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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베로나 축제 '아이다' 주역 소프라노 임세경 "세월 갈수록 더 빛나는 가수로 롱런하는 게 꿈이죠"

2015년 여름,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는 세계적인 오페라 축제 아레나 디 베로나에 한국인 소프라노가 주역으로 선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100년이 넘는 베로나 축제 역사상 한국인 소프라노가 주역을 맡는 것은 처음. 당연히 그 주인공에 관심이 쏠렸다. 전주 출신 소프라노 임세경씨(42). 그 이전부터 유럽의 오페라 무대에서 그의 존재는 빛났었지만 베로나 축제 발탁은 놀랍고도 새로웠다. 베로나의 아레나 원형극장은 모든 오페라 가수들에게 언젠가는 꼭 서고 싶은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그런 영광이 쉽게 주어지는 것도 아니거니와 극장의 특성 상 웬만큼 성량을 갖춘 성악가라도 무대 자체가 두려움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크지 않은 키에 몸집도 작은 한국인 리릭 소프라노의 등장은 그래서 더 관심을 모았다.그해 리릭 소프라노로는 한국인 최초로 주역을 맡아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비엔나 빈 슈타츠 오퍼 극장의 나비부인 오페라 공연으로 최고의 호평을 받아 다음 시즌 초청까지 받았던 그의 노래는 1만5천석이 넘는 아레나 원형 극장에서 더 빛났다. 거대한 공간에 울려 퍼지는 아름다우면서도 전율을 느끼게 하는 압도적인 성량, 타고난 소리에 배인 서정적 감성과 탁월한 연기의 조화는 세계 곳곳에서 찾아온 관객들에게 잊을 수 없는 오페라의 여름밤을 선사했다.유럽과 아시아 오페라 무대를 종횡무진, 타고난 소리와 노력으로 빚어낸 아름다운 노래로 그 자신의 이름 뿐 아니라 한국을 알리고 있는 그를 만났다. 전북대 개교 70주년 기념 공연에 초대된 그는 하루 전날 전주에 왔다.10여년 만에 고향을 찾았다는 그는 밝고 소탈했으며 겸손했다. 2008년부터 꾸준히 국내 무대에도 서왔지만 아쉽게도 고향 무대와는 인연이 닿지 않았었다는 그는 어느 무대보다도 더 설레고 조심스럽다고 말했다.인터뷰를 하는 동안 특별한 그의 목소리에 마음을 빼앗겼다. 타고난 목소리의 울림은 그만큼 인상적이었다. 울림을 품은 그 소리는 치열한 훈련으로 얻은 공력을 만나 그를 세계적인 성악가로 이끌었을 것이다.처절할 정도로 가난한 시절을 딛고 일어섰다는 그의 유학생활은 그래서 더 궁금했다.-전주는 오랜만에 오신건가요.10년도 넘은 것 같아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동생들도 서울로 오면서 아예 이사를 했거든요. 이모들이 계시는데 아무래도 오고 가는 일이 줄어들더군요. 외국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는 더 어렵게 되었고요.-그래도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어서 남다른 그리움이 있지 않나요.물론이지요. 밀라노에 살고 있는데 늘 어릴 때 먹던 음식이 생각나요. 특히 학교 앞에 있던 베테랑 칼국수가 먹고 싶었어요. 제가 성심여중을 다녀서 학교 앞에 있던 그 분식집 단골이었거든요.(웃음)-오페라 아이다 공연이 10월 말과 12월에 있던데요.경남오페라단이 한국 출신의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들과 함께 아이다를 공연하는데 창원과 서울에서 무대를 올립니다. 이정원 이아경 손혜수 씨 등 활발한 활동을 하는 가수들과 한 무대에 서는 것도 즐겁지만 의미가 각별한 것 같아요.- 아이다는 나비부인 못지않게 인연이 깊은 것 같습니다.나비부인은 작품의 특성 상 동양인 가수를 선호하는 경향 때문에 자주 서게 되는데 아이다는 좀 다른 면이 있죠. 개인적으로는 베로나 아레나 극장에서의 아이다 역을 맡은 이후로 아이다와 더 가깝게 된 것 같아요. 이번 무대는 야외 원형극장인 아레나와는 전혀 다른 조건이어서 성량 보다는 극중 인물에 집중하고 소리도 더 섬세하게 표현하고 싶습니다.-놀라운 성량을 갖고 있다는 평을 받는데, 성량은 타고나는 것 아닌가요.아무래도 바탕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겠지만 훈련으로도 어느 정도는 갖출 수 있지 않을까요. 어쨌든 저는 어릴 때부터 목소리가 크긴 컸어요.(웃음)-어릴 때 노래 잘한다는 소리도 많이 들으셨겠네요.그것은 아닌데, 합창단에서 활동하게 되면서 내가 노래를 좀 하는구나 알게 되었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 친구가 전주KBS어린이합창단 모집에 신청했는데 함께 가자는 거예요. 그래서 따라갔는데, 기다리다 잠이 들었나봐요. 선생님이 지나가시다가 너는 뭐 하러 왔냐고 물어보셔서 친구 따라 왔다고 했더니 너도 한번 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별 생각 없이 불렀는데 친구는 떨어지고 저만 된 거예요. 민망한 상황이었어요.-어린이합창단 활동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군요.4학년 초부터 시작해 졸업할 때까지 활동했는데, 당시 합창단을 지도했던 강승구 선생님이 성악의 기본을 참 잘 가르쳐주셨던 것 같아요. 그때 공연을 많이 다녔었는데 어린 마음에 참 신나는 일이었어요.-성악을 전공하게 된 것도 합창단 활동 덕분이겠습니다.당시는 예술중학교나 고등학교도 없었고, 딱히 주위에 음악을 전공하는 분도 없어 더 이상 공부를 지속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런데 고 3때 옆집에 사는 오빠가 서울대 성악과에 다닌다는 것을 알게 된 거예요. 방학 때마다 집에 와서 연습을 했거든요. 하루는 무작정 초인종을 누르고 들어갔어요. 노래를 어떻게 하느냐고 가르쳐달라고 했죠. 자기도 잘 모르니까 일단 서울로 와보라고 하더라고요. 일주일에 한번 서울대로 지도를 받으러 갔었는데 그때 그 오빠가 동아리 친구들과 상의를 해서 저를 가르쳤어요. 엄마랑 고속버스 타고 올라가 2~3시간 공부하고 되짚어서 오는 생활을 6개월 정도 했죠. -여러 명이 한사람을 가르치는 특별한 개인지도였군요.지금 생각하면 그때 가르쳐준 분들이 정말 좋은 스승이었던 것 같아요. 발음이 틀리면 사전까지 찾아서 바로 잡아 주었거든요. 다행히 한양대에 합격했지만 기초 없이 대학을 간 셈이 됐죠. 그러니 다른 사람보다 더 노력했어야 했는데 아버지 사업이 잘못되면서 형편이 어려워져 서울에서 생활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어요. 게다가 아버지가 저를 보러 서울에 오시다가 교통사고를 당하셨는데 2년을 꼬박 병원에 계시다가 돌아가신 것이 대학 4학년 때였어요. 집안 형편이 더 어려워지니 대학원 진학이나 유학은 엄두도 나지 않았죠. 음악에 대한 열정도 없었고, 그저 아르바이트로 대학생활을 지탱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예술가로 성장해온 과정이 더 궁금해집니다.우연한 기회에 이태리 여행을 갔는데 음악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커졌어요. 여행에서 돌아와 곧바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죠. 피아노 학원에서 한 달에 80만원을 받았는데 한 푼도 안 쓰고 천만 원을 모아 유학을 떠났습니다.-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환경이었겠습니다.경제적 부담이 가장 컸는데, 밀라노에 오자마자 어학원부터 등록했어요. 제가 가진 전 재산의 대부분을 수업료로 내야 했으니 두렵기도 했지만 언어가 우선이더라고요. 언어가 해결되지 않으면 일상이 불편해지고 누구에겐가 도움을 청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언어를 먼저 해결해 스스로 자립할 수 있을 때 레슨을 받자고 마음먹었지요. 6개월 동안 전문가 과정 9급까지 마치고 통역사 자격까지 땄습니다. 시에서 운영하는 무료 강습까지 병행해 언어를 해결하고 나니 두려울 것이 없더라고요.-선택이 탁월했던 것 같습니다.그만큼 절박한 상황이어서 가능했던 일 같아요. 유학을 오는 후배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언어부터 해결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배우는 일도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어야 제대로 자기 것이 될 수 있으니까요.-생활은 어땠습니까.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생활이었어요. 어학원에서 소개한 지하 방에서 지냈는데 난방이 안 되어 외투를 입고 자야했죠. 화장실도 밖에 있는. 노숙자가 따로 없었어요.-세계적인 소프라노의 화려한 무대 뒤에 그런 시절이 있었군요. 베르디 국립 음악원을 졸업하고 스칼라 아카데미에 들어가셨는데 그때부터는 생활이 조금 나아졌습니까.그런 셈이죠. 스칼라 아카데미가 원래는 2년 과정인데 저는 3년을 다녔어요. 학비는 무료고 장학금이 매월 한화로 250만원이 나왔는데 레슨을 받으며 충분히 생활할 수 있을 정도였죠. 그러나 정작 공부하는 과정은 고통스러웠어요. 지도 교수님이 워낙 인종차별이 심했거든요.-어려운 과정을 뚫고 합격했으니 실력을 인정받은 셈인데, 인종차별은 뜻밖이군요.저를 지도하는 선생님이 터키 출신의 소프라노였는데 이 분이 동양 사람에 대한 편견이 있었던 것 같아요. 성악을 레슨 받는 2년 동안 내내 너는 왜 들어왔니 이름은 뭐니를 듣고 지내야했어요. 이름조차 알고 싶지 않으셨던 거죠. 작은 콘서트 하나도 주어지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마지막 레슨 때 제가 부르는 아리아를 들으시면서 눈물을 글썽이더니 내가 니 진심을 몰랐던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내가 너를 제대로 대한 적이 한 번도 없으니 1년만 더 다니라고 하셨어요. 과정을 마치고도 장학금을 그대로 받으면서 스칼라 극장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스칼라 극장의 오페라 단역이 많은 도움이 되었겠습니다.전화위복 되었죠. 그때 단역만 열편 넘게 했는데 그것이 오늘날 제가 유럽무대에서 활동하게 된 기반이 되었어요. 선생님은 제게 상처도 주었지만 제 인생을 열어준 중요한 분이기도 합니다.-무대를 넓힌 것은 2007년 이후부터인가요.극장 도움 없이 나간 것이 그때부터인데 당시에는 용기가 필요했어요. 스칼라 무대의 단역을 거절하기 시작했거든요. 단역이지만 경제적으로는 안정된 기반을 가질 수 있는 여건이어서 한번 거절하면 다시는 안 불러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생활이 불안정해지게 되니 결정이 쉽지는 않았어요. 당연히 생황이 힘들어지기 시작했죠. 그때부터 혼자 주역을 따내야 하는데 극장 오디션이며 에이전시 오디션을 위해 수도 없이 캐리어를 들고 극장을 돌아다녔습니다.-그 과정이 오늘을 있게 한 것 아니겠습니까. 유럽에서 임세경이란 이름이 알려진 것은 몇 년 전부터지만, 아무래도 절정은 2015년 베로나 축제의 아이다 역이 아닐까요.이전에도 좋은 극장에 서긴 했지만 그 해의 비엔나 빈 슈타츠 공연과 베로나 축제가 제 인생의 또 다른 시작이 된 무대였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인 셈입니다.-많은 일정이 예정되어 있을 것 같습니다. 올해 초 플라시도 도밍고가 이끄는 빈 필과 나비부인을 공연했던데요.잊을 수 없는 공연이었어요. 도밍고 선생님은 팔순을 넘겼는데도 자신의 무대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국경을 넘나들면서 공연을 하면서도 리허설을 위해 늦은 밤 다시 연습실에 나오는 열정을 보며 거장은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어요.-워낙 많은 오페라에 출연하셨으니 대부분의 무대가 익숙할 것 같습니다.그렇지 않아요. 하면 할수록 어려운 일이 무대에 서는 일이죠. 악보도 다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보이지 않던 악상기호가 매번 새롭게 보이거든요. 누가 써놓았는지 왜 써놓았는지 보면 볼수록 자꾸 새로운 것이 보이고 소리도 점점 달라지니 제대로 된 소리를 지키려면 연습을 게을리 할 수 없게 됩니다.-소리는 일정한 시기까지는 원숙하고 깊어지는 것 아닌가요.나이를 먹으면 나이 먹은 소리가 나기 마련인데, 훈련을 하면 가장 좋은 시절의 소리를 지킬 수 있거든요. 나이가 들면서 내공은 생기겠지만 소리 빛깔 자체가 변하게 되니 맑아지게 하는 것은 노력으로 지켜야 하는 것이죠. 적절하게 컨트롤 하면서 연륜과 내공을 관객들이 느낄 수 있는 음악을 하고 싶어요. 나이를 먹으면서 더 빛나는 가수로 롱런하는 것이 제 꿈이기도 합니다. 그러려면 연습만이 답이겠죠.그는 노래만 생각하고 노래로 일상을 보낸다. 노래를 하지 않았으면 뭘 하며 살았을까 싶을 정도로 일상의 반경이 좁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너무 단조롭고 건조한 삶이지만, 그가 집중해 오직 한길만을 걸어온 덕분에 우리는 세계적으로 한국의 이름을 알리는 성악가를 가질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어느 무대에서건 어느 오케스트라건 꽉 찬 소리로 공간을 압도하며 서정적인 빛깔로 관객들을 만나는 그의 소리는 마음을 잡는다. 어려운 여건을 딛고 세계적 성악가로 우뚝 선 그의 삶을 듣고 보니 그의 소리가 더 빛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전주출신 소프라노 임세경은- 타고난 성량에 연기력 조화로 유럽 각국서 러브콜소프라노 임세경은 1975년 전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자신이 음악적 재능을 갖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타고난 그의 소리를 알아본 것은 방송국 어린이합창단 지휘자였다. 전주KBS 어린이합창단에서 노래 부르는 기본을 익혔다. 성악은 초등학교 시절 취미활동으로 끝이 났지만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고3때 방학을 맞아 집에 내려온 옆집 오빠의 노랫소리가 마음을 이끌었다. 서울대 성악과에 다녔던 옆집 오빠는 노래를 배우고 싶다는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본격적인 성악공부를 시작한지 6개월 만에 한양대 음대에 합격했다.대학시절 아버지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어야 했던 그에게 유학은 언감생심, 안정된 직장을 찾는 것만이 목표가 되었다. 대학 4학년 때 가볍게 떠났던 이태리 여행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이태리의 언어와 도시 풍경, 음악과 극장 등 모든 것이 그의 마음을 끌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 피아노 학원 아르바이트로 받는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 이태리 밀라노로 떠났다. 베르디 국립 음악원을 졸업한 직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 솔리스트 전문 연주자 과정에 지원했다. 300명을 넘는 경쟁을 뚫고 합격했지만 그의 스승은 2년 과정 내내 인종차별로 그를 냉대했다. 마지막 레슨이 다시 그의 운명을 바꾸었다. 스승은 그가 부르는 나비부인의 아리아를 듣고 너의 진정성을 내가 알지 못했다며 사과했다. 스승의 권유로 1년 더 스칼라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2년 과정인 스칼라 전문 연주자 과정을 장학금까지 그대로 받으며 1년 더 다닐 수 있게 된 것도 행운이었지만 이미 과정을 마친 그에게 스칼라극장이 오페라 단역으로 그를 불렀다. 그 시절의 경험이 오늘날 유럽 무대에서 활동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한다.2007년 이태리 도니제티 극장에서 오페라 파리지나로 데뷔한 이후 아르침볼디, 라 스칼라 극장에서 수십 편의 오페라를 리카르도 무티를 비롯한 세계적인 지휘자들과 공연했다. 타고난 소리와 압도적인 성량, 뛰어난 연기력의 조화로 무대마다 돋보이는 그를 주목한 유럽 각국의 극장들이 그를 불렀다. 세계적인 오페라 잡지들은 전율을 느끼게 하는 성량과 혼연일치된 소리와 연기를 가진 작은 한국인 리릭 소프라노 등장을 환호하며 반겼다. 2015년엔 한국인 리릭 소프라노로는 최초로 비엔나 빈 슈타츠 오퍼 극장에서 오페라 나비부인 주역으로 공연했으며 그해 8월에는 이태리 베로나 오페라 축제의 아이다 주역으로 발탁됐다. 아레나 디 베로나 오페라 축제 102년 역사상 한국인으로는 최초였다. 올해 봄과 여름, 빈 슈타츠 오퍼 극장과 베로나 축제에 다시 섰던 그는 독일 헝가리 미국 그리스 공연을 이어왔다.2008년부터 국립오페라단의 대표작을 비롯 국내 오페라 무대도 꾸준히 지켜온 그의 한국 공연은 올해 특히 활발하다. 국립오페라단의 팔리아치와 외투에서 열연, 호평을 받은데 이어 10월과 12월, 창원과 서울에서 아이다를 공연한다. 내년에는 스페인 독일 일본 핀란드 이태리 오페라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 기획
  • 김은정
  • 2017.10.27 23:0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20. 봉선화야 너는 아느냐 - 역사에 묻힌 아픔, 억울한 피해자들 명예 회복해줘야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는 장면이 있다.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주인공 유태인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독일 장교가 듣고 진심으로 감동하여, 그를 체포하지 않고 그대로 나가는 장면이다. 가끔 쇼팽을 들으면 그 장면이 애잔하게 떠오른다. 그 영화 속 독일군 장교와 피아니스트의 이야기는 해피앤딩이었지만, 우리에겐 그 사연과 비슷하지만 결과가 달랐던 새드앤딩의 사연이 있다.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 적에 /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 어언간에 여름 가고 가을 바람 솔솔 불어 /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봉선화(鳳仙花, 봉숭아)를 아름답고도 처량하게 그린 노래 울 밑에 선 봉선화는 한국 가곡의 효시로 꼽히는 곡이다. 1920년 작곡가 홍난파가 애수라는 곡으로 발표한 후, 1925년 김형준이 가사를 붙인 노래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이 나라와 민족의 신세가 처량한 봉선화와 같다는 비유를 그리고 있다. 31 독립운동 이후 1920년대의 이 시기는, 더욱 삼엄해지고 악독해진 일제의 강압으로 인해 백성의 삶은 하루가 다르게 고통에 젖어만 가던 시절이었다. 당시 우리 민족의 말로 다 할 수 없는 시련과 한숨 속에서 독립을 염원하며 봉선화를 빗대어 부른 이 노래는 민족의 목소리를 대변하듯 구전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알음알음 불려왔던 이 노래가 널리 퍼져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리게 된 계기가 있다. 1942년 소프라노 가수 김천애(당시 23세)가 일본 동경의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독일가곡을 부른 후 앵콜송으로 울 밑에 선 봉선화를 부른 때부터이다. 공연이 끝나자 청중들의 박수갈채가 떠나갈 듯했고, 동포들은 무대 뒤로 찾아와 김천애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 이후부터 귀국한 김천애는 무대에 설 때마다 한복 차림으로 이 노래를 불러 청중들의 심금을 울렸다. 일제는 가창 금지는 물론 음반판매도 금지시키며 당시의 블랙리스트로 만들었다. 김천애는 일제 경찰에 여러 차례 잡혀가 모진 고초를 당하였고, 일제는 울 밑에 선 봉선화노래를 부르기만 해도 붙잡아가곤 했다. 실제로 울 밑에 선 봉선화를 불렀던 학생들을 잡아다가 의자에 묶어 놓고 집게로 혀를 뽑아서 죽인 일이 있으며, 그 수가 밝혀진 것만 해도 386명이었다고 전해진다.그 봉선화의 노래에 관한 사연 가운데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유독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가 한 가지가 더 있다. 여수 순천사건으로 희생이 된 故김생옥 선생의 사연이 바로 그것이다.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성악가 김생옥과 유명 피아니스트 박순이와의 결혼은 1944년 당시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행복하기만 할 것 같았던 이들의 결혼생활은 4년 만에 한 사건에 휘말린다. 1948년 10월에 일어난 여수 순천 사건의 비극으로 인해 남편 김생옥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박순이가 불과 27세 때의 일이다.사건을 재구성해보면 이렇다. 결혼 후 유럽으로 함께 유학을 준비하던 김생옥(당시 30세)은 1948년 10월 광주 동방극장에서 순천여학교 제자들과 음악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음악회 장소였던 동방극장에서 영화가 절찬리에 상영되어 음악회를 3일만 연기하자는 연락이 왔고, 연기한 그 날 사이에 여수 순천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순천여학교 120명 중 20명만 살아남았다고 할 정도로 큰 사건이었기에 제자들이 걱정된 김생옥은 아내에게 금방 갔다 올게. 아무 일도 없을 것이오.라는 말을 남기고 순천으로 떠났다. 그런데 그 말 한마디가 마지막 작별이 되고 말았다.사건에 휘말린 김생옥이 체포되어 1948년 10월 31일 순천시 죽도봉 골짜기에서 경찰에 의해 총살된 것이다. 나중엔 알려진 바에 의하면 처형되기 직전 김생옥은 내가 성악가인데 노래 한 곡 부르고 갈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며 울 밑에선 봉선화를 불렀다고 한다. 이내 김생옥의 노래에 감동한 사형 지휘관은 노래를 잘 부르는 인재이니 죽이지 마라.는 의미로 손 신호를 보냈으나, 안타깝게도 이를 빨리 죽이라.는 신호로 오인한 부하들이 방아쇠를 당겨 그만 총탄을 맞고 말았다는 새드앤딩의 이야기이다. 소식을 들은 박순이는 순천으로 달려갔지만, 남편의 시신을 찾지 못했다. 한꺼번에 사살된 시신들이 죽도봉 골짜기에 뒤섞인 채 그대로 매장되었기 때문이다.4년 만에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홀몸으로 3살 된 아들과 8개월의 딸인 두 아이를 키우게 된 박순이는 앞날이 캄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고인이 된 박순이는 자손들을 잘 키우며 오히려 세상을 위해 봉사하고 더욱 열심히 살며 사회복지활동을 이어갔다. 봉선화 같은 꽃다운 나이에 처량했을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세상을 품었던 그 마음이 헤아려지지 않는다. 어찌 그 아픔이 이 사연일 뿐이랴만 무고하게 희생된 많은 이들의 억울함이 한이 된 채 우리의 시간 속에 남겨져 있다.이제, 새 정부가 들어서며 우리의 역사에 남겨진 일제강점기 일제의 만행은 역사와 기억으로 전승되고, 제주의 4.3사건도 재조명되고 있고, 동학농민혁명의 뜻을 기리고, 5.18 광주항쟁도 옳게 보듬어 주고 있다. 하지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고 남겨진 가족으로 고통을 겪은 이들의 마음을 어찌 헤아릴까. 제주 4.3 사건의 진압을 거부한 군인들에 의하여 여수 순천사건이 일어난 지 이제 69년이 지나 내년이면 70주년이 된다. 올해, 10월 19일 그 날도 어김없이 다가왔지만 아픔을 아우를 이렇다 할 이슈도 못 만들고 역사의 더걱거리는 더께가 된 채 또 지나갔다. 이제는 순천 여수사건에 의하여 무고하게 피해를 본 피해자에 대한 명예회복을 해 주어야 한다. 억울하게 휘말려 희생을 당한 민간인들과 가족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억울함을 풀어주고, 그들의 가슴에 멍울로 남아있는 깊은 아픔과 한을 치유해 주어야 할 것이다. 김생옥 선생, 그가 시월의 마지막 날에 불렀던 울 밑에 선 봉선화 노랫말처럼 말이다.북풍한설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 있으니 / 화창스런 봄바람에 회생키를 바라노라봉선화의 꽃은 지면서 봉긋하게 열매를 품어내 씨앗을 투두둑 뱉어낸다. 그 힘에 씨앗은 튀어나와 주변에 자리 잡고 다음 해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온다. 봉선화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고향 누이 같은 꽃이다. 친숙한 민족의 정서를 지닌 봉선화는 역사의 굴곡과 함께 노래로 이어져 왔고, 전해지는 이야기로 첫눈이 오기 전에 봉선화를 물들인 흔적이 손톱에 남아있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그 마음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선연한 아픔으로 남아있는 일들도 이제는 잘 헤아려 역사 앞에 오명을 씻고 회생하기를 기원해 볼 일이다.△전남 목포에서 태어난 故 김생옥 선생의 아들은 훗날 전북 익산 출신의 아내와 일가를 이루었다. 이들 가족은 다른 피해자 가족과 더불어 시신도 수습 못 한 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남아있는 자들의 아픈 시간을 지금도 이어가고 있다.

  • 기획
  • 기고
  • 2017.10.27 23:02

[주민시네마스쿨과 작은영화관] "레디~액션!" 주민들, 영화로 새롭게 소통하다

지난 9월 27일 저녁, 임실작은별영화관에서 특별한 영화상영이 있었다. 임실군 주민들이 직접 제작하고 참여한 2편의 영화가 상영됐다. 한 편은 노년의 사랑도 젊은 사람들만큼 풋풋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함께라면이고, 다른 한편은 중금마을 할머니 유랑극단의 분리수거관련 연극을 극영화 한 할머니의 상장이었다. 할머니의 상장은 중금마을 어르신들이 배우로 참여해 혼신의 연기를 펼쳤다. 영화상영 내내 상영관을 가득 메운 주민들은 웃음과 환호를 보냈다. 영화 상영후 이어진 관객과의 대화에서 영화에 참여했던 한 주민은 두 번째 영화작업에 참여했는데, 하면 할수록 또 해보고 싶다며 주민들에게 도전을 권했다. 이날 상영된 작품은 모두 영화제작교육인 주민시네마스쿨에 참여한 주민들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촬영과 편집, 출연한 작품이다.△도내 14개 시군서 영화제작교육주민시네마스쿨은 작은영화관과 연계해 주민 대상으로 영상 촬영편집제작 등에 대한 교육을 하는 프로그램이다. 2014년부터 도내 작은영화관이 있는 지역에서 시작됐고, 올해는 14개 시군에서 진행되고 있다. 전라북도와 14개 시군이 지원하고, 전주시민미디어센터가 운영하고 있다. 교육 과정은 각 시군마다 기초과정과 심화과정으로 구성되었으며, 영상에 대한 기본 이해에서부터 기획과 시나리오 작성을 포함한 촬영편집 등의 영상영화 제작과정으로 진행된다. 주민시네마스쿨에 참여하는 주민들은 초등학생부터 청소년, 주부, 직장인과 어르신까지 다양한 연령층을 포함하고 있다.주민시네마스쿨은 4년여 동안 많은 변화를 만들어냈다. 그간 1500여명이 넘는 주민들이 교육에 참여해 지역민과 지역을 소재로 한 150여 편이 넘는 영화와 영상이 만들어졌다. 제작된 작품은 지역 작은영화관과 영화제 그리고 지역방송을 통해 상영됐다. 주민들이 만든 작품은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 작품성을 인정받기도 했다. 도내외 다양한 영상제와 영화제에서 인정을 받기도 했다. 작년에 임실 주민시네마스쿨 참여자들이 만든 영화 비온 뒤(감독 한미연)는 영화진흥위원회가 주최한 한국영상문화제전 2016에서 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러한 성과에 힘입어 주민시네마스쿨을 통해 제작된 많은 작품들이 타시도의 다양한 영화제에 초청받아 상영되고 있다. 작년 무주산골영화제에서는 주민시네마 스쿨 작품들로 구성된 상영프로그램이 진행되기도 했다. 또한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진행하는 작은영화관 기획상영전 작품목록에 주민시네마스쿨 작품들이 포함되어 상영되었다.△지역주민이 영화영상 생산주민들은 자신들이 만든 작품이 영화관을 통해 상영됨으로써 흥미를 넘어 자긍심을 갖고 이후 활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교육 수료 후 수료생들을 중심으로 영화동아리 모임이 구성되어, 영화감상과 지속적인 작품제작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주민시네마스쿨이 주민들이 수동적인 영화소비자에서 영화영상의 생산자가 되면서 영화영상의 입문과 인력양성의 토대가 되고 있다.주민시네마스쿨이 지역주민들의 영상문화향유 수준을 높이고 있는 것이다. 작년 전북연구원에서 조사한 2016 전북도민 문화향유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도민의 문화향유 실태가 소극적 문화향유인 관람형태를 거쳐 교육참여단계를 거쳐, 점진적으로 활동의 단계로 이동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활동방식도 개인적 향유 중심에서 공동체 활동이 강조되는 추세라고 한다. 주민시네마스쿨을 통한 주민들의 영상문화향유가 이러한 단계를 거쳐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영화 매개로 주민 소통주민시네마스쿨은 또한 지역민들의 소통과 공동체성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작품제작에 교육생뿐 아니라 지역주민을 참여시키고 있으며, 작품 시사회에 주민들을 초대해 축제 같은 시사회를 진행하기도 한다. 아예 마을영화제를 진행하기도 한다. 진안과 임실에서는 주민들이 만든 영화를 모아 마을영화제를 진행한다. 진안군의 경우 주민시네마스쿨 수료생을 중심으로 마을축제 때 작은영화관에서 주민시네마스쿨 수료작들로 구성된 마을영화제를 개최하기도 했다. 임실의 경우 지난 10월 13일 작은영화관에서 앞서 두 편과 학생들이 만든 UCC 작품을 모아 제3회 임실군 우리마을영화제를 진행하기도 했다. 마을영화제는 주민들이 만든 작품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주민들이 만든 지역영화가 영화관에서 상영되고 주민들이 함께 보면서 소통의 영역이 확대되고 있다.△작은영화관 운영 모델도 제시또한 주민시네마스쿨은 작은영화관의 프로그램 구성에 대한 모델을 제시한다. 매년 영화진흥위원회와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있는 작은영화관 기획전에 주민들이 직접영화를 선정하고 상영시간 배분과 연계 교육 프로그램 기획까지, 기획전의 한 섹션을 온전히 주민들의 힘으로 꾸리기도 했다. 2015년 고창 작은영화관 동리시네마에서 진행된 작은영화관 기획전에서는 2014년부터 진행된 고창군 주민시네마스쿨을 통해 결성된 영화동호회 지역주민들이 프로그래머로 참여해, 이웃주민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영화를 직접 선정하고 상영시간표를 짜는 등 기획전에서 주체적인 역할을 맡기도 했다.이처럼 주민시네마스쿨의 다양한 활동들은 작은영화관의 사회적 가치와 역할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작은영화관이 단순히 영화를 보는 장소로서 뿐만 아니라 영화교육과 다양한 활동 등이 이뤄지는 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과 지역 내 영화영상문화 활성화의 기반을 마련하는 공간이 되고 있다. 작은영화관이 개봉영화 외에도 지역민들이 직접 만든 영화가 상영되고 다양한 커뮤니티 공간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제공되는 영화를 수동적으로 관람하는 것을 넘어서 지역민의 의견이 반영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지역민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영상 문화행사 등이 열리면서 영화관이 지역문화 공간으로 확장되고 있다.△사회적관계 재생산하는 공간현재 작은영화관은 영화관이 없어 영화를 보지 못하는 지역주민에게 영화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지역 공동체의 활성화에 기여하는 사회적 기능도 해야 한다. 문화적 체험을 확대하는 것 이상으로 공동체 공간의 창출과 지역 공동체에 기여하는 기능에 충실해야 한다. 지역 공동체의 유지와 성장을 문화적으로 나누고 공유하는 장으로 기능할 때 지역 영화관으로서의 작은영화관의 의미는 보다 증폭될 수 있을 것이다.미국, 캐나다, 일본 그리고 영화의 본 고장 프랑스에서는 오래전부터 상업영화관이 수익성이 없다고 사라진 자리에 주민들이 직접 운영하고 지역주민들의 소통의 공간으로 마을영화관을 운영하고 있다. 이들 영화관은 단순히 영화를 관람하는 공간이라는 역할만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재생산하는 공간이자 장치라는 사회적 가치를 수행하는 공간의 역할을 하고 있다.스마트미디어 시대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지 않고 가정에서, 컴퓨터로,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보고 있다. 올 한해 영화계에서 화두가 되었던 봉준호 감독의 영화 옥자가 온라인 상영과 영화관 동시 개봉이 되면서 영화 생태계와 영화관의 역할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이러한 영화생태계의 변화에서 영화제작의 주체와 영화관의 미래는 어떠해야 할까. 그리고 작은영화관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이에 대한 해답은 지역주민의 참여를 보장하고 유도해 주민들이 영화영상문화의 주체가 되게 하는 것일 것이다.전북에서 시작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작은영화관의 운영모델에 주민시네마스쿨이 주되게 제시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최성은(전주시민미디어센터장)/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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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0.26 23:02

[문화터미널 고창] 버스 기다리며 '순박한 가을빛 문화 향기'에 취하다

고창군 고창읍에 소재한 고창공용버스터미널, 문화공간으로 탈바꿈된 이곳에선 지금 다양한 문화행사가 한창이다. 2017 여객자동차터미널 아트공간 조성사업으로 고창버스터미널을 문화공간으로 리모델링하여 문화터미널 고창이라 이름붙여 10월 23일에서 28일까지 1주일 동안 문화 프로그램들을 운영한다. 24일엔 문화터미널 고창 개소식 행사가 있었다. 전라북도와 고창군이 주최하고 전라북도문화관광재단이 주관하며 고창공동체협의회가 운영하는 문화 프로그램의 메시지는 가을빛 연애편지 주마간산에 공류(共流)하다이다.△문화예술로 재탄생하는 고창 촌로들의 숨소리10월 23일은 아트콘서트 칠순 넘으니 그림이 그려지더라-판타지적 서사를 이야기하는 촌로작가의 탄생전으로 문화주간을 시작했다. 고창군 신림면 용추계곡 기슭에서 농사짓던 손으로 칠순 넘어 생애 처음 어느날 갑자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김연수 할아버지의 농부미술관 작품들이 발굴되어 세상에 나왔다. 칙칙했던 터미널 공간이 밝은 문화공간으로 확 바뀐 풍경에 놀라움도 가시기 전, 버스를 타러 가다 우연히 마주친 대합실 공간의 그림들에 시선을 멈추며 독특한 화풍을 궁금해 하는 버스 이용객인 관객들에게 촌로작가는 자신의 그림이야기를 나눈다.여름에는 해도 길고 징허게 뜨겁네 / 이 놈의 해는 품도 안팔아 보았나...로 시작하는, 해리면 월봉마을과 부안면 구현마을 어르신들의 삶의 풍경을 담아 쓴 시들도 등단(?)했다. 느르물, 휘어들이 따위의, 고창공동체협의회의 마을활동가들이 찾아낸, 특정한 마을에서만 쓰는 토속어들도 선보이고 있다. 문화터미널 고창엔 고창의 사람들과 삶의 이야기들이 촌스럽게 표현되는 듯 하면서 삶의 가장 한가운데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역설이 문화예술적 아우라로 재탄생하는 촌로들의 숨소리가 있다.△청소년들의 꿈꾸는 문화터미널 나들이책방그런가 하면 꿈꾸는 문화터미널, 끼를 찾는 청소년 인문학 교실을 내걸고 청소년들의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고자 10월 27일과 10월 28일엔 만화 그리기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가을빛을 담은 고창의 소리꾼 김상수의 소리(23일)와 연애편지를 쓰는 듯한 김혜연의 피아노 연주(24일/28일), 더드림싱어즈의 성악(26일), 김회숙과 여현수의 춤과 장구(28일)가 이어지고 목공예, 원예, 퀼트, 전래놀이, 천연제품 등 다양한 체험활동을 제공한다. 주마간산하면서도 함께 소통하기 즉 공류하자는 취지다.터미널 로비와 대합실에서는 청소년들과 어른들을 위한 나들이책방을 상시 운영한다. 다양한 종류의 책들 500여 권이 비치되어 있다. 버스를 기다리고 터미널을 드나들며 잠깐 들여다 볼 수도 있고 대출자 기록을 하고 책을 빌려갈 수도 있다. 버스 이용객들이 집에 있는 책들을 기증하여 함께 공유하도록 할 계획이다. 책을 훔쳐가지 않을 양심(?)에 호소할 필요도 없다. 책읽기를 나누고 지식을 나누는 인문학적 공유의 무인책방이니까. 그래서 나들이책방이다.△체류시간 28분을 즐겨라고창공동체협의회에서는 문화터미널 고창을 운영하기 위해 지난 7월 고창터미널 이용객들을 대상으로 이용자 현황조사를 했다. 요일별, 시간대별 이용 상황과 동선을 분석하고 이용객들의 문화수요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다.두 가지 조사방식을 통해 이를 분석했다. 7월 13-15일 3일간 오후 2시부터 7시까지 탑승객 전체를 대상으로 한 전수조사와 탑승객 일부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이 시간대의 하루 평균 이용자 수가 814명으로 주말보다 평일이 이용객이 훨씬 많고, 설문조사 응답자 245명 가운데 고창 내 거주자가 167명으로 68.2%를 차지했으며, 고창 외 거주자는 77명으로 31.4%를 차지했다. 고속직행버스 이용자 수와 농어촌버스 이용자 수는 비슷했다. 그리고 이들의 터미널 평균 체류시간은 28분이었다. 또한 정기 이용자가 41.6%를, 비정기 이용자가 43.4%를, 일회성 이용자가 12.2%를 차지했다.77.5%가 일상생활의 목적상 버스를 이용하는 것으로 조사된 터미널 이용객들은 터미널에서의 문화 프로그램 활동에 대해 91.0%가 긍정적인 호감을 표명하였고 86.5%가 참여하겠다고 응답했다. 희망하는 문화 활동으로서는 공연이 37.6%를, 전시가 5.7%를 차지했고 간간이 체험활동도 원했다. 터미널에서 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이런 특성을 반영하였고 이용객들의 동선 특성까지 고려해야 했다.△버스 이용객들을 위한 문화공간고창터미널은 고창읍 중심지에 위치한다. 주변은 상가 등 생활권으로 이어지고 있다. 농어촌버스 이용객들의 경우 도보거리 내에서 각종 병의원이나 고창시장을 이용한다. 장날이면 더 많이 붐비는 까닭이다. 2017 여객자동차터미널 아트공간 조성사업을 시행하며 문화터미널 고창으로 조성한 것은 고창터미널을 문화공간으로 조성하되 고창의 주민들을 관객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버스 이용객들을 대상으로 문화 프로그램에 참여시킨다는 취지로 이해된다.버스터미널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승용차와 거리가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개 노인층, 여성, 청소년, 다문화이주민들로서 승용차 혹은 속도사회의 소외자들이며, 이 점에서 사회적 비주류의 경향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하루 수천명이 이용하는, 지역에서 가장 활성화된 공간을 드나드는 그 사회적 비주류의 이용객들이 여행객 혹은 승객이라는 이미지로 고정되며 소외되고 숨겨지는 곳이 어쩌면 버스터미널이다.터미널이 단순히 교통공간으로서가 아니라 낯선 사람들의 대기시간이라는 ㅤ짧은 흐름 속에서 어떤 마주침과 인연이 생성될 수 있는 새로운 문화예술적 교감공간으로서의 문화터미널 고창 역할이 기대된다. 고창에서 살아가는 시골사람들 혹은 고창을 드나드는 여행자들의 주마간산식 문화공간으로서, 그 정취와 이야기가 풍겨지는 문화적 대화의 공류공간으로서 말이다. <고길섶 문화비평가>/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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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0.25 23:02

[우리고을 인물 열전 17. 임실군 삼계면] 조선시대 선비들 묵향 그윽…200명 박사 배출한 '박사골'

‘산자수명한 우리 고장 인심좋고 성실한 조상들의 덕망을 이어 받아 명석한 두뇌를 갈고 닦아 국가의 동량이 된 박사촌을 이루었으니 그 높은 뜻을 기리고 후대에 전수코자...’임실 오수에서 삼계면 소재지로 이어지는 길 옆에 지난 2000년 3월 이 지역 중견 인사들의 모임 삼정회가 세운 ‘博士의 고장 三溪面’ 비문에 새겨진 내용이다. 이 길을 따라 안으로 쑥 들어가면 면소재지를 지나 세심리에 ‘박사골 체험관’이 있고, 그 마당에 우뚝 세워진 박사모를 쓴 석상이 박사고을임을 더욱 실감나게 한다. 삼계면은 ‘박사골’로 불리는 인재의 고장이다. 예로부터 한양에서 낙향해 터를 잡은 선비들이 많았고, 근래 삼계면에서 배출된 ‘박사’가 200명에 육박하고 있다. 이를 자랑스럽게 여긴 마을 사람들이 세심리에 ‘박사골체험관’을 지어 운영하며 큰 자랑으로 삼고 있다. 최근 ‘임실사람 임실이야기’란 저서를 낸 임실군청 문화관광치즈과 김철배 학예사는 “계유정란과 무오사화 등을 피해 내려온 선비들이 씨족을 이뤄 학문을 갈고 닦으며 터전을 이룬 곳”이라고 소개한다. 500년 전부터 중앙정치의 화를 피해 자리잡고 살아온 선비들은 후학을 육성하고 또 조정과 연을 맺기도 했다. 어은리의 청주한씨 고택과 육우정은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광주 김씨)의 외가였다. 인경왕후가 10세라는 어린 나이에 세자비로 간택 돼 외로운 궁궐 생활을 하면서 입궐 전에 지냈던 외가 생활을 그리워 했다는 이야기가 이 마을에서 전해진다. 인경왕후가 외가에서 지낼 때 먹었던 콩잎장아찌를 진상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후천리에 많이 사는 풍천노씨 집안의 노익원 공은 정조의 스승을 지냈을 만큼 인품과 학식이 뛰어난 선비로 알려져 있다. 240여년 된 그의 집 대문에 쓰여진 ‘馬四客’(말 네 마리가 끄는 마차를 타고 예의를 알고 용모단정한 사람이 사는 곳)이란 글씨가 말해 준다. 지금도 임실군 삼계면은 발길 닿는 곳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묵향이 흠뻑 배어 있는 고을이다. 노동환 가옥, 한상준 고택, 육우당 등 200년 전후에 건축된 선비들의 한옥이 즐비하다. 고을 곳곳에 만취정, 광제정, 오괴정 등 정자가 많아 산골 마을 사람들이 예로부터 글과 풍류를 사랑했고, 시인묵객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음직 하다. 선비들의 고결한 인품과 학문을 존중해 세운 서원, 각 성씨들이 조성한 사당과 묘동도 수두룩 하다. 어은리에서 살았던 종호(從好) 최광범씨는 근래의 뛰어난 한학자로 알려진다. 삼계면에서 인물이 많이 배출되는 것은 향학열과 교육열이 남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근대적 개념의 삼계면 1호 박사는 고 심길순 박사다. 1918년생인 심박사는 서울대 약대를 졸업하고 약학대 교수, 학장 등을 지냈다. 2호 박사는 고 허세욱 박사다. 1934년생인 허 박사는 한국외국어대와 타이완사범대 대학원을 나온 중국어문학자로 외대와 고려대에서 교수를 역임했다. 시인이자 수필가이다. 중앙교육진흥연구소 회장을 지낸 허필수 박사도 삼계가 고향이다. 임실의 박사들은 주변과 가족 영향을 많이 받아 직계, 친인척 박사 그룹도 상당하다. 예를 들어 전북대 교수를 지낸 노상순씨의 아들이 노덕환 노도환 노승환 노방환 박사이고, 손자 노시훈씨도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명 8박사 집안이다. 노환성·노영진은 부자지간이고 노상균·노상우는 형제이다. 나로호 연구소에 근무하는 한민홍 박사는 한상엽박사 아들이다. 화천수력발전소장 박병근씨와 박배근박사는 사촌, 김봉철·김주현·김진엽은 삼남매, 김대현·김인희는 형제, 심석무·심유경은 부녀, 김흥주·김효수는 남매, 정남옥·정석균은 남매, 오세원·오세홍은 형제, 김학준·김택현은 삼촌조카, 김진원·김문수는 사촌이다. 세심리에 ‘박사골체험관’을 짓고 인재의 고장 삼계면의 위상을 높이고자 심혈을 기울이는 오흥섭씨(59)는 “인재가 많이 나는 것은 우리 고장의 경사요, 큰 자랑입니다. 박사 테마파크를 조성, 삼계면을 더욱 알리고 싶다”고 말한다. 삼계면은 면적 56㎢에 삼계리, 후천리, 어은리, 삼은리, 산수리, 세심리, 죽계리, 홍곡리, 학정리, 홍현리, 오지리, 덕계리, 두월리, 뇌천리 등 14개 법정리로 구성돼 있다. 인구는 1612명이고, 최근 전통쌀엿을 비롯해 부추와 한우 농사가 많다. 인재의 상징으로 ‘뇌’ 모양을 한 호두 작목반도 출범했다. 연안김씨 고 김시영씨를 중심으로 한 주민들이 살려 낸 ‘말천방 들노래’는 ‘임실군 무형 향토문화유산 제1호’로 지정돼 있다. △정계한상준 5·6·7대 국회의원(어은리), 김진억 전 임실군수(후천리), 오현모 군의원(삼은리), 노두상(삼계리), 김신기 군의원(홍곡리), 김학관 군의원(덕계리), 환경운동 등 시민단체 활동가이자 정치인 최형재 노무현재단 전북지역위원회 공동대표(어은리)△관계내년 익산에서 열리는 제99회 전국체전 화합문화체전 추진 총괄본부장 이지영 전 익산부시장(덕계리), 전북경찰청 차장과 전주완산경찰서장을 지낸 김학역(삼계리), 정보통신부 정석균(오지리), 기획재정부 허점옥(덕계리), 총무처 이재흥(덕계리), 농업기술원 국장을 지낸 유정(삼은리), 경남선거관리위원회 상임위원 김종영(삼계리), 새만금추진지원단장 오정호(삼은리), 김학엽 4대 전주지방환경창장(세심리), 김정호 11대 전주지방환경청장(홍곡리), 오경섭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삼은리)△교육계 심길순 전 서울대 약학대학장(뇌천리), 노상순 전 전북대 명예교수(후천리),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어은리), 허필수 전 중앙교육진흥연구소 회장(덕계리), 김효순 김제교육지원청 교육장(두월리), 김학산 전북교육연수원 원장(삼계리), 노덕환 군산대명예교수(후천리), 노도환 전북대교수(후천리), 노방환(전북대교수), 노상우 전북대교수(후천리), 박배근 충남대 수의학교 교수(세심리), 박은숙 완주 봉성초교 교장(세심리), 오동순(우석대 교수(세심리), 한광수 우석대교수(어은리), 김근주 전북대교수(두월리), 이동호 전북대교수(세심리), 신동수 한양대교수(학정리), 이미재 수원대교수(세심리), 수능출제위원장을 지낸 정병헌 숙명여대교수(봉현리), 이용현 군산대 명예교수(봉현리)△경제·사회계2003년 12월 ‘대통령 측근비리 의혹 수사’ 특별검사를 맡아 유명해진 김진흥 변호사(홍곡리), 김제경찰서장을 역임한 박달근 인천 도로교통공단 전 인천시지부장, 노상흡 캠틱종합기술원 본부장(후천리), 노보환 전 광명기업사장(후천리), (사)한국안전보건협회 회장 오병섭(삼은리), 화천수력발전소 소장 박병근(세심리), 한국농약과학회 회장, 한국잡초학회장 등을 지낸 한성수 전 원광대 대학원장(오지리), 한평호 한국생산성본부 근무 (봉현리), 류강열 전주생물벤처연구소(삼은리)△문화예술언론계삼계 말천방 들노래를 세상에 알리고 전승, 임실군 무형향토문화유산 제1호 지정을 이끌어 낸 김시영(두월리), 고려대·외국어대 중문과 교수를 역임하고 시인이자 수필가로 활동한 허세욱(덕계리), 전주정보영상진흥원장을 지낸 이흥재 추계예술대학교수(삼계리), 박임근 한겨례신문 전북담당지역기자(세심리), 한국국학진흥원 김민옥(두월리)△의료계 ‘간’ 분야 전문의로 명성을 얻고 있는 김인희 전북대의대 교수(삼계리), 박승근 전남 순천 아이미코병원 피부과원장(세심리), 모윤희 치과원장(삼계리), 부산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성수 의학박사(어은리), 허균 국립암센터 연구소 (후천리)·김재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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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호
  • 2017.10.24 23:02

2회 막걸리아리랑김치쓰리랑 축제 여는 김관수 한문화국제협회 이사장 "전북음식문화·관광 결합…한식 뿌리 현대화에 최선"

한문화국제협회 김관수 이사장(60)이 다음달 4일과 5일 전주공설운동장에서 열리는 ‘제2회 막걸리아리랑 김치쓰리랑 문화축제’ 막바지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번 축제는 그간의 한식문화 연구를 기반으로 막걸리 문화와 김치를 융합해 ‘김치와 막걸리 도시 전주’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한편, 체험문화 관광을 결합해 전주 음식의 대중화와 산업화를 마련하고자 기획됐다. 김 이사장은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전주김치와 막걸리를 결합한 융합테마로 한 미식문화축제는 전주의 한문화 콘텐츠를 새롭게 디자인하고, 글로벌화 시키기 위한 새로운 시도”라고 설명했다.- ‘막걸리 아리랑 김치쓰리랑’축제가 2회 째를 맞았습니다. 이번 축제에 대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막걸리 아리랑 김치쓰리랑축제는 노래자랑과 막걸리가 어우러진 문화미식 축제입니다. 작년에는 전주 르윈호텔 맞은편 도란도란 캠핑장 일대에서 ‘음식주가 익는 사이, 문화가 춤추다’는 슬로건 아래 한옥마을 관광객과 함께 어우러지며 치러졌습니다. 한옥마을 1000만 관광객 시대를 맞아 한류와 한문화가 한국 미래의 중심축이 되고 있습니다.저는 전북경제를 살릴 수 있는 큰 힘이 바로 한류 콘텐츠의 중심인 전주의 맛과 전통주 막걸리에 담긴 미학이라고 보고 이 축제를 야심차게 추진해 나가고 있습니다.”-다음 달 열릴 이번 행사에서 주력한 부분이 있다면.“지난해 축제는 첫 행사이다보니 아쉬움도 많이 남았습니다. 축제에서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전주만의 한문화 브랜드를 홍보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많이 느꼈습니다. 이번 축제는 103개 부스 규모로 추진해 막거리 시음은 물론 김치를 활용한 다양한 음식들을 선보이며, 전주가 서민한식의 중심지임을 알리고, 세계 속에 막걸리와 한식문화가 스며들 수 있게끔 기획하고 있습니다.”-전주한식에 대한 철학이 남다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식과 막걸리는 무슨 연관성이 있을까요.“전주는 맛의 고장으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음식으로 유네스코 창의도시로 인정받고 있는 도시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제대로 된 역사나 문헌, 맛은 사라지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전주의 막걸리 문화는 단순한 음주문화가 아닙니다. 다채로운 한식들이 상다리가 휘어지게끔 안주로 나오고 있죠. 막걸리는 이처럼 전주한식문화에 담겨있는 정(情)이 담겨있습니다. 저는 이 점을 전북도민과 국내 관광객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 알리고 싶어 이 행사를 마련하게 됐습니다. 전통적인 우리 음식문화 속에는 항상 막걸리가 있었습니다. 이 행사는 결국 전주음식의 뿌리를 찾기 위한 시민운동의 하나로 봐주셨으면 합니다.”-축제를 통해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는 무엇인가요.“ ‘한국 속의 한국’이라는 전라북도의 슬로건처럼 전주가 가지고 있는 한문화를 확장시키는 것입니다. 매년 독일 뮌헨에서 열리는 옥토버페스트는 단순한 맥주축제를 넘어서 독일의 문화를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이 축제는 전 세계인이 어울리며 친구가 될 수 있는 장을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전주 막걸리아리랑 김치쓰리랑’ 축제에서도 이처럼 관광객과 전주시민이 어울리며, 흥겨운 공연을 즐길 수 있게 마련했습니다. 모든 노력은 이번 축제에 쏟아부었지만, 미흡한 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축제는 시민들의 관심과 사랑이 함께한다면, 전주 한식문화 글로벌 브랜드화에 한 축을 담당할 것입니다.”-앞서 한식문화 붐 조성은 시민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한식은 세계적으로 우수한 유산입니다. 소중한 전주한식문화가 세계로 보급되고, 우리만의 자원으로 지켜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뿌리가 튼튼해야 하지요. 그러나 국가와 기업주도의 한식문화 조성은 한계가 있습니다. 모든 시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사회운동으로 승화,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저는 이를 위해 세계적인 NGO운동을 통해 한글, 한옥, 한식, 한복, 한지, 한소리를 융합한 문화 콘텐츠를 만들어 세계인의 5%가 한식을 찾을 수 있는 시민운동을 전개하고자 합니다. ‘막걸리아리랑 김치쓰리랑 축제’도 그 중 하나죠.”-이번 축제의 주테마이기도 한 전주 막걸리의 매력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막거리는 한국의 음식문화와 생활문화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습니다. 쌀로 대표되는 한국 농경문화의 공동체 정신을 표출하는 수단이었고, 한 많은 민중들의 애환을 해학으로 승화시킨 촉매제였죠.최근에는 과학적으로 막걸리의 유산균이 건강에 좋다는 연구결과까지 나왔습니다. 또한 쌀을 주재료로 쓰는 막걸리가 세계시장에 진출할 수 있다면, 위기를 겪고있는 국내 쌀 농가의 시름을 덜어주고, 전북농업의 활로 모색에도 큰 보탬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축제와 관련해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막걸리아리랑 김치쓰리랑 축제는 맛과 흥이 어우러진 미식축제로 전통음주가무와 청년들의 신선함이 어우러진 음식문화의 장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 축제를 통해 전북음식문화와 관광산업의 융합은 물론 한식의 뿌리를 현대화시키기 위한 작업에 매진할 생각입니다. 새로운 메뉴 개발과 신구세대 문화융합은 우리 한류의 새로운 자원이 될 것입니다. 이번 축제를 통해 시민과 사회단체를 중심으로 전주 음식에 대한 고민들이 하나 둘씩 모아진다면 전주음식의 뿌리를 찾을 수 있는 근간을 마련하는 일이 가까워지는 것과 동시에 음식에 대한 자부심도 커질 수 있을 것입니다. 저와 한문화국제협회는 이를 바탕으로 막걸리와 김치를 활용한 한식 메뉴를 연구하고, 장기적으로 이를 글로벌화 시킬 계획도 가지고 있습니다.”●김관수 이사장은- 한식 문화콘텐츠 개발 세계와 교류 선봉 자임진안출신인 한문화국제협회 김관수 이사장은 ‘전라도음식이야기’라는 한식당을 운영하며, 전주한식문화를 널리 알릴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늘 현장에서 직접 요리를 해보고, 접한 사람이 한식을 가장 잘 알수 있다는 게 김 이사장의 철학이다. 그는 “한국 속의 전주를 세계로, 도한 한류를 알리기 위해서는 한문화를 되돌아보아야 한다”며 “한글, 한옥, 한식, 한지, 한소리 등과 같은 한국적 문화가치를 살리고 콘텐츠 개발과 산업화를 통해 세계와의 교류에 앞장서야 한다”고 강조했다.김 이사장이 결성한 한문화국제협회는 우리문화의 아름다움을 계승·연구하는 한편 한식을 문화콘텐츠로 개발하는 단체다.앞으로 한문화국제포럼협회는 회원을 5000명으로 늘리고 한·문화TED컨퍼런스, 아카데미 및 푸드큐레이터 양성, k-슬로푸드 축제 등을 추진할 방침이다. 그는 이외에도 (사)전라북도 음식문화관광진흥원 원장, (사)전주한정식발전협의회 회장 등을 맡고 있다.

  • 기획
  • 김윤정
  • 2017.10.23 23:02

[철의 궤도: 전라선 철길 답사기 ⑩ 서도역·산성역] 코스모스 피어도 가을 손님 타고 올 열차 없네

그다지 쾌청한 날씨는 아니었다. 가을이 오는 건지 여름이 가는 건지, 이제 서늘한 건지 아니면 늦더위가 남은 건지, 9월 중순의 사매 공기는 어쩐지 어려웠다. 원래는 덕과와 사매면 중심부를 통과했던 활 모양 길이 어느 세월엔가 서쪽으로 멀찌감치 떨어진 직선이 돼 있었다. △ 현재와 마주보는 과거, 서도역 서도역은 이 신작로의 교차로에서 서쪽으로 조금 들어가면 나온다. 공사가 한창이던 울퉁불퉁 도로를 따라 약 2㎞, 새 서도역이 꽤 높은 돌방석을 깔고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서 다리 밑을 지나 들어가면 조그만 마을이 나오고, 그 가운데에 옛 서도역이 있다. 남원시 사매면이라고는 해도, 임실군 오수면과의 경계선상이기 때문에 생활권이 오수와도 겹치는 곳이다. 지금이야 조그만 마을이지만, 옛날엔 그 규모가 상당히 컸단다. 서도역이, 사람이 무지 많았어요. 순창 쪽에서도 이리 와서 열차를 타고 그랬으니까. 요 앞에 가게도 많았어요. 저 집은 방앗간이었고, 저 집도 가게였고 이 거리에만 이발소가 두 개가 있었어. 그런데도 명절 때면 한나절씩 기다려야 됐어. 김용구(62) 노봉혼불체험휴양마을 위원장의 증언이다. 길마다 한들한들 핀 채로 가을을 온몸으로 알리는 코스모스 무리를 따라, 취재팀이 옛 서도역을 찾은 것은 지난 9월 15일. 최명희의 소설 혼불의 배경이 됐던 곳, 그래서 혼불 문학마을의 시작점이 되는 옛 서도역에도 마른 나뭇잎이 하나둘 나뒹굴기 시작했다. 영상촬영장이라는 간판을 보고 들어가면 자갈 깔린 앞마당이 나온다. 그 가운데 선 나무 주위로 뱅글뱅글 바람개비가 돌아가고 있었다. 아름드리나무는 어른 두 사람이 두 팔을 벌려 껴안아도 다 덮지 못할 만큼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그 뒤로 나무로 외양을 꾸민 조그만 역사가 자리했다. 관리인이 따로 상주하고 있지 않아 평상시에는 건물 내부로 들어갈 수 없는데, 맞은편 혼불숭어리들름터에 찾아가 열어달라고 요청하면 된다. 역사 한쪽으로는 조그만 공원이 마련돼 있다. 소설 <혼불>의 원고가 적힌 4만6000여장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원고지를 쌓아 작가의 열정을 표현했다고 적힌 조형물이 시선을 이끈다. 칼보다 강하다는 펜, 그 펜을 받아내는 원고지가 금속 재질로 화(化)해 쌓여 있는 것이, 어떤 힘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쪽으로 계속 걸어가면 보선 사무소 건물이 나오고, 이리저리 갈라져 있던 철길이 하나로 모여 남원 쪽으로 뻗다 만다. 서도역은 1931년 전라선(당시 경전북부선) 전주~남원 구간 개통 때 함께 영업을 시작했다. 조선총독부 관보(제1412호)에는 1931년 전주~남원 구간 개통 당시 정차역으로 고시돼 있는데, 남원시에 따르면 역사가 지어진 것은 그 이듬해인 1932년이라고 한다. 철길 위로 바삐 오가며 역에 생명을 불어넣었던 열차의 기억을 찾아 역사 뒤편으로 가보니, 더욱 흑백사진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울긋불긋 코스모스마저 그 일부처럼 느껴진다. 배롱나무꽃이 떨어지기 시작한 플랫폼에는 효원이 대실에서 매안으로 신행 올 때 기차에서 내리던 곳이니, 강모가 전주로 학교를 다니면서 이용하던 장소니 하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역사를 정면으로 바라봤을 때 오른쪽, 그러니까 북쪽에는 관사와 우물이 서 있다. 1930년대 일본식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역장 관사는 침실, 화장실, 거실 등이 갖춰져 있어 제법 널찍한 내부를 자랑한다. 그 위, 이제는 기차가 다니지 않는 옛 철길 한쪽으로는 레일바이크 시설이 모습을 드러낸다. 원래는 폐 철로에 턴 테이블을 놓은 형태였는데, 지난 2015년께 지금과 같은 순환형으로 선형을 바꿨다고 한다. 지금은 바퀴에 자물쇠가 채워진 채 가만히 앉아 있지만, 남원시 관계자에 따르면 곧 정비를 거쳐 내년에는 운행이 가능하게 만들 예정이라고 한다. 그 바로 맞은편, 언덕배기를 올라가면 붉은 벽돌로 된 밋밋한 한일(一) 자 건물이 있다. 새 서도역이다. 전라선 철도가 개량되면서 2002년에 이곳에 새로 지어졌는데, 2004년 7월 여객 취급이 중지되고, 2008년 7월 1일 역무원이 철수했다. 지금은 시설 관리 업무 위탁 업체 직원들이 역을 지키고 있다. 오수역 시설관리반 직원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플랫폼에는 오래돼 색이 바랜 사진처럼 처연히 세월의 흐름을 그대로 맞고 있었다. 봄날 개나리를 닮은 노란색으로 만들어졌을 점자블록은 허옇게 변했고, 조각조각 부서진 파편들만이 늦가을 낙엽처럼 통행로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한 달여가 지나, 10월 13일에 옛 서도역을 다시 찾았다.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랬나, 뭐랬나. 낙엽이 수북하게 깔려 있었다. 이곳의 낙엽은 망명정부의 지폐라기보다는 지나가버린 비둘기호 열차 티켓 정도가 적당하겠다. 은행나무가 노란빛을 뿌리고 있는 서도역 풍경 앞으로, 붉은 관광버스 한 대가 나타나 멈췄다. 내린 이는 어림잡아 삼십여 명. 김용구 위원장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새마을호는 못 세우더라도 무궁화호만큼은 세웠으면 좋겠어요. 이게 숙원사업이에요. 김은미(47) 체험마을 사무장이 옆에서 거든다. 보통 남원역으로 가서 전세버스로 여기까지 와서 보고 또 시간 맞춰서 남원역으로 가서 나가고 그러거든요. 아예 서도역에 열차가 서면, 여기서 내리면 되지 않겠어요? △ 산성역, 사람 흔적은 어디에 안내를 따라 돌아 들어가자, 취재팀을 맞이한 것은 서남대 정문이었다. 산성역으로 가야 하는데, 서남대는 왜? 하는 의문도 잠시, 조용한 캠퍼스를 가로질러 난 도로를 지나 남원천변을 잠깐 달리자 이내 산성역이 나타났다. 서남대에서 직선거리로 한 1㎞ 될까 말까. 후문쪽 원룸촌에서 걸어서 다닐 수 있을 만한 가까운 자리였다. 나타난 것이라기보다는 이쪽이 찾아낸 것이 가깝다 할 정도로 존재감이 옅었다. 도로에 흔한 폴 사인이나 이정표도 없어,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지도 모른다. 지난 2003년에 새로 지어졌다는, 붉은빛이 도는 벽돌을 두른 역사는 꽤 깔끔했지만, 형태가 좀 어색했다. 여객 기능이 있는 역사에는 보통 정면 가운데쯤에 승객들이 드나드는 문이 있다. 정면이나 가운데가 아니라도, 딱 역사 앞 광장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곳에 출입구가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산성역의 정면 가운데 부분에는 회색 문 굳게 닫힌 역무 공간이 있었다. 매표소와 맞이방으로 갈 수 있는 승객 출입구는 건물 남쪽에 붙어 있었는데, 그 모습이 좀 옹삭시럽게도 보였다. 승강장으로 나가는 정도는 막혀 있었다. 대신 역시 좀 옹삭시럽게, 건물 옆 틈을 통해 나갈 수 있었다. 여수 방향 승강장으로는 건널목 나무 발판을 밟고 갈 수 있었지만, 본선을 가로질러 반대편 승강장으로는 이렇게 비교적 편하게 갈 방법은 없었다. 여객 취급이 중단된 다른 무인역들과 마찬가지로 발판이 치워져 있었다. 사실 이 역사와 시설은 사람 손때를 거의 타지 않은 것들이다. 2003년 12월 25일 새 역사가 준공됐지만, 이듬해 7월 15일에 여객취급이 중단됐다. 이 기간 산성역을 이용한 이는 100명을 조금 넘는 수준이다. 대충 이틀에 한 명 정도 타거나 내린 셈이다. 철도산업정보센터에 등록된 연혁으로는 1967년에 임시승강장으로 개업한 것으로 나와 있지만, 사실 산성역의 역사는 더 오래됐다. 1931년에 전주~남원 구간이 개통될 때 함께 문을 열었는데, 광복 직전인 1944년에 폐지됐다. 이후 1967년에 되살아나 1980년에는 보통역으로 승격되기도 했다. 1980년 산성역을 이용한 이는 모두 10만 8348명, 이 역에서 취급된 화물은 3만 2601톤이었다. 발송 화물이 185톤, 도착 화물이 3만 2416톤이었다. 그러나 이후 승객이 꾸준히 줄어들었고, 결국 2004년에 여객취급이 중단된다. 같은 날 봉천서도주생옹정역이 함께 여객취급 중단의 칼을 맞았다. 남쪽에서 약간 서쪽으로 치우친 방향을 바라보면 교룡산이 내려다보고 있다. 남원 시가지를 내려다보는 이 산에는 산성역이라는 이름의 기원이 된 교룡산성이 버티고 서서 남원을 지키고 있다. 철길은 바로 그 교룡산을 스치듯 돌아 내려가는데, 그러면 곧 남원역이 나온다. 하선에 진행 신호가 들어왔다. 곧 전기기관차가 이끄는 무궁화호 한 편성이 지나갔다. 차내 방송도 이 무렵이면 나올 것이다. 우리 열차는 잠시 후, 남원, 남원역에 도착하겠습니다. ● 노봉마을과 혼불문학관, 천추락만세향의 혼불 사랑 지난달 15일, 푸른 잔디가 파도처럼 넘실대는 혼불문학관 앞마당. 김준식(47)김영아(47) 씨 부부가 천천히 거닐며 문학관을 둘러보고 있었다. 알고 보니 <혼불>의 열렬한 팬이었다. 전주 한옥마을에 있는 최명희문학관부터 작가가 잠들어 있는 건지산의 묘소까지, <혼불>과 관련된 곳이라면 전부 찾아다녔다고. 이곳 혼불문학관도 가끔 찾아온다고 했다. 진안 출신인 김준식 씨는 작가와 같은 전북 출신이다 보니 작가를 통해 내 고향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된다며 혼불을 읽어보면 알 수 있는데, 작가가 지역의 문화와 정서에 대해 색다른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 특히 좋다고 말했다. <혼불>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남원 사매면 노봉마을. 혼불문학관은 노봉마을 윗자락, 청호저수지를 끼고서 이 근방을 전부 내려다보는, 가히 백대천손의 천추락만세향을 누릴 만한 자리에 지난 2004년 들어섰다. 문학관에서는 <혼불> 이야기와 최명희 작가의 생애에 대해 볼 수 있는데, 특히 최명희 작가의 생전 집필 공간을 재현해 놓은 부분이 눈길을 잡아끈다. 오는 11월 4일, 남원 사매면 서도길에서는 <혼불>을 사랑하는 마을 주민들이 팔을 걷고 신행길축제를 연다. 올해로 4회째를 맞은 이 축제는 옛 서도역을 중심으로 혼불문학관 등 노봉혼불문학마을 일원을 무대로 하는 마을 잔치다. 주민들이 잔치국수 등 푸짐한 음식을 지어 축제를 찾는 이들과 오순도순 나눠 먹고 농산물 프리마켓 등 농경문화 체험 행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김은미 사무장은 이날 낮 11시 개막을 앞두고 가장 먼저 손님들을 맞이할 신행길 재연 행렬에 주목해보라고 추천했다. 옛 서도역에서 마을회관을 거쳐 혼불문학관 혼례청까지 이어지는 이 행렬은 혼불 속 효원 아씨 신행길을 뼈대로 마을 사람들이 직접 꾸민다. 소설 속 한 대목을 눈앞에서 생생하게 감상할 기회다. 그맘때면 옛 서도역 앞이 노오란 국화꽃들로 진하게 물들겠네요.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정말 예쁜데, 다음에 한 번 또 구경 오세요. 김 사무장이 귀띔했다. /권혁일김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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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0.21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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