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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과 학교 만나니 사람농사 풍년 들겠네

이제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로 회자되고 있는 온 마을이 한 아이를 키운다는 말. 그 지당하신 말씀을 잊고 살았던 우리에게, 슬그머니 다가와 이제는 마을과 학교를 다시 일으켜 세울 화두가 되었다. 마을이 키우는 아이, 아주 자연스럽게 이제라도 다시 이어가야 할 아름다운 전통으로 화려하게 부활한 것이다. 그런데 화려한 부활 이면에 되짚어야 할 중요한 전제가 있다. 키워야 할 아이가 많이 줄었다는 것, 마을도 예전 그 활력에 찬 마을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을도, 아이도 예전 같지 않은데, 마을이 키우는 아이라는 공식이 여전히 성립할까? 그 공식의 조건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작은 시도들이 지역에서 조심스레 움트고 있다.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마을과 아이, 학교가 연대하는 작은 흐름을 읽어본다.△마을학교 풍경 하나, 온몸교육협동조합온몸교육협동조합 정유선 대표는 가족과 함께 2008년 아산초등학교가 있는 영모정마을에 귀농한다. 둘이었던 아이는 지금 넷으로 늘었고 큰아이가 고등학교 1학년, 막내가 유치원에 다니고 있다. 대학을 빼고 우리나라 학제 전반에 아이들이 포진해 있는 것이다.학교가 있는 마을에 스미어 살게 된 정 대표에게 고민이 일었다. 수업을 시작하는 종소리, 끝나는 종소리가 없는 것은 물론, 심지어 시간표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수업이 진행되기 일쑤였다. 점점 줄어드는 학생 수, 폐교를 앞둔 학교였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었다. 학교가 그렇게 예쁠 수가 없어 학교가 있는 마을에 살게 되었지만,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 하나하나를 간섭하며 살기란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폐교를 막기 위해 운영위원이 되어 납득하기 어려운 것들에 문제제기하며 힘겨운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다 지치고 말았다. 귀농해 사는 자연스런 삶과는 사뭇 다른 생활, 정 대표 가족은 이사를 결심하고 다른 지역에 집까지 계약하게 된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결정을 되물린다. 다른 사회운동보다 학교 교육운동은 학부모가 참여하면 할수록 변화가 있다는 사실에 다시 주목한 것이다.작지만 느끼고 함께 공유한 대로, 변화하면 할수록 그만큼 참여한 사람들의 보람도 크거든요.△농촌유학에서 마을학교까지, 고군(孤軍)에 분투(奮鬪)결정을 되돌리는 일이 쉽지 않았다. 피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생각, 그 생각의 힘이 더 컸다. 그리고 시작한 것이 농촌유학프로그램이다. 마을에 아이들이 늘어나면 학교도 활기를 찾고 변화의 기운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처음에는 마을에 사는 학부모들을 설득해 함께 진행했다. 연줄에 연줄을 대어 불러 모은 도시 어린이들과 시작한 첫 농촌유학프로그램, 그러나 결과는 실패다. 도시생활에 익숙한 어린이들의 몹시 까다로운 투정에, 참여해 홈스테이를 제공한 마을 학부모들이 두 손 두 발 다 들어버린 것이다. 그 애들 짜증이며 시중들기 더 이상 못하겠다.어린 시절 장기간 부모와 떨어져 생활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에 답하며 여름과 겨울 2박3일 단기농촌유학으로 급선회하게 된다. 그것이 2012년이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적용하며 마을자원과 도시 어린이들의 요구를 담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올해는 고창교육지원청(교육장 김국재)과 함께 아산초등학교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마을학교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마을문화 바꾸는 마을학교의 저력저학년은 생태놀이를 중심으로 하고, 고학년들은 절기살이로 진행한다. 절기살이는 처음엔 단순한 농사프로그램으로 시작했다. 학교의 요구도 농사라면 씨뿌리고 거두는 일, 모내고 거두는 일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기획단계에서 온전히 농사 자체를 체험하는 과정으로 바뀌었다. 절기교육이다. 모를 내고 거두는 단순한 체험이 아니라, 모판에 모를 내는 일부터 도정해서 쌀을 손에 쥐고 밥하고 떡 하는 일까지 통째로 농사를 체험하는 방식이다. 학교와 학교 안 아이들만 변화한 것은 아니었다. 그 과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훈수 두듯 함께 참여해준 마을 어르신들의 변화도 컸다. 일에도 관여하고, 참을 먹는 때도 모셔서 함께 했다.수확시기에는 홀테를 가져와 벼를 당겨 나락을 훑는 일을 직접 시범보이는 일이며, 원통형으로 된 호롱기를 발로 굴려 돌리면서 탈곡하는 좀 더 난이도가 높고 위험한 방법도 익숙한 손길로 척척 시범조교가 되어 주었다.습관처럼 평생 몸에 익은 몸짓으로 지금은 구경도 어려운 농기구들을 다루는 품을 본 아이들이 먼저 달라졌다. 우리 할아버지야, 어깨를 으쓱거리는 녀석들부터다. 마을 어르신들의 문화라는 것이 대개는 절기에 맞게 이뤄진 것인데, 아직 유효한 절기가 몇이나 될까? 학교와 학부모, 아이들과 함께 한 절기놀이를 통해 마을어르신들의 문화도 옛 힘을 되찾게 되었다.여름방학을 앞둔 온몸교육협동조합은 새로운 고민이 시작되었다. 방과후마을학교를 수탁하는 문제다. 우리가 얼마나 준비가 되어 있을까? 하는 고민에 더해, 마을과 학부모에게 상대적으로 문턱이 낮은 초등과정과는 달리 여전히 마을과 학부모의 생각이 전해지기 어려운 중등과정의 구조를 어떻게 하면 부드럽게 바꿀 수 있을까 하는 문제다. 그런데 이제는 혼자가 아니다. 온몸협동조합의 난제를 함께 풀어가는 주체가 고창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지역의 교육문제를 함께 풀어가는, 고창마을교육공동체포럼올 초 충남 홍동과 화성, 의정부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마을학교사례를 답사하고 난 뒤 자연스럽게 모인 마을교육공동체와 올해 고창교육지원청과 함께 마을학교, 토요마을학교를 운영하는 18개 마을학교가 함께 꾸리는 고창마을교육공동체포럼이다. 3월부터 함께 모임을 시작해, 매달 공동체 공간을 돌아가면서 해당 교육공동체가 걸어온 자취부터 고민거리, 진로에 대해 의견을 주거니 받거니 한다. 마을학교 지도를 공동제작하기도 하고, 마을학교끼리 서로의 빛깔을 다른 마을학교 어린이 친구들에게 선을 보이고 되받는 마을학교품앗이도 기획하고 있다. 오는 8월 모임으로 이웃 완주군 고산의 풀뿌리교육지원센터와 영광군 여민동락을 차례로 방문하는 마을교육공간투어 2탄도 계획하고 있다.포럼은 마을학교 마을교육의 한쪽 주체인 학부모 주민만 참여하는 것은 아니다. 분기에 한번꼴로 마을교육을 학교교과로 활용하려 고민하는 교사들과 함께 자리를 마련한다. 이른바 소집강 형태다. 학교, 지역, 교육청이 지역교육을 의제로 고민하고 토론하는 작은 모임을 여러 차례 거쳐, 마침내 연말 고창교육대론회로 수렴하는 구조다. 여기에는 참가를 원하는 지역의 초중등학생도 모두 참여해 지역의 교육문제에 해단 솔직한 이야기들을 나누게 된다.포럼은 이제 학교사회적협동조합을 모색하는 단계다. 학교를 이루는 구성원들이 조합원이 되어 학교가 추구하는 공익을 확보하는 길로서 협동조합이다. 포럼에 속한 교육공동체들에게 새로운 공부가 시작되었다. 1인1표의 민주적 운영, 자본주의 4.0으로 불리는 대안적 기업 모델, 5명 이상 모이면 협동조합 설립 가능. 이런 기본 원칙부터 차례로 배워가고 있다. 학교를 둘러싼 작은 모임, 그러니 배움이 빠질 수 없다. 학교를 둘러싼 지역 모두가 이로운 방식으로 교육의 역할을 확장하는 일이, 지역에서 한발 벌써 조용한 목소리로 운을 떼었다.

  • 기획
  • 기고
  • 2017.07.19 23:02

도전이 초월의 동력이다

인간에게는 초월의 욕구가 있다. 초월이 다 언어를 벗어날 정도로 어려운 것은 아니다. 초월은 지금의 나를 넘어서는 것, 지금의 나보다 더 나아지는 것, 더 확장되는 것, 더 넓어지는 것, 더 높아지는 것 등등을 한꺼번에 가리켜 하는 말이다. 가장 높고 크게 확장되어 있는 존재로 인간은 일단 ‘신’(神)을 모셔 놓고, 부단히 그곳을 향해 나아가려 한다. 초월의 욕구다. 외재적 초월도 가능하고 내재적 초월도 가능하다. 내면으로도 가능하고 외면으로도 가능하다. 정신으로도 가능하고 물질로도 가능하다. 초월의 정도가 자기 통제력의 두께다. 통제력의 내용은 복잡 다단에게 현현한다. 얼마나 초월되었느냐가 얼마나 크게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느냐를 결정한다. 개인적인 초월의 여정에 사회가 있고 국가가 있고 세계가 있고 우주도 있다. 여기에 환경도 있고 인권도 있고 자유도 있고 혁명도 있고 저항도 있고 역사도 있다. 학습도 바로 여기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학습과 역사는 매우 밀접하게 붙어있다. 역사적 경험에서 학습에 성공하면 그 역사는 빛나고, 학습에 소홀하면 그 역사는 찬란하기 어렵다. 동아시아의 근대 역사는 서양 침탈로 시작한다. 서양에 대한 반응이 곧 동아시아 역사의 많은 내용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한국도 이렇다. 중국의 개항은 1842년 제1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맺어진 난징조약이 시작이고, 일본의 공식적인 개항은 1854년 미일화친조약이 시작이다. 우리는 서양의 대리인 격인 일본에 의해 강제개항을 당하는데, 바로 1875년 일본이 강화 해협을 불법 침입하여 이듬해에 강제로 맺은 강화도 조약이 그 시발이다. 그러니까 일본은 미국에 의해 강제 개항을 당하고 나서 22년 만에 힘을 키워 다른 나라를 강제 개항시킬 정도가 된 것이다. 물론 강제 개항의 그 시점에 일본과 조선 사이에는 벌써 국력에서 큰 차이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22년이다. 이 22년 동안 일본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가. 바로 학습이다. 서양에 당하고도 그 서양을 배우려는 열기가 왕성했다. 이것은 ‘탈아입구’(脫亞入歐)라는 표어에 집약되었다. 이런 점은 중국도 마찬가지다. 중국도 영국을 필두로 한 서양에 굴욕을 당하고 나서 나라 전체가 “서양을 배우자!”(“向西方學習”)라는 구호로 가득 찼다. 조선은 굴욕을 당하고 나서 서양(일본)을 배우자는 자발적 열기가 성숙되지 않았다. 막부정권의 쇄국정책으로 일본은 220여 년간이나 닫혀 있었다. 1853년 7월 8일 오후 5시경 매튜 페리(Matthew C. Perry) 제독이 이끄는 미국 군함, 소위 흑선(黑船, 쿠로후네) 4척이 에도 앞바다에 들어오면서 일본은 엄청난 변화 앞에 직면한다. 쇄국을 유지하려는 막부와 개방을 요구하는 거대국가 미국과의 대결로 판이 전개된 것이다. 물론 막부가 전면적인 쇄국을 시행하면서도 네덜란드를 예외로 두고 서양 연결 통로를 열어둔다거나 1814년에 영일사전을 편찬한다거나 하는 등의 미래를 향한 개방적인 도전을 제한적으로나마 시행한 점이 훗날의 역사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던 점도 눈여겨봐야 한다. 이때 시대적 사명감을 가진 예민한 지식인들의 투쟁과 학습에 대한 열망은 일본으로 하여금 ‘당황스런 새 판’을 적극적이고 생산적으로 맞이할 수 있게 하였다. 뜻있는 일본의 젊은이들은 도전적인 자세로 과감하게 역사 속으로 뛰어든다. 여기에 일본 발전의 핵심이 있다. 그들은 역사를 위하려 하지도 않았고 자신들의 조국을 위하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바로 자신이 역사 자체가 되려 했고 자신을 ‘일본’ 자체로 만들려 했다. 이들 가운데 앞장서서 스스로 일본의 ‘역사’로 완성되려 했던 젊은이가 그 시대의 중심에 살았다.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다. 요시다 쇼인은 우리에게 큰 고통과 치욕을 안겨준 일제 식민지 침략의 이론적 근거인 정한론(征韓論)을 완성하고, 대동아공영론(大東亞共榮論)의 기초를 다진 장본인이다. 궁극적으로는 침략자 일본의 심장이다. 흑선을 직접 본 쇼인은 큰 충격에 휩싸인다. 그 전에도 서양 문명의 강대한 변화를 듣기는 했지만, 구체적으로 구미 열강과의 격차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배도 대포도 적수가 안 된다’라는 위기감을 친구에게 편지로 쓸 정도였다. 그러나 기득권과 타성에 젖은 막부는 쇼인의 간언에도 불구하고 과감한 개혁을 도모하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강국을 직접 경험하고 싶어 마침내 시모다 항에 정박 중이던 미군의 함선에 접근하여 밀항을 시도하기까지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국법을 어긴 죄로 감옥에 수감된다. 출옥 후에도 일본의 미래를 향한 착실한 행보를 이어간다. 고향 하기(萩)에 쇼카손주쿠(松下村塾)를 운영하며 근대형 인재들을 배양하는 데에 힘을 쏟은 것이다. 3년 정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여기서 배양된 인재들이 메이지 유신의 주력으로 성장하여 일본 근대를 튼튼하게 발전시킬 수 있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토 히로부미도 요시다 쇼인의 제자며, 아베 신조 현 총리도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요시다 쇼인을 들면서 그를 계승하는 일을 사명으로 하고 있음을 감추지 않는다. 심지어 이들은 쇼인이 강조했던 가르침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기까지 하다.근대 이후로 일본과 한국의 국력 차이가 난 근본적인 이유를 한마디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일본에는 요시다 쇼인이 있었고, 한국에는 요시다 쇼인 같은 인물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의 내면에 있는 무엇이 ‘요시다 쇼인’을 만들었을까? 나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을 밀항까지 감행했던 그의 도전 정신에서 찾는다. 도전은 ‘초월’의 동력이다. 도전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밝고 강한 미래를 보장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결정한다. 페리도 이 점을 주의 깊게 본 듯하다. 요시다 쇼인이 밀항하려고 그의 제자와 함께 군함에 접근한 것을 보고 페리는 말한다. “이 사건은 우리를 매우 감격시켰다. 법을 어기고 목숨을 걸면서까지 지식을 넓히려는 두 청년의 뜨거운 열정에 놀랐다. ... 지금은 엄격한 법에 억눌렸지만 만약 모든 일본인이 이 두 젊은이와 같다면 일본은 미국만큼 강대해질 것이다.”(Japan Expedition, 1854) 페리는 도전과 발전을 일치시켜 보는 안목이 있었고, 페리의 말대로 일본은 강대해졌다.전번 주에 14명의 한국 젊은이들과 함께 하기 시에 갔다. 하기 시의 거리 곳곳에는 요시다 쇼인의 제자들이거나 같이 활동했던 인사들의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재밌게 그려진 캐릭터는 매우 친근감을 주게 되어 있었고, 그 아래에 써진 업적들은 그들을 존경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었다. 일본은 승자임에도 불구하고 역사 학습의 지속성을 전혀 잃지 않고 있었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이 역사속의 인물들과 그들의 업적을 어려서부터 매우 친근감 있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어있었다. 요시다 쇼인 빵도 있고 과자도 있고 책받침도 있다. 생활 속에서 역사를 학습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역사를 일상 속에서 만날 수 있는가. 역사 학습이 사라졌다. 하기 시에 가려면 후쿠오카 공항을 거치는데, 그 도시에는 구시다 신사(櫛田神社)가 있다. 이곳은 일본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할 때 사용했던 칼이 보존되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신사와 마찬가지로 여기도 소원을 써서 걸어 두는 곳이 있는데, 거기에 한국인들의 소원패도 많이 걸려 있었다. 우리가 역사를 조금이나마 학습했다면, 어떻게 구시다 신사에다가 자신의 소원패를 걸 수 있겠는가. 일말의 자존심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학습은 도전을 하게도 하지만 최소한의 기품을 지킬 수도 있게 해준다. 초월의 욕구는 자신을 점점 높고 넓게 확장하므로 시대 의식을 포착하게 한다. 그래서 뜻있는 사람은, 즉 초월의 욕구가 살아있는 사람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찾으려 애쓰기 보다는 시대의 병을 함께 아파할 수밖에 없다. 시대의식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대 의식은 나를 보편의 단계로 확장시키는 방아쇠다. 이 방아쇠를 당기는 일을 도전이라고 한다. 젊은이들과 얘기를 하면서 도전을 강조할 때가 있는데, 그 때 나오는 대부분의 질문들이 다음과 같다. “도전을 했다가 실패하더라도 사회에서 그 실패를 허용하거나 보살피는 시스템이 준비되지 않았다. 도전하다 실패하면 어떻게 하는가? 그 위험을 누가 책임지는가?” 도전, 모험 그리고 탐험을 말할 때는 항상 나오는 질문이다. 이것은 나의 매우 협소한 경험인데, 다른 나라 젊은이들에게 도전에 대해서 얘기하고 나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나오곤 했다. “도전이 중요하다는 것은 알겠다. 그런데 내게 도전하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도전할 마음이 생기는가?” 초월의 견지에서 볼 때, 도전해서 실패하였을 경우를 걱정하는 질문과 도전할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하는 질문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크다. 도전은 우선 뒤를 돌아보는 조심성이 결여되어 있어야 미덕이다. 이런 미덕이 갖춰져 있어야만 ‘초월’의 확장이 실현된다. 학습을 통해 두텁고 두터워진 존재는 뒤를 돌아볼 필요가 없다. 그가 당기는 도전의 방아쇠는 역사의 순방향에 조준되어 있을 것이 거의 분명하기 때문이다. 긴 시간 스스로 역사가 될 준비를 진실하게 한 사람은 항상 옳다. 스스로 역사가 되었기 때문에 보상을 기대하거나 결과에 전전긍긍 하지도 않을 것이다. 자유롭다. 두려움도 없다.절대 자유와 한계 지우지 못하는 큰 업적을 이루는 경지를 장자(莊子)라는 철학자는 ‘소요유’(逍遙遊)라 말했다. ‘소요유’의 상징은 ‘대붕’(大鵬)이다. 대붕은 원래 작은 물고기였다. 우주의 바다에서 긴 시간 학습한 공력(積厚之功)이 극한까지 커져서 질적인 전환을 도모하지 않을 수 없던 찰나에 바다가 흔들리자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과감하게 9만리를 튀어 올라 새가 되었다. 이것이 ‘대붕’(大鵬)이다. 대붕은 9만리를 튀어 오르는 내내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건명원 원장·섬진강 인문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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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7.18 23:02

정성길 국제라이온스 전북지구 총재 "겸손한 봉사…내것 먼저 나누면 사회는 더 풍요로워질 것"

겸손한 봉사. 국제라이온스 356-C(전북)지구 제40대 총재로 취임한 정성길(57) 총재가 내세운 캐치프레이즈다. 정 총재는 이를 섬김을 받는 이들의 입장에서 접근하겠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이달초 임기를 시작한 정 총재를 지난 14일 지구 사무실에서 만났다. 인터뷰 내내 호방한 웃음을 보인 그는 봉사를 이야기할 때는 누구보다 진지했다. 그동안 사회에서 받은 사랑이 너무나 크다는 정 총재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부터 나눔을 실천하면 사회가 풍요로워질 것이라고 믿는다며 임기 동안 이웃들 돕는 일에 전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1일 전북지구 총재로 취임하셨습니다. 소감을 말씀해주신다면.전북지구 1만여 명의 라이온 가족을 이끌어야 한다는 부담감에 어깨가 무겁습니다. 취임 이후 짧은 시간이 지났지만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음 한편으로는 최선을 다해 봉사할 좋은 기회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동안 해 왔던 봉사의 폭을 더 넓혀 나가는 계기로 삼을 생각입니다.- 라이온스와 인연은 어떻게 맺으셨습니까.치과를 찾은 환자의 권유로 입회했습니다. 당시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익산에 개업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입니다. 지속적인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고 생각할 때였습니다. 대학때도 의료봉사활동을 했었는데, 졸업후 이어진 공부와 진료활동으로 소원했었습니다. 라이온스 가입 초창기에 농촌 경로당을 찾아 도배와 청소를 해드렸는데, 해맑게 웃으며 좋아하셨던 어르신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봉사를 매개로 라이온스 회원들과 유대관계가 돈독해지는 것도 삶의 활력입니다. 라이온스에 입회한 것이 제가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올해는 라이온스에 특별한 해로 알고 있습니다.국제라이온스협회가 결성된지 100주년입니다. 한 세기를 지나 다음 세기로 접어드는 시점으로 볼 수 있습니다. 6월 26일부터 이달 6일까지 라이온스가 태어난 곳이자 국제본부가 있는 시카고에서 라이온스 국제대회가 있었습니다. 라이온스는 그동안 시력보존사업과 환경, 기아, 청소년 문제, 특히 소아암 환자에 대한 지원활동을 펼쳐왔습니다. 이제 새로운 100년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당뇨병 예방치료에 대한 사업을 추가했습니다. 라이온스의 우리는 봉사한다는 모토처럼 당뇨를 전염병과 같이 세계적인 질병으로 규정하고, 당뇨에 대한 교육과 치료 등 다양한 방법으로 봉사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라이온스는 대표 봉사단체로 꼽히는데요. 추구하는 가치는 무엇입니까.라이온스는 Liberty(자유), Intelligence(지성), Our(우리) Nations(국가의) Safety(안전)의 앞글자를 따서 LIONS라고 부릅니다. 라이온스는 세계 최대최강의 국제적 봉사단체인데, 모토는 We Serve(우리는 봉사한다)이고, 강령은 라이온스의 어원 그대로인 자유지성우리 국가의 안전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142만 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라이온 각자가 1시간을 봉사하면 전체적으로 142만 시간, 5만9166일, 162년이라는 긴 시간 봉사를 할 수 있습니다. 금전적인 면에서도 라이온 한명이 1만 원을 기부하면 142억 원이라는 큰 금액의 기부가 이뤄지는 겁니다. 대단한 규모이죠. 작은 힘으로 거대한 봉사를 할 수 있는 힘을 지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조직화된 집행부와 곳곳에 흩어져 있는 라이온의 활동으로 재난 등이 닥쳤을 때 어느 단체보다 신속하게 봉사자를 투입하고 경제적인 지원을 할 수 있습니다.- 전북지구 규모나 활동사항은 어떻습니까.우선 한국에는 21개 지구와 2100여개 클럽에 8만여 명의 회원이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회원수와 기금 모집 부문에서 4위 정도 규모입니다. 전북에는 1964년 전주 클럽이 최초로 탄생한 이후 현재 12개 지역에 104개 클럽이 있습니다. 전국 21개 지구 중 전북지구는 회원 수로 보았을 때 6번째인데, 활동이 아주 활발한 선두 그룹으로 평가받습니다. 원로 총재님들이 열심히 도와주시고, 임원과 회원들이 열정적으로 봉사를 하겠다는 의욕이 큽니다. 특히 전북도민의 심성이 착하고 봉사에 앞장서다 보니 살아 꿈틀거리는 활발한 지구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라이온스가 보완해야 할 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저희 라이온은 세계적이고 조직적인 봉사단체라는 자부심이 강합니다. 하지만 밖에서 볼 때는 봉사단체라는 본질보다는 사교적인 집단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자기 직업에 긍지를 가지고 근면 성실히 힘써 사회에 봉사한다라는 라이온스의 첫 번째 윤리 강령에서 볼 수 있듯이 친목활동을 통해 바쁜 와중에도 크고 작게 기부하고 봉사하는 활동들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라이온스가 행하는 봉사의 참 뜻을 알리기 위해 활동상을 적극적으로 홍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17-2018 전북지구 운영 방향에 대해 소개해주십시요.이번 회기의 주제를 겸손한 봉사로 정했습니다. 주제 실현을 위해서 회원들과 열심히 봉사하고, 라이온스의 가치와 자존심을 향상시키는 것에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라이온스 혼자 봉사하는 것이 아닌 지역사회 봉사단과 클럽이 결연해 봉사하는 것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어려운 이웃에 대한 지원과 지역 환경 개선, 의료 봉사, 어르신들의 영정 사진 찍어 드리기 운동을 펼칠 계획이고, 라이온스의 공공 이미지 강화를 위해서 각종 미디어를 통한 봉사활동 홍보와 장학금 사업도 준비 중입니다.- 총재 재임 기간 반드시 하시고 싶은 일이 있다면 무엇입니까.라이온 회원들과 함께 겸손하고 성실한 자세로 지역사회 주민들의 삶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겠습니다. 또한, 전북 지구 라이온스 회원의 질적 향상뿐 아니라 회원 확장에도 노력할 것입니다.- 라이온스 회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그동안 각 지역에서 묵묵히 봉사해오신 라이온스 회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리면서 존경의 마음을 표합니다. 이번 회기 저와 함께 겸손한 봉사로 지역사회를 위해서 열정적으로 봉사해 주실 것을 당부드립니다.● [정성길 총재는] 임플란트 전문의로 명성, 부친 유훈 따라 총재 맡아국제라이온스협회 356-C(전북)지구 정성길 총재는 1959년 익산에서 태어나 원광대학교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치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1992년 미국으로 건너가 USC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 보철과에서 수련 후 귀국했다.정 총재는 임플란트 전문의로 명성이 높았다. 성균관 의대 삼성의료원 외래교수와 보건복지부 치과의료 전문 평가위원을 지냈으며, 현재 익산에서 교정 전문의인 아내 박윤경 씨와 치과 의원을 운영 중이다.정 총재는 돌아가신 아버지로부터 봉사에 대한 큰 가르침을 얻었다며 사회로부터 받은 큰 축복을 봉사를 통해 사회로 돌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진료와 강의 등으로 분주하게 보내다 라이온스 총재를 맡은 것도 아버지의 유훈을 본격적으로 실천하기 위해서다. 지난 1997년 익산 청운라이온스 클럽에 입회했으며, 청운라이온스클럽 회장과 국제라이온스협회 전북지구 제2부총재와 제1부총재를 지냈다.

  • 기획
  • 천경석
  • 2017.07.17 23:02

<전북에 머문 최치원의 향기> 역사적 사실·판타지적 설화, 스토리텔링 소재 가득

△ 풍류를 말하다통일신라 말 고대 동아시아의 문장가였던 최치원은 풍류를 말했다. 다소 어려운듯 하지만 여기서 풍류는 국유현묘지도 즉 우리나라에 깊고 오묘한 뜻이 있다는 말이다. 그 기원은 밝 사상인 천신을 섬기는 고조선에서부터 전승되었고 유,불,선 삼교가 담겨있다. 풍류를 실천하는데는 접화군생(接化群生)의 원리를 따른다고 한다. 천지에 살아있는 것들은 가정에서는 식구와 만나고 마을에서는 마을사람을, 나라는 백성과 만나는 등 천지만물과 제대로 만나야 풀어진다는 뜻이다.1200년이 지난 지금도 최치원은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또한 중국과 우리나라의 교류의 아이콘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그 이유는 당나라 말기 토황소격문으로 황소에 기의 날개를 꺾어놓은 글솜씨와 인품이 동북아를 포용한 동인주의(同人主義)를 갖은 국제인, 조국 신라를 사랑한 동민주의(同民主義)를 가진자로서 동북아시아의 진정한 문화영웅이기 때문이다.필자는 지난해 7월 강소성 양주시에 갔다. 최치원의 성장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고 싶어서다. 최치원은 12살의 나이로 유학길에 올랐다. 남이 백 번 할 때 천 번 한다는 각오로 6년만에 과거 진사과에 합격했다. 20세에 첫 발령을 받았던 율쉬이 현에는 최치원의 비석이 있었다. 성 밖에 서민들의 삶을 보살피기 위해서 지나다니던 길목에 있었다. 비석 옆으로 멀어져 가는 오솔길이 보였다. 그 당시는 당나라도 신라도 말세지말의 혼돈에 싸여있었다. 그 혼돈 속에서 한줄기 빛이 되고자 외롭게 걸어갔던 최치원의 뒷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최초 생사당의 주인공중국의 황제로부터 자금어대까지 선물 받았던 최치원은 당대를 풍미한 동아시아의 문인들과 소통할 정도의 문필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당에서도 관리로서 성공의 삶을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치원은 혼돈의 시기에 있었던 신라로 귀국해 자신이 당나라에서 경험한 선진적인 정치이론을 가미한 〈시무10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린다. 하지만 진골귀족 세력에 밀려 야심찬 개혁은 실패로 끝나버렸다. 신라하대 사회의 극심한 분열과 갈등을 회통과 조화의 정신으로 극복하고자 했으나 실패한 후 변방 외직을 자청해 고개 넘어서 외로이 태산에 다다랐다.왕권강화와 나라의 안녕을 위해 온 삶의 열정을 바친 정책은 버려진 풀잎처럼 말라버렸다. 그러나 태산에서 따뜻한 선정을 베풀었다. 정읍에는 최치원이 태수로 재직했던 흔적을 담은 문화경관이 남아있다. 무성서원과 피향정 그리고 유상곡수이다.태산의 옛 이름이 무성이다. 무성서원 입구에는 현가루가 있다. 그 이름은 공자의 제자 자유가 무성고을에서 악기와 노래로 예를 가르쳤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무성서원은 일반적인 서원과는 다른 독특한 구조다. 무성서원은 학문적 기능보다 제향공간으로서의 상징성이 두드러지는 문화경관이다. 최치원은 풍류로 선정을 베풀다가 태산이 견훤의 후백제 땅에 이르니 부성(西山)으로 떠났고 백성들은 그의 사랑을 못 잊어 최치원을 섬기는 생사당을 지었던 것이다.세월이 흘러 정읍에는 최치원에 풍류의 씨가 떨어졌다. 최치원이 뿌린 풍류의 씨앗이 송시열, 송강, 정극인으로 이어지는 가사문학의 맥을 형성한다. 이는 풍류의 연장선인 것이다. 그가 만든 두 개의 연못 사이 피향정 연꽃이 만개해 향기가 고일 때 선비들 모여 앉아 풍류를 논했다. 그 풍류의 씨앗은 가사문학으로 꽃피웠다. 바라건대 그 옛날 최치원 선생이 뿌린 풍류의 씨가 수풀이 되어 정읍과 새만금 땅에 무성하길 바란다.△ 최치원의 판타지 공간정읍과 함께 군산에는 탄생설화가 판타지적으로 유포돼있다.특히 고군산의 해양지역에 최치원에 관한 설화와 유적이 풍부하다. 그 핵심에 군산 옥구가 최치원의 고향이라는 설이 있다. 일반적으로 최치원의 출생지는 경주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대표적인 설이 옥구 내지는 고군산 출생설이다.서유구의 〈교인계원 필경〉의 서문에는 공의 이름은 치원이요, 자는 해부요 고운은 호이니 호남 옥구 사람이다 라고 쓰여있다.고군산군도는 63개의 섬 중 유인도가 16개다. 그 중 최치원과 관련된 명칭이 여러 곳이다.신시도는 고군산도에서 가장 넓은 섬이다. 주봉인 월영산은 가을이 되면 단풍진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최치원이 정상에서 가야금을 타며 글을 읽었는데 그 소리가 중국까지 들렸다고 한다. 월영산에 올라 섬과 섬이 이어지면서 그려낸 비경을 보고 있노라면 스스로 신선이라고 느끼지 못할 사람이 없다. 신시도는 문창현에 속하며 심리, 신치라고도 불리었다.심치는 최치원의 새로운 깨달음이 치솟았다, 심리는 최치원이 바다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는 뜻이다. 문창은 최치원이 고려 현종한테 받은 시호다. 옥구향교에는 문창서원이 있어서 최치원을 배향하고 있다.대각산은 최치원이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는 산이다. 정상에 올라 고군산도를 바라보노라면 그 전경이 가히 신선이 노닐던 곳이 맞구나라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대각산과 월영봉 사이에 되내기샘과 그 전설이 있다. 하늘의 은하수가 쏟아져 바다가 되었고, 별들이 내려와 고군산 섬들이 되었다고 한다. 하늘 위 감로수는 땅으로 흘러 되내기샘이 되었는데 밀물 때면 바다에 잠겼다가 썰물 때면 샘물로 솟아나 최치원이 마시고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최치원의 판타지 공간Ⅱ최치원의 금돼지 설화가 있다. 최치원의 아버지가 무장으로 고군산에 온 뒤 그의 부인이 금돼지에게 납치된 것을 구해와 최치원을 낳았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간척으로 이미 육지가 된 내초도에 금돼지굴이 남아있다.고군산도의 최치원 설화를 〈최고운전〉이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신선이 노니는 섬인 선유도는 물론 원래 자천대가 있던 선연리 등의 지명도 최치원을 신선으로 보던 지역민의 생각을 반영한다. 고군산 지역에 각인된 최치원은 홍길동 류의 선도 계통의 영웅이다. 하지만 홍길동이 무사적 영웅이라면 최치원은 문화적 영웅이라는 차이가 있다. 최치원은 바다의 신선으로 그의 탄생 담과 영웅담이 서해를 중심으로 중국 대륙과 한반도를 넘나들며 펼쳐진다.요컨대 전북에는 역사적 사실로서 뿐만 아니라 판타지적인 설화로서 최치원에 관한 스토리텔링의 소재로 가득하다. 지금은 바다의 시대이다. 그 옛날 해민의 꿈을 펼쳤던 최치원의 흔적이 향기로 묻어있는 새만금지역에 최치원의 꿈이 맘껏 펼쳐지길 바란다.문화는 사회 구성원에 의해 공유되는 지식, 신념, 행위의 총체라고 한다. 역사적 진실 차원보다 지역 주민들의 생각의 진실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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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7.12 23:02

전주우체국 박찬례 첫 여성 국장 "4차 산업혁명 발빠르게 대응, 지역경제 활성화 앞장설 것"

1978년 9급 공무원으로 출발해 121년 역사를 지닌 전주우체국 최초의 여성 우체국장으로 지난 5월 취임한 박찬례 국장은 전북지방우정청 내 모든 여성직원들의 롤모델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선입견으로 오늘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남모르는 고충이 많았다고 한다. 여자니까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40년 세월을 한결같이 남보다 한걸음 더 가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왔다는 박 국장으로부터 향후 청사진 등을 들어봤다.-설립된지 올해 121년이 된 전주우체국 최초의 여성우체국장으로 취임하셨는데 소감을 말씀해주십시오.2015년에 서기관으로 승진해 전북지방우정청에서 우정사업국장으로 근무하다 지난 5월 1일자로 12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전주우체국의 최초 여성국장으로 취임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무한한 영광임과 동시에 다음엔 저보다 더 훌륭한 여성 후배가 나올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선배 역할과 그동안 전주우체국이 발전하는 데 열성을 다한 선배님들의 노력을 계승해 전주시민들한테 더욱 사랑받는 우체국으로 거듭나야겠다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낍니다.-전북지방우청청 1호 여성사무관 등 도내 여성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따르는데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십시오.28년 전 도단위 기관인 우정청에 근무한 최초 여성계장을 시작으로 전북우정청 내 최초 여성사무관, 최초 여성서기관, 121년 역사를 지닌 도내 1번지 전주우체국의 최초 여성국장 등을 들 수 있습니다.-여성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현재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어떤 어려움과 노력을 해오셨나요.제가 우체국에 첫 발령을 받은 곳은 조그만 면단위 우체국이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서 발령을 받았으니 남직원처럼 차석으로 근무하는 줄 알았는데 여직원이기 때문에 보조 업무를 하라는 겁니다. 어느 정도 업무를 익혀도 차석 자리는 저한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여성으로서의 벽을 느낀 것 같아요. 그 후로 벽을 넘는 방법을 직무관련 규정집 섭렵은 물론 방송통신대학교, 전북대 경영대학원 졸업 등 주경야독의 자세로 공부를 택했습니다. 직무교육을 가서도 평가는 항상 1등을 하고 6시그마과제 등 남들이 꺼리는 어려운 직무과제도 맡아서 수행했으며 우정청에서 CS담당을 할 때는 행정자치부 평가, 우정사업본부 평가에서도 최우수청의 영예를 차지했습니다. 이러한 태도와 열정이 오늘의 저를 있게 했습니다. 그러나 여성으로서의 어려움은 아주 많았습니다. 한 예로 저는 2개월만에 출산을 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지금은 많이 변했지만 30년 전에는 도단위 기관에 계장급 여성이 근무하는 일은 거의 없었으며 우정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출산이나 육아문제로 업무처리를 소홀히 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겠지요.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임신을 했다고 하면 추천해주신 윗분들이 얼마나 실망스럽게 생각할까. 또 앞으로는 여직원을 청에 근무할 수 없게 하는 건 아닌가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래서 임신 7개월이 될 때까지 복대로 배를 감싸고 아무일도 없는 것처럼 근무를 했으니 다른 직원들은 임신 사실을 알 수 없었고 그러다 보니 2개월 만에 출산을 한 것처럼 된 것이지요. 출산절벽으로 걱정인 현실에서는 임신을 하면 애국자라고 칭찬해주며 출산휴가에 육아휴직까지 배려해주는 세상인데 저는 그때 당시 법적으로 주어진 출산휴가 60일도 채우지 못하고 45일 만에 출근해야 했던 웃지못할 가슴 아픈 사연이 있습니다.-그동안 이룬 대표적인 성과물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우체국은 단순히 편지 배달과 예금보험만 하는 곳이 아닙니다. 지난 2011년 전북도청에서 지역농수산물 판로개척을 위하여 거시기장터를 개설하면서 기관간 협력으로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하여 전북우청청과 MOU를 체결했습니다. 그당시 도내 220개 우체국에서는 거시기장터를 통해 접수된 농수산물에 대한 택배만 담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담당과장이던 저와 우리 직원들은 지역내 우수 특산품을 지속적으로 발굴해 거시기장터에 입점토록 안내하고 서울을 비롯한 전국우체국 망을 통하여 전북 상품을 홍보했습니다. 그 결과 거시기 장터에서 팔린 상품이 2012년도에 12만건으로 시작해 2013년도엔 53만건, 2016년도에는 80만건으로, 매출액은 120억까지 성장했고 지난해부터는 달팽이 장터를 개설해 시군 지자체와 협업으로 지역특산품 판매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이제 저를 포함한 모든 우체국 직원들은 우체국이 더 이상 편지만 배달하는 곳이 아니라 농어촌 특산물 판매도, 사업 환경이 어려운 중소기업소상공인의 사업홍보를 위하여 post plus+(광고우편)서비스도 제공하는 국민을 위한 기관, 국민과 소통하는 기관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여성 직원들에게 롤모델로 평가받고 있는데 후배 여성 직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영원할 것 같았던 유리천장이 여기저기서 깨지는 소리가 들리고 새로운 정부는 청와대, 장관 등 중요한 자리에 많은 여성을 기용하면서 앞으로도 여성 30% 할당을 약속하는 분위기입니다. 여성들만 근무하는 우체국이 많아지고 28년 전에는 우정청에 여성은 저 홀로 근무하였지만 현재는 거의 남녀 동수의 비율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본인의 노력이 수반되지 않으면 달콤한 과일은 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제가 살아온 여성공직자로서의 40년 세월은 남자보다 더 강한 척 자신을 다독이고 상하좌우 눈치보며 걸어온 자갈밭길이었다면 우리 후배들은 많은 여성선배들이 약간은 다듬어놓은 아스팔트길에서 당당하고 멋지게 개인의 역량을 펴 나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임기 동안 펼칠 청사진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우리는 현재 IOT, 빅데이터, 인공지능 등으로 표현되는 제 4차 산업혁명이라는 단어가 이제 이해 수준을 넘어 내 직장과 내 미래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고민하고 대처해야 하는 변화의 시대에 서 있습니다. 우체국도 예외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체국의 상징인 우편물량은 급속히 감소하고 있으며 예금보험 분야 역시 타 금융사와의 경쟁이 점점 더 치열해 지고 있습니다. 종전에 우편물 배달로만 상징되던 우체국의 인적물적 네트워크를 통하여 지역우수 농특산품을 적극 발굴해 우체국 달팽이 장터 및 우체국쇼핑에 입점해 판매할 수 있도록 지역경제 활성화에 우체국이 앞장서겠습니다. 또한 골목골목을 누비며 국민과 소통하고 있는 집배원을 통해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소외계층, 홀로 어르신을 대상으로 사회공헌 활동을 다각적으로 추진하는 한편 아침에 눈뜨면 출근하고 싶고 신명나게 일할 수 있는 행복한 직장분위기 조성에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박찬례 국장은] 강한 업무 추진력 바탕에 섬세한 감성 리더십 갖춰완주군 봉동읍 출신으로 전주여고와 전북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졸업했으며 1978년 9급 공무원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해 전주익산우체국 영업과장, 전북우정청 회계정보과장, 금융영업과장, 우정사업국장 등 주요 요직을 거치면서 우체국 업무 전반에 걸쳐 전문성과 폭넓은 식견을 가지고 있으며 지난 5월 전주우체국장으로 취임했다.또한 평소 폭 넓은 대인관계와 남성보다 더 강한 업무추진력이 돋보이며 우체국이 우편물 배달, 예금보험업무 등 고유 업무를 넘어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도청 등 유관기관과의 업무협력에도 적극적이라는 평가다.전주우체국장 취임 후에는 제일 먼저 직원들의 휴식공간 꾸미기, 집배원 사물함 비치, 청사 환경정비 등을 챙기는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성 리더십으로 직원들과 늘 소통하는 CEO로 평가받는 박 국장은 전북지방우정청의 많은 여직원들이 멘토로 생각하고 있다.가족으로는 전북도선관위 사무처장으로 재직하다 지난 7월 1일자로 경남도선관위 상임위원으로 승진한 김종영 씨가 남편이며 공무원과 대학생인 두 아들을 두고 있다.

  • 기획
  • 강현규
  • 2017.07.10 23:02

〈조선후기 실학자의 풍수사상〉 펴낸 유기상 전 전북도 기획실장 "풍수는 동양 전통사상…하늘·땅·사람이 소통하는 이치"

고령화와 저출산 시대, 인구가 감소하거나 정체되면서 지방 도시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사실 인구가 늘지 않고 감소하거나 정체된 상황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주목되는 것은 그 정도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30년 안에 적지 않은 지방도시가 아예 사라질 수도 있다는 전문가들의 분석까지 나오고 있으니 지방도시, 특히 작은 도시들이 처한 현실은 절박한 것임에 틀림없다.얼마 전 고령화와 저출산으로 지방 침체의 위기를 우리보다 먼저 겪은 일본 지방 도시의 사례를 다룬 기사를 읽었다. 도시는 도시대로, 농촌은 농촌대로 다움의 가치를 살려 위기를 극복하고 지역을 살려낸 지혜가 돋보였다. 흥미로운 사실이 있었다. 그 성공의 과정과 결실의 뒤에는 반드시 건강한 리더와 활동가들과 지역 주민들이 있었다는 것이다.오래전 실전으로 체험하고 연구한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 발 지방자치 정책실험〉을 펴낸 유기상 박사(61전 전라북도 기획실장)가 떠올랐다. 지방자치제도가 부활하던 90년대 초, 전북도청 사무관으로 일했던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가고시마대학원에서 지방자치행정을 전공했다. 그의 학업은 남달랐다. 대부분의 유학생들이 연구에만 집중하는 것과는 달리 가고시마현청의 공무원 서클에 들어가 공부하고 주말에는 일본 농가들의 홈스테이를 경험하면서 문화적 정서를 공유했다. 그 결실은 빛났다. 고령화시대를 대비하는 실버산업이나 지방자치와 지역 경영, 문화산업 육성, 문화거버넌스 구축 등을 주제로 한 논문과 책으로 엮어졌다. 더러는 대학의 관련학과의 부교재가 되거나 더러는 담당공무원들의 교과서가 되었다.37년 공직생활을 끝내고도 여전히 배우고 공부하는 일을 일상으로 삼고 있는 유기상 전 전라북도 기획실장을 만났다. 지난해 전북대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을 마친 그는 최근 박사논문을 새롭게 구성한 〈조선후기 실학자의 풍수사상〉을 책으로 펴냈다.논문의 주제도 의외였지만 지역과 지역의 자산을 남다른 시각으로 주목하며 자치단체의 정책으로 그 가치를 살리고 지켜내는데 앞장섰던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박사학위 논문 주제가 의외였습니다.제가 문화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하다보니 우리의 문화유산, 전통문화, 역사 쪽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갔어요. 유불선 모든 사상에 공통 코드가 있더군요. 풍수에 담긴 전통사상이었어요. 한국문화를 제대로 알려면 풍수에 대한 이해가 꼭 필요하겠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전주시에 근무할 때 고전번역원이 문을 열었어요. 제가 담당부서를 맡고 있었죠. 어린 시절 서당을 다녔던 경험이 있었는데 기회가 되니 공부를 다시 하고 싶더군요. 3기 수강생으로 들어갔죠. 3년 과정이었는데 충실히 공부하지는 못했으나 수료는 했습니다. 그때 공부한 것이 박사과정을 공부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최근 펴낸 책이 〈조선 후기 실학자의 풍수사상〉입니다. 책을 보니 호남 실학자들을 주목하셨던데요.박사논문을 준비할 때 이재 황윤석 선생의 〈이재난고〉에 완전히 빠졌어요. 깊은 학식도 그렇지만 모든 방면에 걸친 풍부한 지식이 정말 놀라웠거든요. 오늘날 우리가 앞세우는 문화콘텐츠가 다 거기 담겨 있었습니다. 원소스 멀티유스라고 하는데 다양성 면에서 보면 일상 생활문화는 물론이고 영화 연극, 심지어 디자인까지도 활용할 수 있는 콘텐츠의 보고라 할 만하죠. 이재난고를 들여다보면서 고창 사람인데도 이렇게 대단한 학자를 모르고 살았다는 부끄러움이 컸습니다. 후학으로서 제대로 조명하고 싶었어요. 그것이 출발이었습니다.-이재의 학식이 그렇게 깊었습니까.이분은 어문과 역사 예술 천문지리까지 모든 분야를 다 통달하신 분 같아요. 심지어는 어원을 비교하는 책 까지도 있습니다. 오늘날 음운학 하는 사람들까지 이재를 연구하는 정도니까요. 제 생각에는 개인저술로 치자면 아마도 가장 방대한 저술을 한 분이 아닐까 싶습니다.-그중에서도 풍수에 집중하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워낙 이재의 저술이 방대하고 자료 또한 풍부하니 다양한 분야에서 주목해 수십 편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상하게 잡학으로 분류되는 부분은 손을 대지 않았더라고요. 저는 애초 전통문화 분야를 주목했었는데, 그 뿌리를 좇다보니 풍수라는 전통사상에 이르게 된 것이죠.-실학은 경기도 쪽의 학자들이 주도했던 분야라고 생각이 되는데 호남의 실학은 그동안 왜 조명 받지 못했을까요.연구 자체가 그만큼 미진했다는 증거겠지요. 사실 호남학파는 용어도 없어요. 각광을 받은 사람들은 근기학파 실학자들인데 들여다보면 호남의 실학자들의 학문적 성과도 그렇게 만만하지 않거든요.-실학의 비조라 할 수 있는 반계 유형원이 부안에서 말년을 보내면서 〈반계수록〉 같은 명저를 남겼는데도 호남의 실학자들에 대한 조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물론이죠. 조선 후기 3대 호남 실학자로 황윤석 신경준 위백규로 꼽는데 연구 작업은 한결같이 미진합니다. 조명을 제대로 안했으니 그분들의 업적도 당연히 평가절하되고 있었던 것이죠.-지금이라도 호남실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와 조명작업이 절실하겠군요.아마도 호남 학자들이 제대로 조명이 안 된 이유는 오늘까지도 학문을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기관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근기학파가 스타학자들을 여럿 배출해낸 것에 비교하면 호남 학자들은 너무 많은 부분이 묻혀있어요.-풍수 이야기를 좀 들어보죠. 정통 학자들이 풍수를 사상으로 받아들이고 삶속에 그러한 사상을 실천하고 구현했다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호남쪽 학자들만의 특성인가요.그렇진 않습니다. 풍수는 고려시대부터 천년동안 관학이었습니다. 국가공무원이 연구하고 실행했던 학문이었다는 이야기지요. 풍수를 미신으로 취급해 전통사상의 개념까지 덮어버린 것은 일제강점기예요. 일제의 식민 정책으로 우리의 전통사상까지도 식민화 시켰잖아요. 그 가운데 하나가 풍수예요. 풍수는 조선의 탄탄한 기층문화였거든요.-정식 학문의 영역이었다는 게 흥미롭습니다.잡과로 학과에 들어가 있었고. 경국대전에도 고시과목으로 분류되어 있었어요. 기술학 과목으로 음양과가 있었잖아요. 풍수 10개 과목을 봐서 정식으로 채용을 하는데 채용된 사람을 지관이라 했죠. 6품이 책임자였는데, 정인지 같은 사람이 풍수학을 강의했습니다. 풍수가 공식 학문과 공식 관청에서 사라진 것이 일제 강점기인데 해방이 되고도 제자리를 찾지 못했던 것이죠. 이런 상황에서 풍수를 학문의 반열에 올린 분이 최창조 교수고 그 뒤를 잇는 분이 김두규 교수예요.-그동안 풍수 연구를 하는데 자료도 한계가 있었겠군요.그런 셈이죠. 풍수 연구의 기본 원전을 〈경국대전〉이나 〈조선왕조실록〉 같은 공식 관찰 사료에 의존해야 했었으니까요. 간혹 있다고 하는 것이 유학자 문집인데, 그 문집에는 풍수 분야가 들어있지 않았을 겁니다. 풍수를 철저하게 일상에서 활용하면서도 잡학으로 치부하고 부끄럽게 여겨 후손들이 없애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이번에 연구하면서 보니 유성용의 형님인 유운용은 풍수 역학의 대가인데 유언으로 반드시 풍수 등을 공부하라고 일렀더군요. 가학으로 효도를 하기 위해서라도 풍수를 꼭 하라고. 이번에 연구하면서 이재난고의 내용과 비교하면서보니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조선시대 유명한 풍수사 지관 20-30명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를 알 수 있겠더라고요. 덕분에 조선시대 풍수사의 공백을 거의 복원할 수 있었어요. 그만큼 이재난고가 대단한 저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죠.-민간 기록이 지닌 가치가 참 큰 것 같아요. 관찰 사료가 갖지 못한 내용까지도 다 담아 놓은 기록들이 많지 않습니까.물론입니다. 이재난고가 그 대표적인 자료인데 안타깝게도 아직 한글로 번역되어 있지 않거든요. 이재난고는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초서를 정서로 만드는데 만 열 일곱 권, 10년 걸린 작업입니다. 현재 번역 사업을 진행 중이긴 한데 그 과정이 너무 더뎌 국가차원의 적극적인 지원이 절실한 상황이지요. 이재난고는 민속 생활사를 비롯해 모든 전통문화 콘텐츠의 보고라 할 만 합니다.-이제 화제를 좀 돌리겠습니다. 그동안 저술하신 논문이나 책을 보면 지방자치, 지역, 역사문화유산, 지역의 자원 이런 것들에 관심이 많으신데요. 계기가 있었습니까.개인적으로는 일본 유학이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본 유학은 93년부터 2년 6개월 동안 석사과정으로 거쳤는데 그때 우리나라가 지방자치를 앞두고 있던 시점이어서 일본 지방자치정책을 공부했습니다. 당시는 국제교류 업무가 없어 전라북도와 가고시마 국제교류의 창구 역할도 했어요. 개인적으로는 가고시마현청의 공무원 서클에 들어가 정책 연구 활동도 함께 하고, 주말에는 일본 농가들의 홈스테이를 경험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어요. 지역의 가치를 알게 되었죠.-우리나라와 일본은 기본적으로 다른 점이 많은데 정책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았습니까.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우리 실정에 맞게 적용하거나 활용할 수 있는 점들이 많았어요. 그때 강하게 와 닿았던 일본 정책을 돌아보며 〈일본발 지방자치 정책실험〉이란 책을 냈는데, 당시 고령화 사회를 앞두고 지방자치단체의 과제가 노인복지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노인복지를 분석한 책을 냈지요.-공직에 계실 때는 문화 분야 정책과 사업에 남다른 관심을 쏟으셨습니다. 성과도 컸고요.돌아보니 업무의 대부분이 문화 분야에서 이뤄졌더군요. 좋은 체험이었죠. 전주한옥마을 조성, 전주영화제, 전주세계소리축제, 월드컵경기장, 자연하천형 전주천 조성, 백제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등재 등 우리 지역의 빛나는 문화 자원을 만드는데 참여했으니 감사한 일입니다.-고창은 어떻습니까. 역사문화자원이 어느 지역보다 좋은 곳아 인구 감소나 정체 위기에도 자생력과 성장 가능성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고창은 제 고향이어서가 아니라 역사문화자원이나 농업자원이 워낙 탄탄하고 뛰어납니다. 예전부터 이런 자원을 하나로 묶는 10차 산업을 실험하기 가장 좋은 지역이 고창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죠. 인구 6만 명에 역사문화자원이 산재해있고, 좋은 농업자원이 있으니 이것을 잘 엮으면 10차 산업의 메카로 만들 수 있다는 확신과 희망이 있습니다.-풍수로 보자면 고창은 어떤 지역입니까.최고죠. 결국은 땅의 기운인데, 저는 풍수사상을 하늘 땅 사람이 함께 어울려서 살아가는 지의 틀이라고 정리합니다. 천지인 합일사상이지요. 결국 하늘과 땅이 소통하는 기운이 풍과 수거든요. 고창은 산과 들 강 바다, 자연 환경이 다 갖춰져 있습니다. 고인돌이 있던 자리만 봐도 정확하게 풍수상 명당이거든요. 그 시대의 조상들은 하늘과 자연과 소통하는 교감 능력이 뛰어났던 것 같아요. 고창은 또 한편으로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땅입니다. 유형유산인 거석문화의 고인돌이 있고, 무형유산으로는 판소리와 농악이 있습니다. 곰소만 갯벌은 람사르 습지 갯벌 중에서도 세계 최고로 종의 다양성이 많습니다. 생물 다양성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건강하고 사람 살기 좋은 땅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 아니겠습니까.-하실 일이 많은데 너무 고향에 빠져 지내시는 것 같습니다.(웃음)공직에서 물러나면 고향으로 돌아가 고향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바람을 오랫동안 가져왔습니다. 일하는 것도 때가 있으니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서두르지 않고 준비하고 있습니다.고향에 돌아와 둘러보니 할 일이 적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지역을 성장시켜나갈 사람을 키워내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기회가 된다면 고창을 인양(人養) 고창으로 만드는 일에 역량을 쏟고 싶습니다.● [유기상 박사는] 9급으로 공직 시작, 1급으로 은퇴유기상씨는 1956년 고창군 월산리에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났다. 3남 2녀를 둔 부모님은 먹고 살기도 빠듯한 어려운 살림에서도 남들보다 더 가르치겠다는 교육열이 높았다. 특히 어머니는 생활력이 강해 나무를 지고 장에 나가 팔기도 하고, 나물 장사도 하면서 자식들의 학업을 도왔다. 큰 굴곡 없이 고창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애초 학비 안드는 육군사관학교를 가고 싶었다. 돈 들지 않고 노력으로 하는 일이라면 자신 있었으나 번번이 2차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돈부터 벌어야겠다 싶어 서울로 갔다.20대 초반, 그의 삶은 지난했다. 팔리겠다 싶은 물건은 가리지 않고 떼어다 파는 행상부터 술집 웨이터와 기도까지 가리지 않고 일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유도선수였던 덕분에 마음만 먹으면 할일은 널려 있었지만 그대로 가다가는 하루살이 인생이 되겠다 싶었다. 총무처가 공모한 9급 공무원 시험에 응시한 것은 안정된 직업을 갖고 싶어서였다. 공무원 생활은 서울 불광동 우체국에서 시작했다. 군대에 다녀와 복직을 한 즈음 방송통신대가 문을 열었다. 행정학과에 들어가 학사과정을 마쳤다. 경력에 따라 승급이 되었지만 7급 공채 시험에 응시해 노동부로 옮겼다. 기왕에 공무원을 하려면 노동자들의 인권을 보호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되자 전주사무소를 지원해 내려왔다. 내친김에(?) 행정고시에 도전했지만 뜻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합격한 것은 서른 세살, 35세 나이제한으로 보면 거의 막차를 탄 셈이었다. 내무부를 지원해 서울로 올라갔으나 얼마되지 않아 다시 고향으로 왔다. 이후 전주시 문화과장과 문화영상산업국장, 전라북도 문화관광체육국장, 익산시 부시장을 등을 두루 거쳤으며 전라북도 기획실장을 끝으로 37년 공직생활을 마쳤다.인생의 전성기를 공무원으로 보내는 동안 그는 전주와 익산, 전라북도의 문화 분야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하는데 각별한 공력을 쏟았다. 전주한옥마을 조성, 전주국제영화제와 전주세계소리축제, 백제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등재 등 의미있는 문화적 성과들이 직간접적으로 그의 손을 거쳤다.오랫동안 주경야독의 일상을 지켜온 그는 일본 가고시마대학원에서 지방자치행정으로 석사를, 전북대 대학원 사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마쳤으며 〈일본 발 지방자치 정책실험〉 〈실버산업을 잡아라〉 〈일본의 지방자치와 지역경영〉 〈고창사람 유기상의 꿈〉 〈조선후기 실학자의 풍수사상〉 등의 저서를 냈다. 공직에서 은퇴한 직후 귀향, 고향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도모하고 있다.

  • 기획
  • 김은정
  • 2017.07.07 23:0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⑬ 채용신이 그린 시대정신과 사람들, 벼슬 물러나 전북에 살며 지역 이야기·애국충절 화폭에 담아

△<사진 1> 만석꾼, 곽동원의 초상화지난 6월 초상화 한 점이 2억2000만 원에 낙찰되었다. 채용신(1850~1941)이 그린 작품이다.대대로 무관을 지낸 집안의 장남으로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던 채용신은 동근(東根)이라는 본명 외에, 석지(石芝)라는 호와 고종에게 하사받은 석강(石江)이라는 호 등 그 이름이 많았던 화가이다. 그는 모든 분야의 그림을 다 잘 그렸지만, 특히 초상화를 잘 그렸다. 태조, 숙종, 영조, 정조, 순조, 헌종, 고종의 어진(御眞)을 그려 어진화가로 알려진 사람이다. 채용신의 어진 모사와 화사 내용은 고종 시기 승정원일기에 잘 기록되어있다.채용신은 뛰어난 화가이자 무과로 등재해 벼슬이 종2품(從二品)에 이른 사람으로 칠곡군수와 정산군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채용신뿐만 아니라 겸재 정선도 지금의 서울 양천구와 강서구 일대를 관리한 현령이었고, 김홍도도 정조의 어진을 잘 그린 포상으로 현풍현감이 되어 관직에 있었던 것을 보면 당시 유명 화가가 관직에 종종 올랐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겸재 정선이 진경산수화의 대가로서 당시의 자연풍경을 주로 남겼고, 김홍도가 세시풍속을 주로 남겼다면 채용신은 사람들의 사연이나 초상화를 그림으로 남겨냈다.특히 채용신은 우리 지역과 인연이 깊은 인물로 벼슬에서 물러나 전주를 중심으로 거주하고 정읍에서 세상을 떠나 익산에 묻히기 전까지 주변 고을을 다니며 사람들의 모습과 이야기를 담아냈다. 그가 남긴 그림들이 특별한 까닭은, 그림이 전하는 당시의 스토리 속에 지역의 이야기와 애국충절의 마음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김제와 군산 사이 만경강을 배경으로 춘우정의 사연을 그린 김영상투수도(金永相投水圖)를 보면 잘 알 수 있다.△<사진2> 김영상 투수도작품을 보면, 산 위에서 내려다보듯 보이는 그림 한가운데에 배 한 척이 떠 있고 배 좌측으로 물에 뛰어들어 몸부림치는 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로 그림의 주인공 김영상이다. 물에 빠진 김영상을 보며 부지런히 손짓하는 순사와 승객, 뱃사공의 당황한 모습은 물론, 화폭의 위와 아래로 민가와 함께 그 무렵 다녔던 기차까지 그려져 역사의 한순간이 실감나게 전해지고 있다.김영상은 일제강점기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로 호는 춘우정(春雨亭)이다. 1836년 정읍에서 태어나 저명한 유학자들과 활발하게 교류하였으나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활동을 중단하고 학문을 닦는 일에만 정진하였다. 그러던 와중에 조선의 국권을 빼앗아간 일제가 분노한 민심을 달래기 위해 조선의 이름 있는 유학자 100여 명에게 천황 이름으로 노인 은사금을 내리자, 김영상은 일왕의 더러운 돈을 받을 수 없다며 일왕 도장이 찍힌 은사금 증서를 찢어 입에 넣어 삼키고, 일본 순사의 팔뚝을 물어뜯었다고 전해진다. 이 일로 김영상은 천황모독죄로 군산감옥으로 압송되고, 군산으로 가던 그가 만경강 신창 나루 근처에서 입고 있던 옷의 의대에 절명사를 남기고 강물에 뛰어들었던 사건이 바로 그림 속 장면이다. 당시 투신 후 괘씸죄가 추가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 뒤 옥사한 김영상의 정신과 이를 후세에 알리고자 사명감을 가지고 그려낸 채용신의 뜻을 동시에 엿볼 수 있다.채용신은 명나라 소설 삼국지연의 내용인 삼국지연의도(三國志演義圖)도 그렸다. 총 8폭의 그림으로 가로 183㎝, 세로 169㎝의 대작이다. 감상용이 아닌 관우를 모시는 관왕묘에 봉안되었던 종교화다. 관우 신앙은 명나라 때 조선에 온 장수가 전파한 것으로, 왜적을 물리친 것이 관왕의 위령 덕이라 믿었던 것이 유래가 되어 관왕묘에 제사 지내던 것이 일제에 의해 1908년(순조 2년) 폐지되었다. 현재 전북에는 전주와 남원 등에 관왕묘가 남아있고 전북대학교 박물관에는 채용신이 그린 관우 초상이 남아있기도 하다. 아마도 채용신이 삼국지연의도나 관우초상을 그렸던 마음에는 주유가 적은 군사로 조조의 대군을 물리친 것이나 관왕에 대한 믿음을 통해 우리도 일본을 물리치기를 기도하는 애국의 마음이 담겼을 것이라 여겨진다.어진이나 관우 초상 외에도 다양한 초상을 그린 채용신의 그림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정면을 응시한 모습이다. 특히나 눈빛을 중심으로 세밀한 의복과 소품 등 표현 속에 그 사람의 품성이 깃들어져 보는 이들에게도 주인공의 마음이 전해지는 듯싶다. 자애롭게 표현된 고종의 눈빛, 영조의 형형한 눈빛과 불에 타 반쯤 남아 용안의 모습을 안타깝게 짐작하게만 하는 태조의 어진에서 풍겨오는 왕의 기품은 글로 다 나열할 수도 없다. 걸작인 황현 초상(黃玹 肖像)은 사진과 더불어 보물 제1494호로 지정될 만큼 높은 가치로 인정받는다. 한말 4대 시인의 한 사람으로 불리는 매천(梅泉) 황현(1855~1910)은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경술국치를 맞아 나라를 잃게 되자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음독 자결한 우국지사로 유명하다.△<사진3> 황현 초상 및 사진황현의 초상화는 그가 자결한 다음 해인 1911년 5월에 1909년 김규진이 찍은 사진을 보고 그린 것이다. 사진을 보고 그린 그림이라지만 자결한 그의 스토리를 담아 사진과는 좀 다른 모습으로 그의 정신을 엿볼 수 있게 표현하였다. 사실적 묘사와 흑백의 사진으로는 알 수 없었던 역사적 느낌이 더해져, 황현의 당당하고 굳은 의지가 생동감 있게 전해져온다.김영상이나 황현 등 수많은 우국지사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린 데에는, 당대의 역사적 사실과 신분 고저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의 뜻깊은 정신과 업적을 고스란히 후대에 전해고자 했던 채용신의 사명감이 그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채용신은 신분이 높은 사람이나 유명한 인물의 초상만 그린 것이 아니다. 사대부나 중인, 일반 민중의 그림도 그렸다. 그가 그렸던 인물 중 운낭자(雲娘子)는 관청에 소속된 기생으로서 이름은 최연홍이다. 27세 때인 순조 11년 홍경래의 난 때 군수를 도운 일을 높이 평가하여 조정에서는 기적(妓籍)에서 제외하며 상을 내렸고, 사후 평양 의열사에 제향되었다고 한다. 채영신이 운낭자의 27세 때의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은 사내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마치 서양화의 인자한 성모자상(聖母子像)을 연상시킬 만큼 신분을 떠나 그 사연을 특별하고 숭고하게 보이게 한다.△<사진4> 운낭자상사람의 정신까지 담아 그려낸 그의 섬세한 작품에 감탄을 하고 보니, 채용신의 붓끝과 그의 마음을 따라 우리 고을 미술 기행을 해도 좋을 듯싶다. 채용신은 92세의 일생 중 벼슬에서 물러난 후 35년을 전북도에 거주하며 자기공방을 가지고 초상화를 의뢰받아 많은 작품을 남긴 군수 출신의 전업 화가로 살았다. 사실, 당시 초상화의 주요 쓰임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 필요했다니 하니, 아직도 우리 고을 어딘가에는 그가 그린 수많은 초상화 중 몇 점이 가문에 모셔져 아는 듯 모르는 듯 특별한 눈빛을 건네며 있을 것만 같다. 이제, 그 흔적도 찾아 그가 남긴 눈빛들을 만나보고 싶다.

  • 기획
  • 기고
  • 2017.07.07 23:02

[철의 궤도: 전라선 철길 답사기 ⑦ 신리역·남관역·죽림온천역] 물 흐르는 대로, 산 휘어진 대로…이제는 멈출 일도 없이

좁은목을 지나고부터는 산이 마치 골목의 담장처럼 전주천 좌우로 늘어서, 정말 이름 그대로 좁은 통로가 된다. 이 지형으로 전주와 남원 사이를 잇는 춘향로와 완주-순천 간 고속도로(순천완주고속도로), 그리고 전라선 철길이 전주천과 함께 달린다. 물길과 찻길과 철길이 나란히, 혹은 서로 교차하며 달리는 셈이다. 이들의 공존은 전주천 발원지 인근인 완주군 상관면 슬치까지 이어진다. 철도는 색장동을 지나, 완주군 상관면으로 접어든다. 그 경계에 해당하는 것은 신리터널이다. 여름날 뜨거운 햇볕을 피하기에 굴만한 곳이 또 있을까. 단선이던 전라선 옛 구간에 있던 옛 신리터널은 1931년 10월 개통돼 70년 가까이 쓰이다가, 2011년 5월 전라선 복선전철화 개통 후 버려졌다. 이곳이 2015년에 갤러리로 탈바꿈했다. 지난 6월 27일, 취재진은 마중물 갤러리가 된 옛 신리터널을 찾았다. 전주천을 가로지르는 월암교를 지나 곧장 좌회전하면 나오는 곳이다. 월암교 동단부터 선로를 걷어낸 기찻길 터가 길게 이어져 있는데, 침목도 레일도 없이 자갈들만이 옛 모습을 추억하는 듯 드문드문 깔려 있다. 갤러리 바로 옆 위쪽에 뚫린 새 터널에는 이따금 기차가 쌩 지나간다. 지난 시대를 바로 옆자리에 두고, 빠르게도 멀어진다. 입구 앞길 정원에는 옛 철길자리 양옆으로 온갖 식물이 장식돼 있다. 입구에서부터 찬 기운이 마음을 확 끌어당긴다. 온도계는 14~16도에 머물러 있다. 잠시 다른 차원의 세계에 들어온 기분이 든다. 이곳을 주로 찾는 것은 미술작품 전시 관람과 도예 수업을 위한 발길들. 주말에는 가족단위 나들이객이 많고, 평일에는 강의와 작업을 위한 공간으로 쓰인다. 올 4월부터 이곳을 맡아 운영하는 강옥자 씨의 손길이 곳곳에 닿아 있다. 이곳에서 별별미술관을 꾸리고 있는 그는 이 공간을 그림, 도예, 만화 등 미술 활동을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터널이라는 공간의 특성상 습기가 많아요. 그래서 종이 관리에 더욱 신경을 쓰죠. 여기 전시된 작품은 거의 다 제가 그리고 만든 것들이에요. 제 작품들이 실험대상이 된 셈입니다. 습기 때문에 종이가 버티기는 힘들지만, 대신 조소 작업에는 유리한 면이 있다고 한다. 흙이 빠르게 굳지 않아서다. 이곳의 구조는 단순하다. 오로지 직진뿐이다. 제1전시실, 제2전시실, 휴게실 등 구획이 나뉘어 있긴 하지만, 샛길이 있는 것도 아니고 딱히 문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입구부터 반환점까지가 전부 하나의 큰 덩어리 같다. 기차 입장에서는 목적지를 향해 빠른 속도로 통과하던 길. 길이 225m, 딱히 긴 터널도 아니고, 특별할 것도 없던 통로였겠다. 하지만 이제는 양쪽 벽면에 걸린 작품들과 천정의 장식을 살피느라 저절로 뒷짐 지고 사뿐사뿐 걷게 되는 길이다. 터널 저 끝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기대하며 자꾸만 나아가게 되는 별 희한한 미술관이다. 강 씨와 함께 터널의 북쪽 끝, 전주시 색장동 땅으로 나왔다. 강 씨가 포부를 밝혔다. 수익 고민을 안 하긴 어렵죠. 하지만 전 이 공간이 우리 지역에서 지역 사람들이 미술을 배우고 작업하는 공간이 되길 바라요. 바로 옆의 새 철길로 무궁화호 열차 한 편성이 쌩 지나갔다. 역시 속도 차이가 엄청나다. /김태경 기자 신리는 새마을이다. 새 신(新)에 마을 리(里)를 쓴다. 완주군 상관면의 중심지로, 한일장신대가 이곳에 있고, 전주 남부를 빙 돌아온 국도 21호선이 이곳에서 춘향로(국도 17호선)와 만난다. 우체국면사무소와 신리역 등 상관면의 주요 시설도 이곳에 있다. 높이 솟은 신세대 지큐빌 아파트를 보면 정말 새마을 같은 느낌이 든다. 1931년 문을 연 신리역은 상관면의 중심역이나 다름없는 역이지만, 여객 수요의 측면에서는 그다지 신통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군산~임실 간 통근열차가 다니던 시절인 2005년 이 역을 이용한 이는 모두 6029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간선열차 이용객은 967명에 불과했다. 그러니 통근열차 폐지가 직격탄이 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지난 2010년 여객취급이 중지됐다. 1981년 지어진 凸자 모양 옛 역사는 이제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역 광장이었던 자리는 주차장이 됐다. 역의 기능은 바로 옆에 새로 지어진 건물로 옮겨졌지만, 맞이방도 없고 도로 쪽 출입문도 따로 없는 새 역사는 사람의 발길을 거부한다. 물론 이 역에는 아무도 없다. 전주역에서 이곳까지 관리하는데, 취재진이 찾은 이날(6월 26일)도 전주역 관계자가 동행했다. 사람의 발길이 닿을 리 없는 플랫폼에는 파릇파릇 풀들이 하나둘씩 자리 잡았다. 플랫폼 남쪽 끄트머리에는 화단(?)이 있었다. 루드베키아가 한 무리를 이루고 있었고, 일명 계란꽃이라고도 하는 개망초 같은 들꽃들도 눈에 띄었다. 전주역 관계자에 따르면 일부러 심은 것은 아니다고 하는데, 고속열차도 다니는 간선철도 구간에서 열차가 들꽃 바로 옆을 지나가는 모습이 결코 흔한 풍경은 아닐 것이다. 퍽 재미가 있다. 새 역사 주변에는 철길의 유지보수를 위한 자재 따위가 보관돼 있고, 둘레에는 공사장을 방불케 하듯 고철 기둥들이 쌓여 큰 언덕을 이루고 있다. 옛 역사 자리 인근 공터에서 텃밭을 가꾸고 있던 주민 이정두(69) 씨는 신리역에서 기차를 타던 일을 까마득한 시절 이야기라고 말했다. 그는 옛날에 학교 다닐 때나 어쩌다 친구가 찾아오면 신리역에서 기차를 타곤 했다며 전주와 가깝고 시내버스도 다니다 보니 타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던 모양이라고 덧붙였다. 아닌 게 아니라, 옛 신리역 터 바로 앞 버스정류장에서는 752번과 같이 전주 도심으로 들어갈 수 있는 버스들이 20~30분 간격으로 멈추곤 한다. 그러니 신리역이 까마득한 옛 시절처럼 자기주장을 펼 수 있었을까. 그렇다고 해도 옛 건물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아쉽다. 별 특징도 없이 흔한 건물이었음에도. /권혁일김태경 기자 도로 동쪽에 큰 건물 몇 채가 일렬로 늘어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이 죽림온천 단지의 뒤로는 전주천이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또 전라선 철도가 지난다. 1993년 개장한 죽림온천은 전북의 대표 관광지가 되어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당시 보도된 내용을 보면 개장하자마자 하루 평균 이용객 2000여 명, 주말이면 6~7000명 이상도 몰렸다는데, 1996년에는 한 해 동안 이곳을 찾은 이가 무려 114만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죽림온천 단지라고 하지만, 사실 이 단지에는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온천이 두 곳 있었다. 북에서 두 번째 건물이 죽림온천, 그리고 다섯 번째 건물이자 가장 큰 건물이 송산온천이었는데, 대체로 수질은 죽림온천 쪽이, 시설의 쾌적함은 송산온천 쪽이 우세하다는 것이 당시 이용객들의 일반적인 평가였다. 그러나 사업 주체 간의 갈등과 자금난 등이 겹치면서 초기부터 휴업과 재개장이 반복됐고, 결국 지금은 두 온천은 운영되지 않는 상태다. 이 상태로 벌써 몇 년은 흘렀는데, 다만 두 온천 사이에 위치한 상가는 아직 살아있다. 온천 단지 남쪽, 높이 자란 나무들 뒤로 죽림온천역이 보일락 말락 서 있었다. 철도를 떠받치는 교각 아래로 들어가면, 죽림온천역이라는 팻말과 함께 역사로 들어가는 문이 나온다. 혹여 역사 정면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있나 둘러봤지만, 그런 것은 없고 오직 다리 밑 출입구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도록 돼 있었다. 아니, 사실 지금은 그렇게도 들어갈 수 없다. 원래 출입구였어야 할 문은 굳게 잠겨 있다. 시설관리원 김영수 씨(56)가 관계자들이 출입하는 곳으로 취재진을 안내했다. 이곳에는 김 씨를 포함해 시설관리원 3명만 남아 있다. 이들은 선로를 관리하는 역할을 한다. 이제는 시설관리반만 남아있죠. 적자 때문에 여기뿐 아니라 신리, 봉천, 서도, 산성, 주생, 금지, 이런 역들 다 폐쇄됐거든요. 엄밀히는 폐쇄된 역은 아니다. 공식적으로는 무배치 간이역으로, 여객취급만 중지돼 있을 뿐이지 춘포역이나 송천역, 아중역처럼 아예 폐역된 것은 아니다. 그러면 뭐하나. 열차는 멈추지 않고, 탈 열차가 없으니 올 승객도 없다. 1999년 5월에 전라선 복선전철화 1단계 신리~임실 구간 개통과 함께 문을 연 죽림온천역은 원래 도로 건너편에 있던 남관역을 계승하는 역으로,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죽림온천 이용객 수요를 잡기 위한 포석이었다. 의도는 좋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1999년이면 죽림온천이 슬슬 내리막길로 접어들기 시작할 때였고, 역사의 위치도 미묘하게 불편했다. 철도통계연보에 따르면 죽림온천역 개업 이듬해인 2000년 한 해 이용자 수는 2265명이 전부였다. 과거 역 직원들이 찾던 식당을 운영했다는 동네 주민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없응게. 마을이 윗동네 열 가구, 여기 서너 가구, 다리 건너 동네도 한 서너 집 있나? 빈집이 많아요. 또 집에들 차가 다 있으니까. 역 생기자마자 온천도 저렇게 돼서. 지난 2006년 11월, 여객취급이 중지됐다. 역사에는 군산~임실 간 통근열차와 용산~여수 간 무궁화호, 이렇게 상하행 두 편씩만 적혀 있는 시각운임표가 그대로 남아있다. 개찰구를 지나 플랫폼으로 올라가는 통로에는 전주죽림유황온천이라는 글자가 박혀 있는 커다란 거울 두 장이 붙어 있었다. 플랫폼으로 올라서면, 빛깔이 죄다 바래서 무채색으로 통일된 풍경이 나타난다. 사람이 앉은 지 대체 몇 년이나 지났는지 짐작조차 하기 어려운 의자에는 시꺼먼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었고, 팻말들은 녹이 슬어 있었다. 바닥 일부는 빗물을 오랫동안 맞아서인지 움푹 패 있었다. 하선에 녹색 신호가 들어왔다. 곧 누리로 열차 한 편성이, 따르릉따르릉 비켜나세요~ 하는 예의 그 멜로디 경적을 올리고는, 속도를 유지하며 플랫폼으로 들어왔다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남쪽으로는 이제 한때 국내에서 가장 긴 일반철도 터널(6128m)이었던 슬치터널이다. /권혁일 기자 남관초등학교 맞은편, 버스정류장 뒤쪽에 길 하나가 나 있다. 이 길을 따라 잠깐 올라가면, 왼쪽으로는 위로 올라가는 경사로가 하나 갈라지고, 오른쪽으로는 평탄한 부지가 나타난다. 죽림온천역의 전신이자, 산악철도 전라선을 상징하는 역이던 남관역이 있던 자리다. 역사나 플랫폼 등 구조물은 전혀 남아 있지 않지만, 의외로 그 터는 옛 모양 그대로 보존돼 있다. 곳곳에 철도공사 자산이라고 적힌 팻말이 박혀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남관에서 관촌 방향으로 가려면 반드시 넘어야 하는 슬치 고개는 만경강 수계와 섬진강 수계가 갈라지는 분수령이면서 완주군과 임실군의 경계를 이루는 곳으로, 경사가 심해 통행하기 쉽지 않은 곳이다. 춘향로를 타고 자동차로 넘기에도 험한 편인데, 급경사(급구배)에 취약한 철도로는 이 슬치 한 번 넘는 것이 그렇게도 힘이 들었다. 그래서 증기기관차 시절에는 남관에서 관촌 방향으로 가던 열차들이 이곳에서 멈춰 증기압을 올린 뒤 달려야 했다고 한다. 갈 때 급한 오르막이면, 올 때는 급한 내리막이다. 관촌에서 슬치를 넘어 내리막을 타던 열차가 제동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사고 위험이 있었는데, 바로 그때 필요한 것이 왼쪽에 있던 피난선이었다. 지형을 이용해 열차를 멈추던 시설이다. 제동장치에 문제가 생기는 사고가 아주 드문 것도 아니었다. 1990년대에도 연중 1~2차례씩은 벌어지던 일이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만난 주민 서기섭 씨(60)는 옛날에는 슬치재 경사가 심하니까 열차가 못 올라가고, 그럼 올라가다 거기서 내리고 그랬다면서, 이 자리가 옛날에 열차가 브레이크 못 잡으면 이쪽으로 보낸 선이다고 말했다. 철도산업정보센터에 따르면, 남관역은 1929년 6월 16일에 죽림역이라는 이름으로 먼저 문을 열었다. 이후 1931년에 전라선 전주~남원 구간이 개통되면서 남관역으로 이름이 바뀌고 보통역으로 격상된다. 40년 이상 그렇게 지내 오다가 1977년 5월 16일, 승객 부족을 이유로 여객 취급이 중지된다. 철도통계연보에 따르면 그해, 여객 취급이 중지되기 전까지 남관역을 이용한 이는 모두 5783명이었다. 다만 단선이던 전라선의 상황과 슬치를 넘어야 하는 지형적 특성 때문에 신호장으로서의 역할은 계속 남아있었다. 그러다 1999년, 신리~임실 구간이 복선으로 이설 개통된다. 복선이 됐으니 이제 열차 교행을 위한 시설이 필요 없어졌고, 슬치는 터널로 지나게 되니 피난선도 필요가 없어졌다. 그렇게 남관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권혁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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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7.07 23:02

[남원 산내면 문화·예술단체 '문화기획 달'] 생태적 삶 지향하는 젊은 여성들, 재활용 통해 더 의미있고 멋있게

저는 어렸을 때 바늘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요. 엄마가 이불을 꿰맬 때 가까이 다가가다 큰 바늘에 발바닥을 깊숙이 찔려 아주 혼났었거든요. 얼마 전 어떤 집에서도 엄마가 바느질에 푹 빠지다보니 아이가 바늘에 찔려 큰일난 적이 있고요. 바느질 할 때 항상 조심하시고 아이가 있을 때는 안하는 게 좋아요.우리 어렸을 때도 보면 엄마들은 뭐든 절대로 안 버리잖아요. 왜 버리나, 필요할텐데, 이러면서요. 근데 정작 필요할 때는 못 찾아! ㅎㅎ△버려지는 자투리천들을 이쁘게 꼴라쥬한다입으로는 수다 중이고 손으로는 헝겊조각들을 쪽모이하는 패치워크 감성을 키우느라 정신없다보면, 혹여 바늘끝이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지라 강사 류정희 씨가 조심스럽게 당부한다. 그 와중에도 수다는 계속된다. 수더분해 보이는 한 여성은 섬세하게 짜여진 바느질 요령 그림을 유심히 살피면서, 자투리천들을 활용한 꼴라쥬 작업에 몰두한다.화요일 오후, 여남은 여성들이 온갖 수다를 떨며 손바느질에 여념이 없는 곳은 남원시 산내면에 위치한 문화기획 달이다. 문화기획 달은 전북문화관광재단에서 주최하는 지역특성화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으로 블루밍 : 살림-바느질이 바꾸는 삶 프로그램(이하 블루밍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생태적인 삶을 지향하는 산내면의 젊은 여성들이 업사이클 작업을 통해 서로 소통하고 자아실현을 이루어 나가자는 발상으로 기획되었다.이들에 있어서 업사이클은, 업그레이드(Upgrade)와 재활용을 뜻하는 리사이클(recycle)을 합친 단어지만, 더 의미있고 더 멋있게 일상의 버려지는 것들을 재활용한다는 뜻을 담아내고 있다. 이들의 수다도 어쩌면 그 조각들의 하나다.△가정을 탈출한 해방구, 자아실현의 기회2004년 산내에서 방과후 수업을 하기 위해 대구에서 건너와 어영그영 여기 살다보니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는 김현정 씨는 블루밍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그림그리기 재주를 발견했단다. 프로그램 기획자이자 달의 활동가인 달리 씨는 업사이클 작업에서 미적 감수성을 중시하여 초반에 그림그리기 교육을 배치하였다.달의 또다른 활동가인 자정 씨가 강사로 진행하였고, 이때 김현정 씨가 그린 그림이 너무 예뻐 페이스북에 올렸더니 동네분이 가게 이미지로고로 사용하겠다며 자기한테 팔라고 했단다. 김현정 씨는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자신을 재발견하고 남들로부터 인정받으니 기분이 좋고 재밌다고 한다. 마을 여성들 중심으로 꾸려진 커뮤니티 재활용공방 살림꽃을 운영하는 강사 류정희 씨의 말이다.저는 귀촌한 지 15년째라 이제는 귀촌자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선주민이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애매한데요, 더군다나 오래된 귀촌자들은 살림과 가정일에 묻혀 살아왔잖아요, 그런 분들은 가정을 탈출해 일종의 해방구를 만끽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지 이 프로그램 호응도가 아주 높아요. 집안일 스트레스의 해방이고 자아실현의 기회를 주거든요.△공동체에 희생되는 개인의 삶 새롭게 이슈화블루밍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산내면과 인접지역에 사는 30-60대 여성들 15명이다. 도계 넘어 경남 함양의 마천에서 오는 사람도 둘이나 된다. 자동차로 10분 거리라 소문을 듣고 찾아 왔단다. 그러고보니 프로그램 참여자들은 지리산 산자락에 모여들어 살아가고 있는 귀촌여성들이다. 자연 환경이 좋아 모여들었을 사람들일텐데, 이곳에서 이들의 삶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그런 것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산내면은 귀촌자들이 무척 많아 이러저러한 단체들도 많고 지역사회 활동량도 크다. 그리고 그들의 삶이 공동체라는 커다란 프레임에 갇히다보니 부지불식간에 공동의 삶으로 환원되는 공동체 담론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어 개인들의 다양성이 숨쉬기가 어렵지 않았냐는 것이 달 사람들의 판단인 듯 하다.이런 맥락에서 달의 활동가인 이리 씨는 공동체보다도 개인의 일상적 표현활동들이 아름다우며 그래서 더 중시되어야 하고 그 소통과 공감의 장이 곧 블루밍 프로그램이라고 강조한다. 달리 씨도 가족중심주의 문화, 지역기반 공동체주의 문화에 개인의 욕망과 삶이 희생되는 것 아니냐는 문제의식을 보인다. 이들이 말하고 있는 개인이란 곧 공동체주의에 묻혀버리지 않는 여성들의 일상적 삶으로 이해된다.△이런 이야기들을 끄집어내도 되네?문화기획 달은 달리, 자정, 이리 씨, 이렇게 셋이 꾸려나간다. 4년 동안 많은 활동들을 해왔다. 지역독립잡지 계간 지글스 발간, 여성 글쓰기 포럼, 마을 빵동아리 운영, 청소년 문화예술교육, 농촌 성문화 다시보기, 공동체라디오 제작교육, 페미니즘 아트스쿨 등등이다. 스스로를 지리산 자락 마고여신의 생명력과 사랑을 창조성으로 꽃피우는 여자들의 즐거운 작당소로 정의하고 있다.공동체성과 남성성이 강한 지역사회에서 잡지 지글스는 어떤 이에게는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무시되어 왔지만 소중하게 생각하는 소소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 어찌보면 자연스럽게 억압받았던 여성들의 일상 이야기, 이름하여 페미니즘 활동이라 할 수 있을텐데, 이런 류의 이야기들을 끄집어내도 되는구나, 라는 이미지를 심어줬다는 것이다.지리산 산자락의 위엄(?)에 묻혀 생태적 삶의 모태라 할 수 있으나 정작 실종되어 온 여성성 담론, 이제 일상의 부드럽고 섬세한 화두로 말건네기를 하는 달의 이런 활동들이 지역에 사는 남성들에게는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이런 활동의 연장선인 블루밍 프로그램 참여에 대해서 남편들의 반응도 좋고 엄마들의 감성이 표현된 작품들에 대해서 대단하다고 말하는 아이들의 반응을 통해 엄마들은 자존감을 얻는다고 한다.△여성성의 리듬, 우리 모두의 것주부여성들의 일상이 바빠요. 일주일에 한번 한나절을 투여해 여기에 오는 것이 쉽지는 않아요. 그 와중에 참여해 존재감과 해방감을 찾는 거죠. 평소 하고 싶었던 것들이라 이런 기회가 굉장히 소중하다고 보니까요. 초반에 미적 감각을 살리기 위해 그림그리기를 했는데 3시간씩 하다보니 사람들이 지쳐 쓰러지더라고요 처음에는 자기 그림들이 못 그렸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서로 너무 감탄하는 거예요. 자기만의 스타일을 표현한건데, 못 그렸다고 생각한거죠.블루밍 프로그램과 달의 활동은 여러 키워드들이 중첩된다. 무엇보다도 자투리천과 같은 일상의 것들을 재활용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 재활용돼 나오는 생산물은 미적 감각에 기반해 참여자 각자의 창의적 가치와 시선의 새로움을 높이고자 한다.지리산 산자락의 무수한 콘텐츠의 원천들 및 일상들과 소통하려는 여성성의 리듬이랄까, 그래서 그 여성성 리듬은 우리의 삶을 재디자인하는, 사실은 아저씨-남정네들도 즐겨야 할 우리 모두의 것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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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7.05 23:02

취임 한달 맞은 전북출신 심보균 행자부 차관 "낙후되고 인구 적은 지역 재정지원 강화 힘쓸 것"

심보균 행자부 차관이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김제 출신으로 전주고와 서울대를 졸업하고 행정고시(31회)를 통해 공직에 입문한 심 차관은 전북도에서 기획관리실장과 행정부지사를 지냈으며, 중앙에서는 청와대 행정관, 행안부 지역발전정책국장, 여성가족부 기획조정실장, 행자부 지방자치발전위원회 기획단장 등을 거친 행정의 달인이다. 지방분권과 균형발전을 강조하는 문재인 정부의 초대 차관으로서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된 그로부터 행자부의 주요 정책 방향에 대해 들어봤다.-새 정부의 첫 행자부 차관을 맡게 되셨는데, 먼저 소감과 각오를 말씀해 주시죠.개인적으로 명예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낍니다. 대통령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 수 있도록 행자부의 모든 역량을 집중해 새 정부의 국정철학을 충실하게 뒷받침하겠습니다. 먼저, 일자리를 최우선으로 강조하는 국정기조에 부응해 공공 및 지역사회에서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데 매진하고, 중앙정부의 권한을 획기적으로 지방에 이양하는 지방분권을 강력하게 추진함으로써 국가 전체의 경쟁력을 높이겠습니다. 아울러 지방소멸 위협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접경도서 등 낙후지역의 새로운 성장동력을 발굴하는 등 균형발전에도 소홀함이 없도록 할 것입니다. 국민이 주인되는 정부를 구현하기 위해 정책 과정을 더욱 투명하게 공개하고, 국민과 함께하는 참여협치 거버넌스를 실현하며, 나아가 이러한 계획이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성과로 나타날 수 있도록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자세로 꾸준히 실천해 나가겠습니다.-문 대통령은 시도지사와의 간담회를 제2국무회의 수준으로 격상시키고 정례화 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행자부는 이에 대해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지, 그 내용에는 무엇을 담고 있는지요?제2국무회의 신설은 중앙과 지방 간의 소통과 협력을 강화하고 국정운영에 지방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통로를 제도화함으로써 지방분권과 협치를 정착시켜 나가겠다는 의지입니다. 대통령께서는 내년 개헌 때 지방분권 강화와 함께 제2국무회의 신설 근거를 마련하되, 그 이전까지는 시도지사 간담회 형태로 사실상 제도화하겠다고 하셨습니다. 행자부는 대통령의 공약을 체계적이고 실효성있게 제도화할 수 있도록 중앙지방협력회의 형태의 제2국무회의 신설방안을 면밀하게 검토하겠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시도지사 간담회를 수시로 개최해 중앙-지방 간 소통협력체계를 실질적으로 정착시켜 나갈 계획입니다.-제2국무회의가 신설되면 어떤 역할과 기능을 하게 될까요.대통령과 국무총리, 행자부장관 등 관계부처 장관 및 17개 시도지사가 참여하는 자리로 시도지사가 지방 관련 주요 정책 아젠다를 직접 제안할 수 있으며, 지방 관련 중요정책을 심의조정하고 그 결과에 대한 이행력을 확보하는 것 등이 주요 내용이 될 것입니다.-시대의 변화와는 다르게 공직사회에서는 중앙부처와 지방자치단체라는 수직적 사고는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전북혁신도시에도 중앙 행정공공기관들이 들어와 있으나 지방을 한 단계 낮춰보는 시각으로 인해 지역과의 유기적인 협력은 제대로 안되는 것 같습니다. 각 부처를 총괄하고 있는 행자부 입장에서 지방분권시대에 맞는 중앙부처의 역할과 위상은 어떻게 돼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지요?지방분권 시대에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상하관계가 아닌 국정운영을 위한 동반자적 협조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저출산 고령화와 인구감소, 도시밀집 및 농촌과소 가속화 등 지방행정 환경이 다양화복잡화되고 있으며, 기존의 수직적인 중앙-지방 관계로는 다양한 지역 특성에 맞는 효과적인 지방자치의 구현이 불가능합니다. 지방의 창의성과 특수성을 살려야 대통령이 말씀하시는 연방제 수준의 지방분권이 가능해지고 국가의 경쟁력을 키울 수 있습니다. 중앙이 지방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해서는 안됩니다. 중앙부처와 지방자치단체는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 원활하게 소통하고 협력하는 국정운영의 동반자 관계를 구축해야 합니다.-지방분권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우려되는 점 중의 하나가 지역 간 발전의 정도와 재정의 격차가 심하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격차를 줄이지 못한 상태에서 지방분권이 이뤄지면 오히려 지역간 불균형은 더욱 커질 수 있습니다. 지방재정 격차를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일까요?지방의 재정이 국가재원에 크게 의존하고 있고, 복지지출 등 수요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지방재정의 확충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8대 2 수준인 국가대 지방의 세입구조를 7대 3을 거쳐 6대 4 수준까지 개선하기 위한 방안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지방세 공동세, 지방교부세 조정기능 강화, 지역상생발전기금 등 균형발전을 위한 지역간 재원 배분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여러가지 방안으로 재정분권을 추진하려고 합니다.-전북처럼 광역도시가 없는 지역은 상대적인 불이익과 박탈감이 매우 심합니다. 다른 지역에서 두 개의 몫을 가져갈 때 우리는 하나밖에 없는데도 광역시가 아니라는 이유로 또다시 차별합니다. 지역균형발전을 위해 도시중심, 인구중심의 재원 배분정책을 바꿔야 하는 것 아닌가요?그간 국가균형발전정책이 제대로 추진되지 않았기 때문에 수도권과 광역도시 중심으로 경제력이 집중되고, 일자리 및 삶의 질의 격차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앞으로 국가균형발전을 통해 수도권과 지방, 대도시와 중소도시 간의 격차가 해소되고 지속가능한 발전이 꼭 이뤄져야 합니다. 지금까지도 균형발전을 위해 여러가지 노력을 해왔지만, 낙후지역 또는 인구 과소지역에 대한 재정 지원을 강화할 수 있도록 앞으로도 더욱 노력하겠습니다.-내년 지방선거가 1년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주무부처 차관으로서 선거관리는 어떻게 하실 계획이신지요?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지방선거가 깨끗하고 공정하게 치러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법정사무를 차질없이 수행하는 것은 물론 공무원들의 줄서기 등을 차단할 수 있도록 감찰을 강화하고 검경 등 유관기관과 협조해 불법선거를 철저히 단속하겠습니다. 국민들이 투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실 수 있도록 온-오프라인을 통한 홍보활동도 더욱 다각적으로 전개하겠습니다.-도민들에게 안부인사 한마디 해주시죠.저는 전북이 잘 키워주고 관심을 갖고 응원해주신 덕분에 이 자리에 왔다고 생각합니다. 전북에서 기획관리실장과 행정부지사를 지내면서 전북의 어려운 여건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전북의 어려운 사업들이 중앙부처와 협의를 통해 잘 이뤄지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기획
  • 이성원
  • 2017.07.03 23:02

[전홍철 교수의 “영상과 함께 하는 실크로드탐방” ⑪ 백제와 실크로드] 페르시아에서 일본까지…백제, 실크로드를 누비다

실크로드 하면 떠오르는 사막을 가르는 낙타의 행렬. 동서양이 서로 만나 새로운 문명을 꽃피웠던 길, 실크로드. 수많은 사람들이 바다 건넜다는 뜻의 백가제해(百家濟海) 네 글자를 나라 이름으로 쓴 백제. 백제는 실크로드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 실크로드 곳곳에서 우리의 선조 백제인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연재를 마치며 페르시아에서 일본까지 실크로드 선상에 남아 있는 백제의 자취를 정리한다.△페르시아에서 만나는 백제1500년 동안 베일에 싸였던 백제사의 블랙박스를 연 대발견 무령왕릉. 무령왕릉은 백제 대외관계의 비밀을 밝혀주는 열쇠다. 무령왕릉에서는 특이한 모양의 짐승이 발견되었다. 바로 진묘수(鎭墓獸)다. 진묘수는 문자 그대로 무덤을 지키는 짐승이라는 뜻이다. 진묘수는 사자의 몸에 새 머리를 한 서아시아 상상의 동물 그리핀(griffin)과 관련이 있다. 무령왕릉 진묘수는 서아시아와 지중해 일대에서 형성된 수호신으로서의 그리핀 도상이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거쳐 백제 묘장 문화에까지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다.연주문(連珠文)은 서아시아에 기원을 둔 페르시아 공예품의 전형적인 문양이다. 작은 원을 둥근 고리 모양으로 촘촘하게 배열한 연주문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백제에 전해졌으며, 부여 외리사지 백제 와당과 미륵사지 사리장엄함에서 볼 수 있다. 백제 연주문 장식 문양은 백제가 실크로드 동서 문명 교류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한국을 넘어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는 전주비빔밥도 실크로드 문명 교류와 관련이 있다. 전주비빔밥의 주재료인 쌀, 마늘, 당근, 오이, 시금치, 고추 등은 모두 실크로드를 통해 전래된 식재료들이다. 한국 전통음식과 실크로드의 연관성은 우리 주변의 호(胡) 자가 들어간 음식 이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예전에 마늘은 호산(胡蒜), 오이는 호과(胡瓜), 참깨는 호마(胡麻), 양파는 호총(胡蔥), 당근은 호나복, 후추는 호초(胡椒)라 하여 모두 호(胡) 자로 표기했었다. 여기서 호(胡) 자는 수입 외래종이나 외래문화를 뜻하는 글자이다.△인도와 관음신앙 그리고 판소리힌두교의 나라이면서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 불교의 사천왕은 원래 힌두교의 신이었으며, 불교의 여러 보살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관음보살(觀音菩薩)은 이란의 수신(水神) 아나히타(Anahita)와 힌두 여신 사라스바티(Sarasvati)에 원류를 두고 있다. 페르시아와 인도에 기원을 둔 관음 신앙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전해졌으며, 다시 백제를 통해 일본에 전래되었다.우리나라 최고의 전통 예술 판소리. 서사적 이야기를 장단에 맞추어 창과 아니리를 섞어 부르는 판소리식 공연은 실크로드 여러 지역에도 있다. 특히 인도의 판다바니(Pandavani)는 전형적인 판소리형 공연이다. 고대 인도 3대 서사시인 마하바라타(Mahabharata)만큼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판다바니의 판(pan) 은 노래를 의미한다. 판소리형 공연은 실크로드 여러 지역에서 지금도 불리고 있다.△중국에서 발견된 백제인옛날 백제인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고대 백제인을 그린 그림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양직공도(梁職貢圖)다. 양직공도 속 백제 사신은 그림 맨 앞의 양나라 황제 바로 뒤 페르시아 사신 다음에 그려져 있다. 이는 당시 백제가 페르시아와 함께 6세기 동아시아 양나라의 핵심 교역국이었음을 보여준다.광활한 중국의 서쪽 끝에 위치한 오아시스 도시 돈황. 돈황은 1,500년 전 서역으로 가는 관문이었다. 최근 돈황 벽화에서 고대 한국인 그림이 대거 발견되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 가운데는 백제인 모습도 보인다. 돈확 벽화를 통해 새롭게 발견된 사실은 고대 백제인은 고구려와 신라처럼 조우관을 쓰기도 했지만 턱 끈이 없는 오늘날 야구 모자와 비슷한 무후책을 쓰기도 했다. 백제인이 돈황 벽화에 대거 등장한 연유는, 백제 유민(遺民)이 돈황으로 이주해서 살았거나 불교 포교를 위해 각국의 다양한 인물상을 벽화에 집어넣는 과정에서 백제인 인물상도 들어갔던 것으로 추정된다.△백제가 제작한 서역계 일본 보물일본 고대사는 백제와 가장 연관이 깊다. 2001년 12월 일본 사회를 발칵 뒤집는 사건이 있었다. 아키히토 일왕이 생일날 회견에서 자신이 백제 무령왕의 후손임을 고백한 것이다. 실제로 고대 일본 지배층의 무덤에서는 백제와 깊은 관련이 유물이 대량 출토되고 있다.쇼소인은 일본이 세계 제일의 보물 창고라고 자랑하는 곳이다. 쇼소인에는 코발트 빛을 내뿜는 한눈에도 서역 페르시아 계통임이 느껴지는 유물이 있다. 최근 이 유리잔이 백제에서 가공된 것임이 밝혀졌다. 그 증거는 유리잔 받침에 새겨진 무늬가 미륵사지 금동제사리외함에 새겨진 것과 쌍둥이처럼 닮았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한편 호류지(法隆寺)에는 백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불상 세 점이 있다. 그것은 금당벽화 속 관음보살과 백제관음 그리고 몽전(夢殿)의 구세관음이다. 금당벽화는 인도 아잔타(Ajanta) 석굴 벽화가 그 원류이며, 호류지 별관에 전시된 일본 국보 백제관음은 인도 양식을 포용하고 있다. 또 백제 작품이 입증된 구세관음의 보관에는 조로아스터교를 기반으로 하는 페르시아 사산왕조의 상징인 일월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는 구세관음을 제작한 백제가 페르시아와도 긴밀히 교류했었음을 말해준다.△백제, 개방적 다문화 국가문화는 본시 상호 교류를 통해 발전하는 법이다. 교류가 빈번했던 곳일수록 문명이 발전했고 경제가 성장했음을 실크로드는 입증하고 있다. 백제는 굳게 닫혀진 나라가 아니었다. 실크로드 곳곳에 남아 있는 백제의 자취는 백제가 바다 건너 세계 문명과 교류한 문화적 개방성을 띤 글로벌 국가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백제는 동아시아를 넘어 서아시아 문화까지 포용하는 다문화 왕국을 건설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이 백제가 열망한 꿈이요 힘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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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6.30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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