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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혜수 교수의 문화산책] 루이 14세 ④ '사기캐' 초상화와 말년

△사기캐 초상화 루이 14세는 평생 700여 점의 초상화를 제작하였는데, 그의 그림을 보면 그가 얼마나 초상화에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초상화에는 프랑스 왕가의 색상인 푸른색 바탕에 왕가의 문양인 금색 백합으로 무늬 놓아진 화려한 겉감과 고가의 하얀 담비 털 안감으로 제작된 대관식용 망토로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 밖에도 왕관, 목걸이, 왕홀, 샤를마뉴 대제(서로마 제국의 황제)의 검은 절대왕권을 상징하는 레갈리아(regalia)를 적절하게 사용되었다. 성령기사단의 훈장으로 만든 목걸이, 푸른색 방석 위에 ‘정의의 손’, 기둥에 새겨진 율법의 신 ‘테미스’의 칼과 저울은 왕의 정의와 왕권신수설을 뒷받침해 주는 장치로 루이 14세의 태양왕 이미지를 극대화하였다. 루이 14세라는 VVIP고객의 원츠(wants)를 과하게 반영한 이아생트 리고(1659~1743)의 초상화는 원래 스페인에 간 손자 앙주 공작에게 선물하려고 제작되었지만, 루이 14세의 마음을 사로잡아 베르사유 궁 아폴론방에 남게 된다. 평민 출신 이아생트 리고는 이 초상화를 통해 귀족 작위를 받고 궁정화가가 된다. 유럽 최고 군주의 궁정화가라는 타이틀 때문일까? 그의 실력에 대한 입소문은 삽시간에 유럽 왕족과 귀족들에게 퍼져나갔고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의뢰가 쇄도하여 그의 아뜰리에는 문정성시를 이룬다. 요즘으로 치면 증명사진 맛집이라고나 할까? △루이 14세의 빛과 그림자 집권 후, 태양왕으로 군림하며 화려한 삶을 살아간 루이 14세의 말년은 어땠을까? 태양이 저물 듯이 태양왕도 저물어 갔다. 베르사유 궁전 건축과 끊임없는 전쟁으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져 갔고 1680년대부터 국가재정 위기가 위험한 수준이어서 조세는 거두기도 전에 고갈되었다. 엎친데 겹친 격으로 그의 치세 말년에 프랑스에서 천연두와 각종 전염병이 창궐했고 그는 자손들이 전염병으로 죽는 것을 바라만 봐야 했다. 왕위를 이을 직계 자손들이 줄줄이 병으로 사망하였고 부르사고뉴 공작의 막내 아들이며 자신의 증손자인 어린 앙주 공작만이 왕위를 이을 후계자로 남게 된다. 민심 또한 그의 편이 아니었다. 과도한 부역과 세금징수에 시달린 백성들은 궁핍한 삶에 지쳐만 갔다. 굶주린 배에 전염병까지 돌아 사망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백성들은 사치한 전쟁왕을 증오하기 시작했고 그가 죽자 국민들은 애도하기는 커녕 거리로 뛰쳐나와 환호했다고 전해진다. 임종 시, 왕세자에게 남긴 그의 유언은 이러했다. ‘너는 건축물을 짓거나 전쟁을 좋아하지 말아라. 나를 닮아서는 절대 안 된다. 그 전쟁은 백성들을 파멸시킬 것이다. 너는 다른 나라와 평화를 유지하여 백성들의 어려움을 덜어주어라.’ 적어도 이 유언을 보면, 루이 14세는 절대 왕권을 이루기 위해 백성들의 삶을 돌보지 못한 자신에 대해 임종 직전에는 냉정하게 평가하고 후대에는 이것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랐던 것 같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막을 수는 없었겠지만, 그의 후손들이 루이 14세의 마지막 유언을 깊이 새겨 들었더라면 부르봉 왕조의 수명이 조금은 더 길어지지는 않았을까? /권혜수 우석대 교양대학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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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04 16:41

[참여&공감 2024 시민기자가 뛴다] 행복한 도시의 조건, 도시에는 왜 공공공간이 필요한가?

최근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로 공원, 광장 등의 공공공간을 찾아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국민소득의 증가와 여가활동 시간의 확대, 건강과 웰빙에 대한 관심 증가, 워라벨을 추구하는 태도 등에 따라 공공공간을 찾게 되는 것이다. 또한, 행복도시 연구에 따르면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거주지 주변에 산책할 만한 공원이 있고, 잘 조성되어 있으면 행복을 느끼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와 같이 도시에 좋은 공공공간이 있다는 것은 시민들의 건강과 행복, 그리고 삶의 질을 증진할 수 있다는 점에서 행복한 도시의 조건이라고 볼 수 있다. 이번 글에서는 공공공간의 개념과 의미, 국내·외 공공공간 혁신사례를 바탕으로 지역에서 좋은 공공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정책을 제언한다. △좋은 공공공간이란 무엇인가? 공공공간(公共空間, public space)의 사전적 정의는 공원, 광장, 가로와 같이 일반 대중에게 개방되어 있는 곳이다. 가장 중요한 특징은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다.’는 점이다. 성별, 나이, 인종, 계층, 종교와 관계없이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고, 사람들이 편안하고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공공공간은 보통 공적 공간으로서 성격을 갖고 있다. 비록 쇼핑몰은 개방성이 높은 공간이기는 하지만, 사적 공간이고, 상품 구매 여부에 따라 공간 진입과 행동에 제약이 있을 수 있으므로 좋은 공공공간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도시는 어떻게 삶을 바꾸는가>의 저자 에릭 클라이넨버그(Eric Klinenberg)는 공공공간으로서 공원과 광장은 단순히 녹지와 오픈 스페이스 이상의 공간으로서 ‘교류와 연결을 통해 사회성을 증진하는 공간’이라고 하였다. 또한,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조경진 교수는 공공공간은 ‘공동체 의식과 집단 기억이 존재하는 곳으로서 공동체성을 강화하는 장소’라고도 하였다. △국내·외 공공공간 혁신 사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좋은 공공공간은 개방성, 접근성, 편안함, 안전함, 사회성, 공동체성 등의 특징을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좋은 공공공간은 도시의 랜드마크이자 혁신 거점으로서 도시 성장과 발전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미국 시카고 시에는 밀레니엄 파크(Millennium Park)가 있다. 밀레니엄 파크는 20년 전인 2004년 7월에 개장하였으며 기존 철도 부지 상부 공간을 시민을 위한 공원으로 조성한 공공공간 혁신사례이다. 공원 면적은 총 9만9000㎡로서 공원에는 세계적인 건축가 프랭크 게리(Frank Gehry)가 설계한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이라는 대규모 야외 공연장이 있고, 크라우드 게이트, 크라운 분수 등 유명한 공공미술 작품들이 있다. 공원 내에서는 뮤직 페스티벌 등 다양한 문화행사와 이벤트가 열리며, 주변에 위치한 미술관, 박물관, 문화센터 등의 기관들과 유기적으로 연계하여 시카고 시 문화예술 네트워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2017년 기준 연간 방문객 수는 약 2,500만 명으로서 시카고 시 제일의 관광 명소이며 시민들의 휴식처이다. 다음으로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는 리게트 부다페스트(Liget Budapest)라는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부다페스트에는 2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약 100ha 규모의 대규모 도심 공원이 있는데, 19세기 말에 헝가리 건국 1000년을 기념하기 위해 공원 내에 미술관, 궁전 등 다양한 파빌리온이 건설되었지만 한 세기가 지나 시설들이 노후되어 관리가 안되고 방치되어 있었다. 헝가리 정부는 공원 기능을 유지하고 문화유산을 보존하면서 공원을 개조하기로 결정하고, 2013년 프로젝트를 시작하여 지난 10년 동안 민족학 박물관과 헝가리 음악의 집을 새로 건립하였으며, 미술관 등 문화유산 건물들을 리모델링하였다. 리게트 부다페스트는 유럽 최대의 공공공간 혁신사업이자 문화유산과 자연환경, 현대건축이 조화된 프로젝트로서 2023년 공원 방문객 수는 약 750만 명에 이른다. 도시에 있는 대규모 유휴공간을 개발하지 않고 시민들을 위한 공원과 광장으로 조성한 사례는 국내에도 다수가 있다. 기존 경마장과 체육공원 부지를 뉴욕 센트럴파크와 같은 대규모 도시숲으로 조성한 서울숲(2005년), 미군 부대 주둔지를 도심 속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진 시민공원으로 조성한 부산시민공원(2014년), 구 전남도청 부지를 재생하여 문화예술 거점과 시민광장으로 조성한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2015년)이 그 예이다. 서울숲은 2022년 기준 연간 방문객이 약 700만 명에 이르고,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2015년부터 2024년까지 연간 방문객 수가 180~250만 명이며, 10여 년간 누적 방문객 수는 약 1750만 명이 방문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와 같이 미국 시카고 밀레니엄 파크나 헝가리 리게트 부다페스트, 서울숲, 부산시민공원,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공원, 광장 등 공공공간 혁신 사례로 시민들에게 훌륭한 여가 및 휴식 공간을 조성했을 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 관광 산업 등을 통해 도시의 성장과 발전을 이끌고 있다. 앞의 사례와 같이 전북 지역에도 공공공간을 혁신하고 재창조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는 공간이 있다. △전주 종합경기장 ‘시민의숲 1963’ 프로젝트 전주 종합경기장은 전주시 도시 발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전주의 한가운데라는 지리적 위치와 접근성, 전북대학교와 여러 문화시설들, 그리고 대규모 유휴부지 활용이란 측면에서 전주시 도시 발전을 견인할 수 있는 중요한 지역이다. 2016년 종합경기장에서 진행된 시민원탁회의에서 500여명의 시민들은 경기장 부지에 대해 공원·녹지시설, 문화·예술시설, 체육시설, 숙박·회의시설, 판매시설 등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후 전주시에서는 기본구상 연구와 전문가 자문, 시민 의견수렴 과정 등을 바탕으로 ‘시민의숲 1963’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이 프로젝트는 종합경기장 부지에 시민의 숲을 비롯하여 한국문화원형콘텐츠 체험·전시관, 시립미술관, 전시컨벤션센터, 호텔, 백화점 등을 조성하고, 경제기반형 도시재생 사업을 추진하는 것으로 계획되었다. 당시 전주시에서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부지를 매각하지 않고, 경기장 건물을 활용·재생하며, 판매시설을 최소화한다.’는 원칙을 갖고 추진한 것으로 알고 있다. ‘시민의 숲 1963’프로젝트 계획은 민선 8기 전주시정에서 개발방식과 사업계획이 대폭 변경되었다. 종합경기장 및 야구장 건물을 전면 철거하고, 시민의숲 조성 계획은 변경 및 축소되었으며, 판매시설인 백화점과 호텔은 규모가 확대되었다. 또한, 사업방식도 당초 부지를 장기 임대하는 방식에서 대물 변제 방식으로 변경되어 부지 소유권을 개발사에 이전하게 되었다. 전주 미래유산 1호인 경기장 건물을 철거하기로 결정하고, 철거 여부에 대한 시민 의견수렴 절차가 생략된 것도 문제이지만, 많은 시민들의 의견을 바탕으로 마련한 시민의 숲 공원 계획을 폐지 수준으로 변경한 것도 문제라고 생각한다. 제대로 된 도시숲과 공원을 조성하지 않는다면 백화점과 호텔 앞에 남은 자투리 공간을 공공공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미래에 이 공간에 쇼핑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시민들이 찾아와서 마음 편히 쉬며 여가를 즐길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주시 도시 한복판에 경제·산업, 문화·관광뿐만 아니라 공원과 광장을 조성하고, 60년이 넘는 역사와 문화, 공동체의 기억과 추억을 간직한 경기장 건물을 허물지 않고, 활용하면서 지역의 공동체 정신을 이어갈 수 있는 공공공간 혁신사례를 만들 수 있었는데, 당초 계획이 변경된 것이 무척 안타깝다. △행복한 도시의 조건, 좋은 공공공간 조성을 위한 과제 우리가 사는 곳을 행복한 도시로 만드는 조건에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는 핵심적인 도시공간에 공원, 광장 등의 공공공간을 마련하고 혁신하는 것이다. 특히, 전주 종합경기장 부지에는 판매시설 규모를 축소하더라도 ‘시민의 숲’ 계획을 복원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재 경기장 부지에는 판매·숙박, 전시·컨벤션, 문화, 도시재생 등 여러 기능들이 한 공간에 조성되고 있다. 이와 같은 복합적인 기능의 시설들이 유기적으로 통합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다른 기능을 포용하고 완충할 수 있는 공원, 녹지 등의 오픈 스페이스 계획이 필요하다. 건축설계 시 이러한 부분을 충분히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전북 지역과 같이 공원 면적이 적고, 거주지에서 가까운 도시공원이 부족한 경우에는 도시 곳곳에 소규모 공원과 광장을 조성하고, 생활권을 중심으로 촘촘하게 선형 녹지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장우연 독립연구자, 전) 전주시 정책연구소 연구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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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04 15:32

익산에서 탄생한 또 하나의 명품 도시숲 ‘수도산공원’

익산 마동공원에 이어 또 하나의 명품 도시숲이 탄생했다. 익산시가 전북특별자치도 최초로 추진한 도시공원 민간특례사업의 두 번째 결실인 수도산공원이 바로 그 주인공. 3일 시에 따르면, 익산 민간특례사업 중 가장 큰 규모인 수도산공원이 시민들을 맞이할 준비를 모두 마쳤다. 4일 준공식을 앞두고 있는 수도산공원은 전북 제1호 민간특례사업인 마동공원에 이어 조성된 두 번째 도심 속 대형 공원으로, 울창한 수도산의 수목을 최대한 보존하면서도 시민들이 쾌적한 숲 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산책길 정비와 편의시설 조성에 주력했다.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와 작은도서관이 마련됐고, 기존 수도산체육공원 부지에 실내 수영장을 새로 지었다. 새 모습으로 변신한 수도산공원은 앞으로 지역주민들이 도심 속에서 여유롭게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장소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도시공원 실효 위기 딛고 시민 품으로 장기미집행 공원시설로 오래 남아 있던 수도산공원은 2007년 일부가 체육공원으로 조성됐지만, 이외 부지는 계속 집행이 되지 않아 공원시설 실효 위기를 맞았다. 특히 공원 지역이 풀리면 난개발이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이에 시는 실효되는 시기를 3년 앞둔 2017년 수도산공원을 민간공원특례사업으로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민간사업자가 도시공원 부지의 70% 이상을 공원으로 조성해 기부채납하면, 나머지 부지에는 아파트 같은 비공원시설을 허용하는 제도다. 민간의 자본과 노하우를 활용해 공공의 이익을 증진하는 방식이다. 특례 방식의 수도산공원 조성사업은 사업시행자 지정부터 토지 보상, 실시계획 인가 등 관련 절차가 순조롭게 이어지면서 착공 3년 만인 지난 8월 준공이 이뤄졌다. 보상부터 공원 조성까지는 모두 796억 원 가량이 투입됐다. 자연환경 살린 민간특례 최대 규모 도시숲 수도산공원의 가장 큰 특징은 기존의 자연환경을 최대한 보존했다는 점이다. 시는 공원 조성 과정에서 숲의 훼손을 최소화하고 자연 생태계를 유지하는데 방점을 찍고 사업을 추진했다. 주민들에게 지속가능한 자연환경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치 있는 공간으로 조성하기 위해서다. 금강동 일원에 조성된 수도산공원은 남쪽으로는 유천생태습지와 맞닿아 있고, 북쪽으로는 앞서 민간공원특례사업으로 조성된 마동공원이 위치해 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시가 추진하는 민간공원특례사업 중 가장 규모가 크다는 점이다. 전체 사업 면적은 35만 2970㎡인데 이 중 공원이 26만 9675㎡으로 76% 가량을 차지한다. 1566세대 규모의 아파트가 지어진 24% 지역을 제외하고는 기존 수도산의 식생을 거의 그대로 살렸고, 그 덕분에 울창한 숲이 산책을 즐기는 시민들을 위해 그늘을 제공한다. 자연과 조화 이룬 힐링 공간 수도산공원은 기존 산지와 구릉 지형을 활용한 둘레길을 오르내리면 철마다 다른 들꽃이 한들거리고 매미 소리가 귀뚜라미 소리로 바뀌는 계절의 변화를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다. 또 산책길 곳곳에는 체력 단련 시설과 티 테이블, 벤치 등 다양한 편의시설이 자연환경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조화롭게 배치돼 있다. 백제광장 옆 주차장과 무장애 놀이터를 지나 산책길을 따라가면 수도산공원 전망대에 도착한다. 목재로 멋을 더한 전망대 1층에는 공원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그네와 의자가 있다. 전망대는 3층까지 오를 수 있는데, 2층과 3층에서는 유천생태습지와 인화공원 솜리메타누리길, 그리고 만경강 너머까지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할 수 있다. 그 아래 백제정원은 소나무와 연못, 한옥 정자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방문객에게 고즈넉한 분위기를 선사한다. 휴식도 하고 여가도 즐기고 수도산공원은 시민이 생활권 안에서 각기 다른 취향의 여가를 편안하게 즐길 수 있도록 했다. 기존에 조성돼 있던 수도산체육공원 안에 실내 수영장을 추가로 조성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는 그동안 수영장이 없어 아쉬웠던 남부권 주민들을 위한 특별한 선물이다. 수영장 천장에는 넓은 채광창을 둬 개방감을 줬고, 수영장 건물 2층에는 헬스장 시설이 들어선다. 이와 함께 축구장과 농구장, 풋살장, 족구장 등 기존의 체육공원 운동 시설을 활용해 다양한 여가 생활이 가능하다. 수영장 인근으로 또 다른 신축 건물 하나가 지어졌는데 세모 모양 지붕 아래 높은 층고가 인상적인 이 건물은 작은도서관이 들어서는 복합문화센터다. 어린이 생태 연못 놀이터가 바로 옆에 있어 아이들과 함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될 전망이다. 정헌율 익산시장은 “자연과 공존하는 녹색정원도시를 꿈꾸는 익산의 도심 곳곳에 허파 역할을 하는 대규모 공원이 속속 조성되고 있다”며 “이번에 조성된 수도산공원이 마동공원과 함께 주민들에게 수준 높은 휴식을 제공하는 명품 공간으로 자리 잡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 기획
  • 송승욱
  • 2024.09.03 16:24

[권혜수 교수의 문화산책] 루이 14세 ③ 모든 소문을 잠재우고 태양왕이 되기까지

루이 14세는 5살에 왕위에 올라 72년이라는 유럽 왕실 사상, 최장기 집권을 하며 절대왕권을 확립하였다. 봉건제를 바탕으로 한 귀족 중심의 지방 자치제였던 프랑스를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 집권 체재의 나라로 제도를 재정비하고 강력한 왕권을 확립해 나갔다. 그렇다면 프롱드의 난에서 왕실의 권위를 무너뜨린 귀족들을 순한 양처럼 길들이고 유럽 최고의 절대군주가 된 루이 14세만의 노하우는 무엇일까? 첫째, 베르사유 궁, 그의 홈그라운드로 귀족들을 끌어들이다. 모든 운동경기에는 홈그라운드에 이점이 분명 작용한다. 루이 14세도 이 점을 십분 활용하였다. 그는 귀족의 권력을 축소시키고 왕권중심의 국가를 만들기 위해, 귀족들을 궁전으로 끌어들였다. 바로크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자 절대왕권의 상징인 베르사유 궁은 귀족들이 머물고 싶은 매력적인 공간으로 설계되었다. 베네치아 거울 장인이 프랑스로 망명하면서 73m 길이의 거울의 방이 완성되었다. 거울 제조법이 국가 기밀일 만큼 거울이 귀하던 시대에 이 방은 유럽의 왕실과 귀족들의 부러움을 샀고, 루이 14세는 화려함의 극치인 베르사유 궁에서 다양한 연회를 열며, 귀족들에게 볼거리와 놀거리를 제공하였다. 귀족들은 어느새 베르사유만의 특별한 문화에 빠져들었다. 사흘이 멀다 하고 벌어지는 성대한 행사에 참석하려면 자신의 영지가 아닌 베르사유 궁에 살아야만 했다. 베르사유 궁에 거주하려면 국왕에게 잘 보여야 했고, 자연스레 자신이 다스리는 지방의 영지 관리는 소홀해졌다. 베르샤유 궁은 단순히 사치를 위한 궁전이 아니라 태양왕 루이 14세의 정치적 목적으로 십분 활용되었다. 둘째, 차별을 통제 수단으로 이용해 귀족들을 길들이다. 루이 14세는 사람을 차별하고 불편감을 주는데는 선수였다. 신분이 낮은 지위의 귀족일지라도 왕을 감동시키면 높은 관직과 큰 이윤이 남는 일을 맡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자, 귀족들은 왕에게 잘 보일 수 있다면 어떠한 일도 마다하지 않게 되었다. 왕에게 잘 보이려면 일단 가까이 있어야 했기에, 왕의 용변을 처리하는 일이나 변기를 들고 다니는 일을 귀족들이 앞 다투어 하게 되었다. 과거에는 하인들이 할 법한 일들인데, 왕의 변기를 들고 시중드는 귀족들의 모습을 상상하니 프롱드의 난에서 보였던 귀족들의 위세가 완전히 꺽인 것은 확실했다. 반대로 높은 지위의 귀족일지라도 왕의 눈 밖에 나면 베르사유에 더 이상 머룰 수 없게 되었고, 이것은 궁정 문화와 모든 이권 사업에서도 배제된다는 뜻이었기에 귀족들은 반란은 꿈도 못 꾼 채, 왕의 눈치 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루이 14세는 눈 뜨는 순간부터 잠드는 순간까지 모든 일과를 귀족들이 시중들게 하였다. 자신의 사생활을 전부 공개하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루이 14세는 귀족들을 통제하기 위해 17세기 판 트루먼 쇼의 주인공이 스스로 되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극 중 트루먼은 자신의 삶이 대중에게 방영되는 것을 몰랐고, 알고 난 후에도 괴로워했다. 반면, 루이 14세는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상품화하여 정치적으로 활용하였고 집권 후, 숨을 거둘 때까지 미드 시리즈물처럼 자신의 삶을 공개하며 기획, 출연, 연출까지 하는 종합 예술인의 삶을 살았다. 윌리엄 새커리가 풍자한 루이 14세의 모습. 마네킹에 입혀진 왕의 복식, 복식을 착용하지 않은 70대 루이 14세의 초라한 모습, 복식 착용 후, 루이 14세의 모습(왼쪽부터). /권혜수 교수 제공셋째, 이미지 메이킹으로 태양왕이 되다. 그는 복식을 통해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감추는데 귀재였다. 영국의 소설가 윌리엄 새커리는 ‘왕의 권위가 미용사와 디자이너에 손에서 만들어진다.’라고 언급하며 루이 14세를 풍자했다. 이 풍자화는 작은 키. 대머리, 배가 불룩 나온 앙상한 다리의 노인에서 풍성한 가발과 화려한 의상으로 자신의 단점을 보완한 루이 14세의 모습을 그렸다. 그는 남성 최초로 하이힐을 신을 정도로 패션에 관심이 많았고 하이힐과 가발을 이용해 작은 키를 훨씬 커 보이게 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나이가 들면서 초라해지는 외모를 화려하고 웅장한 바로크 복식을 활용해 태양왕의 이미지를 굳건히 하였다. 또한 문화예술의 파급력을 잘 알고 있던 그는 발레 공연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였다. 7세 때부터 부상을 당해 발레를 그만두게 되는 27살까지 매일 2시간씩 춤 연습할 정도로 발레에 열정을 보인 그는 뛰어난 발레솜씨에 공연 기획력까지 갖춰 문화예술공연을 통해 태양왕의 이미지를 확립해 나갔다. 그는 발레 공연 때마다 아폴론신을 연기하며 자신을 태양왕의 이미지에 투영하였고 더불어 귀족층은 항상 태양왕 아폴론에게 무릎을 끓고 절하는 모습을 공연에 넣어 관람하는 이들에게 중앙집권적 절대 왕권을 각인시켰다. /권혜수 우석대 교양대학 석좌교수

  • 기획
  • 기고
  • 2024.09.03 16:14

[권혜수 교수의 문화 산책] 루이 14세 ② 출생 배경

결혼 23년 만에 루이 14세가 태어났다. 그러나 큰 경사에도 불구하고 왕자의 정통성을 의심하는 소문이 돌았다. 그 이유는 부친은 여자를 이상하리만큼 멀리했고, 모친은 두 번의 염문설이 날 정도로 부부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루이 14세의 모친(안 도트리슈)의 집안은 대단했다. 그녀는 13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성장하여 신성로마제국의 제위까지 세습 받은 스페인 합스부르크가의 공주였다. 황제의 명예와 가장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는 가문으로 위세를 떨친 합스부르크가의 번영 뒤에는 정략결혼이라는 수단이 있었는데 “다른 이들에게 전쟁을 하게 두어라, 너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결혼하라.” 라는 시를 보면 이 가문이 얼마나 정략결혼에 진심이었는지 알 수 있다. 루이 13세의 아내, 안 도트리슈는 아름다운 얼굴에 큰 키의 소유자였고 특히, 그녀는 자신의 하얗고 긴 손가락을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모든 유럽 왕실들이 이 결혼을 부러워했으나, 루이 13세는 아버지와 같이 반스페인 정책을 옹호했고, 자신을 심하게 학대한 어머니가 추진한 정략결혼에 자존심이 상했다. 사랑이 없는 결혼은 두 사람 모두에게 불행을 안겨 주었다. 프랑스의 왕비가 된 안 도트리슈는 프랑스어를 잘 구사하지 못했다. 여러 번의 유산으로 남편과 소원해져 프랑스 궁정에서 푸대접을 받게 되자 왕비의 자리를 망각하고 프랑스 국가 기밀을 스페인으로 빼돌렸다. 이것이 발각되자 남편과의 관계는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프랑스 궁정에서 외로움을 느낀 왕비는 버킹엄 공작(1592~1628)과의 스캔들로 온 유럽을 뒤집어 놓았다. 영화로도 여러 번 제작된 알렉산드로 뒤마(1802~1870) 의 소설 <삼총사>에도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등장한다. 외로운 여왕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영국의 버킹엄 공작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낮은 귀족 계층에서 빼어난 외모, 뛰어난 춤솜씨와 언변술로 영국 국왕 제임스 1세(1566~1625)의 마음을 사로잡아 당시, 왕족에게만 부여되던 공작 작위를 받은 인물로 이 사건은 유럽 최고의 미남과 미녀의 스캔들로 기억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불륜이라기 보다는 '썸'을 타는 정도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 역사가들의 중론이다. 왜냐하면 당시 프랑스 궁정에는 왕비를 시중드는 하녀들과 감시하는 눈이 많았기 때문에 외국 대신으로 방문한 버킹엄 공작과 여왕이 둘만의 시간을 갖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 일로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해버린 루이 13세는 왕비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된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태어난 루이 14세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추문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고, 급기야 프롱드의 난 때, 이것이 빌미가 되어 귀족들에게 죽임을 당할 뻔 했다. 어쩌면 루이 14세의 ‘짐이 곧 국가’라고 하는 강력한 절대군주에 대한 열망은 자신의 불편한 출생 배경에 대한 반대급부일지도 모른다. /권혜수 우석대 교양대학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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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02 15:02

[팔도 건축기행] 제주도 본태박물관

본태박물관(bonte museum)은 ‘本態, 본래의 형태’란 뜻을 빌려 인류 본연의 아름다움을 탐구하기 위해 2012년 서귀포시 안덕면 상천리에 설립됐다. 전통과 현대의 공예품을 통해 인류 공통의 아름다움을 탐색하자는 취지에서 계획된 박물관은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은(1995년)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했다. 안도 다다오는 ‘제주도 대지에 순응하는 전통과 현대’를 고민하며 설계를 진행했고,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노출 콘크리트에 자연의 숨결과 따뜻한 색감을 지닌 한국 전통공예품을 담아 담백한 목조건물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본태박물관은 노출 콘크리트와 빛 등 자연적 요소를 잘 담아내 ‘인간과 자연의 조화’라는 안도 다다오의 건축 철학이 가장 잘 담긴 건축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건물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가는 동선에 있는 한국 전통 기와 돌담길과 수벽(水壁, 물이 흐르는 벽)도 박물관의 트레이드 마크다. 박물관 동선은 입구인 주차장부터 건물 내부까지 짧은 거리를 의도적으로 길게 늘여 구불구불 돌아가도록 설계됐다. 안도 다다오는 건물 외부 곳곳에 독립적인 벽체를 사용해 동선을 유도하거나 앞으로 펼쳐질 공간을 의도적을 단절시키는 등 관람객의 호기심을 유발하도록 했다. 전시관 갤러리는 개관 당시 2개에서 지금은 5개로 늘었다. 제1관은 1층에서 2층까지 복도 없이 한 공간으로 조성됐다. 박물관 고문인 이행자 여사가 30여 년간 수집한 조선시대 목공예품인 소반을 비롯해 자수, 보자기, 병풍, 도자, 장신구, 가재도구, 전통복식 등 우리나라 전통 공예품이 전시되고 있다. 제2관은 깊은 처마 아래로 높은 홀과 주전시실이 연결되는 개방적인 공간으로 파블로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페르낭 레제, 백남준 등 세계적인 작가들의 현대미술품과 안도 다다오의 명상실을 관람할 수 있다. 제2관에서 바라보는 산방ㅇ산, 모슬봉, 단산의 풍경은 또 하나의 볼거리다. 제3관은 쿠사마 야요이 상설전을 볼 수 있는 공간이다. 그의 대표작 ‘무한거울방-영혼의 반짝임’, ‘Pumpkin’이 영구 설치됐다. 제4관은 우리나라 전통 상례를 접할 수 있도록 상여와 상여 부속품인 꼭두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제5관은 기획전이 열리는 공간이다. 전통과 현대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다양한 전시가 펼쳐지고 있다. 건물 옥상도 서귀포 남쪽 바다를 조망하며 문화행사를 즐길 수 있는 휴식 공간으로 손색이 없도록 꾸며졌다. 제1관과 제2관을 연결하는 야외 동선은 한국의 전통 담벼락과 좁은 골목, 가느다란 냇물과 작은 다리가 배치돼 차분히 걸으면서 야외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조성됐다. 특히 건물과 건물 사이에 한국의 전통 담벼락과 좁은 골목, 가느다란 물과 작은 다리를 배치, 전시 공간에 들어가기 전에 한국의 전통적 공간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이다. 건물 외관은 최대한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맑은 유리, 전통 석재, 흙, 타일 등 최대한 자연 재료가 사용됐다. 야외 전시도 빼놓을 수 없다. 박물관 남쪽 야외 조각공원에는 문자를 이용한 인물 조각으로 유명한 자우메 플렌사의 트레이드마크인 웅크린 인물 모습을 표현한 작품 ‘Children's Soul’을 비롯해 로트르 클라인-모콰이이 ‘Gitane’, 데이비드 걸스타인의 ‘Euphoria’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최근에는 ‘안도 다다오의 청춘’이라 불리는 ‘푸른 사과’가 야외 호수 주변에 설치됐다. 그의 세계적으로는 4번째, 한국에서는 원주 뮤지엄산에 이어 두 번째로 영구 설치된 이 작품에는 안도 다다오의 건축 철학이 담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노출 콘크리트 안도 다다오는 ‘노출 콘크리트’를 건축의 주 재료로 사용한다. 노출 콘크리트는 모든 색채를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의 특성은 변화시키지 않는다. 건축에 담긴 언어를 추상화할 수 있는 소재로서 그에게 가장 적합한 재료였다. 안도 다다오는 자신의 건축 철학과 언어를 잘 담아낼 수 있으면서도 이전의 건축가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노출 콘크리트를 본태박물관 설계에 반영했다. 안도 다다오는 노출 콘크리트를 건축계에 처음 선보인 르 코르뷔지에의 거칠고 원초적인 마감과는 달리 시각과 촉각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자신만의 노출 콘크리트를 만들었다. 최석의 물과 시멘트의 배합, 철근과 거푸집의 간격 등 그만의 방법으로 완성된 비법을 통해 완성된 노출 콘크리트는 손에 닿는 감촉이 부드럽고 매끄러우면서도 견고한 특징을 가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빛 빛은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안도 다다오의 건축에서 노출 콘크리트와 함께 대표적인 건축 요소다. 본태박물관에 들어서면 빛이 만들어내는 특별한 공간과 빛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조각 작품 같은 공간을 만날 수 있다. 안도 다다오는 빛을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재료로 노출 콘크리트를 선택했다. 회색의 매끈한 노출 콘크리트 표면에 비치는 빛은 자연의 빛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또 빛과 함께 생기는 그림자는 극적인 대비를 통해 공간의 입체감을 더하며 또 다른 시각적 재미를 준다. 텅 빈 방의 천장은 내부를 빛으로 채워 관람객의 사색을 이끌어내고, 어둡고 긴 통로 속 기다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비은 공간과 공간을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물 본태박물관 야외에는 다양한 생물이 서식하는 작은 호수를 비롯해 두 개의 건물 사이에 흐르는 좁고 긴 물길이 있다. 특히 물길과 수벽은 두 개의 전시 공간을 이동하는 통로에 조성, 관람객들이 반드시 거치도록 설계됐다. 건축 속에 담긴 자연을 온전히 느끼라는 설계자의 의도가 담겼다. 물길과 수벽 주변으로 부는 바람은 물의 움직임과 소리를 만들어내 관람객들의 청각과 촉각을 자극한다. ■안도 다다오는? 안도 다다오(1941~)는 물의 도시라 불리는 일본의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수공예 공장과 장인이 많은 지역인 외할머니 집에서 유년 시간을 보내며 성장했다. 이 시기를 보내며 그는 물, 바람, 빛과 같은 자연과 많은 교감을 나눈다. 대학에 진학한 후 독학과 답사를 통해 스스로 건축을 배워나갔고, 독학의 과정 중 책 속에서 만나게 된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 철학에 큰 영감과 깨달음을 얻는다. 자신의 우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건축관과 유년 시절 물리적 환경을 통해 형성된 자연과의 관계는 안도 다다오의 일관된 건축 철학의 바탕이 됐다. 그는 자신의 건축에서 인간과 자연의 조화, 교감을 강조한다. 노출 콘크리트와 기하학적 구조, 자연적 요소를 건축에 끌어들인 독창적인 건축 특징으로 세계적 반열에 오르게 오른다. 1994년 건축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 상을 수상했다. 안도 다다오는 제주에 본태박물관 외에도 섭지코지에 있는 ‘우민 아르누보 뮤지엄’(옛 지니어스 로사이), ‘글라스하우스’ 등의 작품을 남겼다. 제주일보=김문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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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02 14:28

[권혜수 교수의 문화 산책] 루이 14세 ① 아버지가 누구지?

우석대학교 교양대학 권혜수 석좌교수(서울발레시어터 대표·한국전통문화예술원 대표)가 역사 속 그림을 통해 실타래처럼 얽혀있는 당대의 정치·경제·사회·문화에 대하여 산책하며 이야기하듯 쉽고 편안하게 풀어드립니다. 그림 속에는 생각보다 많은 메타포들이 숨어 있어서 그림만 제대로 해석해도 그림 속 주인공이 살았던 시대, 그려진 사람의 성향, 그린 사람의 의도까지 알 수 있습니다. 복식사와 색채학을 전공한 권 교수는 미술사 도서 자료를 바탕으로 공부한 내용을 딱딱한 글이 아닌 증거가 되는 그림을 보이며 전북일보 독자들과 함께 나눌 것입니다. 첫 번째는 목숨을 위협받던 소년에서 태양왕이 된 루이 14세의 이야기를 4회로 나누어 연재합니다. △특명! 철가면을 쓴 죄수, 그 누구와도 이야기 못하게 하라. 알프스 고지 요새의 피네롤 감옥, 1667년 간수장이었던 생마르스는 편지 한 통을 받는다. 발신인은 루이 14세(Louis XIV, 1643~1715)의 최측근인 루부아(1641~1691) 장관이었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죄수에게 들어가는 모든 비용은 왕실에서 지불할 것이다. 철가면을 쓴 죄수를 독방에 가두되, 왕족 대하듯 극진하게 모시고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어라. 가구, 음식, 의복은 최고의 것으로 제공하라. 그러나 그가 그 누구와도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 이를 어길 시,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4번을 이감되면서도 34년간 철가면을 벗지 못했던 사나이는 바스티유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나서야 비로소 가면을 벗는다. 그러나 그가 죽은 직후, 죄수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훼손하고 매장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이쯤 되면 그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그의 얼굴이 정치적으로 타격을 입힐 만큼 누군가와 닮아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배후가 루이 14세라면⋯. 철가면을 쓴 사나이와 왕이 친족이라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을 것이다. 철가면을 이야기는 호사가들을 통해 오랜 세월 다양한 소문이 있었지만, 그의 정체에 대해서 다음 두 가지 주장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먼저, 공식적으로 그를 처음 언급한 사람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계몽주의 철학가 볼테르(1694~1778)로 그는 철가면을 쓴 죄수가 루이 14세의 친형이었다고 주장했다. 다음으로 영국의 역사가 휴 로스 윌리엄슨은 그를 루이 14세의 대리부로 추정하였다. 실제로 루이 14세의 부친인 루이 13세(1601~1643)가 여성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내와 합의 하에, 대리부를 들여 임신하였고 이 문제로 자신의 왕권이 위협받을 것을 걱정한 루이 14세가 친부(대리부)를 감옥에 가두고 극진한 대접을 했다는 입장이다. △“루이13세가 친부가 아닐 수 있다고? 그럼, 이 꼬마를 어떡하지?” 프롱드의 난*(La Fronde 1648-1653), 루이 13세가 사망한 후, 귀족 반란군이 파리로 몰려들어 왕실 가족들을 잡아들였다. 루이 14세의 모친, 안 도트리슈(1601~1666)와 재상인 마자랭(1602~1661)추기경은 파리를 빠져 나갔지만, 미처 피신하지 못한 루이 14세는 귀족들에게 포로로 잡혔다. 귀족 반란군은 그가 루이 13세의 친자가 아니고, 왕비가 마자랭과의 불륜으로 낳은 아들이라며 루이 14세를 죽이려 들었다. 그러나 이 순간, 아무 힘이 없는 어린 왕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두 눈을 꼭 감은 채, 자는 척 하는것 뿐! 귀족들의 반란은 진압되었다. 그러나 귀족들이 어린 왕자에게 쏟아낸 모욕적인 발언과 생명을 위협하는 행동은 분명 그에게 트라우마로 남았을 것이다. * 프롱드의 난 프롱드의 난은 프랑스 부르봉 왕조에 반감을 가진 귀족 세력이 일으킨 내란이다. 프롱드의 뜻은 파리의 어린이들이 관의 세력에 저항하여 돌을 던지는 놀이에서 사용한 투석기에서 유래된 말이다. 1차는 고등법원의 프롱드, 2차는 귀족의 프롱드이다. 어린 루이 14세를 대신하여 섭정을 펼친 재상 마자랭이 귀족들의 기득권을 과도하게 빼앗고 왕권 강화에 박차를 가하자, 위기를 느낀 귀족 세력들이 반기를 들었으나 결국 반란군은 제압 된다. 프롱드의 난은 프랑스 왕권에 대한 귀족층 최후의 반란으로 기록된다. /권혜수 우석대 교양대학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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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01 17:37

[뉴스와 인물] 전주문화재단 최락기 대표이사 "팔복권역 중심으로 새로운 문화 거점 마련"

인공지능(AI)을 활용해 국악의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다면? 신기술과 문화예술을 융합해야 하지 않을까.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시도를 통해 문화예술을 새롭게 꽃피워야 하지 않을까. 최락기 전주문화재단 대표이사(60)와 지난 26일 팔복예술공장에서 만났을 때 이런 대화를 나눴다. 곧 닥치게 될, 어쩌면 이미 진행되고 있을 일이지만, 이를 구체적으로 논하는 문화예술 기관장은 처음이었다. 문화예술계는 언제나 늘 현재가 절체절명이니 말이다. 좀 엉뚱한 이유에서 최락기 대표이사의 말에 마음이 꽂혔다. 실험적, 도전적, 신기술, 인공지능, 로봇 등과 같은 단어들이다. 30년 넘게 공무원 조직에 몸담았던 인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문화예술 분야에 대한 진지한 태도와 실행력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2년 간 대표이사 최락기가 만들어 갈 전주문화재단의 미래에 대해 들어봤다. - 취임 후에 한 달 간의 소회가 어떠신지요. “재단의 업무 추진 흐름과 운영체계를 살펴보고 있는데, 생각보다 많은 업무를 재단에서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시민들의 문화예술 향유에 대한 기대와 전국 최고의 문화지수 도시 전주의 위상을 공고히 해야 하는 책임자로서 어깨가 무겁습니다” - 전북 문화예술계 이해도가 낮을 것이라는 우려가 있습니다. “문화예술 전공자가 아니므로 그런 우려는 당연하다고 봅니다. 따라서 분야별 문화예술 깊이의 한계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전주시 문화예술 행정업무를 10여 년 이상 기획하고 다양하게 현장에서 추진한 경험을 토대로 문화예술의 방향성을 정립하고 종합적 추진체계를 이끌어 가는 데는 상대적 우려가 덜 할 수 있다고 봅니다.” - 문화예술 깊이에 한계가 있다고 하셨는데, 이를 극복할 방안은 있으신지요. “문화예술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서 수시로 공연장과 전시장을 둘러보고 있습니다. 문화예술인과 관계자들의 의견도 청취하면서 간극을 좁혀나가려고 합니다” - ‘지역 문화를 높이고 펼치는 창의적 문화발신 플랫폼’이라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셨습니다. 비전의 의미가 궁금합니다. “문화를 높이겠다는 것은 ‘역시 전주는 다르구나’처럼 다른 지역에서 인정하는 문화예술의 품격을 갖춰나가겠다는 의미입니다. 펼친다는 것은 확장을 의미합니다. 문화예술은 누구나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지역별·계층별로 소외당하지 않도록 문화예술 향유 지평을 지금보다 더 넓혀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 문화예술 향유 지평에 대해 조금 더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이를테면 전주시 곳곳 15분 이내에 문화예술 생활권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문화예술과 문화예술인들이 시대 흐름에 적응할 수 있도록 다양한 신기술을 경험하고, 도전해 창의적 문화예술을 발현할 수 있도록 재단이 ‘플랫폼’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수도권과 지역 간의 문화 불균형이 심합니다. 문화 불균형 해소를 위한 전략이나 구상이 따로 있으신지요. “전체적으로 서울과 인천, 경기 등 수도권에 문화시설의 40% 가까이가 집중되어 있습니다. 누구나 어디서나 고르게 문화를 누릴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문화를 통해 지역 위기도 대응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전주시가 예비 도시로 선정되어 내년도에 문화도시 본지정이 된다면 수도권과 지방의 문화 불균형을 완화하는 촉매 역할을 할 것이라고 자신합니다.” - 그렇다면 전주문화재단에서는 문화도시 지정을 위해 어떤 것들을 준비하고 있으신가요. “전주 북부권인 팔복 산단을 중심으로 새로운 문화예술 창조생태계 거점 공간을 집적하고 있습니다. 전통문화자산과 4차 산업 기술의 융복합을 통한 미래 문화산업을 견인하고자 문체부·유관기관과의 컨설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사업을 구조화하고 체계적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앵커기업과 기본 사업으로 구분해 수행 중입니다. 이외에도 현재 거점 공간 확보와 콘텐츠 개발에 집중하고 있으며 연말까지 예비사업을 추진하면서 관련한 미래 문화도시 페스티벌을 10월 둘째 주에 팔복예술공장에서 3일간 개최할 계획입니다.” - 임기 동안 전주문화재단 대표이사로서 어떠한 청사진을 그리고 계시는지요. “재단이 시민과 함께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문화 플랫폼으로 역할 할 수 있도록 문화예술인, 지역사회 등과 소통·협력을 강화해 나갈 생각입니다. 한편으로 전주시에서 추진하고 있는 대한민국 문화도시 지정을 위해 연계·협력하고 지원하는 것입니다. 팔복권역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문화예술 거점을 조성하는 싹을 틔워 대한민국 문화도시 전주를 안착시키는 데 일조하고자 합니다. 문화예술인과 문화예술의 지원 연계 확장, 시대 흐름과 변화에 따른 문화예술의 융복합 실험과 도전, 새로운 문화 거점 생태계 마련과 기초를 다져가고 싶습니다.” -전주문화재단과 한국전통문화전당 통합에 무게가 실리면서 재단의 기능과 역할이 커질 것으로 예상되는데 어떤 걸 준비하고 계시나요? “전주시의 문화예술 관광정책의 큰 기조 아래 기능적으로 중복되거나 업무 효율이 필요한 부분은 조정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전주시와 전통문화전당 전주문화재단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숙의하는 과정을 거쳐 조율될 거라고 봅니다. 구체화한 사항이 아직은 없어 시간을 두고 직원들과 지속적으로 소통하면서 대응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 임기 마지막에는 어떤 대표이사로 기억되고 싶습니까. “전문 문화 예술인은 아니지만 문화예술을 이해하고 가치를 높이고자 한 사람. 전주가 최고의 문화도시로 거듭나기 위해 나름 애쓰고, 현장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한 사람이면 과분하다고 봅니다.” - 마지막으로 전주 시민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전주 시민의 문화지수는 전국 최고 수준입니다. 구석구석에서 열리는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시고, 향유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전주문화재단은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 재단의 행보에 많은 응원과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최락기 대표이사는 지난 1991년 전주시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해 32년간 근무하면서 한스타일관광과장, 문화관광체육국장, 책의도시인문교육본부장, 기획조정국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전주시 발전을 위해 △전통문화도시 조성 △문화예술 시설 인프라 구축 △문화예술 콘텐츠 개발 및 확충 등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전문성과 조직경영 능력, 리더십 등을 인정받아 제8대 전주문화재단 대표이사로 최종 임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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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은
  • 2024.09.01 15:55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⑮우금치전투를 상세히 기록한 '공산초비기(公山剿匪記)'

△공주 우금치전투의 관군 기록 전봉준 장군은 우금치에서 4차례 접전했다고 말했다. 1895년 2월 9일 첫 번째 문초를 받을 때 “두 차례 접전 뒤 1만여 명의 군병을 점고한 즉 남은 자가 불과 3,000여 명이요, 그 뒤 또 두 차례 접전한 뒤 점고한 즉 불과 500여 명”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우금치전투는 4차례의 전투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공산초비기>는 40차에서 50차에 걸쳐 벌어진 전투를 기록하고 있다. “일본인 군관이 군사를 나누어 우금치와 견준봉 사이에이 산허리에 나열하여 일시에 총을 발사하고 다시 산속으로 은신하였다. 적병이 고개를 넘으려고 하자 또 산허리에 올라 일제히 발사했는데 40∼50차례를 이와 같이 하였다(又登脊齊發 如是者 爲四五十次). 시체가 쌓여 산에 가득하였다.” 한 차례의 접전에서 10여 차의 공격이 이루어졌다. 우금치를 넘으려고 하면 일본군과 관군이 일제 사격을 가해서 수많은 사상자가 나오고, 다시 넘으려고 시도하면 사격을 가해왔다. 동학농민군은 죽고 또 죽어도 고지에 숨어있는 적을 공격하고 또 공격했다. 그리고 쓰러졌다. 얼마나 많이 희생했으면 “시체가 쌓여 산에 가득하였다.”고 했을까? 이러한 전투 상황은 실제 경험이 아니라면 쓸 수 없는 표현이었다. 그렇지만 <공산초비기>의 필자는 확인되지 않는다. 쓴 사람의 이름을 기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러 전투를 요약 정리한 내용으로 보아 상황 파악이 가능한 인물이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금치전투를 기록한 주요 사료인 <공산초비기> 공주성 공방전은 여러 자료가 기록하고 있다. 민간 자료는 간략한 이야기가 대부분이고, 관군 문서가 비교적 자세하다. 관군 자료가 <선봉진일기>, <순무선봉진등록>, <순무사정보첩>, <갑오군정실기> 등이다. <선봉진일기>와 <순무선봉진등록>은 출정군을 지휘한 선봉장 이규태가 주고받은 공문서를 모은 것인데 여기에 우금치전투의 1차 자료가 들어있다. 양호도순무영은 병인양요 당시의 기보연해순무영(畿輔沿海巡撫營) 전례에 따라 편제했는데 출정군 지휘관은 달랐다. 기보연해순무영은 중군 이용희가 출정군을 지휘했지만 양호도순무영의 중군 허진은 출정하지 않았다. 대원군파라고 일본 공사관에서 꺼렸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출정군을 지휘한 이규태의 선봉진 기록과 순무사 보고 내용이 1차 자료가 되고 있다. 일본군의 전투보고서는 후비보병 제19대대의 보고 계통인 남부병참감을 거쳐 히로시마대본영 병참총감에게 직보되었다. 대본영 기록에는 동학농민군 관련 보고가 생략되고 있으나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많은 내용을 전재하고 있다. 일본 정권의 실력자인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는 공사로 온 9월 이후 일본군의 진압을 관장한 현지 실권자였다. 이노우에는 고종을 압박해서 갑오개혁을 강요하는 한편 청국과 전쟁에 긴요한 군용전신을 단절시킨 동학농민군을 제거하려고 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각종 보고문서가 들어갔는데 우금치전투 전후의 보고서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우금치전투의 핵심은 모두 빠져있다. 우금치전투뿐 아니라 일본군이 책임이 있는 학살 상황을 기록하지 않거나 희생자 수를 줄이는 사례가 적지 않다. 따라서 우금치전투의 실상을 파악하는 자료로서 <주한일본공사관기록>은 결함이 있다. 동학농민군의 자료는 <균암장 임동호 씨 약력>이 자세하다. 동학농민군은 훗날 동학사 관련 책을 펴낼 때 기록한 우금치전투는 구체적인 내용 없이 줄거리만 대충 설명하고 있지만 경기도 여주 출신인 임동호가 술회하는 기록은 도움이 된다. 다만 젊은 동학농민군의 제한된 정보와 시각으로 인해 우금치전투 전반을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공산초비기>가 갖는 사료로서의 중요성이 두드러진다. 물론 관군의 시각에서 기록한 자료이기 때문에 다른 자료와의 교차 검증과 지형 등을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공주공방전은 이인전투 · 효포전투 · 우금치전투 <공산초비기>는 동학농민군의 3차에 걸친 전투를 지도와 함께 기록했다. 이인전투와 효포전투, 그리고 우금치전투이다. 이인전투는 손병희 통령의 북접농민군이 싸운 전투이고, 효포전투는 남접농민군이 벌인 전투이다. 우금치전투는 남북접농민군이 일제히 우금치와 견준봉, 그리고 봉황산 일대에서 전개한 전투이다. 이인전투는 공주성 서남쪽 이인역에 있던 북접농민군을 스즈키 아키라(鈴木彰) 소위가 거느린 1개 소대(<공산초비기>엔 100명으로 표기)와 구완회의 충청 감영병, 서산군수 성하영의 경리청 병대가 공격해서 벌어진 전투이다. 관군을 정면에 세운 일본군이 엄폐물 뒤에 숨어서 공격한 상황이 잘 드러난다. 효포전투는 동쪽 효포로 진격해서 공산성 방향으로 돌아 감영을 공격하려는 북접농민군을 이인에서 돌아온 서산군수 성하영과 백낙완의 경리청 병대가 공격한 전투이다. 고지에 올라가서 사격을 가하자 남접농민군이 후퇴해서 상황이 종료되었다. 두 전투는 순무영 선봉장 이규태가 공주로 들어오기 이전에 충청감사 박제순이 통제한 전투였다. 한창 전투 중에 군호를 내려 이인에서 관군을 불러들인 충청감사에게 불만을 표하는 기록도 있다. 한 달여 뒤에 벌어진 우금치전투는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의 서로분진대가 공주에 들어와 남북접농민군에게 매우 불리했다. 일본군 대위 모리오 마사이치가 이끈 일본군은 3개 소대였다. 당진 승전곡 전투에서 밀린 1개소대가 홍주성 방어에 가세해 있었다. 이어 순무영 선봉장 이규태도 통위영 병력을 지휘해서 감영에 들어왔다. 우금치 일대를 방어한 경군과 감영병은 모리오 대위가 장악했다. 선봉장의 위상을 가진 이규태는 모리오 대위의 지시를 따르지 않으려고 했다가 뒤에 후비보병 제19대대장 미나미 고시로 소좌에게 호된 질책을 받는다. △우금치전투의 분투와 감투 의지는 민족의 이정표 제국주의 열강이 세계 각지를 침략한 시기에 강력한 현지민의 항쟁이 여러 지역에서 벌어졌다. 그중에서 아프리카 남부의 줄루전쟁은 상징하는 바가 크다. 1879년에 3만 5000 명의 줄루전사가 이산들와나에서 1만 4000여 명의 영국군과 이에 협력한 원주민 병사를 제압했다. 그렇지만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일방적으로 패배하고 식민지가 되었다. 용감한 병사가 많아도 무기가 열세하면 어쩔 수 없었다. 동학농민군은 죽음을 무릅쓰고 우금치를 오르고 또 오르다가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후퇴해야 했다. 다시는 그처럼 싸울 수 없었다. 그러나 우금치의 분투와 감투 의지는 시대의 이정표가 되었다. 외적의 침략에 맞서려면 우리도 우수한 무기를 가져야 한다는 교훈도 얻었다. 세계 각지에서 벌어진 침략과 반침략 투쟁에서 우금치전투는 뚜렷한 위치를 차지한다. 또한 우금치전투의 처절한 희생은 한국인이 현재를 살아가는 당당한 동력이 되고 있다. 귀중한 기록유산인 <공산초비기>는 규장각에서 그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신영우 충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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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29 16:42

'제28회 무주반딧불축제' 자연특별시 무주로의 힐링여행

무주반딧불축제는 ‘자연특별시 무주’의 생태적 가치를 담은 축제로 무주군 대표 브랜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올해는 ‘자연특별시 무주방문의 해’를 맞아 사람과 자연 모두에게 힐링이 되는 여행을 선사한다. 특히 일회용품·바가지요금·안전사고 없는 3무(無)를 기반으로 ‘에코투어리즘 축제(환경보호와 지속 가능한 여행을 결합한 축제)’를 선보일 예정이어서 더큰 관심이 쏠리고 있다. 바가지요금·일회용품·안전사고 노(NO), 3무(無)는 기본 저렴한데 푸짐하고 깨끗한데 맛있기까지 한 축제 음식관과 간식 부스들이 날마다 방문객들을 기다린다. 가격만 착한 게 아니라 맛과 품질, 위생과 청결까지 모두를 만족시킨다는 계획으로 “바가지요금”을 뿌리뽑기 위한 민관 합동점검반도 운영한다. “일회용품 없는 축제”는 친환경 다회용기 사용으로 선도할 계획이다. 또 반딧불 안전지킴이 운영을 통해 축제 현장을 점검하고 위험 요인을 제거하는 등 “안전사고 없는 축제” 만들기에 주력한다. 3무(無)로 전국의 축제를 변화시킨 선두 주자다운 면모, 기대해도 좋겠다. 반딧불이와 친환경 실천, 1일 1에코(ECO) 9일간 친환경을 실천할 수 있는 ‘에코 파노라마(ECO PANORAMA)’를 운영한다. 현장에서 즐기는 친환경 실천 활동 인증 프로그램으로 ‘워킹 인(IN) 무주(하루 3천 보 걷기)’를 비롯해 ‘반딧불축제 참여’, ‘반디 서약(친환경 활동 동참)’, ‘플로깅(축제장 내 쓰레기 줍기)’, ‘재사용(장바구니, 텀블러 및 다회용기 사용 부스 이용)’, ‘에코 퀴즈(친환경 실천 관련 OX 퀴즈), ’활동 사진(무주반딧불축제 행복한 순간)‘, ’이벤트 공유(SNS공유)‘ 등을 인증하면 된다. 이외 ’방구석 재활용 마트‘ 등 친환경 실천 의미를 담은 프로그램을 신규로 편성했으며 아이디어 공모, 반디 폐품 & 재활용 과학작품 경진대회 등도 개최한다. 태양광·폐현수막 그늘막·재활용 수거함, 친환경 공간 축제장에서 쓰는 에너지원과 공간, 자재 등도 남다르다. 한풍루 수목등, 야광 조형물 등을 조성하는 데 필요한 전력을 친환경에너지(태양광 발전)로 사용하고 방문객들이 무더위를 피할 그늘막(최북미술관·예체문화관 광장)도 지역 내에서 수거한 폐현수막으로 일부 제작했다. 또 재활용쓰레기 수거함 2~3개를 설치해 그 자체를 조형물로 활용한다는 계획으로 반딧불축제를 보며 분리수거도 하고 근사한 활동가가 돼보는 것도 보람 있겠다. 폐 건설자재로 만든 테이블에서 시원한 맥주 한 잔! 그리고 사진 한 장, 찰칵! 즐겁고 의미 있는 한 때로 간직해 보자. 주민들이 만들고 다 같이 즐기는 축제 무주반딧불축제는 무주군민이 함께 만들고 같이 즐기는 축제로, 올해 특히 주민 동참이 두드러질 것으로 보인다. 우선 반딧불축제제전위원회 대의원들 50명이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직접 뛴다. 매일 현장을 돌며 만일의 안전사고에 대비하는 한편, 안전을 저해한다고 판단되는 상황 및 시설에 대해서는 즉시 조치할 계획이다. 이외 개막퍼레이드를 비롯한 전통놀이 시연, 교통 정리, 청소 및 안내 등의 자원봉사활동에 동참하고 축제 음식관과 간식 부스에도 참여해 무주의 맛과 정을 보여줄 예정이다. 무주다움으로 친환경 가치 공유, 글로컬(Global+Local)축제 무주반딧불축제는 2024 피너클 어워즈 및 아시아축제도시 콘퍼런스에서 환경보호와 지속 가능한 여행을 결합한 축제로 인정을 받아 ’에코투어리즘 축제‘에 선정된 바 있다. 무주반딧불축제만의 생태적 가치와 영향력으로 세계 축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과제를 제시한다는 방침으로 지난 7월에는 세계 3대·아시아 최대 맥주 축제인 중국 칭다오국제맥주축제의 러브콜을 받아 교류의 물꼬를 트기도 했다. 이번 축제에서는 친환경적인 지역 특성을 살려 세계적인 축제로 올라서겠다는 무주반딧불축제 포부를 확인해 볼 수 있다. 황인홍 무주군수 "무주반딧불축제는 자연과 사람의 공존을 지향하는 환경축제입니다." 황인홍 무주군수는 "환경지표 곤충이자 천연기념물인 ‘반딧불이’를 소재로 환경의 중요성을 알리고 보전의 필요성을 공유하는 등 선한 영향력을 전파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지난해에는 바가지요금·일회용품·안전사고 없는 3무 축제로 전국 축제장에 일대 변화의 바람을 일으켰다고도 자부한다"며 "특히 9일간 42만여 명이 방문했는데, 한 건의 안전사고 없이 진행된 축제로 행안부 차관 주제 전국 시도지사협의회에서 지역축제 모범사례로 전파되기도 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올해는 ‘3무(無)’에 더해 ‘친환경축제’의 진수를 보여드릴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황 군수는 "반딧불이와 함께 하는 9일간의 특별한 경험 하실 수 있다"며 "축제의 성공 개최를 위해 더큰 기대와 응원을 당부드린다"고 말했다. 유송열 무주반딧불축제 제전위원장 "올해는 환경보호와 여행을 결합한 에코투어리즘 축제를 기대하셔도 좋겠습니다." 유송열 무주반딧불축제 제전위원장은 "친환경 메시지를 전하는 것을 넘어 방문객 누구라도 친환경 실천에 동참하도록 할 예정"이라며 "축제장 내 쓰레기 줍기 등 인증 프로그램도 진행한다"고 말했다. 이어 "축제장 운영에 필요한 전력을 태양광 발전으로 한다거나 분리 수거함, 폐현수막을 활용한 그늘막, 폐 건설자재로 만든 테이블로 축제장 곳곳을 채울 것"이라며 "친환경 실천 분위기를 만들겠다"고 덧붙였다. 그는 "바가지요금을 없애기 위해 입점 업체를 공개 모집해서 음식 가격과 양을 사전 조율하고 행사장 내 모든 음식 부스에서는 다회용기를 사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기획
  • 김효종
  • 2024.08.28 15:14

“고창군이 가면(만들면) 곧 길이 된다”

민선 8기 심덕섭 고창군정이 전국 지자체의 새 역사를 쓰고 있다. 국내 최초, 전국 최초, 전북특별자치도 최초 등 아직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개척하며 지역소멸에 직면한 농촌지자체의 새로운 생존 모델을 제시했다는 평가다. ‘군민행복! 활력고창!’을 향한 고창군의 도전 스토리를 살펴봤다. ‘국내 최초’ 세계의 보물 7개 보유 고창군은 마침내 유네스코가 인정한 세계의 보물 7개를 보유한 국내 유일의 도시가 됐다. 고창군은 2000년 고인돌유적지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시작으로, 2003년 판소리 인류무형유산 등재, 2013년 행정구역 전체의 생물권보전지역 지정, 2014년 인류무형유산 농악 등재, 2021년 고창갯벌 세계자연유산 등재, 지난해 고창·부안 서해안권 세계지질공원 인증, 무장포고문 등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까지 성공시켰다. 특히 고창군은 지난해를 ‘2023 세계유산도시 고창 방문의 해’로 선포하는 혁신사례를 보여줬다. 이전 광역단위(전라북도 방문의 해)나 주변 시단위에서는 4~5년 시차를 두고 진행됐지만 고창군에서는 첫 시도였다. ‘2023 세계유산도시 방문의 해’의 대성공으로 1000만 관광시대를 활짝 열었다. ‘전국 최초’ 농촌인력 인건비 조례 제정·농업근로자 기숙사 완성 고창군은 2023년 8월 1일 전국 최초로 ‘고창군 농촌인력 적정 인건비 운영에 관한 조례’를 제정해 시행 중에 있다. 내·외국인 가리지 않고 9월에는 적정인건비로 남자 11만~13만 원, 여자 9만~11만 원을 제시했다. 조례는 폭등하는 인건비에 한숨 쉬는 지역 농가를 두고 볼 수만은 없어 행정이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으로, 의무나 강제사항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행 1년여를 맞는 현재 고창군의 인건비는 인근 타 지자체에 비해 다소 낮게 유지되고 있다. 전국 최초로 농업근로자 기숙사도 완성됐다. 대산면에 들어선 ‘농업근로자기숙사’는 총 25여억 원의 사업비를 투입해 연면적 950.4㎡에 지상 4층 규모로 지어졌다. 1층에는 공동 취사장, 다목적실, 2층부터 4층까지는 2인실 숙소가 들어섰다. 기숙사는 농촌인력이 부족한 지역에 주거제공이 어려운 농업인의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마련됐다. 일을 마치고 도착하는 주차장부터 외부세척장, 입구에 비치된 개인 사물함, 1층에 마련된 샤워장은 농작업을 하고 돌아오는 근로자의 실제 동선을 반영해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전북자치도 최초 ‘삼성전자 고창스마트 허브단지’ 유치 꿈의 기업 삼성전자가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에 들어온다. 삼성전자㈜는 고창신활력산업단지 18만 1625㎡(축구장 25개 규모)를 매입해 자동화 기술이 접목된 첨단 물류센터를 건립한다. 물류센터는 2025년 상반기 착공해 2027년 내 준공할 계획이다. 아울러 공사 중 건설·기계장비 등 관내 기업 및 인력의 우선 활용·채용도 기대된다. 고창군민들은 ‘삼성’이 들어온다는 것에 큰 기대감을 보이고 있다. 각 모임·단체별로 거리 곳곳에 대형 현수막을 내걸고 세계 초일류 기업 삼성전자의 투자유치를 환영하고 있다. 특히 내년부터 무장 영선고등학교의 AI 특화 직업계고(가칭 전북인공지능고등학교)로 교명 변경이 확정됐는데, 삼성전자의 스마트 허브단지와 연계해 AI 핵심인력 양성의 중추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전북자치도 최초 ‘국립고창치유의 숲’ 운영 산림청 산하 한국산림복지진흥원이 운영하고 있는 ‘국립고창치유의 숲’은 고창읍 고수면 일대 산림치유자원을 활용해 산림치유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전북특별자치도 최초의 국립치유의 숲으로 개장했다. 고창치유의 숲은 제1치유센터와 제2치유센터로 구분돼 있다. 최근에는 14개 읍·면 사회단체와 함께 치유 힐링에 나서면서 큰 호응을 얻고 있다. 고창의 편백림은 총 33만 평 부지에 무려 9만 평 가량의 편백나무가 식재돼 지역주민뿐만 아니라 관광객 누구나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다. 고창군 다수 정책 타 지자체 모범 이외에도 고창군은 △사회복지 종사자 처우개선 용역(전북 최초) △소비자가 선정한 품질만족대상(전국 최초, 고창 미니수박) △국토교통부, 터미널 도시재생 혁신지구 시범사업 선정(전국 군 단위 최초) △저탄소 축산물 인증시범사업 농가 최다 배출(전국 최다) △전국 최대 규모 바지락 생산지(전국 최대) 등 과감한 도전과 열정으로 전국 첫 번째 타이틀 행진이 이어지고 있다. 고창군의 전국 최초는 타 지자체 정책의 모범이 되고 있다. 실제 지난해부터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보존·활용 정책을 배우기 위해 전 세계 각국 대사관과 교육 공무원들의 방문이 이어지고, 대기업을 감동시킨 기업유치 전략은 적극행정 모범사례로 전국에 소개되고 있다. 특히 ‘전국1호 농업근로자 기숙사’는 전남 나주 공무원교육원 교육생들을 비롯해 전국 외국인계절근로자 유치도시 30여 곳에서 기숙사 시설과 운영 노하우를 배워가며 주목받고 있다. 심덕섭 고창군수는 “지역소멸을 막아내고 군민행복 시대를 열겠다는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에 전국 첫 번째 정책을 만들고 성공스토리를 쓸 수 있었다”며 “앞으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더 잘할 수 있는 일을 발전의 동력으로 삼는 자발적이고 긍정적인 혁신을 이어나가겠다”고 밝혔다.

  • 기획
  • 박현표
  • 2024.08.27 15:53

[전홍철 교수의 ‘영상과 함께 하는 실크로드 탐방’] 실크로드의 미스터리 보물 (3) 흉노 무덤에 웬 그리스 알몸 여인?

흉노 무덤 ‘노인 울라(Noin-Ula)’에서 출토된 은제 팔레라(Phalera,말 장신구)에 새겨진 나체의 그리스 여성이 말한다. “저는 순결의 여신인 아르테미스(Artemis)예요. 외설스럽고 색을 밝히는 사티로스(Satyr)가 싫다는데 저를 자꾸 유혹해요. 또 옆에는 흥분한 상태의 남근을 드러낸 헤르메스(Heres)도 있어요. 저는 원래 그리스(로마)에서는 의례용 고급 식기의 부착물이었는데, 흉노 사람들이 중국 상품과 교환해 가지고 와서는 말 장신구가 되었어요.” △ 흉노 지배층 무덤 ‘노인 울라(Noin-Ula)’ 흉노(匈奴)는 BC 3세기부터 AD 1세기까지 동몽골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제국을 건설한 유목 전사들이었다. 노인 울라(Noin-Ula)는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Ulaan Baatar)에서 북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유적지로 200개 이상의 흉노 무덤이 흩어져 있다. 노인 울라 고분들은 도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호화 장신구, 청동 유물, 도기, 직물, 도구, 의복뿐만 아니라 인간과 동물(말, 낙타, 노루)의 뼈와 기장 씨앗 등 많은 물건들이 출토되었다. 또 칠기, 비단과 같은 물건의 존재는 한(漢)나라 시기 중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은제 팔레라(Phalela), 직물과 같은 물품은 그리스, 박트리아 (Bactria), 중앙아시아 등 다른 지역에서 수입된 것으로 여겨진다. △ 알몸 여인의 은제 팔레라(Phalera) 팔레라(Phalera)는 은으로 만든 말 장신구를 말한다. 나체 여인이 마치 조각처럼 높게 부조된 이 은제 원반은 흉노 시대인 BC 1세기에서 AD 1세기 사이에 주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원반의 지름은 143.1mm, 폭의 테두리는 6.4mm이다. 내부 원판은 거의 순수한 은으로 만들어졌고, 합금하였으며 4개의 은 못으로 판에 부착하였다. 판의 외부 가장자리를 따라 10개의 불규칙한 원형 관통 구멍이 있다. 제작 기법은 판의 뒷면을 두들겨 부조한 후 도금하고 아말감 처리를 하였다. 매장실 내 위치로 보아 말 장신구의 일부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원래 그리스(로마)에서는 장식용 식기나 접시 등에 붙어있던 것을 흉노 고위층은 말 장신구에 사용하였다. △ 알몸 여인의 정체 ‘아르테미스 (Artemis)’ 은제 팔레라에 새겨진 알몸 여인은 도대체 누구일까? 이에 대해서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팜므 파탈’ 옴팔레 여왕이 헤라클레스를 노예로 부리면서 희롱하는 모습이라는 설이 있지만 헤라클레스 도상은 애당초 꼬리가 없으므로 따르기 어렵다. 이 여인은 출산, 육아 및 순결의 여신인 아르테미스(Artemis)이고, 남성은 금박 말꼬리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볼 때 사티로스(Satyr)로 추정된다. 이 은제 원반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성기를 드러낸 채 여성을 유혹하는 사티로스의 오른쪽 무릎에 앉아 있는 여성을 높은 부조로 묘사하고 있다. 여성은 왼손으로 사티로스를 밀어내고 있으며, 그녀의 손가락과 손이 그의 턱에 닿아 있다. 이러한 동작 묘사는 꽤 전문적인 것이며, 취한 사티로스의 모습은 위엄 있는 여인 이미지와 대비된다. 그녀의 구부러진 오른쪽 다리를 덮고 있는 베일의 한쪽 끝은 다리 사이로 부드럽게 주름지어 늘어져 있다. 다른 쪽 끝은 그녀의 왼쪽 팔뚝을 두 번 감싸고 등 뒤로 넘긴 후 솟아 있고, 염소 가죽이 여성의 어깨 위로 넘어와 오른쪽 가슴을 덮고 있다. 여인의 입은 작고 도톰한 입술이 꽉 다물어져 있으며, 머리에는 금박 왕관(diadem)으로 머릿발을 묶고 있다. 또 여인 바로 옆에는 솔방울로 장식된 나무 지팡이가 있는데, 이는 갑옷 역할을 한다. 지팡이 옆 작은 금박 인물은 헤르메스(hermes)로 발기된 남근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운동선수 체격의 수염 없는 젊은 남성은 동물 가죽 위에 기대 누워있다. 그는 왼손을 구부려 기대고 다리를 벌리고 있다. 남자의 얼굴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으며, 콧마루 옆 두 개의 깊은 주름으로 고통을 표현하고 있다. 남성은 금박 담쟁이덩굴 화환(gilt ivy wreath)을 쓰고 있는데 황금색 뾰족한 끝이 반짝인다. 한편 그의 등 뒤로는 말꼬리의 금박 끝부분이 부조로 선명하게 보이고, 남성은 오른손으로 무언가를 잡고 있는데 아마도 포도주를 담는 가죽 부대일 것이다. △ 흉노 무덤의 다원적 성격 흉노 제국 전성기 약 250년 동안 중국은 당황했고 평화롭지 못했다. 흉노는 중국의 부를 탈취함으로써 존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많은 중국인들이 흉노에 유입되고, 그들의 기술과 문화가 영향을 미치면서 중국화되는 것 또한 피할 수 없었다. 유목 민족들은 일반적으로 땅을 파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18미터 깊이의 노인 울라 고분은 중국 기술과 장례 의식의 영향이었다. 마차, 칠기, 비단 등 흉노 귀족 무덤 출토품의 3분의 2가 중국과 관련된다. 중국은 흉노에 옻칠된 마차를 선물했는데 실제로는 유목 전사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공물(貢物)이었다. 한편 흉노는 실크로드를 통제했고, 서방과의 무역에서 중국의 고급 상품을 가지고 중개자 역할을 했다. 중국 상품의 대가로 서방의 희귀품들이 교환되었다. 노인 울라에서 출토된 나체 여신의 은제 팔레라는 그리스(로마) 어딘가에서 제작된 의례용 식기의 일부분이었으나, 흉노에 들어와서는 말 가슴에 걸리게 되었다. 이처럼 흉노 무덤은 중국에 대해서 말해줄 뿐만 아니라 서양 문명의 과거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전홍철 우석대 경영학부(예술경영) 교수 전홍철 우석대 경영학부(예술경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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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26 15:28

"지역발전 구심점"...남원글로컬캠퍼스로 재도약 꾀하는 남원시

남원시가 과거의 명성을 되찾기 위한 새로운 도약을 시작한다. 옛 서남대 부지를 활용한 '전북대 남원글로컬캠퍼스' 설립이 그것이다. 시는 민선8기 최경식 시장을 중심으로 남원글로컬캠퍼스의 2027년 개교를 목표로 새로운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 6년 전 서남대 폐교 이후 지속된 침체와 쇠퇴의 역사를 딛고 남원글로컬캠퍼스가 인구 유입의 거점으로서 지역에 활력을 가져올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기대에서 절망으로...6년째 방치된 '애물단지' 서남대 서남대학교는 남원 시민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지난 1991년 개교했다. 인구 10만이 안되는 작은 농촌도시에 50명 정원의 의대를 갖춘 종합대학이 문을 열면서 인구 유입의 거점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됐다. 이 같은 장밋빛 전망은 2018년 2월 서남대가 폐교되면서 큰 충격으로 돌아왔다. 설립자의 교비 횡령 등으로 인한 경영 위기를 극복하지 못한 뒤 교육부의 폐쇄 명령에 따른 결과였다. 서남대가 폐교되고 캠퍼스가 황폐화되자 학교 앞 상권은 몰락했다. 2000여 명의 젊은 학생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남원시내는 점차 활력을 잃고 쓸쓸히 쇠락해갔다. 특히 서남대는 도서관 건물이 15도 기울어 있을 정도로 부실 공사 투성이인 탓에 마땅한 활용 방안을 찾기도 어려웠고 재정자립도 최하위인 시에서 200억 원이 넘는 토지 매입에 선뜻 나설 수도 없었다. 이에 따라 한때 국립공공보건의료대학 부지로 거론되기도 했던 서남대는 6년째 방치돼 잡초만 무성한 도심 속 흉물로 전락해 왔다. 지역 현안 1순위였던 서남대 활용...남원글로컬캠퍼스로 답을 찾다 시는 민선8기 들어 서남대 부지 활용 방안 마련을 지역 현안 1순위 과제로 꼽고 지난해 11월 교육부 '글로컬30' 사업에 선정된 전북대와 손을 잡았다. 전북대 남원글로컬캠퍼스 유치는 30여 년 전 서남대 설립 당시에 못지않은 지역사회의 활력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게 시의 판단이다. 최경식 시장이 이에 깊은 관심을 갖고 적극 추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시는 2027년까지 국비 등 604억 원을 들여 서남대 부지에 전북대 남원글로컬캠퍼스를 설립한다. 이를 위해 지난 3월 매입 계약을 체결하고 205억 원의 예산을 편성해 서남대 캠퍼스 40만㎡와 건물 모두를 사들였다. 시는 2026년까지 시설 증개축을 마무리하고 이듬해 교욱부의 승인을 받아 4년제 기준 유학생을 포함한 1200여 명 규모로 문을 열 계획이다. 계획대로 추진되면 시와 전북대는 이곳에 지역 전통문화를 활용한 K-컬처 학부를 비롯해 외국인 유학생을 위한 한국어학당과 K-팝 학과 등을 신설해 전통과 글로벌 문화를 선도하는 대학을 표방한다. 특히 화장품과 전통목기 같은 남원 특화산업 창업 공간을 조성하고 항공·도심 항공교통(UAM), 농생명 바이오 관련 학과 등을 설치해 지역 미래 산업 성장에 긍정적 효과를 줄 것으로 기대한다. 남원글로컬캠퍼스 설립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지자체가 앞장 서 폐교를 활용한 지역재생 모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현재 시는 서남대 미준공 건축물 철거와 내부 환경정비 사업을 추진 중이다. 또 원활한 외국인 유학생 확보를 위해 전북대와 협력해 유학생 수요를 파악하고 비자 발급을 완화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시는 남원글로컬캠퍼스를 통해 남원에 유입된 2000여 명의 학생들이 지역에 일자리를 창업하거나 근로자로서 그대로 머무는 것이 지속 가능성의 관건이라 보고 정주여건 조성과 기업유치를 위한 특단의 대책을 강구한다는 방침이다. 최경식 남원시장 "지역과 대학 상생의 기회 주어진 것은 기적...최선 다해 성공시키겠다" 최경식 시장은 "후보 시절부터 폐교 서남대를 어떻게 재생시킬까 고민해왔는데 전북대 남원글로컬캠퍼스 설립을 통해 지역과 대학이 상생할 수 있는 기회가 우리 남원에 주어진 것은 기적이라 생각한다"며 이번 사업을 반드시 성공시키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이어 "남원글로컬캠퍼스에 'K-컬쳐학부'를 신설해 최근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K팝 전문인력 양성의 메카로 특별한 경쟁력을 갖출 것"이라며 "이러한 강점을 토대로 향후 남원 국제 K팝 국제학교 설립에도 나서겠다"고 덧붙였다. 끝으로 최 시장은 "남원글로컬캠퍼스가 설립되면 외국인 학부생을 포함해 산업인력과 창업 입주기업 등 2000여 명의 인구 유입 효과가 기대되는 만큼 우리 시에서는 대학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대학이 완성되도록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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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기철외(1)
  • 2024.08.25 16:26

[참여&공감 2024 시민기자가 뛴다] 디지털 복원으로 되살아난 익산 미륵사

익산 ‘미륵사지’는 행정구역상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32-2에 소재하고 있다. 백제 무왕 40년(639년)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백제를 대표하는 최대 규모의 호국사찰로 사적 제150호(1966.8.30)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현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백제역사지구)으로 2015년에 등재되어 세계의 관람객이 찾아오는 유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또한 미륵사지는 1295만8688㎡의 광활한 대지 위에 백제, 통일신라, 고려, 조선 등 후대까지 경영되었던 수 많은 역사적 흔적이 남아 있어 지금도 지속적인 보수정비사업이 추진되고 있으며, 최근 2019년에는 미륵사지 석탑 보수공사가 완료되었고, 2020년에는 국립익산박물관이 개관됨에 따라 현재는 다소 정리된 관람시설과 콘텐츠가 구비되어졌다. 그런데 이런 역사적 의미가 막대하고 가람내 체계적 정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미륵사에 방문해보면 연원이 불확실한 연지와 당간지주 그리고 2개의 석탑만이 덩그러니 서 있고, 관람 동선에 따라 이동하다 보면 약간의 정비된 유적의 모습들 예컨대 당시 건축물의 웅장함을 증거하고 있는 심초석이 보이도록 정비된 금당지와 널따란 강당지 등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결코 이런 친절한 배려로도 과거 미륵사의 진정성있는 전체적인 건축물이 상상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관람객이 현장을 방문했음에도 미륵사의 온전한 모습을 확인하기에는 부족한 상황인 것이다. 이는 백제기 유적이 가지는 공통된 문제점으로 백제 유적 대부분은“땅 아래에서 피와 땀으로 건진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백제기 대부분의 유물과 유적이 고고학에서 밝혀졌다는 자조적인 평가에서 나온 말이며 또 “고대를 연구하는 것은 천재적 상상력이 있는 학자나 하는 영역이다”라는 말도 있다. 이는 실물로 남아 있는 고대 백제기 문화유산이 거의 없어 약간의 역사적 실마리(문헌, 유구 등)를 통해 합리적 추론에 의한 서술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런 이유로 유적의 복원은 이제 필연이 되었다. 그리고 컴퓨터와 인터넷 기술을 기반으로한 정보통신기술의 급격한 발전은 문화유산의 가시적 표현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지난해 디지털 대전환 시대 변화에 따라 미륵사 건축유적에 대한 디지털 복원연구를 추진하게 되었고 이런 노력은 20대 대통령 취임과 함께 국정과제(62-5)로 선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올해에는 그간 추진됐던 미륵사복원기초연구(2008∼2013년), 미륵사 복원 기본연구(2013년∼2023년) 등 그동안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미륵사 중문 디지털 복원과 콘텐츠 개발'이라는 증강현실 콘텐츠를 구축하게 되었고 이를 일반인에 공개할 수 있게 됐다. 이 콘텐츠는 건축물의 터만 남겨져 있던 현장에서 증강현실로 과거 미륵사의 건축유산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콘텐츠로 그간 양주 회암사지와 파주 혜음원지, 부여 정림사지 등에서 시도 된 바가 있으나, 이번 미륵사 디지털 복원의 경우는 20여 년 간 지속적으로 추진된 연구성과를 반영하여 유적의 발굴과정 및 건축물 연구추이를 살펴보는 등 유적의 진정성있는 복원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특별하다. 더불어 중문의 다양한 건축부재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증강현실 상황에서 촬영을 하고 이를 메일로 전송할 수 있는 기능도 새롭게 탑재하고 있다. 미륵사 디지털 복원 프로젝트는 크게 3단계로 기간을 구분하여 추진되는데 사업은 2033년경에 마무리될 것으로 알려졌다. 1단계는 2023~2025년까지로 미륵사 3원영역(중문, 회랑, 목탑) 복원이 대상이며, 2단계는 강당영역의 건축물이 2026~2028년까지 추진될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3단계는 2029~2038년까지 승방영역과 기타구역을 복원할 예정으로 이후 복원 결과물은 일반인 공개는 물론 전문가에게 연구자료로 제공하고 더 나아가 대학의 교재로 제공할 수 있도록 콘텐츠 수준을 업그레이드 한다는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2038년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해이다. 백제가 사비로 천도하고 도읍을 정한(538년)이래 1500년이 되는 해이다. 이런 이유로 백제역사지구 관련 대부분의 정비계획은 이 기간안에 마무리를 목표로 추진되고 있다. 나름 동기부여가 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은 기간과 시간을 정해놓고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이 가장 중요한 역사적 순간이며 이 순간에 우리는 역사가 된다. 역사문화유산의 디지털복원이 우리 역사유적 복원에 필연적 단계가 되었다면 좀 더 강한 정책적 지원과 예산 투입이 필요해 보인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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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21 14:31

[팔도건축기행] 화성행궁에서 '화령전'을 찾아야 하는 이유

요즘은 수원 밖에서도 유명해진 화성행궁의 바로 옆엔 행궁보다 덜 알려졌지만 더 중요한 건축물이 있다. 235년 전 화성행궁을 건립한 정조(조선 22대 임금, 1776~1800년 재위)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어진(임금의 초상화)을 모신 '화령전(사적 115호,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이다. 임금의 어진을 봉안한 전각을 '영전'이라 부르는데 지금은 전주한옥마을 근처의 경기전(태조 어진 봉안)과 이 화령전만 남았다. 현재의 화성행궁과 수원화성이 전국 방문객을 끌어모으고, 과거엔 정2품(지금의 장·차관 또는 도지사) 유수가 머물고 집무하는 유수부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화령전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하며 위상을 잃어가던 수원화성에 계속 순조와 헌종, 철종, 고종 등 모든 조선 임금들이 발길을 이어간 것도 화령전 때문이었다. 융건릉 능행차 길에 오른 임금들이 참배에 그치지 않고 매번 화령전을 찾아가 다시 한번 정조에게 잔과 절을 올린 작헌례(酌獻禮)를 치른 것이다. 화령전은 조선시대 왕실 건축의 정수를 보여주며 창건 당시 원형이 대부분 남아 있다는 평가를 받아 5년 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2035호)로 지정됐을만큼 건축적 가치가 뛰어나다. 정부 정책에 따라 정조의 어진이 잠시 화령전을 떠나고, 병원·행사장·사무실 등 엉뚱한 목적에 쓰여 화령전이 낡거나 훼손될 때마다 수원시민들이 십시일반 성금과 힘을 모아 건물을 수리하는 등 화령전 지킴이를 자처한 것도 이 때문이다. 수원시화성사업소 오선화 학예사는 "수원사람들에게 화령전은 곧 정조"라며 "그가 일궈낸 최고의 걸작 수원화성에 정조의 어진이 머물렀고, 지금도 머물고 있는 공간이 화령전이기에 건축물 그 이상의 의미가 부여된다"고 화령전을 설명했다. 화성행궁을 방문한다면 화령전을 꼭 찾아야 하는 이유다. △역대 임금 모두 찾고, 백성에도 경사였던 화령전 화령전은 정조 승하 3개월 후 그의 할머니인 정순왕후의 명에 따라 지어졌다. 당시 정조의 장례(국장) 절차를 총괄한 총호사 이시수의 청을 정순왕후가 받아들였다. 정조는 생전에 부친인 사도세자를 가까이서 지켜보려고 자신의 초상화를 현륭원에 뒀는데, 나중에 정조의 묘를 현륭원 옆에 조성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정조 어진을 다른 장소로 옮겨야 했다. 정순왕후가 별도의 전각을 지어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도록 하면서 1801년 4월 29일 화령전이 세워졌다. 건립에 참여한 400명 이상 각종 장인들은 쌀이나 포목 등의 상을 받았다. 처음 화령전에서 작헌례가 치러진 건 1804년이다. 11살에 정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순조가 15살 때 첫 능행차에 나서며 아버지의 어진을 찾아 잔과 절을 올렸다. 이후 왕세자까지 데리고 화령전을 방문하는 등 순조는 9차례나 돌아가신 아버지 앞에서 예를 갖췄다. 그 뒤로는 헌종이 1843·1846년, 철종은 1852·1855·1860년, 고종도 1868·1870년 직접 화령전을 찾는 등 정조 이후 모든 조선시대 임금들의 능침(임금이나 왕후의 무덤) 친제(임금이 직접 지내는 제사)가 이어졌다. 이렇게 융건릉 능행차와 화령전 작헌례 등을 목적으로 수원화성을 방문할 때마다 임금들은 화성행궁에서 적어도 이틀을 묵었는데, 이는 지역 백성들에게도 경사였다. 임금이 대궐 밖을 나서는 '행행' 자체가 백성들의 요행을 뜻하기도 하는만큼 이 때마다 지역 백성들에게 여러 혜택이 내려졌다. △바로 인접한 이안청…온돌로 합자와 익실 관리 화령전과 같은 영전 건물은 조선시대 절기마다 선왕의 제사를 지내던 곳이어서 건축에도 각별한 격식을 갖췄는데, 화령전은 그 건축적 제도를 계승하며 고유한 특색까지 갖춘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2019년 제2035호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된 화령전은 1801년 건립 당시 정전(운한각)과 복도각, 이안청으로 구성되는 조선시대 영전 건물들의 건축제도 원형 그대를 유지하고 있다. 동시에 정전 실내에선 중앙에 어진을 봉안한 합자와 좌우에 갖춰진 익실의 구조를 갖추는 등 다른 영전에서 보기 어려운 특색을 지니고 있다. 건립 당시 화령전은 정전을 중심으로 이안청과 복도각이 연결돼 있고 정전 마당엔 내삼문에서 정전 월대까지 어로가 놓인 형태로 지어졌다. 마당 북쪽 담장에 난 동문을 나서면 재실이 있고, 동문과 정전 월대 사이에도 어로가 깔려 임금이 작헌례를 거행할 때의 동선을 드러낸다. 남쪽 서문을 나가면 위치해 있는 향대청과 전사청은 제례 때마다 물과 향, 제수 등 제사 준비에 쓰인 건물이다. 이안청은 정전을 수리하거나 그 밖에 변고가 있을 때 정전의 어진과 기타 서책, 기물 등을 임시로 옮겨놓기 위한 용도로 마련됐다. 정전 곁에 이안청을 두는 방식은 조선초기 다른 영전에서도 볼 수 있지만, 화령전의 이안청은 전주 경기전 등과 같이 담장 너머 별도의 구획된 영역에 위치한 게 아니라 복도각을 사이에 두고 정전과 이안청을 직접 근접하게 연결하는 방식을 갖추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 여러 영전 가운데 화령전에서 처음 나타난 사례다. 화령전은 정전 건물 내부 평면 역시 다른 영전에서 보기 드문 형태를 나타내는데, 중앙에 합자를 두는 건 전주 경기전 등에서도 볼 수 있지만 좌우에 익실을 마련해 서책이나 관련 기물을 보관한 것은 색다른 특징이다. 특히 중앙 합자는 물론 좌우 익실의 바닥에 온돌을 설치해 5일마다 불을 넣어 습기를 제거하도록 했다. 이 온돌은 1872년(고종 9년) 왕명에 의해 마루로 고쳐졌으나, 건물 좌우 측면과 후면의 아궁이는 존치해 당시 정전에 온돌이 쓰인 사실은 지금도 여전히 보여주고 있다. △"화령전 지키는 첫걸음, 가치 제대로 아는 것" 이처럼 수원화성의 역사적 가치를 지켜내며 건축물로서의 가치도 드높인 화령전은 숱한 외력에 자칫 훼손될 뻔한 위기를 한 두번 겪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 때마다 수원시민들이 화령전을 직접 지켜냈다. 화령전 안에 처음 봉안된 정조의 어진이 1908년 당시 정부 정책에 따라 덕수궁으로 옮겨진 이후 불에 타 사라지고, 다시 그린 어진을 2004년 모시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었다. 정조의 어진이 떠난 화령전을 가장 먼저 멋대로 사용한 건 일제였다. 자신들의 근대문명 선전을 위한 병원(자혜의원)을 1910년 화령전에서 운영했다. 1915년엔 작약회란 조직이 화령전을 꽃놀이 장소로 사용했고 곡예단과 기생들의 공연 장소, 물건 판매장으로 이후 쓰였으며 나중엔 영화 상영과 피로연 등 각종 행사장 목적에도 활용됐다. 그렇게 임금의 어진을 모시던 화령전이 엉뚱한 목적으로 쓰이며 건물이 낡고 일부 훼손되기 시작하자 보다못한 수원시민들이 직접 화령전 지키기에 나섰다. 보수 규모는 작았으나 1934년 수원 유지들로 이뤄진 수원보승회가 건물을 직접 수리했고, 1936년엔 추녀와 지붕을 고쳤는데 당시 수리 공사를 위한 도면도 남아 있다. 그럼에도 해방 후엔 화령전이 무당의 숙소로, 마당은 밭으로 쓰이자 1949년엔 주변 신풍동 마을 주민들까지 팔을 걷어붙였다. 당시엔 수원시와 화성군의 예산 및 자재 지원도 이뤄졌고 지역 대목수들도 공사를 도왔다. 그럼에도 다른 목적으로 활용된 화령전은 1963년에야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며 보존 근거가 마련됐으며, 1975년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수원성 복원보수정화사업에 따른 대대적 보수가 진행됐다. 이후 1992년 표준영정으로 그려진 정조의 어진이 80여 년만에 다시 화령전에 봉안됐고, 이후 2004년 다시 그려진 어진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화령전의 높은 가치를 지키는 첫걸음은 그 가치를 제대로 알고 기억하는 것이다. 5년 전 화령전의 보물 지정을 가장 반긴 것도 다름아닌 시민들이었다. 과거 화령전 수직관원들이 5일마다 어진의 이상 유무를 확인하고, 수원유수가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한번 향을 피워 어진을 보살폈던 것처럼 수원시민은 물론 국민들이 다함께 정조가 영원히 머물 화령전을 지켜야 할 것이다. /경인일보=김준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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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19 15:11

<뉴스와 인물> 이원택 더불어민주당 전북특별자치도당 위원장

전북은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중앙정부 지원으로부터 고립됐다. 전북이 미래도약의 발판을 열기 위해서는 그 어느때보다 ‘강한 정치력’이 요구되고 있다. 지금 전북은 대외적으로 새만금 잼버리 파행에 따른 예산삭감 등의 후속조치 선행과 전국에서 전북만 제외된 대광법 통과, 역대 정권의 공약이었던 공공의대 설립, 미래산업 기틀이 될 수소·탄소·이차전지 산업 기틀 확보, 특별자치도에 걸맞는 재정 확보를 위한 재정특례 등 현안이 산적해 있다. 또한 내적으로는 완주-전주 통합, 군산-김제-부안 새만금 특별자치단체 설립 등에 직면해 있다. 전북일보는 더불어민주당 전북특별자치도당 위원장으로 선출된 이원택 국회의원(군산·김제··부안을)을 만나 향후 전북 발전을 위한 계획과 포부를 들어봤다.   -민주당 전북특별자치도당 위원장으로 선출되셨는데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를 지지하고 성원해 주신 당원 동지들과 도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경제와 민생을 파탄시키고 국민 무시로 일관하고 있는 윤석열 정권을 심판하라는 국민의 명령을 받들고 2027년 정권교체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를 더욱 잘 대변하고 전북의 새로운 미래비전을 제시해 도민들과 함께 전북 대도약의 시대를 열어 나가겠습니다. 경제와 민생파탄, 국민무시, 검찰독재 윤석열 정권을 심판하고, 2026년 지방선거 승리와 2027년 민주당으로의 정권교체에 앞장서며 전북특별자치도의 대도약을 이끌겠습니다.”   -전북은 지금 대한민국 속 외딴섬으로 불릴 정도로 예산과 정책 배려에서 소외되고 있는데 대응 방안은. “전북이 홀대 받고 패싱당하고 있는 현실을 바꾸기 위한 노력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새만금 잼버리 사태의 전북 책임 전가, 새만금 예산 삭감과 전북 국회의원 의석수 축소에 맞서 물러서지 않고 싸웠고, 그 과정에서 전북의 이익을 지켜내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전북 홀대에 맞서기 위해서는 전북지역 국회의원들이 원팀으로 단결해 예산과 정책현안에 대응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역 국회의원 모임을 매월 정기적으로 열어 상호 간에 소통하고 협력하는 장을 만들고 힘을 모아 중앙정부의 협의력을 높여 나갈 생각입니다.”   -새만금 SOC예산, 국제공항, 대광법, 공공의전원 등 현안들이 즐비한데 풀어나갈 해결책이 있으신지요. “얼마전 제출된 ‘새만금 SOC사업 적정성 검토 용역 최종보고서‘에서 새만금국제공항 건설사업과 관련한 추진절차와 방법 등이 모두 적정하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새만금 SOC사업 추진의 당위성이 다시 한번 확인된 것인데, 사실 타당성 조사가 모두 마무리되어 재검토할 필요도 없던 사안이었습니다. 연구용역을 한다면서 새만금 사업을 8개월 지연시킨 것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식의 전북에 대한 딴지걸기가 반복되지 않도록 앞으로 전북 관련 국책 사업 추진과 제도개선에 대해 도당 차원의 강력한 대응을 해나가겠습니다. 10명의 전북 국회의원들과 전북 도-시군이 합심해 정부의 부당한 정책결정과 예산홀대에 맞서 싸우고 또 설득해 나가겠습니다.”   -중앙 정치에서 전북 정치의 목소리와 입김이 작은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습니다. “21대 국회에 비해 22대 국회에 전북지역 다선 중진의원들이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5선 정동영 의원, 4선 이춘석 의원, 3선에 김윤덕, 한병도, 안호영 의원까지 무게감이 충분히 있습니다. 또한 전북의 권리당원도 15만명으로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봅니다. 결국 중앙 정치권에서 목소리를 내기 위해 중요한 것은 전북의 정치권이 개인을 넘어 단결하고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도당을 당원 중심의 대중정당으로 혁신하고 정치권이 똘똘 뭉쳐 합심한다면 못 해낼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제가 도당위원장으로서 그러한 통합의 정치력을 발휘나겠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전북 대선과 지방선거를 끌어갈 중책을 맡으셨는데, 각오와 목표는. “선거 승리를 위해서는 민주당이 국민들의 열망과 기대에 부응해 무능하고 무도한 현 정권을 견제하고 심판하는 역할과 더불어 국민의 삶을 개선해낼 수 있는 대안과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북도당을 대중적 도당으로 혁신하고 유능한 정책으로 변모시켜 그러한 국민과 도민의 요구에 부응하고 지방선거를 승리로 이끌고 정권교체의 교두보를 마련하겠습니다. 민주당에 변함없는 사랑을 보내주시길 바라고 지방선거 승리와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해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당원동지 여러분이 끝까지 함께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전북 최대 현안은 전주-완주 통합인데, 통합과 관련한 도당위원장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전주 완주 통합의 기본적인 취지에 공감하지만, 중요한 것은 실행전략입니다. 통합 당사자인 완주 군민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실행전략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통합과 관련된 완주군민들의 다양한 우려를 불식시키고 완주에 이익을 제공할 수 있는 인센티브를 구체적으로 마련해 제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 완주군민이 지역발전을 위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통합을 통해 해소할 수 있는 부분과 지원이 필요한 부분들을 정리하는 것이 통합논의를 위한 기초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완주 군민이 기대할 수 있는 정책과 비전이 제시되어야만 통합 고지를 넘을 수 있는 발걸음을 옮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원과의 관계 재정립과 도당 내부 조직 정비 방침이 있으신지요. “민주당의 주인은 당원입니다. 따라서 당원의 목소리가 언제든지 정당의 운영에 반영될 수 있고 국정과 도정에 반영될 수 있는 구조와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도당의 문턱을 낮춤으로써 당원 누구나 도당에 의견을 전달하고, 도당이 당원들을 자주 만나 소통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도민과의 간담회를 활성화하고 전북 14개 시군과의 당정협의를 개최해 현안과제를 보다 효과적으로 해결해 나갈 예정입니다. 또한 다양한 정책 과제 해결 역량을 높이기 위해 도당의 정책력을 강화하고 전북의 비전과 전략을 제시해 나갈 수 있도록 도당을 정비해 나가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도민과 당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에게 도당위원장이라는 중요한 소임을 맡겨주신 당원동지들과 도민여러분께 다시 한 번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전북도당을 당원중심의 정책정당으로 혁신하고 도민들과의 소통을 강화해 도민의 요구가 곧 도당 정책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도민이 어려울 때 힘이 되는 도당, 찾고 싶은 도당을 만들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감사드리며,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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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강모
  • 2024.08.18 16:53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⑭ 형사재판원본(刑事裁判原本)

조선 정부는 정부군과 지방 행정조직을 동원하여 동학농민군을 무력으로 진압하였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기록물을 생산하였다. 이들 기록물에는 조선 정부의 논의과정을 기록한 문서, 진압군이 작성한 공문서와 보고서, 진압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동학농민군의 판결문 등이 포함되어 있다. 동학농민군 자신은 많은 유물을 생산하지 못했지만 동학농민군을 진압하였던 조선 정부 및 조선 정부가 편성한 진압군이 동학농민군에 대한 많은 기록을 남겨 주목된다. 형사재판원본(刑事裁判原本)은 조선 정부에 체포되어 처벌받은 동학농민군 다수에 대한 재판기록이다. 특히 동학농민군 최고지도자인 전봉준의 판결선고서는 동학농민군의 지향과 인식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 기록에는 평안도 강계부 관찰사 조승현 등 6명의 을미의병 관련 고등재판소 판결문도 수록하고 있지만 동학농민군의 활동과 관계가 없으므로 표 설명문에서는 제외하였다. 형사재판원본은 갑오개혁 시기 설치된 법무아문 권설재판소, 법무아문 임시재판소, 법무아문 고등재판소, 특별법원, 고등재판소, 대한제국 시기의 고등재판소, 평리원의 판결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판결문에서는 동학농민군의 활동을 ‘동요(東擾)’로, 참여자들을 ‘비도(匪徒)’ 동도(東徒)‘ ’비류(匪類)‘ ’동비(東匪)‘ ’동학배(東學輩)‘로 그 지도자를 ’비괴(匪魁)‘ ’동학거괴(東學巨魁), 농민군 토벌을 ’토비(討匪)‘ 등으로 비하하고 있다. 그들의 활동내용도 매우 부정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전봉준, 손화중, 서장옥,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 최시형 등 총 211명의 최종 판결 선고서가 포함된 판결기록으로 동학농민군 및 동학농민혁명의 실상에 가장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자료이다. 농민군 진압에 소홀하였거나 결탁한 일부 지방관도 처벌을 받았다. 2024년 8월 5일 현재 공식 등재된 동학농민군 참여자는 3,817명으로 이 판결선고서에 기재된 관련자는 전체의 18.09%에 불과하다. 이 기록에서 1895년의 초기 선고에는 경성주재 일본영사 우치다 사다츠지(內田定槌)가 입회 서명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동학농민군은 정부와 민병대와의 전투 과정에서 전사하거나 체포되어도 심리와 판결 없이 현장에서 총살ㆍ참수 및 효수ㆍ타살, 원한에 의한 사살(私殺) 등으로 즉결 처형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고 관련 기록도 매우 소략하게 남아있다. 따라서 형사재판원본은 1894~1895년 동학농민군 진압과 그 이후 대한제국 시기에 이르기까지도 이어진 농민군 개별 인물들의 활동과 정부의 체포와 심리와 재판 선고 처벌 등을 이해하는 데도 역사자료로서의 의미는 매우 크다. 이 자료는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홈페이지에서 이미지를 포함한 원문 텍스트와 번역문을 확인할 수 있는데 ‘동학관련판결선고서’로 되어있다. 문서 원본은 국가기록원에서 소장하고 있다. /조재곤 서강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조재곤 서강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아래의 표는 전북일보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가 동학농민군 관련 판결선고서의 핵심내용을 추려 간략히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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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15 15:34

[배리어프리, 공공디자인에서 인권을 찾다] ① 모두를 편리하게, '배리어 프리(barrier-free)'

배리어프리(barrier-free)는 장애인과 고령자, 임산부, 어린이 등 사회적 약자의 일상생활에 지장이 되는 물리적 장애물이나 심리적 장벽을 허물자는 개념의 운동 및 정책을 말한다.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도록 장벽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의미인 만큼, 배리어프리 운동은 지난 몇 년간 한국에서 활발히 전개됐다. 덕분에 배리어프리 영화 상영관이 늘었고, 무장애 여행이 활발해지는 등 크고 작은 변화가 나타났다. 하지만 여전히 ‘배리어프리=시혜적 복지 정책’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지하철 엘리베이터 설치, 장애인 콜택시 증차 등 필수적으로 갖춰져야 할 것들이 장애인만을 위한 정책으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또한 장애인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이해가 부족하다는 점도 한몫한다. 이에 배리어프리가 단순히 사회적 약자만을 위한 정책이 아닌 모두가 편리하고 편안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만드는 정책임을 소개하고, 제도적 변화와 인식 개선을 이끌어 낼 수 있도록 7차례에 걸쳐 다뤄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독일은 전체 인구 중 약 11%가 이동의 불편함을 겪고 있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이동할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독일 정부가 2013년부터 2022년까지 대중교통의 완전한 배리어프리 구현을 실현시켰기 때문. 여객 운송법 제8조 1항에 따라 독일의 시내‧시외버스, 트램/지상철, 연방 주 내에서 운영되는 단거리 기차 등 대부분의 교통수단에 ‘배리어 프리’개념이 적용됐다. 독일은 사회 전반에 걸쳐 존재하는 물리적, 제도적, 심리적 장벽을 제거해 모두가 안전하고 쾌적하게 활동하는 것을 최우선순위에 둔다. 특히 누구든 마음 편하게 원하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권리, 보편적 이동권을 실현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2023년 정부는 교통약자 이동편의 증진법 일부 법률 개정안에 따라 '특별교통수단 도입보조 운영비' 237억 원을 편성했다. 이는 2022년 인구 74만 명의 독일 프랑크푸르트(Frankfurt)시에서 시의회와 독일철도가 서부역 한 개역의 배리어프리 확장을 위해 편성한 예산보다 더 적은 금액인 것으로 알려졌다. 교통약자에게 이동의 문제는 생존과 직결된다. 2001년 오이도역 휠체어 리프트 추락 사고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교통약자들의 이동권 투쟁이 이어지는 것도 이 때문. 오이도역 휠체어 리프트 추락사고 이후 이동권 투쟁운동이 펼쳐졌지만 10여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한국은 장애인이 살기 불편한 도시로 꼽힌다.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을 위해 기반시설이 곳곳에 갖춰져 있지만, 형식적이거나 무용지물인 경우가 적지 않다. 대한민국 헌법 제10조에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적혀 있다. 행복추구는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모든 기본권의 이념적 기초일 뿐 아니라, 종국적 목적인 셈이다. 그 중에서도 이동권은 가장 기본적으로 보장해야 할 가치이다. 그렇기에 사회 전반에 걸쳐 존재하는 물리적, 제도적, 심리적 장벽을 없애야 한다는 의미의 배리어프리 실현은 더욱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7월 독일 현지에서 만난 한국인 유학생 마틴(Matin·49)은 “독일 사회는 장애인을 보호의 대상이 아닌, 자기결정권과 참여권을 가진 일반 시민으로 본다”며 “장애인도 비장애인이 누리는 권리를 동등하게 부여받을 권리가 있다는 인식이 강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는 모두를 편리하게 만든다"라며 "독일, 특히 베를린 주에서는 배리어프리 움직임이 너무나 당연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지난 2021년 ‘저상버스 100% 도입 약속 이행’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여 기소된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 공동대표가 최근 무죄를 선고 받았다. 그는 전장연 회원 20여명과 버스 운행을 23분간 방해하고, 미신고 집회를 연 혐의(집시법 위반·업무방해)로 재판을 받아야 했고, 항소심 재판에서 처음 꺼낸 말이 "죄송하다"였다. 항소심 재판 당일, 박 대표는 거듭 사과하면서도 시위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 대해 이같이 설명했다. "2006년 교통약자법이 제정됐고, 그에 따라 5개년 계획이 세워졌으나 저상버스 도입 이행이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전장연이 주장하는 권리는 왜 비난의 대상이 되었을까. 그들의 방식이 투박하고 공격적이었으나 왜 굳이 출퇴근 시간대에 거리로 나와야했는지 되짚어봐야 한다. 특히 지역에서는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기회 조차 갖기 어렵고, 이동권 문제가 늘 후순위로 밀린다는 점을 따져본다면 '배리어프리' 환경 조성은 선택이 아닌, 필수적인 문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기획
  • 박은
  • 2024.08.12 18:22

[뉴스와 인물] 김경진 익산시의회 의장 “일하는 의회, 강하면서도 유연한 의회 만들겠다”

제9대 익산시의회 김경진 호가 출범했다. 신임 김경진 의장은 취임 일성으로 전국에서 수준 높은 모범적인 의회를 만들어 가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기관으로서 시민의 기대와 신뢰에 부응하고 보다 나은 지역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매진하겠다는 각오다. 특히 그는 시정 발전을 위한 집행부의 파트너로서 매사 열심히 일하는 의회, 강하면서도 유연함을 잃지 않고 집행부와 소통하며 대안을 제시하는 의회의 모습을 구현하겠다는 의지를 강조했다. 새로운 시작에 나선 김경진 의장을 만나 제9대 후반기 의회의 비전과 의정 활동 계획을 들어봤다. 먼저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간단한 소감 부탁드립니다. “저에게 제9대 후반기 익산시의회 의장이라는 막중한 소임을 맡겨 주신 익산시민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의회의 의장이란 단순하게 의회를 운영하는 직책이 아니라 27만 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시민의 뜻을 시정에 반영하여 익산시 발전을 이끌어 가는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 의원들이 의정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며 활발한 의정 활동을 펼쳐 익산시의회가 시민들에게 믿음을 주는 의회로 거듭날 수 있도록, 또 저에게 의장직을 맡겨 주신 시민 여러분과 선배·동료 의원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맡은 역할에 충실하겠습니다.” 취임 일성으로 전국에서 수준 높은 모범적인 의회를 만들어 가겠다는 포부를 밝혔습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의회는 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역할을 하는 기관으로서 시민의 기대와 신뢰에 부응하고 더 나은 지역사회를 만들기 위해 일하는 것이 책무이자 존재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익산시의회는 인구 감소, 청년 취업, 원도심 활성화 등 시민들의 삶의 질과 직결되는 현안을 조속히 해결하고 국가식품클러스터 2단계, 농생명·바이오산업 등 익산의 미래를 견인할 주요 사업들이 확고히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시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공감을 이끌어 내는 생산적인 의정 활동을 펼치겠습니다.” 후반기 의정 활동에 있어 주안점이 있다면. “어려운 경제 여건 속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해까지 입어 하루하루가 살기 힘들다는 시민들의 한탄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안타까운 현재 상황에서 민생 안정과 경제 활성화, 사회안전망 확충 등에 주안점을 두고 시민들의 삶에 꿈과 희망의 비전을 제시하면서 시민들에게 더욱 사랑받는 의회를 만들겠습니다. 또한, 지역 생활 현장에서 시민과 함께 호흡하며 작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고충과 아픔을 함께 나누고 문제를 해결해 지역사회를 더욱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갈 수 있도록 시민의 눈높이에서 더 많은 일을 하는 의회가 되겠습니다.” 밖으로는 집행부 감시·견제가, 안으로는 의원들 간 소통과 화합이 중요한 부분인데요. 의회 수장으로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의회와 집행부는 지역 발전과 시민 행복 증진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함께 노를 저어가는 지방자치의 동반자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동반자적 관계를 위해서는 ‘소통’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소통을 바탕으로 집행부와 협력을 강화하여 현안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함께 강구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냉철하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시정을 살피는 견제와 감시는 지방의회 본연의 역할이기 때문에, 시정이 공정과 상식에 입각하여 집행되는지 집행부에 대한 견제와 감시를 철저히 하는 강한 의회로 이끌어 가겠습니다. 저는 의원 한 명 한 명의 의정 활동이 제9대 후반기 의회를 성공적인 의회로 이끈다고 생각합니다. 각기 다른 배경과 경험을 가진 25명의 의원이 모여 있는 만큼 각자의 생각과 의견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고 다수의 의견을 바탕으로 하되 소수의 의견도 존중하면서 동료로서 화합하는 방법을 찾아가겠습니다. 의회의 수장으로서 앞장서 의회를 이끌어 가지만 때로는 뒤에서 묵묵히 조력하는 의장, 곁에서 함께 소통하고 고민하는 의장이 되어 의원들이 의정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기반을 최적으로 조성할 방침입니다.” 임기 내에 꼭 이루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제9대 후반기 의회 슬로건을 ‘시민이 주인! 더 듣고 더 뛰는 실천의회’로 정했습니다. 의회의 모든 행보는 오직 익산시민을 향한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시민들의 삶의 현장 가까이에서 시민의 목소리를 더 듣고 시민을 위해 더 뛰면서 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삶을 큰 폭으로 변화시킬 수 있도록 ‘실천하는 의회’를 만들겠습니다. 저는 우리 의원들이 힘들수록, 더 진지하게 고민할수록 시민들의 삶이 편안해지고 행복해진다고 믿습니다. 지금의 첫 마음과 뜨거운 열정을 잃지 않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익산시의회는 다르구나, 익산시의회는 정말 열심히 일하는구나’라는 칭찬을 시민들로부터 들을 수 있도록 임기 동안 제가 가진 모든 역량과 힘을 쏟아붓겠습니다.” 지방의회 인사권 독립 이후 지난 7월 정기인사에서 집행부와의 교류가 적극적으로 이뤄졌습니다. 쉽지 않았을 텐데요. “하나는 집행부와의 협치, 다른 하나는 일하는 분위기 조성이라는 취지입니다. 올해 하반기 정기인사에서 의회 승진 인사 요인은 많은 반면 집행부는 상대적으로 적다 보니 적정 수준의 교류가 이뤄지지 않으면 상대적 박탈감 등 직원들 간 불만이나 갈등이 생길 가능성이 많은 상황이었습니다. 감시·견제 역할을 하는 의회지만, 협치 차원에서 집행부 공무원들이 의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다른 측면의 의미는 열심히 일하는 의회사무국 분위기 조성입니다. 때가 되면 당연히 승진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뒤처질 수 있다는 긴장감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앞서 농협에서 39년간 인사와 기획 업무 등을 두루 경험하며 쌓은 노하우와 의회 입성 이후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내린 판단입니다. 앞으로의 승진 인사도 그냥 순번대로 하는 게 아니라 승진 대상 3배수 내에서 열심히 일하는 직원에게 보상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하고, 필요할 경우 집행부와의 교류도 적극적으로 할 예정입니다.” 끝으로 익산시민, 전북도민 여러분들께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익산시의회는 언제나 여러분 곁에 있습니다. 25명의 의원들은 시민을 주인으로 섬기며 시민의 눈과 마음으로 현안을 바라보고 시민들의 바람이 시정에서 폭넓게 구현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애정 어린 격려와 관심을 부탁드리며, 여름철 건강 유의하시고 모두의 가정에 행복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재선의 김경진 의장은⋯ 김경진 익산시의회 의장은 오산남초등학교와 이리동중학교, 이리상업고등학교(현 전북제일고등학교), 원광대학교를 졸업하고 원광대 행정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을 수료했다. 40년 가까이 농협중앙회에 재직하면서 노동조합 전북위원장으로 활동했으며, 삼성동 주민자치위원장과 원광정보예술고등학교(현 원광보건고등학교)·익산지원중학교 운영위원장, 더불어민주당 익산을 지역위원회 사무국장, 제8대 익산시 결산검사 대표위원, 제8대 익산시의회 후반기 기획행정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 기획
  • 엄철호외(1)
  • 2024.08.11 14:27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⑬ 동학임명장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은 총 185건이다. 이를 작성주체별로 구분해 보면 동학농민군이 생산한 기록물이 30건(16%), 민간인이 생산한 기록물이 33건(18%), 조선정부가 생산한 보고서와 공문서가 122건(66%)으로 조선정부가 생산한 문서가 대부분이고 동학농민혁명의 주체인 동학농민군이 생산한 기록물은 매우 적은 편이다. 동학농민군이 생산한 기록물이 많지 않은 것은 당시 역적으로 몰리는 상황에서 동학농민군들이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상황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학농민군이 생산한 기록물 중에 가장 많은 수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동학임명장이다. 동학임명장은 당시 동학교단의 최고책임자인 최시형이 북접법헌의 이름으로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한 1894년에 발급한 임명장이다. 현재 기록유산 목록에 포함된 동학임명장은 18건이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세계기록유산 목록에 포함된 동학임명장을 소장처별로 보면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11건, 천도교중앙총부 6건, 독립기념관 1건이다. 이러한 임명장은 현재 상당히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시기를 1891년부터 1904년까지 확대하면 남아 있는 동학임명장은 대략 80건 정도이다. 나머지 동학임명장이 세계기록유산 목록에 포함되지 않은 이유는 선정기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기준은 추진과정에서 여러 기관의 자문을 통해 정해졌는데 이는‘국가기관이나 이에 준하는 기관이 소장한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록물로 보존 및 관리 대책이 명확한 자료’였다. 이에 따라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천도교중앙총부,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는 기록물만이 목록에 포함되었던 것이다. 나머지 동학임명장도 세계기록유산으로서 충분한 가치와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 동학임명장은 모두 당시 동학교단의 최고책임자인 최시형의 이름으로 발급되었다. 전봉준의 이름으로 발급된 동학임명장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도 발급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전봉준은 동학임명장을 발급할 위치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동학교단의 최고책임자는 최시형이었고, 동학농민군을 이끌었던 최고책임자는 전봉준이었다. 전봉준은 동학교단의 틀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을 이끌면서 농민군을 조직화한 것은 백산대회 때이다. 이때 전봉준은 총대장, 김개남, 손화중은 총관령, 김덕명, 오시영은 총참모, 최경선은 영솔장, 송희옥, 정백현은 비서로 정하여 농민군대로 조직을 갖추었다. 그러나 그 하부단위에 대한 조직은 구성하지 못하였다. 전봉준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조직을 만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따라서 기존 동학교단의 조직을 활용할 수 밖에 없었다. 즉 최시형이 임명하고 그에 대한 역할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조직을 운영하였다고 보여진다. 위의 표에서 임명장이 만들어진 시점을 보면 주로 1894년 7∼8월임이 확인된다. 이는 이 시기에 많은 조선의 농민들이 동학에 입도하고 여기에 더하여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하였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 동학교단 조직은 포접제(包接制)로 운영되었다. 즉 접(接) → 포(包) → 동학교단의 체계를 가지고 있다. 가장 기본이 되는 조직은 접(接)이다. 접에는 접주(接主)와 접사(接司)의 직책이 있다. 접주는 접의 책임자로서 교도를 관리하고 교리를 전파하는 일이 주요한 임무이다. 접사는 접주를 보좌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 문서는 1894년 9월 최시형이 이수방을 접주로 임명하는 임명장이다. 이러한 접주임명장은 동학교단의 계통과 계보를 보여주고 있다. 문서의 오른쪽부터 보면 용담(龍潭)은 교조 최제우를 말하며 무극대도대덕(無極大道大德)은 최제우가 제시한 동학의 궁극적 목표이자 지향점이다. 대선생(大先生)은 교조 최제우의 존칭이며 시포덕(侍布德)은 최제우가 이 동학을 개창했다는 의미이다. 북접(北接)은 최시형을 말하며 무극대도대덕은 동학이 추구하는 목표로서 이를 최시형이 계승한다는 의미이다. 대도주(大道主)는 최시형의 존칭 또는 직책이다. 다음 태인(泰仁)은 지역을 말하며 지역의 책임자로서 이수방을 접주로 임명하고 있다. 다음 눈여볼 것은 도장이다. 접주임명장과 접사임명장의 경우, 도장이 5개가 찍혀 있다. 도장의 글자는 최시형의 호인 해월(海月)이다. 그런데 여기서 1894년 당시 최시형은 주로 보은에 거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 임명장이 만들어지고 전달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당시는 교통과 통신이 제한된 상황에서 각 포의 대접주 명의로 임명장을 발급하지 않았고 모두 최시형 명의로 임명장이 발급되었다. 이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백지 한지에 ‘해월’이라고 하는 도장 5개를 찍어서 각 포에 내려주면 각 포에서 대접주가 문서의 형식에 맞게 글자를 쓰고 직책을 부여하였다고 한다. 때문에 모든 임명장의 글씨체가 다르고 도장 위에 글씨가 씌여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수방 접주 임명장'과 '정성영 접사 임명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여러 개의 접을 관리하고 통할하는 조직이 포(包)이다. 포의 책임자를 대접주(大接主)라고 한다. 김개남, 손화중, 김덕명 등은 바로 이러한 대접주로서 많은 접을 거느린 포의 책임자였다.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각 지역별로 봉기한 지도자들은 대개 이러한 대접주들이 대부분이었다. 대접주는 여러 접을 관할하기 때문에 이를 운영하기 위한 별도의 조직이 필요하였다. 그것이 바로 육임직이다. 육임이란 교장(敎長), 교수(敎授), 도집(都執), 집강(執綱), 대정(大正), 중정(中正)을 말한다. 교장은 알차고 덕망있는 사람(質實望厚員爲敎長), 교수는 성심수도하여 가르칠 사람(誠心修道可以傳授員爲敎授), 도집은 위풍을 갖추고 기강을 세워 다스릴 사람(有風力明紀綱知境界員爲都執), 집강은 시비를 밝혀 기강을 잡을 사람(明是非可執紀綱員爲執綱), 대정은 공평을 유지하며 근후한 사람(持公平勤厚員爲大正), 중정은 능히 직언할 수 있는 강직한 사람(能直言剛直員爲中正)으로 임명하였다. 각 포(包)에서 교장이나 교수에 임명된 사람을 보면 모두 포내(包內)의 장로나 덕망있는 사람들이고, 도집과 집강은 실질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며, 대정이나 중정은 비교적 젊은 사람들로서 포내의 실무를 추진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 육임직의 임명장은 북접법헌이라는 명의로 발행되었으며 한지 백지에 3개의 도장을 찍은 뒤에 각 포에 전달하여 각 포의 대접주가 직책과 이름을 기입하였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여러 개의 포를 비롯하여 모든 동학의 조직을 관할하는 것이 바로 동학교단이다. 동학교단의 최고책임자는 최시형이다. 최제우가 1860년 동학을 창도한 뒤 1864년 처형되었다. 이후 동학교단의 종통은 최시형이 이어받았다. 최시형은 경전을 간행하고 제의와 조직을 체계적으로 정비하여 동학교단의 기틀을 만들었다. 이후 1894년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도 동학교단은 최시형이 교주로서 역할하였으며 그가 체포되어 처형된 1898년까지 이러한 체제는 지속되었다. 동학교단에서도 육임직은 운영되었다. 동학임명장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최시형의 동학교단과 전봉준의 동학농민군 사이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향후 이에 대한 깊이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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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09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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