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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민기] 전북판 스쿨어택이 떴다?⋯지역 예술인이 간다

유행은 돌고 돈다. 빨라도 너무 빨리 돈다. 괜히 아는 척한다고 "요즘 유행인데 몰랐어?" 이야기했다가 유행이 끝나 창피당하는 일도 다반사다. 이 기사를 읽는 순간에도 SNS,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수많은 유행이 올라오고 트렌드가 진화한다. 트렌드에 민감한 기자들, 줄여서 '트민기'는 빠르게 변화하는 트렌드의 흐름을 포착해 독자에게 전달한다. 전국적인 유행에서 더 나아가 전북에서 핫한 현장도 함께 소개한다. 전북판 <스쿨어택>이 떴다. 스쿨어택은 SBS MTV에서 인기 아이돌 그룹이 학교로 찾아가 청소년과 소통하는 프로그램을 말한다. 아이돌 대신 전북 청년보컬그룹 '쟈니컴퍼니'가 인구감소지역 학교에서 미니 콘서트를 진행한 소식이 전해졌다. 쟈니컴퍼니는 서하영(27), 신민수(25), 류수찬(25), 이민석(25), 윤민재(25), 유지오(24) 등 6명으로 구성된 혼성 그룹이다. 모두 전북 출신으로 젊은 보컬리스트의 패기와 신선한 음악 편곡으로 쟈니컴퍼니만의 새로운 공연 예술 장르를 개척해 나가는 중이다. 2025년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예술 전문단체 지원사업에 선정된 쟈니컴퍼니는 <2025 청년, 그리고 지역상생 프로젝트: 비긴어게인 in 전북>을 진행했다. 5월 초중순부터 동국대 사범대학 부속 금산중학교(김제)를 시작으로 백화고등학교(장수), 남원여자고등학교(남원) 등 3곳에서 공연했다. 윤민재 씨는 "저희 (로라뮤직 김주환) 대표님이 지원사업의 주제를 정할 때 전북 인구감소지역·청년 예술인을 키워드로 삼았다. 그렇게 탄생한 프로젝트다"고 설명했다. 문화시설뿐 아니라 프로그램도 많지 않은 '문화 소외' 인구감소지역에서 공연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들이 이 프로젝트를 기획한 이유이기도 하다. 본보는 이 소식을 늦게나마 듣고 마지막 공연이 열린 지난 21일 남원여고로 향했다. 강당에 모여 앉은 학생들은 낯선 지역 예술인이다 보니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무대를 감상했다. 그것도 잠시,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콘서트에 온 것처럼 소리 지르고, 응원봉을 흔들고, 플래시를 켜고 1시간 동안 콘서트에 집중했다. 로제·브루노마스의 <APT.>부터 RIIZE(라이즈)의 <Get A Guitar>, BOYNEXTDOOR(보이넥스트도어)의 <오늘만 I LOVE YOU> 등을 쟈니컴퍼니만의 색깔로 편곡해 학생들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단순히 공연뿐 아니라 즉석에서 학생들을 무대 위로 불러 틈틈이 소통하는 모습도 보였다. 각자 자신 있는 노래를 부르게 한 뒤 보컬 레슨하듯 칭찬과 보완점을 찾아 주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준비된 프로그램이 모두 끝나자 학생들은 연신 "앙코르!"까지 외쳤다. 신민수 씨는 "학생들이 저희와 소통하고 즐거워 하니까 저희도 너무 재미있게 공연할 수 있었다"면서 "저희 쟈니컴퍼니 멤버 전원은 고향이 전북이다. 그래서 앞으로도 전북에서 활동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 전문성 있고 실력 있는 보컬팀으로 활발하게 활동할 것이다"고 전했다.

  • 기획
  • 박현우
  • 2025.05.25 07:23

[트민기] "인기 가수도 좋지만"⋯대학축제 이색 기획 '화제'

유행은 돌고 돈다. 빨라도 너무 빨리 돈다. 괜히 아는 척한다고 "요즘 유행인데 몰랐어?" 이야기했다가 유행이 끝나 창피당하는 일도 다반사다. 이 기사를 읽는 순간에도 SNS,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수많은 유행이 올라오고 트렌드가 진화한다. 트렌드에 민감한 기자들, 줄여서 '트민기'는 빠르게 변화하는 트렌드의 흐름을 포착해 독자에게 전달한다. 전국적인 유행에서 더 나아가 전북에서 핫한 현장도 함께 소개한다. 5월 대학 축제 시즌이 오면서 전국 대학교 캠퍼스가 들썩이는 가운데 전주 지역 대학교인 전북·전주대 총학생회가 이색 축제 프로그램을 기획해 눈길을 끈다. 학생이 주인공이 되는 축제를 만드려는 총학의 아이디어가 큰 호응을 얻는 것으로 알려졌다. 첫 번째는 전북대학교다. 전북대는 지난 21일부터 사흘간 건지대동제를 열었다. 축제를 기획한 제57대 이유 총학생회는 '2025 건지대동제: JB&U 전북대, 그리고 당신'을 타이틀로 한 이른바 총장네컷을 준비했다. 기존 포토 부스인 인생네컷을 활용해 양오봉 총장이 미리 찍어둔 사진으로 만든 사진 틀(포토 프레임)을 만들었다. 양 총장은 과잠·정장을 입고 하트, 브이, 악수 등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굳이 총장과 사진을?"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현실은 아니다. 반응이 뜨거웠다. 학생들이 줄 서서 사진을 찍을 만큼 반응이 좋았다는 후문이다. 구민기(25·전자공학부 19학번) 총학생회장은 "맨 처음에 주변 여론을 통해 양오봉 총장님을 좋아하는 학생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축제는 사진 찍고 추억 남기기 좋은 때인데 무엇을 하면 좋을지 타 학교 사례도 많이 찾아보곤 했다. 그때 인생네컷이 떠올랐다"며 기획 에피소드를 전했다. 평소 천 원의 아침밥, 소통 데이를 통해 학생과 간극을 좁히는 양 총장이다 보니 학생들이 원하는 프로그램이라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총학이다. 총학은 학생과를 통해 의견을 전달하고 홍보실에서 프레임 촬영을 진행했다. 양 총장은 다음 날 해외 일정이 있었지만 바로 촬영해서 보내 줬다는 게 구 회장의 말이다. 그는 "프레임 속 포즈는 저희가 예시 사진을 같이 드렸고 주문한 포즈대로 똑같이 해 주셨다. 사실 총장님이 이렇게까지 해 주실 줄은 몰랐는데 흔쾌히 해 주시고 재미 있는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두 번째는 전주대학교다. 전주대는 오는 27일부터 사흘간 2025 전주대학교 대동제-TripLog: 청춘의 기록을 개최한다. 청춘·여행을 축제의 키워드로 잡은 제52대 결 총학생회는 청춘의 한 장면을 함께하고 싶은 마음으로 굿즈를 제작했다. 앞서 지난달 재학생을 대상으로 굿즈 중 슬로건 타올·띠부 스티커의 디자인 공모전을 열기도 했다. 학생이 공모한 디자인으로 타올·스티커를, 이외 총학 홍보소통국의 자체 디자인으로 야구 티셔츠·짐색 등을 만들었다. 최의지(26·외식산업학과 19학번) 총학생회장은 "학우들이 학교에 대한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매개체를 만들고 싶었다. 이번에 제작된 굿즈 중 일부는 교내 디자인 공모전을 통해 선정된 제품이다 보니 의미가 남다르다. 이 굿즈는 단순한 제품·물품이기 전에 재학생 모두가 함께 축제를 만들어가기 위한 장치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특정 키워드를 내세워 학생이 주인공이 되는 축제를 만들고 싶었던 최 회장이다. 최 회장은 "단순히 예쁘고 실용적인 물품이 아니라 대동제를 녹이는 데 집중했다. 전주대 대동제에서 시작한 본격적인 첫 굿즈 사업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자부심을 갖고 있다"면서 "굿즈는 재고 4/5 가량 판매 완료됐다"고 밝혔다.

  • 기획
  • 박현우
  • 2025.05.24 09:38

[나는] 95년 만에 첫 푸른 눈의 춘향 "'춘향다움' 가치 널리 알릴 것"

"한국의 나이팅게일, 잔다르크. 어색하지 않으시죠? 제가 푸른 눈의 춘향, 에스토니아의 춘향이 돼서 미국·아프리카의 춘향이 나올 때까지 '춘향다움'의 가치를 알리고 싶습니다." '춘향의 도시' 남원에 푸른 눈과 금발을 지닌 미스 춘향이 등장하면서 관심이 모였다. 지난 1일 열린 제95회 춘향제 글로벌 춘향선발대회에서 춘향 현에 에스토니아 출신 마이(26) 씨가 선정됐다. 95년 만에 처음 등장한 외국인 미스 춘향이다. 이날 단정히 금빛 머리를 틀고 하얀 저고리와 푸른 치마를 입은 마이 씨는 1분 자기소개에서부터 화제가 됐다. 마이 씨는 "춘향이 보여 주는 순수한 사랑과 가치는 피부색이나 국적과 상관없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아름다운 마음이다"고 했다. 당시 말이 끝나자마자 무대 아래에서 박수가 터졌다. 본보는 현재 서울대 언어교육원을 다니는 마이 씨를 화상으로 만나봤다. 여전히 아름다운 한복 차림으로 환한 미소를 보여 줬다. 그는 춘향 현에 호명되는 순간을 잊을 수 없다며 말문을 열었다. 마이 씨는 미스 춘향이 되고 싶어 2주 동안 남원에 머무는 강행군을 펼쳤다. 아침부터 밤까지 연습하며 열흘 만에 몸무게가 4kg 감소하는 등 힘든 시간을 보냈다. 외국인이다 보니 걱정이 컸던 것이다. 대회 시작 전부터 미스 춘향을 발표하던 순간까지 마음속으로 "안 돼도 괜찮아"라며 스스로 최면을 걸었지만 떨림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미스 춘향 현에 ‘마이’라는 이름이 불리는 순간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사회자가 “춘향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에스토니아에서 대한민국까지 왔다”며 마이 씨를 소개했다. 올해 새로 도입된 이몽룡이 그의 손을 잡고 무대 중앙으로 이끌었다. 머리 위에는 춘향 현임을 보여 주는 화관이 씌워졌다. 그의 노력이 모두 보상받는 순간이었다. 사실 마이 씨의 도전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외국인도 참가할 수 있도록 대회 규정이 바뀌었을 때도 참가했지만 한국에 온 지 얼마나 안 돼서 긴장한 탓에 본선에서 탈락했다는 게 마이 씨의 말이다. 그는 “단순한 미인대회가 아니라 역사와 전통이 있는 춘향제이기에 정말 잘하고 싶었다”며 “작년엔 본선 2차까지 합격했는데 떨어졌다. 올해는 못 하면 어쩌나 걱정이 컸지만 다행히 잘 돼 영광이다”며 미소를 지었다. 정착 기간은 겨우 1년 반뿐이지만 마이 씨의 한국 사랑은 깊은 역사를 자랑한다. 지난 2016년부터 매년 한국 여행을 온 마이 씨는 한국에서 한복을 입어보고 아름다움을 느낀 나머지 '살아야겠다!'라는 다짐과 함께 한국, 한복을 사랑하게 됐다. "한복을 입으면 마치 공주가 된 기분이 든다. 한복을 입은 순간, 한복이 내 마음에 박혔다"고 말할 정도다. 마이 씨의 한국·한복 사랑은 유튜브까지 퍼졌다. 3년 전부터 한복을 입고 일본·중국·터키·영국 등 해외를 여행하는 콘텐츠를 제작 중이다. 23일 기준 채널 구독자는 무려 16만 명에 달한다. 춘향제 사상 최초 외국인 춘향이는 앞으로도 한복을 입고 세계 곳곳을 다니며 한국 문화를 알릴 계획이다. 그는 금발과 푸른 눈을 가진 춘향이가 낯설 한국 사람들에게 "겉모습보다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여러분도 마음속에 담긴 진심을 보고 따뜻하게 맞아 주셨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 기획
  • 문채연
  • 2025.05.24 09:05

[우리 땅에 새겨있는 역사의 흔적] 개혁의 꿈이 서린 부안 우반동

변산의 동남쪽에 있는 우반동(愚磻洞)은 산으로 빙 둘러싸여 있으며, 가운데 평평한 들판이 있다. 소나무와 회나무가 온 산에 가득하고 봄마다 복사꽃이 시내를 따라 만발한다. 1656년에 유형원이 편찬한 『동국여지지』에 서술되어 있는 우반동에 대한 묘사이다. 우반동은 오늘날 부안군 보안면의 서남쪽에 있는 우신리와 우동리의 옛 이름이다. 이 지리지는 유형원(1622~1673)이 한양에서 우반동으로 거주지를 옮겨 새로운 삶을 시작한 직후에 썼다. 따라서 이 글은 유형원 당시의 우반동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풍광이 수려했던 우반동 이 기록보다 몇 십 년 전에 이곳을 묘사한 기록도 있다. 1608년 교산 허균(1569~1618)이 이곳에 있었던 정사암에 머물며 썼던 「중수정사암기」이다. 포구에 있는 꼬불꼬불한 작은 길을 따라 우반동으로 들어가자 시냇물이 옥구슬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졸졸 흘러 우거진 덤불 속으로 쏟아진다. 시내를 따라 채 몇 리도 가지 않아서 곧 산으로 막혔던 시야가 툭 트이면서 넓은 들판이 펼쳐졌다. 좌우로 깎아지른 듯한 봉우리들이 마치 봉황과 난새가 날아오른 듯 치솟아 있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동쪽 등성이에는 소나무와 회나무들이 울창하여 하늘을 가리었다. 우반동은 이렇게 경치가 빼어나 비경으로 꼽히는 우반십경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선계의 맑은 폭포, ‘선계청폭’이다. 선계폭포 위쪽에는 변산의 4대사찰이었던 선계사와 허균이 묵었던 정사암이 위치해 있었다. 폭포 위의 암반에 커다란 말발굽이 새겨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야인시절 이곳에서 무술을 연마하면서 말을 달려 뛰어내릴 때 생긴 자국이다. 뛰어내리면서 칼로 암반을 내리쳐 이곳의 절벽과 폭포가 만들어졌다. 그래서 폭포의 이름을 성계폭포라 했는데 임금의 이름을 그대로 부를 수 없어 선계폭포라 했다한다. 재미있는 전설이다. △변산도적 녹림당 선계폭포 맞은편 산에는 바위굴이 자리해 있다. 조선시대 유명했던 변산도적의 소굴 중 하나로 추정되는 곳이다. 변산도적은 연암 박지원(1737~1805)이 지은 소설 『허생전』의 무대이기도 하다. 한양 남산골에 살고 있던 가난한 선비 허생이 장안의 부자 변 씨에게 돈을 빌려 과일과 말총을 독점한 장사로 엄청난 이문을 얻었다. 그는 이렇게 번 돈을 변산의 도적들에게 주면서 무인도로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살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 소설의 줄거리이다. 이 소설의 기본구조는 허균이 쓴 『홍길동전』과 흡사하다. 홍길동의 의적행위가 『허생전』에서는 체제순응적인 장사로 치환되었다. 소설의 마무리도 비슷하다. 홍길동이 의적들을 데리고 율도국으로 떠난다는 마지막 설정은 허생이 도둑들에게 소를 사주고 처자와 함께 무인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 수 있도록 했다는 결말과 거의 같다. 가혹한 세상에서 목숨을 버릴 수 없어 도둑이 된 사람들이 살길이 만들어지면 선량한 백성이 된다는 일치된 결말이다. 변산도적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영조 때 처음 나타난다.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던 영조 4년(1728), 반란에 동조해 태인에서 거병했던 태인현감 박필현을 문초하는 과정에서 명화적을 끌어들이려했다는 진술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명화적은 당시 변산지역에서 활동하던 도적의 무리로 녹림당이라고도 불렀다. 녹림당은 본래 전한의 마지막 황제를 독살하고 집권했던 왕망에 반대해 녹림산을 근거지로 하여 대항했던 집단의 이름이다. 이후 녹림당은 반란집단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러한 녹림당이라는 이름을 변산도적들이 내세웠다는 것은 이들이 단순한 도둑집단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 △실학의 효시 『반계수록』 조선사회는 중기 이후로 사회제도의 모순이 심화되고 있었다. 신분제의 모순으로 반상간의 갈등이 고조되고, 토지의 과점현상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부자는 끝없이 땅을 확대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송곳 하나 꽂을 땅도 없게 되었다. 급기야는 땅을 잃은 사람들이 유리걸식하다가 도둑의 무리로 전락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회제도의 모순을 직시한 사람이 있었다. 반계 유형원이다. 그는 한양에서 살다가 서른두 살 때인 1653년(효종 4)에 우반동에 내려와 정착했다. 이곳에는 그의 조부가 개간해 조성한 농장이 있었다. 풍광이 수려한 아름다운 변산에 아이러니하게도 도적이 존재하고 있었다. 태평성대가 아니었다. 유형원은 그 원인을 사회제도의 모순에서 찾았다. 그 중에서도 토지문제가 제일 심각했다. 토지의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심화되고 있었다. 토지문제를 개혁하지 않고는 양민이 유리걸식하다가 도적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유형원은 이에 대한 처방으로 경자유전의 원칙에 따라 균전제(均田制)를 실시하자고 제안했다. 이러한 토지제도의 개혁에서부터 국가의 통치제도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우반동에 칩거하며 22년 동안 저술했다. 실학의 효시로 평가받는 『반계수록(磻溪隨錄)』이다. 이 저서에서 반계가 주장했던 이론들은 일종의 국부론이다. 균전제로 얻은 부와 사회 안정을 기반으로 국방을 튼튼히 하면서 사회제도의 변혁을 이루고자했다. 반계의 이러한 주장과 사상은 조선시대 실행되지 못했다. 하지만 반계의 개혁의지와 사상은 이익과 안정복, 정상기를 비롯한 지식인들의 호응을 받았다. 1769년(영조 45)에는 영조의 명으로『반계수록』이 간행되었다. 유형원이 문을 연 실학이라는 학문이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그 이후 실학은 다산 정약용(1762~1836)에 이르러 집대성되게 된다. △스토리텔링이 풍부한 우반동 우반동 들녘 한가운데 길쭉한 선돌이 서있다. 이 선돌 옆에는 배메산 돌방무덤이란 안내판이 서있다. 그런데 혹 이 선돌은 유형원이 자주국방을 꿈꾸며 말을 달릴 때 목표로 삼고 달렸던 돌이 아닐는지. 유형원은 어린 나이에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었다. 이때 전쟁의 참화를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며 외침에 대비해 튼튼한 국방력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서 우반들녘에서 말을 달리며 스스로를 단련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반계의 실천적 면목을 엿볼 수 있다. 달봉대산 중턱에 복원된 반계서원은 유형원이 『반계수록』을 집필하던 곳이다. 이곳에 올라 앞을 보면 우반들녘이 한눈에 들어온다. 반계의 개혁론이 실현되었더라면 우리에게 어떤 세상이 와 있을까하고 서당마루에 걸터앉아 생각하다가 건너편 우동마을에 눈길이 머문다. 우동마을은 부안 김씨의 집성촌이다. 유형원의 조부 유성민이 1636년에 우반의 동쪽들녘을 김홍원에게 매각했다. 그 이후 우동리는 부안 김씨의 세거지가 되었다. 이 마을에는 후손에게 재산을 분배했던 분재기를 비롯한 부안김씨 종중 고문서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정월 대보름날 당산제로 유명한 마을이다. 삼백년 이상 이어오는 이 마을 당산제는 주민화합의 한마당이다. 당산제로 하나가 되는 우동마을 사람들을 보면 유형원이 꿈꾸던 세상이 조금은 실현된 것 같다. 경자유전의 균전제가 실시되지는 못했지만 해방 이후 농지개혁이 시행되어 농민들 대부분은 자신의 농토에서 농사를 짓는다. 변산에 이제 도적은 없다. 반계 같은 위대한 선각자가 있어 역사는 앞으로 나아간다. 허균이 이곳 정사암에 머물 때 『홍길동전』을 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변산에 도적이 있어 반계 같은 위대한 사상가가 나올 수 있었다. 이래저래 부안 우반동은 개혁을 꿈꾸던 땅이자 재미있는 스토리텔링의 산실이다. 손상국 프리랜서 PD

  • 기획
  • 기고
  • 2025.05.23 08:57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46) 친군통위영갑오십월일출주장졸성책, 갑오십월일친군경리청장졸성책, 갑오십월일경리청

△ 친군통위영갑오십월일출주장졸성책(親軍統衛營甲午十月日出駐將卒成冊) 친군(親軍) 통위영(統衛營)은 1888년 4월 고종의 전교로 기존 우영·후영 및 해방영을 합쳐 신설한 부대이자 장위영・통어영과 함께 3개 군영의 하나로 북한산성・강창(江倉) 등 종래 해방영 관할 지역과 돈의문·창의문·숙정문 등의 도성 수비를 담당하였다. 그러던 중 1894년 9월 동학농민군의 제2차 봉기가 시작되자 조선 정부는 진압을 위해 통위영을 양호 좌선봉장 이규태에 부속시켜 교도중대와 통위영 부대를 이끌고 서울을 출발하였다. <친군통위영갑오십월일출주장졸성책(親軍統衛營甲午十月日出駐將卒成冊)>은 출발 당일인 10월 12일 자 기록으로 동학농민군 진압군의 병력 편제와 인원・명단을 알 수 있다. 먼저 양호 도순무영이 보낸 양찬(粮饌) 및 마태초가(馬太草價) 실수분배기(實數分排記)에는 선봉진 장졸 89명, 통위영 장졸 357명, 교도소 장졸 326명, 전 27,480냥이 기재되어 있는데, 이 돈은 영솔 장졸 20일 분량의 식량 가격이었다. 이어 친군 통위영 간부급 지휘관으로 영관 장용진, 대관 오창성・신창희, 교장 박상길・고학석・김상운・황수옥, 서기 정도한・김원석 등을 기록하였다. 이 문서는 제3소대부터 시작하는데 제1소대와 제2소대의 기록은 누락된 것으로 보인다. 하부 편제는 규칙・십장・병정・치중병 등으로 구성되었고, 이외에 장막군, 장부, 후병, 통위영 기마, 순무영평(坪) 기마, 복마 등 도합 401명의 직책과 이름을 기입하였다. 서울 숭례문 밖에 주둔하던 통위영 병사들은 10월 13일 수원부에 도착하였고 이후 충청도 여러 지역을 거쳐 선봉진 부대와 일본군과 합세하여 공주 이인전투와 우금치전투에 참여하였다. 11월 8일 이인에서 통위영 대관 백낙완ㆍ윤영성 등이 동학농민군과 대치하다가 회군하여 우금치로 물러나 밤을 지냈다. 다음날인 9일 부대를 나누어 양쪽에서 사격하고 일본 병사들과 합세하여 격파하자 농민군들은 대포와 총과 창・깃발 등을 버리고 퇴각하였다. 이때 통위영 대관 조병완ㆍ이상덕, 참모관 이상덕ㆍ이윤철 등이 이들을 10여 리나 추격하였다. 양호 좌선봉장 이규태는 통위영 대관 장용진・신창희・오창성, 교장 박상길・김상운 등이 “자기 몸도 잊은 채 힘을 내어 세 갈래 길로 나누어 적들과 접전을 벌이며 쫓아가 섬멸하여 적의 기세를 꺾고 대포를 빼앗았다”라고 도순무영에 보고한 바 있다. 우금치전투 이후에도 고종은 순무 선봉진에게 통위영·경리영·교도대의 장관과 병정들을 거느리고 담당할 방면을 나누고 날짜를 정해 적을 섬멸하라고 전령하였다. 이에 통위영의 지휘관과 병졸들은 전라도 방면으로 진군하여 일본군과 함께 동학농민군 주력을 토벌하였다. 이 자료는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 갑오십월일친군경리청장졸성책(甲午十月日親軍經理廳將卒成冊) <갑오십월일친군경리청장졸성책(甲午十月日親軍經理廳將卒成冊)>은 1894년 10월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출진한 친군(親軍) 경리청(經理廳) 소속 장수와 병졸 명단이다. 친군 경리청은 원래 1891년 2월 서울의 방비에 중요한 북한산성의 수비를 강화할 목적으로 통위영에 속해 있던 총융청 군을 분리하여 다시 설치한 수도 방위부대였다. 경리청 부대 중 출진 명단이 확인되는 부대로 좌1소대는 영관 구상조, 대관 이상덕, 교장 이봉춘・이장혁, 규칙(糾飭) 김흥윤 외, 병정 김복선 등 156명, 좌2소대는 대관 백낙완, 교장 김명환・정재원, 규칙 박인준 외, 십장 김덕순 외, 병정 남창오 등 156명, 중2소대는 서산군수 성하영, 대관 윤영성, 교장 장대규・정인갑, 규칙 고진용 외, 십장 안창석 외, 병정 박기춘 등 150명, 우1소대는 영관 홍운섭, 대관 조병완, 교장 김홍엽・우기준, 규칙 최순갑 외, 십장 서흥돌 외, 병정 이창갑 등 162명 등 총 4개 소대였다. 각 소대는 영관・대관・교장・십장・병정 등이 있었다. 이 외에 참모관 3명, 서기 2명, 화병(火兵) 32명, 복마군(卜馬軍) 27명 등을 포함한 병력은 총 703명이었다. 1894년 9월 동학농민군의 제2차 봉기에 따라 충청도 관찰사 박제순은 이를 막을 수 있는 대비책으로 순무영 부대와 청주 등지에 주둔하고 있는 장위영과 경리청 군대의 지원을 요구하였고 이에 고종은 전교를 내려 승인하였다. 이미 안성과 죽산에 파견되어 있던 친군 경리청과 장위영 부대는 10월 충청도 지역에서 통위영 부대와 합류하여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한 작전을 전개하였다. 경리청 출진 장졸은 영관 안성군수 홍운섭과 서산군수 성하영이 지휘하였다. 이들이 인솔한 병대는 청주를 거쳐 공주에 도착하여 11월 이인전투와 우금치전투에 가세하였다. 이 전투에 참여한 부대는 일본군 후비 보병 제19대대와 선봉장 이규태가 이끄는 통위영 부대, 홍운섭이 이끈 경리청 우1소대, 영관 구상조가 이끈 경리청 좌1소대, 대관 백낙완이 이끄는 경리청 좌2소대, 성하영이 이끄는 경리청 중2소대였다. 이후에도 경리청 부대는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에서 농민군 토벌에 주력하였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 갑오십월일경리청(甲午十月日經理廳) 1894년 9월 동학농민군이 다시 총봉기하자 조선 정부는 10월 군대를 동원하여 무력 진압에 나섰다. <갑오십월일경리청(甲午十月日經理廳)>은 당시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출병한 경리청 소속 좌1소대・좌2소대・중1소대・우1소대・우2소대 사병들의 명단이다. 좌1소대는 병정 김화경 등 22명이었다. 좌2소대는 십장 김점동 외, 교습(敎習) 남창오 외, 병정 김준영 등 27명이었다. 중1소대는 교습 연경장 등 14명이었다. 우1소대는 십장 유상오 등 20명으로 대포 1문을 구비하고 있었다. 우2소대는 병정 서세웅 등 14명으로 대환구(大環口) 1문을 구비하고 있었다. 각 소대 병력은 14~27명의 소규모였는데 이 책에는 십장・교습・병정・규칙 등의 명단 외에 지휘관 이름은 기재되어 있지 않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재곤 서강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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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25.05.22 10:30

"살면서 가장 잘한 일"⋯20년 차 위탁부모에게 듣다

"가정위탁,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들에게 부모가 돼 주세요." 올해로 20년째 전북가정위탁지원센터 위탁 부모로 활동 중인 김진호(70·가명) 씨는 살면서 가장 잘한 일로 '가정위탁'을 꼽았다. 해 보지 않았으면 영원히 모르고 지나갈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게 김 씨의 말이다. 한 아이를 위탁한다는 것은 단순한 돌봄의 역할이 아니라 한 사람의 미래를 책임지는 일이다 보니 책임과 의무가 따른다. 용기 만으로는 할 수 없는, 용기와 사랑이 다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을 김 씨는 20여 년 동안 하고 있다. 20년 전이지만 김 씨는 지금도 아이를 처음 만났던 날을 잊지 못한다. 김 씨 부부는 젊었을 때부터 아이를 좋아했다. 그때 아내의 직업은 어린이집 교사, 아이는 그 어린이집 원생이었다. 김 씨는 "어떤 사명감을 느껴서 한 것은 아니다. 40세 된 홀애비가 직업도 없고, 매일 술에 절어서 오토바이로 아이를 태우고 다니는데 너무 위험해 보였다"면서 "위탁해서 데리고 온 건 아니고 친부와 이야기를 통해 당분간 우리 집에서 지내기로 했다. 그런데 한 2개월쯤 지났을때 친부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말했다. 장례식을 치른 뒤 친부 가족들이 와서 아이를 데리고 갔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지?'라는 생각에 짐도 다 정리했지만 일주일 뒤 키울 사람이 없다며 다시 아이를 데리고 왔다. 당시 막막하긴 했지만 이미 약 2개월을 같이 지냈던 터라 정이 들어 키워 보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위탁부모가 됐다.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아이와 지내는 모든 과정이 기쁨이고 보람이었다는 김 씨. 지천명(50세)의 나이에 막내가 생긴 김 씨 부부는 모든 게 새로웠다. 바로 위 형과 나이 차이만 23년으로 이미 아이를 키운 지 23년이 된 터라 모든 게 다 새롭게 느껴졌다. 그는 "우리가 아이를 키웠던 경험이 너무나 까마득해서 다 잊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우리 막내(위탁아동)가 걸음마를 했을 때, 엄마·아빠라는 말을 처음 했을 때, 유치원·학교에 들어갈 때, 모든 게 새롭고 즐거웠다"고 했다. 늦게 본 막내지만 김 씨 부부 삶의 윤활유가 됐다. 인터뷰 내내 아이와 함께 한 모든 시간이 다 행복했다는 이야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항상 행복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위탁아동은 뭐든 친권자의 동의가 필요하다 보니 통장·여권·휴대전화를 만들어 주는 것은 물론 수술 동의서 쓰는 것도 위탁부모가 단독으로 결정하기 어렵다. 김 씨는 "사실상 위탁부모에게 부모의 책임과 의무만 주어졌지, 권한은 아무것도 주어진 게 없다"며 "일부 지역은 위탁아동에게 지급되는 지원금의 부정 사용을 확인한다는 목적 하에 6개월마다 지출 내역을 정산하도록 한다. 이게 생각보다 큰 부담이다"고 토로했다. 정산이 귀찮고 불편하다고 토로하는 게 아니다. 예를 들어 식구 4명이 같이 외식을 해서 6만 원을 쓴다면 1만 5000원에 대한 비용만 청구하는 방식이다. 한식구가 함께 밥을 먹어도, 함께 돈을 써도 따로 계산해 달라고 부탁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럴 때마다 위탁부모나 위탁아동이나 괜한 미안함과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수급비 증빙은 지자체마다 다르지만 일부는 여전히 어려움을 겪는다. 위탁가정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지만 지금도 안 좋은 인식이 남아 있다. 그는 "가정위탁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게 문제인 듯하다. 아직도 일부 사람은 '그거 하면 얼마나 줘요?', '돈 많이 받아요?', '그것 때문에 양육해요?'라고 물어본다. 그럴 때 기분이 상한다"고 전했다. 그래도 아이가 주는 행복이 더 크다. 그는 "현재 정부의 방침이 시설보다는 가정에서의 위탁, 양육으로 바뀌고 있다. 많은 가정이, 젊은 가정이 함께 해 준다면 참 좋을 것 같다"면서 "지금 생각보다 많은 아이가 가정의 어려움으로 위탁부모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의 용기 있는 결심과 사랑이 아이들에게 내일을 꿈꾸게 하고 행복을 만들어 준다. 우리 사회에는 빛이 될 일이다. 아이는 낳은 정도 크지만 기른 정도 그에 못지 않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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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현우
  • 2025.05.21 16:42

나중에 끊긴다⋯자립준비청년 지원 사각지대

매년 아동보호시설과 위탁가정에서 자립하는 청년들을 위해 지자체와 기업이 다양한 정책을 마련하고 있지는 가운데 대부분 보호 종료 후 5년이 지나면 대부분 지원이 끊겨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자립준비청년은 아동복지시설이나 위탁가정에서 보호받다가 만 18세가 돼 독립하는 청년을 뜻한다. 본인이 원할 경우 자립 준비 기간은 만 24세까지 연장할 수 있다. 이 기간 정부와 지자체는 매달 50만 원의 자립수당과 최대 2000만 원의 자립정착금을 지원한다. 또 심리상담, 자립교육 등 다양한 프로그램도 함께 제공된다. 전북에서도 관련 지원 정책이 시행 중이다. 전주시는 2023년부터 ‘자립준비청년 사회적가족 이음 멘토링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이는 사회에 진출한 성인과 보호종료아동이 멘토-멘티 관계를 맺어 사회적 지지 체계를 형성하도록 돕는 사업이다. 전북은행도 자립준비청년을 돌봄 공백 아동의 멘토로 선발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청년들은 아동을 돕는 사회공헌활동을 통해 책임감을 기르고 사회와의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다. 멘토로 참여한 청년에게는 1인당 500만 원의 시드머니가 제공된다. 문제는 이러한 지원 대부분이 자립 지원 기간이 종료되면 중단된다는 점이다. 현재 지원 대상은 만 24세 이하로 제한돼 있다는 것이다. 기본 보호 종료 시점인 만 18세로부터 약 5년이 지나면 지원 대상에서 제외된다. 군 복무나 대학 진학 등으로 인해 취업 시기가 늦어질 경우 사회 기반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원이 끊길 위험이 크다. 이에 국민권익위원회는 지난 1월, 자립준비청년이 공공기관 취업 시 가점을 받을 수 있는 나이 제한을 34세까지 확대하도록 보건복지부에 권고했다. 또한 국민건강보험공단·근로복지공단·국민연금공단과 협업해 채용 시 가점 연령 범위를 확대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멘토링 사업 등 자립지원 프로그램에서는 이러한 변화가 아직 반영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 기획
  • 문채연
  • 2025.05.21 16:38

“잠시만 가족이 돼 주세요”⋯22일은 가정위탁의 날

매년 5월 22일은 보호가 필요한 아동을 시설 대신 일반 가정에서 키우는 가정위탁의 날이다. 가정위탁보호제도가 국내에 도입된 지 22년이 지난 현재 전북 보호대상아동 중 위탁가정에서 보호받는 비율이 점차 높아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2003년 정식 도입된 가정위탁은 부모의 질병·가출·학대·질병·기타 사정으로 친부모(원가정)가 아동을 양육할 수 없는 경우 일정 기간 위탁가정이 아동을 보호·양육하는 제도다. 추후 원가정으로 돌아가거나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게 목적이다. 위탁아동은 원칙적으로 만 18세 이후 보호가 종료된다. 아동 본인이 원할 경우에는 만 24세까지 연장이 가능하다. 친부모의 법적 권리가 유지된다는 점에서 입양과 구분된다. 도입 초기에는 보호 대상 아동이 보육원이나 아동쉼터 등 시설에 입소하는 비율이 높았지만 최근에는 위탁가정에서 보호받는 아동의 비중이 꾸준히 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2019년 전북 지역의 보호 대상 아동 중 시설 입소 비율은 79.03%에 달했다. 이후 2020년에는 72.12%, 2021년에는 80.76%를 기록했다. 2022년부터 과반에 가까운 아동이 입양ᐧ가정위탁 등 가정에서 보호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22년 가정에서 보호받는 아동의 비율은 46.01%를 기록했고 2023년에도 45.16%로 상승세를 이어갔다. 일반 가정에서 보호하는 ‘일반위탁가정’ 아동 수 또한 증가하고 있다. 전북가정위탁센터에 따르면 올해 1분기 기준 전북 지역 위탁가정 아동 수는 654명이다. 이중 97명이 일반위탁가정의 보호를 받고 있다. 지난 2019년 48명에 불과했던 일반위탁가정 아동 수가 두 배 이상 증가한 셈이다. 일반위탁가정은 혈연관계가 아닌 가정이 보호를 맡는 방식으로 전체 비중은 작지만 뚜렷한 증가세가 눈에 띈다. 반면 친인척이 보호하는 ‘친인척위탁가정’과 조부모가 보호하는 ‘대리양육가정’은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전북가정위탁센터 관계자는 “많은 아동이 가정위탁제도를 통해 가족 중심의 보호와 교육을 경험하고 있다”며 “출생통보제와 보호출산제 시행, 오는 7월부터 시작될 ‘입양 전 위탁’ 제도를 통해 위탁부모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신생아와 영아를 양육할 위탁가정의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며 “더 많은 시민이 가정위탁에 관심을 갖고 동참할 수 있도록 다양한 참여 통로를 마련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전북가정위탁지원센터는 아동을 사랑으로 양육해 줄 위탁부모를 모집합니다. 문의는 063-288-7770.

  • 기획
  • 문채연
  • 2025.05.21 16:38

[전북일보·전북특별자치도선관위 공동기획] 제21대 대통령 선거 무엇이 달라지나

<전북일보·전북특별자치도선관위 공동기획>제21대 대통령 선거 무엇이 달라지나 2005년 8월 4일 통합 공직선거법이 제정된 이래, 공직선거법은 20년 간 50차례 이상 개정됐다. 시대의 흐름과 변화에 맞춰 선거운동의 자유를 확대하고 유권자의 투표편의 증진을 위해 법이 변화를 거듭하고 있으나 자주 바뀌는만큼 유권자들이 잘 알지 못하고 어려워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법의 개정 뿐 아니라 사회의 요구에 따라 선거관리 차원에서 시행되고 개선되는 부분들이 선거때마다 다른데, 유권자들에게 이를 적극 알릴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무엇보다 최근 부정선거 의혹에 대한 해소와 선거제도에 대한 신뢰 향상, 국민 화합 등을 위해 이번 대선에서 변경되고 시행되는 선거제도들에 대해 살펴본다.<편집자 주> △ 지방공사 ·지방공단 상근직원 이번 선거부터 선거운동 가능 지난 2022년 제20대 대선에서 지방공사와 지방공단 상근직원은 선거운동과 당내 경선운동이 불가능했다. 이어진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총선)에서는 규정이 바뀌면서 이들의 선거운동은 여전히 불가능했지만 당내 경선운동은 허용됐다. 이어 오는 6월 3일 치러지는 제21대 대선에서 이들의 선거운동은 전면 가능해졌다. 이같은 변경 배경은 제21대 총선 당시 카카오톡에서 특정후보를 지지하는 글을 올린 혐의로 기소된 모 공사 상근직원 2명이 공직선거법 제60조 제1항 제5호에 대해 위헌법률심판제청을 신청했고 이 조항이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지난해 1월 25일 나왔기 때문이다. 헌재는 "지방공사·지방공단 상근직원의 지위와 권한에 비추어 볼 때 상근임원과 달리 이들이 선거운동을 한다고 해서 그 부작용과 폐해가 일반 사기업 직원의 경우보다 크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되며, 이는 과잉금지원칙 위반"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과거 불법선거가 난무하던 시절의 환경에 비춰 제정된 공직선거법의 선거운동 관련 조문들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선거운동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특히 2016년 공직선거법의 대표적인 규제 조항이던 제254조, 사전선거운동에 대한 새로운 판례를 계기로 선거운동의 자유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공직선거법이 해석·운용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법과 규칙도 개정되고 있는 추세다. 또 지난해 3월 29일부터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시설물 설치와 인쇄물등의 배부를 제한하는 90조와 93조도 완화돼 제한금지기간이 선거일전 180일에서 선거일전 120일로 줄어들었다. 앞으로 시대에 맞춰 선거운동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기 위한 선거법 개정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사전투표참관인 수 제한 그동안 선거 당일투표와 달리 사전투표에서는 참관인의 수를 제한하지 않았지만, 운영상의 문제가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4월 총선에서 38개 정당이 참여하면서 사전투표소 당 평균 27명의 참관인이 등록됐는데, 그 문제점은 더욱 두드러졌다. 과도한 인원과 수당 지급 문제, 장소 협소 등이 그것이다. 실제 지난해 총선당시 사전투표참관인수는 전국적으로 9만8080명으로 과도하게 많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들은 참관인 수당도 받는데 당초 책정된 56억8000만원 보다 많은 98억원이 이들에게 지급됐다. 장소의 문제도 제기됐다. 한정된 투표소 공간에 다수의 참관인이 상주하면서 참관 실효성은 떨어지고 선관위는 선거관리에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 대선에서는 올해 1월 7일 공직선거법 개정으로 사전투표참관인은 투표소마다 최대 8명으로 제한된다. 만약 선정되거나 신고한 인원수가 8명을 넘는 경우 관할 구·시·군위원회가 추첨으로 선정하게된다. 선관위 관계자는 "사전투표참관인의 참관권리를 제대로 보장하기위한 제한으로 질서정연한 가운데 참관이 보다 원활하고 효율적으로 이뤄질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사전투표소별 관내·관외 투표자수 1시간 단위로 공개 지난해 총선을 앞두고 서울과 인천, 부산 등 10개 도시 행정복지센터 및 체육관 등 사전투표소 운영이 예상되는 40여 곳에 불법카메라가 발견됐다. 이에 선관위는 경찰과 합동으로 전 (사전)투개표소의 불법카메라 설치 여부를 확인했다. 선관위는 이같은 사례가 부정선거 의혹에 빠진 한 유튜버가 사전투표자수를 확인해 보겠다며 벌인 일이라며, 사전투표율에 대한 불신과 의혹의 단적인 예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기존에는 선거인의 주소지를 기준으로 구·시·군별 사전투표자수를 1시간 단위로 공개하고 사전투표소별 투표자수는 매일 사전투표 종료 후 별도 공개해왔다. 하지만 이번 대선에서는 구·시·군별이 아닌 사전투표소별로 관내·관외 투표자수를 1시간 단위로 추가 공개할 예정이다. 선관위는 이같은 변경이 사전투표자수를 실제보다 부풀려서 발표하고 부풀려진 수만큼 허위 투표지를 투입한다는 부정선거론자들의 주장에 대한 의혹을 해소시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일반인 투·개표 사무 지원시 국적확인 절차 강화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이들의 핵심주장중 하나가 선거의 투·개표 사무에 중국인이 대거 참여해 부정선거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이에 선관위는 이같은 의혹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투·개표 사무 지원신청시 국적 확인 절차를 강화한다. 공직선거법상 일반인 투·개표 사무지원의 경우 ‘공정하고 중립적인 자’임을 위촉요건으로 하고 있고 외국인을 투·개표사무원의 결격사유로 규정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선관위는 불필요한 오해를 방지하기위해 2023년 11월 30일자로 '공직선거절차사무편람'을 개정해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사람을 투·개표사무원으로 위촉할 수 없도록 했다. 또 이번 대선에서는 일반인의 투·개표사무원 지원시 국적 확인란을 추가해 국적여부를 분명히 명시하도록 하고, 신분증명서 사본을 함께 제출하도록 했다. 선관위는 이같은 국적 확인 절차를 추가조치로 외국인의 투·개표사무 참여 소지를 제거해 중국인의 부정선거 조작 음모론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공정선거참관단 구성 및 운영 사전투표나 선거일 투표 및 개표 등 일반 국민이 궁금해하거나 오해할 수 있는 모든 선거관리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해 부정선거 의혹 차단 및 선관위의 신뢰성 제고를 위한 조치도 이뤄진다. (사)한국정치학회, (사)한국정당학회 등 선관위로부터 의뢰받은 2개 이상 학회는 참관단 규모 및 참관단원 등을 자율적으로 구성한 뒤 운영해 선거 전 1개월 부터 활동을 하고 있다. 이들은 희망하는 절차사무 전 과정을 참관하는데, 참관단과 학회 관계자가 절차사무 현장 참관을 하고 선관위 직원이 참관에 동행해 각 과정별 설명 및 질문·답변을 하게된다. 이들의 활동도 언론사들이 동행취재를 하거나 촬영영상을 선관위 홈페이지나 유튜브에 게시할 예정이다. 또한 운영 종료후 학회가 참관단 운영결과를 포함한 대선 외부평가가 실시된다. 공정선거참관단 출범식 모습/전북특별자치도 선거관리위원회 제공 선거공보물 발송 작업 지켜보는 공정선거참관단 (서울=연합뉴스) 김성민 기자 = 공정선거참관단이 18일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주민센터에서 열린 제21대 대통령 선거 책자형 선거공보물 발송 작업을 지켜보고 있다. 2025.5.18 ksm7976@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기획
  • 백세종
  • 2025.05.20 18:42

[전홍철 교수의 ‘영상과 함께 하는 실크로드 탐방’] (10) 실크로드의 시각적 강창 설법: 인도 파타에서 한국 땅설법까지

판소리는 본래 '열두 마당'이라 불리며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 적벽가의 다섯 마당 외에도 강릉매화타령, 배비장타령, 무숙이타령 등 다양한 작품들이 존재했으나, 그중 상당수가 현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만약 사라진 것으로 여겨지던 판소리 창본이 갑자기 발견되어 실제 공연까지 이루어진다면, 이는 한국 문화사에서 중대한 사건이 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문화적 '재발견'의 사례가 불교 전통에서 실제로 일어났는데, '땅설법'이 그 주인공이다. (그림1) △ 사라진 줄 알았던 불교 전통 '땅설법', 삼척 안정사서 생명력 이어가 땅설법은 강원도 삼척 안정사에서 최근 재발견된 불교 속강(俗講)의 한 형태로, 불교 교리와 설화를 시각 자료와 함께 구연하는 독특한 설법 방식이다. 이 전통에서는 승려가 그림이나 특수 제작된 도구를 활용하여 불교 교리의 내용을 청중들에게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학술적 관점에서 이러한 시각적 설법 형식은 인도의 파타(Pata) 전통에서 기원하여 실크로드를 따라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전파되면서 속강(俗講)이 생겨났고, 변문(變文)이라는 독특한 불교문학 형태로 발전했다. 이 전통은 다시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전해져 오늘날까지 에토키(絵解き)라는 형태로 남아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한때 사라진 것으로 여겨졌던 이 불교 설법 형식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의 안정사에서 살아있는 전통으로 보존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림2) △ 속강(俗講)과 변문(變文): 중국 불교의 시각적 설법 속강(俗講)은 당나라 중기(7세기 후반~8세기) 이후 중국에서 유행한 불교 설법의 한 형태로, 승려들이 일반 민중(속인)을 대상으로 한 통속적인 설법을 의미한다. 이는 불교 경전의 내용을 대중에게 쉽게 전달하기 위해 변상도(變相圖)라는 그림을 보여주면서 진행되었다. 돈황 장경동에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과 함께 발견된 변문(變文) 문헌 중 펠리오 돈황사본 P.4524 항마변문(降魔變文) 두루마리 그림은 속강이 대중화된 시각적 불교 설법 방식임을 뒷받침한다. (그림3) △ 에토키(絵解き): 일본 불교의 시각적 설법 일본 불교에서 발전한 설법 방식인 에토키(絵解き)는 "그림을 푼다"라는 뜻으로 그림의 장면이나 의미를 설명한다.(그림4) 에토키가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AD 931년으로 시게아키라(重明) 친왕이 쓴 『이부왕기(吏部王記)』에 『석가팔상화(釈迦八相絵)』의 에토키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고대 일본의 에토키는 황실이나 귀족 등 극소수의 상위 신분의 사람들에게 고승이 직접 당탑 내의 벽화나 병풍화를 설명하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가마쿠라 시대(1185-1333) 이후 에토키는 급속히 대중화·예능화되어 종교적 교화 수단을 넘어 문화적 오락 형태로까지 발전하였다. (그림4) 일본 불교의 시각적 설법 에토키(絵解き) △ 인도 파타와 스투파: 동아시아 불교 그림 설법의 모태 동아시아의 시각적 불교 설법 방식은 공통적으로 고대 인도의 파타(Pata) 전통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인도의 파타는 길이가 종종 3~5미터에 달하는 천이나 종이 두루마리에 신화적 장면, 신들, 영웅, 또는 주요 사건을 연속적으로 그려넣은 시각 자료였다. 구연자는 이 그림을 벽이나 나무에 걸거나 펼쳐 놓고, 손이나 긴 막대기로 특정 부분을 지목하며 노래(chants), 설명(narration), 때로는 대화체를 활용하여 이야기를 생동감 있게 전달했다.(그림5) 이러한 시각 자료를 활용한 구술 전통은 문자 해독력이 낮은 대중에게 종교적 가르침과 서사를 효과적으로 전파하는 수단이었다. 불교와 그림 설법의 본격적인 결합은 스투파(불탑)의 부조 조각에서 나타났다. 스투파를 장식하는 부처님의 생애와 전생 이야기(자타카) 등 불교 설화도를 해설하던 승려들은 고대의 "그림 설법 법사"라 할 수 있다. △ 중앙아시아 불교 그림 설법의 현장: 키질 205굴 벽화 중앙아시아에서 그림 구연 설법이 유행하였음을 보여주는 가장 명백한 증거로는 키질(Kyzil) 205굴 벽화이다. 이 벽화는 제작 연대가 7세기 전반기로 추정되는데, 브라만 출신 바르샤카라(Varṣākāra)가 불교 옹호자인 아자타샤트루(Ajātaśatru) 왕에게 부처님 생애 변상도를 보여주며 설법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벽화에서 주목할 점은 바르샤카라가 이러한 시각적 내러티브를 통해 부처의 입멸이라는 충격적인 소식을 왕에게 완충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이다. 왕은 정제된 버터가 담긴 항아리--고대 문화에서 항아리는 자궁과 재생의 상징으로 종종 사용--에서 목욕 중인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충격을 완화하기 위한 장치로 해석된다. 또한 벽화 아래에는 세계의 축인 메루산(須彌山)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이 그려져 있어 부처의 열반이 세계에 미친 영향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그림6) △ 잊혀진 시각적 불교 강창 '땅설법'의 재발견과 의의 한국에서는 '땅설법'이 과거 '삼회향놀이'의 다른 명칭으로 알려졌으나, 1960~70년대 이전에 소멸된 것으로 여겨졌다. 강원도 삼척 안정사에서 다여(茶如) 스님과 신도들이 전승해 온 '땅설법'은 단순한 민속놀이가 아니라 불교 교리를 대중에게 전달하기 위한 체계적인 설법 형식임을 확인할 수 있다. 최근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안정사에서 개최된 <세계의 속강과 땅설법 국제포럼>에서 세계적 석학인 펜실베이니아대 빅터 메어(Victor Mair) 교수가 주목할 만한 발언을 했다. (그림7) 메어 교수는 오늘날 땅설법이 실제로 전승되고 있다는 사실에 학술적 놀라움을 표하며, 이 귀중한 문화유산의 체계적 보존과 국제적 공동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발견은 한국 전통 예술의 계보학적 재고찰을 요구한다. 특히 판소리의 기원과 발전 과정을 불교 속강(俗講)과의 연계성 측면에서 재검토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불교 설법 형식과 전통 공연 예술 간의 영향 관계를 밝히는 연구는 한국 문화사의 중요한 공백을 메울 수 있을 것이다. 전홍철 교수 (우석대 경영학부·예술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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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5.19 16:43

[한신협 공동기획 -팔도 핫플레이스] 독도를 품은 울릉도 '그 섬에 가고 싶다’

섬은 고립의 공간이었다. 바다로 둘러싸인 탓에 가고 싶어도 쉽게 갈 수 없고, 나오고 싶어도 쉽게 나올 수 없는 곳이 바로 섬이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빠른 속도, 대형화된 여객선 영향으로 접근성이 개선되면서 예전보다 방문이 쉬워졌다. 그럼에도 상대적으로 더디게 개발되면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덕분에 힐링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우리나라엔 3천400여개의 섬이 있다. 이중 유인도는 465곳. 인구의 0.5%만이 살고 있고 대부분 서해와 남해에 치우쳐 있다. 동해에는 유인도가 거의 없지만 국토 최동단엔 울릉도와 독도가 있다. 울릉도는 내륙에서 약 200Km가 떨어져 있으며 독도는 울릉도에서 약 90Km가량 동남쪽에 위치해 있다. △애국의 성지가 된 섬 '독도' 독도가 애국의 성지로 떠오르고 있다. 그동안 독도는 천연보호지역으로 묶여 출입이 통제됐다가 2004년 빗장을 풀고 국민들에게 개방되면서 감춰둔 속살을 조금씩 보여 주기 시작했다. 독도 전체가 개방된 것은 아니다. 온전히 개방된 곳은 동도 접안장 시설물인 일부 지역뿐이다. 서도나 동도 정상을 가기 위해선 또다시 경찰청이나 울릉군 독도관리사무소에 허락을 구해야 한다. 독도 현지에서 눈물을 흘리는 탐방객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개방된 좁은 공간에서 30분 남짓한 짧은 체류시간이지만 몸과 마음으로 느끼는 감동은 상상 외로 크다. 한 탐방객은 "멀미에 지쳐 후회하고, 다시는 이곳에 안 온다고 맹세했지만 독도에 상륙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가슴 한 곳이 뭉클하면서 벅차오른다. 독도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것이 새삼 자랑스럽게 느껴졌다"고 했다. 우리나라 동쪽 끝 영토. 동해 망망대해에 비탈지고 깎아지른 듯한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인 척박한 자연과 시시각각 바뀌는 해상 날씨와 사투하며 독도를 수호하는 독도경비대 모습은 도심에서 보는 일반 경찰과 사뭇 다른 매력과 감동으로 다가온다. 독도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일본의 탐욕의 대상이 됐다. 1904년 발발한 러일전쟁을 준비하면서 일본은 독도의 중요성을 깨닫고 자국 소유로 만들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했고 지금도 도발을 계속하고 있다. 일본의 야욕에 항의라도 하듯 탐방객 대부분 태극기와 '독도는 우리 땅'이란 문구가 들어간 옷이나 카드 등을 준비해 독도를 찾는다. 또 사진을 찍을 땐 '김치' 대신 어김없이 "독도는 우리 땅"을 외친다. 이런 모습을 보면 휴전선 인근 전망대나 접경지역보다 더 큰 애국심을 느끼고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장소가 독도가 아닐까 싶다. 독도를 방문하기 위해선 이동경로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그럼에도 연간 20만명이 독도를 꾸준히 찾고 있다. △큰 바람 기다리는 언덕 울릉도 서쪽엔 태하마을이 있다. 울릉도서 한반도를 마주 보는 마을이다. 조선시대 수토사들이 울릉도로 오거나 뭍으로 이동할 땐 이 마을에서 시작했다. 마을 바닷가 우측엔 '대풍감'이라는 곳이 있다. 큰 바람을 기다리는 언덕이다. 먼 거리를 이동하기 위해선 바람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태하마을은 조선시대 울릉도의 요충지였다. 마을 곳곳엔 조선시대 섬을 관할한 수토 증거가 넘쳐난다. 일본인들에게 방문을 권하고 싶은 장소다. 태하마을에 자리 잡은 성하신당과 수토박물관, 태하해안산책로 등은 모두 무료다. 넉넉하게 시간을 갖고 마을과 해안산책로 등을 천천히 둘러보면 재미난 역사와 설화, 자연풍경 등을 간직한 이곳은 어느 여행지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다. 특히 태하마을에서 대풍감 방향으로 이어주는 태하해안산책로(연도교)도 꼭 가봐야 한다. 울릉도 탄생의 지질학적 가치를 눈과 마음으로 담을 수 있는 곳이다. 향목전망대로 가는 길 풍경 또한 절경이다. 태하향목 관광 모노레일을 타고 향목전망대에 오르면 숨겨진 비경을 감상할 수 있다. 이곳 풍경은 한동안 컴퓨터와 휴대폰 바탕화면에 사용됐었다. 일상에서 답답하거나 무료할 때 생각나는 장소다. 모노레일을 타고 급경사를 오르면 정상에서는 동해의 푸른 바다와 울릉도의 절경이 펼쳐진다. 종착지에서 오솔길을 따라 10분간 걷다 보면 울릉도(태하) 등대가 있다. 오솔길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매력이 있다. 태하향목전망대는 1958년 설치된 울릉도(태하) 등대 자리에 위치해 있다. 이 장소는 러일전쟁 당시 일본의 망루터 자리였다. 금화를 가득 실은 러시아 함정으로 잘 알려진 '돈스코이호'를 울릉도서 최초 관측한 곳이다. 특히 바닷가 쪽 전망대에서는 쪽빛바다에 펼쳐진 대풍감의 절경과 웅포 해안의 아름다운 모습을 발아래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 10대 아름다운 해안으로 꼽히는 북면 현포 해안을 한눈에 볼 수 있다.탐방객들이 전망대서 바다 절경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지른다. 관음도 전망대서 본 죽도. 죽도는 현재 한 가구가 살고있는 유인도로 울릉도 부속도서 중 독도 다음 두번째로 크다./울릉군 제공 울릉도 본 섬과 연결해주는 관음도 연도교. 에메랄드 바닷빛과 세로로 절개된 특이한 주상절리가 어울려 절경을 이룬다./울릉군 제공 △울릉도 내 한반도 섬, '관음도' 관음도는 면적 0.0714㎢, 높이 약 106m, 둘레 약 800m로 울릉도 부속도서 중 독도와 죽도 다음으로 3번째 큰 섬이다. 과거 이곳에 깍새(슴새)가 많이 살아 '깍새섬'이라고도 불린다. 조선시대엔 '방패도'라고 불렀다. 항공에서 보면 한반도 모양을 하고 있다. 울릉군 저동항에서 북동쪽으로 5㎞ 해상에 위치해 있으며 예전에 주민이 살다가 무인도가 됐다. 2012년 울릉도 본 섬과 연도교로 연결되면서 쉽게 탐방할 수 있게 됐다. 이곳을 방문하는 관광객을 맨 처음 반기는 터줏대감은 괭이갈매기이다. 고양이와 비슷한 울음소리를 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관음도 주변은 괭이갈매기 집단 서식처로 울릉군에서 보호하고 있다. 연도교에서 바라보면 섬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코발트 빛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바다와 주상절리가 어우러져 만든 풍경이 압권이다. 연도교 밑 투명한 에메랄드 바닷빛은 마치 외국을 연상시킨다. 연도교를 지나 400여개 계단을 오르면 잘 정비된 관음도 지질 탐방로가 나온다. 탐방로 주위엔 동백나무, 참억새, 후박나무, 부지깽이나물, 쑥 등이 자생해 '야생 식물의 보고이며 천국'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보전된 이유 중 하나는 섬의 폐쇄성 때문이었다. 바닷가에서 100m가 넘는 직벽으로 둘러싸여 인간의 출입이 통제됐기 때문이다. 섬에서 바닷가 방향엔 높이 14m의 해식동굴(海蝕洞窟)이 2개인 관음쌍굴이 있다. 동굴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을 받아 마시면 장수한다는 설이 전해진다. 울릉도 3대 절경 중의 하나로 꼽힌다. 울릉도 일주 유람선을 타면 바다에서 보는 섬은 또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다. 관음도는 수중 모습 또한 장관이다.일상을 벗어나 다른 곳과 차별화된 여행지를 원한다면 울릉도, 독도가 어떨까? 매일신문=조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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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5.16 10:12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45) 이용목(李容穆)의 「백석서독(白石書牘)」과 이범석(李範奭)의 『확재집(確齋集)』

△「백석서독(白石書牘)」 이 자료는 이용목(李容穆, 1826~?)의 편지를 모은 서간집이다. 이용목은 서울 출생으로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인 이건명(李健命)의 후손이다. 그는 벼슬살이를 하지 않고 일찍이 경상도 삼가(三嘉)에서 살다가 만년에 충청도 영동, 보은지방으로 이사하여 살았고, 1894년 당시에는 상주 장암(壯岩)으로 피난하였다. 그 자신은 출사하지 않았으나 사촌형 이용원(李容元)은 경상도 감사를 지냈고, 아들 중익(李重益, 重弼)은 보은군수와 무안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또 장흥부사로 재직 중 고부봉기가 일어나자 고부 안핵사(按覈使)로 파견되어 수많은 불법 탐학를 저질러 전봉준 등 고부 일대의 민중을 자극한 이용태(李容泰)가 그의 삼종제(三從弟)이다. 「백석서독」에는 이처럼 관직에 진출해 있던 아들이나 친인척이나 지인들과 주고받은 서신이 실려 있다. 특히 아들 중익과 주고받은 서신에는 1893년 3월의 보은집회이나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내용이 다수 들어있다. 아들 중익은 1892년 1월부터 충청도 보은 군수에 재직하였으며, 재직 중 보은집회를 겪었다. 1894년 1월 무안 현감으로 전보되어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전라도 무안 군수로 재임하였다. 보은집회 당시에는 선무사 어윤중과 함께 1893년 3월 26일과 4월 1일 두 차례에 걸쳐 집회에 모인 동학교도 및 일반 민중을 찾아가 효유하고 대화를 주고받기도 했다. 또 「백석서독」에는 동학농민혁명 시기 무안 현감으로 근무하던 아들 중익과 주고받은 서신을 통해 무안 및 전라도 일대 농민군의 동향을 알려주는 내용이 일부 실려 있다. 「백석서독」의 내용 가운데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하여 중요한 내용을 몇 개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보은집회 개최 직후 집회를 주최한 교도들이 보은 공형(公兄, 아전)에게 글을 보내 집회에 따른 보은 주민들의 불편에 대해 양해를 구한 사실이다. 동학교도들은 척왜양을 하려한다는 자신들의 뜻을 민간에 알려 놀라서 동요하는 일이 없게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와 유사한 내용은 「취어」에만 나오는데 그 내용에 조금 차이가 있다. 보은집회에서는 보은, 상주 등의 수령과 향리들에게 군량과 군기를 내놓을 것을 독촉하고, 인근의 토호와 부민들에게도 통문을 보내 군량을 빌려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백석서독」의 저자 이용목도 3월 22일 밤 동학교도들로부터 백미 30석을 3일 이내에 보내지 않으면 곤란한 일을 당할 것이라는 ‘협박문’을 받았다. 또 「백석서독」에는 3월 23일 무렵 “호남과 호서의 교도들이 합진(合陣)하여 그 위세가 늠름하다.”라고 하여 금구의 교도들이 보은으로 와서 합세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다른 기록들에는 단지 이와 관련된 소문만 기록해두고 있을 뿐이다. 또한 다른 자료를 통해 보은집회의 민중들이 해산 후 서울이나 인천으로 갈 것이라고 주장한 사실은 알려져 있었으나, 「백석서독」에는 3월 그믐 경에 해산하여 1대는 서울로 올라가고 1대는 동래로 내려가기로 되어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한편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기 직전인 1894년 3월 11일 무안 현감으로 재임 중이던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읍촌간의 양반집들이 심하게 모욕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분통하다.”라고 하였다. 또 3월 22일자 편지에서는 황간, 영동, 청산, 보은, 옥천 등지에서도 이미 3월 22일 무렵부터 농민군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져서 ‘원한을 갚고 돈을 빼앗는’ 일, 그리고 사대부들 가운데 구타를 당하는 일이 많다고 기록하였다. 4월 13일 편지에는 회덕과 진잠 2개 읍이 농민군에게 군기를 빼앗겼고, 농민군이 공주의 유성을 점거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으며, 5월 2일 무안의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삼종제인 이용태가 안핵사 일을 잘못한 죄로 유배된 사실을 전하고 있다. 1895년 지인 이천 수령을 지낸 김준군에게 쓴 편지에 따르면, 「백석서독」의 저자 이용목은 자기가 살던 마을이 ‘동비의 소굴’이 되자 아내를 아들 중익이 현감으로 있는 무안으로 피신시켰으나, 1895년 봄에 이르러 오래된 병이 위중해져서 갑자기 사망하여 직접 영결(永訣)하지 못한 애달픈 마음을 표하고 있다. △『확재집(確齋集)』(경란록(經亂錄)」 『확재집(確齋集)』은 이범석(李範奭, 1862~?)의 문집이다. 저자의 자는 성백(成伯) 혹은 순좌(舜佐), 호는 확재이다. 아버지는 덕하(德夏)이며, 어머니는 평산 신씨로 의조(儀朝)의 딸이다. 저자는 충청도 아산 출신으로 16세 때 감영의 복시(覆試)에 뽑혀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였고,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혁명 이후 귀향하여 향리에 은거하였다. 개화파와 맥을 같이 하던 이범석은 이후 1901년 외부주사에 임명되었고, 다음해 길주감리서 주사를 거쳐 통상국(通商局) 과장, 양근 군수 등을 역임했다. 1905년 이후에는 후진 양성에 매진하였다.동학농민혁명 관련 내용은 확재집 8권에 실린 「경란록」에 들어있다. 「경란록」은 1862년부터 1926년에 이르는 시기에 일어난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 기사는 중요한 사건이 있던 해에만, 사건의 주요 내용과 그에 대한 논평을 남기는 방식으로 쓰여 있다. 「경란록」은 그가 ‘난시(亂時)에 나서 자라고 늙었다’고 말하듯이 자신이 살아있던 시기에 일어난 사건들을 기록하고 평가해 놓은 일종의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먼저 1862년 일어난 농민항쟁(임술민란)과 영해에서 일어난 이필제란(1871)에 대해 간략히 서술하였다. 이범석은 민란의 원인을 “수령들이 백성을 제대로 돌보지 않고 오로지 탐욕만을 부려 백성들이 도저히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임을 분명히 밝혔다. 이어 경복궁 중건(1864), 오페르트 도굴사건(1866), 개항(1876), 안기영‧이재선 역모사건(1881),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64) 등을 다루었고, 광화문 복합상소와 보은집회(1893) 등에 대해서도 간단히 언급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배경에 대해서는 고부봉기 가 일어났을 때 조정에서 탐관오리들을 벌하지 않고 헛되어 ‘난민’들만 다스렸으므로 민중이 모두 동학에 입도하였고, 전봉준이 그들을 모아 당을 만들어 호남 전 지역에서 창궐하였다고 지적했다. 또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했을 때, “스스로 국호를 세우고 스스로 왕호를 칭했다[自建國號 自稱王號].”라고 한 내용은 다른 기록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다음에는 저자가 아산의 향제로 돌아와서 겪은 청일전쟁과 동학농민혁명의 경험을 수록하고 있다. 아산 일대에서는 농민군에 의해 양반가의 분묘가 강제로 파헤쳐지는 일이 많았다. 이범석 본인의 집도 말과 돈을 뺐기는 등도 여러 번 ‘토색질’을 당하였고, 특히 마을 사람들이나 ‘상놈’들이 모두 농민군에 가담하고 노비들도 모두 ‘배반’하려는 마음을 품자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노비를 모두 면천(免賤)해 주었으며, 직접 물을 길고 장작을 패서 밥을 지어 먹었다고 기록하였다. 이 글의 맨 마지막에 있는 「담평(談評)」에서 동학농민혁명[‘湖南民亂’]은 조선의 군대로 진압했어야 하는데, 조정에서 이기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이웃 나라의 군대를 빌린 것이 결국 청일전쟁의 단서가 되었음을 지적한 부분도 눈에 띈다. 군데군데 오류도 적지 않으나, 동학농민혁명의 배경이나 의미를 19세기 후반 조선사회의 대내외적 위기 상황과 연결하여 파악하고자 한 저자의 접근도 매우 흥미롭다.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배항섭 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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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5.14 16:14

장수군 민선 8기 3년의 도전과 변화...“장수의 새 역사를 쓴다”

장수(長水)라는 이름에서 우리는 무엇을 먼저 떠올릴까? ‘오래 산다’는 장수(長壽)의 의미일까, 아니면 고품질 사과와 한우 등 레드푸드로 이름난 농산물의 고장일까. 인구 2만 500명의 작고 조용한 농촌으로만 인식됐던 장수군이 지난 4월, 한국기업평판연구소에서 발표한 국내 기초지자체 브랜드평판에서 전국 80여 개 군 지역 중 4위, 전북특별자치도 14개 시·군 중 전주시에 이어 2위를 차지하며 ‘기적 같은 도약’을 이뤄냈다. 민선 8기가 출범한 지 3년. 장수군은 행정 혁신과 끊임없는 도전, 지역 맞춤형 정책 추진을 통해 뚜렷한 변화를 만들어 왔다. ‘새롭게 도약하는 행복 장수’라는 비전 아래, 군민과의 소통을 최우선으로 삼으며 장수군의 새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지난 3년간 지역을 넘어 전국적으로 주목받는 명소가 된 장수군의 경제·문화·관광 분야의 혁신적 변화를 하나씩 짚어본다. △장수만의 독특한 매력을 알리며 이제는 한 번쯤 가고 싶은 ‘명소’로 과거 장수군은 관광지로서 대중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심지어 장수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민선 8기의 시작과 함께 장수는 한 걸음씩 ‘여행의 목적지’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천국’이라 불리며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장수누리파크’를 대표 관광지로 육성하고 청정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금강의 발원지인 뜬봉샘과 그 일대의 뜬봉샘 생태공원은 국가생태관광지로 지정됐다. 또 전국 8대 명산 중의 하나인 장안산의 억새 숲은 넓게 조성했다. 여기에 ‘장수트레일레이스’ 성공적 개최는 장수를 관광지로 주목받게 만드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됐다. 장수군에 ‘한국의 샤모니’라는 별칭을 안겨주며 장수를 산악 스포츠의 성지로 부상시켰다. 천혜의 자연경관과 인간의 도전 정신이 어우러진 이 레이스는 장수를 ‘보고, 뛰고, 느끼는 곳’으로 새롭게 정의했다. 수치 또한 이러한 흐름을 증명한다. 2021년 24만 명이던 연간 관광객 수가 2024년 84만 명으로 3배 가까이 대폭 증가했다. 특히 트레일레이스는 인근 지역민보다 수도권 참가자 비율이 약 90%를 차지해 전국적인 인지도가 상승했음을 방증한다. 이제 장수는 100만 관광객 시대를 향해, 또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곳’을 넘어 ‘자주 찾고 싶은 곳’으로 성큼 나아가고 있다. △과감한 행정 혁신과 성과로 증명한 변화 장수군의 변화는 관광 인프라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변화와 도전을 겁내지 않고 장수군의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을 현실화하고자 행정 시스템 전반에도 과감한 혁신이 이루어졌다. 성과와 역량 중심의 투명한 인사 시스템 도입은 조직문화에 새바람을 일으켰고, 그 결과 지난해 전국 군단위 적극행정 평가 1위(최우수)를 기록해 국무총리 기관 표창이라는 영예를 안았다. 또한 올해 3년 연속 ‘적극행정 및 혁신 우수 지자체’로 선정되며 체계적이고 일관된 개선 노력을 이어오고 있음을 증명했다. 장수의 대표 레드푸드인 사과‧한우‧오미자‧토마토를 중심으로 조성된 ‘장수 만남의 광장’은 지역의 특성을 살려 행정안전부의 인구감소 대응 우수사례로도 인정받았다. 이처럼 행정의 뿌리부터 차근차근 바꾸려는 노력은 장수군 전반의 변화를 견인하는 든든한 추진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기후위기 시대, 지속가능한 농업 실현 지구온난화는 농업에도 예외 없는 위기를 안겼다. 재난 재해에 특히 취약하고 가격 변동성이 큰 농업의 특성상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받기 어렵다는 점에서 농업은 불확실한 산업으로 여겨지고 있다. 장수군은 이러한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스마트 과원, 저탄소 한우, 스마트팜 등 미래형 농업 기술을 적극 도입해 기후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지속 가능한 농업의 기반을 다져가고 있다. 나아가 농산물 가격안정 기금도 조성해 농가들이 불안정한 시장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오롯이 영농에만 집중할 수 있는 구조를 마련했다. 농업의 미래는 불투명할 수 있지만 장수군의 방향은 명확하다. 장수는 환경과 경제가 공존하는 농생명 도시로서의 비전을 실현하고자 그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사는 곳’을 넘어 ‘살고 싶은 곳’으로 사람들이 ‘살고 싶다’고 말하는 지역에는 이유가 있다. 장수군은 최근 그 이유를 만들어 가는 데 힘을 쏟고 있다고. 전북 최초로 유치한 ‘전북형 반할주택 100호’는 주거비 부담을 대폭 줄여주며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일 예정이다. 이뿐 아니라 ‘청년농촌보금자리 30호’, ‘농촌체류형복합단지 20호’ 등 사업도 공모에 선정돼 청년들의 귀촌과 정착을 유도하고 있다. ‘장수에 체류시설이 부족하다’는 말이 옛말이 되는 날도 머지않았다. 또 군은 생활 속 복지도 놓치지 않았다. 군민이 새로운 레저문화를 누릴 수 있도록 번암, 장계를 시작으로 파크골프장을 조성하고 읍·면 소재지 중심으로 LPG 배관망을 구축해 난방비용을 대폭 줄이고 에너지 복지를 실현하는 등 생활밀착형 SOC를 확충했다. 또한 올해부터는 농촌협약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해 읍‧면 중심의 정주여건 개선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들은 장수를 ‘산간 오지’라는 과거의 이미지에서 ‘모두가 찾는 건강한 삶의 터전’으로 바꾸어놓고 있다. △길이 닫혔던 땅, 이제는 남부권의 교통 중심지로 장수는 전체 면적의 75%가 산지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산악지역이다. 한때는 그 지형이 장수의 한계로 귀결돼 타지에서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이었다. 그러나 교통지도가 바뀌면서 지리적 한계가 경쟁력으로 전환되고 있다. 현재 대전-통영 고속도로와 익산-장수 고속도로 2개가 교차하는 이곳은, 전라도와 경상도의 잇는 남부권 교통의 요충지로 탈바꿈하게 됐다. 여기에 천천하이패스IC가 2026년도에 개통을 앞두고 있고, 전주시‧진안군과 연결되는 국도 26호선도 ‘제6차 국도·국지도 건설계획안’에 반영돼 현재 예비타당성 심사에 있다. 그리고 광주-대구를 잇는 달빛철도 특별법이 통과되면서 급물살을 타고 있어 장수는 교통망 중심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다지고 있다. ‘장수’는 이제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사람들이 찾고, 경험하며, 살아가는 공간으로 진화하고 있다. 그 이름은 하나의 브랜드로서 새로운 가능성과 기회가 열리는 곳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인터뷰] 최훈식 장수군수 “매사 행정 수요자인 군민의 눈높이에서 변화와 혁신을 추진해야 한다”는 소신으로 오로지 군민만을 바라보고 숨 가쁘게 달려온 최훈식 장수군수의 혁신적인 리더십이 장수군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배경이다. 최 군수는 “장수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 저의 특별한 목표입니다. 장수군수 당선 당시 군민들과 처음 가졌던 약속과 다짐을 가슴에 되새기며 ‘군민 모두가 행복한 장수’를 만들기 위해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며 “특히 저는 농업이 미래의 ‘블루오션’이고 기후 위기 시대에 ‘장수는 기회의 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수의 지리적, 기후적 강점을 살려 산악관광과 농업을 통해 지속 가능한 장수를 만들고 싶습니다”고 포부를 밝혔다. 최훈식 군수에게 지난 3년의 성과는 끝이 아닌 시작이다. 지금까지 기반을 다지는 시기였다면 이제는 그 위에 탄탄한 미래를 설계해 농생명‧국제산악관광도시라는 새로운 비전을 향해 쉼 없이 전진할 계획이다. 두발자전거는 쉼 없이 굴려야 넘어지지 않듯이.

  • 기획
  • 이재진
  • 2025.05.13 18:27

[작지만 강한 우리마을] ④부안 석동마을, 배우던 마을에서 가르치는 마을로

사람이 떠나고 마을이 사라지는 시대. 전북 부안의 석동마을은 사라지기보다 '살아남는' 길을 개척했다. 마을 주민들이 직접 나서 가꾼 경관과 역사, 그리고 공동체의 힘으로 이곳은 이제 전국에서 벤치마킹을 위해 찾는 모델 마을로 거듭났다. 돈보다 마음, 개발보다 복원, 외부의 손길보다 주민 스스로의 울력으로 완성된 석동마을의 변화는 지방소멸 시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부안군 부안읍 연곡리에 위치한 석동마을은 현재 38가구 70여 명이 살아가는 작은 마을이다. 부안읍과 석동산 사이에 자리잡아 지리적으로 읍내와 가깝고, 자영업 종사자와 직장인 비율도 높아 농촌 마을 중에서는 비교적 젊고 역동적인 에너지를 품고 있다. 이 같은 특성은 다양한 마을 사업 추진의 원동력이자 기반이 되었다. △석동산의 변신, 주민 손으로 다시 태어난 공간 석동산은 과거 부안 주민들의 소풍지이자 부안읍의 남산이라 불릴 만큼 정서적 중심지였다. 그러나 몇 년 전만 해도 대나무 숲이 무성해 어둡고 음침한 분위기를 풍겼고, 사람들의 접근이 어려워 불법 폐기물이 무단 투기되던 장소였다. 마을 사람들조차 산책 대신 큰길을 이용할 만큼 외면받던 공간이었다. 변화는 2018년 경로당이 새로 문을 열면서 시작됐다. 마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마을회관에 모이게 되었고, 마을의 방향성을 두고 의견을 모으는 현장 포럼이 이어졌다. 주민들은 “이대로 두어선 안 된다”는 공감대를 형성했고 마을 만들기 사업에 대한 열망이 커졌다. 2019년 전북도가 추진한 '전북 테마가 있는 자연마을 조성사업'에 선정되며 본격적인 변화의 물꼬가 터질 수 있었다. 5억 원 규모의 예산을 바탕으로 석동산 입구에는 체련공원이 들어섰고, 무성하던 대나무 숲은 걷기 좋은 산책로와 꽃잔디 길로 탈바꿈했다. 공중화장실과 주차장이 설치되면서 외부 방문객의 편의도 고려했다. 주민들이 손수 관리하는 꽃길은 사계절 다른 색으로 물들며 석동마을의 이미지를 바꾸고 있다. △작은 마을의 반전, 이제는 본보기가 되다 특히 마을의 역사성과 문화자원을 되살리는 사업도 함께 진행됐다. 마을에 있는 9곳의 재실에 각각의 유래를 설명하는 간판을 설치했고, 과거 최광지 홍패를 기념하는 시설물도 세웠다. 국내 최초의 서원인 도동서원이 있던 자리는 전라유학진흥원이 2025년 완공을 목표로 건립 중이며 마을은 이에 발맞춰 유학을 테마로 한 장원급제길 포토존을 조성했다. 지난해 11월 수능 시즌에는 이 포토존이 방송에 소개되며 주목받기도 했다. 이 같은 마을 사업의 중심에는 양종천 이장이 있다. 7년 전 마을 이장을 맡은 그는 부안읍에서 화원을 운영하던 경험을 살려 경관 정비와 사업 추진에 앞장섰다. 주민들은 “양 이장이 오고 나서 마을이 천지개벽했다”고 평가한다. 양 이장은 전국 각지의 마을을 찾아다니며 성공사례를 벤치마킹했다. 특히 잡초가 번성하는 여름철에 마을을 방문해 관리 상태를 확인하며 실질적인 정보를 얻어왔다. 그가 추구하는 마을사업의 핵심은 ‘돈보다 울력’이었다. 실제 석동마을의 사업은 주민 스스로 손발을 보태며 진행됐다. 잡초 제거부터 크고 작은 공사까지 힘든 작업이 이어졌지만 이 과정에서 주민들 간 신뢰와 자긍심이 커졌다는 게 주민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6차 산업과 교육 플랫폼, 마을의 미래를 설계하다 현재 석동마을은 단순한 조경을 넘어서 6차 산업화를 목표로 나아가고 있다. 6차 산업은 농업(1차 산업)에 제조·가공(2차 산업)과 유통·관광·체험(3차 산업)을 융합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방식이다. 단순히 농산물을 생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가공해 상품화하고 나아가 체험 프로그램이나 관광 콘텐츠로 연결해 지역 경제를 활성화한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특히 인구가 줄고 산업 기반이 약한 농촌 지역에서 6차 산업은 지역 자원을 활용해 자립적 경제 구조를 만드는 핵심 전략으로 평가된다. 생산만 하는 마을에서 '콘텐츠를 파는 마을'로 나아가는 변화의 길이기도 하다. 양 이장은 "이제 농촌도 경쟁력 있는 산업군이 되어야 하고, 그 첫걸음은 각 마을의 자원을 활용해 스스로 수익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며 "석동마을이 그 모델이 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 일환으로 마을 내 재실 한 곳은 도자기 체험장으로 전환할 계획이고 또 다른 재실은 양식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임대를 추진 중이다. 이를 통해 수익모델을 차근차근 실현해 나가 최종적으로 마을이 돈을 벌어 주민에게 연금을 주는 전북 최초 '연금마을'로 발전하는 것이 목표다. 석동마을은 이 같은 미래 비전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충청과 경상권 등 전국의 다양한 지역에서 주민들이 석동마을을 찾고 있으며 올해에도 충청권의 두 마을이 이곳을 방문해 마을활성화 방안을 배우고 돌아갔다. 마을의 정비뿐 아니라, 사업 추진 과정에서의 주민 결속력, 예산 집행의 투명성, 사업 내용의 지속성 등에서 석동마을이 보여주는 성과는 전국의 농촌 마을에 실질적인 배움의 자원이 되고 있다. 양 이장은 앞으로 석동마을이 가진 경험과 노하우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이를 전국의 다른 마을들과 공유할 수 있는 '교육·교류 센터' 건립을 구상 중이다. 그는 “우리 마을만 잘되는 것이 아니라, 전국 모든 마을이 함께 살아날 수 있도록 서로 배우고 나눌 수 있는 공간이 꼭 필요하다”며 “석동마을이 그 중심이 되도록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마을이 단순한 경관 명소가 아니라, 전통과 철학, 공동체 가치까지 함께 배울 수 있는 교육 플랫폼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기획
  • 이준서
  • 2025.05.11 16:56

[나는] 전북현대 입과 귀, 통역사 김민서·표석환입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도, 길 다니며 스쳐 지나간 사람도, 모두 저마다의 삶이 있다. 우리가 매일 보는 기사 속 공직자, 정치인의 일상은 다 알면서 정작 이웃의 삶을 본 적은 많지 않다. 그래서 준비했다. 평소 접하는 사람이 아닌 스포트라이트가 닿지 않는, 소중한 우리의 이웃,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기획을 준비했다. 오늘 만나볼 이웃은 전북현대모터스FC의 통역사 김민서·표석환이다. 이들은 외국인 감독·선수·스태프의 입과 귀 역할을 해내고 있다. 매일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감독·선수에서 한발짝 뒤에 서서 그들의 말부터 감정, 심지어 몸짓까지 통역하는 '숨은 보석'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자. "매일 출근하는 길이 행복해요." 직업 만족도 상(上), 상 중에서도 최상. 2023년 일자리 만족도는 35.15%뿐이지만 2000년생 전북현대 통역사 김민서(24) 씨의 만족도는 100%다. 보통 출근길은 천근만근이지만 김 씨는 항상 행복하다. 지난 8일 전북현대모터스축구단전용클럽하우스에서 만난 김 씨는 한국 축구계에서 통역을 시작할 때 K리그에 대해서 알아보는 과정에서 전북현대를 보고 '아, 저기다!'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언젠가 전북현대 통역을 해 보고 싶었다는 게 김 씨의 설명이다. 꿈을 이룬 셈이다. 전북현대에 따르면 현재 그는 포르투갈어 통역으로 브라질 선수 위주로 전담하고 있다. 영어도 가능하다 보니 코칭 스태프의 내용 전달과 감독의 지시 사항을 선수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이다. 특히 경기 때 데칼코마니처럼 거스 포옛 감독의 몸짓까지 완벽하게 재현하면서 눈길을 끌었다. 김 씨는 "의식한 건 아니다. 자연스럽게 감독님의 목소리 톤이나 제스처를 보면서 나오는 것 같다"면서 "나쁜 이야기를 해도 모두 전달한다. 조절하려고도 해 보지만 그때마다 똑같이 감정이 올라와서 조절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사실 지난해 말 포옛 감독의 취임 기자회견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그는 긴장을 많이 하면서 중간에 통역이 추가 투입되는 헤프닝을 겪기도 했다. 앞에 많은 사람이 있는 걸 보니 머릿속이 하얘졌던 김 씨다. 그는 통역하면서 크게 어려운 점은 없지만 이날이 어려웠다고 꼽았다. 김 씨는 "전북현대 팬 분들은 경기장 들어갈 때마다 놀라게 만든다. 응원가를 부를 때 제 목소리도 안 들리지만 팬들 목소리가 들리니까 힘이 난다. 선수·감독님 모두 마찬가지일 것 같다. 올해 우승하면 제일 좋겠지만 (비록) 우승이 아니더라도 좋은 모습 보여 줄 테니 끝까지 응원해 주시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매일 인터뷰 도와 주기만 했는데⋯." 이것이 우리가 인터뷰를 결심한 이유다. 뒤에서 감독·선수의 인터뷰 통역만 했던 이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1998년생 전북현대 통역사 표석환(27) 씨는 "인터뷰 도와 주기만 하다가 인터뷰를 하려니 조금 어색하다"면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전북현대에 따르면 영어 통역을 하는 그는 선수 중 콤파뇨·보아텡, 대외 업무(미디어 대응) 등을 맡고 있다. 감독 인터뷰, 경기 전 미팅, 라커룸 토크 등을 통역하는 역할이다. 김 씨가 감독의 몸짓을 완벽하게 재현한다면 표 씨는 팬들 사이에서 래퍼 아웃사이더처럼 빠른 속도로 통역한다고 알려져 있다. "변명처럼 들릴 수도 있는데요. 사실 인터뷰 하면 꼭 수첩과 펜을 들고 다니는데 그날 펜이 안 나오더라고요. 펜 자국이라도 좋으니 빨리 안 쓰고, 통역하지 않으면 잊어버릴 것 같았어요. 저도 하면서 빠르다 싶긴 했죠." 놀랍게도 표 씨는 충청도 사람이다. 그는 "팬 분들이 말하는 빠른 인터뷰는 2025 하나은행 코리아컵 3라운드 안산 그리너스전인 듯하다. 원래 말을 천천히 한다. 사실 충청도 사람인데 감독님의 말이 빠르다 보니 나도 모르게 빨라지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직접 필드에서 뛰는 건 아니지만 표 씨의 마음은 감독·선수와 같다. 팀의 성적이 좋지 않으면 안 좋고 지금처럼 성적이 좋으면 보람 차고 기쁘다는 게 표 씨의 말이다. 오직 '우승', 그것 하나 목표로 삼고 마음속으로 함께 뛰고 있다. 이어 "홈이든 원정이든 많은 분이 경기장을 와 주셔서 항상 감사하다. 시즌을 하다 보면 분명히 또 어려운 시기가 있을 테지만 감독님도, 선수들도, 코칭·지원 스태프도 열심히 하고 있으니 믿어 주시고, 열심히 응원해 주시면 좋겠다"고 했다.

  • 기획
  • 박현우
  • 2025.05.10 09:20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44) 경각영공급기, 소지등서책, 민장초개책

△경각영공급기(京各營供給記) 〈경각영공급기(京各營供給記)〉는 1894년 10월~11월 동학농민군 토벌에 참여한 경리영(經理營), 순무영(巡撫營), 장위영(壯衛營), 선봉진(先鋒陣) 등 각 부대에 공급한 물자들을 기록해 놓은 자료이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크기는 25×26cm이며 전체 15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자료는 〈친군경리청장졸성책(親軍經理廳將卒成冊)〉, 〈선봉진대장진배행장관좌목(先鋒大將陣陪行將官座目)〉, 〈친군장위영장졸실수성책(親軍壯衛營將卒實數成冊)〉, 〈교도소출주장병성책(敎導所出駐將兵成冊)〉, 〈본진별군관차출기(本陣別軍官差出記)〉, 〈창의인명록(倡義人名錄)〉, 〈물금첩기(勿禁帖記)〉, 〈죄인록(罪人錄)〉 등과 함께 〈각진장졸성책(各陣將卒成冊)〉으로 합본되어 1996년 〈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에 실렸다. 이 중 〈경각영공급기(京各營供給記)〉는 경리영, 순무영, 장위영, 선봉진 등 동학농민군 토벌에 직접 가담한 각 부대의 비용명세서를 기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경각영공급기(京各營供給記)〉에 따르면 갑오년, 즉 1894년 10월 16일 전(錢) 100냥을 일본영사관 종사관 김주사(金主事)에게 지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일 기록에는 일본군 출진 시 들어간 비용과 호궤(犒饋), 일본 사관 접대비, 이인 전투 출병 중앙군과 일본군에게 50냥을 지급하고, 능치 전투 당시 30냥을 지급한 사실 등 동학농민군 진압 부대의 비용 지출 내역 등이 들어 있다. 이날 지불한 총 비용은 1,267냥 6전 4푼이었다. 10월 21일부터 11월 7일까지는 경리영(經理營) 799명에게 3,487냥 6전 5푼을, 10월 25일부터 11월 7일까지 순무영(巡撫營)에 325냥 5전을, 통위영에 776냥 3전 8푼을 지급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10월 28일 하루 장위영(壯衛營)에 1,766냥 3전을, 10월 20일부터 27일까지 선봉진(先鋒陣)에 59냥 2전 5푼, 도합 7,682냥 7전 2푼을 지급하였다. 전반적으로 동학농민군 토벌에 나선 조선의 중앙군, 즉 경리영(經理營), 순무영(巡撫營), 장위영(壯衛營), 선봉진(先鋒陣)에서 사용한 비용을 알 수 있게 하는 소중한 자료이다. △ 소지등서책(所志謄書冊) 〈소지등서책(所志謄書冊)〉은 동학농민혁명 제2차 봉기 과정에서 1894년 11월부터 1895년 1월에 이르기까지 민인(民人)의 소지(所志) 등을 모아 등서한 자료이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크기는 20×32cm이며 전체 64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자료는〈언문선유방문(諺文宣諭榜文)〉, 〈고시경군여영병이교시민(告示京軍與營兵以敎示民)〉, 〈공주창의소의병장이유상상서(公州倡義所義兵將李裕尙上書)〉, 〈충청도공주정안면봉엄화촌대소민등정(忠淸道公州正安面鳳嚴花村大小民等呈)〉, 〈전봉준상서(全琫準上書)〉,〈동학당공초(東學黨 供招)〉 등과 함께 〈선유방문병동도상서소지등서(宣諭榜文並東徒上書所志謄書)〉로 합본되어 1996년 〈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에 실렸다. 이 중 〈고시 경군여영병이교시민(告示 京軍與營兵以敎示民)〉은 전봉준이 동도창의소 명의로 공주전투에서 노성으로 후퇴한 뒤 관군과 이교(吏校), 그리고 시민(市民), 즉 시장의 상인들에게 척왜척양(斥倭斥洋) 전선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한 글이다. 〈소지등서책(所志謄書冊)〉이 작성된 시기는 1894년 11월부터 1895년 1월까지이며 그 대상지역은 충청도 및 전라도 지역이다. 월일 순으로 기재되어 있다. 1894년 11월 16일 충청도 공주 산하면 두민(頭民)이 수상한 자 10명을 기찰 체포하여 선봉진에 압송한 내용부터 시작한다. 제2차 봉기 이후 패퇴한 동학농민군들을 전국 각지에서 토벌하는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다. 12월 3일에는 동학농민군으로 추정되는 도인(道人) 수백 명이 전라도 장성군 북이면 금량리 마을에 난입하여 음식과 돈을 탈취하였다. 장성에서는 4월 황룡촌 전투에서 전사한 대관(隊官) 이학승(李學承)과 병정들의 시신을 김중길(金仲吉)이 묻어주었다가 동학농민군에게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장성의 아전 박전성(朴銓誠)도 500냥의 돈을 출연하여 황룡촌 전투에서 전사한 병정들의 초상을 치르는 데 보태기도 하였다. 한편 장성 북이면 백암구리에서는 접주(接主)라고 일컫는 유동근(劉東根)을 두고 그곳의 유생들이 오로지 동도의 폐단을 막고자 노력하였으나 선처해 달라는 소지(所志)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렇듯 〈소지등서책(所志謄書冊)〉에는 동학농민군을 소탕할 때 옥석(玉石)을 분간해 달라는 소지(所志)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물론 장성 북하면의 동학 대접주인 손덕수(孫德秀)와 만화동의 접주 신재일(申在一)을 체포하였으니 이를 처리해 달라는 소지(所志)도 있다. 그밖에 민인(民人)이 동학농민군의 강요로 양곡을 주고 담배 등 물자를 공급해 주고 강제로 인원이 동원된 사연을 적고 처벌을 완화해달라는 호소가 실려 있다. 또 마을 사람들이 동도를 잡아 바치면서 그 포상을 요구하는 내용도 있다. 한 건마다 끝에는 조치를 내린 제사(題辭)가 기록되어 있다. 이 〈소지등서책(所志謄書冊)〉은 단편적이기는 하나 당시 향촌의 여러 사정과 동학농민군 토벌상, 그리고 관군의 조치를 잘 알려준다. 따라서 이와 관련 기록이 희귀한 처지에서 아주 소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 민장초개책(民狀草槩冊) 〈민장초개책(民狀草槩冊)〉은 1894년 8월 전라도 보성군에서 작성한 것으로 각 면별로 백성들이 올린 소장(訴狀)과 그 처리 결과를 정리한 자료이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크기는 20×33cm이며 전체 60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자료에는 보성군 용문면, 옥암면, 백야면, 노동면, 미력면, 겸어면, 봉덕면, 복내면, 문전면, 율어면, 송곡면, 조내면, 대곡면, 도촌면 주민의 민원 관련 소장들이 수록되어 있다. 동학농민혁명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내용은 잘 보이지 않지만 그 당시 향촌 사회에서 주민들이 접한 피폐한 생활상과 그 과정에서 발생되는 다양한 민원과 지방관의 처리 방안 모색에 대하여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향교 집강(執綱)의 결전 납부 독촉, 영저리(營邸吏)의 진상가 배정, 가옥매매, 전세(田稅), 진결(陳結) 징세, 벌전(罰錢), 위토 투매, 결세전의 초과 징수, 소작 관련 처분, 산송(山訟) 관련, 답권(畓券) 위조, 가족 간 재산분배, 고공전(雇工錢) 등 주민 토지 매매와 금전 수수와 채권 채무 관계 분쟁 등에 관한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외에 호포(戶布)와 동포전(洞布錢) 및 잡역 경감 청원, 세금 미납자와 음주 행패를 비롯한 고을 내의 부랑패류의 처리, 무고, 투장(偸葬), 과부 탈거, 노인 모욕, 잡역(雜役)에 대한 불만 등 보성군 관내 각 면과 리 별로 다양한 사항을 이해할 수 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겪으면서 보성군이 겪은 사회적 변화를 알 수 있게 하는 소중한 자료이다. 유바다 고려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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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5.07 11:28

초보 아빠들의 행복한 육아⋯100인의 아빠단 떴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궁금한 게 생기기 마련이다. 다른 육아 부모의 의견이 필요할 때가 있지만 조언을 얻고 싶어도 대표적인 온라인 육아 커뮤니티인 '맘카페'는 가입 자격이 여성으로 제한돼 있어 남성인 아빠는 가입이 어렵다. 하지만 이제 아빠도 걱정 없다. 맘카페 아빠 버전(?)인 '100인의 아빠단(아빠단)'이 있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인구보건복지협회 지난 2011년부터 시작된 아빠단은 아빠 육아에 대한 긍정적 경험을 확산하고 함께하는 육아 실천 분위기 조성을 위해 시작된 대한민국 대표 아빠 육아 모임이다. 전북에도 아빠단이 있다. 보건복지부·전북특별자치도·인구보건복지협회 전북지회가 공동으로 추진하는 저출생 대응 인식 개선사업의 일환으로 전북에서 거주하는 3세∼9세 자녀를 양육 중인 아빠라면 누구나 신청이 가능하다. 아빠단은 매주 놀이·일상·건강·교육·관계 등 분야별 주간육아과제(미션)을 수행하면서 아이와 시간을 보내고 네이버 카페를 통해 아빠들만의 네트워크를 형성해 소통하고 있다. 맘카페처럼 활성화되진 않았지만 계속해서 육아 꿀팁 등을 공유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일명 맘카페가 아닌 대드카페다. 문득 전북에서 활동하는 아빠단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아빠단의 활동이 어떤지, 아빠들 간의 네트워크는 어떤지, 아빠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빠단 소속 아빠 2명을 만나봤다. "저도 아빠는 처음이라⋯." 장정현(45) 씨는 7살 아들, 3살 딸 쌍둥이를 키우는 삼남매 아빠다. 장 씨는 모임도 잘 나가지 않는 집-회사만 아는 사람이었다. 비교적 커뮤니티에 관심이 많았던 장 씨는 맘카페처럼 아빠들을 위한 공간이 없어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지난 2022년 와이프가 100인의 아빠단을 신청해 놓은 덕에 아빠단을 알게 됐다. "활동한 첫해는 몰랐어요. 2023년은 신청 시기를 놓쳐 못했고 지난해에 또 했는데 알겠더라고요. 진짜 대단한 아빠들이 많다는 걸요. 저도 가정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평범한 아빠였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많이 반성하고 배웠어요." 장 씨는 아빠단을 통해 좋은 자극을 받았다. 첫째 이어 둘째 때도 육아휴직을 쓰고 아이들과 잘 놀아 주는 등 가정적인 아빠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아빠들을 보니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본인이 느낀 만큼 주변 사람에게도 아빠단의 활동을 강력 추천하는 장 씨다. 이제는 아빠들만 모여 있는 단체 채팅방까지 들어가서 다른 아빠들과 네트워크를 이어가고 있다. 장 씨는 "처음에는 아빠들이 무엇을 한다는 게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만 해 보면 생각보다 별 거 없고 어렵지도 않다. 아이가 세 명이라 힘도 많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이들이 주는 행복은 그에 비해 수십 배가 넘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실 첫째 때 사정이 있어서 혼자 육아휴직을 쓰고 아들을 케어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밥 먹이고, 재우고, 청소하고, 밥 하고, 밥 먹이고, 재우고. 몸은 안 힘들어도 마음이 힘들고 외로웠다. 텔레비전 속 엄마들이 왜 우울증 걸리는지 알 것 같았다"면서 "만약 아내가 가정주부라고 할지라도 아빠들이 퇴근하고 나서도 같이 육아에 참여하는 게 중요하다. 해 보니까 알겠더라"고 조언했다. "제 삶은 완전히 달라졌어요." 최명호(43) 씨는 7살 딸과 함께 세상을 즐기며 성장하고 있다. 최 씨는 아빠단으로 활동 중이던 아내의 직장 동료를 통해 아빠단을 알게 됐다. 당시 매일같이 어떻게 하면 아이와 함께 재미있게 놀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던 터라 망설임없이 참여했다. "아빠단 중에서 다둥이 아버님, 아프리카로 출장을 가면서까지 미션을 올리시는 아빠들이 계세요. 이렇게 각자 어려운 상황에서도 아이들과 소통하는 아빠들을 보면서 많은 귀감이 됐어요. 가정 내 좋은 아빠들의 모습을 본받게 되는 것 같아요." 장 씨와 비슷하게 아이와 열심히 소통하는 아빠들에게서 좋은 자극을 받은 최 씨다. 특히 아빠단 미션 중 아이와 노는 미션, 아내와 함께 육아하는 미션 등을 통해 육아에 대한 힘듦과 보람 등을 공감하고 아내와 격려를 주고 받을 수 있게 됐다. 자연스럽게 가정 내 좋은 아빠들의 모습을 본받게 된 것이다. 최 씨는 "아이를 처음 품에 안은 순간부터 저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저에게 '아빠'라는 단순한 호칭이 아닌 삶의 방향을 바꾼 가장 큰 축복이자 정말 천국이 펼쳐졌다. 그래도 저도 왕초보에서 이제 막 초보가 된 아빠다"고 했다. 이어 "아빠들에게 당부드리고 싶은 건 아이와 단 둘이 보내는 시간을 두려워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함께 하려고 노력하셨으면 좋겠다. 주변 육아하는 아빠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많이들 엄마 없이 1박 하는 게 두렵다고 한다. 힘들지만 분명 좋은 추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두려워 하지 말고 도전했으면 좋겠다"고 격려했다.

  • 기획
  • 박현우
  • 2025.05.05 08:51

음식 팔아 기부하는 ‘천사’ 남원 초등학생들 사연은

남원에 있는 소규모 초등학교에 다니는 초등학생 4명이 2년째 직접 음식을 만들어 팔아 기부한 사연이 전해졌다. 뛰어놀고 공부하기도 바쁜 때지만 기부 첫 해는 음료를, 이듬해는 음식을 판매하면서까지 기부한 것으로 알려져 눈길을 끈다. 지난 2일 오전 9시께 찾은 남원 이백초등학교 6학년 1반 교실. 작은 교실에 덩그러니 책상 4개가 놓여 있다. 기부의 주인공 김민우·김예준·정의빈·진찬민(가나다 순) 학생의 책상이다. 인터뷰를 한다는 담임 선생님의 말에 "아, 저는 못 해요", "무슨 말을 해야 해요?", "할 말 없는데"라며 부끄럼을 탔지만 그것도 잠시 수다쟁이마냥 답변하기 시작했다. "2023년에 첫 기부를 했어요?" 진찬민 군은 "2년이 지나서 가물가물하다. 4학년 때 '사제 동행' 프로그램 하면서 담임 선생님이 음료를 팔아서 기부해 보자고 이야기했다. 그때는 선생님이 요청해서 아무 생각 없이 물품을 구입하고 호불호 없는 자몽·청포도 에이드를 만들어서 팔았다"고 설명했다. 정의빈 군은 "그때 '양심 기부통'을 만들었다. 음료 가격을 정하지 않고 학교 선배, 후배들이 저희가 만든 음료를 먹고 자유롭게 돈을 낼 수 있도록 했다. 그렇게 10만 원 정도 모아서 물품을 마련해 독거노인·취약계층에 전달했다"고 덧붙였다. 사실 이 4명은 2학년 때부터 5년째 같은 반이다. 단짝 친구처럼 잘 지내다 보니 기부를 하자고 했을 때도 의견 충돌 없이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모두 요리하는 것을 좋아해 직접 만든 음료·음식을 팔아 기부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학생들의 기부는 5학년이 돼서도 이어졌다. 4학년 때는 자의 반 타의 반, 선생님의 제안으로 기부를 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김예준 군은 "5학년 때는 매달 분식·잔치 등 콘셉트를 정해서 음식을 팔았다. 학교에서 음식을 판 돈으로 쌀, 휴지, 라면, 물티슈를 사서 기부했다. 5학년 올라오면서 공부를 많이 하다 보니 바로 기부를 못 했다. 그래서 조금 늦게, 지난 2월에 기부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번에는 선생님의 도움 없이 학생들끼리 기부하기로 결심했다. 어떻게 기부해야 할지 몰라 이백면장을 찾아가 면담을 신청한 학생들이다. 당시 면장에게 물품으로 기부하고 싶은데 기부가 가능한지, 독거노인·취약계층에 전달하고 싶은데 추천해 줄 수 있는지를 물어봤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기부하면서 느낀 감정은 대부분 '뿌듯함'이었다. 진찬민 군은 "친구들이랑 같이 기부를 하니까 더 친해질 수 있고 마음도 따뜻해졌다", 정의빈 군은 "직접 음료·음식을 만들어서 팔다 보니 힘들었지만 기부하니까 뿌듯했다", 김예준 군은 "요리하는 걸 좋아서 재미도 있고 기부 하니까 기분도 좋았다", 김민우 군은 "너무 뿌듯하고 친구들이랑 음료·음식을 만들어서 행복했다"고 했다. 앞으로도 시간만 허락해 준다면 기부하고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중학교 입학을 앞두게 된 만큼 공부를 놓을 수 없어 고민이 크다고 한다. 진찬민 군은 "또 기부 계획은 있지만 고민해 봐야 할 것 같다. 5학년 때 보니까 달마다 요리를 만들어야 하다 보니 수업 진도가 느리다. 그래서 더 힘들지만 기분이 좋고 마음이 따뜻해진다"고 전했다.

  • 기획
  • 박현우
  • 2025.05.05 08:51

[전북 이슈+] 행복은 나누면 배가 된다⋯"가족 같은 이웃 외면할 수 없죠"

서로 감사한 마음을 표현할 기회가 쏟아지는 5월, 가정의 달이 돌아왔다. 이달은 유독 따뜻한 소식이 많이 들리는 달이기도 하다. 본보도 가정의 달을 맞이해 <행복은 나누면 배가 된다> 3편의 기획을 마련했다. 소외된 이웃을 외면할 수 없어 동네 이웃끼리 봉사단을 만들어 반찬과 함께 따뜻한 정을 나누는 '사랑의 울타리' 봉사단, 서툴지만 행복한 육아 꿀팁을 나누고 틈틈이 아이와 시간 보내며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100인의 아빠단, 공부하고 뛰어 놀기도 바쁜 때지만 음식과 음료 팔아 주변 이웃에 물품을 기부하는 남원 이백초 6학년을 만나봤다. 해마다 어려운 이웃에게 반찬과 함께 따뜻한 정을 전하는 단체가 있다. 외환위기가 닥쳐온 1998년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지 못해 만들어진 봉사 단체, ‘사랑의 울타리’가 그 주인공이다. 사랑의 울타리는 전주시 덕진구에 거주는 지역민들로 구성됐다. 구성원들은 각각 식료품점 상인, 요리사, 회사원 등 다양한 직업과 환경을 가졌지만 소외된 이웃들을 외면할 수 없다는 공통된 마음 하나로 뭉쳤다. 그렇게 생활이 어려운 이웃들을 찾아가 밑반찬을 전달하고 말동무를 하기 시작한 지 27년이 흘렀다. 어느덧 봉사단 규모는 643명까지 늘어났다. 유찬 사랑의 울타리 회장 또한 10년 넘게 봉사단에 몸담았다. 유 회장은 “봉사 하는 사람도 봉사 받는 사람도 덕진구 사람”이라며 “그저 봉사단이 오가며 마주치는 이웃들에게 최소한의 안전망이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 시작됐다”고 봉사단 설립 취지를 설명했다. 지난 27년간 사랑의 울타리는 매년 다 함께 만든 김치, 나물 등 밑반찬을 주기적으로 소외 계층에 나눠주고 명절에는 음식을 만들어 제공했다. 주로 홀로 어르신, 한부모 가족 등 소외되기 쉬운 계층이 우선이었지만 올해부터는 어려운 환경에 놓인 아이들에게도 닿으려고 하고 있다. 최근 사랑의 울타리 봉사단원들은 어린 아이들을 위해 제과제빵을 배우고 있다. 10회차 수업을 등록해 30일 기준 6회차 수업에 접어들었다. 유 회장은 “우리 동네엔 아이들도 많은데, 그중에는 부모의 관심을 많이 받지 못하는 아이도 있다”며 “그런 아이들이 눈에 띄면 밥 한 끼 먹이고, 비 오는 날에는 우산도 쥐여주는 편이다. 그래도 더 맛있는 간식을 먹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사랑의 울타리는 매년 봉사하는 범위를 차츰 늘리려 하고 있지만 적극적인 봉사 확대는 힘든 상황이다. 시간이 갈수록 신입 회원 가입 신청은 줄어들고 기존 회원 또한 경제적 이유로 봉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가 늘었기 때문이다. 지원금 또한 끊겨 봉사 단원들이 음식 재룟값을 마련하기 위해 지역 축제에 참가해 모금하고 있는 상황이다. 유 회장은 “봉사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금과 사람이 필요하지만 지금은 둘 다 부족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금이야 우리가 벌면 되지만, 사람이 부족하면 봉사단 명맥이 끊길 수밖에 없다”며 “사랑의 울타리가 아니더라도 동네마다 봉사단이 있으니 관심을 가져달라”고 호소했다.

  • 기획
  • 문채연
  • 2025.05.04 12:17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43) 오면재 통유문, 구본협 상서, 박근순 소지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은 전체 185건이다. 이중에서 낱장으로 된 문서도 존재한다. 이번에는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소장하고 있는 <오면재 통유문>, <구본협 상서>, <박근순 소지> 등 낱장의 문서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문서들은 1894년 8월 또는 12월에 작성된 것으로 주로 동학농민군에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역민에게 보내거나 관에 제출한 문서들이다. 이 문서들을 통해 당시 유교적 소양이 있는 지식인들의 동학농민군에 대한 인식과 대응방식, 그리고 지역 상황 등을 알 수 있다. 오면재 통유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 오면재(吳勉宰) 통유문(通諭文) 이 문서는 전라도 능주군(현 화순군) 오면재(吳勉宰, 1825~1900)의 통유문(通諭文)이다. 이 문서는 3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양면 괘지 3쪽을 이어 붙여 양면에 필사한 것이나 중간에 누락된 부분이 있다. 맨 앞에 기록된 문서는 <갑오동요통유문(甲午東擾通諭文)>이다. 서두에 오면재의 이름이 있으나, 뒤에 기록된 글의 명의는 그의 아들인 향약장 오준상(吳晙庠) 외 42명의 이름으로 되어 있다. 뒷면에는 단발령에 반대하는 내용의 문서가 제목 없이 수록되어 있고 말미에는 <호암면향약소회맹문(虎巖面鄕約所會盟文)>이 있다. 문서의 형태로 보아 3건 문서의 필자는 오면재이고 후에 누군가가 필사한 것으로 보인다. 통유문은 갑오년(1894년) 8월 작성된 것으로 되어 있다. 오면재가 보낸 통유문의 내용은 능주 호암면 백성들에게 호소하는 내용으로 농민봉기에 대해 매우 논리적인 반박을 가하면서 전통적인 유림들의 충군애민 정신에 바탕하여 동학농민혁명 가담자를 회유하는 내용이다. 주된 논점은 동학도들의 봉기 원인은 관아의 수탈과 억압, 그리고 굶주림에 분개한 것이며 그들은 농민봉기가 성공하기 어려운 이유로 대오의 군기 문제와 무기의 빈약, 식량 부족 등 3가지를 들고 있다. 오면재는 다음과 같이 지역민들을 설득하고 있다. “그대들은 모두 이 나라에 태어나서 우리 임금의 백성 아닌 자가 없다. 집안을 화목하게 하고 처자식에게 자애롭게 해야 하는데 오늘날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천하에 나라가 수없이 많지만 의리 때문에 군신(君臣) 관계를 해치는 일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의로써 분별해 보건대, 오직 저 비류(匪類)들이 교화되지 못하고 창궐한 것은 큰 횡액을 틈타 조삼모사(朝三暮四)의 술책을 맘껏 부리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 결과 위로는 정사에 여념이 없는 임금께 걱정을 끼치고, 아래로는 백성을 침탈하는 해악을 자행하여 관가에서는 명령을 시행하지 못하고 백성은 안도하지 못하니, 무릇 혈기가 있는 자라면 누군들 분개하고 탄식하지 않겠는가.” 오면재는 성리학을 기반으로 구축된 조선왕조 체제와 사회질서가 무너져서는 안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한 인식의 기반하에서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전혀 인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오면재는 현재의 불안정한 상황은 동학농민군이 분수를 알지 못하고 준동하였기 때문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당시 많은 유교지식인의 일반적인 인식의 정도를 보여주고 있다. 다음으로 제목 없이 낙장된 글은 일자가 기재되지 않았으나 단발령에 반대하는 글이 포함되어 있다. 이 내용은 1895년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보여진다. 마지막으로 <호암면향약소회맹문>은 그 내용으로 보아 1904년 한일협약 이후에 봉기한 의병의 해산을 요구하는 내용이다. 면암 최익현이 쓴 오면재의 묘갈명(면암집)에 의하면 오준상은 오면재의 큰아들이다. △구본협(具本協) 상서(上書) 이 문서는 1894년 12월 전라도 능주군 한천면의 구본협, 구익모, 구혁모, 구전모, 구정모, 구달모, 구길모 등이 초토사 민종렬에게 올린 상서이다. 이 상서는 능주군 한천면에 향반으로 거주하는 구씨 문중이 호남 초토사인 민종렬에게 자신들이 동학농민혁명 당시 본분을 꿋꿋하게 지켰음을 말하고 보호를 요청하려 올린 문서이다. 이들은 1893년 봄부터 동학에 대응해서 향음주례(鄕飮酒禮)를 거행하고 향약(鄕約)을 실천하였으며 자신들이 이단을 배척하는 유학도임을 천명하면서 특별히 보호해 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이들은 상서에서 “그래서 이듬해 흉험한 저 동학 무리들이 대대적으로 들고 일어났을 때 비단 본면의 인사들이 삶과 의 가운데 어느 쪽을 택할지에 대한 판단을 일찌감치 내렸을 뿐만 아니라 저 무리들 또한 우리들을 협박해도 굴복시킬 수 없고 꾀어도 유인되지 않을 것임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본읍의 충신의 의에 충실하던 이들을 물들여 인류(人類)를 단숨에 쓸어 없애려 하여 저희들의 거처에까지 화가 미치니 저희는 도망쳐 떠돌며 갈 곳도 없이 지냈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긴 밤이 찾아들고 단단한 얼음이 언 것과 같았으니 그 누가 이를 위해 큰 자비를 베풀어 거센 파도를 막겠습니까? 다행히도 우리 합하께서 정성을 다해 나라에 보은하고 마음을 다해 백성을 보살피며 바름을 붙들고 이단을 배척하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아서 보루를 견고히 하고 적도들을 사로잡아 그 옛날 강회(강회)의 보장(堡障)이 아름다운 명성을 독차지하게 두지 않으신 덕에 뭍과 물에 도사리던 짐승들이 안개 걷히듯 사라졌습니다. (중략) …… 삼가 바라건데 합하께서는 중한 말씀을 아끼지 말아서 이 면의 규약이 오래도록 후세에 징험이 되게 해주소서. 천만 축원합니다. 분부를 내리실 일입니다. 초토사 합하는 처분에 주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민종렬 초토사는 “능주는 본래 의관 갖춘 선비의 고장으로 선비들이 모두 제사를 지내고 집집마다 모두 글을 외니 비록 까닭 없이 어지러운 시기를 만났으나 저들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았음을 이미 흠모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삼가 여러 군자들에게 크게 감사하는 바이다”라고 답해 주었다. <구본협 상서>는 우선 문중에서 작성했다는 특징이 있다. 문중 차원에서 문중을 보호하고 지역적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한 차원에서 이러한 문서를 작성해서 제출했다고 보여진다. 내용에 따르면 그들은 동학에 대해서 동조하지 않고 적대적이었으며 동학농민군을 피해 도망쳤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합하 즉 민종렬 초토사가 이들을 척결한 것에 대해 대단히 감사하다는 것을 피력하고 있다. 그리고 말미에 자신들이 만든 규약을 인정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이에 대해 민종렬 초토사는 인정한다는 취지의 답을 해주고 있다. 이 상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1894년 당시 조선사회가 동학농민군이 대규모로 농민봉기를 일으키는 상황이었지만 한편으로 기존 질서를 지키고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사회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향촌사회 단위 또는 문중 단위에서 관과 유기적으로 관계를 형성하고 이를 시스템화했다고 보여진다. 특히 동학농민혁명이 실패한 1894년 11월 이후 이러한 시스템은 더욱 강고해졌다고 할 수 있다. 박근순 소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박근순(朴根洵) 소지(所志) 이 문서는 1894년 12월에 수곡리의 박근순, 한기조, 성하주, 강석중, 하룡팔, 양익원, 유의영, 김기순, 성경구, 하현원 등 10명이 진주목사에게 올린 소지이다. 진주목 관할 아래에 있는 수곡리의 주민들이 관군과 일본군이 진주와 하동 일대에서 농민군을 공격할 때 물자를 협조한 일이 있었다. 이곳 농민군들은 1894년 여름 수곡장터에 모여 대대적인 집회를 가지고 진주목을 점령하려 했다. 그때 부산에서 통영으로 상륙한 일본군과 경상감영의 판관인 지석영이 이끌고 온 감영군이 합동으로 농민군 토벌에 나서 하동 고성산성에서 접전을 벌였다. 이때 농민군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뒤 그 경비의 분담금을 두고 수곡리(현재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와 이웃 마을인 북평리(현재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사이에 분쟁이 일어난 것이다. 수곡리에서 북평리에 비용 중 절반을 분담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북평리에서 ‘전례없는 규례이다’라고 하면서 거부하였다. 이에 대해 수곡리에서는 진주목사에게 이를 해결해 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다. 이에 대해 진주목사는 “과연 힘을 합쳐 방어하였으니 방어할 때 들어간 비용은 나누어 담당하는 것이 옳지만, 그 외 다른 비용은 절대 침탈하지 말도록 면에서 일괄적으로 기별할 일.”이라고 하여 수곡리의 입장을 들어 일부 주었다. 이 소지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선 경상도 남서부 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하였다는 것이다. 이 문서를 통해 보면 경상도 진주, 하동, 함안, 고성 지역까지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있었고 이에 대해 향촌 사회 단위로 동학농민군에 대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문서에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고 토벌하는 비용을 조선정부가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백성들이 담당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소요되는 비용을 지역별로 할당하고 자체적으로 담당하고 있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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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5.02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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