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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61)  법부래문, 법부래거문, 내각법부래거문

이번에 소개할 법부래거문 등은 1894년이후 갑오개혁과 대한제국시기 정부의 법률 관계 공문 중에서 법부가 생산하고 각부서에 보낸 공문을 모아 놓은 것이다. 법부에서 기안한 공문을 기안(起案)이라고 하는데, 본 자료는 법부와 관련 타부서 사이에 오고 간 통첩이나 지령 등을 포함하고 있다. 먼저 ‘법부래문(法部來文)’은 1894년(고종 31)~1902년(광무6) 사이에 법부가 자체내의 인사·봉급·후생 등과 기타 법률 문제를 내각(內閣) 혹은 의정부에 문의한 문건을 모은 것이다. 그 중에서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문건은 1895년 7월 26일자 문건으로 법부에서 작성한 죄인방질책(罪人放秩冊) 1책을 보내어 관보에 계속하여 게재해 달라는 통첩 제349호다. 이는 갑오개혁 1주년을 맞이하여 주요 유배형에 처해진 관료들과 죄질이 낮은 죄수들을 석방하는 조처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후속 문건으로 8월 1일자 관보 중에서 석방한 죄인들의 기록에서 온양에 유배한 김덕여(金德汝)는 덕현(德鉉)의 오기(誤記)라는 문건(통첩 제366호)도 있으며, 9월 12일 임천(林川)의 비적괴수 김재홍(金在洪)은 인명을 살해한 죄로 교형(絞刑)에 처하고, 문화(文化)의 비적괴수 이동엽(李東燁)은 여러 마을의 관사(官舍)를 모조리 불사르고 민인들의 전곡을 강탈한 죄로 역시 교형에 처한다는 내용(통첩 제14호)이 실려있다. 11월 8일은 지평(砥平) 살옥(殺獄) 죄인 안치홍(安致弘)을 모살죄(謀殺罪)로 교형에 처하고, 고덕인(高德仁)은 살인하고 재물을 빼앗은 죄로 교형에 처하며, 홍소사(洪召史)는 간부(姦夫)가 자신의 남편을 죽인 것을 알면서도 고하지 않은 죄로 교형에 처한다는 내용(통첩 제46호)이다. 11월 12일에는 지난 6월 27일자 조칙에 따르면 동년 4월 1일 이전에 수감된 죄인들 중에서 모반, 살인, 절도, 강도, 통간(通奸), 편재(騙財) 등 죄를 저지른 자를 제외한 나머지 죄인들을 전원 석방하라고 하였는데, 이에 법부는 법부 도유안(徒流案) 중에서 이상의 6가지 죄를 저지르지 않은 자들은 전부 석방하였다고 하면서, 각 부(府)에 도유안에서 누락된 죄인들과 본도 감영에서 유배만 보내고 미처 보고하지 못한 자의 죄안과 유배 월일에 대해 자세히 살펴 보고하라고 훈령을 내린다고 하면서 대구부, 평양부, 남원부, 나주부로부터 보고한 내용을 관보에 게재해 달라는 내용(통첩 633호) 등을 수록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법부 문건 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 제4책에 수록된 동학교단의 지도자인 최시형, 황만기(黃萬己), 박윤대, 송일회 등에 대한 판결선고서이다. “최시형(강원도 원주군 거주, 평민, 72세), 황만기(경기 여주군 거주, 평민, 39세), 박윤대(충청북도 옥천군 거주, 53세), 송일회(충청북도 영동군, 33세) 등 안건을 검사 공소로 심리하였다고 하면서, 피고 최시형은 1866년(본문에서는 병인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 1861년이라는 설도 있음)에 간성 거주 필묵상 박춘서(朴春瑞)라는 자에게서 소위 동학(東學)을 받아들이고, 선도(善道)로 병을 낫게 하고 축문으로 신(神)을 내린다며 열군 각도를 돌아다니면서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라는 13자 축문과 ‘지기금지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이라는 8자(字) 강신문(降神文)과 동학 원문(原文) 제1편 포덕문(布德文), 제2편 동학론(東學論), 제3편 수덕문(修德文), 제4편 불연기연문(不然其然文)과 궁궁을을지부(弓弓乙乙之符)로 인민을 선동하고 혹하여 도당을 체결하였다,”는 판결 선고서 전문을 수록하고 있다. 당시 관헌이 가장 주목하고 있는 점은 동학의 조직으로서 교장·교수·집강·도집(都執)·대정(大正)·중정(中正) 등의 6임과 집회 조직으로서 포(包)와 장(帳)의 회소(會所)를 설치였으며, 최시형의 죄목과 처형에 대한 사유로서 최시형이 교조신원운동을 위해 계사년에 대궐 상고와 보은장내에 집회를 소집했다는 점을 들면서도 갑오년에 전봉준과 손화중이 고부에서 봉기했을 때 화응(和應)하지 않았다고 증언했지만, 정부는 그의 혹세무민 행위에 주목했다. 이 선고서를 통하여 최시형의 원주에서의 체포 경위와 함께한 이들의 행동을 소상히 알 수 있다. 결국 최시형은 ‘대명률 제사편 금지사무사술조(禁止師巫邪術條)’를 들어 교형(絞刑)에 처하고 황만기 등 위종자(爲從者)들에 대한 처벌을 선고하였다(1898년 7월 18일자 판결선고, 7월 20일(음력 6월 2일) 형 집행). 이 자료는 법부에서 고등재판소에 지령하는 건(제73호, 74호)와 비교하여 연결된 문서이다(『(법부)기안』 규 17277의 2, 32책, 참조). 다음으로 ‘법부래거문(法部來去文)’은 1895년부터 1906년까지 외부(外部)에서 외국인의 형사·민사 관계의 적용사례를 법부에 문의한 조회와 그 조복을 모은 것이다. 1895년 4월 12일자 조복에서는 옥사(獄事)는 사법의 권한과 관계되어 비밀은 비록 각의에서도 발설하지 않는 것이고 만국정부의 통례이므로 공문으로는 답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외국공사가 외부대신에게 사적으로 물어본다면 가능할 수도 있으나 공문으로 옥사를 탐색하고자 하는 것은 공법이 불허할 뿐만 아니라 법부대신의 권리와 관계되는 것이라고 거절하는 내용이다. 특히 성형일관(省刑一款)은 법부대신이 혹형(酷刑)의 도구를 불허한다는 뜻으로 대군주의 재가를 받았으니 자신의 권한내에 있으며, 아직 특별법원이 개청하지 않았으니 외국인의 회심(會審)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이는 당시 이종정경(李宗正卿-이준용)의 모반사건 재판에 관한 외국의 문의에 대해 답변한 내용으로 추정된다. 그해 7월 5일자 조회의 경우, 한산군에 거주하고 있는 김선재(金善在)와 서가량(徐可良), 오응노(吳應老) 등이 원래 동학난류로서 활동하다가 무휼 귀화시키는 조령으로 면죄하였으나 이후 서학(西學)을 칭하면서 다시 작폐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공주지역의 경우 소요를 거치고 환산하여 흩어진 자가 과반이었으나 동도의 여비(餘匪)들이 서학에 다시 붙어 도당의 세를 늘리고 잔민을 구타하고 전재(錢財)를 침탈하는 현상을 비판한 것이었다. 이때 문제가 된 것은 당시 프랑스 전도사 남일량(南一良 : 본명 퀴를리에(Jean Jules Leon Curlier))에 의탁하여 서학을 칭탁하여 폐해를 일으키고 있으므로, 각국과 체결한 조약 약장에서 전도인을 보호할 뿐이므로 죄를 범한 것은 엄칙하여 금지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다(조회 16,18,19 등 참조). 1901년 4월 4일 <조회>에는 동비 이후 양규태(梁奎泰), 안종학(安鍾學) 등이 길정당(貞吉堂), 안병태(安炳泰) 등과 부동하여 가칭 희랍교(그리스정교회)라 하면서 전도하여 내포와 완북지역에서 십자기를 들고 동비의 여당을 모아 방포하고 향리에 도육하고, 부인을 겁탈하고 인재를 빼앗으며 인총(人塚)을 이굴하고 사채를 늑봉하는 등 지역의 사대부와 부민에게 침학하고 있다는 사태를 고발하고 있다(조회 제5호, 법부거래문, 7권). 이들은 프랑스나 러시아와 연관된 종교의 포교를 빙자하여 내지의 침탈을 일삼는다고 지적하고 있으나, 1894년 이후에도 여러 지방에서 동학의 참여자들이 서학, 영학, 희랍교 등을 활용하여 여전히 민중들의 권익보호와 세력 신장을 도모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내각법부래거문(內閣法部來去文)은 1906년이후 1909년까지 내각과 법부 사이에 오고간 지령과 조회 등 공문서를 모아놓은 자료이다. 이 중에서 1907년 7월 16일에는 법부에서 동학의 교주 최제우(崔濟愚)와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의 제명을 없애는 효주(爻周)를 명하는 지령을 수록하고 있다(지령 제238호). 고종초기부터 혹세무민의 종교로서 탄압을 받아온 동학의 교주들이 사면됨으로써 신원과 포교의 자유를 동시에 획득하게 되어 동학 탄압의 전환을 이룬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렇지만 당시 관료 정치인으로서 김윤식의 특사, 안경수의 사면, 이준용의 사면 등과 함께 이루어졌으며, 조칙은 일제의 침략이 본격적으로 강화되어 준식민지로 들어가는 1907년 정미년의 국면에서 취해진 유화적인 조치였다. 따라서 일제에 항거하는 정미의병이 새롭게 재편되어 치열하게 고조되는 시점과 맞물리면서 동학 교주에 대한 사면의 정치적 의미는 반감될 수 밖에 없었다. 왕현종 연세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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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9.17 18:23

[뉴스와 인물] 호남권 최초 코스트코 부지 제공, 이성식 (유)삼학콘크리트 회장

거대한 글로벌 유통기업 코스트코가 드디어 호남 땅을 밟는다. 전 도민적 관심과 지역사회의 지속적인 노력 끝에 힘겹게 거둔 값진 결실이다.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관건은 단연 부지 확보였다. 당초 계획이었던 익산 왕궁물류단지 조성이 무산되면서 좌초 위기에 처하자 익산시는 3~4곳의 대체 부지를 제안했다. 하지만 부적합 통보를 받자 급기야 정상 가동 중인 익산IC 인근 삼학콘크리트 부지가 대안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수년간에 걸친 설득과 협의 끝에 계약이 마침내 성사됐다. 이는 이성식(78) (유)삼학콘트리트(범창산업) 회장의 통 큰 결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역 발전을 위해 지난 수십 년간 지켜 온 보금자리를 선뜻 내놓은 그를 만나 그간의 소회와 앞으로의 계획을 들어봤다. △드디어 코스트코 익산점 유치가 이뤄졌습니다. 오랜 기간 사업을 영위해 온 공장 부지를 내놓는 결단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 “사실 많은 어려움이 예상됐습니다. 공장 운영 계획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 하는 것은 물론, 현재 수준의 공장 부지를 찾는 것도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공장 운영이나 토지 가치 하락 등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선뜻 대답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지역 발전에 미치는 영향이 우리 회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파급력을 갖고 있는 기업을 개인의 영리 때문에 거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창업주이신 선친께서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일각에서는 돈방석에 앉게 됐다는 식의 특혜 의혹이 일기도 했는데요. 허심탄회하게 한 말씀 주신다면. “하나의 공장 부지를 절반으로 나누는 것은 그 토지에 대한 효용가치가 축소된다고 봐야 합니다. 특히 규모가 큰 공장들은 토지 매매가격을 떠나 아예 맞는 부지가 없어 입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번 계약 조건에는 공장 이전이 포함돼 있는데, 이전 비용을 주는 것도 아니고 잔여 공장 부지를 매입해 주는 것도 없이 정해진 기간 내에 공장을 이전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 부지 매각 및 신규 이전 부지 매입에 따른 각종 세금과 공사비 등을 부담해야 하고 해당 지역주민들과 협의 등 수많은 과정을 거쳐야 하며 정해진 시간과의 싸움을 해야 합니다. 도로망 등 현재의 위치 정도 되는 지역에 3만 평 이상을 확보해 이전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 것으로 판단돼 당초 결정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밖에서 단순히 바라보는 시각은 내부에서 판단하고 있는 실상과는 너무 많은 괴리가 있습니다.” △협상이 매우 까다로운 것으로 알려져 있는 미국계 기업 코스트코 측과의 실제 협상 과정은 어땠나요? “이렇게 어려운 과정을 거칠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습니다. 처음 받은 계약서는 국내 유명한 로펌에서 작성했는데 62페이지에 걸쳐 수많은 조건들이 나열돼 있었고, 그중에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조건들도 많았습니다. 협상 중이던 지난해 5월경 미국 본사 경영진들이 현지를 방문한 후 추가 조건을 제시했는데, 그중에는 우리 회사에서 할 수 없는 조건들도 있고 심지어 법적으로 불가한 조건들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익산시의 중재로 수차에 걸친 협의를 거쳐 천신만고 끝에 매매계약이 이뤄진 것입니다.” △계약체결이 당초 예상보다 오래 걸렸습니다. “조건별로 한국에서 절충이 끝나면 미국 본사 최고 경영진에게 보고하는데, 보고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수정되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반복적인 절차를 따라야 하는 시스템 때문입니다. 이미 별도의 주변 토지 매입이나 용역비 등 30억 원 이상이 투자된 상황에서 황당한 조건들을 추가적으로 요구해 올때마다 여러 차례 포기하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회사 때문에 무산됐다는 얘기는 절대 듣지 않겠다는 각오로 협상에 임했습니다. 익산시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뚝심 있게 뒷받침해 줘 하나씩 하나씩 난제들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역 대표적 상공인으로서 코스트코 입점에 대해 어떤 생각 갖고 계신지요. “호남은 다양한 농산물이 대량으로 생산되지만 지역민들의 생활은 타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곤한 상태입니다. 익산에는 전국 유일의 국가식품클러스터 단지가 있고 그 인접에 코스트코가 자리하게 됐습니다. 코스트코 입점이 지역 농산물의 새로운 판로가 형성되는 계기가 되고 지역과 더불어 상생 발전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입점을 위한 여러 행정절차와 공사가 남아 있습니다. 전북특별자치도와 익산시의 역할도 중요한데요. “모든 계약 조건들은 기한을 두고 있고, 정해진 기한 내 이행하지 못할 경우 회사의 존립 자체까지 위협하는 조건도 있었습니다. 행정을 믿고 여기까지 왔기 때문에, 전북도나 익산시와의 절대적인 협력이 절실합니다. 아울러 코스트코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각종 인허가 절차가 빠르게 진행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코스트코가 입점하게 되면 현 공장 주변에도 많은 변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코스트코 이용객은 광역권입니다. 따라서 유동인구가 늘고 관광이나 지역경제 측면에서도 긍정적 효과가 날 것으로 기대합니다. 도시에 긍정적 변화를 이끌어 내는데 일조했다는 점, 익산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은 개인적으로 정말 큰 보람입니다.” △삼학콘크리트는 지역을 대표하는 콘크리트 전문 제조업체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선친께서 1947년도에 송학동에 근거를 두고 창업하셨고, 이후 이곳으로 1983년도에 이전해 송학동에서 36년, 이곳 왕궁에서 43년 등 총 79년을 이어 오고 있는 지역 대표 향토기업입니다. 특히 동종업계 중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입니다. 제가 기업을 물려받은 지는 올해 52년째인데, 지금의 회사를 혼자의 힘으로 이루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일각에서 반대 목소리를 내고 우리 회사에 마치 큰 특혜를 줬다는 식으로 자기들만의 생각과 판단으로 호도하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협의 과정에서 회사가 수용할 수 없는 조건들을 계속 요구하고 있는 와중에 특혜까지 운운하는 것은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입점이 무산될 경우 주민들의 실망감과 지역에 대한 박탈감이 큰 압박으로 다가왔습니다. 뭐하나 하려면 의심부터 하거나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풍토는 이제 사라져야 합니다.” ●이성식 회장은 이리농림고등학교와 전북대학교 농과대학 수의학과를 졸업한 이성식 회장은 지난 50여 년 동안 콘크리트 전문 제조업체인 삼학콘크리트를 이끌어 왔다. 환경, 안전, 건강과 사람을 중시하는 경영으로 최고의 제품 및 기술 경쟁력을 확보했으며, 자율안전보건시스템을 통해 무재해 사업장을 구현하고 경영 이익 확대를 통한 지역 고용창출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그동안 한국시멘트공업 협동조합 감사, 전북시멘트공업 협동조합 이사장, 익산상공회의소 부회장, 민주평통자문위원, 법무부 익산지구 보호관찰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유)삼학콘크리트와 (유)범창산업의 회장을 맡고 있다. 대담=엄철호 기자/정리=송승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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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엄철호외(1)
  • 2025.09.14 14:21

[트민기] “결혼식 티켓 팝니다!”⋯스드메 흔드는 ‘새로운 결혼식’

유행은 돌고 돈다. 빨라도 너무 빨리 돈다. 괜히 아는 척한다고 "요즘 유행인데 몰랐어?" 이야기했다가 유행이 끝나 창피당하는 일도 다반사다. 트렌드에 민감한 기자들, 트민기가 떴으니 이제 걱정 없다. 이 기사를 읽는 순간에도 SNS,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수많은 유행이 올라오고 트렌드가 진화한다. 트민기는 빠르게 흐름을 포착해 독자에게 전달하는 게 목표다. “이것은 평범한 결혼 파티지만 표 구매한 분들 모두 오실 수 있습니다.” 공연 예매 사이트에 실제 결혼식 관람 표가 올라와 화제다. ‘Untitled: wedding$’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된 결혼식은 오는 27일 서울 세빛섬 가빛에서 열린다. 표를 구매하면 하객은 DJ파티, 보드게임, 술자리 등을 함께 즐길 수 있다. 눈길을 끄는 건 ‘없는 것들’이다. 이 결혼식은 주례도, 축가도, 청첩장도, 축의금도 없다. 결혼 사진, 드레스, 메이크업으로 대표되는 ‘스드메(스튜디오·드레스·메이크업)’ 3종 세트도 빠졌다. 결혼식 최대 난제로 꼽히는 ‘하객룩’ 조차 자유다. 다만 “새로운 사랑을 원한다면 컬러 의상을, 아니라면 흑백을 입어달라”는 안내 문구가 붙어 호기심을 자극했다. 처음엔 결혼 콘셉트 공연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결혼식’이라는 개념이 생소했기 때문이다. 안내문도 나폴리탄 괴담 형식을 택해 일부러 혼란스럽게 꾸며 공연설을 키웠다. 뮤지컬 관람이 취미인 김하늘(25) 씨는 “공연 중에서 관객이 배우처럼 직접 참가할 수 있는 개념의 ‘인터랙티브 공연’이라는 게 있다”며 “한국에서는 카지노 참가자 콘셉트의 공연도 있었기 때문에 이번 결혼 파티도 그런 종류의 공연인 줄 알았다. 그런데 진짜 결혼식이라 충격”이라고 말했다. 사실 이 결혼 파티는 공연이 아닌 실제 커플이 기획한 결혼식이다. 결혼식 당사자로 알려진 조명환(가명) 씨는 SNS에 “연극, 사회실험, 방송이 아니라 결혼 파티 맞다”라며 “청첩장 대신 포스터를, 축의금 대신 표를, 정장 대신에 난장을, 낮 대신 밤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기존에 다들 생각하던 결혼식이 아니지만 그래도 결혼식이다. 무료하고 지친 삶에 하나의 즐거움이 되길 기원한다”고 전했다. 표는 5~15만 원으로 다양하다. 저가권은 일찌감치 매진됐고 11일 기준 15만 원권만 남은 상태다. 이번 결혼 파티는 국내에서 처음 시도된 형태지만, 해외에서는 새로운 웨딩 트렌드로 자리 잡는 중이다. 올해 초 프랑스 기업 ‘인비틴’은 커플과 유료 하객을 연결해 주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초대장을 유로로 판매해 결혼식 비용에 보태고, 구매자는 결혼 당사자·하객들과 어울려 새로운 문화를 즐기는 방식이다. 그 때문에 서비스를 선택하는 하객 대부분은 타국의 결혼 문화를 접하고 싶은 관광객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엄격한 복장 규정이 정해져 있고 기업에서 진행하는 유료 서비스라는 점이 이번 한국에서 진행되는 결혼 파티와는 다르다. 누리꾼들은 다가오는 결혼 파티에 대한 기대감을 쏟아내고 있다. 예매 사이트에는 “와 매진. 나 빼고 다들 재밌게 살아. 결혼 축하드려요!”, “제발 표 풀어주세요. 정말 잘 축복할 자신 있습니다”, “신랑·신부 결혼 축하합니다. 만수무강 무병장수 행복하세요” 등 기대평이 올라오며 새로운 시도를 반기는 모습이다.

  • 기획
  • 문채연
  • 2025.09.13 10:30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60) 양호초토등록, 고종과 홍계훈 문답문서

이번에 소개하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은 동학농민군 진압에 나선 홍계훈 관련 기록물로써, 『양호초토등록(兩湖招討謄錄)』과 『고종과 홍계훈문답문서』 두 자료이다. 특히 이 두 기록물은 1차 동학농민혁명의 실상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는 만큼 흥미롭다. 홍계훈(洪啓薰, 1842-1895)은 초명이 홍재희(洪在羲)로, 1842년에 무관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무예청 별감으로 관직을 시작한 그는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민비를 등에 업고 궁궐에서 탈출시킨 공으로 중용되었다. 1893년 동학교도들이 충북 보은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을 때, 장위영 정령관으로 임명되어 경군 600명을 이끌고 청주로 출동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홍계훈은 당시 민씨정권의 측근 무관으로 활동하였는데, 그 때문에 동학농민혁명기에도 홍계훈의 역할이 컸다. 동학농민군이 파죽지세로 전라지역을 장악하자 위기를 느낀 민씨정권은 홍계훈을 1894년 4월 2일 양호초토사로 임명하여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양호초토등록』과 『고종과 홍계훈문답문서』은 그 과정에서 생산된 기록물이다. △『양호초토등록(兩湖招討謄錄)』 이 기록물은 양호초토사 홍계훈이 장위영군(壯衛營軍)과 강화영군(江華營軍) 등 경군(京軍)을 인솔하고 서울을 출발한 4월 초 3일부터 전주성을 수복한 직후인 5월 16일까지의 관련 사실을 일기체로 수록한 것이다. 이 자료에는 1894년 3월 20일에 동학농민군이 무장에서 기포하여 전주성을 향해서 진군하기 시작하자, 중앙정부가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여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도록 남하시켰을 때의 초토 활동 기록을 담고 있다. 또한 일록(日錄) 뿐만 아니라 양호초토사가 승정원 등 중앙정부에 보고한 장계와 전라관찰사에게 보낸 이문(移文), 각군에 보낸 감결(甘結), 산하 군대에게 보낸 전령(傳令), 도민에게 포고한 방문(榜文), 동학농민군의 귀순을 권고한 효유문 등이 정확한 날짜와 함께 원문이 수록되어 있다. 이 기록물은 비록 양호초토사 자신의 자기 변명이 충만되어 있으나, 그 내용에는 풍부한 사실을 담고 있어 사료비판을 하면서 활용하면 제1차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정부의 대책과 진압군의 초토 활동에 대한 여러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자료는 1894년 4월 3일부터 5월 28일까지 초토사 홍계훈과 각처 사이에 주고받은 전보를 날짜 순서로 수록한 『양호전기(兩湖電記)』와 함께 교차 분석할 경우, 당시 정부의 진압책과 동학농민혁명 전개상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고종과 홍계훈문답문서』 이 기록물은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파견된 초토사 홍계훈과 고종이 문답한 문서로, 폭 23cm, 길이 292cm이다. 이를 통해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두 사람의 시국인식과 대처방안 등을 알 수 있다. 작성자와 작성시기는 불명이다.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4월 3일 서울에서 출정한 양호초토사 홍계훈은 동학농민군이 4월 27일 점령한 전주성에서 5월 8일 철수하자, 전주성내로 들어간 뒤 동학농민군이 해산한 것으로 중앙 각처에 보고하였다. 이를 접수한 정부에서는 청·일 양국 군대를 철수시키는 일이 급선무인 만큼 동학농민군이 해산하였으니 조선에서 철수할 것을 요청함은 물론 홍계훈으로 하여금 서울로 귀경하도록 5월 16일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홍계훈은 5월 16일 전주를 출발하여 공주를 거쳐 5월 26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에 친군 장위영(親軍壯衛營)에서는 ‘본영의 정령관(正領官) 홍계훈이 거느리고 호남에 가서 주둔하고 있던 장수와 군사들이 오늘 올라왔습니다.’라고 고종에게 아뢰었다. 그러자 고종은 당일 초토사 홍계훈을 보현당으로 불러 궁금하였던 점을 홍계훈에게 직접 묻고 홍계훈이 답하였는데, 『홍계훈과 고종문답문서』는 바로 두 사람의 문답내용을 필사한 문서이다. 두 사람이 나눈 문답은 대략 11번 정도였다. 먼저 고종은 홍계훈이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것을 치하한 뒤 궁금한 사항을 질문하는 형식으로 문답이 이루어졌다. 그 가운데 몇 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고종은 호남으로 내려간 청군병을 어디서 만났는지 홍계훈에게 물었다. 홍계훈은 능지점에서 청국군 정탐병을 만나, 동학농민군이 해산한 전말을 상세히 말해주고 갈 필요가 없다고 하자 그 역시 돌아갈 것이라고 답했다고 하였다. 고종이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홍계훈에게 청국군 동정을 물은 것은 그만큼 청일 양국군을 철수시키는 일이 초미의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심영병 가운데 병에 걸리고 부상한 병사가 없는지 물어본 뒤, 군사 훈련도 받지 않은 병정들이 큰 공을 세웠다고 하자, 홍계훈은 ‘우리 군은 불과 2000∼3000명임에도 물러남이 없이 저들 수만명을 무찔렀다’고 답하였다. 또 고종은 동학농민군이 불랑기(佛郞機) 대포를 어느 곳에서 얻었는지 물었다. 그러자 홍계훈은 수십년전 강화에서 분실한 것으로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에서 반납한 뒤 귀화하였다고 답하였다. 실제 동학농민군은 5월 8일 전주성에서 철수하면서, 극로백 1좌, 회선포 1좌, 총과 창 1000자루, 불랑기 대포 24좌와 연환 10두 등을 반납하고 성문을 빠져나갔다. 그러자 고종은 다시 지금 비류가 모두 흩어졌느냐고 물었다. 홍계훈은 태인에 70여 명이 모여 있으나, 그들의 진정에 따라 전주성내로 피신한 태인군수로 하여금 조속히 환관하여 각별히 안정시키도록 하였다고 답하였다. 또 고종이 호남 각읍이 난리를 겪은 뒤 주민들이 실업하고 이산한 자가 많다고 하는데 어떻게 안집시킬 것인지 물었다. 이에 대해 홍계훈은 감영에서 군사를 모으는 것을 금지시켰을 뿐 아니라, 금구·태인·부안·정읍·흥덕·영광·장성·함평 등지의 수령은 각별히 임명해야 후환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또 고종은 청국병이 호남을 향해 갔기 때문에 심영병(沁營兵)이 머물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묻자, 홍계훈은 청국병이 내려온다는 소문에 백성들이 도피한다고 하면서 청국군보다 심영병이 머무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답하였다. 실제 5월 19일 홍계훈이 이끄는 장위영군대는 상경하였지만, 심영병은 청주병영군과 함께 계속 전주에 머물렀다. 이처럼 홍계훈은 고종에게 동학농민군이 해산한 것으로 보고하였지만, 동학농민군 주력부대는 전주성에서 철수해서 각지로 흩어져 순행하면서 계속 활동하였다. 실제 홍계훈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데 큰 공이 없을 뿐 아니라, 청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도록 보고하여 청일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인물이었지만, 동학농민군 진압 공이 인정되어 훈련대 연대장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훈련대 연대장으로의 승진은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1895년 음력 8월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사건 때 훈련대장으로서 광화문을 수비하다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죽었다. 그 공으로 군부대신에 추증되었고 충의(忠毅)라는 시호도 받았다. 1898년 해월 최시형의 죽음에 이어 동학교단의 핵심인물이었던 서장옥·손천민 등이 사형을 당한 1900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현충시설인 장충단에 제향되었다. 김양식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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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9.10 20:00

[전북일보-전북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공동기획] 현실화된 전북 기후불평등...취약계층 지원 구멍 조례로 막는다

기후변화로 재난이 발생한다면 가장 위험한 계절은 여름이다. 대기의 에너지와 수증기가 급증하면서 가뭄과 폭우 등의 피해가 집중되기 때문이다. 올 여름에도 극한 호우와 역대급 폭염, 가뭄 등 상반된 이상기후 현상이 동시에 나타났다. 기후학자들은 이 같은 기후 양극화 현상이 갈수록 심화될 것으로 전망한다. 문제는 이상기후가 심해질수록 피해도 커진다는 점이다. 더욱이 기후위기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기후 양극화로 입는 피해는 저소득층부터 덮친다. 폭염과 폭우, 가뭄과 폭설 등으로 물가가 치솟으면 누군가는 물건 사는 것을 포기하고, 반찬 가짓수를 줄여야 한다. 이상기후로 인한 기후재난은 사회적 취약계층에게 더욱 가혹할 수밖에 없다. 기후위기를 직면한 시대, 전북은 어떻게 버티고 있을까. △폭염 속 하루, 고단한 여름나기 “아이고. 젊은 사람들 돌아다니면 막 열이 나 갖고는 병나겠어, 조심혀” 지난 7월, 전주시 인후동에 거주하는 어르신 A씨(78)는 선풍기 앞에서 간신히 더위를 피하며 이렇게 말했다. 방 안에는 선풍기 한 대가 돌아가고 있었지만, 하루 종일 달궈진 무더운 공기를 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많이 덥긴 더워진 것이, 옛날에는 더워도 그냥 뭐 선풍기 좀 세고 부채질 좀 하고 그러면 그냥 살만했는데 요즘에는 너무 더우니까 부채질해도 그렇고…” 어르신은 더위에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방 한쪽 구석에 에어컨이 놓여 있었지만, 나중에 전기요금 고지서에 찍힐 금액이 무서워 리모컨에 손이 쉽사리 가지 않는다. 더위를 피해 집 바깥으로 나가려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다. 어르신은 “요즘 너무 더우니까 집에서만 있지, 밖에는 못 나가. 나가는 사람들 열병 나고, 더워서 몸살 나고 그런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기후 위기 직면한 우리나라, 전북도 ‘휘청’ 지난해에는 입추가 훌쩍 지난 9월까지 불볕더위가 이어졌다. 평균 기온 24.7℃, 최고 기온29.6℃, 최저 기온 20.9℃로 모두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기상청 관측 결과, 이례적으로 많은 폭염 일수(6일)와 열대야 일수(4.3일)가 나타났다. 지난해 전국 주요 기상관측 지점 66곳 중 7곳에서 9월 첫 폭염이 발생했는데, 전북에서는 장수군이 포함됐다. 임실군은 9월첫 열대야 지역 4곳 중 한 곳으로 꼽혔다. 전북특별자치도소방본부에 따르면 올해 8월 4일 기준 온열질환 의심 증상으로 119구급대가 출동한 건수는 237건으로 집계됐다. 7월 말까지 도내 온열질환 구급 출동 건수도 222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93건)에 비해 2.3배 넘게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가정이나 일터에서 온열질환을 겪을 때 119구급대를 호출하지 않는 것까지 포함하면 도내 온열질환자는 더욱 많을 것으로 예상한다. 행정안전부 중앙재난안전상황실에서 공개하는 ‘국민 안전관리 일일상황보고’를 보면 올해 전북 지역은 최근까지도 폭염주의보가 발효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전북은 더 이상 기후 위기를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지역이 됐다. △취약계층에 더 가혹한 폭염 최근 기후 위기가 심화하면서 ‘기후 위기 취약계층’이라는 개념도 등장했다. 기후위기 취약계층은 폭염을 비롯한 한파, 호우 등 재난에 피해를 볼 우려가 큰 집단을 의미한다. ‘기후 위기 적응 및 국민안전 강화에 관한 특별법률(안)’에서는 노인, 아동, 저소득계층, 야외 노동자, 농어업 종사자, 취약 시설‧지역 거주자 등을 포함한다. 소득이 낮아 냉‧난방기를 마음껏 쓰지 못하거나, 업무상의 이유로 장시간 더위와 추위에 노출되고, 태풍으로 인해 한 해 농사를 망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기후 위기 취약계층에 포함되는 것이다. 한국환경연구원 국가기후위기적응센터(KACCC)는 지난해 기후위기 취약계층 약 2400명을 대상으로 기후위기 취약계층 실태조사를 진행했다. 에너지·물품 지원에 대한 개인 복지와 무더위쉼터, 주거환경 개선에 대한 정책수요가 조사됐다. 특히 에너지 지원에 대한 수요로는 에너지 바우처가 가장 높은 수요를 보였고, 물품 지원에는 에어컨을 가장 원했다. 최근까지 발생한 폭염으로 인한 피해로는 의료비용 발생이나 직장 소득과 연계된 경제적 요인이 가장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사회적 고립이나 폭염 관련 정보를 받지 못하는 것, 온열질환 진단 경험 순으로 피해 결과를 겪었다고 응답했다. 이번 조사는 폭염이나 한파, 폭우 등 기후 위험 요인과 맞닿아 있는 지역에 거주함과 동시에 경제적 취약성(기초생활수급자 및 차상위계층), 주거환경적 취약성(쪽방 등 주택 외 거주자, 반지하 거주자, 에어컨 미보유 가구 등) 중 1개 이상에 해당하는 자를 대상으로 진행했다. △전북, 기후 위기 취약계층 보호에 전력투구 길어진 무더위로 위협받는 일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더위에 지친 어르신들의 한숨은 폭염이 남긴 사회적 숙제다. 이러한 상황에 전북도는 취약계층이 무더위나 한파 등에 대응할 수 있도록 쉼터 운영 등 보호 정책에 나서고 있다. 지난 7월30일 전북도의회 420회 임시회에서는 ‘전북특별자치도 기후불평등 해소에 관한 기본 조례’도 제정됐다. 이번 조례는 기후위기로 발생하는 직업, 계층, 지역 간 불평등과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것이다. 조례를 발의한 서난이 전북도의원은 “기후 위기를 넘어 기후 재난을 맞이한 이 시기의 진정한 피해자인 취약계층들을 위해 조례를 만들게 됐다”고 했다. 이번 조례를 통해 전북도는 도민 안전 보험 안에 기후보험을 도입하는 방향도 논의하고 있다. 기후보험은 올해 4월 경기도가 물꼬를 튼 사업으로, 이상기후로 인한 질환과 각종 피해를 지원하는 내용이다. 모든 도민은 자동 가입되고, 특히 기후 취약계층은 추가로 지원한다. 그러나 그동안 시행한 기후위기 관련 법이나 조례의 실효성에 대한 지적도 나온다. 장진호 전북환경운동연합 활동가는 “단순 시설 설치나 일회성 지원에 그치지 않고 지속 가능한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며 “이행 점검을 비롯한 맞춤형 보완이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북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이예령·강채연·추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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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은
  • 2025.09.08 18:35

[트민기] "승진하면 퇴사할래요"⋯2030세대의 '승진 거부'

유행은 돌고 돈다. 빨라도 너무 빨리 돈다. 괜히 아는 척한다고 "요즘 유행인데 몰랐어?" 이야기했다가 유행이 끝나 창피당하는 일도 다반사다. 트렌드에 민감한 기자들, 트민기가 떴으니 이제 걱정 없다. 이 기사를 읽는 순간에도 SNS,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수많은 유행이 올라오고 트렌드가 진화한다. 트민기는 빠르게 흐름을 포착해 독자에게 전달하는 게 목표다. 그동안 성공의 지표로 여겨진 승진과 리더가 기피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최근 직장에서 리더가 되기를 회피하는 '리더 포비아'라는 현상도 자주 언급될 정도다. 지난해 글로벌 컨설팅 기업 로버트 월터스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Z세대(1997∼2012년 출생자)의 절반 이상(52%)이 중간관리자가 되고 싶지 않다고 답했다. 응답자 72%는 팀을 이끄는 것보다 개인적인 성장과 기술 축적에 시간 쓰는 것을 선호하다고 했다.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Z세대 트렌드 전문 연구기관 대학내일20대연구소가 지난 5월 발표한 '20·30 직장인의 리더 인식 기획조사 2025' 결과에 따르면 직장인 절반(47.6%)이 리더를 맡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다고 응답했다. 불안하다(22.1%)는 응답보다 2배 이상 높았다. 2030세대는 리더 직급을 맡지 않으려는 경향이 두드러진다는 의미다. 또 중간 관리직을 맡고 싶다는 36.7%, 맡고 싶지 않다는 32.5%로 팽팽했다. 기피하는 이유로는 팀·조직 성과 책임 부담(42.8%)이 가장 높고 업무량 증가(41.6%), 개인 성향에 맞지 않아서(33.7%) 등이 뒤를 이었다. 최근 들어 '리더포비아'가 주목받고 있지만 이미 수년 전부터 계속된 현상이다. 취업 포털 사람인이 지난 2019년 2030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최종 승진 목표를 묻는 말에 직급 승진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응답이 41.7%에 달했다. X(구 트위터) 등 온라인 커뮤니티에도 관련 경험담이 올라왔다. 지난 2023년 X의 한 이용자는 “최근 힘든 일 다 맡아서 하던 선배가 퇴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내가 봐도 일이 너무 쏠린다 싶은 정도였는데 결국 힘들어서 퇴사하는 것 같더라”는 내용의 글을 작성했다. 그는 “내가 평소에 느낀 직장 생활은 열심히 하면 일이 더 쏠리는 것. 그렇게 승진해서 중역에 이르면 그때부터 시간을 더욱 갉아먹게 된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과거부터 존재했던 리더 포비아 현상이 최근 들어 더 두드러지는 이유에 대해 전문가들은 근무환경과 가치관 변화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코로나19 이후 유연근무제와 원격근무가 일상화되면서 평생 직장이라는 개념이 약해졌고 빠른 승진보다 개인 성장에 집중하는 분위기가 확산됐다는 것이다. 루시 비셋 로버트 월터스 이사는 하버스 바자와의 인터뷰에서 “Z세대는 더 나은 일과 삶의 균형과 자율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더욱 개인적인 경력을 선호한다”며 “시간이 흐르면서 관리직은 스트레스가 많고 부담이 크다는 평가가 쌓였고 이에 따라 Z세대는 중간 관리직을 맡기 꺼리게 됐다”고 말했다. 관리자가 되면 팀원 업무를 감독하는 등 추가적인 부담이 생기고 동시에 본인이 좋아하는 업무에서 소외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다는 설명이다. 일부 젊은 직원들이 부실한 경영에 시달린 경험이 리더포비아 현상으로 이어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윤정구 이화여대 경영대학 교수는 올해 초 발표한 ‘리더 포비아 시대를 극복하는 진성리더의 급진거북이 전략’에서 “경기가 안 좋음에도 위에서는 여전히 높은 성과 목표를 설정하고 달성을 독려할 뿐 아니라,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때 직원에게 과도한 불이익을 부과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시대에 맞는 리더십 패러다임을 고민하기보다 현실성 없는 리더십을 강요하고 있다. 새로운 리더십 패러다임의 부재는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리더(십) 포비아를 가져왔다”고 지적했다.

  • 기획
  • 문채연
  • 2025.09.06 09:34

[트민기] 나왔다하면 '품절 대란'⋯다이소로 보는 가성비 전쟁

유행은 돌고 돈다. 빨라도 너무 빨리 돈다. 괜히 아는 척한다고 "요즘 유행인데 몰랐어?" 이야기했다가 유행이 끝나 창피당하는 일도 다반사다. 트렌드에 민감한 기자들, 트민기가 떴으니 이제 걱정 없다. 이 기사를 읽는 순간에도 SNS,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수많은 유행이 올라오고 트렌드가 진화한다. 트민기는 빠르게 흐름을 포착해 독자에게 전달하는 게 목표다. 생활용품부터 화장품, 영양제까지⋯. 다이소가 내놓는 5000원 이하 제품이 매번 ‘완판 행렬’을 이어가며 소비자들의 발길을 붙잡고 있다. 최근 물가가 크게 오르면서 청년층부터 고령층까지 모두 얇아진 지갑 사정 탓에 ‘가성비 쇼핑’이 하나의 생존 전략으로 자리 잡은 모습이다. 실제 다이소는 2013년 영업이익률이 1%에 불과했지만 지난해 9%대로 급등했다. 생활 잡화 위주의 저가 점포라는 이미지를 벗어나 화장품·영양제·캠핑용품 등으로 상품군을 확장한 결과다. 대표적으로 2000원대 립밤이나 3000원대 쿠션팩트 같은 화장품은 출시와 동시에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에서 입소문을 타며 ‘품절템’으로 떠올랐다. 최근 선보인 5000원 미만 영양제는 “약국보다 싸다”는 반응 속에 ‘알뜰 건강템’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오프라인 매장에서의 ‘오픈런’ 현상이다. 화장품이나 생활용 전자기기 등 한정 수량으로 공급되는 제품은 판매 당일 품절되는 사례가 잦아졌다. 온라인 중고 거래 플랫폼에도 “다이소 ○○템 구해요”라는 글이 줄을 잇는다. 정가보다 비싼 웃돈 거래가 붙기도 하면서 다이소 리셀 시장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다이소가 시작한 가성비 열풍은 다른 유통업계로 확산하고 있다. 대형마트인 이마트는 초저가 전용 라인 5K 프라이스를 내세워 생활 필수품을 5000원 이하로 공급하기 시작했다. 라면, 세제, 휴지 등 생필품부터 일부 화장품까지 포함되면서 소비자 선택지를 넓혔다. 편의점 업계 역시 1000~2000원 대 자체 브랜드(PB) 음료와 간식을 늘리며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CU는 개당 480원에 불과한 ‘득템라면’을, GS25는 개당 1000원인 ‘혜자백미밥’을 발매하는 등 최저가 경쟁에 돌입한 모습이다. 다이소는 생활 전반을 아우르는 가성비 플랫폼으로 변모하며 유통 시장의 지형도를 바꾸고 있다. 품절 대란이 일상이 된 다이소 발 가성비 전쟁은 이제 대형 유통사와 편의점까지 끌어들이며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 기획
  • 문채연
  • 2025.08.30 10:56

[우리 땅에 새겨있는 역사의 흔적] 조선 태조어진

경기전에 봉안되어 있는 조선 태조어진은 지난 2012년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되었다. 태조어진이 국보로 승격되자 전주시민은 환호했지만 한편에선 이 초상화가 과연 국보로서 가치가 있을까하는 의문도 있었다. 그것은 이 어진이 경기전에 1410년 처음 봉안되었던 초상화가 아니라 1872년에 이모되어 그 역사가 길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태조어진의 국보 지정 이유 서양의 초상화가 감상용으로 제작되었다면 우리의 초상화는 대부분 의례용으로 제작되었다. 경모하고 숭배하는 대상으로서 일단 그림이 완성된 후에는 보는 것이 아니라 모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당이나 영당의 감실에 족자형태로 걸어놓아 영정(影幀)이라 불렀다. 이 영정이 오래 되어 석채물감의 박락이 이루어지거나 비단이 해지게 되면 이모를 하게 된다. 원본과 똑같이 그려 다시 봉안하고, 원본은 세초하여 땅에 묻거나 불에 태운다. 이러한 관습 때문에 오래된 초상화의 원본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조선 태조어진. /출처-「왕의 초상」도록 1410년 경기전에 처음 봉안되었던 태조어진도 1763년에 한차례 수리된 후, 1872년 서울 영희전본 태조어진을 범본으로 이모하여 경기전에 다시 봉안했다. 그렇다면 이 이모본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원본이 아니기에 모조품이라 해야 할까. 그런데 이 이모본은 범본의 도상을 충실히 반영한 초상이었다. 이모에 동원된 화원들이 조선 최고의 실력을 갖춘 화사들이었고, 조선 초상화의 전통에 일호불사 편시타인(一毫不似 便是他人)의 정신이 일관되게 흐르고 있었다. ‘털 한 올이라도 같지 않으면 곧 다른 사람이다’는 초상화 제작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어진이모도감을 설치해 조정대신들의 감수를 받으며 어진을 이모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범본의 초상이 충실히 구현되었다. 이를 입증해주는 증거가 어진의 오른쪽 눈썹 위에 보이는 물사마귀이다. 보기 싫은 사마귀마저 그대로 수용해 범본 그대로의 얼굴을 그렸다. 이를 통해 경기전의 태조어진이 이모는 했지만 태조의 생전 모습을 그대로 충실하게 재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제반 상황을 고려할 때 경기전의 태조어진은 이모본이긴 하지만 처음 봉안되었던 어진과 진배없는 작품이다. 태조어진을 국보로 승격한 데에는 이러한 작품성과 역사성, 그리고 조선의 왕을 그린 어진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희소성도 작용했다. △그 많던 조선왕들의 초상은 다 어디로 갔을까 조선의 왕들은 태조로부터 27대 순종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어진을 그렸다. 태조의 경우만 하더라도 기록상으로 26축의 초상화가 그려졌다. 이렇게 많은 조선왕의 초상화를 그렸지만 현재 남아있는 어진은 경기전에 소장되어 있는 태조의 전신상 한 점과 고궁박물관 소장 영조의 반신상 한 점, 그리고 초상의 절반이 불에 탄 철종의 전신상 한 점뿐이다. 고종과 순종의 초상도 남아 있지만 이 초상화는 진전 봉안용 어진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 많던 조선왕들의 초상은 다 어디로 갔을까. 영흥 준원전의 태조어진(1913년 촬영). 경기전 어진이 노년의 모습인데 비해 중년의 모습이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조선에서는 세종 26년(1444) 경복궁 안에 선원전을 건립해 태조와 태종, 그리고 왕후의 초상을 봉안했다. 이후 역대 왕과 왕후의 초상들이 이곳에 봉안되었다. 그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어진의 수난이 시작되었다. 왜군이 부산포에 상륙해 파죽지세로 북진해오자 선조는 궁궐을 버리고 몽진 길에 올랐다. 이때 선조는 겨우 종묘의 신주만을 챙겨 자신의 몸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왜군에 점령된 서울은 경복궁과 창경궁, 창덕궁이 불에 탔다. 경복궁 선원전에 봉안되어 있던 태조로부터 명종까지의 어진도 재가 되었다. 다행인 것은 외방에 태조 진전을 세워둔 것이었다. 태조의 고향인 함경도 영흥의 준원전을 비롯해 경주의 집경전과 평양의 영숭전, 그리고 전주 경기전과 개성의 목청전이다. 외방에 있던 다섯 곳의 진전 중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경기전과 준원전의 태조 어진이 보전되었다. 이 밖에 세조의 어진 한 점이 임진왜란의 전란을 피해 온전할 수 있었다. 세조가 묻힌 광릉의 능침사찰인 남양주 봉선사의 진전에 세조의 어진이 별도로 봉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임진왜란으로 태조와 세조를 제외한 조선 전반기 왕들의 어진이 모두 사라졌다. 조선후기 창덕궁에 다시 선원전을 건립해서 숙종․영조·정조·순조·헌종의 어진을 차례로 봉안했다. 궁궐 밖 남산 아래에 영희전을 건립해 이곳에도 어진을 이모해 봉안했다. 조선이 망한 후, 1921년 이왕직에서 창덕궁 내에 신선원전을 12실로 건립해 남아있던 역대 왕들의 어진을 한데 모아 봉안하고 향사를 지속했다. △전쟁보다 무서운 화마 창덕궁 신선원전에는 추존왕을 제외하고 조선의 27대 임금 중 10조의 어진이 봉안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이 어진들에 다시 시련의 날이 왔다. 6.25전쟁이었다. 어진은 창덕궁 신선원전에서 부산국악원의 창고건물에 보관되었다. 그런데 1954년 12월 10일 새벽, 어진이 보관된 용두산 일대의 피난민촌에 화재가 발생했다. 때마침 불어온 강풍으로 불길은 판자촌을 전소시키고 순식간에 어진이 보관된 창고로 번졌다. 이 화재로 영조의 반신상 한 점, 초상의 절반이 불에 탄 철종을 비롯한 추존왕인 익종․원종의 어진, 연잉군의 초상 한 점 등 겨우 5점만이 살아남았다. 경기전의 태조어진은 부산화재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부산국악원 창고로 옮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어진들은 모두 부산으로 옮겼는데 어떻게 해서 경기전의 태조어진은 그러지 않았던 걸까. 1907년 7월 23일 순종은 제사제도 개정에 대한 칙령을 반포했다. 이 칙령은 왕실과 국가의 제사를 간소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어진도 포함되었다. 어진에 대한 제례를 줄이기 위해 외방에 있는 어진 모두를 선원전으로 이안하도록 규정했다. 궁궐 밖에 봉안된 어진 중에서 경기전과 준원전의 태조어진만이 이 칙령의 적용을 받지 않았다. 만약 이러한 예외를 두지 않았더라면 경기전의 태조어진도 다른 왕들의 어진처럼 부산화재 때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호남사람들이 지켜낸 태조어진 태조어진이 오늘날까지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부산화재와 같은 재난을 피해갔던 행운도 있었지만 호남사람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경기전이 창건되었을 때부터 전주사람들은 어진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경기전 인근에 있던 향교에서 나는 아이들 글 읽는 소리와 회초리 맞는 소리가 성령의 휴식을 방해한다하여 향교를 화산으로 옮겼을 정도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감사 이광과 경기전 참봉 오희길이 태인의 선비 안의와 손홍록의 도움으로 경기전에 있던 태조어진과 전주사고의 조선왕조실록을 내장산 깊은 곳으로 옮겼다. 이때 안의와 손홍록은 사재를 털어 조선왕조실록과 태조어진을 옮겼을 뿐 아니라 370일간 하루도 빠짐없이 그 곁을 지키며 끝까지 안전하게 지켜냈다. 이처럼 경기전의 태조어진은 조선왕조의 본향에 봉안되어 임진왜란과 6.25전쟁 등 온갖 전란과 어려움을 극복해냈다. 그 과정 속에서 호남사람들이 조선왕실의 본향이라는 자부심으로 어진을 지켜낸 이야기는 초상화의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여기에 어진이 봉안되었던 본래의 자리에 안치되어 있어 유산의 가치를 더하고 있다. 문화유산은 제자리에 있어야 그 가치를 제대로 발하는 법이다. 손상국 프리랜서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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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8.28 18:07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59) 전령(傳令)과 완문(完文)

이번에 소개할 세계기록유산 등재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소장하고 있는 전령(傳令) 3건과 완문(完文) 2건이다. 전령(傳令)은 국왕 및 상급기관이 하급기관의 관리에게 또는 지방관이 백성에게 명령을 하달하는 문서이다. 하달하는 내용은 상부의 명령, 군직과 관직의 임명, 행정적인 고시 등이 포함되어 있다. 전령이 향촌에서 사용될 경우, 지방관이 실무적인 명령이나 처분 그리고 백성들에게 알려야 할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백성들을 대상으로 경계해야 할 등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한글로 번역하여 전달하기도 한다. 수신자는 군문의 하부관원과 지방의 향촌 실무담당자인 풍헌(風憲), 존동(尊洞), 두민(頭民), 약정(約定), 면임(面任), 동임(洞任), 양반, 천인까지 다양한 계층을 포괄한다. 완문(完文)은 조선시대 관립기관이 향교, 서원, 결사(結社), 촌민(村民), 개인 등에게 어떠한 사실을 확인하거나 특전을 인정해 주기 위해 발급한 공문서이다. 완문의 발급자는 대부분 수령이지만 중앙의 상급관청에서부터 지방의 말단하급 관청 및 궁방, 서원, 문중과 같은 결사체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존재하였다. 1894년 4월 4일 전령.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1894년 4월 4일 전령(傳令) 이 전령은 상주목사가 풍헌(風憲)과 각 리의 존동(尊洞), 두민(頭民)에게 1894년 4월 4일 보낸 것이다. 이 시기는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무장에서 기포하고 백산에서 대회를 개최하여 대규모 봉기를 한 직후이다. 이에 조선정부는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고 전라도로 보내 중앙 정부 차원에서 진압을 진행하고, 의정부에서는 동비(東匪)의 철저한 토벌을 삼남의 수령들에게 지시하였다. 전령의 내용에 따르면 “이 전령이 도착하는 즉시 각 면과 리에 신칙(申飭)해서 엄히 단속하고 각별히 탐문하여 만약 적발된 자가 있으면 군교(軍校)와 포졸(捕卒)을 많이 보내어 뒤쫓아 체포하고, 만약 저쪽의 머릿수가 많아 대적할 수 없으면 이웃 읍진(邑鎭)에 알려 관아의 포졸과 마을의 장정과 힘을 합쳐 남김없이 잡아들이기를 기약하되, 우두머리는 즉시 죽여 없애고 따르는 자는 낱낱이 엄하게 가두어야 한다.”라고 하여 동학농민군을 체포하고 우두머리는 즉시 죽여 없애라고 하는 등 동학농민군 토벌의 기준과 방향을 모든 백성들에게 전달하였다. 이에 수령들은 산하 행정구역 책임자들에게 동비(東匪)를 찾아내 잡아 올리고 오가작통(五家作統)을 실시하라고 지시하였다. 이 전령 말미에 “본면의 각 리는 다섯 집을 통(統)으로 만들고 통수(統首) 1명씩을 두되, 만약 동학의 무리들이 소란을 피우는 일이 있으면 모두 나가 힘을 합하여 결박하고 압송하여 올려보낼 것”이라고 하여 오가작통의 구체적인 방안까지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 전령에는, 마을의 책임자인 존동(尊洞)과 두민(頭民)에게 지시를 내리면서 고을이름과 산하 행정지역을 밝히지 않고 있다. 다만 화북(化北)이라는 두 글자만 표시해 놓았다. 또 여기 전령에 ‘지시를 거행함에 있어서 조금도 느슨해서는 안 되지만 양호(兩湖)에서 체포를 엄하게 시행하면 저 무리들이 영남으로 도망쳐 흩어지는 상황이 반드시 올 것이다. 더구나 본 고을의 경내에 이러한 무리들이 많이 숨어 있음은 일찍이 들은 것이기에 서로 호응하여 폐단을 일으킬 우려가 또한 없지 않다.’라고 기술하였다. 여기 표시된 ‘화북’은 경상도 상주의 행정단위 이름이고 또 ‘영남으로 도망쳐 온다’는 표현은 상주가 충청도와 접경지역이므로 실제 일어나고 있었던 현상이다. 따라서 이 전령은 겸관인 상주목사가 풍헌(風憲), 존동(尊洞), 두민(頭民)에게 보낸 전령임을 알 수 있다. 1894년 11월 14일 전령.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1894년 11월 4일 전령(傳令) 이 전령은 초토영에서 농민군 체포의 책임을 맡은 순포중군(巡捕中軍)이 하급 군졸인 집사(執事)에게 1894년 11월 14일 보낸 지시문이다. 이 시기는 동학농민군이 우금치에서 패전한 이후의 시기로 한층더 동학농민군에 대한 토벌이 세차게 몰아칠 때이다. 이 전령에 따르면 “어떤 동이건 막론하고 그 동에 사는 접주(接主)를 즉시 압송하되, 우선 그 동의 존동(尊洞)에게 염탐하게 하여 만약 혹여 동장(洞長)과 동의 사람들이 명을 거행하는 데 힘쓰지 않고 사적인 친분을 따라 일부러 놓아 준다면, 이는 바로 동도(東徒)의 남은 무리들이니 결박해 잡아 올리며 그 가산(家産)과 집물(什物)을 적몰(籍沒)하고 존동에게 압송하게 할 것”이라고 하여 접주는 무조건 잡아들이도록 하고 있으며, 동학농민군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동도(東徒)’라고 규정하여 체포하도록 하고 있을뿐더러 그들에게까지도 가산과 집물을 적몰하도록 하여 동학농민군들의 재산을 몰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당시 조선정부에서 접주를 동학농민군의 지도자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접주는 무조건 체포하도록 하고 있다는 것이다. 1894년 전령.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1894년 전령(傳令) 이 전령은 한글로 작성되어 있다. 전령의 최종 수신자가 일반 백성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한글로도 작성하여 배포하였다. 작성 시기는 1894년 말 또는 1895년 초로 추정된다. 작성자는 알 수 없으나 수신자는 ‘영솔관 개탁’이라 하여 영솔관으로 되어 있다. 주요 내용은 접주를 반드시 잡아들이고 평민은 일절 작폐하지 말라는 것이다. 만일 접주를 숨겨준다면 마을 전체를 도륙할 것이라는 것을 마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라고 되어 있다. 이와 함께 접주의 가산집물을 몰수하도록 하였다. △1894년 11월 완문(完文) 1894년 11월에 나주목에서 해남 백포의 윤씨에게 발급해 준 완문이다. 이 문서는 완문의 형태로 발급한 일종의 물침표(勿侵票)라고 할 수 있다. 이 완문으로 벼슬아치들이나 토벌군들이 재산을 약탈하지 않고 보호해 주었다. 이 완문에 따르면 “해남(海南) 백포(白浦)는 윤씨의 세거지로, 선비다운 기품과 훌륭한 법도가 있어 동학도에 물들지 않았으니 매우 가상하다. 비록 난리로 어지러운 때이지만 특별히 안전하게 보호해야 마땅할 것이다”라고 하여 해남 백포에 거주하는 해남윤씨들에 대해 동학에 물들지 않았으므로 특별히 보호해야 된다고 하면서, 이를 보증해주는 증명서를 나주목사 이름으로 발급해주었다. △1894년 12월 완문(完文) 충청도 단양군 어상천면 면장과 연곡리 집강 등이 마을 사람들에게 1894년 12월에 발급한 완문이다. 시기적으로 동학농민군에 대한 토벌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질 때이다. 충청도 단양군 역시 동학농민군들의 활동이 있었고, 이에 대한 토벌이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완문의 내용은 충청도 단양군 어상천면 연곡리 중곡에 사는 이건재가 동학의 접주였으나 우금치 패전 이후 집을 버리고 도망하자, 그의 재산 중 전답(田畓) 여덟 마지기를 마을 사람들이 토의하여 동학으로 피해를 입은 정선비에게 주기로 하였다. 특히 정 선비에게 준 것은 평소 이건재가 정선비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이 완문을 작성한 이유는 훗날 이렇게 이건재의 재산을 정선비에게 준 것이 마을 사람들의 논의를 거쳐 이루어졌고 정당하다는 것을 증명할 목적이었다. 이 완문을 통해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뒤에 동학농민군의 재산에 대한 몰수가 빈번하게 이루어졌고, 이를 처리하는 주체가 군현 단위뿐만 아니라 면 단위에서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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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8.27 19:07

[전북일보-전북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공동기획] ③ 익산에 웬 아열대농장⋯이상기후가 만든 진풍경

바나나, 파파야, 패션프루트⋯. 듣기만 해도 동남아가 떠오르는 열대과일이지만 지금은 전북의 한적한 농촌 마을에서도 자라고 있다. 바나나와 파파야는 연중 수확되고, 레몬·패션프루트는 해마다 두세 차례 열린다. 이곳은 익산에 있는 열대과일 체험농장 '서동팜'이다. 진택성(54) 서동팜 대표는 지난 2020년 코로나19를 기회로 삼았다. 당시 사람들의 발길이 유동 인구가 적은 농촌으로 향할 것을 예상했고, 곧바로 체험형 농장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4월 새 온실이 완공되면서 지금의 서동팜이 탄생했다. 체험농장답게 판매보다 체험 비중이 훨씬 크지만, 수익 구조는 오히려 안정적이다. 농산물 판매 외 부가적인 수입원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진 대표는 "손님만 유입되면 과일은 저절로 팔린다. 체험이 곧 판로인 셈이다"고 했다. 이곳에서 나는 열대과일도 체험장에서 활용한다. 예로는 파파야 잎을 빻아 만드는 비누, 파인애플·바나나로 만들어 먹는 브런치 등이 있다. 서동팜 온실 안으로 들어서면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눈높이에 매달린 묵직한 바나나송이, 천장을 건드리는 파파야 잎, 그 옆에서 익어가는 파인애플까지. 매년 더워지는 날씨가 빚어낸 진풍경이다. 진 대표는 코로나19에 이어 이상기후를 기회라고 생각했다. 진 대표는 "부모님의 배 농사를 도왔다. 바깥 언덕에서도 노지 배를 키우고 있다. 배의 생육을 위해서 여느 때와 같이 봉지를 씌웠는데, 익다 못해 그 안에서 익어 무르는 배까지 나왔다"고 말했다. 그가 노지에 경고를, 시설에 기회를 준다는 걸 깨닫게 된 계기다. 하지만 열대과일을 키우기 위한 설비의 초기 비용이 부담된다고 토로했다. 진 대표는 "열대과일을 키우는데 필요한 전기 기반 고효율 난방은 비용과 환경에 모두 유리하다. 하지만 초기 투자 비용이 크다"며 "농가가 혼자 짊어지고 가기에는 큰 비용이다. 설비 보조, 연구 협력, 체험·관광 연계를 촘촘히 묶어야 현장이, 농가가 움직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서원영(전북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4학년)·박현우 기자 ※이 기사는 전북일보와 전북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협업 취업역량강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작성됐습니다. 본보 기자 1인과 학생 3명이 한 조가 되어 보도의 기획부터 취재, 기사 작성까지 실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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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현우외(1)
  • 2025.08.25 18:20

[전북일보-전북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공동기획] ② 기후가 만들고 위협하고⋯'완주산 레드향'을 찾아서

"인자 나무가 불쌍할 정도로 덥다니께." 최근 완주군 삼례읍 원수계리에 자리한 송가네 농장에서 만난 송성기(73)·임계자(70) 부부는 "기온이 올라서 시작했는데, 너무 올라서 문제"라며 걱정을 털어놓았다. 송가네 농장의 비닐하우스 안에는 사람 키를 훌쩍 넘는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고, 가지마다 초록빛 둥근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이 열매의 정체는 제주에서 주로 나던 만감류, 레드향과 천혜향이다. 전북에서는 홍예향, 천년향이라고 불린다. 원래는 겨울 한파가 심하지 않은 제주도에서만 안정적으로 재배됐지만, 이상기후로 인해 기온이 전반적으로 오르면서 다른 지역에서도 키울 수 있게 됐다. 관건은 여름이다. 날씨는 뜨겁고 비는 들쭉날쭉한 탓에 갈수록 종잡을 수 없다. 송 씨는 "더워서 작물이 크질 않는다. 어느 정도 시기가 되면 찬 바람이 불어야 하는데 계속 뜨겁다. 한낮 비닐하우스 안은 35도, 40도까지 올라간다"면서 "예전엔 비도 고르게 왔는데, 요즘은 가뭄이 길고 한꺼번에 퍼붓는 듯 내려 힘들다"고 토로했다. 이상기후로 시작한 일을 이상기후가 위협하면서 송 씨 부부의 걱정도 크다. 과거와 비교해 강한 직사광선에 노출돼 표면이 데이는 '일소과'도 많이 생기고, 나무의 생장까지 느려졌다. 송 씨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8월에 차광막을 세웠다. 올해는 7월 초에 세웠다. 선풍기도 소용이 없다. 뜨거운 바람이 나와서 나무가 불쌍할 지경이다. 그 안에서 얼마나 힘들곘나"면서 "앞으로가 문제다. 계속 더워진다고 하면 정말 답없다"고 하소연했다. 송가네 농장뿐 아니라 주변 농가도 농사 짓는 작물을 전환하고 있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삼례의 대표 농산물인 딸기와 수박을 이모작 재배했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다르다. 이상기후로 인해 지역을 대표하던 농산물이 점점 바뀌고 있는 상황이다. 송 씨는 "이제 수박 심는 사람이 거의 없다. 수박 농사가 안 되는 건 아닌데, 열매가 피수박이 돼서 상품 가치가 없다. 결국 헛농사가 되는 것이다"며 "계속 이렇게 날이 뜨겁다고 하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걱정했다. /이영재(전북대 정치외교학과 3학년)·박현우 기자 ※이 기사는 전북일보와 전북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협업 취업역량강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작성됐습니다. 본보 기자 1인과 학생 3명이 한 조가 되어 보도의 기획부터 취재, 기사 작성까지 실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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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현우외(1)
  • 2025.08.25 18:20

[전북일보-전북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공동기획] ① '위기를 기회로'…이상기후가 바꾼 전북 농업지도

최근 기승을 부리는 이상기후가 '농도' 전북에 '혁신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도내 14개 시·군 곳곳에서 아열대 작물을 재배하고 있는 가운데 해당 작물이 전북 농업 발전에 새로운 열쇠가 될지 관심이 쏠린다. 26일 전북특별자치도농업기술원이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기준 전북 아열대(채소·과수) 작목 재배 농가는 230명, 면적은 88.81ha(헥타르·1ha당 1만㎡)다. 재배 품목도 다양하다. 채소·특작류로는 오크라, 삼채, 여주, 공심채, 강황, 얌빈, 롱빈, 인디언 시금치, 차요테, 커피, 차나무 등이 있고, 과수로는 망고, 백향과(패션프루트), 파파야, 구아바, 바나나, 무화과, 석류 등이 대표적이다. 14개 시·군별로는 정읍시가 농가 85명, 면적 60.03ha로 가장 많았다. 완주군(42명·4.46ha), 남원시(22명·4.2ha), 김제시(12명·2.4ha), 고창군(12명·2.11ha), 무주군(12명·1.5ha) 등이 뒤를 이었다. 이외 다른 지역에서도 농가 1명 이상, 면적 0.1ha 이상씩 소규모 재배가 이뤄지고 있다. 특히 정읍시는 기후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작목 전환이 활발히 진행 중이다. 그동안 제주도를 중심으로 재배되던 대표적인 아열대 작물인 레드향 등은 정읍을 포함해 전북 내륙 지역에서도 재배가 시도되고 있다. 최근 정읍에서 농사를 짓는 박정현 씨가 국산 바나나 품종인 '손끝바나나'를 재배하면서 눈길을 끌었다. 정읍시 농업기술센터 관계자는 "기후 온난화로 작목 전환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며 "농가가 안정적으로 아열대 작물을 재배할 수 있도록 셀하우스 설치와 비료·농약 지원 등을 추진 중이다"고 말했다. 전국 지방자치단체와 학계도 아열대 작물 재배 기술과 관련된 정책을 모색하고 있다. 이에 맞춰 전북도 선제 대응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전언이다. 윤시원 전북대 스마트팜학과 교수는 "아열대 작물은 기후 변화에 따른 불가피한 흐름이자 새로운 농업 기회다"면서 "안정적 생산과 유통을 위해 재배 기술 개발, 유통 인프라 구축, 시장 수요 분석이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전북 농업은) 스마트팜과 신재생 에너지 활용으로 농업 리스크를 줄이고 기후 적응형 작물 연구, 지역 맞춤형 정책, 전문 인력 양성도 함께 추진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백예람(전북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4학년)·박현우 기자 ※이 기사는 전북일보와 전북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협업 취업역량강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작성됐습니다. 본보 기자 1인과 학생 3명이 한 조가 되어 보도의 기획부터 취재, 기사 작성까지 실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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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현우외(1)
  • 2025.08.25 18:20

[트민기] "우리 같이 장볼래요?"⋯실속 소비 '소분 모임' 등장

유행은 돌고 돈다. 빨라도 너무 빨리 돈다. 괜히 아는 척한다고 "요즘 유행인데 몰랐어?" 이야기했다가 유행이 끝나 창피당하는 일도 다반사다. 트렌드에 민감한 기자들, 트민기가 떴으니 이제 걱정 없다. 이 기사를 읽는 순간에도 SNS,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수많은 유행이 올라오고 트렌드가 진화한다. 트민기는 빠르게 흐름을 포착해 독자에게 전달하는 게 목표다. “알뜰살뜰 장보기 모임, 함께 할 사람을 찾습니다!” 전국적으로 대용량 제품을 공동 구매해 나눠 갖는 일명 소분 모임이 확산하고 있다. 물가가 치솟는 데다 1인 가구가 늘어나면서 합리적인 소비 방식으로 꼽힌 영향이다. 23일 기준 지역 기반 중고 거래·생활 커뮤니티 플랫폼 당근에 개설된 소분 모임만 수백 개에 이른다. 규모가 상당하다. 세종시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코스트코 소분 모임’은 회원 수가 1200여 명에 이른다. 게시판에는 장보기 일정과 식료품 나눔 글이 빼곡하다. 활동 방식도 다양하다. 함께 장을 보러 가는 사람을 모집하거나, 개인이 산 제품을 나눌 참여자를 찾는 식이다. 특정 제품만 급히 나누려는 글도 올라온다. 한 참가자는 “내일 오전 코스트코 방문 예정입니다. 생연어 절반, 바닐라 아이스크림 한 통 소분하실 분 계신가요?”라는 모집 글을 올려 댓글로 거래가 성사되기도 했다. 소분할 때는 개인 장비가 필수다. 음료수처럼 개별 포장된 제품은 쉽게 나눌 수 있지만 해산물, 육류, 쌀 등 대용량 식료품은 현장에서 직접 나눠야 한다. 그 때문에 참가자들은 음식을 담아갈 비닐봉지, 밀폐용기 등을 챙긴다. 소분 모임에 자주 참여한다는 박수빈(25) 씨는 “몇 년 전부터 가입했지만 올해는 특히 자주 나갔다”며 “달걀 값도 그렇고 물가가 너무 올라서 혼자 장을 보면 사치하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소분 모임이 떠오른 데에는 급격히 상승한 물가가 한몫한 것으로 풀이된다. 23일 통계청 국가통계포털(KOSIS)에 따르면 지난달 식료품 및 비주류 음료 물가지수는 지난해 같은 달보다 3.5% 증가했다. 같은 기간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2.1%)보다 높은 수치다. 품목별로는 어류 및 수산물이 7.2% 올라 두 달 연속 7%대를 유지했다. 빵과 곡물(6.6%), 커피·차·코코아(13.5%)도 큰 폭으로 올랐다. 생수·청량음료·과일주스·채소주스(3.4%)도 상승세를 보였다. 고물가가 이어지는 한 소분 모임은 점차 규모를 키워갈 것으로 보인다. 전북에도 소분 모임이 생겨나는 추세다. 코스트코 같은 창고형 마트가 없는 지역이지만 지난 17일 전주를 기점으로 한 소분 모임이 중고거래 플랫폼인 당근마켓에 개설됐다. 모임 소개에는 “대용량이라 구매를 망설였던 분들이 모여 즐거운 쇼핑 라이프를 만들자”는 문구가 적혀 있다. 온라인 쇼핑 제품도 함께 나누자는 의견이 나오는 등 소분 범위도 키우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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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채연
  • 2025.08.23 11:21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58) 이병휘공초(李秉輝供招)·이준용공초(李埈鎔供招)

△『이병휘공초(李秉輝供招)』 1894년 10월 5일부터 10월 8일까지 3차에 걸친 이병휘(李秉輝)의 신문기록이다. 이병휘와 혐의자 허엽 및 주사 민규정 등과의 대질신문, 허엽 단독 신문도 첨부되어 있다. 서울 출신으로 북한산성 방어와 관리를 담당하던 정3품 무관직인 관성장(管城將)을 하고 있던 이병휘는 흥선대원군의 밀서를 동학농민군에게 전달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당시 대원군은 그의 손자 이준용과 손을 잡고 여러 명의 밀사를 각처의 농민군들에게 파견하였다. 이 『이병휘공초』는 흥선대원군과 동학농민군과의 관계뿐 아니라 당시 중앙 정계의 동향과 농민군의 지향 등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이병휘공초』에 따르면 호서에 있던 대원군의 부하 정인덕이 박동진ㆍ박세강 등에게 제안한 작전 구상 개요는 다음과 같다. 북접 계열 인사인 박동진은 공주에서 임기준ㆍ서장옥과, 남접 계열 박세강은 전봉준ㆍ송희옥과 함께 농민군 동원을 기획하였다. 당시 박동진은 이준용의 지휘를 받았고 박세강은 대원군의 분부를 따르고 있었다. 일본공사관에 의하면 박세강과 박동진은 원래 동학당의 수괴로서 경성감옥에 투옥되었는데 8월 하순 대원군은 두 사람의 죄를 사면하고 박세강을 내무아문 주사, 박동진을 의정부 주사로 임명하여 선유사 정경원과 함께 충청도에 보냈다고 한다. 이들은 충청도 농민군을 규합하여 갑오개화파 정부를 전복하고 정권 탈취를 기도하였다. 일본 측에서도 특히 10월 7일 이병휘의 두 번째 신문을 주목하였는데, 그 내용은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동학당 사건에 대한 회심(會審) 전말 상세 보고 : 이병휘가 제출한 시말서」라는 제목으로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즉, 서울에 들여보낸 동학당은 종로에 모여 ‘만인소청(萬人疏廳)’을 설치하고 서찰을 정부에 보내 각국 공관에 조회한다. 그리고 통위영ㆍ용호영ㆍ총어영ㆍ호분위 등을 파견하여 궁궐을 파수케 하고 대중을 지휘하여 궁궐에 들어가 주상을 상왕으로 받들고 중전과 왕세자를 폐하며 이준용을 맞이하여 보위에 나아가게 한다. 그리고 개화당을 모두 살해하고 ‘자주지정(自主之政)’을 세우고 비밀리에 특사를 파견하여 청국에 알려 후일의 시비를 방지토록 한다. 그러나 일본군이 먼저 출동한다면 청국군을 기다려 협공으로 그들을 물리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였다. 이 자료를 통해 일부 호서농민군 세력은 이준용ㆍ대원군과 연결하여 왕권을 뒤엎으려는 기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대원군ㆍ동학농민군ㆍ조선 정부 모두 평양 전투의 승패 여하에 대단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박세강의 체포로 대원군 측은 남접 주력인 전봉준과 접촉할 기회를 잃게 되었고 이후 주로 북접 호서농민군과 제휴하여 왕권을 뒤엎으려고 기도하였다. 또한 민영준과는 달리 사전에 청병 파병을 요구하지는 않았고 청병 스스로 출병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때 대원군 측은 허엽이 추천한 청주의 이용구를 만인소의 우두머리로 내세웠다.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의 저자이자 정치인인 정교(鄭喬)도 대원군 지시로 호서수재(湖西守宰)와 농민군은 합력 북상하여 청국군과 더불어 남북으로 협공하여 일본군을 타파코자 하였다고 판단하였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이준용공초(李埈鎔供招)』 1895년 3월 25일부터 4월 14일까지 걸쳐 진행된 법부협판 김학우 피살 사건과 이준용 등의 ‘모반사건’ 관련 피의자들의 신문기록이다. 이준용(李埈鎔)은 국왕 고종의 형 이재면의 큰아들로 흥선대원군의 직계 종손자이다. 그는 1894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이후 일본의 힘을 빌려 잠시 권력의 전면에 나서게 된 대원군의 후견으로 밀사를 지방으로 파견하여 동학농민군의 힘을 빌려 평양에 주둔한 청국군과 함께 일본군을 몰아내고 친일 정권 전복을 꾀하였다. 당시 일본공사관에서는 대원군은 일본군이 반드시 패배하리라고 믿고 은밀히 사람을 보내 동학당을 선동하여 청군이 남하하기를 기다렸다가 일본군을 협공하려는 계획을 꾸미고 있다고 파악하였다. 이준용은 이후 군국기무처 의원인 김학우 암살 사건에 연루되었고, 또 박영효ㆍ서광범 등 개화파 세력을 암살하려 하였다는 죄목으로 특별재판소에서 사형판결을 받았지만 이후 유배형으로 감형되었다가 특별 석방되었다. 이 공초는 이준용 외에 관련 및 혐의자 서병선ㆍ임진수ㆍ정조원ㆍ윤진구ㆍ장덕현ㆍ전동석ㆍ김내오ㆍ손이용ㆍ박준양ㆍ이태용ㆍ고종주 등 12명을 총 26차례에 걸쳐 취조하고 그들이 진술한 내용이다. 먼저 법무아문에서는 김학우 피살 사건의 배후 인물로 흥선대원군을 지적하고 있다. 협판 이재정, 참의 장박 등의 심문에서 이준용은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며 억울하다고 진술하였다. 이준용처럼 4차례에 걸친 경우, 박준양과 이태용처럼 3차례, 임진수ㆍ전동석ㆍ고종주처럼 2차례도 있었고, 서병선 등 나머지 사람들은 1차례씩 심문을 받았다. 『이준용공초』의 또 하나의 중요 포인트는 이준용과 동학농민군 관련 문제이다. 이 사건은 대원군 세력이 동학농민군의 재봉기를 추동하고 그들의 힘을 빌려 갑오 개화파 정부의 전복을 꾀했다는 혐의를 추궁하고자 한 재판으로 이 공초를 통해 동학농민혁명의 2차 봉기와 관련하여 대원군과의 관련성 등을 일부 파악할 수 있다. 임진수는 동학농민군 지도자에게 각국 공관과 각국 공사에게 급히 해야 할 일을 함께 토론하게 하고 서양 나라의 통용되는 관례에 의하여 별도로 상하의원(上下議院)의 설치를 구상하고 이를 글로 작성하여 동학농민군에게 갔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정인덕도 일본과 더불어 상하의원을 만들어 공동의 정치를 이룬다면, 동양의 형세도 구미와 균형을 다툴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였다. 또 다른 공모자 고종주는 1차 진술에서 ‘유신설(維新說)’을 주장하면서 이는 갑오년 6월 21일로부터 시작될 것이기 때문에 은밀히 국왕의 형인 이재면에게 통지하였다. 여기서 6월 21일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당일로 일본과 적극 협력하는 방안을 모색한 것이다. 대원군을 정점으로 하는 운현궁 세력은 경복궁 점령 후 일본군과 협력하여 쿠데타를 통한 정권 탈취를 기도하는 방안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2차 진술에서 고종주는 국권을 모두 운현궁으로 돌리려고 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결국 흥선대원군을 정점으로 한 이준용ㆍ이재면 등 대원군 세력의 쿠데타를 통한 정권 탈취 기도로 이해된다. 이준용은 전라ㆍ충청ㆍ경상도 등 삼남의 농민군을 모두 동원하고 이들과 합세해서 쿠데타를 진행할 구체적인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고종주는 ‘동비(東匪; 동학농민군)’와 의논한 일이 없었다고 진술하였다. 반면 3차 진술에서 고종주는 동학농민군 진압을 말하고 청국군과 연합전선을 통한 일본군 격퇴를 주장하는 등 그간의 입장과는 다소 상반된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이 자료는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조재곤 서강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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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8.22 16:49

[한신협 공동기획-팔도 핫플레이스] 무더위 피해 떠나는 전주 야간 산책, 예술·역사·풍경이 어우러진 4코스

입추가 지났지만 한낮의 태양은 여전히 뜨겁다. 하지만 저녁이 되면 한풀 꺾인 열기와 함께 도시의 분위기도 달라진다. 전주는 낮의 분주함과 달리, 저녁 무렵부터는 골목과 산책로, 오래된 건물들이 차분한 매력을 드러내며 걷기 좋은 도시로 변한다. 문화와 역사, 그리고 밤의 정취가 함께하는 전주의 야간 산책 명소 네 곳을 소개한다. △예술과 휴식이 공존하는 서학동 예술마을 전주 한옥마을과 나란히 자리잡은 서학동은 ‘예술의 골목’이라 불린다. 화가, 도예가, 공예가들이 정착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예술마을이다. 낮에는 관광객들로 붐비지만, 해가 기울 무렵부터는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서 진짜 매력을 느낄 수 있다. 골목마다 자리한 작은 갤러리와 공방은 저녁 시간에도 불을 밝히고, 카페들은 시원한 아이스 음료를 준비하며, 산책하는 이들을 반긴다. 텀블러에 직접 담은 음료를 챙겨들고 천천히 골목을 거닐다 보면, 벽화와 조형물이 어우러진 풍경이 한 편의 야외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특히 여름밤의 서학동은 낮보다 한결 차분해 예술가의 작업실 불빛이 더 돋보인다. ‘광커피’, ‘적요 숨쉬다’, ‘어노렌지’, ‘복선’, '하나떡집'등 전주의 ‘핫플’로 자리 잡은 카페와 디저트 가게도 즐비해 문화적 감수성과 미각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다. 전통과 현대, 예술과 일상의 경계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공간에서 여유롭게 걷다 보면 어느새 여름 저녁 더위도 잊게 된다. △달빛을 품은 누각, 남천교 청연루 서학동에서 조금만 발길을 옮기면, 전주의 야경 명소로 꼽히는 청연루에 닿는다. 청연루는 조선 시대부터 내려온 전통 누각으로, 한옥의 곡선미와 함께 저녁 무렵의 운치를 한껏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낮에 보던 웅장함과 달리 밤의 청연루는 달빛과 은은한 조명이 어우러져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나무 기둥과 기와지붕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은 여름 저녁 산책자들에게 천연의 선풍기 역할을 한다. 누각에 올라서면 전주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해가 저물 무렵 붉게 물든 하늘이 검푸른 색으로 바뀌는 순간, 청연루는 최고의 야경 명소로 변신한다. 전통 건축의 아름다움과 탁 트인 전망을 동시에 즐길 수 있어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나 가족 나들이 장소로도 손색이 없다. 청연루의 매력은 단순한 풍경에 그치지 않는다. 누각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는 고목과 꽃나무들이 어우러져 있어 밤 산책의 정취를 더한다. 역사의 숨결을 간직한 공간에서 느끼는 여름밤의 바람은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준다. △역사의 흔적과 드라마의 배경, 한벽터널(한벽굴) 전주의 한밤 풍경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명소가 바로 한벽터널(한벽굴)이다. 이 터널은 일제강점기 시절 전라선 철길을 놓으면서 만들어졌다. 당시 일본은 전주팔경 중 하나였던 ‘한벽당’의 정기를 끊기 위해 이곳에 터널을 뚫었다고 전해진다. 일제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공간이지만, 오늘날에는 시민과 여행객 모두에게 사랑받는 산책 코스로 자리 잡았다. 터널을 지나면 바로 옆으로 전주천이 펼쳐진다. 1급수 수질을 자랑하는 전주천은 도심 속에서 드물게 만날 수 있는 깨끗한 물줄기다. 저녁 바람이 불어오는 강변을 따라 자전거를 타거나,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산책하기 좋은 곳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여름밤에는 시원한 강바람이 불어와 더위를 식히기에 제격이다. 최근에는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더욱 주목받았다. 극 중 두 주인공이 한벽굴을 배경으로 담긴 장면이 방영된 뒤, 방문객들 역시 그 장면을 따라 하며 추억을 남긴다. 이 때문에 한때는 한참 동안 줄을 서야 촬영 차례가 돌아올 정도로 ‘인증샷 명소’가 됐다. 역사적 아픔을 간직한 터널이 이제는 전주의 대표적인 야간 산책 코스이자 문화적 공간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전주천의 시원한 풍경과 함께 걷다 보면, 낮과는 또 다른 전주의 매력을 만끽할 수 있다. △고요한 성지에서 마주하는 바람, 치명자산 성지 전주한옥마을 동남쪽, 어둠이 내린 산등성이에 환하게 빛나는 십자가가 있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이 불빛은 순례자와 산책객 모두를 이끄는 등불 같은 존재다. 바로 치명자산 성지다. ‘치명자(致命者)’란 목숨을 바친 사람, 곧 순교자를 뜻한다. 신유박해 당시 유항검 가족 7명이 순교해 합장돼 있고, 정상 암벽에는 1994년에 세워진 기념 성당이 자리한다. 낮에는 숭고한 역사와 신앙의 의미가 더 크게 다가오지만, 여름밤에 이곳을 찾으면 또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다. 해발 300여 미터 정상까지 이어지는 숲길은 밤이 되면 한낮의 열기를 식혀주는 바람길로 변한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성당 불빛과 함께 고요한 자연의 어둠이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만든다. 특히 성당 아래쪽의 ‘골고타 십자가의 길’은 촘촘히 들어선 가로등 불빛 사이로 이어져 있어, 천천히 걸으며 묵상하기에도, 가벼운 산책을 즐기기에도 제격이다. 안쪽에 자리한 ‘요안루갈다 광장’은 야간 산책객들에게 잠시 숨을 고르는 쉼터다. 저녁 무렵이면 가족 단위 방문객, 연인, 반려견과 함께하는 이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어두운 밤이라 걱정스러울 수 있지만, 광장을 중심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져 오히려 활기와 안전을 느낄 수 있다. 신앙의 성지이자 산책로, 그리고 야경 명소로서 치명자산 성지는 전주의 여름밤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공간이다. 십자가 불빛을 따라 오르는 길에서, 누구나 저마다의 평화와 위로를 만날 수 있다. △전주의 여름밤, 걷기 좋은 길에서 찾는 여유 전주는 낮의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는 다소 숨이 막히지만, 저녁이 되면 오히려 산책하기 더없이 좋은 도시로 변한다. 예술적 감수성을 채울 수 있는 서학동 예술마을, 전통 누각의 운치를 즐길 수 있는 청연루, 시민과 여행객 모두에게 사랑받는 산책 코스 한벽터널, 고요한 성찰의 공간 치명자산 성지까지. 네 곳의 산책 코스는 각기 다른 매력을 지니면서도 공통적으로 여름밤의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입추가 지난 지금, 더위는 조금씩 물러나고 있다. 하지만 여름밤의 낭만은 이제부터가 진짜다. 시원한 음료 한 잔을 챙겨 들고 전주의 골목과 누각, 터널과 산길을 걸어보자. 낮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전주의 또 다른 얼굴이, 밤의 풍경 속에서 조용히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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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현아
  • 2025.08.21 19:20

[뉴스와 인물] 김의겸 새만금개발청장 "새만금은 전북과 우리나라 성장동력, 대전환 이루겠다"

여의도 면적의 140배 달하는 새만금은 경제와 사업‧관광을 아우르면서 동북아 경제중심지로 건설하는 국책사업으로, 지난 1991년 11월 많은 기대 속에 힘찬 출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지금도 공사가 진행 중으로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이곳에는 전북의 미래와 도민의 간절한 염원이 담겨져 있지만 그 동안 ‘장밋빛 청사진’만 난무했을 뿐 여전히 개발은 더디게 흘러가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이재명 정부가 새롭게 출발하면서 답보상태에 있던 새만금에 다시 시선이 쏠리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지난 7월 취임한 김의겸 새만금개발청장이 있다. 김 청장 역시 새 정부의 시작과 함께 새만금의 중요성과 책임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기에 취임 한 달도 되지 않았지만 현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는 취임식 자리에서 "가슴 벅차면서도 어깨가 무겁다"며 "새만금에 필요한 것들에 대해선 국회‧대통령실‧정부 관계기관 등과 유기적으로 협력해 사업이 원활하게 추진될 수 있도록 모든 역량을 집중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김 청장을 만나 새만금에 대한 비전 및 계획 등을 들어봤다. -새 정부 첫 새만금개발청장으로 취임한 소감 부탁드립니다. “새만금청장에 취임한 지 한 달이 다 되어 갑니다. 단군이래 최대 간척사업이자 국책사업인 새만금 사업을 선봉에서 이끌어가는 기관의 책임자로서 사명감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지난 한 달, 안에서 직접 접해본 새만금은 밖에서 바라봤던 새만금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기본계획 재수립, 사업예산 확보, 이해관계 갈등 등이 복잡하게 얽히고 개별 사업마다 예타를 받느라 사업이 지체되고 있습니다. 새만금은 이제 에너지 대전환이라는 거대한 시대적 흐름에 맞춰 새로운 미래 비전을 세워야 할 때입니다. 과거의 관행을 넘어선 참신한 시각으로 국가 균형 발전을 위한 복합적인 난제들을 해결하고, 새만금의 대전환을 이뤄내겠습니다.” -취임 후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고 활동하고 있는지요. “우선, 새만금을 재생에너지 메카로 도약시키기 위해 관계자들과 토론 하는 등 업무 구상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현장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주민‧ 환경단체‧기업인‧지자체장들과 다양하게 소통하고 있으며, 현장의 현안문제를 파악하고 안전관리를 강화하기 위해 산업단지‧기반시설 건설현장 등 사업현장도 방문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새만금 예산확보와 제도개선을 위해 국회뿐만 아니라 기재부·국토부 등 정부부처와도 긴밀하게 소통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청장님이 생각하는 새만금의 방향성과 목표가 있다면. “새만금을 에너지 대전환의 선도공간이며, 최초의 RE100산단 성공모델로 구현해 ‘재생에너지의 메카’로 만들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특히 재생에너지의 발전부터 공급·활용까지 이어지는 유기적인 가치사슬(밸류체인)을 구축해 나가겠습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첫번째로 태양광·풍력·조력 등 새만금에 풍부한 재생에너지를 바탕으로 새만금을 국내 최대 재생에너지 생산기지로 도약시킬 계획입니다. 두번째로 서해안 에너지고속도로(고압직류송전망, HVDC) 신속 건설을 통해 한국경제의 재도약을 이끌어 나가는데 기여하겠습니다. 세번째로 기업들의 RE100 전환을 지원할 수 있는 충분하고 안정적인 재생에너지 전력을 공급할 예정입니다. 이에 더해 해수유통, 친환경 모빌리티, 녹색건축물 등을 통하여 탄소중립 기반의 미래도시를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현재 기본계획 재수립을 진행하고 있는데, 진행 현황과 향후 계획을 설명해 주세요. “새만금 기본계획 재수립을 위해 지난해 4월부터 전문 연구용역에 착수했으며, 현재는 주요과제 도출과 실행전략 구체화를 위한 세부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이번 기본계획에는 새만금을 재생에너지 거점으로 조성하고 RE100 산업단지를 본격적으로 육성하기 위한 개발방안뿐만 아니라 해수유통 확대와 조력발전 추진방안 등도 중점적으로 포함할 계획입니다. 해수유통을 확대해수질을 개선하는 방안 등 오랜 난제에 대한 실행 계획도 포함 될 예정입니다. 또한 지역사회와 관계기관, 각 분야 전문가 등 다양한 의견을 폭넓게 수렴해 정책의 실현 가능성과 공감대를 높일 수 있는 최적의 계획안을 마련하겠습니다. 이를 토대로 새정부의 국정철학과 과제들이 새만금의 핵심 선도사업으로 추진될 수 있도록 차질 없이 준비해 나가겠습니다. 늦어도 연말 이전에는 구체적인 내용들을 국민들께 발표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새만금 해수유통 및 생태계 복원 등에 힘쓰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요. “정부부처 등과 협력해 현재 2개에 불과한 배수갑문을 추가로 증설하고 해수유통을 적극적으로 확대 해 나가겠습니다. 또한 조력발전을 연계 추진해 산단에 RE100을 지원할 예정입니다. 이를 통해 여름철 상습 발생되는 성층화현상 등을 해소하고 수질개선 효과와 함께 최근 극한호우 등 새만금지역 재난에 대응한 홍수예방 기능도 강화하겠습니다. 이와 더불어 새만금개발청에서는 2025년 신규사업으로 호 내 부유쓰레기, 어업폐기물 처리 등 공유수면 관리사업을 추진 중입니다. 향후 새만금호 내 수질악화요인을 감소시켜 깨끗한 친수환경을 조성해 나가고 해양생태계가 복원 될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하겠습니다.” -새만금 경쟁력 강화를 위해 RE100 산단 유치가 과제로 떠오르고 있는데 어떤 전략을 가지고 있는지요. “2030년까지 수상태양광‧조력 등 6GW의 신재생에너지를 구축해 새만금을 재생에너지의 글로벌 허브로 조성할 계획입니다. 6GW 중 수상태양광 1·2단계 등 2.7GW는 서해안 에너지고속도로 가동과 연계해 2030년까지 준공하고 조력 등 3.3GW는 2030년까지 착공을 목표로 추진될 예정이다. 특히 새만금에서 생산한 재생에너지 전력을 직접 공급·활용해 RE100 산단의 조성과 인센티브 발굴·지원 등을 통한 RE100 기업을 집중 유치할 계획입니다. 이러한 계획을 차질 없이 이행하고 RE100 기업에 경쟁력 있는 가격으로 재생에너지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공공 주도의 사업 추진과 제1산단(2030년 완공), 제2산단(2027년 착공) 등을 속도감 있게 개발해 RE100 기업을 적극 유치하겠습니다. 이와함께 산단 내부 유휴지(지붕‧주차장 등) 등을 개발해 RE100 기업에 공급 가능한 재생에너지 자원도 계속 확대할 계획입니다. 또한 RE100 산단 배후도시로 수변도시에 모빌리티·그린에너지 특화 스마트도시를 조성하고, 쾌적한 주거환경과 국제학교 등 정주 여건을 마련하는 등 RE100 산단이 새만금에 지정되도록 노력할 예정입니다." -현재 추진되고 있는 스마트그린 산단 소개와 기대 효과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새만금개발청은 새만금 국가산단 5,6공구 3.7㎢ 지역을 대상으로 국내 최초로 RE100을 실현하는 스마트그린 산단 조성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 사업은 RE100으로 자립하고 스마트 기술이 적용되는 친환경·스마트 산업단지 조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에너지 공급 다변화와 절감체계 구축, 첨단 스마트그린 기술을 활용한 친환경 산단 구현, 지능형 시스템을 통한 산단 인프라 구축 및 입주기업 혁신성장을 도모하는 세가지 방향으로 추됩니다. 올해까지 통합관제센터 건축물과 전력시설 설계를 완료하고 하반기 공사 착수해 2026년까지 구축 완료 예정입니다. 여기에 재생에너지를 2027년까지 30㎿ 공급하고, 2029년까지 총 180㎿를 공급하여 RE100 산단의 기틀을 마련하겠습니다. 스마트그린 산단을 통해 에너지전환 선도하고 첨단기술을 활용한 온실가스 감축, 미래지향 친환경 산단 조성으로 에너지 대전환과 친환경 산업단지의 모범사례를 구축하겠습니다.” -새만금 이차전지 특화단지에서 발생하는 폐수가 논란이 되고 있는데, 어떤 대책을 가지고 있는지요. “이차전지 산업폐수는 환경부가 마련한 법적기준에 맞도록 기업이 개별처리한 후 공동관로를 통해 방류토록 계획하고 있습니다. 새만금개발청은 처리수가 방류되는 경로에 2중으로 원격수질관리시스템(TMS)를 설치하는 등 폐수가 배출기준에 적합하게 처리되는지를 실시간 확인할 수 있는 감시체계를 구축할 계획입니다. 아울러 지역어민‧관련전문가 등과 함께 상생협의회를 운영하고 이차전지 처리수에 대한 체계적이고 정기적인 감시활동 등 지역민의 불안감을 해소하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갈 계획입니다.” -끝으로 도민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새만금은 전북의 미래이자 대한민국의 미래입니다. 새만금을 단순한 대규모 개발사업이 아니라 ‘대한민국 RE100 산단 중심지’와 ‘재생에너지 메카’로 만들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 기반의 에너지 대전환을 추진하고 재생에너지 기반의 RE100 산단을 조성하겠습니다. 두번째로 새만금사업의 조속한 완료를 위해 주요 기반시설 구축과 공공주도의 우선 매립을 추진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지속적인 기업 유치를 위해 세제 혜택을 강화하고 기업 활동에 필요한 기반시설을 조기에 구축하겠습니다. 또한 안전한 환경 속에서 기업이 원활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현장에서 답을 찾아 지원하는 한편 한발 더 나아가 기업들로 북적이는 새만금이 대한민국의 성장동력이 되어 새만금과 전북의 인구와 경제까지 동반 성장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김의겸 청장은 문재인 정부에서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기자 출신으로, 경북 칠곡 출생이나 전북 군산으로 이사한 뒤 초·중·고교를 모두 이곳에서 마쳤다. 그는 군산제일고와 고려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1990년 한겨레신문에 입사해 사회부장과 논설위원 등을 지냈으며 제21대 국회의원, 더불어민주당 대변인 등을 역임했다. 김 청장은 지역 협력과 홍보 소통, 정책 경험 등을 기반으로, 이재명 대통령의 공약을 실천할 적임자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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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환규
  • 2025.08.17 16:22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57) 홍우전물침첩, 이정돈물침첩, 삼향면물침첩, 최운용표, 한학모표, 오세용임명장

이번에 소개할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소장하고 있는 낱장의 문서들이다. 그중에서 1894년에 작성된 물침첩, 표, 그리고 임명장 등을 소개하고자 한다. 홍우전 물침첩(洪祐銓勿侵帖)은 1894년 11월 나주목사가 능주(綾州) 부춘면(富春面) 상우봉(上牛峰)에 사는 홍우전(洪祐銓)에게 발급해 준 물침첩이다. 수령들과 수성소와 유회군에서는 농민군으로 관에 협조를 했거나 뇌물을 썼거나 또 농민군을 배반하고 정보를 제공한 경우, 이를 보호하는 물침첩(勿侵帖)를 주었다. 이 물침첩을 지니고 있으면 벼슬아치들이 재산을 약탈하지 않고 토벌군들이 보호해 주어 일종의 특혜를 입었다. 물침첩도 하나의 이권으로 팔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물침첩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발급자가 나주목사인데 발급대상은 나주관할이 아니라 이를 넘어선 능주 부춘면에 사는 홍우전이라는 점이다. 어떻게 관할을 넘어서는 문서가 발행될 수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는 당시 전라도 남부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을 책임지는 초토영이 바로 나주에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책임자가 바로 나주목사 민종렬이었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나주목사 이름으로 능주에까지 물침표를 작성해 준 것이다. 발급한 시점은 1894년 11월로 우금치 패전 이후 본격적으로 농민군 토벌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물침첩이 발급된 것으로 보인다. 이정돈물침첩(李廷燉勿侵帖)은 1894년 12월 29일 남평현감이 남평(南平) 어천면(魚川面) 야산(夜山)에 거주하는 이정돈(李廷燉)에게 발급해 준 물침첩이다. 이정돈은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소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몰고 다녔는데, 특히 이 소를 침탈하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정돈물침첩은 1894년 12월 29일에 전라도 남평현에서 발급된 것으로 역시 시기적으로 우금치 패전 이후 전라도 남부지역에서 대대적인 토벌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이정돈은 동학농민혁명이라는 대단히 변화가 극심한 시기에 누군가로부터 자신의 소를 지키기 위해 소를 직접 몰고 피신하고 있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소를 지켜려고 했던 것은 아마도 당시 농사를 짓는 농부에게 소가 가장 소중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편으로 이정돈이라는 사람은 대단히 치밀한 면도 있어 보인다. 그는 소를 지키기 위해 남평현감에게 물침첩 발급을 요청하고 이를 발급받아 피신하는 과정에서 직접 소지하고 있다가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 때 이를 제시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삼향면(三鄕面) 물침첩(勿侵帖)은 1894년 12월 무안현에서 발급한 17장의 물침첩 묶음이다. 이 물침첩에는 전라도 무안현 삼향면 극배(克培)·죽림(竹林)·와동(蛙洞)·이동(鯉洞)·송산(松山)에 사는 이이겸(李二兼), 노기화(魯奇化), 손명언(孫明彦), 이태련(李泰連), 박이만(朴二萬 ), 김행순(金行順), 손가마구(孫可馬九), 김단중(金段中) 등 17명에 대해 동학농민혁명에 가담하지 않았으므로 침탈하지 말고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내용이 각각 기록되어 있다. 시기적으로 1894년 12월 무안지역에서 대대적인 토벌 활동이 있었다. 『순무사정보첩』에 따르면 양호도순무영의 선봉장 이규태가 1894년 12월 11일 유시(17시∼19시)에 무안에 도착하여 수성군을 조직하여 각 면의 민간 장정들과 협동하여 접주 70여명을 잡아 가두었다. 또 민원에 따라 30명을 처단하고 40여명을 가두었으며, 무안지역 동학농민군 지도자 배규찬을 체포하여 목을 베고 9명을 총살하였다. 또 『일본사관함등(日本士官函謄』에 따르면 12월 24일 무안 동학농민군 지도자 배상옥이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지 않는 무안현민들이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집단적으로 물침첩 발급을 요청하였고 이를 무안현에서 발급해준 것으로 보인다. 17장의 물침첩의 발급대상 지역인 무안현 삼향면 극배(克培)·죽림(竹林)·송산(松山)·와동(蛙洞)·이동(鯉洞)은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무안군 삼향읍 맥포리(극배, 죽림, 송산)와 용포리(와동, 이동)에 속하여 인접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물침첩에서 몇 가지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발급시기가 대체로 1894년 11월과 12월이라는 점이다. 동학농민군이 우금치에서 패한 이후 남하하게 되고 조선정부와 일본군의 토벌이 가혹하게 전개되는 과정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지 않은 일반 백성들까지도 체포되거나 재산을 약탈당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를 해소해달라는 민원이 빈번하게 되자, 관에서 이를 해결하고자 이러한 물침첩을 발급해준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의 특징은 전반적으로 발급된 물침첩이 전라도 남부지역에서 확인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이 시기에 동학농민군 주력이 남부로 몰리면서 농민군 토벌이 이 전라도 남부지역에서 특히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이를 모면하기 위한 방편으로 물침첩 발급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최운용 표(崔雲龍 表)는 1894년 9월 능성 상서면(上西面) 하황리(下黃里)에 거주하는 유학 최운용(崔雲龍)에게 발급된 표(標)이다. 발급자는 확인되지 않지만 능주목사로 추정된다. 최운용이 미도인(未道人) 즉 동학농민군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이 표를 소지하고 있으면 동학농민군으로 체포되지 않으며 재산을 침탈당하지 않는다. 당시 최운용은 나이가 15세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한학모 표(表)는 1894년 12월 7일 전라 관찰사겸위무사(觀察使兼慰撫使)가 남원 오지(梧支) 일리(一里) 가동(佳洞)에 사는 한학모(韓學模)에게 발급한 문서이다. 곧 물침표(勿侵標)와 같은 것으로 이 표를 제시하면 동학농민군이라는 이유로 체포하거나 재산을 강탈하지 못하였다. 오세용부참모장 임명장(吳世鎔副參謀長任命狀)은 1894년 12월 유학(幼學) 오세용(吳世鎔)을 수성부참모장(守城副參謀長)으로 임명하는 임명장이다. 작성자와 임명 주체는 확인되지 않는다. 시기적으로 1894년 12월이라는 점과 수성군이라는 점에서 볼 때,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한 민간 조직이 구성된 상황에서 유학 오세용을 부참모장으로 임명한 것으로 보인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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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8.13 19:37

[전북의 기후천사] 기후 위기와 생태 이슈에 다가서는 예술적 실험들

자르고 남은 종이들로 전시된 공간을 본 적이 있는가. 누군가에게는 정돈되지 않은 풍경처럼 보이겠지만 예술가의 눈에는 인간이 자연을 어떻게 사용하고 소모하는지를 되묻기에 더할 나위 없는 아이디어로 다가왔다. 작업 후 남겨진 조각들을 마주하며 ‘쓸모없어짐’이라는 감각을 상기시키고, 인간과 자연이 공존할 수 있는 방식을 떠올린 것. 김규리(38) 작가는 자르고 남은 종이 위에 독백 형식의 글을 기록했다. 말 그대로 종이를 수집하고 글을 작성해 메일로 발송하는 실험을 진행하는 것이다. 2025년 그린르네상스 프로젝트에 참여한 김규리 작가는 “그린르네상스 프로젝트는 환경과 기후 위기 같은 주제를 무겁게 받아들이기보다는 재밌게 질문할 수 있는 실험의 장”이라며 “환경처럼 일상에서 피부로 체감할 수 있는 문제들을 예술에 접목해 대중들이 친숙해질 수 있도록 한다”라고 설명했다. 지난 2021년부터 전주문화재단에서 진행하고 있는 ‘그린르네상스 프로젝트’는 기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예술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환경 변화에 대처하는 예술의 역할과 방식을 고민하고 예술의 사회적 가치 실현에 대한 실천적 방안 모색을 목적으로 한다. 올해는 ‘예술가의 질문’을 주제로 생태 이슈와 창작활동을 연계한 예술실험 프로젝트가 하반기까지 운영된다. 예술가의 창의적인 사고방식을 결합해‘환경’과 ‘기후’에 대한 관점을 다각화할 수 있도록 실험 과정을 아카이빙하고 시민과 공유하는 것이다. 기존 환경담론의 인식전환을 위해 예술실험을 운영해 온 전주문화재단은 올해 총 5개 팀을 선발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모색하는 문화예술적 접근방식을 다각화하기 위해 나이와 전공, 예술 분야도 구분하지 않았다. 그렇게 선발된 예술가들이 바라보는 환경 이슈는 무엇일까. 2025년 그린르네상스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조민지·김규리 작가를 지난 9일 팔복예술공장에서 만나 ‘기후 위기’에 대한 생각을 들었다. 그린르네상스 프로젝트에 세 번째 참여한다는 조민지(34) 작가는 환경에 관한 담론 형성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됐다고 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기후 위기’에 대한 이슈에 예술가들의 관심이 집중됐고, 이제는 ‘경각심’ 차원의 메시지 전달을 넘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주제가 됐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이번 프로젝트에서 조민지 작가는 환경과 생태를 둘러싼 감정과 언어 태도의 균열에 주목했다. 조 작가는 전북지역 시각예술가들과 함께 프로젝트 그룹 ‘무해한 예술실험’을 결성했고 올해는 그룹으로 그린르네상스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다. 무해한 예술실험은 ‘감각 회복’이라는 키워드를 내세워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무뎌진 감수성을 회복하는 데 초점을 맞춰 활동한다. 조민지, 김의진, 노진아, 박은필, 한준 등 5명의 예술가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환경 문제를 바라보고, 환경 문제에 대한 여러 감각과 인식의 차이를 대화할 수 있도록 실험의 장을 만든다. 조 작가는 “사람들이 환경 주제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도입부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각종 매스컴에서는 기후위기, 생태 이슈를 말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과연 실제로 체감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직접 몸으로 느껴야만 관련 이슈에 대한 인식이나 생각들이 피어오르지 않을까? 그 사실을 알게 하려면 감각을 회복시키는 것이 먼저 필요했다”라고 덧붙였다. 그렇기에 무해한 예술실험에서는 기후 위기나 생태 이슈를 말하기에 앞서 시각과 청각, 후각과 미각, 촉각 등의 원초적 감각들을 동원해 자료를 채집한다. 5명의 예술가가 직접 채집해 온 감각들을 토대로 자극을 마주하고, 발생한 자극으로 기후 위기와 생태 이슈를 체감하게 한다는 의도이다. 기후 위기나 환경에 관한 이야기가 정보에 의해 선동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 조 작가는 “나의 관념이나 생각이 여러 정보로 인해 희석되거나 휩쓸리지 않았으면 한다”라고 했다. 주체성을 가지고 생각하는 힘을 기르기 위한 객관화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그는 “기후 위기가 자연의 위기는 아니고 인간의 위기라고 보인다. 어쩌면 인간의 사고방식으로 자연과 생태계를 들여다보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며 “예술이라고 감성적으로만 관련 사안을 바라보지 않는다. 보다 이성적이고 객관적으로 탐구해서 생태적 감각을 되찾으려고 한다”고 밝혔다. 개인으로 프로젝트에 참여한 김규리 작가는 ‘버려짐과 남겨진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콜라주 기법을 활용해 시각화한다. 작가가 선택한 이미지와 버려진 이미지 사이에서 자신이 생각하고 깨달은 이야기를 참여형 전시와 구독 메일로 풀어낼 예정이다. 김 작가는“환경에 대한 경각심을 다룬 프로젝트들은 많다. 그렇다면 실제 환경에 필요한 프로젝트인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며 “환경을 이야기하기 위해 더 많은 쓰레기가 배출되기도 한다. 지금은 환경이나 기후위기를 돈이나 사업으로 보기도 한다”라고 짚어냈다. 따라서 그린르네상스 프로젝트를 통해 거창한 담론을 형성하기보다는 대중들에게 예술가의 질문을 흥미롭게 생각해서 곱씹고 기억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환경단체에서 말하는 전문적인 논리나 이야기에서 벗어나 예술가의 시선을 이미지로 각인시켜 기억하게 만드는 방식도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인터뷰 말미에 조민지·김규리 작가는 프로젝트가 “재미있다”고 말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생각하고 문화예술적으로 접근하는 시도 자체가 흥미롭다는 것이다. 현상을 전달하고, 예술가의 시각과 해석을 덧대 새롭게 탄생한 창작물이 제3자의 인식을 전환할 수 있다는 점도 즐거움의 요소라고 했다. 그러니 앞으로도 예술가들이 바라보는 기후 위기와 사회문화적 환경을 고민해 볼 수 있는 실험의 장이 생겨나길, 그래서 최소한 환경과 공존하고 지킬 수 있는 예술 방식의 아이디어를 전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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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은
  • 2025.08.11 17:50

[트민기] ”나는 햄스터, 직업은 회사원”⋯유튜브 뒤집은 AI 동물

유행은 돌고 돈다. 빨라도 너무 빨리 돈다. 괜히 아는 척한다고 "요즘 유행인데 몰랐어?" 이야기했다가 유행이 끝나 창피당하는 일도 다반사다. 트렌드에 민감한 기자들, 트민기가 떴으니 이제 걱정 없다. 이 기사를 읽는 순간에도 SNS,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수많은 유행이 올라오고 트렌드가 진화한다. 트민기는 빠르게 흐름을 포착해 독자에게 전달하는 게 목표다. "회의 끝나니까 6시? 그렇다면 퇴근." 최근 유튜브에서 헤드셋을 끼고 출퇴근하는 생성형 인공지능(AI) 햄스터를 주인공으로 한 '정서불안 김햄찌'가 인기를 끌고 있다. 부드러운 털, 귀여운 콧잔등, 순진한 얼굴을 한 이 햄스터는 그냥 햄스터가 아니라 회사원 햄스터다. 해당 채널은 개설 3개월 만에 구독자 50만 명을 모았다. 평균 조회수만 100만 회이며 댓글에는 "진짜 직장인 같아서 볼 때마다 슬픔”, “퇴근 후에 이 영상만 되돌려 보면서 힐링하고 있다. 너무 고맙다” 등 공감 섞인 반응이 나온다. 그동안 AI 캐릭터는 진짜를 어설프게 닮은 가짜를 보며 불쾌감을 느끼는 '불쾌한 골짜기' 현상 때문에 대중 호응을 얻기 어려웠으나 김햄찌는 다르다. AI지만 자연스러운 표정과 움직임이 돋보인다. 기존 AI 콘텐츠에서 흔히 보이는 어색함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김햄찌의 인기에 힘입어 ‘AI로 동물 영상 만드는 법’도 활발히 검색되고 있다. 지난 7일 기준 구글에 '김햄찌'를 검색해 보면 연관 검색어에 김햄찌 만드는 법이 뜰 정도다. 인기를 끄는 주된 요인은 공감이다. 김햄찌는 여느 회사원처럼 퇴근 후 야식을 먹고, 로또 당첨을 기대하며 사직서를 품고 다닌다. 직장에서 실수한 날이면 집에 와서 울음까지 터뜨린다. 영상을 본 누리꾼들은 "퇴근길에 실수한 거 계속 생각하다가 제일 편한 집에 와서 와르르 무너져서 우는 거 격공”, “햄찌야, 나 아닌 줄 알았는데 회사생활 은근히 힘들었나 봐. 퇴근하는 지하철에서 울컥했는데 간신히 참았어. 위로가 된다”, “햄찌가 내 속마음 대변해 준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김햄찌를 운영하는 채널 주인은 "슬프게도 실생활에서 영감을 많이 얻는다. 내가 위로를 받고 싶어서 영상을 만들게 됐다. 많이 봐 주고 공감해 줘서 항상 고맙다"고 밝혔다. 유튜브가 정책 예고를 하면서 김햄찌 채널에 대한 우려도 나오고 있다. 유튜브가 지난달 15일 수익 창출 기준을 개정하며 AI 콘텐츠는 수익을 창출할 수 없게 된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 이번 개정안에는 AI 콘텐츠를 겨냥하는 내용은 없다. 다만, 동일한 템플릿을 사용한 대량 생산, 다른 곳에서 수정 없이 복사한 내용 재사용 등 AI 영상 제작자 다수가 이용하는 영상 제작 방식의 수익 창출을 막았다. 일각에서는 유튜브를 비롯한 영상 플랫폼 제작자들이 AI 영상에 대한 규제를 시작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 기획
  • 문채연
  • 2025.08.09 17:48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56)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과 선봉진전령각진(先鋒陣傳令各陣)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은 1894년 10월 11일부터 12월 20일까지 양호도순영(兩湖都巡撫營) 휘하 선봉장(先鋒將) 이규태(李圭泰)가 동학농민군을 진압 토벌하는 과정에서 순무사(巡撫使) 신정희(申正熙)에게 보낸 첩보(牒報)를 수록한 것으로, 모두 104종의 첩보가 포함되어 있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크기는 22×30cm이다. 『선봉진전령각진(先鋒陣傳令各陣)』은 1894년 10월 14일부터 12월 26일까지 또한 양호도순무영 휘하 선봉장 이규태가 직접 지휘하였던 통위영(統衛營), 그리고 그의 지휘하에 두었었던 장위영(壯衛營)·경리청(經理廳) 등의 각 부대와 휘하 각 영관·대관·별무사 등, 그리고 각지의 수령과 의병소, 수성군 등에게 내린 전령(傳令)을 모은 책이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크기는 21×31cm이다. 위 두 자료는 모두 양호도순무영 휘하 선봉장 이규태가 상급 부대인 양호도순무영 순무사 신정희에게 올려보낸 첩보(牒報), 그리고 양호도순무영 휘하 각 부대 및 각지 수령 등에게 내려보낸 전령(傳令)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봉장 이규태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상급 부대로의 보고 문건이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이고 예하 및 기타 부대로의 명령 문건이 『선봉진전령각진(先鋒陣傳令各陣)』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두 자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양호도순무영 휘하 선봉진 이규태의 지위 및 상급 부대가 되는 양호도순무영에 대하여 알아볼 필요가 있다. 먼저 이규태(1841~1895)는 1862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훈련원 주부, 초관, 첨정을 맡고 도총부 도사, 경력 등을 역임한 무관이었다. 청주 영장과 내금위장 등을 지낸 다음 경리청과 장위영에서 참영관, 정영관을 지냈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기 전 친군영 체제 하에서 정영관으로 자리 잡은 고급 지휘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까지 뚜렷한 일본과의 관계는 잘 보이지 않는다. 다음으로 양호도순무영은 1894년 9월 22일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하여 조선 조정에서 호위부장(扈衛副將) 신정희(申正熙, 1833~1895)를 순무사로 임명하여 편성된 부대다. 여기서 순무영은 조선시대 전쟁이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이에 대응하거나 진압하기 위하여 임시로 설치된 군영을 뜻한다. 순무영이 설치되면 해당 전쟁이나 반란을 대응하는 모든 부대 및 각지 수령은 순무사의 절제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19세기 들어서도 순무영이 세 번 설치되었는데 첫째, 1811년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기 위하여 설치된 순무영이 있었고, 둘째, 1866년 프랑스의 침략, 즉 병인양요에 대응하기 위하여 설치된 순무영이 있었고, 신정희의 양호도수문영이 바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설치된 세 번째 순무영이었다. 원칙대로라면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한 모든 관군은 순무사 신정희의 양호도순무영의 절제를 받도록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 서울에서 남하한 진압군 대부분은 사실상 일본군 지휘관에게 장악되어 있었다. 1894년 6월 21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이래 기존 친군영을 중심으로 한 조선의 중앙군은 해체당한 뒤 일본군에 의하여 재편성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호도순무영은 명칭상으로는 양호(兩湖), 즉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을 모두 포괄하는 절대적인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휘하 부대들이 대부분 일본군에 의하여 조직된 부대들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제대로 된 지휘권을 행사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양호도순무영 순무사 신정희는 1894년 9월 24일 통위영(統衛營) 영관 이규태를 선봉장(先鋒將)으로 임명하여 선발부대를 이끌고 출진하도록 하였다. 이때 이규태는 교도병(敎導兵) 200명과 통위병(統衛兵) 200명을 이끌고 출진하기로 하였는데, 장위영(壯衛營)과 경리청(經理廳) 등 다른 부대도 선봉장의 지휘를 받도록 전령이 떨어졌다. 여기서 통위영은 기존 친군영 체제 하에 있던 친군 통위영이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후 재조직된 부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명칭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이전의 체제를 어느 정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장위영과 경리청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교도병은 곧 교도중대(敎導中隊)의 병력을 일컫는데, 이는 일본군이 새롭게 조직한 부대였다. 교도중대장(敎導中隊長) 이진호(李軫鎬)는 일본군의 신임을 받는 자였다. 따라서 교도병 200명은 사실상 일본군의 지휘를 받는 병력들이었다. 더욱이 10월 12일 양호도순무영 순무사 신정희가 선봉장 이규태에게 일본군과 의논하여 노정을 정하도록 하는 전령을 내리면서 이규태는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없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군에 대한 숙소 및 음식 공급까지 담당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동학농민군 진압에 대한 주도권은 일본군이 쥐게 되었다. 실제로 선봉장 이규태는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 소좌가 지휘하는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 병력과 함께 공주 방면으로 남하하였다. 11월 벌어진 공주 전투때도 서로분진대를 지휘한 모리오 마사이치(森尾雅一) 대위와 함께 남하하였는데 전투의 주도권은 그에게 내어줄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대하여 이규태는 불만을 품고 순무사 신정희에게 사신(私信)을 보내어 일본군과 관련한 문제들을 토로하였다. 일본군 또한 이규태에게 불만을 품었다.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 대대장 미나미 고시로 소좌는 모리오 마사이치 대위의 지휘를 받지 않은 선봉장 이규태를 두고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일본공사를 향하여 “열렬히 동학당에 가담한 사람이며 모든 처사가 애매모호하고 지휘관의 명령을 왜곡, 이제까지 한 번도 전투 일선에 나선 적이 없다고 합니다”라고 하면서 강력하게 규탄하였다. 이에 따라 이노우에 공사는 외무대신 김윤식에게 이규태의 소환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반면 일본군은 장위영(壯衛營) 병력을 이끌고 남하한 죽산부사(竹山府使) 이두황(李斗璜)을 선호하였다. 그는 청군과의 평양 전투에도 일본군을 따라가 복무한 경험이 있는 친일 군인이었다. 일본군과 함께 남하한 다음에는 일본군의 요구에 따라 보은 장내리와 목천 세성산의 동학농민군 근거지를 초토화시키기도 하였다. 따라서 11월 26일 이두황이 우선봉(右先鋒)으로 임명됨으로써 기존의 선봉장 이규태는 좌선봉(左先鋒)으로 격하되고 말았다. 장위영 병력은 이두황과 원세록이 지휘하고 경리청 병력은 홍운섭과 성하영이 지휘함으로써 이들 병력에 대한 이규태의 지휘권도 불분명해졌다. 교도중대는 이미 이진호가 지휘하고 있었다. 결국 양호도순무영은 12월 23일 순무사 신정희가 강화유수로 임명되면서 혁파되었다. 좌선봉 이규태의 활동도 여기에서 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규태 또한 동학농민군 진압을 충실히 벌인 것으로 보인다. 『순무사정보첩』에 따르면 그는 효포, 판치, 유구, 우금치 등지에서 공주 전투를 수행하였고, 노성, 논산, 강경 등지까지 가서 동학농민군을 격파하였다. 특히 우금치 전투 당시에는 각급 부대 지휘관들에게 “일본 병사와 합세하고 진격하여 토벌하게” 하였다. 『순무사정보첩』에는 전라도 지역까지도 내려가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과정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특히 이규태는 전라도 무안 등지로 내려가 무안의 동학농민군 지도자 배상옥을 토벌하기까지도 하였다. 이를테면 12월 14일 “동학(東學)의 거괴(巨魁)인 배규인(裴奎仁)이 도망하여 해남(海南) 등에 있다고 하니, 너희들은 기필코 쫓아가 붙잡아 바치면 마땅히 상을 후하게 줄 것이다.”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하였다. 이규태가 일본군의 고을 수령에 대한 감금 및 심문, 그리고 동학농민군 지도자에 대한 탈취에 대한 불만을 품은 것은 사실이다. 이를테면 일본군이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을 빼앗아가자 “우리의 신민(臣民)이 국법에 의해 처결되지 못하는” 상황에 불만을 품기도 하였다. 직속상관인 순무사 신정희도 「순무사 방시문」을 통하여 귀순한 동학농민군을 생업에 안정시킬 것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규태의 직책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편성된 부대의 선봉장이었고 역할 또한 이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일본군 및 우선봉 이두황이 동학농민군에 저지른 잔혹성을 보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역시 동학농민군 진압을 맡은 지휘관임은 분명하였다. 다만 이규태는 이두황과 달리 친일 군인의 길을 걷지 않았고 동학농민군 진압 직후인 1895년 6월 서울에서 사망하였다. 유바다 고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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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8.06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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