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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39) 선봉진서목과 상순무사서, 선봉진각읍료발관급감결

양호도순무영은 동학농민군 진압하기 위한 총지휘관으로 선봉장 이규태(李圭泰, 1841~1895)를 임명했다. 홍경래난 때의 양서순무영과 병인양요 당시의 기보순무영은 순무사 다음 직위인 중군(中軍)이 선봉장을 겸하거나 출전 장졸 전체를 이끄는 총지휘관이었다. 그러나 갑오년의 양호도순무영은 중군이 출진하지 않아서 선봉장이 경군 병영과 지방병영 그리고 지방관아의 진압 병력 전체를 통제하는 총지휘관이 되었다. 따라서 선봉장 이규태가 순무영과 군무아문 등에 각종 보고를 올렸고, 휘하 병영의 전투보고서가 선봉진에 전해졌다. 또한 각급 관아와 주고받은 공문 등 선봉 이규태와 관련한 문서가 매우 많이 작성되었다. 순무사에게 보낸 편지와 우금치전투를 전해주는 〈공산초비기(公山剿匪記)〉 등 직접 쓴 기록도 적지 않다. 진중일기인 선봉진일기는 시간순으로 여러 사건을 기록해서 진압군의 대책과 동학농민군의 동향을 전해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러한 문서들은 장신(將臣)인 순무사 신정희(申正熙, 1833~1895)에게 모아졌고, 순무사 신정희의 후손이 고려대학교에 기증해서 현재 그 대부분의 문서를 고려대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선봉진서목(先鋒陣書目) 서목(書目)은 상관에게 올리는 첩정 등의 원본에 핵심 요점만 따로 적어서 첨가하는 문서를 말한다. 선봉 이규태는 상세한 사정을 설명한 수많은 보고문서를 올리면서 그 요점을 간략히 적은 선봉진서목을 첨부하였다. 출전 병영의 행군과 숙영 그리고 군량 조달 등 시시각각 달라지던 출전 병영의 실정이 이 서목으로 확인된다. 선봉진서목의 항목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몇 가지 다른 형태도 있다. 선봉 이규태가 휘하 병영에서 보고한 첩정을 그대로 베껴 순무사에게 올리면서 선봉이 서명한 서목이 있다. 장위영 부영관 겸 죽산부사 이두황의 첩정이나 안성군수 홍운섭의 첩정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휘하 병영의 지휘관이 직접 순무사에게 올린 서목도 있다. 갑오년 11월 1일자 순무영 별군관 최일환의 서목이거나 11월 3일자 출진 장위영 부영관 겸 죽산진토포사 이두황의 서목이 그것이다. 또 충청도 온양군수 서목도 있다. 온양군수의 서목에는 경내에서 활동한 동학농민군의 재산을 빼앗아서 공을 세운 교리(校吏)에게 상으로 준 내용도 나온다. 당시 각종 보고문서는 적지 않았다. 순무선봉진등록(巡撫先鋒陣謄錄)에 포함된 문서를 보면 그 수와 양을 알 수 있다. 그에 비해 서목의 수는 적은 편이다. 현존하는 서목은 그 일부에 불과하다. △선봉진상순무사서 부잡기(先鋒陣上巡撫使書(附雜記) 선봉진상순무사서는 1894년 10월 22일에서 1895년 3월 5일까지 선봉 이규태가 순무사 신정희에게 올린 편지이다. 편지는 모두 11편이고, 첨부한 잡기는 31편이다. 이 편지는 출전 장졸의 현지 지휘관으로서 이규태가 순무사에게 전한 갖가지 내밀한 사정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공무를 맡고 있는 무관이 공문서가 아니라 사신으로 실정을 전하는 것은 당시 관례처럼 보인다. 충청감사 박제순도 총리대신 김홍집과 외부대신 김윤식에게 충청도 동학농민군의 진압과 관련한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것을 모은 자료가 금영내찰(錦營來札)이다. 이규태의 편지는 처음부터 절박한 심정을 담거나 어려운 내용을 전하는 것이 많다. 일본군과 관련한 것이 가장 심각한 내용이었다. 출전 초기부터 일본군 장교의 지휘를 받으라는 지시는 선봉장으로서 황당하게 여겼던 것 같다. 더구나 일본군과 동행해야 해서 천안에 도착해서 3일이나 머물렀다고 한다. 충청도 내포 일대의 상황이 심각해서 경군 병력을 보내려고 했으나 독자적으로 보내지 못했다. 순무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드러나는 심각한 상황은 탄환 부족 사태였다. 일본군은 6월 21일 새벽 경복궁을 점령할 때 경군 병영을 기습해서 무기와 탄약을 몰수해서 일본군이 주둔한 용산 막영으로 보냈다. 이 무기의 일부는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경군이 파견될 때 돌려받았지만 문제는 탄환이었다. 일본군이 준 탄환은 부족했고, 성환에서 패배한 청국군에게 몰수한 탄환을 받았지만 보유한 총의 구경과 달라서 쏘아도 명중률이 떨어졌다. 편지모음에 덧붙인 잡기(雜記)는 여러 실상을 전해준다. “탄환은 일본군의 진중에서 1만개를 가져왔는데, 겨우 경리청의 병정이 가진 총에는 쓸 수가 있었으나 사거리가 200보에 지나지 않아 단지 포 소리만 낼 뿐입니다. 또한 20개를 나누어 주는 데에 불과하여 그 사이에 내포에서 쓴 것이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통위영의 진중에는 몇 십개가 남아 있었으나 천안에서 가져온 탄환은 애초에 모양이 맞지 않았기 때문에 따로 의견을 내어 모양을 바꾼 것이 거의 수 만개나 되었습니다. 이처럼 긴요하게 쓸 것이 이와 같이 구차한데다가 넉넉하지 않아 걱정스럽고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새 탄환을 보내달라고 거듭 요청하고 있다. 12월 1일 순무사에게 보낸 편지에는 전봉준 장군을 추적하는 상황을 전하고 있다. 피신하는 전봉준 장군을 30리 정도로 뒤쫓고 있고, 11월 29일에는 입암산성에서 머물고 아침밥을 먹은 뒤에 바로 떠났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공식 문서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들이다. 선봉장 이규태는 우금치전투를 함께 치룬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의 제2중대장 모리오 마사이치(森尾雅一) 대위와 극히 사이가 나빴다. 중대장급 대위가 경군 총지휘관인 선봉장 이규태를 아랫사람처럼 다루는 것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모리오 대위는 온갖 트집을 잡고 선봉장 이규태를 견제하였다. 전라도로 남하한 후 만난 제19대대장 미나미 고시로 소좌는 모리오 대위의 보고를 듣고 선봉장 이규태를 매도했는데 그 도가 지나쳤다. 순무사에게 올린 편지 귀절은 참담한 것이었다. “ 어제 이 읍에 들어온 뒤에 비로소 일본군 대대장을 만났는데 책망을 당하는 것이 노예보다 심했습니다. 살아서 명(命)을 더럽혔고 죽어서도 이름이 없겠으니 어찌 하겠습니까?” △선봉진각읍료발관급감결(先鋒陣各邑了發關及甘結) 이 자료는 선봉장 이규태가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를 순회하면서 예하 각 병영과 각 군현 또는 면리 단위에 보낸 각종 공문을 묶은 것이다. 상급관청의 공문인 관문(關文)과 아래관청에 보낸 감결(甘結), 그리고 선봉장의 전령과 방시문(榜示文) 등을 수록했다. 선봉진각읍료발관급감결 표지. /고려대 도서관 제공 ​당시 경군이 지방에 파견될 때 어떤 방식으로 행군했는지 보여주는 내용이 처음에 나온다 과천과 수원에 보낸 관문에 “본읍의 포군(砲軍)과 토병(土兵) 중에서 50명 한도로 각각 그 지경에서 미리 준비하고 기다렸다가 차례차례 향도”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리고 경기도 광주, 용인, 죽산, 안산, 안성, 남양, 양성, 진위와 충청도와 전라도 각 군현에 보낸 관문에는 거괴를 잡아서 바치고, 스스로 안정시킬 수 없으면 선봉진에 알려서 토벌할 수 있도록 하라고 했다. 이런 식으로 행군하는 군현의 동학농민군을 제압하면서 그 사실을 충청도와 전라도 전역에 알리도록 했다. 이 자료에는 각 지역에서 활동하던 알려지지 않은 동학농민군 이름이 나오고 있다. 이를테면 천안 방축동(현 아산 온양)의 김치현(金致鉉), 장인보(張仁甫), 김영석(金永石), 이원장(李元章)이다. 특히 직산과 평택 및 성환역에 보낸 감결을 보면 동학농민군의 재산 몰수가 처음부터 행해진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번에 본 지방에서 붙잡혔거나 붙잡히지 않은 자는 죄가 사면을 받지 못할 죄목에 해당하므로, 당해 마을에 안접할 수 없다. 그러니 그들이 가진 집안 살림살이와 땅을 법전에 의해 적몰할 것.”이라고 한 것이다. 여러 물자의 강제 징수와 인마의 동원, 그리고 뒤로 갈수록 동학농민군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는 지시 등이 거듭 나오고 있다. 갑오년의 구체적인 실상이 선봉장 이규태와 관련한 자료에 풍부히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신영우 충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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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 2025.04.02 16:24

“흩날리는 꽃바람, 설레는 '봄 소풍'”...고창 석정 벚꽃축제 4일 개막

사계절 아름다운 자연이 돋보이는 고창군에서 봄을 알리는 대표 축제, ‘제3회 고창석정 벚꽃축제’가 열린다. 벚꽃이 절정을 이루는 4일부터 6일까지 사흘간 석정온천지구에서 다채로운 행사와 함께 봄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야간 벚꽃놀이, 환상의 세계로 초대 올해 축제의 가장 큰 매력은 야간 벚꽃길이다. 1km에 걸쳐 수령 20년 이상의 벚나무들이 터널을 이루며, 야간 조명이 더해져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특히 올해는 조명 구간이 확대되고, 하트·천사의 날개 등 포토존 조명이 추가 설치돼 더욱 화려한 야경을 선사한다. 벚꽃길 곳곳에는 별빛처럼 반짝이는 트리 조명과 바닥경관 조명이 설치돼 걷기만 해도 인생샷을 건질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4일 저녁에는 청사초롱을 들고 벚꽃길을 걷는 이색 체험도 마련돼 색다른 감성을 더할 예정이다. △흥미진진한 축제 프로그램, 남녀노소 즐길 거리 풍성 축제 첫날(4월 4일)에는 어린이 서커스, 버블쇼, 솜사탕 아트쇼가 펼쳐지며, 지역 주민들과 방문객들이 이색 복장을 착용하고 벚꽃길을 거니는 퍼레이드가 열린다. 저녁에는 김현, 윤수, 정해준, 김다현 등 인기 가수들이 전야제를 빛낼 예정이다. 둘째 날(4월 5일)에는 어린이를 위한 ‘브래드 이발소’ 싱어송 콘서트와 읍·면 단합 게임대회가 열리며, 저녁에는 케이시와 케이윌이 출연하는 초청 공연이 축제의 열기를 더한다. 마지막 날(4월 6일)에는 지역 농특산물을 활용한 요리 체험 프로그램 ‘고창벚꽃 200인의 요리사! 고창에 꼬치다’가 열려 가족 단위 방문객들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축제의 대미는 군민들이 참여하는 노래·춤·악기 연주 공연으로 화려하게 장식된다. 이외에도 벚꽃을 배경으로 한 ‘봄봄봄 데이클래스’(한지꽃 만들기, 캘리그라피, 자개핀 만들기)와 사진 콘테스트, 플리마켓, 벚꽃 푸드존 등 다양한 상설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방문객 편의 극대화…셔틀버스 운행 고창군은 원활한 축제 운영을 위해 교통 대책을 마련했다. 터미널과 축제장을 오가는 셔틀버스를 30분 간격으로 운행해 방문객의 편의를 도모한다. 또한, 벚꽃길 보호를 위한 ‘쓰레기 없는 축제’ 캠페인을 진행하고, 안전한 야간 축제를 위해 경찰 및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순찰을 강화할 예정이다. 방문객들이 머물다가 갈 수 있는 호텔이 4월부터 석정에 오픈하여 스쳐가는 고창이 아니라 머물고 가는 고창이 완성됐다. △고창의 대표 벚꽃 명소, 어디가 좋을까? 고창에서 벚꽃을 제대로 즐기고 싶다면 ‘고창읍성’과 ‘고창 꽃동산’을 추천한다. 고창읍성은 1453년 단종 원년에 전라도 19개 군현이 모여 쌓은 성곽으로, 봄이면 성벽을 따라 만개한 벚꽃이 절경을 이룬다. 성곽 위를 걸으며 벚꽃비를 맞는 경험은 고창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감성이다. 고창 꽃동산(배수지) 산자락을 따라 만개한 산벚꽃과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읍성 풍경이 장관을 이루며, 사진 명소로도 유명하다. △고창에서 만나는 최고의 봄날 심덕섭 고창군수는 “올해 벚꽃축제는 지난해보다 더욱 풍성하고 품격 있는 행사로 준비했다”며 “가족, 친구, 연인과 함께 고창을 찾아 벚꽃비를 맞으며 사랑과 행복을 가득 담아가시길 바란다”고 전했다. 이번 봄, 설렘과 낭만이 가득한 ‘고창석정 벚꽃축제’에서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보자.

  • 기획
  • 박현표
  • 2025.04.02 15:34

[팔도건축기행- 한국지방신문협회 공동기획] 진주 국립진주박물관

국립진주박물관은 대한민국 현대건축의 선구자 김수근 건축가의 건축 철학이 스며든 공간이다. 임진왜란의 역사와 진주의 문화가 겹겹이 담긴 진주성 안.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룬 이 박물관은 조용히 숨어 있는 듯하지만, 한 발씩 다가갈수록 그 독창적인 건축미와 공간의 깊이가 서서히 드러난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남강이 감싸 안은 이곳은 과거와 현재, 건축과 역사가 만나는 특별한 장소다. △스며들 듯 세워진 건축, 과거와 현재를 품은 공간 국립진주박물관은 1984년 개관 당시 국내 일곱 번째 국립박물관으로, 경남도 최초의 국립박물관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무엇보다 이 박물관의 가장 큰 특징은 ‘진주성 안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건축’이라는 데 있다. 김수근은 설계 초기부터 진주성의 전통성과 지형적 특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현대적 건축의 기능을 담아낼 방법을 고민했다. 진주성 내 70평 규모의 촉석루를 압도하지 않으면서도, 1700평이라는 규모의 박물관 기능을 충분히 담아내는 일이었다. 실제로 박물관은 낮은 구릉 지대에 자연스럽게 파묻히듯 설계돼 있어, 방문객은 건물에 가까이 다가설 때까지 그 존재조차 눈치채지 못한다. 그러다 어느 지점을 지나면, 마치 자연의 일부처럼 고요히 모습을 드러낸다. 건물 외부는 대지의 상황에 따라 여러 개의 단으로 구성하고, 진입부 전면에는 넓은 광장을 조성해 폐쇄적인 내부 기능을 보조하고 있다. 건물의 외관은 한옥 지붕의 실루엣을 연상시키는 중첩된 지붕선으로 구성돼 있다. 다양한 형태의 지붕이 합쳐져서 장관을 이루는 우리의 전통마을 이미지를 재현하고자 한 것이다. 외벽은 진주산 청회색 돌을 사용해 진주성 내 다른 건물들과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건물은 단일 구조지만 중심 공간을 두고 전시실, 사무실, 직원 식당 등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내부로 들어서면 공간 구성의 치밀함이 더욱 돋보인다. 국립진주박물관은 단일 건물로 설계됐기 때문에 커다란 중심 공간이 설정된다. 이것은 2개 층이 개방된 형식으로, 이를 통해 전체 공간이 유기적으로 연계되도록 했다. 전시 공간에는 경사형 램프가 설치되어 1층에서 2층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며, 관람자는 위로 올라가 유물을 감상하고 다시 다른 램프를 따라 내려오며 전시를 이어갈 수 있다. 이 回자형 동선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낸다. 관람자에게 공간을 경험하게 만드는 건축이다. 빛의 사용도 눈에 띈다. 박물관은 일반적으로 유물 보존을 위해 인공 조명을 설치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곳은 중정 부분을 자연광으로 처리하고, 지붕과 지붕이 만나는 애매한 경계에 천창을 설치함으로써 자연광을 내부로 끌어들였다. 김수근이 1980년에 그린 내부공간을 위한 단면 스케치들을 살펴보면, 내부계단에 의한 레벨차가 불러 일으키는 공간적인 느낌과 천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과의 관계가 중점적으로 탐구됐음을 알 수 있다. 박물관 한편에 마련돼 있는 휴게실도 공간의 매력을 배가시킨다. 마루에 앉아 배롱나무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는 정원과 청회색의 돌담을 바라보며휴식을 취하는 것도 박물관 공간을 즐기는 또하나의 묘미다. 이처럼 공간 그 자체가 하나의 건축적 메시지를 품고 있는 국립진주박물관은 전시 콘텐츠 또한 그 맥락에 맞게 구성돼 있다. △임진왜란 역사, 도내 문화유산 조명 국립진주박물관은 개관 당시에는 경남을 중심으로 성장·발전했던 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대표 박물관으로 출발했다. 그러다 1998년 ‘가야문화 연구’ 기능은 국립김해박물관으로 옮겨지면서 국립진주박물관은 경남 서부지역의 역사 문화와 임진왜란을 전시 중심 주제로 하는 ‘임진왜란 특성화 박물관’으로 거듭났다. 현재 국립진주박물관은 임진왜란 관련 문화재를 모아 전시하고 각종 연구 사업을 통해 국제 전쟁으로서 임진왜란의 다양한 모습을 조명하고 있다. 임진왜란실은 1592년 일본군의 대규모 침입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전쟁의 발발 △일본군의 전략 △조선의 대응(의병과 수군의 활약) △명군의 참전 △정유재란과 종전 등의 주제로 전쟁의 큰 흐름을 보여준다. 이와 함께 제1·2차 진주성 전투가 벌어졌던 진주성의 역사도 살펴볼 수 있다. 역사문화홀은 경남지역 문화유산의 아름다움과 다채로움을 느껴볼 수 있는 공간이다. 신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유산과 역사 도서, 휴식 공간이 어우러진 복합 전시 공간으로, 박물관 본연의 기능을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체감하게 한다. 두암실에서는 두암 김용두 선생이 일본에서 수집해 기증한 문화유산들을 만날 수 있다. 도자기와 서화, 공예품 등 총 190점의 기증품 가운데는 보물로 지정된 ‘소상팔경도’(보물 제1864호), ‘정조어필’(보물 제1632-1호) 등도 포함돼 있다. 야외전시장에는 통일신라 양식의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국보 제105호)이 전시돼 있다. 상층 기단에는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여덟 신장이, 1층 탑신에는 네 명의 보살이 새겨져 있다. 한 석탑에 신장과 보살이 함께 등장하는 것은 9세기 통일신라 석탑 양식의 특징으로, 불교미술의 높은 수준과 뛰어난 조각 기술을 보여준다. 이 밖에도 3D 입체영상관, 승자총통 체험실, 어린이 체험 전시실 등 다양한 교육 및 참여형 콘텐츠가 마련돼 있다. 한편 국립진주박물관은 개관 40년 만인 지난해 누적 관람객 1200만명을 돌파했다. 진주성 유료 입장이라는 입지적 제약을 감안하면 의미 있는 수치다. 현재 박물관은 옛 진주역 철도부지로의 이전이 추진 중이며, 새 박물관은 2028년 말 개관을 목표로 하고 있다. 국립진주박물관 관계자에 따르면 현 박물관 건물의 향후 활용 방안은 아직 정해진 바 없으며, 현재 타당성 용역이 진행 중이다. 진주는 오래전부터 문화도시로 불려왔다. 그 중심에 선 진주성은 역사의 상흔을 간직하면서도, 지금은 시민들에게 휴식과 사색의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국립진주박물관은 이 같은 장소에 들어서면서 과거와 현재, 전통과 현대를 잇는 건축의 좋은 사례로 남았다. 성벽 안에 담긴 박물관은 이제 단순한 전시관이 아닌, 도시의 풍경이자 문화의 연장선으로 자리하고 있다. 돌담 너머로 스며드는 햇살처럼, 조용하지만 깊게, 그렇게 김수근의 건축은 진주성 안에서 시간을 이야기하고 있다. 경남신문=한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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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25.03.31 16:52

“내 인생 최고의 날”…화정마을 할매 작가들 전시회 성황

유독 햇살이 따스한 봄날. 화정마을 어르신들이 아침부터 분주합니다. 오늘(26일)은 작가로 데뷔한 화정마을 할머니들의 작품을 보러 가는 날. 집마다 들뜬 목소리가 담장을 넘어 퍼집니다. “양산 가지고 가야할랑가? 뭘 입고 가믄 좋을라나?” 청년 이장 아지트 바로 옆집에 사는 오율례(74) 어르신은 약속 시간보다 훨씬 일찍 집을 나섰습니다. 생각보다 따뜻한 날씨에 양산을 쓸지, 모자를 쓸지 고민입니다. ‘내가 그린 그림’이 전시회장에 걸렸다는 사실은 어르신들을 자꾸만 들뜨게 합니다. 전시회장으로 출발하는 시간은 오후 2시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이른 오후 1시 30분, 오늘 나들이를 함께 할 동네 어르신 20여 명이 모두 마을회관에 모였습니다. 화정마을에 온 지 벌써 두 달이 되어가지만, 시간에 딱 맞춰 모인 것은 처음(?)입니다. 귀가 어둡고 자주 깜빡하는 어르신들은 곧잘 약속 시간을 착각하곤 하거든요. 하지만 오늘은 아닙니다. 모두 제시간보다 일찍 모여 전시회가 열리는 하얀 양옥집으로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하얀 양옥집에 도착한 어르신들은 저마다 본인 그림을 찾아 나섭니다. 그릴 땐 여유가 없어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던 다른 사람들 그림도 이제야 천천히 들여다봅니다. 그림을 그릴 때만 해도 “쑥쓰러워서 어쭈고 걸어논디야”라며 부끄러워했지만, 전시 그림을 막상 보고 나니 “모아 놓고 보니 예쁘다”며 활짝 핀 미소를 감추지 못합니다. 전시 소식을 듣고 어르신들의 자녀들도 한달음에 달려왔습니다. “우리 엄마 그림이네?” 신기한 듯 ‘엄마’가 그린 그림을 한참 바라보더니 옆에 서서 사진도 찍습니다. 하얀 양옥집은 화정마을 어르신들을 위해 작은 음악회도 준비했습니다. 버스킹그룹 쟈니컴퍼니와 김정일 밴드가 무대에 섰습니다. ‘벛꽃엔딩’,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등 전시 주제인 ‘꽃’과 어울리는 노래가 따뜻한 봄바람을 타고 전시회장을 가득 채웁니다. 음악회를 마치고 다시 마을로 돌아가는 길. 최은주(77) 어르신은 “오늘 너무 좋았다”며 미소를 감추지 않습니다. 옆자리에 앉은 최장금(78) 어르신과 전시회에 대해 들뜬 목소리로 담소를 나누네요. 사실 화정마을에서 처음 그림을 배울 때 어르신들은 모두 “내가 어떻게 하냐”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하얀 도화지 위에 선 하나 긋는 것이 두려워 도움을 요청했지요. 하지만 그렇게 정성 들여 그린 그림이 전시되는 경험을 겪으며 이제는 도전을 한결 가볍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먹고살기 바빴던 시대를 살아내느라 그림, 시 등 문화생활은 그저 ‘남의 일’이었던 어르신들. 이번 전시회를 통해 화정마을 어르신들은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화정마을 어르신들의 도전을 담은 ‘가지각색, 꽃’ 전시회는 오는 4월 27일까지 하얀 양옥집에서 진행됩니다. 디지털뉴스부=문채연 기자

  • 기획
  • 문채연
  • 2025.03.31 16:41

수십년전 '산불 악몽'이 다시⋯시골마을은 두려움에 떤다

건조한 봄, 전국에 번진 대형 산불 소식에 화정마을 어르신들의 마음도 타들어 갑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따스한 햇살 아래 평화로웠지만 어느새 분위기는 조용히 가라앉았습니다. 혹여나 불이 날까 마당에 나와 마른 가지 줍기에 바쁩니다. "사람들이 그만 다쳐야 하는디, 큰일이네. 옛날에는 '여시불'이라고 혔어. 그 불이 진짜 무섭지, 무서와. 이렇게 큰 불이 나니까 무서와." 오율례(74) 어르신은 봄철 산불을 '여시불'이라고 부른다며 가장 무서운 불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르신이 이야기한 여시불은 옛 어른들이 원인도 모르게 갑자기 번지는 불을 여우에 홀린 것처럼 감쪽같다는 의미를 담아 부르던 말입니다. 논과 밭으로 둘러싸인 화정마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불이 가장 큰 재난입니다. 농사가 일생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이 마을에 불이 나면 삶도 무너집니다. 화정마을 주민들은 매년 마을 초입과 끝에 화재막이를 두고 당산제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불이 나지 않게 해 달라고 빌었죠. 그래도 여시불 같은 봄철 산불은 막을 수 없었습니다. 수십 년 전 화정마을에도 산불이 났습니다. 전국 곳곳 동시다발적 산불이 더욱더 무섭게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이칠월(87) 어르신은 그날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저그 뒷산에 불이 났었어. 순식간에 바람이 확 불어 재끼니께 화기가 순식간에 덮쳐서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당게. 그때는 젊으니께 도망이라도 쳤지, 지금이었으면⋯." 불은 산 아래에 있는 집 한 채를 삼키고 나서야 멈췄습니다. 다행히 마을 옆에 있던 수로 덕분에 더 번지지 않았습니다. 주민들은 너무 무서워 집 담벼락을 부수면서까지 소방도로를 만들었습니다. 화정마을 길은 오솔길 하나뿐이었거든요. 소방도로까지 만들었지만 무서운 것은 여전합니다. 마을에 불이 번졌을 때 대처할 방법이 없는 게 현실입니다. 거동이 불편해 빠르게 대피할 수도, 귀가 멀어 불났다는 소식을 듣는 것도 어려운 거죠. "인쟈 불나믄 어쭈겄어. 어디 가도 못 혀. 걸어갈 수가 없당게. 천천히 걷는 것도 힘든디 어떻게 뛰겄어. 걸어가다가 잘못될 수밖에 없지." 보행기가 없으면 걷기 힘든 이장순(90) 어르신의 말입니다. 어르신들은 "어차피 도망가지 못하니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이에 비교적 젊은 60∼70대 주민들이 어르신들께 대피 요령을 알려 드리기도 합니다. 재난안전문자와 마을 방송도 때마다 울려 퍼집니다. 문제는 스마트폰을 다루지 못해 문자를 확인하기도, 귀가 어두워 방송 내용도 듣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그러다 보니 곳곳에서 대형 산불 소식이 이어지는 것을 들은 어르신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남 일 같지 않고 언제 어디서 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죠. 마을 분위기는 여전히 소란스럽습니다. 매일 모여 수다를 떨던 어르신들이지만 지금은 불안감이 커지면서 허공만 보거나 산불 이야기뿐입니다. 디지털뉴스부=문채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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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30 08:18

[우리 땅에 새겨있는 역사의 흔적] 후백제의 도성과 궁궐터

우리고장의 역사는 우리의 뿌리이자 자존심이다. 이 땅에 새겨있는 역사의 흔적을 찾는 일은 우리의 뿌리를 찾는 일이다. 전북일보에서는 그 일환으로 〈우리 땅에 새겨있는 역사의 흔적〉을 월1회 연재한다. 남북화해 무드가 무르익던 문재인 정부시절 비무장지대(DMZ) 안에 있는 궁예의 궁궐터를 남북이 공동조사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남북공동조사는 실현되지 못했다. 비무장지대 안 궁예의 궁궐터는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가 905년 국호를 태봉으로 고치고, 송악에서 철원의 풍천원으로 도성을 옮기면서 조성했다. 1530년에 발간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풍천원은 궁예의 도읍지로 철원도호부의 북쪽 27리에 있다. 외성의 둘레는 1만 4421척이고, 내성의 둘레는 1905척으로 모두 흙으로 쌓았다. 지금은 절반이 퇴락하였다. 궁전의 옛터가 뚜렷이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풍천원의 석등 2기가 국보로 지정되었는데 당시의 모습을 유리건판 사진을 통해 볼 수 있다. 이 석등은 6·25전쟁을 겪으면서 사라졌지만 비무장지대 안에는 아직도 궁예의 궁궐터가 옛 모습 그대로 잠들어 있다. △후백제 궁성에 대한 기록 전주는 900년부터 936년까지 후백제의 수도였다. 그렇다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후백제의 궁궐터에 대해서는 어떻게 기록했을까. 〈신증동국여지승람〉전주부 고적 조에는 후백제 궁궐에 대한 서술 자체가 없다. 다만 고토성(古土城)에 대해 “부의 북쪽 5리에 있다. 터가 남아 있는데 견훤이 쌓은 것이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고려 신종 2년(1199년)에 전주목의 사록 겸 장서기로 왔던 이규보의 〈남행월일기〉에도 “전주는 완산이라고도 일컫는데 옛날 백제국이다”는 언급만 있을 뿐 견훤궁성에 대한 기록은 없다. 1822년(순조 22) 호남을 여행하면서 〈남유록〉이라는 기행문을 남긴 담헌 이하곤은 “전주는 견훤이 웅거하던 옛 도읍지이다. 속언에 전해오기를 견훤이 서산 봉우리에 별궁을 짓고 남쪽 높은 봉우리에 철교를 가설하여 옛 궁터를 왕래했다고 한다.”고 하여 견훤에 대한 전설만을 적어놓았다. 이처럼 지리지나 명사들의 전주방문기에서 견훤궁성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그 까닭은 견훤궁성에 대한 흔적 자체가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백제의 흔적을 지운 안남도호부 고려 태조 왕건은 후백제를 멸망시킨 직후 전주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설치했다. 도호부는 본래 당나라 초기에 광대한 속지(屬地)의 지배를 위하여 설치했던 기관이다. 이 기관은 군사행정조직으로 정복지나 속지의 반발을 무력으로 제압해서 체제에 순응하도록 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후백제왕 신검이 고려에 항복해 후백제가 멸망했지만 왕건은 후백제 세력이 다시 일어서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전주에 안남도호부를 설치해 후백제 부흥 세력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후백제의 흔적을 지우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때 궁성 안의 모든 건물을 불태우고, 흔적마저 철저하게 파괴했다. 이렇게 전주에서 후백제가 다시 일어설 수 없도록 온갖 위력을 행사하다가 951년(광종 2)이 되어서야 안남도호부를 고부로 옮겼다. 고부는 백제의 중방성이 있던 곳으로 후백제 시대에도 오월과의 중요한 교역 거점이었다. 그 후 안남도호부를 995년(성종 14)에 영암으로 다시 옮겼다가 1019년에 폐지했다. 이를 통해 후백제가 멸망한 이후에도 고려가 후백제의 부흥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알 수 있다. △후백제 도성의 흔적 이처럼 왕건은 전주에 안남도호부를 설치해서 후백제의 궁성을 철저히 파괴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도 도성의 흔적까지는 지울 수 없었던 모양이다. 1925년 3월 육당 최남선이 전주를 방문할 때 보았던 후백제 옛 성터에 대한 묘사가 〈심춘순례〉에 적혀있다. 반대산 밑에 높다란 판자로 담장을 두르고 지붕에 창을 낸 집채가 줄줄이 보이는 것은 물을 것도 없이 감옥인데, 그 곁에서부터 철로 쪽으로 논두렁처럼 울묵줄묵하게 약간 일자로 남아있는 것이 후백제의 성터라 한다. 대개 마한 이래의 옛터를 그대로 사용해 내려온 듯하여, 거의 없어지고 겨우 남은 몇 줌 흙이 몹시 남의 마음을 잡아당긴다. 논두렁처럼 멀리 숲정이로 이어지는 후백제 토성-1916년 유리건판 사진. 출처=국립중앙박물관 최남선이 1925년에 경편열차를 타고 오면서 보았던 후백제 옛 성의 흔적은 고토성에 있었던 옛 전주형무소에서 숲정이로 이어지는 토성이었다. 이 토성의 흔적을 1916년에 전주 외곽을 촬영한 유리건판 사진에서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다. 최남선이 보았던 바로 그 후백제 토성이다, 숲정이에는 1928년에 가타쿠라(片倉)방적회사 전주제사소(현 진북동 동국아파트 자리)가 들어섰다. 당시 제사소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엽서에 옛 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도로 앞으로 허물어진 토성이 자리해 있는데 높이가 족히 2미터는 되어 보인다. 후백제가 멸망한 지 천년이 흘렀는데도 이 정도 높이의 토성이 남아있다면 본래는 훨씬 높고 견고했을 것이다. 이 토성은 숲정이에서 전주동초등학교 뒤에 있는 옛 여단(厲壇)을 통과해 산등성이를 따라 기린봉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1941년에 발간된 〈전주부사〉에 수록되어 있는 〈전주부경역연혁도〉를 보면 인봉리를 중심으로 옛 성벽을 2중, 3중으로 만들어 방어망을 구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추정해 보면 후백제의 궁성은 옛 인봉리, 현 문화촌이나 전주제일고등학교 부근에 위치했을 가능성이 높다. △후백제의 궁궐터 〈전주부사〉에서는 전주고등학교 뒤쪽 물왕멀 일대를 후백제의 궁궐터로 추정했다. 왕성의 주초석으로 쓰였을 법한 커다란 들들과 수많은 작은 돌들이 그곳에 산재해 있고, 풍수지리상 사신상응형으로 궁성을 둘만한 위치에 있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하지만 물왕멀 마을을 재개발하면서 지층을 파보니 그곳에 왕궁이 있었다는 것을 입증할 유구를 찾을 수 없었다. 현재 재개발이 추진되고 있는 중노송동 기자촌 재개발구역에서는 발굴조사 결과 유의미한 유구가 발견되었다. 이곳은 인봉리 외곽으로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한 곳이다. 문화촌으로 연결되는 하부 구역에서 폭 4미터 길이 40미터쯤 되는 도로의 유구가 발굴되었다. 언덕 상층부에서는 후원유적으로 추정되는 건물의 유구가 발견되었다. 이곳에는 건물이 불타면서 쏟아진 불 먹은 통일신라 후기의 기와들이 층을 이뤄 쌓여 있었다. 종광대 재개발구역의 발굴조사에서도 후백제의 토성유구 130여 미터가 발굴되어 현지보존 결정이 내려졌다. 종광대는 전주동초등학교 뒷산에 있었던 여단 일대를 아우르는 곳으로 〈전주부경역연혁도〉에서 후백제의 도성으로 추정했던 옛 성벽지가 지나는 곳이다. 오는 2030년까지 낙수정 일원에 후백제역사문화센터가 건립된다. 국비 450억 원이 투입되는 국책사업이다. 후백제역사문화센터에서는 후백제의 역사와 흔적을 조사해 그 성과를 시민들과 공유하게 된다. 이 사업과 더불어 전주시에서는 국가유산청으로부터 후백제의 고도로 지정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고도 지정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후백제의 도성임을 입증할 수 있는 유적이다. 전주시민이라면 혹시 내가 살고 있는 집이 후백제의 유적이나 궁성을 깔고 있지는 않는지 유심히 살펴볼 일이다. 왕건이 아무리 후백제의 역사를 지우려 했어도 그 흔적은 나오기 마련이다. 손상국 프리랜서 PD △손상국 프리랜서 PD는 JTV에서 우리고장의 역사문화 프로그램인 '전북의 발견'을 기획해 5년간 방송했다. 저서로 〈최치윈을 추억하다〉 〈전라감영 이야기〉 〈사진으로 보는 전라감영 복원기록〉이 있고, 현재 〈전북문화살롱〉에 '문화유산의 안과 밖'을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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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27 19:36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38) 관감치부책(關甘置簿冊)·관지책(官旨冊)·진안현각양상납월당전목수효납미납성책(鎭安縣各樣上納月當錢木數爻納未納成冊)

△관감치부책(關甘置簿冊) 관감치부책(關甘置簿冊)은 1894년 1월부터 6월까지 작성한 세금에 관한 장부이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크기는 30×19cm이며 전체 34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부 산하 각 관청의 비용 징수와 지출 관련 내용 등이 수록되어 있는데, 1월 8일 전세(田稅)와 전운영(轉運營)의 세금 납부 관련 내용으로 시작한다. 징수 대상처별로 기술되어 있으며 전운영 징세 관련 내용이 비교적 상세하다. 전라도 동학농민군의 봉기와 관군의 농민군 체포 및 침학에 대한 단속 내용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관감치부책 1894년 1월. /고려대 도서관 제공 동학농민군에 대한 첫 기사는 1894년 4월 2일 등장한다. 호서(湖西), 호남(湖南), 영남(嶺南) 등지(等地)에서 협잡(挾雜)한 무리들이 작당(作黨)하여 기뇨(起鬧)한 수창(首倡)은 체포할 것을 지시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3월 20일 전라도 무장기포 이후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동학농민군의 활동을 두고 호서, 영남 지역까지 아우르는 전국적인 항쟁으로 이미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밖에 같은 날 기사에서 부랑무뢰배(浮浪無賴輩) 천백(千百)이 군집을 이루어 농사를 그만둔 후 지경을 벗어나면 즉시 각 면의 유사(有司), 훈장(訓長)을 초치하여 효유(曉諭)할 것을 당부하는 주문도 있었다. 4월 11일에는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러 간 초토사(招討使)가 동도배(東徒輩), 즉 동학농민군을 체포한 수교(首校), 수형리(首刑吏)의 명단을 보고할 것을 명하였다. 4월 17일에도 각 면에서 민심을 선동하는 자를 체포하여 보고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이때 패류배(悖類輩)를 동학당(東學黨)이라 칭하고 체포한 무리들은 결박하여 압송하라는 지시도 떨어졌다. 한편으로는 동도(東徒)가 취당(聚黨)하여 기뇨(起鬧)한 것 외에는 모두 평민(平民)이니 병정(兵丁), 보상(褓商), 관속(官屬)은 물론 이유 없이 체포한 자들도 보고할 것을 명하기도 하였다. 4월 26일에는 동학농민군의 활동에 대한 더욱 구체적인 정황이 알려졌다. 이날 초토사 전령(傳令)에 40~50명 혹은 60~70명이 무장(茂長) 굴치(屈峙)로부터 각자 부안(扶安), 흥덕(興德), 고부(古阜), 정읍(井邑) 등지로 나아간 정황이 포착되었다. 5월 6일에 이르러서는 귀화(歸化)한 백성은 구휼을 더할 것을 명하기도 하였다. 이미 동학농민군 중 귀화, 즉 투항한 이들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는 완산 전투로 인하여 전주성도 큰 피해를 입었던 시점이었는데, 전주성 안에 있던 조경묘(肇慶廟), 경기전(慶基殿)의 위패(位牌)와 영정(影幀)을 위봉진(威鳳鎭), 즉 위봉산성에 옮기라는 명이 떨어지기도 하였다. 전주화약이 임박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관감치부책(關甘置簿冊)은 1894년 3~5월 간 동학농민군의 제1차 봉기 및 완산 전투의 정황을 알 수 있게 하는 점에서 매우 소중한 자료임을 알 수 있다. 관지책 표지. /고려대 도서관 제공 △관지책(官旨冊) 관지책(官旨冊)은 전라도 임실현에서 1894년 10월경부터 1895년 1월까지 각종 업무 처리 상황을 순영과 병영 등 상급관청에 보고한 내용을 정리한 자료이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서장되어 있다. 크기는 19×30cm이며 전체 26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서의 첫 시작일은 26일로 되어 있어 몇 월인지 명확히 알 수 없으나, 그 다음이 11월 10일과 을미 정월 초6일 순서로 작성되어 있다. 문서 내용은 세금 관련 내용, 현감 부임건, 도망죄인건, 경내에 아이를 유기한 일이 없다는 보고, 소·술·소나무 3금(禁) 조치 이행건, 혼기 넘겨 결혼 못한 남녀가 없다는 보고, 사학(邪學) 금단 조치건, 동학농민군에게서 무기를 회수한 일 등을 순영에 보고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임실현 향약장정이 수록되어 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군현의 행정업무와 동학농민군 대응책 등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면은 을미(乙未) 정월 초6일, 즉 1895년 1월 6일 이전의 기록으로 추정되는데, 임실현 경내에서 동도(東徒), 즉 동학농민군으로부터 몰수한 군기(軍器) 중 조총(鳥銃)이 20자루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1895년 1월 6일 기사에는 죄인(罪人)들, 즉 동학농민군을 체포한 교졸(校卒)의 성명(姓名) 성책(成冊)을 수정하여 올렸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한편으로는 지난달, 즉 1894년 12월 내린 사학금단(邪學禁斷)의 조치가 강조되기도 하였다. 1월 7일 기사에는 비도(匪徒), 즉 동학농민군으로부터 몰수한 군기(軍器)의 성책(成冊)을 만들 것을 지시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마지막으로 임실현 향약(鄕約) 장정(章程)이 수록되어 있는데 도약장(都約長), 부약장(副約長)부터 각 면의 약정(約正)에 이르기까지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임실현이 동학농민군의 활동 직후 지역 사회를 어떻게 종래의 방식으로 재편성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진안현각양상납월당전목수효납미납성책 표지. /고려대 도서관 제공 △진안현각양상납월당전목수효납미납성책(鎭安縣各樣上納月當錢木數爻納未納成冊) 1894년과 1895년 전라도 진안현에서 작성한 것으로 상급기관에 납부해야 할 세액을 납부액과 미납액으로 정리한 자료이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크기는 20×30cm이며 전체 17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갑오년(甲午年), 즉 1894년 정월 예방(禮房)이 선납한 의정부 약채전(藥債錢) 10냥 5전부터 기재되어 있다. 이때 납부 대상은 종친부, 중추원, 기로소, 중진영(中鎭營)이고 그 외에 속오색(束伍色)이 선납한 속오방번전(束伍防番錢) 14냥도 있다. 3월에는 호조, 사포서, 내수사, 균역청, 전주부, 중진영, 병조(兵曹) 등이 대상으로 납부액과 미납액을 각각 기록하였다. 4월에는 선혜청, 호조, 중진영, 순영(巡營), 호조, 5월에는 양향청, 중진영, 충익부, 병영(兵營), 6월에는 중진영, 속오방번, 순무영(巡撫營), 7월에는 기로소, 중추부, 군산진, 병조, 8월에는 순영, 사복시, 좌수영, 병영 등이 대상이었다. 10월에는 병조, 양향청, 어영청, 금위영, 공조, 군기시, 장악원, 선혜청, 수어영청, 균역청, 은언궁, 사포서, 순영, 병조, 11월에는 순영, 육상궁, 12월에는 병조가 대상이었다. 자료 말미에 을미년 2월 제사를 위한 전세미태(田稅米太) 마련기(磨鍊記)가 상세하기 기재되어 있고 이를 주관한 좌수와 호방, 이방의 이름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 언급된 기관 중 중진영(中鎭營)은 전라도 전주에 설치된 중진영(中鎭營)을 의미한다. 중진영은 지금의 초록바위에 자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 김개남을 비롯한 상당 수의 동학농민군이 처형당하였다고 한다. 중진영과 함께 병조, 병영, 순무영(순영) 등도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조선왕조의 군사기구였다. 동학농민군이 활동하던 시기에도 진안현의 이들 기관에 대한 상납이 이루어진 만큼 조선왕조 당국의 조세 행정은 그런대로 작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바다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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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26 15:52

박중석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전북지사장 "장애인 인식개선 및 고용문화에 주력"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전북지사는 1994년 7월 1일 전주사무소라는 이름으로 처음 문을 열었다. 도민들에게 조금은 생소한 공단은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전북 지역 장애인 고용 확대를 위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해 왔다. 2018년에는 전주맞춤훈련센터와 전북발달장애인훈련센터를 개소하며 장애 유형별 맞춤형 직업훈련 체계를 구축했다. 박중석(55) 지사장은 취임 이후 전북 지역 장애인 고용 활성화와 복지 향상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전북일보는 그를 만나 장애인 고용 현안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먼저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취임 후 2개월간의 소감과 주요 활동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전북지사장 박중석입니다. 2025년 2월 4일 자로 전북지사장으로 발령받아 약 2개월 정도가 지난 것 같습니다. 전북에서의 근무는 처음이어서 설렘과 각오를 다지고 왔습니다. 지난 2개월여 동안 전북지역 고용 현황을 파악하고, 도내 장애인 유관기관 방문을 통해 지역 현안이 어떠한지, 그리고 이에 대한 해결책 마련을 위해 무엇을 중점적으로 추진해야 할 것인지를 살펴보는 시간을 보낸 것 같습니다." -임기 동안 전북 관련해 중점적으로 추진하실 주요 현안은 무엇인지요. "지방자치단체와 공공기관 중 고용의무 미이행 기관에 대해 타 기관 고용우수사례 벤치마킹 등 공단의 서비스를 집중하여 고용 의무 미이행 기관이 모두 장애인을 고용해 의무이행을 할 수 있도록 추진하려고 합니다. 전북지역은 300명 이상 민간기업 비중이 전국의 1.57%(61개소, 2023년 기준) 공공기관 비중이 전국의 4.16%(33개소, 2023년 기준) 정도에 불과해 구직자들이 선망하는 대기업, 공공기관 등이 상대적으로 적은 상황입니다. 게다가, 장애인 일자리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부족해 장애인 고용의무 이행을 소극적으로 하고 있는 실정인 점을 고려하면 장애인 일자리의 질적인 측면 향상을 위해서도 지자체와 공공기관의 장애인고용의무 이행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올해는 전북지역의 장애인 고용을 선도할 공공영역에서의 모범사례를 만들어 고용의무 이행을 모두 이행할 수 있도록 사회적 분위기를 확산하는 것이 주요 목표입니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의 주요 역할과 기능에 대해 도민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은 '장애인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 제43조에 의거 설립된 고용노동부 산하 공공기관으로 장애인이 직업생활을 통해 자립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사업주의 장애인 고용을 전문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다양한 사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먼저 ‘장애인에 대한 취업지원사업’은 직업상담, 직업능력평가, 고용지원 필요도 결정, 취업지원프로그램(지원고용, 인턴제, 취업성공패키지 등) 지원, 취업알선 및 취업 후 적응지도, 보조공학기기 및 근로지원인 지원 등이 있습니다. ‘장애인직업능력개발사업’은 장애인 직업능력개발훈련 과정 운영, 직업능력개발원, 맞춤훈련센터, 발달장애인훈련센터 등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사업주의 장애인고용지원사업’은 사업주의 장애인고용환경개선, 장애인 표준사업장 설립지원, 사업주의 장애인 고용의무 이행 및 고용관리 지원, 장애인 고용의무 초과이행 사업주에 대한 고용장려금 지급 등이 있습니다. ‘장애인 고용여건 조성사업’은 장애인 고용·직업재활에 관한 조사연구, 통계 정보의 수집·분석, 장애인 고용촉진을 위한 교육·홍보, 기능경기대회 관련 사업, 장애인 고용의무 미이행 사업주에 대한 고용부담금 징수, 직장 내 장애인 인식개선 강사지원 사업 등이 있습니다." -현재 전북의 장애인 고용현황과 특징에 대해 진단해 주신다면. "2023년도 말 기준 전북지역 인구는 176만 명이며, 등록장애인은 13만 명으로 장애인 출현율이 7.4%로 전국 출현율 5.1%보다 높은 수준이며 경제활동 참가율은 64.1%이며, 실업률이 4.0%로 전국 평균 수준보다 다소 높은 상황입니다. 장애인 고용의무 사업체는 817개소(전국 사업체의 2.55%)이며 300인 이상 민간기업은 61개소(전국의 1.57%)에 불과해 타 시·도 대비 기업규모가 작은 편입니다. 구체적으로 공공부문의 경우 2023년도말 지자체 및 교육청의 非공무원 부문은 각각 9.04%, 4.54%로 의무고용률(3.6%)을 달성했으나 공무원 부문과 공공기관은 각각 2.65%, 3.33%로 의무고용률(3.6%)에 미달했습니다. 다만, 민간부문의 경우 2023년도 말 50인 이상 고용의무사업체의 장애인 고용률은 4.07%로 전국 평균 2.99%보다 높은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전북만의 강점과 앞으로 개선되어야 할 과제는 무엇인가요. "전북지사는 2018년도 청사 이전을 하면서 발달훈련센터, 디지털(맞춤)훈련센터가 같은 건물 내에 상주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경쟁력있는 양질의 장애인을 양성하고, 장애인 개별 맞춤형 서비스를 신속하게 제공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특히 전국 최초로 장애인 공무원 오케스트라 창단을 전북교육청과 함께 준비하고 있는데 3~4월 맞춤훈련을 실시하고, 5~6월에 현장 적응지도 후 7월에 창단을 목표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현재 전주시 성덕동 옛 자림원 부지에 장애인복합타운이 조성되고 있습니다. 전북특별자치도는 물론, 교육청, 전주시가 참여하고 있고 공단도 2027년 완공을 목표로 교육연수원을 건립 추진 중에 있습니다. 장애인 복합타운이 전북지역 장애인 고용복지의 허브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는 만큼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공단에서는 공단에 구직을 희망하는 장애인에 대해서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어 실제 구직욕구를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장애인에 대해서는 정보나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전북지역의 장애인이 어떠한 환경에서 어떤 경제활동, 예를 들어 재정지원일자리 사업 등에 참여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면 지역 장애인에 맞는 적합한 서비스를 설계해 제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지자체에서도 적극 공감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개인정보보호와 관련해 제한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자체 장애인 정책 추진 시 공단과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지난해 광역단체 최초로 전북자치도와 한국장애인고용공단, 한국장애인표준사업장협회가 체결한 업무협약의 기대효과는 어떤 게 있을까요. "지난해 8월 26일 도청 회의실에서 전북특별자치도·공단·(사)한국장애인표준사업장협회와 장애인표준사업장 생산품 우선구매제도 활성화를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습니다. 도내 장애인표준사업장 인증 사업체는 총 37개소로 장애인표준사업장의 장애인복지 및 고용확대, ESG경영 활성화를 통한 더불어 사는 상생 사회 만들기 협약으로 기관별 협력사항과 기관별 역할을 부여해 도내 장애인표준사업장 생산품 판로가 확대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 한국장애인표준사업장협회와의 협력이 궁금합니다. 구체적인 목표와 비전이 있을까요. "(사)한국장애인표준사업장협회와의 협력은 매우 중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가장 우선적인 건 도내 장애인 표준사업장 생산품 우선구매 활성화를 위해 상호 협력할 것이며 장애인 복지와 고용 확대를 위한 공동 행사를 추진하고 장애인 고용에 관한 인식개선을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ESG경영을 바탕으로 동반성장을 위한 협력방안도 모색하려고 합니다." -장애인의 고용과 복지에 대해선 강조되고 있지만, 실천으로 이어지기엔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데. "장애인 고용과 복지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기업, 정부, 사회가 함께 노력하는 구조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단순한 법적 의무를 넘어 장애인도 동등한 기회를 갖고 자립할 수 있는 환경(근로지원인 지원, 보조공학기기 지원, 사내 장애 인식개선교육 등)을 만드는 것이 고용분야의 복지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애인표준사업장 우선구매 제도가 잘 지켜지지 않은 점도 아쉬운 부분입니다. 장애인 표준사업장 우선구매제도의 목적은 장애인 표준사업장에서 생산하는 물품과 용역의 우선구매를 촉진해 판로 개척을 통한 경쟁력 강화로 장애인에게 안정된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공공기관 우선구매 목표비율은 총 구매액의 0.8%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2023년 12월 말 기준 전국 장애인 표준사업장 생산품 우선구매 실적은 1.16%로 목표비율보다 높은 상황이지만, 전북의 경우는 목표비율보다 다소 낮은 0.72%입니다. 아울러, 장애인 표준사업장이 생산하고 있는 다양하고 경쟁력 높은 제품과 서비스를 공공기관, 대기업, 일반 소비자들이 편리하게 찾고 구매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공단에서는 판매지원 홍보사이트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장애인 고용 활성화를 위해 도민과 기업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시다면. "공단은 장애인 일자리의 증대, 일하기 좋은 환경 조성을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여 나갈 것입니다. 기업이 원하는 인재가 실력을 갖출 수 있도록 직업능력개발훈련을 적극 실시하겠으며, 양질의 일자리가 많이 늘어날 수 있도록 대기업이 운영하는 표준사업장을 확대하고 표준사업장 우선구매 지원 등 장애인을 다수 고용하고 있는 기업지원을 위해 적극 노력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전북의 장애인 인식개선 확산을 위한 지속적 노력을 통해 장애인고용문화가 정착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앞으로 많은 성원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박중석 지사장은 박중석 지사장은 서울 출신으로 동국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에서 사회복지 석사, 서울시립대학교에서 사회복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6년 공단에 입사한 이후 본부 기획예산부, 감사실, 능력개발기획부 등을 거쳤으며, 대전지사 기업지원부장, 본부 능력개발국 건립추진단장, 서울남부발달장애인훈련센터장, 본부 근로지원부장 등의 보직을 역임했다.

  • 기획
  • 김선찬
  • 2025.03.23 17:25

꽃바람 '살랑' 봄바람 '솔솔'⋯화정마을에 봄이 찾아왔다

봄이 왔나 봅니다. 4월 4일 김제 꽃빛드리·고창 벚꽃 축제, 5일 옥정호 벚꽃 축제⋯. 여기저기 봄 축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거든요. '청년 이장' 취재진들이 두 달째 지내고 있는 화정마을에도 봄이 왔습니다. 당장 한 달 전만 해도 아무 냄새도, 소리도 안 들리던 시골 마을이었지만 이제 거름 냄새, 관리기·경운기 돌아가는 소리가 나거든요. 그래서 오늘은 따스한 봄 햇살을 맞으며 산책하기로 했습니다. 최고 기온이 18도에 달하는 21일, 미세먼지가 꼈는지 앞이 뿌옇긴 하지만 날이 어찌나 좋은지 그냥 걷기만 해도 입꼬리가 올라갑니다. 괜히 이것저것 챙겨 소풍 가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입니다. 화정마을은 이름에도 '꽃'이 들어갑니다. 주위에 꽃이 많이 피어 화정마을의 '화'를 꽃 화(花)에서 따왔다고 하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다들 마당에는 꽃을 심어 놨습니다. 모두 연로하신 탓에 관리가 힘들어 넓은 마당에 비해 정원이 소박하지만 잡초 하나 없이 단정한 모습이었죠. 마을회관 앞을 지나던 중 조재신(87) 어머니 집 대문 틈 사이로 나무 한 그루가 보이네요. 그 앞에 어머니가 서 계십니다. '청년 이장'이 가장 궁금했던 나무의 정체를 물어봅시다. "어머니, 이 나무는 뭐여요?" "이거 앵두나무여! 5월 되면 이거 솔찬히 달려. 먹으러 와!" 앵두나무였습니다. 빨갛고 작은 열매, 그 앵두 맞아요. 벌써 심은 지도 10년이 된 나무라고 하네요. 5월이 되면 주렁주렁 열린다는 앵두나무는 열심히 깨어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봄이 왔다는 거죠. 다시 산책을 시작해 봅니다. 마을 곳곳 오와 열을 맞춘 파, 마늘이 바람에 살랑살랑 흩날리고 호랑나비도 바람 따라 날아다닙니다. 알록달록한 색이 눈길을 뗄 수 없게 만드네요. 카메라를 들자마자 날아가 버린 나비, 이 정도면 사람인 것 같습니다. 찍으려고만 하면 바로 날아가 버리네요. 아쉽지만 다음 기회를 노리기로 했습니다. △부녀회장님 취미는 '화단 가꾸기'? 화정마을의 평화로움에 반해갈 때쯤 마당에서 화단을 가꾸는 부녀회장님, 이복순(73) 어머니를 마주쳤습니다. 잡초를 뽑고 계시네요. 어머니, 뭐 하셔요? "아유, 뭐 하긴 봄 왔으니까 풀 뽑지!" 사실 어머니의 봄철 취미는 '화단 가꾸기'입니다. 꽃이 피기 전 잡초를 모두 박멸하기로 결심하신 듯합니다. 일단 '청년 이장'도 호미를 들었습니다. 어색하지만 한참 땅을 파헤치다 보니 어머니가 잘 가꿔 놓은 화단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며칠 전 내린 눈 때문에 아직 꽃망울이 터지진 않았지만 저마다 뿌리께 뿌려진 촉촉한 비료를 보니 이건 무조건 예쁘게 잘 필 것 같습니다. 팔·다리부터 허리까지, 성한 데가 없어 화단 가꾸는 것도 잠깐입니다. 마을회관에 갈 준비하고 나온 어머니의 옷에도 봄이 왔네요. 바지에는 귀여운 물고기들이 헤엄쳐 다니고 조끼에는 빨갛고 노란 꽃이 피었습니다. 안에 휘황찬란한 꽃이 핀 티셔츠까지 완벽합니다. △매년 식구 먹여 살린 '냉이' 저기 멀리 보행 보조기 위에 냉이를 캐기 위해 칼·바구니를 싣고 가는 박복순(88) 어머니와 마주쳤습니다. 걷기는 힘들어도 봄 냉이는 캐야 한다는 어머니입니다. 마을 곳곳에 냉이가 한가득 올라왔기 때문에 집에만 앉아 있을 순 없습니다. 박 어머니는 매년 봄이 되면 냉이를 캐서 가족들의 밥을 해 먹였습니다. 이제는 모두 타지로 떠나면서 아들 한 명과 함께 살지만 지금도 버릇처럼 냉이를 캡니다.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청년 이장이 하나 캘 때 이미 어머니의 손과 바구니에는 냉이가 한가득입니다. 심지어 다 똑같이 생긴 냉이인 듯하지만 어머니는 먹을 수 있는 냉이, 먹을 수 없는 냉이를 척척 구별합니다. 무려 80년 넘게 냉이를 캤기 때문이죠.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났습니다. 어머니와 헤어지고 아지트에 쉬고 있으니 손님이 찾아옵니다. 벌써 '청년 이장'이 냉이를 캤다는 소문이 마을에 퍼졌나 봅니다. 손님은 신옥리(82) 어머니와 우리의 '영화 언니' 마을 주민 이혜례 씨입니다. 두 분도 봄이 되면 '냉이'를 꼭 캤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지금처럼 배추가 흔하지 않아서 김장하는 양도 많지 않았기 때문이죠. 지금은 배추를 '포기'로 셀 수 있지만 그때는 속이 차지 않아 김장이라고 하기도 어려웠거든요. 심지어 식구가 많다 보니 김치를 담가도 금방 똑 떨어집니다. 그래서 된장에 무쳐 먹으려고 봄만 되면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냉이를 비롯해 쑥, 머위 등 나물을 캐러 다녔다고 합니다. 냉이 캐는 마을 주민마다 다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냉이를 볼 때마다 옛날 생각이 난다고. 지금은 식재료가 없어 굶는 시절이 아니지만 화정마을 어르신들은 항상 그랬듯 오늘도 옆구리에 바구니 끼고 냉이 캐러 갑니다. 디지털뉴스부=박현우·문채연 기자

  • 기획
  • 박현우외(1)
  • 2025.03.22 12:50

[팔도 핫플레이스] 봄이 스며드는 비밀의 숲, 영양 죽파리 자작나무숲

"당신은 지금 어디에서 봄을 기다리고 있나요?" 누군가는 꽃 피는 거리를 걷고, 누군가는 따스한 햇살을 창문 너머로 바라본다. 하지만 이곳 경북 영양군 죽파리의 자작나무숲에서는 계절이 조금 다르게 흐른다. 겨울의 마지막 눈이 수피(樹皮)에 내려앉아 있고, 봄의 첫 기척이 바람 끝에 머물고 있다. 그리고 이 숲은 아무 말 없이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키며 당신을 기다리는 중이다. 이제 그 고요한 순백의 숲으로 함께 들어가 보자. △30년 기다린 숲⋯꽃말 '당신을 기다립니다' 봄은 아직 머뭇거리지만, 숲은 먼저 계절을 품기 시작했다. 영양 자작나무숲에는 겨울의 마지막 숨결과 봄의 첫 기척이 동시에 머물고 있다. 경칩(만물이 잠에서 깨는 시기, 3월 5일)이 지났지만 자작나무숲 곳곳엔 소복한 눈이 아직 녹지 않았다. 그러나 그 위로 내리쬐는 햇살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봄이, 지금 이 숲으로 향하고 있다고. 숲에 발을 들이는 순간 한 편의 동화 속으로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든다. 하얀 자작나무들이 쭉쭉 뻗은 채 하늘을 향해 자라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 장관이다. 수피에 햇살이 닿을 때마다 은빛이 번쩍이며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가지마다 걸린 눈꽃은 아직 겨울의 흔적을 품고 있지만, 그 사이로 올라오는 새순의 파릇함은 분명히 봄이다. 이 숲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다. 30년 넘게 숨어 있던 비밀의 숲이다. 1993년 조성된 이후 깊은 산속에 묻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던 이곳은 오랜 시간 세상과 단절된 채 그 자체로 숲의 시간을 쌓아왔다. 주변을 둘러싼 금강소나무 군락이 장벽처럼 보호하듯 둘러싸고 있었고, 불편한 접근성은 오히려 이 숲을 고요하게 지켜주는 방패였다. 그러나 이 숲도 때를 기다려왔다. 지난 2019년부터 영양군과 산림청이 자작나무숲을 대중에 공개하고 본격적인 관광자원화 사업을 추진하면서, 오랜 세월 세상에 숨어 있던 이 숲은 마침내 사람들을 맞이하게 됐다. 팬데믹 이후 사람들의 일상이 무너지고 마음마저 지친 시기, 자작나무숲은 고요히 그 존재를 드러내며 새로운 힐링 공간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마치 고요히 기다리던 친구가 "이제 와도 괜찮다"고 말하듯, 자작나무는 '당신을 기다립니다'라는 꽃말처럼 사람들을 품기 시작했다. △걷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치유 영양 자작나무숲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전체 면적 30.6㏊, 축구장 40개에 해당하는 공간에 자작나무 12만여 그루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처음 심을 당시 고작 30㎝ 남짓하던 묘목은 지금은 키 20m가 넘는 거목이 돼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다. 나무 둘레도 60㎝에 육박한다. 나무 하나하나가 마치 숲속의 귀부인처럼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줄지어 서 있다. 자작나무숲은 두 개의 메인 코스로 구성돼 있다. 1코스는 1.49㎞, 2코스는 1.52㎞다. 노란 리본을 따라가면 1코스, 파란 리본을 쫓으면 2코스지만, 정해진 길이 아니어도 괜찮다. 마음 가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걸어도 좋은 곳이 바로 이 자작나무숲이다. 길은 평탄하고 아늑하며, 숲 사이로 이어진 오솔길 곳곳엔 포토존이 마련돼 있어 누구나 인생 사진을 남기기에도 제격이다. 연접한 전나무숲길과 임도도 탐방객들의 다양한 취향을 만족시킨다. 고도 800m가 넘는 숲길 끝자락에는 전망데크가 설치돼 있다. 여기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그야말로 숨이 멎을 만큼 장관이다. 자작나무 우듬지가 한 폭의 은빛 융단처럼 산 사면을 수놓고, 그 위로 흐르는 바람마저 시적인 울림을 준다. 그냥 걷기만 해도, 말없이 바라보기만 해도 이 숲은 사람을 치유한다. 자작나무는 자기 몸을 줄이고자 스스로 잔가지를 버린다. 그 옹이 하나하나가 성장의 흔적이고 숲의 철학이다. 필요 없는 것을 버리고, 더 높이 자라기 위한 결단. 인간의 삶에도 닮은 점이 많다. 그래서일까. 이 숲을 다녀간 사람들 대부분은 '많은 걸 느끼고 돌아간다'고 말한다. △나무가 들려주는 고요한 전설 자작나무는 특유의 백색 수피로 '빛의 나무'라고 불린다. 기름기가 많아 과거 촛불이 없던 시절에는 '화촉'(樺燭)의 재료로 쓰였고, 껍질이 얇고 질겨서 종이 대신 사용되기도 했다. 러시아에서는 '자작나무 껍질에 연애편지를 쓰면 사랑이 이뤄진다'는 속설도 있다. 그래서인지 숲 곳곳에는 나무껍질에 연인의 이름을 새긴 흔적이 남아 있다. 하지만 숲 입구에는 '나무가 아파요'라는 안내 푯말이 붙어 있다. 이 숲이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 보여주는 동시에, 얼마나 소중히 지켜야 할 공간인지를 일깨운다. 자작나무는 그저 아름다운 나무 그 이상이다. 수세기 전부터 인간의 삶과 문화, 전설과 연결됐다. 경주 천마총에서 발견된 말안장의 재료, 북유럽 신화 속 자연의 정령, 영화 속 마법 빗자루의 소재 등 자작나무는 시대를 넘나드는 순수함의 상징으로 통한다. 자작나무 수피는 단순한 나무껍질이 아니다. 얇고 질기며 썩지 않기 때문에 과거에는 종이로, 불쏘시개로, 촛불의 재료로도 활용됐다. 하얀 수피에 연애편지를 적으면 사랑이 이뤄진다는 말도 그렇게 전해졌다고 한다. 지금도 이 숲에는 '빛'이 흐른다. 햇살을 반사하는 수피는 숲 전체를 환하게 만든다. 자연조명 아래에서 걷는 이 기분, 직접 마주한 이들만이 알 수 있다. △모두를 위한 숲⋯산림관광 명소로 진화 영양군은 이 숲의 가치를 보존하면서도 사람들과 나누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산림청·경북도와 함께 '국유림 명품 숲' 지정 이후 ▷힐링센터 ▷숲 체험원 ▷임산물 카페 ▷탐방로 ▷에코로드 전기차 운영 기반 조성을 꾸준히 확대해 왔다. 총 28억원이 투입됐고, 현재는 대부분 완료 단계에 접어들었다. 입소문이 퍼지면서 자작나무숲에는 주말마다 2천명이 넘는 방문객이 찾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숨겨진 숲'이 아닌, 전국에서 손꼽히는 인기 힐링 여행지로 발돋움한 셈이다. 걷는 여행을 즐기는 트레커들과 가족 단위 관광객, 사진작가들까지 다양한 이들이 자작나무숲을 찾아오고 있다. 접근성 개선도 한창이다. 이전에는 진입로가 험하고, 숲 입구까지 3.2㎞를 걸어야 했지만 이제는 전기차 셔틀이 일부 구간을 운행하고 있다. 통신기지국도 개통돼 휴대폰이 터지지 않던 불편함도 해소됐다. 앞으로 더 많은 탐방객들이 보다 쉽게 숲을 찾고, 보다 안전하게 자연을 누릴 수 있게 될 전망이다. 경북도는 '영양 자작도(島)'라는 이름으로 이 숲을 산림관광 거점으로 개발하고 있다. ▷산림관광 상품화 ▷체류형 관광지 조성 ▷주민 참여형 프로그램 개발 등을 통해 죽파리 자작나무숲을 국내 대표 웰니스 관광지로 키우겠다는 복안이다. 최근에는 해외 언론사 팸 투어를 유치하며 국제적인 산림관광 자원으로 도약하기 위한 방안도 모색하고 있다. 이곳은 단순히 사진을 찍고 가는 숲이 아니다. 걷고, 머물고, 느끼고, 쉼을 얻는 공간이다. 오랜 시간 세상에 숨겨졌던 이 비밀의 숲은 이제 봄바람을 타고 사람을 부르고 있다. 그저 마음만 비우고 찾아오면 된다. 자작나무숲은 말없이 그 자리에 서서, '당신을 기다립니다'라고 속삭인다. 매일신문=김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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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20 15:13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37) 〈춘당록(春塘錄)〉, 〈의산유고(義山遺稿)〉

〈춘당록(春塘錄)〉 : 여산 유생이 겪은 동학농민혁명 〈춘당록〉은 전라도 여산의 선비 양평(楊枰)의 남긴 문집이다. 여기에는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한 흥미로운 기록들이 적지 않다. 저자의 내력은 문집 내용 속에 단편적으로 드러나고 있으나 분명하게 기재되지 않았다. 본문의 내용을 통해 그의 아버지 양재우(楊在佑)는 철저하게 이단을 배척한 전통적 유교지식인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며, 양평 자신도 유학자로서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내면서 동학과 서학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관련 글은 “갑오년에 읊다[甲午吟]”, “학술에 대한 변[學術辨]”, “성지를 받들며 감격하는 말[奉旨感激辭]”, “소모를 위해 쓴 격문 초고[爲召募草檄辭]”, “호남의 여러 읍에 보낸 통문[湖南列邑通文辭]” 등 다섯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춘당록〉에 실린 이 글들은 체계적으로 수집되거나 정리된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사실과 희귀한 문서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어 자료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동학농민혁명 관련 주요 내용을 보면 “갑오년에 읊다[甲午吟]”에서 그는 전주성이 농민군에게 점령당할 무렵, 여산 부사 유제관이 군사를 삼례에 보내 전주 외곽을 방어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어 농민군이 장성 황룡강 전투에서 관군을 격파한 사실과 전주성을 점령한 뒤 홍계훈과 공방전을 벌인 과정을 기록하였다. 또 신임 감사 김학진이 전주로 들어가지 못하고 여산에 머문 사실과 순변사 이원회가 파견된 일, 자신이 전주로 달려가서 장군봉에 올라 직접 전주 성내가 불타는 모습을 보고 그 감상을 적은 시를 남겼다. 그 다음 “학술에 대한 변[學術辨]”에서는 동학을 포함하여 이단을 설파하는 장문의 글을 실었다. 이어 “성지를 받들며 감격하는 말[奉旨感激辭]”에서는 1894년 8월 자신이 소모사 이건영의 종사관으로 임명된 사실을 기술하면서 이건영에게서 전달 받은 임금의 유지(諭旨)를 옮겨 놓았으며, 그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에 대해 그는 ‘소모사를 보낸 건 바로 도적의 무리를 보듬어 회유하여 그들로서 몽둥이를 만들어 섬나라 왜적들을 매질해 내쫓기 위함이고 소모사가 온 것 또한 왕실에 충성을 바치고 도적의 무리를 교화하기 위함일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또 여기에는 여산 부사 유제관도 이건영이 포섭했음을 시사하는 내용도 들어 있다. 다음에는 그가 소모사의 종사관으로 군사 모집을 위해 쓴 글인 “소모를 위해 쓴 격문 초고[爲召募草檄辭]”를 실었다. 이 글은 소모사 이건영의 부탁을 받고 쓴 초안이다. 무엇보다도 ‘섬나라 오랑캐’들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하여 임진왜란을 겪은 사실,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와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등이 개화파와 음모를 꾸며 갑신정변을 일으키고, 1894년에는 경복궁을 강점한 사실을 설명하였다. 또한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개화파 3적의 행패를 지적하고 개화 정권의 수립을 비판하였다. 철저하게 일본 침략 세력과 이에 동조한 개화파를 매도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1894년 8월에 호남의 여러 고을에 보낸 통문인 “호남의 여러 읍에 보낸 통문[湖南列邑通文辭]”이라는 글을 실었다. 이 글은 여산향교에서 작성해 호남의 모든 향교에 보낸 것이다. 이 통문에서는 동학농민군 토벌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것은 동학농민군을 끌어들이려는 이건영의 의사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소모사 이건영이 동학농민군과 연합작전을 모색한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의산유고(義山遺稿)〉 : 동학농민군 진압 선봉에 섰다가 의병을 창의한 인물의 기록 〈의산유고〉는 문석봉(文錫鳳, 1851~1896)이 남긴 문집으로 동학농민혁명과 을미‧병신의병에 관련된 내용이 많이 담겨있다. 문석봉은 1894년 양호소모사로 임명되어 진잠, 금산, 고산, 회덕 일대의 동학농민군 진압에 앞장섰으며, 그 이듬해인 1895년 8월에는 일본 낭인들에 의해 명성왕후가 시해되자 가장 먼저 을미의병을 창의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문석봉은 경상도 현풍군의 한미한 집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무과를 준비하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40이 넘은 1893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곧 경복궁 오위장(五衛將)이 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충청도 진잠 현감이 되었다가 모친상을 당해 집으로 돌아왔다. 1894년 11월 양호소모사(兩湖召募使)가 되어 충청도 연산, 고산, 진잠, 회덕 일대의 농민군 토벌에 나섰다. 〈의산유고〉상순영.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의산유고〉에는 소모사로 임명된 다음 관찰사와 도순무영(都巡撫營)에게 올린 글들이 실려 있다. 특히 문집의 권1에 실린 〈토비략기(討匪略記)〉에는 공주 우금티 전투 이후 퇴각하여 곳곳에 둔취해 있던 연산 고산 완주 금산 일대의 동학농민군들을 진압한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동학농민군의 최후 전투로 알려진 대둔산 정상 남서쪽 형제바위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 상황이 비교적 상세하게 실려 있다. 대둔산 전투에 대해서는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실린 내용이 알려져 있었으나, 〈의산유고〉는 그 내용을 다시 확인해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대둔산 전투는 동학농민전쟁 최후의 전투로도 알려져 있지만, 사실 어린 아이와 임신한 여성 등 가족까지 데리고 피신한 농민군과 그 가족에 대한 일방적 학살로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기록된 이들의 최후는 매우 참혹하기 짝이 없다. 고산 완주 일대의 동학농민군과 그의 가족들은 대둔산 정상 남서쪽의 형제바위(720m)에 초막 3개동을 구축하고 1894년 12월 중순부터 진지가 함락되는 이듬해 1월 24일(음력)까지 이곳에서 피신해 있었다. 일본군 3개 분대와 조선 관군 30명으로 된 특공대(모두 60명)가 이들에 대한 대대적 최후의 공격을 시작한 것은 1895년 1월 24일(음력) 새벽 5시였다. 이들은 세 방면으로 나누어서 사다리 등 장비를 이용해 형제 바위로 진격하며 맹렬히 사격을 퍼부었다. 완연한 화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농민군은 지형지물을 활용하여 9시간 동안이나 버틸 수 있었지만, 결국 어린 소년 1명만 남고 25명이 전사하는 비극적 최후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피신해 있던 농민군 가족 가운데는 28~29세쯤 되는 임신한 부인이 있었는데, 일본군과 관군이 난사한 총알에 맞아 죽었다. 또 접주 김석순은 한살쯤 되는 핏덩이 어린 딸을 안고 깎아지른 바위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다 암석에 부딪쳐 즉사하였다. 그 참상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일본군은 이런 참상을 뒤로하고 ‘천황폐하 만세’를 삼창하고 퇴각하였다. 의산유고에는 거짓으로 귀화한다고 한 김공진을 이용하여 대둔산에 주둔해 있던 농민군 사이를 이간질하여 내분을 일으킨 다음 일본군과 함께 공격하여 쉽게 진압할 수 있었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이런 이야기가 없다. 고산, 진잠, 금산 일대의 농민군 지도자 최공우에 대해서도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별다른 내용이 없고, 전사한 농민군 명단 가운데도 최공우의 이름이 없다. 그러나 〈의산유고〉에는 최공우가 대둔산 농민군을 지휘하고 있었으며, 도중에 피신하여 고산 염정동으로 피신한 후 거기서 다시 농민군을 규합하여 활동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대둔산 전투에 대한 사실은 〈주한일본공사관기록〉, 〈의산유고〉 등에 기록되어 있었지만 현장이 확인되지 않다가 1999년 원광대 사학과에서 현장을 발견하여 일반에 공개되었다. 2001년 10월 10일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완주지부〉에서 최후의 항전을 기념하여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배항섭 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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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20 00:30

[작지만 강한 우리마을]③임실 방동마을의 역발상…공동체 정신으로 농촌의 미래를 꽃피우다

작은 농촌마을이 위태로운 지방소멸 시대에 강력한 공동체의 힘으로 새롭게 일어나고 있다. 임실군 관촌면 방동마을 주민들은 농촌다움복원사업을 발판 삼아 마을의 정체성을 되찾고, 모두가 공동체의 주인이 되어 자립형 마을을 만들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임실군 관촌면에 위치한 방동마을은 약 70여 가구가 살고 있는 평범한 농촌이다. 하지만 이 작은 마을이 특별한 이유는 공동체의 가치와 마을 고유의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지키고 가꿔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나 지자체의 막대한 재정적 지원 없이도 자발적인 주민 참여와 공동체 의식으로 모범적인 농촌 재생의 길을 열고 있다. △공동체 혁명의 출발, 농촌다움복원사업 방동마을이 공동체로 거듭난 핵심은 바로 농촌다움복원사업이다. 이 사업은 단순히 마을의 물리적 경관을 정비하는 차원을 넘어 주민들이 직접 마을의 가치를 발견하고 이를 보존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주민들이 스스로 마을 역사와 문화를 되새기고 이를 지켜가자는 자발적인 의지가 결합하면서 마을의 공동체 역량이 눈에 띄게 강화됐다. 민병택 방동마을 이장은 “농촌다움복원사업을 통해 마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소통하는 문화가 확산됐다”며 “외부의 지원에 의존하지 않고 주민들 스스로 마을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 우리 마을의 가장 큰 자랑”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방동마을 주민들은 스스로 '방수8경'이라는 독특한 마을 문화 보존에 앞장서고 있다. 방수8경은 메타세콰이어길, 장제무림, 구절초길, 송대백조 등 방동마을만의 독특한 자연환경과 문화유산을 뜻하는 이름이다. 이 이름들 속에는 마을의 역사와 주민들의 삶이 녹아 있다. 주민들은 방수8경을 보존하고 이를 활용한 마을 축제와 문화행사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며 지역 문화의 자부심을 키워가고 있다. △주민 스스로 지켜가는 전통문화 '방수8경' 방동마을 주민들은 스스로 '방수8경'이라는 독특한 마을 문화 보존에 앞장서고 있다. 방수8경은 메타세콰이어길, 장제무림, 구절초길, 송대백조 등 방동마을만의 독특한 자연환경과 문화유산을 뜻하는 이름이다. 이 이름들 속에는 마을의 역사와 주민들의 삶이 녹아 있다. 특히 메타세콰이어길은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에서부터 방문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대표적인 경관으로, 마을의 아름다움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 장제무림은 오랜 역사를 간직한 숲으로, 마을 주민들에게 사랑받는 산책로로 자리매김했다. 울창한 숲속에서 자연을 느끼고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이 길은 주민들뿐만 아니라 외부 방문객에게도 인기가 높다. 계절마다 각기 다른 매력을 선보이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구절초길과 송대백조 역시 방동마을의 자랑거리로 꼽힌다. 구절초길은 가을이 되면 만발한 구절초로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고, 송대백조는 겨울철마다 철새들이 찾아와 주민들에게 따뜻한 정취를 선사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은 이 길을 정기적으로 관리하며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방수8경을 더욱 의미 있게 가꾸기 위해 매년 정기적인 축제와 문화행사를 개최하고 있는데, 축제 기간 동안에는 마을 주민들이 직접 기획한 다양한 전통문화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해 외지인들이 마을의 문화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러한 행사들은 단순히 즐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주민들이 직접 참여하여 마을 공동체를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다. 마을 주민 이정옥 씨(65)는 “방수8경 축제를 열면서 주민 간 소통과 결속력이 강화됐고 마을의 자부심과 애향심도 크게 높아졌다”며 “젊은 세대들도 마을의 역사와 전통문화를 이해하고 지켜나가는 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또 방수8경을 통해 방문객들에게 농촌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알리고 마을의 정체성을 지켜가는 활동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가겠다는 주민들의 의지도 더욱 강해지고 있다. △마을 주민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전통숲 방수8경을 비롯해 방동마을 주민들의 자부심 중 하나는 바로 마을 전통숲이다. 이 전통숲은 주민들의 생활복지와 휴식의 공간으로 활용되며 공동체 문화를 더욱 단단하게 다져가는 구심점 역할을 한다.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전통숲을 관리하고 정비하면서 마을의 경관을 아름답게 유지하고 있다. 특히 전통숲은 주민에게 휴식 공간뿐만 아니라 세대 간 소통의 장으로서 밑거름이 되고 있다. 어르신들은 이곳에서 전통 놀이와 이야기를 전수하며, 젊은 세대와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다양한 체험을 통해 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있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세대 간의 이해와 유대를 강화하며, 공동체의 결속력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전통숲은 외부 방문객들에게도 개방돼 있어 마을의 문화를 알리는 창구 역할도 한다. 방문객들은 숲에서 열리는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농촌의 삶과 문화를 직접 경험할 수 있다. 이는 마을의 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하며, 주민들에게는 자부심을, 방문객들에게는 특별한 추억을 선사한다. 민 이장은 “전통숲은 마을의 역사가 담긴 공간으로 주민들이 휴식과 소통을 통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마을의 중심”이라며, “이곳에서 주민들이 함께 어울리며 마을의 현안을 공유하고 미래를 계획한다”고 설명했다. △지속 가능한 마을의 핵심, 주민의 자발적 참여 방동마을이 농촌 재생의 성공모델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가 바탕이 됐다. 주민들은 마을 경관 정비, 문화 행사, 환경보호 캠페인 등 각종 마을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특히 민 이장을 중심으로 주민들이 마을의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지키기 위한 다양한 아이디어를 스스로 기획하고 추진하고 있다. 방동마을 주민들은 전통문화 체험과 농촌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해 외지인들과의 소통 기회를 넓히고 있다. 도시에서 온 방문객들이 방동마을의 전통문화를 경험하며 다시 찾고 싶은 마을로 기억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최근에는 마을의 전통 음식과 놀이를 중심으로 한 체험 프로그램이 도시민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미래를 향한 주민들의 끊임없는 도전 방동마을은 앞으로도 공동체의 역량을 더욱 확대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지속하며 고유 가치를 전승할 계획이다. 마을에서 생산하는 농특산물을 활용한 제품 개발과 온라인 판매 등 경제적 자립을 위한 새로운 전략도 준비 중이다. 마을 브랜드 개발을 통해 외부와의 소통도 더욱 활성화할 방침이다. 민 이장은 “우리 마을의 미래는 결국 주민들의 지속적인 참여와 관심에 달려 있다”며 “앞으로도 마을 주민들이 함께 힘을 모아 농촌의 진정한 가치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데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방동마을이 만들어가는 이러한 변화는 농촌이 위기 속에서도 공동체의 힘으로 미래를 개척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방동마을의 성공적인 모델은 다른 농촌 마을에도 커다란 희망과 자신감을 불어넣고 있다. 작지만 강한 방동마을의 이야기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 기획
  • 이준서
  • 2025.03.16 17:58

"여그 버스가 없어요"⋯화정마을 '발'이 된 사연은

"에고, 내 정신 좀 봐! 약을 놓고 와 부렸네. 버스도 없을 텐디." 어느 날 우연히 화정마을 경로당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이덕순(80)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읍내에 있는 병원에서 지어온 약을 식당에 놓고 왔다는 말씀이었죠. 찾아와야 하는 건 알지만 버스는 없고 택시비만 1만 4000원 들어가는 탓에 고민하는 듯했습니다. 그래도 금방이라도 택시를 부를 것 같았죠. "아휴, 어깨 아퍼 저녁에 잠도 못 잤네." 화정마을 초입에서부터 보행 보조기를 끌고 오는 이장순(90) 할머니가 보입니다. 오늘따라 몸이 불편해 보이네요. 장순 할머니는 '청년 이장' 취재진과 이야기하던 중 아파서 잠을 못 잤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보조기 없이는 거동이 힘들어 버스 타기 어려운 데다 아플 때마다 택시를 타기에는 비용이 부담이죠. "진짜 선상님이 나 데려다 주려고? 진짜 부탁해도 될랑가?" 다른 날 이칠월(87) 할머니 댁에서 놀던 중 매일 게이트볼장에 가는 경구(87) 할아버지가 집에 계셔야 한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이유는 차가 없어서였죠. 그동안 게이트볼장까지 차 있는 다른 할아버지와 이동했지만 농사 준비 때문에 못 간다는 말을 들었죠. 어쩔 수 없이 유일한 낙인 게이트볼도 포기했습니다. 경구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취재진이 작은 차를 가지고 쌩쌩 달려 읍내까지 모셔다드렸습니다. 화정마을 어르신들이 돈이 없어서 택시를 못 부르는 게 아닙니다. 돈이 아까워서, 버스가 없어서. 버스로 왕복 3000원이면 충분한데 택시비는 4배가 많은 1만 2000원에서 약 5배가 많은 1만 4000원이 들면 고민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 사는 데에 왜 버스가 없냐고요? 있어요. 도보 5분 거리의 마을 정류장에 오는 버스는 하루 6대뿐. 이마저도 절반이 이른 새벽이거나 늦은 저녁에 다니는 버스입니다. 심지어 옆에 있는 봉동만 갈 수 있을 뿐 고산으로는 갈 수도 없습니다. 고산을 가려면 1.3km, 도보 20분 거리 정류장으로 가야 합니다. 아니면 방법은 버스 환승뿐이죠. 취재진이 화정마을의 발이 된 이유입니다. 다들 미안해하셨지만 취재진 입장에서는 이게 더 마음 편한 일이었습니다. 자가용으로는 겨우 5분밖에 걸리지 않거든요. 저희가 오기 전에는 더 어려움이 많았겠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아파도, 읍내에 나가야 해도 참았던 이유가 다 있었던 겁니다. 말로만 설명하면 '교통 사막'을 겪는 시골 마을을 이해하기는 어렵죠. 취재진들이 화정마을에서 버스를 타 보는 체험기부터 완주군의 교통편 문제까지 모두 짚어 봤습니다. 디지털뉴스부=박현우 기자

  • 기획
  • 박현우
  • 2025.03.15 09:31

버스 오를 때마다 '악 소리'⋯ 어르신 몸 체험해보니

Interactive content by Flourish Interactive content by Flourish 지난 1월 말 '청년 이장' 취재진과 처음 만난 화정마을 주민이 툭 던진 말이 있습니다. "면허 있어? 시골짝에서 살고 싶으믄 차부터 사야 혀." 그때는 속도 없이 웃어넘겼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말이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화정마을에는 그 흔한 마트, 구멍가게도 없어 읍내에 나가야만 합니다. 문제는 그나마 가까운 봉동읍으로 가려 해도 버스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루에 운행되는 버스는 6대뿐. 배차 간격은 짧으면 1시간, 길면 4시간에 달합니다. 주변에 버스가 많이 다니는 정류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화정마을에서 성인 기준 도보 20분 걸리는 거리에 있죠. 보행기에 의지하는 어르신에겐 버거운 거리입니다. 택시를 타면 되지 않냐고요? 화정마을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인 봉동읍에 가려면 왕복 1만 2000원을 내야 합니다. 이것도 운이 좋았을 때입니다. 시골 벽지에 있어 택시가 안 잡히면 1만 4000원까지 낼 때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르신들은 아플 때도 참는 게 일쑤입니다. 병원이 있는 읍내로 향하는 택시비가 부담스럽고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은 보행 보조기가 필수인 탓에 버스를 타는 것도 쉽지 않거든요. "버스는 1500원만 내믄 타. 근디 내가 다리가 아퍼, 마음대로 버스를 못 탕게 택시로만 가야 허는데 비싸잖여. 아파도 두 번 갈 거 고냥 한 번에 갈라고 참지." 손가락부터 무릎, 어깨까지 성한 곳이 없는 이장순(90) 어르신은 계단을 올라가는 큰 버스를 타지 못해 택시를 주로 이용합니다. 문제는 돈, 병원비보다 택시비가 더 나가는 탓에 아파도 참는 게 일상이 됐습니다. 화정마을을 비롯한 시골마을은 다 똑같은 문제를 겪고 있습니다. 읍내에 나갈 일은 많아도 버스가 없어서, 택시비가 비싸서, 거동이 불편해서 한 번 나가려면 혼자만의 싸움 끝에 외출하는 것이죠. 교통이 불편한 건 여러 보도를 통해 접해서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청년 이장이 도전했습니다. 전북특별자치도사회서비스원 전북노인보호전문기관에서 노인 체험 보조 기구를 대여해 준다는 말에 문의했습니다. 허리를 빳빳하게 고정하는 허리 보조기, 온몸을 무겁게 만드는 모래 주머니, 손과 다리 움직임을 제약시키는 관절제한보조기구까지. 모든 기구를 착용해 봤습니다. 온몸이 마비된 듯합니다. 무게 중심을 잡으려면 허리를 숙여야 했고 지팡이를 짚지 않으면 걷기도 힘들었죠. 그냥 길을 걷기도 힘들었죠. 양손과 발목에 찬 모래 주머니 때문에 숨까지 가빠졌습니다. 마치 땅이 온몸을 끌어당기는 듯했죠. 평소에 아무렇지 않게 하던 행동이었지만 노인의 몸으로는 하나하나 계산해야만 가능했습니다. 버스가 왔습니다. 막상 버스 앞에 서자 계단이 커다란 벽처럼 느껴졌습니다. 장순 어르신 말대로 버스 위로 다리를 올리지 못했습니다. 땅과 버스 높이는 고작 30cm 남짓한 계단, 노인의 다리는 그 높이를 견디지 못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악!' 소리를 질렀죠. 버스에서 내리는 것도 똑같았습니다. 왕복 10분이면 이동하는 거리를 노인의 몸으로 한 시간이나 걸려 다녀왔습니다. 체험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마을에서 박복순(88) 어르신을 만났습니다. "여기는 버스가 와도 못 탄다니께. 버스도 몇 대 없고 나갈라면 시간 맞춰야 하니께 여간 힘든 게 아녀! 그냥 비싸도 택시 타지 어쩌겄어. 한 번 나가는 게 일이여. 다른 데는 마을 버스도 있고 500원 택시도 있담서." 복순 어르신이 말하는 버스는 완주군에서 운영하는 공영제 마을버스 '부름부릉'입니다. 이는 교통 취약 지역과 읍면을 연결하는 마을버스로 현재 이서·소양·구이·상관·삼례 등 5개 읍면서 운행 중입니다. 화정마을이 있는 고산면은 아직 운행되지 않고 있죠. "인쟈 버스 안 탄 지가 벌써 10년이 됐네? 타고 싶어도 못 타능 게 슬프지." 복순 어르신의 바람은 언젠가 혼자 힘으로 버스를 타고 마을을 벗어나 읍내로 향하는 것입니다. 어르신들의 불편을 온몸으로 경험한 우리는 그 작은 소망이 이뤄지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봅니다. 디지털뉴스부=문채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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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채연
  • 2025.03.15 09:31

이름만 빛난 완주 '부름부릉'⋯교통불편 호소 여전

교통 취약 지역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운영하는 완주 공영버스 '부름부릉 버스'가 정작 시골 마을에는 들어오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주시를 동그랗게 감싸고 있는 지형을 가진 완주군은 그간 시내에서 읍내를 거쳐 외곽까지 오가는 시내버스가 운영됐다. 농어촌 인구가 감소하고 운송 수입금 재정 상황이 악화하면서 운행 대수가 줄어들어 주민들의 불편이 커졌다. 이에 완주군은 지난 2021년부터 전주시와 시내버스 지간선제 업무 협약을 체결하고 '마을버스 완전 공영제'를 도입했다. 완전 공영제는 시내에서 읍면을 오가는 버스를 제외한 나머지 노선은 줄이고 군 외곽으로 향하는 지선버스를 운영하는 제도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부름부릉 버스다. 줄어든 인구 수에 맞춰 기존 시내버스보다 크기가 작은 마을버스를 투입해 교통 취약 지역의 이동 편의를 높이겠다는 취지로 마련했다. 완주군은 주요 읍면에서 마을로 가는 지선버스를 직접 운영해 기존 전주시 시내버스 운수 업체에 지급하던 보조금을 절감하고 원가가 낮은 마을버스를 운영하기로 했다. 버스 요금도 기존 1500원에서 500원으로 낮췄다. 전국에서 인정받아 농림축산식품부의 2023년 농촌형 교통모델 사업 우수 지자체로 선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교통 불편에 대한 불만이 나오고 있다. 지난해 완주군청 군민 참여 게시판에는 부름부릉 관련 민원이 제기됐다. 글 작성자는 "인구가 많은 지역은 수시로 운행하고 인구가 적은 아예 운행을 안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닌가?"라며 "지역 어르신들은 읍내를 가려고 하면 승강장에서 몇 시간 동안 기다리는 일이 다반사다"고 했다. 그러면서 "버스 노선이나 시간대 증대는 해 줘야 한다. 교통 취약 지역의 편의를 생각한다면 (인구 수에 따라) 차별하지 말고 제대로 운행해 달라"고 호소했다. 실제로 부름부릉 버스는 현재 전주시를 둘러싸고 있는 이서·삼례·소양·구이·상관을 중심으로 총 31대 운행되고 있다. 전주시에서 멀리 떨어진 고산 북부 등은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외 버스 벽지노선 및 대중교통 미운행 지역 등 교통 취약 지역에서 운영하는 '행복콜버스'도 상관·이서·소양·구이·동상에서만 운영 중이다. 시내버스 승강장과의 거리가 500m 이상이면서 대중교통이 운행되지 않는 산간·오지·벽지마을을 다니는 농촌형 택시인 '으뜸택시'는 삼례·봉동·용진·고산·비봉·운주·화산·경천 등 8개 읍면 38개 마을에서만 운영하고 있다. 완주군청 관계자는 "마을버스 한 대 운영에 약 1억 5000만 원이 소요된다. 버스 한 대당 실질적인 탑승자의 수는 적어 예산이 한정돼 지금 모든 수요를 받아들여 증차하기는 힘든 상황이다"고 설명했다. 이어 "올해 4월에는 봉동·용진 방면으로 부름부릉 버스 7대를 증차할 예정이다. 하반기에는 고산 북부 지역 노선을 정비할 계획이다"며 "전화 요청 시 마을 정류장으로 향하는 행복콜버스 제도와 벽지 마을에 전담 택시 1대를 배정해 주민이 요청한 시간대에 운행하는 으뜸택시 제도 확대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디지털뉴스부=문채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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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15 09:30

[전홍철 교수의 ‘영상과 함께 하는 실크로드 탐방’] (8) 신성한 모성의 변용: 이집트 여신에서 성모 마리아로

얼마 전 이집트를 다녀왔다. 이집트 남동부 아스완(Aswan) 누비안(Nubian) 박물관에는 이집트 여신 이시스가 어린 호루스(Horus)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을 표현한 "수유하는 이시스(Isis Lactans)" 조각상(그림1)이 있는데, 설명판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이시스 여신이 어린 호루스 신을 젖먹이는 조각상은 고대 이집트에서 모성의 개념을 상징한다. 후대에 콥트 예술가들은 이 개념을 활용하여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을 표현했다.” 무슨 소리일까? 과연 사실이고,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 콥트 미술로 본 성모 마리아와 이집트 여신의 관계 초기 기독교 미술사에서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형상과 고대 이집트 여신이 아기를 안고 있는 조각상 간의 관계는 미술사학자와 종교학자들 사이에서 지속적인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일부 학자들은 두 도상 사이의 직접적 영향 관계를 강조하는 반면, 다른 학자들은 이러한 유사성이 과장되었거나 우연의 일치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학술적 논쟁의 맥락을 염두에 두고, 특히 콥트 미술(Coptic Art)이 두 전통 사이의 가교 역할을 했을 가능성을 중심으로 이 관계를 살펴 보자.(그림2) 그림2. 안티노에(Antinoe) 출토 ‘수유하는 이시스’, AD 4세기, Dahlem Museum, Berlin △ 수유하는 이시스(Isis Lactans): 모성과 재생의 이집트적 상징 고대 이집트 미술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모자 이미지는 여신 이시스가 아들 호루스를 무릎에 앉히거나 품에 안은 형상이다.(그림3) 기원전 3000년경부터 헬레니즘 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제작된 이 이미지에서 이시스는 왕좌 형태의 머리 장식이나 태양 원반을 쓰고 있으며, 호루스는 매의 머리나 인간 아이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특히 이시스가 호루스에게 젖을 먹이는 '수유하는 이시스(Isis Lactans)' 도상은 모성과 풍요, 보호와 재생의 상징으로 이집트 전역에서 숭배되었다. 특히 신성한 존재에서 나오는 젖은 생명과 신성의 양분을 나타냈다. 이 모자상은 단순한 예술적 표현을 넘어 신화적 서사(오시리스의 죽음과 재생)와 왕권 계승의 정당성을 시각화한 정치-종교적 상징체계의 일부였다. 그림3. 수유하는 이시스, BC 664-332, THE MET △ 초기 기독교 성모자상의 양식적 발전 초기 기독교 예술에서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형상은 4세기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특히 5세기 에페소 공의회(431년)와 칼케돈 공의회(451년)에서 마리아가 '테오토코스(Theotokos, 하느님의 어머니)'로 공식 인정받은 후 성모자상은 기독교 도상학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초기 성모자상(그림4,5)은 카타콤(catacomb)과 비잔틴 아이콘에서 발견되며, 마리아는 후광을 두르고 긴 로브를 입은 채 예수를 무릎에 앉히거나 한쪽 팔에 안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표현은 점차 ‘호데게트리아(Hodegetria, 길을 보여주는 성모, 그림6)'나 '엘레우사(Eleusa, 자비로운 성모)' 등의 특정 양식으로 정형화되었다. 그림4. ‘수유하는 마리아(Maria Lactans)’, AD 3rd, Catacomb of Priscilla, Rome 그림6. 예수가 구원의 길임을 나타내는 호데게트리아(Hodegetria) △ 콥트 미술(Coptic Art): 이집트 전통과 기독교의 만남 이시스-호루스 형상과 마리아-예수 도상은 모두 어머니가 아이를 무릎에 앉히거나 품에 안은 형태를 취하며, 정면성을 강조한 엄숙한 분위기와 위계적 구도를 공유한다. 또한 신성한 모성, 보호, 중재의 상징으로 기능한다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두 전통 사이의 잠재적 연결고리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콥트 미술을 들 수 있다. 콥트 미술은 이집트에서 기독교가 발전하면서 형성된 독특한 예술 양식으로, 고대 이집트 전통과 기독교적 요소가 공존하는 모습을 보인다.(그림7) 예컨대, 콥트 미술은 앙크(ankh) 십자가와 같은 이집트 상징을 기독교적 십자가로 재해석하는 등 기존 시각 언어의 의미를 변형시키는 경향을 보인다.(그림8,9) △ 결론: 종교 도상의 문화적 융합 BBC에서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이시스 락탄스(Lactans)와 마리아 락탄스의 연결성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시작되어 초기 기독교 아이콘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특히 이시스와 호루스의 이미지가 당시 지중해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가 익숙한 시각적 언어를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이집트에서 발전하는 과정에서, 기존 이집트 문화의 시각적 언어와 상징체계를 완전히 무시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며, 동시에 단순한 모방을 넘어 새로운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는 창조적 재해석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성모자상의 도상학적 전통은 이러한 문화 간 대화와 융합의 복잡한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전홍철 교수 우석대 경영학부·예술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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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10 18:51

나경균 새만금개발공사 사장 “새만금 수변도시 첫 분양⋯완판이 목표”

새만금개발공사가 새로운 비상을 하고 있다. 지난 1991년 11월 28일 공사를 시작한 뒤 지금도 새만금 개발은 진행 중이지만 새만금 수변도시 조성사업과 육상태양광 발전사업을 비롯해 도시개발, 관광, 산업기반과 관련된 다양한 사업이 본격적으로 이뤄지면서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고 있다. 이는 공사 임직원 모두가 함께 움직이고, 노력한 결과물이라는 평가다. 특히 그 중심에 지난해 3월 취임한 나경균 사장이 있다. 그는 지난 1년간 오직 새만금 개발의 성공만을 위해 현장 곳곳을 찾아다니며 지역사회와 호흡하고 다양한 사업 구상 및 발판 마련에 앞장서왔다. 나 사장은 그동안 수변도시 조성 및 육상태양광 사업 등에서 성과를 내는 등 궤도에 올랐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말한다. 그리고 앞으로 20년을 넘어 천 년의 새만금을 이끌어나갈 공사로 도약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이에 나 사장을 만나 취임 1주년 소감과 향후 공사 운영 방향 및 계획에 대해 들어봤다. -취임 후 1년을 맞았습니다. 소감과 함께 그동안 어떤 일을 해오셨는지요. “지난 1년 동안 새만금이 지속 가능한 미래 공간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다양한 사업을 추진해 왔습니다. 특히 지역 개발과 경제 활성화에 중점을 두고, 새만금의 대표적인 미래 도시로 성장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다지는데 주력했습니다. 가장 집중한 사업은 새만금 스마트 수변도시 조성입니다. 도시 내 교육·의료·관광·정부 청사 등 필수 시설을 유치해 정주 환경의 질을 높이고, 글로벌 수준의 도시를 만들고 있습니다. 도시 조성 초기에는 민간 자본이 쉽게 유입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이를 보완할 방법을 여러 가지로 고민해 왔습니다. 그래서 초기 민간 자본 유인책으로 ‘새만금 사업법’에 토지의 취득·개발·관리·공급 및 임대관련 내용을 포함해 법적 기반을 제대로 갖추는 데 주력했습니다. 이를 위해 정부, 지자체, 지역 사회와도 긴밀하게 협력해 왔습니다.” -취임하면서부터 ‘2040 비전’과 ‘알파 경영’을 선포하셨는데, 어떤 의미가 있나요? “새만금개발공사는 2018년 설립 이후 새만금 개발을 위해 쉼 없이 달려왔습니다. 이제는 기존의 틀을 넘어 보다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사업을 확장해야 할 시점이라 판단했고, 이에 맞춰 새로운 비전을 수립했습니다. 2040 비전은 ‘대한민국 영토를 넓히는 새만금의 KEY PLAYER’입니다. 새만금 사업은 단순한 매립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영토를 확장하고, 국가 경쟁력을 키우는 중요한 프로젝트라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또한 새만금 사업을 전담하고 현장에서 직접 뛰는 기관으로서, 공사가 새로운 시대를 주도하겠다는 의지를 반영했습니다. 또한 ‘알파(α)경영’이라는 경영 철학을 도입했는데요, 세 가지 핵심 전략을 의미합니다. 로마자의 첫 글자인 ‘α’는 ‘처음’을 뜻합니다.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는 선구자 정신으로, 새만금 내부 개발을 적극 추진하겠습니다. 또한 ‘최고’를 의미하기도 하는데요, 공사가 축적한 새만금 지역의 경험과 데이터를 소중한 자산으로 삼아, 최고 수준의 전문성을 확보해 나갈 것입니다. ‘α’는 ‘추가적인’ 의미도 갖습니다. 공공기관으로서 국민의 높아진 기대에 부응하며 청렴과 안전 기준을 더욱 강화하겠습니다. 이러한 경영 철학을 바탕으로 새만금을 선도하는 기관으로 도약하겠습니다.” -새만금 스마트 수변도시 분양은 잘 준비되어가고 있나요. “스마트 수변도시는 약 600만㎡(189만평) 규모의 대규모 도시개발 사업입니다. 우리 공사는 급변하는 새만금사업지역의 사업환경에 따라 늘어나는 기업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통합개발계획 변경을 추진 중에 있습니다. 기업과 함께하는 새만금의 ‘첫 도시’로서 수변도시가 경쟁력을 갖출수 있도록 창의복합ㆍ업무복합ㆍ문화복합ㆍ기업복합 등 다양한 복합개발 공간으로 구성될 것입니다. 수변도시의 다양한 공간을 통해 기업맞춤형 지원이 가능한 도시 생태계가 구현될 수 있도록 단계별 분양계획을 마련해 새만금형 공급전략을 도출했습니다. ‘첫 분양’은 수변도시 흥행을 유도할 수 있는 ‘주목성‘을 갖춘 토지를 우선 공급하고자 합니다. 지난 해 말, 국내 부동산 전문가로 구성된 자문단을 통해 검토도 이미 마쳤습니다. 우리 공사는 새만금개발청과 긴밀한 협의를 통해 통합개발계획 변경 인허가를 신속하게 완료한 뒤 수변도시의 ‘첫 분양’을 추진할 예정입니다.” -1공구의 단독주택용지를 올해 첫 분양한다는 이야기인데 구체적인 분양 시기, 면적이 나와 있나요. “올해 하반기에 단독주택용지와 근린생활시설용지를 중심으로 첫 분양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부동산 시장 환경과 행정구역 미확정 등 여러 변수를 고려하면서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현재 통합개발계획 변경이 진행 중인데요. 승인이 나면 신속하게 절차를 마무리하고, 수변도시 1공구에서 가장 부가가치가 높은 용지를 우선 공급할 예정입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단독주택용지 약 6500평(2만1482㎡) 규모로 총 65개 필지를 공급하고, 근린생활시설용지는 약 2700평(8820㎡) 1개 필지를 공급할 계획입니다. 이 분양이 새만금 내 첫 도시형 주거공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고, 앞으로 새만금의 정주 기반을 다지는 신호탄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새만금에 조성되는 첫 (수변)도시인만큼 지역에서도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새만금 스마트 수변도시는 전통적인 토지 공급방식과는 다르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다른 도시처럼 공동 주택용지를 먼저 분양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료·관광·첨단산업 같은 정주 환경의 핵심 시설을 먼저 유치해서 자연스럽게 도시가 자리잡도록 하는 전략을 세우고 있습니다. 먼저 살고 싶은 환경을 만들고, 그 다음에 공동 주거시설을 공급해서 시장의 자발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겠다는 구상입니다. 첫 분양 대상지는 교육 특화시설과 가까운 단독주택용지인데요, 추첨방식으로 공급해 실수요자가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할 계획입니다. 미래 성장 거점에서 누릴 수 있는 장점이 많기 때문에, 첫 분양이 성공하면 파급효과도 상당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첫 분양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 새만금 수변도시의 가치가 더 높아질 수 있도록 단계별 전략을 추진할 예정입니다.여기에 △글로벌 기업과 인재를 유치할 수 있는 교육 특화시설 조성 △안정적인 의료 환경을 위한 종합의료시설 유치 △대규모 민간 개발사업 추진 △공공기관 입주를 위한 복합(합동)청사 조성 등을 진행할 계획입니다. 단순한 신도시 개발이 아니라 ‘머물고 싶은 도시’, ‘살고 싶은 도시’로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 -투자 기업이 늘면서 새만금 산단에 이어 2산단 조성을 추진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새만금 국가산업단지가 ′23년도에 ‘투자진흥지구’로 지정되고, ‘이차전지 특화단지’까지 지정되면서 기업들의 관심이 눈에 띄게 늘어났습니다. 기업들이 새만금을 찾는 가장 큰 이유는 단연 넓은 부지와 좋은 입지 조건 때문입니다. 기반시설 공급도 용이하고, 향후 확장 가능성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산업단지를 새로 조성하려면 시간이 꽤 걸리다 보니, 저희도 빠르게 대응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공사에서는 작년부터 새만금 산업용지 확대 방안을 면밀히 검토해 왔고, 그해 8월에는 예비사업시행자로 선정이 됐습니다. 지금은 제2산업단지 사업화 계획을 신속하게 마련하는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새만금청, 지자체 등 관계기관과 적극적으로 협의해서, 3월에 사업시행자 지정 신청을 하고 본격적으로 추진할 계획입니다. -끝으로 임기 중 꼭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제 임기 중 꼭 이루고 싶은 목표는 단연 새만금 수변도시 첫 분양 완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올해 처음으로 새만금 수변도시 1공구가 국민과 기업을 대상으로 분양을 시작하는데요, 이건 단순한 분양이 아니라, 새만금 사업에서 굉장히 의미 있는 전환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1991년 새만금 사업이 시작된 이후 방조제 내부에 처음으로 탄생하는 도시가 바로 새만금 수변도시거든요. 쉽게 말해, 이제 새만금에서 일하고, 거주하고, 여가를 즐기는 진짜 도시 시대가 열린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저희도 책임감을 갖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를 비롯한 우리 공사 임직원들은 새만금을 삶의 터전으로 삼은 분들이 편리하고, 쾌적하고, 스마트한 미래 도시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습니다. ‘새만금 수변도시에 산다는 것 자체가 프리미엄’이 될 수 있도록 만들겠습니다. 새만금 사업은 전북의 미래이자 대한민국의 성장 동력입니다. 새만금개발공사는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도민과 함께 발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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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환규
  • 2025.03.09 17:02

'붓 한번 안 잡았던' 시골 할매들 작가로 데뷔하다

전북일보가 장기 프로젝트 <청년 이장이 떴다>를 진행 중인 화정마을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평균 나이 81세에 달하는 우리 할머니들이 작가로 데뷔했거든요. 1명도 아니고 무려 12명에 달하는 작가님이 나왔다니, 이거 마을 입구에 플래카드라도 내걸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한 달여 전 흥미로운 제안이 오갔습니다. 전북특별자치도문화관광재단이 그림 공부하는 할머니들의 작품을 옛 도지사 관사인 '하얀 양옥집'에서 전시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 것이죠. 무려 2025년 하얀 양옥집 첫 번째 기획 전시에 할머니들의 그림을 걸고 싶다는 말에 '청년 이장' 취재진은 고민도 없이 "네!"를 외쳤습니다. 그렇게 화정마을 할머니들이 작가로 데뷔했습니다. 데뷔작은 오는 11일부터 4월 27일까지 전시됩니다. 전문 예술인 박상규·이동근·이종만·조현동·최분아 등 5명 작가의 작품과 함께 걸릴 것을 생각하니 벌써 기대되네요.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아 조금은 투박하지만 할머니들의 행복이 담긴 꽃 그림이 전시될 예정입니다. 지난 5일 김삼열·이일순 부부 작가의 도움을 받아 꼬박 반나절 동안 완성한 작품입니다. 새싹과 꽃망울이 앞다퉈 피어날 봄을 담은 작품들이기도 하죠. 할머니들이 그린 꽃에는 행복도, 기쁨도, 슬픔도 모두 담겨 있습니다. 우리 할매들의 데뷔작, 기대해도 좋습니다. 기대 이상, 상상 이상의 작품이 나왔거든요. 할머니들이 그린 꽃과 꽃에 담긴 사연이 궁금하지 않으세요? 여러분께만 특별히 공개하겠습니다. 디지털뉴스부=박현우 기자

  • 기획
  • 박현우
  • 2025.03.08 08:12

"우리 그림 어뗘?"⋯'평균 나이 80대' 할매들 작품 첫 공개

화정마을에 행복이 찾아왔습니다. 평균 나이 80대의 멋쟁이 할머니들이 그림 작가로 데뷔했거든요. 먹고살기 바빠 누리지 못했던 기쁨을 이제라도 누릴 수 있어 행복하다는 할머니 작가님들의 말씀이 계속 기억에 남습니다. 그림 수업이 진행된 지난 5일 화정마을 '청년 이장' 아지트. 손가락이 아파서, 손이 떨려서, 어깨가 아파서, 그림이랑은 인연이 없어서⋯. 며칠 전만 해도 "나는 못 혀!"라고 외치던 할머니들은 온데간데없고 다들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막상 해 보니 그림의 즐거움에 푹 빠진 듯합니다. 그림 그리기부터 인터뷰까지 꼬박 반나절이 걸렸지만 지친 내색도 없네요. '청년 이장' 취재진이 화정마을 할매들의 데뷔작을 단독 공개합니다. (이름 가나다 순.) 김정자(86) 작가 "선상님들이 시키는 대로 그렸는디 안 예쁜 것 같어. 그냥 그렸어. 뭔 꽃인지도 모를 거여. 해당화라고 그렸는디 해당화 같지도 않혀. 해당화는 그냥 예쁘잖어. 노래도 있고 얼마나 좋은 꽃이여? 잘 못 그렸는디 그려도 제목은 '해당화'로 할라고. 꽃도 있고 새도 있고 어뗘? 그림 보면 그냥 행복혀." 박복순(88) 작가 "이 나이 먹어 갖고 대우를 받아요. 화정마을이 호강한다니까? 꽃 그린다는 건 상상도 못 혔지, 얼마나 좋은지 몰러. 우리 집에 달래꽃이 있어. 시방 이게 가을까지 피어. 고거시 그렇게 예쁘다고. 그거 그린 거여. 그게 참 예쁘더라고. 밑에 작은 꽃은 우리 아들들이여. 이 아들도 잘허고 저 아들도 잘허고, 그래서 우리 아들들 생각하는 마음으로 그렸네." 신옥리(82) 작가 "너무 재미있었어요. 그림 그릴 수 있어서 너무 좋았어. 나는 이거시 무궁화꽃이라고 그렸는디 안 같고 매화 같으네. 집에 무궁화 나무가 있어, 그놈 생각하면서 그렸지. 옛날에 살던 사람이 키웠던 것 같어. 지금은 내가 키우지, 뭐. 아래에 꽃밭도 만들고. 기냥 이렇게 그리면 멋있을까 해서 그려 봤네." 오율례(74) 작가 "처음에 그리라고 혔을 때는 양 엄두도 안 났는디 허니까 또 되네? 나는 인자 어려서부터 백합을 좋아혔어. 해마다 피고 지고 피고 지고를 반복혀. 그래서 백합을 그렸는디, 그리고 본게 백합이 아니네? 이걸 그리니까 꼭 소녀 때로 돌아간 기분이여. 기분이 요상하단 말이지. 우리 집에 백합은 벌써 싹이 올라왔다고." 이덕순(80) 작가 "좋았응게 그리지 어쩌겄어. 옛날에 회관에서 그림 배울 때는 다 그림을 그려서 주드만. 그래서 그냥 색칠만 혔어. 그런디 여기는 하얀 종이만 준 게 기억이 안 나. 아고, 한참을 머뭇거렸다니께? 어떤 것 그려야 할지 오래 생각혔네. 생각도 없이 그냥 매화꽃이라고 그렸어. 딸 따라서 매화축제에 가 봤는데 요래 생겼더만?" 이복순(73) 작가 "시방 집에 철쭉이 네 그루가 있고 흑장미, 매화까지 있어. 그래서 내가 그대로 그린 거여. 아고, 살구나무도 있는디 그건 안 그렸네. 젊을 때는 화단도 많이 만들었는디 지금은 나이 들어서 힘들어. 그래도 가꾸기는 혀. 보면 얼마나 기분 좋아. 화단 보면서 나도 장미처럼 항상 남을 웃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좋겄다 생각혀." 이장순(90) 작가 "나 헐 줄도 모르고 팔뚝이 아파서 힘들었네. 선상님이랑 같이 그림 그리니께 재미있었지, 뭐. 손 떨리는 거 잡아주느라 선상님이 욕봤제. 해바라기 그려 봤어. 그냥 젊었을 적 산악회 다니면서 본 것 그렸당게. 이 나이에 이런 거 하라고 하니께 얼마나 재밌어. 안 그려? 그냥 몰러, 나는 너무 재미있었어. 항상 감사허지." 이칠월(87) 작가 "내가 그린 것은 장미여요. 다른 꽃은 많이 그렸다는디 장미는 안 그렸담서? 그래서 그렸지. 장미는 언제 봐도 색깔이 참 예뻐. 넝쿨도 예쁘고 흑장미도 예쁘고. 그냥 한 폭의 그림 같잖어? 집에 철쭉도 있고 동백도 큰 놈 있어. 피면 얼마나 예쁜데. 그런데 나이가 먹응게 그래 꽃이 좋아도 다 못 키우겄더라고." 조복현(80) 작가 "내가 원래 꽃을 좋아혀. 근데 그림을 못 그려. 다른 건 몰라도 꽃은 엄청 좋아하거등? 꽃은 다 예쁘고 좋잖어. 다 좋아해서 고민하다가 쉽게 그리려고 튤립을 선택혔어. 그랬는디 다 그리고 보니께 별로 안 예쁘네? 내 생각으로는 나도 어릴 때는 참 잘 그렸는디 지금 보니 못 허네, 고냥 그런 생각이 들어." 조재신(87) 작가 "고냥 해당화 그려 봤어. 자식들 생각허면 살아야겄고 아픈 거 생각하면 죽으면 끝 아닌가 생각하고 살았는디 그림 그리면서 잃었던 희망 찾았어. 마음으론 다 하고 싶은데 몸이 아파 못 하니께 우울증이 오는 것 같더라고. 나도 60대 되고 취미활동 좀 하나 했더니 다쳐서 지팡이랑 23년을 같이 지냈어. 그렇게 아흔이 다 됐네?" 최은주(77) 작가 "이거시 무궁화라고 그렸는디 그냥 엉터리 박사여. 옛날 무궁화는 전통이 있는디 내가 그린 것은 신식 무궁화여. 잘 그리진 못 했어도 완성을 시켜 놓으니께 참 흐뭇허네? 평소에 꽃을 엄청나게 좋아혀요. 그렁게 꽃이 집에 겁나게 많았는디 허리가 아파서 다 없앴어. 꽃 키우긴 힘들어도 보면 예쁘고 얼마나 좋아?" 최장금(78) 작가 "우리 집 마당에 수선화가 그렇게 많어. 가운데 큰 꽃은 엄마, 아빠. 아들 둘은 아래 꽃, 딸 셋은 윗 꽃. 그냥 그렇게 그렸어. 꽃을 보니께 생각 나네. 아저씨가 일찍 하늘나라로 갔어. 벌써 가신 지 30년이 넘었잖어. 우리 아들은 다리를 많이 다쳐서 6년을 아무것도 못허고 있네. 그러니께 내가 마음 고생이 많지. 그냥 그렇게 살어요." 정리=디지털뉴스부 박현우·문채연 기자 사진=조현욱 기자

  • 기획
  • 박현우외(1)
  • 2025.03.08 08:12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36) <시문기>와 <기문록>- 충청지역 유생이 바라본 동학농민혁명

<시문기(時聞記)>와 <기문록(記聞錄)>은 충청지역 유생이 작성한 기록물이다. 당시 유생들의 동학농민혁명 시대인식과 충청지역 동학농민혁명 관련 여러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이 두 기록물은 각각 1862-1895년, 1894-1897년에 걸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큰 시대적 흐름 위에서 전개된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위상을 엿볼 수 있는 점에서 동학농민혁명 기록물로서의 가치가 크다. <시문기>는 충남 공주지역에 살던 유생 이단석(李丹石)이 동학농민혁명의 배경과 혁명의 진행과정에 대해 듣고 경험한 바를 기록한 글이다. 필사본 1책으로 서문과 본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가 이 기록물을 작성한 것은 1896년 7월이다. 서문에 의하면, 그 이유가 1862년부터 시작되어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절정을 이룬 국난을 기록하여 후대 증거로 삼고자 한데 있었다. 그런 만큼 이 기록물은 한 시골 지식인의 시대인식과 관련 사실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기록물로서의 가치가 높다. 〈시문기〉 1894년 1월.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시문기>의 시간범위는 삼남 농민항쟁이 일어난 1862년부터 1895년까지 편년체 형식으로 매년 연월일별로 기록하였고(8개년 누락), 공간범위는 충남 공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충청도지역이다. 주요한 내용은 1862년 삼남 농민항쟁을 시작으로 사학의 폐단, 천주교의 탄압과 병인양요, 당백전의 폐해,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을 기술한 뒤, 갑오년 동학농민혁명 관력 사실을 정리해 놓았다. 특히 5월에 이미 공주지역에 동학 접이 수십개 설치되어 있었다는 점, 공주, 이인, 금산 등 충남 일대에서 벌어진 동학 접주들의 부민 수탈에 대해 기록한 점, 7월 5일 이인 반송에 설치된 동학 도소의 활동 등이 주목된다. 특히 7월 이인 반송에 설치되었던 동학농민군 도소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엿볼 수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 당시 이인 반송 도소는 흰 포장을 넓게 펼쳐 더위를 피하였고 수백명이 모일 정도로 큰 규모였는데, 동학농민군 지휘부가 있는 곳은 병풍을 두르고 돗자리가 깔려 있었다. 반송 도소를 이끌던 동학농민군 대장은 임기준이었다. 이를 통해 7,8월 충청도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던 동학농민군의 도소의 실체를 엿볼 수 있다. 도소는 동학농민군들의 활동 거점이자 지휘부 역할을 한 곳이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또한 8월초에는 보은집회를 주도한 서병학이 경병에 잡혔다는 사실, 충청감사가 이헌영에서 박제순으로 변경된 내용, 10월 이후에는 동학농민군과 정부군의 전투와 사상자 등이 주목된다. 전봉준이 이끄는 남북접 연합군이 본격적으로 공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한 10월 23일에는 동학농민군 1만여명이 신소마을에 유숙하면서 소 12마리를 도살하고 다음 날까지 마을 주민들이 2만개의 밥상을 제공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0월 24일에는 동학농민군의 행렬이 물고기를 꿴 것과 같이 몇 리까지 길게 연이어 이어졌다고 한다. 그 규모도 10여 만명에 이르고 효포, 태봉, 오곡, 이인 등지에 주둔하면서 일본군 및 정부군과 전투를 벌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11월 9일 있었던 공주 우금치전투 때의 상황으로 보이기도 하는 만큼 사료 비판이 요구된다. 특히 종일 접전하였고 콩을 볶는 소리처럼 들린 총소리가 밤낮으로 끊이질 않았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우금치전투 때의 상황을 말해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0월 24일 이인에서 있었던 동학농민군과 정부군·일본군과의 전투는 밤낮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밖에 금산군수의 동학도 처형, 청주병영군 73명의 전몰, 김개남부대의 청주성 공격, 7, 8월 공주지역 동학농민군을 이끌던 임기준의 체포 등 단편적인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다. <시문기>는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많이 제공하고 있지만, 사실 오류도 많아 주의해서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홍계훈이 전주에서 동학농민군과 싸운 시기를 3월에 기술해 놓거나, 전봉준을 김봉준으로 표기하고 서일해(서인주)와 손화중이 김개남과 같이 청주성전투에 참여한 것으로 기록한 부분 등은 모두 오류인 만큼 자료 내적 비판이 요구된다. 이 글에서 저자는 충남 일대 동학농민군의 동향에 대해, ‘곳곳에서 봉기하니, 봉기하지 않은 고을이 없었다. 모두 척왜(斥倭)를 명분으로 하지만 실은 화적이었다’고 하듯이, 지방 유생의 비판적인 입장에서 경험한 바를 직접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 이 기록물을 남긴 이단석은 동학농민군을 ‘천한 도적떼’에 비유할 정도로 동학농민혁명에 비판적이다. 당시 보수적인 지식인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시문기>가 1862-1895년에 걸친 편년체 역사기록물인 반면에, <기문록>은 1894-1897년에 걸쳐 작성된 일기이다. 저자는 본문에서 나오는 지명인 용산과 초강 등이 충북 영동군에 있는 것으로 보아 충북 영동에 살던 어느 유생으로 보인다. 작성된 일기 내용은 일기체 형식으로 그날 그날의 날씨나 일상생활과 농사일, 그리고 시국에 관해 견문한 내용을 날짜별로 기록하였다. 1894년 6월 7일부터 1897년 4월 13일까지 근 3년에 걸쳐 있으나, 전체 분량의 절반은 동학농민혁명이 전개된 1894년 6월부터 12월까지이며 내용도 자세하다. 1895년부터는 내용이 소략하다. 1894년 기록은 6월 27일자에 6월 21일 있었던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관련 내용을 시작으로, 6월 28일 대구에 온 일본인들이 소를 팔지 않는 두 부녀를 살해한 사실을 언급하였다. 또 7월 14일 마을 주민과 동학도들이 충돌한 사건, 7월 18일 동학도들의 옥천 이원집회, 7월 19일 이씨 집의 노복이 동학도를 때려죽인 사실, 7월 22일 동학도들이 초강에 집결한 뒤 전곡을 거두어간 사실, 7월 25일 동학도 천여명이 검촌 민씨 집의 사랑채를 부수고 주민들을 결박한 사실 등을 전하고 있다. 이처럼 7월에 들어와 사실상 영동지역은 동학도들이 장악한 상태였고 그 때문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투어 동학에 가입하였는데, <시문기>의 저자가 살던 마을 주민들도 8월 1일경에는 모두 동학에 들어갔고 자신도 8월 17일 동학에 입도하였다. <시문기>에 따르면, 충북 영동은 9월 26일 대대적인 첫 기포가 있은 뒤 몇 차례 더 기포가 있었으며, 10월 14일 동학농민군 대군이 해월 최시형이 있던 청산으로 이동함에 따라 마을에서 밥상 700개를 준비하였는데, 실제 10월 16일 진천과 충주 등지에서 온 동학농민군들이 마을로 들어왔다. 10월 18일에는 동학 지도자 청주 출신 손천민이 부녀를 겁탈한 동학도를 직접 징계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11월에 들어와 상황은 역전되었다. 정부군과 일본군이 영동에 들이닥치고 남아 있는 동학도들을 색출하여 처형하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경북 상주의 민보군도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영동으로 들어왔다. 그리하여 12월 17일 동학농민혁명기 마지막 대전투였던 보은 북실전투에 관한 일기를 끝으로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록은 거의 모두 일본군이나 민보군 등에 의해 동학농민군이 체포, 처형된 내용만 일기에 남아 있다. 이와 같이 <시문기>는 갑오년 6월부터 12월까지 충북 영동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실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기록물이다. 특히 이 기록은 저자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내용을 요일별로 정리해 놓아 진정성이 있을 뿐 아니라, 역사 사실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어 사료로서의 가치도 매우 높다. 반면에 <기문록>은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1896년에 저자가 1862년 이후 30여년의 사실을 보수적인 시각에서 편향적으로 기술해 놓았기 때문에 활용시 주의를 요한다. 김양식 전 청주대 영화영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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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05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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