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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의 출판 역사 다시 세운 신아출판사 서정환 대표 "그래도 책은 살아남는다는 믿음…그것이 희망이죠"

먼지를 털어내지 않고 포장해 옮겨내는데만 꼬박 이틀이 걸렸다. 씨트박스로 360개, 4.5톤 화물차 두 대를 가득 채운 엄청난 양이었다. 햇빛 제대로 들지 않은 20여 평 비좁은 공간 안에서 숨죽이고 있던 조선시대의 책판 목판의 외출은 특별했다.(2004년 10월 11일자 전북일보 기사 중)전주 향교 장판각에 보관되어 있던 목판본이 정리 작업을 위해 전북대 박물관으로 옮겨지던 날의 현장을 소개한 기사다.장판각에 보관되어온 완판본은 1800년대 전라감영에서 책 출판을 위해 제작한 목판 책판이다. 조선시대 전라감영 이외의 다른 지역 감영에서도 책을 출판하기 위한 목판본이 제작되었지만 완판본처럼 대량 판본이 보존되고 있는 예가 없으니 사료적 가치로서도 완판본의 존재는 특별하다.완판본은 조선시대 출판문화를 이끌었던 전주의 역사를 일깨우는 살아 있는 기억이다. 오늘에 이르러 우리가 만나는 완판본은 전라감영에서 제작된 목판이지만, 감영본이 아니고도 전주지역 민간에서는 또 다른 목판본으로 책을 만들어냈다. 출판문화의 융성을 일궜던 전주의 풍요로운 문화사를 일깨워주는 증거다.그러나 아쉽게도 전주의 출판문화는 근대에 들어서면서 위축되거나 중단됐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혼란기를 건너는 동안 한두 개 출판사들의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 이어졌지만 현실의 무게는 지역 출판의 위기를 부추기고 짓눌렀다. 지역출판의 명맥이 단절되거나 묻히게 된 이유일 터다.그런데 놀라운 일이 있다. 이 열악한 환경을 딛고 전주의 출판 역사를 지켜온 〈신아출판사〉의 존재다. 어느 사이에 전주 사람들에게 낯설지 않은 이름이 된 〈신아〉의 존재는 반갑다. 1970년 인쇄업으로 시작해 올해까지 47년. 만만치 않았을 역경의 노정에서 끝내 살아남아 지역 출판사의 모범이 된 신아출판사 서정환 대표(77)를 만났다.돌아보면 스무 살에 시작한 신문배달이 지역출판을 부흥시키겠다는 꿈을 갖게 한 원동력이었던 것 같다는 그의 삶은 시작부터 지금까지 온전히 출판의 길에서만 존재한다. 〈신아〉의 존재가 곧 그의 삶이 된 셈이다.인터뷰는 전주시 진북동 신아출판사 사무실에서 있었다. 신아문예사와 신아출판사는 한해 수십억 매출을 올리는 적지 않은 기업이 되었지만 그의 공간은 건물 입구, 낡은 책상과 고객들을 맞는 몇 개 의자가 놓인 탁자가 전부다. 보여지는 것보다는 내용을 채우는 일에 마음을 써온 그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단면이다.-출판사 규모가 커진 것 같습니다. 식구들이 많이 늘었나봅니다.오히려 잘 될 때보다 줄었어요. 지금은 인쇄 출판, 전주와 서울사무실까지 30여명이 근무합니다.-출판 상황이 어려워진 탓이겠군요. 2000년대 들어서면서 많은 출판사들이 문을 닫는 사례가 많아졌지요.맞아요. 90년대는 출판 부흥기라고 할 정도로 형편이 좋았었는데 2000년대 들어서면서 출판시장이 위축되니 경영 악화로 출판사들의 부침현상이 이어졌습니다. 인터넷 환경이 확대되면서 종이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지 불안과 회의가 깊었어요.-그럼에도 불구하고 출판을 이어오셨잖습니까.시작을 해놓았는데 다른 탈출구가 없잖아요. 언젠가부터 그래도 종이책은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는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아무리 컴퓨터가 우리 일상을 지배한다고 해도 종이책의 역할은 따로 있다는 생각이었죠.-종이책이 필요하긴 한데 출판 환경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이 현실이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지탱해온 비결(?)이 궁금합니다.물론이죠. 그래도 책은 살아남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요. 결국은 자본주의가 융성해질수록 책을 찾게 된다는 믿음. 그것이 희망이라고 할 수 있겠죠. 비결이 있다면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바로 그 믿음일 수 있겠네요.-둘러보니 한 해 동안 발간하는 책의 규모가 엄청나더군요. 그 책이 좀 팔려나가야 할 텐데요.책을 팔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늘 고민하지만 답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전주가 출판의 중앙이 되면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아주 먼 이야기죠. 현실은 예상보다도 훨씬 더 팍팍해서 출혈이 적지 않습니다.-지금 정기간행물만 11종을 발간한다고 들었습니다. 너무 많은 것 아닌가요. 질적 성장도 중요하지 않겠습니까.모든 문예지나 잡지를 출혈 없이 만들어내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내는 것 중에서는 〈수필과 비평〉이 비교적 성공한 예인데, 나머지 문예지나 잡지는 돈이 되지 않아도 역할과 의미를 살려 만들어내는 것들이 대부분이지요.-〈수필과 비평〉은 신아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죠.90년 〈소년문학〉을 처음으로 문예지로 창간했고 2년 뒤 창간한 것이 〈수필과 비평〉이죠. 처음에는 격월간으로 출발했는데 월간으로 바꾸었어요. 올해로 25년을 맞았는데 그 자체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어요. 수필의 영역을 새롭게 확장시키면서 문학의 한 장르로 정착시키고 발전시키는 통로가 되었다고 자신합니다.-사실 수필과 비평이 창간한 당시만 해도 수필은 문학의 본격적인 장르로 인정받지 못했던 상황 아니었나요.맞습니다. 처음에는 수필에 대한 평론을 받기도 어려웠어요. 수필은 누구나가 쓰는 잡문쯤으로 인식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평론하는 분들도 참여를 꺼렸거든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원고를 청탁하고 문학인들을 초청해 세미나를 열어 수필에 대한 편견을 깨고 문학 장르로서의 위상을 찾는 일을 했더니 서서히 분위기가 달라졌어요.-특별히 수필에 주목하셨던 이유가 있습니까.특별한 이유는 없었지만, 누구나가 글을 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시나 소설과 달리 수필은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요. 물론 수필에 대한 편협된 인식도 바로 잡고 싶었고요. 사실 수필이 근대에 와서 위축되었지, 그 이전에는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수필을 즐겨 썼지 않습니까. 그러다보니 본격적인 장르로 정착하는데 한계가 있었지만 문학적으로도 완성도 있는 수필작품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말씀을 듣고 보니 수필이란 장르가 글을 쓰고자하는 많은 분들에게 용기가 되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문예지 말고도 신아에서 발간하는 정기간행물이 적지 않지요.꽤 됩니다. 〈소년문학〉과 〈수필과 비평〉 이외에 〈좋은 수필〉 〈여행 작가〉 〈계간문예〉 〈인간과 문학〉 등 월간 격월간 계간으로 11종이 나옵니다. 가장 최근에 창간 한 것이 〈K스토리〉인데 이 책은 문학의 탈장르를 예상하고 기획한 것입니다. 미래 한국 스토리의 지평을 여는 신개념 문예지를 부제로 달았는데 이를테면 좋은 영화 드라마 뮤지컬을 만들어내는 콘텐츠로서의 이야기를 모아내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반응은 어떻습니까.앞으로는 괜찮을 수 있다는 판단입니다. 공모를 통해 영화와 드라마 희곡 등을 발굴하는데 반응이 꽤 괜찮거든요. 이렇게 콘텐츠를 구축해나가면 좋은 작품들이 발굴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그렇더라도 이런 간행물들은 경제적 부담이 만만치 않을 것 같습니다.당장 경제적 측면을 생각하면 무모한 일이죠. 사실 두려움도 있습니다. 신아의 경우, 인쇄업이 비교적 잘 되고 있는 편인데, 인쇄에서 번 돈을 출판 쪽으로 쏟고 있으니 그 과정이 정상적이진 않지요. 회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뒤죽박죽 이예요. 체계적으로 얼마가 적자 나는지 잘 파악도 안 되는.매달 월급만 제대로 주면 된다는 생각으로 이 무모한 도전을 해온 것 같아요.(웃음)-말씀하신대로 인쇄업은 괜찮습니까.인쇄업이 아니었으면 출판 쪽 사업은 엄두도 못 냈을 겁니다. 털어놓자면 인쇄업이 괜찮다해도 투자는 더 이상 할 수 없는 상황이에요. 인쇄는 신아문예사, 출판은 신아출판사가 맡고 있는데 지금은 출판물이 적지 않아 나름대로 유지해나가는 수준은 됩니다.-지역에서 출판으로 살아남기 어렵다고 하는데 신아는 잘 버티어 온 셈인데요. 그것이 모두 인쇄업 덕분이었다는 이야기군요.그런 셈이죠. 수필과 비평도 처음에는 지방에서 만드는 책이어서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런데 92년부터 7년 동안을 수필가는 물론이고 이름 있는(?) 시인 작가들에게 지속적으로 보냈어요. 점점 관심을 갖는 분들이 늘어나고 또 직접 참여도 해주셔서 오늘의 수필과 비평이 있게 되었지요. 사실 수필과 비평은 다른 출판물을 이어내는 효자예요.-화제를 좀 돌리겠습니다. 신아의 역사에서 사모님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지역의 문인들 뿐 아니라 신아를 알고 있는 많은 분들 중에는 사모님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지요.집사람이 아니었으면 오늘의 신아도 없었을 겁니다. 제가 인쇄업을 시작한 뒤 10년 쯤 지났을 때 스트레스로 심장병을 얻었는데, 그것이 공황장애까지 이어졌어요. 그래서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지경이었지요. 그 틈을 집사람이 모두 해냈습니다. 2004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회사 관리와 운영은 물론 인쇄물 배달까지 다 했어요. 그래서 저보다 집사람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더 많을 겁니다.- 두 분 모두 등단하셨죠. 글에 대한 관심이 오늘의 신아를 있게 한 힘일 수도 있겠습니다.집사람은 글쓰기도 그렇지만 문화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문화답사도 즐겼지요. 제가 심장병에 공황장애까지 얻으면서 평생 제대로 여행 한번 가지 못했습니다. 아내와 동백꽃 피면 함께 보러가자는 약속을 했었는데 그 약속도 끝내 지키지 못했어요. 지금껏 일에 파묻혀 사느라 휴가 한번 얻은 적도 없거든요.-사장님이 걸어오신 길을 돌아보니 온전히 지역 출판을 지키는 일로만 살아오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길을 고집해 오신 이유가 있습니까. 어려움을 만났을 때는 다른 길을 걷고 싶으셨을 텐데요.걸어오다 보니 돌아갈 수 없어서 인 것 같은데.(웃음) 제가 80년대 초반에 알게 된 전주의 완판본 역사가 가장 큰 이유였던 것 같습니다. 지금껏 완판본의 맥을 잇는다는 자부심을 갖고 살아왔거든요. 완판본은 정말 위대한 유산입니다. 자산으로도 그렇고 그 의미와 가치로도 비교할 수 없는 자랑스러운 문화지요.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가 위대하지만, 실제로 신분사회였던 봉건시대에 서민들을 일깨운 것은 완판본이란 생각이 들어요. 언젠가 책의 역사를 들여다보니 조선시대 조정에서 실제로는 책을 보급하지 못하게 했더군요. 역관들이 책을 사와 서점을 만들려고 했는데 그들 중 두 명을 처형을 했다는 기록을 보았어요. 먹물이 들어가면 안 되는 상황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겠죠. 그런 질서를 변화시킨 것이 완판본 아니겠습니까. 오일장에 나가면 완판본으로 제작된 책을 바닥에 펴놓고 팔았다는 것 아닙니까. 저는 그래서 완판본이 정말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완판본의 역사를 신아가 이어가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보람은 충분 할 것 같아요. 앞으로도 지역 출판을 지켜가야겠다는 힘도 생기고요.신아는 지역에서는 유례없는 출판사로 꼽힌다. 지금까지 낸 단행본만 4천여 종, 여기에 4개의 문학상과 11종의 정기간행물을 이어가고 있는 신아의 존재는 전주 출판문화의 자존심이 되었다.그가 써온 지역출판의 역사가 이제 더 빛나게 될 것 같다.● 서정환 대표는- 수천종 단행본정기간행물로 지역출판문화 선도서정환 대표는 순창 구림면에서 태어났다. 1940년생이니 올해로 일흔 일곱. 물리적(?)으로는 은퇴할 나이지만 그는 지금도 인쇄사와 출판사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현역이다.그의 아버지는 특별한 직업이 없었지만 할아버지 대에 일군 재산 덕분에 어렵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5남매 중 맏이였던 그는 스스로 알아서 공부를 잘하는 아이였다. 덕분에 부모님은 큰아들에 대한 기대가 컸다. 남아 있던 논과 밭을 팔아 온가족을 이끌고 전주로 나온 것도 큰아들을 제대로 공부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세상 물정에 밝지 못했던 아버지는 집을 사고도 등기를 하지 않아 집값만 날린 채 온 가족을 거리로 나앉게 했다. 졸지에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된 가족들을 지키고 먹여 살리는 일은 온전히 큰아들인 그의 몫이 되었다. 나이 스물, 청년가장이 되었다. 방한 칸 없는 형편에 거리를 전전하다 전주역 관사 옆에 땅을 파고 움막을 만들어 일곱 명 가족들이 간신히 정착했다.신문배달부터 돈이 되는 일은 가리지 않고 했다. 성실한 그를 눈여겨 본 민국일보 지사장이 그에게 총무일을 맡겼다. 그즈음 민국일보가 발행하는 사보에 글도 썼다. 1965년 신아일보가 창간되면서 총무로 스카우트 되어 직장을 옮겼다. 글 쓰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그는 신아일보의 주재기자가 됐다. 2년 정도 기자 생활을 했지만 월급 없는 기자보다는 월급 있는 총무가 그에게 우선이었다. 한국일보 지사 총무를 거쳐 다시 신아일보 지사장이 되었다. 지사 운영을 책임 짓고 보니 신문 파는 일만으로는 매월 지대를 챙겨 보내기에도 빠듯해 그만두고 기자들의 권유로 프린트를 부업으로 삼았지만 곧 작파하고 사진관을 열었다. 그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그때만 해도 로비를 잘해야 기관이나 단체 일을 맡을 수 있는데 그런 쪽으로는 영 재주가 없었던 까닭이다. 다시 신문사 지사를 맡으면서 프린트일을 부업으로 삼았다. 내친김에 인쇄소를 본격적으로 차린 것이 1970년, 〈신아문예사〉의 시작이었다. 직접 가리방을 긁어 등사하는 원시적(?) 인쇄업이었지만 주위의 도움으로 일이 몰렸다. 워낙 맨손으로 시작한 일이라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성실함으로 탄탄히 기반을 다지면서 출판업의 꿈을 키웠다. 그즈음 조선시대 책을 제작했던 전주의 역사적 위상과 의미를 알게 됐다. 1984년 〈신아문예사〉로 출판 등록을 낸 것은 전주를 다시 출판의 중심이 될 수 있도록 하는데 역할을 하고 싶어서였다. 이후 5~6년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조금씩 나아져 90년대는 부흥기랄 수 있을 만큼 사업이 번창했다. 〈소년문학〉 〈수필과 비평〉을 비롯한 문예지를 창간하고 단행본을 내기 시작했다. 올해 25년을 맞은 〈수필과 비평〉은 문학의 본격적인 장르로 인정받지 못했던 수필을 독자적 영역으로 자리 잡게 하는 통로가 됐다. 2000년대 인터넷이 일상으로 들어오면서 출판업은 위축되기 시작했다. 지역 출판 상황은 말할 것도 없었다. 경영은 어려워졌으나 기왕 창간한 문예지에 오히려 종합문예지와 다양한 장르의 문예지 창간을 더하고 연구자들의 활동을 북돋는 학술지 출판 지원에도 앞장섰다. 지금 신아의 이름으로 세상에 나오고 있는 정기간행물은 11종. 월간 격월간 계간까지 해마다 신아의 이름으로 나온 수십 권의 문예지와 잡지, 수백 권의 단행본이 독자를 만난다. 지역 출판 역사에 유례없는 궤적이다.47년 〈신아〉의 역사는 2004년 세상을 떠난 아내 황의순씨와 그가 한눈팔지 않고 일궈온 열정의 결실이다. 출판문화의 본고장이었던 전주의 문화사가 〈신아〉의 노정으로 다시 새로운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 기획
  • 김은정
  • 2017.09.15 23:0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18. 시간을 품은 깊은 맛, 순창 - 순창 사람이라도 서울서 고추장 담그면 제 맛 안나더라

전후에 보낸 쇠고기장볶음을 잘 받아서 아침저녁의 반찬으로 삼고 있느냐? 왜 한 번도 좋은지 어떤지 말이 없느냐? 무람없다. 무람없어. 난 그게 포첩(육포)이나 장조림 따위의 반찬보다 나은 것 같더라. 고추장은 내 손으로 담근 것이야. 맛이 좋은지 어떤지 자세히 말해주면 앞으로도 계속 두 물건을 인편에 보낼지 말지 결정하겠다.예나 지금이나 별다를 게 없어 보이는 부모의 마음이다. 이 글을 쓴 사람은 연암 박지원(1737~1805년)으로, 아들에게 장을 담가 보내며 쓴 편지가 『연암선생 서간첩』에 남겨져 있다. 고추장을 손수 만들어 보냈는데 잘 먹었는지 답이 없어 갑갑해 하고 살짝 마음 상해하는 모습이 엿보인다. 그 고추장 사랑에는 정약용 선생도 남달랐다. 『다산 시문집』에는 배를 타고 가며 고추장을 가져가는 그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 나온다.작은 상자에는 고추장이 있고 / 小盒茄椒醬여행길 주방엔 장작불 연기로세 / 行廚榾柮煙사람과 고기 사이를 이어주는 맛이 / 人間梁肉味모두 이 강 뜬 배에 있구려 / 都只在江船요즘 들어 인기 쉐프로 남성 요리사들이 등장하면서 음식 만드는 남자를 TV에서 보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남자들이 요리하는 일상이란 그리 일반적이지 않다. 지금도 그러한데 조선시대 선비들이 고추장을 직접 담가 먹었다니 놀랄 일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궁중음식을 담당했던 이들도 남성이 중심이었고, 초기의 고추장은 입맛을 돋우며 약으로 쓰였기 때문에 담그며 나누어 먹은 기록을 남긴 것에는 조화로운 맛과 발효음식에 담긴 지혜를 귀하게 여긴 듯싶다. 또한, 선비 못지않은 조선 왕들의 고추장에 대한 특별한 애정은 수많은 기록과 지역의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그 흔적들이 순창의 자산이 되어 깊은 맛으로 자리 잡았다.장(醬)의 명가인 순창에는 태조 이성계와 관련된 고추장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는 고려시대 말기 북쪽 여진족을 쳐부수고 남쪽 왜구를 격퇴한 전공을 세웠는데 경상도를 거쳐 올라오는 왜구를 순창 인근 남원 운봉지역에서 물리치기도 하였다. 이즈음 이성계가 만일사(萬日寺)의 무학대사를 만나기 위해 순창에 들렀는데 그때 인근 민가에서 순창고추장의 전신으로 여겨지는 초시(椒豉)에 비벼 낸 밥을 먹어보고 이 맛을 잊지 못해 임금에 오른 후 순창 현감에게 진상토록 했다는 설화이다.이때 이성계가 맛본 초시가 고추장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이성계는 고려시대 말기인 1335년 태어나서 1392년 태조로 즉위했고 1408년 사망했다. 설화에 따르면 이성계가 순창에서 고추장을 맛본 건 늦어도 고려가 아직 망하지 않았던 1392년 이전이다. 고추장의 주요 재료인 고추가 한반도에 들어온 건 이성계가 사망한 뒤 적어도 100년이 지난 16세기경으로 추정된다. 당시 이성계의 입맛을 사로잡은 초시는 산초(山椒)나 호초(胡椒후추나무 열매껍질) 등을 넣은 장류로 고추장의 전신으로 여길 만하니 매운맛을 내는 발효식품인 것은 맞다.또한, 본관이 전주인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1863년)은 승려들이 만들기 시작하여 평민들이 즐겨 먹기 시작했다는 고추장에 대한 기록을 《오주연문장전산고(五州衍文長箋散稿)》에 남겨 놓으며 번초(蕃椒)를 백성들이 고추라 부르며 하루라도 끊을 수 없는 최고의 양념이라 소개했다. 그 기록을 보아도 승려인 무학대사와 이성계의 고추장에 관한 사연은 순창의 귀한 이야기 자산으로 의미를 둘 수 있다.고추장은 조화미(調和美)가 강조된 맛과 영양이 우수한 발효식품으로 조선시대 장류의 발전은 고추장으로 꽃피웠다 해도 무방하다. 이러한 고추장에 대한 여러 가지 학설이 있지만, 고추가 도입되기 이전에 이미 호초(胡椒)나 천초(川椒)와 같은 매운맛을 내는 장(醬)문화가 존재하였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고추의 도입 시기와 관련해서는 임진왜란(1592년) 이후에 일본으로부터 전해졌다는 설과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우리나라에 고추가 들어와 있었고 이 고추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전해졌다는 설이 있다. 또한 소수의견이지만 두 학설의 절충으로 임진왜란 이전에 일본으로부터 고추를 받아들였고, 임진왜란 때 이 고추가 일본으로 역수출되었다는 설이 있다. 어쨌거나 고추 재배가 일반화된 후에는, 고추가 종래에 매운맛을 내는 데 사용했던 호초와 천초를 대체하며 점차 장(醬)에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시대 중기 영조 때의 『승정원일기』나 『조선왕조실록』에 고초장(苦椒醬, 古椒醬)이 기록된 점이나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1766년)에 고추장의 제조법이 기록된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추장 중 가장 유명한 순창 고추장에 대한 명성은 과거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영조 때 편찬된 것으로 추측되는 《소문사설(謏聞事說)》중 「식치방(食治方)」이 대표적이다. 순창고추장조법(淳昌苦艸醬造法)에는 순창의 유명한 고추장 담금법이 기록이 되어 있는데 재료의 내용과 비율 등이 영양학적으로도 우수하였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해동죽지(海東竹枝, 최영연, 1925)에는 순창고추장의 색깔은 연한 홍색이고 맛은 달고 향기로우며, 기운은 맑고 차서 반찬 중 뛰어난 식품이다. 순창 사람이 서울에 와서 손수 이 고추장을 만들었는데, 맛과 색깔이 모두 본지방에서 생산하는 고추장에 미치지 못하였다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순창 고추장은 똑같은 사람이 같은 재료와 방법으로 담가도 다른 곳에서는 결코 같은 맛이 나지 않아, 순창의 물맛과 기후가 조화를 이루고 재료들을 섞는 비율이 좋아 그만의 맛을 만드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순창 고추장은 귀하게 여겨지며 임금에게 진상(進上)되는 것이기도 했다.신분 고저를 떠나 사랑을 받았던 고추장은 우리나라 역사 속에 다양한 이야기도 함께 남기고 있다. 조선시대 임금 중 고추장을 가장 좋아한 왕은 정조로 입맛이 없을 때 고추장을 즐겨 먹었다는 이야기가 정조실록(正祖實錄)에 기록되어 있다. 고추장을 사랑했던 정조는 대궐 밖을 나설 때마다 고추장을 챙겼다고 하며, 이후 연희궁 앞에 아예 고추밭을 만들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고추장에 관한 왕의 이야기 중 가장 흥미로운 스토리는 심한 현기증과 입안의 염증으로 고생하는 영조에게 사도세자가 비약으로 고추장을 구해줬다는 이야기이다. 고추장의 매력에 흠뻑 빠진 영조는 고추장이 늙은이의 입맛을 지켜준다.면서 고추장을 장맛이 좋은 사가로부터 진상 받아 건강을 회복했다 전해진다. 그 이후 기력을 차린 영조가 훗날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였으니 그 고추장은 슬프기도 하다. 매운 것을 먹으면 눈물이 나는데, 매운 고추장으로 눈이 시큰할 때마다 생각날 사람은 그 사연으로 인해 사도세자의 마음도 더해진 것인지 모르겠다.조상의 지혜로 일반적인 밥상에서 약치(藥治)이며 식치(食治)였던 고추장을 위시한 발효식품인 장들은 건강을 지키면서도 마음을 전하고 어루만지는 심치(心治)를 겸한 듯하다. 좋은 재료가 지닌 땅의 힘, 사람의 정성과 시간의 기다림 그리고, 맛있게 취하며 느끼는 즐거움은 마음과도 연결될 수 있다. 장(醬)맛은 그 집안의 음식 맛을 판가름한다는 속설이 있으며 어머니의 손길이 가장 오래 담겨있는, 정을 느끼는 음식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상의 음식으로 치유의 과학을 전해준 조상의 지혜에 감사하며, 가을과 더불어 장(醬)이 익어가는 소리에 마음을 더해보면 어떨까. 그 시간에 담긴 의미를 헤아려보며 고추장의 명가 순창의 풍요로운 가을을 느껴 봐도 좋을 듯싶다.

  • 기획
  • 기고
  • 2017.09.15 23:02

[마을학개론 ② '마을시민'과 '마을주의자'] 농촌 문제 스스로 책임질 '마을시민' 깊이 뿌리내려야

농촌마을을 재생하려면 농민, 주민 말고도 마을에 시민이 많이 살아야 한다. 즉 다종다양한 마을시민들이 어서, 많이 하방해 지역에, 마을 속에 깊이 뿌리를 내려야한다.△잘 학습되고 훈련된 마을시민 필요여기에서 말하는 시민이란 도시에 사는 행정적 협의의 시민이 아니다. 근대 이후 사회에서 도시 지역이나 국가의 중심을 이루는 구성원이었던 그 시민(Citizen)을 말한다. 정치적 권리와 사회적 의무를 가지는 존재인 시민(Citizen)이다. 이같은 시민의 개념은 18세기 봉건사회를 혁파하려는 영국의 명예혁명, 프랑스의 프랑스혁명 등 시민혁명을 계기로 본격 등장한 것이다. 특히 프랑스 혁명 이후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제1조의 기본 원칙에서는 인간은 자유롭게,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천명한다. 제2조는 자유, 소유, 안전, 그리고 압제에 대한 저항으로 시민의 권리를 새기고 있다. 시민과 민주주의는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오늘날 우리 농촌마을의 문제는 결국 사람이다. 근본적, 궁극적으로는 사람이, 사람으로 풀어야 한다. 농촌마을의 근본적 병인과 한계는 일단 사람의 절대적 양도 부족하고 사람의 근본적 질도 모자라다는 점일 것이다. 농촌마을에는 일단 일을 할만한 사람이 별로 없다. 있다 해도 농사기술 전문가 말고는 거의 없다. 그것도 노인 말고는 별로 없다. 지역 내부의 기존의 인적자원만으로는 협동농업이나 마을공동체사업을 감당하는 데 본질적이고 구조적인 장벽이 높은 것이다.하물며 농사도 아무나 지어서 안 되듯, 농촌 일도 아무나 해서 안 된다. 마을공동체의 미래와 운명을 사사로운 외부 용역업자에게 맡길 수 없다. 위험하다. 상부의 행정, 외부의 전문가가 아닌 내부의 마을주민들이 스스로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농촌마을에는 다양한 경험과 기술을 가진 마을시민이 절실하다. 이러한 마을시민(Commune Citizen)이란 지역공동체적 사회자본, 혁신적 인적자본으로서, 마을 또는 지역사회공동체사업에서 주체적 역할을 감당하는, 농촌 및 지역 주민을 뜻한다.△마을시민이라야 지속가능한 농촌생활특히 마을시민은 마을공동체사업의 책임주체인 마을기업을 관리하고 경영하는 역량을 갖춘 책임있는 사업주체 역할과 책무를 감당할만한 유능한 인력이다. 가령 귀농인 출신 마을주민이라면 왜, 귀농했는지 이제는 스스로 자각하고 자족할 수 있는 단계로서, 뭘 해서 먹고 살지 농사를 짓든, 농사를 짓지 않든 마을에서 먹고 살 자신감과 사회적 책무를 깨달은 상태이다. 마땅히 그럴만한 수준과 경지에 이르면 귀농한 외지인 처지라 해도 더 이상 주변인이 아닌 당당한 마을지역사회공동체의 권리와 책임의 주체로 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무엇보다 거의 대부분 소농, 영세농으로 분류되는 평균적 귀농인들은 농사로 먹고 살기 어렵다. 아쉽지만 전업농부의 꿈과 욕심을 합리적으로 조절하고 조정할 필요가 있다. 구체적으로 정부의 겸업농업인, 일본의 반농반X(엑스)의 개념과도 일맥상통하는 마을시민으로서 현실에 기반을 둔 귀농생활계획을 정교하게 세울 필요가 있다. 여기서 마을시민이란 어설픈 낫과 호미 보다, 저마다 도시의 소시민으로 용케 버티면서 챙겨둔 생활의 농기구를 꺼내드는 용기 있고 지혜로운 창조적 귀농인을 말한다.모름지기 마을이라면 농부는 물론 농부가 육체를 다치면 고쳐줄 의사, 농부가 마음이 아프면 달래줄 성직자, 농부가 아이를 낳으면 보살피고 가르칠 교사, 농부의 고민을 함께 풀어줄 연구원, 농부가 사는 마을을 아름답게 표현할 문화예술인이 함께 살아야 마땅하다. 또 농부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세상에 대신 들려줄 작가, 농부의 삶과 운명을 고쳐줄 사회운동가, 농부의 소득을 높여주고 일자리를 만들어줄 기업가, 농부의 집을 짓고 농기계를 고쳐줄 기술자, 농부의 농산물을 제값받고 팔아줄 상인도 한 데 어우러져야 한다. 그래야 마을은 공동체도 되고 사회도 되고 우주같은 대동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마을시민을 넘어 마을주의자로그런데 이미 우리 농촌에는 이런 마을시민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마을시민들이 살아갈만한 이유와 조건이 미비하거나 성립하기 어려운 공간으로 우리 농촌은 충분히 공동화, 형해화된 상태다. 이런 농촌을 살려보겠다는 선의를 품고 작심하고 하방을 감행하는 도시민조차 마을시민으로 살아갈 실제적인 준비와 훈련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마을과 지역을 재생하려면 그 일을 책임지고 맡아할 마을시민부터 발굴하고 양성하는 지역사회디자이너 생활기술 직업전문학교 같은 실질적인 정책과 제도가 시급하다.나아가 귀농인 또는 마을주민이 마을시민의 단계를 넘어 2차로 진화하면 마을주의자의 경지로 올라선다. 마을주의자는 왜 도시를 벗어나 귀농을 해야하는지 남에게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충분히 설명, 설득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상태다. 무엇보다 나와 내 가족만 챙기지않고, 남과 더불어 협동하고 연대할 수 있는 이타적인 몸과 공익적인 마음가짐, 그리고 사회경제적인 마을공동체사업의 계획이 준비된 성숙하고 안정된 마을주민을 말한다.결국 마을주의자(Commune-ist)란 국가와 정부, 자본주의와 정치경제학의 구조악에 휘둘리지 않는 단단한 사람이다. 마을 속으로 뛰어 들어가, 마을사람들과 더불어 부대끼며 생활하며 마을을 먹여살리는 마을기업을 앞장 서 세우고 꾸린다. 사람 사는 대안마을을 일구면서 더불어 함께 사는 게 꿈이다. 머리는 도덕적이고 진보적이며 마음은 정의롭고 양심적이다. 말과 글은 용기있고 지혜롭고 슬기로우면서 행동은 이타적이고 공동체적이다. 곧 세상을 좀 더 사람이 살만한 곳으로 바꾸려는 사회혁신적인 인간이다. 이런 인간형을 기존의 무정부주의나 사회주의로 충분히 표현할 길이 없으니 마을주의라는 새로운 말이 필요했다.△마을주의자들은 공동체의 정의 믿어마을주의자들의 정체성은 어느 정도 공동체주의자라 할 수 있다. 마을(Commune)이라는 공동체의 가치를 따르는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를 믿고 받아들인다. 따라서 공유된 가치와 공동선을 무시하거나 훼손하는 일체의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는 반대한다. 자유주의자들은 자신이 처한 현재 상태와 보유한 가치가 그를 둘러싼 사회에 의해서 형성된다는 사실 조차 미처 자각하지 못한다. 자유주의자들이란 오로지 자기 혼자 잘 나서 잘 사는 것으로 착각하고 사는 존재라고 공동체주의자들은 비판한다. 하지만 마을주의자들은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의 정의(Justice)를 믿는다.가령 19세기 웨일스의 직물업자로서 공장개혁가이자 공상적 사회주의자인 로버트 오언(Robert Owen)의 사례는 공동체주의, 마을주의의 정의와 선의에 대한 확신을 주기에 충분하다. 오언은 산업에 대한 공동협동통제와 통일과 협동 마을의 창설을 주장했다. 이 마을에서 주민은 수확고를 증가시키고 더불어 그들의 육체와 정신을 향상시킬 수 있다. 이같은 오언식 공동체는 인디애나 뉴하모니를 비롯한 미국의 여러 곳에 설립되었다. 하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의 협동조합과 노동조합운동도 실패했다.오언의 혁명은 시기상조였을까. 무모하고 무의미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경쟁체제에 대한 비난, 협동과 교육에 대한 강조, 불건전한 환경이 일으킨 어리석은 결과를 없애면 인간은 자신의 지위를 향상시킬 수 있다는 오언식 사회주의 또는 공동체주의 운동의 교훈과 메시지는 후세에 인류공동체의 경험자산으로 전승되었다. 가령 오늘날 우리 농촌지역에서 마을시민들과 마을주의자들이 함께 벌이고 꾸리는 사회적경제 기반의 공산공유 생활공동체마을의 모습으로 말이다.<정기석 마을연구소 소장>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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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9.14 23:02

[마을신문 해리] 세대와 공간 이으며 활자·종이 위에 번지는 이야기의 힘

이야기가 피어나는 공간이 있었다. 텔레비전 말고, 라디오 말고, 책 말고 이렇게 그럴싸한 이야기 담는 그릇 없이도 잘만잘만 이야기가 피어나는 공간이 있다. 혹은 있었다. 시장 어귀, 시냇가 빨래터, 사랑방 같은 공간이다. 날로 쇠락하는 지역의 시장에서나 겨우 명맥을 이어가는 이야기들이 사는 공간. 사랑방은 겨우겨우 마을 경로당으로 이어지고, 시냇가 빨래터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끊임없이 이어가는 것이 이야기의 속성, 어딘가 움푹 패인 곳에 오래 머물다가는 소화불량, 탈이 나기 마련이다. 대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외친 임금님 이발사 이야기를 아시는가. 그 이야기는 대나무에 스며 그 대나무로 만는 피리들이 동네방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피리 날라리를 불어댔던 것이 아니었나. 누군가에게서 누군가에게로 이어지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이야기들은, 이제 어디서 어떻게 어떤 사람들에게서 이어지고 있을까, 살펴보는 이야기의 보고서다. 마을신문 이야기다.△ 고창 해리면 사람들이 만드는 마을신문, 해리고창군 해리면에는 2016년 봄부터 ‘마을신문 해리’가 태어나 수많은 빛깔 이야기를 머물게 하고 있다. 해리면주민자치위원회 주도로, 해리면과 고창의 인문공간 책마을해리가 함께 신문이 태어난 데 산파노릇을 이어가고 있다. 마을신문 해리는 계절마다 한차례(계간) 태어나다가, 2017년에는 한 달 건너 한번씩(격월간) 태어나고 있다. 산파들의 손놀림, 발놀림이 한층 더 분주해졌다. “이번 호 ‘마을신문해리’에는 해리면민의 날 행사도 있고 우리 해리면 행사마다 고생을 많이 하는 해리면자율방범대를 취재해서 실었으면 합니다.”“옳다고 생각해요. 지난 호에는 농업경영인회에 큰 행사를 앞두고 있다고 해서 밀렸거든요. 지난 번 해풍고추축제에도 축제기간 내내 힘들었을 텐데, 이번 호에는 사진도 좀 크게 넣고 해서 자부심을 갖게 하면 좋겠습니다.”“지난 호에도 고민 끝에 추천했다가 큰 행사를 치른다기에 양보했는데, 이번호는 꼭 좀 넣읍시다.”여기저기서 옳다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 ‘마을신문 해리’ 기획회의 장면이다. 이렇게 고정꼭지의 글 말고 해리면의 기관단체 탐방기사, 해리면 원로에게 듣는 꼭지, 해리면 마을가운데 하나씩 집중취재해서 싣는 마을에 대해서 취재 대상을 결정한다. 가끔 목소리가 높아지기도 한다. 차례를 양보하고 인정하면서 앞뒤 순서를 정한다. 갈등해결 방식도 차례차례다.△ 시니어기자단, 학교이야기까지 마을신문을 채우는 이야기, 이야기, 또 이야기해리면주민자치위원회(위원장 김동우)는 고창군에서 제일 먼저 주민자치위원회가 개설된 곳이다. 그만치 자부심이 크다. 지역의 기관단체장들이 망라되어 있는 단체다. 기획 전반을 잡아나가는 역할이다. 지역 콘텐츠를 찾고 편집하고 유통하는 주체인 책마을해리가 실무를, 고창군과 해리면의 굵직한 이야기와 발송을 책임지는 해리면(면장 윤명수)과 해리면 기관단체가 함께 만들어 주체부터 마을(마을의 확장, 면단위의 마을)이 중심이다. 몇 가지 비중이 큰 취재 꼭지 말고도 시기마다 해리면의 경관을 소개하는 이미지 중심의 표지면, 여기에는 발간주체에 대한 소개와 마을기자단 상시모집 광고가 놓이기도 한다. 이미지 안에는 단 몇 줄, 사진을 설명하는 간결한 글이 붙어, 이미지와 글 사이 상상하는 힘을 키운다.해리면의 초, 중, 고교에서 벌어지는 유쾌한 이야기와 해리면 크고작은 기관단체의 이야기, 마을에서 전해오는 듣고 혼자 말기에는 너무나 아깝고 아쉬운 이야기(이야기를 파는 점방), 해리면의 방과후, 마을학교 들의 생기넘치는 이야기, 해리면에 태를 묻고 더 너른 세상에서 고향의 기운을 세상으로 확장하는 출향인들 이야기가 와글와글 소리없이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더불어, 공연(고창문화의전당에서 열리는), 영화(고창에는 작은영화관이 있다) 소식도 빠질 수 없다. 마을신문 시니어기자단 어르신들이 해리이야기를 그림으로 공예로, 농사일기며 음식일기로 표현한 것들도 곳곳에 놓여 감초역할을 한다. △ 초연결의 시대, 마을신문이 이어주는 세대의 축, 공간의 축 ‘마을신문 해리’는 고창지역에서 처음으로 시도되는 마을미디어 실험이다. 고창군의 행정 경제 문화의 중심인 고창읍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서쪽 끝 바닷가 마을이다. 해리사람들, 하고 부르는 순간 바닷내음이 물씬 풍겨오는 정말 ‘아주 먼 곳’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곳곳에서 피어나듯 살아 움직이던 이야기를 다시 모으고 가꿔 피어내는 것이다. ‘마을신문 해리’는 해리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을까. 세대를 연결하고 있다. 초연결(超連結)의 시대다. 그 매체는 당연, 가장 진화한 매체다. SNS라고 하는 첨단의 연결고리를 통해서다. 그런데 해리사람들은 전통매체인 마을신문, 종이 위에 놓인 활자를 통해서 마을 어르신들과 초등학교 어린 친구들을 연결시킨다. 뉴미디어의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어느 한편 치우치지 않고 함께할 수 있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세대의 연결을 통해 시간을 모은다면, 공간은 이렇다. 지금 해리 사람들과 예전 해리에 살던 사람들을 연결한다. 3000부 가량 출향인에게 보내지는 신문을 통해서다. 해리면은 매달 군정소식지를 출향인들에게 보내고 있다 그 소식지에 마을신문 해리를 끼워 보내는 것이다. ‘꿩먹고 알먹고’다. 이야기를 통해 서로 떨어진 공간과 사람을 모으는 것이다. 이렇게 정든 고향의 소식을 오늘처럼 누리다보면, 언젠가는 귀향으로 이어질지 모를 일이다. 행정과 민간을 연결한다. 면정, 군정을 일방적으로 하향방식으로 알리는 것이 아니라, 정책의 일단을 서로 생산해 소비하는 연결고리 역할을 조금씩 하고 있는 것이다. 마을신문은 과거와 현재를 이었다면, 이제 미래의 역할로 확장하는 것이다. 비단 ‘마을신문 해리’만이 아니다. △ 열 번째 마을만들기전국대회, 천지사방 피어나는 마을미디어의 장지난 주 진안에서 제10회 마을만들기전국대회를 열었다. 백운면 한켠에서는 마을미디어 활동가들이 모여 다양한 논의 공간, 마을미디어 축제의 장을 열었다. 전라북도에 작지만 알찬 마을미디어들이 다시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없던 것의 탄생이 아니다. ‘다시’다. 이야기의 속성대로다. 어디서든 멈추지 않는 흐르는 물처럼, 피어나는 아지랑이 결에 불어오는 봄 바람처럼이다. 사랑방에서 새내끼(새끼)를 꼬면서, 마을 우물에서 곁에서, 오일장 전통시장이 떠내려가라고 피어나던 이야기꽃이, 종이 위에 옮겨온 것이다. 활자와 사진의 옷을 입을 것이다. 마을신문 해리는 마을신문기자단으로 확장되었다. 해리지역 마을학교를 통해 미디어교실로 확장되어 마을신문의 이야기 한 빛깔로 가라앉고 있다. 이야기는 멈추는 법이 없다. 목소리를 낮추는 법이 없다. 전라북도 마을마을마다 저마다 제 목소리로, 그 멈출 수 없는 이야기의 장(場)을 확장해갈 것이다. <이대건 책마을 해리 대표>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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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9.13 23:02

<도가> 넓은 시야로 먼저 발을 내디딜 것인가, 구경만 할 것인가

세계를 높은 시야로 넓게 보는 큰 사람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찾으려 애쓰지 않고 시대의 병을 아파하며, 그 병을 치료하는 데에 헌신한다. 달리 표현하면,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과 시대의 병을 치료하는 일이 일치한다. 자신이 독립적으로 발견했지만, 그 병은 시대의 모두에게 해당된다는 점에서 공적(公的)이다. 또 온 몸을 바쳐 치료에 헌신하며 윤리 행위자로 등극한다. 그래서 큰 사람은 공적이고 윤리적 인격으로 우뚝 선다. 이런 사람이 진정한 의미에서 지도자다.문제는 시대의 병을 자신이 고수하는 생각의 틀에 맞춰 해석하고 치료하려 덤비면 오히려 해가 된다는 점이다. 이런 경우에 그 사람은 시야가 일단 높고 넓지는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높은 수준의 지식도 필요하고, 개방적이며 융통성 있는 심리상태도 필요하다. 게다가 병은 대부분 앓아본 적이 없는 새로운 것일 가능성이 크다. 굳고 철지난 마음으로 새롭게 등장한 병을 다루게 되면, 병은 치료되지 못하고 악화되거나 더 수선스러워질 수 있다. 텅 빈 마음으로 시선을 새롭게 하여 새로 등장한 병을 대면하고, 그것을 치료하려 거기에 자신을 전부 던진 사람이 진정한 지도자다. 그런 사람을 가진 나라는 흥하고, 그러지 못하면 어려움에 처한다.일본은 미국에 강제 개항을 당하면서 충격과 어려움에 직면하고도 바로 수준 높은 차원에서 전열을 정비하여 근대의 흥성기를 구가한다. 이런 흥성으로 형성된 힘을 가지고 우리나라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가했지만, 어쨌든 일본은 나름대로 탄탄하고 모범적인 국가로 성장했다. 물질문명의 발전은 정신문명의 발전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신문명이 물질문명의 발전으로 이행되려면 여기에는 정신적 통합으로 빚어진 일치된 단결이나 공동의 선을 향한 협력이 필수적이다. 이것을 우리는 흔히 사회통합이라고 부른다. 일본은 시대의 병을 앓기 시작하자 바로 일군의 지식인들이 세력을 형성하여 치료에 돌입한다. 정점에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 있었다. 요시다 쇼인이 일본의 근대를 이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다른 문화권과 다른 일본 만의 정신으로 간주되던 것을 다시 살려내어 대화혼(大和魂)이라는 일본 통합의 정신을 제시하였다. 그가 일본의 근대를 주도한 인물들을 배출한 것도 의미 있지만, 일본 정신을 통합하고 방향을 제시한 것이 가장 핵심이다.이와 필적할 인물이 중국에는 누가 있을까? 근대 격동기에 중국인들을 통합할 정신을 형성한 사람은 누굴까? 나는 루쉰(魯迅)이라고 본다. 루쉰은 원래 의사가 되어 중국인들의 육체적인 병을 고쳐주려고 하다가 과거에 갇혀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중국인들의 정신을 먼저 깨우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후 바로 의학 공부를 그만두고 문필가, 사상가, 혁명가의 길로 들어선다. 혁명은 외부와의 투쟁으로만 되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내부의 투쟁이 더 격렬하다. 혁명의 분열상은 혁명의 진행에 매우 치명적이지만 언제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루쉰만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장례식이 이를 증명한다. 1936년 10월 22일에 치러진 그의 장례식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민중장(民衆葬)이었고 또 분열을 일삼던 문단도 이날만큼은 일치된 모습으로 모든 문학잡지가 일제히 추도호를 발행했다. 통합의 아름다운 행렬이다. 이때 루쉰의 시신은 민족혼(民族魂)이라 쓰인 하얀 천에 감싸졌다. 중국 혁명의 여정에 루쉰이 이뤄낸 정신적 통합과 방향 제시는 핵심적이며 또 결정적이다.요시다 쇼인이나 루쉰이 새로운 정신으로 나라를 통합해 미래로 끌고 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국가가 가져야 할 수준의 아젠다를 가졌기 때문이다. 정권이나 정치 집단 차원의 아젠다가 아니라 국가 차원의 아젠다였던 것이다. 그들은 이 정권에서 저 정권으로 이동하자고 말한 것도 아니고, 이 세력을 저 세력으로 교체하자는 것도 아니었다. 더 높은 차원에서 이런 나라를 저런 나라로 만들자고 하며 미래 지향적인 아젠다를 제시하여 통합을 이뤘다. 높고 넓은 시선을 사용한 결과다. 통합을 이루려면 아젠다가 그 이전의 것들보다 높고 넓어야 한다.국가 수준에서의 아젠다를 제시하고, 그것을 삶 전체를 통해 추진할 수 있었던 힘은 젊은 시절부터 보인다. 무엇 때문에 그렇다고 말하는가? 바로 그들의 시선 자체가 시작부터 공적이고 윤리적이기 때문이다. 루쉰만 보더라도 의학을 전공으로 선택한 이유가 단순히 동포들의 병든 육체를 고쳐주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심리적인 배경을 따지면 그가 의학을 선택한 것이 부친이 병을 앓다 세상을 뜬 것과도 관계가 없지는 않겠지만, 무엇보다도 높고 큰 틀에서 새로운 중국을 꿈꿨던 것으로 짐작된다. 왜냐하면, 그가 일본의 메이지 유신 성공을 관심 있게 보면서 그 성공의 출발선이 현대 의학에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때 의학은 단순하게 특정한 한 분야의 학문이 아니었다. 국가 개혁이 시작되는 지식의 원천이었다. 그래서 루쉰은 의학을 자신이 전공해야 할 학문으로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극적인 전환은 의학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나온다.루쉰이 듣던 과목 가운데 세균학이 있었다. 환등기를 사용하여 세균의 모습이나 움직임을 보면서 수업을 했는데, 시간이 남을 때는 시사성이 있는 영화를 보여주기도 했다. 내용이란 것이 대부분은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다양한 동정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영화 속에서는 러시아군의 밀정 노릇을 하다 붙잡힌 중국인들이 일본군에 의해 처참하게 처형되는 장면이 나왔다. 그런데 그 처참한 처형 장면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중국인들이었고, 게다가 동포가 처참하게 죽어가는 것을 빙 둘러싸서 구경하는 것도 모자라 그들 가운데 일부는 박수치고 환호까지 하였다. 이 장면을 본 루쉰은 비통한 충격에 휩싸인다. 내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직접 루쉰의 말을 들어보자. 그때 이후로 나는 의학이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우매하고 연약한 국민은 체격이 아무리 온전하고 건장하다 하더라도 아무 의미 없는 시위의 구경꾼밖에 될 수 없고, 병사자가 아무리 많다 해도 이를 불행이라 여길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 중국인에게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것은 정신을 뜯어고치는 것이고, 정신을 뜯어고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문학예술에 힘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문학예술운동을 제창하게 된 것이다.(『?喊』「自序」)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 결과로 루쉰은 스스로의 인생행로를 전혀 다른 각도로 바꾼다.루쉰도 말한다. 우매하고 연약한 국민은 바로 구경꾼으로 전락한다. 자기 자신의 생명이 좌우되는 일에서마저도 구경꾼 역할밖에 하지 않는다. 구경꾼들은 비판하고 분석하는 데에 재능을 발휘한다. 그리고 분석 비판 이후에는 할 일을 다 했다고 스스로 인정하면서 진실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인하며 도덕적 우월감을 갖기도 한다. 그 우월감은 자신을 정당화하는 데에 매우 효용적이다. 그래서 언제나 자신은 자신에 옳은 사람으로 남는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웃음을 사지만, 자신은 알지 못하고 또 알더라도 인정을 하지 않는다. 루쉰의 고뇌는 늙고 병든 중국이 이런 구경꾼들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구경꾼이면서 또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옳은 사람으로 조작해버리는 우매한 사람을 아Q(阿Q)라 이름 지었다. 루쉰이 보기에 당시 중국인들은 모두 아Q들이었다.『아Q정전』(阿Q正傳)의 앞부분에 나오는 대목이다. 건달들은 그것도 모자라서 그저 그를 놀려대며 마침내는 손찌검까지 했다. 아Q는 형식상으로는 졌다. 건달들은 그의 노란 변발을 휘어잡고 담벼락에 소리가 나도록 네댓 번 머리를 짓찧었다. 놈들은 그제야 이겼노라고 흡족해하며 가버렸다. 아Q는 잠시 멍하니 서서 이렇게 말했다. 아들놈에게 얻어맞은 셈이야. 요즘 세상은 정말 말이 아니야. 그리고는 흡족해하며 의기양양하게 돌아갔다. 아Q는 건달들에게 모욕을 당하고도 아들놈에게 얻어맞은 꼴로 바꿔버린다. 이것을 정신승리법이라고도 하는데, 아비를 때린 아들이 나쁜 놈이기 때문에 나쁜 아들의 역할을 한 건달들이 나쁜 놈들이므로 자신은 오히려 선을 지탱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긴 거나 다름없는 것으로 해석해버린다. 현실에서의 패배를 정신적인 승리로 바꿔서 자위하는 비굴한 모습이다. 루쉰은 아Q를 통해 외세에 늘 시달리면서도 외세를 멸시하고 게다가 스스로 조작한 우월감이나 안정감 속에 빠져 있는 그의 조국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아Q들은 펼쳐지는 판을 자신의 방식대로 혹은 자신이 해석하고 싶은 대로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기대에 따라서 해석한다. 심리적 기대를 객관적 사실로 착각하는 것이다. 이런 비판을 가한 루쉰의 가슴은 쓰리고 아팠을 것이다. 그런데 혹시 지금 우리에게 아Q는 전혀 없을까?구경꾼들은 대개 구체적인 현실보다는 가지고 있는 고정된 생각에 더 집착한다. 현실은 두텁고 유동적이지만, 고정된 생각은 얇고 고정적이다. 얇고 고정적인 생각으로 현실을 지배하려다 보면, 항상 현실에는 삐져나오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여분의 현실은 정해진 생각의 제어 능력을 벗어난다. 여기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정당화, 정신승리법 밖에 없다. 아Q가 정신승리법에 빠져 있는 이유다. 그런데 혹시 지금 우리는 정신승리법으로 버티는 아Q와 닮은 점이 하나도 없을까?요시다 쇼인이나 루쉰은 모두 아Q로 살지 않으려고 발버둥친 사람들이었다. 아Q들을 끌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봉우리를 넘으려고 거친 길을 죽어라 걸었던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자신도 해방되고, 민중들도 해방시켰다. 루쉰이 20여 년 만에 정들고 추억에 젖은 고향에 돌아와 보니 고향 사람들은 여전히 구태의연하고 우매하였다. 하지만 그는 그들을 버리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에게 희망을 걸고 묵묵히 혁명의 길을 걷는다. 그는 이렇게 심정을 토로한다. 희망이란 본시 있다고 할 것도 아니고, 없다고 할 것도 아니다. 그것은 마치 땅위에 있는 길과 같다. 사실 땅에는 본래부터 길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다 보니 길이 생겨났다.(『故鄕』) 길은 사람들이 다녀서 생긴 것이다(『장자』「제물론」)는 장자의 말이 루쉰에게까지 닿아있다. 넓고 큰 시야를 가지고, 먼저 발을 내디딜 것인가, 아니면 분석과 비판을 일삼으며 구경만 할 것인가. 뜻이 있다면, 나라를 보라. 그리고 구경꾼 무리에서 빠져 나와 갇히고 고정된 마음이 아니라 미래로 활짝 열린 마음으로 두려운 첫 발을 내 딛자.<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건명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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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9.12 23:02

김제 출신 김종진 문화재청장 "전북은 유·무형 문화재 보고…부가가치 창출 활용해야"

두 번 문화재청을 떠났다가 되돌아왔다. 퇴직 후 문화재청 차장(1급), 문화재청장으로 돌아온 김종진 문화재청장의 이야기다. 문화재청 내부 승진으로 청장 자리까지 오른 사례는 유일하다. 문화재청에서 30년간 근무한 터줏대감. 그는 친정인 문화재청에서 할 일이 남았음에 기쁘고, 구성원들이 무엇을 하는지 여전히 궁금하다. 업무 보고 날을 손꼽아 기다릴 정도라고….지난 5일 대전 문화재청장실에서 만난 김 청장은 인터뷰 내내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면서 높낮이 변화가 없는 조용한 말투로 대화를 이어갔다. 취임 후 기자간담회를 제외하고 공식적으로 갖는 첫 대면 인터뷰였다.- 문화재청 ‘터줏대감’ 이지만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이사장, 충남문화산업진흥원장으로 근무하기도 하셨죠. 안에서 본 문화재청, 밖에서 본 문화재청 무엇이 다릅니까.“문화재청이라기보다 공직에 대해 생각해보는 기회였습니다. 공직에 있을 때는 맡은 일이 국민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해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공직자가 해당 분야에 기여한다는 긍정적인 사고로 일하면 그 분야가 성장하고, 그러한 생각 없이 일하면 그 분야는 정체됩니다. 공직자가 열린 마음과 건전한 판단으로 일을 해결하고, 맡은 일에 대한 국민적인 공감대를 높이는 노력도 기울여야 합니다.”- 문화재 행정은 보존과 활용이라는 키워드가 늘 따라다닙니다. 문화재청의 정책 기조는.“문화재 행정은 다른 행정과 다르게 연속성이 있습니다. 문화재 지역에 위치하기 때문에 지역주민의 삶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습니다. 지역의 자산이므로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지역적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자원으로 가꿔나가야 합니다. 문화재를 보는 시각은 부가가치 창출 자산, 개발 걸림돌이라는 두 가지 시각으로 나뉩니다. 살다 보면 남의 장점만 보느라, 자신이 가진 장점을 놓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역 문화재도 자신이 가진 장점을 되돌아보면서 새로운 걸 만들어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보존도 개발의 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창 고인돌군도 주변 경관이 잘 보존되니 지역이 살아나고, 김제 벽골제도 주변이 평야 지대로 보존돼 가치가 높아지는 것처럼 말이죠.”- 최근 유네스코 인증서 분실, 해외 환수 ‘덕종 어보’ 모조품 등으로 문화재청에 대한 국민적인 신뢰도가 하락했습니다. 신뢰 회복 방법은 무엇이라고 여기시는지.“저를 포함한 직원 모두가 기본부터 세심하게 확인하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계유산 인증서는 (각 부서에서 보관하던 것을) 문화재청 기록관으로 옮겨 보관하도록 했고, 어보에 대해서는 2019년까지 전수·정밀조사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어보 환수라는 큰 것만 생각하다 보니 재제작 여부 등 기본적인 사항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부족했던 부분을 인정하고 문화재청이 일신하는 기회로 삼겠습니다.”- 문재인 정부 100대 국정과제인 ‘가야사 복원’ 후속 조치 등 추진 상황이 궁금합니다. 이와 관련 자치단체 간 무분별한 사업 계획 등 예산 확보 경쟁이 과열됐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이에 대한 견해는.“가야사 연구·복원 조치는 가야문화권 유적의 의미를 살려 부가가치를 만들고, 지역 발전을 도모하자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큰 틀은 가야문화권 유적을 조사해 목록화하고, 가치에 따라 문화재로 지정하고, 단계적인 고증을 통해 보수·복원한다는 것입니다. 내년 상반기까지 국립문화재연구소 주관으로 가야문화권 유적을 목록화할 예정입니다. 이와 관련 태스크포스(TF)를 가동했고, 곧 자문위원회도 구성할 계획입니다. 자치단체의 좋은 의견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과도한 경쟁은 조절하는 등 문화재청이 방향을 제시하고 이끌어 나가겠습니다. 특히 전북 가야사 연구·복원은 비교적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더 좋은 설계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전북에 대한 애정도 남다르실 텐데요. 전북 문화재 관련 업무 중 기억에 남는 일화는.“고창 고인돌군과 김제 벽골제 문화재 권역 확대 지정, 백제역사유적지구 세계유산 등재, 국립무형유산원 설립 초기 예비타당성 조사 통과 등이 기억에 남습니다. 고창 고인돌군이 일부만 문화재로 지정돼, 이를 주변에 산재한 고인돌군까지 확대 지정했습니다. 그 당시 고창군민이 이주를 협조해주고, 보존관리 계획을 수립하는 데도 동참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결과가 세계유산 등재까지 이어졌죠. 초석을 마련했다는데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백제역사유적지구 세계유산 등재 활동을 하면서 익산 왕궁리유적이 대단한 유적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닫기도 했습니다. 왕궁에서 사찰 유적으로 변이되는 과정, 왕궁리유적 주변 관방유적 등 한 권역에 의미 있는 유적이 분포된 양상이 흥미로웠습니다. 왕궁리유적 주변 유적까지 연계해 조사하고 가꿔나가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전북의 강점은 무엇일까요.“전북은 유형적인 문화재 외에도 농악이나 판소리 등 무형적인 문화재가 아우러져 있다는 점입니다. 익산 백제역사유적지구, 김제 벽골제, 고창 고인돌 등을 엮어 지역 부가가치 창출 자원으로 활용할 여지도 충분하다고 판단됩니다.”- 청장님의 롤모델은 누구입니까.“2000년 초, 보존과 개발이 첨예하게 대립한 서울 풍납토성 안 재건축 부지를 사적으로 지정할 때 담당 계장이었습니다. 서울시에서 보상 기준 요청 문서를 보냈는데, 어떻게 회신해야 할지 고민이 됐습니다. 보상 기준에 대한 법적인 근거, 위원회 구성 등 고민이 많았죠. 이를 멀리에서 지켜보고 있던 그 당시 서정배 초대 문화재청장님이 손수 문서를 기안해 내려보내 주신 일화가 있습니다. 구성원들과 함께하는 서 청장님의 모습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김종진 청장은- 36년간 관련 업무…내부승진 첫 수장김종진(61) 문화재청장은 문화재청의 전신인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시절부터 36년간 문화재 업무를 담당해온 터줏대감이다. 그만큼 문화재청 내에서 가장 경험이 풍부한 관료로 손꼽힌다. 문화재청 출신으로는 내부 승진을 통해 청장에 오른 첫 사례이기도 하다.김 청장은 김제시 진봉면 출신으로 진봉초, 전주서중, 전주고, 방송통신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전주고를 졸업하고 김제시청에서 9급 지방직 공무원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군 복무를 한 뒤 1981년 문화재청의 전신인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에 7급 공무원으로 다시 입사해 문화재청 기념물 과장, 사적과장, 무형문화재과장, 재정기획관, 기획조정관 등을 지냈다. 2013년 문화재청을 퇴직해 한국문화재보호재단(현 한국문화재재단) 이사장으로 일하다가 10개월 만인 2014년 7월, 문화재청 차장으로 재임용됐다. 2017년 4월 충남문화산업진흥원장으로 발탁돼 일하다가 4개월 만에 친정인 문화재청 청장으로 돌아왔다.서울 풍납토성 안 재건축 부지를 사적으로 지정해 문화재 보존에 획기적 전기를 마련했다. 특히 문화재등록제를 도입해 근대문화유산을 보호하는 기반을 마련하는 등 고비마다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고향인 전북과 관련한 업무도 수차례 추진했다.고창 고인돌, 김제 벽골제, 익산 미륵사지 등 전북지역 주요 문화재가 보존·복원되도록 기여하고, 전주 국립무형유산원 설립 초기 예비타당성조사 단계에서 기획재정부를 설득해 준비 작업을 도왔다.

  • 기획
  • 문민주
  • 2017.09.11 23:02

[길 따라 맛 따라 ③ '풀꽃세상' 허인교 대표를 만나다] "음식도 조경도 시각보다 손님이 편안함 느끼게"

먹거리 포비아(불안증)가 확산되고 있다. 구제역조류독감(AI)이 일상적인 전염병이 된데다가 최근에는햄버거병과살충제 계란,E형간염 돼지고기문제까지 불거지면서다. 먹거리에 대한 불신과 불안감은 자연스럽게 채식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채식 동호회가 속속 생겨나고, 여러 형태의 채식축제도 매년 열기를 더해가고 있다. 한국채식연합은 국내 채식주의자 규모를 100만~150만명 규모로 추산하고 있다. 완전 채식주의자인 비건뿐 아니라 오보락토 등 여러 형태의 채식주의자를 포함해서다.채식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채식 전문 식당들도 늘어나는 추세다. 그러나 우리의 외식문화가 육식 중심이어서 채식만으로 식단을 꾸리고 있는 식당은 지금도 그리 많지 않다. 특히 도내의 경우 채식 전문으로 자리를 잡은 식당은 손으로 꼽을 정도다. 그 중 전주 도심의 영화의거리에 있는무심과 금산사 가는 길목의 해성고 근처에 있는풀꽃세상이 전북지역의 채식문화를 이끌었다. 채식 전문점들이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한 것과 달리 이들 두 음식점은 각각 2001년도에 개업한 후 나름의 단골들을 확보하면서 입지를 다졌다. 좀 더 대중적인 이미지로 풀꽃세상을 이끌고 있는 주인 허인교씨(57)를 만났다.△18년째 채식 전문 뷔페식당으로채식에 관한 일반의 관심이 높지 않던 시절에 일찌감치 채식 전문 뷔페식당을 연 것이 먼저 궁금했다. 허씨는 자신의 건강 때문이었다고 했다. 90년대 중반까지 환경 관련 업체를 운영하던 중 혈압으로 쓰러진 것이 계기였다. 술담배를 끊고, 채식으로 건강관리를 하던 중 기왕이면 생업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방안으로 음식점을 차리게 됐단다. 현재의 음식점 바로 옆에서 채식건강부페라는 상호로 출발했다.음식점 운영 경험이 없고, 조리 자격증 하나 없었던 그가 어떻게 대형 채식뷔페식당을 꾸릴 수 있었을까. 채식 관련 단체에서 활동한 것이 힘이 됐다. 그는 한국채식연합회 공동 대표도 지냈다. 연합회를 통해 요리사들을 영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처음 두부 만들기 정도만 하고, 주차관리 등 허드렛일을 맡아보았던 허씨는 하나둘씩 요리를 배웠다. 지금은 이 식당에서 나오는 주요 음식들이 거의 그의 손을 거치고 있다. 벌써 음식점 경력 18년째이니 그럴 만도 하다.채식에 관한 그의 생각을 들어보았다. 그는 음식을 인생과 같다고 보았다. 사람이 성장하는 것처럼 음식관도 진화한다는 거다. 1단계는 배를 채우는 데 관심을 두고, 맞을 찾는 게 2단계며, 그 다음에 미적 아름다움을 찾는다. 마지막 단계가 건강과 평화로운 음식을 추구하는 데, 그것이 채식이라는 것이다.12~13년간 동물성 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 비건(vegan) 채식을 했으나 그 스스로 극단적 채식주의자는 아니다. 운영하는 식당의 식단 역시 세미 베지테리언(semi vegeterian)으로 꾸렸다. 채식이 중심이지만, 생선(고등어)과 닭고기가 식당 구석에 따로 분류돼 놓여 있다. 단골이었던 스님들 중에서 일부 거부감도 드러냈지만, 자신의 소신을 꺾지 않았다. 채식의 범주를 어디까지나 개인의 신념 문제라고 본단다.△냉정한 맛 감별사는 고객점심을 중심으로 저녁 식사까지 하루 평균 400명 남짓의 손님들이 찾을 만큼 전주의 대표적 채식 뷔페점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전주 도심에서 벗어나 접근성이 떨어질 수 있는 단점을 오히려 슬로우 푸드 측면에서 장점으로 활용했다. 중인리 가는 2차선 도로 주변에는 풀꽃세상과 같이 민물장어, 생태탕, 코다리, 보리밥, 추어탕, 국수, 중식 등의 메뉴로 단골들을 확보한 맛집들이 적지 않다. 조금이나마 한적한 곳에서 여유를 즐기려는 이용자들이 고객이다. 풀꽃세상이 자리한 곳은 본래 논이었다. 그곳에 건물을 만들고, 꽃과 나무를 심었다. 10여년에 걸쳐 주인 허인교씨가 1600평의 나대지를 울창한 숲의 정원으로 손수 가꾼 것이란다.음식과 마찬가지로 주변이 평화로워야 합니다. 조경전문가들이 너무 밀식했다지만, 시각보다 손님이 편안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점을 뒀습니다.식사 후 자연으로 나와 여유롭게 사색과 대화를 이어갈 공간을 갖춘 것이 음식 이외 이 집이 갖고 있는 자랑이다.지역에서 3년 이상 버티는 곳이 없을 정도로 채식뷔페 식당의 운영이 어려운 것은 신선도가 생명인 야채류 관리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전북프랜차이즈협회를 만들어 초대 회장을 맡기도 했던 허씨는 전주 고사동에 분점을 낸 적이 있으나 적자 끝에 곧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런 관리 문제 때문이었다.음식의 맛은 식재료의 특성을 잘 살리는 데서 나옵니다. 발효해야 할 때 발효하고, 오래 끓여야 할 것은 그렇게 해야 합니다. 구워야 할 것을 볶는다든지, 익혀야 할 것을 굽게 되면 제 맛을 낼 수 없습니다.허씨는 외국인들도 엄지를 든다고 하는, 현재 음식점에서 가장 사랑받는 통밀빵을 예로 들었다. 이 빵을 내놓기까지 5차례에 걸쳐 24시간 반복적으로 발효를 시키는데, 손쉽게 할 수 있는 유혹을 떨쳐야 했다. 한 때 제빵사를 뒀으나 그런 유혹을 떨치지 못하더란다. 시간이 걸린 노력만큼 편안한 결과가 나온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손님은 냉정한 평가자입니다. 내가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손님이 손을 대지 않으면 잘못된 것으로 여깁니다. 현재 우리 식당에 나오는 음식들은 그렇게 해서 살아남은 메뉴들입니다.△음식 다양성 망치는 조미료는 노허씨의 살림집은 식당 2층에 있다. 거실 서가에는 음식 관련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샐러드, 소스, 두부, 된장, 파스타, 커피와 샌드위치, 녹즙, 디저트 등 음식 전문 서점을 방불케 했다. 식당을 차린 후 늦은 나이에 대체의학 석사학위를 받기도 한 그는 음식 관련 책과 함께 현장의 벤치마킹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지금도 한 달에 한두 번은 꼭 서울의 특급 호텔을 비롯해 전국의 호텔들을 다니며 음식의 흐름을 읽는다. 자만하지 않기 위한 목적도 있단다.허씨는 음식점들이 조미료를 쓰는 걸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조미료의 유해성 여부를 떠나 맛의 획일화를 가져오는 게 조미료다. 화학조미료를 벗어나야 비로소 식재료에서 나오는 맛을 느낄 수 있으며, 음식점마다 다양한 색깔의 맛을 낼 수 있다는 것이다.허씨는 전통음식의 세계화에 관심이 많다. 전통음식을 고루하게 여기며 이에 기반을 두지 않는 세계화는 허구다. 전주시가 한식의 세계화를 목적으로 미슐랭가이드의 별을 따기 위한 노력은 자칫 프랑스화 된 한식으로 잘못 흐를 수 있다고 우려했다. 뉴욕에서 별 2개의 미슐랭 평가를 받은 한식당 2곳을 가봤더니 불고기육개장의 양이 너무 적더란다. 미슐랭의 평가에 맞추다보니 한식의 푸짐함이 사라졌다. 미슐랭 평가에서 국가별지역별 음식의 다양성이 존중되지 않으면서다. 반면 수구적인 자세도 문제로 보았다. 진한 맛의 전통 고추장이 과연 세계적으로 통할 수 있을지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허씨는 한식으로서 채식의 깊은 맛을 내고 싶은 게 향후 꿈이란다. 허씨의 풀꽃세상은 거창하게 채식주의를 앞세우지 않으면서도 지역의 채식문화를 확산시키는 데 직간접적으로 큰 역할을 했다. 슬로시티를 지향하는 전주에 이런 식당 하나 없다면 낯이 안 설 것이다. 채식이 만능이 될 수 없지만, 식문화의 트렌드와 생명환경의 중요성 측면에서도 풀꽃세상의 더 큰 역할을 기대해본다.△음식 가격 1만 2900원.

  • 기획
  • 김원용
  • 2017.09.08 23:02

[노인 일자리 '시장형' 사업] 노년 복지 해법은 질 좋은 일자리 확대

노인이 되면 흔히 4고(苦)에 시달린다고 한다. 빈곤과 질병, 무위, 고독이 그것이다. 이런 4가지 고통의 해법은 무엇일까. 단연 일자리가 아닐까 한다. 일을 하게 되면 돈을 벌고, 생활에 활력이 생겨 질병과 고독도 자연스럽게 물리칠 수 있기 때문이다. 곧 일자리가 노인복지의 핵심이다. 하지만 노인일자리 문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양질의 일자리 마련은 더욱 그러하다.△괜찮은 일자리는 6.4%, 3만개 그쳐2017년 정부가 예상한 우리나라 노인일자리는 46만7000개(추경 3만개 포함)다. 이 중 정부에서 직접 예산을 투입해 만드는 공익형(재능나눔 포함)이 38만2000개로 81.8%를 차지한다. 공익형은 65세 이상 기초연금수급자가 대상이다. 나머지 8만5000개가 시장형, 즉 민간일자리다. 이 가운데 5만5000개의 시장형사업단은 월평균 임금이 30만원 안팎에 불과해 양질의 일자리라 보기 어렵다. 결국 그나마 괜찮은(?) 일자리는 6.4%인 3만개에 불과하다.2017년 8월말 현재 우리나라 65세 이상 고령인구는 725만 명으로 전체의 14%에 이른다. 통계청의 2016년 고령자 통계에 따르면 고령층(5579세) 인구 중 61.2%가 일하기를 원하며, 취업을 원하는 이유는 생활비 보탬이 58.0%에 달했다. 이를 대충 대입해 봐도 노인 400만 명 이상이 일자리를 원하고 있어, 노인일자리가 얼마나 부족한가를 알 수 있다.그러면 시장형 일자리는 어떤 것이 있으며 실태는 어떠한지 살펴보자. 보건복지부가 주관하고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이 대행하는 노인일자리사업은 크게 취업과 창업으로 나뉜다. 취업활동에는 인력파견형과 시니어인턴십, 창업활동에는 시장형사업단(공동작업형, 제조판매형)과 고령자친화기업 등이 있다. 또 고용노동부 사업으로 중장년취업성공패키지가 지난해 11월부터 64세에서 69세로 확대됐다.인력파견형은 수요처의 요구에 의해 일자리를 연계시켜 주는 사업으로 60세 이상이 구직신청서를 작성해 전국 116개(전북 9개) 일자리수행기관에 제출하면 된다. 직종은 관리사무, 공공전문직, 서비스업, 판매, 농림어업, 기능원, 단순노무직 등 다양하다.2016 노인일자리 통계 동향에 따르면 2016년의 경우 1만2557명이 참여했으며 평균 참여기간은 4.7개월, 월평균 임금은 101만8000원이었다.시니어인턴십은 업체에서 60세 이상을 고용하면 매달 45만원씩, 최대 6개월 270만원까지 지원하는 사업이다. 지난해 이 사업을 통해 6730명이 취업했으며 계속고용률이 66.8%로 비교적 높은 편이다. 전북은 5개 수행기관(전국 113개)에서 566명을 취업시켰다. 월평균 임금은 2015년의 경우 87만3000원이었다.△고령자친화기업, 월급 93만원 평균 5개월 근무직접 일자리를 만들어 고용하는 고령자친화기업은 3억 원까지 지원해주는 사업. 대신 60세 이상을 최소 10명(제조업)에서 20명(서비스업)까지 고용해야 한다. 2011년부터 시작해 올해까지 전국에 120개가 선정됐다. 월평균 임금은 93만8000원이며 재직기간은 5개월(155일) 가량이다.전북에는 모두 11개가 선정됐으나 1개가 탈락해 현재 10개(표)가 운영되고 있다. 대다수 운영이 어려운 가운데 천년누리봄, 새참수레 등이 선전하고 있다. 도내에서 건실하게 운영되는 고령자친화기업을 소개하겠다.전주시 경원동 한옥마을 부근에 위치한 천년누리봄은 전주효자시니어클럽이 운영하는 백반 및 막걸리 주막. 매니저를 제외한 종사자 11명이 60세 이상이다. 고풍스런 한옥 분위기에 노인들이 분홍빛 생활한복을 입고 조리와 서빙을 한다. 막걸리 한상에 2만원으로 SNS를 통해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점심에는 백반과 비빔밥 도가니탕 등을 저렴하게 제공한다. 최근에는 사회적 기업 천년누리 전주제과의 비빔빵이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다. 전주의 명물 비빔밥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비빔빵은 SK이노베이션의 사회공헌 지원사업에 선정됐으며, 지난 7월 tvN의 알뜰신잡에 소개되기도 했다.완주시니어클럽이 운영하는 새참수레는 60세 이상 13명이 근무하는 뷔페 농가 레스토랑. 2007년부터 노인공동작업장을 운영하며 농촌지역 특색을 살려, 친환경농법으로 재배한 20여 가지 농산물을 활용해 두부와 각종 반찬 등 식품 제조판매사업과 도시락 배달을 시작했다. 2012년 고령자친화기업에 선정돼 새참수레 1호점(봉동점)을 냈으며 2016년에 2호점(삼례점)을 열었다.조리사 오미자(68) 어르신은 집에만 있으면 게을러지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옷 입고 출근할 곳이 있다는 게 너무나 행복하다 면서 가족을 먹인다는 심정으로 음식을 만든다고 미소를 지었다.한편 남원시니어클럽은 지난 해 (유)크린시니어 청소사업단이 선정된데 이어 올해 (유)남원부각이 선정되는 경사를 맞았다. 60세 이상 30명으로 구성된 (유)크린시니어는 학교 등 공공기관의 청소용역을 맡고 있다. 올 말에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유)남원부각은 기존의 시장형사업단을 발전시킨 형태로 김 연근 고추 감자부각 등 다양한 상품을 개발해 학교급식 및 백화점 등에 납품할 계획이다. 김현성 관장은 아무래도 어르신들이 나이가 있다 보니 생산성이 높은 것은 아니지만 연륜과 성실함으로 극복해, 한번 드신 분이 다시 찾을 수 있도록 맛과 가격경쟁력으로 승부를 걸겠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고용불안정으로 근무기간 짧고 급여 낮아마지막으로 시장형의 개선점을 들어보자.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은 60+ 민간분야 노인일자리사업 현황과 쟁점에 관한 연구(2016)에서 65세 이상 민간일자리는 고용불안정이 높아 근로시간이 짧고 급여가 낮은 수준이라고 진단한 뒤 노인인구의 양적 변화 뿐 아니라 질적 변화에 발맞춰 정책방향을 설정해야 한다고 밝혔다.또 서울대 산학협력단은 노인일자리 및 사회활동 성과평가연구(2016)를 통해 60대 이상 인력수요 발굴을 위해 정기적인 기업 대상 인력조사와 60대 적합 직종직무를 개발해야 한다면서 일상생활지원서비스, ICT 기술활용, 기업 사회공헌사업 활용방안 등을 제안했다.● 전주효자시니어클럽 최재훈 관장 "고령자친화기업 수익 내려면 안정 단계까지 예산지원 필요"- 시장형사업단 지원금액- 오히려 공익형보다 못해노인일자리사업 중 시장형은 정착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등 어려움이 많아 성공사례를 찾기가 힘듭니다. 새 정부가 내년에 민간일자리 2만개를 확대하려고 하지만 쉽지 않을 것입니다.한국시니어클럽협회 수석부회장을 맡고 있는 전주 효자시니어클럽 최재훈 관장은 노인일자리 분야에서만 17년간 잔뼈가 굵었다. 전주어르신일거리마련센터, 노인복지관 일자리 담당, 시니어클럽 등을 거치며 노하우를 쌓았다.최 관장은 시니어클럽이 시장형 사업량의 50% 이상을 수행하고 있는데 비해 전체적으로 수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지역자활센터를 활용하는 방법도 모색해야 한다는 것.고령자친화기업의 경우 실제 운영해 보면 초기 예산지원만 있지 그 뒤 지원이 없고, 인건비로 쓸 수 없게 되어 있어 수익구조 만들기가 어렵다고 지적한다. 안정화 단계까지 지원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시장형사업단의 경우는 올해 1인당 지원비가 200만원이고 내년에는 10만원 오를 예정인데 이는 공익형보다 못하다고 지적한다.최 관장은 장기적으로 민관이 협업을 통해 고령친화산업과 노인복지서비스의 융합모형을 만들고 생산적 일자리 창출을 통해 노인들의 삶의 질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조상진 전주시노인취업지원센터 센터장〉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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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9.07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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