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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미래를 이끈다] ⑤ 농·건설 기계산업-한국생산기술硏 농기계신뢰성평가센터, 농기계 국제경쟁력 강화…기술 개발부터 성능 평가까지

국내 농기계 산업의 수출전략 산업 및 신성장동력 산업 육성을 위한 농기계 국제경쟁력 강화 기술개발 및 IT융합 미래 핵심기술 개발을 수행하고, 농기계의 성능신뢰성 평가 및 교육훈련을 체계적으로 할 수 있는 기반구축 필요성은 그 어느때보다 크다.이에따라 지난 2013년 8월 김제 지평선일반산업단지 내 3만3000㎡(1만평) 부지에 둥지를 튼 한국생산기술연구소 농기계신뢰성평가센터(원장 이성일)는 총 12명의 직원들이 우리나라 농기계 발전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정부출연 연구소인 한국생산기술연구소 농기계신뢰성평가센터는 한마디로 트렉터 및 콤바인, 이앙기, 밭농업기계 등 각종 농기계를 연구 하는 곳으로, 완성된 농기계를 수출판매하기 전 성능 평가도 빼놓지 않고 실시 하고 있다.김제시 백산면 지평선산단 내에 자리 하고 있는 한국생산기술연구소 농기계신뢰성평가센터는 두 개의 시험동과 연구동, 경비동, 실외험로주행시험장 등을 갖추고 있으며, 총 145억원들여 성능신뢰성평가장비 및 시제품제작지원장비, 물성 및 성분 분석장비, ICT융합첨단스마트센서 개발장비, 교육 해석 및 중소기업지원장비, 정밀농업기계연구장비 등 차축다이나모 외 40여종의 장비를 갖추고 있다.장시간이 요구 되는 장비 운영기술 습득 소요시간을 최대한 줄이고, 전북대에서 도입중인 장비를 빠르게 이전 하는 등 조기안정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일 계획이며 지난해부터는 장비활용 수요 업체수를 전북지역 외 농기계조합원 회원사 전체로 확대 하여 450개로 늘리고, 수요기술에 대한 조사를 진행중이다.기술수요업체와 해당 전문가가 1:1 매치를 통해 기술지원 전문성을 강화 하고, 빈번히 발생 하는 지원기술에 대한 사례집을 제작배포하고 있다.국제 농기계박람회 행사 시 부스 방문 인력에 배포 및 협력 대상 업체 450곳에 이메일을 발송 하고, 농기계 관련 전시회 및 학회 참석을 통한 홍보를 실시하고 있다.농기계 업체에 대한 구축장비 홍보강화 및 우수사례 발표 예정이며 김제시 자체적으로 농기계신뢰성시험평가지원센터 브로셔를 농기계업체에 배포할 계획이다.농기계업체의 신뢰성 평가 및 농기계실외험로주행시험장 활용 수요가 높은 신뢰성 평가를 자체적으로 운영할 계획이며, 이럴경우 신뢰성평가기술지원 수혜기업 확대가 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장기적으로 국내 농기계 산업을 수출 전략 및 신성장동력 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해 센터는 신제품 기술개발 지원과 제품의 품질경쟁력 향상을 위한 성능내구성 및 신뢰성 평가를 체계적으로 지원할 방침이다센터건물 및 장비는 한국생산기술연구원에 귀속시켜 파워트레인팀, 내환경시험팀, 험로주행시험팀 등으로 운영할 계획이다.이성일 원장은 한국기술생산연구소는 1단계로 센터 건립 및 장비구축을 마치고 오는 2020년까지 2단계로 기술지원 고도화 및 다양화를 꾀한 다음 오는 2025년까지 3단계로 글로벌 첨단농기계업체를 육성할 계획이다면서 전 직원들이 합심 노력하여 우리나라 농기계 발전 및 나아가 농업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 하겠다고 말했다.● [전북 농건설기계산업은] 김제에 국내 유일 첨단농기계 클러스터 형성전북 농건설기계산업은 지역 내에 입지한 국내 주요 기업과 시험연구 인프라를 중심으로 지속 성장하는 분야다.전북 농기계산업은 김제 지평선산업단지를 중심으로 국내에서 유일하게 첨단농기계 클러스터를 형성하고 있다. 2014년 기준 농기계 기업은 48개, 종사자는 3210명이다. 전북은 국내 주요 완성형 농기계 기업 4개 가운데 2개인 LS엠트론과 동양물산이 입지해 농기계산업을 선도한다.전북은 국내 농기계 생산액의 29%, 종사자의 43%, 농기계 수출량의 40%를 담당한다. 주요 수출품 중 하나인 트랙터의 경우 50% 이상을 생산하는 등 전북이 국내 농기계산업의 허브 역할을 한다는 평가다.이를 반영하듯 2012년 기준 전북의 농업임업용 기계 제조업 입지계수(LQ)는 사업체 수 1.75로 전국 3위, 종사자 수 5.29로 전국 1위를 기록했다. 입지계수가 1.25 이상이면 전국에서 특화 산업 클러스터가 조성된 것으로 판단한다.또 전북 건설기계산업은 두산인프라코어 군산공장 준공과 건설기계부품연구원 개원에 따라 건설기계 기업 유입이 증가하는 등 파급 효과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실제 건설기계 기업은 2010년 18개에서 2014년 39개, 종사자는 같은 기간 501명에서 900명까지 늘었다. 전국 건설기계산업에서 전북이 차지하는 비중도 기업이 2010년 5.1%에서 2014년 10.6%, 종사자가 2010년 3.1%에서 2014년 4.8%로 점차 증가하는 추세다.특히 2011년부터 2014년까지 전국 건설기계 생산액과 수출액이 마이너스 성장(-8.7%)을 기록한 반면 전북은 성장세를 기록했다. 전북 건설기계 생산액은 2011년 4620억원에서 2014년 6260억원으로 35%, 수출액은 같은 기간 3210억원에서 4470억원으로 39% 늘었다.

  • 기획
  • 최대우
  • 2017.03.09 23:02

[전북 미래를 이끈다] ④ 식품산업-익산 국가식품클러스터, 글로벌 시장 향한 '전북 100년 먹거리' 전진기지

식품산업은 전북이 준비하는 미래다. 전북의 100년 먹거리는 식품산업이라는 희망을 품고 국가식품클러스터를 그 전진기지로 삼고 있다. 식품산업을 이끌어갈 6대 기업지원시설도 건립이 마무리되고 본격 가동을 시작했다. 산업단지가 오는 6월 완전 준공되면 기업유치도 더욱 활기를 띌 전망이다. 지금까진 기업유치 성과가 저조하지만 정부의 기업지원시설에서 지원하는 각종 혜택과 행정의 적극적인 기업유치 활동이 시작되면 대기업들의 입주도 잇따를 것이란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국내 유일 국가식품클러스터정부는 국가식품클러스터를 통해 약 7조달러에 이르는 글로벌 식품시장을 선도해 세계푸드도시로 도약해 나갈 계획이다.익산시 왕궁면 일원 약 232만㎡ 규모로 조성되는 국가식품클러스터가 그 전진기지인 셈이다. 이곳에는 산업시설과 연구시설은 물론 상업시설과 주거시설 등도 함께 들어선다.1단계 산업시설건립이 마무리되면 2단계 배후도시와 추가 산업단지 조성 등이 추진될 예정이다.올 하반기에는 국가식품클러스터의 1단계 산업단지 부지조성이 마무리될 예정이며 입주할 기업들을 위한 총 6개의 기업지원시설들은 이미 모두 들어섰다.국가식품클러스터는 식품에 대한 생산, 연구, 지원 기능 등은 물론 식품에 대한 정보와 지식의 유기적인 공유로 농식품산업의 글로벌 경쟁력 강화와 소득성장을 이뤄낼 첨병역할을 하게 된다.특히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활용해 기능성 식품 개발 등으로 농산물의 판로 확대와 농업인의 소득향상 등 기대감이 한껏 고무되어 있는 상태다.△세계 식품시장의 新중심지로 우뚝국가식품클러스터의 중심인 익산은 지리적으로 인근 동북아 15억 인구 식품시장의 중심에 위치한 지리적 강점을 가지고 있다.식품의 고유 특성상 시간이나 온도 등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고품질 원료 농산물의 이송과 관리에는 교통인프라가 가장 중요하다.익산은 고속도로와 철도를 중심으로 한 교통 인프라가 우수하며 특히, KTX와 SRT를 이용한 수도권과의 접근이 탁월하다. 또한, 수출을 위한 인근 항만 도달 거리도 1시간 내면 충분하다.△정부 6대 식품지원시설 본격 가동국가식품클러스터에는 이곳에 입주하는 식품기업들을 위한 6대 기업지원시설이 건립돼 운영을 시작했다.국가식품클러스터지원센터는 산업단지에 입주할 기업들에게 원료조달에서 연구제조마케팅인력공급수출에 이르기까지 전과정을 One-Stop 서비스할 예정이다.먼저 식품기능성평가지원센터는 건강기능식품 인증교육컨설팅, 산학연 네트워크를 지원하며 식품품질안전센터는 식품안전확보를 위한 검사분석 지원 업무를 맡게 된다.식품패키징센터는 수출지향형 가공식품에 대한 패키징 소재개발, 유통기한 설정, 유통물류 안정성 시험 등을 지원한다.시제품 생산을 위한 파일럿플랜트와 우수한 아이디어와 경쟁력을 가진 소기업을 입주대상으로 운영될 식품벤처센터 등은 입주기업에 대한 시설지원에 최적화된 환경을 구축하게 된다.체계적인 기업지원시설은 전북이 식품산업의 중심지로 도약하는 핵심 인프라로 인정받고 있다.△탁월한 입주 혜택 제공국가식품클러스터에 입주하게 되는 기업 중 수도권과밀억제권역에서 이전하는 경우 법인세와 소득세가 5년간 100% 면제된다. 이후 2년간도 50% 감면혜택이 제공된다.취득세의 경우에는 전액 면제되고 재산세는 향후 5년간 100% 면제, 이후 3년간 50%를 감면받는다.기타 지역에서 이전하는 기업에 대해서도 취득세 75% 감면, 재산세도 향후 5년간 75%의 감면혜택이 주어진다.이와 함께 기업의 투자금액이 10억 원을 초과하면 전북도에서 10%, 익산시는 5% 범위 내에서 최고 100억원까지 투자보조금을 지원한다.이외에도 기타 고용보조금, 교육훈련보조금, 근로자정착 보조금 등 다양한 혜택 제공된다.특히 외국인투자지역에 입주하는 해외기업의 경우에는 투자조건에 따라 임대료의 75~100%를 감면받고 50년간 부지를 사용할 수 있다. 이미 유기농 사탕제조업체인 미국 레오아레틴 등 11개 기업이 투자신고를 마치고 코아바이오 등 2개 기업이 입주계약을 마치는 등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국가식품클러스터는] 동북아 식품시장 40% 점유 목표동북아 식품시장의 40% 점유를 목표로 조성되는 국가식품클러스터는 산업단지가 조성되기까지 10년이 걸렸다.정부가 식품산업을 육성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자 전북이 발 빠르게 나섰고, 이에 발맞춰 익산시가 식품산업을 전략적으로 육성하겠다며 호흡을 맞춰왔다.지난 2008년 12월 정부가 국가식품클러스터 입지선정 지역을 발표하고 타당성 검토와 용역, 향후 발전계획을 수립해 산업단지가 조성되기까지 딱 10년이 소요됐다.익산시는 전북도의 승인을 얻어 국단위 부서를 신설하는 등 식품산업 육성에 적극 뛰어들었다.그러나 이런 큰 기대감이 지속되기까지 10년의 세월은 짧지 않았다. 차츰 실망감으로 이어진 식품산업은 산업단지 완공을 기점으로 다시 한 번 도약을 위해 꿈틀거리고 있다.지금까지 하림 등 23개 국내기업이 산업단지를 분양받아 속속 착공하기 시작했고, 외국인투자지역에도 11개 외국기업이 투자신고를 마쳤다.입주 업체들의 입맛에 맞는 연구개발을 할 수 있는 국가식품클러스터지원센터도 동북아 식품시장 공략을 위한 전략을 수립하고 있다.여기에 익산시가 정부를 설득해 국가식품클러스터 2단계와 3단계, 배후도시 건설에 뛰어들면서 식품산업이 전북의 100년 먹거리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준비가 본격화되고 있다.

  • 기획
  • 김진만
  • 2017.03.08 23:02

[김제시 백산면] 조선시대 전북 문필 한 축 이룬 곳…서예 대가 많아

김제시 백산면은 예로부터 흰 돌이 많아 백석면(白石面)으로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백석면과 연산면 등 일부지역이 합쳐지면서 백석면의 백과 연산면의 산자를 따서 백산면이 되었다.위치상으로는 동쪽에 용지면, 서쪽에 만경읍과 성덕면, 북쪽에 청하면과 공덕면, 남쪽에 김제시가 있으며, 김제-익산을 잇는 도로가 남북으로 지난다. 해발 58m의 조종산이 가장 높다고 할 만큼 전 지역이 해발고도 50m 내외의 구릉으로 되어 있으며, 동부의 부용천(芙蓉川) 주변과 남서부의 신평천(新坪川) 주변에 충적평야가 전개된다.예로부터 효부와 열녀가 많은 지역으로 알려져 있으며, 문화재로는 이석정 선생 생가(전북기념물 21호), 안위장군 묘, 백산서원, 학당서원 등이 있다.1966년부터 호남 야산개발사업이 시작돼 69년에 백산저수지가 완공됨에 따라 농사짓기가 좋아져 친환경 농특산물 생산지가 되었다. 가축사육도 비교적 많은 편이다.새만금 배후 거점으로 서해안고속도로 및 호남고속도로와 인접한 부거리 일원에 2994억 원을 투자해 지난 2015년 298만㎡(90만평) 규모의 지평선산단을 완공해 서해안시대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유학서예전라도의 서화를 말할 때 흔히 전남은 그림이고, 전북은 글씨라고 한다. 그리고 조선시대 전북 문필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곳이 바로 백산지역이다. 송재(松齋) 송일중(1632-1717)과 석정(石亭) 이정직(1841-1910), 유재(裕齋) 송기면(1882-1956), 그리고 유재의 아들인 강암(剛菴) 송성용(19131999)과 손자인 아산(我山) 송하영(19271992) 등이 모두 백산 출신이다.송재는 초서와 예서, 대자에 능했으며, 그의 글씨는 중국 강희제도 찬사를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제 벽골제가 무너져 전답이 침수되자 사재를 털고 수령 방백의 도움을 받아 보수하기도 했다.석정은 서화와 실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간재(艮齋) 전우(1841-1922)와 함께 호남 유학을 이끌었다. 실용학문을 중시해 농기구 등을 제작하고 한의학에도 관심이 깊어 많은 환자를 치료했다. 연석산방으로 일컬어지는 그의 생가는 1974년에 전북도기념물 제21호로 지정됐다.유재는 금재 최병심(1867-1957), 고재(顧齋) 이병은(1877-1960)과 함께 조선의 마지막 선비인 간재의 3제자 중 한 명으로 꼽힐 만큼 학문에 탁월했다. 또 같은 동네에 살던 석정에게서 학문과 사군자 등을 배웠으며, 서예에도 뛰어나 묘비문을 청하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 평생 노소귀천의 구별 없이 사람을 대하고 후학들을 가르쳤으며 창씨개명을 거부했다.서예의 대가 강암은 유재의 삼남으로 아버지에게서 한학과 서예를 익혔으며, 간재의 3제자 중 한 명인 고재 이병은(1877-1960)이 장인이다.아산(我山) 송하영(1927~1992)은 유재의 장손으로 한학과 서예, 문장에 능하며 초대 김제미술협회 회장을 지냈다. 우산(友山) 송하경(76)은 강암의 둘째로 성균관대 철학과 교수와 대학원장, 박물관장,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1~3회 조직위원장, 그리고 예총회장을 지냈다.△정관계6선 국회의원으로 국회 부의장을 지낸 운재(芸齋) 윤제술(19041986)이 대표적인 정치가이다. 운재는 유재의 조카사위이자 강암의 사촌 처남으로 유재와 간재의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으며, 남성고 교장으로 퇴직한 뒤 김제에서 3선, 서울 서대문구에서 3선을 지냈다. 서예에도 능해 한국예총 창립에 참여했으며, 아산이 71년에 개최한 한국미술협회 김제시지부 초대 미술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운재의 장남 윤상옥씨는 도로공사 부사장을 지냈다.행정관료 출신으로 전주시장을 2번 지낸 송하진 전북지사는 강암의 4남으로 서예에도 능하다. 또 송하철 전 전북도행정부지사(80)는 강암의 장남이다.강철기씨는 전주시 완산덕진 구청장과 복지환경국장, 전북도 대외협력과장, 김제시 부시장 등을 지냈으며, 안자옥씨(62)는 재경부 생활안전과장, 안성국씨(62)는 문체부 감사실장을 지냈다. 속초, 전주, 익산 소방서장을 지낸 정인영씨도 백산 출신이다.강원구씨(53)는 현재 보건복지부 사회보장위원회 사무국장이고, 박지훈씨(59)는 농업기술실용화재단 종자사업본부장이다. 김제시청에는 이석 회계과장과 안홍순 시립도서관장이 있다.지역내 정치인으로는 456대 시의원을 지낸 오만수씨(75)와 백산면장 출신으로 현재 시의원을 하고 있는 박두기 의원(62) 등이 있다.△사법계강완구 변호사(72)는 전주지방법원장과 광주지방법원장, 대구고법원장, 서울고등법원장,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 등을 거쳐 현재 법무법인 로고스 상임고문변호사를 맡고 있다.유대희 변호사(62)는 전주시 3선거구에서 5대 도의원을 지냈으며, 현재는 전주시 통합체육회 부회장과 대한적십자사 상임위원 등을 맡고 있다.고영준 변호사(75)는 강원도지청에서 근무한 뒤 제일종합법무법인 대표변호사를 맡고 있고, 강신섭 변호사(60)는 중앙행정심판위원과 대법원 재판연구관, 전주지방법원 형사 12부 등을 지냈으며 현재 법무법인 세종의 대표변호사이다.△학계교육계석정의 손자인 이종석씨는 우리나라 최초의 난(蘭) 박사로 실용 한국의 蘭을 펴내기도 했으며, 제주대학교를 거쳐 현재는 서울여대 원예생명조경학과 명예교수이다.강암의 3남인 송하춘씨(74)는 7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소설가로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와 문과대학장을 지냈다.이복렬씨(73)는 호원대 식품환경화공학부 교수와 공과대학장 등을 지냈으며, 현재 호원대 명예교수이다.교육계에는 지난 2009년 김제 교육장을 지낸 박공우씨와 유지득 현 익산교육장(61), 그리고 도교육청 초등교육과 장학관을 거쳐 김제 중앙초 교장을 지닌 문홍근씨 등이 있다.△군경찰임국선씨(62)는 원광대 학군단 출신으로 육군 제7기동군단 군단장과 육군 제2작전사령부 부사령관, 육군본부 정책관 등을 지낸 뒤 중장으로 예편하고 현재는 원광대학교 군사학과 석좌교수로 있다.조연식씨(70)는 육군본부 인사처장과 28사단장을 거쳐 소장으로 예편했고, 공사 19기인 이기택씨(70)는 공군 준장으로 예편했다.장수경찰서장을 지낸 라화종씨(64)는 현재 서울에 거주하고 있다.△금융명창기타박승씨(81)는 중앙대 명예교수와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 건설부장관, 한국경제학회 회장, 한국은행 총재, 금융통화위원회 의장 등을 지냈다.시조창을 완제한 채규남씨(고인)는 86년 전주대사습놀이 시조부에서 대상을 받고 98년에 전북도 지방문화재 14호로 됐으며, 이후 2007년에 대한민국 인간문화재로 지정받았다.언론계에는 정대섭 전북일보 전략기획국장(이사)와 익산신문 홍동기 편집국장, 강찬구 전북포스트 사장 등이 있다. 또 지역에서 (주)오렌지타운이라는 주택건설사업을 하고 있는 강진수씨도 백산 출신이다.

  • 기획
  • 이성원
  • 2017.03.07 23:02

국회 탄핵소추위원 활약한 이춘석·김관영 의원 "증인 25명 증언·수사결과만 봐도 탄핵 사유 충분"

지난달 27일 탄핵심판 공개변론이 마무리될 때까지 그 중심에서 활약한 이들이 있다. 바로 더불어민주당 이춘석 의원(익산갑)과 국민의당 김관영 의원(군산)이다. 두 의원은 국회 탄핵소추위원으로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이 국정농단 사태를 올바로 규명하고, 정의로운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이들은 반드시 대통령 탄핵이 인용될 것으로 전망했다. 두 의원에게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쟁점과 전망에 대해 들어봤다.-국회 탄핵소추위원으로서 활동하신 소회를 들려주신다면.이춘석(이하 이): 안타까움과 또 다른 희망이 공존하는 듯한 기분입니다. 대통령이 국민에게 탄핵받은 것은 국가적인 비극이자 아픔입니다. 하지만 비극에서 멈출 수만은 없습니다. 이번 탄핵심판과정은 대통령이라도 헌법을 위반하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국민에게 보여줬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이 사태를 계기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김관영(이하 김): 시험을 본 이후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는 심정입니다. 탄핵소추위원은 국회에서 탄핵이 의결된 후 인용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입장입니다. 모든 과정을 마쳤고 이제 결과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꼭 인용돼서 대한민국의 정의가 바로 서고 손상된 헌법질서를 다시 세웠으면 좋겠습니다. 또 법 앞에 모두가 평등하고,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국회 탄핵소추활동 성과를 꼽는다면요.김: 인용이 돼야 성과를 거론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웃음). 재판이 스무 번이나 진행되면서 탄핵소추위원으로서 재판관들을 설득시키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한 것 같습니다.이: 탄핵소추위원과 재판관들의 노력으로 이정미 재판관의 임기가 종료되기 전에 탄핵선고가 이뤄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탄핵소추위 활동에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이었는지요.김: 대통령 변호인단 측에서 공정성을 이유로 재판을 지연하려는 시도를 한 점이었습니다. 이들은 3월 13일 이후로 선고기일을 넘겨 탄핵재판을 무력화하려는 속내를 드러내보였습니다. 대한민국 최고법정인 헌법재판소에서 이런 시도를 했다는 것 자체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일반잡범의 재판정에서도 이런 광경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대통령 변호인단이 자기를 지지하는 세력들과 국민들을 양분시키려는 전략으로 밖에 볼 수 없습니다.이: 이미 정호성 전 청와대 비서관 등 대통령 측근들을 통해 결정적인 증언들이 나왔는데도, 대통령 변호인단 측에서 계속 증인들을 무더기로 신청한 것이 그랬습니다. 법조윤리라는 차원에서 따져봤을 때 저런 증인은 오히려 대통령에게 불리한데도 신청한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결국 판결의 유불리보다 시간을 끌려는 의도를 스스로 자인해 준 꼴이죠.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이 첫 번째 증인으로 나올 때 대통령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대통령 변호인단에서는 최순실과 안 전 수석을 재차 증인 신청명단에 올려서, 지난달 22일에 출석시켰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에게 유리한 진술은 없었습니다.-탄핵심리 쟁점은 무엇이었습니까.이: 국회에서 의결된 13개의 탄핵사유를 헌법재판소에서 5가지로 압축했습니다. 비선조직 국정개입에 의한 주권주의 위반, 대통령 권한 남용, 언론자유 침해, 생명권 보호의무직책성실 의무 위반, 뇌물수수 등 형사법 위반 등입니다. 이 사안들이 탄핵의 사유가 되느냐 안 되느냐가 쟁점입니다.김: 현장에서는 국회 소추위원단과 대통령 변호인단 측이 탄핵 각하여부를 두고 충돌하고 있습니다. 대통령 변호인단은 탄핵 기각에 무게를 두다가 각하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탄핵 절차부터 잘못됐으니 결정을 하지 말고 아예 종료하자는 것이죠. 반면 국회 소추위원단 측은 의결절차에 전혀 문제가 없다는 입장입니다.-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증인이 있습니까.이: 최순실이 기억에 남습니다. 대통령이 마지막 서면 답변에 최순실은 옷 심부름 하는 여자다. 국정 농단할 인물이 못 된다고 써놨는데, 실제로 보면 능수능란하고 치밀한 인물입니다. 재판정에서 결정적인 증언을 요구할 때면 화장실 다녀와야겠다, 약 먹어야 겠다고 하는 등 태연한 태도를 취합니다. 심지어 대답을 거부하기도 합니다. 보통 사람이면 재판관이 9명이나 있고, 기자들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그런 식으로 행동을 못합니다. 머리도 상당히 좋은 것 같았습니다. 국회 소추위원단이나 변호인 측에서 계속 질의를 하면 기존과 다르지 않게 일관되게 부인합니다. 문장으로 보면 짧지도 않은데 토씨 하나 틀리지 않습니다. 과연 국정농단을 하고도 남을 여자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김:차은택은 국정농단 핵심의 한 명이지만 나중에 죄를 뉘우치려는 노력들이 보인 것 같습니다. 차 씨가 법정에서 한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해외에 도피했다가 귀국하는 중에 자신의 부인과 더 이상 역사의 죄를 짓지 말자고 약속했다고 했습니다. 결국 차 씨를 통해 고영태-최순실의 연결고리나 국정농단이 상당부분 밝혀졌다고 봅니다. 본인의 죄를 경감하기 위한 행동일 수도 있지만, 정의라는 것에 고민을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인상 깊었던 재판관을 꼽는다면.이: 재판관 중에는 주심을 맡고 있는 강일원 재판관이 기억에 남습니다. 방대한 기록들을 다 검토해서 논점과 핵심을 정확히 짚어내는 것이 대단했습니다.김: 재판 초반 헌법재판관 측에서 대통령 변호인단에게 5만 페이지에 달하는 검찰 조서에 대한 입장을 밝히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대통령 변호인단측에서 워낙 방대해서 못 읽었다고 하니까, 강 재판관이 5만 페이지를 혼자 다 읽었다고 얘기했습니다. 즉 나는 혼자 다 읽었는데 1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못 읽었다는 건 핑계 아니냐고 암묵적으로 얘기하면서 일침을 가한 것이죠.-헌재의 탄핵심판에 대한 성과나 문제점을 짚어본다면.이: 탄핵제도를 전반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회가 탄핵을 개시하고 종결하는 시간까지 72시간이 주어져 있습니다. 탄핵 재판을 담당하는 헌법재판소는 180일 이내 판결을 내려야 합니다. 탄핵이 결정된 후에는 대통령을 60일 이내 결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국회와 국민이 정치적으로 결정한 대통령의 탄핵을 법률 기관인 헌재가 최종결정권한을 갖는 게 옳은 것인지, 대통령의 궐위 상태를 장기간 방치해도 되는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있습니다. 앞으로 헌재가 탄핵에 대한 최종결정권을 담당하는 것이 타당한지에 대한 검토와 대통령의 궐위상태를 방치하지 않는 방향으로 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대통령측 변호인에 대해 평가한다면.김:변호가 잘 되려면 의뢰인하고 대화를 많이 해야 하고, 객관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법리적인 주장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변호인단이 국정농단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대통령하고 제대로 의사소통을 하는지,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려는 노력을 하는 지 의심이 듭니다. 법정에서 많은 증언이 나왔어도 대통령측은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대통령의 주장을 근거로 한 변호인단의 변론은 설득력이 없는 셈입니다. 하지만 변호인단은 그런 것들에 대한 고려가 없이 대통령이 하고 싶은 주장만 그대로 전달하는 역할만 하고 있습니다.이:서석구, 김평우 등 일부 대통령측 변호인들은 탄핵에 대한 진실을 밝히려는 변호인단이 아니라 자신의 지지자들을 선동하기 위한 변호인단이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런 변호인단을 용인한 대통령을 봐야 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부끄럽고 안타깝습니다.- 탄핵, 어떻게 전망하는지요.이: 당위성의 문제이고 당연히 인용될 것으로 확신합니다.김: 법원에 나온 25명 증인들의 증언과 검찰 수사 결과를 종합해보면 탄핵사유는 충분히 됩니다. 헌재가 전원일치로 탄핵을 인용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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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세희
  • 2017.03.06 23:02

[④ 한국음식과 실크로드] 전주비빔밥, 세계문명과 소통하다

다문화 시대의 대한민국. 이젠 어디에서도 외국인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국내 거주 외국인 수는 200만 명을 넘어섰으며 전북은 다문화 혼인 비중이 전국 최고다. 오늘날 우리가 주변에서 체감하는 세계화의 문화적 다양성은 동서 문명을 연결해준 실크로드에 역사적 뿌리를 두고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도시 전주는 문명의 루트 실크로드와 깊은 연관이 있다. 세계에 우리 한식의 위대함을 알린 전주비빔밥과 한국 전통먹거리가 실크로드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탐색한다.△문명 교류의 고속도로, 실크로드실크로드는 문자 그대로 비단길이다. 비단길은 중국의 명품 비단이 서역에서 인기를 끌자 중앙아시아를 거쳐 로마까지 운송되면서 생겨난 이름이다. 실크로드를 통해 동양에서 서양으로 건너간 것은 비단만이 아니다. 도자기, 칠기, 구리, 차, 약재, 대황 등이 사막을 건너 서양으로 전해졌고, 서양의 유리, 상아, 사자, 불교, 경교, 이슬람교 등이 동방으로 건너왔다. 또한 향신료를 비롯한 수많은 식재료 역시 실크로드를 통해 동과 서를 오갔다.△세계 식재료를 비빈 전주비빔밥한국을 넘어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는 전주비빔밥은 실크로드 문명 교류를 통해 탄생한 다문화 음식이다. 전주비빔밥의 주재료인 쌀, 마늘, 당근, 오이, 시금치, 고추 등은 모두 실크로드를 통해 전래된 식재료들이다.먼저 우리 국민들의 수천 년 주식 곡물인 쌀은 실크로드를 통해 확산된 대표적인 농작물이다. 벼의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인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와 중국 운남에서 재배되어 한반도로 전래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무병장수의 탁월한 효능을 가졌다는 마늘은 중앙아시아와 서남아시아가 원산지다. 2000년 전 알렉산더 대왕은 전투에 임하기 전 병사들에게 마늘을 먹였다고 하며, 만리장성을 쌓는 인부들 또한 마늘을 먹으며 40도를 넘는 무더위를 견디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당근은 아프가니스탄이 2000년 이상의 재배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 나라에는 당(唐)나라에서 도입되었기 때문에 당근이라 하고, 빨간 당나라 무라는 뜻에서 홍당무라고도 불렀다.시금치는 채소의 왕으로 불린다. 미국 인기 애니메이션 뽀빠이를 통해 친숙해진 시금치는 페르시아에서 아라비아와 지중해 연안을 거쳐 유럽으로 퍼졌고 우리 나라에는 15세기 무렵 중국에서 들어왔다. 토양 수분이 많아야 잘 자라는 오이는 인도와 남아시아가 원산지다. 1494년 콜롬버스에 의해 신대륙에 전해졌으며, 우리 나라에는 1500년 전에 들어왔다.양파는 이집트와 페르시아에서 재배하기 시작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양파를 먹으면 힘이 생기고 양파에 영원한 생명이 들어 있다고 믿었다. 기원전 14세기 투탕카멘 왕과 기원전 12세기 람세스 4세의 무덤에서 양파 화석이 발견되었으며, 피라미드 내부도 양파 그림으로 장식했다. 벗겨도 벗겨도 계속 나오는 양파 껍질 속에 영원한 생명의 힘이 담겨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매운 맛을 내는 대표 식재료인 고추의 원산지는 멕시코와 남미다. 고추는 고초(苦草)에서 유래된 말로 일본에서는 도우가라시(唐辛子), 중국에서는 애초(唐椒)라 불리운다. 고추는 우리 나라에서 왜초(倭椒)라 했는데 1614년에 (광해군 6년) 일본에서 처음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고추가 우리 나라에 유입된 후 한국 음식문화는 크게 변화했다. 백김치가 붉은색 김치로 바뀌고, 육개장 등 고춧가루를 이용한 국물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다.호박은 열대 및 아열대 기후인 미국 남서부 지역과 멕시코 북부가 원산지이다. 호박은 병자호란 이후 중국에서 환국하는 사신에 의해 우리 나라에 유입되었다.솔솔 고소한 냄새 풍기는 참기름을 만드는 참깨는 호마(胡麻)라 불렸는데, 페르시아 상인을 통해 중국에 전파된 후 다시 한반도로 유입되었다.△ 호(胡)는 페르시아풍 새 트렌드한국 전통음식과 실크로드의 연관성은 우리 주변의 호(胡) 자가 들어간 음식 이름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대한민국 대표 간식 호두과자, 호떡, 호빵에는 우리가 흔히 오랑캐라고 부르는 호 자가 붙어 있다. 또한 한국음식 식재료 중 한자 표기에 호(胡) 자가 들어가는 것이 상당수다. 마늘은 호산(胡蒜), 오이는 호과(胡瓜), 참깨는 호마(胡麻), 양파는 호총(胡蔥), 당근은 호나복, 후추는 호초(胡椒)라 하여 모두 호(胡) 자로 표기했었다. 여기서 호(胡) 자는 수입 외래종이나 외래문화를 뜻하는 글자이다.호 자를 좀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선 동서 문명 교류를 꽃피웠던 중국 당(唐)나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당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에는 외국인이 넘쳐났는데, 이들을 호인(胡人)이라 불렀다. 호인은 중앙아시아의 소그드인이나 페르시아인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당시 중국에서는 외국 음악을 호악(胡樂), 외국 의상을 호복(胡服), 외국 음식을 호식(胡食), 외국 무용을 호무(胡舞), 외국 음악에 맞춰 춤추는 여인을 호희(胡姬)라 할 정도로 외국문화 선호 열풍이 불었고 이를 호풍(胡風)이라 하였다. 여기서 호 자는 페르시아풍의 새로운 유행과 트렌드를 대신하는 상징이었다.△전주의 역동성, 다양한 문화 간 공존문화는 원래 상대적이며 상호 교류를 통해 발전한다. 실크로드가 그를 입증한다. 예로부터 동서양은 실크로드를 통해 서로의 문화를 접하며 발전을 이를 수 있었다. 교류가 빈번한 곳일수록 문화가 발전하고 경제가 성장했다. 한(韓)바탕 전주 세계를 비빈다는 전주의 도시 슬로건은 다양한 문화 간의 공존을 강한 역동성으로 표현한 것이다. 세계와 소통하는 음식 전주비빔밥과 실크로드를 따라 들어온 전통 먹거리를 다문화시대에 제대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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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3.03 23:02

[전북 미래를 이끈다] ③ 탄소산업-한국탄소융합기술원 상용화기술센터 "탄소 복합재 생산 장비·기술력 국내 최고 기관"

전북은 국내 탄소산업의 종가(宗家)다. 자치단체가 기업과 손을 잡고 탄소섬유개발부터 시작해 인프라를 구축하고 기업을 모아 집적단지를 만들었다. 이제는 탄소소재 시장확대를 위한 도약이 필요한 시기다. 기업들이 꾸준히 제품을 개발하고, 시장을 확장하며, 다시 높은 수준의 기술개발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구축해야 한다. 지난해 9월 문을 연 한국탄소융합기술원(원장 정동철) 상용화기술센터가 바로 이러한 역할을 하고 있다. 센터는 기업들의 제품개발을 지원하며 국내 탄소산업의 지평을 확장하는 거점이다.△국내 유일 시제품제작소한국탄소융합기술원 상용화기술센터는 국내에 한 곳 뿐인 탄소복합재 시제품제작소다. 이곳에는 탄소섬유 직조부터 구조설계-금형-성형-가공에 완제품 시험까지, 탄소소재 제품 생산과 테스트를 위한 일련의 장비가 구축됐다. 탄소섬유 다축직조장비(NCF)와 프리프레그장비, HP-RTM 성형시스템, 워터젯 가공장비 등 200억원대의 설비 19종을 들여놓았다.센터가 개소할 수 있었던 것은 지난 2011년부터 시작된 탄소밸리 구축사업을 통해서다. 국산 탄소섬유와 이를 활용한 복합재 개발을 위해 정부와 전북도전주시가 힘을 합쳤다. 5년 여 동안 주요 장비를 도입하고, 운용기술을 익혔다. 장비와 기술인력 모두 국내 탄소관련 기관 가운데 단연 최고 수준이다. 독일과 프랑스 등 선진국에서 장비와 기술을 들여왔지만 지금은 해외 전문가들이 견학을 올 정도다.△탄소산업 선도 공간한국탄소융합기술원과 효성 등 국내 탄소산업을 이끌고 있는 선도기관과 기업이 탄소산업에 본격적으로 투자한 것은 10여년 전부터다. 현재까지 탄소복합재 제품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기업은 30여곳에 그치고, 제품도 방산분야와 스포츠레저용품이 주를 이룬다. 시장확대를 위해서는 원천응용기술개발과 함께 생산원가를 낮추고 공정을 줄이는 등 경제성을 높여야 한다. 센터의 역할에 바로 여기에 있다.권기철 센터장은 센터는 이미 대량생산으로 이어낼 수 있는 일정수준 이상의 기술을 확보했다며 사업성 때문에 제품 상용화에 미온적인 기업들을 이끌 수 있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탄소섬유개발부터, 장비를 구축해온 5년여동안 인력 수준도 함께 성장했기 때문이다. 신헌충 책임연구원도 탄소복합재 생산을 위한 전 공정을 모두 갖춘 국내 최고 기관이라며 선진국인 독일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다.센터는 팬(PAN)섬유 파일럿 생산때부터 참여한 권 센터장과 소재 장비 설계 성형 등 공정 전문가 10여명이 참여하고 있다. 신헌충 책임연구원, 허몽영강창수 선임연구원, 강정석이학성 주임 등 대부분 한국탄소융합기술원 초창기부터 함께한 이들이다. 5년여 동안 시제품 개발에 참여한 것도 연간 90여건에 달한다.△인증 기능 확충 과제센터는 올해부터 시작되는 메가탄소밸리 사업을 통해 성형공정용 장비 4종을 추가로 구축한다. 소재-중간재-성형가공에 이르기까지 장비가 더욱 촘촘히 구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 생산품 시험평가인증기능을 확보하는 일이다. 권 센터장은 탄소복합재상용화시험인증센터로 기능을 확대하는 것이 목표라며 이렇게 되면 소재개발부터 인증까지, 모든 과정을 센터에서 해결할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국산 장비 개발도 서둘러야 한다. 강창수 선임연구원은 기초 공정기술 발전을 위해서는 장비 국산화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허몽영 선임연구원은 수년내 자동차산업과 신재생에너지산업에서 탄소복합재 수요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지만 아직은 시장 여건이 구축되지 않았다며 당분간은 정부와 자치단체, 공공기관 중심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은수정 기자● [전북 탄소산업은] 블루오션 선점, 10년간 거둔 성과 전국 확대탄소산업은 10년 전, 전북이 찾은 블루오션이다. 다른 지역에서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미래 성장 가능성이 높은 산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북 탄소산업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전북은 2006년 7월 산업통상자원부의 고기능 복합섬유 원천소재 기반구축사업을 통해 탄소산업 관련 사업을 처음으로 추진했다. 2008년 4월 한국탄소융합기술원과 효성이 탄소섬유 공동 기술개발 계약을 체결한 뒤 2009년 범용 탄소섬유(T-300급), 2011년 중성능 탄소섬유(T-700급)인 탄섬을 개발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2011년부터 2016년까지는 탄소밸리 구축사업(1991억원 규모)을 진행해 탄소섬유 응용상용화 원천기술을 확보하고, 시험분석성형가공장비를 구축했다. 또 2017년부터 2021년까지는 메가탄소밸리 구축사업(714억원 규모)을 추진한다.그 사이 2014년 12월 탄소특화 국가산업단지 지정, 2015년 12월 탄소융합산업연구조합 출범, 2016년 5월 탄소소재 융복합기술 개발 및 기반 조성 지원에 관한 법률 제정 등으로 탄소산업의 위상을 전북에서 전국으로 확대하는 성과를 거뒀다.그러나 연구개발(R&D) 성과물의 사업화, 탄소기업 집적화 등은 전북이 풀어야 할 과제다. 실제 지난해 말 전북 탄소기업은 120개, 종사자 2241명으로 전체 제조업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기업 수 기준 2.3%, 종사자 수 기준 2.1% 수준이다. 이마저도 탄소소재 또는 탄소 부품을 생산하는 기업이 아닌, 탄소소재를 최종 제품의 원료로 활용하는 기업이 대부분이다. 문민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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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3.02 23:02

[전북일보 만화뉴스] 태극기와 "대한 독립 만세"

태극기와 대한 독립 만세#표지.태극기와 대한 독립 만세#1.1882년.일본으로 향하는 배 안에서 박영효가 그린 태극기.#2.1885년.고종이 외무를 담당하던 미국인 데니에게 하사한 태극기.#3.1896년.독립신문 제호의 태극기.#4.1919년.군산 구암동산을 비롯해 전국에서 물결치던 31운동의 태극기.#5.1948년.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중앙청에 게양된 태극기.#6.1949년.문교부 고시로 지금의 모습이 확정된 태극기.#7.1960년.315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던 419 혁명의 태극기.#8.1980년.계엄 해제를 요구하던 전북대 학생들의 태극기, 5월 민중항쟁의 그 태극기.#9.1987년.민주화를 요구하던 6월 항쟁의 태극기.#10.2002년.대~한민국!을 외치던 이들이 몸에 두르고 얼굴에 그리던 태극기.#11.2017년.삼일절이구나! 태극기 걸어야겠지?#12.(웅성웅성)(태극기!)(300만!)#13.(이 빨갱이 놈들!)(계엄령을 선포하라!)#14.(.)#15.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이하 생략)- 대한민국 헌법 전문오늘은 98돌 31절입니다./기획 신재용, 구성 권혁일, 그림 이권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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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3.01 23:02

[전북 미래를 이끈다] ② 농생명산업 - 전자부품연구원 농생명SW융합클러스터 "농업과 첨단과학기술 융·복합 시대 준비합니다"

전북은 농생명산업을 중심으로 지역 발전 뿐만 아니라 국가경쟁력 강화를 꾀하고 있다. 농생명산업 육성은 기존 농업의 한계를 뛰어넘어 산업 간 융복합으로 그간 낙후됐던 농촌에 새바람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된다. 전북은 2015년 농생명 연구개발 특구로 지정됐으며, 농촌진흥청을 필두로 혁신도시와 새만금 사이에 종자, 식품, 정보통신기술(ICT) 농기계, 미생물, 첨단농업 등 5개 농생명 클러스터가 안착해 있다. 이 중심에는 농업 분야에 첨단 ITSW기술을 융합해 농생명 관련 기술의 상용화를 돕는 기관인 전자부품연구원 농생명SW융합클러스터가 중추적 역할을 해내고 있다. 본보는 전북 미래를 이끈다 두 번째 순서로 전자부품연구원 농생명SW융합클러스터의 최주환 센터장을 비롯해 IT응용연구센터의 정성환 박사, 최철호 선임연구원박인선 연구원을 만나 4차 산업혁명과 농업에 대한 논의를 진행했다.△농생명산업 전북형 4차 산업혁명 중심으로4차 산업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히는 것은 산학연관으로 이어지는 경제융합 생태계 조성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 세계 대도시가 서둘러 소프트웨어 융합 클러스터를 구축하는 추세도 이와 무관치 않다. 전북 농생명산업의 도약은 ICT기술을 효율적으로 활용, 농민과 기업이 상생 발전하는 모델을 만드는 데서 시작될 것으로 전망된다.이미 전 지구촌에서 농업 생산과 가공유통 등 곳곳에 로봇, 빅데이터, 사물인터넷, 인공지능이 접목돼 유용하게 활용되면서 4차 산업혁명이 현실로 다가와 있다. 농생명 SW융합클러스터 전북센터는 산학연 네트워크를 구성해 협력R&D를 지원하는 기관이다. 센터는 상품화 전 단계에 있는 ICT 기술을 농가에 적용하기 위해 개방형 네이처 랩(Open Nature Lab)을 운영해 장비와 기술컨설팅을 제공하고, 테스트 베드(시험무대)와 같은 인프라를 지원하고 있다. 또한 SW융합센터는 미래창조과학부, 정보통신산업진흥원, 전북도, 전주시의 지원으로 개방형 농생명 SW융합클러스터 구축 및 운영사업을 진행, 농가와 벤처기업이 상생하는 전북형 4차 산업혁명의 발판 만들기에 주력하고 있다.△농생명산업 발전 중심에는 농민이 있어야최주환 SW융합클러스터 센터장은 첨단융합기술이 성공적으로 농업분야에 적용된다 하더라도 그 중심에 농민이 없으면 무의미하다고 강조한다. 산업 융복합의 목적은 기술발전 그 자체에 있다기 보다는 위기에 처한 농업의 현실을 개선하고 소득을 극대화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최 센터장은 농업의 첨단화는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농촌에 젊은 피를 수혈해 줄 것으로 기대되지만, 이 과정에서 고령농가는 스마트팜 기술 등에 적응하지 못할 우려가 있다며 농생명산업 정책의 중심에는 농민의 삶이 고려되야 한다고 강조했다.클러스터에서 실무운영을 총괄하는 업무를 맡고있는 정성환 박사는 첨단기술과 농민이 상생할 수 있도록 스마트팜과 IOT(사물인터넷) 제어기술을 시험해 볼만한 장소가 더 많이 필요하다며 농가와 지자체 측에서도 전북 내 농생명ICT 기업들과 더욱 활발하게 소통해야 한다고 피력했다.박인선 연구원은 전북형 4차 산업혁명으로 농업을 키우기 위해서는 제품개발은 물론 보급홍보할 수 있는 경로와 공간의 장벽이 허물어져야 한다고 지적했다.SW협력 네크워크 구축사업을 담당하는 최철호 선임연구원은 우리가 농민들과의 소통에 주력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며 현재 전라북도 마을 만들기 협력센터와의 공조로 첨단 SW융합마을 2곳을 선정할 방침이다고 밝혔다.△농업첨단기술 융합으로 농촌위기 대응전북의 일부 농촌 지역은 지방소멸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첨단 과학기술을 활용한 농생명 클러스터 활성화가 중요한 이유다. 정보관리와 과학기술을 농업에 적용시켜 한 단계 발전된 생산시스템을 갖추게 되면 고질적인 농촌의 노동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 젊은 세대가 유입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특히 AI, 구제역 등 가축전염병 관리도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스마트축사가 활성화되면, 공수의사가 없이도 가축의 질환상태를 미리 예측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으로 예측된다.최주환 센터장은 농생명산업의 발전은 요즘 이슈로 대두되는 동물복지와도 관련이 깊다며 축사에 의료시스템을 갖춘 IOT축사가 활성화 될 경우 매년 발생하는 전염병에도 대응이 가능해진다고 말했다.그러나 그는 농민들이 우려하는 것처럼 농업의 첨단화 속에서 일부 대기업이 농업을 잠식하는 사태는 미리 방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최 센터장은첨단기술의 발전과 농업기술 발전을 위해 대기업의 투자가 꼭 필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중소중견기업은 물론 농민과의 소득분배 정의를 위해 필요한 규제는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북 농생명산업은] 농도 강점 앞세워 4차 산업혁명화 추진최근 전북도는 농도 전북의 강점을 살려 4차 산업혁명의 블루오션을 개척하기 위해 미래 농업의 대표 모델로 혁신도시와 새만금을 연계하는 아시안 스마트 농생명 밸리프로젝트를 발표했다.이는 차별화된 발전역량을 갖춘 분야를 성장 동력으로 집중육성 한다는 점에서 지역발전뿐만 아니라 국가경쟁력 강화에도 기여할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진다.전북도는 5대 농생명 클러스터의 주요 거점을 연계할 도로, 철도, 항만 등 SOC가 2020년까지 구축되면 세계 농식품산업의 진출 전지기지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전북도는 전북연구원, 생물산업진흥원 등 출연기관과 전문가 의견수렴을 통해 6개의 과제를 발굴했다. 도는 국가식품클러스터의 경우 계획 목표 연도인 2020년 전북지역 미치는 경제적 파급효과는 GRDP 증가 효과 측면에서 최대1조6000억 원의 상승효과가 발생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또한 농식품 비즈니스센터 건립으로 다양한 국제 식품 전시 커벤션 국제행사 개최 6차 산업 발전도 꾀하고 있다.고용유발 효과도 기대된다. 도는 새만금 농생명 5공구에 농생명 청년 창업 특구를 조성 청년역량과 농업의 첨단화를 융합해 저성장 극복과 미래 청년 일자리 5만개를 창출 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군산조선소 위기로 인한 수출 부진을 타개할 수 있을지도 주목된다. 정부와 도는 지능형 농기계 실증단지을 구축해 해외 맞춤형 시험설비를 마련 농기계 수출 세계 10대 강국으로 도약한다는 포부다. 생명분야에서는 인체유용 미생물산업 육성, 동물용 백신기반 R&D지원 및 산업 육성, 첨단 미생물 발효소재 고도화사업을 추진 국내 미생물산업의 혁신적 생산기반 구축을 통한 생명공학산업의 중심지로 도약을 목표로 한다.도는 농생명수도 도약을 이번 대선 공약에 최우선적으로 반영될 수 있도록 해 전북을 아시아 최대의 첨단 농생명산업 중심지로 만들겠다는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

  • 기획
  • 김윤정
  • 2017.03.01 23:02

이념에 빠지지 말고, 세계에 직접 접촉하라

철학자 장자(莊子)는 보통을 훨씬 넘어선 그의 시각을 기록으로 남겼다. 수준이 가장 높은 사람은 하늘이 하는 일을 알면서, 인간이 하는 일을 아는 사람이다.(知天之所爲, 知人之所爲者. 至矣.) 「대종사」 편 첫머리에 등장하는 말이다. 지금부터 2000년도 훨씬 전에 이렇게 가장 높은 곳에서 인간사를 개괄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원래 인간은 두 세계를 겹쳐 놓은 무대에서 사는데, 하나는 자연의 세계요, 다른 하나는 문명의 세계다. 자연은 인간이 없을 때부터 존재했으며, 사실상 인간과 상관이 없던 세계다. 문명은 오롯이 인간이 건설한 세계다. 인간은 이 두 세계 외에 다른 세계를 가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이 두 세계를 가장 높은 차원에서 알게 된다면, 그는 지적으로 가장 탁월한 능력자다. 설령 가장 탁월하지는 못할지라도 인간으로서 이 두 세계에 대하여 균형 잡힌 이해를 하고 있으면, 어느 정도는 높은 단계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세계를 다 아는 것은 나처럼 적당한 지력을 가진 사람에게는 버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그래서 한 쪽이라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하자고 제도적으로 합의한 결과, 고등학교 2학년 올라갈 때 영역을 구분한다. 즉 문과와 이과를 각자 선택하여 우선 한 쪽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문과와 이과를 어떤 기준으로 선택했냐고 물으면 가장 많은 답으로 수학Ⅱ를 든다. 수학Ⅰ은 어떻게 해보겠는데, 수학Ⅱ까지는 자신이 없을 때 문과를 택한다는 것이다. 결국 수학Ⅱ가 부담이 안 되는 사람이 이과를 간다. 그러나 문/이과를 선택하는 데에 이보다는 깊은 의미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문과를 가서 배우는 학문을 보자. 철학, 사학, 문학, 정치, 경제, 법률, 신문방송학 등등이다. 이과로 진학한 다음에는 주로 생물학, 물리학, 지구과학, 천문학, 수학, 화학 등등을 배운다. 이렇게 나눠놓고 보면, 두 영역을 가르는 기준이 희미하게 드러난다. 이렇게 물어보자. 이 지구상에서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나 인간이 갑자기 한 명도 남김없이 모두 사라져버렸다고 치자. 그렇다면 문과에서 배우는 학문 분야는 인간이 사라져버려도 여전히 남아 있는가? 아니면 함께 사라져 버리는가? 함께 사라져 버린다. 똑같은 질문을 이과 학문 대상들에게도 할 수 있다. 인간이 모두 사라져버려도 이과에서 배우는 학문 대상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문/이과를 선택할 때, 인간이 사라져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것에 관심이 있으면 이과를 가고, 인간이 사라질 때 함께 사라져버리는 것에 관심이 있으면 문과를 가는 것이라고 알 수 있다. 인간이 개입되어 있느냐 개입되어 있지 않느냐가 관건이다.세계를 통괄하는 능력을 가진 인간형을 추구한다면 문과와 이과를 나누는 것보다는 당연히 문/이과를 함께 다루는 교육 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세계는 문(文)과 이(理)의 두 영역으로만 되어 있고, 이 두 영역은 인간의 실존적 전체 공간이기 때문이다. 자연이 하는 일과 인간이 하는 일을 다 알면 가장 높다는 장자의 통찰은 얼마나 정확한가. 이제 자연세계와 인간세계를 모두 이해한 가장 지적인 인격이 태어났다.자연 세계와 문명 세계의 이치를 모두 아는 사람은 얼마나 위대할까? 그 정도의 사람이 하는 일은 또 얼마나 거창할까? 하늘이 하는 일과 인간이 하는 일을 모두 아는 비범한 높이의 인격을 가진 사람을 창조한 장자는 이런 높이의 사람이 가지는 구체적인 효과를 다음처럼 말한다. 천수를 누리고 중도에 요절하지 않는다. 이것이 지적으로 최고의 단계다.(終其天年, 而不中道夭者. 是知之盛也.) 지적으로 최고의 단계에 이른 사람이라면 무언가 초월적이고 추상적이고 월등한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거의 아연실색할 지경이다. 그렇게도 높은 단계의 지적인 완성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이 고작 요절하지 않는 것이라니! 뭔가 갑자기 촌스러운 골목 모퉁이를 도는 착각이 들 정도다. 최소한 자유나 행복이나 정의나 완벽함이나 성스러움 등이 나올 줄 알았는데, 고작 천수를 누리는 정도라니, 이해가 가질 않는다.도대체 죽는다는 일은 무엇일까? 인간이 실제 생활에서 감당하는 구체적인 일 가운데 가장 무거운 것이다. 실제로 벌어지는 일 가운데 이보다 큰일은 없다. 그런데 지식에는 끝없이 분화하는 속성이 있다. 무한히 분화하면서 한없이 확장한다. 지식의 분화에는 원심력이 작용하고, 실재 세계는 중력의 영향을 받는다. 지식의 분화에 몸을 맡긴 사람은 진짜 세계로부터 계속 이탈하고 벗어날 수밖에 없다.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이 무한 분화하는 지식을 따라 원심력에 몸을 맡기면 매우 위험하다는 경고판을 장자는 이미 「대종사」편 앞의 「양생주」 첫머리에 세워 놓았다.(吾生也有涯, 以知也無涯, 以有涯隨無涯, 殆已) 그는 지식이란 실재 세계, 즉 구체적인 세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 했다. 그는 단호하게 말한다. 개념이라는 것은 실재 세계의 손님일 뿐이다.(名者, 實之賓也. 「逍遙遊」) 세계 그 자체는 구체적으로 유동한다. 그것이 실재이고 진짜이다. 지식이란 원래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진짜 세계를 개념이나 관념의 형식으로 구성한 것이다. 지식은 진짜가 아니라, 진짜를 개괄하는 것일 뿐이다. 당연히 지식이나 이론은 진짜 세계일 수 없다. 지적으로 완벽한 인간은 세계를 믿지, 지식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다. 어설픈 지식인은 지식이나 이론을 화려하게 나열한다. 하지만, 높은 단계의 지식인은 투박하더라도 세계에 대하여 직접 말한다. 세계를 사유하지, 사유를 사유하는 일을 하지 않고 구체적인 세계에 직접 접촉한다. 장자는 구체적인 세계에 직접 접촉하고, 거기서 성숙해지는 것이야말로 지적으로 완성된 사람이 보여주는 경지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결국 지적인 완성은 현실에서 검증될 뿐이다.우리는 지식 생산국이 아니라 지식 수입국이다. 지식은 구체적인 진짜 세계를 밭으로 삼아 바로 거기서 출생한다. 지식 수입국은 밭에서 지식이 생산되는 과정을 모른 채, 수확된 이론 체계만을 가져다 쓴다. 생산 과정을 모른 채 이론을 수입한 나라는 그 이론을 바로 진리로 여긴다. 밭에서 생산된 것이라는 인식이 있으면 밭을 터전으로 삼지만, 그 과정을 모른 채 수확물을 수입만 해서 쓴다면 수확물 자체를 보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체적인 생산 과정에 익숙한 사람들은 주도권을 세계에 두고, 이론을 수입한 나라의 사람들은 주도권을 세계가 아니라 이론에 둔다. 당연히 지식 생산국에서는 세계가 변하면 이데올로기나 이론을 바꾸며 변화해 가지만, 지식 수입국은 한 번 받아들인 이론을 끝까지 믿으며 절대 바꾸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이론으로 진짜 세계를 통제하려 든다. 한 쪽은 변화하며 앞으로 나아가지만, 한쪽은 정체될 수밖에 없다. 지식과 실재 세계를 대하는 이런 태도의 차이가 바로 독립과 종속을 결정해버린다.조선 시대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패망의 기운에 붙잡힌 고려 말의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 성립된 나라인 조선은 고려하고는 전혀 다른 통치 구조나 이데올로기를 쓸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성리학(性理學)과 중앙집권 관료체제를 선택한다. 성리학은 중국 송나라 때 형성된 새로운 형태의 유학적 이데올로기다. 조선은 원나라와 명나라가 교체되는 시기에 성리학을 받아들여 그것을 통치 이데올로기로 정하고 난 후, 줄곧 원래의 성리학 모습을 지키려 매우 노력한다. 하지만 중국은 ― 물론 왕조가 교체되는 정치적 격변을 동반하였다는 점을 이해하더라도 ― 구체적인 현실 세계의 사회 경제적 조건이 달라지면 바로 거기에 맞춰 이데올로기를 바꿨다. 그래서 같은 유학이라도 명나라 때에는 양명학(陽明學)으로 변하고 청나라 때에는 고증학으로 변한다. 다시 조선을 보자. 조선은 1392년에 건국하면서 성리학을 이데올로기로 채택한 후 사상 논쟁의 핵심은 모두 누가 더 성리학의 원래 모습을 철저히 지키느냐에 집중되었다. 순수 집착에 빠진 조선의 엘리트들은 사회 경제적 조건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중국에서 들어온 진리로서의 성리학을 손톱만큼도 바꾸려 하지 않았다. 모름지기 한 나라가 발전한다는 것은 이데올로기 혹은 아젠다나 비전 같은 것들이 그 사회가 처한 요구와 일치하였을 때에만 이루어진다. 그 사회가 처한 현실적 요구와 비전이 일치하지 않을 때는 바로 비효율이 쌓이기 시작한다. 비효율이 쌓여가면서 국가는 허약해지고, 길을 잃는다. 조선은 이데올로기를 현실에 맞춰 바꾸는 대신, 현실을 이데올로기에 맞추려는 노력만 했다. 세계에서 이론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정해진 이론에 꿰맞추려 한 것이다. 진리를 지키려는 순수한 집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물론 여러 가지 효율적이며 실재적인 일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큰 틀에서는 이 흐름을 줄곧 유지하였다. 이런 식으로 이론에만 집착하는 일을 장장 200년 동안이나 한 것이다. 200년 동안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변함없이 지키려고 노력한 결과 국가는 극단적인 비효율에 빠져 허약해졌다. 결국 1592년 일본의 침략 앞에 맥없이 당하는 치욕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그렇다면 중국은 어떻게 이론 틀에 세상을 맞추려 하지 않고, 세상이 달라짐에 따라 대담하게 이론을 바꾸는 일을 할 수 있었을까? 간단하다. 중국은 그 이론을 생산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론을 생산한 나라는 이론이 현실이라고 하는 밭에서 생산된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들은 시선의 무게 추를 이론에 두지 않고, 직접 현실에 둔다. 구체적인 세계와 현실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지, 이미 정해진 이론을 금과옥조로 여기지 않는다. 이론은 그저 현실에서 생산된 부산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이론을 수입한 나라는 이론이 생산되는 그 과정을 경험하지 못한 채, 이미 생산된 이론만을 수입해서 쓰기 때문에 이론을 불변하는 진리로 여기기 십상이다. 이런 경우에는 이론이나 이데올로기를 바꾸면 바로 정의롭지 않은 변절자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그러나 세상의 진화는 현실에 기반을 둔 변절자(혁신가)가 해내지, 이념이나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근본주의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지적인 완결성은 구체적인 현실에 시선의 무게 추를 두고, 거기서 사유의 밭갈이를 하는 우직함에서 드러날 뿐이다. 그 밭갈이의 완성은 또 이 세상에서 가장 구체적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생명 앞에 좌우된다. 지식의 원심력을 극복하고, 실재의 중력을 항상 느껴야 한다. 그것이 독립적이고 창의적으로 사는 길이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건명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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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2.28 23:02

바른정당 최고위원에 임명된 정운천 의원 "전북 전주가 호남의 보수정당 중심되도록 최선"

바른정당 최고위원에 임명된 정운천 국회의원(전주을). 그는 2010년 정치에 입문해 야권 텃밭에서 3차례 선거를 치르면서도 바꾸지 않았던 당적을 지난해 과감히 바꿨다. 국정농단 사태에 반성하지 않는 정치권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다. 당적을 바꾼 뒤 그는 전북은 물론 광주와 전남 등 호남을 대변하는 보수의 아이콘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그는 전북의 예산전도사로 분주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국회 입성 직후 국가예산 확보를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뿐만 아니라 올해도 14개 시군 예산담당자들과 직접 소통하며 내년도 국가예산 준비에 여념이 없다.-정치에 입문해 한 번도 바꾼 적 없는 당적을 바꿨습니다.헌정사상 초유의 사태인 최순실 국정농단사태를 맞아 새누리당을 변화시키고 개혁을 요구했습니다. 총선참패에 대한 책임과 새누리당 윤리위원회 부위원장으로서 국정농단 사태에 대해 대통령을 징계하고 친박패권 주도세력들의 책임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지도부는 윤리성 제고는커녕 대통령을 비호하고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를 지지해주시는 많은 도민들께서 친박패권 세력에 휘둘리지 말고 떠나야한다고 제언해주셨습니다. 바른 보수의 길을 가기위해 신당에 함께 했습니다.-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의 차이는 무엇입니까.자유한국당은 친박패권 세력으로서 최순실 국정농단사태에 대한 대통령의 탄핵을 반대하는 세력이고, 바른정당은 대통령 탄핵을 주도하는 세력으로서 깨끗한 보수, 따뜻한 보수를 지향하고 국민들을 기만하는 권위주의를 무너뜨리고 서민과 중산층의 민생을 먼저 챙기며 국민 모두를 어우르는 포용력을 가진 진정한 보수정당입니다.-정 의원이 국회 입성하면서 호남 보수정당 중심이 전북으로 바뀌고 있습니다.호남 보수정당의 중심이 전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도민 여러분께서 20년 만에 정운천을 선택해서입니다. 여러분의 선택으로 전북 전주가 호남 보수정당의 중심지로 떠올랐습니다. 바른정당 도당 창당대회에 1500여명에 달하는 도민들이 함께 해주셔서 어느 시도당보다도 뜨거운 열기와 보수개혁 의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전북 전주가 중심이 돼 전남광주를 끌어안고 호남의 중심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20대 국회 입성 뒤 한 차례 국가예산 확보 전을 치렀습니다. 지난해 평가와 올해 계획은 무엇입니까.작년까지 지난 3년 동안 전북 예산은 6조 1000억 원 밑으로 홀대 받고 있었습니다. 저는 예산결산위원으로서 전북예산 홀대에 대한 농성까지 벌이면서 예산 투쟁을 벌여 대구경북의 예산은 감소한 반면 전북은 6조 2535억 원으로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뤘습니다. 1당 독주에서 벗어나 여야 쌍발통의 협치를 통해 효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올해는 지난 1월부터 전북 최초로 14개 자치단체 예산실무자 회의를 개최했습니다. 예산은 시작부터 잘 만들어 정부부처에서 국회로 넘어올 때까지의 과정을 촘촘하게 챙겨야 합니다. 실무진들과 체계적으로 소통해 전북 몫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것입니다.-조기대선 가능성이 높은데요. 대선정국 속 전북 몫을 찾기 위한 방안은요.과거 1당 독주의 폐해가 전북을 가장 낙후된 지역으로 만들었습니다. 1당에 몰표를 주는 광주모델을 벗어나야 합니다. 이제 충청모델로 가야 합니다. 과거 충청도가 각 당에 균형적인 표를 줘 캐스팅 보트를 쥐고 실익을 추구했던 것처럼 전북도 이번 대선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중요한 지역으로 인식시켜야 합니다.-AI, 구제역 등 국가위기관리를 위해 재난안전부대 창설을 주장했습니다.AI, 구제역, 지진 등 국가에 재난이나 재해 시 즉각 대응할 수 있는 국가 재난안전부대를 창설해야 합니다. 이번 AI와 구제역사태의 확산속도는 KTX 열차인데 반해 대응 속도는 완행열차에 불과했습니다. AI나 구제역은 최대한 빠른 살 처분이 관건임에도 우리나라는 공무원 노조로 인해 긴급 인력 투입이 어렵습니다. 일본의 경우는 자위대를 동원해 즉각 살 처분 작업에 들어가는데 반해 우리나라는 살 처분까지 2~3일은 기본적으로 소요되었고 세종시의 경우 일주일씩 걸리기도 했습니다. 이에 따라 AI, 구제역, 지진 등의 국가적 재난에 즉각 대응할 수 있는 국방부의 국가재난안전부대 창설이 반드시 필요합니다.-대한민국이 위기라고 합니다. 위기극복 방안 뭐가 있을까요.저는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에서 두 가지 부분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해외 취업 10만 명 양성과 10만 태양광 농가발전소입니다. 현재 청년들의 실업률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며 취업절벽에 절망하고 있습니다. 우리 청년들의 취업 무대를 국내에서만 경쟁할 것이 아니라, 세계 시장으로 확대해 다양한 해외 경험을 쌓도록 지원하고 국가 성장을 주도할 핵심인력으로 양성해야 합니다. 코트라와 코이카, 대기업 주재관, 대사관과 영사관 등 세계 전역에 구축된 대한민국 인프라와 노동부, 교육부, 중기청, 각종 협회 등 국내 민관 합동으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상황에 맞는 전략적 접근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농업도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는 정책이 필요합니다. 태양광 농가발전소는 신재생에너지를 사용함으로써 환경을 생각하고, 전기 판매로 농가의 장기간 소득을 담보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춰나가는 일거양득의 정책입니다. 예를 들어 400평 기준으로 농사를 지을 땐 80만원의 연간 수익이 발생하지만 농가 태양광발전소를 운영하면 연 2400만원의 매출이 발생합니다. 산업부와 2020년까지 태양광 농가발전소 1만호 건설을 추진 중입니다. 바른정당 주요 당론으로 적극 추진해 앞으로 전국 10만 농가로 확대할 것입니다.-지역주의 타파와 선거제도 개편, 개헌에 대한 복안이 있다면.저는 전주에서 임방현 의원이 당선된 이후 32년 만에 여당 의원으로 당선됐습니다. 지금까지 30년 동안 전북에서는 도지사시장군수도의원시의원 등 여당 의원은 한 명도 없습니다. 18대 국회 때 지역 장벽을 허물기 위해 최소한 석패율제도라도 도입해 영남과 호남에 민주당, 한나라당이 5명 정도 당선돼 지역 장벽을 깨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19대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지역주의, 패권주의 이제는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20대 국회에서는 개헌특위를 통해 중선거구제, 석패율제를 도입해 권력 구조를 고치고 철옹성 같은 지역 장벽을 깨 정당 정치를 복원해야 대한민국 정치의 미래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전주시민과 전북도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농사를 짓는 농부가 두 군데 밭이 있는데 하나의 밭에만 비료를 주며 정성을 들이고 다른 밭은 비료도 안주고 정성도 들이지 않았으면서 양쪽 밭에서 모두 수확을 하지 못한다고 한탄하는 농부가 있습니다. 대선정국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전북에는 대선주자가 없습니다. 지혜로운 선택이 필요합니다. 충청모델을 선택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각 당이 전북에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도록 한 당에 쏠리지 않고 균형적인 표를 통해 전북을 살리는 지혜가 이제 필요한 시기입니다.● [정운천 의원은] 전북유일 보수정당 의원농업발전 앞장1954년 4월 전북 고창에서 태어났다. 고려대 농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전라남도 해남 땅 끝 마을로 내려가 25년간 농업인들과 동고동락하며 정부가 부적합판정을 내린 키위산업을 살렸다.2008년 2월 농림수산식품부 초대 장관이 돼서는 현장의 잔뼈가 굵은 농업인답게 현장 속으로 운동을 전개해 살맛나는 농어촌을 만들기 위해 분투했으며, 온 나라를 휩쓴 광우병 파동으로 퇴임한 후에도 농업 발전과 한식 세계화를 위해 동분서주했다.2010년, 정치에 입문했다. 전북도지사 선거에 나가 소통의 씨앗을 뿌렸고, 낙선했음에도 선거 공약을 지키지 못한 죄를 물어 스스로 함거에 올랐다. 2016년 전북 유일 보수정당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20대 국회 입성해 산업통상자원위원회에서 태양광 농가발전소와 같은 정운천만의 현실적 실용성과 창조적 동력을 갖춘 정책을 제안하고 실현시키는 데 앞장서고 있다.또한 바른정당의 AI대책특별위원회 위원장, 전라북도당위원장 등 묵직한 역할을 맡아 활발한 행보를 보이고 있으며 앞으로 펼쳐질 대선정국에서 호남의 보수진영 대표로서 중책을 맡을 것으로도 전해진다.

  • 기획
  • 박영민
  • 2017.02.27 23:02

[전북일보 만화뉴스] 기금운용본부와 무지갯빛 전북 시즌 2

#표지.기금운용본부와 무지갯빛 전북 시즌 2#1.(전주로 가는 KTX 안)#2.결국 전주로 가게 되는군요.뭐, 그렇죠. 처음부터 그렇게 하기로 했던 거니까요.#3.많은 일이 있었군요.그랬죠.#4.(회상)#5.(밀실에서 회의하는 모습)기금운용본부 공사화 논란#6.기금운용본부 전북혁신도시 이전 문제 대선 구호로 등장#7.최광 이사장 퇴임과 문형표 이사장 등장#8.문형표 당시 이사장 차질 없이 이전할 계획입니다.#9.국정감사에서 다시 튀어나온 기금운용본부 이전 재검토공사화 논란#10.떠나는 직원들 계약 만료 등으로 28명 이탈#11.삼성물산 합병 영향력 행사 논란과 압수수색#12.문형표 이사장 구속과 사퇴#13.우리 열차는 잠시 후 전주역, 전주역에 도착하겠습니다.#14.잘 정착하겠죠?그럼요!#15.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가 25일부터 3일에 걸쳐 전북혁신도시로 이사 온다. 기금운용역(펀드매니저) 223명을 포함한 직원 291명과 함께.#16.국민연금공단은 이전 후 기금운용역을 50여 명 채용할 계획이다.#17.머물러 살 수 있는 환경과 교통숙박시설 등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은 전북혁신도시의 남은 과제다.#18.(용 얼굴에 점 찍는 화가)/기획 신재용, 구성 권혁일, 그림 이권중

  • 기획
  • 전북일보
  • 2017.02.24 23:0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⑤ 동학농민혁명군 루트와 전봉준 공초-'평등 세상' 외치던 뜨거웠던 정신…유산계승에 힘 모아야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를 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녹두장군 전봉준(1855-1895)이 동학농민혁명 당시 발표한 격문의 내용이다. 짧게 쓴 문장이지만 그 결의가 실로 절실하게 와 닿는 글이다. 올해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123년째 되는 해이다. 고부(현재의 정읍)군수 조병갑(趙秉甲)의 수탈과 횡포에 항거해 발발했던 동학농민혁명은 실패한 혁명이 되었지만 봉건주의와 오랜 억압속에 살던 농민들의 저항의식을 일깨우고 한국의 근현대사에 크게 영향을 끼쳤던 대사건이었다.역사의 전말은 이렇다. 어릴적부터 체구가 작아 녹두(綠豆)라 불렸던 전봉준 장군은 고창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내고 여러 곳을 거쳐 살다 고부에 정착했다. 그런데 당시 고분군수 조병갑은 온갖 명목으로 부당한 세금을 거두어 농민들을 착취하고 백성들에게 거짓 누명을 씌우는 등 폭정을 일삼는 사람이었다. 정읍천 하류에 농민들이 잘 사용하던 보가 있었음에도 굳이 핑계를 만들어 흉년이 들어도 만석이 난다는 이름의 만석보를 쌓고 세금(水稅)을 거둘 정도였다. 민심을 파악한 조정에서 조병갑을 익산으로 전출을 시켰으나 쉽게 수탈을 일삼던 고부를 떠나기 싫었던 조병갑이, 조정에 손을 써 다시 돌아오면서 농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전봉준과 1000여 명의 분노한 농민들은 말목장터 감나무 아래에 모여 뜻을 같이 하고 관아를 습격했다. 옥을 열어 죄 없는 농민들을 풀어주었으며 곳간을 열어 세미(稅米)를 빈민에게 나누어주었다. 횡포를 상징하는 만석보를 파괴하고 만석보 혁파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하지만 관리들의 만행은 계속되어 전봉준과 농민들은 다시 봉기를 일으켰다. 이번에는 각지에서 1만 여명의 동학농민혁명군이 봉기해 차례차례 관군을 격파했고 급기야 전주에 입성해 정부와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기까지 하였다. 비록 조정이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고 이를 구실로 들어온 일본군이 관군에 합세하면서 결국 동학농민혁명군은 패배하였고 전봉준 장군은 붙잡혀 사형을 당할 수밖에 없었지만,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역사의 정신적 유산이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 남아있는 유물이나 유적, 그리고 다양하게 남겨진 기록과 기억으로 전승되는 흔적 덕분이다. 고창에는 전봉준 장군의 생가터와 부친 전창혁이 아이들을 가르친 서당터가 남아있고, 정읍에는 전봉준 장군의 고택이 사적으로 보존되어 있다. 정읍의 동학농민혁명기념관 근처에는 우물물로 농민혁명군의 밥을 지어 먹여 동학농민혁명군 우물로 지칭되는 우물과 관아터도 있다. 만석보가 있던 터에는 설명판이 있고, 비문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된 만석보 혁파비엔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비각(碑閣)을 세워 놓았다. 말목장터의 감나무 역시 100년 이상 자리를 지키다가 2003년 태풍 매미때 쓰러진것을 보존처리하여 동학농민혁명전시관으로 옮겨놓았고 다른 감나무가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아직까지 남아있는 기록물로써 대표적인 것은 체포 압송될 때의 모습이 담긴 사진과 사발통문 그리고 전봉준 장군의 재판기록인 전봉준 공초(全琫準 供草)가 있다. 사진은 당시 한국에서 활동했던 일본 사진기사 무라카미 덴신이 촬영한 것으로 전봉준 장군이 1895년 2월 27일 서울에 있는 일본 영사관에서 관청인 법무아문(法務衙門)으로 이송되는 모습으로 알려져 있다. 안도현 시인은 이 사진에 대한 인상을 시(詩) 서울로 가는 전봉준으로 남겨 1984년 신춘문예에 당선되었고,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작가로 우리 곁에 있다. 1968년 정읍시 고부면에서 발견된 사발통문도 있다. 고택 마루 밑에 70년 동안 묻혀 족보 속에 있었던 이 사발통문은, 전봉준 장군을 비롯한 동학 간부 20여 명이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이하 악리들을 제거하며 이어 전주감영을 함락시키고 서울로 직향할 것을 결의한 내용을 담은 것으로 추정된다.문) 너의 성명은 무엇이냐? 답) 전봉준이오문) 나이는 몇 살인가? 답) 41살 이오문) 사는 곳은 어디인가? 답) 태인 산외면 동곡리오문) 직업은 무엇인가? 답) 선비를 업으로 삼고 있소간단한 문답으로 시작된 전봉준 공초는 31일간에 걸쳐 5번 열린 심문에 275개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법정 심문기록이다. 법무아문의 관원과 일본영사가 함께 재판에 참여한 것으로 전봉준 장군이 의연하게 답한 과정을 볼 수 있다. 전봉준 공초는 동학농민혁명의 의미와 전개 과정, 그리고 전봉준 장군의 사상을 이해하고 관련지점 및 인물에 얽힌 그의 심리와 고증의 기준이 되는 가치있는 고문서이다. 재판 후 사형판결을 들은 전봉준 장군은 나는 바른 길을 걷고 죽는 자다. 그런데 역률(逆律:역적을 처벌하는 법률)로 적용한다면 천고에 유감이다고 개탄하였다 한다. 고종실록에 사형판결일만 나와 있고 집행일이 명시되지 않아 사형일이 판결 당일이라는 설이 있었으나, 경성신보, 시시신보, 동경조일신문 등에 전봉준 장군의 사형집행이 판결 다음 날인 4월 24일(음력 3월30일)로 기록되어 있다. 필사본으로 기록된 전봉준 공초는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원본이 보관되어 있다.새야 새야 파랑새야 / 녹두밭에 앉지 마라녹두꽃이 떨어지면 / 청포장수 울고 간다전체 가사는 몰라도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라는 노랫말은 우리나라 전역에 널리 퍼진 전래민요다. 그 노랫말에 나오는 파랑새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청나라 군사 혹은 푸른 군복을 입은 일본군인이라고도 하고, 전봉준의 성인 전(全)자를 풀어 팔왕(八王)새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부안출신 신석정 시인은 전북일보 1963년 9월 29일자를 통해 갑오동학농민의 노래를 발표했다. 1963년 정읍 덕천면에 있는 갑오동학혁명기념탑 건립 당시 건립위원장인 가람 이병기 선생의 위촉으로 신석정 시인이 동학농민혁명에 대하여 쓴 시이다.새야 새야 파랑새야/ 너 어이 나왔느냐/ 솔잎 댓잎 푸릇푸릇/ 봄철인가 나왔더니/ 백설이 펄펄 흩날린다/ 저 건너 청송녹죽이 날 속이었네. 전원시인으로 알려졌지만 일제시대부터 저항시를 써왔던 신석정 시인의 면모가 돋보이는 시이다. 비록 실패한 혁명이 되었지만 평등한 세상을 꿈꾼 수많은 농민들의 염원은 민족 정신문화의 상징으로 우리 땅에 남아 있다. 이러한 동학농민혁명을 기리고자 관련 지자체나 유관기관들은 유적을 보존복원하고 관련 예술활동을 지원하고, 유적지 답사와 테마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동학농민혁명 유산을 총체적으로 아우르는 루트로의 연결성과 정확한 고증에 따른 지원 그리고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이 부족한 실정이다. 그 뜨거웠던 정신이 아직까지도 따스한 온기로 남아 있을 때 유산 계승에 힘을 모아야 한다. 평등사회를 꿈꾸며 나아갔던 동학농민혁명군의 발자취를 의미있게 복원하고 잇는다면 크나큰 자산이 될 것이다. 오늘날에도 살아 숨 쉬는 민족정신의 구간으로 올곧이 되살려 그곳에서 살아갈 힘을 얻고 환한 미래를 함께 그려보는 날을 기대한다.

  • 기획
  • 진영록
  • 2017.02.24 23:02

[익산시 왕궁면] 한센인정착촌 아픔 딛고 각계 인물 줄줄이 배출

왕궁은 삼한시대 백제 마한의 왕궁이 있던 곳이다. 왕들의 궁터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지역의 이름으로 쓰고 있는 매우 이례적인 곳이며, 호남고속국도와 1번 국도가 남북 방향으로 관통하는 호남의 관문이기도 하다. 완주군(삼례, 봉동)과 지리적으로 인접해 통일신라시대까지도 완산주 관하의 금마군 우주현이었다.자랑만큼이나 아픈 역사도 간직하고 있다. 한센인 정착촌이다. 1948년 국립병원 소생원이 이 곳에 건립된 뒤 격리 치료받은 사람들과 전남 고흥의 소록도에서 1차 치료된 뒤 강제 이주된 사람들이 살았다. 61년 정착지가 본격적으로 조성되기 시작해서부터 병이 유전되지 않는다고 판명돼 정부가 격리조치를 해제한 1990년대 중반까지 외부로 나가지 못한 채 갇혀 살아야 했다.이들 중에는 치료약을 중단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고, 치료약의 독성이 워낙 강해서 약을 먹기 위해서는 단백질 섭취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래서 일찍부터 발달한 것이 닭, 돼지, 염소 등 축산업이다.축산업의 발달은 많은 부작용을 초래했다. 심한 악취는 고속도로 통행인들을 사시사철 밤낮으로 괴롭혔고, 엄청나게 쏟아져 나온 축산폐수는 새만금 수질오염의 난제가 됐다. 그동안의 정비사업으로 많은 부분이 개선됐지만, 정착촌 조성의 당사자인 정부가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들도 적지 않다.이런 가운데 왕궁면은 지금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맞고 있다. 익산IC에서 불과 5분, 완주공단과 10분 이내 거리에 있는 지리적 이점으로 자동차 부품 등 관련 기업들의 입주가 심심치 않게 이뤄지고 있다. 더 나아가 전북도가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국가식품클러스터의 중심지가 바로 왕궁면이다.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15만평에 이르는 왕궁저수지 수리시설과 끝없이 펼쳐진 비옥한 황토흙 토질이다. 한센인 한 하운 시인이 읊었듯이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이 국가식품클러스터의 성공을 약속하는 듯하다.△정계정계 인물로는 60년 참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도내 최고득표로 당선된 뒤(4선) 초대 참의원(지금의 국회) 부의장을 지낸 소선규씨(1903~68)가 대표적이다. 일본 후쿠시마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부시장을 지낸 뒤 야당으로 4선에 성공한 경제통이었으며, 날카로운 직관과 독설로 유명했다.지역내에서는 원광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제 4대와 5대 전북도의회 의원이자 4대 의회 부의장을 지낸 소병기씨(71)가 있으며 그의 딸은 서울에서 국선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345대 익산시의회 의원이자 4대 의회 후반기와 5대 의회 전반기 의장을 맡았던 김정기 전 의원(72)도 왕궁 출신이며, 현직으로는 경기도의회 송순택 의원(67)이 있다.△관계전주여고 교장을 지낸 뒤 92년부터 98년까지 전북도교육감을 맡았던 홍태표씨(89)는 고향 인근 금마면에 전북과학고를 세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92년부터 7대 익산시교육장을 역임한 뒤 교육위원회 의원을 지낸 송병윤씨(82)도 왕궁 출신이다.송병순씨(88.고인)는 재경부(지금의 기획경제부) 관세국장과 국민은행장, 은행감독원장 등을 지낸 인물로 직위에 맞지 않을 만큼 청빈한 삶을 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송병순씨는 명나라 주지번의 스승으로 청빈한 삶을 살았던 표옹 송영구(1556~1620)의 12대손이며, 전주 객사의 풍패지관은 스승을 찾아 조선을 방문했던 주지번이 쓴 글로 알려져 있다. 또 표옹 송영구의 신도비는 전북도 무형문화재 제232호로 지정돼 있다. 전북도청 공보관과 무주군수, 공무원교육원장, 체육회 사무처장 등을 지낸 송억규씨(75)도 송영구의 후손이다.왕궁 출신으로 한학과 서예에 능했던 이동구씨(84)는 전북도청 민방위 국장과 무주군수, 완주군수를 지냈다.소재민씨(73)는 전북도청에서 총무과 인사담당과 법무담당관, 감사관을 지냈고, 비상대책관을 지낸 소은영씨의 아들 소병준씨는 현재 원광대병원 흉부외과 과장을 맡고 있다. 전북도청 수산시험연구소장과 수산과장을 지낸 우병남씨(65), 김용학 전 공무원교육원 교육운영과장(69)도 왕궁면 출신이다.익산시청에는 이춘희 전 기획행정국장(81)과 현 유희완 미래농정국장이 있다.외교통상부 소속으로 브라질 대사를 지낸 김경용씨(62)와 감사원 과장을 지낸 곽경제씨(72), 청와대 행정관(경비과장) 송호종씨(53)도 고향이 왕궁이다.△소방경찰군소방공무원으로는 소방간부 2기 출신으로 전북소방본부 구조구급과장과 광주시소방안전본부장, 인천시소방방재본부장을 거쳐 대한소방방제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서정식씨(65)가 있다.경찰 출신으로는 전북경찰청 과장과 순창경찰서장, 전주북부경찰서장, 군산경찰서장을 거쳐 익산경찰서장을 지낸 송완식씨(72), 임실과 장수, 김제 경찰서장을 지낸 김운회씨(62)가 있다.군 출신으로는 의무감 출신으로 육군 준장으로 예편한 소병조씨(65)와 현역대령인 맹영호 포대장이 있다. 육사 34기인 홍성근씨(63)는 84년 예편한 뒤 국세청 사무관으로 특채돼 익산세무서장과 고양세무서장 등을 지냈다.△기타도내 태권도 1세대로 63년 일본 동경에서 열린 일본권법회와의 한일전에 참가할 국가대표팀에 뽑히기도 했던 황대진씨(75)는 이후 핀란드와 리투아니나, 라트비아 등에서 태권도를 보급하다가 핀란드에 정착해 핀란드 헬싱키시 국회의원과 시의원에 출마하기도 했다. 현재는 핀란드 재한인회장을 맡고 있다.홍대표씨(87)는 원광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교수로 재직하며 양귀자, 윤흥길, 박범신 등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들을 키워낸 인물로 그의 아들이 현재 익산에서 홍내과 의원을 운영하고 있다.대한변호사협회 법제이사를 지낸 법무법인 동서파트너스의 김갑제 변호사(65)는 진실화해위원회 상임위원과 국가청렴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또 금호타이어 부사장을 지낸 임년희씨(77)와 익산제일산부인과 홍성각 원장도 왕궁면 출신이다.- 다음 회에는 김제시 백산면 편이 이어집니다

  • 기획
  • 이성원
  • 2017.02.21 23:02

취임 1년 박영자 한국여성경제인협회 전북지회장 "또다른 산업동력 여성 인재, 전북경제 중요한 역할 필요"

여성들의 리더십이 각광받고 있지만, 도내에서는 여전히 여성들을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이 높고 견고하기만 하다.한국여성경제인협회 전북지회는 유리천장을 깨고 나온 여성CEO들의 연합체다. 올해로 취임 1년을 넘긴 박영자 회장(51)은 11년 간 도내 산업계에 종사하며 과거보다 여성의 경제 활동 참여가 늘었지만 보이지 않는 한계에 발목 잡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해소하지 않으면 전북지역 경제는 언젠가 정체될 것이라 보고 있다. 여성 인재는 산업의 또 다른 동력이라는 게 그의 소신이다.박영자 회장이 지회장으로 취임 한 1년 간 한국여성경제인협회 전북지회는 양과 질적인 부문에 있어서 모두 성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결손가정돕기, 불우이웃돕기, 엄마의 밥상 성금 등 각종 사회공헌 활동도 꾸준히 벌여 여성경제인들의 사회공헌도를 극대화시켰고, 도내 경제유관기관과의 협력 인프라로 여성경제인의 지위를 향상시키는데 기여했다. 취임 1년을 맞은 박 회장을 만나 그간의 소회와 향후 계획을 들어봤다.-취임 후 1년 간 정신없이 뛰어오셨습니다. 여성경제인협회 회장으로서 그간 느낀 점들은 어떤 것이 있었나요.스마트폰과 SNS, 급변하는 기술환경에서 필수 요소인 소통 능력이 여성 리더십의 새로운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남성 중심의 사회 구조에서 우리지역에서도 여성이지만 기업을 꾸려 전북경제의 중요한 축으로 우뚝 선 여성기업인들이 많아져 뿌듯합니다. 여기엔 개인의 노력도 있지만 여성기업인들이 모여 협회를 만들고, 정부와 지자체, 경제유관기관 등과 함께 관련 법 개정과 여성기업 우대제도 개선, 각종 자금지원사업 등 협치를 이뤄 나간 것이 큰 역할을 했다고 자부합니다.-우리지역 여성경제인들을 위해 가장 개선해야 될 것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여성 기업에게 할당량을 주는 공공기관 물품 구매시장에서 여성기업으로 위장한 소위 치마사장을 내세우는 가짜 여성 기업이 적발되고 있어 여성기업 지원에 관한 법률취지를 무색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정작 고부가가치 여성제품이 공공기관에 제대로 들어갈 수도 없고, 열심히 일하는 여성기업인들마저 사실 경영은 남편이 다하는 것이 아니냐는 오해까지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우선 여성 기업으로 인정을 받으려면 한국여성경제인협회에서 여성기업 인증확인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인증과정에서 여성 CEO가 아주 기본적인 경영지식 등도 알지 못하거나 경영에 전혀 참여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사례가 늘고 있는 거죠. 소위 치마사장이라는 건데 이처럼 남성이 운영하는 기업이 여성기업 지원 법안을 악용한 사례를 나타나면서 이를 철폐하기 위한 방안모색이 시급한 실정입니다. -지난 한해 동안 전북지회에서 중점적으로 추진한 사업은 무엇입니까.창업을 준비 중인 여성 예비창업자 또는 창업 2년 미만의 여성 기업 육성에 집중했습니다. 그들이 제대로 된 벤처로 성장할 수 있도록 경영지원, 기술지원, 판로지원 등의 도움을 줬습니다. 아울러 여성의 창업을 지원하고 촉진하기 위한 여성창업강좌와 여성창업경진대회를 활성화 시켰습니다. 창업을 하고 싶지만 형편이 어려운 저소득 여성가장의 생계형 창업도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사정이 어려운 저소득층 창업희망 여성에겐 여성가장 창업자금도 지원해오고 있습니다.-지식경영을 강조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4차 산업혁명으로 대변되는 이 시대에는 여성기업인이 경영가로서의 지식과 마인드 함양이 가장 중요합니다. CEO가 변화하는 시대를 따라잡지 못한다면 그 조직의 발전도 없는 것이죠. 여성경제인협회 활동에서 교육이 크게 강조되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여성CEO MBA 과정은 물론 성공한 여성경제인과 스타트업 대표들의 상호정보교류를 위해 여성기업간 멘토링을 정기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 같은 활동들은 경영경제 정보를 공유해 다변하고 있는 경제여건에 신속히 대응할 수 있도록 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지자체 및 유관기관 관계자들과의 간담회도 기관과 기업의 협력활동 제고는 물론 경영을 하는데 필요한 모든 정보를 습득하는데 좋은 경험이 되고 있습니다. 이밖에도 우리 협회는 여성CEO 경영포럼과 전국경영연수도 적극 참여하고 있습니다.-앞서 말씀하신 것을 살펴볼 때 지식경영과 더불어 소통활동에도 주력하시는 것 같은데요.저는 지식은 상호 간 소통에서 전달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유관기관과의 간담회를 활성화 한 것이죠. 우리 지회는 회원들의 교육 참여가 높은 곳으로 유명합니다. 강의 뿐 아니라 도내 여성기업인들이 한 자리에 모임으로써 회원 간의 네크워크도 긴밀해 지고 있습니다. 뿌리깊은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권위적이면서 공격적인, 전통적 리더십에 비해 감성적이고 조화를 강조하는 여성만의 리더십을 키우는 데도 소통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 합니다.-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공공기관들이 법률에 명시된 여성기업제품 구매목표 비율을 달성할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해 건의하고 촉구해 나갈 것입니다. 현행 여성기업 지원에 관한 법률 에는 물품과 용역은 각 구매총액의 5%, 공사는 구매총액의 3%를 여성기업 제품으로 구매해야 한다고 규정돼 있습니다. 법에도 명시돼 있지만 도내 일부 기관은 여전히 소극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 같은 행동에 대해 지난해보다 더욱 강력하게 여성기업인들의 몫을 찾기 위해 목소리를 낼 계획입니다. 또한 이제 시장은 제품의 기능과 품질만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감성과 가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변화는 기업 경영에 있어 섬세함과 소통, 고객과의 신뢰가 더욱 중요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최근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페이스북, 트위터 등 SNS에서 나타나듯 소통에 대한 여성의 강점이 리더십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이란 분석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우리 전북지역 여성경제인들의 인프라를 한데로 모아 소통과 참여 지식경영을 통해 더욱 세련된 기업경영 리더십을 만들어나가겠습니다.● [박영자 지회장은] 남성의 영역 건설업 도전섬세한 경영 평가 받기도박영자 회장은 토목공사, 건축공사를 비롯해 조경식재, 시설물까지 아우르는 종합건설기업 (주)성웅종합건설을 지난 2006년 설립했다. 당시 남성들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건설업계에 박 회장의 도전은 기존 건설업계의 선입견을 줄이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 또한 박 회장은 터프한 여성일 것이란 이미지와는 다르게 부드러운 성격에 세련된 이미지를 풍긴다. 건설업을 하면서 숱한 오해도 많았다는 박 회장은 한국여성경제인협회와 인연을 맺은 후 우리지역 여성CEO들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자신의 성공도 중요하지만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여성기업인들이 성장하면 전북지역 경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소신에서다.이 때문에 박 회장은 오직 회원들만을 바라보고 봉사하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한편 박 회장이 취임한 1년 간 여경협 전북지회는 여성 경제인에게 창업부터 성장, 정착에 이르는 원스톱(One-stop)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앞으로도 여성 기업들의 손톱 밑 가시를 제거하는 일에 앞장서겠다는 입장이다.

  • 기획
  • 김윤정
  • 2017.02.20 23:02

[철의 궤도: 전라선 철길 답사기 ② 춘포역] 넓은 들녘 보며 가을 기다리던 봄나루 역

햇볕이 따뜻하던 지난 3일, 익산시 춘포면.111번 버스가 10~20분 간격으로 멈췄다 가는 버스정류장을 끼고 돌아 빛바랜 아스팔트가 두툼한 이불처럼 깔린 길로 들어섰다. 마찬가지로 빛이 바랜 만국기가 공중에 걸려 있고, 저 멀리 소나무 위로 빼꼼 고개를 내민, 역시 빛바랜 옥색 역사(驛舍)지붕이 보인다.그 저채도의 풍경 위로 채도 높은 녹색과 연두색의 방음벽을 두른 고가철도가 지난다. 언뜻 수도권 도심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선하역사(線下驛舍)처럼도 보이지만, 역사와 철로 사이엔 이제 어떤 접점도 없다. 철로는 역사에 눈길 한 번 주지도 않고 그대로 지나친다.춘포역은 그런 풍경 속에 서 있었다.한자로 봄 춘에 물가 포를 쓰는 춘포(春浦)는 우리말 이름 봄개를 한자로 옮긴 것이다.개는 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을 뜻하는데, 그래서 봄 나루 또는 봄개 나루라고도 한다.이 일대는 일제 강점기부터 20여 년 전까지는 대장촌(大場村)이라고도 불렸는데, 큰 대에 마당 장을 붙인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춘포지역은 야트막한 구릉 하나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사방이 훤히 뚫려 있는 평야 지대다.산 비슷한 것이라고 해봐야 북동쪽으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봉개산이 전부고, 춘포면 중심지는 만경강 제방에 올라서면 훤히 내다볼 수 있다.춘포면의 남쪽 경계를 이루며 서쪽으로 흐르는 만경강은 춘포 지역의 정체성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애초 개, 나루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 자체가 만경강을 떼놓고는 생각할 수 없을 것이고, 대장이라는 이름이 붙을 만큼 넓고 평탄한 들녘은 만경강 물이 쉬지 않고 흙을 날라 쌓아 만든 것이니 말이다.한편으로는 만경강이라는 이름 또한 논 100만 이랑에서 온 것이니, 만경강의 정체성 또한 춘포에서 얻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본다. 원래는 모래 사(沙) 자를 써 사수, 사탄 등으로 불리던 것이 일제 강점기에 만경강으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이렇게 넓고 비옥한 땅이 일본인들 눈에 띄지 않았을 리가 없다.20세기가 시작될 무렵, 일본인들이 정착하며 이 지역에 붙인 이름이 대장촌이다. 대장촌은 우리식 독음이고, 그들은 오오바무라라고 불렀을 것이다.그리고 오늘날의 춘포 지역을 만든 것이 또 하나 있다.여 근방이 왜정 때 만들어진 거여. 사람들도 원래 여기 살던 게 아니고 다 객지에서 와서 정착한 거여. 지금이사 3세대까지 있지만. 저 뒤쪽 마을도 원래는 없었어.춘포역에 대해 질문하자, 마을 주민 양기만 씨(60)의 입에서는 그가 어머님께 들은 이야기부터 본인이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이야기까지, 옛날이야기가 술술 나왔다.1914년, 전라선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이리-전주 간 경편철도가 개통하면서 춘포역도 문을 열었다. 개통 당시의 이름은 대장역. 춘포역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1996년이다.옥색 슬레이트 지붕이 얹어진 작은 역사(驛舍)와 화장실 건물, 역사 앞 소나무 한 그루와 공터 정도가 전부인 이 소박한 역은, 몇 되지 않는 전라선 원년멤버다.또 춘포역사는 우리나라에 있는 모든 철도역사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우리나라에서 춘포역사보다 오래된 철도역사는 없다.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5년에 등록문화재 제210호로 지정됐는데, 같은 날 군산 임피역사도 등록문화재 제208호로 지정됐다. 닮은꼴인 두 건물이 나란히 가장 오래된 역사와 두 번째로 오래된 역사다.역이 들어서고, 역이 들어서니 사람이 모인다. 대장촌은 그렇게 형성됐다.광복 이후에도 1960년대 만경강 모래찜이 유명하던 시절에는 하루 150~200명씩 춘포역을 이용했고, 익산 지역에서 섬유산업이 발달한 1970년대에는 젊은 여성 노동자들이 이 역을 통해 출퇴근하곤 했다.1978년 철도통계연보에 기록된 1977년 실적을 보면, 그해 춘포역(대장역) 승하차 인원은 무려 29만9022명.전라선 전북 구간 21개 역(익산역 제외) 가운데 전주남원동이리(동익산)덕진오수삼례역에 이어 7번째로 많은 인원이 이용한 것인데, 같은 해 19만2078명이 이용한 관촌역이나 18만4839명이 이용한 임실역보다도 10만 명 이상 많은 기록이다.그러나 도로교통이 발달하면서 춘포역의 수요는 점차 줄었다.열차가 서던 마지막 해인 2007년 한 해 이곳에서 열차를 탄 사람은 132명, 내린 사람은 159명. 그래서 이용객 합이 291명이었다.양 씨는 요즘은 교통이 좋으니까 개의치 않는다면서, 자가용 승용차나 버스를 타면 된다고 말했다. 하긴, 익산과 삼례를 잇는 111번 버스가 면소재지 중심을 10~20분 간격으로 가로질러 가는데 구태여 기차를 고집할 이유도 없긴 하겠다.그렇게, 춘포역은 지금은 열차가 서지 않는, 아니 열차가 서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역도 아닌 것이 되고 말았다.2011년, 전라선 복선전철화가 완료되며 철길은 콘크리트 구조물 위로 올라갔고, 춘포역 구내의 철길과 플랫폼은 흔적도 없이 철거됐다. 철길이 베고 누워 있던 침목은 뽑혀 나뒹굴다가 역 광장 가장자리의 연석이 되었다.그래도 역사는 잘 보존돼 있다. 안에는 춘포 지역의 역사(歷史)에 관한 내용이 정리돼 있고, 역무원실이었던 공간은 일종의 작은 도서관처럼 꾸며져 있다.건물 자체가 작으니 볼거리가 많지는 않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소박한 맛이 있다.2007년까지 운행되고 이후 자취를 감춘 군산~전주 간 통근열차 시각운임표가 그대로 걸려있는 것이 인상적이다.역은 이제 지역 문화 거점으로서의 기능도 맡고 있다. 익산문화재단이 진행하고 있는 근대문화유산 박물관 춘포 사업이 주민들에게 호응을 얻으면서다.해당 사업을 맡고 있는 익산문화재단 예술지원팀의 김지은 씨는체험 행사를 하니까 주민들이 모이고, 주민들이 모이니까 춘포역이 어떻게 바뀌면 좋겠다 하는 이야기들이 나왔죠. 역사 앞 주차장도 그 과정을 통해서 조성할 수 있었어요. 일단 주민들이 모이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습니다.라고 말했다.역사(驛舍)가 항상 열려있는 것은 아닌데, 아무래도 이곳을 관리하는 익산문화재단의 인력이 모자라는 탓이다. 물론 그냥 겉만 보고 돌아가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역사에 명예역장익산문화재단춘포면사무소 연락처가 붙어 있으니 문이 잠겨 있다면 이 연락처로 문의해보자.김지은 씨는 올해 목표가 상시 개방이라며, 상시 개방을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중이라고 밝혔다.춘포역에서 나와 사거리를 지나 남쪽으로 쭉 걷다 보면 높은 둑이 저 앞에 보인다.그 둑을 한 100m쯤 남겨놓고 붉은 벽돌과 푸른 기와가 인상적인 농어촌공사 춘포지소 건물(일제 강점기 당시 우정국 건물)을 낀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걷는다.마치 작은 성(城)처럼도 보이는 일본풍 건물, 이른바 에토 가옥이 눈에 들어온다.둘러져 있는 높은 울타리 뒤에서 개 짖는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온다. 소리만 들어봐도 개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일제 강점기에 이 지역은 대지주 호소카와(細川) 가문의 농장이었는데, 1940년대에 지어진 이 건물은 당시 농장에 소속된 에토(江藤)라는 사람이 살던 집이라고 한다. 춘포역과 같은 날 등록문화재 제211호로 지정됐다.주민이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군산 히로쓰 가옥처럼 마음대로 들어가거나 할 수는 없지만, 행사가 있거나 할 때 가끔씩 개방되기도 한다고.그런데 호소카와? 어쩐지 이름이 익다. 바로 일본의 자민당 독주 체제를 끝내고 총리가 되었고 총리 시절 과거 침략 행위와 식민 지배에 깊이 반성하며 사과한다고 말했던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이 농장 창업주의 손자다.호소카와 모리히로는 지난 2014년, 탈 원전을 내걸고 도쿄도지사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하기도 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가 지지하고 나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춘포 지역에는 1920년대에 지어진 김성철 가옥이라는 옛 건물도 남아 있다.농어촌공사 건물 사거리에서 에토 가옥의 반대편으로 들어가면 나오는 집인데, 마당의 일본식 정원이 특징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일반에 개방되지 않기 때문에 들어가서 볼 수는 없다.이 집을 그나마 볼 수 있는 방법이라면 만경강 둑 위에 올라가서 보는 정도가 있겠다. 하지만 그렇게 보더라도 잘 보이지는 않는다.김성철은 일제 강점기에는 호소카와 농장의 직원이었고 광복 이후 60년대에는 익산을 지역구로 삼아 국회의원(제6대7대)을 지내기도 한 인물이다. 지난 2004년 별세했다.호소카와 농장의 유산은 이게 전부가 아니다.김성철 가옥 주변의 골목길로 들어가면 허름한 공장 같은 건물을 찾을 수 있다.일제 강점기에는 호소카와 도정공장이었던 대장 정미소로,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기 전에 한 차례 도정 작업을 거쳐 무게와 부피를 줄이는 역할을 했다.1914년에 지어졌는데, 그러니까 춘포역과 동갑이다.농장에서 나온 곡식은 이 정미소에서 도정을 거쳐 춘포역에서 전라선, 군산선 열차를 타고 군산항에 가 일본으로 날라졌을 것이다.만경강 제방에 올라서면 한눈에 볼 수 있는 이 풍경들이, 결국은 전부 한 덩어리다.익산문화재단은 춘포역을 기점으로 농어촌공사 건물과 에토 가옥, 만경강 둑방길, 대장 정미소 등을 한 바퀴 도는 트래킹 행사를 이따금씩 연다. 그 밀도가 군산의 근대역사문화거리와 비견할 만하다.다만 느낌은 조금 다르다. 군산이 근대 도시 느낌이라면, 춘포는 같은 근대라고 해도 도시적인 느낌은 덜하고, 묘하게 목가적인 분위기마저 든다.익산시 관계자는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군산은 아무래도 수탈된 양곡을 반출하는 항구였고, 그래서 여러 건물이나 세관 같은 것이 남아있죠. 반면에 여기는 수탈이 이뤄지던 곳이고 농장이었으니까 조금 다르죠.제방 위 그 자리에서 뒤로 돌면 만경강이 흐르고 있고, 그 건너편은 전주시 덕진구와 김제시 백구면이다. 또 행정구역상으로 춘포면에 속하는 구담마을도 강 건너편이다. 직강화 공사 이전, 옛 만경강 물길의 흔적이다.조류 인플루엔자(AI) 방역을 위해 출입을 자제해 달라는 내용의 현수막 뒤로 넓은 둔치가 눈에 들어온다. 한쪽에는 키가 꽤 커 보이는 억새들도 몸을 흔들고 있다.그 옛날 전국 각지에서 모래찜질을 하러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뤘다는 만경강 변은 고요했다. 다만 멀리 새들만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그리고 그 방향으로 시선을 쭉 이어나가니 뿌연 공기 가운데서 높은 건물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완주군 삼례읍이다.저 멀리 보이는 전라선 철길로 열차 한 편성이 삼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권혁일 기자춘포 모래찜질은 신경통에 도움을 주고 혈액순환에도 좋다고 소문이 나서 유명해졌다. 민물과 짠물이 섞이는 이곳은 하얀 백모래가 깔려있고 조수물과 민물이 드나들면서 모래에 짠물 염기가 있어서 몸 전체에 바르고 땀을 빼고 나면 몸이 가뿐해졌다. (익산문화재단 춘포 백년, 사람 이야기 中)봄에서 여름으로 계절이 넘어갈 무렵, 1960년대 춘포역은 만경강 모래찜을 즐기기 위해 찾아온 발길이 이어져 문전성시를 이뤘다.만경강 변 모래로 찜질을 하면 건강에 좋다는 이야기가 입소문을 타고 퍼져 전라도충청도 일대에서 인파가 몰렸다는 것이다. 덕분에 돈을 받고 모래밭에 구덩이를 대신 파주는 아르바이트도 유행했다고 한다.그 당시 모래찜 인파를 상대로 3원, 5원씩 받고 물장수를 했다는 한 주민은 지금은 논밭뿐이지만 50~60년 전에는 모래찜질하려고 여기를 참 많이들 찾아와 역 앞이 사람들로 빼곡했다며 그땐 전주 3공단 없을 때라 물도 맑았다고 설명했다.지금은 만경강 하류에 놓인 농업용 보의 영향으로 이 일대에서 하얀 자태를 뽐내며 반짝거리는 모래사장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남아 있는 흑백 자료사진을 보며 당시 풍경을 머릿속에 그려볼 뿐이다.익산문화재단 문화예술사무국 예술지원팀 김지은 씨는 춘포 주민들이 관심을 가지고 동참해준 덕분에 근대문화유산 박물관 춘포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며 기회가 되면 춘포 모래찜과 같이 춘포역과 관련된 이야기와 사진을 모아 많은 사람들이 알도록 전시하고 싶다고 밝혔다.간혹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한가로운 날이면 가족연인과 주고받던 모래 장난에 웃음꽃 피던 때가 떠오르는 분들도 있겠다. 그렇게 춘포역이 간직한 작은 추억 하나는 할머니할아버지의 옛날이야기 보따리 속에 자리 잡았다.김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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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2.17 23:02

[③ 무령왕릉과 실크로드] 고대 한·중·일 관계 '보물창고'…백제는 '하이테크 강국'이었다

1500년 동안 베일에 싸였던 백제사의 블랙박스를 연 대발견 무령왕릉. 무령왕릉은 백제 대외관계의 수수께끼를 풀어주는 단초를 제공한다. 무령왕릉은 중국 남조 양나라의 무덤 양식과 비슷하다. 무령왕릉이 중국 남조문화를 수용한 것은 어떤 의미일까?일본 왕가 고분에서는 무령왕릉 부장품과 비슷한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다. 백제와 일본은 얼마나 가까운 관계였을까? 무령왕릉은 백제가 실크로드를 통해 교역한 범위가 서아시아까지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 문명 교류가 백제까지 이어진 구체적인 물증은 무엇일까?△중국 남조의 최첨단 기술을 수용한 백제양자강에 연해 있는 해상 실크로드의 중추 도시 남경(南京). 남쪽의 수도라는 의미를 가진 남경은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기 전까지 중국 남방에서 가장 번성했던 도시 중 하나였다. 중국 전통 한족 왕조 중 가장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던 남조의 수도 역시 남경이었다. 남경은 당시 건강(建康)이라고 불렸다.무령왕은 6세기 동아시아 최강국 남조 양나라에 두 차례 사신을 파견한 바 있다. 당시 백제 선단이 황해를 비스듬히 가로질러 조류를 타고 도착한 곳은 바로 건강 즉 현재의 남경이었다. 무령왕 때 양나라에 파견된 외국인 사절을 그림으로 그린 양직공도(梁職貢圖) 속에 보이는 백제 사신은 이 무렵에 그려진 것이다.무엇보다 특이한 점은, 무령왕릉이 양나라 왕실 무덤인 연꽃무늬 벽돌로 쌓은 아치형 전축분을 본 따 조성한 벽돌무덤이라는 것이다. 무령왕릉의 벽돌에 새겨진 여섯 글자 梁官瓦爲師矣(양나라 관청 벽돌을 모범으로 삼았다.)가 이를 입증한다. 뿐만 아니다. 무령왕릉에서는 청자육이호, 초두, 금동 허리띠와 같은 남조 시대의 유물이 다량 출토되었다. 중국에서도 청자나 금제 장식품은 대단히 귀한 물품이어서 황제나 귀족 무덤에서만 발견되고 있다. 중국에서 만들어진 최첨단 물품이 그대로 백제에 유입된 것이다.무령왕릉이 중국 전통 한족 왕조 중 가장 화려하고 찬란한 문화를 일구었던 남조문화를 수용한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쇠락하던 국력을 회복시킨 백제가 당시 동아시아에서 최고의 선진 문화를 이룩했던 남조로부터 최첨단 기술을 받아들여 하이테크 고대 국가로 도약하기 위해서였다.△일본 고분에서 무령왕릉 부장품과 비슷한 유물 대거 출토무령왕은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일본 규슈(九州) 인근 섬인 가카라시마(加唐島)에는 전북 익산의 화강암을 가져다 만든 백제무령왕의 탄생지(百濟武寧王生の誕地)라고 새긴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2001년 12월 일본 사회를 발칵 뒤집는 사건이 있었다. 아키히토 일왕이 생일날 회견에서 자신이 백제 무령왕의 후손임을 고백한 것이다. 실제로 고대 일본 왕가의 무덤에서는 백제와 깊은 관련이 유물이 대량 출토되고 있다. 후쿠오카(福岡)에서 구마모토(熊本)로 가는 길목에 있는 에다후나야마(江船田山) 고분. 일본이 자랑하는 대표적인 전방후원분이다. 이 고분에서 나온 금동 신발, 금귀고리, 청동 거울 등은 무령왕릉 부장품 그대로다. 금동관은 익산 입점리 고분에서 나온 유물과 크기만 다를 뿐 똑같다. 세계 최대의 무덤이자 일본 최대의 전방후원분인 오사카 인덕천황릉(仁德天皇陵). 여기서 나온 청동 거울과 환두대도는 무령왕릉에서 나온 것과 판박이처럼 같다. 무령왕릉 부장품과 일본 왕가 무덤의 유물이 유사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부인할 수 없는 두 가지 역사적 사실이 있다. 첫째, 일본 고대사는 백제와 가장 연관이 깊다는 점이다. 무령왕은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뒤에 백제에 와서 왕이 되었고, 일본 왕가와 지배층 무덤에는 백제계 도래인과 관계된 유물과 기록이 수두룩하다. 둘째, 백제가 중국 남조와 교역하던 무령왕 시대에는 아직 항해술이 고도로 발달하지 않아 중국과 일본이 직접 교역하기 어려웠다. 일본으로서는 한반도를 거쳐 중국과 교역하는 것이 필요했고, 백제가 그 가교 역할을 한 것이다.△서아시아 그리핀과 무령왕릉 진묘수무령왕릉 입구에 놓여 있는 진묘수(鎭墓獸). 진묘수는 문자 그대로 무덤을 지키는 짐승이라는 뜻이다. 그 모습은 참으로 특이해 어떤 동물인지 알 길이 없다. 앞에서 보면 돼지 같으나 돼지가 아니다. 개 같기도 하고, 해태를 닮은 것도 같다. 머리 중앙 부분에는 닭벼슬 같은 철제 장식이 달려 있다.진묘수는 중국 한대 이래로 악귀를 물리치는 벽사의 뜻으로 무덤 내부 앞에 세워두는 풍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중국 고분에서 수많은 진묘수가 출토된 바 있다. 그런데 최근 중국 남북조 시대의 동서문화 교류와 무령왕릉의 관계를 연구한 민병훈 박사가 진묘수의 기원을 서아시아 상상의 동물 그리핀(griffin)과 연계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쳐 주목을 받고 있다.그리핀은 사자의 몸에 새 머리를 한 상상의 동물이다. 몸에는 날개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머리는 주로 독수리가 많다. 그리핀은 BC 2000년경 옛 시리아 레반트(Levant) 지방에서 처음 생겨나 서아시아 신전이나 무덤의 장식에 즐겨 사용되었다.서아시아 그리핀과 무령왕릉 진묘수, 어떻게 해석함이 좋을까? 무령왕릉 진묘수는 서아시아와 지중해 일대에서 형성된 수호신으로서의 그리핀 도상이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거쳐 백제 묘장 문화에까지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다.△한반도를 넘어 끊임없이 해외 진출을 도모한 백제백제는 한반도를 넘어 동아시아 문화를 포용하는 개방적 세계관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백제의 힘이었다. 백제는 중국 남조와 밀접한 교류 관계를 유지하면서, 동아시아를 넘어 서아시아 문화까지 포용하는 다문화 왕국을 건설하고자 했다. 그것은 백제가 열망한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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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2.17 23:02

[전북일보 카드뉴스] 구제역에서 구제해 줘!

구제역에서 구제해 줘!#표지.구제역에서 구제해 줘!#1.조류 인플루엔자(AI)의 충격에서 좀 벗어나나 했더니(달걀아 반갑다!)#2.이번엔 소돼지들이 아프답니다.#3.구제역은 발굽이 갈라진 동물(우제류)들이 걸리는 질병입니다.#4.입과 발굽 주변에 물집이 생기는 증상이 특징적인데요.전염성이 매우 높고, 어린 가축은 치사율도 높습니다.#5.전북지역은 그간 구제역 청정지대로 불릴 만큼 안전한 편이었지만,#6.지난해 1월 김제와 고창에서 구제역이 발생하면서 돼지 1만여 마리가 도살 처분됐고,#7.이번에 다시 정읍의 한우 농가에서 구제역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8.구제역 위기경보 심각 단계로 격상가축시장 폐쇄우제류 이동 금지등의 조치가 취해졌고#9.전북도는 급히 일제 백신 접종에 들어갔습니다.#10.(백신? 그런 게 있는데도 왜 난리인 거지?)#11.원래 농가에서는 소돼지에 백신을 맞혀 구제역에 대한 항체를 만들어야 하는데요,#12.전북도 통계 속 항체형성률: 96.6%구제역 발생 농가 실제 항체형성률: 5%#13.주변 농가 12곳 중 6곳이 기준(80%) 미만(심지어 0%인 곳도)#14.(왜죠?)#15.도축장에 출하된 소 중에서 일부만 선별해서 검사하는 기존 검사 방식에도 문제가 있고,#16.백신 유통-보관-접종 체계에 허점이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습니다.#17.백신이 사실은 별 효과가 없는 물백신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됩니다.#18.(한숨)#19.(텅 빈 마트 육류유제품 코너)/기획 신재용, 구성 권혁일, 제작 이권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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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2.16 23:02

새만금공항 건설 주창하는 이상직 이스타항공 회장 "중국 가깝고 관광자원 우수한 전북, 국제공항 입지 최적"

국내외 항공수요가 급증하면서 저비용항공사들이 경쟁적으로 몸집 불리기에 나서고 있다. 전북지역에 본사를 둔 이스타항공은 지난해 운송용 항공기 4대를 도입하며 제주항공과 진에어 등 대형 저비용항공사를 바짝 추격하고 있다.저비용항공사의 주 취항지인 청주공항과 대구공항이 지난해 처음으로 흑자를 내는 등 지방공항을 중심으로 항공수요가 늘고 있어서다. 청주대구공항은 최근 6년 간 연 평균 10%에 육박하는 높은 여객 증가율을 기록했다. 이에 새만금 신공항에 대한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이상직 이스타항공 회장은 전국에서 전북과 충남에만 국제공항이 없다. 중국과 지리적으로 인접하고 전주 한옥마을 등 우수한 관광자원을 갖춘 전북은 국제공항 입지로 제격이다고 말했다.이 회장은 새만금 신공항은 미래 전북의 가치와 지역 경제를 살릴 수 있는 마중물이 될 것이라며 새만금 신공항을 중심으로 전북을 공항금융문화도시로 육성해 소외와 낙후의 역사를 청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이 회장은 지난 10일 전북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새만금 신공항을 비롯해 전북 발전을 위한 신사업 등 경제전문가 시각에서 전북의 미래 발전방향을 제시했다.-국내 항공시장이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는 배경으로 이스타항공 등 저비용항공사의 약진이 꼽힌다.최근 공개채용에서 객실승무원 경쟁률이 1000대 1을 넘었다. 각 대학의 항공운항과 입학 경쟁률도 수백대 1에 달하는 등 항공산업에 대한 청년층의 관심도가 높다. 급성장하고 있는 중국 시장을 국내 저비용항공사가 선점한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처음 항공시장에 뛰어들었때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노선 독과점을 깨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신규 노선을 확보하고, 운송용 항공기를 늘리면서 어느정도 독과점 구조를 해소했다는데 자부심을 느낀다. 주 취항지인 청주공항 등 지방공항의 여객 수요가 늘고 있다. 앞으로도 중국과 동남아를 중심으로 지속적인 노선 확대와 항공기 도입을 통해 사업을 확장할 계획이다. 지역의 우수한 인재를 발탁해 일자리 창출에도 기여하겠다.-지방공항 이용객이 늘면서 지역 경제 활성화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는 평가다.청주공항의 경우 첫 개항 당시 연간 이용객이 37만 명에 불과했다. 이후 중국 노선을 정기 취항하면서 최근 연간 이용객이 270만 명을 돌파했다. 이스타항공의 청주공항 국제선 점유율도 지난해 기준 49.3%를 기록, 청주공항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청주공항은 충청권과 수도권, 전북권 등에도 접근성이 높아 다른 지방공항보다 중국인 관광객 유치에 더 유리한 측면이 있다. 반면 국제공항이 없는 전북은 무역수지 등 각종 경제 지표에서 다른 시도에 크게 밀리고 있다. 실제 청주의 지역내총생산은 전주의 두 배를 상회한다. 이런 지역 불균형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전북권 공항이 꼭 필요하다. 새만금 신공항은 지역 발전을 넘어 국내 항공산업의 도약을 위한 전초기지로서 성공가능성이 충분하다.-이스타항공이 지역 사회공헌활동에 앞장서는 모습이 인상적이다.지난해 객실승무원 채용 때 전체 인원의 절반 가까이를 전북 출신으로 뽑았다. 지역 응시자들의 편의를 위해 지방 현장 면접제를 도입하는 양질의 일자리 창출에 힘쓰고 있다. 앞으로도 전북 출신들이 항공 산업의 중추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최적의 운항 서비스와 사회공헌활동을 통해 전북도민들의 자긍심을 높이겠다.-새만금 신공항에 대한 항공수요조사가 진행 중이다. 어떻게 전망하나.최근 전북 몫 찾기가 지역사회에서 화두인데, 전국에서 전북과 충남에만 국제공항이 없다. 단순히 항공수요를 예측하는 것에서 공항 운영으로 발생할 수 있는 부가적 가치를 염두에 둬야 한다. 오는 8월 개최지가 결정되는 2023 세계잼버리유치와 새만금 신항과 연계한 전북형 항공도시 구축 등 새만금 신공항의 필요성에 대한 논리 개발이 필요하다. 중국 주요 여행사 관계자들과 새만금 일대와 전주 한옥마을 등 도내 관광지를 둘러본 적이 있다. 이때 중국 측 관계자들이 새만금 신공항은 반드시 성공한다고 입을 모았다. 중국에서 가까워 유류비가 덜 들고 도로철도망이 잘 갖춰져 수도권이나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도 편리해서다. 새만금 신공항은 세계 최고로 평가받는 네덜란드 스키폴국제공항을 본받아야 한다. 공항을 여객 수송만이 아닌 쇼핑과 휴식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최초의 국제공항이라는 점 등에서 글로벌 스탠다드로 평가받고 있다. 스키폴국제공항의 성공 비결을 다각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물론 지역 사회와 정치권이 힘을 모아 전북을 미래 공항도시로 조성해야 한다-2023 세계잼버리 개최지 선정이 눈 앞으로 다가왔다. 대회 유치 여부에 새만금 신공항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세계잼버리 유치를 놓고 경합을 벌이는 폴란드의 경우 인근에 국제공항이 있어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 또한, 폴란드 정부의 대회 유치를 위한 의지도 강하다. 대선 후보라면 정당과 지역을 넘어 국가적 행사인 세계잼버리 유치에 힘을 모아야 한다. 세계잼버리 유치에 실패하더라도 공항은 꼭 필요하다. 새만금에 하늘길을 내야 지지부진한 기업 투자 유치와 내부개발을 촉진할 수 있다. 향후 수요나 개발 여건이 아닌 공항 건설로 얻을 수 있는 지역 경제 활성화 효과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공항과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 지역 관광자원 등을 연계해 전북을 세계적인 공항금융문화도시로 육성, 낙후와 소외로 점철된 역사를 끊어내야 한다.-공항금융문화도시를 앞당기기 위한 방안이 있나.현 정부 출범 초기부터 기금운용본부의 전북 이전을 정부에 줄기차게 요구해왔다. 앞으로 전남와 광주에 집중됐던 금융 관련 기관들의 전북 이전이 쇄도할 것이다. 전북이 기금운용본부 이전 효과를 누리기 위해서는 서울이나 부산처럼 금융 특화중심도시를 지향해야 한다. 전북의 강점인 농생명을 연계한 연기금 특화 금융중심도시로 지정되도록 지역 정치권과 전북도가 힘을 모아야 한다. 이에 따른 도로와 철도 등 기반 시설 조성이 중요하다. 세계 문명은 길을 기반으로 한 소통의 역사다. 현재 글로벌 국제공항이 세계 문명을 이끌고 있다. 다음으로 철도가 중요하다. 전북을 보면 하늘길이나 철길 모두 미비하다. 국제공항과 마찬가지로 철길은 돈이 많이 들지 않는다. 서해안 내륙철도를 구축해 15억 중국 시장에 대한 접근성을 키워야 한다. 경기 평택과 충남 당진, 새만금, 전남 목포 등을 하나의 철길로 이어 서해안 시대에 대비해야 한다. 이 내륙철도는 새만금 국제공항 활성화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기획
  • 최명국
  • 2017.02.13 23:0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④ 이야기의 보고, 새만금 - 굽이굽이 펼쳐진 고군산 절경…'최치원' 설화 숨어 있었네

돛 걸고 바다에 배 띄우니 긴 바람 만리나 멀리 불어온다뗏목 타니 한나라 사신 생각 약초 캐니 진나라 동자 생각세월은 무한의 밖 천지는 태극의 안봉래산이 지척에 보이고 나는 또 신선 노인을 찾아간다- 최치원, 「바다에 배 띄우니」몇 해 전 한국과 중국 간 정상회담이 있었을 때 중국 시진핑 주석이 직접 인용하여 화제가 된 최치원의 시이다. 시구 말미에 언급된 봉래산은 중국 <사기(史記)>에도 기록된 삼신산(三神山) 중 하나로 신선이 살며 불사의 영약이 있다는 전설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그렇게 무릉도원에서의 삶이 눈앞에 그려지는 시의 묘사를 따라가면 최치원의 전설이 서린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에 이른다. 고군산군도는 이름 그대로 군산의 오래 된 섬의 무리들로, 신선이 놀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 선유도를 비롯한 총 63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곳이다.고군산군도는 과거에는 사람의 접근이 힘들었던 섬이었다. 하지만 이곳이 새로운 약속의 땅이라는 조선시대 <정감록>의 예언이 이뤄진 것인지 1991년 새만금방조제가 착공되고 몇몇 섬들이 육지와 교량으로 이어지면서 이 일대의 운명은 변하게 된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활력이 없던 지역의 경제가 살아나고, 새만금이 우리나라 국토의 균형발전 및 전라북도 성장 동력으로 발돋움할 것이라는 장밋빛 기대가 정부와 지역 내부에서 잔뜩 감돌았다. 기존의 빼어난 경관은 접근성이 높아짐에 따라 잠재가치가 큰 관광지로의 도약을 꿈꾸게 했다. 심지어 군산 앞바다를 전진기지로 중국, 나아가 동북아시아 지역의 거점으로 보다 거대한 비전을 그리기까지도 하였다.부푼 기대와 다르게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발길을 끌어오는 일은, 단지 땅을 고르고 도로등 건설 인프라를 조성하고, 더불어 해외와 민간의 투자 유치를 벌이는 일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새만금을 선점하려는 지자체들의 입장이 있고, 기업 유치를 위한 현실적인 조건들, 또한 이곳에 새로 뿌리를 내린 사람들을 유인하기 위한 정주 요건의 마련 등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필요한 것은, 지역의 뿌리이자 정체성으로 자리잡아온 이곳의 역사와 이야기를 함께 어우러지게 하는 일이다. 지역의 역사문화가 함께 어우러지지 않는 개발은 사상누각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고군산군도는 지역의 이야기자원들이 풍부한 곳이다. 이곳의 지형만 봐도, 만경강과 동진강의 두 물길을 따라 전라북도의 이야기들이 모여들고, 또한 수려한 장관을 이루고 있는 크고 작은 섬마다 제각기 그만의 이야기가 스며있어 개별적이고도 종합적인 장소성을 간직하고 있다.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지역의 가치가 담긴 이야기 자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 고군산군도에 남겨진 최치원의 설화는 특별하다. 최치원은 우리 역사 속 대학자로 과거 중국에 이름을 알린 바 있지만, 그 명성은 앞선 시진핑 주석의 인용에서도 보았듯이 지금의 중국에도 이어지고 있다. 중국 양주에 최치원 기념관이 있을 정도이다. 신라말엽의 문장가이자 대석학이었던 최치원은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시조이자 동방문학의 시초를 이룬 문호이다. 이러한 최치원은 그의 탄생설화를 포함한 이야기들을 고군산군도에 남겼다. 원래 경주최씨의 시조는 금빛 나는 돼지(금돈)에서 낳았다 하여 일명 돼지 최씨로 불린다. 단군이 곰에서 나왔다는 전설과 또 신라의 박혁거세가 박 속에서 나왔다는 설화와 함께 황금돼지 민속설화가 남겨져 있는데, 이 사연이 최치원과 관련된 이야기인 것이다.전설에 따르면 최치원이 태어나기 전 그의 부친은 고군산군도에 있는 내초도에 사냥을 나갔다가 오히려 황금빛이 나는 암퇘지에게 붙들려 토굴에서 몇 달을 지내게 된다. 그리고 그 사이 황금돼지가 새끼를 배어 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바로 최치원이었다. 아버지는 아이를 데리고 육지로 나오려고 했지만 매번 황금돼지에 가로막혀 짐승처럼 살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황금돼지가 이웃 섬으로 사냥을 나가고 없는 사이 다섯 살이 된 최치원에게 아버지가 너를 육지로 데리고 나가 공부를 시키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나 빠져나갈 재주가 없다고 한탄을 했다. 그러자 최치원은 황금돼지가 해놓은 나무토막을 몰래 엮어 배를 만들어 도망가자고 제의하였고 이윽고 두 사람은 어린 최치원의 기지에 따라 탈출에 성공했다 한다.신시도의 월영대는 최치원 선생이 피리를 불고 시를 읊으면 그 글 읽는 소리가 중국 황제의 귀에까지 들렸다는 전설의 장소이다. 신시의 명칭 자체가 최치원이 글을 읽으며 새로움을 다짐했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새만금에는 내초도와 신시도에 남겨진 황금돼지와 최치원 이야기만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이곳은 이순신장군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설화와 전설 그리고 역사와 문학의 배경이 된 수 많은 이야기 보물창고다. 새만금의 비전은 먼 곳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남겨진 이야기가 바로 지역의 힘이되어 복을 불러오는 원천으로 활용 될 때 새만금의 의미와 비전도 그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 기획
  • 진영록
  • 2017.02.10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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