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5-11-04 23:30 (Tue)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기획

[작지만 강한 우리 마을] ⑥천왕봉 품은 정겨움과 치유의 마을 '솔바람'

전북 남원시 덕과면 솔바람권역. 천왕봉 자락에 기대어 율천천이 흐르는 이 마을은 마치 동양화 한 폭 같다. 비촌·양선·작소·도촌·만동 등 5개 마을로 구성된 이곳은 정감 어린 공동체와 정겨운 풍경으로, 한번 찾은 이는 다시 오고 싶어 하는 마을이다. 고즈넉한 자연과 따스한 사람 냄새가 조화를 이루는 이곳은 그 이름처럼 바람결에 솔향이 실려오는 곳이다. 전형적인 배산임수형 마을인 솔바람권역 마을 뒤로는 산이, 앞으로는 율천천이 흐른다. 국도 17호선과 14호선이 교차해 접근성도 뛰어나다. 위치상 남원시의 북쪽 관문에 해당하며, 임실 오수와도 가까워 교류도 활발하다. 이런 입지 덕분에 사람 살기 좋은 마을로 꼽힌다. △ '치매 없는 마을'을 향한 따뜻한 연대 5개 마을이 힘을 합쳐 누구나 살고 싶어 하는 마을로 거듭난 덕에 귀농귀촌해 오는 외부인이 늘어 지난 2020년 130명이었던 인구가 현재 200명으로 증가했다. 마을 주민들의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태도, 그리고 공동체 정신이 더해진 결과다. 솔바람마을의 비전은 분명하다. ‘치매 없는 마을’, ‘귀농귀촌하기 좋은 마을’, ‘아이들이 태어나는 마을’이 되는 것. 이를 위해 주민들은 1년에 두 차례 견학을 다니며 끊임없이 배우고, 서로 돕고, 협력해왔다. “서로의 협력으로 솔바람마을이 한 걸음씩 나아간다”는 소영호 마을위원장의 말처럼, 작은 일도 함께 의논하고 결정하며 마을을 가꿔간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노노돌봄센터'다. ‘노인이 노인을 돌본다’는 철학 아래 조성된 이 공간은 단순한 복지시설을 넘어, 삶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의 거점이다. 마을 어르신들은 이곳에서 교육과 건강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몸과 마음의 활력을 되찾는다. 복지의 틀 안에만 갇힌 돌봄이 아니라, 마을의 품 안에서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는 돌봄이다. 맑은 공기만큼이나 따뜻한 정이 흐르는 이 마을은 도시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고령화 시대를 살아간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이기에 가능한 삶. 솔바람권역은 공동체 기반의 돌봄을 통해, 지방소멸 시대 농촌이 나아갈 새로운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 △ 주민이 주인공이 되는 축제, '솔바람축제' 매년 11월 솔바람권역에는 동절기 찬바람을 이겨내는 웃음소리와 노랫가락이 가득한 날이 찾아온다. ‘솔바람축제’는 농림축산식품부의 공모사업으로 시작된 마을축제로, 기획부터 준비, 운영까지 모든 과정을 주민들이 주도한다. 외부 공연단을 불러 모으는 축제가 아닌, 마을 어르신들이 직접 민요를 부르고, 주민들이 만든 전통놀이와 아이들의 보물찾기, 어르신들이 참여한 시화전 등 우리 손으로 만든 프로그램들로 채워진다. 올해로 5년째를 맞는 솔바람축제는 이제 단순한 마을잔치를 넘어,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행사로 성장하고 있다. 소박하지만 진심이 담긴 이 축제는 귀농귀촌을 고민하는 도시민들에게 마을을 소개하는 살아있는 브로슈어이자, 농촌에서도 즐거운 삶이 가능하다는 증거가 된다. ‘농촌은 지루하다’는 편견은 이곳에서 무너진다. 축제는 이제 이 마을의 철학과 정체성을 가장 따뜻하고 진솔하게 보여주는 무대다. 주민이 주인이 되는 축제, 그 자체가 솔바람권역의 공동체 정신을 오롯이 담아내고 있다. △ 역사와 문화가 흐르는 일상, 자연이 품은 예술 솔바람권역은 문화유산도 풍부하다. 호암서원은 임진왜란 진주성 전투에 참가하지 못한 울분을 품고 은둔했던 매헌 소삼복을 기리기 위한 정자로, 300년 넘은 소나무가 서 있어 역사성과 경관이 모두 살아있다. 문류정은 조선시대 유림들의 제향 공간으로, 마을의 유서 깊은 뿌리를 상징한다. 이외에도 시비공원, 오종문, 솔바람공원 등 마을의 곳곳에 문화적 자취가 살아 숨 쉰다. 또 주민들이 직접 운영하는 체험 프로그램도 다양하다. 허브제품 만들기, 꽃차와 꽃 음식, 김부각과 떡메치기, 도자기 체험 등은 이 마을의 특색 있는 교육 콘텐츠이자 관광자원이다. 무엇보다 이 모든 과정에 주민들의 재능기부와 협력이 있다. 마을은 이제 누가 지원해주는 수동적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문화를 기획하고 실행하는 주체로 변화하고 있다. △ 마을은 결국 사람, 주민이 곧 정책 최근 솔바람권역이 주목하는 비전은 ‘경관을 통한 관광 자립’이다. 천왕봉이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고, 율천천이 사계절 맑게 흐르는 이곳은 그 자체로 한 폭의 풍경이다. 이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숙박, 체험, 역사·문화 콘텐츠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지역 기반 관광의 새로운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마을을 마을답게, 그러나 시대에 맞게 가꿔온 전략이 이제 ‘경관 중심 관광’이라는 해답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과정의 중심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다. 마을회관부터 쉼터 정자 하나까지, 공동체 규약을 바탕으로 주민들이 함께 만들고 함께 관리해왔다. 갈등이 생기면 마을 안에서 논의해 해결하고, 주민 교육을 반복하며 스스로 역량을 키워가는 문화는 오랜 시간에 걸쳐 자연스럽게 뿌리내렸다. 실패한 마을도 찾아가 배우고, 성공한 마을과는 노하우를 나누며 교류해온 이들은 ‘행정이 아닌 주민이 주체’라는 철학을 실천해왔다. 그래서 이 마을에서는 정책보다 사람이 먼저이고, 방향보다 삶의 태도가 더 중요하다. 최근에는 귀농귀촌을 희망하는 도시민들이 솔바람권역의 삶을 체험하기 위해 이 마을을 찾는 경우도 늘고 있다. 직접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들이 마을의 공동체 정신과 자연환경에 감동받아 실제 정착을 결심하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솔바람마을은 이제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도시인의 삶에 전환점을 제시하는 ‘삶의 제안서’가 되고 있다. 소영호 위원장은 “소나무 사이로 햇살 담은 바람이 부는 마을, 포근한 햇살과 맑은 물, 그리고 이웃 간 정이 흐르는 마을이 바로 솔바람권역입니다”라며 “언제든지 따뜻한 미소로 여러분을 반갑게 맞이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 기획
  • 이준서
  • 2025.08.03 15:03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55) 전라도각읍소획동도수효급장령성명병록성책(全羅道各邑所獲東徒數爻及將領姓名並錄成冊)

1895년 1월 나주초토사 민종렬(閔種烈, 1831~1899)이 작성한 「전라도각읍소획동도수효 급장령성명병록성책(全羅道各邑所獲東徒數爻 及將領姓名並錄成冊)」은 전라도 각 군현에서 체포한 동학농민군의 수와 공을 세운 장령의 성명을 적어 정부에 보고한 문서이다. 1894년 12월에는 「전라도 각읍에서 잡은 동도 수효와 빼앗은 물건을 기록한 「전라도각읍소착동도수효 급소획즙물병록성책(全羅道各邑所捉東徒數爻 及所獲汁物幷錄成冊)」을 작성했는데, 두 문서 모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전라도각읍소획동도수효급장령성명병록성책 1 광양 무장 부안.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제공 민종렬은 1870년대에서 189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삼남의 주요 고을을 다스린 뛰어난 지방관이었다. 의금부 도사와 형조정랑을 거친 그는 중앙 정계의 배경도 든든하였다. 형조판서와 병조판서, 그리고 한성판윤을 역임한 민종묵(閔種默, 1835~1916)이 동생이었다. 그는 충청도 노성과 현풍현감, 경상도 양산군수와 밀양부사를 거쳐 상주목사를 지낸 다음 전라도 남원부사에 이어서 나주목사를 지낼 때 동학농민혁명을 맞는다. 전봉준 장군이 1차봉기시 전주성에서 물러나 나주목사 민종렬을 찾아가서 담판했지만 결국 나주에 집강소를 설치하지 못한 일화가 널리 알려졌다. 신임 전라감사 김학진이 동학농민군의 압력을 받아 민종렬을 나주목사에서 이직시키려고 했으나 나주의 여론이 강력히 반발해서 실패하였다. 동학농민군이 재봉기하자 나주성을 지켜낸 민종렬은 9월 29일에 호남소모사를 겸임했고, 10월 28일에는 전라도 서부 고을에서 동학농민군 진압을 책임지는 호남초토사를 겸임했다.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가 남하해서 나주성에 본부를 두고 있을 때 전라도 일대에서 대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호남초토사 민종렬은 대대장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 1942~1921) 소좌의 지시를 받았다. 경군 파견부대와 지방군의 지휘권을 장악한 미나미 소좌는 “장흥 강진 부근 전투 이후로는 많은 비도를 죽이는 방침을 취하였다. 필경 이는 소관(小官) 한 사람만의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훗날에 재기할 가능성을 제거하기 위해 다소 살벌하다는 느낌을 살지라도, 그렇게 하라는 (이노우에 가오루)공사와 사령관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당시 기록을 보면 해남 250명, 강진 320명, 장흥 300명, 나주 230명이 살육되었다. 그리고 함평 무안 영암 광주 능주 담양 순창 운봉 장성 영광 무장에서는 각각 30명에서 50명을 처형했다고 한다. 희생자 수를 대략만 기록할 만큼 마구 학살한 것이다. △전라도 각 군현의 잔여 학살과 체포 기록 「전라도각읍소착동도수효 급소획즙물병록성책」과 「전라도각읍소획동도수효 급장령성명병록성책」은 일본군이 서울로 돌아간 뒤에 호남초토사 민종렬이 여러 군현과 역(驛) 및 진(鎭)에서 동학농민군 가담자를 체포해서 처분한 내용을 각각 1894년 12월과 1895년 1월에 보고받은 기록이다. 보고한 군현과 역진은 광양 무장 부안 금구 장성 능주 남평 만경 동복 함평 보성 무주 법성진 벽사역 경양역 임자진이다. 당시 동학농민군은 일본군과 경군에 밀려서 흩어진 후에 사방의 피신지를 찾아 숨었다. 이 기록을 보면 일본군이 붙잡은 동학농민군을 압송해 가거나 경군 좌선봉 이규태와 우선봉 이두황이 넘겨받아서 처형한 사실이 나온다. 또 활동 근거지로 압송한 사례가 나온다. 부안에서 잡은 곽덕언은 고부로 보냈고, 무주에서 잡은 송석준 등 3명은 금산으로 보냈다. 거점이었던 군현으로 압송한 것이다. 기세가 꺾인 각 고을의 동학농민군 지도자는 해당 군현의 관아와 민보군이 체포하고 있다. 이른바 거괴나 비괴를 지목해서 붙잡아 들인 것이다. 호남토포사 민종렬은 이들을 엄중히 조사해서 실상을 파악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1894년 12월 기록은 처참한 상황을 전하고 있다. 광주 담양 동복 창평 화순 함평 무안 능주 영광 옥과 무장 남평 고창 나주 등에서 보고한 체포와 처형 보고는 전율할 내용이 나온다. 동복에서만 220명을 체포해서 157명이 포살했다는 것이다. 각 고을의 보고에는 죽은 원인이 장살(杖殺) 포살 효수 옥중자살 압송중사망 등이라고 했다. 때려 죽이고, 쏘아 죽이고, 목 잘라 죽이고, 감옥에서 참지 못해 스스로 죽고, 압송하다가 죽었다는 것이다. 이 밖에 각 고을에서 옥에 가둔 사람이 여러 명에서 수십 명이라고 하는데 이 중 많은 수가 처형되었으나 기록조차 없다. 일본군이 나주에서 떠난 이후의 보고 문서이기 때문에 미나미 소좌나 경군이 보고한 학살자 수에 이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호남초토사 민종렬이 남긴 문서들 전라도 일대에서 동학농민군을 최대로 추적한 인물이 김학진 이후 내려온 신임감사 이도재였다. 그러나 이도재가 남긴 문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정부에 보고하거나 감영에 보관된 문서는 인멸되었다. 호남초토사 민종렬이 생산한 문서도 대부분 없어졌으나 서목 9건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894년 11월 29일 나주 수성군 몇천 명에 대한 보고 △1895년 1월 13일 동학농민군 진압에 공을 세운 장령 보고 △1895년 1월 24일 호남 각읍에서 동학도 체포의 공로자들에 대한 포상 △1895년 1월 24일 전순무영 별군관 김윤창의 공로 보고 △1895년 2월 14일 나주 우영장이 10개월 동안 수성군을 지휘해서 공로에 대한 포상 △1895년 2월 14일 장흥 최신동 문공진 이득춘 이인환, 광주 백정 치성, 함평 장공삼 김달매, 능주 한달문 등 처형 보고 △1895년 2월 14일 각읍에서 동학농민군 체포에 공을 세운 명단 보고 △1895년 2월 15일 부안 진사 이병로가 군수미 200석을 원납한 성의 보고 △1895년 4월 15일 전현감 손웅설과 양반 현덕종에 대한 공로 포상 신영우 충북대 명예교수

  • 기획
  • 기고
  • 2025.07.30 19:29

유희태 완주군수 "완주·전주 통합 주민투표 앞서 여론조사로 군민 뜻 정확히 확인해야"

완주-전주 행정통합 문제가 완주 지역사회의 블랙홀이 되고 있다. 유희태 완주군수는 통합이라는 하나의 이슈에 갇혀 군민의 삶을 바꾸는 본질적 논의들이 뒷전으로 밀리는 점이 안타깝다고 했다. 행정통합 관련, 유 군수는 주민투표에 앞서 객관적 여론조사를 먼저 한 후 반대가 많으면 통합 절차를 중단해야 한다는 게 기본 입장이다. 유 군수의 입장이 통합의 찬반이 아닌, 절차적 문제를 제기하는 까닭에 찬반 양측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기도 하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완주-전주 통합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민선 8기 들어 통합 문제가 가장 큰 갈등 요인으로 떠오르면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낍니다. 완주는 지금 수소경제, 정주여건 개선, 인구 10만 달성 등 중요한 전환점에 있습니다. 행정 통합이라는 블랙홀에 모든 에너지가 빨려들어가 버린다면, 군민 모두가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통합을 ‘밀어붙일 때’가 아니라 ‘바로 볼 때’입니다. 감정이나 정치로 접근할 문제가 아니라, 군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차원에서 철저히 군민 입장의 이해득실을 따지고, 군민의 뜻을 정확히 확인해야 할 시점입니다." -전북도와 전주시, 전주 정치권 등에서 통합 필요성에 한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통합 문제에 대응하는데 어떤 점이 가장 어려운지. "가장 어려운 점은 ‘통합이 곧 정답’이라는 인식이 일방적으로 퍼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행정통합은 단순한 조직개편이 아니라, 주민의 삶과 지역 정체성, 자치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중대한 사안입니다. 그런데도 통합의 필요성만을 주장하며 전북도와 전주시, 정치권에서 여론을 몰아가고 있는 상황은 매우 불공정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대광법, 2036 올림픽 유치, 피지컬AI 사업 등 통합과 직접적 연관이 없는 현안들까지 통합 논리로 엮고 있습니다. 이런 방식은 오히려 군민의 신뢰를 떨어뜨리고, 공론화의 진정성을 의심케 합니다. 자칫하면 지역사회 전체가 진영논리로 갈라지는 부작용만 키울 수 있습니다. 저는 일관되게 ‘군민의 뜻이 먼저’라는 원칙을 지켜왔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논의 구도는 ‘통합을 반드시 해야한다’는 구조로만 흘러가고 있어, 균형 있는 시각을 유지하는 데 큰 어려움이 있습니다. 상호 존중이 전제되지 않는 통합 논의는 결국 지역 갈등만 키우고, 전북의 발전에도 장애가 될 것입니다." -김관영 도지사가 완주 주민이 돼 찬성 활동을 하고 있으며, 완주군의회 의원들이 반대 활동으로 맞서고 있습니다. 어떻게 바라보는지. "전북도지사로서의 입장과 개인적 신념을 바탕으로 통합의 필요성을 주장하시는 김관영 지사님의 말씀은 이해하지만, 동시에, 완주군의회 의원들께서 군민 다수의 우려를 대변하며 반대 활동에 나선 것도 지방의회 본연의 역할과 책임에 따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 사안에 대해 김관영 지사님께 ‘모든 결정의 주체는 결국 군민이며, 군민의 뜻이 최우선’이라는 완주군의 일관된 입장을 전달드린 바 있습니다. 아울러 통합에 앞장서는 모습이 자칫 일방적 추진으로 비칠 수 있는 점을 우려하며, 도민과 완주군민 모두로부터 사랑받는 광역단체장의 이미지가 훼손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씀도 함께 전했습니다. 지금 이 문제는 다양한 이해와 입장이 첨예하게 맞서 있는 사안인 만큼, 특정한 목소리가 일방적으로 부각되는 것보다는 서로의 관점을 존중하며 공론화의 균형을 맞추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저는 군정의 책임자로서 주민의 목소리가 가장 먼저 존중받는 구조와 절차를 마련하는데 집중하고자 합니다." -완주-전주 통합에 대해 찬성 반대 어느 쪽인지 분명한 입장 표명이 없어 찬반 양측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찬반 견해를 밝히지 않는 이유는. "완주-전주 통합은 단순히 지자체 간의 경계를 바꾸는 문제가 아니라, 군민의 삶의 터전과 정체성, 자치권의 미래가 걸린 중대한 사안입니다. 그러므로 행정의 책임자로서 이 사안을 찬반으로 재단하기보다, 군민의 뜻이 충분히 수렴되고 반영되는 공정한 절차를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행정이 성급하게 찬반 입장을 먼저 정해버리면, 공론화의 과정 자체가 편향되고 갈등이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저는 다양한 의견이 충돌하더라도 서로의 입장을 경청하고 조정하며, 군민 스스로 최종 선택을 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것이 군수로서의 책무라고 봅니다. 찬반 양측의 목소리를 모두 경청하되, 감정적 대립을 부추기기보다는 절차적 정당성과 주민 주권을 지켜내는 데 집중하겠습니다." -주민 의견수렴이 우선이라고 하지만, 찬반이 갈리는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주민 모두의 충분한 공감대를 얻기 어렵지 않을까요. "지역사회에서 의견이 첨예하게 갈릴수록 모든 주민의 공감대를 완전히 얻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절차적 정당성과 공론화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갈등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갈등을 투명하고 성숙한 방식으로 조정해 나가기 위해 ‘주민 의견수렴’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충분한 정보 제공과 다양한 방식의 의견 청취, 그리고 무엇보다 군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되어야만 비로소 공동체적 합의에 다가설 수 있다고 봅니다. 일방적인 추진이나 정치적 프레임이 아닌, 군민의 삶과 미래에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방향이 무엇인지 깊이 성찰하며, 그 판단의 주체 역시 주민이어야 한다는 것이 확고한 입장입니다." -전주시와 공동으로 행정안전부에 여론조사 실시를 건의하자고 요청하기도 했는데 가능하다고 보는지.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주민투표까지 가는 것은 지역사회를 더욱 깊은 갈등으로 몰아넣을 수 있습니다. 주민 여론조사를 통해 완주군민 반수 이상이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한다면, 그 자체로 통합 추진은 중단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민의 뜻이 가장 중요하다는 원칙은 단순한 명분이 아니라, 정책의 정당성을 결정짓는 기준입니다. 여론조사는 그 민의를 가장 빠르고 객관적으로 확인할 방법입니다. 실제로 2009년에도 행정안전부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반대 64.2%, 찬성 35.8%라는 결과가 나오며 통합이 무산된 사례가 있습니다. 2013년도에도 여론조사를 통해 찬성이 52.2%로 나오면서 주민투표를 진행했지만, 결과적으로 반대 55.3%, 찬성 44.7%로 나오면서 통합은 무산되었고, 완주군의 갈등과 균열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주민 간의 대립과 상처는 지금까지도 공동체 화합에 큰 걸림돌로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전례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여론조사는 통합 여부를 결정하기에 앞서 주민의 민의를 확인하고,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과 갈등을 줄이는 데 반드시 필요한 절차입니다." -전북도는 통합을 이루면 전주올림픽 유치, 대광법 통과에 따른 간선도로 확충, 새 정부 출범으로 특례시 지정 등으로 전북이 도약할 발판이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완주군 발전에도 도움이 되는 것 아닌지. "통합이 전주올림픽 유치, 대광법, 피지컬AI 사업, 특례시 지정 등 대형 프로젝트의 전제조건인 것처럼 주장하고, 대형 사업들의 성공을 위해 마치 통합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이분법적 접근은 매우 위험합니다. ‘통합만이 해답’이라는 전제 아래 정책을 설계하고 여론을 주도하는 것은, 군민의 합리적인 판단을 가로막고 오히려 지역 내 불신과 갈등을 확대하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 언론에서 완주가 통합에 협조하지 않으면 전북 전체의 발전을 가로막는 주체가 되는 것처럼 왜곡하고 있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국책사업의 중대한 과제가 흥정의 대상이 되고, 군민 여론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왜곡되는 상황은 지방자치의 근본 취지에도 어긋납니다. 대형 사업의 유치 여부는 그 자체의 타당성과 전략, 정부의 정책적 우선순위에 따라 결정돼야 할 사안이지, 특정 지역의 행정통합 여부에 따라 좌우될 사안이 아닙니다." -찬성 측이 제시한 105개 상생발전 방안을 수용하지 않겠다고 하셨는데, 그 이유는. "105개 상생발전 방안은 권한없는 특정 민간단체에서 일방적으로 만들어진 문서일 뿐, 사전에 완주군과 충분한 논의나 협의 과정을 거친 결과물이 아닙니다. 군민의 입장에서는 그 내용을 처음부터 검토할 기회조차 없었고, 당연히 신뢰할 수 있는 실현 가능성에 대한 검토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일방적으로 발표되었고, 군민들은 그 내용을 사후에 언론 등을 통해 접하게 됐습니다. 내용과 절차 모두에서 군민을 배제한 채 추진된 계획은 신뢰를 얻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해당 방안 전 항목 자체가 실질적인 실행계획이나 재원 마련 방안이 전무합니다. 예를 들어, 통합 시 가장 민감한 쟁점 중 하나인 ‘통합청사’ 문제에 대해서도 선언만 있지 아무런 계획도 제시되지 않았습니다. 더 큰 문제는 통합청사를 완주에 건립하겠다는 방안이 정작 전주시민들 사이에서도 충분한 공감대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현 전주시청이 위치한 서노송동 일대 주민들은 청사 이전에 따른 지역 공동화에 대한 우려가 매우 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지금까지 통합지역에 청사를 건립한 사례는 없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과거 이리시-익산군 통합 당시에는 익산군의 함열에 통합청사를 짓겠다는 약속이 있었지만 이행되지 않았고, 청주-청원 통합 사례에서도 청주에 통합청사를 별도로 건립하지 않았습니다. 여수-여천시-여천군 통합에서도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주민들은 소외감과 불신을 겪어야 했습니다." -전북도는 특별법을 만들어 상생발전안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으나 군수님은 비현실적이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전북도와 전주시는 특별법 제정을 통해 상생발전 방안을 보장하겠다고 하지만, 법률이 만들어진다고 해서 곧바로 재정이 따라오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 전주시는 전북 지역에서 지방채 규모가 가장 큰 자치단체입니다. 2024년 기준 전주시의 지방채는 4,653억, 올해는 6,000억 원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는 완주군보다 무려 14배나 큰 규모입니다. 전주시는 과도한 채무가 누적돼 있고, 이로 인해 자체 재정 여력이 심각하게 제약받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완주와의 통합 이후 수천억 원 규모의 통합청사 건립, 광역교통망 확충, 문화·체육 인프라 투자 등을 이행하겠다는 상생발전안이 과연 현실적인지 되묻게 됩니다. 지방채가 이미 과중한 상황에서, 새로운 대형 사업을 감당할 여력은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전주시는 ‘지방세 수입으로 충분히 감당 가능하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지만, 이는 단순한 수치상의 기대일 뿐입니다. 실제로는 민생예산을 대폭 줄이거나 현재 추진 중인 대규모 사업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상환이 어려울 것입니다. 법률로 보장한다고 해도 예산이 수반되지 않으면 실현은 불가능합니다. 정치적 선언과 법률 제정보다 우선해야 할 것은 구체적인 재정계획과 실행 가능한 구조라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막대한 부채 부담을 안고 있는 전주시와의 통합은 완주군 재정에도 심각한 위험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와 비슷했던 청주-청원이 통합으로 획기적 지역발전을 이뤘다는 평가가 나오는데. "청주-청원 통합은 성공 사례로 자주 언급되지만, 실제 지역발전의 핵심 동력은 통합 그 자체가 아닙니다. 청주 발전의 결정적 계기는 오송바이오밸리 조성과 오송역(KTX·SRT) 개통 등 통합 이전부터 체계적으로 추진된 국가 산업 전략과 대규모 인프라 투자였습니다. 정부의 장기적인 바이오산업 육성 정책, 산·학·연·병·관 클러스터 구축, 보건의료 6대 국책기관 입주, 충북도의 지속적인 정책 지원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오송을 중심으로 한 개발이 가속화됐습니다. 즉, 오늘날 청주의 성장은 행정통합의 결과가 아니라, 국가가 전략적으로 집중 투자한 결과이며, 이는 통합 없이도 충분히 가능했던 발전입니다. 더군다나 구 청원군 지역은 인구가 감소하고, 쓰레기 매립장·소각장 등 기피시설이 집중되는 등 여전히 소외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통합의 본래 취지였던 균형 발전은 충분히 실현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통합 반대가 주민 뜻과 별개로 완주군 기득권 세력의 기득권 상실을 우려한 때문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완주군과 전주시는 1997년, 2009년, 2013년 세 차례에 걸쳐 통합 논의를 추진했지만 모두 무산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드러난 공통된 결과는, 군민 다수가 통합에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혀왔다는 점입니다. 이는 단순한 감정이나 기득권 때문이 아니라, 주민들이 실제로 느끼는 삶의 변화와 손익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판단이었습니다. 주민들이 수동적으로 따라온 것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 온 과정이었습니다. 이번 4번째 통합 논의가 주민들로부터 시작됐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2022년 지방선거에서 김관영 도지사와 우범기 전주시장이 통합을 공약으로 내세운 것이 본격적인 시작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정치권 중심의 논의가 형성됐고, 지역사회 내부 갈등도 함께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기득권이라는 프레임으로 주민 뜻을 왜곡하기보다는, 군민이 왜 통합을 원치 않는지 그 진짜 이유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통합 찬반측이 통합의 장단점을 일방적으로 발표하면서 공론의 장이 미진한 데 대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통합을 둘러싼 찬반 논의가 일부 단체나 정치권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고, 그 과정에서 객관적인 정보 제공이나 균형 잡힌 토론보다는 일방적인 주장과 감정적 대립이 앞서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에 완주군은 현재 통합 논의와 관련해 주민들께 보다 정확하고 균형 잡힌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자 합니다. 현재 ‘완주-전주 통합 찬·반 바로 알리기’ 간담회 등을 통해 통합의 실질적인 내용과 향후 영향을 군민들께 상세히 알리고, 다양한 의견을 청취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다양한 채널을 활용해 통합 관련 주요 쟁점, 재정 문제, 생활권 변화 가능성 등에 대한 객관적이고 검증된 정보를 지속적으로 안내할 것입니다. 앞으로도 찬성과 반대, 양측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정치적 논리보다 지역의 미래와 군민의 삶에 기반한 경제적 논리로 대화할 수 있는 공론의 장을 적극적으로 만들어가겠습니다." -행정안전부가 통합 절차를 진행할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결국 주민투표로 갈 전망인데, 주민투표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주민갈등과 후유증을 최소화하는 방안과 대책을 세우는 게 현실적이지 않을지. "통합은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닙니다. 주민 삶의 터전과 정체성이 바뀌는 중대한 사안입니다. 완주군은 1997년, 2009년, 2013년 세 차례에 걸쳐 통합 논의가 있었고, 그 과정에서 극심한 지역 갈등과 후유증을 겪어야 했습니다. 당시에 발생한 주민 간 대립과 공동체 분열은 지금도 일부 상처로 남아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주민투표는 형식상 공정해 보일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반목, 감정의 골은 결국 완주군민들이 또다시 고스란히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지역 공동체의 분열은 단순히 투표 이후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아픔과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이에 완주군은 주민갈등과 후유증을 최소화하기 위해, 일정한 공론화 기간을 두고 통합의 찬반을 놓고 다양한 분야에서 깊이 있는 토론과 숙의가 이뤄지길 바라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 문화, 예술, 스포츠 등 생활과 밀접한 영역에서 다양한 주체들이 참여하는 열린 토론회를 통해 군민들이 충분히 정보를 접하고 의견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공론화 과정을 거친 후, 행정안전부가 주관하는 신뢰할 수 있는 방식의 여론조사를 통해 군민의 뜻을 정확히 확인해야 하며, 만약 반수 이상이 반대 의사를 표명한다면 주민투표는 중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주시와 통합하지 않고 완주군 자체로 더욱 발전할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한다면. "완주군은 올해 5월 주민등록인구 10만 명을 넘어서며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숫자의 회복이 아니라, 완주군의 성장 가능성을 보여주는 결과입니다. 테크노밸리 제2일반산업단지는 12년간의 긴 여정을 거쳐 올해 3월 최종 준공되었고, 분양률은 97.6%에 달합니다. 현대차 전주공장을 중심으로 수소상용차 산업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으며, 수소버스, 충전소, 생산기지 등 수소 전주기 인프라를 선도적으로 확보했습니다. 여기에 그린수소 클러스터, 수소특화 국가산단 유치, 탄소중립 R&D센터 등 국가사업과도 적극 연계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기반 위에서 완주군은 GRDP 전국 군 단위 1위, 행복지수 1위 도시라는 중장기 목표를 세우고 ‘행복경제도시 완주’라는 비전을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 기획
  • 김원용
  • 2025.07.29 18:42

우범기 전주시장 “완전통합, 한쪽이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양쪽이 빠른 속도로 발전할 기회”

일제강점기 행정 개편으로 갈라진 뼈아픈 역사를 가진 전주시와 완주군. 그것을 잇기 위한 노력이 다시 시작됐다. 지난 1998년 완주군의회의 반대로 통합이 무산된 이후 4번째 시도이자, 횟수로 27년 만에 찬·반 의견을 묻는 것이다. 특히 민선 8기 첫 공약으로 완주·전주 통합을 제시한 우범기 전주시장은 상생 협력사업 등을 내세우며 추진을 위한 행보를 하고 있다. 그러나 유희태 완주군수를 비롯한 다수의 완주군민들은 통합 반대를 외치며 반발하고 있다. 이에 본보는 우 시장과 유 군수를 차례로 만나 각각의 입장을 들어봤다. 민선 8기 첫 번째 공약으로 완주·전주 통합을 제시하셨습니다. 양 지역의 통합은 왜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완주와 전주는 하나의 생활권이라고 생각합니다. 행정구역은 사람의 활동반경이 되는 생활권을 중심으로 그려져야 맞습니다. 양 지역 주민은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오랜 세월 동안 같은 행정구역 아래 이웃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래야만 도시의 성장동력이 지속한다고 생각합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전북의 대표도시인 전주는 외연 확장에 한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청년 유출과 인구감소, 자영업 비중이 지나치게 높은 경제구조 등 곳곳이 지뢰밭과 같습니다. 당장은 아니지만 그 파장은 완주로 파고들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말하는 통합의 효과는 현세대를 위한 일이라기보다 우리 미래세대가 이 땅을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는 토대를 만들기 위한 필수적인 사항이라고 생각해 추진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전주의 성장동력을 찾기 위해 완주와의 통합을 추진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도 있겠습니다. “통합하면 어느 한쪽이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양쪽 다 지금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발전할 기회가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행정통합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해 왔습니다. 대전시와 대덕군이 통합해서 옛 대덕군의 행정구역이 중심지가 됐고, 광주시도 광산군과 통합해 과거 광산군 지역에 첨단 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광주의 중심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완주와 전주가 통합하면, 20년, 30년 후 아마도 현재 삼례와 봉동을 비롯해 만경강 주변이 완주·전주의 중심으로 변모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완전통합 결정권은 사실상 완주군민에 의해 좌우됩니다. 그러나 군민들 다수는 “전주시의 말만 믿을 수 있겠냐”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데요. “민선 8기 출범 직후부터 완주군민의 신뢰를 얹기 위해 지속해서 노력해 왔습니다. 완주군민과 전주시민이 수혜를 받는 ‘완주·전주 상생 협력사업’을 민선 8기 취임 직후부터 찾아왔습니다. 지난 2022년 11월 첫 상생 협력사업을 발표한 뒤 13차례에 걸쳐 협약을 맺었고 28개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미 사업이 완료돼 상당수 완주군민이 혜택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 통합을 희망하는 완주 민간단체들이 제안한 105개 상생 방안에 대해 수용의 뜻을 공개적으로 시사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 시는 105개 상생 방안에 그치지 않고 완주군민에 직접적인 요구사항을 듣고 있습니다.” 완주군민협의체가 제안하고 전주시가 수용 의사를 밟힌 105개 상생 방안에는 어떤 내용 등이 담겨 있나요. “우리 시는 민간단체의 의견을 존중해 제안을 받는 즉시 실현 방법을 찾았고, 공개적인 실현 계획을 제시해 왔습니다. 당장 지난 3월 완주군 지역에 ‘행정복합타운 조성’을 공개적으로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전주시청과 전주시의회뿐 아니라 전주시 시설관리공단과 완주군 시설관리공단을 통합·이전하고 전주문화재단을 비롯한 6개 출연 기관을 완주로 옮기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만약 전북도의 출연 기관 일부까지 같은 지역으로 이전하게 되면 그 자체가 완주군 어느 지역의 생활권을 완전히 혁신적으로 뒤바꿔 놓은 큰 변화가 될 것입니다. 또 교통체계를 하나를 묶고, 동서남북으로 진출하는 광역교통망 조성과 농업의 발전을 꾀하기 위해 도시·농촌형 농업상생모델을 제시하는 등 완주군민의 통합에 대한 불안감을 잠재우고 발전을 예측할 수 있는 계획을 지속해서 발표해 왔습니다. 105개 상생 방안이 정상적으로 추진되면 완주군 지역에만 1조 5000억 원가량이 투입됩니다. 이 예산은 통합이 한쪽이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양쪽이 함께 성장하면서, 지속 가능한 성장동력을 만들게 되는 밑거름으로 쓰일 것입니다.” 통합을 전체로 한 사업들의 규모가 큽니다. 완주군민들로부터 신뢰를 받기 위해선 예산 확보가 관건인데요. “청주시와 창원군의 통합 과정에서 정부로부터 받은 인센티브가 6000억 원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그 외 청주 시청사를 신축할 때 500억 원 정도를 국가로부터 지원받은 것으로 압니다.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정부의 지원 규모는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 우리 시와 전북도, 정치권도 더 많은 예산 확보에 힘을 모을 것입니다. 최근에는 정동영 의원과 이성윤 의원, 김관영 도지사 등과 함께 105개 상생방안 실현의 국가예산 확보 근거가 될 ‘통합시 설치법’ 추진을 공개적으로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한 해 만에 모든 사업비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전 사업을 실현할 수도 없습니다. 사업의 성격과 규모 등에 따라 다소 시간이 필요한 사업들도 존재합니다. 일부 우려가 있는 것은 알고 있지만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규모이고, 실현 가능한 사업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통합은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고, 양 지역의 성장을 위한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다수의 완주군민은 통합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를 꼽을 수는 없습니다. 불안한 마음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서로 대화의 자리, 소통의 자리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완주군민이 반대하는 이유를 정확하게 알고, 통합했을 때 기대 효과 및 찬성하는 논리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대화의 기회가 많았으면 합니다. 서로 대화하지 않으면서 자칫 통합을 논의하는 과정이 갈등과 분열의 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충분히 노력하고, 대화한 후 결정하게 될 완주군민의 신중한 결정을 우리는 존중할 것입니다. 그것은 완주군도 전주시도, 전북도 등도 같은 입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앞서 말했듯 완주전주 통합 문제는 현세대를 위한 일이라기보다 우리 미래세대를 위한 일입니다, 특히 최근 대광법이 개정되면서 광역교통망 조성계획이 구상되고 있고, 전주가 국내 올림픽 후보 도시로 선정되는 등 우리에게 통합 후 그려질, 도전할 청사진들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이재명 정부가 출범하면서 균형발전정책은 통합에 대한 든든한 뒷받침이 될 것으로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가 돼서 하나 된 힘으로 나아간다면 미래 10년 후 또는 20년 후 어느 지점에는 100만 광역도시로 우뚝 성장해 있을 것으로 굳게 믿습니다. 우리는 3차례에 걸쳐 통합을 시도했고, 아픔을 겪었습니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릅니다. 완주와 전주의 미래를 생각하고, 전북의 희망찬 미래를 그릴 수 있게 완주군민들의 현명한 판단을 해주길 기대합니다.” 우범기 전주시장 “꾸준히 완주군민 만나 통합 필요성·당위성 설명하겠다” “완주·전주 통합은 더 큰 미래, 더 강한 경제를 위한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앞으로도 완주군민들을 찾아가 꾸준히 통합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알리며 흔들림 없이 통합의 길을 열어나가겠습니다.” 완주·전주 통합 논의가 본격화된 가운데 연일 완주군민과의 접점을 넓히기 위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 우범기 전주시장의 일성이다. 우 시장은 완주·전주 통합 공감대 형성을 위한 출근길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그는 지난 21일 옛 송천역 사거리를 시작으로 행정안전부의 통합 권고 전까지 완주로 향하는 주요 길목에서에서 출근길 캠페인은 물론, 민간단체 간담회 등을 이어나갈 계획이다. 우 시장은 “이미 하나의 생활권인 완주와 전주는 상생과 발전을 위한 동행을 바탕으로 더 크고 강한 광역거점도시로 거듭나야 한다”면서 “통합에 대해 우려하고 반대하는 완주군민들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고 끝까지 설득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 기획
  • 강정원
  • 2025.07.28 16:05

[팔팔 청춘] "신체 나이는 60대"⋯80대 건강 비결은 '탁구'?

'팔팔 청춘의 인생 이야기' 여섯 번째 주인공을 만나기 위해 찾은 전주 인후동 윤대선탁구클럽. 이른 아침 시간이지만 탁구공이 통통 튀는 소리가 가득했다. 분명 80대 어르신과 인터뷰 약속을 잡았지만 코트에는 기마자세로 빠르게 공을 받아 치는 건강한 중장년뿐이었다. 이들은 '성탁클럽'이라는 이름 아래 모인 사람들이다. 성탁클럽은 2015년 5월 전주시 생활체육협의회가 주관하는 생활 체육 탁구프로그램에서 조직된 클럽이다. 당시 회원 6명이 시작해서 지금은 28명까지 늘었다. 클럽의 뜻은 이룰 '성', 탁월하다의 '탁'을 합쳐 성탁이 됐다. 회원 연령대도 50대부터 80대까지 다양하다. 이중 초고령자인 이승주, 정석규 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봤다. △탁구와 사랑에 빠진 80대 "안녕하세요. 제가 여든네 살 이승주입니다." 사전에 듣고 온 84세 어르신을 찾느라 바쁜 취재진에 먼저 인사를 건넨 이승주(84) 씨다. 인터뷰하자마자 그의 건강 비결은 운동, 그중에서도 탁구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2015년 성탁클럽 1대 회장이었던 이 씨는 벌써 탁구를 한 지도 10년이 지났다. 의심 반 호기심 반으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건강검진 결과를 받아보고 탁구가 건강에 좋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 씨는 "최근에 건강검진을 받았다. 지금 내 나이가 84세인데, 신체 나이가 62세로 나왔다. 젊었을 때 테니스, 배드민턴 등 다양한 운동을 해 왔다. 나이가 드니 탁구가 우리의 몸을 잡아 줄 수 있는 중심 운동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하기 시작했다. 건강검진하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매일 오전 9시에 나와서 탁구를 치고, 오후에는 건지산을 산책하며 부지런히 운동한 시간은 건강이라는 선물로 돌아왔다. 정년퇴직 후 80대에 접어들면 쉬고 싶은 마음도 굴뚝 같겠지만 마지막 죽는 날까지 운동하는 게 이 씨의 바람이다. 그는 "나에게 탁구는 은인이고 생명줄이다. 옛날 같았으면 지금 내 나이도 죽었을 나이다. 계속 운동하고 사람을 만나서 그런지 생각이 젊어서 아주 좋다. 나는 탁구가 나를 살렸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 뒤를 잇는 80대 함께 만난 2대 회장 정석규(80) 씨는 탁구를 '인생'이라고 표현했다. 정 씨는 "내 생활의 반은 탁구다. 오전은 탁구하고 오후는 개인 업무를 보는 게 나의 일과다. (탁구는) 나에게 아주 소중한 운동이고 항상 생각하는 것이지만 탁구를 하게되서 참 다행이다"며 "몸이 피로하거나 쉬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없다. 운동을 해서 그런지 삶에 생기가 돈다"고 말했다. 그 역시도 탁구 친 지 벌써 10년째, 이제 탁구가 삶이 됐다. 직장 다닐 때 테니스 15년, 퇴직 후 배드민턴, 당구까지 다 해 본 정 씨는 건강상의 문제로 배드민턴은 포기하고 탁구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 탁구에 욕심을 보이는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 정 씨는 "탁구라는 운동이 쉬워 보이지만 기술적으로 계층이 많다. 선수도 있고, 1부, 2부, 3부, 4부, 심지어 8부까지 구분돼 있다. 이게 실력 격차가 있다는 의미다. 실력을 키우는 재미가 있는 운동 같다. 10년 했으면 5, 6부는 돼야 하는데 아직 멀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80이라는 나이에 접어드니까 계속 운동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걱정이다. 아직은 건강에 문제없이 잘하고 있다. 매일 운동을 해서 그런가 몸이 피로하다거나 쉬고 싶다는 생각도 안 든다. 체력이 버텨 주는 한 계속 운동을 하고 싶다"고 했다. △젊었을 적 모습은? 놀랍게도 이 씨와 정 씨는 농협에서 정년 퇴직을 했다. 성탁클럽 회장을 하려면 농협에서 정년 퇴직해야 한다는 농담까지 생겼다. 이 씨는 삼례에서 근무하면서 매일 테니스를, 정 씨는 정읍에서 조기 축구를 뛰었다. 그 많고 많은 운동을 다 해 봤지만 퇴직 이후 탁구와 사랑에 빠지게 된 둘이다. '팔팔 청춘의 인생 이야기'의 필수 질문 중 하나인 꿈이 궁금해졌다. 남들이 보기에는 좋은 직장, 번듯한 직장에서 퇴직한 듯하지만 이야기하다 보니 둘에게도 꿈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축구를 좋아한 이 씨는 축구선수가 꿈이었다. 그는 "그냥 꿈은 공 차는 것이었다. 축구를 너무나도 좋아해서 축구선수를 꿈꿨지만 실현하기는 어려웠다. 지금도 텔레비전을 틀면 축구만 볼 정도다"며 웃어 보였다. 반면 정 씨는 꿈이 없었다고 한다. 수십 년 전만 해도 당장 먹고사는 문제가 먼저였던 터라 정 씨의 형편에는 꿈도 사치였다. 그는 "학교 다니는 것도 그렇고, 꿈도 그렇고 어떻게 하면 졸업하고 취직할지 고민이 컸다. 상고에 다니면서 금융기관에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들어가서 참 다행이다"며 "그때 당시에는 어떻게 가난을 벗어날까, 그게 고민이고 걱정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먹고사는 직장을 가는 게 목표였던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청년들아, 너희들만큼은⋯." 이 씨와 정 씨는 지금을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당부의 말도 남겼다. 이 씨는 "우리는 그냥 일하면 먹고사는 때였는데, 지금은 먹고사는 것보다도 어떻게 머리를 잘 써서 현세대에 부응하면서 출세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때다"면서 "끈기 있는 생활을 하며 국가 발전을 위해 일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누가 뭐래도 건강이 언제나 최우선이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정 씨는 "직장 생활을 해서 그런지 몰라도 어느 자리, 뭘 맡더라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일하면 다 좋아지는 것 같다. 돌이켜보면 다른 것보다도 성실하게 사는 사람이 성공하는 게 세상의 이치 같다"고 강조했다.

  • 기획
  • 박현우
  • 2025.07.28 16:02

[뉴스와 인물]신동식 회장 “K-조선 미래, 지금이 결정적 시기...지도자의 과감한 결단 필요"

“대한민국 조선업은 국가 발전의 도구였습니다. 풀 한 포기 없던 황무지에서 시작해 이제는 미국 대통령마저 손을 내미는 세계 최강의 산업이 되었죠.” 최근 ‘K-조선’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한국에 조선 분야 협력을 요청하면서 그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이 같은 성장의 배경에는 한국 조선업의 씨앗을 뿌리고 터전을 개척한 신동식(93) 한국해사기술(KOMAC) 회장의 헌신이 자리하고 있다. 대한민국 조선 산업 발전의 산증인이자 '대부'로 불리는 신 회장과의 인터뷰를 통해 K-조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조망해 본다. 더불어 한때 지역 경제의 심장이었던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의 향후 운영방안에 대해서도 들어봤다. 인터뷰는 이달 24일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신 회장의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 최근 ‘K-조선’에 대한 미국의 러브콜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 조선업에 협력을 요청했다는 보도를 접했을 때 '하늘이 우리나라를 돕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일감 증가 차원을 넘어 미국과의 전략적인 파트너십을 구축할 절호의 기회를 갖게 되는 의미입니다. 만약, 우리가 미국 군함을 건조하게 된다면 현재 주한 미군(2만 3000여명) 보다 10배인 23만명 이상의 안보 효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감히 미국의 군함을 짓는 한국을 공격할 생각을 하겠습니까? 기술 교류와 경제적 파급 효과 또한 어마어마할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돈을 받고 배를 만들어주는 입장이었다면, 이제는 미국이 아쉬워하는 것을 우리가 해주는 동등한 파트너십이 가능한 때가 온 것입니다.” - 미국이 우리의 조선업에 손을 내민 배경은 무엇입니까. “트럼프 대통령은 세 가지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데, 그 해답을 한국이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해군력 증강입니다. 중국에 비해 부족한 해군력을 강화하기 위해 군함 건조가 시급하지만, 미국은 자체 조선소가 부족합니다. 한국에서 미국 군함을 건조하게 된다면 안보 효과는 물론, 기술 교류 및 경제적 파급 효과가 엄청날 것입니다. 둘째는 미국의 에너지 자원 개발입니다. 미국 내 석유 및 가스 채굴을 늘리겠다는 트럼프의 공약은 결국 에너지 운반선의 수요 증가로 이어질 것이며, LNG선 건조 기술은 한국이 독보적입니다. 셋째는 AI 기술 패권을 위한 데이터 센터 구축입니다. 데이터 센터는 막대한 전력을 필요로 하며, 원자력 발전이 해답인데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원자력 발전소 건설 기술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 미국에 이어 인도에서도 한국 조선 산업에 전략적 협력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인도의 모디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과의 협의를 통해 대규모 가스 수입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이 막대한 양의 가스를 운반하려면 1000척 이상의 가스 운반선이 필요한데, 한국만이 이를 건조할 수 있습니다. 모디 총리는 이러한 상황을 인지하고 한국의 조선 기술을 벤치마킹하여 인도에 초대형 조선소를 건설하고자 합니다. 이는 한국 조선 기자재 업체들에게 엄청난 기회입니다. 약 700개에 달하는 국내 기업들이 인도에 부품을 수출하고 설계 노하우를 제공하며 시장을 확대할 수 있습니다. 인도는 인구도 많고, 기술 인재도 풍부하며, 자본력까지 갖춘 잠재력이 큰 시장입니다. 한국 정부가 인도 정부와 긴밀히 협력하여 이러한 국제적인 환경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 현재 K-조선의 강점은 무엇이며, 앞으로 어떤 분야에 집중해야 할까요. "한국 조선업의 가장 큰 강점은 바로 초격차 기술에 있습니다. 중국은 건조량으로는 압도적이지만, 그들이 짓는 배는 주로 저부가가치 선박입니다. 반면 한국은 LNG선, 초대형 컨테이너선, 쇄빙 LNG선 등 고부가가치 선박 시장을 100% 점유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는 생산성과 정도 관리(정밀도 관리) 시스템에서 독보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 지역에서 만들어진 부품들이 오차 없이 조립되는 정도 관리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미래에는 친환경 선박, 자율 운항 선박, AI 기반 선박, 그리고 로봇과 AI가 주도하는 스마트 조선소가 대세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분야에서 지속적인 R&D 투자를 통해 기술 격차를 더욱 벌려나가야 합니다. 현재 한국의 고급 인력들이 해외로 유출되는 문제가 심각한데, 파격적인 처우 개선을 통해 이들을 지켜야 합니다.” - K-조선업이 세계 최고로 도약하게 된 터닝 포인트는 언제였습니까? “우리가 다른 나라와 비슷하게 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2000년대에 증명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우리 기술자들이 끊임없이 개량하고, 남보다 더 잘 만들고, 빨리 만들고, 싸게 만들면서 초격차를 만들어낸 것은 2000년대 초반입니다. 예를 들어, 30만 톤짜리 초대형 선박을 만들 때 중국 조선소는 24~30개월이 걸리고, 일본은 14~20개월이 걸리지만, 한국 조선소는 7개월이면 만듭니다.” - 모처럼만에 기회가 왔는데, 이 기회를 살리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먼저 대통령 중심의 전략 수립이 필요합니다. 국가 이익과 발전에 집중하여 미래 비전을 제시해야 합니다. 미국과의 협력 문제를 단순히 방위비나 일감 수주의 관점이 아니라, 안보 및 경제적 동맹 강화의 기회로 인식해야 합니다. '한미공동기술협력위원회' 설립을 통해 일시적인 교섭이 아니라, 상시적인 협력 체계를 구축하여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유연하게 대응해야 합니다. 양국의 전문가들이 함께 모여 기술 교류와 협력 방안을 논의해야 합니다. 여기에 △과학 기술 △해양력 △기후 변화 이 세 가지를 국가 미래 전략으로 지정하고, '대통령 직속 미래산업발전기획위원회'를 설립하여 구체적인 실천 계획을 수립해야 합니다.” - 1961년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이 회장님을 한국으로 부르신 과정이 궁금합니다. “저는 1961년 5·16 혁명 후 4~5개월 만에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어떻게 저 같은 사람의 존재를 알았는지 아직도 의문입니다. 아마도 일본 육사 시절, 해양 대국 일본의 모습을 보고 바다의 중요성을 깨달으셨던 것 같습니다.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영국 대사관을 통해 저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조국을 위해 돌아와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가난했던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영국 대사의 설득과 박정희 의장의 진심 어린 애국심과 열정을 느끼고 귀국을 결심하게 됐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헌병들의 안내를 받아 곧바로 의장실로 향했고, 그곳에서 박정희 의장을 처음 만났습니다.” - 한국에 돌아와 처음 맡으신 임무가 대한조선공사를 재가동시키는 것이었다는데. “제가 1961년 9월 한국에 돌아와 처음 만난 대한조선공사는 조선소가 아니라 그저 풀밭이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일제강점기에 만들어 놓은 조선소는 해방 후 15년 동안 전혀 가동되지 않고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직원들은 지난 6개월간 월급도 받지 못하고, 기계 고철을 팔아 쌀을 사서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1961년 대한민국 조선업의 현주소였습니다. 저는 외국의 명문대학에서 공부하고, 최고의 기술을 가진 조선소와 국제기구에서 일하며 학문적으로나 실습적으로 조선업을 익혔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처음 한 일이 작업복을 입고 낫을 들고 공장 마당의 풀을 깎는 일이었죠. 당시에는 양철 조각 하나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수천 가지 부품이 들어가는 배를 만든다는 것은 꿈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와 제가 그린 청사진, 정주영 회장 같은 기업인들의 실행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 조선 산업이 국가 발전에 어떤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저에게 조선 산업은 국가 발전의 도구였습니다. 제가 한국에 왔을 때 당시 우리의 수출액은 4000만 달러에 불과했습니다. 수출 품목이라곤 가발과 김, 면직물, 텅스텐 등이 전부였죠. 이런 상황에서 나라를 잘 살게 만들려면 제조업을 육성해야 하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역발상으로 조선 산업을 선택했습니다. 조선업은 모든 관련 산업이 함께 발전해야 하는 종합 조립 기계 산업입니다. 당시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조선 산업을 통해 철강·기계·전자 등 수백 개의 관련 산업을 자생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과적으로 700개가 넘는 세계 초일류 조선 기자재 기업들이 생겨났고, 이는 우리 조선 산업의 든든한 근육이 되었습니다. 조선 산업은 막대한 수출 금액, 기술 진작 효과, 고용 효과 등 파급 효과가 엄청납니다. 공장 하나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수백 개의 공장이 함께 성장할 수 있죠." - 박정희 전 대통령께서 카이스트 설립에 회장님의 도움을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최초의 경제수석비서관이라는 중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엔지니어인 제가 경제수석을 맡는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며 고사했지만, 대통령의 의지는 강력했습니다. 당시 대통령께서는 경제 전문가와 기업가, 은행가들을 모두 불러 물어보셨지만, 당장 필요한 해결책을 제시해 줄 사람이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외국을 다니며 돈과 기술을 빌려오고 공장 설립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해결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저는 1년에 200일 이상 해외를 다니며 ‘고급 거지’처럼 돈과 기술을 빌려왔습니다. 대한민국의 웬만한 공장은 거의 제가 다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후 우리가 원천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 연구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이것이 바로 카이스트(KAIST)의 전신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설립으로 이어졌습니다. 저는 전 세계를 다니며 한국 과학자들을 설득하여 조국으로 돌아오도록 했습니다. 이분들이 KIST의 창립 멤버가 되었고, 대덕 연구단지에 500개가 넘는 연구소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 더불어 한때 지역 경제의 중심 역할을 담당했던 군산조선소의 완전 재가동에 대해 전망해 주신다면. “죄송하게도 제가 직접 군산 현지 상황을 상세히 진단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신뢰하는 두 전문가 팀에게 군산 조선소의 재가동 가능성에 대해 문의했고, 그들의 의견을 종합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재 군산 조선소는 일부 블록 공장으로 가동되고 있지만, 물류비 지원이 중단될 경우 다시 조업 중단 가능성도 있다고 합니다. 또 조수간만의 차가 커 입지적으로 단점이 있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2017년 조업 중단 이후 조선소 주변의 협력사와 숙련된 인력 풀이 완전히 붕괴되었다는 점입니다. 이처럼 입지적 단점과 인프라 붕괴를 보완하여 과거처럼 신조선 건조 기지로 재가동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단순히 호황기 물량을 소화하는 역할로는 군산 조선소가 성장하기 어렵다는 분석입니다.” - 그렇다면 군산조선소의 미래를 위한 현실적인 대안은 무엇입니까. “두 전문가 팀의 의견에서 공통적으로 제시된 대안은 바로 MRO(유지보수, 수리, 정비) 전문 조선소로의 전환입니다. 한국의 대형 조선소들은 대부분 신조선 건조에 집중하고 있어 선박 수리 전문 시설이 부족한 실정입니다. 특히 LNG 선박의 MRO 특화 단지로 조성하거나, 해상풍력 기자재 특화 단지로 조성한다면 새로운 활로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다른 의견으로는 블록 생산을 확대하고 소형 관용선 수요에 대응하는 방안도 제시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단순한 신조선 건조 기지를 넘어 유지보수, 개조, 해양 플랜트 등 특화된 분야에 집중하여 경쟁력을 확보해야 합니다.” - 공직을 떠난 후에도 민간에서 2000여 종의 선박을 설계했는데, 93세이신 지금도 조선 기술과 국가 전략을 설계하고 계십니다. 회장님께 조선업이란 어떤 의미입니까. "저에게 조선업은 단순히 배를 만들고 돈을 버는 사업이 아닙니다. 그것은 국가 발전의 도구이자, 우리의 자존심이며, 산업의 기반입니다. 저는 일제강점기에 이름과 말을 빼앗기고, 해방 후에는 6.25 전쟁을 겪으며 나라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조국이 없으면 개인의 삶조차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외국에서 유학하고 일할 때도 저는 항상 한국을 생각했습니다.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저는 돈이나 명예를 바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국가 발전을 위한 봉사라는 신념으로 일했습니다. 황무지에서 시작한 한국 조선산업이 이제는 미국의 대통령조차도 도움을 요청할 만큼 성장한 것을 보면 정말 꿈만 같습니다. 오늘날 한국 조선업은 세계 최첨단 기술과 고부가가치 선박 건조 능력으로 세계를 선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산업적 성과를 넘어, 대한민국의 국격을 높이고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위상을 강화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조선업은 저의 삶이자, 대한민국의 역사이며, 미래를 향한 희망입니다." - 마지막으로, K-조선의 미래에 대한 바람을 듣고 싶습니다. “지금은 희망보다 절망에 가까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고, 미국 또한 새로운 요구를 하는 이 시점에 불필요한 이념 논쟁을 중단하고, 국가 이익과 발전에 집중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한국 조선업의 '운명을 바꿀 결정적 요인'은 바로 지도자의 강력한 '미래 비전'과 이를 실현할 '과감한 결단'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비전과 실천 계획을 세우고, 이를 행동으로 옮긴다면 국민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고, 세계에서도 대한민국을 위대한 나라로 인정할 것입니다. 저는 이재명 대통령을 만나 미래 산업에 대한 꿈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신동식 회장은 '한국 조선업의 살아있는 역사이자 대부' 1932년생. 서울대 조선공학과를 졸업한 신 회장은 스웨덴 코쿰 조선소에서 선박 설계를 익히고, 영국 로이드 선급협회와 미국 선급협회 국제 검사관으로 활동하며 국제적 전문성을 쌓았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1급 정무비서관으로 영입했고, 1968년에는 신설된 경제수석직의 초대 경제2수석으로 파격 임명했다. 그 때 신 회장의 나이는 36세. 당시 양철 한 조각 제대로 만들지 못하던 시기, 그는 초대형 조선업 마스터플랜을 수립하고 추진하며 한국 제조업 중장기 발전 계획의 기틀을 마련했다. 특히 세계 최대 규모의 옥포 조선소 건설은 그의 선견지명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주위의 많은 우려 속에서도 강력하게 추진, 오늘의 대한민국 조선 산업을 있게 한 원동력이 됐다. 1998년 도널드 트럼프 당시 부동산 사업가가 김우중 대우 회장의 초청으로 옥포조선소를 방문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 보았던 초대형 크레인의 강렬한 인상이 20년이 지난 지금도 트럼프 대통령의 기억 속에 남아 한국 조선 산업과의 협력을 모색하게 된 계기가 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공직 생활 후 경영난에 처했던 한국해사기술(KOMAC)을 인수해 2000여 종의 선박을 직접 설계하며 한국 조선 기술 저변을 확대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93세의 고령에도 챗GPT를 활용하는 등 끊임없이 배우고 도전하며 현재까지도 왕성하게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 기획
  • 김준호
  • 2025.07.27 17:53

[트민기] 인형 하나에 32만원? Z세대 심리 파고든 ‘라부부’ 열풍

유행은 돌고 돈다. 빨라도 너무 빨리 돈다. 괜히 아는 척한다고 "요즘 유행인데 몰랐어?" 이야기했다가 유행이 끝나 창피당하는 일도 다반사다. 트렌드에 민감한 기자들, 트민기가 떴으니 이제 걱정 없다. 이 기사를 읽는 순간에도 SNS,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수많은 유행이 올라오고 트렌드가 진화한다. 트민기는 빠르게 흐름을 포착해 독자에게 전달하는 게 목표다. 뾰족한 이빨에 토끼 귀, 심통 난 얼굴을 한 인형 '라부부'가 글로벌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블랙핑크 리사·로제, 리한나 등이 명품 가방에 라부부 키링을 달고 찍은 사진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며 품절 사태가 이어지고 있다. 라부부는 홍콩 출신 아트토이 작가 카싱룽이 10여 년 전 만든 캐릭터다. 최근 중국 완구 회사 팝마트가 ‘더 몬스터즈 하이라이트 시리즈’라는 이름의 인형 키링으로 출시해 다시금 주목을 받고 있다. 현재 일부 제품은 웃돈 붙어 거래되고 있다. 정가는 2만 1000원이지만, 중고거래 플랫폼 크림(24일 기준)에서는 5만 원 대에 판매 중이다. 시크릿 제품으로 분류되는 검정 라부부는 32만 3000원까지 치솟았다. 팝마트의 마케팅 전략이 성공한 것으로 풀이된다. 팝마트는 내용물을 확인할 수 없는 블라인드 방식으로 제품을 판매하면서 소비자의 수집 욕구를 자극했다. 동시에 생산 수량을 제한하는 등 희소성과 소장 가치를 끌어올렸다. 간혹 인기 제품은 출시하면 바로 품절될 정도다. 유행은 라부부에서 그치지 않고 비슷한 콘셉트인 아트 토이로 확산되고 있다. 원숭이와 인간을 결합한 캐릭터 몬치치도 다시 인기를 얻고 있다. 복슬복슬한 털과 사람과 비슷한 얼굴을 가졌다는 점이 라부부와 비슷하다. 태국 디자이너 몰리가 만든 크라이베이비도 같은 유형이다. 현재 SNS에서는 크라이베이비의 눈물에 큐빅을 붙이거나 매니큐어를 바르는 '눈물 꾸미기 챌린지' 영상이 유행하고 있다. 제2의 라부부라는 수식어까지 얻었다. 전문가들은 아트 토이 열풍이 단순히 유행을 넘어 Z세대의 심리적 불안정과 연결된다고 분석했다. 임상심리학자 트레이시 킹은 “팬데믹, 경기 침체, 기후 변화 등으로 전통적인 안정 지표에 닿기 힘든 시대에 Z세대는 미래를 위한 저축보다는 지금을 위한 투자를 하는 경향을 보인다”며 “작은 물건을 수집하는 행위는 예측 불가능한 세상에서 통제감과 위안을 얻으려는 심리적 반응”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작은 물건을 모으는 행위는 편안함과 통제감을 안겨 준다”며 “(아트 토이 유행은) 단순한 장난감 유행이 아니라 현대인이 과열된 사회에서 심리적 안정을 찾는 방식임을 보여준 것”이라고 강조했다. 인기로 인해 부작용도 큰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가품이 유통되며 소비자 피해가 잇따르는 상황이다. 가수 이영지가 SNS 영상에서 공개한 라부부는 가품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대만 방송에도 보도됐다. 이영지는 다른 피해자를 막기 위해 "내 라부부는 가짜였다. 짭부부다"면서 "고리가 없고 카드도 없다. 다들 속지 말고 정품 사라"고 당부했다. 안전 문제도 발생했다. 한국·일본·미국 등 팝마트 주요 매장 앞은 오픈런을 위한 밤샘 줄이 늘어섰다. 일부 매장에서는 몸싸움까지 벌어졌다. 팝마트 한국지사는 안전을 이유로 오프라인 판매 중단을 공지한 상황이다.

  • 기획
  • 문채연
  • 2025.07.26 10:16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54)법부청의서, 한성부재판소이수록, 개성재판소형명부, 한성재판소형명부

1894년 갑오개혁은 조선왕조의 낡은 재판제도와 법률을 개정하려고 하였다. 6월 28일 법무행정을 담당하는 부서로 법무아문을 설치하였다. 갑오개혁은 7월 8일에는 “모든 죄인은 사법관이 재판 명정(明定)하지 않고서는 함부로 죄벌을 줄 수 없게 하여”라는 원칙을 내세워 사법권의 독립 원칙을 천명하였다. 근대적 사법제도와 그에 걸맞는 판사·검사 등 법률 소양을 갖춘 사법관이 부족했으므로 사법 개혁은 곧바로 실시되기 어려웠다. 이어 1895년 4월 개칭된 법부는 사법사무를 전담하고 각급 재판소의 민사·형사 재판에 일정한 지령을 내리면서 근대적인 재판소 제도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당시 법부가 시행한 사법제도 개혁에 관한 제법령의 청의서를 모아놓은 자료가 《법부청의서(法部請議書 )》다. 1895년(고종 32) 4월부터 1896(건양 1) 9월까지 법부에서 내각회의에 제출한 청의서로 주로 법률개혁에 관한 안건에 대한 결재, 집행한 일에 대한 보고서철로 되어 있다. 문건 편철은 건별로 일련번호가 붙어있는데, 제1책은 1895년도분 56호(11월 15일까지), 이어 1896년에 제기된 47호(1월~4월)까지 수록되어 있고, 제2책에는 114호(1896년 4월 4일~9월 23일)가 실려 있다. 법부는 재판 운영에 관한 법률들이 제정하고 민사 및 형사에 관한 소송법이나 각종 처벌에 대한 규례 등을 논의하여 국왕에게 청의하는 문서들을 만들었다. 1895년 4월부터는 법률 1호 「재판소구성법(裁判所構成法)」을 정식으로 공포하여 사법권 독립을 제도화하였다. 이중 동학농민군과 관련된 재판에 관련된 안건으로는 법률 7호 <징역처단례>를 통해 유형을 그대로 두고, 도형을 징역으로 바뀌었다. 또 지방재판소에서 불복한 건을 고등재판소에서 수리하게 하면서 1895년 윤 5월 개항장과 22부 단위의 지방재판소를 설치하는 것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 중에서 1896년 법률 2호로 공포된 <적도처단례>는 제8조 범죄에 따라 교형, 태형 후 역형(役刑), 역형, 태형 등으로 세분화하는 규정을 담고 있다. 제7조 ‘인가(人家)의 남녀를 약취(略取)하여 자취(自取)하거나 전매(轉賣)하여 고용(雇傭)을 작(作)하는 자(者)’등을 처벌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그동안 인신의 약취를 통하여 노비, 혹은 고공으로 삼는 관행을 일거에 근절시키는 처벌이 가능하도록 하여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법적 조치였다. 다음은 《한성부재판소이수록(漢城裁判所移囚錄)》이다. 1895년 5월 초부터 하순까지 한성재판소에서 각 기관이나 각군에서 죄수들을 이관해온 상황을 기록한 자료이다. 1895년 4월 15일자로 한성재판소가 설치됨에 따라, 이전까지 각도 감영(監營)이나 군부·경무청 등 기관에 수감 중인 죄수들을 한성재판소로 이관하게 되었다. 속표지에는 “개국 504년 5월 1일 시(始) 고등재판소 한성재판소 각영장계이송기(各營狀啓移送記) 이수록(移囚錄)”으로 되어 있어 당초에는 고등재판소로 이관한 죄수에 관한 사항도 포함하여 기재하려 했던 것 같다. 첫머리에는 서흥군의 첩보로 이송된 갈희천(葛希千)·고윤수(高允秀)가 1895년 4월 28일에 군부에서 이송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두 사람은 동도(東徒) 혐의로 붙잡힌 죄수였다. 이어 다음날 법부는 좌감옥서에 갇혀 있는 이들을 한성재판소로 이송하여 자세히 심판하도록 하였다(《기안(起案)》 1책). 동도 이중칠(李仲七)은 4월 28일 군부에서 이송하여 5월 1일자로 이송되었으며, 이사원, 정기철, 김학룡 등의 진술을 열거한 공초 등과 함께 옥에 갇혀 있는 이사원, 정기철, 김학룡, 원용성, 민성구, 이문복, 이흥옥, 윤완, 김충신 등을 한성재판소에 이송하도록 하였다[공이(公移) 28호 기안]. 이 자료는 군부, 경무청, 전국 각군에서 죄수를 이송한 기록을 담고 있으며, 죄수의 공초 유무와 이관된 일자를 간단히 기록하고 있다. 다만 1895년 5월 한 달 동안 상황만 기록되어 있는 간단한 자료에 그쳤다. 다음은 개성부 재판소에서 기록한 《개성재판소형명부(開城裁判所刑名簿)》이다. 표지가 없어 편자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개성재판소 형명부’라고 인쇄된 용지에 내용을 기록하고, 첫 장 오른편 하단에 ‘대조선국 법부 문서과방’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어 개성재판소에서 법부에 재판 선고 사항을 보고한 문서로 보인다. 내용으로는 각 수인(囚人)별로 주소·신분·성명·나이를 기록하고 범죄 종류·형명 및 형기·선고년 월일·형기 만한·초범(初犯) 혹 재범(再犯)·집행경과 년월일·사고(事故) 등의 항목을 두어 정리하였다. 수인들의 죄목을 보면 구타치사(毆打致死)‚ 간범매합(姦犯媒合)‚ 무고관장(誣告官長)‚ 타인묘굴이(他人墓掘移)‚ 난민수종(亂民隨從)‚ 누설옥정(漏泄獄情) 등 다양하였다. 장단군 평민 신주경(申周景, 34세)에게 구타하여 죽인 죄로 ‘종신 징역’을 선고한 것(<선고 1호>)을 비롯하여 9호(7월 13일)까지 9건의 선고문이 편철되어 있다. 신계군 율탄방 반식리 삼미동에 사는 황문신(黃文信, 33세)은 ‘난민수종죄(亂民首從罪)로 수감되었다. 그는 대명률에 의하여 5품이상 장관을 상하게 한 자는 장 100, 유 2천리로 처하는 규정에 의해 처벌받을 수 있었지만, 법률 7호 <징역처단례>(1895.4.29. 반포)에 의해 감 1등, 태 100대, 징역 3년으로 선고받았다(1896년 6월 28일 선고). 이는 동학농민전쟁 이후에도 계속된 전국 각지 민란 가담자에 대한 처벌이 지속하고 있었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다음으로 《한성재판소형명부(漢城裁判所刑名簿)》는 한성부 재판소가 1896년 7월부터 1907년 12월까지 무려 11년 동안 각종 판결과 선고가 이루어진 죄수들의 형명부이다. 1895년 3월 25일 제정 공포된 <재판소구성법>에 의하여 근대적 재판기관으로 특별법원‚ 고등재판소‚ 순회재판소‚ 지방재판소‚ 한성재판소 및 개항장재판소 등이 출범하였다. 이어 법부령 제1호 <한성재판소 설치에 관한 건>(1895.4.15.)에 의하여 한성재판소가 설립되었으며, 초기에는 한성재판소의 독립적 사법 기구로 운영되었으나 이후 칙령 제5호 <한성부재판소 관제·규정>(1898.2.9.)로 개편되었다. 1897년 9월 12일자로 경기재판소가 설치되기까지 경기도 지역의 민사·형사 사건을 모두 한성재판소가 관할하여 판결 내용을 해당 군에 훈령으로 하달하였다. 이후에는 주로 한성 오서(五署) 내의 민사·형사 사건을 담당하였다. 형명부에는 판결선고 일자나 번호순으로 편철되어 있기도 하고, 선고된 형이 집행된 일자순으로 편철되기도 하였다. 또한 <한성재판소 민형사 기결·미결 성책>(1898.1.31.) 등도 첨부되어 있다. 1898년 제1호 선고문에는 한성부 어의동 평민 정기호(鄭基好, 53세)로 죄목은 비도(匪徒)의 수괴자로 운량관을 칭하여 쌀과 전을 약탈한 혐의로 대전회통 추단조(태 1백대, 징역 종신형)으로 처벌되었다는 사실이 실려있다(《형명부》규 20168, 1898년 2월 21일 선고). 또한 경기도 여주군 평민 김흥산(金興山, 25세)은 1896년 봄 여주군 비도 창궐시에 참여했다는‘작변관문수종’의 죄목으로 같은 처벌을 받았다(《형명부》규 21112, 1897년 4월 6일 선고). 또한 1894년 동학농민혁명 이후에 추가로 잡혀온 동학농민군의 지도자들도 수형자로서 형명부에 수록되었다. 1900년 9월 형명부에는 충북 청주군에 거주한 동학농민군 지도자 서장옥(徐章玉, 49세)이 ‘좌도난정(左道亂正)의 술(術)로 우두머리가 된 자’라는 죄명으로 교형(絞刑)에 선고되었고, 이틀 후 이를 집행했다는 사실을 기록해 두고 있다. 1895년 이후 한성재판소의 재판 수형 기록은 모두 83책으로 다년간에 걸쳐 많은 분량으로 남아 있어, 당시 민중들의 사회적 처지와 다양한 범죄 행위와 관련하여 범죄의 유형과 그에 대한 판결과 집행 결과를 파악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형명부에 기록된 제반 사건과 인물에 대해서는 《사법품보(司法稟報)》와 《관보》에 실린 상세한 기록과 비교하여 검토할 필요가 있다. 갑오개혁 이후 대한제국기에 만들어진 각종 법률 관계 기록물 속에서 동학농민군 지도자와 참여자에 대한 사법 재판과 처벌의 역사를 확인해 볼 수 있다. 왕현종 연세대 교수 왕현종 연세대 교수

  • 기획
  • 기고
  • 2025.07.23 19:43

[전북 이슈+] "문 열긴 했는데"⋯5년도 못 버틴 전북 사장님들 폐업 속출

지난해 전국 폐업자 수가 처음으로 100만 명을 넘어선 가운데 같은 기간 전북 폐업자 수도 최근 5년(2020∼2024년) 중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19일 국세청 국세통계포털(TASIS)에 따르면 지난해 전북 폐업자 수(법인·일반·간이·면세사업자)는 전년보다 100여 명 증가한 3만 1136명이다. 개인 사업자 중 매출 규모가 작은 간이 사업자는 1만 309명에 달했다. 이외 일반 사업자는 1만 4806명, 면세 사업자는 3592명, 법인 사업자는 2429명이다. 이중 소매업(8128명)이 가장 많고 서비스업(6302명), 음식업(5355명) 등 내수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업종에서 직격탄을 맞았다. 고금리·고물가에 따른 소비 위축에 사업 부진이 두드러지면서 영세 소상공인이 많은 업종부터 문을 닫은 것이다. 실제로 폐업자 절반(1만 4633명·47%)이 사업 부진으로 문을 닫았다고 답할 정도다. 사업존속연수를 따지지 않고 많은 사업자가 폐업을 결정했다. 문 연 지 6개월(4282명) 만에 폐업하는 경우도 많았다. 6개월 이상은 3148명, 1년 이상은 5193명, 2년 이상은 3647명, 3년 이상은 5003명, 5년 이상은 5657명, 10년 이상은 2854명, 20년 이상은 1352명인 것으로 조사됐다. 강락현 전북소상공인연합회장은 "전북은 자금난, 매출 부진, 고금리 등 복합적인 위기에 직면해 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금융 지원, 소상공인 온라인화 지원, 폐업 정리 지원 등 다양한 정책을 펼치고 있지만 근본적인 소비 회복과 경기 활성화가 미비한 상태다 보니 즉각적인 회복에는 어려움이 있는 게 현실이다"고 토로했다.

  • 기획
  • 박현우
  • 2025.07.19 11:37

"돈 벌려고 시작했지만"⋯사장님의 같은 마음 다른 시간

"오늘은 손님이 많이 와야 할 텐데." 장사하는 사장님의 바람은 모두 똑같다. 돈 벌려고 뛰어든 자영업 세계는 생각한 것보다 더 어렵고, 더 막막하고, 더 힘든 일이었다. 같은 마음으로 다른 시간을 보내고 있는 두 사장님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20년 차 한상현 사장님 간판부터 정이 느껴지는 전주 노포 '행복한 식탁' 사장님 한상현(72) 씨는 20년 동안 한 자리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이전에 양복집 사장님이었던 한 씨는 기성복이 많아지면서 장사를 접고 음식점을 열었다. 잘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현실은 쉽지 않았다. 한 씨는 "전에는 종업원도 두고 운영했었다. 지금은 경기가 힘드니까 인건비마저 만만치 않아서 아내와 나, 70대 노부부가 몸 힘들어도 영업을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초보 사장님들에게 조언해 달라는 질문에 그는 "계속 장사를 해라, 하지 마라 할 수 없다"면서 "지금은 가게 문을 많이 닫는 시대다. 힘들어도 계속하라고 못 하겠다. 본인이 알아서 잘 판단해야 한다. 어려운 사람의 심정은 어려운 사람이 잘 안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고 말할 수 없다"고 단호한 입장을 밝혔다. △1개월 차 임기만 사장님 매일 직접 두들겨 만든 수제가스, 완산동까스. 10년 차 배관공 임기만(54) 씨는 최근 전주시 덕진구 금암동에 작은 음식점을 열었다. 가게 문 연 지 한 달밖에 안 된 초보 사장이다. 임 씨가 직전에 했던 일은 배관공이었다. 문제는 몸을 쓰는 일이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상처와 병만 남기 시작했다. '현실을 직시하고 성실하게 살자!'는 결심으로 시작한 일마저 접고 앞치마를 매기로 한 이유다. 그는 "정년 없이 오래 일할 수 있는 희망을 가지고 돈가스 가게를 차렸다. 장사는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정말 할 수밖에 없어서 하고 있다. 직장을 잃고 취업이 어려운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자영업뿐이다"고 이야기했다. 디지털뉴스부=박현우·문채연 기자

  • 기획
  • 박현우외(1)
  • 2025.07.19 11:36

전북자치도 소상공인 지원 '확대'⋯진짜 필요한 지원책은?

△전북, 소상공인 지원 '총력' 전북특별자치도는 지난 2월 경기 침체와 금리 인상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소상공인을 위해 창업 지원부터 특례보증, 온라인 판로 확대, 폐업 정리 지원까지 총 17개 사업에 1789억 원을 지원한다고 밝혔다. 지난 5월 말 기준으로는 18개 사업 2161억 원을 지원하는 것으로 변경됐다. 크게 △자금 지원(4개 사업·455억 원) △경쟁력 강화(6개 사업·19억 원) △경영여건개선(5개 사업·1681억 원) △보육성장지원(3개 사업·6억 2000만 원) 등 4개 분야다. 2월과 비교해 소상공인 회생 보듬자금 금융지원 특례 보증(224억 원→308억 원), 광역 소공인 특화지원센터 운영(6억 원→7억 원), 소상공인공제(노란우산) 가입 지원(8억 원→12억 원), 지역사랑상품권 발행 지원(1303억 6200만 원→1587억 원) 등 일부 지원사업의 규모가 확대됐다. 이중 결혼 7년 이내 임신·난임 치료 중인 소상공인을 위한 소상공인 육아안정 금융지원 특례보증, 도내 1인 자영업자를 대상으로 한 사회보험 고용·산재 보험료를 지원하는 1인 자영업자 사회 보험료 지원 등이 신규 사업으로 추진됐다. 김인태 도 기업유치지원실장은 "소상공인은 지역경제를 지탱하는 중요한 축이다. 이들의 경영 안정을 돕는 것이 곧 지역경제 활성화로 이어진다"며 "앞으로도 지속적인 금융 지원과 창업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진짜 '소상공인'이 원하는 지원은? 정부와 전국 지방자치단체는 매년 소상공인 경영 안정을 위한 지원사업을 추진하지만 형편은 나아지지 않는 실정이다. 지원사업 규모를 키워봐도 소상공인 폐업률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현장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소상공인이 원하는 지원사업이 무엇일지 들어봤다. 가장 많이 언급된 것은 '재정 지원'이다. 한상현 행복한식탁 대표는 "사실 나도 그렇지만 모든 소상공인 힘들고 나라도 어렵다. 지원이 쉽지 않을 테지만 (하나를 꼽자면) 재정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나이가 있다 보니 돈이 필요해도 대출 받기가 겁난다. 갚기도 쉽지 않은 데다 갚을 생각하니 걱정만 늘고 무서워서 아예 생각을 안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소상공인의 입장은 어떨까. 임기만 완산동까스 대표는 "대부분 서민은 자금 여유가 없다. 경기가 어려워져서 손님이 끊기게 되는 등 (경영이 어려워지면) 그 시기를 버틸 수 있는 자금이 있어야 한다. 대출 규제 완화 등은 꼭 필요하다. 서민 장사꾼이 버틸 수 있는 돌파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전북에서 가장 많은 소상공인의 목소리를 듣는 강락현 전북소상공인연합회장도 목소리를 냈다. 강 회장은 "현재 정부와 지자체에서 시행하는 소상공인 정책 등이 적기에 실시돼야 한다. 특히 지원 사각지대가 최소화될 수 있도록 힘쓰는 것이 중요하다. 지역적으로는 세제 및 임대료 지원 등이 추가 또는 한시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다"면서 "7월 전 국민 민생회복 소비쿠폰 사용에 있어서도 자금 본연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도록 전국민의 협조를 호소드린다"고 당부했다.

  • 기획
  • 박현우
  • 2025.07.19 11:36

[우리 땅에 새겨있는 역사의 흔적] 추사 금석문

1815년 가을, 전주 한벽당에서 시회가 열렸다. 호남의 명필 창암 이삼만과 전주의 선비들, 그리고 초의선사가 이 시회에 참여했다. 초의는 승려신분이었지만 강진에 유배 와있던 다산 정약용에게 유학과 시문을 배워 시에 능했다. 이 시회에 참석한 전주의 선비 중에 김기종(金箕鍾, 1783〜1850)이 있었다. 김기종과 초의선사는 이 시회에서 처음 만났다. 그렇지만 이 만남이 또 다른 인연으로 이어져 오늘날 우리 고장이 추사 금석문의 보고로 자리매김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효에는 유자와 불자가 따로 없다 김기종의 가문은 효자집안으로 유명했다. 부친 김복규는 효심이 지극하여 순조 23년(1823)에 효자정려가 내려졌다. 김기종 또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효자였다. 이렇게 효심이 강한 김기종이 한 인물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했다. 그 인물은 진묵(震默, 1562~1633)이라는 승려였다. 진묵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의 승려로 민초들의 아픈 삶을 보듬어 생불로 추앙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출가한 승려신분이었지만 자신이 거처하던 아랫마을에 어머니를 모셔두고 정성을 다해 봉양했다. 외아들로 출가해서 대를 이을 후손이 없어 자신의 제사를 걱정하는 어머니에게 천년 동안 향불이 끊어지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모친이 타계하자 손수 제문을 지어 애끊는 정을 표현하고, 유양산 ‘천년향화지지(千年香火之地)’에 장사지냈다. 이곳에서 향을 밝히면 풍년이 들고 가정이 평온해진다는 소문이 돌면서 참배객이 끊이지 않았다. 지금도 진묵의 어머니 묘 앞에는 향불을 밝히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진묵대사의 효성에 감동한 김기종은 그의 일대기를 책으로 펴내기로 결심했다. 당시 민초들 사이에서는 진묵의 수많은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이러한 설화들을 수집해 한벽당 시회에서 만났던 초의에게 집필을 부탁했다. 초의는 진묵의 행적을 글로 표현하는 것은 대사의 뜻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한사코 거절하다 결국 불가에서 출가한 후 부모자식 간에 인연을 끊는 세태의 잘못을 알려주기 위해 진묵의 소전을 쓰기로 했다. 초의는 초고의 집필을 마치고 제주도에 유배 가있는 절친인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에게 보내 검토해달라고 부탁했다. 추사는 원고를 읽고 나서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내왔다. 진묵대사의 행록은 바로 남아있는 옛사람의 은혜와 향기로운 흔적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마디마디가 다 향이어서 오직 이것만으로 진묵대사의 행록을 다했다고 하기에는 부족합니다. 겨자씨가 수미산을 받아들인다고 했으니 진묵대사도 기껍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전후의 기서(記敍)는 매우 좋아서 다시 정정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이렇게 김기종과 초의선사, 김정희로 이어지는 인연의 고리가 만들어졌다. 그렇지만 초의가 쓴 『진묵조사유적고(震默祖師遺蹟考)』는 김기종 생전에 발간되지 못했다. 사후 7년이 흐른 1857년(철종 8)이 되어서야 완주의 봉서사에서 간행되었다. 봉서사는 진묵이 일곱 살 때 출가했던 절이자 만년을 보낸 곳으로 이곳에는 진묵의 영당과 부도가 남아있다. △김복규 김기종 정려각 1850년 김기종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1853년(철종 4)에 효자정려가 내려졌다. 부자지간에 효자정려를 하사받은 가문의 경사를 맞아 1855년 김기종의 장남 영곤이 추사를 방문했다.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추사에게 비문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추사는 9년간의 제주도 유배와 2년간의 북청 유배를 끝내고 부친의 묘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고 있었다. 영곤은 정려비를 세울 커다란 빗돌을 마련해 두고 여기에 맞추어 가지고 온 한지를 추사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추사는 정려비는 크게 세우는 것이 아니라며 한지를 작게 잘라 비문을 써주었다고 한다. 이때 추사는 비각에 걸 수 있도록 현판의 글씨도 함께 써주었다. 효행의 덕으로 경사스러움이 넘치는 집이라는 ‘효덕연경지각(孝德衍慶之閣)’과 2세에 걸친 효자각이라는 ‘양세정효각(兩世旌孝閣)’이다, 이외에도 추사는 편액 글씨 한 점과 비문 한 점을 더 써주었다. 편액은 ‘귀로재(歸老齋)’라는 힘이 넘치면서도 조형미가 뛰어난 현판 글씨이다. 귀로재는 임실 관촌에 있는 김기종의 재실이다. 그리고 김기종의 부인 전주 유씨의 묘비 또한 이때 글씨를 미리 받아 놓았다가 사후에 세웠다. 귀로재 현판 탁본. 전라금석문연구회 제공 △추사가 써준 묘비 완주군 용진면 상운리에 정부인 광산 김씨의 묘비가 있다. 전면의 비문은 추사가 예서체로, 후면은 창암이 해서로 썼다. 1833년에 건립된 이 비는 전면과 후면을 당대 최고의 명필들이 나누어 썼다는 점에서 아주 보기 드문 비석이다. 이 가문은 김기종가와 마찬가지로 효자 집안이었다. 광산 김씨의 장남 최성철과 차남 성전, 그리고 손자인 한중까지 효자정려를 받았다. 추사와 창암이 전면과 후면을 나눠 쓴 또 다른 묘비가 완주군 봉동읍 은하리에 있다. 동지중추부사 김양성과 정부인 수원 백씨의 묘비이다. 그리고 2019년 임실군 신덕면 수천리에서 추사가 쓴 또 한 기의 묘비가 발견되었다.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최성간과 정부인 김해 김씨의 묘비이다. 최성간은 정부인 광산 김씨의 셋째 아들이다. 이 세 기의 비석 주인공들은 모두 김기종가와 인척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 비문들은 김기종의 알선으로 추사가 썼을 가능성이 높다. △추사체의 백미 백파선사비 고창 선운사 입구 부도전에 백파선사비가 서있다. 우리 고장에 남아있는 또 다른 추사의 금석문이다. 1858년(철종 9)에 세운 이 비의 비문은 김정희가 타계하기 1년 전에 짓고 썼다. 백파(白坡, 1767∼1852)는 법명이 긍선(亘璇)으로 18세 때 선운사로 출가해 순창 구암사에 주석했던 대강백이자 선승이었다. 그는 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선문수경(禪文手鏡)』을 저술했다. 이 책은 초의선사와 선에 대한 논쟁을 촉발했다. 이때 김정희는 초의의 편을 들어 백파의 저서에 반박하는 서신을 수없이 보내며 선논쟁에 가세했다. 그러다가 추사보다 열아홉 살 연상인 백파가 1852년에 입적했다. 백파의 제자들이 3년 후 추사를 방문해서 스승의 비문을 청하자 추사는 기꺼운 마음으로 비문을 써주었다고 한다. 이 비문의 전면에는 해서체의 힘찬 필치로 “화엄종주 백파대율사 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 白坡大律師 大機大用之碑)”라 쓰고, 뒷면은 백파의 삶을 기리는 글을 행서로 썼다. 이 행서는 ‘울림이 강하고 변화가 많은 추사체의 전형을 보여주는 추사 말년의 최고 명작으로 평가되고 있다’고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적었다. 추사체의 백미로 평가받는 백파선사비까지 전북특별자치도에는 7점의 추사 금석문이 자리해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추사 금석문은 전국적으로 20여 점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우리 전북이 가히 추사 금석문의 보고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우리 고장에서 발견된 추사 금석문의 대부분은 전라금석문연구회에서 발로 뛴 노력의 결실이다. 연구회의 노고에 격려와 감사의 박수를 보낸다. 손상국 프리랜서 PD

  • 기획
  • 기고
  • 2025.07.19 11:08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53) 창의인명록, 서산 화변면 간월도 유회 성책, 서산 영풍창면 우길리 유회 성명성책

이번에 소개할 세계기록유산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은 『창의인명록』과 충남 서산 간월도와 우길리에서 작성한 『유회 성책』이다. 세 자료 모두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조직된 민보군 관련 기록물이다. 생산시기는 10-11월경이고 생산지역은 충남 아산과 서산지역으로, 이들 지역에서 동학농민군에 적대적인 보수층이 어떻게 조직적으로 동학농민혁명에 대응하였는지 엿볼 수 있다. 창의인명록 표지. 고려대 도서관 제공 △창의인명록(倡義人名錄) 1894년 10월 동학농민군 토벌에 참여한 충청도 아산, 온양, 천안의 민보군 관련 내용으로 창의통문과 진압에 참여한 민간인들의 인명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창의통문에는 “음사한 무리들이 동도라고 부르면서 팔도에서 소요를 일으켜 임금이 근심을 하고 평민을 위협하여 재물과 곡식을 약탈하고 관장이 능욕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라고 하면서, 각자 임금을 향한 일편단심을 분발하면 백성들이 본받을 것이니 진실로 따르기를 원하는 자가 있다면 창의소에 모이기 바란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창의통문을 받고 창의소에 모인 유회군, 즉, 민보군 명단이 바로 ‘창의인명록’이다. 이에 의하면, 의병통령은 윤치소(尹致昭)이고 모화(謀畵) 조중석, 선진영솔 조두영·임의영, 중군영솔 류상후, 후군영솔 홍남수, 참모 남정섭 외 8명, 운량 김두식 외 3명, 경찰 조상희·이범석 외 3명 등으로 지휘부를 구성하였다. 민보군은 아산·천안·온양 등지에서 광범위하게 참여하였다. 천안에서는 신리 14명, 당후리 20명, 문성리 5명, 시포 16명, 항각동 6명, 장재동 8명, 관대 5명, 송산 16명, 산직촌 20명, 죽계 6명 등 116명이다. 아산에서는 냉정리 2명, 중리 13명, 남창 19명, 신리 22명, 신동 17명, 백치 8명, 창정 2명, 삼거리 5명, 곡교 2명, 공수동 9명, 명포 11명, 철봉 5명 등이다. 아산의 경우 화포군(火砲軍)으로 14명도 참여하였다. 총 129명이 참여하였다. 온양에서는 운산 12명, 여사동 15명, 갈산 2명 등 29명이다. 그밖에 부상 의병소 별군관 진사 이주상, 유학 조두영 등도 동학농민군 진압에 참여하였다. 천안·아산·온양 가운데 아산에서 가장 많은 인원이 참여한 것은 창의를 주도한 인물이 아산 윤웅렬·윤치소 부자였던 점과 무관하지 않다. 이들은 윤보선이 윤치소의 아들로, 아산 둔포에 뿌리를 둔 명문세족이었다. 그 때문에 윤치소 등이 발한 창의통문을 받고 참여한 유생들이 아산 둔포면을 비롯한 주변지역에서 참여한 인물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지역은 5월 아산 백석포에 주둔한 청국군의 피해를 몸소 겪었던 곳이다. 청국군들은 군율이 엄격하지 않아 군사들이 마을을 마구 돌아다녀서 작폐가 매우 심하였던 곳이다. 청국군이 물러간 뒤 민족적 위기에 이 지역 유생층은 숨죽였지만, 동학농민군들은 들고일어났다.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이범석(1862~?)의 『확재집(確齋集)』에 수록된 「경난록」에 의하면, 아산지역 일반인 대다수가 동학에 가입하여, 양반가의 묘소를 파헤치고 전에 원한이 있는 경우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포박하여 형벌을 가하였다고 한다. 노비들도 해방되어 자유롭게 활동하자, 이를 지켜 본 이범석은 노비문서를 스스로 불태우고 면천시켜주었을 뿐 스스로 물을 길고 장작을 패어 밥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다 1894년 10월에 들어와 정부에서 군대를 동원하여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려고 하자, 아산지역 유생들이 민보군을 조직하여 정부군 지원에 나섰다. 아산지역에서 선봉에 나선 인물이 바로 윤웅렬·윤치소 부자와 조중석 등이다. 이들은 10월 21일경 이규태가 이끄는 선봉진부대가 아산에 오자 마중하였을 뿐 아니라, 윤웅렬·윤치소와 조중석은 선봉진의 별군관으로 임명되었다. 윤치소가 이끄는 민보군은 현지 사정에 밝은 만큼 길 안내나 정탐 등 정부군을 지원하거나 직접 동학농민군을 수색해 정부군에게 넘기거나 때로는 직접 처형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목천 세성산전투 이후 천안 목천지역에서 활동하였다. 이들은 이두황부대가 세성산전투에서 노획한 군수물자 가운데 백미 169석과 정조 206석을 청주병영으로 운반하는 역할을 맡는 등 정부군을 적극 지원하는 동시에 동학농민군을 수색하여 체포하는 역할을 하였다. 천안지역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자 11월 1일 예산·신창 등지의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천안에서 아산으로 이동하였다. 이 과정에서 11월 5일 8명의 동학농민군을 체포하여 신창현에 압송하였는데, 이들은 다시 이두황이 이끄는 장위영군에게 인계되어 11월 6일 예산 역촌 앞길에서 목이 잘리는 극형을 당하였다. 이처럼 천안·아산 등지에서 동학농민군 토벌에 앞장을 선 민보군은 「창의인명록」에서 의병통령이 윤치소로 되어 있지만, 그 위에는 윤치소의 아버지 윤영렬이 있었다. 단적인 증거가 10월 21일에는 윤영렬과 조중석이 300명의 의병을 불러와 선봉진 주력부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또 선봉진 별군관 겸 의병소 통령 윤영렬은 10월 24일 천안 남쪽 소거리에 사는 전 도사 김화성 등 4명을 체포하여 취조한 사실을 10월 27일 선봉장 이규태에게 보고한 일이 있었다. 이들 민보군은 11월 7일 천안군수의 지시에 따라 장위영군을 지원하기 위해 아산 곡교에서 홍주 등지로 전진하기도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창의인명록」에 의병통령이 비록 윤치소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 민보군을 총지휘한 통령은 그의 아버지 윤영렬이었다. 그럼에도 「창의인명록」에 의병통령으로 당시 24살이었던 윤치소가 기재되어 있는 것은 동학농민군 토벌 공로를 아들에게 돌려 포상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윤영렬이 조중석과 함께 창의통문을 돌려 민보군을 조직한 시기는 선봉진이 아산지역으로 내려오자, 10월 11일 윤영렬과 조중석이 의병을 일으켜 선봉진에게 호궤 물품을 바쳤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무렵으로 보인다. 10월 11일경 민보군 조직은 전국에서도 매우 앞선 시기이다. 서산 화변면 간월도 유회 성책 표지. 고려대 도서관 제공 △서산 화변면 간월도 유회 성책(瑞山禾邊面看月島儒會成冊) 서산 화변면 간월도의 유회 참여 명단이다. 작성시기는 1894년 11월 24일이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기록물은 서산 간월도 유생들이 동학농민군 토벌시 공로가 있음을 간접적으로 밝히고자 이름을 책자로 남긴 것이다. 수록 명단에는 최양여부터 김성필까지 도합 25명의 명단과 면(面) 회장 이만직, 이(里) 회장 김윤화, 동장 김한집, 공원 노문오, 문서 하산길 등이 기재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간월도에서의 민보군 조직은 면리조직이 조직적으로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서산 영풍창면 우길리 유회 성명성책 표지. 고려대 도서관 제공 △서산 영풍창면 우길리 유회 성명성책(瑞山永豐倉面牛吉里儒會姓名成冊) 서산 청풍창면 우길리의 유회 참여 명단이다. 1894년 11월에 작성된 문서로,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기록물 역시 간월도 유회 성책처럼 동학농민군 토벌에 참여한 유생들의 이름을 책자로 남긴 것이다. ‘유학 류병렬 자 성구’부터 ‘한량 길일서 솔제(率弟) 순서’까지 모두 16호가 기재되어 있다. 각각의 직함은 유학, 한량, 고생 등이다. 문서 제일 끝에는 ‘이회장 김광태 자 청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이 유회 성책은 ‘우길리’ 차원에서 동원된 명단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작성단위가 개인이 아니라 호(戶)단위였다. 그래서 참여한 호 구성원을 보면, 동생, 아들, 사위 등이 함께 참여하였고 앞의 간월도 경우보다 더 조직적으로 민보군이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서산 간원도와 우길리에서 작성된 『유회 성책』은 1894년 10월 28일 홍주성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참패한 이후 보수층의 반동적인 움직임이 얼마나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다. 특히 면리조직을 동원하여 민보군을 모집하였을 뿐 아니라, 친인척 혈연관계를 통해서도 민보군으로 편입하였을 정도로 촘촘히 움직였다. 이들 기록물 외에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정산군 청면의 『유회성책』도 비슷한 시기 내포지역에서 생산된 같은 성격의 민보군 관련 기록물이다. 이렇게 조직된 서산 등 충남 내포지역 민보군은 길목마다 유막(儒幕)을 설치하여 통행자를 검문하여 동학농민군을 색출하거나, 마을마다 주민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등 조직적으로 생존 동학농민군을 단속하고 주민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였다. 때로는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일본군이나 관군을 지원하고 길 아내를 맡기도 하였다. 특히 이들은 어느 누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누가 동학 활동을 하였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동학농민군 입장에서는 가장 무서운 존재였고 가장 많은 피해를 받았다. 이러한 내포지역 민보군의 활동과 폐해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예산군 북하면장의 『북하면보』에 잘 나타나 있다. 김양식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소장

  • 기획
  • 기고
  • 2025.07.16 17:59

[전북의 기후천사] "지속가능한 축제를 위하여"…쓰레기와 '헤어질 결심'

바야흐로 축제의 시대다. 매월 다양한 축제들로 빼곡하다. 문화체육관광부 자료에 따르면 2025년 계획된 종합 축제는 모두 1214개다. 하루 평균 3.3개의 축제가 열리는 셈이다. 전북에서도 올해 89개의 축제가 열릴 예정이다. 그렇다면 축제가 끝난 자리에는 무엇이 남을까? 일회용품과 남은 음식물이 가득한 종량제 봉투가 산을 이룬다. 1회 행사에 5,000명이 방문한다고 가정하면 100리터 종량제 봉투 150개 이상이 쌓인다고 한다. 수만에서 수십만 명이 방문하는 축제에는 얼마나 많은 쓰레기가 쌓일지 상상이 되는가? 최근 전주시지속가능발전협의회와 전주문화재단의 주최로 ‘지속 가능한 축제 문화 조성을 위한 간담회’가 열렸다. 2022년부터 활동하고 있는 쓰레기 없는 축제를 위한 시민 공동 행동(이하 쓰없축) 활동가들도 참여해 지역 축제 현장에서의 폐기물 문제 해결과 구체적인 실천 방안 등을 논의했다. 주요 의제인 ‘쓰레기 없는 축제 만들기’는 지자체만 결심하면 되는 일 아닐까 싶었다. 서글프게도 아니었다. 지난 2021년 ‘공공기관 일회용품 사용 줄이기 실천 지침’이 제정됐다. 지침은 공공기관에서 주최하는 회의나 행사에서 일회용품 등의 사용을 최소화하도록 ‘권고’한다. 전주시에서도 2023년 최서연 의원 발의로 ‘1회용품 사용 줄기이 활성화 조례’가 제정됐다. 문제는 둘 다 강제성이 없다 보니 축제를 주관하는 지자체, 기관, 개인 의지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편리성과 자극 추구가 최우선인 축제에서 쓰레기와 일회용품을 줄이기 힘든 이유이기도 하다. △ 축제, 쓰레기와 헤어질 결심 2021년부터 쓰레기 없는 비건 장터 ‘불모지장’을 운영해 온 정은실(39) 전주시 자원순환 정책 포럼 위원장은 쓰레기 없는 축제 만들기 의제 실행에 집중해 왔다. 흔히들 축제는 일상의 권태로움을 날릴 비일상적인 순간으로 인식하지만, 환경운동가 입장에서는 지구를 학대하는 주범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다. 순간의 재미, 자극적 추구를 위해 하루 동안 쏟아지는 폐기물의 양은 숫자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는 게 정은실 위원장의 설명이다. 재작년 쓰없축에서 실시한 축제 모니터링 결과, 방문객 1인당 최소 5~6개의 일회용품이 배출됐다. 지역에서 일회용품을 사용하지 않는 축제 모델들이 생겨났다. 나름 성과를 거둔 사례도 있다. 지난해 2만 명의 관람객이 방문한 ‘순창 떡볶이 페스타’는 축제장 전체를 일회용품 없는 친환경 구역으로 만들었다. 다회용기 사용과 플로깅, 종이 없는 모바일 리플릿 운영 등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기반의 친환경 운영으로 주목받았다. 이처럼 어떻게 줄일 수 있을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시민과 행정에서 불편함을 감수하겠다는 의지의 문제였다. 결심만 하면 가능한 일이 되는 것이다. 지난 11일 전주의 한 카페에서 만난 정은실 위원장은 이에 대해 “지속 가능한 축제는 불편함을 감수하겠다는 의지에서부터 시작된다”며 “쓰레기 없는 축제는 완벽함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감수할 수 있는 불편의 기준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6년째 불모 지장을 운영하는 그는 일회용품 없이도 축제를 운영할 수 있는 시나리오를 구상하고, 판매자와 구매자의 인식 전환에 힘썼다. 덕분에 불모 지장에서는 다회용기와 장바구니 사용이 자연스럽고 당연해졌다. 정 위원장은“기후 위기 시대에서 축제를 바꾸는 것은 제도와 시민의 공동 실천이 이뤄져야 한다”며 “누가 바뀔까가 아니라, 서로 조금씩 바꾸면서 실험하고 시도해야 지속 가능한 축제 문화가 조성 된다”고 강조한다. 지속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행정과 활동가 시민의 역할 분담이 필요하다고 했다. 행정에서는 예산 확보와 운영 매뉴얼·시스템 도입과 같은 구조적 변화로 실행력을 높여야 한다고 설명했다. 활동가들은 불편의 기준을 설정하고, 시민들은 기준을 세우는 데 동참하는 의지를 보여줘야 ‘지속성’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특히 지역축제 대부분이 지자체의 예산으로 운영되는 만큼 과업 조건에 △일회용품 없는 축제 운영방식 △다회용기 사용 구조 △쓰레기 분리배출 계획 등을 명시하고 의무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제언한다. 그는 “당장 쓰레기를 만드는 방식을 멈추고, 기후 위기를 장식처럼 소비하는 것을 멈추고 구조적 전환을 미루는 행정의 시스템을 멈춰야 한다”고 경고하며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쓰레기 배출을 부추기는 행동을 멈추는 것이다. 지속 가능한 축제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모든 걸 멈춰야 그 다음을 이야기 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그린워싱 함정에 빠지면 안 돼” 환경단체 프리데코의 모아름드리(33) 대표는 쓰레기 없는 축제가 가능해지려면 무늬만 친환경인 ‘그린워싱’을 지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부 기관에서 방문객에게 리유저블컵(다회용 컵)을 굿즈로 제작해 증정하는 이벤트는 새로운 쓰레기 발생만 일으키는 꼴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다회용기를 도입한 것처럼 홍보하고 사용률은 10~20% 밖에 되지 않는 기관 축제들도 빈번하다고 꼬집었다. 실제 사용률이 적다 보니 쓰레기는 쓰레기대로 계속해서 발생해 ‘친환경 축제’라는 타이틀이 무색하다고 했다. 이 같은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프리데코는 오는 8월 열릴 전주세계소리축제에 다회용 컵 도입을 제안했다. 평소 지속가능한 축제에 관심을 보여 온 전주세계소리축제는 프리데코의 제안을 수용해 축제장에 다회용 컵을 배치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 프리데코에서는 다음달 8일까지 시민들에게 용량 500ml 내외의 텀블러와 물병을 기부받는다. 모아름드리 대표는 “시민들이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텀블러 위주로 기부를 받고 있다”며 “새로운 상품이 아닌 기존에 사용했던 텀블러를 깨끗하게 열탕 소독해 다시 사용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대표는 단순히 보여주기식 친환경 축제가 아닌, 지속가능한 축제로의 전환을 위한 시도라고 했다. 그는 “남이 쓴 텀블러를 찝찝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더 이상 축제에서 편리성만 찾을 수 없다”며 “불편함을 감수해야 우리의 미래가 보장되지 않을까 싶다. 자원이 계속 순환될 수 있도록 다양한 방식의 불편함을 제안하고 실행해 나갈 예정”이라고 강조했다.

  • 기획
  • 박은
  • 2025.07.14 18:40

[기획] 커지는 K-방산⋯전주시, 폴란드 시장 개척

이달 초 한국의 대규모 방산 수출 소식이 전해졌다. 현대로템이 생산하는 K2 전차의 폴란드 2차 수출 계약 협상이 완료됐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계약 규모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방산 업계 안팎에선 67억달러(약 9조원) 규모로 추정했다. 추정대로라면 단일 계약 기준으로는 역대 최고 규모가 된다. 이번 성과에서 보듯 폴란드는 한국의 주요 방산 수출국이다. 실제로 스웨덴 외교정책 연구기관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에 따르면 최근 5년(2020~2024년) 동안 한국 방산 수출에서 폴란드가 차지하는 비중은 46%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주시가 방산·탄소기업의 해외시장 진출을 위해 폴란드를 공략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다. 몸집 키우는 K-방산⋯전북 탄소복합재, 방산과 연계 "6·25전쟁 당시에는 탱크 한 대도 없었지만, 75년 만에 우리는 세계 10위 방산 대국으로 성장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8일 방위산업의 날에 언급했듯 한국의 방위산업은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2024년 세계 방위비 지출은 2조 7180억달러로 2015년 대비 37% 상승했다. 2024년 기준 미국 9970억 달러, 중국 3140억 달러, 러시아 1490억 달러 등의 순이었다. 이 가운데 한국은 470억 달러로 11위를 기록했다. 이 같은 세계 방위비 지출 증가는 지정학적 리스크 확대와 신기술 도입 등이 주요 원인으로 분석된다. 특히 한국의 세계 무기시장 점유율은 2.2%로 10위 수준이다. 주요 수출국은 폴란드, 필리핀, 인도 등이다. 최근엔 폴란드와의 대규모 계약을 계기로 수출 권역을 유럽으로 확대하는 추세다. 이러한 상황 속 방위산업 후발주자인 전북은 탄소·수소산업 등 지역적 강점을 바탕으로 관련 시장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특히 전주시가 집중 육성해 온 탄소복합재를 우주항공·방산과 연계하겠다는 것이다. 탄소복합재는 탄소섬유를 활용하거나 탄소섬유에 플라스틱 수지 등을 첨가해 만든 중간재, 부품 등을 일컫는다. 철보다 10배 이상의 강도를 지니면서도 철 무게의 4분의 1밖에 나가지 않는다. 탄소복합재의 수요산업인 우주항공·방위산업은 아직 국내 기반이 약해 그 시장이 협소한 편이다. 무엇보다 대기업 위주로 편성된 한국 방위산업에서 후발주자의 한계를 넘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방위사업청 지정 전북 방산기업은 다산기공(화력), 데크카본(항공유도), 동양정공(탄약), LS엠트론(기동) 등 4곳이다. 전국(83곳)의 4.8% 수준이다. 방산 관련 기업도 효성첨단소재, ANH스트럭처, 데카머티리얼, KGF 전주공장, 디쏠, 하이즈복합재산업 등 6곳에 그친다. 정부·지자체 간 협력 통한 '민관 생태계' 구축 필요 방위산업 수출은 '정부 간 협력'이 필수적이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기반으로 한 정부 간 계약이 일반화된 분야인 만큼 정부 간 신뢰 구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와 관련 전주시도 지난달 폴란드 크라쿠프, 제슈프 등을 방문해 전주 탄소·방산기업의 국제 협력 방안을 모색했다. 지난달 9일 폴란드 복합재기술클러스터(PKTK) 간담회에선 양 지자체 간 신규 협력사업 발굴, 기업 간 탄소복합재 협력, 주요 대학·연구기관 간 공동과제 발굴 및 인재 교류 등에 대해 중점적으로 논의했다. 한국탄소산업진흥원은 이 자리에서 폴란드 복합재기술클러스터와 2025 카본코리아(11월 19∼21일 예정)에서 양국 기업 간 기술 협력을 본격 논의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올해 하반기에는 AGH 공대, 크라쿠프 기술대 등 폴란드 주요 연구기관과의 공동과제 발굴 및 인재 교류도 추진할 계획이다. 지난달 10일 제슈프 기업 비즈니스 콘퍼런스는 전주 탄소·방산기업들의 폴란드 진출 가능성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전주 참여기업인 데크카본은 이번 경제 교류의 성과로 폴란드 복합재 기술 클러스터(PKTK), 크라쿠프 기술센터 등과의 네트워크 구축을 꼽았다. F-16, FA-50 등 항공기용 탄소브레이크 디스크 협력 논의도 일정 성과가 있었다. 향후엔 폴란드 방산·항공기업과의 일대일 후속 미팅을 통해 파트너십을 더욱 강화할 계획이다. 탄소복합재, 세라믹복합재 등 관련 시장 확장 전략도 구체화할 방침이다. 또 다른 참여기업인 아이버스는 전기버스로 제작된 어린이 통학버스의 유럽시장 진출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데 의미를 뒀다. 특히 아이버스 측은 "친환경 통학버스 기술과 어린이 안전 시스템이 폴란드 등 유럽연합(EU) 국가에서도 경쟁력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며 "EU의 환경 규제 강화에 따라 전기버스 수요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전기버스 기반의 통학버스뿐만 아니라 다양한 특장차량 개발을 통해 유럽시장 진출을 모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우범기 전주시장은 이번 경제 교류에 대해 "전주시와 폴란드 간 실질적인 국제 협력의 물꼬를 텄다"고 평가하며 "앞으로도 산학연 연계를 확대하고 유럽시장 네트워크를 지속적으로 넓혀나가겠다"고 말했다.

  • 기획
  • 문민주
  • 2025.07.13 18:47

[트민기] "커피 대신 말차"⋯MZ 사로잡은 '이것'은

유행은 돌고 돈다. 빨라도 너무 빨리 돈다. 괜히 아는 척한다고 "요즘 유행인데 몰랐어?" 이야기했다가 유행이 끝나 창피당하는 일도 다반사다. 트렌드에 민감한 기자들, 트민기가 떴으니 이제 걱정 없다. 이 기사를 읽는 순간에도 SNS,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수많은 유행이 올라오고 트렌드가 진화한다. 트민기는 빠르게 흐름을 포착해 독자에게 전달하는 게 목표다. 올해 초 해외에서 큰 인기를 끈 말차가 국내에도 확산되고 있다. 유통업계는 말차 아이스크림·과자 등 말차맛 제품을 선보이는가 하면 대형 프렌차이즈·소형 카페는 말차 음료를 신메뉴로 선보이는 추세다. 말차는 녹차의 일종으로 차나무의 잎을 곱게 갈아 가루 형태로 만들어 먹는 차다. 항산화 성분이 풍부해 신진대사를 활발히 하는 효과가 있다. L-테아닌이라는 아미노산 성분이 들어 있어 스트레스 완화, 집중력 향상, 수면 개선 등의 효능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같은 각성 효과를 가진 커피와 비교해 말차를 건강하다고 느끼는 이유다. 특히 최근 해외는 클린걸, 국내는 저속노화로 대표되는 건강에 대한 열망이 말차의 유행을 이끈 것으로 풀이된다. 앞서 해외에서는 이미 한 차례 열풍이 일었다. 가수 두아 리파와 모델 헤일리 비버, 배우 젠다야 등 유명 연예인들이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 말차 라떼를 마시는 사진을 올리거나 자신만의 레시피를 공유하면서 유행에 불을 지폈다. 또 SNS 틱톡에는 ‘#matcha(해시태그 말차)’를 달고 올라온 영상의 총 조회수는 20억 회를 넘어섰다. 인스타그램에는 관련 키워드 게시물만 900만 건 이상 올라왔다. 대부분 말차를 감각적으로 촬영한 사진·영상이다. ‘matcha spill(말차 스필)’이라는 밈(온라인상 빠르게 확산되는 콘텐츠)도 등장했다. 말차 음료를 바닥에 쏟은 뒤 고가의 신발, 가방, 장신구 등을 함께 찍어 올리는 방식이다. 각자 말차 레시피를 공유하는 게시물도 적지 않았다. 초창기에는 말차에 바나나, 초콜릿 등 잘 어울리는 조합을 찾았다면 최근에는 우유에 말차 가루만 섞은 기본 레시피가 유행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말차가 SNS에서 많은 관심을 받으며 말차 시장의 몸집도 커지고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더 비즈니스 리서치 컴퍼니’는 지난해 말차 시장 규모를 38억4000만 달러(약 5조2100억 원)로 추산했다. 올해에는 43억4000만 달러(약 5조7500억 원)까지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더 비즈니스 리서치 컴퍼니는 “소매점과 카페, 온라인을 통한 말차 유통이 늘고 있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말차 시장 성장세는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 기획
  • 문채연
  • 2025.07.12 10:57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52) 『순천부포착동도성명성책(順天府捕捉東徒姓名成冊)』·『광양현포착동도성명성책(光陽縣捕捉東徒姓名成冊)』·『광양섬계역포착동도성명성책(光陽蟾溪驛捕捉東徒姓名成冊)』

△지리산권 동학농민군 활동 관련 주요 자료 『순천부포착동도성명성책(順天府捕捉東徒姓名成冊)』은 1894년 12월 전라도 순천부(順天府)에서 체포한 동학농민군의 성명 및 날짜 처리 사항을 중앙에 보고하기 위해 기록한 자료로 1책 3쪽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는 쌍암면(雙巖面)의 영호도집강(嶺湖都執綱) 정우형(鄭虞炯)을 비롯하여 동촌면(東村面)·서면(西面)·별양면(別陽面) 등의 접주와 성찰·마부와 광주 성찰 박현동, 운봉 서기 오준기, 경상도 양산 접주 황두화 등 18명에 대한 총살·효수(梟首)·장방(長房) 수감 등의 처리 사항을 적고 있다. 영호도집강은 영호대접주 아래 직위인 도집강으로 집강소 시기 주로 순천에서 활동했다. 이들은 이해 12월 여수에 있는 전라좌수영 공격에 나섰다가 살해되었다. 장방은 각 관아에서 서리가 쓰던 방을 말한다. 그밖에 이름을 알 수 없는 94명을 때려죽인 사실을 적고 있다. 전라도 순천부 등지에서 활약한 동학농민군 지도층 및 참가층의 이름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광양현포착동도성명성책(光陽縣捕捉東徒姓名成冊)』은 1894년 12월 전라도 광양현(光陽縣)에서 체포한 동학농민군의 성명, 날짜 및 처리 사항을 중앙에 보고하기 위해 기록한 자료로 1책 8쪽으로 되어 있다. 내용에서는 영호대접주(嶺湖大接主) 금구의 김인배(金仁培), 영호수접주(嶺湖首接主) 순천의 유하덕(劉夏德)을 비롯하여, 광양현 봉강·인덕·사곡 등지의 접주 및 순천·구례, 경상도 진주의 김학수, 삼가의 고백준, 곤양의 장학용과 임재석 등 외지에서 온 89명의 농민군에 대한 처리 사항을 적고 있다. 영호대접주와 수접주는 효수하고 나머지는 모두 총살되었다. 전라도 광양현 등지에서 활약한 동학농민군 지도층 및 참가층의 이름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광양섬계역포착동도성명성책(光陽蟾溪驛捕捉東徒姓名成冊)』은 1894년 12월 10일 전라도 광양현 섬계역(蟾溪驛) 상동(上洞)의 주민들이 동학농민군을 잡아 이들의 성명 및 처리 사항을 중앙에 보고하기 위해 기록한 자료로 1책 3쪽으로 되어 있다. 참수된 도접주(都接主) 전갑이(全甲伊), 도집강(都執綱) 정홍섭(丁洪燮) 외에 김석준(金石俊)부터 동몽(童蒙) 조백원(趙伯元)에 이르기까지 동학농민군 27명을 총살한 내용을 담고 있다. 섬계역은 광양에 속한 섬거역(蟾居驛)으로 섬진강 연안의 교통 요지였는데 섬진강을 넘나드는 농민군이 많이 몰려들었다. 이후 12월 22에는 관군 일본연합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많은 희생자를 낸 바 있다. 이상 세 자료는 모두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잡책철(雜冊綴)』에 포함되어 있다. △영호대접주 김인배와 지리산권 동학농민군의 활동 김인배는 1870년 6월 전북 금구면 하서면 봉서마을 출신으로 그의 집은 100여 석을 수확하고 상당수의 머슴을 거느리는 부농에 속했다. 그러던 중 1894년 동학농민군의 봉기가 전라도 일대에서 시작되자 김인배는 농민군에 들어가 전주성 점령에 참여하였다. 그는 원래 김덕명 포에 속해 있다가 전주성 공방전 이후부터 김개남 측근의 대접주로 활약하게 된다. 김인배는 김개남이 남원서 집강소 활동을 할 무렵인 6월 순천 지방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순천 성내에 영호도회소(嶺湖都會所)를 설치하고 농민군의 군수(軍需)를 위해 무기와 전곡(錢穀)을 징발하였다. 당시 영호대도소는 김인배를 대접주로, 순천 출신 유하덕을 수접주로, 순천부 수령 정우형을 도집강으로, 권병택을 성찰로 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그 아래 순천 광양의 11개 면을 단위로 한 접주들이 있었다. 영호대도소는 현재의 전남 동부지역 지리산권의 가장 대표적인 농민군 조직이었다. 김인배는 순천에서 활동하다가 8월부터 경상도 하동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이어 9월 1일 전투에 김인배와 유하덕이 이끄는 농민군 1만여 명이 출전하였다. 결과는 농민군의 대승리로 민보군과 향병은 달아났고 농민군은 9월 2일 하동부 관아에 도소(都所)를 설치하고 집강소 활동을 시작하였다. 하동 집강소는 약 2개월 동안 활동하였는데, 이때 농민군들은 민보군 거점인 화개동 500여 채에 불을 질렀고, 김인배는 처음 며칠간 이곳에 머물렀다. 김인배는 하동전투 승리 이후 진주로 갔다. 영호대도소의 농민군과 현지의 농민군은 9월 14일 진주성에 입성하여 옥문을 부수고 갇혀있던 사람들을 풀어주었다. 9월 17일에는 남원과 구례ㆍ익산 등지의 농민군도 이 지역 농민군 대열에 합류했다. 김인배는 농민군 1천여 명을 이끌고 18일 진주로 들어와 대도소를 설치했다. 그러나 10월 18일 하동에 들어온 일본군과 진주병영의 군사, 토포사가 이끄는 중앙군들은 22일 광양 섬거역에서 농민군과 접전을 펼쳐 10여 명 이상 살해하였고, 당일 광양의 농민군 1천여 명은 섬진강을 건너 하동부를 공격했다. 이때 김인배는 섬진나루로 진격하는 부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화기 공격으로 농민군들은 무기를 버리고 달아났고, 김인배 또한 산골에 숨어있다가 후퇴하였다. 진주 퇴각 후 하동과 광양전투에서 패한 김인배는 이에 좌절하지 않고 10월 말 이후 유하덕과 함께 순천과 광양의 농민군을 다시 규합하여 여수의 좌수영 총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광양 출신 유학자이자 역사학자인 황현(黃玹)의 『오하기문(梧下記聞)』에 따르면 김인배가 좌수영을 공격하려는 것은 뱃길을 끊어 세금 상납과 상거래를 차단하려는 목적에서 비롯한 것이라 한다. 11월 10일 첫 번째 공격에서 좌수영을 함락시키지 못한 채 양측이 별다른 피해 없이 일단 순천으로 후퇴하였다, 11월 16일 다시 습격하여 감영병과 성 밖에서 접전 후 후퇴하였다. 그러나 좌수영 수사 김철규는 통영의 일본 해군 측량선 쓰쿠바호(筑波號) 함장 구로오카 다테와키(黑岡帶刀)에게 서한을 보내 동학농민군 섬멸을 요청하였다. 이에 일본군 100여 명이 진남관으로 들어왔다. 드디어 11월 22일 농민군 수만 명은 덕양역 전투를 시작으로 최후의 결전을 개시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공격으로 농민군들은 일방적 수세에 몰렸고, 그날 밤 좌수영 격전에서 이풍영이 이끄는 좌수영 군사의 습격으로 또다시 패주하였다. 김인배는 이후 순천을 거점으로 활동을 지속하였다. 그러나 12월 초 순천·광양·구례 등지에서 민보군이 조직되어 숨어있던 농민군들을 체포 처형하는 등 잔인한 보복을 개시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김인배와 유하덕은 1천여 명을 이끌고 순천에서 광양으로 옮겼는데, 12월 7일 광양의 민보군 김석하 등은 아전들과 함께 농민군 대 토벌전을 펼쳐 김인배를 비롯한 농민군 40여 명을, 며칠 후에는 다시 100여 명을 체포하였다. 구로오카가 히로시마 대본영에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전라도 안의 53개 지역 중 50곳은 동학도가 점유하는 바이고 좌수영, 나주 및 운봉만 가담하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그는 동학도의 명부에 이름을 올린 자는 1백만 여 명에 이르는데, 이들에 대해 귀순반정(歸順反正)의 방법을 만들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같은 기간 제4중대장 스즈키 아키라(鈴木彰) 대위는 전라도 남부에서 총살과 효수 등으로 살해한 농민군 명단을 제시하였다. 이 자료에서 영호대접주 김인배 외에 최초로 확인되는 농민군 이름이 많이 보인다. 이름을 알 수 없는 94명도 타살되었다. 김인배는 봉강접주 박흥서 등 부하 23명과 함께 참수 처형된 후 광양객사 문 앞에 효수되었는데 당시 나이는 약관 25세였다. 조재곤 서강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 기획
  • 기고
  • 2025.07.09 16:15

[제12대 전주시의회 2025년 상반기 결산] 현장 중심 소통·정책 실효성 높이는데 주력

전주시의회는 2025년 상반기에도 ‘현장 속으로!, 시민과 함께!’라는 슬로건 아래 시민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기 위한 의정활동에 매진해왔다. 시민의 목소리를 중심에 두고 지역 곳곳을 직접 찾아가는 현장 중심의 소통으로 정책의 실효성을 높이고자 노력했으며, 조례 제·개정과 예산 심사, 간담회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복지, 경제, 환경, 청년 정책 등 핵심 분야에서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했다. 또한 시정에 대한 감시와 견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의회의 책무를 강화하고, 시민의 뜻이 시정 전반에 반영될 수 있도록 힘써왔다. 남관우 의장 “시민과 함께, 시민중심의 노력하는 의회 구현” 남관우 전주시의회 의장은 올 상반기 지역 발전과 시민 복리 증진에 중점을 두고, 주민의 목소리가 시정에 적극 반영될 수 있도록 힘써왔다. 남 의장은 지역의 다양한 현안을 발굴하고, 정책을 연구하고 시행하는 전 과정에서 시민의 눈높이에 맞춰 검토하고 확인하는 데 주력했다. 특히 전북특별자치도시군의회의장협의회장으로서, 전북 전역의 주요 현안 사업 해결을 위한 정책을 발굴하고 실현하는 데도 앞장서며, 도민을 위한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남 의장은 “시민의 신뢰와 기대에 보답하는 적극적인 의정활동을 통해, 시대의 변화를 주도하며 함께 성장하는 지방의회를 만들어가겠다”고 밝혔다. 최주만 부의장 “시민의 뜻 대변, 복리증진·지역발전에 앞장” 최주만 전주시의회 부의장은 전주시민의 소중한 뜻을 대변하며, 시민 복지 증진과 지역 발전에 앞장서는 한편, 뛰어난 친화력과 보이지 않는 리더십으로 동료 의원들의 의정활동을 묵묵히 지원해왔다. 전주시민의 대의기관인 전주시의회가 민의(民意)의 참된 대변자로서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최 부의장은 의원 연구단체 운영, 예산결산검사, 특별위원회 활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아낌없는 지원을 이어왔다. 최 부의장은 “의원들의 높은 역량과 열정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는 의정활동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다”면서 “앞으로도 지역 주민의 목소리에 더욱 귀 기울이며, 시민들의 희망찬 미래와 전주시의 도약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말했다. 운영위원회 - 내실 있는 의회 운영 및 의원 역량 강화 운영위원회(김원주·신유정·이국·이남숙·이보순·장재희·정섬길·천서영·최지은 의원)는 의회의 전반적인 업무가 원활하고 체계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운영위는 회기 일정을 사전에 확정함으로써 효율적인 의사진행이 가능하도록 했으며, 탐구하고 발전하는 의회를 만들기 위해 의원 연구단체 활동에 대한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생산적이고 효율적인 의정활동 환경을 조성하고, ‘현장 속으로! 시민과 함께!’라는 제12대 전주시의회 후반기 캐치프레이즈를 실현하는 데 집중했다. 또한 공무원의 근무환경 개선과 후생복지 향상을 위해 ‘전주시의회 지방공무원 복무 조례’와 ‘전주시의회 지방공무원 후생복지에 관한 조례 ’를 개정했다. 이를 통해 의회사무국 소속 직원들이 보다 나은 환경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도 힘을 쏟았다. 행정위원회 – 시민 목소리 반영되는 합리적인 행정 실현 행정위원회(최용철·김성규·김동헌·김학송·이기동·이남숙·장재희·최명권 의원)는 올 상반기 동안 시민의 입장에서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행정이 이뤄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의정활동을 펼쳐왔다. 행정위는 시민의 목소리가 시정에 제대로 반영되고 있는지, 전주시 예산이 투명하게 집행되고 있는지를 면밀히 점검하며, 집행부에 대한 감시와 견제 역할을 성실히 수행했다. 이를 통해 건전한 재정운영과 지역 간 균형발전 실현에도 힘을 쏟았다. 또한 ‘전주시 시정 홍보 등에 관한 조례안’을 통해 현재 운영 중인 다양한 홍보사업의 체계적 관리와 법적 근거를 마련했고, ‘전주시 청소년 중독 예방 및 치료 지원에 관한 조례안’을 제정해 청소년이 유해환경으로부터 보호받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정책적 기반을 마련했다. 이와 함께 완주·전주 통합 추진을 위해 집행부와 간담회나 업무보고를 통해 소통하고 있으며, 합리적인 예산지원을 통해 완주·전주 통합에 힘쓰고 있다. 복지환경위원회 - 시민 복리 증진과 쾌적한 환경 조성 주력 복지환경위원회(김윤철·김정명·양영환·온혜정·이국·채영병·천서영·최주만 의원)는 시민의 건강과 안전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안정적인 복지 서비스 제공과 지속 가능한 환경 보전에 중점을 두고 활발한 의정활동을 펼쳐왔다. 복환위는 갈수록 다양화되고 복잡해지는 복지 수요와 환경 문제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시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실효성 있는 정책 발굴에 집중하고 있다. 특히 ‘전주시 외국인노동자 쉼터 지원 조례안’을 제정해 외국인 노동자들이 휴식과 재충전을 할 수 있는 공간은 물론, 법률 상담과 생활 정보 제공이 가능한 환경을 조성했다. 또한 전주동물원, 하수관로 정비사업 현장, 전주 지방정원 조성현장 등을 직접 방문해 주요 시책사업의 추진 현황을 면밀히 점검하고, 시민의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정책이 실현될 수 있도록 현장 중심의 의정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쳐나가고 있다. 문화경제위원회 - 문화예술 진흥과 관광문화 콘텐츠 개발 위해 노력 문화경제위원회(전윤미·이성국·김원주·박혜숙·송영진·신유정·이보순·장병익·한승우 의원)는 시민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문화예술 진흥과 관광문화 콘텐츠 개발 및 산업화를 통한 부가가치 창출 활성화에 힘써왔다. 문경위는 세계적인 전통문화도시로 자리매김한 전주의 명성을 드높이고, 전통과 미래가 조화를 이루는 ‘잘 사는 전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히 관광문화 콘텐츠 개발과 산업화를 통한 고용 창출 및 경제적 부가가치 창출에 집중하며, 소상공인 육성 및 지원을 통해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앞장섰다. 또한 도심항공교통산업 기반 조성을 위해 ‘전주시 도심항공교통산업 육성 및 지원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고, 전주시가 영화영상산업 도시로 도약할 수 있도록 ‘전주시 영상진흥 조례’를 개정하는 등 미래 신산업 육성에도 힘썼다. 도시건설위원회 - 쾌적하고 안전한 친환경 도시 만들기 노력 도시건설위원회(박형배·김세혁·김현덕·박선전·이병하·정섬길·최명철·최서연·최지은 의원)는 효과적이고 환경 친화적인 개발을 통해 쾌적하고 안전한 친환경 생태도시를 만드는 데 온 힘을 다했다. 도건위는 전주시 내 각종 개발 사업이 도시 균형발전 등 올바른 방향으로 추진될 수 있도록 간담회와 토론회를 적극 개최하며, 더 많은 전주시민이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특히 불법 주차 감소와 주차난 해소를 위해 ‘전주시 주차장 무료개방 지원 조례’를 개정했으며, 고령운전자의 면허 반납을 촉진하기 위해 ‘전주시 고령운전자 교통사고 예방을 위한 지원 조례’도 개정하는 등 시민 안전을 위한 정책 마련에 힘썼다. 또한 전주청년 만원주택 현장과 예비군 육성지원사업 현장을 직접 방문해 시민 생활과 밀접한 현장 점검을 실시하며, 시민이 보다 행복하고 안전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세심한 의정활동을 이어갔다. 예산결산특별위원회 - 건전하고 효율적인 재정 운용 주력 예산결산특별위원회(송영진·이보순·김동헌·김성규·김세혁·김정명·김현덕·온혜정·이국·이남숙·이성국·장병익·최명권·최서연 의원)는 투명하고 효율적인 예산 집행을 위해 위원회를 체계적으로 운영하며 재정 운용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데 힘썼다. 예결특위는 한정된 재원을 불균형 없이 배분하기 위해 세심한 예산 심의를 진행했고, 집행부에 대한 철저한 견제와 감시를 통해 예산이 적재적소에 사용되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했다. 특히 어려운 재정 여건 속에서도 민생에 꼭 필요한 시급한 사업들이 원활히 추진될 수 있도록 2025년도 1차 추가경정예산안을 심사·의결했으며, 이를 통해 투입된 예산이 지역경제 활성화의 마중물이 되도록 최선을 다했다. 아울러 결산검사 과정에서 철저한 분석을 바탕으로 사후적 처방에 그치지 않고 사전 예방에 중점을 둔 예산 심의를 펼쳐, 건전한 재정 운영 방향을 제시하고 재정 효율성 제고에 주력했다.

  • 기획
  • 강정원
  • 2025.07.06 17:47

[전북이슈+]"와, 여름이다!"⋯올 휴가는 전북에서 즐겨볼까

◇빨리 떠나자/야이 야이 야이 야이/바다로⋯. 생각만 해도 설레는 여름 휴가철이 왔다. '여름 노래' 하면 떠오르는 쿨(COOL)의 <해변의 연인>을 들으면서 전북의 초록초록한 여름을 느끼고 찰랑찰랑 물에 발을 담가보는 건 어떨까. 여름 피서지 정보를 정리했다. 전북특별자치도가 운영하는 '투어 전북'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이달의 추천 여행 섹션 7월편 <한여름의 뜨거운 열기 식히는 피서 여행지>로 선정된 관광지들이다. 자세한 내용은 투어전북 문화관광에서 볼 수 있다. △부안 격포해수욕장 변산반도 국립공원에 속해 있는 격포해수욕장은 간만의 차가 심하지 않고 물이 맑은 게 특징이다. 무엇보다 채석강의 절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다. 해수욕장에서 채석강으로 가면서 겹겹이 쌓인 퇴적층을 거닐다 보면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과 절경을 한몸에 느낄 수 있다. △군산 선유도해수욕장 100여 미터 들어가도 수심이 허리까지밖에 차지 않고 높은 파도가 없는 것으로 알려진 선유도해수욕장.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아름다운 백사장이 넓게 펼쳐져 있어 해수욕장의 매력을 한층 더 높인다. 맑다 못해 코발트빛인 앞 바다를 붉은 낙조가 물들이는 모습은 더 그림 같다. △고창 구시포해수욕장 고창군 최대의 해수욕장인 구시포해수욕장은 길고 넓은 백사장과 우거진 송림이 핵심이다. 이 넓은 백사장은 물이 빠지면 단단해져 운동장으로도 사용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전에 방송한 tvN <삼시세끼>의 촬영지로도 유명해 많은 관광객을 모으는 해수욕장이다. △남원 지리산뱀사골 지리산에서 가장 계곡미가 뛰어난 골짜기 하나로 꼽히는 지리산뱀사골. 봄철에는 철쭉꽃이 계곡을 메우고, 가을철에는 오색 단풍이 계곡을 덮고, 여름철에는 삼복더위를 얼어붙게 하는 냉기가 감돈다. 물이 깨끗하기로 유명한 곳이다 보니 여름이면 발 담글 데 없이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다. △완주 동상운장산계곡 완주군의 최동단에 위치한 동상계곡은 소양 위봉산과 진안 운장산 사이의 대아호를 감고 돌아가는 우리나라 오지 중의 하나로 깊은 계곡이다. 자연이 빚어낸 천혜의 휴식처답게 '한국의 블루라군'으로 불리기도 한다. 물빛이 에메랄드 색이다 보니 매년 많은 관광객의 사랑을 받고 있다. △진안 운일암반일암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몸에 느낄 수 있는 운일암 반일암은 자연경관의 끝판왕이다. 전북을 대표하는 여름 관광지로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집채만 한 기암괴석이 겹겹이 자리잡고 있고 거기에 산자락에서 솟구치는 맑고 시원한 냉천수가 만들어낸 크고 작은 폭포와 소, 절경이다. △완주 고산자연휴양림 삼림욕을 즐길 수 있는 고산자연휴양림은 사계절 내내 다른 매력을 보여 주면서 가족 휴양지로 각광받고 있다. 봄에는 꽃이, 여름에는 시원한 물이, 가을에는 단풍이, 겨울에는 기막힌 설경이 특징이다. 이곳은 시설이 잘 돼 있어서 수위의 높낮이에 따라 남녀노소 모두 놀 수 있다. △장수 방화동자연휴양림 깨끗한 계곡을 따라 기암절벽, 다양한 수목이 수려한 자연경관을 보여 주는 방화동자연휴양림은 가족 단위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방화동계곡의 얼음같이 차가운 물줄기와 나무가 만들어 준 그늘이 한여름 열기를 식혀 주는 피서 명소다. △진안 데미샘자연휴양림 섬진강 발원지인 '데미샘'을 품은 데미샘자연휴양림은 다른 곳과 다르게 물놀이 기구인 워터슬라이드가 있어 마치 워터파크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 등산이나 숙박에 집중되기보다는 생태학습 공간, 숲 체험공간 등도 마련돼 있다.

  • 기획
  • 박현우
  • 2025.07.05 11:43

올여름 '여기 어때'⋯전북으로 떠나는 3박 4일 '기막힌 여행'

전북은 아름다운 자연이 절경을 이루고 있어 특별한 활동 없이 앉아 있기만 해도 힐링되는 시·군이 있다.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고서야 처음 들어보는 시·군도 있을 테지만 전북의 14개 시·군 모두 보장된 관광지라고 생각해도 좋다. 이중 관광객들로 그리 북적이지 않는 진안·장수·순창군으로 떠나는 3박 4일 휴가 계획표를 구성해 봤다. 되도록 쉴 수 있고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선별했다. 각 군청 기준 진안, 장수, 순창 순으로 들리면 고속도로를 이용해 1시간 30분이면 이동이 가능할 정도로 서로 가까운 지역이다. 편의를 위해서 관광지별이 아닌 1∼3일 차 일정으로 정리했다. ◇1일 차-진안 운장산 자연휴양림 휴가 1일 차 답게 늦잠을 자고 천천히 출발하는 건 어떨까. 오후 일정만 소화한다고 생각하고 집을 나서보자. 시원하고 깨끗한 공기를 마시며 몸도 달래고 마음도 달랠 수 있는 '운장산자연휴양림'이 휴가의 첫 번째 일정이다. 휴양림 내에 있는 약 7km에 달하는 계곡은 연중 맑은 물이 흐른다. 정말 휴양 목적이라면 이만한 장소가 없을 정도다. 곳곳의 바위와 폭포, 나무 등 자연경관에 취해 하루가 갈지도 모르니 주의해야 한다. 숙박시설·야영장도 잘 돼 있으니 몸과 마음의 휴식을 선물하고 다음 날을 준비해 보자. ◇2일 차-장수 논개수상레저∙장수누리파크 전북에도 수상 레저를 할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장수논개수상레저다. 호남권 최대의 수상워터파크로 꼽힌다. 시원하고 다이나믹한 여름을 느끼고 싶다면 한 번쯤 들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다면 강력 추천한다. 만약 아이와 함께 여행을 왔다면 장수누리파크도 있다. 발물놀이장은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를 끄는 게임 '마인크래프트'를 연상시키는 입체적인 구조와 원색의 블록 디자인이 아이들의 시각적 흥미와 상상력을 자극한다. 수심은 발목 높이로 제한돼 있어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다. 숲놀이터와 키즈카페인 장수어린이생활문화센터, 상상나래누리쉼터, 동물 카라반 등도 있어 가족 관광객에게 사랑받고 있다. ◇3일 차-순창발효테마파크∙쉴랜드 순창군으로 넘어가서 순창발효테마파크에서 순창을 대표하는 고추장을 만나보자. 발효 문화의 미래적 가치를 발굴하고 확산하기 위해 조성된 테마파크인 만큼 발효, 미생물, 효모를 주제로 한 놀이·전시·체험·교육 공간 등이 갖춰져 있다. 전 세대가 순창에 대해 몸으로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곳이다. 이제 휴가 끝나기 전 그동안 쌓였던 몸의 피로를 풀고 다음 날 집으로 돌아가 보자. 이름부터 '쉴랜드'다. 지속가능한 건강한 삶의 영위하는 공간이라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멀리 떠나고 싶을 때, 삶에 지쳤을 때 치유받을 수 있다. △바른 식생활 프로그램 △치유연수 프로그램 △웰니스 프로그램 등 자체 프로그램도 있다. 다 쉼에 초점이 맞춰진 프로그램들이다. 여기서 하루를 묵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듯하다.

  • 기획
  • 박현우
  • 2025.07.05 11:43
기획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