욕구가 그 상황을 반증합니다. 공영방송들의 리더십 교체가 숨 가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망가진 방송환경의 복원이 이미 변화한 미디어 환경에 맞게 보다 발전된 형태로 이뤄질 것인지는 지켜보아야할 것 같습니다. -아까 시청자의 힘을 주목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방송환경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가장 큰 힘이 시청자들이니까요. 이번 KBS의 사장 선출에 40%의 선택권을 행사하는 시민자문단도 사실은 시청자의 다른 이름이지요. 이런 저런 변화를 보면 지금 우리는 미디어 소통방식의 대 변혁기를 통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역할이 더 중요해질 것 같습니다. 물론이죠. 방송통신심의위는 정기적으로 허가 또는 승인을 받는 전국의 340개 방송사의 프로그램과 광고가 적법하게 송출되었는지를 사후심의 합니다. 방송법 준수 여부와 사회질서 유지, 개인의 기본권 보호가 심의기준이지요. 특히 이번 4기 위원회의 경우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의 기본권에 시선을 맞추고 언론의 인권감수성을 높이도록 촉구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통신에서는 마약판매와 사행성 오락, 불법정보, 국가전복을 목적으로 한 통신회합 그런 내용을 담은 사이트를 찾아서 차단합니다. 청소년에게 해로운 선정적이고 잔혹한 영상을 삭제하고, 청소년유해정보를 목록화하는 작업도 담당하고요. 최근에는 이용자 권익보호와 관련해 개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사건에 대한 분쟁조정업무도 시작했습니다. 심의위 조직도 시청자중심이용자중심 조직으로 대규모 개편을 준비 중이예요. -오랫동안 방송제작 현장을 지켜오셨는데, 이제는 입장이 바뀌었습니다. 방송 심의에 걸려 불려온 적도 있으셨을 것 같은데요. 정치가 언론을 폭압하던 80년대에는 저도 의견진술자 자리에 여러 번 앉았습니다. 30년이 지나 진술을 듣는 방송심의소위원회 위원장 자리에 앉으니 여러 가지 마음이 교차하더군요.(웃음) 입장은 서로 바뀌었지만 방송의 공정성 심의에 있어서의 불편부당과 사회적 약자에 주목하는 시선은 맥락이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심의위원이 갖춰야 할 방송의 가치관이 매우 중요할 것 같습니다. 가장 중요한 덕목은 정파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방통심의위 위원 9인은 대통령이 위촉하는 자리로 법적 지위와 역할이 정해져 있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집니다. 문제는 여당 몫, 야당 몫의 위원자리가 6대 3의 구조로 대통령과 국회의장, 국회 과학기술방송위원회에서 각 3인을 추천하고 대통령이 위촉하는 제도로부터 오는 정파성이예요. 이런 구성은 정부로부터의 직접적인 간섭을 최소화 하라는 사회적 합의가 법제화된 결과지만, 지난 10년 동안 청와대를 필두로 여당과 야당이 첨예하게 대치한 채 갈등을 빚어온 게 사실입니다. -4기 위원회가 8개월 동안 표류한 것도 실제로는 정치권의 갈등 때문이었죠. 태생적 한계가 있으니 쉽지는 않겠으나 정파성을 벗어나는 일이 무엇보다도 절실하겠습니다. 그래서 4기 심의위원들은 그 어느 때보다 공정성, 객관성, 독립성을 바탕으로 한 합의제 정신을 중요한 가치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위원회 출범 이후 방송소위에 상정된 모든 안건이 프로그램에 대한 법정제재까지도 매 회 전원합의로 의결되는 기록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방심위의 궁극적인 목표가 궁금해집니다. 명실상부한 표현의 자유 보호기관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입니다. 방송의 공정성 훼손에는 제재를 가하지만, 제작과 취재의 자율성은 훼손되지 않도록 보장돼야 하고요, 더불어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를 포함한 시청자 권익보호를 위해서도 노력해야죠. -그 목표를 위해 심의위원들이 지켜야할 가치는 무엇일까요. 아까도 말씀 드렸듯이 합의제 정신입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헌법재판소와 유사한 합의제 기구입니다. 심의위원은 공정하고 객관적이며 독립적으로 모든 사안을 판단해서 결정해야 합니다. 심의위원이 정파적이거나 특정한 이익에 좌우되면 그때부터 우리사회는 정의로울 수 없게 되죠. -화제를 잠깐 돌려보겠습니다. 부위원장님은 현업에서 일할 때 방송 민주화를 가장 큰 과제로 삼았었는데요. 인생의 변곡점이 그만큼 적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고난과 맞닥뜨렸을 때 스스로를 지켰던 가치가 궁금합니다. 시간의 질량에 대한 인식과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관계에서 형성되는 에너지와 기쁨은 평생 놓치고 싶지 않은 선물 같은 것이니까요. -방송에 오랫동안 몸담았던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겠지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가장 바람직한 방향이 무엇일지 끊임없이 고민하자는 것입니다. 가치도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니까요. 변화하는 가치에 맞는 새 규칙과 삶의 스타일을 만들 필요는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잊지 말아야할 것은 방향입니다. 가령 낡은 전통을 단절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속도를 낸다고 해서 그 시대가 빨리 다가오지는 않죠. 오히려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가와 그 방향을 향하기 위해서 필요한 가장 적절한 속도를 찾자는 것입니다. 두 시간 남짓 인터뷰를 하는 동안 그는 오랫동안 고민해온 심의위원회의 역할을 명쾌하게 정리했다. 심의위원은 미디어가 지배하는 우리 사회에서 전통과 윤리를 지키는 마지막 문지기 같은 존재들입니다. 심의위원을 하수종말처리를 담당하는 청소부에 비유하는 것도 그 때문이지요. 심의위원들은 하수라도 청정해역에 내보낼 수 있도록 수질을 향상시키는 일을 담당해야한다는 그가 여러 번 강조한 대목이 있다. 정파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 그것은 곧 부위원장으로서 그가 경계하고 지켜내야 할 의무 같은 것이다. 인터뷰 말미 그가 말했다. 만일 마지막 문지기가 정파적이고 편향적이며 특정 정치세력의 대리인 노릇만 한다면 우리의 방송 환경은 어떤 지경에 처할까요. 아마 쓰레기와 오폐수가 넘쳐나는 최악의 방송 상황을 맞겠지요. ● 허미숙 부위원장은 - 독재정권 하 검열의 시절, CBS 민주화 지켜온 산증인 허미숙 부위원장은 1952년 김제시 금산면 용산리에서 태어났다. 종가의 장손으로 중국문학에 심취했던 아버지(허 환)는 한학자였다. 평생 직업을 갖지 않았지만 물려받은 재산으로 1남 4녀를 키웠던 아버지는 늦둥이로 낳은 딸을 엄하게 가르쳤다. 덕분에 종아리 맞으며 한문을 배웠던 시절이 아직도 또렷한 기억으로 남아 있지만 삶의 변곡점마다 중요한 깨달음과 지혜의 길을 찾게 해주었던 통로가 어린 시절 배웠던 한학 덕분이었으니, 인생의 가장 귀한 선물을 남겨준 아버지의 엄한 가르침을 그는 감사해한다. 언니들과 오빠는 그가 성장하는 동안 실질적인 보호자가 되어 주었지만 일찍부터 독립적인 삶을 받아들여야했다. 원평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전주로 나와 중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도 환경은 그의 의지와 관계없이 수시로 바뀌었다. 특별한 의지 없이 중학교를 졸업하지 않고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입학 자격을 얻고, 기전여고에 문예장학생으로 들어가 전주대 국문과를 입학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작가가 되고 싶었던 그는 원하던 대학에 가지 못한 상실감을 이겨내고 싶었다. 대학 3학년 때 시내버스 안에서 우연히 보게 된 CBS(이리방송)의 PD 채용 공고가 그의 삶을 바꾸었다. 중고등학교시절부터 문학적 재질을 인정받았던 그의 답안지는 당시 채점위원이었던 소설가 홍석영씨(원광대 교수)가 그의 글 실력을 두고두고 칭찬할 정도로 빼어났다. 1975년 방송 PD가 됐다. 가벼운 음악방송으로 시작한 그의 프로그램은 점차 저널리즘의 특성을 담아내는 시사성 프로그램으로 확장되었다. 78년부터 80년까지 직접 제작하고 진행까지 도맡아 했던 <안녕하세요 허미숙입니다>가 그 시작이었다. 독재정권의 탄압이 엄혹했던 검열의 시대, 80년 언론통폐합으로 CBS는 뉴스 보도 기능을 빼앗겼다. 시대를 읽지 못하고 함께 호흡하지 못하는 현실은 자존감을 무너뜨렸다. 83년, CBS는 뉴스를 뺏겼다는 1분짜리 스파트를 시작으로 <방송사설> 등 뉴스의 기능을 대신 할 수 있는 논평프로그램 등을 만들어냈다. 익산(당시 이리방송)에서 뉴스 회복 운동이 시작되자 서울 본사도 나섰다. 방송위원회에 불려 다니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부터였다. 뉴스 기능을 회복시키는 일은 방송 PD로서 그가 해내야하는 가장 절실한 의무였다. 본사 편성국 차장으로 자리를 옮긴 87년, 동료들과 의기투합해 다섯 시간짜리 생방송 우리는 CBS 뉴스를 듣고 싶습니다를 만들었다. 그 직후 CBS는 뉴스 기능을 회복했다. 그러나 후유증이 컸다. 당시 CBS 뉴스 기능 정상화 운동에 나섰던 주동자(?)들을 해고하라는 압력을 받은 경영진이 중심에 섰던 사람들을 지방으로 뿔뿔이 헤쳐 놓으면서 그는 다시 이리방송으로 돌아왔다. 이후 광주방송 보도국장과 뉴욕특파원을 거쳐 92년 대선을 앞두고 본사로 복귀한 그는 제작 1부장으로 있으면서 시사토론의 절정을 달리는(?) 프로그램들을 제작해냈다. <월요특집> <시사자키> <통일로 가는 길>등이 그가 만들어낸 CBS의 대표적인 시사프로그램이다. CBS의 민주화를 이끌어내고 지켜온 방송인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그는 그 덕분에 험지로 내몰리는 상황에 번번이 처했지만 경남방송(마산)과 전남방송(순천)을 설립해내는 강단(?)을 발휘했다. 본사 편성국장과 TV본부장을 거쳐 2009년, CBS전북방송 본부장을 끝으로 CBS를 퇴직했으며 2012년 C채널 대표이사 사장으로 자리를 옮겨 IP TV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내고 싶었으나 희망이 보이지 않는 구조적 한계를 절감하고 자유인이 됐다. 3년 동안 스스로에게 준 안식년을 마치고 2018년 1월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부위원장에 위촉되면서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 기획
  • 김은정
  • 2018.03.08 20:04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29. 눈물처럼 지는 꽃, 선운사 동백 - 다시는 불나지 말라 심었지만 붉은 꽃잎 불꽃처럼 '활활'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 지는 건 잠깐이더군 /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 이더군. 최영미의 <선운사에서>란 시의 문장이다. 동백꽃의 소식이 들리기 시작하니 문득 이맘때쯤 선운사(禪雲寺)를 찾아가 발길을 돌렸던 기억이 난다. 추운 겨울 흰 눈 속에서 붉게 피어나는 동백의 모습을 그리며 찾았던 선운사는 동백꽃이 피기 전이었다. 선운사의 동백은 봄날이 한창일 때 벚꽃과 더불어 핀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찾았을 때는 이미 송이째 떨어져 처연하게 지고 난 후라 그 잠깐의 아름다움을 번번이 놓쳤다. 몇 계절에 이름을 걸어 놓고 피어나는 동백(冬柏)은 흔히 겨울에 꽃이 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지만 피어나는 시기에 따라 선운사의 동백처럼 봄에 피는 춘백(春栢)도 있고, 가을에 피는 추백(秋栢)도 있다. 오래전 중국에서는 해홍화라고 불리다 지금은 산다화라고 부르며 일본에서는 애기동백을 다매, 유럽에서는 카멜리아라 불리는 등 그 이름이 많지만,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동백으로 불리며 그 아름다움이 문학의 소재가 되고 노래로 불리는 꽃이다. 가수 이미자의 대표곡인 동백아가씨는 1964년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영화 <동백아가씨>의 주제가로 35주간 가요순위 1위를 달렸던 히트곡이다. 그러나 동백아가씨는 인기 절정을 누리던 중 갑자기 왜색풍이라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는 수난을 겪게 된다. 일제강점기 시절 대중가요의 주류였던 일본 엔카와 비슷한 트로트가 다시 유행되는 것을 염려했다는 것과 동백나무의 주요 자생지가 일본으로 잘못 알려져 금지되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동백아가씨는 오랫동안 금지곡이었다가 1987년 6월 항쟁 이후 해금된 노래로 땅에 떨어져 다시 피어나는 동백과도 같은 아픈 사연을 지녔다. 동백에 대한 색다른 오해를 남긴 문학작품도 있다. 김유정의 단편 『동백꽃』으로 산골 마을을 배경으로 풋풋한 사랑을 담은 작품이다. 소설 속에서 동백꽃은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져 쓰러지며 한창 피어 흐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그만 아찔하였다.라는 문장 속에 등장한다. 대부분 붉은빛이나 흰색을 띠는 동백꽃과 달리 작품 속에서 노란 동백꽃으로 서술된 꽃은 바로 강원도에서 동백나무 혹은 동박나무로 불려왔던 생강나무 꽃이다. 이른 봄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생강나무를 입안에 넣고 깨물어 보면 알싸한 향이 나니 작품의 내용과 맞아 떨어진다. 우리가 알던 동백이 아닌 생강나무이다 보니 이런저런 오해를 불러오기도 했다. 붉은 동백꽃이 김유정의 단편집 표지와 관련 자료를 장식했고 김유정 문학관 조성 시 쪽동백나무가 심어졌다가 생강나무로 다시 심었다는 에피소드도 전해진다. 어찌 되었건 동백나무는 유명세만큼이나 사연이 많은 꽃나무이다. 이들 동백 중에는 우리 민족과 운명을 같이하며 슬픈 사연을 지닌 동백도 있다. 울산과 제주의 동백이다. 울산이 원산지인 울산동백은 한 나무에 오색빛깔 여덟 겹으로 피어나는 희귀종으로 학성에 자생하고 있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울산동백을 발견하고 채집해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바쳐지면서 일본에 빼앗긴 꽃이다. 불행히도 학성의 울산동백은 군락지가 소멸되었으나, 이후 1989년 일본의 한 사찰에서 발견되어 반환 운동을 통해 다시 고향인 울산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며, 지금은 울산시청과 울산 중구 학성공원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제주의 아픈 역사인 43항쟁의 70주년을 상징하는 꽃도 동백꽃이다. 제주 43항쟁 때 토벌을 피해 주민들이 동백동산으로 숨어들었던 그 슬픔이 이젠 역사의 아이콘이 되어 우리의 가슴과 어깨 위에서 붉게 피어나고 있다. 꽃이 아름다운 동백은 그 모습과 다르게 향기가 없는 꽃이다. 게다가 추운 겨울부터 피는 꽃이다 보니 벌과 나비가 아닌 새에 의해 꽃가루가 수정되는 조매화(鳥媒花)로 동백의 이름을 딴 동박새와 공생한다. 차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일본중국 등에 분포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남쪽 해안이나 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군락지 중 북단 경계에는 고창 선운사(禪雲寺)의 동백숲이 있는데, 그 가치가 높고 사찰과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어 1967년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 제184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선운사 동백나무는 정확히는 동백(冬栢)이 아니라 봄기운이 제대로 올라야 활짝 피는 춘백(春栢)이며 절 뒤쪽 비스듬한 산 아래 절을 수호하는 모습으로 군락을 이루어 선운사의 역사와 함께하고 있다. 선운사는 신라의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과 백제 위덕왕 24년(577년) 때 창건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백제 무왕 무렵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 고려말 공민왕 3년(1354년)에 중수되었고, 조선 성종 때에 이르러 십여 년에 걸쳐 건물이 189채나 되도록 중창되면서 1475년 봄에는 선왕선가(先王仙駕)를 위한 수륙재(水陸齊)를 크게 열고 번창하였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인 선조 30년(1597년)에 어실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다. 이후 광해군에 이르러 승려를 위한 선방과 법당을 건립하게 되며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당시 사찰의 역사를 기록한 『선운사적』, 『운사고작』 ,『선운사사적』등이 전해져와 선운사의 자세한 창건기록은 물론이고 조선시대의 불교사를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로 인정받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55호로 지정되었다. 동백나무 숲은 정확지는 않지만 사찰이 전소된 후 중건과정에서 승려들이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선운사 대웅전 뒤편 경사진 언덕에 평균 높이는 약 6m이고, 둘레는 30㎝인 동백나무 2000여 그루가 병풍처럼 띠를 둘러 선운사를 호위하듯 조성되어 있다. 아름다운 사찰 경관을 위해 심은 듯하나 선운사에 동백나무 숲을 조성한 이유는 분명하다. 동백나무의 두꺼운 잎이 수분을 많이 머금고 있어 예로부터 방풍림이자 방화림으로 쓰여 화재로부터 사찰을 보호하기 위해서라 한다. 그래서인지 선운사는 정유재란 이후 화재 피해가 없었다. 게다가 열매에서 짠 동백기름은 머릿기름이나 사찰을 밝히는 등불과 부처님전에 바치는 등잔불의 기름으로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임신한 왕비의 태교를 위해 쓰인 『태교보감』에는 동백기름이 피부를 탄력 있고 윤택하게 가꾸어주기 때문에 피부에 좋다고도 나와 있으니 동백나무는 여러모로 선조들에게 사랑받는 나무였던 것 같다. 선운사에 있어 동백숲의 조성은 필요에 의한 이로운 나무의 식재였지만, 선운사와 어우러진 동백숲의 아름다움은 봄날의 감성을 건네주는 지역의 귀한 자산이 되었다.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 바람 불어 설운 날에 말이에요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 눈물처럼 후두둑지는 꽃 말이에요 나를 두고 가시려는 님아 / 선운사 동백꽃 숲으로 와요 떨어지는 꽃송이가 내 맘처럼 하도 슬퍼서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못 떠나실 거예요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 눈물처럼 동백꽃 지는 그곳 말이에요 송창식의 노래가 선운사의 동백숲으로 마음을 이끈다. 봄이 한창인 어느 좋은 날 춘백으로 남아있는 선운사에 다시 가볼 참이다. 가서 선운사와 어우러진 동백나무도 보고 눈물처럼 후두두 지어 땅에서 피어난 처연한 꽃송이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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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08 20:04

[전라도 정도 1000년, 창조와 대안의 땅 '전라북도'] ⑤ 새로운 불국토 꿈 꾼 백제 무왕 - 백제 무왕의 익산 천도 입증하는 왕궁리·미륵사지 유적

해양을 통해 성장한 백제의 공식 수도는 한성(서울 강남) ,웅진(공주), 사비(부여)지역으로 《삼국사기》에 전한다. 그런데 2015년 백제역사유적지구로서 공주 부여와 함께 익산지역이 백제의 왕도유적으로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익산지역에서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유적은 현존하는 백제의 유일한 왕궁인 왕궁리유적과 삼국시대 최대의 사찰인 미륵사지 유적이다. 이들 공간은 누가 그리고 왜 만들었을까? △삼국의 왕중 유일한 용의 아들, 백제 무왕 익산지역에 백제의 새로운 터전을 마련한 존재는 백제의 무왕이다. 《삼국사기》기록에는 법왕의 아들로 나타나고 있는데 《삼국유사》 에는 백제 무왕이 삼국시대 왕들 가운데 유일하게 용(龍)의 자식으로 기록되어 주목된다. 즉, 백제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章)인데 그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못속의 용(龍)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다.는 것이다. 무왕의 탄생지에 대해서는 익산지역의 금마면 서고도리 연동마을에 있는 마룡지(馬龍池)와 주변 용순리지역 명칭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 같은 백제 무왕의 신화적 탄생설화는 신라의 문무왕이 동해 용이 되었다는 사실과 대비되는 내용으로 유일하게 용의 아들로 부각된 것은 용으로 상징된 토착성을 잘 보여준다. △마 캐던 서동, 신라공주의 남편이 되다 한편 무왕은 어릴 때 이름은 서동(薯童)으로 《삼국유사》에서는 재주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항상 마를 캐다가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아 사람들이 서동이라 이름지었다.라 하였다. 이 내용을 보면 무왕은 용의 아들이라 하였지만 평범한 시골 청년으로 성장한 존재였고 왕의 후손이란 내용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무왕이 범상치 않은 존재로 부각되는 것은 자신의 부인을 얻는 과정 설화이다. 당시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의 미모가 뛰어나다는 말을 들은 서동이 자신의 부인으로 삼기 위해 신라까지 가서 아이들에게 선화공주가 서동과 어울린다는 서동요를 부르게 해 선화가 왕실에서 쫓겨나자 선화를 맞아 부인으로 삼았다는 내용이다. 또 현재의 익산지역에 와서 함께 살 때 선화공주가 생계를 위해 내논 금팔찌를 보고 자신이 마를 캐던 곳에 이 같은 금이 많다고 하고 금을 모아 신라왕실과도 관계가 좋아지고 백성들에게도 베풀어 민심을 얻어 왕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서동은 백제에서 신라로 건너가 자신의 부인을 맞이할 정도로 지략과 기개가 뛰어난 인물로 묘사되고 있으며 금을 통해 신라 및 백제지역에서 명성을 얻었다는 점에서 매우 뛰어난 친화력과 포용력을 가늠케 한다. 특히, 한미한 존재로 묘사된 서동과 선화의 만남은 서동과 신라왕실이 정상적이지 않은 상황속에서 연결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신라 왕실과 몰락한 백제왕실 세력과의 결합일 가능성도 추측케 한다. 한편 무왕의 왕위등극과 관련된 금관련 설화에서 주목되는 것은 금마지역의 금이다. 사실 전라북도지역의 금자 들어가는 지명을 보면 금마와 함께 금제, 금구 등 금자가 들어가는 지명이 많으며 특히, 김제의 경우는 금산과 연결되어 사금이 많이 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한때 미륵신앙과 연결되어 금은 신화적인 내용이라 하였지만 미륵사에서 멀지않은 왕궁리 유적 공방터에서 금세공 과정의 부스러기 금이 흙속에서 상당량 찾아진 것은 결코 전설이 아닌 사실을 전하는 내용이다. 또한 미륵사지 서탑 발굴시에도 규격화된 금으로 된 시주품도 나와 이 지역의 금산출 가능성을 확인시켜준다. 즉 삼국시대의 이름도 금마저(金馬渚)였던 이곳이 진짜 금이 났던 곳임을 알려주며 이 금으로 무왕은 신라와 백성 모두에게 인심을 얻었음을 알 수있다. 이같이 무왕은 익산지역의 금을 바탕으로 성장한 지방세력이거나 몰락한 왕손 중 익산에서 신라와의 협력을 통해 성장한 세력일 가능성이 보여진다. 이같이 용(龍)의 아들로 신성시된 무왕은 미륵사탑을 세워 익산지역 주민들의 인심을 얻었다. 결국 무왕은 이는 마한의 중심지였던 익산지방 고유의 용신앙과 불교신앙인 미륵하생신앙(미륵불이 내려와 사바세계를 극락으로 만들어 달라고 기원하는 신앙)을 연결하여 고구려신라의 계속된 침략에 국가존망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익산을 국가증흥의 땅으로 삼아 불국토로 탈바꿈하려 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무왕, 삼국시대 최대의 사찰 미륵사와 왕궁을 건립해 새 희망을 꿈꾸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과 왕비가 미륵삼존의 출현을 계기로 금당과 탑, 회랑 등을 세 곳에 건립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1980년부터 1994년까지의 발굴 조사를 통하여 미륵사의 배치는 중원과 동서 삼원으로 3개 사찰이 함께있는 구조임이 밝혀졌다. 미륵사 서원에 세워져 있는 미륵사지석탑은 절반 이상 붕괴되어 6층까지 일부가 남아있던 것을 1915년 일본인들이 콘크리트로 보강한 상태였다. 이 석탑은 본래 9층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그 규모가 장대하고 석재를 사용하여 목조탑을 표현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의 시원으로서 그 가치가 크다. 미륵사지석탑은 2009년 1월 1층의 제1단 기둥돌 상면에서 사리를 모신 구멍이 발견되고 내부에서 사리장엄과 봉안기록 등 유물이 발견되어 백제사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탑은 2017년 남아있던 6층까지의 모습으로 재현되었고 곧 개방될 예정이다. 미륵사의 창건배경은 신라 황룡사(皇龍寺)의 예를 고려할 때 주변국을 복속시키고 미륵불국토를 구현하고자 하는 신앙적인 염원에서 발현된 것이라고 보인다. 또 무왕은 현세에서 부처를 돕는 왕인 전륜성왕(轉輪聖王)에 비유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같이 익산은 무왕이 이루고자 한 미륵 불국토의 땅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무왕은 백제를 불교를 통해 신성국가로 중흥하려하였고 이를 위해 익산지역에서 새로운 수도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익산 천도문제는 1970년 일본 교토대 마키타 다이료 교수가 찾아낸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했다는 기록에 의해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그 내용중에 백제 무광왕(무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여 사찰을 만들었는데 그때가 정관 13년(639년)이었다. 때마침 하늘에서 뇌성벽력을 치는 비가 내려 새로 지은 제석정사가 재해를 입어~라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지모밀지는 삼국사기에는 지마마지(支馬馬只)라고 했는데 이곳이 금마(金馬)로서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는 백제 별도로 표현되어 백제 천도설, 별도설, 신도설 등 다양한 입장이 개진되고 있다. 그런데 왕궁유적 등에서 발견된 5부명 인장와와 수부(首府수도를 뜻함) 글자 기와의 존재와 왕궁유적에서 발견된 중국 북조(北朝)시대에 제작이 유행했던 청자편의 발견은 왕궁리 유적이 수도의 왕궁이었음을 보여준다. 결국 600년 무왕이 집권하면서 자신의 출생과 관련있는 익산 금마에 미륵사를 창건하고, 비슷한 시기에 왕궁리 유적에서 보이는 당시의 성벽과 건물터들에 궁궐이나 부속건물을 지어 천도를 위해 새로 도성을 조성하였다. 이같이 백제의 무왕(武王)은 금마로 왕도를 옮겨 백제의 중흥을 꾀하며 당시 미래의 구세주 신앙인 미륵신앙을 백제불교의 주축으로 하고 호국적인 나라의 사찰로 미륵사를 창건하였고, 불교 수호를 자임한 자신의 궁궐의 근처에는 토착신과 연결되는 제석사를 창건해 왕실의 번창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무왕은 익산지역에 백제를 새롭게 중흥시키기 위해 수도를 만들어 옮기고 미륵 불국토신앙과 전통신앙을 결합해 백성들에게 새로운 백제의 희망을 제시하였다. <조법종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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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07 20:29

금속노조 한국지엠본부 군산지회 김재홍 지회장 "한국지엠 고사시키기 위해 오래전부터 준비한 GM의 먹튀"

▲ 김재홍 금속노조 한국지엠지부 군산지회장은 이번 군산공장 폐쇄 원인을 지엠측의 경영실패로 규정하고 향토기업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계속할 뜻을 밝혔다. 한국지엠 존폐위기는 강성노조, 귀족노조 때문이라고 매도당하며 경영정상화를 위한 희생양이 될 것을 강요받고 있다 GM 군산공장 폐쇄로 군산이 죽음의 도시가 될 거란 우려가 커가는 가운데, 직장을 잃은 근로자와 가족들은 노조를 둘러싼 비판적 시각과 여론에 또 다른 아픔을 겪고 있다. 이에 본지는 김재홍(48) 금속노조 한국지엠지부 군산지회장을 만나 비판적 여론에도 지역과 노동자의 피해가 최소화될 수 있는 방안 마련을 위해 투쟁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절박한 입장과 향후 계획에 대해 들어봤다. -5년 전부터 생산물량 감소가 지속돼 왔는데 노조는 그동안 어떻게 대응해 왔는가? GM은 내수 판매보다는 해외 판매를 주 목적으로 대우자동차를 인수했으며, 군산공장은 70%이상의 수출 물량을 꾸준하게 생산해 왔다. 그러나 2013년 GM의 유럽시장 철수 결정으로 물량이 줄어드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노조는 매년 진행되는 임금 협상에서 신차배정, 물량확보, 공장발전 전망 등을 제시해 줄 것을 사측에 요구했고 회사는 교섭 때마다 각 공장별 발전전망에 대해 구체적인 안을 제시해왔다. 하지만 막상 협의가 끝나고 나면 사장이 바뀌고 글로벌 GM의 경영 상황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회사 측은 협의 사항을 이행하지 않았다. 특히 부평, 창원은 신차와 생산 물량을 보전해 주는 반면 군산공장의 물량 및 신차 배정은 항상 뒷전이었다. 그나마 2014년 한국지엠 군산지회와 군산시 및 군산 시민들이 내 고장 상품 사주기 운동 등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올 뉴 크루즈를 배정받았지만, 이 역시 경영진의 가격책정 실패로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번 사태를 노조 때문이라고 보는 비판적 시각이 많은데 .. 군산공장 폐쇄에 대한 원인에 대해 갑론을박이 많을 걸로 알고 있다. 강성 노조나 귀족 노조로 매도되는 것은 GM 경영진의 부실 경영 진실을 감추기 위한 고도의 전술 때문이다. 이번 사태에 대해 노동자들의 잘못이 전혀 없다고는 말하기는 어렵지만, GM이 경영 정책 변화에 맞춰 한국 지엠을 고사시키기 위해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먹튀의 교과서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2013년까지 흑자 기업이었던 한국지엠이 2014년에 갑작스럽게 적자로 전환됐다. 당시 생산이나 내수수출 등의 판매 수량 등은 큰 차이가 없었음에도 적자 전환의 상황이 발생한 것인데, 그 이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한국지엠에서 벌어지고 그 이유를 아무도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GM이 경영 악화를 이유로 군산공장 폐쇄라는 일방적인 선언을 하며 정부에 보조금을 요청했지만 경영 악화의 이유를 묻는 정부에 어떤 관련 자료도 공개하지 않으며 회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이를 뒷받침하는 대목이다. -한국지엠 군산공장 폐쇄 결정의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2013년 쉐보레 유럽시장 철수와 올 뉴크루즈 가격 정책 실패, 그리고 한국 시장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차량 판매 정책 등 경영진들의 안일한 대책을 주된 요인으로 볼 수 있다. GM은 군산공장의 모든 생산 차량을 해외에서도 생산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 의도적으로 군산공장을 폐쇄하기 위해 수년전부터 준비해 온 것으로 보인다. 대우자동차 시절 군산공장에서 생산한 라세티는 우리가 개발해 전 세계로 판매됐지만, 올 뉴 크루즈는 오펠의 개발과 아키텍쳐 공유로 글로벌GM 주요 공장에서 생산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만들어도 판매할 시장이 없는 것이다. -국내에는 한국지엠 4개 공장이 있는데 그 가운데 군산공장만 폐쇄결정이 이뤄진 이유는 무엇으로 보는가. 결과부터 말씀드리면 한국지엠 4개 공장 중 가동률이 가장 낮고 고비용 저효율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어 GM이 책임과 팩트를 빗겨가기 위한 치밀한 협상카드라 볼 수 있다. 2012년 크루즈 후속인 J400의 군산공장 배정을 취소한 뒤 2013년 쉐보레 유럽법인을 철수하면서 군산공장의 주력 수출시장이 없어졌고 이 때부터 군산공장 철수설은 매년 단골 메뉴가 됐기 때문이다. -노조차원에서 군산공장을 회생시킬 수 있는 어떤 방안은 있다고 생각하는지. 노동조합의 노력만으로는 군산공장을 회생시킬 수 없다. 군산시와 지역민은 군산공장을 살리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하고 있으며 노조 또한 민주노총, 금속노조 등과 긴밀히 협력해 정부와 국회의원들을 만나 군산공장 폐쇄 철회와 한국지엠의 재무상태를 철저히 조사해 줄 것을 요구 하고 있다. 군산공장의 인력과 기술력은 세계적으로 검증된 공장으로 전기차를 비롯한 미래형신차를 배정받으면 충분히 회생이 가능하다. 군산공장의 회생을 위해 노조는 어떠한 양보와 타협도 열어 놓고 교섭에 임할 것이다. 2018년 임단협 협상이 진행 중인 만큼 투쟁과 협상에 집중하고 매각 및 다른 방안에 대해서는 아직 시기적으로 논의 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향후 노조 차원에서의 활동계획은 정부를 설득, 한국지엠 특별감사, 특별 세무조사에 노조가 참여해 GM의 비윤리적 행태를 전 국민에게 알리겠다. 만약 군산 공장을 살리기 위해 정부의 지원이 이뤄진다 해도 대안 없는 자금 지원을 반대하고 GM과 정부의 협상에서 반드시 군산공장을 회생시키는 자구안이 포함되도록 할 것이다. 또한 다국적 기업의 횡포와 이에 따른 국부 유출을 막기 위해서라도 군산공장 사태를 계기로 외투 자본에 대한 규제와 제도가 개선될 수 있도록 투명한 감사를 요구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노조는 대단한 것을 바라는 게 아니다. 그저 나고 자란 곳에서 가족 및 동료들과 함께 웃으며 일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전부다. 200만 전북도민과 국민들이 한국지엠 군산공장 폐쇄로 인해 분열되는 것을 원치 않으며, 지역민들과 함께 향토 기업을 지켜내는 싸움을 만들어 내겠다. 한국지엠 군산공장 노동자들의 절박한 소망이 이루어지는 그 날까지 전북도민과 국민들의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간곡히 부탁한다. ● 김재홍 지회장 약력 -1971년 전북 군산 출생 -1990년 군산동고등학교 졸업 -1996년 3월 군산공장 조립완성부 입사 -2000년 조립부대의원, 2대 군산지회 조사 통계부장 -2001년 정리해고 반대투쟁(정직1개월) -2002년 3대 군산지회 조직실장 -2005년 임단투 파업관련 본관타격투쟁 (정직1개월) -2006년 6대 군산지회 부지회장 당선 -2010년 올란도 투입 관련 라인정지투쟁 (정직2개월) -2011년 군산지회 조립부대의원(6선) -한국지엠지부 24대 부지부장 당선 -2016년 임단협 파업투쟁관련 정직2개월 -2017년 6월 중앙노동위 승소 부당징계 판결 -현) 군산지회 11대 지회장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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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정곤
  • 2018.03.04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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