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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감 2018 시민기자가 뛴다] 느슨한 연대와 견고한 지지, 꽁냥장이 협동조합 - 적당히 벌고 재밌게 살자!

그의 현재 직업은 목수, 디자이너, 협동조합 대표다. 한때 잘나갔던 시절엔 홍대 앞 클럽 운영자이기도, 건축 인테리어 회사 대표이기도 했다. 예술인들이 모여있는 꽁냥장이 협동조합 김광열 대표 얘기다. 2011년 완주로 내려온 이후 그를 따라 십여 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완주로 귀촌했다. 그 이후 추가된 호칭이 있다. 아브라함. 그리고 밥 잘 사주는 동네 형이다. 목수, 음악가, 손 그림 작가, 삽화가, 요리사&문화기획가, 서퍼, 공예가, 미술치료사 등 구성원들의 다양한 직업만큼이나 개개인의 개성이 남다른 꽁냥장이 협동조합이 봉동읍 구암리에 거주와 창작, 놀이가 어우러지는 재미난 예술촌을 조성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지난 토요일 오후, 완주군 봉동읍 신성마을을 지나 만경강을 지척에 끼고 있는 김광열 대표의 집을 찾았다. 꽁냥장이의 구성원 9명과 영입하기 위해 공을 쏟고 있다는 서울에서 놀러 온 젊은 예술인 2명 등 총 11명이 거실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일요일 물놀이와 늦가을 그림전을 궁리하고 있었다. -예술촌을 조성한다는 소식이 들리던데요. 예술촌이라고 부르니 뭐 대단한 일을 벌이는 것 같은데요. 이왕 노는 거 더 신나게, 제대로 놀자고 하는 일이에요. -제대로 놀기 위한 예술촌,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죠. 꽁냥장이 멤버가 12명인데, 현재 봉동과 삼례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특히나 젊은 친구들은 아무래도 주거공간에 대한 고민이 많지요. 여기 설래(귀촌 5년 차, 손 그림 작가) 같은 경우 2013년에 내려와 5년간 6번 이사를 했을 정도고요. 그러느니 함께 모여 살자! 창작활동도 같이 하고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아트마켓, 강좌, 전시도 자유롭게 열 수 있는 공간을 한번 만들어 보자고 의견을 모으게 됐어요. 게다가 다들 서울과 수도권에서 활동하다 완주로 귀촌한 친구들이다 보니 밤 놀이문화가 부족한 걸 아쉬워했는데. 구암리 스타일의 펍(Pub)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가벼운 주머니로 언제든지 들려 음주가무도 즐기고 다른 예술인들과 교류도 할 수 있도록 말이죠. -그러자면 꽤 많은 자금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알다시피 예술하는 젊은 친구들이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잖아요. 형편 되는대로 십시일반 모아 봉동읍 구암리에 500평 남짓 땅을 매입했습니다. 거주공간 3동과 공유공간 1동을 지을 예정이에요. -집들을 직접 짓는다는 얘긴가요. 물론이죠. 집뿐만 아니라 땅을 고르는 작업부터 멤버들과 함께해나갈 계획입니다. 그래서 기본적인 장비들도 갖췄어요. 특히 작은 굴착기를 샀다고 하면 다들 놀라시더라고요.(웃음) 조금 더디게 가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집을 짓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나만의 집, 공간이 생기는 거죠. 다행히 꽁냥장이 대부분 멤버들은 주전공 외에도 목수를 꿈꾸고 있을 만큼 관심도, 재주도 많아서 직접 짓는데 어려움은 없을 것 같습니다. 우혜정 씨(귀촌 5년 차, 커뮤니티 까페 우마왕 운영) 같은 경우는, 요리도 하고 문화기획도 하고 있는데 심지어 완주여성직업체험 프로그램의 소목 분야 강사로도 활동할 만큼 집짓기에 일가견이 있거든요. -서로 품앗이한다는 거죠. 그렇다고 해서 무료로 노동력을 제공한다는 의미는 아니고요. 서로에게 시간당 최저임금보다 조금 높은 8,700원을 계산해 주려고 해요. 굳이 350원을 높인 이유는 계산할 때 편하려고요.(웃음) 물론 외부에 맡기는 것보다 예산을 절감하는 효과도 크고요. -구성원 간 신뢰가 깊은 것 같습니다. 꽁냥장이 협동조합은 언제 만들어졌나요. 제가 완주에 내려오고 그다음 해니까, 2013년 즈음 만들었네요. 초창기 때는 14명이 함께 했는데 몇몇은 다시 서울로 올라가고 그 빈자리는 완주로 내려온 또 다른 젊은 친구들이 자연스럽게 채우게 되면서 지금의 모양새를 갖추게 됐습니다. -완주가 일찍부터 사회적 가치에 주목하면서 다양한 공동체사업을 추진하고 있는데 그 영향을 받은 건가요. 애초에 꽁냥장이 협동조합을 설립할 때 구체적인 중장기 로드맵이나 협동조합으로써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자거나 하는 거창한 목적이 있던 건 아니었고요. 기반 없이 귀촌한 예술가들의 비빌 언덕 내지는 혼자 놀기 심심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놀면 더 신나지 않겠나 하는 소박한 이유가 컸어요. 다만 당시 완주군에서 지원하는 공동체지원사업들이 많아서 관심을 갖게 됐고 이왕에 모여 활동하는 거 조합을 만들어 지원사업도 참여해봅시다! 했던 게 직접적인 설립 계기가 됐죠. -얘기를 들어보니 오늘 분위기도 그렇고 유연하게 운영되고 있는 것 같아요. 그게 꽁냥장이의 특징이자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규정이나 정관에 매이지 않고 원하는 누구라도 자연스럽게 들어오고 나갈 수 있는 개방적인 분위기가 좋은 것 같아요. 느슨하고 유연한 연대지만 가깝게 들여다보면 서로를 튼튼하게 지지해주고 있는 그런 형태. -구성원 모두가 귀촌자들이신데 지역민과의 관계 맺기는 어렵지 않았는지. 시간이 필요한 부분인데 지역에 스며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죠. 초창기 땐 삼례에서 지역단체들과 함께 꽁냥마켓을 열어 안심먹거리장터, 생활공예장터, 리페어장터, 어린이장터 등을 운영하기도 하고 프러포즈 축제, 와일드푸드축제, 나는 난로다 같은 지역축제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하고 있어요. 그런 참여를 통해 수입이 생기는 건 아니지만 지역을 이해하고 지역민들과 더 가깝게 교류할 수 있는 토대가 되는 것 같아요. -다양한 활동만큼 구성원 간 의견이 다른 경우도 있지 않을까요. 당연히 많죠. 개성 강한 예술인들이 모여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게 문제가 되거나 한 적은 없는 것 같아요. 꼭 전원이 찬성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을까요. 각자 생각하는 바를 자유롭게 얘기하고 혹 다른 의견이 있어도 그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자는 입장이에요. -예술공동체생활이 지속 가능하기 위한 고민을 많이 하실 것 같은데요. 그래서 도움이 될 사례들을 찾고 있어요. 올해 완주문화재단에서 완주 예술가들의 해외 배낭여행을 지원해주는 사업이 있었는데, 운 좋게 저희 팀이 선정됐어요. Viva Viva_살아있는 삶이라는 주제의 여행기획안인데. 협동조합으로 유명한 스페인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예술인 마을들을 다녀올 계획이에요. 이은희 씨(공예가), 우혜정 씨(요리사&문화기획가), 설래 씨(손그림 작가)가 보름 동안 다녀올 거에요. -구체적으로 어떤 마을들을 다녀오시나요. (이은희) 판자라 마을과 마리날레다 마을, 말라가까지 3곳을 다녀올 계획이에요. 판자라 마을은 인구 280여 명의 자그마한 마을이지만 7년 전부터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예술가들이 정착하며 활동하고 있는 곳이에요. 특히 마리날레다는 농업을 기반으로 한 시골 마을이지만 자체적인 문화예술 프로그램과 활동을 활발하게 펼치며 자급자족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어서 그 작동 기제를 들여다보고 싶은 곳이고요. 말라가는 워낙에 문화예술의 도시로 알려진 곳이라 다양한 마켓들을 경험해보고 싶어서 들려올까 해요. -꽁냥장이 멤버들이 구암리 예술촌에서 꿈꾸는 삶은 어떤 건가요. 조금씩 생각들이 다를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급자족의 삶이 아닐까요. 적당히 벌고 재밌게 살자! 예술가로서 작품 활동하고 전시와 마켓을 통해 소비자와 만나고 교류할 수 있는, 삶터와 일터가 일치하는 삶이면 충분히 행복할 것 같습니다. /송은정(문화기획가완주문화재단 사무국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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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7.25 19:33

[참여&소통 2018 시민기자가 뛴다] 4대강, 숨길을 열다 - 물꼬 틀자 살아난 강…요순시대에서 배우는 치수사업

민선 7기가 공식적으로 시작된 지난 2일, 새로 선출된 지방자치단체장들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대부분 취임식을 취소했다. 태풍 쁘라삐룬(PRAPIROON)이 북상하면서 전국 곳곳에 호우특보가 내려지자, 수해대책 마련과 피해상황 점검으로 첫 업무를 시작했다. 농업이 근간인 나라에서 태풍과 홍수는 피할 수 없는 숙제이고, 때로 몬순기후대에 자리한 국가들의 운명을 가를 만큼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수와 치수는 지도자들이 반드시 갖춰야 할 덕목으로 요구되어 온지 오래다. △태평성대의 꿈, 치수 오랜 기억의 꼬리는 전설 속 요순시대까지 거슬러간다. 맹자와 서경에 전하는 바로는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그 시절, 20년이 넘도록 계속된 대홍수가 들이닥쳤었다고 한다. 중국 문명의 요람인 황하는 서북쪽의 황토고원에서 발원하여 중원을 거쳐 보하이 만으로 흘러가는데, 큰 비가 내리면 성난 파도가 바다처럼 요동을 쳤다. 황토와 뒤엉켜 누렇게 쏟아지는 물줄기는 비가 멎은 후에도 천둥소리를 토해냈다. 백성들의 공포와 요임금의 근심이 얼마나 깊었을까. 대책을 고심하던 요임금에게 곤이라는 자가 추천되었다. 일을 맡은 곤은 흙을 끌어다 강물이 넘치지 못하도록 높게 제방을 쌓았다. 지상의 흙이 모자라자, 하늘나라 창고에서 식양이라 불리는 흙을 훔쳐다 둑을 쌓기도 했다. 그런데 9년이 넘도록 그의 노력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 얄궂은 황하는 곤이 쌓은 제방을 우습게 무너뜨렸고, 상류로부터 몰고 온 엄청난 위력으로 매번 물길을 바꿔놓는 변덕을 부렸다. 쌓으면 무너뜨리고 넘치면 또 막아놓는 곤과 황하의 줄다리기가 반복되는 동안, 왕위는 순임금에게 넘어갔다. 순임금은 곤의 실책을 나무라고, 대신 그의 아들인 우에게 일을 넘겼다. 우는 아버지 곤의 실패로부터 귀중한 가르침을 얻을 만큼 지혜로웠고, 10년 동안 잠시도 쉬지 않고 일에 매달릴 정도로 우직했다. 물길을 가두고 제방을 쌓아 홍수를 막으려했던 곤과 달리, 우는 물길을 열고 여러 갈래 수로를 놓아 성난 황하를 달랬다. 우가 황하를 다스리면서 재난이 물러가자 세상의 민심이 그에게로 흘렀고, 순임금의 왕위는 자연스럽게 우에게 계승됐다. 국가적 환란을 극복한 인재라면 백성들의 근심을 덜어 능히 나라를 다스릴 수 있을 것이라 여겨졌다. 요순임금 시절 태평성대를 이루었던 리더십은 황하를 중심으로 중원에 넓게 자리 잡았다던 하나라의 전설로 이어졌다. △江, 물꼬를 트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지난 해 5월 22일, 본격적인 하절기를 앞두고 녹조 발생 우려가 심한 6개 보부터 상시 개방토록 하라는 업무지시를 내렸다. 아울러 수량과 수질, 재해관리를 환경부로 일원화하도록 추진하는 것과 4대강 사업정책 결정 및 집행 과정에 대한 정책 감사를 지시했다. 그리고 1년, 흐름을 회복한 강물의 조류(藻類) 농도는 감소했다. 비교적 개방 폭이 컸던 세종보와 합천창녕보 인근 지역은 모래톱이 드러나고 여울도 되살아나면서, 자연적인 수질정화 기능 회복과 수생생물들의 서식처 형성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초기부터 완전 개방했던 세종보의 경우 모래톱 면적이 4배 이상 증가했고, 식생군락 또한 빠르게 회복되어가고 있다. 보 개방 이후, 독수리와 노랑부리저어새를 포함한 겨울철 조류들의 개체수도 증가했지만, 보 개방 때문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비록 저마다의 기대치와 속도에는 못미칠 망정 4대강의 재자연화 가능성은 분명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면적인 16개 보의 수문 개방은 쉽지 않아 보인다. 무엇보다 인근에서 수막재배 방식으로 농사짓는 농민들의 반대 때문이다. 수막재배는 비닐하우스 안에 이중으로 비닐하우스를 치고, 그 위에 지하수를 뿌려 수온 12~15℃를 유지해서 보온한다. 한겨울에도 별도 난방이 필요 없어 한 때 친환경적인 농법이라고 알려지기도 했지만, 실은 200평 규모 하우스 한 동당 약 300톤의 지하수가 소모되는 치명적인 맹점이 있다. 즉 강의 수위가 낮아지면 지하수 확보가 어려워 생계를 위협받게 되는 것이다. 전체 수막재배 농가가 사용하는 지하수량은 아직까지 정확한 통계도 잡히지 않고, 그렇다고 피해보상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닌 듯하다. 또 하나, 4대강 사업을 둘러싼 사회적 논란이 지속될 이유는 지방 선거 이후로 미뤄왔던 4대강 사업에 대한 감사원의 네 번째 발표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노골적인 개입이 확인되었다지만, 이번에도 핵심적인 논란에 시원한 답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특히 4대강 사업 관련자들에 대한 형사적 책임을 물을 수 없어 촛불 민주주의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에 실망만 남긴 꼴이 되었다. 한편에서는 감사원을 감사하라는 목소리마저 터져 나오고 있다. 지난 과거사를 정리해가며 개혁추진에 속도를 내지 못하는 정부에 대한 시민사회의 갈증이 쉽게 해갈되지 못하는 이유다. 지금까지 보 개방 이후 모니터링을 총괄해왔던 통합물관리상황반(국무조정실 소속)의 발표에 따르면, 이번 달 내로 민간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4대강 조사평가단이 구성되고, 평가를 바탕으로 향후 보처리 계획안을 마련해갈 계획이다. 4대강 보의 운명은 내년 6월 출범할 것으로 예정된 국가물관리위원회에서 최종적으로 결정될 전망이다. △치수사업 성패와 지도자의 흥망성쇠 물 관리를 통해 태평성대의 꿈을 이루었다는 곤과 우의 이야기는 다분히 상징적이면서 주관적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어떤 정치인은 요순시절 태평성대의 이유를 치수사업의 성공에서 찾으며, 오늘날 강과 하천 개발의 정당성으로 역설한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물길을 다스렸던 두 사람의 방식 차이를 두고, 백성의 입을 막고 자신의 귀를 닫아 실패하는 정치인과 민심을 잘 읽어내어 성공하는 지도자의 흥망성쇠에 빗대기도 한다. 그 해석의 차이를 더 이상 역사의 심판에 맡겨둘 일은 아니다. 지금의 촛불 정부를 탄생시켰던 당신이 바로 역사의 주역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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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7.24 18:06

지난 1일 취임한 곽유석 전북지방병무청장 "병역, 누구에게나 공정하게…특권·반칙없는 문화 조성"

▲ 곽유석 전북지방병무청장이 지난 18일 전북지방병무청에서 병무청 운영 방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지난 1일 제42대 전북지방병무청장으로 취임한 곽유석 청장(58)은 1980년 12월 9급 공채를 통해 병무청에 들어온 뒤 지금까지 38년을 병무청에서만 근무해온 정통 병무인 이다. 근무한 기간 만큼 병무청내 다양한 직무를 맡았고 주요 부서를 모두 거친 베테랑이다. 취임사에서 모든 행정의 중심에는 국민이 있다고 밝힌 곽 청장은 병무청은 무엇보다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기관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곽유석 청장으로부터 취임 이후 소회와 향후 병무청 운영 방향 등에 대해 들어봤다. <대담=강인석 사회부장> - 취임을 축하합니다. 소감이 어떠십니까? 문화와 예술의 본향인 전라북도의 병무 행정을 책임지게 돼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더불어 지역주민과 병역의무자들에게 보다 나은 병무 행정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책임감도 무겁게 느끼고 있습니다. 전북지방병무청은 지역민들로부터 신뢰도 높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모두가 병무 행정에 대해 많은 관심과 격려를 보내주신 전북도민들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와 전북지방병무청 직원 모두는 도민 여러분과 함께 호흡하며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지난 취임식에서 모든 행정의 중심에는 국민이 있다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는 징병제 국가인 우리나라에서 병무 행정을 지탱해 주는 힘은 국민입니다. 병무청은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받아야 공정하고 정의로운 병역문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기관장인 저부터 정책 현장을 부지런히 다니며 국민과 소통하고 공감하는 기회를 자주 가질 것입니다. 지방병무청 자체적으로 개선이 가능한 사항은 즉시 개선해 도민들이 병무청의 서비스를 체감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취임 직후 직급별 소통간담회도 개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병역의무자들과 도민들에게 더욱 나은 병무 행정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직원들이 어떤 생각으로 업무에 임하고 있고 애로사항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직원들과 허물없는 대화의 기회를 통해 신임 청장으로서 직원과의 거리를 줄이고 주요 현안 사항들을 공유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일할 맛 나는 일터, 가족 친화적인 조직문화가 결국 국민 서비스의 질을 높일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 임실호국원 참배에서 방명록에 반칙과 특권 없는 공정한 병무 행정을 구현하겠습니다라고 적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반칙과 특권 제로를 강조하신 이유가 있으실 것 같은데요. 병무청 하면 많은 국민들께서 과거의 부정적인 기억을 떠올리고 아직도 병역 비리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국민에게 병역의무를 부과하는 병무 행정은 공정성이 생명입니다. 공정한 병역문화가 조성되도록 철저히 관리할 것입니다. 어떠한 반칙과 특권도 통하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앞으로 병역은 누구에게나 공정하다라는 공감대를 형성해 반칙과 특권 없는 공정하고 정의로운 병역문화를 조성하는데 전 직원과 함께 앞장서겠습니다. - 반칙과 특권 제로를 위해 시행하는 제도가 있나요. 병무청은 90년대 이전 병역 비리가 있을 때는 국민들로 부터 병무 행정에 대한 신뢰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뼈를 깎는 자정 노력의 결과 2000년대 들어서는 병무청 직원이 연관된 병역비리가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지난해 9월부터는 고위공직자 및 고소득자와 그 자녀, 연예인, 체육선수 등 사회 관심 계층에 대한 병적 별도 관리 제도도 운용하고 있습니다. 이들에 대해서는 병역의무가 발생하는 18세부터 현역병으로 입영하거나, 보충역의 복무를 마칠 때까지 병역이행 전 과정을 좀 더 꼼꼼하게 들여다봅니다. - 최근 사회복무요원 소집적체 문제가 심각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016년부터 복무 기관에서 필요로 하는 인원보다 사회복무요원들이 훨씬 많아져 사회복무요원의 소집적체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젊은 청년들이 사회복무를 마치고 학업을 계속하거나 빨리 취업을 해야 하는데 늦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소집적체를 해소하기 위해 병무청에서는 올해부터 장기대기 사유 전시근로역(면제)처분 대기기간을 4년에서 3년으로 단축했습니다. 또한 올해 중으로 병역판정 신체검사규칙을 개정해 일부 질환을 4급(사회복무요원)이 아닌 5급(면제)으로 분류하도록 보충역 처분기준을 강화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 다양한 경력 중 병무청 대변인을 맡으셨던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대변인은 병무 행정 전반을 꿰뚫고 있어야 하는 자리인데요. 1980년 공직에 입문한 후 병무청에서만 근무했습니다. 전북지방병무청장 부임 직전까지 대변인실에서 8년여 기간 동안 근무했습니다. 오랜 대변인실의 근무는 병무 행정을 언론과 국민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됐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을 바탕으로 지역 언론과의 소통과 교감의 기회를 더 많이 가지려 합니다. 도민들이 병무청에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고 그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 우리 지역 병무 행정에는 어떠한 가치를 두고 업무를 추진하실 생각이신지요. 병역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민감한 문제 중 하나입니다. 따라서 무엇보다 모든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공정성이 생명입니다. 전북지역에서 병역문제 만큼은 누가 봐도 공정하다는 소리를 듣도록 하겠습니다. 병역문제는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공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병무 행정이 과거처럼 병역의무를 부과하는 행정에 그쳐서는 국민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병역이행이 취업 등 사회진출로 연결되도록 취업 맞춤 특기병 제도도 계속 발전시키겠습니다. - 마지막으로 도내 병역의무자와 도민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부모님들이 흔히 말씀하십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내 자식이라고. 그만큼 자식이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모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보답하는 길은 바로 공정한 병역문화를 정착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병무청에서 어떤 병역처분을 하더라도 국민이 신뢰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도내 정책현장을 고루 살피면서 병역을 이행하는 도내 의무자와 그 가족들이 조금의 불편함이 없도록 챙겨나가겠습니다. 다양한 정책과 제도개선의 발굴에도 힘쓰겠습니다. <정리=천경석 기자> ●곽유석 청장은 - 38년간 병무청서 근무 주요 부서 거친 베테랑 1960년 경기 여주시에서 태어난 곽유석 전북지방병무청장은 인천고와 한국방송통신대, 중앙대 대학원(행정학 석사)을 졸업했다. 지난 1980년 9급 공채로 병무청에서 공직을 시작한 이후 병무청 감사담당관실, 인천경기지방병무청 운영지원과장, 병무청 중앙신체검사소장, 병무청 대변인실 대변인 등을 거쳤다. 전북지방병무청장 발령으로 지방 병무행정의 수장을 맡은 그는 전북에 있는 동안 전북사람이 되겠다고 말했다. 부임이후 주소도 이미 전주로 옮겼다. 외아들을 둔 곽 청장은 본청 근무 당시 주말마다 손주를 돌보기 위해 자녀들이 있는 경기도를 찾았지만 전북청장으로 부임한 이후에는 부인과 함께 관사로 이사하고 신혼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곽 청장은 손주들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보면 될 것 같고 이제는 시간이 날 때마다 아내와 함께 전북 곳곳을 돌아보러 다닐 생각이라고 말했다. 등산과 배드민턴, 골프 등 운동도 즐기는 편이다. 곽 청장은 내 고장, 내 고향을 챙긴다는 마음으로 전북 도민이 공감하고 신뢰하는 명품 전북병무청이 되도록 전 직원과 함께 더욱 더 노력할 것이라며 현장에서의 다양한 정책과 제도개선 발굴에 힘쓰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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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18.07.22 18:24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37. 함열산 조선음식 소개서 도문대작 - 미식가·문장가 허균, 유배지서 조선의 진귀한 맛을 읊다

여름이 한창이다. 본격적인 더위를 알리는 초복을 시작으로 보신 음식에 대한 관심이 높다. 음식에 대한 관심은 사실 시기를 가리지 않고 뜨겁다. SNS를 비롯한 각종 미디어에는 먹방 BJ, 맛집 블로거들이 등장했고, 단순히 먹는 것을 넘어서 대중에게 영향을 끼치는 스타급 음식평론가들이 주목받고 있다. 그 맛칼럼니스트의 원조격으로 조선시대 유명한 음식평론가가 있다. 함열(咸悅, 현 전북 익산시 함라)에서 조선 팔도 음식 소개서인 『도문대작(屠門大嚼)』을 저술한 허균이다. 평생 먹을 것만 탐한 사람이라고 자신을 스스로 칭한 허균(許筠: 1569~1618)은 『홍길동』의 저자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허균은 아버지 초당(草堂) 허엽과 형 허성, 허봉 그리고 여동생 허난설헌과 함께 허 씨 오문장가(五文章家)로 불린다. 그의 아버지 허엽은 강릉에 살면서 바닷물을 간수로 사용해 두부를 만드는 법을 개발한 자로 알려져 있으며 지금까지도 그의 호를 딴 초당두부는 강릉의 명물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가풍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음식에 대한 조예가 깊었던 허균이다. 그가 함열에 머물며 우리나라 팔도의 명물 토산품과 별미음식에 대하여 저술하게 된 이유도 분명하게 남아있다. 죄인 허균을 함열현(咸悅縣)으로 귀양 보냈다. 허균은 총민함과 문장의 화려함이 근래에 견줄만한 자가 없지만, 망령되고 경박하며 또 행실을 단속하지 못하였다. 얼마 전 과장(科場)에서 부정을 행하였다가 잡혀 들어가 신문을 받았는데, 이때에 이르러서야 허균이 죄를 자백하니, 법률에 따라 단죄하여 전라도 함열 땅에 정배하였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에 과거시험관이었던 허균이 조카와 사위를 부당하게 합격시켜 그 죄로 전라도 함열 땅으로 귀양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배지 함열은 허균이 자원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가 함열로 자원한데는 33세 때 전운판관(轉運判官)으로 호남에서 조운(漕運)을 감독하며 그 지역에 익숙한 까닭도 있다. 또한, 그의 다른 생활 근거지였던 부안과 가까웠으며, 당시 친분이 두터웠던 함열현감 한회일(韓會一, 인조대비 인열왕후의 오빠)과도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내가 죄를 짓고 바닷가로 유배되었을 적에 쌀겨마저도 부족하여 밥상에 오르는 것은 상한 생선이나 감자들미나리 등이었고 그것도 끼니마다 먹지 못하여 굶주린 배로 밤을 지새울 때면 언제나 지난날 산해진미도 물리도록 먹어 싫어하던 때를 생각하고 침을 삼키곤 하였다. 다시 한번 먹어보고 싶었지만, 하늘나라 서왕모(西王母)의 복숭아처럼 까마득하니, 천도복숭아를 훔쳐 먹은 동방삭(東方朔)이 아닌 바에야 어떻게 훔쳐 먹을 수 있겠는가. 마침내 종류별로 나열하여 기록해 놓고 가끔 보면서 한 점의 고기로 여기기로 하였다. 쓰기를 마치고 나서 『도문대작』이라 하여 먹는 것에 너무 사치하고 절약할 줄 모르는 세속의 현달한 자들에게 부귀영화는 이처럼 무상할 뿐이라는 것을 경계하고자 한다. 신해년(1611, 광해군3) 4월 21일 성성거사(惺惺居士)는 쓴다. 『도문대작』의 책명은 위나라 조식(曹植, 조조의 셋째 아들)이 『여오계중서(與吳季重書)』에서 푸줏간 앞을 지나며 크게 씹는 시늉을 함은 고기를 비록 못 얻어도 귀하고 또 마음에 통쾌해서다(過屠門而大嚼, 雖不得肉, 貴且快意)라고 한 데서 따왔다. 푸줏간 문을 향해 입맛을 다신다.라는 작명으로 이는 실제 먹지 못하고 먹고 싶어 흉내만을 낸다는 자족의 의미이다. 그가 조운을 관리하던 시절 귀한 음식으로 대접을 받은 기억으로 선택한 유배지가 막상 죄인이 되어 귀양살이하자 사정이 달랐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옛날에 먹었던 산해진미들이 떠올랐을 것이며 음식의 고마움을 넘어선 그리움에 그리고 부귀영화의 허망함에 대한 심정으로 미식가다운 체험기를 기록한 것이다. 허균의 호인 성소(惺所)를 따 그의 옛글을 정리한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총 26권)》 <설부(說部)>편에 수록된 『도문대작』에서는 병과음식(떡 종류) 11종목, 채소와 해조류 21종목, 어패류 39종목, 조수육류 6종목, 차, 술, 꿀, 기름, 약밥 등 조선 팔도의 명품 토산품이 적혀있다. 또한 서울의 계절 음식 17종과 방풍죽, 차수(칼국수), 두부 등 지역별 별미 음식이 소개돼 있다. 『도문대작』의 서문에서 식욕과 색욕은 본성이며, 먹는다는 것은 더구나 생명과 관계되는 것이다. 선현들이 먹는 것을 바치는 자를 천하게 여겼지만, 그것은 먹는 것만을 탐하고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를 지적한 것이지 어찌 음식을 제쳐 두고 음식 얘기는 하지도 말라는 뜻이겠는가?라는 말로, 맛있는 음식을 원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며 기존의 규범에 어긋나지 않는 일임을 강조한다. 『도문대작』에 나온 음식들은 허균이 직접 맛본 체험을 생생하게 표현한 것이다. 우리 집은 비록 가난했지만, 선친이 살아계실 때 사방에서 별미 음식을 예물로 보내는 이들이 많아 어린 시절 진귀한 음식을 두루 먹어보았다라 하고 부잣집에 장가가 산해진미를 다 맛보았다라고도 써 놓았다. 그래서인지 당시 팔도의 이름난 음식을 적어 놓은 책 『도문대작』에는 음식의 맛과 향에 대한 설명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 음식을 맛있게 먹었던 장소나 그 지방에서 그 음식을 잘 만드는 사람이 누구인지와 같은 것들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도문대작』에 나오는 지역 음식은 공물로 바치는 음식이 주류를 이룬다. 왕실을 핵심으로 여겼던 조선시대의 제도가 그 뒤에 숨어 있는 것으로, 임금에게 바치는 것이 중심이 되고 일반 백성이 좋아하고 상업적인 것은 뒷전이었던 당대의 사회상이 담겨 있다. 그러다 보니 허균이 『도문대작』에서 꼽은 전라북도의 특산으로는 변산의 작설차, 전주의 생강과 크고 달다고 표현한 승도(천도복숭아)와 색이 복숭아꽃 같은데 맛이 매우 좋다고 표현한 부안과 옥구에서 나는 도하(桃蝦,도하새우)와 부안의 것으로 그늘에서 말린 녹미(사슴의 꼬리) 등을 뽑았다. 『도문대작』에 소개된 음식들은 당시에도 맛보기 힘든 진미들로 상류층의 식생활을 살필 수 있으며 시대가 변해 이제는 찾기 힘든 식재료에 대한 기록들도 상세하다. 이는 일제강점기 대중잡지 『별건곤(別乾坤)』에서 소개한 진품(珍品)명품(名品)천하명식팔도명식물예찬(天下名食八道名食物禮讚) 등 조선시대 이후 글들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끈 유명음식을 중심으로 소개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미식가이자 문장가인 허균의 삶 속에서 그의 취향을 엿볼 수 있는 족적이 우리 지역에 남아있다. 부안 기생 매창과의 인연으로도 알려진 허균은 음식과 문화적 향유를 남달리 즐겼지만, 가장 힘들었던 시절 그가 자조하며 남긴 기록을 통해 과거를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익산시는 국가식품클러스터로 지정되었고, 그가 입맛을 다셨을 푸줏간의 터도 함열 동헌터 인근에 어렴풋이 전해져 내려온다. 당시의 식생활에 대한 고증 자료로서 가치가 있는 『도문대작』과 이를 기록한 곳인 함열에 남은 허균의 자취를 지역의 자산으로 가져야 한다. 또한, 되풀이되는 역사의 수레바퀴 안에서 그가 겪었던 당대의 생활사도 세세히 살펴보며 그에 담긴 멋과 교훈도 돌이켜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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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7.19 19:53

[문화&공감 2018 시민기자가 뛴다] 전북지역 상설 뮤지컬 - 전북의 역사·문화자원 바탕 명품 브랜드 공연 '날갯짓'

진심은 말을 한다. 잔가락이 없는 울림으로 사람의 마음을 크게 들었다 놓는다. 조용한 가운데 움직임이 있으며, 모든 움직임을 한데 모아 들어 올려서 깨끗이 매듭지어 주는 명무(名舞)들의 손사위마냥 정갈하다. 호남 내륙의 몇몇 춤에서나 보이던 정중동(靜中動)의 맛, 장엄하면서도 고아한 품격이 전해진다. (재)전북문화관광재단에서 주관하는 뮤지컬 <홍도>를 벌써 두 번이나 만나러 가게 된 이유이다. △ 뮤지컬 <홍도>, 400년을 기다려온 여인의 이야기 조선시대 혁명가 정여립을 모티브로 한 뮤지컬 <홍도>는 제3회 혼불문학상 수상작인 홍도를 원작으로 했다. 대동계(大同界)를 조직하여 반상의 귀천이라든가 사농공상의 차별, 남녀차별이 없는 세상을 꿈꾸었던 정여립의 사상과 삶, 그에 얽힌 대동계 사람들의 이야기가 배경이다. 그리고 불사의 몸이 되어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 400년 동안 기다리는 정여립의 손녀 홍도의 삶과 사랑이 최기우 극작가의 극작으로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살아 돌아오게 된 것이다. 총연출을 맡은 권호성 씨는 홍도와 자치기라는 가공의 인물이 어떻게 관객의 마음속에 각인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가장 많이 했다고 한다. 그리고 뮤지컬 특성상 음악에 많은 공을 들였다. 좋은 음악은 전체 극을, 상황을, 인물에 대한 몰입도를 높여주기 때문이다. 처음엔 홍도라는 여인에 대한 표본이 없어서 캐릭터 잡기가 어려웠어요. 홍도는 개인의 삶이나 사랑보다도 정여립이라고 하는 대동세상과 함께 하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나만의 홍도가 아닌 치열하게 버텨온 한 역사를 표현하려고 애썼어요. 홍도 역을 맡은 전라북도문화관광재단 객원배우인 29세의 김채현 씨는 말한다. 맞는 얘기다. 홍도는 자치기와의 애틋한 사랑을 그리는 여인을 넘어 시공간을 뛰어넘는 시대이고 역사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정여립이 그렇게도 부르짖었던 대동의 세계이며 정신이다. 죽을 수 없는, 결코 죽지 않는 혼의 맥이 홍도의 몸을 빌어 지금에 이르러 있는 것이라고. 거듭 두 번을 관람한 <홍도>는 극중 홍도처럼 볼 때마다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처음엔 작은 민들레꽃을 사랑하는 소녀였다가, 여인이었다가, 정여립이었다가, 불멸의 역사였다가. 홀로그램 등 디지털 영상 기법을 충분히 무대에 적용시켜서인지 시공간의 구애가 느껴지지 않는 것도 그렇지만 최첨단 영상기술, 입체음향의 결합도 한몫을 했다. 시대의 어느 곳엔가 침잠해 있는 역사를 견인해 최대한 끌어 올리고자 노력한 그 모든 것들이 우리가 전북관광브랜드 상설공연작 <홍도>를 지극히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입 안 가득 맴도는 홍, 잇부리를 혀끝으로 톡 차고 도 부르면, 홍도 내이름~ 하고 언제 어디서나 살아나올 것만 같은, 여인 홍도의 이야기를. △ 뮤지컬 아리울스토리3 <해적2: 월영의 검> 전북을 대표하는 상설공연이 또 하나 있다. 새만금의 고유한 공연 콘텐츠를 브랜드화한 아리울스토리(Ariul Story) 뮤지컬 <해적2: 월영의 검>. 군산에서 부안까지 새만금방조제를 달리다 보면 신시도 새만금휴게소 부근에 있는 상설공연장 아리울예술창고에서의 특별한 만남이 시작되는 것이다. 올 4월부터 공연된 이 작품은 창세신화라고도 볼 수 있는 서해를 관장하는 개양할미 신화와 풍어제 등의 문화자원을 활용해 에피소드 형식의 시리즈물로 재구성되었다. 아리울 즉 새만금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하여 용신족과 천신족의 대립과 통합을 통해 새만금이 진정 희망의 땅이자 생명의 땅임을 알려준다. 극의 역동성을 강화한 새로운 음악 구성 때문일까. 아니면 기존의 군무를 한층 더 강렬하고 힘찬 모습으로 변모시킨 때문일까. 대사 한마디 없이 몸짓과 표정 그리고 안무로만 이루어진 비언어극임에도 엄청난 관람객을 끌어 모았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한국무용과 스포츠댄스, 마샬아츠, 타악 등이 융합된 강렬하고 화려한 퍼포먼스로 크게 호평을 받고 있다. 하늘은 마음이 움직이는 곳에 머문다 했던가. 어쩌면 그 힘은 저 광활한 새만금과 서해 바다를 관장하는 여성 거인설화의 주인공인 개양할미가 보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아리울 달빛 아래 평화와 번영을 기원하는 천신제가 끝나고, 사랑의 축제인 달의 축제에서 우연히 만난 극 중 아리 여왕과 미르 장군의 사랑이 지극해서일지도. 아리울을 빼앗기 위해 침략한 해적왕 염왕에 의해 계속되는 고난을 겪는 아리와 미르. 결국 염왕의 인질이 된 미르와 자신의 백성을 구하고자 검을 들고 염왕과의 마지막 결전을 치르는 아리의 모습에서는 새만금의 지향성을 보게도 되는 것 같다. 크고 무게 있는 부피를 지니고 관객을 압도시키기에 충분한 아리울스토리 시즌3: 해적 . 김충한 총연출과 최석열 안무연출, 김태근 음악감독 등에 의해 완성도를 더욱 높이게 된 작품은 아닐까. 새만금을 공연관광상품으로 자리매김시키기에도 충분한 이 작품은 금년 11월까지 공연된다. 새만금이 명품 문화관광 도시로 부상할 수 있도록 새만금의 혼이 깃든 문화예술 행사가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바로 그것을, 새만금상설공연은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 2018 군산 근대역사문화 상설공연 군산에 희망버스가 생겼다.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와 한국 GM 군산공장 폐쇄로 많은 어려움을 겪는 군산 시민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마련된, 말 그대로 희망버스이다. 문화예술을 통해 군산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어주기 위함이기에 무임승차가 가능하다. 전라북도와 군산시가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후원하는 <2108 군산 근대역사문화 상설공연>의 일환인 이 버스에서 지난 7일, 아리울스토리3: 해적2가 군산 시민들을 위해 막을 올렸다. 군산 예술의전당 대공연장에서 첫 문을 연 <2108 군산 근대역사문화 상설공연>은 단비처럼 군산 시민들에게 뜨거운 감동을 안겨주었다. <2108 군산 근대역사문화 상설공연>은 희망버스: 해적2 공연을 시작으로 올 11월까지 공모를 통해 선정한 팀으로 구성될 계획이다. 그리고 별별마당(마당상설공연, 거리퍼레이드, 버스킹), 집중상설공연, 찾아가는-희망버스 등 다양한 형식으로 군산 곳곳에서 사람들에게 위로와 응원이 되어줄 것이다. 찾아가는 희망버스 두 번째 움직임은 단연 뮤지컬 <홍도>다. 8월 4일, 군산 예술의전당 대공연장에서 공연될 예정이다. 홍도가 400년을 견뎌온 그 모든 세월을 다해 외롭고 아픈 사람들과 함께 대동세상을 만들어갈 것에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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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7.18 21:20

라디오의 재발견! 마을라디오 - 소소한 동네 이야기 공동체 활력도 꿈틀

올드 미디어라 불리는 라디오가 다시 각광받고 있다. 스마트 미디어 시대 수많은 볼거리와 읽은 거리가 넘쳐나고 있지만 라디오라는 오래된 매체에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듣는 매체를 넘어 말하고 소통하는데 활용되고 있는데, 이른바 마을라디오에서다. 최근 우리 지역에서는 마을라디오에 대한 관심과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다. 지난달 개국한 혁신마을라디오FM을 비롯해 평화동 꽃밭정이 라디오, 노송FM, 덕진노인방송국, 순창FM, 학부모기자단 꼬뮤니티 라디오 등 다양한 마을라디오가 운영 중에 있거나 준비 중이다. 이주여성, 어르신, 장애인, 학부모, 청소년 등 다양한 계층과 전주, 익산, 군산, 남원, 진안, 순창, 완주 등 여러 지역에서 라디오를 활용해 주민들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있다. 꽃밭정이 라디오의 경우 평화동 마을신문에서 함께 운영하고 있다. 마을신문 공간에 라디오 스튜디오를 마련했다. 복합 마을미디어 공간이다. 전국적으로도 마을라디오 활동이 늘어가고 있다. 마을미디어가 활발한 서울지역의 경우 40여개의 마을라디오가 있으며 연간 3000개가 넘는 콘텐츠가 만들어 지고 있다. 수원, 광주, 부산, 천안, 원주, 제주 등 전국 방방곡곡에서 마을라디오가 주민들과 소통하고 있다. 공간도 다양하다. 별도의 마을라디오 뿐만 아니라 도서관, 주민센터, 아파트, 마을회관, 시장, 생태숲 등에 스튜디오가 생겨나고 있다. 서울 방학동 은행나루 마을방송국은 주민센터내에 스튜디오가 있다. 주민센터가 행정의 공간이 아닌 커뮤니티 공간으로서 역할을 한다. 광주 광산 마을라디오 역시 주민센터 안에서 라디오 방송을 진행한다. 전주시민미디어센터 공동체미디어 지원팀 최란 활동가는 센터에서 라디오 교육을 오랫동안 진행해 왔는데, 최근 마을라디오가 공동체 구성원들의 소통에 적합한 매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라디오 활동이 많아지고 있다고 전했다. 전주시민미디어센터는 2005년 개관 때부터 라디오 제작 교육을 진행해오고 있다. 마을라디오에 대한 관심과 문의가 많아지면서 이에 대한 지원과 교육을 확대하고 있다. 전주시민미디어센터에서 교육을 받고 라디오 활동을 진행하고자 하면 공간구성과 장비에 대한 컨설팅과 지원을 하고 있다. 마을라디오의 매력은 평범함에 있다. 이야기 소재도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우리 이웃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주민들이 참여해 직접 방송을 기획하고 제작해 공유한다. 또 마을라디오는 일방적으로 들려주기만 하지 않는다. 서로 소통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1인 미디어가 아니라 같이 이야기 하고, 화자가 청자가 되기도 청자가 화자가 되기도 한다. 쌍방향 매체이다. 마을라디오가 활성화되면서 공동체의 재발견도 일어나고 있다. 소소하게만 생각했던 일상의 이야기, 이웃의 이야기를 담았더니 공동체에 변화가 생겨나고 있다. 마을을 다시 보게 되고 관심을 갖게 되면서 공동체가 회복되고 있다. 지구 반대편 소식은 알아도 옆집엔 누가 사는지 모르는 단절의 관계에서 서로를 알고 따뜻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간다. 스마트 폰으로 세상 소식을 다 알 수 있는 시대 마을라디오가 각광받고 있는 이유다. 혁신마을라디오FM 문진환 대표는 혁신도시의 경우 주민들이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채널이 필요하다며 인위적으로 형성된 공간이다 보니 외부에서 이주한 주민들, 행정구역이 다른 주민들 간의 교류가 어려웠다. 마을라디오를 통해 서로 말하고 듣다 보면 훈훈한 정이 쌓이게 되고 공감이 될 것이다고 마을라디오를 개국한 이유를 설명했다. 마을라디오는 마을의 의제를 논하고 지역 현안을 고민하는 공론장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이번 지방선거 기간 전주학부모 기자단 팟캐스트 꼬뮤니티는 교육감 후보자 선거방송을 운영하기도 했다. 서울의 마을라디오의 경우 16개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각 지역별로 후보자 인터뷰 방송을 진행하고, 동네에 필요한 정책을 질문하고 발언하는 주민마이크를 진행하기도 했다. 마을라디오는 주민들과 만나는 방식도 다양하다. 주로 인터넷 팟캐스트로 진행되지만 공개방송의 형식으로 직접 만나기도 한다. 노송FM 1기 구성원들은 소리톡톡FM 이름으로 첫 돌 축하 공개방송을 19일 오후 5시에 비사벌초사(신석정 가옥)에서 진행한다. 김승수 전주시장도 게스트로 함께한다. 혁신마을라디오FM은 개국기념 공개방송에 이어 오는 23일 혁신도시 호반2차아파트 작은 도서관에서 공개방송을 진행한다. 게스트로 김승환 교육감이 초대되었다. 일찍이 독일의 대표적 시인이자 극작가인 브레히트는 라디오는 일방적인 전달 도구에서 의사소통 도구로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주장한 라디오의 쌍방향적 의사소통 기능은 한 세기가 지나 마을라디오에서 구현되고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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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7.17 18:17

[전라도 정도 1000년, 창조와 대안의 땅 '전라북도'] 고려문인 이규보, 전북서 삼국시대 자취 찾다 - 첫 관직 나선 전주서 고승들 자취 찾아가 기록으로 남겨

△청년 이규보, 첫 부임지 전북도를 거닐다 고려시대 대표적 문인 이규보(1168-1241)는 고구려의 웅혼한 기상을 전하는 동명왕편을 기록하여 잊혀질 뻔한 우리 역사의 원형을 전해주었고 8000여편의 시를 남긴 고려 최대의 지식인이다. 그런데 이규보가 전라북도지역과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다. 어려서 천재소리를 듣던 이규보는 정작 과거에 4번이나 낙방하고 간신히 22세에 사마시에 급제했지만 10여년 동안 벼슬길에 나가지 못해 세상을 한탄하다 32세 되던 1199년 6월 첫 부임지인 전주목에 서기직으로 임명되었다. 따라서 이규보 입장에서 전주는 인생의 첫 출발지로서 또 좌절과 울분에 차있던 마음을 풀어준 희망의 땅이었다. 그 같은 마음을 보여주듯 이규보는 전주목 관할구역인 현재의 전라북도권역에 출장을 다니면서 유려한 글 솜씨로 기행수필인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 등 많은 시와 글을 남겨 820여년전 전라북도의 생생한 기록을 전해주고 있다. 이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이규보가 전북 지역의 고구려, 백제, 신라 스님들이 머물렀던 사찰들을 찾아 관련기록을 남겨놓은 것이다. △고구려 평양에서 백제땅 전주로 날라온 비래방장을 가다 이규보는 전주에 부임하자 전주근처 고달산에 있는 고구려 승려 보덕이 세운 경복사의 비래방장을 찾았다. 비래방장(飛來方丈)은 문자 그대로 날라온 암자라는 뜻이다. 보덕은 고구려에서 연개소문이 도교를 진흥시키자 제자들을 거느리고 하룻밤새 백제땅으로 날라왔다고 전해졌다. 이 사건은 워낙 유명해 신라시대 최치원도 관련 기록을 남겼는데 이규보는 경복사를 찾아 보덕화상의 초상화도 보고 비래방장에 갔다. 경복사는 우리나라 불교 열반종의 종찰로 그 위세가 고려-조선에 걸쳐 유지되었는데 1597년 임진왜란때 승병의 중심지 역할을 하다 일본군이 파괴하여 지금은 폐사되었다. 현재 완주군 고덕산에 폐사지로 남아있는데 최근 몇차례 발굴을 통해 대형석축 건물지와 경복사(慶福寺), 중도종(中道宗) 등의 명문와가 출토되었다. 주목되는 것은 한강이남지역에 유일한 고구려승려가 만든 사찰이 전라북도에 존재하였으며 670년 고구려 유민들이 대거 전북지역으로 옮겨와 살게 된 배경으로 이 경복사가 상정된다는 점이다. △백제부흥 거점에 자리한 신라의 원효방 이규보가 찾은 두 번째 승려의 자취는 변산의 원효방이다. 변산 소래사에 갔는데, 다음날 원효방에 이르렀다. 높이가 수십 단이나 되는 나무 사다리가 있어서 발을 후들후들 떨며 찬찬히 올라갔는데, 곁에 한 암자가 있는데, 속어에 이른바 사포성인(蛇包聖人)이란 이가 옛날 머물던 곳이다. 남행월일기 이규보는 신라의 유명한 승려 원효의 자취를 변산에서 찾았다. 원효는 신라의 대표적 승려로 전국에 많은 흔적이 전하지만 대부분 후대에 갖다 붙인 것이다. 그러나 이규보가 방문한 변산 원효방은 당시에 이미 원효초상이 모셔져 있어 실제 원효가 왔던 곳임을 알려준다. 현재 개암사 뒤 산 정상 부분에 원효방 흔적이 전하는데 이곳은 앞서 살펴본 백제부흥군 거점인 주류성으로 파악되는 우금산성 지역이다. 문제는 느닷없이 왜 신라 승려 원효가 변산지역에 나타났는가이다. 여기서 추정할 수 있는 단서가 함께 등장하고 있는 존재인 사포성인이다. 사포는 뱀복이로 불리는 죽은 이들을 사후세계로 데려가는 민간신이었다. 즉, 신라가 백제부흥군을 진압한 이후 원효와 사복을 파견해 진압과정에 죽은 자들을 위한 위무활동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같이 이규보는 원효와 사포의 자취를 찾으며 백제부흥군의 잔영을 추론해 주류성위치비정에 중요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백제승려 진표의 불가사의 암자 부사의방 한편 이규보는 원효방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진표의 불가사의한 수행암자를 찾았다. 이른바 불사의 방장(不思議方丈)이란 것이 어디에 있는가를 물어서 구경하였는데, 그 높고 험함이 원효방의 만배였고 높이 100 척쯤 되는 나무사다리가 곧게 절벽에 걸쳐 있었다. 3면이 모두 위험한 골짜기라, 한번만 헛디디면 다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다리가 와들와들 떨려 내려가기도 전에 머리가 벌써 빙 돈다. 그러나 예전부터 이곳의 빼어난 정경을 익히 들어오다가 이제 다행히 일부러 오게 되었는데, 만일 그 방장을 들어가 보지 못하고 또 진표대사의 상(像)을 뵙지 못한다면 뒤에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 그래서 어정어정 기어 내려가는데, 발은 사다리 계단에 있으면서도 금방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드디어 들어가서 부싯돌을 쳐서 불을 만들어 향(香)을 피우고 율사(律師)의 진용(眞容)에 예배하였다. 그 방장은 쇠줄로 바위에 박혀 있기 때문에 기울어지지 않는데, 세속에서 전하기를 바다 용이 그렇게 한 것이라 한다. 남행월일기 백제가 망한 지 100여 년이 지난 8세기 중엽 통일신라 경덕왕 때의 승려인 진표(眞表)는 현재의 김제지역 출신으로 송고승전에는 백제인으로 기록되어 금산사를 중심으로 미륵신앙을 중흥시킨 승려다. 그의 미륵신앙은 견훤과 궁예에게 연결되어 후삼국 시대 새로운 사회의 중심신앙을 마련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진표가 중이 되는 계기를 전하는 다음 내용이다. 진표는 어려서부터 활을 잘 쏘았다. 12세 때 사냥을 나갔다가 밭둑에서 개구리를 잡아 버드나뭇가지에 꿰었고, 사냥이 끝난 뒤에 가져가기 위하여 물속에 담가두었다. 그러나 집으로 갈 때에는 다른 길로 갔다. 이듬해 봄 다시 사냥을 갔다가 개구리 우는 소리를 듣고 그 물속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30여마리의 개구리가 줄기에 꿰인 채 그때까지 살아서 울고 있었다. 지난해의 일을 생각해낸 그는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출가를 결심하였다. 삼국유사 위 기록에 나타난 진표가 자신이 꿰었던 개구리를 풀어주고 스님이 되었다는 설화는 망한 나라의 백성들은 마치 나뭇가지에 꿰어져 도망가지도 죽지도 못하는 처지에 있는 개구리와 같은 존재로 이들을 종교적인 방법으로 해방시키라는 진표의 사명이 반영된 것으로 이해된다. 즉, 출가 후 진표는 자신의 소명을 위해 극단적인 고행을 하는데 그 장소로 벼랑 끝에 매달린 바위틈새에서 수행하는 방법을 택한다. 바로 변산 꼭대기 절벽에 암자를 차렸다 하여 이를 불가사의한 암자라는 의미의 불사의 방장으로 이름하였다. 이같이 이규보는 청년백수를 벗어나 첫 직장지인 전라북도권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꿈을 키웠고 특히, 고구려, 신라, 백제와 연결된 승려들의 자취를 찾아 기록으로 남겨 820여년 전 전북권 역사의 모습을 전해주었다. 특히, 이를 통해 전라북도의 숨은 역사 즉, 삼국시대 백제, 신라, 고구려인들의 역사가 온전히 전라북도로 모여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낸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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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7.12 19:59

[문화&공감 2018 시민기자가 뛴다] 전북 문화예술교육 진단 - "예술교육, 백년 설계해 장기적·과정 중심으로 가야"

현재 전라북도에서는 8개 분야(국악, 연극, 영화, 무용, 디자인, 만화애니메이션, 공예)에 걸쳐 문화예술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연극의 경우 140여 개의 학교에서 연극을 활용한 문화예술교육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또한 전북에 거주하는 약 65명의 연극 강사들이 전문성을 가지고 학교에서 연극을 가르치고 있다. 전북지역 문화예술교육은 어느 정도의 위치에 도달해 있을까. 현재의 교육 현황을 들여다보고 보완점을 짚어봤다. △연령에 맞게, 교과연계 창의력 중요 문화예술교육을 진행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우선적으로 참여자의 연령에 맞는 교육과 소통을 통한 관계형성이 꼽혔다. 예를 들어 초등 저학년은 동화책과 연계된 역할극, 초등 중학년은 인형극이나 가면극 활동을 통한 연극 만들기, 초등 고학년은 희곡과 연극의 구성요소를 활용한 연극 만들기 체험으로 나뉘어야 한다. 통합교과 수업을 통한 교과간의 연계성이 중요하고 이를 창의적으로 표현하게 하는 것도 꼽힌다. 정현호 강사는 미술교과에 나오는 김홍도의 서당도를 통해 화가인 김홍도가 살았던 조선시대 사회상을 들여다본다. 이 과정에서 그림에 나오는 학생들의 복장이나 머리 모양을 살펴보고, 오늘날 학교 교실이라면 이러한 장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살펴보는 식으로 확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 관계맺기불연속성 어려움 문화예술교육 강사로서 어려운 점도 있다. 김복임 강사는 학생들과의 관계 맺기를 떠올렸다. 한번은 한 아이가 자신의 생각을 말하라고 해도 말을 하지 않아서 그냥 넘어간 적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그 일로 아이는 상처를 받았더라고요. 생각해보니 저는 시간 안에 마무리하는 것에만 집중했지 오히려 그 아이가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기까지 기다려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개성이 뚜렷한 아이들이 충분히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도록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 주는 것은 항상 힘든 것 같습니다. 연속적이지 않은 수업과 결과성과 중심의 교육 방식도 아쉽다. 대체적으로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만나는 수업 구조여서 심도 있는 수업은 어려운 것 같아요. 교육이 끝나고 난 후의 일주일 동안 아이들에게 어떠한 변화가 있었고 그에 따른 수업 활동 변경 및 수정 보완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다 보니 주어진 교육 시간 안에서 빠른 판단과 진행을 해야 한다는 게 어렵죠. 오지윤 강사의 설명에 채유니 강사도 말을 보탰다. 채 강사는 주어진 교육 시간 안에 결과를 얻으려 하니 힘들다며 결과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건데 과정이 많이 생략된 결과물을 보고 이것이 문화예술교육의 전부인 듯 치부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된다고 토로했다. △ 결과 아닌 과정 중심으로 가야 교육은 백년지대계라고 한다. 백년 앞을 내다보는 큰 계획이라는 뜻인데, 문화예술 교육 또한 백년지대계다. 문화예술교육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계속 변화해야 한다. 안혜영 강사는 새로운 예술교육 방법이 제시하며 연극치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채유니 강사는 형식적인 예술교육보다는 충분히 생각하고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시간과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학교, 강사, 수행 단체가 서로 긴밀하게 협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교육 내용과 방법의 변화도 중요하지만 강사에 대한 인식평가도 바뀌어야 한다. 정현호 강사는 강사 평가가 다음 교육활동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통과의 지표로만 인식된다며 우수한 평가를 받은 사람은 문화예술교육 현장에 갔을 때 그에 합당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평가 문화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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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7.11 19:12

[참여&소통 2018 시민기자가 뛴다]늘어나는 2030 탈모 - '취직 못한 것도 서러운데…' 휑한 머리에 더 우울한 청년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는 A씨는 몇달 전부터 머리를 짧게 깎고 있다. 수년 전 군에서 전역하면서부터 시작된 탈모증상이 최근 들어 유독 심해졌기 때문이다. 입대하기 전에는 긴 머리를 멋지게 꾸미고 다녔지만 전역 이후 다시 머리를 기르면서 A씨는 우수수 떨어지는 머리카락과 휑한 정수리를 마주했다. 이 때문에 적잖은 스트레스를 받았고 결국 짧은 머리를 선택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2017년도 자료에 따르면 탈모증으로 인한 전체 병원진료의 43%가 20대와 30대의 진료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듯 중년과 노년의 골칫거리로만 여겨졌던 탈모가 청년의 문제가 되고 있다. 취업준비면접 생각하면 한숨만 취업준비생 B씨는 요즘 걱정이 많다. 토익, 자격증, 해외봉사 등 서류전형을 통과할 스펙도 문제지만 탈모로 인해 유독 넓어진 이마가 면접에 악영향을 미치지는 않을지 염려하고 있다. 평소에는 앞머리를 길러 이마를 덮기 때문에 처방받은 약을 복용하는 것 이외에는 이마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않았지만 면접 때는 앞머리를 올려 이마를 드러내야 하기 때문에 걱정이 크다. 더욱이 최근 탈모로 인해 면접에서 떨어졌다는 언론보도가 심심치 않게 흘러나오면서 B씨의 초조함을 더하고 있다. B씨는 만약 이번 면접에서 탈모로 인해 떨어진다면 모발이식을 받아볼 생각이다. 병원에서 이마는 약을 먹어도 유지만 될 뿐이지 전처럼 나아지지는 것은 없다고 하더라구요, 정 안되면 모발이식이라도 해야죠. 심리적인 문제, 병원 찾기도 꺼려 여기저기서 봐서 대강 알지만 그래도 안 쓰는 것 보다는 좋지 않을까 싶어서 썼죠. 탈모증세가 4년째인 서른 살 C씨는 탈모방지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이용해 봤다. 샴푸, 에센스, 마사지기 같은 제품은 물론이고 두피클리닉 서비스, 발모에 좋은 차(茶) 등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찾았다. 그렇게 머리에 쓴 돈만 수 백만원. 그러나 여전히 머리는 계속 빠졌고 C씨는 작년에서야 뒤늦게 병원을 찾았다. 처음부터 병원을 찾아 적절한 처방을 받았다면 충분히 머리숱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이미 C씨의 정수리와 이마선은 머리가 많이 빠진 상태였다. 머리에 수 백만원이나 쓸 만큼 탈모를 걱정했지만 C씨는 정작 병원만큼은 피하고 싶었다고 한다. 대머리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 있는 만큼 탈모증세로 병원을 찾고 진료를 받는 그 자체가 일종의 유죄선고로 생각됐다고 했다. 뭐라고 말로 설명하기는 좀 어려운데 머리빠지는 것에 대한 걱정과는 별개로 피부과에서 탈모라고 얘기를 듣는 그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좀 있었어요 그래서 병원을 못간거 같아요. 약값 부담에 쪼들리는 주머니서울로 나갑니다 전체 환자의 대다수는 정수리와 이마에서 탈모가 시작하는 안드로겐 탈모증에 해당한다. 그런데 안드로겐 탈모의 치료는 미용치료로 분류해 처방약이 비급여 항목으로 지정돼있다. 때문에 의료보험의 보장이 제한되며 약값지출을 오롯이 환자가 자비로 부담해야하는 실정이다. 이 같은 상황은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20대에게는 더욱 가혹한 현실이다. 결국 20대 탈모환자 D씨는 먼 곳으로 눈을 돌렸다. 병원이나 집에서 가까운 약국을 포기하고 정기적으로 서울에 있는 도매약국을 방문하고 있다. 서울까지의 교통비, 소비되는 시간을 고려하더라도 몇 달치 약을 한꺼번에 사오면 남는 장사라고. 먹는 약, 바르는 약을 종류별로 2개월치 받으면 약값이 10만원을 넘었어요, 용돈 타서 쓰는 입장에서는 큰 부담이라서 몇 달에 한 번씩 서울에 있는 도매약국을 갑니다. 황금 같은 주말을 날리지만 돈은 그만큼 굳어요. ▲ 탈모치료, 먹거나 바르거나해외직구 저렴하지만 품질보증 못 해 탈모가 시작되는 연령이 점점 낮아지면서 2030세대가 탈모 시장의 큰 손으로 떠올랐다. 탈모예방 및 초기 단계에서 구매가 시작되는 샴푸 매출 역시 급상승하고 있다. 모바일 커머스 티몬이 지난달 밝힌 최근 3개월 판매량을 보면 일반 샴푸 매출은 2% 하락했지만, 탈모 방지용 샴푸 매출은 1002% 증가했다. 탈모 방지용 샴푸를 가장 많이 구매하는 연령층은 30대였다. 구매량에서 30대가 차지하는 비중이 42%, 20대는 18% 등 2030세대가 전체 탈모샴푸 매출의 60%를 차지했다 탈모약을 먹는 2030세대도 많다. 탈모약은 크게 먹는 약과 바르는 약으로 나뉜다. 의료보험의 보장을 받지 못하는 탈모 환자들은 약값 지출을 줄이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고 있다. 특히 바르는 탈모약은 먹는 약과 달리 일반의약품으로 분류되기에 처방전 없이도 구매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병원에서 진찰을 받거나 약국을 거치지 않고 이베이, 아마존 등에서 해외직구로 구매하기도 한다. 하지만 가격경쟁력에도 불구하고 해외직구에는 큰 결점이 있다. 바로 신뢰성과 안전성의 문제. 약품을 취급하는 딜러는 검증받은 약사가 아니기에 문제 발생 시에 책임을 질 수도 없고 약의 품질 또한 보증할 수 없다. 전북대병원 피부과 전문의 박진 교수는 일반의약품도 약사의 지도가 필요한 의약품이기에 당연히 약국에서 구매하는 것이 맞다며 또한 해외직구 제품은 알레르기 등 문제가 발생했을 때 책임소재를 명확히 할 수가 없고 더욱이 인터넷에서 판매되는 제품이 진짜 해당 약품이라는 보장도 없다고 조언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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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7.10 18:27

현장경영·소통 중시 박종만 한국농어촌공사 전북지역본부장 "농어업인 안정적 소득향상 통한 전북경제 살리기 매진"

▲ 박종만 한국농어촌공사 전북지역본부장이 올해 중점 계획과 전북 농어촌의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조현욱 기자지난 2월 취임한 박종만 한국농어촌공사 전북지역본부장이 현장경영을 바탕으로 전북지역 농어가 문제를 해결해기 위해 분주히 뛰고 있다. 그는 회의와 업무결제를 간략하게 마치면 사무실보다 매일 농어촌 현장에서 도내 농어민과 함께 호흡하고 있다. 최근 농어촌공사 전북지역본부에서 만난 박 본부장은 수많은 현장 근무로 인해 검게 그을린 얼굴이었다. 그를 만나 올해 중점 계획과 전북 농어촌의 현실에 대해 들어봤다. -거의 매일 도내 전역을 누비는 일정을 소화하고 계시는 것으로 압니다. 최근 반년 간 현장에서 지켜본 우리 농어촌의 현실은 어떠했습니까. “본부장이 현장을 찾지 않고 농어촌 지원책을 펼치는 것은 탁상공론에 불과하지요. 제가 지켜본 전북 농어업과 농어촌은 점점 더 어려운 시기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성장은 정체되었고 도농 간의 소득격차가 갈수록 커지고 있죠. 농어촌 고령화와 마을 공동화가 심해질수록 전북지역경제는 침체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땅과 바다에서 일할 미래 농어업을 이끌 후계 인력 확보도 쉽지 않은 현실입니다.” -본부장님 말씀을 들으니 전북지역 농어촌의 현실이 녹록치 않음을 느낍니다. 그럼에도 우리 농어촌에서 희망을 찾는 사례들도 있을 거라 생각되는데요.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적 흐름 속에서 급속한 기후변화나 4차 산업혁명 등은 다시 눈길을 농어업에 돌리게 하고 있는 요인입니다. 과거, 식량의 안정적인 공급 기능이 중시되었다면, 지금은 환경 보전, 휴양과 치유, 미래형 산업으로서 일자리창출과 행복한 주거 공간 조성 등 농어촌의 공익적인 가치가 재평가되어 국민들로부터 새롭게 인식되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4차 산업 혁명기술의 도입과 농어업의 융·복합 산업이 확산되면서 지역 공동체가 주도하는 창의적인 고부가가치 산업으로의 가능성이 한층 높아지고 있는 것은 희망적인 부분입니다.” -올해 가장 역점에 두고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이 있다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 보다는 기존의 사업을 재정립하고 완성시키는 데 주안점을 둘 계획입니다.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너무 많은 사업을 벌이거나, 사업내용이 자주 개정되면 정책수혜자인 농어민들의 혼란도 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농어촌공사의 미션은 분명합니다. 기후변화에도 농민이 안심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농지의 활용도를 높이는 것이죠. 저는 이 같은 공사 본연의 역할에 더욱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유 수량을 물이 부족한 지역에 연결하는 물길 잇기, 밭 기반 정비, 맑은 물 공급사업 등이 가장 핵심 사업이라고 봅니다.” -농어촌 공사가 새롭게 추진하는 사업도 있을 텐데요. “물론입니다. 수상태양광 발전에 주력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전북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고 공사 전체에 해당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수상태양광 발전 확대로 친환경에너지 정책에 부응하고, 농어촌에 새로운 일자리와 소득원 창출, 생활서비스 확충을 통한 농어촌 정주 공간 개선에도 앞장선다는 계획입니다. 공사가 보유한 저수지의 수면을 활용한 수상태양광 발전은 새로운 부지를 개발하는 데 드는 비용과 환경훼손이 없는 게 가장 큰 장점입니다. 태양광 사업은 물론 주민이 필요한 사업을 발굴, 정부 정책에 반영될 수 있도록 적극 추진하겠습니다.” -태양광 사업은 자칫 농가의 수익보단 관련 업자들의 배만 불린다는 비판도 팽배했습니다. 실제 감사와 수사결과 관련자들이 무더기로 적발된 사례도 있고요. “우리가 하고자 하는 신재생에너지 사업은 공사에서 소유·관리하고 있는 유휴부지와 저수지 등 농업생산기반시설을 최대한 활용하자는 게 골자입니다. 여기서 나온 수익금은 다시 농어촌 유지관리 사업에 재투자함으로써 장기적으로는 국가재정 부담을 경감시키고, 농업인의 영농편의를 도모하고자 하는 것이죠. 물론 투명하게 운영하고, 사업의 수익 전액은 유지관리비용에 투자할 것임을 약속드립니다. 발전소 주변지역 주민을 위한 환원 계획도 마련 중입니다.” -지난해에는 전국적인 가뭄에 농민들의 어려움이 컸습니다. 충분할 것으로 예상됐던 전북지역 저수율도 위태위태했죠. 올해는 안심할 수 있을까요. “우리 전북본부는 도내 농업인들이 가뭄에 대한 걱정없이 농사지을 수 있도록 지난해 수확이 끝난 뒤부터 용수 확보에 전력을 다해왔고, 현재 용수공급에 큰 어려움이 없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 발생할 수 있을 최악의 상황도 미리 고려하고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본부는 이달 말까지 강우량이 평년의 30% 수준까지 될 것으로 가정하고 물 대책을 세워 왔습니다. 여기에 가장 고갈이 빠를 것으로 예상되는 저수지를 분석해 저수지별로 특별대책을 마련한 상황입니다. 다행히 올해는 강우량이 적정해서 물 공급이 작년처럼 어렵진 않으리라고 전망됩니다.” -물 관리 데이터 제시가 점점 정확해지고, 공사도 물 관리에 더욱 자신감을 갖고 계시다는 느낌입니다. “한국농어촌공사는 우리나라 영농급수를 110년 간 관리해왔습니다. 그만큼 빅데이터가 많이 쌓여있죠. 기술의 발달로 오차율도 적어지고 있습니다.” -이번 인터뷰가 끝나시고, 바로 현장으로 달려가시는 걸로 압니다. 그만큼 직접 보고 해결해야할 문제가 많기 때문이라고 보는데요. 현재 전북 농어촌이 해결해야 당면과제는 무엇이라고 보시는지. “당연히 농가소득 증대입니다. 전북은 농도임에도 농가소득 수준이 낮습니다. 전북 지역총생산 중 농림어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고작 8.7%에 불과합니다. 전국 평균으로는 2.3%밖에 되지 않아요. 농어업인의 안정적인 소득 향상, 일자리 창출, 귀농·귀촌 활성화 등의 방안 마련이 가장 시급하게 해결할 과제들이죠. 이 과제들은 농가소득을 높이고, 이를 통해 전북경제를 살리자는 목적을 위한 것입니다. 은퇴한 농민의 농지를 매입해 청년 창업가와 후계농업인에게 농지를 우선 지원하는 것도 청년 일자리를 농업에서 창출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농지연금사업을 통한 농업인들의 안정적인 노후생활도 중요합니다. 귀농·귀촌인의 성공적인 영농정착을 위해 주기별 지원 체계를 마련해야 됩니다.” -그간 소회와 도민들께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는지요. “고향에서 일하는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현장에서도 많은 분들이 격려와 지지를 보내주시는 데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 전북은 호남평야를 근간으로 농업위주의 생활을 영위해 온 지역입니다. 그만큼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면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농어촌·농어업의 외부요인을 남들보다 한 발 앞선 노력으로 극복해 나가고, 전북발전과 농어촌·농어업의 희망을 일구어내는 한국농어촌공사 전북지역본부가 되도록 힘쓰겠습니다.” ●박종만 본부장은 공사 최고 토목전문가 전문성·조직관리 탁월 박종만 본부장은 농어업토목기술사로서 농어촌공사 최고의 토목 전문가로 꼽힌다. 그는 전문성과 조직관리 능력을 겸비했다는 평가다. 본부장 취임 이후에는 현장업무를 중심으로 도내 농어촌에 산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뛰고 있다. 김제출신인 그는 이리고등학교와 전북대학교 토목학과를 졸업한 뒤 1985년 한국농어촌공사에 입사한 박 본부장은 무진장지사장, 금강사업단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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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윤정
  • 2018.07.08 19:00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36. 금강 하구에 깃든 최무선의 기상 - 100척 배로 500척 왜구 물리친 600여년 전 함성 들리는 듯

해망(海望), 바다를 바라본다는 의미가 담긴 군산의 아름다운 지명이다. 하지만 해망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지도와 문헌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1932년 옥구군 미면 신풍리 일부가 군산부에 편입되면서 비로소 해망이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금강하구와 서해가 만나 지리적으로 조운이 활발했던 이곳은 일제 수탈의 현장이었으며 625 전쟁 후에는 피난민들의 집단촌이 있던 곳으로 민족의 애환이 담긴 장소이다. 집단촌이 사라진 지금은 일제강점기 수탈의 통로로 만들어진 해망굴(국가 등록문화재 제184호)이 625 전쟁 때 생긴 총탄 자국을 지닌 채 남아있다. 하지만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민족에게 더없는 큰 힘이 되어 준 곳이기도 하다. 바로 최무선 장군이 100척의 배로 500척의 왜군을 물리치는 대승을 거둔 진포대첩(鎭浦海戰)의 기개가 서린 자랑스러운 장소가 그 일대다. 최무선(崔茂宣, 1325~1395년)은 군인이자 과학자였다. 그가 화약을 만들고 진포대첩을 승리로 이끈 활약상은 『조선왕조실록(태조실록 7권』에 최무선의 졸기로 기록되어 있다. 검교참찬문하부사(檢校參贊門下府事) 최무선이 졸(卒)하였다. 무선의 본관은 영주요, 광흥창사 최동순의 아들이다. 천성이 기술에 밝고 방략(方略)이 많으며, 병법(兵法)을 말하기 좋아하였다. 고려조에 벼슬이 문하부사에 이르렀다. 일찍이 말하기를, 왜구를 제어함에는 화약만 한 것이 없으나, 국내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 최무선은 우리나라에서 화약과 화약을 사용한 무기를 처음 만들어 사용한 인물이다. 그가 화약과 무기를 만들게 된 계기는 고려 말, 왜구의 잦은 침략과 노략질을 보고 이를 막기 위함이라고 전해진다. 『태조실록(太祖實錄)』에 잘 기록되어 있듯이 최무선은 일찍부터 기술에 밝고 방략이 많았으며, 병법을 논하기를 좋아했다. 특히 각 분야의 책을 섭렵했으며 중국어에도 뛰어나 다양한 문물을 접하기 좋은 자질을 갖추었다. 일찍이 화약에 관심을 가진 그는 화약을 만드는 재료인 초석(硝石)유황분탄 중에서 유황과 분탄은 쉽게 구할 수 있으나 초석(염초)을 만드는 것이 가장 어렵고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불꽃놀이와 무기에 사용된 화약과 화포(火砲)가 있었으나 화약 제조에 필요한 염초를 얻지 못해 수입하는 염초에 의존하고 있었다. 화약의 주요 재료 중 하나인 염초는 진토(塵土)에서 채취했는데, 중국은 그 방법을 극비로 하여 우리나라에는 그 기술을 아는 이가 없었다. 최무선이 직접 화약을 만들기로 결심한 때 중국은 원나라가 명나라에 넘어가는 혼란의 시기라 화약의 관리가 소홀한 시점이기도 했다. 화약의 제조법을 배우기 위해 최무선은 직접 중국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벽란도(碧瀾渡, 개성 인근 예성강하구 국제무역항)에 가서 초석의 제조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을 찾았다. 그러던 중 화약에 대한 지식이 많은 중국(원나라) 상인 이원(李元)을 알게 된다. 최무선은 그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후하게 대접하면서 화약 제조에 대한 집념을 보이며 설득을 했다. 최무선의 진심에 감명받은 이원은 초석을 추출하는 방법을 전수해주고 중국으로 돌아간다. 그 뒤 최무선은 홀로 실험하며 여러 번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초석을 추출해 화약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최무선은 각종 화약을 이용한 무기 개발에 몰두하며 화통도감(火筒都監)의 설치를 여러 번에 걸쳐 조정에 건의했다. 결국 1377년(우왕 3년) 10월 화통도감이 설치되었고, 오랜 바람을 이룬 그는 3년간 화약 무기를 개발하고 병사들이 화약을 잘 이용할 수 있도록 포병부대를 양성하였다. 또한 무거운 화포와 포탄을 싣고도 견딜 만한 튼튼한 군선을 만들어 화약 무기와 훈련된 병사, 군함 등을 모두 갖추게 되었다. 그러던 중 1380년(우왕 6년) 8월 내륙으로 침입할 목적인 왜구가 500여 척의 군선을 이끌고 진포(금강하구, 지금의 전라북도 군산과 충청남도 서천군 일대)로 접근하자 고려 조정에서는 최무선의 화기를 시험해 볼 만한 기회라며 최무선을 부원수로 임명해 참전토록 했다. 원수 나세(羅世)를 필두로 심덕부와 최무선이 지휘하는 고려군의 수군은 왜선에 비해 5분의 1밖에 안 되는 군선 100여 척을 이끌고 출정하였다. 왜군은 500여 척의 거대한 규모로 위협적인 전세를 펼쳤으나, 화포로 무장한 고려 수군은 대규모 함포 공격으로 적선 500척을 모두 섬멸했다. 진포대첩에서 배를 잃은 일부 왜군이 내륙으로 퇴각하였으나 이를 추격한 이성계에게 남원 운봉 일대에서 섬멸되었으며 훗날 조선의 태동을 이끈 영웅담으로 기록되었다. 대승을 거둔 진포대첩은 고려군이 자체 제작한 화기로 거둔 승리였고, 군선에 최초로 화포를 장착하고 함포 전술에 따른 공격이 감행된 해상전투였다. 서양의 최초 함선으로 알려진 베네치아 해군의 초대형 군용 갤리선인 갈리아스선(Galleass)이 활약한 레판토해전(1571년)보다 200여 년이 앞선 진포대첩은 세계 최초의 함포해전이었다. 이로 인해 해상전투의 획기적 변화를 이뤄낸 최무선은 염초의 채취법과 화약의 제조법 등을 기술한 『화약수련법(火藥修鍊法)』, 『화포법(火砲法)』 등을 저술했지만 현재 남아 있지 않다. 그의 지혜와 용맹함을 아꼈던 조선 태조 이성계는 그가 죽자 그를 총리(원수)로 추서했다. 최무선이 진포에서 왜구를 물리친 그해 아들 최해산(崔海山, 1380~1443년)이 태어났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최무선은 부인 이 씨에게 아들이 장성하면 이 책을 주라면서 화약제조의 비법이 적힌 책을 남겼다고 한다. 최무선이 71세로 죽었을 때 최해산의 나이는 불과 15세였지만, 최해산은 아버지의 비법을 전수받아 화약 제조법을 습득했다. 최무선의 뜻을 이은 최해산 역시 태종과 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병조참판의 벼슬에 오르고 화약 병기를 비롯한 군 장비를 보강하고 발전시켰다. 최무선 장군의 기개가 깃든 금강하구 일대는 수많은 세월의 풍파를 거친 곳이다. 지금의 해망굴 옆에는 해망자연마당이 자리잡고 있는데 언덕에 올라보면 군산과 서천의 바닷길을 잇는 교량이 눈에 들어온다. 이 교량은 원래 군장대교라 불리다가 동백대교로 다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한다. 군산과 서천을 상징하는 꽃이 동백이어서 동백대교라 칭했다고 하지만 동백에서 바로 금강하구의 장소를 연상하기 어렵다. 동백이 유명한 남해안의 여타 지역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해상교량 중에는 지역에 그 흔적을 남긴 위인의 얼을 받들어 사람 이름이 교량의 이름이 된 곳이 있다. 광양과 여수를 잇는 이순신대교와 완도의 장보고대교가 그런 곳이다. 다리 이름만 들어도 그 지역에서 활약했던 위대한 조상의 업적과 지역의 역사를 직관적으로 알게 되는 작명이다. 군산과 서천을 잇는 해상교량의 이름이 동백대교라 확정이 되었다면, 그 일대에 역사적으로 큰 자취를 남긴 최무선 장군을 기려 최무선대교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것도 좋을 듯하다. 해망에서 바라보는 바다의 모습과 더불어 위대한 최무선 장군이 이룩한 이로운 기상도 품고 지역과 사람을 이어주는 희망찬 곳이 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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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7.05 21:02

[문화&공감 2018 시민기자가 뛴다] 순창 청년 컨퍼런스 '청년, 청년을 잇다'

▲ 청년허브 컨퍼런스 포스터 갈수록 청년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다양한 정책과 지원을 펼치고 있지만 좀처럼 청년 문제가 개선될 것 같지 않다. 특히 일자리 문제는 갈수록 신기록을 갱신하고 있다. 여러 방법으로 청년 일자리를 창출하고 활성화 하려고 하지만, 청년 실업률은 10.5%를 육박하며 극에 치달았다. 정서적인 고립도 문제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경쟁의식 때문에 청년들의 인간관계는 점점 협소해지고 있다. 사람과의 만남으로 느낄 수 있는 인정은 사라지고 점점 효율적인 것들만 추구하다보니 혼밥혼술 등 혼자 살아가는 청년들을 지칭하는 말들도 이제는 더 이상 신조어가 아니다.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많은 청년들이 꿈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하고 싶은 것은 많지만, 사실 이 사회에서 하고 싶은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는 용기와 자본, 관계 등 많은 존재들이 필요하다. 그러한 존재들이 청년 세대에는 부족하고 이에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지방일수록 그러한 경향이 뚜렷한 데 취업준비생 중 약 70%가 공무원 준비를 하고 있는 지표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 헬조선 사회, 순창 청년들은 어떤가 그렇다면 필자가 사는 지역, 순창의 청년들은 어떨까. 필자가 느끼는 순창 청년들의 문제는 서로 모일 수 있는 소통의 장이나 구심점이 없다는 것이다. 인구 3만의 작은 소읍 순창은 타 도시에 비해 절대적인 청년 수가 부족하긴 하지만 생각보다 적지 않은 20대30대 청년들이 거주하고 있다. 순창에서 카페 겸 문화공간을 2년 여째 운영하고 있는데, 순창에 이런 젊은 친구들이 다 어디에 있었지?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은 20대30대들이 공간을 찾는다. 이들을 보면서 아쉬웠던 것은 정작 같은 지역에 사는 청년들끼리는 서로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삼삼오오 모여 카페를 찾는 청년들은 하나같이 말한다. 순창에는 우리 또래가 없어요. 20대30대 청년들이 우선 다 같이 만나고 연대할 수 있는 자리가 절실하다고 느꼈던 지점이다. 또한 순창의 청년들이 다양한 활동을 하기 보다는 농사나 가게 운영 등에 한정되는 것이 아쉽다. 순창에 사는 청년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한다. 몇몇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주변에서도 농사 외에는 새롭게 하고 있는 사람이 없고, 자신 역시 새로운 일을 깊이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다고 한다. 순창에서도 농사 또는 읍내에서 식당 등 가게를 운영하는 것 말고도 할 수 있는 다양한 직업, 또 다양한 청년 문화가 있다면 청년 유출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 다양한 사례로 청년에게 영감을 아직 청년 네트워크가 다져지지 않고 문화가 단조로운 순창에서는 다양한 담론을 자체적으로 생산하기가 쉽지 않다는 판단이다. 따라서 비슷한 지역에서 소신 있는 행보를 이어가는 이들의 사례를 들어보면 영감을 받거나 변화의 계기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러한 이유로 기획된 것이 청년 허브 컨퍼런스다. 문화기획사 우깨가 3년 전부터 전주에서 하고 있는 행사인데, 순창에도 이러한 청년과 청년을 잇는 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포맷을 빌려왔다. 행사는 5일 오후 7시 순창군 장난감도서관 2층에서 열린다. 특별한 프로그램은 없고, 딱히 할 말이 없을 수도 있지만 그냥 만나 서로에 대해 이해하고 알아간다. 이번 컨퍼런스에는 전주, 광주, 남원, 순창 등 다양한 지역에서 청년단체 10팀이 각자의 활동 사례 발표를 한다. 광주에서 동네줌인을 운영중인 김태진, 전주 타악기 연주자 두드림공동체 김은수, 완주 삼례예술촌의 더 구루오브 오디언스 김병수, 남원 청년문화협동조합의 서진희, 완주 너멍굴영화제의 윤지은, 전주 한옥버스킹의 문화통신사 김지훈, 순창 젊은농부팀인 더불어농부의 신성원 등이다. 시골에 내려와 여행자들을 위한 카페를 만든 청년, 문화기획으로 청년들의 역할을 찾아주고 싶은 청년, 농사로 본인의 꿈을 키워가는 청년, 대기업을 때려 치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청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다. △ 연대가 모여 지역 분위기 바뀌길 이날 순창귀농귀촌지원센터, 지역의 벼룩시장인 촌시장의 젊은 상인들, 순창 청년회의소 JCI 등과 평범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지역민들도 참여할 예정이다.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연대하는 첫 자리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사례 발표가 끝나면 자유롭게 네트워킹 파티를 진행하며 서로의 만남으로 시너지 효과를 노린다. 모든 컨퍼런스의 음식은 순창 청년들이 직접 만들어 더욱 의미 있다. 이러한 컨퍼런스가 뚜렷한 성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무언가 결과물이 나오지 않아 어쩌면 조금 답답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청년들이 함께 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갈수록 줄어드는 청년들의 인간관계, 정서적 고립 등은 어쩌면 사회가 자연스럽게 형성해 놓은 분위기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 스스로를 오픈하고 만나는 것 자체만으로도 청년들은 새로운 무언가를 얻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고령화 지역인 순창은 50~60대까지도 청년으로 인식된다. 대도시에서는 청년 주거 복지, 취업 지원 등 20대30대를 위한 다양한 지원 정책이 많지만 시골에서는 역소외 받고 있는 실정이다. 청년들이 도시로 떠나지 않고 내가 자란 고향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 수 있기 위해선 더 많은 연대와 의견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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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7.04 18:39

[참여&소통 2018 시민기자가 뛴다] 생활 속 민주주의 ‘민주시민교육’ - 민주주의, 때때로 배우고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지난 5월 30일 전북에서는 민주시민교육 전북네트워크 구성을 위한 간담회가 열렸다. 20여 개 단체 30명 이상의 관계자들이 모인 이 자리에서는 전국민주시민교육네크워크 준비위원장으로부터 지금까지의 추진 경과와 앞으로 진행 과정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전북지역 민주시민교육 방향과 네트워크 구성 및 방향에 대한 의견도 교환했다. 전국민주시민교육네트워크는 그동안 중앙과 제도 중심의 민주시민 교육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고, 민주시민 교육정책 과정에 시민사회 주도권 확보 필요성과 지역 및 전국단위 민주시민 교육 주체의 역량 강화에 대한 필요성을 계기로 조직됐다. 민관 거버넌스 구축 기반을 마련하고, 지역영역별 민주시민 교육운동 주체들 간의 연계와 협력을 증진해 나가며 이를 통한 전국적 민주시민교육 역량 강화, 민주시민 교육지원법 등을 제정하는 일을 해나갈 예정이다. 이를 위해 지난 2월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지역준비위원회를 통해 지역별 간담회 및 토론회를 진행했다. 613 지방선거 이후에는 영역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9월 경에 전국민주시민교육네트워크의 필요성 등에 대한 전국토론회를 진행할 예정이다. 그리고 올해 11월, 출범식을 통해 민주시민교육 과제 도출 및 실행방안에 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계획이다. △민주시민교육 활성화와 한계 그동안 다양한 영역과 지역의 주체들이 민주시민교육을 실천해 왔지만, 충분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난 촛불 광장에서의 경험은 시민들이 주권자의 힘을 느낀 계기가 됐고, 이후 일상에서의 민주주의를 위한 민주시민교육에 대한 관심이 확대됐다. 현 정부의 주요 국정과제로 민주시민교육이 설정됨으로써 국무총리실, 행정안전부, 선거관리위원회 등 관련 부처에서 민주시민교육법 제정 노력이 진행 중이다. 이미 서울시, 경기도 등 지역 단위에서의 민주시민교육이 확산되고 있고, 2014년 서울시 민주시민교육에 관한 조례를 시작으로 광역자치단체 5곳, 기초자치단체 11곳, 6개 교육청이 관련 조례를 제정했다. 우리 지역의 교육 시민사회단체인 전북교육자치시민연대는 지난 국민개헌 시민사회단체네트워크 교육부문 개헌 요구에 민주시민교육을 넣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전국민주시민교육네트워크 발족 준비 활동을 진행하고 있는 황정옥 민주화기념사업회 민주시민교육국장은 지난 4월부터 전국을 순회하며 간담회를 진행하고 있는데, 민주시민교육에 대한 관심이 예전보다 훨씬 뜨거운 것 같다. 특히 이번 지방선거에서 큰 변화가 있었던 지역의 경우 더욱 민주시민교육에 대한 높은 기대감을 느낄 수 있었다고 현장의 분위기를 전했다. 그러면서 기대와 관심만으로는 민주시민교육을 활성화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황 국장은 민주시민교육은 단기적으로 구체적인 성과가 나타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기반조성이 중요하다며 민주시민교육 주체 양성뿐만 아니라 물적 지원도 함께 이뤄져야 하지만 현재 민주시민교육을 진행하고 있는 지역의 중간지원조직들이 서로 어떻게 상호 협력할지도 관건이고, 기관 예산 편성 우선순위에서도 밀리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민주시민교육을 위해 예산을 투입하는 지역은 서울과 경기도밖에 없다. 필요성은 인식하지만 민주시민교육을 활성화하는 데까지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존재하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그동안 민주시민교육과 관련한 포괄적인 공감대 형성이나 사회적인 논의와 합의가 마련되지 않다 보니, 민주시민교육의 필요성 논의가 그저 담론 수준에 그치고 있다. 물론 교육청에 민주시민교육과가 있는 곳도 있고,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학교와 협력해 민주시민교육 수업을 진행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것은 단기적이고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일상적으로 배우고 온몸으로 체득해야 한다. 특히 독일의 경우 체험형 교육인 모의 선거를 2022년까지 전국 모든 학교에서 실시하는 것을 목표로 추진하고 있다. 독일, 핀란드,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는 이미 국가 차원에서 교육과정의 일환으로 선거교육을 공식화하고 실천하고 있다. △ 전북 청소년 모의투표 참여 지난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청소년 모의투표 전북운동본부에서는 전북의 청소년들이 실제 교육감과 도지사 출마 후보를 놓고 모의투표를 진행했다. 전북 14개 시군 중 12개 지역 21개 투표소를 만들어 7500여 명의 청소년들이 참여했으며, 이 중 6곳은 학교와 연계해 사전투표를 진행하기도 했다. 또한, 전라북도 교육감 후보자들에게는 자신들의 공약을 학생들의 언어로 표현된 홍보 포스터를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후보별 청소년 정책도 배포함으로써 학생들의 선택에 도움을 주고자 했다. 교육감 당선자에게는 학생들이 직접 당선증도 전달했다. 청소년 당사자들이 이번 모의투표를 통해 민주시민의 권리와 책임을 얼마만큼 배우고 성장했는지 당장 가시적인 평가를 할 수는 없지만,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지역 후보들과 지역 정치에 더 관심 갖고 하나의 주체로 참여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모의투표에 참여한 전주의 한 여고생은 그동안 부모님을 따라 투표소에 갔던 게 고작이었는데, 비록 모의투표긴 하지만 이런 기회를 통해 직접 투표를 할 수 있다는 것에 설레었고 뭔지 모를 무게감이 느껴졌다며 후보들의 정책을 하나하나 찾아보기도 하고, 친구들과 그에 대한 서로의 이야기도 나누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또 참여하겠다며 보다 많은 친구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홍보도 할 생각이다고 덧붙였다. 학교 밖에서의 이러한 움직임뿐만 아니라 학교 내의 여러 의사 결정 과정에 학생들이 참여할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고, 학교의 분위기와 문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다양한 민주시민교육이 이뤄지고, 더 나아가 사회 전반에 걸친 민주시민으로서의 기본적인 자질과 역량 등을 기를 수 있는 민주시민교육이 이뤄진다면, 실질적인 민주적인 가치와 태도를 내면화하고 일상화되는 일상의 민주주의가 한 발짝 더 다가올 것으로 생각한다. △전국민주시민교육네트워크 역할과 과제 지난 613 지방선거를 통해 교육감을 비롯한 기초광역 자치단체장, 기초의원까지 선출됐고, 7월 1일부터 민선 7기가 시작됐다. 전국민주시민교육네트워크 준비 및 조례 제정, 여러 분야에서의 민주시민교육에 대한 활동 등 일상의 민주주의를 향한 노력이 시작된 만큼, 이번 선거에서 선출된 정치인들에 대한 관심과 감시 등을 통해 우리들이 민주주의를 지키고 만들어가는 주체임을 확인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시민들이 깨어있어야 함을 다시 한 번 명심하고, 이러한 변화를 통해 일상의 민주주의가 온몸으로 묻어날 수 있는 그 날을 준비해 본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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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7.03 20:32

[최진석의 노장적 생각] 적후지공(積厚之功)과 자유 - '착실한 보폭' 없이는 높은 경지도 없다

6월21일자 어느 신문 인터넷 판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마크롱 대통령은 18일(현지시간) 파리 외곽 몽 발레리앙 추모공원에서 열린 샤를 드골의 대독 항전 연설 78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다. 이날 마크롱 대통령은 행사장 앞에 모여 있던 청소년들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 10대 남학생이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면서 잘 지내요? 마뉘?라며 마크롱의 이름(에마뉘엘)을 제멋대로 줄여 불렀다. 이 남학생은 노동해방을 노래한 혁명가요 랭테르나시오날(Cest la lutte finale)의 후렴구도 흥얼거렸다. 별다른 악의는 없는 표정이었지만 약간은 빈정거리는 듯한 인상을 풍겼다. 이때 마크롱 대통령은 소년과 악수를 한 뒤 곧바로 아니야 아니야라고 고개를 저으며 오늘 공식적인 행사에 왔으면 거기에 맞게 행동해야지라며 훈계를 시작했다. 그는 오늘은 라 마르세예즈(프랑스 국가), 샹 데 파르티잔(레지스탕스의 투쟁가)를 부르는 날이야. 그러면 나를 므슈(성인남성에게 붙이는 경칭)나 므슈 르 프레지당(대통령님)으로 불러야 한다. 알겠니?라고 설명했다. 이 남학생은 바로 주눅이 들어 죄송합니다. 대통령님이라고 말했다. 이에 마크롱 대통령은 아주 좋아!라고 칭찬했다. 그러면서 절도 있게 행동해야 해. 네가 만약 언젠가 혁명을 하고 싶다면 먼저 학교를 마치고 스스로 생계를 책임질 줄도 알아야 해라며 팔목을 툭툭 치면서 충고했다. 저항감 있는 젊은이에게 호응하며 공감해주는 대통령도 멋있지만, 이렇게 훈계하는 대통령도 멋있다. 마크롱은 젊은이의 혁명을 부정하지 않았다. 혁명을 잘하기 위한 방법을 말해주는 방식으로 훈계의 격을 지켰을 뿐이다. 절도 있는 행동과 졸업 그리고 생계에 대한 책임이 혁명의 성공을 결정한다고 말해주었다. 혁명은 이름 붙은 세계의 경직성을 부수고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세계를 펼치려는 도전이라는 점에서 이미 충분히 아름답다. 혁명은 질서를 일거에 야만으로 몰아넣으며, 환상을 현실화 하려고 시도한다. 모든 종교도 다 근본정신은 혁명이다. 그래서 혁명과 종교의 염원은 모두 다음과 같다. 이 세계는 너무 낡았어요. 이제 낡은 이 세계를 버리고 저 세계로 넘어가야 해요. 그래야 사는 것처럼 살다갈 수 있어요. 저 세계는 주장하는 자 외에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저 세계를 설명하는 문법은 아직 없다. 공허하게 시작된 이 외침을 깃발로 흔들며 사람들을 설득해서 모은 것이 종교들이다. 종교의 근본정신은 혁명이다. 종교에서 혁명이라는 근본정신이 사라지고, 조직 관리에 더 많은 힘을 들이고 있다면 이미 많이 낡았다는 뜻이다. 혁명을 조금 낮추고 순화해서 흔히들 혁신이라고 한다. 세계가 변화한다는 것을 진실로 받아들인다면 혁신은 생명 혹은 세계의 존재 방식이다. 생존하려면 혁신해야 한다. 혁신을 다른 형태로 표현하면 창의다. 이렇게 보면, 창의도 생명의 존재 방식들 가운데 중심 자리를 차지한다. 창의니 혁신이니 하는 것들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참 생명이나 참 존재로 살고 싶다면 반드시 해야만 하는 필수 사항이다. 혁명은 아무리 환상이고 야만이어도 절도 있는 행동, 학업 그리고 생계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할 때라야 효율적으로 완수될 수 있다. 혁명의 주체들은 왕왕 혁명적 환상과 야만에 빠져, 혁명의 길과 관계없어 보이지만 매우 중요한 착실한 보폭을 중시하지 않는다. 착실한 보폭이 나라에서는 정책으로 현실화된다. 혁명이 정치로만 남고 정책으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일들은 착실한 보폭을 소홀히 한 결과다. 그럼 왜 착실한 보폭은 소홀히 다뤄질까? 지적으로 게을러서 걸어야 할 길이 지루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건너 뛰어 바로 혁명의 경지로 올라서려고만 한다. 성철 스님은 지독한 독서광이었다. 하지만 수자오계(修者五戒) 즉 수행자를 위한 다섯 가지 가르침에서는 책보지 말라는 가르침을 남겼다. 평소 수행하는 제자들에게도 진리는 문장 아닌 마음에 있다는 것을 자주 강조하였다. 높은 단계의 경지에 오르려는 포부는 가졌으되 근기가 그 포부의 무게를 감당할 정도로 갖춰지지 못한 사람이 성철 스님의 이 말을 듣는다면, 바로 책읽기를 끊을 수 있다. 그것이 훨씬 간편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책 읽지 말라는 이 말이 독서광으로 불릴 정도로 수많은 책을 읽고 난 다음에 문장과 마음의 관계를 깨달은 사람으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이다. 부단한 책읽기의 과정도 거치지 않았으면서 바로 책 끊기의 경지에 오르려 하다가는 인생에서 큰 낭패를 볼 것이다. 어떤 큰 스님은 깨달음에 이르고 나서 계율을 넘나들 수 있었다. 이것을 본 새끼 스님도 덩달아 계율을 넘나든다. 계율을 넘나든 것은 같으나 그 높이와 깊이는 다르다. 높이와 깊이가 다르면 감화력이 다르다. 새끼스님도 큰 스님이 아주 긴 시간동안 수계(受戒)의 고통과 지난함을 정성껏 거치고 나서 높은 위치에 오른 후에야 수계(受戒)의 한 형식으로서 계율을 넘나든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새끼 스님은 그 고통과 지난함을 피하고자 계율을 넘나드는 행위만 따라서 한다. 지적인 게으름이다. 착실한 보폭이 없는 깨달음은 늘 경박하게 쪼그라든다. 한 때 음식 한류를 일으키고자 노력들 했다. 그러나 녹록치 않다. 일본의 스시가 국제적으로 가지고 있는 위상에 비하면 아직 한참 부족하다. 스시와 비빔밥은 왜 이리 차이가 날까? 한국과 일본이 가지고 있는 국제적 위상이나 이미지의 차이가 이유일 수도 있다. 전략의 경험과 치밀함의 차이가 이유일 수도 있다. 그러나 느닷없지만 이런 이유가 있을 수도 있겠다. 바로 제품 자체의 문제다. 철저함이 부족하여 제품 자체에 매력이 더해지지 않은 것도 이유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다. 내 고향은 비빔밥으로 제법 유명한 동네다. 늦은 시간 고향에 도착하자 내가 다니는 단골 비빔밥 집이 벌써 문을 닫았다. 나는 새로 문을 연 것처럼 보이는 다른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거기도 비빔밥이 있었다. 주문한 비빔밥을 비비면서 나는 매우 난감한 상황에 빠졌다. 밥이 너무 뭉쳐져 있어 잘 비벼지지가 않았다. 숟가락으로 잘게 부숴가며 비볐다. 비비기 어려운 비빔밥이라니... 그러고 보니 비빔밥을 먹다가 이런 일을 가끔 당했던 것 같다. 물론 이 상황은 드믄 경우다. 내가 어쩌다 들른 어느 초라한 집에서 겪은 경험을 가지고 비빔밥을 다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나는 이런 난감한 상황을 겪으며 비빔밥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기는 했다. 비빔밥에 가장 적합한 쌀 품종은 무엇일까? 비빔밥에 최적화된 밥의 점도는 어느 정도여야 할까? 밥의 온도는? 나물의 온도는? 최적화된 나물의 삶기는? 밥과 나물의 비율은? 그릇의 온도는? 비빔밥에 잘 맞는 그릇의 재료는? 집에 와서 인터넷을 뒤져 비빔밥에 관한 정보를 아무리 뒤져도 이런 의문은 해소될 길이 없었다. 내가 찾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어느 것 하나 표준화된 연구는 보이지 않았다. 그 후로 약 한 달 뒤 어느 스시 집을 가는 일이 생겼다. 나는 일부러 요리사와 마주 앉을 수 있는 자리를 잡았다. 식사하면서 몇 가지를 물었다. 비빔밥을 먹다가 생긴 의문들을 스시로 바꿔 죄다 물어봤다. 그 요리사는 모두 말해줬다. 스시에 적합한 쌀 품종들이나 밥의 온도나 밥의 점도 등을 막힘없이 대답했다. 구체적인 수치들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개는 어느 것에나 표준화된 규격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사실 개성이나 경지도 다 이 표준화된 규격을 수행한 다음의 일이어야 제대로다. 세심하게 살피면 쩨쩨하게 보일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나를 쩨쩨하다고 힐난할 수 있다. 한국 음식은 손맛이 최고라거나 경험에서 우러난 자신만의 경지가 있다고 말하기도 할 것이다. 이것이 한국 문화의 특징이라고 말 할 수도 있다. 온도계를 갖다 대거나 자를 들이미는 것은 하수들이나 하는 일들이고, 진짜 고수는 어림짐작으로 해도 다 최고의 경지를 산출할 수 있다고도 할 것이다. 손맛이라고 하면서도 우리는 손맛의 비밀을 궁구하지 않고 그냥 말한다. 손맛을 말하려면 손맛이 연구되어야 한다. 그러지 않았다면 사실 대충한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착실한 보폭이 결여된 경지란 항상 우연에 기댈 수밖에 없다. 마치 절도 있는 행동과 졸업 그리고 생계에 대한 책임을 배우지 않고 혁명을 꿈꾸는 것과 같다. 지난한 수계의 고통을 겪지 않은 채, 계율을 넘나드려는 것과 같다. 착실한 보폭만이 일관성과 지속성을 보장한다. 어떤 경지도 일관성과 지속성이 결여된 것은 운이 좋은 것에 불과하다. 품질이 들쭉날쭉 할 수밖에 없다. 어떤 개성도 착실한 보폭을 걸은 다음의 것이 아니면 허망하다. 허망하면 설득력이 없고 높은 차원에서 매력을 가질 수가 없다. 그러면 많은 일을 그냥 감에 맡겨 해버린다. 스시 정도의 위상을 갖고 싶으면서도 스시 정도의 연구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결과는 허망하다. 착실한 보폭이 없는 높은 경지란 없다. 도가 철학을 좀 아는 사람들은 무위를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무슨 일이건 그냥 되어가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으로 이해하고는 착실한 보폭을 하수의 것으로 치부해버린다. 지적인 게으름이다. 우선 『장자』 첫 페이지를 보라. 곤(鯤)이라고 하는 조그만 물고기가 천지(天池)라고 하는 우주의 바다에서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는 크기로 자라나자 어느 날 바다가 흔들리는 기운을 타고 하늘로 튀어 올라 붕(鵬)이 되었다. 『장자』에 나오는 대부분의 얘기는 다 이 대붕의 경지다. 그래서 도가 철학에 우호적인 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대붕의 모습만 인정하고 따르려 한다. 그러나 반드시 간과하면 안 되는 것이 있다. 대붕은 조그맣던 곤이 엄청난 축적의 과정을 겪은 후, 몇 천리나 되는지도 모를 정도로 커지고 나서 된 영물(靈物)이라는 것이다. 매우 두터운 축적의 과정이 영물을 만들었다. 두터운 축적의 공, 즉 적후지공(積厚之功)을 의식하지 않은 채, 대붕의 자유나 소요유를 흉내 낸다면 다 방종에 가까울 뿐이다. 우리는 흔히 근대를 제대로 겪지 않았다고 한다. 식민지를 겪은 일과 관련이 깊을 것이다. 하지만 외세의 억압과 관계없이 우리 스스로 근대를 학습하여 해낼 수 있는 것들도 있다. 근대를 특징짓는 몇 가지 내용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표준화와 객관화다. 근대란 인류가 진화를 해나가면서 만든 매우 빛나는 한 고리다. 표준화를 해내지도 못했으면서 하는 표준화에 대한 현대적 비난은 다 경솔하다. 결과는 허망할 것이다. 객관화 과정을 바닥까지 겪지 않고 객관화를 비판하는 것도 경솔하다. 결과는 비참할 것이다. 손맛과 경험에만 기대서 만든 비빔밥은 매력을 갖기 어렵다. 더 철저해져야 한다. 두터운 축적이 없는 창의성도 있기 어렵다. 야성을 유지하면서 하는 축적! 철저함! 당신을 영물로 만들어주는 비결이다. /건명원 원장섬진강 인문학교 교장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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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7.02 19:46

[전라도 정도 1000년, 창조와 대안의 땅 '전라북도'] 고려 국제무역항 군산도, 한중 교류 역사 빛내다 - 외국 사신단·상단 머문 중세 서해연안 핵심 항구

△한국전통 해양 역사자원 보고 군산도(선유도) 전라북도 지역의 대표적 섬들의 공간인 고군산군도 지역의 중심 섬은 선유도 즉, 과거 고려시대 군산도이다. 이곳은 2018년 다리가 개통되어 이제 새만금 방조제를 통해 자동차로 진입할 수 있는 대표적인 관광명소로 바뀌었다. 그런데 이곳이 900여년 전 고려시대에는 당시 고려 최대의 대중국 국제 무역항이었다는 사실은 거의 모르고 있다. 선유도(군산도)가 역사기록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123년(인종 1년) 송나라 사신 서긍의 고려도경(高麗圖經)이었다. 당시 송나라는 북방의 거란과 신흥하는 여진의 금 등에 의한 압박을 고려와의 외교를 통해 극복하려한 상황에서 서긍은 고려 예종의 조문과 인종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이때 서긍은 송나라 황제 휘종의 명을 받고 고려 항해를 위해 특별 제작한 신주(神舟)를 타고 고려의 도성 개경을 왕래하며 특히, 첫 기착지인 군산도(선유도)를 비롯한 고려로 오는 뱃길과 고려 수도 개경의 정황 등을 상세히 기록한 고려도경을 남겼다. 선유도 지역의 지명 변천을 보면 1123년 남송의 서긍이 쓴 고려도경과 고려사기록에서는 군산, 군산도란 표현이 사용되다가 현재의 선유도지역에 설치되었던 고려시대 수군 본부인 군산진을 조선 세종때 육지지역인 지금의 군산시 진포지역으로 옮기면서 군산 지명도 함께 이동하고 원래 군산도는 옛 지역을 의미하는 고(古)를 덧붙여 17세기 중반이후 고군산으로 불렸는 데 일제강점기 들어 군산(시)와 확실히 구분하기 위해 고군산은 선유도로 개명돼 오늘에 이른다. 이 군산도의 성격은 연안항로 및 대중 해로교류의 거점으로 기록에 나타난 것처럼 고려시기 쌀 등을 수송하는 조운(漕運)과 중국 무역선의 기항지로서 번영하였다. 즉, 선유도는 중세시기 서해연안해로에서 핵심항구였다. 조운선의 중간 기착지, 왜구 소탕의 전진기지, 외국 사신단과 상단 등이 머무른 곳이다. 사신단은 중국, 일본은 물론이고 동남아 자바국까지 확인된다. 인근 십이동파도, 야미도, 비안도 바다에서 인양된 청자보물선으로도 설명된다. 또한 조선시대에도 중요항구로 활용되었고 특히, 1597년 9월 명량대첩에서 대승한 이순신장군이 일본군의 후속 공격을 피해 선유도로 피신해 머물며 지친 심신을 회복한 공간으로서도 매우 중요한 역사공간이었다. △고려 역사유적의 보고 군산도 군산도(선유도)지역의 해상교역의 거점 기능은 앞서 통일신라시대 완도를 중심으로 한 장보고선단의 활동과 이를 계승한 후백제왕 견훤에 의한 해상교류의 중심지 역할을 계승한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또한, 변산반도의 가장 돌출된 지역에 위치한 백제 죽막동 제사유적의 존재를 고려할 때 백제 및 그 이전 마한-고조선시기이래 지속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후백제왕 견훤이 서긍이 출발한 항주일대지역에 위치한 오월국과 긴밀히 교류하고 사신 왕래가 있었던 사실을 고려할 때 선유도지역은 전주를 수도로 한 후백제시기에 집중적으로 성장한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고려시기 국제 무역항인 군산도(선유도)에는 국제무역항에 걸 맞는 다양한 건물들이 있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고려도경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6일 정해에 아침 밀물을 타고 항행하여 진각(辰刻)에 군산도에 이르러 정박하였다.그 산은 열 두 봉우리가 잇닿아 둥그렇게 둘려 있는 것이 성과 같다.여섯 척의 배가 와서 맞아 주는데접반사 김부식(金富軾)이정사와 부사에게 군산정(群山亭)으로 올라와 만나주기를 청했다. 그 정자는 바다에 다가서 있고 뒤는 두 봉우리가 의지하고 있는데, 그 두 봉우리는 나란히 우뚝 서 있어 절벽을 이루고 수백 길이나 치솟아 있다. 문 밖에는 공해 10여 칸이 있고, 서쪽 가까운 작은 산 위에는 오룡묘(五龍廟)와 자복사(資福寺)가 있다. 또 서쪽에 숭산행궁(崧山行宮)이 있고, 좌우 전후에는 주민 10여 가가 있다./ 고려도경 기록에 의하면 현재 망주봉 동쪽 봉우리의 기슭에 오룡묘가 있는데, 그 북쪽에는 자복사와 동쪽인 샛터마을 일대에는 객관인 관아, 망주봉 서쪽 봉우리 남쪽 기슭에는 군산정과 숭산행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같이 고려시대 군산도(선유도)는 국제교류 및 해상교역의 전략적인 거점이자 고대의 해상문화와 동북아 무역 루트에서 중요한 바다의 길목이었다. 군산도는 또한 금강과 만경강, 동진강의 물줄기가 한데 모이는 새만금해역의 해상교통의 중심지로서 특히, 후백제가 오월과, 고려가 남송과 국제교류를 진행할 때 군산도가 국제교역의 거점항구이자 국제외교의 관문이었다. △고려시대 전통선박 문화자원의 활용 따라서 현재 선유도는 단순한 해양관광을 위한 해수욕장과 휴양을 위한 시설 등으로 구성된 단순 해양관광지역이 아닌 중국 및 일본을 비롯한 국제적인 해양대국 백제의 전통을 계승한 고려의 국제무역항에 걸맞는 역사공간과 관련 문화콘텐츠가 활성화된 역사문화 관광지역이 되어야 한다. 현재 군산시와 전라북도에서 관련유적지가 팬션단지로 바뀌뻔한 상황을 막았지만 보다 적극적인 학술조사와 발굴 및 중장기 대책마련이 요청된다. 특히, 엄청난 예산이 투여되고 있는 새만금 개발에서 이같이 소중한 역사문화자원과 관련 내용들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이제야 부분적으로 관련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은 깊은 반성을 요하는 부분이다. 특히, 고려도경기록에 나오는 송나라의 신주(神舟)와 고려 접반사 일행이 타고 온 대형선박 대주(大舟)와 순선(巡船), 군산도의 배인 송방(松舫)을 복원해 선유도의 역사성을 부각하고 관광용으로 활용한다면 역사적 의미와 상징성 및 역사자원의 문화콘텐츠화를 이룰 수 있는 가장 좋은 자원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송방은 군산도의 배이다. 선수와 선미가 다 곧고 가운데에 선실 5칸이 마련되어 있고 위는 띠로 덮었다. 앞뒤에 작은 방 둘이 마련되어 있는데, 평상이 놓이고 발이 드리워져 있다. 중간에 트여 있는 두 칸에는 비단 보료가 깔려 있는데 가장 찬란하다. 오직 정사ㆍ부사 및 상절(上節)만이 거기에 탄다.라고 하여 복원 가능한 고려시기 군산도만의 선박에 대한 문화자원을 보여주고 있다. 이같이 백제-후백제이래 해양역량을 보여주는 군산도의 고려시대 역사유적 공간과 해양 선박 문화자원을 활용한 선유도정비를 통해 전라북도 역사문화 관광자원의 새로운 확산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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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28 19:50

[문화&공감 2018 시민기자가 뛴다] 완주 팝업스페이스 누에살롱 - 로컬푸드와 예술의 만남…'꿈꾸는 아이템' 맘껏 펼쳐요

2조 9397억원. 지난 해 중소벤처기업부를 포함한 9개 중앙부처가 창업지원에 쏟아부은 액수다. 내역을 들여다보면 금융지원, 사업화 지원과 같은 직접지원 뿐 아니라 창업교육, 멘토링/컨설팅, R&D 등 간접지원도 상당하다. 어찌 중앙부처뿐이랴. 공공기관, 지자체, 심지어 대학들도 창업생태계에 뛰어들어 국민을, 학생들을 창업전선으로 이끌고 있다. 의지와 아이디어만 있다면, 재원이 없어 창업을 못하는 일은 없겠구나 싶다. 문화예술분야 창업에 관한 관심도 점차 높아지는 추세다. 2016년 문화창조벤처단지 자료에 따르면 지원기업 중 예술분야 기업 비중이 44.1%에 달한다. 문화예술기반 창업 성공사례들도 심심찮게 언론에 오르내린다. 올해 완주문화재단이 진행하는 문화예술창업과 사회적경제를 주제로 한 아카데미는 정원 10명을 예상했는데 13명이 신청해 듣고 있다. 이런 현상을 조금 뒤집어 살펴보면, 이는 예술인들의 평균 예술활동 수입이 연 1,255만원에 불과하고, 예술인 중 한명은 생계를 위해 다른 직업을 갖고 있다는 수치(2015년 문화부 예술인 실태조사)와 무관하지 않음을 시사하고 있다. 문제는 언론에서 쏟아내는 각종 지표들 - 창업률보다 높아지는 폐업률이라던가, 자영업의 5년 내 생존률이 불과 20%에 불과하다는 것들- 이 문화예술분야 창업에서는 더 큰 난제라는 점이다. 기술기반이 아닌 아이디어 기반의 창업 아이템이 많다는 점, 그로인한 낮은 진입장벽과 취약한 수익구조, 비즈니스 마인드의 부족 등은 예술창업이 일반창업보다 풀어야 할 숙제가 더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실패할 확률이 높다는 것. 우리가 오는 7월 시범운영을 앞두고 있는 팝업스페이스 누에살롱(이하 누에살롱)에 주목하는 이유다. 완주군 용진읍 완주로 462-9에 위치한 누에살롱은 2017년 행정자치부 마을공방육성사업에 선정되어 오랫동안 폐산업시설로 방치돼 있던 (구)호남잠종연구소 폐관사를 창업지원공간으로 재생한 곳이다. 완주의 로컬아트와 로컬푸드를 기반으로 창업을 준비 중인 예술인, 청년, 예비쉐프들이 창업을 놀이처럼 즐기고, 꿈꾸는 아이템을 마음껏 실험하고 실현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인큐베이팅 공간이다. 창업의 전쟁터에 나가기 전 일정기간 입주해 실전과 같은 경험과 교육, 멘토링, 소비자들과의 만남 등을 통해 수요자 취향과 선호도를 충분히 파악하고 준비함으로써 실패 확률을 최대한 줄이도록 지원하는 역할이다. 151.02㎡ 규모의 단층 건물로 요리가 가능한 주방시설과 3개 구역으로 연결된 실내 공간, 야외데크와 잔디밭 등을 갖추고 있다. 또한 바로 옆에 복합문화지구 누에가 위치해 있어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과 교류 및 자문을 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전시, 공연, 공방아카데미에 참여하는 일반 관람객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마케팅을 펼칠 수 있는 이점도 지니고 있다. 올해는 예술과 로컬푸드를 결합한 예비창업자를 공개모집해 10주에서 12주까지 팀별 특성에 맞춰 창업아이템을 실현해 볼 수 있도록 공간과 프로그램, 전문가 멘토링 등 참여자 맞춤형 지원을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완주군(공동체활력과)과 완주문화재단이 업무협약을 통해 서로의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공간조성과 행정지원은 군이, 예술가 모집 및 프로그램 운영지원은 재단이 역할을 나눠 운영함으로써 사업의 시너지를 키우고 있다. 오는 7월 2일 시범운영을 시작하는 누에살롱의 첫 번째 예술창업준비팀은 3D프린팅과 미디어전시를 결합한 원더랜드다. 요즘 한창 오픈 준비에 여념이 없는 임세진(미디어전시), 임솔(3D프린팅) 작가를 만나봤다. - 청년예술창업, 하나씩만 놓고 봐도 결코 만만치 않은 길인데, 거기에 더해 동업까지, 쉽지 않은 길을 걷고 계십니다. (세진) 듣고 보니 그렇네요. 지금 이 길은 우연과 인연과 기회가 겹치며 시작된 길인 것 같아요. 지난 해 우연히 완주문화재단의 완주 한 달 살기에 지원을 하게 됐는데 운좋게 선정이 되면서 운주 용계원 마을과 고산 원오산 마을에서 레지던시 작가 생활을 하게 됐어요. 그게 인연이 되어 재단에서 청년 작가들의 창업 아이디어를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하길래 설마 될까하는 심정으로 부담없이 응모를 했는데. 음, 근데 덜컥 공동 1위를 해버려서. (솔) 그때 제안한 아이템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모티브로 한건데 원더랜드 : 3D프린팅으로 만든 음식과 함께하는 미디어 전시공간이었어요. - 제목만 들어서는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데, 어떤 내용인지. (솔) 누구나 일상에서 벗어나 꿈같은 시간, 꿈같은 공간을 경험하고 싶어 하잖아요. 저희는 그런 시간 그런 공간을 원더랜드라고 부르고 있는데요. 공간에 입장하게 되면 먼저 보드게임을 적용한 체험형 프로그램에 참여해야 하는데. 위치마다 다양한 장치와 표현 기법들을 만나게 돼요. 바닥에 놓인 32개의 보드판을 다 통과하고 나면 저절로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하게 되는 프로그램이에요. (세진) 이렇게만 얘기하면 되게 교훈적인 건가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는 않구요. 체험과 전시를 보고난 후에는 3D프린팅을 이용해 팬케이크를 만드는 체험이 연결되어 있어요. 아, 완주의 로컬 식재료를 가지고 만든 건강음료도 드실 수 있어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후 2시-8시 사이에 오시면 됩니다. - 3D프린팅과 팬케이크, 미디어와 전시. 이 조합은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세진) 저는 영화를 전공하고, 졸업 후에 다양한 영상분야에서 작업을 했어요. 뮤직비디오, 공연영상, 파티, 영화제 영상작업들이요. 그러다 2016년, 서울에서 영상맵핑공간을 잠깐 운영하게 됐는데 짧은 기간이었지만 흥미로웠고 다시 해보고 싶은 경험이었어요. (솔) 저는 건축학과를 다녔고 현재는 스토리팜이라는 3D프린터 공방을 운영하고 있어요. 주로 시제품을 만드는 일과 스토리가 담긴 콘텐츠를 만드는 일들을 하고 있는데 세진과 서로의 콘텐츠를 결합해 새로운 아이템을 만들고 싶었어요. 자연스럽게 미디어는 전시로, 3D프린팅은 먹거리와 결합시켜 낯설지만 흥미를 유발할 수 있도록 고민했죠. - 두 분에게 누에살롱은 어떤 공간? (솔) 마음껏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보고 경험해 볼 수 있는 놀이터 같은 공간이에요. 어쩌면 예술가적인 성향이 강한 저희팀에게 예술성과 실질적인 수익모델로 전환할 수 있는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말도 안되는 메뉴와 프로그램들을 다양하게 실험해보면서 창업초기의 데이터를 최대한 모을 수 있는 좋은 공간이라고 생각해요. (세진) 창업할 때 제일 큰 부담이 공간과 비용인데요, 이 부분을 지원해주면서 결과물에 대한 압박보다는 다양한 시도와 실험을 해볼 수 있도록 지원해줘서 좋은 것 같아요. - 누에살롱에서 인큐베이팅 과정을 마치면, 실제로 창업할 계획인지. (솔) 소양면 해월리 866-6번지 공간에서 원더랜드의 이야기를 이어가보려 해요. 누에살롱에서 테스트해본 내용과 피드백을 반영해 제대로 준비해 보려구요! 내년 초엔 만나볼 수 있을 겁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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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27 18:44

한반도 미래와 지속가능발전목표 - '작은 연못' 속 공존·상생으로…대한민국, 희망을 찾다

△평화, 새로운 시작 지난 6월 12일, 북미간 정상회담이 열렸다. 세기의 만남이라는 표현처럼 전 지구촌의 이목이 회담장에 쏠렸다. 인공기와 성조기가 나란한 배경을 두고 긴장한 표정으로 등장한 양국의 정상이 악수를 나눴다. 약 12초 정도의 짧은 순간이었다고 한다. 눈앞에 두고도 믿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주변국들의 우려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미사일을 쏘아 올리며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던 북한이었고, 꼬마 로켓맨이라는 비아냥과 핵단추를 운운해가며 강력한 군사적 대응이라는 엄포를 놓던 당사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회담을 불과 보름 남겨둔 시점에서 돌연 취소를 선언했다가 다시 재개했던 두 정상의 모습은 뒷배경의 양국 국기처럼 서로 다른듯하면서도 닮았다. 때 마침 국무회의를 앞두고, 이 역사적인 만남을 지켜보는 문재인 대통령의 모습은 무척 인상 깊었다. 그는 이미 두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었고,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한 소중한 출발이 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었다. 과연 그와 우리 모두의 바람대로 지난 65년간의 휴전을 끝낼 종전선언이 나오고, 마침내 한반도의 평화가 찾아올 것인가. 문득 떠오르는 노래 한 곡이 있다.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 것도 살지 않지만 먼 옛날 이 연못엔 예쁜 붕어 두 마리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지요. 깊은 산 작은 연못. 어느 맑은 여름날 연못 속에 붕어 두 마리 서로 싸워 한 마리는 물 위에 떠오르고, 여린 살이 썩어 들어가 물도 따라 썩어 들어가 연못속에선 아무 것도 살 수 없게 되었죠. 양희은의 목소리로도 잘 알려진 노래, 작은 연못이다. 작사와 작곡은 이제는 뮤지컬 제작,연출자이면서 작은 극단을 운영하고 있는 김민기다. 70~80년대를 지내온 세대들에게는 익숙한 이름이겠지만, 젊은 세대들에겐 혹시나 故 노무현 대통령의 애창곡으로 유명해진 상록수나 아침이슬이 그의 곡이라는 설명이 더 편할듯하다. 노래의 곡조는 서정적이면서도 슬프고, 가사는 동화나 전설의 한 토막처럼 단순하지만, 듣는 사람에 따라 그 무게가 섬뜩할 정도로 무겁게도 들린다. 험한 시절에 금지곡 처분을 받기도 했던 사연을 두고 뒷이야기들이 무성했다. 김대중을 죽이려 했던 박정희를 비꼬았다는 말도 있었고, 이 작은 땅덩어리에서 서로 총칼을 겨누고 있는 우리 민족의 현실을 은유하고 있다고도 했다. 소문들이야 어찌됐던 적대적인 갈등과 경쟁을 넘어서 화해와 공존으로 나아가는 길목에서 다시 듣는 이 노래는 그의 목소리만큼이나 굵고 묵직하게 울린다. 한 마리가 죽으면, 썩어 들어간 살과 물 때문에 나머지 한 마리도 죽게 되고, 결국 연못마저도 죽는다. △공존과 상생, 그리고 지속가능한 미래 자연의 질서와 인간 사회의 현상을 하나의 잣대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계절의 변화로 나라의 흥망성쇠를 비유하기도 하고, 달이 차고 기울거나 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모습으로 사람의 운명과 인생을 노래하기도 했다. 비단 시인이나 예술가들만이 아니다. 물의 철학이라고도 불리는 도덕경이나 변화의 철학으로 알려진 주역은 오늘날에도 심오한 철학서로 읽히고 있다. 지난 세기 크게 유행했던 적자생존과 약육강식 그리고 피부색이나 혈통으로 인종이나 민족을 구분하여, 우열을 가르고 제국주의의 식민지 침략을 정당화했던 사상조류들도 있었다. 사회진화론이나 우생학이 대표적인 경우다. 허버트 스펜서는 19세기 찰스 다윈의 생물진화론을 사회의 변화와 모습을 해석하는데 적용할 수 있다고 믿었다. 생물진화론처럼, 사회도 적자생존의 원칙이 적용된다고 보았다. 사회진화론은 영국과 독일, 미국을 비롯한 서구사회에 널리 유행하였고, 제국주의와 소수 자본가의 독점, 나치즘을 정당화하는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나라와 나라, 개인과 개인의 다툼과 경쟁은 적자로 선택받기 위한 불가피한 과정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미 청산해야할 지난 세기의 잔재로 비판받고 있다. 대안의 하나로 주목받고 있는 이론이 사회생태주의(Social ecology)다. 1964년에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이 주장한 사회-경제-환경 철학이다. 그는 사회 구조면에서 인간을 억압하는 권위의 종식과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의식의 문제를 연계시켜서 설명한다. 즉 다양한 계급, 계층 간 사회적 통합문제와 무자비한 자원착취와 개발로 인한 환경파괴 문제가 하나의 원리로 해결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지금까지 대립적인 갈등의 영역으로 이해되는 경제와 환경, 개발과 보전의 문제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접근하려는 적극적인 시도다. 이런 측면에서 급진적인 생태주의나 환경론자들의 주장과도 구분된다. 사회생태주의는 최종적으로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매력적인 미래상을 제시하고 있다. 바로 지난 주 21일, 대한민국의 지속가능발전 목표(K-SDGs; Korean 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국민대토론회가 환경부와 지속가능발전위원회 주관으로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 대회의장에서 열렸다. 전국에서 모인 약 450여명의 참가자들이 원탁의 테이블을 가득 채웠다. 이미 UN에서 합의된 17개 주제의 목표와 지표설계를 준비해온 작업반들의 중간발표와 농민과 여성, 이주민과 청년 그룹 등 다양한 이해집단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하는 자리였다. 비록 북미간 정상회담이나 월드컵 축구경기만큼 세상의 이목을 끌지는 못했지만, 회의장에는 올해 말까지 2030년까지 한반도의 미래비전에 맞춘 세부목표와 이행계획을 마련하겠다는 고민과 열기가 가득했다. 공존과 상생을 통해 대한민국의 희망을 만들어가려는 노력들이 영글어가고 있다. △유엔 지속가능발전목표(UN SDGs; UN 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 15.9월 제70회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2030년까지 달성해야 할 빈곤과 기아 종식, 성평등 등 17개로 집약된 인류 공동의 목표(169개 세부목표232개 지표 로 구성) - 어느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다.(No one will be left behind)는 비전 아래, 인류의 삶의 질 제고를 목적으로 함 △ 국가지속가능발전목표(K-SDGs; Korean 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 유엔 지속가능발전목표의 기틀 하에 우 리나라 특성에 맞게 국가균형발전, 남북 간 평화, 저출산고령화 대비 등을 포함 한 2030 사회발전 비전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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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26 20:47

취임 6개월 정영상 고용노동부 전주지청장 "청년들 전북 머물고 돌아오게끔 행정·재정지원 앞장"

▲ 부임 6개월을 맞은 정영상 지청장이 고용노동부 전주지청의 운영 방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조현욱 기자지난해 12월 초 고용노동부 전주지청장으로 부임한 정영상 지청장(57)은 올해는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 등으로 노사 모두 어려운 해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더욱이 올해는 에코세대의 본격적인 노동시장 진입으로 청년 등 고용 사정이 난망하다. 정 지청장은 오히려 경제가 어려울 때 일수록 정공법이 필요하다고 했다. 부임 6개월을 맞은 정 지청장으로부터 고용노동부 전주지청의 운영 방향 등에 들어봤다. - 부임 6개월 소회가 어떠신지요. “고용노동부 전주지청에 부임하면서 직원들에게 업무의 전문성 강화와 직원과 소통을 강조한 취임식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6개월 정도가 지났습니다. 그간 최저임금 안착 및 일자리안정자금 등 주요 현안 사안에 대한 현장 활동으로 부단히 바쁜 일정이었지만, 앞으로도 근로시간 단축 및 일자리 창출 등 주요 정책과 관련한 국민과 노사의 의견을 청취해 성과를 높이고 선제 대응으로 부작용을 최소화할 계획입니다.” - 고용노동부 전주지청의 주요 업무를 간단히 소개해 주신다면. “고용노동부 전주지청은 전주고용센터, 정읍고용센터, 남원출장센터 등 3센터와 지역협력과, 고용관리과, 근로 개선지도 1·2과, 산재예방지도과 등 5과에 200여 명의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습니다. 지청에서 담당하는 주요업무는 구직자와 사업주를 위한 일자리 매칭 지원, 실업급여, 직업훈련, 고용안정지원 등 각종 고용보험 지원과, 체불근로자의 권리구제, 최저임금·근로시간 등 근로자들의 기본권 보장을 위한 지도점검, 상생과 협력의 선진 노사문화 정착 및 산업재해 예방을 위한 업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 전국적으로 경제 지표가 좋지 않습니다. 특히 전북은 어떤 분야가 위기입니까.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17년 우리나라 청년고용률은 42.1%입니다. 같은 기간 전라북도 청년 고용률은 32.7%로 전국 17개 광역시도 중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국 평균 대비 10%p 정도 낮은 수준의 청년고용률이 지난 10년간 지속되어 지역 상황을 볼 때 앞으로도 청년 문제가 시간이 갈수록 악화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 위기에 대한 다양한 대책을 수립하고 있으실 것 같은데요. “올해 전주지청은 청년에 대한 중점 지원을 위해 ‘청년드림팀’을 신설했습니다. 지난해 12월에 고용노동부에서 대학생 등 청년 1,600명을 대상으로 ‘2017년 청년고용정책 인지도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조사결과 청년고용정책에 대해 관심이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79.5%에 달했지만, 정작 정부의 청년고용정책에 대한 종합 인지도는 50.9%로 나타나 정책 홍보나 안내의 필요성이 있어 전주고용센터 자체적으로 ‘청년드림팀’을 지난 2월에 신설, 고용서비스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 최저임금 인상의 부작용이 있습니다. “노동계는 물론 경영계가 보기에도 완전히 만족스럽지 못한 측면이 있을 수 있으나 노사 모두에게 법 개정 취지 등을 충분히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고 있습니다. 향후 최저임금 취약사업장을 방문하고, 청년·여성·고령층 대상 각종 간담회를 통해 법 개정 내용을 설명할 예정입니다. 특히 노동자에게 지급하는 임금을 낮추고자 개정법의 취업규칙 변경절차 특례규정을 악용하지 않도록 철저히 지도할 것입니다. 특히 우리 본부에서는 저임금 노동자 보호를 위해 EITC 제도 확대 및 직군별 보호 대책 등을 관계부처와 협의하고 있습니다.” - 근로시간 단축 시행을 앞두고 있는데요. “우리 지청에서는 7월 1일부터 주 최대 52시간제가 적용되는 관내 300인 이상 사업장 및 공공기관, 특례업종에서 제외되는 버스업체 등 총 65개소에 대해 실태 조사한 결과, 23개(35.4%) 사업장에서 주 52시간을 초과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300인 이상 사업장은 근로시간 초과 비율이 60%로 공공기관보다 높게 나타났습니다. 근로시간을 초과한 기업들은 유연근무제, 업무량 조정, 설비투자, 신규채용을 통해 근로시간을 단축할 계획이어서 기업의 인건비 부담과 노동자 임금 감소 등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 대비는 어떻게 하고 있나요. “우선 일자리 함께하기 지원 사업을 확대 개편합니다. 노동시간을 조기에 단축한 기업에 대해 300인 미만 기업은 신규채용 1인당 지원금을 월 최대 80만 원에서 100만 원으로 인상하고 지원 기간도 현 2년에서 3년으로 확대합니다. 300인 이상 기업에 대해서는 신규채용 인건비 지원 금액을 월 40만 원에서 월 60만 원으로 인상했으며, 재직자 임금보전 비용 지원대상도 500인 이하 제조업뿐만 아니라 금융업 등 특례제외 업종(21개)도 포함했습니다.” - 일 생활 균형 정착을 위한 워라벨이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최근 기업현장에서는 일과 생활의 균형을 추구하는 워라벨(Work & Life Balance) 문화가 기업생산성과 경쟁력을 높이는 혁신방안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워라벨은 일하는 방식 개선과 장시간 근무 관행을 탈피하고 기업과 근로자가 행복한 직장문화를 함께 만들어 가자는 것이 기본 취지입니다. 유연근무제 등을 도입하는 기업에는 사업계획 심사와 추진실적에 따라 ‘일·생활균형 환경개선지원금’을 직접 지원하고 있습니다.” - 산업 현장에서는 여전히 산업재해가 빈발합니다. “산업재해는 노동자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는 가족의 삶, 기업 및 지역공동체, 나아가 국가 경제까지 파괴하는 사회적 재난입니다. 우리 지역 현황도 좋지 않습니다. 2017년 산업재해 현황을 보면, 전북은 전국 17개 광역 시도 중에서 재해율과 사망만인율이 각각 12위였습니다. 전주지청은 정부의 2022년까지 산재 사고사망자 수 절반 감축 목표에 맞춰 5개년 감축 목표를 설정했습니다.” - 행정과 도민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2017년 전라북도에서는 7206명의 인구가 순유출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연령별로 보면 15~34세 이하에서 8646명이 순유출되었고, 35세 이상에서 1768명이 순유입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요약하면 전라북도에서는 15세~35세 이하에서 인구감소를 주도하고 있고, 1년에 9000여 명에 가까운 청년들이 학업, 취업준비, 일자리를 찾아서 타 지역으로 떠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래세대 주역인 청년들을 어떻게 하면 우리 지역에 머물게 하고, 떠나간 청년들이 다시 돌아오게 할 것인지에 대한 전북도 차원의 대책이 절실합니다. 각계의 지혜와 의지가 반영된 청년대책이 구체화 된다면, 우리 지청은 거점별 고용 인프라와 전문인력을 활용한 고용서비스, 지역 일자리창출 지원사업 등을 통해 행정적,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정영상 지청장은 - 굵직한 노사 분규 해결 근로감독 등 역량 탁월 전남 담양에서 태어나 광주 인성고등학교, 전남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7급 공채로 공직에 입문해 담양군청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선거관리위원회를 거쳐 노동부로 자리를 옮겼다. 정 지청장은 고용노동부 감사담당관실, 익산 근로감독과장, 진주·여수·순천 고용센터 소장, 광주청 산재 예방 지도과장, 근로 개선지도 1과장 등 고용노동부 본부와 일선 지방고용노동청의 주요 보직을 역임했다. 그는 근로감독관 및 과장으로 재직 시 군산 개정병원 등 호남지역의 굵직한 노사분규를 원만히 해결하는 등 근로감독과 노사관계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명 근로감독관으로 평가받았다. 또한 목포지청장 재임 시 전국 최초로 ‘전남 일자리 아이디어 공모전’을 개최, 전남도 일자리 예산을 전국에서 가장 많이 지원받는 데 기여했다. 정 지청장은 “직원들이 법과 원칙을 철저히 준수하고 전문성 향상을 통해 대민서비스의 질을 높이겠다”면서 “전북에서도 현장 중심의 고용·노동 행정 추진에 전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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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승현
  • 2018.06.24 19:50

전주한옥마을에 '온고을소리청' 다시 문 연 김일구·김영자 명창 "우리 음악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게 되는 공간됐으면"

2001년, 전주한옥마을에 온고을소리청이란 이름을 내건 작은 공간이 문을 열었다. 명창 부부가 제자들을 가르치고 가끔씩은 판도 여는 곳이었다. 드러내놓고 공개된 곳은 아니었지만 골목길을 지나는 사람들은 담장 안에서 들려오는 판소리와 북장단, 아쟁과 가야금 소리에 마음을 앗겨 슬쩍 슬쩍 기웃거리기도 하고, 담장에 기대어 한숨 쉬어가기도 했다. 10년 남짓 시간이 더해지면서 온고을소리청은 자연스럽게 한옥마을의 명소가 되었다. 그즈음 한옥마을이 변하기 시작했다. 관광지로 이름을 알린 한옥마을에 관광객들이 물밀듯 몰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골목길은 번잡해지고 길거리음식과 온갖 오락기구로 채워진 가게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온고을소리청도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명창 부부는 담장을 넘어가 오가는 사람들을 즐겁게 했던 우리 음악이 이곳에서는 더 이상 제 빛깔을 찾기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다잡기 어려웠던 부부가 한옥마을의 온고을소리청 문패를 내리고 떠난 것은 2012년이었다. 김일구 명창과 김영자 명창 부부의 이야기다. 그 뒤 햇수로 6년, 소리청이 있던 곳에 문을 열었던 카메라박물관이 떠난 자리에 예쁜 정원을 품은 한옥이 들어왔다. 다시 문을 연 온고을소리청이다. 지난 4월부터 박물관으로 변신했던 한옥의 제 모습을 다시 찾느라 고된 노동에 매달렸던 김일구 명창(78)과 김영자 명창(69) 부부를 만났다. 6년 만에 돌아온 한옥마을이 아직은 낯설지만 다시 출발하는 기대로 설렌다는 부부는 마지막 삶의 터가 될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관객들을 만나며 우리 음악의 가치를 많은 사람들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예전의 한옥과 좀 달라진 모습입니다. 일이 많았겠습니다. 두 달 정도 걸린 것 같아요. 우리가 이사를 하고 카메라 박물관이 들어왔잖아요. 그래서 공간이 아주 많이 변했었어요. 전시가 중심이었던 공간을 다시 원상복구하려니 일이 많았어요. 기왕에 원형을 다시 잡으면서 교육공간을 조금 넓혔는데 건축법상 문제가 있다고 하네요. 한옥의 모습을 제대로 찾아야겠다 싶어 나선 일이 너무 복잡해져서 아주 힘들었어요. 괜히 시작했다 싶기도 했고, 좋은 취지를 이해해주지 못하는 행정도 야속했어요. 그래도 그럭저럭 정리되어가니 다행이지요. -다시 돌아오실 계획이 있었습니까. 떠날 때는 이런 저런 생각을 깊게 하지 못했지만 다시는 안돌아오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나는 이사 가고 싶지 않았는데 집사람이 서둘렀던 일이거든요. -그럼 사모님 결정이었군요. 이 양반은 이사하지 말자고 했었는데 제가 옮기자고 했어요. 가장 큰 이유는 이 양반이 일을 너무 많이 하는 거예요. 아침에 일어나면 우리 집 마당에서부터 오목대 올라가는 입구 밑에까지 쓸고 물청소를 합니다. 날이면 날마다 하루 두 번씩이나 했어요. 오죽했으면 우리가 이사를 가고 나니 청소하는 아저씨가 김일구 선생님이 안계시니까 너무 힘들다고 하시더라고요.(웃음) 안 되겠다 싶더군요. 건강관리도 해야 하는 나이인데. 게다가 동네가 너무 이상하게 변하는 거예요. -선생님은 이사를 반대하셨는데 어떻게 설득하셨나요. 기회가 좋았어요. 우리가 그런 고민을 갖고 있다고 하니 카메라를 수집해온 제자가 여기에 박물관을 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내가 나서서 강권했지요. 소리청과는 다르지만 카메라박물관도 한옥마을에 좋은 공간이 되겠다는 생각도 했고요. -2012년에 떠나셨으니 6년 만에 오신 셈인데, 그때에 비해 환경이 더 나아진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더 번잡해진 경향도 있고요. 그래서 망설이기도 했어요. 지금이 다시 돌아오기 적절한가 싶기도 했는데 이때를 놓치면 더 어려워지겠더라고요. -두 분 다 고향도 아닌 전주로 어떻게 오시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나는 전남 화순, 저 사람은 대구가 고향이에요. 결혼하고 나서는 줄곧 서울에 살았습니다. 그래도 공연 때문에 왔다 갔다 하는 전주는 늘 마음이 가닿는 곳이었어요. 아내는 국립창극단에 있었고, 나는 국립국악원에 있었는데 정년퇴임을 하고나니 서울을 떠나고 싶더라고요. 어디로 갈까 고민이 별로 필요 없었는데 아내를 설득하는 일이 어려웠죠. -그럼에도 내려오신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까. 친분이 깊은 전주 분들이 내려와 살라고 권하셨어요. 옛 속담에 권하는 장사는 밑지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이렇게 권하는 분들이 있으니 가도 밥은 굶지 않겠다 싶었죠. 그리고 더 큰 이유는 내 기술로 제자양성을 한다면 묻히지는 않을 텐데, 그런 일을 하기에 전주가 가장 좋은 곳이라고 생각했어요. 한번 해보자해서 이 집을 그때 산 것이죠. -그때만 해도 한옥마을에 빈집이 많았지만 이사를 오려고 하는 사람들이 없었을 때인데요. 선견지명이 탁월하셨던 것 같습니다.(웃음) 그래도 그때가 참 좋았어요. 고즈넉하고 공기 좋고 사람 살기 참 좋은 동네였잖아요. 세상사가 그런 것 같아요. 넘치면 부족한 것만 못하다고, 한옥마을이 좋은 관광지가 되는 것은 좋은데 역사성이나 특성을 간직할 수 있는 환경을 조금이라도 회복했으면 좋겠어요. -화제를 좀 돌려보겠습니다. 선생님은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준보유자이면서 아쟁과 가야금 연주에도 독보적인 위치를 지키고 계신데 여러 갈래 길을 걸어오신 시간이 궁금합니다. 어느 것 하나 놓는 일이 참 어려웠어요. 때로는 한 길만 제대로 가는 것도 어려운 마당에 내가 잘하고 있는 일인가 생각도 하지만 소리나 연주나 모두 제게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거든요. 돌아보면 부질없는 욕심인데 -단순히 욕심으로만 치부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 선생님의 분야를 명창이냐 아쟁과 가야금 명인이냐로 가른다면 정말 어려운 일일 것 같거든요. 더구나 아쟁산조 같은 경우는 김일구류란 갈래를 정립하셨지 않습니까. 그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소리나 기악이나 모두 내 존재 자체가 스승 덕분인데 아쟁은 스승님의 반열에 머무르지 않고 김일구류를 새로 만들 수밖에 없었어요. 제 스승이 장월중선 선생님인데 당시 공부를 할 때 받은 산조가 10분 남짓한 길이거든요. 제가 그 뒤로 공부를 하면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가락을 더해 하나의 판을 짜게 되었는데 그 분량이 36분 정도 되었어요. 그러다보니 산조의 바탕도 전혀 새로워졌는데, 돌아가신 최종민교수님은 김일구가 아쟁을 하는 것은 말을 하는 것 같다고 하셨어요. 김일구류 산조를 세워놓은데 큰 힘이 되었죠. -어떻게 이 세 갈래 길을 함께 걷게 되셨는지요. 소리길에 들어선 것은 아버님 덕분인데, 본격적인 소리는 공대일 선생님께 배웠어요. 그러다가 변성기를 맞으면서 아쟁을 배우게 되었지요. 목포에 계셨던 장월중선 선생님을 그래서 찾아갔는데 당시 여성국극단 활동이 아주 활발했습니다. 2-3년 아쟁을 배우다가 여성국극단 반주로 따라 다니게 되었죠. 흥행이 잘되면 돈을 주는데, 그것도 야참비 정도였어요. 그마저도 나중에는 수입이 안나니 받을 수 없게 됐어요. 그때 마침 부산공연을 갔었는데 부산에는 가야금 연주로 이름난 원옥화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이 분이 좋은 음악꾼들이 있는 단체가 왔다고 하니까 저녁에 초대를 했어요. 큰 온천장에서 판을 벌였는데 그때 주인 없는 공사는 없다시며 먼저 연주를 하시는데, 내 아쟁은 감히 내놓을 수도 없는 경지였어요. 강태홍 류 가야금 산조였죠. 그 길로 단체를 그만두고 부산에 남아 가야금을 배웠어요. -그럼 서울은 이후에 올라가셨군요. 거기서 바로 서울로 갔어요. 70년대 초반이었죠. 그때부터 국립창극단, 국립국악원 등에서 활동했고, 독립적으로 창극 작품을 제작해 올리기도 했어요. KBS 우리가락 우리마당이라는 프로그램도 만드는데 힘을 보탰고요. 그즈음에 방송프로그램으로 창극을 내보내기도 했는데 개인적으로도 그때가 가장 활동을 활발하게 했던 시기였을 거예요. -활동하신 영역을 보면 판소리에 아쟁 가야금 연주, 작창에 작곡, 연출까지 다양한 분야를 두루 섭렵해오셨는데요. 언젠가 고수로도 무대에서 뵈었던 것 같습니다. 맞아요. 한동안 주위의 권유로 북도 쳤어요. 돌아가신 오정숙 선생님은 제자들의 북을 여러 번 부탁하셨는데 거절 할 수 없어서 몇 번 맞췄었지요. 그런데 언젠가 항의를 받았어요. 왜 남의 밥그릇까지 뺏어 가냐고. 그때 알았어요. 아무리 좋은 마음으로 하는 일이라 해도 누군가에게는 뺏기는 일이 된다는 것을. -사모님과 함께 선 무대도 많았었지요. 국립창극단에서는 함께 주역을 많이 했어요. 시새움을 많이 받았죠. 그래서 한때 창극단에 사표 쓰고 나와서 뺑파전을 만들어 공연했어요. 일본 공연까지 갔었는데 관객들의 인기가 높았어요. 전통의 원형과 현대적 변형을 잘 구성한 작품이었죠. 처음에는 우려했던 원로 선생님들도 전통은 저렇게 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올해 큰 무대를 준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소리길에 들어선 시점으로부터 올해가 70년이 되었더라고요. 그래서 70주년 무대를 기획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서는 무대인데, 저는 판소리와 아쟁 가야금에 이번에는 거문고 연주도 해보려고 합니다. 거문고는 70년대 초반 서울에 올라갔을 때 한갑득 선생님을 찾아다니며 공부했었어요. 여러 가지 이유로 작파했었는데 나이 들어가면서 자꾸 아쉬움이 들어요. 그래서 지금 혼자 연습하며 가락을 익히고 있습니다. 가을 소리축제에 제 70주년 무대가 구성되었는데, 서울 부산 광주에서도 공연을 합니다. 이런 공연은 마지막이 아닐까 싶습니다. -조금도 열정이 식지 않으신 것을 보니 한옥마을 온고을소리청의 역할이 더 기대됩니다. 개인 공간이긴 하지만 우리음악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게 되는 통로가 되고 또 한편으로는 전주한옥마을의 환경을 참하게 만드는데도 역할을 했으면 좋겠어요. 나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을 챙겨서 국악공연에 대한 인식도 변화시키고 싶습니다. 다 도와주셔야 가능한 일입니다. 전주여서 할 수 있는 일들이기도 하고요. 올해 일흔 여덟의 김일구 명창과 일흔을 바라보는 김영자 명창은 부화뇌동하지 않고 자신들의 생각을 고집스럽게 지켜온 국악인으로 꼽힌다. 작은 이해타산에 마음 쓰지 않고 요란스러운 세태에도 휩쓸리지 않고 부부가 걸어온 길을 들여다보니 그만큼 쌓아진 궤적이 높고 단단하다. 전주한옥마을에 다시 문을 연 온고을소리청. 명창부부의 귀환이 그저 반갑다. ●김영자 명창은 - 김일구 명창과 판소리 대중화 열정 김영자 명창은 대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즐겨듣는 축음기에서 나오는 판소리가 좋아 국악의 길에 들어섰다. 아버지는 소리를 하려거든 정권진 선생을 찾아가라는 유언으로 소리길을 열어주었다. 잠시 대구에 와있던 정권진 명창 문하에서 소리를 시작했지만 곧 스승이 떠나 차승호 선생으로부터 소리를 배웠다. 국극단을 따라다니며 무대에 섰던 그는 김준섭 임준옥 강종철 정응민 등 여러 선생의 문하를 거쳤으며 김소희 성우향 정광수 명창으로부터 다섯 바탕을 익혔다. 20대 중반, 박동진 명창의 권유로 국립창극단에 들어간 이후 창극 무대에서 재능을 발휘했다. 타고난 목과 탄탄한 성음으로 실력을 인정받아온 그는 30대 중반, 남원춘향제 전국명창대회 장원과 이듬해 전주대사습놀이 판소리 명창부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명창의 반열에 섰다. 남편 김일구 명창과 함께 창극 대중화에 특별한 열정을 쏟아왔으며 전북도립창극단 단장을 맡아 7년 동안 재직했다. 송흥록-송광록-송우룡-유성준-정광수로 이어지는 수궁가 로 중요무형문화재 준보유자가 됐다. ●김일구 명창은 - 판소리연주작창 능한 타고난 예인 김일구 명창은 화순이 고향이다. 여관업을 했던 아버지(김동문)는 국악단체를 인수해 운영할 정도로 예능을 좋아했는데 그 덕분에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판소리를 배웠다. 본격적인 소리 공부는 공대일 선생 밑에서 시작했지만 변성기를 지나면서 길을 바꾸어볼 요량으로 장월중선 선생을 찾아가 아쟁산조를 배웠다. 그러나 소리에 대한 일념은 변하지 않아 후에 김상룡, 장영찬, 박봉술, 정권진, 성우향 명창 문하를 거치면서 소리를 익혔고, 특히 박봉술선생으로부터는 적벽가가 한바탕을 제대로 받아 송흥록-송광록-송우룡-송만갑-박봉술로 이어지는 적벽가 계보의 적자가 되었다. 30대에는 부산에서 활동한 가야금명인 원옥화로부터 가야금산조를 배웠으며 한갑득으로부터 짧은 기간 거문고를 배우기도 했다. 여성국극단 반주자와 여러 곳의 국악원 강사를 거쳐 국립창극단에 입단, 여러 편의 창극 무대에 서거나 작품을 각색하고 연출하는 등 여러 분야에서 재능을 펼쳤다. 마흔네 살에 전주대사습놀이 판소리 명창 부문 장원으로 명창의 반열에 올랐으며 2년 뒤 신라문화제 기악부문 대통령상을 수상해 아쟁 명인으로도 자리를 굳혔다. 국립창극단을 거쳐 국립국악원에서 활동한 그는 판소리는 물론 아쟁과 가야금 연주에 작창과 연출까지 두루 능해 타고난 예인으로 꼽힌다. 남성 판소리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호방함과 잘 다듬어진 성음의 조화가 일품인 그의 소리는 귀명창들에게 특히 인기가 높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준보유자로 아내 김영자명창과 함께 전주한옥마을에서 온고을소리청을 열고 국악교육에 열정을 쏟고 있다. 아들 경호 도연씨도 그의 뒤를 이어 판소리와 아쟁 연주로 주목받고 있다.

  • 기획
  • 김은정
  • 2018.06.21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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