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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인후문화의 집] 6차선 도로가 가른 주민들 이어주는 '공감의 공간'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변하는 세상만큼이나 사람들 간에 관계 맺고 소통하는 대상과 특성 또한 달라졌다. 예전에는 마을이라는 지역적 공동체에서 서로 품앗이하며 일을 해왔고, 아이도 함께 키우며 마을에서 모든 일을 해결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마을의 문화가 만들어졌으나, 지금은 마을이라는 개념이 사라진 지 오래다. 이제는 지역적 범주를 벗어나 다양한 특성으로 사람들이 모이고 관계 맺는다. 더러는 그 관계 속에서 갈등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그 갈등은 서로의 관계를 분리시키거나 배척시키기도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문화예술교육은 사람과 사람들의 관계를 잇고,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해 나가는 데 중요한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 원주민과 이주민을 분리시킨 6차선 도로전주시 덕진구 인후동 북일초등학교가 있는 동네는 조금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6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완전 다른 두 모습의 동네가 공존하고 있다. 한 곳은 오랜 시골마을처럼 정겹다. 단독주택들이 줄지어 나지막이 앉아있고, 골목마다 다양한 모습을 뽐낸다. 6차선 도로가 무색할 정도로 골목은 조용하다. 오래전부터 그 터를 지킨 모습처럼 이곳에 살아가는 사람들 또한 60~70대의 어르신들이다. 반면에 다른 쪽의 동네는 대도시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빼곡하게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고, 상가들도 네모 반듯 줄을 맞춰 서 있다. 누가 봐도 신상처럼 보이는 아파트에는 30~40대의 젊은 세대들이 이주해 터를 잡고 살아가고 있다. 6차선 도로를 기점으로 이주민과 원주민들은 의도치 않게 편을 가르듯 둘로 나뉘어 살아가고 있다. 북일초등학교로 등하교를 하는 아이들을 위한 육교가 서로 다른 환경을 이어주는 이들의 유일한 매개의 공간으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서로를 이어주는 교류의 장 필요인후문화의집은 인후동에 터를 잡아 주민들의 일상 문화예술 공간을 운영하면서 인후동의 지역적 상황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원주민과 이주민의 심리적 거리를 좁히기 위한 교량의 역할이 필요하고, 문화의집 답게 본인들이 잘 하는 문화적 접근으로 그 고민을 풀어나가기 위한 기획들을 시도했다.원주민과 이주민의 서로 다른 환경을 이어주는 유일한 매개공간인 육교에서 깜장이라는 장터를 연 이유도 서로의 시선이 닿고 머물러야 그들의 삶이 섞여 공존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연장선상에서 인후문화의집의 고민은 계속되었다.△ 문화예술 매개로 사람과 사람 잇기사람들이 긴 테이블 위에 오밀조밀 앉아 휴대폰 화면에 있는 그림을 도화지에 옮겨 그린다. 휴대폰 화면에는 정겨운 마을시장 풍경이 담겨 있다. 30대부터 60대 어르신까지 세대도 다양하게 섞여있다. 그렇게 그림을 한참 그리다 서로 눈이 마주치면 수다 삼매경에 빠진다. 일상에서 겪었던 이야기부터, 지금 그리고 있는 그림에 대한 이야기, 어떤 예술가에 대한 평가까지 수다의 주제는 다채롭다. 무슨 활동인지 물으니 지난 시간 동네 시장을 돌아다니며 자기 마음에 남았던 사진을 골라 본인이 바라본 시선으로 그려나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이질적인 두 집단을 이어 심리적 거리감을 조금이라도 좁히기 위해 인후문화의집 김명규 기획팀장은 일상의 재해석이라는 지역특성화 프로그램을 올 초 기획하여 진행하기 시작했다.지역주민간의 커뮤니티 형성은 공감대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서로가 알고 있는 공간을 기록하고 이야기 해보는 프로그램을 기획한 거예요함께 모여 서로가 알고 있는 공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동네를 새롭게 바라본다. 항상 지나던 길을 사진으로 찍으며 깊게 관찰해 본다. 나의 일상을 관찰하며, 본래 있었으나 보이지 않았던 사람들을 알아가게 된다. 평소 데면데면 하던 시장 과일가게 사장님, 야채가게 사장님과 이야기도 나눠본다. 이러한 과정 속에, 시장상인들과 주민들은 물건을 사고파는 소비적인 소극적 관계를 넘어, 서로의 스토리와 사건을 주고받는 적극적인 커뮤니티의 관계로 성장한다. 이렇듯 프로그램을 함께 참여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뿐 아니라, 지역의 사람들과도 더불어 관계를 맺어간다.△ 일상을 재해석 해보며 느끼는 일상의 작은 일탈사람들의 감정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새로운 상황이 아니라, 일상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탈들이라고 생각을 해요. 내가 살아가는 공간, 만나는 사람 등을 나만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재해석 해 보는 거예요.내가 살아가는 지역이 시시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매번 지나치며 보는 것들이 색다르게 다가올 리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일상의 공간은 더 일탈의 공간이 될 수 있다. 일상의 재해석 주강사로 참여하고 있는 김누리 작가는 상점을 기록하는 작품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김누리 작가는 각자 상점마다 가지고 있는 스토리들이 있다고 이야기 한다. 그 스토리를 찾아내는 작가의 일상적 비일상이 작품 활동을 하게 만든 관찰력이 아니었을까 싶다. 기획자는 그런 작가의 시선을 지역주민들에게 연결해 주고 싶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비일상성은 지역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하는 힘을 만들어 주어 참여자들이 살아가는 지역에 대해 생각을 전환시켜 주는 환기의 역할을 할 것이다.△ 문화를 향유하는 것에서 벗어나 문화 생산자로의 성장우리가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 참여했을 때 각자가 느끼는 감정이 다 달라요. 뭐라고 뚜렷하게 설명하지는 못하겠지만, 삶에서 이게 필요한 것이구나 하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어요. 저는 그 감정을 느낀 사람들은 문화예술을 배우고 가져가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무언가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봐요. 그게 지속의 힘이 될 것 같아요인후문화의집 일상의 재해석 프로그램은 지역특성화사업으로 진행되는 사업이다. 지역특성화 사업은 문화를 향유하는 것에서 벗어나 자기문화를 생산하는 역할로서의 문화예술교육을 지향한다.결과보다는 과정과 소통을 중요시하는 사업이다. 그래서 단순히 장르를 체험하는 형식의 접근보다는 교육 과정 안에서 소통관계를 형성하는 활동이 더 중요한 사업이다. 소통은 사람들 간의 소통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이 느끼고, 변해가는 스스로와의 소통도 포함된다. 그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 질 때 문화예술은 일상 안에서 지속 될 것이고, 그 지속은 지역 안에서 또 다른 변화를 이끌어 나갈 것이라 생각된다.

  • 기획
  • 기고
  • 2017.06.28 23:02

[우리고을 인물 열전 12. 장수군 산서면] 학문 중시하고 문학 사랑한 '충효예의 고장'

장수군 산서면은 장수군청 소재지에서 20㎞, 전주에서 40㎞ 거리에 위치한다. 장수군 7개 읍면 중 장수읍 등 6개가 해발 500미터 고지대에 위치해 있는 반면 산서면은 유일하게 팔공산 서사면 아래 해발 200미터 평활한 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이 때문에 팔공산 북동쪽에 위치한 장수읍 등을 왕래하기 위해서는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비행기재를 넘어야 한다. 이 도로가 개설되기 전에는 20㎞ 떨어진 남원을 거쳐 번암면 쪽으로 빙 돌아가야 했다.고인돌과 돌도끼 등 구석기시대 유물이 발견됐고,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했다. 삼국시대 백제 때는 거사물현이라는 독립된 현의 위상을 가졌고, 신라 때는 임실지역이 주가 되는 청웅현에 속했다. 고려 때는 거령현이 됐고, 남원부에 예속됐다. 조선 때 신서방, 진전방이 됐는데 고종 때 수서방으로 개칭됐고, 1914년에 산서면이란 명칭이 생겼다. 이는 장수의 서쪽에 있기 때문에 붙여졌다. 북동쪽으로 영대산과 팔공산 등이 든든하게 지켜섰고, 서남쪽으로 낮은 야산 지대가 형성돼 있지만, 남으로 탁트인 지세다. 전체면적 47.75㎢ 중 밭이 270여㏊, 논 1100여㏊, 임야 2,900여㏊ 등으로 구성돼 있다.산내면에 들어서면 충효예의 고장이라는 표석이 눈에 띈다. 31운동기념비, 호룡보루와 향토수복기념비, 그리고 수많은 서원, 정자 등에서 충효예를 중시하며 삶을 이어온 주민들의 올곧은 정신을 읽을 수 있다. 전해 내려오는 수많은 유고집에서는 산서면 사람들이 예로부터 학문을 중시했고, 문학을 사랑했음을 알 수 있다. 선비들은 진실했고, 훌륭한 선인들의 뜻을 받들어 충효예를 근간 삼는 삶을 소홀히 하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선대의 뜻을 이어 지난 1997년에는 산서면지를 발간하기도 했다.문향이자 양반고을 산서면의 인물들을 권희상 노인회장, 권승근 문화원장, 육동수 전 산서면장, 정익수 전 산서새마을금고 이사장, 배형근 산서면장, 박경애 부면장 등의 도움을 받아 소개한다.△정관계산서면 출신으로 중앙정부에서 장관을 지낸 인물은 하월리 출신의 정재석, 봉서리 출신의 정세현씨다.정재석(丁渽錫)씨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제8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에 입문했으며, 1979년 상공부장관, 1992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을 역임했다. 봉서리 태생인 정세현(丁世鉉72)씨는 서울대 출신의 정치학 박사다. 1977년 통일원에 들어가 대북정책업무를 담당했고, 업무 능력을 인정받아 통일부 차관을 거쳐 2002년부터 통일부장관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2010~2014년까지 원광대 총장을 지내며 학계에도 몸을 담았다.정재석 전 장관의 동생인 정장현씨(丁璋鉉78)는 서울대법대를 졸업한 후 아산사회복지재단 사무총장, 현대백화점 사장 등을 거쳐 제14대 국회에서 국회의원을 지냈다.오산리 출신의 권정주(權正周)씨는 감사원 감사관을 역임했고, 마하리 출신으로 전북대를 나온 김광영(57金廣泳)씨는 감사원 공공감사운영단장으로 일하고 있다.산서면 출신 중에서 장수군수는 아직 배출되지 않았다. 다만 전북도공무원교육원장을 지낸 권건주(權鍵周)씨(63)가 내년 단체장 선거를 겨냥해 뛰고 있어 지역민들 사이에 관심이 되고 있다.△학계건지리 출신의 류재신(柳在新)씨는 전라북도교육청 7대와 8대 교육감을 지냈으며, 교육계에 지여한 공을 인정받아 군민훈장 기린장(1983)과 국민훈장 모란장(1984)을 수상했다. 또 한대희(韓大熙)씨는 임실순창장수 교육장을 역임하고 1979년 애향대상을 수상했다. 사창리 출신의 양환승(梁桓承)씨는 농학박사로서 전북대 농과대학장을 지냈다. 1997년 전북도민의장 산업장을 수상했다. 정기수(丁奇洙)씨는 서울대 불어불문과를 졸업하고 프랑스에서 문학박사를 취득했다. 공주대에 재직하며 불어교육학과장을 지냈으며 한불 문화교류 공로를 인정받아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화교육훈장을 수훈했다. 오산리 출신의 권이종씨(權彛鍾77)는 독일에서 교육학박사를 받고 서울시립대교수, 교원대 교수를 역임한 아동교육전문가다. 신창리 출신의 이달형(李達珩)씨도 교육학박사로서 명지대 교수를 지냈다. 월곡리 출신 정필수(丁必洙)씨는 미국 텍사스대에서 경제학박사를 취득, 한국해양수산개발원 선임연구위원, 항만유통연구실장 등을 역임했다. 백운리 출신인 오병무씨는 순천대 교수이고, 오성리 출신인 송기재(宋基在)씨는 프랑스 파리대학에서 경제학박사를 취득하고 산업경제계획원 연구원으로 있다.△법조계이룡리 출신의 방봉혁(房峯爀)씨는 제20회 사법시험에 합격, 서울중앙지검 부장검사로 재직하고 있다. 또 신창리 출신의 이영기(李永基)씨는 사시 35회에 합격, 부산지검에서 검사로 일하고 있다. 사계리 왕곡 출신의 김순곤(金順坤83)씨는 서울지방법원 의정부지원 사무국장으로 퇴임, 1980년 옥조근정훈장을 수상했다. 업무와 관련해 연구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그는 등기부와 대장의 일원화 문제에 관한 연구 등 다수의 저술도 남겼다.△군인과 경찰신창리 출신의 이재훈(李載薰)씨는 진안경찰서장을 역임했고, 역시 신창리가 고향인 이석형(李碩珩)씨는 육군 중령으로 전북방첩대장, 전주농조장 등을 지냈다.△경제계월곡리 출신의 정동섭(丁東燮)씨는 경희대를 졸업, 현재 태림포장공업(주) 대표다. 경제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대통령국무총리장관 표창을 수상했다. 역시 월곡리 출신인 정영섭(丁榮燮)씨는 서울대를 나와 동일제지 이사로 있다. 재무장관 표창 등을 수상했다.하월리 출신의 정석현(丁石鉉66)씨는 전주공고를 졸업하고 현대건설에 입사해 주경야독으로 한양대를 졸업했다. 작은 공구상으로 시작, 지금의 수산중공업을 일궜다. 금탑산업훈장, 노사문화대상대통령상 등을 수상했으며, 무역협회 부회장 등으로도 활동했다.△문화예술체육계음악과 미술 등에서 뛰어난 기량을 발휘한 인물은 찾기 힘들지만, 유학자들이 남긴 문집이 다수 전해오고 있다. 정유헌의 유헌집, 방만오의 만오유고, 김명은의 명은집, 이경석의 경석시집 등 유고집이 50개가 넘는다. 이런 영향으로 서예에서 출중한 인물들이 나왔다. 1869년에 출생한 이수형은 호남 명필로 유명했는데 남원 양사재(養士齋) 현판 등 다수의 글씨를 남겼다.오룡리 출신의 이규진씨는 전북대의대 교수를 역임한 현대 서예가로 유명하다. 국전에서 여섯 번 특선할 만큼 실력을 갖춘 국전추천작가, 국립현대미술관초대작가, 대한민국서예대전 심사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그의 작품이 중국국립서법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산서면 옆에 위치한 임실군 지사면 관곡서원에 있는 경행문(景行門) 편액, 무주 적상산 안국사 청하루(淸霞樓) 편액 등이 소남의 글씨다.마하리 출신의 육종진씨는 제1회 동아미술대전에서 특선, 제5회 동남아현대대전 입선 등 실력을 발휘했다.체육계에서는 마하리 원흥마을 출신인 홍성진(53)씨가 현대건설 배구감독에 이어 현재 여자배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뛰고 있다.광해군 9년 내진전방 대창부락에서 출생한 장옥경의 불고정별곡(不孤亭別曲)을 보면 산서인들의 예술적 기질이 엿보인다. 불고정별곡의 첫 구절을 소개한다. 靑山은 에워들고 綠水는 도라가고 夕陽이 거들 때에 新月이 소사난다. 一樽酒 가지고 시름프자 하노라-다음 회에는 완주군 봉동읍 편이 이어집니다

  • 기획
  • 김재호
  • 2017.06.27 23:02

임대료 부당 인상 부영 고발한 김승수 전주시장 "악덕기업 횡포로부터 시민 권리 보호, 행정이 해야 할 일"

전주시가 최근 임대료 부당인상을 이유로 국내 대표 임대주택 공급업체인부영을 고발했다. 부영 임대아파트가 있는 전국 25개 지자체 중 첫 사례다. 서민주거안정을 기치로 내건 이 싸움에 전국의 지자체와 건설사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성매매집결지인 선미촌 재단장과 대통령 공약으로 만든 문화특별시 조성 등 전주시가 추진하는 일련의 정책도 전국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더욱이 문재인 대통령이 주문한 혁신도시 이전 공공기관 지역인재 30% 채용 방안 마련은 전주시가 공론화한 정책이기도 하다. 김승수 시장을 만나 이슈가 되고 있는 주요 정책에 대해 들어봤다.- 전주시의 부영 고발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고발이라는 강수를 두신 이유가 무엇입니까.부영은 서민 임대아파트 짓는다며 엄청나게 싼 땅을 가져다가 지금까지 어마어마한 돈을 벌지 않았습니까. 지난해 전주시는 서민 울리는 악덕건설사 횡포 저지대책 위원회라는 걸 만들었는데 그 촉발이 바로 부영 이었습니다. 하가지구 부영 임대아파트를 여러 차례 갔었는데요. 전주시가 찾아낸 하자만 해도 200건이 넘습니다. 복도는 밀폐된 창문인데 환풍기는 설치하지도 않았습니다. 바닥은 뜨고 벽은 갈라지고, 현장에 가보면 화가 납니다.- 하가지구 부영임대아파트는 준공한 지 채 3년이 안됐는데요.2014년 준공입니다. 입주민들이 아무리 보수를 요구해도 부영이 듣지 않습니다. 들어 올 사람 줄 서있으니까 나가든 말든 하라는 겁니다. 법적으로 임대료 상한율이 5%까지인데, 이렇게 매년 올리면 서민들의 부담은 감당하기 힘들만큼 커집니다. 부영 이중근 회장은 개인 자산으로는 아마 대한민국 5위 안에 들 겁니다. 또 대규모 부동산을 계속 사들이고 있습니다. 반면에 부실공사율은 높습니다. 건강한 기업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부영 임대아파트가 있는 지자체가 25곳이나 되는데요, 전주시가 먼저 나선 배경은 무엇입니까. 또, 결과를 어떻게 전망하시는지요.서학동 효성임대아파트 임대전환 사례 기억하시지요. 민간아파트가 부도가 나 입주자들이 내몰릴 처지였어요. 그 전환을 전주시가 이끌어 냈습니다. 그 일환입니다. 서민 주거복지차원에서 행정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부영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악덕기업의 횡포로부터 시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 행정에서 해야 할 일입니다. 부영은 끝까지 저항을 할 것입니다. 전주시도 끝까지 갈 것입니다. 여기에 임대료 인상 상한을 2.5%, 또는 물가 인상수준에 반영해서 정하는 등 법제화도 중요합니다. 민간분야도 임대료 상한을 정하는 것 그것이 진짜 주거 복지입니다.- 성매매 집결지 선미촌도 변하고 있습니다. 현장시청이 들어서는데요.전주의 선미촌 개선사업은 두가지 의미에서 중요한 시사점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행정이 일방적으로 추진하지 않고 주민과 여성단체예술가경찰이 함께해 선미촌민관협의회를 꾸준하게 운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는 물리적 동원없이 의회에서 발의한 조례를 통해 여성들의 인권을 지키고 희망을 주는 정책이라는 것입니다.- 의미는 있지만 개선사업이 더디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습니다.아마 전주가 유사한 사업을 추진하는 모든 지자체 가운데 가장 빨리 진행되고 있을 겁니다. 다른 지역에서도 벤치마킹을 많이 오고계십니다. 관계자가 함께 참여해 성매매 집결지를 개선하고 개발하는 것, 여성의 인권을 지키면서 점진적인 방식으로 나아간다는 것, 이것이 바로 전주가 다른 지역과 다른 패러다임입니다. 이와같은 시각에서 보면 많이 진전돼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주역 앞 첫 마중길도 조성하셨는데요. 평가가 분분합니다.첫 마중길은 원래 전주 모습을 찾아가자는 것입니다. 관광객에게 예쁘게 보이려고 한 건 전혀 아닙니다. 나무가 숲을 이루고 도시에 물이 있는 원래 전주다웠던 모습을 추구하고자 했습니다. 콘크리트보다는 녹색생태 도시를 추구하고 직선보다는 곡선의 도시를 지향하려 했습니다. 그동안 육지구가 완전히 폐허화 됐는데 마중길 사업으로 주민들이 변화에 대한 희망을 만들고 있습니다.- 운전하기에 불편하다는 의견들이 많습니다.자동차를 이용하시는 분들의 불만이 많은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그 지역은 아무리 차가 많이 밀려도 5분10분입니다. 저는 시간대별, 요일별, 날씨별로 다 가봤습니다. 불편함은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가치투자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불편하신 분들은 해당지역주민이 아니라 지나다니는 분들입니다. 육지구에 사는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한번 쯤 그들의 생각도 해야하지 않을까요.- 최근 반가운 소식이 들립니다. 혁신도시 공공기관 지역인재 30%채용이 가시화될 것으로 보입니다.청년일자리 문제와 균형발전 차원에서 반드시 필요합니다. 혁신도시 공공기관 이전이 마무리단계이지만 지역 청년 일자리 문제에는 효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지난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전북혁신도시 공공기관 지역인재 채용이 1015%에 그쳤습니다. 이전 기관 지역인재 채용이 권고사항이어서 실질적인 효과에 한계가 있었던 거죠.-이전기관 지역인재 채용은 전주시가 공론화에 앞장선 것으로 알려졌는데요.2014년 지방선거때부터 주창한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전주시장 후보 때 공약으로 내세웠고, 이후 전국혁신도시협의회를 중심으로 의제화했습니다. 지역 국회의원과 대학, 청년 등과 함께 법제화를 촉구했고, 지난 2월 문재인 대통령이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경선과정에서 전북을 방문했을 때 대선공약으로 건의했습니다. 절박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촉구했는데, 결실을 보게 되는 것 같아 뿌듯합니다. 실제로 지역 청년들에게 기회가 돌아가는 방식으로 제도화되길 바랍니다.● [왜 '문화특별시' 강조하나] "도시 경쟁력 필수조건전주, 국가대표 브랜드 마땅"김승수 전주시장이 미래 전주를 논하며 가장 강조하는 것은 문화특별시다. 전주 문화특별시는 문재인 대통령의 지역 공약으로 채택돼 있다. 김 시장이 문화특별시를 강조하는 이유는 전주의 도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다.김 시장은 국가가 성장했지만 도시는 성장하지 않았다며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는 세계 10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지만 도시들은 그렇게 발전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선진 국가는 도시 브랜드가 몇 개씩 있지만 우리나라는 서울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고 지적했다.김 시장은 이러한 시각에서 전주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그는 문화자원이 풍부하고,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한국을 대표할만한 도시가 바로 전주라며 전주가 국가의 시대에서 도시의 시대로 넘어오면서 국가를 대표하는 브랜드로 키울만한 곳이라고 했다.국가 균형발전 차원에서의 문화특별시 지정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김 시장은 광역시가 없는 지역은 전북과 충북, 강원 뿐인데, 강원도는 이미 2018년 동계올림픽을 준비하면서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고 충북은 수도권에 속해 발전해 나가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전북만 성장, 발전 동력이 없다고 우려했다. 이어 전주를 광역시로 만드는 것 보다는 전북을 위해 문화특별시라는 집을 만들어 전주와 전북을 키워야한다며 문화의 열매는 관광이고 그 관광을 육성하자는 의미에서 전주를 문화특별시로 키우자는 것이라고 덧붙였다.문화특별시 방향에 대해서 그는 역사와 문화, 근대 도시가 공존하고 재생되는, 도시재생 차원에서 이뤄져야한다며 이는 현 정부 정책 방향과도 잘 맞는 것 같다고 말했다.

  • 기획
  • 백세종
  • 2017.06.26 23:0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⑫ 물을 다스려 안은, 벽골제와 황등제 - 우리 고장에 남아있는 치수의 흔적, 소중한 문화유산

최악의 가뭄이다. 살다 살다 이런 가뭄은 처음이라고들 한다. 바짝 말라붙은 하천바닥에 배를 드러내고 죽어버린 물고기 떼의 모습과 거북이 등 모양으로 쩍쩍 갈라진 땅에 말라만 가는 곡식들이 마음을 더 애달게 한다.오랜 역사 속에서 인류는 물가 근처에서 생활해 왔다. 문명의 시초가 늘 강에서였던 것이나 인류가 물을 생명수로 여기며 물의 재난이나 물 부족에 대비해왔던 것은 그와 같은 까닭이다. 더욱이 치수(治水)는 전통 농경사회에서 식량 생산에 영향이 지대한 것으로, 특히 우리나라 농경문화의 중심이 되었던 전북도 일대에서는 물을 잘 다루고 활용하는 것이 생존 그 자체였다. 이중 예로부터 고을마다 물을 넉넉하게 사용하기 위해 하천이나 골짜기에 흐르는 물을 담아 놓은 저수지와 둑은 지난 과거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치수법 중 하나였다.김제시의 벽골제(碧骨堤)는 가장 유명한 저수지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로 벽골의 이름은 지명에서 유래되었다 한다. 벼의 고을이라는 뜻으로 마한시대에는 벽비리국(辟卑離國)으로 백제시대에는 벽골군(碧骨郡)으로 김제를 불렀다. 벼 고을의 둑이 벽골(碧骨) 표기된 것은 이두 표기(우리말 고유의 문법 형태를 보충하고자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적는 문법)에 기인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기록에 의하면 330년(백제 비류왕 27년)에 처음 둑을 쌓았다고 전해지는데, 고대임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저수지 축조를 한 것을 보면 당시 선조들의 토목기술이 대단했음을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둑을 쌓는데 동원된 사람들의 짚신에 묻은 흙을 턴 것이 쌓여 산을 이루어 신털미산 혹은 초혜산(草鞋山)으로 이름 붙여진 지명을 보면 오랜 시간에 걸쳐 큰 규모의 공사가 회자되었던 것 같다. 이후 790년(원성왕 6년)에 증축되었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수축과 재축을 거쳐 온 기록들이 전해져 오고 있다. 그중 1415년 (조선 태종 15년)에 중수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벽골제 중수비는 벽골제 제방과 함께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인정받아 사적 제111호로 지정되었다. 중수비는 애초 신털미산 정상에 건립되어 있었지만, 단지가 조성되면서 현재의 장소인 벽골제 단지 내로 이전되었다. 세월에 흔적으로 마모되어 판독이 어려우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통해 전문을 알아볼 수 있다.군의 남쪽 15리쯤 큰 둑이 있는데, 그 이름은 벽골(碧骨)이다. 이는 옛사람이 김제(金堤)의 옛 이름을 들어서 이름을 붙인 것인데, 군도 역시 이 둑을 쌓게 됨으로 말미암아 지금의 이름으로 고친 것이다. 둑의 길이는 6만 843자이고, 둑 안의 둘레는 7만 7406보이다. 다섯 개의 도랑을 파서 논에 물을 대는데,다섯 도랑이 물을 대는 땅은 모두가 비옥하였는데, 이 둑은 신라와 백제로부터 백성에게 이익을 주었다. 고려 현종(顯宗) 때에 와서 옛날 모습으로 보수하였고, 인종(仁宗) 21년 계해년에 와서 증수(增修)하였는데, 끝내 폐기하게 되니 아는 이들이 이를 한탄하였다. (후략)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3권 전라도 김제군, 벽골제 내용 원문 발췌)오늘날 그나마 모습을 남기고 있는 제방 일부는 평지에 일직선 거리로 약 3㎞가량 펼쳐져 있는데 아쉽게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그 원형이 크게 훼손돼 있다.하지만, 분명한 것은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지니며 지역 정체성을 갖게 해 준 귀한 유산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할 수 있는 의미가 충분하다는 사실이다.예로부터 나라를 다스림에는 이수와 치수가 근간이 되어 왔다. 농경사회가 나라의 근간이 되었던 까닭에 곧 물을 다스리는 것이 사람의 목숨을 다스리고 윤택한 삶을 좌지우지하는 길이 되어 왔던 것이다.한때 우리는 국가가 물 부족 국가로 분류된 것을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여 물에 대한 철학을 되새기기도 했지만, 작금에 물에 대한 인식은 4대강 등 몇 가지 이슈에 한정돼 있는 듯 보인다.하지만 보다 편리하고 발달된 기술로 다스리고 있을 뿐 물은 여전히 우리가 주의 깊게 다스려야 할 대상이며 오늘날에는 생태와 지역 문화 등 신경 써야 할 것이 더욱 많은 귀한 대상임을 되새겨야 한다.그렇기에 옛 선조들이 해왔던 물을 대하는 귀함과 두려움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벽골제와 우리 고장에 남아있는 치수의 흔적과 옛 물길을 다시 복기하듯 살펴보며 선조의 지혜를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물의 흔적도 귀한 자산이다.익산에는 백제시대부터 있었다는 호수와도 같은 큰 저수지, 요교호(腰橋湖)라고도 불리는 황등제(黃登堤)의 흔적이 아직까지 황등면의 지명에 남아 그 존재를 말해주고 있다. 뱃길마을, 섬말, 샛터, 도선마을 등 백제 무왕의 설화와 함께 원형을 발굴해서 이어갈 우리의 역사이다.《대동여지도》와 《동여도》에도 황등제의 표기가 분명히 있고, 유형원의 《반계수록》에는 부안(扶安)의 눌제(訥堤), 임피(臨陂)의 벽골제(碧骨堤), 만경(萬頃)의 황등제(黃登堤)는 소위 호남 지방의 3대 제언이다. 처음에 그 제언을 쌓을 때는 온 나라의 힘을 다 들여서 완성시켰는데 중간에 훼손되자 내버려 두었다.지금 불과 몇 고을의 힘만 동원하여 예전처럼 수선해 놓으면 노령(蘆嶺) 이북은 영원히 흉년이 없을 것이며 호남 지방의 연해 고을이 중국의 소주(蘇州)나 항주(杭州)처럼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이라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동국문헌비고》 등에도 황등제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있지만, 아직은 백제 유적지 들판에 담겨 있는 원형의 모습이 상상으로만 남아있다. 사라진 지역의 귀한 자산인 황등제의 원형이 올곧이 복원되기를 바란다.심한 가뭄이 든 지금은, 선조들이 우리 지역에 남긴 물을 다스리며 귀히 여겼던 그 마음도 담아 기우제라도 함께 드리고 싶은 마음이다. 비가 충분히 내려 목마른 대지를 적시고 생명수를 흐르게 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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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6.23 23:02

[고창 문화재야행 추진단] '고창 밤 나들이'…지역경제 꽃 피우길 비나이다

△겨울 당산제를 지내던 사람들이 한여름 다시 모인 까닭밤새 쉴새없이 양수기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들판을 난무한다. 전국에 가뭄도 이런 가뭄이 없다는 가문 날이다. 한 방울 물기라도 모아 아직 가느다란 어린 모에, 이제 뿌리를 뻗고 이파리를 펼쳐가기 시작한 고구마에, 벌써 손가락만한 열매를 매단 고추에 끌어대어 한 모금이라도 목을 축이게 하기 위해서다. 실낱같은 생명 부지하기 위해서다. 물과 사투하는 이 염천(炎天)에 땀과 사투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창문화재야행을 준비하는 고창오거리당산제보존회(회장 설태종) 사람들이다. 한겨울, 대보름 전야 올해 삿된 기운 물리치고 마을을 평화롭고 풍요롭게 하소서 당산제를 정성으로 치르는 사람들이, 한여름 땅을 태우는 열기 속에 팔 걷고 나선 까닭은 무엇일까?△여덟가지 밤놀이로 수놓는 문화재 야행문화재 야행부터다. 야행(夜行), 밤놀이다. 기실 문화재란 지역마다 고유한 빛깔로 오래 사람들이 이야기를 다져온 것에 재(財)의 지위를 부여해, 잘 가꾸고 다듬어 다음 세대에 물려주자는 것이다. 꼭꼭 감추어 고스란히 보존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 한 결이 문화재 야행이다. 유형 무형으로 문화재에 깃든 이야기를 펼쳐 향유하게 하고, 나아가 지역경제도 활성화하자는 취지다. 그런데 밤이다. 도시로 사람이며 물산이 집중되면서 지역은 더 지역으로 갈수록 밤은 칠흑이다. 찾아오는 사람은 물론 거기 사는 사람들까지 두문불출로 활기를 잃어간다. 그 활기를 문화재로 되찾자는 뜻이다. 문화재 야행은 문화재를 밤과 만나게 하는 여덟 개의 키워드로 완성된다. 팔야(八夜)다. 팔야는 밤에 비춰보는 문화재(야경, 夜景), 밤에 걷는 거리(야로, 夜路), 밤에 듣는 역사이야기(야사, 夜史)로부터 먹고 자는 야식(夜食)과 야숙(夜宿)에 이르는 여덟 가지 밤 테마다. 부제 슬로건도 역사를 품고 밤을 누비다다.밤을 누비는 사람들을 그러모으는 장렬한 프로젝트는 2016년 10개 도시에서 시작되어 올해는 열여덟으로 확대되었다. 서울, 인천, 수원, 청주, 공주, 부여, 강릉, 안동, 대구, 경주, 김해, 부산, 광주, 순천을 거쳐, 우리 전북에는 전주와 군산, 그리고 마침내 고창이다. 굳이 수식을 붙일 까닭이 없을 이름짜한 곳들이다. 고대로부터 도시화되어 그야말로 문화재 투성이인 곳이다. 마찬가지다. 굳이 따지지 않아도 열세가운데 열세, 고창이다.△고창 야행 주체, 오거리당산제보존회이 물적 열세를 질적 보완으로 만회하려는 고창 야행 추진주체는 고창오거리당산제보존회다. 이제 오거리당산과 제, 보존회이야기다. 여느 지역의 사람들처럼 고창사람들도 공동체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공동체를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지키려는 노력이 시작되었을 터다. 홍수로부터 가뭄, 지진 같은 자연의 극한 위협이 훨씬 더 두려울 것이었다. 자연의 힘을 거스르지 않고 고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야 위기를 극복하려는 눈물겨운 노력이 시작된 것이다. 그 한 형태가 오거리당산이다. 고창읍에는 동서남북, 중앙 다섯 군데 당산돌과 당산나무가 쌍으로 조성되어 있다. 조선 후기, 현재의 형태로 자리 잡게 된 것을 지난 1969년 중요 민속자료 14호로 지정했다. 한편으로 이렇게 형체를 빚어 거스를 수 없는 힘과 균형을 꾀했다면 그 형체를 둘러싸고 보이지는 않으나 거대한 기운을 모으는 것은 사람들의 몫이었다.한해를 시작하는 대보름 전야, 사람들이 모여 재해(災害)는 달래어 쫓고, 풍성한 수확과 안녕을 부르는 의례를 이어간다. 무형 유형의 격식을 차려 온전히 보전하고 있는 전국 유일 오거리당산제는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37호이며, 올해 36회째에 이르고 있다. 제47회 한국민속예술축제 출전하여 최우수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했다.정월 초 당산 동제를 이어가다, 정월대보름 전야에 중거리당산으로 향한다. 고창읍 시가지를 횡으로 종으로 가로지르는 줄행, 길꼬내기부터 시작한다. 참여자들은 중거리당산 앞에 정성으로 차린 제물(祭物)을 모으고 당산제를 올린다. 오거리당산제는 동부 서부 편을 갈라 연등 간대의 초롱불을 서로 먼저 끄려는 연등놀이(영등놀이), 줄 놀이(줄 시위굿, 줄 예맞이, 줄합궁, 줄다리기), 당산 옷 입히기, 달짚(달집)태우기, 쥐불놀이에서 절정에 이른다.△9월 하순 이틀 밤을 이어지는 장쾌한 드라마한겨울 오거리당산제를 마치고 그렇게 기원하던 안녕과 풍요를 위해 일터에서 전전해야할 사람들이 이 불 붙은 하늘아래 모인 까닭이, 문화재 야행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고창야행 추진단은 고창읍성 앞 관광안내소 한켠에 자리잡고 있다. 9월 22일(금) 저녁 고창야행 개막공연 <고창읍성 축성 재현 오페레타>를 시작으로 고창야행 길꼬내기, 야밤 백중싸움, 고창읍성 달빛 답성놀이,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월하기원, 고창판소리마당, 길거리 만담놀이, 풍물 버스킹, 원님행차재현, 용줄꼬기에서 용줄드리우기로 이어진다. 고창의 담백알싸한 맛의 향연도, 한옥스테이 꿀잠도 곁들인다. 고창읍성 광장에서 전통시장으로 이어지는 야시(夜市)도 밤을 밝힌다. 9월 이틀 밤, 장쾌한 드라마가 펼쳐진다.고창오거리당산제보존회 300여 회원가운데, 소품팀을 맡은 회원들이 그 축성재현오페레타에 쓸 굵직굵직한 성돌 만들기에 한창이다. 알이 조밀해 단단한 짙은 회색 스티로폼을 다 다른 크기로 잘라내고 불로 그을려 자연미를 살려내고 있다. 그냥 이벤트업체에 맡겨 편하게 제작하면 될 일, 이 뙤약볕에 일을 어렵게 하시는지, 원.그게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아요. 우리나라 대개 축제들이 지역사람들의 역량을 키우는 일과는 멀게 진행돼요. 외부 전문 업체에 통짜로 맡기기 때문이에요. 야행을 계기로 회원가운데 관련 업을 가진 사람들을 중심으로 노하우를 쌓고 지역 안에서 예산이 배분되는 효과도 누리는 것이라는 심길수 총감독의 말이다.△마른 땅에 단비를 부르는 기우제, 간절한 호소수백 년 이어온 오거리당산제를 고을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나서 정성을 다해 준비하던 방식 그대로다. 고창야행은 하루 이틀 반짝 열리고 끝나는 축제가 아니다. 수백 년 고창읍성과 오거리당산을 쌓고 다듬어온 사람들, 그 위에 야행이 놓인다. 그 뒤는? 고창 야행이 내건, 뿌리깊은 역사문화의 향을 되살려 살만한 고창, 명품 지역재생의 방향이 있다.문화재 야행을 진행하는 18개 시군구 가운데 군 단위는 우리와 부여입니다. 당산제를 통해 고을민이 한마음으로 힘을 모아 고을에 닥친 어려움을 이겨낸 것처럼, 군민 전체가 힘을 모아 고창 야행이 고창의 저력을 보여주고, 지역 경제를 꽃피게 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고창 야행이 성공을 거둘 수 있도록 함께해야지요. 박우정 고창군수의 말에서, 뜨거운 땀으로 가문 하늘을 향해 시위하는 오거리당산제보존회원들의 모습에서, 300년 전 이 땅에 당산 돌을 쌓아 올린 앞선 사람들의 결기를 떠올린다. 마른 땅에 단비를 부르는 기우제, 제문의 간절한 호소(呼訴)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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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6.21 23:02

'정해진 마음' 장례 지내기

어떤 모임에서나 앉자마자 정치나 종교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촌스럽다. 무지하고 강박적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신념을 선(善)으로 확신하고 들이미는 행위다. 신념을 전면에 내 세우면서도, 전 인격으로서의 자신은 뒤로 감추고 나타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매우 큰 실례다.보통의 경우 정치와 종교를 주제로 하는 대화에서 논리적으로 합의점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합의점을 찾았다면 아마 논리 너머의 다른 어떤 요인들이 개입되어서일 것이다. 정치와 종교는 기본적으로 신념의 활동이다. 매우 세련되고 현란하며 또 권위까지 갖추고 있어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게다가 보편성으로 해석될 무늬의 외피까지 두르게 되었지만 일상 안에서는 신념의 차원을 넘지 못한다. 가끔 정치와 종교의 최고 지도자들 가운데 높은 차원의 포용을 보여주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는 분명히 자신의 신념을 조금이나마 양보했을 때다. 신념은 각자에게 진리다. 진리를 양보하고 마음 편할 수는 없다. ‘자기 진리’를 양보하고 여유로울 수 있는 것, 아마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일지 모른다. 정치와 종교의 영역에 모두 순교자가 있고 또 그들이 떠받들어지는 한 그것들이 강력한 신념 체계라는 것을 부인 하지 못한다. 신념이 맹목적인 방향으로 자가 발전하면 타협이 원천 봉쇄되는 근본주의로 흐른다. 그런데,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거수일투족은 다 정치행위다. 말 한 마디도 모두 정치행위다. 상황을 자신의 의지대로 끌고 가려는 욕망을 실현시키려 하는 한 이 정치 행위를 벗어날 수 없다. 삶이 정치 행위라면 인간은 모두 크거나 작거나 혹은 강하거나 약하거나 하는 점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 모두 각자의 신념 속에 갇혀 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자신만의 판단 기준을 갖는 것이다. 이것을 장자는 ‘정해진 마음’(成心)이라 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정해진 마음을 스승처럼 모시고 산다. 현자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다 똑같다. 따지고 보면 누구나 정해진 마음을 기준으로 해서 시비판단을 한다. 그래서 정해진 마음이 없이 시비판단을 한다는 말은 오늘 월(越)나라로 떠났는데 도착은 어제 했다는 말만큼이나 이치에 맞지 않다.”(『장자 · 제물론』) ‘정해진 마음 - 시비판단- 정치행위- 삶’이 하나의 유기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삶의 형태에서라면 어떤 합의도 애초에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각자의 기준은 각자에게 진리이기 때문이다. 다음에 말하는 장자의 얘기를 들으면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나와 당신이 논쟁을 한다고 합시다. 당신이 나를 이기고, 내가 당신에게 졌다면 당신은 옳고 나는 틀렸을까요? 내가 당신을 이기고 당신이 졌다면 내가 옳고 당신은 틀렸을까요? 한 쪽은 옳고 다른 쪽은 틀린 경우일까요, 아니면 두 쪽 다 옳은 경우일까요? 두 쪽 다 틀린 경우일까요? 이런 일은 둘 다 알 수 없소. 제3자는 더 알 수 없소. 그렇다면, 누구를 불러 이를 판단하게 할 수 있겠소. 당신과 입장이 같은 사람을 불러 판단하게 한다면, 그는 당신과 같으니까 공정하게 판단할 수 없소. 나와 입장이 같은 사람을 불러 판단하게 하면, 나와 같은 입장이라 공정한 판단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우리 둘 모두와 입장이 다른 사람을 불러 판단하게 하면, 그는 나하고도 다르고 당신하고도 다르니 역시 공정한 판단을 할 수가 없소. 우리 둘 모두와 입장이 같은 사람을 불러 판단하게 하면, 그는 우리 둘 모두와 같기 때문에 공정한 판단을 할 수가 없소. 그렇다면 나도 당신도 그리고 제3자도 모두 공정한 판단을 할 수가 없는 거요. 그런데 누구에게 기대한다는 말이요?”(『장자 · 제물론』) 이처럼 ‘정해진 마음’에 갇혀 사는 것이 세상 속 인간이다. 이 ‘정해진 마음’을 치장하는 데에 거의 대부분을 쓰는 존재가 또 인간이다. 자신만 모른다. 이 ‘정해진 마음’을 치장하며 사는 한 자신은 한 곳에 뿌리를 내린 결박된 존재가 되고, 자신이 하는 일은 대부분 과거를 지키는 일이 된다는 것을 알기 어렵다. 어쩌랴. 새롭고 신선한 일은 죄다 자신의 ‘정해진 마음’에서 이탈해서야 가능한 일인 것을...한 농부가 있었다. 하루는 밭에서 일을 하다가 내달리던 토끼가 밭 가운데 있는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쳐 죽는 것을 보았다. 죽은 토끼를 주워 집으로 돌아 온 농부는 그 다음 날부터 농사는 짓지 않고 그루터기만 지켜보며 또 그런 토끼가 나오기를 기다리기만 했다. 하지만 그 뒤로 한 마리도 보지 못하고 결국에는 온 동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수주대토(守株待兎)’라는 말이 출현한 이야기다.어떤 검객이 배를 타고 양자강(陽子江)을 건너고 있었다. 그런데 강 중간쯤에서 물결이 크게 출렁거리던 차에 차고 있던 칼이 강물에 빠지고 말았다. 놀란 검객은 급히 작은 단도(短刀)로 칼을 떨어뜨릴 때 앉아있던 뱃전의 한 곳에 표시를 하였다. “이곳이 칼을 떨어뜨린 곳이다.” 건너편 나루터에 도착하여 여유가 생기자 검객은 칼을 찾기 위해 뱃전에 표시한 바로 그 밑의 물속으로 들어갔다. 각주구검(刻舟求劍)이라는 말로 회자되는 고사다. 이 두 고사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모두 비웃음을 사지 않을 수 없다. 비웃음이라는 것은 어디서 오는가. 바보 같은 상황에 있으면서 정작 자신은 알아채지 못한 채 어떤 고정된 행위를 벗어나지 못하면 비웃음을 살 수 밖에 없다. 달라진 상황에 다르게 반응하지 못하고 계속 같은 반응을 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도 같은 일이다. 다른 시대에 다른 비전을 생산하지 못하고 고정되고 철 지난 틀로 새 시대를 맞자고 주장하는 것도 같은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비웃음이 비웃음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비웃음을 사는 행위 때문에 비효율이 발생되어 힘 자체가 빠지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이처럼 ‘정해진 마음’은 한 번 토끼를 얻은 기억을 떨쳐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박혀서 계속 토끼만 기다리게 한다. 토끼를 기다리는 동안 이 농부는 어떤 생산 활동도 하지 못한다. 막연한 심리적 기대가 객관적 사실로 착각되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토끼를 주워서 먹을 수 있다는 기대와 확신이 너무 커서 지금의 배고픔을 불평할 틈도 없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러고 있다가는 굶어 죽을 수 있다고 해도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다. 오히려 그런 말 하는 사람들을 무지하거나 사악한 부류로 몰아붙이기 까지 할 것이다. ‘정해진 마음’에 지배되는 상태가 되면, 그 사람의 온 마음과 행동이 이 ‘정해진 마음’의 변주에 불과해진다. 한 사람이 하는 모든 심리적 활동의 터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진짜로는 ‘심리적 기대’와 ‘심리적 확신’인데, 그것을 ‘객관적 사실’로 믿는다. 이처럼 ‘정해진 마음’은 한 사람을 과거에 묶어두고, 변화하는 현실에 적응할 수 없도록 만들어버린다. 토끼를 기다리는 이 농부의 이야기는 『한비자(韓非子)』의 「오두」편에 나오는데, ‘오두’는 나라를 망가뜨리는 다섯 종류의 ‘좀 벌레’를 말한다. 즉 나라를 망하게 하는 다섯 가지 요인이라는 뜻이다. 비효율적으로 운용되는 나라에서는 심리적 기대와 객관적 사실을 혼동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우리 경제는 선진국의 문턱에서 몇 년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은 2007년에 2만 달러대에 진입하고 나서 선진국 진입의 경계선으로 여겨지는 3만 달러의 벽을 여태껏 넘지 못하고 있다. 심한 정체에 빠져 있다. 무엇이 정체되어 있다는 것은 새로움이 시도되지 못하고 있다는 뜻과 같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선진국 진입을 기대하면서 중진국에 이를 때 사용하던 방법을 계속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봐야 한다. 게다가 후진국에서 중진국으로 이르는 일과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일은 성격이 전혀 다르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후진국에서 중진국에 오르는 일은 선진국에서 먼저 닦아 놓은 길, 즉 있는 길을 가는 것과 같다. 하지만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일은 없는 길을 열면서 가야 한다. 있는 길을 가는 것과 없는 길을 열면서 가는 길은 차원이 다르다. 뱃전에 긁어놓은 표식만을 마음속에 담고 있다가는 자신이 배를 타고 얼마나 흘러왔는지를 망각한다. 이 망각은 사람을 맹목적인 상황 속에서 헤매게 만든다. ‘정해진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염치(廉恥)가 없어진다. ‘정해진 마음’이 자신의 마음을 차지하는 덩어리가 크면 클수록 ‘정해진 마음’이 주인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그 ‘정해진 마음’을 철저히 지키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자 진실을 지키는 일로 바뀐다. 따라서 아무리 크고 중한 일이라도 그것이 ‘정해진 마음’을 발휘하는 데 방해가 되면 바로 사소한 것으로 취급된다. 이럴 때 사용하는 비굴한 논리들은 모두 상황을 상대적인 묘사 속으로 끌고 간다. “다른 사람보다는 그래도 덜하다”고 하거나 “나만 그런 것이냐”고 하는 식으로 자신을 정당화 한다. 남보다 더 낫기만 하면 된다는 종속적 사고에 빠져 있다.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사람이라면 남보다 더 나은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남과 다를 뿐만 아니라 나만의 고유한 것이 있어야만 만족할 것이다. 비굴한 논리를 사용하는 것도 자신을 자신의 존엄 위에 세우지 못하고 ‘정해진 마음’ 위에 세우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불행하게도 염치를 잃어버린다. 자신이 뭐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된다. 예를 들어, 이런 일이 있다고 하자. 법을 어긴 사람을 법무장관으로 추천하고, 악의적 표절을 한 사람을 교육부 수장으로 추천한다. 법무장관은 법을 관장해야 하고, 교육부 수장은 표절을 하지 못하도록 감독해야 할 직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천한 사람들이나 추천된 사람들이나 모두 아무렇지 않은 양 당당하다. ‘정해진 마음’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스스로 말한 원칙을 스스로 깨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소위 ‘정치’를 버리고 ‘정치 공학’을 선택하는 것이다. 게다가 ‘정해진 마음’을 공유한 사람들은 객관적 비판 능력보다는 감성적 동질감에만 의존하면서, 갑자기 호위무사로 등장한다. 자존감이나 품격이나 진실성은 사라진다. 오직 ‘정해진 마음’들의 굳건한 연대만 남는다. 참 무섭고 슬픈 일이다. 이처럼 무섭고 슬픈 풍경 안에서 아무도 몰래 비효율은 두꺼워진다. 우리가 ‘정해진 마음’에 좌우되는 감정을 극복하고 과학적으로 사고해야 하는 이유다. 그래서 장자는 말한다.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들어라.” “ ‘정해진 마음’에 갇힌 자기를 장례지내라.”서강대 철학과교수·건명원 원장·섬진강 인문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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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6.20 23:02

[전홍철 교수의 “영상과 함께 하는 실크로드탐방” ⑩ 전북에서 만나는 중국문화 흔적] 전주 속 중국마을 '차이나타운'·삼국지 관우 모신 사당도

석도(石島:산동성의 섬)에서 닭이 울면 군산 앞바다에서 들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가까운 이웃 중국. 대중 교역의 전초 기조로 새만금에 한중경협단지를 조성 중인 전북은 예로부터 중국과 경제문화 교류가 활발했다. 특히 올해는 한중 수교 25주년이 되는 해이다. 최근 사드 배치 문제로 한중 간에 불협화음이 야기되고 있지만, 소중한 이웃 중국과의 유대감 강화와 한중 문명교류의 역동성을 확인하기 위해 전라북도 곳곳에 남아있는 중국문화의 흔적을 찾아간다.△객사와 풍남문에서 만나는 차이나전주의 상징물이자 대한민국의 보물인 객사(客舍). 객사에 걸려 있는 현판 풍패지관(豊沛之館)은 중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초서체로 휘갈겨 쓴 풍패지관은 중국의 친한파 서예가 주지번(朱之蕃)이 쓴 것이다. 풍패 또는 풍패지향(豊沛之鄕)이란 말은 황제의 고향을 말한다. 예전에 전주를 흔히 풍패지향이라 했는데, 이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고향 전주를 한나라 황제 유방(劉邦)의 고향 풍패와 연계시킨 것이다. 풍남문(豊南門)의 풍은 지금의 강소성 서주(徐州) 인근의 풍읍(豊邑)을 가리킨다. 현재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은 서문은 예전에 패서문(沛西門)이라 했는데, 여기서 패는 강소성 패현(沛縣)을 의미한다. 주지번이 쓴 현판은 익산 왕궁면 망모당(望母堂)에도 걸려 있으며, 남원과 강릉 등 전국 여러 곳에 남아 있다.△전주 차이나타운과 사합원(四合院)전주 차이나타운은 전북 속 중국을 대표하는 곳이다. 현재 전주 차이나타운은 거리가 다소 한산하지만, 과거 화교(華僑)들이 가장 많을 때는 1000명이 넘었고, 화교 상인이 운영하는 중화요리집이 120곳이나 되었다. 전주 시내 곳곳에 화교들이 중화요리집을 열었고, 심지어 전주 중화요리 조합장을 화교가 한 적도 있었다. 현재 전북에는 화교가 300여 명 거주하고 있으며, 국내 유일의 화교 전통가옥인 사합원(四合院)이 남아 있다. 요즘 전주하면 한옥마을을 떠올리지만, 전주에는 중국 마을도 있는 셈이다.△삼국지의 영웅 관우와 관왕묘전주 남고산성에는 삼국지의 영웅 관우(關羽)를 모시는 관성묘(關聖廟)가 있다. 관우는 흔히 무성(武聖)이라 하는데, 무성에게 제례를 올리는 곳이 바로 관왕묘다. 관성묘가 우리나라에 건립된 것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였다. 당시 지원군으로 온 명나라 군사들이 왜구와의 전쟁에서 관우 장군의 도움을 얻고자 했고,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고자 왕의 명을 받들어 전국적으로 건립해 수호 신당으로 섬기게 되었다. 국악의 성지 남원에도 관왕묘가 있으며, 예전 전북에는 김제와 태안 등 여러 곳에 관왕묘가 있었으나 현재는 전주와 남원 두 곳에만 남아 있다.△학문의 성인 공자와 향교(鄕校)중국에는 무술의 성인 관우 외에 또 하나의 성인이 있다. 바로 문장과 학문의 성인 공자(孔子)이다. 공자는 문성(文聖)이라 하며, 중국 곳곳에 있는 문묘(文廟)는 공자를 섬기는 곳이다. 한국에도 문묘에 해당하는 장소가 전국 방방곡곡에 있으니 향교가 바로 그곳이다. 전주 한옥마을에 위치한 향교는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향교로 65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대성전 안에는 공자상이 정 중앙에 모셔져 있고, 공자의 제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 그리고 우리나라 열여덟 명의 현자 위패가 함께 놓여 있다.△부안에서 만나는 차이나부안의 채석강(彩石江)과 적벽강(赤壁江)은 중국인이 매우 친근감을 느끼는 장소다. 채석강은 중국에도 있는데, 강소성 마안산시(馬鞍山市)에 있는 채석풍경구(采石磯風景區)가 바로 그곳이다. 채석강은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이백(李白)과 깊은 관련이 있다. 중국의 시성(詩聖:시의 성인) 이태백이 뱃놀이를 하며 강물에 비친 달그림자를 잡으려다 물에 빠져 숨졌다는 곳이 바로 채석강이다. 부안의 적벽강 역시 중국 강 이름이다. 중국 송나라 때의 대문호 소동파(蘇東坡)가 우리나라 산수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접하고 직접 우리나라를 찾아왔다가 이곳의 절경을 보고 마치 중국의 적벽강을 옮겨놓은 듯하다 하여 적벽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완주에서 만나는 차이나완주군 불명산에 있는 화암사(花巖寺)의 극락전은 중국 사찰의 전형적인 건축 기법인 하앙식(下昻式)으로 지어진 국내 유일의 목조 건축이다. 하앙식 구조란 서까래와 지붕 사이를 긴 목재로 받쳐 처마의 하중을 줄인 형태를 말하며, 중국에서 발전해 백제를 거쳐 일본에 전해졌다. 완주군 봉동에는 임진왜란 당시 다섯 아들과 함께 조선에 와서 왜군을 물리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명나라 장수 추수경(秋水鏡) 장군의 묘역이 있다. 추수경 장군처럼 임진왜란 때 큰 전공을 세운 후 귀화한 사람이 또 있으니 바로 천만리 장군이다. 남원 환봉서원은 명나라 원병으로 조선에 와서 영양(穎陽) 천씨(千氏)의 중시조가 된 천만리 장군을 기리는 사당이다.△정읍 무성서원(武城書院)의 하우전(夏禹傳)정읍(井邑)의 무성서원은 최치원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최치원은 중국에서도 높이 존경받아 당송 100대 시인의 반열에 오른 대문장가로 고려 현종 때 문창(文昌)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중국 강소성 양주(揚州)에는 최치원기념관과 함께 시내 한복판에 최치원의 시호를 뜻하는 문창각(文昌閣)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무성서원 강수재에 기둥에는 대단히 특이한 글씨체의 주련이 걸려 있다. 소위 하나라 우임금의 글씨체인 하우전(夏禹傳)이다. 하우전은 장수 심원정에도 남아 있다.△한중 관계,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신뢰 회복해야!2016년 한국은 중국 수입시장에서 점유율 1위를 차지했으며, 중화권 국가를 제외하면 대중국 직접투자액이 가장 많은 나라이다. 최근 한중 관계는 사드 문제로 이상 기류가 흐르고 있지만, 양국의 오랜 관계를 보여주는 문화유적에 대한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대외 교류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잠재우거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전북 속에 남아있는 중국 문화유적을 찾아 나선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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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6.16 23:02

[옛날과 현재의 노둣돌 고군산군도] 자연이 빚은 보물창고…문화·관광 가치 '풍성'

노둣돌이란 솟을대문 앞에 놓인 돌로 말에서 내리기 쉽게 하기 위해 놓여진 돌이다. 고군산군도 역시 옛날과 현재 나아가 미래를 연결해 주는 시간박물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 세계화 시대에 지역의 역사문화는 문화상품으로서 가치를 지닌다. 교통통신의 발달로 인해 원하는 상품을 쉽게 얻을 수 있어 희소성이 떨어지고 가치가 하락이 된다. 그러나 그 지역에 가야만 경험할 수 있는 자연환경과 그로 인해 생겨지는 독특한 역사문화는 문화관광상품으로서 희소성에 의해 가치가 있다.그런 의미에서 군산시에 속하는 고군산군도는 가치가 높다. 동북아 해양물류의 허브 역할을 할 수 있는 지리적 조건이 좋고, 역사적 기록과 전설, 설화 등이 풍부하다. 새만금 일대에 속하는 장소성이 갖는 콘텐츠도 좋다.△ 고군산군도란고군산군도는 위치적으로보면 군산을 기준으로 볼 때 서남쪽, 변산의 서북쪽으로 63개의 작은 섬들이 오밀조밀하게 펼쳐진 곳이다. 그 가운데 신선이 노니는 섬이라 불리우는 선유도가 있다. 선유도 옆으로는 춤추는 무녀 의 형상이라고 불리는 무녀도가 있다. 새만금 방조제의 버팀목이 되는 신시도는 고군산군도에서 가장 넓은 섬이다. 그 섬 위에는 최치원이 가야금을 켜면서 놀았고 그 소리가 중국까지 들렸다는 월영봉이 있다. 월영봉의 가을은 단풍으로 활활 타오르는 듯 그 색깔이 푸른 바다와 어울려 숨이 막힐 듯한 장관을 자아낸다.△ 뛰어난 경치 선유팔경바다에 떠있는 섬들의 선들이 아름다운 고군산군도는 뛰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선유팔경이 있다.고군산군도는 곧 연륙교가 완성돼 차로 돌아다니거나 걸어서도 섬 전체를 돌아다닐 수 있게 된다. 지금도 무녀도 앞까지 차로 이동한 후 셔틀버스를 이용해서 섬 전체를 돌아볼 수 있다. 이미 육지가 되어버린 야미도를 지나 새만금 방조제를 따라 신시도를 향하다 보면 방조제를 사이에 두고 바다 색깔이 다르다. 오른쪽은 바다가 출렁이면서 검푸르고 햇빛이 반짝이는 파랑이 생기가 생기가 넘친다. 그러나 방조제로 갇힌 왼쪽 바다는 움직임이 없어서 숨이 막힐 것 같이 고요하고 어두운 색깔이다.선유팔경도 감상할 수 있다. 신시도 월영봉을 가을빛으로 피어오르게하는 월영단풍, 해질녘 바다 위를 붉은 금빛으로 물들인 선유도에서 볼 수 있는 지는 해의 빛나는 모습인 선유낙조, 선유도 해변에 고운 모래 빛이 띠를 두른 듯 십리나 펼쳐지는 명사십리, 망주봉 앞 바다에 기러기 날개 편 듯한 모래톱 평사낙안, 여름철 비가오면 살아나는 7개의 물줄기 망주폭포, 저녁녘이면 몰려드는 조기의 퍼덕이는 몸짓이 꽃과 같은 장자어화, 병풍처럼 펼쳐지는 열 두 봉우리 무산십이봉, 세 개의 섬이 마치 만선으로 집에 돌아오는 듯 푸근한 정경인 삼도귀범을 일컫는다.△ 과거부터 동북아 해양물류의 중심지두 번째 가치는 동북아 해양물류의 허브 역할을 할 수 있는 지리적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무궁무진한 에너지의 원천이 바다라는 것을 아는 시대에서 바다의 중요성이 강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고군산군도의 앞바다는 예전부터도 그랬지만 미래에도 동북아 해양물류 유통의 시대를 맞이할 수 있는 거점이 될 수 있다.고군산군도에 관한 역사적 기록도 가치를 높인다. 고고학에서는 강과 바다를 옛날 고속도로라고 부른다. 새만금 지역은 바다로 갇혀있지 않고, 바다로 열려있다. 선사시대부터 중국 또는 일본과는 새만금을 통과하는 바닷길로 해양 문물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졌다.고려시대에 이르러 고려와 송은 친선관계를 유지해왔다. 예종이 죽고 인종이 등극하니 애도와 축하를 동시에 하려고 송의 휘종은 국신 서긍을 보낸다. 서긍은 신주호를 타고 500명의 부하들을 데리고 고려에 온다. 중국 명주에서 출발한 서긍 일행은 흑산도를 거쳐 고군산군도에 이른다. 머물면서 여행기록문인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이라는 책자를 쓴다. 이책에 선유도에 대해서 자세히 묘사했다. 잔치 중에 행해졌던 풍습과 먹거리 그리고 사용되었던 기구들을 상세히 적어놓아 고려시대를 알 수 있는 귀한 자료로 남아있다. 기록을 통해 고군산군도를 통한 우리나라의 국제관계를 살펴볼 수 있고, 그 사료는 대한민국과 중국을 관광자원화 측면에서 노둣돌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스토리텔링의 보고이야기로 엮을 수 있는 전설과 설화가 풍부하다. 선유도에는 커다란 바위 봉우리가 두 개 있다. 멀리서 보면 코끼리가 엎드려 있는 모습과도 같다. 두 부부가 섬으로 유배를 와서 임금이 불러주길 애타게 기다리다가 돌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망주봉은 시방도 저 물길 넘어 어딘가에 오실 고운님을 바라듯이 성군을 기다기고 서 있다.또 하나는 장자할매 설화이이다. 장자도에는 장자할매 바위가 있다. 장자교를 걸어가다 멀리 바라보면 대장도와 장자도가 보인다. 작은 몽돌이 깨알처럼 펼쳐있는 해변을 따라 걷다 길위로 올라서면 갑자기 눈에 확 들어오는 바위가 있다. 신비스런 모습으로 산 중턱에 서 있는 바위는 먼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장자할매는 남편이 공부를 좋아해서 자신을 희생하며 뒷바라지를 많이 해줬다. 한양에 갔던 남편이 과거에 급제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고 밥상을 차려들고 맞이하려 갔는데 남편의 뒤를 따라오는 여자가 있어 속상한 나머지 순간 돌이 되어버렸다. 마주오던 남편과 남편을 따라오던 식솔들도 졸지에 돌이 되어버렸다. 돌이 되어서 지금도 제자리에 서있다. 장자할매 바위와 장자할배 바위 전설이 바닷바람에 실려 오고가는 뱃사람과 섬사람들 마음에 돌처럼 박혀졌고 지금껏 전해져 오고있다.고군산군도는 군산시민들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전라북도를 위해서 나아가 우리나라의 문화관광산업 활성화 차원에서도 콘텐츠 차원에서 기획돼야 한다. 그래서 세계인들이 와도 손색이 없는 공간으로 거듭나야한다. 중국에는 주산군도가 있다. 그곳은 관음성지다. 한 해동안 1500만명의 관광객이 다녀간다고 한다. 어떤 면에서 보면 고군산군도는 자연풍광 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실과 스토리텔링이 되는 설화를 살펴보더라도 주산군도 못지않게 관광자원화 될 가능성이 높다.뿐만 아니라 훌륭한 은유를 띠고 있다. 섬이 산처럼 무리지어있는 곳 군산, 각각의 섬과 각각의 산 사이에는 거리가 있어야 섬이고 산이다. 각자의 위치에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아름다움으로 어우러지는 자연의 모습을 고군산군도를 통해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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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6.14 23:02

[임실군 지사면] 농사 발달하고 서원 많았던 영천 이씨의 관향

임실군 지사면은 삼국시대 백제지역의 거사물현(居斯勿縣)에 속했다가 통일신라시대에는 청웅현(靑雄縣), 고려시대에는 거령현(居寧縣)으로 바뀌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지사방(只沙坊)으로 격하되고, 관할도 지금의 지사면으로 줄어들었다. 남원부에서 관할하다가 1914년에 임실군으로 소속이 바뀌었다.그러나 일찍부터 농사가 발달한 농향(農鄕), 유교 교육기관인 서원이 많았던 유향(儒鄕), 그리고 영천 이씨의 관향(貫鄕) 등 3향의 본고장이다.먼저 농향(農鄕)으로서는 장수 산서면과 남원 덕과면 임실 성수면, 오수면에 둘러싸인 고산 분지로 농경지가 넓어서 일찍부터 농사가 발달하고 살기 좋은 곳이었다. 또 고을은 작았으나 선조 40년(1607)에서 영조 12년(1736)까지 덕암서원, 영천서원, 주암서원, 현주서원, 관곡서원 등 전국에서 유일하게 5개의 서원이 설립 운영되었다. 이들 중 영천서원과 주암서원은 전북도문화재자료 20호와 21호로 각각 지정돼 있으며, 관곡서원에 소장돼 있는 일괄문서들은 전북도 유형문화재 제198호이다.지사면에는 또 영천 이씨의 시조인 이능간을 모시는 이능간 신도비와 이능간묘가 있다. 이능간은 영천리 사촌마을에서 태어나 일찍이 충숙왕의 상왕인 충선왕이 원나라로 끌려갈 때 수행했다가 유배지인 티베트까지 따라가 충성을 다해 모셨다. 또 원나라가 고려국을 일개 성(省)으로 격하시키려 하자 원제 앞에 나가 대의로써 이를 철회케 하여 면좌장이라는 별호를 얻기도 했다. 면좌당이란 왼쪽으로 옷깃을 여미는 것을 면하게 해줬다는 뜻으로 원나라의 속국이 되는 것을 막았다는 의미다. 우리나라와 달리 원나라는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풍습이 있기 때문이다. 이능간은 그 뒤 숙왕 8년에는 반란을 토벌하는 등 많은 국가에 많은 공을 세워 그 벼슬이 문하시중(지금의 국무총리)에 이르렀으며, 영천부원군 작위를 3번이나 받아 조그마한 마을 지사면의 영천리가 영천 이씨(고려시대 지명이 거령현이었기에 거령 이씨라고도 함)의 관향이 되었다. 현주서원에도 면좌당이라는 판액이 남아있다.△정치인최낙철씨(고인)는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소령으로 예편하고 재계에 투신한 뒤 계성제지 사장과 회장, 한국제지공연입협회장, 뉴코리아골프장 회장을 지냈다. 또 민정당 전국구(지금의 비례대표)로 11대 국회의원을 했다.최용안씨(고인)는 국민당 후보로 남원임실순창 지역구에서 12대 국회에 진출했으며, 통일민주당 전북도지부장과 (주)아이스원(해태) 사장, 산림조합중앙회 회장 등을 지냈다.열린우리당 소속으로 익산갑지역에서 17대 국회에 진출했다가 문재인 정부에 정무비서관으로 발탁된 한병도 전 의원(50)도 이 고을 방계마을에서 출생했다.△경제계최주호씨(고인)는 수원농림고(현 서울대 농대)를 나와 계성제지 회장과 우성건설 회장, 서울대 동창회장 등을 지냈으며 지사중학교 설립에 크게 공헌했다. 아들이 최낙철 전 국회의원이다.안성호씨(고인)는 동아여객 대표와 남양석유 대표, 전주상공회의소 회장 등을 지냈으며 전주한일고교 설립자이다.조윤현씨(95)는 전주 전일여객 대표 회장을 맡고 있으며, 그의 아들 조정권씨(65)가 사장이다. 김철진씨(고인)는 서울에서 시내버스 회사인 신촌운수 회장과 신길운수 대표, 권투협회장 등을 지냈고, 최낙인씨(85)는 신길운수 회장을 맡고 있다.최낙현씨(82)는 계성제지 대표와 동양건설 부회장을 지냈고, 최윤신씨(72)는 계성제지 대표와 동양고속건설, 성부건설 및 해운대개발 사장을 지냈으며, 최주호씨의 생질인 최용선씨(63)는 우성건설 이사와 시민일보사 대표이사, 코암시앤시 대표이사를 거쳐 한신공영(주) 회장을 맡고 있다. 또 태기전씨(69)는 한신공영(주) 대표이사다. 이석법씨(65)는 제일제당 인도네시아 공장장과 본부 공장장을 지냈고, 최규재씨(54)는 대성식품 사장이며, 김용식씨(62)는 범우공영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김병이씨(55)는 임실치즈피자체인본부장으로 전주시 우아2동 주민자치위원장을 맡고 있고, 이용기씨(64)는 (주)성우스카니아 대표이며, 강석진씨(74)는 (주)과학축산 대표와 우진 B&G 사장이다.△학계이용숙씨(71)는 시인이자 문학박사로 전주교대 총장을 지냈으며, 최선영씨(75)는 전북대 농대 교수와 농대학장을 역임했다.이종섭씨(63)는 서울대 교수로 자연대학장과 입학관리본부장을 지냈고, 전 서울대 교수인 최덕근씨(68)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정회원이다.송영무씨(63)는 순천대 교무처장과 영재교육원장을 지냈고, 최규재씨(54)는 군산대 교수이자, 자동차부품 연구실장이다. 강용구(53)씨는 동국대 생물과학부 교수이고, 최낙관씨(55)는 서남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이며, 회계사인 최창규씨(46)는 웅지세무대학 교수로 교무처장을 맡고 있다. 전북대에서 인문대학장을 지낸 양병호 교수(59)도 지사면에서 출생했다. 또 행정고시 출신으로 농학박사인 장현규씨(고인)는 전북대 농대 교수와 대학원장을 지냈다.△군인경찰방계마을에서 출생한 이형근씨(고인)는 대한민국 군번 1번으로 육군사관학교 초대 교장과 육군참모총장. 영국과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주재 대사를 지냈다. 양해찬씨(78)는 여단장을 지내고 육군준장으로 예편했으며, 안명선씨(70)는 서울강남경찰서장을 지냈다.△문화예술진도에서 원을 지낸 중산 박이규(고인)는 그의 형 송암 박창규와 함께 조선 낙화를 사실상 창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낙화는 종이나 나무, 가죽 등의 표면을 인두로 지져서 그림이나 문양 등을 표현하는 전통 예술이다.송재영씨(56)는 2003년 전주대사습놀이전국대회 판소리 부문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국악인으로 현재 (사)전주대사습놀이보존회 이사장 권한대행을 맡고 있다.강석준씨(77)는 교장 출신으로 서예 초대작가였으며, 최정균씨(고인)는 서예국전 최고 장관상을 받은 인물로 원광대 서예학과를 창설해 교수를 지냈다.△기타 분야김한태씨(고인)는 평생을 나무에 헌신하며 성수산 자연휴양림을 조성한 인물로 초등학교 5학년 교과서에 나무 할아버지로 소개됐다. 대한목재 사장을 지냈다. 이용욱씨(49)는 국토부 민자도로과장을 거쳐 현재는 영국에서 연수중이며, 이종선씨(61)는 국제협력단(koica)에서 태국필리핀 사무소장과 본부 총괄기획부장을 지냈다. 이장섭씨(85)는 80년대 농산물검사소 충북과 전북, 전남지역 소장을 지냈고, 최정근씨(73)는 무역협회 상무이사와 상임고문을 거쳤다. 이용기씨(72)는 대통령 자문위원과 서울보증보험 고문, 열린정책연구원 위원 등을 지냈다.- 다음회에는 장수군 산서면 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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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성원
  • 2017.06.13 23:02

전북가정위탁지원센터 유혜영 관장 "가정 위탁은 '아름다운 인연'…우리 지역에 천사들 많아"

남의 자식을 돌보는 것을 두고 말들이 많지만, 지난 1월부터 전북가정위탁지원센터를 맡은 유혜영 관장(44)은 가정 위탁에 대한 홍보가 아직 충분하지 않고, 알고는 있더라도 참여하는데 망설이는 요인이 많다고 했다.빡빡한 위탁 가정 방문 일정 때문에 지난 9일 아침 일찍 겨우 시간을 내 마주 앉은 유혜영 관장은 현장에서 만난 위탁 가정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오히려 더 큰 힘을 받는 것 같다며 웃었다.모든 가정 위탁은 그 자체가 아름다운 인연이라는 유 관장으로부터 전북가정위탁지원센터의 운영 방향과 도내 가정위탁의 실태 등을 들어봤다.- 전북가정위탁지원센터 관장으로 부임한 지 6개월이 됐습니다. 소감이 어떠신지요.올해 1월부터 국제 구호개발 NGO인 세이브더칠드런이 전북가정위탁지원센터를 맡으면서 동시에 제가 관장으로 부임했습니다. 저희 센터는 아동의 생존과 보호, 발달을 온전히 누리는 세상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가정위탁 지원 서비스를 지원하는 아동복지전담기관으로 제게 주어진 임무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가정위탁제도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먼저 가정위탁제도 소개를 부탁드립니다.지난 2003년에 만들어진 제도가 14년이 지났습니다. 생면부지인 남의 아이를 맡는 일반위탁과 할머니할아버지가 맡는 대리양육위탁, 고모삼촌이 맡는 친인척위탁 등 3가지가 있습니다. 만 18세까지 아동을 위탁해 시설이나 그룹홈이 아닌 가정에서 자라도록 하는 것이 큰 특징입니다. 친자로 호적에 등록되는 입양 제도와는 다른 점이기도 합니다.- 전북지역 위탁 가정의 규모는 어떤가요.많은 수는 아닙니다. 도내에는 지난달 기준 총 607세대 803명의 위탁 가정이 있습니다. 유형별로는 일반위탁이 40세대 54명이고, 대리양육위탁 427세대 575명, 친인척위탁 140세대 174명입니다.- 위탁 아동들은 사연도 많을 것 같은데요.이혼이 가장 높습니다. 도내 위탁 아동 803명 중 344명은 부모의 이혼 때문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외에도 사망과 별거가출, 수감, 장애, 혼외출생, 학대방임, 질병, 빈곤 등도 주된 위탁 이유로 꼽히고 있습니다.- 위탁 아동들의 가정위탁 신청과 발굴은 어떤 과정을 거쳐 진행되는지요.보통은 보호자나 가족들이 신청하는데, 마땅히 신청할 가족조차도 없다면, 주민센터에서 요보호 아동들의 사례를 알려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례가 접수되면 가정위탁지원센터는 현장을 방문해 가정환경을 조사한 뒤 보호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아이를 키우고 싶은 가정과 연결을 해주고 있습니다.- 위탁 가정에 돌아가는 혜택이 적다고 들었습니다.제도가 생긴 지 14년이나 됐지만, 가장 뼈아픈 부분이 정부의 지원입니다. 위탁 아동들에게 전달되는 지원금인 양육보조금은 한 달에 15만 원입니다. 종결된 아동에게는 자립지원금 300만 원과 200만 원의 대학 진학금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센터에서는 심리치료와 친가정 위탁가정 지원 등을 하고 있습니다.- 별도의 지원은 없는지요.네 없습니다. 그나마 양육보조금이 지난해 12만 원에서 올해 15만 원으로 한 차례 인상되기는 했지만, 아동이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것과 무관하게 일률적으로 1인당 15만 원이 지원되고 있습니다. 요즘 학생들은 학원 한두 개씩은 다니는데 위탁 가정 현장에서는 정부의 지원금은 현실을 반영하지 못 한다는 불만이 적지 않게 나옵니다. 연령이나 상황에 따른 보조금 확대가 필요해 보입니다.- 도내에 조손가정이 많습니다. 모두 위탁 신청 대상이 되나요?일반적으로 맞벌이를 위한 조손가정은 해당이 되지 않지만, 생계가 어려운 가정들은 위탁 가정으로 신청할 수 있습니다. 주변에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손자손녀를 키우시는 어른신들이 있지만, 아직 제도가 있는지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앞으로 홍보 등을 강화해야 할 부분입니다.- 생면부지의 아동을 맡는 일반위탁을 결심하는 가정들은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도내 일반위탁 40세대를 보면 상당수는 종교적인 신념이 있는 분들입니다. 무엇보다도 아이를 좋아하는 분들이 주로 위탁을 하고 계시는데요. 특히 위탁과 함께 입양도 하고 계신 분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위탁을 하면서 입양을 결정하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분들은 위탁 아동과 함께 생활하면서 내가 장기적으로 힘든 아이를 키울 수 있을지를 확인하고 점검하시는 거죠.- 직원들이 관리해야 할 위탁 가정도 많은 것 같습니다.저희 직원이 10명인데 800여 명의 위탁가정을 관리하려니 쉽지만은 않습니다. 특히 올해부터는 관리 주체가 바뀌면서 새롭게 위탁가정의 관리 체계를 정립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올해 목표는 800여 가정을 모두 방문하는 건데 현재 250가정을 찾아갔고, 지금도 꾸준히 다니고 있습니다.- 위탁가정 현장을 방문해보면 어떤 느낌을 많이 받으십니까.가정마다 각자 다릅니다. 위탁 가정들은 모두가 비슷하게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새 가정을 찾아 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각자 사정이 천차만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접근 방식도 맞춤형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학대 및 방임을 겪은 아동들은 심리치료를 해주고 있고, 건강이 좋지 않은 아동에게는 영양제 등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중점적으로 추진할 사업이 있다면.전문가정위탁을 올해부터 시범적으로 운영할 계획입니다. 특히 학대를 받은 아동들은 일반 위탁을 통해 생활을 하는데, 사실 일반 아동보다는 더 큰 관심이 필요합니다. 일반 가정에서는 이 아이들에게 할 수 있는 부분이 매우 제한적이죠. 그래서 가정에서 학대를 받는 아동들에게 심리치료 등을 제공할 수 있는 부모들을 발굴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주로 직업이 교사나 사회복자사 등인 부모들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힘든 일이 많겠지만 보람도 느끼실 것 같습니다.최근 예비 위탁 부모 가정을 직접 방문하다보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돌아오곤 합니다. 다 자란 자녀들은 취직과 결혼으로 외지로 나가고, 남은 부모는 위탁 아이를 어떻게 키울 지 계획을 세우고 설명을 하는데, 꼼꼼하게 준비를 하고 있는 부모들에게는 감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위탁 아동을 위한 방을 꾸며 보여 준 가정도 있었는데, 우리 지역에도 마음이 따뜻한 천사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향후 계획이 있으시다면.올해 처음으로 세이브더칠드런이 가정위탁지원센터를 맡았습니다. 계약 기간 5년 동안 가정위탁지원센터 업무에 매진할 텐데, 중요한 것은 예비 부모들의 인력풀을 많이 확보하는 것입니다. 현재는 위탁 아동이 나타난 뒤 부모를 찾아 연결하는 방식이라 위탁 가정이 만들어지기까지 시간이 제법 소요되고 있습니다. 예비 부모들을 많이 확보한다면 보호가 필요한 아동들을 빨리 연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시간을 줄일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유혜영 관장은] 21년간 사회복지 분야서 잔뼈 굵어전북가정위탁지원센터 유혜영 관장은 전주 출신으로 우석대 아동복지학과를 졸업하고, 전북대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 석사와 박사과정을 공부했다. 전주종합사회복지관과 국제 구호개발 NGO인 세이브더칠드런 호남지부 등 사회복지 분야에서 21년간 근무했다.유 관장은 현장에서 보호가 필요한 아동들을 만나면 정말 긴박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경우가 많은데 빨리 보호가 되지 않는 모습을 많이 목격한다며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내가 아동을 위해 업무를 잘 처리했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 다음 날 직원들을 모아 새롭게 회의를 한다고 말했다.이어 아동과 청소년에 지원되는 국가 예산이 적다며 앞으로 정부가 아동청소년 정책과 관련해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 기획
  • 남승현
  • 2017.06.12 23:02

[글Pic] 6월 민주항쟁, 30년 전 그날은…

span.introduction { font-size: 45px; float: left; color: #906; line-height: 35px; padding-top: 7px; padding-right: 3px;}1980년 봄에 피로 얼룩진 디딤돌을 놓았다. 7년 후인 1987년 봄에는 피로 범벅이 된 디딤돌 위에 올라서서 민주주의의 대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이 땅의 민주주의는 일제와 그 앞잡이, 군사독재자와 그 주변에서 호가호위하던 무사들, 독재정권과 결탁한 자본가의 위력 앞에서 굴하지 않았다. 시나브로 자랐다. 2016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이어진 촛불혁명으로 더욱 단단해졌다. 2017년 봄, 59 대선으로 탄생한 문재인정부에 거는 국민적 기대가 하늘을 찌르는 분위기다.길가의 잡초 하나도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햇볕과 건조, 온습, 비바람과 동식물이 휘두르는 온갖 물리력을 견뎌 내야 꽃을 피워 벌나비도 불러들일 수 있다. 길가의 잡초 하나도 그럴진대, 사람 사는 사회가 피땀 없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겠는가.오늘날 한반도의 제한된 평화, 민주주의는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싸운 군경과 애국 민주열사 등의 용기와 그에 동참한 수많은 국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우리는 숱한 시련 앞에서 좌절하지 않고 슬기롭게 극복해 나왔다.그 주변에, 혹은 가운데에, 혹은 조금 비켜선 곳에 서 있던 50대 직장인의 기억을 통해 6월을 다시 본다.'애국'과 '정의'가 바로 서는 '나라'한국인에게 6월은 남다르다.현충일과 625전쟁 발발일, 610 민주항쟁기념일, 615남북공동선언기념일 등 역사적 의미가 깊은 날들이 많다. 핏빛과 희망이 뒤엉켜 있다. 애국과 민주, 그리고 통일 대업의 열망이 6월 태양 아래 이글거린다.지난 6일 현충일 추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애국이, 정의가, 원칙이, 정직이 보상받는 나라를 만들어 나가자고 말했다. 대통령이 언급한 애국, 정의, 원칙, 정직은 지난 몇십 년 간 구겨져 왜곡된 채 민중의 삶을 짓눌렀다. 애국애족 업무를 관장하는 부서는 장관으로 대접하지 않았다. 원칙과 정의 편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탄압받았고, 불이익을 받았다. 그 최종 결정체가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비리 형태로 만천하에 모습을 드러냈다. 애국이, 정의가, 원칙이, 정직이 외면받는 나라는 결국 망하고 만다는 절박함이 문 대통령의 언급에 묻어있다.주인공들올해 6월 10일, 1987년 6월에 발발한 610민주항쟁 30주년이 되는 날이다. 6월이 되면, 그 무렵에 대학을 다닌 50대는 마음속에 자화상을 한 번쯤 그려볼 것이다. 소위 운동권에서 뛰었던 대다수 사람은, 정치적 이념을 같이 하든 다소 차이가 있든, 지난 촛불혁명과 문재인 대통령 시대에 큰 자부심을 가질 것이고, 운동권을 외면했던 사람들은 어떤 미안한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적극적 운동권은 아니지만 시국을 고민하고, 때로 참여했던 사람들은 아쉬움이 있을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닌 사람들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그렇다고 그들이 그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인간은 무 자르듯 돈키호테형과 햄릿형으로 양분되지 않는다. 반드시 행동하는 양심만 양심인 것은 아니다. 행동을 주저하고, 실행을 하지 않았어도 관심과 응원과 고심이 일선에서 뛴 운동권, 행동하는 자들에게 큰 힘이 되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지난 런던 테러 당시 노숙자들이 부상자들을 구한 사례처럼, 인간적 양심과 가치를 잃지 않았다면 모두가 우리라는 사실이다.주변인 신세가 된 87년 복학생나는 55세 남성 직장인이다. 또래보다 1년 늦은 82학번으로 대학물을 먹었고, 1984년 2월에 입대, 28개월간 군복무를 했다. 86년 5월에 전역, 어머니를 도와 모내기부터 가을걷이, 추곡수매까지 한 해 농사를 지었다.당시만 해도 벼농사를 지으려면 물 대기가 용이한 논 한쪽에서 모를 길러야 했다. 벼 묘판을 만들려면 일찍부터 서둘러야 했다. 봄은 왔어도 땅속은 그렇게 차가웠다. 우리 농투성이 부모님들은 장화도 신지 못한 채 그런 논일을 해냈다. 그때 대학 친구들 사이에서는 늬 부모는 깻잎 팔아 등록금 내주는데라는 말이 많았다. 개천에서 용 날 수 있는 환경이었고, 부모님들은 허기진 배를 달래가며 벼농사, 깻잎농사 지어 자식 등록금을 주었다. 내 자식만은 이런 힘든 일을 하게 만들지 않겠다. 그들은 자식을 용으로 만들고자 했다.그렇게 한 해 농사를 짓고 1987년 3월 복학했다. 1년간 농사를 지으면서 내 머릿속에 남은 것은 취직에 대한 갈망이었다. 농부는 봄부터 가을까지 고된 노동에 시달린다. 진흙투성이가 돼 모내기하고, 농약 살포하고, 비료 뿌려 벼를 길러낸다. 가을 추수철이 되면 벼 베기와 벼 말리기, 볏단 쌓기, 운반과 탈곡, 수매, 방아 찧기 등 온갖 과정들이 여간 힘들지 않다.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손을 보았는가. 그들의 손은 갈퀴손이다. 그들의 이마와 얼굴에는 산천의 계곡이 박혀 있다. 그리되는 것을 어머니도 나도 원치 않았다.하지만 현실적으로 취직은 헛된 망상이었다. 나 자신을 돌아보니 머릿속에 남은 것이 없었다. 대학 12학년은 흥청망청 보냈다. 군대농사 3년은 공백기였다. 농사짓다가 학교에 돌아온 내 앞에 드리워진 장막은 높고 두껍고 암울했다. 취직의 문을 어떻게 뚫을 수 있단 말인가.취업파와 운동권복학생에게 비친 대학풍경은 크게 구분됐다. 취업파와 학구파, 운동권 그런 식이었다. 운동권은 용기 있는 사람, 나보다 대중과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 의식 있는 사람, 사람다운 일을 하는 부류로 비쳤다. 상대적으로 학구파와 취업파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이기적인 존재로 비치는 듯했다.일제 강점기에 비춰보자면, 운동권은 독립운동가였고 학구파와 취업파는 이를 외면하며 개인적 영달 챙기기를 앞서 했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운동권을 비난하거나, 학구파취업파를 비난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의 처지를 이해했고, 서로를 마음으로 응원했다. 운동권이나 취업파나 순수한 젊은 청춘들이었다. 다만 이른바 짭새들이 심어놓은 장학생들은 적이었다. 우리는 그들을 경계했고, 그들은 자유스럽지 못했다.당시는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비롯해 <해방전후사의 인식>, <노동의 철학> 등 대학가 의식화 필독서가 많았다. 나도 몇몇 도서를 읽었다. 얼마 전 새롭게 주목받은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등은 읽지 않으면 덜떨어진 놈, 머릿속이 텅 빈 놈 쯤으로 인식되는 분위기가 있었다. 적지 않은 친구들은 그런 소위 의식화 도서를 읽었고, 동아리 활동에서 시대 상황에 대한 자극을 받는 것 같았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소위 참여문학은 관심이었다. 시와 소설은 감성과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사람의 진솔한 삶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언어의 마술사가 돼 기교를 잘 부려도 그게 훌륭한 문학작품이 되는데 한계가 있다는 생각도 가졌다. 역사가만 역사가인 것은 아니다. 문학인도, 기자도 역사가다. 하지만 모두가 가치 있는 역사 기술자는 아니다. 그런 차원이다."형들은 부끄럽지도 않아요!" 87년 봄, 새 학기 대학 현장은 심상치 않았다.전두환이 민의를 제대로 읽지 않고 413 호헌조치를 말했을 때 학내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져 갔다.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거나 대열을 맞춰 학내를 오고 가며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쳤다. 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 씨가 치안본부에 잡혀가 고문 도중 사망한 사건,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당국의 거짓말 탄로 등으로 독재 정권에 대한 반발이 거세게 일던 상황에서 전두환이 기존 간접선거를 고수, 독재정권을 이어가겠다는 야수의 이빨을 거침없이 드러내자 전국이 발칵 뒤집힌 것이다.취업이 절실했지만 머릿속이 비어 있던 촌놈에게 어지러운 시국은 싫었다. 매일 학교에 가지만 데모에 제대로 참여도 하지 않고 어영부영하는 것이 부끄러웠다. 세월은 흐르는데 공부할 분위기가 안 되니 화가 났다. 어지럽고 절박한 시국이었지만, 데모는 운동권이나 하는 것쯤으로 자기 합리화하고 생활하는 부류들이 많던 시절이다. 나도 그런 부류였다. 그렇지만 시국 상황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어느 날이다. 그 날이 6월 10일이었고, 그게 역사적인 날이 되었다는 것을 나는 나중에야 좀 더 확실하게 알았다. 방송 뉴스와 당일 아침 신문, 그리고 학교 대자보의 내용들이 학교 앞 경찰력과 학교 안 시위대 세력에 영향을 줬다. 6월 9일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치던 연세대 시위 현장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고 이한열 씨가 쓰러졌고, 결국 숨졌다. 시위대는 더욱 강렬해졌고, 경찰력의 대응도 강했다.어느 날, 강의실에 같은 과 여학생이 나타났다. 그는 남원이 고향이었는데 운동권이었다. 하얀색 티셔츠 차림의 그 학생의 얼굴은 땀으로 가득했고 크게 상기돼 있었다. 목소리에는 분노가 서렸다. 그 학생의 표적은 나를 비롯한 복학생 무리였다. 30년 전 일이라 정확히 기억할 수 없지만, 그는 말했다.형들은 대체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이럴 수 있는 거예요? 부끄럽지도 않아요?그렇게 호통치고선 나가 버렸다. 그랬다. 우리는 비겁했다. 이 땅이 독재정권에 유린당하고, 동료 학생이 경찰 직격탄에 맞아 죽어 가는 엄중한 시국이다. 시와 소설을 놓고선 한가롭게 참여문학이 어떻거니, 순수문학이 어떻거니 갑론을박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독재자들 밑에서 취직해 무슨 호의호식하겠다는 것인가.헌신과 희생의 산물양심은 있었다. 미안했다. 우리는 그 길로 강의실을 나와 시위대열에 합류했다.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며 학내 시위에 동참했다.우리 인문대 시위대는 정문 쪽으로 진출했다. 최루탄이 뿌옇게 뒤덮였고, 격렬한 투석전으로 정문을 전후한 중앙대로 등에는 깨진 돌멩이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저쪽은 헬멧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학생 시위대는 맨 몸이었다. 몽둥이든, 최루탄이든 스치기만 해도 중상이다.우리도 투석전에 가담했다. 몇몇은 보도블록을 캐내어 던지기 알맞은 크기로 깼다. 어떤 학생들은 그 돌멩이를 다른 학생들에게 공급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야, **가 맞았다. 직격탄에 맞았어.나는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쓰러져 있었다. 나는 급히 그쪽으로 달려갔고, 우리는 나무숲 뒤로 몸을 숨겼다. 전경이 발사한 최루탄이 허벅지를 타격했는데, 바지가 찢어지고 피가 철철 났다. 그이의 허벅지에는 지금도 상처가 남아 있다. 그렇게 시위대에 참여한 나는 충경로 집회 등에 몇 번을 더 참가했다. 우아동 전주역 앞 시위 등에도 참가했다. 그때마다 청바지를 입고 하이바를 쓴 경찰, 백골단은 두려운 존재였다. 체포조인 그들은 시위대가 달아나면 쫓아가 가격하고 체포했다. 나는 몇 번이나 잡힐 위기에 처했지만, 골목과 옥상 등을 이용해 피할 수 있었다. 재수 없게 붙잡힌 시위대는 그들이 휘두르는 곤봉에 크게 두들겨 맞았다. 멀리 숨어서 그런 장면을 지켜보노라면 등골이 오싹했다.6월 29일 민정당 대표이던 노태우가 대통령 직선제 등을 골자로 하는 629선언을 하면서 나의 시위대 참여도 끝났다. 그날 나는 도서관 한쪽의 사무실 TV 화면에 비친 노태우의 회견을 지금도 기억한다. 많은 학생은 안도했고, 뿌듯해했다.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박종철, 이한열 등 수많은 희생, 피와 땀으로 그해 10월 헌법이 개정됐다. 1987년 10월 12일 국회를 통과한 제9차 헌법개정안이 10월 27일 국민투표에 부쳐졌고, 확정된 것이다. 나는 그날 아침 일찍 투표하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지난봄에 치열하지 못했기에 무임승차하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음은 떨칠 수 없다.대통령 직선제, 임기 5년 단임 등을 골자로 한 제9차 헌법개정은 민정당 세력으로서도 늦출 수 없었다. 전두환 권력을 유지해 나가기 위해선 노태우의 대권을 성공시켜야 했고, 노태우가 629선언 약속을 착실히 이행해 나가는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 주어야 했다.아쉽게도 그들의 전략은 맞아떨어졌다. 15년 만의 국민 직접선거에서 군사정권의 일당인 노태우가 보통사람들의 탈을 쓰고 당선된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6월 민주항쟁은 절반의 승리가 됐고, 그 5년 후에도 국민은 군사정권의 후예들과 결탁한 세력을 지지했으니 안타까울 뿐이었다.어쨌든, 87년 6월 민주항쟁은 결국 꽃피웠다. 운동권의 최일선에서 시위를 기획하고, 실행한 학생들이 애쓴 결과였다. 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헌신하지 않았다면 이 땅의 민주화는 지금도 먼 이야기일지 모른다.이제 6월 항쟁의 결과물인 87년 헌법을 뛰어넘자는 여론이 끓는다. 정세균 국회의장이 의장 취임부터 개헌을 챙기고 있고, 문재인 대통령도 개헌을 공언했다. 표면적 출발은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 등을 근본적으로 손보자는 것이지만, 30년이 된 헌법인 만큼 이제 새 시대에 걸맞은 가치관이 배어 있는 새로운 헌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을 계기로 혹독했던 독재의 잔재들이 제거됐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 기획
  • 김재호
  • 2017.06.10 23:0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⑪ 세월을 품은 피바위와 요강바위, 자연이 빚어낸 세월의 흔적…'지역이야기 꽃' 피우자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의 손길이 더해지며 세상 풍경은 십 년이란 말이 무색하게 더 빠르게 변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우리 주변에서 묵묵히 세월을 견디며 함께하는 사물들도 많다. 그렇기에 무언가 독특한 모양의 돌이나 바위를 보면 우리 조상들은 특별한 이름을 지어 부르며 그만의 이야기를 만들어주었다. 동네 어귀 근처 혹은 길가에 남아, 어떤 것은 풍자로 웃음을 짓게 하고, 어떤 것은 소원을 그리고 안타까운 사연이나 슬픔을 품으며 우리 곁을 지켜왔다.△남원시 인월면 피바위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의 바위가 그렇다. 달을 끌어낸다.는 뜻의 인월(引月)이라는 지명과 붉은빛을 띤 바위라는 뜻의 혈암(血巖) 곧 피바위라는 이름에는 그만의 전설이 전해진다. 고려 말 3000여 명의 왜구가 지리산 일원에서 노략질을 일삼을 때, 조정에서는 토벌을 위해 활 쏘는 실력이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신궁 이성계를 보낸다. 이성계는 기습을 계획하고 황산에서 기다렸지만, 적장 아지발도는 황산에 이르기 전 진지로 되돌아가고는 했다. 고려 침략 전 누이로부터 황산을 조심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경고를 받았던 것이다.이성계는 꾀를 내어 할머니 한 명을 아지발도에게 보냈고, 할머니는 이곳에 황산이라는 곳은 없다.고 거짓말을 해 그가 안심하고 황산에 이르게 하였다. 작전에 성공한 이성계는 어두운 밤에도 활을 쏘기 위해 달이 뜨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드렸고, 기도에 화답하듯 그믐밤임에도 밝은 보름달이 떠올라 화살이 적장의 목구멍을 꿰뚫었다. 이때 람천에 있는 바위에 적장과 왜구들이 흘린 붉은 핏자국이 남아있다 하여, 이 지역을 인월로 바위를 피바위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피바위의 붉은 흔적은 이성계의 호국 전설보다도 훨씬 이전의 세월을 품었을 수 있다. 철기시대를 이끈 지역의 산물로 더 거대한 역사를 말이다.기록을 보면 설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이성계의 왜구토벌 활약 상황이 중심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 중기에 기록된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는 운봉(雲峯) 팔량티(八良峙)에 피바위[血巖]가 있는데, 이것은 태조가 왜장 발도(拔都)를 쳐 죽인 곳으로 돌 위에 얼룩진 피가 지금까지 생생하다. 임진년에 바위에서 피가 맺혀 흐르고, 왜적이 왔으니 괴이한 일이다.고 기록하고 있다.△『연려실기술』에 기록된 피바위에 대한 내용 원문바위에 관한 전설은 기록만이 아니라 인근 마을 주민 구전을 통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특히 피바위 위에서 음식을 먹으면 건강한 기를 받을 수 있으며 바위가 잡귀를 물리치고 우환을 막아 준다는 속설 때문에 바위 부스러기를 따로 보관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전해져오던 피바위의 전설이 최근 과학적 분석 및 여러 지질학자의 검증을 통해 그야말로 전설에 불과한 것으로 밝혀졌다.연구에 따르면 피바위의 붉은빛은 과거 우리나라를 침략한 왜구의 피에 물든 것이 아니라, 일반 바위보다 높은 바위의 철분 성분이 오랜 시간 물에 닿으면서 산화해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어떤 것은 과학적 검증보다 오랜 세월이 품은 이야기의 힘이 더 센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그 사연을 그대로 지역의 자산으로 간직함이 좋을 듯싶다.피바위로부터 멀지 않은 구간, 전라북도 순창에는 섬진강을 호위하듯 들어선 장군목이 있다. 주변 산봉우리가 신비롭게 웅장하게 마주 선 장군대좌형(將軍大坐形) 형상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장구목으로도 불리는 이곳에는 수만 년 동안 섬진강 물살이 다듬어 놓은 기묘한 바위들이 약 3km에 걸쳐 드러나 꿈틀거리며 물결치는 형상을 지니고 있다. 그중에서도 강물 중심 바위 중 툭 도드라져 가운데가 움푹 파인 바위 하나가 눈길을 끈다. 바위 가운데가 파인 모습이 마치 요강 같다고 하여 이 바위에는 요강바위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순창군 장구목 요강바위요강바위는 둘레 1.6m, 깊이 2m, 폭 3m, 무게 약 15t으로 움푹 파인 외형이 강한 인상을 준다. 그 파인 공간은 사람이 들어갈 만큼 커서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5명이 토벌대를 피해 몸을 숨겨 목숨을 건졌다는 일화가 있으며, 아이를 못 낳는 여인들이 요강바위에 들어가 지성을 들이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전설이 내려올 정도이다. 독특한 외형과 이름만큼이나 역사의 아픔과 개인의 소망까지 소중히 간직한 자연물이 아닐 수 없다.이러한 유명세에 억대의 비싼 가격까지 매겨진 탓에 1993년에는 중장비까지 동원한 도석꾼들에 의해 바위가 도난을 당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요강바위를 내가기 위해 도석꾼들은 오랜 시간을 들여 길을 낸 탓에 길을 정비하는 인력으로만 알고 주민들도 상황을 잘못 짐작했다 한다. 하지만 다행히 1년 6개월 만에 마을주민들의 노력으로 되찾아 와 지금의 자리에서 지역의 상징이 되고 있다.△요강바위 주변 지형이 드러난 여지도의 순창군 일부사시사철 그 모습이 변하지 않는 피바위와 요강바위 같은 바위의 모습들은 긴 시간을 통해 자연이 빚어낸 세월의 흔적으로 우리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짧은 인간 생애 속에서 긴 시간 동안 변화를 거듭해오며 지금의 모습을 지키고 있는 바위를 바라보면 자연과 시간에 대한 경이로움을 품게 되는 듯하다. 유독 바위에 관해 여러 전설과 이야기들이 전해지는 것은 그와 같은 이유에서다.지난 5월에는 임실의 사라졌던 동자바위가 한 독지가에 의해 복원되었다. 복원 이후 마을을 찾아가 보니, 되살아난 동자바위가 어르신들 틈에 어울려 능청스런 웃음을 짓고 있었다. 지역 이야기는 사람들의 삶의 흔적에 따라 끊임없이 만들어지며 또 사라지기도 한다.브뤼셀의 상징으로 유명한 오줌싸개 소년(Statue of the Pissing Boy)도 프랑스 루이 15세가 약탈해 간 후 다시 되돌려졌다는 일화를 지낸 채 도시를 상징하며 사랑받고 있다. 사라졌을지라도 지역 이야기가 품었던 흔적을 발굴하고 다시 살리는 것이 지역만의 정체성을 이어가는 일이라고 믿는다.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것보다, 지역에 구전되거나 기록에는 남아있지만, 사라진 흔적을 발굴하여 복원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 오랜 세월 소박한 모습으로 자생했던 식물들도 다시 지역의 이야기와 더불어 꽃과 나무로 피어나게 해야 한다. 이것이 지역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긴 여정이 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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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6.09 23:02

[철의 궤도: 전라선 철길 답사기 ⑥ 전주의 옛 흔적] 철길은 아스팔트가 덮고, 역 자리는 무엇이 덮었나

p.introduction:first-letter { font-size: 45px; float: left; color: #906; line-height: 35px; padding-top: 7px; padding-right: 3px;} 자동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넓지도 않은, 기껏해야 2차선밖에 안 되는 도로를 몸집 큰 화물차들이 쉴 새 없이 오가고 있었다. 건널목 차단기는 올라가 있었다. 북전주역에서 빠져나온 철길은, 한 가닥은 아스팔트의 강을 가로질러 이제는 흰 꽃잎을 다 떨어내 버린 이팝나무들 사이로 뻗었고, 또 한 가닥은 한일시멘트 공장 방향으로 누웠다. 지난 5월 26일, 취재팀은 전주 팔복동을 다시 찾았다. 그곳에서부터, 전주를 관통하던 옛 전라선 철길의 흔적을 더듬었다. 철길 걷힌 자리엔 자동차가 이게 원래 철길 자리여. 텃밭에 바가지로 물을 뿌리고 있던 정운오 씨(76)는 바로 앞을 지나는 4차선 도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북전주역 앞에서 추천까지 그대로 이어지는 신복로다. 옛날 철길의 모습이 어땠는지 묻자, 정 씨는 풍경이랄 게 뭐 있어라면서 당시 모습을 생생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예전엔 여기가 (손을 높이 드는 시늉을 하며)이렇게 높았거든. 철길이 그 위로 지나가고. 저쪽 버스 서 있는 데 있잖여? 거기 조금 못 미쳐서 굴다리가 있었어. 동네로 들어가는 길, 굴다리. 높이 돋운 노반 위에 누운 철길은 마을 사람들에겐 일종의 장벽이었다. 굴다리가 있긴 했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않았을 터. 정 씨도 종종 철길을 넘어 다니곤 했다고 말했다. 1981년에 전라선 철도가 전주시 외곽으로 옮겨지고, 과거 철길이 차지하던 공간은 도로가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신복로 일대는 자동차 공업사가 밀집해 있고 폐차장과 운전면허학원도 찾아볼 수 있는, 자동차와 관련한 종합 패키지와도 같은 지역이다. 정 씨의 텃밭을 뒤로하고서 반듯한 길을 따라 쭉 걷자 추천이 나타났다. 추천이라고 하면 약간은 생소한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전주천과 삼천이 하가지구 즈음에서 만나 한 몸이 되는데, 그때부터는 추천이 된다. 인근에 추천대라는 누각이 있고, 추천대교가 가로지른다. 봄철이면 하안이 벚꽃으로 물드는데, 그런 벚꽃길이 그대로 쭉 만경강 둑방길로 이어져 춘포, 목천포 어드메까지 장관을 이룬다. 옛 철길은 신복로 자리로 흘러 내려와서 추천대교 바로 위를 지났다. 아쉽게도, 철교가 있었던 흔적은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그 플랫폼엔 창포 향도 났을까 추천을 건너면 이제는 철도의 자취를 찾아보기가 더욱 어렵게 된다. 권삼득로와 기린대로 사이 어디쯤을 가로지르는 직선인데, 블록마다 도로(라기보단 골목에 가까운 길)가 끊어지는 탓에 어떤 도로가 정확히 일대일로 옛 철길과 대응한다는 식으로 결론을 짓긴 어렵다. 그래도 역의 흔적은 금방 알아볼 수 있다. 덕진 시외버스 간이터미널(정류장), 덕진광장이 바로 옛 덕진역의 흔적이다. 마침 파란 하늘과 대조되는 빨간 시외버스가 정차 중이었다. 버스는 군산대야익산 방향이 대부분인데, 여기서 충남 보령이나 충북 청주, 강원 강릉 등지로 가는 버스도 탈 수 있다. 덕진역은 전라선의 전신이자 이리-전주 간 경편철도의 후신인 경전북부선이 표준궤로 개축된 1929년에 개업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향토역사학자 이용엽 선생의 부친인 故 이상래 선생의 1916년 5월 21일 자 일기에는 이리-전주 간 경편철도가 임시 운행돼 운동장 인근의 덕진역을 통해 이리 출신 관중이 운집해 있었다고 적혀 있다. 또 1942년 발간, 2009년 국역 출간된 <전주부사>에는 경편철도는 전주이리 양 역 사이 15.56마일의 협궤 증기철도로, 전주평야를 대략 남북으로 종단하며 전주 방면으로부터 덕진동산삼례대장 및 구이리(동이리) 5개 역을 연결했으며 선로의 위치도 지금과 커다란 차이가 없었다고 기록돼 있어, 이를 보면 이미 경편철도 시절에도 덕진역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의 덕진터미널이 그렇듯 당시에도 전북대 통학생들이 주로 이용했지만, 60~70년대엔 또 단오 무렵이면 그야말로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창포가 많이 자라는 덕진연못의 물로 머리를 감고 몸을 씻으면 머릿결이 고와지고 피부병이 낫는다는 소문이 널리 돌던 때였다. 철도통계연보에 따르면 폐역 전해인 1980년의 덕진역 이용객 수는 88만 1973명이었다. 그해 전라선 역 가운데선 이리, 전주, 순천, 남원, 여수에 이어 여섯 번째다. 마지막 해인 1981년의 통계를 보면 위치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1981년 5월 폐역 직전까지 덕진역 이용객 수는 39만 1341명이었고, 덕진역의 역할을 그대로 이어받아 5월 25일 문을 연 송천역의 연말까지의 이용객 수는 5만 1608명이었다. 기간은 송천역이 두 달여가 긴데도 이용객 수는 8대 1 수준, 덕진역의 완승이다. 그랬던 덕진역이 1981년 폐쇄되고, 이 자리가 1987년 교통광장으로 지정된 뒤 90년대부터는 시외버스가 이곳에 멈춘다. 또 일부는 주차장이 된다. 이후 시민광장 조성 사업을 거쳐 2010년에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바뀐다. 덕진을 지난 철길은 금암동 전북일보사 뒤쪽 골목을 지나 금암광장으로 향했다. 물론 전북일보사 건물은 1984년에 지어졌으니, 철길과 이 건물이 마주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금암광장 즈음부터는 기린대로를 따라가면 된다. 정확히 그 자리가 철길이 있던 자리다. 지금은 건산로라는 이름의 도로가 그 위를 덮고 있어 낯을 볼 수 없는 모래내(건산천)를, 철도는 다리로 건너 그대로 직진한다. 진북동을 가로질러, 철길은 노송동으로 들어선다. 대로와 광장과 전주역 전주시청 건물은 볼 때마다 새롭다. 풍남문의 모양을 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콘크리트를 아낌없이 쓴 현대 건축물 구조 가운데에 한옥 기와지붕이 얹혀 있다. 좋게 말하면 신-구가 조화를 이루는 건물이라 하겠고, 좀 나쁘게 말하면 어색하게 뒤섞인 모양이라 하겠다. 그만큼 시민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갈린다. 일단 전문가들 눈에는 부정적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지난 2013년 동아일보와 월간 Space가 공동으로 건축 전문가 100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전주시청사는 최악의 현대건축 19위에 오르는 불명예를 얻었다. 당시 전문가들은 전통이라는 키워드가 강박관념으로 이어져 빚어진 변종이라고 혹평했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이렇다. 현대 도시로서 쌓아 올린 구조 위에서 제 나름대로 전통을 해석해 공존하는 길을 걷고 있는, 전주의 그 근현대사를 몸에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전주다, 이렇게 주장할 수도 있지 않은가. 시청사 앞 노송광장은 전주시청사가 들어서기 전부터 광장이었던 곳으로, 큰일이 있을 때 전북도민이 이곳에 모여 목소리를 내곤 했다. 이를테면 1980년 5월 15일 오후 2시, 이 광장에는 1만여 명이 모여 연행 학생 석방과 계엄령 철폐 등을 외쳤다. 광장 한쪽에는 지난 2014년 518 구속부상자회 전북지부가 세운 1980 민주화 운동 집결지라는 글귀가 적힌 비석이 이 장면을 기리며 서 있다. 518 민주화운동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된 이 자리. 1980년 당시만 해도 광장 뒤에 서 있던 건물은 전주시청사가 아니라 전주역이었다. 조선총독부는 1927년 10월 1일, 이리-전주 간 경편철도를 매수해 국철화한다. 이때부터 이 철도의 이름은 경전북부선이 된다. 762mm 협궤를 그대로 쓰던 경전북부선은 1929년에는 1435mm 표준궤로 개축되고 일부 구간이 이설되는데, 상생정(현 태평동)에 있던 전주역사는 이때 노송정(노송동)으로 옮겨졌다. 새 역사는 주민 요구에 따라 기와지붕을 얹은 한옥으로 지어졌다. 경전북부선은 여기서 남쪽으로 연장된다. 1931년에는 남원, 1933년에는 곡성, 1936년에는 순천까지 이어졌고, 이미 개통돼 있던 순천~여수 구간이 연결되며 드디어 완전체가 된다. 전라선이 된 것도 이때다. 다시 동남쪽으로 발을 뗀다. 지금은 호텔 르윈(옛 리베라 호텔)과 한옥마을 공영주차장 등이 들어서 있는 옛 전주여중전주여고 옆을 스쳐 지나가, 오목대 구름다리 밑을 지난다. 언덕배기라 그런지, 열차가 이곳에만 오면 속도가 느려져서 달리는 열차에서 그냥 뛰어내리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한벽루 옆 터널을 지나, 철길은 전주천을 따라 흘러갔다. 숨길 또는 전주 한옥마을 둘레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길이다. 그렇게 승암사와 치명자산 성지, 대성동과 색장동을 거쳐 전주를 빠져나간다. 이즈음에서 흔적은 지난 2011년 복선전철로 새로워진 전라선 철길과 재회한다. 만경강을 건널 때만 해도 주변에 펼쳐져 있던 평야는 보이지 않고, 이제는 산이 좌우에 늘어선다. 권혁일 기자 태평동에 겹친 세월 입구에 들어서자, 널따란 비빔밥 상징원에 금방 살아 숨 쉴 것 같은 소 동상이 취재진을 반겼다. 공원 안으로 들어가 정자에 올라서니 좌우로 굴뚝 모양 조형물이 늘어서 있는 게 눈에 띈다. 일직선으로 놓인 전주역 터 상징물까지, 모두 태평문화공원의 풍경이다. 전주역 터 상징물을 가까이서 살펴보니 몇 미터쯤 되는 철길의 끝자락에는 작동하지 않는 완목신호기와 수동 전철기(선로전환기)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옛 시절을 추억하듯 꿋꿋하게 서 있다. 짤막한 이 레일에는 쓸쓸함마저 감돈다. <전주부사>의 통계에 따르면 국철화 직후이자 노송동 이전 직전인 1928년, 전주역의 승차 인원은 18만 9022명, 하차 인원은 20만 6912명이었다. 이때까지는 협궤 철도였기 때문에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전북지역의 교통 운수에 공헌했으며 영업성적 또한 매우 우수해 경영 측면에서도 적잖은 이윤을 올렸다고 한다. 공원의 담 너머에는 바로 고층 아파트단지가 조성돼있다. 어린아이들이 바닥분수에서 솟아오르는 시원한 물줄기를 만지며 재잘거리는 소리가 있었다면 더욱 좋았을 뻔했다. 1921년 7월 조선연초전매령이 공포되고 고사동 일대에 전주전매지국이 문을 열었다. 이후 태평동 이 자리에 연초 공장이 자리잡는다. 연초의 경작, 제조, 판매 등 사무를 관장하던 이곳은 독립 이후 전주지방 전매지국 , 전주지방 전매청, 전매청 전주연초제조창으로 개편된다. 창설 이후 80년이 넘도록 움직이던 연초제조창은 1980년대 후반 이후 기계화 시설이 도입되면서 노동자의 수가 급격하게 줄고, 2002년에는 문을 닫는다. 이후 2008년 이 부지가 택지로 개발되면서 아파트와 문화공원 등이 조성되면서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태평문화공원은 그러던 2008년 12월, 안득수 전북대 조경학과 교수가 설계한 공간이다. 공원 설계개념비에 따르면 최초의 전주역과 공북정이라는 정자가 자리했던, 그리고 연초제조창이 오랫동안 지켜온 자리로서의 태평동의 역사가 이 공간에 담겨 있다. 여기에 공원 뒤쪽에 들어서 있는 고층 아파트까지, 이 넓지 않은 공간에 전주의 근현대사가 그렇게 쌓여 있는 셈이다. 김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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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6.09 23:02

[고창 신림면 입전마을] '돌담에 속삭이는 햇살같이' 주민들 한마음으로 쌓는 행복

가만히 서 있으면 머리에 까치 앉어. 이놈의 것, 징허게 말을 안들어.초여름 따까운 햇볕이 내리쬐는 마을 골목길, 예닐곱 사람들이 돌담을 쌓고 있다. 누구는 돌을 헐고, 누구는 돌을 나르고, 누구는 담장 뽐새를 갸늠해보고, 누구는 돌을 쌓는다. 누구 하나 게으름피우지 않고 각자 제 할 일들을 한다. 그래도 칠순을 훌쩍 넘긴 고광필 씨는 불만인 모양으로 다그친다. 다그치는 말 뽐새가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자 내뱉는 농담 섞인 추임새인지라 마을 사람들은 웃어 듣기도 하고 무시해버리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일하는 맛도 나고 흥겹다.△몇몇이 의기투합해 시작요새 참 보기 드물게 신바람 나 울력하는 사람들은 고창군 신림면 입전마을 사람들이다. 마을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불과 1년 전부터다. 뒤로 방장산과 용추폭포가 있으며 경관이 아름다운 농촌마을인데 옥의 티랄까, 안타깝게도 고압선 송전탑이 마을을 가로질러 간다. 그것도 선로가 두 개씩이나 된다. 하나는 영광 원자력발전소에서 뻗쳐나와 대전으로 가는 마을 앞 송전탑이고, 다른 하나는 마을 뒷산 중턱으로 이어지는 KTX 송전탑이다.마을 어르신들이 왜 그대로 수용했는지 모르겠어요. 원래 흥덕 쪽으로 지나게끔 계획되었다는데 이쪽으로 삥 돌아가고 있거든요. KTX 철탑은 녹색으로 칠해놔서 눈에 확 들어오지는 않아 그나마 나은데.이 마을 출신으로 1년 전에 귀향한 이장 이종만 씨의 말이다. 약속이라도 했듯이 이장보다 보름 일찍 귀향한 이도 있었으니 그이는 마을 총무를 맡고 있는 허예실 씨다. 이들이 동시에 귀향함으로써 마을에 일이 나기 시작했다.토박이로 살아오는 고광필 씨에게는 마을의 변화를 위해 어떻게 좀 움직였으면 하는 마음이 늘상 있었는데 나이도 먹고 하니 추진 동력이 없던 차에 쌍피로 들어온 이 두 사람이야말로 천군만마인 셈이다.△자발적으로 움직이는 마을 사람들마을은 참 좋은 데 철탑 때문에.예전에는 마을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꼭 이런 말을 내뱉곤 했다. 그러나 이따금씩 고향을 방문하는 출향민들은 1년 동안의 변화에 놀라곤 한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고광필, 이종만, 허예실 씨 등 동네사람들이 마을의 변화를 고민하면서 문화사업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곧바로 색깔있는 마을 만들기 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다. 홍수미, 신용운, 진교돈, 정향숙, 신용엽 씨 등도 입전마을 추진위원들이다. 50대의 젊은 사람들이 주축이다.이들은 무엇보다도 땅만 파면 나오는 마을의 돌 자산을 이용해 마을 담장 전체를 돌담으로 쌓기로 했다. 오래 전부터 마을은 돌담 투성이였고, 1970년대 새마을운동 때 안길을 넓힐 때도 브로크담을 쌓지 않고 돌담의 전통을 이었다. 그러던 것이 돌담이 점차 사라지게 되자 마을의 키워드로 돌담문화를 생각한 것이다. 돌담 자체도 중요하지만 돌담을 쌓을 수 있는 기술의 전수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야 나중에라도 더 쌓거나 보수할 일이 있으면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쌓을 수 있단다. 돌담 쌓기의 노하우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 고광필 씨다.잘 모르는 젊은 사람들은 돌담을 쌓아가면서 면 맞추는 데에만 신경을 쓰는데 각을 맞춰야 혀, 각을. 45도로 마주치게 각을 맞추면서 쌓아야 돌들이 서로 맞물리면서 무너지지 않지.△돌담문화는 갓밭등의 얼굴돌담에 속삭이는 햇살같이. 마을회관에 걸려 있는 현수막 글귀다. 올해 농어촌희망재단에서 주관하는 농촌지원사업을 추진하면서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 표현하였다.돌담문화는 이제 입전마을의 얼굴이고 상징이 될 것이다. 이 마을의 돌담문화는 마을 사람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만들어지고 있는 현재진행형이다. 올해에 계속 돌담을 쌓아갈 작정이다. 마을 사람들은 한창 농사일에 바쁜 농번기인데도 마다 않고 나와서 함께 울력을 한다. 자기일이 있어서 못 나오거나 늦으만치 나오면 서로 불편할 정도로 군시렁대는 게 마을 풍경의 한 모습이기도 한데, 입전마을 사람들은 그러지 않고 서로 편하게 대하며 협력하는 마음 씀씀이가 인상적이다.이 날도 진교돈 씨는 마을 앞 모내기 논일을 도와주다 뒤늦게 참여했다. 반갑게 맞이한다.이들의 마음은 돌담을 따라 마을 전체의 일로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뒷산에서 구절초를 뽑아다 심고, 어떤 어르신은 자기네 집의 작약을 옮겨주고, 또 어떤 사람들은 집에 있는 채송화나 봉선화 씨들을 심어주니 그야말로 마을정원이 이쁘게 조성되고 있다.△다채로운 사람들 모여한 300미터되는 마을 진입로가 지금은 넓잖아요. 옛날에 넓혔지요.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땅주인들이 야금야금 파먹으며 좁아졌어요. 안되겠다 싶어 4명이서 땅 주인들을 설득하여 어렵게 어렵게 넒은 길로 다시 복구시켜놨지요. 한 5년 전쯤의 일이에요.이장의 말이다. 설득은 마을공동체의 필수적인 과정이다. 애로사항도 많고 마을 사람들이 다 내맘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는 와중에 마을 경관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도 변해간다. 입전마을 사람들의 돌담문화는 상부상조의 미덕으로 쌓아가고 있다. 사소한 것이라도 누구네집에 도와줘야 할 일이 있으면 당장 함께 해결해준다. 각자도생으로 자기일 하느라 허덕이는 게 농촌의 또다른 풍경인데도, 이 마을 사람들은 상생의 미담으로 서로 끈끈하게 연결하고 있다.1970년대에 30여 가구 되던 마을이 지금은 16가구다. 그나마 토박이집은 다섯집에 불과하다. 외지에 나갔다 들어온 집이 네집이고, 연고없는 귀촌귀농자 집이 일곱집이다. 귀농귀촌자가 비중이 높다. 그리고 대부분 논농사를 하지만 사람들이 다채롭다. 도공, 그래픽디자이너, 곤충사업자, 경찰, 특수작물 농가, 포크레인 기사, 그리고 책이 있는 풍경의 집주인 문학평론가 등, 그럼에도 이들은 잘 뭉친다. 대보름날 행사에는 출향민들이 내려와 함께 논다.△너무 행복하고 좋아요돌담을 쌓으면서도 마을 사람들은 내년에 5억 원짜리 창조적 마을만들기 사업을 따오려고 주민 역량강화를 위해 현장포럼 활동에 몰두하고 있다. 방장산 자락에 자리잡은 마을은 돌 외에도 용추폭포, 전통우물, 열녀비 등 마을자원이 풍부하다. 산간에는 절도 있고 용하다는 무당집도 있다. 장성으로 넘어가는 파릿재의 전설도 마을의 콘텐츠다. 옛날에 우시장 가는 산길에 도적들에게 많이 털리고 전쟁 통에는 민간인들이 학살당해 소나무가 빨갛게 자란다는 썰도 전해진다.입전(笠田)은 토박이말로 갓밭등이다. 갓밭등에 동네 보배가 있다. 이장이 자랑스러워 하는 별칭이다. 허예실 씨를 두고 하는 말이다. 허 씨는 동네 사람들을 다 오빠라고 부르는 것 같다. 심지어는 스무살 정도 나이차가 나는 고광필 씨에게도 거침없이 오빠라 한다. 친구 오빠이기 때문이란다. 붙임성 있고 마을일을 잘 하는지라 오빠들도 좋아한다. 컴퓨터 그래픽 기능을 가지고 있는 허 씨는 타일도 전문가여서 회관 담장에 타일벽화를 할 계획이다. 이게 다 돌담문화의 씨줄날줄이다.마을이 너무 변했어요. 돌담 쌓는 게 행복하고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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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6.07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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