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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개막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이연택 공동조직위원장 "무주 세계선수권 성공리에 치러 태권도 성지 자리매김"

세계태권도선수권 대회(6월24~30일)가 20여일 앞으로 다가오면서 이 대회 조직위원회의 이연택 공동조직위원장에게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월드컵 유치나 대회 진행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온 한국 체육계의 거목으로서 이번에는 어떤 대회를 연출할 지 기대감이 쏠리고 있다. 지난 2일 광화문에 있는 조직위원회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2020년 도쿄올림픽에 가라데가 진입해 한중일 유사무술종목과 치열한 경쟁에 돌입했다며 이번 대회를 통해 태권도가 유사무술종목에 비해 우위에 있는 글로벌 스포츠라는 점을 확실히 보여줘야 한다며 이번 대회의 당위성을 부여했다. 또 무주 태권도원을 세계 8000만 태권도인의 성지로 이미지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97년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이후 20년 만에 치르는 역대 최대 규모 국제대회입니다. 감회가 어떠신지요.오래 잠자고 있던 고향이 모처럼 꿈틀거리는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체육계에 있으면서 고향을 바라볼 때 너무 잠잠한 거 같아 걱정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대회를 서둘러 개최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최근 국제무대에서 태권도 종주국의 위상이 내려가고 있기 때문이죠. 한국에서 태권도 승단시험을 주도하는 데 대한 불만도 곳곳에서 나옵니다. 일본의 가라데에 비해서도 인기가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대회가 중요합니다. 대회 이후에도 대한민국이 존경받는 태권도 종주국으로서 위상을 유지하는 것도 관건입니다. 또 지역발전을 위해서도 이런 대회는 필요합니다.-태권도 종주국으로서의 위상회복과 지역발전과의 관련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십시오.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른 뒤, 무주 태권도원을 세계태권도 연맹에서 교육 연수기관으로 지정하게 할 계획입니다. 이렇게 되면 원내에 대학원을 비롯한 연구기관, 교육기관을 세워 세계 태권도인을 불러 모을 계획입니다. 여기서 지도자를 양성하고 세계로 배출하면 태권도 본산으로서의 위상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지역발전과 관련해서는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회를 예로 들겠습니다. 전북에서 동계유니버시아드를 열면서 전주-무주 간 도로가 생겼고, 국립공원도 재정비 됐습니다. 또 전주의 실내 빙상경기장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큰 대회를 개최하다 보면 대회 유치의 필요로 인해 기반시설이 생기고, 국가 지원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대회 유치를 통해 전북 경제에 긍정적 효과를 내려는 큰 그림을 그리시는 것 같습니다.예,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태권도원, 장수승마장, 전주한옥마을, 새만금 등 도내 관광지를 연계해 셔틀버스와 기차여행 상품판매 등을 위한 마케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또 관광공사 또는 해외 태권도 지도자와 연계해 해외 관광객 유치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태권도 대회로는 참가국 수 180여 개국, 참가인원 1700여명으로 역대 최대 규모인 2015년 러시아 첼라빈스크 대회(139개국, 1458명)를 뛰어넘었습니다.세계 최초로 태권도 전용경기장을 보유한 태권도원에서 대회를 개최한다는 점이 큰 호응을 이끌어낸 것 같습니다. 무주 태권도원은 우리나라 상암월드컵 경기장 면적의 10배 뉴욕 센트럴파크 전체면적의 70%에 달하는 대형시설입니다. 내부에는 태권도 전용경기장과 박물관, 각종 체험시설, 강연장, 공연장, 숙소 등 모든 시설이 갖춰져 있습니다. 또 세계태권도연맹(WTF)의 208개 가맹국 중 57개국은 경제적인 이유로 세계 태권도 선수권 대회에 참여하기 힘든 실정입니다. 이런 국가들에게 조직위가 항공비용과 국내체제 비용을 직접 지원해 참여를 가능토록 한 것도 호응을 얻은 것 같습니다.-기존에 다른 국가에서 열렸던 태권도 대회와 차별화된 전략은요.이번 대회에는 세계선수권 대회 사상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과 위자오칭 IOC부위원장, IOC위원 10여명, 주한 각국 대사 20~30여명이 옵니다. 태권도 종목뿐만 아니라 국제 스포츠 리더들이 대거 참가하지요. 따라서 조직위원회는 국제스포츠계 유명인사들의 내한으로 스포츠 강국 이미지와 수준 높은 한류 문화를 알리고자 만전을 기하고 있습니다. 또 이번 대회에서 태권도 종주국의 위상을 부각시키는 것도 차별화 전략입니다. 무주가 태권도 종주국의 성지라는 인식을 전 세계 태권도 수련자들의 마음속에 각인시킬 것입니다. 대회 후에도 수련자들이 계속 무주를 찾아오게 하려는 의도입니다.- 2007년 이후 10년 만에 북한 국제태권도연맹(ITF)시범단이 개막식 공연과 폐막식 남북 합동공연에 참가합니다. 핵 문제로 남북 관계가 경색된 현 상황에서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굳이 북한 ITF시범단의 참석을 국제 정치 상황하고 연결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포츠는 스포츠입니다. 공식적으로는 WTF와 ITF가 지난 2014년 맺은 상호 교류협력에 의한 합의서에 의해, 조정원 WTF총재와 북한의 리용성 ITF 총재, 장웅 IOC 위원이 성사시킨 것입니다. 또 저와 장웅 IOC위원 간의 친분관계도 작용했습니다. 장웅 IOC위원과는 제가 1988년 국무총리비서실 행정조정관을 할 때부터 인연을 맺었고, 지금까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대회 개최까지 20여 일 정도의 시간이 남았습니다. 성공적인 대회유치를 위한 현재의 계획을 말씀해주십시오.대회 준비를 90%정도 끝마쳤습니다. 시설, 수송, 숙박 등 대부분 준비를 완료됐습니다. 특히 숙박시설 부족난을 겪지 않기 위해 무주군 인근의 거의 모든 숙박시설을 총동원했습니다. 무조리조트를와 총 11개 호텔, 콘도, 모텔까지 동원해 1800여개의 객실을 준비했습니다. 약 4000여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규모입니다. 평창 동계올림픽의 경우 숙박문제가 해결되지 못해 주변 숙박시설의 이용요금이 10배까지 폭등했다고 하는데, 무주대회에서 그런 일은 없습니다. 이와 함께 오는 9일 전주 비전대에서 열리는 KBS열린음악회를 통해 대회를 전국적으로 홍보할 계획입니다.-도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태권도 종주국의 위상에 걸맞은 대회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번 대회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도민 여러분께서도 많은 지원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이연택 위원장은] 고향 일 발벗고 나선 국내 체육계 원로이연택 조직위원장(82)은 한국 체육계의 큰 어른이다.국제 체육계에서는 한국 대표 인물로 김운용 전 IOC위원장 다음으로 이 조직위원장을 꼽는다.그는 30년 넘게 체육인으로 활동했다. 대통령비서실, 행정수석비서관과 총무처 장관,노동부 장관을 역임한 뒤 한 순간도 체육계를 떠나지 않았다.이력도 화려하다. 국민체육진흥공단 이사장, 2002 한일월드컵 조직위원회 공동조직위원장,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 제34대제36대 대한체육회 회장, 인천아시아경기대회조직위원장을 지냈으며, 현재 2017무주세계태권도 대회 공공위원장을 맡고 있다.이 위원장은 장차관으로 있을 때부터 고향 후배를 잘 챙기고, 고향을 위한 일이라면 좌고우면하지 않고 발 벗고 나선 것으로 유명하다.무주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조직위원장을 맡을 때도 국내 체육계의 원로가 직접 유치위원장에 나섰다는 게 화제였다. 당시 그는 주변사람들은 유치위원장을 맡지 않았으면 했지만, 고향인 전북이 어렵다는 말을 들으니 피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고창 출신인 이 위원장은 전주북중, 전주고, 동국대 법대를 졸업했다. 이후 고려대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단국대에서 행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 기획
  • 김세희
  • 2017.06.05 23:02

전주국제영화제 특별전 주인공 송길한 시나리오 작가 "내가 생각하는 좋은 영화는, 발과 가슴으로 쓰고 만드는 것"

전주시 고사동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 1층 전시실에서는 흥미로운 전시가 열리고 있다. 지난 5월 6일 막을 내린 제 18회 전주국제영화제가 마련한 작가 송길한 특별전이다. 작가 송길한, 영화의 영혼을 쓰다란 부제가 붙은 이 전시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원로작가의 손끝에서 태어난 수십 편의 영화가 한국영화사의 기록이 되어 관객들을 만난다.전시실 입구, 기획자는 그를 이렇게 소개한다. 한편의 영화가 이룬 성취가 감독의 전유물로 인식되는 가치의 장안에서 작가 송길한은 맹렬한 창작의지와 일관된 세계관으로 하나의 세계를 이루어냈다.70년대 초반, 한국영화의 암흑기로 분류되는 이 시기에 영화판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70여 편의 영화로 그 자신 한국영화사의 굵은 궤적이 된 시나리오 작가 송길한씨(77)를 만났다.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당선작이자 첫 영화 작품인 〈흑조〉로부터 반공영화의 상징적 이름이 된 〈짝코〉,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해 주목받았던 〈만다라〉와 〈씨받이〉를 비롯해 시간을 뛰어넘는 수십 편 역작으로 관객들을 끌어들였던 그의 삶과 영화 인생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러나 인터뷰의 의도는 빗나갔다. 영화 이야기는 순조로웠으나 정작 그의 삶을 결정적으로 바꾸어놓은 가족사나 사적 공간의 이야기는 완곡하거나 단호하게 비껴가는 그의 화법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인터뷰는 편하고 즐거웠다. 늘 상대방을 살짝 긴장시키는 직설적인 화법이 그의 진정성을 온전히 전해주는 덕분이었다.-올해 전주영화제에서 작가 송길한 특별전시를 기획했습니다. 전시를 둘러보니 시나리오 작가 40여년 세월의 무게감이 크게 와닿았습니다.73년 첫 작품부터 근작까지 모아놓고 보니 적지 않은 작품을 썼더군요. 돌아보니 분단과 독재와 치열했던 민주화 과정의 시간을 체험한 세대로서 영광이나 자긍심보다는 부끄러운 작업이 더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나의 역사이니 감출일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많은 작품을 임권택 감독님과 함께 하셨더군요. 원로배우 김지미씨 역시 80년대 대표작 대부분에 출연했었던데요.가족 같은 관계가 되었어요. 김지미씨와 내가 동갑이거든요. 임감독님은 그 이전에 만났지만 김지미씨와 나는 마흔다섯 살 이후 영화인생을 함께 걸어왔습니다. 서로 개성을 존중해주면서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마음을 모았고, 지금까지 큰 갈등 없이 같이 늙어 간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큰 축복이고 즐거움이고 행복입니다.-시나리오는 어떻게 시작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원래 문학도이셨습니까.중고등학교 시절 영화는 많이 보았지만 시나리오를 쓰겠다거나 문학을 하겠다거나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가려고 했던 길은 사실 이 길이 아니었어요. 내 삶의 반경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가족사가 길을 바꾸어 놓았죠. 그저 앞만 바라보고 살아오다 나이 60이 될 즈음 돌이켜보니 내가 가고자 했던 길은 초장부터 가로막히고 궁극적으로 내가 하려고 했던 모든 것은 제어 당했는데, 결국 여기까지 왔으니 이 길이 숙명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70년대, 시나리오 작가로 등단한 직후부터 놀라울 정도로 다작을 하셨더군요. 그만큼 글쓰기가 자유로우셨습니까.젊은 시절에는 무엇을 절제한다는 것에 익숙지 않았어요. 다만 분단민족으로서 안아야했던 사상 검열의 문제가 늘 무거운 과제였죠. 나의 30대와 40대 한국 영화의 생태 현장은 군부가 거의 장악하고 있었어요. 영화도 철저하게 사전 검열하던 엄혹한 시절이었죠. 참으로 어려웠어요. 예술은 자유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늘 감시당하고 있다는 강박 속에서 창작정신이 제대로 발휘될 수 있었겠습니까.-작가로서 겪어야 했던 내적 갈등을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이런 상황을 어떻게 피해나가느냐는 것도 또 하나의 예술이라고 생각했어요. 멋모르고(?) 읽히게 하되 그 안의 뜻은 잃지 말자는 의도가 은연중에 담겨 있었고, 숨겨진 메시지를 담고자 했어요. 워낙 반골 기질이 있었는데 엄혹한 시대 상황 속에서 그것을 들키지 않아야 하니 괴로운 시절이었습니다.-70년대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는데도 엄청난 양을 쓰셨습니다.생계를 위한 일이었으니까요. 거의 주문 생산하는 글쓰기로 작품을 냈다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공장과도 같았죠. 그런 싸구려 글쓰기로 70년대를 보냈어요. 그러면서 문득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차라리 길거리에서 생선장사를 하던 튀밥장사를 하던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양심적이고 나답지 않은가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는 작가로서의 자존심이나 명예로움 이런 것은 아예 잊고 살았던 시절이었습니다.-그런 시절을 겪으셨으니 영화다운 영화에 대한 갈증이 더 컸겠습니다.그랬던 것 같아요. 임권택 감독님을 만난 이후 우리만의 고유한 작품, 세계적으로도 우리가 보여줄 만한 작품을 만들자는데 마음을 모았어요. 그런 과정에서 나온 영화가 〈길소뜸〉입니다. 분단국 영화로서 각광받았던 영화죠. 이어진 〈만다라〉도 그렇고요. 아쉬운 것은 우리가 당시 해외영화제에 대한 정보도 없고, 스킬도 부족해 우리 영화를 돋보이게 할 만한 전략이 없었다는 것인데, 어느 해인가 베를린 영화제 집행위원장이 한국에 왔을 때 그때 그랑프리는 〈만다라〉였어라고 하더군요.-〈길소뜸〉이나 〈만다라〉는 한국영화사의 굵은 족적이기도 하지만 한참 지난 세대들에게도 주목받는 역작이지요. 80년대 사회적 이슈가 됐던 〈비구니〉는 어땠습니까. 김지미씨가 왕성하게 활동을 하다가 한동안 영화계에서 물러나있던 시기가 있습니다. 〈비구니〉는 김지미씨가 그 휴지기를 딛고 재기하려는 강력한 의지의 통로였고, 임감독님이나 내게도 의미가 큰 영화였어요. 당시 문을 연 태흥영화사 이태원 대표에게도 창립 영화라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지요. 사실 〈비구니〉는 김지미씨가 제안했던 영화였습니다. 원기획자라고 할 수 있죠. 어쨌든 이 영화에 대한 기대나 열망은 컸습니다. 나와 임권택 정일성 감독은 전국의 사찰을 찾아다니며 취재했어요. 동국대 승가대 학생들의 관심도 컸는데 그들이 제공해준 책과 자료로 더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시나리오 작업을 하면서 이 사람들을 실망시키면 안 된다는 강박감을 안게 되었지만 그만큼 제대로 해볼 만한 소재라는 자신감이 생겼어요.-사회적으로도 큰 이슈가 되었었죠.당시 촬영이 5분의 1 정도 되었었는데 비구니들이 거리 시위에 나섰어요. 제작을 중단하라는 것이었죠. 여기에 맞서고 영화인들은 창작의 자유를 들고 나서고. 그러다 법정까지 갔어요. 엄청난 사건이었죠. 결국은 영화사측이 제작을 포기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되었는데 안타까운 것은 영화의 본질이 왜곡되었다는 것이에요.-화제를 좀 바꾸겠습니다. 고향을 떠나신 지는 오래되었죠.대학에 가면서 떠났으니 50년대 후반인데 그래도 어머님이 계셨으니 자주 오갔습니다. 나는 고향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냉담해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더구나 전주영화제가 만들어지면서 전주에 대한 애정이 더 뜨거워졌지요.-아직은 말할 때가 아니라고 하시지만 선생님의 삶을 결정짓게 한 가족사를 짐작하게 됩니다.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던 청년기의 좌절감이 오히려 글을 쓰는데 는 단단한 동력이 되지 않았을까요. 시나리오를 쓰게 된 특별한 계기가 궁금합니다.한심한 시절이었어요. 조선일보사 옆에 동시상영을 하는 극장이 있었는데 빵값만 있으면 하루 종일 극장에서 영화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어요. 어느 날부터인가 영화 대사를 메모하는 습관이 생겼어요. 그 무렵 동아일보 신춘문예 공모가 났죠. 처음으로 시나리오를 써서 응모했습니다. 당시 오영진 김정옥 선생이 심사위원이었어요. 신선했는지 습작도 안 해본 초짜의 글을 당선시킨 겁니다. 신춘문예에 당선되면 삶이 달라질 줄 알았어요. 그런데 1년이 지나도록 찾아오는 사람 한명 없는 거예요.(웃음) 어느 날 찾아 오긴 했는데 〈흑조〉(신춘문예 당선작) 수준을(?) 좀 낮춰 영화로 만들자고 하는 거예요. 못한다고 했죠. 또다시 1년 정도 잠잠했는데 이번에는 제작자가 원작 그대로를 영화로 만들자고 왔어요.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첫 영화 〈흑조〉예요.-신춘문예 작품이 영화화 되는 예는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겠습니다.그렇죠. 신춘문예는 우선 상업성과는 거리가 멀어야 하는데 그 당선작이 영화화 되었으니까요. 그 뒤로는 의뢰가 오면 무조건 썼어요. 주문 받아 원고를 써주는 소규모 공장을 차린 셈이었죠.-갈등은 없었습니까.왜 없었겠어요. 정신없이 10여년 지나고 보니 뭐하는 짓인지 싶었어요. 스스로 변화해야 한다는 깨달음이 있었는데 80년 광주항쟁을 거치면서 그런 작업을 하고 있는 내 삶이 비루하게 느껴졌어요.-그즈음 임감독님을 만나신거군요.영화제작사에 한동안 몸담았다가 그만두고 임감독님을 만나 10년 동안 10개 작품을 스트레이트로 만들었죠. 그 첫 작품이 〈짝코〉였습니다. 반공영화로 잘 만들었다하여 두 번씩이나 상을 받았으니 대표작이라 할 만하죠. 그런데 사실 그 영화는 단순한 반공물이 아니었어요. 소설 원작을 각색한 것인데 남북분단의 상황을 휴머니즘의 가치로 조명한 작품이에요. 당시에는 발상자체가 조심스러웠죠. 다행히 검열 과정에서 중요한 부분 5분 정도 잘려나간 것이 전부였어요.-한국영화의 오늘을 어떻게 보십니까.머리로 쓰고 머리로 만드는 이야기들, 상업적 테크놀로지를 바탕으로 보면 상당한 수준이랄 수 있지요.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좋은 영화란 발과 가슴으로 쓰고 만드는 영화예요. 요즈음 영화를 보면 그래 저렇게 만들어져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다만 내 경우도 기교나 내러티브 같은 부문이 좀 더 젊고 싱싱해질 필요는 있겠다는 생각은 합니다.-영화 제작 환경과 관련이 있겠지요.물론입니다. 시스템 자체를 요지부동한 자본력이 뒷받침하고 있으니 모두가 각자 도생으로 그 그늘로 못 들어가 안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요. 영화 정신보다는 자본이 우선이 되는 환경은 씁쓸합니다.-독립영화 정신을 지켜가는 영화인들도 적지 않은데요. 그래도 희망이 있는 것 아닐까요.독립영화 저예산영화를 지지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 있습니다. 나는 앞으로 독립영화가 건강성을 지켜간다면 분명히 독립영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스타 시스템에만 얽매여 큰 자본을 들이지 않고 저예산으로 제작한 영화라도 이야기의 질이 어떤 것이냐에 관객들이 따라와 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요.세계 어느 영화사를 보나 소위 뉴웨이브라고 하는 것은 자본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신과 가치로 이어져 왔지 않습니까. 우리나라는 그런 면들이 확고하지 못하죠. 그런 점에서 보면 전주국제영화제가 독립영화를 주목하고 지지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입니다.-제자나 후배들에게도 그런 정신을 강조하십니까.물론입니다. 그러나 경계를 두고 예술영화만 하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상업영화도 알아야죠. 중요한 것은 어떤 정신으로 영화를 만드느냐는 것이니까요. 자신의 가치관, 지향점을 찾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입니다.영화는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겪고 있는 삶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함께 고민하고 치유하고 북돋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그에게는 아직 하고 싶은 일이 있다. 시대정신을 담은 깊고 탄탄한 시나리오와 독립영화 정신을 가진 감독이 만나 좋은 영화 한편 만드는 일이다. 뚜렷한 작가정신으로 구축한 세계로 한 시대를 지켜온 원로 작가를 작품으로 다시 만나게 되는 일,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송길한 작가는] 만다라우상의 눈물씨받이 등 80년대 한국영화 대표 거장시나리오 작가 송길한씨는 1940년 전주 교동에서 태어났다. 북중을 거쳐 전주고를 졸업한 그는 대학을 위해 서울로 갔지만 아직은 밝힐 수 없는 가족사의 굴레 때문에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10대와 20대를 건너던 시절, 그는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차라리 잘했다는 어머니의 위로가 힘이 됐다. 대한석탄공사 시험에 합격하자 노무 행정직이 아닌 현장직을 선택했다. 강원도 도계에 탄광에서 채탄부로 일하다 광업소장의 권유로 행정직으로 전환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서울로 다시 왔다. 특별한 직장을 얻지 못해 막노동부터 시장 공판장에서 지방에서 올라온 쌀을 내리고 올리는 일까지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 서러운 시절이었다.조선일보사 옆에 있던 코리아시네마 극장을 알게 됐다. 하루 두 번 동시 상영을 하는 영화를 보며 시간을 때웠다. 어느 날부터인가 영화 속 대사를 외워 메모하는 습관이 생겼다.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에 〈흑조〉를 응모해 당선했다. 2년만에 이 작품을 영화화하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73년 발표한 〈흑조〉는 신춘문예 당선작이자 그의 첫 영화작품이 됐다. 이후 10여년 동안 시나리오 주문이 밀어닥쳤다. 무엇을 쓰는지도 모를 정도로 그는 글쓰는 기계처럼 주문을 받고 생산하는 글쟁이가 됐다. 자성의 시간이 찾아왔다. 이대로 간다면 내 삶은 아무것도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혹했던 80년대 초반, 임권택 감독을 만났다. 반공영화 〈짝코〉를 시작으로 의기투합, 시대정신을 함께 한 임 감독과 파트너가 되어 지금까지 가장 많은 영화를 함께 만들었다.〈만다라〉 〈우상의 눈물〉 〈안개마을〉 〈길소뜸〉 〈티켓〉 〈씨받이〉 등을 발표했던 80년대 그는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우뚝 섰다. 백상예술상과 대종상 등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영화상이 그의 작품을 불러들였고, 주목받는 신인감독들에게도 그의 작품은 시대적 영감을 불어넣었다. 2000년 전주국제영화제를 만드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그는 부집행위원장을 거쳐 지금은 고문을 맡고 있다.2010년 임권택 감독의 〈달빛 길어 올리기〉를 끝으로 각색 작업은 중단되었으나 여전히 시나리오 쓰는 일에 마음을 두고 있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는 한국영화사에 굵은 족적을 남긴 그의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특별전을 개최했다.

  • 기획
  • 김은정
  • 2017.06.02 23:02

[전북일보 만화뉴스] 전북일보, 창간 67년.

전북일보, 창간 67년.#표지.전북일보, 창간 67년.#1.1950년.(창간호 신문을 보며 기차에 오르는 사람)#2.(증기기관차가 굉음을 내며 출발한다.)#3.(차창 밖을 바라보는 사람)#4.(차창 밖으로 지나는 풍경-1965년 3월 8일, 한일회담 반대 시위)#5.(차창 밖으로 지나는 풍경-1977년 11월 12일, 전날 일어난 이리역 폭발 참사로 폐허가 된 현장)헉 이대로 달려도 괜찮은 건가;;#6.(차창 밖으로 지나는 풍경-1987년 6월 26일, 호헌 철폐와 독재 타도를 외치며 행진하는 군중)#7.(차창 밖으로 지나는 풍경-1993년 10월 17일, 1차 인양된 서해 훼리호 모습)#8.(투박한 노트북 컴퓨터. 노트북 화면에는 1999년 공식 서비스가 시작된 인터넷 전북일보 화면)#9.(다시 차창 밖을 바라보는 사람)#10.(차창 밖으로 지나는 풍경-2002년 6월 25일, 붉은 티셔츠를 입고 전북일보사 앞에 모인 월드컵 거리응원단)#11.(차창 밖으로 지나는 풍경-2006년 4월 21일, 새만금 물막이 공사가 완료되는 장면)#12.(스마트폰 화면에 전북일보 모바일 페이지가 떠 있다.)#13.(철의 궤도 기획 기사를 띄운 모습)#14.(전북일보 디지털뉴스국의 페이스북 라이브 모습)#15.(다시 차창 밖을 보면 어느새 어두워져 있고, 촛불이 보인다.)#16.(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2017 숫자)#17.창간 67주년(고속열차가 전조등을 밝히며 달려간다.)/기획 신재용, 구성 권혁일, 제작 이권중

  • 기획
  • 전북일보
  • 2017.06.01 23:02

[전주 '문화파출소 덕진'] 유휴 '동네 치안센터', 생활밀착형 문화예술 공간으로

문화파출소 덕진이라는 생소한 간판이 걸려있다. 분명 독수리 간판을 한 파출소 건물인데, 드로잉이며, 플라워데코며, 소설 쓰기 등 문화예술 강좌를 진행한다고 한다. 뭐하는 곳이지? 혹시 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이 파출소로 들어온다. 그렇게 들어온 10명 중 9명은 동그래진 눈으로 여기 파출소 맞아요? 질문을 던진다. 파출소라는 단어에 시간이 쌓아올린 편견 때문일까?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음악, 여럿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 함께 읽을 수 있는 책과 따뜻한 조명이 존재하는 파출소 공간을 사람들은 낯설게만 느끼는 듯하다.△ 온기를 잃어버린 유휴 공간, 파출소치안기능 유지를 위해, 주민들의 접근성이 높은 생활밀착 공간에 파출소는 자리한다. 그만큼 파출소는 주민들의 발길이 가 닿는 곳곳에 존재하고 있다. 주민들에게 더 가까이 가겠다며 꽤 오래전엔 담장도 허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출소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낯선 공간이었고, 가까이 하기에 어려운 공간이었다.그래서였을까? 2004년 파출소 효율화 정책의 시행으로 2~3개의 파출소가 지구대로 통합하게 된다. 이 때 남은 건물을 개조하여 치안센터를 만들게 되는데, 치안센터는 24시간 근무가 아닌 주간 근무 위주의 민원상담 전용공간으로 기능하면서 사람들의 들고 남이 없는 유휴공간에 가까운 시설이 되었다. 제 기능을 상실한 공간은 점점 사람의 온기를 잃기 시작한다.△ 경찰청과 문체부, 전혀 다른 존재들의 이유 있는 상상사람의 온기를 잃어버린 파출소는 국가 재산관리 주체인 기획재정부에 인계되어 공개매각을 거치는 작업이 진행됐다. 얼마 전까지 우리의 치안을 담당했던 파출소는 철거되거나 개인 소유의 공간이 되기 시작했다. 전주의 경우도 송천동에서 동물원으로 들어가는 오르막길에 위치했던 파출소가 지금은 카페로, 관통로 대로변에 있던 파출소가 악기점과 법률사무소로 사용되고 있다. 이런 실정이다 보니 유휴 파출소의 공익적 활용 방안을 마련하는 문제가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고, 2016년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와 경찰청.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부처가 만나 이유 있는 상상을 시작했다. 생활밀착형 문화예술교육의 운영을 통해 주민들의 자발적 예술 활동 공간으로 파출소를 활용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것이다. 경찰청은 공간의 활용 등 하드웨어 부분을, 문체부는 인력, 프로그램, 공간조성 등 소프트웨어의 협력을 통해 그 간의 치안기능에서 지역 문화예술 커뮤니티로 파출소의 기능을 확장하겠다는 내용으로 문화파출소 조성 및 운영사업을 시작하게 된다.큰 그림을 경찰청과 문체부가 그렸다면, 밑그림을 그리고 색칠을 해나가는 것은 이제 지역의 역할이다. 문체부와 경찰청이 함께 2016년 3월, 전국 경찰서를 대상으로 한 수요조사를 통해 치안센터 10개소를 문화파출소로 선정하였다.전북의 경우 최근까지 범죄피해자종합지원센터로 활용되던 (구)금암파출소도 전문적인 프로그램을 기획, 운영할 주관처를 찾고 있었고 전라북도 문화관광재단이 3년간 운영권을 갖게 되면서 2016년 10월, 본격적으로 지역 내 문화파출소 조성을 시작하게 된다.혼자여도 즐겁고, 여럿이와도 즐거운 공간. 더불어 주민들의 이야기가 쌓여 힘이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관점으로 고민하고 설계했다. 만들어진 공간에 힘이 생기려면 사람들의 드나듦과 그들의 향기가 존재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그리고 지금의 문화파출소 덕진은 그 향기를 묻히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공간마다 진행되고 있다.△ 문화파출소 덕진서 즐기는 다양한 프로그램1층 때론더불어의 공간에서는 꽃꽂이가 한창이다. 잔잔한 음악이 사람들의 감성을 깨운다. 다들 싱글벙글 꽃향기에 취한 듯 미소가 입가에 가득하다. 강사님이 알려주는 대로 꽃을 배치 하며, 자기만의 방법을 만들어낸다. 2층 볕드는 방에서는 도화지에 꽃을 그리고 있다. 도화지 옆에는 신발이 하나씩 놓여있다. 도화지에 그린 그림을 신발에 옮겨 그려 나만의 작품 신발을 만든다. 처음 잡아보는 붓이 어색하기만 하다. 선생님의 붓놀림을 따라 열심히 꽃그림을 그린다. 이외에도 문화파출소 덕진에서는 프랑스자수, 손바느질, 시 쓰기 등 요일마다 다양한 문화예술 프로그램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처음 파출소 공간을 낯설어 하던 주민들도 이제는 익숙한 듯 파출소를 드나들고, 다양한 강좌의 구성에 다음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기대하고 기다린다.△ 일상과 연결되는 문화예술 프로그램 설계 운영대중의 삶에서 예술은, 미술관이나 극장 등 차려입고 가야만 경험할 수 있는 것처럼 삶에서 분리된 소비적 대상으로만 존재한다. 그러나 요즘은 이러한 패러다임이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삶과 분리된 예술이 아닌, 일상적 삶 안에서 주체자로 경험하고 향유하는 문화예술로 생활문화라는 개념이 만들어 지고 확산되고 있다. 문화파출소는 지역주민들의 생활권 안에 존재하는 공간이다. 지역주민 누구나 쉽게 와서 배울 수 있는 공간인 것이다.문화파출소는 일상 속 문화예술이 실천될 수 있는 매개이자 거점으로 역할을 하기 위해 그림을 그려 나가고 있다. 그래서 거창한 예술 활동이 아닌, 바느질, 플라워데코, 소설쓰기 등 누구나 쉽게 접근 할 수 있는 의식주와 연결되는 일상 속 문화예술 활동부터 시작해 주민들의 삶속에 정착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 문화파출소 덕진, 다른 공간으로 온기 나눌 수 있기를전주 덕진경찰서가 가지고 있는 파출소라는 공간과 전북문화관광재단(문화예술교육팀)이 다년간 문화예술교육 사업을 하며 축적한 노하우들이 만나 시너지를 내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가치 있는 사건이다. 이 사건은, 주민들의 치안을 위해 접근성이 좋은 곳에 만들어진 파출소 본래 의미와 역할을 퇴색시키지 않고, 즐거운 방식으로 사람의 온기를 쌓을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발휘 할 것으로 기대한다. 지역에 활용가능하고 잠재력이 높은 유휴공간들이 많이 존재한다. 이 사업을 시작으로 온기가 없었던 파출소 공간에 사람의 온기가 가득 채워지고, 그 온기의 전도로 지역에 많은 유휴 공간이 발굴되고 활용되어지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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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5.31 23:02

[군산시 임피면] '탁류' 작가 채만식 고향…고건 전 총리의 '뿌리'

임피면은 1000년이 넘는 오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다. 백제 때 시산군의 일부였다가 신라에 와서 임피군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고려 때는 현이 되었다가 조선말에 다시 군으로 부르게 됐다.일제 강점기에 만경강 제방을 쌓기 전까지는 포구를 낀 너른 강변지역으로 땅이 비옥해서 살기 좋은 곳이었다. 일찍부터 임피향교가 세워져 교육이 활발하게 이뤄졌는데, 전국 360여개 향교가 세워지던 조선태종 3년에 설치됐다. 군산지역에서는 옥구향교와 함께 유이한 향교였다.오늘날에는 국도 27호선, 지방도 711, 718호선이 교차하는 지역으로 충청, 익산 등 사통팔달 교통의 분기점이며, 군산시 동부권의 축을 이루는 전주 생활 경제권의 중심지이다. 탁류의 저자인 채만식 선생의 고향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축산리 계남마을에는 채만식 선생의 생가와 집필장소, 묘가 위치해 있다.△정관계고건씨(79)는 본적이 임피로 강원지사와 전남지사, 교통부장관,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을 거쳐 85년 민정당 후보로 군산옥구지역에서 12대 국회의원이 됐다. 이후 내무부 장관(87년)과 서울시장 2차례, 명지대 총장(94년),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를 등을 거쳐 2003년에 35대 국무총리에 올랐다.그의 아버지 고형곤씨(고인)는 동아일보 기자 출신으로 연세대학교와 서울대 철학과 교수, 전북대학교 총장(59년)을 거쳐 63년에 군산옥구지역에서 당시 야당인 민정당 소속으로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으며, 이후 통합야당인 민중당의 정책위의장과 사무총장을 지냈다.전주이씨 집안인 이요한씨와 이용택씨, 이을식씨는 비슷한 시기에 지사를 지냈다. 이요한씨(고인)는 45년 해방 후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서 활동했으며, 52년 자유당 전북도당 위원장을 하다가 전북지사로 발령받아 55년까지 재임했다.또 이용택씨는(고인) 수원고등농림 동기인 장면 선생과 함께 야당에 소속되어 민주화 투쟁을 하다가 60년 4.19이후에 전북지사로 취임했으며, 농업협동조합 중앙회장을 지냈다.이을식씨는(고인) 1951년부터 53년까지 제3대 전남지사를 지내면서 오늘날의 전남대학교를 설립한 주인공이다. 당시 이 지사는 전남도립대 설립을 추진했으나 전남도의회에서는 정부의 예산지원이 없다며 사흘 동안이나 반대했다. 그러나 이 지사는 2세 교육의 필요성을 도의회에 간곡히 호소해 의원 만장일치로 전남대 설립안을 가결시켰다.또 13, 14, 15대 국회의원을 지낸 채영석씨(고인)는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 출신으로 민추협 대변인과 평민당 수석부총무, 국회 보건복지위원장 등을 지냈다. 권형신씨(71)는 군산시장과 남원군수, 내무부 재경국장, 한국소방검정공사 사장 등을 지냈다.△문화예술탁류의 작가 백릉 채만식(고인)은 일본 와세다 대학교 부속 제일고등학원 문과에 입학했으나 중도에 학업을 그만뒀다. 24년 춘원 이광수의 추천으로 조선문단에 단편 세길로를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해 탁류(37), 천하태평춘(38), 레디메이드 인생(34), 패배자의 무덤(39), 제향날(37) 등 장편과 단편소설, 희곡, 평론, 수필 등 290여 편을 썼다. 식민지 농민의 궁핍상과 지식인의 고뇌, 도시 하층민의 문제 등을 실감나게 그렸지만, 친일부역작가라는 오명도 받고 있다.이근영씨(고인)는 백릉보다 8년 뒤인 1910년에 태어나 1935년 신가정에 금송아지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그의 작품은 주로 농촌을 배경으로 근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물들을 통해 현실의 모순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으나 월북작가라는 이유로 그동안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최근 군산시가 신흥동 일대에 낡은 주택 두 채를 리모델링해서 백릉을 주인공으로 하는 탁류문학관과 이근영을 포함한 향토작가 문학관을 조성한다는 계획이어서 새로게 관심을 받고 있다.문인화가이자 서예가인 남천 정연교씨(73)는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상(87년) 등 수많은 수상 경력이 있으며, 한일친선 교류전, 한국현대미술초대전 등 다수의 전시회도 열었다. 원광대 미대 교수를 지냈다.석향 정의주씨(54)는 남천의 조카이면서 문하생이기도 하다. 원광대 미대와 원광대 대학원을 다녔으며, 문인화 부문 우수상을 두 차례 받고 2003년 국전 초대작가를 지냈다. 또 대한민국서도대전 심사위원, 대한민국미술대전 문인화 부문 심사위원 등을 지냈다.△기타 부문이인식 선생(고인)은 1901년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나 3.1만세 운동 때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다가 체포돼 옥살이를 했으며, 일본 동양대학에서 수학 중 항일운동으로 퇴학당했다. 이후 전답을 팔아 상해 임시정부에 당시 8000원의 독립자금을 전달했으며, 독립 후에는 임피중학교 교장으로 후학 양성에 힘썼다. 군산공원에 동상이 있다.김종량씨(고인)는 동산학원 이사장 출신으로 군산신문사를 창설해 초대 사장을 지냈으며, 서울 한성신문사 사장을 겸임했다. 이문희씨(고인)는 일본 유학파 출신으로 중앙일보사 편집국장을 지냈다.배일헌씨(61)는 해사 34기 출신으로 준장 예편했으며, 작전사작전참모처장 잠수함 전단장과 해군 기초군사교육단 단장을 지냈다.정종관씨(54)는 수원지법 성남지원 부장판사와 서울행정법원 부장판사, 대전고법과 서울고법 부장판사 등을 거쳐 현재 의정부지법 법원장을 지내고 있다. 한상원씨(43)는 사시 47회 출신의 변호사다.유병현씨(54)는 고려대에서 법학 박사를 받은 뒤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학교 기획예산처 처장과 대외협력처 처장, 기금기획본부 본부장을 맡았다.이종영씨(64)는 1대 옥구군의회 의원과 2,3대 군산시의회 의원으로 3대 군산시의회 전후반기 의장을 지냈다. 또 진희완씨(53)는 4, 5, 6, 7대 군산시의회 의원으로 7대 군산시의회 의장을 지냈다.이진원씨(83)는 학교 교장 출신으로 군산시문화원장을 맡고 있으며, 군산시청 수도사업소장 출신의 김인생 국장은 현재 교육 중이다.이규철씨(79)는 기술고시 4회 출신으로 한국정수공업주식회사 대표이사 사장을 지냈다.양삼영씨(고인)는 37년부터 동아일보 문선부에서 견습사원으로 일했으며, 당시 사회부에서 근무했던 이근영씨 등의 도움으로 39년 일본 유학길에 오른 뒤 사업가로 변신해 재일거류민단 의장 등 다양한 사회활동을 펼쳤다.- 다음회에는 임실군 지사면 편이 이어집니다

  • 기획
  • 이성원
  • 2017.05.30 23:02

천주교 전주교구 신임 김선태 교구장 "사랑 실천 위해 자신 먼저 내려놓고 낮출 것"

여러모로 특별한 해다. 1937년 4월 13일 설정된 천주교 전주교구는 올해로 80주년을 맞았다. 특히 27년 만에 새 교구장이 탄생했다. 천주교 전주교구는 지난 13일 군산 월명체육관에서 김선태 사도요한 주교 서품착좌식을 거행하고 목자의 앞날을 축하했다. 김선태 신임 천주교 전주교구장을 만나 소감과 종교와 삶에 대한 철학 등에 대해 들어봤다.- 천주교 전주교구 설정 80주년이자 27년 만에 신임 교구장이 탄생했습니다. 교구장으로 임명받은 소감이 어떠신지요.교황대사관으로부터 후임 교구장으로 임명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저 자신이 부족하고, 그 직무를 수행하기에 부당한 사람이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하느님께서 부족한 저를 필요로 하시는구나라고 인간적인 일이 아닌 하느님이 원하시는 일로 생각하니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직무를 받아들였다고 제 능력이 갑자기 배양되는 건 아니므로 많은 신자의 도움과 협력, 기도가 필요합니다.- 이병호 주교님(전 전주교구장)과의 인연도 남다르시죠. 이 주교님의 당부 말씀이 궁금합니다.이병호 주교님은 제 신학교 은사님이셨습니다. 주교님은 사제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범을 보였고 지주가 됐습니다. 후임자로 부족한 점이 많아 염려스럽다고 말씀드리니 어려운 일이 있지만, 하느님께서 그와 견주어 위로도 충분히 주시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구장 주교만이 누릴 수 있는 하느님의 위로가 있다라는 말씀을 분명히 해주셨습니다.- 교구장 임명 전까지의 삶을 되돌아봤을 때 아쉬운 점이 있으신가요.어려운 처지나 딱한 사정을 지닌 신자들을 제 시간적물리적인 한계로 다 돌봐드리지 못해 항상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 개 성당을 담당해 활동하는 것도 힘이 들어 역부족이었는데, 큰 교구를 맡는다는 게 저로서는 마음이 복잡했습니다.- 한국 천주교주교회의 의장이신 김희중 대주교님이 착좌식에서 주교 되는 날만 영광이고 다음날부터는 십자가라는 말씀을 하셨죠. 실제 그러하신가요.임명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를 받아들일지 말지 결정하기까지가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수락한 뒤에는 하느님께 저 자신을 다 내맡겼기 때문에 마음이 편했습니다. 영광스럽다는 건 제 차원이 아닌 사람들의 시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목 표어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의 의미는 무엇인가요.루카복음 10장 37절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는 사제서품 성구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모든 걸 빼앗기고 얻어맞아서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데, 지나가던 사제가 피해 도망갔습니다. 두 번째 사람도 피해 도망갔습니다. 앞선 두 사람은 모두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이었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이 상처를 치유하고, 자기 노새에 그를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 돌보아 주었습니다. 정신적물리적으로 상처 입은 사람을 도외시하지 말고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사랑을 베풀라는 뜻입니다. 주교가 된 뒤 되돌아보니 그 삶을 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여생 동안 그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마음에서 그 표어를 계속 정하게 됐습니다.- 최근에는 번역서 〈너 자신을 아프게 하지 마라〉를 출간했지요.이 책의 근본 내용은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도 상처 줄 수 없다 입니다. 내가 상처를 받는다면 내가 나에게 상처를 주기 때문에 받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아니라는 요지입니다. 예를 들어 주식 투자를 했다가 돈을 많이 잃으면 돈 잃은 것 때문에 고통받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상처받는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 그 사람의 돈에 대한 가치관과 집착으로 인해 상처받은 것입니다. 사물이나 사람에 대한 나의 그릇된 가치관이나 표상, 관념, 개념 때문에 상처를 받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올바른 표상과 관념을 가져야만 우리가 상처를 덜 받는다고 말합니다.- 세상 속에서 교회와 신앙인이 할 일은 무엇일까요.이 문제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왜 존재하느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정체성과 신앙인의 신앙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세상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세상으로 투신해야 합니다. 그런데 신앙인이 세상으로 너무 깊이 들어가면 세속화돼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앙인은 세상을 위해 일하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교회에 속하면서도 세상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비동일성과 관계성. 이 맥락을 명백하게 선 긋고 의식해야 합니다. 또 신앙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교구장 주교가 할 일도 고통당하는 사람을 위해 함께 울어주고, 눈물을 닦아주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종교인의 사회 참여, 정치적인 발언에 대한 논란이 빚어지기도 합니다.성직자가 종교인으로서 사회를 밝게 비추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하는데, 빛과 소금의 역할이 각각의 시각에 따라 정치적 개입 또는 적절한 처사로 읽힙니다. 그런데 분명한 점은 사회에 참여하는 종교인은 항상 자신이 믿는 종교 정신, 즉 복음의 빛으로 식별하고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정치에 간섭한다거나 특정 정파의 이익을 위한 건 아닙니다. 공동선을 위해 참여하고 협력하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선과 악, 진보와 보수, 빈과 부 등 한국 사회가 직면한 갈등을 어떻게 바라보시는지 궁금합니다.세상 역사가 시작된 이후 항상 선과 악, 좌측과 우측이 존재했습니다. 리영희 교수의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말처럼 한쪽 날개로는 불안정합니다. 균형 잡힌 사회를 위해서는 우측의 생각과 좌측의 생각이 필요합니다. 우리 사회는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모두 자기편에서 자신과 같이 생각하고, 행동하길 바랐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 큰 모순이 있습니다. 나와 네가 다르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 분열된 상황 속에서 갈등을 조정하고 통합하는 가장 큰 원칙입니다. 다양성을 인정할 때 대화가 시작됩니다.- 중점을 둔 계획이 있으신가요.성경의 핵심 내용대로 사는 것이 우리의 비전이고 목표입니다. 비전도 사랑 목표도 사랑입니다. 사랑의 큰 특성 중 하나는 공동체의 일치와 화합입니다. 신부들이 먼저 하나 되어야 신자들이 하나 된 삶을 살고, 신자들이 하나 된 삶을 살 때 그걸 보고 세상 사람들이 하나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먼저 내려놓고 낮춰야 합니다. 우리 사회는 자기 자신을 내려놓거나 희생하는 것이 부족하고, 그런 점에서 종교인신앙인도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천주교 신자와 전북도민에게 남기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요.우리의 삶은 사랑이어야 합니다. 모두 행복을 바라며 살지만, 실제로는 행복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돈을 더 많이 가져야, 명예를 더 많이 누려야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행복은 그런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 반대로 자신이 가진 부와 명예, 권력을 내려놓고 부족한 사람에게 나눠주면 행복합니다. 각자 서 있는 위치에서 힘들고 어려운 사람에게 도움을 행한다면 사회가 조금씩 나아지리라 믿습니다.● [김선태 주교는] 스스로 선택한 길 "잘맞는 옷 입은듯"김선태 주교(56)는 1961년 9월 익산 성치마을에서 5남2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성치마을은 천주교 박해시대에 박해를 피해 교우들이 만든 교우촌으로 김 주교의 집안도 하루의 시작과 끝을 새벽기도와 저녁기도로 채우는 신실한 신앙 생활을 했다. 김 주교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로부터 너는 꼭 사제가 됐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사제가 되기로 결심하고 소신학교(성신중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김 주교는 고등학교 시절, 주변의 권유가 아닌 자신의 자아와 의지에 입각해 사제의 길을 택했다고 말했다. 김 주교는 신앙에 젖은 삶을 어렸을 때부터 살아왔기 때문에 (사제 서품이) 당연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이 길 외에 다른 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자연스러웠다. 아주 잘 맞는 옷을 입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회상했다.이후 1983년 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 학사, 1989년 광주가톨릭대학교 대학원에서 신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해 1월 전주교구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후 전주 전동둔율동본당 보좌를 거쳐 1991년부터 1997년까지 스위스 프리부르대에서 기초신학을 공부했다. 2001~2003년, 2006~2009년 두 번에 걸쳐 전주가톨릭신학원장을 맡았다. 전주 솔내화산동연지동본당 주임을 역임하고 2016년 2월부터 삼천동본당 주임으로 사목해왔다. 2017년 3월 14일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제8대 전주교구장에 임명됐다.〈너 자신을 아프게 하지 마라〉, 〈자기 자신 잘 대하기〉 등 10여 권의 번역서를 내고 전주교구 계간지 〈쌍백합〉과 주보 〈숲정이〉에 10년 가까이 묵상글을 연재했다. 주변 사람들은 김 주교를 탁월한 학자이자 성실한 사목자로 평가한다.

  • 기획
  • 문민주
  • 2017.05.29 23:02

장미의 계절, 도로공사 수목원으로 꽃구경 가자스라

햇볕이 공기와 지면을 달구기 시작하는 계절. 봄과 여름의 경계는 그 열기로 녹아내린다.이글거리는 태양을 고개를 들어 똑바로 쳐다보며, 오뉴월을 대표하는 꽃 장미는 그렇게 피었다.2017 FIFA U-20 월드컵 코리아가 한창인 전주, 세계 청소년 축구 스타들이 한 판 승부를 벌이는 전주성 바로 근처에, 전북도민이 사랑하는 장미 명소가 있다.장미를 보러 왔어요. 꽃이 참 다양해서 좋습니다. 이만한 곳이 없죠.장미를 배경으로 연신 어린 아들의 사진을 찍던 전주시민 김지수 씨(37)는 미세먼지가 없으면 보통 여기로 온다고 말했다.그의 평가는 관리가 잘 돼 있다는 것, 꽃을 하나하나 보기 좋다는 것, 그리고 외지인에게도 자주 추천하곤 한다는 것이었다.지난 24일, 전주시 반월동 한국도로공사 수목원에 취재팀이 들어서자 참 타이밍 좋게도 하늘을 덮고 있던 구름이 살살 걷히며 파란 하늘이 드러났다.그러고서는 마치 올 신상 여름날 체험행사라도 하겠다는 듯, 햇볕이 뜨거워졌다.수련이 동동 떠 있는 연못(수생식물원)을 지나 오솔길(?)을 잠깐 걸으면, 이내 형형색색 제 잘난 얼굴을 뽐내는 장미들이 눈에 들어온다.빨간색, 자주색, 분홍색, 노란색, 흰색 등 색깔도 다양하지만, 그 모양도 천차만별이다.장미는 5월 하순 무렵, 그러니까 봄과 여름의 경계선을 밟고 피어난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이미지는 화려함이지만, 사실 다 세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품종이 있어 한 가지로 단언하기는 어렵다. 워낙 품종 개량이 활발해, 지금도 새로운 장미가 계속 생겨나고 있다.전체 규모가 29만1795㎡에 달하는 한국도로공사 수목원에서 장미원이 차지하는 면적은 3520㎡. 여기에 약 600주의 장미가 심어져 있다.어디까지나 관찰학습이 주 목적인 수목원이기 때문에 휴식여가가 목적인 다른 장미 명소와는 달리 빽빽하거나 화려한 느낌은 덜하다. 대신 꽃 하나하나를 깊게 음미하기에는 좋다.이것도 일장일단이 있는데, 이날 동료들과 함께 장미원을 찾은 한 사진 애호가는 풍경사진을 담기에는 조금 부족하지만, 한 송이 한 송이, 감성사진 찍을 땐 오히려 좋다고 말했다.한국도로공사 수목원은 사진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이미 전국구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수목원 측이 밝힌 올 5월(1일~25일) 하루 평균 입장객은 약 2300명. 이날 만난 사진가는 이를 한 마디로 정리했다.사진 찍는 사람들은 다 알죠.단, 수목원 내에서 삼각대를 펼치는 것은 금지돼 있으니 주의하자.장미의 계절이지만, 장미만 보고 가기엔 나머지 공간이 아깝다.수생식물원 나무다리 위에서 물 위에 동동 떠 있는 수련과 이따금씩 첨벙 소리를 내는 잉어들을 바라보는 것도 즐거움이다. 한 달여 뒤에는 연꽃이 필 테니 그때 다시 찾아도 좋다.어쩌면 이열치열의 느낌으로 온실에 들어가 보는 것도 좋을 테지만, 햇볕이 뜨거울 땐 역시 숲속으로 들어가는 게 최고. 수직으로 쭉쭉 뻗은 죽림원 대나무 사이에 서서 열을 식혀보는 것도 좋겠다.한국도로공사 수목원은 하절기인 요즘은 오후 8시까지 열려 있다. 월요일에는 휴원한다.시내버스로는 423424428번 등을 이용하면 된다.자가용 승용차를 몰고 외지에서 찾아온다면, 호남고속도로 요금소를 빠져나오자마자 CBS 방향으로 우회전해 지하통로로 건너면 만날 수 있다.

  • 기획
  • 권혁일
  • 2017.05.26 23:02

⑨ 양직공도와 실크로드 - 양직공도(양나라에 조공 온 외국 사신 그린 그림), 6세기 백제 국제적 위상 고스란히 담아

옛날 백제인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고대 백제인을 그린 그림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양직공도(梁職貢圖)다. 양직공도는 6세기 동아시아 최강국 양(梁)나라에 조공 온 외국 사신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최근 돈황 벽화에서 백제인 그림이 발견되기 전까지 양직공도는 백제인을 그린 거의 유일한 그림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양직공도에서 사라졌던 제기(題記:각 나라에 대한 간략한 기록)가 발견되어 백제의 국제적 위상에 대한 흥미 있는 정보를 알려주었다. 백제사 연구의 1급 사료인 양직공도와 새로 발견된 제기를 통해 당시 백제의 대외 교류가 어떠했는지를 탐색한다.△양직공도(梁職貢圖)란?양직공도에서 양(梁)은 중국 남북조시대 양나라를 가리키고, 직공(職貢)은 직방공물(職方貢物) 네 글자를 줄인 말로 직방은 중국 관직, 공물은 조공품을 가리킨다. 중국 왕조에서는 관직에 임명된 인물은 요즘 증명사진 찍듯 그림으로 남겼는데, 이러한 관례가 외국 사신에게도 적용되어 양직공도가 탄생하였다. 양직공도는 양나라의 세자이자 화가였던 소역(蕭繹)이 당시 동북아 최강국인 양나라에 조공하러 왔던 각국 사신을 그린 것인데, 현재 원본은 사라지고 없으며 모사본만 세 종류가 있다.양직공도 중 가장 사료 가치가 높다고 평가받는 남경박물관 소장본에는 원래 25개국 이상의 사신이 그려져 있었으나 현재는 12개국 사신 그림만이 남아 있다. 12개국 사신의 국가명을 순서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활국(滑國:아프가니스탄), 파사국(波斯國:페르시아), 백제(百濟), 구자국(龜玆國:중국 신강성 주변 국가), 왜국(倭國:일본), 탕창국(宕昌國:감숙성 주변 국가), 낭아수국(狼牙修國:말레이반도 국가), 등지국(鄧至國:감숙성 주변 국가), 주고가국(周古柯國:아프가니스탄 주변 국가), 가발단국(呵跋檀國:아프가니스탄 주변 국가), 호밀단국(胡密丹國:아프가니스탄 주변 국가), 백제국(白題國:아프가니스탄과 페르시아 중간 국가), 말국(末國:서역 36국 중 하나).△양직공도로 본 백제의 대외 교류양직공도 속 백제 사신은 무령왕 때 파견된 사신으로 추정된다. 무령왕은 6세기 동아시아 최강국 양나라에 두 차례 사신을 파견한 바 있고, 무령왕릉은 양나라 왕실 무덤인 아치형 전축분을 본 따 조성한 벽돌무덤이다. 실제로 무령왕릉에서는 梁官瓦爲師矣(양나라 관청 벽돌을 모범으로 삼았다)라는 글자를 새긴 벽돌이 발견되었고, 양나라 왕실 무덤에서만 발견되는 유물도 다량 출토되어 양나라와 백제의 긴밀한 관계를 입증하고 있다.양직공도 속 백제 사신은 아프가니스탄 사신과 페르시아 사신 다음에 등장한다. 12개국 사신 중 세 번째에 그려져 있는 것이다. 특이한 점은 12개국 사신을 보면, 백제와 일본을 제외하면 모두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 주변 국가들이다. 아프가니스탄과 페르시아는 지금과는 달리 과거 실크로드 문명을 꽃피운 찬란한 고대 강국이었고, 동아시아 최강국 양나라는 이들 나라와 활발히 교류했었다. 백제 역시 양나라를 통해 중앙아시아페르시아와 교류하면서 최첨단 물품을 백제로 유입하였다.흥미 있는 사실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백제가 일본과 신라보다 위상이 높았음을 양직공도가 증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양직공도 속 왜국 사신은 천으로 대충 감싼 남루한 옷차림에 맨발을 하고 있어 세련되고 품격있는 백제 사신과는 너무나도 차이가 난다. 또 왜국 사신은 백제 사신 뒤에 그려져 있다. 신라와 고구려 사신 역시 백제 사신 뒤에 보인다. 특히 백제 사신은 그림 맨 앞의 양나라 황제 바로 뒤 페르시아 사신 다음에 그려져 있다. 이는 당시 백제가 페르시아와 함께 6세기 동아시아 양나라의 핵심 교역국이었음을 보여준다.△양직공도 신라 제기(題記)의 발견몇 해 전 획기적 발견이 있었다. 양직공도에서 영영 사라졌다고 여겼던 신라 제기(題記)가 발견된 것이다. 세상을 놀라게 하며 나타난 신라 제기는 청대 문집 애일음노서화소록(愛日吟廬書畵續錄) 제5권에 청장경제번직공도권(淸張庚諸番職貢圖卷)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청장경제번직공도권은 그림에 조예가 깊은 청나라 장경이 친구 이탁에게서 양직공도를 빌려와 18개국 사신도와 함께 나라별 제기를 베낀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사신 그림은 사라지고 각국 제기만 남아 있다.새롭게 발견된 신라 제기에서 시선을 끄는 내용은 신라가 양무제 2년(521)에 신라왕 모태(募泰:법흥왕)가 처음으로 백제 사신 편에 붙어 사신을 보내 표(表)를 올리고 특산품을 받쳤다. 그 나라에서는 성(城)을 건년(健年)이라 부르며 그 습속은 고려(고구려)와 비슷하다. 문자가 없어 나무를 새겨 표시로 삼는다. 말은 백제를 거쳐야만 통할 수 있다고 되어 있는 부분과 신라는 한(韓:마한)에 속하기도 하고 더러 왜에 속하기도 했다. 그 나라 국왕은 스스로 사신을 보내 조공할 수는 없다는 기술이다.△신라 제기(題記)로 본 백제양직공도가 탄생했던 6세기는 무령왕(武寧王)이 백제의 해상강국 재건의 꿈을 이룬 시기였다. 신라 제기에 쓰여 있듯이 당시 신라는 스스로 중국 왕실과 교역할 수 없는 처지였고, 백제 사신 편에 붙어서 양나라와 교역해야 했다. 또 신라에서는 중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없어 백제의 통역을 빌려야만 했다. 또 신라가 한(韓:마한)에 속하기도 하고 더러 왜에 속하기도 했다.는 부분은 많은 논란을 야기할 수 있는 문구지만 당시 신라의 국제적 위상에 대해 중국 왕조가 어떠한 시각을 갖고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6세기 해상강국 백제양직공도 속 백제인은 무령왕이 쇠락하던 백제의 국력을 회복시킨 후 당시 동아시아 최강국이었던 양나라에 파견한 사신의 모습이다. 당시 무령왕은 고구려를 군사적으로 압도하면서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음을 알리고자 양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양직공도와 새롭게 발견된 신라 제기는 6세기 백제의 국제적 위상이 대단히 높았고, 당시 백제가 동아시아 국제 교역을 다시금 주도하는 실크로드 해상강국으로 재도약하고 있었음을 확인시켜주는 소중한 사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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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5.26 23:02

[문화&공감] 고창 심원면 사등마을 - 하늘과 땅, 사람 향해 1500년 갚아온 은혜, 자염

뭍이면서 물이고 물이면서 뭍인, 겹침 공간 염전. 겹쳐 있다는 것은 이편이기도 저편이기도, 혹은 아무 편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 폐(閉)는 진즉 예정된 것인가. 뭍에서 물로 염전의 물거울 표면을 파르르 흔들며 부는 바람이 그치기를 기다려, 뙤약볕 아래 늙은 염부들이 은빛 거울 속으로 첨벙 들어가고 있다. 그들은 다시 뭍의 세계로 나올 수 있을까? 폐염전 한 귀퉁이에서 훅훅 거친 숨을 터뜨리는, 아직은 살(殺)이 아닌 산 풍경을 그린 책이다.(책읽는 경향, 2010년 3월, 〈소금이 일어나는 물거울, 염전〉)△새로운 소금밭 이야기, 자염(煮鹽)꽤 오래 전 어느 신문에 서평으로 낸 글이다. 유종인 작가가 글을 쓰고 사진 찍고 눌와에서 펴낸 책, 〈소금이 일어나는 물거울 염전〉에 대한 짧디 짧은 서평이다. 그 많은 책 가운데 뭍도 아니고 물도 아닌 갯벌, 염전에 대한 책이라니, 세계적인 갯벌을 가진 고창, 바닷가 해리에서 태어난 탓이다.고창은 염전의 고장이다. 1900년 이후 대규모 간척 사업이 일본인들의 손으로, 우리 손으로 벌어진 흔적이다. 바다로부터 땅을 얻기 위한 쟁투(爭鬪)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었다. 깊이를 모르는 바다에 등짐으로 한짐 한짐 산을 허물고 들을 파내어 들이 붓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 끝없는 싸움의 결과는 세 갈래다. 삼대가 망하든, 들이 되든, 염전이 되든이다. 들이든 염전이든 땅이 되는 그 갈래야말로 삼대가 흥청거리고도 남을 일. 염전에 대한 소리소문은 어렸던 나에게도 장대한 드라마로 들렸을 것이다. 그 천일염전만 알고 살았다. 다시 고향에 돌아와 어른의 눈으로 본 새로운 소금밭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자염(煮鹽)이다.△은혜갚은 소금, 보은염 이운행렬로 이어져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대규모로 형성된 천일염전과 달리, 자염은 우리나라 서해안 너른 갯벌에서 오랜 전통으로 내려오는 소금이다. 고창군 심원면 사등마을 검당포에는 독특한 자염짓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무려 1500년이다. 호남을 대표하는 선운사를 창건한 검단선사에 얽힌 이야기다. 577년 백제 위덕왕 시절, 검단스님은 당시 민중들에게는 아주 낯선 불교라는 새로운 믿음체계를 어떻게 전해줄까, 고민했다. 종교 안에 삶의 방편, 곤궁한 생활을 타개할 새로운 신기술 전수를 끼워 넣는다. 그 한 가지가 바로 소금 굽는 방법의 전수다. 소금이야말로 대사작용의 기본일 뿐 아니라 모든 음식의 기본이다.물론 이 땅에서 검단스님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소금은 만들어왔겠지만, 그가 전한 자염의 제염방식은 획기적인 것이었으리라. 호구를 해결해준 스님의 덕망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을 터, 오늘날 대 가람 선운사가 이렇게 자리 잡을 수 있게 된 묘책이었을 것이다.그 흔적이 해마다 봄 가을이면 자염으로 소금을 짓는 사등마을 사람들이 산 넘어 선운사에 농사지은 자염을 공양하는 보은염 이운행사로 남아있다. 검당포라는 지명 또한 말없이 선운사 검단스님과 뿌리깊은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벌막에서 갯벌과 바람과 함께 한올 한올 엉겨낸 소금 알갱이모래가 많아 붙여진 이름 모랫등, 사등마을에서 한창 소금을 구워내던 때에는 제법 큰 지역에 300여 호가 넘었다고 한다. 동학의 거대한 불길이 온 고창 땅을 휩쓸고 그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서 말없이 흥건하던 무술년(1896년)이었다. 거대한 해일이 밀려와 마을은 통째 사라지고, 겨우겨우 남은 사람들이 지금 이 모랫등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사등마을에는 자염박물관이 있다. 마을 집집마다 간직하던 자염도구들을 내어놓고 소금이 태어나는 과정을 종이인형으로, 그림으로 쉽게 풀어 내어놓았다. 박물관 앞마당에는 이미 사라지고 만 벌막도 재현해놓았다. 선운사에 이르는 길다란 만(灣)을 따라 수십 수백에 달라던 벌막은 이제 대문안벌, 막벌, 새벌, 안벌 같이 지명으로 흔적만 남았다. 작은 집 한 채만한 그 벌막에서 염부들은, 소금기 머금은 갯벌흙을 걷어내 섯구덩이에 맑게 거르고 그 거른 염도 높은 물을 길러 커다란 무쇠솥(지금은 네모난 철판 솥이다)에 넣고 불땀 좋은 불길로 끓여내, 한올 한올 소금을 엉겨냈을 것이다.△체험관광으로 날개 다는 슬로푸드 사등마을그 소금 짓는 풍경이 다시 살아났다. 그야말로 산풍경(살풍경이 아닌)은 사등에서도 고스란하다. 전라북도가 지역의 이야기와 전통이 깃든 음식으로 마을을 되살리자는 전북형 슬로푸드마을에 2015년 선정되면서부터 급물살을 탄다. 체험 관광형이라는 수식이 붙은 이 마을재생사업은 그동안 마을 자원을 잘 꾸며 박물관은 물론 사라진 벌막까지 재현해놓은 그 바탕 위에서 시작되었다. 그동안 마을 사람들이 잘 다듬어온 자염이라는 마을 자원에, 이제 체험과 관광이라는 날개를 달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슬로푸드마을에 선정되고 벌써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80대 어르신부터 바다 일에 틈이라고는 하나 없는 장년층 주민까지, 그동안 마을이 정체된 아쉬움을 단번에 풀어내려 내놓는 의견이 끝이 없었어요. 그 의견 하나하나 서로 귀 기울여 듣고 중요한, 가장 시급한 것들부터 차례를 정해나갔죠. 무급 마을사무장으로 마을이 정한 방향을 지켜가는 정정선(56) 씨의 말이다.△자염, 인류에 내린 하늘의 선물보따리를 풀며서로 듣고 말하며 사등마을 사람들의 고민이 하나하나 실현되고 있다. 지난해 완공한 자염체험관은 전통방식으로 자염만들기, 오색 자염 만들기부터 미니어처 작은 벌막 만들기, 조개 공예 등 마을 자원을 체험으로 연계한 노는 듯 공부하는 체계를 잡았다. 더불어 마을에서 운영하는 검당팬션에서 편안한 하루를 묵어갈 수도 있다. 자염이 밑간이 되고 해풍이 들녘에 내린 풍요로운 산물을 마을 아짐들의 솜씨로 다듬어 올린 자연밥상을 기대한다. 복분자에 장어 일품요리라면 두말할 것 없으리.사등마을의 다음 차례는 브랜딩한 자염의 홍보 마케팅이다. 하늘염 상품으로 자염 선물세트를 구성했고, 국제 슬로푸르 좋은 먹거리 맛의 방주에 등재한 사등마을 특산 칠게젓갈이 상품화 채비를 마쳤다. 더불어 자염체험관과 자염박물관, 검당팬션의 활성화다. 그러고 나서 본격적인 체험 휴양체험마을로 자리잡는 것이다. 자염으로 지어낸 자연음식 밥상으로 편안한 쉼으로 세상과 만나려는 것이다. 근디, 자염이 왜 좋은지 아요? 정 사무장은 사등의 자염은 염도가 낮고 무기질이 많아, 피를 맑게 하고 피부를 건강하게 한다, 염증치료에도 효험이 크다고 한다.자염에 얽힌 역사며, 스토리텔링이며, 상품화며, 체험이며, 소득과 마을의 풍요에 앞선 가치, 자염만의 가치를 놓칠 수 없다. 자염이 좋은 것이다. 인류에 내린 하늘의 선물이니.이대건 책마을해리 촌장※시민기자가 참여하는 문화&공감은 매주 수요일 연재됩니다. 이대건 책마을해리 촌장, 문성희 문화파출소 문화보안관, 고길섶 문화비평가, 문정현 역사문화연구가가 차례로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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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5.24 23:02

성숙한 이탈

인간에게는 이탈의 욕구가 있다. 부정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 동작이지만, 사실 이는 매우 긍정적이며 생산적이기도 하다. 모든 생물은 자기 존재를 보존하며 확장하려 애쓰도록 태어났는데, 서로 확장하려 하다가 경쟁을 피할 수 없게 되기도 한다. 확장은 다양한 의미에서 기존의 터전에 고착되지 않고 벗어나려는 율동이다. 이것이 이탈이다. 어쩔 수 없이 이탈은 부정의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 정반합의 ‘반’이다. ‘합’을 기약하는 ‘반’, 그래서 또 인간은 이탈을 하면서 스스로를 확장한다. 생산적이지 못한 상황에 처한 인간은 지루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 지루함을 이기려고 그것을 부정한다. 부정이 없다면 얼마나 지루할까. 또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의 속성은 얼마나 공격적이며 생산적인가. 부정할 수 있어서 우리는 고정되지 않고 움직인다. 발전도 부정의 한 형식이 빚은 결과다.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부정이 어느 순간에는 또 멈추어 고정될 수 있다는 점이다. 부정의 죽음이다. 싫증난 한 켠을 부정한 후에 채택한 새로운 한 켠이라고 해서 계속 새롭거나 영원한 선인 것은 아니다. 새로운 부정이 기약될 때만 새롭고 선하다. 부정의 동력이 끊기고, 뿌리를 내려 자리를 잡으면 폐색과 멸망만이 기다릴 뿐이다. 이는 매우 미묘한 원칙이다. 불교에서는 일찍부터 이 점을 주의 깊게 살피고 이중 부정이나 지속 부정을 말했다. 바로 양공(兩空)이니 중현(重玄)이니 하는 것들이다. 장자는 양행(兩行)을 말한다. 시인 이갑수는 이렇게 적었다. “신은 시골을 만들었고/인간은 도회를 건설했다/신은 망했다.”(『신은 망했다』 민음사) 사태가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의 중심 자리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신’은 인간이 가고 싶어 하는 방향이거나 완성이거나 원본이거나 모델이거나 초청된 감독자다. 인간 확장의 절정이다. 그런데 인간은 도회를 건설하면서 확장에 가속도를 냈다. 우리가 누리는 문명은 모두 도회의 산물이다. 그렇다면, 도회적 확장의 절정은 신이 만든 시골을 닮아가야 할 것이다. 도회의 시골화는 이상적인 차원에서 완성된 모습일 수 있지만, 현실 속에서의 확장은 시골의 도회화다. 그래서 우리는 도회에 있으면서 시골을 갈망한다. 시골을 갈망하는 농도가 강해질수록 도회에 대한 비판은 격렬하다. 도회에 대한 비판이 격렬해질수록 그는 신적인 영역에 가까워지는 환상을 차지한다. 도회를 공격할수록 진실하고, 신을 닮은 참된 인간으로 치장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도회를 떠나지 않는다. 시골에서 도회를 동경하는 것도 도회에서 도회를 비판하는 강도만큼이나 인정을 받아야 공평하다. ‘신은 망했다’는 이갑수의 말이 시골을 택하고 도회를 버리라는 웅변은 아닐 것이다. 신이 망하면서 인간의 승리를 몰래 감추듯이 말해준다. 그런데, 도회의 승리가 시골을 품어야 진정한 완성이 되듯이, 인간의 승리도 신의 승리를 품을 수 있다. 도회에 살면서 배타적 자세로 도회를 부정하고 시골을 갈망하는 것으로는 아무리 격렬해도 성숙한 완성의 길이 아니다. 시골과 도회가 상호 교차되거나 포섭되는 길만이 인간적인 완성에 가깝다. 이것도 사실은 부정이 부정으로 고착되지 않고, 스스로 부정되어 다시 새로워지는 한 형태다. 이것이 진정한 완성이다.스스로를 생태주의자로 자리매김하는 어느 분의 인터뷰 대상자가 된 적이 있다. 그는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에 마당에 난 민들레의 꽃대를 꺾어 피리 만드는 법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나는 시골 출신이면서도 난생처음 민들레 피리를 만들어 불어보았고, 나중에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주기도 하였다. 민들레 피리를 불 때, 나는 잠시 잊었던 시골의 정서를 다시 불러올 수 있었다. 이야기가 깊어갈수록 그는 매우 절실하고 진실한 사람임을 드러냈다. 생태주의의 철저한 복원을 꿈꿨다. 시골을 건설해놓고 망한 신을 살려내려는 전사 같았다. 당신이 사용은 하지만, 사실은 냉장고도 부정한다고 했다. 강남에 살지만, 사실은 많이 가지는 생활 방식을 부정한다고도 했다. 인터뷰 중간쯤에서 나는 지식의 생산이나 창의력이 탐험이나 모험과 깊게 연관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서양에는 직업으로서의 탐험가가 먼 옛날부터 존재했지만, 동양에는 그러지 않았다는 점을 언급했다. 그러자 그 분은 탐험이 오히려 삶의 환경을 악화시켰다고 강조한다. 탐험을 통해서 대륙 간에 교류가 활발해지고, 이 교류가 세상의 생태 환경을 악화시켰다고 한다. 지식의 생산이나 생산된 그 지식을 통한 과학 기술 문명의 발달도 추구할 일이 아니라고 한다. 이는 그냥 단순한 서양추수주의일 뿐이며 결과적으로 삶을 나쁘게 끌고 가는 악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천성을 해칠까봐 문명의 이기인 기계 자체를 사용하지 않는 노인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는 그 이야기의 반 만 알고 있었다. 나는 나머지 반을 이야기 해주고 싶었지만, 그저 조용히 있었다. 『장자』의 「천지」편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얘긴즉슨 다음과 같다. 공자의 제자인 자공이 여행길에 밭에서 일하는 노인을 보았다. 굴을 뚫고 우물에 들어가 항아리로 물을 퍼 나르고 있었다. 그러자 자공이 힘겹게 일하는 그 모습이 딱해서 두레박이라는 기계를 쓰면 하루에 백 이랑도 물을 줄 수 있고 아주 편하니 그렇게 해 보시라고 권했다. 그러자 노인이 웃으면서 기계를 쓰면 기계에 사로잡히는 마음이 생겨나서 순진 결백한 본래의 것이 없어지고, 그러면 또 정신이나 본성의 작용이 안정되지 않으며, 더 나아가서 도가 깃들지 않게 되니 기계를 안 쓰는 것이지 기계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 말의 의미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고 크게 느껴진 자공은 넋을 잃었다가 30리나 걷고 나서야 제정신이 들었다고 한다. 자공은 왜 정신을 잃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을까? 문명의 착실한 건설을 주장하는 스승 공자와 전혀 다른 생각을 펼쳐 보이면서 문명 자체를 부정하는 근본주의적 철저함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자공에게도 제자가 있었다. 그 제자하고 나눈 대화를 보면 자공이 왜 그리 놀래고 또 감탄했는지를 알 수 있다. 안색이 변하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놀랜 자공을 보고 그 제자는 그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어서 그렇게 놀래신 것이냐고 묻는다. 그러자 자공이 말해준다. 자공은 원래 스승인 공자로부터 옳은 것을 하고 공을 이루려고 애쓰며 수고를 덜하고도 큰 효과를 거둬야 한다고 배우고 그 가르침을 최고로 알았는데, 이 노인네는 확실히 근본의 도를 지키고 있어서 덕과 육체와 정신이 모두 온전하니 확실히 공자보다도 훨씬 더 성인의 도를 구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경탄한 것이다. 자공이 머리속에 그린 성인의 도는 일의 편리함이나 거짓 기교 따위로 자유롭고 소박한 원래의 마음을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 경지에 있는 사람은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어디에도 가지 않고, 마음이 원치 않으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온 세상 사람들이 칭찬해도 돌아보지 않고, 모두가 비난해도 들은 채를 않는다. 성인의 도를 이렇게 생각하고 있던 자공에게 기계가 주는 편리함을 누리다가 거짓 기교에 빠져 본마음을 잃지 않으려 하는 이 노인네의 모습은 자공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 했다.귀향 후에 공자에게 이 이야기를 전했다. 아마 자공의 속마음에는 그 노인네를 스승보다 더 높이 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주의할 점은 장자라는 책에는 ‘중언’(重言)이라는 기법이 사용되는데, 그것은 유명한 사람의 입을 통해 필자 자신의 말을 하는 것이다. 권위에 기대 설득력을 배가시키려는 기술이다. 당연히 여기에 나오는 공자는 『논어』 속의 공자라기보다는 도가적 사상가로서의 공자다. 공자가 자공에게 그 노인네는 도가 정신을 잘못 배워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즉 자신의 내면만 다스리고 외면을 다스리는 법은 모른다고 일러준다. 참된 본성 만 품고 무위자연의 순박한 모습을 지키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정신으로 속세적인 삶을 살면서도 유유자적하는 경지를 보여야 제대로 된 것이라고 말한다. 장자는 내면과 외면을 동시에 다스릴 수 있어야 최고지, 어느 한 편만 지키는 것은 아직 부족하다고 분명히 말한다.양자택일의 논리에 익숙한 사람들은 『장자』에 나오는 이 이야기를 들을 때도 한 쪽 만을 택해서 장자를 문명 부정론자로 끌고 간다. 이런 일은 노자를 읽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쉽게 나타난다. 『도덕경』에는 분명히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 즉 “무위하면 모든 일이 잘 이뤄진다”고 쓰여 있는데, 양자택일의 전사들은 ‘무위’만 보고 ‘무불위’는 애써 외면한다. 하지만 사실 노자의 시선은 모든 일이 잘 이뤄지는 현실적인 효과로서의 ‘무불위’에 가 있다. 노자의 사상은 뒤로 물러서는 것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물러서는 것도 앞서기 위해서다. 『도덕경』 제7장에 분명이 기록되어 있다. “후기신이신선”(聖人後其身而身先), 즉 뒤로 물러서지만 결국 앞서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 편을 지키는 일에 익숙한 사람들은 뒤로 물러서는 일만 챙기고, 책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앞서는 일은 애써 외면한다. 노자나 장자나 모두 문명 부정론자가 아니다. 철저한 문명론자다. 다만 다른 또 하나의 문명을 주장할 뿐이다. 문명 비판을 문명 부정으로 바로 끌고 갈 일이 아니다. 문명 비판이 문명부정에서 멈추지 않고 다른 또 하나의 문명을 초청하는 힘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보통 대립된 두 면 가운데 하나를 취하는 데 익숙하다. 이 쪽 아니면 저 쪽을 택하면서 상대방에게도 그러기를 은연중에 강요한다. 한 쪽을 택한 후, 그것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을 순수하고 절실하고 진실한 삶의 태도로 여기기도 한다. 이단이나 극단적 근본주의는 다 이런 곳에서 성장한다. 하지만 두면을 동시에 장악하거나, 두 면 사이의 경계에 처하지 않으면 전면적 인식이나 진보적 삶은 구현되지 못한다. 이것을 부정하다가 저것에만 빠지는 것은 부정의 고착화다. 지속 부정을 통해 부정을 살아있게 해야 한다. 그것이 성숙한 이탈이다. 한 쪽을 택하면 과거에 박히고, 경계에 서면 미래로 열린다. 한 쪽을 택하면 이념화되기 쉽고, 경계에 서면 생산적인 효과를 낸다. 한 쪽을 택하면 얼굴에 짜증기가 새겨지고, 경계에 서면 밝고 환해진다.서강대 철학과 교수·건명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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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5.23 23:02

이춘석 더불어민주당 신임 사무총장 "압도적 지지 전북도민 기대에 부응 공약이행 최선"

더불어민주당 이춘석 국회의원이 지난 15일 당내 사무총장에 임명됐다. 사무총장은 당의 살림과 인사를 책임지는 막중한 위치다. 여기에 집권 여당이기 때문에 당청 간 가교 역할, 야권과의 협상력도 중요한 덕목으로 꼽힌다. 이 의원이 사무총장에 인선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의원은 당내에서 비주류로 분류되지만 계파색이 옅고 성품이 합리적이라는 평을 받는다. 그를 만나 집권여당 사무총장으로서의 포부와 역할 등에 대해 들어봤다.-집권 여당 사무총장이 되셨습니다.민주당이 집권여당이 된 것은 10년 만이고, 전북 출신이 여당 사무총장에 임명된 것은 거의 20년 만입니다. 여러모로 의미가 깊은 만큼 어깨가 무겁습니다. 더구나 이번 정부는 촛불민심이 만든 국민의 정부입니다. 민심을 얼마나 충실히 반영하느냐에 따라 국정 운영의 성패가 달려있습니다. 정부, 당, 국민이 수평적 주체로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정부와 국민 사이에 소통의 통로 역할을 하고자 합니다.-사무총장은 당의 살림, 인사를 책임지는 자리입니다. 임명 직후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은 무엇입니까.두 가지에 방점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는 정부의 성공을 뒷받침하기 위한 당청 간 가교 역할을 하는 것, 다른 하나는 당의 쇄신과 정비를 통해 신뢰받는 집권여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특히 당청 간 가교 역할이 중요한 과제로 보입니다.박근혜 정부에서 최순실 게이트가 발생한 이유는 여당이 청와대에 민심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청와대의 거수기, 대통령의 아바타 노릇만 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반면교사 삼아 청와대와 비판적 동반자 관계를 견지하겠습니다. 청와대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도 하지만 국민들의 쓴 소리도 가감 없이 전달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함께 야당과도 국정운영의 파트너로서 함께 갈 것입니다. 이때 여당으로서의 포용력과 유연한 협상력은 필수입니다. 어느 상황에서나 갈등은 존재합니다. 이 때 끈기를 가지고 설득하는 게 중요합니다. 정치에서 국민이 소외되지 않고, 국정운영에서 야당이 소외되지 않고, 그리고 당내에서도 소외되는 목소리가 없도록 부지런히 듣고 대화하고 설득해 나가겠습니다.-도민들의 기대가 높습니다.제게 사무총장이라는 중책을 맡긴 배경에는 문재인 대통령을 전국 최고 득표율로 지지해준 도민들에 화답하기 위한 측면도 있습니다. 집권여당의 사무총장은 정부 부처와 수시로 협의하며 정책 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정부가 정책을 원활하게 추진하기 위해서는 여당의 협조를 반드시 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문재인 대통령이 전북에 약속한 공약들이 충실히 이행될 수 있도록 저의 모든 역량을 발휘하겠습니다. 이번 정부에서 전북이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반드시 마련하겠다는 약속을 드립니다.-전남에 비해 입각 인사에서 홀대 받는다는 목소리가 나옵니다.너무 성급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문 대통령 역시 전북 도민들의 염원을 잘 알고 있고, 인사와 예산에 있어 전북을 별도 권역으로 배려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아직 임기 초반입니다. 성급하게 평가하기보다 믿고 응원해줘야 할 때입니다. 당장 장차관에 누가 가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앞으로 장차관으로 성장할 수 있는 중간관리자나 실무자급에 전북 출신이 배치되고 있는지도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여소야대 국면에서 내년 지방선거가 상당히 중요할 것 같습니다.현 정부가 향후 꽃길을 갈 것인지 자갈길을 갈 것인지는 내년 지방선거에 달려 있습니다. 어느 정권이나 임기 초반 치러지는 지방선거가 중요합니다. 여당이 승리하면 국정운영에 힘이 실려 힘차게 정책을 추진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에는 정책 추진에 동력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야당과의 협상력도 떨어지게 됩니다. 또 중앙당과 지방이 원활하게 협력을 이룰 수 있는 토대가 마련돼야 지방도 살고 중앙도 삽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중앙에서 어렵게 정책결정을 해도 지방에선 무용지물이 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문 대통령 선출로 좋은 엔진을 달았으니 지방선거 승리로 튼튼한 바퀴까지 달아주신다면 정부가 탄탄대로로 달려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지방선거 승리가 문 대통령 전북 공약 실현의 동력이 될 수 있습니까.천군만마와 같은 힘이 실립니다. 정부에 힘이 실리는 만큼 공약 추진에도 박차를 가할 수 있습니다. 이 때 중앙과 지방간의 유기적인 협력이 중요합니다. 제가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간사를 했을 때 지역을 위해 간신히 사업예산을 확보한 적이 있는데 자치단체가 거부하는 바람에 무산된 적이 있습니다. 중앙에서 아무리 예산을 주고 싶어도 지방정부가 적극적으로 사업을 발굴하거나 나서지 않으면 예산을 줄 수 없습니다. 전북의 힘찬 발전을 위해 내년 지방선거에서 우리당의 압승을 이어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개혁적이고 참신한 인재공천과 공정하고 투명한 선거관리로 도민들의 마음을 얻겠습니다.-전북도민들에게 당부 말씀이 있다면.전북도민들께서는 최고의 지지율로 문재인 정부를 탄생시킨 일등공신입니다. 도민 여러분께서 보내주신 압도적인 지지를 발판으로 인재도 키우고 예산도 부지런히 따와서 도민들께서 문 대통령과 민주당을 선택하신 것을 뿌듯해하실 수 있도록 사력을 다 할 것입니다. 항상 따뜻한 지지와 성원 당부 드립니다.● [이춘석 사무총장은] 호남 유일한 3선 의원, 대선땐 원내비서실장이 신임 사무총장은 더불어민주당 내에서는 호남 유일 3선 의원이다. 1963년 익산에서 태어나 남성고등학교와 한양대학교 법학 학사를 졸업한 뒤, 제30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1994년 익산에 1호로 변호사 사무실을 내고 무료 변론 등의 지역활동을 했으며, 원광대 법학과 겸임교수를 지내다 제17대 대선 당시 대통합민주신당 중앙선대위 조직위 부위원장직을 맡으며 정계에 입문했다.2008년 18대 국회에 입성한 뒤에는 원내부대표와 대변인을 맡았다. 법률가 출신답게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박영선박지원 의원과 함께 맹활약을 펼치며 MB정부의 천성관 검찰총장 후보자 낙마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19대 국회에서는 법사위 야당 간사, 예산결산특별위원회 간사로 활동했다. 2015년에는 국회 운영위원회 간사 직을 맡았다.20대 국회에서는 국회 남북관계개선 특별위원회 위원장,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으로 의정활동을 하고 있다. 대선기간에는 문재인 당시 후보의 원내 비서실장을 맡아 대통령 당선을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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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세희
  • 2017.05.22 23:02

[전북일보 카드뉴스] 2017 U-20 월드컵은 전주컵!

2017 U-20 월드컵은 전주컵!#표지.2017 U-20 월드컵은 전주컵!#1.2002년, 붉은 물결이 거리를 가득 메우던 전주.(2002년 6월 25일, 월드컵 준결승 대한민국 대 독일 경기 당시 거리응원이 펼쳐지던 전북일보 앞 사거리 모습)#2.아시아 최강 전북 현대 모터스가 있는 축구 도시 전주가 다시 뜨거워집니다.#3.FIFA U-20 월드컵 코리아 2017, 5월 20일 전주에서 개막합니다.#4.24개 팀, 504명의 쟁쟁한 선수들이 오는 6월 11일까지 23일 동안 겨뤄 세계 최강을 가립니다.<조 편성 표>A조: 대한민국, 기니, 아르헨티나, 잉글랜드B조: 베네수엘라, 독일, 바누아투, 멕시코C조: 잠비아, 포르투갈, 이란, 코스타리카D조: 남아프리카공화국, 일본, 이탈리아, 우루과이E조: 프랑스, 온두라스, 베트남, 뉴질랜드F조: 에콰도르, 미국, 사우디아라비아, 세네갈#5.전주에서는 20일 오후 4시 30분, 숙명의 라이벌 아르헨티나 대 잉글랜드의 A조 경기를 시작으로#6.같은 날 오후 8시 대한민국 대 기니,#7.23일 오후 5시 잉글랜드 대 기니,#8.23일 오후 8시 대한민국 대 아르헨티나의 경기가 이어집니다.#9.28일에는 E조 온두라스 대 베트남 경기(오후 3시)와 F조 세네갈 대 에콰도르의 경기(오후 6시)가 열리죠.#10.31일에는 A조 1위 팀과 C/D/E조 3위 팀이 맞붙습니다. 대한민국이 A조 1위를 차지하면 전주에서 한 번 더 볼 수 있어요.#11.그대로 4강까지 진출하면 6월 8일 오후 8시에 열리는 준결승전에서 또 볼 수도 있죠!#12.전주에서는 또 6월 4일 오후 8시에 제37경기(B조 1위 vs A/C/D조 3위)와 제44경기(F조 1위 vs E조 2위)의 승자끼리 맞붙는 8강 경기도 열립니다.#13.1983년 멕시코에서 이룬 대한민국 U-20팀의 4강 신화, 이번에 안방에서 재현할 수 있을까요?#14.전주가 그 시작입니다./기획 신재용, 구성 권혁일, 제작 이권중

  • 기획
  • 전북일보
  • 2017.05.19 23:02

[전북일보 카드뉴스] <임을 위한 행진곡>과 '비정상의 정상화'

#표지.<임을 위한 행진곡>과 비정상의 정상화#1.[사랑도 명예도]1980년 5월. 신군부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잔혹하게 짓밟았다.#2.[이름도 남김없이]1982년 2월 20일.1980년 5월 27일 계엄군의 총에 맞아 산화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열사와 들불야학에서 활동하다 1979년 세상을 뜬 노동운동가 박기순 열사의 영혼결혼식.#3.[한평생 나가자던]백기완 선생의 시 <묏비나리>를 바탕으로 황석영 작가가 지은 가사와 김종률 작곡가가 지은 곡이 붙어, 이 결혼식을 위한 노래 한 곡이 완성됐다.#4.[뜨거운 맹세]제목은 <임을 위한 행진곡>.#5.[동지는 간데없고]1997년, 518이 국가기념일로 공식 지정되면서 매해 기념식에서 공식 제창됐다.#6.[깃발만 나부껴]그러다 이명박 정부 2년째였던 지난 2009년 합창으로 바뀌면서 민중은 공연의 구경꾼이 되고 말았고,#7.[새날이 올 때까지]심지어 2010년엔 잔칫집에나 어울릴 <방아타령>을 연주하려는 시도도 있었다.#8.[흔들리지 말자]국가보훈처 <임을 위한 행진곡> 기념곡 지정은 물론, 제창으로의 변경도 불가(2016년 5월 16일)#9.[세월은 흘러가도]지난겨울, 거리를 수놓은 촛불들.#10.[산천은 안다]촛불로 이룬 탄핵과 정권교체. 그리고 제창을 막아 왔던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은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11.[깨어나서 외치는]9년 만의 비정상의 정상화.#12.[뜨거운 함성]올해 518 기념식에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다시 제창할 수 있게 됐다.#13.[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전주 관통로에서 열린 촛불집회 모습)#14.[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전북대 故 이세종 열사 추모비 앞에서 열린 추모식)/기획 신재용, 구성 권혁일, 그림 이권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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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17.05.17 23:02

[부안군 보안면] 유형원 '반계수록' 완성한 곳…군인 출신 많아

부안군 보안면은 뿌리 깊은 역사를 지닌 곳이다. 우선 보안(保安)이라는 이름 자체가 1077년이나 됐다. 고려 태조 23년(940년)에 보안현이 생겼고, 보안현은 이후 조선 태종 16년(1416년)에 부령현과 합쳐지며 부안진이 됐다. 1895년 부안진이 군(郡)으로 승격하면서 보안현의 옛 이름을 그대로 살린 오늘날의 보안면을 뒀다.보안면은 조선 중기의 실학자 반계 유형원이 반계수록을 완성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서울 사람인 반계가 이곳에 들어온 곳은 9대조인 유관의 사패지(왕이 큰 공을 세운 신하에게 내린 땅)가 부안현 우반동(오늘날에는 우동리라고 불림)에 있었기 때문이다. 반계라는 아호도 마을을 가로지르는 시냇물의 이름에서 따왔다. 반계는 32세 때 이곳에 들어온 뒤 우반동 산자락에 반계서당을 짓고 학문 활동과 제자 양성에 몰두했다. 반계는 이곳에서 벼슬에 나가지 않고 평생을 살면서 이상향을 건설하고자 학문연구에 전념했다. 우리나라 실학사에 길이 남을 반계수록 26권은 근 20년에 걸쳐 집필된 것으로 영조 46년(1770년) 왕의 특명에 의해 간행되어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농촌을 부하게 하고 민생을 넉넉하게 할 그의 여러 가지 주장과 사상은 이익, 안정복, 정양용 등에게 이어져 훗날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으로 발전했다.보안면은 또 고려 중기의 가마터인 유천리(현 외포리) 청자도요지가 있는 곳이다. 넓은 벌판의 구릉 주위로 40여개의 가마터가 널려 있는데, 11~14세기의 뛰어난 순청자와 상감청자는 물론 고려백자, 상감백자, 진사백자, 1m 이상의 매병 등이 출토되었다. 유천리는 전남 강진 지방과 함께 우리나라 청자의 대표적인 제작지로 알려져 있다. 국가사적 제69호인 유천리 도요지의 복원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지난 2011년에 부안청자박물관이 문을 열었다.이 밖의 역사문화 자원도 풍부하다. 부안김씨 종중의 400~500년 된 문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연구에 필요한 문서들로 6종 80점이 보물 900호로 지정돼 있다. 또 월천리 석장승은 환웅과 단군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만들어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희귀한 유형이어서 전북도 민속자료 30호로 지정돼 있다.△군정계보안이라는 이름의 영향인지 군 출신이 많다. 고명승씨(82)는 육사 15기 출신으로 전두환 정권 시절에 수경사령관, 보안사령관, 3야전군사령관 등을 지내고 대장으로 예편했다. 이후 14대와 15대 총선 때 부안에서 여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동생인 고진석씨(80)는 육사 출신으로 한미연합부사령관을 지냈으며 소장으로 예편한 뒤 비어콤광고 대표이사를 거쳐 BYC 대표이사 사장을 맡고 있다. 육사 30기인 임원택씨(63)는 준장으로 예편했다.하석교 출신의 심재옥씨(57)는 해군사관학교 38기 출신으로 해군대학을 졸업하고 영국 국방대학원 정규과정을 수료했으며, 제6항공전단장을 끝으로 준장으로 예편했다.△관계이명수씨(66)는 행정고시 출신으로 농림부 차관을 거쳐 주 덴마크 대사관 대사, 농협중앙회 사외이사 등을 지냈다.허동일씨(고인)는 정읍과 부안, 진안 군수를 지냈으며, 전북도의회 허남주 의원(55)이 그의 여식이다.신진하씨(83)는 전북도정책보좌관, 김제군수, 전주 완산구청장 등을 지냈고, 윤태섭씨(72)는 전주 덕진구청장과 전북도립국악원장을 지냈다. 또 청와대에는 김남철 행정관(53)이 근무하고 있으며, 전북도 임노욱 탄소산업과장과 한동일 새만금국제협력과장도 보안면 출신이다. 이현근씨는 부안보건소장을 지냈다.△문화예술체육김오성씨(71)는 중졸 학력이지만 독학으로 석조(石彫)를 익혀 미술계에 큰 파문을 일으킨 인물이다. 73년 제23회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남자 좌상인 변산반도로 특선한 데 이어 83년에는 국전 초대작가가 되었다. 금구원은 농민교육운동을 했던 선친이 농민학교로 조성하려던 변산에 있으며 그 곁에는 국내 첫 개인천문대도 갖추고 있다.김기찬씨(56)는 1994년 〈자유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으며 전북시인상을 받았다. 전주를 무대로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최효주씨는(21) 2015년 포항스틸러스에 입단한 공격수이다.△봉사경기도 용인에서 서전농원을 운영한 김병호씨(75)는 집에 먹을 것이 없어서 열여섯 살에 무작정 상경한 뒤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2006년 부안군에 나누미 근농장학금 10억 원을 종잣돈으로 출연해 오늘날 부안군이 전국에서 최초로 반값 등록금을 실현하는데 기초를 놓았다. 또 2009년에는 평생 동안 모은 300억원을 카이스트에 기부했으며, 뒤이어 그의 부인 김삼열씨도 카이스트에 50억 원을 추가로 기부했다.김가선씨(고인)는 일제때 우동제를 막는데 앞장섰던 분으로 알려졌으며, 70년대 초반 민주공화당 이병옥 국회의원의 심복으로 보안중을 설립하는데도 기여한 인물이다.△학계전북도골프협회장을 맡고 있는 전북대 강종구 교수(61)와 전주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를 지낸 전주대 김종국 교수(65), 그리고 전북대 농학과 교수를 지낸 구자경씨 등이 있다.△기타분야재계 인물로는 JTV 전주방송의 대주주인 일진그룹 허진규 회장(77)이 있다. 허 회장은 68년 일진금속공업, 82년 일진경금속을 설립했으며, 2010년에는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조직위원장을 지냈다.김태철씨(56)는 공안통의 부장검사 출신으로 법무법인 동인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김종훈씨(57)는 전라북도 근대5종연맹 회장과 한나라당 전북도당 대변인을 거쳐 한국농어촌공사 상임감사를 지냈다.보안과 줄포, 진서농협이 통합해 탄생한 남부안 농협에서는 최우식씨와 고석진씨가 조합장을 지냈다.- 다음 회에는 군산시 대야면 편이 이어집니다

  • 기획
  • 이성원
  • 2017.05.16 23:02

전주 찾은 청문회 스타 주진형 전 한화투자증권 사장 "한국, 진짜 지방자치 해본 적 없어…권력 분권화 중요"

주진형 전 한화투자증권 사장(58)은 복지제도가 강화돼야 진정한 시장경제체제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개혁론자다. 그는 중앙이 예산을 틀어쥐고 내려 보내는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지방분권은 공허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경제 알아야 바꾼다 북콘서트를 위해 최근 전주를 찾은 그를 만나 지역경제에 관한 그의 철학과 삶에 대해 들어봤다.-서울에 이어 경제 알아야 바꾼다 북콘서트 장소로 전주를 선정하셨는데 전북과의 인연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저는 줄곧 서울에서 나고 자라 미국에서 청년기를 보냈지만, 전주와 인연이 깊은 편이죠. 부안출신인 아버지는 전주고등학교를 정읍출신인 어머니는 전주여고를 졸업하셨습니다. 집안뿌리가 전북에 있는지라 현재도 많은 일가친척들이 전주에 살고 있습니다. 또한 산업화 시대 심하게 소외됐던 전북은 경제 알아야 바꾼다의 주제와도 밀접한 곳입니다. 중앙에 비정상으로 치우친 한국경제구조를 전북도민들이 알아야 불합리한 구조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국정농단 사태에서 우리 국민들이 보여줬던 시민의식에서 저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느꼈습니다.-재벌총수들을 앞에 두고 재벌은 조폭과 같다는 사이다 발언으로 청문회 스타가 되셨습니다. 청문회 이후 자신의 삶에 바뀐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알아보는 사람들이 조금 더 늘어난 것 빼면 없다고 봅니다. 저는 기업에 있을 때부터 왜 사람들이 재벌을 특별한 존재로 보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사실 지금 재벌들은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의 경영권을 물려받은 것이지 그들에게 딱히 내세울 만한 업적이 있던가요. 자신의 이익을 위해 기업을 사유화 시키는 행태가 꼭 조폭과 비슷하다고 봤고, 평소 생각했던 것을 그 자리서 말했을 뿐입니다.-이번 책을 보면 우리나라 거버넌스 구조에 대한 비판이 많습니다.우리나라 대부분의 문제는 조직 간의 원청-하청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이 많습니다. 지방분권도 이와 비슷합니다. 청와대와 중앙정부부처는 원청, 지자체는 하청취급을 받고 있죠. 실제 지역발전을 위해 일하는 곳이 지자체임에도 불구하고 자치권은 많이 인정되지 않고 있어요. 민주사회는 선거만해서 이뤄지지 않습니다. 정치권에서는 항상 지방분권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지방분권화를 어떻게 할 것이냐가 불명확해서 문제입니다. 스웨덴 같은 경우 걷은 세금을 지방정부가 먼저 가지고 남은 돈을 중앙정부에 넘깁니다. 그러나 한국은 반대죠. 중앙정부가 거의 징수해서 지방에 다시 뿌려줍니다. 정부정책에서 지역이 소외될 수밖에 없는 구조죠.-전북의 지역경제가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앞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예산배분과정 개혁에 대한 논의가 중요하겠군요.맞습니다. 사실 우리나라는 진짜 지방자치를 해본 적이 없으니 제대로 지방분권을 추진하자고 하면 두려움부터 느낍니다. 이것은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쳐 중앙집권화 체제 역사가 깊게 배어있기 때문입니다. 지역에서 모은 재원에 대한 쓰임은 그 지역 사람들이 정해야 합니다. 저는 한국에 아직도 일본 군대식의 중앙집권화된 조직운영이 우리사회에 그대로 남아있다고 봅니다. 권력의 분권화가 이뤄지지 않고선 성장동력도 작용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민주주의라면 국민의 의사가 위로 올라가야 하는데 아직까지는 그런 점이 많이 부족합니다.-투자업계의 대표로 있던 시절 단행한 구조조정에 대해 논란이 많았습니다. 진보적 철학과도 배치된다고 공격당하기도 하셨고요.제가 사장으로 있을 당시 한화투자증권은 적자가 심각한 상태여서 구조조정이 불가피했습니다. 위기에 처한 기업이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반발이 큽니다. 사회안전망이 취약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 노동시장은 경제 독과점구조와 맞물린 대기업 노동자들의 이기주의로 더욱 경직돼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경직성을 이야기해도 당장은 엄청난 반발에 시달립니다. 이는 사회신뢰구조는 물론 복지문제와도 결부돼 있다고 봅니다.-500조가 넘는 국민연금의 사용방법이 잘못됐다고 주장하셨는데.국민연금 제도가 시작된 지 30년이 지났는데도 현재 노인빈곤문제에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처럼 연금을 내지 않은 노인들에게도 혜택이 돌아가도록 설계했어야 합니다. 국민연금의 설립목적에도 그게 맞는 것입니다. 국민연금은 560조의 기금을 쌓아뒀다고 자랑하고 있지만, 이게 사실 국가가 재벌을 이용하는데 활용되고 있다는 것이 이번 국정농단사태에서 드러났습니다. 500조가 넘는 돈을 쌓아두고도 노인빈곤을 방치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연금고갈에 대한 공포와 노인세대에 더 많은 돈을 주는 것에 대한 젊은 세대의 반발도 있습니다.7080세대는 한국경제 성장의 주역입니다. 너무 많은 것을 희생해왔어요. 특히 자식세대를 위해 우리나라 교육에 투자한 바도 큽니다. 이것은 보수진보 이념 문제가 아닌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빈곤에 빠진 고령층을 내버려 둔다는 것은 경제발전에도 악영향을 끼칩니다. 국민연금의 근본적인 목적은 노년층의 빈곤을 막기 위해섭니다. 이들이 배우지 못해 정치적 시민의식이 낮은 것과 이들의 빈곤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혼동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안타깝습니다. 이런 점이 바로 제가 한국의 연대의식이 약하다고 말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이번에 펴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셨는데,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신지요.없습니다. 원래 뚜렷한 계획없이 사는 스타일입니다. 제가 금융업계 비즈니스맨으로 산 것도 우연한 계기였고요.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 같아요. 그래서 저를 잘 아는 주변사람들은 백수되기 딱 좋은 성격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책을 낸 것도 어쩌다 진행하게 된 팟캐스트의 대화를 보완해서 엮은 것이죠. 자유롭게 움직이다 저를 필요로 하는 곳에 제가 하고 싶은 일이 있지 않을까요.● [주진형 전 사장은] 재벌경제 폐해 지적, 대표적 진보 지식인주진형 전 사장의 부친은 부안출신의 경제학자 주종환 전 동국대학교 명예교수다. 농업경제학자인 그는 1970~80년대부터 토지공개념을 공론화하고 재벌 중심 경제의 폐해를 지적한 대표적인 진보지식인으로 꼽힌다.주 전 사장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정치, 경제,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폭넓게 듣고 자랐다고 한다. 주 전 사장의 취미는 농담반 진담반으로 경제정책 만들기인데, 그는 그런 자신을 경제정책 공상가라고 소개했다.주 전 사장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후 세계은행에서 컨설턴트로 일하던 도중 존스 홉킨스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한국에 돌아온 그는 삼성증권 전략기획실장과 우리투자증권 리테일 사업본부장 등을 거쳐 한화증권 사장에 부임했다. 삼성그룹 출신 인사임에도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증권사 중 유일하게 합병에 반대 보고서를 낸 인물이기도 하다.증권업계의 돈키호테, 구조조정 청부사 등의 별명이 있다. 특히 주 전 사장은 한화 김승연 회장 바로 뒤에 앉아우리나라 재벌들은 기본적으로 조직폭력배들이 운영하는 방식과 같다는 발언을 하면서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그는 자신이 낸 책 경제 알아야 바꾼다가 조금이나마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사회를 만드는데 쓰이길 바란다고 말했다.

  • 기획
  • 김윤정
  • 2017.05.15 23:02

[철의 궤도: 전라선 철길 답사기 ⑤ 송천역·전주역·아중역] 철도, 이제는 도시 외곽을 감싸고

주변 풍경이 달라졌다.한참 평야를 가로지르던 철길은 도심으로 파고들기 시작한다.시선을 맞이하는 것은 건물의 숲.수탈을 위한 농업철도였던 모습은 더는 찾아보기 어렵다.전주 팔복동을 지나 송천동에 이르면, 철길은 지상의 차량과 사람들을 피해 그 아래로 내려간다.도시는 그 위로 꿈틀꿈틀 그 몸집을 불려간다.흔적도 없는 <송천역>부활은 올까콘크리트로 된 성채가 보였다. 아직 유리창도, 페인트 옷도 없이 콘크리트 살갗 그대로를 보이고 있는 그 건물들은 그러나 위용만큼은 대단했다.옛 육군 제35사단이 있던 자리에 조성되는 전주의 신도시 에코시티가 슬슬 그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에코시티를 포함한 전주 북부 지역으로 넘어가려면 다리를 건너야 한다. 다리 밑으로 흐르는 것은 전라선 철길. 1981년 도심에서 쫓겨나 당시 전주 시가지 최외곽을 빙 두르는 경로로 다시 놓인 이래 36년, 이제는 다시 도심 안으로 들어올 예정인 그 철길이다.전주시 송천동에는 송천역 사거리라는 지명이 있다. 원래는 송천역 삼거리였던 이 지명이 증명하는 것은 송천역이라는 것이 있었다는 사실.그러나 송천역과 관련한 어떤 흔적도 이제는 찾을 수 없게 된 지 오래다. 취재팀이 찾은 지난 4월 28일, 송천역이 있던 자리에는 전라선 철길을 넘어가는 과선교와 송천변전소 공사장이 있을 뿐이었다.1981년 5월 25일 전라선이 전주 외곽으로 이설되면서 송천역도 문을 열었다.덕진 시외버스 간이터미널 자리에 원래 있던 덕진역이 선로 이설로 폐지되면서 그 역할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인데, 통근열차 수요는 나쁘지 않아서 지난 2007년 철도통계연보를 보면 그해 송천역에서 1만4480명이 열차를 타고 6826명이 내려 총 2만1306명이 이 역을 이용했다.이것은 1만8801명을 기록한 군산선 대야역보다 높은 실적이고, 군산-전주 간 통근열차 정차역 가운데서는 익산, 전주, 군산, 삼례 다음이다. 사실상 전북의 간이역 가운데서는 가장 붐볐다고 볼 수 있겠다.그러나 통근열차가 폐지된 2008년부터는 그저 전주 북부의 자리만 차지하는 건물 정도의 처지가 돼 버렸고, 결국 전라선 복선전철화와 에코시티 개발과 맞물려 2010년께 철거됐다. 정식으로 폐지되며 그 길지 않은 생을 마감한 것은 2011년의 일이다.하지만 또 앞일은 알 수 없는 것이 세상일.전북도가 제안한 전북권 광역전철망이 현실화하면 송천역이 에코시티를 등에 업고 부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오늘을 사는 역<전주역>전주역 앞 첫 마중길 조성사업이 막바지였다. 전주역을 등지고 다소 어수선한 풍경을 지켜보고 있자니 마치 새로운 도시의 탄생을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었다.신호가 청색으로 바뀌고 버스와 자가용들이 앞을 다퉈 바삐 제 갈 길을 가는 통에 이리저리 흙먼지가 휘날린다.지난 4월 28일 낮 1시, 머리 위로 내리쬐는 다소 강렬한 봄볕을 피해 역사 안으로 들어섰다.대기실에서는 남녀노소가 의자에 앉아 스마트폰이나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대선 관련 뉴스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이제 막 기차에서 내린 듯 한옥마을부터 가자며 잔뜩 들떠 이야기를 주고받는 20대 여행객들은 결국 가위바위보를 하더니 택시 승강장 쪽으로 사이좋게 발걸음을 옮겼다.어디를 가든 줄이 길게 늘어서는 여자 화장실, 전주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KTX 열차가 두 편 연달아 서는 시간대였다. 길게 늘어선 줄, 발을 동동 구르는 마음도 전해진다.지하통로를 걷자 시원한 바람이, 기차를 타려면 이쪽으로 오라는 듯 살랑거렸다.남원에서 전주로 치과 진료를 받으러 왔다는 한 승객은 아들이 완주 봉동에 사는데, 역으로 마중 나오기로 했다며 빙그레 웃었다.의자에 앉아 서류가방을 책받침 삼아 독서를 하고 있던 변호사 김도형 씨(55)는 오늘 오전에 전주에서 재판이 있어서 출장차 들렀다가 다시 순천으로 간다며 편하고 안전한 데다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어 기차를 애용한다고 말했다.전주역을 통해 출장길에 오른 사람은 그뿐이 아니었다. 박식 씨(48)는 용산으로 가는 KTX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교통체증 없이 시간 맞춰서 갈 수 있어서 열차를 자주 이용한다면서 KTX 운행 횟수가 부족하다는 점이나 SRT가 안 들어온다는 점이 아쉽다고 말했다.교복 차림인 이도 보였다. 중학생인 황현우 씨는 주말을 맞아 광주의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전주에서 광주까지 직통으로 갈 수 있는 철도 노선이 없으니 익산으로 가서 갈아타야 한다고.그럼에도 굳이 철도를 이용하는 이유는 터미널이 집에서 멀기 때문이란다.한편 음료자판기 쪽에서는 모녀 한 쌍이 다정하게 서로를 바라보며 간식을 나눠 먹고 있었다.여수로 여행 가요. 기차여행은 오랜만이라 기분이 좋네요.1914년 이리-전주 간 경편철도 종착지로 처음 문을 연 전주역은 원래는 이곳 우아동에 있지 않았다.상생정, 지금의 태평동에서 출발한 전주역은 1929년에 지금의 전주시청 자리로 옮겨졌는데, 이때 전주지역 주민들의 건의에 따라 기와지붕을 얹은 한옥 양식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그 모습은 지금의 전주역 건물과 모양이 상당히 비슷한데, 콘크리트로 지어진 지금의 전주역보다는 한옥 느낌이 훨씬 강하다.물론 전라선 연선 도시 중 가장 큰 도시인 전주의 중심에 있다 보니 자연스레 이용객이 몰렸다. 전주역사(史)에 따르면 1980년 전주역 승차 인원은 180만여 명, 하차 인원은 173만여 명. 합이 350만(철도통계연보 기준으로는 승하차 합계 421만 6841명)이 넘는 엄청난 수요였다.그러나 도심을 가로지르는 철길은 도시 확장을 가로막는 장벽이었고, 그래서 1981년, 전라선은 전주 외곽으로 쫓겨난다. 지금 우아동에 서 있는 전주역은 그때 세워진 것이다.노송동 시절보다 역사는 커졌지만, 이설 개통 다음 해인 1982년 기록을 보면 전주역 승차 인원은 76만여 명, 하차 인원은 77만여 명 수준으로 폭락했다.세월이 지나고 백제대로가 깔리고 6지구도 개발되고 전라선에 KTX도 들어오면서, 그리고 전주가 내일로 성지 중 한 곳이 되면서 전주역은 옛 위상을 되찾는다.지난 2015년, 전주역을 이용한 인원은 모두 255만8479명이었다. KTX 이용객 90만8817명이 포함된 숫자다.지난 3월, 전북도는 2017년을 전북방문의 해로 선포했다. 전주역은 외지 관광객들이 전주라는 도시에 첫발을 내딛는 관문이자, 이곳 주민들이 다른 지역으로 향하는 통로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페달을 밟아라!<아중역>전주 동부대로를 타고 전주역에서 남동쪽으로 달리다 보면 왼쪽에 이제 슬슬 산 비슷한 것이 발을 뻗기 시작하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그 앞엔 누런 타일이 붙어 있는 건물이 서 있다.볼록할 철(凸)자 모양으로 된, 전형적인 1980년대 역사. 1981년 5월 25일 전라선이 이설 개통될 때 지어진 건물이다. 역사만 새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원래 없던 역이 새로 태어난 것이다.아중역은 언덕 위에 서서 삼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은 역사의 정면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역 광장이라 할 만한 것이 정면에 있지 않고, 또 취재팀이 찾아간 4월 28일에는 시티 가든 조성 사업이 한창이어서 역사 정면이 접근 불가 상태였기 때문.2008년 여객 취급이 중지된 뒤 2011년 5월 9일 복선전철 전라선이 개통되면서 송천역과 함께 폐역된 아중역은, 그러나 복작복작하니 활기가 넘쳤다. 접근 불가의 정면이 아니라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뒷면의 모습이었다.한 시간에 세 번, 이곳에서는 열차가 출발한다. 기관차는 따로 없이, 사람이 발로 페달을 밟아 굴리는 차량이다. 지난 2016년 운행이 시작된 전주한옥레일바이크다.레일바이크 차량이 줄지어 서 있는, 옛날에는 사람들이 진짜 열차를 기다렸을 플랫폼 자리 너머로는 전라선 철도가 지난다.방음벽 같은 것으로 가로막혀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지대가 조금 높을 뿐이라 마치 아직도 아중역이 그 역할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도 든다. 열차는 물론 그대로 쌩- 하고 지나가 버릴 뿐이지만.매표소의 기능은 여전하다. 단지 파는 표의 종류가 바뀌었을 뿐이다. 건물 모습도 옛 모습 그대로고, 다만 건물의 북쪽 날개 부분에 카페가 하나 생긴 정도다.정작 바뀐 것은 철길이다. 분명 단선 철길이었는데, 레일바이크 전 구간이 틀림없는 복선이다. 레일바이크 운행을 위해 개량된 것이다.이 레일바이크에 별명이 하나 있어요. 고진감래라고. 처음에는 오르막이어서 조금 힘든데, 나중에는 내리막이어서 아주 편하게 탈 수 있죠.페달을 밟아보면 느낌이 생각보다 묵직하다. 그런데 또 한 번 가속도가 붙으면 훨씬 수월해진다. 신이 난다고 막 밟아대면 그건 그것대로 또 곤란하다. 제동거리를 감안해서 안전거리를 20m씩은 확보해야 한다. 선로가 상하행 한 줄씩이니, 앞차가 느려서 답답하다고 추월할 수도 없다. 이것까지 모두 철도의 특징 그대로다.그런데 실제로 타 보면 스피드 욕심이 들 겨를이 없다. 소박하면서도 가슴 탁 트이는 주변 풍경도 바라보고, 저 바로 옆 철길을 달리는 열차도 시선으로 따라가 보고, 셀카봉을 들어 인증샷도 찍고 하다 보면 그렇다.관문(?)을 지나 알록달록한 불빛이 맞이하는 터널 두 개를 통과한 뒤 턴테이블(전차대)로 방향을 바꿔 아중역으로 돌아오게 돼 있는 이 레일바이크 노선의 전체 길이는 3.4㎞.약 20분 정도가 소요되는데, 관계자의 말대로 고진감래다. 가는 길이 조금 힘들고, 돌아오는 길은 과장을 약간 섞으면 굳이 페달을 밟을 필요도 없을 정도다.위험하진 않겠죠?아유, 물론이죠. 안전하게 탈 수 있도록 만들어 놨습니다.인력 열차들은 반환점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돌아가지만, 철길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왼쪽 언덕 위 전라선 철길, 열차들은 쌩쌩 잘도 달리며 거침없이 전주를 빠져나간다.이제부터는 산지. 산악철도 전라선의 시작이다.:권혁일김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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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5.12 23:0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⑩ 특별한 장소, 동국사와 두동교회 - 우리 문화에 외래 종교 스며든 공간, 담고 있는 의미 커

군산에는 특별한 소녀상이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의자에 앉은 소녀상과 달리 꼿꼿이 서 있는 소녀상이다. 소녀상이 특별한 것은 서 있는 장소 때문이기도 하다. 일본식 사찰 양식으로 지어진 절에 일제의 위안부 강제연행을 잊지 말자는 평화의 소녀상이 건립된 것이다. 그 어디보다도 더 적절한 장소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지역에는 이처럼 역사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다른 곳에 없는 특별한 장소와 건축물들이 있다. 군산의 동국사(東國寺)와 익산의 두동교회가 대표적이다.일본 불교는 1877년 부산의 개항과 함께 일본 정부의 요청에 의해서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이것은 순수한 포교 목적이 아닌 조선을 일본에 동화시켜 식민지를 고착화 하려는 의도였기에, 그들은 1899년 5월 군산이 개항하자 기다렸다는 듯 일본식 사찰과 포교소를 설치하였다. 1909년 6월에는 일본불교 최대 종파 조동종(曹洞宗) 우치다(內田佛觀)스님이 군산의 외국인 거주지 1조통(영화동)에 금강선사(錦江禪寺)라는 이름의 포교소를 개창하였다. 이후 금강선사는 1913년 현 위치(금광동)로 옮겨와 에도시대 풍의 대웅전과 요사를 신축했고, 1955년 동국사로 개명하여 현재에 이르게 된다. 동국사가 특별한 것은 일제강점기하 전국에 세워진 일본식 사찰 500여 개 중 유일하게 남은 일본식 사찰이라는 점이다.동국사는 군산이 고향인 고은 시인과의 특별한 인연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자전적 소설 「나의 山河 나의 삶」과 「만인보」 등에는 동국사의 이름이 자주 등장하는데, 일찍이 동국사에 자주 다녔던 고은 시인은 동국사 주지 혜초(慧超) 스님의 설법에 감동하여 출가할 결심을 하게 되었고, 중장이라는 법명을 받아 스님이 되었다. 이 민족의 애환이 서린 동국사에 광복 70주년이었던 2015년에 국내에서 열한 번째로 사찰 경내에는 최초로 서 있는 소녀상이 세워지게 되었다. 일제가 당시 우리나라 소녀들을 끌고 가 종군 위안부로 삼고 고통 속에서 살게 한 역사적 사실을 상기하고 이를 후대에 알리기 위한 결정이었다.그에 앞서 2012년 9월에는 일본 불교 종단인 조동종이 과거에 행한 과오에 대한 불교적 참회와 사죄의 뜻을 담아 동국사 경내에 참사문비를 세운 바 있어 두 기념물이 함께 의미를 더하고 있다. 그밖에 동국사에는 1919년에 교토에서 만든 국내 유일의 일본 전통 양식의 종각과 국가지정 문화재 64호로 등재된 대웅전, 보물 제1718호인 군산 동국사 소조석가여래삼존상 및 복장유물 373여 점이 남겨져 있다.군산의 동국사가 일제가 우리의 불교문화에 외래문물인 일본불교를 강제로 이식하려고 했던 사례라면, 익산의 두동교회는 역시 외래 종교인 기독교문화가 당시 지배적이었던 유교문화를 거스르지 않고 우리에게 합류된 사례이다. 건물 두 동을 합해서 만든 교회라 해서 두동교회라 이름이 지어진 이 교회는, 기독교가 우리 문화 속에 들어오기 전의 유교 전통과 기독교 신식문화가 한데 어우러져 있다.두동교회가 유난히 특별한 것은 이 교회가 김제 금산교회와 더불어 두 곳에만 남아있는 ㄱ자형 교회 건물이라는 점이다.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 일곱 살만 되어도 남녀가 한자리에 같이 앉지 아니한다)이라고 하여 남녀를 구별하고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자리하는 것을 삼갔던 당시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예배드리는 장소를 남녀가 분리되는 두 공간으로 구분한 두 개의 동을 합쳐 교회를 ㄱ자형으로 만든 것이다. 일종의 현지 토착형 선교라고 할 수 있는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통하여 우리나라의 문화와 자율성을 존중하였을 뿐 아니라 독창성까지 돋보이는 건물인 것이다.1929년 세워진 두동교회는 두 축의 중심인 강단에서 바라봤을 때 오른편인 동서 측에는 여자들만, 왼편인 남북 측에는 남자들만 앉을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더욱이 똑같은 ㄱ자형 건물이라도 남자가 앉는 공간이 더 길게 지어지고 강단도 남자석을 바라보고 있는 김제의 금산교회와 다르게 두동교회는 강단이 중심에 설치되어 있고 남녀공간이 똑같은 크기로 지어져 더욱 의미가 크다. 남녀의 공간을 분별하는 우리 문화를 존중하면서도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대했던 기독교적인 사상이 담겨 있는 것이다.두동교회의 건립 사연도 특별하다. 이 고장에 박재신이라는 큰 부자가 있었는데, 그에게는 대를 지을 자식이 없던 것이 유일한 걱정거리였다. 익산시 성당면의 선교사였던 해리슨(William B. Harrison, 하위렴)은 박재신의 어머니와 아내를 전도하며, 교회에 다녀야 집안이 복을 받고 자식도 얻을 수 있다고 말했고, 이에 박재신의 아내는 3㎞ 넘게 떨어진 이웃 마을로 예배를 다니게 되었다.처음에 박재신은 집안 여자들의 교회 출입을 반대했지만 부인이 임신하게 되자 아예 자기 집 사랑채를 예배당으로 내놓았고, 1923년 5월에는 구연직 전도사와 첫 예배를 드리며 두동교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후 박재신의 소작인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교회에 나오면서 1년새 교인이 80명까지 증가하였고, 두동교회는 박재신이 곳간으로 쓰던 고패집(ㄱ자형) 창고에 마루를 깔고 예배 처소를 넓히기까지 하였다.그러나 1929년 박재신의 아들이 어린 나이에 죽게 되면서 박재신의 마음이 급변했고, 교회로 사용하던 자신의 집을 모두 비우라고 명하였다. 박재신의 눈치를 봐야 했던 교인들의 대부분이 교회를 떠났지만, 이 중 20여 명의 사람들이 남아 교회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남은 신자가 채소밭 100평을 내놓았고, 마침 1929년 6월 소나무를 실은 배가 침몰하여 배에 실려 있던 소나무들이 두동리 근처 성당포구까지 떠내려온 덕에 적은 돈으로 목재를 구매하여 현재의 예배당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우리 문화에 외래종교가 이식된 동국사와 외래종교에 우리 문화가 자연스럽게 깃든 두동교회 두 곳을 차례로 둘러보며 우리가 그저 무심코 지나치는 다른 건물들에도 외향만이 아닌 그만의 역사와 문화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된다. 특히 말없이 동국사 경내를 응시하는 소녀상의 모습에서 아직도 아물지 않은 민족의 아픔과 당시 고통 속에서 희망을 바라보던 소녀의 마음이 전해져 온다.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촛불로 뭉친 국민의 염원으로 세워진 새 정부는 일그러진 역사를 바로잡고 지난 과오들을 다시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작게는 우리 주변 곳곳에 새겨진 역사의 흔적들을 되돌아보고 정리하는 것으로부터 역사를 바로 세우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 오월 푸르른 날, 새 정부의 성공을 기원하며 동국사와 두동교회로 특별한 나들이를 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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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5.12 23:02

[전북일보 만화뉴스] 신세기 데모크라틱 포뮬러

신세기 데모크라틱 포뮬러#표지.신세기 데모크라틱 포뮬러#1.부아앙-(서킷에서 앞서서 달리고 있는 자동차)#2.(힐끔 사이드미러를 바라보는 문재인)훗, 이 정도면 제가 대세지요?#3.기호 1번 문재인/더불어민주당/64세대표 공약 일자리를 책임지는 대한민국대표 전북 공약 전북 농생명 수도 조성#4.(가속 페달을 밟는 안철수)마지막 한 바퀴 챔피언 될 사람 누굽니까?!!#5.기호 3번 안철수/국민의당/55세대표 공약 튼튼한 자강안보를 토대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계 구축대표 전북 공약 백년먹거리 첨단 농식품 산업 육성#6.(바로 앞 안철수를 맹추격하는 홍준표)!@!#^$@$@$ 삐- @$^#!! 삐- #%@$^@#&^%#@!!(자체 심의에 의한 처리입니다)#7.기호 2번 홍준표/자유한국당/62세대표 공약 강한 안보 강한 대한민국대표 전북 공약 새만금 무규제특구 지정, 기업투자 대거 유치#8.(위에서 바라본 경주 서킷, 앞의 세 차량 뒤로 노란 차량 한 대가 무서운 속도로 추격하고 있다.)#9.(선글라스를 끼고 누아르 풍의 얼굴을 한 심상정)홍 후보님, 운전 그렇게 하지 마시고요 노동권은 헌법에서 보장된 권리입니다!#10.기호 5번 심상정/정의당/58세대표 공약 일생활 균형 실현과 여성경력단절 방지대표 전북 공약 전북에 전국 로컬푸드 육성 전문기관 설립#11.(자전거를 몰고 힘겹게 따라붙고 있는 유승민)저는 저 유승민은 완주합니다!#12.기호 4번 유승민/바른정당/59세대표 공약 아이 키우고 싶은 나라를 만들겠습니다대표 전북 공약 새만금특별회계 및 특별행정구역 지정#13.(뒤따라 달리고 있는 기타 후보들 모습)#14.와-! 와-!(환호하는 관중)#15.(레이서들을 향해 소리치는 관중들)핸들을 왼쪽으로!!오른쪽! 오른쪽!기어 바꾸세요!!(卜자 표시가 찍혀 있는 깃발이 휘날리는 모습)#16.(결승선 모습)5월 9일#17.(결승선 너머, 卜자 표시가 찍혀 있는 티셔츠를 입고 당당한 자세로 있는 다양한 사람들)/기획 신재용, 취재 김세희, 구성 권혁일, 그림 이권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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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5.08 23:02

취임 100일 김형수 중소기업진흥공단 전북본부장 "산업화 때 소외됐던 전북, 성장동력 잠재력 커"

전북은 물론 국내외를 둘러싸고 있는 경제 환경이 저성장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도내 중소기업계 사정이 앞으로 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중소기업진흥공단 전북지역본부장 부임 100일 째를 맞는 김형수 본부장(55)은 올해 우리 중소기업은 오랜 세계 경기침체와 저성장 등 악재로 전에 없던 위기와 도전에 직면할 것이라며 4차 산업혁명에 맞춘 중소기업 육성이 전북지역경제의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김 본부장은 내수위주 기업을 수출로 유도하고 수출기업에는 해외 판로 지원으로 중소기업에 새로운 활로를 열어주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전북의 강점을 살려 도내 중소기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그를 만나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들어봤다.-전북 근무가 처음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00여 일간 이곳에서 본부장으로 근무하신 소감은.전북에 오기 전 1년 6개월간 전남지역본부장으로 근무했습니다. 지역산업 현황이나 중소기업들의 성향이 다르기는 하지만, 호남에서 두 번째 지역본부장을 하게 된 터라 낯설지 않았습니다. 특히 저와 가까운 지인들 중에는 전북출신들이 많습니다. 저와 전북은 인연이 많은 곳이지요. 전북은 각종 경제지표나 산업구조가 취약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탄소융합산업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고, 농식품업을 중심으로 국가식품클러스터 기반 K-Food허브 도약, 삼락농정의 농축산 6차 산업화, 전북방문의 해를 맞은 체험관광산업 등 전북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산업을 중심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을 직접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시점에 전북지역본부에서 일하게 되어 더욱 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전북에 와서 보신 우리 지역 중소기업의 강점을 비롯해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전북이 상대적으로 타 지역에 비해 산업구조가 취약하고 영세 중소기업 비율이 높은 지역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IMF 금융위기 이후 수차례의 경제 위기 속에서도 잡초 같은 생명력을 가지고 이겨낸 강소기업들도 많습니다. 대기업이 타 지역 대비 현저히 적어 안정적인 판로를 가진 중소기업이 적다는 것이 약점이 될 수도 있지만, 어려운 기업환경 변화에의 대응력 내지 유연성이 높은 것은 강점이 될 수 있습니다. 한 예로 전북지역 산업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농업의 6차 산업으로의 발전 프로세스를 통해 우리는 이미 확인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간 산업화 시대에 소외돼왔던 지역 환경이 오히려 전북 성장 동력의 잠재력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많은 중기 관계자들을 만나시는데, 어떤 요청이 가장 많은지요.자금 조달과 인력 문제에 대해 여전히 많은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지속되는 경기 침체로 자금회전이 원활하지 않아 생기는 경영애로 가중과 함께 인력난이 심화되고 있으며, 특히 수도권에 편중된 핵심인력문제가 심각합니다. 이러한 문제들이 우리 중소기업의 경쟁력 약화에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있죠. 중진공은 지역경제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 적기에 자금조달이 가능하도록 힘쓰고 있습니다.-그렇다면 중진공이 그들을 위해 시행하고 있는 정책은 무엇인가요.우선 자금 애로 부분에서는 올해 초 1538억 원의 정책자금을 배정받아 집행 중에 있습니다. 일회성 대출로 끝나는 양적인 측면의 정책자금만이 아니라, 중소기업에 적합한 지원 프로그램을 1+2(두개 더, together)방식을 활용해 연계함으로써 우리 전북 중소기업의 체질 강화를 염두에 두고 사업을 집행하고 있습니다. 인력 애로 부분에서는 내일채움공제 사업을 통해 중소기업의 인재가 장기 근속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고 있습니다. 올 4월에는 전북지역본부에 기업인력애로센터를 설치해 학교-중소기업-중진공 간 One-Stop 지원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인력 미스매칭을 최소화시켜 청년실업 문제와 중소기업 인력난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중진공과 금융권 자금조달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인가요.중진공은 미래 성장성은 있으나 금융권 이용이 어려운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기업진단에 기반한 직접신용대출을 합니다. 중진공 내에서 이런 역할을 시장실패영역을 보완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민간금융권은 재무적인 안정성을 중심으로 기업을 평가합니다. 하지만 중진공은 재무적인 안정성은 그 비중을 낮추고 기술성과 사업성, CEO의 사업의지를 중심으로 기업을 평가합니다. 이러한 근본적인 차이점을 가지고 지원한 결과, 지역경제의 파급효과가 큰 창업초기 자금비중은 지난 2015년 43.8%에서 올해 58.5%로 올랐습니다. 시설자금에 대한 지원 비중도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기술개발이나 사업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는 업력, 3년 내지 7년 이내 창업기업에 대한 지원 또한 증가하고 있습니다. 특히 청년의 1인 창업에 대해서는 별도의 예산을 두어 지원하고 있고, 실패경험을 경영자산으로 삼아 성공에 다시 도전하는 재도약기업 지원도 확대하고 있습니다. 일부 정책자금 지원기업들이 단기적으로는 수익성이 개선되지 않았다는 연구 결과가 최근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창업기업의 경우 데스밸리를 넘은 시점에, 또한 시설자금을 투자한 일반기업의 경우에는 상환만료 시점을 지나야 정확한 평가가 가능합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중진공이 투자한 정책자금의 효과는 충분히 입증되고 있는 상황이며, 특히 시대적 화두로 대두되고 있는 고용 측면에서 기여한 바는 무시할 수 없습니다.-재임 기간 집중할 사업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4차 산업혁명이 전북중소기업에 새로운 도약이 될 수 있도록 지원하고자 합니다. 특히 지역 중소기업 중 스마트팩토리 확충을 위해 설비투자를 하는 곳이 있다면 우선 지원할 계획입니다. 4차 산업혁명은 개방과 협업, 공유의 철학을 소유한 기업에 강점이 있듯이 기업 간 그리고 지원기관 간 협력과 협업 환경 조성에 일조해 나가겠습니다. 또한 중진공의 인프라인 정책자금, 수출, 인력, 연수 등을 연계 지원함으로써 기업 편의성을 도모하고 애로사항을 적극 해소토록 하겠습니다.● [김형수 본부장은] 공학IT심리학 섭렵, 4차 산업혁명형 리더전남 목포 출신인 중소기업진흥공단 김형수 전북지역본부장은 중소기업 컨설팅과 기술 R&D지원 전문가다.목포고와 인하대 공과대학 응용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불교대학원 상담심리학을 전공해 공학, IT, 심리학을 두루 섭렵한 독특한 이력으로 조직 내에서 4차 산업혁명에 적합한 융합형 리더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지난 1993년 중소기업진흥공단에 입사한 그는 IT 1세대답게 중소기업정보화사업과 온라인마케팅 지원 사업(GObizkorea)에서 새로운 사업영역을 개척하고 전문성을 발휘해왔다.또한 실패한 재기 기업가를 위해 전북지역 재창업자를 위한 학습모임을 매주 주도적으로 개최하면서 재창업자들을 격려하고 있다.평소 온화한 성품으로 직원들과의 소통에도 적극적이다. 김 본부장이 특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는 4차 산업혁명이다. 그는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한 기업 컨설팅 및 온라인마케팅 분야와 재도전지원 분야에 있어서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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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윤정
  • 2017.05.08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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