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표의 전북 작고 문인을 찾아서] (17)해방 후 전북 문단의 후원자, 백양촌
백양촌 신근(白楊村 辛槿·1921~2003)은 부안에서 태어나 일본에 유학한 뒤에 귀국한 시인이다. 그는 해방되던 해 12월 김해강의 추천에 의해 전주사범학교 교사로 부임한 것을 시작으로 삼례중학교, 전주고등학교, 전주 성심여자고등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의 행적은 교직 외에 언론계와 문학계에서도 발견되는 바, 일련의 움직임은 전북 문단이 활성화되는 토대를 이루었다.그는 언론인으로서도 분주히 살았는데, 해방 후에 창간된 전라신보의 편집국 부국장과 전북일보 편집고문 겸 논설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그는 1950년 10월 전북일보사에 입사한 뒤로는 전쟁 통에 발표지면을 구하지 못하던 지역의 작가들을 위해 매주 문예면을 고정적으로 할애하였다. 그의 도움으로 지역의 문학 활동은 지속될 수 있었으니, 언제나 남 좋은 일만 해주느라 힘쓰던 그의 품성을 이해할만하다. 그로 인해서 그 동안 그의 문학세계에 대한 평가는 적었기에, 문단의 인심도 세간을 뒤따르는 줄 알 수 있다.백양촌이 남긴 공은 전북 문단의 이면을 뒤져보면 금세 드러난다. 그는 1945년 8월 27일 시인 김해강, 연극인 김구진 등과 함께 문화동우회를 발기하여 결성하였다. 이 모임에는 당시 전북 지방의 문화예술계를 대표하던 쟁쟁한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였고, 그들은 해방으로 혼란한 상황 속에서 문화계의 정지작업을 신속히 수행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듬해 2월에 그는 이병기, 김창술, 김해강, 정우상, 채만식 등과 함께 전북문화인연맹을 조직하여 문화인들의 통합과 친목 도모에 진력하였다. 위의 경력으로 알 수 있듯이, 백양촌의 헌신적인 노력에 힘입어 전북 문학은 발전할 수 있었다.이러한 공적보다도 그가 자랑스럽게 생각한 것은 아동문학의 중흥에 헌신한 일이었다. 백양촌은 1946년 전라북도아동교육연구회를 주도적으로 결성하고, 2월부터 5월까지 기관지 '파랑새'(제1-4호)를 발행하였다. 이 잡지의 발행인은 김수사, 인쇄인은 오영문이었다. 주요 필자는 김해강, 백양촌, 김목랑, 김표 등이었고, 신석정은 창간사를 썼다. 잡지는 나중에 재정 사정으로 폐호되었으나, 도내 초중학교에 배포하여 학생들의 정서 함양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김수사는 뒷날 서울로 올라가서 유명한 잡지 ?학원?의 편집인을 지냈다. 또 백양촌은 1948년 어린이들의 예술 발전을 위해 봉선화동요회를 조직하고, 동요와 동극 운동을 전개하였다.해방이 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건국신문' 등지에 작품을 발표한 것으로 보건대, 백양촌은 일제시대부터 작품을 쓴 듯하다. 그는 생전에 변변한 시집 한 권 만들지 못했다. 평생 도내 작가들의 활동 무대를 만들어주거나, 궂은일을 행하면서도 잇속을 챙기는데 서툰 탓이다. 만년에 그가 와병하자, 1989년 후손과 후학들이 힘을 합하여 '백양촌시전집'과 '백양촌수필전집'을 발행하였다. 그의 완쾌를 빌며 작품집을 만든다고 하자 서정주가 선뜻 '서'를 써준 것이나, 1940년대 말 군산에서 국민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시작 모임 토요동인회의 일원으로 활동하던 평론가 원형갑의 작가론을 보면, 백양촌이 문단에서 두루 존경받았던 줄 짐작할 수 있다.백양촌의 작품들은 거의 순수한 세계를 지향한다. 더욱이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고, 지역의 유수 신문사에서 고위직에 있었으며, 유명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화려한 경력의 소지자답지 않게,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평이한 일상어로 쓰였다. 이것만 보아도 그가 추구한 문학은 한없이 소박하고 담백하다. 세간에서는 그가 시를 썼다고 시인이라고 칭하지만, 차라리 동시인으로 보아야 마땅할 정도로 그의 작품은 순결한 시심에서 우러나온 것들이 태반이다. 생전에 스스로 어린이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보고 살아갈 용기와 희망을 얻었다고 술회하던 백양촌은 어린이 관련 행사에 참석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이런 모습을 종합해 보면, 백양촌은 해방 후에 어수선하던 지역의 문단 사정을 신속히 정지한 후원자라고 볼 수 있다. 그의 보이지 않는 도움으로 전북의 문단은 재빨리 조직될 수 있었다. 더욱이 그의 성실한 노력은 후속세대를 양성하기에 쓸모있는 아동문학계에서 빛났다. 언제나 어디서나 성인문학이야 문명을 탐하는 이들까지 나서서 성황을 이루기 마련이다. 그런 판국에서 아무 보상이 없을뿐더러 주목받지 못하는 아동문학은 뒷전에 밀리기 십상이다. 나라를 빼앗기는 일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어린이들을 서둘러 잘 가르쳐야 할 터이므로, 소란한 시기일수록 아동문학의 중요성은 더하다. 이때 백양촌이 없었더라면, 전북의 아동문학은 초기에 활성화되지 못했을 터이다.이와 같은 백양촌의 행적에서 바람직한 교육자의 모습을 찾아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가 문단의 뒤에서 선배와 후배 작가들을 이어주는 역할에 충실한 것도, 따지고 보면 전면에서 각광받는 편보다 뒤에서 웃는 일에 익숙한 교사 기질에서 비롯된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