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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공감 2024 시민기자가 뛴다] “갯벌의 세계적 위상, 이제 시작”.. 갯벌은 ‘복원’하고 ‘보전’해야

“만져봐. 부드럽지? 어떤 생물들이 있지? 조개, 갯지렁이, 꽃게. 망둥어와 문어도 있지?” 현장 학습을 온 유치원생들이 선생님의 설명에 집중한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펄을 쥐어도 보고 조개라도 있을까 진흙을 파헤쳐 보기도 한다. 매 년 아이들과 갯벌 체험을 오는 선생님은 아이들이 진흙의 촉감도 느껴보고 생물이 가득한 새로운 곳에서 배움은 물론 즐거운 추억을 쌓길 바라는 마음이다. 자라나는 아이들의 소중한 배움터이자, 수많은 이들의 해루질 명소, 추억의 장소인 이곳은 전북 고창의 갯벌이다. 도시 사람들에게 갯벌은 한번 씩 ‘체험’을 하러 오는 곳이지만, 서해안 지역민들에게 갯벌은 무척 친숙하고 익숙한 곳이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조개와 게를 잡고, 펄에 발이 푹 빠져 넘어지기도 하며, 어느새 차오르는 바닷물에 황급히 집으로 돌아갔던, 어릴 적 추억이 풍부한 장소이다. 가깝고 익숙해 그 아름다움과 가치를 깨닫기 어렵기도 하지만, 세계적으로 한국의 갯벌은 위대한 가치를 자랑한다. 서해안 갯벌은 세계적으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2021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됐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 즉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유일한 가치가 인정돼 세계적으로 보전에 힘써야 한다는 의미이다. 세계 유일무이한 서해안(서천, 고창, 신안, 보성-순천) 갯벌은 각각의 특성도 있지만, 대표적으로 경관적 가치, 생물 다양성의 보고, 바다 새의 서식지로써 가치를 인정받았다. 우리에겐 여름철 조개나 한번 씩 잡으러 가는 그 친숙한 갯벌이 ‘유일하다’는 이유로 세계적 보전 가치를 인정받았다. 이 크나큰 지구촌 다른 곳에서는 우리나라 같은 갯벌을 찾아볼 수 없다는 말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같은 갯벌은 황해 갯벌, 즉 중국의 동해안과 한국의 서해안 갯벌이 유일하다. 이 황해 갯벌의 특징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인 규모와 범위에 있다. 미국과 캐나다, 영국 등의 갯벌(mud flat)은 풀이 자라는 염습지의 끄트머리 구간에서 살펴볼 수 있는 정도이다. 그러니, 전 세계적으로 흔치 않은 막대한 규모의 환경자원인 우리나라 갯벌이 전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간 주류 국가들에 비해 목소리를 크게 내지 못해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막대한 탄소 흡수원 ‘블루카본’, 탁월한 ‘오염 정화원’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로 한국의 갯벌이 전 세계에 소개됐지만, 우리나라 갯벌에 대한 연구는 충분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갯벌의 가치를 연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조금씩 그 위상이 쌓이고 있다. 대표적으로, 20여 년 전부터 서해안 갯벌을 연구하기 시작한 권봉오 국립군산대학교 해양생물자원학과 교수는 우리나라 갯벌의 위대함을 알리기 위해 관련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기후 위기 시대에 중요한 화두인 탄소 중립에 갯벌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갯벌의 탄소흡수력 연구를 바탕으로 국제 학회와 기관 등을 방문하며 우리나라 갯벌 알리기에 발 벗고 나서고 있다. 권 교수와 연구진이 주목하는 갯벌의 가치는, 갯벌이 단순히 생물다양성의 보고라는 것을 넘어, 기후 위기 시대에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른 ‘탄소흡수원’, 일명 블루카본이라는 점에 있다. 블루카본은 해양생태계에 흡수되어 저장된 탄소를 일컫는다. 대표적으로 맹그로브, 갈대, 염습지 등이 있다. 권봉오 교수는 2017년부터 본격적으로 갯벌의 탄소흡수력에 대해 연구를 진행했는데, 전국 갯벌을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 전체 갯벌이 연간 최대 49만 톤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승용차 20만 대가 연간 내뿜는 이산화탄소의 양에 버금간다. 뿐만 아니라, 서울대 연구팀과 함께 갯벌의 오염 정화 능력에 관한 연구를 진행한 결과, 갯벌에는 총 152만 톤의 질소가 저장되고 있고, 연간 1만 톤의 정화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권 교수는 “1만 톤의 정화 효과를 하수 처리장에서 처리한다고 가정해 하수처리장 건설비용에 대비하면, 연간 16조 원의 가치에 버금가는 양을 우리 갯벌이 담당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갯벌의 효능과 가치가 연구로 검증되며 지난달에는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IPCC 전문가 회의에서 갯벌이 탄소흡수원(블루카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한 논의도 펼쳐졌다. 우리나라가 블루카본으로 정직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냐는 질문에 권 교수는 “IPCC에서 요구하는 것은 갯벌에 대한 객관적 연구가 이뤄졌는지 여부인데, 자신 있게 자료를 제출했다. 국제적으로 우리 갯벌이 인정을 받게 되면, 국가 정책으로도 활용이 가능하다. 이러한 부분에서 같이 관심을 갖고 지속적으로 투자하고 연구하고, 공부하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며 “갯벌이 블루카본으로써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초입에 들어선 것”이라고 평가했다. △논란의 땅 새만금의 갯벌은? 막대한 탄소흡수원이자 오염 정화원인 우리 갯벌. 우리나라 갯벌의 가치는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데, 30여 년간 이어진 지지부진한 사업으로 아직까지도 선택의 기로에 놓인 땅이 있다. 상처와 논란의 새만금이다. 이미 20여 년 전, 새만금 간척을 반대했던 시민단체와 학자들은 새만금이 제2의 시화호가 될 것이라 입을 모았다. 갯벌의 정화 기능을 알던 학자들은 갯벌을 훼손할 경우 오염원이 계속 쌓이고 쌓여 썩을 수밖에 없는 구조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불행히도 이는 현실이 되었고, 심각한 수질 오염으로 이어져 새만금의 해수 유통을 촉구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끊이질 않고 있다. 어느 유명한 시의 구절처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다르지 않았을까. 실제 새만금 인근 주민들은 흐르던 물길을 막자, 풍부했던 자원의 땅이 어떻게 황폐화 되었는지 직접 목격했다. 갯벌에 대한 블루카본 연구가 시작된 지 이제 10년. 갯벌을 살리는 것보다 매립해 농업용 땅으로 쓰는 것이 이득이라 여기던 때 시작된 공사는 강산이 세 번이 변하도록 이어지면서 ‘갯벌 복원’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린 것이다. 더군다나 갯벌에 대한 연구는 이제 시작 단계라, 탄소흡수 능력인 블루카본 기능 외에도 아직 우리가 모르는 갯벌의 가치가 더 있을 것이라는 게 학자들의 의견이다. 고창 갯벌 등 서해안 갯벌이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고 이후에도 지위를 유지하면서 전 세계가 우리나라 갯벌에 주목하고 있다. 유네스코 등재 뿐 아니라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에서 공식적인 ‘탄소 흡수원’으로써 인증을 기다리고 있다. 추가적인 갯벌의 연구와 국제적 인정을 위해서는 앞으로 두 가지 요소가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는 갯벌 보전, 두 번째는 갯벌 복원이다. 남아 있는 갯벌은 ‘보호구역’으로 지정해 ‘보전’하고, 이미 훼손된 갯벌은 ‘복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훼손된 갯벌의 복원이 가능한 것이냐”는 질문에, 오랫동안 갯벌을 연구해온 권봉오 교수는 자신 있게 답했다. “당연합니다. 갯벌은 바닷물이 흐르는 것이 핵심입니다. 바닷물이 흐르게끔 하면 갯벌은 자연스럽게 복원됩니다.” 목서윤 전주MBC 아나운서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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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07 13:15

고창군, 서해안을 국내 최고 선셋 특화 관광지로 만든다

고창군의 해안가를 중심으로 초대형 관광투자가 잇따르고 있다. 세계자연유산에 오를 만큼 최고의 풍광을 자랑하고, 최고급 먹거리가 가득했던 지역인 만큼 그간 아쉬웠던 놀거리와 숙박시설로 세계최고의 선셋비치로 도약하겠다는 큰 그림에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명사십리 해양관광지 조성 고창군 상하면·해리면에 걸쳐 있는 명사십리 해변.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든 8.5㎞의 직선형 해안이다. 일몰 시간이 되면 붉은 노을과 하늘빛 바다, 젖은 흙에 반사되어 붉은빛을 띠는 모래사장, 소나무들의 실루엣이 로맨틱한 장관을 만들어낸다. 지난 7월 30일 고창군청 대회의실에서 국내 기업 4곳(㈜LIG시스템, ㈜P&K INC, 영풍제약, 서울경제TV)과 3000억 원 상당의 ‘명사십리 해양관광지 조성사업 투자협약식’이 열렸다. 협약식에는 심덕섭 고창군수, ㈜LIG시스템 윤종구 대표, P&K INC 김태균 대표, ㈜영풍제약 김재훈 대표, 서울경제TV 홍준석 부사장 등 30여명이 참석했다. 각 업체들은 2030년까지 3000억 원을 투자해 고창 명사십리 일대에 리조트와 숙박, 스포츠, 휴양·레져시설을 조성할 계획이다. 군은 연말까지 타당성 용역을 마무리하고, 내년도에 관광지 지정과 조성계획 용역을 본격 추진해 2026년 상반기 본격적인 개발에 착수할 방침이다. 명사십리에 대규모 해양관광지가 조성되면, 관광객 유치는 물론 스쳐 지나가는 관광이 아닌 체류형 관광지로의 대변신하게 된다. 명사십리 관광개발은 지역의 숙원사업이었다. 명사십리 부지에 국유재산이 일부 포함돼 상업적으로 이용하거나 관광산업을 하는데 제한이 많았기 때문. 이에 심덕섭 고창군수는 기획재정부 등을 찾아 국유재산 매각을 요청했고, 최근 긍정적인 답변을 주면서 이번 관광투자 협약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었다. 고창종합테마파크, 정부 소규모 관광단지 후보 선정 국내 최대 스키장을 운영 중인 용평리조트(모나용평)은 2027년까지 3500억 원을 투자해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고창갯벌과 맞닿은 심원면 만돌바람공원 인근에 273실 규모의 리조트와 200실을 갖춘 럭셔리 호텔, 컨벤션 시설 등을 조성한다. 고창종합테마파크의 하이라이트는 명산 선운산과 골프장, 숲을 마주한 인티니티풀(시각적으로 경계가 없을 것 같은 수영장)이다. 낮에는 이국적인 경관을, 밤에는 화려한 조명이 연출하는 로맨틱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을 뿐 아니라 아름다운 노을을 배경으로 인생사진도 남길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될 예정이다. 특히 최근 정부의 소규모 관광단지 후보로 선정되며 사업에 탄력이 기대되고 있다. ‘소규모 관광단지’는 기존 관광단지의 개발부담금 면제 등 민자유치 혜택에 더해 인구감소지역 혜택(관광기금 융자우대, 재산세 최대 100%감면, 지방소멸대응기금 활용연계 등)이 추가로 지원된다. 지정요건도 기존 50만㎡에서 5만~30만㎡정도로 줄이고, 관광단지 필수시설도 공공편익과 관광숙박시설을 갖추면 승인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아직 개발이 확정되지 않은 주변 부지와 관련, 소규모 관광단지 지정을 통해 국내·외 많은 기업들의 적극적인 투자가 이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2030 서해안 관광지도가 바뀐다 노을대교는 고창군 해리면 동호와 부안군 변산면 도청리를 연결할 전체 7.48㎞ 길이의 다리를 말한다. 완공 땐 62.5㎞를 우회해야 했던 이동 거리가 단, 7㎞로 줄어든다. 다리가 놓이면 기존 한나절 넘게 걸리던 거리를 단 10분이면 오갈 수 있게 된다. 특히 노을대교는 대한민국 해안관광도로인 KR777 위에 건설된다. Korea777(KR777)는 경기, 충남, 전북, 전남을 잇는 서해안 관광도로인 국도 77호선과 동해안 관광도로인 7호선을 연결하여 명명한 것으로 한반도 바다 전체를 여행할 수 있는 통합해안도로를 일컫는다. 심덕섭 고창군수는 지난 3월 최상목 경제부총리와 면담하고 지역염원인 ‘노을대교 조기착공’을 위한 정부차원의 관심과 지원을 요청했다. 고창 해안지역과 단 30분이면 오갈 새만금국제공항도 속도를 내고 있다. 국토교통부 서울지방항공청은 지난 6월 18일 ‘새만금국제공항 건설공사’ 실시설계 적격자로 HJ중공업 건설부문을 선정했다. 목표 개항 시점은 오는 2029년이다. 심덕섭 고창군수는 “아직까지 국내에 선셋비치를 특화시킨 곳은 없었다. 국내 생산량의 절반이 넘는 바지락과 풍천장어 등 최고의 먹거리는 충분하다”며 “온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다양한 즐길거리를 마련하고, 프리미엄 쇼핑시설과 호텔, 펜션단지를 지어 세계 최고의 선셋비치로 만들어 가겠다”고 밝혔다.

  • 기획
  • 박현표
  • 2024.08.05 16:30

[팔도건축기행] 후당 김인호와 대구건축

일제강점기와 해방, 6, 25동란의 폐허를 지나고서 60년대 조국 근대화의 시기에 비로소 근대건축을, 80년대 올림픽을 맞아서 우리의 현대건축을 세우게 되었을 것이다. 급변의 시간 속에서 겨우 남겨진 근대건축의 가치를 소중히 생각하는 시대가 되었다. 대구건축의 선구자 김인호는 현대건축과 아울러 불국사 조영 계획, 영남제일문, 경주화랑 연수원등을 설계하며 전통건축 고찰 논문들을 남긴 대학교수(청구대학)였다. 그의 건축에는 전통과 지역성에 대한 실험적 표현들이 내재하며 지나치게 세련되거나 일률적인 설계로 정형화하지 않았다. ‘한강 이남에서는 대구의 건축 수준이 높고 가장 활동적이었다'라고 회자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바로 후당 김인호 선생(대아건축)이 활동했던 그 시절이었다. 대구의 건축가이면서도 서울 잠실야구장을 비롯, 대전 충무체육관, 원주 치악체육관 등 전국적으로 작품활동을 하였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즈음에 이곳 시설들을 설계한 별들이 연이어서 떨어졌다. ‘잠실종합경기장’ 설계자 김수근은 86년 6월(55세)에, ‘올림픽 기념조형물’ 설계자 김중업은 88년 5월(66세)에, ‘잠실야구장’ 설계자 김인호는 88년 7월(56세)에 타계하였지만 짧은 생에 굵은 작품들을 남겼다. 30여 년을 시민과 함께하고 있는 ‘대구문화예술회관’, 증개축하여 ‘대구 콘서트하우스’로 재탄생한 과거 ‘대구시민회관’, 시대적 흐름에 따라 사라질지도 모를 ‘경북체육관(현, 대구체육관)’ 건축을 조명해 본다. ◆대구문화예술회관- 30년 세월과 공간의 건축 서울 세종문화회관(1978년)을 시작으로 80년대부터 각 지역 도시에 건립된 문화예술회관은 그 도시 위상을 나타내는 대표적 건축이었다. 1990년에 건립된 대구문화예술회관은 30년 동안 시민들과 함께하고 있는 도시의 안식처이다. 광장 마당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전시동, 왼편으로 공연 동이 낮은 산자락처럼 펼쳐진다. 육각형 연속패턴 평면의 전시동은 화강석 바위처럼 중첩되어 이어진다. 전시동 로비의 조경 공간은 행사 시 다목적공간으로 바뀌었고 전시장 아래위 트인 공간은 탱화 등 대형작품을 배려했다 한다. 당시의 설계개요에서 말하고 있다. 전시동 평면 흐름은 농악의 상모 이미지와 외부 공간 축을 중심으로 한국 전통 아리랑 흐름으로 구성, 외양은 대구의 상징 목련 꽃잎을, 공연 동 지붕은 박사(薄紗) 고깔의 승무를 연상하는 디자인이라 말한다. 당시의 현상공모 설계 공공 건축들은 전통적 요소의 건축 표현이 필수적이라 할 만큼 한국적 주체사상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행정관서 발주자의 분위기이기도 했고 다양한 건축 어휘를 경험하지 못한 과도기적 건축 표현이었을 것이다. 김인호 선생은 공사 기간 중 작고하여 마지막 유작이 되었다. 광장 마당은 대구예술인 장(제2대 대구 예총회장)을 치르고 그를 떠나보내는 마당이 되었다. 대구문화예술회관 건립 30주년을 기념하는 ‘후당 김인호 건축전(2020년 11월)’이 이곳에서 열렸고, 선생의 뜻을 기려 창의적 젊은 건축가를 선정하는 ‘후당건축상’이 27년을 맞고 있다. ◆대구시민회관의 재탄생 (현, 대구 콘서트하우스) 건축을 ‘시대의 거울’이라고 말한다면, 바로 시민회관 건축은 그 시대의 문화 경제 정치가 담긴 건축이었다. 특히 대구역과 광장에 인접하여 근현대 대구의 도시변천사를 지켜본 건축의 장소였다. 시민회관은 문화예술 행사는 물론 국경일 기념식, 시상식, 반공 궐기대회, 미인선발대회까지 열리던 다목적 건축이었고, 부속건물에는 문화예술단체 시민단체들이 한곳에 모여 있었다. 바로 이곳은 ‘대구방송국’과 ‘KG’홀이 있었던 사라진 기억의 공간이었다. 1975년 건립된 대구시민회관은 대구역 서편, 도시 정면을 향한 웅장한 처마와 지붕 곡선, 열주(列柱), 주두(柱頭) 등 전통적 요소를 세련되게 표현한 건축이다. 세워진 지 38년 후. 시민회관은 4여 년의 증개축 공사를 마치고 2013년 콘서트 전문 홀로 재개관했다. 시대적 노후 건축을 철거치 않고 건축적 가치를 보전하는 방법으로 과거 건축의 디테일과 구조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며 첨단 콘서트홀로 재탄생했다. 과거 시민회관은 다목적 공연장으로 전면 무대막이 설치되고 프로시니엄 아치가 무대와 객석을 구분 짓는 건축방식이었다. 콘서트하우스는 최고의 음향을 위해 무대와 객석이 하나의 공간으로 통합된 슈박스 방식으로 대구가 자랑하는 시립오케스트라의 주 무대인 콘서트홀로 변신하였다. 대구예술발전소, 대구문학관, 대구근대역사관, 창조경제캠퍼스‘와 함께 도시 근대건축의 재생은 근대 골목과 건축 문화유산으로 이어져서 도시문화의 깊이를 나타내는 척도가 되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이곳은 다행히도 도시의 여백을 존중하는 광장 공간이 중심이다. 공연이 있는 밤이면 내부 홀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으로 처마 곡선 실루엣이 우아하며 문화예술의 불빛이 도심 광장을 밝히는 밤이 아름다운 건축이다. ◆경북체육관 (현, 대구체육관)- 재생과 철거의 갈림길 1971년 개관 당시의 ’경북체육관‘은 1981년 행정 개편으로 ’대구체육관‘이 되었고, 당시 공사비(37억)의 70%는 시민 성금으로 건립되었다고 한다. 과거 오리온스 농구팀을 거쳐 지금은 한국가스공사 페가수스 농구팀의 홈구장이다. 1966년 전국현상공모 당선작으로 당시 대형체육관 설계는 고난도 첨단구조의 건축적 실험이요 모험이었다. 양쪽 초대형 기둥이 지탱하는 지붕구조의 전체적 외형은 신라 화랑의 투구 형상으로 의미화한다. 동서남북 출입구는 사찰의 일주문을, 저층부 노출 구조는 대들보와 서까래 추녀 곡선의 한국 전통 조형으로 형상화하고 하였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상승하는 경사면과 지붕 수평 수직 구성은 기운생동(氣運生動) 하는 힘의 건축이다. 특히 체육관 내부 천장을 구성하는 3차원적 기하학 곡선은 시간을 초월한 건축미학이다. 당시 공사 현장의 일화가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거대한 상부구조를 받치고 있었던 마지막 공사가설 기둥 제거 시에는 붕괴 위험 우려에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그때 선생이 직접 나섰다. 대형구조물이 제자리를 찾을 때 내는 굉음과 공포의 순간을 몸소 감당하며 설계자의 책임을 몸소 보여주신 것이다. 50년을 넘긴 체육관은 기능과 구조의 노후화, 교통 접근성으로 재생이냐? 철거냐? 갈림길에 서 있다. 바로인근 구, 경상북도청(현, 대구시 산격청사)과 아울러 향후 보존과 지속 가능 건축을 긍정적으로 연구해야 할 시점이다. 최상대 전,대구경북건축가협회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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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05 15:22

[뉴스와 인물] 남관우 전주시의장 "현장과 시민에 무게…소통의 중심 굳건히 지켜갈 것"

제12대 전주시의회가 후반기를 맞아 새로운 출발점을 나섰다. 남관우 의장(66)을 중심으로 앞으로 2년여 동안 전주시 발전과 시민의 복리 증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있는 전주시의회는 향후 의정활동을 보다 적극적인 현장 활동 속에서 찾는 데 역량을 집중하기로 했다. 이같은 포부를 담아 ‘현장 속으로, 시민과 함께’라는 슬로건을 발표했다. 지난달 30일 열린 전북자치도시군의회의장협의회 제284차 월례회에서는 임시총회에서 남 의장은 제9대 후반기 협의회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그는 전북 시·군의회를 대표해 도민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 정책을 발굴하고 지역의 각종 현안 해결을 위해 앞장서겠다는 각오다. 취임 한달, 제12대 전주시의회 후반기를 이끌면서 시민 소통을 중심으로 현장 의정활동을 강조하고 있는 남관우 의장을 지난달 24일 전주시의회 의장실에서 만나 후반기 의회 운용 방안에 대해 들어봤다. -4선 의원 경력의 의장으로서 기대와 관심이 큽니다. 의장에 당선된 소감이 있으신지요. "저에게 전주시의회 의장이라는 중책을 맡겨주신 동료 의원님들과 65만 전주시민분들에게 깊은 감사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의장은 의원들의 동지이고 든든한 울타리가 돼야 합니다. 특히 시민의 목소리를 귀담아듣고 의정에 반영하는 '소통의 중심'을 지켜야 하는 자리인데요. 동료 의원들이 의장으로 지지해준 것은 4선 의원의 경력을 바탕으로 선배·동료 의원과 초선 후배 의원들 사이에서 윤활유 같은 역할을 해달라는 의미라고 봅니다.” -제12대 후반기 전주시의회의 슬로건이 ‘현장 속으로! 시민과 함께!’입니다. 어떤 의미입니까. "언론계에서도 '현장에서 발로 뛰는 기자'를 최고라고 생각하듯이 의원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주민의 선택을 받아 의정활동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참된 의원은 시민의 참뜻을 바로 듣기 위해 현장에 답을 찾습니다. 주민과 직접 소통하고 공감하는 정치를 하겠다는 다짐으로 슬로건을 정했습니다. 늘 현장에서 활동하고 시민과 소통하는 마음으로 뛰어야 시민이 살기 좋은 전주시를 만들 수 있고 신뢰받는 의회가 구현될 것입니다. 앞으로 전주시의회 모든 의원들이 시민과 적극적으로 소통할 수 있도록 중심 역할을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런 말씀은 의회및 의회사무국의 위상 제고와도 연결이 되는것 같습니다. 역대 의장들도 강조해 오셨고요. "의회 구성원은 의원과 의사국 직원들이고, 의원들은 의사국 직원들의 직접적인 지원을 받습니다. 의사국 직원들의 인사권을 그동안 집행부의 장이 가지고 있었고, 2년 전 지방자치법 개정으로 독립적 인사권을 부여받았습다. 하지만 인력 확충이나 인사 적체 문제 등 조직 자체를 독립적으로 운영하기에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예산의 편성권도 독립되지 않아 지방의회가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역할을 하는데 장애 요소가 많은 게 현실이죠.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체 조직권과 예산편성권 등을 담은 지방의회법을 제정하도록 전국 단위 협의회와 중앙 정치권을 상대로 적극적으로 건의하고 협의하겠습니다.” -의회와 집행부간 협치 관계와 의원들의 정책적 역량 강화를 위한 복안은 있으신가요. "시의 주요 현안을 추진하는 데 있어 의회와 집행부간 상호 협의와 공유 방식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간 긴급 현안 발생시 의회를 건너뛰는 일이 적지 않았던 만큼, 주요 쟁정 사업과 긴급 현안과 관련해 집쟁부와 정책 협력 회의를 상설화함으로써 상호 대등한 협치 체계를 만들겠습니다. 필요에 따라서는 특별위원회까지 가동할 수 있도록 의회의 권한과 역할의 폭을 넓히고, 긴급현안질문 제도를 도입해 의정과 시정에 즉각 반영할 수 있는 기회도 만들생각입니다. 또한 의원들에게 필요한 맞춤형 정책 지원을 할 수 있도록 정책지원관제의 재정립과 보좌 인력의 시너지 효과가 충분하게 발휘되도록 노력할 것이고요. 의원 연구단체 활성화와 정책연구용역의 활용 폭도 넓힐 수 있도록 시스템 개선이 필요한 상황인데요. 이를 위해 대외적 정책역량 네크워크 확립을 위해 토론회와 세미나, 공청회 활성화를 위한 지원 예산을 확대하는 등 다각적 변화를 주려고 합니다." -제12대 후반기 전주시의회 의정활동 방향도 궁금합니다. "후반기 의회의 방향성을 고민하면서 의회와 의원의 역할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결론은 시민이 주인 될 수 있도록 뛰자는 것이었고, 늘 현장 가까이에서 시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시민이 체감할 수 있는 정책이 발굴되고, 시민들에게 의회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의원 동료들끼리 소통하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생각인데요. 다양성을 가진 많은 의원들이 서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협력해야 지역의 발전이 이뤄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 화합하는 의회를 꾸려나가려고 합니다. 의원 전원회의를 상시화해 의원 모두의 생각과 합의에 의해 의회의 목소리를 결정하고, 시에 주요 현안이 있거니 의회의 명확한 입장이 필요할 때 활용할 계획입니다. 또 의장실을 상시 개방하고 상임위원회간 협의 체계를 강화하기 위한 회기별 상설회의제도로 적극 도입하겠습니다." -최근 시의회에서는 완주·전주 통합 관련 토론회를 지속적으로 펼치고 있습니다. 완주-전주 통합을 어떻게 보십니까. "토론회는 찬반 성격보다는 양 지역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주민 간 갈등 해소 방안과 상생협력 사업의 지속 추진 및 추가 발굴에 대해 머리를 맞대는 자립니다. 우리는 이런 자리를 통해 특별지방자치단체, 메가시티 등 급변하는 행정환경 및 흐름에 대비해 우리 지역이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지 논의하며 상생을 도모할 것입니다. 통합에 대해 충분히 논의하고 발전적 대안을 제시하고, 우려를 불식시키는 것이 찬성과 반대를 논하기 이전에 해야할 일이라고 봅니다." -지역 발전을 위한 시민의 목소리가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전북일보 독자들과 시민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시면. “전주시의회는 앞으로도 현장 의정활동을 통한 소통으로 시민 목소리를 경청하고, 시민의 뜻을 최우선으로 하는 의정활동을 펼쳐나가겠습니. 이를 바탕으로 시민이 살기 좋은, 시민이 만족하는 전주를 만들어 나가는 시민과 함께하는 의회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때로는 날카로운 질책으로, 때로는 따스한 관심으로 의회와 함께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남관우 의장은 완주 경천면 출신으로 전주완산고와 전북과학대학교를 졸업했다. 제8·9·10·12대에 걸쳐 전주시의회에서 4선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현장 속에서 시민들과 긴밀하게 소통하는 '생활정치'를 강조해왔다. 2009년 집중호우로 인한 진북동 도토리골 어은골 침수 피해 당시 현장으로 가장 먼저 달려가 주민들을 위로하고 해당지역이 재해위험지구로 지정되도록 노력해 전주천 수해 지역 각종 침수 대비 사업 시행의 단초를 마련하기도 하는 등 '발로 현장에서 뛰는 의원'이라는 인식을 심어줬다. 2015년 '그리운 어머님'이라는 트로트 앨범을 내 가수로 데뷔한 독특한 이력이 있기도 하다. 현재 더불어민주당 전국 대의원, 전주시 이웃사랑자원봉사단 이사장, 전주 덕진구 발전포럼 회장, 전주시 생활법률지원단장을 맡고 있으며,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통령 후보 직속 정무특보단 전주공동본부장과 도당 후쿠시마 원전오염수 해양투기저지 총괄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 기획
  • 김태경
  • 2024.08.04 15:16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⑫ 전봉준 상서∙동도창의소 고시문

● <전봉준 상서(全琫準上書)> : 반일투쟁을 위한 ‘민족적 대연합’ 추구 1894년 동학농민군의 반일투쟁을 시작하여 북상하던 전봉준이 논산에 주둔 중이던 10월 16일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보낸 글이다. 동학농민군의 반일투쟁 준비는 1894년 9월부터 시작되었다. 제1차 봉기 때도 ‘척왜양(斥倭洋)’ 구호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차적인 목적은 어디까지나 백성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폐정(弊政)을 개혁하고 탐관오리를 쫓아내자는 것이었다. 상황이 변한 것은 5월 초순이었다.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직후인 5월 초부터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에 출병하는 뜻밖의 심각한 상황이 초래되었기 때문이다. 6월 이후에는 일본의 경복궁 강점과 청일전쟁 개전, 내정간섭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태 속에서 일본의 침략의도가 점차 노골화하였다. 이에 따라 농민군 지도부의 관심은 폐정 개혁으로부터 일본의 침략을 막아야 한다는 ‘반일투쟁’ 쪽으로 급격히 선회하였다. 일본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하여 국가가 멸망한다면, 폐정개혁은 고사하고 백성들이 하루도 편히 살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재기포를 결심한 전봉준은 9월 10일경 전라도 삼례에 대도소를 설치하고 ‘반일투쟁’에 착수하였다. 삼례에서 재기병을 준비하던 전봉준은 1개월여를 삼례에 머물러 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 추수가 끝나지 않아 군량과 농민군을 동원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는 점, 반일투쟁을 전개하기에는 농민군의 현실적인 역량이 취약하였다는 점 등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전봉준은 추수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한편, 각지에 통문을 띄워 함께 기포할 것을 촉구하였다. 손화중과 최경선이 있던 광주와 나주에도 다녀왔으며, 김개남에게도 연락하였다. 또 각지의 관아에 반일투쟁을 알리는 통문을 보내 군수품 조달에 협조할 것을 촉구함과 동시에 인근 지역의 관아들을 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여 군사력을 강화하였다. 그러다가 추수가 거의 끝났고, 북접에서 기포를 결정하였다는 통지를 받은 직후인 10월 12일경 북상을 개시하였다. 북상 당시 농민군은 약 4,000명이었고, 이들은 주로 전라우도의 농민군이었다. 손화중과 최경선도 원래는 공주로 함께 북상하려 하였으나, 일본군이 바다를 통해 내려온다는 정보를 접하자 이에 대비하기 위해 광주로 내려가 주둔하기로 했다. 김개남은 전봉준과 달리 청주 쪽으로 북상하였다. 10월 12일 논산에 도착한 전봉준과 휘하의 농민군은 이미 도착해 있던 이유상의 부대와 합류하였다. 북상하는 과정에서, 또 논산에 주둔해 있는 동안 합세한 인근 고을이나 북접 휘하의 농민군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세한 화력으로 무장한 일본군과 맞서 싸우기에는 부족하였다. 그래서 공주 진격을 앞둔 10월 16일 전봉준은 양호창의영수(兩湖倡義領袖)의 자격으로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전봉준상서>를 보냈다. 이글에서 전봉준은 우선 ‘왜구(倭寇)’들이 침략하여 임금을 협박하고 백성들을 혼란하게 하는 상황에서 대신들은 구차하게 목숨을 보전하려는 생각에 위로는 임금을 위협하고 아래로는 일본 오랑캐와 결탁하여 백성들을 해치려 한다는 현 상황을 규탄하였다. 이어 초야에 사는 필부들인 농민들도 울분을 참지 못하고 반일투쟁에 일어섰으니, 충청감사도 동참하여 ‘의를 위하여 죽을 것’을 요청하였다. 골육상쟁을 피하고 항일전선을 강화하기 위해 관군까지 포함하는 민족적 대연합을 추구한 것이다. /배항섭 성균관대 교수 ● 동도창의소의 한글 고시문, 행간을 다시 읽는다. 갑오년 11월 12일 동도창의소 명의로 발포한 고시문은 특이하게도 한글로 되어 있다. 2차 봉기의 분수령이던 공주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전봉준 등 동학지도부가 정부군과 지방 감영군 등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것에 대해 비판하는 글이다. 세상에 처음으로 공개된 것은 1959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펴낸 <동학란기록>(하권, 379~380쪽)에서였다. 이 고시문은 정부군의 진압보고서류 중에서 노획한 문서에 편입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편집자는 한글로 된 언문에다가 행간에 임의로 한자를 넣어서 의미를 분명하고자 하였다. 제목에서 ‘경군여영병이교시민’이라는 한글 문구를 ‘(京軍與營兵而敎市民)’으로 표기하여 ‘경군과 영병에게, 그리고 시민에게 가르친다’는 이상한 표현으로 변했다. 본래 언문 표현대로 하면, ‘경군과 영병, 향리(鄕吏)와 장교(將校), 시민에게’ 호소한다는 제목일 것이다. 고시문의 서두에는 개항 이래 조일 관계를 개관하면서 갑신개화파가 일본과 협력했다는 점을 거론하고, 1894년 갑오개혁파들이 왜국과 체결하여 경성에 들어와 군부(임금)를 핍박하여 국권을 마음대로 농단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사건, 1894년 6월 21일에 일어난 사건으로 명확하게 인식하고 ‘금년 뉵월의 개화간당’이라고 지적하였다(국편 편집본에는 ‘금년 십월’로 오기). 또한 갑오개혁 정부가 인민을 무휼하지 않고 도탄에 빠지게한 상황에 대해 ‘왜적(일본)’을 초멸하고 개화를 제어하고 조정을 청평하여 사직을 안보하려고 봉기를 일으켰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우고 있다. 이때 사용된 ‘척왜척화’가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 설왕설래했다. 국편 간행본에 ‘척왜척화(斥倭 斥華)’로 한자를 첨기하여 동학농민군의 대외인식을 반일본·반중화라는 배외주의로 오도하게 만들었다. 이에 의문은 느낀 정창렬은 한글본 원본 사진을 확인하여 한자 오류임을 밝혔다(<갑오농민전쟁 연구>, 박사학위논문, 1991). 결국 개화간당 비판과 관련되어 ‘척화(斥化)’로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고시는 사실 조선 군대와 접전을 벌여 많은 인명이 상하게 되었다는 후회와 질책을 가하고 있다. 공주 우금치 전투 전후, 이른바 ‘조·일연합군’에 대항하여 조선사람끼지 서로 죽이는 골육상잔을 중지하자면서 “조선사람끼리야 도 혹은 다르나 척왜 척화라는 기의를 같이”하자고 했다. 동학농민군은 자신을 섬멸하려 하는 정부와 영군에게조차 민족연합전선을 구축하여 국권을 침탈하는 일본에 대항하자고 호소한 것이다. 그런데 고시문 표기 중에는 “□성상, □군부, □조정, 충□군우국” 등 조정과 임금을 상징하는 용어 앞에 한 칸을 띄어 쓰고 있다. 이는 당시 국왕이나 국가를 우선시하는 관행적인 표현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동학농민군의 의식 속에는 조선왕조의 통치질서를 그대로 긍정하는데 머물렀다고 해석될 수는 없다. 앞서 공포된 <선유방문 한글 고시문>에서 “우리 성상이 극히 인자하시니 어찌 너희를 죽이랴 하시리오”라고 하여, 백성을 적자(赤子)로 인식하는 고종의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 고시문은 고종 윤음이나 농민군 진압의 방침을 정면 반박하려고 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고시문의 전후 맥락은 갑오 11월 12일 같은 날에 배포한 정부군의 탄압책을 비판하는 <고시문(示京軍營兵)>과 바로 연결되고, 순무영에서 배포한 고시문(한문 및 언문)에 대한 전면 거부라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 고시문은 조선사람끼리 동족상잔을 이제 그만두고 인민의 생명과 생존을 존중하자는 눈물겨운 호소를 담고 있다. 나아가 전쟁을 그치고 평화를 간절하게 요청하고 있다는 면에서 반전 평화 휴머니즘까지 느낄 수 있다. 원본 자료는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었으나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아카이브에 유리필름 사진 형태로 제공되고 있다. /왕현종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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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01 15:50

[참여&공감 2024 시민기자가 뛴다]인구감소와 지방소멸 위기, 그리고 전북의 미래(하)

전북 지역의 인구감소 및 지방소멸 위기가 심각하다. 출생아 수가 급격히 감소하였으며, 서울·경기 등 수도권으로의 청년인구 유출도 지속되고 있다. 또한, 전북 지역의 인구감소 및 지방소멸 관련 교육·의료·주거·교통·생활편의 측면에서 주민 삶의 질이 저하되고 있다. 이번 글에서는 중앙정부·지자체 정책을 검토한 뒤, 국내·외 사례를 바탕으로 전북 지역의 인구감소 및 지방소멸 대응을 위한 전략 및 정책과제를 제시한다. △중앙정부 및 지자체 정책과 한계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에 따르면 정부는 ‘05년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을 제정한 뒤 ‘06년부터 ‘23년까지 저출생 대응 명목으로 약 380조 원의 예산을 투입하였으며, ‘23년 한 해에만 47조 원의 예산을 투입하였다. 하지만, 매해 천문학적인 예산이 투입됐음에도 불구하고, ‘23년 합계출산율은 0.72명으로 OECD 국가 중 최하위 수준을 기록했다. 통계 지표상으로 지난 20여 년간의 정부 저출생 대응 정책의 효과성이 크지 않은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또한, 지방소멸과 관련하여 행정안전부는 ‘21년 전국 89개 시·군·구를 대상으로 인구감소지역을 지정하고 특례를 부여하였으며 지방소멸 대응을 위한 사업들을 지원하고 있다. 특히, 정부의 여러 지방소멸 대응 정책 중 이슈가 되는 것은 ‘지방소멸 대응기금’이다. 최근 국회 예산정책처의 ‘2023 회계연도 결산 위원회별 분석 보고서(2024)’에 따르면 “지역별 특색없이 유사한 사업이 획일적으로 추진되거나 나눠먹기식으로 재원이 배분된”것으로 평가되었다. 또한, 파크골프장, 야간조명, 음악분수와 같이 기금 취지에 맞지 않은 사업, 단체장 공약과 같은 단기적인 사업, 기금 재원 부족 등 지방소멸 대응기금의 한계와 실효성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중앙부처뿐만 아니라 지자체에서도 인구감소 및 지방소멸 대응 정책들을 추진하고 있다. 지자체의 출산지원정책 예산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출산장려지원금’이다. 국회 예산정책처의 ‘인구위기 대응전략 보고서(2023)’에 따르면 ‘22년 기준 국내 지자체 중 출산장려지원금을 지원하는 지자체는 총 213개이며, 예산 규모는 5735억원으로서, 전국적으로 매년 출산장려지원금 규모가 증가하고 있다. 또한, 출산장려지원금은 지역에 따라 편차가 큰 편이며, 지자체 간 경쟁이 과열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전북 지역의 지방소멸 위기 대응을 위한 전략 및 과제 전북 지역의 인구감소 및 지방소멸 문제는 출생아 감소 등 자연감소와 더불어 수도권으로의 인구 유출 등 사회적 감소로 인한 영향이 크다. 그러므로 정부에서 추진하는 저출생 대응 정책을 기본으로 하되 지역 외부로의 인구 유출을 줄이고, 신규 인구 유입은 늘리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특히, 지역에서 나고 자란 청년들이 지역에 머무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려면 수도권이나 대도시에 가지 않고도 청년들이 원하는 다양한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하고, 삶 전반에서 청년들이 지역에서 매력을 느끼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인구감소 및 지방소멸 문제는 단기적으로 한두 가지 정책을 추진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교육·의료·주거·교통 등 여러 분야의 정책들을 종합적으로 추진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협력적 거버넌스가 반드시 필요하다. 다음은 협력적 거버넌스를 바탕으로 전북 지역의 인구감소 및 지방소멸 위기 대응을 위한 5개의 정책 패키지들이다. 첫째, ‘작은 학교 살리기 사업’을 통해 폐교 위기의 학교를 살리고, 학생 및 학부모 신규 인구 유입으로 인구감소 문제를 완화할 수 있다. 경남 작은 학교 살리기 사업은 경남도, 경남도교육청, LH공사가 협력하여 학교를 중심으로 소멸 위기의 마을을 되살리는 프로젝트로서, 각 기관이 5억씩 총 15억원의 예산을 지원하며, 교육청과 학교는 특색 있는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지자체는 일자리 연계와 입주민 융합프로그램을 운영하며, LH에서는 임대주택과 편의시설을 건립하였다. ‘20년부터 시작하여 함양군 서하초, 고성군 삼산초 등 10개 지역에서 사업을 하였고, 251명(57가구)이 이주하는 성과가 있었다. 이 사업은 ‘교육’, ‘주거’, ‘일자리’관련 대안을 제시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마을교육공동체’를 통해 학령기 아이들의 교육과 방과 후 돌봄을 지원함으로써 농어촌 지역을 아이 키우기 좋은 지역으로 만들 수 있다. 완주군 고산면은 ‘11년 설립한 고산향교육공동체를 중심으로 숟가락 공동육아, 고산청소년센터 고래 등의 단체가 활동하고 있고, 마을교육 및 방과 후 돌봄 관련 풀뿌리 교육지원센터, 완주미래행복센터와 같은 지원조직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완주 고산 지역은 주민, 학부모, 학교가 공동으로 학생들의 배움을 위해 협력하고 연대하는 마을교육생태계를 구축해왔다. 이와 같이 완주 고산은 10년이 넘는 마을교육 운동을 통해 전국적인 마을교육공동체 모델이 되었으며 ‘교육’, ‘돌봄’, ‘공동체’가 어우러진 지방소멸 대응 사례로서 의미가 있다. 셋째, 지역으로 이주하는 청년, 시니어, 귀농·귀촌인 등의 지역 체류 및 정착을 맞춤형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다. 일본 도쿠시마현 가미야먀 마을은 인구 5천명 규모의 산골마을로서 인구가 감소하는 상황에서 ‘마을에 신규 인구가 전입할 수 있도록 이주교류지원센터를 설립하고, 마을에서 살아보는 체류 프로그램을 운영하였다. 또한, 마을에 들어온 사람에게 빈집 정보를 제공하고, 빈집을 고쳐 사무실로 개조하고, IT 기업 등 위성사무실을 입주시켰으며, 기업들이 편하게 원격 근무를 할 수 있는 시설을 조성하였다. 그 결과 2008년부터 2016년까지 8년간 91세대 161명이 이주하였고, 위성사무실 16개소가 입주하였다. 가미야마 마을 사례처럼 지역 이주를 희망하는 사람이 필요로 하는 서비스와 인프라를 제공함으로써 지역 체류와 정착을 도울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주거’, ‘빈집’, ‘청년’,‘일자리’, ‘교육’문제에 종합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넷째, 빈집, 빈점포 등을 리모델링하여 카페, 숙박시설, 문화공간 등으로 활용하여 빈집 문제를 완화하고 지역을 활성화할 수 있다. 공주 봉황동 마을호텔, 정선 고한 마을호텔 18번가 등은 빈집과 빈점포를 활용하여 게스트하우스로 조성하고, 마을에 있는 카페, 식당 등은 호텔의 편의시설로 연결한 사례이다. 또한, 부여 자온길 프로젝트는 빈집을 서점, 찻집, 양조장, 공방 등으로 조성하여 새롭게 재탄생시켰다. 여러 사례와 같이 인구감소지역 내 빈집, 빈점포에 대해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으며, 빈집을 숙박시설로 활용할 때 규제 완화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도시 지역의 경우 ‘외국인관광 도시민박업 내국인 숙박 특례’관련 도시재생 활성화지역 내 마을관리 사회적협동조합에 대해 특례 확대 적용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다섯째, 농어촌 지역 내 민간 버스 회사에서 노선을 폐지한 교통 소외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이동권 보장을 위해 공공에서 재정을 보조하는 마을버스와 마을택시 운행범위를 확대할 필요가 있으며, 음식료품 소매점이 없는 농촌마을을 대상으로 차량을 통한 이동편의점을 운영하여 주민 생활불편을 해소할 필요가 있다. 이동편의점 민간 사례로는 ‘11년부터 전남 영광군에서 이동형 마트 트럭으로 매주 2회씩 42개의 마을을 운행하며 생필품과 식료품을 판매한 동락점빵 사회적협동조합이 있으며, 농식품부에서도 올해 7월부터 시범사업으로 지자체, 지역 농협과 협력해 농산물 등을 트럭에 실어 농촌마을로 배달하고 판매하는 ‘가가호호 농촌 이동장터’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업들을 통해 ‘교통’, ‘생활편의’, ‘돌봄’ 등의 문제를 완화할 수 있다. △지방소멸. 말그대로 소멸은 아니지만... 농어촌 및 지방중소도시의 인구가 감소하면 민간 및 공공에서 생활인프라와 서비스를 감축하게 되고, 서비스가 줄어들면 주민들의 삶의 질과 정주여건은 더 악화되게 된다. 그러면 일부 주민은 더 나은 거주지를 찾아 이주하여 인구가 유출되고, 지역의 인구감소 및 지방소멸은 가속화되는 악순환이 반복될 수 있다. 물론 지방소멸이라고 하여 그 지역이 아예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역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고, 고령화가 가속화되면 경제·산업, 지방재정 측면에서 큰 타격을 받고 자족기능을 상실하게 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인구감소 및 지방소멸 대응 정책은 중앙정부보다 현장에 가까이 있는 지자체의 역할이 더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자체에서는 기존 수립한 정책의 효과성을 점검하고, 보다 실효성있는 정책이 될 수 있도록 지역사회 내에서 라운드테이블과 같은 논의의 장을 마련하여 여러 사람들의 지혜를 모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장우연 독립연구자, 전) 전주시 정책연구소 연구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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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31 15:18

[전홍철 교수의 ‘영상과 함께 하는 실크로드 탐방’]   실크로드의 미스터리 보물 (2)

문무왕(文武王) 비문과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에 신라 김씨의 조상으로 명백히 기록되어 있는 흉노 휴도왕(休屠王)의 태자 투후(秺侯) 김일제(金日磾). 최근 필자는 김일제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감숙(甘肅)성 무위(武威)시를 답사하였는데 이곳에 금년 8월 김일제 광장이 오픈하고 내년에는 <김일제기념관>이 개관한다. 그런데 이제까지 흉노 출신으로 알려져 온 김일제의 신분에 대해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었다. 즉 흉노가 아니라 그리스에서 출발해 파르티아(Parthia)와 중앙아시아를 거쳐 감숙(甘肅)성 일대에서 살았던 그리스-박트리아 왕실의 후손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파격적인 주장은 둔황(敦煌) 막고굴(莫高窟) 제323굴 '장건의 서역 사신 출행도(張騫出使西域圖)'에 보이는 황금 조각상이 불상이 아니라 제우스(Zeus)상이라는 새로운 해석을 근거로 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소개한다. △ 김일제(金日磾)는 누구인가? '신라 문무왕릉 비문'에 “투후 [김일제]는 제천의 후손(秺侯祭天之胤)”,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에 “먼 조상 이름은 일제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에 투항하시어 무제 아래서 벼슬하셨다(遠祖諱日磾自龍庭歸命西漢仕武帝)”는 명백한 기록이 남아 있어 신라 김씨의 시조로 간주되기도 하는 김일제(金日磾, B.C135-85)는 한무제(漢武帝)가 흉노를 정벌하기 위해 파견한 장수 곽거병(霍去病)에게 사로잡혀 말을 사육하는 노예가 된 인물이다. 그후 김일제는 한무제의 암살을 막아낸 공적으로 발탁되고, 한무제는 흉노족이 황금을 유난히 숭상하는 것을 고려해 ‘황금’을 뜻하는 금(金)씨 성을 하사받아 김씨의 시조가 된다. 또한 흉노 출신의 그가 사육하는 황실 말들이 살찌고 뛰어나자 대장군 다음으로 높은 직책인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임명되고 투후(秺侯)에도 봉해졌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투후(秺侯)라는 용어는 김일제의 가계 왕국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된다. △ 한무제의 군대가 약탈해 온 황금 조각상 BC 121년 한무제(漢武帝, BC 157-87)는 장수 곽거병을 보내 흉노 휴도왕을 토벌했을 때 태자 김일제는 포로로 잡혀와 노예가 되었는데, 그밖에 무슨 일이 있어났을까? 이에 대해 돈황 막고굴 제323굴 벽화 '장건의 서역 사신 출행도(張騫出使西域圖)' 방제(榜題)에는 다음과 같이 명확히 적혀 있다. “한무제가 흉노를 정복하고 10척 높이의 황금 조각상 두 개를 획득하여 감천궁에 안치하였다. 황제는 이를 위대한 신으로 모셔 늘상 참배하였다.(漢武帝將其部眾討匈奴,并獲得二金長丈餘,列之于甘泉宫。帝為大神,常行拜謁時.)”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한무제가 약탈해 와서 스스로 참배했다는 흉노 휴도왕의 3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황금상이다. 이제까지 이 황금상에 대해서는 한서(漢書) 주석가 장언(張晏), 유의경(劉義慶), 위수(魏收) 등이 “불교도들이 섬기는 황금상(佛徒祠金人), 불교의 유통으로 인한 전파(此則佛道流通之漸也)”로 해석하여 불상으로 간주하였다. 하지만 한무제 시기에 간다라 양식의 불교 조각은 아직 중국에서는 유행하지 않았고, 특히 3미터에 달하는 두 개의 불상을 황실에 모셔 놓고 참배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따라서 흉노 휴도왕의 섬겼던 황금상은 불상이 아닌 다른 조각상일 가능성이 크다. 이 조각상은 그리스-박트리아 신상으로 제우스가 니케나 아테나를 들고 있는 조각상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애당초 휴도왕과 김일제는 흉노족이 아닌 그리스 박트리아계 외국인으로 이름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 휴도왕과 김일제는 외래어의 한자 번역 휴도왕의 '휴도(休屠)'는 외국어를 중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휴(休; '쉬다', '멈추다')와 도(屠; '학살') 두 글자는 중국어로는 '학살을 끝내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리스어로 '구원자'를 의미하는 '소테르(Σωτήρ, Soter)'가 휴도의 원래 이름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 김일제(金日磾)의 ‘일(日)’은 중국에서 ‘rì’로 읽히지 않고 ‘mì’로 읽힌다. ‘일(日)’자가 ‘밀(密)’ 혹은 ‘밀(蜜)’자와 관련되어 ‘mì’로 읽히는 의문을 풀기 위해 많은 학자들이 노력했으나 아직까지도 명확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으나 외래어로 해석할 때 실마리가 풀린다. 즉 ‘일(日)’자의 이독(異讀)은 외래어 ‘밀(密)’과 깊은 관련이 있다. ‘밀(密)’은 ‘태양’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외래의 역일(曆日)과 관계가 있으며, 소그드어에서 태양을 의미하는 ‘mīr’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 ‘제(磾)’는 고대에 증(繒)을 염색하는 데 사용한 검은 돌을 의미한다. <북사(北史)>의 기록에 따르면, 북방 호인(胡人)들은 "증(繒)으로 모자를 만들고(以增为帽)", "검은 색으로 모자를 만들었다(以皂为帽)" 즉 검게 염색한 증(繒)으로 모자를 만들어 사용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휴도왕과 아들 김일제는 흉노 아닌 그레코-사카인 미국학자 루카스 크리스토풀로스(Lucas Christopoulos)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그레코-박트리아인(Greco-Bactrians)인 즉 그리스-사카인(Greco-Sakas)들이 BC 176-162년경 감숙(甘肅) 일대에 남아 있다 흉노가 통제권을 장악하자 예속되었고, 후에 선비족이 하서회랑 일대를 장악했을 때는 다시 그들의 대열에 포함되게 되었다. 놀랍지만 휴도왕은 그리스 박트리아 왕으로 유티메모스(Euthydemus) 왕조의 창시자였고, 김일제는 그의 아들 데메트리오스(Demetrios)였을 가능성이 있다. 감숙성과 신강 일대에서 출토된 수많은 헬레니즘 문물들은 단순한 상품 거래를 넘어 그레코-박트리아인들이 이 지역에서 종교적 문화적 관습을 유지하며 살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면 흉노가 아닌 그레코-박트리아 출신 김일제가 어떻게 신라 김씨의 시조가 되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에 의거해 추론하면, 그레코-박트리아인 김일제 일가가 한나라 때 난리를 피해 요동(遼東) 지역 특히 산동과 한반도 낙랑 지역으로 피신해 왔다가 다시 신라 경주 일대로 옮겨 왔을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향후 좀더 깊이 있는 연구와 구체적인 실증이 필요하다. (참고 자료: Lucas Christopoulos, 'Dionysian Rituals and the Golden Zeus of China', <SINO-PLATONIC PAPERS>(326), 2022.) /전홍철 우석대 경영학부(예술경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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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29 14:56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⑪<흥선대원군 효유문> : 대원군과 전봉준의 관계

<흥선대원군 효유문>은 1894년 8월~9월에 걸쳐 전국 각지에 전달된 문서로 대원군이 동학농민군의 해산을 명령하면서, 즉각 해산할 경우 처벌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담고 있다. 원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필사본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소장되어 있으며, <수록>, <미나미 고시로 문서>, <소모사실>(정의묵), <뮈텔문서> 등의 자료에도 수록되어 있다. 각 문서에 따라 일부의 글자에 차이가 있으나 내용은 동일하다. <효유문>을 내린 날짜도 <수록>과 <뮈텔문서>에는 ‘개국 503년(1894) 8월’로 되어있고, <소모사실>에는 ‘개국 503년(1894) 9월 10일로 되어 있다’. 동학농민군의 해산을 명하는 이 효유문의 내용에 대해서는 문서 자체의 진위 문제, 그리고 대원군의 원래의 뜻이 어디에 있었는지 등을 둘러싸고 논란이 있다. 이는 대원군과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군 지도부 간의 관계에 대한 논란과 연결되어 있는 만큼, 동학농민혁명의 성격에 대한 이해와도 직결된다는 점에서 <효유문>은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 전봉준과 대원군 간의 ‘밀약설’은 동학농민혁명 당시부터 중요한 정치적 이슈로 제기되었으며, 대원군이 실권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후 일제시대에도 대부분의 글에서 이 문제가 언급되어 왔으나, 1945년 이후에는 대체적으로 양자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이 지배적인 분위기였다. 100주년을 맞은 이후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고 새로운 연구들이 발표되면서 전봉준과 대원군 사이에 모종의 연관이 있었음은 거의 분명해지고 있다. 그러나 전봉준과 대원군이 언제부터 관계를 가졌고, 또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견이 있다. 대원군과 동학과의 관계와 관련해서는 이미 1893년 2월 동학교도들의 광화문 복합상소가 일어났을 때부터 중앙정계와 서울에 주재하던 각국의 외교관들 사이에 동학교도의 배후에는 대원군이 있다는 소문이 돈 바 있다. 또 정교(鄭喬)의 <대한계년사>도 이와 관련된 내용을 기록해두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발발 이후 동학농민군의 요구에 대원군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4월 16일 영광에서 '창의소' 명의로 완영유진소(完營留陣所)에 보낸 통문이다. 이때 농민군은 자신들의 의거가 “탐관오리를 개과혁신케 하고 국태공(國太公)을 감국(監國)케 하여 위로는 종사를 보전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편안케 하는” 데 있음을 천명하였다. 이어 4월 18일 함평에서 나주 공형(公兄)에게 보낸 통문과 4월 19일 초토사(招討使)에게 보낸 정문(呈文), 5월 4일 역시 초토사에게 보낸 소지(所誌)와 그 무렵부터 제시한 27개조의 폐정개혁안 등에서 대원군의 섭정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였다. 2차 봉기가 일어나기 직전에도 대원군 측이 보낸 밀사들과의 만남을 비롯하여 몇 차례 직간접적인 접촉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자료들은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군과 대원군 간에 모종의 관계가 있었음을 추측케 하지만, 언제부터, 또 어떤 관계였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다만 여러 자료를 통해 볼 때 대원군은 1894년 6월 21일의 일본군에 의한 경복궁 강제 점령을 계기로 집정한 직후부터 이미 농민군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그를 위해 준비해 나갔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 당시 일본 언론이나 일제시대 일본인 연구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전봉준이 대원군의 사주를 받았거나 대원군의 비호를 기대하여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킨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전봉준 혹은 농민군 측에서 대원군을 이용하려 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전봉준을 비롯한 농민군지도부는 동학농민혁명에 임하기 이전부터 ‘반봉건’ 뿐만 아니라 ‘반외세’의 과제를 동시에 인식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이러한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 일찍부터 다양한 세력과의 연합을 추진하고 있었다. 전봉준이 대원군을 접촉한 의도도 대원군의 경우와 마찬가지였다고 생각된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가장 풍부한 기사를 생산한 일본 「二六新報」의 1894년 11월 14일자에는 이와 관련하여 매우 흥미로운 기사가 실려 있다. (동도가) 그들이 믿는 대원군과 미리 기맥을 통하였느냐 여부는 의문이지만, 전봉준의 인물됨으로 미루어 보면 그의 처음 기포가 반드시 대원군을 기대하였기 때문은 아님이 명확하다. 다만 그의 지략이 풍부하고 동도의 의기(義氣) 역시 한계가 있으므로 이에 대원군이라는 목상(木像)을 대중의 눈앞에 세움으로써 조종(操縱)의 편리로 삼으려 한 것 같다. 전봉준은 동학농민혁명에 임할 때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민란을 일으킨 다음 그 힘을 모아 전주감영을 점령하고, 나아가 매관매작을 일삼는 민씨 척족세력을 타도하면 팔도가 하나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당시 대중들은 고을범위를 벗어나는 ‘반란’에 뛰어드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전봉준은 자신들의 행위가 ‘반란’이 아님을 보여주고자 노력하였다. 아직 반란의 대열에 동참하기를 꺼리던 민중들의 참여를 유도하고 지지기반의 확대를 도모한 것이다. 이 점에서 대원군은 중요한 전술적 가치가 있었다. 대원군은 이미 실세한 정치가로 1885년 청나라에서 돌아온 후 운현궁에 유폐된 채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원군은 국왕의 아버지이자 당시 대중들로부터 가장 호평을 받던 정치가였고, 또 이미 10여년간 섭정을 한 경력이 있으며, 임오군란 시에도 일시적으로 섭정을 하여 정권을 장악한 경험이 있는 등 대중적 신망을 한 몸에 안고 있었다. 전봉준은 이러한 대원군을 내세움으로써 자신들의 행동이 결코 반란이 아님으로 강조할 수 있었다. 이점은 5월 4일 홍계훈에게 보낸 <피도소지(彼徒訴志)>에서 “국태공을 받들어 나라를 맡기자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거늘 어찌 불궤라 하느냐”라고 한데서도 엿볼 수 있다. 또 전봉준은 생각과 행동은 대원군의 농민군 동원기도나 ‘정변계획’과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전봉준이 제2차 기포를 결심하게 된 데는 농민군의 기포를 요구하기 위해 보낸 대원군 측의 밀사와 접촉한 것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대원군이 보낸 밀사들과의 접촉을 통해 일본군의 일본의 침략의도와 일본군이 진압하러 온다는 계획, 일본이 친일적 개화파를 내세워 내정개혁을 추진하려 하나 그 진의가 의심스럽다는 점 등 중앙정국의 동향과 청일전쟁의 추이에 대한 비교적 정확한 정보를 제공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대원군이 농민군의 재기포를 요구하는 밀사를 파견한 직후 또 다시 <효유문>을 보내 농민군의 해산을 명령하였지만, 전봉준으로서는 그 진위 여부를 떠나 재차 봉기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의 경복궁 강점 사실을 알고 나서도 중앙정국의 동향과 청일전쟁의 추이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어서 재기포를 유보하여 왔으나, 대원군 측의 밀사를 통해 이제는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을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전봉준으로서는 농민군의 역량이 일본군에 맞서기에는 취약함을 잘 알고 있었지만, “국가가 멸망하면 생민이 어찌 하루라도 편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국가와 멸망을 함께할 결심”으로 반일항쟁을 시작한 것이다. /배항섭 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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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25 16:59

[팔도 핫플레이스] 천혜의 비경 고군산군도⋯힐링‧체험‧즐길거리 다 있다

군산은 항구도시다 그 만큼 바다를 활용한 관광자원이 풍부하다는 의미다. 이 중 고군산군도는 지역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표 해상관광 자원이다. 고군산군도는 ‘신선이 놀았다’는 말이 나올 만큼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예부터 크고 작은 섬들과 바다 그 사이의 개성 있는 기암괴석들이 연출하는 경관이 훌륭해 ‘천혜의 비경’ 으로 불리고 있다. CNN은 지난 2022년 48개 국가로 구성된 아시아 대륙 곳곳의 관광명소를 설명하면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숨은 관광명소 18곳을 발표했는데,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고군산군도가 이름을 올렸다. CNN은 고군산군도에 대해 “도심을 벗어나 휴양을 즐기려는 이들에게 인기 있는 여행지로,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한다”고 소개했다. 이곳은 한국관광공사에서 선정한 2023~2024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명소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되기도 했다. 사계절 어느 때에나 섬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고군산군도다. 특히 자연경관뿐 만 아니라 힐링과 체험, 즐길거리도 가득해 가족과 연인, 친구 등과 추억 쌓기에도 제격이다.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아름다운 백사장 '선유도 해수욕장' 군산시에서 남서쪽으로 약 50㎞ 떨어진 해상에 위치한 고군산군도는 선유도를 포함해 신시도‧무녀도‧ 방축도 등 63개 섬이 펼쳐져 있다. 이 중 16개 섬이 유인도로 인구는 약 2000명이다. 특히 선유도와 신시도·무녀도·장자도·대장도의 경우 ‘바다가 육지라면’의 노랫말이 현실로 된 섬들이다. 2017년 새만금방조제와 고군산연결도로가 개통되면서 차량으로 이동할 수 있을 정도로 접근성이 좋아졌다. 이런 가운데 고군산군도 대표적인 곳이 선유도 해수욕장이다. 선유도 해수욕장은 파도가 높지 않고 수심도 얕아 물놀이하기에 좋은 해수욕장으로, 육지섬이 되기 전부터 여름철 피서지로 많은 방문객이 찾던 곳이다. 모래입자가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아름다운 백사장이 넓게 펼쳐져 있다고 하여 명사십리 해수욕장이라고도 한다. 선유도 해수욕장의 중심에 자리잡은 명승(국가에서 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뛰어나게 아름다운 경관) 망주봉은 선유도만의 아련한 분위기를 자아내 해수욕을 즐기는 피서객들에게 또 다른 볼거리를 선사한다. 이곳 해수욕장은 8월 18일까지 운영하며, 개장기간 중 비치 파라솔과 구명조끼, 실내 샤워장 등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수려한 경관에 짜릿함을 더하다 선유도에서 명사십리 상공을 가로지르는 익사이팅 체험은 빼놓을 수 없는 즐길거리다. 선유도의 대표 익사이팅 체험시설인 선유스카이썬라인은 높이 45m로, 선유도 해수욕장 입구에서부터 망주봉 입구에 위치한 조그만 솔섬까지 700m를 케이블에 매달려 하강하는 시설이다. 짚라인을 타고 상공에서 내려다본 명사십리 해변은 하트 모양을 띄고 있어 연인들에게 인기가 많다. 짚라인의 종착지인 솔섬에서 옛시절 선유도에 유배된 선비가 망주봉에 올라 한양 쪽을 바라보며 임금을 그리워하였다는 설화를 떠올리며 망주봉과 명사십리 해변의 경관을 잠시 감상하는 것도 선유도 해수욕장만의 색다른 매력을 즐기는 방법. 부드러운 돌들이 가득 ‘옥돌해변’ 선유도의 옥돌해변은 선유1구 마을에 위치한 작은 해변으로 모래사장이 아닌 부드러운 옥돌과 주변의 기암괴석들이 연출해내는 풍광이 아름다워 점차 입소문을 타고 있는 명소다. 해안절벽에 데크길이 조성되면서 산책하기가 좋으며, 아기자기 작은 섬들과 해변이 연출하는 경관이 아름다워 마을에서는 '신선둘레길'이라고도 부른다. 햇빛에 반짝이는 돌들이 가득한 해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일상에서 한가로운 정취를 즐겨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이자 힐링이다. 옥돌해변과 해안산책로에서 바라보는 선유도의 노을 또한 아름다워 낮시간 해수욕을 마치고 해질녁 방문하는 것도 추천되고 있다. ◇바다 위도 걷고 대장봉 배경삼아 인생 컷도 찍고 선유도와 장자교를 연결하는 장자교스카이워크는 1986년 개통됐던 장자교를 지난해 스카이워크로 새롭게 리모델링하면서 인기를 끌고 있는 장소이다. 바다 위 투명유리 위에서 대장봉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남기고, 장자도 천년데크를 지나 대장봉에 오르면 고군산군도의 풍광이 한눈에 펼쳐진다. 대장봉 정상에서는 고군산군도의 절경을 360도 모든 방향에서 전망하며 신선이 된 듯한 감상을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숨은 매력으로 꼽히고 있다. 해질녘 전국 최고의 노을명소 ‘선유낙조 ’ 낮시간 시원한 물놀이와 짚라인 체험을 즐겼다면 해질녘 고군산의 노을 감상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고군산군도의 아름다운 절경 8선을 이르는 ‘선유8경’ 중 제1경은 ‘선유낙조’이다. 또한 망주봉은 낙조의 아름다운 경관 가치를 인정받아 명승으로 지정되었을 만큼 선유도의 노을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고군산군도 어느 지점에서나 노을 감상이 가능하지만 무엇보다 명사십리 해수욕장과 솔섬데크, 장자교스카이워크, 옥돌해변 명품 데크길 등을 명소로 추천한다. 유람선 타고 고군산 바다 누비다 바다와 좀 더 가까이 하고 싶다면 유람선을 타면 된다. 선유도에서 유람선에 오르면 1시간 남짓 선유도-장자도-관리도-방축도-명도에 이르는 고군산 해상을 유람하며 육지에서와는 또 다른 모습의 고군산 바다를 감상할 수 있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갈매기떼를 만나고, 운이 좋다면 갈매기와의 인증샷도 남길 수 있다. 주요 관람 포인트별로 진행되는 선장의 간단한 설명은 유람여행의 재미를 더한다. 육지에서는 보이지 않는 말도-보농도-명도, 광대도-방축도를 연결하는 해상인도교와 인어상(방축도)‧독립문바위(방축도)‧ 거북바위(횡경도) 등 고군산군도의 명물을 만나는 기회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K-관광섬으로 떠오른 말도‧명도‧방축도 섬여행의 매력을 오롯이 느끼고 싶다면, 장자도 선착장에서 고군산군도 서쪽으로 향하는 여객선에 몸을 실으면 된다. 관리도‧방축도‧명도‧말도 등 고군산 서쪽 섬들은 장자도에서 불과 15분~30분이면 갈 수 있다. 군산항에서는 2시간~2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캠핑족이라면 해안절경을 그대로 담고 있는 관리도 캠핑장에서 백패킹을 즐겨보자. 고군산 섬트레킹 1번지 방축도는 산책로를 따라 무인섬 광대도와 연결된 출렁다리까지 트레킹하기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다. 특히 출렁다리에서 내려다보는 독립문바위의 경관과 광대도까지 건너가며 즐기는 아찔한 체험은 방축도 여행의 재미난 요소이다. 명도에서는 마을 산책로를 따라 오진여 전망대와 구렁이 전망대로 갈 수 있으며, 구렁이 전망대에서는 말도와 보농도가 한 눈에 보인다. 간조 시에는 무인섬 광대도까지 바닷길이 열리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고군산군도의 끝섬 말도에서는 1909년 설치되어 1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말도 등대와 바위섬 정상의 한 그루 소나무 천년송, 해안절벽의 습곡구조 등 이색 볼거리가 가득하다.

  • 기획
  • 이환규
  • 2024.07.25 14:26

[참여&공감 2024 시민기자가 뛴다]세계 음악을 듣는 삶에 대하여

세계 음악을 다양하게 접하는 삶은 어떤 삶일까, 어쩌면 이게 무슨 엉뚱한 말장난인가 할 수 있다. 세계음악? 그게 생활과 무슨 연관이냐고 할 수 있다. 그럼 다른 예를 들어본다. 안전한 보행자 인도가 있는 도시, 자연주의 놀이터가 있는 도시, 쾌적한 도서관이 많은 도시, 가깝게 산책할 수 있는 공원이 있는 도시를 떠올리면 누구나 그런 곳은 사람의 삶을 편리하고 풍요롭게 만들 것이라고 인정한다. 반대 상황도 그려 보자. 주차공간이 부족해 불법주차가 많아 걷기 힘든 도시, 삐걱거리는 녹슨 놀이기구만 있는 놀이터, 환기도 되지 않는 어두침침한 도서관, 산책할 수 있는 공원 하나 없이 빌딩만 빼곡한 도시...잠시 상상만 해도 긍정 의욕이 감소한다. 약간의 과장을 포함해서 말하자면, 필자는 풍요로운 기반시설이 지역민들의 삶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듯 다양한 세계음악을 듣는 것, 즉 다양한 문화를 만나는 것도 유사한 영향을 준다고 믿고 있다. 물론 다른 문화를 접하고, 이해하고, 수용하기까지는 시간의 축적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지역(도시)의 교육, 복지, 문화예술, 환경 등의 방향성은 당장도 중요하지만 장기적인 계획과 지속성이 필요하다. 축적의 힘 때문이다. 어디든 지역마다의 고유한 전통예술이 내려오기 마련이지만, 전북은 지역 곳곳에 판소리, 시조, 줄풍류를 이어 들노래, 풍물굿 등 문화예술적 유산이 풍부하다. 그런 조건이 전주대사습놀이와 같은 전국적인 국악경연대회를 가능하게 했고, 전주세계소리축제와 같은 국악중심의 세계음악축제를 존재하게 했다. 전주세계소리축제에 ‘세계’를 붙이게 된 이유는 아마도 양가적인 바람을 담고 있을 것이다. 전주세계소리축제를 통해 세계 문화예술과 동등하게 판소리를 비롯한 한국전통음악을 알리고 싶은 바람과 우리가 펼치는 축제의 판 속에 세계의 다양한 음악을 소개하고자 하는 바람이 공존한다. 전자는 ‘우리것이 좋은 것이야.’를 외치며 이러한 문화자산이 있는 전북특별자치도의 가치와 경쟁력을 자랑하고, 후자에서는 전북특별자치도민들이 소리축제와 같은 문화사업을 통해 열린 문화적 소양이 있는 행복한 지역 생활을 누리기 바랬을 것이다. 물론 관광활성화, 지역예술가 성장, 국제교류 활성화 등 더 많은 기대와 요구들이 연결되어 있지만 큰 맥락에서의 첫 출발은 ‘세계 속의 소리, 우리 소리의 세계화’로 짐작된다. 이런 지역의 여건과 기대로 인해 소리축제는 2001년에 시작되었고, 8월 14일부터 18일까지 23회 소리축제를 코앞에 두고 있다. 올해는 13개국 13개의 해외 단체가 전북을 방문할 예정인데, 폴란드, 네덜란드, 아일랜드, 이탈리아, 일본, 베트남, 태국, 말레이시아 등 다양한 나라에서 미지의 음악 혹은 한번쯤은 들어봤을 음악이 소개될 것이다. 그 5일간의 축제판에 초대된 해외 예술가들은 지금 한창 한국이라는 나라를 검색하고, 자신들의 무대를 상상해 볼 것이다. 축제는 관객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도 즐겨야 판이 살아난다. 그들도 역시 ‘우리의 음악과 문화를 알리고 싶다’는 우리의 마음과 다르지 않은 뜻을 품고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 대한민국 전주로 날아온다. 서로 다르지만, 음악과 예술로 소통할 수 있기에 우리는 그들을 초대하고, 환대하고, 호기심으로 경청한다. 축제판에서는 평가와 판단을 멈추고 지금은 우리 삶에 자극과 전환를 줄 수 있는 순간이라 생각하고 즐겨야 한다. 그런데 맘껏 즐기는 것은 좀처럼 쉽지는 않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노래와 춤을 좋아하긴 하지만 부끄러움을 많이 타고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다. 해외 음악이 어렵고 익숙하지 않아서만은 아닌 것 같다. 전국노래자랑을 봐도 흥이 넘쳐 춤추는 몇몇 어르신을 제외하고는 얌전히 앉아서 쑥쓰러운 얼굴을 가리며 박수만 치는 관객이 대부분이다. 가끔 국제교류 공연 기획자들은 “한국 사람이 가장 일으켜 춤추게 하기 어려운 관객”, “예술가보다 놀줄 아는 해외 관객들을 초청하고 싶다.”는 말을 하곤 한다. 물론 MZ세대가 열광하는 싸이콘서트나 레전드 팝스타 공연이나 축제는 제외하고 말이다. 사실 판소리와 국악, 해외 민속음악이나 소위 월드뮤직이라고 하는 분야는 알면 알수록 즐거움이 증가하는 장르이다. 대중음악이나 클래식처럼 즉각적인 감정 몰입이나 공감이 쉽지 않다. 하지만 한번 알아가기 시작하면 그 매력에 두 손을 모르게 되는 장르임에는 틀림없다. 소리축제는 올해 처음으로 ‘월드뮤직 아카데미’라는 공연과 강의의 중간 형태의 수업(?)을 진행했다. 누구나 익숙하지 않은 세계음악과 악기에 대해 알리는 것이 결국 소리축제를 찾는 마니아 관객 확보에 효과있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물론 평일 저녁에 4주간 과연 도민들이 관심있을까? 축제를 앞두고 괜한 사업으로 힘을 빼는 것이 아닐지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웬걸, 수강 신청을 시작하자 50여석의 객석이 찼고, 매회차 반짝이는 도민 수강생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아르헨티나의 반도네온(실제는 독일이 고향이라고 함), 인도의 시타르, 아일랜드의 휘슬과 아코디언, 중국의 비파를 주제로 진행된 아카데미에서는 “아~ 그렇구나. 아~”라는 알아감의 탄성이 지속되었다. 4주를 모두 참석한 충성 관객 비율이 높았고, 어느 관객들은 일주일 한 번의 외출을 위해 한껏 멋을 부리기도 했고, 1시간이나 일찍 도착해서 앞자리를 사수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예술가를 마주하는 것을 부끄러워 했지만, 점점 궁금한 점을 직접 묻기도 하고 사진을 같이 찍기도 하며, 소리축제 응원군이 되어주었다. 축제를 준비하는 스태프들도 좋은 경험이었다. 소리축제 기간에는 모든 직원들이 평균 4Kg씩 강제 다이어트가 될 만큼 바쁜 일정을 보내기 때문에, 관객 한사람 한사람과 소통하거나 관찰하기 어렵다. 그런데 작은 사업을 통해 도민의 다양한 바람과 만족, 공감을 마주하고 아카데미 수업도 같이 들으며 관객과 소통하는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 4주간 세계 음악을 듣는 삶은, 그 시간에 머물지 않고 흐르는 우리의 삶과 일터에서 타인을 대하는 태도와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포용의 여유를 주었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자신의 소양을 확장하고자 배우고 찾아가는 지역민들이 있는 도시, 그들이 살아가는 도시의 분위기는 바로 지역의 경쟁력, 차별성의 작은 시작이 아닐까. 곧 축제 판이 시작된다. 관객들이 춤을 추었으면 한다. 아일랜드 켈틱 음악에, 이탈리아 타란타 지역의 민속음악에, 혹은 우리나라 뽕짝의 대가 이박사의 탬버린 장단에, 김반장의 신들린 드럼장단에 춤을 추었으면 좋겠다. 춤은 흥미 없고 수준 높은 공연작품을 보거나 유명예술가를 만나고 싶다면, 세계적인 연주자 정경화&임동혁의 듀오 리사이틀, 대니구&조윤성트리오, 음악극 ‘적로’를 놓치지 말자. 추임새를 외치고 싶다면 판소리 다섯바탕에서 “얼씨구, 좋다”를 외쳐보자. 어린이에게 새로운 체험을 안겨주고 싶다면 어린이소리축제에서 악기체험, 재활용음악극을 찾아보자, 분명 엄마가 더 즐거운 시간이 될 것이다. 소리축제의 판은 우리 지역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위한 특권이다. 부디 놓치지 말고 일년의 한번 축제를 풍성하게 즐기시길 바란다! 세계음악을 듣는 삶은 분명 우리에게 행복감을 안겨줄 것이다. 한지영 (사)전주세계소리축제 콘텐츠운영부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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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24 16:40

[팔도 건축기행] (15) 마산 양덕성당

마산 양덕성당은 대한민국 현대 건축의 거장 고(故)김수근 건축가의 종교 건축 서막을 연 공간이자 불광동성당, 경동교회와 함께 그의 3대 종교 건축물로 꼽힌다. 마산역에서 도보 7분. 잠깐 걷다보면 빼곡히 들어선 아파트와 건물 사이 위치해 있는 양덕성당을 발견할 수 있다. 마산 양덕성당은 45년여 세월 동안 도민들과 시대를 함께 살아오면서 어떤 이에게는 평안과 위로를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 종교를 믿거나 믿지 않아도, 가난한 마음일 때도 주저 없이 갈 수 있는 공간, 이곳에서 살아갈 힘을 되뇌인다. 다른 누군가에게는 건축학적 미학을 발견하는 즐거움과 경이로움을 안겨준다. 지난주 종교적으로도 미학적으로도 건축물의 가치를 발하고 있는 양덕성당을 다녀왔다. ◇45년 지역민 삶과 애환 스민 곳=1970년대 마산은 수출자유지역으로 지정됐다. 노동집약산업인 섬유, 의류, 봉제, 전자 등 일본기업들을 유치하면서 많은 노동자들이 마산으로 몰려들었다. 양덕동은 한일합섬과 수출자유지역이 가까워 가난한 노동자들이 셋방을 얻거나 기숙시설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동네였다. 일에 지친 노동자들을 위한 주거와 복지, 교육 등이 현안 문제로 떠올랐다. 당시 박기홍(Josef Platzer) 양덕성당 주임신부는 마산교구로부터 허락을 얻고 고향인 오스트리아 그라츠 교구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아 가톨릭여성회관을 지었다. 가톨릭여성회관은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노사문제 상담부터 인간다운 삶을 위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과 최소한의 복지를 위한 주거 지원에 이르기까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마산교구가 양덕동에 본당을 신설하기로 하고 박기홍 신부를 본당신부로 임명했다. 그는 임시성당을 가톨릭여성회관 안에 두고 회관 강당에서 미사를 하며 본 성당 설계를 계획했다. 이때 그는 회관 길 건너편에 새 성당 부지를 마련하고 김수근에게 마산자유수출무역지역에 있는 노동자들을 위한 성당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지난 2001년에 나온 '양덕성당 25년사'를 보면 박 신부의 부지 매입 당시 일화가 나온다. 그는 "부지를 사고 며칠 후 성당 근처에 마산역이 들어선다는 정부 발표가 나왔다"며 "한 주 만에 땅값이 두 배로 치솟았고, 일 년 뒤에는 열 배로 뛰었다"고 회고했다. 그가 제시한 성당의 기본 성격은 '화해와 축제의 인간공동체를 위한 공간'이었다. 김수근은 20대 중반의 수습 건축가 승효상을 책임 디자이너로 지목하면서 양덕성당 건축을 함께 했다. 박 신부는 29차례 서울과 마산을 기차로 오가면서 성당 건축 설계를 위해 소통했다고 한다. 이 같은 소통을 바탕으로 약 9개월 동안 설계가 이뤄졌고 1978년 11월 26일 착공, 1년 뒤인 1979년 11월 25일 마산 양덕성당이 헌당됐다. 이후 일본 건축잡지를 통해 전세계에 양덕성당이 알려지게 되면서 김수근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양덕성당 건축에 참여했던 승효상은 훗날 한 에세이에서 양덕성당에 대한 애정을 이렇게 담아냈다. "준공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곳저곳 둘러보고 있는데, 인근 공장에서 일하는 듯한 한 젊은 여성이 수심 가득한 얼굴로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가 한참 후 다시 나왔을 때 밝은 얼굴로 바뀌어 있는 걸 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만든 공간이 이 여성을 바꾸는데 도움이 되었을까요? 제게 부과된 사명을 조금이나마 행한 듯하여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김수근 종교건축의 서막=양덕성당 입구에 들어서면 건물외관의 붉은색 벽돌 향연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외관을 자세히 살펴보면 각자 다른 질감을 내고 있다는 걸 금방 확인할 수 있다. 먼저 하단부는 깬 벽돌을 사용해 거칠고 강한 질감으로 마치 석재를 쌓아 올린 느낌을 통해 기단이 튼튼해 보이면서도 안정감을 준다. 또 바로 서있지 않고 기울어진 느낌으로 설계돼있다. 반면 상단부에는 깔끔하게 마감된 벽돌을 써서 솟은 느낌을 주면서 하단부와 분명하게 분리시키고 있다. 여기에 6개의 면으로 분할한 벽면들을 각각 달리 처리해 자유로운 형태를 가진 단위 공간들을 조합해나가면서 원형 느낌의 성당을 갖추고 있다. 김수근이 양덕성당의 이미지를 '바위산에 핀 수정꽃'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의도적으로 성당의 하단부를 비스듬한 매스로 처리해 건물이 바위산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설계했다. 성당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면 이미지가 더욱 선명하게 그려진다. 성당의 중심 꼭대기에 꽃봉오리가 보이고 그 주변으로 건물을 감싸는듯한 꽃잎 형상이 나타난다. 지붕 역시 원래는 벽돌로 지어졌지만, 보수 등의 이유로 현재는 금속패널로 덮여 있다. 벽돌과 철제의 이질감과 함께 설계자가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진 원형을 볼 수 없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제 내부로 들어가 본다. 신성한 공간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과정이 필요하다. 성당으로의 접근은 긴 램프(경사로)를 통해 한층 높은 곳에서 이뤄진다. 그 외 나머지 회합실, 부속건물 등 나머지는 지상에서 접근하도록 했다. 신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을 구분하고 있는 걸까. 마음을 가다듬고 경사로를 천천히 올라가다 보면 커다란 십자가를 눈높이에서 마주할 수 있다. 현재는 십자가가 처마에 가려 있지만 예전에는 시원하게 볼 수 있었다. 십자가 양 옆으로 세워진 기둥은 마치 십자가를 쥐고 기도하고 있는 손을 연상케 한다. 성당에 들어가면 절제된 빛에 의해 빛과 어둠의 대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측창과 천창에서 미세하게 스며드는 빛이 내부의 종교 건축 특유의 엄숙함과 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천정을 올려다 보면 내부의 철근콘크리트 기둥이 상부의 볼트형식으로 연결되면서 조형미를 만들어내고 있다. 천장 사이 사이 만들어져 있는 천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중심에 있는 십자가에 집중된다. 좁은 공간이지만 회중과 회랑 공간의 높낮이를 활용해서 섬세하고도 다양하게 공간 분리를 해냈다. 성당에 또하나 나있는 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보면 성당 뒤뜰이 나온다. 성전 뒤뜰에는 익명의 신자가 기증한 한복 입은 성모자상을 마주할 수 있다. 건물 주변에 계속 이어지는 동선들을 통해 성당 주변을 산책하는 즐거움도 느낄 수 있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거친 붉은 벽돌바닥과 틈새에 번져 있는 이끼에서 지나온 시간을 유추하며 상념에 젖는다. 양덕성당에 들러 각기 다른 시각으로 건축물의 가치를 누려보길 바란다. 경남신문=한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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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22 14:19

[뉴스와 인물] 정강선 파리올림픽 선수단장 “최상의 컨디션에서 최대의 성과 거두도록 헌신”

전 세계인의 축제인 제33회 파리올림픽이 오는 26일 개막식을 시작으로 8월 11일까지 각 국의 명예를 걸고 출전한 선수들이 선의의 경쟁을 펼친다. 전북특별자치도체육회 정강선 회장은 이번 올림픽에 대한민국 선수단을 진두지휘하는 선수단장으로 선임됐다. 특히 이번 정강선 회장의 선수단장 선임은 전북 첫 출신으로 알려져 높아진 전북 체육의 위상도 엿볼 수 있게 됐다. 정강선 올림픽 선수단장은 ‘선수의 입장에서 선수를 최우선’을 기치로 내걸었다. 올림픽 선수단장이라는 중책을 맡은 정강선 단장을 만나 이번 올림픽에 임하는 각오와 목표, 선수들의 최상의 컨디션을 위한 방안 등에 대해 들어봤다. 올림픽 선수단장으로 선임된 것을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네. 감사합니다. 2024 파리하계올림픽대회 대한민국 선수단장이라는 막중한 책무를 맡게 된 것을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파리에서 돌아오는 그 날까지 자랑스러운 우리 선수단이 후회 없이 최고의 경기력을 펼칠 수 있도록 한 치의 소홀함이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특히 ‘선수의 입장에서 선수를 최우선’을 기치로 내걸고 원 팀, 원 드림이 될 수 있도록 일체의 업무를 꼼꼼히 챙기겠습니다.” 선수단이 역대 최소 규모인데 어떻게 구성됐나요. 그리고 전북지역에서는 어느 종목의 선수들이 출전하나요. “이번 올림픽에는 22개 종목에 선수와 임원 등 총 262명(선수 144명, 임원 118명)이 ‘원 팀 코리아’로 출전합니다.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이후 역대 최소 인원입니다. 이는 출전 선수 규모가 상대적으로 큰 단체 구기종목에서 출전권 확보가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인데, 여자 핸드볼만 유일하게 단체 구기종목에 출전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전북이 고향이거나 전북을 연고로 뛰고 있는 8명의 선수가 올림픽에 나섭니다. 자전거 종목의 김유로(국토공사)와 송민지(삼양사), 역도 유동주(진안군청), 복싱 오연지(울산광역시체육회), 사격 김예지(임실군청)와 양지인(한국체대), 배드민턴의 서승재(삼성생명)와 공희용(전북은행) 등입니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자랑스러운 선수들이 최고의 경기력을 펼칠 수 있도록 국민들의 많은 성원과 관심 부탁드립니다.” 이번 올림픽에서 우리 선수단의 목표는. “5개 이상의 금메달, 종합순위 15위 이내 입상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양궁과 배드민턴, 펜싱, 사격, 수영, 태권도 등에서 메달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올림픽의 경우 최고의 기량을 가진 세계 각 국의 선수들이 출전하는 만큼 실력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얼마나 자신감을 갖고 최상의 컨디션으로 경기에 임하느냐에 따라 깜짝 올림픽 스타가 배출되는 반전도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국민들의 성원과 관심, 응원이 선수들에게 전달되면 기대 이상의 성적도 나올 것입니다.” 파리 날씨가 매우 덥다고 합니다. 선수단을 위한 대책은 마련하셨나요. “이번 올림픽의 최대 변수는 바로 무더위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 올림픽은 저탄소 친환경 올림픽을 구현하기 위해 선수촌에 에어컨이 설치되지 않았습니다. 올림픽조직위원회에서는 기술을 통해 외부보다 7도 가량 낮추는 시스템과 각 방마다 선풍기를 배치한다고 했지만 40도를 넘나드는 더위 속에서 각 국의 선수들이 폭염과의 사투를 벌일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친환경 특수 냉매제를 활용해 제작한 쿨링 재킷과 쿨링 시트 등을 준비했습니다. 에어쿨러도 현지에서 확보해 배치할 계획입니다. 쿨링 재킷은 선수들의 열사병을 방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혹여 부상을 입었을 때 냉찜질 효과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또 급식지원센터 운영을 통해 더위를 이겨낼 수 있는 식단 제공 등 최적의 환경을 만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선수들을 위해 가장 중점적으로 신경 쓰고 있는 부분은. “선수들이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도록 5대 케어풀(CARE-FULL) 프로젝트를 시행하고 있는데 심리, 회복, 영양, 균형, 커스터마이징 총 4대 전문 케어팀이 가동 중입니다. 세부적으로 보면 심리팀은 스포츠의학, 심리전문가 상담을 제공하며 회복팀은 종목별 맞춤형 회복 전략 제시 및 회복 전문가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영양팀은 선수 개개인 맞춤형 식단을 제공하고, 영양 섭취법을 교육하고 있습니다. 균형팀은 필라테스 강습을 지원하고 있으며 커스터마이징팀은 종목별 수요 맞춤형 지원에서 총력을 쏟고 있습니다.” 현지에서 ‘팀 코리아 파리 플랫폼’을 운영한다고 들었습니다. “‘팀 코리아 파리 플랫폼’은 사전훈련 캠프와 급식지원센터를 아우르는 용어로, 지난 2012년 런던올림픽 이래 12년 만에 마련됐습니다. 팀 코리아 플랫폼에서는 단순한 시차 적응을 위한 시설 차원을 넘어 진천국가대표선수촌과 같은 수준의 안정되고 체계적인 훈련시설, 숙박, 급식, 의료, 편의, 수송 등의 서비스가 선수들에게 제공됩니다. 팀 코리아 플랫폼이 구축 된 퐁텐블로(지역명) 국가방위스포츠센터(CNSD)의 훈련시설과 지원 인프라를 통해 우리 선수들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최상의 상태로 경기에 출전하는 것으로 승리로 가는 여정에 선수단 맞춤형 올인원서비스가 지원되는 것입니다.” 또 코리아하우스도 운영한다고 하는데, 이곳은 무슨 역할을 하나요. “대한체육회가 주최하는 코리아하우스는 국내 유치 대회 홍보 및 국제스포츠 교류를 목적으로 운영돼 왔는데 파리 올림픽 코리아하우스 역시 대한민국 스포츠와 문화, 관광, 음식, 예술 등을 전 세계에 알리는 스포츠외교 활동이 될 것입니다. 코리아하우스는 파리 시내에서 운영되며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대한민국의 매력을 뽐내게 됩니다. 또 팀 코리아 선수단을 응원하는 단체 응원전과 메달리스트 기자회견도 진행됩니다.” 끝으로 국민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영광스럽고 기쁘기도 하지만 선수단장이라는 막중한 책무를 맡게 돼 부담감도 큽니다. 그러나 올림픽은 지구촌 최대 스포츠 대회인 만큼 세계인이 하나 되는 축제가 될 수 있도록 선수들을 물심양면 지원하겠습니다. 특히 올림픽은 국가 간 선의의 경쟁을 펼치는 치열한 무대로 성적도 중요하지만 선수들이 그동안 수없이 많이 흘려 온 땀과 눈물이 기억되는 올림픽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경기장에서 보여 줄 자랑스러운 우리 태극전사들의 투혼과 열정에 국민들의 많은 성원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정강선 파리올림픽 선수단장 “선수들의 땀과 눈물 기억되길” 정강선 파리올림픽 선수단장은 “올림픽 기간 동안 우리 선수들이 안전하게 경기를 치르고, 최상의 컨디션으로 고른 활약을 펼쳐 그동안 선수들이 흘린 땀과 노력이 파리 올림픽에서 기억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선수의 입장에서 선수를 최우선’을 기치로 내건 정 단장은 “올림픽 기간 동안 선수단에 발생할 수도 있는 위기를 파악해 예방 및 관리 계획 등을 수립했다”면서 “도쿄 올림픽 당시 선수단 지원부단장을 역임했던 경험을 토대로 선수들이 안전하게 경기에 임할 수 있도록 이끌겠다”고 말했다. 그는 “올림픽은 실력이 입증된 각국의 선수들이 출전하는 만큼 영원한 승자도, 패배도 없는 각본 없는 무대”라며 “선수들이 얼마나 긴장감과 부담감을 떨쳐내느냐에 따라 승패가 엇갈리는 만큼 선수들이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오롯이 선수단에만 집중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성적보다는 과정이 중요하지만 솔직히 이번 올림픽에서 선수들이 고른 활약을 펼쳐 대한민국 체육의 위상을 드높였으면 한다”며 미소를 지었다. 고창 출신인 정 단장은 고창고와 우석대 체육학과, 경희대 대학원(체육학 석사), 전북대 대학원(체육학 박사)을 졸업했다. 그는 2020 도쿄 올림픽 선수단 지원부단장과 2023 전북아태마스터스대회 조직위 부위원장, 전국시도체육회장협의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피앤 대표이사와 전북특별자치도체육회장을 맡고 있다.

  • 기획
  • 강정원
  • 2024.07.21 17:22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⑩ 명록, 나주명록, 함평갈동명록

<명록>, <나주명록>, <함평갈동명록> 이 세 건의 문서는 현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소장하고 있다. 이 문서들은 1980년대 원광대 박순호교수로부터 입수되었다. 이 문서들은 동학농민군으로 참여한 사람들이 직접 남긴 문서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명록>은 1894년 7월에 작성된 것으로 <나주명록>이나 <함평갈동명록>보다 먼저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문서들 중에 제일 먼저 작성되었다. 작성 주체는 명확하지 않지만 동학농민군이라고 보여진다. 표지에는 갑오 7월이라 하여 1894년 7월 작성되었다. 이 <명록>에는 45명의 성명(姓名)과 자(字) 본관(本貫) 거주지(居住地) 그리고 나이 등이 기록되어 있다. 대부분은 나주거주(羅州居住)로 표시되어 있고, 마지막 7명은 함평(咸平)으로 표기되어 있다. <명록>에 기록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명록(名錄)>(갑오 7월(1894년 7월)) 순서 성명 자(字) 본관 거주지 나이 1 김진선(金鎭善) 군명(君明) 부안 나주 50 2 김진묵(金鎭黙) 군백(君伯) 부안 나주 47 3 김세표(金世表) 치도(治道) 부안 나주 43 4 김진방(金鎭邦) 정만(正萬) 부안 나주 37 5 신석규(申錫圭) 우범(禹範) 평산 나주 35 6 김진필(金鎭必) 명오(明五) 부안 나주 35 7 하계헌(河啓獻) 도숙(道淑) 진주 나주 31 8 김낙환(金洛煥) 도균(道均) 부안 나주 29 9 김낙윤(金洛允) 응화(應化) 부안 나주 26 10 신석필(申錫必) 덕중(德仲) 평산 나주 36 11 황성룡(黃成龍) 여화(汝化) 장수 나주 36 12 고기학(高起學) 경선(景善) 장택 나주 35 13 이신수(李信守) 명선(明善) 전주 나주 34 14 김진대(金鎭大) 경환(景換) 부안 나주 34 15 김명국(金明國) 재원(在元) 광산 나주 44 16 김맹종(金孟宗)   부안 나주 17 17 김상업(金相業) 명숙(明叔) 광산 나주 47 18 이영근(李永根) 만서(萬書) 전주 나주 42 19 김진환(金鎭煥) 명환(明煥) 부안 나주 40 20 김진우(金鎭佑) 윤천(允天) 부안 나주 37 21 임양서(林良書)   팽택 나주 37 22 김진한(金鎭漢) 성칠(成七) 부안 나주 37 23 신석봉(申碩逢) 덕행(德行) 평산 나주 33 24 김상열(金相㤠) 백현(白賢) 광산 나주 32 25 황정묵(黃丁默) 운오(雲吾) 장수 나주 36 26 신영모(申永謀) 공진(公盡) 평산 나주 36 27 김진상(金鎭相) 경선(景善) 부안 나주 37 28 박종택(朴宗擇) 경문(景文) 밀양 나주 31 29 박봉옥(朴鳳玉) 봉래(鳳來) 밀양 나주 38 30 김낙중(金洛仲) 경중(敬仲) 부안 나주 19 31 김낙운(金洛雲) 동몽(童蒙) 부안 나주 19 32 김창용(金倉用) 동몽(童蒙) 광산 나주 17 33 신효재(申孝才) 동몽(童蒙) 평산 나주 14 34 김막동(金幕童) 동몽(童蒙) 김해 나주 23 35 박몽국(朴蒙國) 동몽(童蒙) 밀양 나주 21 36 김재현(金才鉉) 동몽(童蒙) 광산 나주 23 37 박몽실(朴夢實) 동몽(童蒙) 밀양 나주 18 38 박장룡(朴長龍) 동몽(童蒙) 밀양 나주 17 39 이돈섭(李敦燮) 오겸(五兼) 함평 함평 28 40 이돈창(李敦倡) 사욱(士郁) 함평 함평 25 41 이목헌(李穆憲) 화경(和景) 함평 함평 26 42 송염신(宋炎臣) 동몽(童蒙) 신평(?) 함평   43 이유영(李儒英) 성업(成業) 함평 함평   44 이유수(李儒洙) 성빈(成彬) 함평 함평   45 한백룡(韓白龍) 동몽(童蒙)   함평   ‘명록’이란 이름을 기록해 놓았다는 의미이다. 자(字)가 있는 경우는 성인으로 결혼을 했다는 의미이며, 동몽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성씨별로 보면 부안김씨가 29명으로 가장 많고, 평산신씨 5명, 광산김씨 5명, 밀양박씨 5명, 전주이씨 2명, 장수황씨 2명, 진주하씨 1명, 장택고씨 1명, 평택임씨 1명, 김해김씨 1명, 함평이씨 5명, 등이다. 거주지는 대부분 나주이고, 7명은 함평이다. 연령별로 보면 10대부터 50대까지로 가장 연장자가 가장 먼저 기록되어 있다. 이 문서는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해 놓았는데 이는 어떤 목적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확인되지는 않는다. 주어진 자료만을 가지고 해석해 보자면 1894년 7월 나주와 함평지역에서 무엇인가 행동을 하기 위해 사람들의 명단을 적어놓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나주명록>.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그런데 다음 문서 <나주명록>을 보면 이것은 어떤 목적에서 기록되었을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나주명록>은 <명록>이 작성된 후 2개월이 지난 1894년 9월에 작성되었다.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나주명록(羅州名錄)> (갑오 9월(1894년 9월) 순서 성명 직책 순서 성명 직책 1 김진선(金鎭善) 교장겸도금찰(敎長兼都禁察) 38 박장룡(朴長龍) 중정(中正) 2 김진욱(金鎭郁) 교수겸접주(敎授兼接主) 39 김창용(金倉用) 대정(大正) 3 김세표(金世表) 도집(都執) 40 신효재(申孝才) 중정(中正) 4 신석규(申錫圭) 도집겸금찰(都執兼禁察) 41 김정섭(金貞攝) 집강(執綱) 5 신석필(申錫必) 교수(敎授) 42 김진구(金鎭龜) 집강겸교수(執綱兼敎授) 6 김진방(金鎭邦) 교수겸교수(敎授兼敎授) 43 김진곤(金鎭坤) 집강겸교수(執綱兼敎授) 7 김진효(金鎭孝) 교수(敎授) 44 김진석(金鎭錫) 교장(敎長) 8 김진우(金鎭佑) 교수(敎授) 45 김만순(金萬順)   9 김상업(金相業) 교수(敎授) 46 김낙현(金洛現)   10 이신수(李信守) 집강(執綱) 47 김상수(金相秀)   11 고기학(高起學) 집강(執綱) 48 신옥랑(申玉郞) 대정(大正) 12 김낙환(金洛煥) 집강겸접사(執綱兼接司) 49 송재옥(宋在玉) 대정(大正) 13 김낙윤(金洛允) 집강금찰(執綱禁察) 50 김낙교(金洛敎) 대정(大正) 14 하계헌(河啓獻) 집강겸교수(執綱兼敎授) 51 김학성(金學成) 봉도(奉道) 15 황성룡(黃成龍) 교수(敎授) 52 김만엽(金萬葉)   16 김진대(金鎭大) 집강겸교수(執綱兼敎授) 53 김낙종(金洛種)   17 김명국(金明國) 교수(敎授) 54 김갑수(金甲秀)   18 김맹종(金孟宗) 집강겸교수(執綱兼敎授) 55 김자갈(金玆碣)   19 이영근(李永根) 교수(敎授) 56 김화조(金華祚)   20 김진환(金鎭煥) 교수(敎授) 57 이두성(李斗星) 중정(中正) 21 임양서(林良書) 집강(執綱) 58 장찬모(張贊謀) 도집(都執) 22 김진한(金鎭漢) 집강(執綱 59 백종삼(白宗三) 교수(敎授) 23 신석봉(申碩逢) 집강(執綱) 60 장양윤(張良允) 집강(執綱) 24 김상열(金相悅) 대정(大正) 61 김종선(金宗善) 교수(敎授) 25 최대현(崔大賢) 집강(執綱) 62 문영도(文永道) 집강(執綱) 26 김진상(金鎭相) 대정(大正) 63 송정권(宋正勸)   27 박종택(朴宗擇) 대정(大正) 64 이영규(李永奎)   28 황정욱(黃丁郁) 대정(大正) 65 조병규(曺秉圭)   29 김진호(金鎭湖) 집강(執綱) 66 장정영(張丁永)   30 박봉옥(朴鳳玉) 집강(執綱) 67 김남서(金南書)   31 신영모(申永謀) 집강(執綱) 68 김세복(金世福)   32 김낙중(金洛仲) 대정겸집강(大正兼執綱) 69 김진학(金鎭學)   33 김만동(金晩童) 중정(中正) 70 김봉서(金逢書)   34 김몽국(金蒙國) 중정(中正) 71 김재환(金在煥)   35 김재현(金才鉉) 대정(大正) 72 이상영(李相永)   36 김낙운(金洛雲) 대정(大正) 73 김세현(金世顯) 교장(敎長) 37 박몽실(朴夢實) 중정(中正) 74 김진필(金鎭必) 접사겸교수(接司兼敎授) <나주명록>에서 눈에 띄는 것은 명단에 포함된 사람이 45명에서 74명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명록>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포함되어 있다. 다만 <명록>에 함평 거주자들은 이어서 등장하는 <함평갈동명록>에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명록> 단계에서 <나주명록> 단계로 발전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나주명록> 단계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새롭게 직책이 부여되고 있다는 것이다. 전체 74명 중에서 18명을 제외한 56명에게 직책이 부여되고 있다. 이 직책은 바로 동학 교단의 접주, 접사, 도금찰, 교장, 교수, 금찰, 도집, 집강, 대정, 중정, 봉도 등이다. 이 직책을 받았다는 것은 동학을 받아들였다는 의미이며, 동학농민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1894년 9월은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동학농민군의 세력이 가장 강력했던 시기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직책을 받았다는 것은 동학농민군의 일원으로서 역할을 충실하게 했다는 의미이다. 7월에 작성된 <명록> 단계는 마을 공동체가 무엇인가 행동의 방향을 결정하기 위해 뜻을 모으고 그 뜻에 동의한 사람들의 명단을 적은 것으로 여겨진다. 9월 <나주명록> 단계는 동학농민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는 방향을 설정하고 동학을 받아들여 각각 직책을 받아 활동을 전개한 것이다. 즉 마을 공동체가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동학농민군과 함께 같은 방향으로 가겠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적극적으로 동학의 직책을 받은 것이라고 보여진다. <명록> 단계에서 <나주명록> 단계로 발전하면서 추가된 성씨는 최씨, 백씨, 장씨, 송씨, 조씨 등으로 큰 흐름은 기존 <명록> 단계를 기반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와 함께 <함평갈동명록>은 이들 <명록> 및 <나주명록>과 연관된 문서인데 작성 시기는 이 문서들보다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보여진다. 총 11명의 명단이 포함되어 있는데 <명록>에 있는 8명과 관련된 자(字), 나이, 본관이 기록되어 있고, 여기에 <나주명록> 단계에서 기록되어 있는 직책이 명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 문서보다 뒤에 작성된 것으로 보여진다. 여기에 <명록>, <나주명록>에는 없는 3명의 명단도 함께 기록되어 있다. <함평갈동명록(咸平葛洞名錄)> 순서 성명 자 나이 본관 직책 1 정안면(鄭安冕)       집강 접주 2 정해욱(鄭海郁)       집강 접사 3 김기섭(金琪燮)       집강 도집 4 이유영(李儒英) 성업(成業) 31 함평 교수 5 이유수(李儒洙) 성빈(成彬) 35 함평 집강 6 이돈섭(李敦燮) 오겸(五兼) 28 함평 집강 7 이돈창(李敦倡) 사욱(士郁) 25 함평 집강 8 이목헌(李穆憲) 화경(和景) 26 함평 집강 9 송염신(宋炎臣) 동몽(童蒙)   신평(?) 대정 10 한백룡(韓白龍) 동몽(童蒙) 24   대정 11 김진선(金鎭善)       강장(講長) 羅州 居 그렇다면 이러한 <명록>을 작성하고 이러한 활동의 방향을 전개한 주도세력은 누구였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그런데 이 세 건의 문서에 모두 등장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김진선이라는 사람이다. 그는 <명록>에서 가장 먼저 기록되어 있고 50세로 나이가 가장 많다. 그리고 <나주명록>에는 역시 가장 먼저 기록되어 있고 교장겸도금찰이라는 직책을 받고 있으며, <함평갈동명록>에는 마지막에 가로로 강장(講長)으로 기록되어 있다. 교장이나 도금찰은 열거된 직책 중에 상위의 직책이라고 볼 수 있으며, 강장은 나주에서 시작된 활동을 함평갈동까지 연결해주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김진선이 이러한 방향을 주도한 것이 아닌가 싶다. 김진선의 근거지와 함평갈동은 인접해 있다. 김진선이 부안김씨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동안 후손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김봉곤 교수가 '2021년 나주동학농민혁명 한일 학술대회'에서 <나주 동학농민군의 활동 재조명>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이들 부안김씨 후손들이 누구인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은 현재 행정구역상 광주광역시 광산구 본량면 양산리와 인근지역에 근거를 두고 살아왔다. 이 지역은 원래 나주에 속해 있었으나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속하였다.<명록>과 <나주명록>에서 집강겸접사로 활동한 김낙환의 고손이 김종후임이 <부안김씨대보>(1981)에서 확인된다. 김종후는 그동안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가 이러한 내용을 확인하고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에 유족 등록을 신청하였다. 심의위원회는 기존에 직권등록된 김낙환과 신청인 김종후의 고조부 김낙환이 동일인임을 확인하고 김종후와 함께 신청한 유족들을 모두 등록하였다. <명록>, <나주명록>, <함평갈동명록>은 얼마 남아 있지 않은 동학농민군이 직접 생산한 문서라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그리고 문서에는 동학농민군의 이름과 직책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동안 유족들이 자신의 선조가 동학농민군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가 이 자료에서 이를 확인하고 동학농민군 후예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이병규(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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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18 15:22

[참여&공감 2024 시민기자가 뛴다]연동리 석조여래좌상에서 백제 미의식을 확인하다

'이 불상은 머리만 없어졌을 뿐 불신(佛身), 대좌(臺座), 광배(光背)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백제의 작품이다. 지금의 머리는 새로 만든 것이며, 불상의 현 신체 높이는 156㎝이다. 당당한 어깨, 균형잡힌 몸매, 넓은 하체 등에서 서툰 듯 하면서도 탄력적이고 우아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자락은 길게 내려져서 사각형의 대좌를 덮고 있는데, 앞자락은 U자형, 좌우로는 Ω형의 주름이 대칭으로 2단씩 표현되어 있다. 왼손은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구부려 가슴에 대고 오른손은 세번째와 네번째 손가락을 구부려 다리에 올려놓은 특이한 손모양을 하고 있다.광배의 중앙에는 둥근 머리광배가 볼록 나와있고 그 안에 16개의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바깥에는 방사선으로 퍼진 특징이 있다. 몸광배도 볼록하게 나와있고 바깥부분에는 불꽃무늬를 배경으로 7구의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다.이 석조여래입상은 대좌의 모습과 광배에 새겨진 무늬를 볼 때 장중하면서도 세련된 특징을 보여주는 600년경의 희귀한 백제시대 불상으로 그 의의가 높다.'(국가유산청 홈페이지 설명) 석조여래좌상은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삼기면 진북로 273(연동리)에 소재한 석불사 대웅전에 모셔져 있다. 현재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제4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7세기 전반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백제 최고·최대의 석불로 백제왕도 핵심유적으로 관리되고 있다.. 불상은 새로 제작한 두부를 제외하고 어깨선까지 156㎝, 무릎 너비는 172㎝, 무릎 높이는 48㎝, 가슴두께는 60㎝이며 화강암으로 제작되어 있다. 불신과 대좌, 광배로 구성되어 있고 절단된 불두를 승려형 불두로 대신하고 있어 다소 어색한 모습이다. 그러나 불상의 옷주름이 새겨진 방형대좌와 거대한 불꽃형상의 광배는 일찍부터 석조예술에 뛰어났던 백제 장인들의 석불제작 발전과정을 이해하는 중요유물로 평가된다. 연동리 석조여래좌상의 신체표현의 특징인 당당한 체구와 밀착된 불의 그리고 부드러운 옷주름의 곡선 등은 중국 수(타산석굴 본존불좌상/ 6c말)나 당(용문석굴 본존불좌상/7c 전반)의 양식과 닮아있고 일본 아스카 기 불상(법륜사 목조약사여래좌상/7c 후반)과도 흡사해 고대 불교문화 전래의 흐름을 증명하는 유물로 가치가 크다고 하겠다. 그리고 연동리 석불에서 주목되는 특징은 일반적 불상에서 보이는, 불상이 양쪽 어깨를 가린 착의법의 통견방식과 오른쪽 어깨를 노출하고 언쪽 어깨만 가린 착의법인 편단우견법이 아닌 불상의 양어깨에 걸쳐진 옷 위로 다른 옷자락이 일부를 덮는 이중착의(着衣)에 대한 표현이다. 기본적으로 연동리 석불은 오른쪽 어깨부분의 끝단을 표헌한 북위의 복제를 취하고 있어 중국의 영향을 받아들인 것으로 추정되나, 2매의 대의를 겹쳐입은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어 흥미롭다. 또한 환조상이여서 중국의 불상에서 알기 어려운 불상 뒷면의 조형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더불어 주목되는 것은 석불 가슴에 표현된 띠매듭이다. 이는 인도불상에서 볼 수 없는 표현으로 중국식(북위) 복제로 알려져 있으며, 이런 고리형 띠매듭의 형태는 6세기~7세기 백제 불상의 일반적 모습이다. 연동리 석조여래좌상의 첫만남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것은 거대한 규모의 연잎형 광배이다. 중심에 배치된 두광에 원, 12옆 연화문, 5중의 동심원문, 그리고 바깥 테두리의 화염문이 전면적으로 배치되어 탄성을 자아낸다. 결론적으로 연동리 석조여래좌상은 백제 조각의 미의식을 입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을 뿐만아니라 단순히 중국의 영향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고 이를 기초로 새로운 백제 양식을 토착화해서 이를 7세기 일본으로 전달한 분명한 증거를 보여주고 있다고 사료된다. 이런 의미에서 향후 우리가 해야할 일은 연동리 석조여래좌상의 최대한 원형에 가까운 보존과 복원의 문제이다. 잘려져 괴상한 형태로 복원된 불두의 모습과 손상된 불신과 광배의 모습에서 이런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자료에 의하면 연동리 석조여래좌상는 광배와 대좌의 물리적 풍화와 손상에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약화된 석재의 물성을 보강하고 향후 일어날 손상을 예방하는 것이 우선일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보강 보존처리는 문화유산의 가치와 원형 보존을 위해 최소한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또한 잘려져 나간 불두의 복원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사안으로 비록 완벽한 고증은 어려울 수 있으나, 제작 당시 백제불상의 모습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전문가의 의견을 모아 조속히 추진해야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영일 백제문화센터 파견 전북특별자치도 연구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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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17 15:28

고창군, 5대 전략산업과 세계유산 7관왕의 대업으로 날아올랐다

‘군민 모두가 행복한 활력 넘치는 고창’을 슬로건으로 힘차게 출범했던 민선8기 고창군이 출범 2년여 만에 초대형 프로젝트들을 잇따라 성공시키며 모두를 놀라게 하고 있다. 심덕섭 고창군수는 특유의 글로벌마인드와 도전정신으로 당면한 현안 문제점들을 해결하고, 활력 넘치는 고창을 만들기 위한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민선 8기 후반기를 맞아 고창군의 현재와 미래를 조명한다. ‘전북특별자치도 최초’ 삼성전자 유치 세계초일류 기업 삼성전자가 고창에 들어온다. MOU를 넘어 분양계약까지 마무리되며, 세계초일류 기업의 고창시대가 눈앞에 다가왔다. 지난 4월 3일 삼성전자㈜가 고창군 신활력산업단지 5만 5000평을 사들이는 분양계약을 체결했다. 삼성전자는 고창신활력산업단지 18만 1625㎡(축구장 25개 규모)를 매입해 자동화 기술이 접목된 첨단 물류센터를 건립한다. 삼성전자 유치는 고창은 물론 전북도민 모두의 숙원사업이었다. 때문에 심덕섭 고창군수를 비롯한 관련 부서의 열정과 노력이 더 크게 다가오고 있다. 세계유산도시 고창방문의해 대성공...1천만 관광객 시대 개막 심 군수는 지난해를 ‘세계유산도시 고창방문의해’로 선포하고, 연중 끊이지 않는 축제로 전세계 방문객을 끌어들이면서 꿈의 1천만 관광시대를 성공적으로 열었다. 주요 관광지와 음식점, 숙박업소, 거리 곳곳에 사람들이 몰리며 고창군에 활력이 넘쳤다. 올해도 지난해 성과를 바탕으로 ‘다시 찾고 싶은 고창’을 목표로 ‘2024 세계유산도시 고창’ 관광 홍보에 힘쓰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 7곳을 찾아 즐기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스탬프투어’로 젊은 관광객과 외국인이 많이 찾는 지역 관광 프로그램의 새로운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터미널 도시재생 혁신지구 국가시범사업 선정 고창군 도시재생 혁신지구 사업은 국비 250억 원과 공기업 등 1044억 원 등 총 1707억 원을 들여 2027년까지 추진한다. 고창군이 추진하는 단일 사업으로는 역대 최대급이다. 1층은 여객터미널이 새로 단장해 들어서고, 2층은 식당과 함께 꽃집, 제과점 등이 입주하고 청년종합센터와 다목적 복합공간도 자리 잡는다. 3∼4층에는 청년스타트업오피스와 베리앤바이오식품연구소, 소규모 컨벤션센터, 입주기업 및 협력기업 오피스, 전략연구소, 품질 검사기관 등이 들어선다. 이외에도 공공형 오피스텔(210세대), 디자인특화거리 등이 진행될 계획이다. 호남권 드론통합지원센터 선정 ‘호남권 드론통합지원센터’는 부지를 군에서 제공하지만, 시설건축과 운영은 국토부 산하 한국교통안전공단(TS)에서 맡게 된다. 시설투자와 운영비 모두를 국토부에서 내면서, 군의 재정적 부담이 없는 그야말로 알짜사업이다. 센터가 지어져 활성화되는 시점에는 센터를 이용하는 연간 교육 인원이 1000명, 자격시험 인원이 1만 5000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센터 내 드론 스타트업 기업들의 입주 공간도 마련될 예정이다. 용평리조트, 고창군에 사계절 휴양시설 짓는다 세계자연유산 고창갯벌이 드넓게 펼쳐지고, 명품 해송 산책로가 아름다운 고창군 심원면 일원에 복합리조트가 지어진다. 국내 최대 스키장 운영사로 잘 알려진 ‘㈜HJ매그놀리아 용평호텔앤리조트’가 고창군에 3500억 원 상당의 투자를 결정했다. 서해대교와 어우러진 서해바다와 세계자연유산 갯벌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고급호텔 등이 계획되면서 군민의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농촌인력난 안정화 고창군은 농촌인력 부족 대응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외국인계절근로자 도입’과 ‘농업근로자 인건비 안정화’를 안정적으로 시행 중이다. 올해 캄보디아, 베트남 등 전체 계절근로자 입국 인원은 무려 1500여명에 달한다. 이는 지난해 입국한 전체 계절근로자 600명의 2배를 뛰어 넘고, 고창군 성송면(1677명)의 전체인구와도 맞먹는다. 최근에는 대산면에 연면적 950.4㎡ 규모로 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기숙사도 전국 최초로 문을 열었다. 이어 2023년 8월 1일에는 전국 최초로 ‘고창군 농촌인력 적정 인건비 운영에 관한 조례’를 제정해 시행중에 있다. 시행 10개월차를 맞는 현재 고창군의 인건비는 남자 13만~14만 원, 여자 11만~12만 원선으로 인근 타 지자체에 비해 다소 낮게 유지되고 있다. 심덕섭 고창군수 "고창의 미래 위한 일이라면 뭐든 한다" 심덕섭 군수는 취임 후 ‘현장(將)’이란 별명을 얻었다. 농·어촌이 혼합되어 있고, 귀농인, 다문화, 여성, 노인, 아이 등등 다양한 현장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담아내야 한다는 게 심 군수의 군정 철학이다. 민원이 있는 곳이면 바다든 산이든 가리지 않는다. 공부하고, 소통하고, 노력하며, 항상 뛰어다닌다. 특히 아무도 시도해 보지 않은 ‘세계유산도시 고창방문의해’를 추진하면서 매월 쉼없이 이어지는 축제와 페스티벌 현장에 거의 살다시피 하며 ‘세계유산도시 고창’의 이미지를 전세계에 알린 일은 심 군수의 현장 리더십을 잘 보여준 사례로 꼽힌다. 심 군수는 또 아이디어 뱅크로 통한다. 젊은 시절 캐나다 대사관 공사와 프랑스OECD사무국, 영국 버밍햄대학교 박사 공부 등으로 경험했던 글로벌 시각으로 고창의 활력을 이끈다. “일에 대한 열정이 대단해 모든 군정 업무를 꼼꼼히 챙기는 스타일”이라는 게 군청 관계자의 설명이다. 모든 군정의 최우선에 지역 어르신을 배려하며 ‘고창군 3대 어르신 보건의료 정책(우리마을 주치의사제, 65세 이상 보건소 진료비 전액무료, 임틀란트·틀니 본인부담금 지원)’으로 든든한 아들 역할을 해내고 있다. 평소 심 군수는 지역의 ‘랜드마크’나 ‘누구나 딱하면 떠올릴 고창의 상징 찾기’를 강조해 왔다. 유네스코가 인정한 세계의 보물 7개를 간직한 도시, 4차 산업혁명을 이끌 드론과 첨단물류 등 고창의 상징 찾기는 여전히 진행중이다.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는 도전으로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꿔내는 고창군과 심 군수의 더 큰 도약에 많은 이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 기획
  • 박현표
  • 2024.07.11 16:54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⑨<홍계훈밀부유서> <양호전기>

홍계훈밀부유서(洪啓薰密符諭書) <홍계훈밀부유서(洪啓薰密符諭書)>는 1894년 4월 2일 고종이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에게 내린 문서이다.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 당시 동학농민군이 무장에서 기포한 후 전주성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하자, 조선 정부는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홍계훈을 진압군 최고책임자인 양호초토사로 임명하였다. 고종에게 유서와 밀부를 하사받은 홍계훈은 장위영 군사 800명을 이끌고 농민군 진압을 위해 출병하게 된다. 유서(諭書)란 지역에 군사권을 가진 관리를 부임시키거나 파견할 때, 임금이 내리는 임명장 및 명령서와 같은 문서를 말한다. 밀부(密符)는 자의로 혹은 역모를 위해 동병(動兵)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임금이 내린 증명패이다. 제1부(符)부터 제45부까지 존재했으며, 다음과 같이 활용되었다. 유사시 임금의 비상명령이 내려지면 관원이 간직하고 있던 부 반쪽과 임금이 보낸 부 반쪽을 맞춘다. 두 개의 반쪽 부가 의심할 바가 없이 일치하면 명령대로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국왕이 밀부를 해당 관원에게 발급할 때, 유서도 함께 내렸다. 관원은 이 유서를 생명과 같이 귀중하게 여겨 유서통(諭書筒)에 항상 지니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홍계훈밀부유서>는 가로 67cm ,세로 56cm의 크기로 되어있다. 첫 행에 ‘유(諭)’자를 쓰고 바로 아래에 품계인 숭정대부(崇政大夫), 관직인 친군장위영(親軍壯衛營) 정령관(正領官) 양호초토사, 성명인 홍계훈을 기재했다. ‘경수위양호(卿受委兩湖)’로 시작한 3행부터 9행까지는 그 임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비상시 군사를 동원할 때는 함부로 하지 말고 반드시 임금이 내리는 밀부와 합쳐보아 의심할 바 없이 명확한 경우에만 명령대로 군대를 동원하라’는 취지의 내용을 기록하여 압(押)한 제38부를 내렸다. 마지막 10행에는 연호와 월일인 ‘광서 20년(光緖二十年) 1894년 4월초2일(四月初二日)’을 적고 ‘유서지보(諭書之寶)’를 5곳에 국왕문서임을 확인하는 고종의 직인이 찍혀있다. <홍계훈밀부유서>의 원문과 번역문은 다음과 같다. 諭崇政大夫 親軍壯衛營正領官 兩湖招討使 洪啓薰 (유숭정대부 친군장위영정령관 양호초토사 홍계훈) 卿受委兩湖軆任非輕 (경수위양호체임비경) 凡發兵應機安民制敵 (범발병응기안민제적) 一應常事自有舊章慮 (일응상사자유구장려) 或有予與卿獨斷處置事非密符莫可施爲 (혹유여여경독단처치사비밀부막가시위) 且意外奸謀不可不預防如有非常之命合符無疑然後當就命 (차의외간모불가불예방여유비상지명합부무의연후당취명) 故賜押第三十八符卿其受之故諭 (고사압제삼십팔부경기수지고유). 光緖二十年四月初二日 (광서이십년사월초이일) 숭정대부 친군장위영 정령관 양호초토사 홍계훈에게 교유한다. 경이 양호(兩湖 충청도와 전라도)에 관한 일을 위임받았으니 책임이 가볍지 않다. 무릇 병사를 출동시켜 비상사태에 대처하는 것은 백성을 편안히 하고 적을 제압하는 것이다. 일체 평상시 사안은 자연히 옛 법도가 있다. 그러나 혹여 내가 경과 독단으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면 밀부(密符)가 아니면 시행할 수 없다. 또 뜻밖의 간사한 계략을 예방하지 않아선 안 되니 만약 비상한 명이 있으면 밀부를 합쳐서 의심이 없는 뒤에야 응당 명을 시행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압(御押)을 찍은 제38밀부를 내리니 경은 이를 받으라. 그러므로 교유한다. 광서 20년(1894, 고종31) 4월 초2일. <홍계훈밀부유서>는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진압군 최고책임자 홍계훈에게 고종이 직접 내린 유서로 국왕문서라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 및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다. 홍계훈의 후손(증손)이 보관하고 있던 것을 2012년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입수하였으며 보관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유서와 밀부는 조선시대 군사제도를 연구하는 데 밑거름이 될 중요한 자료이다. <홍계훈밀부유서>는 조선왕조의 거의 마지막에 국왕이 발급한 밀부유서이다. 이후 조선의 군제가 개편되면서 밀부유서는 거의 발급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홍계훈밀부유서>는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양호전기(兩湖電記) <양호전기>는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 당시 동학농민군이 무장에서 기포하여 전주성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하자, 중앙정부에서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였는데, 이때 양호초토사 홍계훈이 각처(各處) 사이에 서로 주고받은 전보를 날짜순으로 수록한 것으로 1894년 4월 3일부터 같은 해 5월 28일까지 기록되어 있다. 양호전기에서 전(電)은 전보를 의미한다. 조선에 전신이 처음 가설된 것은 외세에 의해서였는데 일본은 1884년 나가사키에서 부산까지 해저 전선을 개통하였고, 그 다음해에 청나라는 서울에서 의주까지 최초의 육로 전선인 서로전선을 구축하였다. 조선은 한발 늦게 1887년 조선전보총국을 설립하여 전신을 통한 한반도의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여 서울과 부산을 연결한 남로전선과 서울과 원산을 연결한 북로전선을 가설하였다.(<개항기 전보송달지 연구>, 한미경), 이후 가설된 전신을 통해 홍계훈은 전주에서 중앙의 관료들과 전보를 주고 받으면서 진압활동을 수행하였다. 홍계훈이 주로 전보를 주고받으면서 관련 내용을 보고하고 지시받은 기관은 공사청(公事廳), 혜당댁(惠堂宅), 본영 사또댁(本營使道宅), 수교대신댁(水橋大臣宅), 내서(內署) 등이다. 공사청은 고종 때 왕명을 전달하는 기관이었고, 혜당댁은 민씨척족 세력의 핵심인 민영준이며, 본영 사또댁은 장위영의 최고책임자인 장위사(壯衛使)이며, 수교대신댁은 좌의정 조병세를 말한다. 내서는 당시 권한이 강력하였던 내무부로 보여진다. 내무부(內務府)는 1885년 개화·자강사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대궐 안에 설치한 관청이다. 통리군국사무아문(통리내무아문)의 후신으로, 의정부·6조 체제와는 별도로 각종 근대화 관련 업무를 수행하면서 1880년대 후반 국정 운영을 총괄하였다. 갑오개혁으로 정부 조직이 대대적으로 개편되면서 1894년 폐지되었다. <양호전기>는 양호초토사 홍계훈이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 진압과 관련하여 서울을 출발하여 다시 돌아오기까지의 당시 전황과 정부의 대책에 관련되는 사항들을 기록하고 있으며, 특히 당시 전보를 주고받은 곳이 집권층 내부의 핵심적 위치에 있던 인물이 많았으므로 전주성 공방전과 5월 8일 ‘전주화약(全州和約)’이 성립되기까지 집권층의 입장을 잘 반영하고 있다. 예를 들어 5월 5일 내서(內署)의 전보에서는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 요구에 대하여, “귀화지설(歸化之說)은 믿을 수 없다. 기어이 소멸하도록 하되 평민에게 이르러서는 불가불 충분히 신중하게 판단하라”고 하여 동학농민군의 휴전제의를 거절하였지만, 5월 8일에는 그 사자(使者)가 일전에 소지(所志)한 바 민원을 상계(上啓)하고 실시하면 해산하겠다는 공문을 제출하였고 5월 8일에도 비슷한 내용의 공문을 제출하였다고 하면서 동학농민군의 요구를 받아들였던 사정을 소개하고 있다. 현재 <양호전기>는 2점이 전해지며 1점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2014년 홍계훈의 후손으로부터 입수하여 소장하고 있으며, 나머지 1점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양호전기>는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양호전기>는 당시 정부진압군의 입장과 동학농민혁명의 전개상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1차 자료로서의 소중한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취어> <양호초토등록> 등의 자료들과 함께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 전반을 이해할 수 있는 핵심적 자료이다. 또한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양호초토영을 설치하고, 최고지휘관으로 임명된 홍계훈이 기록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홍계훈(1842~1895) 홍계훈의 본관은 남양(南陽), 초명은 재희(在羲), 자는 성남(聖南), 호는 규산(圭珊)이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때 민비를 궁궐에서 탈출시킨 공으로 중용되었다. 1893년 3월 동학교도들이 충청도 보은에서 척양척왜의 기치를 내걸고 대규모 집회를 갖자, 장위영정령관(壯衛營正領官)으로 경군(京軍) 600명을 이끌고 출동했었다. 1894년(고종 31) 장위영의 영관으로 있을 때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양호초토사로 임명되어 장위영 군사 800명을 거느리고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급파되었다. 전주·태인·정읍·고창·영광 등지에서 동학농민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4월 28일부터 5월 3일까지 전주성을 둘러싸고 거의 매일 크고 작은 전투를 벌였다. 전봉준의 폐정개혁안이 받아들여져 5월 8일 전주화약이 성립되고 동학농민군이 철수하자 강화병 200명을 남겨 성을 지키게 했다. 그 공으로 훈련대장에 승진하였고, 유길준 등과 협력하여 친일파 박영효 타도에 나섰으나 이듬해인 1895년 8월 일본군이 궁궐을 습격하자 군부대신 안경수와 함께 시위대 병력을 이끌고 방어하다가 일본군에게 피살되었다. 이후 1896년 군부대신에 추증되었으며, 1900년 장충단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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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11 15:13

강임준 군산시장 “글로벌 신산업·K문화관광도시로 도약”

민선 8기 반환점을 돈 강임준 군산시장이 후반부 시정 방향의 키워드로 ‘글로벌 신산업’과 ‘K-문화관광 거점도시’를 제시했다. 강 시장은 8일 민선 8기 2주년 언론 브리핑을 갖고 2년간의 성과와 후반부 시정 방향 등을 설명하며 “아이키우기 좋은 도시를 최우선으로 강력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표명했다. 또한 “민선 8기에 보내주신 성원과 지지에 보답할 수 있도록 군산시를 미래세대가 더욱 풍요롭게 살 수 있는 글로벌 신산업 · K문화관광 거점도시로 도약시키겠다”고 강조했다. 강 시장은 지난 2년 동안 △인구위기 대응 ‘키움으뜸 가족 행복도시’ 선포 △이차전지 신산업 육성 △중소공동도매물류센터를 통한 골목상권 지원 △지역특화 콘텐츠 기반 문화관광 활성화 △이상기후 재난재해 사전 대응 △친환경 시민친화 도시숲 조성 △경쟁력 강한 농·수산 육성 등으로 시정 전반의 혁신적 변화를 이끌어냈다고 자평했다. 그리고 앞으로 남은 2년에 대해 △아이 낳아 키우기 좋은 ‘키움으뜸 가족행복도시’ 만들기 △탄소중립 재생에너지 선도도시로의 도약 △글로벌 신산업 및 로컬 경제 육성 △체류형 K문화관광 활성화 △친환경 생태·안전도시 조성 등 5대 전략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 시민과 함께 포용하고 성장하는 ‘글로벌 신산업‧K문화관광 거점 도시, 군산’을 만들겠다는 게 강 시장의 계획이다. ‘키움으뜸 가족행복도시’ 조성 강임준 시장은 아이와 청년을 키우는 동시에 가정과 지역의 성장을 돕고, 돌봄과 교육을 잘하는 누구나 살고 싶은 행복도시를 만드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꼽았다. 이에 5대 전략 17개 과제 총 92개 사업에 4262억 원을 투입, 내실 있는 ‘키움으뜸 가족행복도시’ 조성에 박차를 가한다는 방침이다. 특히 공설시장내 스마트도서관 조성 및 거점 도서관 리모델링 등 창의적 혁신 도서관 인프라 확충, 돌봄과 배움이 결합된 군산만의 특색있는 교육발전 특구 모델을 발굴할 예정이다. 여기에 효능감 높은 교육생태계 조성 의지를 밝히고, 올해 하반기 중고등학교 시내버스 무상교통 사업의 전면시행 등 교육 분야에 전폭적 투자도 예고했다. 탄소중립 재생에너지 선도 도시 강임준 시장은 재생에너지 산업의 필요성을 피력하며 탄소중립 재생에너지 선도도시 추진 의지를 강력히 전했다. 강 시장은 “연간 약 35억 원의 육상태양광 발전 사업 수익은 미래세대 투자를 위한 큰 자본이기에 인재 육성과 지역발전을 위해 재생에너지 사업을 흔들림 없이 완수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시는 사용전력량 100%를 풍력·태양광 등 재생에너지원을 통해 발전된 전력을 구매 또는 자가 생산으로 조달하겠다는 캠페인인 RE100을 추진했다. 또한 육상태양광에 이어 수상태양광‧해상풍력 등 재생에너지산업의 육성을 이끌어냈으며, RE100산단 조성을 선제적으로 진행, 현재 관련 기업의 입주가 이뤄지고 있다. 이와 함께 연구 및 실증 클러스터 구축, 분산에너지활성화 특별법 시행 등 대내외 여건이 무르익어가는 만큼 ‘재생에너지 선도도시’ 군산의 순항을 자부했다. 글로벌 신산업 및 로컬경제 육성 강임준 시장은 세계시장을 선도할 신산업을 육성하고 로컬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한 방안에 대해 신산업‧항만물류‧농수산‧민생경제 등 분야별로 꼼꼼히 챙겼다. 특히 미래모빌리티‧에너지신산업 등 첨단산업 중심 재편을 준비하며 새만금 미래성장센터 등 속도감 있는 이차전지 혁신산업 생태계 구축에 그치지 않고 이차전지‧반도체와 융합하는 미래모빌리티 산업을 육성·강화한다는 방침이다. 이를 통해 시가 지속 성장하는 ‘글로벌 신산업 거점 도시’로 위상을 높이겠다는 계획이다. 이어 한중 특송화물 통관장 개장에 따른 전자상거래 활성화 기반 구축과 군산새만금신항, 국제공항, 철도의 새만금 트라이포트의 조속한 완성으로 산업지원 인프라를 구축해 ‘국제 물류교통 허브도시’로서 도약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와 함께 △농촌협약을 토대로 농촌지역 생활권 활성화 및 정주여건 개선 △전략작물 육성 △스마트 수산식품가공단지 조성 △군산수산물종합센터 서해안권 대표 관광 수산시장 육성 등 ‘경쟁력 있는 강한 농·수산’으로 키워나가기로 했다. 강임준 시장은 지역의 모세혈관인 골목상권 구석구석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도록 군산사랑상품권 지속 발행, 안심물가제 운영, 군산맥아를 활용한 수제맥주 산업화 등 지역의 가치와 콘텐츠를 기반해 지역경제활성화를 도모하겠다는 입장도 전했다. 체류형 K-문화관광 활성화 매년 500만 명 이상이 다녀가는 명품관광도시인 군산은 앞으로 고군산군도에서 시간여행마을 잇는 체류형 K문화관광도시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할 계획이다. 이에 명도~말도~방축도 K-관광섬 본격 추진으로 고군산해양문화 관광 활성화를 꾀하고, 월명산 전망대, 달빛마루를 연계한 서해안 선셋드라이브 사업으로 매력적 관광인프라를 조성할 예정이다. 또한 익사이팅한 사계절 축제도시 지향, 지역 특화형 대규모 관광숙박단지 조성 추진으로 ‘K콘텐츠 기반 체류형 문화관광도시’로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친환경 생태·안전도시 조성을 통한 정주도시 완성 정주도시로서의 필수요건인 안전대책도 놓치지 않겠다는 시의 방침이다. 2023년 7월 60년 만의 집중호우에도 인명피해 제로를 달성했던 시는 빈틈없는 재해예방을 위해 풍수해 생활권 정비사업의 추진, 화학사고 예방시스템 가동 등 자연재해와 각종 재난 사고로부터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내기 위해 흐트러짐 없는 태세를 유지하고 있다. 이외에도 철길 숲, 도시바람길 숲 등 친환경 시민 친화 숲 조성으로 자연 휴식공간을 만들어 친환경 녹색도시를 조성할 뿐 아니라 군산전북대병원 연내 착공과 공공심야 어린이병원 운영으로 지역 의료의 불균형 해소와 야간시간대 안정적 소아 진료체계를 확보하겠다는 계획이다. 강 시장은 “당면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며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 시민과 함께 포용하고, 군산시만의 강점을 살릴 수 있는 시정을 만들어 가겠다”고 말했다. 이어 “아이와 어른 모두가 살맛나는 공동체, 지속가능한 경제성장, 기후·환경 위기 극복, 안전하고 쾌적한 정주환경을 만드는데 행정 역량을 모으겠다”며 “오직 시민 행복과 군산 발전만을 생각하며 시정을 위해 전력을 다해 다시 뛰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 기획
  • 이환규
  • 2024.07.08 16:10

[뉴스와 인물] 취임 한 달여 이오숙 전북소방본부장 "현장 중심 소방행정"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보완해 나갈 점을 파악하기 위해 현장 곳곳을 누볐습니다. 그래도 아직 갈 곳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난 5월 27일 제20대 전북특별자치도 소방본부장에 이오숙 소방감(57)이 취임했다. 전북 소방의 최고 책임자로서 부안 지진 현장과 이차전지 업체 등 사고 현장과 대형 시설물에 대한 안전 점검에 주력했다. 그는 소방 최초 여성 소방감 탄생이라는 점에서 큰 이목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성별에 따른 구분보다는 소방관의 전문성과 사명감을 강조했다. '여성 소방관'이 아닌 '대한민국 소방관'으로서의 정체성을 중시한 이 본부장을 만나 향후 각오와 계획을 들어봤다. -여러 부서를 거쳤지만 한 지역의 소방본부장으로 취임하신 것은 처음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 달여의 소회는 어떠하신지요. "아름다운 자연과 따뜻한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멋진 전북특별자치도의 소방본부장으로 근무하게 되어 매우 분주하게 지내온 40여일이었습니다. 우리 전북 지역에 맞는 안전대책을 수립하고 시행해야 되기 때문에 짧은 기간이었지만, 많은 분들을 만나 인사도 드리고 시간 닿는대로 소방관서와 업체들을 방문했습니다. 만나 뵙는 분들마다 모두 반갑고 따뜻하게 맞아주셔서 늘 감사한 마음이었고 지금은 어느 정도 전북소방인으로 자리잡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전북에서 근무하시는 것도 처음이신데요. 전북소방본부만의 강점은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전북소방은 타 시도에 비해 조직규모가 적은 편인데도 도민 안전을 위해 추진하고 있는 정책들의 수준이 매우 높았습니다. 먼저 도전경성(挑戰竟成)의 정신으로 언제나 ‘도전’을 외치고, 노력하는 3400여명의 소방공무원과 소방력이 미치지 않는 농어촌지역의 부족한 소방력을 보완해 주는 8200여명의 의용소방대원들의 저력을 강점으로 꼽고 싶습니다. 전북특별자치도소방본부는 전기차충전구역 화재안전시설 설치, 화재안전취약자가 더 보호받는 안전서비스 제공 등 지역 특성에 맞는 화재예방 및 재난대응체계가 체계적으로 잘 구축되어 있습니다. 또한 119구급대와 지역별 의료기관 간 응급의료 협력이 잘 이뤄지고 있으며, 임산부와 특이질환을 가진 영·유아들에 대한 구급서비스 등도 큰 장점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지난해 전북소방본부는 부서장들의 갑질 논란에 휩싸였었는데요. 신임 소방본부장으로서 이러한 일들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것들이 필요하다고 보시나요? "먼저, 모든 부서장들이 조직 내부의 불합리한 관행을 과감히 개선하기 위해 솔선수범하고, 업무 수행 시 원칙에 따라 공정하게 수행해야 합니다. 또한, 중요한 의사결정과정에 동료들의 의견을 반영해 투명하게 공유해 상호간 신뢰를 기반으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조직문화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본부 차원에서도 정기적으로 익명의 설문조사를 실시해 부서별 분위기와 문제점들을 파악하고 그 결과를 부서장들에게 피드백해 자신을 돌아보고, 개선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갑질문제가 발생하는 경우에는 사실관계를 명확히 조사해 해당자를 엄중문책해야 할 것입니다." -취임 인사 당시 소통이 본부장님의 최대 강점이라고 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떠한 방식으로 도민들과의 소통을 이어나가실 예정이신가요? "재난사고 현장은 물론 화재취약대상, 소방관서를 수시로 찾아 업체와 동료들의 애로사항을 청취하고 해소할 수 있는 소통을 할 계획입니다. 아울러 지역사회의 안전과 화재 예방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계시는 의용소방대원들, 의료기관장 등 소방 활동 관련 기관장님들, 그리고 지역 언론과도 기회 닿는대로 소통하고, 개선이 필요한 사항은 충분히 검토해 현장의 목소리가 정책에 반영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의료 집단행동이 예상했던 것 보다 더 길어지는데요. 의료계 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에 아프면 걱정이 많은데, 119 구급서비스에는 문제가 없나요? "현재 전공의 이탈 등으로 도내 대학병원에 대한 119구급대 이송환자 수용율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이에 전북소방은 비응급환자는 일반 병의원으로, 경증, 중등증 환자는 2차 병원으로 이송하고, 긴급한 중증환자인 경우에만 대학병원으로 이송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119구급대의 응급환자 이송에 적극 협조해 주고 계시는 도내 모든 의료기관에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아울러 응급환자가 적시에 치료를 받기 위해서는 올바른 구급차 이용 문화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꼭 필요한 분들이 구급차를 이용할 수 있도록 도민 여러분들의 많은 협조 부탁드립니다." -전북소방본부장 직급이 소방준감 3급 상당에서 소방감 2급 상당으로 상향됐습니다. 그에 따른 지역 소방본부의 이점과 전북 소방의 발전 방향 및 가능성은? "지역별 소방본부장은 ‘재난 및 안전관리기본법’ 제50조에 따라 재난 발생 시 지역의 군·경찰·유관기관 등을 지휘하는 긴급구조통제단장으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이번 직급 상향으로 인해 재난현장에서 신속하고 효과적인 대응과 현장지휘가 가능해지고 소방공무원들의 사기 또한 높아졌습니다. 전북소방은 전국 최초로 AI긴급구조시스템을 운영하고, 전국 최대 규모의 실화재훈련장을 건립 중에 있으며, 다기능화학차, 험지펌프차 등 첨단소방장비 보강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를 토대로 소방행정 및 현장활동에 활용해 도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킨다면 전북소방의 발전 가능성은 크다고 봅니다." -첫 여성 소방감이십니다. 유리천장을 뚫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후배 여성 소방관에게 한 마디 해주신다면? "첫 여성 소방감은 저 혼자만의 노력이 아니라 여러분과 함께 이루었기 때문에 더욱 의미있고 감사한 마음입니다. 오늘도 전국 각지에서 화재진압, 구급 등 현장업무를 비롯해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여성소방관의 능력과 열정이 인정받고 있는 만큼, 앞으로도 한 사람의 소방관으로서 자신을 믿고 꿈을 크게 가지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노력이 우리 조직을 더욱 강하게 만들 것입니다. 멋진 소방관으로서의 길, 우리 함께 걸어 나갑시다." -전북 치안 총수인 전북경찰청장도 여성입니다. 협업 과정에서 여러 장점이 있을 것 같은데, 업무 파트너로서 어떠실까요? "소방과 경찰의 협력은 긴급상황 시 신속하고 효율적인 대응을 통해 큰 시너지효과를 발휘해 지역사회 안전망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같은 시기에 공직생활을 해온 여성리더로서 상호 이해와 공감능력이 높아 신뢰와 배려를 바탕으로 원활한 소통과 협력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전북경찰청과 힘을 모아 도민들이 각종 재난 및 사고로부터 안심하고 생활하실 수 있도록 더욱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전북특별자치도 출범과 함께 전북 소방도 새바람이 불 것으로 기대됩니다. 전북자치도에 걸맞는 임기 내에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있다면. "재난 발생시 신속·최대·최고 대응을 원칙으로 현장에서 작동하는 대응체계를 확립하고, 예방 중심의 선제적 화재 안전대책 추진을 통해 도민의 안전을 확보하겠습니다. 생명존중 고품질 서비스와 재난안전약자 맞춤형 응급의료를 제공하는 등 도민 중심의 119서비스를 제공하고, 실화재 훈련시설 설치, 소방청사 현대화, 첨단 소방장비 도입 등 미래 지향적 소방활동 기반을 조성하겠습니다." -전북은 자연재해로부터 안전지대가 아니며, 화학 사고나 화재 등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사전 예방책이 있다면.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도민 모두가 자연재해에 대한 위험성을 인식하고 자신의 안전을 지킬 수 있도록 대비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전북소방 또한 어떠한 자연재해가 발생하더라도 도민 안전을 위해 즉시 대응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화학사고나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해당 사업체의 철저한 안전관리가 최우선되어야 합니다. 소방관서에서는 지역내 화학물질 취급 사업장 또는 화재발생 우려 대상물에 대해 정기적으로 점검하고, 최근 도입된 다기능화학차 등 첨단소방장비를 활용해 관련 기관과의 합동훈련을 통해 화학사고 및 화재 발생 시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대응, 유사시 도민 피해를 최소화하고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도민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전북특별자치도 소방본부장으로서 동료들과 다양하게 소통하고, 도내 관련부서와 유관기관은 물론 지역사회와도 긴밀하게 협력해 도민들의 안전을 지켜 드리고 '성장하는 전북소방, 신뢰받는 전북소방'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도민여러분! 여러분 곁에는 언제나 119가 있습니다." △ 이오숙 전북소방본부장은 충남 부여 출신으로 한남대학교에서 행정학 학사와 석사,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8년 12월 소방사 공채로 공직에 입문해 대구북부소방서장, 대구소방안전본부 소방행정과장을 역임했다. 소방청 중앙학교 인재개발과장, 코로나19긴급대응과장을 지낸 후 강원도소방학교장을 거쳐 소방청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소방감으로 승진 이후에는 전북특별자치도 소방본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 기획
  • 김선찬
  • 2024.07.07 17:32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⑧ 무장포고문

1894년 3월 20일 동학농민군이 전라도 무장에서 본격적인 동학농민혁명을 시작하면서 내놓은 포고문이다. 대략 400여자의 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본은 확인되지 않으며, 모두 원본 혹은 누군가 필사한 것을 다시 베껴 쓴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각 자료에 소개된 <포고문>의 내용은 거의 동일하지만 자료에 따라 일부 글자에 차이가 있다. <포고문>에는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키게 된 배경과 목표 등이 담겨져 있다. 따라서 동학농민군의 생각이나 동학농민혁명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만큼 먼저 전문을 번역하여 소개한다. <무장포고문>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사람에게 인륜이 있기 때문이다. 군신과 부자의 관계는 가장 큰 인륜이다. 임금이 어질고 신하가 충직하며, 아버지가 자애롭고 자식이 효성스러운 뒤에야 나라와 집안이 이루어지고 끝없는 복이 미칠 수 있다. 지금 우리 임금께서는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자애롭고 총명하며 슬기롭다. 현명하고 어질며 정직한 신하가 밝은 임금을 보좌한다면 요순(堯舜)의 덕화(德化)와 한(漢)나라 문제(文帝)와 경제(景帝)의 치세도 날짜를 손꼽으며 바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신하된 자들은 나라에 은혜를 갚을 생각은 하지 않고 한갓 벼슬자리만 탐내며 (국왕의) 총명을 가린 채 아첨을 일삼아 충성스러운 선비의 간언을 요사스런 말이라 하고 정직한 사람을 도적의 무리라 일컫는다. 그리하여 안으로는 나라를 돕는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백성들을 수탈하는 관리들만 득실대니 인민들의 마음은 날로 변하여 들어와서는 즐겁게 살아갈 생업이 없고 나가서는 제 한 몸 간수할 방책이 없다. 학정은 날로 더해지고 원성이 이어지며,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윤리와 상하의 분별이 드디어 무너져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관자(管子)가 말하기를 “사유(四維)[예의염치(禮義廉恥)]가 베풀어지지 않으면 나라가 곧 망한다.”고 하였다. 바야흐로 지금의 형세는 옛날보다 더욱 심하다. 공경(公卿)으로부터 방백수령(方伯守令)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위태로움을 생각하지 않고, 단지 남몰래 자신을 살찌우고 제 집을 윤택하게 하는 계책만 생각하고, 벼슬아치를 뽑는 일을 재물이 생기는 길로 여기며, 과거 보는 장소를 온통 사고파는 장터로 만들어 허다한 재화와 뇌물이 국고로 들어가지 않고 도리어 개인의 창고를 채우고 있다. 국가에는 쌓인 부채가 있는데도 갚을 방도를 생각하지 않고, 교만하고 사치하며 음탕하게 노는 데 거리낌이 없어서 온 나라가 어육이 되고 만백성이 도탄에 빠지니 참으로 지방관들의 탐학 때문이다. 어찌 백성들이 곤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근본이 약해지면 나라가 멸망한다. 그런데도 보국안민의 방책을 생각지 않고 시골에 저택이나 짓고 오직 저 혼자서 살 길만 도모하면서 벼슬자리만 도적질하니 어찌 올바른 도리이겠는가. 우리들은 비록 시골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백성이지만 임금의 땅에서 농사지어 먹고 임금이 준 옷을 입고 살아가고 있으니 국가의 위기를 좌시(坐視)할 수 없어서, 온 나라 사람들이 마음을 합치고 많은 백성들이 상의하여 지금 의(義)의 깃발을 치켜들고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생사의 맹세로 삼았다. 금일 이러한 광경은 비록 놀랄만한 것이지만 절대로 두려워하지 말고 각자 자신의 생업에 편안히 종사하여 모두 태평성대를 축원하고 다 함께 성군(聖君)의 교화를 누릴 수 있다면 천만다행이겠다. 1892년 10월부터 1893년 4월에 걸쳐 교조신원운동과 척왜양운동을 전개하였던 전봉준과 호남지역의 동학지도자들은 1893년 말부터 정부를 개혁하기 위해 새로운 계획을 구상하고 추진했다. 그것은 바로 군현 단위의 봉기를 확산하고 규합하여 전라도 전 지역의 봉기, 나아가 전국적인 농민봉기를 추진하려는 것이었다. 그것을 잘 보여 주는 것이 1893년 11월에 만들어진 사발통문 거사계획(“⑥세기를 넘어선 미스터리, 사라진 사발통문의 기록을 찾아서” 참조)과 1894년 1월 10일 일어난 고부농민봉기이다. 동학농민혁명 계획을 실현하기 위한 첫 단계가 바로 고부농민항쟁이었지만, 전봉준의 뜻대로 전개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인근 읍의 호응이 충분히 일어나지 않았다. 2월 20일경에는 봉기를 전라도 전역으로 확산하기 위해 “각 읍의 군자(君子)들은 한 목소리로 의기를 내어 나라를 해치는 적을 제거하여 위로는 나라를 돕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자”는 격문을 전라도 각 군현으로 띄우기도 했지만, 인근 읍의 호응은 거의 없었다. 이에 따라 전봉준은 부하 50여 명만 거느리고 고부를 빠져나가 무장의 손화중에게 갔다. 이 때 전봉준과 손화중은 전국 규모의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키기로 합의한 것으로 보인다. 3월 10일경부터는 전라도 각지, 그리고 일부 다른 도에서도 동학농민군들이 합세해 오기 시작하였다. 모여든 농민군이 4,000여 명에 이르게 되자 전봉준 등 지도부는 드디어 3월 20일에 무장에서 <포고문>을 발포하고 동학농민혁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포고문>은 동학농민군의 생각과 동학농민혁명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님에도 불구하고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지금까지 이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도 거의 없었고,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도 거의 소개되지 않았다. 이는 그 동안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이해가 ‘반봉건’ 근대화나 ‘반외세’ 민족주의적 성격을 강조하는 시각에서 이루어져 왔다는 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언뜻 보더라도 <포고문>에는 근대지향성과 거리가 먼, 유교적 이념과 언어가 매우 많을 뿐만 아니라 ‘반외세’와 관련된 내용도 전무하다. 그러나 <포고문>에는 동학농민군의 생생한 현실진단과 지배층에 대한 비판이 매우 선명히 제시되어 있다. 국왕은 비판의 대상이 아니었지만, 공경대부 이하 방백 수령들이 가장 중요한 책무인 인정을 방기고 가혹한 정사를 펴기 때문에 나라의 근본인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국가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현실진단을 바탕으로 농민군들은 비록 자신들이 시골에 사는 평범한 백성[草野遺民]에 불과하지만, 국가의 위급함을 구하기 위해 “나라를 지키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자”는 의기(義旗)를 들게 되었다고 하였다. 농민군이 스스로를 “보국안민”의 주체로 자각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자각이 있었기에 일본군의 침략행위가 가시화하자 나라와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근대지향적인 성격만 부각시키는 동학농민혁명 이해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기후위기와 환경파괴라는 냉엄한 현실이 잘 보여주듯이 근대는 더 이상 추구의 대상만이 아니다. 지금은 오히려 근대를 넘어서는 방안을 고민해야 될 시점이다. 동학농민군들의 생각 가운데는 ‘근대’와 거리가 먼 것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근대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담고 있을 수 있지 않을까? /배항섭 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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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4 15:14

[참여&공감 2024 시민기자가 뛴다]인구감소와 지방소멸 위기, 그리고 전북의 미래(상)

전국적으로 인구감소 및 지방소멸 위기가 심각하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3년 기준 국내 출생아 수는 23만 명, 합계출산율은 0.72명으로 OECD 국가 중 최하위 수준이다. 출생아 수가 급격히 감소함에 따라 ‘20년부터 출생아 수보다 사망자 수가 많은 인구의 자연감소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농어촌 지역과 비수도권 중소도시의 경우 저출생·고령화와 수도권으로의 인구유출로 인해 지방소멸 위험이 커지고 있다. 이러한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최근 정부는 인구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인구 정책을 전담하는 부처인 인구전략기획부를 신설하겠다고 발표하였지만, 이미 전국적으로 고착화된 인구감소 및 지방소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본 고에서는 두 편으로 나누어 전북의 인구감소 및 지방소멸 현황과 이슈를 분석하고, 중앙정부와 지자체 정책의 한계를 진단한 뒤, 국내·외 사례의 시사점을 바탕으로 전북 지역의 인구감소 및 지방소멸 위기 대응을 위한 전략과 과제를 제시하였다. △전북 인구감소 및 지방소멸 현황 ‘24년 3월 기준 전북의 주민등록 인구수는 174만9376명이다. 전북 인구는 1973년 약 250만 명으로 정점을 찍은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하여 지난 50년 동안 인구의 30%가 줄었다. 인구수가 매년 1만5000 명씩 감소한 셈이다. 이렇게 전북 인구가 큰 폭으로 감소한 원인은 무엇일까? 여러 원인과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전북 지역 인구감소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출생아 수 감소 및 사망자 수 증가에 따른 자연감소와 수도권 등으로의 청년인구 유출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먼저, 인구 자연감소 관련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3년 한 해 동안 전북 지역 출생아 수는 6625명으로서 10년 전인 2013년 1만4555명에 비해 45.5% 수준으로 급격히 감소하였다. 같은 자료에서 2023년 전북 지역 사망자 수는 1만7211명으로서 2013년 1만3492명에서 약 27.5% 증가하였다. 이와 같은 출생아 수 감소와 사망자 수 증가가 맞물려 2016년 인구 데드크로스인 자연감소가 시작되었고, 2023년에는 자연감소 인구가 1만명을 넘었다. 그리고, 청년인구 유출 관련 호남지방통계청에서 발표한 인구이동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23년 전북도 전입자는 18만8788명이고, 전출자는 19만3245명으로서 순유출 인구수는 4,457명이며, 20대 청년의 순유출 인구수는 6396명이다. 이와 같이 인구 자연감소와 청년인구 유출이 전북 지역 인구감소의 주요 원인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전북은 인구감소뿐만 아니라 지방소멸도 심각하다. 지난 6월 28일 한국고용정보원에서 2024년 지방소멸 리포트를 발표했는데, 전북 지역의 소멸위험이 과거에 비해 증대된 것으로 나타났다. ‘24.3월 기준 전북의 소멸위험지수는 0.394로서 전남(0.329), 경북(0.346), 강원(0.388)에 이어 네 번째로 소멸위험이 큰 지역으로 분류되었다. 같은 자료에서 ‘24.3월 기준 전북 14개 시·군별 소멸위험지수를 분석한 결과 전주시를 제외한 13개 시·군이 소멸위험지역으로 분류되었다. 이중 임실, 장수, 진안, 고창, 무주, 순창, 부안 7개 지역은 소멸고위험지역이고, 김제, 남원, 정읍, 군산, 익산, 완주 6개 지역은 소멸위험진입지역으로 분류되었다. 참고로, 소멸위험지수는 20~39세 여성 인구수를 65세 이상 고령 인구수로 나눈 값으로 측정되며, 소멸위험지수 값이 0.5 미만이면 소멸위험진입지역, 0.2 미만이면 소멸고위험지역으로 구분된다. 이와 같이 전북은 전국적으로도 인구감소 및 지방소멸 위기가 심각한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전북 지역 인구감소와 지방소멸의 이슈와 현안은 무엇이며 구체적으로 지역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을까? △전북의 인구감소·지방소멸 관련 이슈 및 현안 전북의 인구감소 및 지방소멸 이슈와 현안은 교육, 의료, 주거, 교통, 생활편의 5개 영역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첫째, 교육 부문은 학령인구 감소로 인한 학교 통폐합 및 폐교 문제이다. 전북의 초·중·고 학생수는 ‘14년 학생수 24만2474명에서 ‘24년 17만8798명으로 26.3% 감소하였으며, 학생수 감소로 인해 농산어촌 및 구도심 지역을 중심으로 학교 통합 및 폐교가 증가하여 ‘24.3월 기준 전북 지역 폐교 수는 총 349개교이다. 이중 매각 280개교, 기관 및 학교 설립 22개교이며, 나머지 47개교는 교육청에서 자체적으로 활용하거나 사업 추진중이다. 현재 계속 폐교가 증가하는 추세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역에 있는 학교가 폐교가 되면 학생들이 먼 거리를 이동해 통학해야 하는 어려움이 발생하고, 그로 인해 인구감소와 지방소멸 문제가 심화될 수 있기 때문에 학교 폐교 문제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둘째, 의료 부문에서 병의원·약국 등 의료시설 부족과 농어촌 지역의 의료 격차 문제가 있다. 호남지방통계청에서 발표한 전북 농어촌마을 생활모습 자료에 따르면 ‘20년 기준 전북도 관내 읍·면 중에서 병·의원이 없는 지역은 56.7%, 약국이 없는 지역은 40.5%이며, 보건소나 보건진료소가 없는 지역도 10%가 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같은 자료에서 전북 읍·면 지역 중 과반수 이상이 종합병원 이용 시 차량으로 30분 이상 소요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종합병원 이용을 위해 수도권 및 대도시에 가야하는 상황으로 수도권 등 타지역과의 의료 격차가 커지고 있다. 특히, 전북 농어촌 지역에 산부인과, 소아청소년과 등의 의료시설 및 의료인력 부족 문제가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셋째, 주거 부문의 경우, 빈집 문제가 심각하다. 한국국토정보공사에서 수행한 전북 빈집 실태조사 결과 1년 이상 아무도 거주하거나 사용하지 않는 빈집은 ‘21년 기준 1만6876호인 것으로 파악되었으며, 전북연구원의 빈집 실태분석 및 활용방안 연구보고서(2017)에 따르면 빈집 발생 사유는 거주자 사망 및 이사로 인한 빈집이 전체의 86.8%이고, 빈집 기간은 6년 이상 장기간 방치된 것이 74.2%이며, 빈집 상태는 절반 이상이 상태가 불량하거나 폐가 수준인 것으로 분석되었다. 현재 연구 시점으로부터 수년이 경과되었기 때문에 다수의 빈집이 장기 방치되고, 빈집 상태는 더 악화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넷째, 교통 부문의 경우, 시외버스 등 대중교통 운행 축소로 인한 도민 불편이 예상된다. 최근, 농어촌 지역 승객 감소로 인한 운영 적자로 시외버스 회사에서 노선을 폐지하거나 및 운영 횟수를 감축하고 있다. 또한, 호남지방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년 기준 걸어서 15분 이내에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없는 마을 수는 320개로서 10년 전에 비해 80개소가 감소하였으며, 여러 대중교통수단 중 특히 시외버스 이용 접근성이 떨어진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와 같이 인구감소 문제는 대중교통 이용에도 영향을 미친다. 마지막으로 다섯째, 인구감소로 인해 생활편의시설에 대한 접근성이 악화되었다. 호남지방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년 기준 전북 지역 읍·면 중에서 은행이 없는 지역은 86.8%, 영화관이 없는 지역은 92.1%, 도서관이 없는 지역은 47.5%, 어린이집이 없는 지역은 37.5%, 노인복지회관이 없는 지역은 61.0%, 학원이 없는 지역은 70.0%, 목욕탕이 없는 지역은 45.6%, 이·미용실이 없는 지역은 25.5%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구감소 및 지방소멸 현상이 계속되면 주민 불편이 가중되고 삶의 질이 저하되며, 지역 매력이 감소할 수 있다. 또한, 이는 다시 추가적인 인구감소로 이어져서 지역 경제 약화 및 지역 공동체 붕괴 등으로 이어져 지방소멸이 가속화될 수 있다. 다음 편에서는 중앙정부 및 지자체 정책의 한계를 진단한 뒤, 국내·외 지방소멸 대응 사례를 바탕으로 전북 지역의 인구감소 및 지방소멸 대응을 위한 전략 및 정책과제에 대해 제시하고자 한다. 장우연 독립연구자, 전) 전주시 정책연구소 연구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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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3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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