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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 '아리랑' 속 배경을 찾아서] 김제~삼례~군산 이어지는 일제 수탈의 역사와 마주보다

초록빛 싱그러움을 뒤덮으려 들판에는 갯내음 짙은 바람이 불고 있었다. 거칠게 휘도는 바람을 앞세우고 탁한 회색빛 구름이 바다 쪽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시커먼 먹구름은 하늘을 금방금방 삼켰다. 그리고 그 두껍고 칙칙한 구름덩어리들은 서로 얽히고 설켜 꿈틀대고 뒤척이며 뭉클뭉클 커져가고 있었다.〈아리랑〉 1권 중에 나오는 구절이다. 여기서 들판을 징게 맹갱 외에밋들이라 불렀다. 이는 김제, 만경의 너른 들이라는 뜻이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의 공간적 무대가 된다. 갯내음 섞인 바람은 서해로부터 불어오고 신작로와 군산선은 그 들판을 가로지르며 군산항으로 내달린다. 징게 맹갱 외에밋들에서 나오는 나락들은 실어 나르기 좋은 두 개의 길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첫 번째 수탈의 대상이 됐다.그 수탈지였던 곳을 배경으로 조정래는 대하소설 〈아리랑〉을 집필했다. 소설 속에서 뿐만 아니라 현지에도 수탈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소설 숨결이 깃든 아리랑 문학관필자는 조정래의 아리랑 문학관에서부터 삼례문화예술촌 그리고 대야의 주조장과 군산 내항까지 하루코스로 답사를 했다.오전 8시 30분에 군산에서 출발해서 김제 아리랑 문학관까지는 45분이 소요됐다.문학관 1층에 들어서자마자 유리관 속에 들어있는 원고탑이 눈에 들어왔다. 그 원고 더미 속에서 일제강점기에 징게 맹개 외에밋들과 군산항에서 그리고 만주와 하와이에서 살아갔던 나라 잃은 자들의 애달픈 이야기들이 꿈틀거리며 말을 건네고 있었다.벽에는 〈아리랑〉 내용들이 소설 속 배경이 되었던 실재 현장 사진과 함께 전시되어있다. 시선이 멈추어선 곳 마다 나라를 잃은 조선 백성들의 지난한 몸부림을 시간의 망원경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조정래 작가의 글을 쓰기 위한 스케치들이 전시되어 있다. 월명산에서 내려다 본 군산항의 전경들에는 멀리 보이는 장항의 굴뚝과 째보선창의 민야암 등대까지도 자세히 그려놓은 것을 보고 발로 쓰는 조정래 작가의 부지런함에 놀라웠다. 뿐만 아니라 〈아리랑〉 속 공간적 배경이 되는 만주와 러시아 그리고 하와이 등 모든 곳에 가서 주인공들 입장이 되어 그들의 삶을 공감하고 아파하면서 그 이야기를 소설속에 담아놓은 진정성과 인간애에 감동의 전율이 느껴졌다.아리랑 문학관을 나오면 바로 앞에 벽골제가 보인다. 벽골제가 존재하는 것 하나만으로도 일제가 욕심을 부릴 만한 쌀의소출 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벽골제를 뒤로 하고 〈아리랑〉 속 주인공들이 살았던 김제시 죽산면 옛 내촌 외리 마을에 만들어진 아리랑 문학마을로 이동했다.△ 서민 생활상 복원 아리랑 문학마을아리랑 문학마을은 〈아리랑〉속에 나오는 근대 수탈 기관인 주재소, 면사무소, 우체국, 정미소, 등이 실물 크기로 만들어져 있다. 그 안에는 각종 도구들 나침반, 카메라 측량도구, 등사기, 망원경등이 전시 되어있다. 하나같이 악행의 도구로 쓰였던 것들이다. 재현한 시설물들을 통해서 일제수탈, 강제노역, 소작쟁의, 독립운동 등의 우리 근대사를 한 자리에서 배울 수 있다.물론 내촌 마을은 소박하게 소설 속 내용을 근거로 복원되어있다. 이 마을에 살았던 주요 인물은 손판석, 지삼출, 감골댁, 송수익 등이다. 그들이 살았던 마을은 조그만 야산을 뒤로 하고 너른들이 펼쳐진 초가집들이 옹기옹기 모여 있는 평화로운 곳이다. 그러나 소설에서 묘사된 주인공들의 삶은 고통스런 삶의 연속이다. 손판석은 의병과 독립군 연락책으로 활동하면서 갖은 고생을 한다. 지삼출은 친일파인 장칠문의 나쁜짓에 보복을 하려다 주재소에 끌려가 채찍질 당하고 후에 의병으로 활동을 한다. 감골댁은 빚 때문에 맏아들이 하와이로 팔려간다. 가난 때문에 큰 딸이 부잣집에 첩으로 가겠다고 하자 우리는 굶어도 함께 굶고 죽어도 함께 죽어야한다며 눈물을 쏟아낸다. 감골댁의 맏아들 방영근이 가서 노예 같은 우리의 미주지역 이민사. 그것은 풍전등화의 국운 하에서 가장 억눌리고 착취당한 조선 민중들이 신음소리와 그 궤를 같이 한다. 그들은 김제에서 살 수 없게 되자 군산으로 거주지를 옮긴다.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필자가 처음에 출발했던 군산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미곡창고가 있던 삼례문화예술촌에 들렸다.△ 근대와 현대가 공존 삼례문화예술촌40뿐쯤 이동하니 삼례문화예술촌에 도착했다. 미곡창고 4동이 있었다. 농협창고라는 옛간판글씨가 창고 벽에 색 바랜 채로 남아있다. 한 동은 커피숍으로 한 동은 책 전시장으로, 한 동은 옛 인쇄도구들을 전시해 놓은 곳으로 한 곳은 목공실로 이용되고 있었다. 농민의 피땀어린 쌀들이 가득히 쌓여있던 창고가 문화 공간이 되어 여행객들의 발길을 붙들고 있었다.가득히 쌓인 나무판들이 정감을 불러일으키는 건물로 무작정 들어갔다. 그곳은 목공소였다. 오래된 지붕의 서까래가 드러나 있는 창고에 쌀 대신 나무 향기로 가득했다. 하나같이 다른 용도의 다른 모양으로 손때가 묻은 도구들이 벽에 가지런히 걸려있고 맞은편에는 잘 짜여진 가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 옛날 빼앗겼던 슬픈 양식들이 담겨있던 창고가 지금은 개성 가득한 가구들의 냄새와 매우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픈 역사를 경험하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보는 시간을 가져 보는 것도 좋은 답사여행에서의 체험일 것 같다.다시 처음 출발했던 군산으로 이동했다. 40여분 후 도착한 곳은 대야의 주조장과 대야농협창고로 사용 중인 미곡창고이다. 일제는 1934년 밀주법을 만들어서 전통 곡주를 만들지 못하게 했다. 술 제조를 그들이 하면서 세금으로 수탈을 해 가고 조선 농민들의 흥과 정담을 나눌 기회도 박탈해 갔다.△ 콘텐츠 연계이야기 엮기 필요조정래 〈아리랑〉속 공간적 배경이 되는 김제와 삼례를 지나 전군가도를 따라서 대야에 이르고 군산구도심을 거쳐 내항에 이르렀다. 전라북도 서북 지역인 징게맹갱외에밋들과 전군가도가 연결 된 그 수탈의 길 위에서 누구나 한 번쯤은 아리랑 이야기를 늘어지게 듣고 보아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김제의 아리랑문학관과 아리랑문학마을 그리고 삼례의 미곡창고를 활용한 문화예술촌 군산의 근대역사경관지구 등 이미 각 지자체에는 나름대로의 콘텐츠 공간으로서 활용을 하고 있는 상태이다.지난해 2월 매일경제에서 청소년에게 쌀 수탈의 역사를 가르치는 쌀 수탈 근대역사 교육벨트 조성사업으로 전북 김제시와 군산시, 완주군이 공동으로 진행한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각 지자체가 경쟁적으로 자신의 지역발전에만 올인(All in)을 하는 입장에서 연대를 통한 콘텐츠 개발은 매우 고무적이고 가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다.필자 역시 쌀 수탈 근대역사 교육벨트 조성사업에 공감한다. 따로따로가 아니라 어느 한 곳에서 출발을 해도 세 곳을 지나면서 하나의 이야기가 나오도록 해야 한다.그래서 답사를 하고 나면 한권의 책을 읽은 것처럼 생생하게 그 시대의 사람들을 만난 듯한 경험을 가질 수 있도록 이야기가 스민 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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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9.06 23:02

[우리고을 인물 열전 15. 군산시 회현면] 비옥한 토지에 농업 발전…반기문 전 UN총장 선대의 터전

군산시 회현면은 옛 지명 회미(澮尾)에서 읽혀지듯 남쪽으로 큰 강인 만경강 하류에 접한다. 군산시 대야면옥산면개정면 등과 경계를 이루며 전체적으로 평탄한 지세다. 면적은 39.91㎢이다. 9월 현재 회현면의 토지 이용 현황 자료에 따르면 밭 84.1㏊, 논 1526.7㏊, 임야 338㏊, 대지 1885.1㏊다. 대정리, 학당리 등 8개 리에 속한 37개 마을에는 1595세대 3758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북쪽의 청암산(해발 115m)과 남쪽 만경강 사이의 비옥한 토지에서 생산되는 쌀이 옥토진미라는 브랜드로 시중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전통적으로 농업이 주된 산업이며, 쌀과 흰찰쌀보리 등 미맥이 중심이다. 최근 새만금사업이 진행되면서 회현면 일대도 새만금배후지역으로서 향후 발전 가능성이 높아졌다.역사에서 회현면에 대한 기록을 종합해 볼 때 회현면은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땅이었다. 백제때는 부부리현(夫夫里縣)이었는데 신라 때 회미(澮尾, 임피현 소속)라는 명칭이 됐다. 고려 예종 때 회미현(澮尾縣)이 됐는데, 조선 태종3년 1403년에 옥구로 내속되면서 폐현됐다.회미현의 읍성지는 대정리에 있는 계령산(鷄嶺山, 해발 90m)에 위치했다. 지금도 척동(尺洞), 구성리(九城) 등 성터를 뜻하는 지명이 남아 있고, 내기마을 북쪽에는 동헌자리를 추측케 하는 주춧돌이 있다. 월연리 월하산마을에서는 패총이 발견됐다. 회현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 풍수지리상 금반형옥배안(金盤形玉盃案)이라는 명당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고사리에는 양씨와 문씨, 신씨, 두씨, 전씨, 김씨, 심씨, 홍씨 등이 오랫동안 살고 있다. 이 곳에는 이들 성씨의 선산과 제각이 있는데, 척동마을에 있는 평산신씨 제각은 1876년에 건축됐고, 학당리에 소재한 진주강씨 건물은 1681년 건물로 알려진다. 회미현에는 풍면과 장면이 속했다. 풍면에는 학당원우증석옥석리가, 장면에는 월연금광대정세정고사금성리가 있었다. 일제시대 때인 1914년 풍면과 장면이 통합되어 옥구군 회현면이 되면서 금성리는 인근 옥산면으로, 옥석리는 개정면으로 편입되었다. 1995년 도농통합으로 군산시 회현면이 되었다.△인물 이야기회현면에는 특정 성씨가 유난히 많다. 경주 김씨, 광산 김씨, 평산 신씨, 진주 강씨, 두릉 두씨, 제주 고씨, 남평 문씨 등이다.현재는 거주자가 없는 것으로 알려지지만, 회현의 인물 소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눈길 끄는 성씨가 있다. 바로 광주반씨다.유엔사무총장을 지낸 반기문씨의 조상이자 조선 중종 때 8도감사, 5도병사 등으로 고위관직에 오른 반석평의 부친 반서린과 모친 회미 장씨의 무덤이 회현면 고사리에서 충북 음성으로 이장됐는데, 이는 반기문 전 총장의 선대가 회현면 일대에서 상당기간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신증동국여지승람 옥구현 인물조에는 회현면의 소문난 효자 이야기가 나온다.조선 중종 때 회현면 금광리 금당마을에 두세준이란 효자가 살았는데, 모친이 병들자 대변의 상태를 맛보아가며 병세를 살필 정도로 극진히 간호했다. 모친이 돌아가시니 무덤 곁에 여막을 짓고 3년상을 치렀다고 한다.이야기를 전해들은 중종 임금이 두세준의 효성에 감복, 1529년 정려를 짓고 세인의 귀감이 되도록 명했다.두세준효열비는 현재 금당마을에 있으며, 군산시향토문화유산 제10호로 지정돼 있다.원우리 출신 고이곤 악기장(1913~2007)은 단소, 가야금, 시조에 능했던 부친(고영지)의 영향으로 김제 황산의 유동초 선생, 추산 전용선 선생 등으로부터 단소와 가야금, 시조, 정악 등을 사사하고, 옥구 시우회 회장을 지냈다. 1995년 전북도지정무형문화재 제12호 악기장으로 지정됐다.옥구향교 전교를 지낸 김조현(83) 군산문화원 상임위원에 따르면, 원우리 문중구씨는 천석꾼이었고, 용화초등학교 설립에 큰 기여를 했다고 한다.금광리의 두희철 씨는 일제 때 면장을 했는데, 홍수 때마다 만경강물이 범람해 농사를 망치는 일이 잦아지자 도지사를 만나 만경강둑을 높였다고 한다.대정리의 강정태, 학당리의 신명철씨 등은 농민들이 힘들게 지은 수확물을 일제에 공출로 빼앗겨 힘들어 할 때 구휼미를 내놓아 칭송 받았다고 한다.근래에는 한 마을 앞에 장원탑(壯元塔)이 세워져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군산시가 유난히 고시합격자 등 인물이 대거 배출되는 학당리 풍촌마을에 장원탑을 세워 풍촌마을 주민들의 기를 한껏 세워준 것이다.최근 회현면 출신으로 활동이 가장 활발한 인물은 단연 학당리 출신인 김관영 국회의원이다.그는 공인회계사(88년), 행시(92년) 합격에 이어 1999년에는 동생 형완씨와 나란히 고시에 합격한 고시3관왕으로 유명하다.국회 1920대 재선인 김관영 의원은 초선 시절부터 중앙정치권에서 광폭 행보를 보이며 국민 눈도장을 찍었고, 최근에는 국민의당 사무총장이란 중책을 맡았다.△정계강대권 전 옥구군의회 의장(금광리), 두상균 전 군산시의회 의원(고사리), 고석원 군산시의회 의원(금광리), 강태창 전 군산시의회 의장, 강금식 13대 국회의원, 강철선 14대 국회의원(이하 대정리), 문기영 전 군산시의회 의원(원우리), 김관영 19대, 20대 국회의원, 김난영 군산시의원(이하 학당리)△관계김정훈 군산시 신풍동장, 두양수 대야면장(이하 금광리), 강희업 국토교통부 부이사관, 강희은 서울시청 과장(이하 대정리), 문명수 전 전주시부시장, 오귀일 전 국산시국장(이하 원우리), 김충렬 나포면장(증석리), 고석동 전 회현면장, 김건주 전 회현면장, 김원주 전 옥구군부군수, 김치주 전 군산시국장, 김옥주 전 군산시국장, 김왕제 전 군산시국장, 김종환 전 정보통신부 국장(이하 학당리)△법조계신문식 변호사(고사리), 강문희 서울 남부지법 판사, 강용구 변호사(금광리), 두완수 변호사(이하 금광리), 문철기 변호사(대정리), 김소영 변호사, 김귀동 변호사(이하 증석리), 강인영 변호사, 고석문 전 전주지검 군산지청 사무국장, 김동주 변호사, 김형완 변호사, 신영한 변호사, 김성환 변호사, 김병석 변호사 및 공인회계사(이하 학당리)△군경김연환 예비역 공군 준장, 김정웅 예비역 육군소장(이하 학당리)△교육계곽병선 군산대 법학과 교수(금광리), 고길곤 서울대행정대학원 교수(월연리), 김영수 전 옥구향교 전교, 김조현 전 초등교장 및 옥구향교 전교, 김제열 연세대국문과 교수, 김형섭 군산대해양학과 교수(이하 학당리)△경제계강윤구 전 회현농협장, 두성국 아시아나항공 이사, 송주성 전 회현농협장(이하 금광리), 강수선 전 회현농협장(세장리), 문영의 전 군산축협장(원우리), 두 철 공인회계사, 강창환 공인회계사(이하 원우리), 유창수 회현농협장(월연리), 김진풍 전 회현농협장, 김효제 전 회현농협장, 김재주 전 현대제철 부사장, 김병석 공인회계사 겸 변호사, 이현호 전 군산상공회의소 회장(이하 학당리)△기타강동구 전 KBS노조위원장(대정리), 강철승 군산개인택시조합장(금광리), 김문영 김문영치과의원 원장, 김한규 전주푸른안과 원장, 김영동 (전)군산중고총동창회장(이하 학당리)김재호 수석논설위원

  • 기획
  • 김재호
  • 2017.09.05 23:02

2017 대한민국 독서대전 준비한 이기성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 "누구나 책 만들고 읽을 수 있는 전자출판 인프라 만들겠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전북혁신도시에 둥지를 튼 지 2년 만에 전주에서 2017대한민국독서대전이 사랑하는 힘, 질문하는 능력을 주제로 지난 1일부터 3일까지 3일동안 열렸다. 이번 전주시의 독서대전 유치는 책 생산에서부터 유통, 소비에 관한 모든 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전북에 터를 잡은 것이 큰 힘으로 작용했다는 후문이다.앞서 지난 3월 이기성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과 김승수 전주시장은 전 국민의 책 읽기 문화 확산, 지역 독서문화 활성화, 전자출판산업 활성화 등을 위해 상호 협력을 약속했다. 전북혁신도시 이전 후 처음으로 독서대전을 전주에서 치른 이기성 원장을 만나 행사를 마무리한 소감과 향후 계획을 들어봤다.-문화도시 전주에서 처음으로 대한민국 독서대전이 열렸습니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이전 후 가장 규모가 큰 독서문화 행사가 전주에서 치러졌는데 소감이 어떠신지.2017대한민국 독서대전은 국내에서 가장 큰 독서문화 축제입니다. 올해는 우리 진흥원이 있는 전주가 이 행사를 유치하게 하게돼 사실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간 김승수 전주시장님을 비롯해 많은 분들이 전주를 독서문화의 중심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오신 게 결실을 맺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독서대전에 맞춰 무더위도 사라져 전주 독서대전을 찾은 관람객들도 한층 더 즐거워 보였습니다. 전주는 기록문화의 땅이지 않습니까. 한국 출판의 전통이 살아있는 곳이 전주입니다. 이번 축제에서 한옥과 한복, 책 읽는 사람들이 어우러진 모습을 보면 한 폭의 그림 같았다고 할까요.-이번 독서대전을 전주시와 주관하시면서 가장 크게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대한민국 독서대전은 매년 독서문화 진흥에 앞장서는 기초지자체 1곳을 선정해 해당 지자체를 책의 도시로 선포하고, 9월 독서의 달에 메인 행사를 개최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책과 독서 축제입니다.올해 독서대전은 사랑하는 힘, 질문하는 능력이라는 슬로건이 말해주듯, 책의 도시 전주의 품격을 높일 수 있는 수준 높은 교양의 장으로 꾸미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즐거움, 참여, 품격, 다채로움을 기본 전략으로 전주시와 진흥원의 긴밀하게 협력해왔습니다. 특히 책의 힘과 독서의 즐거움을 시민들에게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이 컸습니다.-독서대전에서 전주시와 진흥원이 각자 맡은 부문은 무엇인지요.전주가 독서대전 개최지로 선정된 이후 전주시와 각 도서관 실무자, 그리고 진흥원 실무자들이 수시로 기획회의를 하며 이번 행사를 준비했습니다. 또한 진흥원은 출판독서도서관문화예술계 인사들을 폭넓게 섭외해 이들을 중심으로 2017 대한민국 독서대전 추진협의체를 발족시켜 성공적인 행사 개최를 위해 다양한 의견을 수렴했습니다.-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전북혁신도시로 이전 후 달라진 점이 있다면. 아울러 전북에서 추진해 온 일이 있다면 설명 부탁드립니다.전북으로 진흥원이 이전하면서 지역사회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이 가장 달라진 점입니다. 전북지역 지자체는 물론 교육기관과의 원활한 소통이 가능해졌죠. 전북혁신도시로 이전한 이후 해온 일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대표적인 것을 몇 가지 꼽자면 전북출판지도를 제작배포해 지역 출판문화 사업의 로드맵을 만든 것입니다.여기에 한국전통문화전당에서 가졌던 오페라와 영화 속 인문학 찾기는 물론 진흥원 청사에서 열었던 초청강연 등을 포함해 다양한 행사를 지속적으로 개최했습니다.또한 전북지역 학생들이 출판에 관심을 갖고 진로를 찾을 때 도움을 주기 위해 자유학기제 연계 진로체험교육도 실시했습니다.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부터 책과 관련한 직업을 소개하고 있습니다.-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전북 혁신도시 이전으로 기대하는 도민들이 많습니다. 전북지역 출판계와 서점업계가 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전략이 있으신지요.강조할 점이 있다면 전주는 근대한국사를 관통하는 완판본의 도시입니다. 한국의 출판산업이 전주에서 태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조선시대 전주는 백성들의 다양한 취향과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출판문화가 번성했던 곳입니다. 당시 춘향전, 유충렬전 등 다양한 책이 전주에서 출간되기도 했습니다.전주는 인문학 정신이 살아있는 고장입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온라인 서점이 주류가 됐고, 이후에는 스마트폰 대중화로 사회적 변화까지 겹치면서 지역서점이 많이 어려워진 것은 사실입니다. 변화를 따라잡기에는 변화 속도가 빠른 편이었죠.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서점은 이 지역의 문화공간이라는 신념을 가진 서점주들이 문화활동을 많이 하셨습니다. 진흥원에서 지원하는 지역서점 문화 활동도 그런 서점을 많이 만들기 위한 사업입니다.-그렇다면, 독서문화 공간 조성을 위한 청사진이 있을까요.세계적으로 출판 산업과 독서문화가 예전 같지 않다는 평이 나오는 것은 시대의 변화 때문이죠. 책이 하던 역할을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일부 가져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여전히 사람들에게 길을 제시해주는 중요한 문화콘텐츠입니다. 4차 산업혁명 이야기가 많지만, 4차 산업혁명만 해도 인문학적 소양이 중요하다고들 말하지 않습니까?시대에 따라 다른 형태, 다른 옷을 입을 수는 있어도 독서가 주는 깊은 사유를 따라올 콘텐츠는 없죠. 독서문화 조성을 위해서는 평소에 책을 많이 접할 수 있는 환경, 습관들이 필요합니다. 진흥원에서 추진하는 청소년 북토큰사업이나 인문독서 아카데미 사업 등 아주 가까운 곳에서 책을 접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중요합니다.책은 공부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은 의무감 때문에 독서의 즐거움을 반감시키기도 하는데, 사실 새로운 것을 알아간다는 것은 사실 굉장한 즐거움입니다. 그리고 그 즐거움을 주는 가장 대표적인 콘텐츠는 역시 책이죠.이런 사회적 분위기와 독서습관, 그리고 어디서든 쉽게 책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소개 부탁드립니다.현재 제가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사업 중에서는 전자출판 인프라 구축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특히 진흥원은 공용 DRM 상용화와 표준 메타데이터 개발 사업에 모든 역량을 쏟고 있습니다.앞으로는 워드프로세스 정도의 프로그램을 사용할 줄 아는 국민이면 누구나 쉽게 전자책을 만들 수 있는 소프트웨어와 그에 쓰일 폰트(활자)를 개발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전자출판용 활자와 에디터 프로그램을 구축할 수 있다면 사람들이 더 쉽게 책을 만들고, 읽는 데 새로운 전환점이 될 거란 생각입니다.국민 누구나 손쉽게 전자책을 만들 수 있도록 하고, 현재 서점별로 다른 전자책 리더도 표준화 할 것입니다.● 이기성 원장은- 부친 회사서 관련업무 시작 전자출판분야 전문가 평가서울 출신인 이기성 원장(71)은 서울대 지리학과를 졸업하고, 단국대 전자계산학과 석사, 경기대 재료 공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이 후 계원예대 출판디자인과에서 25년 간 교수생활을 한 그는 전자출판 분야 전문가라는 평가를 받고있다.지난해 지난 2월 공모 절차를 통해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에 선임된 이 원장은 부친인 아버지 이대의(98) 씨가 대표로 있는 출판사 장왕사에 입사해 출판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이곳에서 상무이사와 한국전자출판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전자출판 육성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저서로는 출판은 깡통이다, 출판개론, 유비쿼터스와 출판, 한글디자인 해례와 폰트 디자인 등이 있다.

  • 기획
  • 김윤정
  • 2017.09.04 23:02

[철의 궤도: 전라선 철길 답사기 ⑨ 봉천역·오수역] 철길이 관통하는 ‘개와 사람의 시간’

춘향로를 타고 남쪽으로 달리는 길. 조물주가 처음부터 이 땅을 길로 쓰라고 만들어놓은 듯, 좌우 양쪽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산맥이 늘어서며 춘향로를 호위한다. 섬진강 상류의 한 줄기인 둔남천이 옆에 바짝 붙었다. 철길이 보이지 않았다. 원래는 서편 산기슭을 훑으며 지나던 것이, 산지를 관통하는 터널 속으로 숨었다. 물론 무슨 지하철처럼 땅속으로만 달리는 것은 물론 아니다. 성수면을 지나 오수면으로 접어들자마자, 철길은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 위에서 얼굴을 내민다. △ 봉천, 무역할의 역할 뜬금없게도, 6차선 도로를 가로지르는 다리 아래에 역이 하나 있었다. 생긴 것은 서울의 도시철도 역, 그러니까 대충 한 2호선 지상 구간 어디쯤의 역 같은데, 오가는 사람은 없고 문은 굳게 닫혀 있다. 그러고 보니 서울 도시철도 2호선에 봉천역이라는 역이 또 있었지. 아마 봉천역이라고 하면 대부분은 그쪽 봉천역을 떠올릴 것이다. 한글로 써놓으면 같은데, 한자가 다르다. 이쪽은 鳳泉이고, 서울 2호선 봉천역은 奉天이다. 공사장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금속 가림막 앞에 봉천역이라 적힌 간판이 누워 있었다. 플랫폼으로 올라가려면 철문을 하나 통과해야 하는데, 원래는 있었던 맞이방 같은 시설은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붉은 벽돌로 치장한 역사를 등지고 계단을 오르다 보면, 무채도의 콘크리트 구조물 속에서 혼자 맑고 푸른 빛을 뽐내는 안내판이 눈에 들어온다. 서울서대전익산전주방면이라는 표지가 흥미롭다. 종착지가 용산이 아니라 서울인 점이. (이 역이)지금은 어떤 역할이 있는 건 아니에요. 여객 수요 문제도 있고, 정차역이 점차 줄어든 영향도 있죠. 바람이 세차게 부는 플랫폼 위에서, 조연호 오수역 시설관리반 선임장(48)의 말이 무덤덤하게 날렸다. 죽림온천역처럼 쌍섬식 플랫폼을 갖춘 선하역사 구조인데, 그래도 얼마간은 승객들이 이용했던 죽림온천역과는 달리 봉천역은 그런 기억조차도 없다. 2004년, 단선 시절 전라선에 있던 오류역과 봉천역을 합친 새 봉천역이 이곳에 들어섰다. 바로 전해인 2003년 열차를 타거나 내린 이가 오류역이 213명, 봉천역이 660명이었는데, 그러니까 둘이 합쳐도 연간 1000명을 못 넘는 신세였다. 훨씬 전에는 사정이 조금 나았지만(이를테면 1977년에는 오류역과 봉천역이 나란히 4만5000여 명의 이용객 수를 기록했다), 어쨌든 이용객 수로 전라선 최하위권이었던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별로 중요하진 않은 사실이지만, 서울의 봉천역은 지난 2016년 한 해 동안 약 840만 명이 이용했다. 그런 고로, 2004년에 여객 취급이 중단돼 버렸고, 새 역은 지어지자마자 버려지는 신세가 됐다. 원래는 관촌역에 있었던 것과 같은, 버스정류장처럼 생긴 시설도 있었다고 하고, 그 아래 벤치도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흔적뿐. 역명판도 뽑혀서 측선 자리 쪽에 누워 있다. 시설물들이 그대로 방치돼 있으면 위험할 수 있어서 철거한 것이라 한다. /권혁일 기자 △ 임실은 안 서도 오수는 선다 오수면은 2010세대 4392명(2016년 통계 기준)이 사는, 임실군에서 임실읍 다음으로 인구가 많고 번화한 지역이다. 그 중심부는 둔남천과 오수천이 이룬 부채꼴 평야 지대에 있다. 예로부터 교통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이곳에 있던 오수역은 조선 후기까지도 전라도에서 내로라하는 규모였다고 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오수역은 철도역이 아니라 역참제의 역을 말하는 것이다. 둔남천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 옥색 아치가 보이면, 거기부터가 오수면 중심부고, 이 다리를 건너면 2004년에 새로 지어진 새 오수역이 나온다. 대명리 수로고개 초입 즈음에서 잠깐 마주쳤다가 헤어진 철길은 터널과 다리를 거쳐 오수역에 이른다. 산과 내를 일직선으로 질러가느라 철길이 지상 십여 미터 위에 떠 있는 탓에, 역도 꽤 높이 돋운 자리에 들어섰다. 오수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의견(義犬) 상징물이 옆에 함께 서 있다. 석재로 외장을 두른, 전형적인 2000년대 초 공공건물처럼 생긴 역사. 그 안 아담한 맞이방에서는 대부분 노년층인 승객들이 의자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며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새마을호 특실 등급인 남도해양관광열차가 플랫폼을 스쳐 쌩 지나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용산 가는 무궁화호 열차가 들어온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오전 11시 50분, 용산행 무궁화호 도착을 5분여 남짓 앞두고 역무원이 플랫폼으로 통하는 출입문을 열자 승객 10여 명이 줄을 지어 이동했다. 양순덕(74) 씨는 멀리 여행을 떠나듯 보따리가 한 짐이다. 두 손 무겁게 어디로 가는지 물으니 서울 사는 아들 만나러 가는디, 필요하게 생긴 거 이것저것 챙겼다며 웃음으로 답했다. 여그서 태어나 이때까지 평생 살면서 기차 많이 탔지. 우리같이 나이 많은 사람들은 멀리 갈라면 기차가 편해. 화장실도 있응게. 오수역에는 전라선의 무궁화호 등급 열차가 빠짐없이 멈추는데, 이는 임실역보다도 상하행 4편씩이 많은 것이다. 2015년 한 해 오수역을 이용한 이는 모두 8만9305명. 같은 해 임실역은 7만3627명이 이용했다. /권혁일김태경 기자 △ 레일 잃은 옛 역사엔 추억만 옛날엔 역이 커서 오수, 삼계, 지사면 쪽 사람들이 전부 이 역을 이용했죠. 지금도 많이들 이용하고요. 옛 오수역사 인근 식당에서 만난 이해숙 씨(60)는 임실엔 안 쉬는 기차도 오수에는 쉰다며 이렇게 말했다. 오수면 사람들은 역까지 전부 걸어 다녔다고도 덧붙였다. 이정표는 없었지만, 옛 오수역사를 찾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오수면사무소에서 삼일로를 따라 북쪽으로 똑바로 걸어가면 금방이고, 오수초등학교가 바로 앞에 있다. 과연 걸어서 다닐 만한 위치다. 더 쉽게 가고 싶다면, 마을 초입에서 의견로를 타고 직진하면 그만이다. 이 의견로가 바로 옛 전라선 철길이 있던 자리다. 식당 맞은편에서 만난 김균자 씨(59)는 이곳에서 나고 자란 오수역 원주민이다. 아버지가 철도와 관계된 일을 하셨다고 했다. 저 식당이 사택이었어요. 관사. 일본 사람들이 지어놓은 우물도 있었고. 옛날엔 사쿠라 나무도 많았어요. 나무 올라가서 노는 애들도 많았지. 역무원들이 무임승차자 잡으러 뛰어다니던 풍경도 생각나고. 사쿠라 나무는 벚나무다. 김 씨는 사실 어렸을 적엔 사쿠라 나무랑 벚나무가 다른 것인 줄 알았다며 웃었다. 김 씨는 기차가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이 들리면 준비, 땅!을 외치며 신발을 대충 구겨 신고는 하교하는 오빠를 마중하러 달려가곤 했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어린 날 김 씨는 저녁노을을 배경 삼아 오빠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떤 재미난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옛 오수역사는 고요했다. 1931년 전라선 전주~남원 구간이 개통될 때 처음 문을 열었다가, 한국전쟁 중에 소실된 것을 1958년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그러니 지금 있는 이 건물은 내년이면 환갑을 맞는다. 붉은 페인트를 뒤집어쓴 벽 위에 오수역이라는 간판과 옥색 지붕이 올라가 있었다. 한쪽에 오수자율방범대라고 쓰인 간판이 함께 걸려 있었고 같은 글자가 쓰인 차량도 한 대 주차돼 있었지만, 역사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나가던 주민이 (방범대가)요즘은 활동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기차가 다닐 적에는 사람들의 발길로 북적였을 앞마당에는 마을 주민이 널어둔 듯한 곡식들이 한여름 햇볕을 만나 바삭바삭 마르고 있었다. 이제 더 사람이 떠날 일도, 돌아올 일도 없는 이 건물은 사람들의 온기 대신 먼지와 거미줄로 채워져 있다. 낡아 여기저기 금이 간 벽면과 뜯어져 나간 천장만이 지나간 세월의 흐름을 이야기하고 있다. 역사 뒤편에는 매끈한 아스팔트 도로와 인도 양옆으로 길게 늘어선 초가집 식당들이 자리하고 있다. 주민들이 열차를 기다리며 앉아 있었을 나무 벤치와, 한때 여러 소식을 전했을, 옛 삼각형 로고와 한국철도 표식이 붙어 있는 게시판, 이용객들이 열차표를 샀을 구멍 뚫린 창 정도를 제외하면 철도와 관련된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건물 한쪽엔 쓰레기가 쌓여 있었다. 임실군청은 별다른 보존활용 방안을 세워놓지는 않은 모양이다. 군청 관계자에 따르면, 오수역 이전 이후 옛 오수역 부지는 매입했지만 건물은 매입하지 않았다고 한다. 익산시가 나서서 옛 물건들을 보존하고 각종 사진 자료와 지역 주민 구술 채록 자료 등으로 꾸민 춘포역과 비교하면 좀 아쉬운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김균자 씨는 오수역에 대한 추억을 가진 사람이 많은데, 레일도 없어지고 관리도 잘 안 돼서 너무 아쉽다고 말했다. 레일을 다시 놓을 수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여기서 가까운 서도역과 어떻게 연계할 수는 없을지 곡성역처럼요. 오수역이 살아있는 역이 됐으면 좋겠어요. 잊히지 말았으면. /권혁일김태경 기자 △ 오수義犬, 오수의 犬 오수 주민들의 애견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듯 보였다. 오수역의 어제와 오늘을 사이좋게 둘러보고 돌아가는 길, 오수교를 지나 오수공용버스정류장 쪽으로 가다 보면 나오는 정미소 건물에는 개 캐릭터 벽화가 저마다 개성을 뽐내고 있다. 여기도 개, 저기도 개, 전부 개다. 고려 후기에 최자가 엮은 시화집 '보한집'에는 당시 김개인(金蓋仁)이라는 사람이 키웠다는 의로운 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날 김개인은 술에 취한 채 들판에 누워 낮잠을 잔다. 그러던 중 들녘에 불이 붙어 퍼지면서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 이 상황을 본 개가 냇가로 들어가 물을 적신 후 제 몸을 던져 그 불을 끈다. 그렇게 불길이 잡히고 김개인은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지만, 개는 그만 지쳐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 이 같은 개의 충성심이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전해져와 많은 이들에게 진한 감동을 새겨준다. 오수(獒樹)라는 지명도 이 이야기에서 나왔다고 전해진다. 주인이 개를 묻으면서 지팡이를 꽂아 두었는데, 그 지팡이에서 싹이 나와 큰 나무가 됐다는 이야기. 개(獒)와 나무(樹). 개의 충성심이 마을 이름까지 선물했다는 이야기다. 이 의로운 오수의 개의 명성은 오수면 곳곳에서 실감할 수 있다. 오수리 시장 옆 원동산 공원에 세워진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호인 의견비가 대표적인데, 이는 말 그대로 주인을 위해 제 한 몸 희생한 개의 충성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이 아담한 공원 안에는 비석 말고도 사람 키를 훌쩍 넘는 의견 동상이 있는데, 두 앞발을 언덕 위에 '척'올리고 있는 모습을 올려다보고 있노라면 그 기상에서 사뭇 비장함까지 느껴진다. 임실군문화체육센터 옆 오수의견공원도 빼놓을 수 없다. 연못 주변의 경관과 잘 어우러지는 여러 의견 동상을 찾아다니는 재미도 있다. 이름하야 전 세계를 아우르는 '주인 사랑 챔피언 견들'이다. 신라 시대 오수개, 영국의 보비, 일본의 하찌코, 알프스의 배리, 미국 알래스카의 발토 등. 저마다 제 주인과 아름다운 이야기보따리 하나씩 간직한 친구들이다. 공원 바깥쪽으로 나와 의견교를 바라보며 천변을 따라 걷다 보면 강아지풀들이 반겨주듯 꼬리를 살랑살랑 흔든다. 다리 초입에는 이제 오수에서 빠지면 서운할 개 석상도 양옆에 자리해 있다. 이 다리를 지나가는 도로 이름이 의견로다. /김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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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9.02 23:0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17. 고지도가 그려낸 고창의 정취 - 조선시대 지리정보에 생활사까지 담은 '아름다운 그림'

아름다운 고지도가 있다. 조선시대 지금의 고창군 무장면을 그린 「전라도무장현도(全羅道茂長縣圖)」이다. 당시 무장현에 있던 무장읍성의 내부가 비교적 소상하게 묘사되어 있어 지도를 통해 당대의 풍경과 생활사까지도 엿볼 수가 있다. 지도를 소장하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은 동헌과 객사 등 관아의 실제 모습이 회화 기법으로 묘사되어 있어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두루 갖춘 지도라고 소개하고 있다.이 지도는 읍성이 주변 지역보다 크게 그려진 군현 지도의 특성을 지닌 채 현대의 지도와 같이 완벽한 축척을 적용한 것은 아니지만, 산과 바다로 이르는 물길과 사람들의 흔적을 담은 마을과 길 등이 마치 한 폭의 회화처럼 그려져 있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지도이다.지도의 여백에는 사방 경계까지의 거리와 산과 하천 그리고 포구의 이름, 민가의 수, 논밭 등의 기록이 적혀 있어 지역의 정보를 상세히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읍성 남문에서부터 나와 홍살문을 지나며 구불거리는 길을 따라 이어지는 풍경과 성벽을 견고하게 표현한 모습이 흥미롭다. 남문에는 진무루(鎭茂樓)가, 읍성 안쪽에는 시장(市場)과 동헌, 객사 그리고 둥근 원형의 감옥(獄)과 연못도 그려져 있다. 남문 앞쪽에는 남산 솔숲의 울창한 모습을 강조하고 있고, 특히 버드나무와 복사꽃이 활짝 핀 모습과 일동면에는 이석탄(李石灘) 신주를 모신 충현사(忠賢祠)를 세밀하게 표현했다. 지도 오른쪽 하단에 을미맹춘(乙未孟春)으로 시작되는 글을 보면 을미년 이른 봄 시기(맹춘은 음력 1월을 칭하기도 함) 봄이 무르익는 고장의 아름다운 찰나를 사진 찍듯 그린듯하다.서쪽 해안의 심원죽도(心元竹島)에는 전죽봉산(箭竹封山)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대나무만을 별도로 관리하던 봉산(封山: 나라에서 나무 베는 것을 금지하던 산)이다. 그 곁에 물결을 일으키며 배를 타고 고기를 잡거나 짐을 싣고 다니는 당시 사람들의 모습도 정겹지만, 특히 다른 지도에서 보기 힘든 고기 잡는 전통적인 도구인 창살 모양의 어전(漁箭)이 그려져 있는 것이 독특하다. 사실 남아있는 읍성과 변치 않는 지형의 모습은 눈으로 확인하고 그 밖의 기록들은 문자로 확인하면 되지만 당시 읍성 주변의 모습이나 구체적인 정취는 오롯이 남겨진 이 지도를 통해 느낄 수 있다. 지도 속에 의미 있고 아름답게 표현된 공간과 어우러지는 나무와 꽃들을 바라보노라면 당대 사람들의 자연을 대하는 태도와 안목을 오늘을 사는 우리가 다시금 배워 아름다움을 되돌려 놓아야 할 듯싶다.지도 속 무장읍성은 왜구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조선 태종 17년(1417년)에 지어진 성으로 사적 제346호로 지정돼 있다. 진무루 주변의 석축 성곽을 제외하고는 흙으로 쌓인 토성으로 우리나라 읍성 중 지어진 연대가 가장 정확하게 알려진 성이다. 병마절도사 김저래(金著來)가 호남 여러 고을 백성과 승려 2만여 명을 동원해 4개월 동안 쌓았다고 하며, 원래는 옹성을 두른 남문과 동문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옹성이 사라져 남문과 동헌, 객사 등이 남아있다. 읍성은 지방의 관부(官府)와 주민의 거주 지역을 함께 빙 둘러쌓은 성으로, 읍(邑)이라는 글자 자체가 성으로 둘러싸인 고을을 형상화하였다. 따라서 읍성이 자리한 곳은 지역 행정의 중심이었으며, 동시에 많은 사람의 생활공간을 의미하기도 했다.「전라도무장현지도」와 또 다르게 무장읍성의 모습을 남기고 있는 『광여도』의 「무장현」 지도를 보면 관아(衙, 아), 창고(倉, 창), 객사(客舍)와 무기를 세워놨던 군기(軍器) 등이 표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지도의 표현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1872년지방지도』의 「무장현지도」는 읍성의 표시가 훨씬 자세하다. 성문만 해도 『광여도』에 없는 동문 등 문이 추가로 표시되어 있고, 관청의 경우 내아(內衙), 관청(官廳), 관노청(官奴廳), 작청(作廳), 형청(形廳) 등이 세부적으로 구분되어 나타나 있다. 군기고(軍器庫) 옆 훈련청(訓練廳)의 모습과 향청의 모습도 살펴볼 수 있다. 지도를 그리며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며 중심에 담았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전라북도 고창은 고창현, 무장현, 흥덕현이 부군폐합령에 의해 하나의 군으로 통합된 경우로 본래는 읍성이 세 곳이나 있었고 동헌과 객사, 향교도 셋씩 있었다. 이중 고창시내 자리 잡은 고창읍성은 사적 제145호로 서산의 해미읍성, 낙안읍성과 함께 조선시대 대표 읍성으로 손꼽힌다. 고창읍성은 무장읍성보다 더 늦은 조선시대 단종 원년(1453년)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돌로 쌓은 석성이다. 이곳도 애초에 그 목적이 방어에 있었던 것을 보면 근방이 호남내륙의 전초기지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음을 알 수 있다. 고창읍성은 모양성(牟陽城)으로도 불리는데, 백제시대 산을 의미하는 모와 처소나 방위를 나타내는 량이라는 글자를 본 따 고창을 불렀던 모양부리(毛良夫里)에서 유래했다. 둘레는 약 1.7㎞, 높이는 4~6m로, 축성 당시 관아건물 22동과 연못, 수구문 등이 있었지만 대부분 소실되었다가 1976년에 성문, 성벽을 비롯해 일부 건물이 복원되었다.고창읍성에는 본래 민가가 거의 없이 관아 건물만 들어서 있었기 때문에 전국에 남아있는 읍성 가운데 가장 많은 관아 건물을 복원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다른 읍성과 또 다른 점은, 대부분의 읍성은 남문이 정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에 비해 고창읍성은 남문이 없고 오히려 북문이 정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까닭은 고창이 동쪽과 남쪽이 높고 서북쪽이 낮아 산을 둘러쌓은 읍성도 자연히 평지에 가까운 북쪽에 정문을 내게 되었다.두 읍성이 자리했던 곳은 주변의 산과 강, 바다 등이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자랑한다. 그러한 까닭에 고창읍성과 대나무 숲은 영화 「왕의 남자」의 촬영지가 되기도 했고, 무장읍성 가까이에 있는 선운사는 동백꽃이 아름답기로 유명하지만 올라가는 길은 드라마 「대장금」에 그 모습을 드러내며 인기를 끌었다. 고창읍성 성문 앞 광장에는 판소리의 집성자 신재효 선생의 고택이 있고 그 곁에는 판소리 공연장인 동리국악당이 들어서 있다. 이처럼 똑같은 장소이지만 우리 옛 지도에서 보이는 것과 오늘날 영화나 드라마 속 멋진 구도의 화면으로 보이는 것, 웅숭깊은 업적을 남겨내는 것도 그 땅이 건네는 힘의 표현일 것이다. 지역의 풍경은 깊은 고민을 담아내거나 찰나의 순간일지라도 새로운 시각과 감동을 주고 사연을 건넨다.옛 지도를 통해 당대의 정세나 생활상을 파악하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요즘이야 위성과 드론이 땅의 지형지리를 한눈에 알게 하지만, 조선시대 고산자 김정호를 비롯하여 우리 국토의 지도를 제작하고 지리지를 편찬한 사람들이 남긴 고지도를 보면 어찌 하늘에서 내려다본 듯 지형의 모습을 담아냈는지 놀랍기만 하다. 그들도 종종 기존의 군현 지도를 엮거나 참조하기도 했겠지만 직접 발로 걷고 눈으로 확인해 지도를 그리고 지역에 대한 여러 고민까지 탐구하고 담아내며 노력한 전문인이다.그런 의미에서 고지도는 단지 지리적인 위치만이 아닌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좋은 선생이자 당대 기술과 노력으로 집약된 으뜸 실용서가 아닐까 싶다.가을의 고창 선운산 일대는 동백을 대신하여 잎 없는 꽃대를 밀어내며 붉게 피어나는 꽃무릇의 향연이 아름답게 펼쳐질 것이다. 구월, 가을 문턱에 들어서며 네비게이션이 건네는 음성과 위성지도를 뒤로하고 「전라도무장현지도(全羅道茂長縣地圖)」속 길을 따라 고창의 정취를 느끼며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 그 아름다운 고지도를 지금의 관광지도에 응용해도 멋들어질 듯 싶다. 그때와 지금을 중첩해 오늘을 비춰보는 것도 지도에 드러난 것과 드러나지 않은 고창의 내밀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방법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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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9.01 23:02

"생활밀착형 소식 전하기 매력"

TV방송이 이웃을 연결하고, 공동체를 형성하는 매개체가 되고 있다. 그동안 주류미디어에서 주목하지 않았던 동네이야기,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를 영상을 통해 생생하게 담아냄으로써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 내고 있다. 우리동네 TV(이하 우동 TV)가 그 주인공이다. 우동TV는 지역 케이블방송(티브로드 전주방송)의 지역채널을 통해 방송 되고 있다. 우리동네 뉴스와 우리동네 스포츠 뉴스두 개의 프로그램이 우동 TV를 구성하고 있다.다매체 시대 지역미디어가 살아남긴 위해선 지역민들의 방송참여가 많아져야 한다. 김선욱(티브로드 전주방송)보도국장은 지역민들의 시각과 직접 제작으로 이뤄지는 우동TV는 앞으로 지역방송에서 지향하는 목표라면서, 시민들의 다양한 시각으로 방송이 만들어 질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지원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우동 TV가 다음달로 방영 3주년을 맞는다. 1회부터 참여하고 있는 3명의 시민기자와 PD를 만나 앞으로의 활동에 대해 들었다.■ "생활밀착형 소식 전하기 매력"김강수 앵커 겸 기자우동 TV 뉴스 앵커와 기자로 맹활약하고 있는 김강수 기자.본업은 영어학원 원장이다. 마을신문 기자로 5년째 활동하고 있다. 초기에는 문화부였으나 지금은 사회부로 영역을 넓혔다.- 마을미디어 활동 후 달라진 점은.내가 하는 활동이 의미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됐다. 작년엔 전북민언련에서 상도 받았다. 이런 활동이 중요하고, 풀뿌리 민주주의 활동이라는 생각이 든다. 활동하면서 주민자치 활동을 활성화하고 지역을 바꿔보자는 생각도 늘어났다. 이제는 스스로 기자이면서도 지역에서 주민자치 활동을 지원해 주고, 뿌려보고 싶은 활동가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우동TV 만의 매력이 있다면.취재영역이 더 넓다. 소개되는 범위도 더 넓다. 그리고 영향력도 더 넓어졌다. 마을신문과 우동 TV가 연계되면서 기사의 파급력이 커졌다. 콘텐츠도 계속 재확산 된다. 케이블방송을 통해 재방송되고, SNS 등을 통해 계속 확산 된다. 알아보는 사람도 많아지고 피드백도 늘어간다. 그 만큼 책임감이 생긴다.- 마을주민들의 미디어활동은 어떤 의미를 가지나.더 생활밀착적인 내용을 담아내고, 주민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게 된다. 동네에 살고 있기 때문에 기사거리가 눈에 잘 띈다. 동네소식이나 문제를 보도했을 때 주민들로부터 지지와 지원도 받는다. 이러한 활동이 우리지역에 산재한 현안과 문제들을 주민들 스스로 해결 할 수 있도록 하고, 곧 주민자치와 마을민주주의에 이바지한다고 생각한다.- 우동 TV에서 제작해보고 싶은 내용은.전국적 이슈가 지역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다뤄 보고 싶다. 예를 들어 지역분권이 동네에서 어떻게 주민자치가 실현되는지 등에 대한 내용 같은 것이다. 또 지역 내 소외계층의 이야기도 다뤄보고 싶다. 지역의 수급자들, 어려운 사람들 이야기, 탈북자, 이주 노동자 이야기도 다뤄보고 싶다. 이들은 직업이나 활동에 차별을 받는다. 하지만 이들도 지역주민 구성원이다. 만나서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도록 하고 싶다. ■ "사소한 이야기가 특별해지죠"- 이평강 앵커 겸 기자딸아이 머리 묶기, 도로명탐정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이평강 기자. 본업은 사회복지사다. 평화동 마을신문기자로 활동 중이고, 우리동네 TV 뉴스에서 앵커와 기자를 맡고 있다.-활동 소감은. 개인적으로 나의 기록이 되었고, 영상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일상의 시간을 살았는데 영상이라는 족적이 남았다. 요새 봉사활동 하는 사람들을 찍어주고 있다. 자원봉사자 영상을 올려주니까 다들 좋아한다.- 마을신문과 다른 우동TV 만의 매력이 있다면.우동TV는 사소한 걸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나의 이야기, 우리 동네 이야기가 관심을 갖지 않을 이야기 같지만, 영상으로 만들어지게 되면 영상에 담긴 주체들은 특별하게 생각하게 된다. 계속 반복해서 보게 된다. 또 다른 사람들도 그 이야기를 특별하게 생각하게 한다. SNS로도 나가다 보니 전 세계가 볼 수 있게 된다.- 주변의 반응은 어떤가.내가 방송을 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인지한다. TV 나오면 전화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웃들과도 친해지게 되는 것 같다. 동네 치킨집 사장님이 배달시키면 자기가 본 이야기를 해준다.- 마을미디어의 역할은 무엇인가.사람들을 끈끈하게 이어주고 결집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과거에는 서로가 잘 알았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그런 기회가 없다. 옆집 살면서도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된다. 지역민간의 이야기가 없다. 우리사이에 마을미디어 바람이 불어오면 우리 이야기, 나의 이야기로 생각하고 이것이 끈이 되어 지역민이 더 결속해 질 수 있다.- 우동TV를 다른 분들에게 권한다면?여러 사람들이 더 참여했으면 한다. 사람들이 어렵게 생각한다.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도 , 다른 사람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줄 수 도 있다. 혼자나 둘이 하는 것보다 여럿이 하는 것이 더 좋은 내용이 나온다. 꼭 촬영이 아니더라도 다방면으로 참여할 수 있다.■ "생활체육 수준 낮단 편견 깰것"- 전 별 미디어활동가우리동네 스포츠뉴스는 기존 TV가 다루지 않던 생활 속 체육인들의 박진감 있는 모습을 영상으로 담아내고 있다. 전 별 미디어활동가는 전주시민미디어센터에서 영화와 팟캐스트 관련 교육을 받았다.- 활동 소감은.처음에 의욕만 앞섰다. 혼자 촬영하고 인터뷰 하니까 미덥지 못하게 생각했다. 한 두 번 하고 말겠지 하고 생각 하고 거리감을 두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동호인들이 반겨주고, 자신들 활동이 방송에 나가는 모습을 좋아하고 취재 요청이 많이 온다. 자신들의 영상이 길게 나왔으면 좋겠다거나, 더 많은 경기를 다뤘으면 좋겠다는 주문도 많이 받는다.- 동호인들의 반응이 좋은 걸로 알고 있다.그동안 스포츠 하면 엘리트만 하는 것이다 라는 인식이 있었다. 조기축구, 생활체육 하면 수준이 낮게 보는 경향도 있었다. 그러나 TV 방송으로 나가니까 생활체육에 대한 인식도 달라지고, 자신들 운동 모습을 알려지고 본인들에게 의미를 부여를 해 주는 것 같다. 현장에 가서 보니까 수준도 높고 노력과 열정이 높다. 열의와 열정만큼은 엘리트 체육 보다 높다.- 생활스포츠를 기획했던 이유가 있는가.기록을 하고 싶었다. 많은 생활스포츠 동호인들이 열정을 가지고 경기를 하지만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또 기록이 되지 않고 있다. 최소 5년에서 20년 된 동호인 팀들이 있는데, 그들에 대한 촬영과 기록이 없다. 소중한 자료가 될 거라 생각한다. 시민들은 생활체육에 대한 관심이 높지만, 지역 방송사에서는 방영되지 않는다. 주말경기이고 비용이 많이 든다. 한마디로 돈이 안 되니까 관심을 갖지 않는다.- 계획과 바람은 무엇인가.프로그램 측면에서는 다양한 생활체육 종목 동호인을 모시고 토크쇼 같은 걸 해 보고 싶다. 그리고 많은 영상제작 활동에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으면 좋겠다. 이러한 활동들이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심을 갖게 되고,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를 건강하고 활기차게 만드는 것이라 생각한다./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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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8.31 23:02

[장애인 대상 교육프로그램 운영 문화예술단체 '라온'] "세상에 나를 이야기해요" 서툴지만 뜨거운 그들의 도전

손 씻고 오세요.크기는 일정해야 해요. 서로 서로 비슷하게.30-50대의 젊은 남녀 10명 정도가 두 테이블에 둘러 앉아 선생님의 주의사항을 들으며 경단을 빚고 있다. 찹쌀가루를 반죽하여 밤톨만한 크기로 동글동글하게 빚는다. 모두가 비닐장갑을 끼고 신기한 듯 경험해본다. 선생님은 반죽할 때는 더 힘주어 해야 한다고 몇 번 씩이나 강조한다. 노란 카스테라를 곱게 걸러내는 일도 해본다. 선생님은 함께 둘러 앉아 시범을 보이며 잘 할 수 있도록 한 명씩 한 명씩 요령을 일러준다. 몸 움직임이 좀 느린 듯 하면서도 시선은 반죽 행위에 집중하는 이들은 1, 2급의 지적장애인들이다.△사진 찍는 게 될까?이들이 특별한 경험을 하는 곳은 정읍시 신태인읍에 위치한, 장애인 생활공간인 정읍천사마을이다. 매주 목요일 오전, 문화예술교육단체 라온의 세 선생님들이 운영하는 지역특성화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 찰칵! 이야기를 시작하다에 참여하여 자신들을 표현하는 활동을 한다. 이들이 경단을 빚기 전에는 투명한 비닐 앞치마에 검정색, 파란색, 빨간색 매직으로 각자 뭔가를 표현하도록 하는 그림 그리기를 하도록 했다. 직접 그림으로 표현한 앞치마를 두르고 경단 만들기를 경험해보도록 하기 위해서다.장애인복지법 시행규칙에 따르면, 지능지수(IQ) 34 이하를 제1급, 35-49를 제2급 지적장애인으로 구분한다. 예전에는 정신박약아 또는 정신지체인이라고 하였으나 이 호칭이 부적절하다는 판단에 따라 지적장애인으로 바꾸었다. 네이버의 두산백과에서는 지적장애인을 정신 발육이 항구적으로 지체되어 지적 능력의 발달이 불충분하거나 불완전하고 자신의 일을 처리하는 것과 사회생활에 적응하는 것이 상당히 곤란한 사람으로 설명하고 있다.정읍천사마을의 박현배 원장은 1, 2급 지적장애인의 경우 대체적으로 한글 습득이나 간단한 산수도 어려워하는 분들이 많다고 말하면서도 지적 능력이 사람들마다 다 다르다고 한다. 글자를 전혀 모르는 데도 스마트폰으로 유투브 동영상을 보는 사람도 있다. 문화예술교육에 참여하는 10여 명 중에는 한둘 정도가 한글을 습득한 경우라고 한다. 박 원장은 처음에 이들이 교육에 참여해 사진 찍고 그림 그리고 요리하는 게 될까, 생각했다고 한다.△립스틱 바르고 선글라스 낀 날엔이들은 저마다 사진기를 들고 촬영하는 법을 배우고 각자 촬영하거나 서로가 서로를 촬영하며 촬영된 사진이미지를 보며 매우 즐거워 한다. 안진희 선생님의 말이다. 이남숙 씨의 경우 처음에는 사진기 프레임 안으로 사물이 들어가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어요. 지금은 달라졌죠. 종이에 점 하나 찍는 것도 못했지만 지금은 자유롭게 그리기를 해요.이현자 선생님은 이렇게 설명한다. 요리 경험은 커녕 원재료들이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는 상태였어요. 이들 중 여성의 경우 요리본능이 있더라고요. 박삼미씨를 사례로 든다. 박삼미 씨는 요리하는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며 함께 하려 하고 자신의 의사를 드러내기도 한다.삼미 씨는 오늘 정읍시내로 나가는 동료들이 있어 따라 나가려고 했는데 요리를 한다 하니 우리 프로그램에 참여했어요. 삼미 씨는 기분이 안 좋은 날에는 빨갛게 립스틱을 바르고 선글라스를 끼고 나타나요. 그러고선 립스틱 바르고 선그라스 낀 날은 자기를 건들지 말라고 경고(?)해요. 삼미 씨처럼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 행위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나 미용실 갔다 왔어라온의 선생님들은 이들이 각자의 시선에 따라 사물을 만져보며 촉감을 느끼고 또한 향기를 맡고 느끼면서 표현활동을 하게 한다. 생활세계를 둘러싼 것들에 대해 감수성을 키워 조금씩이나마 삶의 독립 주체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선생님들의 이러한 태도는 정읍천사마을의 방향과 비슷하다. 표현행위나 삶의 자기결정권이 지적장애인들에게는 보호자에게 위임된 경우가 많지만 박현배 원장은 다르게 생각한다.우리는 시설 안에서만 생활하지 않아요. 이 사람들이 사회 속으로 들어가 비장애인과 만나길 바라거든요. 이쁘게 머리 손질을 하고 싶어 미용실에 가겠다고 하면 우리가 동행해줘요. 각자의 판단에 맡겨 능동적으로 선택해서 움직이게 하고, 우리는 그걸 도와주는 거고요. 다양한 학습과정을 경험하도록 하는 사회활동 프로그램을 진행해요. 그러다보면 어떤 부분은 예상치 않게 잘하기도 해요. 지적 능력이 떨어진다고 해서 못하게 하는 게 아니라, 뭔가를 발견해서 할 수 있는 가능성을 키워주려는 것이죠. 이런 맥락에서 지금 선생님들이 하시는 문화예술교육의 수확이랄까, 그 성과가 있는 것 같아요. 지적장애인들이지만 활동하는 것을 좋아한다. 머리 하러 정읍 시내에 다녀 오고 나선 나 미용실 갔다 왔어 하며 자랑한다고 한다. 정읍천사마을은 하루 일정 중 이들 각자가 원하는 희망활동을 1순위로 선택하여 활동하게끔 배려한다.△작품사진 전시회가 줄 메시지안전과 청결에 대해서는 매우 주의하는 모습이다. 경단 만들기처럼 불을 사용해야 할 때는 불 사용을 최소화하며 그때그때 주의를 환기한다.동글동글 빚은 경단 알을 삶는 곳으로 그 과정을 궁금해 하며 박삼미 씨가 접근하자 이현자 선생님은 요리 과정과 상황을 설명해주며 좀 떨어져 있어야 해요 라고 당부한다. 이들은 자기가 만든 음식에 대해 애착이 강하다. 이 날은 사회복지사 직원도 함께 참여했다.경단 만들기 체험하는 와중에 유성수 선생님은 그림 그리기도 잘 하고 사진에 관심을 많이 보이는 김건 씨에게 경단 만들기 하는 모습을 사진에 담아보도록 권유하고 피사체 조정하는 법을 가르쳐준다. 서툰 말, 어눌한 행동으로 담아내는 피사체 모습일지언정 김건 씨의 시선엔 또다른 세상이 열리는 과정일테다.처음엔 돌발행동이나 거친 행동을 하던 몇몇도 프로그램이 진행되면서 사그라들었다. 격려와 칭찬을 해주면서 이들과 소통한 효과다. 기회가 되면 이들과 함께 음악 합주를 하고 싶다는 유성수 선생님은 야외활동을 할수록 교육효과가 더 좋다고 한다. 세상에 나가 세상과 대화하고자 하는 이들의 욕망일까.올해 프로그램을 마무리하면서 할 이들의 작품사진 전시회는 이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나 왜곡된 시각을 벗어나게 하는 메시지가 있으리라 기대된다.<고길섶 문화비평가>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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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8.30 23:02

31일 명예퇴임하는 서거석 전 전북대 총장 "전북 교육 미래를 위한 봉사의 길 모색하는 중"

서거석(63) 전 전북대 총장이 35년 동안 몸담았던 대학 강단을 떠난다. 국립대에서는 드물게 직선 총장을 연임하고,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돌아와 강단에 섰던 그는 정년을 2년 남겨놓고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퇴임일은 오는 31일이다.그는 지난 2006년 12월부터 8년 동안 전북대 제15, 16대 총장을 지내면서 대학을 반석에 올려놓았다는 평을 받았다. 총장 재임 중 한국대학교육협의회장과 전국국공립대학 총장협의회장 등을 맡아 우리나라 고등교육 발전을 위해서도 열정을 쏟았다.퇴임을 앞둔 서거석 전 총장을 지난 25일 대학 연구실에서 만나 그동안의 소회와 지역 교육, 그리고 앞으로의 활동 방향에 대해 들었다.- 35년 교수 생활을 마감하고 총장으로 재직했던 대학을 떠나시는데, 소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전북 도민의 관심과 사랑 속에 지역 대학 발전을 위해 노력했고, 끊임없는 혁신으로 괄목할만한 성장도 이뤄냈습니다. 대학 구성원과 도민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물론 올해 개교 70주년을 맞은 전북대가 지역사회와 함께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열정의 끈을 놓지 않을 생각입니다.- 총장 재임 시절 세계 100대 대학 도약이라는 목표를 내세웠고, 실제 전북대 도약에 큰 성과를 냈다는 평을 받았는데요.지난 2006년, 총장으로 취임하기 직전에 전북대는 총체적인 위기였습니다. 대학평가에서 추락하고 일부 교수들이 비리에 연루되는 등 어수선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로 대학 구성원 모두와 소통하며 위기 극복에 노력했습니다. 잘 가르치기 위해 강의평가를 강화했고, 교수 연구력 향상을 위해 연구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그 결과 잘 가르치는 대학 1위에 오르고 각종 대학평가에서 국립대 12위에 랭크되는 등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뤄냈습니다. 교육과 연구, 행정서비스 분야에서의 소통과 개혁이 전북대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고 생각합니다.- 평생 교육자의 길을 걸어오셨기에 지역 인재양성에 특별한 관심이 있을 텐데요.전북은 인구가 줄고 경제적인 낙후도 심각합니다. 국가 예산 배정에서 소외되고 인재발탁의 기회가 줄어들면서 우리 지역의 몫을 찾지 못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우리 지역의 몫을 제대로 찾으려면 무엇보다 인재양성이 중요합니다. 초중고교 교육과 대학 교육이 균형적으로 발전해야 전북 인재를 국가 지도자로 길러낼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지역의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우선 초중등 교육이 정상적으로 이뤄져야 합니다. 대학에서 교육을 하다 보니 대학교육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초중등 과정에서 기초교육이 탄탄해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전국 최하위권으로 떨어진 기초학력 수준을 끌어올리고, 우수 학생이 전북을 대표하는 인재로 커 나갈 수 있도록 수월성 교육도 강화해야 합니다. 또 지역 대학 간 협력교육 등 대학의 혁신도 계속돼야 합니다.- 대학과 함께 초중등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셨는데요. 평소의 교육철학이나 소신을 말씀해 주신다면.모두가 공감하는 것처럼 교육은 사람을 열두 번 바꿉니다. 선생님의 따뜻한 격려와 부모님의 지속적인 관심이 있다면 우리 아이들이 지역과 국가를 이끌 미래의 동량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 전북을 살리기 위해서는 교육입도(敎育立道) 정책을 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초중등 교육을 적극 지원해서 인재를 길러내야 합니다. 교육현장에서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교권도 바로 세워야 합니다. 지역 정치권과 힘을 모아 그동안 불이익을 받았던 지방 교육재정 문제를 해결하는 일도 시급합니다.- 최근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전북후원회장을 맡으셨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어린 시절 갑자기 가세가 기울어 중학교 때 신문 배달과 학교 매점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어린이들을 돕고 싶었습니다. 전북지역의 경우 빈곤 가정 아동의 비율이 전국에서 가장 높습니다. 아직도 지원과 배려가 필요한 아이들이 많습니다. 도민 여러분의 적극적인 관심을 바랍니다.- 정년을 2년 앞두고 명예퇴직을 선택하셨는데, 앞으로의 활동 계획이 궁금합니다. 주변에서 지역 교육발전을 위한 역할을 권유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35년 동안 거점 국립대에 봉직하면서 대학 발전에 헌신할 수 있는 기회까지 얻게 돼 개인적으로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지역사회에 감사의 마음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평생을 교육자로 살아왔고 무엇보다 지역과 국가발전을 이끌 인재양성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기에 전북교육의 미래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많은 도민, 특히 일선 학교 선생님과 학부모님들로부터 고견을 듣고 있습니다.- 끝으로 전북 도민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은.아무리 좋은 정책이나 철학도 현장에 제대로 접목되지 않는다면 공수표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저는 소통과 참여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교육현장에서도 여러 주체의 적극적인 소통이 필요합니다. 전북 교육 발전을 위해서는 먼저 학생학부모교사 등이 적극적으로 소통협력해야 하고 각 시도교육청과 지방자치단체, 그리고 대학과도 유기적인 협력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 전북인은 예로부터 강한 교육열로 온갖 고초를 이겨내고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번영을 이루는 데 앞장서왔습니다. 저는 전북도민의 도전정신을 믿습니다. 전북교육의 미래도 활짝 열릴 것으로 믿습니다.● 서거석 전 전북대 총장은신문배달 소년서 국립대 총장까지국공립대학 총장협의회장 등 중책도중학생 때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신문 배달도 하고, 학교 매점에서 근로 장학생으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힘들었지만 그때 길러진 백절불굴(百折不屈)의 정신이 인생에 큰 힘이 됐죠.서거석 전 전북대 총장은 스물여덟, 이른 나이에 전북대 법대 전임교수가 됐다. 그리고 지난 2006년 말, 50대 초반에 전북대 제15대 총장에 뽑혔고, 구성원들의 지지를 얻어 제16대 총장까지 연임하면서 8년 동안 대학을 이끌었다.서 전 총장은 전주고와 전북대 법대를 졸업하고, 일본 중앙대(中央大)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20대 후반에 전임교수로 임용돼 국립대 총장까지 지내면서 탄탄한 길을 걸었지만, 어린 시절에는 몹시 어렵게 공부를 해야 했다. 초등학생 때 부친이 사업에 실패하면서 가족이 친척집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이 때문에 서 전 총장도 직접 학비를 벌어야 하는 형편이었다.정세균 국회의장과의 특별한 인연도 이 같은 가정형편이 계기가 됐다. 전주 신흥중에 다녔던 서 전 총장은 당시 한 울타리 내 신흥고 학생이었던 정 의장과 함께 학교 매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청소년 시절, 서로를 위하고 격려했던 인연이 계속되면서 지금도 거리낌 없이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사이라고 한다.그는 전북대 총장 재임 중 전국 국공립대학 총장협의회장과 전국 4년제 대학 총장 협의체인 한국대학교육협의회 회장, 국가교육과학기술자문회의 교육 분야 위원장 등 국가교육 관련 중책을 잇달아 맡았다.대학과 국가 교육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국민훈장 목련장과 대한민국 창조경영인상, 글로벌 경영대상 등을 받았다.지난 2014년에는 전북일보가 뽑는 올해의 전북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31일 명예 퇴임 때는 청조근정훈장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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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표
  • 2017.08.28 23:02

[길 따라 맛 따라 ② 전주 금암동 맛집골목] 순대부터 가맥까지 입이 즐거운 골라먹기

남도주유소는 한 때 전주 금암동의 랜드마크격이었다. 주변에는 대형 보험사 건물이 즐비하고, 금암1동주민센터와 전북일보 등이 자리하는 데도 근방 약속 장소를 찾을 때는 곧잘 남도주유소를 떠올렸다. 큰 규모도 아니고, 대중적으로 이용하는 곳도 아닌 남도주유소가 왜 금암동 일대의 길잡이가 됐을까. 큰 도로변 네거리에 접한 위치상 특성과, 큰 빌딩 들어서기 전에 일찌감치 자리를 잡은 선점 효과 때문이었을 게다. 주유소가 지난해 철거되고 현재 커피숍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나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는 남도주유소 골목이다.백제로와 기린로를 옆에 둔 옛 남도주유소 일대의 금암동 번화가는 전북은행 본점과 국민은행, 농협, 신협, 수협, 새마을금고, 보험회사 등 금융관련 회사가 밀집되어 있다. 또 인근에 시외버스와 고속버스 터미널 등이 있어 유동인구가 많은 교통의 중심지다. 그럼에도 덕진구 안에서 금암1동은 주민등록인구가 가장 적다. 금암2동을 합쳐도 2만명 정도에 불과하다. 아파트 보다는 단독주택, 원룸이 많아서다.옛 남도주유소 뒤편은 백제로가 뚫린 이후에도 달리 변화가 없었다. 좁은 골목길로 이어지면서 낯선 이가 목적지를 찾으려면 미로를 헤매기 일쑤다. 주차할 공간도 넉넉하지 못하다. 이런 불리한 여건에서도 이곳에는 오래된 맛집이 많다. 옛 남도주유소와 전북은행 본점을 대각선으로 삼을 때 몇 안 되는 주택과 원룸을 제외하고 모두 음식점이라고 할 만큼 보이는 게 맛집이다. 이곳 맛집이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금융기관과 전북대 등 큰 기관을 끼고 있어서다. 기본적인 고객을 확보한 까닭에 다른 지역과 달리 상대적으로 음식점의 생존기간이 긴 편이다.줄잡아 30여개 안팎에 이르는 이곳 맛집들은 전반적으로 규모가 작다. 대부분 음식점들이 10개 안팎의 테이블을 갖고 있을 뿐이며, 자체 주차장을 갖지 못한 경우가 태반이다. 특정 음식업종으로 집중되지 않은 다양성도 이곳 맛집 골목의 특징이다. 일반 백반에서부터 분식, 중국음식, 고기, 참치, 설렁탕, 추어탕, 순대국, 약식 집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분포돼 있다. 이곳 맛집 골목을 선택할 때 뭘 먹을까 고민할 필요가 없다. 별 생각 없이 그저 골목 한바퀴를 돌면 당기는 메뉴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또 낮 유동인구가 많아 저녁보다 점심에 더 붐빈다. 몇 업종의 음식점을 제외하고 1만원 안쪽에서 간단히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곳이 대다수다.△금암소바이렇게 고만고만한 음식점들이 즐비한 이곳에서도 맛집 골목의 대표 선수는 있게 마련이다. 그 하나가 금암소바(주인 황옥주, 69)다. 금암소바는 여름이면 손님들이 줄 서 기다릴 만큼 전국적인 명성을 갖고 있다. 방에 있는 2개 테이블을 포함해 총 11개 테이블에 불과하지만, 하루 고객 700~800명이 이 집의 맛을 보증한다. 소바의 맛은 국물에 달렸다. 담백하면서 시원하고 진한 국물맛이 이 집 소바의 특징이다. 그 비결을 묻자, 주인 황씨는 빙그레 웃는다. 웃음 뒤에는 어찌 영업비밀을 캐느냐는, 말도 안 되는 질문이라는 뜻을 담아서다.국물 맛의 비밀과 관련해 7~8년 전 이런 일화도 있었단다. 일본인 4명이 손님으로 와서 이 집 메뉴인 소바와 냉면, 콩국수 등을 고루 먹은 뒤 대뜸 일본에 분점을 내자고 제안했다. 소바의 본고장인 일본에서도 금암소바의 맛을 내지 못한다면서다. 어렵다고 말하자, 사례비를 줄테니 비법이라도 전수해달라고 했다. 주인 황씨의 대답은 물론 천부당만부당이었다. 금암소바의 진한 국물 맛은 중독성이 있는 모양이다. 미국으로 이민한 교포 중 여름이면 꼭 이곳을 찾는 분이 있다고 했다. 이 교포는 국물을 얼려서 미국으로 보내달라고 할 정도란다.황씨가 내는 소바국물은 40년 가까운 내공이 담겼다. 전주시내 유명 소바집(진미식당)에서 10년간 소바국물을 전담했던 경력도 있다. 소바 국물의 오묘한 맛은 기본적으로 재료에서 나온다. 멸치홍합다시마반지락 등 16가지의 싱싱한 재료를 3~4시간 끓인 후 간장정종 등으로 간을 맞춘다. 한 두가지 재료를 빠트리거나 재료의 분량이 맞지 않으면 제 맛이 나지 않는다. 황씨는 좋은 재료와 재료간 조화가 맞아야 한다고 비법을 귀띔했다. 음식점을 하는 사람들에게 팁이 될 만한 말도 했다. 손님 하나 하나의 입맛에 맞추다보면 음식을 버린다는 것이다. 손님마다 식성이 다른 데 그 입맛에 따르다보면 본연의 맛을 잃게 될 것을 경계하는 말이다. 주인의 맛으로 표준화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28년간 같은 맛으로 금암소바의 오늘에 있게 한 것도 개개 손님의 맛이 아닌, 그의 맛이었다.맛의 변화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전에 비해 국물이 싱거워졌다. 소바는 짜야 맛을 내는 데, 건강을 생각하는 고객들이 아무래도 짠 음식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어 그런 쪽으로 변했다. 국물 맛과 함께 이 집의 메밀면도 차별성이 있다. 식품회사가 아닌, 일반 가정에서 뽑는 면을 사용한단다.손님이 많으면 으레 큰 집을 구하고, 치장에 신경을 쓰기 마련이지만, 금암소바는 28년째 현재의 장소에서 그대로 있다. 흔히 분점을 통해 번화가로 향하거나 서울로 진출하지만 주인 황씨는 그저 금암동 맛집골목의 터줏대감으로 만족한다.△봉이설렁탕전북대 신 정문 앞에 자리 잡은 봉이설렁탕(주인 이양임, 73)도 금암동 맛집골목을 대표하는 곳이다. 설렁탕은 물가변동의 잣대로 쓰일 만큼 서민들에게 인기 있는 보양식이다. 옛 전북교육청 인근에서 현재는 중화산동으로 이전한 60년 전통의 신씨네설렁탕을 비롯해 경원동의 연지회관, 송천동의 족보설렁탕 등 전주시내 에서 설렁탕 잘하는 집도 많다.소의 머리, 무릎도가니, 뼈다귀 등을 넣고 푹 끓여 우려낸 설렁탕의 국물은 뽀얗다. 봉이설렁탕은 국물을 내는 데 소머리를 주로 사용한다. 설렁탕 추세가 살코기 쪽으로 변하는 데 비해 이곳은 소머리를 고집한다. 5시간 정도 뼈를 고아서 고기국물과 합쳐 내놓는 이 집 설렁탕은 고소한 국물과 쫀득쫀득한 고기 맛이 특징이다. 94년 문을 연 뒤 지금까지 이곳을 지키고 있다. 주인 이씨는 10년 가깝게 동생이 운영하는 인근 벽계가든에서 고기를 다뤘다. 다대기김치깍두기파김치 등 밑반찬은 지금도 본인 담당이며, 고기와 국물은 아들(오민섭, 42)에게 전수했다.이곳 역시 점심때면 16개 테이블이 손님들로 넘친다. 농구시즌이면 KCC 선수들의 아지트. 선수들이 땀을 많이 흘리기 때문에 자극적인 음식을 피하고, 속을 다스리는 데 적합한 음식이 설렁탕이란다. 요즘 같은 여름에도 하루 150~200명 정도가 다녀간다.금암순대(주인 이정숙) 역시 금암동 맛집의 터줏대감. 허름했던 바로 앞집에서 테이블을 늘려 이사한 후에도 계속 문전성시다. 집 분위기는 시골스러웠던 옛집이 더 정겨웠던 아쉬움도 있다. 전북 지역 곳곳에 산재한 유명 순대집과 비교할 때도 맛과 양, 밑반찬 등에서 결코 빠지지 않는 집으로 추천되고 있다. 금암순대에서 1차로 얼얼할 때 좀 서운하다 싶으면 인근 새움가맥이 그 뒤를 책임질 수 있다. 올 가맥축제에도 초대 받은 이곳은 더 깊은 골목에 자리잡은 숨은 가맥집이다. 한옥마을 베테랑 칼국수집을 연상시키는 금암면옥, 약초를 이용한 자연음식점 감로원, 팥칼국수의 정주분식, 닭곰전골의 정둔면옥, 쌈밥집 쌈가 등도 금암동 골목을 지키는 맛집들이다.△금암소바(278-0945)=소바(보) 6000원, 콩국수(보통) 6000원, 냉면(보통) 6000원, 사리 2000원, 콩물(1.5ℓ) 8000원△봉이설렁탕(271-0912)=수육 3만6000원, 접시수육 1만8000원, 사골떡국 8000원, 영양설렁탕(인사+버섯+대추+떡) 1만1000원, 설렁탕 9000원, 물만두4000원△금암순대(272-1394)=암뽕모듬(대) 2만 5000원, 막창모듬(대) 2만원, 머리고기(대) 1만 8000원, 순대 1만원, 순대국밥 8000원, 머리국밥 6000원

  • 기획
  • 김원용
  • 2017.08.25 23:02

[다문화-건강가정센터 통합] 이민 다문화정책 축소 위기…두 센터 차별성 인정해야

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이제 없어지나요? 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통합되어 없어지면 어떻게 되나요?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근무하고 있는 결혼이민자 베트남 통번역사 두엉씨는 갑작스러운 문의 전화를 받았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와 건강가정지원센터의 통합에 따라 다문화가족들도 궁금증과 불안감을 드러내고 있다.△통합 관련 의견수렴 편파성 논란다문화가족지원센터와 건강가정지원센터와의 통합은 보수정부 하에서 급속도로 진행돼왔다. 전국적으로는 101개소가 통합서비스 운영기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문재인정부와 이전 정부와의 다문화정책의 차별성은 특별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여성가족부 관계자는 다문화가족지원센터와 건강가정지원센터에 대한 통합은 정부 변화와 관계없이 추진될 것이라고 표명했다. 다만 지자체와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원하지 않으면 강제적으로 통합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의견수렴을 잘 해왔고 지역마다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강제적으로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지자체에서는 정부에서 요청하면 통합서비스 운영기관 지정을 추진할 수밖에 없다며 강압성이 있었음을 내비쳤다.여성가족부는 한국건강가정진흥원을 통해 통합관련 의견수렴을 하고 있는데, 한국다문화가족지원센터협회는 의견수렴 과정에서 통합되지 않은 다문화가족지원센터를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등 절차적 문제가 있다면서 반발하고 있다. 또한 여성가족부에서 구성한 민관추진단 17명에 대한 민간 현장전문가가 단독다문화가족지원센터는 4명에 그치는 불공정성을 지적했다. 그리고 민간추진위원단이 통합서비스에 대한 찬반의 입장을 논하는 것이 아닌, 통합추진을 위한 기구로써 작용하는 것도 문제로 지적했다.△통합서비스기관 문제점 노출다문화가족지원센터와 건강가정지원센터 통합 후 부작용이 이곳저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일반 내국인 가족들과 다문화가족들이 모이면 다문화가족은 한쪽에 치여 버리는 현상, 프로그램 신청 접수를 하면 내국인은 접수율은 70%인데 반해 다문화가족은 30%밖에 되지 않는 것, 프로그램 교육수준을 내국인 언어수준으로 하는 바람에 힘들어하는 결혼이민자 발생하는 것, 역으로 프로그램 수준이 너무 이주여성에 맞춘다며 항의하는 내국인가족 발생 등 다양한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또한 실천현장에서 다문화가족지원센터를 중심으로 통합한 운영기관의 경우와 건강가정지원센터를 중심으로 통합했을 때, 다문화가족에 대한 고충과 이해에 상당한 차이가 발생한다고 현장 관계자는 밝혔다.진안군다문화가족지원센터 박주철 센터장은 지금부터라도 외국인정책기본계획과 다문화가족정책기본계획 등이 통합적 이민다문화정책기본계획이라는 틀 속에서 고민되어야 한다면서 여성가족부의 통합에 대한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했다. 여성가족부는 통합과정에서 현장에 있는 당사자인 다문화가족들의 의사를 물어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추진한 것, 법률적 근거 없이 여성가족부 지침만으로 통합을 추진한 것, 통합서비스센터에 대한 인센티브 예산 부여와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 대한 예산에 대한 불이익을 준 것, 통합센터는 시범센터일 뿐인데, 3년이 지나도록 통합 이후 나타나는 부작용 등을 함구하고 공론화하지 않는 것 등을 문제점으로 지적하면서 통합 중단의 필요성을 밝혔다.△다문화가족지원법 폐기 우려다문화가족지원법이 만들어진지 10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다문화가족지원센터는 절반으로 줄었고, 이후 계속될 통합작업으로 인해 다문화가족지원법이 유명무실화되고 있다는 비판이 일어나고 있다.문제는 다문화정책의 큰 축인 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진로가 국가의 모든 부처가 다문화정책의 큰 틀 속에서 결정하지 않고, 여성가족부 하나의 부처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는 한계성이 있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사라지는 것은 다문화정책의 실패 또는 후퇴를 의미한다. 다문화 계층은 결혼이민자뿐만이 아닌 유학생, 이주노동자, 재외동포, 새터민 등 그 폭이 다양하고 넓다. 여성가족부가 가족정책을 강화하면 할수록 다문화정책은 후퇴하고 있다.여성가족부는 여성과 가족이라는 핵심 단어를 중심으로 정책방향을 결정하고 나갈 수밖에 없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여성가족부로서는 이민 다문화정책의 큰 흐름을 짚어볼 여력이 없다. 여성가족부 부처의 성격 상, 다문화 정책의 관점보다 가족의 관점으로 모든 것을 볼 수밖에 없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 대한 무리한 통합은 여성가족부의 정책전문가들이 가족분야 전문가를 중심으로 구성되고 다문화정책 전문가가 균형 있게 자리 잡지 못했을 것이라는 비판도 가능하게 한다.현장의 전문가들은 여성가족부가 저출산 고령화현상과 인구정책 등과 향후의 이민자 증가 등 다양한 문제를 근시안적으로 보고 있다며 국가의 큰 틀 속에서 이민 다문화 현상의 거대한 숲을 보지 못하고 가족이라는 나무 몇 그루만을 보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가족정책의 관점에서만이 아닌, 다문화 정책적 관점도 놓치지 않는 노력이 필요하다. 국가의 중요한 정책결정이 한 개의 부처에 결정되기 보다는 중앙정부 모든 부처가 공동으로 협력하고 논의하면서 대통령이 직접 챙기는 이민다문화정책 수립이 필요한 시점이다.이지훈 전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 전북 거점센터장■ 법률근거 다른 두 기관 일방적 통합 편법 논란사업 지침만으로 국가의 다문화가족 지원 시스템을 송두리째 바꿔놓고 있어요.국가가 얼마나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고 있는지를 여성가족부가 보여주고 있어요.다문화가족지원센터 관계자들의 말이다.여성가족부는 다문화가족지원센터와 건강가정지원센터에 대한 통합을 추진해왔다. 2014년부터 추진되어졌던 것이 2017년 현재는 107개소로 통합 추진되었다. 그러나 사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와 건강가정지원센터의 통합은 편법이라는 지적이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는 다문화가족지원법 제 12조에 설립근거를 두고 있고, 건강가정지센터의 설립근거는 건강가정기본법 제 35조이다. 두 기관은 각기 다른 법률적 근거에 의해 존재하는 서로 별개의 독립적 기관이다.여성가족는 법률이 아닌 사업지침을 통해 다문화가족지원센터와 건강가정지원센터에 대한 일방적 통합을 추진해오고 있는데, 통합서비스운영기관이라는 시범사업을 통해서다. 보통 시범사업의 경우 최초 몇 개를 중심으로 사업을 진행한 후 그에 따라 사업의 긍정적 요소와 부정적 요소 등을 분석한 후 사업의 타당성이 검증이 되면 법률을 제정하고 사업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시범사업이 107개소로 전체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시범사업이라 보기 힘들다.다문화가족지원센터와 건강가정지원센터의 통합정책은 박근혜 정부과 차별 없이 동일하게 이어지고 있다. 현장 관계자들은 여성가족부의 밀어붙이기식의 통합강행은 문재인 정부의 정의로운 나라정신에도 부합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여성가족부가 이렇게 박근혜 정부가 하던 방식 그대로 변칙과 편법을 행하는데, 어떻게 일본과의 위안부 합의에 관한 문제 등에 있어서 그 부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면서, 여성가족부가 정의로운 선택으로 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를 지켜주길 바란다고 현장의 관계자들은 요구하고 있다.이지훈 전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 전북 거점센터장/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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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8.24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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