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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이장이 떴다] 젓가락도 내려놓고⋯'올림픽' 후보지 선정에 환호

2월의 마지막 날 일일 농부를 위해 푸짐한 밥상을 차려 주신 최은주(79) 할머니 댁. 오후 6시쯤 결과가 발표될 것이라는 전망을 알고 있었던 본보 식구들은 한창 밥을 먹다가 휴대폰부터 꺼내 들었습니다. 2036 하계 올림픽 유치 국내 후보지 선정 모습을 실시간으로 시청하기 위해서죠. 숨죽인 채 유승민 대한체육회장의 목소리에 집중했습니다. 이렇게 화정마을이 조용한 것도 처음입니다. 유 회장이 A4용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어 금방이라도 발표할 줄 알았지만 조금 시간이 걸리면서 다들 목 빠지게 기다렸습니다. 그때 유 회장의 발표가 시작됐습니다. "1위는 49표를 득표한 전북특별자치도이며⋯." 잠깐 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마저 내려놓고 같이 만세를 외쳤습니다. 놀라움 반 기쁨 반이었습니다. 투표 결과 유효 투표 수 61표(무효 1표) 중 전북이 49표를 획득했다는 소식에 더 놀랐죠. 다들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손뼉을 쳤습니다. 이중 가장 크게 행복해 했던 것은 최 할머니였습니다. "전북이 됐다고? 아휴, 잘했네!" 최 할머니는 "내가 2036년까지 살지 모르겠지만 잘됐어! 잘됐네!"라며 좋아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셔요. 당연히 건강하셔야지!"라고 말하는 청년 일일 농부들에도 "내가 10년 뒤면 아흔이어요. 살면 좋고 그렇지, 뭐. 그래도 참 잘됐네. 축하하네, 전북특별자치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화정마을에서도 함께 '올림픽' 국내 후보지 선정에 환호하며 기뻐했습니다. 또 이렇게 하나의 추억을 만들었고 또 하나의 이야기를 함께하게 됐습니다. 꼭 10년 뒤 최 할머니와 같이 하계 올림픽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디지털뉴스부=박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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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현우
  • 2025.03.02 17:33

[청년 이장이 떴다] '농사 경험 無' 청년 10명이 시골 마을에 모인 사연은?

"이거 맞아?" 오늘 하루 가장 많이 하고, 많이 들은 말입니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을 때 자주 쓰는 말이죠. 평소 불평불만 없이 일만 하던 우리가 왜 이러한 말을 썼냐고요? 힘들어서요. 너무 힘들어서요. 3주 전 신옥리(83) 할머니 댁에 놀러갔다가 마을 고충(?)을 하나 들었습니다. 봄 되기 전에 농사 준비하려면 비료 포대를 다 날라야 하는데 몸이 예전같지 않아 고민이 많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미래의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 채 '청년 이장' 취재진은 "그러면 저희 회사 청년들 초대해서 한 번 같이 나를까요?"라고 답했습니다. 그렇게 약속이 성사되고 2월의 마지막 날 화정마을에 전북일보 식구들이 모였습니다. '청년 이장' 디지털미디어국 디지털뉴스부 박현우·문채연 기자, 영상제작부 김지원·조현욱 기자부터 편집국 문화교육체육부 전현아 기자, 제2사회부 남원 주재 최동재 기자, 심지어 경영기획국 이상규 사원까지 본보 청년 7명이 화정마을에 모였습니다.(사실대로 말하면 '청년 이장'들의 강요로⋯.) 도착하자마자 면 장갑부터 끼고 만반의 준비를 마쳤습니다. 완전무장(?)을 하고 도착한 신옥리 할머니 밭. '일일 청년 농군' 7명의 입이 모두 떡 벌어졌습니다. 한쪽에 덮혀 있는 천막을 걷어내자 무려 60포대에 달하는 비료 포대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농사 경험 0회, 無지만 일단 20kg에 달하는 포대를 손으로 들었습니다. 후배들이 힘들어 보였는지 영상제작부 선배님들마저 카메라를 내려놓고 장갑을 꼈습니다. "이건 진짜 안 돼." 이렇게 단호한 모습은 처음입니다. 그래도 첫 집이라 그런지 힘들지만 다들 으샤으샤 하면서 해냈습니다. 한쪽은 수레에 싣고 한쪽은 경사진 흙길 위로 포대를 올리고 말 안 하고 여차저차 분업도 됐습니다. 찬 바람이 부는데도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게 아니라 여름 한낮 때처럼 땀이 주르륵 흐릅니다. 참고로 지금은 여름이 아닙니다. 정말 힘들었습니다. '시골 어르신들도 하는데 그리 힘들지 않겠지!'라고 생각했던 때를 후회했습니다. 일단 지친 몸을 이끌고 두 번째 집인 최은주(79) 할머니 댁으로 향했습니다. "우린 20포대여!"라는 말을 들은 청년 7명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네요. 웃음은 1분도 안 갔습니다. 저기 마을 길 건너까지 걸어가야 밭이 나온다네요. (하하하) 하지만 우리는 7명입니다. 못 할 일은 없습니다. 땀이 식기도 전에 20포대를 싣고 나르기 시작했습니다. 진짜 울고 싶었습니다. 땀을 어찌나 흘렸는지 여기저기서 땀냄새가 폴폴 나네요. 이건 진짜 힘들다는 증거입니다. 더 멀리 가야 합니다. 이번에는 오율례(76) 할머니입니다. 목적지까지 무려 도보 5분이 넘습니다. 우리가 믿을 건 '외발수레'뿐. 이마저도 처음 운전해 보는 터라 비틀비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옆으로 쓰러진 수레도 적지 않습니다. 청년 7명이 모였는데도 고요합니다. "나 진짜 못하겠어. 이거 아니야." "한 집만 하면 돼요! 서두르자고요." 큰일났습니다. 아직도 끝이 안 났거든요. 김정자(87) 할머니 밭이 마지막인데 이게 왠걸 이번 비료 포대는 물을 한껏 머금었습니다. 물을 먹기 전 20kg였을 테지만 지금은 40kg입니다.(아마 체감상 40kg는 되는 듯했습니다.) 다들 걸음도 느릿느릿, 쉬는 시간이 더 길어졌습니다. 다들 힘들었는지 짜증도 늘어났죠. "누가 비료 포대를 가까운 데서부터 내려 놓은 거야." 지친 탓에 멀리까지 비료 포대를 가지고 갈 힘이 없는지 다들 바로 코앞 거리부터 비료 포대를 채우기 시작했죠. 그래도 누구 할 것 없이 하얀색이었던 목장갑은 어느덧 검은색이 됐고 깨끗했던 옷은 여기저기 흙이 묻을 정도로 열심히 했습니다. 오후 내내 함께 땀 흘리며 무려 110포대를 나른 오늘, 웃음도 사라진 채 말 없이 일만 했지만 모두 이 말만은 똑같이 했죠. "우리가 너무 쉽게 봤어. 너무 힘들다. 이걸 그동안 할머니 혼자서, 아니면 할머니·할아버지 두 분이서 했다는 거야? 진짜 대단하시다. 다시 하라고 하면 못 할 것 같아." 오늘 농번기를 앞둔 시골 마을에서 제대로 농사의 고단함 배우고 느끼고 반성하고 퇴근합니다. 함께해서 즐거웠지만 힘들었고 힘들었고 힘들었습니다. 디지털뉴스부=박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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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현우
  • 2025.03.02 12:53

[청년 이장이 떴다] "고생했응게 많이 먹어"⋯따뜻한 '저녁 한 상'

긴 겨울이 지나고 오랜만에 따뜻한 햇살이 내리쬡니다. 그 아래에서 본보 청년들이 구슬땀을 흘립니다. 한참 일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넘어갈 시간. 땀을 닦으며 잠시 숨을 돌리는 사이, 어디선가 최은주(79)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아이고, 고생들 많다니께! 밥은 먹고 혀야지!" 최 할머니가 마당 한쪽에서 사용감이 느껴지는 바비큐 그릴을 꺼내 옵니다. 자식들이 집에 찾아올 때 쓰던 물건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특별한 손님을 위해 꺼냈습니다. 손에는 큼지막한 삼겹살 덩이도 들려 있습니다. 직접 재배한 싱싱한 상추도 큼직한 채반에 한 가득. 거기에 신옥리(83) 할머니의 명이나물과 고추 장아찌, 매콤한 고추와 마늘까지. 금세 저녁 한 상이 뚝딱 차려졌습니다. ”얼른 와! 고기 탄다. 먹고 혀! 고생했응께 많이 먹어야 혀." 푸짐한 한 상이 차려지고도 한참을 안 오는 청년들을 부르는 소리가 점점 커집니다. 뒷정리에 매진하다 헐레벌떡 달려간 최 할머니의 집 앞 마당은 앉을 자리도 없었죠. 고기 그릇이 바닥 나기가 무섭게 끊임없이 채워집니다. 너무 많이 먹었다는 말도 소용없습니다. ”어르신, 저희 많이 먹었어요! 이제 그만 굽고 같이 드셔요.” 그만 굽고 드시라는 말에 어르신은 손사래를 칩니다. 꼭 고생한 저희에게 직접 구운 고기를 먹여야겠다는 겁니다. ”안 다쳤어? 많이 힘들지?“ 함께 고기를 굽기 위해 그릴 곁에 함께 선 청년 이장을 향해 신 할머니가 말합니다.(사실 신 할머니도 치킨을 준비했다가 너무 많은 고기 양에 급하게 주문을 취소했답니다. 다음에 사 주기로 약속했죠.) 맛있는 고기 냄새가 마을에 퍼진 듯 주변에서 운동하던 마을 주민들까지 모였습니다. 이장순 할머니부터 청년 이장들도 '영화 언니'라고 부르는 동네 주민 이혜례 씨까지 다 모였죠. 그리고 귀여운 시골 똥강아지도 왔습니다. 명절에나 다 모일 것 같은 인원이 한 자리에 모여 왁자지껄 하하호호 한바탕 놀았습니다. 뒷정리까지 마친 후 집으로 돌아간다는 청년들의 말에 할머니들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고마워!"라는 말을 반복하셨죠. 사실 오늘 고생한 사람은 저희만이 아닙니다. 화정마을 어르신들도 마음고생이 컸답니다. ‘젊은 청년들을 고생시키는 건 아닐까?’, ’다치면 안될 텐데.‘ 걱정이 함께 걷는 걸음에서, 함께 수레를 잡아 주던 주름진 손에서, 한숨처럼 흘러나온 말들에서 묻어났습니다. 그 마음을 알기에 배가 불렀지만 내어주신 음식을 남김없이 비웠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어르신! 디지털뉴스부=문채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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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채연
  • 2025.03.02 12:53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35) 우금치 전투 이후 지방통제의 실상을 보여준 북하면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북하면보(北下面報)〉는 총 12건으로 현재 모두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소장하고 있다. 북하면장 홍순철은 1894년 11월 10일부터 12월 15일까지 북하면의 상황을 상부인 청양현에 보고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정정해야 할 내용이 있다. 그동안 북하면이 충청도 예산에 속하였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북하면은 충청도 청양현에 속하였다. 〈여지도서(輿地圖書〉(1757)에 북하면이 청양현에 속해있으며, 〈호구총수(戶口總數)〉(1798)에서도 역시 북하면이 청양현에 속해 있음이 확인된다. 이후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청양현 북하면과 북상면이 운곡면으로 합쳐졌다. 1894년 당시 북하면은 현재 운곡면 영양리, 미양리, 광암리, 추광리 및 신대리 일부 지역이다. 이는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북하면보〉가 12건이지만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이외의〈북하면보〉가 더 있다고 짐작된다. 이 〈북하면보〉의 작성자 또는 보고자는 북하면의 면장 홍순철이었고, 수급자는 청양현이다. 먼저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바로 작성 시점이다. 이 〈북하면보〉는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으로 보면 1894년 11월 10일부터 12월 15일까지 작성되었다. 가장 빠르게 작성된 것은 바로 11월 10일(음력)에 작성된 〈북하면보〉이다. 이 시기는 바로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주력이 공주 우금치에서 패배한 직후이다. 즉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패배 하자마자 행정단위의 기본조직인 면의 책임자가 고을 현감에게 해당 면의 상황을 매우 상세하게 보고하고 있다. 이는 우금치 전투 이후 조선정부의 지방통제책이 강화되고 있는 상황과 맞물려 있다고 생각된다. 즉 동학농민군을 색출하여 토벌하는 동시에 5가 작통제와 향약을 통해 향촌사회를 강력하게 통제하는 상황에서 작성되었다고 보여진다. 청양현 북하면은 공주 우금치와 매우 가까운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농민군 토벌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특히 보고가 빈번하게 그리고 상세하게 이루어졌다고 보여진다. 12건의 〈북하면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북하면보〉 현황 <북하면장 홍순철이 작성한 보고(1894년 11월 15일)> 북하면의 첩보[北下面報] 다음과 같이 면(面)에서 첩보합니다. 그간 찾아서 얻은 병기는, 길이 1장 5척인 장창(長鎗) 1개로, 위아래가 구리로 장식되어 있고 고리를 잇닿아 꿴 사슬이 달려 있어 쟁쟁하게 울리니 창 가운데 특이한 것입니다. 그리고 환도(環刀) 한 자루, 등자(鐙子)가 없는 말안장 1건입니다. 지금 이에 관아에 납부하기 위해 이날 보냅니다. 추동(秋洞)에 거주하는 최원재(崔元在)는 바로 동도(東徒)들의 수괴로 이른바 ‘대정(大正)’의 직임을 맡은 자입니다. 일전에 대흥(大興) 백성들에게 잡혀갔는데, 무슨 교묘한 언변으로 별난 농간을 부렸는지 처벌을 피하고 나와 끝내 징계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추동에 사는 백성들을 위협하여 장차 재앙의 그물 가운데에 묶어 던져 버리려고 하여 추동의 백성들이 장차 버티기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를 잡아와서 자백하게 하니 스스로 말하기를, “10여 년간 동학 수백 명에게 포덕(布德)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일삼은 것을 캐 보니, 다른 사람의 무덤을 파고 다른 사람의 집을 훼손시키며 다른 사람을 묶어 놓고 돈을 바치게 하는 등의 일에 매번 앞장섰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밟아 죽이네, 불을 지르네 하는 말로 위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동(洞)의 민가(民家)에 감시하에 잡아 두고서 관아에서 어떻게 처분할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제 미시(未時)쯤에, 공주(公州) 신촌(新村)의 백성들이 배대일(裵大一)을 마을 안에 잡아 두고 사람을 시켜 급히 기별하기에 면의 백성을 보내 데려와서 또 동의 민가에 묶어 두고 또한 어떻게 처분할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첩보합니다. 갑오년(1894, 고종31) 11월 15일 묘시(卯時) 북하면장 홍순철(洪淳喆) [제사] 보고한 것 중에 창 한 자루는 잘 도착했는데, 환도, 말안장 그리고 수동(受洞)에서 옮겨 온 화포(火砲) 한 자루는 무슨 이유로 오지 않는 것인가? 동도(東徒)들이 혹여 오면 즉시 첩보한 대로 조사하여 찾아내 들여보내라. 그리고 최원재와 배대일에 관한 건은, 착실한 군인을 따로 정해서 모조리 속히 압송하고, 여러 가지 사무들은 모두 이전의 영칙(令飭)의 내용대로 별도로 자세히 살펴서 실행하되, 촌마을 사람들과 반드시 의지하면서 안정되기를 힘쓰도록 할 것. 15일 관(官) (서압) (『동학농민혁명신국역총서』11권,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9, 81∼82쪽) 위의 내용은 1894년 11월 15일 묘시(오전5시∼7시)에 북하면장 홍순철이 청양현감에 보고한 내용이다. 주요 내용은 북하면에서 수거한 병기인 장창 1개, 환도 1자루, 말안장 1건을 청양현에 보낸다는 것과 추동에 거주한 동도 수괴 대정 최원재와 배대일을 잡아 두고 어떻게 처분할 것인지를 묻고 있다. 즉 북하면 차원에서 과거 동학에 참여했던 수괴 최원재와 배대일을 임의로 잡아 그 잘못을 따지고 있다. 당시 면 조직 차원에서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고 색출하는 일을 자체적으로 자발적으로 진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보고서를 받은 청양현은 제사(백성이 관부(官府)에 제출한 소장(訴狀)·청원서·진정서에 대하여 관부에서 써주는 처분)를 통해 병기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최원재와 배대일을 압송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이는 청양현이 북하면에서 자발적으로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고 색출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에 대해 인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밖에 중요한 내용은 동학농민군으로 참여한 사람들에 대해 그 재산을 몰수하고 있다. 1894년 12월 15일 〈북하면보〉에 따르면 “동적(東賊)의 물건은 관아에서 몰수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이다”라고 하여 동학농민군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이 매우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북하면보〉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고 토벌하는 상황에 대한 보고,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결성된 유회군의 활동, 북하면의 동학농민군 토벌 활동, 동학농민군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것을 사용한 현황 등이 〈북하면보〉의 주요 내용이다. 당시 동학농민군 토벌과 진압활동이 지방행정조직을 통해 매우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당시 지방행정조직이 체계적으로 운용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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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26 22:13

[팔팔 청춘] 초등학교 졸업한 80대 할머니?⋯"건강만 된다면 고등학교도"

수년 전 기성세대가 자주 쓰는 "나 때는 말이야"를 풍자하는 신조어(?)가 생겼다. 바로 "라떼는 말이야"다. 같은 말을 들어도 누군가는 기성세대를 '꼰대'라고, 누군가는 '인생 선배'라고 칭한다. 결국 듣기 나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순히 인생 선배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후배한테 하는 조언도 '라떼'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진짜 인생 조언이 될 수도 있는데 말이다. 이러한 안타까운 현실에 <팔팔 청춘의 인생 이야기>라는 기획을 구상하게 됐다. 과연 인생 선배인 기성세대는 어떤 삶을 꿈꿔 오면서 살았을까. 그 안에서 '희로애락'을 겪으며 어떤 교훈을 얻었을까. 후손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조언은 무엇일까. '평균 나이 81세'지만 영화 촬영하고 사진집 낸 화정마을 멋쟁이 할머니 이야기에 이어 구순을 앞둔 조옥선 할머니를 만나봤다. 구순을 앞두고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중·고등학교까지 바라보는 조 할머니는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을까? "새장은 참 예뿌다/새장 속에 새가 있어야 참 예뿐대/새가 없음니다 날아다니는 새야/예뿐 새장이 있으니 날아다니다 힘들면/언제든지 차자와 쉬었다 가렴"(조옥선作 '새장' 전문) 글씨가 삐뚤빼뚤하고 한글 맞춤법에 맞지 않아 더 울림 있는 이 시는 조옥선(86) 할머니의 작품이다. 조 할머니의 창작 실력은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져 있다. '문해교육' 초등 과정 재학 기간 6년 중 3년 동안 익산시가 주최한 성인문해학습자 문해 백일장 대회에서 익산시장·한국문해교육협회 익산지부장상을 받기도 했다. 조 할머니는 지난주 익산행복학교 황등 2반에서 초등 과정을 마친 '늦깎이 학생'이다. 여기서 말하는 익산행복학교는 2024학년도 기준 문해교육 프로그램 학력인정 기관으로 지정된 도내 6개 지역 10개 기관 중 한 곳이다. 조 할머니는 매주 3회 연간 240시간에 달하는 수업을 받으며 꼬박 6년을 공부했다. 학업 성적이 우수한 데다 품행이 단정해 6년간 반장은 물론 익산행복학교 졸업식 당시 졸업생 대표로 답사를 전하기도 했다. "제 나이 팔십에 머리는 희고,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고, 세상살이 외롭고 힘들 때 학교에 입학하게 됐습니다. 그동안 6년을 배워 마침내 졸업장을 받았습니다. 익산행복학교 이름처럼 학교에 오면 행복해지고 젊어집니다. 봄에는 봄 소풍, 가을에는 체육대회, 저에게는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함께 공부했던 반 친구들도 떠오릅니다."(졸업식 답사 중 일부) 조 할머니는 10여 년 전 남편을 떠나보내고 외로운 시간을 보냈다. 마음이 한창 힘들 때 지인을 통해 익산행복학교를 알게 됐다. 공부를 가르쳐 준다며 같이 가보자는 지인의 말에 못 이기는 척 따라갔는데 졸업까지 하게 됐다. 항상 배움에 대한 갈증은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6·25가 발발하면서 저학년 때부터 일찍이 엄마 따라 돈을 벌러 다닌 조 할머니는 평생 공부를 못 했다는 것에 대한 한이 있었다. 그래서 누구보다 더 열심히, 진심으로 학교에 다녔다.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하고 배운 것은 꼭 집에 가서 몇 번이고 복습하는 게 조 할머니의 일상이었다. 그날 배운 거라도 문 앞만 나오면 기억이 가물가물해지는 탓에 남보다 한 번 더 보고 복습했다. 이제 시 쓰기는 기본 전자 제품에 써 있는 영어 또한 술술 읽을 줄도 알게 됐다. 실제로 조 할머니에게 특별한 일이 있었다. 인터폰이 고장 나서 고객센터에 전화하니 상담원이 영어로 적힌 모델 넘버를 불러 달라고 했다.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지 않았다면 읽을 수 없었을 테지만 조금은 느려도 한 글자 한 글자 정확히 불러 준 탓에 인터폰 고장도 뚝딱 해결했다. 조 할머니는 "이 나이에 공부 안 했으면 어떻게 내가 영어를 읽고 이름을 쓰겄어. 선생님 덕분에 다 가능했지. 전에 큰 영어 말고 작은 영어(소문자)는 못 배우겄다고 했다니께? 근데 해 보니께 괜찮더라고"라고 말했다. 이렇게 평생 조 할머니의 등에 있던 짐 보따리 같았던 '배움'에 대한 한이 해결되면서 자신감도 생기고 행복해졌다. 아무것도 모른 채 입학했지만 이제는 어엿한 중등 과정 입학을 기다리는 학생이 됐다. 그의 도전은 끝이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조 할머니는 배움에 때는 있지만 나이가 없다고 말한다. 보통 늦깎이 학생이라면 배움에는 때가 없다고 말하지만 조 할머니는 조금 다르다. 조 할머니는 "배움에는 때가 있지만 해 보고 나니까 나이는 없는 것 같어. 제때 배우는 게 중요하지. 나이 들면 아무리 가르쳐 줘도 몰라. 그래도 하니까 돼!"라며 웃어 보였다. 나이에 맞는 교육이 중요하긴 하지만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못 하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할머니에게는 꿈이 있었다. 때에 맞게 교육을 받았더라면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믿는 그 꿈, 바로 선생님이다. 초등학교도 몇 년 다니지 못했지만 선생님이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모습이 너무 멋있어 보였던 것이다. 여느 어린 아이처럼 꿈도 있었지만 할머니가 어릴 적 꿈을 꾸는 일은 사치이고 욕심이었다. 조 할머니는 "선생님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러. 못 배웠는데 꿈꿔서 뭐 하겄어요. 그냥 꿈으로 가지고 있는 거지, 배웠다면 할 수 있었을 텐디. 꿈도 다 욕심이지, 뭐"라고 했다. 할머니는 또다시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있다. 중학교를 넘어 고등학교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다. 한 번 도전해 보니 나 자신이 너무 뿌듯하고 할 만하다는 생각에 계속해서 도전하기로 한 조 할머니다. 그는 "중학교 가면 초등학교 때보다 더 많은 걸 배울 수 있잖어. 그래서 가고 싶어. 우리 같은 할머니들은 고등학교는 함열여고로 갈 수 있어. 내가 그때까지 살겄어? 건강이 허락한다면 하고 싶지. 건강만 된다면 무조건 갈 거여"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우리가 살던 때는 이렇게 멍청하게 살았지.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세상이 밝고 좋지 않어? 못 배워도 노력만 하면 살 수 있어!"라며 "내가 공부도 하고, 도전도 해 보니께 알겄더라고. 자식들이 엄마를 자랑스러워 혀. 더 배우라고 하지. 그리고 해 보니께 그냥 나 자신이 너무 뿌듯혀. 자랑스러워"라며 지금을 살아가는 청춘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전했다. 디지털뉴스부=박현우 기자

  • 기획
  • 박현우
  • 2025.02.24 14:46

[뉴스와 인물] 최주만 전주시의회 부의장 “2036 하계올림픽 유치, 완주‧전주 상생 발전 최선”

‘현장 속으로, 시민과 함께’라는 슬로건으로 제12대 후반기 전주시의회를 이끄는 최주만(동서학, 서서학, 평화1·2동) 부의장은 시민과 호흡하며 현장 속에서 민생을 해결하기 위한 의정활동에 여념이 없다. 특히 2036 전주올림픽 유치라는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최 부의장을 비롯한 전주시의회 소속 의원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최 부의장을 만나 2036 전주올림픽 유치 전략과 각종 의정 현안 등을 들어봤다. 후반기 부의장으로서 의회를 이끌고 계십니다. “동료, 선‧후배 의원님들과 협력하고 지역 발전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치며 매우 뜻깊고 보람찬 일정을 보내고 있습니다. 특히 시민의 목소리를 듣고 이를 반영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큰 책임감을 느낍니다.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조율하며,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의회를 이끌어가는 일은 쉽지 않지만 여기에서 오는 뿌듯함 또한 큽니다. 이러한 경험들이 앞으로의 정치적 여정에도 큰 자산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현장 속에서 시민과 함께 소통하며 전주시의 발전과 시민의 행복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겠습니다.” 전북특별자치도와 전주시가 2036 하계올림픽 유치에 나서고 있습니다. 유치 전략은. “전주는 대한민국의 전통문화와 자연환경, 신재생에너지를 활용한 친환경 도시 개발로 지속 가능한 올림픽 개최가 가능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올림픽 어젠다 2020 핵심 가치인 비용효율성, 지속가능성, 사회적 영향에 완벽 부합한 전주는 지방 도시 연대 전략을 통한 IOC와 세계에 올림픽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며 유치에 힘쓰고 있습니다. 특히 신재생에너지 생산량 전국 1위 도시로, 그린 올림픽을 실현해 신재생에너지를 기반을 둔 친환경 대회 개최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거둘 것으로 기대됩니다. 또한 올림픽 투자유치 과정에서 구축한 투자환경과 신뢰를 바탕으로 상생 협력관계를 구축하면서 올림픽 스폰서십 확보가 용이합니다. 이미 전주는 문화와 역사, 미래가 공존하는 도시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단순 올림픽이 아닌 풍부한 무형문화재(106건)와 판소리·태권도·비빔밥 등 K-컬처 열풍의 원동력이자 뿌리인 전북의 전통문화와 연계한 올림픽을 선사하며 세계인들의 문화 올림픽으로 폭을 넓힐 수 있습니다. 또한 전주는 유네스코 음식창의 도시, 스페인 유력 언론 ‘엘페리오디코’가 선정한 세계 미식 도시로 전주가 맛으로 세계를 충분히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문화와 자연이 어우러진 전주는 비용효율성, 지속가능성, 사회적 영향 등 IOC 핵심 가치를 전략으로 2036 하계올림픽이 실현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036 하계올림픽을 유치하게 되면 어떤 기대 효과가 있나요. “2036 하계올림픽 유치는 전주와 전북이 글로벌 도시로 도약할 절호의 기회입니다.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등 다방면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불러오는 것은 물론, 특히 관광, 서비스 산업 활성화와 대규모 인프라 확충을 통해 지역 발전의 촉진제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실제 전주시의회의 검토에 따르면 올림픽 유치는 경제적 측면에서 약 9조 1781억 원의 투자로 생산 유발 28조 원, 부가가치 유발 13조 원, 취업 유발 37만 명의 경제적 파급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분석됐습니다. 지역 경제 활성화와 국가 경제 성장에 기여할 가능성이 크며, 인프라 확충과 교통망 개선을 통해 장기적으로 관광 및 물류 산업의 발전을 촉진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자리 창출, 관광객 유입, 신재생에너지 기반 시설 확충 등을 통해 지속 가능한 지역 발전을 이끌어낼 것입니다. 나아가 수도권에 집중된 자원과 인프라를 지방으로 분산함으로써 국가 균형발전과 지방 활성화를 실현하는 상징적 계기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시의회 차원에서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요. “전북자치도와 전북자치도체육회 등 관계 기관들과 긴밀한 협력 체계를 구축하는 것을 기본으로 전방위적인 유치 활동을 펼쳐나갈 계획입니다. 먼저 지난 12일 전북자치도지사와 올림픽 유치를 위한 간담회를 갖고 범시민 홍보 대사 역할을 수행하는 등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습니다. 2036 하계올림픽 유치를 위한 원동력은 시민들의 열정입니다. 올림픽 유치를 위한 시민들의 의지와 열기를 끌어 모으고 결집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또한 전주시의원들은 정계와 체육계 등의 두터운 인맥과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올림픽 유치를 위해 발로 뛰겠습니다. 여기에 전주시의회 송영진·이성국 의원이 2036 전주올림픽 유치 성공 기원 범도민 지원위원회 사무총장과 사무국장이라는 중책을 맡게 됐습니다. 두 의원은 전주올림픽 유치를 위한 중앙과 지역의 가교 역할을 해나갈 것으로 기대됩니다.” 올림픽 유치와 함께 완주‧전주 통합 문제도 뜨거운 관심산데요. “전국이 통합 분위기고 지방분권을 이루기 위해서는 경쟁력 있는 도시가 돼야 합니다. 완주·전주 통합을 위해서는 많은 대화와 관계 기관의 도움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의회는 완주·전주 통합과 관련해 찬·반 입장보다는 양 지역이 함께 상생발전 할 수 있는 토론회를 지난해부터 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토론회와 같은 소통의 장을 마련해 통합이 지역 발전과 주민 이익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양 지역 주민들의 불필요한 오해를 해소할 수 있게 하겠습니다. 완주·전주 통합 움직임이 10년 만에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 만큼 다양한 의견을 청취하고 한 뜻으로 모아 완주군민과 전주시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안을 도출해 우리 지역이 미래 도시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전주시의회가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현안이나 과제가 있다면. “복지, 교통, 일자리, 환경, 주택 등 다방면에서 해결해야 할 현안들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고령화 문제와 농업 위기는 우리 지역뿐만 국가 차원에서 선제적인 대책과 방안이 시급한 상황입니다. 이에 우리 의회는 올해 첫 회기인 제417회 임시회에서 이보순 의원이 대표 발의한 고령친화도시 조성 지원 조례를 제정했습니다. 이로써 노인인구 증가와 고령화에 따른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정책을 수립해 나이와 관계없이 모든 세대가 살기 좋은 고령친화도시 전주로 거듭날 것으로 기대됩니다. 또 김성규 의원이 대표 발의한 전주시 스마트농업 육성 및 지원 조례가 통과되면서 전주시 농업 경쟁력 강화는 물론 농업인 소득증대, 농업인 고령화‧노동력 부족 등을 해결할 수 있게 되면서 지역경제 발전과 미래 농업 발전이 가속화될 것으로 보입니다. 앞으로도 집행부와 함께 숙원사업은 머리를 모아 해결하고 전주를 지켜낼 미래 먹거리 산업에 대해서도 꾸준히 관심을 두고 적극적인 의정활동을 펼쳐나가겠습니다.” 전주시의회의 정책 결정 과정에서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요소는. “정책 결정 과정에서 시민의 목소리가 적극 반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간담회, 공청회 등을 통해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며 소통 의정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또한 정책 과정이 투명하게 이뤄져야 합니다. 이는 의회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와 직결되며, 의회는 시민들의 신뢰와 지지를 바탕으로 효율적인 의회를 운영할 수 있습니다. 동료, 선‧후배 의원들, 행정기관, 시민단체 등과의 협력과 소통을 통한 정책 다양성과 실효성을 높이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러한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고 반영해 전주시 발전과 시민 삶의 질 향상에 이바지하는 정책 발굴 등 노력하는 의정활동을 펼쳐나가겠습니다.” 앞으로 의정활동 계획과 목표는 무엇인가요. “후반기 전주시의회 슬로건이 ‘현장 속으로! 시민과 함께!’입니다. 시민과의 소통을 중심으로 주민 목소리가 정책에 반영되고 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의회가 되는 것이 저를 비롯한 모든 의원의 궁극적 목표일 것입니다. 주민이 필요로 하고 필요한 현실적인 정책 개발과 의정활동을 펼쳐나가겠습니다. 또 주민 삶의 가치를 높일 수 있도록 적극적인 지역구 활동과 주민에게 꼭 필요한 숙원사업들을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대의기관으로서 미래 기초의회의 모습은 민의를 저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주민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주민참여예산, 주민발안조례, 주민감사, 주민투표, 주민소환 외에도 여러 제도와 창구를 확실하게 넓혀 갈 생각입니다.” 마지막으로 전북일보 독자를 비롯한 전주시민과 동료의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전주시의회는 64만 전주시민을 대표하는 의결기관이면서 시민의 뜻에 따라 집행부를 견제 감시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시민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의원 스스로 높은 도덕성을 유지하고 우리의 책무를 다해야 합니다. 시민으로부터 존경받고 신뢰받는 의회를 우리가 만들어야 하며, 부의장으로서 의원들의 원활한 의정활동을 위한 지원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전주시의회가 제 역할을 해나가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지가 중요합니다. 시민들께서 직접 뽑은 시의원들인 만큼 지켜봐 주시고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뜨거운 관심 부탁드립니다.” 최주만 전주시의회 부의장은 최주만 부의장은 지난 2022년 6월 치러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당선되면서 12년 만에 전주시의회로 돌아왔다. 그는 “제12대 전주시의회 의원들 중 초선의원이 상당히 많은데, 모두들 열심히 의정활동을 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며 “초선의원들이 열심히 해주니 나 자신부터 열심히 의정활동을 하게 되는 등 중진의원들 모두 열심히 하는 등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나면서 선배의원으로서 뿌듯하다”고 말했다. 동료, 선‧후배 의원들과 시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해 현장을 발로 뛰고 있는 최 부의장은 올해 신설된 긴급현안질문에 이어 주민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다양한 제도와 창구를 마련하는 게 목표라고 했다. 최 부의장은 “시민을 대변하고 시민에게 꼭 필요한 전주시의회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최 부의장은 완산고와 원광보건대, 전주대 경찰행정학과, 전북대 법무대학원 지방자치학과(석사)를 졸업했으며, 제7·8대 전주시의회 의원을 지냈다.

  • 기획
  • 강정원
  • 2025.02.23 17:47

[청년 이장이 떴다] "못해요!"→"재미있네!"⋯화정마을 그림 교실에서 생긴 일

"선상님, 다른 그림 안 보면 못 허요! 머리가 안 돌아간다니께. 허연 종이에 뭐슬 그리라고." "어머니, 저 한 번 따라해 보시게요. 네모 먼저 그려 볼까요? 저는 지붕을 이렇게 그릴 거예요." 지난 19일 화정마을 '청년 이장' 아지트에서 특별한 그림 수업이 열렸습니다. 전주에서 이일순(서학동사진미술관 대표)·김삼열 선생님이 온다는 소식에 할머니들은 일찍이 채비를 마치고 모였습니다. 앉을 자리 없어 따닥따닥 붙어 앉았지만 얼굴은 싱글벙글 웃음꽃이 피었네요. 그렇게 앉은 책상 위에는 달랑 하얀 캔버스와 4B 연필뿐. 그림 주제는 '집'입니다. 내가 살았던 집, 살고 있는 집, 살고 싶은 집, 다 좋습니다. 그림을 그려 보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할머니들 눈에는 물음표가 가득합니다. 최은주(80) 할머니는 "선상님, 이거 본뜨는 거 아닌가? 나 이러믄 못 허는디. 갑자기 '집'이라고 하니께 생각 나는 게 없네, 우짠대"라며 당황해 했습니다. 다른 할머니들도 "이렇게 하믄 어떻게 혀", "금방 나왔는디 우리 집이 우째 생겼는지 기억도 안 나" 서로 목소리를 높입니다. 이일순 선생님도 덩달아 당황했습니다. '청년 이장' 취재진으로부터 할머니들이 지난해 그림 수업을 받았다고 들었지만 다들 밑그림을 원하셨기 때문이죠. 알고 보니 이전에는 본뜨듯이 아래에 그림을 대고 스케치를 했다는 것입니다. 할머니들의 힘으로 했던 건 물감 칠하기뿐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일단 캔버스를 들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네모부터 천천히 그려 보자는 선생님 말에 할머니들도 하나둘 손에 연필을 들고 따라 그려 봅니다. 닭부터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고양이도 하나씩 넣어 캔버스를 가득 채웠습니다. 이전에 '그림' 수업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안 하겠다고 하셨던 강정애(79) 할머니까지 푹 빠졌습니다.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를 보이면서 집도 그리고 마당에 있는 양은솥, 닭도 그려 봅니다. 괜히 쑥스러운지 더 크게 소리 내 웃으시면서 꼼꼼히 색칠해 봅니다. 하얀 캔버스가 순식간에 알록달록 색깔 옷을 입었네요. 처음에 어떻게 그릴지 몰라 헤매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작업에 열중해 봅니다. 생각보다 수준급의 완성도를 보이는 할머니들에 작가님들도 깜짝 놀랍니다. 모두 캔버스를 들고 여기저기 돌려 봅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했나 같이 작품을 보여 주기도 합니다. 앉아 있었던 것도 벌써 두세 시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그래도 모두 지친 내색 없이 작품 하나를 완성했습니다. 작가처럼 완벽한 그림은 아니지만 어르신들만의 개성이 담긴 작품은 장관을 이룹니다. 오늘도 '청년 이장' 아지트에서의 수업은 성공입니다. 두 세 시간 내내 실컷 웃고 함께 이야기 나누며 또 하나의 추억을 쌓았습니다. 디지털뉴스부=박현우 기자

  • 기획
  • 박현우
  • 2025.02.22 08:57

[청년 이장이 떴다]"유쾌한 어르신들 모습에 위로 받아"⋯작가까지 떴다

'청년 이장' 취재진에게 새로운 의뢰가 접수됐습니다. 이번에는 그림입니다. 곧바로 취재진은 작가 섭외에 나섰습니다. 고민 끝에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서학동사진미술관 이일순(52) 대표님을 섭외하기로 했습니다. 겨우 전화 한 통으로 프로젝트 설명 후 재능 기부를 조심스레 요청했지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우리 기자님 좋은 일 하시는구나!"라며 응해줬습니다. 이 대표는 남편인 김삼열(56) 작가와 함께 화정마을을 찾아 하얀 캔버스 위에 알록달록 색을 입혀 주셨습니다. 처음에 "부끄러워!", "그림은 안 혀, 못 그려!" 하던 어르신들은 뚝딱 작품 하나를 완성했습니다. 화정마을 어르신들과 서너 시간을 호흡한 이 대표님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흔쾌히 재능 기부에 응해 주신 이유가 있나요? "먼저 신문사에서 시도하는 이색 취재 현장이라는 점에서 관심이 갔습니다. 막연하게 농촌 인구가 줄어든다며 걱정하던 시대를 지나 나라 전체가 인구 소멸 등의 문제를 안고 살고 있잖아요. 어르신들이 모여 마을을 지키고 있는 현실을 신문사가 관심을 갖고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소식이 반가웠습니다. 젊은 기자들의 활약도 궁금해 흔쾌한 마음에 응했습니다." 직접 시골 마을 어르신들을 만나 보니 어떠셨나요? "미술 작업이 처음인 분들도 계셨을 텐데 유쾌한 어르신들의 호응에 감사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현재 부모님들이 편찮으셔서 요양원, 요양병원에 계셔요. 그래서 오랜만에 어머님들과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위로를 얻은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90세가 되신 어르신들도 함께 그리고 소통하며 서로를 챙기시는 모습 속에서 마을 공동체의 역할과 좋은 영향력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됐어요. '청년 이장' 프로젝트의 시도에 박수를 보내고 사회에 꼭 필요한 연결고리로서 전북일보가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 기대하고 성과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디지털뉴스부=박현우 기자

  • 기획
  • 박현우
  • 2025.02.22 08:56

[청년 이장이 떴다]"게이트볼 한판 허야지!"⋯화정마을 할배들의 '특별한 나들이'

오늘(18일)은 특별한 날입니다. '청년 이장' 취재진이 화정마을 할아버지들과 나들이(?)를 가는 날이기 때문이죠. 평소 오후 2시만 되면 삼삼오오 경로당에서 '수다 삼매경'에 빠지는 할머니들과 달리 할아버지들은 경로당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할배들은 365일 게이트볼을 칩니다. 점심 먹고 오후 1시가 되면 이경구(87)·윤병일(83) 할아버지는 약속이라도 한 듯 장청송(80) 할아버지 집 앞에 모입니다. 세 분 모두 멋들어진 모자에 장갑을 꼼꼼히 챙기고는 청송 할아버지의 트럭에 올라탑니다. 목적지는 고산체육공원 게이트볼장. 이날 취재진이 찾아간 게이트볼장의 첫인상은 '훈훈함'이었습니다. 실내 게이트볼장 곳곳에 설치된 난방기가 뜨거운 바람을 뿜어내며 어르신들의 몸을 따뜻하게 데워 줍니다. 작은 움직임에도 다치기 쉬운 어르신들을 위해 겨울이면 후덥지근하게, 여름이면 시원하게 유지되는 곳입니다. "이(여기)는 누구여?" 저기 멀리 몸을 풀고 있는 고산게이트볼협회장 이승규(78·덕암마을) 할아버지가 눈을 동그랗게 뜹니다. 그때 경구 할아버지가 "우리 동네 청년이장이여! 내가 아주 잘 아는 사람들이지!"라고 환하게 웃으며 한 마디 던집니다. 처음엔 취재진을 낯설어하던 할아버지들도 '청년 이장'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뿐 아니라 할아버지들에게도 인정받은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진짜 고산면, 그것도 화정마을 사람이 다 된 듯하네요. "어이! 이제 시작하게! 일로 오쇼!" 순식간에 게이트볼장이 떠들썩해졌습니다. 다른 마을 사람도 하나둘 얼굴을 드러내더니 어느덧 10명이 모였습니다. 게이트볼을 한 팀당 5명, 총 10명의 사람이 모여야만 할 수 있는 협동 운동입니다. 우리 삼총사 할아버지로는 턱없이 부족하죠. 그래서 게이트볼장에는 총 5개 마을이 함께합니다. 화정마을을 비롯해 덕암·교전·심풍·부동마을까지 모이죠. 사는 마을은 다 다르지만 대부분 '고산 토박이'인 터라 서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게이트볼장은 '고산면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뭣이 그렇게 재밌으셔요?"라는 취재진의 질문에 경구 할아버지는 망설임 없이 "365일 친다고! 겨울엔 따숩고 여름엔 시원하니 을매나 좋아!"라고 대답합니다. 이승규 할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이며 "여기 나오면 사람 만나고 같이 노니까 좋지. 집에서 뭐 하겄어?"라며 한 마디 덧붙입니다. 젊었을 적에는 일하는 게 전부였던 할아버지들은 취미가 뭔지도 모르게 바삐 살다 이제서야 비로소 취미를 찾았습니다. "옛날엔 취미가 어딨어? 먹고 살기도 바뻤지. 우리가 배곯지 않고 살게 된 지 얼마 안 됐어. 60년대 말 70년대 초에 누가 이렇게 따순 밥 먹고 좋은 옷 입었겄어. 일만 허고 살았지." 할아버지들은 오늘도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십니다. 트럭을 타고 게이트볼장을 가야 하기 때문이죠. 덕분에(?) 고산 게이트볼장은 연중무휴입니다. 디지털뉴스부=문채연 기자

  • 기획
  • 문채연
  • 2025.02.22 08:56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34) 〈남정일기(南征日記)〉, 〈갑오실기(甲午實記)〉

〈남정일기〉 표지. 서울대 규장각 제공 〈남정일기(南征日記)〉 1894년 동학농민군 진압차 조선에 출병한 청국군 영접사 이중하(李重夏)의 비망기로 ‘남정(南征)’이란 일기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남쪽 전라도 동학농민군 정벌 관련한 내용 중심으로 되어 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조선에 진주한 청국군의 경로와 조선 정세에 대한 인식을 살펴볼 수 있다. 5월 1일 조선 정부는 공조참판 이중하를 대표로 하는 영접사를 파견하여 무기 수송과 통신ㆍ치안 등을 위한 인력과 양식, 우마와 선박ㆍ뱃사공 및 이에 소요되는 각종 비용 등 그들의 요구사항에 적극 협조하였다. 아산에 상륙한 청국군의 인력과 우마ㆍ양식ㆍ선박 제공 등과 관련하여 직명ㆍ용도별 동원 인원 및 금액 지출 내역 등을 매일매일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이중하는 서울을 출발하여 평택과 둔포를 지나 당일 저물녘에 아산 백석포에 도착하였는데, 아산현감과 온양군수ㆍ직산현감 등이 와서 청국 군함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들과 함께 우마와 운송 선박 마련과 제반 응접에 관한 일들을 준비하는 한편, 각 읍에 각별히 경계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다음 날 인천 주재 청국 영사는 영접사에게 태원진 총병 니에시청(聶士成)과 직례제독 예지차오(葉志超)를 비롯한 청국 군대의 도착 일정을 설명하고 아산의 포구는 물이 얕은 까닭에 병선은 앞바다의 내도(內島)에 정박하고 작은 배로 운반할 것이라고 예시하였다. 이후 니에시청의 병선 1척과 소륜선 1척이 아산만에 도착하였다. 이중하는 작은 배로 병선으로 가 니에시청과 그 일행에게 위로와 문안의 뜻을 전하고 잠시 대화하였다. 니에시청 부대의 아산 상륙은 새벽 조수가 밀려 들어왔을 때부터 시작되어 작은 배로 군량과 군기를 운반하느라 종일 부산하였다. 니에시청도 군대를 거느리고 백석포에 내려 아산읍으로 들어왔다. 다음날 예지차오의 병함 1척이 내도의 앞바다에 도착하였는데 니에시청의 경우와는 달리 배와 말의 준비 문제로 상륙이 지연되는 상황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조수가 밀려올 때 예지차오의 대군은 배를 타고 백석포로 향했다. 이중하는 초토사가 ‘비류(匪類)’를 크게 이겨 도망가고 흩어졌다는 충청감사의 전보 내용을 예지차오에게 설명하고 ‘적도(賊徒)’들이 이미 흩어졌으니 진군할 필요가 없다는 뜻을 말하였다. 그러나 예지차오는 이를 따르지 않았고 니에시청은 내일, 자신은 모레 행군할 것이라고 답하였다. 이에 이중하는 며칠 만이라도 쉬면서 피곤함을 풀고 잠시 정탐한 사실을 기다린 후 행군할지 머물지를 결정하자고 완곡히 제안하였다. 그럼에도 예지차오는 ‘공주에 도착하여 친히 적들의 형세를 살펴본 연후에 행군할지 말지를 결정하겠다’면서 일축하였다. 이중하는 ‘읍촌에서 짐을 질 백성들은 뽑아 군에서 필요한 땔감과 말먹이 등 각종 물건의 짐을 지도록 하는 것 등은 모두 값으로 쳐서 지급할 것이다’는 내용의 포고문을 내걸었다. 한편 예지차오도 별도로 전주의 농민군들이 흩어져 달아났다는 정탐 내용을 확인하였지만, 북양대신 리훙장(李鴻章)의 지시를 받은 후 수군과 육군의 거취를 정하겠다고 우리 측에 회답하였다. 전주의 동학농민군들이 철수했다는 조선 정부의 보고에도 불구하고 ‘적당(賊黨)은 그래도 몇몇 군데에 둔을 치고 모여 있다’는 전보를 받은 청국군 진영에서는 관원을 전주에 파견하여 상세히 탐지토록 하였다. 예지차오는 ‘여비(餘匪)가 아직도 많이 몰려 있다’는 전주 파견원의 정탐 보고에 따라 군사를 보내 그들의 근거지로 들어가서 ‘비도의 우두머리’를 잡아들이겠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이중하는 ‘이미 흩어진 여비들은 저들 스스로 귀화할 것인즉, 이와 같이 사람을 파송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고 전하였다. 이중하의 건의에 따라 청국군은 당분간 아산 일대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며칠 후 예지차오는 농민군 진압을 위한 출동을 결정하고 실행에 옮겼다. 그는 ‘비당(匪黨)이 아직도 장성ㆍ고부 등지에 남아있고 다시 방자하게 미쳐 날뛰고 있다’고 판단하고, 병사들을 진군시켜 이들을 쓸어버릴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였다. 이에 이중하는 지금 초토사를 철수시켰고, 남은 ‘비도’들도 이미 흩어졌으니, 근심할 것이 못 된다면서 정탐한 내용이 반드시 사실과 부합된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다시 정확하게 탐지한 후에 병사들을 진군시키자는 신중론을 여러 차례 피력하였다. 그럼에도 예지차오는 이미 북양대신으로부터 속히 ‘남비(南匪)’를 쓸어버릴 일에 대하여 전보로 영을 받은 것이 지엄하므로 감히 잠시도 늦출 수 없다고 일축하였다. 그 결과 니에시청으로 하여금 소속 병용 900명과 진마(陣馬) 100필을 거느리고, 각 영과 각 역에는 말 150필의 대기를 지시하고 전주를 향하여 출발시켰다. 이 기간 일본군의 인천 출병과 서울 도성 밖 진입상태에서 청국군 주력은 전라도 행을 중지하고 다시 아산으로 되돌아오면서 사태의 추이에 촉각을 세우고 있었다. 또한 예상되는 일본군의 남하에 대비하여 니에시청은 6월 13일 아산을 출발하여 성환역을 지나 다음날 진위와 수원 등지를 정찰하고 15일에는 평택을 거쳐 아산으로 되돌아왔다. 23일 새벽 니에시청은 일본군과의 본격적인 전투 즉, 성환 전투의 준비를 위해 성환으로 부대를 옮겼다. 당시 황현(黃玹)의 기록에 의하면 그 과정에서 서울로부터 삼남 가는 도로변의 성환 100여 개 마을이 청국군에 유린되었고 노인과 어린이의 사망자가 이어졌다고 한다. 남정일기는 6월 27일 성환전투까지 기록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문서이다. 〈갑오실기〉표지. 서울대 규장각 제공 〈갑오실기(甲午實記)〉 1894년 3월부터 12월까지의 중요 사실을 정부 입장에서 날짜별로 기록한 것으로 필자는 확인할 수 없다. 동학농민혁명 관련 내용은 3월 26일 자 의정부 초기부터 시작한다. 최근에 호서ㆍ호남ㆍ영남 등지에서 협잡의 부류들이 무리를 모아 멋대로 못된 풍습을 자행하고 난동을 부린다고 하니 3도의 관찰사에게 명하여 엄하게 단속하고 만약 고치지 않고 예전과 같은 폐단이 있다면 그 괴수를 잡아서 효수해 경계하고 뒤에 보고하도록 하라는 내용이다. 그 결과 29일 장위영 영관 홍계훈을 전라 병사에 제수하고 현지에 파견토록 하였다. 4월의 기사는 양호초토사 홍계훈의 호남지역 파견, 고부민란과 군수 조병갑의 도주, 안핵사 이용태의 파견과 불법 행위 등을 거론하고 있다. 이후는 고부ㆍ금구 농민군의 활동과 전주 점령 내용까지 이어진다. 5월 1일에는 청국 원병의 조선 파견 요청에 관한 조정 내의 논의 내용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원임 대신 입궐 시 고종은 청국군의 구원을 요청하는 일로 하교하면서, “총리 위안스카이(袁世凱)가 말하기를 만약 전보로 통지하면 며칠이 안 되어 군함이 내박한다”고 하였다. 이에 여러 대신이 모두 사세가 어쩔 수 없다는 뜻으로 상주하자 고종은 일본이 같이 움직이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그런데 궁궐에서 물러난 뒤 이 일로 민영준이 영돈령부사 김병시에게 편지와 사람까지 보내어 문의하자 “비도(匪徒)의 죄는 비록 용서할 수 없지만, 모두 우리 백성입니다. 어찌 우리 병사로 소탕하지 않고서 다른 나라 병사를 빌려 토벌하면, 우리 백성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민심이 따라서 쉽게 흩어질 것이니, 이것은 정말 신중하게 살펴야 합니다”라면서 잠시 관망하자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이에 민영준이 궁궐에 들어가 이 말을 상주하니, 고종은 “이 논의가 매우 좋다. 그러나 닥쳐올 일을 헤아릴 수 없는 데다 여러 대신들의 논의 역시 (청병의)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 마땅하니, 청관 조회의 발송을 재촉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성기운을 위안스카이에게 보내 이 내용을 전달하니, 위안스카이는 곧장 톈진으로 전보하여 며칠 되지 않아 청병 군함이 연안에 정박하고 예지차오가 2천여 병을 거느리고 아산에 상륙하였다는 것이다. 6월의 기사에서 주목되는 점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관련 내용이다. 갑오실기에 따르면, 6월 21일 “새벽에 일본 병사 몇천 명이 와서 경복궁을 지키고 영추문 밖에 이르렀는데, 자물쇠가 열리지 않자 나무 사다리를 타고 궁궐 담장을 넘어 들어왔다. 또 동소문은 불을 질러 돌진하여 자물쇠를 부수어 문을 열고, 임금이 계시는 집경당(緝敬堂)의 섬돌 아래로 곧장 들어와 빙 둘러 호위하고 각각의 문을 지켜서고 조정 관리와 액속(掖屬)은 모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평양 병정 중에 신남영(新南營)에 있던 자는 곧장 건춘문으로 들어와서 일본 병정을 향해 발포하였다. 안경수는 안에서 나와 서둘러 중지시켰다. 평양 병사는 분한 마음으로 군복을 벗고 나와서 돌아갔다”고 되어 있다. 이로 보면 최초의 교전은 사다리를 타고 궁을 넘은 일본군과 수비병 간에 궁 안에서 시작된 것은 분명하다. 그 과정에서 이미 궁 안에 있던 안경수가 일본군과 내응하여 전투 확산을 저지하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이후부터 8월까지의 기록은 군국기무처 설치와 이 기구에서 입안 시행한 각종 개혁안과 정부의 직제 개편 내용 등에 관한 것이다. 원훈(元勳)이자 전 총리대신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조선에 공사로 파견하였는데, 총리대신에게 전임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가 궁궐을 핍박한 것은 매우 불경한 것이었고 지금까지의 의안 대부분은 급하지 않은 일을 미리 행한 것 뿐으로 매우 한심스럽기에 대개 ‘개화에 관한 법’은 하루 이틀에 급하게 논의할 수 없고 점차 실시하고 서서히 완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고 한다. 10월의 기사는 성주와 하동의 소요로 인한 민가 소실, 수원 및 용인 동학농민군 지도자 효수 및 수색 체포 처단, 법부 협판 김학우 암살 등의 내용이다. 이어 충청도와 전라도ㆍ경상도에 위무사를 파견하여 백성들을 달래게 한 내용도 상세하다. 11월에는 정부군과 일본군의 호남 농민군에 대한 연합 토벌 작전과 지역별 농민군 체포 차단 상황, 공주 효포전투에 관한 선봉장 이규태의 보고, 회덕전투에 관한 교도 영관 이진호 보고, 직산과 목천ㆍ공주ㆍ노성ㆍ논산 농민군 체포 처단에 관한 선봉장 보고 등을 기록하였다. 12월에는 패잔 농민군 체포 처형, 금구 원평 농민군의 동향, 홍산ㆍ서천 농민군 토벌과 함께 김개남 처단, 전봉준 체포 압송 소식을 기술하고 있다. 갑오실기에는 청일전쟁과 청국군의 동향도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예지차오는 부하 병사 다수를 이끌고 관동과 관북으로 우회 퇴주했고 흩어졌던 청국군은 평양에서 합류했다. 원래 청국군이 압록강을 넘어 평양으로 들어올 때 의주부터 평양에 이르는 여러 고을의 백성들이 도시락밥과 국을 싸들고 와서 맞이하였고 쌀과 소고기 등 양식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처음에는 우호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특히 웨이루쿠이(衛汝貴)의 성자군(盛字軍)은 오합지졸로 통솔이 되지 않았고, 그들이 지나는 곳은 노략질로 넘쳐나 백성들이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이 시기 평양 이북부터 의주까지의 지역 사정을 ‘십실구공(十室九空)’의 형세로 비유하고 있다. 당시 평양은 인구 2만여 명의 도시로 1만 5천여 명인 청국군의 군량과 군수 등을 대기는 쉽지 않았고 질고는 상상을 초월하였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조재곤 서강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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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21 12:14

[전북의 기후천사] 김지훈 문화통신사협동조합 대표가 2년 째 '플로깅' 하는 이유는?

‘이 시간에 쓰레기를 줍는다고요?’ 1월 17일 금요일 오전 7시, 김지훈 문화통신사 협동조합 대표가 해도 뜨지 않아 어두컴컴한 아침에 서신동 천변을 걸으며 쓰레기를 줍고 있었다. 한 손에 봉투를 들고 보물찾기하는 사람처럼 천변 곳곳을 훑으며 쓰레기를 줍고 있는 그에게 슬쩍 물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쓰레기를 줍나요?” 2023년 연말부터 서신 천변에서 플로깅을 실천하고 있는 김지훈 대표는 튼튼한 팔다리와 짱짱한 허리만 있다면 누구든 기후 천사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플로깅’은 길거리와 공원, 바닷가 등을 걸으면서 쓰레기를 줍는 행위로, 기후 문제에 관심이 높은 MZ세대 사이에서 입소문 난 기후 행동으로 꼽힌다. 전북의 기후 천사를 소개하고자 기자도 이날 직접 참여해 봤다. 슬쩍 둘러봤을 때는 깨끗했지만 천변 곳곳을 샅샅이 훑어보니 담배꽁초부터 플라스틱 뚜껑, 땅에 묻힌 마스크까지 갖가지 쓰레기들이 튀어나왔다. 플로깅을 시작한 지 1시간쯤 지나자 봉투 안은 쓰레기로 가득 찼다. 평소와 다르게 아침 일찍 쓰레기도 줍고 운동도 하니 기분은 가뿐했다. 하지만 불현듯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가 쓰레기를 줍는다고 세상이 달라질까?’… 의구심을 품고 그에게 물었다. “쓰레기를 주워서 세상이 바뀌었나요?” 스웨덴에서 시작된 ‘플로깅’은 환경보호와 운동효과가 결합한 활동으로 주목받으며 힙한 문화로 자리매김했다. 각종 소셜미디어에는 해시태그(#) 플로깅이 달린 게시물들이 수만 개에 이른다. 최근 들어서는 친환경 이미지를 원하는 기관이나 기업에서 플로깅 행사를 열어 캠페인을 실천하기도 한다. 플로깅이 단순한 거리 미화를 넘어 기후에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있을까. 김 대표는 환경 문제를 알리는 효과가 크다고 강조한다. 실제로 그가 꾸준히 플로깅을 실천하면서 가족과 주위 예술인들도 플로깅에 관심이 생겼다. 플로깅이 다른 기후 행동에 비해 진입장벽이 낮다 보니 접근도 쉽고 다른 기후 행동 실천으로 확산할 수 있는 긍정적인 영향이 크다는 것이다. 평소 기후 위기나 환경문제에 관심은 있었지만, 김 대표도 기후 행동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린웨이환경축제 감독이었던 대표에게 지인이 “사업으로만 (환경 활동에) 접근하지 말고, 진심으로 접근해야 하지 않겠냐”고 조언했고, 곧바로 플로깅을 시작했다. 그는 쓰레기를 줍다 보니 점점 환경 활동에 진심을 쏟게 됐다고 했다. “오타니 (야구) 선수가 운동장 모퉁이와 관중석까지 돌면서 남들이 버린 쓰레기들을 줍잖아요. 행운을 줍는다고 하면서 말이죠. 저도 제가 하는 일이 잘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천변을 걸으면서 행운을 주워요. 좋은 마음으로 플로깅을 실천하다 보니 좋은 일들도 많이 생기는 것 같아요” 2년 동안 꾸준히 플로깅을 하다 보니, 어르신들의 칭찬과 용돈은 덤으로 따라온다. 아침부터 사람들에게 “수고한다, 고맙다” 등의 애정 어린 인사를 받으면 더할 나위 없이 큰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플로깅이 기후 위기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변화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에너지 전환 등과 같은 거시적인 관점에서만 환경 문제를 보려고 하기보다는, 개개인의 변화에 초점을 두고 기후 행동을 실천하다 보면 훗날 거대한 변화를 목격할 수 있다고 했다. 꾸준한 변화를 위해 김 대표는 환경 활동에 재미와 가치를 결합한 시도를 계속해서 선보일 방침이다. 캥거루 옷을 입고 등산을 하면서 주운 쓰레기를 앞주머니에 넣고, 배가 많이 나온 사람에게 선물을 주는 환경 활동 ‘캥거루 플로깅’부터 버려진 골판지를 활용해 해양쓰레기의 심각성을 알리는 ‘고래 먹이주기 자판기’ 등 환경에 재미를 더하고 가치를 덧댄 활동을 활발히 진행하겠다고 약속했다. 플로깅을 마친 뒤 김지훈 문화통신사 협동조합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기후 행동이라는 게 거창한 건 아니에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부터 실천하면 돼죠. 길거리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는 일도 기후위기 해결의 출발점이 될 수 있어요. 작은 실천들이 하나씩 쌓이다 보면 결국에는 세상을 바꾸는 단단한 힘이 될 테니까요" 대표는 주운 쓰레기들을 분리수거하겠다며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플로깅만으로 세상이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쓰레기 줍기라는 작은 행동 덕분에 우리의 삶은 보다 나아질 것이라고 믿는다. △김지훈 대표는 전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지훈 대표는 사회적 기업인 문화통신사 협동조합을 운영하고 있다. 젊은 청년들과 함께 문화활동을 기획하고, 환경 활동을 실천하고 있다. 2018년부터 2023년까지 그린웨이 환경축제 총감독으로 일했으며 2023년 지구를 지키는 신묘한 자판기 축제 등을 기획해 선보였다. 지난해에는 부안에서 '에코 서바이벌 게임'과 꿈다락 문화학교 '지구를 지키는 신묘한 자판기' 등 기후·환경 활동을 추진해 청소년들이 기후위기, 환경문제를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 기획
  • 박은
  • 2025.02.20 14:46

농협중앙회 전북본부 이정환 총괄본부장 "청년들 농업 진출 위한 소득 3000만 원 기틀 마련"

"전북농협은 지난 60년을 넘어 앞으로도 우리 땅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농업인과 농촌의 믿음직한 동반자가 되겠습니다" 농협은행 전북본부장으로 1년 동안 활동하다가 올해 1월 1일 총괄본부장으로 영전한 이정환 본부장. 부안출신인 그는 전북농업의 발전을 위해 초심을 잃지 않고 한걸음 나아갈 때 마다 올바른 길로 가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면 현장에서 그 답을 찾고자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믿음직한 동반자, 전북농협’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전북특별자치도와 함께 도내 농업·농촌과 농업인의 동반자가 되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특히 농업에서 희망을 찾고 젊은이들이 농업에 더 많이 진출 할 수 있도록 농업소득 3000만원의 기틀 마련도 약속했다. 올해 전북 농축협이 탄탄한 수익을 바탕으로 농촌을 지키는 중심축이 되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밝힌 이정환 총괄본부장을 만나 전북농협의 계획과 비전에 대해 들어봤다. -먼저,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십니까! 전북농협 본부장으로 일하게 된 이정환입니다. 을사년에는 모두에게 희망이 있고, 발전이 있는 해가 되길 기원합니다. 전북농협도 어려운 시기에 지혜와 협력을 통해 위기를 기회로 삼는 힘찬 도약을 하는 해로 만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전북농협은 전북특별자치도와 도민의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 동행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자 합니다. -전북출신으로 고향 사랑이 남다르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전북발전을 위한 계획이 있다면 "저는 부안에서 태어나서 초·중·고를 나왔고 전북대학교를 졸업하고 전북농협에 입사했습니다. 그 만큼 전북특별자치도에 대한 애정이 남다릅니다. 제가 농협은행 본부에서 여신과 기업 관련 업무를 담당할 때 전북특별자치도의 기업들이 더욱 열심히 경제 활동을 할 수 있게 최대한 지원을 했습니다. 그게 고향이 제가 큰 일을 할 수 있게 도와 준 고향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전북특별자치도는 농생명사업의 수도입니다. 이는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고 중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전북농협의 수장으로서 도내 농업인 등이 마음 놓고 농업경영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작은 일부터 차근히 준비하고 지원하고자 하는 것이 전북특별자치도의 발전이라는 생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 할 생각입니다. -농업소득 3000만원 달성을 위해 농업 현장의 어려움을 직접 듣고 지원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는데 구체적인 추진계획이 있다면 "지난 2023년 기준 농업소득은 약 1,110만원 정도였으며, 1994년에 약 1,032만원에서 30년 동안 8%에도 못 미치게 증가했습니다. 물가상승률을 대입하면 실질적으로는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사이 같은 기간 농업경영비는 502만원에서 2,677만원으로 430%가 넘게 증가했으니 대한민국 발전의 근간을 책임졌던 농업인의 어려움이 어떠할지 이 수치만 보더라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농협은 농업인의 본업인 농업소득 보다 농업외 소득이 더 많은 상황을 타개하고, 농업에서 희망을 찾고 젊은이들이 농업에 더 많이 진출 할 수 있도록 농업소득 3000만원의 기틀을 마련해 나가려고 합니다. 전북농협은 이를 위해 농가 수취가 제고, 경영비 절감, 생산성 향상이라는 세가지 분야에 중점을 두고 사업을 추진해 나갈 것입니다. 먼저, 수취가 제고를 위해서 전국 최초 도내 14시·군에 설립된 조공법인 활용을 통해 판매량 극대화와 농산물 제값받기에 매진해 나가겠습니다. 또한, 도내 54개 운영 중인 로컬푸드 직매장 내실화를 통해 소비자에게 믿음을 주고 탄소배출 감소에도 노력하는 한해로 만들어 가려고 합니다. 농산물 부가가치 증대를 위해서 지속적인 상품개발을 지원하고 OEM가공사업 추진 농협도 적극 육성해 나가겠습니다. 다음으로 경영비 절감을 위해서는 농작업 대행과 공동방제를 적극 확대하여 작업량과 면적을 확대해 나가겠으며, 드문모심기와 직파재배를 지원하여 쌀 생산농가의 비용 감축에도 노력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생산성 향상을 위해서 스마트팜 확대를 지속해 나감과 동시에 농진청, 농업기술원 등과의 협업을 통해 새로운 농업기술 도입에 매진하겠습니다. 더불어 청년농 육성과 신기술 보급을 위해 지자체-농축협-전북본부와의 삼각 지원체계 마련을 위해 협력해 나갈 예정입니다. 농업소득은 농업인의 가장 근본이 되는 소득원이지만 그간 소득증대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2025년을 계기로 농업소득 3천만원을 달성의 기반을 마련토록 전북농협이 최선을 다해 나가겠습니다" - 농도 전북의 위상에 걸맞은 2025년 새해 전북농협의 계획과 비전이 있다면. "전북농협은 2025년 슬로건으로‘믿음직한 동반자, 전북농협’을 선정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농업인과 함께 웃고, 성장하는 전북농협'을 만들기 위해 농가 수취가 제고, 경영비 절감, 생산성 향상이라는 세가지의 중점 과제를 설정하고 농업소득 3천만원을 이루어 나가기 위해 역량을 집중하겠습니다. 또한, 농촌은 살기 힘들고 지루한 곳이라는 인식을 개선하는데 앞장서서 신규 복지사업을 발굴ㆍ확대하고 더 많이 웃는 농촌을 만들어 나갈 생각입니다. 다음으로 농축협의 성장을 지원하는 '농축협과 함께 뛰고, 도약하는 전북농협'을 만들어 가겠습니다. 농촌지역에서 농축협의 역할은 단순히 금융과 농자재 지원이라는 개념을 넘어 식품 사막화를 막고, 인적 교류의 중심 센터로 자리매김 하는 등 경제ㆍ문화의 중심 역할의 수행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농축협은 농업인이 힘들 때 가장 먼저 의지 할 곳으로‘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올해는 전북의 농축협이 탄탄한 수익을 바탕으로 경제사업을 활성화 시켜, 농업인의 경영안정을 돕고 농촌지역을 지키는 중심축으로 자리매김 하도록 추진해 나가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지역사회와 협력하는 '지자체와 함께 보고, 협력하는 전북농협'을 만들겠습니다. 농업정책은 행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농협이 하는 일들은 지역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에 전북농협은 지자체와 협력을 공고히 해서 행정의 지원 역할을 강화하고, 지역 발전의 방향과 개선책을 찾아 정책에 적용 시키는 상호보완의 관계 발전에 주력할 것입니다. 이를 통해 농업인과 농촌 그리고 전북특별자치도의 발전의 한 축으로 거듭나고자 합니다" -지난 해 전북농협은 아침 밥 먹기 운동 등을 통해 쌀소비촉진을 위한 다양한 캠페인을 실시했는데 올해는. 많은 분들이 한번 정도는 들어 보셨을 ‘아침밥 먹기’운동을 기억하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매년 떨어지고 있으며 잘못된 다이어트 정보로 인한 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높아지는 현실 속에서 농협은 건강한 식습관 형성으로 국민의 건강을 지키고 쌀 산업 유지를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한 해 동안 진행한 캠페인이 약 330여회, MOU는 55회, 판매는 수출을 포함하여 2천톤을 넘겨서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는 것을 임직원들 스스로 실감했습니다. 쌀 산업은 대한민국 농업의 근간을 이루며, 식량안보는 물론 국민의 건강을 지키는 밑바탕으로 2025년에도 농협은 지속적으로 올바른 인식을 전파하고 소비촉진을 추진해 갈 예정입니다" -전북농협이 지역사회와 상생하는 활동을 꾸준히 전개 해 왔는데 올해 계획은. "전북농협은 지역사회와의 상생을 통해 도내 농업인 등이 좀 더 나은 삶을 영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시작한 청춘버스가 그 중 하나입니다. 청춘버스는 도내 농촌을 찾아 농협과 유관기관들이 함께 자발적 재능기부를 통해 의료검진, 피부미용, 청춘사진 촬영 등 제공하여 많은 농업인들의 호응을 받아 올해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자 계획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인 저출산 및 고령화로 인하여 급속도로 인구가 소멸되는 도내 농촌에 식품사막화가 가속되고 있어 찾아가는 이동 장터를 통해 올바른 먹거리를 제공 할 수 있게 계획 중 입니다. 또한 도내 많은 유관기관·지자체와 함께 일손 부족으로 농업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농촌을 찾아 지속적인 일손돕기도 실시할 예정입니다. 이처럼 전북농협은 일회성 전시 행사가 아닌 도내 농업인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활동을 할 계획이니 많은 관심과 협조 부탁드립니다" -끝으로 도민들과 전북일보독자들께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제가 부임한지 벌써 2달이 다 되어 갑니다. 처음 부임했을 때 도내 곳곳을 다니며 열심히 하겠다는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럴 때마다 많은 분들 60년 넘은 세월동안 농업인들의 곁을 든든히 지키고 있는 농협에 대한 칭찬과 개선점 등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말씀들을 하나 하나 메모하여 올 한해 전북농협이 한걸음 나아갈 때마다 꺼내 보곤 합니다. 또한 한걸음 나아갈 때 마다 올바른 길로 가는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면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현장에서 그 답을 찾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저희 전북농협은 지난 60년을 넘어 앞으로도 우리 땅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농업인과 농촌의 믿음직한 동반자가 되고자 노력 할 것입니다. 늦었지만 전북일보독자 여러분 모두가 새해에 이루고자 하시는 일 성취하시길 바라며 2025년‘믿음직한 동반자, 전북농협’에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이정환 총괄본부장은 1969년 생인 이정환 총괄 본부장은 부안고등학교와 전북대 정치외교학를 졸업하고 지난 1995년 농협에 입사했다. 이후 전주산업단지 지점장, 무주군 지부장, CIB심사부 부장 등을 거쳐 지난해 1월 1일 자로 농협은행 전북본부장에 임명돼 활동하다가 올해 1월 1일 NH농협 전북 총괄 본부장에 임명됐다. 전북지역에서 오랜세월 동안 활동한 경력이 있어 지역사정에 대해 해박한 지식이 있는데다 전북출신으로 고향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고 박진감 있는 추진력과 함께 친화력을 갖춘 덕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 기획
  • 이종호
  • 2025.02.16 18:17

[청년 이장이 떴다] 씻고, 무치고, 끓이고⋯수십 인분 정월대보름 밥상은?

평소 화정마을 경로당의 인사는 "성님, 어서 오셔요!"로 통합니다. 하지만 한 해의 첫 보름달이 뜨는 정월대보름을 맞이한 12일 인사는 다릅니다. 오늘의 인사는 "성님, 내 더위 사세요!"로 통일됐네요. 정월대보름에는 '더위팔기'를 합니다. 새벽에 아는 사람을 만나면 그 이름을 부르고 그 사람이 대답하면 "내 더쉬 사가라!" 또는 "내 더위 네 더위 맞더위!"라고 소리치는 방식이죠. 보통 해 뜨기 전에 하는 아침 인사지만 오후 2시가 돼야 만나는 화정마을 어르신들은 늦게나마 더위팔기를 해 봅니다. 정월대보름인 지난 12일 화정경로당에서 부녀회장이 나물을 씻는 등 바삐 움직이고 있다. 김지원 기자 아참, 오늘은 정월대보름을 맞이해 마을 주민들이 모여 저녁을 먹는 날입니다. 이장님이 영양 가득한 찰밥을 준비하고 부녀회장님이 9색 나물·고등어찌개·두부조림 등을 준비했습니다. 비가 내리는 탓에 저녁밥을 조금 일찍 먹고 헤어지기로 했습니다. 오후 1시부터 부녀회장님이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마을 주민 수십 명의 반찬을 만들어야 하니 정신없는 게 당연합니다. 차가운 물에 나물을 깨끗이 씻고, 고등어찌개 간 맞추고, 가스레인지 위에서 끓고 있는 두부조림 뒤집어 주고, 다시 나물 무치고⋯. 정말 쉴 새 없이 움직여 마을 주민 수십 명이 먹을 밥·반찬이 모두 완성됐습니다. 완성되기가 무섭게 곧바로 수십 명의 밥·반찬 덜기가 시작됐습니다. 상다리가 부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한 상 가득 정월대보름 밥상이 차려졌습니다. 여차저차 준비를 마치고 '청년 이장' 취재진들도 자리 잡고 앉아 봅니다.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있으니 진짜 가족이 된 듯합니다. 함께 모여 밥 먹고, 먹고 또 한 그릇 더 먹고, 한참을 이야기꽃을 피우다 헤어졌습니다. 우리는 오늘 또 공동체를 배웠습니다. 함께 하는 시간이 얼마나 즐거운지, 함께 먹는 밥이 얼마나 맛있는지 알게 됐죠. 오늘도 잘 먹었습니다! 디지털뉴스부=박현우 기자

  • 기획
  • 박현우
  • 2025.02.15 18:29

[청년 이장이 떴다] "필라테스가 뭐라고?"⋯시골마을 겨울잠 깨운 운동 교실

여느 농촌이 그렇듯 농번기가 오기 전까지는 한가로이 흘러갑니다. 화정마을 역시 매일 같은 하루가 반복되죠. 아침에는 따듯한 집에서 해가 뜨기를 기다리고 오후 2시가 되면 경로당으로 모입니다. 오늘(11일)은 화정마을에 반가운 손님이 왔습니다. 바로 인기 방송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해 유명세를 떨친 '청년 농부' 차정환(28) 씨와 필라테스 강사 백진선(39) 씨입니다. 둘은 지난 2023년부터 김제 어르신들께 필라테스를 알려 주는 '재능 기부'를 하고 있습니다. 김제에서 완주 화정마을까지 왕복 1시간 40분이 걸리지만 '청년 이장' 취재진의 부탁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왔습니다. "오늘은 필라? 필라 뭐라고? 그거 한담서, 그래서 빨리 왔지!" 오율례(76) 할머니가 가장 먼저 도착했습니다. 맨 앞자리를 찜한 율례 할머니 뒤로 어르신들이 하나 둘 모입니다. 그렇게 모인 인원은 총 11명, 기대감이 가득한 표정입니다. "어머님들, 필라테스라는 운동을 해 볼 거예요. 필라 아니고 필라테쑤 아니고 필라테스예요." 유쾌한 정환 선생님 말씀에 어르신들의 얼굴에도 금방 웃음꽃이 핍니다. 누워서 다리를 들어 올리고 손끝을 쭉쭉 늘려 보기도 합니다. 누군가에게는 작은 움직임이지만 어르신들에게는 큰 도전입니다. 진선 선생님도 어르신들 사이사이를 다니며 자세를 바로잡아 줍니다. 뻣뻣하게 굳은 어르신들의 몸은 작은 동작 하나에도 다칠 수 있어 특별히 더 신경 쓰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하니께 엉덩이가 두근두근하는디? 아유, 선상님! 이게 맞는 거여요?" 최은주(80) 할머니가 빨개진 얼굴로 묻습니다. 경로당에 한바탕 웃음이 번집니다. 정환 선생님도 제대로 운동하고 있다며 격려를 아끼지 않습니다. 굳어 있던 몸이 조금씩 풀리는지 여기저기서 곡소리(?)와 비슷한 감탄이 터져 나옵니다. "아고야! 나 죽네, 나 죽어. 어구 시원혀." 한 시간이 금방 지나가고 정환·진선 선생님이 돌아갈 시간이 됐습니다. 다들 아쉬운 마음을 숨기지 못했습니다. 평소 어르신들밖에 없다 보니 찾아오는 사람이 오면 항상 헤어짐이 아쉽습니다. 어르신들은 두 선생님이 선물해 주고 가신 필라테스 공을 한참 만지작거리며 배운 동작을 다시 해 봅니다. 어쩌면 남은 겨울 동안은 화투패 대신 공을 들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 읍내만 나가도 필라테스·헬스 등을 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읍내에 나가는 것도 일인 시골 마을은 간단한 체조 하나 배우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오늘 열린 운동 교실이 화정마을 어르신들에게 작은 활력이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디지털뉴스부=문채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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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채연
  • 2025.02.15 07:44

[청년 이장이 떴다] "더 많은 마을에서 봉사하고 파"⋯'청년 농부'도 힘 보탰다

'청년 이장' 취재진에게 접수된 수많은 의뢰 중 하나는 '운동'이었습니다. 실제로 운동과 관련해 재능 기부를 하는 청년을 떠올리던 중 문득 텔레비전 속에서 본 차정환 씨가 떠올랐습니다. 바로 전화를 걸어 '청년 이장이 떴다' 기획 프로젝트를 소개한 후 조심스레 재능 기부를 부탁했습니다. 아무 대가 없는 부탁이었지만 고민도 없이 "좋다"고 웃었습니다. 그렇게 화정마을 어르신들과 차 씨의 만남이 성사됐습니다. 일과 중 가장 재미있는 시간은 '화투'뿐이었던 어르신들은 차 씨와 어느 때보다 즐거운 하루를 보냈습니다. 고요한 화정마을에 긍정의 힘을 불어넣은 '긍정 농부' 차 씨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김제에서 마을 어르신들께 필라테스를 알려 드린다고요? "2023년 12월부터 봉사를 시작했으니 벌써 1년이 넘었네요. 원래는 저희 할머니 운동 시키는 게 목적이었어요. 사실 운동이라는 건 혼자 하면 재미가 없죠. 마을 어르신들이 같이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시작하게 됐어요." 농사를 지으면서 봉사까지, 힘들 것 같은데요. "생각보다 어르신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게 즐겁습니다. 따뜻한 분위기가 되게 힘이 되는 것 같아요. 처음 만난 어르신들도 오래 본 사람처럼 대해 주시거든요. 이런 게 평소 살아가는 데 좋은 영향을 주더라고요. 그래서 농번기에도 빠지지 않고 봉사를 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앞으로도 계속 이어가실 생각이신가요? "그럼요. 앞으로는 더 많은 마을에서 봉사하고 싶어요. 운동하고 싶은 어르신들이 되게 많거든요. 대신 그러려면 선생님들이 더 필요하겠죠. 그래서 저와 뜻이 맞는 선생님을 구하고 있습니다. 함께 하고 싶은 선생님들이 있다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화정마을 어르신들께 한 마디 해 주신다면요? "연세가 많으신 편이더라고요. 그래도 굉장히 유쾌한 모습을 보여 주시고 힘차게 함께 운동해 주셔서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떻게 보면 멀리서 온 외지인인데 정말 자식·손주처럼 친절히 대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디지털뉴스부=문채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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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채연
  • 2025.02.15 07:40

[청년 이장이 떴다] "죽기 전에 꼭"⋯75년 만에 날아온 '편지 한 장'

지난주 조재신(89) 할머니가 화정마을 경로당에서 어르신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청년 이장' 취재진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할머니는 "시방, 누가 우리 집으로 편지를 보냈어. 이장님들이 내 주소를 알려 준 겨?"라고 물었습니다. 깜짝 놀란 취재진은 "할머니 개인 정보인데 누구한테 알려 드려, 큰일 나요!"라고 대답했습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편지를 확인하러 함께 할머니 댁으로 이동했습니다. 할머니는 일기장 깊숙이 넣어 놓은 편지 봉투를 꺼내셨습니다. 색이 다 바랜 우표가 붙은 봉투 속에는 한 글자 한 글자 정성껏 눌러쓴 글씨가 빼곡히 적힌 편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고산면 화정리 조재신 할머님께. 나는 비봉면 죽산마을에 살다가 전주로 이사 간 조재영입니다. 오늘 아침 전북일보 신문을 보고 본 서신을 드립니다." 누가 봐도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이 쓴 편지 같았습니다. 조 할머니는 "처음에 보낸 사람이 누군지도 몰랐당게. 근데 시방, 나랑 같이 국민학교 다닌 양반이더라니께. 신문 보고 편지 썼디야. 우리 집도 모를 텐디 어떻게 알고 보냈는지 모르겄어"라고 말했습니다. "75년 전 비봉국민학교 제17회 졸업생이시면 반갑게 인사 올립니다. 졸업한 지 75년이 되었지요. 졸업 사진 보고 얼굴도 기억했습니다. 조 여사님 건강하시고 잘 계셔요!" 알고 보니 두 분은 열다섯 살 때 같은 반이었던 겁니다.(옛날에는 국민학교를 18살에 졸업하는 일도 있었죠.) 먹고 사느라 바빠 친구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른 채 지냈는데 본보 신문(1월 20일·2월 3일 자 각 2면)을 보고 75년 만에 연락한 것입니다. 할머니도 편지를 읽고 너무나 반가워서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두 분은 한참을 통화하다가 약속했죠. 죽기 전에 꼭 만나자고요. 이후 취재진은 사무실로 돌아와 편지를 몇 번이고 읽어봤습니다. 75년 만에 닿은 연락이라⋯. 편지의 내막이 궁금해 바로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동창들이 다 죽은 줄 알았는데 친구를 보니까 반갑더라니까. 아버지·어머니 산소 갈 때 아들들이랑 가기로 했어요"라며 만남을 기약하셨습니다. 꼭 두 분이 만나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디지털뉴스부=박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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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현우
  • 2025.02.15 07:33

[청년 이장이 떴다] 그땐 그랬지⋯ 왕할머니에게 듣는 옛 정월대보름

올해 화정마을 정월대보름은 저녁 먹고 해산됐습니다. 옛날부터 이랬던 것은 아닙니다. 경로당이 없을 때부터 매년 대보름을 챙겨오던 화정마을이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풍습을 이어가기도 어려워졌습니다. 이웃집을 찾아가 쌀을 받으러 다니는가 하면, 같이 풍물놀이를 하기도 했죠. 이것도 마을 주민들이 젊었을 때나 가능했다는 게 주민들의 전언입니다. 이제는 말이 다릅니다. 모두 나이가 들면서 풍습을 유지하는 게 쉽지 않아졌죠. 대체 화정마을은 그동안 어떤 정월대보름을 보냈을까요? 화정마을 왕할머니인 90대 이장순(91)·이칠월(90) 할머니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옛날에는 정월대보름을 거창하게 지냈다고 들었는데요. "암, 화정마을은 해마다 밥도 같이 먹고 그랬지. 젊어서는 경로당이 없었어. 그래서 마을 아줌마들이 찰밥을 걷으러 다녔어. 가정집에 가서 골고루 얻어다가 같이 밥해서 먹고, 밤새도록 놀고, 술 마시고 그랬다니께. 심지어 돈도 걷었어. 마을 돌아가는 데 쓰기도 혔지." 막걸리까지 직접 만들어서 드셨다고요? "예전에는 막걸리가 통으로 있었어. 지금 보는 병이 아녀. 그것도 다 직접 빚었다니께. 옛날에는 소주·맥주가 귀혔지. 막걸리가 만들기 쉽고 많으니까 막걸리를 많이 먹었지." 화정마을도 당산제 지내고 그랬나요? "옛날에는 불교를 많이 믿어서 다 했어. 정월대보름이 오면 과일을 사고, 술도 사고, 다 준비해서 그냥 제사를 지내는 데가 있어. 저그 마을 입구에 돌 있고 끄트머리에 또 있고. 두 곳에서 다 혔지. 화재맥이라고 혀. 이걸 안 하면 불이 난다나 어쩐다나. 어떻게 안 하겄어. 꼭 가서 제사도 지내고, 절도 하고 그랬는디." 진짜 불이 난다고요? "한 20년 전에 불이 났었어. 해마다 허다가 한 해 건너뛴 적이 있었는디 모르겄어. 진짜 불이 났더라고. 정월대보름에 맞춰서 말이여. 고거 참 신기하더라고. 근디 지금 보면 그것도 아닌가 벼. 안 한 지 오랜디 아무 일도 없잖어. 그냥 단속 잘하는 게 답이었나 싶어. 알아도 혔지. 혹시 모르니께, 옛날부터 했고." 또 정월대보름에 했던 게 있나요? "쥐불놀이도 있쟈. 막 내두르고 그랬지. 우리 애들 클 적에만 해도 했는디. 지금은 쥐불놀이도 안 혀? 동네에 애들이 없는디 어쩌겄어. 뭐 하는 사람이 있겠어? 옛날에는 불도 나고 그랬는디. 그냥 그렇게 놀고 그랬어. 그게 다 재미고, 추억이고, 풍습이었지. 근데 지금은 뭐 하간? 이제 힘들어서 못 혀. 아, 풍물놀이도 했어. 다들 풍물을 할 줄 알았거든. 저기 골목 끝까지 풍물도 치고 쭈욱 서서 같이 춤추고 그랬는디 다 옛날 이야기 돼 부렸지." 디지털뉴스부=박현우 기자

  • 기획
  • 박현우
  • 2025.02.15 07:31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33) 1894년 이후 중범죄의 처벌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정배안〉 〈중범공초〉에 실린 관료층과 민중에 대한 차별

〈정배안〉는 1895년 3월경에 작성한 것으로 1885년부터 유배된 자의 죄목과 유배지 등이 기록된 책이다. 원 제목은 〈도유배안(島流配案)〉(1책)이며, 내지에는 ‘정배안’이라고 했고, 대조선국 법부 형사국의 인신이 찍혀있다. 조선정부는 새로운 재판소 제도가 시행하기 이전에 중범죄 죄인의 경우 유배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첫머리에는 평안도 용천부에 유배된 백은수(白殷洙)에 대한 기록이지만, 이는 1885년 을유년의 백성 침학죄로 유배된 것이기 때문에 농민전쟁과는 관련이 없다. 3번째 기록된 경상도 금산군에 유배된 이용태(李容泰)로부터 관련 사항이 등장한다. 그는 1894년 4월 21일 승정원의 전언에 의해 유배형에 처한 것으로 “고부 안핵사로 전내(傳內)의 명을 받아 안핵(按覈)하라는 법의(法意)가 있었지만, 하등 긴급하지 않고 아무런 사계(查啓)도 하지 않고 오히려 소요를 일으켰으며 이미 분함과 잘못을 많이 저질렀”다고 사유를 설명하고 있다. 다음으로 경상도 거제부에 안치된 김문현(金文鉉)의 경우, 5월 14일부터 승정원의 명에 의해 위리안치(圍籬安置)하여 가극(加棘-귀양간 사람의 집 둘레에 가시나무를 둘러서 왕래를 하지 못하게 함)의 벌을 받았다. 그는 전라감사로 있으면서 농민봉기를 막지 못하고 도리어 전주성을 버리고 월경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가중 처분된 이유는 김문현이 직접적으로 전주성 함락의 책임을 지게 된 것이었지만, 그해 5월 20일에 이설(李偰)의 상소에 의하여, 전운사 조필영, 균전사 김창석, 전고부군수 조병갑, 안핵사 이용태, 전라감사 김문현, 영광군수 민영수 등 처벌이 가중되었다. 고부민의 원흉이었던 고부군수 조병갑에 대해서도 5월 17일 엄형 1차로 신장(訊杖) 30도 후에 원악도 안치의 죄를 처분하였다. 이어 조만승, 민영준, 민형식, 김세기, 조필영, 임치재, 이소영, 신학휴 등이 수많은 부패관료들이 그해 말까지 계속해서 처벌되었다. 전총제사 민응식과 전전 개성유수 김세기도 포함되었다. 또한 오석영(吳錫泳)의 사례도 눈에 띈다. 그는 전 성주목사로 성을 비워 비적들에게 넘겨준 죄로 갑오년 11월 10일에 귀양을 보내졌다. 정배안의 기록은 1895년 3월이후에도 추가되어 4월 20일 제주 등지에 유배를 떠난 종신죄인 서주보 등 9명에 대한 처분을 기록하였지만, 나머지 부분은 백지로 남아있다. 당시 유배형을 처벌하게 되는 사유를 설명하면서 고종은 반복적으로“이것은 내가 백성을 위하는 것이고 또한 세신(世臣)을 보전하려는 고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국왕의 태도는 관료들을 배려하고자 하는 차별적인 언사였다. 이들 부패무능 관료들의 유배형은 1895년 6월 27일 전격 중단되었다. 고종은 도형(徒刑)과 유형(流刑)의 죄인들인 민영준을 비롯하여 조병식, 민영주, 민형식, 김세기, 민병석, 이용태, 김문현, 이용직, 조필영, 조병갑, 민응식, 김창렬, 조만승. 임치재, 서정철, 심능필, 조준구, 민영순 등 19명외 260명을 방송(放送)하는 조치를 내렸다. 이는 갑오개혁의 출범 1주년을 맞이하여 취한 대사면의 결과였다(〈고종실록〉 1895년 7월 3일 기사). 당시 사안을 한 걸음 들어가 보면, 내부대신서리 유길준이 ‘대소죄인 방석하는 사’라는 안건을 제의하였다. 1895년 4월 1일 이전(신식 재판소제도 시행)에 국사범 이하 정치상 관계 및 기타 유형(流刑)에 처한 자는 모두 석방하자는 안이었다. 이렇게 되면 농민전쟁과 관련되어 재판을 받거나 구속된 농민들도 석방조치에 포함될 수 있었다. 그러나 법부대신 서광범은 이에 반대하여 적용 예외대상을 절도, 강도, 통간, 편재 등 파렴치한 범죄자 이외에도 모반과 살인자를 포함시켰다. 법부는 주로 유배된 주요 관료들만에 한정하는 사면조치를 취했다(〈구한국관보〉 106호, 1895년 7월 5일, 1072∼1073쪽). 결과적으로 유배형 관료의 석방조치는 1894년 동학농민군이 죽음을 무릅쓰고 제기했던 조선국가의 정치 개혁과 부패 관료의 청산과제가 1년 만에 물거품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 자료는 〈중범공초(重犯供草)〉다. 이는 1895년(고종 32)부터 1899년(광무 3)까지 전국 각 지역에서 발생한 민요(民擾) 등에 가담한 중범(重犯) 죄인을 심문한 공초 자료이다. 모두 9책으로 되어 있다. 중범죄 사례는 대부분 민란 관련, 사주(私鑄)‚ 사굴인총(私掘人塚) 등의 죄와 관련된다. 동학농민혁명과 직접 관련된 기록은 제5~6책, 그리고 9책에 수록된 부분이다. 먼저 제5책은 황해도 지방의 동학 잔존 세력의 병란 모의와 관련된 기사이다. 장연군 신화방(薪花坊) 산포수를 조직하여 다시 봉기를 일으키고자 한 것이다. 주모자는 백락희(白樂喜)와 김재희(金在喜) 등이었다. 백락희는 당시 38세로서 1894년 7월 동도(東徒)에 들어가 교장 명색으로 활동하다가 1895년 봄에 귀화하였다가 그해 11월에 산포수 도반수인 김재희와 공모하게 된 것이었다. 이들은 1895년 12월 12일에 해주 김창수(金昌守) 가를 방문하여 김형진(金亨鎭)을 만나 모의하게 되었다. 김형진은 청국 심양에 가서 마대인(馬大人)을 만나서 심양자사 연왕 이대인(李大人)에게 ‘진동창의(鎭東倡義)’인신과 직첩을 받아 조만간 병사를 거느리고 출래할 것으로 알려주었다. 그리하여 자신은 평안, 전라, 황해 3도 통도총관이 되고, 백락희는 장연 선봉장이 되어 각군병을 이끌고 취회하여 먼저 군기를 탈취한 후 관장과 관속을 도륙해서 오면, 검단방 유학선, 안악 대덕방 최창조, 문화 차담동 명부지 이가(李哥) 등과 힘을 합쳐 해주부를 소탕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다음에는 황해도 제군을 소탕하면 청병이 올 것이니 이와 합세하여 도성을 도륙한 후에 정(鄭)씨로서 왕을 삼으면 대사를 다스릴 수 있다고 선동하였다. 봉기예정일은 1896년 1월 초 1일이었으나 사전 탄로가 났다. 그래서 붙잡힌 백락희를 비롯하여 전양근(24세), 백기정(38세), 김계조(41세), 김의순(30세), 백락규(31세) 등 6명 공초가 수록되어 있다. 6책에는 해주부 장연군수 염중모(廉仲模)의 보고서와, 앞서 수록된 공초가 중복되어 첨부되어 있다. 황해도 장연 일대의 봉기 모의는 이전 정감록을 차용하여 대규모 민란을 일으키려고 했던 1812년 홍경래란과 유사한 형태였다고 생각된다. 동학농민전쟁의 2차 봉기가 황해도 지역에서 실패한 이후 황해도 장연군 일원에서 동학의 잔당 인사들이 대규모로 반정부 봉기를 추가로 계획하고 있었던 정황을 알 수 있다. 제9책은 〈흥덕난민공초(興德亂民供草)〉라는 제목이 붙여진 자료로 1899년 1월 7일 장성군수 김성규(金星圭)가 흥덕군 민란을 조사하여 관찰사에게 보고한 기록이다. 1898년 12월 28일 새벽에 난민 수백 명이 흥덕 동헌에 난입하여 일으킨 사건을 수서기 박우종(朴佑鍾)이 조사하였다. 보고서에는 민란 두목 이화삼(李化三)과 수종 이이선, 이복환, 정계술, 박기수, 채기엽 등 6명을 전달 30일에 해군의 관속과 각촌민이 합세하여 순교청에 잡아들였고, 이어 31일에 난민이 해산되었다고 간단히 요약되어 있다. 봉기의 주모자는 이화삼이었다. 그는 당시 서울에서 진행되었던 만민공동회를 모방하여 민회(民會)를 개최하였다. 그는 “흥덕 원(군수)을 여기에 두고 재판하는 게 가(可)하냐, 월경을 시키고(군수를 내쫓고) 우리거지(행동거지) 공사(公事)하는게 가하냐”는 극단 질문을 해서 흥덕군민들을 선동하여 마침내 봉기를 일으켰다. 이 공초 내용은 주로 주모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지만, 이후 미흡한 사후 조처로 인하여 5월 4일 흥덕민란을 재차 일어나기도 했다. 1899년초 흥덕민란의 주모자들은 ‘갑오동학여당(甲午東學餘黨)’‘갑오누비(甲午漏匪)’라고 지칭되듯이, 1894년 동학농민봉기 이후 잔여세력들이었다. 이들은 서양 종교 영학(英學)을 이용하여 고창과 고부, 흥덕지역을 거점으로 고창, 고부 등지에서 세력을 확대하고 동학농민 재봉기를 잇고자 하였다. 이처럼 보국안민과 척왜양의 구현이 여전히 미완의 농민적 개혁이념이라는 것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앞서 소개한 정배안과 더불어 중범공초는 모두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중범공초의 경우, 실록을 편찬하기 위해 별도로 정서한 필사본이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중범공초〉 9책 흥덕민란에 대한 정부 보고서. 서울대 규장각 제공 왕현종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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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12 13:36

[전홍철 교수의 ‘영상과 함께 하는 실크로드 탐방’] (7)염견(焰肩) 도상의 세계적 전파, 태양신에서 종교 권위자로

교회, 성당, 불교 사찰, 삼성각(三聖閣) 그리고 이슬람 모스크에는 태양신의 흔적이 있다. 그 흔적은 어깨의 화염이다. 무슨 소리일까? 인류 초기부터 태양은 중요한 숭배 대상이었고, 메소포타미아의 샤마쉬(Shamash)는 그 대표적인 신이었다. 그런데 샤마쉬의 모습에는 매우 특이한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신성한 존재의 어깨에서 불꽃이 피어오르는 '염견(焰肩)' 도상이다.(그림 1) 어깨에서 솟아나는 화염은 원래 신의 권위와 왕의 통치권을 상징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 표현 방식은 문화권과 종교의 경계를 넘어 기독교, 불교, 무속 신앙, 이슬람 등 각 종교의 최고 권위자를 표현하는 보편적 상징으로 발전했다. △ 왕권과 신성: 고대 태양신 숭배의 발전 태양신 숭배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되어 유라시아 대륙 전역으로 퍼져나간 중요한 문화 현상이다. 메소포타미아의 태양신 샤마쉬는 정의와 공정의 상징이었으며, 어깨에서 뻗어나오는 불꽃으로 그려졌다. 특히 함무라비 법전의 조각에서는 샤마쉬가 왕의 통치 권력을 인정하는 신으로 묘사되어 있다.(그림1) 태양신 숭배는 이란 고원에서 미트라교로 변화했다. 미트라교는 태양신의 능력을 화염과 빛으로 나타냈고, 이후 로마 제국에서도 특히 군인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페르시아에서는 이런 전통이 조로아스터교의 아후라 마즈다 숭배로 이어졌다. 아후라 마즈다는 빛과 선을 상징하는 신으로, 날개 달린 원반과 화염으로 표현되어 왕의 통치력이 신성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다. △ 성스러운 빛의 표현: 기독교와 이슬람의 염견 기독교 초기의 염견 도상은 그리스-로마의 태양신 아폴론과 헬리오스의 영향을 받았다. 4세기 바티칸 지하 무덤의 그리스도 모습은 태양신의 빛나는 형상과 섞여 있다. 이후 비잔틴 시대에는 이 표현이 만돌라(Mandorla)라는 형태로 바뀌면서, 어깨의 불꽃이 온몸을 둘러싸는 거룩한 빛이 되었고, 이것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상징이 되었다.(그림2) 이슬람 미술에서는 예언자 무하마드가 하늘로 올라가는 미라지 장면에 염견 도상이 자주 등장한다. 특히 일칸국 시대의 역사책 필사본들은 무하마드의 어깨에서 불꽃이 피어오르는 모습을 담고 있는데, 이는 페르시아의 왕권을 상징하는 전통과 이슬람의 예언자 사상이 하나로 어우러진 것이다.(그림3) △ 빛과 불의 신들: 인도-이란 문화의 연결고리 고대 인도와 이란은 언어와 문화를 공유했는데, 특히 태양신 신앙에서 이런 공통점이 잘 드러난다. 힌두교의 수리야와 페르시아의 미트라는 모두 '빛나다'를 뜻하는 'swar'에서 비롯되었고, 두 신 모두 태양 수레를 타고 하늘을 달리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불을 다루는 신들의 경우도 비슷하다. 힌두교의 아그니는 제사를 주관하는 신으로, 브라만 사제들이 관리하는 성스러운 불꽃과 관련이 있다.(그림4) 이란의 아타르 역시 조로아스터교에서 마기 사제들이 모시는 거룩한 불로 여겨졌다. 이러한 신들의 모습은 쿠샨 왕조 시기에 이르러 더욱 복잡하게 섞였고, 간다라 지역에서는 힌두교와 페르시아의 전통이 불교 미술과 만나 새로운 예술 형식을 만들어냈다. (그림4) 힌두교 불의 신 아그니 △ 카니시카 왕의 시대: 문화 교류의 황금기 쿠샨 왕조는 월지라는 유목 민족이 세운 나라로, 박트리아에서 시작해 인도 북부까지 영토를 넓혔다. 이 지역은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만나는 중요한 접점이었다. 특히 127년부터 150년까지 통치한 카니시카(Kanishka) 왕 시기에 문화 교류가 절정에 달했다. 카니시카 왕이 만든 동전에는 왕의 어깨에서 불꽃이 피어오르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그림5) 이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왕의 권위가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알리는 상징이었다. 카니시카 왕은 또한 불교를 적극 지원했는데, 이로 인해 간다라 지역의 불교 미술이 크게 발전했다. 특히 가필시(Kapisi)에서 발견된 불상들은 페르시아 미술의 전통과 불교가 만나 만들어진 독특한 불꽃 표현을 보여준다.(그림6) △ 불꽃에서 빛으로: 한국 불교 미술의 염견 수용 간다라에서 시작된 염견 도상은 실크로드를 따라 동아시아로 전파되었다.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 도시들을 거쳐 중국에 도착했고, 마침내 한국과 일본까지 퍼져나갔다. 키질(그림7), 호탄(그림8), 돈황(그림9), 운강, 병령사의 석굴 사원과 하북 석가장의 불상(그림10)에서 발견되는 어깨의 불꽃은 이 도상이 동아시아에서 부처의 깨달음을 표현하는 보편적인 상징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한국의 불교 미술에서도 이 전통이 이어져, 무주 안국사 칠성탱(그림11)과 미황사 괘불탱(그림12)에서는 팔에서 머리까지 오색 빛으로 표현되었다. 이처럼 염견 도상이 동아시아까지 전해지고 변화한 것은 고대 유라시아의 활발했던 문화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다. (그림8) 신강 호탄 부처상의 염견 (그림9) 막고굴 263굴 부처상의 염견 (그림10) 석가장 금동불좌상(300년경) (그림11) 무주 안국사 칠성탱 어깨 주위의 방광(放光) (그림12) 전남 미황사 괘불탱 전홍철 교수 (우석대 경영학부·예술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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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11 13:58

[청년 이장이 떴다] "나도 꼬부랑 간판 읽고 싶어"⋯할매들이 영어를 공부하게 된 사연

'청년 이장' 취재진들이 만든 화정마을 아지트가 문 연 지 하루도 안 돼 소란스럽습니다. 매서운 한파에 벌벌 떨면서도 할머니들이 아지트로 모여듭니다. 저기 멀리 학생처럼 가방을 들고 오는 오율례(76) 할머니도 보이네요. 할머니들이 아지트에 왜 모였냐고요? 오늘은 아지트에서 영어 수업이 열리는 날입니다. 지난 6일 오후 1시 30분에 열린 영어 수업은 그동안 할머니들에게 접수된 민원 중 하나였습니다. 몇 주 전 이칠월(90) 할머니는 슬쩍 다가와 "청년 이장, 영어 좀 아는가? 장에 나가믄 간판을 못 읽겄당게"라고 말했습니다. 며칠 전 일본 여행을 다녀온 율례 할머니도 "화장실이 일본어·영어로 쓰여 있는데 뭐라고 써 있는지 몰라 못 갔다"며 멋쩍게 웃어 보였습니다. 화정마을에서 가장 젊은 사람도 환갑이 넘었다 보니 대부분 영어보다는 한자에 익숙한 세대뿐입니다. 한자는 막힘없이 턱턱 읽을 수 있지만 꼬부랑 글씨 같은 영어는 언제 봐도 큰 산처럼 어려워만 보입니다. 읍내에 나가도 간판마다 영어가 잔뜩 적혀 있는 터라 못 들어가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이것이 청년 이장으로서 영어를 알려 드려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입니다. 화정마을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불편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 의뢰해달라고 말한 청년 이장들이 말을 지킬 때가 왔습니다. 대망의 첫 수업 날, 수능을 앞둔 고3 교실을 방불케 했습니다. 오랜만에 연필을 잡고 딱딱한 의자에 앉았지만 불편한 내색 없이 영어 수업에 집중했습니다. 눈이 침침해 선도 잘 안 보이지만 영어 노트 위에 알파벳을 쓰고 지우고를 반복합니다. 처음 써 보는 영어 노트에 대문자, 소문자 할 것 없이 다 한 줄에 쓰기도 합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갑자기 칠월 할머니가 벌떡 일어나십니다. "할머니, 왜 그러셔요. 뭐 불편하셔?"라고 묻자 "눈이 침침혀! 안 보여! 나 집만 빨리 갔다 올게"라고 대답하십니다. 돋보기 안경이 없어 집중하기 어렵다는 할머니입니다. 1시간이 넘도록 알파벳을 쓰면서 굳어버린 손이 아파 바르르 떨더라도 내색조차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집에서 복습하겠다며 다 걷어온 영어 노트와 연필·지우개를 찾으십니다. 할머니들의 얼굴에는 열일곱 소녀처럼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아이고, 진짜 고맙습니다. 선생님, 나 정말 영어 배우고 싶었는디 너무 고마워." 오늘 영어 수업은 아주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진은 쏙 빠졌지만 할머니들을 위해서 우리는 매주 수요일 오후 1시부터 1시간 영어 수업을 하기로 했습니다. 농번기가 오면 이마저도 어려워질 테니 조금씩 속도를 내 보려고 합니다. 화정마을 영어 수업은 다른 수업과 달리 목표가 크지 않습니다. 1등을 만드는 것도, 유창한 영어 회화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단순히 ABC 수준이어도 좋습니다. 그냥 읍내에서 열리는 시장에 가셔서, 자식·손주와 해외에 나가서 영어 간판을 읽지 못해 헤매는 일이 없는 날이 오기를 그려 봅니다. 디지털뉴스부=문채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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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08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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