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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카드뉴스] 이 포켓스톱에는 저항의 전설이 있어

이 포켓스톱에는 저항의 전설이 있어#표지.이 포켓스톱에는 저항의 전설이 있어#1.포켓몬 성지로 떠오른 전주 덕진공원!이곳에는 그동안 잘 모른 채 지나쳤던 우리 지역의 이야기가 있다는데요!#2.한 번 떠나볼까요?(가취가욥~!)#3.연못 동쪽, 동상 하나가 서 있습니다.이 동상의 이름은 전봉준 선생 상.#4.동학농민혁명을 이끈 바로 그 전봉준 장군을 기리는 동상입니다.#5.다만 지도에서 위치가 조금 어긋나 있어, 실제 위치를 찾으려면 눈썰미가 조금 필요합니다.#6.덕진공원에는 전봉준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을 이끈 손화중 장군을 기리는 조형물도 있습니다.보국안민 척양척왜라고 쓰인 비석이 그것인데요.#7.사실 덕진공원 자체는 동학농민혁명과 큰 연관이 없어 논란도 있었습니다만,#8.전주라는 도시가 혁명의 절정이었던 전주성 점령과 전주 화약의 도시였기에 의미가 적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풍남문과 전라감영 터, 한옥마을 동학혁명기념관도 포켓스톱으로 지정돼 있습니다.)#9.동학농민혁명을 기리는 포켓스톱은 전북대 캠퍼스에도 있습니다.#10.구정문을 지나 학생회관 맞은편을 보면 건물 한쪽 벽에 그려진 벽화가 보입니다.#11.제1과학관의 이 벽화는 전북지역미술공동체가 1988년 그린 것인데요.#12.동학농민혁명에서 출발한 민중 저항의 역사를 담아낸 그림으로, 그 힘과 기운이 느껴집니다.#13.그 바로 앞에는 1980년 5월 18일, 518 민주항쟁 당시 첫 희생자인 이세종(리세종) 열사를 기리는 비석이 있습니다.#14.518과 저항 정신의 상징과도 같은 조형물로, 지난해 전북대 학생들의 시국선언도 이 자리에서 진행됐죠.#15.다만 포켓스톱 이름에서 리세중으로 오타가 나 있는 점이 아쉽습니다.#16.구정문 옆에는 419 혁명의 진원지라는 글귀가 박힌 비석이 있습니다.#17.1960년 419 혁명 정국에서 전국 대학가 최초의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였던 전북대 44 시위가 이곳에서 벌어졌다는 의미입니다.#18.때마침 4월 4일은 전북대 개강일이었습니다. 정치과 학생이라면 현실정치에 대한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었습니다.(전대열 씨, 당시 정치학과 3학년)#19.그간 무심코 지나치곤 했던 우리 지역의 저항의 기록들. 이제 조금은 새롭게 다가오지 않나요?/기획 신재용, 구성 권혁일, 제작 이권중

  • 기획
  • 전북일보
  • 2017.02.09 23:02

전북 미래를 이끈다 ① 자동차산업 "부품업체 기술 경쟁력 높이는 산업 체질개선 필요"

전북지역 경제가 변곡점에 놓였다. 2015년 전북의 경제성장률은 전국 17개 시도 가운데 유일하게 제로(0%)를 기록했고, 가파른 저출산고령화 현상으로 인구 절벽이 눈앞에 닥쳤다. 국내외적인 도전을 기회로 삼아 앞으로 나아가느냐,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이대로 주저앉느냐 하는 기로라는 뜻이다. 전통적인 주력산업의 성장이 둔화된 상황에서 기본 전략을 수정보완하고, 미래 성장동력산업을 적극적으로 발굴육성하는 대변혁이 절실하다. 이에 본보는 자동차산업, 농생명산업, 농건설기계산업, 식품산업, 탄소산업 등 전북 전략산업을 이끄는 전문가를 통해 산업별 현황과 과제 등을 10차례에 걸쳐 짚어본다.첫 순서로 전북 제조업을 지탱하는 자동차산업과 관련해 자동차융합기술원의 방동훈 전략기획실장, 김영군 감성융합연구본부장, 김성곤 감성융합연구본부 스마트전장연구그룹장, 조상현 시스템연구본부 파워트레인연구그룹장을 만났다.△대기업 의존형서 기술 추구형으로전북 자동차산업은 1995년 현대자동차 전주공장, 1997년 대우자동차 군산공장 준공을 계기로 시작됐다. 자동차산업 기반이 없던 전북에 완성차업체가 둥지를 틀면서 자동차산업이 태동했고, 현재는 전북 제조업의 근간을 이루는 뿌리로 자리 잡았다. 자동차산업은 부품 제조와 완성차 조립뿐만 아니라 판매, 정비, 보험 등 전후방 산업과 연관된 종합산업이다. 전후방 파급 효과가 큰 만큼 지역에 미치는 영향력도 단시간 내 빠르게 확산됐다.방동훈 전략기획실장은 전북 자동차산업은 완성차업체인 대기업을 구심으로 중소 부품업체들이 모였고, 실제 2003년 자동차 부품업체는 200개에서 2016년 500개까지 늘었다며 국내 자동차 생산량은 연간 450만대로 이 가운데 상용차 생산량은 40만대(9%)에 불과해 국외 상용차 생산량 비중(25%)에 비해 턱없이 적어 전반적인 상용차 생산 규모 확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이어 전북 자동차산업은 기술 추구형이 아닌 대기업 의존형으로 완성차업체의 성장과 궤를 같이 해왔다며 자동차 부품업체가 자생력을 갖추려면 완성차업체에 역제안할 수 있는 기술력을 보유해야 한다며 뛰어난 생산 제조력에 비해 부족한 기술 경쟁력을 아쉬워했다.조상현 파워트레인연구그룹장도 승용차 기술력은 세계 5위권이지만, 상용차 기술력은 세계 20위권으로 전반적인 기술 수준 향상이 필요하다며 특히나 향후 자율주행 등 상위 개념이 구현될 때는 자동차 부품업체가 적극적인 체질 개선으로 체력을 키워야 한다고 조언했다.△상용차 테스트베드 구축 모색유럽은 상용차의 안전성 제고와 물류의 효율화를 위해 상용차 군집주행 실증시험 기반을 구축하고, 관련 부품과 소프트웨어 개발에 나섰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전북 역시 기존의 상용차 집적지를 혁신클러스터로 발전시키고, 군집주행과 관련한 국내외 기업의 투자 유치를 통해 국내 유일의 상용차 자율주행 생태계를 조성할 필요가 제기된다.이들은 시대적 변화를 기회로 판단했다. 방 실장은 해외에 비해 낮은 상용차 기술개발 수준 향상이 시급한 문제지만, 자율주행이라는 시대적 트렌트도 무시해서는 안되는 시대적 과제라며 때문에 이제는 국가 차원에서 새만금과 연계한 미래형 상용차 글로벌 전진기지를 조성해 자율주행(군집주행) 테스트베드를 구축하는 방안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라고 짚었다.김성곤 스마트전장연구그룹장은 상용차는 사고시 승용차에 비해 탑승자와 화물의 피해 규모가 크기 때문에 자율주행 기술을 구현하기까지 더 까다로운 시험이 요구된다며 승용차에서 검증된 기술도 상용차에 적용하기 까지는 최소 3~5년이 걸리므로 이를 충분히 실증하는 테스트베드가 필요하다고 밝혔다.김영군 감성융합연구본부장은 기술개발 투자에 대한 자동차 부품업체의 긍정적인 인식 전환, 오랜 기간 축적된 제조 기술력에 주목했다. 김 본부장은 자율주행차와 전기자동차 등 새로운 개념의 자동차가 도입된다고 해도 누군가는 그 바탕이 되는 부품을 만들어야 한다며 수년간의 다품종 소량 생산 체제를 유지해온 전북 부품업체는 이 시장에 가장 적합한 노하우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했다.● [전북 자동차산업은] 국내 중대형 상용차 95% 담당하는 생산기지전북은 국내 2.5톤 이상의 트럭과 16인 이상의 버스 등 중대형 상용차의 95%를 생산하는 대표적인 상용차 생산기지다. 현대자동차와 타타대우, 한국GM 등 완성차업체를 중심으로 군산시익산시김제시완주군 일대에 차체, 의장, 섀시 등 부품업체가 집적화돼 있다. 완성차업체 3곳의 생산시설과 상용차부품 주행시험장, 상용차부품 R&D 센터 안에 구축한 대형 상용차용 10m 전자파 챔버 등 상용차 특화 인프라는 강점으로 꼽힌다.통계청의 광업 및 제조업 시도 지표에 따르면 2014년 기준 전북 자동차산업 분야(10인 이상) 출하액은 11조원, 사업체수는 219개, 종사자수는 1만9688명이다. 전북 제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만 해도 사업체 수 11.9%, 종사자 21.8%, 출하액 25.4%, 부가가치 24.9%에 달한다.전북 상용차 생산량은 2011년 7만3600대, 2012년 6만9300대, 2013년 7만2200대, 2014년 8만750대, 2015년 7만3600대 등으로 일정한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다. 반면 승용차 생산량은 한국GM 군산공장의 생산 물량 축소로 인해 2011년 26만8670대, 2012년 21만 1180대, 2013년 14만4810대, 2014년 8만1670대, 2015년 7만대로 매년 감소 추세다.특히 자동차산업은 전북 제조업 수출액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는 주력산업이다. 2015년 기준 전북 제조업 전체 수출액은 79억5300만달러로 이 가운데 자동차산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30.2%인 24억500만달러다. 제조업 수출액의 30%를 차지하지만, 승용차 생산량과 수출량 감소로 2005년 이후 가장 적은 수출액을 기록했다.전북도와 자동차융합기술원은 새만금 내 미래형 상용차 글로벌 전진기지를 조성해 상용차 군집주행 테스트베드 구축, 핵심 기술 개발, 부품업체 집적화 등을 꾀한다는 구상이다. 이를 통해 전북 상용차 생산량을 2015년 7만3600대에서 2025년 20만대까지 확대한다는 목표다.

  • 기획
  • 문민주
  • 2017.02.09 23:02

[남원시 아영면] 흥부놀부전 모델 '박첨지·박춘보' 살던 곳

남원시 아영면은 신라 경덕왕 16년(757년)까지 모산현 천령군(지금의 경남 함양)에 속해 있었으며, 고려 태조 23년(940년)에 운봉현이 남원부의 관할이 됐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신라가 영토확장을 위한 각축전을 벌이던 곳이었고 그 중심에 아막성(阿莫城 전라북도 기념물 38호)이 있다. 아막성은 백제의 이름이며, 신라에서는 모산성이라고 불렀다.지리적으로는 장수군 번암면, 함양군 백전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통영에서 진주, 산청, 함양(백전), 아영, 번암, 임실, 전주, 한양으로 이어지는 삼남대로가 지나는 곳이었으며 역촌도 있었다.아영면은 인근 인월면과 함께 흥부전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흥부전에 나오는 지명이 대부분 이 일대에 분포돼 있고 놀부와 흥부의 모델이 되는 박첨지와 박춘보가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일부 주민들을 중심으로 아영면의 명칭을 흥부면으로 바꾸려는 움직임도 전개되고 있다.△관계고시 출신으로 문화체육관광부에서 국립중앙도서관 기획연수부장(이사관)을 지내고 현재 공로연수 중인 유정영씨(60)와 부산출입국관리소 김삼준 소장(59, 고위공무원), 염종호 산림청 국유림관리과장(57부이사관) 등이 있다. 전북도청에서는 김용태 전 교통물류국장(67)과 성신상 전 농림수산국장(62), 임종환 공무원 연수원 과장(62) 등이 근무했으며, 성신상 전 국장은 현재 농촌진흥청 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남원시청에서 총무국장(서기관)을 지낸 김병한씨(65)도 아영 출신이다.△학계이남호 총장(59)을 비롯해 전북대에 김동근 법학전문대학원 원장(52), 김철생 공과대학 학장(58), 학생취업지원처 김환일 교수, 의학전문대학원 이규형 예방의학과 교수, 자연과학대 양계모 교수 등이 있다.김동근 법학전문대학원 원장은 기획부처장과 홍보부처장, 신문사 주간 등을 지냈으며, 김철생 기계설계학부 교수는 지난해 연구팀과 함께 각막이나 고막 등을 재생할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의 멤브레인(membrane세포막) 제조기술을 개발해 세계적인 학술지 네이처(Nature) 자매지인 Scientific Reports (I.F:5.578)에 게재했다.김정우 원광대 의대 교수도 아영면 출신이며, 연세대학교 김대중 도서관 소장을 지낸 연세대 국제대학원 유상영 교수(54)와 강원대 경제무역학부 김태인 교수, 영남대 건축공학부 형원길 교수, 한국폴리텍 대학 원주캠퍼스 변창수 교수, 한중대학교 경영행정문화학부 우태식 교수 등이 현직에 있다.전직 교수로는 동국대 부총장을 지낸 오법한 교수(90. 고인)와 고려대 학장과 고시출제위원장을 지낸 박재섭 교수(고인), 한양대 김종태 교수(83. 고인), 동국대 형기주 교수(85), 영남대 박창현 교수(70) 등이 있다. 교육고시에 합격해 교육부에서 부이사관을 지낸 강영웅씨(71)는 현재 순천에서 살고 있다.△금융계금융감독원 국장으로 퇴임한 정상덕씨(67)는 금감원 인력개발실 교수와 한국HSBC 감사 등을 지냈다. 안문택씨(85)는 증권감독원 부원장과 동성하이켐 사외이사, 한국투자신탁 비상근 감사위원장, 한국저당권거래소 이사장 등의 경력을 갖고 있다. 농협대 총장과 농협중앙회 인력개개발부장과 상무, 농협물류 대표이사 등을 지낸 이건호씨(70)와 국민은행 본점 영업본부장을 지낸 유준영씨(65), 그리고 전북은행 남원지점장을 지낸 강윤중씨(61)도 아영면 출신이다.△사법계사시 14기로 합격해 국가인권위 상임위원(차관급)과 법무법인 케이씨엔 변호사를 거쳐 현재 법무법인 유남영 법률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는 유남영 변호사(57)와 사시 17기로 대한변협 인권위원을 지내고 법무법인 원에서 활동하고 있는 유선영 변호사(55)는 형제이다. 사시 16기인 오광수 변호사(57)는 청주와 대구지검 검사장, 법무부 범죄예방정책국장 등을 지냈으며, 현재 오광수 법률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사시 35기 출신의 김미정 검사는 한때 전주지검에 근무했으며, 임동호씨(36)는 사시 46기로 현재 연수원에 있다.국민은행 유준영 전 본부장(65)과 문체부 유정영 전 이사관(60)이 유남영유선영 변호사의 형제이며, 유정영씨의 딸도 사법고시에 합격해 연수원에 있다. 또 연세대 국제대학원 유상영 교수가 이들의 동생이다. 형제들의 아버지인 병태씨는 아영면장을 지냈는데, 훗날 한 지인에게 어려서부터 형제들에게 공부습관을 길러주기 위해 무척 노력했다고 술회했다. 그에 따르면 류씨는 자녀들이 공부하는 방에서 새끼를 꼬면서 함께 밤을 보내고, 자녀들이 공부하다 지쳐서 잠이 들면 고구마 등을 삶아 와서는 먹고 힘내라며 격려하기도 했다. 또 객지에서 학교에 다니다가 방학 때 집에 오면 신발을 방안에 들여놓음으로써 함부로 밖에 나가서 놀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재계 및 군하나그룹 고문을 지낸 류성우씨, (주)인풍기획을 운영하고 있는 류대우씨, 청구화공 김태진 전 회장(고인), (주)태광피씨건설 천영래 대표, 영일만두를 운영하고 있는 성경문씨 등이 재계에 있으며, 재경아영면향우회 회장을 거쳐 고문을 맡고 있는 공대식씨도 고양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군 출신으로는 육사를 졸업하고 육군 대령으로 예편한 박태현씨, 공사를 나와 공군 대령으로 예편한 박태환씨, 그리고 육군 중령으로 예편한 유성희씨 등이 있다.△문화 및 기타문화계에는 가회민화박물관장을 맡고 있는 윤열수 문화재청 전문위원(71)이 있다. 윤씨는 한 평생을 민화와 함께 했으며, 민학회 회장과 가천박물관 부관장을 지냈다.한지박사로 불린 김시곤씨(고인)는 97년 자랑스런 신한국인상(대통령상)과 2000년 중소기업청이 선정한 신지식인, 그리고 산업인력공단의 한지 명인으로 선정됐다. 전북대 김동근 법학전문대학원 원장의 선친이다. 김영돌씨(78)는 전북도 무형문화재 13호인 옷칠장이다.농업부문에는 포도왕으로 2016년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상을 받은 강신철씨가 있으며 서울시의회 행정자치위원장을 맡고 있는 최조웅씨(57)도 아영면 출신이다. 또 건강과 관련한 방송출연으로 잘 알려진 이광연 한의사는 재경아영면 향우회장을 맡고 있다.종교계에는 조계종 포교원 연수부장과 포교부장, 강원도 철원 심원사와 고성 건봉사 주지를 지내고 지난 2008년 열반한 영도스님과 속리산 복천암 회주인 월성스님이 있다.- 다음 회에는 익산시 왕궁면 편이 이어집니다

  • 기획
  • 이성원
  • 2017.02.07 23:02

장인수 우석대의료원장 겸 전주한방병원장 "국가적 위기에 의료계도 '빙하기'…변화 기회 삼겠다"

지난달 2일 제14대 우석대 의료원장 겸 전주한방병원장에 취임한 장인수 교수는 지난해보다 더욱 단단한 마음으로 정유년(丁酉年)을 시작했다. 지난달 25일 전주시 중화산동 우석대 한방병원에 찾아갔을 때 장 병원장은 갑자기 상태가 나빠진 입원환자를 혼신을 다해 돌본 뒤 바쁜 걸음으로 나왔다.환자들의 환부 치료뿐만 아니라 마음의 병을 고치는 정신이 필요하다는 장인수 병원장은 그러기 위해서는 환경에 더 기민하게 반응하는 의료 환경의 질적양적 쇄신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장 병원장으로부터 우석대 부속 한방병원 운영방향 등을 들어봤다.-우석대학교 부속 한방병원장으로 부임되셨습니다. 소감이 어떠신지요.현대사회의 의료 환경이 급격하게 변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병원장직을 수행하게 됐습니다. 우석대학교 부속 한방병원은 제가 한의학을 배운 곳이기도 하고 지금까지 근무해온 모교 병원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의료 환경에서 지역의 의료기관으로서 대학의 교육병원으로서 우리 병원에게 그리고 병원장으로서 제게 주어진 임무가 크다고 생각됩니다.-먼저 병원 소개를 부탁드립니다.우석대 한방병원은 1991년 개원 이래 교육연구지역사회의 건강을 위해 힘써오고 있으며, 환자가 중심이 되는 병원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우석대학교 의료원은 한방병원과 우석병원으로 구성돼 있는데, 한방진료과는 내과, 침구과, 부인과, 소아과, 신경정신과, 안이비인후피부과, 사상체질과, 재활의학과이며, 양방진료과는 내과, 외과, 영상의학과입니다. 우리 병원은 양한방협진과 전문센터체계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중풍파킨슨병센터, 통합암센터, 통증재활센터, 아토피알레르기센터, 건강검진센터로 구성된 5개의 센터, 각 전문과의 전문분야에 따른 22개 클리닉을 중심으로 한방의료 및 한양방협진에 대한 수요에 맞는 새로운 의료서비스를 펼치고 있습니다.-우석대학교 부속 한방병원만의 특징이 있다면.우리 병원은 특히 중풍파킨슨병센터, 통합암센터, 통증재활센터, 아토피알레르기센터, 건강검진센터를 중심으로 진료와 연구를 발전시켜나가고 있습니다. 이 중 중풍파킨슨센터는 중풍과 파킨슨병 등 신경계 질환을 대상으로 하는데, 한의학에서 중풍 치료는 잘 알려진 분야이고, 파킨슨병 또한 한의학에서 활발한 연구와 진료가 이뤄지는 분야입니다. 또 우리 병원의 산후조리원은 1990년대부터 한방산후조리를 시스템화해 병동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아토피알러지센터는 한방치료와 자연요법의 장점을 살려 아토피 질환 알러지 질환에서 성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최근 개설한 통합암센터는 통합의료를 통한 암환자의 치유를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설해 운영하고 있습니다.-부임 이후 특히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이 있는지요.통합암센터입니다. 우리 병원은 통합암센터를 개설해 양한방 협력적 진료를 통해 최선의 암 환자 치료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국내외의 연구성과들을 기반으로 침치료, 뜸치료, 약침치료, 고주파온열암치료, 자연요법 등 환자중심의 암치료를 추구하고 있습니다.-병원 운영과 함께 대학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우석대에서 저는 한방내과학을 전공했고, 5개 분야로 나눠지는 내과 분과에서 순환신경내과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순환신경내과학은 중풍, 파킨슨병 등의 신경계질환과 순환기계질환을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제72회 한의사 국가시험에 재학생 모두 합격했다고 하던데요.우리 대학이 한의사 국가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올해도 전원 합격한 것은 수업과 임상실습 교육이 충실히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대학은 전국 한의과대학 중에서 재학생 대비 교수의 비율이 가장 높고, 실험 실습, 임상수련을 위한 우수한 시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반에서 학생들의 노력이 거둔 성과라고 생각됩니다.-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좀 소개해 주시죠.주로 연구해온 것은 신경계 질환과 레이저치료의학 분야입니다. 레이저치료라고 하면 외과 분야의 레이저사용을 떠올리게 되는데, 레이저의 생체자극효과를 통한 치료적 활용 또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분야가 제가 주력해온 연구분야입니다. 레이저는 세포와 조직의 광화학적, 광생물학적 효과를 통해 적절한 용량의 레이저 광선은 세포 고유의 기능을 자극하는 효과가 있으며, 전신적 효과를 나타냅니다. 레이저침을 통증치료와 비염치료, 탈모치료 등은 임상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 2014년에 파킨슨병 치료와 관련해 국제학회에서 상을 받으셨습니다.세계레이저의학회(WALT)와 북미광선의학회(NAALT) 연합 학술세미나에서 해외연구자상(NAALT Travel Award)을 받았습니다. 미국 워싱턴 D.C Arlington Capital View Hotel에서 개최된 행사였는데, 발표 제목은 파킨슨병에 대한 광선의학 최신지견이었습니다.파킨슨병에 대한 신경세포 보호 효과를 보이는 LED 및 레이저광선 치료의 실험 연구에 대한 최근의 연구 동향 및 전망에 대한 연구 결과들에 대한 발표였는데, 많은 연구자가 신경질환에서의 레이저광선치료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다양한 퇴행성 신경질환에서 레이저치료의 응용이 더욱 발전되어갈 것으로 생각합니다.-최근 중의학이 급성장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중국에서의 한의학 연구는 양적 질적으로 크게 성장했습니다. 연구뿐 아니라 임상 분야에서의 성과들을 적극적으로 교류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한의학을 발전시키기 위한 국가적 노력과 기초의학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다양한 과학 분야와 한의학이 결합된 연구가 발전할 때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우석대학교 부속 한방병원이 직면한 과제가 있다면.우석대학교 부속 한방병원은 1991년 개원했으니, 올해가 27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동안 꾸준히 변화하고 발전해왔습니다. 개원 초기 중풍과 통증질환 중심이었다면, 지금은 양한방 15개 진료과로 확대됐고 중풍, 파킨슨병, 산후조리, 척추관절질환, 아토피 알러지질환, 통합암센터, 검진센터 등 여러 전문센터가 운영되고 있습니다.의료기술과 환경은 매우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우리 병원의 직면한 과제라고 한다면 이러한 빠른 변화에 대처하고 새로운 의료기술의 도입을 통해 각 전문센터가 양적 질적으로 성장해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통해 대학 부속병원으로 지역사회 병원으로 더욱 깊이 뿌리내리는 것입니다.-향후 병원 운영 계획을 어떻게 세우고 계신지요.지역사회 의료기관으로서 역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고자 합니다. 새로운 치료기술을 빠르게 도입하고 우수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병원, 정성으로 환자를 진료하는 병원, 친절하고 편리한 병원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병원에서 임상 각 분야는 각각의 전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병원은 다양한 전문 직역의 직원들로 구성돼 있습니다. 이러한 각 분야의 전문성과 다양성을 가진 병원 각 부분들의 유기적인 협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협력하는 가운데 개인과 영역들의 전문성이 발휘될 때 병원이 더욱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장인수 병원장은] 파킨슨병 치료한방 레이저의학 권위자우석대학교 부속 한방병원 장인수 병원장은 서울 출신으로 우석대 한의학과를 졸업하고, 우석대 대학원 석사와 경희대 대학원 박사를 수료했다. 2001년 우석대 김제한방병원 한방내과 과장을 시작함과 동시에 2002년 우석대 한의대 전임강사와 조교수를 맡았다. 2007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학(UNC) 의대 교환교수를 거쳐 2008년 다시 우석대 한의대 교수로 복귀했다.현재 우석대 전주한방병원 한방2내과 과장과 중풍파킨슨센터장을 맡고 있다. 한방레이저의학회 회장도 맡아 바쁜 활동을 펼치고 있다.장 병원장은 병원과 대학, 학회, 연구 활동을 두루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며 그러나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바쁘고 시간 없는 나의 모습에 큰 즐거움을 느낀다고 말했다.이어 국가적으로 사령탑이 흔들려 온 국민의 마음이 아픈 위기라며 의료계도 마찬가지로 빙하기인 상황에서 전 의료진들이 의기투합해 위기를 변화의 기회로 삼겠다고 말했다.

  • 기획
  • 남승현
  • 2017.02.06 23:02

평생 석정 문학 연구한 원로시인 허소라 교수 "석정의 문학사적 위치 저평가 바로잡고 싶어"

반세기 가까운 세월을 한 시인의 문학과 삶을 조명하는 연구로만 바쳐온 시인. 그 덕분에 한국문학사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채 목가적 서정시인으로만 알려져 온 신석정 시인은 문학사의 새로운 노정, 그 주인공이 되었다.고등학교 시절부터 존경해온 시인을 스승으로 만난 것이 20대 초반, 시인을 꿈꾸던 젊은 문학도는 스승과 사제의 인연을 생애의 축복으로 알고 스승의 시정신과 청빈했던 삶의 태도를 온전히 자신의 귀감으로 삼았다.서정시와 저항시의 두 세계를 치열한 시정신으로 지향했던 스승의 문학을 그대로 안아 자신 또한 시대를 투영하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는 제자. 원로시인 허소라 교수(80)의 이야기다.시인으로 문학연구자로 문학도들을 가르치는 교수로 살아온 그의 삶은 온전히 석정 시인의 문학만을 지평으로 삼았다. 군산대에서 정년퇴임을 한 이후에도 시쓰기와 석정 문학연구로만 시간을 보내온 그를 만났다.-지난 연말, 유난히 활동이 많으셨던 것 같습니다. 석정문학상 수상도 축하드립니다.어떻게 하다 보니 그리 되었어요. 석정문학상도 그렇고 전주문학상도 그렇고 상을 받는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예요. 더구나 이 나이에 상을 받는다는 것은 미안한 일이기도 하고요.-근래 활동이 뜸하셨는데 연말에 이어진 수상소식에 인문학콘서트 초대까지 반가워하실 분들이 많았을 겁니다. 어떻게 지내셨습니까.내 나이 여든을 맞고 보니 아무래도 외부 활동보다는 안에서 지내는 일이 많았어요. 책도 읽고 밀린 자료 정리도 하고, 더러 시도 쓰면서 지냈지요.-늘 문학소년 같은 이미지의 교수님이 벌써 여든이 되셨다니 믿겨지지 않습니다.(웃음) 건강은 괜찮으시지요.특별히 앓고 있는 병은 없지만 공연히 온몸이 줄어들고 있는 듯 한 느낌을 갖습니다. 나이병이지요. 건강은 그런대로 괜찮습니다.-국정농단 사태로 온 나라가 어수선합니다. 매주 토요일, 광장의 촛불 집회를 보면서 석정 시인의 시집 〈촛불〉의 시어들이 떠올랐습니다. 현실의 암담함을 치열한 자각으로 인식해 시로 구현해냈던 석정 시인은 오늘의 상황을 어떤 시어로 담아냈을까 궁금했습니다.너무 유연하다고 나무라셨을 것 같아요. 일제강점기, 그 엄혹한 시대에서도 현실을 직시하며 정치적 저항시를 발표했던 분이니까요.-석정 문학 연구에 오랜 시간을 쏟아오셨습니다. 석정에 대한 재조명 작업은 교수님의 연구로 물꼬가 트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언제부터 연구를 시작하셨습니까.학문의 길에 들어선 이후 지금까지 석정 문학연구에만 온전히 매달려왔으니 40년도 훨씬 넘은 것 같습니다. 석사 박사 논문도 모두 석정 선생님의 문학세계가 주제였어요.-한 문학인의 삶과 문학세계에 그 오랜 시간을 천착하는 일이 놀랍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석정 문학에 대한 왜곡된 시각, 편향된 평가를 바로 잡고 싶어서였습니다. 석정은 우리 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놓여야 마땅한데도 지방에서 활동했던 향토시인 정도로 평가되는 일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저는 그것을 문단적 야맹 현상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그런 현상을 꼭 바로 잡고 싶었습니다.-석정 시인과는 개인적으로 인연이 있었나요.물론입니다. 스승과 제자 관계로 뿐 아니라 부모와도 같은 분이셨습니다. 그만큼 제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제게는 늘 미치지 못하는 거목 같은 존재였습니다.-어떻게 스승과 제자가 되었습니까.전북대 국문과 2학년 때 선생님이 한 학기 강의를 하셨어요. 가람 이병기 선생님이 석정을 굉장히 아끼셨거든요. 그때 시론 강의를 맡겼는데 그 강의를 듣게 된 거예요. 고등학교 때부터 〈촛불〉이나 〈슬픈목가〉등을 구해 읽으면서 존경하게 되었던 석정 선생님을 가까이에서 모실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았겠어요. 그 이듬해에는 교내 대학생 작품 응모에서 제 시가 장원에 뽑혔는데 그때 심사를 석정선생님이 맡으셨어요. 이후부터 선생님이 찾으시면 댁에도 드나드는 관계가 되었습니다.-특별히 아끼는 제자셨군요.많이 챙겨주셨지요. 그때는 전화가 없을 때여서 손자를 시켜 메모를 전하셨어요. 시 한편 갖고 빨리 오라는 내용이 많았는데 가보면 서울에서 신문사 기자가 와있었어요. 선생님 원고를 청탁하러 온 기자에게 제 시도 꼭 챙겨주셨어요.-등단도 석정 선생님 추천으로 하셨죠.석정 선생님이 당시 〈자유문학〉 심사위원이셨는데 3회 추천을 받아야만 등단의 절차를 끝낼 수 있었어요. 1년여 만에 3회 추천 모두를 석정선생님이 해주셨죠.-인연이 아주 깊었군요. 석정 문학에 대한 연구는 자연스러운 과정이었겠습니다.그렇죠. 지방에서 활동하신다는 이유만으로 변방의 시인으로 평가받는 것은 온당하지 않는 일이거든요. 더구나 선생님의 다양한 문학세계가 편향되게 평가 받는 일을 그대로 둘 수 없었습니다.-사실 석정의 시세계는 오랫동안 목가적 전원시, 혹은 서정시로만 분류되어 왔습니다. 그러니 현실참여의 저항시를 써온 시인으로 재조명 받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예요.물론 선생님은 목가적 서정시도 많이 쓰셨지만 아주 강한 어조로 써낸 현실 참여시가 적지 않습니다. 한국시의 자연서정과 현실참여라는 이원적 경험을 온몸으로 흡수하고 통합하려는 시도를 줄기차게 해오셨죠. 그런 점에서 석정은 한국시사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한 시인으로 평가 받아야 마땅합니다.-교수님도 많은 영향을 받았겠습니다.선생님의 시정신을 이어받고 싶었지만 그 세계에 늘 미치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컸습니다. 선생님은 민족의식이 투철했을 뿐 아니라 시대를 직시하는 감각이 워낙 탁월하셨어요. 한국군이 월남전에 파병될 때는 누구보다 안타까워하셨는데 어느 날인가 신문을 읽으시면서 달러하고 목숨을 바꾸는 짓이라며 분노하셨어요. 월남전에서 희생당한 한국군이 4300명. 선생님은 다가올 상황을 그렇게 짚어내셨던 것이죠.-기억에 남는 일이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일화가 많지요. 이런 일도 있었어요. 5.16이 났을 때 교사들이 자율권 보장하라고 국회 앞에 가서 데모를 했는데 그 사태와 관련해 석정 선생님이 경찰서에 끌려가셨어요. 소식을 듣자마자 쫓아갔더니 의자에 혼자 앉자계시더군요. 취조관이 자리를 비웠었는데 선생님이 하시는 이야기가 그 취조관이 선생님이 쓴 시한편이 인민군 1개 사단과 맞먹는 위력이 있는 것을 아느냐고 하더래요. 그 사람이 시의 힘을 알았던 것이죠. 깜짝 놀랐습니다.-어떤 시였습니까.당시 교사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데모를 했어요. 선생님은 전주고에 근무하고 계셨는데 그때 〈단식의 노래〉란 시를 쓰셨거든요. 이 시가 데모를 고조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죠. 그 사건으로 여러 선생님들이 다른 학교로 전출되고 붙들려가서 취조를 받는 고통을 겪었어요. 이후에도 남산기관에 끌려가시기도 했고, 여러 번 어려움을 겪으셨지요.-화제를 좀 바꿔보겠습니다. 석정 선생님과 가까워지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특별한 계기는 아닌데, 선생님의 칭찬을 받았던 시가 있었어요. 속으로는 따뜻하지만 겉으로 그런 마음을 잘 표현하시지 않는 분인데, 제가 발표한 〈목종〉이라는 시를 과분하게 칭찬하셨어요. 1964년에 경기도 운천리 미군부대에서 캔 하나를 훔치러 들어간 소년이 사살되는 사건이 있었어요. 그런데 일간지에 이 엄청난 사건이 고작 네줄 다섯줄짜리 기사로 나왔더라고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때 전북일보에 〈목종〉이라는 시를 써서 발표했지요. 나무종은 아무리 때려도 소리가 나지 않잖아요. 그것을 읽으시고 선생님께서 소라 시가 참 좋더라고 말씀하셨어요. 어떤 분의 평가보다도 감사하고 좋았습니다.-교수님이 펴낸 〈흐느끼는 목마〉는 당시 베스트셀러로 화제가 되었던 산문집인데요.그랬었죠. 30쇄가 넘게 인쇄를 했으니까요. 당시 여고생들에게 인기가 있었어요. 첫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만한 감정으로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 엮은 책이거든요. 그러니 사춘기 여고생들이 가슴 두근거리며 읽었겠죠.(웃음)-그 책을 내게 된 뒷이야기가 더 흥미롭던데요.제가 대학신문에 시를 발표했던 적이 있어요. 그 신문이 전국의 고등학교 도서관에 보내졌던 모양이에요. 제 필명이 허소라잖아요. 그 시를 읽은 포항의 여고생이 제게 편지를 보낸 거예요. 제목이 〈미지의 언니에게〉였어요. 저를 여자로 알았던 겁니다. 친구들이 그냥 여자인척 답장을 해주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몇 차례 주고받았는데 사람이 언젠가는 막다른 골목에서 마주치는 법이라고 그런 상황이 온 겁니다. 그래서 고백하는 글로 용서를 빌었지요. 그런데 오히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교제가 시작된 겁니다. 결국은 헤어지게 되었지만(웃음) 그 과정에서 주고받은 편지가 〈흐느끼는 목마〉로 엮인 거죠.-부안에 석정문학관이 문을 연 것이 2012년이었던가요. 문학관이 문을 열기까지는 교수님의 열정이 바탕이 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문학세계를 학문적으로 조명하고 정리하는 일도 그렇지만 대표작이나 유작 등 관련 자료를 모아내는 일도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다행스럽게도 제가 선생님의 작품을 발굴하기 시작한 것이 거의 40년 전의 일인데 웬만한 발표작은 거의 다 찾아냈고, 미발표작도 거의 발굴했습니다. 그 자료들이 큰 힘이 되었지요. 어려움이 없지 않았지만 제 생애에 가장 큰 보람과 의미를 얻은 시간이기도 합니다.-그 많은 작품은 어떻게 수집하셨습니까.일일이 찾아다녀야만 가능한 일이었어요. 60년대부터 찾아다녔는데 아무래도 신문에 발표된 시가 많아서 서울의 신문사 자료실을 찾아다녔습니다. 처음 찾아낸 것이 선생님 첫 작품인 조선일보에 실렸던 〈기우는 해〉였는데 그게 언제 실렸는지가 정확하지 않았어요. 당시 조선일보에 석정선생님 자형뻘 되는 분이 문예부장으로 계셨는데, 그래서 본명이 아닌 필명으로 실렸던가 봐요. 신문사 담당자에게 부탁을 해서 필름을 돌리다보니까 그 작품이 나오는 거예요. 그 순간, 신경이 곤두서더라고요. 날짜를 보니 1924년 4월 19일자였어요. 그것을 가져오면서도 얼마나 소중한지 가방에 넣으면 잃어버릴 것 같아서 등에 끼워서 가져왔지요.(웃음) 그때 선생님 필명이 소적으로 되어 있었어요.-이후에도 수많은 작품을 원본으로 확인하고 수집하셨겠습니다.조선일보에 실린 작품만 스크랩북으로 네 권 분량이고 전북일보에 실렸던 작품도 두 권이나 됩니다. 이 작품들이 모두 제 연구의 바탕이 되었고 문학관 자료가 되었지요.-2009년엔가 석정의 미발표작이 교수님의 노력으로 발굴되어 빛을 보게 되었었는데요.현실참여 성향이 강했으나 발표되지 않았던 시 11편을 그때 공개했었지요. 혁신이란 단어만 입에 올려도 공산당으로 몰렸던 1960년대 엄혹한 상황에서도 저항성이 짙은 시를 기고할 정도로 선생님은 저항시를 많이 썼습니다. 미발표작 시들은 그럼에도 발표하지 못했던 시들인데 선생님의 육필원고에서 찾아낸 것들이었어요. 덕분에 기존의 평가로부터 석정의 시세계가 재평가되어야 하는 이유가 더 분명해졌습니다.-당시 그렇게 왕성한 발표활동을 하셨던 것을 보면 석정 선생님의 문학이 그만큼 평가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아니겠습니까.물론입니다. 선생님은 정지용 김기림 박목월 박두진 선생님 등 당대를 대표하는 문학인들과 교류가 깊었어요. 김기림 시인은 특히 석정 선생님의 시세계를 높이 평가 했는데 한해를 돌아보는 연평에 선생님을 늘 거론할 정도였죠.-40년이 훨씬 넘는 동안 석정 선생님의 시세계만을 천착해 연구해오신 교수님의 작업으로 자칫 문학사의 한편에 겨우 이름을 올리고 있었을지도 모를 석정의 문학이 재조명을 받아 온전한 평가를 받게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좀 더 폭넓은 연구 작업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없습니까.오히려 제 연구가 아직도 미진하다는 것에 한계를 느낍니다. 석정은 한국시사의 모범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 문학사속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후배들이 풀어야할 과제입니다.허 교수와의 인터뷰는 처음부터 끝까지 석정의 문학과 삶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만큼 그의 모든 문학 연구 작업의 시간과 정신은 석정의 문학위에 놓여 있었다. 넓지 않은 그의 서재를 채우고 있는 여러 권의 스크랩북과 빛바랜 자료들까지도 석정의 문학에 닿아 있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은 놀라웠다. 한 시인의 문학적 업적을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게 하기위해 달려온 수십 년 세월의 고투가 그의 삶으로부터 더 빛나 보였다.● [허소라 교수는] 석박사과정 모두 석정문학 주제 논문으로 마쳐허소라 교수는 진안이 고향이다. 본명은 형석이지만 필명인 소라가 더 널리 알려졌다. 군청에서 근무하셨던 아버님을 따라 초등학교 시절, 전주로 나왔지만 중고등학교는 금산에서 다녔다. 어렸을 때부터 교사가 되기를 희망했던 그는 전북대 국문과에 들어가 석정시인을 만나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었다. 59년부터 그 이듬해까지 〈자유문학〉에 시 지열(地熱) 피를 말리는, 도정(道程) 등 세편의 시를 추천받으면서 등단했다. 당시 시 추천을 해준 사람도 석정시인이었다. 전주신흥고등학교 교사로 시작해 군산 수산고등전문학교와 수산전문대학을 거쳐 군산대 교수로 정년퇴임할 때까지 재직했다.석정 시인의 시세계를 고등학교 시절부터 동경해왔던 그는 스승의 문학이 한국문학사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워 석정 문학 연구를 평생의 과제로 삼았다. 석정 연구를 시작한 20대 이후부터 그의 작업은 오로지 석정의 문학과 생애 위에 놓여있었다. 고려대 석사과정과 경희대 박사과정을 모두 석정문학을 주제로 한 논문으로 마쳤다.2012년 개관한 부안의 석정문학관 조성작업에 참여했으며 많은 부분이 그의 손을 거쳐 기획되고 완성됐다. 신석정시인 탄생 100주년 기념문학제 제전위원장과 석정문학관 초대관장을 역임했으며 중국연변대 객좌교수를 지냈다.1964년 첫 시집 〈木鐘목종〉을 낸 이후 〈풍장〉 〈아침 시작〉 〈겨울밤 전라도〉을 비롯한 시집과 60년대 중반 베스트셀러로 전국적인 관심을 모은 산문집 〈흐느끼는 목마〉, 평론집 〈못다 부른 목가〉 등 15권의 저서를 냈다.전라북도 문화상전북대상백양촌문학상모악문학상윤동주문학상과 석정 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다양한 관점으로 석정의 문학세계를 조명한 논문 50여 편을 발표했다.석정의 수많은 시를 발굴하고 수집했으며 지난 2009년에는 미발표 저항시 11편을 공개해 석정 문학을 새롭게 연구하는 전환점을 마련하기도 했다.

  • 기획
  • 김은정
  • 2017.02.03 23:02

[② 돈황 벽화 속 백제인] 턱끈 없는 야구모자 비슷한 '무후책' 쓰고 불교 전파

동서양으로 통하는 거대한 길 실크로드. 실크로드의 여러 도시 가운데 실크로드 교역의 오아시스, 문명 교류의 요지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바로 돈황이다. 그런데 최근 돈황 벽화에서 고대 한국인 그림이 대거 발견되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 가운데는 백제인 모습도 보인다. 사막 한 가운데 있는 도시 돈황에 왜 고대 한국인의 족적이 남아 있는 것일까? 벽화 속 백제인은 어떤 모습일까?△돈황 막고굴, 사막 위에 건립된 위대한 미술관돈황은 광활한 중국 대륙의 서쪽 끝에 위치한 오아시스 도시로 1500년 전 서역으로 가는 관문이었다. 돈황이 세계적인 관광지로 각광받고, 전 세계의 수많은 학자들을 돈황학에 빠져들게 한 것은 실크로드가 낳은 최고의 금자탑인 막고굴(莫高窟) 때문이다. 수천 개의 불상이 있다 하여 일명 천불동(千佛洞)이라고도 불리는 막고굴은 세계적인 불교유적지요 사막 위에 건립된 위대한 미술관이다.△돈황은 한국과 밀접한 관계돈황은 한국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막고굴 제17굴에서 신라의 구도승(求道僧) 혜초(慧超)가 지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과 원효 스님이 저술한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필사본이 발굴되어 고대 한국과의 연관성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최근 막고굴 벽화에서 고대 한국인의 복식과 생활상을 보여주는 그림들이 무더기로 발견했다고 주장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돈황연구원의 중국학자 리리신(李立新) 연구원이다. 그는 둔황 지역의 석굴을 10여년 동안 조사한 결과 막고굴 38개, 유림굴과 서천불동 각 1개에서 고구려백제신라고려인이 그려진 그림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그의 주장은 향후 진위여부에 대한 정확한 검증을 요한다. 다만 돈황 벽화 중 한국 관련 그림을 10여년간 직접 조사한 유일한 연구자인 만큼 그의 주장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돈황 벽화 속 고구려인이번에 공개된 40여 점의 인물상은 고구려인이 가장 많은데, 대부분 새 깃털을 꽂아 만든 모자인 조우관을 쓰고 있다. 일찍이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Afrosiab) 궁전 벽화에서 조우관을 쓴 고구려 사신 그림이 발견된 바 있는데, 돈황 벽화 속 고구려 인물상도 비슷한 조우관을 착용하고 있다.그런데 리 연구원이 공개한 조우관 인물상은 이제까지 알려졌던 통상적인 모습과는 매우 다르다. 이제까지 발견된 조우관 인물상은 보통 두 개의 새 깃털을 모자에 꽂았지만 이번에 발견된 인물상에서는 세 개 또는 네 개의 깃털을 꽂은 경우도 있었다. 또 새의 깃털이 아니라 꼬리를 꽂은 조미관(鳥尾冠), 흰색 비단으로 만든 백라관(白羅冠), 청색 비단으로 만든 청라관(靑羅冠), 자주색 가죽으로 만든 자라관(紫羅冠) 등 매우 다양했다.△돈황 벽화 속 신라인과 고려인막고굴 제61굴의 오대산도(五臺山圖)는 돈황 석굴 가운데 가장 큰 벽화 중 하나인데, 특이하게도 시대가 다른 신라인과 고려인이 함께 묘사되어 있다. 그 이유는 중국 오대(五代907~960) 말기에 제작된 오대산도는 밑그림이 만들어진 시기가 신라와 고려가 공존하던 때였기 때문이다. 오대산도의 오른쪽 아랫부분에 있는 신라송공사(新羅送供使신라에서 보낸 공양 사신)라는 그림에는 통역원, 사신, 두 명의 관원, 마부 등 신라 사신 일행 5명이 그려져 있고 오른편에는 이들을 맞고 있는 두 명의 중국인 관리가 보인다. 또 이 그림 왼쪽 아래에 있는 고려왕사(高麗王使)라는 그림에는 연락관, 사신, 짐꾼 등 3명의 고려 사신 일행과 이들을 안내하는 여관 주인이 그려져 있다.△돈황 벽화 속 백제인, 무후책을 쓰다이번에 발견된 돈황 벽화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백제인 인물상이다. 현재까지 회화를 통해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백제인 인물상은 중국 양(梁)나라 시대에 그려진 사신도인 양직공도(梁職貢圖)였다. 양직공도 이후 또다시 백제인 인물상이 나타난 것이다. 돈황 벽화 속 백제인은 두 가지 형태의 모습을 보인다.먼저 막고굴 제335굴 벽화에는 문수보살과 유마거사가 나누는 대화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 중에 조우관을 쓴 사람이 두 명 보인다. 깃이 둥글고 소매가 넓은 옷을 입고 새 깃털 두 개가 꽂힌 푸른색 모자를 쓰고 있는 이들은 서로 마주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리 연구원은 북풍을 막는 옷깃을 한 사람은 추운 지방에서 온 고구려인이고, 열린 옷깃을 한 사람은 따뜻한 남쪽에서 온 백제인으로 봤다.그는 고대 백제인은 고구려와 신라처럼 조우관을 쓰기도 했지만 턱끈이 없는 오늘날 야구 모자와 비슷한 무후책(無後 )을 쓰기도 했다고 주장한다. 막고굴 제237굴 벽화에는 곱슬머리 외국 사신 위의 인물이 무후책을 쓰고 있다. 이 사람이 바로 백제인이다. 막고굴 제115굴 벽화는 부처님이 열반했을 때 각국에서 조문단을 파견해 눈물을 흘리며 애도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그림 속에 조우관을 쓴 인물과 무후책을 쓴 두 인물이 보인다. 조우관을 쓴 사람이 신라 혹은 고구려인이고, 무후책을 쓴 사람이 백제인이다.그러면 백제인이 돈황 벽화에 대거 등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리 연구원은 그 연유를 불교를 널리 전파하기 위해 각국의 다양한 인물상을 대거 벽화에 집어 넣으면서 자연스레 백제인 인물상도 들어갔고, 한편으로는 백제 유민(遺民)이 돈황으로 이주해서 살았기 때문으로 추정했다.△백제, 세계 문명과 교류한 글로벌 국가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 돈황 벽화에 등장한 백제인. 백제는 굳게 닫혀진 나라가 아니었다. 백제는 바다 건너 세계 문명과 교류한 문화적 개방성을 띤 글로벌 국가였다. 실크로드에서 만나는 백제 이야기는 중국을 지나 인도양을 넘어 그리스까지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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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2.03 23:02

이룬 공을 차고앉지 말라

성공한 사람의 발목을 잡는 가장 큰 적은 무엇일까? 한 번 성공을 해 본 사람이라면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또 다른 성공을 이루고 싶어 할 텐데, 그것을 못 하도록 하는 가장 센 요인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성공 기억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한 번 강력한 성공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대개 성공할 때 사용하였던 그 방법과 섬광 같았던 결정의 순간을 짜릿한 신화의 중심 줄기로 붙잡게 된다. 하지만, 그 신화의 줄기가 다시 자라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세월이 그리도 무정하기 때문이다. 세월은 원래 있던 환경을 지우고 전혀 다른 환경을 세워가며 질주해 나간다. 이 동작은 한 번도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성공할 때 발을 딛고 있던 그 상황과 조건은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 한 번 더 성공을 꿈꾸는 그 사람이 마주해야 할 상황은 언제나 새롭고 처음 직면하는 것이다. 이러한데도 성공 기억에 갇힌 사람은 새롭게 나타나는 조건마저도 과거에 했던 그 성공의 기억으로 다루려 한다. 움직이는 세상을 자신의 기억 속에 가두려는 무모한 시도와 다르지 않다. 한 번 더 큰 성취를 이루고 싶다면, 우선 그 짜릿한 기억에서 벗어나야 하리라. 기억은 과거이고, 한 번 더 해야 할 성공의 결정적 순간은 이미 과거를 벗어난 환경 앞에 있다. 문제는 이 새로운 조건 앞에서 어떻게 새로운 결정을 새로운 방식으로 할 수 있는가이다. 노자는 말한다. 공이 이루어지면, 그 공을 차고앉지 말아야 한다.(功成而不居) 공을 차고앉았다는 말은 바로 성공 기억에 갇혔다는 뜻이다.노자는 처음에 이 말을 정치적인 의미에서 주로 사용하였다. 정치인이 지속적인 지배력을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백성들의 마음 속에 영원히 살아남는 생명력 있는 권위는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 우선 자기가 이룬 공, 바로 그것에 함몰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이룰 때 사용하였던 방법에 고착되서는 안 된다. 에리히 프롬은 말한 적이 있다. 어떤 혁명가가 자신이 타도하려고 하는 대상을 타도하고 나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면 그것은 이미 혁명가가 아니라 반항아에 불과하다고. 왜 진실한 표정을 지은 채 혁명가로 자처하며 목숨을 불사하던 헌신적인 사람들이 혁명을 이룬 후에는 쉽게 비판받고 버림받는가. 그것은 혁명 대상을 타도하고 나서 그 자리를 차고앉으려 시도하면서 이미 자신이 타도하려던 그 대상과 부지불식간에 닮아 버리기 때문이다. 정치 자체를 상승시키지 못하고, 정권만 교체한 형국이다. 혁명의 기운이 감돌 때, 백성들이나 국민들이나 시민들은 모두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꿈꾼다. 다른 세상은 다른 정치로만 가능하다. 혁명가들은 대개 다른 정치를 제공하겠다고 선동하지만, 결국 타도 대상이 앉았던 자리에 자신이 앉음으로써 다른 정치의 길은 요원해져 버린다. 정치가 상승하는 길은 사라지고, 권력만 교체된다. 이 정권이 저 정권으로 바뀐 것에 불과하다. 더 좋은 세상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정치의 발전이지 정권이나 권력의 교체가 아니다.당연히 혁명이라는 공을 이룬 후에는 그것을 차고앉으면 안 된다. 왜 아직도 현대의 유일한 혁명가로 체 게바라를 드는지 알 수 있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체 게바라는 쿠바를 혁명시키고 나서 쿠바의 권좌에 눌러앉지 않았다. 바로 다음 혁명지인 볼리비아를 향해 떠났을 뿐이다. 체 게바라에게는 혁명만 있었지 권력이라는 의자에 앉으려는 정주(定住)의 욕구가 없었다. 그래서 혁명을 또 혁명하며 비로소 유일한 혁명가로 남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 주위에서 들리는 익숙한 혁명가의 이름들은 사실 반항아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사회가 진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은 혁명가가 아니라 반항아가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반증이다. 지금의 대한민국 현실에서도 정권 교체를 강조하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서는 권력의 교체는 있을지 몰라도 정치의 상승을 기대하기란 어려울지도 모른다.이런 반항아들은 스스로를 혁명가라 자처하고, 자신들이 했던 반항의 활동을 혁명적이었던 것으로 포장한다. 진실한 혁명가는 스스로를 혁명가(革命家)라고 말하지 않는다. 부단한 혁명만 있기 때문에 자기를 어떤 집안(家)에 앉혀 둘 수 없기 때문이다. 특정한 집안(家)의 의자에 앉아 혁명을 말하려 하는 순간 그는 바로 반항아로 전락하지 않을 수 없다. 반항아들은 모두 무엇인가를 타도하고 난 후, 바로 그 자리를 차고 앉아 바로 정주(定住) 형태의 집안(家)을 이루어버린다. 혁명이 성공한 그 순간을 차고앉는다. 혁명의 기억에 갇힌다. 이렇게 하여 앞으로 일어나는 어떤 일들도 이 혁명의 기억을 가지고만 재단한다. 그 기억에 맞으면 선이고, 그 기억에 맞지 않으면 반동이다. 혁명의 깃발이 바로 완장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모든 혁명의 과실은 역사 속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조작된 기억으로 담장을 친 이 집안으로 흘러 들어가 버린다. 어쩔 도리가 없이 혁명의 동네는 이 집안의 지배를 받는다. 역사가 더 흐르고 싶어도, 동네가 더 진보하고 싶어도, 혁명을 지속하고 싶어도, 혁명 시기 쌓인 증오를 벗어버리고 싶어도, 화해하고 싶어도, 다른 새 세상을 만들어보고 싶어도, 혁명의 그 기억에 갇힌 집안에 발목이 잡혀 있는 한, 한 발짝도 떼지 못한다. 혁명이란 지속적으로 혁명될 때에만 혁명이 된다. 권력의 교체에 머무르지 않고, 정치의 상승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진보적 혁명도 결국은 보수화되고, 혁명가들은 또 다른 권력자로 남을 뿐이다. 그래서 공이 이루어지고 난 후에는 그것을 차고앉지 말자고 말하는 것이다.혁명의 기억에 갇히지 않음으로써 정치 발전을 이루고 새 세상을 펼친 예로는 중국의 유방(劉邦)을 들 수 있겠다. 유방은 항우와의 치열한 전투를 거쳐 승리자가 된 후, 한(漢)이라는 이름을 단 새로운 정치 마당을 펼친다. 황제가 되어 새 정치를 펼치고 있는 유방에게 육고(陸賈)라는 신하가 말한다. 황제께서는 이제 경전을 공부하십시오. 여기서 경전은 철학이나 문학 혹은 역사 등 경세의 근본에 관한 학문을 가리킨다. 그러자 유방이 화를 내면서 말한다. 나는 경전 공부 없이도 말 잔등에 올라탄 채 천하를 차지하였다. 이런 경전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러자 육고가 차분한 어조로 대들며 재차 주장한다. 말 잔등에 올라탄 채로 천하를 차지했다고 해서, 말 잔등에 올라탄 채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유방의 위대한 점은 육고의 이 충고를 그 즉시 알아들었다는 데에 있다. 육고의 지도 아래 유방은 바로 경전 공부에 들어가는데, 이런 경청(傾聽)의 능력으로 유방은 천하를 차지할 때의 기억에 갇히지 않을 수 있었다. 만약 혁명의 그 기세와 기억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유방도 분명히 말 잔등에 올라탄 형상으로 국가를 다스리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방은 공이 이루어질 때의 그 기억에 갇히지 않고 바로 변신을 감행하였다. 혁명가에서 국가 경영자로 변신함으로써 오히려 혁명을 완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통치자들은 모두 권력을 잡는 데까지는 성공하지만, 결국 권력을 잡을 때의 그 기억에 갇혀 국가 경영자로 변신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정치인에서 국가 경영자로 진화하지 못한 것이다. 바로 공이 이루어지고 난 다음에 그것을 꿰차고 앉은 결과다.통치자들이 연이어 정치인에서 국가 경영자로 변신하는 데에 실패하면, 나라의 진보나 진화는 어느 단계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신생 독립국으로 출발한지 70년 만에 한계에 갇혀 긴 시간 새로운 출로를 찾지 못함으로써 탄력을 상실하고 낡아버렸다. 한계에 갇혀 늙어버린 형편의 내용은 무엇인가. 공을 이룬 후에 그것을 꿰차고 앉은 결과다. 늙었다는 평가를 받기 전까지의 우리는 세계가 주목할 만한 직선적 발전을 구가하였다. 바로 해방 후 건국, 건국 다음의 산업화, 산업화 다음에 민주화를 시대적 요구에 맞춰 잘 해낸 것이다. 건국산업화민주화의 직선적 역사발전은 국가에 효율을 가져다주어 사회 각 부문이 모두 탄성 있고 탄력 있었다. 풍모가 젊고 싱싱하여 도전적이었다. 그러나 민주화까지 내달리고 난 다음에 우리는 그 다음의 목표를 설정하지 못하고 있다. 다음 목표가 설정되어야만, 그 목표를 새로운 사명으로 삼아 나아가면서 이미 이룬 공을 꿰차고 앉는 퇴행적 탐욕을 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 다음의 새로운 목표가 서지 않고 있으니, 민주화 세력은 민주화의 공을 꿰차고 앉아 있고, 산업화 세력은 산업화의 공을 꿰차고 앉아 있으며, 심지어는 건국 세력까지도 건국의 공을 꿰차고 앉아 있다. 꿰차고 앉아서 자신이 세운 공(功)이 진리라고 주장하며 싸우는 모습이 지금 우리의 민낯이다. 화려했던 그 성공의 기억을 붙들고 해왔던 얘기를 계속 해대며 자신의 입장을 권력화하려고만 한다. 그러나 정권이나 세력에 묻지 않고 역사에게 묻는다면,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이제 건국 세력도 과거이고, 산업화 세력도 과거이며, 민주화 세력도 과거이다. 각 세력 집단들은 우선 자신이 벌써 과거가 되었음을 인식해야 한다. 과거가 되었음을 인식해야만, 자신의 공을 꿰차고 앉지 않을 각성이 가능하고, 이 각성이 있어야만 새로운 탄력과 탄성이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새 정치라 하고, 새 역사라 하는 것이다. 과거가 미래의 발목을 잡으면 안 된다.공이 이루어져도 그것을 차고앉지 않는 일(功成而不居)은 노자 철학의 핵심인 무위(無爲)의 한 형태이다. 노자에 의하면, 무위로만 위대함을 이룰 수 있다. 무위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無不爲) 독일의 문호 괴테는 스스로를 뱀과 같은 존재로 생각했다. 허물을 벗고 항상 새로운 시작을 시도한다는 뜻이다. 괴테만큼의 성취를 이루고 간 사람이 몇이나 될까. 괴테의 성취는 부단한 허물벗기의 결과다. 허물을 벗는 뱀은 살고 허물을 벗지 못하는 뱀은 마침내 죽을 수밖에 없다. 공(功)이라는 허물에 갇히면 안 된다.서강대 철학과 교수건명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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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1.31 23:02

[전북일보 카드뉴스] 설 특집, 전북도민 촛불 연대기

(동영상 카드입니다. 재생을 눌러주세요.)(동영상 카드입니다. 재생을 눌러주세요.)설 특집, 전북도민 촛불 연대기#표지.설 특집, 전북도민 촛불 연대기#1.이건 바로 전북도민의 엄청난 열기#2.준비됐나요?#3.전북일보가 여러분께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4.이화여대국정감사태블릿 PC 에서#5.드러난 국정농단#6.전북에서는10월 27일#7.박근혜 정권 퇴진을 위한 전북지역 비상시국회의 시국선언대통령 사퇴새누리당 해체#8.10월 28일#9.전북대전주대 시국선언성역 없는 수사와 관련자 엄중 처벌#10.그리고첫 번째 촛불집회#11.10월 29일 토요일,#12.분노한 시민들의 행진과시내버스 경적시위#13.(동영상)#14.쏟아지는 시국선언과대자보,#15.청소년들의 행진#16.11월 5일#17.제1차 전북도민총궐기(주최 측 추산 3500명)#18.11월 12일#19.서울로, 서울로민중총궐기#20.100만 촛불 함성'하야정국 횃불'로 번지다#21.그리고매주 토요일,전주 관통로 사거리#22.혹은 풍남문 광장#23.군산, 익산, 정읍,#24.남원무주장수임실순창고창부안에서도#25.캠퍼스의 대학생도거리의 상점도바다의 낚시꾼도농민의 트랙터도#26.(동영상)#27.12월 9일#28.가 234표#29.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30.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31.해가 바뀌고#32.1월 9일#33.세월호 참사가 벌써 1000일#34.날이 추워도눈이 내려도#35.함께 외친적폐청산#36.적폐?#37.국정원 대선개입 의혹공공부문 민영화 갈등세월호 참사메르스AI 등 위기 대응 실패쌀값 폭락물대포와 국가 폭력한-일 위안부 합의개성공단 폐쇄사드(THAAD) 갈등대학 구조조정 문제문화계 블랙리스트...#37.아직 안 끝났습니다.#38.전북도민의 목소리,설날 이후에도 계속#39.전북일보사/기획 신재용, 구성 권혁일, 제작 이권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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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1.26 23:02

[무주군 무풍면] 전쟁·전염병·흉년 없는 곳…군인 출신 유난히 많아

무주군 무풍면은 호남지역에서 보면 역사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 독특한 곳이다. 삼국시대에는 신라의 변방에 있는 작은 현(무산현-무풍현)이었다가 고려 성종 때 백제권역에 편제됐다. 조선태종 14년에 무풍현과 주계(현재의 무주읍)가 합쳐져 무주현이 생기면서 치소(治所)가 주계로 옮겨갔고, 무풍은 풍동과 풍남으로 나뉘었다. 1914년에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풍동과 풍남, 그리고 구천동 일부 지역이 합쳐져 500년 만에 다시 무풍이라는 옛 이름을 되찾아 면(面)이 설치됐다.그러나 무주읍이나 설천면과는 원래부터 왕래가 없던 곳이다. 현재도 무풍면에 가려면 설천면쪽에서 라제통문을 지난 뒤 7km 정도를 더 가야 한다. 라제통문은 일제 강점기에 신작로를 내면서 비로소 뚫렸으며 그 이전에는 막혀있던 곳이다.무풍면은 또한 정감록에 나와 있는 십승지 중 하나다. 우리나라에 10곳이 있는 십승지(十勝地)는 삼재불입지지(三災不入之地)라고도 하며,전쟁과 전염병, 흉년이 없는 곳이라는 뜻이다. 해발 400~900m의 고원분지형태로 험악한 산맥이 접근을 막고 있어 옛날에는 외부에서 접근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흉년이 들어 종자를 구하기 어려우면 무풍으로 가면 된다는 말이 예로부터 전해졌다고 한다. 또 한 번도 사용된 적은 없지만 조선말기 민비(명성황후)의 행궁을 목적으로 민병석이라는 사람이 명례궁을 짓기 했다.외부와는 비교적 단절되어 살았지만, 조선시대에는 거창쪽에서 과거보러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언어나 문화풍속 등이 호남보다는 영남권에 가까우며 20~30년 전까지만 해도 학교나 직장, 생활터전을 따라 영남권으로 빠져나가는 사람이 많았다.△황인성과 김광수무풍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지금은 고인이 된 황인성 전 총리와 김광수 전 국회의원을 꼽을 수 있다. 두 분 모두 법정으로는 대덕산 아래에 있는 증산리에서 태어났으며, 자연부락으로는 황 전 총리가 석항리, 김 전 의원이 사동리 출신이다. 석항리와 사동리는 1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두 분은 무풍초를 14회로 졸업한 동기동창이다.황 전 총리는 73년부터 78년까지 전북도지사를 지낸 뒤 교통부장관을 거쳐 11대와 1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농림부장관을 지냈다. 이어 93년에는 국무총리, 94년에 민자당 총재를 맡았다.김광수 전 의원의 정치이력은 황인성 전 총리에 비해 빠르다. 대한교과서(현 미래엔) 대표이사를 거쳐 73년에 9대 국회의원이 되었으며, 10, 12, 14, 15대까지 5선의 경력을 쌓았다. 목정장학회를 설립해 1973년부터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해왔으며, 1993년에는 목정문화상을 만들어 전북 출신으로 문학미술음악 등 3개 부문에서 공헌한 원로 예술가들에게 매년 수상해왔다.김 전 의원의 자제인 김홍식씨가 전북도시가스 대표이사를 맡고 있으며, 김창식씨는 서해도시가스 대표이사를 맡다가 건강 등의 이유로 일선에서 물러나 있다. (주)미래엔과 미래엔 서해에너지 대표이사는 손주인 김영진씨이다.△정관계현내리 출신의 하경철씨(80)는 헌법재판관을 지낸 변호사다. 지난 92년에 전주 완산지역에 민주당 공천을 받았으나 스스로 출마를 포기했으며,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 때는 문재인 현 민주당 상임고문과 함께 변론을 맡기도 했다.97년에 전북도 복지여성국장을 지낸 김명희씨는 하경철 헌법재판관과 같은 해인 50년에 29회로 무풍초를 졸업했으며, 부군이 전북도청 과장을 지낸 하종철씨이다. 82년 무주부군수 였던 하호철씨(88)와 순창교육장을 지낸 하영철씨가 하종철 과장의 형제들이다.금평리 출신의 박창정씨(70)는 농림부 차관보와 마사회장을 지냈고, 하갑기씨(고인)는 55년도에 경북 영덕군수를 역임했으며 신현만씨(78)는 건교부 시설이사관을 지냈다. 52년에 초대 전북도의회 의원을 지낸 김용환씨(고인)씨는 6대 전북도의회 의원을 지낸 김홍기씨(72)의 백부이다. 현직으로는 고용노동부 전주지청장을 지낸 노동부 하헌제 서기관과 기상청 홍성대 서기관 등이 있다.무주군청에서는 이상갑김기옥 전 과장과 주성재 면장 등이 근무했으며, 현직으로는 김진표 보건의료원 보건과장과 박희영 무주읍장, 최원희 부남면장 등이 있다.△군인경찰육사를 나와 소장(별2)으로 예편한 황인성 전 총리의 영향인지 군 출신이 유난히 많다. 금평리 출신의 이상호씨(80)는 육군 중장(별3)으로 예편해 병무청장을 지냈으며, 대구 카톨릭병원장을 지낸 이상화씨(84)가 형, 공군대령으로 예편한 뒤 대한항공 기장을 하고 있는 이상경씨(69)가 동생이다.육군 준장으로 예편한 박찬수씨(고인)는 산림청 부청장과 한국직업훈련관리공단 원장을 지냈으며, 농림부 차관보와 마사회장을 지낸 박창정씨와 육군 대령 출신으로 무기도입업을 하고 있는 박노욱씨(59)가 동생이다.현내리 출신의 황인갑씨도 육군 준장 출신이며, 이판조씨(고인)는 육군 대령으로 예편했다. 현역 육군으로는 증산리 출신의 김홍연 대령이 있으며, 공군에서는 이상경씨와 엄익준씨(70), 김진동씨(62) 등이 대령으로 예편했다. 김진동씨는 아시아나항공에서 기장으로 근무하고 있다.경찰계에는 황인성김광수씨와 무풍초 동기인 박래조씨(90)가 있었다. 625때 참전했으며 70년대 전주경찰서장을 지낸 뒤 현재는 전주에서 살고 있다.군 출신이 유난히 많은데 대해 지역에서는 집안형편이 어려운 상황에서 학비가 무료이고, 당시는 군이 꽤 힘이 있던 때라서 사관학교에 많이 입학했다며 육사 1, 2, 3, 4학년에 모두 무풍 출신이 재학하던 때도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무풍의 언어와 풍습이 백제보다는 신라권에 가까워서 경상도 사람들과도 쉽게 친해지고 어울렸다고 증언하고 있다. 실제로 무풍 출신이면서 본적지가 경북 등으로 잘못 알려지거나 경북이나 대구 등에 생활근거지를 마련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학계언론계학계에는 홍익대 교육대학원장을 지낸 서정화씨(73)와 고려대 교수를 지낸 서영석 의학박사(77), 중앙정보부를 거쳐 대학교수를 지낸 하정수 정치학 박사(70), 청주김해제주공항 본부장을 거쳐 한서대 교수를 하고 있는 최광림씨(66), 그리고 현직으로는 최연택(선문대), 표내숙(부산대), 김홍규(한양여대) 교수 등이 있다. 금속공학박사인 김정태씨(58)는 두산그룹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언론계로는 경향신문 기자를 거쳐 김광수 의원 보좌관을 지낸 김성기씨(82)와 연합뉴스 전북본부장을 지낸 조순래씨(65)가 있다.△재계기타재계에는 재경무주군민회장을 지낸 김문기 (주)태양금속 회장과 또 다른 재경무주군민회장 출신의 임영술 (주)상신금속 회장(65), 그리고 동아전기 대표이사를 지낸 황인출씨(83) 등이 있다. 박옥련씨(79)는 한양대 음대 성악과를 졸업하고 전주대 등에 출강했으며, 그 아들이 성악가 김동규씨이다.- 다음 회에는 남원시 아영면 편이 이어집니다.

  • 기획
  • 이성원
  • 2017.01.24 23:02

완주로 귀향, 장편소설 〈문신〉 집필 중인 윤흥길 소설가 "6·25 전쟁 뒤 사회문제 소설 주안점으로 부각"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와 블랙리스트 파문 등 어지러운 시국 속에서 소설 <완장>이 재부각되고 있다. 1983년에 발표한 장편소설로 권력의 실체와 속성을 파헤친 작품이지만, 권력이 폭력이 되는 세상과 그 권력 에 대해 걸쭉한 입담과 해학으로 풀어낸 점이 현 시국과 맞아떨어지면서 이 시대 꼭 읽어야 할 소설로 다시 세간의 눈길을 끌고 있다.현대사회의 모순을 낱낱이 파헤친 작품들을 써온 윤흥길 소설가가 고향에서 책을 쓰고, 또 이를 고향에서 출간하고 싶어 3년전 완주 소양으로 내려왔다. 지인들과도 거의 왕래를 끊고 칩거하다시피 하며 마무리 작업에 한창인 작가가 올해 하반기 출간 예정인 장편소설 <문신>에 대해 처음으로 전북일보에 상세하게 공개했다. 고향에서 출판하는 책의 내용을 고향의 언론에 처음 공개하는 것도 고향을 남다르게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먼저 귀향하게 된 배경부터 말씀해주시죠.정읍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익산으로 이사해 성장기 대부분을 보내다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그동안 고향을 떠나 작품활동을 했지만 한시도 고향을 잊지않았습니다. 고향을 작품의 무대로 삼아 고향집과 사람들, 사투리가 담겨진 토속적인 고향 이야기를 주로 써왔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니 고향을 직접 피부로 느끼면서 마지막 작품을 쓰고 싶었습니다.고향에 돌아오니 마음이 푸근해지고 또한 좋은 일들도 많이 생겼습니다. 지난해에는 손주가 태어났고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는 겹경사들도 이어졌습니다.- 올 하반기에 완간 예정인 대작 소설의 소재를 문신으로 택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옛날에는 문신을 부병자자라 했습니다. 병정으로 뽑혀나갈 때 있었던 관행입니다. 난리가 나거나 전쟁이 발생하면 타지에서 객사하거나 비명횡사할 것에 대비해 입영 직전에 몸에 문신, 죽으면 자기 시신을 식별해내서 고향 선산에 묻힐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죠.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는게 가장 큰 바람이지만 죽어서 시신으로라도 고향에 묻히길 소망하는 마음이 담긴거죠.- 소설 〈문신〉의 내용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시죠.문신은 우리 한민족에만 있는 특징으로 종교적 의미와 주술적 의미, 둘다 가지고 있습니다. 남태평양의 원주민들은 종교적인 의미로 문신을 하고, 전사들은 용기를 뽐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조폭들에게는 위협의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하죠. 그러나 시신이 고향에 묻히길 바라는 마음에서 문신을 하는 것은 우리 만의 뼈아픈 사연이 담긴 것이며 한민족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죽어서라도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표시로 새겼던 우리 조상들의 풍습인 문신은 고향으로의 귀소본능입니다. 이번 작품은 일제말 강제 인력동원된 사람들이 문신을 행했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에 기독교인이 가지고 있는 본향의식을 연결했습니다.- 장편소설 〈문신〉을 고향에서 마무리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지요.너무도 우여곡절이 많았고 또 사연도 많은 책입니다. 오래 전부터 구상해오던 것을 1990년도에 처음으로 집필해 오며 두 권 분량을 썼지만 출판사가 문을 닫게 되면서 저작권 분쟁문제로 갈등을 빚었습니다. 이후 다시 3년 째 연재해오던 곳마저 폐간되면서 재차 저작권 분쟁에 휩싸이게 됐고 결국 계약금을 배상하고 판권을 되돌려 받았습니다. 그러다 3년전 고향에 내려오면서 그 동안에 써왔던 내용을 다시 전면 수정하게 됐습니다. 그동안 써온 내용을 전면적으로 뜯어 고치라는 뜻에서 내린 시련이라 생각합니다. 지난해 봄에서야 출판사와 계약돼 3권 분량은 출판에 돌입했고 나머지 2권은 진행 중에 있습니다.- 그동안 발표해온 현대사적 작품들과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 같은데요.작품생활 10년동안 일관된 흐름을 보이고 있는데 이들 작품의 원초적 기억은 625에서 출발합니다. 9살 때 625를 겪었고 이는 사회적 자아가 싹트기 이전인 소년 시절이었기에 강렬하게 머물러 있습니다. 70년 가까이 지났지만 아직도 디테일한 부분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됩니다. 이후 독재정권은 경제개발을 빌미로 자유와 인권을 억압했습니다. 토지 수용과정에서도 쉽게 사유재산을 침해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사회불평등이 심화되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GNP 수준에 비해 복지문화교육수준은 취약해졌고 북한과 대립한다는 명목으로 국방비가 과다지출되었습니다. 이는 우리 사회가 아직도 전쟁과 분단문제에서 못벗어났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전쟁 후유증을 목격한 저로서는 사회문제가 소설의 주안점으로 부각될 수 밖에 없었죠.- 우리 근현대사의 문제와 아픔을 주로 다룬 작가께서 블랙리스트에 빠진 것이 의아해집니다.글쎄요. 분명 전에는 리스트에 올랐었는데 왜 지금은 빠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늙어서 관리할 필요가 없어졌나(웃음).- 3년여 만에 돌아온 고향의 모습은 어떤지요.지난 1961년 전주사범 졸업 후 춘포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했습니다. 문학의 꿈을 키운 곳이죠. 또 동반자가 된 부인 유계영 권사와 인연을 맺게 해준 곳이기도 하죠. 최근 그곳을 찾았습니다. 옛 모습이 없지만 위치는 그대로였습니다. 더구나 익산지방국토관리청이 만경강 하천관리사업의 일환으로 만경강가에 이야기 공간을 조성해 매우 흡족했습니다. 춘포문학마당에 있는 가람 이병기 선생과 홍석영정양안도현 작가 등의 문학비는 우리의 삶과 지역에 대한 이야기를 새겨, 지역의 정서를 올곧이 담아냈더군요. 익산지방국토관리청 관계자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향후 작품 구상도 밝혀주시죠.객지에서 생활하다 보니 고향이 더 잘 보여 고향에 대한 작품을 많이 썼어요. 그러다 고향에 내려오니 고향에 대해 쓸 이야기가 더 많아졌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갈 걸 꿈꾸는 아리랑인 밟아도 아리랑을 소재로 한 소설을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또 손자가 생기다 보니 동화도 쓰고 싶어지구요. 여기는 새나 짐승들이 사람을 피해 도망을 가지 않을 만큼 전원적입니다. 이곳 생활에 대해서도 쓰고 싶습니다. 차기 작품으로 구체화시키고 있는 내용은 전주 한지입니다. 한지의 고장인 소양에 살고 있으니 보답해야죠. 고향이 저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쓰고 싶은게 너무 많아 지금은 쓰고 싶은거 다 쓰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합니다.● [윤흥길 소설가는] 독특한 리얼리즘, 한국 현대사 예리하게 통찰1942년 정읍에서 태어나 전주사범학교와 원광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6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회색 면류관의 계절이 당선돼 문단에 데뷔했으며, 1977년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로 제4회 한국문학 작가상을 수상했다. 그는 〈완장〉과 〈에미〉 등 많은 작품에서 독특한 리얼리즘의 기법으로 한국 현대사를 예리하게 통찰해냈다. 기행문집 〈윤흥길의 전주 이야기〉를 통해 지역에 대한 강한 애정을 보이기도 했다.소설집으로 〈황혼의 집〉,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장마〉, 〈꿈꾸는 자의 나성〉, 〈소라단 가는 길〉 등이 있으며, 장편소설로 〈묵시의 바다〉, 〈에미〉, 〈완장〉, 〈낫〉 등이 있다. 한국창작문학상과 현대문학상, 제6회 21세기문학상, 제12회 대산문학상, 제14회 현대불교문학상(소설부문)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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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1.23 23:02

[철의 궤도: 전라선 철길 답사기 ① 익산역·동익산역] 강철의 수레, 동남쪽 사백육십 리 첫발 떼는 곳

반질반질 빛나는 두 줄 평행선. 1814년 스티븐슨의 증기기관차 발명으로 시작된 철길은 근대를 열어젖혔고, 현대를 쌓아 올렸다. 정확히 100년 뒤, 이리(익산)와 전주 사이에도 철길이 놓였다. 전북도민의 사연을 침목 밑에 고이 쌓아 올린 전라선 철길의 시작이었다.전북일보는 지난해 인터넷판으로 연재한 군산선 철도 기행에 이어 새해에는 전라선 철길 답사기를 연재한다.지난 10일, 익산역.플랫폼에 서자 귀가 한시도 쉴 틈이 없었다.KTX의 끼이이익 하는 제동 소리, SRT의 슈우우웅 하는 모터 소리, 군산과 대야를 거쳐 막 도착한 특대형 디젤기관차의 우렁찬 엔진 소리, 8200호대 전기기관차의 시-미-라-레- 하는 모터 소리, 에스컬레이터의 걷거나 뛰거나 장난치지 마시라는 안내 음성,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말소리, 그리고 스피커에서 연신 나오는 몇 시 몇 분에 용산으로 가는, 몇 시 몇 분에 여수로 가는 하며 열차가 도착한다고 안내하는 소리.1912년 3월 6일에 이리역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연 익산역은 자타가 공인하는 호남에서 가장 바쁜 역, 호남 철도 교통의 메카다.삼례, 전주, 임실, 오수, 남원을 거쳐 섬진강 줄기를 따라 곡성, 구례구를 지난 뒤 저 남쪽 순천, 여수에 이르는 180.4㎞, 사백육십 리 전라선 철길은 여기서 시작한다.익산역은 참 바쁘다.이 역에서 만나는 철도 노선만 4개(호남선호남고속선전라선장항선). 일반 여객열차, 화물열차는 물론 KTX에 최근 영업을 시작한 SRT까지 취급한다.시종착 열차의 기관차를 돌려 붙이는 등의 작업도, 호남선-전라선 복합열차의 병결 및 분리 작업도 여기서 이뤄져야 한다. 그러니 그야말로 눈코 뜰 새가 없다.철도통계연보에 따르면 지난 2015년 한 해 익산역에서 열차를 타고 내린 인원은 모두 447만7499명. 광주송정역(399만7775명)이나 전주역(255만8479명)보다 많은, 호남에서는 단연 으뜸인 이용량이다.교통로는, 특히 철도는 사람과 돈을 부른다. 역 주변에는 상권이 형성된다. 근현대 도시 발달사에서 예외 없이 적용된 원칙이다. 그러니 이렇게나 바쁜 호남 철도의 메카가 우리가 아는 현대 도시 익산을 만들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일제 강점기가 시작될 무렵까지도 익산의 중심지는 옛 마한과 백제의 중심지였던 금마였다. 그러나 호남선 공사가 진행 중이던 1911년에 군청이 남일면으로 옮겨졌고, 1914년에는 남일면과 동일면을 합해 익산면이라 부르게 된다.한촌에 불과했던 이 지역은 익산역 개통 15년 뒤인 1927년, 일본인 3322명을 포함해 8000명 이상이 거주하는 현대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춘다. 그리고 이 지역은 이후 이리읍, 이리부, 이리시 시절을 거쳐 1995년 익산군과 통합되며 현재에 이르게 된다.그 사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이리역은 이상하게도 폭발과 안 좋은 인연도 몇 번 맺었다. 1950년에는 미국 폭격기가 폭탄을 떨어뜨려 수백 명이 희생됐고, 1977년에는 바로 그 이리역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1년 만에 재건된 이리역은 1995년 익산군-이리시 통합 때 익산역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2015년에는 호남고속선 개통에 발맞춰 새 외피를 갖게 됐다. 역 광장에 서 있던 보석탑은 사라졌지만, 새로 지어진 역사(驛舍) 양쪽 날개 부분에 옛 역사의 모습이 남아 있다.호남 철도의 메카라는 정체성은 익산 시가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익산대로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골목골목 담벼락마다 그려진 철도 관련 벽화도 그 가운데 하나랄 수 있겠다.무슨 사진을 그렇게 찍어? 들어와서 차 한잔하고 가.어느 양복점에서 웃는 얼굴과 손이 밖으로 나왔다. 기어이 그 손은 기자를 자기 가게로 데려가 종이컵에 커피 한 잔을 타 내놓고야 만다.과거 낮에는 10만, 밤에는 6만이라는 말도 있었던 번화가였던 익산 영정통 거리. 윤태중 씨는 1972년부터 45년 동안이나 이 거리에서 양복을 만들어 왔다고 한다.익산대로에서 동쪽으로 살짝 들어가면 나오는 골목은 과거 번화했던 익산역 상권이 남긴 모습이다. 번성했던 익산 영정통도 시간이 흐른 지금은 전형적인 원도심 거리의 외양을 하고 있다.시간의 흐름에 더해, 열차 운용이 정교해지고 익산역 환승 시스템이 잘 갖춰지면서 열차 갈아타는 시간에 이 거리까지 나오는 경우가 드물게 됐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하지만 그저 그렇게 쇠락하게 내버려 두기엔 쌓인 시간과 기억의 무게를 무시할 수는 없었을 터. 오래된 건물(일제 강점기에 지어졌다고 한다)을 꾸며 만든 문화복덕방에서, 이 거리를 문화예술의 거리로 되살리는 작업을 맡은 코디네이터를 만날 수 있었다.여기도 근대 건축물의 흔적이 조금씩 남아 있어요. 일제 강점기 건물 중에도 원형이 남아 있는 게 있고. 아직 이 거리의 테마는 구상 단계지만, 근대유산에 관한 색채는 빼놓을 수 없을 겁니다.원형이 남아 있는 일제 강점기 건물의 대표 격인 것이 바로 익산문화재단 건물이다.문화예술의 거리 남쪽 끄트머리에 있는, 붉은 벽돌로 된 이 3층짜리 건물은 1930년에 익옥수리조합의 사무소 용도로 지어졌다.토지가 비옥해 예로부터 곡창이라 불린 농도 전북은 역시 이 때문에 일제의 수탈 표적이 되곤 했다. 서쪽의 옥구 지역 못잖게 익산 지역도 수탈의 대상이 됐는데, 오오하시(大橋대교) 농장이니 대장촌(大場村)이니 하는 이름들이 나오는 시기가 이 무렵이다.익옥수리조합은 후지이 간타로(藤井寬太郞)라는 사람이 만들었다. 이 일본인 지주는 대아댐을 짓고 그 물을 돌려 농업용수로 쓰고자 했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익옥수리조합은 당대 전국 최대 규모의 수리조합이었다.물론 일본인 지주가 한 일이 다 그렇듯 목적은 원활한 수탈에 있었고, 이렇게 생산량이 늘어난 곡식을 군산 등의 항구로 날라 수탈을 도운 것은 철도였다.결국 이 건물 또한 철도와 수탈의 유산인 것이다.시간이 흘러 광복과 산업화가 지나가고, 그토록 번성했던 상권도 점차 쇠락하고 중앙동 거리는 활기가 꺼져 갔다. 그런데 또 어느 틈에 예술가, 공예가들이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이 거리는 새로운 동력을 얻었다. 과거 어느 순간에 박제라도 된 것처럼 남아 있던 건물과 간판들은 이제는 오히려 볼거리가 됐다.지난해에는 치맥축제나 7080축제 같은 프로그램들이 진행됐고, 올해는 등록문화재 제180호 삼산의원이 이 거리에 이전 복원되고, 주차장으로 쓰이는 공터에 거점 역할을 할 공간도 지어질 예정이란다.뭔 사진을 찍을라고? 이케 좀 하까?상추밭에 물을 뿌리고 있던 장하영 씨는 카메라를 양어깨에 주렁주렁 달고 있던 기자를 보고 외쳤다. 파란 하늘 아래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가 상추 이파리에 닿아 방울이 되어 떨어지는 모습이 퍽 평화로웠다.어릴 적 이리동중에 다녔던 그는, 바로 그가 서 있는 곳 뒤를 지나던 전라선 철길과 동이리역(동익산역)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다.대장촌역(춘포역)에서 기차를 타고 이리로 통학을 했는데, 집에 갈 때 이리역에서 기차를 좀 태워달라고 하면 역무원에 따라서 아이고, 학생인디 그냥 뭐 하면서 태워주기도 하고 좀 깐깐하기도 하고 그러거든. 그럼 동이리역까지 뛰어와서는 거기서 타는 거여. 여긴 아무래도 좀 허술하니까.1914년 11월 17일, 이리-전주 간 경편철도 개통과 함께 문을 열 당시에는 이름이 동익산역이 아니었고, 위치도 좀 더 안쪽이었다.이리역(익산역)이 익산 시가지의 중심이 되기 전의 중앙부였던 인화동 지역(당시 주소도 본정 2정목이었다)에 구이리역이라는 이름으로 영업을 시작했는데, 호남선 분기역인 이리역(익산역)으로 중심이 옮겨가면서 구이리 지역은 동이리 지역으로 바뀌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셈이랄까. 결국 1938년에는 동이리역으로 간판을 바꿔 달게 된다.동익산역으로서는 이 인화동 시기가 이른바 리즈시절이다. 동익산역사(史)에 따르면 1970년대에는 하루 평균 승하차 인원이 1500여 명에 달했고, 연탄이 매일 45톤씩, 경유밀가루양회 등이 160톤씩 이 역에서 내려지곤 했다.기록을 보면 1984년에는 이 역에서 열차를 탄 인원이 96만9000명, 여기서 내린 인원이 70만1000명이었다. 합하면 무려 167만 명이나 된다.그러나 1987년에는 전라선의 호남선 접속 구간이 개량되면서 동이리역도 동산동(LH 행복주택이 지어지고 있는 자리)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이때 수송 실적이 땅으로 떨어지고 만다.당시 기록에는 신도시로서의 현저한 발전이 예상된다고 적혀 있는데, 물론 역사 자리에서 고작 300m 떨어진 사거리에 대형 마트가 들어서는 등 신도시로서의 현저한 발전을 이룬 것은 맞지만 그것이 동익산역의 영업에 도움이 된 것은 아닌 모양이다.군산-전주 간 통근열차 운행 마지막 해였던 2007년에 이 역에서 열차를 타고 내린 인원은 모두 1만871명. 2008년 통근열차가 끊긴 뒤로는 그나마도 유지할 수 없었고, 결국 2009년에는 여객 취급이 중지된다.1995년 익산군-이리시 통합으로 동익산역이라는 이름을 새로 얻게 된 이 역은 2011년에 전라선 복선전철화 사업으로 인해 더 남쪽으로 다시 자리를 옮겼다.새 동익산역은 남쪽으로 멀리, 옥야초등학교를 넘어가면 나오는 허허벌판 위에 서 있다. 주변이 황량하기가, 누가 여기를 굳이 찾아오기나 할까 싶을 정도다.역에 플랫폼이 세 개가 있는데, 플랫폼으로 올라가는 통로에는 행선지를 표시하는 표지도 달려 있지 않다. 여객열차가 선 적도, 누가 여기서 여객열차를 타거나 거기서 내린 적도 없으니 굳이 안내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장항선과 연결될 예정이기 때문에 플랫폼이 세 개예요. 익산역을 안 거치고 올 수 있는 일종의 삼각선인데, 지금은 군산 쪽에서 화물을 싣고 오려면 익산역에서 기관차 방향을 돌려야 되거든요. 선로가 이어지면 좀 수월해지겠죠.널찍한 컨테이너 야드에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가 몇 개 쌓여 있었다. 역 관계자는 이 역에서 실어 보내는 것이 이 컨테이너 기준으로 하루 평균 20개, 이 역으로 도착하는 것이 10개 정도라고 설명했다.익산 국도화학이나 군산 OCI 공장에서 나오는, 도로로 운반하기엔 위험한 화학물질들이 주요 고객이다.사실 동익산역의 존재 이유는요, 익산으로 가는 화물열차들을 대기시키거나 하는 역할 때문이에요. 여기가 병목 구간이니까, 만약에 익산역 선로 용량이 여유가 없다, 그러면 여기서 대기시켰다가 하나씩 보내고 하는 거죠.한 마디로 익산역의 관문 역할이라는 것이다.그러나 그것도 화물열차에 해당하는 말이다. 시각표가 정해져 있는 여객열차는 여기서 멈출 일이 없다. 여객열차에게는 결국 통로에 불과한 셈이다.철길은 동남쪽으로 곧게 뻗었다. 논두렁을 달리던 옛 철길과는 달리, 이제는 콘크리트 구조물을 밟으며 씽씽 달려나간다.

  • 기획
  • 권혁일
  • 2017.01.20 23:0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③ 만마관과 풍남문 - 막을 건 막고 품을 건 품었던 '호남제일관'

층층 성벽 굽은 보루 강을 베고 누웠는데 만마관을 지나오니 광한루 여기 있네유수의 진영에는 정전 이미 묵히었고 대방의 나라 요새 예로부터 철벽이라쌍계의 푸른 풀에 봄 그늘 고요하고 팔령의 만발한 꽃 전장 기운 걷혔네봉홧불 들 일 없고 노래와 춤 성하거니 수양버들 가지에다 배 매고 머무노라.다산 정약용 선생이 남원 광한루에 올라 지은 시구에는, 그가 광한루에 오르기 전 지나왔다는 만마관이 등장한다. 과거 만막관이라고도 불렸던 만마관(萬馬關)은, 일만 마리의 말 곧 천군만마라도 다 막아낼 수 있다는 뜻의 관문이다. 지어질 당시 전주와 호남평야의 미곡과 재산을 약탈하는 왜적으로부터 우리 땅을 지키기 위해 지은 요새의 출입구였기에 그 의미와 더불어 중요한 곳 이었다. 왜적이 남원을 거쳐 임실 그리고 전주로 들어올 때 침공을 저지하는 1차 방어요새가 바로 이 만마관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정약용의 시구 속 언뜻 스치는 만마관 이름에는 봄 그늘 고요하고 만발한 꽃기운으로 전쟁 대신 노래와 춤이 성한 노래 속 평안이 층층 성벽의 철벽 요새와 그 문인 만마관이 있기에 가능하다는 고마움이 담겨 있기도 하다.전주로 들어오는 길목의 군사적 요새지역으로서 만마관은 축조시기와 기원에 대한 여러 주장들이 공존하지만 분명한 것은, <대동여지도> 17첩 4열이나 1872년 <지방도> 임실현지도 등 옛 지도와 문헌 그리고 최명희 작가의 소설 <혼불>에도 만마관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중기 전주와 완주 일대의 뛰어난 경치를 꼽은 완산승경(完山勝景) 32경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그 중요성과 역사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만마관의 관(關)은 본래 문의 빗장을 가리켰다. 즉 빗장으로 문을 닫아서 막을 사람을 막는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나라에서도 관문 위에 성벽이나 대문을 세우고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였는데, 이곳은 호남 제일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큼 수비적으로 중요한 위치였기 때문에 남원 방면에서 전주를 향하던 길손들은 관문이 닫히면 문이 열리는 다음날 아침까지 문밖에서 하루를 지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만마관은 철저히 통제되었다. 이러한 길손들로 인해 관문 밖 마을에는 주막이나 여인숙이 성업을 이루었고, 병졸과 부대원들 거처를 중심으로 바로 아래 쑥재에 마을이 생기기도 하였다.그러나 관문이 무조건 사람을 막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관문은 문(門)으로서 사람을 지나가게 하고 또 통과하게 한다. 농민들이 탐관오리들의 수탈과 악랄한 행동에 저항해 일으킨 갑오동학농민혁명 제2차 봉기에서, 농민들이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통과했던 길이 바로 이 만마관이었던 것이다. 농민혁명군은 그렇게 호남제일관을 지나 호남제일성(湖南第一城)이라는 현판이 걸린 전주성의 풍남문(豊南門)에 도착했다. 세워졌을 당시 명견루(明見樓)라고 불리웠던 풍남문의 명칭은, 한나라 고조 유방이 태어난 풍패를 빗대어 조선왕조의 발원지인 전주를 풍패지향(豊沛之鄕)으로 부른 것과 관련이 있다. 당시 주요 성읍이나 산성에는 서울의 4대문처럼 4방문을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전주성도 마찬가지여서 1389년 축성 당시 성의 동서남북 네 곳에 문루가 세워졌고 이중 남문을 풍남문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앞서 만마관을 지나왔던 농민혁명군은 성 안의 백성들에 의해 활짝 열린 풍남문을 통과하여 전주성에 입성하는 쾌거를 이루게 된다. 비록 지금은 풍남문을 제외한 세 방향의 문들이 모두 사라져 이후 보물 제308호로 지정된 풍남문만이 남아 호남의 사통팔달을 기원해주고 있지만, 이처럼 관문은 때로는 막고 때로는 통과하게 하여 우리 역사의 중요한 순간들과 함께 하고 있다.만마관 이야기로 돌아오면, 만마관이 있던 완주군 상관면 용암리 일대는 현재 제17호선 국도가 지나고 있다. 상관(上關)이라는 지명 자체가 관의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며, 남쪽에 있는 마을은 반대로 남관이 되었는데 모두 만마관이 있었기에 유래한 이름이다. 이처럼 이 지역을 대표했던 만마관은, 성곽이 도로를 지나고 있었던 까닭에 세월의 풍파속에 소실돼 성벽을 쌓았던 돌무더기만이 남아있다. 풍남문의 경우 조선시대 대화재를 겪고 근래에 들어 노후화되어 몇 차례 모습을 잃을 뻔 했음에도 복구와 보수를 거쳐 그 이름과 모습을 이어오고 있는데, 만마관과 주변 천연요새 지역 역시 과거 성곽을 쌓았던 형태로 복원할 수 있기를 기대해보게 된다. 이는 그 자리를 든든히 지키고 열어주었던 만마관의 모습과 함께 일대의 역사적 가치 및 문화적 기억을 함께 되살리는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어느덧 첫 달의 절반을 지난 2017년 붉은 닭의 해인 정유년(丁酉年)의 의미 속에도 문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닭 유(酉)자는 상형문자의 기원상 술을 빚어 담은 항아리의 모양을 본뜬 글자로 술 주(酒)의 기본이 되는 글자이기도 하다. 한편 유(酉)의 상형자는 같은 십이지의 토끼 묘(卯)의 상형자와 함께 문(門)을 닮은 형상으로도 해석되는데, 유(酉)가 문이 닫혀 있는 형태인 것과 달리 묘(卯)는 문이 열려 있는 형상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태양은 묘방(토끼의 방향)인 동쪽에서 떠올라 유방(닭의 방향)인 서쪽에서 지기 때문에, 마치 관(關)과 문(門)처럼 열고 닫는 의미를 취한다는 것이다.역사 속에서 정유년은 좋은 일도 나쁜 일도 함께 있어 왔다. 1597년 정유년은, 당시 임진왜란때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참패를 당한 해이자 정유재란이 일어난 해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이순신 장군이 남은 배 13척을 수습해 10배나 넘는 일본군을 물리치는 명량대첩의 대승을 거둔 해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300년 뒤 1897년 정유년에는 고종이 삼한(三韓)을 아우른다는 뜻의 대한제국을 세우고 황제로 등극해 이때 지은 국호가 대한민국의 모태가 되었지만, 반대로 그 해는 외세와 일제의 간섭 앞에서 국운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시기이기도 하다. 2017년 우리가 맞이한 정유년 역시 세계사의 굵직한 관문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나라는 탄핵의 여부에 달렸지만 프랑스도 대선이 예정돼 있고, 새로운 리더가 미국을 이끌게 되고, 의원내각제를 택하고 있는 독일과 네덜란드는 총선이 실시된다. 정유년의 유(酉)가 품고 있는 의미처럼, 결국 통과해야만 하는 중요한 지점의 관문으로서 반드시 막아야 할 재난과 국가적 어려움은 막아내고 번영과 행복을 맞아들이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한다.

  • 기획
  • 기고
  • 2017.01.20 23:02

심현섭 농어촌공사 새만금사업단장 "새만금 내부개발 촉진 위해 농지기금 활용 검토해야"

단군 이래 최대 국책사업으로 불리는 새만금개발이 30년 가까이 진행되고 있지만, 용지 조성 등 내부개발 속도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내부개발이 본 궤도에 오르기 위해서는 농지기금 활용과 국가공공기관 주도 매립 등 다양한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매립 속도가 애초 계획보다 크게 떨어지면서 투자 유치 실적이 저조한 데다, 물가 상승에 따른 사업비 증가가 우려되기 때문이다.용지 조성 등 개발 현장에서 20년 넘게 새만금 변천사를 지켜본 심현섭(57) 한국농어촌공사 새만금사업단장은 내부용지를 우선 매립한 후 민간에게 조성 및 개발을 맡기는 방향으로 정책이 수립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달 1일 취임한 심 단장으로부터 새만금 내부개발 촉진 방안과 새해 사업 계획에 대해 들어본다.-내부개발을 촉진할 대안이 있나.새만금 기본계획상 소요될 사업비는 약 22조 원에 달하는데 이 중 민자가 10조 원으로 민간투자자 참여가 사업 성패를 결정한다. 국비로 추진되는 기반시설 설치 및 농생명용지 조성의 경우 성과가 있었다. 하지만 국제협력, 관광레저 등 복합용지 개발은 민간사업자가 매립부터 분양까지 일괄 개발하는 방식으로 사업기간이 10년 이상 소요된다. 이 때문에 민간사업자의 투자 유치가 어려운 상황이다. 신속한 사업 추진을 위해서는 선 매립, 후 투자유치란 개발방식 개선이 필요하다. 국가 및 공공기관이 내부용지를 우선 매립한 후 민간에게 조성과 개발을 맡기거나 농지기금을 활용하는 방향이 검토돼야 한다. 이 중 농지기금 활용이 가장 쉽고 현실적인 대안이다.-농지기금 활용에 대한 구체적 청사진이 있다면.새만금 농업용지를 제외한 다른 용지는 개발 수요 부족으로 방치돼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 발생하고 있다. 새만금 방조제가 2010년 준공된 이후 농림축산식품부와 농어촌공사가 조성하고 있는 농업용지와 산업단지를 제외하면 대부분 사업 추진이 지연되고 있다. 산업단지나 택지개발로 농지를 전용할 때 부담하는 농지관리기금의 여유 자금을 투입하면 조기 매립이 가능하다. 전체 토지용도 변경 없이 농지기금으로 먼저 매립한 후 조사료 재배 등 농업목적으로 활용하고, 향후 수요가 생겨 민간투자자가 나타날 때 매각하면 된다. 이렇게 되면 투자한 농지기금을 회수할 수 있다. 또한, 매립 이후 투자 수요 발생 전까지 조사료 재배 등 농업목적으로 사용하게 되면, 수입대체 효과와 조사료 가격안정에 따른 지역 농축산경제에 긍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올해 조기 대선이 예상되면서 새만금 내부개발 활성화를 위한 대선공약 발굴이 과제로 꼽힌다.정권 교체시기 마다 새만금사업의 조기 완료가 공약으로 제시돼왔다. 하지만 관련 사업은 지지부진하다. 국내외 기업이 몰려와 일자리를 만들고 전북경제가 살아나는 새만금시대에 한 발 더 다가서기 위해서는 도로, 철도, 항만, 공항 등 SOC사업과 내부용지 매립을 병행해야 한다. 새만금사업이 조기 완료될 수 있도록 다음 정권 때 정부의 집중투자가 필요하다. 이에 지역 정치권에서는 새만금 내부개발을 촉진할 대선공약을 발굴해야 한다. 우선, 정부 주도로 새만금 내부개발 매립공사 우선 시행이 중요하다. 장밋빛 청사진보다 먼저 투자 여건이 될 땅이 드러나야 한다. 또한 정부는 항만, 공항, 철도, 도로 등 광역교통망을 조기에 구축하고 전력통신상하수도 등 공급처리 시설을 완비해야 한다. 이처럼 민간사업자가 새만금개발에 적극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돼야 한다. 삼성의 새만금 투자 무산 사례를 본보기 삼아 막연하게 민간투자자를 기다려선 안 된다. 대기업이 자발적으로 투자할 수 있도록 규제완화 및 인센티브 부여 등 기업 맞춤형 유인책을 마련해야 한다.-새만금을 글로벌 경제특구로 조성하기 위해선 어떤 정책이 펼쳐져야 하나.새만금은 환황해권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고, 비행거리 3시간 이내에 인구 100만 명 이상의 거대시장을 60여개나 확보하고 있다. 중국, 일본, 유라시아 등 환황해 교역의 교두보 역할을 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최근 중국 경제의 부상에 따른 환황해권의 전략적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외국인 직접투자 유치가 가능한 새만금은 중국과의 지리적 접근성이 높은 만큼, 이를 활용해 글로벌 경제협력의 거점으로 성장시켜야 한다. 초국가적 경제협력 특구, 글로벌 정주교류 거점도시, 활력있는 녹색수변도시, 탈규제 및 인센티브 특화도시를 표방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간 유기적 협력관계 구축이 선행돼야 한다. 특히 중국을 겨냥한 기업투자 유치를 위해서는 물자와 인력을 공급하고, 생산된 제품을 시장에 수출할 수 있는 SOC 구축이 필수적이다. 본격화된 동서남북 도로 조성에 발 맞춰 새만금사업의 구체적 성과를 내려면 무엇보다 시급한 게 용지 조성이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언제 땅이 조성될 것인지, 주변의 모습은 어떻게 변할 것인지에 대한 그림이 그려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투자를 결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투자 유치 활성화를 위해 새만금에 적용가능한 신사업은 어떤 게 있나.급변하는 농정여건을 고려할 때 쌀 농업 위주의 간척사업에서 벗어나 고부가가치의 밭농업, 시설원예 등 복합영농기반 구축이 필요하다. 새만금은 수출 농업과 정보통신기술(ICT)을 결합한 스마트팜 등 농업분야 신사업을 펼칠 기회의 땅이 될 것이다. 농업은 그동안 ICT가 접목되지 않은 대표적 분야인 만큼, 농업과 ICT를 연계한 대규모 스마트팜 단지를 통해 가공 및 유통시설, 생산재배시설 등 스마트 바이오파트를 조성한다면 농민과 기업이 상생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농업과 제조가공, 유통판매 및 문화체험관광 등을 복합적으로 연계함으로써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해야 한다. 또한 풍력과 태양광을 등 자연에너지 신사업을 개척할 수 있는 최적의 기반을 갖췄다.● [심현섭 단장은] 20년 넘게 새만금 핵심업무 전담농식품 수출 전진기지 육성 계획새만금을 농식품 수출전진기지로 조성해 전북의 미래 먹거리를 창출하겠다.심현섭 농어촌공사 새만금사업단장은 새해 주요계획에 대해 미착공된 방수제 1개 및 농생명용지 3개 공구를 올해 착공, 2020년까지 사업을 차질 없이 마무리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겠다고 말했다.심 단장은 농생명용지 일부를 대규모 농업특화단지로 조성하기 위해 연말까지 부지 조성을 완료할 것이라며 농업계와 기업이 상생할 수 있는 농업특화단지 추진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농어촌공사는 새만금 농생명용지 5공구(김제시 광활면)에 700㏊ 규모의 농업특화단지를 조성, 첨단농업과 6차 산업이 결합된 농식품 수출전진기지를 구축하겠다는 구상이다.심 단장은 농식품부 및 전북도와의 소통과 협업을 통해 새로운 농정 발전모델을 구축하겠다면서 지자체 및 농업인기업 등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한 뒤, 올 상반기 사업자 공모를 하겠다고 말했다.익산 출신인 심 단장은 이리고와 전북대 토목공학과를 졸업했다. 전북대에서 토목공학 분야 석박사 학위를 받고, 1982년 농어촌공사에 입사했다.1996년부터 새만금 방조제농생명용지 조성 등 핵심 업무를 맡았던 그는 새만금사업단 2공구사업소장, 전북본부 조사설계팀장, 부안지사 지역개발팀장, 새만금사업단 공무팀장, 새만금개발처장, 새만금산업단지사업단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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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명국
  • 2017.01.16 23:02

[① 백제와 실크로드] 찬란했던 동서 문물교류…그 중심에 '백제'가 있었다

한중 수교 25주년을 맞아 전북일보는 우석대 공자아카데미와 함께 백제 시대부터 실크로드에 남긴 우리 선조의 발자취를 추적하는 영상과 함께 하는 실크로드탐방을 기획, 격주로 연재한다.전통문화의 향기가 가득한 전주에는 특이한 곳이 있다. 바로 전주 인후동의 이슬람 성원이다. 이곳은 호남 유일의 이슬람 예배당으로 매주 금요일 시리아인 이맘(이슬람교의 예배인도자)의 주재 하에 파키스탄, 우즈베키스탄, 인도네시아 등 실크로드 도시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올린다. 가장 한국적인 도시 전주에서 만나는 대단히 이국적인 풍경이다. 한국 전통문화가 살아 숨쉬는 전주는 실제로 예전부터 이슬람문화 그리고 실크로드와 관계가 있었을까. 있다면 얼마나 있었을까.한국과 실크로드하면 대부분은 신라 경주를 떠올린다. 신라 금관, 괘릉 등 실크로드와 관련된 수많은 유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백제는 실크로드와 관련이 없을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깊은 연관이 있다.백제는 백가제해(百家濟海)의 준말이다. 백가제해는 수많은 사람들이 바다를 건넜다는 뜻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바다를 건넜으면 나라 이름을 백제라 했을까. 오늘부터 시작하는 영상과 함께 하는 실크로드탐방의 향후 연재할 주요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실크로드 육로에서 만난 백제인광활한 중국이 끝나고 서역이 시작되는 곳 돈황. 이곳에는 세계에서 현존한 가장 규모가 크고, 동양의 루브르라 불리는 세계 최대의 불교 석굴사원 막고굴(莫高窟)이 있다. 최근에 이곳 벽화에서 한국의 삼국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의 고대 한국인 복식과 의관, 생활 모습이 담긴 인물상이 다량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 가운데 백제인 초상화도 있다. 백제인이 실크로드 육로를 따라 동서 문물이 오가던 교류의 장에 확연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특이한 점은 조우관을 쓴 신라인과 달리 백제인은 무후책을 쓰고 있는 점이다.실크로드의 동쪽 종착점 일본 나라(奈良)에 있는 쇼소인(正倉院). 이곳은 실크로드 희귀 유물과 문서가 가득한 일본 왕가의 보물 창고다. 여기에도 백제와 깊은 연관이 있는 유물들이 있다. 코발트빛을 내뿜는 1300여년 전 유리잔. 서역풍이 물씬한 이 유리잔의 다리받침에 새겨진 당초문(唐草紋)과 어자문(魚子紋)은 익산미륵사지 석탑에서 출토된 금동제사리호의 문양을 빼닮았다. 일본 학자 나이토(內藤)는 백제가 서역 페르시아 계통의 유리잔을 수입해 다리받침을 가공해 일본에 전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공주 무녕왕릉. 고대 백제사의 블랙박스를 연 대발견이었다.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도 실크로드와 관련된 것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진묘수(鎭墓獸)다. 진묘수는 글자 그대로 무덤을 지키는 짐승이다. 이 진묘수는 수호신으로서의 상상의 동물 페르시아 그리핀(Griffin)에서 유래한 것이다.△해상실크로드의 주역전남 신안군 증도 앞바다. 이곳에서 1323년 중국 절강성 닝보(寧波)에서 출발해 일본 하카다(博多)로 가다 좌초된 무역선이 발견되었다. 당시 경원(慶元)이라 불렸던 닝보는 한국과 일본이 서아시아나 아라비아 상인들과 교역하던 해상실크로드의 본거지였다. 현재 닝보 시내 중심가에는 당시 고려 사신들이 머물렀던 고려사행관(高麗使行館)이 복원되어 있는데 바다 실크로드를 개척한 우리 선조의 뚜렷한 자취이다.중국 산동성 펑라이(蓬萊). 펑라이는 중국 북방무역의 대표 항구로 한반도 서해 연안에서 출발한 무역선이 가장 많이 정박한 곳이었다. 2005년 펑라이 해안에서는 부안과 강진에서 생산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자기를 실은 고려 상선이 발굴되어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완도에는 청해진 유적지가 있다. 당시 동아시아의 지중해 역할을 했던 서해를 누비며 해상왕, 무역왕이라 불렸던 장보고는 바다를 개척한 세계인이었다. 산동성 석도(石島)에는 해상왕 장보고가 세운 적산법화원이 있고, 그 옆에는 장보고 기념관도 있다. 지금으로부터 1200여 년 전 바다를 개척해 동북아시아의 해상권과 무역권을 장악한 장보고는 해상실크로드의 주역이었다.△실크로드와 전주비빔밥 그리고 판소리전주의 대표음식 전주비빔밥. 전주비빔밥은 세계와 소통하는 음식이다. 재료가 그를 입증한다. 전주비빔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재료인 마늘, 오이, 양파, 당근 등은 모두 페르시아 지역에서 온 것이다. 대한민국 대표간식 호떡, 호빵, 호두과자. 이 또한 실크로드와 깊은 관련이 있다. 호떡, 호빵, 호두과자의 호(胡) 자는 페르시아를 의미한다.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온 새로운 음식이라는 뜻이다.호남 지역에서 발원한 우리의 전통 음악 판소리. 소리꾼이 고수(鼓手)의 북장단에 맞추어 창(唱)과 아니리를 엇섞어 공연하는 판소리는 우리 나라에만 있을까. 다른 나라에는 판소리가 없을까. 만약 있다면, 우리 나라 판소리와 관련이 있을까.판소리와 유사한 장르는 불교 발원지 고대 인도에서 시작되었다. 매우 다양한 고대 인도의 전통예술 속에서 판소리형 공연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인도의 판다바니(Pandavani)다. 판다바니(Pandavani)는 라마야나와 더불어 인도 2대 산스크리트 서사시로 알려진 마하바라타를 이야기로 풀어내는 판소리형 공연이다. 이웃 중국에는 판소리를 설창(說唱)이라 하는데 백 가지가 넘는다. 중동, 인도, 중앙아시아를 거쳐 일본에 이르기까지 소리길을 따라가면 다양한 형태의 판소리를 만날 수 있다.실크로드하면 떠오르는 황량한 사막. 이제는 관광지에서나 볼 수 있는 사막 위의 낙타 대상(隊商) 카라반. 실크로드는 정녕 사라진 길일까. 그렇지 않다. 실크로드는 모래 바람에 묻혀버린 잊혀진 길이 아니다. 실크로드는 백제 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살아 숨쉬는 현재의 길이다. 실크로드에 남긴 우리 선조의 흔적을 찾아나서는 긴 여정은 이제부터 시작이다.△전홍철 우석대 공자아카데미 원장=돈황학 전문가로 실크로드와 중국문화에 대한 글쓰기과 영상 제작을 하고 있으며, 세계 최초로 돈황변문집을 완역 출간한 바 있다. 주요 저서와 역서로 〈돈황 강창문학의 이해〉(소명), 〈돈황 민간문학 담론〉(소명), 〈돈황과 동아시아문학〉(차이나하우스), 〈돈황변문집교주〉(1-6권, 소명), 〈당대 변문(唐代 變文)〉(소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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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1.13 23:02

[전북일보 카드뉴스] 전북 여행자랑: 2017~2018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전북 관광 6선

전북 여행자랑: 2017~2018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전북 관광 6선#표지.전북 여행자랑: 2017~2018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전북 관광 6선#1.이불 밖은 위험해. 역시 누워있는 게 최고야.#2.뭐, 재미있는 거라도 있나 볼까?#3.>>>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2017~2018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한국관광 100선<<<#4.뭐야 이게?#5.>>>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한국관광 100선<<<>>>전라북도에 있는 관광지는 6곳<<<#6.호오.#7.전주 한옥마을은 전라북도뿐 아니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관광지 중 하나죠.온갖 먹거리와 함께, 한복 입고 즐겨보는 가장 한국적인 동네 한 바퀴.#8.100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는 곳. 근대문화유산을 간직한 군산으로 시간여행 다녀오는 건 어떨까요?#9.바다와 산이 공존하는 곳, 변산반도. 변산격포에서 바닷바람도 쐬고, 내소사에서 속세의 짐도 덜어보고.#10.하나, 둘, 셋, 치즈!디디에 세스테벤스(지정환) 신부가 산양 두 마리를 키우며 시작된 곳, 우리나라 치즈의 원조, 임실 치즈마을. 치즈를 직접 만들어볼 수도 있어요.#11.하늘로 쫑긋 솟은 귀 두 개. 진안을 상징하는 마이산은 사시사철 언제 찾아도 훌륭한 여행지.겨울엔 위로 솟는 역고드름에, 봄엔 산을 둘러싸는 벚꽃에, 여름엔 바위와 어울리는 푸른 수목에, 가을엔 코스모스와 단풍에 감탄하는 곳.#12.전주의 관문, 예(禮)의 고장 삼례. 옛 양곡창고와 시설물들을 꾸며 내놓은 삼례문화예술촌은 오가는 이들의 눈길을 잡아끕니다.비비정에 앉아 만경강을 바라보는 풍경도 일품이죠.#13.호오.#14.이 정도면 이불 바깥이라도 괜찮을 것 같은데?(주섬주섬)/기획 신재용, 구성 권혁일, 제작 이권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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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1.11 23:02

[완주군 화산면] 서출동류 3대 명당터, 농촌지역 면에 인물 많아

전북일보사는 정유년 새해를 맞아 도내 각 읍면동을 중심으로 지역출신 인사들을 소개하는 우리고을 인물열전 시리즈를 마련한다. 각계에서 활동했거나 현재 활동하고 있는 인사들을 소개함으로써 고향과 지역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고 대화와 소통, 교류의 새로운 시발점이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다.완주군 화산면 소재지 앞으로는 화평천이 흐른다. 동해안을 제외한 우리나라 대부분의 하천이 동출서류(東出西流)지만, 이 하천은 서출동류(西出東流)로 물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가서 경천저수지에 잠시 머물렀다가 만경강과 합류해 서해로 향한다.서울 종로의 청계천과 충청 계룡산에서 출원하는 물줄기도 서출동류다. 예로부터 한학자나 풍수가들은 이러한 서출동류의 모양을 대길지로 여겼으며, 이 지역에서도 화평천과 화평뜰 일대를 두고 대한민국 3대 명당터다, 8대 명당터다 하는 말들이 전해져왔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옛날에는 많은 풍수가들이 매년 화산을 찾았고, 아예 식솔을 이끌고 들어와 화산으로 터를 옮긴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풍수 이야기가 맞는 것인지는 몰라도, 화산면은 농촌지역 면 치고는 인물이 많은 곳이다.△관계우선 완주군의 수장인 박성일 군수(62)가 화산면 와룡리 출신이다. 박 군수는 행정고시 출신으로 정읍부시장과 전북도행정부지사를 거쳐 지난 2014년 지방선거때 완주군수에 당선됐다.전북도교육청 부교육감을 지낸 김찬기씨와 전북도청에서 공무원노조를 이끌었던 이정천씨도 동창생이다. 김씨는 부교육감에 앞서 전북체신청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기업인으로 변신해 더케이호텔경주의 사장을 맡고 있다. 전북도청 김미정 과장이 동생이다.이정천씨는 전국 공무원노동조합총연맹 초대위원장과 2대 위원장을 지내며 대한민국 공무원노조의 기틀을 잡고 초기 역사를 이끌었다. 전주시청에서 도시관리국장과 상수도사업소장을 지낸 김시관씨(71)는 퇴직한 뒤 (주)토우를 운영하고 있으며, 화산면장을 지낸 이방재씨(71)는 완주군 기획감사실장을 끝으로 퇴임했다.전북도청에서 새만금추진단장과 공무원교육원장 등을 지낸 신세우씨(68)도 정읍에서 고교를 졸업했지만, 원래는 화산면 출신이다. 의사 출신으로 2000년대 중반에 전라북도 남원의료원장을 지낸 김정회씨(64)와 변호사로 전북도 감사관을 지낸 김수태씨(45)도 화산이 고향이다.또 국정원 전북지부장과 본부 국장 등을 지낸 장세혁씨(71), 한국가스공사 본부장(1급)을 지낸 김길창씨(62), 국회 법사위 이재윤 과장(38미국 연수중)과 환경부 강성구 팀장(48) 등도 화산면 출신이다.△정계정계 인사로는 국회의원 정책보좌관을 거쳐 청와대 민정비서실 행정관을 지낸 국중호씨(65)가 있다. 국씨는 재경완주군민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주)월드컵종합건설 대표이사인 임동순씨(63)는 성공한 기업인이자 정치인이다. 5대 서울시의회 의원과 민주당 당기위원장, 연청 서울시지부 회장 등을 지냈다. 임원규씨(69)는 36세때 최연소 화산면장으로 부임해 10년 동안 활동했으며, 이후 완주군의회에 진출해 3선 의원으로 5대 군의회 의장과 완주문화원장 등을 지냈다. 화산면장 13년, 삼례읍장 3년의 경력이 있는 장인태씨(89)는 군행정동우회 회장과 화산번영회 1대 회장을 지냈으며, 한때 지방정치에도 참여했다. 국중각 삼육대 교수가 사위이다.국회의원 보좌관을 거쳐 익산에서 제5대 도의원으로 활동한 김창수씨(68)도 화산면 출신이다. 김씨는 이후 전주장학숙장과 유종근 지사 비서실장을 지내기도 했다.△사법군사법부 인사로는 지금은 고인이 된 노병인 전 판사가 알려져 있다. 전주지방판사와 광주고등법원 수석부장판사 등을 지냈으며, 자유당 정권시절 강한 야성으로 부정사건에 관련된 국회의원을 구속시키기도 했다. 현역으로는 박정수 의정부 지원 부장판사(45)와 김영환 부산지법 판사(41) 등이 있다. 군 출신으로는 육군통신학교장을 거쳐 소장(별 2)으로 예편한 노인우씨(73)와 35사단장을 지내고 교육사령관을 끝으로 3성 장군으로 예편한 유해근씨(72)가 있다.△교육계학계화산면에는 작은 시골에 어울리지 않게 일찍부터 사립중학교가 있었다. 오늘날 자율형 화산중학교의 전신인 화산고등공민학교다. 지금은 고인이 된 남도현씨가 이사장, 심의두씨 등이 이사로 참여해 64년에 세웠으며 심의두씨가 초대 교장을 맡았다. 그 뒤 69년에 설립된 학교법인 화산학원은 95년에 화봉학원으로 이름을 바꿨으며, 현재는 심의두씨(81)가 이사장을 맡고 있다. 심씨는 전북도교육위 의장과 한국중등교육협의회 중앙대의원 등을 지냈으며, 현재는 한글세계화총본부 이사장을 맡고 있다. 교육계 옛날 인물로는 임실교육장과 교원단체연합회장을 지낸 김갑배씨와 도교육청 학무국장을 지낸 손희장씨 등이 있으며, 순창교육장을 지낸 오갑택씨(75)도 화산 출신이다.학계에도 많은 인물이 있다. 박성일 군수의 1년 후배인 전북대 영문과 이종민 교수(61)는 인문대학장과 인문역량강화(CORE)사업추진단장을 맡고 있으며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 전통문화도시조성위원회 위원장 등 사회적으로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전북대 불문과 교수로 인문대학장을 지낸 유제식 전 교수(84)와 원광대에서 기획처장과 교무처장, 농대학장, 한국토양학회 회장 등을 지낸 최성식 전 교수(74), 그리고 박천배 원광대 교수(63)와 임석태 전북대의대 교수(51)도 화산이 고향이다. 도외 지역에는 국동전 전 서호대 교수(71, 한국기독교직장선교연합회 고문 겸 명예이사), 부산외국어대에서 국제언어교육원장과 평생교육원장, 통역번역대학원장 등을 지낸 임온규 교수(62)와 미국 오레곤 주립대에서 컴퓨터 관련 박사학위를 받은 삼육대 국중각 교수(65), 김현태 상지대 미대 교수(63), 이철승 성균관대 철학과 교수(55) 등이 있으며, 해외에는 임상성 호주 시드니 주립대 교수(51, 전 인하고대 교수)와 오은아 미국 뉴욕버팔로대 교수(44) 등이 있다.△재계기타재계 인사로는 삼양사 사장을 지낸 유제춘씨(81)와 전주공고 총동창회장을 지낸 김송회 고려종합건설 회장(71), 김영만 한빛소프트웨어 대표이사(56), 이진일 한백종합건설 대표(56) 등이 있다.지난 2002년 KBS 공채 17기로 출발해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개그맨 김병만씨(42)와 전국 4-H 연합회 회장을 지낸 김재수씨(56), 서양화가이자 문인으로 미국 뉴저지주에서 초대전도 열었던 김영근씨(70), 소설가 유현종씨(77) 등도 화산이 낳은 인물들이다.이성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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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성원
  • 2017.01.10 23:02

정국수습 온 힘 기울이는 정세균 국회의장 "전북 새로운 도약하려면 정치권·도민 함께 노력해야"

2017년 붉은 닭의 해가 밝았다. 새로운 해가 떴지만 대한민국호는 여전히 극심한 혼란에 빠져있다. 여기에 경기침체로 서민들의 생활고는 가중되고 있고, 조류인플루엔자로 전국의 축산농민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유년(丁酉年) 새해를 맞아 정세균 국회의장을 만났다. 혼란에 빠진 정국수습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는 정 의장으로부터 우리사회가 풀어야 할 과제와 나아갈 방향에 대해 들어봤다. 인터뷰는 지난 6일 국회의장실에서 진행했다.-국회의장에 취임하신지 반년이 지났습니다. 성과와 소회를 밝혀주십시요.국회가 국정운영의 한 축으로서 역할을 다해왔다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여야협의과정을 통해 예산안을 법정기한 내에 처리했습니다. 쟁점이던 누리과정예산문제도 해결했습니다. 약속드린 국회 환경미화원 직접고용 약속도 지켰습니다. 당이 여러 개 있어서 걱정을 많이 하셨는데, 잘 협력해 의회주의를 살렸다고 생각합니다. 헌정회 신년인사회에 갔는데, 선배들께서 좋은 말씀 많이 해주시고 칭찬 해주셔서 개인적으로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취임 때 특권 내려놓기를 강조하셨습니다.의장 직속으로 특권내려놓기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여러 성과를 냈습니다. 위원회에서 제시된 내용의 3분의 1은 완료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불체포특권을 내려놓았습니다. 체포동의안이 제출되더라도 72시간만 버티면 무용지물이 돼 버렸는데요, 국회법 개정을 통해 다음 본회의에서 표결처리하도록 했습니다. 방탄국회 오명을 벗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밖에 친인척 채용 문제와 선출직들은 면제를 받아왔던 민방위 훈련을 받도록 했습니다. 아울러 정책개발비 등에 대해 과세를 결정하면서 자연스럽게 세비를 삭감시키는 효과를 얻었습니다.-취임 이후, 짧은 기간 난관이 많았습니다. 농림부 장관 해임 건의안 때문에 새누리당 이정현 전 대표는 의장 사퇴를 요구하기도 했는데요.교체된 의회권력 수장으로서 의장직을 대충 누리고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의회의 권능을 제대로 찾고, 국민들과의 거리를 좁혀야 한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야 신뢰가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국민들이 의회권력을 바꿔준 상태의 의장은 달라야 된다고 판단하고, 작심하고 행동한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발생한 상황은 제가 감수하면 되는 것입니다.-박 대통령 탄핵 심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이 공정하고 신속한 결론 도출 의지를 밝힌 바 있습니다. 헌법재판소가 신속하고, 현명하게 결정 내릴 것으로 기대합니다. 또 주권자인 국민의 뜻에 따라 결정을 내릴 것으로 봅니다.-조기대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정치권이 합종연횡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시는지요.정파들이 선거를 위해 합종연횡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것을 개헌과 연결시켜서 개헌의 중요성과 순수성을 훼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기회를 줘서 잘 하면 더 시키고, 잘 못 하면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민들이 온당한 판단을 하실 것으로 생각됩니다.-대선과 맞물려 개헌 논의가 활발합니다. 임기 내 개헌을 추진하겠다고 밝히셨는데요.국회 개헌특위가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습니다. 개헌이 안 될 일은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문제는 개헌과 대선을 묶어서 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대선은 다음의 국가지도자를 뽑는 것이지만 개헌은 국가의 기본법을 어떻게 잘 만드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헌은 매우 중요한 과제입니다.-개헌 시기와 권력구조 개편방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개헌이라는 것이 뚝딱 해치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선이 조기에 이뤄지면 물리적으로 대선 전은 어려울 것으로 생각됩니다. 개헌은 국민적 공감대 위에서 여러 정파가 합의해야 되는 것입니다. 대통령 권력이 조정되는 조건이라면 4년 중임제와 분권형 대통령제 모두 찬성합니다. 물론 이는 개인적 의견이고, 의회 결정에 따를 것입니다.-차기 정부는 어떤 정부가 들어서야 한다고 보시는지요.2017년 대선 시대정신은 공정사회와 민생경제가 될 것입니다. 민생을 잘 알고,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청년세대에 희망이 되는 분이 대통령이 될 것입니다. 그런 분을 뽑기 위해 대선이 시작되면 국민들께서 시대정신에 맞는 분을 판단하실 것이라고 봅니다.-올해 전북예산을 확보하는데 의장님의 역할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지역구는 옮겼지만 전북에 아주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2017년 국가예산에는 묵은 숙제를 조금은 했다고 봅니다. 태권도원 숙원사업 해결과 탄소 관련 지원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런 것들이 가능했던 것은 야당이 국회에서 힘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전북출신 예결위원님들이 열심히 해주신 영향입니다.-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 도크 폐쇄 문제로 지역경제가 휘청이고 있습니다. 해결 방법이 없을까요.우리나라 조선업이 겪고 있는 고통이 전북에도 와 있는 것입니다. 군산조선소가 들어오면서 많은 일자리가 생겨나고, 연관 산업도 생기면서 지역에 큰 영향을 줬습니다. 가슴 아픈 상황입니다. 다각도로 해법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묘수를 찾아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메가탄소밸리 조성사업이 우여곡절 끝에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했습니다. 하지만 사업비가 대폭 삭감되고, 주도권도 경북에 빼앗긴 모양새입니다.전북의 탄소산업은 출발부터 관여했습니다. 국회 예결위원회 간사를 맡았을 당시 제안을 받고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 때는 대한민국의 누구도 탄소에 관심이 없을 때였습니다. 새롭고 독창적인 것을 해보자고 해서 공을 들이고, 정성을 쏟아왔습니다. 2003년 당시 노무현 당선자가 전주를 방문했을 때도 제가 탄소기술원에 모시고 갔었습니다. 그런데 탄소산업 주도권이 경북으로 넘어가는 것 같아 대단히 안타깝습니다.-새만금도 여전히 터덕이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내국인 카지노를 포함한 복합리조트 허가를 골자로 한 특별법 개정안을 놓고 정치권과 시민단체가 갈등하고 있습니다.제가 열린우리당 정책위의장을 하고, 원내대표, 국회 예결위원장을 할 당시인 지난 2002년부터 2004년까지 3년 동안 새만금사업이 멈춰 있었습니다. 해수유통문제에 대한 소송 때문이었는데요. 황금 같은 시기에 진도를 뺐다면 많이 진척됐을 텐데, 아쉬움이 남습니다. 갈등이 있으면 빨리 조정해서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버려야 하면 버리고, 필요하다면 취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갈등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일은 다시는 없어야 합니다. 적극적인 소통과 지혜로운 합의가 필요합니다.-의장님께서는 일찍부터 국가 균형발전을 강조하셨는데요.15대 국회(1996년)에 처음 들어와서 요구한 것이 국토의 균형발전입니다. 당시 전북과 강원, 충북, 제주 등 4곳을 집중 지원해서 균형발전을 해야 국가 경쟁력이 커진다고 주장했습니다. 이후 제주도는 중국 자본이 들어와서, 충북은 서울 등 수도권과의 근접성을 내세워 기업도시 등이 성공하면서 낙후를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강원도도 이제 졸업을 앞두고 있습니다. 전북만 아직도 터덕이고 있습니다. 참으로 답답합니다.-마지막으로 도민들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지난해 국가적으로 어려운 과정을 겪었습니다. 책임 있는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낍니다. 빠른 시간 내에 어려움을 극복하고 대한민국이 다시 전진하도록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2017년은 우리 전북이 새로운 가능성을 열기 위해 함께 힘을 모으는 해가 되길 바랍니다. 낙후된 지역에서 졸업할 수 있도록 일꾼들과 도민이 일체감을 갖고 함께 노력해야겠습니다. 도민 여러분도 일꾼들을 믿고, 일 잘 할 수 있도록 힘을 모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정세균 의장 약력△1950년 진안 출생 △전주 신흥고, 고려대 법학 학사, 페퍼다인대학교 경영학 석사, 경희대 경영학 박사 △151617181920대 국회의원 △쌍용그룹 상무이사 △새천년민주당 제2정책조정위원장 △제16대 대선 노무현 후보 중앙선대위 국가비젼 21위원회 본부장 △국회공적자금국정조사 대책 특별위원회 위원장 △열린우리당 정책위의장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열린우리당 당의장 △제9대 산업자원부 장관 △민주당 대표 △민주당 최고위원 △20대 국회 전반기 의장대담=은수정 정치부장, 정리=박영민 기자

  • 기획
  • 전북일보
  • 2017.01.09 23:02

'첼리스트로, 생물학 박사로' 두 길 가는 고봉인 씨 "과학자로서, 음악가로서 몸과 마음 치유하고파"

나의 음악은 악을 배척하고 삶의 승리를 구가하고 슬픈 사람들과 자리를 같이하고 인류사회에 희망을 주고자 하는 의욕이 담겨 있습니다. 나의 고국과 형제자매 여러분 부디 나의 음악을 통하여 위로와 용기를 얻으시고 내가 절실히 염원하는 민족의 평화적 사회와 민족끼리의 화해가 하루 빨리 실현되기를 바라고 또 다 같이 노력합시다.여러해 전 통영의 윤이상 기념관에서 만난 작곡가 윤이상의 글이다. 그 때 이 글을 보면서 전주 출신의 젊은 첼리스트 고봉인을 떠올렸다. 고봉인은 2008년 평양에서 열린 윤이상 연주회에 초청돼 우리나라 연주자로는 처음으로 북한의 오케스트라와 협연해 화제를 모았던 첼리스트다.그는 음악공부를 위해 독일로 유학을 떠났지만 하버드대와 프린스턴대에서 생물학을 전공한 과학자가 되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바이오융합연구소 전문연구원으로 유방암 줄기세포를 연구하고 있는 젊은 과학자이자 첼리스트. 과학과 음악, 두개의 길을 동시에 걷고 있는 그의 삶은 아직 낯설다.지난 해 말, 첼리스트이자 생물학 박사인 고봉인씨(32)를 그의 연구실이 있는 한국과학기술원에서 만났다. 연구에 전념해야 하는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 연습을 하고 연주활동을 해나가는 그의 일상이 고단하지 않을까 궁금했다. 지난해만도 협연과 두 차례의 독주무대까지 치러냈던 그는 머뭇거림 없이 답했다.쉽지는 않지만 두 길을 함께 갈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합니다. 과학과 음악, 어느 한쪽도 포기하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사실 저에게는 생물학 연구나 첼로 연주가 잘 맞는 일이에요. 이루고자 하는 바람도 같고요. 신약 개발로 질병을 치료하는데 기여하고 좋은 연주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힘이 되는 것, 서로 맞닿아 있지요.과학자의 길에서 인류의 건강을, 음악가의 길에서 인류의 정신과 마음을 치유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그의 바람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선물인가. 겸손함과 따뜻함을 갖춘 올해 서른두 살의 청년 고봉인을 인터뷰하는 일은 그래서 더 즐거웠다.-첼리스트 고봉인을 연습실이나 공연장이 아닌 연구실에서 만나는 일이 조금은 낯설군요. 지난 가을에 독주회를 가졌죠. 어땠습니까. 독주회로는 꽤 오랜만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많이 설레었어요. 협연은 더러 했었는데 독주는 꽤 오랜만이었거든요. 그래서 욕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대중들과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는 친숙한 곡보다는 제가 연주하고 싶은 곡을 선곡했었거든요. 윤이상, 브리튼, 코다이 등의 곡들이었는데 아무래도 대중들에게는 좀 어려운 곡들이었던 것 같아요.-첼로 무반주곡들로만 구성되어 있었으니 음악에 조예가 깊은 청중들이 아니고서는 어렵다고 느낄 법 했겠습니다.이번 무대는 금호의 독주회 시리즈였는데, 선곡하면서 많이 흔들렸던 것이 사실이에요. 한국에서는 프로그램을 대중적인 곡으로 구성하는 것이 좋다고 주위에서 조언을 하셨거든요. 사실 선곡은 매우 중요하죠. 선곡에 따라 연주회의 성공이 가름되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연주회의 성공을 그런 기준으로만 얻고 싶지 않았어요. 제 목소리를 들려줄 수 있는 프로그램을 짜고 싶었죠. 윤이상 선생님 곡을 두 차례 무대 모두 첫 곡으로 올린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 윤이상 선생님 곡은 연주하기도 어렵고 듣기도 쉽지 않지만 제 목소리를 가장 깊게 들려줄 수 있다고 여겨온 까닭에 청중들이 낯설어 해도 들려주고 싶다는 마음이 컸어요. 좀 어려워도 한번 들어보세요라고 이야기 하고 싶었죠.-그런 마음이 청중들에게 가 닿았을까요.꼭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우선 객석이 많이 차지 않았거든요. 프로그램을 보고 미리 포기하는 청중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웃음)-대중적인 곡들로 선곡했으면 객석을 꽉 채웠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겠군요.아쉬움이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 선곡을 후회하진 않아요. 그런 방향은 제 목소리를 제대로 들려주는 무대가 아니니까요. 음악을 접하는 태도의 차이일 터인데 청중들의 태도에만 연주가 맞추어 갈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윤이상 선생님에 대해 각별한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윤 선생님은 독일에 가서 처음 알았어요. 연주회마다 프로그램에 어김없이 윤이상 곡이 있었어요. 이분이 누굴까 싶었습니다. 알고 보니 우리 시대의 아주 중요한 작곡가셨죠. 그 분의 존재가 자랑스러웠습니다.-윤이상 곡은 연주자들도 어려워하는 곡이라고 들었습니다.적잖은 연주자들이 피하는 곡들이 많죠. 그러나 한국인 연주자들은 많이 연주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저도 한국인 첼리스트로서 윤이상 선생님 곡을 널리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고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다른 천재 작곡가의 곡보다 더 어려운 것은 아니에요. 한국 사람이 연주하기에는 아주 좋은 곡이죠. 동질적인 감정이 있거든요. 제가 아무리 브람스나 베토벤을 잘 한다고 해도 유럽의 연주자들처럼 그들의 감성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들보다는 부족한 것이나 마찬가지죠.-화제를 돌려보죠. 과학과 음악 두개의 길을 동시에 간다는 것 쉽지 않은 일일 텐데요. 더구나 한국에서는 낯선 문화이기도 하고요.저는 처음부터 병행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어요. 어려서부터 아버지처럼 과학자가 되고 싶었는데 음악 또한 마음을 접기 어려웠거든요. 그래서 음악을 먼저 시작하게 되었는데 대학 다닐때까지만 해도 어머니께서는 반대하셨어요. 연주자의 생활이 워낙 외롭고 성공하기 힘들다는 것을 아시니까.-과학자는 아버지 영향이 컸겠군요.어렸을 때 우리 아버지는 참 행복하게 일을 하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자연스럽게 나도 과학자가 되면 행복하게 살 수 있겠다 싶었죠. 그래도 음악의 길을 먼저 갔는데 선배들이 대학은 일반 대학을 가서 다른 것을 제대로 공부를 해보라고 권했어요. 자신들은 그렇게 하지 못해 후회가 된다고 했어요. 저도 40-50대가 되어 후회하지 않으려면 마음에 품고 있는 과학을 공부해야겠다고 결정했죠.-두가지 다 해보니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나요.결국은 내 삶에서 밸런스를 이루는 것이 중요한데 그것이 보기 나름인 것 같더군요. 저는 음악에서 배운 점을 과학에 유입할 수 있고 반대로 과학에서 배운 것이 음악에 적용된다고 생각했어요.-그러고 보면 환경이 중요한 것 같아요. 부모님의 영향도 그렇고 외부적인 요인도 그렇고요.제 생각에는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패션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을 해요. 저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하는데, 무엇인가 선택을 하면 인생을 걸고 하는 일이 다반사인 한국에서는 그 기준이 다르겠죠. 저는 다행스럽게 좋은 환경을 얻어 제 의지를 실현할 수 있었어요.-꽤 일찍 유학을 떠났었죠.중학교 3학년 때인데, 처음에는 게링가스 교수님이 계신 독일의 뤼벡으로 갔었어요. 1년 뒤에 교수님을 따라 베를린으로 옮겼는데 그곳에서 미국계 공립고등학교에 들어가 과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죠.-우리시대의 현존하는 첼로 거장으로 불리는 게링가스 교수님은 어떤 인연으로 만났습니까.99년 오디션에서 뵈었어요. 운이 좋았죠.-미국으로 건너간 것은 대학 진학을 위해서였습니까.그런 셈이죠. 하버드대에 들어가면서 옮겼으니까요.-학과 공부도 아주 잘했던 모양입니다. 음악과 병행하면서 원하는 대학을 들어갔다는 것도 놀랍습니다. 대학에서도 복수전공으로 음악 석사과정을 마쳤던데요.사실은 학부 때 많이 힘들었어요. 그런데 제 주변에 전공이 아닌 다른 패션을 갖고 있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위로를 많이 받았죠. 그럼에도 결국에는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가 싶기도 했는데 그 순간을 생각하면 어느 한쪽도 포기할 수 없었어요. 연구하는 것도 음악도 정말 재미있는 일이거든요.(웃음)-포기를 안하면 그만큼 고단하잖아요. 두 개를 거의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부담도 있겠고요.부담보다는 탐이 날 때가 있어요. 예를 들어 독일에서 공부했던 선배들 중에는 정말 훌륭한 연주활동으로 이름을 널리 알린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 선배들이 좋은 오케스트라나 훌륭한 음악가들과 협연하는 무대를 보면 내가 음악가의 길로만 갔다면 나도 저들처럼 되지 않았을까하는 그런 생각이 들죠.-그럴 때면 무엇으로 위안을 받나요.욕심을 버리는 일이죠. 늘 리마인드하는 것이 있는데, 정명화 선생님이 저게 주신 말씀이에요. 음악은 마라톤이다. 지금 아무리 잘해도 나중에 잘 못하면 쓸모없게 된다고 하셨죠.계속 성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그 말씀을 생각하면서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한 단계씩 올라가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다지게 됩니다.-연구 분야가 궁금합니다.혈관 쪽입니다. 지금까지는 유방 암 줄기세포 연구를 집중적으로 해왔는데, 최근에는 뇌졸중 연구로 넓혔습니다.-의사가 아닌 연구 분야를 선택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까.아버지의 영향이 컸어요. 새로운 약을 개발해 치료에 쓰이게 하는 것,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을 하려면 연구 쪽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이야기를 들으면서 연구와 첼로 연습, 연주활동까지 어느 것 하나도 소홀하지 않게 일상을 꾸려간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일상을 지켜가는 것이 가능한지 궁금합니다. 우선 시간이 부족할 텐데요.남들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자기 고집이 있으면 시간은 찾아집니다. 예를 들어 제가 지키고 있는 하루 두 시간의 연습시간은 사실 프로연주자들에게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거든요. 그러나 연구에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하는 저에게는 두 시간을 빼내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보통 저녁 먹고 연습을 하는데, 상황이 그러하니 타이밍을 잘 해서 인큐베이션 등 집중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활용합니다.-치열한 계산법이 동원되는군요.(웃음) 책은 많이 읽습니까.많이 읽으려고 노력합니다. 어렸을 때는 공상과학소설 같은 류에 마음이 있었는데 대학교 때 교양과목을 들으면서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음식에도 관심이 있어 관련된 책을 많이 읽는 편입니다. 요리도 즐겨해서 가끔 지인들을 초대해 콩나물국을 대접하기도 합니다.-이제 곧 전문연구원 과정이 끝나는데 앞으로의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미국으로 돌아가 연구를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대학에서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좋은 연구자들과 의미 있는 실험을 통해 인류의 건강에 기여하는 신약을 개발하는 것이 꿈이기도 합니다.-과학자인 아버지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지금도 많은 것을 배웁니다. 특히 아버지가 쌓아 오신 인간관계는 놀랍습니다. 아버지는 연구 성과를 곧바로 열어놓습니다. 연구는 공유해야 발전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계시는 것 같아요. 특히 생물학은 혼자서는 절대 멀리 갈 수 없는 영역인데, 저는 아버지의 그런 자세가 혈관 분야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그 길은 제가 가고 싶은 길이기도 합니다.두 시간 남짓한 인터뷰로 첼리스트 고봉인이 과학과 음악의 길을 동시에 걸어가는 이유를 분명하게 알게 됐다.아버지의 연구가 혈관연구 발전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새롭게 개발된 약들이 인류를 어떻게 구해내는지를 과학의 길에서 알게 되었다는 그는 무대 위에서 연주하는 일 또한 수많은 청중들과 감정을 교류하면서 위안과 힘을 건네는 일이라는 것을 더 깊게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권력이나 파워가 아니어도 내가 가진 것을 공유하고 나누면서 행복해질 수 있다면 기꺼이 그 길을 가야 하는 것 아닐까요. 아무리 힘들어도 이 길을 가야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고요.그가 고단해도 이 길을 가고자하는 명쾌한 이유다.● 고봉인씨는 2008년 평양 윤이상 연주회서 남한 연주자 최초 북한 오케스트라와 협연첼리스트 고봉인은 1985년 전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돋보였던 음악에 대한 재질과 과학에 관심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백승희)와 생물과학자인 아버지(카이스트 의과대학원 고규영 특훈교수) 자질을 그대로 이어받은 덕분이었다.첼로를 시작한 것은 여덟살 때. 과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그대로 안은 채 음악가의 길을 먼저 걷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반겼으나 어머니는 과학자의 길을 권했다. 그의 재능을 주목한 사람은 첼리스트 정명화씨였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예비학교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연주자의 꿈을 키웠다. 1997년 차이코프스키 국제청소년 콩쿠르 첼로부문 1위를 수상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전주 신흥중 3학년 때 독일로 유학을 가 첼로거장 다비드 게링가스의 제자가 되었다.베를린 한스 아이슬러 음대생이었던 그는 미국계 일반 고등학교인 존 F 케네디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과학자의 길을 동시에 걸을 수는 없을까 고민했다. 두가지 길을 다 갈 수 있다고 용기를 준 것은 유럽에서 만난 선배 연주자들이었다.하버드대에 진학, 생물학을 전공하면서 뉴잉글랜드 음악원의 복수학위 과정을 동시에 거쳤다. 2005년에는 독일 첼로 마스터클라스 란드그라프 폰 헷센상을 수상하면서 유럽 음악계에 이름을 알렸다.예술가와 과학자의 길을 함께 가는 일은 쉽지 않았으나 그 과정 자체가 그에게는 삶의 의미이자 행복이었다. 어느 것 하나도 소홀하지 않는 열정으로 프린스턴대학교 대학원에서 분자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유럽과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에도 러시아 심포니오케스트라,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비롯, 국내외 오케스트라와의 협연과 유럽 미국 일본 중국 한국을 오가며 여러 차례 독주회와 협연을 가졌다. 2008년 10월에는 평양에서 열린 윤이상 연주회에 초청돼 남한 연주자로서는 처음으로 북한 오케스트라와 윤이상 첼로협주곡을 협연했는데 그 스스로 내 인생의 가장 의미 있는 연주회가 아닐까 싶다고 말할 정도로 큰 의미를 두고 있다.3년 전부터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문연구원이 되어 유방암 줄기세포를 연구하고 있는 그는 연구에 집중하느라 다소 거리를 두었던 연주무대에 다시 서기 시작, 첼리스트 고봉인을 다시 주목하게 했다. 특히 지난해에는 이어진 협연과 7년 만에 가진 10월의 두차례 독주회로 진지하면서도 따뜻한 음악세계를 전해 호평을 받았다.올 하반기 3년 동안의 연구 과정이 끝나면 미국으로 돌아가 과학자로서의 길을 더 단단히 다질 계획. 물론 첼리스트로서의 길도 더 넓게 이어갈 생각이다.

  • 기획
  • 김은정
  • 2017.01.06 23:0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② 고도리 불상과 동자바위의 인연 - 천년의 세월 '님' 그리워하며…우리네 삶도 위로받고 있다

불교에서는 인연(因緣)이라는 말을 두고, 인(因)은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인 힘이고 연(緣)은 그를 돕는 것이라 하였다. 문화나 종교를 떠나 사람은 그러한 인과 연에 의해 짜인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이나 과거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속에서 인연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여산은 옛~고을 호남의 첫 고을 그 역사 몇~천년 나리어 오면서...익산 여산면 출신인 가람 이병기 선생은, 고향에 있는 여산초등학교를 위해 교가 가사를 남긴 바 있다. 몇천 년을 이어온 역사의 끈이 곧 나와 우리 고장을 이어주는 인연이라는 가사는 우리로 하여금 지역과 연결된 인연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한다. 인연 이야기로 남녀 사이 인연도 빼놓을 수 없다. 두 사람이 인연으로 맺어지고 늘 서로를 그리워하면서도, 매년 칠월칠석 일 년에 단 한번만 볼 수 있다는 견우와 직녀의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이병기 선생의 생가가 있기도 한 이 여산의 옆, 익산시 금마면에도 고려 때로부터 천년동안 전해져 내려오는 가슴아린 인연 이야기가 있다.1번국도를 타고 시인 신동엽이 마한, 백제의 꽃밭이라고 일컬은 금마면을 향할 때 우리는 백제의 찬란한 문화유산이 남겨진 왕궁리 유적지에 시선이 뺏겨 옥룡천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선 석불 2기를 지나치기 십상이다. 바로 고려시대의 석조여래입상으로 두 개의 석불이 하나의 쌍이어서 쌍석불로도 불리는 석상이다. 사람과의 인연도 있지만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도 인연으로 엮여져 있다는 피천득의 인연의 문구가 강하게 떠오르게 하는 모습이다. 고려시대 말엽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두 석불은 부르면 들을 수 있지만 맞닿을 수는 없는 가깝고도 먼 200m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하나의 이름을 지니고도 가깝고도 먼 지척에 서로를 바라보고 있어 더욱 그 사연을 궁금하게 한다. 석조여래 입상은 각각 동고도리(여자)와 서고도리(남자)인데, 평소에는 만나지 못하다가 음력 12월 섣달 그믐날 밤 자정에 옥룡천이 꽁꽁 얼어붙으면 서로 만나 사랑을 나누고 새벽닭이 울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옥룡천이 얼지 않아도 만날 수 있도록 다리가 놓여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곧 찾아올 섣달 그믐날 그들의 만남이 기다려진다.기록에 의하면 조선 철종 9년(1858)에는 익산 군수로 부임해 온 최종석이, 당시 쓰러져 방치되어 오던 석조여래 입상을 현재의 위치에 일으켜 세웠다고 한다. 그 때 씌어진 《석불중건기》에 적힌 내용에 의하면, 금마는 익산의 구읍자리로 동서북의 삼면이 다 산으로 가로막혀 있는데, 유독 남쪽만은 터져 있어 물이 다 흘러나가 허허하게 생겼기에 읍 수문의 허를 막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또 일설에는 금마의 주산인 금마산의 형상이 마치 말의 모양과 같다고 하여 말에는 마부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마부로서 인석(人石)을 세웠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남녀간 사랑의 전설과 풍수적 의미를 동시에 전하고 있다.임실군 덕치면 천담 섬진강에도 이야기 하나가 전해진다. 이곳에 서 있었던 동자바위의 사랑 이야기가 그것이다. 옛날 마을의 사냥꾼 총각이 어느 날 뒷산에서 꿩을 발견하고 화살을 쏘았는데, 그 화살은 꿩을 맞춘 채 두꺼비나루 건너 산기슭에서 나물을 캐던 처녀 앞에 떨어졌다. 그런데 한참 꿩을 찾던 총각은 이윽고 꿩 앞에서 파랗게 질려있는 처녀를 쳐다보고 한눈에 반하게 된다. 집으로 돌아와 몇 날 며칠 처녀를 못 잊던 총각이 두꺼비나루를 건너 결국 처녀에게 가려고 했을 때 마침 맑은 하늘에 뇌성벽력이 일어나고 광풍이 일어 두꺼비나루를 건널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리움에 시름하던 총각은 병이 들어 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죽고 말았다. 그렇게 총각이 죽은 날 밤 천지가 진동하고 광풍이 일었는데, 날이 밝자 총각이 살던 마을 앞에는 놀랍게도 생시의 총각모습을 닮은 동자바위가 생겨나 있었다. 그리고 같은 날 두꺼비나루 건너에는 동자바위와 마주 보이는 곳에 여자를 상징하는 바위가 생겨났는데, 이는 역시 총각을 그리워하던 끝에 한날한시에 죽게 된 여인의 바위였다. 그 후 남편이 부인을 싫어할 경우 동자바위에서, 부인이 남편을 싫어할 때에는 여인바위에서 돌을 쪼아 가루를 만들어 몰래 상대방의 음식물에 섞어 먹이면 사이가 다시 좋아진다는 설이 전해져 사람들이 돌을 쪼아가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오늘날 아쉽게도 여인바위는 도로공사로 인해 흔적이 사라진 상태이고, 동자바위 역시 이야기만을 남긴 채 모습을 찾을 수 없다. 근처 순창 장군목의 요강바위는 1993년 도난을 당했다가 다시 찾았다고 하는데, 사라진 동자바위는 우리에게 돌아올 수 없을까. 찾을 수 없다면 그 이야기와 모습을 살려 복원함도 좋을 듯하다.가까운 듯 먼 거리에서 서로를 그리워하는 고도리 석조여래 입상과 동자바위 이야기를 떠올리며 인연의 의미를 곱씹어 본다. 서편의 남자 석조여래 입상은 의연히 웃고, 동쪽 석조여래 입상은 배시시 화답하는 통에 전설 속 안타까운 인연에도 그들은 괜찮다고 도리어 우리를 위로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것이 사람의 인연이든 물성에 의한 것이든 시간이 깃들고 사연이 담긴 인연은 언제나 우리 마음을 끌어당긴다. 늘 곁에 있다가도 한순간 사라지기도 하는 인과 연에 대해 돌이켜 보고 좋은 인연은 잘 보듬고 나쁜 연은 흘려 보낼 줄 아는 것이 세상을 사는 지혜가 아닐까 싶다. /윤주 한국지역문화 생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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