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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고전 중점 출판하는 서해문집 김흥식 대표 "문명 흔적 담은 백과사전 발간 평생의 과제"

종이책이 외면 받는 시대다. 출판유통시장 매출 규모는 해마다 줄어들거나 정체된 상태고, 신간 발행종수 역시 감소하고 있으니 이미 종이책은 그 존립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실 종이책의 위기는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거니와 우리나라만이 처한 현실이 아니다.그렇다면 이제 종이는 더 이상 책의 유효한 그릇이 될 수 없는 것일까. 출판의 형식과 유통방식이 달라지면서 종이책의 존재가 위협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아직 종이책의 존립은 건재(?)하다. 국민 독서율이 높은 영국의 경우, 2018년에는 전자책 매출이 종이책의 매출을 추월할 것이라는 예고가 있었다. 태블릿 기기 이용으로 영국인들의 독서 습관이 변화하고 있는 추세에 따른 변화다. 그러나 최근 영국인들이 전자책을 멀리하고 종이책으로 회귀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흥미로운 보도가 있다. 예상과는 달리 전자책의 약세는 미국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다.그럼에도 책을 읽는 인구가 갈수록 줄어드는 현실로 보자면 종이책의 미래를 기대하는 일은 무모하다. 게다가 경제 논법으로 따지자면 출판 산업은 미래 산업이 되지 못한다. 한해에도 적지 않은 출판사가 들고 나는 현실이 그것을 증명한다.30년 가깝게 출판사를 운영해오면서 그 자신 책의 저자이자 번역자이자 출판기획자로 살아온 도서출판 서해문집 김흥식 대표(60)를 만났다. 인문과 역사와 고전을 주목하면서 특히 역사와 고전을 독자들과 가깝게 만드는 작업을 신념으로 지켜온 그를 만나면 종이책의 유효함, 책읽기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1989년 서해문집을 세워 이듬해부터 책을 내오기 시작한 그는 다른 출판사들이 주목하기를 꺼리는 역사와 고전을 일찌감치 부터 출판사의 중심에 세워놓았다. 서해문집의 대표시리즈인 〈오래된 책방〉이 그 기둥이다. 그중에서도 직접 번역해 출간한 〈징비록〉은 그의 신념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 대표적 결실이다. 출판사 직원들조차도 출판을 만류했었다는 이 〈징비록〉은 어느 날부터인가 슬슬 팔려나가기 시작하더니 드라마로 제작되면서 베스트셀러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으며 이 흐름을 타고 20여개의 출판사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징비록〉 짝퉁(?)을 펴내면서 고전 출판의 물꼬를 열었다.초기에 냈던 책들은 사실 제가 내고 싶은 책들이 아니었어요. 팔릴 것을 생각하며 낸 책들이었죠. 그런데 생각만큼 팔리지도 않았어요. 어느 날 문득 평생 출판을 하겠다고 마음먹었으니 내가 내고 싶은 책만 내다 그것도 안 되면 우동집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런 각오로 처음 기획한 것이 〈오래된 책방〉시리즈예요. 어떻게 하면 고전에 독자들을 쉽게 다가가게하고 읽히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 끝의 결정이었지요.인터뷰는 예상보다 길어졌다. 그의 소문난 독서편력은 풍부한 지식이 되어 전해지는 책이야기와 시대를 바라보는 명쾌한 관점과 분석으로 담겨져 시간을 잊게 했다.책 읽는 사회와 좋은 책을 만드는 나라를 꿈꾸는 김 대표와의 인터뷰는 덕분에 즐겁고 유쾌했으며 책읽기의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깨닫게 하는 통로가 되었다.-서해문집은 언제 시작하셨습니까.등록은 89년에 했는데 책은 그 이듬해부터 냈습니다. 그때는 직장을 다니면서 출판사를 운영했어요. 대학 3학년 때 출판을 하려고 마음을 먹었거든요. 그러나 출판사를 운영할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이 되지 않아 돈을 벌어야 했어요. 10년 동안 직장 생활을 했지요. 출판사는 그때까지만 해도 허가제여서 마음대로 등록을 못했어요. 허가제가 풀리면서 일단 등록을 한 것인데, 직장 생활을 하고 있으니 1년 정도는 이름만 갖고 있었던 거죠.-1990년부터는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출판에 뛰어드셨나요.곧바로 전념한 것은 아니었어요. 개인적으로는 제 인생에 의미 있는 일로 꼽고 있는데 직장을 그만두자마자 〈영화저널〉이라는 주간지를 창간했어요. 영화비평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주간지입니다.-쉽지 않는 일이었을 것 같은데요.당시 영화나 연예 관련 주간지는 〈선데이서울〉 등 선정적인 잡지가 대부분이었어요. 그런데 영화전문 비평을 내세웠으니 대중적인 관심을 기대할 수 없었죠. 다행히 영화계에서 아주 반가워했어요.-운영 자체가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처음에는 무가지로 나왔는데. 나중에는 자금이 없어서 유가지로 돌렸죠. 지하철에서 팔려야 하는데 그 통로를 뚫기도 쉽지 않았어요. 판매하는 곳에서는 이런 신문을 누가 보냐는 식이었죠. 그래도 몇 군데서 받아주어 팔기 시작했는데, 저희도 놀랄 정도로 팔려나가기 시작하는 거예요. 1위가 일요신문, 2위가 영화저널이었죠. 파는 사람들도 깜짝 놀라더군요. 글자밖에 없는 영화지가 그렇게 팔려나가니. 그러나 신문은 사실 광고가 뒷받침되어야 운영이 되는 것이잖아요. 우리는 그런 능력이 없었어요. 영화전문가들까지 힘을 보태며 노력했지만 결국은 손을 들었는데, 그 시점에 그냥 접기가 너무 아쉬웠어요. 한겨레신문사를 찾아가 영화전문주간지를 만들어보라고 제안했어요. 〈씨네 21〉이 그래서 탄생하게 되었죠.-영화와 특별한 인연이 있었습니까.영화를 좋아한 이유죠. 그 당시 정보를 다루는 무가지들이 나오기 시작할 때였는데, 자본주의적인 것 말고 영화를 제대로 알리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다가 후배와 의기투합한 것이 〈영화저널〉이었어요. 30대 초반이었는데 그나마 모았던 돈 다 없애고 다시 저는 거지가 됐죠.(웃음) 그래도 우리나라에 영화비평 저널을 뿌리내리게 했다는 보람이 있습니다.-그리고 나서 서해문집으로 돌아오셨군요.서해문집으로 돌아와 출판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 그러나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어요. 출판사를 운영하려면 자금이 필요했죠. 직장을 다시 얻어 일을 했어요. 5년 정도 일하면서 돈을 다시 모았어요. 자연히 그 시기 서해문집은 유명무실했죠. 몇 권 낸 책도 좋은 책은 아니었어요. 2000년 4월 직장에 사표를 내고 이제는 내고 싶은 책을 내자 마음먹었습니다. 그런 각오로 처음 기획한 것이 〈오래된 책방〉 시리즈예요.-〈오래된 책방〉의 기둥이 된 〈징비록〉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직접 번역까지 하셨죠.조그만 출판사이다 보니 처음에는 번역자를 만나기도 어려웠어요. 나서는 사람이 없어 제가 할 수 없이 하게 된 것입니다. 징비록은 제가 좋아하는 책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그 책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직원들이 누가 읽겠느냐며 출간을 반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지요.-그런데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하셨잖아요.내심으로는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가치 있는 책이니 내야한다고 고집했어요. 조금씩 팔리기 시작했는데 1년쯤 지나고 〈불멸의 이순신〉이 드라마로 제작되면서 갑자기 〈징비록〉을 찾는 독자가 급속히 늘어나는 거예요. 드라마에서 유성룡 선생이 긍정적으로 그려졌거든요. 그 후에 오래된 책방 시리즈로 〈난중일기〉도 나왔는데 역시 잘 팔렸어요. 〈오래된 책방〉 시리즈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죠. 번역자를 구하는 일도 쉬워졌고요. 물론 직원들에게 체면도 서게 됐죠.(웃음)-당시 〈징비록〉은 여러 출판사에서도 발간되었었죠.맞아요. 그 전까지는 징비록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드라마가 인기를 끌고 책이 팔리기 시작하니까 20종 정도가 나왔어요. 대한민국 출판계의 잘못된 풍토이기도 한데, 그것이 결국은 베껴먹기거든요. 그러나 어쨌든 우리 고전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게기가 되었으니 그것으로 의미는 찾았다고 생각합니다.-그즈음부터 고전 출판이 활발해졌나요.그렇다고 봐야합니다. 그러나 고전을 출판하려는 많은 출판사들이 서해문집 때문에 고전 시리즈를 기획했지만 포기했다는 이야기가 많았어요. 저희는 텍스트에만 주목하지 않고 사진 그림 일러스트 자료의 비중을 높였거든요. 일단 예산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었죠. 이전까지의 고전은 원문과 해설, 번역 등으로만 구성되는 것이 다반사였어요. 그런데 저희는 원문 대신 본문을 쉽게 읽히게 하고 사진 등의 자료를 많이 넣어 우선 독자들이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구성했어요.-서해문집의 효자가 된 〈징비록〉의 번역자이시니 인세도 꽤 받으셨겠습니다.한 푼도 받지 못했어요.(웃음) 2만부는 족히 넘었는데, 제가 출판을 시작하고 난후 처음으로 베스트셀러 10위에 올라간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어요.-내고자 하는 고전은 아직도 많습니까.우리가 모르는 훌륭한 고전이 많으니까요. 그런 책들을 알려야하니 과제가 많습니다.-고전은 결국 전통과 맞닿아 있는 것인데, 전통을 고루한 것이라는 인식이 크잖아요. 그런데 말씀을 들으면서 징비록 같은 고전이 책으로서 성공한 요소를 보면 전통을 고스란히 고수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책이 지닌 의미가 무엇이냐를 생각해보면 그렇죠. 자기계발서나 경제경영서라고 하는 것들을 저는 방울도마토나 벼를 심는 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봄에 심어서 가을에 추수를 하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쌀만 먹고 살수는 없다는 것이에요. 예를 들면 사과는 나무를 심고 최소한 3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배는 5년을 기다려야 하죠. 숙성해서 우리에게 자양이 되는 시간이 되기까지 걸리는 기본적인 시간이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책을 지나치게 조급하게 읽으려고 합니다. 경제경영서나 자기계발서류의 책들은 정보나 기술은 전할 수 있겠지만 내가 생각했던 모든 사고의 틀, 이를테면 작은 우주라고 하는 공간이 폭발해서 더 커진다는 느낌, 아니면 다른 우주로 나아간다는 느낌은 절대로 받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고전이나 인문 분야처럼 본질을 다루는 책들을 읽다보면 그것이 어느 날 탁 터지는 때가 있거든요. 갑자기 내가 상상하는 세계가 커져버리는. 그랬을 때 만나는 즐거움이 얼마나 황홀한 것인지. 독서의 그 즐거움을 알려주어야 하는데 우리는 독서를 현실적으로 무슨 이익을 주는 것처럼 가르치고 있죠.-평생의 과제로 삼고 있는 책이 있습니까.물론입니다. 백과사전에 관한 책을 쓰고 싶어요.-백과사전을 주목하는 이유가 있겠습니다.백과사전은 한 나라 문명의 집합입니다. 우리나라는 백과사전의 의미를 너무 소홀하게 취급하죠. 지금 우리나라에는 백과사전이 없습니다. 다 인터넷 백과사전이죠. 출간이 안 되니 헌책방에 가야만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백과사전이란 모든 것을 종합하는 백과사전이예요. 책의 역사를 보면 극히 소수의 지배계층이 독점하고 있던 지식이 시민들에게 확장된 것이 백과사전으로 시작하거든요. 백과사전은 16세기부터 태동 합니다. 르네상스 지나고 소위 시민계급이 형성되면서 백과사전이 나오게 되죠. 일본도 백과사전을 처음 접한 것이 서양백과사전 번역을 통해서인데 당시 일본 사람들은 충격을 받습니다. 우리가 너무 문명에 뒤떨어져 있었구나하는 자각이죠. 그래서 일본은 백과사전을 매우 중시합니다. 지금도 일본은 종이 백과사전이 팔리고 있고, 덕분에 개정판이 계속 나오고 있어요. 부러운 일이죠.-우리나라도 백과사전이 있지 않습니까.우리는 1980년 동아백과사전이 처음으로 나왔어요. 그 다음 나온 것이 번역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인데 그것은 우리나라 백과사전이라고 볼 수 없죠. 극단적으로 말하면 우리나라는 대한민국의 모든 문명을 기록한 백과사전을 낸 적이 없어요.-인터넷을 통해 사전의 기능을 활용할 수 있는 것도 종이 백과사전의 출간을 막는 이유가 될 것 같습니다.맞아요. 그런데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인터넷 사전과 종이사전의 차이가 있는데, 우리가 백과사전을 찾는 것은 모르는 것을 알고자 찾는 것이거든요. 모르는 것을 알고 싶어 찾는 것인데, 인터넷으로 모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나요. 제목이나 이름이라도 알아야 검색이 가능하죠. 종이 백과사전은 그렇지 않습니다. 펼치면 몰랐던 사람, 몰랐던 사건도 알게 됩니다. 결정적 차이는 종이사전은 모르는 것을 내가 습득하는 것이고 인터넷 백과사전은 내가 아는 것을 더 많이 아는 것이에요.백과사전에 대한 중요성은 인터뷰 말미까지 이어졌다.인문학도 중요하지만 백과사전을 만드는 일은 정말 중요한 과제예요. 백과사전을 집필하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는 그는 개인의 힘으로 이루어내기에는 한계가 너무 큰 백과사전 출간을 위해 우선 백과사전의 의미에 관한 책을 낼 계획이다. 이를테면 왜 우리가 백과사전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제기이자 답이다.많은 분들이 백과사전을 객관적 지식을 전달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백과사전은 사실 그것이 아니에요. 문명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을 담는 것이 백과사전이죠. 그렇다면 대한민국도 우리만의 백과사전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김 대표가 일본인이 백과사전에 대해 쓴 글이라며 덧붙인 이야기가 있다.백과사전은 지나간 것들이라고 하지만 지나간 것들이 옳은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 자체가 문명의 흔적이라는 사실이다.그의 열정으로 우리가 썩 괜찮은 백과사전을 우리 시대에 가질 수 있으면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는가.● [김흥식 대표는] '팔릴 수 있는 책'보다 '내고 싶은 책' 기획김흥식 서해문집 대표는 군산이 고향이다. 초등학교 때 서울로 이사와 서울사람이 되었지만 어린 시절의 경험과 기억이 삶을 가장 풍요롭게 하는 바탕이 되었음을 그는 잘 알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집안의 장손이었지만 가난 때문에 쫓겨나다시피 고향을 떠나 순창에서 터를 잡았다. 일제 때 군산으로 와 직장을 잡은 아버지는 배움의 부족함을 혼자 공부하는 노력으로 극복했다. 늘 글을 가까이 했던 아버지 덕분에 그와 형제들은 자연스럽게 책을 가까이 하는 습관을 갖게 됐다.책 읽는 즐거움을 열어준 것은 어린 시절, 집에 배달되었던 6종의 일간지였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신문 읽기 보다 소중한 읽기는 없다고 생각한다.중학교에 들어가서는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며 많은 책을 읽었지만 고등학교 시절에는 노느라 바빠(?) 책과 떨어져 지냈다. 대학은 문과를 선택하고 싶었지만 형과 누나가 모두 문과를 지망하자 다들 문과를 가면 집안은 누가 먹여살리냐는 아버지의 강권에 상대(서강대)를 택했다. 억지로 선택한 전공에 마음이 갈 리 없었다. 4년 동안 거의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책과 함께 지낸 것은 그 때문이었다. 출판을 평생의 업으로 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그즈음이었다. 출판사를 차리기 위해 우선 취직을 했다. 전공을 살려 은행에 들어갔으나 아무래도 내가 갈 길이 아니다는 생각을 했다. 한두 차례 이직을 거쳐 광고회사 코레드에서 근무하면서 89년 출판사 〈서해문집〉을 등록하고 90년부터 책을 내기 시작했다. 직장을 그만둔 후 출판사 일과는 별개로 영화평론 주간지 〈영화저널〉을 창간했다. 〈영화저널〉은 우리나라의 영화 비평 문화를 한 단계 끌어올리고 전문 저널지 창간을 이끌어내는 바탕이 됐다. 그 역시 인생에서 의미 있는 일을 꼽으라 하면 〈영화저널〉 창간을 내놓는다.출판사 일에 전념한 후에는 팔릴 수 있는 책보다 내고 싶은 책을 기획했다. 자연스럽게 인문과 역사와 고전 분야의 책들이 중심에 섰다.어릴 때부터 축적해온 독서편력으로 그는 여러 권 책의 저자이자 번역가가 됐다. 서해문집의 베스트셀러로 꼽히는 〈징비록〉은 그가 직접 번역한 책이기도 한데, 우리 출판계가 고전 출간에 눈을 돌리게 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행복한 1등, 독서의 기적〉 〈다르다고 틀린 건 아니야〉 〈백번 읽어야 아는 바보〉 〈한글전쟁〉등 형식도 다양한 책들이 그의 글쓰기로 책이 됐으며, 〈안중근재판정 참관기〉나 〈전봉준재판정 참관기〉 같은 역사적 자료들이 번역돼 책으로 나왔다.2007년에 펴낸 〈세상의 모든 지식〉은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책으로 꼽힌다. 책으로부터 얻은 지식을 모아 낸 이 책은 인류가 이루어온 모든 지식과 지성의 흔적을 독자들에게 쉽고 흥미롭게 전해주는, 독자들에게는 더없이 귀한 선물이 됐다.제대로 된 백과사전을 만드는 것을 출판인으로서 가장 큰 목표로 삼고 있는 그는 서울국제도서전 기획단장과 파주 북소리 기획단장으로 일했으며 지금은 책읽기와 강연으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최근 파주출판도시 입주기업협의회가 운영하는 출판산업체험센터 활성화 책임(?)을 맡아 새로운 고민을 하고 있다.

  • 기획
  • 김은정
  • 2017.05.05 23:02

[⑧ 효녀 심청과 실크로드] 효녀 심청, 한·중 해로를 건너다

장님 아버지를 위해 공양미 300석에 인당수에 몸을 던진 후 연꽃에 실려 세상으로 되돌아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했다는 효녀 심청 이야기는 실크로드와 관련이 있다. 효녀 심청과 실크로드,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을까?심청 설화가 탄생했던 시기는 백제가 이웃 진(晉)나라와 교류하던 때로 심청이 공양미 300석을 받고 간 곳은 인당수 속 용궁이 아니라 중국의 대표적인 관음성지이자 해양 실크로드의 중심지인 절강성 보타산(普陀山) 부근 심가문(沈家門)이었다. 현재 중국 절강성 심가문에는 심청을 기리는 사당인 심원(沈院)이 세워져 있다. 효녀 심청과 관음 그리고 실크로드에 관한 이야기를 탐색한다.곡성 관음사 연기설화심청전의 원형 설화 가운데 국문학계에서 가장 널리 인정받고 있는 것은 〈관음사 연기설화 원홍장 이야기〉이다. 심청의 원래 이름인 효녀 원홍장(元洪莊) 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옛날 장님인 원봉사가 일찍이 부인과 사별하고 홍장이라는 어린 딸과 가난하게 살았다. 어느 날 원봉사는 길에서 성공(性空)이라는 스님을 만났다. 성공은 원봉사에게 절을 하면서 전날 밤 꿈에 부처님께서 내일 아침에 길에서 만나는 장님이 너를 위해 큰 불사를 해줄 것이다하였다고 하자, 원봉사는 집에는 곡식 한 톨 없지만 어린 딸 하나가 있으니 사찰을 짓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바치겠다고 하였다. 그때 홍장의 나이 열여섯이었다.홍장은 애통해하며 아버지께 하직하고 성공 스님을 따라나섰다. 성공 스님은 길을 가다 바다를 바라보고 쉬던 중, 중국 진나라 사신을 만나 공양미 300석을 받고 원홍장을 사신에게 인계하였다. 원홍장은 사신을 따라가 진나라에 가 황후가 되었다. 황후는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황후 홍장은 고향과 장님 아버지를 잊을 수 없어 관음보살상을 만들어 고국에 보내며 말하길, 이 관음상을 실은 배가 표류하거든 멈추는 곳에 모시도록 하여라라고 지시하였다.홍장이 보낸 관음상을 실은 배가 표류하다 멈춘 곳은 낙안포 바닷가였다. 이튿날 성덕이라는 아가씨가 낙안포 바닷가에서 한 척의 배를 발견하고 다가와 멈추었다. 성덕은 배 위에 금빛 관음상이 있는 것을 보고 몸을 굽혀 예배한 다음 등에 업으니 새털처럼 가벼웠다. 성덕은 열하루를 걸어 지금의 곡성 관음사 부근에 이르니 새털처럼 가벼웠던 관음상이 태산처럼 무거워져 한 걸음도 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관음상을 봉안하고 절을 지어 성덕산 관음사라 부르게 되었다.성덕산 관음사 설화는 세 가지 중요한 점을 담고 있다. 첫째, 심청의 본명은 원홍장이었다. 둘째, 심청은 중국 사신에게 공양미 300석을 받고 팔려가 진나라로 가 황후가 되었다. 셋째, 고국에 관음상을 보내 백제 최초의 사찰이자 한국 최초의 관음 도량인 관음사가 세워졌다. 그런데 성덕산 관음사 설화는 다음 몇 가지 점을 의문으로 남겨두고 있다. 첫째, 효녀 원홍장은 어떻게 심청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는가? 둘째, 심청은 한국을 떠나 중국 진나라 어디에 도착해 살았는가? 셋째, 심청은 왜 장님 아버지를 위해 관음상을 보냈는가? 이 세 가지 수수께끼는 중국 절강성 보타산 부근에 있는 심청 사당 심원(沈院) 이야기를 통해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보타산 심가문(沈家門) 설화심청 사당 심원(沈院)은 중국의 대표적인 관음성지인 보타산(普陀山) 부근 심가문(沈家門)에 있다. 심가문은 성이 심씨인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으로 오늘날도 많은 심씨가 이곳에 살고 있다. 심원은 심청을 기리는 심덕정사(沈德精舍)와 효녀관, 심청의 배우자였던 심국공(沈國公)의 거처인 국공청(國公廳), 작은 호수 옆 정자인 박아청(博雅廳)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심청 사당을 건립할 정도로 효녀 심청에 대해 칭찬이 자자했던 심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심청 이야기는 이렇다.백제의 원홍장이란 어린 효녀는 장님 아버지의 길러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성공 스님의 사찰에 시주되었다. 성공 스님은 백제와 무역 거래를 하고 있던 절강성 보타섬의 부자 상인인 심국공에게 공양미 300석을 받고 팔았다. 심국공은 홍장을 자신의 고향인 심가문으로 데리고 간 후 심청으로 이름을 고쳤다. 심청은 중국에서 행복하게 살았지만, 고국의 장님 아버지를 잊을 수 없었다. 심청은 부친을 위해 중국 관음성지 보타산의 관음상을 한국으로 보냈고, 그 공덕으로 장님 아버지는 눈을 떴다. 한국에 보낸 관음상을 모신 사찰이 바로 곡성 관음사다.한중 심청 설화 속 역사적 사실흔히 소설은 삼실허칠(三實七虛)이라 한다. 즉 소설은 역사적 사실은 30%, 나머지 70%는 허구로 되어 있다는 말이다. 한국과 중국에 전해 내려오는 심청 이야기는 전설인 탓에 차이가 있지만, 다음 몇 가지 점은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다.첫째, 심청의 원래 이름은 원홍장이었고, 중국 심씨 집성촌에 시집을 가 심청으로 개명하였다.둘째, 심가문은 현재 절강성 주산(舟山)시의 한 동네 이름으로, 평창동이나 성북동에 비길만한 부촌이다. 공양미 300석은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약 1억 원이 되는데, 심청이 시집간 심국공 집안은 이 정도를 지급할만한 부잣집이었다.셋째, 심청이 배를 타고 백제에서 중국으로 간 곳은 해상 실크로드의 중심 항구 도시인 영파(寧波)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과거 명주(明州)로 불렸던 영파는 현재도 시내 중심가에 고대 한국 상인들이 머물렀던 고려관이 남아 있고, 보타산에는 장보고 기념비가 세워져 있을 만큼 한중 해로의 주요 항구였다.넷째, 심가문은 중국 절강성 북쪽 바다에 위치한 중국 불교 4대 명산 보타산 옆에 있다. 인도 전설에 의하면, 관음보살이 사는 곳은 남인도의 포탈라카(potalaka)인데 이를 한자로 음역하면 보타락가(普陀洛迦)가 된다. 관음보살의 중국 거주지를 뜻하는 보타산은 바로 보타락가에서 온 말이다. 관음성지 보타산 부근에 살았던 심청은 관세음보살상을 자주 찾았고, 한국에 장님 아버지를 위해 관음상을 보냈던 것이다.관음을 모시는 사찰은 인도와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 모두 해안가에 있다. 내륙에 위치한 곡성 관음사의 심청 이야기는 백제 시절 한중 해로의 구체적인 항로를 알려주는 한편 심청이 백제 최초의 사찰이자 한국 최초의 관음도량을 세운 해상 실크로드의 개척자 역할을 했음을 말해준다.

  • 기획
  • 기고
  • 2017.05.05 23:02

[진안군 안천면] 일부 마을 용담호 수몰 아픔…한승헌 전 감사원장 고향

대덕산과 국사봉 지장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안천면은 본래 용담현의 북면이었는데, 북면은 이후 일북면과 이북면으로 나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이북면 전부에 일북면 삼락리, 무주군 부남면 교동 일부를 흡수해 안천면이 됐다.예로부터 하양 허씨와 청주 한씨, 의성 정씨, 낙안 김씨, 장수 황씨 등 5대 문중이 각 마을에 정착해 살아왔으며, 집성촌 마을마다 서당이 있어 경쟁적으로 교육에 힘썼다.면적이나 인구수로 보면 전국에서도 가장 작은 고을이지만, 진안읍과 무주읍, 금산읍, 장수읍과 각각 20km씩의 거리에 있어 교통도시 역할을 했다. 한 때는 5일장이 서기도 했다. 또 전국에서 유일하게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을 통합 운영하는 안천초중고교가 이 지역에 있다.2001년 전북과 충남에 맑은 식수원을 공급하는 용담댐이 건설되면서 삼락리 대부분과 노성리신괴리 일부분이 수몰되었으며, 안자천(顔子川)이 흐른다고 해서 안천면(顔川面)이라고 했다.안자천은 진안천, 주자천, 정자천 등 용담댐으로 흘러드는 물줄기 중에서 가장 길이가 짧으며, 세수나 할 만큼 작은 물줄기라는 뜻으로 얼굴 안(顔)자를 쓴다. 물이 금방 말라서 항상 가뭄이 심한 지역이었으나 용담댐이 생긴 뒤로는 안자천의 물이 밖으로 나가지 않고 항상 마을 앞에 넘쳐난다. 어렵기만 하던 안천의 살림이 이때부터 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용담댐관리사업소가 위치해 있다.△관계관계 인사로는 우선 전북대 법대를 졸업한 한승헌 전 감사원장(83)이 꼽힌다. 한때 검찰에 근무하기도 했으며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에 양심수들을 변론하는 등 인권변호사로써 이름을 날렸다. 72년 여성동아에 쓴 〈어떤 조사(弔辭)〉로 필화를 겪으며 구속됐으며, 이 때 129명의 변호인단이 변론에 나서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17대 감사원장과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위원장, 전북대 및 가천대 석좌교수 등을 지냈다.허재영씨(83)는 국토개발원장과 서경대 총장, 하버드대학원 객원교수를 거쳐 건설부장관을 지냈으며, 한때 안천면 서울향우회장을 맡기도 했다. 완주군수와 정읍군수를 지낸 허석철씨(고인)가 부친이다.또 허홍석씨(고인)는 무주고창옥구남원김제군수를 지냈고, 허재송씨(고인)는 전북도청 민방위국장이었으며, 성점수씨(61)는 전주세무서장과 서울 동작세무서장을 지냈다.△교육계한연종씨(83)는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하고 군산대 자연과학대 수학과 교수로 부임한 뒤 91년 3월부터 95년 2월까지 군산대 초대 직선제 총장을 지냈다. 허영민씨(84)는 전북대 법대학장 및 행정대학원장,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인 헌정제도연구위원, 전북도교육위원회 교육위원을 지냈으며, 초대부터 3대까지 진안교육청 교육감(당시에는 시군교육청의 장을 교육장이 아닌 교육감으로 불렀다)을 지낸 허정석씨(고인)가 부친이다. 한 전 총장과 허 전 학장은 한승헌 전 감사원장의 초등학교 동창이기도 하다.전북대 영문과 정석권 교수(62)와 한양대학교 의대 교수 출신으로 광명 새움병원 영상의학과 원장을 맡고 있는 허정남씨(48)도 안천 출신이다.교육계 관료로는 도교육청 부교육감과 문교부 체육국장을 지낸 허영묵씨(고인)가 있으며, 진안교육장을 지낸 허영기씨(83)와 전주에서 제5대 도의원을 지낸 허영창씨(79)가 그의 동생이다.현재 서울에 살고 있는 황병수씨(74)는 전북도교육청 부교육감 출신이며, 허완규씨(80)는 전북교육청 교육위원회 부의장을 지냈다.황민주씨(76)는 전교조 출신으로 전북도교육위원회 위원과 전북교육연구소 이사장, 동학혁명기념사업회 이사 등을 지냈다. 한영선씨(70)는 전북장애인학부모회 회장과 전북도초등교장단협의회 회장 등의 경력이 있다.△공공기관 등황의영씨(66)는 농협중앙회 진안군 지부장과 전북농협 본부장, 농협 상호금융총본부장(상무)을 거쳐 현재는 (주)NH무역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전북발전연구원 초대 원장을 맡았던 한영주씨(67)는 뒤에 대통령자문 지속발전위원회 위원을 지내기도 했으며 현재는 도시 및 지역계획연구원 원장이다. 한영선 전북장애인부모회 전 회장의 동생이다. 성기현씨(60)는 담배인삼공사(KT&G) 전북과 경기지역 본부장을 지냈다.△재계길영우씨(73)는 전북도청과 남원, 군산, 완주, 장수 등에서 공직생활을 하다가 서울로 상경해 사업가로 변신했으며, 미래로정보통신 회장과 고려대학교 이사, 리치몬드 재산운용 회장을 맡고 있다.성흥수씨(69)는 신동아고속관광 대표로 재경진안군민회 회장을 지냈으며, 안천초중고 학생들을 위해 수학여행비 부담하는 등의 도움을 주기도 했다.△사법계임시규씨(57)는 서울과 부산 고등법원 부장판사,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실장 등을 걸쳐 현재는 김&장 법률사무소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길영인씨(56)는 아세아종합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이며, 박문우씨(56)는 경기도 의정부시에서 박문우법률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황종호씨(84)는 전북대 법대를 졸업하고 전주지방법원에서 부이사관으로 근무했었다.△기타 분야허진호씨(54)는 8월의 크리스마스로 데뷔한 영화감독으로 98년 19회 청룡영화상 대상과 2001년 22회 청룡영화상 최우수감독상 등을 수상했다.허재안씨(65)는 경기도의회 의장과 시도의회의장협의회 의장을 지냈다.정남균씨(39)는 세계 동아마라톤 우승자이며, 국가대표로 시드니올림픽 마라톤 종목에 참가했다.김환식씨(고인)는 시조시인이자 아동문학가로 충남 지역에서 주로 활동했으며, 한종률씨(84)는 세종시노인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다음 회에는 부안군 보안면 편이 이어집니다

  • 기획
  • 이성원
  • 2017.05.02 23:02

제99회 전국체전 추진지원단장 이지영 익산 부시장 "전국체전 성공 열쇠는 시민들 관심과 참여"

전북에서 15년만에 전국체전이 개최된다. 특히 기초자치단체에서 주관하는 전국체전은 전북에선 처음이다. 제99회 전국체전을 유치한 익산시는 기존의 체육 인프라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부족한 체육시설을 보강하는 등 대회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시는 이지영 익산시부시장을 단장으로 하는 전국체전추진지원단을 꾸리고, 부시장 직속 전국체전담당부서를 신설해 1년여 남은 전국체전 준비에 여념이 없다. 이지영 단장을 만나 준비과정과 지금까지 추진상황 등을 들어봤다.-2018년 전국체전이 익산에서 개최됩니다. 소회가 남다르시겠습니다.전북지역에서 전국체전이 열리는 건 2003년 제84회 대회 이후 15년 만입니다. 전국체전을 통해 유네스코 세계유산 도시로서 위상을 전국에 널리 알리고 지역 체육을 크게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맞았습니다. 아직도 익산하면 이리역 폭발사고, 공업도시 등 삭막하고 부정적인 이미지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전국체전을 계기로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진 아름답고 살기 좋은 지역으로 도시브랜드 가치를 쇄신하겠습니다. 제99회 전국체육대회는 도내 14개 시군 69개 경기장에서 47개 종목이 분산 개최되고 주 개최지인 익산시에서는 개폐회식과 축구, 야구, 배구, 육상 등 12개 주요종목이 개최됩니다. 도와 체육회가 함께 준비를 해 나가고 있지만 개최도시로서 책임감이 좀 더 무겁습니다. 대회 개막까지 1년 6개월 정도 남았는데 도와 체육회, 유관기관, 시민사회 단체와 긴밀히 협력해서 차질 없이 준비하겠습니다.-기초자치단체에서 전국체전을 개최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 같습니다.지방도시의 경우 수도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프라가 열악하기 때문에 전국 규모 행사를 치르기 위해서는 준비할 것이 많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일시에 유입되는 대규모 인원을 수용하기 위한 교통, 주차, 숙박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가장 큰 숙제입니다. 대회기간에 8500여명이 익산에 묵을 것으로 예측되는데 수용가능 숙박시설을 파악한 결과 다소 부족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건축 중인 4성급의 컨벤션 호텔이 개막 전 조기 완공되면 숙박문제도 어느 정도 해소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대회 성공의 열쇠는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입니다. 시설 인프라를 갖추는 것과 동시에 기초질서, 친절, 나눔 배려 등 질적 성장을 통해 도시의 품격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할 수 있도록 다각적인 노력을 해 나갈 계획입니다.-성공적인 전국체전을 위해 분산 개최지를 비롯한 전북도와의 유기적인 협력체계구축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많습니다.제99회 전국체육대회는 전라북도 14개 시군에서 분산 개최되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도와 시군간 유기적 협력이 필요합니다. 전국체전의 경제적 효과를 공유하고 지역발전의 계기로 삼고자 하는 의지는 같기 때문에 협력시스템 가동은 문제없을 것으로 판단합니다. 전국체전은 익산 뿐 아니라 전북 경제 활성화, 관광산업 진흥, 도민화합 등 전북발전 전반에 호재로 작용하기 때문에 도와 시군, 각 유관기관이 유기적인 협력과 공조체제를 긴밀히 구축하여 반드시 성공체전이 되도록 준비에 만전을 기하겠습니다.-전국체전을 총괄지휘하는 이지영 단장께선 익산시 부시장으로 부임한지 1년이 지났습니다. 소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시간의 빠른 흐름을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소통과 현장을 중시하는 시장님의 시정철학에 맞춰 쉴 틈 없이 현장을 다니고 시민들을 만나다 보니 순식간에 1년이 지난 것 같습니다. 취임 당시 전라북도 최초 여성 부단체장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책임감이 무거웠던 것이 사실이지만 40년 공직생활의 종착역이 될 곳이기에 후회 없이 열정을 쏟아 부었습니다. 명령이나 지시보다는 대화로 직원들과 소통하면서 자칫 경직되기 쉬운 공직 조직에서 윤활유 역할을 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돌이켜보면 AI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1년 중 반절은 민방위복을 입고 지낸 것 같습니다. 휴일도 없이 상황근무에 매달리며 청정구역 사수에 총력을 다 했지만 뒤늦게 AI가 확산되면서 그동안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것은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어려운 고비도 있었지만 그만큼 보람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임기도 시정과 지역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고 싶습니다.● [이지영 부시장은] 도내 첫 여성 부단체장부드러운 통합 리더십임실에서 태어난 이지영 전국체전추진지원단장(59)은 누구보다 꽃과 나무를 좋아한다. 익산부시장에 부임 후 시내 곳곳에 꽃과 나무를 심는 일에 열정을 보였다. 전국체전을 통해 익산을 찾는 방문객들에게 예쁜 도시, 편안한 도시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고 싶다는 생각에서다.특히 요즘처럼 미세먼지가 화두로 떠오르면서 나무 많은 익산을 만들기 위해 더욱 분주하다. 고향에서 직접 기른 수선화 5000주를 익산시청 화단에 심고, 읍면동사무소에 분양하기도 한 그는 익산시청 복도, 계단, 사무실 벽면과 창틀 앞 선반에는 모두 꽃이 놓일 만큼 청사를 화사하게 꾸며 놨다.첫번째 여성 익산부시장이면서 전라북도의 첫 번째 여성 부단체장이 된 이지영 부시장은 전주여자고등학교와 전북대학교 행정학과 대학원과 박사과정을 마친 행정 전문가다. 1977년 9급 공채로 공직에 입문해 공무원교육원 교육혁신과장, 도청 문화예술과장, 기획관리실 교육법무과장, 복지여성국 사회복지과장, 대외협력국장, 전북여성정책연구소장 등 주요 요직을 두루 거쳐 지난해 4월 익산시 부시장에 취임했다.취임 초부터 소통과 화합, 배려를 강조하며 부드럽고 포용력 있는 여성리더십으로 조직 안정과 통합의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는 이지영 부시장은 여성가족친화도시, 도시녹지화사업, 전국체전 등 시 핵심 사업들을 직접 진두지휘하면서 뛰어난 행정역량을 보여주고 있다. 카리스마 넘치는 정헌율 익산시장과 부드러움을 가진 이지영 부시장은 딱 맞는 팀워크를 보여준다.시청 내에선 인심 좋은 시골 아줌마 같다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공직사회를 편안하게 이끌면서 그의 인기는 역대 부시장 중 최고라는 평가도 나온다.

  • 기획
  • 김진만
  • 2017.05.01 23:0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⑨ 귀한 우리술, 죽력고와 이강주 - 봄 나들이…전통주로 취하고~ 세상 시름 잊고~

조선시대 백미의 도자기가 있다. 백자 철화 끈무늬 병(白磁鐵畵垂繩文甁)이란 이름의 보물이다. 그 멋스러운 모습은 만든 이의 마음과 도자기를 취했던 선조의 풍류가 느껴지는 듯싶다. 풍만한 곡선을 그린 백자의 잘록한 목에, 휘감아 늘어뜨려져 살짝 말려진 끈이 여백의 미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멋을 제대로 낼 줄 아는 선비가 바지 춤에 귀한 약주를 담은 술병을 걸고 마치 우리를 초대하는 것 같다. 이러한 기품이 있는 병에 담겨 봄나들이의 벗으로 함께 할 우리 술을 선택하라면, 주저 없이 죽력고와 이강주를 담고 싶다.명주라는 표현에 걸맞은 죽력고와 이강주는 본디 갖고 있는 품성은 물론이고, 독특한 향미가 매력적인 술이다. 더욱이 예로부터 선조들이 약주 즉 약이 되는 술이라 하여 심신에 좋은 동반자로 여기며 귀하게 여긴 술 중에 최고인 술이다.조선시대 후기 당시 우리 조상들의 연중행사와 풍속을 정리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서 봄에 마시기 좋은 술로 꼽은 호남의 술이 지금의 정읍에서 전해지는 죽력고이다. 죽력(竹瀝)이라는 말은 대나무 진액을 의미하는데 약을 의미하는 고(膏)를 붙여 죽력고라고 불렀다. 죽력고가 봄에 마시기에 좋은 술이라지만 약주라는 단어에 걸맞게 예로부터 약으로 쓰였다는 것은 고문헌과 전해지는 이야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주역으로 순창에서 체포된 전봉준 장군이 모진 고문을 당해 몸이 상했을 때 죽력고를 구해 마시고 원기를 회복해 서울로 압송될 때는 수레에 꼿꼿이 앉아서 갔다고 전해진다. 이 죽력고가 꽤나 몸에 좋고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는지, 다산 정약용 선생도 『목민심서』에서 그 죽력을 채취하여 약을 조제하면 막힌 것을 트이게 하는 신기한 효력이 있어 저절로 많이 파급되는 것이라고 효능을 인정하기도 하였다. 『구사당집』 제2권에는 죽력고는 겨우 세 되를 얻어 복용하시고 있으나 이 섬에는 역죽(瀝竹)을 구하기가 매우 어렵고 또 생강도 없으니, 참으로 괴롭고 기막힐 노릇입니다라며 병든 이에게 줄 죽력고가 없어 안타까워하는 대목도 등장한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명성이 대단한 술인 죽력고는 현재 송명섭(宋明燮) 명인에게 정통의 맥이 이어지고 있다. 죽력고는 며칠 동안 정성을 들여 죽력을 추출해야 하기에 대량생산이 무척 어려우며, 이 지역의 쌀과 대나무 진액 외에 생강, 계피, 솔잎. 석창포 등이 들어가므로 술보다 약에 훨씬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죽력고처럼 약주로 대접을 받는 대표적인 술이 또 있다. 이맘때 피어나는 배꽃의 배를 주재료로 빚어 죽력고처럼 봄의 술로 사랑받았던 이강주(梨薑酒)가 그것이다. 이강주 역시 약주였기에 이강고(梨薑膏)라는 이름이 함께 따라다녔다. 전주 일대에서 전해 내려오는 최고급 술로, 배(梨)와 생강(薑)이 들어가서 이강(梨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주재료인 쌀과 정제수와 전주의 배, 봉동의 생강 이외에 울금, 계피, 꿀 등 몸에 좋은 재료들을 섞어 만들어 정말 약주라고 부르기에 제격이다. 특히 생강과 계피에서 나는 독특한 맛과 향 그리고 부드러움 덕에 선조들은 이강주를 더운 밤의 서늘한 초승달 빛으로 묘사하며 술잔 속 여유와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강주 또한 오랜 전통의 명주로 고문헌 속에 유독 자주 등장한다. 조선시대 순조 때의 문신 이해응(李海應, 1775~1825)은 『계산기정( 山紀程)』에 조선 최고의 술 중 하나로 이강주를 추천했고, 『동국세시기』와 『경도잡지(京都雜志)』 등에도 우리나라 5대 명주 중 하나로 이강주를 꼽곤 하였다. 이 문헌들에 의하면 이강주는 조선시대 상류사회에서 즐기던 고급 약주로서 신선과 어울린다는 평판까지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외에도 많은 문헌에서 이강주를 언급하며 그 역사와 전통을 증명하고 있는데, 봉산탈춤의 말뚝이 사설 부분에는 아예 자라병, 강국주 이강주를 내놓고라는 대사가 나오고, 한미통상조약 체결 당시에도 나라를 대표하는 건배주로 쓰일 정도였다.하지만 아무리 좋은 술이라도 술이 몸에 이로운 약주가 되려면 잘 마셔야 한다. 전해 내려오는 우리 옛말에 술은 어른에게 배워야 한다는 말이 있다. 술을 마실 때에도 예의가 필요해서 사람들 사이 화목과 질서 유지를 위해 술 마시는 것을 예법으로서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마을의 자치규약이었던 향약에는 이처럼 고을에서 어른을 모시고 술 마시는 예법을 배웠던 향음주례(鄕飮酒禮)가 따로 있을 정도였다.정극인 선생의 『불우헌집』을 보면 어린이는 서당을 열어서 깨우치는 법을 엄하게 하고, 이웃 간에는 향음주례를 정하여 화목한 규정을 세웠다고 말하고 있다. 손위 어른과 마실 때 두 손으로 받아 정면으로 마시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고개를 살짝 돌려 마시는 풍습은 이러한 예법으로부터 나온 우리 모습이다.이렇듯 술은, 우리 문화 속에서 많은 이들의 일상과 함께 하고 있다. 꽃이 피어서 마시고 꽃이 진다 마시며, 기쁜 일로 축하하며 마시고, 슬픈 일을 위로받으며 마신다. 과거 술을 지혜롭게 즐길 줄 알았던 선조들처럼 건강을 위한 약주로 예를 갖추며 마시기도 한다. 무엇이든 과하면 좋지 않지만 좋은 이들과 함께 기분 좋게 마시는 술은 행복이고 위안이기도 할 것이다. 앵화우(櫻花雨)나리고 이화우(梨花雨)나리는 시절 나들이길 벗으로 우리 전통주가 어떨까. 멋들어진 병에 귀한 술과 봄빛을 함께 담아 세상사 잊고 기분 좋게 취해도 좋을듯싶다.

  •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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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4.28 23:02

[전북일보 카드뉴스] 먹어야 산다: 전주 도심 맛집 탐험

먹어야 산다: 전주 도심 맛집 탐험#표지.먹어야 산다: 전주 도심 맛집 탐험#1.이 (빈칸) 맛이 아주 기가 막혀. 내가 이거 먹으려고 매년 전주국제영화제 온다고 하면 믿겠니?#2.문제. 여기서 (빈칸)에 들어갈 음식으로 알맞은 것은?(복수정답)#3.영화의 참맛!그리고 영화와 함께 맛볼 전주의 음식들을 전북일보 디지털뉴스국이 소개합니다.#4.(밥/한식) 금일옥5000원짜리 백반부터 대구탕, 불고기백반 등에 이르기까지 밥이 중심인 것들이 이곳의 주력 메뉴입니다. 식당으로 가져오기 직전에 도정한 김제 신동진쌀로 짓는 밥맛이 일품.#5.(음료간식) 때알한바탕 전주, 벌써 덥죠. 케이크 종류는 물론이고 스무디에이드 등 음료도 OK. 생딸기 조각들을 부어 먹는 딸기우유빙수는 그야말로 최고.참, 때알은 전라도 말로 딸기라는 뜻!#6.(밥고기/인도음식) 마살라정통 인도 요리를 맛볼 수 있는 마살라. 치킨이나 새우 커리, 큰 치즈 덩어리가 숨어 있는 시금치 커리, 안남미로 지어진 밥이나 라씨짜이 등 음료까지 무엇 하나 빼놓을 수 없습니다.#7.(빵/양식) 마틸다피자의 고향 전주? 벽에 걸려 있는 이 문구가 어색하지 않을 만한, 훌륭한 피자를 만날 수 있는 곳. 놀이공간은 덤이랄까? 점심에 찾아가면 브런치 메뉴를 주문할 수도 있어요.#8.(음료간식) 목련을 부탁해CGV 골목에 있는 아늑하고 편안한 한옥 카페 목련을 부탁해. 다양한 커피 종류와 함께 케이크와 같은 디저트를 판매하는데, 특히 롤 케이크가 훌륭합니다.#9.(면밥/베트남음식) 하이즈엉퍼전주 남부시장에 소박하게 앉아 있는 정통 베트남 쌀국수 가게. 들어선 지는 얼마 안 됐지만 입소문을 타고 흥하는 곳입니다. 고수 향이 그립다면 여긴 어떠세요?#10.(면밥/중식) 한미반점간판의 포스가 예사롭지 않은, 삼백집 맞은편에 있는 전통의 강호. 주력은 간짜장과 탕수육인데요, 특히 미리 비벼진 채로 나오는 살짝 매콤한 간짜장은 이곳만의 특별한 매력입니다.#11.(밥?/퓨전식) 휴일식탁메뉴판과 주문이 없는 곳. 요즘 SNS에서 흥하는 휴일식탁은 그날그날 한 가지 메뉴를 제공하는 독특한 공간입니다. 메뉴는 인스타그램에서 확인할 수 있어요.#12.그런데 말입니다.#13.이게 전부일까요?/기획 신재용, 구성 권혁일, 제작 이권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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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17.04.26 23:02

문명은 용기의 소산

인간이 삶을 꾸리는 하나의 무대는 문명과 자연이라는 두 개의 세계로 구성되어 있다. 자연은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장되어 있는 스스로의 법칙에 따르는 저절로[自] 그러한[然] 세계고, 문명은 인간이 그려 넣은[文] 세계다. 인간이 그린 세계를 문명이라고 할 때, 그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이 의도를 개입시켜 제조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문명을 제조하는 의도를 의지나 의욕, 욕망 혹은 영혼 등등으로 다양하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통괄하여 일단 생각이라고 하자. 그래서 각자 누리는 문명의 수준이나 내용은 각자 가지고 있는 생각의 그것들에 좌우된다. 나는 이것을 『탁월한 사유의 시선』에서 시선의 높이가 삶의 높이다.고 표현하였다. 당연히 앞 선 문명은 앞 선 생각이 만들고, 뒤따라가는 문명은 생각이 뒤따라간 결과다. 먼저 생각을 하여 문명의 새 길을 내는 일이 창조고, 창조의 의지가 발휘되는 일이 바로 창의다. 창의를 통해서 새로운 길을 열어 흐름을 만들면, 그것을 선진이라고도 하고 일류라고도 하며 선도력을 가졌다고도 한다. 이미 있는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없는 길을 열어서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이리하여 창의는 결국 삶의 영토를 확장하는 셈이다. 따라서 창의적인 인간은 영토를 확장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언제나 높은 자리에 올려 진다.생각은 들쑥날쑥하고 들락날락한다. 무엇을 만들거나 개척하려면, 그 들쑥날쑥하고 들락날락 하는 것이 일정한 높이에서 초점을 맞춰 작동해야 한다. 높이와 초점을 맞춘 생각을 시선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왜 시선이 중요한가? 사람은 자신이 가진 시선의 높이 이상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기관이나 국가도 마찬가지다. 시선은 삶과 사회의 전체 수준을 결정한다. 시선의 높이가 삶의 높이다. 그래서 보통 일컫는 발전이나 진보라는 것도 사실은 시선의 상승이 이뤄낸다. 여기 있던 이 시선이 한 단계 더 높이 저 시선으로 상승하여 이루는 구체적 결과가 바로 발전인 것이다. 그런데, 이 발전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를 지배하는 정해진 생각의 틀을 벗어나는 도전이 감행되어야 한다. 익숙함과의 결별이다.『장자』의 「소요유」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혜자(惠子)가 위(魏)나라 왕으로부터 큰 박이 열리는 박 씨를 선물로 받아와서 뒤뜰에 심었다. 아니나 다를까 자라나 엄청나게 큰 박이 열렸다. 그런데 크기가 너무 커서 물을 담자니 무거워서 들 수가 없을 지경이고, 쪼개서 바가지로 쓰자 해도 납작하고 얕아서 한 방울도 담을 수가 없었다. 위나라 왕이 말한 대로 박이 크기는 컸지만 아무 쓸모가 없어서 부숴버리고 말았다. 헤자의 말을 다 듣고 나서 장자(莊子)가 말했다. 그렇게 큰 박이 열렸다면 어째서 그 속을 파내 큰 배로 만들어 강이나 호수에 띄워 놓고 즐기려 하지 않고, 납작하여 아무 것도 담을 수 없다는 걱정만 하셨소? 선생은 생각이 꼭 쑥대 대롱에 난 작은 구멍만큼이나 좁디좁군요.우리는 보통 익숙한 생각에 갇힌다. 혜자가 그랬던 것처럼 박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물을 담아 다니거나 쪼개서 바가지로 쓰는 일을 먼저 떠 올리고, 그 생각에 박의 용처를 제한해버린다. 이러면 박은 물을 담고 뜨는 기능에만 갇혀 그 이상으로 확장되기 어렵다. 갇힌 생각은 이처럼 갇힌 세계를 조성한다. 세계를 일정한 틀로 가두어버린다. 이미 있는 익숙한 생각을 가지고 살면서 우리는 부단히 새로운 환경을 접한다. 인간의 역할은 새로운 세계를 맞닥뜨렸을 때 적절한 대응방안을 찾느냐 찾지 못하느냐로 수준이 결정된다. 이미 가지고 있는 생각으로 새로운 세계를 관리하려고 하는 일은 보통 누구나 하는 일이다. 새로운 영토를 확장하는 역할은 새로운 세계를 맞닥뜨렸을 때 새로운 적응 방법을 찾아내야만 비로소 가능해진다. 이 이야기에서 예상 밖으로 큰 박은 이전에 대면해 본 적이 없는 새로 맞닥뜨리는 세계다. 기존의 생각에 갇혀있는 혜자는 이 큰 박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적응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새로운 세계가 혜자에게는 없는 세계가 되었다. 박을 깨서 새로운 세계 자체를 부정해버린 것이다. 장자는 새로운 세계에 맞는 새로운 적응 방법을 만들어 냈다. 창의가 일어난 것이다. 이제까지 세계에 존재해본 적이 없는 박 배가 탄생하였다. 바로 창조다. 이런 창조가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장자가 박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매몰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일은 기존의 관념이 주는 무게감을 이겨낼 수 있는 단련된 자아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일어나지 못한다. 자아가 이념과 관념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 수 있을 정도로 고도로 단련된 상태, 사실은 이것이 모든 창의적 활동의 핵심이다.창의는 익숙하게 알고 있는 것이 부과하는 무게를 이겨내고 모르는 곳으로 과감하게 넘어가는 일이다.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는 일에다 과감이라는 단어를 붙인 이유가 있다.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는 일은 일종의 모험이자 탐험이기 때문이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모르는 곳은 명료하게 해석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이상하고 불안한 곳으로 남는다. 그래서 위험한 곳이기도 하다. 위험한 곳으로 넘어가는 탐험과 모험의 여정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 모든 창의가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넘어가는 일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철저히 탐험의 결과다. 장자의 박 배도 장자가 가지고 있었던 지식이 아니라, 그의 탐험 정신이 만들어냈다. 그 탐험 정신은 장자를 여기서 저기로 성큼 건너가게 만들었다.탐험 정신이 살아있는 문명은 강하다. 새로운 이론이나 지식이 생산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왜 문명을 강하게 만드는가? 문명은 생각이 만든다. 생각이 문명을 통제한다는 뜻이다. 인간은 문명을 확장하고 통제하는 매우 효율적인 생각의 얼개를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바로 지식이자 이론이다. 앎의 체계인 것이다. 당연히 지식이나 이론을 생산하는 문명은 문명의 통제력이 클 수밖에 없고, 통제력이 큰 문명은 강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지식이나 이론을 수입하는 문명은 종속적이기 때문에 주도권이 없어 강한 면모를 보이기 어렵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안다고 할 때, 보통은 그것에 대하여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앎을 매우 좁게 이해하는 것이다. 앎이 문명을 통제하고 확장하는 이론을 생산하는 기초인데, 앎을 이렇게 제한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회에서는 이론의 생산이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론의 생산까지 보장할 수 있는 앎은 어떤 것에 대해서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반드시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고 발버둥 치고 몸부림친다.앞에서 말한 대로 인간이 사는 무대는 문명과 자연으로 되어 있다. 문명은 인간이 만들고, 자연은 저절로 그러하다. 그래서 인간은 이 두 세계에 대해서 제대로 알면 지적으로 완벽해진다. 자연은 내장되어 있는 자연 그대로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므로 인간은 그것을 이해하고 거기에 맞추면 되지만, 문명 세계는 인간이 계속 만들어 나간다. 어쩔 수 없이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곳 혹은 아직 모르는 곳을 열며 나아간다. 이것을 장자는 「대종사」편 첫머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즉, 인간의 일을 아는 사람은 알고 있는 것을 가지고 모르는 곳을 기른다.(知人之所爲者, 以其知之所知, 以養其知之所不知) 장자에 의하면, 아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고 하는 발버둥이 문명을 전개시키는 토대다. 이렇게 되면, 지적인 최고 단계는 엉뚱하게도 지식의 영역을 벗어나서 태도의 문제가 되어버린다. 확장성을 포기한 앎은 이론의 구축이나 생산까지는 엄두를 낼 수도 없다. 이론의 생산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에서 진보적인 선진 문명을 꿈꿀 수는 없다. 앎의 진보는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는 바로 그 발버둥이나 몸부림에 있기 때문이다. 발버둥이나 몸부림은 지적인 영역 밖의 것으로서, 차라리 인격적인 활동이나 태도나 기질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어느 한 문명이 다른 문명과 비교했을 때, 압도적인 과학 기술 문명을 가졌다는 것은 그런 과학 기술을 구체화 시킬 수 있는 상위의 지식과 이론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위의 지식과 이론을 가졌다면, 분명히 그들은 지적인 발버둥이나 몸부림을 훨씬 더 강하게 발휘하였을 것이다. 더 탐험적이었고 더 모험적이었을 것이다. 발버둥 몸부림 탐험 모험이 없이는 새롭고도 높은 지식과 이론을 생산하는 일은 불가능하다.생각-지식-이론은 문명을 확장하고 통제하는 가장 효율적인 무기다. 이런 것들이 세계를 새롭게 열며 앞으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세계를 새롭게 열 때 인간이 발휘하는 능력을 창의라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창의는 인간의 능력 가운데 고도의 어떤 것이 분명하다. 절대 평범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더 나은 삶을 도모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모두들 창의력을 발휘하자고 서로 독려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애석하게도 창의력이 나타나는 일은 그렇게 일반적이지 않다. 왜 그런가? 발휘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혜자로 살기는 쉬워도 장자로 살기 어려운 이유다. 보통은 창의력을 발휘한다고 하는데, 이는 틀렸다. 창의력을 기능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냥 해버리면 될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알 듯이 창의력은 발휘하려 한다고 해서 쉽게 되는 일이 아니다. 창의력은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발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적으로 단련된 어떤 사람의 내면에서 튀어나오는 것이지 해보려고 맘먹는다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창의력이 튀어나올 수 있는 내면이 준비되어있지 않으면 그것은 이 세상에 나타나지 못한다. 이렇게 하여 창의력은 기능적인 범위를 넘어서서 인격적인 문제로 바뀌어버린다. 결국 사람의 문제다.장자가 지적인 상승과 확장은 아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고 발버둥 치는 일에서 이루어진다는 뜻을 피력하고 난 후, 바로 이어서 한 말은 그래서 더욱 울림이 크다. 참된 사람이 있고 나서야 참된 지식이 있다.(有眞人而後有眞知) 사람은 근본적으로 이론이나 지식이나 관념이나 이념의 수행자에 제한될 수 없다. 그것들의 생산자이거나 지배자일 때만 사람이다. 그래서 사람을 채우는 진실은 차라리 모르는 곳으로 덤벼드는 무모함에 있다. 탐험이고 모험이고 발버둥이고 몸부림이다. 이것을 우리는 용기라고 말한다. 이렇다면, 문명은 사람이 발휘하는 용기의 소산일 뿐이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건명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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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4.25 23:02

[전북일보 카드뉴스] 전북일보가 제안하는 대선공약

#표지.전북일보가 제안하는 대선공약#1.전북 20대 청년 2040년엔 '반토막'(2016년 12월 29일 자)저출산고령화탈전북전북 인구 위험하다(2016년 8월 26일 자)전북경제 체감경기 '칼바람'(2017년 1월 12일 자)추락하는 전북경제 답이 없다(2016년 12월 29일 자)(기사 제목들 아래, 시무룩한 자세로 앉아 있는 신명이)#2.(달력 보는 신명이, 5월 9일에 시선)이번 대선 땐 우리 목소리를 내야겠어!#3.그래서 전북일보가 제안합니다. 제19대 대선 공약 아홉 가지!#4.첫 번째. 인사 대탕평- 중요한 자리에 전북 출신 인물 기용을#5.두 번째. 더 적극적인 새만금 내부 개발- 국책사업이면 국책사업답게, 국가 주도로#6.세 번째. 전주를 문화특별시로- 세계적인 문화도시로 거듭날 수 있도록#7.네 번째. 전북 탄소산업 육성- 전주 탄소산단 조성, 탄소융합기술원 국책기관 승격#8.다섯 번째. 전북에도 사회기반시설을- 새만금 국제공항, 전주~김천 철도, 무주~대구 고속도로, 정읍~남원 국도#9.여섯 번째. 농도 전북! 농생명 산업 활성화- 정부 전략산업답게 예산 지원 확대를#10.일곱 번째. 고창을 전력 산업 메카로- 경관 피해 한전 전력시험센터송전탑, 전력산업 원동력으로 전환#11.여덟 번째. 지리산 산악철도- 남원 주민 교통권 확보와 관광 수요 대응, 오염 저감까지 세 마리 토끼를#12.아홉 번째. 군산조선소 재가동- 군산 경제 24%, 전북 경제 15% 경기 회복 때까지 존치해야#13.문재인홍준표안철수유승민심상정조원진오영국장성민이재오김선동남재준이경희김정선(사퇴)윤홍식김민찬대선 후보 여러분, 보셨죠?/기획 신재용, 구성 권혁일, 제작 이권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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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4.24 23:02

김준채 농어촌공사 전북본부장 "농어촌 소득증대·마을 개선·농업용수 보급 만전"

올 1월 2일자로 한국농어촌공사 전북지역본부장으로 취임한 김준채 본부장(56)은 순창출신으로 우리지역농어촌 발전에 애정이 큰 인물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도내 농어민들의 불편이 없도록 서비스 향상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그는 직원들이 마음껏 역량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농어민 서비스도 높아질 수 있다면서, 조직의 소통 분위기를 만드는데 주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김 본부장은 이제는 농업기반시설이 많이 갖춰져 있는 만큼 새로운 업무 발굴은 물론 농어촌 마을 주민의 삶의 질 향상에 더욱 고민하고 있다. 김 본부장을 만나 올해 업무 추진 계획과 향후 비전을 들어봤다.-본부장으로 취임하신지 벌써 석달이 지났습니다. 고향인 전북으로 돌아와 농어촌 공사를 이끄는 소회와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업무에 대해 소개 부탁드립니다.제가 전북지역본부장으로 취임한지 100여일이 지난 지금, 700여명의 직원과 함께 고향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아 감사한 마음이 가장 큽니다. 또한 나고 자란 고향에서 농어업과 농어촌의 발전을 위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도 남다릅니다. 실제 전북본부장으로 취임한 지난 석달 동안 전북 경제 활성화를 위해 농어촌공사에서 발주하는 대형공사 참여에서 지역 업체들이 외지의 대형업체들에게 밀리지 않도록 함께 노력해 왔습니다. 전북본부에서 추진하는 사업의 90%이상을 전북지역 업체에게 발주했을 뿐 아니라 기재부 고시금액 이상의 공사 입찰 공고 시, 지역 업체의 참여비율을 49%이상으로 지역 업체 의무 공동 도급으로 발주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새만금 농생명용지공사 등에도 지역업체 참여 방안을 모색하고 있습니다.-올해 전북본부 추진사업은 무엇인가요.전북본부는 올해 총 4353억 원의 사업비를 5개 분야로 나눠 투자할 계획입니다. 우선 생산기반정비분야는 안전영농 기반구축을 실현하는 다목적농촌용수사업에 424억 원, 홍수침수피해를 해소하기 위한 배수개선사업 788억 원 등 모두 1501억 원의 사업비를 집행할 예정입니다. 농어촌용수관리분야는 양질의 용수를 적기에 공급하는 유지관리에 413억 원을 투입하는 공익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한편 노후화된 수리시설을 개선해 재해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수리시설 개보수사업 등에 1086억 원의 사업비를 배정했습니다. 농촌 고령화에 대비하기 위해 농지은행사업분야에는 713억 원을 지원하고, 우리 지역 농어촌의 특화산업 발전을 도모하는 지역개발사업분야에 656억 원의 사업비를 집행할 계획입니다. 일반수탁 등 기타분야에도 397억 원의 규모의 사업을 추진 중입니다.-공사에 대한 농어민들의 기대가 큰 만큼 불만도 많은데, 이를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전북지역 농어촌은 현재 고령화로 인한 노동력 부족, 교육 및 정주여건 악화로 인한 젊은 세대의 급감, FTA 체결에 따른 시장개방, 이상기온에 따른 가뭄이나 홍수피해, 쌀값 하락 등으로 인한 어려움에 직면에 있습니다. 또한 문제 해결을 위한 공사의 큰 기대와 함께 우려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일선현장 문제의 상당 부분은 정부의 정책적 판단과 지원이 필요한 사안과 현장에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을 구분해 대안을 고민하고 실제 정책에 반영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본부장 부임 후 지역 간 농업용수 수급불균형 및 시설 격차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지역정치권과 정부의 협조를 구하고 있는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여기에 지금까지 수행해 온 기존의 농업분야의 인프라 구축이 강화돼야 합니다. 이에 공사는 농업 경영인 전문교육, 자문역할 강화, 신속한 정보제공 등 서비스 기능을 보강할 생각입니다.-전북지역의 주요 농업기반시설 관리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요.한국농어촌공사 전북본부가 관리하는 시설물은 총 1921개입니다. 공사는 최근 지진, 가뭄 등 재난?재해대비가 국민적 관심사로 대두됨에 따라, 전북지역 전체 417개 저수지에 대한 정밀안전점검을 실시했습니다. 이 중 저수지 18개에 대해서는 보수보강공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안전점검 강화를 위해 재해취약 저수지의 시설상태와 안전사고 우려시설에 대해서는 점검반을 운영하고, 한건의 안전사고도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끝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고향에 본부장으로 취임하고 보니, 전북지역의 사업여건이 생각했던 것 보다 좋지 않았습니다. 농업분야의 시장 개방과 농산물 소비 감소, 농어업인의 고령화 등으로 농산업환경이 날로 어려워짐은 물론 예산에 있어서도 차별을 받아 왔죠. 이 같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전북의 경제 활성화를 위해 저를 믿고 도와주시는 농어민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은 우선 드립니다. 전북은 농도를 넘어 농생명 산업의 수도로 도약하고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공사에 대한 기대가 크다고 생각돼 막중한 책임도 느낍니다. 농어촌의 어려운 외부환경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변화와 혁신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변화는 미래를 한 발 앞서 경험하는 것이며 성공은 남보다 조금 먼저 경험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마음가짐으로 변화와 혁신에 가장 앞서가는 한국농어촌공사 전북지역본부가 될 수 있도록 맡은 바 소임을 다하겠습니다.● [김준채 본부장은] 승진배심원제 도입 등 공정투명한 인사 혁신김준채 본부장은 순창 출신으로 전주 해성고와 전북대 농공학과를 졸업하고 전북대 석사(농업토목)를 수료했다.지난 1990년 11월 한국농어촌공사에 입사한 뒤 2004년 3월 군산지사 농지사업부장을 역임했다. 이후 본사 경영관리팀장, 홍보팀장, 보상사업단장, 감사실장 등을 두루 거쳤다.특히 김 본부장은 본사 경영혁신실장 재임 중 승진시험 폐지, 승진배심원제 도입, 서열명부 공개와 외부 공모 확대 등 공정하고 투명한 인사제도를 위한 혁신을 단행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있다.그가 경영혁실실장을 역임하던 당시 새로운 인사제도는 정착단계에 접어들었으며 승진, 채용 등 인사와 관련한 비리나 결과에 불만을 제기하는 투서가 한건도 발생하지 않았다.김 본부장은 매출 규모를 지속적으로 늘려가면서 수익률도 동시에 높여나가는 방법을 강조한다. 그는 이를 위해 사업별 부서단위별로 목표에 대한 공감대를 새롭게 조성, 시스템을 개선할 수 있도록 직원들을 다독여 나가고 있다.김 본부장은우리지역 농어촌이 되살아나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며낙후되고 소외된 농산어촌 지역주민의 맞춤형 행복서비스를 구현하기 위해 추진되는 농산어촌 행복충전사업에도 집중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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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윤정
  • 2017.04.24 23:02

[⑦ 연주문과 실크로드] 백제 연주문, 페르시아 문명을 말하다

연주문(連珠文)은 작은 원을 둥근 고리 모양으로 촘촘하게 배열한 문양을 말한다. 연주문은 페르시아 사산(Sassanian)조 시기에 크게 유행했는데, 이 무늬가 중요한 이유는 실크로드 문명 교류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에 기원을 둔 연주문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과 한국에 들어왔으며 다시 일본에 전해졌다.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연주문은 부여 외리사지 백제 벽돌에서 발견되며,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연주문이 새겨진 백제 유물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연주문을 통해 백제와 실크로드의 관계를 탐색한다.△페르시아, 연주문의 기원연주문은 이란 루리스탄(Luristan)에서 출토된 청동 주전자(BC 1000~500)와 페르세폴리스(Persepolis) 석회암 벽돌(BC 550~330) 장식 무늬가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다. 사산조(AD 37세기) 시대에 이르러 금속공예품, 건축, 직물 등의 장식에 크게 유행했다. 페르시아에서 연주문은 왕권신수(王權神授) 즉, 왕의 권력은 신이 준 것임을 상징한다. 제왕 서임식을 묘사한 이란 타그에보스탄(Taq-e Bostan) 석굴의 기마상 안장에 새겨진 연주문은 왕관에 새겨진 일월문(日月紋)과 함께 사산 왕조의 왕권을 나타낸다.또 연주문의 작은 원은 흐바르나(Khvarenah)라는 진주를 표현한 것인데, 진주는 세계 최초의 종교로 알려져 있는 이란 조로아스터교의 영광과 위엄을 상징한다.연주문이 실크로드 각지에서 크게 성행한 연유는 이 문양이 영생과 왕권신수의 개념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페르시아 연주문이 불교를 만난 것은 인도와 중앙아시아에서다.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 조각품인 산치 스투파와 아잔타 석굴 그리고 간다라 지역 유물에서 확인되는 연주문은 페르시아 문화가 불교문화와 접목하면서 불상과 사원 벽화 등의 장식에 영향을 미치면서 생겨났다.△중국 북제, 백제와 실크로드의 교량중국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연주문은 북제(北齊, AD 550-577) 시기 고분에 보인다. 우리에게 낯선 북제라는 중국 왕조는 서역의 소그드와 활발히 교류한 탓에 호다우민(胡多于民) 즉, 외국인이 중국인보다 많았던 이국적인 나라였다.페르시아 연주문은 바로 북제 무안왕 서현수(徐顯秀, 502-571) 묘에 보인다. 중국 고고학 10대 발굴에 속하는 서현수 묘에는 당시 생활상을 생생하게 묘사한 벽화가 남아있는데, 말안장과 시중을 드는 여인 복식에 수많은 연주문이 새겨져 있다.북제는 불과 27년간 존속했던 단명 국가였지만 백제는 세 차례나 사신을 파견했고, 북제 화폐인 상평오주전(常平五銖錢)이 부여 왕흥사지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이러한 점들은 백제가 북제와 대단히 가까웠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백제는 북제와 교류하면서 서역 계통의 문물을 받아들였고, 이 시기에 연주문도 백제로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부여 외리 벽돌, 한반도 연주문의 시원우리나라에서 연주문이 가장 유행한 시기는 불교가 흥성했던 통일신라 때였다. 이 당시의 불교공예품, 불상, 도자기, 수막새 등 장식 문양에는 수많은 연주문이 새겨져 있다. 예컨대 경주박물관 안압지관 앞뜰의 입수쌍조문(立樹雙鳥紋, 나무를 가운데에 두고 공작새 두 마리가 있는 문양)이 새겨져 있는 연주문 석조물과 괘릉의 서역인상은 통일신라 사회와 페르시아 문명 간의 긴밀한 관계를 보여준다.한반도에서 연주문은 통일신라 때 가장 성행했지만, 그 시원은 백제 벽돌에서 찾아진다. 백제는 한성 시기부터 사비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건축물에 다양한 무늬로 장식한 벽돌을 사용했다. 6세기 초에 조성된 무령왕릉 벽돌은 백제 미술의 우수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부여 규암면 외리의 옛 절터에서 출토된 8무늬 벽돌은 한반도에서 발견된 연주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벽돌은 통일 신라 이전인 6세기 말 혹은 7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부여 외리 8무늬 벽돌 중 연주문 벽돌은 4개인데, 연주문 안에 용, 봉황, 연꽃, 연꽃 구름이 새겨져 있다. 연주문 안에 상서로운 동물인 용과 봉황을 묘사한 것은 페르시아 연주문 장식물에 새겨 넣은 신령스러운 짐승과 흡사하다. 또 연주문 안에 환생과 재생을 상징하는 연꽃을 그려 넣은 것도 페르시아 도상을 매우 닮았다.△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 속 연주문백제 불교문화를 대표하는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에도 연주문이 보인다. 사리장엄에는 연주문이 당나라(唐) 풀무늬(草紋)란 뜻인 당초문(唐草紋), 생선 알 문양의 어자문(魚子紋)과 함께 새겨져 있는데 모두 서아시아에 기원을 둔 페르시아계 문양이다. 당초문은 서아시아 팔메트에서 유래한 인동(忍冬) 당초문과 지중해에서 시작된 포도(葡萄) 당초문 두 가지가 대표적인데, 사리장엄에는 인동당초문이 묘사돼 있다. 또 사리공에서 발견된 진주 구슬 역시 페르시아나 동남아시아 베트남과의 교류를 통해서 들어온 것이다.△백제 연주문, 동서 문명교류의 산물연주문은 서아시아에 기원을 둔 페르시아 공예품의 전형적인 문양이다. 연주문은 진주를 상징하는 작은 원을 구슬처럼 꿰맨 듯 연결해 만든 무늬인데, 원래 진주는 광명과 선(善)을 상징해 왕관, 건축, 의복의 장신구로 많이 사용되었다. 한반도에서 가장 이른 시기 연주문인 부여 외리 8무늬 벽돌과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에 새겨진 띠모양 연주문은 실크로드 동서 문명 교류가 백제까지 이어져 백제 장식 문양에 뿌리를 내렸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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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4.21 23:02

[고창군 흥덕면] 독립운동 투신한 고씨 집안…명창 김소희 등 배출

흥덕면은 고창의 북동부에 위치해 있으며, 고창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자 교통도시이다. 동쪽으로는 성내면, 남쪽으로는 신림면, 남서쪽으로는 부안면, 북쪽으로는 부안군 줄포면이 있고, 서쪽 일부는 황해의 곰소만과 접해 있다.비산비야라고 할 만큼 해발고도 50m 미만의 구릉지가 많으며, 대보화강암이 풍화되어 형성된 적황색토가 널리 분포한다. 고부천 주변에 넓은 충적평야가 발달해 있으며, 성내면과 경계에 있는 동림저수지가 관개용수를 공급한다.백제시대에는 흥성현, 고려시대에는 흥성현/장덕현, 조선 태조 때 흥덕현에 속했다. 조선 말기에 현내면이 되었다가, 1914년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북면과 일동면, 부안군 건선면, 고부군 일부를 병합하여 흥덕면이 되고 고창군에 편입되었다.△의병과 파리장서1592년 임진왜란이 시작되자 9월 18일 채홍국을 비롯한 92명의 선비들이 흥덕고을에서 삽혈동맹으로 의병소를 설치하고 활동에 나섰다. 이후 정읍과 장성, 담양, 곡성, 순천, 남원, 순창 등에서 전과를 올렸다.1919년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만국 평화회의를 통해 일제의 악랄한 무단통치를 전 세계에 알리고 조선의 독립의지를 호소하는 사건이 있었다. 파리장서로 불리는 이 청원서에는 전국의 유림대표 137명이 서명했는데, 흥덕지역 한 집안 출신인 고석진, 고예진, 고순진, 고제마 등 네 분도 여기에 포함돼 있다.△정계1901년 사천리에서 태어난 신용욱씨(고인)는 일본 오꾸리 비행학교와 미국 실라 헬리콥터학교 조종과를 졸업하고 45년에 대한국민항공사(KNA)를 설립한 민항의 선구자이다. 2~3대 국회의원을 지내며 고수 조산저수지, 성내 중앙저수지, 신림 계내저수지 등을 준공했으나, 비행기를 일본에 자진 헌납한 행위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 있다.같은 마을에서 1917년에 때어난 신용남씨(고인)는 일본 동경중앙대학교를 졸업하고 군정청 사법부 형사과장과 법무부 용도과장을 거쳐 제7대 국회의원이 됐다. 57년 골프에 입문해 1, 2, 7, 8, 12회 한국 아마추어 골프 챔피언을 지내기도 했다.지방정치인으로는 전북대 수의학과 출신으로 4대와 5대 전북도의회 의원을 지낸 흥덕리 출신의 김용원씨(고인)가 있다.△법조계이홍훈 전 대법관(71)은 신송리에서 태어나 서울 고등법원 부장판사와 제주지방법원 법원장, 대법원 대법관 등을 지냈다. 4대 법조윤리협의회 위원장을 지냈으며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장과 서울대학교 법인이사장을 맡고 있다.남준희 변호사(52)는 석교리에서 태어나 부산과 전주지방법원 판사, 전북대학교 고문변호사,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법무법인 온고을 대표변호사를 맡고 있다.박태기 변호사(53)는 흥동에서 태어나 서울중앙지검과 동부지검 특수부, 전주지검, 대구지검 등을 두루 거친 형사전문 변호사로 현재 법무법인 공간을 운영하고 있다.원성윤 변호사(41)는 신송리 출신으로 신아법무법인에서 활동하고 있고, 흥덕리 출신의 성춘일 변호사(39)는 기자를 하다가 법조인이 되어 남양유업 사태를 시작으로 공익사건에 적극 나서고 있다.제하리 출신의 고광노 변호사(53)는 검사 출신으로 현재 법무법인 양헌 변호사로 일하고 있으며, 흥덕리 출신의 박영기씨(49)는 세무사이자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신송리 출신 이창현씨와 흥덕리 출신의 최정용씨는 군 법무관 판사이다.△관계흥덕리 출신의 진동수씨(68)는 조달청 청장과 재정경제부 제2차관, 한국수출입은행 행장을 거쳐 2009년부터 2010년까지 장관급인 금융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신송리 출신의 김영근씨(63)는 국세청 근로소득지원국장과 대전국세청장을 거쳐 2010년 대한주정판매(주) 대표이사에 취임했다.흥덕리 진정수씨(65)는 국토연구원 감사실장, 선임연구위원, 한진해운 상무 등을 지냈고, 진갑종씨(74)는 강원지방병무청 징집관과 창원지방병무사무소장, 경남지방병무청장을 지냈다.신송리 출신의 원영희씨(고인)는 66년 농림부 기획관리실장을 지낸 뒤 70년 농협대학 학장을 맡았다.흥덕리 박주홍씨(82)는 전주 덕진구청장을 지냈고, 오호리 국종철씨는 95년에 고창부군수였다.신송리 김희철씨와 원종찬씨는 외무고시에 합격해 외교관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흥덕리 고재춘씨는 태권도 진흥재단 마케팅부장을 맡고 있다.흥덕리 출신의 박용기씨(66)는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책임연구원과 부원장 등을 지냈다.△문화예술체육1917년 사포리에서 출생한 만정 김소희(고인)는 광주에서 이화중선의 공연을 보고 소리의 세계에 푹 빠졌다. 48년 여성국악 동호회를 설립해 최초의 여성국극 〈햇님 달님〉을 무대에 올렸고 64년 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기/예능 보유자가 되었다. 93년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을 지냈으며, 안향련, 한농선, 박초선, 박송희, 김동애, 오정숙, 안숙선, 성창순, 남해성, 이일주, 신영희, 박양덕, 오정해 등을 가르쳤다.오태마을 출신 국악인 김완수씨(72)는 무형문화재 제22호인 마들농요보존회 회장이자 예능 보유자다. 마들농요는 서울 노원구가 아파트촌으로 변하기 전 노원지역의 옛 모습인 마들평야 지대에서 농사지을 때 농부들의 흥을 돋우기 위해 부르던 노래다.사포리 출신의 소설가 김장천씨(83)는 고창예총 이사를 지내고 제6회 고창문학상을 수상했다. 또 신송리 출신의 시인 원용수씨(고인)는 서라벌예대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시집 갈대골과 자서전 가지 많은 나무 등을 남겼다.체조선수 서연희씨(48)는 치룡리에서 태어나 86년 아시안게임 이단평행봉에서 금메달을 따냈으며, 오호리 출신의 신승찬씨(23)는 2015년 세계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여자복식과 혼합복식, 혼합단체전 등 배드민턴 3관왕에 올랐다.△교육계흥덕리 박주황씨는 84년 전주대 초대 총장을 지냈고, 박만기씨(79)는 서울대 약학대학장을 지낸 명예교수이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출신의 박용기씨는 박만기 명예교수의 동생이며, 또 다른 동생 박흥기씨는 김천대 교수로 있다. 박복기씨(71)는 호원대 교수를 지냈다.신송리 원윤희씨(60)는 서울시립대 교수와 서울시립대 총장, 조세연구원 원장 등을 지냈고, 원찬희씨(60)는 전북대 교수, 원재강씨는 경기대 교수, 원택희씨는 강원대 교수, 이상범씨는 아주대 교수, 조숙희씨(58)는 중앙대 교수로 있다.이선동씨(57)는 상지대 한의학과 교수, 이창훈씨는 조선대 교수이며, 사천리 신재철씨는 아주대 교수, 용반리 채규현씨(47)는 세종대 교수로 있으며, 오호리 출신 김덕수씨(69)는 군산대 교수를 지냈다.사천리 출신의 신국중씨(73)는 전주교육장과 전북도교육위원회 의장, 전북체육회 고문 등을 지냈다.△재계변재용씨(61)는 한솔교육 대표이사 회장으로 2007년 한국의 경영대상 고객가치혁신부문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고삼상씨는 1998년에 민간주택을 건설하는 양우건설을 설립한 창업주로 현재 양우건설 회장을 맡고 있다.신송리 이영훈씨(72)는 대우그룹 이사와 광양제철 및 옥포조선소 건설 현장소장을 지냈으며, 94년에 산업포장을 받았다.-다음 회에는 진안군 안천면 편이 이어집니다

  • 기획
  • 이성원
  • 2017.04.18 23:02

취임 한달 맞은 배진환 지방행정연수원장 "스마트 거버넌스 시대 지방공무원 전문화 가장 중요"

취임 한 달째를 맞은 배진환 지방행정연수원장(52)은 스마트 거버넌스 시대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지방공무원들의 전문화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지방공무원의 전문성은 곧 신뢰도 향상으로 이어져 자치단체의 경쟁력이 되고, 결국에는 지방분권 시대로 이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지방행정가 인재발전소인 지방행정연수원의 역할도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면서 지방공무원들의 역량제고를 위한 프로그램 확대는 물론 지방의원들의 전문화 교육프로그램도 확충할 것이라고 밝혔다. 취임 후 혁신도시 기관장의 지역과의 상생을 위한 첫 걸음으로 배진환 원장은 부부가 모두 전북으로 이주했다. 다양한 지역상생 협력사업은 물론 지방공무원의 전문화를 위해 뛰고 있는 배 원장을 만나 지방행정연수원의 운영방향과 향후 계획 등을 들어봤다.-전북혁신도시 기관장 중 처음으로 부부가 함께 동반 이주한 모범사례로 꼽힙니다. 부부가 함께 전북도민이 되신 소감이 어떠신지요.저는 근무지가 변경되면 항상 부부가 함께 동반이주를 합니다. 기관장부터가 근무지에 터를 잡는 것이 공공기관 이전의 취지를 더욱 살리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 뿐만 아니라 연수원 내에도 가족들과 함께 전북에 새롭게 둥지를 튼 직원들이 늘어나는 것 같아 기쁩니다. 저는 행정자치부에 오랫동안 근무하면서 지역과 관련 깊은 일을 해왔지만 전북에서 직접 근무하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렇지만 전북도민들의 인간미를 느껴 제 고향인 강원도와도 같은 친근감을 느낍니다. 특히 시간이 나는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 지역명소들을 하나 둘 찾아가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참에 투어패스를 구입해서 전북을 전부 둘러볼 생각입니다. 저는 지방행정연수원장으로서 뿐만 아니라 도민의 한사람으로서 더 큰 애정을 가지고 업무에 임하고 싶습니다.-취임 이후부터 전북과의 상생을 강조하셨습니다. 지역균형발전 철학에 대해 들려주십시오.지방균형발전은 정치경제사회적으로 과밀화된 수도권으로 인해 국가 발전속도가 둔화된 시점에서, 새로운 경제성장 동력의 발굴을 위해 지방 거점도시를 중심으로 균형적인 산업경제의 발전을 도모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작게는 산업경제지만, 크게는 사회문화적으로도 지역 간 격차를 해소함으로써 종국에는 수도권지방에 상관없이 국민 간 삶의 질을 상향평준화 시키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혁신도시 공공기관 이전이 단순히 물리적으로 위치를 옮긴 것에 그쳐선 안된다 봅니다. 실질적인 변화도 같이 추구함으로써 지역과 공동 발전하기 위한 방안들을 모색해 나가야만 지역균형발전에 보탬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지방행정연수원이 지역균형발전의 밑거름이 되야 한다고 항상 강조하고 있습니다.-그렇다면 지방행정연수원의 지역상생을 위한 계획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요.우리 연수원의 전북 경제 활성화에 대한 공헌은 작년부터 지역 언론사들이 계속 소개할 만큼 혁신도시 입주기관 중에서도 높은 기여도를 보이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앞서 소개해드린 상생과제뿐 아니라 전국 지자체 공무원들이 매년 연수를 받으러 오기에 우리 연수원은 자연스레 전국 지자체의 인적물적 자원을 전북으로 유입시키는 통로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5급 승진 및 장기교육생들이 전북에 머물며 연 60억 원 정도를 소비하는 것으로 조사됐으며 구내식당을 통해 지금까지 전북지역 로컬푸드를 72%(6억600만 원 규모) 수준으로 소비하고, 연수원 총 구매액의 80%(57억 원 규모)를 지역 업체와 우선 계약을 실시하고 있습니다.-지방분권이 강조되고는 있지만 여전히 중앙정부 쏠림현상은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지방행정연수원장으로서의 생각은 어떠신지요.지방자치시대가 열린 지 20여년이 지났음에도 무늬만 자치, 2할 자치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는 우리나라의 지방자치제는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은 것 같습니다. 왜 그런가를 생각해보면 만연해진 중앙 지향적 사고와 더불어 제도적 모순으로 인해 많은 한계점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극복하고 지속 가능한 지방자치의 발전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각 지역의 다양성과 가치를 존중하는 지방자치 모델이 꾸준히 개발되어야 합니다. 특히 주민들의 지역발전에 대한 열망과 끊임없이 변동하는 외부환경을 고려한 각 지역 고유의 자치모델이 세워지고, 이를 중앙정부가 함께 정비하고 지원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전국의 고급공무원의 교육을 맡고 있는 우리 연수원의 역할 확대론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입장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우리 연수원은 전국 지자체 실국장, 시군구 단체장 등 현재 뿐 아니라 장차 일선현장에서 주민들을 위한 정책을 기획하고 집행해 나갈 고위공무원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기에 누구보다 중요한 역할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연수원을 향한 많은 기대와 주문에 부담감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현재 지방공무원들에게만 실시하고 있는 교육대상을 확장시켜 지방의회에 대한 연수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는 각 지자체에서 의원 워크숍이나 세미나 개최 등 단발성 지방의정연수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지방의회의 역할과 의원 전문성 강화에 기여하지 못한 부분이 크다고 생각됩니다. 지역일선에서 주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정책을 집행하는 담당자에 대한 직접적인 교육이 이루어져야 말 그대로 주민이 주인 되는 행복한 생활자치가 구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도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인재가 자원인 이 시대에 지방의 핵심인재를 키우는 지방행정연수원이 우리 전북에 있다는 점은 같은 도민으로서도 정말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열어가는 지방행정 인재양성소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전북도와 상생 발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여 전북 도민에게 사랑받는 기관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올해가 전북방문의 해인만큼 전북을 찾는 연수생들을 도민여러분들께서 적극 환영해 주신다면 전북의 대외 이미지는 더욱 더 밝아질 것입니다. 전북도민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지원 부탁드립니다.● [배진환 원장은] 지방분권론 옹호자핵심인재 양성 강조배진환 지방행정연수원장은 제31회 행정고시를 통해 공직에 입문했다.행정자치부 장관 비서실장, 대통령 혁신관리비서실 선임행정관, 중앙공무원교육원 기획부장, 행정자치부 지방세제정책관, 강원도 행정부지사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한 그는 행자부 내에서 대표적인 지방분권론자로 통한다.배 원장은 특히 국가와 지방의 상생발전을 위해 국정시책 및 철학을 공유하고, 지방자치단체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지방핵심인재 양성이 중요하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그는전북이전 4년차를 맞이한 지방행정연수원이 지역상생 역할의 마중물이 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전했다.강원도 평창 출신인 배 원장은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 시라큐스대학교 대학원에서 행정학과 석사학위를 취득해 실무와 이론을 겸비한 행정전문가란 평가를 받고 있다.그가 이끄는 지방행정연수원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스마트 거버넌스를 지향하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전문교육과정을 신설해 운영할 방침이다.

  • 기획
  • 김윤정
  • 2017.04.17 23:02

[철의 궤도: 전라선 철길 답사기 ④ 동산역~북전주역] 여전히 그곳에, 전주 산업의 핏줄 북전주선

그곳을 정의(定義)하는 것은 컨테이너들이 쌓여 만든 커다란 탑이었다.그 탑은 미세먼지와 부유먼지가 가득한 뿌연 공기 너머로도 뚜렷하게 보였다.3월 31일, 전주 동산역을 찾은 취재팀은 질서정연하게 쌓여 있는 직육면체들에 시선을 빼앗긴 나머지 사람 드나드는 길목을 보지 못하고 한 바퀴 빙 돌았다.어쩌면 사람 드나드는 것엔 딱히 관심이 없었을지도 모른다.동산역의컨테이너 동산동산이라고 한글로 써놓으면 텔레토비 동산 같은, 야트막한 산을 말하는 것 같지만, 동산역에 쓰이는 동산은 좀 다르다. 한자로 東山, 그러니까 동쪽 산이다.원래 있던 이름은 아니고, 일제 강점기에 일본 대기업 미쓰비시가 이곳에서 경영하던 동산농장, 그러니까 도잔 농장(Tozan noji, farm)에서 따온 이름이다. 도잔은 미쓰비시를 창업한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彌太郞)의 호라고 한다.도잔 또는 토잔이라는 이름을 가진 농장은 지구 반대편 브라질에도 있다. 캄피나스 인근에 있는 커피 농장은 미쓰비시가 1927년 포르투갈인 지주에게서 사들인 것이라고 한다.東山은 또 히가시야마라고도 읽을 수 있는데, 그래서 히가시야마 농장이라고 설명하는 경우도 쉽게 찾을 수 있다.1915년 1월 16일, 이리-전주 간 경편철도가 개통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동산역이 보통역으로 문을 연다. 춘포에 철도가 놓인 데 호소카와 가문의 영향이 컸듯, 이것 역시 삼릉재벌, 그러니까 미쓰비시 자이바쓰의 입김이었다.새로 지어진 다리를 밟고 만경강을 건너온 철길은 강 남단의 들판을 가로지르다 몇 가닥으로 갈라진다. 그 옆으로는 전차선 없는 철길이 또 여섯 가닥 있다.분명 이 앞에 볼록할 철(凸)자 모양으로 된 역사(驛舍)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 건물은 찾아볼 수가 없다. 2011년에 새로 지어진 동산역사는 거기서 동쪽으로 약 300m쯤을 더 가야 나온다.반듯반듯 육면체들의 조합으로 된 역사는 사람을 반기지 않는다. 화장실과 역무원실이 곧바로 나타날 뿐, 매표소도, 맞이방도, 로비도 없다. 플랫폼은 있지만, 동익산역과는 달리 플랫폼으로 갈 수 있는 통로가 없어 위험한 철길을 넘어다녀야 한다.여객 업무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순도 100%의 화물취급전용역이다.힘들게 올라간 플랫폼에서 동산역 관계자가 말했다.저도 플랫폼은 순회 점검할 때나 나오고, 그 외에는 나올 일이 없죠. 여기선 여객열차 취급도 안 하니까요.물론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동산역사(史)에 기록된 1954년 승차 인원은 26만 9000명, 하차 인원은 21만 7000명이었다. 전주시 한가운데를 관통하던 전라선 철도가 외곽으로 이설되기 전해인 1980년까지도 합계 27만 3000명이 이 역을 이용했다.(단 1981년에 발행된 철도통계연보에 기록된 1980년 실적은 21만 6071명으로, 동산역사의 통계와는 차이가 있다.)2007년 12월 31일까지는 군산~전주 간 통근열차가 멈췄고, 통근열차가 폐지된 뒤로도 2009년 6월까지는 무궁화호 열차가 가끔 멈췄다.그러다 2009년 7월부터 동산역은 더는 승객을 받을 수 없는 역이 됐고, 그나마 과거 여객열차를 취급했던 흔적조차도 전라선 복선전철화 이후 옛 역사가 허물어지면서 사라졌다.그렇다고 동산역의 존재감이 미미하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동산역은 전북 권역 내 전라선 역 가운데서는 가장 큰 화물역이고, 여전히 전주권 철도 물류의 심장이다. 지금도 휴비스, 전주페이퍼, 롯데 글로벌로지스 등의 화물을 다루는데, 화차가 25량 연결되는 열차를 하루에 10차례 정도 취급한다고 한다. 열차를 열 차례 취급한다.옛 역사가 허물어진 바로 그 자리에 컨테이너들이 쌓여 있고, 쉴 새 없이 컨테이너를 나르는 작업이 이뤄진다.'그래도 아직은'북전주역전차선이 함께하는 철길은 동쪽으로 반듯하게 지나가고, 전차선 없는 철길은 동산역 구내에 머문다.복선전철화 이전부터 있던 이 철길들은 지금은 역 구내에서 화물을 처리하거나 화물열차를 전라선 본선으로 올려보낼 때 쓰인다.전차선 없는 철길 중 한 가닥은 굴다리를 하나 지나 동남쪽으로 뻗어 나간다.들판을 가로질러 건널목 두 개를 지나 약 1㎞, 철길은 다시 여러 가닥으로 갈라진다. 한쪽으로는 춘포역이나 임피역에서 본 듯한 모양의 건물이 하나 서 있다.마침 량 수를 다 세기도 어려울 정도로 길게 늘어진 화물열차가 느릿느릿 들어서고 있었다. 입환(철도 차량을 분리하거나 결합하거나 철도 차량의 선로를 바꾸는 등의 작업)에 주로 쓰이는 4400호대 중형 기관차가 화차들을 밀고 있었다.그렇게 화차들을 밀어놓은 뒤, 기관차는 다시 동산역 방향으로 굴러갔다.1968년 9월 1일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한 북전주역의 원래 이름은 감수역이었다고 한다. 물론 감수역이라는 이름이 실제로 쓰인 적은 한 번도 없고, 영업 개시 직전에 북전주역으로 바뀐 뒤로 쭉 이 이름이 쓰였다.이 인근의 옛 지명이 감수리였는데, 지금도 시내버스 종점이나 주변 상호 등에서 여전히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여객열차라고 해봐야 완행열차가 몇 편 서는 정도였지만, 북전주역의 핵심은 그게 아니었다.철도통계연보에 따르면 1980년 이 역에서 보낸 화물은 16만 1977톤, 받은 화물은 70만 3104톤. 합계 86만 5081톤이나 되는 화물이 이 역에서 처리됐다. 이는 당시 전라선의 그 어떤 역보다도 높은 실적이다.1981년에 전라선 철도가 전주의 동북부를 우회하는 경로로 이설되면서 동산-북전주 구간은 북전주선이 됐다. 원래는 전라선 본선이었던 구간이 화물 전용 지선으로 바뀐 것이다.그러거나 말거나. 팔복동 공단 안에 위치한 탓에 화물 수요는 엄청났고, 전라선 이설 다음 해인 1982년, 이 역의 발착화물은 90만 5252톤에 달했다.한동안은 이렇게 전주의 산업과 함께 호황을 누렸지만, 1990년대가 지나가고 공단이 쇠퇴의 길을 걸으면서, 또 도로를 이용한 물류 운송이 힘을 얻으면서 북전주선과 북전주역도 점차 한가해졌다. 그리고 2015년 7월엔 무배치간이역이 됐다.지난 3월 31일, 역사(驛舍)는 굳게 닫혀 있었다. BUG JEON JU라 적힌 역명판이 인상적이다.역사 반대편에 현대시멘트, 동남쪽에 한일시멘트라 적힌 사일로가 우뚝 서 있다. 그리고 한일시멘트 사일로에 약간 못 미친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철길 한 가닥이 남쪽으로 돌아 나간다.공식적으로는 북전주역에서 끝나는 북전주선은 휴비스전주페이퍼 등 공단 업체들의 필요에 따라 조금 더 몸을 뻗었다.전주페이퍼선, 또는 전용선이라고도 불리는 이 철길 양옆으로는 아직은 앙상한 이팝나무가 줄지어 섰고, 그 옆으로는 인공하천인 금학천이 흐른다.공단을 관통하는 철길 바로 옆엔 변신을 시도하는, 20m짜리 굴뚝이 인상적인 폐공장도 하나 있다.팔복예술공장과'기억의 재생'어릴 적, 시골 큰집에 가면 동네 아이들과 즐겨 찾던 우리만의 아지트가 있었다. 사람들의 온기와 세간살이가 다 빠져나간 빈 집터, 온갖 쓰레기와 녹슬어 못쓰게 된 기계들만 덩그러니 남아있던 폐공장이었다. 그때 그 아이들에게는 처음 생긴 우리 공간이었다.지붕은 군데군데 이가 나가 빛이 새어들고, 창문이 있던 자리엔 커다란 구멍이 숭숭 뚫려있던 그 고장 난 공간은 그 특성 때문에 무엇을 해도 다 허용되는 열린 공간이기도 했다.한 공간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 만들어지고, 버려지며, 재생된다. 전주 팔복예술공장의 삶도 마찬가지다.산업화의 황금시대가 지나가고, 팔복동에는 낙후된 곳이라는 이미지가 붙었다. 그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주시가 꺼내든 카드는 문화였다. 산업단지 안에 문화를 심자는 생각으로 이 폐 산업시설 현장에 기억의 재생이라는 키워드를 얹은 것이다.전주 팔복동 제1산단 내 옛 쏘렉스 공장 건물 입구에 들어서자 삐뚤빼뚤 글자들이 한 데 모여 이곳을 팔복예술공장이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1970~80년대에는 카세트테이프를 생산하며 그 시절을 기록해 왔던 곳, 1992년 문을 닫은 뒤 20년 넘게 방치돼 있던 공간의 새 이름이다.가장 큰 키워드 중 하나가 바로 기억의 재생이예요. 이 건물이 단순한 콘크리트인 게 아니라 과거 사람들의 흔적, 역사가 있는 거잖아요.한민욱 전주문화재단 팔복예술공장 기획팀장은 지역 곳곳에 있는 유휴공간의 용도를 바꿔 써보자는 데서 팔복예술공장이 출발했다면서 이곳이 공장으로서는 그 기능을 상실했지만, 그 덕분에 문화시설로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여러 전시가 진행되고 있는 공장 건물 이곳저곳, 벽이나 계단, 모서리 틈새마다 이곳이 예전에는 카세트테이프를 만들던 공장이었다는, 그리고 노동자들, 특히 여성노동자들의 공간이었다는 흔적이 널려 있었다.멈춘 컨베이어 벨트, 공정을 위해 꼭 필요했다는 구멍 뚫린 의자, 테이프가 늘어지지 않도록 실내 온도를 유지해 주던 장치, 400명 이상의 여성 노동자가 사용해야 했던 단 하나의 여자 화장실, 옥상의 몇 평 되지도 않는 탈의실.희미한 기억 속 추억의 물건이자 그 자체로 기록 매체였던 카세트테이프는 80년대의 추억이자 그 시절을 기록하고 추억할 수 있는 정체성으로서 이 건물 곳곳에 존재한다. 늘어진 테이프를 나무로 된 육각 연필로 감던 기억이 되살아난다.팔복예술공장은 오는 5월에 공간 리모델링을 시작한다. 공장 앞에 늘어선 이팝나무들이 꽃을 피울 무렵이다.과거 1990년대 이팝꽃이 만개할 때면 쏘렉스 공장 앞 철길에서 웨딩 촬영을 하곤 했던 전주시민들의 기억도 재생될 수 있을까?권혁일김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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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4.14 23:0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⑧ 마음을 노래한 상춘곡과 정읍사 - 옛 선조들의 풍류… 봄꽃에 취하고 노래에 취하다

봄꽃과 더불어 봄 노래가 한창이다. 화사한 봄은 우리 마음을 꽃처럼 피워낸다. 봄의 낭만에 취하게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봄을 노래하고 시구를 떠올리며 더욱 낭만적이 되는 듯싶다.전라북도 정읍에 살았던 정극인(丁克仁, 1401-1481)은 요즘 시절에 딱 맞게 봄을 맞아 경치를 구경하고 즐기며 하는 노래라는 의미의 상춘곡(賞春曲)을 지었다. 이 작품은 조선시대 최초의 가사(歌辭) 작품으로 그가 벼슬을 사임한 뒤 처가가 있는 태인으로 내려와 어떤 마음가짐과 생각으로 만년을 지냈는지 잘 나타내고 있다.가사문학은 지난 역사 속에서 우리 민족에게 가장 대중적인 시 형식이었다. 고려 시대 후기에 발생하여 조선시대 초기 사대부 계층에 의해 확고한 문학 양식으로 자리 잡았지만, 행(行)에 제한을 두지 않는 자유로운 연속체 율문(律文) 형식과 폭넓은 개방성 때문에 양반은 물론 승려, 부녀자, 중인과 서민 등 모든 계층이 참여했던 민족의 문학이었다. 가사문학에는 우리 조상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과 정신이 투영되어 있다.紅塵(홍진)에 뭇친 분네 이내 生涯(생애) 엇더한고,(세속에 묻혀 사는 사람들아, 이 나의 살아가는 모습이 어떠한고?)녯 사람 風流(풍류)랄 미찰가 맛 미찰가.(옛 사람의 풍류에 내가 미칠만한가? 못 미칠까?)天地間(천지간) 男子(남자) 몸이 날만한 이 하건마난,(천지간의 남자 몸이 나만한 이 많건마는,)山林(산림)에 뭇쳐 이셔 至樂(지락)을 마랄 것가. (산림에 묻혀 있어서 즐거움을 모르는가?)數間茅屋(수간 모옥)을 碧溪水(벽계수) 앏픠 두고,(작은 초가를 시냇물 앞에 두고,)松竹(송죽) 鬱鬱裏(울울리)예 風月主人(풍월 주인) 되어셔라.(소나무와 대나무 울창한 데에 풍월주인이 되었구나.)엇그제 겨을 지나 새봄이 도라오니,(엊그제 겨울을 지나 새봄이 돌아오니,)桃花杏花(도화 행화)난 夕陽裏(석양리)예 퓌여 잇고,(복숭아꽃과 살구꽃이 석양 속에 피어있고,)綠楊芳草(녹양 방초)난 細雨中(세우 중)에 프르도다.(푸른 버들과 풀은 가랑비 속에 푸르도다.)-불우헌집(1786) 제2권에 실린 정극인의 상춘곡 중 일부당시의 가사문학을 보면 선조들이 우리 주변의 자연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선명하게 알 수 있다. 동양적 사상에 의한 자연은 인간과 조화를 이루며 곁에 두고 즐기는 친근한 대상이었다. 특히 자연을 삶의 벗으로 여기고 동경하는 다른 가사 작품들이 항상 임금의 은혜나 그에 대한 그리움을 함께 토로한 것에 비해 상춘곡은 그러한 상투적인 내용이 없어 더욱 특별하다.이는 그가 이미 벼슬살이를 마친 후에 창작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관직에 대한 욕심 없이 순수하게 안빈지족(安貧知足)의 삶을 즐기는 그의 마음이 잘 투영된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신의 호를 딴 불우헌(不憂軒)이란 집을 짓고 자연과 더불어 향리의 자제들에게 협동하고 예의를 갖출 것을 가르친 것이 태인 고현동 향약(泰仁古縣洞鄕約)의 시초가 되었고, 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향약으로 퇴계 이황 선생의 예안 향약보다도 81년이 앞섰다고 한다. 그러한 그의 행적을 임금 성종이 치하를 하자 정극인은 송축하는 의미로 불우헌가와 불우헌곡을 지었다. 그가 남긴 아름다운 가사는 불우헌집에 남겨있고, 현재는 무성서원에 신라 말 태수로 부임했던 최치원과 함께 배향되어 있다.정극인의 가사 작품처럼 지금까지 전해오는 노래는 문학이 되고 당시 조상들의 생각과 마음을 알 수 있는 역사의 길잡이가 되기도 한다. 정극인이 살았던 정읍에는 가사문학 훨씬 이전의 유명한 노래 한편이 더 전해진다. 정읍사(井邑詞)가 바로 그것이다. 작자와 연대 모두 알려져 있지 않지만 통일신라 경덕왕 이후 옛 백제 지방의 노래로 짐작되며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유일한 백제 가요라는 점에서 특별하다.달하 노피곰 도다샤(달님이시여, 높이 높이 돋으시어)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멀리 멀리 비춰 주소서)어긔야 어강됴리(어긔야 어강됴리)아으 다롱디리(아으 다롱디리)져재 녀러신고요(저자에 가 계신가요)어긔야 즌대를 드대욜셰라(아, 위험한 곳을 디딜까 두렵습니다)어긔야 어강됴리(어긔야 어강됴리)어느이다 노코시라(어느 곳에나 다 내려놓고 오시어요)어긔야 내 가논대 졈그랄셰라(아, 내 님가는 곳에 날이 저물까 두렵습니다)어긔야 어강됴리(어긔야 어강됴리)아으 다롱디리(아으 다롱디리)-악학궤범에 실린 정읍사 전문당시 정읍에 사는 행상의 아내가 남편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자, 달에게 남편의 안녕을 빌며 밤길을 걱정하는 마음을 담아낸 노래이다. 조선시대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정읍사의 노래와 망부석을 연결하여, 아내가 남편을 기다리던 언덕에 망부석(望夫石)의 자취가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상춘곡에 담겼던 정극인의 순수한 마음처럼, 이 노래에는 하염없이 님을 기다리는 와중에도 상대방을 향한 원망을 하지 않고 오로지 걱정과 관심으로 일관해 그 마음이 더욱 절실하게 와 닿는다. 1493년에 출간된 악학궤범에 실리기까지 무려 700년 이상을 구전으로 전해졌다고 하니, 그 그리움과 사랑이 전해지기까지 세월에 쌓인 마음이 더욱 애틋하게 다가온다.눈과 마음을 돌려 우리 곁을 돌아보면, 꽃송이 채로 붉게 떨어져 땅 위에서 아프게 또 한 번 피어나는 동백꽃은 남편을 그리는 그 여인의 마음을 닮아있다. 그리고 화사한 봄꽃과 더불어 꽃놀이를 즐기는 모습에선 옛 선조들의 풍류가 느껴진다. 복잡한 시류와 바쁜 일상을 지내오며 우리 마음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미처 생각하고 느끼지 못한 채 지나치는 순간들이 많다. 봄이 건네주는 봄바람 꽃바람에 우리 마음을 담아보며 봄날이 가기 전에 지금 흘러나오는 봄 노래라도 따라 불러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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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4.14 23:02

[전북 미래를 이끈다] 10. 문화관광산업 전북도 토탈관광팀, 전북투어패스 통한 체류형 관광명소 조성 '기대'

전북도가 도내 14개 시군의 시설과 먹거리, 역사자연경관을 하나로 묶는 체류형 관광 명소 조성을 위한 본격 시동에 나섰다. 한옥마을과 고군산군도 등 특정 명소의 관광객 쏠림 현상을 극복해 14개 시군의 명소를 하나로 잇는 토탈관광 시스템을 구축한 전북투어패스 발매와 통해 전북 올라운드 관광분권을 실현하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전북도는 전북투어패스 운영을 위한 특별 전담팀을 발족, 지난 2015년 10월부터 지난해 7월31일까지 전주완주 두곳을 대상으로 시범운영을 거쳐 드러난 단점을 보완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이에 본보는 전북투어패스 전담부서인 토탈관광팀 육홍기 관광총괄과장, 조광희 팀장, 민동규, 안진영, 이승준 주무관을 만나 전북투어패스가 나아갈 방향과 향후 청사진을 들어봤다. △전북투어패스 도입 배경 민선 6기 핵심과제인 토탈관광시스템 구축 실현을 위해 각 지역의 자원을 대중교통과 하나로 상호 연계해 관광객에게 각 지역의 자원을 대중교통과 하나로 상호 연계시키기 위함이다. 특히 기존의 스쳐지나가는 관광 패턴을 바꿔 관광객에게 새로운 형태의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관광편의 뿐만 아니라 지역 내 일자리 창출과 경제 활성화를 유도할 수 있는 정책 필요성의 목소리가 높다. 특히 관광객의 특정 공간 및 지역 집중현상을 방지하고 관광으로 인한 경제적 파급효과를 14개 시군에 분산시키기 위해 전북 관광패스라인 도입이 추진됐다. 전북은 관광에 대한 인지도가 낮아 관광객 수와 관광수입이 타시군에 비해 저조한 실정으로 특화된 관광 전략이 요구되고 있다. △전북투어패스 개념 전북에 산재한 전통문화, 생태, 농산어촌 등 다양한 관광자원을 전북관광 패스라인으로 연계해 관광객 체류시간 연장과 방문지역 확대 방안을 골자로 하고 있다. 전북투어패스는 한 장의 카드로 전북 주요 유료 관광지, 시군내버스 및 공영주차장 무료 이용과 맛집숙박공연(체엄) 등 특별할인 혜택을 제공하는 자유이용권 관광 패스다. 소비자 니즈와 사용편의성을 고려해 카드형과 모바일형으로 제작됐으며, 기간은 1일권, 2일권, 3일권, 한옥마을권, 수요자맞춤형(선택형)이 있으며, 종류는 관광형(관광시설 및 특별할인)과 교통형(관광형+대중교통 또는 공영주차장)이 있다. △전북투어패스 혜택 및 구매방법 14개 시군 주요 관광시설과 전북119안전체험관, 종합사격장, 작은영화관 등 62개 유료시설을 제한 없이 무료로 이용 가능하며, 5회 이내 시군 버스 무료이용, 도내 32개 공영주차장 무료이용(한 곳당 2시간 이내), 음식점, 카페, 숙박시설, 공연장 등 최대 50% 할인된 가격으로 이용이 가능하다. 구매 및 이용방법은 온라인의 경우 투어패스 홈페이지, 쿠팡인터파크티몬 등 인터넷 쇼핑몰에서 구매가 가능하며 오프라인으로는 도내 주요 관광시설, 관광안내소 등 45개 판매점에서 구입하면 된다. 카드 구매 후 관광시설 입장 시 단말기에 터치만 하면 자동으로 인식된다. △전북투어패스 운영 문제점 및 대책 지난 2015년 10월부터 지난해 7월31일까지 전주-완주 두곳을 대상으로 시범운영을 거친 결과 자유이용시설 부족에 따른 관광객 유치어려움이 있어 애초 10개의 자유이용시설을 62개소로 대폭 확대했다. 또 특별할인가맹점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일자 90개에 불과한 가맹점을 967개로 확대했지만 가맹점의 서비스 및 불친절 등의 민원에 대한 대응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공영주차장 부족도 문제점으로 나타나 기존 13곳에서 32개소로 대폭 확대했고 오프라인 구매에 한정된 구입방법을 인터넷으로 대폭 늘렸다. 시군 버스 무료 이용 역시 현재 도내 2000개 시군 버스를 대상으로 단말기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있어 4월 중 사용이 가능해질 전망이다. ■ 투어패스, U-20월드컵 등 국제대회와 연계 - 투어패스, U-20월드컵 등 국제대회와 연계 도내에는 320개소의 문화시설이 있으며 영화관은 24개소, 문화예술단체는 32개(연합회2, 전문예술법인단체 30)가 존재하며, 체육시설은 3177개(공공 1103, 민간 2074), 골프장 25개(회원제 5, 대중제 20), 경기단체는 90개(체육회 66, 장애인체육회 24)가 있다. 문화재는 864건(국가지정 199, 도지정 606, 등록 59), 유네스코 등재유산은 고인돌, 판소리, 매사냥, 농악, 백제역사유적지구 등 5건이며, 전통사찰은 118개소(조계종 76, 태고종 37, 화엄종 2, 기타3)가 존재한다. 전북도는 올해 관광분야 예산으로 644억7400만원을 책정, 이들 문화시설과 문화재, 체육시설 등을 전북투어패스와 연계해 성장시킨다는 계획이다. 이에 대한 일환으로 지난해 전주-완주에서 1년 시범기간을 거쳐 문제점을 개선, 보완한 전북투어패스 발매로 전북 14개 시군의 전통문화, 생태자원, 농산어촌 등 풍부한 관광자원을 통합 연계시킴에 다라 전북에서의 관광객 체류시간이 연장되는 등 관광산업이 활성화 될 것으로 기대된다. 또 전북투어패스를 피파 U-20월드컵, 2017 WTF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등 대규모 국제행사와 연계하고 2017 전북방문의 해 선포식, 관광홍보대사(한류스타), 홈페이지, SNS, 래핑 광고 등 적극적 온오프라인 홍보를 통해 관광객 유치에 적극 활용할 계획이다. 조광희 토탈관광팀장은 전북투어패스가 유럽의 유레일패스처럼 국내 관광객은 물론 전북을 찾는 세계인들이 손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개선해 나갈 것이라며 도민과 14개 시군이 머리를 맞대고 전북투어패스는 물론 관광산업이 더욱 실효성을 높이는 데 주력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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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강모
  • 2017.04.12 23:02

전북선거관리위원회 김종영 사무처장 "5월 대선, 자유·정의로운 민주사회 디딤돌 되길"

대통령 탄핵으로 치르는 조기 대선. 촛불시위와 탄핵정국에서 만일에 대비해 선거준비를 해왔지만 60일 안에 궐위선거를 치르는 일은 만만치 않다.올해 초 전라북도선거관리위원회 살림을 맡은 김종영 사무처장. 선관위 30년 재직 중 대부분을 전북에서 보낸 그는 국민들의 관심이 높은 선거인 만큼 어느 때보다 공정투명하게 선거관리를 하겠다고 강조했다.- 예정보다 빨리 대통령선거를 치릅니다.지난해 12월 국회의 대통령 탄핵과 헌법재판소의 심리, 그리고 국민들의 촛불과 태극기시위가 이어지면서 사회가 갈등과 혼란의 상태였습니다. 이번 선거는 대통령 파면 결정에 따른 사태를 수습하는 마지막 단계입니다. 그동안의 사회갈등을 해소하고, 화합과 통합을 이뤄내는 길목이기도 하지요. 촛불과 탄핵정국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선거입니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하는데요, 이번 선거가 자유롭고 정의로운 민주사회로 나가는 디딤돌이 되길 바랍니다.- 의미가 큰 만큼 신경쓰는 부분이 많을 것 같습니다.어느 때보다도 국민들의 관심이 높아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습니다. 특히 유권자가 후보자의 정책이나 공약을 제대로 살필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아 선거정보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제공하고, 정책으로 경쟁하는 선거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선 선거관리, 가장 역점을 두는 부분은 무엇입니까.선거관리의 공정성 확보와 신뢰증진입니다. 유권자의 관심은 이제 후보자와 심판 역할을 맡는 선거관리위원회로 집중되고 있습니다. 그동안 일부 개표사무 실수나 단편적 오류를 조합해 마치 개표부정이 있는 것처럼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이번 선거에서는 이러한 일들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사전투표함 보관장소에 CCTV를 설치하고, 투개표소 1곳을 정해 모든 과정을 생중계합니다. 분류기도 오프라인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외부에서 해킹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시민 개표참관인을 모집하던데요.신뢰를 높이기 위한 일환입니다. 미리 신청하면 시민들이 개표과정을 현장에서 지켜볼 수 있습니다. 이번 대선은 공정사회 구현과 국가발전, 국민통합을 이룰 지도자를 선출해야 하는 매우 중요한 선거입니다. 인력과 시설, 장비 등 그동안 쌓아온 노하우를 총동원할 것입니다.- 높은 관심 만큼이나 대선후보를 지지하는 팬클럽이 많습니다.특정 후보자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임을 결성하는 것은 자유롭습니다. 또한 모임내에서 친목을 도모하거나 후보 초청 강연회 등을 여는 것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회원이 아닌 시민을 대상으로 행사를 열거나 현수막을 게시하는 활동은 불법입니다. 온라인 상에서는 보다 자유로운데요. 개인자격으로 선거운동을 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팬클럽 명의나 대표자 명의로 선거운동을 하는 것은 위법입니다. 최근 선거법이 말은 풀고 돈은 묶는 방향으로 개정되고 있습니다. 허위사실유포나 비방에 대해서는 엄정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미 선거법 위반사례가 적발되고 있습니다. 네거티브 공방도 시작됐는데요.선거가 채 30일도 남지 않았습니다. 경미한 사건에 대해서는 경고조치를 했고요, 검찰에 고발한 사안도 있습니다. 사이버상의 위반게시물도 1000건 이상 삭제요청했습니다. 이번 대선에서 중대 선거범죄에 대해서는 엄정하게 대응하겠다는 것이 선관위 방침입니다. △매수기부행위 △비방허위사실공표특정지역비하모욕행위 △불법선거운동조직 설치운영행위 △공무원의 선거관여 행위는 중대선거범죄입니다.- 지방의원 보궐선거가 12일 있는데요. 대선에 밀려 관심이 덜 합니다.도의원 전주4선거구(서신동)와 군의원 완주라선거구(고산비봉운주화산동상경천면) 보궐선거가 진행중입니다. 이미 7일과 8일 사전투표도 실시됐고요.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사퇴해 다시 치러지는 선거인만큼 많은 사회적 비용이 뒤따릅니다. 이번에는 더 따져보고 더욱 신중하게 투표하시길 부탁드립니다.- 대선을 마치면 바로 지방선거입니다.네, 다음 선거는 내년 6월 13일에 있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입니다. 일부 입후보예정자들은 이미 활동에 들어간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동시지방선거가 가장 어렵고 힘듭니다. 선거 종류도 많고, 후보자와 운동원 등 관리해야할 대상도 많습니다. 지역선관위가 가장 신경쓰는 선거입니다.- 이미 지방선거 입지자들의 선거운동이 시작된 것 같습니다.선거운동이 예전보다 많이 완화됐습니다. 지역행사장을 찾아 자신을 알리는 활동은 해도 됩니다. 문자메시지나 인터넷홈페이지, 전자우편, SNS로 홍보활동을 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지지를 호소하는 등 당선을 도모하는 의사가 표시되는 것은 사전선거운동에 해당합니다. 선관위에서는 선거전까지 준법 선거운동을 하도록 도 홍보하고, 지도하는 활동을 이어갈 방침입니다. 경미한 위법행위에 대해서는 시정이나 재발방지 약속을 받겠지만, 반복되면 엄중한 조치를 취하기로 했으니 선거법 테두리안에서 활동하는게 바람직할 것입니다.- 유권자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어떤 지도자를 뽑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념이나 가치, 철학 등 선택의 기준은 다양하겠지만 후보자가 내세우는 공약을 꼼꼼히 살펴주길 바랍니다. 정치는 생활문화를 바꾸는 일이기도 합니다. 내가 살고 있는 사회, 생활환경을 스스로 가꾸어 나간다는 생각으로 정치에 관심을 갖고, 후보자 면면을 살피고, 신중하게 선택하시길 바랍니다.● [김종영 사무처장은] 선관위 30년 지킴이, 관련업무 두루 섭렵지난 1월 부임한 김종영 사무처장은 전북선관위 터줏대감이다. 1984년 체신부에서 공직생활에 입문했다가 3년 뒤 선거관리위원회로 옮겨 30년 동안 자리를 지켰다. 선거관리, 지도, 홍보 등 선관위 업무를 두루 섭렵했다.김 사무처장은 선관위 기능과 위상이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를 대변한다고 말했다. 1987년 민주주의에 대한 높은 열망으로 선관위 조직이 확대됐으며, 잇단 부정선거로 1989년 단속권한이 생겼고 이후 중립적인 독립기구로서의 위상을 갖게 됐다. 또한 공공단체와 조합선거관리로 시작해 지금은 주민자치위원회 등 생활선거까지 지원하는 가 하면 민주시민교육도 벌이고 이다. 그동안 선거문화도 많이 발전했다.김 사무처장은 재임하는 동안 전북선관위가 도민에게 지지받는 기관으로 자리매김하도록 노력할 계획이다. 또한 선관위 직원들의 능력개발을 통한 전문성 향상과 소통이 활발한 조직문화를 만드는데도 힘을 쓸 작정이다.대전 유성구, 부산 선관위를 거쳐 전북선관위 홍보지도관리과장과 충남선관위 사무처장을 지냈다.임실이 고향이며, 전북지방우정청 최초 여성국장으로 관심을 모은 박찬례 우정사업국장이 아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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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수정
  • 2017.04.10 23:02

[⑥ 관음보살과 실크로드] 백제 관음상, 인도·이란 문명을 포용하다

관음보살(觀音菩薩)은 불교의 여러 보살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보살이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 즉 중생이 관음보살을 부르면 소원을 성취시켜 준다고 믿기에 불교가 번성한 지역이면 어느 곳에나 관음상이 있다. 그런데 관음보살은 이란의 수신(水神) 아나히타(Anahita)와 힌두 여신 사라스바티(Sarasvati)에 원류를 두고 있다. 무슨 소리일까? 관음보살은 페르시아와 인도의 신이 간다라 지역에서 불교화된 후 중국과 한국에 전해졌으며, 백제를 통해 일본에 건너가 크게 유행하였다. 실크로드를 따라 전파된 관음 신앙과 그 속에 남아 있는 백제의 흔적을 탐색한다.△페르시아인도 물의 여신과 관음보살관음보살은 구원을 요청하는 중생을 구제해주는 구도자다. 관음은 소리(音)를 본다(觀)는 의미인데, 뛰어난 피아니스트가 악보를 보기만 해도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느끼듯 중생을 구제하는 탁월한 능력을 관음 두 글자로 표현한 것이다. 보살은 지혜를 가진 자, 구도자를 뜻한다.원래 관음보살은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의 성스러운 물의 여신 아나히타에서 기원했다. 관음보살이 머리 위에 화불(化佛)을 얹고 있거나 천관(天冠)을 쓴 것이 아나히타상의 특징과 유사하며, 손에 물병을 들고 있는 것 또한 관음보살상의 그것과 같다. 또 관음보살상 오른손에 들려 있는 버들가지 역시 아나히타상 장식 문양과 비슷하다.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관음성지가 모두 해안에 위치해 있고 한결같이 흐르는 물병을 들고 있는 것도 물의 여신 아나히타와 관련이 있다.한편 아나히타는 힌두교에서 창조의 신 브라흐마의 아내이며 물과 풍요의 여신인 사라스바티와 기원이 같다. 아나히타는 하라흐바티(Harahvat)로도 불리는데 이는 사라스바티를 페르시아어로 발음한 것이다. 또 관음은 산스크리트어 아바로키테슈와라(Avalokitevara)를 한자로 표현한 것인데, 아바로키테슈와라는 브라만교에서 비슈누와 시바 신에 대한 호칭으로 사용되었다.간단히 정리하면, 이란의 수신 아나히타가 간다라에 들어와 불교의 관음보살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힌두교의 신들도 수용된 것이다.△아잔타석굴, 호류지 금당벽화의 원류관음보살과 인도페르시아의 특별한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호류지(法隆寺)다. 호류지는 백제 승려 혜총에게 불교를 배워 일본 불교 발전에 절대적 공헌을 한 쇼토쿠태자(聖德太子)가 607년에 세운 나라(奈良)현의 사찰이다. 호류지에는 한국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관음보살 세 점이 있다. 그것은 금당벽화 속 관음보살과 백제관음 그리고 몽전(夢殿)의 구세관음이다.먼저 금당벽화는 인도 아잔타(Ajanta) 석굴 벽화가 그 원류이다. 이는 금당벽화 6호벽 아미타정토도와 아잔타석굴 제1굴 보살상이 쌍둥이처럼 닮은 것에서 확인된다. 힌두 문화를 꽃피운 굽타 왕조 때 건축된 아잔타 석굴의 벽화와 불상들은 인도 고유의 특색이 두드러진다. 아잔타석굴 제1굴 벽화에는 자타카(Jataka) 즉 붓다의 전생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이 가운데 최고의 걸작품은 연꽃을 손에 쥐고 있는 보디사트바 파드마파니(Bodhisattva Padmapani)로 일명 연화수보살(蓮花手菩薩)이라고 불린다. 보관, 목걸이, 팔찌 등으로 장식하고 기품 있게 미소 짓고 있는 이 그림은 금당벽화 아미타정토도 우측에 화려한 장식과 가냘픈 허리, 손가락 굽히는 모양, 응시하는 눈매 등으로 그려진 관음보살상을 매우 닮았다. 이는 아잔타석굴 양식이 돈황을 거쳐 한반도로 유입된 후 일본에 전해졌음을 보여주는 놀랍고 흥미로운 사례다.△호류지 관음상의 인도이란 특색호류지 별관에 전시되어 있는 일본 국보 백제관음은 키가 209.4㎝의 장신 불상으로 7세기 초중엽에 제작된 것이다. 백제관음상의 특이한 광배, 8등신의 호리호리한 몸매, 부드러운 어깨와 허리 곡선을 보고 있으면 절로 탄성이 나온다. 무엇보다 우아한 미소를 띤 얼굴은 일본 불상에서 볼 수 없는 전형적인 백제인의 모습이다.백제관음은 인도 양식을 포용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보살의 형상은 인도 귀족의 모습을 띠고 있어 머리에 보관을 쓰고 천의(天衣)를 걸쳤으며 아래에는 치마와 같은 군의(裙衣)를 걸치고 있다. 또 귀걸이, 목걸이, 팔찌, 영락 등으로 몸을 장식한다. 인도 귀족의 모습이 토착화된 백제관음은 인도 미술 양식이 실크로드를 따라 백제를 거쳐 일본에 전래되었음을 보여주는 뚜렷한 예이다.호류지에는 백제인이 만든 관음상이 하나 더 있으니 키 180㎝의 구세관음(救世觀音)이 그것이다. 일본에서는 구세관음을 쇼토쿠태자를 본 뜬 불상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백제 불상이다. 이를 입증하는 증거들은 많다. 우선 호류지의 고문서 성예초(聖譽抄)와 헤이안(平安)시대 역사서인 부상략기(扶桑略記)에는 백제 위덕왕이 서거한 부왕을 그리워해 구세관음을 제작한 사실이 기술되어 있다. 또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서산 마애삼존석불의 우측 보살입상은 머리에 높은 보관을 쓰고 있고, 천의는 양팔에 걸쳐져 U자형으로 길게 늘어져 있으며 두 손에 보주를 들고 있는 것이 구세관음과 매우 닮았다. 구세관음이 백제 작품임을 입증하는 명백한 증좌인 것이다.그런데 구세관음의 보관에는 조로아스터교를 기반으로 하는 페르시아 사산왕조의 심볼인 일월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란 왕의 상징인 일월 문양이 왜 새겨져 있을까? 이는 구세관음을 제작한 백제가 페르시아와도 긴밀히 교류했었음을 말해준다.△관음보살, 실크로드 문명 교류의 소산관음신앙은 페르시아와 인도에 기원을 두며,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전해졌고 다시 백제를 통해 일본에 전래되었다. 일본 호류지에 남아 있는 관음보살상은 실크로드 문명 교류의 소산으로 백제가 인도와 페르시아 문명과도 교류한 해양실크로드의 주역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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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4.07 23:02

[전북 미래를 이끈다] ⑨ 금융산업-전북도 금융산업지원팀, 연기금·농생명 특화 금융중심지 효율적 조성 온 힘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가 전북혁신도시로 이전했다. 이를 계기로 전북도는 금융타운과 클러스터 조성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연기금농생명 특화 금융중심지 조성을 위한 특별 전담팀을 발족했다. 최근 대선정국을 중심으로 안철수문재인 후보 등이 금융타운 조성을 약속해 정권교체 이후가 주목되고 있다. 아울러 지금부터는 기금운용본부의 이전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전북도를 중심으로 금융타운 조성을 철저히 준비해 나가야 한다. 이에 본보는 전북 농생명연기금 특화 금융타운 조성담당 실무자인 전해성 전북도투자유치과장, 윤세영 금융산업지원팀장, 최준상, 안성옥 주무관 등을 만나 전북 금융타운의 안착계획과 향후 청사진을 들어봤다.△전북도의 농생명연기금 특화 금융타운 조성계획전북도는 기금운용본부 이전을 계기로 연기금 조사연구기구를 설치하고, 금융전문대학원을 설립해 연기금 특화 금융중심지를 조성한다는 구상이다. 또한 글로벌 리서치센터를 신설해 대체투자 금융도시라는 인지도가 형성되면 증권사은행 등 금융기관과 국내외 위탁운용사의 집적화가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금융타운 조성사업은 기금운용본부 일대 3만3256㎡ 부지를 연기금농생명 특화 금융 산업 중심지로 만드는 것이다.도는 이곳에 연기금 금융클러스터를 조성해 전북이 강점을 갖고 있는 농생명분야에 금융을 활용, 농업의 규모화첨단화를 도모할 수 있도록 농생명관련 금융교육기관 신설과 집적화에 집중하고 있다. 금융타운 조성팀은 19대 대선공약으로 채택될 가능성이 높은 연기금농생명 특화 금융 중심지 지정을 통해 서울, 부산에 이은 금융도시를 만든다는 계획이다.윤세영 전북도 금융산업지원팀장은지금은 금융타운의 밑그림을 그린 상태다며사업화방안 및 재원조달방안을 설정하고 2020년 착공을 목표로 관련된 절차를 진행해나가고 있다고 밝혔다.전해성 전북도 투자유치과장은전북금융타운에 금융기관이 이전할 수 있도록 수도권 금융기관을 대상으로 IR활동(투자자를 상대로 호소하는 홍보활동)과 팸투어 활동을 계획 중이다고 말했다.△금융타운 조성 걸림돌 산재전북의 농생명연기금 특화 금융타운의 실현은 막연한 기대감이 아닌 정부국민연금전북도정치권과의 공조를 통해 완성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근 한국산업관계연구원을 통해 전북 금융타운 조성 기본구상 연구용역을 진행한 결과, 전북지역으로 본사지점을 이전하거나 직원을 추가 파견할 의향이 있다고 응답한 금융기관이 30곳도 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전북금융타운의 개막을 앞두고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도 여전하다. 일부 중앙언론은 객관적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기금운용본부의 전북혁신도시 이전으로 연기금 부실이 염려된다고 보도하고 있는 상황이다. 전북애향운동본부 등 도내 시민사회단체는 일제히 성명서를 내고만약 편파보도로 인한 부작용으로 기금본부의 전북이전에 문제가 생길 시에는 전북도민의 거센 저항에 부딪힐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전북도민들의 강한 반발에 원색적인 비하보도는 점차 사그라든 모습이지만 안심할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주장이다.금융타운조성팀 최준상 주무관은기금운용본부 전북시대 흔들기에 일부 중앙언론이 나선다는 것은 그만큼 기금운용본부 이전이 금융업계에 피치는 파장이 크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같은 팀의 안성옥 주무관은기금본부 이전으로 우려되는 측면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정부, 정치권 등과 긴밀한 협조를 통해 전북의 미래금융서비스 발전과 경제성장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피력했다.△금융타운 조성을 위해 풀어야할 과제들가장 유력한 대선주자로 꼽히는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와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 모두 전북을 금융허브로 키우겠다는 공약을 내놓았다. 그러나 공약만으로 안심해선 안 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한 현실적인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특히 금융타운의 중심이 될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의 안착은 가장 중요한 과제로 평가받는다.기금운용본부는 업무 특성상 증권사와 은행 등 금융기관, 국내외 위탁운용사, 외부 전문가 등과 회의나 행사가 빈번하다.투자금융업계의 기금운용본부 방문은 월평균 3000명, 연간 3만6000명 정도다. 그러나 최근 기금운용본부를 방문한 금융관계자들은 전북 혁신도시의 교통, 회의, 숙박 등 인프라가 아직도 취약하다고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기금운용본부의 원활한 업무 추진을 위한 인프라 개선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다. 기금운용본부 관계자는KTX 등 고속열차를 탈 수 있는 기차역과 혁신도시를 바로 오갈 수 있는 버스를 우선적으로 만들어야한다고 주장했다.아울러 특급호텔 등 숙박시설 건립, 대도시가 가진 장점인 문화 공연쇼핑고급 식당 등 생활문화 인프라 조성도 풀어야 할 과제다.윤세영 금융산업지원팀장은전북이 그리는 연기금농생명 특화 금융중심지는 기금운용본부의 적극적인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다며기금본부와 관계를 맺고 있는 유관 금융기관 유치를 위한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고 밝혔다.● [농생명연기금 특화 금융타운은] 금융기관 업무지원금융산업 육성 시설 집적화전북 농생명연기금 특화 금융타운은 기금운용본부와 관계된 금융기관에 필요한 업무지원시설과 전북 금융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시설을 집적화하기 위해 구상하는 시설이다. 기금운용본부는 2016년 1분기 기준 국내외 위탁운용사 343개, 거래증권사 146개와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러한 기관을 지원하는 동시에 이들을 활용해 전북의 금융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핵심적인 시설이다. 현재 전북금융타운의 조성 규모, 필수 기능 등을 선정하기 위한 전북 금융타운 기본구상용역을 실시하고 있다. 이를 통해 전북금융타운의 사업화 방안, 재원 조달 방안을 설정하고 2020년 착공을 목표로 관련된 절차를 진행해나가고 있다.전북은 농촌진흥청을 중심으로 식품, 정보통신기술(ICT), 농기계 등 농생명산업 육성에 필요한 인프라가 풍부하다. 전북은 앞서 2015년에 농생명 연구개발특구로 지정받았으며, 이후 스마트농생명산업 육성계획을 세우는 등 첨단 ITSW기술을 융합해 농생명산업을 전북형 4차 산업혁명의 중심으로 키우려 하고 있다.금융타운 조성이 성공할 경우 2043년이면 2500조원 규모의 기금을 운용하는 기금운용본부와 금융기관들의 집적화가 가능하다. 이는 지역경제의 선순환 구조를 거쳐 지역내 총생산, 부가가치, 소비, 투자, 지방정부 재정 등에 상당부분 긍정적으로 기여할 것으로 전망된다.앞서 송하진 전북도지사는농생명 특화 금융도시 실현을 위해서는 농협대학 이전 유치, 농생명교육혁신캠퍼스 구축, 농업인력 인큐베이팅 농지지원 사업 등 집중이 필요하다며농업금융 인프라 확보를 통해 농업금융투자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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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윤정
  • 2017.04.06 23:02

[전북 미래를 이끈다] ⑧ 신재생에너지산업-수소연료전지산학협력센터, 수소연료전지 부품 개발·인력 양성 통해 기업 돕는다

차세대 친환경 에너지원인 연료전지는 한중일 삼국지 구도다. 한국에서도 부안 신재생에너지단지 내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수소연료전지산학연협력센터는 세계 수준의 수소연료전지 기술력과 장비를 자랑한다. 이곳에서 윤영기 센터장과 정치영 선임연구원, 이종민 기술원 등을 만나 전북 수소연료전지산업의 현황과 미래 발전 전략에 대해 들어봤다.△수소연료전지는연료전지는 발전기다. 이 중 수소연료전지는 물을 전기분해할 때 전기를 많이 투입하면 수소가 조금 발생하는 반응의 역발상에서 출발했다. 즉 수소를 조금만 투입해도 전기가 많이 발생한다는 논리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수소연료전지는 인간이 개발한 에너지원 가운데 에너지 전환율이 가장 높다. 발전효율은 38%, 열효율은 90% 수준이다. 뿐만 아니라 수소와 산소의 전기화학 반응 과정에서 전기, 열, 물만 나오므로 공해에서 자유롭다.수소연료전지는 건물용과 수송용으로 나뉜다. 1셀은 0.6~0.7V로 전압이 낮다. 수십~수백 개의 셀을 적층해 발전기 본체인 스택을 만든다. 연료전지 시스템은 이 스택과 수소 공급장치, 공기 공급장치, 전력변환기로 구성된다.건물용 연료전지는 시장이 확대되는 추세다. 신재생에너지 설치 의무화 제도로 공공기관이 건축 연면적 1000㎡ 이상의 건물을 신증개축할 때 총예상 에너지 사용량의 일정 비율을 신재생에너지 설비로 공급해야 하기 때문이다.또 수송용 연료전지의 경우 승용차는 초기 상용화 단계, 버스는 개발 초기 단계다. 특히 현대자동차와 도요타, 혼다 등 세계 굴지의 완성차기업이 수소연료전지 자동차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특히 완성차기업은 내연기관의 배출가스 감소와 연비 규제에 대응하기 위해 수소전기하이브리드 자동차 상용화에 열을 올리는 상태다.△수소연료전지 전문 지원기관부안 신재생에너지단지는 2004년부터 2011년까지 국비 800억원, 지방비 250억원 등 총 1050억원을 투입해 신재생에너지 실증연구단지(수소연료전지풍력태양광), 산업연구단지, 테마파크단지를 조성했다.이 가운데 2012년 문을 연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수소연료전지산학연협력센터는 수소연료전지 분야의 전문 지원기관이다. 연료전지 부품시스템 개발, 성능실증 평가, 인력 양성 등을 통해 기업이 개발에만 전념하도록 돕는다. 국내 유일의 10㎾ 급 건물용 고분자 연료전지 성능검사기관이자 국내 유일의 고분자 연료전지 분야 한국인정기구(KOLAS) 인정기관이다.이를 반영하듯 수소연료전지산학연협력센터를 통해 지원받은 기업의 면면도 화려하다. 부품시스템 개발을 진행하는 기업은 현대자동차와 두산퓨엘셀, LG화학, 현대제철, 프로파워, 범한산업 등이다.1996년부터 연료전지를 연구한 윤영기 센터장은 그동안 센터는 100억원 상당의 개발 장비, 2644㎡(800평) 규모의 공동 이용시설, 30년간 축적한 보유 기술 등 기업에 대한 원스톱 지원 체계를 갖췄다며 이를 십분 활용해 2019년까지 부안 신재생에너지단지 내에 연료전지 관련 기업 1개를 유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세계수준 기술력 확보현재 수소연료전지는 연구개발(R&D)에서 상용화로 넘어가는 단계다. 윤 센터장과 정 선임연구원, 이 기술원 등은 전북이 수소연료전지 연구개발의 리더로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고 평가한다.2016년 9월 입사한 정치영 선임연구원은 입사 전, 홍콩과 영국에서 연료전지를 연구했다. 2년간 홍콩과학기술대학에서 연료전지 전극, 1년간 영국 임페리얼 컬리지(Imperial College) 런던에서 버스용 스택 모델을 연구하면서 국제적인 감각을 쌓았다.정 연구원은 한국의 연료전지 기술은 선진국과 비교해도 굉장히 높은 수준이라며 그동안 한국은 선진국의 기술 팔로워 입장에서 각 산업에 대한 연구개발을 진행했지만, 수소연료전지 산업은 한국이 북미나 유럽 등 선진국보다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단계라고 밝혔다.또 이종민 기술원도 수소연료전지의 시대가 멀지 않았음을 실감한다고 했다. 전북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한 이 기술원은 도시가스회사에서 근무하다 2015년 12월 센터에 들어왔다. 수소도 고압가스이므로 도시가스회사만큼 안전 관리에 각별한 주의를 요한다.이 기술원은 외부에서 본 연료전지 산업과 내부에서 체감한 연료전지 산업은 크게 달랐다며 수많은 기업들이 부품시스템 개발을 추진하고, 성능실증 평가를 진행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수소연료전지의 시대가 현실로 다가왔음을 느낀다고 말했다.그러나 수소연료전지 자동차 상용화를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도 많다. 수소연료전지 자동차의 충전 인프라인 수소스테이션을 확충하고, 이에 앞서 수소스테이션 설치와 관련한 고압가스 안전 관리법 등 법규를 보완하는 작업이 요구된다. 수소연료전지 자동차에의 안정성 우려를 불식해 수용성을 높이고, 대량 생산으로 가격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전북 신재생에너지산업은] 생산량 연평균 11% 증가2015년 매출액 1조 넘어전북의 신재생에너지산업은 태양광, 풍력, 연료전지, 에너지저장장치(ESS) 등으로 구분된다. 그 중심에 부안 신재생에너지단지가 있다. 부안 신재생에너지단지 내에는 한국산업기술시험원, 전북대 소재개발지원센터, 한국기계연구원재료연구소,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수소연료전지산학연협력센터 등 연구기관이 있다.전북의 신재생에너지 생산량과 발전량은 증가세를 기록했다. 2015년 기준 전북의 신재생에너지 생산량은 55만5000TOE(석유환산톤)로 전국 1329만2000TOE의 4.1%를 차지한다. 2011~2015년까지 전북 신재생에너지 생산량은 연평균 11.32% 증가했다. 같은 기간 전북의 신재생에너지 발전량은 125만2700㎿로 전국 3707만8800㎿의 3.3%를 점유한다.특히 2015년 전북의 태양광 신규 설비용량은 20만5200㎾로 전남 31만7000㎾ 다음으로 높다. 누적 설비용량은 66만2700㎾다.또 2015년 기준 전북의 신재생에너지 기업체는 25개, 고용 인원은 2080명, 매출액은 1조3348억원을 기록했다. 신재생에너지원별 고용인원으로 살펴보면 태양광이 1772명(85%)으로 대부분이고 폐기물 85명(4%), 풍력 82명(4%), 연료전지 79명(2%), 바이오 51명(2%) 등의 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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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민주
  • 2017.04.05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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