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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이슈+] '흥행 보증수표' 오징어게임도?⋯찍었다 하면 '천만 관객'

10년 전부터 전북에서 촬영하면 '천만 관객' 공식이 통했다. 과거 <왕의 남자>, <명량> 등 사극 영화를 중심으로 흥행 소식이 들렸지만 지금은 장르를 불문하고 대박을 터트리고 있다. 개봉 한 달 만에 천만 관객을 동원한 <7번방의 선물>, 제72회 칸 국제영화제 황금 종려상을 수상한 <기생충>부터 시청률 16%를 기록한 드라마 <정년이>, 여기에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넷플릭스 드라마 <수리남>, <소년심판>까지 전북에서 찍은 영화·드라마가 많은 사랑을 받았다. 전북에서 찍은 영화중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이준익 감독의 <왕의 남자>다. 연산군 시대 조선 최초 궁중 광대 이야기로 감우성, 정진영, 강성연, 이준기 등이 주연을 맡았다. 관객 수가 1051만 명에 달하는 이 영화는 부안영상테마파크와 고창읍성에서 전체 분량의 80% 넘게 촬영했다고 전해진다. <명량>도 빼놓지 않고 거론된다. 당시 한국 영화계 신기록을 갈아치우는 무서운 영화 중 하나였다.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개봉 20일 만에 한국 영화 최초로 관객 1500만 명을 넘어섰다. <왕의 남자>와 마찬가지로 부안영상테마파크에서 촬영했다. 이밖에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 등도 전북에서 촬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5년 전 전 세계를 들썩이게 하며 오스카 4관왕의 쾌거를 이룬 영화 <기생충>도 전주에서 촬영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화제를 모았다. 영화 속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박 사장(이선균) 저택이 있었던 곳이 바로 전주영화종합촬영소 야외 세트장이었다. 지금은 철거해 없지만 당시 주목을 받으며 저택 복원 검토가 논의되기도 했다. 무려 1031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뿐 아니라 각종 드라마도 큰 인기를 얻었다. 최고 시청률 16%를 기록한 tvN 드라마 <정년이>가 대표적이다. 익산 원불교 중앙총부, 남원 광한루원, 전주 학인당 등에서 촬영됐다. 1950년대 여성 국극을 소재로 한 <정년이>는 떡목이 돼 국극단에서 나온 주인공 정년이에게 어머니가 국창 정정렬 선생의 이야기를 해 주는데 국창 정정렬 선생도 익산 망성명 출신의 명창이다. 또한 수 많은 시청자를 보유한 OTT 드라마 촬영지로도 전북이 떠오르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OTT인 넷플릭스의 인기 드라마인 <수리남>은 전 세계 82개국에서 톱10 차트에 이름을 올렸다. 제2의 오징어게임이라고 불릴 정도로 글로벌 시청자를 단숨에 사로잡았는데 이 드라마 역시 전주영화종합촬영소, 만성지구·혁신도시 일대 등 전북에서 촬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넷플릭스 TV 프로그램 부문 전 세계 7위에 올랐던 김혜수 주연의 <소년심판>도 전북에서 촬영된 것으로 알려져 조명을 받았다. 지방법원 소년부 우배석 심은석(김혜수) 판사와 좌배석 최태주(김무열) 판사가 근무한 곳이 전주지방법원이다. 소년범을 혐오하는 판사 심은석이 소년 범죄를 마주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고민하고 해결하는 장소 등으로 나왔다. 전주대, 군산대 등에서도 일부 촬영한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지난 26일 공개된 <오징어게임2>도 전주영화종합촬영소에 촬영된 것으로 알려져 공개 전부터 들썩이기도 했다. 디지털뉴스부=박현우 기자

  • 기획
  • 박현우
  • 2024.12.28 07:21

[팔도건축기행]대구 내당성당

기억속에 자리하고 있는 어린시절 동네 예배당은 일찍이 경험한 작은 종교건축이었다. 빨간 양철지붕과 종탑은 고딕 형식이었고, 방석을 깔고 앉았던 마룻바닥은 회중석이었다. 비로드 커튼의 성탄절 공연무대는 제대 강단이었고, 교회 앞마당은 공공 커뮤니티의 마을 광장이었다. 로마 카타콤에서부터 초기 기독교, 비잔틴,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에 이르는 서양 건축의 역사는 곧 종교건축의 흐름이었다. 로마의 기독교 공인(313년) 이후, 교회는 바실리카 형식이었고 입구에서 회중석, 제단, 십자가 정면에 이르는 위계는 오늘날까지 2,000여 년을 지속해온 평면형식이었다. 하늘을 향한 첨탑, 높은 내부 공간, 스테인드글라스의 중세 고딕은 교회의 전형으로 지속되어 왔다. 1900년대 초, 서양 선교사들이 설계하여 중국인 기술로 이 땅에 지어진 붉은 벽돌과 고딕 첨탑의 대구 계산성당, 서울 명동성당, 비잔틴 돔의 전주 전동성당, 지금은 이 땅 근대건축의 유산이 되었다. △‘바티칸 공의회' 전례 정신을 반영한 설계 계산성당이 세워지고 60여 년이 지난 1966년, 대구 서구 내당동 언덕 위에 특별한 성당 건축이 세워졌다. 진입 마당 오르막에서 나타나는 언덕 위의 내당성당(內唐聖堂)은 3단 스텝 피라미드 형태의 기하 입방체의 건축이다. 익숙하게 보아왔던 붉은 벽돌, 경사지붕, 높은 십자가 첨탑과는 다른 성당의 모습이다. 비엔나 대학교 교수 건축가 오토카 울(Ottokar Uh·1931-2011) 설계의 성당은 지금까지의 긴 방향의 바실리카 평면과 고딕 첨탑의 전형에서 벗어난 세계에서도 유례가 드문 성당 형식이다. 외국에서도 선례를 찾기가 힘든 획기적인 성당설계가 어떻게 한국 땅에서 실현이 됐을까? 그 당시, 성당을 설계할 당시 1965년, 로마에서 열렸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가 끝난 시점으로 새로운 가톨릭 전례 정신이 세상에 발표되었다. 미사를 각 지역 언어 집전을 허용하고 엄격한 성직자 중심에서 평신도의 참여를 강화하는 소통과 변화를 요구는 2000년 가톨릭 개혁의 시점이었다. 내당성당은 개방된 문, 신자와 가까이 마주하는 낮은 제단의 실천을 설계한 것이다. 바티칸 공의회 정신이 세상에 채 퍼져 나가기도 전, 세계 어디서도 실천되지도 않은 전례 정신의 성당이 변방의 선교지였던 이 땅에서 지어진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소통과 개방, 낮은 곳으로 오신 하느님의 성당. 성당은 엄숙하고 장중한 정면이나 출입문을 강조하지 않는다. 정방형 평면의 네 모퉁이 양쪽 여덟 개 출입문이 있어 쉽게 회중석으로 출입하게 된다. 활짝 열린 출입문은 신도 중심의 참여와 소통, 개방의 새로운 가톨릭 전례 정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처음 설계에는 출입 공간이 서로 연결되어서 회중석보다 넓은 홀의 소통 공간이었으나 지금은 회중석 내부로 확장되었다. 지금의 네 곳 출입 부는 반투명 유리로 구분되어서 방풍실로 이용된다. 회중석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성이 없는 사방공간이 넓게 나타난다. 곧 실내에 익숙해지고 나면, 회중석과 제대, 전후좌우 방향성이 없는 전체공간 속에서 일체화되는 나를 느끼게 된다. 회중석은 'ㄷ'자 형태 3방향으로 배치한다. 회중석보다 몇 단 낮은 가운데에 제대가 있다. 장 방향 긴 거리가 아닌 일정한 거리 가까운 자리에 둘러앉은 신자들은 낮은 곳의 제대를 편히 바라보게 된다. 신도 회중석보다 낮은 위치의 제대는 하느님께서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것을 의미하는 전례 정신의 실천이다. △로만 십자가(Roman cross)가 내재된 건축. 반듯한 정방형 건축 평면은 길이 5m, 가로세로 각 5개 스판(Span)과 높이 3m 모듈을 기준으로 설계하였다. 회중석에는 노출된 십자 기둥, 한옥 대들보처럼 상부 구조가 노출되고 비워진 공간은 다락 창고 같은 초기예배소 분위기를 자아낸다. 제대 상부의 점층적 천장은 가로세로 균등한 십자(cross) 공간 형태이며 그 상부는 스테인드글라스 빛 디자인 천장이다. 십자가 현판이 매달려 있는 제대 상부는 하늘이 내린 성스러운 십자가로 느껴진다. 가로세로가 균일한 로만 십자가(Roman cross) 형상은 건축 배치, 평면, 천장, 구조, 성당 건축 전체에 내재하고 있는 설계 개념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성당은 겹친 십자가의 형상과 다이아몬드(하느님의 고귀한 보물) 결정체를 상징하는 조형으로 나타난다. 성당 건축의 형태, 내부 기능, 구조 요소가 전체적으로 통합하는 구조주의 또는, 2차세계대전 이후의 국제주의 건축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1954년 건립된 코르뷔제 설계의 롱샹 성당은 콘크리트 경사 벽면과 곡선, 유기적 빛의 건축으로 전통적 형태에서 벗어난 건축이었다. △개조공사로 원형이 변형되다. 6·25전쟁 이후의 1966년은 제1차 경제개발계획 마지막 해였고, 성당 주변에는 한센인 수용소가 있었다. 당시 사진을 보면 이곳 주변 초가집만 있는 동네였고 언덕 꼭대기의 현대적 성당 모습은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설립 당시, 초대 주임신부는 오스트리아 국적의 서기호(루디) 신부였다. 고국 오스트리아 가톨릭 부인회에 성전 건축비 모금 운동을 전개하여 그 기금으로 성전이 지어졌다고 한다. 건축 설계는 비엔나 대학교 오토카 울 교수를 소개하면서 먼 이국땅에 유럽 건축가의 작품이 세워지게 되었다. 설계도를 보고는 공사를 맡을 시공사가 없을 정도로 당시의 기술력 수준으로 어려운 공사였다고 한다. 1966년 11월 힘들게 축성된 성당은 20년 동안 원래의 모습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신자 수 증가로 인한 회중석의 부족과 시설의 노후화로 1988년 대대적인 개조공사를 하게 된다. 'ㄷ'자형 회중석은 일반적인 종 방향 배치방식으로 개조되면서 초기 건축원형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당시 유럽의 건축 전문지 Domus에 소개된 내용을 보면 중앙부 전체를 둘러싼 ‘ㅁ’자 배치 회중석이다. △다시 원형으로 복원하다. 개조공사 이후, 초기 성당의 가치를 기억하는 교구와 신자, 건축학계에서는 초기 건축에 대해 아쉬움이 많았고 그래서 성전 복원은 곧 숙원사업이 되어왔다. 2021년 박장근(베드로) 신부가 부임하며 이듬해 성당복원추진위원회(위원장 손술영)를 결성, 교구청의 적극적인 후원과 공사비 지원, 신자들의 모금으로 2023년 초, 복원공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의 공사설계도가 없어서 마치 유적발굴 현장처럼 바닥과 벽 부분을 조심스럽게 해체하며 초기 성당 형태를 되찾았을 수 있었다고 한다. 건립공사 당시, 울 교수는 고려청자 색의 타일을 구하기 위해 경주의 도자기 공장을 직접 방문하여 타일을 주문했을 만큼 애정을 기울였다고 한다. 복원공사에서도 새 창을 내느라 철거했던 타일 벽 복원을 위해 당시의 타일 색을 구하느라 고생했다고 한다. 또한 60여 년의 세월 동안 숨겨져 있었던 여러 건축 부분들을 찾아내고 어려운 복원공사를 거쳐서 지난 4월, 초기 건축 모습의 성전으로 복원하게 되었다. △오토카 울 교수의 건축, 건축 문화재로의 기대 먼 이국땅에 성당을 설계한 오토카 울(Ottokar Uhl·1931-2010) 교수는 설계 후 대구에 날아와 주교관에 머물면서 공사 현장을 지도했다. 늦어지는 공사 진척으로 체류 마지막 날까지 열성을 다하였다고 한다. 만약 유럽에 세워졌다면 건축 완성도가 높았을 것이며, 독창적 건축작품의 답사지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울 교수는 가톨릭교회의 현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왔으며 전통적 교회 건축을 재해석하여 열린 공간과 공동체 중심 사회적 역할을 강조해 왔다. 그는 오스트리아 건축상(1963년), 비트겐슈타인 상(1996년), 비엔나 황금 명예상(2001년)을 수상했다. 성당이 복원되면서 천주교계는 물론 국내외 건축계의 새로운 관심 받고 있으며 건축 문화재 등재 준비를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대구 성당건축 흐름과 연결 대구 최초의 서양식 성당은 1903년에 세워진 ’계산성당(설계, 프와넬 신부)’으로 대구의 화가 이인성의 작품에도 등장한다. 청라언덕 위 새로 지은 제일교회와 서로 마주하는 계산성당은 120여 년 시간으로 대구근대골목 답사의 시작이다. 그로부터 60여 년 후, 1966년에 세워진 ’내당성당(설계, 오토카 울교수)‘은 바티칸 공회의 가톨릭 개혁 정신을 반영한 국제주의의 근현대건축이다. 유럽 건축가가 설계한 혁신적 성당은 종교사 건축사에서도 중요한 건축으로 널리 알려져야 할 대구건축의 유산이다. 계산성당 건립 120여 년 후, 2016년 ’대구대교구 100주년 기념 범어성당(설계, 현대건축)‘이 건립되었다. 100m 길이의 성당 건축, 100m 길이의 광장의 상징성과 함께 대성당(2,500석), 다목적공연 홀(410석), 100주년기념관, 갤러리는 도시의 공원과 시민 문화공간 역할의 열린 성당이다. 60년의 간격으로 과거에서 오늘날까지 대구 성당 건축의 역사와 그 흐름을 읽게 된다. 최상대 전 대구경북건축가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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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23 17:26

[뉴스와 인물] 제18대 전라북도병원회장에 취임한 신충식 예수병원장 "환자에게 희망 주는 병원"

예수병원 신충식 병원장이 제18대 전라북도병원회장에 취임했다. 신 원장은 전북 의료계의 현안 해결과 복지 향상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1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의·정 갈등 상황에서 그는 몰려오는 현안 해결을 위해 매일 구슬땀을 흘린다. 그는 지역 내 치료를 받지 못하는 환자들을 위해 각종 전문의료기관을 만들어가고 있다. 환자를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을 토대로 고난을 헤쳐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전북일보는 신충식 예수병원장을 만나 의료계 현안에 대해 이야기해봤다. 제18대 전라북도병원회 회장에 취임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개인적으로는 전라북도병원협회장 자리는 봉사를 하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제까지는 회장직을 역대 전북대병원과 원광대병원장님들이 맡으셨고, 코로나19 시기에만 대자인병원장님이 하셨습니다. 맡은 자리를 잘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가 가장 중요한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전북병원협회가 잘 발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전북병원회장 임기 동안 추진하고 싶은 정책이 있다면. “대한병원협회장으로 취임한 이성규 이사장님이 대한병원협회 다섯가지 테마를 얘기한게 있습니다. 일단은 협력하는 마음으로 큰 테마를 함께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전북병원협회에서 하고 싶은 것은 먼저 협회에 소속된 병원들이 가능하면 좀 더 많이 참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늘리고 싶습니다. 각 개·별적인 원장님들을 만나뵙는 기회를 많이 늘렸으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로는 소속 병원 직원들의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대형병원과 달리 중소병원들은 타 지역에서 하는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를 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분들을 우리 전북병원협회에서 초청을 해 일반 행정직원들 뿐만이아니라 보직자들이 알아야할 노무교육이나 인사관리, 회계 등 꼭 필요한 교육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포상을 늘리는 방안도 고민 중입니다. 올해 각 병원 보직자들은 의정 갈등 때문에 많이 힘들었습니다. 각 병원 자체적으로도 포상을 하겠지만, 협회 차원에서 포상을 좀 해주려고 합니다.” 의정갈등이 계속되고 있는데요. 예수병원 상황은 어떻습니까. “의사와 정부의 갈등이 장기화 되면서 고스란히 환자에게 피해가 전해지고 의료기관도 효율적인 운영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을 보여준 한 해였던 거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병원 의료진들은 환자 안녕 최우선의 원칙과 환자 자율성 존중의 원칙, 그리고 사회적 정의 추구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사회 구성원 모두를 위한 방법이라 생각하고 온전하게 역할을 다하며 병원 구성원들과 합력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병원 응급의료센터가 지역민들을 위한 환자 진료와 안전망 구축에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앞으로도 의료인력 확충과 지역의료 강화 그리고 의료 시스템 개선을 위해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며 대응하겠습니다.” 정치권 상황에 따라 병원들의 상황도 크게 변화할거 같습니다. “먼저 권역 재활병원과 관련된 정책은 크게 변하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재활병원의 처음 시작이 전임 정권부터 였기에 진행에 차질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해당 사업은 약 3년에 걸쳐 진행될 예산이기에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필요에 따라서는 정치권 등을 통해 우선순위로 정부지원금이 책정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윤석열 정권에서는 의료계에서 이야기 하는 부분들에 대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부분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번 사태와 관련해 오히려 새로운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의료계에서 주장하는 부분이 2025학년도 신입생 증원 자체를 하지 않도록 하는 주장이기에 받아들여지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예수병원장에 취임하신 지 2년이 지났습니다. 큰 변화가 있었다면. “예수병원은 오랜 역사를 가진 병원뿐만 아니라 선진 의료기술과 실력 있는 의사들이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인 의료성과를 이뤄내고 있는 지역 보건의료의 산실입니다. 제가 병원장에 취임하면서 ‘정직, 공정, 효율’ 이 세가지를 원장 임기 동안 이루고 싶은 원칙으로 정했습니다. 특히 병원 내의 물품 구매나 계약과 관련된 부분에서 정직성을 강화하기 위해 공개경쟁 입찰을 통해 투명하게 장비나 시설등을 구매하도록 결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의료경영전문컨설팅 업체와의 계약을 통해 재무 뿐만아니라 진료, 성과금, 홍보, 구매역할 등 전 시스템에 대해 평가를 받고 예수병원의 장단점을 파악했습니다. 컨설팅 업체가 제시해준 플랜들은 다시 한번 예수병원에 맞게 논의해서 적용을 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해 중장기적인 발전 계획을 세울 수 있는 계기가 됐던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인력을 줄이려는 것 아니냐 이런 오해를 받았었지만, 직원들게 결과를 공개하고 설득는 과정에서 많은 직원분들이 병원의 미래에 대해 신뢰할 수 있는 계기가 됐습니다.” 권역 재활병원과 공공 어린이 재활센터의 추진 상황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공공어린이 재활병원과 어린이 재활병원은 같이 하나의 사업으로 인식돼 다행히 국가에서 임금인상 분이나 자재값 상승 부분에 대해 감당을 해주기로 약속이 됐습니다. 장애를 가진 아이들 부모들이 저희 도에는 전문재활치료기관이 없다보니 타 도시로 가야하는 상황입니다. 아이를 보내기 위해서는 부모도 함께 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굉장히 큰 시간과 재정적 낭비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전문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기관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병원은 호남권 유일의 소아 전문응급의료센터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안전한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의료환경을 구축하는 것은 지역의료기관으로서 당연한 역할인 것 같습니다. 특히 소아청소년 의료진 부족과 출산율 감소는 지역의료기관이 가진 숙명과도 같습니다. 가장 큰 걱정은 소아과 전문의를 구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현재 근무하고 계신 선생님들의 업무의 강도가 많은 상황입니다. 점점 인건비가 올라가는 상황에 현실적인 봉급을 맞춰주기가 어렵습니다. 현재 국가와 전북도에서 인건비를 지원을 해주고 있지만, 현실에는 턱 없이 부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전남 해남과 경상도, 충청도 등에서 치료가 필요한 아이들이 저희 병원을 찾아주고 있습니다. 참 보람도 있습니다.” 끝으로 전북일보 독자들과 도민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우리 지역의 건강과 의료 정보를 정확하고 신속하게 전달해 주시는 언론사 여러분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지역 주민들의 건강 증진을 위해 의료 현장의 목소리를 담아 주시길 바랍니다. 또한, 의료 취약계층에 대한 관심과 보도로 우리 사회가 더욱 건강해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지역 언론사의 발전을 응원하며, 앞으로도 주민들의 건강한 삶을 위해 함께 노력해 나가겠습니다” 신충식 예수병원장은 신 병원장은 전북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동 대학 의과대학 석사 과정을 졸업했으며, 예수병원 정형외과 주임과장, 기획조정실 차장 등을 역임한 뒤 제25대 예수병원장을 맡았다. 또 올해 제18대 전라북도병원회장에 취임했다. 그는 대한정형외과학회 국문학지편집위원회 위원과 정형외과 호남 슬관절 지회 부회장, 대한적십자사회장 자문위원회 위원, 대한병원협회 이사 등을 맡고 있다. 신 병원장은 전공의 시절 만났던 한 환자를 잊지 못할 정도로 따스한 마음을 가졌다. 그는 그때 병원이란 환자에게 신뢰를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느꼈다고 한다. 그는 환자에게 ‘희망을 주는 의사’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다. 신충식 병원장은 “병원은 환자에게 좌절보단 희망을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앞으로도 전북병원회의 지속적인 발전과 예수병원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 기획
  • 김경수
  • 2024.12.22 14:39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29)<금번집략>과 <금영래찰>- 충청지역 동학농민혁명 기록물

2023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의 하나로 등재된 <금번집략>과 <금영래찰>은 충청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실상을 잘 보여주는 기록물이다. 특히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충청감영의 움직임을 자세히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동학농민혁명 기록물로서의 가치가 크다. <금번집략>과 <금영래찰>의 공통점은 저자가 동학농민혁명기 충청감사를 지낸 이헌영(1837-1907)과 박제순(1858-1916)이란 점이다. 이헌영은 이른바 집강소기로 불리어진 6월부터 8월까지 충청감사로 재직하였고, 이헌영의 뒤를 이은 박제순은 동학농민군이 재봉기하여 공주 우금치전투를 벌인 시기에 충청감사 임무를 수행하면서 동학농민군 진압에 앞장을 서다 1895년 5월에 퇴임하였다. 따라서 두 기록물은 충청지역에서 전개된 동학농민군의 동정을 엿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그에 대응한 정부쪽 동향을 파악하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기록물이다. <금번집략>의 저자 이헌영은 34세에 과거에 급제한 뒤 1881년 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한 이후 통리기무아문경리사가 되었고, 부산항 감리, 의주부윤을 거쳐 주일공사를 지냈다. 1890년 귀국하여 교섭통상사무 협판에 재직하다가 경상도 관찰사를 지내고 1894년 4월 충청감사로 임명되었으나, 6월 20일에 가서야 공주 충청감영에 부임한 뒤 8월 25일까지 재임하였다. 이 시기는 충청도에서 청일전쟁과 동학농민혁명이 맞물려 나타나면서 매우 위중한 때로, 그 실상이 <금번집략>에 잘 나타나 있다. <금번집략>의 구성은 일록(日錄, 11면), 별계(別啓, 32면), 별보(別報), 별감(別甘, 19면), 시구(詩句)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총 51면으로 크기는 29x30cm이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일록’은 이헌영이 충청감사로 제수받은 4월 25일부터 신임 감사 박제순과 교체되는 8월 29일까지 쓴 일기체 형식의 기사로 주로 동학농민군의 동향과 청일양국 군대의 동정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이헌영은 6월 10일 고종 임금께 부임인사를 드릴 때, 동학농민군을 잘 타일러 귀화시키라는 명을 받은 만큼 충청도 동학농민군 해산에 적극 나섰다. ‘별계’는 중앙 정부로 올린 계문들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6월 27일에 발발한 청국군과 일본군의 성환전투와 전투 이후 두 나라 군대의 동향을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성환전투에서 패한 청국군이 공주에서 청주・충주를 거쳐 평양으로 북상하는 일련의 과정과 그에 따른 민폐, 그리고 충북 연풍・충주를 거쳐 북상하는 일본군 제5사단의 행군 움직임 등이 계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7, 8월 충청지역 동학농민군의 동향도 기록으로 남아 있는데, 예를 들어 7월 7일자 기록에는 서천포·청양·이인·보은 등지의 동학농민군들이 ‘사유창의(士儒倡義)’라는 제목의 녹명기(錄名記)를 마련하고 관아를 습격하여 군기를 마련한 내용이 자세히 실려 있다. 그밖에 ‘별보’는 태안의 세미를 육상궁(毓祥宮)의 하인에게 빼앗긴 사건에 대해 의정부에 보고하는 글 등이 실려 있다. ‘별감’은 충청감사 이헌영이 충청도 각 지역으로 보낸 효유문이나 전령 등을 모아 놓은 것이다. 그 가운데에는 충청도 각지의 민회소(民會所), 유회소(儒會所)에 내린 감결 등이 수록되어 있어, 당시 동학농민군은 물론 유생층의 움직임에 관한 소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예를 들어 부여 유생들은 ‘훈신들이 구름처럼 모였다’라고 하면서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이헌영은 경솔한 거사라고 하면서 만류하기도 하였다. 특히 <금번집략>에 따르면, 7,8월 사실상 충청지역은 충청감영이 위치한 공주를 비롯해 거의 대부분 지역이 동학농민군의 해방구나 다름 없었고 선무사 정경원이 제시한 집강안도 거부한 채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충청도 지역 중에서도 동학농민군이 왕성하였던 곳은 공주를 비롯해 이인, 부여, 임천, 연산, 정산, 서천, 보은, 영동 등지였다. 심지어 8월 1일에는 1만여 명이 공주 정안면 궁원에 모여 창의를 하였고, 다음 날에는 깃발을 앞세우고 총칼로 무장을 한 채 충청감영 안으로 들어왔어도 충청감사 이헌영이 제어할 수 없었을 정도였으니, 7,8월 충청도에서의 동학농민군 위세를 엿볼 수 있다. <금영래찰>은 ‘금영(충청감영)에 온 편지’란 뜻으로, 충청감사인 박제순과 개화정부의 총리대신인 김홍집과 외무협판인 김윤식 사이에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기록물이다. 세 사람은 당시 친일개화파정부의 주역이었다. 충청감사 부임 당시 박제순은 36세의 젊은 나이였다. 그는 25살인 1883년에 문과에 급제한 뒤 요직을 거쳐 1894년 6월에 전라감사에 발탁되었으나, 전라도에서 전봉준과의 협상을 통해 집강소체제를 이끌어낸 전라감사 김학진이 유임됨에 따라 충청감사에 임명되었다. 나이가 젊은 박제순은 동학농민군에 다소 유화적이었던 전임 충청감사 이헌영과는 달리 동학농민군 진압에 더 적극적이었다. 더욱이 8월 25일 충청감사 이헌영과의 임무 교대로 공주감영에 부임한 박제순은 동학농민군 진압에 적극 나서는 한편, 중앙정계와도 적극 소통하였는데, 그가 바로 친일개화파정부의 총리대신인 김홍집과 외무협판인 김윤식이었다. 이들은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시국을 논하고 동학농민군 진압책을 논의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금영래찰>로 남아 있는 것이다. <금영래찰>은 모두 2책 총 75면 분량이다. 크기는 33x23cm이고,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책에는 김홍집이 1894년 8월 21일부터 12월까지 보낸 편지를 수록하였다. 여기에는 대책을 지시하거나 당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박제순은 사건의 전말을 알리는 답신을 간간이 보내기도 하였다. 2책에는 김윤식이 1894년 8월 11일부터 12월까지 보낸 편지를 담고 있다. 김윤식은 “동학도의 소요는 복심의 고통이므로 서양의 소요보다 심하다”고 말하는 등 동학농민군을 철저히 적대하는 문구들이 많다. 김홍집의 편지에는 일반 대책을 알리기도 하고 당부를 하는 내용을 주로 담았으나 김윤식의 편지에는 자신의 견해를 많이 드러내고 있어 대조를 보인다. 여러 내용 속에는 충청도와 전라도의 동학농민군의 사건 전말만이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을 살필 수 있다. 특히 일본군의 동정과 외국 공관의 대책도 아울러 전해준다. 김윤식의 12월 14일자 마지막 편지에는 프랑스 선교사가 피해를 입었는데 2천원의 배상금을 주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 것이라고 하여 배상할 것을 당부하는 등 기밀에 속하는 사실을 적고 있어 흥미롭다. 따라서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전보를 이용하지 않고 개인 편지형식을 빌은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금번집략>과 <금영래찰>은 충청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실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기록물일 뿐 아니라, 당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정부의 인식과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많은 정보를 저장하고 있어 사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특히 훗날 철저한 친일반민족자의 길을 걷는 박제순이 동학농민혁명에 어떠한 인식과 행위를 보였는지를 엿볼 수 있는 기록물이다. 김양식 청주대학교 영화영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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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18 16:42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28)유회성책(儒會成冊) - 마을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한 성분조사서

〈유회성책〉은 1894년 청면 천동 유회에서 작성된 문서이다. 표지에 갑오년 11월 일 청면(靑面) 천동(泉洞) 유회성책(儒會成冊)이라고 써진 이 문서는 표지까지 포함하여 10쪽으로 되어 있다. 청면 천동은 1894년 당시에는 정산현(定山縣)이었으며, 현재의 행정구역은 충남 청양군 청남면 천내리이다. 문서에 관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천동 유회(儒會)의 리회장(里會長) 김학현(金學鉉)이 현감에게 보고한 문건으로 보인다. 문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림 1) 유회성책 표지. 갑오십일월 일(甲午 十一月 日) 청면천동유회성책(靑面泉洞儒會成冊)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그림3) 유회성책 4면. 김휘오 귀화(金輝五 歸化), 솔자 명규 불입(率子 明奎 不入), 김휘찬 귀화(金輝瓚 歸化), 윤영백 귀화(尹永百 歸化), 솔제 영락 불입(率弟 永樂 不入), 김창규 귀화(金昌奎 歸化), 솔자 태현 불입(率子 泰鉉 不入)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그림4) 유회성책 5면. 김홍규 귀화(金鴻奎 歸化), 솔자 종하 불입(率子 鍾夏 不入), 소휘직(蘇輝稷 歸化), 김성규 불입(金聖奎 不入), 김학현 불입(金學鉉 不入), 솔제 태현 불입(率弟 台鉉 不入)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이 문서의 작성 시기는 1894년 11월이며, 작성지역은 정산현 청면 천동이다. 여기서 가장 궁금한 점은 왜 이러한 문서가 작성되었을까 하는 것이다. 몇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다. 먼저 시기와 장소의 문제이다. 시기는 동학농민혁명의 우금치전투가 있었던 때이며 장소인 청면 천동은 우금치전투지와 매우 가까운 위치에 있다. 이것으로 보아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문서로 보인다. 그리고 우금치 전투 이후 조선정부의 지방통제책이 강화되고 있는 상황과 맞물려 있다고 생각된다. 즉 동학농민군을 색출하여 토벌하는 동시에 5가작통제와 향약을 통해 향촌사회를 강력하게 통제하는 상황에서 작성되었다고 보여진다. 다음은 내용의 문제이다. 속오(束伍) 4명을 포함한 29가호의 아버지와 아들 39명을 대상으로 ‘불입(不入)’과 ‘귀화(歸化)’로 구분하여 기재되어 있다. 여기서 불입은 동학농민군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며, 귀화는 동학농민군에 참여하였다가 돌아왔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문서가 작성되었을까? 그 이유는 청면 천동의 유회가 자신들의 마을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 작성한 것으로 짐작된다. 즉 강력한 통제가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러한 문서를 선제적으로 만들었다고 보여진다. 즉 일부 마을 공동체 구성원들이 동학농민군에 참여했지만 그들을 모두 귀화시켰기 때문에 그들을 더 이상 잡아가거나 체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정산현감과 토벌군에게 알리기 위해 작성한 것이다. 말하자면 마을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 이러한 문서를 작성하였다고 보여진다. 각각 가호별로 보면 25가호의 불입과 귀화의 양상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볼 대목은 10가호에서는 부자 또는 형제가 함께 기재되어 있는데, 이들의 경우 부자 또는 형제가 모두 귀화한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즉 아버지가 불입이면 아들은 귀화, 아버지가 귀화면 아들은 불입 등으로 기재되어 있다. 형제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가 아닌가 생각된다. 다음으로 궁금한 것은 이들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실마리는 청면 천동에서 찾으면 된다. 이곳은 현재 행정구역으로 충남 청양군 청남면 천내리이다. 이 마을은 예안김씨의 집성촌이다. 그래서 성책을 보면 속오를 제외하고 김씨 27명, 윤씨 4명, 소씨 1명, 이씨 1명, 전씨 1명, 복씨 1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씨가 대부분이다. 이 김씨가 바로 예안김씨참판공파로 대대로 집성촌을 이루고 이곳에서 살았다. 이러한 사실은 〈예안김씨참판공파세보〉에서 확인된다. 그림 10) 『예안김씨참판공파세보』(2003) 김휘홍, 김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그림 9)는 유회성책 내지 첫장이다. 처음 등장하는 인물은 유학 김휘홍과 그의 아들 김병규이다. 김휘홍은 불입이고 아들 김병규는 귀화이다. 그런데 이를 그림 10)의 예안김씨참판공파세보와 비교해 보면 김휘홍과 그의 아들 김병규가 확인된다. 한자도 같다. 김휘홍은 1826년에 태어나서 1907년 사망하였고, 김병규는 1854년 태어나서 1906년에 사망하였다. 이들은 모두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생존해 있었다. 즉 유회성책에 기록된 인물들이 대대로 청면 천동, 지금의 청양군 청남면 천내리에 살았던 예안김씨라는 것이 확인된다. 그림 9) 유회성책 첫장의 김휘국, 김원규도 〈예안김씨참판공파세보〉에서 확인된다. 김휘국은 귀화이며 그의 아들 김원규는 불입이다. 김휘국은 1836년에 태어나서 1904년에 사망하였고, 김원규는 1856년에 태어나서 1930년에 사망하였다. 이들도 1894년에 동학농민혁명 당시에 생존해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그림 12) 유회성책 김학현 그림 13) 유회성책 리회장 김학현 그림 12)와 13)은 리회장 김학현에 관한 기록이다. 김학현은 청면 천동의 리회장으로서 이 문서를 작성하여 상부에 보고한 당사자이다. 그런데 그림 14)와 15)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김학현은 예안김씨참판공파 종손이기도 하다. 김학현은 그의 동생과 함께 불입이다. 그는 1852년 출생하여 1915년 사망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생존하고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김학현은 청면 천동에서 대대로 살았던 예안김씨참판공파 종손으로서 그리고 리회장으로서 우금치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패하자 마을과 종중 구성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 유회성책을 작성하였다. 유회성책에 예안김씨는 27명으로 추정되는데, 〈예안김씨참판공파세보〉에서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에 사망한 사람은 없는 것으로 확인된다. 청면 천동에는 과거에 150가구가 살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이 마을의 예안김씨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거의 알지 못하고 있었다. 조사과정에서 이를 알고 매우 놀라면서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우리는 이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우선 귀화한 이들은 적극적으로 해석해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을에서 집단적으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것이 확인된다. 비록 귀화하기는 했지만 이들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러한 성분조사서를 작성한 주체의 경우, 마을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서 선재적으로 작성하였고 이 때문에 희생을 당한 사람은 없었다. 따라서 이들의 행동은 매우 현명하고 적절한 조치였다고 생각된다. 동학농민혁명이라는 매우 혼란스럽고 엄혹한 상황에서 마을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한 이러한 문서 작성은 매우 지혜로운 행동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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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12 18:21

곽영길 회장 "전북과 동반자적 협력 관계...실질적 협력 모델 만들어 나갈 것"

신임 곽영길(아주경제 회장·70·전주·사진) 재경전북특별자치도 도민회장은 ’소통과 연대’를 도민회 운영의 최고 가치로 꼽았다. 곽 회장은 재경 전북특별자치도 도민회의 성격을 "고향과 수도권을 잇는 가교이자, 전북의 발전과 도민의 화합을 이끌어내는 단체"라고 규정하면서 재경 향우 간은 물론 전북과의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유대를 강화하는 등 도민회를 활성화시켜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미래 청년 세대와의 연결을 강조했다. 그는 "청년 세대는 전북의 미래를 책임질 중요한 자산"이라며 "수도권에서 활동하는 청년들이 고향 가치를 재발견하고, 고향과의 유대를 이어갈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고향 전북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동반자적 협력 관계"라고 했다. 그는 "수도권에서 활동하는 도민들이 전북의 발전을 위해 할 수 있는 역할을 명확히 정립하고, 이를 기반으로 실질적인 협력 모델을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곽 회장은 지난달 21일 열린 재경전북도민회 임시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추대됐다. 임기는 3년이다. 서울 서초구 서울장학숙 내 재경전북특별자치도 도민회 사무실에서 만나 향후 재경전북도민회 운영계획과 비전을 들어봤다.   - 재경전북특별자치도 도민회장으로 추대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어깨가 무거울 것 같습니다. "재경전북특별자치도 도민회는 고향과 수도권을 잇는 가교 역할을 수행하며, 전북의 발전과 도민의 화합을 이끌어내는 중요한 단체입니다. 앞으로 도민회 운영에 있어서 '소통과 연대'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을 예정입니다. 이의 실현을 위해 △ 도민 네트워크 강화 △ 고향 발전 기여 프로그램 운영 △ 청년 지원 프로그램 확대 △ 문화·예술 교류 활성화를 중점 추진할 계획입니다."   -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신다면. "먼저, 도민 네트워크는 재경 지역 내 전북출신 인사들 간의 네트워크를 체계적으로 구축해 서로 간의 교류와 협력을 촉진한다는 구상입니다. 이를 통해 전북 도민의 자부심과 소속감을 강화해 나갈 것입니다. 고향 발전 기여 프로그램은 전북의 주요 현안을 중심으로 수도권 인적·물적 자원을 적극 활용해 고향의 경제적·사회적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다양한 사업을 전개한다는 것입니다. 또 전북 출신 청년들이 수도권에서 성공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멘토링과 취업 지원 등 다양한 프로그램도 운영하겠습니다. 더불어 전북의 풍부한 문화와 예술 자원을 수도권에 알리는 행사를 주최해 전북의 이미지를 제고하고, 도민 간 문화적 유대감을 강화할 계획입니다."   - 이중 가장 중점을 두고 싶은 부문은. "전북 청년 세대와의 연결입니다. 수도권에서 활동하는 청년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이 전북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고향과의 유대를 이어갈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전북 출신 멘토들과 청년들을 연결하는 멘토링 플랫폼 구축, 취업 지원 세미나와 네트워크 형성 지원, 그리고 고향 전북과 연계한 창업 기회 발굴 등을 추진할 계획입니다. 청년 세대는 전북의 미래를 책임질 중요한 자산이며, 이들의 성장이 곧 고향 전북의 발전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향후 고향 전북과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하실지. "전북은 제 삶의 뿌리이자 정체성의 근간입니다. 재경 전북도민회장으로서 전북과의 관계를 동반자적 협력 관계로 설정하고자 합니다. 수도권에서 활동하는 도민들이 전북의 발전을 위해 할 수 있는 역할을 명확히 정립하고, 이를 기반으로 실질적인 협력 모델을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또한 전북에서 진행 중인 주요 정책과 사업이 성공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수도권과 전북을 잇는 지식·자원 교류의 플랫폼을 마련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전북의 성장 잠재력을 극대화하고, 도민들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 최근 전북에서는 여러 이슈가 있습니다. 이중 찬반 논란이 일고 있는 '2036년 하계올림픽 전북 유치'와 '전주·완주 통합'에 대한 생각은. "2036년 하계올림픽의 전북 유치는 도민들에게 큰 희망과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중요한 프로젝트라고 생각합니다. 올림픽 유치를 통해 전북은 국제적인 도시로 도약할 기회를 얻게 되며, 이를 통해 지역 경제 활성화, 인프라 확충, 그리고 문화·관광 자원의 세계화라는 긍정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재경전북특별자치도 도민회 차원에서도 올림픽 유치의 당위성과 전북의 강점을 널리 알리는 데 기여할 계획입니다. 다만, 전주·완주 통합 문제는 신중히 접근해야 할 사안입니다"   - 전주·완주 통합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표명한 이유는. "통합은 행정의 효율성을 높이고, 지역 발전의 시너지를 극대화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통합 과정에서 이해관계의 조율, 지역 주민의 동의, 지속 가능한 발전 전략의 수립 등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합니다. 통합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전주는 명실상부한 전북의 중심지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오랜동안 서울에서 활동하시면서 느낀 전북의 모습과 미래 발전을 위한 제언을 부탁드립니다. "먼저, 산업 다각화와 경쟁력 강화입니다. 전북은 농업과 제조업에 강점을 가지고 있으나, 미래 산업을 선도하기 위해 ICT, 바이오, 신재생에너지와 같은 첨단 산업으로 영역을 확장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정부와 민간의 협력으로 전북에 R&D 센터를 유치하고 관련 산업 생태계를 조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통·물류 인프라를 개선해야 합니다. 전북은 교통망의 중심지로 도약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를 위해 광역 교통망을 확충하고, 전북의 물류 거점 기능을 강화하여 기업 유치와 지역 경제 활성화를 도모해야 합니다. 더불어 문화·관광 자원을 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북은 풍부한 전통문화와 자연경관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를 활용한 체험형 관광 콘텐츠와 글로벌 관광 자원 개발을 통해 전북을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매력적인 지역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 인재양성도 빼놓을 수 없는데요. "그렇습니다. 지역 인재 육성은 매우 중요합니다. 전북 내 우수한 인재들이 지역에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전북 지역 내 대학 및 연구기관과 협력하여 청년들에게 양질의 교육과 취업 기회를 제공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도민들이 전북의 잠재력과 미래 비전에 대해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도민회 차원에서 도민의 목소리를 정책에 반영하고 소통과 공감을 기반으로 한 지역 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 전북도민들에게 한 말씀. "재경전북특별자치도 도민회장으로서 고향 전북의 발전과 도민들의 화합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향의 자긍심을 높이고, 수도권과의 연결을 통해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만들어 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곽영길 회장은. 1954년 전주 출생. 부친의 고향은 임실이다. 전주고-고려대를 졸업하고, 연세대 행정대학원을 수료했다. 언론사 기자로 출발해 언론사 경영인의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 자신의 좌우명처럼 '혁신과 도전'의 삶을 지향하고 있다. 문화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 파이낸셜뉴스 편집국장 및 대표이사 등을 거친 후 아시아경제신문과 아주경제신문을 창간하면서 경영인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에도 언론매체를 잇따라 창간, 현재 아주닷컴과 아주일보, AJP아주TV, 이코노믹데일리, 로엔피, AMC, 인민일보 등이 자매지로 있다. 2017년부터는 이들 매체를 총괄하는 아주경제 회장을 맡고 있다. 아주경제는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 베트남어 등 5개국 언어로 기사서비스를 제공하는 종합미디어로, 국내 최초로 해외화문매체합작조직과 세계중문신문협회, 세계화문매체합작연맹에 가입해 중화권 언론과의 네트워크를 다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달 3일에는 아시아권 49개국을 아우르는 영어뉴스 통신사 AJP(AJU PRESS, 아주프레스)를 출범시켰으며, 내년엔 방송국 개국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재경전북특별자치도 도민회장 수락연설에서 도덕경의 ’허이불굴 동이유출(虛而不屈 動而愈出•텅 비어 있지만 끊임없이 솟아나오는 것)’을 인용하며 재경 도민회를 창조적이고 역동적으로 이끌겠다는 각오를 밝히기도 했다. ’한국신문인협회상’, ‘장한 고대언론인상’, ‘소충·사선문화상 대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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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준호
  • 2024.12.08 18:22

[한신협 공동기획-팔도 핫플레이스] 제주 한라산 설경

지난달 28일과 29일 내린 눈으로 한라산은 벌써 눈 세상이다. 한라산은 겨울이 되면 순백의 눈으로 뒤덮이며 마치 설국(雪國)에 들어온 듯한 풍광을 자랑하고 있다. 겨울철 하얀 눈으로 덮인 한라산은 마치 동화 속 풍경으로 변신한다. 눈으로 덮인 겨울 한라산의 풍광은 마치 그림처럼 아름답다. 해발 1950m의 한라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사계절 다양한 매력을 자랑하고 있지만 특히 겨울철에 눈 덮인 한라산의 풍경은 환상적이다. 이 때문에 겨울철 한라산의 설경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으며 탐방객을 불러들이고 있다.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표현하는 영주십경(瀛洲十景)중 하나가 한라산 백록담이 쌓인 설경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녹담만설(鹿潭晚雪)이다. 멀리서 하얀 눈으로 뒤덮인 한라산을 보기만 해도 마치 선계(仙界)에 들어선 듯 신비롭고 폐부(肺腑)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이다, 한라산은 고도(高度)에 따라 서로 다른 식생(植生)이 분포하는데, 한 겨울 한라산의 설경 또한 정상 백록담을 향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색다른 장관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특히 맑은 날에는 하늘의 파란색과 한라산의 설경이 조화를 이루며 마치 이 세상에는 두 개의 색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 신비로운 풍광을 자아낸다. 너무 눈이 부셔 제대로눈을 뜨지 못할 정도다. 한라산에는 백록담 정상을 향하는 2개의 탐방로(관음사탐방로·성판악탐방로)와 백록담 턱밑 윗세오름과 남벽에 이르는 3개의 탐방로(어리목탐방로·영실탐방로·돈내코탐방로)그리고 어리목주차장 인근의 어승생악으로 향하는 탐방로가 있다. 각 탐방로별로 서로 다른 절경이 펼쳐진다. △성판악탐방로=백록담 정상까지 9.6㎞, 편도 약 4시간 30분이 소요된다. 7.3㎞ 지점에 위치한 진달래밭까지는 탐방로 주변이 숲이어서 잎을 모두 떨군 나무에 하얀 눈이 솜처럼 소복이 내려앉은 풍광이 일품이다. 출발지점서 4.1㎞에 속밭대피소가 있는데 이 지점 삼나무 숲의 설경에서는 탄성이 절로난다. 속밭대피소에서 1.7㎞ 더 진행하면 사라오름 입구에 도착하는데, 백록담행을 잠시 미뤄두고 사라오름에 꼭 올라가보기를 강추한다. 이 지점서 오름 정상까지는 600m. 오름 분화구는 산정호수다. 비가 많은 여름에는 탐방로까지 물이 차오르고, 겨울에는 하얀 눈이 산정호수를 뒤덮고, 호수 주변 나무들에서는 눈꽃과 상고대의 향연이 펼쳐진다. 성판악코스는 정상까지 완만해 가장 많은 등산객들이 찾지만 사라오름 입구에서부터 정상까지 3.8㎞은 다소 가파르다. 진달래밭을 지나면 숲은 사라지고 키 작은 관목지대로 시야가 확 트인다. 지금까지는 설경 속에 갇혀 걸었지만 지금부터는 설경 위를 걷는다. 숨이 차오르지만 저 앞에 우뚝 솟은 순백의 백록담 풍광이 힘을 불어 넣고, 뒤를 돌아보면 지금까지 걸어왔던 여정에 뿌듯함을 느낀다. 드디어 해발 1950m 정상.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다. 먼 옛날 뜨거운 용암을 쏟아냈던 저 웅장한 굼부리(분화구·噴火口). 지금도 세상을 삼킬 듯 입을 벌리고 있는 그 웅장한 모습에 숨이 멈춰진다. △관음사탐방로=백록담 정상까지 8.7㎞. 편도 소요시간 5시간. 성판악코스보다 짧은데도 소요시간은 길다. 그만큼 높은 경사가 발걸음을 무겁게 한다. 관음사 주차장에서 6㎞ 떨어진 삼각봉대피소까지 숲길. 탐방로 주변 나무와 숲의 모양에 따라 서로 다른 설경들이 펼쳐진다. 서로 자신을 바라보라고 뽐내는 듯하다. 3.2㎞ 지점 탐라계곡 다리를 건널 때 색다른 풍광이 펼쳐진다. 계곡 아래 크고 작은 바위를 살포시 감싸며 쌓여 있는 설경이 크기가 다른 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듯하다. 삼각봉에 이르러 반전이 일어난다. 그동안의 숲길은 끝나고 시야가 탁 트인다. 그리고 하얀 눈옷을 입고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삼각봉과 눈 덮인 왕관을 쓴 왕관릉의 장엄한 모습이 등장한다. 삼각봉대피소를 지나 용진각계곡을 건너는 다리 위에서 사진 촬영은 필수. 어느 계절에 찾든 주변 산세와 어우러져 명작이 탄생된다. 정상까지 2.3㎞의 힘겨운 과정이 남아있지만 시시각각 서로 다른 모습으로 눈앞에 펼쳐진 순백의 장관을 보노라면 힘이 절로 난다. △영실탐방로=윗세오름(3.7㎞)을 거쳐 백록담 턱 밑 남벽분기점에 이르는 5.8㎞코스. 편도 2시간30분. 백록담 정상까지 갈 수 없지만 등산객들에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다. 영실탐방로에는 영주십경 중 하나인 영실기암(靈室奇巖)이 사철 장엄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산림청 지정 ‘아름다운 소나무 숲’ 사이로 다양한 모습의 기암괴석(奇巖怪石群)이 고개를 내민 모습이 마치 환타지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여름 집중호우 시에는 성벽처럼 이뤄진 바위군 사이로 커다란 폭포가 형성되고, 겨울에는 얼음폭포라는 또 다른 장관이 펼쳐진다.. 한때 대한민국에서 가장 맛있는 컵라면을 팔았던 윗세오름. 지금은 여타의 사정으로 라면이 판매되지 않고 있다. 이곳서 잠시 휴식 후 남벽으로 진행. 백록담의 외벽(外壁)인 남벽은 깎아지른 듯한 수직절벽이 울퉁불퉁한 모습을 하고 있어 마치 외계행성에 서 있는 듯하다. 특히 겨울 설경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신비로운 모습이다. 한라산 윗세오름으로 가는 영실탐방로. /제주일보 제공 △어리목탐방로=윗세오름(4.7㎞)을 거쳐 남벽분기점에 이르는 6.8㎞코스. 편도 3시간 소요. 해발 1423m의 사제비동산까지는 숲 터널. 사제비동산부터 윗세오름 대피소까지 광활한 평원이 펼쳐진다. 저 멀리 보이는 백록담까지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덮여 있다. 윗세오름까지의 등산과정에서 주변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흰 눈에 덮인 온통 하얀 세상이다. 그 어떤 방해물도 없다. 새 하얀 넓은 도화지 위에 혼자 놓여 있는 기분이다. △어승생악탐방로=어리목 주차장(탐방안내소)에서 어승생악 정상까지 1.3㎞. 소요시간 편도 30분. 어승생악은 시간적, 체력적으로 다른 탐방로는 택하기 버거운 등산객들이 찾는 오름이다. 어승생악은 미니 한라산이라 할 수 있다. 비록 탐방거리가 짧지만 정상에 커다란 굼부리를 비롯해 자연생태가 잘 보존되어 있으며 한라산 백록담을 비롯해 멀리 추자도, 비양도, 성산일출봉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짧고 굵게 한라산 설경을 즐길 수 있다. 한라산 윗세오름 대피소와 윗세오름. /제주일보 제공 △돈내코탐방로=돈내코탐방안내소에서 평궤대피소(5.3㎞)를 거쳐 남벽분기점(7㎞)에 이르는 코스로 편도 3시간30분정도 소요된다.‘ 남벽순환로를 따라 윗세오름에 이르고, 어리목과 영실탐방로와 연계할 수 있다. 이 밖에도 한라산에 직접 오르지 않고서도 한라산 설경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1100도로 최고점인 1100고지 휴게소. 도로의 높이가 해발 1100m로, 타지방의 웬만한 산 정상보다도 높아 한라산 못지않게 눈이 많이 쌓이는 곳이다. 1100고지는 한라산과 삼형제오름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람사르습지로 지정된 습지 산책로가 있어 이 산책로를 걷는 것만으로도 한라산 설경을 즐기기에 충분하다. 멀리 한라산 백록담의 설경뿐 아니라 습지 앞 삼형제오름이 선사하는 눈꽃과 상고대의 풍광에 감탄이 절로 난다. 눈이 내릴 때마다 설경을 감상하려는 탐방객들이 몰리면서 주변 일대가 교통정체를 겪기도 한다. 겨울철만 되면 한라산 설경을 감상하려는 등산객들이 몰리면서 제주특별자치도는 이들의 편의를 위해 지난달 27일부터 오는 27일까지 백록담 정상으로 향하는 성판악코스와 관음사코스에 탐방예약제를 해제했다. 정상 탐방 예약 없이 겨울 한라산 설경을 만끽할 수 있다. 또한 탐방객들의 편의를 위해 오는 21일부터 내년 2월 23일까지 한라산 눈꽃버스가 운행된다. 눈꽃버스는 토요일과 공휴일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 사이 제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영실 탐방로 매표소까지 왕복 24회 운행된다. 한라산 설경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유의해야할 점이 있어 사전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겨울산은 복병이 많다. 눈과 추위, 강풍 등으로 평소 산행보다 체력이 급격히 떨어진다. 특히 정상까지는 왕복 10시간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체력 고갈에 대비한 충분한 간식과 물은 필수. 또한 따뜻한 옷과 방수가 되는 등산화, 땀으로 장갑이 젖어 얼 수 있기 때문에 여분의 장갑, 방한모, 찬바람을 막을 수 있는 넥워머, 미끄럼 사고 예방을 위한 아이젠과 스틱도 필요하다. 한라산 설경의 장관도 좋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안전한 산행이다. 제주일보=조문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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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05 18:54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27)찰이전존안과 계초존안

△찰이전존안(札移電存案) 찰이전존안은 1894년 음력 8월 10일부터 1896년 1월 21일까지 의정부와 지방관아, 조선 주재 일본공사관 사이에서 주고받은 공문서와 전보문을 의정부 기록국에서 보관용으로 작성한 문서철이다. 도찰원(都察院)에 보낸 찰위(札委), 학무아문 내무아문 탁지아문 등에 보낸 공이(公移), 각 감영에 보낸 전기(電奇), 각 감영·감사에 보낸 전문(電文)과 조회(照會), 각 감영·감사가 의정부로 보낸 전문, 일본공사가 의정부에 보낸 전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문서는 동학농민군 토벌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제2차 봉기 이후 전국 각지 동학농민군의 활동, 공주 우금치전투 이후 전봉준·김개남·손화중 등 농민군 핵심 인사들이 체포되는 상황 등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외에 청일전쟁 관련 사실도 많이 기술되어 있다. 조선에 출병한 일본군이 군표(軍票)를 지불하고 개인의 토지를 수용하는 사례도 확인된다. 일부 지역에서 일본군의 토지사용료 미지급이 문제였다. 예컨대 9월 부산을 통해 북상하는 일본군은 경북 달성에 머물던 기간 주민의 밭을 차용하여 매 1두락에 도조(賭租)로 6냥씩, 즉 전(田) 38두락에 228냥을 주기로 하고 대구사령부에서 증표를 만들어 주었다. 이 표는 정식 발매된 군용수표라기보다는 일종의 약속어음 형태의 보증서로 보이는데, 지역 병참사령부에서 그마저도 태환해 주지 않아 민원으로 남았다. 다음 해 1월까지도 지불하지 않아서 주민들이 달성 판관에게 소장을 올린 바 있다. 찰이전존안에서는 특히 충청도와 전라도 동학농민군의 성세는 중앙군과 지방 감영병으로서는 ‘이과적중(以寡敵衆)’의 형세로 기록하고 있다. 경상도의 경우 이와 마찬가지로 11월 21일 진주 토포사에 의하면 하동·곤양·단성·진주 일대는 마치 “밥에 파리가 몰려드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고 있듯이 농민군의 세력이 강하여 지방관이 일본 군대의 주둔을 ‘엎드려’ 원할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농민군 토벌차 현지에 출동한 중앙정부군이 일본군에 의지하는 모습을 알 수 있는 내용도 많이 보인다. 예컨대 10월 21일 자 영남 토포사가 관찰사에게 보내는 전보에, “일본군이 철수하려고 하는데 이곳에는 지킬 군대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말씀을 드리면 하동과 곤양 등지에 주둔하는 일본군이 없다면 재앙이 이어질 것이니 이 전보를 의정부에 전달하여 죽을 지경에 처한 수많은 생명을 구해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내용 등이다. 관찰사도 의정부에 “지금 일본군이 주둔할 때 잠시도 고개를 돌릴 수가 없는데, 더욱이 일본군이 철수한 뒤에는 어떠하겠습니까?”라는 전보를 보냈다. 그는 11월 초 10일 전보에 “(일본군이) 아직 내려오지 않아 근심스럽습니다”라고 하였다. 11월 17일 전라좌수영도 정부에 전보하여, “군량은 준비하였으나 일본군은 오지 않고 동도(東徒)가 와서 포위하여 위태로움이 조석 간에 있습니다. 부산에 있는 일본군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신속하게 동도를 토벌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간청한 바 있다. 조선 정부의 일본군 의존 정책은 이듬해까지 이어져 1895년 1월 전라감사는 “지금 이노우에 공사가 일본군 진영에 보낸 전보를 보니, ‘일본군을 철수시키고, 경군도 모두 돌아간다’라고 하였습니다. (중략) 지금 군사를 철수한다면 재앙이 뒤를 잇는 것은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다시 3~4개월 동안 연장하여 인심이 조금 진정되기를 기다렸다가 지방관이 제자리에 선 뒤에 점차 철수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이노우에 공사와 의논하여 대대장에게 다시 전보를 해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정부에 전보하기도 하였다. 농민군 핵심 지도자 김개남과 전봉준·손화중의 체포 상황도 생생하다. 강화 진무영 병사가 전라도 태인에서 체포한 김개남은 참수하여 그 수급(首級)을 순무영에 보냈고, 순창에서 사로잡은 전봉준은 임실 수령과 일본군이 압송하여 금강을 건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정부에서는 “김개남은 무슨 이유로 (목을) 베었는지 상세하게 알려 달라. 전봉준이 잡혔다고 하는데, 반드시 수레로 데려와서 유지(有旨)를 받들어라”고 전라감사에게 전보하였다. 고창에서 체포한 손화중은 옥에 가둔 후 일본군에게 보내 압송토록 전라감사에게 전보하였다. 농민군 주력이 진압될 무렵 충청도에서는 남학(南學)과 그 다른 일파인 북학(北學)·서학(西學, 천주교) 등이 성행하여 충청감사가 이를 금지하자고 주장한 사실도 기록하고 있다. 일본군의 농민군 토벌에 편승하여 과거 농민군과 계급적 대립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던 지방 양반과 유생을 중심으로 한 민보군(民堡軍)·유회군(儒會軍), 스스로 ‘의병’이라 칭하는 무리 및 보부상(褓負商) 등 수많은 반농민군(反農民軍) 그룹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도처에서 패잔 농민군을 색출하여 살해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충청감사는 이들이 동학을 토벌한다면서 양민을 침탈하는데도 불구하고 막을 수가 없다고 토로하였다. 또한 향약(鄕約)과 5가작통·10가작통의 작통제(作統制)를 실시하여 패잔 농민군을 숨겨주거나 이들에 협조하는 기미가 있는 사람들까지 모두 얽어매었음도 이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청일전쟁과 관련하여 청국으로 보내는 인부의 징집 사실도 이해할 수 있다. 갑오개혁 이후 새로 임명된 평안감사 김만식은 의주에서 일본 군대를 영접하고 군수품 수송과 인부의 차출을 끝마치고 평양으로 되돌아온 사실을 정부에 보고하였다. 「시모노세키 강화조약」 직전인 1895년 4월 12일까지도 주롄청(九連城)으로 보내는 인부 1,081명과 안동현 행 선박 10척 등 조선인 인부와 조선 선박 동원은 오랜 기간 지속되고 있었다. 한편 청국 관내로 진입한 일본군 위문 사절로 군부대신 조희연 일행이 청국 진저우(金州)에 도착하여 뤼순(旅順)·웨이하위웨이(威海衛)를 거쳐 다롄만(大連灣)에 돌아왔다는 전보 내용도 수록하고 있다. 이후에는 잉커우(營口)로 향한다는 군부대신의 전보도 수록하였다. 이 자료는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계초존안 표지. /서울대 규장각 제공 △계초존안(啓草存案) 계초존안은 의정부에서 1894년 7월 21일부터 같은 해 11월 20일 사이의 계초(啓草)를 의정부 기록국에서 모아서 베껴 놓은 것이다. 중요 내용을 보면, 먼저 8월 1일 전주의 사민(士民)들이 연명으로 전라감사 김학진에게 올린 소장의 여러 조항 가운데 국가 재정과 관련하여 처분을 바라는 7개 조항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1. 엽전 5만 냥을 불에 탄 가호에 빌려주어 5년을 기한으로 나누어 갚는 일. 2. 계사년(1893) 각 면의 세미(稅米) 중 아직 거두지 못한 5,516석을 전례에 따라 매석 당 25냥씩 거두어들이고, 부내(府內) 4개 면에서 거두지 못한 520석은 특별히 감면하는 일. 3. 과거 각 연도의 미납한 쌀과 콩을 상정가(詳定價)로 대신 징수하고 군포(軍布)는 돈으로 대신 징수하는 일. 4, 보세(洑稅)와 잡세(雜稅)를 혁파하는 일. 5. 진결(陳結)에 대한 조세를 기한을 정하여 다시 감면하는 일. 6. 전운소(轉運所)에서 새로 만든 잡비와 양여미(量餘米, 정량을 넘게 거두는 쌀)를 시행하지 않는 일. 7. 균전답(均田畓, 결세를 고르게 하는 전답)에서 도조를 지나치게 거두는 것과, 마름과 하인들의 폐단을 금하는 일 등이다. 이에 대한 김학진의 처분 제안과 국왕으로부터 윤허를 받았다는 내역까지 소개하고 있다. 9월 15일 경상감사 조병호의 장계 내용도 수록하였다. 이는 1. 도내 환곡의 총액 가운데 포흠(逋欠)이 누적된 11개 고을과 역참의 포흠은 탕감해 주고, 통영의 환곡 폐단은 모두 바로잡는 일. 2. 진결(陳結) 1만 1,703결을 영구히 탈급(頉給)하는 일. 3. 결가(結價)는 금전으로 납부하고, 운반비는 될수록 적게 납부하며, 정비(情費)와 잡비는 받지 않는 일. 4. 진상(進上) 물품과 전문(箋文)을 올릴 때 거두는 정비 징수를 금지하는 일. 5. 재해를 입은 50여 고을의 공납(公納)은 내년 가을까지 미루고, 양호의 세미(稅米) 수만 석을 우선 이전하는 일. 6. 각 역에서 사복시(司僕寺)의 입파(入把)에 보충할 말의 세전(貰錢)은 수량을 줄여서 정식으로 삼고, 공조(工曹)의 도롱이와 언치[言赤]는 혁파하는 일. 7. 전운소에서 징수하는 것을 대전(代錢)으로 징수하면 운반비 및 여러 가지 폐단이 변통될 수 있다는 일. 8. 어세(漁稅)·염세(鹽稅)·선세(船稅)를 사실대로 조사하여 바로잡는 일. 9. 남영(南營)의 병사에게 지급하는 급료의 부족액을 모종의 공전으로 지정해 붙이는 일. 10. 도내 백성들의 소요 원인은 규정 외에 추가로 징수하는 데에 있으니, 여러 폐단을 차례로 바로잡는 일 모두를 의정부에서 아뢰어 처리하도록 요청한 것이다. 계초존안에는 집강소와 제2차 봉기와 관련한 동학농민군 활동 상황을 자세히 기재하고 있다. 예컨대 수천 명이 전라우수영의 군기와 금전을 빼앗아 간 일, 전라감영 군사마 송인회와 군관 김성규가 농민군을 타이르고 귀화에 힘쓴 공으로 수령으로 임명하라는 전라감사 김학진의 건의, 경상도 성주와 예천 및 경상도 서남부 지역의 농민군 상황, 전라도 남원과 경기도 지평 농민군의 활동 상황 등이다. 이 기간 동학농민군의 활동과 달리 전개되던 민란 상황도 소개하고 있다. 경상도 영천 민란으로 영천 안핵사 이중하는 이 지역 백성들의 소요는 원인이 3가지로, 첫째, 결세(結稅)가 지나치게 무거운 것이며, 둘째, 관아의 정사가 탐오한 것이며, 셋째, 명례궁(明禮宮)의 보세(洑稅) 때문이라는 것이다. 조선에 출병한 청국군의 동향도 기재되어 있다. 즉, 성환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한 청국군이 우회로로 평양으로 가는 기간 새로 집권하게 된 갑오 개화파 정부는 우마와 군량·마초 등을 민간에 배당해서 거두어 청국군에게 제공한 강원도와 함경도 관찰사 등의 추고(推考; 죄상을 심문하여 추궁하는 일)를 계안으로 청하여 국왕의 윤허를 받게 된다. 지방관에 대한 정부의 이와 같은 징계 조처는 사후 미봉책에 불과했는데, 이 내용은 조선 정부가 자발적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원산 주재 영사의 보고를 받은 일본 정부의 훈령에 따라 일본공사관에서 조선 정부를 강박하여 진행된 것이다. 한편 청일전쟁 기간 서북 지역 지방관 처벌 관련 문제도 이 자료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예컨대 서흥부사 홍종연은 조선과 일본이 체결한 「양국 맹약」을 위배하고 일본군을 모함하였다는 혐의로 일본군 제5사단에 일시 구금되어 있다가 외부대신 김윤식의 항의로 풀려났다. 그러나 곧바로 조선 정부로부터 공식 파면된 내용의 전말이 계초존안에 수록되어 있다. 신임 평안감사 김만식은 평양중군 이희식, 강동현감 민영순과 숙천부사 신덕균, 영변부사 임대준, 안주목사 김규승, 성천부사 심상만, 상원군수 이국응, 병우후 김신묵과 대동찰방·자산부사 등 평양 전투 전후 청군에 협조하거나 관인을 버리고 임지에서 이탈하여 도망간 지방관의 파직 처벌을 청원하여 윤허를 받았다. 제1군 사령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일본 공사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에게 늦가을로 접어드는 상황에서 마료(馬料)의 보충과 방한용 신탄(薪炭) 조달이 필요함에 조선 정부를 통해 선유사 권형진에게 특별한 직권을 부여하고 충분히 효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청구할 것을 조회한 바 있었다. 야마가타는 공사 이노우에에게 현재 ‘대징발’ 중이므로 권형진이 의주를 떠나면 큰 지장을 일으키게 되므로 계속 체류시키도록 조선 정부에 조회토록 하였다. 그 결과 권형진은 반접관(伴接官)으로, 전 사과 김응옥을 반접종사관(伴接從事官)으로 임명하여 관서 지역에 주둔한 일본군을 접대하면서 그들의 전쟁 수행을 위한 협조에 전담토록 하였다. 이 자료는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조재곤 서강대학교 학술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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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05 13:00

[배리어프리, 공공디자인에서 인권을 찾다] ⑦ 포용적 교통수단을 늘리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권리 보장이 배리어프리의 시작

“장애인, 노인, 어린아이 등 사회적 약자를 보편적 인권으로 보장해 주지 않는데, 그들의 권리를 당연히 보장해 줘야 지역에서도 배리어프리가 제대로 실천될 수 있는 것 아닐까요?”(양은주 전북장애인차별철폐연대 집행위원장) “생활 속 모든 환경이 차별 없는 존중과 배려가 가능한 지역사회로 성장해야 합니다. 나와 다를뿐 이라는 차이를 모두가 받아들일 마음을 갖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거죠”(서양열 전북자치도 사회서비스원 원장)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이 반드시 그들(장애인)만을 위한 시설이 아니라는 점을 인지해야 합니다. 포용적 교통이라는 말은 결과적으로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가 함께 이용할 수 있어야 하는 교통체계 시스템이고, 물리적 환경 개선부터 이뤄져야 심리적 장벽까지 없앨 수 있습니다”(최원규 전북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노인과 어린아이, 산모와 장애인이 어울려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떠한 변화가 필요할까. 휠체어 사용자들이 지역에서 대중교통을 편안하게 이용할 수는 없을까. 이러한 질문에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포용적 교통수단이 늘어나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권리 인정이 근본적인 해답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이용할 수 있는 포용적 교통수단을 도입해야 한다는 얘기이다. 특별 좌석을 배치하고, 특별 교통수단을 늘리는 등 물리적 변화도 필요하겠지만 장기적인 관점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한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동등한 위치에서 생각하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깔려야 하고, 이러한 관점을 녹여낸 포용적 교통수단 도입이 뒤따라야 사회적 약자들의 기본 권리인 ‘이동권’을 보장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해외에서는 휠체어 장애인이 교통수단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독일의 경우 전체 인구 중 약 11%가 이동의 불편함을 겪고 있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이동할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지난 2013년부터 2022년까지 대중교통의 완전한 배리어프리를 실현했기 때문이다. 여객 운송법 제8조 1항에 따라 독일의 시내‧시외버스, 트램/지상철, 연방 주 내에서 운영되는 단거리 기차까지 대부분의 교통수단에 배리어프리 개념이 적용되어 있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도 고령자와 장애인 등이 대중교통을 이용해 이동을 편리하게 할 수 있도록 관련 법률을 제정했다. 이를 통해 교통수단에 대한 물리적 장애물 없는 배리어프리를 의무화했고, 택시의 경우 휠체어 탑승이 가능할 수 있도록 탑승 가능 차량으로 표준 모델을 바꾸었다. 전문가들은 배리어프리의 첫 시작은 물리적 장벽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모든 이동에는 비용이 따르기 때문에 사회적 약자에게 결국 이동은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라는 것이다. 양은주 집행위원장은 “전북에서 운행 중인 (시내) 버스는 980대다. 이 중 3분의 1이 저상버스인데, 모든 버스가 저상화 되지 않는다면 노선이 끊기게 된다. 그로 인해 사회적 약자들의 이동이 어려워지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장애인도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데 이동 수단에 제약이 있는 건 발을 묶어버리는 것”이라며 “사람을 만나면서 상호 교류하고 관계를 형성해야 성장하게 되는데 이동이 어렵다 보니 이분들의 삶 자체가 피폐해진다”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지역에서 배리어프리가 제도적으로 발전하려면 비장애인 중심의 사고를 깨트려야 한다고 제언한다. 최원규 전북대 교수는 한 가지 예시를 들었다. 저상버스는 휠체어 사용자를 위해 설계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노인과 어린이, 임산부, 심지어는 대중교통 이용자 모두에게 편리함을 제공한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저상버스 100% 도입에 대해 돈 낭비라는 부정적인 시선이 어쩌면 모두가 편리해질 수 있는 기회를 박탈시키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자동문, 엘레베이터 , 방지턱 제거까지 사회적 약자를 위한 편의시설이 반드시 그들만을 위한 시설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고 했다. 최 교수는 “버스를 타고 내릴 때 저상버스가 어르신과 어린아이 모두에게 편리함을 제공한다. 양 손에 짐이 가득한 이들도 자동문이 있으면 훨씬 이동이 수월하다고 느낀다"며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차별'이나 '특혜' 등과 같은 부정적 시선으로 바라볼 게 아닌 긍정적 차별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적극적인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 우리도 언제든지 처지가 뒤바뀔 수 있는 만큼 사회적 약자들의 생활 전반이 제도화 되어야 진정한 시민과 도민으로서 권리를 행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끝>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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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은
  • 2024.12.02 17:20

[전북 이슈+] 올겨울 역대급 한파인데⋯또 기부 한파 올까

첫눈과 함께 사회 취약계층에 혹독한 계절인 겨울이 찾아왔다. 올해 전북 '사랑의 온도탑'이 26년 만에 처음으로 100도를 넘기지 못한 가운데 내년에 또 기부 한파 악몽이 되풀이될지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사랑의열매 전북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매년 12월 1일부터 이듬해 1월 31일까지 62일 동안 희망 나눔 캠페인을 진행한다. 캠페인의 상징이자 이웃사랑의 지표인 사랑의 온도탑을 설치해 목표 금액의 1%가 기부되면 온도탑 수은주를 1℃씩 올리는 방식이다. 지난 25년간 사랑의 온도탑은 100도를 넘겨 펄펄 끓어올랐다. 하지만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1월까지 두 달간 진행된 온도탑의 나눔 온도는 89.8도에 그쳤다. 1999년 나눔 캠페인을 시작한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모금액은 104억 3000만 원이었다. 당초 목표로 삼았던 모금액 116억 1000만 원보다 10억 원 이상 부족했다. 모금회 관계자는 "아무래도 경기가 좋지 못해 도움의 손길이 줄어든 것 같다. 매년 나눔 온도가 100도를 돌파해 모금 목표를 꾸준히 올렸다. 하지만 지난 캠페인에서 모금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서 이번 모금 목표는 지난번과 똑같이 설정했다"고 설명했다. 서민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인당 기부액·현물 기부 등이 줄어든 영향이다. 온도탑에만 '기부 한파'가 온 것이 아니다. 실제로 사회복지시설 등에 따르면 물품 후원도 많이 줄어들었다. 특히 규모가 작은 곳부터 타격을 입고 있다. 익산의 한 지역아동센터 관계자는 "규모가 작은 곳은 기업 후원보다 개인 후원자의 소액 기부에 기댈 수밖에 없다. 기부와 모금회·정부 등에서 지원하는 보조사업이 많았는데 코로나19 이후로 많이 줄어들어 규모가 작은 시설들을 중심으로 운영이 어려워지고 있다"고 토로했다. 취약계층의 난방 필수품인 연탄마저 기부가 줄어드는 실정이다. 혹독한 겨울을 버텨내야 하는 취약계층의 어려움이 더 커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전주연탄은행에 따르면 올해 10∼11월 각각 3만 장, 4만 장의 연탄이 기부됐다. 최근 3년(2022∼2024년) 같은 기간 중 가장 적은 수다. 지난해와 비교해서도 각각 1만 장, 2만 장이 줄었다. 2022년 10월에는 4만 1000장, 11월 4만 3255장, 12월 18만 5222장 등 모두 26만 9477장이, 2023년 10월에는 4만 장, 11월 6만 장, 12월 15만 2000장 등 모두 25만 2000장이 기부된 것으로 조사됐다. 실제로 매년 연탄 기부가 줄고 있다는 의미다. 윤국춘 전주연탄은행 대표는 "코로나19 때도 이 정도까지 줄지는 않았다. 다들 먹고살기 어렵다 보니 나도 힘든데 이웃까지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없는 듯하다. 올해 나눔이 저조하다면 내년에도 마찬가지고 내후년에도 마찬가지지 않을까 싶다"면서 "사람의 체온은 36.5도다. 연탄 한 장은 3.65kg이다. 연탄 한 장이 사람의 온도와 같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 관심을 가지고 마음을 전달해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편 '희망 2025 나눔 캠페인' 성금 모금 대장정은 내년 1월 31일까지 진행된다. 사랑의 열매는 2일 '사랑의 온도탑'을 설치한 전주 오거리문화광장에서 출범식을 갖고 정식 캠페인에 돌입한다. 디지털뉴스부=박현우·문채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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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현우외(1)
  • 2024.11.30 08:40

[전북 이슈+] 기부의 꽃 '아너소사이어티'⋯전북엔 누구 있나

1억 원 이상 고액 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가 국내에 설립된 지 5년째가 되던 지난 2012년 전북 1호 아너가 탄생했다. 1호 아너 탄생 후 불과 12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전북에 100명이 넘는 아너가 나타났다. 아너 소사이어티는 1억 원 이상을 기부했거나 5년 이내 1억 원 납부를 약정한 개인 고액 기부자의 모임을 의미한다.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바탕으로 참여와 지원을 통해 내일을 여는 사회 지도자들이 모인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함으로써 전북의 나눔 문화를 선도하고 진정한 나눔의 가치를 창조해 나가고 있다. 사랑의열매 전북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따르면 지난 10월 말 기준 전북에서 활동 중인 아너는 97명이다. 1호 아너가 탄생한 지난 2012년 3명을 시작으로 올해 106명까지 가입했지만 기부액 부족 등을 이유로 9명이 자격을 상실했다. 1호 아너는 김제에서 인삼 농사를 짓는 농부 배준식 씨다. 그의 아내인 황순이 씨도 50호 아너로 가입돼 있다. 100호에는 지난해 11월 백종일 전북은행장이 이름을 올렸다. 전북지역 아너 가운데는 부부 아너 14호, 부자 아너 6호, 패밀리 아너 4호도 포함돼 있다. 전북 1호 부부 아너는 2013년 4월, 패밀리 아너는 2019년 10월, 부자 아너는 2019년 11월에 탄생했다. 전북 14개 시군 중 아너가 가장 많은 지역은 전주시(47명)다. 군산시(15명), 김제시(10명), 익산시(9명), 완주군(3명), 남원시와 장수·임실·순창군(2명), 정읍시와 부안군(1명) 순이다. 아너가 한 명도 없는 곳은 진안·무주·고창군 등 3곳이다. 전북 14개 시군 곳곳에 아너가 있다는 의미다. 아너들이 함께 소통할 수 있는 전북 아너소사이어티 클럽은 2014년 1월 발족됐다. 제1대 대표는 김동수 ㈜참프레 회장(전주고 총동창회장)이 맡았다. 2018년 3월 2대 대표에 정대영 삼흥종합건설㈜ 대표이사, 2022년 10월 3대 대표에 신동식 유복ENG대표가 선출됐다. 아너들의 직업은 다양하다. 농부부터 기업·기관 대표, 자영업자, 금융업 종사자, 경찰 공무원, 의사, 병원장, 대학 교수 등 다 다른 일을 하고 있다. 아너들은 하는 일도, 사는 지역도, 나이도 다르지만 '나눔'이라는 가치로 하나가 됐다는 의미다. 아너들은 뜻을 모아 기부뿐 아니라 정기적으로 김장·연탄·삼계탕 나눔 등 봉사활동도 하며 함께 나눔에 대한 뜻을 실천해 나가는 중이다. 디지털뉴스부=박현우·문채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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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현우외(1)
  • 2024.11.30 08:39

[전북 이슈+] 전북 1호 아너소사이어티 회원 정체는⋯국내 최초 농부 아너

"혼자만 잘 살아서 뭣하게요." 전북 1호 아너 소사이어티인 배준식(72) 씨의 1억 원 기부 결심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우연히 전북에 아너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란 배 씨는 "왜 다른 데는 다 하는데 전북은 안 하지? 내가 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너의 삶은 그렇게 시작됐지만 사실 배 씨의 선행은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다. 하루아침에 1억 원 기부를 결심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랫동안 쌓여온 '기부의 내공'이 있었다. 백두산 여행 중 구걸하는 북한 어린이를 보고 어릴 적 배고파했던 본인이 떠올라 쌀 1억 6000만 원어치를 북한에 전달한 적도 있다. 그는 "지금도 북한에 쌀 전달하던 때가 생생히 기억 난다. 빡빡 깎은 머리를 한 어린이들이 배고파했는데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북한으로 전달하는 데까지는 어려운 과정이 있었지만 잘한 선택 같다"면서 "그때가 가장 힘이 있었던 나의 모습이다"고 했다. 배 씨가 선행을 베푼 것은 본인이 배고픈 어린 시절을 보낸 만큼 굶주림·부족함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서다. 배 씨는 "옛날보다 먹고살기는 풍요로워졌지만 사회는 각박해졌다. 어릴 때부터 봉사가 익숙한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내가 배고파서, 돈이 없어서 추웠을 때가 떠오른다. 돈 때문에 힘들고 울었던 시절이 떠오르니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조금더 가진 사람이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은 당연하다. 가까운 이웃부터 둘러보면 된다"고 기부하는 이유와 기부 철학에 대해 설명했다. 이외 아들과 함께 돼지저금통을 깨어 7만 원을 방송국 불우이웃돕기에 기부하는가 하면, 셋째 아들의 결혼 축의금 5000만 원 전액을 기부하기도 했다. 지역 이웃을 위해 도서배달차량과 신간 도서, 연탄 등도 지원하고 있다. 전북에서 기부왕이 된 배 씨는 무일푼으로 타지에서 김제로 건너와 인삼농사를 시작했다. 놀랍게도 전북 1호인 동시에 국내 최초 농부 아너인 배 씨는 전북 사람이 아닌 충남 금산 사람이다. 20대 때 이모부 일을 도우러 김제시 용지면에 왔다가 지금의 아내와 사랑에 빠졌다. 당초 1∼2개월만 머물다 다시 금산으로 가려고 했지만 아내를 만나 용지면에 살림살이를 차리게 됐다. 그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내가 한 기부·봉사도 다 아내가 했다고 생각한다. 옆에서 함께 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기부·봉사도 힘들다. 옆에서 적극적으로 같이 해 준 아내가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다. 내가 돈을 벌 수 있었던 것도 아내와 주변 이웃 덕분이다. 나누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고 설명했다. 예나 지금이나 배 씨는 다름을 인정하는 사회, 이웃을 사랑하는 사회, 싸움 없는 사회를 꿈꾼다. 돌아가신 배 씨의 어머니도 같은 꿈을 꿨다. 배 씨의 어머니는 자식이 못 먹을지언정 더 못사는 남을 돕는 사람이었다. 지금의 배 씨처럼 나보다 더 못사는 사람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배 씨는 "내 힘이 닿는 한 꾸준히 기부·봉사를 하고 싶다. 가래떡을 먹고 싶어도 돈이 없어 참고, 군대 휴가 때도 돈이 없어 어머니에게 부담이 될까 봐 휴가를 포기하고 군대에 있었던 적도 있다. 이렇게 돈 때문에 힘들어 봤기 때문에 더 열심히 살아야지, 더 베풀면서 살아야지 생각한다"며 앞으로도 남을 도우며 살겠다고 말했다. 디지털뉴스부=박현우·문채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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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30 08:39

[전북 이슈+] 마음만큼은 나도 아너소사이어티⋯기억해야 할 기부자는

겨울 한파에 몸이, 경기 불황에 온정의 손길이 얼어붙었지만 여전히 세상을 끓어오르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각자 생활도 녹록지는 않지만 나보다 더 못 사는 이웃을 위해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이다. 우리의 곁에서 따뜻한 나눔을 실천하는 네 명의 기부자들의 이야기를 모아봤다. △단칸방에 살면서도⋯기초연금 모아 기부 수년 전 전북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살면서 한 번은 꼭 기부하고 싶다"는 전화 한 통이 왔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공은 익산의 한 마을에서 일평생 살아온 70대 기초생활수급자 어르신이었다. 기초연금에서 생활비를 제외하고 매달 조금씩 모아온 성금을 전액 기부했다. 먹고살기 어려울 정도였지만 먹을 돈, 입을 돈 아껴 1000만 원을 모았다. 모금회 관계자는 "어르신과 함께 짜장면을 먹었던 기억이 있다. 1만 원도 안 되는 짜장면을 맛있게 드시는 모습을 보는데 이 돈을 모으시느라 얼마나 고생했을까 싶어 마음이 안 좋았다. 소중한 성금 1000만 원이 더욱더 따뜻하고 무겁게 느껴졌다"며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고사리손'에서 성인으로⋯17년째 기부 중 엄마 손을 꼭 잡고 전북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무실을 찾아 고사리손으로 성금을 내밀던 꼬마 기부 천사들이 어엿한 성인이 됐다. 바로 2008년부터 기부해 온 유민준(23)·유채영(20) 남매다. 남매는 지난 17년 동안 겨울 방학이 시작되는 날이면 한 해 동안 모은 용돈·공모전 등에서 받은 상품 등을 기부해 왔다. 첫 시작은 2008년 겨울 어머니 손에 이끌려 사생대회에서 받은 문화 상품권 2장이었다. 이날을 기점으로 해마다 기부하고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기부를 이어오고 있다. 어릴 적에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시작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둘 다 기부에 진심이 된 것이다. 유민준 씨는 군대에 있을 때도 겨울 방학 시기에 맞춰 휴가를 내고 기부를 했다는 후문이다. △'동네 기부 천사' 된 익산 붕어빵 아저씨? 수년째 동네 기부 천사로 불리는 붕어빵 아저씨가 있다. 올해로 20여 년째 지역사회에 기부하고 있는 김남수(66) 씨다. 매년 매서운 강추위가 몰아치고 따뜻한 붕어빵이 생각 나는 겨울이 찾아오면 기부하는 김 씨다. 붕어빵 장사를 하며 십시일반 모아온 돈을 익산시와 사회복지시설·단체 등에 전달하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주저앉으며 붕어빵 장사를 시작한 그는 "어려웠던 시간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 후 매년 기부를 해 왔다. 전북대 지하보도에서 장사할 때부터 익산에서 장사하는 지금까지도 기부를 하고 있는 그는 본인만의 루틴이 생겼다. 매일 1만 원씩 꼬박 1년을 모은 365만 원을 연말에 기부하는 것이다. 연말 기부뿐 아니라 지역에 큰 피해가 생길 때마다 성금을 지정 기탁하며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한 달 소득 훌쩍 넘지만⋯폐지 어르신 사연은 폐지를 수집해 모은 돈으로 5년째 기부를 이어온 어르신이 있다. 중앙동에 거주하는 홍경식(81) 어르신의 이야기다. 홍 씨는 지난 2020년 코로나19 재난지원금 40만 원에 폐지 줍고 노인 일자리 사업을 통해 모은 돈 60만 원을 더한 성금 100만 원을 전주시복지재단에 기부했다. 보건복지부가 추산한 폐지 수집 노인의 월 평균 소득이 76만 6000원인 점을 감안하면 홍 씨는 한 번 기부할 때마다 한 달 소득을 훨씬 뛰어넘는 금액을 전달한 셈이다. 홍 씨는 평소 이웃들에게 김장 김치를 비롯한 밑반찬 등 따뜻한 정을 받아왔다. 이 정을 다시 돌려 주겠다는 마음에서 기부를 시작했다. 이웃에게 받은 정을 돌려 주기 위해 지금도 아침이면 집을 나서 일하러 간다. 디지털뉴스부=박현우·문채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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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현우외(1)
  • 2024.11.30 08:39

[한신협 공동기획 팔도 핫플레이스] 사계절 낭만과 힐링 모두 사로잡은 대구 구미 지산샛강생태공원

맨발길 신드롬의 중심, 사계절 팔색조 매력 넘치는 생태공원으로 탈바꿈 '큰고니벅스' 카페 편의시설 구축, 다양한 야간조명등 설치로 야간명소로 우뚝 지산샛강생태공원은 도심 속 힐링공간으로 경북 구미시 지산동에 있다. 지산의 명물인 샛강을 보다 쾌적하고 건전한 휴식공간으로 만들고자 구미시가 조성한 공원으로 구미의 유일한 습지다. 봄엔 아름다운 벚꽃산책길, 여름엔 연꽃 군락지, 겨울엔 철새 보금자리로 사계절 즐길거리가 많고, 도심에서 가까워 접근성이 좋다. 황토맨발길·황토볼장 등 다양한 맨발체험 공간과 야외광장, 운동시설, 휴게 공간 등을 갖춰 시민과 관광객에게 건강한 휴식과 여가를 제공하고 있다.〈편집자 주〉 짧은 가을을 배웅하는 시점에서 자연의 선물을 느끼기 원한다면 '구미 지산샛강생태공원'이 제격이다. 지산샛강생태공원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산업도시인 경북 구미에서 도심 속 힐링과 낭만을 강조하는 구미만의 색깔을 가장 잘 나타낸 곳으로 꼽힌다. 그동안 방치되고, 겨울철 고니가 잠시 머무르는 곳 정도였던 지산샛강생태공원은 자연과 인간이 공존가능한 생태공원으로 재탄생했다. 이 덕분에 매일 1천500명 이상의 방문객이 찾는 등 요일, 시간 상관없이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곳이 됐다. 특히 최근 도심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구미 지산샛강생태공원이 인프라를 제대로 갖추면서 구미에서 반드시 가봐야 할 곳이자 사계절 내내 콘텐츠가 있어 질리지 않는 명소로 탈바꿈했다. 봄의 벚꽃, 여름의 연꽃, 가을의 억새, 겨울의 천연기념물 큰고니까지 감상할 수 있는 천혜의 자연환경이 갖춰졌고, 맨발걷기를 위한 황톳길도 마련되면서 최상의 힐링 공간으로 급부상한 것이다. △맨발걷기 신드롬의 중심 전국이 맨발걷기 열풍이다. 그중에서도 황토와 마사토로 조성된 구미 지산샛강생태공원은 경북에서 관심을 받기 시작해 전국구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불과 2~3년 전까지만 해도 을씨년스럽기만 했던 지산샛강생태공원에 3.4㎞(황토 1㎞, 마사토 2.4㎞) 규모의 황토맨발길이 갖춰지면서 힐링명소뿐만 아니라 각종 영상 촬영지로도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한 번도 안 와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와본 사람은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마니아 층도 탄탄하다. 우연하게 이곳의 맨발길을 접한 외지인들도 다시 방문하는 등 많은 사람을 매료시키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곳은 인위적인 아름다움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체감할 수 있으며,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자연 속에서 진정한 힐링을 경험할 수 있다. 황토 맨발걷기가 시작되는 입구에서 신발과 양말을 벗고 황토를 한발 한발 밟으며 걸으면 그간 쌓인 스트레스도 금방 해소된다. 홀로 자연을 느끼며 여유롭게 맨발길을 걸을 수도 있고, 가족‧친구 등과 동행해서 걸으면 금세 한 바퀴를 돌 정도로 편안한 환경이 조성돼 있다. 황톳길 맨발걷기가 질퍽하고 찐득해 걷기가 불편하다는 편견 탓에 시도조차 어려워하는 방문객도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가져온 신발은 신발장을 이용하면 되고, 황토가 묻은 발은 최신식 시설로 준비된 세족장과 에어건을 사용하면 된다. 특히 가족 단위 방문객에게는 아이들에게 인기 만점인 황토풀장과 황토볼장을 추천할 만하다. 맨발길 조성에 진심인 구미시는 맨발길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유실된 황토와 마사토를 수시로 보충하고, 수분도 매일 보충하면서 가장 걷기 좋은 상태를 만들고 있다. △사계절 팔색조 매력 덩어리 구미 지산샛강생태공원은 금오산과 함께 사시사철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쌍두마차로 떠올랐다. 지산샛강생태공원은 봄의 벚꽃, 여름의 연꽃, 가을의 억새, 겨울의 천연기념물 큰고니 등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어서다. 봄에는 매서운 추위를 뚫고 꽃망울을 터뜨린 꽃들이 공원 전체를 봄내음으로 가득 채운다. 여기에다 지산샛강 주변 벚나무와 바람에 흩날리는 하얀색‧분홍색 꽃잎은 생태공원의 아름다움을 더한다. 특히 벚꽃철에는 '인생샷'을 찍기 위한 구름 인파가 몰릴 정도다. 수많은 벚나무 속에서 숨겨진 포토존을 찾는 것도 하나의 재미다. 여름엔 연꽃이 장관이다. 샛강을 가득 메우며 연꽃 군락지를 이룬 이곳에서는 매년 여름철이면 연잎과 연꽃이 가득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특히 여름 일몰 시간에 수변관찰데크와 연꽃쉼터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무더운 한여름 더위를 식혀줄 만큼 장관이다. 또한 이곳은 생태적으로나 경관적으로나 가치가 높아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생태학습장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가을이 되면 풍성한 억새가 연꽃의 빈자리를 채운다. 인근 들판에 노랗게 익은 벼와 쌀쌀한 날씨에 맞춰 지산샛강으로 찾아오는 철새들이 조화를 이루며 가을의 정취를 더한다. 게다가 가을이면 지산샛강의 자연환경을 활용한 체험형 프로그램인 '지산샛강 생태문화 축제'가 열린다. 이 축제는 소박하지만 매년 풍성한 볼거리로 방문객들의 큰 사랑을 받고 있다. 겨울이면 고니 떼가 지산샛강생태공원을 한 폭의 그림으로 만든다. 이곳엔 천연기념물이자 멸종위기종 2급으로 분류되는 고니 1천여 마리가 매년 겨울 찾아들면서 '백조공원'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을 정도다. 고니를 만나려면 샛강전망대나 조류관찰대가 안성맞춤이다. △큰고니와 함께 낭만에 빠지다 이곳엔 겨울철 지산샛강을 찾는 큰고니보다 더욱 인기 있는 곳이 있다. 지산샛강생태공원 내 광장에 자리 잡은 '큰고니벅스' 무인카페다. 올해 처음 문을 연 이곳에서는 바쁜 일상을 벗어나 탁 트인 풍경을 감상하며 커피 한 잔을 즐길 수 있다. 특히 걷기 좋은 날이면 항상 손님으로 붐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이곳 주변엔 자판기 등 음료를 사먹을 수 있는 시설이 한 곳도 없었다. 처음에는 각종 규정 등으로 인해 무인카페보다는 자판기 2대를 설치하는 것으로 의견이 좁혀졌지만, 김장호 구미시장의 발상의 전환과 적극 행정으로 '큰고니벅스'가 문을 열게 됐다. 구미시 관계자는 "'물 한잔 마실 곳이 없다'는 시민들의 불평이 있었지만, 휴게음식점 설치를 할 수 없는 지역이었기에 그간 어려움이 있었다"며 "무인카페 형태의 '큰고니벅스'를 설치하는 방식으로 난관을 극복했다"고 말했다. 현재 이 카페에선 총 55종의 다양한 음료를 방문객에게 판매하고 있다. 일몰 후 캄캄하기만 했던 지산샛강생태공원은 최근 야간경관조명이 설치되면서 낭만의 장소로 탈바꿈했다. 방문객의 눈을 사로잡는 야간 조명과 볼거리로 구미 대표 야경 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지산샛강생태공원 광장 앞에는 갈대조명(LED)과 생태공원 데크 산책로 2곳(215m)에 야간 조명등이 설치됐다. 또, 벚나무 산책로에는 야간조명등 250개가 설치돼 분위기를 완전히 바꿨다. 특히 벚나무 산책로에 야간조명등이 설치되면서 벚꽃 시즌에는 야경을 감상하려는 연인이나 가족 단위 방문객이 줄을 잇고 있다. 그밖에도 고니 등 겨울 철새를 만나지 못한 이들을 위해 구미시가 마련한 큰고니 조형물을 비롯해 글자포토존, 커피잔 모양 조형물 등도 사진촬영 명소로 인기를 끌고 있다. 지산샛강생태공원에 대한 외부의 평가도 긍정적이다. 지산샛강공원은 도심을 흐르는 샛강의 특색을 살려 조성된 수변공원과 황톳길이 있는 생태 공간이다. 특히 최근엔 전국 5곳만 있는 산림청의 '모범도시숲'로 선정되면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구미시는 지산샛강생태공원을 찾는 수요가 늘면서 지난 3월 차량 138대를 수용할 수 있는 주차장을 추가로 만들었다. 김장호 구미시장은 "지산샛강생태공원을 특색 있게 정비해 전국 최고 수준의 생태공원으로 가꿔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매일신문=이영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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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27 16:51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26)양호도순무영의 공식 기록인 <갑오군정실기> 2부

정부를 고무시킨 맹영재의 지평 민보군 양호도순무영이 막하 진용을 구성하던 9월 26일 고무적인 보고가 올라왔다. 경기도 지평의 맹영재가 관포군과 사포군 100여 명을 거느리고 강원도 홍천에서 동학 근거지를 소탕했다는 것이다. 이어 금산에서도 유생들이 포수 300명과 무사 700명을 뽑아서 읍내를 방비하는데 그 비용은 민간에서 돈과 곡식을 거둬 비용으로 충당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전국에서 봉기한 동학도를 막을 방도가 없었던 양호도순무영은 이런 보고에서 유력한 방안을 찾게 되었다. 지평과 금산의 사례처럼 민보군을 조직하는 방안이었다. <갑오군정실기> 첫 부분에 그 과정이 자세하다. 먼저 동학농민군 진압에 공을 세운 관리들에게 군직을 부여했다. 9월 25일에 대구판관 지석영을 토포사에 임명하고, 안의현감 조원식을 조방장에 임명했다. 다음날인 9월 26일에는 지평의 맹영재와 금산 유학 정두섭을 소모관에 임명했다. 해당 지방관에게는 화약과 연환, 그리고 군량을 지원하도록 지시했다. 9월 30일에는 삼남에 각각 2명씩 소모사를 임명하여 자력으로 민보군을 만들어 운영하도록 했다. 호남소모사는 나주목사 민종렬과 여산부사 유제관, 호서소모관은 홍주목사 조재관과 진잠현감 이세경, 영남소모관은 창원부사 이종서와 전 승지 정의묵이었다. 이때부터 군직 임명이 빈번해졌다. 강원도의 관동토포사로 횡성현감 유동근을 임명하고, 하동부사 홍택후를 조방장에 임명했다. 11월에는 전 승지 조시영을 김산소모사로 차하하고, 김산군수 박준빈을 조방장으로 임명했다. 보은군수 이규백도 조방장에 임명했다. 이어서 천안군수 김병숙과 목천현감 정기봉이 소모관이 되었고, 호남소모관에는 전동석 백낙중 임두학을 모두 임명했다. 고부군수 윤병도 소모사가 되었다. 이런 군직은 민보군을 지휘하는 권한뿐 아니라 처형권을 준 것을 의미한다. 사로잡은 동학농민군을 소모사 등이 처형해도 사후 보고만 하면 문책이 따르지 않았다. 지방관은 관아의 무기와 식량을 주는 방식으로 민보군을 지원했다. 그런 사실이 <갑오군정실기>에 생생히 기록되었다. 경군 병영의 출진 병력과 비용 9월에 재봉기한 동학농민군의 1차 목적은 척왜(斥倭)였다. 부산에서 서울로 연결된 일본군 전신소와 병참부가 공격 대상이 되었다. 일본의 히로시마대본영은 즉각 후비보병제19대대를 증파하는 동시에 서울 주둔군을 충청도 일대에 보내서 동학농민군의 공세를 막으려고 하였다. 조선 정부도 대규모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막으려고 하였다. 정부가 금지하는 사교 집단이 일으키는 병란이란 판단도 거두지 않았다. 양호도순무영의 지휘 아래 통위영 · 장위영 · 경리청 병력을 출전시켰다. 그 규모가 <갑오군정실기> 제10책에 자세하게 나온다. 선봉장 이규태가 지휘한 통위영 장졸은 337명이고, 이들을 지원한 참모사와 참모관 그리고 별군관 등이 65명이었다. 모두 402명의 행군 속에 기마 17필과 짐말 13필이 있었다. 경리청은 홍운섭이 이끈 장졸 358명과 성하영이 이끈 370명이 동원되어 모두 728명이 출진하였다. 짐말은 각각 27필과 34필이었다. 경리청 병대가 가장 많은 군수 물자를 가지고 다녔다. 장위영은 가장 먼저 출진한 병영이었다. 이두황이 거느린 381명과 원세록이 지휘한 351명이 동원되어 모두 732명이 동원되었다. 1893년 봄 보은 장내리집회를 해산시키려고 청주까지 간 홍계훈의 병대도 장위영이었고, 1차봉기 당시 장성 황룡촌전투와 전주 완산전투를 치룬 경군도 장위영이었다.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의 중로군과 동행한 경군은 장졸 255명의 교도중대였다. 여기에 별군관과 참모관 12명을 지원받았다. 영관 이진호가 인솔한 교도중대의 실제 지휘관은 19대대의 대대장 미나미 고시로 소좌였다. 처음 편성할 때부터 일본군 장교에게 훈련받고 그 지시에 따라서 정찰과 경계 등 맡았다. 이노우에 가오루 공사는 교도중대를 일본 협조자로 만들라는 명령을 미나미 소좌에게 몰래 내렸다. 경군 병력의 군량을 책임진 운량관으로는 경기도의 양성현감 남계술, 충청도의 노성 신창 온양 회덕 충주의 지방관을 선정했다. 이들은 공금을 전용하거나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보내서 군수전과 군수미로 쓰도록 했다. 고종의 내탕금과 운현궁의 하사금, 또 대신들의 성금도 경비로 사용했다. 경군의 행군로에 위치한 지방관에게는 식량과 땔감, 그리고 말먹이로 쓸 건초를 미리 마련하도록 했다. 갑오년 참혹상을 전하는 기록 동학농민군이 처했던 참혹한 실상을 전해주는 자료는 드물다. 진압기록을 보면 여러 내용이 확인된다. 첫째가 재산 탈취 사례이다. 소모관 정기봉의 10월 19일자 보고에서 양성의 유성옥을 잡지 못하자 그의 재산을 적몰했다고 하였다. 총과 창 등이나 깃발과 염주뿐 아니라 재산을 빼앗았다고 한 것이다. 동학농민군 참여자의 재산을 탈취하는 사태는 갈수록 심해졌다. 그러자 양호도순무사 신정희는 이를 엄격히 금지하였다. 12월 9일자 전령에서 동학농민군을 잡아들일 때 먼저 그 재산을 적몰하는 실상을 말하면서, 재산을 모두 잃은 자들이 의지할 곳이 없어 결국 모여서 도적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에 항명하는 강원도 홍천의 사례도 나왔다. 이미 죄인의 가산을 적몰하여 민가를 나누어 주었으니 다시 환급받기가 어렵다며 항명을 한 것이다. 그러자 도순무사는 해당 향리를 엄히 곤장을 때리고 옥에 가두며, 적몰한 재산을 찾아서 돌려주고 그 결과를 보고하라고 했다. 고부군수 윤병과 상주소모사 정의묵은 “적몰한 재산을 가지고 납속하는 일은 영구히 중지”하라는 전령을 잘 따르겠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 문제가 매우 심각했던 당시 사정을 전해주는 기록들이다. 동학농민군이 전투를 벌일 때 초가를 불태우거나 읍내에 방화한 사건은 <고종실록> 등 여러 기록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일본군과 관군의 방화 사건은 심각하였다. 특히 일본군의 방화 사건은 도처에서 일어났다. 관군의 방화 사건 중 가장 큰 것이 이두황의 장내리 방화사건이다. 장위영을 이끌고 보은에 간 이두황은 민가 200채와 초막 400채를 불태웠다. 이 때문에 커다란 마을이 폐허로 변했고, 마을터에는 다시 집이 들어서지 못했다. 일본군의 방화는 더욱 심했다. 스즈키 아키라의 일본군 지대는 황해도 강령에서 11월 19일 밤에 민호 400여 호를 불태워버렸다. 금구 원평으로 가던 일본군이 길가의 민가를 방화해서 참혹한 상태가 되었다. 이런 사태는 너무 많아서 관군의 보고에도 일일이 쓰지 않을 정도였다. 매우 추웠던 갑오년 겨울에 다행히 살아남은 동학농민군은 살던 마을로 돌아와도 추위를 피할 거처가 없었다. 여러 곳에 움막을 짓고 숨어 살았다는 증언이 있다. <갑오군정실기>의 기록을 그런 실상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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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27 16:41

[전홍철 교수의 ‘영상과 함께 하는 실크로드 탐방’] (5)실크로드의 미스터리 보물

무용총 수렵도, 페르시아 사냥도에서 나왔나 중국 길림성 집안(集安)현 통구(通溝)에 위치한 고분 널방에 그려진 고구려인이 사냥을 벌이는 장면을 묘사한 무용총(舞踊塚) 수렵도. 특히 몸을 돌려 활을 쏘는 소위 '파르티안 샷(parthian shot)'은 활쏘기와 승마에 능한 고구려인의 기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새로운 해석이 제기되었다. 사냥도가 무용총 외에 덕흥리(德興里)고분, 약수리(藥水里)고분, 장천1호분(長川一號墳) 등 여러 무덤에 그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 거주 이란계 민족인 소그드(Sogd)인 석관상(石棺床)과 한대(漢代) 화상석(画像石)에까지 일관되게 나타나 있어 천국으로 가는 길에 맞닥뜨리는 사악한 존재를 물리치는 주술적 의미가 담겨 있다는 주장이 대두된 것이다. 이는 이른 바 ‘사냥 마법론(hunting magic theory)’으로 페르시아의 사냥 도상이 사자나 맹수를 사냥하는 국왕의 영웅적 면모와 함께 천국으로 향하는 길에서 거치는 영적 투쟁을 내포했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주술적 의미가 실크로드를 통해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고구려까지 이르렀다는 것인데 과연 사실일까? △ 페르시아 사냥 도상의 주술적 의미와 그 기원 페르시아 사냥 도상의 주술적 의미는 조로아스터교의 종교적 세계관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즉 조로아스터교의 선신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와 악신 안그라 마이뉴(Angra Mainyu) 사이의 대립 구도는 사냥 도상의 상징적 의미를 형성하는 근간이다. 특히 사악한 동물들은 악신의 창조물로 여겨졌기에, 이들을 퇴치하는 사냥 행위는 곧 선의 승리를 의미했다. 이러한 종교적 의미는 정치적 상징성과 결합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아케메네스(Achaemenid) 왕조 시기부터 '왕의 사냥'은 통치자의 권위와 능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도상이었다. 타크이 부스탄(Taq-i Bustan) 암벽의 사냥도 부조에서 볼 수 있듯이, 맹수를 사냥하는 왕의 모습은 그의 영웅적 면모와 신성한 권위를 동시에 표현했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사냥 도상이 현세와 내세를 연결하는 매개체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사후 영혼이 친바트 다리(Chinvat Bridge)를 건너 천국에 도달한다고 믿었는데, 이 과정에서 영혼은 여러 악마적 존재들과 맞닥뜨리게 된다. 사냥 도상은 바로 이러한 영적 투쟁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 페르시아 사냥도: 이란계 소그드인 무덤에 적극 도입 특히 사산조(Sasanian Empire, AD 224-651) 시기에 이르러 이러한 도상 전통은 더욱 체계화되었다. 왕실 사냥 장면을 새긴 정교한 은제 접시들이 제작되어 널리 퍼졌는데, 이는 단순한 장식품이 아닌 실제 의례적 의미를 지닌 물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페르시아의 사냥 도상 전통은 실크로드를 따라 동쪽으로 전파되었다. 특히 소그드 상인들은 이 전통을 자신들의 무덤 미술에 적극적으로 도입했는데, 사군묘(史君墓), 우홍묘(虞弘墓), 안가묘(安伽墓), 일본 미호(Miho)박물관과 프랑스 기메(Guimet)박물관 석관상 등에 그려진 사냥도는 페르시아 도상의 주술적 의미가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결과적으로 페르시아의 사냥 도상은 단순한 예술적 표현을 넘어, 종교적 신념, 정치적 권위 그리고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이 복합적으로 녹아든 문화적 산물이었다. 이러한 복합적 성격이 바로 이 도상이 광범위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핵심 요인이었던 것이다. 페르시아 호르미즈드(Hormizd)왕의 사냥도. 소그드 안가묘(安迦墓) 사냥도. △ 한화상석(漢畫像石)의 사냥 주술 중국과 이란의 교류는 파르티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나라(BC 250-AD 224) 황제와 파르티아(BC 206-AD 220)의 미트리다테스(Mithridates) 2세 사이의 사절단 교환은 두 문명 간교류의 시작점이었다. 사마천(司馬遷)은 <대완열전(大宛列傳>에서 “한나라의 사신들이 귀국하기로 결정했을 때, (파르티아 왕은) 자신의 사신들을 함께 보내어 중국이 얼마나 크고 광대한지 직접 보게 했다. 파르티아 사신들은 큰 새의 알과 여헌(黎軒, 알렉산드리아)에서 모집한 곡예사들을 황제에게 선물로 가져왔다. 황제는 이를 매우 기뻐했다."고 기록했다. 이러한 접촉은 점차 확대되어 사냥 모티프를 포함한 것들이 중국에서 널리 사용되고, 특히 파르티안 샷을 모방하여 사냥 장면을 묘사했다. 이러한 융합의 사례는 많은 한화상석에 나타나며 그중 섬서(陝西)성의 흉노 고분인 선무(神木)의 대보당(大保當) 한화상석에서 뚜렷이 확인된다. 대보당 화상석 도상은 천국에 도달하기 위해 지나야 하는 길이 악령들과 야생 동물들로 가득 차 있으며, 원 안의 새 문양은 영원한 천국으로 가는 길의 또 다른 상징이다. △ ‘사냥 마법’의 실크로드 전파 사냥 마법 이론은 1940년대에 프랑스의 고고학자 앙리 브뢰유(Henri Breuil)가 프랑스 남서부의 라스코(Lascaux) 동굴 벽화를 분석하기 위해 처음 제시했다. 이 이론은 동굴 벽화가 사냥의 성공을 위한 일종의 의례적 주술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소그드인 석관상과 한화상석 그리고 돈황 벽화에 보이는 파르티안 스타일의 사냥 장면에서 주술적 의미를 추출한 후 실크로드를 따라 동쪽으로 전파되었다고 주장하여 고구려 벽화 수렵도를 새롭게 해석할 단초를 제공한 학자는 이란 이스파한(Isfahan) 대학의 하미드 레자 파샤자누스(Hamid Reza Pashazanus) 교수와 미국 코스탈 캐롤라이나(Coastal Carolina) 대학의 레슬리 월러스(Leslie Wallace) 교수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무용총 등 고구려 벽화에 보이는 사냥 도상은 고인이 천국에 도달하기 위해 싸워야 했던 이 세상과 저 세상 사이의 험난한 여정을 상징한다. 전홍철 교수(우석대 경영학부·예술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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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25 19:40

[전북 이슈+] 한국인 밥상 책임지는 '장'⋯유네스코도 엄지 척

오랫동안 한국인의 밥상을 지켜온 '장'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전망이다. '한국의 장 담그기 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권고 판정을 받았다. 오는 12월 2일부터 7일까지 파라과이의 수도 아순시온에서 개최되는 제19차 무형유산보호 정부간위원회(무형유산위원회)의 논의를 거쳐 최종 등재 여부가 결정된다. 22일 국가유산청·유네스코에 따르면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 산하 평가기구는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대표 목록으로 등재 신청한 장 담그기 문화를 포함해 총 57건에 대해 등재 권고, 1건은 정보 보완을 권고했다. 평가기구가 심사 결과를 발표한 뒤 이를 무형유산위원회에 권고하는데 그간의 사례를 보면 등재 권고 판정이 뒤집히는 경우는 거의 없어 사실상 등재가 확실시됐다. 장 담그기 문화에는 한국 음식의 기본 양념인 장을 만들고 관리·이용하는 과정의 지식과 신념, 기술 등이 모두 포함돼 있다. 고추장·된장·간장 등 한국의 장은 오랫동안 한국인의 입맛을 책임져 왔다. 대부분 가족 간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져 내려와 한 집안의 역사와 전통을 상징하기도 한다. 예부터 가족 구성원이 함께 참여해 만들고 나눠 먹으면서 집안의 음식 맛을 공유하는 데 의미가 있다. 평가기구 측은 장 담그기 문화와 관련해 "고추장·된장·간장과 같은 발효 장류는 한국 식생활의 근간을 이룬다. 밥, 김치와 함께 한국 식단의 핵심이다"면서 "장 담그기 관련 지식과 기술은 가족 내에서 전승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장은 가족의 정체성을 반영하며 가족 구성원 간의 연대를 촉진한다"고 밝혔다.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온 장 담그기 문화는 지금도 전국 곳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전북 14개 시군 중에도 전국적으로 장 담그기·장류로 유명한 곳이 있다. 바로 순창이다. 순창은 '고추장' 하면 순창, 순창 하면 '고추장'이라는 공식이 생겼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지정하는 대한민국식품명인 80명(전통식품 분야·8월 기준) 중 순창고추장 명인은 제64호 강순옥, 제36-가호 조종현 등 2명이다. 조종현 명인의 어머니는 순창을 고추장의 주산지로 우뚝 서게 만든 고 문옥례 명인이다. 이외 순창군이 지정한 순창고추장 기능인은 200여 명에 달한다. 순창고추장은 순창만이 가진 제조 비법이 있어 다른 지역과는 조금 다른 장맛이 난다고 알려져 있다. 순창고추장이 고추장의 대명사로 거듭나게 만든 비법이다. 솜씨와 최적의 자연환경, 장류전문연구기관 보유 등 타 지역과 비교되는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순창군은 최근 장 담그기 문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기원제를 개최했다. 이미 10여 년 전부터 장류 문화 보존을 위해 전통 장류 문화 계승에 힘써왔다. 순창고추장민속마을을 중심으로 전통장문화학교, 발효아카데미 등을 통해 장 담그기 문화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최영일 순창군수는 "순창군은 앞으로도 장 담그기 문화의 보존과 전승, 세계화를 위해 더욱 노력하겠다. 이번 유네스코 등재는 우리나라 전통 발효 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역사적인 순간이 될 것이다"고 기대했다. 디지털뉴스부=박현우·문채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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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23 08:05

[전북 이슈+] "유네스코 등재는 당연"⋯강순옥 명인의 이야기

'한국의 장 담그기 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권고 판정을 받으면서 전국이 떠들썩하다. 고추장, 장류의 고장으로 알려진 순창에서 만난 순창고추장 명인들은 이 소식에 기쁨과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전통 장의 명맥이 끊기지 않을지 걱정이 많았다. 전 세계적으로 관심을 받게 되는 만큼 명맥이 이어질 수 있도록 지원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지난 8월 기준 대한민국 식품명인(전통식품 분야) 80명 중 장 담그기 식품 명인은 12명이다. 이중 장류의 고장에 있는 순창고추장 명인 64호 강순옥·36-가호 조종현 명인을 만나 장 담그기 문화의 과거·미래 이야기를 들어봤다. "김치도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됐는데 전통 장 문화가 안 되면 쓰겄어요?" 지난 19일 순창고추장 제조 기능인이 모인 순창전통고추장민속마을에서 만난 대한민국 전통식품 강순옥 명인(64호·순창고추장)은 "한국의 장 담그기 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했다. 그와 전통 장의 인연은 오래전부터 시작됐다. 어린 시절 할머니와 어머니가 장 담그는 모습을 보며 자랐다. 결혼 후 시어머니와 시누이에게 본격적으로 장 담그는 비법을 배웠다. 이후 강 명인은 시누이의 사업장에서 고추장 제조 기능인으로 일하며 전통 장을 직업으로 삼게 됐다. 이후 시누이가 사업을 접고 다른 지역으로 떠나면서 강 명인이 30여 년 전 사업장을 열었다. 그는 인생 대부분을 장을 담그면서 보냈다. 그래도 힘든지 모른다는 강 명인이다. 그는 "매일 낮이고 밤이고 일을 하지만 지금까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 만약에 몸이 안 좋으면 못 했을 텐데 내가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영광인지 모른다"고 밝혔다. 수십 년간 전통 장을 담가온 강 명인은 누구보다 빠르게 전통 장의 시대가 저물어가는 현실을 실감하고 있지만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계속 전통 장을 지켜나가고 있다. 그에게는 전통 장의 명맥을 이어 나가는 것은 물론, 또 다른 목표가 있다. 콩·천일염 등 전통 장에 들어가는 재료와 비닐봉지, 박스 등까지도 국내에서 생산되는 것을 사용한다. 국내 기업과 함께 상생하고 싶은 게 강 명인의 목표다. 그는 "장 담글 때 참기름, 참깨 하나도 일체 수입산을 안 쓴다. 국산 제품 중에서도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것을 쓸 수 있을까 고민한다. 가격을 따지면 수입산을 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수입산 안 쓰고 잘 지켜 왔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것만 고집하다 보니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 원재료 가격이 부담되는 실정이다. 특히 전통 장에 들어가는 재료 중 하나라도 가격이 오르면 당장 어려움이 생긴다.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면서 강 명인만의 차선책이 생겼다. 고추장 담그는 일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된장·장아찌 등 다른 제품을 팔아 수익을 내면서 영업을 이어왔다. 그는 "재료 가격이 오르면 적자 날 때도 있다. 내가 열심히 일하면 다 되지 않겠나 싶다"고 말했다. 어려운 상황이 반복되지만 앞으로도 전통 장의 명맥을 이어가는 데 남은 삶을 쏟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강 명인은 "명인이 됐다고 해서 엄청난 지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마을에 사는 고추장 제조 기능인만 해도 수십 명인데 나만 도와 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직원들은 먹여 살려야 하니까 대표인 내가 나서서 이것도 해 보고 저것도 해 보고 있다. 끝까지 최고의 제품을 만들며 꿈을 이뤄갈 것이다"고 전했다. 디지털뉴스부=박현우·문채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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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23 08:04

[전북 이슈+] "등재 권고, 기쁘고 설레"⋯조종현 명인의 이야기

"세계인에게 우리의 순창고추장, 한국의 장 맛을 알릴 수 있는 계기가 생겨 기뻐요." 지난 19일 순창에서 만난 대한민국 전통식품 조종현 명인(36-가호·순창고추장)은 "'한국의 장 담그기 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권고 판정을 받은 것에 대해 명인의 입장으로 너무 기쁘고 설렌다"면서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전통 장에 대한 애정이 묻어났다. 조 명인은 순창고추장을 전국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고(故) 문옥례 명인의 아들이다. 문옥례 명인은 '순창하면 고추장'이라는 공식을 만든 장본인이다. 지금은 조 명인이 2대째 명인으로, 아들이 순창고추장 전수자로 등록돼 있다. 집안의 장 담그기 문화는 7대째 이어지고 있다. 그는 "지금은 2대째 순창고추장 명인이 됐지만 언젠가는 3대째 명인 집안이 탄생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면서 "옛날에는 가마솥으로 고추장을 담갔다. 무겁고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라 어머니를 돕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이 길을 걷게 됐다"고 설명했다. 45년째 고추장과 함께하고 있는 조 명인이다. 그는 전통 장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 돌파구를 찾아가고 있다. 문옥례 명인이 전수해 준 전통적인 순창고추장 제조 방법을 지키면서 현 시대 입맛에 맞는 새로운 제품군을 만들었다. 순창고추장을 이용한 부대찌개·떡볶이 소스 등이 그 예다. 문옥례·조 명인의 이름에 걸맞는 수준 높은 순창고추장, 그를 이용한 제품군을 선보이기 위해 모두 국산만 고집하고 있다. 고추장을 비롯한 전통 장류는 판매되기까지 최소 1년 반이 걸린다. 재료 준비 시간만 6개월이다. 여름에는 질 좋은 고추를 사들이고 가을에는 소금·콩 등 부재료를 산다. 겨울이 되면 고추장을 만든다. 갓 담근 고추장은 맛이 덜하다 보니 최소 1년 이상 숙성해야 세상에 나올 수 있다. 이러한 노력 속에 탄생한 순창고추장에서는 재미있는 소리가 들린다. 조 명인은 잘 익은 고추장에서만 들을 수 있는 소리라고 표현했다. 그는 "봄을 지나서 여름이 되면 고추장 익는 소리가 들린다. 양조장에서 막걸리가 익으면서 나는 소리와 비슷하다. 진짜 기가 막힌다. 마치 고추장 발효 연주 같다"고 말했다. 최근 전통 장 소비가 줄면서 여느 전통 장 명인과 같이 조 명인도 전통 장 문화가 사라질까 걱정이 많다. 아무리 명인이라도 사업이 어려우면 폐업할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조 명인은 "지금 전통 장 사업은 대기업과의 가격 경쟁 때문에 값을 올리기가 쉽지 않다. 과거보다 이윤이 적은 구조다. 이대로 가다간 10년 안에 없어질 수도 있다고 본다. 돈이 돼야 가족이 대를 이어받을 텐데 벌이가 안 되니까 다 떠날 수밖에 없다. 그게 현실이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등재도 앞둔 만큼) 전통 장을 비롯해 전통 음식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려면 정부에서 더 탄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디지털뉴스부=박현우·문채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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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23 08:04

[전북 이슈+] 수라상부터 고추장마을까지⋯순창고추장 역사는 계속 된다

순창고추장과 관련해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순창에서 고추장을 맛보고 극찬했다는 유명한 설화가 대대로 전해지고 있다. 왕의 입맛까지 사로잡았다고 알려지면서 '순창 하면 고추장, 고추장 하면 순창'이라는 공식이 생겼다. 고려 말 이성계가 1만일 동안 기도하던 스승 무학대사를 만나기 위해 순창을 찾았다. 이성계는 순창 만일사를 찾아가던 중 마을의 한 농가에서 초시(순창고추장의 전신)에 점심을 먹었다. 그 맛을 잊지 못해 임금이 된 후 대궐로 진상토록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순창고추장에 대한 기록은 이시필(1657-1724년)이 지은 '소문사설'에서 처음 보인 것으로 전해진다. 다른 지역과는 구별되는 순창고추장을 담그는 방법이 소개돼 있다. '승정원일기'의 영조 30년 기록에는 조선의 왕 중 영조가 내의원 고추장보다 사헌부 지평인 조종부 집안에서 만든 고추장을 좋아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조종부는 순창 조 씨, 본관이 순창으로 알려지면서 순창고추장으로 추정되고 있다. 역사이다 보니 해석·의견이 분분하지만 이러한 순창고추장에 대한 역사가 전해지며 명성이 더해졌다. '규합총서'에는 고추장이 순창의 특산품이며 고추장 담그는 방법, 고추장 재료와 양이 상세히 기록됐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도 순창과 천안의 고추장이 전국에서 유명하다는 기록이 있다. '의약월보', '해동죽지' 등에도 순창고추장이 지역 명물이자 전국 으뜸으로 기록돼 있다. 이성계·영조도 반한 고추장은 쌀·보리로 질게 지은 밥이나 떡가루, 되게 쑨 죽에 메줏가루·고춧가루와 소금을 넣어 섞어서 만든 붉은 빛깔의 매운 장을 이야기한다. 우리 고유의 발효 식품인 고추장에는 단백질·지방·비타민B2·비타민C·카로틴 등 몸에 유익한 영양성분이 많이 함유돼 있다. 고추장 중에서도 임금에게 진상한 순창고추장의 정체는 무엇일까. 순창고추장은 다른 지역 고추장보다 맛있는 이유가 있다. 바로 메주·시기·원료·발효·자연 조건이다. 순창고추장을 유명하게 만든 다섯 가지 요소다. 이중 핵심은 자연 조건이다. 예부터 순창은 옥천고을로 불릴 정도로 물이 좋은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연평균 기온 12.4℃, 습도 72.8%, 안개일수 77일로 발효에 최적인 자연 조건을 갖췄다. 같은 순창고추장 명인이 담가도 순창이 아닌 지역에서 담그면 장 맛이 다를 정도다. 순창고추장은 순창을 장류의 고장으로 만들었다. 순창군은 1997년 전통 장류 산업 활성화와 명성·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순창전통고추장민속마을을 조성하고 순창군 곳곳에 흩어져 있던 순창고추장 제조 장인들을 마을로 모았다. 처음 조성된 1997년에는 54가구가 살았지만 지금은 32가구밖에 남지 않았다. 명맥을 잇기 어려워지고 저출산 고령화 등 복합적인 요인으로 가구 수는 점점 줄어들 전망이다. 순창군은 계속해서 순창고추장 제조 기능인을 발굴하고 역사를 살려 마을을 활성화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19년째 대한민국의 대표 먹거리 고추장의 본 고장 순창에서 장류를 테마로 한 순창장류축제도 열리고 있다. 잊혀 가는 전통장류문화를 재조명하기 위해 시작해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축제로 자리매김했다. 올해는 순창고추장을 활용한 순창 떡볶이 페스타도 개최됐다. 이렇듯 순창고추장의 역사는 옛날 옛적부터 시작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디지털뉴스부=박현우·문채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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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23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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