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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여성보호쉼터] 가정폭력 당한 이주여성과 자녀, 제대로 보호 못받는다

나 자살할거야. 내 아이 데려와결혼이주여성 A씨와 혼인한 한국인 남성 B씨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뛰어내려서 죽겠다면서 외치는 말이다. 가정폭력으로 인해 이주여성 A씨는 이주여성보호쉼터에 자녀와 함께 보호 중이었는데, 남편 B씨는 아내 마리아씨와 자녀를 집으로 보내달라며 자살소동을 벌였다.남편 B씨는 폭력을 행사한 가해자였지만 피해자 보호쉼터가 가족의 해체를 부추긴다며 관할 시청과 여성가족부에 민원을 제기하였다. 남편 B씨의 자살소동과 행정기관에 대한 민원제기로 문제가 시끄러워지자 관할 지자체는 남편 B씨가 자살을 시도하고 있으니 빨리 아이를 만나게 해주고 동영상을 찍어서 보내주라며 피해자보호쉼터에 요구했다. 또 남편이 보고 싶다 말하면 언제든지 볼 수 있게 해달라며 보호쉼터를 압박했다. 경찰도 이주여성을 집에 돌려보내라는 의견을 타 기관을 통해 우회적으로 얘기하는 등 가해자의 자살소동으로 인해 피해자 보호원칙을 뒤로 하는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결국 피해 이주여성은 해당 피해자보호쉼터에서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되었다.폭력 가해자가 자살을 무기로 피해자를 가정으로 복귀시켜 달라는 요구를 하면, 이에 대해 대처할 수 있는 시스템이 취약하다. 아무리 가해자라 하더라도 생명보호가 우선이기 때문에 자살을 시도를 하면 이에 대응을 해야 하기 때문에 경찰과 행정기관의 고충은 이해할 만하다. 그런데 가해자의 자살을 무기로 하는 가정폭력 피해 당사자를 만나게 해달라는 것과 가정으로 복귀시켜달라는 요구의 수용은 또 다른 피해를 발생시킬 수 있다. 그 사례로 2011년 경북 청도에서 베트남 이주여성이 남편이 휘두른 흉기에 살해되고 말았다. 이 여성은 한때 이주여성보호쉼터에서 한 달 반 동안 보호를 받았었다. 이후 아이출산을 위해 집으로 돌아갔지만 남편이 휘두른 흉기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말았다.현재 우리나라의 법률 체계에 따르면 가정폭력 가해자가 아내를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으면 죽겠다며 자살소동을 벌이는 것에 대해 대처할 수 있는 시스템이 취약하다. 폭력가해자가 자살시도를 하는 것은 자기생명권에 대한 자기위협이다.타인의 생명에 위해를 가하는 경우에는 살인관련 죄로 처벌할 수 있지만, 자기의 생명을 스스로 해치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취약하다. 경찰에서는 상황 발생 시에 전문경찰을 출동시키고 중재역할을 하며 경찰특공대를 보내는 등의 대처를 할 수 있다. 또 심리전문가를 보내서 자살 시도자에 대해 안정시키는 방법을 동원하고 있지만, 이를 대처할 수 있는 심리상담 전문가는 전북 경찰청에 1명만을 선임하고 있어서 사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어려운 실정이다.정신건강복지법에 의하면 정신질환자로 추정되는 자로서 자신 또는 타인을 해할 위험이 큰 자의 경우 3일간 응급입원을 시킬 수 있다. 상황이 매우 급박하여 자의 입원이나 보호자 동의 입원 등 다른 입원을 시킬 시간적 여유가 없을 때 누구든지 발견한 사람이 의사와 경찰관 동의를 받아 정신의료기관에 응급입원을 의뢰할 수 있다. 그러나 자살 시도자가 병원에 입원했다고 하더라도 3일 후에 전문의가 진단하여 퇴원과 계속 입원 여부를 결정해야하는데, 정신질환으로 판명되지 않는 한 계속 입원할 수는 없다. 자살시도를 했다고 해서 모두 정신질환으로 볼 수는 없다. 인격장애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의학전문가들은 가정폭력을 행하는 자들의 행위 요인을 폭력자의 인격특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진단한다. 회피적 인격장애, 의존적 인격장애, 수동-공격적 인격장애, 반사회적 인격장애, 경계선적 인격장애, 반사회적 인격장애, 충동조절장애, 자기애적 인격장애 등 다양한 인격장애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진단한다. 폭력가해자가 인격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정신질환자로 판단하여 입원시키는 인권침해 논란의 소지가 있다. 정신질환이 아닌 인격장애자의 자살 시도와 같은 극단적 행위에 대한 조치는 한계가 있다.가정폭력 가해자가 자살을 하겠다면서 소동을 벌이는 것은 실제로 자살로 이어지기보다는 아내와 자녀를 보내 달라고 하는 등의 협상을 하려는 목적이 주요하다. 폭력을 가하는 가해자들은 일반적인 방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극단적 방법을 선택한다. 이러한 극단적 방법은 피해자와 더불어 보호시설 관계자들의 신변에도 위험을 가져온다. 가정폭력 가해자의 이러한 행동은 이주여성 피해자의 불안감을 증대시키고 2차-3차의 피해를 유발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정신질환이 아닌자가 여타의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기생명권에 대해 위해를 가하려 하거나 실제로 위해를 가할 경우에 이를 대처할 수 있는 대책이 필요하다. 현재는 타인의 생명에 가해를 하는 것에 대한 처벌 규정은 있지만,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고 위해하는 것에 대한 법률적 규제 장치가 없기에 이에 대한 관련 대책을 신속히 마련할 필요가 있다. 자기생명권 보호에 관한 법률 제정 등이 필요하다.또한 가정폭력 가해자가 자살을 극단적 협상수단으로 삼아 피해자인 아내와 자녀 등을 집으로 돌려보내달라는 요구를 한다고 하더라고 경찰과 행정기관이 피해자 보호쉼터 등에 압력을 가하는 행정적 조치도 개선될 필요성이 제기된다.■ 내국인 쉼터와 차별 심각- 가해자 대면 금지에도 외부서 종종 상담 요구쉼터는 상담소가 아닌 피해자를 보호하는 곳입니다.이주여성을 보호하는 쉼터 관계자들의 호소이다. 쉼터는 상담기관이 아닌 피해자보호시설이다. 그런데 외부의 여러 기관에서는 이 사실을 간과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폭력가해자와의 대면상담을 요구하는 사례가 대표적이다.내국인 여성쉼터 등에서는 가정폭력 가해자와는 원칙적으로 대면상담을 진행하지 않는다. 가정폭력보호쉼터의 주된 목적은 피해자를 보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가정폭력 행위자들이 향후 폭력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약속 등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문제 등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대면은 자칫 2차 피해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내국인 여성쉼터가 가해자와의 상담을 진행하지 않는데도 이주여성보호쉼터는 외부로부터 피해자와의 상담진행을 상당부분 요구받는다. 피해자 보호에 있어서도 내국인 여성과 동등한 관점 속에서 이주여성도 보호받을 수 있는 조치가 필요하다.이주여성이 폭력을 당하면 심각한 불안과 공포감을 나타낸다. 이러한 불안 증상은 오랜 동안 지속이 되는데, 피해 이주여성은 가해자인 남편을 만나는 것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다.이주여성쉼터 관계자는 피해이주여성이 남편을 만나고 싶지 않다는 강한 의사를 표명함에도 불구하고 외부에서는 부부 대면상담 등을 통해 이주여성이 빨리 가정으로 복귀할 것을 요구하고 있어서 어려움이 많다며 안타까움을 표명했다.또 쉼터 관계자들은 폭력 가해자와의 상담을 진행할 때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다고 호소했다.지금 전북지역의 이주여성보호쉼터에서는 피해자보호의 어려움과 쉼터종사자의 신변의 위협 속에서도 다문화가정의 행복을 위해 다양한 상담 및 지원활동을 통해 평화로운 가정 만들기에 힘쓰고 있다./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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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1.30 23:02

[진안문화의집 연극 활동] 귀촌 아줌마들의 설레는 무대 도전기 '지금 막 오릅니다'

너희들 몰랐어? 여기 호수에 오래된 천년 묵은 용이 있다는 거? 에이~ 그런 게 어딨어요? 할아버지 보셨어요? 그럼 봤지. 이리 가까이 와봐. 저기 용담호 보이지? 이 할아버지가 너희들만 했을 때 저 아랫마을에 살았는디 거기서 봤지. 물 속에서 살았다구요? 용궁? 허허. 용궁이 아니라... 아니 용궁이기도 허네. 여기 댐이 만들어지기 전에 저곳이 다 마을이었어... 진안문화의집 공연장에서 예닐곱의 젊은 여성들이 연극 연습을 하고 있다. 3-40대 아줌마들이다. 무대 위 여기저기에 한두어 명씩 어울려 대사를 읽거나 몸동작을 연습한다. 말투나 얼굴 표정에도 각별히 신경 쓰며 몰입한다. 그이들은 연극단원은 아니다. 진안으로 귀촌해와 살고 있는, 익숙해지는 듯 하면서도 아직은 진안에서 산다는 게 낯설기만 한 젊은 귀촌여성들이다. 이들은 12월에 발표할 아동극 소원이가 용됐네 연습에 한창이다. 진안에 전해 내려오는 용담호 전설을 섞어서 프로그램 참여자들과 의견을 나누어 창작했다. △ 소원이가 용됐네 산골 촌구석에서 연극하자고 모여든 주인공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귀촌한 지 5년이 되어가는 심수진 씨는 진안에서 마을만들기 일을 하고 싶어서 귀촌했으며 임신과 출산 때문에 잠시 쉬는 사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아이를 입학시키려고 장수에서 넘어오게 되었다는 김현미 씨는 초등학교 방과후 보육교사로 일하고 있다. 진안으로 귀촌한 지 만 2년차 되어가는 전해경 씨는 초등학교와 유치원에 다니는 두 아이의 엄마이며 알바로 방과후 교사 활동을 하는 중이다. 오랫동안 시골살이를 꿈꾸었으며 시댁 가까운 전라도 지역을 알아보다 진안에 귀촌하게 되었다. 결혼하기 전 남편과 연애할 때 서울 대학로에 가서 연극을 보던 경험들이 참여 계기가 되었다. 초기에 즉흥극할 때 부끄러워서 자꾸 빼고 주춤거렸는데, 여전히 부끄럽긴 하지만, 재미있단다. 재미있어서 자주 웃게 돼요, 집에서 아이들에게 책 읽어 줄 때 이제 연기하듯이 읽게 되더라고요. 아이한테도 그렇게 읽어보라고 시키고, 가족들끼리 그렇게 읽다가 많이 웃어요. △ 삶의 이야기들도 서슴없이 나누고 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김희진 씨의 말이다. 귀촌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연극 활동인지라 처음에는 귀촌한 삶의 마음들을 풀어보는 일반 어른들의 세계를 표현해보려고 했어요. 연극을 해보자고 모여든 사람들이 연극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일상생활을 하는 평범한 보통사람들이거든요. 그러나 진안에 귀촌해서 사는 사람들이다보니 평범하지 않은 낯선 존재들인 것도 사실이고요.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사람들은 무대에 대한 열정이 강해요. 젊은 주부들이 많아서 그런지 아이들과 함께 하고 싶어들 한다. 연극을 통해 집에서 아이들과 놀 수 있는 방법을 배우려 한다거나 책을 재미나게 읽어주는 법을 배우고 싶어 한다. 얼굴이나 몸짓의 표현을 통해서. 그래서 아동극을 하기로 했단다. 시나리오가 나오기 전에 우리는 즉흥적인 장면 꾸미기 활동을 위주로 했어요. 대본이 미리 짜여진 것은 아니고, 참여자들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즉흥적인 장면 꾸미기 연습을 하고 그러면서 아동극의 방향이나 줄거리를 잡아온 거죠. 나를 알고 서로 알아가고 몸짓형으로 이야기 나누고 우리 동네 이야기 하고... 아이 양육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지 집 장면들이 많이 등장했어요. 시부모나 남편들도요. 가족이나 이웃집 사람들에 대해 알아가고 학교 이야기도 나누는 과정이었죠. 서로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다보니 정치나 교육 이야기들도 서슴없이 했어요. 지역에서 마을에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보니... △ 생활세계와 관련이 먼 줄 알아 너무 좋아요. 치유하고 나를 표현할 수 있고 연극이 좋은 거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봤어요. 중학생인 큰딸이 극심한 아토피로 고생하자 순천에서 친정이 있는 진안으로 귀향한 이유민 씨의 말이다. 이사온 지는 채 1년도 되지 않았다. 아이가 학교를 자주결석할 정도로 아토피가 심했다. 아이도 시골로 옮겨 살기를 원했다. 시골에서 살다보니 아이의 몸이 많이 좋아졌다. 이것만으로도 이 씨는 행복할텐데, 이 씨는 나름대로 자기 삶을 찾아 나섰고 그러다 연극하는 프로그램으로 합류할 수 있었다. 이런 엄마인생에 아이들도 좋아한다. 저는 연극이란 게 저의 생활세계하고는 관련이 먼, 특별한 정신세계를 가진 사람들이나 하는 거라고 생각해왔어요. 그런데 막상 진안문화의집 선생님으로부터 권유를 받고 선뜻 응한 거예요. 뭔지 모르게 설레었어요. 아이의 아토피 때문에 힘들던 몸이 나를 발산시키고 싶다는 생각으로 동요한 것 같아요. △ 주부 여성들의 잃어버린 감각 살리기 이유민 씨에게는 연극 활동이 행운이 되었다. 어렸을 때 웅변도 하고 글짓기도 좀 하던 끼가 되살아나기라도 한 것일까. 연극 활동이 있는 날 오후에는 진안에서 초등학생 아이들 독서지도를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힘들어 지치지 않고 오히려 더 신나게 더 상쾌하게 아이들과 수업할 수 있단다. 아이들이 주의집중력이 약해서 연극 활동에서 흥미유발을 하며 주의집중력을 키울 수 있는 방법들을 고민하면 좋겠다고 한다. 김희진 씨는 프로그램이 더 진척이 되면 아이들을 위해서 인형극으로 아동극을 꾸며 볼 생각이란다. 그러자면 공연용 인형도 만들어야 하고 극복 꾸미기나 목소리에 집중해서 연습할 계획이다. 주부여성들의 잃어버린 감각 살리기도 과제다. 나중에 아동인형극을 공연하고 마을로 순회하면서 봉사활동을 하고 싶은 생각이다. △ 연극에 꿈을 가진 사람들 진안에 귀농귀촌자들이 많잖아요. 농삿일을 하지 않는 젊은 주부들도 많고요. 의외로 연극을 해보고 싶어하는, 연극에 꿈을 가진 사람들이 더러 있어요. 진안군 진안읍에 있는 진안문화의집 기획자 황현화 씨의 말이다. 황 씨는 전라북도문화관광재단에서 주관하는 지역특성화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연극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그이도 귀촌해서 진안에 살고 있다. 그러다보니 귀촌여성들의 심정을 헤아리는 마음이 크다. 매주 목요일 오전이면 연극을 하고 싶어하는 귀촌여성들이 모여들어 연극 활동을 한다. 소원이가 용됐네 시나리오도 그렇게 모여서 공동으로 창작했다. 진안 용담호 이야기를 중심으로 설정하고 있다. 분주한 도시생활을 하다 진안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와 살다보니 산골마을의 한가로운 맛을 만끽할 수 있어 좋아요. 그러나 대부분 낯선 곳에서 마음이 위축되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죠. 도시문화가 그리워지기도 하고요.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 다른 사람들과 새로운 일상의 관계를 맺으며 살고 싶은 욕구가 있는 사람들, 그리고 끼와 열정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들, 그 다양한 사람들을 모아 연극이라는 새로운 활력소를 찾자는 의도였지요. 진안 귀촌여성들의 연극 소원이가 용됐네는 12월 14일 주민들과 만난다. 진안문화의집 공연장에서 오전 10시에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고 저녁 7시에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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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1.29 23:02

한지 판매만 40여년, 동양한지 박성만 사장 "전주한지 살리기 위해선 소비자 수요 맞게 특화돼야"

서울의 인사동은 한때 대한민국의 전통문화를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골동품과 화랑과 표구점과 필방, 전통공예품 전통찻집 전통음식점 등이 집중되어 있었던 덕분이다.1990년대 들어서면서 인사동은 변하기 시작했다. 1988년 전통문화의 거리로 인사동이 지정되면서 관광객들이 몰리기 시작한 탓이다. 인사동을 지키고 있던 고서점, 필방 표구점 등 전통문화 상품을 다루던 가게들이 하나둘씩 밀려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이후 20여년, 오늘의 인사동은 값싼 기념품과 온갖 먹거리와 프랜차이즈 업종 가게들이 뒤섞인 정체불명의 거리가 됐다.그러나 인사동은 여전히 전통문화를 상징하는 공간의 명맥을 지키고 있다. 자본의 힘에 밀리면서도 끝내 자리를 지키고 있는 토박이(?) 가게들이 아직 적지 않기 때문이다.동양한지도 그 중 하나다.1974년에 문을 열었으니 올해로 43년째. 동양한지는 인사동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지업사, 그것도 한지만을 다룬다.이 가게를 열고 오늘까지 지키고 있는 박성만 사장(68)은 전주가 고향. 아버지 대부터 전주 한지로 인연을 맺은 이후, 지금까지 한눈 한번 팔지 않고 오로지 한지 판매로만 살아왔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한지 전문가다. 수십 년 한지를 보고 만지고 느끼는 경험의 시간이 가져다준 선물이다.여주 연구소로 가는 첫째 주와 셋째 주 주말만 빼고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가게에 나오는 박 사장을 그의 오래된 가게에서 만났다. 깊어가는 가을, 평일이었지만 인사동은 젊은이들과 관광객들로 붐볐다. 종로 쪽에서 인사동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있는 그의 가게는 마음먹고 둘러보아야만 찾을 수 있는 작은 공간이다. 인사동에서 밀려나고 있는 토박이 가게들의 현실이 보였다. 그런 마음을 읽었을까. 그가 말했다. 가게는 좁지만 이 안에 대한민국 각지에서 만들어지는 한지는 다 모여 있어요. 그럼 됐지 뭐.인터뷰를 하는 동안 서너 명 손님들이 들고 났다. 가게를 함께 운영해온 그의 아내는 일일이 용도를 묻고 짧은 설명을 더한 후에야 종이를 건넸다. 진귀한 풍경이었다.-가게가 꽤 오래되었나봅니다. 여기서 창업을 하신건가요.건물이 낡았지만 장사하는데 특별히 불편함은 없어요. 종이 사고파는데 특별한 시설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요.-아버님께서 한지 도매상을 하셨다면 한지를 취급하는 지물포가 꽤 많았다는 이야기겠습니다.그렇죠. 당시는 벽지도 그렇고 한지를 많이 썼잖아요. 더구나 전주한지는 이름이 높아 인기가 있었으니 아마 전국적으로도 많이 찾았을 겁니다. 1960~70년대에는 서울의 중앙시장이나 영등포시장에 지물포가 몰려 있었어요. 전주 한지가 많이 올라갔죠.-판매는 어땠습니까.그때 전주한지라고 하면 화선지 보다는 창호지라고 불렀던 초배지를 알아주었어요. 전주 쪽에서는 포지라고 해서 면 메리야스를 갈아서 만든 초배지를 만들었거든요. 전주에 가면 교동에 천이 있었죠. 옛날에는 그 곳에서 빨래를 많이 했는데, 많이 헤진 것은 버리잖아요. 그것을 넝마주이들이 주워서 종이를 만드는 공장으로 가져갔어요. 그것을 갈아서 초배지를 만들었죠. 당시는 흙으로 집을 많이 지었는데 그 종이로 초배를 해야 벽지가 뜨지 않았어요.-지역별로 만들어진 종이의 특성이 달랐군요.초배지로는 전라도는 포지, 경상도는 영덕지를 알아주었고, 일반적으로 쓰이는 초지도 전라도는 소지, 경상도는 살래지, 장판도 전주에서는 전주장판, 경상도에서는 경각장판이란 이름으로 만들어져 올라왔어요.-이런 종이들을 모두 취급하셨나요.그때만 해도 초배지나 장판지가 많이 팔렸어요. 그러던 것이 70년대 중반부터 서예 붐이 서서히 일기 시작하더니 화선지를 찾는 사람이 늘더군요. 전주에서 한지를 만드는 장인들의 화선지가 올라온 것도 그즈음입니다.-70년대 중반, 한지 생산이 번성한 것도 그러한 분위기와 연관이 있군요.인사동에 지업사가 문을 본격적으로 열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니까요. 서울에서도 70년대 초반까지 지물포는 왕십리에 있는 중앙시장이 거점이었어요. 그곳에서 한지 상권도 이루어졌죠. 그러던 것이 70년대 중반부터 인사동으로 한지가 들어오기 시작한 겁니다. 서예, 동양화 붐이 일어나면서 표구사도 성업을 맞았잖아요. 인사동에 표구사가 들어오니 자연히 한지를 다루는 지물포도 들어오게 된 것이죠.-동양한지도 그때 문을 열었습니까.1974년에 열었는데, 그때는 가게 이름이 동양지업사였어요. 80년대 들어와 동양한지로 이름을 바꾸었지요.-한지로 특정하게 된 이유가 있었습니까.이전에는 아무래도 장판이 많이 팔려나가니 장판 위주였어요. 그런데 아파트 문화로 바뀌면서 장판의 수요가 줄고 서예 서화 붐이 일면서 화선지 수요가 급증했거든요. 게다가 한지를 인테리어 용도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아예 한지 쪽으로만 특성화해보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죠.-지업사에서 한지로 특화시킨 것은 잘된 선택이었습니까.그때 생각으로는 잘한 일이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라졌죠. 그래도 후회는 하지 않아요. 한지를 특화한 덕분에 한지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고, 그것이 제 삶의 즐거움이 되었으니까요.-한지 수요도 부침이 심할 것 같습니다.물론이에요. 70년대와 80년대까지는 전주에도 한옥이 많이 남아 있었잖아요. 그때 당연히 전주에 한지공장이 많았었고, 서예 붐이 일어나 서예학원과 표구사가 성업을 누릴 때 또한 전주의 한지 공장도 전성기를 맞았었죠. 그런데 지금은 서예인구도 줄고 아파트 문화로 한옥이 거의 자취를 감추었으니 한지의 수요가 그만큼 줄어든 것이죠.-그런데도 한지로만 가게를 지속 운영해오셨는데요.사실 어려운 시기가 있었어요. 학교에서조차 서예 교육이 없어지면서 화선지는 아예 수요가 거의 없어졌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90년대부터 한지로 만드는 공예가 서서히 일어서기 시작했어요. 2000년대까지는 거의 한지공예로 연명했다 고해도 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역시 한계가 왔어요. 지금은 민화 분야에서 한지 수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5~6년 정도 된 것 같은데, 앞으로도 민화에 대한 관심은 10년 정도 더 이어질 것 같아요.-그런 흐름이 이제는 다 보이시나 봐요.(웃음)50년 가깝게 이 분야에서 놀다보니까 그럴 수밖에요. 더구나 내가 하는 일이란 것이 판매잖아요. 그 흐름이 훤히 보일 수밖에 없어요.-여주에 한지공장을 만드신 것도 이러한 흐름을 예견한 결과겠습니다.그렇죠. 지금 제 눈에는 앞으로 한지가 어디로 갈 것인가가 보여요. 그러다보니 내가 직접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내가 만들고 싶은 종이를 만들려면 연구소부터 내자고 생각했지요.-사장님의 말씀을 들으니 한지 수요의 흐름이 그려집니다.70~80년대는 서예, 90년대~2000년대는 한지공예, 2000년도가 넘어 가면서 민화, 그 다음은 어떤 것이 올까 생각해보니 한지가 미술의 영역에서 매우 좋은 재료로 활용될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어요. 여주연구소에서도 그런 바탕으로 종이를 연구하고 있죠. 최근의 한지 수요, 특히 작가들의 소비성을 보면 그런 예상이 맞는 것 같거든요.-회화 등의 미술 재료로 한지 수요가 확대될 것이란 예상은 흥미롭습니다.실제로 국내작가들의 한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소비면에서 보면 유럽이나 미국 등 외국의 작가들이 한지를 더 선호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미술 분야의 경계도 그렇지만 재료의 개념도 없어졌잖아요. 한지는 이러한 과정에서 매우 좋은 재료로 주목받고 있어요. 지금 저희가 연구하고 개발하는 것은 외국의 작가들이 필요로 하는 재료로서의 한지예요.-주문이 들어옵니까.얼마 전에도 프랑스 작가가 찾아왔어요. 종이 일곱 장을 사러 왔더군요. 원하는 종이가 특수한 것이어서 주문에 맞추어 제작해야하는 것이었어요. 일주일 정도 걸리겠다고 했더니 기다려서 일곱 장을 만들어 가겨갔어요.-특별한 주문, 이를테면 맞춤형식의 한지인 셈인데 작가와 장인의 협업으로 종이 한 장이 만들어지는 것이니 그 자체로 작품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물론입니다. 우리나라의 작가들에 비해 그들은 일반 한지가 아니라 비구상적인 조형성을 갖춘 종이를 원합니다. 우리의 닥으로 만든 종이를 원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겠지요.-대량생산을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한지의 발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계기로는 충분할 것 같습니다.문제는 이런 종이를 우리 기술자들이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대부분의 기술자들은 거의 60세를 넘은 노인들입니다. 전주의 공장들도 예외가 아닐 것 같은데 이 분들이 대개 종이를 하루에 몇 장 뜨느냐에 따라 임금을 받거든요. 월급이 보장되어 있지 않으니 연구는 그만두고 종이만 떠내는 통꾼이 되는 겁니다.-지금 처한 현실로 보자면 숙련된 기술 경험 노하우를 전수하는 일이 중요하겠군요. 여주연구소에서는 종이 장인들이 어떻게 일합니까.자기만이 갖고 있는 장점을 살려낼 수 있는 종이를 만들 수 있도록 독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공장에서는 일반 한지는 생산하지 않고 고급지 특수지 같은 것을 만듭니다.-어떤 종이들인가요.일단 맞춤형 종이가 그렇고요. 지금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아주 얇은 특수지 제작입니다. 우리의 귀한 유물을 보존하는데 꼭 필요한 종이가 있어요. 예를 들면 옛 그림을 잘 보존하고 싶은데 그것이 오래되어 바스러진단 말이죠. 찢어지기도 하고요. 표구 작품이라도 그것을 다시 표구 기술만으로 복원하고 보존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런데 원화가 그대로 드러나 보일 정도로 얇은 한지가 있다면 그 위에 배접을 할 수 있으니 보존성이 높아지겠지요. 이런 한지를 기록이나 문서 보존에 활용한다면 몇 백 년 지나도 훼손될 염려가 없을 겁니다.-한지의 값도 수요를 늘리는데 걸림돌이 되지 않습니까. 특히 수입지가 아닌 국산한지는 가격이 높은데요.우선 닥의 가격이 천지차이거든요. 놀라시겠지만 국내산 닥은 톤당 1억 원이 넘습니다. 지구상에 종이를 만드는 원료가 이렇게 비싼 경우는 없을 겁니다. 모조지나 이런 것은 펄프가 100만원도 안 될 거예요.-그럼에도 국산 닥으로 만든 종이를 찾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 아닌가요.물론입니다. 그만큼 종이의 품질이 좋다는 것이죠. 사실 국내산 닥으로 만든 한지는 보존성, 광택성, 강도와 미세함 등 모든 면에서 현저하게 다릅니다. 토질과 기후가 다르니 조건이 다른 곳에서 자란 닥나무의 성질도 다를 수밖에 없는데, 이런 특성이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겠느냐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기후의 온난화를 말씀하시는 것인가요.실제로 우리나라도 기후 온난화로 닥섬유질의 특성이 북상하고 있거든요. 섬유질이 굵어진다는 이야기인데 이제는 경기도 양주 포천 쪽으로 닥나무 재배가 옮겨져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이런 문제들에 대한 연구가 좀 더 긴밀하게 이루어질 필요가 있겠습니다.사실 한지 산업을 살리기 위해서는 정책적으로 이런 기본적인 문제들이 연구되고 대안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한지 생산은 결국 닥의 문제인데 한지 관련 정책 대부분이 근본적인 문제보다는 피상적인 문제에만 머물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연구자들도 자료에 의존해 연구하다보니 현실과는 동떨어진 결과를 내놓기도 하고. 안타까운 일들이 참 많습니다.-전주한지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전주한지의 우수성은 다들 인정하는데 산업으로 발전시키는데는 아직 한계가 적지 않은 것 같은데요.전주한지의 우수성을 지키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수성을 내세우는 것만으로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전주 한지의 환경과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주에는 아직도 한지를 만드는 공장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공장들이 대부분 비슷한 종이를 뜹니다. 고급지나 특수지에 대한 관심이 적은 것이죠. 같은 종이로 경쟁하는 일은 가격 경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어려운 환경에 처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지금 닥나무 원료는 물론이고 한지까지도 태국이나 중국에서 어마어마한 물동량이 한국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한지는 한통을 떠도 팔 곳이 없다는데 이러한 현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결국은 차별화를 해야 한다는 말씀이군요.그렇죠. 소비자는 다른 곳에 있는데 아직도 일반적인 한지 생산에 몰두하고 있다면 그 끝은 뻔 한 것 아니겠어요.전주한지 이야기가 나오자 박 사장의 얼굴은 굳어졌다. 그는 전주한지의 브랜드를 살리려면 해결해야할 과제가 적지 않다고 지적하면서도 끝내 말을 아꼈다. 50년 가까운 세월, 한지 수요의 최전선 현장을 지켜온 그의 눈에 비친 전주한지의 현실이 더 궁금해졌으나 여전히 일상에서 멀어져 있는 한지의 현실을 보면 답이 따로 없겠다 싶었다.누구나가 한지를 만들 수 있는 체험공간을 늘리고 맞춤형 한지를 만드는 일에 나선 그의 작업은 그래서 더 기대가 된다.● 박성만 사장은- 종이 장인들과 옛 기록 보존할 탁월한 한지 개발 시작박성만 사장은 전주가 고향이다. 완산동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전주에서 살았다. 위로 형이 있었지만 6.25때 세상을 떠나 장남이 됐다. 한지 위탁 판매를 업으로 삼았던 그의 아버지는 전주한지를 비롯해 전라도의 종이를 생산자로부터 가져다 지물포에 넘겨주는 이른바 도매상이었다. 별도의 가게를 열지 않고도 서울의 중앙시장과 영등포시장에 한지를 넘겨주는 아버지의 사업 덕분에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한지에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군대를 다녀온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사업을 이어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한지는 유행을 타지 않는다. 혹시 한지가 제때 팔리지 않아 오래 묵혀둔다 해도 도침의 효과가 있으니 더 좋은 종이가 된다며 재고가 없는 한지 판매업을 권했다. 당시 아버지의 사업은 순조로웠다. 아버지의 거래처를 파악하고 인수하는 일부터 나섰다. 정작 거래처를 돌아다녀보니 아버지가 남겨놓은 빚이 적지 않았다. 그 빚을 정리하는 데만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처음에는 혼자서 서울을 오르내리다가 자리가 잡힐 즈음 가족들을 모두 서울로 올라오게 했다. 아버지의 영향이 컸지만 짧은 시간에 적지 않은 지물포와 신뢰를 쌓게 됐다. 1974년 인사동에 동양지업사란 이름으로 가게를 냈다. 당시 골동품상 화랑 표구사 지업사 등이 물려있던 인사동은 전통문화를 상징하는 곳이었다. 가게 운영은 금세 자리를 잡았다. 80년대에는 아예 가게 이름을 동양한지로 바꾸었다. 한지만 판매하는 가게로 특화시키고 싶었다. 서예 대중화로 전주의 한지 공장들이 번성기를 맞았을 때였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점차 서예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자연히 판매 규모가 위축됐다.한지의 앞날이 훤히 보였다. 생활환경이 바뀐 다해도 한지의 쓰임은 건재 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지만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생활에서 필요로 하는 한지를 만드는 일에 나선 것은 그 때문이었다. 여주에 공간을 마련해 연구소를 열었다. 한지를 만드는 장인들을 불러 종이를 연구하는 일이 시작됐다. 사라져가는 진짜 장인들의 기술을 살려 그들의 기술로 좋은 종이를 만들어내는 일이 그의 목표가 됐다. 그중에서도 그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에 나선 종이가 있다. 옛 기록들을 보존할 수 있는 얇고 탁월한 한지다. 이제 시작단계지만 그는 충분한 가능성을 확신한다.한지를 판매하는 일로만 45년, 온갖 종이를 다뤄온 그는 굳이 만져보지 않아도 한눈에 좋고 나쁜 종이를 가려내고 누가 어떻게 만든 종이인가를 분별해낸다.맞춤형 한지의 미래를 기대하고 있는 그는 첫째 주와 셋째 주 주말이면 여주의 공장을 찾아 직접 특수지를 실험하고 제작도 한다.큰아들이 기꺼이 동행에 나선 덕분에 그의 한지업은 3대로 이어지는 가업이 됐다.

  • 기획
  • 김은정
  • 2017.11.24 23:0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22. 지진의 역사가 말해주는 것 - 역사의 경고…한반도에 지진 없던 시대 없었다

태종 12년 2월 1일 전라도(全羅道)에서 지진(地震)이 일어나니 서운관(書雲觀)에서 해괴제(解怪祭)를 행할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말하였다. 예전 사람이 말하기를, 천재지변을 만나면 마땅히 인사(人事)를 닦으라.고 하였으니, 반드시 제사를 행할 것은 없다.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23권 태종 12년 2월 1일 병진 1번째 기사)지진에 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중 일부이다. 경주 지진에 이어 최근 포항에서 일어난 큰 지진으로 나라가 떠들썩하다. 바다 건너 멀리 일본의 일일 뿐 지진 안전지대인 줄로만 알았던 우리 일상에 닥친 변고로 많은 사람이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지만 사실 우리 역사 속에서 지진의 경고는 이미 여러 차례 반복되어 기록으로 남아 있다.삼국시대나 고려시대까지 멀리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조선왕조실록』에는 지역마다 일어난 지진 등 천재지변에 대한 기록과 이에 대한 관리와 임금의 다양한 반응과 조치들이 기록되어 있다.앞서 임금에게 지진을 이야기한 서운관은 기상을 관측하고 시간을 관장하는 곳으로, 고려시대부터 일식과 월식 그리고 우주의 별들을 관찰했고 조선시대 초반 태조시기 한양 천도에도 관여를 하였다. 1395년에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의 석각을 제작하고, 비의 양을 재는 측우기와 하천의 깊이를 알 수 있는 수표 등을 제작하고 설치하는 등 지금으로 치면 기상청의 역할을 더해 각종 과학 관련 업무까지 담당하며 장영실을 비롯한 많은 관원을 배출한 곳으로, 세조 때 관상감(觀象監)으로 개칭이 된 관청이다. 그렇게 천기(天氣)를 살피며 기상을 예측하는 일을 담당하다 보니 천재지변에 관한 일을 주로 임금에게 아뢰다 이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을 경우 꾸중을 듣거나 귀양을 가는 일이 많은 관직이기도 했다.『조선왕조실록』에 남겨진 많은 지진 기록에는 지진의 횟수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만 흥미로운 사실은 단순히 지진이 발생한 횟수보다도 사람들의 반응과 대처 자세이다. 지진이 나고, 가옥이 흔들리며(「선조실록」 52권), 담과 가옥이 무너지고 허물어져 사람이 많이 깔려 죽기(「단종실록」 12권)까지 하는 여러 피해 기록 속에서, 신하들은 자연의 현상을 무언가의 계시로 보아 제사를 청하거나 임금이 직접 나라에 재변(災變)이나 기이한 자연 현상이 있을 때 이를 해소하기 위해 지내던 제사인 해괴제(解怪祭)를 지내기도 하였다.그중 태종은 지진을 정국의 정치적 개편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어전에서 회의하다 직접 지진의 진동을 강하게 겪은 태종은 지진의 위력을 누구보다도 두려워하며 즉각 이용했던 왕으로, 지진을 사람 탓으로 치부하여 자신의 왕권 강화에 방해된다고 여긴 처남 민무구, 민무질 형제를 제거했다. 처음에는 민 씨 형제의 부덕함을 지적한 사간원의 상소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이들을 제주도로 귀양 보냈으나 이듬해 다시 큰 지진이 발생하자 이들의 해괴함으로 다시금 큰 지진이 발생했다 탓하며 자결을 명하여 이들을 지진의 희생양으로 삼았다.또한, 지진을 정치적으로 보다 극적으로 활용한 사례는 중종 때 정국의 주도권을 놓고 다투던 조광조의 사림파와 그 반대파인 훈구파의 대립이었다.조광조는 중종에게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것은 음(陰)이 성하는 조짐이어서 지진으로 인한 어려움을 극복하려면 소인(공신)들을 멀리하는 것보다 급한 것이 없다고 주장했고, 이에 중종은 조광조의 손을 들어주어 사림파가 정국 개혁을 주도하게 하였다. 그러나 1518년 큰 지진이 다시 일어나자 도리어 반대 세력에게 역공을 당하게 된다. 이는 결국 사림파가 대거 숙청되는 기묘사화로 이어지고 이후에도 중종은 1518년의 대지진이 기묘사림의 변란(己卯士林之變) 때문이라고 언급하는 등 불운한 사건으로 남았다. 또 지진을 예언하여 민중들의 동요를 일으킨 사람들의 죄를 벌해달라는 기록들을 살펴볼 수 있다.지진과 같은 천재지변을 사람 탓으로 돌리는 것은 지금의 과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한 판단으로야 터무니없는 이야기이지만 당시에는 충분히 받아들여질 법한 이유였나 보다. 조선시대 최고의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의 태평시대에도 어김없이 지진 발생의 기록이 있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역사적으로 시대를 막론하고 한반도에 늘 지진이 있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므로 방심 없이 자연재해에 철저히 대비하는 것이다.조선시대 지진의 기록은 지진의 범위가 경상도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주, 익산, 고부 등 우리 전라북도 지역에도 고르게 발생했다. 그 기록을 살펴보면 우리 지역도 결코 안심 지역이 아님을 알 수 있다.전라도의 전주(全州)남원(南原) 등 27개 고을에 지진이 일었다 (「세종실록」 15권)전라도 전주 등 13고을에 지진이 일었다 (「세종실록」 65권)전라도 전주에 지진(地震)이 일어나니, 향(香)과 축문(祝文)을 내려 해괴제(解怪祭)를 행하였다 (「세조실록」 9권)남원부(南原府)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예종실록」 7권)전라도 익산군(益山郡)에 지진이 있었다 (「중종실록」 27권)전라도 임실(任實)에 지진이 일어났다 (「명종실록」 17권)전라도의 전주(全州)여산(礪山)임피(臨陂) 등 고을에 지진이 있었다 (「인조실록」 42권)전주(全州)김제(金堤) 등의 고을에 지진이 있었다 (「효종실록」 20권)전라도(全羅道) 정읍(井邑) 등 세 고을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숙종실록」 29권)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전라도 지역의 지진 기록을 전라도 키워드가 포함된 것으로만 한정해도 200여 건에 이르고, 나라에 본격적인 지진 관측이 시작된 1978년 이래로 따져도 전라북도에서 발생한 지진은 80여 차례에 이른다고 한다.조선시대에는 해괴한 일로 여겨 지진을 두려워하며 제사를 지내거나 누군가의 잘못으로 탓을 돌려 반대파를 숙청하고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지진을 이용하였다.그런 악폐가 있었지만, 관은 지진으로 인해 어려움에 처한 백성들의 상황을 파악하여 이를 기록하고 구호 활동을 하는 등의 긍정적인 역할도 했다.지진과도 같은 큰 자연재해가 두려움에 대상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특히 현재의 과학으로도 정확하게 예보할 수 없는 지진의 경우에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일상에서 위험을 예측하고 준비하며 다가올 상황을 앞당겨 예행연습처럼 시뮬레이션해보는 것은 중요하다. 지반이 약한 곳이나 붕괴의 위험이 있는 장소를 미리미리 점검하고, 재난이 발생했을 때 헤쳐 나갈 방법을 숙지하고 준비해야 한다.수많은 역사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친 과거의 기록들이지만, 기록의 힘으로 우리에게 정확한 메시지를 준다. 역사의 기록으로 알려 준 우리 지역의 지진 진앙지를 분석하여 재난에 대비하여야 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포항 시민에게도 온정의 손길을 내어주는 것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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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1.24 23:02

[호스피스·완화의료와 연명의료] 덜 고통스럽고 품격 있게 맞는 삶의 마지막 순간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웰빙((well-being) 못지않게 웰다잉(well-dying)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수명 연장으로 100세 시대가 눈앞에 닥쳤으나 노후 10년 이상을 질병의 고통 속에 보내다 가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좋은 죽음이란 무엇일까. 삶의 마지막 커튼이 내려질 때 고통 없이 죽음을 맞이할 수 없을까. 이러한 의문에 대한 대답이 호스피스완화의료와 연명의료 결정이다.△영원한 이별그러나 고통스럽지 않게지난 6월 19일, 전주 다가공원 옆 엠마오사랑병원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한 이모씨(52). 20대부터 그를 괴롭혔던 B형 간염은 간경화가 되었고 2013년에는 간암 판정을 받았다. 다행히 당시 군 복무 중이던 아들에게 간 이식을 받아 건강을 회복하는 듯 했으나 2년 후인 2015년 암세포는 척추까지 전이됐다. 2개월 전부터는 하지마비로 두 다리를 못 쓰게 되었다.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상황. 이씨와 아내 김모씨(49)는 호스피스완화의료를 선택했다. 사회복지사로 일하는 김씨는 남편의 병실에서 쪽잠을 자며 노인복지센터로 출퇴근했다. 하지만 자신의 몸이 힘든 것보다 통증과 고열로 고통스러워하는 남편을 보는 것이 더 힘들었다. 넉넉하지는 못했어도 늘 성실했고 가족밖에 몰랐던 남편. 김씨는 매일 밤 잠든 남편의 곁에서 하루만 더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아들은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기록했고 딸은 아픈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간호학과에 진학했다. 87세의 아버지는 병든 아들을 먼저 보내야 했다. 이 같은 100일간의 병상일지는 EBS 메디컬다큐 7요일을 통해 방영돼 많은 이의 눈시울을 적셨다.1998년 호남지역 최초로 호스피스완화의료 서비스를 시작한 이 병원에는 이씨와 같은 말기암 환자가 32명(29병상) 입원해 있다. 간암뿐 아니라 폐암, 뇌종양, 직장암, 전립선암, 간내 담낭암 등 병종도 다양하고 사연도 가지가지다. 일반 병원이나 요양병원을 전전하다 옮겨온 환자들은 전인의료와 환자별 맞춤의료에 이곳이 천국이네!라며 감사한다고 서인숙 간호부장은 들려준다.△회복 불가능한 말기환자와 가족 돌보는 전인적 팀 접근호스피스완화의료는 완치가 불가능한 말기환자가 품격 있는 삶을 유지하면서 마지막 순간을 평안하게 맞도록 도와줄 뿐 아니라 가족들의 고통과 슬픔을 덜어주는 총체적 돌봄을 뜻한다. 여명(餘命)이 6개월 이내로 항암치료나 방사선치료, 수술요법 등 더 이상 치료가 안 될 때 의사의 판단에 따라 의뢰하게 된다. 이를 위해 신체적사회적정서적영적인 4가지 측면에서 전인적 팀접근을 하고 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게 신체의 고통을 덜어주는 통증 완화다. 말기암 환자의 7580%는 참을 수 없는 통증을 호소하는데 이때 필요하면 항구토제나 마약성 진통제를 사용한다.호스피스완화의료팀에는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성직자 자원봉사자 등이 한 팀을 이뤄 돌봄에 나선다. 엠마오사랑병원의 경우 전담의사 2명과 간호사 15명, 사회복지사 2명, 성직자 1명, 자원봉사자 35명이 조를 나눠 일하고 있다. 이와 함께 임종이 3일 정도 남은 환자를 위해 생명사랑실이 따로 마련돼 있고, 매주 수요일마다 보호자를 위한 담쟁이가족 간담회도 갖는다. 또 임종 후 13개월까지 가족을 케어해 주는 사별가족모임도 활성화돼 있다. 특히 2015년 7월부터 시행하고 있는 완화의료 도우미제도는 전북에서 유일하다. 40시간의 호스피스 교육을 받은 요양보호사 1명당 환자 34명꼴로 돌보고 있다. 하루 4000원, 한 달 12만 원 가량이면 이용이 가능하다.당초 호스피스의 어원은 hospitality로, 이 용어가 임종을 앞둔 환자에게 제공되는 특별한 의료의 영역에 적용되기 시작한 것은 1948년 영국에서 부터다. 우리나라는 1965년 호주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에 의해 강릉에 갈바리의원을 세운 게 효시다. 2001년 국립암센터가 설립되었고 2008년부터 보건복지부에 의해 완화의료 전문기관 지정이 시작되었다. 2016년에는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에 관한 법률(일명 웰다잉법)이 제정돼 호스피스완화의료는 지난 8월부터 시행됐고, 대상도 말기암 뿐 아니라 비암환자(에이즈, 만성폐쇄성호흡기질환, 만성간경화)로 확대되었다. 연명의료는 2018년 2월부터 실시될 예정이다.전국적으로 10월말 현재 호스피스완화의료는 81개 기관에 1321병상이 운영되고 있다. 전북지역에는 전북지역암센터(전북대병원), 군산의료원, 남원의료원, 재단법인 원불교 원병원, 엠마오사랑병원 등 5개 기관 93개 병상이 운영 중이다. 호스피스 이용률은 17.5%로 아직 저조한 편이다. 2015년 사망환자의 평균 서비스 이용기간은 32.5일로 집계되었다.△임종시 불필요한 연명의료 않기 위해 사전의향서 작성병원에서 소생할 가능성이 없는 환자가 기계에 매달린 채 단순히 생명만을 유지하는 경우가 꽤 많았다. 이제는 이러한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환자가 스스로 죽음을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웰다잉법 시행으로 임종과정에서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서 임종과정이란 회생의 가능성이 없고 치료에도 불구하고 회복되지 않으며, 급속도로 증상이 악화되어 사망에 임박한 상태(법 제2조)를 말한다. 담당의사와 해당 분야 전문의 1명이 임종과정이라 판단해야 한다. 연명의료 중단 결정이 내려지면 환자에게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 등 4가지 행위를 하지 않게 된다.일반시민들이 연명의료를 받지 않으려면 평소 건강할 때 사전의향서를 작성한다. 그러다 임종과정에 접어들면 언제 어디서나 의료진이 의향서를 열람해 환자의 뜻대로 존엄사를 돕게 된다. 1997년 서울 보라매병원 사건 이후 20년 만에 연명의료 중단이 합법화된 것이다.● 윤욱희 한국호스피스협회장 "신체는 후퇴할지라도 정신 새로워진다 믿어"호스피스는 말기환자와 그 가족을 위해 죽음과 사별까지를 포함한 총체적이고 포괄적이며 전인적인 돌봄입니다. 특히 임종은 겉사람(사회적신체적)과 속사람(정신적영적)의 분리로 볼 수 있는데 겉사람은 후퇴할지라도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 믿습니다.한국호스피스협회장을 맡고 있는 윤욱희 엠마오사랑병원장(62)은 30여 년 동안의 의료인생활을 호스피스와 함께 해왔다. 전주 출신으로 이화여고를 나와 전북대 의대 본과 4학년 실습 때부터 호스피스에 관심을 가졌다. 환자가 죽으면 그냥 끝이라 생각하지 않고 죽은 다음 어떻게 해야 좋은가를 고민했다는 것.1988년 전주시 전동에 풍남의원을 개원하면서 말기암환자와 가족을 어떻게 돌볼지 기독교적으로 접근했다. 그러다 간호신문에서 이화여대병원 가정 호스피스 교육생 모집 기사를 보고 교육을 받게 됐다. 이어 남편과 함께 일본 유학을 다녀왔다. 마침 어느 시설에서 방문진료를 요청해 가보니, 눈이 보이지 않는 할머니 한 분이 누워있는데 어깨까지 소변이 척척했다고 한다. 그나마 의수를 하고 있어 충격을 받았다. 이때 가정방문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느껴 30병상 규모의 병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곧 바로 옛 예수병원을 인수해 엠마오사랑병원을 열었다. 노인과 장애인, 호스피스 환자 등 기능저하 환자를 주로 보고 있다.윤 회장은 우리나라 호스피스완화의료 수준이 미국 등 선진국 못지않게 앞서 갈 것이라고 낙관한다. 왜냐면 외국에서는 신체적사회적 진료를 주로 하는 터미널 케어인데 비해 우리는 영성을 포함한 진정한 전인적 진료를 하기 때문이란다. 또한 윤 회장은 병이 악화되면 중환자실로 보내 온갖 검사와 치료를 하는데 이는 본질보다 부모님을 잘 모셨다는 명분에 집착한 것이라며 호스피스를 통해 마지막 가시는 부모님의 모습이 풍요로워야 자녀들의 애도반응이 병리로 가지 않는다고 연명의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한국호스피스협회는 전국 12개 지회에 103개 기관이 가입해 호스피스의 질적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윤 회장은 2018년부터 이사장을 맡을 예정이다. 더불어 전북병원협회 부회장과 한국호스피스완화의료학회 전북지회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조상진 전주노인일자리센터장>/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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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1.23 23:02

[전주 중노송동 문화1길 '꽃장'] 어르신들의 이야기가 차곡차곡 쌓여 작품이 된 '꽃길'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터에는 삶의 무늬가 존재한다. 과거와 현재의 일상이 공존하며 삶터에는 새로운 무늬들이 만들어지고, 그렇게 만들어진 무늬가 쌓이면 문화로 자리 잡게 된다. 어느 한 동네에 꽃나무를 나눠주는 어르신이 계신다. 종묘장에서 꽃나무를 가져다 집 앞에서 가꾸고, 한 두송이 더 가져다 이웃주민들에게 나눠주며 함께 가꾸기 시작했다. 한해 두해 길러낸 꽃나무가 제법 자리를 차지하더니 집 앞과 옥상에 계절마다 형형색색 꽃을 피워 예쁘게도 마을을 물들였고, 그리하여 이제는 꽃길이라는 별칭까지 얻은 마을이 되었다.꽃길이라는 별칭을 얻은 곳은 바로 전주 중노송동 문화1길이다. 원래 문화촌은 1000년 가까이 기린봉에서 내려온 물을 가두었던 저수지였다. 둘레에는 아름드리 능수버들이 늘어졌고, 아름다운 정자들이 서있었다고 한다. 이후, 일제시대 때 저수지가 메워지고, 공설운동장이 되었다가, 1969년 공설운동장이 철거된 후 중앙정보부와 문화촌으로 상징되는 대규모 주택단지로 개발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터를 잡았다. 네모 반듯 깔끔하게 정돈 된 골목과 도로, 2층 양옥집으로 고즈넉하게 지어진 집들은 오랜 세월 풍파에 허름해 졌어도, 그 기세가 등등해 보인다. 이제는 꽃들이 더해져 아름다움까지 더한 길이 되었다.△어르신과 청년작가, 꽃길에서 만나다꽃길이 되어가던 문화촌에 청년사진작가(장근범 씨)가 이사 와 새 둥지를 틀었다. 이 청년사진작가는 뚝딱뚝딱 본인이 살 집을 고치다, 어느새 마을의 모습과 마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자분자분 눈에 담고 마음에 담기 시작했다. 이 동네에서 뭔가 의미 있고 재미있는 일을 해보고 싶었다.어르신들은 젊은이들이 살아보지 못한 세월을 먼저 살고, 경험하지 못한 삶을 경험했다. 시간이 쌓아올린 세월의 경험치는 미래를 살아갈 젊은이들에게 큰 배움이 된다. 청년들의 계절은 새롭다. 다양한 것들을 색다르게 받아들이며 꿈꾼다. 오래됨과 새로움. 그 안에 녹아나는 가치들이 만나면 큰 에너지를 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2016년 어르신과 청년작가들이 꽃장이라는 꽃길에서 만남을 시작하게 된다.△어르신, 삶을 이야기 하다꽃길에서 만나니, 그 만남의 매개는 당연 꽃이다. 둥지를 튼 사진작가의 집 1층이 마을의 사랑방이 되어 매주 이야기꽃을 피우고 가끔 밥해 먹는 공간이 되었다. 어르신들이 꽃을 매개로 나누고 가꾸는 활동만 했다면 이제는 다양한 장르의 청년작가들과 새로운 것을 시도할 준비를 한다. 주변을 살피면 기술적으로 배움을 가르치는 곳은 많으니, 이곳이 굳이 기술을 습득을 위해 존재하는 공간은 아니길 바랐다. 삶을 살아가는 공간이니, 어르신들의 삶이 풀어지고, 다시 이어지는 생산적 공간이기를 바랐다.인간의 세포는 분자가 아니라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는 말이 있다. 어르신의 세포가 어떤 이야기로 구성되었는지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 것부터 청년작가들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사랑, 결혼, 출산, 일 등 어르신의 삶을 구성하는데 중심에 놓였던 주제들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오래전 꽁꽁 숨겨 놓았던 이야기를 물으니 어르신들이 천천히 기억을 더듬는다. 더듬을수록 기억은 생생해지고, 감정이 되살아나는 듯하다.함께 나눈 사랑에 대한 이야기 중 연세가 제일 지긋하신 할아버지께서 사랑은 배려다, 배려해야 만이 살아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 이야기가 제일 마음에 남아요. 어르신들과 이야기 하면서 어르신들이 생각하는 깊이감이 청년인 우리와는 정말 다르구나 하는 것을 매번 느끼게 되었어요. 청년작가로 참여했던 전수진 작가는 사랑을 주제로 어르신들을 만났다. 어르신들의 입을 통해 나오는 이야기는 오랜 세월이 만들어낸 깊이감 때문에, 당연하다 생각 했던 이야기들이 더 큰 울림으로 전해져 왔다고 한다.청년작가들과 매 차시 주제를 가지고 나눈 이야기가 이제 작품으로 새롭게 탄생한다. 어르신은 경험과 세월을 들려주고, 청년작가는 어르신에게 작품을 통해 새로움에 대한 경험을 제공한다. 일방향적 배움과 가르침이 아닌 서로간의 등가 교환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스토리가 브랜드가 되는 장터, 꽃장어르신들의 이야기가 차곡차곡 쌓인 작품은 꽃장이라는 이름을 통해 사람들에게 선보인다. 어르신이 살아가고 있는 삶터에서 진행했기에 장터 또한 삶터에서 진행한다.매서운 겨울추위가 찾아오려는 문턱에서 진행한 2017년 마지막 꽃장은 마을잔치라는 이름처럼 소박하게 진행되었다. 한해 함께 살아냈으니 잘했다고 서로 박수치고 토닥여 주는 자리로 마련된 것이다. 거창하고 사람이 북적이는 공간이기 보다, 소소하게 어르신의 삶을 응원해주는 사람들의 온기로 채워지기를 바랐다.꽃을 매개로 하다 보니 곳곳에 꽃들이 보인다. 매대 마다 어르신들의 작품이 놓여있다. 놓여있는 작품마다 어르신의 이야기가 담겨있고, 시간과 노력이 담겨있다. 그래서 돈으로 교환가치를 만들어 내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2016년 장터에서는 에 어르신 자신이 직접 값을 매기기보다, 손님 스스로가 가격을 요구하고, 어르신은 그 가격에 동의하여 작품을 판매했다. 생각보다 큰 가격이었지만, 스토리에 감동한 사람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작품을 구매했다. 팔릴까 걱정했던 어르신들도 덩달아 신이 났다.꽃장을 장근범씨와 함께 기획한 맹그러브 대표 김명규씨는 꽃장은 단순히 상품을 파는 곳이 아니라 어르신들의 스토리가 브랜드가 되는 장터로써 자리매김 하는 공간이기를 바란다. 더불어 돈으로 어르신의 스토리에 가격이 매기고 판매하기 보다는 다른 방식으로써 교환가치를 만들어 내는 방식을 고민 중이라고 이야기 했다.△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 소중해 지는 과정요즘, 새로운 것을 접하거나 배우기 위해서는 일상의 공간을 벗어나야 가능한 것들이 많다. 일상이 단절된 공간에서의 배움은 낯섬을 경험하는 것 외에는 삶의 변화를 만들어 내기가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꽃장은 의미 있게 다가온다. 평생을 살아온 삶의 공간에서, 어르신 자신의 세포를 구성하는 이야기를 통해 일상의 변화를 청년작가들과 함께 만들어 낸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 소중해지고 새로워진다.서로 다른 세대가 만나는 것은 균열을 만들어 내는 일임으로 순조롭지만은 않다. 서로가 생각하는 모습들이 있기에 그 간극을 좁혀가는 과정 또한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 균열을 만들고 다시 메우는 일은 서로의 세대를 이해하고, 살아가는 삶터에 또 다른 무늬를 그려가는 일임을 알아간다. 그렇기에 서로 다른 세대가 관계를 만들어가고 소통하는 것은 지난하지만, 아름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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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1.22 23:02

취임 한달 김규일 전주기상지청장 "전북, 지진 안전지대 아냐…관측소 5개 신설 등 대책 수립 노력"

전주기상지청은 내년이면 100년의 역사를 기록한다. 지난 9월 말 전주기상지청장으로 부임한 김규일 지청장의 마음이 분주한 까닭이다. 김 지청장은 내년 3월 23일 세계기상의날에 맞춰 기념 행사를 열 계획이라고 했다. 연고는 없지만 전주를 동경해왔다는 김 지청장은 그래서 요즘 옛 전주기상대를 되돌아보고 미래를 살피는 고민에 빠져 산다고 했다. 지난 15일 김 지청장으로부터 전주기상지청의 운영 방향 등에 들어봤다.- 부임한지 한달이 지났습니다. 어떻게 지내셨습니까.“전북은 자연에 대한 큰 위험이 없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직접 근무하게 돼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관계기관을 방문해 업무 협조를 당부드리고 있습니다. 집중 호우와 폭염 등 수요가 증가하고 있는 기상정보의 중요성을 알리는데 주안점을 두고 바쁘게 보내고 있습니다.”- 포항에서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전북 도민들의 불안감도 높습니다.“포항과 경주에서 지진이 발생한 이후 우리나라가 더 이상 지진으로부터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국민들의 의식이 확산되었습니다. 1978년 지진관측 이래 전북에서 발생한 가장 큰 규모의 지진은 2015년 12월 22일 익산에서 규모 3.9였습니다. 최근에는 10월 20일 진안에서 규모 2.0의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전북도 결코 지진의 안전지대로 볼 수 없습니다.”- 다양한 대책을 수립하고 있을 텐데요.“지난해 12월 기상청 지진환산센터가 신설돼 신속한 지진정보전달과 관측망 확충 등 지진 업무를 총괄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국에 156개소의 지진관측소를 운영하는데, 추가 신설될 에정입니다. 전북에도 5곳의 관측소가 신설됩니다. 전북도청에서 관계기관과 지진대책을 포함한 안전관리대책을 수립하고 있으며, 119안전체험관을 통한 지진대피훈련도 실시하고 있습니다.”- 겨울이면 서해안을 중심으로 눈이 많이 옵니다.“전북 서해안 5개 시군이 많은 눈이 내리는 지역입니다. 겨울철 찬 대륙고기압이 확장할 때 서해상의 수온과 대기의 기온 차에 의해 전북 서해안을 중심으로 많은 눈이 내리는 지형적인 특성이 있습니다. 현재 전주기상지청은 전북지역의 기상재해와 대설 유형에 따른 사회 경제적 영향도를 조사 분석해 내년 2월 28일까지 전북 서해안 5개 시군과 전라북도 고속도로 4개 구간에 대해 대설 영향 예보 시범서비스를 시행할 계획입니다.”- 특히 전북의 미세먼지 농도가 높고, 도민들의 우려가 큽니다.“미세먼지가 왜 전북에서 높게 측정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전문가도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우선 지역별로 자세히 보면 기상학적 특성으로 판단은 매우 어렵습니다. 서해안 쪽이 높은 것은 이해가 되는데, 전주 등 내륙 쪽은 발생원인이 여러 가지 일수 있습니다. 전주는 공장에서 상시로 오염물질이 발생하는 것이 아닌, 비점오염의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중에서는 지역에서 차량의 이동이 많은 것이 큰 원인으로 보입니다. 교통량과 미세먼지가 증가하는 그래프가 비슷한지 등을 검토하고 원인을 신속히 찾아야 합니다.”- 전북은 농도로서 농업인들을 위해 기상서비스 수요가 높은데, 맞춤형 서비스가 있습니까.“지난해 6월부터 영농현장의 안전한 활동과 농산물 생산, 유통 등 농업 경영에 필요한 기상정보 자원을 위해 ‘들에서 콜’ 서비스를 개발해 농업인들에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활용 가능한 이 서비스는 기온과 강수 습도 등 기상정보를 비롯해 각 지자체의 시정정보를 볼 수 있습니다. 현재 정읍과 김제, 완주 등에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서비스를 운영하려면 비용 부담이 생길 텐데.“기상청과 기상 사업자, 지자체가 함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기상청의 날씨 자료와 사업자의 프로그램 제작 및 운영, 지자체의 예산 등 3개의 축이 작동하는 겁니다. 우선, 서비스 제작 운영 관리에 정부 예산이 투입되고 있습니다. 일부 시행 지역의 반응이 좋고, 본청에서도 관심 있게 보는 사업으로 조만간 전국으로 서비스 지역을 확대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비용 부담이 증가할 텐데, 수익자 부담 원칙으로 볼 때 추후 유료화로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전북은 지방청이 아닌, 지청의 개념입니다. “기상청의 구조를 보면 본청이 있고, 6개 지방청, 3개 지청으로 세분되어 있습니다. 전북은 전주기상지청이 모두 담당하고 있습니다. 지방청과 지청의 차이를 보면 업무는 동일한데, 분화가 조금 덜된 것으로 보면 됩니다. 호남은 광주에 지방청이 1곳 있습니다. 현재 조직 개편이 되어가는 과정인데, 1도 1지방청으로 하고 동시에 ‘전북지방기상청’이라는 명칭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20여년 이상 본청에서 근무하셨지만 지방청과 지청 근무 경험도 있습니다. 어떤 차이가 있나요.“업무적으로 본청과 지방청, 지청 차이가 큽니다. 본청은 예보할 때에 큰 그림을 그리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때로는 전체적인 그림이 맞지 않을 때가 생기면 큰 그림에 맞추려고 합니다. 가령 편서풍권인 우리나라에서 서쪽은 비가 안 오는데 동쪽이 비가 온다고 예보를 하면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경우가 있는 상황도 있습니다. 그럼 현지의 의견을 우선 고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해당 지역의 예보관은 수 년간 근무하면서 특정 지역의 기상 특성을 잘 압니다. 평소 소통이 안 되는 부분들을 지역에서 느끼고 있는데, 본청에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개선하려고 노력합니다.”- 전주기상지청에서 꼭 하고싶은 일이 있다면.“전주는 기상 쪽으로는 매우 축복받은 땅입니다. 역설적으로 기상산업적인 면에서는 큰 관심을 받지 못하는 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상정보는 과거처럼 재해 저감이 목적이 아니라 산업적 측면에서 활용해야 합니다.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연결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사용자들이 기상 정보의 필요성을 인지하도록 해야 합니다. 현재는 기상을 과학적 접근 방식으로 교육을 시키는 수준인데, 아직 가치에 대해서는 확산이 덜 된 것 같습니다. 정보의 긍정적인 측면을 이해시키고 홍보하고 싶습니다.”● 김규일 지청장은- 고향 아닌 전주 택한 반골 호남기후역사서 준비도1959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난 김규일 전북기상지청장은 의성종합고등학교와 청주대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기상청에서 공직을 시작했다. 이후 주경야독으로 기상대학 대기과학과, 연세대 환경공학 석사를 졸업하며 대기와 환경 분야의 전문성을 키웠다.전북과 특별한 인연은 없지만 여행차 몇차례 왔는데, 편안하면서도 격조 있는 도시분위기에 매력을 느꼈었다고. 그는 “반골기질이 있어서 고향이 있는 대구지청으로 가지 않고 전주를 지원했다”고 털어놨다. 특히 김 지청장은 “전주의 기상관측이 여느 도시에 비해 매우 빨랐다”고 했다. 내년 100주년 기념 사업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데, 과거 역사 정리와 함께 비전을 수립하는데 고심중이라고 했다.또한 그는 “새만금 방조제와 간척지 조성 등 지형변화에 따른 기상특성을 분석하고, 이를 토대로 관계기관과 협력체계를 구축해 나갈 것”이라며 “옛 전주기상대의 역할을 이어받아 광주지방기상청과 합동으로 호남기상기후역사서를 발간하는 작업도 준비중”이라고 말했다. 김 지청장은 기상청장 비서관, 기상청 대변인실 홍보담당, 기상청 기상산업정책과 산업진흥 담당, 기상청 계측기술팀장, 강원지방기상청 춘천기상대장, 관측 과장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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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승현
  • 2017.11.20 23:02

[길따라 맛따라 ⑥ 군산 근대역사거리 맛집] 맛깔난 음식으로 오감 만족하고 시간여행 출발~

군산의 근대 역사는 곧 군산항의 역사다. 군산항에 도나드는 선박의 뱃고동 소리가 높았을 때 군산경제는 꿈틀거렸고. 반대일 때 군산은 휘청거렸다. 일제 강점기 군산항은 일본으로 쌀 반출 핵심 통로였다. 1933년 기준 국내 쌀 생산량의 53.4%가 일본으로 반출됐으며, 그중 20%가 군산항을 통해 나갔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군산은 1930년대 성장했고, 그 뒤 성장을 멈춘 후, 화석과도 같은 도시로 추락했다는 말도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현재 군산관광의 아이콘이 된 군산 역사문화의거리는 1930년대 중반 이전에 대부분 완성됐다. 도심 주요 도로와 철도가 항구를 향해 뚫렸고, 세관과 우체국 등 관청과 은행포목점미두장 등 상가도 내항 주변에 집중됐다. 항만 인접지역 거리를 지금도 일각에서 본정통이라 부른다. 일제 강점기 군산항에는 남부여대로 전국에서 많은 사람이 몰렸고, 길거리에 판 하나만 놓아도 장사가 됐다고 군산 향토사학자 이병훈 시인이 생전에 들려줬다. 군산내항 주변이 일제 때 가장 경기가 좋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조선인 대부분은 부두막노동 일꾼이었고, 거리에서 목로판을 깔고 감자 고구마떡장수 등 밑바닥 생활을 했다는 말도 곁들여서다.오늘에 이르러 일제가 남긴 잔재들이 군산의 관광산업을 떠받드는 자산이 될 것이라고는 2000년대 이전까지 생각지 못했다. 일제 강점기 지어진 건축물의 보존과 철거를 두고 시민들 사이에 많은 논란을 거쳤다. 이 과정에서 일부 건물이 헐리기도 하고, 철거 직전에 살아나기도 했다. 국가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등록문화제 제도를 도입하고, 군산시가 근대문화유산벨트화지구 사업을 통해 차별화된 역사문화 관광지로 정비하면서 이런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군산의 주요 근대역사 콘텐츠들은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을 중심으로 도보로 20분 이내에 집적해 있다. 박물관 주변에는 옛 군산세관을 비롯해 일본 제18은행을 개조해 만든 군산근대미술관, 미곡창고였던 장미공연장, 적산가옥이었던 장미갤러리, 조선은행을 개조한 군산근대건축관, 일본 건축양식의 숙박시설인 고우당, 영화촬영지 초원사진관, 일본식 사찰 동국사, 진포해양공원 등이 관광객들이 찾는 필수 코스다.이런 군산 근대역사문화의거리가 전국적인 관광명소임을 실감할 수 있는 것은 역시 맛집이다. 전주 한옥마을과 같이 군산 근대거리에서도 줄을 서서 인증샷을 찍는 관광객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인 이성당 앞은 주말이면 긴 줄로 장사진을 이루며, 1951년 문을 연 근대건축관 건너편의 중화요리점 빈해원도 관광객들로 넘친다. 복성루, 쌍용반점, 용해장, 지린성, 수송반점 등도 관광객들이 줄을 서는 중화요리 맛집들이다.△역사지구로 뜬 한일옥줄 서 기다리는 군산근대거리의 맛집 중에 한일옥이 있다.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블로거 등을 통해 이름난 맛집이며, 군산의 어제와 오늘을 보여주는 음식점이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촬영지로 유명한 초원사진과 바로 앞에 위치해 있다. 음식점 건물은 1937년 지어졌다. 외과 병원으로 사용되다가 레스토랑, 보신탕집으로 변신을 거듭한 끝에 4년 전 현재의 한일옥으로 주인이 바뀌었다.주인 김혜주씨(50)가 이 집으로 오게 된 사연에 인간미가 물씬 묻어났다. 음식점은 40년 전 김씨의 시이모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배고팠던 시절, 소고기 국물이라도 배불리 먹이고 싶어 선택한 메뉴가 무국이었다. 현 음식점 바로 옆 허름한 집에서 시작한 한일옥은 초기에는 주로 운전기사들이 이용한 기사식당이었다. 입소문이 나면서 군산 시민들에게 알려졌고, 관광객 유입에 따라 음식점은 대박이 났다.김씨는 비를 맞으면서까지 30~40분씩 기다리는 손님들을 보면서 3~4년 전에 구입한 현 장소로 이전을 결심했다. 번듯한 집으로 이사하는 게 능사가 아니라고 보고 그 전까지는 허름한 집을 고수했단다. 큰 곳으로 옮기면 손님들이 줄 서 기다리는 일이 없을 것으로 여겼으나 지금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손님들에게 미안하단다. 평일 평균 700명, 주말 1300~1400명의 손님을 맞는다.한일옥의 주 메뉴는 무국이다. 특별한 밑반찬이 제공되는 것도 아닌 데, 손님들을 불러들이는 비결이 궁금했다. 깔끔한 국물 맛이 비결이다. 콩나물 국밥을 대신할 수 있는 해장으로 엄지 척이다. 소고기와 무를 넣고 50분 정도 끓인 물에 굵은 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8000원으로 가격을 올린 대신 소고기, 국물, 밥은 무한리필이다.음식점 2층을 옛 생활용품 전시장으로 꾸려놓은 것도 이색적이다. 옛날 전화기, 라디오, 축음기, 주판, 놋그릇, 유기 수저, 향로, 징, 반닫이, 고리짝. 붕어빵 틀 등 과거로의 여행에 걸맞게 진열된 골동품(?)들이 근대거리와 잘 어울렸다.△옛 추억의 아복식당한일옥의 무국은 군산 음식의 상징과는 거리가 있다. 보통 군산의 대표 음식으로 회와 꽃게장, 아구(복), 물메기 등이 꼽힌다. 특히 군산의 지역명을 단 아구집은 전국 각지에 퍼져 있다. 군산에서도 군산복집수풍회관 등 이름난 아구집이 즐비하다. 역사지구에서 조금 벗어나 째보선창에 인접한 아복식당은 관광객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지역 주민들의 사랑을 받아온 복 전문점이다.군산 내항 주변의 집들이 다 그렇듯, 이 음식점 역시 일제 때 만들어진 가옥이다. 지붕이 뚫려 햇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한 것이 특이했다. 음식점은 1986년부터 30년 넘게 부두사람들과 애환을 같이 했다. 3년 전 작고한 친정어머니와 함께 15년째 복집을 운영하고 있는 주인 신소정씨(42)는 역사지구의 음식점과 달리 경기상황이 예전만 못하다고 했다. 새만금방조제 완공 후 복이 잡히지 않은 데다, 대명동 화재사건 후 유흥가들이 문을 닫은 영향이 크단다. 인근 재래시장조차 사람이 없단다. 주인 신씨는 고기가 잘 잡혀서 IMF가 있는 줄도 모를 정도였다고 옛날을 그리워했다.그럼에도 이 집 음식점이 굳건한 것은 예전의 단골들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군산에서 복 요리가 발달할 수 있었던 배경은 기본적으로 살아있는 복을 원료로 쓸 수 있는 복 생산지가 인근이었고, 부식으로 쓸 수 있는 해산물 등 식재료들이 풍부해서다. 지금의 복 재료는 부산에서 조달한다. 팔딱팔딱 뛰는 복은 아니어도 산 채로 냉동을 시켜 선도를 좋게 하는 게 기본이다. 오래 끓여 진한 맛을 빼는 대신, 재래식 된장으로 간을 맞춰 깊은 맛을 내는 게 이 집의 비결이다. 복 양이 푸짐하고, 파 무침 등 싱싱한 밑반찬도 자랑이다. 군산의 차가운 갯바람을 맞고 나서 찾았던 얼큰하고 시원한 복탕이 다시 그립다.

  • 기획
  • 김원용
  • 2017.11.17 23:02

[시민영화프로그래머를 만나다] "다양한 취향 가진 관객들 최대한 만족시켜야죠"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경계가 흐릿한 시대다. 영화영역도 마찬가지다. 과거 전문가들의 전유물이었던 영화제작도 비전문가이면서 소비자였던 관객들의 참여가 활성화 되고 있다. 작품의 양도 많아졌고 질적 수준도 높아지고 있다. 관객들은 그저 영화를 보고 상영관을 떠나는 일방적인 영화문화 수용자가 아니라 훨씬 주체적으로 영화문화를 즐기고 참여하는 향유자가 되고 있다. 스마트폰으로 간단히 영상을 제작할 수 있으며, 미디어센터와 같은 곳에서 교육과 지원을 받으면 좀 더 전문적인 영화를 제작할 수 있다.영화제 역시 이런 영상들을 보고 즐길 수 있도록 변화하고 있다. 시민들이, 관객들이 만든 영화를 상영하고 소통하는 시민영화제, 시민영상제가 전국 곳곳에서 출현하고 있다. 시민의 참여는 영화를 제작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영화를 보고, 보여줄 것인지도 결정하기도 한다. 그들을 시민영화프로그래머라 부른다.시민영화프로그래머란 시민 스스로 영화프로그래머가 되어 다 같이 영화를 보고 즐기는 재밌는 마당을 만드는 사람이다. 관객으로서 주어진 대로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영화제의 방향을 정하고 개성과 색깔을 담아내고 상영장소 섭외, 영사와 관객대응, 관객과의 대화와 이벤트 등 영화제 전반을 운영한다. 일반 영화프로그래머보다 더 많은 일들을 진행한다. 올해 전주에서도 전주시민미디어센터 영시미(이하 영시미)에서 시민영화프로그래머 양성과정을 운영했다. 지난 4월부터 9월까지 총 15주에 걸쳐 영화와 영화제 프로그래밍 그리고 영화제 전반에 대한 교육을 진행했다. 시민영화프로그래머의 역할을 이해하고 어떻게 영화제를 기획운영하는 배우는 입문과정과 전주국제영화제와 협업을 통해 전주국제영화제 기간 동안 영화를 관람하고, 자신만의 영화제를 기획해 보는 실습과정이 이어졌다. 9월에는 경기도에서 열린 DMZ 영화제에 참가해 사례 발표와 교류시간을 갖기도 했다.특히 전주국제영화제와 공동기획으로 이번 가을에 열린 2017 폴링인 전주(FALLing in JEONJU)에 시민참여섹션을 기획, 운영하기도 했다. 폴링인 전주는 올해 열린 전주국제영화제 수상작과 다시 보고 싶은 상영작을 만나는 행사다. 시민영화프로그래머들은 한국단편경쟁 섹션에서 선정한 작품들을 보고 Focus on Short Films 이라는 섹션을 마련했다. 이들은 영화 선정과 관객과의 대화를 이끌었다. 각자 바쁜 중에도 시간을 쪼개 영화를 보고, 관객과의 대화와 홍보 그리고 이벤트를 준비를 하는 열정을 보였다. 또한 전주의 다양한 관객모임들과의 간담회를 진행하기도 했다. 시민영화프로그래머 모임과 영화상영, 잡지, 관객동아리 들이 모여 서로의 정보 공유와 활동을 소개하고 네트워크 결성을 논하기도 했다. 6개월간의 긴 과정에도 불구하고 18명의 시민영화프로그래머가 배출되었다.지난 10일과 11일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에서 열린 제 13회 시민영상제(주최 전주시민미디어센터)에서는 영상콜라주 보통의 나날이라는 섹션을 구성하기도 했다. 영화선정에서부터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한 구자건, 최은경 시민영화프로그래머를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시민영상제 섹션의 기획방향과 작품 선정기준은 무엇인가.구자건(이하 구): 다양한 형식, 다양한 이야기를 다루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장르도 다양해졌고, 다양한 연령대가 볼 수 있도록 구성됐다. 다큐의 경우 전주를 다루고 소개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극영화는 짜임새가 좋았던 작품을 선정했다. 전체적으로는 감정의 라인이 힘들지 않도록 구성했다.최은경(이하 최): 제목처럼 평범한 사람, 보통의 나날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주고자 했다. 보통의 나날을 살아가는 삶의 모습들, 우리들의 모습들 그것이 가장 빛나고 좋은 것이라 생각해서 제목을 그렇게 지었다.- 작품들은 어땠나.구: 솔직히 UCC 같은 경우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보고 나니 정말 좋았다. 재기발랄 하고 톡톡 튀었다.최: 흔히 지역에서 만든 작품들이라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기대 이상이었다. 평범한 시민들이 공감할 수 있고, 예술적으로도 가치 있는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좋았다.- 시민영화프로그래머 교육을 받은 계기는 무엇인가.구: 예전에 영화 관련 활동을 짧게 한 적은 있었다. 다양성영화, 특히 유럽영화 위주의 다양성영화를 보고 리뷰 쓰고 관객과 대화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 이번 교육에는 한국단편영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는데, 크게 관심은 없었지만 참여하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영시미 라디오 제작교육을 받기도 했다.최: 영화가 대중적이면서도 사람을 변화 시킬 수 있는 종합 예술이라 생각한다. 그런 영화를 다루고 있는 영화제가 어떤 것인지 궁금해졌다. 영화제의 전반적인 흐름이 어떤지 궁금하고 배우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 영시미 시민프로그래머 교육을 알고 다니게 되었다.- 교육을 받아보니 어땠나.최: 교육과정에 포함되었던 폴링인 전주 프로젝트가 즐거운 경험이었다. 영화에 대한 열정을 가진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했던 것이 도움이 많이 되었다. 반면에 준비하고 진행하다보니 영화를 많이 못 보게 돼 아쉬웠다.구: 다양한 영화제 사례를 들을 수 있어 좋았다. 강사분이 지역 영화제나 커뮤니티 영화제에 대한 경험이 많으셨다. 개인적으로 영화제에 대한 시야가 넓어졌다.- 관객으로 영화를 볼 때와 프로그래머로 영화를 볼 때 차이가 있나.구: 신중하게 영화를 보는 것은 개인적으로 볼 때나 프로그래머로 볼 때나 차이가 없다. 차이가 있다면 관객으로 볼 때는 개인적 만족으로 끝나지만, 프로그래머로서 영화를 선정할 때는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다른 사람들한테 전달이 될 수 있고 이야기를 끌어 낼 수 있는 작품을 본다. 또 혼자서 하는 작업이 아니다 보니 여러 사람들의 합의를 끌어 낼 수 있는 조화로운 작품을 선정하는 것이 다르다.최: 관객은 자기 취향으로 보는 것이지만, 프로그래머는 여러 사람의 다양한 취향을 최대한 만족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차이가 있다. 그런점에서 혼자 프로그래밍하는 것보다 여럿이 같이 프로그래밍을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DMZ 영화제의 경우 프로그래머 혼자서 수백편의 영화를 보고 선정한다고 한다. 굉장한 노동력이다. 프로그래머가 많이 양성되어서 적당한 양의 영화를 보고 같이 선정하는 것이 완성도를 높일 수 있을 것 같다.- 교육 과정을 마친 시민영화프로그래머들이 모여 모임을 만들고 지속적인 활동을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다.최: 수강생 중심으로 아프로(Au-Pro, Audience Programer club in Jeonju)라는 전주 시민프로그래머 모임을 결성했다. 그리고 겨울영화제를 준비하게 되었다. 폴링인 전주가 좋은 경험이 되었고 자신감도 갖게 되었다. 이대로 헤어지기 보다는 이어서 작게나마 시작하면 충분히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겨울영화제는 언제, 어떤 컨셉으로 진행되는가.최: 12월 89일 최명희문학관에서 열릴 예정이다. 단편영화 중심으로 선정했다. 특히 힘들게 만들어졌지만 영화제에 선정되지 않았거나 대중에게 많이 소개되지 않은 작품 위주로 선정했다./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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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1.16 23:02

[고창 책마을 해리 책영화제] 책을 품은 영화이야기…"같이 한 편 펼쳐볼까요?"

영화의 원천은 무엇일까? 혹은 책은 어떻게 세상과 만나는가? 두 가지 물음은 오래된 미디어 책, 여전히 진화하는 새로운 미디어 영화(혹은 영상매체) 사이에 어떤 관계가 생기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가,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영화의 원천을 찾아 떠돌다 만나는 이야기의 집, 책. 이야기가 책의 집을 떠나 새로 머물며 희로(喜怒)하고 애락(愛樂)하는 이미지의 옷, 영화. 이 두 가지 방식 매체에 대한 논의가 비로소 우리 곁에서 빛과 소리로 만나기 시작했다. 바로 <책영화제>이다. 지난 11월 3일부터 5일까지 이틀 밤 사흘을 책과 영화 속에서 지낸 <책영화제, 고창> 이야기를 전한다.△영화의 원천, 책의 새로운 거처이번 <책영화제>는 모두 여덟 개 나라 스물여섯 편의 영화와 만나는 작은 영화제이다. 스물여섯 편의 영화는 모두 책을 원전으로 하고 있거나, 책을 모티브로 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게 영화의 원전을 책으로 삼아 영화제를 열은 것은 처음 시도다. 영화제이지만, 영화 못지않게 책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대개 영화이야기 만 나눈다. 영화의 감독을, 배우를, 배경을, 제작자를 이야기한다. 그 영화가 태어난 원천에 대한 이야기는 가뭇, 사라지고 없다. 그 원천, 책에 대한 고민을 다시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책 영화제는 책 이야기가 왁자지껄하다.책의 편에서 살피자. 책은 요즘 어떤 존재인가. 눈을 움직이며 활자를 따라 끊임없이 호흡을 이어가야 한다. 손은 또 어떠한가. 눈동자가 움직이며 활자의 끝을 따라가기 바쁘게 페이지를 넘기며 면과 면을 이어야 한다. 그림책같이 이미지가 주를 이루는 책이라면 좀 나으련만, 글만 가득한 활자중심의 책은, 쉼 없이 활자가(혹은 문자가) 지시하는 대상을 호명해야 한다. 소리 내 읽을라 치면, 귀도 가만있을 수 없다. 스스로 내거나 누군가 읽어주는 그 소리를 잡아채기 위해 청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책을 읽는 다는 것은, 이렇게 손이며 눈, 귀, 온 감각과 상상하는 힘까지 송두리째 동원해야 하는 꽤 까다로운 행위다. 그 행위의 수고로움을 누그러뜨리는 방향 가운데 하나가, 이미지화다. 음성화다. 인류가 그 맞춤한 결과로 만들어낸 것이 바로, 영화다.△10년 이야기를 쌓다첫 책영화제는 전북 고창 책마을 해리에서 열렸다. 책마을 해리는 글, 그림작가(조형예술가, 목수) 출판 기획자와 편집자, 디자이너 들이 사는 책, 마을, 공동체다. 바닷가 폐교에 깃들어 마을사람들과 숨을 나누어 쉬며 수많은 빛깔 마을학교를 열어 어린이로부터 가족, 마을어르신들의 배움과 놀이의 공간이 되고 있다. 책마을답게 그 모든 결과를 책(혹은 신문 같은 매체)으로 펴내고 있다. 지난 2008년 초 폐교된 나성초등학교 숙직실을 리모델링하면서 시작된 책마을이야기가 이제 10년을 채웠다.출판캠프 방식으로 운영하는 학교 프로그램 못지않게 책마을 공간도 정리가 되어가는 시점, 세상과 책마을해리가 만나는 구체적인 접점으로 책과 영화를 삼은 것이다. 책마을해리에서 열리는 첫 책영화제가 시작된 것이다.△이틀 밤 사흘간 책과 영화 이야기책영화제 첫 영화는 <슈렉>, 윌리엄 스타이그라는 걸출한 그림책 작가의 동명 그림책 『슈렉』을 함께 읽으며 영화제를 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단체 관람객들에게 책과 한편 같고 한편 다른 영화이야기가 흥미진진이다. 이름짜한 애니메이션으로만 알았던 영화의 원작이 그림책이라니, 펼치고 읽는 책과 빛으로 번지는 영상 사이에서 우쭐우쭐이다. 어린이들만을 위한 영화 뿐 아니다. 영화제를 마무리하면서 함께 감동을 나눈 <캡틴 판타스틱>은 원작이 책이 아닌 시나리오지만, 그 안에 등장하는 작가, 책, 책의 문구들이 난무하는 인문경연장이 되었다. 교육은 무엇인지, 삶이란 무엇인지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영화 끝에 이어진 <북씨네토크>에서 중년 관람객은 앵콜상영을 요청하기도 했다.서울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의 도움을 받아 단편 애니메이션을 선보이기도 했다. 청년영상제를 함께 열어, 20대 초반 청년들의 다양한 영화적 시도를 엿보기도 했다. 책과 영상 공모전도 진행했다. 대하소설 첫권떼기를 통해 긴 호흡 소설에 익숙하지 않는 세태, 읽기의 한계를 극복해보려는 시도도 빠지지 않았다. 출판평론가 장은수, 조월례, <씨네21> 주성철 편집장과 안재환 애니메이션 감독이 전하는 책과 영화이야기, 주제토론도 책영화제의 의미를 더해주었다.책영화제 꾸밈은 꼭 책과 영화만이 아니다. 다양한 공연, 전시도 함께였다. 마을학교 <밭매다 딴짓거리> 어르신 학생들의 4년동안 그림과 글을 모아 엮은 『여든, 꽃(김선순)』『마을, 숨은 이야기 찾기(나성마을아짐들)』원화전도 열렸다. 작가와 만남 시간도 100여 명 참가자들과 함께 감동과 웃음의 도가니가 되었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게 부끄럽다며 반주로 소주를 들이키던 분들이 첫날 밤을 묘사하는 적나라함이며, 마을에서 유일한 연애결혼담이며, 이야기보따리가 열리자 봇물 터지듯 말문이 열렸다.책마을아트앤북레지던시 전시도 함께했다. 3년동안 바느질 속에 살았던 정상경 작가의 <수궁가헝겁조형전>부터, 책마을해리 책뜰을 조형예술 작업으로 채운 류충렬 화백의 책조형전도 함께 진행했다. 우리나라 지역출판도서전을 작게 꾸미기도 했다. 이번 책영화제는 3일간 1천여 관람객과 함께했다.△아직 가슴 설레는 모험의 꿈책영화제는 전라북도, 고창군,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KBS전주총국, 전북일보, 전라도닷컴 등의 친구들과 함께 열었다. 책마을프랜즈는 지역공동체도 한몫을 했다. 고창의 마을공동체 교류의 장이 되기도(책영화제 첫째 날), 마을학교 진행자와 참가자들이 함께 어울리는 학교의 장이 되기도(책영화제 둘째 날) 했다.마지막 날은 해리포터즈의 날이 되었다. 해리포터즈는 책마을해리와 서포터즈의 합성어다. 30여명의 해리포터즈는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대학생까지 두루 참여해 책영화제 감동을 함께 나눴다.이번 책영화제는 책마을은 누구나 책을 만드는 마을이라는 슬로건처럼, 영화제를 기획과 준비, 영화제 3일의 기록을 잘 편집하고 디자인해 책으로 발간할 계획이다. 가제가 『책의 미래, 책영화제의 모험』이다.이번 첫 책영화제는 주제를 <책과 영화, 모험을 떠나다>로 삼았다. 책마을해리는 책과 마을이 만나 시작하는 책의 모험이다. 책과 마을로 시작한 책의 모험은, 올해는 토요일 하루 고창 청소년들과 진행한 책 학교로, 책영화제로 확장하고 있다. 2018년 책영화제는 또 어떤 사람들과 어떤 이야기를 불러올지, 자못 기대가 크다./이대건(책마을 해리 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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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1.15 23:02

[우리고을 인물 열전 18. 익산시 여산면] 국도 1호·고속도로 지나는 호남 관문…가람 이병기선생 고향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여산에 있는 호산(壺山현재는 천호산)은 여산지역의 진산(鎭山)이다. 진산은 도읍의 북쪽에 있으면서 도읍을 보호하는 주산을 말한다. 실제로 여산은 호리병의 작은 입구 형상을 보인다. 동쪽 천호산과 서쪽 미륵산용화산 사이에 위치한 탓이다. 북쪽으로 충남 연무읍, 남쪽으로 익산시 왕궁면이 소재한고, 남북을 잇는 국도 1호선과 호남고속도로가 통과한다. 호남, 전북의 관문이다.여산(礪山)지역에는 삼한시대 이전에 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이라는 부족국가가 있었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했고, 마한이 백제에 흡수된 후에는 지량초현(只良肖縣)으로 불렸다. 신라와 고려 때는 여량현(礪良縣)으로 불리었다. 현재의 여산이란 명칭이 생긴 것은 조선 태종 2년(1402년)에 이웃 낭산현과 여량현이 합쳐지면서부터다. 여량현은 세종 18년(1436년)에 태종의 비 원경왕후의 외향이라는 사실 때문에 군으로 승격됐다. 원경왕후 민씨의 외조부는 여산송씨 송선이다. 또 숙종 26년(1699년)에는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정읍 칠보에서 출생, 송헌수의 딸)의 성향(姓鄕)이란 이유로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기도 했다.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여산군에 속했던 11개 면 158개 리가 분할될 때 낭산면, 망성면, 황화면이 여산에서 떨어져 나갔다. 여산면은 천동면과 천서면, 부내면만으로 축소돼 여산리, 두여리, 호산리, 태성리, 제남리, 원수리 등 6개리 체제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여산에는 숯고개, 진터, 갑옷터, 닭작골 등 옛 지명들이 전하는데 전주성으로 진출하는 골목에 위치한 여산 일대가 후백제와 고려의 주요 격전지 였음을 짐작케 한다.면소재지인 여산리의 동헌 건물과 노거수가 옛 여산의 위상을 짐작케 한다. 참상의 역사 현장도 남아 있다. 동헌 아래에 위치한 백지사터(白紙死)가 그것이다. 대원군 집정 때인 1866년 병인년, 조선 정부는 천주교 신자들의 얼굴에 물을 뿌리고 백지를 덮어 질식사 시켰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위에 위치한 동헌 뜰에는 대원군의 척화비가 세워져 있다. 광복 이후 여산 출신으로 가장 빛나는 인물은 국문학자요, 시조시인 가람 이병기다. 지난 달 14일 원수리 진사마을 이병기 생가 옆에 가람문학관이 문을 열었다. 가람문학관이 개관에 이르기까지는 익산시 등 주변의 관심과 함께 평소 생가 관리에 힘써온 김장환씨(69여산리여산면지추진위원장) 등 지역민들의 여망이 크게 컸다. 김장환씨는 여산면지 발행에 앞장서고 있다.△여산송씨의 본향여산의 인물을 거론하자면 여산을 본관으로 하는 여산송씨에 대한 이야기를 지나칠 수 없다. 고려와 조선에서 출세 가도를 달린 인물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우리나라 모든 송씨는 당나라에서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내다 귀화한 송주은(宋柱殷)의 후손들이다. 그의 후손 자영의 세아들 중 맏이 계통이 유익, 천익, 문익 삼형제인데, 유익은 여산송씨, 천익은 은진송씨, 문익은 서산송씨의 시조가 되었다.송유익(宋惟翼)은 훗날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銀靑光錄大夫 樞密院副使)로 追贈 되었다.현재 송유익의 4세손인 송송례(宋松禮, 고려 충렬왕 때 중찬)를 중시조 1세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으며, 송송례가 여산군(礪山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본관을 여산으로 하게 됐다. 여산송씨는 송송례의 아들 염과 분 형제의 아들 대에서 원윤공파, 밀직공파, 소윤공파(이상 염의 아들), 지신공파, 정가공파(이상 분의 아들)의 5파로 갈라졌다.여산송씨는 영의정 1명, 좌의정 1명, 왕비 1명, 판서 다수 등 수많은 인물을 배출했다.여산송씨의 중시조가 된 송송례는 1270년 직문하성사(直門下省事)로서 권신 임연의 아들 임유무를 죽이고 왕정을 바로세웠다. 송거신(宋巨信)은 태종의 비 원경왕후 민씨의 당질로서 태종의 신임을 받았다.동래부사 송상현은 임진왜란 때 동래성이 함락될 때 장렬하게 전사한 절신으로 유명하다. 송질은 중종반정 때 정국공신으로서 영의정에 올랐고, 송익필은 선조 때 대학자로서 8문장의 한사람으로 꼽혔다.△정관법조계두여리 출신인 박선규(56두여리)는 언론인 출신으로 정계와 관계에서 활동했다. KBS 기자였던 그는 1999년 이명박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후 2008년 대통령실 언론2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 청와대 대변인과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을 지냈다.제남리 출신의 송삼섭씨(70)는 여산초중학교, 전주고를 거쳐 서울법대에 졸업한 인재였지만, 연좌제에 막혀 제대로 뜻을 펴지 못했다고 알려진다. 쌍용그룹, 일진그룹 법률고문을 역임했다.△교육계원수리 출신의 국문학자이자 시조시인 이병기(1891년~1968년)는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와 전북대 교수를 역임했다. 일제 강점기부터 한글운동을 벌인 국문학자요, 독립운동가다. 첫 국어사전 편찬에 열정을 다했고, 현대 시조문학을 개척해 세운 시조시인이다.두여리 출신인 유인종 전 서울시 교육감(85)는 노스캐롤아이나대학원 철학박사이고, 고려대 교수를 거쳐 1996~2004년 서울시교육감을 지냈다. 그는 교육감 재임시절 일제고사 폐지, 고액과외 폐지, 자립형사립고 반대 등 학교교육 살리기에 열정을 쏟았다. 여산리 출신의 김양수씨(77)는 성신대 총장을 역임했고, 여산리 출신의 하중호씨(82)는 여산초, 전주고, 연세대 상대를 졸업한 후 금융계에서 일했다. 퇴직 후 예절 교육 활동에 열정을 쏟았으며, 목포대와 세종대에서도 일했다. 제남리 출신의 배경식씨(69)는 한일장신대 교수를 역임했다.△군경이남신 예비역 대장(73육사23기제남리)은 육군 7사단장, 육군본부 감찰감, 8군단장, 국군기무사령관, 3군사령관을 역임한 뒤 김대중 정부에서 함참의장을 지냈다. 퇴임 후 육사 총동창회장을 역임했다. 유해근 예비역 중장(72육사 26기원수리)은 35사단장, 특전사령관에 이어 교육사령관을 지냈다. 송승석 예비역 준장(64육사 32기두여리 수운마을)은 76보병사단장, 수도포병여단장, 수도방위사령부 부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대한민국성우회 안보전문위원, 한국위기관리연구소(KICA) 선임연구위원으로 재임하고 있다.△경제계여산리 출신인 이연(1915년~2003년) 전 대한석탄협회 회장은 신흥고를 졸업하고, 1994년 원광대에서 명예경제학박사를 받았다. 1963~1992년 동원탄좌 회장,1986~1997년 대한석탄협회 회장 지낸 그는 강원도 사북에서 석탄을 채취하는 동원탄좌를 운영하며 큰 돈을 벌었으며, 동원전자 등 10여 개 방계기업을 세워 운영했다. 서울 강남의 특급호텔 리츠칼튼서울의 이전배 사장(60)은 그의 아들이다.두여리 출신의 송관용(1932~2014) 전 부림흥산(주) 회장은 여산보통학교, 고려대 최고경영자과정을 거쳤다. 삼우토건, 삼강통상(주), 부림흥산(주) 대표이사 회장을 지냈으며, 여산에 두여장학회를 설립, 고향 후배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여산리 진성섭씨는 쌍용그룹 사장을 지냈고, 호산리 최창규씨는 대구, 두여리 출신 이정수씨는 대전에서 사업가로 활동하고 있다.원수리 내동마을이 고향인 이경수씨(49)는 떡볶이 프랜차이즈 아딸을 창업, 크게 성공했다. 지역 출신 이정원 목사의 아들 이경수 대표는 2017년 들어 아딸 브랜드를 탈피하고, 감탄 브랜드를 새롭게 내세웠다.재경익산향우회 부회장 이지희 사장은 원수리 출신으로 서울 경희대를 졸업한 후 토너 등 전자제품의 부품을 만드는 클린톤전자 대표다.△문화체육언론계원수리 출신의 이만희씨(81)는 대전광역시 지정 무형문화재 제10호 각색편 보유자다. 각색편은 연안이씨가(延安李氏家)의 고유 음식으로 그 제조법이 지난 2000년에 대전광역시로부터 무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됐다.여산리 교동 출신으로 이리농림과 고려대를 나온 배성환씨(84)는 한국일보 부사장을 역임하고 재경익산향우회를 이끌었다. 역시 여산리가 고향인 이정근씨(71)는 매일경제 동경특파원을 지냈다. 이봉원씨는 KBS제작국장을 지냈다. 스포츠전문기자인 스포츠조선 이상주 부장은 제남리가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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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호
  • 2017.11.14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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