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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보다 착한 농산물'의 진정성 소비자에게 전달"

다시 농업이다.도시의 기계적인 생활을 벗어나 농촌에서 자연의 삶을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 귀농귀촌이 일반적인 현상을 넘어 소망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귀농귀촌의 인기는 삶의 질 향상 때문. 슬로 라이프가 건강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 지면서 귀농귀촌은 삶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스스로 주도하는 자율의 인생을 도와준다고 평가된다.도내의 귀농귀촌과 관련, 사람들모임의 얘기를 듣고 마을을 탐방하는 지면을 마련했다. 귀농귀촌인에 희망을 다지게 하고 준비중인 사람에게 도움이 될 것으로 믿는다. /편집자주# 농가들은 '유통'이라는 거대한 벽에 막혀 자신들의 상품을 소비자들에게 제대로 알리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여섯 농가가 함께 모여 지난해'남원에서 왔어요(대표이사 조용섭)'라는 영농조합법인을 탄생시켰다. 길게는 20여년, 짧게는 4년 가량의 남원에서의 귀농귀촌 생활. 남원시 농업기술센터에서 '블로그 등을 활용한 마케팅교육'을 받으면서 시작된 이들의 '상생'은 농촌의 새로운 공동체로 성장했다. '2012년 농어촌산업박람회 대한민국 향토제품대전 우수상품 전국 1위'라는 성과도 국내산 농산물을 이용한 가공식품을 만들자, 몸과 마음에 약이 되는 농산물을 만들자, 농부도 프로페셔널한 비즈니스를 하자는 이들의 기업이념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한 농가가 바쁜 영농업무로 탈퇴해, 현재 다섯 농부가 법인에 속해 있다. △지리산두류실(생청국장, 청국장환, 허브청국장) 조용섭 씨 △하늘모퉁이(된장, 효소, 수제차) 고광자 씨 △시골농장(유기농 쌀과 채소, 전통미꾸리) 현은숙 씨 △지리산처럼(들기름, 참기름, 고랭지채소) 정정은 씨 △천년송바라기(고로쇠, 지리산산나물, 약초차) 공상훈 씨가 법인의 주인공이다.# 이들은 지난해 8월부터 공동 홍보활동을 시작했다.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은 함께 나누고, 그 과실로 상생하자는 '더불어 삶'이 판매전략이다. 하지만 같은 뜻을 가졌다하더라도 여러 농가가 함께하다보니 시행착오가 많았다. 공동의 목표설정은 시급한 과제였다. 농사 일이 끝나면 저녁시간에 한자리에 모여 회의를 거듭했다. 그 결과 향후 3년간 남원의 농산물 및 먹거리를 홍보하는데 중점을 두자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현재의 판매실적에 연연하지 않고 '남원의 착한 농부들이 만든 착한 농산물'이라는 이미지 홍보에 집중하기로 한 것. 한 달에 2회씩 서울 아파트단지, 인사동거리, 고속도로 휴게소 등지에서 공동판매 행사도 기획됐다. 이들은 "당당한 농부로서 자신이 생산하는 농산품에 대해 떳떳하게 제값을 받자는 마음, 소비자들에게 우리 농산품의 진정성을 담아 전달해야겠다는 사명감을 중시했다"고 말했다.공동 이름으로 된 포장박스 없이 첫걸음을 내디딘 공동마케팅, 2011년 추석명절 선물세트가 그 출발이었다.# 이후 '남원에서 왔어요'라는 리플릿(전단)과 제법 고급스런 포장박스가 마련됐다. 하지만 초기 반응은 여전히 냉담. 또 날마다 회의가 이어졌다. "기본과 초심에 충실하자. 돈을 벌기 보다는 진정성을 알리는데 초점을 맞추자." 이 노력은 소비자들의 좋은 반응을 이끌어 값진 결실로 이어졌다. 법인은 이제 '건강하고 맛있는 밥상을 꿈꾸는 지리산 농부들'에 주력하고 있다. 개인과 지역을 넘어 시골과 도시를 잇는 '이음'의 역할, 상생과 공동의 행복을 추구하는 진정성 있는 공동체가 '남원에서 왔어요'의 미래 전략인 셈이다.

  • 기획
  • 홍성오
  • 2013.01.02 23:02

"도민 공공복리 증진·서민 주거안정 사업 확대" 취임 1개월 맞은 전북개발공사 제7대 홍성춘 사장

전북개발공사 제7대 사장으로 홍성춘 사장이 취임한지 1개월이 지났다. 전북의 경제발전과 그리고 '내 집 마련 꿈'에 대한 도민의 열망이 꾸준히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공공주택 분양과 임대에 대한 도민들의 열망 등 내년에도 전북개발공사가 맞닥뜨려야 할 시련과 도전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저런 이유로 신임 홍성춘 사장의 행보에 도내 정관계 안팎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홍 사장을 만나 향후 개발공사가 지향할 포부와 운영계획에 대해 들어봤다.-어려운 난관을 뚫고 전북개발공사 제7대 사장으로 취임한 소감은 어떤지요."먼저 도민을 위해 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도민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개발공사는 전북도가 전액 출자해 설립한 지방공기업으로서 전북도민이 바로 주인입니다. 도민의 혈세로 설립된 공기업인 만큼 앞으로 공공복리증진과 서민의 주거안정 사업을 최대한 많이 추진해 공기업으로서 소임을 다 해 나갈 계획입니다. 아울러 사업추진 과정에서 발생한 수익은 더 많은 공익목적 사업에 재투자함으로써 도민에게 그 혜택을 되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전북개발공사가 가진 강점과 약점을 보완할 계획이 있다면?"저의 경영방침은 건실한 경영기반 구축, 경영 수익의 사회 환원, 협력과 소통을 통한 믿음과 신뢰의 기업문화 정착입니다. 조직 내 불필요한 일들은 과감히 정리하고 신속하고 유연한 조직으로 정비해 합리화 시키겠습니다. 또 투명하고 객관적인 인사운영 체제를 구축하겠습니다. 내외부의 어떠한 청탁도 받아들이지 않겠으며 철저한 목표관리제를 통해 경쟁에 입각한 인사관리를 추진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공사의 자본금 확대와 재무구조 건전화를 통해 신규 사업 추진에 대한 경쟁력을 확보하는 등 대내외적 신뢰도를 높이겠습니다. 마지막은 미래를 위한 준비로 엄격한 타당성 분석을 통해 신규 사업 발굴에 매진할 것이며, 중장기 경영전략을 재정비해 안정적이고 지속가능한 경영기반을 마련하고 노사 상생발전을 도모함과 동시에 윤리경영을 강화해 믿음직스런 공기업 문화를 정착시키겠습니다."-공동임대주택 추진방향 및 주택가격 안정화 대책이 있다면?"도내 주택가격은 2012년 상반기를 정점으로 점차 하락세를 보이고 있으며, 실제 거래량 또한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는 상황입니다. 향후 아파트 가격이 더욱 하락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전주시 주택 수요 및 공급현황 분석 결과 혁신도시에 본격적으로 입주가 시작되는 2013~2014년까지 일시적으로 공급이 수요를 앞지를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2015년 다시 공급부족 현상이 예상되기에 2016년 이후 공급을 목표로 만성지구에 신규 임대주택(2개단지) 사업을 추진 중에 있습니다. 주택가격 안정화와 관련 임대주택 공급확대가 종국적으로 주택가격 안정화에 기여할 수 있다는 분석아래 앞으로도 공공임대 및 보금자리 주택 공급에 중점을 두고 추진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향후 주택 트렌드는 어떻게 변화할 것으로 예측하나?"삶의 패턴이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대가족에서 핵가족화, 그리고 대형 평수에서 소형 평수로, 한마디로 홀로 사는 가구들이 늘 것으로 예측되면서 소형 주택 선호가 높아질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대비해 일정기간 임대 후 분양으로 전환되는 공공임대주택의 지속적인 공급은 무주택 서민의 '내 집 마련 꿈'을 실현시킬 가정 좋은 정책 중 하나로 사료됩니다. 지난 2009년 말까지 준공된 임대주택은 1670호에 불과했으나 임대주택 확대공급 정책으로 올해 말까지 4166호로 확대됐습니다. 이 같은 정책기조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계획이며, 내년부터 본격 추진되는 만성지구 도시개발사업도 전북도와 호흡을 맞춰 성공적인 도시개발 케이스로 만들어 내겠습니다."-마지막으로 개발공사의 간단한 업무설명과 도민에 대한 당부 말씀이 있다면?"개발공사는 지방공기업으로 사업영역은 주민 복리증진을 위한 공익사업 중 수익성이 있는 사업을 추진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국가나 자치단체가 예산에 한계를 느껴 하지 못하는 개발 사업을 대신하는 겁니다. 주로 택지개발 및 지역개발사업을 벌이고 있으며 주택건설, 분양, 임대, 관리사업, 관광개발, 기타 체육시설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간 공직에만 있다 보니 일각에서는 기업가적 마인드나 경영관련 분야에서 다소 부족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진 특유의 친화력과 성실함으로 도민의 복리증진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작지만 강한 공기업'을 만들어 나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다가오는 계사년 한 해에도 도민 여러분의 가정에 기쁨과 행복이 충만하기를 기원하며, 항상 진정어린 격려와 함께 혹독한 질책도 부탁드립니다."

  • 기획
  • 이강모
  • 2012.12.31 23:02

"새만금에 중국 기업 전용단지 조성을"

새만금지구에 중국기업 특화 전용단지를 조성하는 등 세계시장의 큰 손으로 급부상한 중국자본을 유치하기 위한 맞춤형 전략이 수립돼야 한다는 지적이다.전북발전연구원은 26일 '중국 기업유치 활성화를 위한 전라북도 대응방안'이란 주제의 이슈브리핑을 통해 상대적으로 저조한 전북지역의 중국자본 유치전략으로 전용단지 조성과 타켓기업, 타켓지역 등 3가지 특화 방안을 제시했다.이슈브리핑에 따르면 중국의 대외경제정책이 투자유치 중심에서 해외직접투자 정책 등으로 바뀌면서 중국 기업들의 해외투자가 급증하는 추세다. 중국의 해외직접투자액은 지난 2002년 27억 달러에 불과하던 것이 2007년 265억 달러, 2008년 559억 달러, 지난해 746억 달러 등으로 크게 늘어났다.그러나 중국자본의 전북지역 투자규모는 소극적인 마케팅 등의 영향으로 인해 최근 10년간 58건, 1130만달러에 그치는 등 매우 미미한 수준이다.전북에는 특히, 중국의 대한(對韓) 투자 장려업종인 자동차부품과 조선산업, 신재생에너지 분야가 발달됐는데도, 중국기업 투자업종은 서비스분야에 집중됐다. 따라서 중국기업 투자유치 활성화를 위해 새만금지구에 중국기업 특화 전용공단을 조성해 중국기업이 안심하고 투자하도록 지원해야 한다.중국기업 특화 전용공단은 새만금개발을 촉진할 수 있는 앵커사업이 필요하며, 한국의 FTA네트워크를 활용하려는 중국기업이 많다는 것에서도 타당하다.또한, 중국 정부의 투자지침에 맞춰 중점 투자유치산업과 중점 투자유치 지역을 정한 뒤, 이를 토대로 투자유치에 나서는 맞춤형 전략도 필요하다.투자유치 산업으로는 1순위로 자동차 부품과 태양광 산업, 2순위로 조선해양과 운수 등을, 투자유치 지역으로는 산동성, 절강성, 강소성 등이 제시됐다.전북발전연구원 관계자는 "전북도는 지리적 접근성 등을 활용해 중국자본을 유치할 수 있는 맞춤형 특화전략을 조속히 수립하는 것에서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 기획
  • 구대식
  • 2012.12.27 23:02

이석연 변호사는 - 헌재 연구관·법제처장·시민 변호사…'헌법 지킴이'

이석연 변호사는 정읍시 옹동면에서 1954년 태어났다. 태인중을 졸업하고 6개월만에 독학으로 대입검정고시와 예비고사에 합격했다. 검정고시는 전북 전체 수석이었다. 그러나 대학 진학을 미루고 김제 금산사 심원암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1년 8개월 동안 동서양의 고전과 역사, 문학서 등 300여 권의 책을 읽었다. 이때 인생과 사회에 대한 안목과 자세를 깨우쳤다. 전북대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1979년 행정고시에 합격, 법제처에 첫 발을 디뎌 8년 동안 사무관과 법제관으로 일했다. 이 가운데 3년은 육군 정훈장교로 전방에서 근무했다. 1985년 사법시험에 합격, 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으로 자리를 옮기고, 서울대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자유로운 활동을 위해 15년 동안의 공직생활을 마감하고 1994년 변호사로 나섰다. 이때부터 헌법소송 등 주로 공익소송을 맡았다. 또 시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경실련 사무총장(1999-2001년), 헌법포럼 상임대표, 시민과 함께하는 변호사(시변) 공동대표로 활동했다. 2001년 미국 국무부 초청으로 미국 전역을 시찰했고, 2003년에는 일본 게이오대학 객원연구원으로 초빙돼 각국의 법문화와 시민운동을 비교 연구하는 등 국제적 감각을 쌓았다. 2004년에는 전국을 뜨겁게 달궜던 신행정수도 이전법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 위헌결정을 받아냈다. 이어 새만금소송에서 승소, 방조제가 완공하는데 기여했다.2008년 이명박 정부의 첫 법제처장에 임명돼 2년 6개월 동안 소신껏 일했다. 이때 국무회의와 국회에서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2011년 9월에는 범보수진영 서울시장 후보로 나섰다가 뜻을 접었다.현재는 법무법인 '서울' 대표변호사와 21세기 비즈니스포럼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5월에 출범한 책권하는사회운동본부 상임대표를 맡았으며 김을호, 김종훈, 소설가 김홍신, 영화배우 안성기, 올림픽축구 국가대표팀 홍명보 감독이 공동대표로 돕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이번에 발행한 〈책, 인생을 사로잡다〉 외에 〈헌법 등대지기〉 〈침묵하는 보수로는 나라 못지킨다〉 〈헌법의 길 통합의 길〉 〈헌법과 반(反)헌법〉 〈헌법소송의 이론과 실제〉 〈형법총론예해〉 등과 50여편의 논문이 있다.

  • 기획
  • 조상진
  • 2012.12.25 23:02

법무법인 '서울' 이석연 대표변호사 "독서는 성공의 지름길이자 국가 경쟁력이죠"

의외였다. 그 동안 헌법과 형법 등 딱딱한 법만을 다루던 이석연 변호사(58)가 독서 예찬을 담은 책을 낸 것이다. 또 '독서가 국력'이라며 책권하는사회운동본부를 만들어 독서 전도사로 나선 것도 특이했다. 법제처장을 그만 둔 뒤 서울시장 출마 여부로 지난 해 가을, 뉴스의 한복판에 있다 사라져 궁금하던 차여서 더욱 그랬다. 책을 펼쳐보니 예사롭지가 않았다. 그가 어떻게 어렵다는 고시 양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고 스피치와 문장에 자신감이 붙어 있는지, 그 비결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책 읽기와 개헌, 새만금 등 헌법소송, 고향 발전 등에 대해 듣고 싶었다. 인터뷰는 그가 대표변호사로 있는 서울 서초동의 법무법인 '서울' 집무실에서 가졌다.- 안녕하십니까?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합니다."책권하는사회운동본부 일과 헌법과 관련된 공익소송을 주로 하고 있습니다. 또 대학의 로스쿨이나 명사특강, 자치단체 특강 등에도 다녀옵니다. 그리고 생활 밀착형 시민운동 몇 군데, 가령 기부문화나 나눔, 청년창업 지원이나 양극화 해소 등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반면 대외적인 정치성을 띤 활동은 자제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책, 인생을 사로잡다〉를 내셨는데, 반응이 괜찮은 것 같습니다. 이를 쓰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제 모토는 '책과 더불어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간다'입니다. 젊은 시절부터 독서로부터 얻은 지식지혜가 지금까지 삶의 자양분이랄까, 자신감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저를 키운 건 8할, 아니 전체가 독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문맹률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데 책 읽는 것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낮다고 하지 않습니까. 부끄러운 일이죠. 저는 '독서의 힘이 국력이요 국격이다'이런 생각을 해요. 그래서 국가적으로 책 읽는 풍토를 마련했으면 합니다. 저는 농촌출신으로 지방에서 크면서 내 삶이 항상 아웃사이더였지만 어디 뒤지지 않고 자신감을 가진 것이 젊은 시절 독서에서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청소년들에게 비주류로서, 이런 사람도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책을 읽는 방법이 독특한 것 같습니다. 유목(Nomad) 독서법은 뭡니까?"제가 즐겨 인용하는 문구(文句)가 있습니다. '성을 쌓고 사는 자는 반드시 멸망할 것이며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영원히 살아 남을 것이다.'이게 소위 유목정신이에요. 징기스칸에 앞서 몽골제국을 통일했던 돌궐제국의 명장 톤유쿠크(Tonyuquq)의 비문(碑文)에 새겨진 글입니다. 항상 개방적이고 이동적인 마인드, 또 창의적이고 열린 마인드가 필요하다는 거죠. 책을 읽는데도 그게 필요합니다. 책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라, 또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책을 공부나 시험을 위해 읽는다면 지루하겠죠. 저는 그것을 탈피해서 끊임없이 이동하는 유목의 정신으로 독서를 하라고 권합니다. 3가지 방법을 제시했는데 중요하지 않은 내용은 건너뛰라, 여러 권을 겹쳐 읽어라, 재독(再讀)의 묘를 살리라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읽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책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 동안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을 꼽는다면?"젊은 시절부터 제 곁을 떠나지 않았던 10권의 책이 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가 가장 큰 영향을 줬고 괴테의 〈파우스트〉, 조지훈의 〈지조론〉 그리고 〈낭만적인 고고학산책〉 〈동방견문록〉 〈예언자〉 〈진리의 말씀 법구경〉 〈노자 도덕경〉 〈손자병법〉 〈징비록〉도 꾸준히 제 삶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미쳤습니다."- 지난 5월에 '책권하는사회운동본부'를 출범시켰는데 어떤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까?"저는 책으로 인해 혜택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독서는 성공하는 삶의 지름길이자 국가경쟁력이라는 신념을 내걸고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운동본부는 123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저를 비롯해 대표단 6명이 3권의 책을 가져와 1권은 청소년에게, 나머지 2권은 지인들에게 덕담과 함께 전달합니다. 책을 받은 사람은 매월 13일에 또 다른 지인들에게 3권의 책을 권하면 됩니다. 대표단과 운영위원 106명이 전달을 시작하면 1년 후에는 65만1264권의 책이 전달됩니다. 더불어 전자책 선물과 SNS를 통한 '메리북스마스''밸런타인북스데이' 등의 이벤트와 콘테이너 이동도서관, 취약계층저개발국 청소년에게 책보내기 활동 등도 펼치고 있습니다."- 이번 대선에서 대통령이 바뀌었습니다.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는데 권하고 싶은 책은?"〈권력의 조건〉과 〈징비록〉입니다. 권력의 조건은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의 포용의 리더십을 다룬 책입니다. 링컨이 라이벌까지 껴안고 등용해서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난국을 극복해 냈습니다. 당선인도 통합과 소통의 리더십을 주장하고 있어 권하고 싶습니다. 징비록은 임진왜란 직전의 국내외 정세부터 임진왜란의 실상과 왜란 후의 상황을 아주 냉철하게 서술한 경세서이자 역사서입니다. 치욕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꼭 읽었으면 합니다."- 변호사님은 '헌법 지킴이''헌법 등대지기'라 불리는 등 유난히 '헌법정신'을 강조합니다. 헌법은 한마디로 뭔가요?"헌법은 우리 사회를 떠받쳐주는 기본적인 틀입니다. 공기나 물처럼 국가의 기본틀을 의식하지 못하지만 중요한 거죠. 오늘날 대한민국이 이 정도의 번영을 누리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꿈을 이루어 왔고 특히 우리 젊은이들로 하여금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해 그들의 꿈과 희망을 이룰 수 있도록 떠받쳐 준 것이죠. 제가 보는 헌법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를 한 축으로 하고, 또 그걸 달성하기 위해 법치주의, 적법절차, 그리고 기본권 존중을 한 축으로 해서 양축이 조화를 이루면서 발전해야 합니다. 결국 인간의 존엄과 가치, 행복 추구권을 최대한 확보하는 겁니다." - 헌법소송의 전문가로서 지금까지 관여한 소송은 얼마나 됩니까? 이 가운데 특기할만한 소송은?"저는 헌법소송을 공익소송의 일환으로 했습니다. 순수한 공익소송 목적으로 한 것이 150여 건 정도 됩니다. 그 중 30여 건이 위헌결정을 받았습니다. 헌법재판소의 인용률은 1-2%도 안 됩니다. 이러한 소송은 제가 무료로 한 것으로 사회의 기본 흐름을 바꿔 놓았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신행정수도 이전법을 비롯해 제대군인 가산점제도, 재외동포의 차별을 시정하는 헌법소원 등이 있습니다. 또 결혼식 때 혼주가 음식물을 접대하면 처벌받도록 한 가정의례에 관한 법률과 민법 상속제도도 제가 위헌결정을 받아내 민법이 개정됐습니다. 국회의원 선거구 획정 등 정치관계법 10건도 위헌결정을 받았습니다." - 이명박 정부의 첫 법제처장으로 들어가 각종 법령정비 등에 앞장섰는데 보람 있었던 일은 무엇입니까?" 2가지만 얘기하겠습니다. 하나는 가장 중점적으로 추진했던 것이 국민 불편법령개폐센터를 만들어 대대적인 법령 정비를 한 점입니다. 국민에게 불편을 주는 법령들을 많이 고쳤습니다. 운전면허도 간소화했습니다. 간소화해 놓으니까 오히려 사고가 줄어들었죠. 당시에는 경찰이 (사고가 늘어난다고) 반대하고, 운전면허학원 사람들이 정부종합청사에 몰려와서 '이석연이 물러나라'고 데모도 하고 그랬습니다. 또 하나는 법제처가 법령을 심사할 때 정부부처 등 다른 눈치를 보지 않도록 확립해 놓았습니다."- 국무회의나 국정감사에서 '쓴소리'를 많이 낸 정부내 유일한 '야당'이라는 평판을 들었습니다. 내각에 몸담고 있어 쉽지 않았을 텐데요?"사람들이 저에게 쓴소리 했다고 하는데 저는 그게 당연한 얘기에요. 그게 쓴소리로 비춰지는 것은 그만큼 국정 운영이나 법치가 원칙과 정도로 안 가고 있다는 것이죠. 예컨대 용산참사와 관련해 법원에서 수사기록을 공개하라고 판결을 했단 말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공개해야 하는데 검찰은 공개를 안 하려고 해요. 국회에서 당연히 공개해야 한다고 답변했더니 정부 입장과 다르게 말을 한다고 그래요. 야당은 잘 한다고 하고 오히려 여당이 집중적으로 물고 늘어지는 이상한 현상이 나타난 거예요. 언론관계법도 제가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MB한테 찍힌 거죠.(웃음)"- 몇 년 전부터 개헌에 관한 얘기가 꾸준히 나오고 있습니다. 개헌의 방향에 대해?"개헌의 필요성은 충분히 인정됩니다. 새 정부에서는 개헌 논의가 되어야 합니다. 권력구조는 많은 국민들이 동의하고 정치적으로 상당히 접근한대로, 대통령은 4년 중임으로 가고 부통령제를 신설해야 합니다. 일각에서 주장하는 이른바 분권형 개헌은 한국 현실에 맞지 않기 때문에 저는 반대합니다. 그렇지만 개헌을 한다면 권력구조 보다는 국민의 기본권 향상을 위한 개헌이 더 중요합니다. 예컨대 소비자 권리, 환경, 정보사회로 이행하면서 IT와 관련된 새로운 기본권을 신설하는 것, 선언적 의미에 머물러 있던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에 대한 사회권적 기본권을 하나의 구체적 권리로 헌법에 명시하는 게 필요합니다."- 경실련 사무총장을 지낼 당시, 참여연대 사무처장이던 박원순 변호사(현 서울시장) 등과 시민운동의 방법론을 놓고 논쟁을 벌였는데 그 과정에서 '시민운동이 너무 권력화되고 무오류 환상에 사로잡혔다'고 비판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까?"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시민운동은 법의 테두리 내에서 해야 하고 초법화, 관료화, 권력화 돼서는 안 됩니다. 즉 무오류성의 환상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악법을 옹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법이나 제도는 고치는 절차적 과정이 필요합니다. 시민단체가 무조건 악법이다 하면 그 판단의 주체는 누구냐, 그게 문제란 말이죠. (16대)총선에서 낙선운동을 법이 금했지만 그 사람들이 했잖아요. 저는 낙선운동을 찬성한다, 그렇지만 법이 금하기 때문에 법부터 개정하자, 그래서 경실련에서는 정보공개운동을 했어요. 지금도 그게 시민운동의 정도라고 생각해요."- 이후 뉴라이트 운동 등 보수 또는 우파활동으로 돌아서 의아하게 생각하거나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저는 진보나 보수, 좌우로 나누는데 대해 굉장히 거부감을 느껴요. 헌법적 가치에 의해서 저는 활동을 했다고 생각해요. 다만 제가 주장한 것은 DJ정부나 노무현 정부 때 헌법적 가치를 주장하면 굉장히 보수적으로 비쳤어요. 또 MB정부 와서는 그런 걸 주장하면 진보적인 걸로 비치는데, 제 소신은 변하지 않았고 사회 흐름이 그렇게 간 거죠. 굳이 저를 얘기한다면 헌법적 실용주의자라고 주장하고 싶어요."- 2011년 10ㆍ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선언을 했다 접었는데요?"처음에는 뭔가 크게 변화시키려고 했는데 여러가지 시(時)와 운(運)이 안 맞았죠. 언젠가는 여기에 대해 따로 할 얘기가 있을 겁니다."- 새만금사업은 국책사업이자 전북의 숙원사업입니다. 새만금 소송에 참여해 승소하는데 크게 기여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새만금 간척사업은 1심에서 진 걸 제가 2심부터 맡아서 뒤집어 놨어요. 대법원에도 나가서 헌법적 주장을 했고, 결국 확정시켜서 물막이 공사가 끝난 것 아닙니까. 새만금사업은 개념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새만금 간척지를 막는다고 하면 저도 반대를 해요. 그렇지만 새만금 간척공사가 문제가 된 것은 이미 공사 시작 후 7-8년 뒤였어요. 그 상태로 놓아두면 어떻게 할 거예요. 그 유명했던 변산해수욕장도 가보니까 이미 다 죽었더라고요. 순수하게, 그야말로 고향을 위해서 공익소송을 한 거죠. 돈도 안 받고 욕도 먹어가면서 했지만 저는 신념을 갖고 했어요. 격려도 많이 받았고요. 그러니까 강현욱 지사가 수임료는 못주지만 나중에 간척사업해서 조금 땅을 떼어주겠다고 했다고요.(웃음) 도민의 이름으로 감사패를 받았는데 지금도 저는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거기서 주장한 것은 환경이 만능은 아니다, 환경과 더불어 환경과 조화된 개발도 헌법적 가치라는 거죠. 새만금이 대표적입니다." - DJ와 노무현, 이명박 정부 등 누가 정권을 잡든 전북은 낙후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대개 호남 몫이다, 전북 몫이다 해서 호남출신을 요직에 앉혔다고 하는데, 솔직히 말해 이 사람들 마음은 호남을 떠난 사람들이라고 봐요. 그 사람들, 전북에 관심 없어요. 한때는 전북이나 호남 출신이라는 걸 감추고 다니던 사람도 있었어요. 한 둘이 아니에요. (내각 등 인사에서) 호남 대표처럼 지역안배라고 하는데 진짜 하려면 제대로 된 호남사람을 임명해야죠. 장차관 뿐 아니라 그 밑에 자리도 그래요. 저는 어디든 강연할 때 호남사람이고 전북대학교 나왔다고 얘기를 해요. 제가 지방에서 컸고 지방대학을 나왔는데도 이 정도까지 왔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으로 애향심을 느끼는 거죠. 누가 정권 잡는 것과 관계없이 정말로 전북을, 호남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사람,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면서, 그게 제대로 안되니까 아쉽죠. 정부의 정책라인에 있는 사람들이 과연 어떻게 했는가, 그런 점을 강조하고 싶어요."

  • 기획
  • 조상진
  • 2012.12.25 23:02

순창군 광역친환경농업단지 조성사업 - 친환경 인증 면적 늘려 농업 경쟁력 키운다

1년여간 진통을 겪어오던 순창농축산순환자원화센터 예정부지가 금과면 호치리로 전격 결정되면서 순창광역친환경농업단지조성사업이 본격 추진된다. 이 광역친환경농업단지조성사업은 단지 내 축산농가에서 나오는 가축분뇨를 유기질퇴비로 자원화해 경종농업에 이용하고 경종농업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이나 부산물을 다시 가축에 이용 지역 안에서 물질을 순환시켜 지속가능한 친환경농업을 유도하기 위한 사업이다. 총 100억원의 사업비가 투입되는 대규모 정부(농식품부)지원사업인 광역친환경농업단지조성사업은 앞으로 순창군 농업발전에 큰 계기가 될 중요한 사업으로써 지금까지의 추진상황과 앞으로의 전망 등을 살펴본다.△사업 추진배경순창광역친환경농업단지조성사업은 전국 제일의 장류·장수 고장으로서의 다져진 입지를 기반으로 지난 2011년도부터 본격적으로 공모 준비절차를 밟아 추진해 왔다. 주요 추진 배경으로는 첫째, 환경적 측면에서 관행적인 화학비료와 농약 과다 사용으로 위협받고 있는 농업환경과 국민 건강 회복을 위해 추진됐다.둘째, 경제적 측면으로 친환경안전농산물 소비확대 추세에 대비 친환경농산물생산 확대로 농가소득증대와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기 위함이다. 셋째, 순창군 농업정책 측면으로 농업환경과 기반시설이 매우 열악한 지역적 한계에서 '친환경농업 확대'만이 '순창 농업의 경쟁력'이라는 판단 아래 농업 변화의 흐름에 앞장서기 위하는 등 친환경농업으로 돈 버는 농업 순창 실현을 목표로 추진하게 됐다.△사업개요순창광역친환경농업단지조성사업 규모는 금과·팔덕·복흥·구림면 일대를 1개 단지로 1140ha의 친환경농산물 인증을 목표로 하는 사업이다. 주요사업내용은 농축산순환자원화시설, 친환경벼건조저온저장시설, 미생물제조시설, 친환경농산물유통시설, 친환경교육시설 등이 들어서게 된다. 사업비는 100억원(국비 30%, 도비 15%, 군비 35%, 자부담 20%)이 투입되며, 사업기간은 2012년부터 2014년까지 3년이다. 사업주체는 순창군친환경조합공동사업법인(6개 농축협 공동출자=순창·동계·금과·복흥·구림농협·순정축협)에서 맡아 운영한다.△지금까지 추진상황순창군은 그동안 대규모 정부 지원사업인 광역친환경농업단지조성사업 유치를 위해 농업인단체, 관내 농.축협 등 유관기관단체와 함께 부단한 노력을 해왔다. 지난해 2월 사업신청을 시작으로, 같은해 4월 농식품부를 방문해 사업추진 계획 및 의지를 설명하고, 11월 중앙평가단 현지 평가, 2012년 1월 10일 농식품부 주관 최종평가에서 황숙주 군수가 직접 참여, 사업의지를 발표한 가운데 1월 16일 순창군이 광역친환경농업단지 조성사업 대상지로 최종 선정됐다. 군은 후속절차로 2012년 4월 순창군 친환경조합공동사업법인 설립인가 신청을 거쳐 2012년 7월 12일자로 농림부에서 친환경조합공동사업법인 설립인가 승인을 받았다.하지만 올해 1월 16일 금과면에 승인된 농축산자원화센터가 혐오시설로 인식돼 주민들의 반발로 바로 착공에 들어가지 못하고 약 1년여동안 표류하는 아픔을 겪어오다 금과면 지역주민들의 협조로 24개마을 자체 공모를 통해 지난 11월 20일 호치마을로 부지가 최종 확정되면서 본격적으로 사업추진에 시동을 걸게 됐다.△이후계획 및 기대효과금과면 호치리로 최종부지가 확정되면서 올해말안에 농축산자원화센터 부지 매입을 위한 감정평가를 시작으로 환경영향평가, 농지전용 및 개발행위허가 등 행정절차를 이행하게 된다. 또 농축산순환자원화센터 기본설계 및 실시설계를 거쳐 2013년 3월에 착공하게 되며, 농축산순환자원화센터 이외 다른 사업들도 2014년 준공을 목표로 추진된다.사업이 완료되면 농축산순환자원화센터에서 양질의 친환경 유기질퇴비를 연간 90만포가량 생산해 지역농가에 보급하게 된다.순창의 지역적 특성을 살린 경종과 축산을 연계한 광역친환경농업단지조성사업을 통해 현재 320ha로 저조한 친환경농산물 인증면적이 1100ha 이상으로 확대될 것으로 기대된다.

  • 기획
  • 임남근
  • 2012.12.25 23:02

황숙주 군수 포부 - "사업 성공시켜 다른 지역 농업과 차별화"

"군수로 취임하면서 저는 돈버는 농업 잘사는 농촌을 최우선 목표로 삼아 지금껏 달려왔습니다. 특히 전통 농업지역인 순창군이 요즘의 트렌드인 웰빙에 맞는 농산물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친환경으로 나가야 된다고 판단해 친환경농업단지 사업을 신청하게 됐습니다."황 군수는 "사업취지 설명을 제가 직접 발표하는 등 저를 비롯한 공무원들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인해 사업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고, 친환경단지의 성공적인 추진을 위해 작목반과 공무원 등 친환경 단지 선진견학도 수차례 다녀왔다"고 말했다.황 군수는 이어 "다른 지역과는 차별화된 농산물 생산을 위해서는 이번에 추진하는 광역친환경농업단지 조성사업이 성공을 거둬야 된다고 생각한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군민과 농협, 행정이 상호 협력해야 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상호 협력을 다해 사업 추진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덧 붙였다.특히 황 군수는 "사업 성공으로 친환경 인증면적이 확대되면 농업환경 개선과 국민건강 증진은 물론, 친환경농산물 유통시스템의 체계적 확충으로 대도시 소비자 신뢰 확보 및 소비 활성화 등 순창 농업의 경쟁력이 크게 향상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강조했다.

  • 기획
  • 임남근
  • 2012.12.25 23:02

최승범 시인은 - 40년 대학 강단·집필에 몰두…생활시조 개척자

자상하고 다감하지만 지켜야 할 것에 대해선 깐깐하고 강직한 성품이다. 고향을 지키며 교편과 집필에 몰두했고 정갈하고 청빈한 삶을 살았다. 감칠맛 나는 문장이 독자들을 매료시킨다. 현대시조의 개척자다. 예전 시조가 충효 등의 관념적 개념에 치중하고 있다면 고하는 일상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생활시조를 개척했다. 우리 고유의 멋과 맛, 예(禮)와 얼 등의 전통 정신을 계승하는 일에 천착하면서 많은 시와 수필을 썼다. 1931년 남원 사매면 서도리에서 태어나 전북을 떠나 살아본 적이 없는 토종시인이자 학자다. 최명희 시인과 동향이다. 1954년 전북대(국문과)를 졸업한 뒤 이 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7년 전북대에서 가람 이병기 선생이 맡았던 '시조론'과 '수필론'을 물려받아 전임강사를 시작으로 강단에 섰다. 1958년 김동리 선생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시 3편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1996년 정년 퇴임 때까지 40년간 전북대에서 재직했다. 퇴직후엔 명예교수로 활동했다. 박사학위를 딴 수제자만 12명을 배출했다. 전북문인협회 회장과 전북예총 회장을 역임했고 2002년엔 세계서예 전북비엔날레 조직위원장을 맡았다. 신석정(辛夕汀) 시인의 장녀인 일림(一林)여사가 부인이다. 사이에 3남을 두었다. 큰 아들은 전문직종, 둘째는 금융기관에 종사하고 셋째는 사업을 하고 있다.저서로 '한국수필문학연구' '시조에 깃든 우리 얼' '조선도공을 생각한다' '시조에세이' '남원의 향기' '풍미기행' '한국을 대표하는 빛깔' '한국의 소리를 찾는다' '한국의 먹거리와 풍물' '후조의 노래' '몽골기행' 등 다수. '소리, 말할 수 없는 마음을 듣다'는 107가지 소리를 채집한 책이다. 수상실적이 화려하다. 전라북도 문화상, 정운시조문학상, 서울신문사 향토문화대상, 한국현대시인상, 학농시가문학상, 가람시조문학상, 춘향문화대상, 한국시조대상, 목정문화대상, 한국문학상, 민족문학상, 한림문학상을 수상했다. 1996년엔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았다.

  • 기획
  • 이경재
  • 2012.12.18 23:02

풍류시인 古河 최승범 선생 "풍류가 흐름이고 정신이지"

고하((古河) 최승범(81) 선생에겐 '풍류'와 '선비'가 따라붙는다. 두가지를 소재로 시를 많이 썼고 유유자적하면서도 자신한테 엄격한 생활태도 때문일 것이다. 이 시대의 선비를 꼽으라면 강암 송성용 선생과 함께 고하 최승범 선생을 꼽는 이들이 많다. 양병오 전북대 교수(54)는 스승인 고하에 대해 "문학정신은 여유롭고 낙낙한 풍류에 뿌리하고 있지만 세상을 살면서는 '줏대'를 강조하시는 외유내강형 성품"이라며 "이 시대 선비정신을 실천하고 계시는 몇 안되는 분"이라고 했다. 선비정신은 그의 예술과 학문을 지탱해 온 힘이다. 혹한이 기승을 부리던 지난 11일 고하문학관을 찾았다. 전주 성심여중고 남쪽 향교길에 있다. 최승범 선생은 고하문학관 관장이다. 집필실이기도 하고 문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곳이다. 장서가 가득하다. 원로시인이지만 꾸준히 작품을 구상하고 시작(詩作)활동을 하고 있다. 얼마전엔 시조풍류를 엮은 '시조로 본 풍류 24경'이란 책을 펴냈다. 풍류란 '속기가 섞이지 않은 맑은 바람, 맑은 물의 흐름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풍류와 선비의 대명사인 고하 선생을 만나 여러 얘기를 들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합니다."집과 고하문학관(향교길)을 왔다 갔다 해. 운동 삼아 동문 네거리까지 1200보쯤 걸은 뒤 차를 타고 인후동 집까지 가요. 지인들 만나는 게 일이지."-고하문학관이 사랑방 역할을 하겠군요."문학관에서 수필 시 이야기 등을 하며 지내. 오늘(11일)도 문인 다섯분과 만나 격주에 한번씩 회동하자는 얘기를 나누었어."1996년 정년퇴임한 뒤 장서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던 중 신용금고를 경영하던 중학교 동창이 공간을 마련해 줘 1997년 문예관의 둥지를 틀었다. 그뒤 전주시가 성심여고 남쪽 향교길의 2층짜리 동사무소를 리모델링한 건물을 제공해 2010년 현재의 공간으로 이전했다. 고하(古河)는 최승범 선생의 호다. 호를 따 고하문학관으로 명명됐다. 3만여 권을 웃도는 장서가 있다. '고하문학관'이라는 한글 현판은 송하진 전주시장이 썼다.-얼마전 '시조로 본 풍류 24경'을 펴내셨습니다.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하시는데 근간의 집필활동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주로 밤에 옛 생각이나 현실의 느낌을 쓰는데 다음날 아침에 문학관으로 가져와 다시 보고 하는 거지. 산문은 원고 청탁이 들어와도 잘 써지지 않아. (나이 때문에) 긴 글은 이제 못 쓰겠어."-어떤 분은 이 책을 '빼어난 시조들을 아우른 백과사전 같은 작품'이라고 소개했던데 어떤 작품입니까."'시와 문학'이라는 잡지를 펴내는 김재홍 교수가 황진이 시조를 소재로 원고지 50매씩 써달라는 청탁이 와 여러차례 썼는데 나중엔 황진이 이후의 시에 대해서도 계속 써달라는 거야. 이 때 쓴 작품들을 엮은 책이야. 가람선생이 '내 시조의 스승은 황진이'라고 할 정도로 뛰어났어. 가람 선생한테 배운 내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지. 황진이는 명기(明妓)이면서 예기(禮妓)였고 시기(詩妓)였어."-평소 '풍류(風流)'를 소중히 여기고 천착해 오셨는데 풍류란 무엇이라고 설명하시겠습니까."글자 그대로 맑은 바람, 유유히 흐르는 물과 같은 것 아닌가. 최치원 선생이 맨 처음 이 말을 썼는데 인간의 교화도 풍류에서 찾아야 돼. 화랑도들이 산천을 유람하며 몸과 마음을 닦았던 호연지기도 바로 풍류에서 발원하는 것이라고 봐야지." -선생님 문학의 바탕도 풍류정신이랄 수 있겠군요. "대학 (교수)시절부터 문학정신을 풍류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어.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恨)을 갖고 많이 이야기하지만 잘못된 생각이야. 찌들어지고 슬픈 한만 이야기 해서 뭐해. 풍류가 흐름이고 정신이야."-많은 사람들이 풍류에 묻혀 살고 싶어하긴 하는데 현실이 용인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세상이 복잡하게 돌아가고 신경 쓸 일이 많으니까 그렇겠지. 안타까워."-선비와 선비정신에 대해서도 많은 글을 쓰셨는데 선비정신이란 어떤 것일까요."한마디로 말하기가 어렵지. 나라를 먼저 생각해야 하고 재물을 멀리 해야 해. 또 예(禮)를 알아야 하고 마땅히 지켜야 할 도(道)를 지켜야 하는 게 선비정신이지."-선비정신은 억지로 실천하려 한다고 해서 되는게 아니지 않습니까."나는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선비집안 자식은 이래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고 자랐어. '양식이 없어 굶을 망정 기생해서는 안된다'는 것 같은 말을 들으면서 자랐지. 중학교 때 흉년이 들었는데 담임 선생님이 집에 먹을 게 없는 사람 손을 들어라고 한 뒤 손을 들면 편지봉투에 서숙(조)을 담아 나누어 주었는데 나는 형편이 어려웠지만 손을 들지 않았어. 집에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할머니는 '장하다 우리 손주. 그래야 한다. 없는 것 군색 떨면 안된다'고 등을 두드려 주며 기특하게 생각하셨지. 이런 게 몸에 밴 게 아닐까. 그런데 요즘엔 이런 가르침이나 문화가 없어."-오늘날에는 선비정신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이 정신적 가치로 삼아야 할 것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내가 강조하고 잘 쓰는 말이 '줏대 없이 살지 말라'는 말이거든. 속 되게 살면 안돼. 회똥거린다는 말이 있는데 좌고우면 하면서 살면 안된다는 말이지."-선생님을 두고 이 시대의 자상한 어른, 고고한 선비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인생의 좌우명이랄까 삶의 철학이 있다면 소개해 주시죠. "자식들이 어렸을 때 우리 집의 가훈이 있느냐고 물어. 그래서 '눈은 아래를 봐야 한다'고 가르쳤어. 사람을 보거나, 길을 가거나 눈을 치켜뜨고 보면 안돼. 그리고 봄이 왔다고 해서 봄을 그냥 믿어서는 안돼. 섣불리 옷을 벗어 제치고 했다가는 봄에 속아 넘어가는 수가 있어."-선생님은 우리 시문학의 큰 기둥인 가람 이병기 선생을 스승으로 모신 현대시조의 산 증인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인연이 맺어졌나요."서울대에 재직했던 가람 선생이 625전쟁이 끝나자 전북대로 옮겨 오셨어. 그래서 스승으로 모시게 됐지. 당시 가람 선생의 제자들이 월북했어. 전쟁이 끝나자 이를 두고 학생들이 가람 선생을 공산주의자로 몰아부치면서 반대했지. 그러자 학장으로 있던 이병도 박사가 잠깐 내려가 있으라고 해서 전북대학교로 옮겨온거지. 당시 이병도 박사는 '가람이 다른 뜻이 있었다면 월북했을 것이다, 떳떳했기 때문에 서울대에 남아 학교를 지켰다'며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학생들을 타일렀지만 소용이 없었어. 나한테는 묘한 인연이 됐지."-가람 선생은 어떤 분이셨습니까."일제시대에 개명도 하지 않았어. 친일 내용은 한 줄도 쓰지 않았지. 누군가 어느 글에서 친일했다고 썼는데 알아보니까 가람 선생이 징용간 아들이 돌아오지 않자 아들을 생각하며 글을 썼는데 이걸 두고 친일했다고 쓴 거야. 그 아들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어. 가람선생에 대해서는 책도 쓰고 글도 여러번 썼는데 그때마다 나는 가람선생 발 뒤꿈치도 못 따라갈 만큼 모자란다는 생각을 많이 하지. 시험 보고 나면 잘못한다고 혼나기도 많이 했어. 당시 학적부를 보니까 C학점(국문학사 과목)이 하나 있었는데 가람선생 과목이었어. 학문은 정확하게 가르쳤지."-난(蘭)에 얽힌 일화도 있던데요."가람선생은 평생 난을 가꾸며 사신 분이야.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도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난초가 담배연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라는 거지. 난초는 술의 향기는 좋아하지만 담배 냄새는 싫어해. 정종을 마시고 난 뒤에 남아 있는 정종을 붓에 묻혀 난을 닦아주곤 했지."-또 한분의 스승이 신석정 선생인데 석정선생은 장인이기도 합니다. 어떤 인연이 있었나요."석정 선생한테는 시론을 공부했지. 면전에서는 칭찬을 하지 않지만 무슨 일이 있으면 사위한테 가서 물어보라고 술자리에서 자주 얘기하셨다고 해. 내가 문단에 등단한 것도 석정 선생 추천을 받은 게 아니야. 김동리 선생 추천으로 1958년 현대문학에 글이 나오면서 등단했지. 석정선생은 자신이 심사위원인데 사위를 추천해선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계셨어. 요즘으로 치면 상피원칙이지."-김동리 선생이 추천하게 된 특별한 계기는 있었나요."전주에 문학강연 왔다가 일번지다방에서 대학신문에 게재된 내 시를 보셨던 모양이야. 서울로 올라간 뒤 얼마 있다가 작품을 보내라는 엽서를 보내셨어. 그래서 '등고' '소낙비' '설경' 세 편의 시를 보냈는데 현대문학에 실려 등단했어."-석정 선생 큰 따님하고 결혼하신 얘기 좀 들려주세요."당시 김준영 선생이라고 계셨는데 석정 선생의 부안 집에 놀러가자고 하더라고. 그래서 함께 갔는데 석정 선생이 아이들을 불러 인사를 시켰어. 정원에서 술 한잔씩 하고 놀다 다음날 떠나면서 뒤돌아보니 큰 딸이 정원에 서 있었고 시선이 마주쳤지. 마주치자 마자 둘 다 시선을 돌렸지만 묘한 감정이 있었던 모양이야. 그 뒤 김 선생이 사귀어 보라고 했고 가람 선생도 좋다고 하셔서 사귀었지. 아버지께서는 바닷가 쪽(부안)이라 내키지 않으셨지만 시인 집안의 딸이니 괜찮겠다며 승락하셔서 결혼했어." -맨 처음 문인의 길로 들어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아버지께서는 고등고시를 (준비)했으면 했어. 그런데 할아버지는 공부를 할려면 먼저 사람이 돼야 한다며 소학을 읽게 했지. 나는 어깃장을 내기도 하곤 했는데 책을 많이 읽었던 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싶어. 할아버지는 60년대에 돌아가실 때까지 상투 틀고 평생 갓을 벗은 일이 없어."-지금까지 펴내신 저술이 상당량에 이를 텐데요. 몇권이나 됩니까."나도 잘 몰라" 그러면서 저술, 시집, 수필집 목록을 건네주었다. 세어 보니 58권이었다. -좋은 시란 어떤 시일까요."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좋은 시를 얘기하겠어. 나는 정지용의 '고향' 같은 시가 좋아, 순수시."-특히 사라져 가는 옛것들에 대한 애착이 강하신 것 같아요. 소리, 맛, 빛깔 등이 그러한 소재들인데 특별한 동기라도 있는 겁니까."평소에 우리 것, 우리적인 것인 것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지. 전통계승이나 선비정신에 대해 원고청탁도 많이 받았고. 그럴 때마다 애착을 갖고 우리 것이 뭐 있겠는가 챙겨본 거지. 그런 중에 우리 고유의 소리나 맛, 빛깔 등이 사라져 가고 있더란 말이야. 안타깝고 그리워서 소재로 삼았던 거지."-선생님은 '풍미산책'을 쓰시고 미식가로도 정평이 나 있습니다. 요즘 음식들은 무엇이 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콩나물 하나를 쓰더라도 맛이 다 달라. 안타까워. 이 근방에 손칼국수집이 있는데 바지락 같은 재료를 새벽에 일찍 장보기 하고, 또 밀가루를 두드리고 밀고 하는 것도 주인 혼자 다해. 정성이 들어가니까 맛도 좋을 수 밖에 없어. 내가 자랑하고 싶은 음식점이야. 근방에 등갈비집이 하나 있는데 엉터리야. 하도 맛이 없어서 노동부 근처 잘하는 곳을 알려주면서 배워오라고 했더니 처음엔 그 맛을 못내. 여러번 채근했더니 자체 개발을 해서 이젠 아주 맛있게 잘 해. 갈비도 손대기 좋게 다루고 쌀도 장수에서 가져온 좋은 쌀로 밥을 짓고. 음식은 결국엔 정성과 노력에 달려 있어."-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이 가는 책이 있다면 어떤 걸 들 수 있겠습니까."범우사에서 '남원의 향기'라는 책을 낼 때인데 작품을 30여편 골라달라고 하더라고. 그런데 못 고르겠어. 그래서 조교선생이 알아서 골라 주도록 했지. 지금도 마찬가지야."-시를 쓰면 밥 먹고 살기 힘들다고들 하던데요."책을 사지 않는다고 하던데 문제야.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고 도서관에 틀어박혀 공부해야 하는 세상인데 시를 읽을 틈이 어디 있겠어. 안타까워."-요즘의 후학이나 후배 시인들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십니까. 충고 한토막 해 주신다면. "내가 어떻게 충고를 해. 큰 일 나. 일본 작가가 한 말이 있어. '은근하고 점잖은 고답적인 문장에 짜증나는 전후세대의 반격이 시작되고 있다'고. 안타까운 현상이지." 이 작가는 하야시 마리코(58)로, 베스트셀러 작가다-학자로서, 문인으로서 외길 인생을 사셨는데 후회나 미련은 없으시나요. "정년퇴임 때 이런 말을 했지. 가정이 남원이고 대학도 전북이고 문인의 길을 걸어왔는데 다시 태어나도 이 고장, 이 길을 걸어가겠다고. 지금도 후회는 없어."-나이 들어 세가지 즐거움을 갖고 사신다고 들었습니다."첫째가 문을 닫고 책을 읽는 즐거움, 둘째가 문을 열고 밖에 나가 자연을 소요하는 즐거움, 셋째는 찾아온 친구들과 술 한잔 하며 담소하는 즐거움인데 이제 그럴 친구들이 없어."-사회에 대해, 세상에 대해 하실 말씀은 없나요."세상에 말할 게 뭐 있나. 이 상태로 살아가게 해 준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인데 가당치 않아."-대통령 선거철입니다. 선거 때마다 문인들이 보수-진보로 나뉘어 특정후보 지지선언을 하는데 이런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다 자기 길을 가는 거지."

  • 기획
  • 이경재
  • 2012.12.18 23:02

고창 노인복지서비스업, 웰파크시티 - 자연에서 심신 치유하며 건강한 노후 보낸다

최근 경제적 안정과 건강을 추구하고 노후에 사회에 봉사하며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길 희망하는 은퇴자와 인구 고령화가 맞물리면서, 이들을 위한 새로운 개념의 고품격 은퇴자 마을이 고창에 들어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노인복지서비스 분야에서 탁월한 노하우를 인정받은 서울시니어스타워(주)와 30년 전통의 서울송도병원 의료시스템이 함께 고창읍 석정리 일원 150만㎡에 3000여 억원의 사업비를 투입하여 현재 추진중에 있는, 고창 웰파크시티(대표이사 이종균·석정온천관광지)는 건강하고 편안한 생활은 물론, 재테크와 일자리까지 원스톱으로 충족할 수 있도록 만든 자연치유형 가족건강리조트다. 이곳에는 서울송도병원의 의료진을 비롯해 임상영양학박사, 암면역센터 의료진, 세포연구소 연구진, 운동처방 박사들이 꾸준히 연구 개발한 의료성과를 기반으로 개개인에 맞는 치유요법이 이뤄질 수 있도록 종합건강관리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이 외에도 관광호텔과 컨벤션센터, 온천휴양병원, 명품아울렛, 산림욕장, 산악자전거 공원 등 다양한 시설이 2014년 준공을 목표로 추진되고 있어, 완공되면 고창군에 3000여명의 인구유입과 600여개의 일자리 창출, 100억 여원의 세수가 증대될 것으로 예상된다.△자연치유 공간 고창 웰파크시티는 고창 웰파크시티는 현재 석정 웰파크 C.C, 골프빌라(석정힐스), 휴양펜션(석정힐링카운티)과 휴스파, 자연면역치유센터, 종합검진이 가능한 의원을 운영 중이다. 작년 개장한 전장 6123m의 '석정 웰파크C.C(18홀)'는 호남의 삼신산 중 하나인 방장산에 둘러싸여 수려한 자연경관과 사통팔달의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업다운이 있는 낮은 계곡지형(마운틴코스)과 편안하고 아늑한 느낌의 평야지대(레이크코스)가 함께 있어 한층 즐거운 플레이를 기대할 수 있다. 주거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는 석정힐스는 골프장의 페어웨이를 앞뜰처럼 조망할 수 있는, 일조량이 풍부한 전 세대 남향 배치로 인기다. 각 라인별 계단식지형 활용으로 모든 세대에 확 트인 시야를 보장해 주는 것이 특징이다.자연치유형 펜션인 석정힐링카운티는 관광·휴양객이 머무는 공간으로 활용되며, 심신의 치유를 통해 건강을 되찾으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건강증진에 중점을 둬 황토벽돌과 황토기와, 편백나무, 한지 등 친환경 소재의 마감재를 사용했으며, 건물 주변에 피톤치드를 내뿜는 편백나무를 식재, 입주자들의 면역력을 높여준다. 펜션이나 단지 내 상가를 분양받은 입주자는 직접 운영하거나 위탁경영을 통한 임대수익을 얻을 수 있으며, 단지안에 있는 유기농식당, 황토찜질방, 한·양방클리닉 등 부대시설 이용에 대한 할인 또는 무료 혜택을 받을 수 있다. △행복하고 건강한 제2의 인생을 누리세요'웰파크시티'는 피톤치드 발생량이 많은 대단위 편백나무와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자연 면역력 강화를 위한 최고의 환경을 갖추고 있으며, 혈액순환과 면역력 증진에 도움을 주는 게르마늄 온천도 있다. 교통여건 또한 좋아 광주에서 30분, 전주에서 1시간, 서해안고속도로 이용시 서울에서도 3시간이면 도착한다. 이곳에 입주하면 최소 비용으로 의료서비스 및 재활치료를 받을 수 있고, 건강·휴양·레저서비스는 물론 골프, 온천, 승마, 낚시, 산림욕 등을 즐길 수 있다.특히 일자리를 원하는 입주자들은 웰파크시티 내에 만들어지는 각종 부대시설을 통해 단지내 취업기회를 제공받을 수 있다. 현재 운영되고 있는 골프장과 펜션 관리를 위해 100명의 고용이 이루어져 지역주민의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고 있다. △웰파크시티, 고창에 둥지를 튼 이유 신이내린 자연 고창은 세계문화유산인 고인돌과 판소리, 호남의 내금강이라 불리우는 선운산도립공원과 대한민국에서 꼭 가봐야 할 여행지로 꼽히는 노을이 아름다운 명사십리 해변, 람사르습지로 등록된 청정한 고창갯벌과 운곡습지, 피톤치드가 풍부한 편백나무숲, 청보리밭, 복분자, 수산물축제 등 관광자원이 풍부하고 다양해 레저·휴양문화를 즐기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특히 웰파크시티는 대규모 편백과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곳에 위치해, 면역력 강화를 위한 최고의 자연 환경을 자랑한다. 또한 게르마늄 온천이 있어 노화예방 및 자연치유력을 높이는데 도움을 줘, 건강한 노후와 심신의 치유를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최적의 장소다.

  • 기획
  • 김성규
  • 2012.12.18 23:02

이종균 대표이사 "레저·휴양 동시에…대체의학 메카 될 것"

"진정한 은퇴자마을이란 반드시 은퇴한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기 위한 제반 여건을 갖춘 곳이라야 합니다. 고창은 대규모 편백과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지리적 위치로 면역력 강화를 위한 최고의 자연 환경을 자랑합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찾기 힘든 게르마늄 온천이 있어 노화예방 및 자연치유력을 높이는데 도움을 줘 건강한 노후와 심신의 치유를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최적의 장소입니다." 이종균 대표는 지난 30년간 병원과 실버타운을 경영하면서 은퇴를 앞둔 사람들이 오늘의 급속한 고령화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면서 선진국의 사례와 모델들을 섭렵했다. 이 대표가 운영하는 서울시니어스타워는 국내 최대의 도심형 시니어 복지시설 운영에 15년 역사를 가진 곳으로, 특히 건강관리에 대한 마인드가 세계 최고라고 알려져 있다.이 대표는 "석정휴스파를 비롯해 힐링카운티, 면역치유센터, 의원·종합검진센터, 관광호텔, 컨벤션센터 등 다양한 시설들이 모두 들어서게 되면 웰파크시티는 건강관리는 물론, 레저와 휴양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국제적인 대체의학의 메카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은퇴자들을 위한 진정한 건강휴양리조트가 되려면 일정한 일자리와 수입을 보장, 품위 있는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해야하며, 철저한 건강관리가 가능한 시스템과 주변 환경이 갖춰져야 한다. "서울시니어스타워는 가지고 있는 의료 및 사회복지에 대한 모든 지식을 총동원하여 건강한 노후를 보내고자 하는 사람들과 지친 현대인들에게 건강을 되찾을 수 있는 편안한 쉼터를 제공할 계획으로, 고창 웰파크시티를 그에 걸맞는 의료·복지·문화·교육 등 그 어느 하나도 소홀함이 없는 새로운 개념의 리조트로 탄생시킬 것이다"고 이 대표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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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타
  • 2012.12.18 23:02

남형두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저작권은 문화산업을 보호·진작시키는 요체"

2000년대 초반부터 불기 시작한 '한류'는 올해 절정을 맞았다. 물론 그 정점에는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있다. 빌보드 차트에 오르고, 유튜브 최다 추천기록을 깨고, 미국 캐나다 등의 메이저 리그 경기장에서 그것도 경기 클라이맥스의 단골 응원가가 되더니 드디어는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올해의 '깜짝 스타' 1위에까지 오른 것을 보면 '싸이가 지구를 점령했다'는 말이 과장된 것만은 아니다. 한류 역사를 새로 쓰고 대한민국의 국가브랜드를 높인 '강남스타일'의 가치가 얼마쯤 되는지는 그래서 더 궁금해진다. 문화산업의 시대, 문화로 돈을 만드는 시대다. 캐릭터 하나로 기업이 살고, 뮤지컬을 팔아 도시가 먹고 산다. 문화가 경제로 치환되는 시대에서 산업적 가치는 그것을 어떻게 만들고 지키느냐에 달려있다. 세계의 나라들이 자국의 산업을 위해 지적재산권 보호에 나서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근래 들어 저작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퍼블리시티권 분쟁이 늘어나는 것도 문화 산업화의 새로운 질서가 가져온 결과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나라는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문화산업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저작권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남용, 혹은 무의식적 관행이 깊이 뿌리 박혀 있기 때문이다.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남형두 교수(48)는 우리나라의 몇 안 되는 저작권 분야의 권위자다. 그것도 한류와 직결된 엔터테인먼트와 스포츠법 분야가 전문이다. 그는 200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한류 열풍의 파고가 높아지던 시기, 그 중심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다. 16년 변호사 생활을 접고 교수가 된 이후에도 저작권이란 기둥을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 글쓰기로, 강연으로, 법제화 운동을 통해 분투하고 있다. 한류의 정점이 전북에 있다고 생각하는 남교수는 고향인 전북이야말로 문화산업의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지역이라고 확신한다. 그를 만났다. 인터뷰는 연세대 남교수의 연구실에서 있었다. 3시간 넘게 이어진 인터뷰는 재미있는 강의와도 같았다. -변호사 시절 인사 드려서인지 '교수' 호칭이 좀 낯섭니다. 학교로 옮긴지 얼마나 됐습니까."2005년 9월이니까 햇수로는 벌써 8년째군요. 제가 교수가 되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꾼 적이 없는데,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기의 의지와 관계없이 주어지는 길이 있기 마련인가봐요."-대학교수로 전업한 결정적 계기가 있었습니까. "광장에 근무할 때인데, 영국의 한 텔레콤 회사와 국내 회사의 소송을 맡았었어요. 우리나라 회사가 영국 회사의 기술을 베껴서 벌어진 사건입니다. 저는 영국 쪽 대리인이 되었는데, 완벽한 승소를 이끌어냈어요. 결과로만 보면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 정도였지요. 그 이야기를 저녁 식사하면서 가족들에게 했는데 초등학생인 아들이 '아빠, 근데 아빠한테 진 한국회사 불쌍하다' 하는 거예요. 방망이로 뒷퉁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습니다. 내가 평생을 이렇게 이기고 지는 승부사로만 지내야 하는가 회의가 들었습니다. 그즈음 연세대에서 제안이 온 거예요. 뒤도 안돌아보고 왔지요. 그런데 정작 아들 녀석은 '아버지가 변호사 계속 했으면 더 좋았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실패와 시련이 많았다고 하셨는데, 뜻밖입니다. 그런데 결과로 보자면 그런 과정이 있어서 행복하다고 느끼시는 오늘의 길을 만난 것 아닐까요. "물론입니다. 법대는 독특한 환경이 있어요. 1학기 때 사법시험 1차 발표나면 한차례 초상집이 됩니다. 2학기 때 2차 발표나면 또 그렇죠. 그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제 경험인데요. 사법연수원에서는 1년에 두 차례 체육대회를 하죠. 제가 달리기를 좀 하는 편인데, 4백미터 계주에서 6팀 중 4등을 했던 저희 팀이 마지막 주자였던 저의 스퍼트로 역전을 해 1등을 했어요. 헹가래를 치고 난리가 났죠. 그런데 하루는 교수님이 판결문을 강의하면서 제 판결문을 사례로 들었어요. '내가 잘 썼나' 했는데 교수님이 저를 부르더니 '이렇게 써서는 안 된다'고 하시더군요. 오시범의 사례로 뽑힌 것이었어요. 수모였죠. 그러시면서 덧붙이는 말씀이 '체육 특기자로 들어왔냐'고 하셨어요. 그 뒤로 제 별명은 특기생이 되었죠."-상처를 많이 받으셨겠군요. 학생들은 그런 실패담을 들으면서 위안을 받았을테구요."그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여기 들어온 학생들 대부분이 사실 다른 사람한테 등만 보여주고 살아온 애들이잖아요. 우수하니까요. 그런데 등만 보여주고 사는 사람은 진짜 불행합니다. 다른 사람의 등을 못 보니까 어려움을 모르게 되죠. 나보다 앞에 가는 사람이 있는 것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살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니 패닉 상태가 되는 겁니다. 공항에 가보세요. 휙휙 이륙하는 비행기들의 대부분은 근거리행입니다. 기껏 일본 정도 가는. 그러나 미주나 유럽으로 가는 보잉 747같은 경우는 '못뜨는 것 아냐' 할 정도로 활주로를 다 가서야 뜹니다. 그러니 아직 날지 못한다면 큰 인물이 될 장거리행이라고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너무 조급증에 시달리지 말라는 것이지요."-저작권을 전공해야겠다는 특별한 인식이 있었습니까. "우연한 계기였어요. 변호사가 되고 2년쯤 되었을 때인데, 개그맨 주병진씨가 운영했던 '좋은 사람들'이 제임스 딘 유가족에게 소송을 당했어요. 이름을 쓰고 초상을 썼기 때문인데요. 제가 주병진씨 쪽 대리인을 맡았어요. 그때 그 사건이 우리나라에서는 최초의 퍼블리시티권 사건이었습니다. 상표 사건이 아니었거든요. 일반적으로 상표는 속지주의라 해서 해당 국가에 등록을 해야 합니다. '제임스 딘'이 미국에서는 유명한 상표지만 한국에서도 못쓰게 하려면 한국 특허청에 상표 등록을 해야 하죠. 그런데 '제임스 딘' 재단이 상표 등록하기 전에 주병진씨가 먼저 등록한 것입니다."-퍼블리시티권은 이제 시사용어가 되었지만 일상에서는 아직도 인식이 낮지 않나요."당시에는 더 생소했죠. 미국에서는 이미 퍼블리시티권이 권리로 자리 잡았었지만, 한국에서는 들어본 적도 없었을 정도였어요. 학계도 그렇고 법원 판례도 없었죠. 우리나라의 초유의 사건이 생긴 것인데, 그래서 과연 그 퍼블리시티권을 법원이 인정할 것인가,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이겼어요. 법원의 판결은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배우나 가수 운동선수들의 이름과 초상을 상업적으로 쓸 수 있는 권리가 인정이 된다. 법률로 제정하지 않았어도 관습적으로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죽은 사람한테는 인정 안 된다'는 것이었어요. 퍼블리시티권을 인정하되 상속성이 없다고 판결한 겁니다."-저작권의 기본적인 취지는 이해가 되는데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복잡한 내용이 많던데요."제가 이해하는 저작권은 두 개의 기둥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문화의 산업화죠. 지금은 너나 할 것 없이 문화를 내세우는데, 문화를 산업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노력은 부족합니다. 예컨대 문화인들에게 연금을 주거나 창작금을 지원하는 것은 일시적인 지원책이예요. 그러나 문화예술인들의 창작물을 권리로 보호해주면 그것은 지속적인 수익원이 될 수 있습니다. 저작권법을 문화의 기본법이라거나 문화산업법이라고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저작권은 문화산업을 진작시키는 요체입니다. 저작권을 제대로 이해하면 문화산업은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또 하나는 정직한 글쓰기입니다. 표절문제지요"-근래 들어 저작권과 표절문제가 사회적으로 이슈화되는 것을 보면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산업화는 저작권 기본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아직도 저작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죠.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디즈니사의 곰 인형 '푸우'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미국의 저작권 보호기간은 75년이었습니다. 그래서 '푸우'는 2006년에 저작권 보호가 끝날 운명이었죠. 그런데 2000년도에 미국의회에서 저작권 보호기간을 20년 연장했습니다. 2026년까지 '푸우'의 수명이 연장된거예요. 물론 미국에서도 위헌소송이 제기되는 등 논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국 산업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합헌판결을 냈어요. 곰 하나를 위해 미국 법이 바뀌고, 헌법재판까지 간 것이죠. 그 '푸우'가 경제적 가치를 환산하면 200억불, 우리 돈으로 20조예요. 저작권의 가치죠."-한류 파고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데요. 이런 열기가 지속적으로 갈 수 있을까요. "지금 한류는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국내에서는 한류 콘텐츠의 공급에만 너무 집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공급이 필요한 것도 있지만 때로는 수요를 단속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도 합니다. 수돗물의 수량을 조절할 때 열어서 조절하기도 하지만 입구를 막아서 더 멀리 나가게 하기도 하잖아요. 제2의 '욘사마' '뵨사마'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멀리 보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조절하는 역할을 저작권이 합니다. 결국 저작권 권리를 통해 가치를 팔아야 한다는 것입니다."-그런데 저작권으로 창작자의 권리를 보호하고 그 가치를 높이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자칫 그것이 지나치게 엄격히 제한되면 오히려 창작을 위축시키는 결과가 되고, 문화 산업화에도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싶은데요. 산업화는 수요가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나라 저작권 문제는 이용자들이 저작권을 지키지 않는 것도 있지만, 지나치게 저작권자들이 탐욕을 부리는데서 오는 문제도 심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모범적인 사례라고 봅니다. 강남스타일 유튜브 조회수가 기록을 갱신했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유튜브에 올리는 것 자체가 저작권 위반입니다. 그런데 원작자 싸이가 문제를 삼지 않습니다. 저작권에 위배되지만 권리자가 행사하지 않음으로써 자기의 노래를 유포시킬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한 것입니다."-정보공유연대 운동은 활발한가요. 우리나라의 카피레프트(copyleft) 수준은 어떻습니까. "지금은 저작권법이 개정되어서 미국의 공정 이용(fair use) 조항이 우리나라에도 들어왔어요. 여러 가지를 고려해서 피해가 크지 않고 사용하는 목적이 비영리적이라든지 등등의 몇 가지 이유에 해당되면 저작권 침해라 할지라도 침해가 아닌 것으로 보는 그런 법조항입니다."-그것과 반대되는 사건이 있었죠. 손담비 노래를 부르는 아이를 찍어 블로그에 올린 아이 아빠가 소송을 당했던. "손담비의 '미쳤어'라는 노래였죠. 손담비의 노래를 신탁 받은 한국음악저작권협회가 문제를 삼은 것인데 결과적으로는 잘못된 선택이었어요. 따져보면 저작권 침해가 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된다한들 무슨 손해를 보았습니까. 그런 경우는 그야말로 저작권법을 형식적으로만 이해한 결과예요.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니까 협회에서 없던 것으로 하려고 법적 소송을 진행하지 않고 포기 했죠. 그런데 아이 아빠가 정보공유연대측의 지원을 받아 채무부존재확인 소송이라해서 '저작권을 침해하지 않았음을 확인해 달라'는 소송을 역으로 제기했습니다. 결국 저작권 침해가 아니라는 판결을 받았어요."-저작권의 또 한 기둥이 정직한 글쓰기라고 하셨는데요. 표절 문제는 지금 우리 사회의 이슈가 되었죠. "제 개인적으로도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연구를 집중하는 분야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가 문화선진국이 되려면 표절에 대해서 더 이상 관대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표절을 바라보는 관점에 문제가 있습니다. 판결이나 정치인들이 쓰는 글이나 회고록은 주로 다른 사람 대필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령작가'라고 하죠. 그것은 사실 용인된 것들입니다. 표절의 대상이 아니예요. 그러나 학자로서 다른 사람의 글을 밝히지 않고 사용했다면 그것은 표절이죠. 표절은 그것의 메커니즘과 기본 철학, 저작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봐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녀사냥이 되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렇다보면 정작 악의적인 표절을 거르는 일은 놓치게 됩니다."-표절은 학교교육이 잘되면 바로 잡을 수 있지 않을까요. "표절과 인용 교육은 어려서부터 하는 것이 좋습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을 하는데 '서울로 못가도 반듯하게 가야 한다고 교육 하는 것'이 바로 정직한 글쓰기입니다. 요즈음은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온갖 글을 다 쓸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학계의 관행은 결과만 좋고 논문 편수만 많으면 된다는 식이지요. 결국 학문 발전도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습니다."-교수님은 전라북도 문화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시던데요. 정작 자치단체들은 말과 생각으로는 문화가 도시를 살릴 수 있다고 하면서도 실천에 옮기는 일에는 소극적입니다. "그것이 좀 답답합니다. 문화는 새로운 시대의 중요한 경제 가치입니다. 이미 많은 나라와 도시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요. 저는 전주와 전북의 문화파워가 한국의 중심이 되고 세계로 나갈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문화에는 유니버설리티(universality)와 로컬리티(locality)가 있잖아요. 보편성과 지역성. 그러나 지역성을 가지면서 그것이 보편성을 띠려면 지역성이 아주 뛰어나야 합니다. 전주와 전북은 그런 자원과 역량이 충분합니다. 전북이 우리나라 문화산업화를 이끄는 저작권 중심지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궁극적으로는 문화산업화의 중심 역할이 되겠지요. 대단한 예산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의지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입니다."-문화산업의 시대에 전북의 경우, 자원은 많으나 산업화의 길은 찾지 못한다는 지적이 있어왔습니다. "지금은 OSMU(one source multi uses) 시대입니다. OSMU를 순수한 우리말로 하면 '우려먹기'예요. 나쁜 뜻이 아닙니다. 좋은 원작으로 2차 3차 창작물을 개발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 성공이 뮤지컬 '맘마미아'잖아요. 하나의 좋은 원작은 뮤지컬 발레 영화 음악 등 다양한 창작물을 만들어내고 가치를 높입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저작권입니다. 저작권법의 목적은 저작권자를 보호하는 것이지만 단순히 창작자를 보호하는 것만은 아니에요. 좀 더 분명하게는 '창작자를 보호하고 공정한 이용을 도모함으로써 문화 및 관련산업의 향상발전에 이바지함'이 목적입니다. 저작권법이 추구하는 최고의 목표는 문화발전, 문화산업의 발전에 있습니다. 전북이 문화산업에 진정한 눈을 뜨게 되면 가장 가능성 있는 지역이 될 수 있습니다."

  • 기획
  • 김은정
  • 2012.12.11 23:02

"도민들의 미술에 대한 안목 넓고 깊어져 보람"

지난 10월 19일 전북도립미술관에서 개막한 세계미술거장전'나의 샤갈, 당신의 피카소'는 여러 이야깃거리를 남기고 있다. 세계미술계를 주름잡은 작가의 원작들을 우리 고장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것 자체가 처음 있는 일이다. 10억원 가깝게 투입된 전시회가 얼마만큼 성과를 거둘 지도 개막전부터 관심사였다. 기대반 우려반 속에 출발한 전시회는 개막 7주만에 7만 관람객을 돌파했다. 주당 평균 1만명이 전시회를 관람할 만큼 '대박'을 터뜨린 셈이다. 이흥재 전북도립미술관장(58)을 만나 거장전 유치와 진행 과정을 들어보았다.-내년 2월 17일까지 진행되는 세계미술거장전이 중반을 넘어섰습니다. 중간 평가를 해주십시오."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관람하느냐가 외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잣대인데, 관람객 수에서 일단 성공작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개막 7주 동안 7만명이 관람했으며, 이 추세라면 최소 10만명 이상 관람객을 유치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관람하며'열광'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블록버스터급 전시회에 그만큼 목말라 했다는 방증입니다. 80대 어느 노부부가 전시장을 찾아 제 손을 꼭 잡고 감사하다고 하더이다. 죽기 전에 피카소 작품을 직접 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는 거예요. 그림에 '그'자도 모르는 음식점에서 서빙하는 어느 아주머니는 친구와 함께 전시장을 찾은 뒤 입장료 2만원이 아깝지 않을 만큼 참 좋다고 했습니다. 전북도민인지 아니면 외지에서 온 분들인지 통계는 내지 않았지만, 타시도 관람객도 많습니다. 그림 마니아층이 오디오 가이드를 활용하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전북 이외 지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전시회를 찾는다는 것 자체가 이 전시회의 가치를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원작이 아닌, 판화 작품이 많아 전시 작품의 질에 문제가 있다는 평가도 있는 데요."유화 작품 원본만 전시하려면 엄청난 비용이 듭니다. 유일본이 아니라 작가 본인이 판화로 찍어낸 작품이라고 해서 그 가치가 결코 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서울 등 다른 전시회에서도 원본만으로 전시회를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샤갈, 피카소, 마네, 모네, 세잔, 몬드리안, 미로, 앤디 워홀 등 인상주의 화가부터 입체파, 초현실주의, 팝아트 작가에 이르기까지 근현대 작가들을 대거 아우르는 작가들의 작품들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전시회가 전국적으로도 흔치 않습니다. 광주·대전·제주·부산·포항시립미술관장들이 직원들과 함께 대거 다녀갔으며, 자신의 미술관에서 이 작품들을 그대로 전시하고 싶다는 의향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물건'이 좋지 않으면 어떻게 이리 많은 전문가들이 전시회를 찾겠습니까."-거장전이 지역 문화예술에 미친 파급이 있다면."어떤 분이 그러더이다. 거장전을 보지 않으면 화제에 낄 수 없다고. 또 술자리에서 안줏거리의 격이 달라졌다는 거예요. 교과서로 본 작품을 원작으로 보면서 아우라를 느낀다는 사람도 있고, 그래서 몇 번씩 전시장을 찾는 분들도 있습니다. 도민들이 미술에 대한 안목을 넓히고 깊게 하는 데 일조를 했다고 자부합니다. 전시장에서의 예절을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또 미술관 자체 기획에 대한 의미도 큽니다. 예산이나 경험이 없어 대부분 기획사에서 전시회를 기획하는 데, 자체 기획을 통해 노하우를 쌓은 것도 우리의 자산이 될 것 같습니다."-어떻게 전시회를 유치하게 됐습니까. "도민들이 서울에 가지 않고도 명화를 볼 수 있게 하자는 게 지사님의 생각이었습니다. 사실 블록버스터급 전시회를 유치하기에 전북의 수요층이 적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전북에서도 이런 전시회 한 번쯤은 이제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본 것입니다. -유럽이 아닌, 베네수엘라에서 작품을 빌려왔는데요.△당초 유럽쪽에 선을 댔으나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작품 임대비용이 비쌌습니다. 결과적이지만, 베네수엘라 국립현대미술관 등으로 선회한 것이 잘 된 일이었습니다. 유럽쪽에서 왔다면 이리 많은 작품들을 들여오기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전시회 진행 과정에서 아쉬움도 있을 텐데."전시회 유치에 어려움을 겪다보니 정작 전시 과정에서 챙기지 못한 게 많았습니다. 주말 관람객이 한꺼번에 몰릴 때를 대비해 관람객 안내를 위한 체계적 관리가 미흡했고, 많은 관람객 입장에 따른 항온·항습 문제도 소홀한 감이 있습니다. 전시회에 들어간 뒤에서야 보안을 강화한 것도 아찔했습니다."-앞으로도 잠재적 관람층들을 겨냥한 관람객 유치활동이 필요할 텐데요. "겨울 방학이 되면 학생들의 관람이 많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특히 김승환 도교육감이 1억원의 후원금을 지원해 전시회의 교육적 기능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전북지역 학생들에게 3000원으로 관람료를 할인한 것도 이 같은 배경에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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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2.10 23:02

김을생 명인은 - 전통목기 가업 대물림…옻칠분야 1인자

1935년 남원시 산내면 백일리에서 2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조부로부터 목기를 가업으로 해 왔다. 1951년 전라목기기술학교에 들어가 자연산 옻칠법과 목기기술을 배웠다. 그러나 전주공고 졸업 후 군에 입대하면서 목기와 떨어졌다. 그의 아버지도 플래스틱 그릇과 스텐리스 그릇에 밀려 식탁에서 사라지는 목기업보다는 농사에 충실하려 했다. 전통목기를 가업으로 이어가겠다고 나선 것은 1969년 전역 후 일이다. 목기는 우리의 전통이고, 대대로 전승해 나가야 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15년간의 타향살이가 가업으로 전승돼 온 목기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것이다. 불교미술대전 장려상, 대한민국공예전 장려상, 전북민예품공예전 금상 등 다양한 수상 경력을 쌓으며 발우와 제기 등 목기 전통을 이어왔다. 옻칠 분야의 최고 명인인 김을생 선생은 1995년 공예인의 꽃인 '무형문화재 제13호(옻칠장)'로 지정됐다. 일찌감치 외아들 김연수에게 목기 가업을 전수했다. 7세 때 천자문과 사자소학을 배우고, 중학교 때 한학자 이상필 선생으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평소 논어와 맹자를 수백독하며 내면을 수련해 온 그는 현인들의 명언을 정리한 징심록(澄心錄)을 펴냈다.

  • 기획
  • 김재호
  • 2012.12.04 23:02

무형문화재 13호 옻칠장 김을생 명인 "남원에 목기박물관 만들어 관광자원 활용해야"

지난해 한국 불교의 세계화를 위해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를 방문한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스님이 유네스코 각국 대사 등을 대상으로 사찰음식체험행사를 개최했다. 그리고 행사에 사용된 발우(鉢盂바리)를 모두 선물했는데, 여기에 사용된 발우 110세트는 남원시 산내면에 있는 금호공예 김을생 명인이 납품했다.남원은 목기의 고장이다. 특히 남원시 산내면 백일리는 한국 목기의 발생지라고 할 만큼 유명하다. 실상사라는 큰 절이 목기를 필요로 했고, 목기를 만드는데 필요한 다양한 수종의 나무와 옻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왕실에 진상됐고, 당시 궁궐 목기는 모두 남원산이었다. 남원목기는 지금도 전통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몇몇 장인들 덕분이다. 남원에는 목기와 옻칠 부문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명인이 5명이나 된다. 그 중 옻칠장인 김을생 명인(78)을 지난 24일 남원시 산내면 백일리 금호공예에서 만났다. -남원지역에서 목기업이 성하게 된 원인은 뭐라고 생각하는지요."목기가 발달한 것은 간단히 말해서 목기 수요가 많은 실상사가 있어서 팔기가 좋았다고 봐야지. 실상사는 한 때 스님이 3,000여명에 달했다고 해. 당연히 제기, 바리때, 소반 등 목기 수요가 많을 수밖에 없었어. 또 지리산이라는 큰 산이 있으니까 나무와 옻을 구하기 좋았어. -조부와 부친께서 가업으로 하던 목기 사업을 3대 째 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은 목기업에 종사하지 않습니까."2남2녀 중 내가 장남인데, 동생은 해방 후 전주에 나가서 살고 있어. 나는 선대로부터 목기 일을 해 온데다 전라목기기술중학교에서 목기 만드는 일을 배웠기 때문에 목기에 눈을 떴지만, 당시는 목기업이 너무 어려워 가업 잇기가 힘들었어. 나도 처음엔 목기를 쳐다보지 않았어. 상품 가치가 없었거든. 그래서 전주공고에 진학하고, 군대도 공병소위로 임관해 1969년 공병대위로 예편했어.전라목기기술중학교는 전통 목기를 전승할 목적으로 1951년에 세워졌는데 1968년까지 18회 동안 480여명이 졸업했다. 김을생 명인은 1회 졸업생이다. 목기기술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중학교 정규 교육과정도 병행했기 때문에 졸업 후 전주공고에 진학했다. -그런데 어떻게 다시 목기를 만들게 됐습니까."전방 GOP에서 군대 생활하는데 적막강산이더라고. 그래서 틈틈이 책을 많이 읽었는데, 일본인들이 전통 가업을 중시하고, 가업을 대대로 이어간다는 것을 알게 됐어. 그러면서 '사람이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 있게 사는 것인가'를 고민하게 됐지. 그래 자연스럽게 고향의 목기를 생각했고, 전역 후 전통 목기를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 거야. 학교에서 목기 기술을 배웠지만 그 때는 확고한 신념이 없었지. -군대 제대하고 곧바로 목기업에 뛰어들었나요?"1969년 제대하고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목기를 만들겠다고 나섰어. 하지만 농사 짓던 부모님 반대가 아주 심했어.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아시니까. 나는 선조들이 준 전통을 묻어두기 보다는 잘 살려야겠다는 신념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결국 목기를 시작했지. 처음 '원백일리 부업단지'라는 상호로 시작했는데, 그 후 금호공예라고 바꿨어. 당시 시골사람들은 밥먹고 살기가 힘들었잖아. 우리 공장이 일자리를 주었고, 동네사람들은 공장에서 돈 벌어 아이들을 가르쳤어. -힘든 상황이었는데, 처음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당시에 목기공장은 없었고, 몇몇 집에서 농사지으며 부업으로 조금씩 만들었어. 전업으로 할 만큼 소득이 안되니까. 그 때문에 내가 공장을 세워 전통 가업을 잇겠다고 하자 주위에서 말리는 거야. 부모님이 크게 말렸어. 그 때 1천만 원은 컸어. 그런데 막상 해보니까 생각처럼 안되더라고. 논도 (저당)잡히고 해서 나중엔 재산이 다 넘어갈 지경이었어. 한때 '부모님이 말릴 때 들을 걸'하는 후회도 했지."-왜 그렇게 어렵게 된 겁니까."그때는 보부상이 있었어. 열심히 만들어서 그들에게 물건을 주었더니 돈을 떼어먹기 일쑤야. 원금의 절반도 안줘. 1년에 보리벼 나올 때 두 번에 걸쳐 주거나 아예 떼어 먹어." -어떻게 그 난관을 극복하셨습니까."공장이니까 사람을 써야 물건을 만들 수 있어. 그런데 목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나무하고, 초갈이하고, 건조하고, 재갈이 하고, 사포질하고, 몇 차례에 걸쳐 옻칠을 하는 등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돼. 인건비와 재료비 등 돈이 많이 든다고. 그런데 보부상들이 제품 대금을 떼어먹기 일쑤다보니, 아버님 재산까지 파산 직전이 되고 말았어. 뒤돌아보면 공장 만들고 4~5년은 참 힘들었다고. 애들은 커가고, 부모님 뵐 면목도 없고. 욕심 없이 바르고 가치 있게 살고자 했지만 갈수록 일이 풀리지 않아 참 힘들었어. 그러던 어느 날 집에 갔더니 일곱 식구가 냉방에서 자고 있더라고. 그걸 보고 악심이 생겼지. 그래 보따리에 물건 싸가지고 내가 직접 팔러 다니기로 했지.-도매상을 거치지 않고 직접 소비자를 찾아 갔군요."당시 제기 1벌에 3000원을 남기고 보부상에 넘겼어. 15벌 1짐이 3만 6000원이었지. 그런데 내가 어떤 주문이 있어서 구례에 갔을 때 그곳 사람에게 가격을 물었더니, 제기 1벌 가격이 20,000원 가까이 되더라고. 큰돈이야. 중간상을 통하지 않고 소비자에게 직접 팔아야 한다는 걸 깨달은 거지. 제기는 1벌이 37개로 구성된다. 또 15벌이 1짐이다. 그런데 중간상들은 1짐을 생산자로부터 3만 6000원에 받아 소비자에 판매하면서 엄청난 이문을 남긴 셈이다. 비록 당시 운송 수단이 좋지 않아 1짐(제기 555개)은 커녕 한 벌도 배달하기가 힘든 여건이었지만, 생산자 입장에서는 중간상을 거치는 게 큰 손해였다. 김을생 명인은 목기업을 시작하면서 제기와 함께 쟁반, 소반도 만들었다. 대중적인 제품을 만들어야 자금을 회전하며 공장을 가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기나 소반은 부피가 커 배달이 힘들었지만, 발우는 부피가 작고 돈도 됐다. 게다가 사찰(스님)은 보부상처럼 떼일 위험이 없었다. 김 명인의 판단은 적중했다. -그래서 발우를 만들었습니까."제기는 많이 만들기가 어려워. 그래 바리때를 주로 만들기로 했지. 바리때를 만들어서 스님들을 찾아갔어. 그런데 스님들이 바리때를 이리 저리 살펴보고선 '지금 이 세상에 옻이 어디에 있냐. 밥그릇인데 진짜 옻으로 만들어야지 화학재료를 쓰면 못써'하며 바리때 품질을 믿지 못하는 거야."금호공예에서 발우를 본격적으로 만들기 시작한 것은 1975년 무렵이다. 당시 우리 사회에서 옻은 귀했고 화학도료를 사용한 물건이 많았다. 스님들 공양에 사용하는 발우는 위생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스님들의 신중한 반응은 당연했다. -어떻게 설득했습니까."'돈 안 받을 테니까 일단 써 보시라' 하고 바리때를 놓고 나왔지. 4~6개월 후에 믿음이 가면 대금을 치르라고. 몇 개월 후 물건을 준 스님을 찾아갔더니 좋은 바리때라며 사주더라고. 진짜 옻칠을 한 발우는 처음에는 새까만데, 한참 쓰다보면 붉어지면서 반짝 반짝 광택이 나거든. 스님들이 식사하면서 어느 곳의 누가 만든 바리때가 좋더라는 말이 있으면 그 정보가 빠르게 퍼지지. 그렇게 시작된 바리때 사업은 적중했어. 얼마 후부터 내가 만든 바리때가 전국 사찰에 들어가게 됐지. 그렇게 바리때를 짊어지고 전국 사찰을 찾아다니는 보부상을 5~6년 했는데, 처음에는 자동차가 없어 고생도 많이 했어." 전국에 사찰이 3,000여개 된다. 절에서는 발우 외에도 불전이나 생활에서 사용하는 목기와 소반이 많다. 전통의 가치를 녹여 만든 그의 제품은 스님들의 마음을 끌었고, 모든 일이 술술 풀렸다. -그러면서 느낀 것도 많았을 것 같아요."사람은 어려움을 겪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해. 어려움을 어떻게 대처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거든.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어려움을 너무 모르고 사는 것 같아 안타까워." -평생 목기를 만들어 왔고, 무형문화재로 지정돼 명인의 반열에 올랐다. 마음 속에 두고 있는 좌우명은?"신용이 최고야. 나는 평생 신용을 지켜왔지. 전통 가치를 이어가려는 집안의 물건과 얼렁뚱땅 만들어 돈을 벌려는 집안의 물건은 하늘과 땅 차이가 있어. 나무는 잘 말리지 않으면 나중에 비틀어져. 예를 들어 바리때는 4개 이상의 그릇 중 가장 큰 그릇 안에 작은 그릇들을 차례로 포개어 하나처럼 만드는데, 포개어진 그릇끼리 부딪치지 않고 빙글빙글 잘 돌아야 해. 근데 돈이 급하다고 대충 만들면 돌지 않아. 불량품이야. 나는 처음부터 품질과 신용을 중시했어. 처음에는 어려워도 한번 신용을 얻으면 만사가 풀리게 돼 있어. -발우는 수작업으로 만듭니까? "가끔 스님들이 은사로부터 받은 금강산 바리때가 낡았다며 옻칠을 해달려고 가져오는데, 살펴보니까 세 사람이 수작업 한 것 같아. 추정해 보면, 원목을 긴 줄로 한차례 감은 뒤 양편에서 두 사람이 당기는 작업을 서로 반복하고, 기술자가 작업 칼을 이용해 빙글 빙글 도는 원목을 깎았어. 지금은 원동기를 이용해서 깎아. -목기 제품은 어떤 과정을 거쳐 생산됩니까. "제기, 바리때, 소반, 쟁반 등 만들 물건을 정한 후 그에 맞는 목재를 구해. 그리고 제품 크기에 맞게 절단하지. 바리때용으로 잘랐다면 먼저 초갈이를 하고, 음지에서 1년 정도 건조 과정을 거쳐. 1년 후 초갈이한 것 중에서 갈라지거나 뒤틀리지 않은 좋은 백기만 골라 재갈이를 해. -목기 종류별로 쓰는 나무가 다릅니까."발우는 은행나무 은사시나무, 제기는 물푸레나무 자작나무 오리목나무, 소반은 은행나무를 쓰지"-제기, 발우 모두 옻칠을 하는데, 옻은 어떻게 구합니까."여기서 가까운 곳에 있는 경남 마천은 우리나라 3대 옻나무 주산지 중 하나야. 산내에서 목기가 발달한 것도 나무와 옻을 구하기 쉬웠기 때문이야. 옻나무에서 칠을 내려면 세 사람이 필요해. 나무에 흠집내고, 칠을 긁어내고, 그릇에 담는 사람이 필요하지. 옻 내는 사람은 꼭 문둥병자처럼 피부가 좋지 않아. 그만큼 작업이 힘들기 때문에 누가 일하려고 하지 않아. 이런 저런 사정 때문에 옻 50그램이 12만원씩 해. 게다가 인건비도 비싸서 이윤은 많지 않아."-옻칠하는 작업장 조건은."화학칠은 햇빛만 좋으면 잘 말라. 그러나 천연 옻은 날씨가 좋다고 마르는 것이 아니야. 조건이 맞아야 돼. 습도 85%, 온도 섭씨 30도 조건이 모두 맞아야 옻이 말라붙는단 말이야. 그래서 별도의 칠장을 만들어서 습도와 온도를 인위적으로 맞추는데, 그런 상태면 하루 만에 말라. 단, 여름에는 밖에서도 잘 말라."-옻칠은 1,000년을 간다고 들었습니다. 특성은."옻은 나무에 대한 침투력이 강해. 화학 칠은 석유를 묻히면 닦이지만, 옻칠은 절대 벗겨지지 않아. 그리고 방수가 잘되기 때문에 나무가 절대 썩지 않아. 신안 앞바다에서 발견된 보물선이 썩지 않은 것도 옻칠 때문이라고. 또 살균 살충효과가 있고, 처음 새까맣던 색이 갈수록 붉은 빛을 띠면서 윤기가 나는 것도 옻칠의 장점이지."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는 작업에 남다른 열정을 쏟는 이유가 있습니까."내가 이 인터뷰를 하는 이유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전통에 대해 관심을 갖고 전통의 가치를 계승 발전시켰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지. 목기든 뭐든 전통으로 하는 것은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그런데 정치하는 사람들이 관심 갖지 않는 게 문제야. 예를 들어 남원에 목기박물관을 만들면 좋을 텐데 관심이 없어. 남원목기와 칠을 전승하는 전국 유일한 시설이 들어서면, 목기 만드는 체험도 하는 등 관광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고, 일자리도 늘어나니 좋지. 남원목기의 1,500년 역사를 (스토리텔링해서) 문화 상품으로 만들어야 돼. 대한민국 목기의 전통은 남원 목기야. 이곳에 목기박물관을 세우면 외국인들도 많이 방문하고 제품도 사갈 거야."-발우를 만들고, 사찰을 돌아다니면서 스님들과 인연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은사 스님들은 제자에게 세 가지를 물려주는데 가사와 장삼, 그리고 바리때라고 해. 스님이라면 반드시 이 세 가지는 지니고 있는 거지. 그래서 일을 하면서 항상 스님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어. 일타스님, 서암스님 등은 이곳을 지나면서 꼭 들러주시고, 이런 저런 조언도 해 주시고, 바리때도 팔아주었지. -금호공예 전시장 앞 화강석에 '복 짓는 법'을 새겼던데요. "사람들은 복을 받고 싶어하는데, 복을 받기 전에 복을 지어야 해. 복을 지으려면 씨를 뿌려야지. 복전(福田)의 첫째는 남에게 베푸는 거야. 보시(普施)야. 내가 도움을 준 그 사람이 잘 되면 그 복이 내게 돌아오게 돼 있어. 둘째, 경전(敬田)이야. 어른한테 공경할 줄 알아야 해. 셋째, 은전(恩田)이야. 부모 은혜를 잘 알라는 것이지. 그리고 비전(悲田남을 불쌍히 여김)과 시전(施田가난한 자를 돕고 병자를 구제)도 있어. 끝으로 낙전(樂田이)은 극락세계를 안다는 뜻이야. 우리가 좋은 마음을 갖고 좋은 일을 하면 극락세계로 간다는 마음을 가져야 복을 짓고 세상살이가 즐거운 것이야. 그 중 가난한 자와 병자를 구제하는 것이 복을 짓는 으뜸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지.-칠시(七施)는요."일곱가지 보시야. 부족한 사람 돕고, 항상 웃는 눈빛과 얼굴, 상냥한 말씨로 응대하면 복 받는 거지. -동네 입구에 제심서원(濟心書院)이라는 간판이 눈에 띄던데, 직접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1980년에 만들었어. 사람이 자기 마음을 제어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야. 이 일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문, 한학을 가르쳤어. 지금 우리가 한문, 한학을 하지 않으면 안돼. 우리말 어원의 80%가 한자에서 나왔다고. 그걸 배우지 않으면 조상 근원도 몰라. 읽을 수도 없고 어떤 뜻인지도 모르잖아. 공자는 파당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했어. 학자들이 한글과 한문 파당을 만들고, 한문을 못하게 하는 것은 큰 문제야. -독자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죠."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람다운 가치를 가져라, 전통을 이어가면서 선조 혼을 잊지 말라고 말해 왔어. 한 때 세계를 호령한 칭기즈칸의 나라를 봐라. 전통이 보잘 것 없잖아. 우리는 좋은 전통을 많이 갖고 있다고. 자부심을 가지고 전통을 세워야 일등국민이 돼. 그러기 위해서는 국방이 중요해. 나라는 한 번 지키지 못하면 모든 것을 잃고 말아. 그런 가치, 근본을 잊어선 안돼.

  • 기획
  • 김재호
  • 2012.12.04 23:02

임실군 치즈산업 - 입맛 잡은 임실치즈, 이제 맛있는 체험으로 승부

지난 1970년대 초 임실성당에 부임한 지정환 신부(본명 디디에세르스테반스)에 의해 치즈의 메카로 자리한 임실군은 최근 치즈산업의 희망으로 한껏 부풀어 있다. 특히 정부와 자치단체의 집중적인 관심과 투자에 힘입어 작금의 임실지역에는 치즈와 관련된 다양한 관광 및 유가공산업의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다.△임실군 신성장 동력산업 치즈산업지난 2004년 치즈과학연구소 건립사업을 시작으로 임실에는 지역농업클러스터사업과 치즈피아 조성사업, 치즈테마파크 조성사업 등이 차례로 들어섰다.이에 앞서 임실치즈마을은 10여년전부터 치즈체험과 관련된 다양한 콘텐츠를 선보이면서 어린이와 가족을 동반한 체험관광지로 전국에 명성을 떨쳐왔다.주민의 자발적 운영진 구성과 프로그램도 직접 개발해 인기를 끌고 있는 치즈마을은 최근 연간 10만명의 체험객이 몰리면서 농촌체험마을 성공케이스로 자리했다.여기에 힘입어 성수면 도인리 13만㎡의 부지에 조성된 임실치즈테마파크도 지난해 개장하면서 폭발적인 관심지로 부상하고 있다.이곳에는 총사업비 564억원이 투입된 가운데 치즈과학연구소와 치즈피아, 낙농클러스터 및 체험테마파크가 조성됐다. 눈여겨 볼만한 것은 이곳을 바탕으로 임실군의 주요 관광지인 옥정호와 필봉풍물촌, 성수산 등을 연계한 관광벨트화가 가시화 되고 있다는 점이다.하지만 문제점도 다양하게 표출되고 있어 이에 따른 대책도 시급하다는 지적도 제기됐다.최근 임실군이 치즈체험객을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에서 방문객의 50%가 체험교육을 목적으로 방문했으며 42%는 관광과 체험교육 병행이 차지했다.또 구체적 방문목적으로는 치즈 및 치즈요리만들기체험에 80%가 응답했고 결정적 방문요인으로는 치즈에 대한 호기심이 37%, 체험관광이 34%로 뒤를 이었다.이와 함께 방문객 불만족 요인으로는 체험프로그램 빈약도가 45%를 차지했고 주변 경관 및 환경미비의 경우도 29%가 지적됐다.이 때문에 임실군은 중점 추진과제로 구성원의 경영마인드 제고와 초지를 활용한 관광목장 등의 기반조성, 체험프로그램의 다양성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더불어 마케팅 부문에서도 치즈의 신제품 개발과 기술축적을 비롯 생산자조직 및 가공업체와 체험업체간의 협력시스템 구축도 모색 중에 있다.△치즈산업 활성화 위한 생산기반임실군이 추구하는 치즈의 신성장 동력산업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기업과 주민이 동참하는 생산기반 구축이 필수적 요건이다.치즈를 생산하는 임실군의 젖소 사육두수는 4015두로써 도내의 13%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중 낙농가는 62농가에 그치는 빈약한 실정이다. 여기에 원유생산량은 1일 48톤으로 전국 대비 1%에 불과하고 도내에선 13.2%를 차지하고 있다.낙농단체로는 (사)한국낙농육우협회임실군지회와 (사)임실치즈생산자협의회 등이 있으며 임실군 산하 치즈과학연구소가 이들을 지원하고 있다.이와 함께 유가공업체로는 우유와 발효유 전문 생산업체인 (주)푸르밀을 비롯 치즈를 생산하는 임실치즈농협이 연간 매출액 1950억원으로 쌍두마차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이플'과'목장의 아침'등 영농조합으로 구성된 10여개의 목장형가공공장이 지역별로 등장하면서 임실지역에는 유가공업이 성행을 이루고 있는 것. 임실군의 지원아래 이들은 대부분 소규모 생산체제를 갖추고 값비싼 숙성치즈와 고급형 요구르트를 생산, 자체 판매루트를 통해 운영 중에 있다.임실군은 이 같은 소규모 유가공업체에 대한 기술이전과 시설비, 마케팅 알선 등 다각적인 지원을 통해 원활한 생산기반 구축에 총력을 쏟는다는 방침이다.△치즈산업의 미래전략 사업목표이 같은 임실치즈산업의 발전을 위해 임실군은 미래전략 사업목표를 수립, 임실치즈를 활용한 체험관광산업화로 지역경제 활성화에 주력한다는 계획이다.사업목표로는 임실치즈산업 사업주체의 통합조직화를 바탕으로 산학연관민의 네트워크 구축을 강화하고 다양한 체험관광 콘텐츠 개발과 관광상품화에 총력을 쏟는다는 방침이다. 더불어 지역의 문화관광 지원과 연계한 체험관광 상품개발에 주력하고 이를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를 미래전략으로 설정했다.비전제시를 위한 구체적 추진전략으로는 치즈산업의 통합 네트워크를 구축해 사업주체의 통합조직화와 사업단 운영, 역량프로그램 운영 및 네트워크 다변화를 꼽고 있다. 또 체험문화 기반조성 및 다양한 마케팅 부문에도 치즈체험을 위한 홍보와 임실N치즈피자 공동마케팅, 치즈요리 개발과 문화이벤트 등도 구상하고 있다.이밖에 임실체험 관광상품의 산업화를 위해 체험관광 콘텐츠 개발과 문화자원 연계, 낙농체험장 조성 등에 박차를 가한다는 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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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2.04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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