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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21. 흥부전에 담긴 가치 - 남원 땅 흥부가 전한 나눔 메시지를 지역의 힘으로

태산같이 쌓인 곡식 누구를 주자고 아껴서 이리 몹시 때렸을까. 어떤 사람은 팔자 좋아 장손으로 태어나서 선영(先塋, 죽은 조상) 제사 모신다고 호의호식 잘사는데 누구는 버둥대도 이리 살기 어려울까. 차라리 나가서 콱~ 죽고 싶소!아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가만 들어보면 맞고 들어온 사람 위로는 못할 망정 자신의 처지를 보태 한탄하는 넋두리이다. 이 대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흥부의 아내로 놀부네 갔던 흥부가 실컷 맞고 돌아온 것을 보고 한 말이다. 진짜 흥부가 기가 막힐 말이지만,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장자 중심의 가족제도에 의한 재산 상속의 차별과 조선 후기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말로 흥부전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이기도 하다. 이러한 『흥부전(興夫傳)』은 많은 식솔을 위해 노동을 하는 가난한 농민을 동생 흥부로 표현을 했고, 신흥부자와도 같은 삶을 사는 이를 형 놀부로 표현했다.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흥부전(興夫傳)』은 조선시대 지어진 작자 미상의 고전소설이며, 이를 바탕으로 한 판소리 『흥보가(興甫歌)』 또한 존재한다. 이 판소리 사설 버전은 전라북도 고창 출신 신재효(1812~1884)가 1864년부터 10여 년간 정리한 것으로, 흥부가(興夫歌), 박타령, 흥부타령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작품이다. 이 같은 흥부전은 사실 작자와 연대가 구체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지만 조선시대 정조와 순조 시대 명창인 권삼득(1771~1841)이 흥부가를 특히 장기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을 볼 때 18세기 이전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그 흥부전의 유력한 발상지로는 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과 아영면이 꼽힌다. 인월면 성산리 성산마을은 흥부가 태어난 곳이며, 아영면 성리마을은 흥부가 놀부에게 쫓겨나 정착했다가 훗날 복을 누리고 살았던 곳이라는 것이다. 흥부가 중 「제비노정기」에 등장하는 전라도는 운봉이요, 경상도는 함양이라. 운봉함양 두 얼품에 흥보가 사는지라.라는 대목 속 운봉읍과 함양군 사이가 곧 성산리를 일컫는다는 것이다. 또 성산리에 전해오는 박첨지라는 사람에 대한 설화도 흥부전의 줄거리와 비슷하여, 남원 기원설에 설득력이 보태진다.오래전 이곳에 살았던 박첨지는 부유했지만, 매우 인색하여 이웃과 소작인들에게 못되게 굴었고, 심지어 하나밖에 없는 동생도 내쫓았다. 훗날 동생이 다시 찾아왔지만, 이때도 매를 때려 쫓아냈다. 이후 함양 땅에서 민란이 일어나 박첨지가 죽게 되자 평소 박첨지를 괘씸하게 생각했던 마을 사람들은 죽은 박첨지의 시체조차 거두어 주지 않았다. 그러나 후에 부자가 된 아우는 형의 소식을 듣고 마을로 찾아와 동네 사람들에게 돈과 제답(祭畓)을 주며 해마다 형의 제사를 지내 달라고 부탁하였고, 성산마을 사람들은 결국 박첨지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성산리에는 연비봉, 화초장 바위, 흥부네 텃밭, 연하다리 등 흥부전과 관련된 지명이 지역의 복원 노력이 더해져 흔적으로 남아 있다.또한, 남원에 살았던 춘보라는 천석꾼이 흥부의 모델로 지목되기도 하고, 그 밖에 이야기의 배경을 평양으로 지목하는 1833년에 쓴 필사본 『흥보만보록』 등을 비롯하여 다른 판본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어찌 됐든 흥부전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별별 품팔이를 다 했던 흥부 부부의 고단한 삶을 엿볼 수 있다. 가난한 농부인 흥부가 우리 품이나 팔러 갑시다라고 부인에게 이야기하고는 가래질하기, 전답 갈기, 이집 저집 다니며 이엉 엮기, 비 오는 날 멍석 걷기, 땔감 하기, 말짐 싣기, 말편자 박기 등의 품을 팔고, 흥부 아내는 방아 찧기, 자리 짜기, 떡 만들기, 술 거르기, 나물 뜯기 등을 하며 동네의 잡일을 닥치는 대로 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런 노력에도 살림살이가 나아지지 않자 곡식을 빌리러 관청을 찾아가는 흥부의 모습이 참으로 처량하다. 당시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있다는 환곡을 얻으려다, 가난한 백성이 어찌 나라의 곡식을 그냥 가지려는가? 매는 맞아 보셨소?라며 비아냥거리는 관아의 사람에게 매품 거래를 하게 된다. 하지만, 매를 대신 맞고 곡식을 받기로 한 날 나라에서 사면령이 내려져 매품도 팔지 못한 흥부가 천근만근의 발걸음을 옮기며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에선 여러 품팔이를 마다치 않고 살아가던 가난한 백성의 삶의 무게를 느낄 수 있다.그렇게 무엇을 해도 잘 풀리지 않던 흥부가 제비 다리를 고쳐주며 얻은 박에서 대박을 터트리며 극적인 반전이 일어나는데, 그 박에서 나온 물건들이말로 당시 백성들이 갈망했던 품목일 것이다. 흥부 부부가 슬근슬근 톱질하니 온갖 것들이 박에서 펑펑 나오는데, 불로초를 비롯하여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환혼주(還魂酒), 장님을 눈뜨게 하고 벙어리를 말하게 하는 수많은 약재와 약주가 나오고, 논어, 맹자, 사략, 통감 등 책도 나온다. 그리고 자개장롱, 삼층장, 동래 반상, 안성 유기, 곳간을 가득 채우는 곡식과 모시와 비단 등에 목수까지 나와 집도 지어주고 돈벼락에 대박을 맞은 흥부의 모습으로 당시 귀하게 여기는 것과 신분 상승을 위해 백성도 책을 보며 공부를 해야 함을 암시했다.그리고는, 대박을 맞은 착한 동생 흥부에게 샘을 내며 어설피 따라 하다 쪽박을 차게 된 놀부 이야기로 권선징악(勸善懲惡)의 메시지를 담아 대리만족을 얻게 해준다. 어느 고을이나 있을 신분 상승한 졸부의 얄미운 행태나 가난한 아우 같은 농민의 삶을 투영한 흥부전의 내용은 조선 후기 생활상이 잘 반영된 것으로 대박과 쪽박으로 뒤집어 불합리한 당시 경제 상황과 세태를 비판하고 사회의 불만을 해소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형제가 화해하는 이야기로 훈훈하게 마무리된 흥부전이 남긴 해학과 풍자는 우리에게 권선징악이나 징벌보다 중요한 형제애와 보은과 나눔의 메시지도 전해준다. 늦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쌀쌀한 계절, 소외된 이웃에게 따스한 손길을 건네며 흥부전에 담긴 나눔의 가치를 지역의 힘으로 귀하게 여겼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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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1.10 23:02

[마을학개론 ④ 마을사회] '사회안전망' 구축해 '사회적 자본' 쌓아 '정의로운 대안사회'로

마을 만들기로 마을공동체를 이루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오로지 마을만들기의 3주체인 행정, 주민, 전문가의 역랑과 진정성의 부족 때문만은 아니다. 차라리 구조적이고 태생적인 문제다. 잘 하고 싶어도 잘 할 수 없는 구조악을 안고 있는 것이다. 일단 행정편의적이고 기술만능적인 마을 만들기 방법론이 문제다. 그 질곡에서 어서 벗어나야 한다. 많은 행정과 주민들이 막연히 소망하는대로 대부분의 마을은 관광지나 공원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홍보, 마케팅, 호객행위를 열심히 해도 농외소득이나 일자리를 창출하는 일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무엇보다 마을은 결코 상품이 될 수 없다. 마을로 돈을 벌 수는 없다. 마을은 단지 주민들의 생활의 터전일 뿐이다. 굳이 마을에 손을 대려면, 예산을 퍼부으려면 마을이 품고 있는 사회적이고, 인문적이고, 문화적인 요소와 자원들을 융복합적으로 결합, 마치 종합예술 작품처럼 승화시키려는 사업목표를 세우는 게 좋겠다. 결국 마을 만들기의 방법론은 마을 살리기또는 마을살이로 가치관, 그리고 자세와 마을가짐부터 전향하는 게 순서다.여기서 그런 마을을 이른바 대안마을로 부르고자 한다. 경제적 측면으로는 1차 유기농산물 생산, 2차 고부가 농특산물 가공, 3차 도농교류와 도농직거래 서비스 등의 밸류체인(Value Chain)이 작동되는 융복합형 농업농촌 발전전략이 유효하다. 마을공동체사업을 책임지는 마을시민과 마을기업을 중심으로 주체적이고 사회혁신적으로 지속발전가능한 농촌지역공동체마을이다.사회적 측면으로 대안마을은, 도시민, 견학단 등 외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구경거리나 체험놀이터를 조성하는 마을 만들기는 하지 않는다. 대신, 원주민, 출향인, 귀농인 등 내부인의 안정된 생활과 예측가능한 생애설계를 위한 마을 살리기 또는 마을살이를 실천하는 생활과 생존의 공간이다. 물론 이를 위한 학습과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 깨어있는 마을시민들이 모여 마을기업을 함께 조직해 협동해서 관리하고 공동으로 경영하는 생활공동체마을일 것이다.△대안마을은 곧 사람 사는 복지농촌이다대안마을은 이른바 사람 사는 농촌을 뜻한다. 즉 마을사람들끼리 서로 돌보고 보살피는 마을단위의 마을복지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마을이다. 오늘날 우리 농촌사회에는 복지의 공백지대, 사각지대가 마치 함정이나 지뢰밭처럼 도처에 산재해 있다. 마을 만들기를 열심히 한다고, 법을 몇 군데 고치고 예산을 좀 늘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아예 기왕의 돈 버는 농업이라는 경제적 잣대와 농촌지역개발이라는 토건적 잣대는 걷어치우고 사람 사는 농촌이라는 사회복지의 시각으로 농정을 새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무엇보다 우리 농민의 주력인 소농, 영세농, 가족농은 고소득, 고부가가치의 농정구호가 여전히 어렵고 버겁다. 그 보다 보건, 의료, 주거, 고용, 교육 등의 사회복지망이 그들에게는 더욱 절실하다. 최근 복지전달체계를 행정단위에서 마을단위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과 연구도 이어진다. 전북연구원은 전라북도 마을복지 전달체계 구축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관주도 복지서비스에 의존하는 복지는 한계에 달했다며 복지체감도 향상을 위해 마을단위로 전달하는 전북형 마을복지 모델을 제안한다.전북형 마을공동체복지 모델을 실현하기 위해 행정 읍면동 단위의 복지전달체계를 마을단위로 세분화하면 복지시설을 이용하지 못하는 동네주민까지 복지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때 복지제공 기관을 복지시설로 제한하지 않고 복지의 제공 방식을 다원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마을의 병원, 보건소, 경로당, 반상회, 주민자치회 등으로 복지의 주체로 확대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공적재원이 미처 투입되지 못하는 복지사각지대를 마을의 조직과 자원이 주체적으로, 내생적으로 보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다.이같은 마을단위 복지 제안은 마을단위에서 민간의 자발적 참여가 결합되는 주민참여형 공동체 복지가 대안이라는 진단의 결과다. 다만, 복지예산의 부족을 이유로 자칫 국가와 정부의 기본적인 책무마저 민간에 전가하는 식의 정책은 불필요한 오해를 살 수도 있다. 당연히 정부의 복지 예산의 확충과 집행 효율 제고부터 우선 노력하는 게 일의 순서다.나아가 농민은 국가의 식량주권과 국민의 먹거리를 책임지는 국가기간산업 농업에 복무하고 있으니 마땅히 공익농민, 또는 사회적 농민이라 할 것이다. 국가와 정부가 나서서 농민을 사회적 농민 수준으로 대접하는 게 보다 근본적인 사회복지 대책이 될 것이다. 가령 농사만 지어서도 먹고 살 수 있도록 기본소득 생활비를 지급하거나,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농민 또는 농촌주민, 귀농인에게는 따로 먹고 사는 생활기술을 가르치는 마을이 있다면 그 마을이 바로 대안마을이다. 사람 사는 복지농촌마을이다.△대안사회는 사회적 자본과 사회 안전망으로하지만 한국사회에서 대안마을로 가는 길은 험로다. 마을을 둘러싼 사회의 현실과 전망이 그다지 밝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 신자유주의 천민자본주의의 표본이자 신식민지 반봉건사회 같은 헬조선 한국에서 마을이나 공동체는 해묵은 난제다. 한국사회의 평균적인 시민들은 오로지 먹고 사는 문제. 안전하게 사는 문제에 진력하고 매진하느라 남을 돌보거나 보살필 시간도, 여유도 거의 없다. 그런 처지와 형편에서 마을공동체사업이나 사회적 경제를 시작하거나 참여하는 건 실로 어려운 일이다. 마음은 있어도 몸이 잘 할 수 없다.특히 생업과 생활의 공간이 분리, 격절된 도시에서는 일상의 대부분을 생업 현장에서 탕진하느라 삶의 터전인 마을은 그저 숙소 또는 수용소의 모양과 기능으로 전락하고 있다. 그래서 마을이나 공동체사업현장에 가서 속을 들여다보면 세 부류의 사람들만 유독 눈에 띈다. 마을공동체사업을 생업 삼아 하는 전문 활동가, 어쨌든 먹고 살만한 이른바 중산층들, 그리고 다른 기회나 대안이 차단된 이른바 삼포세대의 청년들이다. 정작 마을공동체의 주력으로 참여하고 활동해야할, 공동체의 돌봄과 보살핌이 절실한 중하위 계층의 주민들, 시민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먹고 사는 일터에 오로지 매달려 있기 때문에 마을공동체를 기웃거릴 시간도, 힘도 없다.그런 주민, 시민들과 함께 공동체사업을 모두 함께, 잘 하려면 법, 제도, 정책을 개발하기 전에, 공동체 사업계획서를 쓰기 전에 먼저 해야할 일이 있다. 먹고 살아야 한다는 강박증, 두려움, 공포심으로부터 주민과 시민들은 우선 해방시켜줘야 한다. 그러자면, 먹고사는 전장의 경쟁 상대인 이웃을, 친구를, 타인을 서로 믿지 못해 공동체에 다가가지 못하는 것이니, 우선 서로 믿고, 서로 약속한 규범을 잘 지킬 수 있도록 사회적 자본부터 키우고 공유해야 한다.그리고 국가나 정부가 시민과 국민을 돌보고 보살피지 않아서, 내가 스스로와 처자식까지 돌보고 보살피느라 남 따위는 쳐다볼 여유나 이유가 없으니, 그래서 나도, 너도, 우리 모두 불안하고 위험하니 튼튼한 사회안전망부터 구축해야 한다. 기본소득제로 상징되는 사회안전망이 일단 구축되면, 공동체 구성원마다 서로 믿고 남을 도울만한 생활의 여유가 생겨 신뢰, 협동, 연대, 규범, 네트워크 같은 사회적 자본은 저절로 생성, 축적될 것이다. 그런 사회적 자본이 만들어지면 마을공동체는, 사회적 경제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발생하고 진화할 것이다. 지금처럼 국가나 정부가 마치 생색내듯 돈 몇푼씩 나눠주며 훈련시키듯 다그치거나 감독하거나 평가하지 않아도 자생적으로, 자조적으로, 자치해나갈 것이다.그러니까 1단계로 사회안전망(무상교육, 무상의료, 사회주택, 고용안정, 기본소득 등), 2단계로 사회적 자본(생활기술 학교, 공유재 은행, 협동경영 조합, 공동체융합 플랫폼 등), 3단계로 법제도정책(마을공동체, 사회적 경제, 커뮤니티 비즈니스, 도시재생, 귀농 등)의 순서와 단계로 공동체사업의 설계도와 추진전략도 새로, 다시 그릴 필요가 있다. 앞으로 수십년이 걸리든, 수백년이 걸리든, 그 길이 불량사회 한국, 불행사회 한국에서 탈출, 마침내 사람 사는 마을공동체, 정의로운 대안사회로 들어가는 옳고 바른 외길로 보인다. 꿈이나 욕심이 아니다.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 선진유럽의 국민들은 이미 그렇게 살고 있다./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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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1.09 23:02

[군산항은 콘텐츠다] 평화 땐 교류 나들목·전쟁 땐 요충지 활용 '이야기 무궁무진'

항구를 노래한 유행가가 있는가 하면 항구에 관한 사연들도 많다. 인생을 항해하는 배로 비유하며 떠나는 자와 보내는 자의 이별의 정을 나누는 장소를 항구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군산항은 일반적 항구와는 다른 의미가 있다. 사람을 떠나보내는 이별 보다는 자식 돌보듯 소출한 쌀을 가차 없이 수탈당했던, 쓰라린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이런 군산항을 이제는 과거의 회한에만 얽매여 있지 말고 콘텐츠화해 역사교육의 장소로, 반성적 사고를 동반한 힐링의 장소로 활용 하자는 것이다.△ 세계와 전북의 연결고리, 군산항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黃海)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 째 얼어 좌르르 쏟아져 버리면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大處)하나가 올라앉았다. 이것은 군산(群山)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에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채만식의 탁류 첫머리에 나오는 문장으로, 군산의 지정학적 위치를 설명하기에 매우 적절한 내용이다.군산은 서해 중남부지역에 위치하며 북으로는 금강이 남으로는 만경강이 흐르는 사이에 반도형 들판이 서해에 맞닿아 있어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다. 북으로는 우리나라 3대 강 중에 하나인 금강이 우리 군산을 끼고 흘러 바다에 이른다. 그 금강 줄기에는 백제시대의 제23 수도가 있었다. 그러므로 군산은 평화시에는 물류와 문화 교류의 나들목 역할을 했고, 전쟁시에는 요충지가 되었던 곳이다.강가에는 배가 닿기 좋은 포구가 있어 상권이 활발하게 형성 됐었다. 그래서 고려시대는 진포라고 불렀다. 그 강 줄기에 나리포구, 서시포구, 사옥포, 궁포, 경포(서래포구), 죽성포(째보선창)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군산의 내항은 수탈의 창구였다. 쌀을 빼앗아 가기 좋은 구조로 강둑에 축대를 쌓고 밀썰물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부잔교를 만들었다.1976년에는 외항의 건설로 본격적으로 세계로 연결 될 수 있는 역할을 확보하게 되었다. 현재의 비응항과 신시도항에 이르기까지 과거에서 미래로 연결되어지는 군산항에 대한 다양한 콘텐츠를 생각해 보려고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바람을 가르는 금강둑생명력 넘치는 탁류아스라이 강 끝에 햇살이 퍼지면, 산자락은 봄기운에 들뜨고 강 둔덕 풀섶엔 유채꽃 무리들이 철렁철렁 강물박자로 춤춘다. 강바람 마주하며 사뿐 사뿐 걷다 보면, 금강하구 반가운 갯 내음이 가득하다. 녹슨 작은배가 옛 영화를 꿈꿀 때, 물오리 세 마리 한가로이 노닥이고, 강둑 위 금단추 같은 민들레가 오늘을 노래하네.지난 봄 공주산 옆 나리포구에서부터 내항까지 금강둑을 따라 걸으면서 필자가 적었던 감상글이다.세월이 빨라 벌써 늦가을이다. 며칠 전 금강 하구둑을 다시 걸었다. 안개가 낀 것도 아닌데 먼 산은 수채화를 그려놓은 듯 희미하다. 강물은 가을 햇살에 은빛으로 반짝인다. 강둑에는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바람을 가르며 달린다. 여전히 갯 내음이 코끝을 스친다.채만식 문학관을 막 지나서 내항을 향해 걷다보면 군산을 잇는 개통을 앞 둔 동백대교의 라인과 오래전 문을 닫고 초식 공룡의 목처럼 우뚝 솟은 장항제련소의 굴뚝이 묘한 어우러짐을 볼 수 있다. 강물의 색깔은 갯벌이 휘돌아 흐르는 탁류이다. 지구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바다와 강이 만나 만들어진 생명력 넘치는 탁류이다. 그곳에 저녁노을이라도 질 때면 불타오르는 붉고 금빛 나는 하늘이 장관을 이루어 보는 사람 누구나 감탄사를 연발하게 한다.LA에 살던 필자가 아는 이는 군산 내항에 지는 노을을 바라보고는 발길을 떼지 못하며 그 아름다움에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군산 내항 길은 걷는 것 자체로서 힐링이 되는 콘텐츠 공간이다.△ 금강하구 포구마다 깃든 사연들군산항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는 공주산 아래의 나리포구엔 아직도 작은 배가 묶여있다. 나리포구가 언제부터 포구역할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 임피현 산천조에는 공주산은 현의 북쪽 13리 약 5km에 있는데 전하는 말에 공주로부터 떨어져나왔기에 이름한다고 한다. 공주산 밑이 진포인데 민가가 즐비하고 배부리는 것을 상업으로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조선시대 초에도 상당한 규모의 어촌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군산항에서 출발한 여객선이 나포를 거쳐 강경으로 올라가는 항로상의 경유지가 되었다. 해방이후 군산동부어판장 즉 째보선창에 어협조합이 만들어지면서 객주들의 영업자체가 불법이 되어 쇠퇴기에 접어들었다가 한국전쟁을 겪으며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이처럼 금강하구에 있던 포구들은 그 외에도 서시포구, 궁포, 경포(서래포), 죽성포(째보선창)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포구들은 역사적인 이유로 또는 갯벌이 쌓여 큰 배가 들어오지 못하는 자연현상 등으로 포구의 기능을 잃고 쇠락한 채로 누워있다.그러나 금강하구에 포구마다 깃든 사연은 스토리텔링의 보고이다. 경포는 서래, 슬애 포구라고도 불리웠으며 초가집이 가득찬 어촌마을이었다. 슬애란 서래의 군산식 발음인데 서울에 가는 포구라는 뜻이다. 슬애를 한문으로 기록하려니 서울경(京)에 포구포(浦)를 사용하여 경포라 부른 것이다. 경포에는 경장시라는 오일장이 열렸다. 서래장터에서 호남최초의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일제 강점기 조선인들의 삶이 수탈만 당했던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저항도 함께 했음을 알 수 있는 장소이다.대나무가 많아서 죽성포구라고도 불린 째보선창. 이는 물길이 째지듯 육지를 파고 든 모습 땜에 또는 선창 객주가 실재 째보여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일제는 금강 줄기에 있는 조선민족 상권인 강경상권을 축소시키려고 계획적으로 째보선창을 활성화시킨다. 소설 탁류 속 주인공 정주사가 착지한 곳이기도 하다. 째보선창이 번창하면서 3.1만세 운동의 집결지인 경포 옆에 있는 서래장도 서서히 문을 닫게 된다. 당시엔 만선의 고깃배 출어를 돕는 객주들 나무장수, 물장수, 떡장수 등 째보선창 언저리가 발디딜 틈도 없이 북적거렸다. 지금은 주인을 잃은 고깃배 붉게 녹슨 닻 수북한 어상자들 쓸쓸한 민야암 등대 넘어로 철공소의 쇠망치 소리만 그 정적을 깨고 있다.필자는 째보선창에 있는 동부어판장 옥상을 해질녘에 올라간 적이 있다. 넓게 펼쳐진 갯벌과 함께 밤하늘 별빛의 아름다운 어울어짐은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키기 좋은 곳이다.△ 이야기 많은 군산항, 항구적 기능도 살려야군산항을 근대항으로 개발한 것은 1905년 구한국정부에 의해 공사비 8만 6000원의 투자 7개년 계획으로 대형 부잔교 3기가 만들어지면서 부터이다. 1930년대부터 대륙침략의 병참기지화로 활용되었다. 해방 후부터 1960년대 이후 도시발전 정체로 인해 해망동의 수산물시장을 축조했다. 현재 내항의 모습은 개항 이전부터 현재까지 군산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발달하고 쇠퇴를 거듭해 왔다.1979년 금강 하굿둑이 생긴 이래 토사가 쌓이면서 항구로서의 기능을 점점 잃어가면서 꼴깍꼴깍 수명이 다하고 예전의 군산항의 정취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외항으로 나가서 무역항과 여객선을 운행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비응항에는 어선이 드나들고, 신시도에 새로운 외항을 건설 중에 있다.내항은 이미 수탈의 현장으로 활용되었던 흔적들은 근대역사교육 장소로 활용되어 전국에 있는 수학 여행단들의 답사지가 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강을 살려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밀물과 썰물이 자연스럽게 콸콸거리며 소통이 되게 해야 한다. 소통되게 하기 위해서는 금강 하굿둑의 갑문을 열어서 해수유통을 하게 해야 한다. 백중사리와 장마 때만 빼고 평상시에는 꾸준하게 문을 열어놓고 민물과 바닷물의 유통이 콸콸거리게 하면 좋겠다. 갯벌로 조여진 목이 뻥 뚫어져서 뱀장어, 우어, 황복어 등의 전성기를 다시 맞이하게 하고, 강 하구로서 민물고기들이 산란을 하여 그것이 자라나 박시글거리며 찾아오는 곳이면 더욱 좋겠다. 또한 뱃길이 열려서 여객선이 드나들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금강하구에 있는 포구와 지금의 내항과 외항 모두 군산항으로서 그 역할을 잘해왔지만 항구적 기능과 어항적 기능이 죽어가고 있는 시점에서 군산항을 다시 살리는 수 있는 방안을 다양하게 모색해야 한다. 그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금강은 천혜의 관광자원이고 금강하구에 집중되어 있는 군산항구는 콘텐츠의 보고이기 때문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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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1.08 23:02

[성스러움, 불편 자초하기] 편한 기능에 갇히지 않고 '장애' 상태 자초할 때 성숙 시작

몇 마디 말을 나눠보지도 않았지만, 괜히 믿음이 가는 사람이 있다. 많은 말을 나누고도 뭔가 허전한 느낌만 남기는 사람이 있다. 여럿이 모여서 어떤 일을 결정할 때 마지막 매듭을 짓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꼭 있다. 강의를 듣고 나서 강의 내용을 물고 늘어져 자기 멋대로 다음 이야기를 구성해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강의 내용을 기억하는 데에만 집중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듣고 나서 죄다 흘려보내버리는 사람도 있다. 똑같은 내용의 얘기를 들어도 사람마다 반응은 모두 다르다. 같은 내용에 각자 다른 반응을 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같은 일에 각기 다른 깊이로 반응하는가?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근거, 즉 그 사람만의 바탕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일에 분개하면서 정작 자신도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들이 쓰레기 버리는 일을 탓하지 않고 묵묵히 봉지 하나를 들고 집을 나서는 사람도 있다. 기차를 탔을 때 전화가 오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통로로 나가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안하무인격으로 앉은 자리에서 전화 통화를 하는 사람도 있다. 다른 사람의 글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것으로 날을 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묵묵히 마음을 내려놓고 자신만의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 밖에서는 민주를 외치지만, 집에 오면 독재자로 변하는 사람도 있다. 책을 읽을 때 질문이 마구 샘솟듯이 일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책 내용을 수용하기만 하는 사람도 있다. 환경 보존을 외치면서 일회용 컵이나 접시들을 마구 쓰는 사람이 있는 있는가 하면 철저히 자제하는 사람도 있다. 주장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각각이 따로 있는 사람도 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달라지는가.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근거, 즉 그 사람만의 바탕이 다르기 때문이다. 내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교회가 있다. 일요일이면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끌고 온 차들 때문에 주변 도로의 교통 상황은 엉망이 된다. 도로 양쪽에 모두 불법주차를 하는 바람에 상당한 거리의 차도가 극심하게 좁혀져서 오가는 데에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교회에 나와 모두 이웃 사랑에 관한 설교를 듣고 결심하고 다짐하는 일을 하느라 이웃에 큰 폐를 끼친다. 이웃을 사랑하는 그 다짐과 이웃에 폐를 끼치는 일 사이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는가. 제대로 사는 일. 힘들고 불편하다. 쓰레기 함부로 버리는 일을 비판하기는 쉽고, 자신이 직접 그것들을 줍는 일은 힘들다. 이웃은 아랑곳하지 않고 편리를 위해 차를 끌고 오는 것은 쉽고, 이웃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오면 불편하다. 이웃 사랑을 말하기는 쉽다. 그것을 실천하려면 반드시 일정 분량의 불편과 노고를 감당해야 한다. 일회용 물건을 쓰기는 쉽고, 그것들을 안 쓰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컵을 가지고 다니는 등의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기능적인 일은 쉽다. 사람의 본바탕이 작동하는 일은 어렵고 불편하다. 대답은 기능적 활동이고 질문은 그 사람에게만 있는 내면의 호기심이 발동하는 일이라 인격적 활동에 속한다. 당연히 질문은 어렵고 대답은 쉽다. ‘따라 하기’는 쉽고 창의가 어려운 이치다. 우리는 쉬운 쪽으로 쉽게 기울게 되어 있어 질적인 상승이 더디다. 그래서 제대로 사는 일은 언제나 어렵기만 하다. 간단히 정리하면, 인간으로서 제대로 사는 일은 스스로 불편을 자초하는 일과 같기도 하다. 불편의 최고 단계인 ‘장애’의 지경으로까지 끌고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다양한 수행의 모든 과정은 사실 ‘불편’한 것들로 짜여 있다. ‘장애’를 내면화하여 그것과 일치되는 경험을 유도한다. 불편과 장애와 한 몸이 되는 단계에서 인간의 본바탕이 구출되곤 한다. 편하고 자극적인 기능에 갇히지 않고 ‘장애’의 상태를 자초하면서 성숙은 시작된다.아주 오래전 중국 노(魯)나라에 형벌을 받아 발 하나를 잘린 왕태(王?)라는 사람이 있었다. 덕망이 높아서 따르는 제자가 공자만큼이나 많을 정도였다. 공자의 제자 가운데 한 명인 상계(常季)가 공자에게 묻는다. “왕태는 외발이 장애자입니다. 그런데도 따르는 제자 수가 선생님만큼이나 많습니다. 그는 가르치는 것도 없고 토론도 하지 않는데, 빈 마음으로 찾아갔다가 무언가를 가득 얻고 돌아간다고들 합니다. 그는 과연 어떤 사람입니까?” 공자가 답한다. “그분은 성인이시다. 나도 찾아뵈려했지만 꾸물대다가 아직 뵙지 못했을 뿐이다. 나도 그분을 스승으로 삼으려 하는데, 나만 못한 사람들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느냐. 노나라 사람뿐이 아니라 온 천하 사람들을 다 데리고 가서 그를 따르려 한다.” 장애인인데도 모두 그를 따르려 한다면 도대체 그 사람은 어떤 마음가짐을 가진 것인지를 상계가 묻자 공자는 ‘근본’을 지키고 있다고 말해준다. 왕태는 자신의 지혜로 자신의 본마음을 터득한 것이다. 이에 상계가 또 묻는다. “자신의 지혜로 자신의 본마음을 터득했을 뿐인데 왜 모든 사람들이 그를 따르는지요?” 그러자 공자가 답한다. “사람은 흐르는 물을 거울삼지 않고 잔잔하게 가라앉은 물을 거울삼는다. 올바른 본심은 뭇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장자·덕충부』) 도가에서는 이런 본마음, 즉 존재의 근본 상태를 ‘덕’(德)이라고 표현한다. 덕이 있는 사람은 타인을 압도하는 힘을 갖는다. 타인들은 이 사람을 추종하고 싶어 한다. 중후함이 경박함을 흡수하는 이치다.기능적인 활동에 갇힌 사람은 편한 것을 추구하며 가벼운 잡담과 비교 욕망에 빠져서 자신의 본바탕을 놓치고 가볍게 흔들린다. 하이데거는 이런 상태를 “존재자에게서 존재가 빠져 달아나버렸다”고 말한다. 가벼운 기능과 비교와 잡담에 빠져 인간으로서 가져야하는 성스러운 어떤 본바탕을 상실하였다고 비판한 것이다. ‘장애’의 상태를 자초하여 불편을 감수하면서 ‘덕’이라고 불리는 본바탕을 지키는 것이 자신을 키우는 일이다. 이 ‘덕’의 유지가 바로 인간을 기능적 활동에서 벗어나 본래적인 인간으로 서게 만든다. 기차 안에서도 전화가 오면 전화를 받는 기능에 빠지지 않고 인간으로서 품격을 유지하기 위해 통로로 걸어 나가는 불편을 감수한다. 교회에 갈 때 이웃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차를 몰고 가지 않는 불편을 스스로 받아들인다. 아는 것에 매몰되지 않고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고 불편한 몸부림을 친다. 이렇게 하면 자신의 질량이 커지고 또 커져서 다른 가벼운 것들을 제압하는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매력이고, 존경을 유발하는 요소다. 장애인 왕태가 존경을 받고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린 이유다.또 아주 오래 전 중국 고대의 위(衛)나라에 애태타(哀??)라는 추남이 살고 있었다. 그와 함께 지낸 남자들은 그 곁에서 떠나지 않으려 하고, 그를 본 여자들은 다른 이의 아내가 되느니 차라리 그의 첩이 되겠다고 한다. 그는 자기 의견을 내 세우지도 않고 늘 다른 이에게 동조할 뿐이었다. 군주의 자리에 있어서 죽음의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해준 것도 아니고, 쌓아둔 재산으로 남의 배를 채워준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 흉한 몰골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다. 지식도 사방 먼 곳까지 미칠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도 많은 남녀가 그를 따르려 모여드는 까닭은 무엇인가? 장자는 이것을 온전한 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드러나게 하지 않는[德不形] 깊은 내공 때문이라고 한다.(『장자·덕충부』) ‘덕’을 갖추고 있음에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비유하여 말하면 물이 잔잔하게 멈추어 수평을 이룬 상태다. 안에 깊은 고요를 간직하고 출렁이지 않는다. 덕이 출렁출렁하게 드러나지 않을 정도가 되면 사람들은 거기에 이끌려 떨어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외적으로 출렁이는 모습은 기능에 갇혀 경박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말한다. 쓰레기를 버린다는 비판을 하면서도 자신 역시 버리는 이중적 가벼움 같은 것이다. 아는 것을 지키기만 하지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는 지적 부지런함을 발휘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눈앞의 편리함을 위해 공공의 책임감을 포기하거나 불편을 감수하지 않으려는 경박함이다. 이런 경박함을 버리고 불편함을 감당하며 인간으로서 품격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자가 덕이 있는 자다. 여기서 매력과 존경이 생길 뿐 아니라 비범하고 특별하며 위대한 일들도 덩달아 일어난다.하이데거의 “존재자에게서 존재가 빠져 달아나버렸다”는 문장에서 ‘존재’는 바로 존재자의 고향이자 ‘덕’이 활동하는 곳이다. 가볍고 번잡한 기능들을 지배하는 힘을 가진 비밀스런 곳이자 일상 속의 다양한 이중성 속에서 인간으로서 더 나은 선택을 하는 힘이 드러나는 곳이다. 창의적이고 비범하며 특별한 일들이 시작되는 곳이다. 그래서 ‘존재’, 즉 ‘덕’의 활동은 성스러운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사는 사람을 우리는 인간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자, 즉 ‘성인’(聖人)이라고 부른다. 왕태나 애태타는 존재자에게서 존재가 빠져 달아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잘 지킨 사람들이다. ‘불편’, 심지어는 ‘장애’적 상황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감수한 사람들이다. 경박하지 않고 성스러운 삶은 스스로 ‘불편’과 ‘장애’를 자초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다. 시민으로 사는 일도 마찬가지다. 불편을 자초하며 경박함을 벗어나면서라야 비로소 가능하다. 그것을 우리는 시민의식이라 하지만, 사실은 인간으로서의 성스러움을 지키려는 태도다. 성스러운 삶은 불편을 감수하거나 자초한다.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건명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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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1.07 23:02

취임 100일 맞은 라승용 농촌진흥청장 "농생명산업 새 플랫폼 구축, 일자리 창출·지역발전 모색"

라승용 농촌진흥청장이 부임한지 100여 일이 지났다. 지난해 말 차장으로 퇴임한 그는 문재인 정부에서 청장으로 다시 조직에 돌아왔다. 41년 이상의 세월을 농촌진흥청에 몸담아 온 라 청장은 농촌진흥청 공공기관 지방 이전 초대 추진단장을 맡아 전북혁신도시의 농업분야 R&D 기관의 집적을 이뤄냈다. 그는 청장으로 오면서 농촌 진흥 기관 집적을 만들어 낸 자신이 그 성과를 나타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특히 지난 1일 농촌진흥청 청장실에서 만난 그는 인터뷰 내내 확신과 결의에 찬 모습을 보였다.-농촌진흥청장으로 조직에 돌아오신지, 100일정도 지난 것 같습니다. 소감이 어떠신지.작년 연말 농촌진흥청 차장을 퇴임한 후 반년 간 처음으로 우리 조직을 외부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 저에게는 큰 배움의 시간이었습니다. 학계와 산업체, 농민 등을 만나며 농업과 농촌을 다시 되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이었죠.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 농촌진흥청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고 변화와 혁신이 필요한 시점임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다시 농촌진흥청에 청장으로 돌아올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밖에서 농업발전을 위해 힘쓸 방법을 찾고 있었죠. 특히 대학의 석좌교수로 활동하면서 대학생들과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20대가 생각하는 농업과 농촌에 대해 격을 내려놓고 소통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우리 청년들은 농업을 희망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농대생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저는 큰 충격을 받았고, 내가 무엇을 할지에 대해 다시 고민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처음으로 공직을 떠나 농촌진흥청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혹독한지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농산업을 메가 트렌드로 만들어 방향성을 제시하자는 것입니다. 취임사에서 짧은 시간 이야기 했지만, 저는 혁신도시 시즌 2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우리의 강점을 최대한 살려 연구실에만 갇혀있던 농진청을 실천하고,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조직으로 만들기 위해 제 인생을 걸어보고자 합니다.-최근 국감에서 농촌진흥청의 비정규직 상황이 일자리 창출정책과 역행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습니다. 관련 대책을 세우셨는지.사실 비정규직이 많아진 것은 직무전환 예산 문제였습니다. 현재는 비정규직 중 1701명에 대한 예산을 확보해서 심사절차를 거쳐 이들을 전부 정규직으로 전환할 생각입니다. 국정감사에서 의원님들과 국민들이 지적한 점을 받아들여 근로자 입장에서 계속되는 업무라고 판단될 때 예산이 허락한다면 이번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농진청이 정규직 전환의 틀을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국감이 끝난 직후 모든 비정규직 직원들의 직무분석에 들어갔고, 마무리 작업 중에 있습니다.-GM 작물 추진단 해체와 관련해서 내외부적으로 많은 공격을 받으셨습니다. 농진청이 딜레마에 빠진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는데 이에 대한 생각을 말씀해 주시죠.저는 단 한번도 GMO연구에 대한 대원칙을 깨뜨린 적이 없습니다. 첫째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는 한 상용화는 없을 것이고, 둘째 연구내용을 모두 공개하지 않으며, 셋째 기술확보를 위해 연구는 지속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시민단체와 협약을 맺었다는 이유로 우리 농진청이 GMO 연구를 전면 포기한 것처럼 비춰지는 것은 유감입니다. 시민단체에 울며겨자먹기로 협상을 한 것 아니냐는 오해를 숱하게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국민먹거리를 논의하는 데 시민사회와의 소통은 중요한 것 아닙니까. 국민적인 합의를 거쳐 작물개발 사업단을 농생명 연구단으로 이름을 바꿔, 연구는 지속한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제가 청장으로 와서 너무 안타까웠던 것은 GMO에 대한 오해로 농진청의 위상이 흔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연구원들은 잦은 시위에 지쳐가고 있었죠. 저는 연구를 차질없이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하다고 보고 대화를 시작했고, 시민단체 측도 오해와 증오를 내려놓고 우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소통과 협치는 이어갈 것이지만, 미래기술 확보와 해외에서 들어오는 GMO를 감시하기 위해서라도 농진청의 연구는 계속돼야 한다는 게 제 철학입니다. 기술혁신이 없다면, 우리 농업은 물론 국민의 식탁도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시 한 번 GMO와 관련된 대국민 소통을 이어나가 안전한 연구를 할 것을 약속드리며, 연구기관 수장으로서의 소신도 관철해 나갈 생각입니다.-공식석상에서 혁신도시 시즌2에 대한 강조가 부쩍 잦아지셨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농촌진흥청을 중심으로 설명 드리자면, 농생명 산업의 새로운 플랫폼 구축입니다. 이를 통해 농산업과 일자리 창출, 지역발전을 함께 모색해보자는 것이지요. 혁신도시 시즌 2의 실현은 전북혁신도시 공공기관의 힘만으로도, 전북도의 힘만으로도 부족합니다. 도와 공공기관의 협치는 물론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필요하죠. 농촌진흥청은 이와 관련해 크게 세 가지의 계획을 세웠습니다. 첫째 농업기술실용화재단과 종자업체 간 협력체계를 구축으로 한 종자산업 육성, 둘째 농생명 산업 창업 실용화에 연계되는 클러스터 구성, 셋째 전북혁신도시 이전기관 간 융복합 사업 도출입니다.-협치를 위해 모이는 혁신도시 상생협의회가 제 자리 걸음을 넘어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이제 혁신도시 모든 기관이 이전한 지금은 전북혁신도시 상생협의회가 지자체와 혁신도시 공공기관 간 건의사항을 이야기하는 자리만 되어선 안 된다고 봅니다. 그러나 아직도 정주여건 개선, 지역인재 등용 등 이 두 가지 사항만 가지고 서로의 입장만 이야기하는 것으로 상생협이 이뤄지니 진전이 없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철저하게 각 기관 간 역할을 제대로 분담해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야 합니다. 혁신도시의 성장을 남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직접 혁신도시를 살리겠다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하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각 기관이 가진 인프라와 장점을 극대화해 이웃기관과 협력하고, 도와 협력하며, 나아가서 정부의 지원을 받아야 혁신도시가 변화할 수 있습니다. 이대로는 절대 나아지는 것이 없습니다. 혁신도시 상생협은 이제 철저하게 실용적인 논의를 하는 장으로 탈바꿈해야 합니다.-앞으로의 계획과 포부에 대해서 말씀 부탁드립니다.농업의 전국적인 붐 조성이 농촌진흥청과 전북을 중심으로 시작할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할 것입니다. 조직은 생각과 도전이 넘치는 곳으로 변화시킬 생각입니다. 또한 전북은 저에게 단순한 고향이 아닙니다. 지역균형발전 혁신의 틀을 제공해줄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지요.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의 조성과 도민 분들의 전폭적인 지원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못하는 것이 있다면 라승용이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는 각오로 일하겠습니다.● 라승용 농진청장은뚝심소통실용주의 9급서 청장까지 올라9급 공무원으로 공직에 발을 들인 뒤 41여 년 만에 청장까지 오른 라승용 농촌진흥청장은 현장 중심의 야전 스타일 지도자다. 좌우명은 못할 일도 없고 안 될 일도 없다는 각오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뚝심을 근성으로 밀고 나간다. 소통에 있어서도 적극적이다. 반GMO 시민단체와의 협약도 대화를 중시하는 그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냈다는 평가다.일에 있어서는 철저한 실용주의자로 화려한 슬로건이나 캠페인성 사업보다 실질적인 성과를 도출하는 것을 선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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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윤정
  • 2017.11.06 23:02

[철의 궤도: 전라선 철길 답사기 ⑪ 남원역] 철길 옆 꽃길, 시간도 머물다 가다

교룡산 자락을 돌아, 철길은 터널에 누운 채 남쪽으로 뻗었다. 전주에서부터 나란히 동행하던 춘향로는 이즈음에서 전라선 철길과 영영 이별하고, 대신 국도 제17호선의 바통을 넘겨받은 서부로가 철길과 함께 달린다. 삼거리를 지나자, 맞배지붕을 얹은 커다란 한옥 양식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광장에는 그네 뛰는 춘향과 부채를 펼쳐 든 몽룡이 보였다. 전라선 전북 구간의 마지막 여객 정차역, 남원역이다. △활기 넘치는 그 플랫폼 10월 20일, 남원역. 역사 앞에 택시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역사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과 역사에서 나오는 사람이 교차하는 풍경 뒤로, 소풍을 온 것 같은 어린이들이 도시락을 먹는 모습이 보였다. 플랫폼으로 나가려면 선로 위를 통과하는 다리를 이용해야 한다. 전라선의 모든 여객열차가 서는 역답다. 전주익산용산행 플랫폼에서, 김혜정 씨(55)는 인천공항행 KTX를 기다리고 있었다. 해외 일정이 있어 공항에 가는 길이라는 그의 좌우에는 짐이 한가득이었다. 부피도 부피였지만 무게도 그냥 딱 봐도 무거워 보였다. 직장 동료 손모 씨(41)가 그를 도우러 나왔지만, 정차시간 내에 짐을 열차에 실을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열차는 편리하니까 자주 이용하죠. 자주 없어서 문제지. 그런데 이 짐을 정차시간 내에 올릴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좀 도와주시겠어요? 하하 대학교 입학 면접시험을 앞두고 있던 채수인 씨(19)는 군산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날이 마침 졸업 앨범 사진을 촬영하는 날이었단다. 일찍 끝났으니 일찍 돌아가서 면접 준비를 할 요량이라고 했다. 열차요? 자주 이용하는 편이에요. 급하면 KTX를 타기도 하고, 그렇지 않으면 무궁화호를 타기도 하고요. 학교가 바로 이 근처라서 역으로 걸어서도 오기도 해요. 한쪽에서는 분홍색 옷을 맞춰 입은 어린이들이 나란히 걷고 있었다. 줄잡아 열댓 명 정도인 이 행렬은 진안 안천초등학교 병설유치원에서 나들이 나온 어린이들이었다. 남원에 어떤 볼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기차를 타보기 위해 전주역에서 KTX를 타고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기차를 타 본 소감이 어떠냐고 묻자, 돌아가며 한마디씩 한다. 빨라요! 신기해요! 난 타봤는데! 안 신기하거든? △침체를 딛고 다시 흥하다 남원역은 1931년 전라선(당시 이름 경전북부선) 전주~남원 구간이 개통될 때 동충동에서 영업을 시작했다. 옛 남원성 북문이 있던 자리인데, 일제가 성을 헐고 그 자리에 철길을 깔고 역을 지었다. 남원성은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에 맞서 치열하게 항전했던 곳이다. 그 혈전 끝에 전사한 이가 관군과 남원 주민, 명나라 원군 등을 합해 만여 명에 이르렀는데, 이들을 모신 곳이 만인의총이다. 지금의 남원역은 2004년 8월, 전라선 임실~금지 구간이 복선으로 다시 깔리면서 새로 지어졌다. 옛 남원역으로부터는 직선거리로 2km 남짓 떨어져 있다. 지도를 놓고 보면 그다지 멀어 보이지는 않는데, 막상 직접 찾아가 보면 새 남원역은 도심과 좀 격리돼 있다는 느낌이 든다. 아무래도 고개를 하나 넘어야 한다는 지리적인 요인도 있겠고, 새 남원역 주변 택지개발이 지지부진하면서 신도시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탓도 있겠다. 역 광장에서 승객을 기다리고 있던 택시기사 김모 씨(54)는 아무래도 옛날 역이 낫다. 거긴 상권이 형성돼 있으니까. 여기(새 남원역)는 식사를 하기도 불편하다고 말했다. 사실 남원역이 외곽으로 옮겨지면서 접근성이 떨어졌다는 이야기는 하루 이틀 얘기는 아니다. 철도통계연보 기록을 보면, 이전 전인 2003년 한 해 68만9041명에 달하던 남원역 이용객 수가 이전 다음 해인 2005년 55만5978명으로 13만여 명이나 줄어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또 사정이 달라졌다. 열차 이용의 편리함이 역을 오가는 불편함보다 크면, 이용객은 자연히 늘기 마련이다. 그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KTX 운행이다. 2011년에 전라선 KTX가 개통되고 2012년에 KTX 필수정차역이 되면서 이용객 수가 크게 늘어, 2015년에는 71만 명을 넘기기도 했다. 관광도시 남원답게, 수도권에서 단체로 오는 여행객도 많다고 한다. 정병훈 남원역 부역장(45)은 봄가을이면 여행상품을 기획해서 많이들 내려오는데, 특히 봄에 많이 오는 편이라고 말했다. 한편 남원역에서는 여행객들을 위해 자전거를 빌려주기도 한다. 홍보가 많이 되지 않아 이용객은 아직 적은 편이라고 하는데, 동선에 따라서는 이 자전거도 매력적일 수 있는 선택지다. △광한루, 사랑과 전쟁 남원역에서 나와, 남쪽으로 빠져 남문로를 타고 도심으로 향했다. 길가엔 코스모스가 피어 있었고, 저기 원경으로는 맑고 파란 가을 하늘을 머리에 이고 있는 지리산이 보였다. 왼편으로는 곧 만복사지가 나온다. 김시습의 소설 <만복사저포기>에 나오는 그 만복사다. 고려 문종 때 처음 세워졌다가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됐다. 지금은 석인상을 비롯한 몇 가지 석조물만 남아있다. 왕정교를 건넌 뒤 남쪽으로 길을 틀었다. 남원역에서 길 따라 약 3km, 요천 북쪽에 광한루원이 자리해 있다. 조선 초 황희 정승이 남원으로 유배를 와 광통루라는 이름으로 처음 지었다고 한다. 요천에서 끌어온 물이 광한루원을 흐른다. 문자 그대로, 흐른다. 물은 이제 곧 용이 되든 뭐가 되든 될 것 같은 거대한 잉어들을 품고, 호남제일루 광한루를 제 얼굴에 비춘다. 연못을 건너는 다리 이름이 오작교다. 견우와 직녀 사이를 이어주었다던 그 오작교에서 딴 이름이 맞다. 그렇다면 아래 흐르는 물은 은하수가 되겠다. 그러니, 광한루는 작은 우주다. 전설 속 광한전과 은하수, 오작교를 바라보는 자리에는 춘향제의 무대로도 쓰이는 완월정이 서 있다. 사실 지어진 지는 얼마 안 되지만(1971년 신축),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춘향과 몽룡이 나오는 사랑 이야기의 배경으로 알려진 자리지만, 반대로 전쟁의 자리이기도 했다. 1597년 남원 전체를 불태우다시피 했던 정유재란의 전화가 이곳에도 미쳐, 광한루 또한 소실되고 말았다. 지금의 누각은 나중에 인조 때 다시 지은 것이란다. 또 동학농민혁명 때, 남원성을 빼앗기고 쫓겨난 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에게 참혹하게 죽임을 당했던 성밖시장 저잣거리 자리가 지금의 광한루원 주차장 인근이라고 한다. 광한루원에서 시나브로 걸을 작정을 하면, 요천과 천변길, 춘향테마파크며 함파우 소리체험관이며 남원 항공우주천문대며 하는 남원의 내로라하는 관광 명소들을 모두 둘러볼 수 있다. 물론 지리산도 식후경. 추어탕 전문점이 광한루원을 둘러싸다시피 할 정도로 성업 중인데, 먼저 한 그릇 비우고 길을 나서도 괜찮겠다. △옛 남원역과 겹겹이 쌓인 시간들 까딱- 까딱- 까딱. 나무로 된 흔들의자가 시계추처럼 흔들리고, 코스모스와 백일홍이 고개를 끄덕인다. 배는 하얗고 등은 까만, 그래서 무슨 예복이라도 걸친 듯한 고양이 한 마리가 레일을 따라 걷고 있었다. 남원 도심 한복판, 동충동 옛 남원역은 조용했다. 쓸쓸하거나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말 그대로 조용했다. 한때 이곳을 시끄럽게 했던 것들이 떠나버리고, 이곳에는 열차 대신 사람과 시간이 찾아와 도심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주민 조효순 씨(79)도 그 풍경 속에 있었다. 여그 사는데, 가까우니까 자주 와요. 공기도 좋고, 사람도 보고. 쪼께 쉬었다가 가죠. 지금이야 도심 속 조용한 별세계가 됐지만, 기억과 기록을 더듬으면 전북 동남권 최대의 역이자 전라선 철도의 주요 거점으로 기능했던 과거도 있다. 이를테면 1970~80년대 춘향제가 열릴 때면 전국에서 인파가 몰려오곤 했는데, 남원역 플랫폼도 그야말로 콩나물시루 꼴이었다. 당시 연간 백만을 우습게 넘던 이용객 수 규모에 걸맞지 않게 플랫폼이라고 해봐야 섬식 승강장 하나뿐이었으니, 미어터지는 건 다반사였다. 얘기헐 것이 뭣이 있냐던 조 씨는, 그땐 역 마당까지 바글바글했다고 회상했다. 한편 이곳에서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1971년 10월 13일, 남원국민학교 6학년 학생 158명을 태우고, 제192호 완행열차가 서울 방향으로 출발했다. 출발 직후 언덕길을 올라가던 열차는 중간에 멈췄다. 출력 1800마력의 신형 디젤기관차였지만, 급유펌프가 고장나는 바람에 힘도 못 쓰고 주저앉은 것이다. 그러다 브레이크의 공기가 다 빠지면서, 열차는 올라온 길 그대로 다시 굴러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이때 남원역에 유조열차가 들어와 있었다. 두 열차는 그대로 부딪혔고, 수학여행길의 남원국민학교 6학년 학생 19명을 포함해 20명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나고 말았다. 정비 불량에다 미숙한 사고 대처가 겹치며 벌어진 참사였다. 이런저런 기억들을 모두 침목 밑에 고이 접어놓은 채, 동충동 남원역은 2004년에 역으로서의 기능을 새 남원역에 내주고 안식에 접어들었다. 그 뒤 그대로 방치되면서 도심 속의 흉물이 될 뻔했던 이 자리가 꽃밭으로 거듭난 것은 2008년. 바로 옆 묘포장 자리에 2007년 조성된 향기원과 묶어 꽃 단지로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였다. 지금은 옛 남원역사 4만2000여㎡, 향기원 1만7000여㎡가 마치 처음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그렇게 자연스럽게 연결돼 있다. 꽃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어느새 철길에, 플랫폼에 발이 닿게 된다. 어쩐지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기분도 든다. 이 풍경도 조만간 다른 모습으로 바뀔지도 모르겠다. 남원시는 2019년 이곳에 중앙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다. 아직 옛 남원역사를 보존할지 허물지는 결정되지 않았다.

  • 기획
  • 권혁일
  • 2017.11.04 23:02

[길 따라 맛 따라 ⑤ 완주 구이면] '어머니 산'에 안긴 마을, 가는 곳마다 '어머니 손맛'

완주군 구이면은 산과 물이 잘 어우러진 곳이다. 어머니의 산으로 일컬어지는 모악산과 맑은 물을 가득 담은 구이저수지를 품고 있다. 지리적으로 전주의 남쪽에 바로 인접해 있어 전원생활과 도시의 편리성을 동시에 누릴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전주와 순창으로 연결되는 4차선 도로와, 상관으로 연결되는 동서 우회도로가 개통하면서 교통 또한 잘 발달했다. 90년대 후반까지 다른 면 단위 도시와 별 차이가 없었던 구이면을 상전벽해로 만든 중심에는 모악산이 있다. 모악산을 찾는 등산객을 겨냥한 관광단지가 조성되고, 전북도립미술관이 이곳에 터를 잡으면서 매년 탐방객 수를 더했다. 근래 술테마박물관이 문을 열었고, 모악산 바로 밑에 150여세대의 모악호수마을이 조성됐다. 여기에 호수로 눈을 돌려 2015년부터 구이저수지 호반 8.8㎞를 도보로 걸을 수 있는 둘레길 조성사업을 벌이고 있다. 모악산과 쌍벽을 이루는 경각산은 패러글라이딩 명소로 알려진 곳이다.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문화시설, 레포츠 시설이 있는 곳에 음식이 빠질 수 없다. 등산객이 가장 많이 찾는 모악산 등산로 입구 앞에 조성된 관광단지는 음식점 천국이다. 보리밥집에서부터 청국장, 고깃집, 로컬푸드 채식 레스토랑까지 골고루 갖춰져 골라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번잡한 관광단지를 벗어나고 싶다면 옛 등산로 입구 쪽으로 눈을 돌릴 수 있다. 이곳에는 등산로집 모악산 돌담집 산촌 옛날국수 상호를 단 음식점이 자리한다. 등산로집의 주 메뉴는 김치찌개. 묵은 김치와 돼지고기를 굵직굵직하게 썰어 넣어 만든 김치찌개의 국물이 깔끔하다. 청국장, 묵은지 닭볶음탕, 청국장, 보리비빔밥, 도토리묵도 맛 볼 수 있다. 산촌은 보리비빔밥으로, 모악산 돌담집(옛 소라네집)은 닭볶음탕으로 특화돼 있다. 옛날국수집은 분위기부터 색다르다. 음식점 내 갖은 골동품(?)과 손님들이 남긴 메모쪽지들이 어지러울 지경이다. 정작 손님들이 찾아봐야 할 메뉴판은 천장에 붙어 있다. 심심하지 않을 정도로 여기저기 눈을 돌리는 사이 금세 주문 음식이 나온다. 국수 한 그릇에 3000원. 아주 착한 가격이다. 면발이 굵직하고, 양도 많다. 국수로 좀 허전하면 도토리묵으로 달랠 수 있다. △홍합 짬뽕부터 소고기까지 골라 먹는 재미 모악산 보다 호수 쪽이 가까운 구이면 소재지는 한 때 모악산 관광단지에 밀리면서 상권이 많이 쇠락했으나 호수마을 조성과 함께 최근 다시 활기를 찾았다. 면 소재지 음식은 지역에서 나는 재료로 주인이 직접 요리를 하는 경우가 많아 더 믿음이 간다. 면 소재지를 중심으로 30여개에 이르는 음식점들이 특색 있는 다양한 메뉴를 내놓아 미식가들의 입을 즐겁게 만든다. 누룽지 백숙누룽지 칼국수보리굴비정식연잎밥메밀전을 메뉴로 삼고 있는 목향밥상은 건강식을 지향한다. 구이우체국 바로 옆에 자리 잡은 다슬기수제비 집은 다슬기수제비 하나로 고객을 확보하고 있다. 수제비 보통곱빼기특으로 나눠 5000원~7000원을 받고 있다. 촌민은 팥죽과 콩국수 맛집으로 통한다. 속초코다리찜 전문점에서 코다리찜과 동태탕, 고등어조림, 도토리묵밥을, 소담집에서 낙지 연포탕을 먹을 수 있다. 백반 집으로는 만고강산 구이회관이 있다. 구이는 유명한 소고기 집도 많다. 대표적인 곳이 학래촌. 모악산 관광단지에 있는 소야와 쌍벽을 이룬다. 정육점과 함께 하는 가정집 같은 분위기로 차려진 이곳은 1주일에 3마리의 소를 소비할 정도로 손님이 몰린다. 소고기의 맛은 좋은 소를 고르는 능력에 달렸다. 정육점 경력 25년의 주인 이석계씨가 구이와 임실에서 직접 소를 골라 도축시킨다. 안창살토시살 등 특수부위 9만5000원(600g 기준), 갈비살낙엽살 6만5000원, 육사시미 5만원을 받고 있다. 구이 음식점의 터줏대감은 구이반점. 주인 진동순씨가 84년부터 이곳에서 30년 넘게 운영하고 있는 중식당이다. 맛집으로 통할 수 있는 비결은 재료에 있다. 양파대파배추고추 등 직접 재배한 재료를 사용하고, 나머지 재료들은 전주 전동시장에서 구입한다. 홍합짬뽕굴짬뽕이 별미며, 탕수육도 고기 위주로 튼실하다. 얼큰한 맛이 싫다면 잡채밥이 제격이다. 돼지감자호박고구마 등 주인이 재배한 몇몇 농산물을 덤으로 구입할 수도 있다. △별미 메기구이 맛보려면 범상치 않은 맛집으로 엄지산장(주인 유정선)이 있다. 오래된 느티나무 아래 옛 구이면사무소 바로 옆에 자리 잡은 이곳은 메기구이 메뉴로 특화됐다. 메기구이는 포를 떠서 살을 발라 굽는 요리다. 메기에 가시가 많고, 살이 연약해서 굽는 과정이 녹록치 않다. 퍽퍽 튀거나 조금 방심하면 탈 수도 있다. 살을 발라 굽는 노하우가 필요하고, 익을 때까지 꼬박 지켜봐야 하기에 많은 손이 가는 요리다. 장어와 같은 양념을 발라 장어 비슷한 느낌을 주면서도 메기만의 부드러운 식감을 맛볼 수 있다. 느끼하지 않으면서 담백한 맛이다. 주인 유씨가 메기구이 메뉴를 개발해 지금에 이르기까지 곡절도 많았다고 한다. 메기구이 메뉴는 어머니와 함께 남원 죽항동에서 운영하던 옴팡집에 뿌리를 두고 있다. 4차선 도로가 뚫려 집이 헐리기 전까지 이 집은 남원에서 잘 알려진 맛집이었다. 진안 용담광주서울 등지에서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는 데 실패한 후 10년 전 구이에 정착했다. 메기구이가 잘 알려지지 않은 낯선 메뉴인 까닭에 처음에는 백반과 병행하다가 점차 알려지면서 백반을 버렸다. 살을 발라낸 후 남은 뼈와 내장 등으로 메기탕이 제공된다. 민들레원추리양파 장아찌, 매실 마늘종, 버섯새송이 깨탕 등 밑반찬도 별미다. 3~4인 기준 4만5000원(메기탕 포함).

  • 기획
  • 김원용
  • 2017.11.03 23:02

[부처 따라 다른 종사자 처우]"다문화센터 관리 부처, 여가부에서 보건복지부로 옮겨주세요"

다문화가족지원센터 관리 부처를 여성가족부에서 보건복지부로 옮겨주세요.다문화가족지원센터 종사자들의 외침이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를 관리하고 지원하는 중앙부처는 여성가족부이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 종사자들이 여성가족부로부터 벗어나 보건복지부 관리와 지원을 받고 싶다고 주장하고 있다.△관리부처 따라 처우 달라사회복지시설인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근무하고 있는 종사자들은 사회복지사로서 다문화가족이 지역사회에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다문화가족을 지원하는 종사자들의 처우는 일반 사회복지시설에서 근무하는 종사자보다 열악한 조건 속에서 근무하고 있지만, 처우가 개선될 조짐은 보이지 않아왔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 종사자들에 대한 처우가 뒷전으로 밀려나는 것을 해마다 경험한 종사자들은 여성가족부의 종사자 처우 개선에 대한 의지를 믿을 수 없다며 굿바이 여성가족부를 외치고 있다.사회복지종사자 중 보건복지부 산하 복지시설과 여성가족부 산하 복지시설의 인건비 등 종사자에 대한 처우는 다르게 나타난다.보건복지부의 2017년 기준 사회복지시설 종사자 인건비 가이드라인에 의하면 보건복지부 산하 복지기관과 여성가족부의 다문화가족지원센터와의 인건비 차이는 호봉수에 따라 상당한 차이를 나타나고 있다. 보건복지부 산하 복지시설 인건비와 여성가족부 산하의 다문화가족지원센터 종사자 인건비는 최고 19% 이상 차이가 있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종사자 인건비는 일반 사회복지시설 종사자 기본급 권고기준의 81% 수준이다.호봉수와 직급 등과 관련하여 동일한 지점도 있지만, 그것은 극히 일부의 직급과 일부 호봉에만 해당되는 것으로 나타난다.△시간외 근무수당 없어동일한 사회복지시설이고 동일한 사회복지사인데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거죠?다문화가족지원센터 김동준 팀장은 사회복지사 임금체계에 문제가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다문화가족지원센터 종사자들은 동일근로에 따른 동일한 임금체계를 주장하고 있다.중앙부처에 따라 임금체계가 다른 것으로 인해 사회복지 대상자들에 대한 서비스를 수행함에 있어서 존중받지 못하고 차별당하는 느낌이라고 종사자들은 말하고 있다.보건복지부의 2017 사회복지시설 종사자 인건비 가이드라인에 의하면 보건복지부 산하의 사회복지시설 종사자에게 명절휴가비 60%씩 연 2회 지급을 명시하고 있으며, 시간외 근무수당을 지급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또 부양가족의 수에 따라 2만원에서 10만원까지 가족수당을 지급하도록 하고 있다.반면 여성가족부 산하의 다문화가족지원센터는 사회복지사업법에 규정된 동일한 사회복지시설 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수당을 지급받지 못하고 있다. 명절휴가비, 시간외 근무수당, 가족수당 등의 예산확보는 물론 이와 관련한 규정이 명확하게 마련되어 있지 않다. 시간외 근무 등은 근로기준법 위반 논란이 일기도 한다.△담당 부처 종사자 처우 개선 나서야지난달 한국다문화가족지원센터협회는 여성가족부 실장 등 관계자와의 간담회를 통해 다문화가족지원 종사자에 대한 처우개선 문제를 논의했다. 한국다문화가족지원센터 관계자는 여성가족부가 이전 정부 때와는 다르게 대화를 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세와 의지가 사뭇 다르다며 향후 다문화가족지원 종사자들에 대한 처우가 잘 해결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나타냈다.하지만 이전 정부에서 여성가족부가 종사자 처우개선에 소극적으로 대처해 왔고, 예산부처의 종사자 처우에 대한 안일한 생각이 그 동안 존재해 왔던 만큼, 전적으로 신뢰할 수만은 어렵다며 의구심도 품고 있다.보건복지부의 2017년 예산은 57조6628억원이다. 반면 여성가족부의 예산은 7122억원에 불과하다. 1조원도 되지 않는 예산규모를 가지고 있다.보건복지부는 예산중 보건 관련한 예산을 제외하고도 사회복지분야의 예산은 47조7464억원에 이른다.지난 8월에 발표한 2018년 정부 예산안을 보면 보건복지부의 예산은 64조2416억원으로 2017년 대비 11.4% 증액됐다.여성가족부도 2018년 예산이 7685억원으로 2017년 대비 7.9% 증가했지만, 보건복지부와는 비교조차 불가할 정도로 소규모다.이러하다보니 여성가족부 산하 사회복지 시설은 매년 물가상승에 따른 사업비와 운영비 지원, 종사자 처우 등에 관하여 다른 부처에 비해 열악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진다. 여성가족부만이 아니라 예산 부처가 종사자 처우개선에 대한 적극적 의지를 보여야 할 때이다.여성가족부의 예산규모와 위상은 현장에서 다문화가족을 지원하고 있는 종사자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다.여성가족부 산하의 지원을 받고 있는 다문화가족지원센터 종사자들은 여성가족부의 작은 예산 규모 속에서 지금까지 처우개선에 있어서 암묵적인 희생을 감당해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종사자들의 처우는 지금껏 개선되지 않았다며 이제는 대통령이 나서서 이에 대한 개선 조치를 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다문화가족지원센터 종사자들도 인간다운 삶을 누릴 권리가 있는 만큼, 정부의 적극적인 처우개선 의지와 종사자 처우개선을 위한 예산확보 등 다양한 대책과 정책이 요구된다.<이지훈 전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장>■ 역할에 비해 처우 낮은 사회복지사- 사람다운 삶을 살도록 돕는 사람들 정작 자신의 삶은 열악한 경우 많아노무현 대통령은 사람 사는 세상을 강조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국민의 나라, 사람중심 사회를 구축하는 것을 정부의 기본 철학으로 삼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인 전주시도 사람의 도시, 품격 있는 도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는데, 그만큼 사람의 중요성이 우리 사회 속에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고 있다.사회복지종사자들은 사람을 살리고 회복시키고 사람이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다양한 서비스를 지원하고 있다. 반면 사회복지사 스스로의 처우는 열악한 경우가 많다. 따라서 전주시를 비롯해 각 시군에서도 다문화가족지원 종사자를 위한 처우개선을 위해 다양한 지원을 하고 있다. 전주시는 사회복지종사자들에 대해 자기개발과 여가활동지원을 위해 사회복지사카드를 발급하고 있다. 전주시를 비롯한 자치단체의 사회복지종사자들에 대한 처우개선을 위한 지원정책은 사람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좋은 정책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여성가족부 소관의 시설인 다문화가족지원센터 종사자의 처우는 다소 미흡한 부분이 발견된다. 따라서 전라북도와 각 시군 지방자치단체의 면밀한 관심 속에서 다문화가족에 대한 안정적 서비스가 이루질 수 있도록 종사자들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기획
  • 기고
  • 2017.11.02 23:02

[문화 & 공감] 완주숙녀회·여성자립생활기술캠프 - 전등·창문틀 교체 내 손으로 척척…'난 남자없이 잘 살아'

요즘, 많은 사람들이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의 이주를 시도한다. 지난해 통계청 발표결과 도시에서 농촌으로 이주한 귀농·귀촌인이 50만명에 육박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귀농·귀촌은 가족단위의 이주가 많았다. 은퇴시기를 맞이한 50~60대의 장년층이 제2의 삶을 시작하기 위해 선택하거나, 30~40대 중년층이 아이들의 교육이나 건강한 먹거리에 관심을 갖고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저성장 시대에 제일 타격을 많이 받은 세대부터 차근히 대안적 삶을 위해 이주를 택하는 듯 보인다. 그리고 지금, 그 타격의 마지막 세대인 청년들이 점차 농촌으로의 이주를 시작하고 있다.△나 홀로 귀농·귀촌 하는 여성 증가 50만명에 육박하는 귀농·귀촌인중 30대 이하 젊은 층이 절반이 넘는다. 귀촌 가구의 가구 원수는 1인 가구가 70.0%, 2인 가구가 18.1%를 차지해 1~2인 가구의 비율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또한, 2015년 대비 2016년 전체 귀촌인의 성별 분석 결과 남성이 1.4%증가 했고, 여성이 2.4% 증가해 여성의 증가율이 다소 높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청년, 그중에서도 가족을 구성하지 않은 여성들의 귀농·귀촌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느슨하게 연결된 조직 완주숙녀회시대를 살아가는 세대들의 가치관에 따라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진다.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어려웠던 때는 일정한 나이가 되면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것이 으레 당연한 것이라 여겨졌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남편과 자식을 뒷바라지 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여성이 굳이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지 않아도, 독립적 주체로 스스로를 인식하고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 나서고 있는 것이다. “도시가 싫어서 왔어요. 도시는 차도 많고, 사람도 많고, 건물도 많고, 일도 너무 많아요. 굳이 내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반복적이고 소모적인 일을 하는 것이 의미도 없고 재미도 없었어요.” 완주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두 여성 청년을 만났다. 완주숙녀회의 회원 이지정, 이보현씨다. 둘 다 도시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완주로 귀촌했다. 특별히 완주인 이유는 없었다. 다만, 귀촌을 하고 싶어 하는 순간에 여러 가지 상황이 완주로 정착하게 된 이유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성들이 지역에서 홀로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만은 아니다. 시간과 경험이 쌓아올린 기준의 경계를 허무는 일은 꽤 어려운 일이다. 어려서부터 길들여진 성역할과, 때가 되면 으레 당연히 해야 할 것들(결혼, 출산 등)을 하지 않고 있음에 대한 걱정을 빙자한 잔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그러면서, 소위 정상가족이라 불리는 커뮤니티에 끼지 못함에 불편함을 느꼈던 비슷한 나이대의 여성들이 자주 모이기 시작했고, 그렇게 모이게 된 모임체를 통해 완주숙녀회(이하 완숙회)가 만들어졌다. 청년회, 부녀회, 노인회도 있으니 숙녀회도 만들자고 했다. 정체성 없음이 곧 완숙회의 정체성이며, 각자 독립된 주체로 삶을 살다 서로가 필요하면 함께 하는 지지대 역할을 서로 해 나가고자 했다. “우리는 여자라고 무시당하고 결혼 안(못)한다고 혼나고, 애 (더) 안 낳는다고 혼나고 억울한 일 종종 당하면서 시골에 삽니다. 그래도 완주에서 재미나게 살아보려고 모여서 뭐라도 합니다. 함께 기술을 배우고, 재능을 나누며 서로 돕고, 같이 놀면서 서로와 스스로를 돌봅니다” 완숙회는 위와 같은 고민과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 회원일 수 있다고 말한다. 가족중심의 이주에서 1인 가구 여성 청년들의 이주가 늘어나면서 ‘정상’이라 불리던 기준에 경계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여성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문제들이 드러나고, 문제제기를 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연대를 이루면서 차츰 그것이 문제임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결혼을 했든 하지 않았든 여성 스스로가 독립된 주체로 당사자성을 가지고 살아가기 위한 그들의 연대는 앞으로 귀농·귀촌을 꿈꾸며 발을 한걸음 내딛으려는 여성청년들에게는 큰 힘이 될 것이라 생각 한다. △여성, 진정한 독립을 위한 자립 기술전등이 어두워 다른 것으로 교체해야 된다는 아내의 요청에 남편은 차일피일 일을 미룬다. 업체에 맡기자니 너무 작은 일인데다 수리비용도 아깝다. 직접 하자니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난감하기만 하다. 차일피일 일을 미루는 남편이 치사하기만 하다. 문고리가 고장 났다. 어떻게 하면 될 것 같은데 이리보고 저리 봐도 모르겠다.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니, 그러니까 집에 남자가 있어야 된다는 핀잔이 돌아온다. 문고리 고치려고 남자와 결혼을 해야 하나?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이야기지만 언제나 기승 전 결혼으로 끝나니 불편하다. 여자라면 한번쯤 겪어봤을 일이다. 그리고 이 문제 있어서 결혼을 한 여성이든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이든 자유로울 수 없다. 그 자유를 찾을 길은 단 하나. 그 기술을 배우는 것이다. “귀농·귀촌 교육이 여전히 남성중심에 머물러 있었어요. 가르쳐 주는 과정에 여자들은 모르면 너무 위축되는 교육이었고, 잘하면 잘하는대로 희한하게 보더라고요. 그런 문제에 있어 불편함을 느꼈고 문제의식을 느꼈어요. 우리가 초보자 여성을 위한 여성기술 워크숍을 만들어 보자 기획하게 된 이유가 된 거죠 ”적정기술 관련 해 일을 했고, 관심이 많았던 두 사람은 이지정씨와 이보현씨는 여성들의 자립생활기술에 관심이 많았다. 당사자성을 가지고, 여성들이 겪는 문제를 함께 해결해 보고자 여성들의 자립을 위한 생활기술캠프를 작년부터 진행하고 있다. △여성 스스로의 힘 기르기 하늘에 가을이 담겼다. 드릴소리, 망치소리, 톱질소리. 공구 쓰는 소리로 한적한 완주 시골동네가 시끌시끌하다. 11명의 여성들이 여성생활기술캠프에 모였다. “여기 왜 왔어요?”“자기 손으로 밥 떠먹듯, 조금 고장 나고 상한 것들 스스로 고치려고요. 남편한테 해달라고하기 치사해서.”각자 다른 이유가 있어 이곳에 왔겠지만, 공통된 하나는 본인 스스로가 독립적 주체가 되어 살아가고 싶어 했다. 자기 손으로 밥 떠먹듯,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스스로가 해내고 싶어 했다. 1박2일로 진행한 기술캠프 첫날은 완주 한적한 시골동네 친구집을 방문해 망가진 창문을 바꾸는 일정이었다. 창문을 바꿔 달기 위해 필요한 사항들을 알아본다. 드릴에 대한 기본적인 사용방법을 이해하고 응용하는 방법들을 배운다. 두꺼비집이 어떻게 기능하는가도 배우고 전기가 나갔을 때의 대처법도 배운다.“해보니 별거 아니네” 참여자들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중 제일 많이 나온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그동안 그 별거 아닌 것 때문에 치사한 상황에 놓였던 자기 스스로가 한심스럽기도 했다. 둘째 날은 공동부엌을 함께 고쳤다. 빛이 약한 전등을 다시 갈아 끼우거나, 환풍기를 고쳤다. 두 조로 나누어 직접 실습하고 실행하니 신기하고 재미있어 했다. 앞으로 완벽하게 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는 척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더듬더듬 더듬어 보면 새록새록 기억이 떠올라 스스로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긴다. 이번 캠프에는 기술에 관심이 있어서 온 여성들도 있고, 또 다른 여성들은 완주와 완숙회를 탐색하러 온 사람들도 있다. 굳이 기술을 이야기 하지 않아도 ‘여성’, ‘청년’이라는 이름으로 교집합 될 부분들이 많았다. 당사자들이 겪는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 보고, 문제의식을 느끼는 사람들과 함께 일을 도모해 가는 과정은 뜻깊은 일이다. 캠프를 통해 이어지고 연결된 힘들은 연대의 힘이되어 여성 스스로가 각 지역에서 겪는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큰 힘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문성희(문화파출소 덕진 문화보안관)※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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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1.01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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