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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다락토요문화학교 여름캠프] 청소년과 예술가들의 만남…꿈 많은 가슴에 창의력 점화

청소년 시기에 아이들은 다양한 것들을 시도하고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온전한 자기 색을 드러내는 시기를 보내기보다, 자기만의 색깔을 알아가기 위해 한걸음씩 걸어가 보는 경험을 해야 하는 시기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 입시제도 안에서 청소년들은 그저 네모난 교실과 책상, 그리고 책에 갇혀 네모난 삶을 살아가기에 바쁘다. 입시공부 외의 것들은 무용한 것처럼 보여지는 세상이다. 아이들에게는 네모의 삶을 벗어나, 다양한 형태의 삶에서 무용한 것이 삶의 목적임을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다.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키팅 선생님이 한 이야기처럼 시와 미, 사랑 낭만이 삶의 목적이라 느낄 수 있도록 유연하게 숨 쉬고 사고할 수 있는 시간들이 필요한 것이다.△ 2박3일, 무주에서 펼쳐진 낭만의 캠프여름의 계절이 깊어진 무주 덕유산 자락(무주자연환경연수원)에 저마다의 꿈을 안고 아이들이 모였다. 전주, 익산, 무주, 남원, 장수 등 전라북도 방방곡곡에서 모인 100여명의 아이들은 뜨거운 햇볕의 기운을 먹음은, 초록빛 여름 숲 같았다. 무르익어 어떤 색이 될지 모를 다양한 가능성을 품은 아이들이다. 예술가들은 이 아이들에게 creative mind up이라는 주제로 함께 만나 영화와 음악 장르로 즐거운 창작 작업을 해보자고 손을 내밀었다.이번 creative mind up 캠프는 전라북도문화관광재단에서 주최하는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사업의 일환으로 꿈다락 토요문화학교를 통해 음악을 매개로 청소년들을 오래 만나온 라이브음악문화발전협회 정상현씨가 기획을 맡았으며, 현재 꿈다락 토요문화학교에서 아이들과 영상작업을 하고 있는 여울림이 함께 운영을 맡아 진행했다.△ 레디~ 액션! 영화 만들기영화팀은 두 팀으로 나누어 창작활동을 진행했다. 장난 끼 가득한 얼굴로 웃고 떠들던 아이들이 감독의 레디~ 액션! 신호에 사뭇 진지한 모습으로 자기 역할을 찾아간다. 캠프 내내 비가 세차게도 내렸다. 야외촬영이 어려워지니 본래 찍기로 했던 내용에서 많은 부분을 수정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카메라 잡는 폼도 엉성하고 조명 위치도 못 잡더니, 시간이 지나자 점점 익숙해져 가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새벽까지 진행되는 밤샘 촬영에 지칠 법도 한데, 지친가운데 힘을 내서 아이들은 촬영에 임한다. 한 씬을 찍기 위한 한 시간의 준비. 영화라는 장르에 다양한 역할들이 있음을 아이들이 알아간다. 연출, 조연출, 조명, 연기자, 마이크 등등. 어느 역할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서로의 호흡이 맞아야 하고, 그 호흡으로 작품하나가 완성됨을 아이들은 알아간다. 고가의 장비들이다 보니, 처음 장비를 접해보는 아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처음을 맞이하는 생경함 속에 아이들은 지금 이순간 자기 나름의 새로운 상상과 도전을 시작할 것이다.△ 다양하게 즐겼던 음악팀음악팀은 고등학생들이 많았다. 평소 자신이 하고 있고, 관심이 있던 영역이어서 집중도가 높았다.음악팀의 워크숍은 다양하게 구성되었다. 평소 만나지 못하는 뮤지션들과 만나 함께 공연 하며 새로운 경험을 이어간다. 스타로부터 스무 발자국이라는 영화를 강사님의 해설과 함께 들으며 음악에 대해 진중하게 고민하고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새벽까지 녹음이 진행하여 잠을 못 잤음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오전 말로의 강의에 모두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듣는다.평소에 궁금한 점을 풀어내느라 아이들의 시간은 하염없다. 빡빡하다 느낄 수 있는 과정 속에서도 아이들의 표정과 몸짓에서는 여유가 느껴진다. 아이들 뿐 아니라 함께하는 강사들에게서도 여유로움이 함께 느껴졌다.△ 서로가 만나는 교차지점. 캠프특히, 음악팀은 참가자도 강사도 아닌 청년들이 캠프에서 큰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수년 전 공연장을 운영했던 정상현씨는 공연할 곳이 없어 공연을 못하는 아이들을 만나기 시작하면서 청소년들과 함께 하는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는 도중 꿈다락 토요문화학교를 통해 아이들과 앨범작업을 하던 것이 2017년 5년차까지 이어져 오게 되었다.그렇게 만나 인연이 된 청소년들이 이제는 같이 무대에 오르는 동료 뮤지션으로, 함께 하고 있다고 말하는 그에게서 청소년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느껴졌다.지금 우리 나이 또래에 뮤지션들이 아이들(청소년)에게서 얻을 수 있는 열정의 원동력들이 있잖아요. 아이들은 지역의 뮤지션들을 자연스럽게 접하고 무대에 함께 서보는 계기들이 필요하고요. 지역에서 선배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계속 창작물이 나올 수 있도록 하고 싶어요. 그게 시간이 지나니 점점 큰 힘이 되는 것 같아요. 캠프는 그런 의미에서 선배와 후배가 만나고 연결되고 섞이는 매개가 된다고 생각해요시간은 그저 흘러만 가는 것은 아니다. 주변의 이야기를 쌓고, 사람을 남긴다. 이렇게 쌓아온 시간이라는 역사가 지금의 creative mind up 캠프를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음악팀에게서 느꼈던 편안함은 어쩌면 음악이 주는 편안함과 동시에 오랜 세월 함께한 그 시간의 단단함 때문이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Creative! mind up!두 편의 영화와 한곡의 노래가 나왔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활동은 매력적이기도, 그리고 힘들기도 한 과정이다. 영화 장면 속에 본인의 모습이 나올 때마다 아이들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으나,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각자의 위치에서 자기의 역할로 무대를 꽉 채웠던 음악팀 아이들의 노래는 캠프가 끝난 다음에도 계속 흥얼거리게 된다.2박3일은 짧은 시간이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이 때로는 긴 여운으로 남아 살아가는 시간에 큰 힘이 되기도 한다. 이번 캠프에 참여한 아이들에게 이번 캠프가 그런 순간을 만들어 내는 힘이 되었을 것이라 믿으며, 살아가는 삶에서 자기의 색깔을 서서히 피워내길 바라본다.문성희 문화파출소 덕진 문화보안관/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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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8.23 23:02

[우리고을 인물 열전 14. 정읍시 영원면] 남다른 애향심·투철한 애국심…독립운동 뿌리 깊어

정읍시 영원면은 시청 북서쪽 15㎞ 지점에 위치한다. 정읍시 이평면과 덕천면, 고부면, 그리고 부안군 백산면과 주산면에 빙둘러싸여 있다. 이웃 이평면과 경계를 이루는 천태산은 영원면의 주산이고, 부안군 동진면 동진강 하구 쪽에서 고부면까지 이어지는 고부천이 영원평야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젖줄이다.역사를 거슬러 가보면, 영원면은 마한시대에는 구소국이었고, 백제시대에는 고사부리군이었다. 백제 고사부리군의 중심지는 은선리 토성이었지만, 백제 멸망 후 그 정치적 중심지가 현재 고부면 고부 소재지로 옮겨졌다고 한다.고사부리군은 정치 군사적으로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 사비시대 오방성의 하나인 중방성이 이 곳에 설치됐다고 보는 것이다. 백제시대 최대 지방거점이었던 것이다.조선시대 행정구역에서 이곳은 고부군 북부면이었다. 1914년 4월 행정구역 개편 때 현재의 영원면 구역이 획정됐다. 영원면의 행정구역은 장재리, 앵성리, 운학리, 은선리, 풍월리, 신영리, 후지리, 청량리 등 7개리 32개 마을이다.영원면 지역에서는 2002년 구석기시대 유물인 유문암제 석기가 발견됐고,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고인돌(운학리 2기, 은선리 11기)도 다수 발견됐다.2017년 현재 영원면 인구는 2,000명 정도로 줄어든 상태지만 2005년 영원면의 역사와 현황, 인물 등을 집대성한 영원면지를 발간했을 만큼 지역민들의 애향심이 남다르다.△독립운동영원면 후지리 출신인 은세룡(1872~1964)은 조선 독립을 계획하고 동포들이 민족의식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 뜻있는 주변 선비들과 함께 1926년 황극교(黃極敎)를 창교, 이끌었다. 그의 독립활동을 못마땅하게 여긴 일제에 체포돼 1938년 전주재판소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출옥해서도 한복착용, 일본말 사용금지, 창씨개명 반대 등 배일활동을 계속했다.은선리 출신의 양재 권순명(1891~1974)은 유학자이자 항일운동가였다. 18세에 간재 전우의 제자가 되어 왕등도와 계화도에서 공부했다. 일제에 붙잡혀 삭발을 강요당하자 장도로 자신의 목을 찌르며 항거했고, 창씨개명을 끝까지 반대했다. 영원 태산사에 배향되었다.운학리 라홍균(1886~1984)은 8000석 큰 부자였고 군자금 지원 등 평생 독립운동과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살았다. 그의 동생 백봉 라용균(1895~1984)은 임시정부 전북대의원 등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고 광복 후에는 제헌국회의원에 이어 456대 국회의원, 국회부의장, 보건사회부장관을 역임했다. 국회는 합리적인 정치활동가였던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99년 모범적인 정치인을 격려하는 백봉 신사상을 제정, 매년 시상하고 있다.독립운동가 구파 백정기(1896~1934)는 영원면 은선리 갈선마을에서 성장했다. 1919년 3.1운동을 목격, 고향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며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33년 이강훈, 이원훈 등과 함께 홍구공원에서 유기찌 주중일본대사 등에 대한 암살계획에 참여했다가 체포, 이듬해 옥사했다. 해방 후 윤봉길, 이봉창 의사와 함께 효창공원에 안장됐으며, 1963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됐다. 그를 기리는 의열사 성역화 사업이 2004년 영원 현지에서 완공됐다.△정관계후지리 출신 김형래(1940~2010)는 서울 서초구에서 111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배문환은 풍월리 출신으로 정읍시의회 234대 의원(4대 의장)을 지냈다. 후지리 출신 김형욱은 학생운동, 노동운동 등을 하다 노무현 정부 청와대 비서실 시민사회비서관을 역임했다. 앵성리 박옥은 국립보건원에서, 후지리 김형원은 제41회 사시에 합격, 기획재정부에서 근무하고 있다. 운학리 정학용은 정주읍장, 수성동장을 역임했고, 최근 익산시 부시장으로 간 김철모씨는 지사, 부안부군수를 지낸 권재민씨는 금곡 출신이다.△학계장재리 오덕렬은 교육부 기획예산담당관, 국립교육평가원장, 제주 탐라대 총장 등을 지냈다. 운학리 라종일은 독립운동가 라용균의 아들이다. 경희대 교수, 일본대사, 우석대 총장 등을 지냈다.후지리 출신의 김인숙은 원광대 가정대학장을 지냈다. 대한가정학회 전북지회장, 한국영양학회 호남지부장 등을 역임했고, 건강과 식생활 등 다수의 저서를 냈다.풍월리 출신 신일균은 신경외과전문의, 청량리 출신 송옥렬(서울대 법대)은 사법행정외무고시 3과에 모두 합격한 수재다. 금곡 출신 정재철 전 백산고 교장은 향토사학자로 활동하고 있다.△법조계은선리 김지웅은 사시 39기 출신으로 서울 중앙지검검사, 창원지검 통영지청 검사 등으로 일하다 2007년 변호사 개업했다. 후지리 출신 신형철은 사시 40기로 부산지법 부장판사다.△군인경찰후지리에서 살았던 조재미는 영원 출신 최초의 장군이다. 육사 2기인 그는 419 후 서울지역 계엄사령관을 지냈고, 63년 준장으로 예편했다. 앵성리 김명환은 육사 5기로 1군 포병사령관 등을 지냈다. 운학리 정동조는 해사 28기이고, 해군대학 총장을 역임했다. 정동조의 동생 정승조(육사 32기)는 이라크 자이툰부대장을 비롯해 특전사와 야전부대장을 두루 거친 후 함참의장을 지냈다. 신영리 출신 이정욱은 부안경찰서장을 역임했다.△경제계이상균(1925~)은 신영리 출신으로 1944년 19세 때 강제 징용으로 일본 북해도로 끌려가 혹독한 탄광 노동에 시달렸다. 현지 사업에 성공한 그는 1986년 형 상영과 함께 고향을 방문, 마을회관 건립, 마을 진입로 포장, 논 5000평 희사, 부안 개암사 입구 벚나무 꽃길 조성, 이웃돕기 성금 등에 재산을 아끼지 않았다. 이에 고향은 1995년 전북대상 봉사상, 애향운동본부 애향대상 등으로 고마움을 표했다.후지리 출신의 양석규는 입학금이 없어 중학교를 포기해야 했다. 간난신고 끝에 대학을 졸업, 미국으로 이민한 사업가다. 1991년 영원초등학교 장학사업을 시작, 지금까지 정읍지역 수백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 운학리 송현만(호남주류 대표)은 민주평통 전북 부의장을 역임했다. 하림그룹 상무 문경민씨는 백양리가 고향이다.△문화예술체육계장고의 명인 이명식(본명 이이동, 1912~ 1986)는 장재마을 출신이고, 상쇠 놀음의 최고수로 평가받는 전사종(1918~1991)은 부안군 백산면 거룡리에서 태어나, 결혼 후 영원면 앵성리 미전마을에서 살았다. 17세에 전통 쇠가락을 이어온 김광래에게 사사, 1943년 대표적인 우도풍물인 정읍농악단에 들어가서 활동했다. 서울 국악예술고의 전신인 국악예술학교에서 전사섭 등과 함께 풍물을 지도했다. 1965년 창단된 서울시국악관현악단에서 농악부 지도를 맡았고, 76년부터 84년까지 국악예고에서 민족예술전문인 양성에 힘썼다.한국 최고의 소리꾼 은희진(1947~ 2000)도 영원면 출신이다. 후지리 출신 은희진은 9살 때 광주에서 정정렬의 수제자 오천수에게서 판소리를 배웠고, 동편제의 거장 박봉술에게 적벽가를 배웠다. 정읍국악원에서 활동하다 국립창극단에 입단, 현대 판소리 명창의 중심에 섰다. 판소리 다섯바탕 완창, 남원춘향제와 전주대사습놀이 대통령상 수상 등 명실상부한 명창 반열에 올랐다. 1997년부터 2000년 작고할 때까지 전북도립국악원 예술감독으로 고향을 위해 일했다. 효문마을 출신 정읍신문 이준화 편집국장은 20여년간 지역언론 창달을 위해 뛰고 있다.

  • 기획
  • 김재호
  • 2017.08.22 23:02

이철우 새만금개발청장 "정부 선도적 개발이 새만금 민간투자 마중물 될 수 있게"

새만금사업은 전북의 희망이자 아픔이다. 전북의 소외와 낙후를 극복할 수 있는 원대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는 희망이지만, 수 십년 동안 온갖 노력에도 별다른 진전이 없고 오히려 새만금으로 인해 전북이 역차별을 받아왔다는 점에서는 아픔이다. 이러한 사정을 잘 알기에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새만금 사업을 직접 챙기겠다’ ‘속도감 있게 추진하겠다’고 여러차례 약속했고,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나름대로 그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새만금사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 이철우 새만금개발청장(57)을 만나봤다. 이 청장은 남원 출신으로 전주고와 서울대 법대를 나온 법학 박사이며, 행시 31회로 공직에 입문한 뒤 국무총리실에서 평가총괄정책관과 총무기획관, 정부업무평가실장 등을 지냈다. 또 잠시동안 농림수산식품부에 파견돼 원양협력관을 지내기도 했다.-문재인 정부의 첫 청장을 맡게 됐습니다. 소회와 비전을 말씀해 주시죠.“(고시에 합격한 뒤) 1989년 전북도청 기획실에서 수습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새만금이 노태우 대통령의 공약사업이었으나 국가사업으로 지정되지는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기획실에서 주로 하던 일이 새만금을 국가사업으로 확정해달라고 계속해서 국회와 정당 등에 건의하고 찾아다니며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29년 공직생활의 마지막 자리가 공교롭게도 처음 접했던 새만금사업이어서 더욱 감회가 새롭고, 동시에 많은 책임감과 사명감도 느낍니다. 새만금사업이 오랫동안 지연된 만큼 빠른 시일 내에 본궤도에 오를 수 있도록 신명을 바쳐서 혼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새만금은 국가사업인데도 역대 정부는 별 관심이 없고, 그동안 전북도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이끌어왔습니다. 새만금청도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했지만 전북도와 호흡이 맞지 않는 부분도 있었고, 전북도의 기대에 다소 미흡했다는 지적도 받고 있습니다. 국가사업이지만, 지역에서 진행되다보니 지역의 여론과 기대도 무시하기 어려울 텐데, 앞으로 이런 부분을 어떻게 해 나갈 계획입니까?“새만금이 국책사업이지만 전북이라는 지역에서 진행되는 만큼 사업 추진 과정에서 지역과의 협력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 새로운 정책수립과 주요 사업 추진과정에서 지역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소통하면서 사업을 추진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울러 새 정부의 새만금개발에 대한 의지가 그 어느 때보다 강하고 지역주민들의 기대감도 높은 만큼 사업을 속도감 있게 추진할 수 있도록 관계부처와도 적극 협의해 나가겠습니다.”-새만금사업이 여러 부처와 관련되기 때문에 송하진 도지사가 일부러 총리실 출신의 새만금개발청장을 원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총리실에서의 근무경험이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사실 새만금개발청에서 직접 집행하는 사업은 많지 않습니다. 새만금개발청 혼자서는 할 수 없고 국토부와 해수부 등 각 부처의 도움이 필요하고, 총리실과 청와대에서도 지원해줘야 합니다. 이런 부분에서 총리실 출신이라는 게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새만금지원단 도움도 받고 관련부처에 대한 설득과 부탁에도 유리할 것입니다. 총리실에서의 근무 경험과 인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겠습니다.”-새만금은 그동안 정부의 투자가 제대로 안되니 사업에 대한 믿음이 떨어지고, 믿음이 없다보니 투자유치가 안되고, 투자유치가 안되다 보니 또다시 사업이 늦어지는 악순환이 되풀이됐습니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방책은 있습니까?“새만금에 대한 공공주도 매립과 인프라 구축 등이 새 정부의 국정과제에 포함돼 있습니다. 이전 정부와는 다를 것입니다. 앞으로 주요 사업을 속도감 있게 추진해 정부의 선도적 개발이 민간투자의 마중물이 될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하겠습니다. 아울러 관계부처와 협의를 통해 불필요한 규제를 개선하고 과감한 인센티브를 도입함으로써 민간투자가 확대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 나가겠습니다.”-문재인 대통령이 약속한 공공주도 매립은 그동안 전북도가 꾸준히 요구해온 내용입니다. 이낙연 총리는 얼마전 지방언론사 사장단 초청 만찬에서 ‘새만금개발공사’ 추진안을 밝히기도 했는데, 어디까지 추진되고 있습니까? 또 공사가 추진되면 사업추진에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나요?“새로운 공기업을 설립하는 방안을 비롯한 여러 가지 대안들을 검토 중입니다. 신규 공기업 설립방안은 새만금 전담 개발기관을 설립해서 용지개발과 부대 수익사업을 추진하는 것으로 공사채 발행 및 수익사업 재원을 토대로 정치여건 등 외부여건의 변화와 관계없이 장기적, 안정적으로 사업추진이 가능한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재부 등 관계기관과 협의하고 법령을 개정해야 하는 등 시간이 다소 소요되는 단점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새만금사업을 촉진시킬 수 있는지 관계부처와 긴밀히 협의해 가장 좋은 대안을 찾도록 하겠습니다. 신규 공기업을 설립할 경우, 새만금청이 개발과 실시계획, 각종 영향평가 등 매립사업 준비절차를 이행한 뒤 새롭게 생기는 공기업이 설립과 동시에 매립에 착수할 수 있게 하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습니다.”-새만금을 글로벌 경제중심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파격적인 인센티브, 무규제 특구 등 획기적 규제개혁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그동안의 학술토론회나 포럼 등에서 꾸준히 제기됐습니다. 이런 주장들에 대해 어떻게 판단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추진할 계획입니까?“전 세계 모든 나라가 경기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매력적인 투자유인 정책을 경쟁적으로 제시하면서 기업유치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새만금지역도 그동안 두 차례의 무역투자진흥회의를 통해 외국인 고용과 출입국 규제완화, 국공유재산 임대특례, 사업시행자 국세감면 및 자금지원 확대 등을 추진했고, 새특법 개정을 통해 외투 협력기업 지원확대, 공유수면 잔여매립지 취득 특례, 국가유공자 의무고용 배제 등의 제도를 마련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글로벌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기업들이 요구하는 임대용지 기준완화, 매립 사업성 강화, 출입국 특례 등을 우선적으로 추진하면서 장기적으로는 국내외 경쟁특구보다 높은 수준의 인센티브 지원과 규제완화를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새만금청을 전북으로 이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새만금청이 사업의 현장에 있어야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어떻게 추진되고 있습니까?“새만금개발청이 새만금 현장에 위치해야 한다는 신념은 확고합니다. 건물을 임차해서 임시 이전하는 방안, 청사를 조기에 신축해서 이전하는 방안, 그리고 공공주도매립 및 기반시설 확충과 함께 하는 방안 등을 포함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새만금 개발에 가장 도움이 되는지를 관계 부처 및 전북도 등과 협의해서 추진해 나가겠습니다.”-새만금 잼버리 유치로 새만금에 대한 인지도와 관심이 크게 증가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새만금청에서도 앞으로 새만금을 외부로 알릴 수 있는 크고 작은 행사들을 자주 갖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이러한 계획이 있는지요?“잼버리 유치에 성공한 것은 매우 기쁜 일입니다. 우리 새만금청도 새만금을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지난 2011년부터 새만금 상설공연을 진행하고 있고, 계절에 맞춰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다채로운 행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새로운 문화·관광 아이템을 발굴하고, 변산반도 및 고군산군도 등 주변 관광지와 연계시켜 홍보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가겠습니다.”·

  • 기획
  • 이성원
  • 2017.08.21 23:0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16. 적(敵), 이완용의 흔적과 적산가옥 - 매국노 누웠던 명당엔 돌무더기만 수북이…

적(敵), 싸움의 상대를 말한다. 그리고 해를 끼치는 요소를 일컫는다. 요즘 들어 적폐청산이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지만, 역사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우리에겐 청산해야 할 적, 을사오적이 있었다. 일제는 1905년 11월 17일 조선의 주권을 빼앗으며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군인들을 대동한 이토 히로부미가 어전회의에 들어와, 참석한 각료들을 압박하여 조약에 찬성할 것을 강요했다. 고종은 조약에 반대했지만, 건강 문제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총 8명의 대신 중 일부가 찬성했는데 당시 서명한 5명을 매국노라고 하여 을사오적이라고 칭하였다.전국 곳곳에서는 을사오적을 규탄하고 일제와 맞서 싸우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언론인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사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이날 목 놓아 통곡하노라)을 써서 조약 체결의 부당함을 알리고 을사오적을 규탄했다.울분을 참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어 부당함을 알리는 우국지사들이 줄을 이었다. 통분한 국민들은 을사오적에 대해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민들의 분노와는 반대로 을사오적은 이후 일제강점기 시기 승승장구했는데, 그중 대표 매국노 이완용의 흔적이 전북 익산에 있다.적(敵), 이완용의 본관은 우봉(牛峰)으로 경기도 광주 낙생면 백현리(현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 출신이다. 1858년 가난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10살 때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가며 형편이 달라졌다. 이후 1882년(고종 19년)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맡으며 전라북도 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특히 육영공원에서 영어와 신학문을 배운 뒤 미국을 오가며 외교관 생활을 했고, 친러파였다가 친일파로 돌아섰다. 조선의 중앙정부 조직이었던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친 후 내각 총리대신이 되었고, 1907년에는 헤이그 밀사에 관련하여 고종의 책임을 추궁하면서 퇴위를 강요해 순종이 즉위하게 했다.이로 인해 전국에서 의거가 일어났고 성난 민중에 의해 이완용의 집이 불에 탔다. 그럼에도 1910년 총리대신으로서 한일 강제병합 체결을 주도했다. 그 대가로 을사오적 중 가장 높은 후작 작위를 받아 자손들까지도 그 혜택을 누리며 살았다.이완용은 1909년 이재명(李在明, 1890~1910년) 의사에게 칼에 찔리는 테러를 당한 뒤 후유증을 앓으며 암살을 두려워하는 불안한 삶을 살았다. 자신의 무덤이 훼손될까봐 전국에 가묘를 몇 개씩 두었으며 최고의 명당을 익산에 찾아 놓고 1926년 2월 11일 종로구 옥인동 자신의 집에서 병사했다.당시 《경성일보》에 따르면 그의 장례는 일황이 내린 장례 깃발을 앞세워 성대하게 치러졌고, 일제는 이완용의 업적을 높게 사 그의 장례식을 기록영화로 만들었다 한다. 그의 죽음을 두고 무슨 낫츠로(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라는 제목의 사설이 1926년 2월 13일자 동아일보에 실렸다가 조선총독부의 발행금지 처분으로 삭제된 채 호외로 발행되었다.장례 후 이완용의 시신은 용산역에서 기차에 실려 내려가 전라북도 익산시 낭산면 낭산리 산 154-3번지 자신이 명당으로 지목한 터에 묻혔다. 묘소를 훼손하는 사건이 종종 발생하자 일본 순사가 묘를 지켰고, 해방 이후에도 식칼이 묘에 꽂아 있거나 봉분이 파헤쳐지는 등 훼손이 이어지자 1979년 그가 죽은 지 53년 만에 후손에 의해 유골은 화장되어서 뿌려지고 묘는 폐묘되었다. 당시, 남겨진 이완용의 관 뚜껑은 원광대학교 박물관에서 5만 원에 구입했다고 전해진다. 그 후, 적폐청산의 의미로 태워졌다 하나 확실한 근거는 남아 있지 않다. 현재, 이완용이 남긴 흔적으로 남아있던 명당인 그곳엔 컨테이너와 돌무더기들이 자리 잡고 있다.적의 또 다른 대표 흔적으로 적산가옥(敵産家屋)이 있다. 적산(敵産)은 적의 재산을 뜻하는 말로 적으로서 머물러 있었던 이들의 집을 일컫는 말이다. 전라북도는 이 땅의 양곡을 노리는 적들에 의해 늘 수탈의 대상이 되었으며 만경강과 동진강, 그리고 서해의 물길과 군산항은 수탈의 통로가 되었다. 1910년 일제가 국권을 강제로 침탈했던 시기 전후로부터 일제강점기에는 많은 일본인이 수탈을 목적으로 전라북도에 살았다. 그러다가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배하자 철수하면서 그들이 살던 집들은 정부에 귀속되었다. 당시 38선 이남을 통치한 미군정청은 남한 내 모든 일인 소유재산을 인수하였고, 이후 1949년 대한민국 정부가 제정한 귀속재산법 및 1950년 시행령에 의해 수많은 적산에 대한 매각이 빠르게 진행되었다.그에 따라 오늘날 적산은 단순한 적의 재산이라는 의미보다 적에게 수탈당했다가 되찾은 재산이라는 의미로 일제강점을 입증하는 역사의 흔적으로 가치를 남기고 있다.근대문화유산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는 군산에는 대표적인 적산가옥인 군산 신흥동 일본식 가옥(구 히로쓰가옥)이 있다. 군산 신흥동 일본식 가옥은 과거 군산유지들이 거주하던 신흥동 일대에 위치한 주택으로, 포목점을 운영하던 히로쓰 게이사브로가 지은 집이다. 목조 2층 형태로 근세 일본 무가(武家)의 고급주택 양식을 띄고 있으며, 일본식 정원과 건물의 모습 등이 건립 당시 모습을 지니고 있어 건축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다.이 가옥은 2005년에 국가등록문화재 제183호로 지정되었으며 영화 《장군의 아들》, 《타짜》, 《범죄와의 전쟁》 등 우리나라 근대사를 소재로 다룬 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지로 활용되었고 군산의 근대문화유산 탐방의 메인 코스의 거점으로 인기장소가 되었다.익산에는 익산 춘포리 구 일본인 농장가옥(구 호소카와 농장가옥)이 있다. 일본식으로 지어진 목조 2층 건물로 등록문화재 제211호로 지정돼 있다. 곡창지대였던 호남평야 농장 중 가장 대표적이었던 호소카와(細川) 농장 안에 있었던 주택이자, 전 일본 총리였던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의 할아버지 소유였던 농장의 일본인 농업기술자가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봄나루, 춘포(春浦)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지면서도 호소카와 농장으로 인해 대장촌(大場村)이라 불리는 지역이다. 이곳에서 수탈해간 돈으로 일본의 총리가 탄생했다 하니 참으로 기막힐 노릇이다. 이 일원은 당시의 원형을 간직한 곳으로 호소카와의 도정공장과 춘포역 그리고 수탈의 통로였던 만경강과 이어지는 근대사의 흔적지로 남아 역사의 의미를 전해주고 있다.지난 8월 15일 익산역에 평화의 소녀상이 건립되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노동자들이 끌려갔던 출발지이자 이완용 시신이 실렸던 용산역에는 강제징용 노동자상이 세워져 있다. 아픈 기억도, 적(敵)과 적산(敵産)의 흔적까지도 잊지 말아야 할 우리의 역사이다. 그 역사의 흔적 따라 사람의 발길이 이어지는 것도 땅이 지닌 힘이다. 청산해야 할 적폐도 있지만 아픔은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교훈을 깊이 새기며 그 흔적을 따라 가봐야 할 팔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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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8.18 23:02

[마을학개론 ① 마을이란 무엇인가]사람으로, 사람답게,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곳

9월초부터 우석대 평생교육원에서 마을학개론 강좌를 개설한다. 전남의 순천대 평생교육원에서도 같은 강좌를 연다. 하지만 실제로 개강할 수 있을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적정한 인원의 수강생이 신청을 해야 비로소 개설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소 불안하다. 과연 자기 돈을 내고 15주 동안, 일주일에 하루 2시간씩을 공부할 여유가 있는 삶을 사는 전라도 시민들이 그만큼 될지. 더군다나 마을학개론이라는 게 재미있는 놀이도, 돈 되는 생활기술 공부도 아니지 않은가.부디 전북에서든, 전남에서든 뜻이 모아져 국내 최초의 마을학개론 강좌가 대학의 밖에서나마 무사히 개강할 수 있기를 바란다. 당연하지만 개인적인 욕심이나 현시욕은 아니다. 마을학개론으로 생활비나 벌자는 게 아니다. 오래 전부터 마을에서 사람답게 먹고 사는 법을 서로 가르치고 배우자는 간절한 소망을 품었다. 평소 귀농인들을 관찰하고 연구하다보면 안타깝고 답답했기 때문이다. 귀농 또는 자발적 하방을 해서 농촌마을에서 먹고 살려면, 지역사회에서 사람답게 살아가려면 일단 마을이란 무엇인지 잘 알아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 마을은 잘 모른 채 무작정 귀농한다. 농사를 그렇게 보듯 마을의 삶 또한 만만하게 보는 것이다. 마을학개론의 발상은 이같은 절박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그래서 농사짓는 비법, 집 짓는 기술, 땅 고르는 요령 보다 우선 마을, 공동체, 마을시민, 마을기업, 대안마을, 대안농정, 그리고 대안사회에 대해 충분히 공부하는 교육과정이 필요하다. 개인적으로 귀농 15년 여정의 기록인 〈마을시민으로 사는법〉 〈마을을 먹여살리는 마을기업〉 〈사람 사는 대안마을〉 〈농부의 나라〉 〈농촌마을공동체를 살리는 100가지 방법〉 〈행복사화유럽〉 〈마을주의자〉 〈귀농의 대전환〉 〈농민에게게 기본소득을(근간)〉 등 이 곧 마을학개론의 컨텐츠를 이루는 셈이다. 구체적으로는 마을공동체귀농의 이론과 실제, 마을과 공동체의 주체인 마을시민과 마을주의자의 실제와 사례, 마을공동체 사업의 주체인 마을기업의 실제와 사례, 농촌마을생태공동체마을의 실제와 사례, 농업농촌농민사회적 경제 관련 대안농정의 해법, 그리고 EU(유럽연합) 등 대안사회의 현장사례와 대안모델 등에 대해 주로 강의하고 토론할 계획이다.또 마을공동체사업에 뛰어든 원주민들도 사정은 귀농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마을이나 공동체에 대한 사전학습이나 훈련이 부족하다. 하지만 사회적경제 기반 농촌마을공동체를 통해 농업농촌농민은 물론, 도시와 국가의 지속발전가능한 활로를 되찾을 수 있다고 믿는 편이다. 마을에서 마을사람으로 살아가는 한, 마을공동체사업이란 포기도 방임도 할 수 없는 과제다. 그러자면 더 열심히 마을을 공부해야 한다. 그래서 마을로 들어가 마을공동체를 일굴 마을시민과 마을주의자들이 서로 배우고 가르칠 마을학교가 필요하다. 마을학개론은 그 마을학교의 교과서에 다름아니다. 다만 읽고 말하고 듣는 공부에 그치지말고 현장에서 행동하고 실천하고 체화할 수 있는 사람답게 먹고사는 실용적 공부라야 한다. 마을학개론이 마을에서 먹고사는 법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이자 목표다.△ 마을이란 무엇인가사전에 적힌대로 보면 마을이란 주로 시골에서 사람사는 집들이 모여있는 곳이다. 아무래도 생업에 주로 매달리는 도시의 동네는 마을의 사전적 의미나 원형과는 서로 어긋나거나 어울리지 않는다. 모름지기 마을이려면 최소한 삶(생활)과 일(생업)이 하나의 시공간에서 조화롭게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그러기에 도시보다는 농촌이 적합하다. 거기에 쉼(휴식)과 놀이(문화)까지 보태 누릴 수있다면 더 할 나위 없는 살기좋은 마을일 것이다. 마을학개론에서 의미하고 소망하는 마을이 바로 그런 마을이다.그런데 먹고 사는 일에 자꾸 치이는 도시의 동네를 벗어난 마을에서도 결국 먹고 사는 게 문제다. 농사를 짓든, 농사를 짓지 않든 먹고 사는 일에 다시 매달리게 된다. 결코 개인이 온전히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 사회적 난제라는 결론에 이른다. 결국 국가와 사회가 나서야 한다. 기본소득, 무상교육, 무상의료, 무상급식, 고용안정, 보편적 사회복지 같은 사회안전망(social safety net)이 열쇠를 쥐고 있다.여기에 먹고 사는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직업학교, 지역공유 사회적경제 자산은행, 지역단위 협동연대 농업농촌경영체, 마을공동체와 사회적경제의 융합 플랫폼 등의 정책과 제도를 통해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을 지속적으로 생산하고 축적해야 한다. 물고기(기본소득)와 물고기 잡는 법(생활기술), 소득과 일자리를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 그래야 마을에서 먹고사는 문제가 풀릴 수 있다.마을이란 그렇게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사람들과 더불어 나눠먹고 살 수 있는 곳이라야 한다. 사회안전망과 사회적 자본의 힘으로 서로가 서로를 믿고 기대고 돌보고 보살필 수 있는 곳이라야 한다. 그렇게 삶과 일, 그리고 쉼과 놀이가 하나되는 곳이라야 한다. 마을이란 무엇인지, 공동체를 왜 하는지, 지역사회는 어디쯤 가고있는지, 마을자치를 어떻게 할지 끊임없이 묻고 답을 구해야 비로소 마을은 보일 것이다. 그게 마을학개론에서 함께 하려는 공부의 목적이다.△사회적 인간은 마을자치공화국으로그러나 마을학 공부도, 마을공동체의 실천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사회적 동물로서, 사회적 인간은 몰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에밀 뒤르켐은 사회분업론에서 기계적 연대로부터 분업에 따라 개성적이고 이질적인 개인들의 유기적 연대로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집합의식이 약하고 개인의식이 우월한 근대사회에서 사회적 인간의 몰락을 염려했을 것이다. 로버트 퍼트넘은 나 홀로 볼링(Bowling alone)에서 사회적 자본을 폐쇄성이 강한 결속형 자본과 포용성이 큰 교량(연계)형 자본으로 구분했다. 가령 성가대나 볼링클럽 같은 곳에서 다양한 사람이 어울릴 수 있는 교량형 사회적자본이 많을수록 건강한 사회라는 것이다. 울리히 벡은 서구를 중심으로 추구해온 산업화와 근대화 과정이 실제로는 가공스러운 위험사회를 낳는다고 주장했다.다행히 도시든, 농촌이든 몰락하는 사회의 출구와 해방구를 찾으려는 새로운 사회의 시민들이 마을공동체를 재생하고 복원하려 애를 쓰고 있다. 걱정과 우려는 적지 않지만 문재인정부도 50조원의 도시재생사업을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다. 그동안 경제학자들이 주로 구축해놓은 자유시장의 진지, 현대 자본주의의 패러다임과 플랫폼에 갇혀있는 도시나, 국가에서는 해법과 출구가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을학개론의 결론은 마을로 내려가자는 것이다. 마을에 가야 비로소 사회적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다. 사람답게, 사람의 도리를 다 하며 먹고 살 수 있다. 마하트마 간디가 설계한 마을은 개인의 자유에 기초한 완전한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한 마을자치(Swaraji)로 작동하는가히 마을공화국이라 할만하다. 그래서 간디는 마을이 세계를 구할 수 있다고 믿고 주장했다. 정기석 마을연구소 소장시인※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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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8.17 23:02

[책마을해리 만화학교]만화에 푹 빠진 아이들, 만화 그리며 세상과 만나다

이것 좀 읽어 봐, 엄청 재밌다. 이건 표현이 좀 지독한데, 헐~. 초등학교 45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 남짓한 열 댓 명 아이들이 와글바글 순전 입으로 책을 읽고 있다. 책마을해리 운동장 끝 나란히 선 다섯 그루 꿀밤나무 플라타너스 아래였다. 짙은 나무 그림자 커다란 티피텐트 두 개 사이에 올망졸망 놓은 작은 북 텐트, 책 파라솔, 책 의자와 매트 들에 아무렇게나 앉거나 누워 책을 읽는다.폐교된 지 내일모레면 20년, 학교의 소란이 아득한 이 곳에 그 귀한 아이들이 떼를 지어 책을 읽느라 해 기우는 줄 모른다. 이들의 정체, 2017인문독서예술캠프에 참가한 청소년들이다. 50명 남짓 대한민국 곳곳에 흩어져 살던 친구들이 〈책마을 만화학교〉 타이틀 아래 2박3일 모였다.하루 종일 나무 그늘 아래서 뒹굴뒹굴 책만 읽느냐고? 그것도 좋고도 좋지만, 뚜렷한 목적이 있다. 만화다. 우리가, 책으로 눈으로 다른 모든 감각으로 세상을 읽고 생각하고 느낀 것들을 다시 이야기로, 특히나 그림으로 풀어내 칸에 가두어 보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언제든 칸에서 풀려나 자유로워지는 법을 배우려는 것이다.△만화가 좋아 전국에서 모인 50여 명의 아이들책마을만화학교는 3년째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심혈을 다해 진행해오고 있는 인문독서예술캠프 책마을 버전이다. 작년까지 100명 이상, 한두 차례 큰 규모 독서캠프로 진행해오던 것을, 4050명 단위 45회로 진행하는 새로운 버전을 시도한 것이다. 독서를 청소년, 청년, 가족의 공간으로 되찾자는 노력이 조금씩 다양한 빛깔로 번진다. 40명 청소년 참가자를 만화선생님, 책마을 선생님 열세 분이 함께하며 독서부터 다양한 지역의 인문생태자원 체험(하기)과 쓰기(그리기가 더 부각된), 그리고 마침내 펴내기(출판)까지를 돕는 것이다. 밀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40명 정원을 넘겨 진행한 핫한 여름캠프 책마을만화학교. 책마을해리로는 올해가 두 번째 만화학교다. 작년 학교를 마치고 만화책 『넌 너, 난 나』를 출판해 관심을 끌기도 했다. 3일 동안 이어지는 만화학교 일정을 따라간다.△읽기만 하던 것을 쓰고 출판하는 주인공으로첫날 첫 일정은 계약서 작성으로다. 출판권설정계약서, 독자들에게 생소한 계약서다. 저작권자가 출판권자, 출판사와 계약하는 서식이다. 만화학교 아이들은 이제 만화의 독자가 아니라 저자가 되는 역할 바뀜 마법공간으로 들어선다. 저자 사인(서명)을 멋들어지게 하는 아이들 눈에 진한 호기심이 비친다. 출판권설정계약서에서 갑은, 저작권을 가진 아이들 자신이기 때문이다.이제 모둠나누기다. 나이에 따라 파랑, 초록, 주황, 연두, 분홍까지 모두 다섯 모둠이다. 잘곳 머물곳 먹을곳 놀곳에 대해 살피고는 바로 캐릭터 공부에 들어간다. 공부라기보다는 놀이다. 자기 모습에서 가장 잘 드러내고 싶은 부분을 찾고 그려보고 그려보고 그려보고,다. 저마다 다양한 캐릭터가 태어난다. 나는 이렇게 여러 번 여러 가지 모습으로도 세상과 만난다. 우리가 자녀로, 어버이로, 학생으로 교사로, 관계에 따라 역할이 변하듯이.책속에서 길을 찾는 진로탐색, 『나는 지하철입니다』 그림책을 읽으며 다양한 사람들, 다양한 삶의 모습을 만나고는 다시 나로 돌아오는 여행을 마친다. 이제 비로소 만화로 향한다. 만화가 갖는 여러 가지 속성 이야기, 만화기법과 스토리텔링에 대해 이야기 나눈다. 그림 그리는 재주(이것을 테크닉, 혹은 스킬이라고 한다)보다 이야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함께 공감하는 시간이다. 이야기불변의 원칙을 다시 확인한다.해는 서편으로 기울기를 늘어뜨리고, 이제 형님들과 아우들이 편을 나눠 한편은 갯벌놀이(바다물놀이), 한편은 만찬을 준비하는 요리사놀이에 접어든다. 첫날은 형님 먼저 요리사다. 형님들 솜씨는 짜장밥, 난생처음 양파를 썰어보는 친구들은 이구동성, 엄마를 외친다. 이 매운 일을 맨날만날 하는 우리 엄마 생각이 얼마나 간절할까. 만화학교 식탁에 오르는 밥은 특별하다. 자연식당 청미래(민형기 대표) 도움으로 오곡통곡식으로 차린다. 작은 도정기에 오색 벼를 넣자, 트트특 현미 쌀이 되어 나오는 신기한 체험부터 만찬준비가 시작된다. 다음날 만찬은 아우들이 준비한 스파게티였다. 이 솜씨, 집에 가서도 부모님께 자랑해보렴. 밤이다. 이제 이야기를 짜는 시간이다. 이야기가 사는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이야기의 틀을 스케치로 표현하고 이야기와 그림 언저리에서 서성대다가 잠깐 앉았다가 한다. 마지막 일정은 만화일기 한편 쓰기, 꿈에서도 만화라니.△내 마음, 내 몸을 향한 여행은, 이제 바깥 세상으로만화학교 둘째 날 일정은 몸 여행 마음여행으로 시작한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내 몸 안 여행으로 시작한다. 눈을 감고 보이지 않는 몸 안 구석구석을 찾아가는 의념(意念)여행이다. 오전 어제 못다한 스케치를 마무리한다. 생각이 좀 빠르고 손이 조금 빠른 아이들 몇은 벌써 색칠에 들어가 주위 아이들의 분노 대상이 된다. 얘야, 살살하렴.오후 만화선생님 가운데 대표교사 이지훈 작가와 함께 작가와만남 시간, 만화작가로 사는 일에 대해 열띤 토론이 이어진다. 그런데, 연봉이 얼마예요?그림놀이시간, 어제 그렇게 궁리궁리했던 자신의 캐릭터로 캐릭터 버튼 만들기, 만화 책갈피를 만들기를 통해 책마을과 인문독서캠프 추억을 기억의 갈피에 소중하게 챙겨놓는다.질세라 아우님들 실력발휘 만찬 뒤에는 캠프파이어와 요즘아이들다운 밤놀이가 이어진다. 실컷 놀아야 후회없는 법. 마지막 날이다. 언제 다시 우리가 우리 안으로 여행을 떠날까, 생각여행으로 시작한 하루는, 못다 그린 이야기, 그림 채색을 완성하고, 마침내 책에 들어갈 저자 소개글쓰기까지다. 3일 대장정 마무리다.△책마을 이틀밤 삼일낮 기억을 온몸 온마음으로전국 곳곳에서 왔듯이 전국 곳곳으로 흩어져 돌아가는 아이들이 전라북도가 가진 책의 문화, 고창이 가진 생태인문자원, 책마을 기억을 온몸온맘으로 새겨놓았을 것이다. 이미 끝 난 시인학교 참가자들은 물론일 테다. 이 신나는 책놀이 책쓰기가 여기서 끝일까? 천만에다. 매주 후반 조월례 어린이책평론가와 서평학교, 권오준 생태작가와 생태학교, 이억배 그림책작가와 그림책학교가 9월 첫 주까지 이어진다.우리도 이렇게 시원한 나무그늘 아래서 며칠 책만 읽고 놀았으면 좋겠다.책마을인문독서예술캠프 참가하는 친구들을 데리러 온 어버이들 이구동성 하는 말이다. 살다가 언제 다시 이 전라도 구석 바닷가 작은 폐교 책마을에 오겠는가. 마음 한켠에 작게 나무그늘을 만들고 시원한 바닷바람을 불리고, 그리고 그 언저리에서 책을 펴 드시라. 마음의 북텐트 하나 마련하시라.이대건 책마을해리 대표※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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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8.16 23:02

진짜 자유인은 도시 살면서도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 사람

철이 나기 전, 아주 어릴 적에 참으로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잠깐 한 적이 있다. 출가(出家)를 하면 어떨까? 출가를 해볼까? 원래 출가의 근기를 타고 난 사람이라면 절대 입 밖에 내지 않고 혼자만 품은 채 열병을 앓고 또 앓다가 결행하기 직전에 공표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가볍기가 한량없어서 생각이 들자마자 몇 밤도 넘기지 못하고 어머니에게 말해보았다. 초여름의 이른 오후였다. 적당히 데워진 마룻장에 등을 대고 누워 어머니를 빤히 쳐다보며 종알댔다. 그런데 의외로 어머니께서 내 말을 너무 진지하게 듣고 놀라시자 얼른 포기했다. 훗날 어머니는 내가 등산 가는 것도 싫어하셨다. 저 높은 산에 들어가 어머니 본인이 살고 계시는 낮고 거추장스런 이곳으로 내려오지 않을까봐 걱정하셨던 듯하다. 당신이 낳고 당신이 기르면서도 그 아들의 성정이 얼마나 폴폴 가벼운지는 내내 모르셨던 것 같다. 자식에게 사랑과 기대만 퍼 부으시느라 정작 본바탕을 애써 외면하셨던 그런 분을 괜히 괴롭혀 드렸다. 그렇게 하여 나는 성불(成佛)의 길보다 효자(孝子)의 길을 택했다. 성불은 저 먼 곳에서 빛나는 이상적인 달관의 경지로 보였고 효자는 구구절절 생활의 때가 묻은 이곳의 일 같았다. 그 뒤로 내 어깨와 견줄만한 높이에 있는 것들은 어쩐지 하찮고 심드렁했다. 아주 특별하고 높은 곳에서만 빛나는 어떤 것을 포기한 사람이 갖는 약간 비굴해진 느낌이랄까. 그것을 감추느라 내 어깨 아래의 삶 속에서 얼마간은 더 뻣뻣했는지도 모르겠다. 효성은 어쩐지 땔감들 사이를 직선으로 헤집고 들어와 잠든 먼지들을 다 깨워놓은 석양빛 드는 부엌의 아궁이에서나 일어나는 평범하고도 평범한 일 같았다. 밥은 나오지만 눈길은 머물지 않는... 어쩔 수 없이 한동안 내 눈길은 차라리 파르스름한 빛이 남몰래 감도는 젊은 탁발승의 쓸쓸한 ‘삭발’에 닿으려 했다.노자나 장자를 많이 읽는다는 것을 아는 친구들은 내게 항상 크고 특이한 얘기들을 듣고자 했다. 일상의 규칙들을 무시하면 더 환호하고 내가 학문적으로 이해한 것을 몸소 실천까지 한다고 인정해주기도 했다. 시험을 열심히 준비해도 친구들은 노장(老莊) 학도답지 않다고 했다. 성공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조금이나마 비치면 장자의 소유유(逍遙遊)를 배운 사람이 왜 그러냐고 했다. 신발과 옷가지만 남기고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성선(成仙) 차원 정도의 얘기는 되어야 다들 만족했다. 볕이 낮게 들어오는 봄날 오후, 어느 맥주 집 창가에 앉아 수업에 들어가지 않은 날이었다. 먼저 일어서면서 친구들은 나를 널리 이해한다는 뜻으로 말했다. “쟤는 도가 철학을 하니까 저래. 괜찮아.” 이 일탈은 도가 철학과 아무 상관없다. 게으름이자 방종일 뿐이다. 그저 각자 한 편으로 치우쳐 있는 사람들끼리의 부족한 교류였을 뿐이다.구작자(瞿鵲子)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름에는 깜짝 놀라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 까치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장오자(長梧子)라는 사람이 있었다. 아주 오래 산 오동나무라는 뜻을 가졌다. 오동나무[梧]는 깨달음을 나타내는 글자인 ‘오’(悟)자와 발음이 같아서 가끔 섞어서 쓰기도 한다. 여기서 장오자는 깨달음에 이른 도가적 인물을 나타내고, 구작자는 아직 거기에 이르지 못한 사람, 즉 유가적인 인물을 나타낸다. 구작자가 장오자에게 이렇게 묻는다. “제 스승에게서 들은 얘깁니다만, 최고 높은 수준에 이른 사람인 성인은 세상일에 빠지지 않고, 이익을 좇지 않으며, 해가 닥쳐도 피하지 않고, 무언가 추구하는 것도 없고, 정해진 길을 따르지도 않고, 말을 하지 않아도 무언가 말해지고, 말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말한 바가 없으며, 이런 식으로 하면서 이 세상 밖에서 유유자적 한다고 합니다. ‘도’(道)를 실천한다면 이 정도는 되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이 얘기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여기에 장오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런 말은 황제(黃帝) 정도 되는 사람이라도 알아듣지 못할 것이요. 그러니 당신 스승인 공자가 어찌 알 수 있겠소. 또한 당신도 이런 얘기를 ‘도’를 실천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지나친 단견이오. 달걀을 보고 새벽을 알리기를 바라고, 탄알을 보고 곧바로 새 구이를 찾는 것처럼 급하오. 그냥 당신을 위해서 내 생각을 아무렇게나 말해볼까요? 그러니 편하게 아무렇게나 들어주시오. 해나 달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우주를 겨드랑이에 낀 채, 만물과 잘 맞아 서로 어그러지지 않고, 모든 것에 억지로 자기 뜻을 부과하지 않은 채 그대로 놓아두고, 가치 판단 기준으로 귀천을 나누지도 않소. 세상 사람들은 온 힘을 들여 힘들게 살지만 성인은 우둔하며, 오랜 세월동안 세상사에 섞여있으면서도 자신만의 순수함을 지키고 있소.”(『장자 · 제물론』) 가장 높은 경지나 깨달음 혹은 절대 성숙은 ‘이곳’을 떠나서 훨훨 높이 날아올라, 이곳과 전혀 다른 저 먼 곳의 어디에 안착해 있으면서 이곳을 내려다보는 어떤 것이 아니다. 장오자가 말하듯이 세상사와 함께 하면서 그것들과 어그러지지 않고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함께 나아가면서 자신만의 ‘보물’만은 절대 놓치지 않는다. 그 보물을 장자(莊子)는 ‘순수함’(純)이라고 말했다. 바로 자신을 자신이게 하는 자신만의 고유한 특질인 것이다. 여기서 자신이 평생 수행해야 할 ‘사명’이 나온다. 그럼 자신의 ‘순수함’을 지키는 바로 그 ‘우둔한’ 성인은 어떤 높이에 있는 사람인가. 장자는 말한다. “해나 달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우주를 겨드랑이에 낀” 정도의 사람이다. 지식이 되었든 사고의 폭이 되었든 감각이 되었든 간에 해나 달이나 우주의 높이 내지는 넓이에 닿아 있다는 뜻이다. 그런 후에야 세상사와 어그러지지 않을 사고의 두께를 가진 자로서 자신만의 편협한 잣대로 귀하고 천한 것을 나누어 세상을 대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장자가 말하는 ‘우둔함’이다. 자신만의 잣대가 없기 때문에 속세에서는 그를 바보나 우둔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도시에서 지친 사람들은 오지의 발길 끊긴 산 속을 꿈꾼다. 그래서 많은 시간을 들여 숨어들 곳을 찾아 헤맨다. 도시에서의 일을 끊고 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승리로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연 속이라도 자신만의 ‘순수함’을 지키지 못한다면, 방만과 게으름을 벗어날 길이 없다. 지력이나 감각이 꼭 ‘해나 달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우주를 겨드랑이에 낀’ 정도가 될 것까지야 없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만 유지되어도 매일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삼겹살을 구워먹는 한가한 유흥으로는 자유나 자족의 경지를 맛볼 수 없다. 자족이나 자유의 중심 자리는 항상 ‘자기’(自)가 차지한다. ‘자기’가 지켜져야 자연스럽기도 하고 자유스럽기도 하고 자족하기도 한다. ‘자기’가 지켜지지 않은 자유가 방종이고, ‘자기’가 지켜지지 않은 ‘자족’이 나태함이고, ‘자기’가 지켜지지 않은 ‘자연스러움’은 촌스럽다. 최종 승리의 길은 자신만의 순수함을 지키느냐 지키지 못하느냐가 결정한다. 자기가 굳건하게 지켜지는 사람은 절대 어느 한 쪽으로 쏠리지 않는다. 도시에 있던 시골에 있던 자신이 중심을 지키면 된다. 자기가 중심을 지키는 한 도시에서도 시골을 살 수 있고, 시골에서도 도시를 살 수 있다. 도시도 이상향이 아니고, 시골도 그 자체만으로는 절대 이상향이 아니다. 자기가 약한 사람은 도시에 있을 때 시골을 꿈꾸고, 시골에 있으면서 도시를 꿈꾼다. 자기의 순수함을 지키는 사람은 도시에 있건 시골에 있건 자신이 있는 곳에서 두 세계를 ‘우둔’하게 실현한다. 자아의 실현이나 완성은 장소에 좌우되지 않는다. 오히려 장소를 지배하는 자신의 사명이 결정적이다. 자기 자신만 가지고 있는 고유한 그 ‘순수함’이 바로 이상향을 좌우하는 손잡이다. ‘순수함’이 장소를 지배하게 해야 한다.인간의 삶은 따로 있지 않다. 유동적 우주에 섞여가는 한 형태인데,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이상 그것 자체가 바로 우주적이다. 이런 점에서 자연과 인간은 분리되지 않는다. 인간성 안에 자연성이 들어있고, 자연성이 인간성의 토대다. 이렇다면 인간이 하나의 관점을 고집하며 자기 정체성(整體性)을 주장한다면 매우 정체적(停滯的)이거나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 장자는 세계를 이렇게 묘사한다. “아지랑이나 먼지, 이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생물이 서로 입김을 내뿜는 현상이다. 이렇게 본다면 하늘이 새파란 것은 진짜 원래부터 그 색깔인 것일까? 아니면 멀리 떨어져서 끝이 없기 때문일까? 9만리 높은 하늘을 나는 대붕 또한 위에서 내려다보면 파랗게 보일 것이다.”(『장자 · 소요유』) 야마(野馬)로 표현되는 아지랑이과 진애(塵埃)로 표현되는 먼지는 정해진 방향 없이 계속 움직인다. 정해놓은 방향이나 목적도 없이 그저 움직일 뿐이다. 왜 움직이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이 자연이다. 이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운동하면서 우주의 완결성을 이루는 것과 같다. 여기서 자유가 태어난다. 장자는 이 문장을 통해 특정 지점에서 결정되는 관점의 기능을 철저히 무화시킨다. 하늘은 여기서 올려다 볼 때만 파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한 가지 기준으로 나를 고정시켜 우주 운행에 방해를 주면 안 된다. 이것이 우주적 원리이고 거대한 성취가 시작되는 출발점이다.이제 나는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이 세상의 일을 열심히 하면 바로 여기서 저 세상이 구현된다는 것을. 저 세상은 따로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진짜 자유인은 도시에 살면서도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자신을 관조하며 천천히 움직이는 사람이란 것을. 원수를 사랑하는 일이 왜 나를 살리는 일인지를. 용서하고 용서 받는 일이 왜 인간의 편협성을 벗어나는 우주적인 사건인지를. 서울 시내의 호텔과 나무 위의 새둥지가 그리 크게 다른 것이 아님을. 협력이라는 것은 나를 줄이고 반대하는 쪽을 수용하는 일이란 것을. 부엌 흙바닥에 쭈그려 앉아 석양빛을 모로 받으며 어머니를 위해 아궁이 불을 살리던 일이 바로 성불(成佛)의 길이었음을.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건명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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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8.15 23:02

"청중평가단 첫 시도…시민과 함께 즐기는 축제로"

심사 비리, 이사진 간의 갈등으로 홍역을 치렀던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구원 투수로 김명곤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 나섰다. 잘해야 본전이고, 잘못하면 온갖 비난을 뒤집어쓰는 자리다. 그도 이를 모를 리 없을 터. 그래서 그 역시 처음 지인을 통해 자리를 제안받았을 때 거절했다. 시끄럽고 힘든 자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후 김승수 전주시장이 직원 8명과 함께 재차 찾아와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에 대한 전면적인 개혁 의지를 밝혔다. 그는 수락 결정을 내렸다. 그 개혁 의지는 원활히 실행되고 있을까. 지난 9일 김명곤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조직위원장을 만나 올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9월 8일11일)의 운영 방향과 국악 활성화 대책 등에 대해 들어봤다.-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가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와 일하시는데, 심경이 복잡하실 듯합니다.이번 1년 만이라도 공정하고 투명한 심사제도 틀을 만들어 놓는 것 자체가 의미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면 좋겠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그간 쌓인 적폐를 1년 안에 완전히 청산하기는 어렵겠지만, 개선된 심사제도를 토대로 국악계를 정화하는 개혁적인 분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그간의 심사 비리와 이사진 갈등 등에 대해 알고 계셨는지요.간혹 드러나는 사건만 접했을 뿐, 속사정은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평소 창작 판소리를 연출할 때 젊은 국악인과 작품 활동을 하면서 전통 예술 경연대회의 문제점에 대해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돈 없으면 대회에 나갈 수 없다, 계보나 파벌이 심해 실력이 있어도 안 된다는 말을 합니다. 실력 있는 국악 인재들이 좌절과 환멸을 느끼고 포기합니다. 심각한 문제입니다.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가 경연대회 상금 등 돈과 비리로 얽힌 혼탁한 관계가 되는 겁니다. 관행처럼 굳어져 당사자들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모르는 것이 국악계를 망가뜨리고 황폐화하는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가 약 한 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올해 가장 달라지는 점은 무엇입니까.국악 경연대회에서 처음 시도하는 청중평가단 제도입니다. 올해는 판소리 명창부에 한해 시행하지만, 좋은 효과가 난다면 모든 분야로 확대해 청중평가단의 규모와 비율을 늘려나가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청중평가단은 단순히 일반인이 참가한다는 것보다 이들이 국악 핵심 마니아로 성장한다는 데 더 큰 의의가 있습니다.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높아집니다. 청중평가단을 판소리뿐만 아니라 무용, 풍물, 민요 등으로 확대하면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에 열광하는 마니아 1000명이 확보되는 겁니다.- 청중평가단 이외에 심사제도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하는 다른 장치는 무엇이 있습니까.심사위원 선정에 관한 문제입니다. 심사위원을 임의로 선정하면 문제 발생 소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번잡하더라도 심사위원 선정 방식부터 심사위원 추천위원회를 구성해 분야별로 심사위원 후보자 5배수 이상을 확보합니다. 또 덕망 있는 지도자급으로 심사위원 선정위원회를 구성합니다. 이들이 심사위원 후보자 리스트를 가지고 3배수 이상으로 순위를 매기도록 합니다. 조직위원회 사무국에서 이 순위대로 연락을 돌려 심사위원을 선정하게 됩니다. 누가 심사위원이 될지 누구도 모르게 하겠다는 의도입니다. 또 하루에 예선과 본선을 치르는 4종목(판소리 일반부시조명고수부어린이 판소리)을 제외하고 예선과 본선 심사위원을 분리운영합니다.- 말씀을 들을수록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무척이나 슬픕니다. 심사위원장을 모시면 그분에게 심사위원을 선정하고 합의 하에 수상자를 선정해달라고 전적으로 맡기고 싶습니다. 실제로 서양 콩쿠르는 그렇게 합니다. 그분들은 뒷돈을 받지 않고 공정하게 자기 눈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청중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심사 결과들이 나옵니다. 그러면 뒷소문, 악소문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심사위원 평가와 청중평가단 평가가 일치되는 단계가 오면 그때는 청중평가단이 심사가 아닌 진짜 청중으로만 와도 될 겁니다.- 현장에서 느낀 애로 사항은 무엇입니까.경연대회 자체의 질을 높이고, 경연대회가 축제가 되기 위해서는 청중평가단을 확대하는 게 제일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그것도 예산입니다. 하지만 예산 편성을 보면 현재는 경연보다 상금 위주입니다. 경연대회는 수상의 명예와 권위 위주로 가야 합니다. 지금은 상금 규모, 대통령상 여부에 지나치게 치중합니다. 오히려 상금으로 대중들이 즐기는 경연대회 내 프로그램을 추진하는 게 낫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술인을 뽑는 상 이름을 대통령상, 국무총리상 등 정치인의 계급으로 나누는 것도 한번 쯤 재고해 봐야 할 사안입니다.- 이 모든 변화가 궁극적으로는 판소리 활성화로 이어져야 할 텐데요.소수 마니아를 점차 확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쉴 새 없이 공연해야 합니다. 절이나 고택 등에서 진행하는 국악 프로그램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국악 동호회를 그룹화해야 합니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국악 팬을 자청해 이러한 일에 앞장서길 바랍니다.- 전북도민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일반 시민들이 참여하도록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우리의 소중한 명인, 명창을 뽑는 축제입니다. 내가 뽑겠다라는 마음으로 방문해주길 바랍니다. 전북은 전통문화예술의 본고장입니다. 시민들이 주인 의식을 갖고 공연을 즐겼으면 좋겠습니다.● 김명곤 위원장은기자배우작가연출가 문화 현장 만능 엔터테이너김명곤(65) 전주대사습놀이전국대회 조직위원장은 잡지사 기자와 배우, 극작가, 극단 대표, 연출가, 행정가 등 문화 현장에서 활동한 만능 엔터테이너이자 공연 예술계 중진이다. 그는 이 시대 진정한 광대(廣大)를 꿈꾼다. 넓을 광(廣), 큰 대(大). 넓고 큰 영혼을 가지고 창조적인 활동을 하는 창조자 말이다.그는 전주 출생으로 전주고와 서울대 독어교육학과를 졸업했다. 1977년 잡지 뿌리깊은 나무 기자로 입사하면서 문화예술계와 인연을 맺었다. 배화여고 독어교사, 극단 아리랑 창단 대표, 전국민족극운동협의회 의장, 우석대 연극영화과 겸임교수, 국립중앙극장 극장장, 천년전주사랑 이사장, 문화관광부 장관, 전주세계소리축제 조직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동양대 예술대학장, 세종문화회관 이사장으로 있다.1978년 연극 아벨만 이야기로 연극계에 데뷔해 뻐꾹 뻐 뻐꾹, 멈춰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 아리랑, 격정만리, 유랑의 노래 등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희곡을 쓰고 연출한 작품도 수두룩하다. 또 1983년 영화 바보 선언으로 영화계에 데뷔해 서편제, 태백산맥, 영원한 제국 등 여러 작품에 출연했다. 그를 대중적인 스타 반열에 올려놓은 작품은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다. 극 중 오정해의 아버지로 등장해 빼어난 판소리 솜씨와 선굵은 연기력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고(故) 박초월 명창에게 판소리를 배웠다.저서로는 <광대 열전>, <꿈꾸는 퉁소리쟁이>, <어떻게 하면 똑똑한 제자 한 놈 두고 죽을꼬?> 등이 있다. 1993년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과 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상, 1995년 자랑스런 서울시민상, 1995년 제1회 현대연극상 연출상 등을 수상했다.배화여고 교사로 재직하던 시절 사제 관계로 만난 부인 정선옥 씨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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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민주
  • 2017.08.14 23:02

[철의 궤도: 전라선 철길 답사기 ⑧ 관촌역·임실역] 비수기와 성수기 사이, 그 어디쯤에서

하늘 어딜 봐도 파란 구석이 없었다. 회색 커튼이 햇빛을 깔끔하게 막아선 가운데, 그 아래로는 구름인 듯 안개인 듯 고양이 털을 뭉쳐놓은 것처럼 생긴 덩어리 몇 조각이 고갯길을 휘감으며 저공비행 중이었다. 춘향로를 타고 슬치 남쪽 사면을 굴러 내려가면 이제 임실군 땅으로 접어든다. 길 동쪽으로는 번화한 마을이 나오고, 계속 나아가면 섬진강의 상류인 오원천과 마치 호남제일문처럼도 보이는 사선문이 차례로 인사한다. △옛 얼음창고와 승강장 옛 시설물 고개를 넘고 강을 건너 또 비탈을 내려오니 펼쳐진 것은 평탄한 들녘. 조금 전까지의 풍경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관촌역은 그 평지 위에 서 있었다. 마치 학교 건물처럼도 생긴 꽤 큰 역사(驛舍)는 1997년에 지어진 것이다. 관촌역이 그때 처음 생긴 것은 물론 아니고, 1931년에 전라선(당시 이름 경전북부선) 전주~남원 구간이 개통될 때 배치간이역으로 문을 열었다. 관촌면사무소와 버스 터미널, 초중학교가 있는, 그리고 고려조선 시대 오원역이 있던 면 중심지로부터는 조금 떨어져 있지만, 그래도 이용객이 적은 편은 아니었다. 1970년대만 해도 한 해 이용객 수가 19만여 명으로, 이는 임실역보다 근소하게 많은 수준이었다. 역과 오원천 사이에는 한눈에 봐도 오래됐음을 알 수 있는 회색 건물이 서 있다. 여기서 나서 여기서 늙었다는 주민 임남례 씨는 얼음창고라고 설명했다. 옛날에 일본 사람들이 얼음을 여기다 쟁여놨다가 전주, 군산으로 실어가고 그랬죠. 그만큼 번성했던 마을이라는 뜻이겠다. 관촌역 앞을 지나는 차량은 많지만, 그러나 이들 가운데서 관촌역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2002년에 개통된 병암지하차도 때문이다. 대부분은 지하차도를 지나 쌩 내달리고, 병암리나 대리 어딘가에 볼일이 있는 차량 정도가 길 가장자리로 빠져나온다. 이 가운데서도 관촌역에 볼일이 있는 경우는 매우 적다. 일단 열차를 탈 일이 없다. 이곳에 서는 여객열차는 이미 2008년 12월 1일부로 사라졌다. 여객열차가 서지 않게 된 이유야 달리 생각할 것도 없다. 2008년의 11개월 동안 관촌역에서 열차를 타고 내린 이가 310명에 불과했다는 통계만 봐도 그렇다. 전주나 남원까지 시원하게 내달릴 수 있는 춘향로가 그대로 관통하는데, 마이카 시대에 철도가 여객 분야에서 딱히 경쟁력을 가질 수가 있었을까. 임실역과의 거리도 그다지 멀지 않고 말이다. 그런 가운데, 취재진이 찾은 7월 24일은 마침 화물도 비수기를 맞은 시기였다. (관촌역에서는)비료를 주로 취급하는데요, 1~6월은 농번기 대비로 비료가 많이 올라가죠. 지금(7월 하순)은 끝났어요. 관촌역 관계자가 화물 플랫폼을 가리키며 말했다. 인근에 군부대가 있는 터라 군 관련 화물을 취급하는 것 또한 관촌역의 주요 업무에 속하지만, 마침 또 시설 공사로 한동안 관련 업무가 멈춘다고 했다. 그야말로 비수기 중 비수기인 셈이다. 그래도 비수기라고 해서 역이 완전히 멈추는 것은 아니다. 이날도 화물 플랫폼에서 트럭 한 대와 지게차 한 대가 비료를 나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여객 승강장으로 나가려면 일단 좌우를 살펴야 한다. 육교도 지하도도 없이, 열차가 지나는 철길을 그대로 건너가야 하기 때문이다. 좌우를 살피다 보면 왼쪽에 서 있는 주목 두 그루가 눈에 띈다. 아는 사람은 아는, 관촌역의 명물이다. 가을이면 붉은 열매가 맺히는데, 주민들이 이 열매를 종종 따먹기도 했단다. 임남례 씨도 그랬다고. 아마 나무가 나보다 늙었지? 빨간 열매가 열리는데, 따먹어도 암시랑 안 혀. 그래도 씨앗 부분에는 독성이 있다고 하니, 아무렇게나 먹어서는 안 되겠다. 플랫폼은 휑했다. 역명판도 없고, 타는 곳 알림 표지도 없다. 과거 여객열차가 설 적에는 플랫폼에 버스정류장처럼 생긴 시설이 있었는데, 이것도 어느 틈에 사라져버렸다. 그나마 붉은 플랫폼 가운데 하얗게 흔적이 남아 있을 뿐이다. 화물열차와 KTX가 무심히 지나가고, 하늘에서는 빗방울이 하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람이 황급히 우산을 받쳐 들자마자 ITX-새마을 열차 한 편성이 비를 뚫고 남쪽으로 달렸다. 권혁일 기자 △내일러 중간 기착지 임실 한 무리의 승객들이 플랫폼을 걸어 나오고 있었다. 친구가족과 함께 여행길에 오른 대학생 내일러 김희엽 씨도 그 무리 속에 있었다. 오늘이 내일로 2일차예요. 임실역에는 치즈테마파크 때문에 들렀어요. 체험활동을 예약해 놨거든요. 임실 다음엔 여수로 갈 계획입니다. 이날, 이렇게 유난히 청년으로 보이는 이들이 많이 보였다. 역 광장으로 나오는 이들을 맞이하는 것은 택시들이다. 베이지 톤의, 동글동글한 인상을 주는 역사(驛舍) 앞의 광장에는 승객을 기다리는 택시들이 있었다. 어디들 가시려구요? 승객을 기다리던 한 택시기사가 친근하게 말을 건네 왔다. 그에 따르면, 다른 지역에서 관광을 위해 기차를 타고 임실역을 찾은 이들은 대부분 택시를 타고 전북119안전체험관, 치즈테마파크 이 두 곳을 목적지로 부른다고. 그렇다면 치즈마을은? 역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어 주로 걸어가는 이들이 많단다. 치즈마을과 치즈테마파크는 서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긴 하지만, 임실역을 기점으로 잡으면 이렇게 가는 방법이 달라진다. 물론 치즈마을을 거쳐 테마파크까지 걸어갈 수도 있다. 임실역에서 치즈마을까지는 성인 걸음으로 20여 분 남짓. 역을 뒤로하고 이정표를 따라 걷다 보면 철로 밑으로 굴다리가 나타난다. 그곳을 통과해 임실치즈마을, 어서오세요라고 쓰인 알록달록한 팻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도로변을 따라 한 줄로 서서 발걸음을 재촉하다 보면 금성교라는 이름의 다리를 만나게 된다. 다리를 장식하고 있는 샛노란 치즈 모형에 잠시 시선을 뺏긴다. 태양은 머리 위에서 이글이글 맹공격을 퍼붓고, 사람은 익어간다. 하지만 다리를 건너면, 이제 거의 다 온 셈이다.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느티나무 그늘이 환영 인사를 건네 온다. 안쪽으로 좀 더 들어가면 큰 정자를 만나게 되는데, 이 앞에 마을 구조를 가늠해볼 수 있는 안내판이 있다. 그 뒤로는 금성천(방염천)의 시원한 물줄기가 마을의 중심에서 여름 한 자락을 수놓고 있다. 치즈교라는 앙증맞은 이름의 짤막한 다리도 있다. 임실 치즈가 유명 브랜드로 자리 잡고 치즈마을이 남녀노소가 사랑하는 관광지가 되기까지엔 벨기에에서 온 디디에 세스테벤스 신부의 노력이 컸다. 지정환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더 알려진 그가 1966년 임실에서 산양 두 마리를 키우면서 임실 치즈의 역사는 시작됐다. 연평균 기온, 강수량 등 기후조건과 자연환경이 젖소를 사육하는데 알맞아 목장과 유제품 공장 등이 속속 자리를 잡았다. 치즈마을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임실치즈테마파크가 나온다. 치즈테마파크는 치즈판매장, 치즈&식품연구소, 레스토랑, 치즈숙성실, 유가공공장, 홍보관 등으로 이뤄져 있다. 치즈 판매장을 지나 계단을 올라가면 유럽의 성과 닮은 건물이 떡하니 자태를 드러낸다. 동화 속 나라에 온 듯한 기분도 내본다. 물이 뿜어져 나오는 분수 앞에서는 한 아이가 양팔을 휘젓고 있고, 부모로 보이는 이들이 그 광경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치즈마을과 치즈테마파크는 20대 여행객들 사이에서도 단연 '핫플레이스'로 꼽힌다. 포털 사이트에서 '임실 여행'을 검색하면 치즈마을과 치즈테마파크에 다녀온 이야기가 넘쳐난다. 정종인 임실역 부역장은 기차에서 내린 내일로 여행객들은 주로 치즈마을이나 치즈테마파크로 가는 길을 물어오곤 한다고 말했다. 점차 활성화돼가는 임실역에 자부심을 느낀다는 그는 육군 35사단이 전주에서 임실로 이전하면서 군인들도 많이 보게 됐다고 덧붙였다. 역과 부대 사이를 오가는 셔틀버스도 운영된다고. 지난해 6~8월 기준 임실역 이용객 수는 월평균 6315명. 지난 한 해 이용객이 월평균 6099명이었으니, 여름철, 그러니까 내일로 시즌의 이용객이 많은 편이다. 다만 아직 활성화의 효과는 본격적이지는 않은 모양이다. 역 앞 슈퍼마켓에서 만난 주민은 활성화에 대해선 다소 부정적인 답을 내놨다. 글쎄요. 옛날보다 사람이 늘진 않은 것 같은데. 시간과 투자가 좀 더 필요한 걸까? 지난 2015년 임실역을 이용한 이는 모두 7만3627명이었다. 7월 25일 낮 12시 20분, 임실역. 상하행 플랫폼에 딱 하나씩 있는 벤치와, 그 벤치 위로 드리운 푸른 지붕, 그 뒤로 보이는 푸른 들판과 더 뒤쪽의 능선이 만드는 풍경이 자못 목가적이었다. 고요를 깨고, 남쪽에서 무궁화호 열차 한 편성이 달려와 그 풍경에 자기 몸을 보탰다. 익산으로 향하는 이 무궁화호에서 내린 이는 단 두 명. 15개월 된 아이와 함께 내린 공성원 씨는, 휴가를 맞아 친구가 사는 집에 찾아왔다고 말했다. 아이 장난감이 잔뜩 담긴 가방은 하늘에 떠 있는 커다란 뭉게구름처럼 가볍고 평화로워 보였다. 공 씨 일행이 떠나고, 열차도 떠나고, 임실역은 낮잠에 빠져들었다. 김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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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8.12 23:02

가회민화박물관 윤열수 관장 "민화는 한국인 심성에서 태어나 서민정서와 흐름 같이 해"

조선시대 그림을 가장 잘 이해한 미술사학자로 평가받는 고 오주석씨는 생전의 강연을 통해 우리 옛 그림 안에는 우리가 지금 이 땅에 사는 이유, 그리고 우리인 까닭이 들어있는데, 우리는 여전히 내가 사랑하는 우리 그림 하나 대기가 힘들다고 말하곤 했었다. 옛 그림이 지닌 아름다움과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환경을 안타까워한 말일 터다. 그가 펴낸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역시 그림은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통해 그 속의 작가와 대화를 하는 것이 진정한 그림읽기라는 것을 일러주지만 언감생심, 오늘날의 교육으로는 미술, 특히 우리의 미술을 제대로 만나고 이해할 수 있기란 여전히 요원하다.이런 환경 속에서도 급격히 불고 있는 바람이 있다. 옛 그림, 특히 민화에 대한 관심이다. 정통회화와 배치되는 민화는 생활공간이나 민속적인 관습에 따라 제작된 실용화를 이른다. 조선 후기 서민층에서 유행하여 발전한 민화는 대부분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한 이름 없는 화가나 떠돌이 화가들에 의해 그려졌지만 민중들의 일상 속에서 활용된 특성으로 한국적인 정서가 짙게 배어 있다. 민중의 심성을 가장 쉽고 솔직하게 표현했지만 정통회화에 비해 완성도나 격조가 떨어진다 하여 한국미술사 연구의 본류에서조차 소외되어 왔던 민화가 21세기를 지나면서 다시 각광받게 된 상황은 흥미롭다.가회민화박물관 윤열수 관장(70)을 만났다. 남원이 고향인 윤 관장은 오랫동안 한국미술사에서조차 소외되어왔던 민화를 주목해 그 가치와 의미를 널리 알려온 민화전문가다. 1970년대 초, 민화 전문 박물관인 에밀레박물관 학예사로 들어가면서 민화연구를 시작한 그는 40여년 세월을 온전히 민화의 밭에서 보냈다.제 1세대 민화전문가로 꼽히는 조자용 선생으로부터 지식뿐 아니라 옛것과 대화하는 즐거움과 의미를 배웠다는 그는 민화야말로 가장 한국적인 민족화라고 단언한다.민화는 한국인의 심성 속에서 태어난 그림입니다. 서민들의 생활정서와 흐름을 같이하지요. 그런 점에서 근래 들어 민화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높아진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에요.-박물관 찾기가 어렵더군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화전문박물관이 이렇게 낡은 건물 비좁은 지하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당황스러웠습니다.부끄럽습니다. 사실 말이 안 되는 상황이죠. 공간의 크기가 중요한 것은 아지만 시설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지하에 전시실이 있으니 여러 가지로 문제가 있습니다.-오랫동안 가회동 한옥에 자리하고 있지 않았습니까.2002년에 그곳에서 문을 열었어요. 저기 위쪽으로 한옥 지붕이 보이지요? 저곳이 민화박물관이었습니다. 서울시가 북촌의 가회동 일대 작은 한옥을 구입해서 작은 박물관을 만들겠다 해서 들어갔는데 이후 조례가 만들어지고 사용할 수 있는 기한이 정해지면서 우여곡절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쫓겨 나온 셈인데 좋게 말하자면 양보하고 나왔다고 할 수 있어요.(웃음) 2014년의 일입니다.-작은 박물관의 전형으로 소개되면서 해외 문화전문가들의 관심이 집중되기도 했었는데요.2004년 세계의 무형유산전문가들이 모이는 세계박물관대회가 서울에서 열렸는데 그때 우리 박물관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어요. 당시 한국을 방문한 전문가들이 유명한 박물관 말고 작은 박물관을 가보자고 했대요. 그래서 우리 박물관을 오게 되었는데 둘러보고는 바로 이것이라고 호감을 보였어요. 덕분에 해외 전시 의뢰가 이어졌지요. 돌아보면 그동안 세계 각국에서 초청을 받아 진행한 민화 전시가 아주 많았습니다. 내년 2월에도 모스크바 국립 동양박물관 초대전이 예정되어 있고 코스타리카 전시도 이어집니다.-그럼에도 현재의 박물관은 아무리 개인 박물관이라고는 하지만 비좁고 수장고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이곳을 찾아주시는 분들께는 참으로 죄송한 마음이죠. 더 중요한 문제는 자료 보관이 한계에 이르러 조만간 공간을 마련해야할 처지입니다. 당장 해결해야하는 절박한 과제이기도 합니다.-지금 당장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니겠군요. 개인박물관은 아무래도 운영이 어려우실 텐데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습니까.에밀레박물관이 첫 직장이었는데 박물관 운영에 경험이 있다 보니 삼성출판박물관과 인천 길병원 가천박물관을 만드는 일에 참여하게 되었어요. 그곳에 각각 몇 년씩 근무를 했었는데, 늘 내 박물관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 꿈을 실현한 것이죠.-한국 미술사에서 소외되어왔던 민화를 주목한 것은 언제부터일까요.사실 1960~70년대 지식인들은 민화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깊었습니다. 한국 미술의 정체성을 민화로 보는 분들이 많았죠. 한국적인 민중 서민문화는 영정조 시대, 18~19세기 들어서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은데, 민화 또한 그때 발전했습니다. 민족문화를 이야기할 때 민화를 빼놓을 수 없어요. 안타깝게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민화의 존재가 묻혀버렸지만 야나기 무네요시 같은 사람은 한국의 민화를 불가사의한 최고의 그림이라고까지 칭송했어요. 그만큼 의미나 가치가 컸다는 이야기지요. 후에 조자용 선생을 비롯한 지식인들이 한국문화의 원형을 찾자는데 의기투합을 하게 되는데 그 통로가 민화였어요. 사라져가던 민화를 그때부터 수집하기 시작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관장님은 언제부터 민화를 수집하셨습니까.1973년에 에밀레박물관에 들어갔지만 처음에는 민화를 알지 못했어요. 그럴만한 계기도 없었고 지식도 부족했죠. 민화는 조자용 선생님을 모시면서 자연스럽게 눈을 뜨게 되었어요. 선생님은 민화를 구해오시는 날이면 특별한 의식(?)을 치렀는데 막걸리통과 그림을 앞에 두고 밤새도록 대화를 나누셨어요. 민화 속에 그려진 새와 꽃, 나무와의 대화였지요. 처음에는 이해하기도 어려웠고 옆에서 빈 술잔을 채워드리는 것이 제 역할이었는데 지나고 보니 그 시간이 귀한 배움의 시간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민화의 세계에 자연스럽게 빠질 수 있었겠습니다.감사한 일이죠. 그러면서 수집에도 마음을 두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아현동에 골동품 가게까지 열고 민화를 모았습니다. 그때 그 가게가 민학회의 아지트였어요.-민화가 해외로 알려진 것도 그즈음부터인가요.해외전시를 이끌어낸 분이 바로 조자용 선생님인데 74년부터 미국에서 전시를 시작했고, 76년에는 미국 전역에서 순회 전시를 했었어요. 당시만 해도 한국 사람들에게는 민화가 엿장수그림으로 폄훼되었지만 외국에서는 한국문화를 읽을 수 있는 진정한 통로가 되었던 겁니다.-근래 들어 민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민화인구도 많이 늘었죠.제가 동국대 대학원에서 민화로 석사과정을 마치고 강의를 시작한 것이 81년이거든요. 50명쯤 석사과정을 마쳤는데 그중 30여명이 민화전공자들입니다. 본격적인 연구 작업이 활발해졌다는 증거지요. 민화 인구만도 15만 명에 이른다는 통계가 있습니다.-다른 전통문화유산과 비교할 때 민화의 가치는 어떻게 보십니까.한국문화의 정체성을 이야기할 때 도자기나 불상, 혹은 건축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민화는 설득력이 있어요. 가장 한국적인 정서를 온전히 담아내고 있는 것이 민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민화는 오랫동안 미술사에서 외면당해왔고, 학문 연구 대상으로서도 무시되어 왔어요. 지금은 외국에서 우리 민화를 연구해 학위를 받고 들어온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반가운 일이죠.-민화의 가치와 의미는 어떤 기준으로 평가해야 할까요. 예술적 완성도가 우선인지 생활 속에서 쓰인 실용화로서의 의미가 우선인지 궁금합니다.민화는 예술성으로도 생활예술로서도 뛰어난 회화입니다. 궁중작가와는 또 다른 예술성과 창의성이 있어요. 추상적인 민화를 보면 그 경계가 더 넓어집니다. 민화는 대부분이 일상에서 사용하기 위해 이름 없는 화가들이 그린 것들인데 그래서 그림의 내용이나 형식이 자유롭습니다. 어떤 경우는 표현의 파격이 놀랍습니다. 한국인의 심성과 한국인의 기층문화 정신이 가장 긴밀하게 담겨진 그림이랄 수 있지요.-민화도 지역에 따라 특성이 있습니까.민화는 이제 대부분이 발굴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은데, 이름 없는 작가들이 남긴 작품이 대부분이니 뚜렷하게 지역적 특성을 분류하기는 아직 어렵지만 지역에 따라 민화를 즐겼던 정도는 확실하게 차이가 납니다. 강원도나 제주도의 민화는 많이 나오거든요. 그런데 아쉽게도 전라도 민화는 별로 나오지 않습니다. 제 고향이 남원이어서 전라도 민화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는데 우선 수적으로 적으니 연구에 한계가 있습니다.-전주에도 대단한 민화작가가 있었다고 하던데요.민화는 대부분 정식 미술교육을 받지 못한 화가들이 그린 그림이었지만 계보와 유파는 분명히 있었을 겁니다. 민화는 그 경향이 더 강했을 수도 있어요. 전주 민화작가로는 장산파라는 사람이 알려져 있는데 그 솜씨가 빼어납니다. 전라도 천재라고 불릴 정도인데 제가 보기에는 민화의 천재라고 할 만큼 수준이 뛰어나요. 그런데 아쉽게도 그에 대한 기록이나 자료가 없습니다. 한때 연고가 있다고 전해지는 삼례 지역을 찾아다녔었는데 흔적을 얻지 못했어요. 연구자로서 꼭 찾아내고 싶은데 전라도 민화를 정리하는 일과 함께 제가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았습니다.2002년 서울의 북촌 가회동 한옥을 얻어 가회민화박물관을 열어 3년 전 지금의 북촌로 낡은 건물 지하로 이사해 간신히 전시실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지금까지 민화에 바쳐온 그의 시간은 곳곳에서 빛났다.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 민화의 족적을 따라 걷다보면 그 길목에서 어김없이 그를 만나게 될 뿐 아니라 발로 뛰며 발굴하고 수집해온 2000여 점 민화가 그 통로에 놓여있다.● 윤열수 관장은 40여년 민화 수집 외길윤열수 관장은 남원 아영면이 고향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수집에 취미가 있었다. 한 때 유행처럼 번졌던 우표수집이 시작이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우표집이 제법 두툼해질 정도로 모아졌는데, 2학년 때인가 우표집을 통째로 도둑 맞았다. 수집에 바친 열정만큼 허망함이 컸으니 더 이상 수집에 마음을 두지 않았을 법도 하지만 그는 사람들이 관심 갖지 않을 물건을 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부적 수집은 그렇게 시작됐다. 사람들이 미신으로 치부해 가치 있는 물건이라고 여기지 않은 덕분에 부적을 모으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단순한 취미로 시작했던 부적 수집은 그에게 우리 문화의 소중함과 가치에 눈을 뜨게 했다.대학(원광대 영문과)에 들어갔지만 1학년 때부터 학교 박물관에서 일하면서 전공보다는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전역한 그해 곧바로 민화를 전문으로 연구하고 전시하는 에밀레박물관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민화의 중요성을 깨달아 사라져가는 민화를 수집하고 연구해 그 의의를 널리 알리는데 앞장서온 조자용 선생과의 만남은 그의 삶을 바꾸어놓았다. 그 또한 민화의 가치와 소중함에 눈을 뜨게 되어 전통문화유산을 지키는 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게 된 것이다. 75년 동국대 대학원에 들어가 본격적인 민화 연구 활동을 시작했다. 에밀레박물관에서 만난 아내(최진옥 전 정신문화연구원 교수)는 인생 뿐 아니라 학문의 동반자가 되어 그가 민화를 수집하고 연구하는 고단한 일에 늘 큰 힘이 되어 주었다.민화 수집에 열정을 쏟았던 그는 전국 각 지역을 찾아다니는 일은 물론이고, 고물상까지 열어 민화를 모았다. 삼성출판박물관과 인천 길병원 가천박물관 설립에도 큰 역할을 했던 그는 2002년 서울 북촌 가회동의 작은 한옥을 얻어 가회민화박물관을 열었다. 2004년 최초의 민화 이론 전문교육기관인 가회민화아카데미를 설립해 민화 전공자들을 배출하기 시작했으며 전국어린이민화그리기대회와 같은 행사를 만들어 민화를 대중화하는 통로를 열었다. 〈문자도〉 〈무속화〉 〈산수화〉 등 박물관의 상설기획전은 물론 국내외 박물관의 초대를 받아 〈청계천으로 돌아온 물고기전〉 〈모란꽃 그림전〉 〈오방색 눈썰미, 호랑이도 꽃도 웃는 민화〉과 같은 흥미로운 주제전으로 관객들을 끌어들였다. 민화를 학술적으로 연구하는 일에도 열정을 쏟아 민화의 지역적 양식과 작가에 주목한 연구 성과로 민화 연구의 지평을 열었으며 〈민화이야기〉 〈민화〉 〈산신도〉 〈용, 불멸의 신화〉를 비롯해 20여권의 저서를 냈다.2006년부터 시작된 해외전시는 해마다 이어지면서 한국의 전통문화, 특히 민화를 세계에 널리 알리는 보고가 되었다. 2008년 창립한 한국민화학회 초대 회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월간 〈민화〉 초대 발행인으로 활동했다.가회민화박물관은 2014년 우여곡절 끝에 서울시 소유였던 가회동 한옥 공간을 떠나 북촌로의 오래된 건물 지하로 옮겨졌다. 제대로 된 수장고와 전시 공간을 갖춘 박물관을 마련하는 것이 그의 절박한 과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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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은정
  • 2017.08.11 23:02

[길 따라 맛 따라 ① 전주 한벽루 오모가리촌] 친구야, 오랜만에 얼큰한 쏘가리탕 뚝배기 어때?

오늘은 뭘 먹을까뭐 잘하는 집 알아?거기 맛집 하나 소개해줘?일상에서 먹는 즐거움만큼 큰 것도 없다. 살기 위해 먹던, 끼니를 채우던 시대는 옛말이다. 그러다보니 맛집에 대한 관심이 절로 높아졌다. 외식산업 또한 급성장 추세다. 음식점이 그만큼 많이 생기고 있다. 고객들의 입맛도 더 까다로워졌다. 맛집이 아니면 음식점 자체 생존이 어려울 만큼 가히 맛집 경쟁시대다.TV와 신문, SNS 등 각종 매체에 맛집 정보가 넘친다. 음식 관련 파워 블로거도 수두룩하다. 그러나 맛집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식성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식성은 잘 변하지 않는다. 젊은층과 중장년층, 노년층이 좋아하는 음식도 차이가 난다. 특별히 어떤 음식점을 맛집으로 추천하기 어려운 이유다.그럼에도 각 고장마다 널리 사랑을 받는 맛집은 있기 마련이다. 맛집은 그저 잘 빚은 음식의 맛에만 있지 않다. 주변의 풍경과 정취, 지역사회와의 밀접성, 맛을 내는 주인의 정성 등이 함께 할 때 더 빛이 난다. 본보는 맛집 골목을 중심으로 이런 맛집에 주목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맛집골목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그 골목과 함께 해온 맛집의 애환을 들여다보는 내용으로 꾸린다.전주 토박이들은 한벽루에 추억들을 차곡차곡 싸놓았다. 토박이 누구에게 물어보더라도 그 추억들을 술술 풀어낸다. 한벽루를 휘감고 나온 전주천에서 멱을 감고, 물고기를 잡았다는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자갈밭에 벗어놓은 옷이 없어져 시내 멀리 떨어진 집까지 팬티만 입고 가는 아이들이 허다했다. 물놀이 사고가 간간이 나던 시절이어서 부모님 걱정을 끼쳐드리지 않으려고 티나지 않게 고깃병을 숨겨놓았던 곳도 천변 자갈밭이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보를 쌓기 전까지 천변을 따라 자갈이 널따랗게 깔려 있었고, 그 자갈밭이 바로 베이스캠프로 활용됐다. 한벽루는 어둑해질 무렵 아주머니들이 빨래하고 목욕하는 곳이었다. 강태공들이 즐비하게 앉아 피리낚시에 열중하는 모습도 흔하게 볼 수 있었다.농촌 출신들에게 그리 새삼스럽거나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지만, 전주 토박이들이 곧잘 어린시절 추억으로 떠올리는 한벽루 풍경이다. 전주가 도시화의 물결을 타고 그만큼 많이 변했으며, 한벽루도 그 변화를 비켜서지 못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아주 오래 전 한벽루의 모습을 보여주는 신문 기사도 눈에 띈다. 전주의 한벽루는 역사적으로나 풍경으로나 전주의 명승지인 동시에 소공원인바 근래 제방 위에 우마를 매어둠으로 불결하기 짝이 없다. 이 한벽루는 봄철에는 사구라구경으로 전주에서 유일무이한 곳이고, 여름철에는 금년부터 풀이 되어서 찾는 이가 많을 뿐 아니라 저녁에 납양객 사오백명이 모여드는 곳으로 좀 더 정화를 요하는 곳이다.1938년 7월28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한벽루 정화의 필요성을 역설한 내용이지만, 당시에도 시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이 보다 10년 더 앞선 기사에서는 한벽루 뒤편에서 조석으로 들리는 남국사 쇠북소리를 좋다고 했으며, 하절기 조선 전체에서 가인재자가 모여들어 청풍을 즐기며 수영에 절호의 장소라고 적었다.△풍광과 정취,추억이 듬뿍 담긴 명소이런 유서 깊은 한벽루에서 어찌 맛집을 빼놓을 수 있으랴. 한벽루 바로 아래 자리잡은 오모가리촌은 한 때 전주를 대표하는 맛집 골목이었다. 지금이야 한옥마을 곳곳에 널린 게 맛집이다. 콩나물 국밥, 비빔밥, 갈빗집, 백반집, 칼국수집, 중국집 등 비교적 오래된 맛집에서부터 새로운 트랜디 레스토랑까지 한옥마을 전체가 먹을거리 천국이다. 그 와중에도 한벽루 오모가리촌이 한옥마을의 외진 뒷방에서 옛 멋과 정취를 지키고 있는 게 참 용하고 대견스럽기까지 하다.기실 맛집 기획 첫 번째로 전주 오모가리촌을 잡은 이유도 다른 데 있지 않다.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 음식업계에서 옛 맛과 멋을 간직하며 전주의 자존심을 꿋꿋이 지키는 곳이어서다. 전주시내 음식점 중에 번호표를 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맛집도 많고, 동종의 매운탕 음식점 중에도 오모가리촌 보다 쾌적하고 맛깔스러운 곳이 즐비한 데도 말이다.7~8년 만에 찾은 한벽루 밑 오모가리촌도 그 사이 많이 변하기는 했다. 가장 크게 변한 것이 음식점들 앞에 놓인 평상이 없어지고 그 자리를 전주시에서 만든 12칸짜리 방갈로가 차지했다. 깔끔해졌지만 정취는 예전만 못한 것 같다. 방갈로를 만들면서 치렁치렁 늘어졌던 버드나무가 사라진 것도 아쉬웠다. 한벽루 오모가리촌의 매력이 무엇보다 야외 풍광과 물소리를 벗삼을 수 있는 점인데, 인위적인 요소가 가미될 경우 아무래도 그 맛이 반감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오모가리촌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는 했지만, 음식점은 현재 3곳에 불과하다. 김제집과 버들집이 없어지면서 한벽집남양집화순집만 남았다. 한옥마을의 많은 원주민들이 외지 자본에 떠밀리는 상황에서 그나마 이들 3곳의 음식점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맛집으로서 전국적인 오랜 명성과 함께 음식점 주인소유의 집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이들 음식점의 맛과 메뉴, 가격은 비슷비슷하다. 옆에 두고 나란히 60~70년을 함께 해온 까닭이다. 음식점 단골이 아니라면 음식점 이름을 몰라 약속을 잡을 때 몇 번째 집에서 보자고 한다. 취재 대상으로 삼은 집은 한벽집과 남양집 사이에 있는 가운데 집이었다. 자문 겸 말 동무 삼아 전주 토박이인 선기현 전북예총 회장에게 두 번째 집에서 보자고 했다. 화순집이다.여름철 외부서 손님이 오면 꼭 이곳으로 모셨어요. 평상에 앉아 자연바람을 쐬며 쏘가리탕에 막걸리를 기울였던 추억을 떠올리는 친구들이 지금도 많습니다. 벗어놓은 신발에 지네가 들어가 지네에 물렸던 친구는 평생 이곳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선 회장은 전주 오모가리가 갑자기 유명해진 것이 아니라고 했다. 전주 한벽루 주변의 특성이 반영된 것이란다. 한벽루 밑 전주천 맑은 물에서 물고기가 많이 잡혔고, 이 물고기를 재료로 일반 가정에서도 즐겼단다. 여기서 잡은 붕어만 하더라도 조림으로, 말려서 탕으로, 회쳐서 일상으로 먹었다는 것이다.△ 60년 된 화순집, 정갈한 밑반찬에 정성 가득선 회장과 몇 마디 나누는 사이, 주문했던 쏘가리탕 한 상이 방갈로로 나왔다. 밑반찬이 정갈했다. 콩나물마늘종멸치볶음겉절이고추양파된장파김치깻잎시금치맨 간장과 김계란말이멸치속젓. 전주의 대부분 음식점에서 풍성한 밑반찬을 차리기 때문에 가짓수로는 그리 많다고 할 수 없지만, 하나하나 정성을 들였다는 게 한 눈으로도 알 수 있었다. 계란말이는 다른 재료를 넣지 않고 소금 하나로 소박하게 만들어 담백한 맛이다. 갈치속젓은 곰소에서 직접 구입해 맛깔스럽게 무친 것이며, 깻잎은 된장에 버무려 담은 후 간이 베었을 때 물에 씻고 양념을 해서 푹 찌는 방식으로 내놓는다. 된장에 담는 것은 간이 배게 하기 위함이란다.오모가리에 들어가는 주 메뉴인 민물로는 쏘가리, 빠가사리(동자개), 새우, 메기, 피라미가 있다. 진안 용담호 등에서 조달하는 물고기들이다. 주인 김종희씨(69)는 냉동고기를 쓰지 않고 산고기만 사용한다고 했다. 그러다보니 성질이 급한 쏘가리를 조달하는 데 어려움이 있단다. 싱싱한 물고기와 함께 시래기가 맛의 생명이라고 했다. 그래서 가을에 열무 시래기를 만드는 게 큰일의 하나란다. 아무리 바빠도 막 지은 고슬고슬한 검정 콩밥과 누룽지, 눌은밥을 합해 메뉴가 완성됐다. 오모가리는 오목한 그릇의 전라도 사투리로, 거기에 끓인 탕이 오모가리탕이다.한옥마을이 북적거리면서 오히려 손님이 줄었어요. 예전에는 저녁 12시까지도 손님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10시쯤이면 발길이 끊깁니다.의외다. 한옥마을에 관광객들이 몰리면 당연히 이곳 손님도 늘어날 텐데 그렇지 않다니. 한옥마을을 주로 많이 찾는 젊은층에게 오모가리탕은 큰 매력이 없나보다. 한옥마을 중심 부근에 많은 맛집들이 새로 생기고, 한옥마을이 북적이면서 차량 통행에 제한을 받는 것도 이유일 것으로 주인 김씨는 분석했다.욕심 부리고 싶지 않습니다. 서울에서 체인점을 내라는 분도 있지만, 오모가리탕이 먹고 싶으면 전주로 와서 잡수라고 합니다. 주인 김씨의 오모가리탕에 대한 자존심을 그대로 보여주는 말이다. 지상파 방송에도 여러 번 출연해서 맛집으로 널리 소개됐고, 지금도 방송 출연 제의가 간간이 오지만 사절한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2년 대선 후보시절 찾았고, 방송인 송해씨 등 유명 인사들이 찾았지만 사진 한장 걸어놓지 않았다. 진짜 맛있게 먹었다는 손님 한마디로 족하단다.△한벽당 284-2736, 화순집 284-6630, 남양집 284-1912,△음식가격(대 4인 기준) 쏘가리탕 100,000원, 빠가탕 55,000원, 새우탕 45,000원, 메기탕 45,000원, 피라미탕 45,000원

  • 기획
  • 김원용
  • 2017.08.11 23:02

[노인 일자리 공익형 사업] 취약 노인층 소득보전·사회참여…건강하고 활기찬 노후 보장

일자리사업에 나가기 전에는 건강도 안 좋고 힘들었는데 일을 하게 되니까 몸도 좋아지고 사람들하고 함께 있으니 마음이 편하죠. 자식들한테 용돈 달라고 손 벌리지 않아서 좋고올 3월부터 전주천변 하천정화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A어르신(75)은 3년째 노인일자리사업에 나가고 있다. 일주일에 23번 아침 일찍 전주 한옥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전주천변에 나가, 폐지를 줍고 쓰레기 치우는 일을 한다. 이 일을 하기 전에는 집에 틀어박혀 살다보니 무료하고 건강도 좋지 않았다.△ 2004년 시작, 올해 33만7000명에 일자리 줘우리나라의 노인 빈곤율은 49.6%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단연 1위다. 평균이 12.4%로 4배에 이르며, 자살률도 제일 높다. 또한 노인들이 일에서 손을 놓는 나이가 73세로, 세계에서 가장 늦게까지 일을 하고 있다. 원인은 자녀들의 뒷바라지와 연금체계의 미흡 등으로 노후준비가 안되어 있기 때문이다. 상당수 노인들이 생계를 위해 일자리가 필요하다는 얘기다.하지만 노인이 되어 일자리를 찾기란 쉽지 않다. 청년과 중장년 등 젊은 사람들도 일자리가 없어 놀고 있는 판이어서 더욱 그렇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차원에서 내놓은 방안이 노인일자리사업이다. 노인일자리의 대표선수인 이 사업은 노동시장에서 소외된 65세 이상의 노인계층을 위해 소득창출 및 사회참여 기회를 제공하고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성취감 고취 및 건강하고 활기찬 노후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말하자면 취약 노인층의 소득보전과 사회참여가 양대 목표라 할 수 있다.노무현 정부시절인 2004년 시작된 이 사업은 전국적으로 3만5000개에서 2017년 현재 33만7052개(추경 포함)에 이르고 있다. 투입된 예산은 292억원에서 5232억원으로 대폭 증가했다. 14년 사이에 일자리는 9.6배, 예산은 17.9배가 늘어난 셈이다. 애초 이 사업은 공공참여형, 공익강사형, 인력파견형, 시장참여형으로 구분돼 출발했으며 공공참여형과 공익강사형의 경우 6개월간 20만원을 지급했다. 그 이후 공공분야와 민간분야로 나눠졌으며 사업의 성격에 따라 유형이 분리추가되는 등의 변천을 겪었다.△ 70대가 주축, 여성이 남성의 두 배현재 공익활동의 경우 보통 9개월(전국형은 12개월) 동안 하며 65세 이상 기초연금수급자가 대상이다. 하루 3시간씩 일주일에 23회, 한 달 30시간을 일하면 8월부터 활동비로 월 27만원이 지급된다. 활동비가 지난해까지 20만원이었다가 올 들어 22만원으로 올랐고, 새 정부 들어 추경에 인상분을 반영해 27만원을 지급하게 된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는 2020년까지 40만원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전북지역 공익형 일자리는 2만6232개(추경 6200개 포함)로 전국의 7.8%를 차지한다. 이는 인구 비례보다 높아 도내 노인의 생활이 열악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수행기관은 기초자치단체를 비롯해 노인복지관, 대한노인회, 시니어클럽, 노인복지센터 등 전국적으로 1200여개에 이른다.한국노인인력개발원에 따르면 참여자 성별(2014년)은 여성이 66.3%, 남성이 33.7%로 여성이 2배가 많다. 또 연령은 70대가 66.9%(7074세 35.4%, 7579세 31.5%)로 주류를 이루며 6569세 16.7%, 80세 이상 13.2%로 조사되었다. 이러한 연령 분포는 2007년에 6569세 33.4%, 7579세 16.8%, 80세 이상 5.2%에 비해 급격히 고령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공익활동의 유형은 노노케어, 취약계층 지원, 공공시설 봉사, 경륜전수 활동 등 4개 유형으로 나뉜다. 전주시내에서 노인일자리사업을 가장 많이 하는 대한노인회 전주시지회의 경우 꽃밭 가꾸기, 노노케어, 경로당 위생 및 안전봉사, 게이트볼 지원, 한궁 지원, 그라운드골프 지원, 지역아동센터 연계, 시내버스승강장 관리, 공원관리 등을 하고 있다.△ 소득 보전과 건강 vs 임금 살포노인일자리사업은 긍정적 효과와 함께 한계점도 드러나고 있다. 긍정적 효과는 취약계층 노인들에게 소득보전과 더불어 건강과 우울감 해소에 도움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만족도가 비교적 높은 편이다. 반면 가야할 길도 멀다. 봉사인지 근로인지 어정쩡하고, 세금으로 임금을 살포한다는 비판이 없지 않다.서울대 산학협력단의 노인일자리 및 사회활동 성과평가 연구(2016.11)에 따르면 참여대상을 기초노령연금 수급자로 한정함으로써 참여인력과 수요처 사이의 괴리가 크고 참여노인의 고령화와 성과지표 구성의 단순화를 한계로 꼽았다. 이와 함께 지방정부의 역할 강화, 연중 실시, 전달체계, 전담인력의 정규직화 등도 개선할 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전담인력 처우 형편없어 정규직화 시급- 저임금고용불안 스트레스 / 연속성전문성 기대 어려워노인일자리사업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주체는 전담인력이다. 이들은 접수에서부터 대상 선정, 교육, 현장관리, 활동비 지급에 이르기까지 전 분야를 맡고 있다.하지만 이들의 신분은 11개월 계약직이다. 기간제 비정규직으로 최저임금을 받는다. 올해는 월 135만3000원(국비 50%, 도비 20%, 시군비 30%)으로 퇴직금도 없다.올해 공익형 전담인력은 전국적으로 2729명이며 전북은 199명이 배정되었다. 보건복지부 지침에 따라 2013~2015년에는 136명당 전담인력 1명이었고, 2016년에 150명당, 2017년에 154명당 1명이다. 이들은 수행기관에서 일자리 뿐 아니라 다른 일도 함께 하는 경우가 많다. 또 낮은 임금과 고용 불안에 따른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따라서 연속성과 전문성을 기대하기 어렵다.4년째 전담인력으로 일하고 있는 B씨(48)는 솔직히 이 월급을 받고 일하는데 적극적으로 일을 찾아서 하겠어요? 대충 이 일을 하다가 좀 더 나은 곳이 있으면 다른 데로 가려고 기회를 보는 경우가 많죠라고 털어 놓았다. B씨는 애로사항으로 두 가지를 들었다. 하나는 지난해부터 수행기관들이 통합모집을 하는 바람에 나중에 혼선이 오는 일이다. 또 하나는 나이가 너무 많거나 장애가 있어 활동을 거의 할 수 없는데도 배점이 높아 선발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노인일자리사업에 참여하는 노인들의 안정적인 돌봄과 사업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 전담인력의 정규직화가 시급하다. /조상진 전주시노인취업지원센터장/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기획
  • 백세종
  • 2017.08.10 23:02

[백두대간 품은 장수가야 철을 밝히다] 첨단 신소재 기술 갖고도 연맹 상생 추구한 '철의 왕국' 기지개

이 글의 주제는 장수군 가야문화유산 유네스코(UNESCO) 세계유산등재추진을 위한 학술심포지엄 기념 도록의 제목에서 따왔다. 제목이 멋지다. 백두대간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넓어지는 듯하고 민족의식이 불끈거리며 올라오는 것 같다. 그런 백두대간을 품은 장수가야가 철을 밝히다니 왠지 사라진 철의 제국이 다시 살아나 거대한 모습을 드러내며 옛이야기를 시작할 것 같다. 그리고 그 옛이야기 속에서 오래된 미래를 꿈꿔 볼 수 있을 것 같다.최근에 문재인 대통령은 가야사 연구와 복원에 대해 국정과제 필요성을 강조했다. 문화재청은 2015년 3월 가야 고분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 우선 등재추진대상으로 선정했고, 2019년 최종 등재 신청을 준비 중이다. 그 중심에 장수가야와 남원 운봉가야가 크게 부각되고 있다. 군산대학교 박물관장인 곽장근 교수가 청년 시절부터 30여 년간 젊음을 바쳐 연구해 온 결과로 가야가 전북 동북지역까지 아우르는 영역으로 삼국 못지않게 넓었음을 증명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백두대간은 백두산 병사봉에서 지리산 천왕봉에 이르는 1,470㎞의 산줄기를 이르는 말이다.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한반도의 모든 물줄기가 서류와 동류로 갈라진다.(네이버사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산맥은 분리해서 각각 이름을 붙였다. 그러한 방식은 일제강점기 일본학자에 의해서 명명된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신경준의 산경표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백두대간을 뼈대로 강이 실핏줄처럼 동서로 흘러온 땅을 적시며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는 유기체와 같다고 보았다. 백두대간을 품은 철의 왕국 장수가야라는 말에 이끌려 필자는 고대왕국을 탐험하러 가는 것처럼 현장인터뷰를 떠났다.2017년 7월 28일 장수에 가서 보니 장수의 기상이 장수 같다. 전주문화유산연구소 전상학 책임연구원을 장수면사무소 앞에서 만났다. 한낮인 2시에 만나 두 시간 동안 장수군과 장계면 일대를 차량으로 돌면서 장수가야의 지정학적 위치 구조, 역사성과 연구 과정과 발굴의 의미에 대해서 묻고 답하는 답사를 했다.예부터 전라도와 경상도를 이어주는 육십령 고갯길을 따라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계지점인 터널에 도착했다. 터널 건너편 출구에 초록산 풍경이 보인다. 경상도 땅이란다. 팔각정에 올랐다. 장수군 전체가 한눈에 보인다. 겹겹이 멀어지며 펼쳐지는 백두대간의 장대한 산세는 외적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한 요새 역할을 충분히 해 온 남성성을 간직하고 있다. 그사이 나지막한 분지는 먹거리와 생명을 품은 아늑한 여성성을 갖추고 펼쳐져 있다. 장수분지와 장계분지를 아우르며 백두대간을 품고 있는 장수는 역사 속에서 호남을 지키는 호위무사 즉 남성성과 여성성을 갖춘 무사 역할을 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필자는 육십령고개의 역할도 궁금했다. 질문에 대해 전상학 연구원는 친절하게도 응답해 주었다. 백두대간을 가로지르는 육십령고개는 전라도와 경상도를 이어주는 길목이다. 문화와 경제적 교류를 위해서 이 고개를 넘어가야만 했다. 육십령고개는 산세가 깊어 60명이 모여야 넘어갈 수 있다 해서 또는 육십리 라서 붙여진 이름이다고 했다.무엇보다도 역사책에서 배운 6가야에 대한 것 외에 장수가야를 증명할 수 있는 근거를 현장에서 알아보고 싶었다.연구원은 장수군 가야문화유산의 분포도를 보면 제철유적과 산성, 봉수, 고분군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멀리 보이는 남덕유산과 합미봉 그리고 봉화산에 모두 철광석이 가득하다. 장수군 내에만 60개의 제철유적이 발견되었다. 남원 운봉고원 제철유적지도 31곳이나 된다. 경상도에 있는 대가야와 고령가야에서는 제철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전라도 장수와 남원운봉지역에 엄청난 제철유적이 남아있다. 또한 장수가야가 요충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봉수대가 21군데가 있으며 백두대간 자체가 천연의 요새가 되기도 하지만 길목을 막기 위한 산성이 11군데나 된다고 말했다.그리고 장수군 내에는 지름이 20~30m 되는 고총이 240기나 있다. 고총 발견 시 말발굽 즉 편자와 말뼈가 나왔다. 이는 왕급에 해당하는 지배자의 무덤임을 알 수 있다고 했다.이동 중에 곳곳에서 커다란 봉우리들을 보며 고총이라고 한다. 난평 동네에 이르니 마을 입구에 300여 년이 된 고목이 서 있고 하늘을 찌를 듯한 적송들이 줄지어 있다. 그 너머로 보이는 동산 같은 것이 알봉이란다. 지름이 70m나 되는 무덤이다. 조상 대대로 신성시 여기며 지켜왔는데 촬영을 해 보니 고무덤임이 밝혀졌단다. 경주고분군에 있는 황남대총에 버금가는 크기다. 전율이 느껴졌다. 장수가야의 수많은 유적으로서 고분들이 땅속에 묻혀 사라질 위기에서 이제야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승자의 기록에 패자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역사책에는 단지 6가야만 남아있다. 6가야의 명칭은 후대에 만든 명칭이다.그러나 중국과 일본의 사서에는 가야와 관련된 국가가 20여 개가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그 중에서 장수군 번암면으로부터 계북면까지 40㎞ 지역이 남원시 운봉고원과 함께 가야의 유물과 유적이 발견됨으로 인해 가야시대에 강력한 독립적인 정치체가 존재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이렇게 발전했던 지역이지만 중심지가 옮겨지면서 변방이 되고 역사 주체가 바뀌면서 잊혀진 존재가 된 것이다.그런데 왜 문재인 대통령은 가야사 연구를 중요시 여기는가 궁금했다.물론 그 전에 김종필 총재나 김대중 대통령도 금관가야를 세운 김수로의 후손이라고 해서 가야 연구에 관심을 많이 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에는 호남과 영남의 화합과 상생 관계를 회복하려는데 역점을 둔 것 같다. 백두대간을 사이에 두고 나뉜 신라와 백제는 영호남으로 이어져 지역색의 차이로 갈등의 소지를 늘 안고 있다. 그러나 가야는 백두대간을 사이에 두고 사이좋은 한 나라였음을 기억하면 상생과 조화를 위한 근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모든 생물이 그렇듯이 그 생애가 짧고 길고의 문제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얼마나 의미 있는 삶을 살았느냐에 달려있다.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 역사에서 4국이 되지 못하고 사라졌지만 562년의 긴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가야의 의미는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서로를 침범하지 않았던 부분 때문에 외침으로 쉽게 망하기도 했지만, 연맹체의 상생은 배울 부분이다. 또한 그 당시 철을 다루는 기술이란 첨단 신소재 기술에 해당한다. 최첨단의 기술로 무장하고 화합의 국가경영을 했던 철의 왕국이 역사의 기지개를 켜고 있다.다시 말해 장수가야는 백두대간의 민족정기를 품은 동서화합을 위한 노둣돌이 될 미래의 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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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8.09 23:02

[김병종 미술관 개관 앞둔 김병종 교수]"고향 남원은 역사·문화 저력 있는 곳"

6여년전 남원시가 세운 함파우 아트벨리 개발계획의 일환으로 건립하는 시립 김병종 미술관 공사가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 남원시가 국내외적으로 지명도가 높은 김병종 교수의 작품을 기증받아 지은 이 미술관은 남원의 브랜드가치를 높여주는 고품격 문화 인프라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미술관은 김 교수가 그 간 몇몇 자치단체의 권유를 마다하고 고향 남원시의 요청에 따라 평생토록 제작한 작품과 문헌들을 대량 기증하기로 결정하는 과정에서 잔잔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최근 공사 현장을 둘러보기 위해 내려온 김 교수를 만나 미술관의 의미와 운영 방향 등을 들어봤다.-미술관 얘기 나온 지가 십여년인데 이제야 개관을 앞두고 있다.이미 십수년전 내가 미술작품과 한 연재물을 중앙일간지에 기고하고 있을 때부터 내 의사와 관계없이 미술품 기증이며 미술관 얘기가 나왔지만 그때마다 정중히 고사했다. 남원뿐이 아니었다. 한 지자체에서는 나와 지역적 연고를 맺기 위해 명예군민으로까지 위촉하며 이 일을 추진하기도 했지만 역시 고사했다. 예수 관련 연작들을 모두 기증받아 내 이름의 기독교 관련 미술관을 세우고 싶어하는 곳도 있었다. 그러다 함파우 문화예술단지 개발과 함께 다시 남원시로부터 요청이 있었고 평생 제작한 작품과 자료를 대량 기증하기로 하고 양해각서를 체결한 것이 2014년 초이다.-작은 건물인데도 공사기간이 무려 4년 가까이나 됐다.전체 건물면적 1442㎡ 규모며 전시실과 수장고, 북카페 등을 갖췄다. 워낙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골짜기에서 그 지형 조건을 살리면서 짓기가 쉽지 않았다. 고향에 백년대계의 건축물이 하나 지어졌으면 싶었다.-왜 그렇게 건축에 공을 들인 것인가. 건축보다 빨리 전시를 보여주는 게 더 중요한 것 아닌가.빨리 세우는 게 능사가 아니다. 한 도시의 세련미는 건축이 좌우한다. 건축이 아름답고 세련되지 않으면 다시 찾게 되지 않는 법이다. 일본만해도 1만개를 훌쩍 넘는 미술관이 있고 그중에는 골짜기나 해변에 정말 다시 가보고 싶은 미술관들이 많다. 요즘 떠오르고 있는 베를린은 무려 백개가 넘는 미술관, 박물관이 있다.-국내 사정은 어떤가.국내도 이제 활발해지고 있다. 인구 4만명의 영월에는 미술관과 박물관이 30여개에 이른다. 남원은 역사와 문화, 예술의 저력으로 치자면 손꼽히는 곳이다. 앞으로 적어도 10여개 이상의 문화예술 공간이 더 지어져야 한다고 본다. 현대미술관이나 뮤지컬 등을 할 수 있는 현대 예술극장 혹은 구비 문학관, 현대 문학관, 판소리 박물관 등등의 공간이 생겨서 국내뿐 아니라 외국 관람객까지 끌여들여야 한다고 본다.-새로 지어진 미술관이 의외로 그림을 걸 공간이 많지 않은 것 같다.워낙 규모가 작기도 하지만 오늘날의 트렌드는 미술관 벽마다 그림을 빼곡히 거는 것이 아니라 복합문화공간적 성격으로 간다. 이 미술관 역시 음악회나 퍼포먼스, 시 낭송회 등 시민들의 예술활동과 도서관 기능까지 하는 것을 염두에 뒀다.-미술관 내에 이례적으로 북카페를 두었는데.일종의 자료관이다. 내가 평생 모은 문헌자료들과 국내 저명출판사들의 협조로 채워질 것이다. 미술관이라 해서 미술작품 몇 개만 보고 휙 나가버려서는 안된다.-남원시에 기증하는 작품 수만도 무려 400여점이 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떤 규모이며 어떤 작품들인가.처음 시에서 요청한 것은 미술관 허가에 필요한 백여점이었는데 여기까지 오게됐다. 기증작에는 바보예수, 어린 성자, 숲에서, 생명의 노래, 화첩기행 등 10여년 단위로 변해오며 국내외에 선보였던 대표적 작품들이 망라돼 있다. 크기는 1000호의 대작부터 소품까지 다양하다. 2015년 중국 최대의 현대미술관인 금일미술관 초대전에 나왔던 거의 모든 작품이 내려가게 될 것 같다. 액면가만도 엄청난, 이 정도 양을 완전 무상 기증으로 내려보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하지만 남원시에서는 실무라고는 현재 학예사 한 명밖에 없다. 열악한 상황인데 향후 운영에 어려움이 있지 않겠는가.아무래도 우선은 후원회에 많이 기대야 할 것 같다. 다행히 학계와 재계 등에 있는 지인들이 벌써부터 자발적으로 후원회 가입을 희망해왔다.-전시는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시에서는 관광객 유치 차원에서 눈꼽만한 내 브랜드 효과를 사용하려는 것 같지만, 실제 전시 상황은 전혀 내 이름과 관계없는 것들이다. 심수관과 남원도예, 남원 목칠과 현대 목칠 작가전, 춘향과 사랑의 테마전, 남원부채와 선비문화전, 한중 , 한일 미술 교류전, 남원미술인전 등 몇 년치가 기획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어쨌거나 서울은 물론 장차는 타지역에서 많이 구경오는 전시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김병종 교수는 세계가 인정한 한국 대표 작가 '화첩기행' 등 20여 권 저서도김병종 교수는 남원 출신으로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미국, 프랑스, 독일 등지서 30여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대영박물관, 온타리오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고, EC를 비롯 세계 10여개 재외공관에 한국대표작가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작품들이 설치돼 있다. 중국 최대의 현대미술관인 금일미술관과 독일의 구마르드니미술관, 헝가리 기욜미술관, 프랑스 몽뜨니갤러리와 가나 보브르갤러리, 전북도립미술관 등에서 대규모의 초대 혹은 기획전을 열었다.시진핑 주석의 국빈 방문 때 김 교수의 작품이 선물로 증정돼 화제가 되기도 했고 금일미술관 전시 때는 신화사 통신 등 20여개 언론사와 인터뷰를 가졌으며 한달 가까이 중국 TV에 소개되기도 했다.노무현 대통령 시절에는 새로 꾸민 국가영빈관을 모두 김교수의 대작 〈생명의 노래〉로 채우기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휴가 때에 열독했다고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던 베스트샐러 화첩기행(전 6권)을 비롯해 20여권의 저서를 내기도 했다.미술기자상, 선미술상, 대힌민국 기독문화대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대한민국 문화훈장 등을 받았고 1999년에 전북이 배출한 걸출한 인물에게 주는 전북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또한 고향 사랑 또한 특별해 오래 전 남원의료원이 미술품 장식 문제로 준공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1억원 상당의 미술품을 쾌척했는가 하면 모교인 용성중학교의 성적 우수 학생들의 유럽연수를 후원하는 등 지난 30여년간 다양한 형태로 고향 남원 발전에 기여해 왔다.서울대 미술관장과 미술대 학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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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기철
  • 2017.08.07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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