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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기의 서예·한문 이야기] (18)묵소거사(默笑居士) 자찬(自撰) -추사 김정희의 글씨(5)

當?而?, 近乎時, 當笑而笑, 近乎中.周旋可否之間, 屈伸消長之際. 動而不悖於天理, 靜而不拂乎人情. ?笑之義, 大矣哉. 不言而喩, 何傷乎?. 得中而發, 何患乎笑. 勉之哉. 吾惟自況, 而知其免夫矣. ?笑居士自讚.응당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한다면 상황에 맞게 처신한다 할 수 있고, 응당 웃어야 할 때 웃는다면 중용(中庸)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는 여러 상황이 있다.) 가능한 일과 불가능한 일을 조절해야 할 때도 있고, 몸을 굽혀야 할 때와 나래를 활짝 펼 때가 있으며, 뭔가를 없애야 할 경우가 있는가 하면 북돋아야 할 경우가 있다. 이런 때, 저런 경우마다 때로는 활발히 움직여 활동하면서도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고, 때로는 조용히 멈춰서면서도 인정(人情)을 저버리지 않아야 한다. (이런 저런 어떤 경우에도 침묵하는 가운데 빙그레 웃는 '?笑'처럼 좋은 처신은 없는 것 같다.) 그러니 ?笑의 의미는 참으로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지 않고서도 상대를 깨우칠 수 있다면 침묵한다고 해서 해를 당할 일이 무엇이겠으며, 중용의 입장에서 웃음을 보인다면 웃었다고 해서 무슨 환난을 당하겠는가? 그러니 ?笑하기에 힘써야겠다. (지금 실어증에 걸려 말을 못하는 가운데 빙그레 웃기만 하는) 나의 경우에 빗대어 봄으로써 (묵소하며 산다면 세상의 모든 비방과 환난을) 면하고 살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當:응당 당/ :잠잠할(침묵할) 묵/ 笑:웃을 소/ 周:두루 주/ 旋:돌(선회) 선/ 屈:굽힐 굴/ 伸:펼 신/ 消:사라질 소/ 際:즈음(때)/ 悖:어긋날 폐/ 拂:털(털어낼) 불/ 矣:어조사의 哉:어조사 재/喩:깨우칠 유/傷:상할 상/ 患:병 환/ 勉:힘쓸 면/惟:오직 유/ 況:빗댈 황/ 免:면할 면/ 讚:기릴 찬오늘 소개한 글은 상당히 길다. 그러나 약간의 인내심을 가지고 읽으신다면 큰 재미와 보람을 느끼시리라고 생각한다. 짧은 글이지만 속뜻이 너무 깊어 필자도 번역하는데 적잖이 고심했다. 번역의 어려움을 다시 한 번 실감한다.이 작품은 추사의 나이 51세에서 54세 사이에 쓴 것으로 추정하는데 추사 해서(楷書)의 백미이다. 원래는 추사 자신이 짓고 쓴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2006년 국립중앙박물관이〈추사 김정희, 학예일치의 경지〉라는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작품의 둘레를 빙 돌아가며 찍힌 도장이 추사의 절친한 친구인 황산(黃山) 김유근(金?根1785~1840)의 것임을 발견함으로써 김유근이 글을 짓고 추사가 글씨를 쓴 것으로 추정하게 되었는데 후에 김유근의 문집인 《황산유고(黃山遺稿)》에 이 〈묵소거사(?笑居士) 자찬(自讚)〉이 수록되어 있음을 확인함으로써 김유근의 글임을 확정하게 되었다. 게다가 김유근이 1837년부터 1840년까지 실어증에 걸려 고생했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이 글을 실어증에 시달리던 그 시기에 지은 것으로 짐작하게 되었고 글씨 또한 그 시기 즉 추사의 나이 51세에서 54세 사이에 쓴 것으로 추정하게 되었다.김유근의 이〈묵소거사 자찬〉은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인생의 질(質)이 크게 달라짐을 보여주는 명문(名文)이다. 실어증에 걸린 상황에서 침묵하는 가운데 웃을 수 있음에 감사하며 오히려 그런 침묵과 웃음으로 자신을 갈고 닦으려 하는 태도가 얼마나 여유롭고 긍정적인가? "말하지 않고서도 상대를 깨우칠 수 있다면 침묵한다고 해서 해가 될 일이 무엇이겠으며, 중용의 입장을 지키면서 웃음을 보인다면 웃었다고 해서 무슨 환난을 당하겠는가? 그러니 말이 없는 가운데 빙그레 웃기에 힘써야겠다."고 하며, 실어증에 걸리고 보니 그런 '?笑'의 진리를 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다고 말하는 작자 김유근은 이미 삶에 달통한 도인(道人)이라는 생각이 든다. 추사의 글씨 또한 글만큼이나 명작이다. 추사의 작품 중에 해서가 별로 보이지 않는데 이작품은 유독 해서로 또박또박 쓴 걸 보면 글씨에도 '말없이 빙그레 웃는' 수신(修身)의 의미를 담고자 한 것 같다. 필획에서 마치 살아있는 물고기를 잡았을 때 용쓰는 물고기의 힘과 같은 그런 힘을 느낄 수 있다.?笑, 말없이 빙그레 웃는다는 것!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마음이 편하고 쾌활해야 빙그레 웃을 수 있는데 어디 범인(凡人)들이 그렇게 할 수 있나? 말을 안 하다보면 평안해지기는커녕,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울증에 빠지고 마는데 어디에서 '빙그레'웃음이 나올 수 있겠는가? 힘쓸지어다. 힘쓸지어다. 말없이 웃을 수 있도록.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1.06.29 23:02

'엄마를 부탁해', 아마존닷컴 상반기 베스트10

지난 4월 미국에서 출간된 신경숙의 장편 '엄마를 부탁해(Please Look After Mom)'가 최대 인터넷서점 아마존닷컴 상반기 결산(Best of 2011 So Far)에서 편집자가 뽑은 베스트 10에 뽑혔다. 아마존닷컴이 최근 편집자에게 의뢰해 뽑은 2011년 상반기 베스트 10에 따르면 '엄마를 부탁해'는 쟁쟁한 베스트셀러를 제치고 10위에 올랐다. 또 이 책은 또 편집자 선정 픽션 부문에서는 4위에 랭크됐다. '엄마를 부탁해' 영문판은 아마존닷컴 전체 순위에서는 100위권 밖으로 밀려났지만 '문학ㆍ픽션' 부문의 하위 분류인 '본격문학(Literary)' 부문에는 29위에 올라있다. 신경숙 작가의 해외 판권을 관리하는 KL매니지먼트의 이구용 대표는 "신 작가의 작품이 아마존닷컴 편집자 선정 베스트 10에 뽑혔다는 것은 상업적인 면 뿐만 아니라 작품가치 측면에서도 충분히 인정받게 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 책은 지난 4월 출간 하루 만에 아마존닷컴 전체 순위 100위에 진입하는 등 미국 시장에 선보이자마자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뉴욕타임스에 두 차례 소개되는 등 현지 언론과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순위 양장본소설(Hardcover Fiction) 부문에서는 14위까지 올랐다. 이 책의 영문판을 펴낸 미국의 유명 출판사 크노프는 출간 전 이미 초판 10만부를 찍었고 지금까지 8쇄까지 소화했다. 미국 등 28개국에 번역 출간됐다.

  • 문학·출판
  • 연합
  • 2011.06.29 23:02

국제해운문학상 송재옥·강진숙 시인

(주)국제해운(대표이사 윤석정)과 열린시문학회 시창작교실(대표 이운룡)이 시상하는 '제5회 국제해운문학상'의 대상은 시집 '시간 구워먹기'를 펴낸 송재옥 시인에게 돌아갔다. 본상은 시 '푸른 축제' 외 25편을 지은 강진숙 시인이 선정됐다. '제22회 열린시 문학상' 금탑상에는 강태구 시인과 이현정 시인이 받는다.심사위원회(위원장 이동희)는 27일 시집을 출간했거나, 1년간 신작을 발표한 후보자 중 우수한 작품을 내놓고 왕성한 활동을 한 4명을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밝혔다.송 시인의 작품은 현대 문명세계의 비극적인 삶을 여과시켜 강도 높은 휴머니즘을 드러냈으며, 풍자성 짙은 철학적인 심상을 표현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송 시인은 1991년 '표현'을 통해 신인작품상으로 등단한뒤, 열린시문학상·모악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한국문인협회·전북문인협회·전북시인협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강진숙 시인은 2009년 '한국문학예술'로 등단, 삶에 대한 문제의식에 천착해 존재의 부조리나 모순 등을 바로잡기 위한 내면의식을 미적감각으로 승화시킨 시를 창작해왔다. 삶의 여백을 채우는 서정적 세계를 보여준 강태구 시인은 2004년 '해동문학'으로 문단에 나와 전북문인협회, 전북시인협회, 전주문인협회, 열린시문학회 회원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짙은 서정성을 함축성이 강한 시어로 표상해 온 이현정 시인은 10년 간 창작 수련을 거친 중고 신인이다.'국제해운문학상'은 군산에 지사를 둔 (주)국제해운 윤석정 대표이사가 매년 창작지원금(대상 300만원, 본상 200만원)을 지원하면서 창작의욕을 고취시키고 있다. 전북 출신으로 포항해운항만청장, 목포해양수산청장, 바다살리기국민운동본부 사무총장을 역임한 윤 대표는 지역 문학 활성화에 헌신하고 있다. '열린시문학상'은 올해부터 (유)현대건설안전연구소 김병국 대표이사가 기업의 메세나 운동으로 창작지원금(200만원)을 지원하면서 지역 문단의 경쟁력을 제고시키고 있다. 시상식은 7월 1일 오후 4시 전주 완산구청 8층 대강당에서 열린다.

  • 문학·출판
  • 이화정
  • 2011.06.28 23:02

[최명표의 전북 작고 문인을 찾아서] (19)전북 서정시의 원정, 최승렬

최승렬(園丁 崔承烈·1921~2003)은 전주 출신의 시인이다. 아버지 없이 자란 그는 살아가는 내내 어머니에게 지극한 효자였다. 그에 관한 하나의 일화이다. 그는 어릴 적에 서울의 여관에서 부엌에 장작을 지피고, 수원의 한 종묘장에서 씨앗을 골라내었다. 그는 일해서 받은 첫 월급으로 어머니에게 흰 고무신을 사다드렸는데, 어머니는 아들이 땀흘려 번 돈으로 사온 고무신이 아까워서 평생 동안 한번도 신지 않고 아끼다가 신발은 결국 영위 앞에 놓였단다. 그의 시에서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철철 넘치는 사연이다. 청년 시절에 그는 흥안령 계곡과 몽고의 고비사막을 방황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고생과 방랑으로 점철된 그의 성장기는 커서 타인과의 접촉 기회를 차단하고, 자신을 문학과 학교 속에 유폐하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그는 해방 후에 귀국하여 국학대학을 졸업하고 목포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의 인연으로 그의 첫 동시집 '무지개(항도출판사·1955)'가 목포에서 출간된 것이다. 그 뒤에 그는 서산 등지를 전전하다가 전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도내 신문지상에 활발히 작품을 발표하면서 생애 처음으로 안락을 누렸다. 고향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그는 어머니의 품에 안긴 아들처럼 평안하였고, 신석정을 찾아다니며 시를 공부하였다. 그런 이유로 그의 시에는 석정의 시풍이 배어 있다. 석정도 그를 끔찍하게 아꼈던지, 동시집에 글을 써주고 격려하였다.최승렬은 전쟁 후에 전북 시의 전통이었던 전원시를 다시 꽃피웠다. 그에 이르러 엄격한 자기 수양으로부터 비롯된 정갈한 시형이 다시 살아났다. 그가 전주에 있는 동안에 쓴 작품들에는 자연 취향이 남다르게 표출되어 있다. 아마 고향에 돌아와 생활하는 도중에 갖게 된 정신적 아늑함이 평화한 성정을 돋보이도록 도와주었을 터이다. 아울러 이 시기에 전라북도의 시단을 지배하던 서정적 경향은 그의 시적 어조를 단정하게 가다듬어주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엄연히 시집을 낸 시인이라고 할지라도, 동시인 축에 들어야 맞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들은 온통 사모곡이었고, 시적 주제는 항상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그는 오로지 아들의 효도를 받지 못하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수단으로 시를 썼던 것이다.그런 성향은 전쟁 후에 발간된 시집이라고 해서 달라지지 않았다. 도리어 동족상잔을 겪는 동안에 어머니를 추억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해졌다. 그가 전후에 발간한 시집에서 전쟁이라는 거대 서사를 다루었을지라도, 그것은 결국 초기의 시편에서 잦게 출현하던 어머니를 찾아가기 위한 우회로에 마련된 전략적 대상물이었을 뿐이다. 그에게는 전란이라는 비극상조차 궁극의 여성적 이미지를 구현하기 위해 필요한 소도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을 일러서 전후시의 비인간적 경향을 수용했거나, 실존적 존재의 의미를 탐색했다고 별명할지라도, 그것은 어머니를 찾으며 종료하게 된다는 점에서 특별한 차이가 없다. 최승렬에게 자연은 어머니요, 어머니는 곧 자연이었던 셈이다.최승렬 시의 형식적 특징은 감정의 절제와 언어의 조탁으로 요약할 수 있다. 예컨대, 그는 새봄의 기운을 독자에게 전하기 위해서 소리 외의 움직임을 고의로 사상하여 감각적 이미지를 보여준다. 또 그는 시의 여백 효과를 충분히 살리기 위해 불필요한 언어들을 과감히 삭제해버린다. 이런 노력들은 그의 성품을 닮은 것일 테지만, 전쟁 후의 산란한 마음들을 위로하기에 알맞다. 도처에서 분출하는 소란한 소리는 전후의 일반적인 풍경이거니와 이런 상황에서 시가 담당할 수 있는 최우선적 기능은 위안일 터이다. 그는 이처럼 시인으로서의 사회적 책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가 전원의 아름다움을 집요하게 시화한 이면에는 전쟁으로 인해 피멍든 가슴을 치유하려는 의도가 작용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 점은 그의 시가 획득할 수 있는 시사적 의의이다.1950년대 전북의 문단을 빛내던 그는 1957년 초에 인천으로 주거지를 옮겼다. 그는 제물포고등학교와 대건고등학교를 거쳐 신명여자고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교육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 동안에 시집, 국어 연구서 등을 출판하며 고향을 그리워하였다. 이런 연유로 그는 전북문학사에서 출향 인사로 분류되어 논의선 밖에 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작품들은 사장된 채, 지금껏 변변히 거론되지 않는 실정이다. 그 원인들 중에서 그의 결벽에 가까운 성품 탓이 크다. 그는 '소년시집'이라 불리우는 '푸른 눈동자에 그린 그림'(익문사·1975)의 머리말에서 '스스로 사람들 틈에 끼어 법석대기를 꺼리는 성미라 홀로 초야에 묻혔다'고 고백한 것처럼,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싫어하여 문단 활동을 삼갔다. 그가 좀더 폭넓게 교유하고 활동했었더라면, 도내 문단에 끼친 영향은 더욱 확대되었을 것이다. 이 점은 그가 최근까지 활약한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전기적 이력조차 온전하게 재구성하기 힘들도록 만든 요인이다. 그의 시적 성과에 관심이 필요한 이유이다.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1.06.28 23:02

"전북문인협회가 중심 돼 추진하자"

한국 시조문단의 거목인 구름재 박병순 선생(1917~2008)의 생가 복원사업이 첫발을 뗐다.25일 시인의 고향인 진안군 부귀면 적내마을에서 가진 생가 복원 발기모임에서 전북문인협회(회장 이동희)가 중심이 돼 문단적 사업으로 전개되어야 한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됐다.이들은 이날 모임에서 국내 시조문학의 거목인 박병순 시인의 생가 복원을 위해 힘을 모을 것을 다짐했다.이동희 회장은 "없는 문학적 자산도 발굴하는 상황에 가람 선생의 맥을 잇는 시조시인의 생가를 방치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며 "진안군이 소중한 자산이 흩어지기 전에 모아 바로 세우는 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구름재 시인은 시조시인이자 교육자, 한글 운동가로 외길 인생을 살아오며 실천적 교육자로 존경받았다. 김해강 시인을 통해 시에 눈을 뜨게 됐으며, 고향을 떠나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해 시조를 통해 민족의식을 다졌다. 참혹한 일제 치하에서 '시조집'을 몰래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에 잡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8·15 해방 후 구름재 선생은 만학으로 전북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스승인 가람 이병기 선생을 중심으로 시조 부흥에 힘썼으며, 최승범 최진성 장순하 등과 함께 '새벽' 동인을, 신석정 백양촌 장순하 최승범 등과 함께 '가람동인회'를 조직해 활동하기도 했다.1938년 동광신문에 시조 '생명이 끊기기전에'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온 시인은 평교사로만 40여년 가까이 교단을 지키면서 '별빛처럼', '문을 바르기전에', '새 눈 새 맘으로 세상을 보자' 등 많은 작품집을 냈다.이날 모인엔 김남곤(시인·전북일보사 사장), 손석배(아동문학가), 최공엽(전 전북적십자협회장), 허소라(시인·군산대 명예교수), 이운룡(시인·문학박사), 허호석(아동문학가·전 진안예총회장), 유휘상(시인·전라시조문학회장), 정순량(시인·우석대 명예교수), 이승철(진안예총회장), 송영수(진안문인협회장), 양규창(전북문인협회 사무국장) 등이 참석했다.

  • 문학·출판
  • 이화정
  • 2011.06.27 23:02

고은 시인 문학·사상 재조명

노벨문학상 유력후보로 거론돼 온 고은(78) 시인의 문학적 가치와 위상을 정립하기 위해 민간주도로 추진된 '만인의 물결 군산운동본부'가 다음달 1일 군산에서 출범한다.운동본부는 이날 오후 5시30분 군산 궁전예식장에서 아리랑TV의 초청 인터뷰 장면 상영을 식전행사로 발대식을 갖고 국악공연, 시낭송, 피아노연주 등 축하공연과 특별행사로 고은 사인회를 마련한다.운동본부는 출범식을 계기로 고은 선생의 작품세계와 인물에 대한 재조명과 생가 복원, 문학관 건립 등을 통해 문화자원화에 나서 그의 문학적 가치를 연계하는 기념사업을 본격적으로 시행해 나갈 계획이다.또한 1인 1만원(년) 기금마련 운동과 다양한 홍보활동을 통해 향후 고은 문화재단을 설립한다는 계획이며, 문화재단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전국 10만명 회원확보를 목표로 운영된다.이와 함께 풍요물결, 감동물결, 평화물결이란 세가지 주제와 조직구성으로 '현장홍보'와 인터넷을 통한 온라인 '사이버 홍보클럽'을 운영한다.운동본부의 산파 역할을 해 온 조시민 만인보문화재단 준비위원장은 "만인의 물결 운동본부는 고은 선생과 그의 대표작인 '만인보'의 정신을 함께하고 홍보하기 위해 민간이 주축이 돼 추진돼 왔다"며 "선생이 태어난 군산에서부터 시작해 전주 등 도내는 물론 전국적으로 확산돼 나간다면 노벨상 수상에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한편 고은 시인은 군산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로 1958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후 1960년 첫 시집 '피안감성'을 내면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 수십편의 시집을 발간했다.시인이 집필한 '만인보'는 민족의 다양한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지난 1986년부터 2010년까지 총 30권 3800여편이 시집으로 연작되면서 세계최대 인물 대서사시로 평가받아 지난해를 비롯해 노벨상 유력 후보로 수년째 거론돼 왔다.

  • 문학·출판
  • 이일권
  • 2011.06.27 23:02

[김병기의 서예·한문 이야기] (17)해남 대흥사의 현판들

枕溪樓(침계루) -시내를 베개 삼아 세워진 누대無量壽閣(무량수각) -아미타불(무량수불)을 모시는 불전駕虛樓(가허루) -허공을 타는 누대枕:베개 침/ 溪:시내 계/ 樓:다락 루/ 無:없을 무/ 量:헤아릴 량/ 壽:목숨 수/ 閣:집 각/ 駕:탈 가, 수레 가/ 虛:빌 허대흥사는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두륜산도립공원에 자리하고 있는 절이며 달리 대둔사(大芚寺)라고도 한다. 이 절은 원래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절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가 거느린 승군의 총본영이 이곳에 자리하였고 또 서산대사가 자신의 의발(衣鉢)을 이곳에 전한 후부터 전국적으로 유명한 절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에는 조선 후기의 3대 명필이라고 할 수 있는 원교 이광사와 추사 김정희, 그리고 창암 이삼만의 글씨로 쓴 현판이 걸려 있어서 3대 명필의 서예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枕溪樓, 無量壽閣, 駕虛樓가 바로 그것이다.침계루(枕溪樓)는 글자 그대로 '시냇물을 베개 삼는 누대'라는 뜻이다. 절 주변에 흐르는 시내 위에 다리를 놓고 그 위에 누대를 앉히거나 시냇가 언덕에 누대를 지었다는 의미를 아름답게 표현하여 '침계루'라고 한 것이다. 대흥사 외에 경북 울주의 석남사에도 침계루라는 이름의 누대가 있고 순천 송광사에도 침계루가 있다. 무량수각(無量壽閣)은 아미타불을 모시는 불전인데 아미타불은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커다란 염원을 품고 한량이 없는 수명을 이어가며 서방정토의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지금도 설법을 계속하고 있다는 부처이다. 달리 무량수불이라고도 부른다. 가허루(駕虛樓)는 불교보다는 도교적인 색채를 많이 띠고 있는 이름이다. 설악산 한계사(寒溪寺)에도 가허루라는 누대가 있는데 한계사 가허루에 대한 기록인〈가허루기(駕虛樓記)〉에는 "표표히 속세를 떠나 날개를 달고 신선의 세계에 오르고자하는 뜻을 품게 된다.(其飄飄如遺世 羽化登仙之志)"는 구절이 있다.이광사가 쓴 침계루 현판은 글자의 모양이 매우 호방하고 시원스러운 초서이다. 그러나 모양 즉 결자(結字)에 비해 필획은 다소 약한 편이다. 호방한 초서를 너무 점잖은 필획으로 썼다고나 할까? 허우대에 비해 골기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러한 점이 이광사 글씨의 한계라면 한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추사가 쓴 무량수각 현판은 다분히 디자인적이고 현대적이다. 필획도 두툼하여 실팍지고 결구도 중후한 가운데 시원하다. 지금 보아도 파격적인 글씨인데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까? 특히 '閣'자의 '門'부분 문기둥에 해당하는 획의 끝부분을 오른편으로 쭉 삐친 점은 상상을 초월하는 새로운 시도이다. 추사의 실험정신과 예술성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창암이 쓴 가허루 현판은 매우 단정한 해서체이다. 창암은 제자들에게 현판 글씨 쓰는 법을 따로 가르칠 만큼 현판 글씨에 관심을 많이 기울였다. 필자가 최근 연구한 바에 의하면 창암은 현판글씨만큼은 예술성도 예술성이지만 가독성(可讀性) 즉 '일반인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자 모양으로 쓰는 것'을 매우 중시한 것 같다. 이 가허루 현판은 창암의 이러한 서예정신을 담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대흥사는 조선 후기에 조선의 지성들이 모여 담론하는 세미나실 역할을 톡톡히 해낸 절이다. 초의선사와 추사의 교류도 유명하고, 다산 정약용과도 관련이 깊은 절이며, 신지도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이광사와도 연관이 있는 절이다. 36세에 요절한 천재 아암 혜장 스님과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절이다. 그런데 유독 창암 이삼만과 대흥사와의 관계에 대한 자료는 전하는 게 거의 없다. 창암과 초의가 주고받은 시가 몇 편 있다는데 최근 필자는 창암이 쓴〈남해의 스님 초의와 이별하며(贈別南海僧草衣)〉라는 시 한 수를 접하였다. 창암도 대흥사 세미나실을 자주 드나들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소중한 자료이다. 대흥사와 원교, 창암, 추사, 다산, 아암 등과의 관계를 밝히는 일은 조선 후기 지성인의 교류를 연구하는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우리가 대흥사의 현판에 주목해야 하는 주된 이유 중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1.06.22 23:02

전북도립문학관, 곧 문연다

도내 문인들의 창작활동 공간 제공과 작가들의 작품발표및 교류의 장이 될 '전북도립문학관'이 곧 문을 열게돼 문학의 본향인 전북의 이미지 제고가 기대된다.특히 전북도립문학관은 전국 시·도에서 건립되는 첫 도립문학관으로서 특정 작가의 작품에 국한하지 않고 현존하는 도내 모든 문인은 물론, 작고 문인들의 작품 전시와 교류활동, 문학테마 여행 등을 다루게 될 중심체로 기능할 것으로 보인다.도의회는 20일 열린 제281회 임시회 본회의에서 전북도립문학관 설립 관련 리모델링비 5억원과 올 하반기 운영비 5000만원 등 총 5억5000만원의 추경예산안을 심의, 의결했다. 도의회는 시기상조론및 전북문화재단과의 통합 등을 이유로 두 차례나 이 예산을 삭감했으나, 그 필요성을 인정해 이번에 통과시켰다. 이에따라 전북도는 전주시 덕진동 옛 전북외국인학교 부지 6607㎡를 개조해, 전북도립 문학관으로 운영할 방침이다.옛 도지사 관사로도 쓰였던 이 부지에 대해 도는 내달까지 리모델링 공사를 마친 후, 8월 건물 사용승인 신청을 거쳐 9월 민간위탁 사업자를 선정, 곧바로 개관한다.민간위탁에는 전북문인협회, 전북작가회의 등 도내 문인단체는 물론, 전문성을 갖춘 각 단체나 이벤트사가 뛰어들 것으로 보인다.도내 문화예술계 인사들은 "다른 시·도를 보면 지역명칭을 딴 일부 문학관이 있기는 하지만, 전북도립문학관은 지방정부가 주도적으로 설립하고 운영은 민간 자율에 맡기는 전국 최대 규모이자, 첫 광역단체 지원 문학관이 될 것"이라면서 "30년동안 북해도 문학의 흩어진 자료를 모아 집대성해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는 일본 훗가이도 도립문학관이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서정주·신석정·이병기·채만식·이매창·최명희·고은·신경숙 등 유명 작가를 배출해 문학의 본향으로 널리 알려진 전북이 바야흐로 국내 문학관광의 메카로 자리매김할지 여부가 주목된다.

  • 문학·출판
  • 위병기
  • 2011.06.21 23:02

[김병기의 서예·한문 이야기] (16)원교 이광사의 글씨③-지리산 천은사의 현판들

智異山泉隱寺(지리산천은사): 천은사 일주문(一柱門) 현판極樂寶殿(극락보전): 서방 극락세계에 살면서 중생에게 자비를 베푸는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 좌우의 협시보살로는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혹은 지장보살)을 둔다.冥府殿(명부전): 명부란 염마왕(閻魔王)이 다스리는 저승세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며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모시고 죽은 이의 넋을 인도하여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절 집을 말한다. 지장보살을 모셨기 때문에 지장전이라고도 함.智:지혜 지/ 異:다를 이/ 泉:샘 천/ 隱:숨을 은/ 寺절 사/ 極:다할 극, 지극할 극/ 樂:즐거울 락/ 寶:보배 보/ 殿:집 전/ 冥:어두울 명/ 府:곳집(창고)부, 마을 부지리산(智異山)은 전라북도 남원시와 전라남도 구례군, 경상남도 함양군·산청군·하동군 등 3개 도의 5개 시·군에 걸쳐있는 웅대한 산군(山群)에 대한 통칭이다. 한자 발음대로라면 '지이산'이어야 하지만 예로부터 '지리산'으로 읽어온 것으로 보아 '지리'에 순 우리말 어원이 있고 한자 '智異'는 '지리'에 대한 음역어가 아닌가 한다. 옛 문헌에 지리산을 '두류(頭流, 頭留)'로 표현한 예가 많은데 이 '두류'가 '지리'로 음이 변하고 그것을 다시 한자로 표기한 것이 '智異'라는 생각을 해 본다. 지리산의 옛 이름인 '두류(頭流, 頭留)'의 '頭'는 백두산(白頭山)의 '頭'에서 온 것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즉 백두대간 산맥의 산세(山勢)가 주욱 흘러내리다가(流) 머물러서(留) 이루어진 산이기 때문에 두류산(頭流山 혹은 頭留山)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혹자는 지리산의 한자 표기 그대로를 풀이하여 "특이하게 슬기롭고 지혜로운 산"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조선의 대학자이자 스승의 표상이었던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은 지리산을 일러 "天鳴猶不鳴(천명유불명)"의 산, 즉 "하늘이 울어도 오히려 울지 않는 산"이라고 표현하였다. 지리산의 웅장함을 표현한 명구이다.전라남도 문화재 제35호인 천은사는 전라남도 구례군 광의면 방광리에 자리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인 서기 828년(흥덕왕3)에 덕운선사(德雲禪師)가 창건하였는데 경내에는 이슬처럼 맑고 찬 샘이 있어 원래는 절 이름을 감로사(甘露寺)라고 하였다. 창건 이후 여러 차례의 증축과 개축을 거치다가 1773년(영조49)에 화재로 소실되었는데 1775년에 혜암 스님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천은사의 일주문에 걸려있는 '지리산 천은사' 현판과 관련하여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임진왜란의 피해를 복구하여 절을 중건할 때 샘에서 큰 구렁이가 나오자 잡아 죽였더니 그 후로는 샘이 솟아나지 않았다. 그래서 절의 이름을 샘이 숨었다는 뜻으로 '천은사(泉隱寺)'라고 바꾸었는데 그 뒤로는 원인 모를 화재와 재앙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사람들은 절을 지키는 구렁이를 죽였기 때문이라고 두려워하며 명필 이광사에게 청하여 '지리산 천은사' 현판을 마치 물이 흐르는 것 같은 서체로 써서 일주문에 걸자 그 뒤로는 재앙이 그쳤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원교 이광사의 이 현판 글씨에 마치 물이 흐르는 것 같은 율동감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예로부터 정성을 다하여 쓴 글씨에는 神이 붙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 현판 글씨가 바로 그런 글씨인가 보다. 천은사에는 이 일주문 현판 외에도 이광사가 쓴 極樂寶殿(극락보전)과 冥府殿(명부전) 현판이 있다. 이렇게 여러 장의 현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천은사와 이광사 사이에 모종의 관련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천은사에 가거든 이광사의 글씨에 주목해 볼 일이다.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1.06.15 23:02

[최명표의 전북 작고 문인을 찾아서] (17)해방 후 전북 문단의 후원자, 백양촌

백양촌 신근(白楊村 辛槿·1921~2003)은 부안에서 태어나 일본에 유학한 뒤에 귀국한 시인이다. 그는 해방되던 해 12월 김해강의 추천에 의해 전주사범학교 교사로 부임한 것을 시작으로 삼례중학교, 전주고등학교, 전주 성심여자고등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의 행적은 교직 외에 언론계와 문학계에서도 발견되는 바, 일련의 움직임은 전북 문단이 활성화되는 토대를 이루었다.그는 언론인으로서도 분주히 살았는데, 해방 후에 창간된 전라신보의 편집국 부국장과 전북일보 편집고문 겸 논설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그는 1950년 10월 전북일보사에 입사한 뒤로는 전쟁 통에 발표지면을 구하지 못하던 지역의 작가들을 위해 매주 문예면을 고정적으로 할애하였다. 그의 도움으로 지역의 문학 활동은 지속될 수 있었으니, 언제나 남 좋은 일만 해주느라 힘쓰던 그의 품성을 이해할만하다. 그로 인해서 그 동안 그의 문학세계에 대한 평가는 적었기에, 문단의 인심도 세간을 뒤따르는 줄 알 수 있다.백양촌이 남긴 공은 전북 문단의 이면을 뒤져보면 금세 드러난다. 그는 1945년 8월 27일 시인 김해강, 연극인 김구진 등과 함께 문화동우회를 발기하여 결성하였다. 이 모임에는 당시 전북 지방의 문화예술계를 대표하던 쟁쟁한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였고, 그들은 해방으로 혼란한 상황 속에서 문화계의 정지작업을 신속히 수행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듬해 2월에 그는 이병기, 김창술, 김해강, 정우상, 채만식 등과 함께 전북문화인연맹을 조직하여 문화인들의 통합과 친목 도모에 진력하였다. 위의 경력으로 알 수 있듯이, 백양촌의 헌신적인 노력에 힘입어 전북 문학은 발전할 수 있었다.이러한 공적보다도 그가 자랑스럽게 생각한 것은 아동문학의 중흥에 헌신한 일이었다. 백양촌은 1946년 전라북도아동교육연구회를 주도적으로 결성하고, 2월부터 5월까지 기관지 '파랑새'(제1-4호)를 발행하였다. 이 잡지의 발행인은 김수사, 인쇄인은 오영문이었다. 주요 필자는 김해강, 백양촌, 김목랑, 김표 등이었고, 신석정은 창간사를 썼다. 잡지는 나중에 재정 사정으로 폐호되었으나, 도내 초중학교에 배포하여 학생들의 정서 함양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김수사는 뒷날 서울로 올라가서 유명한 잡지 ?학원?의 편집인을 지냈다. 또 백양촌은 1948년 어린이들의 예술 발전을 위해 봉선화동요회를 조직하고, 동요와 동극 운동을 전개하였다.해방이 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건국신문' 등지에 작품을 발표한 것으로 보건대, 백양촌은 일제시대부터 작품을 쓴 듯하다. 그는 생전에 변변한 시집 한 권 만들지 못했다. 평생 도내 작가들의 활동 무대를 만들어주거나, 궂은일을 행하면서도 잇속을 챙기는데 서툰 탓이다. 만년에 그가 와병하자, 1989년 후손과 후학들이 힘을 합하여 '백양촌시전집'과 '백양촌수필전집'을 발행하였다. 그의 완쾌를 빌며 작품집을 만든다고 하자 서정주가 선뜻 '서'를 써준 것이나, 1940년대 말 군산에서 국민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시작 모임 토요동인회의 일원으로 활동하던 평론가 원형갑의 작가론을 보면, 백양촌이 문단에서 두루 존경받았던 줄 짐작할 수 있다.백양촌의 작품들은 거의 순수한 세계를 지향한다. 더욱이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고, 지역의 유수 신문사에서 고위직에 있었으며, 유명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화려한 경력의 소지자답지 않게,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평이한 일상어로 쓰였다. 이것만 보아도 그가 추구한 문학은 한없이 소박하고 담백하다. 세간에서는 그가 시를 썼다고 시인이라고 칭하지만, 차라리 동시인으로 보아야 마땅할 정도로 그의 작품은 순결한 시심에서 우러나온 것들이 태반이다. 생전에 스스로 어린이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보고 살아갈 용기와 희망을 얻었다고 술회하던 백양촌은 어린이 관련 행사에 참석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이런 모습을 종합해 보면, 백양촌은 해방 후에 어수선하던 지역의 문단 사정을 신속히 정지한 후원자라고 볼 수 있다. 그의 보이지 않는 도움으로 전북의 문단은 재빨리 조직될 수 있었다. 더욱이 그의 성실한 노력은 후속세대를 양성하기에 쓸모있는 아동문학계에서 빛났다. 언제나 어디서나 성인문학이야 문명을 탐하는 이들까지 나서서 성황을 이루기 마련이다. 그런 판국에서 아무 보상이 없을뿐더러 주목받지 못하는 아동문학은 뒷전에 밀리기 십상이다. 나라를 빼앗기는 일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어린이들을 서둘러 잘 가르쳐야 할 터이므로, 소란한 시기일수록 아동문학의 중요성은 더하다. 이때 백양촌이 없었더라면, 전북의 아동문학은 초기에 활성화되지 못했을 터이다.이와 같은 백양촌의 행적에서 바람직한 교육자의 모습을 찾아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가 문단의 뒤에서 선배와 후배 작가들을 이어주는 역할에 충실한 것도, 따지고 보면 전면에서 각광받는 편보다 뒤에서 웃는 일에 익숙한 교사 기질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1.06.14 23:02

"시 쓰는 순간, 정화가 돼 사는 맛 느껴"

"난 시가 재밌어서 씁니다. 시를 쓰는 순간은 정화가 돼 사는 맛을 느끼죠. (시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고 삽니다. 그래서 시를 '벌기'위해 여행을 많이 다녀요."전북시인협회(회장 송 희)의 '제4회 도민과 함께하는 문학강좌'에 초청된 문인수 시인. 12일 전북은행 3층 회의실에서 만난 문 시인은 '길 위에서 시쓰기'를 주제로 한 강연에서 "일상은 아스팔트 포장처럼 속도감으로 지나가지만, 여행은 일상과는 전혀 다른 객창감(호젓하고 낭만적인 정서)을 준다"며 "새로운 발견을 가능하게 하는 여유로움이 있다"고 했다."시를 잘 쓰려면 세상에 대해 질문을 해야 돼요. 집요한 관찰이 답으로 돌아옵니다. 그런 자문자답의 결말이 곧 시죠."늦깎이 시인인 그는 마흔 턱을 넘긴 1985년에야 등단했다. 하지만 활발한 창작열로 시집을 여러 권 냈다. 흥미로운 사실은 2000년쯤부터 시가 좋아졌다는 평가가 잇따랐다는 점이다. 미당문학상 최종 심사 때 심사위원 정현종 시인은 그를 두고 "이 친구, 아무리 봐도 지금이 전성기야."라고도 했다.길 위에서 삶을 묻는 그의 시는 삶을 향한 진득한 고뇌만 도드라진다. 시인은 시집 '늪이 늪에 젖듯이' '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 '배꼽'등을 펴냈으며, 김달진문학상, 미당문학상, 노작문학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 문학·출판
  • 이화정
  • 2011.06.13 23:02

[김병기의 서예·한문 이야기] ⑮원교 이광사의 글씨(2)

對酒當歌, 人生幾何. 譬如朝露, 去日苦多. 何以解憂, 惟有杜康.대주당가 인생기하 비여조로 거일고다 하이해우 유유두강술을 대하거든 응당 노래를 불러야지, 우리네 인생 얼마나 된다고. 비유컨대 아침 이슬과 같은 것, 지나쳐 버린 날들이 안타깝게도 많구나. 무엇으로 근심을 풀거나? 오직 술밖에는 없도다.對:대할 대/ 酒:술 주/ 當:마땅 당/ 歌:노래 가/ 幾:몇 기/ 何: 어찌 하, 얼마 하/ 譬:비유할 비/ 朝:아침 조/ 露:이슬 로/ 去:갈 거/ 苦:괴로울 고/ 多:많을 다/ 解:풀 해/ 憂:근심 우/ 惟:오직 유/ 杜:막을 두/ 康:편안 강소설《삼국지》의 핵심인물인 조조(曹操)가 지은〈단가행(短歌行)〉이라는 시의 첫 부분이다. 조조는 흔히 난세의 간웅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소설 삼국지에 그렇게 묘사되었기 때문일 뿐, 실지 역사 인물로서 조조는 천하의 인재를 구하여 어지러운 시대를 바로잡고자 하는 영웅적 포부가 강하였고 또 탁월한 지도력도 갖춘 사람이었다. 문학적 소양 역시 대단하여 그의 두 아들 조비(曹丕), 조식(曹植)과 더불어 '조씨 3부자'라는 이름 아래 한 시대를 풍미한 시인이었다. 이 시〈단가행(短歌行)〉은 조조의 시재(詩才)와 포부와 당시의 어지러운 시대상을 잘 표현한 조조의 대표작이다. 시에 나오는 '두강(杜康)'은 중국 고대에 술을 처음 발명했다는 인물인데 후에 그의 이름 자체가 술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게 되었다. 최근 중국에서는 '두강'이라는 이름의 술을 개발하였는데 명주로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따라서, 중국 사람들은 술을 마실 때면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조조의 이〈단가행(短歌行)〉시 처음 두 서너 구절을 읊조리곤 한다. 술맛을 돋우는 시임에 분명하다.원교 이광사가 쓴 이 작품은 중국서예와는 다른 조선적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다. 중국 서예사를 통관해 보면 해서(楷書:정자체)의 대가들이 많다. 왕희지는 물론, 당나라 초기의 구양순(歐陽詢), 중기의 안진경(顔眞卿), 원나라 때의 조맹부(趙孟?), 명나라 때의 문징명(文徵明) 등이 다 해서의 대가들이다. 그런데 이들 대가들이 쓴 해서는 하나같이 그 규구(規矩)가 엄정하여 마치 자로 잰 듯이 어떤 틀에 딱 들어맞는 분위기를 띠고 있다. 그런데 이광사의 해서는 그렇게 자나 컴퍼스로 잰 것 같은 규구성(規矩性)이 거의 없다. 중국의 해서가 대부분 벽돌을 빈틈없이 쌓거나 곧은 나무를 잘 맞추어서 지은 집과 같다면 이광사의 해서는 곧은 나무는 곧은 대로 굽은 나무는 굽은 대로 삐뚤빼뚤 얽어지은 우리의 건축과 너무나 닮았다. 이게 바로 동국진체의 매력이다. 원교 이광사가 시작한 이 동국진체의 바람은 창암 이삼만에 이르러 보다 더 조선적인 모습으로 정착하게 된다.그런데, 이런 동국진체의 바람에 찬물을 끼얹은 사람이 있다. 바로 추가 김정희이다. 추사의 문집인《완당선생전집》을 읽다보면 곳곳에서 원교의 글씨를 호되게 비판한 글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추사의 그런 비판이 합리적이지도 객관적이지도 못한 부분이 많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비판을 위한 비판도 적지 않다. 왜 그랬을까? 24살의 젊은 나이에 청나라의 수도 연경에 가서 한 달 여 동안 머물며 중국의 대가들을 두루 만나 당시 청나라에 일던 새로운 서예 풍조를 느끼고 돌아온 추사의 눈에는 조선의 글씨가 너무 고루하게 보였기 때문일까? 그래도 그렇지. 비록 다소 촌스럽기는 해도 그 안에 우리의 민족 미감이 자리하고 있다면 그것을 잘 가꾸려는 노력도 했어야 한다. 그런데 추사는 조선의 자생적인 그런 서예 조류에 대해 너무 비판적이고 배타적이었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 그가 일으킨 이른 바 '완당바람'은 긍정적인 면도 많지만 부정적인 면도 적지 않다. 광복 후 50, 60년대 우리나라에 미국 열풍이 불 때 미국에 잠시 다녀오기만 하여도 으레 미국문화에 도취되어 미국은 추켜세우고 한국은 비하하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24살의 젊은 나이에 청나라에 다녀온 추사는 청나라의 서예에 너무 일찍 그리고 많이 도취되어 버렸던 것은 아닐까?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1.06.08 23:02

[최명표의 전북 작고 문인을 찾아서] (16)농민문학을 개척한 신세대 작가 이근영

우관 이근영(牛觀 李根榮·1909~?)은 옥구 임피 출신의 소설가이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자식 교육에 높은 관심을 지녀 아들이 함라의 소학교를 마치자, 상경을 감행하여 아들의 뒷바라지에 매달렸다. 그의 어머니는 가난한 형편을 고려하여 장남을 큰집에 양자로 보낼 정도였으며, 이근영의 학비를 마련하고자 친척집에서 침노일 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역시 그 집에서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중동중학을 다니다가 보성전문학교 법학부에 입학하였다. 그는 재학 중에 숙명여전에 다니던 김창열과 장안이 떠들썩하게 연애하다가 결혼하였다. 1934년 대학을 마친 이근영은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 언론인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다.그는 생전에 소설을 비롯하여 수필, 동화, 평론 등의 여러 갈래에 걸쳐 작품을 남겼다. 1935년 '신가정' 10월호에 그는 소설 '금송아지'를 발표하면서 대략 40년에 가까운 작품 활동에 나섰다. 이 작품은 당시에 사회적으로 크게 문제되었던 신여성들의 허영심리를 포착한 단편이다. 그는 식민자본주의의 이식으로 물신화되어 가는 세태를 묘사하면서도 인간의 보편적 윤리를 작품의 저변에 깔고 있다. 말하자면 그는 사회의 부정적 단면을 소설화하면서도, 인간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그의 작품 세계에 두드러지는 바 그로 하여금 작가적 양심에 입각하여 식민지의 농촌 현실을 응시하는 심급으로 작동하였다. 그의 소설적 평가들이 대부분 긍정적 입장에 치우치는 까닭도, 따지고 보면 그의 치열한 사회의식과 남다른 작가의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이근영의 '최고집 선생'은 청빈을 생활 덕목으로 삼은 최하원 영감의 얘기이다. 동네에 소문난 가난뱅이 외골수 최 영감은 전통적인 지식인에 속한다. 그는 면장 따위의 감투도 마다한 채 농사를 지으며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큰아들이 지주의 첩과 바람을 피우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그는 얼굴을 들 수 없는 수치심에 고향땅을 떠난다. 그의 만주행은 실낱같은 벼리조차 지켜낼 수 없는 지식인의 나약한 모습을 초래한 가난의 결과이다. 이근영은 일제의 농지 수탈이 농민들에게 궁핍을 강요한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최소한도의 윤리마저 훼손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처럼 그는 자신의 소설들을 논의하기 수월하게 농민문학의 범주에 묶어버리는 연구자들의 편의주의적 속성을 나무란다. 그처럼 식민지 사회의 자잘한 모순까지 행간에 마련해 둔 작가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그의 다른 소설 중에서 이채로운 작품은 '소년'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바이올린에 천재적 소질을 가진 한 소년을 다루었다. 소년은 인력거를 끌고 직공 노릇을 하면서도 예술적 성공을 이루기 위한 꿈을 갖고 있다. 그는 회사가 자본을 앞세워 회유하자 단호하게 거절한다. 이근영은 소년의 과단성 있는 거부 의사를 통해서 식민자본주의의 폐해가 예술적 꿈까지 파멸시키고 있는 비극적 현실과 자본의 도움이 없다면 소중한 희망조차 철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개인의 허약한 상황을 드러내었다. 이러한 모습은 그의 작가적 책임감이 예정한 결과이다. 그의 주제의식은 포악하고 교묘한 일제의 기만적인 술책에 여지없이 무너져가던 당대의 예술가들을 향한 날선 꾸짖음이었고, 미국에 자신이 직면할지도 모를 절망감과 패배주의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한 소설적 결의였다.이와 같이 이근영 소설의 근저에는 도저한 윤리의식이 흐르고 있다. 그 점을 앞서 알아차린 평자들은 그의 작품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다. 그는 한국문학사에 무수한 농민작가들처럼 농촌 현실이나 소박한 농민들의 심리를 그리는데 만족한 작가가 결코 아니다. 그 점은 그가 '고향사람들'에서 일제의 토지 수탈과 그로 인한 이농현상을 서술하면서도, 결말부에서 농민들끼리 장래를 걱정하는 대목을 준비한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일제의 간교한 이간과 흉포한 억압이 지속될지라도, 민족간에 염려하며 다독거리는 한 광복은 멀지 않았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처럼 하찮아서 가장 잊어버리기 쉬운 대동의 실천을 강조한 셈이다. 그 작은 덕목은 식민지 말기가 가까울수록 작가나 독자에게 공히 요구되는 것이었다.1941년 이근영은 영창서관에서 단편집 '고향 사람들'을 펴냈다. 이 작품집은 그가 월북하기 전에 낸 것이어서 전작품을 수록한 것이 아니다. 아직까지 그의 전집이 발간되지 못한 이유 중에서 그가 전쟁 통에 가족들을 데리고 월북한 탓이 크다. 그는 해방 후에 조선문학가동맹의 농민문학위원회 사무장을 맡았으며, '해방일보' 기자로 재직하였다. 그는 북한에서 활발히 작품을 발표한 것으로 보이나, 1973년 이후의 행적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북한 연구자들은 그가 1990년대 중반에 사망한 것으로 단정하고 있지만, 북한에서의 활동상과 함께 그조차 확실하지 않다.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1.06.07 23:02
문화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