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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라 맛따라 7. 순창 맛집] 수백년 명성 고추장으로 빚어낸 맛의 자존심

고추장을 빼놓고 순창을 생각할 수 없고, 순창을 빼고 고추장을 말하기 어렵다. 그만큼 순창은 장류의 고장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자랑하고 있다. 순창 고추장이 어떻게 유명해졌을까. 먼저 역사성에서 찾을 수 있다. 순창 고추장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700년대에 편찬된 요리책인 <수문사설>에서 지방 명산물로 순창 고추장의 제조법이 소개됐다. 1809년 생활의 슬기를 모아 엮은 책인 <규합총서>에서도 고추장이 순창의 특산품이며, 고추장 재료와 양이 상세히 기록됐다. 순창 고추장과 이성계에 얽힌 이야기가 전한다. 이성계가 왕에 오르기 전 스승인 무학 대사가 기거하고 있던 순창의 만일사를 찾아가던 중 농가에 들러 고추장을 곁들인 점심을 먹고 그 맛을 잊지 못해 진상토록 했다는 것이다. 순창에서 명품 고추장이 나오는 것은 이런 오래된 전통에다가 고추장 제조에 최적의 환경을 갖췄기 때문이라고 한다. 섬진강 상류의 깨끗한 물과 적당한 햇볕, 효모군 번식에 적합한 기후조건 등이 어우러지면서다.여기에 순창 고추장이 전국적으로 알려질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있었다. 대상(주)이 80년대 후반 임금님표 순창고추장을 출시하면서다. 80년대 중반 순창 고추장보존협의회가 구성돼 나름대로 활로를 모색하기는 했으나 대부분 소규모 영세업체들이어서 산업화에 한계가 있었다. 대상이 순창 고추장의 이미지를 전국에 높이면서 순창군도 지역산업으로 장류산업 육성에 적극 나섰다.순창군 전통고추장 민속마을을 만들고, 순창군장류연구사업소를 발족했으며, 장류산업 특구 지정을 받는 등 장류산업의 메카로 발돋움하기 위한 노력이 20년 넘게 이어졌다. 지자체와 장인들의 이런 노력으로 순창에서 생산되는 장류 매출액이 전국 30%대를 차지하고, 순창 지역총생산의 절반을 넘는다. 장류의 고장이라는 말이 결코 허명이 아닌 셈이다. △새집 흔히 음식 맛은 장맛이라는 말이 있다. 장맛에 따라 음식 맛이 좌우된다는 이야기다. 장류가 발달한 순창에 유명한 맛집이 많을 것임은 당연하다. 그러나 현지인들에게 맛집 추천을 해달라고 해도 선뜻 음식점 이름을 대지 못한다. 음식 맛이 장맛이라는 옛말이 틀리단 말인가. 그 이유를 새집 주인 허경순씨(57)를 만나서 알 수 있었다. 주민들 스스로 고추장된장간장청국장을 만들어 먹는 마당에 한정식 집이 그리 특별할 리 없을 것이란 설명을 듣고서다. 그럼에도 순창 읍내에만 새집을 포함해 남원집 녹원 대궁 가람한정식 민속집 순창예찬 신한국관 해오름 등 한정식이 즐비하다. 순창 주민이 아닌, 타지에서 그만큼 많이 한정식을 찾기 때문이리라. 새집은 남원집과 함께 순창 맛집의 산역사다. 40년간 운영해온 시어머니에 이어 허씨가 20년째 현재의 순창 읍내 한옥에서 같은 이름으로 지키고 있다. 전주에서 1시간 전 전화 예약을 한 탓인지 금세 상이 나왔다. 상차림이 정갈하다. 대략 20여 가지 반찬이 놓여 있다. 황석어젓 조개젓 고록젓 꼬막 조기 시금치 경종배추 고사리 무말랭이 깻잎 콩나물 마늘쫑 부침개 무조림 고추조림 고추장불고기 된장국. 이 정도면 밥 한 그릇이 아깝다. 도시의 백반집에서 만날 수 있는 메뉴들이지만, 주인의 정성이 깃든 반찬이 많다. 깻잎 마늘쫑 콩나물 고사리 시금치 등 거의 모든 나물이 주인의 손을 거쳤다. 재료는 순창 전통시장과 광주에서 조달한다. 된장국이 개운하다 했더니, 직접 콩으로 만든 메주란다. 거섶이 그리 많이 안 들어갔어도 된장 자체에서 우러나는 깊은 맛인가 보다. 새집의 별미는 고추장불고기다. 직접 담근 고추장을 돼지고기에 발라 석쇠에 얹어 연탄불에 구워 내온다. 그 담당은 남편의 몫이다. 공장용 고추장을 사용했더니 석쇠에 달라붙어 고기가 새까맣게 타더란다. 손이 많이 가지만 직접 만든 재래식 고추장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다. 담양 떡갈비가 유명하지만, 결코 밀리지 않는단다. 상대적으로 싼 가격도 있지만, 순창 고추장이 빚어낸 맛에 대한 주인의 자부심이 느껴진다. 60년 역사만큼이나 단골도 많다. 단골들은 전국에 걸쳐 있다. 전주광주와 함께 대구거창함양 등 경상도쪽 고객이 많은 것도 이채롭다. 겨울은 다소 한가하지만, 봄철 주말이면 줄을 서서 순번을 타야 한다. 옛날에는 예식 손님이 많았던 반면, 지금은 관광객 손님이 주를 이룬다. 100년 넘은 본채에 3개의 별채가 있다. 40명 규모를 수용할 수 있는 연회석도 갖췄다. 2인 기준 3만4000원. 063)653-2271 △순대촌 어느 고장이나 가장 대중적인 음식이 순대다. 저렴한 가격에 가볍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어서다. 순창읍내 순대국밥 역시 오래 전부터 지역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그 명성이 자자했다. 순창군이 이를 바탕으로 재래시장 현대화사업의 일환으로 순대집을 한데 모아 순대촌을 조성했다. 순창 순대촌은 3년 전 한국관광공사의 1월에 가볼만한 곳에 선정되기도 했다. 현재 순대촌에는 5곳의 순대집이 있다. 2대째 순대 연다라 전통순대 순창 전통 순대집 봉깨 순대 순창 장터순대. 2대째 순대와 순창 전통 순대집(옛 곡성순대)은 각각 60년 전통을 갖고 있다고 자랑한다. 각기 나름의 특징이 있지만, 공통적으로 인조피와 찹쌀, 당면을 쓰지 않고 선지와 10여 가지의 천연 양념과 야채를 넣어 감칠맛이 난다. 직접 담근 된장과 싱싱한 부추, 고추와 양파, 새우젓, 무, 갓김치 등 밑반찬이 풍성한 점도 도시 순대집과 비교된다. 새끼보전골, 새끼보국밥, 막창국밥 등의 메뉴와 라면국수사리 등을 넣어 먹는 것도 이색적이다. 순대전골 3만원(대 기준), 새끼보전골 5만원, 순대수육 3만원, 순대국밥 7000원, 막창국밥 9000원. △뜨란채 순창군의 대표적 관광지인 강천산을 찾는다면 뜨란채에서 식사를 해도 좋을 듯하다. 강천산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위치한 이곳은 산기슭에 자리 잡아 일단 분위기가 한몫 거든다. 주 메뉴는 생선구이와 생선조림이다. 생선 맛이야 거기서 거기겠지만, 얼핏 보더라도 빨간 고추장을 바른 갈치구이와 감자가 먹음직스럽다. 깨끗한 식당 내부와 10여 가지의 밑반찬도 정갈하다. 생선구이의 경우 손님 수에 따라 생선종류가 달라진다. 2인일 때는 고등어, 청어, 조기가 나오고, 3인이면 갈치가 추가된다. 갈치구이, 갈치조림, 묵은지고등어조림, 오리백숙, 닭백숙 등도 메뉴에 들어 있다. 식사 후 가볍게 산보를 즐길 수 있으며, 카라반을 구경하는 재미도 곁들일 수 있다. 생선구이 1만2000원, 갈치구이 1만3000원, 보리굴비정식 2만원, 오리닭백숙 5만원. 063)653-1305

  • 기획
  • 김원용
  • 2018.03.01 20:47

부임 3달 째 맞는 김장근 NH농협은행 전북본부장 "소통, 제일 중요한 가치…고객 니즈 반영한 맞춤 서비스할 것"

▲ 김장근 NH농협은행 전북본부장이 농협은행 전북본부 운영 청사진을 설명하고 있다. 조현욱 수습기자 NH농협은행 전북본부는 지난해 12월 말 김장근 본부장 취임 이후 지역 중소기업과의 소통행보를 의욕적으로 펼치고 있다. 김 본부장은 도내 전역을 누비며 기업대표들의 애로사항을 듣고 있다. 그는 기업이 튼튼해야 일자리가 창출될 수 있기 때문에 기업 자금난 해소를 첫 번째 원칙으로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취임후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김 본부장으로 부터 향후 청사진에 대해 들어본다. -부임하자마자 도내 전역을 돌며 기업과의 소통에 주력하고 계십니다. 본부장 업무를 기업과의 만남에 집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는 항상 현장에 답이 있다고 믿습니다. 취임 후 곧바로 지역 기업체들을 방문해 현장을 살펴보고 이들의 애로사항을 듣는 것은 생생한 최근 경기 동향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서 우리 농협은행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과정입니다. -도내 중소기업 관계자들과 대화하며 얻은 수확이 있다면. 현장 소통에서는 우리가 볼 수 없었던 많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기존에는 은행에서 획일적인 상품을 기획하고 판매했다면 앞으로 농협은행은 기업고객과의 소통을 통해 얻은 정보를 면밀히 분석하고, 고객의 니즈를 반영한 상품을 개발할 계획입니다. -농협은행은 금융업이라는 특성에도 농민을 위한 조직이라는 인식이 강합니다. 농협은행의 존재 목적과 역할은 농협법 제1조와 농협은행 정관 제2조에 잘 설명돼 있습니다. 이들 조항을 살펴보면 농협은행의 존재목적은 농업인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지위를 향상시키고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라고 규정돼 있죠. 제가 사실 기업 활성화에 집중하는 것도 농협은행이 금융사업을 해서 벌어들인 수익을 농업지원 사업과 배당 등의 형태로 농업인과 농촌에 환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농협은행의 업무는 농업농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기업, 일반고객, 조합원, 농민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지요. 농협은행 전북본부는 더욱 열심히 일을 해서 수익을 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수익이 전북 지역의 발전을 위해 사용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올해 농협은행 조직 경영방향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우선 건강한 은행지속성장 하는 은행지역과 함께 발전하는 은행을 슬로건으로 삼아 농업농촌을 위한 수익 센터 역할을 다할 방침입니다. 이를 위해 농민의 자산을 지킨다는 마음으로 리스크 관리를 더욱 철저히 해 대손비용을 감축하는데 집중하고, 우량자산위주의 건실한 성장을 이어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또한 고객관리도 강화해 나가겠습니다. 항상 해답은 고객과 현장에 있습니다. 고객들을 요구를 더욱 충실히 듣겠습니다. 새로운 고객유치를 위해 더욱 발로 뛸 생각입니다. 이와 더불어 고객들에게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임직원 교육에 더 많은 지원과 투자를 할 계획입니다. 이제는 은행이 고객들에게 친절하기만 해서는 고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습니다. 고객의 니즈를 정확히 파악하고 필요한 것을 적시에 해결해 줄 수 있는 해결사가 필요합니다. 농협은행 전북본부는 임직원들의 직무능력 향상을 위해 지속적으로 금융교육을 실시하고 있고, 매년 자기계발 왕을 선발해 시상하고 있습니다. -농협은행은 타 금융기관보다 관의 성격이 강한 측면도 있습니다. 본래 금융의 최대가치는 수익창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협은행은 항상 사회공헌에 더 힘써왔다고 자부합니다. 지속가능한 기업은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곳입니다. 농협은행은 매년 약 1000억 원을 사회공헌비용으로 지출하고 있으며, 최근 6년 연속 사회공헌 1위 은행에 선정됐습니다. 전북영업본부도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사회공헌활동을 하기 위해 올해 사회공헌활동 연간계획을 이미 수립한 상태입니다. 체계적이고 활발한 사회공헌활동을 통해 전북 도민들 곁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겠습니다. -스마트 금융이 대세입니다. 이미 농협은행은 가상화폐 업무를 하고 있기도 합니다. 농협은행이 추진하는 스마트 금융 서비스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4차 산업혁명이 본격화되면서 금융업계에서도 타 업종과의 융복합 사업이 증가되고 디지털 플랫폼 시장으로의 진출이 활발해지는 추세입니다. 이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IT유통제조업종 등과 사업제휴를 통해 디지털 금융도 플랫폼을 선점하고 경쟁력을 갖춘 은행들이 시장을 장악하고 선도해나갈 것입니다. 농협은행은 이미 지난 2015년 NH핀테크 오픈 플랫폼을 선보였습니다. NH농협은행은 금융권 최초로 오픈API를 통해 새로운 서비스의 성능과 효과를 시험할 수 있는 테스트베드를 구축했습니다. 요즘 홍보에 주력하고 있는 올원뱅크도 기존 분산돼 있던 금융업무를 통합해 고객의 편의를 극대화 한 사례입니다. -요즘 영화관을 가면 농협 올원뱅크 광고가 어김없이 나옵니다. 이미지는 있는 데 정확히 어떤 서비스 인지는 잘 모르겠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올원뱅크는 고령 고객이 많은 것을 고려해 제작된 모바일 금융 앱 입니다. 큰글씨 송금뿐 아니라 은퇴설계 브랜드인 All100플랜과 연계한 자산관리서비스, 골드바 시세 등의 정보 제공과 구매, 귀농귀촌 정보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모바일 플랫폼에 익숙한 젊은 세대를 위해서는 영업점 방문없이 차량 구입용 대출이 가능한 NH간편오토론을 탑재했습니다. 캐시비(CashBee)와 연계해 교통카드 잔액이 모자라지 않게 돕는 자동알림과 충전 기능이 강점입니다. 아울러 2030세대가 선호하는 모바일쿠폰(기프티쇼), 음원(지니뮤직), 웹툰(코미코), 셰어하우스(컴앤스테이) 등의 제휴서비스도 다양합니다. 지난해 개선된 2.0 버전에서는 계좌정보 및 자주 쓰는 서비스를 첫 화면에 배치하고 단계별 전자서명 축소, 골드바 등 다양한 상품 신설, 세대별 맞춤 서비스로 편의성을 높였습니다. 다른 농협금융 계열사의 앱을 설치하지 않아도 은행카드증권보험의 핵심 서비스를 원스톱으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앞으로의 포부와 계획에 대해 들려주시죠. 절대 안주하지 않겠습니다. 기존에 농협은행이 가지고 있던 강점은 발전시키고 약점은 줄여나갈 것입니다.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소통입니다. 도내 지자체와 기업이 금고 은행으로 농협은행을 더 많이 선택할 수 있도록 우리가 축적한 소통 노하우를 통해 더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자신합니다. 농협 임직원이 마음에 새겨야 할 사명의 시작과 끝은 농가소득 증대입니다. 전북지역 농가소득 증대에 기여할 방안을 찾기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겠습니다. ● 김장근 본부장은 - 28년간 농민과 함께 추진력결단력 강점 김장근 NH농협은행 전북본부장은 야전에 강하다. 그는 조직 내에서 추진력과 결단력을 인정받아 지역금융이 어려운 시기에 농협본부장으로 낙점됐다. 김 본부장은 지난 1990년 농협중앙회에 입사한 이후 28년간 농민들과 동고동락 해왔다는 평가다. 김 본부장은 성실함과 열정만 가지고는 부족하다며 항상 부족한 부분은 배움을 통해 개선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고향 전북에서 농촌과 지역사회를 위해 헌신할 것을 약속했다. 전주 출신인 김 본부장은 신흥고와 우석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전북대학교 경영대학원 과정을 수료했다. 농협중앙회에서는 언론국장, 홍보국장 등 외부와의 소통에 특화된 업무를 수행했다.

  • 기획
  • 김윤정
  • 2018.02.25 18:21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28. 번영과 쇠락의 군산 째보선창 - 역사의 시계추, 이제 어느 쪽으로 째깍거리고 있는가

우석: 어디인 것 같더노. 그 장소는? 진우: 낡은 건물인데, 무슨 여관 같았습니다. 우석: 여관 위치는 기억나나? 진우: 얼굴을 가리고 끌려가가, 근데 뱃고동 소리가 났고, 기차 소리도 가깝게 났습니더. 영화 《변호인》에서 주인공 송우석 변호사(송강호 분)가 빨갱이로 몰려 고문을 당한 피고인 진우(임시완 분)를 변호하기 위해 고문 장소로 추정되는 곳을 찾아 헤매는 장면이 있다. 영화 속에서는 부산으로 묘사되지만 사실 이 장면은 군산에서 촬영되었다. 1980년대 그 시절의 기찻길이 지나는 낡은 항구 풍경을 고스란히 재현해 낸 곳은 바로 군산의 째보선창이다. 지금 가보아도 일제강점기부터 가까이는 1970~1980년대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째보선창이라는 독특한 이름은 현재 군산시 금암동, 과거 옥구군 죽성리에 위치했던 포구로 일제강점기부터 째보선창으로 불려왔다. 본래 이름은 죽성포구였으며 고려시대부터 군산 지역 주요 포구 중 하나였다. 죽성이라는 이름은 근방에 있던 넓은 대나무 밭이 마치 성(城)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보호하는 형상이어서, 마을 이름을 죽성리(竹成里)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다. 죽성 포구는 대나무숲의 풍광이 아름다워 포구 일원이 군산 팔경(八景)의 하나로 꼽히기도 하였다. 그 죽성포구가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째보선창으로 개명되듯 불린 유래도 독특하다. 포구의 모습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측되는 설로, Y자 형태로 째진 듯이 조성된 포구가 마치 째보(언청이의 사투리)처럼 보인다고 하여 포구 이름을 째보선창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혹은, 죽성 포구에 살던 힘센 째보 객주가 포구 주변의 상권을 장악하고 일대를 꽉 잡고 있어 그의 별명 그대로 째보선창이라고 불렀다는 설도 전해진다. 그런데, 이 독특한 이름의 째보선창은 군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전라남도 목포에도 째보선창이 있다. 목포시 유달산 아래 다순구미(따뜻하다는 다순과 후미지고 깊은 곳이란 뜻의 구미의 순우리말 합성어로 지금의 온금동)앞에 물자 수송을 위해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곳이다. 배를 접안하는 부두시설의 삼면 중 한 면만을 연 모습이 언청이 모습과 흡사하여 째보선창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목포의 째보선창은 일제강점기에 그 지역의 주요 사업체인 조선내화의 화물을 중심으로 물자를 실어나르며 번성기를 누린 포구이다. 그러다, 1981년 제10회 전국소년체전이 열리던 시기 유달산 일주도로를 확장 정비하면서 사라졌고 조선내화마저 광양으로 본사와 공장을 이전한 후에는 번창했던 기억과 불린 이름만 남아있다. 군산과 목포가 각기 같은 이름의 째보선창을 가졌던 것처럼 두 지역은 동시대에 비슷한 번영과 쇠락의 시간을 보냈다. 두 곳은 예로부터 어족이 풍부하고 어획량이 많아 자연스럽게 포구가 형성되었고 이를 내다 파는 어시장이 함께 발달했다. 배가 많이 드나드는 지리환경이다 보니 나라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에는 군산의 전신이었던 옥구와 목포를 전라도의 4진으로 언급하고 있다. 대비하고, 도관찰사로 하여금 부지런하고 게으른 것을 상고하게 하였다. 경상도는 4진(鎭)인데, 합포(合浦)강주(江州)영해(寧海)동래(東萊)이고, 전라도의 4진은 목포(木浦)조양(兆陽)옥구(沃溝)흥덕(興德)이고, 충청도의 3진은 순성(蓴城)남포(藍浦)이산(伊山)이고, 풍해도(豊海道)의 2진은 풍주(豊州)옹진(甕津)이고, 강원도의 2진은 삼척(三陟)간성(杆城)이다. - 「태조실록」 11권, 태조 6년 5월 21일 임신 1번째 기사 각도의 병마 도절제사를 파하고 각 진에 첨절제사를 두다 조선시대 군산에는 전라도 7개 고을 세곡을 취급하는 옥구 군산창(群山倉)이 있어 이곳에 객주도 많았다. 1899년에는 군산항이 개항하면서 당시 군산포, 죽성포, 경포 등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군산 객주들이 각종 상회사(商會社)를 설립하였고, 이들 상회사는 을사늑약(1905) 이후 우리 민족 국채보상운동과 교육사업을 지원하고 활약하여 일본 상인들의 경제침투를 어렵게 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 속에서 군산에 발달한 포구만 해도 째보선창(죽성포), 설애장터(경포), 구암포(궁포), 나리포(나포), 달개나루(월포), 서시포(서포) 등이 있었으나 째보선창 주변은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 한다. 그러다 일본영사관이 이 지역에 들어서면서 째보선창은 군산의 대표 포구가 된다. 경술국치(1910년) 이후 일제는 일본인 거주 지역이었던 지금의 해망동에 1918년 서부어시장을, 외곽지역이었던 째보선창 일대에는 1923년 동부어시장을 개설한다. 그런데 막상 어시장이 개설된 이후에는 개량된 선박과 근대화된 어구를 갖춘 일본 어민이 주로 동부어시장을 애용하여 거래 규모가 서부어시장에 비해 현저히 많았다. 이후 1928년에 째보선창 앞바다 해면 매립 공사가 완공되고, 이어 1929년 조수간만의 차에도 항상 수평을 유지하는 뜬다리(잔교, 길이 49m, 폭 4m)가 설치되면서 째보선창 일원은 어항으로서 제반 시설을 모두 갖추게 된다. 1932년 째보선창은 군산부로 편입되면서 동빈정(東濱町)이 되었다. 1930년대 동빈정에 있었던 주요 사업체 및 기관만 해도 군산어업조합, 전북어업조합 판매소, 전라북도 수산시험소, 황목조선소, 전북조선철공소분공장, 경마장(헌병, 경찰기마대 훈련장), 해안순사파출소, 임경상점(군산냉장고), 신탄시장(숯, 장작 등을 파는 시장), 수호제염소등 다양해 일대의 번영을 짐작하게 한다. 동빈정은 1945년 광복 후 금암동(錦岩洞)이 되었고, 금암동은 바닷물이 드나드는 간석지였으나 매립공사를 통해 육지가 됐다. 1978년 이곳을 흐르던 째보천이 복개되었고 선창의 핵심 공간이던 어시장 역시 2003년 동백대교 근처로 이전하면서 지금은 어수선하고 쇠락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째보선창은 한때 군산지역의 소위 제일 잘 나가던 포구로 중요한 뱃길이자 일제강점기 수탈의 통로였다. 번영과 쇠락의 역사를 동시에 지니며 지역의 애환이 짙은 째보선창은 문학에서도 그 이름이 등장한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의 주요 배경지로 주인공인 정주사가 충청남도 서천(용댕이)에서 식솔들을 데리고 배를 타고 와 첫발을 내디딘 곳이 바로 째보선창이다. 그 외 조정래의 『아리랑』 그리고 고은의 『만인보』에서도 째보선창의 애환이 담긴 사연을 찾아볼 수 있다. 군산항과 목포항 두 곳 모두 비슷한 시기 2년의 차이를 두고 개항했고, 째보선창이라는 이름의 부두가 우연인지 필연인지 일제강점기를 관통하며 생겨나 역사의 풍파 속에 있었다. 같은 이름 다른 곳의 째보선창은 금강과 영산강의 끝자락에 번영과 수탈의 기억을 동시에 지닌 장소이다. 목포의 째보선창은 작년 12월 남아있던 조선내화 건물(1938년 건축)이 등록문화재(제707호)로 등재되면서 목포 째보선창이 있던 장소의 복원 계획이 탄력받고 있고, 군산의 째보선창도 영화 속의 배경과 문학 속에 남아 있으며 일대가 근현대사의 중요한 자산으로 인식되면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군산시는 현재 구도심과 째보선창 일대를 새로운 도시재생 지역 및 관광명소로 만들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마치 추운 겨울이 지나면 따뜻한 봄이 찾아오듯이 쓸쓸하고 적막해 보이는 역사의 현장에 따스한 햇볕이 내비치는 듯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군산의 겨울 바다는 얼어붙은 군산시민의 마음만큼 그 어느 때 보다도 춥고 스산하다. 번영과 쇠락을 오가는 역사의 시계추가 이제 어느 쪽으로 째깍거리고 있는지 그곳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염려와 염원들이 가득하다.

  • 기획
  • 기고
  • 2018.02.22 19:08

[전라도 정도 1000년, 창조와 대안의 땅 '전라북도'] ④동아시아 해양국가 백제의 터전 전북 - '나루터 국가'백제, 바다 통해 중국-일본 잇는 허브였다

△해양국가 백제백제(百濟)의 나라이름은 한자로 일백 백(百)에 건널 제(濟)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삼국지와 삼국사기등 사서에서는 백제의 나라이름이 정해지는 과정이 3단계의 변화를 보이며 나타나고 있다. 먼저 중국 기록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맏형 백(伯)자를 쓰는 백제(伯濟)가 마한의 여러 나라 가운데 하나로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서인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시조인 온조가 처음에 한강 남쪽에 열 명의 신하와 함께 나라를 세웠다(十臣補翼) 하여 이름을 십제(十濟)로 정했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리고 미추홀로 갔던 형 비류가 죽자 그를 따랐던 세력이 동생 온조와 합쳐지면서 백성이 즐겁게 따랐다하여(백성락종百姓樂從) 백제(百濟)로 바뀌었다고 전한다. 이들 사료를 정리해 보면 백제라는 나라이름이 만들어지기 까지 백제(伯濟)-십제(十濟)-백제(百濟)로 바뀐 것이다. 그런데 이 명칭들의 변화를 보면 이름의 앞 글자만 으뜸 백(伯)- 열십(十)-일백 백(百)으로 바뀌고 뒷부분의 제(濟) 글자는 계속 유지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변하지 않은 글자, 즉, 제(濟)는 건너다라는 동사적 의미와 함께 명사로 나루터 , 포구라는 의미가 있다. 결국 백제라는 나라이름은 으뜸나루터 국가-열 개 나루터 국가-백 개 나루터 국가로 발전한 것이다. 백제가 한강, 예성강, 임진강 및 경기, 충청, 전라지역 서해안 포구세력들을 중심으로 성장해 동아시아 해양 중심국가로 성장한 사실이 국호에 표현된 것이다. 이 같이 백제라는 이름에 담긴 뜻은 현재의 한국-중국-일본 등의 지역을 바다를 통해 연결하는 동아시아 해양 국가임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한성시기 해양국가 백제의 바다제사유적 죽막동유적한성백제이래 해양국가 백제의 모습은 우리나라 최초이자 현존 유일의 백제시대 바다제사 유적인 전라북도 부안 죽막동 유적이 1992년 수성당(水聖堂) 주변 해안초소를 보수하는 과정에서 발견되면서 극명하게 확인되었다. 즉, 부안 죽막동 제사 유적은 서해안에 돌출된 해안절벽에 형성된 해식동굴 옆에 만들어진 유적으로 백제시대 이후부터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까지 바다 제사가 이어진 유적이다. 국립전주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한 결과 이곳이 백제시대 이래로 바다 신에게 제사를 지내왔던 곳임이 확인되었다. 죽막동 제사유적은 수성당을 포함한 공간인데 수성당은 바다여신 개양할미를 모신 곳이다. 전설에 의하면 개양할미는 키가 매우 커서 나막신을 신고 서해를 걸어 다니면서 수심을 재고, 풍랑을 다스려 어부들이나 이곳을 지나는 선박들을 보호했다고 한다. 바로 이 여신의 원형이 백제이래 바다항해 수호신으로 모셔졌던 것이다. 즉, 백제이래 바다 항해의 안전을 기원한 우리민족의 해양제사유적의 원형모습을 보여준 곳이다.제사유적에서는 3세기 후반부터 마한, 백제, 가야, 왜 토기 및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특히, 신에게 바쳐진 후 인간이 쓰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일부러 입구 부분을 깨트린 백제의 토기와 무기 등 금속제 유물들이 시대변화에 따라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가야토기 및 왜에서 만든 석제모조 무기와 중국제 초기 청자 등이 나타나 이른 시기부터 백제가 중국 및 가야, 왜 등과 바다를 통해 교역을 진행하였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통일신라시대의 병이나 그릇, 고려청자 및 조선 백자 등 바다 신에게 바친 유물들이 나타나 백제 이래 바다 신에 대한 제사전통이 계승되었음을 보여준다.죽막동 유적은 선사시대 이래로 중국이나 북방의 문화가 한반도 남부로 전파되던 해로상의 중요지점이며 특히, 백제시대에는 가야와 왜에 선진 문물을 전해주던 역사를 보여주는 곳이다. 즉, 항해술이 아직 발달되지 못했을 때 연안을 따라 섬이나 육지의 주요지점을 표시 삼으면서 항해시 서해안으로 돌출된 이곳을 항해상의 중요한 지점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해식동굴에 파도가 쳐서 나는 소리는 바다신의 노여움을 상징하는 바다 울음소리로서 인간의 경외감을 일으켰다. 이곳은 백제이래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던 바다신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곳으로 해양국가 백제를 지켜준 곳이다.△웅진시기 백제의 바다출구, 익산 입점리유적한편, 1986년 봄에 한 학생이 토끼를 잡다 발견한 익산 입점리 고분유적은 백제가 웅진(공주)와 사비(부여)로 수도를 옮긴 이후 가장 중요한 대외 창구인 금강하구에 위치해 해양국가 백제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 유적은 금강하구 포구인 웅포(곰개나루) 배후의 함라산 자락에 위치해 백제의 해양진출 관문을 통치한 인물의 무덤으로 파악된다.이 고분군 가운데 제1호분은 봉토 밑지름이 약 15m의 규모로 출토된 유물로서는 금동제장신구류금동제신발말재갈철제발걸이토기중국산 청자항아리화살통장식금귀걸이유리구슬 등이 있다.특히 금동제 관모의 모양과 제작수법은 마한세력의 무덤으로 파악되는 나주 반남면 신촌리 9호분이나 일본의 규슈지역의 구마모토현〔熊本縣〕 후나야마고분〔船山古墳〕출토품과 유사하다. 특히, 일본 후나야마고분 출토품이 좀 더 후대의 양식으로 보인다. 또 금동제 신발의 경우 입점리 1호분과 나주 신촌리 9호분, 일본 후나야마고분에서 모두 1점씩 출토되었다. 입점리에서 출토된 신발이 일본 후나야마 출토품보다 신촌리 9호분 출토품에 더 가까운 형태를 보이고 있어 백제에서 하사한 유물임을 보여준다.이같이 입점리고분에서 출토된 관모는 당시 백제와 마한세력 및 일본과의 문화교류를 연구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그리고 이곳에 분포되어 있는 무덤들은 5세기경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로 설명이 가능하다. 먼저 백제에서는 판석으로 만든 돌널〔石棺〕이 6세기 이후에야 유행했는데 입점리고분보다 후대인 일본 후나야마고분에서 그러한 돌널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된 6세기경의 관모와 입점리고분의 것을 비교해 볼 때 입점리고분의 관모는 4세기 이후6세기 이전으로 추정된다는 점이다. 이같이 백제가 한강유역에서 금강유역의 웅진으로 수도를 옮긴 후 금강을 새로운 해양진출 통로로 활용하면서 금강하구의 중요 포구지역인 현재의 웅포지역이 부각되었다. 백제는 이곳에 백제의 지배층을 파견하였고 그 지배층이 죽자 백제의 새로운 무덤양식인 돌방무덤을 만들고 백제 왕실의 하사품인 금동모자와 금동신발 및 마구 그리고, 중국과의 교역품인 청자 등을 함께 부장해 백제의 위용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관련 유물이 마한의 잔존세력 공간인 나주와 백제의 일본 진출 거점인 규슈지역에까지 확산된 모습에서 입점리유적은 백제가 금강을 통해 동아시아 세력과 교류한 모습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으로 파악된다. 이같이 전라북도의 부안 죽막동유적과 익산 입점리 유적은 백제가 바다를 통해 동아시아를 연결해 해양국가로 성장하는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적이다. 특히, 현재 전라북도가 새만금을 중심으로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환황해권 중심지역으로 발전하려는 미래전략의 역사적 근거를 잘 보여주는 유적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현재 부안의 경우 죽막동 유적의 중요성에 부응하는 전시관이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고 관련 유적에 대한 안내도 전무한 상황이다. 향후 죽막동유적과 입점리유적 등 두 유적을 연결한 해양백제의 역사를 알리는 체계적인 학술, 교육, 홍보 공간의 마련과 프로그램 마련이 시급히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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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2.22 13:36

[우리고을 인물 열전 21. 완주군 구이면] 명산 둘러싸인 넉넉한 자연 자양분…문화예술 분야 탁월

등산과 저수지 주변 산책을 편리하게 할 수 있는 곳. 새처럼 하늘을 날아보고 싶다면 실제로 활공의 짜릿함을 즐길 수 있는 곳. 나룻배를 타고 가족과 친구, 연인이 호수의 낭만을 느낄 수 있는 곳. 바로 완주군 구이면이다.전주시 남쪽 평화동에서 남방 6㎞ 거리에 위치한 완주군 구이면은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산골이다. 구이면 원기리 면사무소(구이로 1482번지)를 중심으로 볼 때 그 동북쪽에 해발 604m 높이의 고덕산이 위치하고, 동쪽에는 경각산(659m) 우뚝 솟아 있다. 서쪽에는 해발 794m의 모악산이 병풍처럼 기다랗게 둘러쳐 있고, 그 아래 서남쪽에는 국사봉, 남쪽에는 513m 높이의 오봉산이 자리한다. 하나같이 오래 전부터 뭇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온 유명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구이면은 남북이 유난히 길다. 길게 늘어뜨린 수제비 형상이다. 북쪽의 전주에서 뻗어나와 임실 운암과 강진을 거쳐 순창으로 이어지는 국도 27호선이 시원하게 뚫려 있다. 구이면의 중심 생명선인 이 도로를 중심으로 두현리, 원기리, 항가리, 계곡리, 백여리 마을이 몰려 있다.지리적 형세가 이렇다보니 전체 면적 89.8㎢ 중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답(5.77㎢)과 전(4.59㎢)보다 임야(68.84㎢)가 훨씬 많다. 과거 농사가 산업의 중심이던 시절에는 주민들의 삶이 힘들었을 것이다.하지만 최근 국민소득 3만달러에 진입했다고 할 만큼 국민 삶이 나아지면서 구이면의 면모가 크게 달라지고 있다. 귀농귀촌인이 늘어나면서 완주군 전체 13개 읍면 중 구이면 인구가 봉동, 이서, 삼례, 용진, 소양 다음으로 많을 정도가 됐다.구이면이 전원생활을 희망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전주에 인접한데다 호남고속도로와 완주순천 고속도로로 이어지는 자동차전용도로가 사통팔달 뻗어 있는 편리한 교통, 그리고 모악산과 경각산, 오봉산 등에 둘러싸여 경치 좋고 공기 청정하기 때문이다. 최근엔 상관 편백숲에 뒤질세라 광곡리 너브실 편백숲을 개발했다.이런 연유 등으로 20년 전부터 모악산 아래 예술인마을이 조성되더니, 5년 전 완주군이 분양한 구이저수지 변 전원주택단지 모악호수마을이 인기리에 조성됐다. 구이가 젊어지면서 오카리나, 서각, 풍물 등을 배우고 즐길 수 있는 생활문화센터도 인기라고 한다. 이 때문에 땅값이 상승한 것은 문제지만, 완주군의 투자도 그만큼 더해지고 있다.김동준 구이면장은 면소재지에서 두현리, 덕천리, 술테마박물관을 거쳐 항가리 망산마을까지 이어지는 8.8㎞(4시간 거리)의 구이저수지 둘레길과 무동력 수상레포츠공원이 내년 완공 예정이라며 모악산 한 해 등산객 130만 명이 구이에서 충분히 쉬면서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관광지 조성 계획이 착착 진행되고 있다고 소개했다.항가리평촌리광곡리덕천리두현리원기리계곡리백여리안덕리 등 9개 법정리가 있고, 대원사 용각부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71호), 남계정(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34호), 경복사지(전라북도 기념물 제108호) 등의 유물유적이 있다.△정관계임방현(88) 전 국회의원은 덕천리 칠암이 고향이다. 그는 조선일보 기자, 한국일보 논설위원을 지낸 언론인 출신으로 청와대 대변인을 거쳐 제1112대 국회의원(민주정의당)으로 활동했다. 대륙국제특허법률사무소 대표 변리사인 황태청씨(82)는 덕천리 지등 출신이다. 공직 시절에는 특허청 국장을 지냈다,임정엽 전 완주군수는 덕천리 청명이 고향이다. 임씨는 전북도의원, 유종근도지사 비서실장, 김대중 정부 청와대 행정관 등을 거쳐 완주군수를 두 번 지냈다.이돈승 전 청와대 행정관은 항가리 원항가 출신이다. 그는 총선과 단체장 선거에 잇따라 출마하기도 했다. 정성모 완주군의회 의장과 김영석 전 완주군의회 의장은 모두 백여리 출신이다.△군경경찰청장 출신의 이수일 전 국정원 3차장은 항가리가 고향이다. 전북지방경찰청장을 지낸 이용상씨는 평촌리 원평촌, 전주덕진경찰서장을 지낸 이상선 변호사는 안덕리 출신이다.△법조계이임생 전 광주고법 부장판사는 평촌리 원평촌이 고향이고, 강성대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 판사는 백여리 상용, 이혜미 법무부 검사는 안덕리 장파, 이혜진 서울 북부지검 검사는 항가리 원항가가 고향이다.△경제계유기정 전 삼화출판사 회장은 광곡리 신원이 고향으로 알려진다. 제8910대 국회의원(민주공화당)을 지냈고, 중소기업중앙회장과 세계중소기업연맹 총재를 역임했다. 구이면 광곡리 천수답 주민들의 평생 숙원이던 광곡제를 건립했다. 이에 주민들이 공적비를 세워 고마움을 표했다.이창승 전주 르윈호텔 회장은 항가리가 고향이다. 코아백화점과 코아호텔, 우성종합건설, 전북중앙신문 등을 경영했다. 지방자치가 본격 시작된 1995년 전주시장에 출마해 당선, 한 때 시정을 이끌기도 했다.△교육문화예술언론대한민국 시조창 정가 전통을 이끌고 있는 지봉 임산본씨(86)의 고향이 항가리 신기다. 임씨는 1952년 전주시우회에서 김병익에게 시조창을 사사했으며, 석암 정경태에게 완제시조창의 본령을 배웠다. 부산시조경창대회와 대한시우회 명창부 1등, 전주대사습놀이 시조부 장원, 백제문화제 시조경창대회 대통령상 등을 수상했으며, 지난 1996년 전북도지정 무형문화재 제14-1호로 지정받았다. 현재 (사)정가보존회 이사장을 맡아 지난해 제10회 전국정가경창대회를 개최했다.2014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9호 소목장(목가구)으로 지정된 천철석씨(59)는 두현리가 고향이다. 천씨는 완주 용진 출신의 당대 최고 소목장 조석진씨로부터 전통 짜맞춤 가구의 정수를 전수받았다. 판소리판의 고수 명인 오태근씨(70)는 평촌리 상하보가 고향이다.최근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서예가 백종희씨는 안덕리 출신이고, 전북도민일보 임환 사장은 항가리 신기, 전북일보 권순택 국장은 덕천리 지등, KBS 전주방송총국 함윤호 아나운서는 추동마을이 고향이다. 구이면에 둥지를 틀고 활동하는 대표적 문화예술인 및 장인은 서양화가 유휴열, 판소리 조소녀, 송화백일주 제조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조영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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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호
  • 2018.02.21 23:02

취임 100일 맞은 유재도 농협중앙회 전북지역 본부장 "농업경영비 절감 등 통해 농가소득 5000만원 시대 열겠다"

유재도 본부장이 취임 100일을 맞는다. 그는 취임 이후 전북 농업인들의 살림살이를 살펴보기 위해 동분서주 뛰고 있다. 그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지름길에 연연하지 말고 항상 원칙과 기본에 충실해야 농업인과 지역사회로부터 신뢰받고 사랑받는 농협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인터뷰는 전주 서부신시가지에 위치한 농협중앙회 전북본부 본부장실에서 진행됐다. -취임 후 줄곧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농협은 농민의 농가소득 증대를 위해 존재하는 조직입니다. 전북이 제 고향이지만 떠난지도 오래돼 꼭 현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특히 이제는 조직 혼자서 일을 해결하는 것이 아닌 정부, 지자체는 물론 기업과도 협업할 필요성이 커졌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만날 일이 많아졌습니다. -고향에 돌아와서 전북지역 농민들을 위해 꼭 실천하고자 했던 일이 있으신지요. 우선 농가소득 5000만원 달성을 위해 제 모든 역량은 물론 범 농협 조직들의 시너지를 이끌어 내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도 농촌에서 농민의 자식으로 태어났고, 우리 농민들이 얼마나 힘들어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농가소득 증대가 가장 큰 숙제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본부장으로서 먼저 도내 농가의 생산비용를 줄이기 위해 힘쓸 계획입니다. -농협중앙회는 물론 전국 농협조합의 슬로건인 농가소득 5000만원 실현은 구호만으로 끝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들립니다. 농가소득 5000만원 달성 프로젝트는 지난해 농협중앙회가 기획시행에 들어간 사업입니다. 농협은 농가소득 목표를 2020년까지 2015년 대비 1278만원 증가시켜 5000만원을 달성할 계획입니다. 이에 대해 일부 회의적인 목소리도 있으나 농가소득 5000만원 시대 플랜은 매우 촘촘하게 짜여 있다고 자신합니다. -그렇다면 농가소득 5000만원을 실현하기 위한 세부 대책은 무엇인가요. 농가소득 5000만원 시대는 5대 핵심역량 키우기를 중심으로 실천되고 있습니다. 이를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먼저 농가수취가격 향상, 농업경영비 절감, 농식품 부가가치 제고입니다. 이들 3가지 핵심역량 사업은 농가소득 증대와 관련이 있습니다. 또한 태양광 등 신규소득원 발굴, 농촌관광 등 도농교류 추진 등 농외 소득원 발굴과 농업농촌 이해증진 활동, 농업인 문화복지지원사업 등 농가소득 간접지원을 통한 농촌활력화도 5대 핵심역량 키우기에 포함됩니다. -추진실적을 사례를 들어 설명해 주신다면. 농업경영비 절감을 예를 들어보면 농협은 올해 영농자재 가격을 지난해 보다 248억 원 인하해 농가 영농비를 줄여 주기로 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비료 108만2000톤을 지난해 보다 평균 2.1% 낮은 가격으로 공급해 110억 원의 농가부담을 덜어주기로 한 것이죠. 또한 농기계 사전 수요예측을 통해 확보한 농기계로 농가들의 부담을 덜어줄 계획입니다. 농약은 업체별상품별 개별상담으로 평균 1% 이상 가격을 인하시켜 최소 82억 원 정도 농가 부담이 줄어들 것으로 보입니다. -올해 전북농협이 중점 추진할 사업에 대해서도 설명 부탁드립니다. 우선 조합공동사업법인 조직수를 350개로 확대하고 광역 마케팅 실시로 연합판매 사업 규모를 3500억 원으로 확대하겠습니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상생할 수 있는 안정성이 강화된 로컬푸드 직거래 매장은 25개소로 확대 육성하고 유관기관과의 협업으로 안정성을 강화할 것입니다. 또한 수출품목 10개를 집중 육성해 수출확대와 해외 판로 다변화로 전북 농산물 수출 3000만 불 시대를 개척할 계획입니다. 고품질 쌀 생산기반 조성, 들녘별 계약재배 확대, 전북 쌀 역외유통 등 전북 쌀 판매에도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농업인 사업 참여 태양광사업은 400건을 목표로 정하고 농업인 설명회, 직원교육, 농정활동을 통하여 농가소득 증대를 도모할 방침을 세웠습니다. -전북농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과제와 청사진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예부터 우리 전북은 풍류와 문화, 농업경제의 중심이었습니다. 땅이 비옥하고 경작문화가 크게 발달하였고 서해를 가까이 하고 있어 수산물까지 풍족한 풍요로운 농도입니다. 전북인구 186만 중 12.6%인 23만 명이 농민이며 전국대비 쌀 생산량이 16.4%를 차지합니다. 하지만 계속되는 도 인구 감소 및 농가의 고령화로 인한 농촌의 일손부족은 농업이 직면한 어려운 현실입니다. 또한 전국 농가 평균소득 3722만원에 못 미치는 농가소득(3688만원) 역시 해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그러나 전북도 제1정책인 삼락농정을 비롯하여 문재인 정부의 아시아대표 스마트 농생명 밸리육성정책은 지속가능한 전북의 미래농업 구현을 위한 마중물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또한 R&D 기관인 농촌진흥청 및 미래 전문농업인 배출의 산실인 농수산대학교 이전 등 전북농업의 발전 가능성은 대단히 높다고 평가합니다. 특히 농업관련 기관들이 농도인 전북만의 농업관련 정책을 발굴할 수 있는 체제를 마련해 서로 협력하고 노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농업가치를 다음 개헌 때 꼭 반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농업의 공익적 가치에 대한 판단은 다소 차이가 있으나 최고 200조가 넘을 것으로 추산됩니다. 농협은 이 같은 농업의 공익적 가치를 헌법에 반영하기 위해 지난해 11월 30일 1000만 명 서명을 달성했습니다. 지속 가능한 미래농업, 굳건한 식량안보, 환경보전, 도시와 농촌의 상생발전, 전통문화 계승, 국토 균형발전을 위해서는 농업가치가 헌법에 꼭 반영돼야 합니다. 농업가치를 담은 헌법개정안이 국민투표에 부쳐지는 그날까지 최선의 노력을 다 할 생각입니다. -태양광발전사업이 구호만 요란하고 그들만의 잔치라는 비판이 있습니다. 대책이 있다면. 태양광발전사업은 농업인의 유휴농지를 활용해 100KW당 월 200만 원 정도 농외소득을 올릴 수 있는 사업입니다. 사업초기라 각종 인허가 문제, 선로 등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난해 전북농협은 전국 1호 태양광 발전소 준공식을 개최해 전국적으로 분위기를 조성하였으며, 농가 신청량 전국 1위, 농촌태양광 상호금융 대출 전국 1위, 농축협 태양광발전 직접사업 전국 2위 용량 승인 등 농촌 태양광 관련 사업을 추진해왔습니다. 올해에는 추진 목표를 3배 이상 상향했습니다. 아울러 태양광발전사업 유관기관과 협력해 농업인 지분 참여 등 신규 농외소득 방안을 발굴해 나가겠습니다. -전북농민과 도민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불영과불행(不盈科不行)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이 흐르다 구덩이를 만나면 다 채운 다음에야 비로소 앞으로 나간다는 의미죠. 저는 항상 정도를 지키자는 것을 신조로 삼고 있습니다. 꼼수나 지름길은 달콤하지만 항상 위험을 품고 있습니다. 원칙과 기본이 충실해야만 신뢰가 생깁니다. 항상 기본에 충실함으로써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전북농협을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 유재도 본부장은 - 과장 없는 언행 신뢰 받아 탈권위적 의사 소통 호평 유재도 농협중앙회 전북본부장은 온화한 인품과 원만한 대인관계 등을 바탕으로 조직안팎의 두터운 신망을 받아 왔다. 유 본부장은 언행에 과장이 없으며, 이를 통해 쌓아온 신뢰를 바탕으로 농가소득 5000만원 시대를 이끌 적임자로 평가 받는다. 그는 특히 권위적이지 않은 의사소통 방식으로 전북농협 직원들의 역량을 끌어올리고 있다. 한편 유재도 본부장은 전라고등학교와 전북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1989년 농협중앙회에 입사한 이후 종합조정실 신경영기획단, 채권관리단, 전북지역본부, 정읍시지부장, 여신관리부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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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윤정
  • 2018.02.19 23:02

[우물 안 개구리] 문화 확장성, 한계 밖을 향해 무모하게 덤비는 상상력이 결정

장자라는 중국 고전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우물 속에 있는 개구리한테는 바다에 대해서 말해줘도 소용없다. 그 이유는 그가 우물이라는 좁은 세계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여름벌레한테는 얼음을 말해줄 수 없다. 여름이라는 시간만 살다가기 때문이다. 함량이 작은 사람에게 도(道)를 말해봐야 아무 소 용없는 것은 그가 자신만의 좁다란 진리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인간은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 체계나 시간적 경험 혹은 공간적 제약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래서 대개는 자신의 믿음 체계나 시공간적 제약으로 빚어진 함량만큼만 살다가는 것이다. 일반적인 소시민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학자나 종교인이나 정치인 등을 망라하여 누구나 그러하기 쉽다. 그래서 철없는 어른도 있고, 신도들의 이해 안에서 겨우 연명해나갈 수밖에 없게 된 성직자도 있으며, 제자들의 아량에 기대 살게 되는 교수도 있고, 시대의 버림을 받게 된 큰 정치인이 생기는 것이다. 우물 안에 사는 개구리한테는 자기가 사는 우물이 자기 경험과 인식의 전체다. 그런데 인간은 개구리와 다르다. 진화를 선택한 동물과 달리 인간은 문화를 선택하였다. 문화는 진화에 비해 시공간적 또는 질적이고 양적인 면에서 모두 확장성이 훨씬 더 크다. 진화는 ‘필요’가 만들지만, 문화는 지금 당장 필요치 않은 것을 향해 나아가는 무모함에 기대는 바가 크다. 인식의 범위 밖으로 나가 보려는 무모한 상상력이 문화의 핵심이다. 우물 안 개구리는 우물을 자신의 전 세계로 알고 살다 가지만, 인간은 가본 적도 없는 자신의 우물 밖을 꿈꾸는 것이다. 결국 무모한 꿈을 꾼 한 사람에 의해 인간은 우물 밖의 세계를 자신의 영토로 갖는다. 당연히 문화의 확장성은 한계 밖을 향해 무모하게 덤비는 상상력이 결정한다. 상상력 즉 자신의 제한성을 넘어서려는 무모함이 있으면 문화적 활동을 크게 할 수 있고, 그것이 없으면 문화적 활동을 작은 테두리에서 따라 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도의 크기가 큰 문명을 살 것인지 아니면 작은 문명을 살 것인지를 결정한다. 결국 상상력은 익숙함에 갇히지 않고 생경한 곳으로 나를 끌고 가서 새로운 세계를 열게 한다.문제는 이 제한성을 넘어서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그래서 작은 문명은 일정한 파라다임 안에서는 계속 작게 유지되고, 큰 문명은 일정한 파라다임 안에서는 계속 크게 유지된다. 후진국 형 국가에서는 후진국 형 일이 일어나고, 선진국 형 국가에서는 선진국 형의 일이 일어난다. 우리나라에 후진국 형 재난이 끊이질 않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다. 후진국적 제한성 혹은 후진국적 시선을 극복하고 한 단계 더 높고 큰 시선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느 단계에서나 시선의 제한성에 갇혀 있으면, 다시 말해 익숙한 시선을 벗어나지 못하면, 그 단계를 세계 전체로 여기며 살 수 밖에 없는데, 이런 상황을 비판적인 언사로 ‘우물 안 개구리’라고 하는 것이다.더 단순화해서 말하면 우물 안 개구리 형 인간은 자신만의 익숙함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인간이다.우물 안에서 우물 밖을 꿈꾸는 상상력이 발동될 때, 가장 먼저 일어나는 지적 활동이 바로 ‘질문’이다. 반면에, 자신이 머무는 우물 안으로만 시선이 향해 있을 때 작동되는 지적 활동이 ‘대답’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적인 문제는 ‘대답’의 기능으로 닿을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이미 도달해버렸기 때문에, 그 다음을 노려야 하는데, 계속 우물 안에만 머물려 하거나 우물 안에 머물던 습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대답’하던 습관을 ‘질문’하는 습관으로 바꿀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점이다. 우물 안 개구리로 남을 것이냐, 아니면 우물 밖을 향해 튀어나가는 도전을 할 것이냐 하는 점이라고 말해도 되겠다.대답이란 무엇인가. 이미 있는 지식과 이론을 그대로 먹은 후, 누가 요구할 때 토해내는 것이다. 이때 승부는 누가 더 빨리 뱉어내는가, 누가 더 많이 뱉어내는가, 누가 더 원래 모양 그대로 뱉어내는가에 따라 갈린다. 여기서 인간의 성장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원래 모양’그대로 뱉어내는 일이다. 대답이라는 기능을 하면 할수록 자기도 모르게 ‘원래 모양’을 중시하고 거기에 집착한다. 그런데 ‘원래 모양’을 시제로 따져보면, 그것은 미래적이라기보다는 과거적이다. 그래서 ‘원래 모양’을 중시하는 데 익숙해지면 과거를 따지는 일을 중시하게 되고 과거를 분명히 하는 일을 제대로 해야 진실한 삶을 사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사람들이 채우는 사회의 논쟁은 거의 대부분이 과거 논쟁으로 흘러 버린다. 그런 사람들에게 우선적인 사명은 과거를 지키고 밝히거나 과거의 횃불이 꺼지지 않게 하는 데에 있지 미래를 여는 일에 있지 않다. 오히려 미래를 이야기 하는 사람들을 우선 분명히 해결해야 할 시급한 문제를 내버려 두고 뜬구름이나 잡으려 하는 사람으로 치부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 당장 가까이에 있는 현실의 기능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집중하지,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꿈을 꾸거나 비전을 세우는 일을 하지 못한다. 오히려 비전이나 꿈을 현실성 없는 한가한 소리로 치부하기 쉽다. 그래서 일상에서도 고등학생들에게 꿈을 꾸는 일보다 우선은 대학 합격이 더 중요하니, 꿈은 대학에 가서나 꾸라고 말해주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우리의 청춘들은 점점 고갈되어 간다. 나라도 마찬가지다.또 ‘원래 모양’은 바탕이나 근거가 되거나 모범적인 모습을 표현하기 때문에 그것을 쉽게 기준으로 사용하는데, 기준이라는 것은 언제나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 기준이 없이 구분은 일어나지 않고, 구분을 하지 않는 기준이란 있을 수 없다. 구분 가운데 가장 분명한 것은 시비와 선악의 기준이다. 자기가 가진 기준에 맞으면 옳거나 선이고, 기준에 맞지 않으면 그르거나 악이 된다. 이런 연유로 ‘원래 모양’을 중시하는 ‘대답’이라는 기능을 잘하도록 훈련된 인재들은 진위나 선악을 따지는 일에 쉽게 빠진다. 그러다가 결국은 세계와 관계를 맺을 때, 옳고 그름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사용하고, 선과 악의 윤리적 기준을 적용하는 것을 철저한 삶의 모습으로 믿게 된다. 그래서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인재들로 채워진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논쟁이 진위 논쟁이나 선악 논쟁으로 빠진다. 이런 사람들에게 진위나 선악을 넘어서거나 혹은 비켜서서 새로운 길을 내려는 사람들은 종종 사이비나 회색분자 혹은 변절자로 취급되어 가혹한 냉대를 당하고 배척된다. 변절이나 변화나 제3의 길은 회색분자의 길로 치부되기 때문에 이런 사회에서는 종종 기준에서 이탈하지 않고 그것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뭉치게 된다. 바로 진영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제 모든 활동이나 논의는 진영의 논리로 귀결된다. 이런 사람들에게 진리는 진영에 있지 세계에 있지 않다. 나에게도 있지 않다. 나는 진리의 입법자가 아니라 진영의 진리를 대행하는 대리인으로만 존재한다. 능동적이거나 독립적인 주체가 아니라 바로 종속적 주체로 전락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 종속성을 스스로는 의식하지도 못하고, 또 인정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불행하게도 평생 종속성을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종속성은 종속성 그 자체로 불행한 것이 아니라 그 종속성으로 채워진 주체들이나 또 그런 주체들이 이루는 사회나 국가가 종속성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더 큰 불행이다. 한 번 종속성에 갇히면 종속성을 벗어나기 어려워지는 운명 앞에 던져져 버리는 것, 이것이 비극인 것이다. 그래서 진영에 갇힌 사람은 대부분이 근본주의자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다 근본주의자다. 우물 안 개구리는 우물 밖을 넘보는 무모함 자체를 죄악시 할 수 있다. 우물 안은 이미 진영이 되었고, 그 진영을 벗어나는 일은 옳지도 않고 선하지도 않다. 진영에서 공유한 논리와 맞지 않은 것은 다 나쁘고 악하다. 그래서 모든 일들은 진영 안에서만 유효하다. 변화도 진영 안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당연히 작은 변화에 만족하고 큰 변화를 시도하지 못한다. 우물의 왼쪽에 있다가 오른 쪽으로 옮기고 또 오른 쪽에 있다가 왼쪽으로 옮기는 것을 큰 변화나 생명력으로 착각한다. 왼쪽과 오른쪽을 바꾸는 것을 스스로는 새 세상을 연 것으로 착각한다. 이 착각은 자신도 우물 속에 가두고 사회도 우물을 벗어날 수 없게 붙잡는다. 그래서 한 번도 미래를 실현하지 못하고 평생 과거만을 살다간다. 전술적 차원에만 머물다 전략적 차원으로 건너가지 못한다.우물 안에서 볼 때 우물 밖은 다른 곳이거나 없는 곳이거나 불가능한 곳이거나 위험한 곳이다. 상상력은 다른 곳을 꿈꾸는 무모한 행사다. 다른 곳을 적대시하지 않는 포용력이 없이는 우물 안 개구리의 신세를 면하기 어렵다. 우물 안에서 왼쪽 오른 쪽은 ‘다른 곳’이 아니라 ‘같은 곳’이다. 우물 안에서 왼쪽과 오른 쪽을 바꾸는 것은 변화가 아니다. 조삼모사일 뿐이다. ‘대답’으로만 훈련된 사람들끼리 하는 진영의 교체를 우물 밖으로 나간 것이라고 우기거나 새로운 우물이라고 우기면 안 된다. 진영의 교체를 새 세상으로 착각하면 착각할수록 넓은 세상의 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우물 안의 한 쪽만 지키다가 속절없이 작아진다. 그래도 말할 것이다. 작아진 것이 패배가 아니라, 진정한 승리라고 말이다. 이런 우물 안 개구리들을 중국의 루쉰(魯迅)은 ‘아큐’(阿Q)라고 하면서 중국인의 종속성을 비판하고, 중국이 우물 안을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나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과거에 갇힌 우물 안의 중국에서 왼쪽 오른쪽의 교체를 말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중국’을 꿈꿨던 것이다. 아직 ‘아큐’(阿Q)의 속성을 탈각하지 못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대답만 해 왔던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건명원 원장·섬진강인문학교 교장 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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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2.13 23:02

취임 한달 이규성 농촌진흥청 차장 "IT기술·빅데이터 활용, 미래농업 이끌 신성장동력 창출"

이규성 농촌진흥청 차장이 취임 1달째를 맞는다. 이번 이 차장의 승진으로 농촌진흥청은 30여 년 만에 내부출신 청·차장을 배출했다. 그래서인지 지난 8일 집무실에서 만난 이규성 차장은 더욱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조직 내부에서 승진한 이 차장은 농촌진흥청에 대한 확고한 자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특히 그는 혁신도시 시즌2와 전북 농생명산업 발전을 궤도에 올려놓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다.-먼저 승진을 축하드립니다. 30여년 만에 조직내부에서 청·차장이 배출된 터라 소감이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감사합니다. 저는 30여 년 만에 우리조직 내부에서 청장과 차장이 동시 배출됐다는 사실을 ‘농촌진흥청이 더욱 잘하라’는 채찍질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내부승진은 강점도 많지만 그만큼 약점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점을 최대한 살려 국민의 믿음과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고 매일 되새기고 있습니다. 우리 농촌진흥청은 연구기관입니다. 연구기관은 연구 성과로 그 존재가치를 증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농업여건이 어려운 이 시점에서는 더욱 농민들과 관련 산업 종사자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고 보급할 의무가 있습니다.”-전북지역과 깊은 인연을 맺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익산에 있는 원광대학교 농학과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석사학위까지 취득하고 공직에 입문한 뒤에도 익산에서 10여 년 근무했습니다. 사실상 고향이지요. 전북은 청년시절 제 나아갈 길을 보여준 곳입니다. 애정이 클 수밖에 없지요.” -농학으로 진로를 결정한 것과 벼 육종에 평생을 바치자고 결심한 계기가 있나요. “저는 대학생 시절 군복무를 하면서 벼 육종을 통해 우리나라 식량 산업을 발전시켜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당시만 해도 군부대에 보급되던 쌀의 수준은 물론, 우리 국민들이 먹는 쌀의 품질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암담한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농업이 인간의 삶을 유지하는 근간이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 철학을 세우고 이 길을 처음 걷게 된 곳도 전북입니다.”-차장의 정확한 역할에 대해 궁금합니다. “청장은 조직의 큰 방향과 틀을 결정하는 자리입니다. 연구 방향과 사업계획을 정하고 추진하는 것도 청장님의 몫이지요. 차장은 조직의 살림살이를 책임집니다. 청장이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면 이 계획이 잘 실행될 수 있도록 더욱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써야합니다. 청장이 조직의 기틀을 세우면 이를 잘 융합시키는 것도 차장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청장을 보필하며, 농촌진흥청 내 모든 분야의 업무를 관장하는 게 차장의 가장 큰 임무입니다.”-정부가 최근 미래농업을 이끌어 나갈 비전을 발표했습니다. 농촌진흥청이 해나갈 역할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우리정부는 ‘소프트웨어 강국, ICT르네상스로 4차 산업혁명 선도 기반구축’을 국정과제로 제시했습니다. 농업에서도 첨단 기술을 응용한 미래대응 과제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농촌진흥청은 특히 IT와 빅데이터를 활용해 미래농업을 이끌어나갈 신성장 동력을 창출할 계획입니다. ICT 기술로 농업생산 시설관리 자동화 및 생육정보 DB 연계 기술을 확립하는 한편 빅데이터를 통해 유전정보 및 분자육종기술을 접목해 유용 형질 유전자 개발과 신품종 육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4차 산업혁명시대 농업이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전북 농생명 산업에서 혁신이 요구되는 분야는 무엇일까요.“농촌고령화와 청년들이 농업을 외면하는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첨단농업의 기반을 마련해 신규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전북도가 강조하는 ‘아시아 스마트 농생명밸리’가 성공적으로 안착한다면 농업은 하이테크 산업으로서 미래를 여는 열쇠가 될 것입니다. 또한 전북 농생명 산업의 성공은 국내 전역에 농업에 대한 인식의 대전환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농업인의 현실을 면밀히 파악한 후 표준모델을 개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핵심기술은 반드시 국산화해 비용을 절감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아울러 꾸준한 전문 인력양성도 필수적이라고 봅니다.”-혁신도시 시즌2와 관련한 올해 농촌진흥청의 추진 사업을 소개하자면. “혁신도시 건설의 궁극적인 목적은 지역이 가진 잠재력을 극대화하고 자립적 성장기반 마련을 통해 국가 균형발전을 구현하는 것입니다. 농촌진흥청이 전북혁신도시로 오게 된 것은 전북을 첨단 농산업 메카로 탈바꿈하라는 의미입니다. 혁신도시가 지역경제 성장을 견인하려면 지자체와 일부 기관의 의지만 가지고는 어렵습니다. 지역 혁신을 선도할 수 있는 상장기업은 전국의 1% 수준으로 저조합니다. 기업을 유치하고 육성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전북혁신도시 이전기관 모두가 가진 기술 인력 역량을 결집해야 할 시점입니다. 농진청은 지역기관과 협업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전북을 농생명 산업의 성장거점으로 육성하는 3대 사업을 추진 중에 있습니다. 첫째 청과 농업기술실용화재단 종자 기업의 협업을 통해 종자 산업을 궤도위에 올려놓을 것입니다. 종자는 반도체와 같아 무수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습니다. 둘째 기술공급과 산업화지원을 통한 선순환 생태계를 조성할 생각입니다. 마지막으로는 다른 혁신도시 기관과 융복합 산업을 도출해내자는 구상입니다.”-앞으로의 포부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혁신도시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지역과의 유대강화와 주민과의 상생이 필수적입니다. 이밖에도 우리나라 전체 농업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쌀 수급안정과 농업인력 양성이 시급합니다. 저는 농진청의 연구가 현장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농가소득 향상과 국민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연구 성과와 그 토대를 마련할 수 있도록 남은 공직생활에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이규성 차장은- 벼 품종육성 현장전문가 국내·외 쌀 고급화 기여이규성 차장은 벼 품종육성 전문가로 현장에서 잔뼈가 굵다. 그는 그만큼 누구보다도 연구 현장의 어려움과 문제점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지난 1987년 호남농업연구소에서 공직에 입문한 이 차장은 벼 품종 육성과 미래식량난 해결에 집중해왔다. 특히 이 차장은 세계 최초로 ‘자포니카 벼 내염성 유전기작 규명 및 검정법’을 개발한 인물이다. 또한 국내최초 생합성 영양쌀 개념을 도입하며 국내외 쌀 산업 고급화에 기여했다. 그 결과 대한민국 연구대상 1호로 선정, 농촌진흥청에서 연구 성과로 특별 승진한 첫 케이스가 됐다. 그는 선이 굵으며 업무추진력이 강하다. 아울러 친화력, 전문성, 연구성과는 물론 오랜 해외 근무경험을 바탕으로 국제적인 감각도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전남 곡성출신인 그는 원광대 농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국립필리핀대학교에서 박사(식물육종) 학위를 받았다. 2007년 국제미작연구소(IRRI) 파견 주재관, 2008년 국립식량과학원 벼맥류부 간척지 농업과장, 2010년 캄보디아 해외농업개발센터(KOPIA) 초대 소장으로 근무했다.이어 국립농업과학원 농업생물부장과 국립식량과학원 중부작물부장, 농촌진흥청 기술협력국장 등 주요보직을 두루 역임했다.

  • 기획
  • 김윤정
  • 2018.02.12 23:02

취임 2년째 접어든 문권순 호남지방통계청장 "활발한 소통 통해 전북에 꼭 필요한 통계 생산"

경제를 비롯한 모든 부문의 정책 수립에서 통계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통계는 지방자치단체의 주요정책 수립과 집행에서부터 지역주민의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어느 때보다 어려운 한해가 될 것이라고 예측되는 전북경제상황에 비춰 통계의 활용도는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전북지역의 통계조사와 작성을 책임지는 문권순 호남지방통계청장은 ‘지역특화통계’발전을 위해 분주히 뛰어왔다는 평가다. 지난 2016년 7월 취임한 그는 올해도 지역통계의 개발과 지원에 주력할 방침을 밝혔다. 최근 전주를 찾은 문 청장을 호남지방통계청 전주사무소에서 만나 그간의 성과와 향후 계획에 대해 들어봤다.-취임하신지가 엊그제 같은 데 벌써 햇수로 2년째에 접어드셨습니다. 그간 소회와 성과에 대해 설명해주시지요.“돌이켜보면 취임하면서부터 지금까지 호남지방통계청 전체 구성원 모두가 변화의 중심에서 있었던 시기로 기억됩니다. 호남지방통계청장으로 취임하며 전북을 비롯한 호남지역은 물론 제주 지역민들을 폭넓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국가통계 선진화의 일환으로 인력 재배치, 조사대상처 표본개편 등이 추진돼 업무환경에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특별히 성과로 꼽을만한 게 있다면 먼저 지난해 책임운영기관 종합평가에서 우수기관으로 선정된 것입니다. 둘째는 지역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는 지역통계 개발과 기술지원, 통계교육 등을 통해 지역통계 인프라를 확장한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 호남지방통계청은 전북지역의 사회조사 문항을 표준화하고, 지자체 간 비교가 가능하게 함으로써 지역정책의 효율성을 높였다고 생각합니다.” -남은 임기동안 꼭 이루자고 하시는 것이 있다면.“지금까지 통계개발은 통계가 정책을 지원하는 형태였습니다. 그러나 지난해 국민디자인단과 함께 청년통계를 개발하면서 느낀 것이 있다면 소통하는 과정에서 양질의 통계가 생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지자체, 통계 수요자의 제안과 아이디어를 적극 반영하는 한편 통계전문지식이나 지원이 필요한 곳은 우리 청 직원들이 직접 찾아 도울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지역특화 통계 생산에 주력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전북지역의 특화통계는 어떠한 것들이 있었는지요.“통계청은 전국 5개의 지방통계청에 지역통계과를 신설하고, 지방분권시대에 대비한 기능으로 확대했습니다. 호남청은 특히 지역 특화통계 개발 및 컨설팅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전북지역 특화통계는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청년 일자리와 관련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전주시, 완주군의 청년통계 등이 그 결과물이죠. 이외에도 전주시 주거실태조사 전통시장 및 상점가 동향조사 등을 지역특화통계를 지자체와 협업을 통해 생산하고, 제공했습니다.”-전북은 지역경제가 취약하고 일자리가 부족한 편인데도, 지역통계마저 중앙보다 부실하다는 지적이 있어왔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저도 공감하며, 책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지역에서 필요한 통계를 작성하기 위해서는 예산과 인력 등이 뒷받침 되어야 하나, 지방의 중앙에 비해 예산과 인력 등의 여건이 충분치 못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통계청 지역사무소 구성원들이 역량강화와 완주군 등 전북지역 지자체에서 통계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고 있다는 것은 고무적인 사실입니다. 올해는 도민에게 더 밀접한 양질의 지역통계 생산을 위해 지역통계 컨설팅을 확대해 나갈 계획입니다. 지자체는 물론 시민들과 활발히 소통함으로써 진짜 필요한 통계를 생산해야겠죠.”-호남청이 아무래도 광주에 있다 보니, 전북도민들은 상대적으로 소외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를 해소할 만한 계획이 추진 중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동안 행정·조사 통계의 원시자료(micro data)를 이용하거나 활용하고자 하는 도민들은 대전이나 서울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주사무소가 많은 역할을 해왔지만, 더 큰 조직을 원하는 전북도민들의 마음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에 저는 앞으로 전북지역은 물론 호남사람들이 고품질의 통계 서비스를 누릴 수 있도록 마이크로데이타이용센터(Research Data Center. 이하 RDC)를 전북에 유치할 생각입니다. 마이크로데이터이용센터가 전북에 설립된다면 거리적인 접근성이 용이해 이용자들의 시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으며, 지자체 등 유관기관들도 센터를 적극 활용해 정확하고 세부적이고 과학적인 자체 통계를 생산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전북도민의 삶의 질 향상과도 이어질 수 있다고 봅니다. RDC는 현재 통계청 본청(대전), 한국통계진흥원(서울), 판교스타트업캠퍼스(경기 성남), 서울대·서강대(서울), 한국개발연구원(KDI·세종) 등 6곳에만 있습니다. 전북에 센터가 유치된다면, 이곳은 앞으로 통계소외지역이 아닌 지역통계 중심지역으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전북은 농생명, 탄소 산업 등 지역특화산업에 대한 전문통계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나오는 데.“지역산업특화 통계를 작성하려면 지자체의 적극적인 의지와 산업자원통상부를 비롯한 관련 부처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중앙부처가 아니더라도 우선 지자체의 강한 의지가 필요합니다. 기업 및 관계자들이 통계에 적극 협조해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주신다면 불가능한 일은 결코 아닙니다. 다시 한 번 강조드린다면 ‘지역특화’ 통계의 생산을 위해서는 다소 관련 실적이 낮은 것으로 드러나더라도 이를 통계로 보고, 개선하겠다는 지자체 수장의 강한 의지가 요구됩니다.”-혁신도시 발전과 관련한 통계청 통계에 대한 수요도 높아지고 있습니다.“전북 혁신도시로만 한정해 혁신도시에 대한 도시발전 및 주민의 생활변화 등 실태를 파악·분석하고 공표할 수 있습니다만, 다만 더욱 정확한 분석을 하기 위해서는 전국의 모든 혁신도시를 동일한 방법으로 조사해야 합니다. 혁신도시 통계는 행정자치부, 국토교통부 등과 긴밀한 협의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새해 업무설계 방향과 집중 추진할 사안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올해는 신규 조사대상처가 지속적으로 통계조사에 협조해 주도록 하는 안정화 작업이 가장 중요한 사업입니다. 정확한 통계는 정확하고 솔직한 문항작성으로 만들어집니다. 표본개편에 따른 신규 대상처의 안정을 위해 발로 뛰는 한편 지자체 통계개발 자생력 강화를 위한 지역특화 메뉴얼 사업을 진행할 계획입니다. 또한 빅데이터를 활용한 4차 산업혁명 대응에도 호남지방통계청이 앞장서겠습니다. 특히 지방분권에 따른 지자체의 기능과 역할이 확대되는 현 시대상황에 맞춰 지역민의 다양한 통계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전북도민들 또한 지역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통계가 무엇인지 함께 고민해 주시고, 통계조사에 적극 협조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문권순 호남지방통계청장은- 차별화된 통계 기획 현장 소통행정 눈길문권순 호남지방통계청장은 차별화된 지역특화 통계생산 기획에 앞장서고 있다는 평가다. 지난해에는 호남과 제주에 이르는 모든 관할지역 현장을 수시로 찾아다니는 등 각 지역 통계수요자들과의 소통에 주력해왔다. 문 청장은 “지역민의 삶 향상을 위해서는 지역통계가 허브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이를 위해 지방통계청 최초로 관할 지자체를 대상으로 한 지역통계 표준작성기법(매뉴얼)사업을 추진하고 있다.한편 서울 출신인 그는 강원대학교 통계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에서 통계학 석·박사학위를 받은 통계 전문가다. 지난 1992년 5급 박사특채 사무관으로 공직에 입문한 문 청장은 통계분석과장, 부산통계사무소장, 경제통계기획과장 등을 역임했다. 문 청장은 정부가 최근 지역균형발전을 강력히 추진할 것으로 선포한 가운데, 각 지역의 상황을 통계로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적임자로 꼽힌다.

  • 기획
  • 김윤정
  • 2018.02.05 23:0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27. 역사를 지켜낸 곳, 사고 - 역사는 기억의 투쟁…잊히고 지워야 할 과거는 없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조지오웰의 작품 <1984>에 나오는 유명한 문구이다. 과거의 기록은 힘 있는 자들의 기록이라는 말도 있지만, 가장 힘이 있던 왕을 중심으로 한 기록은 당대 역사의 사실을 헤아려보고 지금까지 이어오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 선조는 예로부터 왕을 중심으로 한 일들을 기억하고 남기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 고려시대부터 춘추관과 예문관을 상설하여 조선시대까지 이어오며 상세히 기록하였다. 대부분 전대의 왕이 죽고 난 후 다음 왕이 즉위된 초창기에 실록을 편찬하였으며 이를 특별히 설치한 사고(史庫)에 안전하게 보관해 왔다. 그렇게 특별한 관리를 받은 사고들도 재난과 외세의 침입에 훼손되었고, 그 와중에 기록한 사람들 못지않게 역사의 저장고인 사고를 지켜낸 사람들이 있어 지금도 우리는 과거 역사를 디딤돌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왕의 곁에서 기록되는 실록은 춘추관 내 임시로 둔 실록청에 재상을 중심으로 문필이 뛰어난 대제학을 비롯한 사관(史官) 등으로 조직되어 편찬되었다. 사관은 두 명이 조를 이루어 왕이 잠이 들기 전까지 역할을 나누어 왕의 행동을 기록하고 왕의 말을 기록하는 등 모든 언행을 기록하였다. 사관이 기록한 공식적인 사초는 관장사초(館臧史草)라 하여 춘추관에 보관하였고, 미처 기록하지 못한 사항을 집에 돌아와 기억을 되살려 기록한 것을 가장사초(家臧史草)라 하였다. 가장사초도 왕이 죽고 나면 실록편찬을 위해 제출해야 했지만, 미처 제출하지 못한 가장사초는 사관이 죽으면 함께 묻었던지라 종종 가장사초가 사관의 무덤에서 발견되기도 한다.국보 제151호인 조선왕조실록은 태조에서 철종까지 조선왕조 472년의 역사의 실록이 지정되었는데, 1935년에 편찬되었으나 국보에 못 들어간 고종실록과 순종실록도 있다. 그러한 연유는 이전 왕들의 실록이 4부에서 5부만 보관돼 있는 데 반해 일제 치하에서 200부나 발간되어 역사적 가치도 떨어진 데다가, 총편집인을 일본인이 맡은 까닭에 외면을 받고 세계기록유산 등재에서도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제외되었다.집필하고 수정하는 과정에서의 파기와 보관도 철저하게 다루었던 실록청은 편찬이 끝난 실록의 보관에 힘을 다했다. 사고에 보관된 실록은 종이로 제작되었기에 습기와 벌레의 피해를 막기 위해 3년에 1번가량 햇볕에 말리거나 바람을 쐬게 하는 포쇄 과정을 거쳤다. 또한, 국가의 제례나 행사에 과거의 전례를 참고하기 위해 사관이 살펴보는 것을 제외하고는 열람을 금지하며 엄정하게 관리했다. 실록과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사고는 곧 당대의 중요한 기억을 보존하는 장소였기에, 안전한 위치에 짓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복사본을 만들어 여러 곳에 나누어 둘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궁궐 안에 내사고(內史庫)를 두고, 외사고(外史庫)를 지방에 두는 이원체제로 관리했다. 그중 고려시대의 내사고는 개성 수창궁(壽昌宮)에 있었고 외사고는 충주에 충주사고로 두었다. 이후 내사고는 수창궁의 화재, 한양으로의 천도 등에 따라 궁궐 안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조선시대 1440년(세종 22년) 경복궁 안에 세운 춘추관에 정착하였다. 외사고는 1439년(세종 21년)에 충주에 이어 경상도 성주와 전라도 전주에 새로운 사고가 설치되어, 도서관 역할을 한 내사고인 춘추관사고, 보존을 목적으로 둔 외사고인 충주사고, 성주사고, 전주사고의 4대 사고 체제가 완성되어 임진왜란 이전까지 운영되었다.춘추관(春秋館)에서 아뢰기를, 《태조실록(太祖實錄)》 15권, 《공정왕실록(恭靖王實錄)》 6권, 《태종실록(太宗實錄)》 36권을 이제 이미 각각 네 본(本)씩을 썼사오니, 한 본(本)은 본관(本館)의 실록각(實錄閣)에 간직하여 두고, 세 본(本)은 충주(忠州)전주(全州)성주(星州)의 사고(史庫)에 나누어 간직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110권, 세종 27년 11월 19일특히, 외사고가 전주에 자리 잡게 된 까닭은 전주가 조선 왕실의 본관이자, 태조의 어진이 경기전에 봉안된 것을 중요하게 여긴 것으로 실록을 차례로 옮겨가며 경기전 내부에 실록각을 설치하여 보관하였다. 초기 3곳 외사고 중 하나였던 전주사고는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춘추관, 충주, 성주의 사고가 불에 탄 후, 유일하게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남게 되면서 역사적인 의의를 갖게 되었다. 대부분 평지에 있던 사고들은 외부의 침략 등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지만, 다른 곳의 사고와 달리 전주사고가 화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전주 지역 선비였던 손흥록, 안의, 승려 등이 실록을 안전한 곳에 옮겨 지켜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중 사고를 지키기 위해 분투했던 지역민의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왜군이 전주 인근에 진입해왔을 때, 당시 경기전 참봉 오희길은 태조의 어진과 사고의 실록들을 안전하게 옮겨 보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실록 총 805권 614책 및 기타 전적 등을 옮기기 위해서는 말 20여 필과 많은 인부가 필요했다. 이를 고민하던 중 지역의 명망 있는 선비 손홍록을 찾아가 의논하였다. 나라의 역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보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 혼자 하기엔 역부족이오니 도움을 청하고자 합니다.고 하자 손흥록은 흔쾌히 뜻을 같이하기로 하였다. 뜻을 함께한 안의와 조카 손숭경, 하인 30여 명과 함께 태조의 어진과 실록을 정읍 내장산의 은봉암으로 옮겼다가 하루 뒤 산중 더 깊숙이 들어가 용굴암으로 피난시켰다. 그 후 태조의 어진을 따로 비례암으로 옮겨 안전하게 보관될 수 있었다.그 덕분에 전주사고의 실록은 남았지만 이후 나머지 소실된 실록의 복구와 안전한 보존이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에 전주사고본을 모본으로하여 2년 9개월 만에 4부의 실록을 다시 완성하였고 이를 더욱 안전하게 보관할 장소로 깊은 산속 험한 장소들을 고려하게 되었다. 그 결과 강화도 마니산, 오대산, 태백산, 묘향산이 채택되었고, 이에 따라 전주사고의 실록은 마니산으로 옮겨졌다가 인근의 정족산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묘향산사고는 한반도의 북방에 위치한 탓에 중국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관리 소홀이 지적되어 논의되다 묘향산사고의 실록이 1633년(인조11년) 무주 적상산(赤裳山)으로 옮겨졌다. 이로써, 4대 사고에서 춘추관, 정족산, 오대산, 태백산, 적상산의 5대 사고의 시대가 되었다.하지만, 이후 적상산사고의 실록들은 1911년 일제 강점기 창덕궁 내 장서각으로 옮겨졌다가, 6.25 전쟁 때에 북한으로 옮겨졌고, 다른 사고의 실록들도 조선총독부로 옮겨지고 일본으로 반출되는 등 나라의 운명과 같은 풍파를 겪게 되었다. 북한으로 넘어간 적상산사고의 실록은 1980년도에 번역되었고, 강화도로 건너간 전주사고의 조선왕조실록은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적상산사고는 1992년 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될 위기에 놓이자 적상산 위쪽으로 옮겨졌다. 현재, 4대 사고와 5대 사고 중 전라북도에 있는 전주사고와 적상산사고만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당시 사고의 역사성을 전해주고 있다.역사는 기억의 투쟁이다. 한쪽에서는 기념해야 할 것들을 간직하여 소중한 미래의 발판으로 삼고 다른 한편에서는 다시는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피눈물을 삼키며 지난 과거를 곱씹는다. 민족이나 공동체와 연관된 기억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교훈을 전달한다. 우리 선조들이 사고를 여러 곳에 나누어 두면서까지 역사를 지키려 했던 까닭이다. 그 애쓴 흔적이 남아있는 장소의 면면도 다시 살려 돌이켜 보아야 한다.역사 안에서 잊히고 지워야 할 기억은 없다. 당대 왕의 기록물인 실록을 두려워하고 귀히 여기며 봉안에 힘썼던 선조들의 지혜를 다시 보게 된다. 디지털 세상이 도래하면서 역사의 기록과 저장의 수단이 달라져 보관에 대한 개념의 차이가 있지만, 오히려 또 다른 오류와 변종의 폐단을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2018년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지나온 역사를 복기하며 지난 시간과 작금의 기억들을 유산으로 잘 남겨내는 것 또한 과거를 잘 이어갈 사명일 것이다.

  • 기획
  • 기고
  • 2018.02.02 23:02

판소리 대중화 꿈꾸는 왕기석 명창 "판소리, 우리 시대 이야기 담는 소통과 감동의 그릇 되어야"

차고 넘치는 재담과 타고난 목, 지칠 줄 모르는 소리 공력으로 우리시대의 판소리를 이끌었던 소리꾼, 자신만의 독특한 소리를 만들어냈던 명창이 있었다. 70여년 공력을 소리에만 들이고도 정작 득음은 언감생심이라며 하루도 소리를 입에 붙이지 않고는 살 수 없고 다시 태어나도 소리를 하겠다고 했던 명창. 2003년 작고한 박동진 명창이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15년, 아직 소리판은 그를 그리워하지만 그 뒤를 잇고 있는 소리꾼들의 대열이 그리 미약하지는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판소리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후, 한국의 오래된 유산 판소리는 세계가 주목하는 유산이 되었다. 그렇다면 오늘의 판소리는 어디쯤 와있을까.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전통판소리와 판소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다양한 형식의 무대들은 대중들과 가까워졌을까. 오늘의 판소리 무대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왕기석 명창(55, 정읍시립국악단 단장)을 만났다. 크고 작은 창극 무대를 아우르며 자신의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청중들을 기꺼이 찾아가는 우리 시대의 광대. 다른 사람보다 늦게 시작한 소리공부의 부족함을 타고난 재능에만 기대지 않고 노력으로 채워 끝내 오늘의 소리판을 대표하는 명창으로 우뚝 선 그의 길을 들여다보면 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열여덟 살에 연수단원으로 들어가 30여 년 동안 몸담았던 국립창극단을 떠나온 것이 2013년. 그는 이제 고향인 정읍과 전주를 중심으로 판소리 대중화를 이어내는 통로를 다양한 형식으로 실현해내고 있다. 그러나 그는 판소리가 여전히 공간에 갇혀 있고 대중들의 일상에 놓이는 음악이 되기에는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 판소리를 우리 시대의 음악으로 들여놓기 위해 누구보다도 깊게 고민하고 있는 그는 3시간 가깝게 이어진 인터뷰 동안 현실적 한계에 때로 좌절하고 때로 울분을 터뜨렸으나 결국 들려준 이야기는 판소리가 지닌 가치와 힘, 그래서 포기할 수 없다는 희망과 가능성이었다. -지난 연말 바쁘셨더군요. 왕기철 명창과 창극퍼레이드까지 진행하셨던데요. 해마다 연말이면 공연이 이어지는데 작년에는 특별히 기획된 공연도 많았고 개인적인 일까지 더해져 분주했었습니다. -정읍시립국악단에 오신 후로 자체 제작 무대도 그렇지만 지역에서 만들어지는 창극 작품 출연도 눈에 띄게 많은 것 같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에너지 넘치는 시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소리꾼으로 무대에 서는 일 못지않게 창작과 제작에까지 나서는 상황이니 앞으로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합니다.(웃음) 개인적으로 버거운 일정이 되기도 하지만 내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자리는 가능하면 가려고 합니다. 그렇다보니 아무래도 바빠질 수 없게 되지요. -소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습니까. 집안 내력이 있나요. 부모님은 예술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다만 아버님이 농한기에 사람들이 사랑방에 모여 있으면 책을 읽으며 들려주시고 소리도 한 대목씩 하셨는데 그 소리가 구수했답니다. 그리고 작은 아버지는 상여소리를 아주 잘하셔서 동네에서 선소리꾼을 도맡아 하셨답니다. -재능은 유전적으로 타고 나셨군요. 소리는 셋째 형님(왕기창)이 먼저 시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형님 덕분에 저와 바로 윗 형인 왕기철 명창이 그 길을 가게 되었어요. 기창 형님이 가족들보다 먼저 서울로 갔는데 박초월 선생님 밑에서 공부를 했거든요. 먹고 살기 힘든 시절에 형님은 라면 하나를 쪼개어 끼니를 떼우며 소리를 배우러 다니셨어요. -그렇게 지난한 길을 어쩌다가 함께 가시게 되었습니까. 가족이 모두 서울로 이사를 갔는데 생계가 막막했어요. 열네 살 즈음부터 온갖 일을 다 했지요. 그러다 국립창극단 단원이 된 형님을 만나러 갔는데 거기서 남해성 선생님 권유로 소리를 하게 되었어요. 단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었는데 종종 들었던 형님 소리를 흉내 내 불렀지요. 선생님이 형님께 목이 좋으니 소리를 시켜보라고 하셔서 바로 연수단원이 되었습니다. 그때가 열여덟 살, 소리길이 제 운명이 되었지요. -형님이 국립창극단에 있었다고는 하지만 가족들의 생계에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형제가 그 길을 가는 것에 반대하지 않으셨나요. 아주 심하게 반대하셨어요. 바로 윗 형이 왕기철 명창인데 그 형을 기창형님이 먼저 서울로 끌어들여 박귀희 선생님 제자로 넣었거든요. 이미 두 형제가 소리를 하는 판에 저까지 나섰으니...... -늦게 소리길에 들어섰으나 국립창극단 창극 작품에 대부분 주역을 맡으셨던데요. 타고난 재능도 그렇지만 대단한 노력이 더해졌을 것 같습니다. 첫 작품은 어땠습니까. 당시 남자 단원들이 부족했어요. 덕분에 제가 일찍부터 주역을 맡을 수 있었죠.(웃음) 첫 주역으로 선 작품이 86 아시안게임문화예술축전 작품으로 제작했던 용마골 장사 인데 저로서는 잊을 수 없는 작품입니다. -첫 작품 말고도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작품이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천명도 그렇고 좋은 작품이 많죠. 그러나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된 작품은 첫 작품입니다. 허규 극장장님이 연출 하셨는데 본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재공연할 때 제가 연습시간에 늦었어요. 하루아침에 역할을 박탈당하고 무대 뒤에서 심부름을 해야 했어요. 며칠 지켜보시던 허규 선생님께서 내가 당장 자를 수도 있지만 네 장래를 봐서 자르지는 않겠다고 하시더라고요. 부끄럽고 자괴감이 들어 사표를 써서 일주일 이상 가지고 다녔습니다. -어찌됐건 복귀는 했겠군요. 저 때문에 속상해하시는 선생님들이 많았어요. 선생님들이 저렇게 가슴 아파하시는데 덜컥 그만둔다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열심히 심부름을 했죠. 다행히 88년 서울 올림픽 문화예술 축전 때 춘향전을 공연했는데 그때 허규 선생님이 다시 기회를 주셨어요. 돌이켜보면 정말 감사한 일이죠. 늦게 소리를 시작했지만 어린나이에 주인공을 맡아 혹시 건방져질까 싶으니 한번 꺾어주신 것이 아닌가 싶었어요. 그 이후부터는 비교적 순탄하게 길을 걸어 왔습니다. -창극단에서 형님과 함께 활동했다는 것도 특별한 경우 아닌가요. 좋은 일이지만 제게는 큰 아픔이기도 했습니다. 가장 먼저 소리를 시작한 형님이 아픔을 겪게 되었거든요. 당시 창극단 오디션은 대단했습니다. 열 몇 명씩 탈락하는 일도 있었는데 어느 해인가 형님이 오디션에서 탈락하신 거예요. 통보를 받고 제가 형님을 모시고 가는데 버스 정류장에서 털썩 주저앉으시더라고요. 그때 나는 형님 덕분에 소리를 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보면 동생들에게 치어 빛도 못보고 이런 일을 당하는가 싶어 죄송하고 만감이 교차했어요. 형님은 이후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먹고 살아야 하니 도배일 미장일까지 했지요. 다시 복귀는 했지만 또 시련을 겪으셨는데, 이후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어 50대 초반에 간경화로 세상을 떠나셨죠. -듣다보니 궁금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소리를 늦게 시작하셨고 정통 판소리가 아닌 창극 소리를 먼저 시작한 셈인데, 그 과정에서 혹시 갈등이나 개인적인 고민을 없었습니까. 왜 갈등이 없었겠습니까. 창극단에 먼저 들어갔으니 창극을 위주로 하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정통 소리를 공부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주위에서는 왕기석 소리는 정통 소리가 아니라 창극 소리라는 얘기가 있었어요. 그 편견을 벗고 싶어 더 열심히 소리 공부를 했어요. -그 과정이 궁금합니다. 당시 허규 극장장님이 당대의 명창들인 정권진 박봉술 정광수 강도근 성우향 오정숙 선생님을 모셔다 단원들을 대상으로 판소리 다섯 바탕을 가르쳤어요. 그런데 단원들 중에는 스승의 유파가 아니라는 이유로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지요. 다행히 저희 선생님은 여러 계보의 소리를 배우라고 권하셔서 다양한 소리를 섭렵할 수 있었어요. 저에게는 엄청난 소리가 되었죠. 돌이켜보면 제가 그나마 지금 이 소리로 버틸 수 있는 것은 그때 그 선생님들에게 배웠던 소리 덕분이에요. -전주대사습 도전도 창극소리에 대한 편견 때문이었습니까. 그 이유가 컸습니다. 창극소리만 잘하는 소리꾼이란 편견도 벗고 싶었지만 정통 판소리는 궁극적으로 제가 온전히 감당해야할 과제였으니까요. -완창은 언제부터 시작하셨습니까. 거의 2년에 한번 꼴로 완창회를 갖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1994년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수궁가완창을 처음 했어요. 지금까지 적벽가와 심청가까지 세 바탕을 완창했습니다. 세 바탕의 제가 다 다르죠. 사실 다섯 바탕을 다 배우긴 했는데 아직 완창에는 자신이 없습니다. 기회가 되면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완창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완창은 판소리가 사라져가는 시점에서 박동진 선생님이 시도하셨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판소리사가 새롭게 쓰인 셈이죠. 완창은 엄청난 시간을 쏟아야만 가능한 대상이지만 꼭 해내야 하는 과정이기도 해서 소리하는 사람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목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제가 생각하는 완창은 그 의미가 다릅니다. 완창을 위한 완창이라면 그 굴레에 매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죠. 결국 중요한 것은 완창을 할 수 있는 능력이거든요. 그 능력을 갖추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와 싸우고 어려움을 극복해내는 노력과 그 노력이 이어내는 과정이 더 중요합니다. -소리의 공력을 갖추지 못했는데도 완창 그 자체에 의미를 두는 풍토는 바뀌어야겠군요. 소리는 평생을 해야 하는 길입니다. 죽을 때까지 공부해도 소리다운 소리를 못하고 마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득음? 그것은 정말 함부로 불러서도 안 될 신성한 영역입니다. 득음은 신이 소리꾼에게 주는 가장 값진 선물이에요. 소리는 어떤 자세 어느 만큼의 노력으로 공부하느냐는 과정이 훨씬 중요합니다. 완창, 그 자체에만 의미를 두는 것은 잘못된 일이지요. -판소리가 대중화되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하셨는데 가장 큰 과제가 무엇인가요. 현실적으로 벽이 너무 높습니다. 국악의 많은 부분이 시대와 소통하면서 동시대의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유독 판소리는 과거의 전통을 앞세워 다섯 바탕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거든요. 제가 생각하는 모든 음악은 그 시대에 맞는 음악이 되어야 합니다. 옛것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은 그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고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법고 창신, 옛것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음악도 필요합니다. 기악만 해도 그 굴레를 많이 벗었는데 판소리는 여전히 그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시대와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는 판소리의 문제점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창작판소리가 많이 만들어지지 못하는 현실입니다. 창작판소리는 판소리의 본류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가치를 살려내는 그릇입니다. 전통 판소리 다섯 바탕도 따지고 보면 그 시대를 담은 것이거든요. 그렇다면 우리시대에는 우리시대의 이야기를 담는 음악이 만들어져야 당연하죠. 형식도 그렇고요. 판소리가 누구나 불러보고 싶고 감동하는 그런 음악이 된다면 대중화는 자연스럽게 이루지지 않겠습니까. 우리 시대의 광대는 우리시대의 이야기를 담아야지요. 그가 지난 연말 대한민국예술원상 시상식 이야기를 들려줬다. 소설가 조정래 선생님이 그러시더군요. 노력을 이기는 재능은 없다 고. 제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타고 났어도 노력을 이길 수는 없다는 말씀인데, 저에게는 그러니 죽을 때까지 소리다운 소리를 하기 위해 노력하라는 이야기로 들렸습니다. 인터뷰 말미, 그에게 판소리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나에게 판소리는 즐겁게 노는 일이다. 나의 판소리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잘 놀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광대로서의 목표이고 꿈이라고 했다. 그의 노력으로 빚어지는 새로운 판소리가 우리를 잘 놀 수 있게 하는 판으로 불러낼 날이 머지않았다. ●왕기석 명창은 - 완창만 30회 돌파창작 창극판소리 제작 등 영역 확대도 왕기석 명창은 정읍 옹동이 고향이다. 6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세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병으로 잃은 큰 딸을 늘 가슴에 안고 살았던 그의 어머니는 여덟 남매를 키우느라 생계에 쪼들리면서도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교육시키고 싶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열심히 공부해 성공하면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 역시 정규 교육으로는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였다. 그가 다니던 초등학교 졸업생 60명 중 두 명이 중학교 진학을 하지 못했는데 그 중 한명이 그였다. 그즈음 그의 가족은 서울로 이사를 했다. 중학교를 가고 싶었지만 당장 먹고사는 일이 힘들었던 가족들 사이에서 그는 어린나이로 노동판에 뛰어 들어야 했다. 열여덟 살 되던 해 소리를 만났다. 가족보다 먼저 서울로 가 국립창극단 단원이 된 셋째 형 기창씨 덕분이었다. 형을 만나러 창극단을 찾아온 그에게 남해성 명창이 너도 소리 한번 해보라고 권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형의 소리를 흉내내보는 것이 전부였는데, 안목 있는 명창은 목이 좋은 그를 창극단 연수단원으로 끌어 들였다. 남해성 명창의 제자가 된 그는 창극단 연수 단원을 거쳐 1983년 창극단 정단원이 되었다. 다른 사람보다 늦게 들어섰지만 노력하면 얼마든지 좋은 소리꾼이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된 그는 남자 소리꾼이 부족했던 창극 무대에서 돋보이는 재목으로 성장했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문화예술축전 참가작인 용마골 장사를 시작으로 춘향전 심청가 천명 우루왕 서편제 등 150여 편의 창극무대가 그를 주역으로 불렀다. 덕분에 우리 창극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배우가 되었지만 그의 이름은 언제나 창극소리 잘하는 소리꾼으로만 분류되었다. 전주대사습놀이에 도전한 것도 그 때문이었는데 그는 결국 31회 전주대사습이 배출한 명창이 되었다. 창극무대에서만 빛나지 않고 판소리 명창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도 그 이후부터였다. 한해씩 건너가며 이어온 수궁가 적벽가 심청가 완창 무대는 30회를 넘었으며 2004년 독일 함부르크와 베를린에서 가진 다섯 시간 동안의 심청가를 시작으로 이어진 여러 차례의 해외 완창 무대는 한국의 판소리와 그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검정고시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추계예술대와 중앙대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창작과 제작에도 열정을 쏟아 <어린이창극>의 영역을 확산하고 전통 판소리 다섯 바탕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해내는 작업에 참여해왔으며 논개 백범 김구를 비롯한 창작 창극작품과 전주사투리 녹두장군 비빔밥전을 비롯한 여러 편의 창작판소리를 만들었다. 2014년 전라북도무형문화재 판소리 <수궁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으며 KBS국악대상(2014), 대한민국문화예술상(2017) 등을 수상했다. 2013년 국립창극단을 그만 둔 뒤 고향에 내려와 정읍시립국악단 단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가족창극> <마당창극> 등 다양한 형식의 창극 작품을 개발해 관객들과 만나는 판을 확대해나가고 있다.

  • 기획
  • 김은정
  • 2018.02.02 23:02

[전라도 정도 1000년, 창조와 대안의 땅 '전라북도'] ③ '대한' 국호 발상지 전북 - 고조선 명맥 이은 '삼한' 총괄해 '대한' 으로 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다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란 나라이름은 언제 그리고 왜 대한이란 명칭으로 생겨났을까? 사실 우리가 월드컵 경기 등 국가 행사 때 응원 구호로 외치는 대~한민국! 국호는 근현대사에서 우리 민족이 당한 아픔과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의 역사가 담긴 나라이름이다.대한민국이라는 국호는 1910년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긴 지 9년 후인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을 통해 나타났다. 즉, 민족대표와 전 국민적 참여를 통해 독립을 선언한 이후 독립된 나라를 다스리기 위한 정부를 세우기 위해 국내 및 노령, 중국 등 각 지역의 독립운동단체 대표들이 상해에 모여 정부수립을 논의했다.그리고 1919년 4월 10일 임시정부의 첫 의정원 회의에서 국호를 결정했다. 당시 몇 가지 논의안이 있자 신석우 선생이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다시 흥해보자라고 제안하여 1897년 세워진 대한제국에서 황제를 의미하는 제국(帝國)을 민주공화국을 뜻하는 민국(民國)으로 바꾸어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국호를 정했다. 다만 국권을 상징하는 대한명칭에 영토와 국민을 일제에게서 아직 회복 못했으니 임시를 붙여 정부이름을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결정한 것이다.임시정부가 사용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이름은 해방 후 1948년 7월 소집된 제헌국회에서 새 나라의 국호로서 대한민국을 정하면서 그대로 계승되었다. 그리고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승만은 당시 연호를 대한민국 30년으로 표현하였고, 1948년에 처음 발행된 대한민국 관보 1호에는 발행일이 대한민국 30년 9월 1일로 적혀있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하였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1987년 개정된 현재의 헌법 전문에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계승의식을 명확히 하고 있다.△대한제국, 왜 조선이 아닌 대한을 국호로 정했나?대한(大韓)이란 나라이름의 유래는 1897년 10월 고종이 기존의 나라이름 조선(朝鮮)을 폐기하고 새롭게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선포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조선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인 을미사변,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 등 국내외 혼란으로 조선왕조의 혼란과 국가적 위기가 매우 커진 상황이었다. 고종은 나라의 독립과 자존을 확립하기 위해 중국과의 예속관계를 단절함과 동시에 황제국가 체제로 일신하는 국가체제 변화를 모색하고 있었다.이 상황에서 기존의 국호인 조선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독립성을 부각하기 어렵다고 보아 역사적 명분과 근거를 가진 새로운 국호제정이 필요하였다. 이에 따라 고조선의 역사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사용된 조선의 의미를 유지하면서도 보다 독립적인 명칭으로 찾은 것이 마한, 진한, 변한 등 삼한(三韓)을 총괄한 대한(大韓)이란 표현이었다.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의 반조문의 내용을 보면 대한의 의미는 단군의 고조선에서부터 변한, 진한, 마한 즉 삼한을 통일한 고려와 이를 계승한 조선 등을 망라하는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다.그렇다면 삼한으로 확산된 한(韓)이란 명칭은 어떻게 나타났을까?△고조선 준왕의 남래와 삼한정통론《삼국지》 동이전 등 중국사서에는 기원전 194년경 고조선의 준왕이 신하인 위만의 정변으로 나라를 빼앗긴 후 남쪽 지역으로 이동하여 한(韓) 왕이 되어 마한을 다스렸고 이후 진한, 변한의 명칭이 생겼다는 기록이 나타나 있다.여기서 한(韓)이란 명칭은 동북아에서 왕을 의미하는 Khan(한<汗>) 또는 크다는 의미의 고유어 한을 한자로 쓴 것으로 파악된다. 바로 이 명칭이 삼한의 한명칭이 된 것이다. 한편 고조선의 준왕이 남쪽으로 이동한 지역에 대해 《제왕운기》를 비롯하여 《고려사》 지리지, 《세종실록》 지리지 등 대부분 전통 지리서는 현재 전라북도 익산지역이 고조선 준왕이 남쪽으로 내려 온 지역이라고 전한다.이 같은 사실은 현재 전라북도권 지역에서 한이란 명칭이 시작되어 마한, 진한, 변한 등 삼한의 명칭으로 확장되었음을 보여준다.그런데 이 사실에 대해 조선후기 학자들은 우리 역사의 정통이 단군조선이래 고조선 준왕을 거쳐 마한지역으로 계승되었다는 마한(삼한)정통론을 주장하여 역사 정통성이 삼한지역에 있음이 강조되었다. 위만이 정권을 장악했지만 이는 불법적인 것으로 정통성은 남쪽으로 이동한 준왕에게 있고 이를 계승한 삼한지역에 역사의 정통이 계승되었다는 것이다.한편 금마 등 익산지역과 함께 만경강을 둘러싸고 있는 전주지역에서 청동기시대 중요 유물과 유적이 발견되면서 고조선과의 연계성이 고고학적으로도 확인되고 있다.특히, 익산지역의 초기 청동기, 철기 계통 유적과 유물 및 최근 전주 혁신도시 건설과정에서 확인된 청동기, 철기유적은 이들 공간이 만경강을 중심으로 일찍부터 중요 거점지역으로 성장하였으며, 고조선계통 유물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고조선계 유민이 이동한 지역이었음을 보여준다.고조선 준왕의 이동과 한이라는 명칭의 사용, 그리고 조선시대 고조선의 정통성이 삼한지역으로 계승되었다는 삼한정통론 등으로 이어진 계승의식이 있었기에 대한이라는 명칭을 국호로 사용하게 되었는데 그 중심지가 전북이었던 것이다.이를 상징하듯이 고종은 1899년 전주 건지산에 전주이씨 시조의 무덤자리로 추정되는 곳에 대한조경단을 설치했다.이같이 전라북도 지역은 만경강과 동진강을 둘러싼 호남평야를 중심으로 고조선의 정통을 이은 마한의 터전으로서 삼한에서 삼국으로 연결되는 우리 역사 정통의 중심이자 우리의 자랑스러운 나라이름 대한국호의 발상지로서 자리하고 있다.

  • 기획
  • 기고
  • 2018.02.01 23:02

[우리고을 인물 열전 20. 임실군 오수면] - 조선시대 교통·상업 중심지, 실력·인품 겸비한 인물 많이 나

오수면(獒樹面)은 임실의 남쪽 끝, 남원과의 경계에 위치한다. 주변으로 멀리 팔공산 등이 둘러싸고 있는 해발 130m의 장방형 분지이며, 남북의 길이는 12㎞ 정도이다.소설가 최명희는 혼불에서 오수에 대한 소개를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남원도호부로부터 서울까지의 거리는 655리인데 걸어서 이레하고 반 날이 걸리느니라고 하였다. 그래서 철도가 생기기 전, 멀리 한양길을 떠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괴나리봇짐을 등에 메고, 몇 켤레의 짚신을 갈아 신으며,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여 걷고 걸었던 것이다. (중략) 전라도 길은 섬진강의 유역을 따라 남원을 거쳐서 전주를 지나고 공주로 접어들어 서울로 가는데, 비교적 순탄한 길이라, 한양에서 뻗은 팔도 길을 통틀어 말할 때, 남원을 통하는 전라도 길이 가장 부드러운 길이라고 일컬어 말했다. (중략) 예전에는 이런 길목의 요소마다 찰방(察訪)이 있었고, 찰방이 있는 곳을 역(驛)이라 하였다. 찰방은 조선시대 각 도의 역참을 관리하던 종6품의 외관직으로(중략) 이들은 역승의 잘잘못을 규찰하거나 주군수령의 탐학과 민간의 고통을 살펴서 엄히 다스리는 것이 주임무였다. (중략) 찰방이 있는 곳은 한양으로부터 그 고을에 들어가는 첫 머리 초입에 위치하고 있었으니, 세상 돌아가는 일과 시정의 소식에 빨랐다. 그래서 장사하는 시정아치들이 사방에서 모여들고, 물산의 교류가 저절로 이루어져 큰 장이 서게 되었다. (중략) 조선시대 남원진도호부의 찰방은 오수역에 주둔하고 있었다. 한양에서 남쪽으로 내려올 때 남원진의 입구는 오수였던 것이다. 이 오수역에는 역사와 찰방의 관사, 그리고 역의 소유인 둔전이 있고, 역마 스물일곱 필이 역졸과 함께 항상 대비되어 있었다. (중략) 오수 찰방이 관할하는 곳은 11역, 15원이었다. 오수역 찰방은 모두 스물여섯 군데나 맡아 관장하였던 것이다. 매안에서 오수역까지는 시오리 길이요, 남원 읍내까지는 삼십 리 길이었다.남원의 입구 오수역은 관리들이 역졸을 부려 관물을 운송하고, 공문서를 전달하는 통로였다. 관리와 일반 길손들이 역과 원 등에 머물고 숙박했다. 장이 서는 등 사람들이 항상 붐비는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 핫 플레이스였다. 지금도 오수 지역은 전주~남원간 자동차전용도로, 익산~순천 고속도로, 전라선 철도가 통과한다.오수지역은 동쪽과 서쪽이 높은 산이고, 남과 북은 터진 형세를 하고 있다. 장수군 산서지역에서 발원하는 오수천은 지사면 들판을 거쳐 오수를 통과하면서 율천의 물을 합수하고, 순창군 동계면에 이르러서 섬진강에 합류, 전남 곡성과 구례, 경남 하동을 거쳐 남해로 빠져 나간다.오수면 지역은 고려시대 남원부(南原府) 둔남방(屯南坊)에 속했다. 조선시대에는 둔덕방(屯德坊)과 남면으로 분리되었고,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개편 때 다시 통합되면서 둔남면(屯南面)으로 개칭됐다. 이때 남원군 덕과면 오수리와 대명리 일부가 둔남면으로 편입되었다. 또 1983년 2월 16일 조정 때에는 남원군 덕과면 금암리가 편입됐다. 14개 법정리, 32개 행정리가 있다.고려시대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둔남이란 지역 명칭은 아쉽게도 주인을 살린 의로운 개(義犬) 캐릭터를 내세우자는 지역 여론 속에서 1992년 8월 10일 오수면(獒樹面)으로 변경됐다. 임실군은 오수에 의견공원을 만들어 지역발전을 모색하고 있다.오수면 금암리 오수의견공원 일대에 건설 중인전라북도 양궁 전용경기장이 오는 6월 완공 예정이다. 98억 원의 예산이 투입되는 전북도 양궁장은 오수 의견관광지 부지 9만2천400㎡에 세워지는데, 전북도는 1단계로 45억 원을 들여 전용 훈련장을 건설하고 2단계로 53억 원을 추가해 전용 양궁장으로 확대할 계획이다.오수면은 인근 삼계면과 지사면, 장수군 산서면과 함께 인물의 고장으로 이름이 높다. 500년 종가 이웅재 고가가 소재하는 둔덕리 일대(일명 둔데기 마을)에 남원 5현이라고 불린 폄재 최온(영의정 최항의 후손, 인조의 아들 인평대군 강학을 맡은 인물) 선생을 비롯해 이대윤, 최상중, 이상형, 하만리 등 실력과 인품, 의를 겸비한 인물이 많이 났다. 옛날에는 남원 인물의 반은 둔데기에서 난다고 할 정도였다.오수 사람들은 임진왜란, 정유재란, 일제강점기 등 국란 때 나라를 위해 앞장 섰다. 오수초등학교 학생 400여 명이 이광수 선생의 지휘 하에 3월10일 독립만세를 불렀고, 이기송 선생 등은 3월23일과 24일 양일간 오수장터 등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오수의 전주이씨 독립애국지사는 이송의 등 16명에 이른다.△관계금암리 출신 김능태(82)씨는 총무처 예산과장 등을 역임했다. 오수리 출신 김용태(68)씨는 전북도 건설물류국장을 지냈다. 전북도 자치행정국장을 지냈던 용정리 출신 이강오(61)씨는 현재 전북도 대외협력국장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이강안(68) 씨는 완산구청장, 전주문화재단 상임이사를 거쳐 광복회 전북지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둔덕리 출신 김태수(68)씨는 완산구청장을 지냈고, 이강칠씨(57)는 국민연금관리공단 전주완주지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전북도청 노흥래(57) 체육정책과장은 한암리 출신, 곽승기(57) 전북도 예산과장은 주천리 출신, 전북선관위 홍보과장을 지낸 이규정(62)씨는 금암리 출신이다.△정계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은 만주에서 태어나 장수 산서면과 오수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진다. 또 제5~7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한상준 의원은 인근 삼계면 출신이나 오수초등학교를 다녔다. 제5대 도의회 의장을 지낸 이강국(80)씨는 오수리가 고향이다.△군경오산리 출신 김보영씨는 육사 26기로 육군헌병감(준장)을 지냈고, 봉천리 출신 박창희(65)씨는 육사 32기로 62사단장을 지낸 예비역 육군준장이다. 용정리 출신 이강수(66)씨는 전북지방경찰청 정보과장, 임실경찰서장 등을 역임했다.△법조용정리가 고향인 이강국(73) 서울대 석좌교수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제8회 사법고시에 합격한 법조인이다. 대법관, 법원행정처장, 제4대 헌법재판소장 등을 지냈다. 주천리 출신 곽종훈 변호사는 의정부지법원장을 지냈고, 안춘식, 김길수, 곽세일 변호사도 오수가 고향이다.△교육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의 동생 정대현 서울시립대 환경조각과 교수, 정명희 고려대 불어과 교수는 오수리 출신이다. 또 김무영 전북대 스포츠학과 교수도 오수리가 고향이다. 전북대 화학공학과 김춘영교수는 오산리다.△경제휴대폰 부품 등 무선통신기기 관련 제조업체인 (주)인탑스 김재경 회장(72)의 고향이 오수리다. 전주제일고(옛 전주상고), 한양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김 회장은 중견기업 신화공업 근무 경험을 토대로 1981년 (주)인탑스 전신인 신영화학공업사를 설립, 각고의 노력 끝에 인탑스를 국내 손꼽히는 강소 기업으로 일궈냈다.또 김만두 전 한전산업개발 사장도 오수 출신이고, (사)코스닥협회 제1대 상근부회장을 역임한 정강현씨도 오수리가 고향이다.△문화예술언론한제욱 전 전북일보 이사(62)는 봉천리 출신, 이강덕 KBS 대외협력실장은 군평리 출신이다. 대한민국 서예박람회 심사위원, 운영위원 등을 지낸 서예가 장암 허민수(65)씨는 오수리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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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호
  • 2018.01.31 23:0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26. 고을의 수호신 장승 - 서민 대변하는 조상의 얼굴…지역 문화자원으로 계승해야

아이고 이것이 웬일인가, 나무하러 간다더니 장승 빼어 왔네 그려. 나무가 암만 귀하다 하되 장승 패어 땐단 말은 언문책(諺文冊) 잔주(注)에도 듣도 보도 못한 말. 만일 패어 땠으면 목신동증(木神動症), 조왕동증(竈王動症) 목숨 보전 못 할 테니 어서 급히 지고 가서 선 자리에 도로 세우고 왼발 굴러 진언(眞言)치고 다른 길로 돌아옵쇼.신재효가 정리한 판소리 여섯 마당 중 한 작품이기도 하고, 남원 출신의 명창 송흥록이 특별히 잘 불렀다고 전해지는 판소리 《변강쇠가》 속 한 대목이다. 가루지기타령, 횡부가라고도 불리는 이 사설은, 주인공 변강쇠가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나무 대신 장승을 빼어온 것을 보고 부인 옹녀가 놀라 내뱉는 말이다. 목신동증은 나무 신이 노해서 얻는다는 병이고, 조왕동증은 부엌 신이 노해서 얻는다는 병인데, 벌을 받기 전에 장승을 어서 되돌려 놓으라는 부인의 말을 듣지 않고 장승을 패어 불을 피웠던 변강쇠는 결국 전국 장승들의 저주를 받아 온갖 병을 얻고 장승처럼 서서 죽게 된다. 장승 설화를 일부 근원설화로 하는 변강쇠가는 지리산에 있는 남원시 산내면이 그 배경으로 알려져 있다. 변강쇠가에 등장한 나무 장승뿐만 아니라 우리 지역에는 특별한 장승들이 남아 있다.주로 돌이나 나무로 만들어졌던 장승들은 마을이나 절 입구, 고개 등지와 길가에 세워져 도로 위 이정표나 마을의 랜드마크 역할을 담당했다. 어찌 보면 무섭고 근엄하기도 하고, 한없이 천진하고 인자해 보이기도 하는 장승은 세밀하고 정교하게 다듬어진 것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에 의해 툭툭 쳐내듯 만들어져 투박하고 친근한 모습이다. 이 같은 장승은 마을의 안팎을 구분하는 역할뿐만 아니라 마을 밖에서 들어오는 재앙을 막아주는 신령한 수호신이었다.지금에야 장승이라는 말로 통일해 부르지만 조선시대에는 한자로 후(堠), 장생(長栍), 장승(長丞, 張丞, 長承) 등으로 썼고, 지역에 따라 장성장싱장신, 벅수벅슈벅시법수, 당산할아버지, 수살수살막이수살목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렀다.장승이라는 말의 어원은 1527년 최세진이 한글로 해석한 한자 사전 『훈몽자회』에서 후(堠)를 설명하면서 댱승 후라 기록하였으며, 이 댱승이 쟝승에서 장승으로 변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벅수 등의 말은 호남과 영남지방에서 불리었던 것으로, 바보나 눈치 없는 사람의 뜻으로 쓰여지기도 했다. 멍하니 장승처럼 그저 눈치 없이 서 있다는 뜻에서 유래된 것으로 벅수 이빨을 세면 벅수가 된다란 속담이 있고 벅수같이 서 있다란 말이 남아있다. 또한, 수살 등의 이름은 장승을 세워서 마을 안으로 들어오는 살(煞)인 나쁜 재액을 막아 준다 하여 붙인 말로, 민속문화 형태로 천하대장군, 지하대장군이 남성, 여성 형태의 장승과 벅수로 오늘날 일부 전해지고 있다.최초의 장승은 선인의 얼굴을 새긴 원시 신앙물로서 유목 생활과 농경문화의 소산으로 파악되지만, 실제 역사적 유래는 몇 가지 설이 존재한다. 분명하게 추측되는 것은 일종의 수호 신상으로서 공통적 염원을 담은 상징이 되어오다가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들어 불교의 영향으로 사찰의 장생표(長生標)로 사용되었다 한다. 전해지는 기원 중 신라시대 소지왕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신라 21대 왕인 소지왕이 역참(驛站) 제도의 일환으로 나라의 땅과 길을 과학적으로 관리하며 안전한 길을 안내하고 알려주기 위한 푯말로서 장승을 5리 또는 10리마다 세웠다는 것이다. 그 밖에 조선시대에는 『경국대전』에 의하여 중국에서 길을 통해 들어오는 좋지 못한 귀신을 막고자 십 리마다 세운 이정표에 무서운 얼굴을 새기고 장생이라 한 것 등 장승의 기원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전해진다.다양한 역할을 담당한 장승은, 그 역할 구분에 따라 다르게 불리었는데 마을의 이정표나 안내판 구실을 했던 장승은 노표장승이라고 하였고, 농경과 수렵 및 땔감을 얻는 땅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세운 장승은 경계표 장승이라고 했다. 방위신 역할을 했던 방위 수호 장승이 있으며, 성문 앞에 세워 성문을 지키는 역할을 했던 성문 수호 장승도 있다. 마을 입구에 세워 역병과 재앙을 막았던 장승, 고을과 마을의 지맥이나 수구가 허한 곳을 다스리기 위해 세웠던 읍락 비보 장승이 있으며, 신령한 기운을 품고 제사를 지내거나 소원을 비는 신앙의 대상이었던 장승과 사찰 입구에 세워 경내의 청정과 존엄을 지켰던 불법 수호의 장승도 있다. 산천 비보라고 하여 풍수도참설에 의한 국기의 연장과 군왕의 장생을 기원하기 위해 사찰 주위에 세웠던 장승은 얼굴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장승은 그 역할이나 지역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어찌 보면 못생기고 투박한 모습이지만 우직하고 나름의 멋을 지닌 장승들은 당시 민중의 모습을 표현한 듯하다. 제주도의 돌하르방의 얼굴과 비슷한 모습이 여러 돌장승에서 언뜻 보이기도 하는데, 지리산 기슭 남원 운봉 서천리에 자리한 돌장승은 마을의 수호신으로 방어대장군, 진서대장군(중요 민속자료 제20호)이라 새겨져 있는데, 세모꼴 벙거지 형상에 둥근 눈망울, 주먹코와 합죽이 모양의 다문 입 등 그 표정이 천진하다.진서대장군은 1989년 도난을 당했다가 되찾았다 하는데, 목이 부러져 연결해 놓은 자국으로 인해 부부싸움을 했다는 설과 두 장군이 싸우다 목이 부러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산내면 실상사의 석장승(중요 민속자료 제15호)도 남원을 대표하는 장승이다. 조선시대 영조 1년인 1725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장승으로 높이 250㎝~290㎝가량에 통방울눈에 주먹코를 하고 커다란 귀에 벙거지를 쓴 익살스러운 모습의 장승이다. 원래는 실상사를 지키는 상징적인 장승으로 절로 가는 냇가에 세워진 두 쌍의 돌장승으로 네 개가 있었으나 한 개가 1936년 홍수에 유실되는 바람에 현재 세 개만 남아있다.장승촌과 장승축제가 이어져 오는 순창에는 특별한 장승들이 전해지고 있는데, 순창 충신리 장승(중요 민속 문화재 제101호)은 높이 180㎝로 한 면만 다듬어 장승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머리는 왼쪽으로 경사지듯 깎여 있고 다른 장승에 비해 작은 눈을 하고 턱 아래에 가슴의 흔적인 듯한 조각이 특이하다.순창의 북쪽을 지켜주던 남계리의 장승(중요 민속 문화재 제102호)은 높이 175㎝로 연지 곤지를 찍은 듯한 둥근 점이 볼에 있고, 양미간에는 불상의 눈썹 사이에 있는 백호를 조각하였고, 메롱 하듯 혀를 내밀고 웃는 모습이 해학적이다. 장승의 콧날이 뭉툭하게 잘려져 있는 것은 장승의 코가 아들을 낳는 데 효험이 있다고 믿은 까닭에 떼어진 흔적으로 보인다. 충신리와 남계리에 있던 두 장승은 2004년도에 순창문화회관으로 옮겨져 전해지고 있다.장승은 여러 가지 역할과 모습으로 조상들의 삶과 정서를 다양하게 표현하였다. 그러나 장승은 역참제도가 폐지된 이후부터 점차 소멸되었는데,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개화의 바람이 불면서 그저 미신과 구습의 하나로 치부되면서 생명력을 잃어갔다. 하지만, 장승이 예전처럼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자 신앙의 대상이 아닐지는 몰라도, 민속문화의 상징으로 서민을 대변하는 조상의 얼굴인 것은 변함없다. 장승의 역할과 상징은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점차 사라져가고 있지만, 과거 조상들이 품었던 믿음과 가치는 선조들의 손길이 스민 장승의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절절한 기원의 마음이 담긴 채 우리를 너그럽게 바라보며 지켜주는 장승을 지역의 자원으로 잘 전승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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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1.19 23:02

[전라도 정도 1000년, 창조와 대안의 땅 '전라북도'] ② 세계유산이 된 고인돌과 전북의 청동기·철기문화 - 익산-전주지역, 선사-역사시대 잇는 거점 증명

△전북의 고인돌, 세계유산이 되다한국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선사유적은 고인돌이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에 성행하여 초기 철기시대까지 존속한 거석문화(巨石文化)의 일종으로 정치세력 형성과 국가성립시기의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 고인돌은 나라에 따라 이름이 다른데, 한국에서는 고인돌(굄돌)로 부르는데 한자로는 한국과 일본에서 지석묘(支받침 지 石돌 석 墓무덤 묘), 중국에서는 석붕(石돌석 棚시렁 붕), 유럽 등지에서는 돌멘(Dolmen) 등의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이 고인돌은 선사시대 무덤으로 이해되는데 조상신에게 제사지내는 제단이자 신전같은 의미로도 파악된다.흥미로운 것은 전 세계에 존재하는 고인돌 가운데 가장 많은 고인돌이 한반도와 만주지역에 존재하며 그중에서도 전라북도 지역이 가장 많다. 이같이 한반도에 집중적으로 퍼져 있는 고인돌의 기원에 관해서는 바다를 통해 동남아시아 또는 중국 동북부 지역에서 전해졌다는 전파설과 함께 주변 지역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많다는 점과 축조연대가 이르다는 점에서 주변 지역과 관계없이 자체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자생설이 맞서고 있어 아직까지 뚜렷하게 설명하기는 어렵다.이 같은 우리나라의 고인돌 중 전라북도의 고인돌은 예로부터 꽤 유명하였다. 즉, 820여년전인 서기 1200년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는 전주에서 관리를 지낼 때 익산지역을 지나며 일부러 소문이 자자한 익산의 지석묘를 찾아 간 기록을 『동국이상국집』에 남겼다. 그리고 이 기록이 우리 역사상 최초의 고인돌 기록이었다.다음날 금마군(현재 익산)으로 가는 중에 이른바 고인돌(支石)이란 것을 찾아가 보았다. 고인돌이란 것은 세상에 전하기를 옛날 성인(聖人)께서 고여 놓은 것이라 하였는 데 과연 기이한 모습이 매우 신기하였다. 《동국이상국집》고려시대에도 이미 소문이 자자했던 전라북도의 고인돌은 만주-한반도 지역에 집중 분포된 세계 고인돌을 대표하여 2000년 11월 29일, 강화, 화순의 고인돌군과 함께 고창지역의 고인돌군락이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기원전 5~4세기경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양 최대의 고인돌 집단 군락지인 고창 지석묘군(죽림리, 상갑리 고인돌군)은 고창읍에서 북서쪽으로 약 10㎞ 남짓한 지점에 자리한 매산마을을 중심으로 야산의 기슭에 큰 군집을 이루고 분포되어 있다. 상갑리의 경우 야산의 남사면 기슭에 약 2.5m 거리에 600여 기의 고인돌이 산줄기 방향으로 분포되어 있다. 도산리의 탁자식 고인돌은 가장 남쪽에 분포되어 있어 그 의미가 자료적 가치가 높다고 하겠다. 고창의 고인돌군은 전 세계에서도 가장 밀집된 곳으로 대표적인 2가지 고인돌 형태가 공존해 청동기 시대 묘제 양상과 당시 사람들의 사상과 문화 등을 알 수 있는 공간이다. 이 같은 유적은 전라북도 선사문화의 특성을 잘 반영한 것으로 이같은 문화를 토대로 마한으로 상징되는 초기 역사의 중심이 전라북도 권역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한국 청동기, 철기문화의 중심 만경강 유역최근까지 진행된 고고학계의 발굴 성과에 의하면 기원전 3세기경 고인돌문화는 쇠퇴하고 중국 랴오닝지역 문화가 한반도지역으로 옮겨오며 새로운 철기문화가 한반도 서해안권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즉, 경기, 충청, 전라의 해안을 따라 마한으로 통칭되는 세력이 형성되었는데 금강유역과 함께 만경강을 사이에 둔 익산-전주-완주지역이 새로운 중심이었음이 최근 발굴 성과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즉, 이 일대에서 석관묘나 움무덤에서 청동검과 청동거울 및 철제무기와 토기, 구슬 등이 출토되며 마한문화의 중심모습을 확연히 보여주고 있다. 또한 완주 상림리에서 발견된 중국식 동검문화는 만경강으로 연결된 교통로가 선사이래로 많은 문화가 전래된 통로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기원전 2세기를 전후하여 중국 전국시대의 철기가 유입되면서 고조선 및 중국계 문화가 전래되면서 이 지역은 마한의 중심으로 성장하였다.전라북도 권역에서 초기 목관을 쓴 토광묘의 중심 분포권은 고조선 준왕의 남래지로 알려져 있는 익산을 중심으로 하는 만경강 유역으로 이 문화세력은 기원전 2세기경에 절정을 이루었다. 그리고 기원전 2세기 이후에는 완주 갈동, 신풍, 덕동, 전주 원장동, 중인동, 중화산동 등 만경강 남쪽의 전주완주 일대가 중심이 된다. 이 같은 철기문화의 유입은 고조선 준왕의 남래 및 고조선 유민의 이동으로 촉발되어 마한(馬韓) 성립의 중심으로 익산과 전주지역이 자리하게 된다.한편, 목관을 쓴 토광묘는 기원 후부터는 점차 사라져 무덤주위에 구덩이를 판 주구묘로 대체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목관)토광묘 축조를 담당하였던 세력이 준왕세력이라면 주구묘를 축조한 세력은 토착 마한인들로 볼 수 있으며 준왕세력이 약화되어 사라진 이후에 다시 마한인들에 의해 마한의 묘제인 둘레에 구덩을 파 무덤을 감싼 주구묘가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같이 익산-전주 지역은 전통시대 문헌자료와 1960년대 이래 발견된 익산의 청동, 철기유적 그리고 최근 전주-완주 혁신도시 건설과정에서 발견된 다량의 청동기, 철기유적을 함께 고려할 때 한국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잇는 중요한 거점지역이었음을 보여준다.즉, 고조선시기 위만에 의해 왕위를 빼앗긴 준왕이 신하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온 지역으로 금마지역이 구체적으로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 같은 역사적 사실에 부응하는 기원전 5~2세기경 청동기, 철기유적이 서해안 항로 가운데 만경강유역 공간인 익산-전주-완주로 연결되는 지역에 분포하고 있음이 수십 군데 유적에서 확인된다. 이같이 전라북도의 대표적 강줄기인 만경강 유역 공간은 한국사의 첫 역사를 연 고조선의 청동기, 철기문화가 한반도 중남부로 전해진 첫 공간이며 역사적 기록과 고고학적 유적, 유물을 통해 확인된 마한의 중심으로 호남지역을 대표해 성장한 곳이다. <조법종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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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1.18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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