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5-11-10 12:14 (Mon)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기획

전북도부지사 지낸 고창 출신 심덕섭 국가보훈처 차장 "국가유공자에 정당한 보상, 나라다운 나라 만드는 첩경"

문재인 정부는 국가유공자에 대한 정당한 대우를 강조한다. 유공자들에게 합당한 보상과 예우를 하는 것이 나라다운 나라를 만드는 첫 걸음이라는 생각에서다. 문재인 정부 들어 국가보훈처가 차관급 정부기관에서 장관급 기관으로 격상된 것도 이 때문이다.이처럼 새롭게 출발해 체질개선을 꾀하고 있는 국가보훈처의 실무 총괄 책임자인 차관 자리는 전북도부지사를 지낸 고창출신의 심덕섭 차장(55)이 맡고 있다. 심 차관은 서울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하고 86년 행시 30회로 공직에 입문한 뒤 대통령 비서실 선임행정관, 외교통상부 기획심의관, 행안부 조직정책관과 전자정부국 부국장을 거쳐 전북도 행정부지사와 행자부 지방행정실장 등을 지냈다. 지난해 7월 국가보훈처 차장에 보임돼 지난 6개월 동안 변화와 혁신을 이끌어왔다.-장관급 부처로 바뀐 뒤 첫 차장을 맡아 그 동안 할 일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지난 6개월 동안 주로 어떤 일을 하면서 지내셨는지요?크게 보면 세 가지 업무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새롭게 출범한 문재인 정부의 보훈 정책을 설계하는 중차대한 과제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국가유공자 분들을 한 분도 놓치지 않고 국가가 책임지는 따뜻한 보훈을 펼칠 수 있는 정책의 틀을 만들었습니다. 둘째는 국가보훈처 본연의 업무에만 충실할 수 있도록 하는 일입니다. 과거에는 우리 국가보훈처가 이념적정치적으로 편향돼 국민들께 큰 걱정을 끼쳐드린 바 있습니다. 이런 과거의 잘못을 통렬히 반성하고 앞으로 이런 일들이 재발되지 않도록 조직을 새롭게 정비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장관급으로 격상된 조직의 위상에 걸맞게 국가보훈처의 행정역량과 인적역량을 높이고자 변화와 혁신을 선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바탕이 되어 우리 국가보훈처가 문재인 정부 5년 동안의 국가보훈 정책을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초석을 다지도록 하겠습니다.-장관급 부처 승격에 따라 내부적으로도 적지 않은 변화를 겪고 계신데, 국민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어떤 변화가 실제로 느껴지시나요?문재인 정부는 국가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신 분들에 대한 합당한 예우와 보상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국가보훈처의 역할이 크게 강화되었고, 책임감도 그만큼 막중해졌습니다. 장관급 기관으로 격상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제가 이 자리에 오게 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장관급 승격에 따라 조직이라든가 기관위상 등이 변했지만, 무엇보다도 보훈에 대한 국민들의 생각과 관심이 크게 달라졌다는 점이 보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민들께서 국가유공자분들의 공헌과 희생에 대해 높이 평가해 주시고, 각종 기념일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참여해 주고 있습니다.-앞서 말씀하신 대로, 문 대통령은 기회 있을 때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이들을 제대로 대접하고 보답해야 한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해왔습니다. 이러한 대통령의 뜻과 정신이 어떻게 구체적인 보훈정책으로 구현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대통령께서는 기회 있을 때마다 보훈정책이 곧 안보를 튼튼히 하고 국민통합을 이루는 지름길이라며 국가유공자에 대한 정당한 예우를 강조했습니다. 저는 대통령께서 강조하시는 바와 같이 보훈의 가장 기본적인 정책방향은 국가를 위해 헌신하신 분들에 대한 최상의 보상과 예우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국가 유공자에 대한 정당한 보상과 합당한 예우를 하는 것 자체가 새 정부가 추구하는 나라다운 나라를 만드는 첫 번째 발걸음일 뿐만 아니라 중요한 시금석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국가보훈처는 단순한 보상과 예우에 머무르지 않고 국가유공자 분들이 소외당하지 않도록 의료, 요양, 복지, 안장서비스를 강화해 국가유공자의 명예와 자부심을 높이는 따뜻한 보훈 정책을 추진하겠습니다. 또한 보훈을 통한 국민통합의 완성에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국가유공자에 대한 보상을 더 높여야 한다는 요구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국가유공자분들에게 정당한 보상을 해 주는 것은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어 가는 첩경이라고 생각합니다. 2018년도에는 국가유공자 보상금을 물가상승률 등 일반 사회경제지표 수준이나, 지난 정부 평균 인상률 3.7% 보다 높은 수준인 5%를 인상했고, 참전명예수당도 참전유공자의 연령이 고령인 점 등을 고려해 대폭 인상했습니다. 앞으로도 희생과 공헌에 걸 맞는 보상을 통해 국가유공자에 대한 예우를 강화하고 생활안정에 기여하도록 하겠습니다.-국가유공자에 대한 대우도 중요하지만, 국가에 공을 세우신 분들이 빠짐없이 예우를 받을 수 있도록 적극적인 유공자 발굴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요?국가를 위해 헌신한 분들이 등록심사에 필요한 객관적 입증자료를 확보하지 못해 국가유공자로 예우받지 못하는 억울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여러가지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입증책임을 신청인에게 미루지 않고 국가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현지조사를 확대하고, 청문 기회도 보다 적극적으로 제공함으로써 한 분이라도 더 국가유공자로 정당한 예우를 받을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아직 찾지 못한 독립유공자를 적극 발굴해 내기 위해 전문 학자의 도움을 받아 후손이 없거나 사회적 차별 등으로 사각지대에 있던 무명의 의병여성 독립운동가 등을 발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독립운동 공적의 기초자료가 되는 판결문 등 재판 및 수형기록을 모두 조사하는 등 국가 입증책임을 강화해 나가고 있습니다. 국가보훈처는 독립유공자 및 참전유공자를 한 분이라도 더 찾아내 예우함으로써, 억울한 분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고 국가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전북에는 국립묘지로 임실호국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매장 부지는 이미 오래전에 모두 소화됐고, 봉안시설도 점차 부족해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요?2002년 설립된 임실호국원은 우리나라 전체 국립묘지 6개 중 하나입니다. 봉안묘 1만 6000여기 규모로 개원돼 안장서비스를 제공해왔으나 2012년 11월 만장되었습니다. 2011년부터는 봉안당을 설립해 안장을 시작하고 있으며, 시설부족이 임박함에 따라 지난해 7월 131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봉안실, 추모실 등 현대화된 시설을 갖춘 제2 봉안당을 건립해 1만 2240기의 안장능력을 확보했습니다. 봉안묘는 더 이상 늘릴 수 없지만 봉안당에는 2025년까지 걱정 없이 서비스를 제공해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임실호국원이 호남권 호국성지로서 열린 추모공원이 되도록 참배객 편의시설 개선 등 쾌적한 환경조성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편의시설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현충일이나 명절이면 임실호국원에 너무 많은 유족들이 한꺼번에 몰려 대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이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요?현충일이나 명절 때 내방객이 많아 교통 혼잡을 겪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2017년의 경우, 추석 연휴기간 동안 총 10만 여명의 참배객이 다녀가셨고, 추석 당일만 해도 3만 5000여명의 참배객이 방문했습니다. 이에따라 임실호국원에서는 기존의 편도 1차선 호국원 진입로를 편도 2차선으로 확장하고 홈페이지 및 문자메시지 안내를 통해 혼잡 예상일을 피해 내방하시도록 권유하고 있습니다. 셔틀버스 운행, 임시 주차장 확보운영 등을 통해 참배객 및 지역주민의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참배객 및 지역 주민이 교통 혼잡에 따른 불편을 겪지 않도록 추가적으로 편의 제고 대책을 마련하는 등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전북 부지사를 지내셨고 해서 아시는 분들도 많을 텐데, 도민들께 인사말을 부탁드립니다.도민 여러분, 대단히 반갑습니다. 제가 2014년에 전라북도 행정부지사를 하면서 도민 여러분들을 많이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만, 2015년 행안부로 옮긴 후로는 다소 소원했습니다. 오늘 다시 전북도민 여러분께 인사드릴 기회가 생겨 매우 기쁜 마음입니다. 지금 전라북도는 새만금 시대의 개막과 함께, 동북아 중심으로 도약하는 희망과 기회의 시기를 맞고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보이는 곳이든 보이지 않는 곳이든 전북이 발전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무술년, 황금개띠의 해를 맞아 도민 여러분 가정에 항상 사랑과 행복이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렇게 지면으로나마 인사드릴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돼 다시 한 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도민 여러분,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기획
  • 이성원
  • 2018.01.15 23:02

농협중앙회 상호금융 소성모 대표이사 "농가소득 5000만원 달성 디딤돌 역할 혼신 다할 터"

남원 출신으로 NH농협은행 전북본부장을 지낸 소성모 전 NH농협 디지털뱅킹본부 부행장(59)이 구랍 29일 농협중앙회 상호금융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농협 역사상 전북출신으로 중앙회 대표이사를 맡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농촌에서 자라나 농촌의 실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농도 전북 출신 소 대표이사의 취임은 전북과 농촌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될 전망이다. 소 대표이사를 만나 농촌 및 농협의 발전 구상과 취임 소감을 들어봤다.-전북지역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중앙회 대표이사를 맡게 되셨는데, 먼저 소감을 말씀해 주십시오.“저 혼자만의 능력이 아니라 내 고향 전북지역에서 많은 분들의 마음을 모은 성원이 있었기에 이 자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중앙회 이사이신 김원철·김봉학 조합장님, 금융지주 이사이신 유남영 정읍농협조합장님 등이 저에게 큰 힘이 되어 주셨습니다. 또 많은 조합장님들이 축하해주셔서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우리의 농업과 농촌, 그리고 전북발전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전북지역에서도 꽤 근무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남원에서 자라나 82년 전북대 상과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농협중앙회에 입사해 김제지부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주로 서울에서 근무하다가 2015년 농협은행 전북본부장으로 발령받아 고향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지역에 기여하고 지역과 함께 발전하는 농협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지역사회와 끊임없이 소통하고 교류하는 한편 좋은 기업을 발굴해 지원하고 농업경영체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자금지원에 힘을 썼습니다. 어려운 순간도 있었지만, 업적평가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등 가장 보람 있었던 순간 중 하나로 기억합니다. 35년 농협 재직기간 중 6년 정도 전북에서 근무했습니다.”-농협 상호금융이 어떤 일과 역할을 하는 기관인지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간단하게 설명 부탁드립니다.“농협 상호금융은 예수금이 300조원에 육박하는 명실상부한 국내 최대의 금융기관입니다. 전국 1130여개 지역 농협·축협의 금융사업을 총괄하며, 전국 4650개 영업망을 통해 도서와 산간을 불문하고 양질의 서비스를 공급하는 금융인프라입니다. 다양한 금융상품과 예치자금의 건전한 운영 등을 통해 농업인의 농가경영을 지원하고 직접적인 소득 증대를 이끄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대표이사로서 상호금융이 미래 금융환경을 선도하고 지역고객에게 사랑받는 금융기관으로 자리매김함은 물론 범농협 차원에서 추진 중인 농가소득 5000만원 달성의 디딤돌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혼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지금 농촌의 상황은 고령화와 인구감소 등으로 매우 어렵습니다. ‘지방소멸’이라는 말이 너무나도 실감나는 상황입니다. 이런 농촌을 위해 농협이 지역사회에서 해야 할 역할은 무엇입니까?“지역사회와의 상생은 농협이 가장 중요시하는 일 중의 하나입니다. 지역의 좋은 기업을 발굴하고 육성하는 책임이 금융기관으로서 우리 농협에 있습니다. 고용을 창출하고 직원들과 함께 성장하는 좋은 기업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입니다. 또 각 지역이 안고 있는 개별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합니다. 상호금융대표이사로서 앞으로 최대한 많은 현장을 방문해 지역의 고민을 청취하고 지역본부와의 협조를 통해 지역발전에 도움을 드리려고 합니다. 범 농협 차원에서 추진하고 있는 ‘또 하나의 마을’이나 도농교류 운동 또한 지역과의 상생발전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만큼 계속 지원하겠습니다.”-그동안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농촌이 처한 상황이 개선되기는커녕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희 농협은 ‘또 하나의 마을’ 운동, 청년 창농 및 귀농·귀촌 지원 등 농촌 활력화를 위한 사업을 지속적으로 시행하고 있습니다. 쌀값 지지를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펼치고 있으며, 지난해 소기의 성과를 거뒀습니다. 농촌의 현실에 맞지 않은 ‘김영란법’상의 선물가액 한도를 조정하기 위해 농협이 농업계 및 농민들과 함께 노력한 결과 다소나마 의미있는 변화를 이끌어 내기도 했습니다. 농협은 앞으로도 농업과 농촌의 어려움을 현장에서 청취하고 함께 해결책을 찾아나가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할 것입니다.”-이야기를 전북으로 좁혀서, 전북농업의 고민은 무엇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농협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입니까?“농도 전북의 가장 큰 문제는 쌀의 과잉생산입니다. 재배면적과 생산량이 다소 감소하고 있지만, 지난해 65만 톤을 생산하는 등 여전히 전국 3위의 쌀 생산지입니다. 상호금융 예치금 운용을 통한 수익 5000억원을 농축협에 조기 추가 정산해 추곡수매에 활용토록 하는 등 적극적인 노력으로 애초 목표치인 15만원을 넘어서 16만원에 육박하는 쌀 가격을 지지했지만, 쌀값 안정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지자체별로 논에 쌀 대신 타 작물을 재배하는 농가에 지원금을 주는 등 벼농사에 집중된 농업구조를 바꾸는 한편, 쌀 소비촉진에도 힘써야 합니다. 농협은 쌀 가공식품 개발과 쌀 소비촉진 운동 등에도 노력해서 전북을 비롯한 전국의 벼 농가에 힘을 드리도록 할 것입니다.”-농협이 지난해 농가소득 5000만원 달성을 목표로 중점 추진했다고 하셨는데, 왜 이런 사업을 추진하게 됐고,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설명해주시지요.“농협이 농가소득 목표를 구체적인 수치로 제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만큼 중차대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2015년 말 기준 농가의 평균소득은 3722만원으로 도시근로자 평균 5780만원에 비하면 64% 수준에 불과합니다. 근대화 과정에서 양곡가격을 통제하는 등 잘못된 정책 때문입니다. 일본도 근대화가 급격히 진행됐지만, 우리처럼 농업과 농촌을 소외시키면서 진행되지는 않았습니다. 어쨌든, 도시와 농촌의 이 차이를 줄이지 못하면 앞으로 농업의 존립 자체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또 스마트팜 등 미래 농업을 이끌 젊은 농업인의 유입을 위해서라도 농가의 소득향상은 필수적입니다. 농협은 지난해 범농협 차원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2조원 가까운 소득기여가 있었던 것으로 자체 추산하고 있습니다. 사실 농협을 사회적 기업이라고 합니다. 이윤 추구만이 목적이 아니라 조직 유지를 위한 적정 이윤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회에 환원하기 때문입니다. 지역사회와 고객, 주주, 종업원 등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농협은 올해도 비료, 사료, 농자재 가격 인하를 통한 생산비 절감은 물론 금융비용 절감 및 신규 소득창출 기회제공 등 농가소득 증대를 위한 100대 과제 추진을 변함없이 추진할 것입니다. 저희 상호금융에서도 농업부분에 들어가는 자금금리를 낮추는 등 좋은 금융 서비스를 통해 농가소득 5000만원 달성할 수 있도록, 상호금융이 기여할 수 있는 바를 찾아서 선도적인 노력을 펼치겠습니다.”-앞으로의 계획과 포부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농업인과 도시 고객에도 보다 많은 혜택을 드릴 수 있는 금융상품의 개발과 디지털 금융 발전에 힘쓰겠습니다. 농·축협의 건실한 경영을 지원하고 리스크 관리와 소비자 보호에도 노력하겠습니다. 더불어 지역사회에서 신뢰받는 농·축협이 되기 위해 사회적 기업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겠습니다. 직원으로 출발해서 대표이사 자리에 오른다는 기대를 해본 적이 없지만, 82년 입사이후 농업인과 고객을 위해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며 일한 결과 오늘날 이 자리에 오게 됐습니다. 그 간의 경험을 통해 직을 잘 수행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갖게 됐습니다. 특히 고향 조합장님들의 많은 성원과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전북농업의 고민거리를 해결하는데 일조하도록 하겠습니다. CEO의 역할은 소통과 조정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안 되는 것은 소통을 통해 이해시키고 되는 것은 더 잘되도록 하겠습니다.”● 소성모 대표는- 농협 역사상 첫 전북출신 중앙회 대표이사1959년 남원에서 태어나 전주 해성고와 전북대 경영학과 학사 및 석사를 받았다. 82년 농협중앙회에 입사해 기획실 과장과 팀장, 일본사무소 근무를 거쳐 2003년 전주 서신동 지점장을 지냈다. 이후 전북지역본부 교육지원부장, 중앙회 상호금융지원부장, NH농협은행 스마트금융부장과 NH농협은행 전북본부장, NH농협은행 디지털뱅킹본부 부행장을 거쳐 지난해 12월 농협중앙회 상호금융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 기획
  • 이성원
  • 2018.01.11 23:02

[우리는 최고점을 찍었나]시선은 삶의 높이…한 단계 더 높일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

한사람의 삶은 전적으로 그 사람이 가진 시선의 높이에 의해 결정된다.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시선의 높이까지만 살다간다. 나라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문명은 세 개의 층으로 구성된다. 가장 아래층은 구체적인 물건들로 채워진다. 둘째 층은 구체와 추상 사이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제도다. 가장 높은 층은 추상적인 형태를 띠는 철학이나 윤리나 문화 같은 것이다. 제도는 인간이 사는 길이다. 그 길을 따라 물건들이 생산되고 삶이 영위된다. 풍요롭고 정의로운 삶은 그런 것들이 보장되는 길(제도)에서 만들어진다. 그런데 제도는 또 철학이나 문화적 지향에 의해 결정된다. 이렇게 살고 싶은 사람은 이런 식의 길을 내고, 저렇게 살고 싶은 사람은 저런 식의 길을 낸다. 이런 꿈을 꾸는 사람은 이렇게 살고, 저런 꿈을 꾸는 사람은 저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이치다.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사람’의 생각(철학)이 길을 내고 또 그 길을 따라 물산(物産)의 질과 양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명’은 ‘사람’의 생각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결과다. 높은 생각은 높은 문명을 만들고, 낮은 생각은 낮은 문명을 만든다. 앞선 생각은 선진 문명을 만들고, 뒤따라가는 생각은 후진 문명을 만든다. 이런 이유로 시선의 높이가 삶의 높이라 고 말하는 것이다.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가장 구체적인 물건들을 예로 들어 보자.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물건 가운데 우리가 만들기 시작한 것이 몇 개나 되는가. 거의 없다. 다른 나라에서 누군가가 최초로 만든 것들을 들여와서 살고 있다. 이 말은 우리가 먼저 생각하거나, 먼저 불편을 느끼고 해소해보려 했거나, 먼저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 해보려고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모든 물건들은 다 발상이나 불편함이나 문제를 해결한 결과들이기 때문이다. 물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제도도 그렇다. 우리가 사용하는 제도도 대부분 외부에서 온 것들이다. 총체적으로 볼 때, 우리는 ‘따라 하기’의 문명을 살아왔다. 다른 사람이 생각해서 낸 길을 따라 다른 사람들이 만든 물건들을 누리며 산 것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자유롭지도 독립적이지도 주체적이지도 않고 아직까지는 다만 종속적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종속적인 문명이 닿을 수 있는 최고의 높이에 도달했다. 중진국 상위 레벨에 이미 도달했다는 뜻이다. 문제는 중진국을 넘어서 선도력을 행사할 수 있는 단계, 즉 독립적이고 자유롭고 주체적인 단계로 넘어설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창의가 일어나는 사회를 열 수 있느냐 없느냐 라고 할 수도 있고, 대답하는 기능에 머물지 않고 질문이 감행되는 사회를 이룰 수 있느냐고 할 수도 있고, 전술적인 높이를 넘어 전략적인 단계에 이를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고도 말할 수 있고, 분열을 넘어 통합을 이룰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고도 말할 수 있다. 종합적으로 말하면 지금까지 우리가 익숙하게 발휘하였던 시선을 한 단계 더 높이 상승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다. 종속적인 단계의 특징은 스스로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해 놓은 생각의 결과나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이념을 수용하고 키우며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산다. 그러므로 나라 전체나 대국을 보기보다는 기준이나 이념의 공유체인 진영을 중심으로 해서 사고하는 습성을 갖는 다. 세계의 진실에 접촉하는 것이 아니라 진영의 진실을 세계에 부과하려 애쓴다. 또 기준이 분명하므로 그 기준에 맞으면 참이고 맞지 않으면 거짓이다. 그래서 항상 자신의 기준을 중심으로 하는 진위 논쟁에 힘을 쓴다. 또 이 진위는 과학적으로 확인된 진위가 아니라 특정한 가치관에 싸인 정치적인 판단이 하는 진위로서 쉽게 선악이라는 가치판단으로 연결된다. 보통 과학적 판단보다는 정서적인 판단에 빠진다.사회를 움직이는 엔진은 크게 두 개다. 정치와 교육. 사실 우리 정치는 소란스럽기는 하지만 박제되어 있다. 본질에 도달하지 못하고 기능에 갇힌 것이다. 진영의 정치는 기능을 벗어나지 못한 채, 적대적 공생 관계로 유지된다. 기능과 진영의 논리는 분열을 낳는다. 현대 한국 정치의 큰 특징은 누가 뭐래도 ‘배타성’을 위주로 하는 ‘분열’이다. 그러다가 결국 대한민국이라는 하나의 국호 아래 “두 국민 국가”라는 침울한 풍경만 남았다. 한국의 정치사를 단순화 해보자. 해방 후 지금까지 한국의 정치는 이승만과 김구의 대결 구도 그대로다. 이승만/김구, 친미/반미, 반북/친북, 보수꼴통/친북좌빨, 박정희/김대중, 국가/민족으로 양분된 대립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아마 이런 대결에는 조선시대 영남학파/기호학파, 이언적/서경덕의 구도가 그대로 계승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들이 체결한 FTA에 대해서도 정권이 다른 진영으로 바뀌면 바로 반대로 돌아선다.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결정한 정권에 참여한 인사들도 정권이 다른 진영으로 넘어가면 격렬한 반대론자로 바뀐다. 미군이 낸 사고에는 격렬한 저항 투쟁을 하지만, 중국 해적에게 우리 해경이 맞아죽어도 그 흔한 데모 한 번이 없다. ‘독립’이라는 높은 시선에서 태도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진영’이라는 낮은 기능에 갇혀 있기 때문에 유사한 사안에 대해서 미국에 대하는 태도와 중국에 대하는 태도가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국익’이라는 전략적인 높이가 아니라 ‘진영’의 논리로 문제를 다루면 같은 사안을 놓고도 이 정권에서는 이렇게 행동하고 저 정권에서는 저렇게 행동하는 기능적 태도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정치가 기능에 갇히듯이, 정해진 지식을 지키고 전파하는 지식 기사들은 넘쳐나도 세계를 응시하며 그 시대에 맞는 지적 해결책, 즉 지식을 생산하는 지식인이 귀해졌다. 타도하는 자리에 올라앉으려는 반항아는 많아도, 국가의 명(命)과 틀과 비전을 바꾸는 일에 헌신하는 혁명가는 사라졌다. 반항만 넘치고 혁명은 씨가 말랐다.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일은 ‘명’(命)이 바뀌는 일이고, 이것이 바로 진정한 혁명이다. 동일한 단계 내에서 의자 싸움하는 일은 반항일 뿐이다. 지금 우리에게 기능적 반항을 넘어서는 혁명 역랑이 있기나 한가. 이제 우리에게는 기능에 갇혀 내뱉는 순결한 사자후가 아니라 전략적 단계로 올라서려는 굵고 거친 발걸음이 필요할 것이다.교육에서 기능인을 양산하기 때문에 정치가 기능적이다. 우리 교육은 내용을 정해놓고 그것을 숙지하는 것으로 이뤄져왔다. 자신 안에서는 숙지해야 하는 내용이 주도권을 갖지 실제 자신은 그 내용들이 들락거리는 통로나 중간 역으로만 존재한다. 자신의 의식이나 사유에서 자신이 주인 노릇을 하지 못한다. ‘생각’하는 인재가 아니라 기준을 적용만 하는 ‘판단’ 주체로 길러진다. ‘문제’나 ‘불편함’을 발견한 후, 그것을 해결하려고 집요하게 붙들고 늘어지는 사람이 아니라, 정답을 찾는 사람으로만 길러지는 것이다. 독립적 주체가 아니라 종속적 주체다. 이렇게 배양된 인재들은 이미 숙지한 내용을 기준으로 쓰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판단에 빠지기 쉽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전쟁’이라고 하면 무조건 피해야 하는 것, 해서는 안 될 것으로서, 악한 것으로 정해놓고 대화를 시작한다. 내가 미국이나 일본 학생들과의 대화를 통해 경험한 바에 의하면, 그들은 ‘전쟁’을 무조건 피해야 하는 것으로 정해놓지 않고 질문을 했다. 즉 전쟁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지 등을 묻는 것이다. 전쟁을 피해야 하는 것으로 정해놓은 문명과 전쟁을 통제하고 제어하며 주도권을 잡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개방적 태도가 일구는 문명은 크게 차이가 난다. 세계에서 마주치는 대상이나 사건에 대하여 도덕적 판단을 쉽게 하는 인재들은 숙고하고 사고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세계의 진보는 이미 굳건히 자리 잡은 기준이나 가치관으로 하는 ‘판단’에 의존하기보다는 개방적으로 진행되는 ‘사유’에 더 크게 의존한다. ‘판단’에만 빠진 채 ‘사유’ 능력을 기르지 못하면, ‘판단’이 제공할 수 있는 문명만 누리지 ‘사유’하는 능력이 제공하는 더 높은 문명은 누릴 수 없다.새해 첫날, 새해의 희망을 담은 성스러운 기원을 하려고 일출을 보러 온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경포119안전센터 앞, 소방차를 세워야 할 곳에 주차를 해 놓았다. 소방관들이 일일이 전화를 해서 차를 빼는 데에만 40분이 걸렸다 한다. 경포119안전센터 관계자는 “대부분이 해돋이를 보러 온 사람들이었다. 계도 차원에서 과태료를 부과하진 않았다”고 한다. 얼마 전 KTX를 타고 가는데, 딸 둘을 데리고 젊은 부부가 나와 같은 칸에 탔다. 딸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는 내내 큰 소리로 전화 통화를 하였다. 보다 못한 어떤 사람이 지나가는 역무원에게 전화 좀 통로로 나가서 하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역무원은 그냥 지나친 후, 방송으로 기차 안에서의 예절에 대해서 간단히 방송하는 것으로 끝냈다. 여기 두 풍경에서 소방차 세울 자리에 주차를 한 사람들이나 기차 안에서 전화 통화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 편리한 기능을 좇느라 시민으로서의 책임성이나 존엄성을 포기하였다. 이런 부모들 앞에서 어떤 교육이 이뤄지겠는가. 그리고 공적 기관의 책임자들도 당연히 행사해야 할 ‘강제력’을 전혀 행사하지 못했다. 모두 당시의 불편함이나 정서적 갈등을 피하는 등과 같이 기능적으로 편하려고만 했지, 누구 하나 독립적이고 공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지 못하다. 모두 기능에 빠져 있다.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으로는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도달했다. 지금 정도의 시민의식, 지금과 같은 인재 배양 방식, 지금과 같은 정치 수준으로 도달할 수 있는 높이로는 여기가 가장 높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할 일은 이미 다 해버린 민족인지 모른다. 이제는 어떤 주장도 어떤 정책도 새롭거나 참신하지 않다. 모두 전에 들어봤던 얘기들이다. 알고 있는 것이나 익숙한 것을 넘어선 “다음”을 말 할 수 있는 것이 지혜다. 이제 우리는 한 층 높은 단계의 지혜로 재무장하여, 이 한계를 돌파하려는 용기가 절실하다. 아인슈타인이 말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바보는 다른 결과를 기대하면서 같은 방법을 계속 쓰는 사람.” 귀담아 듣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하는 민족이라야 산다.”는 함석헌 선생의 말씀이 다시 들린다.<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건명원 원장>

  • 기획
  • 기고
  • 2018.01.10 23:0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25. 무술년, 다시 돌아본 오수의 개 - 오수견도 진돗개처럼 국내 대표 품종에 포함돼야

사람은 짐승이라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만 / 人恥平爲畜(인치평위축)공공연히 큰 은혜를 저 버린다네 / 公然負大恩(공연부대은)주인이 위태로울 때 주인을 위해 죽지 않는다면 / 主危身不死(주위신부사)어찌 족히 개와 같다고 논할 수 있겠는가 / 安足犬同論(안족견동논)무술년(戊戌年) 개띠의 해가 오니 사람보다 나은 개를 추모하며 지은 「견분곡(犬墳曲)」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견분곡은 고려시대 문인 최자(崔滋, 1180~1260)가 지은 『보한집(補閑集)』에 실려 있는 작자 미상의 노래이다. 이인로의 파한집을 보충한다는 의미로 지은 시문집인 보한집에는 오수의 개 설화와 더불어 전라도 안찰사를 지낸 그가 살펴봤던 가치 있는 글이 많이 담겨 있다. 그를 정계로 천거하며 인연이 깊은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1200년 오수역(獒樹驛)이란 시구를 남겨 고려시대부터 의견 이야기와 더불어 유명했던 오수에 대한 지명의 근거를 남겨 놓기도 했다.오원에서 점심때 떠나 / 烏園侵午出오수에서 잠깐 쉬었네 / 獒樹片時留사슴은 숲 속에서 한가히 졸고 / 閑鹿眠深草새는 계곡 물에 몸을 적시네 / 幽禽浴淺溝산은 눈에 가득한 그림이고 / 山供滿目畵바람은 내 가슴 상쾌하게 해주네 / 風送一襟秋두 차례 대방국(남원)에 들어왔으니 / 再入帶方國승경(勝景) 속에서 맘껏 즐겼구나 / 天敎飽勝遊- 이규보,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전집 제9권(1241년), 「남원(南原)으로 갈 때 오수역(獒樹驛)에서 누상(樓上)의 벽에 붙은 시를 차운하다」오수(獒樹)는 개를 뜻하는 한자 오(獒)를 사용한다. 익숙하지 않은 한자지만 개 중에도 특히 사람에게 잘 길들여진 개, 4척(약 120㎝) 이상의 큰 개를 특별히 가리켜 개 오(獒)자라 한다고 하니 글자를 다시 눈여겨보게 된다. 큰 개 오(獒)와 나무 수(樹)자를 합친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의 지명은 한자만 살펴보아도 특별한 의미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디 오수뿐이랴.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개, 말, 토끼, 닭, 쥐, 뱀은 물론이고 곰, 호랑이 같은 야생동물이나 용과 같은 신화 속 영물까지 갖가지 우리에게 친숙한 동물들을 지명 속에 남겨왔다. 그러나 막상 이와 같은 지명의 사연이 오늘날까지 지역의 자산으로 남겨져 있는 예는 많지 않다.오수면 근방은 고려시대 남원부 둔덕방과 남면으로 불리던 곳이었으나 특별한 개의 이야기가 지역에 전해져 내려와 지역민들이 이를 지명으로 삼기 원했고, 주민의 요청 끝에 명칭 변경이 승인되어 1992년 오수면으로 확정되게 되었다. 신라시대의 실화로 추측되는 이야기가 천년을 넘어 구전되다 지명에 짙게 남겨진 오수견 사연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임하필기』 등에 전해지고 있다.김개인(金蓋仁)은 거령현(居寧縣) 사람인데 집에서 기르는 개를 몹시 사랑하였다. 하루는 개인이 출행하는데 개가 따라 왔다. 개인이 술에 취하여 길가에서 잠이 들었는데 들불이 일어나 사방에서 타들어오니, 개가 가까이 있는 내에 뛰어들어가 몸에 물을 적셔 와서는 개인이 잠들고 있는 주위를 뒹굴어 풀에 물기를 뿌렸다. 이 행동을 반복하여서 불은 껐으나 개는 기진하여 죽고 말았다. 개인이 술에서 깬 뒤에 죽어있는 개의 모습을 보고 노래를 지어 슬픔을 표하고 봉분을 만들어 묻어 주고 지팡이를 꽂아 표시하였더니, 그 지팡이가 잎이 피는 나무가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 지명을 오수(獒樹)라 하였으니 악부(樂府) 중에 〈견분곡(犬墳曲)〉은 바로 이것을 읊은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9권 「전라도 남원도호부」오수의 이야기인 줄은 몰랐어도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어딘가에서 전해 들었을 법한 이 이야기는, 현대에 들어 이 의견(義犬)을 기리기 위해 노력해온 지역 주민들과 지자체에 의해 다양한 기념과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다.원동산 공원에 세워진 의견비(義犬碑)는 오랜 세월 풍파를 겪으며 마모돼 글씨를 알아보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지만 상리 천변에서 발견되어 세워지기까지의 이야기도 드라마틱하다. 의견비에 대한 기록은 1923년 임실군지에 충구비인 의견비(義犬碑)가 있다는 기록이 있었으나, 큰 홍수로 의견비가 사라져 실체를 알 수 없었다. 이후 1930년경 오수면 상리에 사는 주민의 꿈에 나타나 당시 전라선 철도개설공사 현장인 상리 천변에서 발굴되었으나 의견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이에 의견비 위에 고사를 지내니 움직일 수 있게 되어 논둑으로 옮겨졌다가, 현재의 장소인 오수면의 공원으로 1939년 다시 옮겨져 오수의 자산이 되었다. 마모되어 뜻의 의미가 퇴색된 의견비는 지역민들과 전문가들의 연구에 의해 일부 해독돼 오수견의 충성심을 입증해주고 있다. 무게 5톤, 높이 218㎝, 넓이 98㎝, 두께 28㎝의 의견비는 육조체로 쓰여진 석문으로 되어있어 고려시대 중기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짐작하게 한다. 또한, 개의 발자국 같은 문양과 개의 상반신을 추측할 수 있는 신비로운 문양이 시비를 세우는 데 뜻을 함께 한 사람들의 명단과 함께 새겨져 있는 명물로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되었다.무술년(戊戌年)의 무가 땅(土)의 기운을 의미하는 황색을 뜻하다 보니 2018년 새해를 황금개의 해라 한다. 행운의 감을 지닌 황금개라 하지만 실상은 누런 개에 가까울 것이다. 우리네 고향 마을 어귀 어디에서나 꼬리 치며 반기던 누렁이 황구(黃狗)들의 해인 것이다.흔히들 잡종견을 일컬어 똥개라 불러왔지만, 진도의 진돗개, 경주의 동경개, 경산의 삽살개 그리고 북한의 풍산개와 같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품종의 토종개들이 여럿 존재한다. 이 같은 견종들 사이에 임실 오수개도 마땅히 포함되어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 오늘날 임실군에서는 의견 이야기를 활용한 지역축제나 의견비만이 아니라 고증과 연구를 통해 당시 오수견의 모습을 복원하려고 노력하며 재조명을 하고 있다.연구에 따르면 오수견은 몸에 물을 묻혀 불을 꺼야 했으므로 장모종이었을 것이라는 의견과 덩치도 진돗개보다 조금 큰 중형견이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여러 고증을 거쳐 토종견의 혈통을 이어받아 복원된 오수견이 얼마 전 평창올림픽 성화 봉송의 길에도 함께 했다. 오수견의 계속된 관심과 지원이 이어져 우리 고장의 이야기와 더불어 토종 오수개가 올곧이 복원됨을 인정받아 대표 토종개로 우리 곁에서 사랑받기를 바란다.개는 사람과 가장 친근한 동물로서 이제는 반려견이라는 명칭을 얻으며 가족처럼 지내는 존재가 되었다. 견분곡에서 노래했듯이 은혜를 저버리지 않는 타고난 충성심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영특함으로 사랑을 받다 보니 우리 주변에는 개에 관련된 여러 속담과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그중에서도 개 짖는 소리에 묵은 재앙이 나간다는 속담이 유독 마음에 와닿는 연초이다. 땅의 기운이 강한 새해를 맞으며 다사다난했던 2017년의 묵었던 재앙이 물러가고 황금개가 상징하는 행운과 복이 만방에 가득하길 기원한다.

  • 기획
  • 기고
  • 2018.01.05 23:02

[우리고을 인물 열전 19. 남원시 주생면] 서쪽 문덕봉 동남쪽 비옥한 평야…물 맑고 공기 좋은 천혜의 땅

주생면은 조선시대 이언방(伊彦坊), 주포방(周浦坊), 자성방(者省坊,南生坊) 등 3개 방이 있었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주포와 남생의 이름을 따서 주생면(周生面)이라 칭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원시에서 남서쪽으로 8㎞ 가량 떨어진 주생면은 서북쪽이 구릉성 야산, 동남쪽이 평야지대로 형성돼 있다. 동쪽으로 남원시와 송동면에 접하고, 북쪽으로 대산면, 서쪽으로 대강면, 남쪽으로 금지면에 마주하고 있다. 남원 시내에서 길게 흐르는 요천이 주생면 너른들 중심을 관통하며 생명수를 공급, 농사짓기 알맞은 고장이다. 방동주 주생면장은 “주생면은 쌀과 배, 복숭아, 포도, 멜론 등 고품질 농작물을 생산하는 전형적인 농촌지역이면서 교통 여건이 좋아 남원 시내는 물론이고 전주와 광주, 여수 등 도심 접근성이 탁월하다. 부족함이 없는 살기 좋은 고장”이라고 소개했다. 남원시 주변 전체 읍면 중에서 시내권 접근성이 가장 좋다고 할 수 있다. 주생면 일대에는 KTX철도와 완주~순천간 고속도로, 광주~대구간 88고속도로 등 주요 교통망이 십자로 통과, 주민들은 일찍부터 전국 1일 생활권 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 전체 면적은 26.33㎢이고, 경지 면적은 밭이 1.878㎢, 논이 7.626㎢이고, 임야는 10.637㎢이다. 사람이 살기 좋은 고장이지만, 다른 농촌지역과 마찬가지로 인구는 감소세여서 9월 현재 1,957명이다. 9개의 법정리와 17개 행정리는 상동리(상동, 부동), 중동리, 낙동리, 내동리(내동, 광촌), 도산리(도산, 상도), 지당리(대지, 소지, 효동), 정송리(정충, 반송), 영천리(영촌,유매), 제천리(제천, 서만)이다. 이에 딸린 자연마을은 30개이고, 주생면사무소는 주생면 요천로 821(제천리 9-4)에 자리잡고 있다. 유매마을은 남양방씨 집성촌이다. 주생면의 명산은 서쪽의 문덕봉(598.1m)이다. 위로 대강면, 아래로 금지면에 걸친 문덕봉은 대둔산, 구봉산 등과 함께 전북의 5대 바위명산으로 꼽힌다. 문덕봉에 올라서서 남으로 장쾌하게 뻗어나간 산줄기를 따라 솟아오른 삿갓봉(629m)과 고리봉(708.9m)을 바라볼라치면 마치 천군만마를 거느린 대장군의 위세를 실감할 지경이다. 문화재급 유물로는 지당리 석불입상, 낙동리 석조여래입상, 상동리 용장서원, 중동리 윤영채 가옥, 영천리 사계정사와 유천서원, 제천리 구천사, 내동리 비홍산성 등이 소재한다. 북서쪽이 막히고 동남쪽이 훤히 터진 비옥한 평야지대, 그 중심부를 요천이 가로지르는 곳 주생면.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남원 48방의 명당을 손꼽을 때 첫째가 이언, 둘째가 지당이었다고 하니, 예로부터 물 맑고 공기 좋고 물자가 풍요로웠던 주생면은 인물 나기 좋은 고장이었다. △정계상동리 출신인 양창식(梁昶植, 1930년 3월 15일 ~ )씨는 3선(11, 12, 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육군사관학교 제10기 출신의 양 전 의원은 1981년 제11대 총선 때 민주정의당 후보로 남원순창임실 선거구에서 민주한국당 이형배 후보와 동반 당선하며 국회에 진출했다. 내동리 출신인 조찬형(趙贊衡, 1938년 7월 25일 ~ )씨는 정치인, 법조인이다. 고등고시 사법과 제13회 합격, 광주고검 부장검사 등을 지냈다. 1988년 제13대 총선 때 평화민주당 후보로 남원순창임실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했다. 제14대 때 양창식 의원에 패했다가, 15대 때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출마해 양 후보를 꺾고 당선하는 등 재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상동리 출신인 하대식(941년 3월1일~ )씨는 육군사관학교, 건국대행정대학원을 나왔다. 전라북도의회 제7·8·9대 도의원을 지냈다. 유매마을이 고향인 방규태씨는 1991년 출발한 남원군의회 초대의원을 지냈다. 내동의 조성구, 서만의 김길호, 대지의 장복수씨도 기초의원으로 활동했다. △관계지당리 대지마을이 고향인 윤영관(65) 서울대명예교수는 김대중 정부 햇볕정책의 대표적 지지자였고, 노무현정부 때인 2003~2004년에 제32대 외교통상부장관을 지냈다. 청와대 윤영찬 국민소통수석은 전주에서 태어난 그의 친동생이다. 정송리가 고향인 양병구씨는 완주군수를 거쳐 1994년 1월3일자로 남원군수로 부임, 그해 10월까지 근무했다. 흥부문화권 개발 추진, 농촌도로 158㎞ 군도로 승격 등 고향발전에 노력했다. 대지마을 출신인 윤기호씨는 남원부시장을 지냈다. 김상호 도청 사무관, 박경윤 남원시청 과장, 박정옥·박용재 전 면장 등도 주생이 고향이다. △법조계도산리 출신으로 원광대 법학과를 졸업한 방기호(66) 전 법제처장은 국무총리행정심판위원회 상임위원 등을 역임했다. 지당리 소지마을이 고향인 방극성(62) 전 광주고법원장은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법무법인 동인 대표변호사 김진권(67·대지) 전 서울고법원장, 부장판사 출신의 오진환(내동) 변호사, 윤영환(대지) 변호사 등도 주생면 출신 법조인이다.△군경도산리 상도가 고향으로 남생초, 금지중 출신인 방향혁(57)씨는 학사장교 제5기 출신으로 2013년 육군 준장에 진급, 탄약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1981년 출범한 학사사관제도 아래에서 장성 승진을 한 사람은 10명도 채 안된다. 영천리 유매가 고향인 방춘원(62)씨는 익산, 김제, 남원경찰서장, 전북경찰청 보안과장 등을 역임했다. △교육계도산리의 이강엽(66)씨는 도교육청 장학관, 전주서천초교 교장을 거쳐 2009년 임실교육장을 지냈고, 김학권(65) 전 원광대 철학과교수는 원광대 인문대학장, 한국주역학회 회장, 대한철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김평기 원광대 경영학부 교수, 양기환(효동) 초등교장, 방극성 변호사의 부친 방계원(소지) 중등교장 등이 교육자로 활동했다. △경제계주생면 출신으로 지역에 큰 족적을 남긴 경제계 인사는 남원에서 니트 제품 생산업체인 화림공업을 경영한 심재명 사장(2015년 사망, 정송리 반송)이다. 재일동포 실업가 심 사장의 고향사랑에 대해 주민들은 십시일반으로 성금을 모아 주생면사무소 앞에 ‘심재명 선생 공적비’를 건립했다. 공적비에 따르면, 1926년생인 심재명 사장은 일제에 징용 당한 부친의 생사를 광복 후에도 확인할 길이 없자 23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부친을 찾았다. 하지만 귀국할 돈이 없어 현지에서 막노동하며 돈을 벌었고, 1967년 일본 야마구찌현에서 여성용 란제리 기업 히로세, 세화 등 4개사 7개 공장(임직원 1200명)을 세워 경영했다. 그는 고향을 잊지 않았고, 결국 귀국했다. 1988년 남원시 노암동에 내의생산업체 화림공업(주)를 설립, “진정한 번영은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공존공영에 있다”는 신념을 적극 실천했다. 그는 고향인 반송노인회관, 파출소, 자율방범대, 남원여상 강당신축, 남원고 냉난방기와 음향시설 등 각종 기관단체의 시설과 장비, 차량구입에 거금을 쾌척하면서 항상 부족함을 미안해 했다고 한다. 그는 남원시민 2,179명의 일본 선진지 견학 및 남원 출신 도공 심수관 가문과의 교류 등에 심혈을 기울였다. 1992년 수출 500만불탑 수상, 상공부 장관상, 국세청장상 등 정부 표창도 그의 삶을 말해준다. 이밖에 제천리 출신인 박한근 한성신소재 대표는 재경주생향우회장을 맡아 서울과 지역의 가교역을 하고 있다. 중동리의 박철규씨는 남원새마을금고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문화언론체육계김종량(76)씨는 건국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전북일보·전라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언론인으로, 언론중재위원회 전북지역 중재위원 등을 역임했다. 김동수씨(70) 백제예술대 문화콘텐츠학과 명예교수는 시인이자 미당문학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박태주(64)씨는 1979년 단편소설 화려한 마을로 문단에 데뷔한 소설가, 아동문학가다. 제천리가 고향인 박정선(55)씨는 2010년 6월 열린 제36회 전주대사습놀이 판소리 명창부에 출전, 장원(대통령상)을 하며 명창 반열에 올랐다. 강도근, 오정숙, 한해자 선생 등에게 사사했으며, 전남 구례에서 섬진강판소리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 기획
  • 김재호
  • 2018.01.03 23:02

[전라도 정도 1000년, 창조와 대안의 땅 '전라북도'] ① 프롤로그 - 조선왕조 발상지, 왕도 역사 품은 호남 유일의 공간

2018년은 전라도(全羅道)라는 명칭이 생긴지 1000년이 되는 매우 뜻 깊은 해이다. 천년 전인 1018년, 고려 현종은 기존의 전주일대의 강남도와 나주일대의 해양도 지역을 합쳐 전주(全州)와 나주(羅州)를 잇는 길 즉, 도(道)로 연결된 지역을 포괄해 광역 행정구역인 전라도(全羅道)를 설치했다. 이 명칭이 조선으로 계승되고 현재의 대한민국까지 이어져 현존하는 8도 명칭 중 가장 오래된 천년 전라도가 된 것이다. 전라도 명칭이 생긴 이후 300여 년이 지난 뒤에야 경상도(1314년), 충청도(1356년), 강원도(1395년), 평안도(1413년), 경기도(1414년), 황해도(1417년), 함경도(1509년) 등이 생겨나 전라도 명칭이 타 지역에 비해 300~400년이나 오래되었음을 보여준다.따라서 전라도 천년을 맞이하는 2018년, 전라도 정명 천년의 의미를 되새기며 우리 역사의 긴 흐름 속에서 전라도 가운데 특히, 전라북도 지역의 역사적 역할과 의미는 새롭게 주목되고 있다.우리나라 역사 전개과정에서 전라도지역은 크게 조선을 먹여살린 호남평야지역(전주익산완주김제정읍)과 한중교류와 연안 항로의 거점 서해안권(군산부안고창), 그리고 새로운 가야 세력의 거점(남원진안장수)과 문화 교차로 역할을 한 지역(무주임실순창) 등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같은 전라도 천년의 역사를 전라북도를 중심으로 다음과 같은 주제로 개관하여 새로운 천년을 조망하고자 한다.△대한국호 발상지 전라북도대한(大韓)이란 나라이름은 1897년 10월 고종이 기존의 나라이름 조선을 폐기하고 새롭게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선포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 명칭은 고종이 나라의 독립과 자존을 확립하기 위해 중국과의 예속관계를 단절함과 동시에 나라를 황제국가 체제로 일신하는 국가체제 변화를 모색하며 선택한 명칭이었다. 이때 고조선의 역사를 계승하면서 독립적인 명칭을 찾은 것이 마한, 진한, 변한을 총괄한 대한(大韓)이란 표현이었다. 그런데 삼한의 출발인 마한이란 명칭은 바로 고조선의 마지막왕 준왕이 전라북도 익산지역에 피난하여 시작된 명칭이었다. 결국 전라북도는 고조선의 정통을 이은 마한의 땅으로 대한(大韓) 국호의 발상지로서 우리 역사의 근간 지역임을 보여준다.△백제중흥, 부흥, 부활의 땅 전라북도백제는 동아시아 해양교류를 통해 문화를 새롭게 창조하고 전파한 해양국가였다. 이 같은 백제문화의 거점인 익산지역은 백제 무왕이 수도를 옮겨 백제의 마지막 왕도가 조성된 백제 중흥의 터전이었다. 또한 660년 백제가 붕괴된 직후 백제를 다시 일으키기 위한 부흥군의 핵심 거점인 주류성이 현재 부안 우금산성으로 확인되고 있다. 즉, 부안지역은 백제역사 부흥의 공간이기도 하다. 또한 900년 후백제가 전주에 도읍하여 결국 백제는 다시 부활하였다. 이같이 전라북도는 백제의 중흥의 터전이자 부흥의 거점이며 결국 백제를 부활시켜 백제를 살려낸 백제 재창조의 땅이었다.△왕도(王都)의 땅 전라북도900년 견훤은 세력을 키웠던 무진주(현재 광주)에서 수도로서 전주를 선택하여 후백제를 공식 출범시켰다. 37년이란 기간이었지만 전주는 국가의 수도로서 그에 걸맞는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모든 부문의 중심지였다.또한, 전주는 전주이씨의 관향(본관도시)으로서 조선왕조의 원형공간으로 자리하고 있다. 특히, 고려말 우왕때 남원 운봉의 황산(荒山)에서 대승리를 거두어 전국적인 명성을 얻어 새로운 왕조탄생의 원동력을 갖게 되었던 전북지역은 태조의 영정을 모신 경기전이 마련되고 조선왕조실록을 모신 사고가 설치되고 임진왜란을 거치며 어진과 조선왕조실록이 유일하게 보존되어 조선 역사수호의 도시로서 위상을 드높였다. 이같은 백제의 마지막 수도, 후백제 왕도, 조선왕조의 발상지로서 전라북도는 왕도의 역사를 품은 호남의 유일한 공간이다.△모두가 하나되어 평등한 대동(大同)과 개벽(開闢)의 땅 전라북도전라북도 지역은 모두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의 동학 정신이 가장 넓게 유포된 지역이다. 이 같은 특성은 1894년 조선왕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구호아래 동학농민혁명으로 꽃 피워졌다. 이를 통해 우리 역사상 최초로 민주주의적 통치인 관민협치를 실행한 곳이었다. 또한 외세의 침입에 맞서 척양척왜(斥洋斥倭)를 외치며 분연히 일어난 절의의 땅이었다. 이러한 대동과 변혁의 정신은 종교적으로 계승되어 증산 강일순의 후천개벽과 소태산 박중빈의 정신적 문명개벽으로 발전되어 새로운 세계로의 지향점을 제시하였다.△창조와 대안의 땅 전라북도전라북도는 앞서 개관한 것처럼 고조선의 준왕이 새로운 나라를 이룩한 곳으로 역사적 위상을 자리하고 있다. 또한 백제의 무왕은 당시 수도였던 사비(지금의 부여)를 떠나 백제를 새롭게 일으켜 세워 새로운 수도를 만든 백제 중흥의 땅이었다. 그리고 660년 백제가 붕괴한 후 663년 백제부흥군이 현재의 부안 우금산성지역인 주류성에서 왜의 지원군과 함께 백제 부흥을 꿈꾸었던 지역이다. 더욱이 668년 고구려가 붕괴한 후에는 고구려 부흥군이 익산지역에 옮겨와 보덕국을 세워 신라와 함께 당과 맞서며 새로운 출발을 모색하였던 대안과 재창조를 모색한 땅이었다.한편, 통일신라시대 여전히 백제인으로 인식된 승려 진표는 불교의 미래 구세주인 미륵의 이념을 퍼트려 백제유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으며 후백제 견훤은 전주를 중심으로 해양대국 백제의 역사를 새롭게 부활시켰던 곳이다. 또한 고려말 이성계는 새 왕조 창출의 의지를 전주에서 피력해 조선왕조의 발상지 전주의 역사성을 극명하게 부여해 주었으며 전봉준을 필두로 한 전북의 사람들은 반역으로 낙인찍혔던 정여립의 아픔을 극복하고 진정한 대동세계를 이루고자 새 역사를 만들었다.또한 진안장수 및 남원 일대 지역은 철기의 생산을 통해 고대국가 성장의 동력을 구성한 공간으로 가야의 중심이자 백제중흥의 기축으로 역할해 한국고대사의 새로운 문화중심으로서 부각된 곳이었다.따라서 전라북도 지역은 고조선이래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시대적 과제를 극복하고 대안을 찾아 새로운 역사를 창조한 현장이었다. 이 같은 전라북도의 역사적 전통과 경험은 결국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지역갈등, 남북 통일 및 동아시아 평화와 인류 공영을 위한 역사적 혜안의 터전이다. 이러한 전라북도의 역량을 찾아 새로운 미래 천년 역사를 만드는 창조력을 발휘하자.

  • 기획
  • 기고
  • 2018.01.02 23:02

[철의 궤도: 전라선 철길 답사기 ⑬ 금지역, 그리고…] 전북 이야기 실은 기차, 이제 강 너머 남쪽으로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금지역 지난 12월 8일, 남원시 금지면. 신월보건진료소, 금지초등학교 등과 함께 금지역이라는 표기가 화살표 모양의 이정표에 박혀 있었다. 그 크기가 크지 않아 자칫 못 보고 지나칠 뻔했다. 아무래도 서두르지 말고 싸드락싸드락 댕기라고 그런 게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농협 건물을 끼고 들어가 우체국과 보건소를 지나 좁은, 그러나 곧게 뻗은 길로 쭉 들어가면, 그 끝에는 금지역이 서 있다. 파란 직사각형 간판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얇은 금속판을 세워놓았는데, 다른 역의 그것과 비교해보면 좀 볼품없다는 느낌이 먼저 든다. 얇은 금속판일 뿐이라, 바람이 불면 웅 웅 하니 우는 소리가 들린다. 그 다음에는 지붕이 눈에 들어온다. 역사(驛舍) 지붕으로서는 전형적이지 않은 것이, 마치 눈썹 아래까지 내려오는 더벅머리처럼도 보인다. 주차된 자동차는 많은데, 인기척은 없었다. 대합실로 들어가는 문도 없었다. 원래는 있었지만, 여객취급 중단 이후로 문을 떼어내고 그 자리를 아주 깔끔하게도 벽돌로 메워놓았다. 벽이 된 문에는 금지역은 직원이 없는 무인역입니다라 쓰인 안내만 붙어 있다. 당연히 겨울이라 그렇겠지만, 이파리 하나 없이 서 있는(또 일부 가지는 죽은 것처럼 보였다) 벚나무들이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아무 것에나 감정을 이입하고 보는 인간의 몹쓸 감성일지도 모르겠다. 금지역은 1933년 남원~곡성 구간 개통 때 주생역, 곡성역과 함께 문을 열었다. 주생역과 곡성역 사이, 딱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는데, 두 역과의 거리는 6km 정도다. 문을 열 때는 역원배치간이역이었다가, 1980년에 보통역으로 승격한다. 여객수송실적만 보면 의아할 수도 있겠다. 1979년 금지역을 이용한 이가 모두 8만8853명이었는데, 같은 해 옹정역 이용객이 14만3187명으로 더 많았기 때문이다. 옹정역은 건물도 측선도 없는 본격 간이역이었다는 점을 잊지 말자. 그러나 금지역은 옹정역이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었다. 1979년 금지역이 처리한 화물은 발송이 3만2750톤, 도착이 4545톤으로 모두 3만7295톤이었다. 전주나 북전주, 남원 등 도시나 공업지대의 역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비슷한 규모의 주생역이나 오수역 등과 비교하면 꽤 수요가 있는 편이었다. 금지역이 할 수 있었던, 아니 할 수 있을 뻔했던 것이 또 하나 있다. 일제 강점기, 송정리역(지금의 광주송정역)에서 광주, 담양, 순창을 지나 경남 진주, 마산까지 이어지는 철도 노선 건설 계획이 있었다. 1922년에 이 가운데 서쪽 끝에 해당하는 송정리~광주~담양 구간이 먼저 개통됐다. 이를 전남선이라 불렀다. 송정리~광주 구간은 광주선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열차가 운행되고 있다. 하여간 이후로도 공사는 계속된 듯한데, 순창에 남아 있는 향가터널과 향가유원지 교각이 그 흔적이다. 그러다 1944년, 전쟁물자가 부족해진 일제가 공사를 중단하고 이미 깔려 있던 철길도 철거해 버렸다. 이 철길이 전라선과 만나기로 예정돼 있던 곳이 바로 금지역이다. 어떻게 보면, 전라선과 경전선이 만나는 지금의 순천역과 비슷한 역할을 부여받을 뻔했던 셈. 광복 후인 1965년에 광주~금지 구간 공사를 재개한 기록이 있지만, 이 또한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만약 이 철길이 이어졌더라면, 그 모습이 좀 달라졌을까? 그렇게 그저 평범한 시골 역으로 남게 된 금지역은 1998년 전라선 노반 개량에 따라 한 차례 자리를 옮겼다가 2007년, 여객 취급 업무를 손에서 놓았다. 이듬해에는 무배치 간이역으로 격하됐다. 최근 광주~남원~대구 사이를 잇는 달빛내륙철도 건설이 논의되고 있지만, 논의되는 노선을 지도에서 짚어보면 금지역이 설 자리는 없어 보인다. 사람 발길이 끊어진 지 거의 10년, 플랫폼 바닥의 블록 사이로 풀들이 올라와 있었다. 역명판 같은 시설물들은 철거됐고, 이제는 다만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역 이름 쓰인 간판이 네 개 있었고, 녹이 슬어서 삭아서 없앴지. 여기 하나, 저 짝에 하나 그렇게 있었는데, 인자 관리를 않고 사람이 없으니까. 태풍이라도 불면 위험하잖아요. 동행한 코레일 관계자의 설명에 납득이 되다가도, 그래도 뭔가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승강장의 지붕 시설물이라도 남아있는 것을 감지덕지해야 할까. 녹색 진행 신호가 들어왔다. 눈 깜짝할 새 KTX 한 편성이 지나갔다. 확실히, 관리되지 못한 시설물 같은 것이 바람에 날려 저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리는 열차의 진로를 방해하면 위험할 것도 같다. △에필로그: 다시 만날 그 열차 휙휙 지나가는 창밖 풍경을 보고 가만히 있노라니 마치 몇 분짜리 단편영화 같다는 생각도 해 본다. 같은 칸 앞쪽에서 아이가 부모에게 보채는 소리와 뒷자리에 앉은 승객의 휴대전화에서 울리는 문자메시지를 알리는 띠링띠링 하는 알림음, 문 여닫고 오가는 발소리 등. 기차가 달리며 내는 시-미-라-레-, 덜컹덜컹, 후두둑, 삐이이, 이런 소리에 고명을 올리듯 저녁 소리가 풍성해진다. 복도를 사이로 옆에 앉은 승객이 열차 안의 히터바람에 노곤해진 몸이 풀리는 듯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땅거미 진 어둠 속으로 가로등 불빛들이 고개를 든다. 주지하다시피, 한국 철도의 역사는 수탈을 빼놓고는 성립할 수 없다. 일제 강점기에 호소카와 가문이니 삼릉(미쓰비시)재벌이니 하는 자본가들이 달려들어 전라선 철도를 놓으려, 혹은 끌어들이려 했던 것도 결국 수탈과 관련이 있다. 태생은 그렇지만, 일단 놓인 철길은 어떤 식으로든 전북 사람들의 삶을 극적으로 바꿔놓았다. 이리동중 다니던 장하영 씨를 학교에서 집으로 또 집에서 학교로 데려다 줬으며, 춘포 살던 노동자들을 공단으로 실어 날랐고, 신리 주민 이정두 씨가 친구를 만나러 가게 해줬다. 오수 사는 김균자 씨에게도, 남원 사는 조효순 씨에게도 옛 기차의 추억은 선명하다. 그뿐이랴. 현대의 이리(익산)를 만든 것도 철길이었고, 산업화 시기 전주의 물류를 지탱했던 것도 전라선-북전주선 철길이었다. 내일로 티켓 한 장에 의지해 삼례로, 전주로, 임실로 돌며 전북을 맛보는 청년들 모습도, 고속열차 타고 남원에서 내려 봄내음(春香)에 취하는 여행객들 모습도, 모두 철길이 만든 풍경이다. 누군가에겐 평범한 일상일수도, 또 누군가에겐 특별한 여정일수도 있는 길. 봄꽃 나들이로 여행객 발길에 설렘 가득하던 봄, 태양이 아스팔트까지 녹일 기세로 쨍쨍 내리쬐던 여름, 단풍 익고 코스모스 만개해 향수 불러일으키던 가을, 기차 창밖으로 눈 이불 덮은 시골동네 풍경화 펼쳐지던 겨울까지. 다시, 금지역. 이곳에서 남쪽으로 조금 달리면, 물줄기 하나가 앞을 가로막는다. 관촌에서 만났던 그 물이다. 섬진강댐을 지나 순창 땅을 적시고 오수천, 경천, 옥과천과 한 몸이 되어 왔다. 강변으로는 자전거길이 깔끔하게 닦여 있다. 손이 시리고 귀가 얼고 머리는 땅땅 울리는 날씨였는데도, 자전거 여행객들이 유유히 길 따라 다리 밑을 지나갔다. 졸졸 소리 내며 흐르는 이 섬진강 물을 건너면 저편은 이제 전라남도 곡성 땅. 이야기를 가득 실은 남행열차 한 덩어리가 다리를 건넌다. 반질반질 빛나는 평행선, 전북도민의 사연을 침목 밑에 고이 쌓아 올린 전라선 철길은 이제 전북을 벗어나 달린다. /권혁일김태경 기자 <끝>

  • 기획
  • 전북일보
  • 2017.12.23 23:0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24. 굽이굽이 사연 품은 섬진강 - 긴 세월 수많은 사람 만나며 오감 아우른 감성 가득한 물줄기

2017년도 한 해가 저물어간다. 다가오는 2018년은 고려시대 현종 9년(1018년) 이래 전라도(全羅道)라는 지명이 만들어진 지 천년이 되는 해이다. 긴 세월 이 터에 자리 잡은 수많은 사연이 천년 동안의 시간을 지나며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전라도를 아우르는 많은 이야기 중에 오랜 세월 옥토를 적시고 곁을 주며 흘러온 섬진강(蟾津江)이 있다.섬진강은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팔공산에 위치한 데미샘을 발원지로 물을 내어 마이산의 물과 합쳐져, 전북의 임실, 순창, 남원, 전남의 곡성, 구례, 광양 등 전라도 땅을 고루 적시며 경남의 하동까지 끌어안고 남해로 흘러가는 물길이다.많은 고장을 머물고 흘러가며 이야기를 남긴 강으로, 지금이야 섬진강으로 불리지만, 지역마다 정감 있는 이름으로 달리 불리던 강이다. 하늘로 올라가는 봉우리란 뜻을 지닌 천상데미에서 흘러나와 오원천, 운암강, 옥정강, 앞강, 적성강, 순강(鶉江), 순자강, 방제천, 압록, 잔수진 그리고 모래가 많고 곱다고 하여 모래가람, 다사강(多沙江), 대사강(帶沙江), 사천(沙川), 용왕연, 섬강(蟾江), 두치강(豆恥江) 등 굽이굽이마다 달리 불리던 이름이 지역의 사연을 싣고 육백리를 흘러가는 아름다운 강이다.가녀린 데미샘의 물줄기가 임실 사선대에서 까마귀가 놀던 강이란 뜻의 오원천이 되었다가, 옥정호를 지나 순창 적성리에서 적성천이 된다. 옛날 이 강에는 신이 살던 미륵바위가 있었는데 배를 타고 강을 건널 땐 신이 노하지 않게 항상 마부가 말을 죽여야만 했다. 어느 날 최고원이라는 자가 말 대신 미륵바위의 팔을 칼로 베어버렸고, 미륵바위에서 나온 피로 강이 붉게 물들어 이 강에 적성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바위의 팔은 적성진 앞에 돌무더기로 변했다고 한다. 그 적성강이 흘러 남원에 닿아 순자강이 된다. 여성의 이름인듯한 순자라는 이름은 순한 여성의 마음같이 남원과 곡성 부근을 순하게 흘러서인가도 싶지만, 메추리 순자를 써 순자강(鶉子江)이다. 넓은 들판의 풍부한 곡식과 강에 넘쳐나는 물고기 등 많은 먹이가 있어 사시사철 갖가지 새들이 있고 특히 메추리가 많아 순자강이라고 불렀다 전해지지만, 순자강에 얽힌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옛날 남원 송동(두동리)에 살던 김취용(金就容, 전주 판관을 지냈다 함)이 병으로 몸져눕자, 아들 김정설(金廷卨)이 지성을 다하여 아버지를 간호했으나 별다른 차도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병환 중인 아버지가 메추리 고기를 먹고 싶다고 했으나, 메추리는 가을철이 되어야 돌아오는 겨울철 새로 더운 여름철에 메추리를 구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효성이 지극했던 김정설은 천지신명에 열심히 기원하고는, 메추리가 많이 서식한다는 순강을 찾았다. 강가에 가자 그의 정성이 하늘에 닿았는지 메추리 한 쌍이 하늘에서 나타나 강으로 떨어졌고, 김정설은 반갑게 그 메추리를 건져다 아버지에게 고아 드렸더니 아버지 병이 말끔히 나았다고 한다.이 이야기가 전해지자 나라에서는 그의 효성을 치하하여 정려를 내리고 이 강을 메추리가 떨어진 강이라 하여 메추리 순(鶉)과 효성 지극한 아들 자(子)를 합하여 순자강(鶉子江)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효자, 효부 이야기는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는 것이지만 메추리 이야기와 더불어 지역의 강 이름으로 전해져 오는지라 더욱 의미가 있다.순자강(鶉子江)은 두 갈래의 근원(根源)이 있다. 그 남쪽 근원은 장흥군(長興郡)에서 나와 북쪽으로 꺾여 동쪽으로 흘르다가 순천(順天)과 곡성(谷城)을 경유하여 압록 나루〔鴨綠津〕에 이르는데, 남원(南原)에서 온 북쪽 근원의 본류(本流)와 여기에서 합쳐진다. 압록 나루의 위로 수백 리 물길은, 산과 계곡을 뚫고 시내와 여울을 모으면서 굽이굽이 감돌아 흐르므로 뛰어난 절경이 많다.- 황현, 『매천집』 제6권 「영의정기」 중에서또한, 황현의 글을 보면 강의 아름다움의 근원을 말하는 곳에 순자강과 더불어 압록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압록은 대황강인 지금의 보성강이 섬진강과 만나는 곳으로, 푸른 초록의 두 강이 합해지는 곳이라 하여 합록(合綠)으로 불리다가 철새들이 많이 날아드는 것을 보고 합(合)을 오리 압(鴨)으로 바꿔 불러 압록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 푸른 압록은 구례에 이르러 잔잔한 물결을 뜻하는 잔수진이 되었다가 화개에서는 용왕연이 되고 모래와 관련된 이름들이 나오다 광양에 이르러 지금의 섬진강과 관련된 섬진(蟾津)이 등장한다. 고려가 새로운 시대를 연 후에 붙여진 이 이름은, 고려 우왕(1385년) 때 왜구가 지금의 섬진강 하구로 침입해 오자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 떼가 울부짖자 이에 놀란 왜구가 광양지역을 피해갔다고 하여 두꺼비 섬(蟾), 나루 진(津)을 써서 부른 이름이다.조선시대에는 현재의 섬진강을 섬강(蟾江)이라 불렀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섬진강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나루의 섬진이라는 호칭을 쓰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때에는 섬강을 구례 현으로부터 섬진나루를 지나 지금의 광양만에 이르는 물줄기를 가리키다가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지금의 섬진강 본류 전 유역을 섬진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작은 물줄기 데미샘에서 남해에 이르기까지 섬진강은 흐르는 물길만큼 수많은 세월과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온 우리의 강이다. 그래서 오랜 옛날부터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섬진강 강을 노래하는 시인이나 문학, 그림 그리고 소리가 발달하여 오감을 아우르는 감성 가득한 강이다.섬진강을 중심으로 동쪽은 동편제 서쪽은 서편제로 나뉜다 하지만, 본디 두 소리가 한 곳에서 출발했고 한 곳으로 흐르므로 두 소리 모두 웅숭깊은 소리를 지닌 이유는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에 근본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2018년 전라도 정도 천 년이 되는 해, 그 이상의 사연이 켜켜이 자리하고 있는 산하를 둘러보며 전라도 옥토에 가득한 우리 이야기들을 살뜰하게 살펴보자. 섬진강만 보더라도 옛 이름이야 남아있지만, 그 귀한 사연들은 아직 세상에 온전하게 빛을 내며 전해지지 않고 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된다는 옛말처럼 섬섬옥수 귀한 자원을 이제 하나둘씩 꿰어 천년을 더 할 이 땅의 의미를 되살려야 할 것이다.

  • 기획
  • 기고
  • 2017.12.22 23:02

삼례 책공방북아트센터 김진섭 대표 "한지·출판, 산업적으로 살리는 일이 완판본 정신 이어가는 것"

직지심체요절은 금속 활자로 인쇄된 책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책이다. 청주의 흥덕사에서 직지가 인쇄된 것은 1377년, 구텐베르크가 주조 활자에 의한 활판 인쇄에 성공한 것이 1450년이니 금속활자의 발명은 우리나라가 구텐베르크를 훨씬 앞선다. 그러나 인류의 기록문화는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술을 통해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가 유럽 전역으로 퍼지면서 종교개혁과 르네상스를 꽃피우는 역사의 대전환을 가져왔던 덕분이다. 인쇄의 역사가 곧 인류 문명의 역사를 만든 셈인데, 안타깝게도 시대는 다시 변했다. 종이와 인쇄술의 발명은 인류 문명을 바꾸어놓았지만 이제는 인터넷의 발달이 종이책의 운명을 위협하고 있다. 책의 존재가 위태로워진 시대, 종이책도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란 예견이 더해졌지만 종이책은 아직 유효한 존재다. 그 위태로운 시간의 끈을 붙잡아 우리에게 사라지거나 잊혀져가는 문명의 흔적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가를 일깨워주는 공간이 있다. 완주군 삼례읍 삼례예술문화촌 옛 농협창고를 개조한 공간에 문을 연 책공방북아트센터다. 오래전에 생명을 다한 인쇄기계와 온갖 도구들이 놓인 이 공간은 2001년 책공방공책이란 낯선 이름을 걸고 책 만드는 일을 새로운 삶으로 선택해 달려온 김진섭대표(51)의 꿈과 열정이 이어낸 결실이다. 겨울 한파가 몰려온 지난 주말, 공방에서 김 대표를 만났다. 책공방 안쪽, 공식 사무실이자 그의 작업실은 온갖 책과 물건들이 높낮이를 달리하며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돌아보니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지나칠 수 없게 하는 오래된 물건들이다. 문득 쓸모없게 되어 버렸던 물건들이 그리워졌다. 마음을 읽었을까. 김 대표가 말했다. 여기 있는 대부분의 기계와 도구들은 버려지거나 버려질 뻔했던 것들이에요.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없습니다. 물건도 마찬가지예요. 어느 사람에게는 쓸모없는 것도 어느 사람에게는 중요한 물건이 되거든요. 어느 날 그의 마음을 빼앗은 인쇄기계와 도구들도 그랬을 것이다. 책공방을 시작한지 17년째, 우연히 인연이 닿은 이곳 삼례에서 그는 꿈을 이루고 있을까 궁금했다. 이곳에 오면서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었습니다. 책공방의 일상을 기록하는 일과 책기획자를 양성하는 것이었어요. 5년 동안 무리 없이 잘 진행되고 있는데 덕분에 제 꿈이 더 커졌습니다. 기록의 힘과 가치를 공유하고 확산하는 일을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어요. 다시 시작인 셈이지요. 두 시간 남짓한 인터뷰동안 귀한 인쇄 기계들과 온갖 도구들을 만나면서 그의 외로운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었을까를 짐작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삼례에 책공방 문을 연 것이 2013년이었던가요. 6월에 오픈했으니 5년, 올 연말에 계약기간이 끝나고 다시 재계약을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특별한 상황이 없다면 연장되겠죠. -이 곳에 와서 보면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기계들은 어떻게 구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여기 놓인 인쇄 기계들은 우리 선배들이 기름을 쳐가며 지식을 찍어냈던 기계와 도구들입니다. 기술자만 있으면 지금도 모두 작동되는 것들인데, 더 이상 쓰임이 없어져 버려지거나 버려질 뻔 했던 것들이지요. -김 대표님 덕분에 이런 기계들이 다시 살아나게 되었군요. 우리나라에서 이런 종류의 기계를 모아놓은 곳이 또 있을까요. 개인이 이만큼의 규모로 수집해놓은 예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 분야에 관심을 갖는 분들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이런 기계들이 이제는 함부로 사라지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죠. -언제부터 관심을 갖게 되셨습니까. 제가 첫 책을 낸 것이 1998년인데 계기가 있었어요. 잡지사에 근무할 때 유럽 출장을 갔다가 책 공방을 만나게 됐습니다. 손으로 책을 만드는 장인을 보며 아날로그적인 방식의 가치를 알게 되었어요. 책 만드는 사람들을 장인으로 존중하는 그들의 문화를 접하며 당시 큰 충격을 받았죠. 자신들의 고유한 아이덴티티를 지켜온 전통이 문화의 격을 달리 바라보게 했습니다.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인쇄업이 사양길에 들어섰을 때였겠군요. 사식이나 청타, 이런 것은 다 지나가고 컴퓨터가 들어오고 매킨토시 초창기 버전이 나와 조판을 시작한 즈음이었죠. 그런 환경이 되니 아날로그적인 기계는 다 사라지는 상황이었어요. 그때 기계를 없애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처음에는 작은 도구들을 수집하는 수준이었는데 2000년 넘어 오면서 큰 기계가 마구 버려지는 현장을 보게 되면서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되겠더라고요. 그런데 무작정 수집할 수도 없었던 것이 워낙 기계들이 크잖아요. 기계를 거저 준다고 해도 옮기는 물류비용이나 보관할 공간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뜻을 같이 할 수 있는 분들이 없었습니까. 인식이 부족할 때였으니까요. 기계는 그 기계를 아는 기술자들이 해체를 하거나 조립해야 제대로 옮겨지잖아요. 이런 저런 한계가 많았는데 어떻게든 해보자는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방황을 하다 100평 크기의 창고를 얻었어요. 그나마 인쇄 기계들을 모아놓을 수 있게 되었죠. -만약 그때 김 대표님이 나서지 않았다면 지금 세상에 없을 기계가 적지 않겠습니다. 제가 이일을 하면서 확인한 것이 있습니다. 수집을 하다보면 대부분 개발되지 않은 곳에 아직 물건이 있다는 것이에요. 얼마 전에도 뒤쪽 마을에 인쇄소가 있다고 해서 가보았는데 그곳에서만 수십 년 넘게 인쇄업을 하셨더라고요. 사장님이 10대부터 견습공으로 시작해서 일을 해 오셨다는데 개발이 안 되니 그나마 유지하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개발이 되면 당장 오래된 가게나 업종들이 하나같이 문을 닫거나 없어지죠. 개발이 된다해도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상존할 수 있는 환경이 아쉽습니다. -유럽이나 일본 같은 곳은 100년 된 가게들이 적지 않은데, 대를 물려 가업을 잇거나 오래된 것에 대한 가치를 높이 사는 인식 덕분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그들에게는 손으로 하는 일에 대한 경외와 존중이 기본적으로 있는 것 같아요. 직업에 대한 편견의 경계도 거의 없고요. 장인이나 예술가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런 요소들이 문화의 격을 지키는 것이겠지요. -전주는 조선시대 출판의 중심지였습니다. 오늘에까지 전해지는 목판본 완판본의 존재가 그것을 증명하지요. 다행히 완판본의 가치를 살려 현대에도 활용할 수 있는 콘텐츠 개발이 이어지고 있지만 출판도시로서의 위상을 찾기에는 아직 한계가 많습니다. 이제라도 옛것의 가치에 눈을 뜬 것은 잘된 일입니다. 문제는 지속적이고 진정성 있는 관심과 투자가 이어져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전주의 완판본은 정말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자산입니다. 다만 역사적 자긍심만 내세울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재해석하고 그것의 본질적 의미가 무엇일까를 고민하면서 오늘에도 그 가치를 살릴 수 있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완판본은 출판이자 인쇄입니다. 한지와도 결이 맞닿아 있으니 한지와 출판을 산업적으로 살리는 일이야말로 완판본의 정신을 이어가는 것 아닐까요. -그렇고 보니 우리는 근대의 인쇄사에 큰 관심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한 시대의 자산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이어져왔는지에 대한 연구와 해석이 중요할 것 같은데요. 대한민국 역사에서는 근대의 기억이 아주 희미합니다. 기록이 부실하기 때문이죠. 일본강점기를 거친 탓도 있지만 근대화를 지나 현대화라는 미명 아래 없애고 잊어버린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근대의 인쇄사도 예외가 아닙니다. -인쇄의 역사, 특히 그중에서도 인쇄 기술의 역사를 살필 수 있는 자료도 당연히 미흡하겠습니다. 특히 인쇄 기술은 인쇄의 역사에서도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인쇄술을 단순한 인쇄술로만 보면 안됩니다. 인쇄 기계나 도구는 단순한 기계와 부품이 아니라 지식을 찍어내는 하나의 도구예요. 대단히 위대한 도구죠. 그런데도 우리는 그 위대한 도구에 별로 관심을 쏟지 않았어요. 사실 우리를 근대화시킨 최고의 요소는 역시 인쇄술이거든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신식 인쇄술은 일본에 의해 들어왔고 한편으로는 선교사들에 의해 한글이 활자로 만들어지고 발전했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사실들을 연구자들조차 관심을 두지 않고 연구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겁니다. 근대의 인쇄사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고요. -그런 점에서도 대표님이 일찍부터 인쇄 기계와 도구를 수집해 오신 것은 참 다행이다 싶습니다. 수집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하십니까. 몇 가지 원칙이 있는데, 인쇄와 관련해서는 인쇄 기계, 제책 기계, 책을 만들었던 도구, 인쇄 기계를 운용하기 위한 소품까지 다 모읍니다. 소품들은 도구라고 부르는데 이번에 책으로 낸 레터 프레스 툴즈가 그런 소품들을 모아놓은 것입니다. 책도 수집을 합니다. 그런데 수집하고자 하는 책이 좀 특별합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고급 책이 아니라 매우 특수한 책들이죠. 형식적으로는 장정이 특별하거나 인쇄 방식이 독특한 것들이고요. 또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에게는 직접적인 의미가 없는 책들입니다. 예를 들면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썼던 일기를 모아 놓은 어머니가 책으로 펴낸 것이거나 한글을 몰랐던 할머니가 성경책을 필사하며 자연스럽게 깨친 한글 실력으로 써낸 책 같은 것들이지요. -수집의 관점, 특히 책에 대한 관점이 매우 특별하시군요. 통념을 좀 바꾸면 세상이 다르게 보입니다. 기존의 방식에서 조금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면 가치 있는 물건은 많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고급 최고를 내세우면서 하찮게 보이는 것들에는 관심을 두지 않죠. 그러다보면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들이 갖는 가치는 다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의 역사도 보세요. 지배자와 승자들의 입장에서만 기록되고 보존되면서 정말 의미 있는 한 시대의 역사를 그려내는데 실패했지요. 이제부터라도 일상성을 찾는 일이 필요합니다. 유물도 마찬가지예요. 지나간 것은 모두 역사가 됩니다. 저마다의 가치를 갖고 있다는 것이지요.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느냐가 중요하겠군요. 그렇죠. 결국은 관점의 문제인데, 내가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무엇을 볼 수도, 보지 못할 수도, 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눈을 키우는 일이 저는 기록의 첫 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책공방에서 삼례 주민들을 대상으로 운영한 자서전 학교도 그런 연상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겠습니다. 맞습니다. 삼례에 내려오면서 완주를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싶었어요. 이곳이 책마을과 박물관의 역할을 하는 곳이라면 책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책은 엄밀히 따지면 기록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공방에서는 무엇을 기록할 것인가를 고민했어요. 완주에 대한 기록을 답으로 찾았지요. 책이 들어오고 문화가 들어왔으니 이제 기록을 해야겠다 싶었죠. -자서전 학교가 궁극적으로는 개인의 삶에 그치지 않고 완주를 기록하는 프로젝트였군요. 이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란 어른들의 삶을 기록하는 것이 곧 완주의 가치있는 기록이니까요. -성과는 있었습니까. 3회까지 진행했는데 삼례를 중심으로 26명 주민이 참여해 26권의 자서전을 만들었습니다. 자치단체의 지원을 받아 운영했는데 평가가 엇갈려 지금은 중단된 상태입니다. 아직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기록하고 그것을 자서전으로 만들어내는 일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 같아요. 계획으로는 10년 정도 이 작업을 해나가면 완주의 역사가 제대로 드러날 수 있겠다 싶었는데 아쉽습니다. -좋은 기록은 곧 의미 있는 기록일 텐데, 좋은 기록과 의미 있는 기록의 기준은 어떤 것입니까. 귀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다르겠지요.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귀하게 여기는 것들의 본질을 알아야 좋은 기록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이에요. 아무리 많은 기록을 남긴 다해도 그것의 본질을 알지 못하면 애써 남긴 기록이 모두 쓸모없는 종잇장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삼례에서 5년이 지났는데 무엇을 얻으셨습니까. 즐거움을 얻었다면 안타까움도 있습니다. 많은 청년들이 지역을 떠나고 있는 현실이에요. 꿈을 잃고 방황하는 청년들을 보며 책공방이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경험과 작은 지식을 통해 그들이 꿈과 희망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어요. 다양한 사업들이 떠오르는데 궁극적으로는 책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일구어가는 책 학교를 설립하고 싶습니다. ● 김진섭 대표는 - 독일 작은 책공방이 인생 바꿔책 만드는 즐거움 확산 기여 김진섭 대표가 완주군 삼례읍 삼례역로에 조성된 삼례문화예술촌에 책공방을 연 것은 2013년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한 그의 첫 직장이자 마지막 직장은 잡지사. 기획 운영 파트에서 일했던 그는 90년대 말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책의 새로운 세계를 만났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그 세계는 책의 물성인데, 덕분에 그는 매체로서의 책이 아닌 추억을 간직하는 보물로서의 책을 만드는 일에 눈을 뜨게 되었다. 독일의 작은 공방에서 장인이 손으로 책을 만드는 풍경은 그가 오래전부터 가슴에 품어왔던 꿈을 다시 불러냈다. 누구나 책을 만들 수 있게 하는 일을 자신의 삶으로 끌어들인 것은 그 덕분이었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첫 번째 책(책잘만드는 책)은 기대 이상으로 많은 관심을 받았다. 용기가 생겼다. 직장에서 나와 책의 특성을 살려내는 다양한 형태의 책을 개발하거나 작은 출판사를 대상으로 출판컨설팅을 해주는 사업을 시작했다. 2001년, 책공방공책으로 시작한 사업은 얼마 되지 않아 자리를 잡았다. 독립된 공간을 얻게 되자 작업 공간 이름도 책공방으로 바꾸었다. 인쇄 출판 기계와 온갖 도구들을 주목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내친김에(?) 출판사 성격을 바꾸어 일반 대중들에게 책 만드는 일을 전파할 수 있는 책공방북아트센터를 열었다. 책공방에 북아트를 더하는 변신이었다. 북아트가 새롭게 부상하면서 그의 사업은 날개를 달았다. 꿈이 현실이 되는 과정을 만나며 그에게는 더 새로운 꿈이 생겼다. 아이들이 책 만드는 즐거움을 갖게 해주기 위한 책만드는버스는 그 연상의 작업이었다. 즐거움과 보람을 함께 누리는 시간이 이어졌으나 모든 일에는 부침이 있듯이 그에게도 고난이 찾아왔다. 즐겁게 오래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게 되었다. 서울이 아닌 또 다른 지역에서 그 길을 찾고 싶었다. 그즈음 책마을 조성을 추진하고 있는 삼례와 인연이 닿았다. 2013년, 책공방북아트센터를 삼례로 이전했다. 올해로 5년, 지역출판전문가를 양성하고 주민들의 자서전을 엮어내며 크고 작은 다양한 책을 기획하고 만들어내는 그의 시간 대부분은 삼례의 책공방에 놓여있다. <책잘만드는 책> <디자이너를 완성하는 포트폴리오> <책만드는 버스> 등을 펴냈으며 삼례로 내려온 이후에도 <책잘만드는 제책> <한국 레터 프레스 100년 인쇄 도감> <책공방 15년, 삼례의 기록> 등 출판사의 보물 같은 책들을 엮어냈다. 지금은 삼례 책공방에서 만나 그의 제자가 된 이승희와 생각과 가치를 소통하고 공유하며 새로운 책문화 운동을 확산해가고 있다. 올 연말 한국출판연구소는 제 23회 한국출판평론상 우수상에 그가 펴낸 책공방, 삼례의 기록과 북 툴즈를 선정했다.

  • 기획
  • 김은정
  • 2017.12.22 23:02
기획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