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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군 동계면] 과실 많이 생산되는 농촌…황숙주 군수 등 배출

순창군 동계면은 동쪽으로는 남원시 사매면과 대산면, 북쪽으로는 임실군 덕치면과 삼계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동부에는 섬진강의 지류인 오수천, 서부에는 섬진강이 흐르는 섬진강 상류 지역이며, 용궐산과 풍악산, 남산이 고을을 감싸고 있다. 예로부터 밤과 감, 매실 등 과실이 많이 생산되는 부촌이었다.원래는 남원 소경(小京)에 속하는 영계방이었으며, 조선시대에도 아동방과 영계방, 성남방으로 나뉘어 남원부에 속했다.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아동면과 영계면을 통합해 동계면이 되면서 순창군에 귀속됐으며, 성남면은 남원군 대산면에 통합됐다. 또 1935년 남원군 대산면 일부를 동계면에 편입했다.△정관계지난 2011년 재선거를 통해 정치인으로 변신한 황숙주 군수(70)는 감사원 출신으로 감찰국장과 특별조사국장, 감사교육원 교육위원 등을 지냈다.황군수의 동계초 동창인 강대민씨와 이종기씨는 1년 후배인 황금주씨와 함께 노무현 정부시절에국정원 국장으로 3명이 동시에 근무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인수위에도 참여했던 강씨는 기획총무국장, 이씨는 국내수사 담당국장, 그리고 LA 부총영사와 베트남 공사를 지낸 황금주씨는 해외담당국장을 했다.박근혜 전 대통령이 참 나쁜 사람들이라고 말해 경질된 문체부 진재수 전 체육정책 과장도 동계 출신이다.정계 인물로는 2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정두씨(고인)가 있다. 11.3 광주학생독립운동에 가담하고 상해임시정부에 자금을 전달했다가 전주지검에 구속돼 3년간 옥고를 치른 인물이다. 워낙 조리 있게 말을 잘해 말 잘한다 김정두로 알려졌다.지역내 정치인으로는 순창 농지개량조합 전무 출신으로 23대 순창군의회 의원과 3대 전후반기 의장을 지낸 김주곤씨(82), 4/5대 순창군의회 의원과 5대 순창군의회 하반기 의장을 지낸 양승종씨(56)가 있다.△학계교육계양복규씨(79)는 동아당약방 대표로 대한 한약협회 중앙회 대의원 의장을 지냈으며, 동암고와 사회복지법인 동암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지난 2009년에 전북도민의장을 받았다.안준태씨(80)는 문교부 사회교육과장과 법무담당관, 전북대 사무국장을 거쳐 전북교육청 부교육감을 지냈으며, 그의 형 안준영씨(85)는 제1회 기술고등고시에 합격해 조달청 시설국 설비과장을 지낸 뒤 대림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순창군교육위원회 의장을 지낸 안종선씨(고인)가 이들의 아버지이다.양진욱씨(66)는 전북교육연수원 총무부장과 교육위원회 의사과장, 군산교육문화회관 관장을 지냈다.우석대 김두규 교수(58)는 독일 뮌스터대학교대학원에서 독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전문위원과 신행정수도 건설추진위원회 자문위원을 지냈다. 풍수에 대한 관심이 많아 여러 저서와 풍수학 사전을 편찬하기도 했다. 우석대에는 또 김경애 패션디자인학과 교수가 재직하고 있다.군산대 최동현 교수(63국문학)는 30여 년 간 판소리 연구에 매진하면서 판소리와 관련한 다수의 저서를 집필하고 판소리 다섯 바탕의 바디별 전집을 한영 대역으로 완간하기도 했다. 제5회 동초대상을 받았고 군산대 인문대학장과 한국미술인총연합회 전북지회장을 지냈다.전주대 박병도 교수(59)는 전북도립국악원예술단 예술감독을 지냈으며, 광주비엔날레와 전주세계소리축제 개막공연 연출을 맡기도 했다. 현재는 전주대 문화융합대학장을이다.양창호씨(70)는 호원대 경영학부 학과장, 행정부처장, 관광대학 학장을 지냈고, 김병곤씨(47)는 강릉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황의열씨(63)는 경상대 인문대학 교수회장과 도서관장을 지내고 한문학과 학과장을 맡고 있다. 서원대 중어중문과 황선주 교수(59)는 국정원 국장을 지낸 황금주씨의 동생이다.△사법계황면주 변호사(고인)는 남원지방법원 판사, 전주지방법원 부장판사 등을 지냈으며, 전북도립박물관 설립추진위원장, 갑오농학혁명 기념탑 건립추진위원장, 전북농학보존회 이사장 등을 맡아 고향발전에 이바지했다. 황의열 경상대 교수가 아들이다. 김종세(82) 변호사는 인천지방변호사회 회장과 2005년 인천 항공사 법률고문 등을 거쳤으며 재경순창군민회 789대 회장과 재경도민회 부회장을 맡기도 했다.전주지검에도 근무했던 한동영 검사(57)는 서울고등검찰청 검사로 있고, 전주지검 형사1부장을 지낸 정인균씨(59)는 부산고등검찰청 검사를 끝으로 변호사를 개업했다.홍은숙 판사(39)는 서울북부지방법원에 근무하고 있다.△문화예술동계면 수장리 가작마을에서 태어난 김세종(고인)은 어려서부터 동편제를 익힌 명창이자 판소리 이론의 선구자다. 조선 창극사(朝鮮唱劇史)에는 그를 헌종철종고종 3대에 걸친 동편제 인물로 송우룡박만순과 함께 소개되고 있다. 판소리 이론은 신재효에게서 지도받았다고 한다.정우현씨(61)는 2000년 대한민국 서예전람회 특선의 예예(특선 5회)를 획득했으며 2003년 대한민국 서예전람회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서예가다. 황갑주씨(87)는 국문학 박사이자 시인이다. 미국으로 이주했으나 현재도 고향에 시집 등을 보내오고 있다.△재계김재호씨(고인)는 72년 호남자동차공업사 회장, 76년 제일여객 대표이사, 77년 신진교통 회장, 86년 호남고속 사장 등을 지냈으며 89년에 전북도민일보사 회장이 됐다. 전북도민일보는 현재 아들인 김택수 회장(68)이 맡아서 운영하고 있다. 김씨는 또 전북도택시운송조합 이사장 등을 맡고 있으며 전주상공회의소 회장을 지냈다.김학선씨(고인)는 현대산업개발 사장을 지냈고, (사)옥천향토문화연구소 이사장을 지낸 이중환씨(82)는 제일냉풍 주식회사 회장을 맡고 있다.(주)나라감정평가법인 대표를 지낸 정균씨(69)는 풍수와 관상에 조예가 깊었으며 정주영 전 현대그룹회장이 생전에 곁에 두고 챙겼다고 전해진다.황호연씨는 한국도자기(주) 회장과 전국 도자기협회장을 지낸 월간도예 발행인이며, 이용윤 삼보상사 대표는 순창군 향우회장을 지내며 동계장학회에 10억 원을 기증했다.정정현씨(77)는 (유)한국주류상사 대표이고, 김중민씨(61)는 (주)참존식품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진재철씨(72)는 광동한샘 대표이사 사장과 (주)동한마케팅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지난 2006년 전북중소기업청장을 지낸 양평식씨(67)도 이곳 출신이다.△종교계원팔연씨(69)는 전주 바울교회 담임목사이며, 기독교 대한성결교회 총회장과 전북도 기독교연합회 회장,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중앙이사 등을 지냈다.황의태씨(66)는 원불교 중앙총부 교정원 기획실장과, 원음방송 사장. 원불교신문사 사장 등을 거쳤으며, 황면주 변호사의 아들이다.△기타황의옥씨(76)는 전주시 약사회장과 중앙신용협동조합 이사장, 88올림픽범민족추진협의회 부의장, 대한약사회 회장,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 전북지부장 등을 지냈으며, 현재 전주시자원봉사센터 이사장을 맡고 있다.임귀래씨(72)는 대한적십자사 전북지사장을 지냈으며, 최형원씨(56)는 체육학 박사로 전북도체육회 훈련과장과 총무과장 등을 거쳐 현재는 사무처장을 맡고 있다.정승균씨(49)는 국비로 미국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해군준장이며, 우리나라 최초로 전투함을 해외에 파병한 청해부대 작전을 계획했다. 뛰어난 작전지휘로 7차례에 걸쳐 각국의 선박들을 해적의 피랍 위협에서 구출했다.- 다음 회에는 고창군 흥덕면 편이 이어집니다.

  • 기획
  • 이성원
  • 2017.04.04 23:02

설립 1주년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전주지원 조원구 지원장 "지역 의료기관과 협력 강화, 시민 건강증진 위해 노력"

매달 우리가 내고 있는 건강보험료가 얼마나 적절하게 쓰이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은 누구나 한 번 쯤 가져봤을 것이다. 건강보험료는 심사를 거쳐 의료기관(병원약국)에 지급되는데, 그 심사를 하는 곳이 바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하 심평원)이다. 심평원은 요양기관의 진료비 심사와 요양급여의 적정성 평가, 의약품치료재료의 관리, 보험수가 개발 등 건강보험을 포함한 보건의료정책 개발 업무를 수행하고 지원하는 보건복지부 산하 공공기관이다.2000년 출범한 심평원은 본원과 각 지역 관할 7개 지원 체제로 운영돼 오다 지난해 3월부터 2개 지원(의정부, 전주)이 추가 신설돼 현재 본원과 9개 지원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이 같은 배경엔 전북지역 의료기관들의 진료비 심사를 광주지원에서 담당해와 지리적 접근성 제한 등으로 각종 서비스를 받는 제약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따라 지난해 3월 1일 심평원 전주지원이 설립됐고 첫 수장으로 조원구 지원장(57)이 부임했다. 취임 1년을 보낸 조 지원장을 만나 전주지원의 업무와 역할 등에 대해 들어봤다.-만나서 반갑습니다. 먼저 심평원 소개를 좀 부탁드립니다.심평원은 국민들이 의료기관 이용 후 본인이 부담한 진료비가 건강보험법에서 정한 기준에 맞게 책정되었는지를 확인해 잘못 지불한 진료비가 있을 경우 환불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진료비확인 신청제도, 그리고 의료급여 사례관리 및 응급의료비 대불제도 등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의료급여 뿐만 아니라 자동차보험, 보훈환자 진료비심사 등 대부분의 국민의료비를 심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올해로 40주년을 맞이한 한국 건강보험심사평가 시스템(HIRA)을 바레인에 첫 수출하는 쾌거도 이뤘습니다.-초대 전주지원장으로 취임해 1년을 보내셨는데요. 소감을 말씀해주신다면.저는 고향이 완주이고 중고등학교와 대학교까지 전북에서 다녔습니다. 고향에서 초대 전주지원장으로 업무기반을 마련하고 안정적인 업무개시로 전주지원이 정착할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고생도 많았지만 멋진 전주지원을 만들어 지역사회에 봉사하자는 마음으로 업무에 임했습니다. 그동안 심평원은 규제 및 삭감하는 기관이라는 인식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전북지역 의료기관과 14개 시군 의약단체와의 간담회 실시 등 소통을 강화하고 실시간으로 맞춤형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전주지원이 의료기관을 도와주고 국민건강증진을 위해 함께하는 동반자라는 인식을 갖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안정적으로 업무를 개시하고 정착 발전되는 토대를 마련한 것에 대해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습니다.-전주지원은 주로 어떤 일을 하는지요.전주지원은 그동안 광주지원에서 수행해왔던 전북지역 병원급 이하 3600여개 의료기관의 진료비 심사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지원 설립 이후 5800여 만 건, 지급된 진료비만 2조2000억 원이 넘습니다. 전문적인 심사직원과 대학교수로 구성된 전문심사위원 80여명이 의료기관에서 청구된 진료비를 적정하게 진료하고 올바르게 청구했는지를 심사(확인)하고 있습니다.-의료급여 심사업무가 만만치 않은 전문영역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직원은 어떻게 구성돼 있나요.전주지원에는 현재 51명이 근무하고 있습니다. 주로 간호사 경력을 지닌 전문가 집단으로 전 직원 중 여성비율이 75%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간호사 비율이 많은 것은 의료기관에 대한 심사를 하는데 전문적인 의학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의학적으로 다툼이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대학병원 등 지역 전문의사들이 함께 진료비 심사를 하기도 합니다.-의료비 지급 규모가 커 그만큼 청렴성이나 업무에 대한 자부심도 크실 것 같은데요.일부에서는 심평원을 의료계의 갑이라고 표현합니다만 그 부분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엄격한 기준에 따라 심사를 하기 때문에 요양기관 입장에서 그렇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역 관할 의료계와 접촉을 많이 하고 소통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업무에 대해서는 한정된 재원을 가지고 국민을 대신해 건강보험료를 지급한다는 사명에 따라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지난 1년 동안 주로 어떤 업무에 집중하셨는지요.신설 지원이다 보니 지난 1년은 전북 지역사회 일원이 되기 위해 전주지원의 안정적 정착에 역점을 두고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의료기관과의 상호신뢰 관계 구축을 위해 현장 중심의 목소리를 듣고 애로사항 등을 실무에 반영하는데 중점을 뒀습니다. 또한, 급여기준 등의 정보를 즉시성 있게 제공하는 등 적극적 서비스 제공을 통해 불이익이 초래되지 않도록 노력했습니다. 아울러 전주지원 개소와 함께 전북도민과 성장 발전할 수 있도록 사회공헌 협약, 전 직원이 참여하는 지역네트워크 기반 상생협력, 기관특성을 살린 의료봉사, 가족동반 봉사활동 및 소외계층 나눔 등 지역사회 발전 및 동반자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올해 업무는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고 계신가요.올해 1월부터 종합병원 진료비 심사가 관할지원으로 이관됨에 따라 전북지역 종합병원급 이하 모든 의료기관의 진료비를 심사하게 됐습니다. 또한 한방병원 역시 7월 1일부터 지원에서 심사를 하게 됩니다. 전문성을 갖추고 보건의료분야 전문가로서 최고의 역량을 발휘하도록 직원 전문역량을 강화하고, 전 직원이 신바람 나고 행복하게 근무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겠습니다. 또 현장중심, 고객중심의 고품질 서비스제공으로 전북지역 의료기관과 국민건강 증진을 위한 동반자로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동반성장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와 함께 전북지역 질병별 통계를 지역언론과 SNS 등을 통해 제공해 전북도민 건강증진에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할 예정입니다.-끝으로 전북도민과 의료계에 하실 말씀이 있다면.전주지원 설립이후 지난 1년은 근무환경과 시스템 구축, 유관기관과 네트워크 형성 등 하드웨어적인 측면의 구축에 역점을 뒀다면, 올해는 소프트웨어적인 측면의 구축에 힘쓸 계획입니다. 전주지원은 설립 취지에 맞게 현장 중심의 소통, 다양한 채널의 정보제공 등 고객중심의 업무수행으로 전북지역의 보건의료 질 향상 및 도민의 건강증진을 위해 기여하겠습니다. 도민들께서도 전주지원이 도민과 함께 더욱 더 성장 발전할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가져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조원구 지원장은] 현장 소통 중심 업무 추진, 소탈꼼꼼한 일처리 호평조원구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전주지원장(57)은 완주 고산 출신으로 초중을 완주에서 다닌 뒤 전라고와 전북대 행정학과를 졸업했다.1988년 건강보험공단의 전전신 격인 의료보험연합회에 입사했고, 이후 연합회는 의료보험관리공단, 건강보험공단으로 바뀌었다. 2000년 건강보험공단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분리되면서 심평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심평원 본원 기획실과 심사기획부, 급여조사실 조사관리부, 감사실 감사부장, 고객지원실 지원부장 등 주요 요직을 거쳐 지난해 3월 전주지원장으로 부임했다.지원장 부임이후 6개월 넘게 도내 14개 시군을 돌며 의료계와 간담회를 갖는 등 현장 소통중심 업무를 추진해왔다. 소탈하면서도 꼼꼼한 일처리로 심평원 내 신망이 높은 조 지원장은 2005년과 2013년 보건복지부 장관상을 받기도 했다. 특히 업무적으로 항상 노력하면서 상황 판단과 방향 감각이 탁월해 복잡한 사안도 갈래를 잘 탄다는 평을 받고 있다.직원들에게는 항상 배우고 공부할 것을 요구하면서도 사무실에서 웃음이 끊이지 않도록 분위기를 이끄는 능력도 갖췄다는 평이다. 타고난 부지런함과 배려하는 꼼꼼한 성격으로 의료계 등 유관기관과의 유대관계도 원활히 유지해 전북의 첫 심평원 지원의 업무를 슬기롭게 풀어갈 것이라는 기대를 받고 있다.

  • 기획
  • 백세종
  • 2017.04.03 23:02

지역사 찾기 나선 이인철 전북체육발전연구원장 "기록 수집·과거 돌아보는 일 게을리 한 대가 크다"

3월 초, 전주시청 로비에서 흥미로운 전시회가 열렸다. 전주의 기억을 내세운 이 전시회는 시민들이 소장했던 다양한 기록물과 근현대 전주의 사료들로 관객들을 불러 들였다. 역사가 단지 과거가 아니라면, 그 지나간 역사가 오늘을 있게 하고 또한 우리의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면 그것이 무엇이었는가를 알아내려고 하는 노력은 치열해질수록 의미 있는 일이다. 지나간 시대의 기록은 오늘의 우리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바로 그 통로다.이 전시회에서 눈길을 모았던 자료가 있었다. 원로 체육인 이인철 전북체육발전연구원 원장이 소장한 자료로 엮여진 특별전시회였다. 지역의 근현대 역사와 체육의 역사가 관객들을 만난 자리, 이 귀한 기록물을 소장하고 있는 그에게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사실 이 원장은 그동안에도 여러 차례 전시회를 통해 지역 근현대사의 증거(?)를 우리 앞에 내놓았었다. 오래전부터 지역사를 연구하는 전문가도 아닌 그가 지역의 역사와 지나간 시대의 기록과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된 배경이 궁금했다.이인철 원장(88)을 만났다. 올해 미수를 맞았지만 그는 여전히 젊다. 꼿꼿한 자세에 정갈한 수트를 차려입은 그로부터 물리적 나이를 짐작하는 일은 어렵다. 그 뿐인가. 놀라울 정도의 기억력과 막힘없는 언변은 그의 일상이 얼마나 큰 활력으로 차있겠는가를 짐작케하고도 남는다.그는 25년 전, 전주종합경기장 안에 전북체육발전연구원을 개설했다. 체육 분야는 물론, 지역의 역사부터 생활문화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록과 자료를 주목해 수집하고 정리해온 그의 삶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는 곳이다.인터뷰는 온갖 자료들이 빼곡히 들어차있는 연구원에서 있었다. 여기 저기 쌓여있는 자료들은 나름대로 질서를 갖고 있는 듯 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이 원장은 끊임없이 자료를 가져와 소개했다.역사는 기록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랫동안 기록의 소중함을 잊고 살았어요. 안타까운 일이지요. 전공자도 아니고 지식도 깊지 않은 내가 해온 일은 사실 단순합니다. 뒤돌아보면 순전히 개인적 취미로 해온 일인데 그래도 그 결실이 지역사를 바로 찾는데 도움이 될 수 있게 되었으니 감사한 일이죠. 후학들을 위해 무엇인가 기여하고 싶다는 바람이 작게라도 이루어질 수 있게 된 것, 그것만으로도 보람 있습니다.그의 공간에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기억의 증거들은 이제 곧 역사가 될 것이다.-자료가 많습니다. 직접 정리하시나요.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모았던 것들인데 어느 때부터인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쌓이게 되었어요. 그냥 방치하면 정리하기 더 어려워지니 나름대로 분류를 해놓는 정도입니다.-체육발전연구원이란 문패가 무색할 정도로 얼핏 보기로도 역사적 자료가 꽤 많은 것 같습니다. 이 일을 어떻게 시작하시게 되었습니까.젊은 시절에 운동을 했었어요. 52년도니 꽤 오래전 일인데 사격을 했었죠. 제가 전북사격선수 1호입니다. 체육 분야에서 활동하다보니 문학이나 미술 등 문화 쪽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과 교류가 있었어요. 자연히 취미가 생기더군요. 지역의 문화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여러 통로로 만나는 역사적인 자료를 보며 나중에 후진들에게 좋은 양식이 되지 않겠는가 싶었어요.-개인적인 취미로 시작하신 일이겠습니다.그렇긴 한데, 한편으로는 이제 고향이 되어버린 이 지역에 봉사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늘 생각하면서 얻은 일이기도 합니다. 언젠가는 이런 자료들이 기여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어요.-자료 수집은 언제부터 시작하셨습니까.1955년 즈음이었던 것 같아요. 50년 전후로 험한 상황이었었잖아요. 그때 시대정신이나 역사정신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 1957년에 야화지 사건이라는 필화 사건이 일어났어요. 〈야담과 실화〉란 월간지에 조영암이란 작가가 이 지역 사람들과 특성을 매우 악랄하게 폄훼해 글을 썼습니다. 그대로 둘 수 없어 잘 아는 신문기자에게 이야기하고 언론을 통해 보도 될 수 있게 했어요. 도민 궐기대회가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는데, 일이 아주 커졌지요. 그런 일을 겪으면서 지역의 역사를 바로 알려줄 증거들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료 수집은 그래서 시작했어요.-역사의식이 투철하셨군요.(웃음)당시에는 경찰에 몸담고 있었는데, 역사적 소용돌이에 놓인 국가를 위해 젊은 사람들이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고했었으니까요. 개인적으로는 자료 수집을 하기 시작했고, 공적으로는 당시 신문기자였던 전영래씨와 도모해 청년회의소를 만들었어요. 지금은 사업가들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고 있는 JC 전신이지요. 이를테면 청년운동의 씨앗을 만든 겁니다.-자료가 다양한 것 같은데, 아무래도 역사 분야 사료가 많은 것 같습니다.역사 분야가 많아요. 특히 일제 강점기에 관한 기록이 집중적으로 많죠. 일제 때 빼앗기거나 묻혀버린 사료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리 멀지 않은, 아직은 그 역사를 경험한 세대들이 생존해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시대 역사의 많은 부분이 왜곡되거나 폄훼되어있습니다.-전주부사 완역을 주도하셨던데요.전주부사 번역은 일제강점기 역사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아 또 다른 왜곡을 가져오는 상황을 알게 된 후에 가장 큰 과제로 안고 있었던 작업이었습니다. 전주의 역사와 문화 자산은 조선시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유산의 대부분이 일제 강점기에 파괴되었죠. 전주부사는 비록 일본인들에 의해 쓰인 것이지만 전주의 역사 문화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중요한 사료입니다. 번역의 의미는 거기 있습니다.-전통문화도시로서의 정체성을 미래의 가장 큰 유산으로 삼고 있는 전주로서는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바로 찾는 일이 절실하다는 말씀이군요.물론입니다. 그런 점에서 전주부사 번역 말고도 꼭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일본에 구성되어 있는 전주회를 통해 그 당시의 기록과 기억을 찾는 일입니다.-전주회는 전주 출신 모임인가요.맞습니다. 전주회는 전주에 연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에요. 처음에는 전주에서 태어났거나 살았던 사람들이 모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후손들에게로 이어졌습니다. 오래전부터 여러 통로를 통해 642명 회원 명단을 알아내 모든 회원에게 편지를 썼었어요. 6~7년 전의 일인데, 그중 420통이 되돌아왔어요. 그렇다면 나머지는 전달되었다는 것 아니겠어요. 기대를 갖고 몇몇 사람들과는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는데 개인의 힘으로는 지속하기 어려운 일이었어요. 끝내 중단되고 말았는데, 언젠가는 누군가 꼭 해야 할 일입니다.-그래도 성과는 있었습니까.많지는 않지만 일본 지역에 살고 있는 전주 출신들을 확인한 것도 성과랄 수 있겠지요. 후속작업이 이어진다면 좋은 자료가 될 겁니다.-전주부사 번역 이후로도 많은 일을 하셨지요.요즈음 K스포츠재단이 화제인데, 얼마 전에 그 전신인 〈체육육성기금〉에서 제가 갖고 있던 자료를 모아 체육사 책을 만들었어요. 20만권을 제작해 전국적으로 배포했는데 귀한 사진 자료나 기록을 거의 망라했지요. 체육사의 한편을 정리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전주부사 번역 이후 전주부사에 실린 사진만으로 재밌는 이야기책을 만드셨던데요.도시의 기억을 찾는 일의 중요한 통로가 된 작업입니다. 단순한 사료만으로 설명되어지던 수많은 역사적 유산들이 새롭게 가치를 더하거나 제대로 확인되는 계기가 되었으니까요. 사진이 갖는 힘은 증거의 가치를 더하는데 있는 것 같아요.-지금 진행하시는 작업이 궁금합니다.남북분단의 불행한 민족사를 정리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625 민간인 학살조사연구회 사업인데요. 1950년 9월 26일, 전주를 점령한 인민군이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수감자들을 무참하게 학살한 사건이 있었어요. 그들 중 300여명은 가족들에게로 돌아갔는데 175명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했습니다. 전주 효자공원묘지에 합동 안장되어 있어요. 당시 보도연맹 사건 등 인민군들이 남한에 들어와 반동분자라고 내세워 학살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알려진 것만으로도 5900명이 넘지 않습니까. 그중 80% 정도가 전라남북도 사람들일 겁니다. 통탄할 일이지요. 그렇다고 좌익들은 안 당했나요. 11사단의 양민 학살도 대단했지요. 통일을 이야기하면서 억울하게 희생된 분들에 대한 추모제나 그 진상을 밝히는 일을 묻어둔다면 그것은 또 다른 역사적 죄를 짓는 일이예요. 비극적인 이 역사를 정리하는 일을 전라북도에서 먼저 시작하자는 겁니다. 〈6.25 피살자 묘역 사업〉은 그 첫걸음이죠.-특별히 이 문제에 주목한 이유가 있습니까.북한에서 넘어와 경찰공무원이 되었는데 첫 부임지가 전주였어요. 당시 전주형무소에 쌓여있던 시체를 보았었는데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큰 충격으로 안겨 있습니다. 전주형무소 민간인 학살사건 규명에 나선 것도 그 때문이지요.-지난해에 희생자 추모비가 제막됐죠.추모비는 전주형무소 민간인 학살사건을 규명하는 사회적 공론을 시작하는 자리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기록을 찾는 일이나 학살현장 발굴 사업 등 해나가야 할 일이 많지만 이제 본격적인 걸음을 뗐으니 정부와 자치단체의 관심이 더해진다면 잘 진행되리라고 믿습니다.-자료 수집 뿐 아니라 실제로 역사를 규명하는 일에까지 나서는 일이 쉽지는 않겠습니다.그렇긴 한데 이런 세월을 보내다보니 이제는 일상이 되었어요. 지역사를 바로 잡기 위해 막힌 곳의 물꼬를 찾아내는 일은 우선 자료가 바탕이 되죠. 다행히 50년대부터 별 의무감 없이 수집해온 자료들이 연구자들에게도 좋은 사료가 된다니 즐거운 일입니다.-이즈음 각 자치단체들마다 도시의 역사를 찾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록의 중요성을 이제 새롭게 깨닫는 것이겠죠.실제 제가 갖고 있는 자료 전시로 여러 도시들을 갈 기회가 있는데, 그 관심이 놀라울 정도로 높습니다. 기록하는 일, 그리고 그 기록을 수집하는 일을 일상적으로 해왔으면 아마도 우리사회가 이런 상황에 처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기록하지 않고 쉽게 잊어버리고, 과거를 돌아보는 일에 게을리 했던 대가가 참으로 큽니다.-그런데 이런 자료들은 어떻게 수집하시는지 궁금합니다.자료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깨닫게 된 이후에는 사진 한 장이라도 그것을 얻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합니다. 여러 해를 걸려 사진 한 장 구한 경험도 있어요. 그러다보니 이 사람이 자료를 많이 갖고 있다더라, 혹은 찾는다더라 하는 소문이 퍼져 먼저 제공해오는 고마운 분들도 있습니다.-건강은 어떻습니까.아주 좋습니다. 아침 9시면 출근해 6시에 퇴근합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빠짐없이 주 5일 정상 출퇴근하며 지냅니다. 주말에는 책을 보죠. 아직도 여러 가지 할일이 있다고 생각하면 책을 읽지 않을 수 없습니다.-이즈음은 어떤 책을 읽으십니까.역사책을 많이 읽는 편이예요. 지금은 조선왕조실록을 다시 보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기억력이 문제가 되니 잊지 않으려면 스스로 책을 읽는 수밖에 없어요.그는 전직 경찰출신이다. 수많은 직업을 거쳤지만 그에게는 20대, 딱 10년 몸담았던 경찰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남북전쟁으로 어수선했던 시절, 사찰을 주로 다루는 부서에 근무했던 때문일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투철한 반공주의자이면서도 이념에 대해 뚜렷한 철학을 갖고 있다.제가 아는 분 중에 사회주의자였던 김철수 선생이 있습니다. 그 어른은 오염되어 가는 사회주의를 지키려했던 분이예요. 사회주의를 단순한 빨갱이라는 개념과 혼돈하면 안 됩니다. 나는 우리가 어떻게 우리답게 살아야 하는가를 연구하는 것이 사회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답게 사는 것에 대한 관점이 다를 뿐이지요.다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 그가 수집한 기록이 가치를 더하는 이유도 거기 있겠다 싶었다.● [이인철 원장은] 북한서 넘어와 '전북체육 역사 산증인'으로이인철 원장은 1929년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났다. 정미소를 운영했던 부모님은 기독교를 신앙으로 삼았다.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북한에서 그의 집안은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그 역시 철원중학교를 졸업한 이후 민주청년동맹에서 활동했으나 숙청 대상으로 감시 받는 삶을 견디지 못해 목숨 걸고 삼팔선을 넘었다. 오갈 데 없이 혈혈단신이었던 그는 명동성당 옆에 움막에서 살면서 배추장사, 미군부대의 깡통장사, 군밤장사 등 온갖 잡일로 생계를 꾸렸다. 대학을 가고 싶었지만 현실은 막막했다. 탈출해온 이듬해 625전쟁이 났다. 남아 있는 가족들이 피난을 왔지만 아버지는 오지 못했다. 철원노동당사 폭파 계획에 연루되어 총살을 당했다는 것을 가족들로부터 들었다.전쟁이 났으니 무조건 도망쳐야했다. 군대에 가려했으나 피난 가는 길에 트럭에 실려 학도병으로 끌려가는 학생들을 보고 마음을 바꾸었다. 우연히 〈북한 진주 경찰관 모집〉에 응시해 합격했다. 대구에서 경찰관이 되었지만 전라북도 경찰국으로 배속됐다. 1950년 가을, 전주로 오면서 그는 전주사람이 됐다.무주경찰서와 전주경찰서에서 근무했던 그는 정치문화반장, 사찰반장 등을 거쳤다. 사찰 업무를 주로 했지만 원칙과 상식으로 일하고 싶었다. 엄혹한 시절, 정부에서 부역자를 처리하는 법률을 만들었다. 인민군 치하에서 부역했던 사람들의 명단을 만들어 관리하는 업무가 맡겨졌다. 그의 관리대상이던 부역자 명단을 갖고 사찰(?)을 하다 보니 이 명단이 억지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저 밥 먹고 살기 위해 잠시 동원되었던 억울한 사람들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단을 없애 더 이상 사찰을 할 수 없게 만든 것은 그 때문이었다. 경찰로는 꼭 10년을 일했다. 3.15부정선거 사태로 책임자를 정하면서 이유도 없이 직분 때문에 엮여 옷을 벗었다. 퇴직금 한 푼 없이 쫓겨난 뒤 살길이 막막했다. 그때 그를 먹여 살린 사람들은 그의 사찰 대상이었던 남부시장 상인들이었다. 여러 해 남부시장에서 장사꾼으로 살았던 그는 전주의 한 산소 제조공장 상무로 취직이 되었다. 그의 경영 능력을 주위 사람들이 눈여겨보았다. 경영자로서 삶이 시작되었다. 전북연탄의 전신인 일자표 연탄 사장을 거쳐 부산과 인천 등지의 규모 있는 회사 임원으로 발탁돼 근무했다. 80년 광주항쟁이 나자 광주 출신들이 운영했던 그의 회사는 부도가 났다. 그 책임을 그가 져야 했다. 전주로 돌아왔을 때 집도 경매로 넘어가고 거처할 집한칸 마련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비닐하우스를 짓고 아내와 꽃가게를 차렸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92년 전북체육발전연구원을 설립했다. 지역을 위한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결과였다. 그 뒤 25년, 그는 지역사를 바로 찾는 일에 나섰다. 50년대부터 이어온 자료 수집이 큰 힘이 되었다. 〈실록전북체육사〉 〈사진으로 보는 한국체육사〉를 발간했으며 〈전주부사〉를 번역해 일제강점기 전주의 역사를 기억해내는 통로를 만들었다.전라북도 체육회 상임고문, 전주시 통합체육회 상임고문 등을 맡고 있는 그는 전북체육사의 산증인이다. 크고 작은 지역사 연구에 발 벗고 나선 지금은 지인들이 이 박사라고 부른다.

  • 기획
  • 김은정
  • 2017.03.31 23:0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⑦ 전주 탁백이국과 진안 애저찜 - 역사도 '전북의 맛'에 반했다

1928년 12월에 발간된 대중잡지 <별건곤(別乾坤)>에는 경기도 여자부터 시작해 팔도(八道) 여성들의 특징을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온다. 전라도의 여자들이 다른 도의 여자보다 요리를 잘한다. 그 중에 전주여자의 요리하는 법은 참으로 칭찬할 만 하다고 말하며 음식에 관한 한 서울여자가 갔다가 눈물을 흘리고 호남선 급행열차를 타고 도망질할 것이라고 재미있게 표현한 문장이 있다. 사실 예로부터 전라북도가 다양한 전통의 맛과 푸짐한 상차림으로 유명할 수 있었던 것은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옛말처럼 풍요로운 전라북도 농경문화를 낳은 자연의 축복에서 비롯된 것이다. 호남평야의 기름진 땅과 이를 둘러싼 산 그리고 옥토를 적시며 흐르는 좋은물에서 양질의 쌀과 갖가지 채소가 생산되었고, 서해바다에서 온 다양한 수산물이 음식재료로 더해져 풍요로웠기 때문이다.근래에 들어와 전주의 유명한 음식 목록에 비빔밥이 빠지지 않는 것은 근방에 좋은 쌀과 식재들이 있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한 비빔밥 못지않게 향토색이 짙은 음식이 바로 콩나물국밥이다. <조선요리제법(朝鮮料理製法)>(방신영, 1917)에 콩나물국밥 대신 콩나물국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콩나물국밥은, 전주에서는 탁주를 담는 그릇을 뜻하는 탁백이 탁백이국이라고 부르며 우리 조상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콩나물에 관한 문헌상의 기록은 고려시대부터 나오며, 조선시대에도 이를 나물로 무쳐먹거나 구황식품으로 이용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를 콩나물국으로 먹었다는 기록이나 구체적인 조리법은 1910년대 이후부터 나타난다. 콩나물국은 사실 재료를 구하기 쉬워 사시사철 맛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 속에 정착된 조리법은 매우 단순해 별로 특별해 보이지 않기도 한다. 그럼에도 유독 전주의 콩나물국밥이 유명했던 것은 주재료인 이곳의 콩나물, 쌀, 물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1929년 별건곤 12월호에는 팔도의 명물을 예찬하는 기사에서 전주의 탁백이국이 특별히 맛있는 것은 좋은 물 덕분이라며 이를 칭찬하고 있다.서울의 설렁탕이 명물이라면 전주명물은 탁백이국일 것이다. 다른 채소도 마찬가지지만 콩나물이라는 것은 갖은 양념을 많이 넣은 맛있는 장과 놓아야만 입맛이 나는 법인데 전주콩나물국인 탁백이국만은 그렇지 않다. 단지 재료라는 것은 콩나물과 소금뿐이다. 이것은 분명 전주콩나물 그것이 단 것과 품질이 다른 관계이겠는데, 그렇다고 전주콩나물은 류산암모니아를 주어 기른 것도 아니요, 역시 다른 곳과 똑같이 물로 기를 따름이다. 다 같이 물로 기르는데 맛이 그렇게 다르다면 결국 전주의 물이 좋다고 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후략)지금의 전주시를 관통하며 흐르는 맑고 풍부한 물은 맛있는 콩나물을 재배하기에 제격이었다. 콩나물국밥 보급의 비결은 물뿐만이 아니기도 했다. 현재 남부시장의 근원이 된 남문 풍남문밖에 형성된 시장의 여건도 영향을 주었다. 시장음식으로 전주의 좋은 물과 콩나물, 싸전다리에서 유통되던 쌀 등을 조리하여 손쉽게 상인들이 먹게 되면서 콩나물국밥이 호황을 누렸다.전국에 널리 알려진 콩나물국밥과 다르게 좀 특별한 별미도 있다. 전북 10미(味) 중에서도 특히 호기심을 끄는 진안의 애저찜이 바로 그것이다. 애저(兒猪哀猪)를 한자로 풀었을 때, 아이 兒자가 붙어 혐오감이 들 수 있는 까닭에 슬플 哀를 붙이기도 하였다. 어미 뱃속에 있지만 바깥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죽어 슬프다고도 해석할 수 있고, 어쩔 수 없이 죽은 새끼돼지를 먹는 것이 슬프다고 풀 수도 있다. 옛날 먹을 것이 귀해 일반적인 식재는 물론 농가의 고기가 특히 귀하고 아쉬웠던 당시, 죽은 새끼돼지도 그냥 버릴 수밖에 없어 찜으로 요리했던 데서 생겨난 음식이다. 돼지는 대략 8마리에서 15마리까지 새끼를 낳는데, 한꺼번에 많은 새끼를 낳다보니 새끼가 뱃속에서 죽은 채 태어나기도 했고 어미젖을 먹다가 깔려 죽는 경우도 있었기에 애저찜의 탄생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후기로 넘어오면서 애저찜의 기원은 조금 변질된다. 조선시대 독점적 상권을 부여받은 상인들은 많은 돈을 벌어들였고 돈 많은 상인들은 자신들의 부를 과시했다. 그러한 부의 과시수단으로 공급이 한정되어 있던 애저찜을 먹는 것이 유행하게 되었고, 결국 죽은 새끼돼지의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에 이르자 어미돼지를 잡아 태어나기 직전 어미 뱃속에서의 새끼돼지로 애저찜을 요리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애저찜에 대한 기록은 콩나물국밥보다 시기가 더 거슬러 올라간다. <규합총서>나 <증보산림경제>, <조선무쌍 신식요리제법> 등 조선시대 후기와 일제강점기에 쓰인 문헌에서 돼지새끼집을 삶아서 갖은 양념과 함께 찐다., 새끼돼지의 뱃속에 여러 가지 양념을 채우고, 솥에 물 한 사발을 부은 다음 대나무를 솥에 걸쳐서 새끼돼지를 안친다. 동이에 물을 담아 솥 위에 놓고 천천히 불을 지핀다. 동이의 물이 따뜻해지면 찬 물로 세 번 바꾸어 고기가 충분히 익으면 식기를 기다렸다가 초장에 찍어 먹는다.와 같은 조리법을 찾을 수 있다. 최초의 기원을 알아본다면 진안군 강정리의 당산제의 제물 목록에 애기돼지가 기록 되어있었던 걸로 그 역사를 추측할 수 있다. 정확한 시기는 불분명하나 오래 전 진안 강정마을 당산제에 올랐다는 돼지새끼를 마을사람들이 도로 파내어 찜 형태로 요리해 먹었을 것이라고 전해진다. 진안 사람들은 이 당산제의 역사를 근거로 애저찜의 본고장을 진안으로 여기고 있다. 이런 사연을 지닌 애저는 양반들도 즐겨 찾았던 음식이며, 조선시대에는 궁중연회의 식단에도 들어 있던 특별식이기도 했다.어머니의 정이 담긴 집밥이나 콩나물국밥 같은 친숙한 음식이거나 혹은 애저찜처럼 생애 몇 번 먹어볼지도 모르는 별미이던 음식은 우리와 떼어놀 수 없는 것이다. 음식은 어떨때는 장소가 연상되기도 하고 누군가와 먹었던 기억으로 인해 때론 위안이 되기도 향수를 느끼게도 한다. 그렇기에 요즘엔 요리와 맛집에 관련된 것들이 대중의 높은 관심사가 되었다. TV프로그램뿐만이 아니라 일반인들도 맛집투어를 다니며 SNS로 인증하는 것이 유행이다. 그도그럴 것이 맛있는 음식은 생각만해도 즐겁고 찾아가는 여정에 따라 그만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어 더욱 특별해지기 때문이다. 오늘은 지역의 특색을 음미할 수 있는 맛있고 든든한 향토음식으로 모두가 행복한 봄날을 이어갔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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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3.31 23:02

[전북일보 만화뉴스] 비보호: 어느 콜센터 현장실습생 이야기

비보호: 어느 콜센터 현장실습생 이야기#표지.비보호: 어느 콜센터 현장실습생 이야기#1.(콜센터 풍경)어제도 7시를 넘겨서 퇴근했다.오늘은 언제 퇴근할 수 있으려나?물론 콜 수를 채워야 퇴근할 수 있다.#2.어제까지 보이던 얼굴이 오늘은 안 보인다. 못 견디고 나간 거겠지.평균 근속기간이 0.86년이라고 했었다. 2주마다 새로 뽑는다지?같이 들어온 친구들도 다 나갔다.#3.나도 그만하고 싶다.물론 그만두면 학교에서 크게 혼날 것이다.#4.안녕하십니까 고객님!헤드셋이 싫다. 이건 내 전공도 아니다.#5.인터넷 해지 좀 해달라는데 왜 이렇게 전화를 돌려?아, 고객님 불편하셨군요, 죄송합니다 고객님.이건 내 잘못이 아니다.#6.아 글쎄, !@#$#^@$#$#7.(입술을 깨문 화자)그러시군요 고객님,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시면요 고객님.이런 걸 교육청은 알까?#8.(매우 많은 학교, 그 가운데 극히 일부만 체크 표시돼 있는 모습)1112개 사업체 중 실태점검이 이뤄진 곳은 31곳(1차 4곳, 2차 27곳)뿐.모르겠지.#9.(서류)현장실습 만족도 <상>업무 파악 정도 <상>산업체 적응도 <상>근로시간과 임금 <상>(상에 체크하는 손)선생님께는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가 없다.언제나 기업이 갑이니까.#10.(띵동!)(화면에 뜬 메신저 창, 콜 수가 부족하니 분발하세요라고 쓰여 있다)/(헤드셋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야! 너 이 !@$^#$!@#%!!!#11.(헤드셋을 빼 내려놓는 화자)#12.(고개를 돌려 뒤를 보는 화자)(화자 뒤에 있는 고양이, 강아지 등 동물들, 각자 팻말을 들고 있다)당신 잘못 아니애오(리트리버 강아지)불행하지 않을 권리가 있어(왕관앵무)#13.이제는 찾자, 인권(커다란 고양이)#14.(아까 벗어놓은 헤드셋)#15.3월 24일, 고용노동부는 LG U+ 전주고객센터(LB휴넷)에 대한 근로감독을 뒤늦게 시작했다.전북교육청도 조사위원회를 꾸려 관련 조사를 시작했다.진상규명 대책회의는 3월 29일, LB휴넷 구본완 대표를 고용노동부에 고발했다.#16.이제는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필요하다. 파견 현장실습이 정말 교육과정의 일환으로 진행되는지 물어야 한다. 대안이 없다면 폐지도 검토해야 한다. - 윤성호 전교조 전북지부장#17.삼가 故 홍수연 씨의 명복을 빕니다./기획 신재용, 취재 남승현, 구성 권혁일, 그림 이권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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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3.30 23:02

금방 죽는다

이 단어를 떠 올리면 느리고도 느리게 평정이 흔들린다. 이런 비슷한 기분이 들 때 착 가라앉는다고 표현하곤 했던 것 같은데, ‘착’이라는 단어가 바늘 끝처럼 거슬린다. 어딘가에 딱 달라붙어버린 느낌. 그래서 유동성이 제거되어 상승이나 승화의 기운은 아예 휘발되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 밀폐성의 답답함. 그러나 내 기분은 사실 ‘착’을 울타리 치는 이런 느낌들과는 많이 다르다. 차라리 좀 붕 뜬 기분 같기도 하다. 부력을 받는 중량감. 그러면서 흘러가는 그런 상태다. 이 단어는 바로 ‘죽음’이다.고등학교 1학년 여름 방학 초입의 조금 늦은 초저녁이었다. 나는 마당에 덕석을 깔았다. 거기 둘러앉아 우리 식구들은 닭백숙을 먹을 것이다. 엄마가 준비를 하시는 동안 모깃불을 피우고 덕석에 벌렁 누웠다. 하늘에는 초저녁 별들이 부산스러웠다. 그렇게 이른 시간에 벌써 서둘러 달려가는 별똥별도 있었다. 별똥별은 달리다가 가속도를 타고 사라졌다. 나는 이유 없이 별똥별의 궤적을 내 안의 어딘가에 한참 동안 가둬두었다. 어느 것이 먼저이고, 어느 것이 나중인지를 모를 정도로 잠깐이었다. 항상 하던 일을 하면서 잠깐 누운 순간에 나는 아주 다른 세계로 급히 이동하고 있었다. 그것은 처음 경험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부족하다. 정확하게 말하려고 애써 본다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어떤 것으로서 태초 같기도 하고 종말 같기도 하였다. 음험한 어떤 기운이 모든 땀구멍에다가 표식을 달아 놓고 나를 훑으며 아주 천천히 지나갔다. 나는 한기가 서린 그 기운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냥 무너졌고, 방향을 잃었으며, 끝없이 추락했다. 구체적으로 체온도 떨어졌다. 닭백숙이 담긴 그릇을 들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웃으며 다가오시는 엄마도 갑자기 남이 되었다. 누나와 동생의 재잘거리던 소리들도 내게 다가오지 못하고 그냥 먼 곳에서 멈추어 웅성거릴 뿐이었다. 매우 무서운 경험이다. 닭백숙을 한 점도 뜯지 못하고, 나는 별똥별이 남긴 기억 속의 궤적을 따라 희미하게 소멸되어갔다. 몇 날을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우물에서 기력을 놓고 쓰러지기 전까지. 잠들기 전에는 항상 그 덕석의 찬 기운을 느꼈다. 긴 시간동안 그것은 하나의 의식이 되어버렸다. 내 기운은 방향 없이 소멸되면서 맥없는 분말처럼 소실점도 갖추지 못한 채 흩어지고, 정신은 안개처럼 흐려진다. 체온이 내려가다가, 공포도 아니고 두려움도 아니지만 모호하게 무섭기만 한 어떤 한기에 의해 정신이 아득해질 때쯤 갑자기 온 몸에 식은땀이 나면서 나는 축축해진다. 그 축축함은 그늘진 깊은 계곡 큰 낙엽 아래의 음습한 어떤 곳 같기도 하다. 많은 것을 습관처럼 감추기만 하는 응큼한 파충류의 눈 주위 같기도 하다. 아무것도 아니면서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 사실 수시로 덤비는 그것들에 속수무책인 채 몇 십년동안 그저 식은땀만 흘리다 잠들었다. 나는 매일 이런 의식을 치르며 잠든다.그런 의식을 치르기 시작하던 16살에 나는 분명히 딴 사람이 되었다. 그 단절 같은 두려움 앞에서 원래 열심이던 것에는 게으름을 피우고, 눈길을 주지 않던 것들에 눈길을 주었다. 허용된 모든 것이 지루해 죽을 맛이었다. 대신 금지된 것들은 죄다 재밌고 좋아서 깊이 빠져들었다. 내 성실성의 초점도 대상을 바꾸었다. 대학에 가는 일보다 정체 모를 ‘의미’가 커보였다. 그런데 그 내면의 두려움은 오히려 내게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만용과 거친 숨결을 주었다. 방탕한 생활 속에서도 시간이 금보다 귀하다는 것을 천천히 배워나갔다. 무엇보다도 내가 금방 죽는다는 것을 몸으로 느꼈다. 밤마다 치르는 의식은 내게 인생의 유한함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돌이켜보면, 이보다 더 큰 학습은 없었다. 어찌 보면, 나는 내가 금방 죽는다는 이 체득 위에 흔들리며 서 있기 시작했고, 서 있던 그 자리는 점점 견고해졌다. 또 알게 되었다. 나뿐만 아니라, 내가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내가 예뻐하는 사람이나 미워하는 사람이나 내 아내나 내 아들들까지도 모두 금방 죽는다는 것을. 금방 죽는다는 사실에 대한 체득은 언뜻 생각하면, 모든 것을 소멸시키고 포기해버리려 할 것 같지만, 정 반대로 내게 두려움 대신 순간을 영원으로 확장하려는 강한 의지를 주었다. 순간에 대한 체득은 필연적으로 영원성에 대한 갈망을 낳게 한다. 사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그것을 흔들어서 무한 확장하려는 예술적인 높이의 도전으로 이끌어주었다. 시를 읽고 외우게 하였다. 문자보다는 그 문자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는 소리의 아름다움을 알게 하였다. 이제는 더욱 분명히 안다. 죽음에 대한 체득이 삶을 튼실하게 북돋운다는 것을. 이것은 모든 크고 위대한 성취의 가장 강력한 비결이다. 곧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바람직한 일보다는 자기가 바라고 좋아하는 일을 선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장자』(莊子)는 매우 두꺼운 책이다. 그 안에서 장자가 한 많은 얘기들은 인간의 무한 확장을 도모한다. 그것을 장자는 ‘소요유’(逍遙遊)라는 단어로 묘사했지만, 절대자유라고 말해도 된다. 「제물론」에 나오는 말이다. “해와 달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우주를 겨드랑이에 낀 채, 만물의 흐름과 하나도 어긋나지 않는다. 모든 것을 혼돈의 상태 그대로 두고 귀천 같은 것은 구별도 하지 않는다.”(「제물론」편) 한 인간이 우주를 겨드랑이에 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였다. 그래도 이 정도는 좀 친절하게 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장자』를 펼치자말자 읽히는 내용은 더욱 광활하다. “우주의 북쪽 바다에 몇 천리나 되는 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큰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살았는데, 변해서 붕(鵬)이라는 새가 되었다. 붕의 등 넓이도 몇 천리나 되는지 모른다. 힘차게 날아올라 날개를 펼치면 마치 하늘 가득 드리운 구름 같다. 이 새는 바다가 크게 출렁거려 대풍(大風)을 일으킬 때, 그 기운을 타고 천지(天池)라고 불리는 남쪽 바다로 날아간다.”(「소요유」편) 곤은 그냥 붕이 되는 것이 아니다. 우선 긴 시간의 축적을 통해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크기를 키워야 한다. 크기가 충분히 커진 어느 날 우주의 바다(그냥 바다가 아니다)가 출렁대며 일으키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거대한 날갯짓을 해 구름을 뚫고 9만리를 솟구쳐 오른다. 상승하는 동력이 극점에 이르러 멈추는 순간 존재 차원에 극변이 일어나 새가 되는 것이다. 적후지공(積厚之功), 즉 두텁게 쌓은 공력이 실현되는 순간이다. 이 장엄한 전 과정을 장자는 높은 창공에서 남쪽으로 날아가는 긴 여정으로 묘사했다. 이것은 위대한 승리의 여정이다. 그 안에는 삶에 대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헌신이 깃들어 있다. 성실한지도 모를 정도로 펼치는 무극의 성실이다. 어떻게 이 정도의 삶이 가능할까? 이 정도의 삶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는 근저의 힘은 무엇일까? 한참 그것을 찾던 어느 날 내 눈에 한 구절이 들어왔다. 곤이 붕이 되어 남쪽으로 날아가는 이 장엄한 성실성의 기초는 모두 이 한 구절에 담긴 체득에서 나온다. 내가 별똥별의 궤적을 내 안의 어딘가에 감추곤 하던 시절, 지붕은 초가에서 슬레이트로 바뀌었지만 벽은 여전히 흙벽이었다. 나뭇단이 쌓인 부엌은 특히 석양볕이 길고 낮게 들어왔다. 부엌에 찾아드는 석양볕은 흙벽의 갈라진 틈새를 거침없이 밀고 들어왔는데, 겨우 책받침 두께 정도에 불과했다. 당연히 흙벽의 갈라진 틈은 책받침보다도 얇다. 그 틈의 간격을 천리마가 달리며 지나치는 시간은 얼마나 짧을까? 아마 순간보다도 더 순간적이고, 찰나보다도 더 찰나적일 것이다. 이 얇은 두께의 틈새를 보통은 극(隙)이라고 한다. 장자에 의하면, 우리의 일생은 고작 이 찰나적인 간격을 천리마가 지나치는 그 시간 정도밖에 안 된다고 갈파한다. 이것이 바로 근본적인 체득으로 이끈다고 앞에서 말한 바로 그 한 구절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사람이 사는 시간이라는 것은 마치 천리마가 벽의 갈라진 틈새를 내달리며 지나치는 순간 정도이다. 홀연할 따름이다!”(「지북유」편) 장자가 말하는 무한 확장, 덕후지공, 절대 자유, 위대한 성취들은 모두 금방 죽는다는 이 처절하고도 두려운 체득에 푹 빠졌다가 건진 결과들이다. 순간에 대한 체득만이 영원으로 확장하려는 강한 욕망을 갖게 한다. 장자 철학의 핵심은 절대적으로 이 한 구절의 인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장자가 살았던 자유롭고 투철한 삶은 모두 죽음에 대한 진실한 인식을 기초로 한다.죽음은 경험되지 못한다. 경험하는 순간 경험하는 주체의 의식이 원래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이탈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은 누구에게나 제3자의 일로 다가올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타자의 죽음을 통해서 죽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전부다. 내 죽음을 경험할 수는 없다. ‘금방 죽는다’는 말을 듣거나 의식하는 당시에는 평정이 허물어지고 내면이 동요하기 때문에 체득이 일어나는 것 같지만, 잠깐 지나면 ‘금방 죽는다’는 문장이 나의 일로 남지 않는다. 나에게 경험되지 않기 때문에 항상 ‘죽음’으로만 존재하지 죽어가는 일로서의 ‘사건’으로 의식되지 못하는 것이다. 보자. ‘죽음’은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죽어가는 일’이 있을 뿐이다. 체득은 ‘죽음’에 대하여 내용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사건’으로 직접 경험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죽어가는 사건’을 내가 경험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다만, 죽음의 구체적 상황 비슷한 경우 속으로 나를 밀어 넣을 수는 있다. 나에게 직접 닥치는 ‘사건’으로 체득하려면 ‘죽음’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평정’이 무너지며 내면이 동요하는 그 경험의 시간을 계속 늘려나가는 수밖에 없다. 기억하고 의식하는 수밖에 없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운명처럼 우연히 다가와서 집요하게 머물러 죽음을 ‘사건’으로 대면할 수 있기도 하지만, 보통 그런 경우는 매우 희박하므로 우리는 튼실한 삶을 위해 죽음을 의식적으로 자주 불러들이는 수밖에 없다. 인생이 짧디 짧다는 것을 항상 의식적으로 기억해야 한다. 나는 ‘금방 죽는다’는 사실과 ‘죽어가는 사건’의 실재성을 연속적으로 붙들어 놓고 싶다. 그것이 삶을 튼실하게 하는 비결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조용히 앉아 “나는 금방 죽는다”고 서 너 번 중얼거린다. 그러면 적어도 그 날 하루는 덜 째째해질 수 있다. 최소한 그날 오전까지 만이라도 덜 째째해질 수 있다. 나 자신을 번잡하고 부산스러운 곳에 두는 일을 그나마 조금 줄일 수 있게 된다.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소중하게 쓸 수 있게 된다. 급한 일보다는 중요한 일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된다. 그래도 사는 것이 이 모양 이 꼴인 것을 보면 나는 아직 덜 죽은 것이 분명하다. 더 철저하게 죽어버려야겠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건명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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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3.28 23:02

3년간 전주세계소리축제 이끌 박재천 집행위원장 "멀리 봐야 소리에 근거한 전통의 가치 볼 수 있어"

전주세계소리축제가 지난 2015년 문화체육관광부의 대표적 공연예술제 평가에서 처음으로 A등급을 획득하면서 대한민국 음악예술제 중에 최고 등급으로 격상되는 경사를 맞을 수 있도록 지난 3년간 축제를 이끌어온 박재천 집행위원장. 그는 현재 소리축제 집행위원장을 3년 더 맡도록 내정된 상태다. 오는 4월 6일에 열리는 (사)전주세계소리축제조직위원회 조직총회에서 재선임 여부를 확정 짓게 된다.연임을 앞둔 박재천 위원장에게 앞으로 3년간 소리축제를 어떻게 이끌 것인지 향후 계획을 물었다. 그는 소리축제가 왜, 무엇 때문에 전주와 전북에 소중한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 더 소리축제를 사랑하고 아끼고 있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소리축제를 향한 올곧은 마음은 어느 전북인보다 더 강하게 다가왔다.전통은 절대 망할 수 없어요. 국악이 천편일률적이다, 존재감이 없다, 관객들이 적다고 다들 말하지만, 전통음악축제에서 흥행이란 있을 수 없어요. 전통은 그냥 있는 것입니다. 전통축제가 망했다고 없앨 수는 더군다나 있을 수 없죠. 지금도 쌓여가고 있는 것이 전통입니다. 전통은 진실합니다. 진실한 전통에 기반을 둔 축제를 만들어야 합니다. 멀리 보아야 소리에 근거한 전통의 가치를 볼 수 있습니다. 전북은 연주, 관객, 프로그램 등 축제의 기반을 모두 골고루 갖추고 있어 어느 지역보다 경쟁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전북에서 성숙한 소리축제가 나올 수 있는 배경인 거죠.- 전통과 소리의 중요성부터 강조하는데, 예향 전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요?전북에는 수백 년을 내려온 예향의 분위기가 살아 넘치고 있습니다. 전북과 소리를 전체로 보아야 합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다들 전북을 부러워하는데, 왜 전북 사람들은 이를 모르는지요. 소리의 고장에서 열리는 소리축제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이제 정말 진지하게 검토해야 합니다. 전통에 바탕을 둔 전북의 예술정신부터 되살려내야 합니다. 진정한 예향 전북의 의미에 대해 고민해야 할 시점입니다.- 아주 단호하게 전북의 전통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전통에 기반을 둔 소리축제는 어떤 형태이어야 하는지?소리축제를 개최해온 지난 15년 중에서 앞선 10년은 혼란기였고, 그 후 4~5년 정도는 성숙하고 안정된 축제였습니다. 이제 도민들이 원하는 축제의 여건은 만들어졌습니다. 전북에 풍성하게 자리하고 있는 전통으로 소리축제의 맛을 내고 싶습니다. 예향 전북 고유의 특성을 살리는 한편, 여러 가지 산재된 많은 행사를 축소시키고, 전북문화의 디테일 확보에 중점을 두어야 합니다. 축제의 확장이나 새로운 해외시장 등의 영역 개척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순도가 높은 하이엔드급으로 가야 합니다. 내실을 기해야 할 때입니다. 충분히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소리축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어떠해야 한다고 보는지요?그동안 소리축제의 틀과 시스템을 갖췄습니다. 소리축제에 대한 인식도 크게 바뀌었습니다. 외국에서의 반응도 많이 달라졌고요. 이제는 멋진 관객이 나와야 할 차례입니다. 그동안 잃어버린 전통음악을 소리축제가 끌어안고 새롭게 나아가야 관객들도 돌아옵니다. 지난 축제를 돌이켜 보면, 중장년층은 소리축제의 정서적 이탈자였습니다. 지난 1회 축제 때 가졌던 감동에 비해 그 이후의 축제들이 이에 부응하지 못하자 40~50대들이 실망했습니다. 축제에 대한 기대감이 상실된 거죠. 전통과 현대 양식을 다 아는 관객이 40~50대입니다. 15년 전 제1회 소리축제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중장년층을 되찾아와야 합니다. 문화 수도 전주문화 지성체 은퇴세대인 노인층과 중장년층들을 문화를 향유하고 축제를 지지해주는 세력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문화적 소양을 갖춘 지성체들을 소리축제로 끌어들여, 천 년 전라도 이후의 새로운 천 년을 맞는 소리축제로 만들도록 과감히 승부수를 던지겠습니다.- 올해 소리축제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시죠.올해는 컬러 오브 소리(Color of Sori)를 주제로 다양한 소리의 스펙트럼을 펼쳐낼 계획입니다. 우리가 알고 느끼고 인식해 온 소리의 영역은 다채로운 실험과 시도로 확장됩니다. 귀로 듣는 소리에서 보고 만지고 체험하는 소리로 확장하고, 익숙한 소리에서 낯설고 생소하고 호기심 어린 소리로, 장르와 세대를 아우르며 소리의 스펙트럼은 무한히 확장되는거죠. 특히 전통음악과 월드뮤직이라는 두 동력이 갖는 고유의 색채를 보다 선명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개막공연을 통해서는 과감히 융합되고 수용되는 모습을 그려내 그 주제성을 뚜렷이 할 계획입니다.- 지난 소리축제에서 가장 의미가 있었던 행사는?소리축제의 메인 프로그램은 당연히 판소리 다섯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2000석 좌석과 무대 연출의 자유로운 활용을 할 수 있는 소리문화전당 모악당 주인이 판소리어야 한다는 거죠. 저는 모악당에서 모던한 공연예술로서 판소리의 가능성을 실험했습니다. 모악당 위에 무대와 객석을 동시에 올려, 판소리 공연의 무대장치와 미디어 등 현대적 장치를 충분히 발휘했습니다. 관객들에게 21세기형 판소리 무대의 신선함을 안겨준 거죠. 모악당에 관객 1000석이 채워지는 그 날까지 소리축제 판소리 메인공연을 모악당에서 개최할 계획입니다. 전북에서 이런 공연을 하지 않으면 누가, 어디에서 이런 공연을 하겠습니까? 안된다고 해서 줄이고 줄이는 것으로는 전통문화를 지킬 수 없습니다.- 도민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은?전북의 잃어버린 소리를 되찾아올 때입니다. 이제 그 몫은 도민들의 참여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전북인 모두가 먼저 관심을 두고 최대한 응원해야 합니다. 전주와 전북의 내부에서 잃어버린 우리 정서를 되찾을 수 있도록 우리 모두의 응원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입니다.● [박재천 집행위원장은] 클래식재즈 연주자, 전통음악까지 섭렵지난 1961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초등학교 고적대에서 작은북을 연주한 것이 계기가 돼 밴드부, 음악대학(클래식 작곡), 군악대, 오케스트라, 그룹사운드, 월드뮤직, 판소리, 사물장단과 굿장단, 프리뮤직. 현대음악, 전위재즈의 역사 등 다양한 음악의 경험과 교육을 토대로 즉흥음악 타악 연주자가 되었다.클래식 음악과 재즈 연주자로 활동하면서도 한국 전통음악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져 판소리 심청가를 완창으로 배우고, 진도씻김굿의 전통 굿 장단과 사물놀이 장단을 섭렵했다. 직접 작곡한 KBS 드라마 태양인 이제마의 메인 주제곡 여인은 소리꾼 오정해가 불러 많은 호응을 받은 곡이다. 2012년 국립극장 여우락 페스티벌에서 안숙선 명창(판소리)과 이광수 명인(사물놀이), 김청만 명인(고수), 미연(피아노)과 함께 공연한 조상이 남긴 꿈은 한국음악의 즉흥성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프로젝트로 국악계에 큰 호응을 받았다.박재천 위원장은 한국의 음악가들은 클래식이나 재즈, 대중음악을 막론하고 반드시 판소리와 전통음악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연주활동을 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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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3.27 23:02

[전북일보 카드뉴스] 문화예술의 거리, 너와 나의 거리

문화예술의 거리, 너와 나의 거리#표지.문화예술의 거리, 너와 나의 거리#1.(한산한 거리, 앉아 있는 사람)#2.(생각하는 사람)원도심이 계속 침체되는데. 여길 살릴 방법이 없을까?#3.(붓을 든 미술가, 조각칼 든 공예가, 기타 든 음악가 등)걱정 마세요! 문화와 예술이 있으니까요!#4.(북적북적해진 거리)역시! 문화예술의 거리가 최고야!#5.(스크린을 놓고 프리젠테이션 중인 사람)라는 것이 이 사업의 핵심 내용입니다.(오-오- 하는 반응)#6.5년 뒤.#7.(남원 예가람길 사진 배경)(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는 사람 그림)#8.(전주 동문예술거리 사진 배경)(짐 싸서 나가는 예술가)에휴, 월세 싼 웨딩거리로 가야지#9.거의 100억 원 가까이 들였다면서 이게 어떻게 된 거죠?!#10.(공무원)그놈의 실적 때문에 빨리빨리 해치우려 하다 보니 그만#11.(예술가)사실 예견된 결과였죠. 차별화된 기획도 없었고요.#12.김동영 전북발전연구원 연구위원문화예술의 거리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예술인들이 모이고 그들의 생활 형식에 맞춰 자연스럽게 공간이 변하는 거죠.#13.(알겠다는 듯한 표정의 사람)예술인들이 공간의 주인공이 될 수 있게 하고, 관은 이를 돕는 구조가 돼야 한다는 거네요.#14.연구원이나 실무자들은 이런 사업의 성과가 드러나려면 10년 정도는 지나야 한다고 하네요.#15.(짐 싸서 나가는 남원시)(말리는 사람)성과가 없다고 해서 사업을 중단할 게 아니라, 보완해서 더 아름다운 거리를 만들어야죠!#16.문화와 예술은 도시의 품격. 더 멀리 내다보며 함께 만들어 가야 하지 않을까요?/기획 신재용, 취재 김보현, 구성 권혁일, 그림 이권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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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3.24 23:02

[⑤ 일본 보물창고 쇼소인(正倉院)과 백제] 日 왕가 '1급 보물' 곳곳에…'백제의 혼' 살아 숨 쉬다

일본 나라(奈良)현 도다이지(東大寺) 경내에 있는 쇼소인(正倉院)은 고대 일본 왕실의 보물창고다. 이곳에는 일본뿐만 아니라 한반도와 중국, 인도, 서역 등지에서 수입한 각종 미술품, 공예품, 문서가 보관돼 있다. 특히 백제에서 유입된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이 바로 이곳에 있다. 일본 국보급 문화재의 일대 보고인 쇼소인에 있는 백제 보물은 어떤 것이 있고, 어떻게 이곳에 왔을까?△사슴 천국 나라현의 실크로드 보물들과거 일본의 수도였던 나라현은 불교문화가 꽃피운 곳으로 도시 어디에서나 사슴을 볼 수 있는 매우 특이한 도시다. 우리 나라에 백제의 도읍지인 부여와 공주가 있고 신라에 경주가 있었다면, 일본에는 바로 나라현이 있다.나라현을 대표하는 사찰 도다이지(東大寺) 후원에는 일본 왕실 보물창고인 쇼소인이 자리잡고 있다. 여기에는 일본 유물 외에 중국 당나라나 서역, 페르시아 등에서 유입된 희귀한 보물 약 9000여점이 소장되어 있다. 쇼소인 보물은 매년 10월 수십 점만 공개하고 공개 후 십년 동안은 전시를 제한할 만큼 소중히 여기는 국보급 유물들이다.△백제에서 제작한 서역풍 유리잔쇼소인에는 코발트빛을 내뿜는 높이 12cm의 특이한 유리잔이 있다. 한눈에도 서역 페르시아 계통임이 느껴지는 유물이다. 그동안 일본 학계에서는 이 유리잔이 도대체 어디에서 왔는지를 놓고 설왕설래했었다. 그런데 최근 이 의문이 풀렸다. 이 유리잔이 백제에서 가공된 것임이 밝혀진 것이다. 증거는 유리잔 받침에 새겨진 무늬에 있다. 유리잔 받침에는 역동적 소용돌이 모양의 애초문(唐草文)과 작은 생선알 모양의 어자문(魚子紋)이 새겨져 있는데, 미륵사지 금동제 사리외함에 새겨진 것과 쌍둥이처럼 닮았다. 또 유리 표면에 동그란 무늬를 덧붙인 장식기법은 경북 칠곡 송림사 전탑 안에서 발견된 사리 그릇과 유사해 한반도와 깊은 관련이 있는 유물임이 확인되었다. 일본 나라국립박물관 학예부장인 나이토 사카에는 백제와 일본 왕실의 밀접한 친분 관계로 장인들이 세공한 다수의 공예품을 일본에 선물로 보냈었고, 백제 멸망 뒤 다수 장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점 등으로 미뤄 이 유리잔은 백제에서 가공돼 들어왔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백제인 미마지(味摩之), 일본에 기악을 전하다.미마지는 백제인으로 AD 612년 기악을 일본에 전수한 인물이다. 기악은 한국의 산대가면극, 일본 고대 가면극 노(能)의 원류로 여겨지는 탈춤 형식의 음악 공연이다. <일본서기>에는 백제인 미마지가 오에서 기악무를 배우고 일본에 와 사쿠라이(나라현 북부의 도시)에서 소년을 모아 기악을 가르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백제인 미마지가 기악을 배운 중국 오나라는 어디이며, 기악은 구체적으로 어떤 공연이었을까? 오늘날 위치로 추적하면, 미마지가 기악을 배웠던 오나라는 백제와 교류가 빈번했던 양자강 연안 중국 남부 지역을, 기악 공연은 가면극 형식의 공연이었다. 쇼소인에는 당시에 사용되었던 기악탈이 남아 있어 기악 공연이 어떠했는지 유추할 수 있다. 당시 기악 공연은 높은 괴물같은 탈을 쓴 배우가 선두에 서고, 피리와 북 등 악기 연주단이 뒤따르며 승려 일행이 같이 행진하였다. 또 사자춤이 연행되었고 중국 강남의 미녀 오녀(吳女, 용을 잡아 먹고 산다는 인도 신화 속의 큰 새 가루다, 술취한 주정뱅이 서역왕 취호왕 등으로 분장한 가면 배우들이 무언극 형식으로 연기하였다. 쇼소인 기악 가면들은 페르시아, 인도, 중국 그리고 백제에서 공연되던 가면 악무가 백제인 미마지에 의해 일본에 전수되었음을 보여준다.△의자왕이 보낸 천하 명품 바둑알과 바둑판쇼소인에는 오늘날 기술로도 세계 최고 수준임을 보여주는 바둑 용품이 보관되어 있다. 쇼소인 헌납목록인 국가진보장에 따르면, 백제 의자왕이 당시 일본의 최고 실력자였던 내대신(內大臣) 후지와라 가마타리(藤原鎌足)에게 적색옻칠장을 선물했다. 그리고 그 안에 코끼리 상아를 염색한 후 표면을 아름답게 조각해 만든 홍아발루기자(紅牙撥鏤碁子)와 감아발루기자(紺牙撥鏤碁子)라고 불리는 바둑돌 두 벌, 상아로 은빛 코끼리 문양을 정교하게 새긴 바둑돌통인 은평탈합자(銀平脫合子)와 금은귀갑감(金銀龜甲龕)을 넣었다. 옻칠장 속 바둑 용품은 백제 장인의 화려하고 정밀했던 세공 기술을 보여주는 1급 보물이다. 한편 일본 왕실에 보낸 바둑 용품 선물 목록에 빠진 바둑판이 쇼소인에 소장되어 있는데, 목화자단기국(木畵紫檀碁局)이 그것이다. 스리랑카산 자단에 상아로 줄을 긋고 낙타, 공작 등을 새긴 이 바둑판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바둑판이다. 그동안 이 바둑판이 도대체 어디에서 만들어졌는지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으나 백제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것임을 다음 몇 가지 점이 증명하고 있다. 첫째, 바둑판의 화점이 우리 나라 순장 바둑에서만 볼 수 있는 17개이다. 바둑판의 화점 수는 중국은 5개, 일본은 9개, 티베트 바둑은 12개인데, 우리 나라는 일제 때까지 17개였다. 둘째, 바둑판에 쓰인 목재가 한국산 소나무인 육송이다. 이는 목화자단기국이 백제 유물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다. 셋째, 적색옻칠장 안에 들어 있던 바둑알에 새겨진 새 무늬가 안압지에서 출토된 상아 유물에서도 발견된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목화자단기국 바둑판은 백제가 일본 왕실에 보낸 것임이 분명하다.△해양강국 백제, 바다 실크로드를 개척하다백제 보물은 일본이 세계 제일의 보물 창고라고 자랑하는 쇼소인 외에도 나라현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호류지(法隆寺)에도 있다. 동양의 비너스상으로 불려지는 세계적인 문화재 백제관음과 구세관음상이 바로 그것이다. 이처럼 나라현 곳곳에 남아 있는 백제 보물들은 백제가 일본과 긴밀히 교류했을 뿐 아니라 서역 국가들과도 활발히 교섭했었음을 말해준다. 백제는 바다 실크로드를 개척한 해양강국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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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3.24 23:02

[전북 미래를 이끈다] ⑦ 방사선 융복합산업-첨단방사선연구소 공업환경연구부, 방사선 기술 이용한 의료용 소재 개발 두각

한국원자력연구원(원장 하재주) 첨단방사선연구소(소장 윤지섭)는 방사선 응용분양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를 수행하며 미래 국가 신성장동력을 창출하고 있다.방사선 관련 산업의 중요성이 부각됨에 따라 이를 육성하기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및 지자체의 협력속에 정읍시 신정동 소재 첨단방사선연구소가 주목받고 있다.방사선이용 기술은 타 분야의 첨단 기술을 접목한 방사선 융합기술로 발전되며 농업을 비롯해 환경, 공업, 생물자원등 다양한 산업 분야에 접목되고 있다.△해파리콜라겐 추출기술 성과방사선 기술을 이용한 신소재 제조는 향후 미래 국가 성장 동력으로 연구 성과의 산업화를 통한 고부가가치 상품을 생산하고 삶의 질 향상과 지역 경제발전에 기여할 전망이다.첨단방사선연구소 공업환경연구부(부장 유승호)의 ICT 융합 생체소재 개발연구원들은 방사선 기술이용 의료용 소재 개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임윤묵 선임연구원을 비롯해 노영창, 권희정, 박종석, 정성린, 오승환, 김현빈, 윤진문, 안성준, 강리라 연구원 등이 주인공이다.이들 연구팀에서 2013년 개발한 해파리 콜라겐 대량 추출 기술은 대표적인 기술사업화 성과로 평가받는다.해양 유해생물인 해파리를 의약품과 화장품 소재 등의 유용한 자원으로 활용함으로써 연간 수백억원씩 수입되는 육지동물 유래 콜라겐을 대체하고 연간 40억 달러에 달하는 세계 해양 바이오 물질 시장 진출을 확대할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연구소에 따르면 방사선 이용 해파리 콜라겐 대량 추출 기술은 화학물질을 이용해서 해파리에서 콜라겐을 추출하는 기존 공정에 감마선이나 전자선등 방사선을 쪼이는 공정을 추가함으로써 콜라겐 등 유용단백질 추출 효율을 4배 이상 크게 높이는 기술이다.특히 현재 많이 사용되고 있는 돈피, 닭, 쥐 등 육지동물에서 추출한 콜라겐과 달리 세포 독성 및 면역 반응의 위험이 없다는 것도 장점이다.임윤묵 박사는바다의 골칫거리인 해파리에서 방사선기술을 활용해 추출할수 있는 콜라겐의 수득률을 획기적으로 높인 기술을 개발함으로써 연구팀이 보유한 하이드로겔 제조 기술 노하우를 바탕으로 고부가가치 바이오 소재및 의료용 소재 개발의 기초 원천기술을 확보했다고 밝혔다.△개발 기술 기업이전 상용화이 기술은 신규 벤처 기업인 이젠바이오(주)(대표 윤병남)에 기술 이전되어 정읍 첨단과학산업단지내 9929㎡(3003평)의 부지에 160억원 규모의 유럽 GMP(Good Manufacturing Practice) 생산설비를 갖춘 공장이 신축되면 상용화될 예정이다.또 고령화사회에 접어들면서 인공장기에 대한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방사선을 이용해 인공혈관용 고분자 소재(3종) 개발에 나서 지난 5년여간의 연구 끝에 생체내에서 세포활성도(140%), 혈액응고율(32% 이하), 기계적강도(3800mmHg)가 우수한 인공혈관용 고분자 소재 제조기술을 개발했다.특히 체내 삽입 동물 실험결과 이식된 소재가 새로운 혈관으로의 재생이 빠르게 진행되는 것이 확인됐다.앞서 2008년에는 노영창 박사팀에 의해 방사선기술을 이용해 아토피 치료용 패치도 개발돼 아가방에 기술이전됐다.느릅나무, 어성초 등 아토피 피부염에 효과가 있는 토종 약용식물 추출물을 수용성 고분자와 혼합한뒤 방사선처리를 통해 겔(gel)타입으로 만들었다.그외에도 인공 골 대체재, 국소마취, 상처, 화상치료용 하이드로겔(6종), 수면마취용 구강점막 약물전달체 개발등 방사선을 이용한 생체재료 연구개발 성과를 거두고 있다.임윤묵 선임연구원은 각종 연구개발 성과가 최종적으로 기업 이전 제품화가 되기 위해서는 실증화를 거쳐야 한다며 현재 건립 중인 대단위 다목적 전자선 실증센터가 내년에 개관하면 기술 실용화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고 덧붙였다.■ '대단위다목적 전자선 실증센터' 내년 5월 개관제작 시간 단축, 생산비 절감 효과 커전북도와 정읍시, 첨단방사선연구소가 공동으로 2014년 5월 미래부에 공모과제로 신청해 선정되어 대단위다목적 전자선 실증센터가 2018년 5월 개관 예정이다.대단위다목적 전자선 실증센터는 국가 방사선융합 원천기술의 개발성과를 바탕으로 시제품제작가공조립성능시험 등을 통합적으로 수행해 제품의 신뢰성 및 질적 성능을 검증하는 실증연구센터다.총 190억원(국비 130억원, 지방비 60억원)이 투입돼 실증센터가 구축되면 다양하고 파급효과가 큰 방사선 핵심기술의 조기 산업화가 가능하며 관련 산업체의 제품가격 경쟁력의 획기적 혁신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된다.방사선연구소에 따르면 그동안 국내 전자선 가속기는 규모상(최대길이 3.5m, 폭 1.6m)한계와 대량 생산 설비가 구축돼 있지 않아 산업화를 위해서는 대형대면적 제품의 자동공정 대량 생산 실증시설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다.전자선 조사시설 및 자동화 설비가 구축돼 방사선융합 기술을 이용하면 제작 시간이 1/50로 단축됨으로써 생산비의 40% 절감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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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장훈
  • 2017.03.23 23:02

[전북일보 카드뉴스] 미세먼지, 원인이 뭔지?

미세먼지, 원인이 뭔지?#표지.미세먼지, 원인이 뭔지?#1.2013년 12월 4일.콜록콜록쿨럭쿨럭(2013년: PM10 나쁨매우나쁨 122일)#2.2014년 2월 24일.쿨럭쿨럭콜록콜록(2014년: PM10 나쁨매우나쁨 121일)#3.2015년 3월 23일.에읏 퉷퉷퉤에브르릅릅르(2015년: PM10 나쁨매우나쁨 114일, PM2.5 나쁨매우나쁨 157일)#4.2016년 5월 26일..(2016년: PM10 나쁨매우나쁨 104일, PM2.5 나쁨매우나쁨 122일)#5.2017년 3월.또야?!(2013~2015 3년간 평균 PM10 농도 51㎍/㎥, 전국 3위)#6.미세먼지, 원인이 뭔지?어#7.원인을 알아야 대책을 세우죠!저, 그게#8.성분을 측정하는 대기오염 집중측정소가 전북엔 한 곳도 없어서요.#9.그렇지만 전북 잘못은 아니거든요?!#10.2011~2013년 기준 연평균 미세먼지(PM10) 배출량은 2285톤뿐. 이건 전국에서 두 번째로 적은 양이라고요.(경북 2만8086톤, 전남 2만2483톤, 충남 2만2369톤전북 2285톤, 제주 527톤)#11.음 안에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면 밖에서 온 게 아닐까요?(중국: 미세~!!)#12.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13.전국적인 미세먼지 배출량 감소 정책도 필요하지만, 이와 더불어 자치단체 차원의 지역별 대책도 세워야 합니다.(이정현 전북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14.모처럼 봄이 왔는데 창문은 열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기획 신재용, 구성 권혁일, 제작 이권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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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3.22 23:02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준비에 만전 황정수 무주군수 "방문객들 무주의 품격 담아갈 수 있도록 최선"

MUJU KOREA . 2015년 5월 2017 무주 WTF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개최지가 결정되던 순간의 감동이 아직도 생생하다. 러시아 첼라빈스크에서 날아든 낭보는 태권도의 나라 대한민국의 국민임을 자랑스럽게 만들었고, 태권도성지 무주를 품은 전북을 더욱 당당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대회조직위와 전라북도, 무주군을 중심으로 시작된 대회 준비는 어느새 막바지에 다다르며 차근히 대회 여건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손님맞이에 정성을 쏟고 있는 무주군민들의 맨 앞에서 전 세계 8000만 태권도인들의 함성을 태권도원으로, 73억 세계인들의 열기와 관심을 무주로 모으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황정수 군수를 만나봤다.-2017 무주 WTF 세계태권도대회가 90여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2011년 경주대회 이후 6년 만에 국내에서 열리는 세계대회이니만큼 성공개최가 이뤄져야 할 텐데요.예감이 좋습니다. 동계유니버시아드 대회를 비롯해서 세계 태권도한마당대회와 세계 태권도문화엑스포 등 다양한 국제대회 개최 경험이 우선 있고요. 무엇보다도 군민들의 관심과 동참 열의가 대단해서 무주군 자체적으로 하는 준비는 무리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태권도원 진입도로 인도 설치 공사도 완료됐고요, 선형이 불량하고 경사가 심해 위험하다는 지적이 있었던 국도 30호 선에 대한 개선공사도 현재 진행 중입니다. 또 마침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관계자들의 숙박과 WTF 총회가 열리게 되는 기반시설 정비를 위해 행자부에 요청했던 특별교부세 15억 원도 지원 확정이 됐기 때문에 대회 참가 선수와 관계자들이 무주에 머무르며 제대로 된 품격을 담아가실 수 있을 겁니다.-주민들의 협조도 대단하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참여를 하는지 궁금합니다.대회에 대한 입소문을 내고 내 집 앞을 깨끗이 하며 내 마을을 가꾸고 무주를 대표할만한, 그리고 세계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을 만한 먹을거리를 개발하고 친절을 실천하는 것, 청결을 생활화하는 것 모두를 주민들께서 솔선해주고 계십니다. 2017 무주 WTF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는 우리나라 국기 태권도를 알리고, 207개국 8000만 태권도인들의 성지 태권도원을 알리는 목적도 있지만 지역주민이 참여하는 축제로 승화시키고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목적도 있거든요. 그래서 대회기간에는 주민들이 직접 손님을 맞는 주인도 되고 대회에 참여하는 관람객도 되고, 지역과 대회 이미지를 높이는 자원봉사자도 돼서 움직이게 될 겁니다.-무주군 경제도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를 계기로 살아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클 것 같은데요.공식적으로는 170개국에서 2000여 명이 참가하는 것으로 돼 있습니다만 207개국에서 모두 참가할 수 있도록 하자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규모나 유무형의 효과 면에서의 기대가 사실 큽니다. 경희대 마이스 통계정보센터와 전북연구원은 이번 대회를 통해 총 211억 원의 경제적 파급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분석을 했는데요. 무주 입장에서 보면 전 세계에 무주를 각인시키는 기회인 동시에 사회간접 시설 확충과 삶의 질 향상, 관광객 증가의 계기도 되기 때문에 관광발전과 소득창출 등에 대한 기대를 함께 하고 있습니다.-2017 무주대회의 성공적 개최도 그렇고 태권도원 활성화를 위해서도 인프라 구축이 우선돼야 하지 않을까요.제대로 된 손님맞이를 하고 태권도 성지로서도 손색이 없으려면 인프라 구축이 사실 시급하지요. 그래서 예산확보도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춰 진행을 했습니다. 가장 큰 성과는 태권도원 상징지구 조성사업비 70억을 확보한 것이라고 봅니다. 전체 사업비(176억 원) 가 확보되면서 교류의 장인 태권전과 고단자들의 수련공간인 명인관을 모두 만나볼 수 있게 된 건데요. 2017 무주대회 때 보기는 어렵겠습니다만 태권도 성지화와 세계화의 기반이 될 뿐만 아니라 민자 유치에도 든든한 동력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태권도원진입도로(무주-설천 간 10.9km) 4차로 확장사업이 제4차 국도건설 5개년 계획에 포함됐고요. 태권도상징거리를 비롯해서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선수단과 관광객 편의시설 조성, 태권도원 주변 관광활성화사업비도 확보를 했습니다.-무주는 이제 누가 뭐래도 태권도의 고장인데요. 태권도 인재 육성은 어떻게 이뤄지고 있나요.태권도인재육성이 결국 무주를 태권도 성지로 세우는 원동력입니다. 그런 이유에서 2007년부터 태권도인재육성을 하고 있는데요. 해마다 6억여 원을 투입해 학생 태권도 시범단과 관내 초중고교의 태권도 선수부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31명으로 구성된 무주군 학생 태권도시범단은 국내외 시범 활동을 통한 태권도 활성화와 태권도원 홍보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데 실제로 미국, 중국, 프랑스, 스페인 등지에서 개최되는 대규모 태권도 행사에 초청돼서 시범공연을 하는 등의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올해는 학생 태권도 시범단원 중 6명 전원이 한국체대와 우석대, 용인대 등 태권도 명문 대학에 진학을 했고요. 시범단원 출신 선수들은 국기원과 대한태권도협회 시범단으로 발탁되는 결실도 맺었습니다. 학교 선수부 출신 학생들은 2014년도부터 현재까지 10여 명이 대학 태권도 관련 학과에 입학을 했고, 지난해에는 청소년 국가대표 상비군에 선발되는 쾌거도 이뤘습니다.-무주가 태권도원과 2017 무주WTF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태권도인재육성을 통해 어떻게 변화해 나갈지 기대가 큰데요. 독자여러분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태권도는 우리나라 국기이고 태권도원은 태권도의 얼을 담은 성지입니다. 태권도원이 전북만의 관심, 전북인들만의 공간, 전북에 위치한 관광지 중 하나로만 끝나지 않아야 한다는 절실함으로 함께 해주시길 바라며, 무주군은 6월 24일부터 개최되는 2017 무주 WTF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성공을 계기로, 또 태권도원 활성화를 통해 세계 태권도 성지가 되고 우리나라 대표 관광지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관심을 가지고 무주의 도약을 지켜봐주시고 아름답고 깨끗한 자연과 반딧불축제, 산골영화제와 마을로 가는 축제, 농특산물대축제로 1년 365일이 즐거운 무주를 함께 즐겨주시고 사랑해달라는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 기획
  • 김효종
  • 2017.03.20 23:02

[철의 궤도: 전라선 철길 답사기 ③ 삼례역] 호남 발길 모이던 관문, 이제는 문화 중심지로

지난 3일, 완주군 삼례읍.삼례 읍내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서 있는 옛 역사(驛舍)를 지나, 남쪽으로 200m쯤 움직였다.잘 숨어 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주위 모습과 잘 어울린다고 해야 할까. 건물 크기가 작지는 않은데도 어쩐지 위화감이 없었다.붉은 외장이 인상적인 새 역사가, 철길을 옆구리에 낀 채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전기기관차 한 대가 그 특유의 시-미-라-레- 하는 소리를 내며 무궁화호 열차를 이끌고 북쪽으로 출발했다.호남 교통의 중심지삼례"삼례에 역참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죠?여기 보시는 것처럼 과거엔 지금의 익산역 같은 역할을 했던 곳이 바로 삼롑니다."윤대열 삼례역장이 역사 로비 한쪽을 가리키며 설명했다.삼례역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옛 삼례역참에 관한 유물들이다.교통과 통신의 거점 역할을 하던 역참은 전국 주요 지점에 있었다. 삼례 역참은 그 가운데서도 특별한 위상을 갖고 있었는데, 바로 삼남대로와 통영대로가 만나는, 호남의 관문이었던 것이다.철도로 치자면 삼남대로는 호남선, 통영대로는 전라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지금의 익산역 역할을 과거 삼례역참이 했던 셈이다.이렇게 예로부터 교통의 중심지였으니 사람들이 모이기도 쉬웠을 것이다.1892년, 동학교도들이 삼례에 모여 삼례집회를 연다. 교조 신원과 포교의 자유를 외친 이 집회를 통해서 전봉준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떠올랐고, 또 여기서 동학농민혁명의 불씨가 지펴졌다고 평가된다.동학농민혁명의 역사에서 삼례가 다시 등장한 것은 1894년.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그해 9월, 전봉준 등은 삼례에 집결해 재기포를 준비한다. 이것이 2차 봉기다.김정호 완주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장은 삼례는 동학혁명 2차 봉기의 주 무대며, 이는 갑오개혁, 31운동 등 현대에 이르는 민족 운동의 정신적 모태가 됐다며 특히, 나뉘어 있던 남접과 북접이 삼례 2차 봉기를 계기로 화합하게 됐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삼례 곰멀마을에 있는 동부교회 부근이 삼례집회의 현장인 삼례역참터로 알려져 있다. 다만 지금은 이와 관련한 자료를 찾아보기는 어렵다.동부교회 관계자는 삼례역참터가 이곳이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이를 기념할 자료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면서 지역 역사를 조사하는 이들이 자주 찾아오곤 하지만 도와드릴 수 있는 게 없어 아쉽다고 말했다.한편 삼례 찰방다리 부근 도로변에는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세운 삼례봉기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완주군 보건소 인근에는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역사광장이 조성돼 있다.비껴가는철마그렇게 호남 교통의 중심지였던 삼례는 철도교통 시대로 접어들면서 호남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이리(익산)에 내주게 된다.1912년 3월 6일 호남선 강경~이리 구간이 개통되고 이리역(현 익산역)이 문을 열었다. 또 군산선 군산~이리 구간이 개통됐다. 호남선은 이리에서 곧장 남쪽으로 내달려 김제, 정읍을 거쳐 송정리, 나주를 지나 목포로 향했다.이것부터였을까? 21세기가 되어 익산역과 전주역에 고속열차가 정차할 때, 삼례역은 고속열차가 플랫폼을 지나 가버리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한때 호남고속선을 익산역이 아닌 삼례 인근을 지나도록 짓자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결과는 물론 익산역을 통과하는 것으로 확정됐다.2011년 전라선 복선전철 개통을 앞두고 삼례역에도 전라선 KTX를 정차시켜 달라는 목소리 또한 나왔지만 이 역시 무산됐다.지난 2015년 철도통계연보에 기록된 삼례역 승하차 인원은 모두 11만2963명.코레일 전북본부가 관할하는, 지금도 여객 취급이 이뤄지고 있는 12개 역 가운데서는 9번째다. 삼례역 뒤에 랭크된 세 역은 오수역과 임실역, 그리고 장항선 대야역이다.아홉 번째라. 도찰방이 있던, 삼남대로와 통영대로가 만나는 호남 교통의 중심지였던 삼례의 옛 위상과 비교하면 개운하지 않다.다만, 그렇다고 해서 삼례가 아예 교통이 불편한 곳으로 전락해버린 것은 아니다.삼례는 1번 국도가 지나는 곳이고, 호남고속도로와 익산포항고속도로가 이곳을 지난다. 자동차를 이용한 도로교통은 강세인 것이다.완주문화원 관계자는 아무래도 교통의 많은 부분이 익산에 편입된 것은 맞지만, 그래도 전반적인 교통 환경을 보면 삼례는 여전히 교통의 요충지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삼례역과양곡 창고삼례에 철도가 들어온 것은 1914년 11월 17일.전라선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이리-전주 간 경편철도가 들어설 때 삼례역 또한 보통역 등급으로 함께 문을 연다.춘포역과 임피역이 서로 닮았다고 하지만, 옛 삼례역사도 원래는 그들과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러다 1997년에 석재 외장을 가진 꽤 큰 역사가 지어졌다. 이 건물은 원래는 처마 끝 등의 형태만 살짝 한옥 지붕을 흉내 낸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지난 2013년 세계 막사발 미술관으로 재탄생하면서 지금과 같은 모양의 지붕이 새로 얹어졌다.새로 지어진 지 불과 14년 만인 지난 2011년, 전라선 복선전철화로 선로가 지나는 위치가 살짝 바뀌면서 삼례역도 남쪽으로 자리를 옮겨 다시 지어졌고, 남은 역사는 미술관이 됐다.지난 2013년 8월 15일 문을 연 이 미술관에는 가마와 공방은 물론 작가들이 묵을 수 있는 레지던시도 마련돼 있다. 이제는 철도 차량 대신 흙으로 빚은 미술품들이, 승객 대신 관람객이 이곳을 찾는다.이 자리에서 읍내 방향을 바라보면 좌우로 서 있던 것이 양곡 창고였다.1920년대부터 이곳에는 양곡 창고가 들어서기 시작했는데, 인근에서 생산된 곡식들이 이곳에 모여 삼례역을 거쳐 전라선과 군산선 철도를 통해 군산항으로 가곤 했다.물론 삼례가 단순히 물류 기지의 역할만 한 곳은 아니다.전북의 평야 지역 대부분이 그렇듯, 완주 지역에도 당시 지명으로 조촌면 반월리에 전북농장이, 삼례면 삼례리에 조선농장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특히 대지주 시라세이(白勢) 일가가 1926년에 세운 식민농업회사 이엽사는 삼례역 부근인 후정리 일대에서도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삼례역 인근의 이 창고들이 바로 그 이엽사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이엽사는 옥구군 서수농장 또한 경영하고 있었고, 소작료를 무려 75%나 내놓으라고 농민들에게 요구하기도 했다. 그 결과가 바로 옥구농민항일항쟁이다.삼례역 인근의 창고들은 광복 후에도 계속 사용돼 왔고, 나중에 한 동이 추가로 지어지기도 했다. 이들이 역할을 내려놓은 것은 2010년의 일이다.- 삼례 -이제 문화의 중심지로책의 중심지, 문화의 중심지.삼례가 그런 곳이 돼야 한다는 거예요.우습게 보지 말라는 거죠.벽에 녹색과 붉은색을 띤 판이 얼기설기 붙어 있는, 출입문 위에 어린 왕자가 앉아 있는 건물, 북 하우스. 옛 양곡 창고를 단장한 건물로, 10만여 권을 보유한 고서점 호산방이 여기 있다.삼례는 책이다는 표어를 달고 있는, 이 삼례 책마을의 중추를 이루는 곳에서 만난 박대헌 책 박물관 관장은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책, 그리고 그 책으로 만들어내는 문화만큼은 삼례가 중심지가 되어야 하지 않겠냐는 이야기다.서울에도 없고 대형 서점에도 없는 책들을 놓고 전문가가 봐도 감탄할 수 있을 만한 수준으로, 아주 제대로 된 서점을 만들자, 이런 겁니다. 우습게 보지 말라는 거죠.박 관장이 운영하는 책 박물관은 책마을에서 삼례역로를 건너가면 나오는 삼례문화예술촌에 있다.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양곡 창고가 하드웨어 역할을 맡고, 박 관장이 강원도 영월에서 운영했던 책 박물관이 그 하드웨어 안에 들어가 소프트웨어를 이뤘다.3일 취재팀이 이곳을 찾았을 때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 그림책 거장 랜돌프 칼데콧에 관한 전시가 진행 중이었다. 책마을 한국학 아카이브에서는 또 다른 빅토리아 시대 거장 케이트 그린어웨이에 관한 전시가 열리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그림책 축제라 할 만하다.책에서 잠시 눈을 뗀다. 몇 발짝 물러서자 다른 건물들도 눈에 들어온다. 비슷한, 그러나 각기 다른 특징을 가진 여섯 건물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 꼭 어떤 마을 같다.완주군이 원래의 기능을 잃어버린 옛 창고 건물들을 매입해 문화와 예술을 채워 넣었다. 이것이 지난 2013년 문을 연 삼례문화예술촌이다.VM아트미술관, 문화카페 오스, 디자인박물관, 김상림목공소, 책 박물관, 책공방 북 아트센터가 마을을 이루고 있는데, 삼례성당 등 주변의 풍경과도 꽤 어울려서 위화감이 들지 않는다.가족과 함께 온 엄지민(30) 씨는 인스타그램에서 사진을 보고 왔다고 말했다.아닌 게 아니라, 삼례문화예술촌의 풍경은 사진이 잘 나올 것 같은, 예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마침 3일도 날씨가 좋아 하늘이 파랗게 비치는 날이었다.삼례문화예술촌은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여행 명소다. 한국관광공사가 2017~2018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하기도 했으니, 이쯤이면 우습게 볼 수 없는 곳이 된 것은 분명하다.윤대열 삼례역장은 철도는 네트워크 산업이다고 거듭 강조했다. 과거 교통의 중심지였던 삼례가 이제는 철도의 유산을 바탕으로 문화의 중심지로 거듭나려 하고 있다.권혁일김태경 기자비비정에 앉아만경강 바라보기목에 방울을 달고 있는 삼색 고양이가 사람을 보자 발라당 드러눕는다. 다리가 짧은 흰 강아지는 길을 안내하겠다는 듯 사람 앞에 선다.어느 커플이 웨딩 사진을 찍고 있고, 그 뒤 언덕 아래로는 만경강이 흐르고, 그 너머로는 전주 북부의 스카이라인이 서 있다. 두어 달 뒤면 U-20 월드컵이 치러질 전주 월드컵경기장도 함께한다.1920년대에 지어진, 붉은 벽돌로 된 옛 삼례양수장 또한 이 풍경의 구성원이다.언덕 위 카페 비비낙안과 언덕 아래 비비정 농가 레스토랑은 완산 8경의 하나인 비비정을 중심으로 진행된 마을 문화공간 조성 사업의 결과물이다.만경강 북단 언덕 위에 있는 비비정은 조선 선조 때인 1573년 최영길이라는 이가 처음 지었고, 이어 영조 때인 1752년 전라관찰사 서명구가 중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의 정자는 지난 1998년에 복원된 것이다.과거엔 저 멀리 날아다니는 기러기 떼와 만경강에 떠 있는 배들을 이곳에 앉아 바라보는 풍경이 그렇게 좋았다고 한다. 비비낙안이라는 말도 여기서 나왔다.옛날엔 배와 기러기를 볼 수 있었다면, 지금은 철교와 열차를 볼 수 있다.지난 2013년 등록문화재 제579호로 지정된 옛 만경강 철교가 바로 옆에 있고, 전라선 복선전철화 이후 새로이 열차들이 밟고 지나는, 콘크리트로 된 구조가 인상적인 새 다리도 정자에서 멀지 않다.해는 뉘엿뉘엿 기울고, 저어기 열차 하나가 만경강을 건너간다.다리를 건너면 이제 전주다.권혁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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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3.17 23:0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⑥ 춘풍이 전해온 매창과 황진이 - 이별이 애끓게 한 사랑…오늘도 사무치게 그립구나

봄이다. 향긋한 봄바람이 콧끝에 감긴다. 춘풍에 실려 온 남쪽의 매화소식은 마음을 설레이게 한 여인들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 같다. 전주 한벽당 아래 바위에는 매화향기를 찾아가는 소로라는 뜻을 지닌 심매경(尋梅逕)이라 쓰인 암각서가 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기녀를 만나러 갈 때 매화 향기를 맡으러간다는 표현을 쓰기도 하였다는데 그 설렘을 표현한 길인 듯 싶다.시대를 막론하고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는 마치 따스한 봄날의 햇살처럼 그 사연만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녹여내며 설레이게 한다. 전라북도에는 남원 광한루를 거닐었던 춘향이와 이몽룡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예향의 낭만을 만끽할만한 이야기가 여럿 전해져오고 있다. 그 중에서도 부안의 매창 이야기와 익산의 소세양이 사랑했던 황진이의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매창과 황진이는 재능과 기예가 출중해 조선시대 기녀문화를 대표하는 시와 사연을 많이 남겨 역사를 넘어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들이다.瓊花梨花杜宇啼 (경화이화두우제) 배꽃 눈부시게 피고 두견새 우는 밤滿庭蟾影更悽悽 (만정섬영갱처처) 뜰 가득 달빛 어려 더욱 서러워라相思欲夢還無寐 (상사욕몽환무매) 꿈에나 만나려도 잠마져 오지 않고起倚梅窓聽五鷄 (기의매창청오계) 일어나 매화 핀 창가에 기대니 새벽닭이 울어라가슴 한구석 설레임과 아련함을 동시에 전해주는 이 시의 주인공은 조선시대 중기에 부안에서 태어난 기녀 매창(梅窓, 1573~1610)이다. 평생에 동쪽 집에서 밥 먹는 것을 배우지 않고, 매화 창문에 달그림자 비낀 것을 사랑하여 스스로 매창이라고 하였던 그녀는 그 이름만큼이나 봄날의 매화와 잘 어울리는 인물이다. 당대 유명한 기녀이자 뛰어난 시인이었지만 무엇보다 낭만적인 사랑을 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글을 배워 시조와 한시에 능했고, 노래와 춤은 물론 거문고 솜씨도 매우 뛰어났다 한다. 비록 기녀 신분임에도 몸가짐이 곧아서 손님들이 희롱하려 하면 곧잘 시를 지어 물리쳤다 전해진다. 실제로 그녀는 허난설헌, 황진이 등과 더불어 조선시대 손꼽는 여류시인으로서 주옥같은 시조와 한시를 남겼다. 현재 58수(매창의 시는 56수로 기록되어 있고 2수는 다른 이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의 싯구로 구성된 <매창집>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중 한권은 미국 하버드대학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런 매창을 두고 <홍길동전>을 지었던 허균은 성품이 고결해서 기생이지만 음란한 짓을 즐기지 않았다. 내가 그 재주를 사랑해 거리낌 없이 사귀었다.고 말했다.그런 그녀가 열렬히 사모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천인 출신으로 당상관 벼슬까지 오른 뛰어났던 시인 유희경이 그 사람이다. 시와 거문고 연주를 잘한다는 부안의 기녀 소문을 듣고 찾아온 유희경과 만난 매창은 아름다운 시절을 보낸다. 이후 오랜 이별 가운데 서로를 그리워하다가 전주에서 짧은 해후를 갖기도 하지만 다시 유희경이 서울로 올라갈 수밖에 없게 되면서 두 사람은 영영히 이별하게 된다. 매창은 거문고를 안고 38세 젊은 나이로 죽을 때까지 유희경을 결코 잊지 못했고 유희경 또한 그러한 매창을 사무치게 그리워했다고 한다.매 창東風一夜雨(동풍일야우) 하룻밤 봄바람에 비가 오더니柳與梅爭春(유여매쟁춘) 버들과 매화가 봄을 다투네對此最難堪(대차최난감) 이럴 때 가장 견디기 어려운 건樽前惜別人(준전석별인) 잔을 앞에 두고 님과 이별하는 일유희경娘家在浪州(낭가재낭주) 그대의 집은 낭주(부안)에 있고我家住京口(아가주경구)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相思不相見(상사불상견) 그리워 사무처도 서로 못보고腸斷梧桐雨(장단오동우) 오동나무 비 뿌릴 제 애가 끊겨라만남은 잠시이고 늘 헤어져있던 두 사람의 관계를 안타까워하고 그리워했던 유희경의 시 역시 이심전심 두 사람의 마음을 함께 전해주고 있다.또 다른 주인공인 소세양(蘇世讓 1486-1562)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이다. 그는 전라도관찰사와 형조판서우찬성좌찬성홍문관 대제학까지 두루 지낸 뒤 익산으로 은퇴한 명사였으며, 율시 등 각종 시문에 능한 문장가이자 송설체를 잘 쓰는 명필이기도 하였다. 한편으로 소세양에게는 강직하고 호기로운 면모도 있었다. 그가 젊었을 때 스스로 여색에 빠지는 것은 사내라고 할 수 없다고 자부하여, 당시 송도의 명월(明月)이라고 소문났던 기녀 황진이(黃眞伊)와 시한부 연정을 맺었던 일이 바로 그것이다. 소세양은 자신의 친구 앞에서 명월이 뜨는 날 명월 황진이를 만나 한 달 뒤 그 다음 명월이 뜨는 밤에 헤어지겠다는 약속을 한다. 당시 소세양과 황진이의 한 달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두 사람이 어떠한 생각으로 한 달을 함께 지냈는지 자세히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약속된 30일이 지나 소세양이 떠나려고 할 때의 시문이 전해져 와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던 일임을 증언해준다.月下梧桐盡(월하오동진) 달빛 아래 오동잎이 다 지고霜中野菊黃(상중야국황) 서리 맞은 들국화만 노랗게 피었구나樓高天一尺(루고천일척) 높은 누각 하늘과는 한 자 사이 맞닿았고人醉酒千觴(인취주천상) 사람들은 취하는데 술은 천 잔이로다流水和琴冷(류수화금냉) 흐르는 물은 거문고와 어우러져 서늘하고梅花入笛香(매화입적향) 매화는 피리소리에 향기를 풍겨오네明朝相別後(명조상별후) 내일 아침 서로 이별하고나면情與碧波長(정여벽파장) 그리운 정은 푸른 물결처럼 길게 이어지리황진이가 읊은 시를 듣고 소세양은 내 맹세한 대로, 사람이 아니어도 좋다고 하고는 며칠을 더 머물렀으며, 이후 익산에 내려와서도 황진이와의 짧은 만남을 그리워했다고 한다.매창과 황진이의 이야기는 단지 기녀라는 이유로 자칫 가치가 훼손될 수도 있다. 기녀는 우리나라 오랜 문화예술사에서 예악을 담당하고 당대 예술을 선도했던 중요한 축이었음에도 겉으로 드러난 신분 탓에 이중적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기녀라는 직업을 연회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는 가무기(歌舞妓)와 매음(賣淫)을 업으로 삼는 창기(娼妓)를 구분하지 않고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매창과 황진이와 같은 기녀는 시서가무를 전문으로 하는 예기(藝妓)로서 오늘날의 프로 예술인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사랑은 단순히 가십거리에서 벗어나 보편적이고 아름다운 사람의 이야기이며 그들이 남긴 자취와 글은 그 시대의 정서를 대변하는 예술적인 작품인 것이다.그가 세상을 뜨자 인조 임금이 3일을 애도했다는 조선시대의 문신 신흠(1566~1628)은 오동나무는 천년을 묵어도 늘 가락을 간직하고, 매화는 일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글을 남겼다. 그들에게서 풍겨났던 매화 향기는 그저 누군가를 이끄는 가벼운 유혹이 아니다. 추운 겨울을 이기고 봄이 찾아옴과 함께 풍겨내는 매화향의 고결한 자연섭리처럼, 그들만의 예술적 재능과 사랑을 그려내는 진심이 담긴 아름다움일 것이다. 전북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에는 매창이, 익산시 왕궁면 용화리에는 황진이가 사랑했던 소세양이 잠들어있다. 이제는 사랑을 이야기해도 좋을 새봄, 매화 향기에 이끌리듯 그들의 흔적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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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3.17 23:02

[전북일보 만화뉴스] 박, 당신의 이름은…….

박, 당신의 이름은.#표지.박, 당신의 이름은.#1.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2.와~!#3.박근혜 대통령, 아니 전 대통령이죠 이제!#4.전 대통령은 무슨? 파면됐는데 이제 박근혜 씨 아냐?#5.(옥신각신)#6.대통령으로서 재임했던 사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vs파면됐으니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를 해줄 수 없다#7.서경원 변호사안 그래도 변호사 단톡방에서 화제가 됐는데요.#8.직을 소급해서 상실한다는 규정이 없는 점, 파면이라는 게 장래에 향해 효력이 있는 점 등에 비추어 보면 법적으로는 전직 대통령이 맞다는 게 다수설이네요.#9.그렇다면 무조건 박근혜 전 대통령이라고만 불러야 하는 걸까요?#10.김승환 전북교육감(헌법학자)그건 아닙니다. 호칭으로는 박근혜 씨와 박근혜 전 대통령 둘 다 가능하고,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법으로 규정된 건 아닙니다.#11.송기춘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대통령직 자체가 무효였던 게 아니니 전 대통령이라고 부를 수도 있죠. 하지만 법적으로 정해진 건 없고, 정할 필요도 없어요. 평등한 시민인데, 그건 부르는 사람이 결정할 문제죠.#12.그러니까 법적 지위로는 전직 대통령이 맞고, 일상에서 부를 땐 전 대통령으로 부르든 씨로 부르든 상관은 없다는 거네요.대개 공식적으론 법적 지위를 존중해 전 대통령으로 씁니다.#13.여러분은 어떻게 부르고 싶으신가요?/기획 신재용, 구성 권혁일, 제작 이권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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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3.15 23:02

[전북 미래를 이끈다] ⑥ 문화콘텐츠산업, 업체·종사자 수 적어도 문화자원·기술력은 최고

전북지역 문화콘텐츠산업은 작지만 강하다. 문화콘텐츠산업 사업체 수와 종사자 수, 매출액은 전국 하위권이지만 대기업과 견줘도 손색없는 아이디어와 기술력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특히 전주한옥마을 등 특색 있는 관광지와 전국에서 가장 많은 무형문화유산 등은 콘텐츠 원천소재로 활용하는 데 손색이 없다는 평가다.문화콘텐츠산업은 고용유발계수가 높아 전통적 제조업의 고용 없는 성장을 해결할 신산업으로 주목받는다. 전북도 역시 게임음악출판만화 등 문화콘텐츠산업을 체계적으로 육성하기 위해 지난해 1월 전북문화콘텐츠산업진흥원을 출범시켰다. 전북문화콘텐츠산업진흥원은 융복합 콘텐츠 지원개발, 1인 창업기업 육성, 창조인력 양성 등을 통해 미래 먹거리를 만들어나가고 있다.이곳에서 이경범 모아지오 대표, 조용로 나인이즈 대표, 조동민 전북대 산업디자인과 교수, 박형웅 전주대 산학협력중점교수 등을 만나 전북 문화콘텐츠산업의 현황과 육성 전략에 대해 들어봤다.△4차 산업혁명은 콘텐츠 싸움4차 산업혁명은 AR(증강현실)VR(가상현실)과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 3D 프린팅 기술 등이 결합된 새로운 산업 흐름이다. 너도나도 4차 산업혁명을 외치지만, 관련 업체들은 한국이 4차 산업혁명 먹거리를 준비해 놓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그 이유로는 트렌드를 산업화하는 장기적인 지원이 아닌, 이슈에 편승한 단기적인 지원을 꼽는다. 관련 업체들은 이제라도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장기적인 로드맵을 제시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2003년 설립된 모아지오는 PC용 온라인 게임과 모바일 게임을 개발해 해외 수출에 성공한 대표적인 모바일 게임 전문 제작 업체다. 현재는 사업 비중을 ARVR 80%, 모바일 게임 20%로 전환하는 단계다.이 대표는 4차 산업혁명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4차 산업혁명은 제조업 기반이 아닌 타 산업적 아이디어 간의 콜라보가 중요한 것으로 결국 콘텐츠 싸움이라며 전북은 전통문화 관광지나 무형문화재 등 아날로그 콘텐츠를 많이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디지털 체험화하면 문화콘텐츠산업과 관광산업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이어 제조업은 기계 자동화로 투자 대비 고용 창출 효과가 미미하고, ITCT는 투자 대비 일자리 창출 효과가 크다며 전통적 제조업이 위기인 상황에서 전북이 나아갈 길은 4차 산업혁명 로드맵 안에서 ITCT 중심의 콘텐츠 업체를 육성발굴하고, 지속적인 지원을 통해 콘텐츠 업체의 자립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나인이즈는 2010년 AR 기술을 기반으로 창업했다. 조 대표는 창업 당시인 2010년께도 ARVR은 이슈였다며 이슈화될 때 반짝 연구개발(R&D) 자금을 지원하고 중단하니 관련 업체가 산업적으로 안착하거나 시장을 형성하지 못하고 폐업하는 것이라고 아쉬워했다.또 콘텐츠의 핵심은 아이디어와 기술력이라고 전제한 뒤 ITCT 창업 시 기술력 없이 아이디어만으로 성공할 확률은 희박하다며 창업의 핵심 아이디어와 기술력은 본인이 개발할 줄 알아야 한다고 조언했다.△전주한옥마을 트래픽이 기회이들은 전주한옥마을의 방대한 트래픽(데이터 사용량)을 문화콘텐츠산업의 기회 요인으로 언급한다.이 대표는 전주한옥마을의 트래픽을 연계해 ITCT 업체들이 콘텐츠를 개발하고, 이를 활용해 테마파크나 연구실증단지를 조성한다면 문화콘텐츠산업과 관광산업 간 실험적인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진다고 주장한다.박 교수도 현재 VR 산업은 B2B(기업 간 거래) 시장만 열리고, B2C(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이 열리지 않았다며 B2C 시장이 열리지 않았을 때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테마파크 등 명소를 만들고, 그 안의 내용물을 중소 콘텐츠 업체가 만들어 완성형 모델을 보여준다면 문화콘텐츠산업 시장이 활성화되는 것이라고 밝혔다.반면 조 교수는 ARVR 등 신기술에 대한 과도한 이슈화를 경계했다. 조 교수는 VR 산업은 고무적인 형태이지만 1세대도 끝나지 않은 초도 진입 상태이기 때문에 ARVR이 모든 산업을 해결한다는 식의 과도한 붐은 지양해야 할 점이라며 기능성 게임에 대해 재미적인 요소만 따지는 경향을 경계하고, 광의적인 해석을 통해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북 문화콘텐츠산업은] ARVR 등 신기술 '역점', 진흥원 통해 개발지원도문화콘텐츠산업은 아날로그 시장에서 디지털 콘텐츠 시장으로 급전환 되는 추세다. 유무선 네트워크의 발달과 스마트폰태블릿을 이용한 모바일 게임 확산, 디지털 광고 등 다양한 디지털 콘텐츠 시장이 빠른 성장세를 보인다.국내 게임 시장이 온라인에서 모바일로 급변하면서 전북의 많은 기업도 게임 시장의 주도권을 잡은 서울경기지역으로 이전했다. 모바일 시장에 빠르게 대처하지 못한 전북은 새로운 산업 패러다임으로 인식되는 AR(증강현실)VR(가상현실) 등 신기술을 기반으로 한 문화콘텐츠산업 육성을 꾀하고 있다.실제 문화체육관광부 2014 콘텐츠산업통계에 따르면 전북 문화콘텐츠산업 사업체 수는 2852개(전국 대비 2.7%), 종사자 수는 7701명(1.3%), 매출액은 5257억3200만원(0.6%)으로 전국적으로 하위권에 속한다. 그러나 AR(증강현실)VR(가상현실)과 관련한 기업의 역량은 전국 상위권으로 평가받는다.문화콘텐츠 업체는 분야별로 음악 935개, 출판 718개, 게임 562개, 만화 311개, 지식 정보 178개 등의 순이다.지난해 1월 출범한 전북문화콘텐츠산업진흥원은 전북 문화콘텐츠산업을 활성화하기 위한 다양한 시책을 개발지원하는 기관이다. 전북글로벌게임센터, 전북콘텐츠코리아랩, 지역스토리랩, 웹툰창작체험관 등의 인프라를 갖춘 문화콘텐츠산업의 구심점이다. 지역의 풍부한 유무형문화자원을 기반으로 기능성 콘텐츠와 전통문화유산 융합형 콘텐츠 등을 개발하고, 실감형 전문 인력을 양성한다.

  • 기획
  • 문민주
  • 2017.03.15 23:02

탄핵정국 촛불시위 이끈 전북비상시국회의 공동대표 "부정부패 청산 통한 새 대한민국 만들기 남았다"

박근혜 탄핵 정국을 맞아 전북 곳곳에 울렸던 함성이 요원의 불길처럼 우리들의 삶에 펼쳐지고 있다. 4개월 전 거리에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쏟아져 나왔고, 시내버스는 경적을 울렸고, 가족과 지인은 광장에 모여 촛불을 들었다. 이는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일이며, 지역 민주운동사에서도 의미있는 일이다.탄핵 정국 내내 전북의 촛불이 꺼지지 않고 이어져온 데는 이를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 써온 이들이 있다. 박근혜 정권 퇴진 전북비상시국회의의 공동대표를 맡아 이를 이끌어온 사람들이다. 이세우최승희조상규윤종광 대표로 부터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 뒤 그들의 속 이야기와 향후 계획에 대해 들어봤다.△이세우 목사지난 10일 오전 11시 객사 인근에서 울려퍼진 박근혜 대통령 파면 소식에 이세우 목사(완주군 이서면 들녘교회)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감사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라며 그는 지난 4개월간 함께 고생했던 동료들과 인사를 나눴다. 인근 상점을 돌면서는 그동안 시끄럽게 집회하느라 민폐였죠?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며 꽃다발을 선물했다.탄핵 인용 뒤 공식 인터뷰에서 그는 조마조마했는데, 인용돼서 기쁘다. 촛불의 입장에서 보면 일차적인 승리를 했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고 부정부패를 청산해서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이 2차 과제다. 도민들과 함께 촛불들고 나온 심정을 잘 받들어 앞으로 중요한 과제들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이세우 목사는 비상시국회의에 참여한 모든 시민사회단단체가 의견을 내 함께 동의되는 것만으로 집회를 이어왔다며 노동, 환경, 여성, 교육 등 광장에서 도민과 공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정리해 민심으로 부터 멀어지지 않으려 노력했다고 말했다.그는 또 민주주의를 지키는데 학생들이 큰 힘을 써줘 고맙다고도 했다.이 목사는 초반에 교복 입은 학생들이 대거 몰려 나와 분위기를 띄웠는데, 어른들이 잘못해 나라가 어지러운데 학생들이 분노해 적지않게 당황했다며 충동적으로 나온 것인지 싶어 돌려보내야 할까 고민하다가 스스로 발언을 신청한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우였음을 깨달았다고 말했다.탄핵이후 박근혜 정권 퇴진 전북비상시국회의는 목적을 이뤘으니 해산하느냐, 정권 교체가 이뤄질 때까지 이어가느냐를 놓고 고민중이다.이세우 목사는 박근혜 정권 퇴진을 달성한 것으로 사실상 목적을 수행한 것이지만, 우리가 원하는 방향의 개혁이 이뤄지지 않은데 대한 우려도 적지 않다며 조만간 대표자 회의를 거쳐 전북비상시국회의의 존립을 논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최승희 대표박근혜 대통령을 파면한다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의 입에서 주문이 선고되자 최승희 전북여성단체연합 대표는 눈물을 왈칵 쏟았다.최 대표는 4개월 넘는 시간 동안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어느 때보다 추운 겨울을 보냈다며 이번 탄핵 인용으로 민주주의의 불씨가 다시 시작될 것 같다고 말했다.그는 오랫동안 사회운동을 하며 사회의 부조리를 바꾸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생각하는데, 이처럼 큰 성과가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을 정도라며 그동안 집회에 참여했던 수많은 시민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간다고 읊조렸다.이어 촛불 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이 항상 자발적으로 흥겨운 분위기를 만들어 줘 힘을 낼 수 있었고 시민들이 자유 발언하며 무대를 꾸밀 때 이렇게 시민들이 함께하는 것이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아닐까? 생각했다며 시민들이 함께 만든 광장에서 탄핵 인용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게 돼 정말 기쁘다고 말했다.최 대표는 그러나 이제 한고비 넘겼을 뿐 과제는 아직 많이 남아있다며 탄핵 인용은 됐지만, 박근혜와 국정농단에 가담했던 세력들에 대한 법적 처벌이 있어야 하는 게 첫 번째 과제라고 강조했다.이어 무엇보다 두 달 뒤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 대선이 진행될 텐데 어떤 대통령을 뽑느냐가 우리에게 남은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덧붙였다.전북비상시국회의에서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온 최 대표는 여성 폭력과 여성 혐오, 한일 위안부 문제, 노동현장 내 여성 차별 문제 등 이질적이게도 첫 여성 대통령 정권에서 여성들이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왔다며 여성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대통령, 굴욕적인 한일위안부 합의를 뒤집을 수 있는 대통령, 세월호 조사가 신속히 이뤄질 수 있도록 조사위를 만들 대통령, 성 평등을 위한 사회를 이끌어 갈 수 있는 대통령이 선출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조상규 의장조상규 전농 도연맹 의장은 탄핵 인용 선고 며칠 전부터 이런저런 가짜 뉴스를 비롯해 서울 여의도 정가에 어떤 재판관은 기권이니 반대이니라는 찌라시가 나돌아 고민했다며 그렇기에 재판관 8명 모두에게 촛불 민심을 받아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조 의장은 이번 일을 계기로 시민사회단체가 서로간에 자주 대화를 갖고 토론하니까 이해 정도가 넓어진 것 같다며 박근헤 정권 퇴진이 지역사회의 연대의 정신을 높이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전북비상시국회의 공동대표를 맡은 뒤 기억에 남는 일을 묻자 시내버스 경적 시위를 꼽았다.조 의장은 탄핵 정국 초기 전북지역 버스 노동자들이 가장 먼저 차에 박근혜 퇴진 손팻말을 걸고, 경적을 울렸던 것이 지역사회에 큰 울림을 줬다며 다른 지역에서도 전주를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의 성지로 느끼고 더 뜨겁게 달아오른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이어 대검찰청 청사 포크레인 돌진과, 최순실을 향해 동물의 분뇨를 투척한 장면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며 특히 김제의 한 중학생이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고 혼자 경찰서에 가 집회 신고를 하고 실제 학생들과 거리 집회를 한 것들이 박근혜 퇴진 운동을 촉발한 계기로 작용한 것이라고 평가했다.조 의장은 특히 박근혜 퇴진이라는 공동 목표가 여러 단체들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극복하는 데 큰 가치가 됐다고 했다.그는 비상시국회의에 늦게 참여한 단체에 대한 거리감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19차 집회까지 진행을 하면서 이견없이 잘 진행된 것은 모두의 노력 덕분이라고 말했다.△윤종광 본부장민주노총 전북본부 윤 본부장은 박근혜 정권 4년 동안 민주노총이 괴롭힘을 많이 당했다며 이번 탄핵 인용은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내는 민주노총을 불순한 테러집단인 양 몰고 갔던 박근혜 정권이 헌법을 위배해 통치해왔음을 확인시켜 준 것이라고 말했다.윤 본부장은 첫 집회를 준비하는 과정과 광장에 모인 수많은 촛불을 눈앞에서 확인했을 때 북받쳤던 감정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회상했다.첫 집회를 준비하며 사람들이 모일까? 안 모이면 어쩌지? 기대 반 걱정 반이었는데 풍남문 광장을 가득 메우고 설 자리가 없도록 사람들이 가득 찼을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 뒤로는 시민들을 믿고 주저할 게 없었다고 말했다.이어 거리에 나서며 유독 추웠던 겨울날 집회 참가자들에게 나눠달라며 손난로를 몇 상자 씩 후원하신 분, 탄핵 인용 촉구 천막 농성장 앞을 지나가며 파이팅을 외쳐주신 분 등 기억나는 장면이 많다. 매 순간 감사했고, 뿌듯했다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윤 본부장 역시 탄핵 인용이 끝이 아니라고 말했다.우리가 광장에 모인 이유는 박근혜 4년 내내 심화된 사회 불평등, 재벌 독식, 노동조건 악화 등으로 한국 사회가 너무 살기 힘들었다는 호소라며 이렇게 망가진 사회를 다음 세대에 물려줘서는 안 된다는 반성과 책임감이 촛불을 들게 한 것이라고 했다.그는 노동자의 목소리로, 노동자의 편에서 무엇보다 재벌들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재벌 총수는 피해자가 아니라 국정농단에 가담하고 자신들이 들인 비용보다 훨씬 큰 이득을 취한 집단이라며 이들 재벌총수를 구속하고 이들이 취한 부당이득을 원상회복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윤 본부장은 촛불 집회는 우리가 같은 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연대감을 절절히 느낄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며 이런 마음이 모이면 좀 더 살만한 세상으로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믿음이 생겼다고 말했다.남승현, 천경석 기자

  • 기획
  • 전북일보
  • 2017.03.13 23:02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 모필장 곽종찬 씨 "서예는 붓이 먼저…필력은 붓에서 나오는 것"

지난해 가을, 귀한 전시를 만났다. 전주의 전통공예 부문 기능 보유자 열 일곱 명 명장이 빚어낸 공예품들이 한자리에 모인 전시였다. 침선과 소목, 단청 유기 지우산 나전 낙죽 악기 유기와 모필, 옻칠에 부채와 한지발까지 명장의 손길로 만들어진 전통 공예품들은 아름다웠다.그중에서도 새롭게 눈에 띈 작품, 사동고리라 이름 붙여진 액자 속에 크고 작은 붓들이 줄지어 있었다.마치 자연스럽게 얻어진 얼룩처럼 선명하지 않은 무늬를 몸체에 얹은 이 붓들의 정체(?)가 궁금했다. 붓 하나에 여러 개의 붓이 들어가, 붓 한 자루만으로 다양한 글씨를 쓸 수 있게 제작했다는 설명이 있었다.자료를 찾아보니 이전에도 세필 중필 대필이 하나로 된 삼동필이 있었다. 선비들이 휴대용으로 지니고 다녔던 삼동필은 전통 붓의 백미로 꼽혔지만 제작자의 수가 워낙 적어 오늘에 이르러서는 좀체 마주하기 어려운 유물이 되었다.그러나 이미 40여 년 전에 전통붓 삼동필의 형식을 다시 살려 현대적 미감으로 온전히 복원해낸 모필장이 있다. 2015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가 된 곽종찬 명장(66, 전주시 중노송동) 이다.사실 서예의 전통이 뿌리 깊은 전북에서 모필장의 역사와 존재는 빛나야 옳다.그러나 붓을 만드는 사람과 그 기술을 이르는 모필장은 안타깝게도 전통문화의 영역에서 오랫동안 부각되지 못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기록의 방식이 바뀌어 붓의 쓰임이 소멸된 것이 가장 큰 이유일터다. 사실 쓰임의 기능을 잃은 전통 공예품이 전통붓 뿐이겠는가. 옛사람들의 일상에서 숨 쉬었던 수많은 공예품들은 기계에 의해 대량 생산되는 상품들에 그 자리를 내주고 쓰임의 영역에서 도태된 지 오래다.재작년 전북에서는 유일하게 모필장 기능보유자가 된 남파 곽종찬 명장을 만났다.모바일 기기와 컴퓨터 자판이 기록의 수단이 되어버린 현실에서도 전통붓의 존재를 꼭 되살려내고 싶다는 그의 의지가 궁금했다.-붓을 판매하고 직접 만드는 공간인데도 가게 안이 깨끗합니다.일을 제대로 할 때는 몇날 며칠 치우지 못하니 지저분하죠. 깨끗하다는 것은 그만큼 작업 시간이 적다는, 이를테면 일이 없다는 의미입니다.(웃음)-2월이 가장 바쁘시다는데 이 시간에 찾아뵙게 되어 죄송합니다. 대나무를 구하러 다니신다고 하셨죠. 지금이 대나무 채집시기인가요.조금 늦었어요. 설 쇠고 나면 바로 시작해야 좋은데. 설 지나고 보름 사이가 적기지요. 어제 가보니 벌써 물이 많이 올랐더라고요.-어디로 다녀오셨습니까.김제에 있는 대나무 숲인데, 오후에 가서 베어놓고 밤에 실어 날랐어요. 옮기는 일만 자정 넘어 끝났습니다.-대나무 채집은 미리 예정해놓으십니까.오랫동안 하다 보니 어디에 좋은 대나무가 있는지 대충은 알죠. 그런데 갈수록 쓸 만한 대나무 밭을 찾기 어려워져요. 가봐야만 쓸 수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어요. 한 군데를 두세 번 걸음하게 되죠.-대나무 베어오는 일도 직접 하십니까.물론이죠. 모든 과정을 내 스스로 알아야 제대로 된 붓을 만들 수 있어요. 대나무를 자를 때 그 특성도 알게 되거든요. 대나무를 베어 옮기는 일은 만만치 않아요. 대나무는 깍지에 명치털 같은 가시가 있는데 아주 사나워서 일하고 며칠만 지나면 손등이 새까맣게 됩니다. 긁힌 자리에 딱지가 앉아서죠. 우리같이 붓 일하는 사람들은 연례행사처럼 겪는 일이에요.-쌓아놓은 대나무 양이 엄청난데요. 저 정도면 1년 작업할 수 있는 양인가요.어림도 없어요. 저 대나무는 아주 좋은 것들이지만 다듬어 붓의 몸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또 한계가 있어요. 더 구해야죠.-꼭 이시기에 다 해놓아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대나무 재료는 반드시 겨울에 다 준비를 해야 해요. 대나무는 물이 내렸을 때 베어야 합니다. 물이 오르면 마르면서 병충해가 들어 못 쓰게 되거든요.-뭐 한 가지 순조로운 과정이 없군요.공력이 대단하죠. 사서 쓰는 사람은 비싸네 싸네 하지만 준비하는 과정만도 아주 복잡합니다. 잘라놓은 대나무를 햇빛에 말려 깍지를 지그재그로 돌리면서 벗겨냅니다. 그런 다음 황토와 모래를 섞어 문지르죠. 황토는 대나무의 진액을 빨아냅니다. 그것이 보름쯤 지나면 뿌옇게 마르기 시작하는데 20일 정도 지난 후에 개울에 가서 씻어 말립니다. 대나무 한대에 10개 정도의 도막이 나오는데 골라내면 두 마디쯤 쓰게 됩니다.-모든 붓이 그런 공정을 거치나요.그렇지는 않아요. 제가 쓰는 대나무는 흙을 바르니 깨끗해지거든요. 그런데 과수에 하루 정도 담가 말리면 더 하얀 색을 얻을 수 있습니다. 색은 좋은데 그렇게 하면 대가 삭게 돼요. 그래서 저는 좀 힘들더라도 대나무의 특성을 살릴 수 있는 자연스러운 방식을 사용합니다.-털 작업도 시간이 많이 걸리지요.150번 정도 손길이 가는 일이죠. 하루 종일 붙잡고 있어도 안 끝나는 경우가 많아요. 맘에 들지 않으면 마무리할 수가 없으니까요. 제 마음에 맞게 한 번에 모양이 나오는 일은 거의 없어요. 그것이 다 세상의 이치라고 생각합니다.-좋은 털을 고르는 것도 중요하겠습니다.물론이죠. 저는 다행히 아버지 덕분에 털 고르는 일도 배웠어요. 아버지는 동물 가죽을 통째로 구해서 털을 잘라 사용하셨거든요. 암놈 수놈 부위별로 질감이나 길이, 색깔까지 골라낼 수 있게 되었지요.-붓도 쓰임에 따라 종류가 다양할 텐데 공통적으로 좋은 붓은 어떻게 고릅니까.붓은 털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선 붓털의 끝이 뾰족하고 가지런해야 합니다. 털의 모둠은 원형을 이루어야 하고 획을 긋고 난 다음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짐승의 모든 털은 붓의 재료가 될 수 있는데, 겨울에 잡은 짐승의 털이 윤기가 있어요.-붓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대표작품이 사동고리라고 알고 있는데 그 형식이 흥미롭더군요.붓 한자루에 작은 붓들을 차례로 넣어 만드는 것인데, 동그랗게 깎아내기 때문에 동고리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붓이 네 개 들어가면 사동고리, 다섯 개 들어가면 오동고리가 되겠죠. 지난번 서울 문화재청 전시 때 여섯 개까지 들어가는 붓을 만들었어요. 속을 파내는 일만 해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그런 새로운 일을 도전하면 일이 재미있어지더라고요.-대나무 자루 위에 무늬를 넣는 것도 독특합니다.일종의 낙죽기법인데 만들어지는 물방울처럼 보이는 무늬는 저만이 낼 수 있어요. 비법이 따로 있는데 아직 아무한테도 전수를 하지 않았습니다. 예전에 광주에서 붓을 만드는 부부가 와서 방법을 알려달라고 하더군요. 아직 넘겨줄 일이 아니라고 했더니 그럼 돌아가실 때 가르쳐주고 가세요 하더라고요. 빨리 죽으라는 이야기로 들리던데.(웃음)-넘기지 않으시는 이유가 따로 있습니까.저 무늬가 있는 것이어야 곽종찬 붓이라고 할 수 있거든요. 제 이름으로 내는 모든 붓은 저 무늬를 넣습니다. 그러니 아직은 그 무늬를 함부로 내놓을 수 없어요.-사동고리는 언제부터 만드셨습니까.군대 가기 직전이에요. 그냥 재미삼아 만들어서 전주에서 유명한 필방에 몇 자루 내놓았는데 금세 팔린 거예요. 몇 개 더 만들어달라고 사정을 했는데 그 다음날 군대에 가야 했어요. 1972년이었을 겁니다.-아무래도 붓을 찾는 사람들이 적어졌을 텐데요. 어떻게 유지하십니까.어려움은 말할 수 없죠. 붓을 쓰는 사람이 아예 없잖아요. 서예 하는 사람들 말고는 붓글씨 쓰는 사람도 없을 뿐 아니라 붓마저도 중국산이 많거든요. 실제로 팔리는 갯수는 한 달에 다섯 손가락 안의 숫자만큼으로 보면 됩니다. 이런 상황이 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것이니 20년 사이 붓은 우리 생활에서 완전히 잊혔다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그런데도 왜 붓 만드는 일을 놓지 않으셨습니까.배운 기술이 이것뿐이니까요.(웃음) 사실 70년대 80년대를 거쳐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살만했습니다. 70~80년대에는 돈도 많이 벌었어요. 다 까먹어서 그렇지. 아내가 10년 정도 병으로 고생하다 세상을 떠났어요. 젊어서 번 돈을 그때 다 썼죠. 그러고 나니 설상가상 붓이 쓸모없는 용품이 되어버리더라고요. 먹고 살 방법이 없어서 오랫동안 가게는 열어놓고 공사장 일을 다녔어요. 안 해본 일이 거의 없지요. 그래도 저녁에 집에 와서는 붓을 만들었습니다. 그런 과정이 있으니 오늘까지 그래도 기능을 지킬 수 있었던 것 같아요.-찾는 사람도 적고 특별히 팔려나가는 수량도 많지 않은데 그렇게 계속 만드시면 다 어떻게 처리하시려고.붓 만드는 사람이 안 팔린다고 손을 놓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예전에도 같은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더구나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니 그에 대한 보답으로라도 더 열심히 만들어내야죠.-사실 전북은 서예의 전통이 깊은 지역인데 붓을 만드는 장인들이 잊혀 있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그렇죠. 서예는 붓이 먼저입니다. 필력은 붓에서 나오는 것이니까요. 붓의 성질을 알아야 좋은 글씨를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서예하는 사람들은 붓이 저절로 써주는 것인 줄 아는 것 같아요. 그러니 좋은 붓을 구하려는 성의도 없고, 값싼 붓만 찾게 되죠. 어느 분야든 기본을 갖추는 것이 먼저인데, 글씨를 공부한다는 사람들이 붓의 성질을 연구하는 일에는 왜 그렇게 무관심한지 참 마뜩치 않아요.-열세 살부터 지금까지 붓 만드는 일로만 지켜온 삶이 후회되지는 않으십니까.후회할 일은 없어요. 돌아보면 좋은 시절도 있었고 어려운 시절도 있었지만 붓 만드는 일이 내게 주어져서 그래도 큰 허물 없이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아쉬움이 있다면 그동안 몇 명 함께 일했던 제자들이 있는데 더 이상 생활이 되지 않으니 붓 만드는 일을 지켜가지 못하고 중도에 길을 바꿀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붓 만드는 기술을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이 없습니까.근래 들어서는 거의 없죠. 다행히 재작년에 새로운 제자를 얻었어요. 배우려는 의지가 높아 기능을 이어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게는 큰 힘이지요.-붓의 쓰임이 없어진 상황에서 전통붓을 살려내는 일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그렇겠죠. 붓이 제 기능을 하기에는 환경이 너무 많이 바뀌었으니까요. 그래도 붓 만드는 일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2000년대 초반, 경제적 어려움이 커졌을 때 이러다 붓 만드는 일도 할 수 없겠다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생각났어요. 516이 일어난 직후인데, 지펜이 나오면서 붓이 안 팔렸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일하는 사람들을 그대로 일하게 했어요. 월급도 못 주어서 계속 빚이 쌓였었는데, 정말 거짓말처럼 지펜이 서서히 들어가고 붓이 다시 일어나더라고요.그는 더 이상 붓의 기능이 현대에 되살아날 수 있다는 기대는 하지 않게 됐다고 했다. 그런데도 붓 만드는 일에 희망을 잃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이 붓을 보세요. 이렇게 액자 안에 넣어 놓으면 훌륭한 장식품이 되죠. 훌륭한 공예품으로서 쓰임을 겸비하면 좋겠지만 예술성만으로도 전통붓의 존재를 지켜가는 방법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봅니다. 좀 더 새로운 형식으로 붓을 살려내고 싶어요.전주 붓의 옛 명성을 다시 찾고 싶다는 그에게 과제가 생겼다. 전통에 현대적 삶의 문화를 입히는 일, 붓의 쓰임을 새롭게 찾아내는 일이다. 머지않아 전주 붓의 이름이 우리에게 올 것 같다.● [곽종찬 명장은] 아버지로부터 '붓일' 배워독창적 '사동고리' 만들어내남파 곽종찬 명장의 고향은 완주다. 아버지가 한때 천안으로 가 살면서 천안에서 태어났지만 완주로 다시 돌아와 줄곧 이곳에서 성장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붓 만드는 일을 즐겼다. 할아버지 대부터 붓만드는 일을 가업으로 삼아온 덕분에 그의 아버지(곽준팔) 또한 붓으로 이름을 널리 알렸다.당시만 해도 붓은 없어서는 안 되는 생활도구였다. 상관에 터를 잡고 살았던 그의 집은 붓을 만들어 파는 일만으로 부를 쌓아 일대의 땅을 거의 사들일 정도로 부자 소리를 들었다. 어린 시절은 그만큼 유복했으나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는 공부와 담을 쌓았다. 4남 1녀 중 유난히 노래 부르기 좋아하고 놀러만 다니는 셋째 아들을 아버지는 아예 소리꾼으로 키우겠다며 남원의 국악학원으로 보냈지만 밤중에 도망쳐 걸어서 상관 집으로 돌아왔다.그는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좋았다. 집에서 붓일을 거들던 할아버지가 하루는 그에게 붓을 만들어보라고 권했다. 잘 만든다는 칭찬이 좋아 학교에서 오면 아예 붓일하는 일에 매달렸다. 야간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에 들어갔지만 며칠 되지 않아 그만두고 아예 붓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삼았다.붓만 잘 만들면 먹고 사는 일은 걱정 없을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가 며칠씩 붓을 팔러 나갔다 들어오시면 물건이 들었던 박스가 돈으로 채워져 왔다.아버지로부터 배운 대로 전통붓을 만들면서도 뭔가 창의적인 붓을 만들고 싶었다. 군대 가기직전 만들어 인기를 끌었던 사동고리는 그 결실이었다.군대 제대 후에는 내 장사를 하고 싶어 독립을 했다. 자신이 만든 붓을 갖고 문방구와 필방을 돌면서 몇 자루씩 써보라고 권했다. 지금 들여놓지 말고 쓸 만하면 그때 주문해 달라는 방식을 썼다. 기대 이상으로 주문이 많이 들어왔다. 전주 뿐 아니라 익산 군산 서천까지 건너가 붓을 팔았다. 돈은 두둑한데 물건은 물건대로 남아 있는 상황이 신기했다. 장사는 이렇게 하는 것이구나고 깨달았다. 장사의 재미를 알아가고 있을 무렵, 한복 짓는 솜씨가 좋은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아내는 그 못지않게 손재주가 좋았다. 나중에는 그보다 부인이 붓을 더 잘 만든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 80년대 초반, 건물을 사서 이조필방을 냈다. 한참 잘나가던 시기, 아내가 병을 얻었다. 10여년 동안 고생하다 세상을 떠났다. 모아 놓았던 재산도 바닥이 났다. 그즈음 붓의 수요가 줄기 시작했다. 당장 생활이 곤궁해지자 막노동이라도 나가야 했다. 철쭉 캐내는 일, 축대 쌓는 일 등 가리지 않고 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면 밤에는 붓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덕분에 전통 기법과 기능을 온전히 지키면서 사동고리 같은 그만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힘을 얻게 됐다.그는 붓만드는 일 뿐 아니라 붓과 관련된 기물 만드는 일을 즐긴다. 대나무 뿌리를 활용한 붓걸이 장식품은 그의 빼어난 손재주를 그대로 담아낸 걸작이다.전주전통공예대전에서 동상과 특별상을 수상하면서 대중들에게 모필장의 존재를 알렸던 그는 2015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가 됐다. 자신의 기능을 인정해준 자치단체에 답을 하고 싶다는 그는 올해 개인전을 계획하고 있다. 전주붓의 이름을 다시 알리고 싶다는 바람이 거기 담겨 있다.

  • 기획
  • 김은정
  • 2017.03.10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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