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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교수는 - 군사정권시대 법관의 꿈 접고 사회참여 대열 '앞장'

1965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남들보다 두 살 일찍 학교에 들어갔지만 공부를 잘해 만 열여섯 살에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맞벌이 부부교사였던 부모님 덕분에 '지식친화적' '문화친화적' 환경에서 성장한 그는 중고등학교 시절, 입시공부에 매달려 지내면서도 삼중당 문고를 꼭 끼고 살았다. 딱딱한 교과서를 보다가 지루해졌을 때 문고판 소설을 읽는 즐거움이 크고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소설 읽기에 빠져 삼중당 문고의 대부분을 읽었던 그는 그때 만났던 문학이 자신의 절반을 키웠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그의 독특한 독서법은 그때부터 길러온 습관이다. 예를 들면 딱딱한 법학전공책과 사회과학·인문과학 책, 그리고 시나 소설류 같은 말랑말랑한 책을 동시에 번갈아가며 읽는 식인데, 제법 괜찮은 방식인 것 같아 제자들에게도 권하고 있다. 고등학교시절 부마사태로 시대를 조금 알게 되었고, 대학생이 되어서는 운동권 성향을 갖고 있던 법과대학 편집실에 들어가 활동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정치의식을 갖게 됐다. 고등학교때만 해도 남들처럼 공부해 판사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지만 시대상황을 목도하며 군부독재자들의 법무참모역할이나 하는 '육법당' 멤버는 되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울산 대학 재직 시절,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기도 했던 그는 이 활동과 별도로, 주체사상 비판 작업에 참여해 〈주체사상 비판〉 책을 펴내기도 했지만 지금은 '종북좌파'로 분류되는 코미디를 겪기도 한다. 고등학교 시절 팝송에 심취한 덕분에 음악 분야는 물론, 다양한 문화적 취향을 갖고 있으며 그 폭과 깊이가 남달라 그의 페이스북은 정치의 영역 뿐 아니라 장르를 불문한 지식과 교양이 넘쳐난다. 미국 버클리 로스쿨 유학기간을 포함해 20대 후반부터 30대까지의 10여년은 오롯이 전공분야 공부에만 쏟았으며, 이후 세상에 다시 나와, 사회참여의 대열에 섰다. 24시간이 부족해보일 정도로 많은 일들, 특히 사회를 바꾸려는 활동에 전력하고 있는 그는 자신만의 많은 룰을 만들어 지키며 그 일들을 해나간다. 40대에는 소설보다는 시집에 더 마음이 가는데, 압축적인 전달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울산대와 동국대 교수를 거쳐 모교인 서울대 교수로 왔으며, 전공 관련 책 외에도 〈성찰하는 진보〉 〈보노보 찬가〉 〈조국, 대한민국에 고한다〉 등의 시론집을 냈다. 2010년, 〈진보집권플랜〉을 내면서 정권교체를 위한 프로젝트를 구체화하기 시작했으며 이번 대선을 앞두고는 야권 후보 단일화를 위해 모든 것 내던지고 가장 열심히 뛰고 있다. 정치에는 뜻이 전혀 없으며, 우리 사회의 기본이 서게 되면 언제라도 학문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 기획
  • 김은정
  • 2012.11.06 23:02

야권 대선 후보 단일화 조율사 조국 서울대 교수 "文·安, 서로 동의하고 승복하는 단일화 과정 필요"

또 매스컴을 탔다. 이번에는 '90도 절'이 문제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를 만나 악수 하면서 몸을 90도 가까이 숙여 인사하고, 후보를 향해 오른손을 내밀면서 왼손은 배 위에 얹은 '아주 공손한 자세'를 보인 것이 화근(?)이었다. 새누리당에서는 이 기사를 바탕으로 '그의 90도 인사에 사회적 지탄이 이어지고 있다'고 비난했다.'90도 인사법'으로도 '사회적 지탄을 받게 된' 사람.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조국 교수(47)의 이야기다. 그런데 이 기사를 보면서 문득 예전에 강한 인상을 받았던 그의 인사법이 떠올랐다. 그를 처음 본 것은 2010년 겨울, 전북일보와 전북환경운동연합이 공동으로 주최한 '초록시민강좌'에서 였다. 그때 그는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90도보다 훨씬 더 깊숙이 고개 숙이고 인사하며 악수를 나누었다. 눈에 띄게 출중한 외모에 정중하기까지 하니 인사를 나눈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했다. 그런데 그 '인사법'이 이번에는 그를 '폴리페서'로 모는 또 하나의 단초가 됐다. 그를 비판하는 언론매체의 표현대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정치 발언'을 하면서' 정권교체를 위한 모든 짐을 진 듯 결연히 나선 사람, 보수진영의 온갖 모욕적인 비판과 지탄을 받으면서도 당당하게 대응하고 더 명징한 태도로 진보진영의 연대를 강조하는 사람, 늘 언젠가는 정치에 뛰어들 것이란 혐의를 받으면서도 사회참여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열정적이고 충실하게 실천해가는 사람. 그를 만났다. 왜 그는 편안한 개인적 삶을 놓아두고 굳이 이 진흙탕 정치판을 떠나지 못하는 것이며, 정말 그리고 끝내 정치에 입성하지 않을 것인가 알고 싶었다. 묻고 대답하는 일에 단련된 그는 부드러우면서도 명쾌한 논리로 자신의 입장을 정리했다. 인터뷰는 두 차례, 지난달 25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그의 연구실과 다음날 강연차 내려온 전북대의 카페에서 진행됐다. 전북대 강연은 야권 단일화를 위해 그가 중심이 되어 진행하고 있는 '시민정치콘서트' 전국순회로 이루어진 자리였다. 강연장소인 전북대 인문대 최명희홀 300여석은 차고도 넘쳤다. -정말 바쁜 일정을 보내시더군요. 시간 내주시어 감사합니다. 전북대 강연 시간에 맞추어 인터뷰 할 계획이었는데, 수업 때문에 도착시간이 늦어지는 일정에서는 시간이 너무 빠듯했습니다. 수업을 늘 그렇게 철저하게 하십니까."수업을 빼먹는 일은 없도록 노력합니다. 불가피하게 휴강하는 경우는 학회와 일정이 겹칠 때인데, 그렇게 되면 보강을 하고 수업진도를 반드시 나갑니다. 학교 일과 관련해서는 몇 가지 원칙을 정해놓고, 가능한 지킵니다."-그럼에도 워낙 열심히 정치활동을 하시니까 오해를 받는 것 같습니다. 지난번 새누리당에서 '연구활동은 언제하냐" 비판하는 성명을 냈을 때, 페이스북에 '새누리당, 날 꼭 찍어 "연구활동은 언제 하냐"고 비판하는 대변인 성명 발표. 풉, 내가 많이 신경쓰이제? 그런데 내 연구실적이라도 확인하고 이래라'고 즉각 올리셨더군요. 당당하고 자신 있어 보였습니다.(웃음)"민주화 운동을 했던 윗세대 선배들은 훌륭한 활동을 많이 했지만, 학문을 병행하기는 어려웠던 상황이었죠. 저는 20대에 운동권 활동을 하면서 진보를 지향하면서 공부도 잘해야겠다고 생각 했었습니다. 정치활동과 사회참여를 하지만 전공 공부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던 것이죠.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고, 그 생각을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한 비난은 좀 가소롭습니다."-그래도 신경은 쓰이시죠? '프로페서'의 뜻을 명확하게 짚어 올리셨던데요. ''교수'로 번역된 professor의 원의는 자신의 신조를 '공언'(profess)하는 사람'이라고 정의 해놓으셨던데. '왕왕 개 짖는 소리가 들리지만, 직업윤리와 의무를 다하고자 한다'는 대목에서는 웃음을 주더군요. "자꾸 반복하니 말장난 같지만 프로페서의 정의는 '공언 하는 것'이고 종교적으로는 고백까지도 하는 것입니다. 그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은 직분을 다 안하는 것이죠. 대중들은 프로페서가 아닙니다. 살기 위해 돈을 버는데,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면 위험할 수 있고, 자신을 드러내면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조심하며 살아갑니다. 나쁘다 좋다로 판단하기 이전에 삶의 조건 자체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프로페스를 해줘야 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유권자나 대중들은 프로페서의 말을 들어보고 자신들의 생각을 정리해 판단하게 됩니다. 교수는 지식을 가르치는, 지식 전달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지만, 실제로는 더 나아가 지식을 전달함과 동시에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진리나 정치적 종교적 신념과 세계관을 공언해야 합니다." -교수님께서는 그 직분을 아주 충실하게 다하고 있는 셈이군요. 그 직분 이야기를 좀 해보죠. 교수님께서 대선을 앞두고 정권 교체를 위해 줄곧 절박하게 강조해온 것이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의 단일화 작업인데 최근 단일화 물꼬가 좀 트이는 것 같지요."안철수 후보 쪽에서 단일화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했으니까요.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보면 안 후보 쪽에서 11월 25일 전까지는 최종합의를 늦출 가능성이 큽니다. 시간을 벌어야하는 입장에서는 자연스러운 전략이겠죠. 그러나 민주당에서는 빨리 입당할 것을 권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평행선이 됩니다. 그럼 이 상태로 벼랑 끝 전술을 끝까지 갖고 갈 것이냐는 문제가 남죠."-단일화의 절차와 방법이 매우 중요한 일일 것 같습니다. 일전에 두 후보 간 단일화를 위해 공동으로 정치혁신위원회를 구성해 공동 정강정책을 확립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제안을 하셨는데요. 문 후보 쪽에서는 받아들였고, 안 후보 쪽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어떤 문제가 있나요.(웃음) "안 후보 캠프에서 안 받았다고 해서 섭섭한 것은 없습니다. 안 후보 쪽은 독자영역을 개척해야 하는 상황이잖아요. 충분히 이해가 되죠. 그러나 계속 그렇게만 갈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분들이 가는 쪽으로 따라가 주는 것만이 답은 아니라고 봐요. 그래서 끊임없이 연결 고리를 만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어느 캠프에도 속하지 않은 지식인이 해야 할 역할이라고 봅니다. 어쨌든 제 주장의 핵심은 11월에는 양쪽 후보가 무조건 만나야한다는 것입니다. 공식적이건 비공식적이건 가릴 필요가 없습니다. 단일화를 촉구하는 문인들의 성명서나 원로들의 원탁회의 성명서, 그리고 곧 나오게 될 대학교수들의 성명서도 모두 같은 맥락에서 절박함을 담은 것입니다."-교수님의 단일화를 위한 진정성을 의심할 수 없겠지만, 그동안 문 후보 친성향 인사로 분류되어왔기 때문에 안 후보 쪽으로서는 거리를 둘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그럴 수 있죠. 그러나 저는 문 후보 쪽의 영입 제안을 계속 거절해왔습니다. 어떤 캠프에도 합류하지 않고 제 역할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두 후보가 합리적으로 투명한 절차를 통해서 단일화 되면 그 후보를 지지할 것입니다. 물론 문후보든 안후보든, 민주당이든 아니든, 잘못된 정책과 지향에 대해 비판할 것은 해야죠. 우리 쪽 정책을 비판하면 상대편이어서 그렇다고 치부해버리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캠프의 논리가 작동하게 되면 자기 캠프가 하는 것은 모두 선이고, 다른 캠프가 하는 것은 모두가 악이라는 그런 구도로 갈 수 밖에 없게 되죠. 사실 맘편하기로는 어느 쪽으로 확실하게 서는 것이지만 누군가는 단일화를 위한 연결 고리를 꾸준히 만들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수님이 온갖 공격을 무릅쓰고 비평하면서 제안했던 안들이 늦어지거나 여전히 선명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특히 두 후보가 무조건 만나야 한다는 부분은 아직도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안 만날 수도 있겠죠. 저도 현실 자체를 낙관적으로만 보진 않습니다. 논리가 작동하면 안 만날 수도 있다고 보는데, 그것을 알기 때문에 더 강한 압박, 강한 제안을 하는 것입니다. 그나마 변화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은 10월 중순까지만 해도 안 후보 캠프에서 단일화는 금기시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단일화를 언급하기 시작했거든요. 물론 복잡한 조건이 붙어 있긴 하지만 분명한 진전이고 변화죠."-그럼에도 최근 움직임을 보면 두 캠프 사이에 상당한 간극이 있는 것 같습니다. 교수님은 대선에서 이기려면 후보와 캠프가 경쟁하면서도 연대한다는 것을 분명히 자각하고 그것을 자신의 지지층에 메시지를 분명하게 계속 보내야 한다고 하지만 신뢰 없이는 어려운 일이겠죠. "물론입니다. 제 철학 중의 하나가 진리는 아무도 독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치와 관계없이 우리 모두는 부분적 진리를 갖고 있습니다. 후보와 캠프가 자기쪽 주장은 백프로 진리고, 한쪽은 백프로 허위라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맞지 않죠. 만약 그렇게 말한다면 정치공세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일정한 진리를 갖고 있고, 각각 합당한 존재 근거와 합당한 이유가 있는데 자기 쪽만 온전한 진리라고 내세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서로 동의할 수 있는 합리적 절차에 따라서 승복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 단일화하는 과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사실 그동안 교수님이 걸어온 정치영역에서의 활동을 보면, 이번 대선을 앞둔 정치 활동이 낯설진 않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권교체를 위해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하게, 그래서 어떤 '결기'까지 보이게 하는 적극적인 활동의 이면에 특별한 계기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12기 민주정부때에는 정치활동를 하지 않았습니다. 참여연대나 국가인권위원회에서 활동을 했지만, 직접적인 정치적 발언은 의도적으로 안했습니다. 물론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도 불만이 있었고, 그래서 비판하는 글을 쓰기도 했지만 정치의 기본은 굴러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이명박 정부에 들어서면서 기본정도는 유지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다 무너지더군요. 안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억해보면 지금은 MB정부의 실정을 모두 비판하지만, 집권 초기에는 지지율이 아주 높았습니다. 그때 MB정부 출범 1주년을 맞아 생방송 토론이 있었어요. 그때 패널로 나갔었는데, 요즘 표현으로 '돌직구'를 던졌습니다.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틀렸다고 비판하고 경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변화가 없었어요. 국가인권위원을 사퇴하고, 나서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와 함께 진행한 '진보집권플랜'은 그래서 나온 것이지요."-'진보집권플랜'은 반향이 대단했었죠. 한국사회의 진보와 개혁을 화두로 많은 사람들에게 낙관과 희망을 안겨주었다는 평가는 의례적인 찬사가 아니었습니다. "오대표와 진보의 불을 지펴보자고 의지를 모았는데 반응이 괜찮았어요. 그때부터 '스노우볼 효과'처럼 제 발언권이 세져버린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진보집권플랜 낼 때만해도 문제제기를 하고 들어올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오히려 더 앞으로 나가게 되어 버렸죠. 제 목표는 정권교체하고 5년간 잠수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의 저 개인으로 돌아가는 것이 목표예요." -기대가 그렇게 크진 않군요. "개인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 있거든요. 바깥에서는 아무 관심이 없지만, 논문을 쓰고, 책을 낼 일이 있는데 아무래도 시간 투여가 적어지기 때문에 계획이 조금씩 구멍이 나게 되죠. 물론 좀 더 크게 보아 3~4기 연속 민주정부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확고합니다. 지금 경제민주화가 화두인데, 사실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를 이루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스웨덴 같은 경우는 사민당이 40년 집권해서 지금 체제를 만들었죠. 미국 같은 경우도 뉴딜정책을 민주당이 30년 집권해서 체제를 바꾸어놓았습니다. 경제민주화에 모두 공감한다면 3~4기(대통령이 누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민주진보정부를 수립해 적어도 10년 정도는 집권해야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러면 잘될 것이고, 저는 여기(연구실) 있어야겠다는 것이죠. 공적 목표의 대의와 사적 이익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지점입니다.(웃음)"-농담처럼 이야기하셨지만, 집중적으로 활동해서 정권을 바꾸고, 장기간 개인 공부에 몰두하고 싶다, 이런 말씀이시군요. 정치에는 전혀 뜻이 없으십니까. 끊임없이 영입제안을 받고 있는데요. "아마 제가 정치인으로서 '상품성'이 있다고 보시는 것 같습니다. 고마운 일이긴 한데, 정치하려고 마음먹었으면 오래전에 했을 겁니다. 40대 후반인 지금까지 학자로서 움직여왔다는 것은 정치가 제 몸에 맞지 않아서이지 않겠어요. 저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제 직분에 맞는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갑자기 형성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생각해서 정리한 것이지요.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각종 선거 때마다 많은 제안을 받았지만 그때마다 명시적으로 거절했어요. 그런데도 그것을 안 믿어줍니다.(웃음)" -왜 그럴까요. "자신의 희망이 섞이면 믿지 않게 되죠."-그렇다면 교수님께 거는 희망이 그렇게 크다는 말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이런 것 같습니다. 학교나 학계에서 저에게 요구하는 사항이 있죠. 그러나 학교 밖의 대중은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무슨 논문을 쓰는지도 알 필요 없죠. 그런데 저는 바로 여기 학교에서 출발했습니다. 학자로서의 직분을 다하는 것이 저의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지금은 비상상황이어서 밖으로 나왔고, 학자로서가 아닌 지식인으로서 역할을 하는 것인데, 기본이 갖추어진 사회가 되면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제 소신이기도 합니다."-진보의 승리를 위해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는데, 그 역할의 성과가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 하실 일들이 궁금합니다. "단일화가 되면 단일 후보를 위해 끝까지 열심히 뛰어야겠지요. 필요하다면 어떤 역할이라도 할 생각입니다. 물론 결과가 좋아야지요. 바람대로 정권이 바뀌어 3기 민주정부가 들어서면 제가 사회적 발언에서 잠수하는 기간이 아주 길어질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잠수 기간이 훨씬 짧아질 수도 있겠죠. 사적인 이익과 사적인 행복을 위해서도 반드시 정권 교체를 해야 합니다. (웃음)"

  • 기획
  • 김은정
  • 2012.11.06 23:02

만지기만 해도 병이 낫는 영험한 바위? '도대체 어떤 돌이길래…'

무주군 무주읍 오산리 왕정마을에 가면 신기한 변성암을 볼 수 있다. 1928년 영국의 지질학자 홀머스(A.Holmas)에 의해 발견된 세계적인 희귀석 구상화강편마암으로 1974년에 천연기념물 제249호로 지정됐다.구상화강편마암은 주로 무주읍 오산리 왕정마을 뒤 작은 계곡 일대에서 볼 수 있으며 모양과 크기가 다양하고 아름답다. 특별히 바위 전면이 백륜(白輪)으로 둘러싸여 있어 호랑이 바위라고도 불린다. 구상화강편마암의 특이한 생김새와 희귀성이 세상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불법으로 채취하려는 사람들의 발길도 많아져 문화재관리국이 바위 주변에 울타리를 만들어 직접 보호하고 있다.암체 내에서 어떤 광물을 중심으로 그 둘레에 동심원상의 각이 발달하는 구상구조의 암석은 지질학적으로도 매우 희귀한 암석이어서 암석의 생성 원인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무주군 무주읍 오산리 왕정리의 '왕정(旺亭)'이란 지명은 마을의 용 고갯마루를 지나던 고승이 '마을의 지세를 보고 부자가 많을 동네'라며 지어주었다고 한다. 구상화강편마암에 대한 전설에서도 바위의 영험함을 엿볼 수 있다. 조선 후기 철종 때 전국에 역병이 돌았고 호랑이 무늬를 한 돌을 만지거나 가까이 있으면 병이 나았다고 한다. 지금도 왕정마을 사람들은 호랑이 바위 주변을 지날 때면 두 손을 모아 무병장수를 기원하고 가족의 건강을 기원하는 풍습이 전해지는 등 마을사람들에게 호랑이 바위는 영험함의 대상이 되고 있다.무주군 관계자는 "구상화강편마암은 호랑이 무늬의 독특함과 세계적인 희귀석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며 "하지만 일부에서 수석을 수집한다는 이유로 바위를 가져간다던지 정을 이용해 구멍을 뚫어 훼손을 하는 사례들이 늘고 있어 지금은 외부인들의 출입을 막고 있다"고 밝혔다.그는 이어 "하지만 무주군청 후정과 반디랜드(무주군 설천면 무설로 1324, 월요일 휴관㎜에 가면 전시해 놓은 구상화강편마암을 볼 수 있다"며 "무주에 오시면 꼭 한 번 봐주길 바라며 세계적으로 희귀한 자원을 보존하고 천연기념물을 보호하는데도 마음을 써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기획
  • 김효종
  • 2012.11.06 23:02

우신산업 ④ 계열사 - 차·선박·건설분야 부품 설비 해외시장서 날개

우신산업의 로고에는 큰 뜻을 이룬다는 육바라밀(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뜻이 담겨 있다. 풀어보면 6개의 계열사와 함께 우신산업그룹은 법질서를 앞장서 지키고 어떤 어려움도 슬기롭게 극복하며 소리 없이 뜻을 이루기 위해 정성을 다해 목표를 달성하고 이익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의미다.로고 가운데 파란색 타원은 천체궤도로 하늘색 바탕은 우주를 의미하며 영문은 우신산업의 앞 글자, 금색 6줄은 계열사를 지칭한다. 최연소 나이로 우리나라 일류 기업 임원까지 오른데 이어 기업 CEO로 변모해 지구촌 곳곳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고 있는 '작은 거인' 우신산업 국중하 대표의 신화는 아직 진행형이다.1987년 3월 세상 부러울 것 없던 현대그룹의 이사 자리를 박차고 세상으로 나와 자기만의 회사(지금의 우신산업)를 설립하기에 이렀다. 우신산업은 지난 1987년 직원 12명으로 설립해 당해 연매출 3억원을 기록했고, 25년이 지난 지금 직원 수는 200명, 연매출은 570억원에 이르는 단단한 기업이다. 국 대표는 지금 우신산업과 우신엔지니어링, 우신공업, 우영, 여산재, 여산장학재단을 이끌어 가며 현대, 대우 등 국내 굴지 대기업을 상대로 자동차 연료통 등을 생산해 납품하고 있다.△우신산업= 우신산업은 자동차 부품 전문 생산 회사로 지난 1994년 6월24일 익산 왕궁에 설립됐다.이곳에서는 상용자동차 연료탱크 제작을 주로 범퍼, 자동차 부품을 생산한다. 우신산업은 연료탱크 자체 디자인(MODELING) 작업을 시작으로 내구성과 신뢰성 시험에 이르기까지 원스톱으로 자체 설계 능력이 가능하다.알루미늄 연료탱크는 2002년 초부터 현재까지 그 어떤 구조적 결함이 발견된 바 없으며 국내법규 및 북미·유럽법규까지 만족시키고 있다.대표적 생산 제품으로는 알루미늄 연료 탱크를 꼽을 수 있다. 알루미늄 연료탱크는 자체 DESIGN ED 작업을 시작으로 내구/신뢰성 시험에 이르기까지 전 공정이 자체 기술로 소화된다.2002년도 초반부터 알루미늄 탱크 양산 이후 현재까지 구조적설계 결함이 발견된 바 없을 정도로 제품이 표준·규격화 돼 있으며 국내 법규 및 북미, 유럽 법규까지 만족시키고 있다.현재 국내에 판매되는 전 차종에 걸쳐 주문생산이 이뤄지고 있으며, 이 같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중국과 기술 이전 및 제휴를 체결한 바 있다. 또 플라스틱 및 스틸범퍼까지 고객요구에 만족하는 전 차종 맞춤형 상용차 범버도 생산하고 있으며, 중형차와 버스, 트럭에 들어가는 배기파이프도 생산한다.주요 거래처는 현대모비스, 현대자동차, 타타대우상용차, 기아모터스, 경일중공업(주), 두산인프라코어, 두산DST, 타가즈ENG(코리아), 대우버스 등으로 국내에서 정평이 난 기업들을 상대하고 있다. 우신산업은 짧은 설립 역사에도 불구하고, 중국CCC 인증, 특허증, 실용신안등록증 획득 및 연료탱크 부문 국내자동차 3사에 납품 및 대미 수출을 통한 우수한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또 기술개발 장비를 갖춘 최신 설비, 효율적 공정관리를 통한 6시그마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우신엔지니어링= 우신엔지니어링은 1989년 6월 군산 오식도동에 설립됐다. 이곳에서는 조선용 철의장품, 위생냉난방 배관 기기, 플랜트 설비류 설계 제작 설치공사를 담당하고 있다.선박용 철의장품을 제작해 현대중공업에 납품하고 있으며, 선박 동체와 건설현장에서 쓰이는 파이프를 생산하고 있다. 국내실적으로는 영종도 국제공항, 월드컵상암경기장과 수원경기장, 부산 컨벤션센터 건축에서 이 파이프가 이용됐다.일본의 경우 7개의 돔구장과 크레인설치에도 사용하고 있으며, 도쿄타워의 재건축에는 타워 전체 길이 612m의 파이프를 사용했다. 그 외에도 상수도관, 다리교각, 육교에도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파이프를 이용한 모든 구조물에 있어 어디든지 사용이 가능하다.공사실적으로는 현대중공업(주)의 바지선 수리공사, 강남사옥 STAIR 제작 설치공사를 맡았다.또 (주)동부철구 사업소의 고속도로 40호선 충주 제천간 건설공사, 롯데잠실 열병합 시스템 제작, 현대산업개발의 석문유화 공장 설비공사도 진행했다. 이 외에도 포항종합제출(주), 고려산업개발, 대립산업(주) 등 다양한 공사를 수주한 바 있다.△우영= 우신산업은 지난 2003년 6월 우영(1994년 11월 설립)을 인수 자회사로 두고 있다. 이 회사는 우신산업과 영풍, 명우, 동해금속의 공동 지분 출자로 설립(완주군 봉동읍 용암리 소재)됐다. 이곳은 자동차 부품 제조 공장으로 식당 및 기숙사를 운영하고 교육문화시설 여산재를 운영하고 있다.우영의 사명은 '가장 깨끗한 회사. 언제나 경쟁력 있는 회사.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회사'다.이 외에도 우신공업이 자회사로 있으며, 여산장학재단도 별도로 운영되고 있다.이들 우신산업 계열사들은 모두 윤리를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며 공정하고 투명한 기업경영. 국가와 지역사회에 대한 기업으로서의 책임과 역할 충실 수행을 목표로 하고 있다. 또 기술개발과 함께 예술 분야 지원도 아끼지 않고 있으며, 지역사회에서 나아가 인류사회 전체에 이익이 되도록 하는 기업 이미지상을 확립하고 있다.

  • 기획
  • 이강모
  • 2012.11.01 23:02

박근형 원로배우는 - '살아있는 연기교과서'…후배들에 무서운 선배 정평

박근형은 배우 생활만을 천직으로 삼고 54년을 외길로 달려왔다. '살아있는 연기교과서''연기의 신(神)'이란 말이 그냥 붙여진 게 아니다. 넘치는 '끼'에다 끊임없는 절차탁마의 숙련기간을 거쳤기에 가능했다. 그러는 사이 신산(辛酸)의 고통이야 왜 없었겠는가. 배고픔을 견뎌야 했고 방송사의 잘못된 풍토를 바로잡기 위해 나섰다 핍박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매 작품마다 탁월한 인물 성격의 묘사를 통해 그가 아니면 상상이 안 되는 연기력을 보여줬다.박근형은 1940년 정읍시내 본정통에서 여관업과 음식점을 크게 하는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8남매 중 셋째였다. 어려서부터 남 흉내내기를 잘 했고 어른들 앞에서 노래하기를 좋아했다. 그런 끼는 초등학교 때부터 발휘되기 시작했다. 정읍 서초등학교 4학년 때 연극부에서 무언극으로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어 전체 3등으로 입학한 호남중학교에서 브라스 밴드에 들어가 큰 북을 쳤다. 그리고 휘문고 1학년 때는 유치진 선생이 주도하는 제1회 전국남녀 중고교 연극경연대회에서 사육신 박팽년 역을 맡았다. 그리고 중앙대 연극영화과 1기로 입학했다. 하지만 부친은 배우의 길에 들어서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소위 '딴따라'생활이 불안정하다는 이유였다. 반면 모친은 학원비를 대주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부친으로부터 인정받은 것은 1973년이었다. 그가 주연한 영화 '국회 프락치사건'을 대한극장에서 보고 "이제야 내 아들이 제대로 하는구나"하고 안도하셨다.연극을 배우는 과정에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나소운 이진순 이해랑 안광남 이근삼 선생 등이다.연극에 전념하다 1963년 KBS TV 공채 3기로 옮겼다. 먹고 사는 문제도 해결하고 TV나 영화 등 다른 장르에도 관심을 갖고 싶었다. 그러나 입사 2년만에 쫓겨나야 했다. 자살 시도를 했으나 실패하고 정읍으로 낙향했다. 1년간 음식점 일을 돕고 있는데 엽서 한 장이 날아왔다. 극단에서 같이 연극하던 이효영씨가 "연극 딱 한편만 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게 덜컥 제3회 동아연극상을 받게 됐다. 결국 KBS에 화려하게 복귀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어 TBC와 MBC로 옮겼으나 겹치기 출연으로 배우의 생명력이 단축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1971년 프리랜서 선언을 했다. 하지만 프리랜서 생활은 어려움이 많았다. 방송사마다 제 식구를 우선 챙겼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1974년 영화 〈이중섭〉으로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TV 배우가 대종상 영화상을 타기는 초유의 일이었다.그러다 1980년 전두환 정권 들어, 열악한 방송 환경을 개선하고자 '한국방송연기자협회'창설을 주도했다. 당시 출연료가 회당 4300원이었다. 너무 힘들어 출연료를 올려 달라고 1주일 동안 파업을 했다. 요주의 인물로 찍혀 4년간 거의 방송 출연을 하지 못했다.그는 후배들에게 무서운 선배로 정평이 나 있다. 칸의 여왕인 전도연이나 제69회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조민수 등은 그에게 혼나 눈물 꽤나 흘렸다. 덕분에 오늘날 연기자로 대성했다. 김남주는 딸과 같이 생각한다. 김자옥도 30대 초반 슬럼프로 2년간 연기를 떠나 있었다. 그때 "너는 이 시대가 공들여 키운 배우다. 너란 배우가 한명 나오려면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고 호통을 쳐 다시 돌아오게 했다.그리고 가수 송대관과는 특별한 관계다. 고향 후배이기도 하지만 송대관 공연을 위해 자신의 공연을 펑크 낼 정도로 아꼈다. 송대관 역시 "뭘 줘도 아깝지 않은 형님"이라고 살갑게 얘기한다.박근형은 그 동안 TV 드라마 150여 편, 영화 70여 편, 연극 50여 편, CF 20여 편에 출연했다. 그리고 백상예술대상, 대종상, 한국방송대상, KBS MBC SBS 연기대상 등을 수상했다. 가족으로는 고향 후배인 부인 이경자(67)여사와 사이에 2남1녀가 있다. 딸 재은(43)은 연기 아카데미를, 막내아들 상훈(33)은 배우겸 작곡가로 아버지 뒤를 잇고 있다.

  • 기획
  • 조상진
  • 2012.10.30 23:02

원로배우 박근형 "54년 배우 인생…아직도 대본 보면 가슴이 두근거려"

박근형(73)은 스스로를 '굿쟁이'라고 부른다. 연기에 대한 자긍심과 욕심이 대단하다. 배우 인생으로 54년을 보냈지만 "아직도 극본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말할 정도다. '영원한 현역'인 셈이다. 연기에 대한 '무한 욕심'을 보이는 덕분에 대한민국의 시청자와 관객들은 행복하다. 그러한 열정의 비밀이 무엇일까 궁금했다. 흔히 '살아있는 연기교과서'라는 찬사를 받고 있어 대하기가 어려울 줄 알았다. 그런데 의외로 스스럼없고 소탈했다. 꿈나무를 키우기 위해 매달 고향인 정읍에 내려와 골프모임을 갖는데, 막 라운딩을 끝내고 그 모습 그대로 달려왔다. 정읍경찰서 맞은 편 찻집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타기 전에 1시간 30분가량 만났다.- 안녕하십니까? 요즘 정읍을 자주 내려오신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매달 내려옵니다. 두 가지 일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는 골프 모임이고, 또 하나는 조그맣게 설립된 장학회 일 때문입니다."- 골프 모임이라뇨?"정읍에 있는 기업인들이 매달 모여서 골프를 치는 정타회라는 모임이 있습니다. 거기서는 골프 꿈나무를 키웁니다. 그 애들이 국가상비군이 될 때까지. 5명을 키우고 있죠. 키운다기보다 보조하고 있죠."- 정타회는 어떻게 운영되는데요?"회원이 40명입니다. 회원들이 스스로 조금씩 출연하고, 저희들이 기부하는 돈도 있고, 거기서 학생들을 지원하는 거죠. 이번에 전북교육감배 골프대회에서 1등을 한 아이가 정타회에서 지원하는 아이입니다. 여자 골퍼인 이정은 파이브(24 호반건설)도 정읍 출신입니다."- 장학회는요?"이름이 법인장학회인데 순수 민간인들이 모여서, 한 15년 됐습니다. 회원들이 있어 월 회비를 내시고, 저희들은 고문이랄까 해서 일정액을 내놓고 있고"- 말하자면 지역인재 양성에 기여하는 거군요?"제가 한 3-4년 후면 정읍에서 조그맣게 아이들 공부를 시킬 수 있는 그런 걸 하려고 해요. 그런 일로 미리 와서 고향을 자꾸 둘러보고 "- 아이들 일이라면 무엇을?"연기에 대한 거죠. 제가 어차피 나이를 먹고 그러면 귀향해야 되는데, 미리 준비를 해 가지고 연차별로, 여기서 버스 편으로 갈 수 있는 숲이 있는 곳에서 애들하고 같이 지내면서 보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그 동안 꾸준히 연기활동을 해오셨지만 최근 들어 더욱 활발하신 것 같습니다. SBS 월화드라마 〈추적자〉에서 엄청난 카리스마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KBS2 〈승승장구〉에서 오랜 경륜과 만만치 않은 입담을 과시하셨는데요?"제가 1958년도부터 연극을 시작했습니다. 그쯤해서 우리나라 대학극 동아리가 서울대 연대 고대에서 출범해서 우리나라 연극계를 이끌기 시작했어요. 그 가운데 제가 끼어들어가 있었어요. 우리나라 연극이 동인제 연극단체에서 상업극으로 넘어가는 부분에 (제가) 같이 있었고, 그것이 지나서 영상미디어 쪽으로 TV가 나오고, 그러면서 영화 쪽이 활발히 움직이고, 이런 부분을 제가 다 겪었기 때문에 그 때 좋은 선생님한테 배운 전통극에 대해서 제가 상당히 귀하게 알고 가지고 있습니다. 그대로 답습을 하고, 그걸 좀 더 발전을 시키면서 그 동안 연기생활을 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부터 20 몇 년 전부터 트렌디 드라마(Trendy Drama)가 인기를 끌면서 유행에 따른 극들이 많이 나왔어요. 저희들은 전통파라고 자처하니까, 전통극이 활발하게 움직여야 사람들한테 감동을 줄 수 있는 극이 나오거든요. 그 부분을 고수하는 분이 이순재씨, 신구씨, 저, 최불암씨죠."- 이른바 H4(할배 4인방)이군요? 그 명칭은 누가 붙인 겁니까?"꽃미남 아이돌하고 얘기하다가, 한류 아이돌이 붙인 것 같애요."(그는 〈승승장구〉에서 H4 중 내가 막내다. 내가 노래 부르면서 그들을 즐겁게 해줘 '박카수'라 불렀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H4중 누가 제일 외모가 나은 것 같냐?'는 MC 김승우의 질문에 망설임없이 '내가 제일 낫다. 우리끼리 얘기지만 이순재씨는 키가 너무 작다, 신구씨는 벌써 틀니를, 최불암씨는 앞뒤로 나오고 쳐졌다'고 말해 폭소를 자아낸 바 있다.)- 선생님은 한때 연기생활과 관련해 자살을 시도했다면서요?"1963년에 KBS TV 공채 3기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입사 2년 만에 김혜자씨 등 4명이 연기를 못한다는 이유로 쫓겨났습니다. 그 때 세상이 나를 받아들여 주지 않는다고 느껴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실제로 국립극단 출신인 그를 좇아낸 이유는 드라마의 문제점을 자주 지적해 눈엣가시였기 때문이다.) 말라리아 치료약인 키니네로 자살하려고 여러 약국을 돌아다니며 한 웅큼을 모았습니다. 거의 성공할 뻔 했지만 먹고 난 뒤 다 토해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정읍으로 내려갔습니다."- 선생님은 "우리나라에 스타는 많은데 배우는 없다"고 쓴소리를 하십니다. 원로배우 입장에서 소위 한류 스타들이 연기력을 갖추지 못한데도 우쭐거리는 것을 지적하신 건가요? "아니죠. 그런 나무람이 아니고요. 그것은 사회적인 경향이니까 이야기할 생각은 없고, 소위 의식을 가지고 대중예술을 한다는 사람이 이 정도 되면 작품성과 이런 것으로 감동을 줘야 되고 연기를 하는 배우들을 길러야 하는데 유행에 영합하는 그런 얄팍한 걸 가지고는 오래 갈 수 없다는 얘기죠. 그런 쪽으로 스타는 있을 수 있어도 우리나라 전체로 봐서 순수예술이나 연극, 대중예술이나 그런 배우가 많이 없다는 얘기죠." - '연기란 여러 사람이 어울리는 공동작업이다' 이런 말씀을 강조하시는데요?"연기예술이라는 게 연극이 모체가 되니까요. 연극은 제8의 예술로서, 문학, 건축 미술, 음악 등 여러 분야가 모여서 하기 때문에 한 가지만 알아서 되는 것이 아니죠. 그리고 항상 준비되어야죠. 예를 들어 작품을 분석하고 거기에 대비한 인물 창조를 하기 위해서 인물간 서로 교류라든가, 그 작품이 뭔가를 남기고자 하는 메시지를 알아야 하죠. 거기다가 나의 메시지도 넣어서 연기술로서 표현할 수 있는 작가적인 입장이 돼야 그게 이루어질 수 있다 이거죠. 그냥 시키는 대로 기계를 향해서 연기하는 것은 배우예술이 아니라는 거죠." - 선생님은 흔히 '살아있는 연기교과서'라고 불립니다. 자신의 연기철학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과찬입니다. 저의 경우는 우선 작품을 분석해서 그 인물에 대한 주변상황을 다 알고, 만약에 내가 그 사람이라는 가정 하에 출발을 해서 가능성을 여러 가지 두고, 그동안 내가 관찰해 왔던 다른 여타의 인물들 중에서, 그 특성들을 모아서, 인물을 창조해 내는 거죠. 그 안에는 소위 상황에 의해서 변해지는 그런 인물, 우리 본성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죠. 희로애락이라든가 이성이나 감성이라든가 모든 걸 포함해서 그냥 표피적인 걸 표현하는 게 아니라 내면의 깊은 면까지 표현해야 되는데 그 역할창조가 저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저는 작품을 대할 때도 그냥 스쳐지나가지 않고 항상 저의 상상의 세계 속에서 계속해서 갈등을 하는 거죠. 나만이 갖는 내 형태로서, 내안에서 다른 사람을 만들어 내는 거죠."- 어쩌면 교과서적인 이론에다 생생한 경험이 합쳐진 살아있는 얘기군요?"그렇습니다. 연기이론이라는 게 소련의 스타니슬라브스키, 미국 액터 스튜디오의 리스트라스버그 연기이론도 있고, 유럽이나 인도 등 여러 이론이 있습니다. 이런데서 비롯된 이론은 아주 순수한 백지 위에 색깔을 칠해 나가듯이 사람이 변해가는 과정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에 이론은 대체로 공통적이라고 봐요. 그 이론에다가 우리나라 것, 성리학 쪽에서 가져오는 인의예지라든가, 또 이성과 감성이 어떻게 충돌해서 어떻게 해 내는가, 변해가는 과정이라든가. 어차피 동서양 사람이 사는 과정이 같고 감성이나 이성이 같은 거라 보면, 우리 것도 나름대로 괜찮다고 생각해서, 저는 그 쪽을 추구하고 있죠. 그리고 이론과 실제라는 것이 전부 훈련입니다. 꾸준한 연습이죠."- 50년 넘게 한 우물만 파셨는데 연기가 싫증난 적은 없었습니까?" 저는 아직도 극본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연기를 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다른 사람의 역할이 탐날 때도 있어요. 한 마디로 무한욕구죠. 저희는 끝이 없어요. 그리고 저희는 완성도라는 것을 거의 믿을 수 없으니까요. 어느 정도가 완성된 것인지 저희는 잘 모릅니다. 관객들이 보고서 평가해 주실 적에 그걸로 위안을 삼는 거고, 제 상상력으로 만드는 인물들이 감동을 줬을 때 저에 대한 희열은 이루 말할 수 없죠. 그게 좋은 거죠."- 지금 출연하고 계신 작품과 앞으로 계획은?"tvN 〈제3병원〉과 채널A 〈판다양과 고슴도치〉에 출연 중이고 〈추적자〉 이후 SBS 월화드라마 〈드라마의 제왕〉이 11월 5일 첫 방송될 예정입니다. 영화 〈가문의 영광5- 가문의 귀환〉이 촬영 중이고 〈고령화 가족〉을 11월에 찍습니다. TV(KBS2)는 내년 1월에 이순재씨 신구씨와 저, 3명이 시트콤을 합니다. 또 〈추적자〉를 했던 작가분 작품이 내년 6월에 방송될 예정입니다."- 그 동안 프리랜서로 활동하다가 이번에 소속사(레젤이엔엠코리아)에 처음 둥지를 트셨는데 그 이유는 뭡니까?"다작(多作)을 하다 보니까 혼자 힘으로는 해내기가 너무 어려워졌어요. 젊은 시절에는 아무 상관이 없었는데. 기획사에서 개인적인 홍보라든가 그런 걸 일괄 책임을 지기 때문에 제가 정신을 덜 쓰겠죠."-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십니까?"걷는 것, 스트레칭 하는 것, 또 골프를 좋아하니까 골프연습을 하지요. 저는 서울서는 거의 필드에 나가지 않습니다. 고향에 내려와서 이틀이고 삼일이고 하고 올라가고 그렇습니다."- 아, 그리고 사모님한테 두 번 퇴자 맞으셨다면서요?"그렇습니다."- 당시 잘나가지 않으셨는가요?"그렇지 않았어요. 저희가 먹고 살만한 때가 그리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언제적이냐면 KBS 방송공사 설립이후 좀 나아진 거죠. 그 전까지 방송 3사가 있어도 생활이 힘들었어요. 지금도 저희는 용역입니다. 근로자가 아니에요. 그 전에는 국민연금도 못 들어갔습니다."- 요즘 젊은 아이들이 서로 연예계에 진출하려는데 대해?"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의식을 가지고 좀 더 발전적으로 해줬으면 좋겠어요. 너나할 것 없이 '전 국민의 연예인화' 이것은 곤란하다는 거죠." - 끝으로 도민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은?"저희는 예향의 고장이라는 것은 다 아는 거고요. 한 가지 섭섭한 것은 영화제라든가 문화적인 행사를 할 때, 고향에서 나올 수 있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육성해 주는 쪽이 낫지, 이름을 빌려와서 하는 행사는 하지 말라는 거예요. 처음은 어려우나 시간이 가면 분명히 인정을 받습니다. 그리고 문화회관, 문예회관 등 건물 짓기를 좋아하죠. 그런데 문화적인 혜택을 시민들한테 못주고 있는 형편이에요. 그런 것을 지어 놨으면 시민 자신들이 자주 활용할 수 있도록 개방이 되어야죠."

  • 기획
  • 조상진
  • 2012.10.30 23:02

친환경 농업 지휘 홍낙표 군수 "청정환경 인식시켜 소비자 무한신뢰 이끌 터"

"우리나라의 생명산업과 저탄소 녹색성장을 이끌어간다는 사명감으로 친환경농업실천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홍낙표(사진) 무주군수는 "농산물 수입개방의 여파로 값싼 저질 식재료들이 우리의 식탁과 농업을 위협하는 등 지금 우리의 농업 환경은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렵지만 위기는 반드시 극복할 기회를 업고 오는 법"이라며 "무주군은 그 기회를 친환경농업에서 찾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반딧불이가 살아 숨 쉬는 깨끗한 자연환경을 기반으로 친환경 브랜드를 정착시키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다"며 "무주=반딧불=친환경농업=청정환경"을 인식시켜 반드시 소비자들의 무한신뢰를 이끌어 낼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그는 "반딧골 광역친환경농업단지는 이를 위한 여정의 든든한 버팀목이 될 것"이라며 "올해부터 가축분뇨의 해양투기가 전면 금지됨에 따라 자원을 재활용하고 질 좋은 퇴비를 생산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췄다는 점에서 큰 기대를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홍 군수는 "생산규모와 공급량을 확대해 가는데 보다 주력할 방침"이라며 "좋은 땅, 안전한 퇴비로 정성스럽게 키워진 무주 반딧불 농산물이 대한민국을 살리는 먹을거리가 될 수 있도록 혼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기획
  • 기타
  • 2012.10.30 23:02

무주 친환경농업 경축순환자원화센터 - 가축분뇨에 톱밥·왕겨 섞어 친환경 유기질 퇴비 생산

무주가 '잘 사는 농촌, 돈 버는 농가, 돈 되는 농업경영'을 실현하기 위해 친환경농업 실천에 주력하고 있다. 친환경농업 실천은 농산물수입개방에 맞서는 경쟁력이자 4000여농가 1만여명의 농업인들을 살리는 길이요, 대한민국의 건강한 먹을거리를 지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친환경농업 실천을 위한 무주군의 움직임은 최근 반딧골 광역친환경농업단지 경축순환자원화센터의 가동을 통해 더욱 구체화되고 있다. 광역친환경농업단지는 2009년 농림수산식품부 공모를 통해 조성된 것으로, 핵심시설인 경축순환자원화센터에서는 연간 80만 포대의 유기질 비료를 생산해 농가에 공급하고 있다. 화학비료와 농약사용량을 줄이는 직접적인 기반이 돼 무주군의 자연환경 보존과 농가소득증대, 농업경쟁력 향상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친환경농업실천의 중심기지무주군 안성면과 적상면, 부남면 일원에 조성된 1301ha 규모의 반딧골 광역친환경농업단지(2009~2012)는 밭작물과 축산이 연계된 자연순환형 농업단지로 국·도비 70억원을 포함한 101억원이 사업비로 투입됐다.이곳에는 경축순환자원화센터를 비롯한 벼 건조 저온저장시설과 농산물종합유통센터, 농기자재류보관창고, 다목적 공동육묘장 등의 시설들이 건립됐으며, 각기 제 역할들을 해내며 무주군 친환경농업실천의 중심기지가 되고 있다. △축분(畜糞)을 친환경 퇴비로무주군 안성면 장기리 경축순환자원화센터는 공장면적 3299㎡, 하루 50톤 이상 유기질 퇴비를 생산하며 반딧골 광역친환경농업단지의 핵심시설로 꼽힌다. 관내 축사에서 발생되는 축분이 주원료이다.이곳에서 생산하는 유기질 퇴비는 축분과 왕겨, 톱밥, 발효제 등을 혼합해 70℃ 이상에서 발효시킨 것으로, 유해 성분은 분해되고 유기질 또한 다량 함유하고 있어 토양개량효과가 매우 크다는 분석이다. 또한 보비력과 보수력은 증대시키고 토양미생물의 활동을 높여 지력을 키우는 장점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품질은 높이고 농가부담은 줄이고반딧불 유기질 퇴비에 대한 성분 검사와 비료생산업 등록까지 모두 완료한 반딧골 광역친환경농업단지 경축순환자원화센터의 유기질 퇴비 생산 규모는 연간 80만 포대.이곳에서 생산된 유기질 퇴비는 무주농협협동조합을 통해 포당 3800원에 농가에 공급되고 있다. 농업인들은 값싸고 품질 좋은 퇴비 공급에 반색하고 있다. 값도 싸지만 자연환경을 거스르는 화학비료와 농약사용량을 줄이는 동시에 농업환경과 농산물의 품질은 한층 높일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반딧불 친환경브랜드 정착 기대친환경 인증 취득 농가를 1000농가 900ha로 확대할 방침인 무주군은 축분을 재활용한 반딧골 광역친환경농업단지 경축순환자원화센터의 운영으로 반딧불 친환경브랜드 정착이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를 통한 농산물 매출은 내년에 최고 120억원에 이를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무주군은 경축순환자원센터가 기피시설이라는 이미지를 탈피시키기 위해 톱밥 등을 활용해 악취를 완벽하게 제거하는 최첨단 시설을 갖추었으며, 시설 벽화를 그리고 소나무를 심어 친환경 공간을 조성했다.환경오염문제를 해결하는 한편, 유기 관광축산, 생태관광의 가능성도 열어 농업군이자 관광군인 무주지역의 경쟁력을 한층 높인 것이다.

  • 기획
  • 김효종
  • 2012.10.30 23:02

진안 마이산 탑사 천지탑 - 태풍 볼라벤도 힘 한번 못썼다

"저 천지탑이 끝으로 올라갈수록 왜 저리 뾰족하나"(이각). "밑이 뾰족할 수는 없지 않냐"(박하).얼마전 종영된 SBS 수목드라마 '옥탑방 왕세자'에서 주연배우인 박유천과 한지민이 진안 마이산 탑사(주지 청파진성 스님)를 배경으로 한 촬영분에서 나눈 한 대화 내용이다.인기리에 방영중인 드라마 '서영이'를 비롯해 숱한 화제작들이 앞다퉈 배경으로 삼고 있는 마이산 탑사의 돌탑. (카메라)앵글에 담겨진 기묘한 매력 때문인지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다. 드라마, 영화 배경 섭외 0순위로 떠오를 정도다.그런 맥락으로 볼때 일본 NHK 등 유수 해외 다큐멘터리 팀까지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도립공원 속에 지역의 작은 문화유산이 세계적인 명물로 거듭나고 있음을 방증하고 있는 대목이다.그렇다면 탑사의 돌탑이 왜 유명할까. 그 물음에 답은 그동안 탑사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 말해주고 있다.그 신비의 빗장은 겨울철, 탑사 단 위에 정화수를 떠 놓고 기도를 올리면 고드름이 꺼꾸로 열리는 '역고드름 현상'이 열었다.기이한 현상에 한 방송사 다큐멘터리팀이 10여년전 그 수수께끼를 풀려했으나 결국, 답을 내리지 못했다. 미스테리로 남겨진 것이다.그런 가운데 최근 채널A 이영돈의 논리로 푼다 '소원바위'편에 탑사 천지탑이 방영되면서 영험한 도량임이 또 한번 입증됐다.솟대역할을 하는 천지탑에서 성심을 다해 기도를 올리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사실이 논리에 입각, 밝혀지면서다.실제, 시험관 시술마저 번번이 실패했던 김모씨가 탑사에서 간절히 빈 어머니의 기도 덕분에 6년 만에 첫 아들을 낳았고, 카페를 운영하는 노모(여)씨도 이 곳 탑사를 찾아 기도를 올린 덕에 카페 매출이 올랐다고 한다.뿐만 아니라 태어날때부터 휘어있던 아들의 한쪽 다리가 곧게 펴졌다는 팔순 노파의 사연 등 말로 형용하기 힘든 기적들이 실제 일어난 것이다.탑사 천지탑에 깃든 그 영험함은 지난 여름 괴풍을 몰고온 태풍 '볼라벤'을 통해 극명히 입증됐다. 당시 탑사에는 사람이 날라갈 정도의 초속 40m 안팎의 강풍이 불어닥쳤지만, 80여기의 돌탑은 흔들릴 뿐 한 개도 무너지지 않았다.그 영험함이 알려진 이 돌탑을 스토리텔링화해 지역의 대표 문화상품으로 승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여론이 일고 있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탑사 주지 청파진성 스님은 "몸체에 해당하는 탑신의 돌멩이가 밑에는 '음돌'로, 위에는 '양돌'로 이뤄져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고, 그 사이에 박아둔 '샛돌'은 탑신이 움직일때 같이 이동하면서 탑신을 잡아준다"는 말로, 100여년 동안 탑이 풍파를 이겨낸 배경을 나름대로 풀이해 냈다.그 신비의 돌탑은 임실 둔덕 출신인 고 이갑용 처사(1860~1957년)가 구한말인 1885년 현재의 탑사로 들어와 생식(솔잎)으로 연명하며 1927년까지 30여년간 기도와 정성으로 쌓아올린 신념의 탑으로 알려지고 있다.

  • 기획
  • 이재문
  • 2012.10.25 23:02

안완식 박사는 - 전국 돌며 '토종' 발굴…한국종자은행 산파역

2002년 농업생명공학연구원에서 퇴임한 뒤 우리나라 토종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토종지킴이'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육종학회와 한국작물학회 부회장을 지냈고 1999년 한국토종연구회를 만든 뒤 지금도 전국을 돌아다니며 토종 발굴에 몰두하고 있다. 서울 출신으로 용산고와 서울대 농과대학을 나왔다. 농촌진흥청에서 근무하던 1983년 일본에서 식물유전자원 관련 연수를 받은 것이 계기가 돼 종자연구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귀국 후 직제에도 없는 식물유전자원 연구를 시작하라는 지시가 떨어져 종자은행 업무를 시작했다. 이 때 우리 농업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됐고 사라져 가는 토종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식물과 꽃을 좋아했다. 열살 무렵 한국전쟁 때 어느 불탄 집 마당에 새싹이 돋아난 걸 신기하게 관찰하고 나팔꽃백합을 집에 옮겨오기도 했다. 고교 시절엔 변산반도에 갔다가 변산중 교정에 나 있는 빨간 꽃이 너무 좋아 서울 집으로 가져온 일도 있다. 이런 관심 때문에 대학도 농과대학에 들어가 한 평생을 이 분야에 종사했다. 농촌진흥청 맥류연구소 연구관, 농업과학기술원 유전자원 과장 등을 지냈고, 강원대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멕시코 국제맥류옥수수연구소, 일본 농생물자원연구소, 미국 오리건대학교 연수를 마친 뒤 귀국해 밀 육종과 식물 유전자원 연구에 매진했다. 식물유전자원 관련 연구 논문이 55편에 이른다. KBS MBC EBS의 토종 관련 다큐 프로그램에 출연했고, 전주MBC 창사 35주년 기념 특집 제작 때에도 미국 멕시코 일본을 다니며 출연했다. '우리가 지켜야 할 우리 종자' '내 손으로 받는 우리 종자' '한국 토종작물자원 도감' '식물유전자원학 개론' '육종실험의 길잡이' '종자은행의 종자관리 요령' '우리매화의 모든 것'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고려대와 단국대, 성신여대에서 강사로 활동했고 국립 몽골대학 객원교수를 지냈다. 전국여성농민회와 전국귀농운동본부 회원들과 함께 5년 전 만든 인터넷 다음 카페 '토종씨드림' 대표를 맡아 전국을 돌며 토종 종자를 발굴하고 있다. 1999년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우리 종자'를 저술해 공무원 문예대전 최우수상인 국무총리상을 수상했고 2002년엔 녹조근정훈장을 받았다.부인 채숙자 여사(68)와 사이에 1녀(39) 1남(37)을 두었다. 부인은 30년 동안 화원을 경영했다. 호는 매화와 친구라는 뜻의 '매우(梅友)'와 종자의 집이란 뜻의 '인제(仁薺)' 두개다. 일본 연수시절 매화에 매료돼 귀국한 뒤에도 매화에 푹 빠졌다. 2004년부터 2010년까지 전국의 매화 350여점 중 250여점을 선별해 책으로 엮은 '우리 매화의 모든 것'을 펴냈다. '수인사대천명(修人事待天命)'이 좌우명이다. 최선을 다한다는 '진(盡)'이 아니라 수양을 통해 인간됨을 지향한다는 '수(修)' 자를 쓴 게 이채롭다. 취미는 매화와 동백 분재.

  • 기획
  • 이경재
  • 2012.10.23 23:02

'토종 지킴이' 안완식 박사 "전북, 육종산업 메카 되려면 상품성 높은 종자 개발해야"

토종 종자들이 사라지고 있다. 외환 위기 이후 종묘회사들도 외국기업에 넘어갔다. 우리 토종 씨앗도 이젠 로열티를 주고 사와야 하는 실정이다. 그래서 '종자주권' '식량주권'을 되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종자산업. 부가가치가 높은 유망 업종이다. 농업비중이 높은 전북은 종자산업을 꽃 피울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지만 아직은 인프라가 취약하다. 최근 들어 방사선 육종연구센터와 민간 육종연구단지를 유치하는 등 종자산업에 눈을 뜨고 집적화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도민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농촌진흥청과 산하 관련 기관, 한국농수산대학이 전주혁신도시에 이전해 오면 생산과 연구, 인력공급이 본 궤도에 오를 것이다. 우리나라 종자은행 개설의 산파역을 했고 유전자원 연구에 몰두했던 안완식 박사(70)를 만났다. '토종 지킴이'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지금도 전국 각지를 찾아다니며 토종 종자 발굴에 심혈을 쏟고 있다. 인터뷰는 경기도 화성에 있는 그의 자택 서재에서 이뤄졌다. 토종 종자와 종자산업을 주제로 얘기를 나누었다. 종자산업 메카의 꿈을 키우는 전북에 대한 조언도 궁금했다.-토종 씨앗 살리는 의병대장, 토종지킴이, 토종연구분야 최고권위자 등 별칭이 많습니다. 부담은 없나요."종전에는 무덤덤했는데 근래에는 부담되기도 하고 책임감마저 듭니다."-한자 성함 安完植을 풀이하면 이름 대로 세상을 사시는 것 같습니다만."완식이란 이름은 지관을 하셨던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셨는데 살고 보니 '완전하게 심어서(完植) 큰 탈 없이 편안하게(安)' 살아온 것 같습니다."-우리나라 사람들은 토종이란 말을 매우 좋아하는데 역설적으로 토종 종자들을 지키지 못하고 있어요. 특히 외환위기 때 심했는데 어떤 실정입니까. "당시 국내 채소 종자시장의 67%를 차지했던 서울종묘, 흥농종묘, 중앙종묘 등이 외국 유명 종묘회사인 몬산토, 신젠타, 다끼이 등에 인수합병됐어요. 몬산토 같은 글로벌 회사는 우리나라 농산물 종자사업권의 대부분을 흡수했어요. 우리나라를 발판 삼아 중국에 진출하려 한 것이지요. 결국 우리 밥상에 오르는, 우리 땅에서 길렀던 채소 대부분을 이젠 로열티를 물고 먹어야 하는 실정입니다."-우리 기업이 되찾아 온 경우는 없나요."동부팜한농이 얼마전(9월11일) 몬산토코리아를 인수했어요. 청양고추를 포함한 고추와 토마토파프리카시금치 등 310개 종자 중 20%를 제외한 250개 종자사업권을 되찾게 된 겁니다. 참으로 다행이지요." -우리 토종들이 사라지는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시나요."국내외의 새 품종이 보급되면 농가들은 품종을 바꾸게 되니까 먼저 심었던 토종들은 사라지게 돼요. 농촌 일손 부족도 토종 소멸을 부채질한 원인입니다. 1985년 토종을 수집했는데 8년 뒤 같은 지역에서 같은 방법으로 다시 조사했더니 74%나 소멸됐고, 다시 7년 뒤에는 12%가 소멸된 것이 확인됐어요."-토종 종자연구에 심취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어려서부터 식물을 좋아했어요. 그래서 농대를 지원했고요. 토종과의 인연은 1983년 일본 쯔꾸바 과학도시에 있는 농업연구센터에서 3개월 동안 식물유전자원에 관한 연수를 받은 것이 계기였어요. 귀국 후 식물유전자원 연구를 하라는 청장의 지시로 종자은행 업무를 시작했고, 이때 우리나라 농업을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뭔지를 고민했어요. 결국 사라져 가는 토종을 수집, 확보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책도 쓰기 시작했지요."-전국을 돌아다니며 토종 발굴에 매진하고 계시는데 성과는 좀 있습니까."도시화가 빠른 지역일수록 토종을 찾아보기 힘들어요.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군 지역을 빠짐 없이 조사하면 300400점 정도는 수집할 수 있었습니다."-얼마전 정읍지역에서 토종종자를 살펴보고 가셨는데 다른 지역에는 없는, 전북에만 있는 토종도 있나요."전국여성농민회 정읍회원들과 함께 옹동태인정우이평면에서 활동했는데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많은 토종을 볼 수 있었어요. 콩녹두팥돈부강낭콩 등 두류 토종이 많고 상추시금치호박오이갓 등의 토종 채소와 메밀땅콩참깨들깨 등의 유류 작물 토종도 다양했습니다. 특히 대를 이어 심어온 뿔시금치검은찰옥수수감자녹두시금자깨청호박 등이 오래된 토종들이었습니다. 전국 어디나 그곳에서만 나는 토종은 거의 없고 같은 작물이라 하더라도 그 지역에 나는 품종은 그 지역에서 적응되어 온 그 지역만의 토종입니다."-토종을 발굴하고 가꾸는 철학이 있을 텐데요."처음엔 의무감에서 시작했지만 나중엔 몸에 배면서 재미를 느껴요. 토종을 수집하고 사진 찍고 정리해서 책으로 펴내면 자신감도 생기게 돼요. 토종은 한번 사라지면 다시 찾을 수 없는 귀중한 자원이고,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 영원해야 한다는 소신 때문에 이런 일을 하는 거지요. "-토종은 수량이 적고 모양이나 품질이 떨어지는 문제점도 있지 않나요."개량품종에 비해 수량성이 낮은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질을 더 따지지 않습니까. 토종 맛이 우리 입맛에 맞기 때문에 토종을 선호하는 예가 많아요. 넓은 면적에서는 개량종을 재배해 다수확을 올리고, 토종은 유기농 재배에 적합하기 때문에 넓지 않은 면적에서는 토종 유기농산물을 재배한다면 그만큼의 가치를 가격으로 보상받을 수 있겠지요." -농업비중이 높은 전라북도는 지금 종자산업의 발판을 다지고 있습니다. 오랜 유전자 연구원 생활을 하셨는데 어떤 방향성을 갖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종자산업은 부가가치가 큽니다. 종자시장을 넓게 보아야 합니다. 안정성을 위해 내국시장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되 중국과 동남아 등을 집중 공략하기 위한 현지 수요자 중심의 연구개발도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현지인들의 입맛과 취향에 맞는 품종을 개발하려면 다양한 유전자원을 현지에서 확보해야 하고 연구소도 현지에 두어야 합니다. 그에 따른 체계적인 인력양성도 과제겠지요."-종자산업은 다국적 기업이 장악하고 있는데 후발주자로서 가능성이 있을까요. "동부팜한농이 몬산토코리아를 인수해서 다행이지만, 되찾지 못한 20%는 우리 채소의 핵심이 되는 고추파프리카시금치토마토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배추무고추육종은 한국 연구진이 세계에 앞서 있고, 고추 연구기술은 파프리카나 토마토 연구와도 상통하는 것이어서 연구개발 투자를 늘린다면 가능성은 크다고 봅니다."-농촌진흥청 재직 시절 종자은행에 관심이 많으셨는데 종자은행은 잘 운영되고 있나요."1974년 종자저장시설(5만점 보존 규모)을 신축했고 농촌진흥청 연구기관에 보유하고 있던 종자 3만3000점을 이곳에 저장했지요. 이 일을 시작하면서 전국의 농촌지도소 요원 7000여명을 동원해 토종을 수집하기 시작했어요. 이 때 5170점을 수집했는데 이것이 지금 보유하고 있는 토종의 근간이 되고 있지요. 2006년에는 종자저장시설인 '국립농업유전자원센터'가 최첨단 무인관리(로봇) 시스템으로 수원에 건설돼 국내 유전자원 16만점을 보존하고 있어요. 국제식량농업기구(FAO) 공인 안전중복보존센터로 지정돼 아시아 지역의 '유전자원 허브뱅크'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농촌진흥청이 전주혁신도시로 이전해 오면 이 시설도 같이 따라 오게 됩니까."아니예요. 이 시설은 수원에 보존되고 전주혁신도시에는 새로 지어질 겁니다. 조선시대 여러 곳에 보관해 안전을 도모했던 사고(史庫)와 같은 이치이지요."-전북은 방사선육종연구센터와 민간육종연구단지를 유치했습니다. 종자의 다양성이 기대되는데 향후 과제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100여년간 수원이 농업연구기관이 집결 지역으로서 성과를 거두었듯이 전북도 육종연구기관이 집적화되면 큰 성과를 거둘 것으로 봐요. 다만 연구기관 간 연계체제가 원활해야 하고, 시설 및 기자재 활용이 극대화될 수 있도록 사전 연구인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요."-방사선 육종이 부가가치가 높을 것으로 전망되는데 예를들면 어떤 품목들이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요."미국 일본 중국 등 방사선돌연변이 육종 선진국을 따라 잡으려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해요. 방사선돌연변이는 종자에 의한 생산물을 이용하는 곡물의 육종 보다는 영양체를 이용하거나 영양체로 번식하는 작물에서 효과가 잘 나타납니다. 다양한 품목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시도한다면 좋은 결과가 도출될 수 있어요. 방사선돌연변이 육종에 대한 오해와 막연한 불안감을 해소하는 것도 숙제입니다."-자치단체가 해야 할 일을 꼽으신다면."자치단체 힘만으로는 종자산업을 발전시킬 수 없어요. 정부의 육종 연구기관과 민간 육종연구기관들이 부단히 노력해야 해요. 이들 연구기관들이 어려움 없이 연구를 수행할 수 있도록 행정적인 배려와 편의를 제공하는 것이 자치단체로서는 중요한 일입니다."-적기 예산지원 등 정부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할 터인데요. "정부 차원의 큰 사업이기 때문에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지 않겠어요?"-인력확보와 양성도 중요한 과제일 텐데 현재 우리나라 인력풀은 잘 돼 있나요."우리 학력수준은 세계 제일입니다. 외국의 유명한 대학에서 수학한 석학들도 많아요. 인력풀은 충분하지만 중요한 건 대우예요. 훌륭한 대우가 우수한 인력을 낳는다고 하지 않습니까."-지구촌이 농업 유전자원을 선점하기 위한 종자전쟁시대를 맞고 있는데 지금 우리나라는 어떤 수준입니까."현재 세계 6위의 농업유전자원(27만2000점)을 확보하고 있어요. 앞서 얘기한 것처럼 '세계종자안전중복보존소'로 인증 받고 또 '국제유전자원협력센터'를 설치하는 등 선진 인프라를 구축해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천연의약소재, 기능성 신소재, 식품소재, 바이오 에너지작물, 아열대 과수 및 미생물 자원 확보에 주력해 2017년에는 세계 5위의 유전자원을 확보할 예정입니다. 2020년까지 세계 종자시장의 선두그룹에 올라서겠다는 계획을 세운 만큼 기대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종자산업은 황금알을 낳는 신성장 동력사업이 될 겁니다. "-우리나라 민간기업의 종자산업은 어느 수준입니까."토종 메이저급으로는 동부팜한농과 농우바이오, 한농종묘 등이 있어요. 주로 채소류와 화훼류 종자를 취급하고 있는데 상당히 많은 유용한 유전자원을 보유하고 있고 경쟁력도 있습니다. 사까다종묘, 다끼이종묘 등 100년 이상된 육종기술을 갖고 있는 일본을 제외하면 국내 육종기술 수준은 거의 세계적 수준입니다."-육종 문제는 결국 인프라가 많은 농촌진흥청이 주도해야 하고 기업들도 육종연구에 투자를 해야 할 터인데 잘 될까요."농진청은 정부 연구기관으로서 당연히 새로 형성되는 종자산업 클러스터 발전에 일익을 담당해야 해요. 민간 기업 투자를 유도하는 일에도 마찬가지이고요."-전북에는 방사선육종연구센터-민간육종연구단지-농촌진흥청농수산대학-국가식품클러스터 등이 들어설 예정입니다. 종자 육종산업의 메카라는 말이 벌써부터 나오는데 과제라면 무엇을 들 수 있겠습니까."종자 육종산업의 메카로 발전하려면 무엇보다 외국 회사에 대적할 만큼 경쟁력을 갖춰야 해요. 외국산 품종에 뒤지지 않는 상품성 높은 종자를 개발해야 하고, 국내는 물론 수출용 종자를 육성해야 합니다. 사전 연구인력과 자원 확보도 중요하고요. 전북은 고급 인력이 올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고 행정편의를 제공하면서 일하기 쉽게 원스톱 지원체제를 갖춰야 합니다. 정부도 관련 산업 및 업체에 대한 지원과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하겠고."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몸을 움직일 수 있는 한 열심히 살아야지요. 팔자소관이랄까요, 눈 감기 전까지는 종자분야에 진력할 생각입니다. 15년 전 창립한 '한국토종연구회'와 '토종씨드림' 활동을 통해 토종을 찾아 종자은행에 보존하고 확산시킬 거예요. '한 농가 한 토종 갖기운동'으로 승화시킬까 합니다."

  • 기획
  • 이경재
  • 2012.10.23 23:02

가정폭력 실태 - 부인폭행은 '부부싸움' 아닌 처벌받을 범죄

우리는 언론보도를 통해 여성들이 죽음을 당하거나 폭력의 피해를 입는 소식을 종종 듣는다. 대검찰청의 작년 범죄분석에 따르면 2010년을 기준으로 1년 동안 살해당한 전체 여성수가 무려 456명에 이른다. 여기에 남편이나 애인이 가해자일 경우에는 대부분이 폭행 또는 상해 치사로 기소되는 것을 감안한다면 가시화되지 않은 피해여성은 훨씬 많다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강간살인 등은 살인이 아닌 성폭행으로 분류되면서 실제 포함되지 않은 여성의 수는 더 많이 늘어난다. 정말 여성이라면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위험 속에서 우리는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전혀 알지도 못하는 타인에 의한 무차별적인 폭력으로 생명을 잃는 여성 외에도, 많은 여성들이 친밀한 관계에서 생명권을 무참히 침해당하고 있다. 일례로 지난 9월 한국여성의 전화가 주최한 '여성인권영화제' 피움 토크 무대에선 18년간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죽은 딸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한 어머니의 피맺힌 절규가 있었다. 74세의 노모는 "딸이 '너무 맞아서 오래 못 살 것 같아'라고 하는데도 애들 크면 괜찮아진다며 그냥 참고 살라고 했다"는 자신을 탓하며, 결국 자신이 딸을 맞아 죽게 했다며 통곡했고 관객 모두 함께 눈물을 흘렸다. 실제 여성부가 2004년부터 3년마다 실시하고 있는 전국가족실태조사에 따르면 2010년 한해 동안 우리나라 65세 미만 부부의 신체적·정신적·경제적 폭력, 성학대 등을 포함한 부부폭력 발생률은 53.8%로 나타났다. 또한 최근 3년간(2009-2011) 한국여성의 전화가 언론보도자료를 분석한 결과에서 남편과 애인에 의해 살해된 여성이 최소 209명이나 되었다. 이렇게 기록조차도 되지 않는 이 여성들의 죽음이 단순히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혹은 둘 만의 사소하고도 개인적인 문제였다라고 폭력을 허(許)할 수 있단 말인가? △신고는 피해자의 '절규'가정폭력이 발생했을 때 피해자의 신고행위는 목숨을 건 행위이다. 그러나 오히려 가정폭력 피해여성들은 신고했다는 이유만으로 가혹한 폭력적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고 한다. 2010년 가정폭력실태조사통계에서 경찰신고 후 경찰의 조치 내용을 살펴보면 출동하지 않거나 잘 해결하라고 돌아간 경우가 68.2%라고 한다. 특히 가정폭력 가해자와 피해자에게 일차적으로 대면하는 경찰이 "집안일입니다"라거나 "가정사네요"라는 식으로 가정폭력을 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 해결해야 된다는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경찰의 남성중심적이고 안이한 태도는 여성이 가정폭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더욱 어렵게 한다. 한동안 언론을 들썩였던 오원춘 사건에서도 당시 경찰은 112구조를 요청하는 피해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부부싸움인 것 같다"며 먼저 구조요청 전화를 끊었고 결국 한 여성은 소중한 목숨을 잃고 말았다. 한 통계에 따르면 가정폭력의 구조요청 시 경찰의 소극적 태도로 인해 가해자의 폭력행동의 변화가 없거나 높아졌다는 응답이 60.3%나 된다. 경찰의 방관적 태도는 가정폭력 피해 여성이 결국 폭력남편을 살해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예컨대, 한국여성의 전화가 상담한 사례에 따르면 가정폭력피해 여성의 자녀는 어린 시절 구구단 보다 경찰번호를 먼저 외워 112에 신고 했다. 하지만 경찰은 '가정사'라는 가해남성의 설명만 듣고 그냥 돌아갔으며 경찰을 붙잡는 아이의 호소에도 공권력의 적절한 개입은 없었다. 경찰의 무성의와 무대응은 결국 가정폭력피해여성이 폭력남성을 살해하는 상황까지 몰고 갔다.가정폭력 피해자 여성은 최초로 만나는 경찰의 무성의한 모습을 통해 '절망감'을 느끼고 다시는 신고하지 않게 된다고 한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야 하는 책임을 갖고 있다. 그 일차적 집행기관이 경찰이다. 국민의 한사람인 여성이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 경찰은 언제, 어디서든 그 여성의 안전을 보장해줘야 하는 책임이 있다. 그래서 많은 국민들이 사용하는 스마트폰에도 자동으로 긴급전화번호 112가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기억의 화요일, 우리가 거리로 나오는 이유 작년 전북여성단체연합이 주최한 여성주간 행사에서 부안경찰서 주산파출소의 김 경위는 파출소로 도망쳐 나온 가정폭력피해여성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준 공로로 여성인권디딤돌상을 수상했다. 특히 김 경위는 피해자에게 욕설을 퍼붓는 남편의 언어적 폭력도 가정폭력이므로 신고할 것을 당부하며 상담소와 법적 처벌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피해여성에 따르면 처음으로 경찰이 자기편이 된 것 같이 느껴 폭력의 무서움과 괴로움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었다고 한다. 정말이지 당연한 경찰의 적극적 대처가 우리사회에서는 아직까지 특별한 것으로 회자되고 있다. 이 특별함이 모든 가정폭력 피해자가 당연한 권리로 보장 받기를 기원하며 여성폭력근절 공동행동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노현정 NGO시민기자(전북여성단체연합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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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0.22 23:02

자연 속에서'힐링' 주말 2000명 '북적'

완주군 상관면 죽림리 공기마을 일대(산214-1번지 일원)에 조성된 편백나무숲. 건강과 힐링에 대한 현대인들의 관심이 부쩍 높아지면서 이곳의 명성이 알음알음으로 전해지고 있다.공기마을 편백숲이 조성된 시점은 1976년경. 이젠 30년이란 세월을 훌쩍 넘긴 아름드리 성목이 200만㎡에 이르는 숲을 빼곡히 채우면서 장관을 이루고 있다. 상관면 박영배 부면장은 "공기마을 일대 조림지에 심어진 수종은 편백나무 10만주를 비롯 잣나무 6000주 정도로 파악된다"며 "이밖에 삼나무낙엽송오동나무도 소규모 군락을 이루고 있다"고 말했다.편백나무가 건강과 치유의 숲이라는 사실이 전해지며 이곳을 찾는 내방객이 꾸준히 늘고 있다. 상관면사무소는 "평일엔 500여명, 주말엔 2000여명 정도가 공기마을 편백숲을 찾고 있다"고 전했다. 주말엔 주차난이 자주 발생한다.이곳의 장점은 전주시민들에게 접근성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17번 국도를 따라 전주-완주 경계를 막 벗어나면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이룬 편백숲이 언제나 반긴다. 전주 시민들은 아낌없이 건강을 나눠주는 자연의 보고를 지척에 두고 있는 셈이다. 또 자연분출 되는 유황수도 내방객들에겐 크나큰 선물이다. 공기마을과 접한 죽림온천이 이곳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판단된다. 상관면사무소는 내방객들의 편의를 위해 소규모 유황족욕탕과 편백탕을 조성, 삶의 무게에 짓눌린 도시인들의 피곤을 내려놓도록 돕고 있다.편백숲에 가장 어울리는 것은 가벼운 산책. 이곳엔 산책로나 등산로로 분류할 수 있는 길이 7㎞ 정도이고, 오솔길에 가까운 길도 2㎞ 가량 조성되어 있다. 굽이굽이 소박하게 이어지는 산책로를 걷다 보면, 가을 바람이 실려오는 편백향기와 함께 온몸이 자연 속으로 빠져들어 버린다. 걷다 지치면 언제든 늘씬늘씬 하늘을 향해 빼곡이 내달리는 편백숲 아무 곳이나 자리를 잡으면 그만이다. 내방객들이 숲에 더욱 가깝게 다가갈 수 있도록 배려한 숲체험장과 삼림욕장도 마련되어 있다.내방객들이 자주 던지는 질문은 '공기마을 편백숲과 유황수를 왜 체계적으로 개발하지 않느냐'는데 모아진다. 상관면사무소는 이에 대해 "이곳 면적의 절반 가량이 사유림"이라고 설명했다. 공기마을 편백숲은 개발의 손길이 닿지 않을 때 더욱 아름다운 모습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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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모
  • 2012.10.18 23:02

박 남 재 화가는 - '생명과 자유'표현 왕성한 활동…한국화단 발전에 기여

1929년 순창에서 태어난 박남재 화백은 서울대 미대 중퇴 후 우리나라 인상주의 거두 오지호 화백을 만나면서 다시 붓을 잡는다. 1960년 조선대 미술대를 졸업한 박 화백은 전주여고 교사를 거쳐 원광대 미술대 교수와 학장을 지냈다. 풍경을 주로 그려온 박 화백은 대상을 재현하는데 머물지 않고 이의 해체를 통해 작가의 세계관을 표현하는데 주력했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산, 들, 나무 등은 작가의 심연에 등장하는 의식들이 카오스적 혼돈상태를 일으킬 때 작가에 의해 제어되어 나타난 새로운 자연, 즉 '자연으로 승화된 자아'다.1970년대의 〈설경〉, 〈雲〉을 비롯해 1980년대 이후 〈내장산 秘景〉, 〈지리산 하경〉, 〈성산일출봉〉, 〈제주 비자림〉, 〈파도〉 등으로 이어지는 작품들을 통해 박 화백은 생명과 자유라는 가치를 보여준다. 1958년 제7회 국전 입선(국립현대미술관)을 시작으로 수차례의 각종 대회 수상을 했으며, 초대전, 개인전 등을 꾸준히 펼쳐왔다. 지난해 11월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그의 60년 화업을 조명하는 초대전을 했고, 최근에도 크고 작은 전람회에 작품을 꾸준히 출품하고 있다. 대한민국 미술대전 운영위원 및 심사위원, 신라미술대전 심사위원, 대한민국 예술원상 심사위원 등 각종 미술 관련 활동을 활발히 해오며 지역 및 한국 화단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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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호
  • 2012.10.16 23:02

박남재 서양화가 "그림은 작가가 만드는 자기 세계…지금도 공부라 생각해"

"나는 가끔은 울컥하고 눈물이 치솟는 순간이 있다. 그 눈물은 이유도 없고 나도 알 수 없는 눈물이다. 다만 이번 전시를 임하고 그래도 열심히 살았구나 하는 것이 나에게 남는 것이듯.이번 전시가 끝나고 나면 정말 외롭게 더 넓은 하늘을 바라보며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뚜벅 뚜벅 걸어 갈 것이다." (2011년 11월 2일 작가노트) 서양화가 박남재 화백(84)은 지난해 11월 2일부터 9일까지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개최한 '박남재 화업 60년 초대전'을 담은 화집 말미에서 이 같이 밝혔다. 아마 화가로서 살아온 지난날들을 정리하고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생을 살아가려는 여유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망구의 나이에도 불구, 그의 화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박 화백은 여전히 열정적이다. 공부하고 붓질하며 작업실을 지키고 있다. 박 화백의 작품에서는 항상 강렬한 색감과 붓의 필치를 느낄 수 있다. 지리산, 대둔산, 강천산, 설악산 등 산을 비롯해 바다, 하늘, 들녘 등 풍경화를 많이 그리는 박 화백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 자신의 방식과 직관으로 이것 저것 따지지 않고 한 번에 짚어 그린다. 사물에 대한 직감을 그대로 그려내기 때문에 작품에 꾸밈이 없고 항상 맑고 소탈하다는 평이 뒤따른다. 방법과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것. 이는 자기의 인격을 연마해 사물의 내면을 뚫어볼 수 있어야 가능하다. 그는 지금도 끊임없이 공부하며 그림을 그린다고 말한다. 지난 9일 오전 10시 전주시 덕진구 금암동 옛 KBS건물 뒷동네에 살고 있는 박남재 화백을 찾아 그의 인생과 그림, 그리고 세상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어보았다. -바쁘신 가운데 시간 내 주어서 감사합니다. 오늘 완주군에서 주최하는 제1회 이코리아 전북비엔날레가 열립니다. 축사도 있고, 작품도 출품하시던데요. "참석해서 축사를 합니다. 이런 행사를 전주시나 도청도 아니고 완주군에서 한다고 하니까 참 고맙더라고요. 전라북도 기관장들이 그런 면에 무관심해요. 미술, 음악 등 문화예술에 대한 인식이 너무 없어요. 목정상이 그나마 생명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예요. 광주 쪽에는 오지호 상 등 몇 개가 있는데, 광주 시민이 주는 상이니 얼마나 자랑스럽고 위엄이 있는 상인가요. 이번 전북비엔날레에 제 작품은 '김제 백산의 가을 들의 구름'(30호)을 출품했어요. 요즘 가을 풍경과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오는 12월 1일에는 KBS 전주방송총국에서 초대전이 있는데, 그때는 100호 8점과 조그만 것 2점 가져 갈려고 그럽니다.-옛 날 이야기를 좀 들어보았으면 합니다. 어려서 꿈은 뭐였는가요?"815 해방 후에는 중학생들도 정치활동을 많이 했는데, 중학교 4학년 때 민주학생연맹 등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중학교 때 유치장 생활도 했어요. 농구선수로도 뛰었습니다. 당시 축구, 배구 등은 지방 학생들도 잘 했는데, 농구는 서울을 따라잡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서울 아현동에 있는 한성중학교로 갔습니다. 1950년 초 한성중학교에 5학년으로 들어간 박남재는 특유의 집념과 노력으로 농구에 몰두했다. 슛팅 10개 중에서 4개가 들어가면 우수한 슈터였지만, 10개 시도해서 10개 못 넣을 것도 아니라는 신념을 갖고 달빛 아래에서 슈팅 연습을 할 만큼 뭘 한 번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끝장을 보는 근성을 갖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인생의 첫 갈림길이 닥쳤다.-중학교 때 농구선수였는데 어떻게 미술을 할 수 있었는가요? "그 해 4월 마산에서 학생종별농구선권대회가 있었는데, 연습 도중 갑자기 호흡 곤란과 함께 심한 통증이 왔어요. 서대문 적십자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과격한 운동은 절대 하지 말라고 해요. 결국 농구를 포기하고, 미술을 택했죠. 농구를 곧바로 그만 둘 수 없어 오전에는 그림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농구를 했죠. 4월15일 마산종별선수권대회(4위)를 다녀오고, 남산 미술연구소에서 5개월 정도 공부해 서울미대 시험을 보아 합격했죠. 손톱이 닳도록 데생을 열심히 했어요. 서울대에 들어간 얼마 후 625가 발발했는데, 사실 서울대는 제대로 다니지 못했지요." 박남재는 7월13일에 한강을 나룻배로 건넜다. 그리고 국제해양법재판소 재판관을 지낸 고향 친구 박춘호(남원 대강)와 함께 걸어서 고향 순창으로 돌아왔다. 고향엔 사람을 마구 죽이는 공포감이 뒤덮었고, 그는 회문산으로 들어가 빨치산 생활도 했다. 국군의 총공세에 진안 운장산으로 도망쳤지만, 백운면에서 붙잡혔다. 결국 1951년 1월1일 광주포로수용소에 수용되는 신세가 됐다. -스승이신 오지호 화백은 어떻게 만나셨는지요? "광주포로수용소 안에서 만났어요. 수용소 안에서 '(그림 등)기술자들 모이라'고 해서 나갔죠. 거기서 오지호 선생을 만났어요. 그 분 때문에 제가 그림을 다시 시작하게 된 겁니다.1951년 9월25일 광주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박남재는 방랑 생활을 많이 했다. 농구선수 출신인지라 군산고등학교 농구코치도 하고, 전북대 군산상과대학 농구선수로 3년간 부정 출전도 했다. 부정선수 시비가 붙었지만, 피해갔다. 그렇게 20대가 흘러갔다. -10대, 20대 때 미술을 제대로 한 것이 아니군요."서른이 다 돼서야 제대로 시작했죠. 마침 조선대 미술대에 있던 오지호 선생이 불러주었습니다. 그래서 조선대 미대(1960년 졸업)에서 본격적으로 그리게 됐지요. 그 때는 미술교사나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오지호 선생 때문에 화가로서 제대로 된 길을 걷게 됐어요. 그 때 선생님이 세 가지를 말해주었는데 '첫째 자네는 인간이 돼 먹었네, 둘째 자네는 색에 대한 감각이 좋네, 셋째 생각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태도가 좋네. 이 세 가지면 안 될 일이 없으니까 정말로 마음 먹고 그림을 한 번 그려보게' 해. 그 때 참 데생을 손톱 닳도록 했어요."-오지호 선생님의 배려도 있었지만 대단한 집념을 발휘하셨군요."제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장점이 몇 가지 있는데, 첫째는 농구를 하며 기초운동의 중요성을 알았고, 그 덕분에 미술에서도 기초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눈 위를 맨발로 걸어다니면서 살아보았고, 5일간 물만 마시고도 살아봤다는 점입니다. 그런 역경 속에서 인내라는 것을 배운 것이죠. 기초와 인내는 나의 성장에 큰 도움을 주었지요." -1979년에 파리에 다녀오셨더군요. 어떤 수확을 얻었습니까. "파리에 가기 전 제자들이 '선생님은 이번에 파리에 다녀오시면 그림이 굉장히 변할 겁니다'라고 하더군요. 파리 생활 5개월을 접고 돌아온 뒤 제자들에게 '내 그림 한 번 보아라. 오히려 후퇴 했을 것이다'라고 말했어요.파리에 가서 보니까 그 사람들은 잘못 그린 그림도 그냥 버리지 않고 굉장히 아끼더군요. 남이 보면 창피할 텐데 소중히 아끼면서 (타산지석 삼아)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한국에서는 창피하니까 감추거든요. 그걸 보고 내가 다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또 하나는 그들과 함께 모델을 놓고 유화를 하는데, 동색을 채색해가지고 점점 색을 분리해요. 그렇게 계속해서 최후에 정말 아름다운 색을 내더라고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조금 하다가 아름다운 색이 나왔다며 그걸 취해버려요. 그 뜻은 더 아름다운 색을 내 그림을 더 이상 고치지 않겠다는 것이죠. 지금 서울의 대가라고 하는 사람들 그림 보면 형편이 없어요. 나이가 많아지면서 그림이 좋아져야 하는데 왜 나빠지는가 하고 생각해 봤어요. 첫째, 정말로 연구하고 공부하는 태도로 기초를 단단히 다져서 공부를 안했다는 것이죠. 둘째, 인내해서 꾸준히 가야하는데 나이 들면 싫거든요. 대충 하거든요. 그래서 그림이 좋지 않다고 봐요. 저는 지금도 공부해요. 공부라 생각하고 그림을 그립니다. 기초를 소홀히 한 작가는 몇 층 올라가면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해요. -아름다운 색이란."작가가 인간이 되면 아름다운 색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옵니다. 그림은 절대 머리로 그리는 작업이 아닙니다. 머리는 일정한 시스템으로 움직이지만, 감각(가슴)은 헤아릴 수 없이 무수히 많은 시스템으로 움직입니다. 길을 가다가 어떤 사람이 쓰러진 노인을 내 친부모처럼 부추겨 일으켜 주는 그 따뜻한 감정, 바로 그런 감정으로 대상을 대하고 그림을 그려야 진정 아름다운 색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주로 자연, 풍경 그림을 많이 하셨고, 광한루에 있는 춘향 그림도 그리셨습니다. 특히 자연 풍경에 매료돼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저는 지금도 인물화를 굉장히 그리고 싶어해요. 그런데 인물화는 모델이 있어야 하고, 모델과 나하고 시간을 맞춰야 해요. 어려움이 있지요. 그런데 자연은 사시사철 그대로 있잖아요. 풍경은 그대로 그리는 그림이 아니예요. 작가가 자기 세계를 만들어야 돼요. 그래서 어려워요. 저는 지금도 이류화가들 사생 갈 적에 한 달에 24번은 이젤을 가지고 따라가요. 촌에 가서 밥 사먹는 맛도 재미가 있거든요. 화가는 자연을 그리면서 가슴을 키워야 합니다. 웅장한 산을 보고 그림을 그리게 되면 그 산의 위대함을 느끼게 되고, 자기 가슴에 낀 때를 볼 수 있어요. 그 때를 씻어내면 내 가슴에 주먹 만한 것이 느껴지고요. 그렇게 가슴을 정화하고, 키우는 것이 사생이거든요. 화가는 풍경사생을 자주 해야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어요. 어떤 제자 그림의 색이 하도 유치해서 "너, 이류화가들 사생 다니는데 좀 따라댕겨라"라고 했더니 서운해 하더군요. -지금도 그림 작업을 열심히 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챙피한 말이지만, 제가 세수를 않고 산지가 오래됐습니다. 목욕탕에 가지만 별도로 세수를 안해요. 대학 졸업하고 전주여고 미술교사로 들어갔는데, 여름방학을 이용해 국전 출품작을 준비했습니다. 한참 그리고 있는데 어느새 개학일이 닥쳤어요. 난감했죠. 이래서는 그림 한 장 제대로 못그리겠더라고요. 결국 사표를 냈죠. 얼마 후 원광대에 출강(1974년)하게 됐는데, 이 무렵부터 세수를 못했어요.새벽에 일어나면(박 화백은 지금도 새벽 4시면 일어나 작업을 한다) 여기(2층 작업실)에 올라와서 그림을 그립니다. 한참 그리다가 아침밥 먹고, 수저 놓으면 곧바로 올라와 그림을 그렸죠. 그러다 낮 12시가 되면 점심 먹고 원대로 달려갔죠. 작업에 몰두하다보니 세수할 시간이 없었어요.-학생들하고 함께 그림 그리면서 강의했다고 들었습니다."저는 학교에서 월급 받으면서 내 공부를 했습니다. 학생들과 나란히 이젤 펴 놓고 똑같이 모델을 그렸거든요. 화집에 나와 있는 인물화는 모두 그때 그린 그림들이지 특별히 인물화를 그리려고 한 적은 없어요. 학생들하고 함께 그림 그리면서 가르치면 같은 애기를 자꾸 반복할 필요도 없고, 학생들도 직접 선생님이 그리는 과정을 보니까 공부가 잘되고, 그 자리에서 그림 평도 하고 하니 좋았지요. -1992년 개관한 남원 광한루 춘향관에 있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3백호짜리 대형 작품이 무려 9점이 걸려 있는데 어떻게 제작했습니까."남원 만인의총에도 기록화가 있어요. 그것은 이의주천진봉 씨가 그렸어요. 그런데 그 그림은 사람 얼굴이 똑같아요. 나는 자동차 8대를 동원해서 학생들을 선발해 실고 용인 민속촌에 가서 영화 촬영 때 쓰는 조선시대 의상을 입힌 뒤 각 장면에 맞게 해서 그림을 그렸어요. 그래서 광한루 그림은 얼굴들이 다 달라요.남원시가 춘향 그림을 전시하면서 제대로 관리를 못하는 것 같아 아쉬워요. 기회가 닿으면 다시 손질할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화제를 잠시 바꿔서, 전북도립미술관 건립이 선생님으로부터 비롯됐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2004년 10월 개관한 전북도립미술관은 나 때문에 지었어요. 당시 도지사고, 시장이고 간에 도립미술관 지을 생각이나 했나요. 어림도 없어요. 김태식 의원이 예산 가져와서 지었거든요. 그 무렵 우석대학교에서 화가들을 데리고 금강산을 다녀온 적이 있어요. 그 때 화가들이 금강산 그림을 하나씩 출품, 2000년 9월에 서울 공평아트갤러리에서 전람회를 하게 됐어요. 그곳에 이협김태식 의원이 왔어요. 제가 단상에 올라가 인사말을 하면서 한 마디 했죠. '어떻게 해서 지사나 시장 등 기관장들이 예술에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 전북을 예도(藝道)라고 합니까'라고 했죠. 그리고 전주에 온 일본인들이 지역 미술관이 없다는 말에 놀라는 모습을 보고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었다는 어떤 기자 이야기도 들려줬죠. 그러자 축사를 하러 단상에 올라간 김태식 의원이 '박남재 선생에게서 내가 참 좋은 얘기를 들었다. 충격을 받았다'고 말하더니 단상에서 내려와 '내가 오늘 문화관광부 직원들을 만나니까 예산에 반영하겠다'고 말했어요. 김태식 의원이 정말로 도립미술관 건립 예산을 가지고 왔어요. 전주시장과 도지사가 부지를 확보하지 못하는데 완주군수가 현재의 부지를 확보해 건립한 거예요."-예향의 도시에 사는 도민들에게 예술인으로서 한 말씀해 주시죠. "도민들이 미술 전람회 등에 별 관심이 없는 것이 안타까워요. 경남 거창 미술관에서 열린 초대전에 가보니 미술관을 참 잘 지었더군요. 너무 고마워서 축사를 하러 단상에 올라간 김에 제가 큰절을 했어요. 전주엔 없잖아요. 서양화 대작들 펴 놓고 전시하면 와서 볼 만 해요. 강암 서예관 옆에 서양화 미술관 하나 있고 하면 한옥마을이 제대로 살아날 것이라고도 생각해요. -끝으로 한 말씀해 주시죠."저는 화가로서 사명은 갖고 살아요. 길가에 뒹글어 다니는 돌멩이 하나를 주어다가 책상 위에 놓고 평생 쳐다보면 무슨 진리든 나올 것 아니냐는 생각을 중학교 때 했어요. 기왕 그림 하면서 남보다 뒤지고 싶지 않아요. 그 일념으로 삽니다. 지난해 예술의 전당 전람회를 끝내 놓고 정리를 하다보니까 300호짜리 3장, 200호짜리 6장, 120호짜리 여러 장 등 모두 합하면 예술의 전당 전람회를 또 할 수 있겠더라고요. 지난해 마지막 전람회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예요. 예술원 회원, 예술원상 등을 놓고 주변에서 권하기도 하지만, 지방 사람은 힘들어요. 결국은 좋은 그림 그려야 해요. 고흐도 생전에 그림 한 장 팔았다고 하잖아요. 요즘 고흐그림 한 장에 465억 원 그래요. 거기에는 뭐 금이 붙었나요. 이중섭, 박승훈의 그림, 그런 그림을 그려놓을 겁니다. 열심히 그려야지 별도리가 있습니까?

  • 기획
  • 김재호
  • 2012.10.16 23:02

로컬푸드 1번지 완주, 용진농협 로컬푸드직매장 - 참여농가 확대…월소득100만원 실현

로컬푸드(local food)는 일정 거리의 지역 내에서 생산된 식품재료나 이를 바탕으로 가공된 음식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완주군에서 의욕적으로 벌이고 있는 로컬푸드는 이같은 일상적인 의미를 넘어 생산과 유통과정에서 더욱 엄격한 조건을 갖출 것을 요구한다. 생산 과정에선 친환경 재배라는 요건을 충족시켜야 하고, 유통 과정에선 거래단계를 최소화한 직거래 형태의 시장을 지향한다. 생산-가공-유통-소비라는 일련의 과정이 지역내에서 해결되는 셈이다. 특히 이 정책의 주요 대상이 상업농 틈바구니에서 근근이 생활을 영위하는 소농이라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항목이다. 로컬푸드는 다의적인 개념인 셈이다.완주군은 2008년 로컬푸드에 선도적으로 뛰어들어, 2년여 동안의 밑그림 그리기라는 산고를 거쳐 이젠 하나하나 실천으로 가시화하면서 전국적인 관심을 모으고 있다. 완주군에서 펼쳐지는 로컬푸드를 정책 단계부터 소비단계에 이르는 주요 항목별로 살펴본다.△가족단위 소농이 정책대상완주군이 추진하는 로컬푸드의 주요 정책 대상은 지역내 가족 중심의 소농이다. 단일작목 중심의 규모화 농업에 치중한 국가적 농업정책에서 소외된 이들 소농은 농촌소득 양극화의 피해자들이다. 완주지역에서 1ha 미만을 영농하는 소농은 6000여 농가. 이 가운데 현재 로컬푸드에 참여하는 농가는 550여 농가이다. 군은 참여농가를 연차적으로 확대해 나간다는 목표를 실천하고 있다. 참여 농가들의 소득 수준 목표액도 월 100만원 정도로 현실적이고 실현가능성에 초점을 두었다.규모농이 아닌, 지역 중소농 중심의 다품목 소량 생산체계라는 점에서 정책 기획과 집행의 정교함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현장과 함께 하는 기획이 필수요건이다.△13개 읍면별 작목반 조직화현재 가동중인 로컬푸드 관련 작목반은 영농법인 건강밥상(100 농가), 용진농협 1일유통직매장(150 농가), 〈주〉완주로컬푸드(20개 공동체, 300 농가)이다. 이들 작목반의 바탕에는 소농과 귀농자가 손을 잡은 두레농장과 군 자체 사업으로 육성한 파워빌리지가 자리잡고 있다. 군은 이들 기존 자원을 네트워크화, 로컬푸드 추진의 원동력으로 활용하고 있다.△친환경 생산과 바른 먹거리로컬푸드의 가장 큰 장점은 믿을 수 있는 농산물이란 점이다. 일반 시장에서는 상품성의 기준이 규격화·모양·색깔·무게이지만, 로컬푸드형 상품은 지역산·제철·신선도·맛·토종종자 여부가 우선한다. 이에 따라 로컬푸드형 식품의 기준과 신뢰를 연계할 가교로서 인증제 마련이 추진되고 있다. 군은 생산이력 관리를 비롯 친환경 재배를 거친 상품에는 인증로고를 붙여주는 제도를 올 하반기에 가동, 대외적 신뢰도를 구축할 계획이다.△생산자-소비자 잇는 직거래로컬푸드는 기본적으로 직거래라는 시장 시스템에 따라 움직인다. 이같은 체제는 신선한 농산물을, 값싸게 공급할 수 있고, 지역농민이 생산한 얼굴 있는 농산물이라는 점에서 안전한 먹거리란 장점을 만들어 낸다. 로컬푸드는 한걸음 더 나아가 농산물의 가공을 통한 고부가가치에도 관심을 높이고 있다. 군은 이를 위해 고산면 삼기리에 제1호 완주군거점농민가공센터를 올해 8월 설치, 가공산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가공센터는 농민들에게 가공에 필요한 인허가라는 복잡한 과정을 해결해 준다는 점에서 가공분야가 활성화에 불을 지필 것으로 기대된다.△일자리 창출 효과도 기대로컬푸드는 소농들의 소득 향상을 통한 실질적인 일자리 마련과 함께 새로운 일자리도 자연스럽게 창출한다. 2010년 시작된 건강밥상꾸러미 사업의 경우 연 매출액 30억원을 올릴 뿐만 아니라 일자리 16개를 만들었다. 이를 근거로 로컬푸드 직매장, 로컬푸드 스테이션, 농민가공센터, 슬로푸드 음식점, 로컬푸드 통합지원센터 등 사업이 확충될 경우 수백명의 고용효과가 이루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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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모
  • 2012.10.16 23:02

용진농협 로컬푸드 직매장은- 매일 수확한 신선한 농산물 판매

로컬푸드를 소비자들이 실감할 수 있는 곳은 직매장이다. 올해 4월 27일 완주군 용진면에서 문을 연 '용진농협 로컬푸드직매장'은 로컬푸드 소규모 직매장의 첫 작품이다. 직매장을 이곳으로 결정한 이유는 전주와 완주의 접경지역이라는 전략적 판단이 작용했다.이곳의 운영 시스템은 로컬푸드에 참여한 150여 농가가 매일 아침 수확한 신선하고 안전한 농산물을 소포장, 이를 직매장에 공급하는 형식이다. 농가들은 바코딩은 물론 가격표까지 직접 부착한다. 자신이 생산한 농산물의 가격을 본인이 책정, 사실상 중간상과 도매상이 농산물 값을 매기는 형식과는 딴판이다.완주군이 직매장 운영모델을 검증하고, 확산시키기 위해 마련한 용진 매장은 개점과 함께 성공이라는 평가가 내려졌다. 260㎡에 진열된 판매대에서 팔리는 매출액은 하루 평균 1500-2000만원을 오간다. 9월말 추석을 앞둔 시점에는 하루 평균 매출액이 7000만원까지 치솟았다.용진 매장의 성공에 따라 직매장 사업이 확대될 전망이다. 군은 전주-완주 통합에 따른 상생협력사업의 일환으로 전주시 효자4동 옛 주민자치센터에 로컬푸드 직매장 2호점 개설을 전주시와 함께 추진, 머지않아 선보일 예정이다. 또 봉동권역에도 내년도에 직매장을 개설할 계획다.이들 매장은 로컬푸드 스테이션이라는 체제로 통합될 예정이다. 군은 완주군 구이면 모악산에 내년 상반기 스테이션을 개설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스테이션은 직매장과 함께 농가 레스토랑, 농식품 가공 체험장을 통합,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적으로 교류하는 복합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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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모
  • 2012.10.16 23:02

전북, 핵발전소 안전지대인가? - 日 후쿠시마 거주 어린이 43.7% 갑상선 질환'시름'

일본의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는 그 동안 남의 일로만 여겨졌던 핵발전소(원자력발전)의 문제가 먼 나라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나라의 문제일 수 있음을 실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세계에서 원자력발전소가 제일 많은 나라인 미국과 러시아, 일본 등에서 사고가 차례로 터지면서 다음은 핵발전소 숫자가 세계에서 세번째로 많은 프랑스(58기)와 다섯번째로 많은 우리나라(23기)에서 핵사고가 발생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를 낳고 있다. 우리나라의 핵발전소 숫자는 일본(54기)에 비해 적지만 국토면적으로 환산하면 일본보다 밀도가 높다.과연 핵발전소가 위치해 있지 않은 전라북도는 안전지대일까? 지난 8월 21일 고창군 상하면에서 발표된 '핵발전소 주변 지역주민 암 발생 역학조사결과 고창지역 설명회'에서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전라북도 지역이 핵발전소 폭발사고 시에는 말할 것도 없고 평시 운영시기에도 결코 안전하다고 볼 수 없는 조사결과가 발표됐다.△20년동안 장기추적 대규모 프로젝트 진행이날 발표된 자료는 정부가 서울대 원자력영향·역학연구소(안윤옥 책임교수)에 용역을 주어 전남 영광, 부산 고리, 경북 월성, 경북 울진 등 4개 핵발전소 주변지역(5㎞이내) 주민 1만1367명, 근거리지역(5~30㎞) 1만323명, 대조군(30㎞밖) 1만4486명을 대상으로 1992년부터 2011년 2월까지 20년 동안 장기 추적조사를 벌인 대규모 프로젝트의 결과이다. 이 역학조사는 1989년 영광핵발전소에서 근무하던 경비원 부인이 두 차례나 '뇌 없는 태아'를 유산한 사건을 계기로 시작되었다.조사결과는 핵발전소 주변지역(5㎞이내)에 거주하는 주민에게서 대조군(30㎞밖)에 거주하는 주민보다 갑상선암(여성)의 경우 2.5배, 유방암(여성) 1.5배, 간암(남성) 1.4배, 위암 1.3배 등 높게 나타났다. 또한 여성갑상선암의 경우 근거리지역(5~30㎞)에 거주하는 주민이 대조군(30㎞밖)에 비해 역시 1.8배 높게 나타났다. 결과만 놓고 보면 매우 충격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다.그런데 이러한 조사결과에 대해 조사책임자인 안윤옥 교수는 지난 2011년 12월 12일 "다른 암들은 통계적으로 의미가 없었고, 여성 갑상선암은 통계적으로 의미가 있었지만, 핵발전소 방사선과 관련성이 없다. 왜냐하면 핵발전소 방사선이 영향을 미쳤다면, 방사선 관련 암이 주변지역에서 모두 높다든가 하는 경향성이 있어야 하지만, 다른 암들의 경우 갑상선암과 같은 경향성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핵발전소와 여성의 갑상선암은 관련이 없다"고 핵발전소와 관련성을 부인하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연구에 참여한 바 있는 주영수 교수 등은 안윤옥 교수의 결론에 동의하지 않고 있다. 주영수 교수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를 보였기 때문에, 주변지역의 여성갑상선암 발생률은 대조군과 비교해 분명하게 높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또한 갑상선암의 경우 핵발전소에 가까이 살수록 더 많이 발생하는 경향성을 입증했다. 따라서 핵발전소와 갑상선암 발생의 관련성이 입증된 만큼, 다른 암과의 관련성에 대한 보다 정밀한 추가조사가 필요하다"고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이러한 상이한 결론에 대해 김익중 교수(동국대 의대)는 "역학조사의 책임자인 안윤옥 교수의 결론은 갑상선이 방사능에 특히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는 것이다. 이번 조사의 결과는 갑상선 질환과 방사능의 관계가 매우 밀접하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입증한 것이다"라고 조사결과에 유의해야함을 강조했다. 김익중 교수는 덧붙여 "인체의 갑상선은 신체에너지와 대사를 조절하는 기관으로 요오드를 사용해 갑상선호르몬을 생성한다. 그러나 갑상선이 일반 요오드와 방사능 요오드를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핵발전소 사고로 유출되는 방사능요오드가 몸에 흡수되면 재빨리 이를 축적한다. 결국 축적된 방사능요오드가 갑상선암을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갑상선 질환을 방사능 건강피해의 지표로 삼고 있는 것이다"라고 갑상선 질환과 방사능의 관계를 설명한다. △일본 방사능 피해는 이제 시작단계일본에서도 후쿠시마사고 이후에 방사능으로 인한 갑상선 질환의 변화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있으며, 초미의 관심사다. 지난 9월 11일 후쿠시마현 공식발표에 따르면 후쿠시마 거주하는 어린이의 43.7%가 낭포(병으로 형성된 액체주머니) 등 갑상선 질환을 앓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특히, 6~10세의 여자 어린이의 54.1%와 11~15세 여자 어린이의 55.3%에서 갑상선 낭포가 높게 발견되어 남자 어린이에 비해 여자 어린이의 발병률이 높았다. 이러한 결과는 2000년 방사능에 오염되지 않은 일본의 나카사키 지역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실시한 갑상선검사 결과(낭포 0.8%)와 비교하면 엄청나게 높은 수치(55배)로 충격적 사실이다. 불행히도 일본의 방사능 피해는 이제 시작단계이다. 일본 뿐만이 아니라 체르노빌과 프랑스 등 세계 각국의 방사능오염으로 인한 갑상선질환의 피해사례는 많다. 이제 정부는 우리나라 핵발전소 주변 주민의 갑상선암 발병률이 높고, 특히 여성들에게서 더욱 높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더 이상 은폐해서는 안된다. 전북도와 고창군청도 그저 중앙정부만 쳐다보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 고창군민과 전북도민의 안전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핵발전소 주변 지역주민 암 발생 역학조사' 결과에 대한 정밀검토와 진상조사 등 보다 적극적이고 전향적인 조치를 취해야할 상황이다.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이후 우리나라 국민들의 원전에 대한 반대여론이 높아지고 있고, 최근 전라북도 시민사회내에서도 탈핵을 위한 활동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고 있다. 고창지역대책위가 이미 출범을 했고, 한살림과 환경운동연합 등 생활협동조합과 환경운동단체를 중심으로 '핵 없는 세상을 위한 전북모임'이 꾸려지고 있다. 탈핵과 에너지전환을 위한 전북지역활동이 본격 시동을 걸고 있어 주목된다.한승우 NGO시민기자(전북녹색연합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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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0.15 23:02

윤종호 '핵없는 세상' 고창군민행동위원장 "고창·전주까지 방사능 피해…영광핵발전소 폐기운동 전개"

지난 9일 고창농산물유통센터에서는 40여명의 군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핵없는 세상을 위한 고창군민행동(이하 고창군민행동)'이 출범식을 가졌다. 고창군민행동은 '영광핵발전소의 안전한 관리와 시급한 폐쇄, 재생가능에너지로의 정책전환'을 목적으로 명시하여 영광핵발전소의 폐쇄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출범식 준비와 진행으로 정신없는 윤종호 운영위원장을 인터뷰했다."전라북도 도민들은 전라북도에 핵발전소가 없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전라남도 영광핵발전소는 전라북도와 경계에 위치하며 고창군 상하면 신자룡마을과는 불과 2㎞ 이격해 있다. 행정구역상은 전남에 위치해 있는 것이 맞지만 실제적으로는 영광원자력발전소가 아니라 영광·고창원자력발전소나 마찬가지이다. 영광핵발전소로 인한 피해를 고창군과 전북도도 그대로 받고 있다" 윤종호 위원장은 이처럼 영광핵발전소와 전북도가 무관하지 않음을 강조하면서 "특히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로 인한 피해범위가 인간이 살 수 없는 방사능 오염도, 시간당 2마이크로시버트의 고농도지역이 60~70km 반경까지 광범위하다"면서 "이를 단순비교하면 영광핵발전소로부터 20㎞ 떨어진 고창읍은 물론 70㎞ 떨어진 전주시까지 사람이 살 수 없는 고농도 오염지역이 될 수 있다"라며 핵발전소 사고로부터 전라북도 지역이 결코 안전지역이 아님을 강조한다.윤 위원장은 "앞으로 영광핵발전소로부터 주민들의 건강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원전주변 환경감시운동은 물론 근본적으로 핵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영광핵발전소 폐기운동과 에너지전환을 위한 주민운동을 적극 펼쳐나갈 것이다"라며 각오를 밝힌다. 전북지역에서도 탈핵과 에너지전환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다. 한승우 NGO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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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0.15 23:02

③ 국중하 대표의 문학 사랑 - '문학도의 꿈' 수필집과 여산재로 이루다

작은 거인으로 불리는 우신산업 국중하 대표. 그의 이면엔 여린 문학 소년의 모습이 서려 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 임원 자리를 박차고 땅과 바다, 그리고 하늘을 점령하겠다는 포부로 우신산업을 설립한 그의 모습엔 강인함이 베여 있지만 오늘의 그가 있기 까지는 서정적 정서가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기업가이면서 수필가인 그의 이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여산장학재단 설립과 문화예술 공간 여산재 설립이다.△펜팔로 이루어진 사랑국중하 대표는 1962년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국내 제1의 대기업으로 꼽혔던 전남 나주의 호남비료(주) 회사 공채 시험에 합격해 당당하게 사회인으로서 첫 발걸음을 뗀다.당시 호남비료 구성원들은 우리나라 초 엘리트들로 구성돼 있으며, 지방 대학생의 입사는 전무후무한 일이다.호남비료에서 받던 급여는 당시 마을 최고의 '파워'를 자랑하던 면서기의 7배에 해당할 정도로 높았고 어디에 돈을 써야 할지도 몰랐다고 한다.그런 그에게 가장 즐겨하던 취미가 있었는데 바로 '펜팔' 이었다. 손바닥만 한 가요책 뒷면에는 펜팔 명단과 주소가 있었고 그는 수시로 얼굴 모를 이들에게 편지를 썼다.그러던 중 한 여대생의 어려운 소식을 접했고, 그는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당시 충주대학교에 다니던 불우 여학생이 있었는데 엄마는 일본인, 아빠는 우리나라 사람으로 일찍이 돌아가셨고 집안형편이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그 여학생은 시와 편지를 좋아했던 문학소녀로 국 대표는 그녀가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 일체를 지원했다.그 문학소녀와 주고받은 편지만도 300여통에 이를 정도며, 그 소녀는 국 대표의 이 같은 동정심을 연정으로 착각, 향후 졸업 후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찾아와 구애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이후 국 대표는 맞선을 통해 현재의 부인을 만났고 부인과도 수백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당시 그가 썼던 편지 첫 글귀는 "석양이 지는 저녁 무렵 빨간 단풍나무 위에 걸려 있는 태양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간간히 스치는 소슬바람이 뺨을 스칠 때 마다 그대의 얼굴이 떠올려져 이렇게 펜을 듭니다"라는 내용으로 지금 그 편지를 보면 낮이 간지러울 정도라고 한다.그후 수십년이 흘렀고 그는 1998년 8월 '수필과 비평' 수필부문 '성지를 찾아서'로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한다.그는 한국문인 문학상 본상과 전북수필문학상 등을 수상하면서 '들녘 바람몰이' 등 6권의 수필집을 문단에 내놓기도 했다. △예술문화 공간 여산재 설립국 대표는 지난 1973년, 현대그룹 고 정주영 회장 밑에서 27만톤급 배를 만드는 당시에 현대건설(주) 기계과장으로 일한 적이 있다.그 무렵, 일본 가와사키중공업에 산업 시찰을 갔는데 50살이 넘은 여자가 영빈각에서 잔잔한 베이직 음악을 틀어주면서 무릎을 꿇고 손님을 지극 정성으로 접대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속 깊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일본은 자원과 경제력만 앞서는 강국이 아닌, 문화도 한국보다 월등하다는 사실에 대한 분개와 한국에서는 보지 못한 새로운 문화를 접했다는 사실에서다.이날의 기억은 수십년이 흐른 지금까지 이어졌고 2001년 드디어 여산장학재단을 만들고 2003년 완주군 동상면 수만리 학동마을 125번지에 문화예술 공간 여산재를 설립했다. 여산재는 그의 꿈이었다.'여산'이란 호를 지어준 사람은 수완스님(통도사)이며, 여산재는 문화공간이지만 다실, 서재, 외국인과 내국인를 배려한 숙소가 깨끗하게 잘 정비되어 있음은 물론 공연 및 세미나, 전시실을 겸용한 외부 공간을 갖춘 문화 사랑방이다.여산재에는 다도를 즐기고 책을 읽을 수 있는 영빈각이 설치돼 있으며, 야외와 실내 공연장이 마련, 다양한 문화 행사가 가능하다.또 서재에는 수십점의 그림과 글씨 등이 전시돼 있다.국 대표는 그간 연중 무휴(공휴일은 제외)로 여산재를 운영하면서 문화산업 창업 강좌, 관리자 대학생 취업대비 워크샵, 가톨릭문우회 심포지엄, 전주시립국악단 공연, 주부클럽연합 전북지부 세미나, 전북수필문 제58호 출판기념회, 국제 디자인 대회 등의 행사를 통해 전북 대표적인 복합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국 대표는 "여산재는 30여년간 키워온 나의 꿈으로 지난시절 기업 임원으로 일할 당시 우리의 접대문화에 회의를 느꼈다"며 "그러던 중 문화 예술이 함께 어울어진 여산재를 구상하게 됐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그는 이어 "만발하는 꽃에서 향기가 없다면 진실과 가치가 무너지듯이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모든 분과 예술의 한 장르를 일궈 내겠다"며 "동시에 혼신을 바치는 예술가와 함께 호흡하며 아름다운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그는 새로운 것들을 찾기 위해 돌아다니다가 혼자 보기 아까워 꿰놓은 게 바로 수필이라며 대중 앞에 한걸음 더 다가가는 부드러운 글이 될 수 있도록 오늘도 퇴고를 거듭하며 원고지와 씨름을하고 있다. 이강모기자 kangmo518@● 국중하 대표 프로필△1962. 3 : 전북대학교 공과대학 기계공학과 졸업△1962 - 1967 : 호남비료(주) 나주공장△1967 - 1971 :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1971 - 1972 : 극동건설(주) 기계과장△1972 - 1973 : 현대건설(주) 기계과장△1973 - 1982 : 현대중공업(주) 상무이사△1982 - 1983 : 현대정공(주) (상무이사)△1983 - 1985 : 현대건설(주) (상무이사) △1985 - 1987 : 현대중공업(주) (상무이사)△1987 - 1994 : 우신공업우신엔지니어링(주)(주)우영우신산업(주) 설립 △1998. 8. 29 : 「 수필과 비평 」 수필부문 「성지를 찾아서」 신인상 수상△1999: 한국문인협회 / 국제펜클럽 / 전북문인협회 / 전북수필문학회 회장△한국문인 수석부이사장 / 새천년 문학회 문학상 운영위원장 역임△2001 - 2004 : 우석대학교 반도체 전기 자동차공학부 강사△2001. 6. 20 : 여산(餘山) 장학재단 설립(재단이사장) △2002. 2. - 2008. 12 : 전주문화재단 이사△2003. 12: 여산재(餘山齎)개관△2009. 3: 우신엔지니어링(주) 군산공장 준공, 본사이전△2010. 4 : 어린이재단 전북 지역본부 후원 회장△2010. 10: 한국 엔지니어클럽 전북지부 회장● 저서『수필집』 △내 가슴속엔 영호남 고속도로가 달린다(1998. 8. 15.) △호남에서 만난 아내 영남에서 만든 아이들(2001. 8. 30.)△나의 삶은 도전이며, 시작이다.(중역수필집. 2003. 9. 1.)△나에게는 언제나 현재와 미래만 존재한다.(2004. 9. 5.)△들녘 바람몰이(2007. 10. 1.)△여산재 가는길(2010.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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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강모
  • 2012.10.11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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