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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라대곤씨(71)가 19일 오전 11시 군산대에서 명예 문학박사학위를 받는다. 군산 출생인 라씨는 소설가이자 수필가로 활발한 창작활동을 하면서 지역 사회 발전에 공헌했다는 평가를 받았다.1982년 단편소설 '공범자'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온 라씨는 두 권의 장편소설 '악연의 세월', '망둥어' 등과 수필집 '한번만이라도','취해서 오십년' 등을 펴내며 힘있는 필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전북문학상(1996), 백양촌문학상(2002), 채만식문학상(2006), 목정문화상(2007) 등을 수상했으며, 한국문인협회 이사, 전북소설가협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시인, 소설가, 문학평론가 등 문학 전방위에서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이장욱(43)이 3번째 시집 '생년월일'(창비 펴냄)을 발간했다. 전통적인 시 문법을 비틀고 현실과 환상의 세계를 오가며 감각적인 시를 써 온시인은 이번 시집에서도 몽환적인 분위기로 시상을 펼친다. "근육질의 눈송이들/허공은 꿈틀거리는 소리로 가득하네/너는 너무 가까워서/너에 대해 아름다운 이야기를 지을 수는 없겠지만 (중략) 점 점 점 떨어질수록/유일한 핵심에 가까워진다는 것/우리의 머리 위에 정교하게 도착한다는 것"('겨울의 원근법' 중)시인은 그만의 독특한 잣대로 세계를 인식한다. '내가 오래 살아온 도시가 재가되'거나('뒤' 중) 기쁨이 가득해야 할 생일이 불안함으로 가득차기도 한다. "저 바다 너머에서 해일이 마을을 덮쳤다. 바로 그 순간 생일이 찾아오고, 죽어가는 노인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연인들은 처음으로 입을 맞추고,/케이크를 자르듯이 수평선을 잘랐다. 자동차의 절반이 절벽 밖으로 빠져나온 채 바퀴가 헛돌았다. "('생년월일' 중)또 "동사무소에 가자/왼발을 들고 정지한 고양이처럼/외로울 때는/동사무소에가자/서류들은 언제나 낙천적이고/어제 죽은 사람들이 아직/떠나지 못한 곳"('동사무소에 가자' 중)처럼 일상 속 동사무소에서도 모순의 징후를 파악한다. 문학평론가 함돈균은 "이 시집의 '생일'은 태어남에 관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일상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장욱 시인은 1994년 '현대문학'으로 문단에 나온 뒤 시집 '내 잠속의 모래산''정오의 희망곡', 장편소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 등을 발표했다. 144쪽. 8천원.
▲잠깐 쉬었다가 = 손봉호 서울대 명예교수의에세이집.기독교윤리실천운동 이사장,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 등을 지낸 저자는'따뜻한 남자 손봉호 교수의 훈훈한 잔소리'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에서 무겁지 않은 문체로 다양한 생각들을 펼쳐낸다. 저자는 서문에서 "나의 '공자님 말씀'과 같은 글만 읽고 심각한 말만 들은 사람은 이 책을 읽고 적잖이 놀랄 것이다. 좀 점잖고 심각한 글도 몇 있지만 '가볍게'쓴 글이 대부분"이라며 "이론적인 글은 '내 생각'을 대변하지만 이런 글은 '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앞부분에는 시골 출신인 저자가 경주로 유학가서 영어 공부에 매진하게 된이야기, 고등학교 시절 학교신문을 통해 교장 선생님을 비판한 이야기, 영문학을 전공한 후 신학과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된 이야기 등 내밀한 개인사가 담겼다. 홍성사. 352쪽. 1만4천원.▲남자의 자격 = 에두아르트 아우구스틴ㆍ필리프 폰 카이젠베르크ㆍ크리스티안차슈케 지음. 임영은ㆍ정유연 옮김. 독일 일간지 '쥐트도이체 차이퉁'의 기자인 저자들이 여러 분야 전문가들의 조언을 바탕으로 '남자라면 꼭 알아야 할 것들'을 정리했다. 스테이크 굽기, 연봉 인상 요구하기, 구두 깨끗하게 오래 신기, 와인 알고 마시기, 식스팩 만들기부터 미국인에게 오프사이드 설명하기, 여자가 운전하는 동안 조용히 있기, 코 고는 여자 조치하기 등 익살스러우면서도 실용적인 조언들로 가득 차있다. 지상사. 345쪽. 1만6천원.▲인생을 건너는 여섯 가지 방법 = 스티브 도나휴 지음. 김명철 옮김. 베스트셀러 자기계발서인 '사막을 건너는 여섯 가지 방법'의 저자가 5년 만에 낸 신간.장대한 사막을 건너는 법에 인생을 비유했던 전작에 이어 이 책에서는 평생 끝을 알 수 없는 바다 속을 누비다 태어난 곳으로 돌아와 알을 낳고 일생을 끝마치는 바다거북의 삶을 인생에 빗대고 있다. 저자는 거북의 여정을 통해 인생이라는 매혹적이고 두려운 여행 길에서 올바른 방향을 찾아갈 수 있는 여섯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김영사. 204쪽. 1만2천원.▲나는 한 마리 개미 = 주잉춘 그림. 저우쭝웨이 글. 장영권 옮김. 개미 한 마리의 고군분투를 담은 중국의 우화.작고 보잘 것 없는 개미 한 마리가 세상에 나와 벌이는 좌충우돌 모험담을 서정적으로 그려냈다. 흰 여백을 강조한 파격적인 디자인으로 2007년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에선정되기도 했다. 펜타그램. 120쪽. 1만5천원.▲학교가 달라졌다 = 이중현 지음. 경기도교육청이 혁신학교로 지정해 운영하고 있는 양평 조현초등학교의 성공스토리를 기록한 책.내부형 교장공모제를 통해 2007년 부임한 평교사 출신의 교장인 저자는 지난 4년간 이뤄낸 성과와 자신의 교육철학을 상세하게 소개한다. 우리교육. 248쪽. 1만3천원.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1883년 제물포항이 개항하면서 이 지역을 중심으로 양식주택이 처음 유입되기 시작했다. 대부분 벽돌로 지은 식민지 풍의 이 양식주택들은 이후 우리나라 주택의 기능과 구조, 재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임창복 성균관대 건축학 교수가 쓴 '한국의 주택, 그 유형과 변천사'(돌베개 펴냄)는 개항 이후 2000년까지 약 120년 동안 우리나라 단독주택의 변천사를 짚어본책이다. 개항 이후 나타난 여러 단독주택을 유형화해 분류하고 다양한 시각자료와 함께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양식주택은 1884년께 인천 송학동에 세워진 세창양행 사택으로 추정된다. 독일인 카를 볼터가 마이어 상사의 한국지점인 세창양행의 책임자로 부임하면서 지었던 이 주택은 사각기둥이 늘어선 이탈리아 빌라식 아치형 베란다가 있는 전형적인 별장풍 양옥으로, 한국전쟁 중 소실됐다. 개화 초기의 양식주택이 서구인들의 주택양식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면 이후 본격적으로 유입된 선교사들은 한국의 주거문화에 동화하기 위해 '한ㆍ양 절충식 주택'을 주로 지었다. 주요 재료인 벽돌이나 기와는 모두 한국에서 직접 제작한 것을, 창이나 문짝, 마루재 등은 대부분 본국에서 들여온 것을 사용하고 지붕구조는 한옥 도편수들이 참여해 지은 주택이다. 광주에 있던 유진 벨 목사의 사택이나 평안북도 선천에 선교사로 부임한 샤록스의 주택 등이 그 예다. 그런가 하면 한일 강제병합 이후에는 일식주택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1921년 경성에 건립된 가옥 중 일식주택이 차지하는 비중은 전체 신축 주택의 60%에 이르기도했다고 한다. 초기에 건립된 일본인들의 사택은 다다미방 2개와 부엌, 욕실, 화장실 등으로 구성된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이후 한반도의 기후 여건이나 지역주민과의 관계 등을 고려해 점차 양풍(洋風)을 수용하는 경향도 등장했다. 그런가하면 한식기와와 구들, 마루를 가진 한옥은 외래 주거문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근대적인 형태로 발전된다. 대문 외에 진입 현관이 생기고 남성들의 공간인 누마루(다락처럼 높게 만든 마루)가 도입됐으며 전통적으로 주택의 가장 안쪽에 위치하던 안방이 점차 대문 가까운 곳으로 옮겨졌다. 유리문이 달리기 시작했고 도시의 경우 화장실이 주거공간 내부로 들어왔다. 이 책은 이밖에도 1930년대 '도시형 한옥', 1960년대의 재래식 'ㅋ'자형 주택,1970년대 '불란서주택'과 2층 주택을 거쳐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 다세대ㆍ다가구 주택까지 일반 단독주택의 흐름을 상세하게 보여준다. 이런 주택의 변천사는 사회상의 변화와도 무관하지 않다. 가령 재래식 'ㅋ'자형 주택에서 안방의 위치가 밝은 남쪽 전면으로 나오게 된것은 당시 "우리사회에서 여성의 위상이 급격하게 변화된 시기라는 점을 드러낸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우리의 주거문화적 전통을 기반으로 새롭게 변화하는 가족의 가치와 기술적 변화를 도시 구조 속에서 통합하는 상호 관입적 노력을 기울일 때 우리의 문화적 전통이 수용된 근대적 주거문화는 창출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552쪽. 2만6천원.
茗禪 -艸衣寄來自製茗, 不減蒙頂露芽, 書此爲報. 用白石神君碑意. 病居士隸.차와 함께 선(禪)에 들다 -초의가 스스로 만든 차를 부쳐왔다. 몽정차나 로아차 못지 않았다. 이에, 이 글씨를 써서 보답한다. 「백석신군비」의 필의를 살려 병거사가 예서로 썼다.茗:차 명/ 禪:(불교 용어)참선(參禪)할 선, 고요할 선, 하늘에 제사 지닐 선/ 艸:풀 초(=草)/ 衣:옷 의/ 寄:부칠 기/ 製:지을(만들) 제/ 減:덜 감, 덜할 감/ 蒙:어릴 몽/ 頂:정수리 정/ 露:이슬 로/ 芽:싹 아/ 書:글 서, 글씨 쓸 서/ 此:이(This) 차/ 爲:할 위/ 報:갚을 보/ 碑:비석 비/ 意:뜻 의/ 病:병들 병/ 居:살(live) 거/ 士:선비 사/ 隸:글씨 예, 노예 예이 작품은 여러 면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지고 있다. 「茗禪」이라고 쓴 작품 본문의 오른편으로부터 왼편으로 이어 쓴 방제(旁題:곁에 쓴 글)의 내용으로 보아 추사와 초의선사(艸衣禪師)와의 관계의 일단을 볼 수 있으며, 말미의 "「백석신군비」 필의를 살려 병거사가 예서로 썼다(用白石神君碑意. 病居士隸)."라는 말을 통하여 추사가 글씨를 익힌 노선의 한 가닥을 확인할 수 있음은 물론, 이 작품을 쓴 시기가 언제쯤인지도 대강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수년 전부터 한 동안 '위작(僞作)'논쟁에 휘말려 있었다. 현재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작품에 대해 미술 사학자인 강우방 교수가 위작이라는 의견을 제기함으로써 한양대학교의 정민 교수와 공방을 벌였는데 정민 교수가 금년(2011) 4월에 펴낸 그의 저서《새로 쓰는 조선의 차문화》라는 책에서 다시 이 작품이 추사의 진필임을 구체적으로 밝힘으로써 공방이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정민 교수는「茗禪」이라는 말이 단순한 '문구(文句)'가 아니라, 추사가 초의에게 지어준 호(號)라는 자신의 종래 주장을 증거를 들어 다시 한 번 확인하였고, 이 작품「茗禪」이 탄생하기까지의 구체적인 정황을 소상하게 밝혔다.정민 교수가 밝혀내기 전까지는「茗禪」의 의미를 그저 '차와 선', '차 그리고 선', '차를 마시며 참선에 들다.' 혹은 '차와 선은 같은 이치'라는 의미의 "다선일치(茶禪一致)"나 "다선일미(茶禪一味)"라는 말의 축약형 정도로 이해하였다. 그런데, 정민교수는 당시 강진에 귀양 와 있던 다산 정약용의 제자인 황상(黃裳)이 초의선사에게 보낸 걸명시(乞茗詩:차를 보내 줄 것을 애걸하는 시)에 "추사가 초의에게 '명선'이라는 호를 지어주었다."는 내용이 있음을 발견하여 세상에 알리면서「명선」이 추사가 초의에게 지어준 호임을 주장한 것이다.당시 대흥사 일지암(一枝庵)에 머물던 초의선사가 우리나라 차(茶) 문화를 크게 일으킨 인물이라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추사와 초의는 절친한 사이로서 추사는 늘 차를 보내주는 초의에게 고마움을 표시하였고, 때로는 차를 빨리 보내달라고 투정을 부리기도 한 사실 또한 세상에 널리 알려진 바다. 이 작품은 추사와 초의 사이에 있었던 그런 차문화의 공유와 교류를 대변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추사는 초의선사가 직접 만든 차를 중국 사천성 명산현 몽산(蒙山)에서 난다는 천하제일의 명품 차인 몽정차(蒙頂茶)나 역시 중국 강소성 강녕현에서 난다는 유명한 차인 노아차(露芽茶) 못지않다는 칭찬을 하고 있다. 추사가 몽정차나 노아차까지 두루 다 마셔보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초의가 만든 차에 대한 최고의 찬사임에는 틀림없다.추사는 방제의 말미에서 이 글씨를 '백석신군비'의 필의를 살려서 썼음을 밝혔는데 이 또한 추사의 서예를 연구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는 소중한 기록이다. 백석신군비는 원래 중국 하북성 원씨현(元氏縣)의 백석산에 있는 백석신군 즉 백석산 산신령의 사당에 세워져 있던 비석이다[현재는 백석산에서 25km 떨어진 봉룡산의 한비당(漢碑堂·한나라 때 비석을 모아둔 집)에 보관돼 있다고 한다]. 이 비는 한나라 때의 비석이 아니라는 의견을 제시하는 학자들이 있어서 한나라의 대표적 글씨체인 예서를 배우는 교본에서 더러 제외되기도 할 만큼 중요도가 그다지 큰 비석은 아니었다. 추사가 이 비석을 접하게 된 것은 스승으로 받들었던 청나라 학자 옹방강(翁方綱)의 영향 때문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추사가 지명도가 그다지 높지 않았던 이 비석까지 접했다는 사실을 통해 추사의 글씨 공부 범위가 매우 넓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더욱이 이 작품은 백석신군비에 없는 글자를 약간 변형하여 썼음에도 필의(筆意) 즉 필획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백석신군비의 그것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추사가 행한 서예 공부의 정치(精緻)함도 실감할 수 있다. 이 작품을 토대로 추사와 초의와의 관계는 물론 추사 서예의 형성과 변천 과정이 보다 더 소상하게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전북문학포럼(대표 김형중)가 주최하고, 전북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가 후원하는 '2011 여름문학학교'가 지난 13일 전주시 중화산동 춘향골 문화공간에서 개강, 오는 27일까지 매주 토요일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열린다.백봉기 전북예총 사무처장의 사회로 열린 이날 개강식에는 임수홍 한국문학신문 발행인을 비롯, 김형중 전북문학포럼 대표, 이수홍 대한문학작가회 회장, 박귀덕 행촌수필문학회장, 김정길 영호남수필문학회 회장과 도내 문인 등 50여명이 참석, 전북문학 발전을 위한 열띤 토의를 벌였다.첫 강사로 나선 김형중 전북문학포럼 대표(원광보건대 교수)는 "대한민국 국민이 대한민국 언어와 사상으로 글을 쓰는 게 국문학이다."고 말문을 연 뒤 "글 쓰는 사람들이 공상을 해서 쓴 내용이 바로 과학으로 연결되고 그것이 결국 과학발명의 원동력이 됐다."고 강조했다.그는 주로 한국문학의 장르, 고시가(古詩歌)의 내용, 삼국시대의 시가(詩歌), 고려시대의 가사문학과 시조(時調) 등 고전문학의 이해에 바탕을 두고 진행됐다.두 번째 강사로 나선 임수홍 한국문학신문발행인은 "자본이 정신을 지배해서는 안되지만, 현실적으로 각 분야를 보면, 자본이 없는 곳에서는 발전을 기대할 수 없는만큼 결국 문학도 경영을 해야 배고픔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오는 20일과 27일 열리는'2011 여름문학학교'에서는 김학 전북대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전담교수가 '늘 초심으로 돌아가 수필을 쓰고 싶다.'란 제목의 특강을 하며, 백봉기 전북예총 사무국장은 'TV와 드라마 작가, 문화가 경쟁력이다'란 주제로 강연에 나선다.또 유대준 전 전북시인협회 회장의 '문학성을 높이기 위한 문학창작의 기본자세', 이승수 진안우체국장의 '영화치료', 김정길 영호남수필문학회장의 '나의 수필쓰기', 양규창 한국문학신문 편집국장의 '시민기자 활동자료' 등이 준비됐다.
국내외에 '엄마 신드롬'을 일으킨 소설가 신경숙(48)의 '엄마를 부탁해'가 다음달 말 일본에서도 출간된다.신 작가의 해외 판권을 관리하는 KL매니지먼트 이구용 대표는 15일 "'엄마를 부탁해'의 일본어 판이 9월 말 일본 출판사 슈에이사(集英社)를 통해 출간된다"며 "신작가는 이와 관련해 다음 달 14~17일 일본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밝혔다.슈에이사는 2005년에도 신 작가의 소설 '외딴방'을 번역해 출간한 바 있다. 슈에이샤는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 이문열의 장편소설 '사람의 아들' 등을 출판한 일본의 대형 문예출판사다.'엄마를 부탁해'는 현재 미국, 이탈리아 등 28개국에서 번역 판권이 팔렸으며 신 작가는 미국 7개 도시와 유럽 8개 도시를 순회하면서 북투어 행사를 펼치고 있다.신 작가는 최근에는 이스라엘에서도 책을 냈으며 이달 초 현지에서 사인회 등을소화했다.'엄마를 부탁해'는 지난 6월에는 최대 인터넷서점 아마존닷컴 상반기 결산(Bestof 2011 So Far)에서 편집자가 뽑은 베스트 10에 뽑혔고 이스라엘에서도 이례적으로 베스트셀러 2위까지 오르는 등 해외에서 꾸준히 인정을 받고 있다.
유기수(劉基洙·1924~2007)는 전주 출신의 소설가이다. 그는 전주의 외가에서 태어났으나, 본향은 정읍 태인이다. 그는 태인보통학교를 마치고, 1941년 전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의 전신이었던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선망하던 대학에 들어가는 순간, 그는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말았다. 태평양전쟁의 말기에 만주에 주둔하던 관동군 군의관으로 차출된 것이다. 광복을 맞아 귀국하여 1950년까지 서울대학교 부속병원 산부인과 교수로 재직하던 중에 동족상잔의 전쟁이 터졌다. 그는 인민군으로 징발되어 낙동강전선에서 사선을 넘었다. 그런 탓에 그는 유엔군이 참전하고 서울이 수복된 후에 수인으로 지냈다. 수형기간이 끝나자 다시 소집되어 국군 군의관이 되라는 명령을 받고 중부전선에 투입되었다. 이 과정을 소재로 쓴 소설이 '인간교량'이다.말하자면 그는 전쟁 중에 태어나 전쟁에 휩쓸려가고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전후에는 국가의 재건을 담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불행한 세대에 속한다. 이와 같은 시기에 청춘을 연소시켜야 했던 그는 전주에 낙향하여 개업하면서 문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을 딴 '유기수 산부인과의원'은 소문을 타고 금세 유명해졌다. 그러던 중에도 문학을 향한 그의 열정은 사위지 않았다. 문학은 그에게 지난날의 청춘을 보상받을 수 있고, 청년기의 가슴 아픈 상처들을 치유할 수 있는 최선의 안식처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읽었던 문학작품에서 감동을 받았다면, 이제 그는 스스로 작품을 써서 전쟁으로 인한 내상을 지우는 것이었다.유기수는 초기에 '柳林一'이란 필명을 사용했으며, 시에도 관심을 기울여 시집 '공백의 장'을 펴내기도 하였다. 1954년 8월 이병기를 위시한 일군의 작가들이 전 해에 출범한 전주문학회 대신에 '詩園'을 발간하고자 꾸린 모임에도 그는 참가했으며, 당시 도내에서 발간되던 신문에도 필명으로 여러 편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는 한국예총 전북지부가 출범할 당시에 이사로 선출되어 김해강을 도왔고, 표현문학회의 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그 후에도 그는 도내 문단의 여러 활동에 직접 참가하거나, 업무로 바쁘면 작품을 찬조하여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특히 그는 민족통일문학회의 회장으로 있으면서 1998년 북한 동포 돕기 책 한 권 사보기 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그의 움직임은 평생을 '통일 지향 문학'에 매진했던 문학적 신념의 실천이었다.마침내 196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호로 박사'가 당선되면서 그는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필화 사건을 일으켰던 문제작이다. 장편으로 개작되어 이 작품이 1977년 6월 1일부터 7월 5일까지 '전북신문'에 연재되었을 당시 전라북도의사회에서는 성명을 발표해 소위 의권을 침해한 작가에게 사과를 요구하며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두말 할 것도 없이 문학작품은 허구의 산물이다. 이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금에도 특정 집단의 행동이 더러 문제시되곤 한다. 문학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이 사실에 동의하며 읽는다. '문학이 허구'라는 사실조차 부인한 동료들에 의해 유기수는 다시 한번 깊은 상처를 받는다.유기수는 분단 문제의 극복에 소설의 초점을 맞추었다. 그의 작품들은 한결같이 역사의 뒤편에서 신음하던 군상들의 애꿎은 삶을 다루고 있다. 예컨대 '지리산 사람들', '북에서 온 기러기', '벽소령 가는 길', '두만강 7백리', '지리산에 핀 꽃은 시들지 않는다' 등을 보아도, 그가 소설적 관심을 기울인 바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특히 지리산의 비극을 자주 형상화하였다. 그 이유는 '지리산의 화해 없이는 남북의 화해도 민족과 조국의 통일도 없다'는 작가의 소신에 있었다. 자신이 굴곡진 삶을 살았기에, 그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야기한 역사의 뒤편을 주목했었으리라. 세상을 향해서 자유민주주의자로 자처했던 그는 지리산의 저편에서 자신과 동질의 정서를 소설화한 '지리산'의 작가 이병주와 허교하며 우정을 나눴다. 두 사람은 허물없는 사이로, 상호 왕래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가리켜 문단에서는 '영남에 이병주, 호남에 유기수'라 칭했거니와, 작가의 길에서 만난 양인의 우정은 만인의 표본이었다.유기수는 개업의로서 유복한 생을 살았다. 대한의학협회 부회장, 대한산부인과학회 부회장 등의 직함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의료계에서도 존경받는 의사였다. 그러나 그는 생전에 "사소한 의학 논문을 발표한의사, 의학박사보다는 책을 펴낸 작가로서 기억될 것"을 바랐다. 그만큼 문학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유기수는 휴머니즘에 입각한 문학을 표방하며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역사의 격랑에 휩쓸려서 멍들고 다친 영혼을 따뜻이 감싸 안으려고 노력하였다. 그가 작품집 '사랑의 조건'에서 "사랑은 인간 존재의 아름답게 승화된 상태이자 삶의 고귀한 것"이라고 판에 박힌 말을 촌스럽게 적은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여린 감수성으로 세상의 온갖 아픔을 포용하려고 글을 쓴 의사작가였다.
왜 바쁜지 모르게 바빴다. 지난 학기 7곳 대학에서 소설 창작 강의를 맡았다는 게 이유였지만, 글쓰기에 대한 강박이 더 힘겨웠는지도 모른다. 몇 년 만에 떠난 몽골 여행에서 "성질 더러운" 낙타를 본 뒤 단편'그때 낙타가 들어왔다'를 "잘못 썼구나" 했다. 자신의 소설에서는 낙타가 피상적이었다나. 단편'그래서'에서 죽은 줄로만 알았던 작가가 줄이 바뀔 때마다 글씨가 사라지는 고통스런 글쓰기를 하는 모습은 소설가 백가흠(37)의 앞·뒤쪽 모습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년여 만에 내놓은 세번째 소설'힌트는 도련님'(문학과 지성사)을 보는 마음은 한결 가볍다. '잘 써야 한다'는 글쟁이의 불편한 숙명 보다는 등장인물에 대한 '사랑'을 떠올릴 만큼 자유로워졌다.몸도, 마음도 성하지 못한 폭력적 남성들에 대한 작가의 고발은 농촌 총각들의 성적 소외와 다문화 여성들이 겪는 성적 착취('쁘이거나 쯔이거나'), 월남전 고엽제의 피해('통(痛)')로 확장됐다. '제도'라는 폭력에 복종하고 체념하고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는 또 피눈물이 난다. 다만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도 배꽃 흩날리는 서정성이 읽혔던 전작에 비해 의뭉스런 유머가 무거운 주제를 일상적으로 풀어냈다고 보면 맞을까."아무리 찾아봐도 소설 안에 내가 없었다"는 회의는 자전적 단편'힌트는 도련님','그래서','P'를 내놓게 했다. "장가나 가라"는 부모님의 애원에도 두문불출하고 '안 써진다'는 글만 붙들고 앉은 '도련님'이 응시한 것은 '나'였다. 때문에 자신이 만들어낸 인물들에게 압박을 받는 등 소설 쓰기의 여러 딜레마가 드러나는가 하면,"모더니스트인가 리얼리스트인가 하는 것"의 '구닥다리' 같은 질문에서 허덕이는 그가 보인다.그래서 그는 꿈을 꾼다. 폭력의 고통을 무심히 보는 게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보내기 위해. 창작의 고통을 떠들어대는 게 아니라, 그 고통을 제대로 사랑하기 위해. 소설가 백가흠은 그렇게 단련된다.익산 출생으로 명지대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뒤 200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그는 '귀뚜라미가 온다'(2005), '조대리의 트렁크'(2007) 를 출간, 두번째 장편'나프탈렌(가제)'과 또다른 선집을 준비하고 있다.
수필가인 김정길·서상옥씨가 오는 9월 3일 오후 5시 전주시청 옆 호남성에서 합동 출판기념회를 갖는다.수필가로서는 매우 드물게 이들이 합동 출판기념회를 갖기로 한 것은 비용을 줄이고, 지인들의 부담을 없애는 한편, 문인으로서 서로 통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문인들이 출판기념회를 하면 보통 3~5만원의 책값을 내는게 관례지만, 이들은 모금함도 설치하지 않고 일체의 화환도 사양한채 의례적 행사를 줄여 30분 이내로 간소하게 치르기로 했다.동료 문인들의 따뜻한 마음만 받겠다는 의미다.벽송 김정길은 세번째 수필집인 '내 마음의 텃밭'을 냈고, 호심 서상옥은 두번째 수필집'그림보다 의미있는 이야기'를 발간했다.'내 마음의 텃밭'은 산에서 배우는 호연지기와 사람의 향기를 맛갈스럽게 담아냈다. 또 '그림보다 의미있는 이야기'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 시와 수필로 짠 문학의 그물망이라는 평가다.임실 출신으로 수필과 비평을 통해 등단한 김정길 작가는 전주상공회의소에서 오랜 기간 근무하다 기획진흥실장을 끝으로 퇴임했다. (사)대한산악연맹 상근부회장겸 모악산지킴이 회장을 맡고 있으며, 행촌수필문학회장을 역임한 뒤, 현재는 영호남수필문학회장으로 활동중이다.서상옥 작가는 김제 출신으로 중등학교 교감을 지냈다.한국교총 익산지부 부회장과 김제난산초 동창회장을 역임했다. 수필은 '대한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제1회 혼불문학상'의 대상은 '붉은 빗방울'을 쓴 소설가 최문희(76)씨에게 돌아갔다.심사위원회(위원장 박범신)는 허난설헌의 일대기를 다룬 '붉은 빗방울'이 '혼불'의 최명희를 연상시킬 만큼 문장력을 바탕으로 한 서술의 힘과 집요하리만큼 세세한 묘사력이 허난설헌을 되살려냈다고 평가했다.스스로 '혼불 애독자'라고 밝힌 최문희씨는 "별 기대 없이 책이나 출간하게 되면 좋겠다 심정으로 낸 것인데, 아버지의 고향에서 커다란 상을 덜컥 받게 돼 영광"이라고 밝혔다. "불굴의 시혼을 가진 허난설헌의 시가 우리나라 보다 중국에서 더 알려져 있어 안타깝다"는 최씨는 "이번 당선으로 흙 속에 묻혀 있는 진주를 끄집어낸 것 같다"고 소감을 전했다.그는 1988년 '월간문학'에서 '돌무지'로 '늦깎이 글쟁이'가 됐다. 하지만 '제2회 국민일보 장편소설 공모전','제4회 작가세계 장편소설 공모전' 등에서 '서로가 침묵할 때','율리시즈의 초상'이 당선, 문단에서 필력을 인정받았다.혼불문학상은 전주MBC(대표이사 선동규)가 상금 5000만원이 내건 장편소설 공모전으로 올해 총 227편이 출품, 모두 6편이 올라와 경합을 벌였다. 시상식은 10월10일 전주 MBC에서 열린다.
且呼明月成三友, 好共梅花住一山 -桐人仁兄印定. 阮堂作蜀隸法게다가 밝은 달을 불러 세 친구를 이루고, 좋아서 매화와 더불어 한(같은) 산에 사네. -동인 인형께서 바로잡아 주시기를 바라며 완당이 촉예법으로 쓰다.且:또(게다가) 차/ 呼:부를 호/ 好:좋을 호/ 共:함께 공/ 梅:매화 매/ 住:살(live) 주/ 桐:오동나무 동/ 印:도장 인/ 定:정할 정, 바로잡을 정/ 阮:성씨 완/ 堂:집 당/ 蜀:촉나라 촉/ 隸:노예 예, 글씨 체 예/ 法:법 법이것은 글씨도 글씨려니와 오묘한 대구를 이루는 글의 형식과 내용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우선 글의 형식과 내용을 보자. 한문은 한자가 가지는 고립어(孤立語:어형 변화나 연결사가 없이 글자가 자리하는 위치에 따라 문장 속에서 역할이 결정되는 언어)적인 특징으로 인해 운문이든 산문이든 예로부터 대우(對偶:대칭을 이루는 짝)를 즐겨 사용해 왔다. 즉 한 쌍의 짝을 이루도록 대구(對句)로 지어진 문장이 많은 것이다. 예를 들자면, '청풍명월(淸風明月)'이라는 말도 '淸風'과 '明月'이 짝(대우)을 이룬 하나의 대구이다. 그런데, 이런 대우를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 바로 '사성상동(詞性相同)'이다. 짝을 이루는 양 편 글자의 품사가 서로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淸風'과 '明月'의 경우, '淸'과 '明'이 '맑은'과 '밝은'이라는 뜻의 형용사로서 품사가 같고, '風'과 '月'이 '바람'과 '달'이라는 뜻의 명사로서 품사가 같다. 이와 같은 '사성상동(詞性相同)'의 조건에 따라 이 작품의 글을 분석해 보자면, '且'와 '好'는 '게다가'와 '좋아서(古語의 '조히')'라는 의미의 부사로서 품사가 같고, '好'와 '共'은 '부르다'와 '더불다'라는 의미의 동사로서 품사가 같으며, '明月'과 '梅花'도 '형용사+명사'의 구조로서 품사가 같고, '成三友'와 '住一山'도 '동사+수사(數詞)+명사'의 구조로서 각 품사가 같다. 완전한 대구를 이룬다. 따라서 이런 문장은 한글 운용을 잘 하여 전후 두 구절 해당 단어를 같은 품사로 번역해야 한다.'밝은 달까지 불러서 세 친구를 이루었다'는 말은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 이백이 〈월하독작(月下獨酌:달빛 아래서 혼자 마시다)〉이라는 시에서 사용한 "친구가 없어 혼자 마시다가 달을 맞고 보니 달과 나와 그림자가 세 친구를 이루었네."라는 표현을 빌려 만든 구절이다. "매화와 더불어 한(같은) 산에 사네."라는 구절은 중국 송나라 때 임포(林逋)라는 사람이 산에 은거하며 '매처학자(梅妻鶴子)' 즉 '매화로 아내를 삼고 학으로 자식을 삼았다.'는 고사를 빌어 지은 구절 같다. 두 구절 다 자연을 벗 삼아 사는 사람의 한가한 생활을 읊었다.첫 번째 폭의 오른 편 위에 쓴 "동인 인형께서 확실하게 바로잡아 주시기를 바라며(桐人仁兄印定)"라는 말과 두 번째 폭의 왼편 중간 부분에 쓴 "완당이 촉예법으로 쓰다(阮堂作蜀隸法)"라는 말을 합칭하여 흔히 '쌍낙관(雙落款)' 혹은 '쌍관(雙款)'이라고 한다. 본래 '낙관(落款)'이란 말은 '낙성관지(落成款識)'의 줄임말인데 '낙성'은 원래 '(건물을) 완공한다'는 뜻으로서 여기서는 작품을 마무리하여 완성한다는 의미로 썼다. '관지(款識)'의 '款'은 음각으로 새긴 도장을 말하고 '識(지)'는 양각으로 새긴 도장을 말한다.(원나라 陶宗儀의 설) 그러므로 '낙성관지(落成款識)'란 음각으로 새긴 이름 도장과 양각으로 새긴 호(號) 도장까지 찍어서 작품을 최종 마무리하여 완성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처럼 낙성관지를 할 때 작품을 쓴 사람의 이름과 도장만 찍을 경우에는 '단관(單款)' 혹은 '단낙관(單落款)' 이라고 하거나 그냥 '낙관(落款)'이라고 하고, 작품의 어느 부분에든 작품을 받을 사람의 이름이나 호를 밝혀 놓은 경우에는 '쌍낙관(雙落款)' 혹은 '쌍관(雙款)'을 했다고 한다. 추사의 이 작품에는 "동인 인형께서 확실하게 바로잡아 주시기를 바라며(桐人仁兄印定)"라고 하여 받을 사람의 호인 桐人이 명시되어 있으므로 '쌍낙관(雙落款)'이 분명하다. '桐人仁兄印定'의 '仁兄'이라는 말은 친구이거나 혹은 손아래 사람이라도 친한 사이에 상대를 높여 부르는 칭호이다. '印定'이라는 말은 '도장을 찍듯이 정확하고 정직하게 바른 말로 내 작품을 바로잡아 달라'는 의미의 겸사이다. 추사가 쌍낙관으로 쓴 '桐人'이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추사에게 글씨를 배운 동암(桐庵) 심희순(沈熙淳)으로 짐작하고 있다. 관지의 마지막 구절에 쓴 '촉예법(蜀隸法)'은 일종의 서체이거나 필법을 이른 말임에는 분명하나 무슨 뜻인지에 대해서는 학계에 아직 정설이 없다. 추사 글씨의 별미를 맛볼 수 있는 특이한 작품이다.
인터넷 서점 예스24가 열린책들, 시공사, 예림당 등 24개 출판사와 함께 8일부터 10월 13일까지 소셜네트워킹서비스(SNS)에서 독서장려 캠페인을 펼친다. 캠페인은 경영/경제, 인문/예술, 문학/에세이, 아동, 자기계발, IT/종합 등 6개분야에서 진행된다. 출판사가 돌아가며 추천 도서를 소개하고 추첨을 통해 댓글을 남긴 24명에게 해당 책을 증정한다. 참여를 원하는 사람은 예스24홈페이지(www.yes24.com) 이벤트 페이지로 들어가서 받고 싶은 책의 제목과 이유를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연동된 SNS를 통해 등록하면 된다. 또 캠페인 기간 추천도서의 리뷰를 작성한 사람에게도 추첨을 거쳐 상품권 등선물을 준다.
"선생은 제자와 후배를 가이없이 사랑하셨다. 습작기에는 (중략) 심지어 제목 다는 요령까지 무엇 하나 소홀함이 없으셨지만,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일단 등단하여 기성 작가 대우를 받기 시작하면 어디에 무슨 글을 어떻게 쓰든지 참견을 하지 않으셨다."(10쪽 '한국 현대문학의 거목' 중)'무녀도' '등신불' 등을 쓴 소설가 김동리(1913~1995)가 생전에 제자를 대하는 태도가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용둔마을의 신동은 6세부터 10세까지 서당에서 '천자문' '동몽선습' '명심보감' '논어' '맹자'를 읽었다. 이 신동은 상상력도 수준이 높았다. (중략) 하늘에 총총한 별마저 먹을 것으로 보여 별을 따달라고 울어 보챈 기억도 있다."(73쪽 '5세 신동의 50년' 중)는 부분은 시인 고은(78)의 어릴 적 이야기다. 이처럼 한국 현대 문학사의 한 장을 장식한 문인들의 삶과 일화를 생생하게 그린 이는 바로 '관촌수필'의 작가 이문구(1941~2003)다. 당대 문인과 누구보다 폭넓게 교류한 소설가 이문구가 동료 선후배에 대해 풀어놓은 이야기가 '이문구의 문인기행'(에르디아 펴냄)이라는 책으로 묶여 발간됐다. 책은 이문구가 생전에 잡지 등 여러 곳에 남긴 글 가운데 현대문학의 주요 문인에 대한 자료만 모았다. 이 책의 편집주간인 시인 이흔복은 "이문구는 동료 문인에 대해 무척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며 "문인에 대해 잘 알고 또 그 이야기를 재미있게 쓸 작가는 이문구외에 없다고 판단했다"고 책 발간 배경을 설명했다. 김동리, 신경림, 고은, 한승원, 염재만의 인물평은 1부에 실었고 2부에서는 박용래, 송기숙, 조태일, 임강빈, 강순식 작가의 단행본에 쓴 발문을 모았다. 우리말 특유의 가락이 담긴 글로 유명한 이문구는 각 인물에 대한 애정을 듬뿍담아 유장한 문체를 펼쳤다. 구수한 입담과 해학을 토대로 문인 세계의 풍경을 전한다. 특히 이문구와 친분이 두터웠던 시인 박용래와의 일화를 담은 글에서 이런 분위기가 잘 드러난다. "그는 조상 적 이름의 풀꽃을 사랑하여 풀잎처럼 가벼운 옷을 입었고, 그는 그보다 술을 더 사랑하여 해거름 녘의 두 줄기 눈물을 석 잔 술의 안주로 삼았다. 그는 그림을 사랑하여 밥상의 푸성귀를 그날치의 꿈이 그려진 수채화로 알았고, 그는 그보다 시를 사랑하여 나날의 생활을 시편의 행간에 마련해두고 살았다."(91쪽. '내가 왜 울어야 하나' 중)흥겹고 유려한 문장으로 박용래의 삶을 노래한 그는 박용래의 눈물에 얽힌 일화, 시인 정지용이 자신의 고향 선배인지도 모르던 한 시인을 호되게 꾸짖은 일 등 다양한 에피소드를 전하고 있다. 이어 3부에는 이문구가 '월간문학' 등에 작가 탐방을 주제로 연재한 글이 실렸다. 황석영, 박상륭, 김주영, 조선작, 박용수, 이정환에 대한 글이다. 마지막 4부는 박태순, 서정주 등에 대한 실명 소설 추도사를 담았다. 328쪽. 1만3천원.
정열(雲月 鄭烈·1932~1994)은 정읍 정우면 회룡리에서 태어난 시인이다. 그의 고향은 갑오동학농민혁명의 함성이 들판을 적셨던 곳이다. 그런 탓인지 몰라도, 그의 시를 읽노라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속이 울울해지는 느낌을 주체할 수 없다. 그 스스로 "내 시는 어머니의 가슴속에서 영영 풀리지 못한 채 응얼진 핏덩이거나, 아니면 한밤중 반딧불 같은 호롱불 앞에서 반쯤 석불이 되어 어깨를 울먹이던 속울음이다"고 고백했듯이, 그의 시에는 한이 서려 있다. 시력 30주년을 맞아 병석에서 낸 시선집의 제목조차 '할말은 끝내 이 땅에 묻어두고'(청사·1985)였으니, 그의 시작품에 살로 배어 있는 '응얼진 핏덩이'나 '울먹이던 속울음'은 포괄적으로 한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그는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여느 아이들처럼 천자문을 배우며 자랐다. 이런 가정 형편은 특출난 것도 아니어서 굳이 시를 쓰지 않아도 될 터이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약골로 소문나는 대신에, 하늘의 허락을 얻어 시재를 부여받았다. 몸과 문학을 맞바꾼 그는 1948년 전주상고에 들어가면서부터 차근차근 수련을 시작하였다. 그는 학교의 문예부장을 맡으며 문학의 길에 본격적으로 발을 디뎠다. 이러한 경로는 시인으로 나아가는 전형적인 방법이었다.1953년 '자유신문'에서 신인들의 문예작품을 공모하자 그는 시를 내어 당선되었다. 그는 자신의 시작에 자신감을 갖고 1955년 '문학예술'에서 추천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의 월간지에서는 3회까지 추천해야 완료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그는 계속하여 작품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당선 소감문까지 보냈던 잡지가 폐간되어 버리자, 그는 등단 시기를 늦추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59년 11월이 되어서야 그는 '사상계'에서 등단 절차를 마치고 마침내 시인이 되었다.첫 시집 '원뢰'(정치문화사·1959)를 내면서 그는 본명의 정하열(鄭夏烈)에서 '여름'을 지워버리고 정열로 필명을 삼았다. 아마 '여름'이 정열(情熱)의 계절이고, '녀름'이 그 여름의 결실이라 생각하여 중첩된 의미를 삭제해버렸는지도 모른다. 혹은 게으름을 부추기거나 겨르로운 호흡을 요구하는 여름의 의미망에 부담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가 아호를 거의 사용하지 않은 점으로도 유추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그의 필명은 줄임이 아니라 없앰이다. 그는 여름을 지워서 시인의 '정열'을 얻고 싶었던 것이리라.정열은 1963년 국학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의 태인중학교에 국어교사로 부임하였다. 이후로 그의 생은 교육 현장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그에게 변화라곤 통근하기 쉬운 태인기술학교를 거쳐 신태인종합고등학교로 전근한 것 외에, 평생 동안 교단에서 영재를 지도하느라 심혈을 쏟았다. 그는 교직에 종사하는 한편으로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농사도 함께 지었다. 그에게 '농민 시인'이란 칭호를 붙게 해준 것은 그로부터 연유한다.사실 정열의 시집에는 농촌을 소재화한 작품들이 흔하다. 구체적으로 그의 시는 "손금마다 살아 남는 풀물"('풀물')이 듬성듬성하고, 또한 "갯도랑까지 다 메운 팥죽같은 흐레"('미꾸라지')가 질펀하다. 이런 사례를 들어서 정열을 농민시인이라 칭한다손, 크게 어긋난 평판이 아니다. 하지만 조금 더 읽어보면 "지어미 가슴속 기진한 속울음"('쑥국새 소리') 소리와 "제가 꼰 새끼줄에 제 손들 묶여"('진눈깨비')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찾아내기가 더 수월하다. 말하자면, 정열은 더불어 부대끼며 살아가던 농민들의 정서를 작품의 원경으로 삼고, 자신이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던 농촌의 현실을 근경으로 설정한 뒤에, 자신의 섬세한 감수성을 육화한 것이다.이런 성향은 그의 무골호인에 가까운 천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속으로는 속울음으로 범벅된 그였으나, 겉으로는 다정한 이웃 아저씨로 불리던 그였다. 그는 '할말은 끝내 이 땅에 묻어두고' 다정도 병인 양, 시작에 열중하여 농촌의 참모습과 농민들의 애환을 자신의 것으로 승화시켰다. 그가 "거덜난 일상"('흙에게')과 "하얀 백자기의 은은한 속삭임"('농악은')에 '파르르' 떠는 것도, 따지고 보면 "안으로 안으로 크나큰 강물"('여백')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추모하는 움직임이 일다가, 최근 이르러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번지르르한 시편들에 현혹된 세태를 보는 듯하다.이승에 사는 동안에 "살아 남아 귀먹고 눈먼 것들을 위하여"('할말') 몸살을 앓고 가슴을 졸이던 그는 1964년 정읍과 김제, 부안 지역의 문우들과 문학회를 결성하고 동인지 '향토문학'을 발간하는 등 열심히 문단 활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그의 이런 모습은 큰 시인이 되려거든, 먼저 고향의 문학 발전에 헌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소박한 진리를 입증한다. 성근 시재의 시인일수록 저 잘난 맛에 겨워 고향을 멀리한다. 이 점에서 죽어서도 정든 땅을 떠나지 않고 고향사람들에게 무한한 애정을 지녔던 정열의 생애는 오래 기릴만하다.
한국 대중음악(K-POP)이 유럽 등에서 새롭게 한류 열풍을 일으키는 가운데 한국 문학도 해외 출판시장의 지평을 넓히고 있어 눈길을 끈다. 최근 해외 무대에서 크게 인지도를 높인 소설가 신경숙은 이스라엘에서 '엄마를 부탁해'를 번역 출간한 것을 계기로 7~12일 현지에서 사인회와 인터뷰를 소화하고있다. 지난 7월 초 이스라엘에서 출간된 '엄마를 부탁해'는 현지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3위까지 오를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조경란의 '혀'가 앞서 이스라엘에 출간된 바 있지만 '엄마를 부탁해'처럼 한국작가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현지에서 작가 사인회까지 열리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신경숙의 해외 판권을 관리하는 KL매니지먼트 이구용 대표는 "'엄마를 부탁해'는 한국 문학의 불모지라고 할 수 있는 레바논에까지 소개되는 등 해외에 어필하고있다"며 "한국 문학을 발굴해 해외에 소개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최근 여러 곳에서 진행되면서 얻어낸 결과"라고 말했다. 일본 문학계에서는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문을 두드리고 있다. 우선 한강의 연작 소설인 '채식주의자'가 한국문학번역원의 '저작권수출활성화사업'의 일환으로 최근 일본에서 출간됐는데 기대 이상의 반응을 얻고 있다. 지금까지는 윤동주, 이상, 채만식 등의 근대 문학 작품이나 김지하, 조정래 등1980~90년대 작가의 작품이 주로 일본에 소개됐지만 최근에는 젊은 작가의 작품이 크게 늘고 있다. 한국문학번역원은 "'채식주의자'는 일본 쿠온 출판사가 '새로운 한국문학 시리즈'의 첫 번째 책으로 지난 6월 출간했다"며 "지난달 중순부터 아사히, 마이니치, 요미우리 신문 등이 관련 기사를 다뤘다"고 전했다. 2000년대 이후에 출간된 작품 중에서는 공지영의 '즐거운 나의 집'이 일본에 소개된 바 있으며 쿠온 출판사는 김중혁의 '악기들의 도서관', 하성란의 'A' 등을 출간할 예정이다. 은희경의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김연수의 '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애란의 '침이 고인다', 박민규의 '카스테라' 등은 한국문학번역원의 지원을 받아 번역이 진행되고 있다. 한국문학번역원은 "한국 문학을 일본에 소개하는 번역가의 세대가 교체되고 있다"며 "재일교포 3세 출신 번역가나 한국 문학에 관심을 둔 현지 학자들이 생기는 등 번역가층이 넓어지면서 한국의 젊은 작가가 일본에 자주 소개되고 있다"고 밝혔다.
인터넷서점 예스 24(대표 김동녕·www.yes24.com)가 25일부터 27일까지 지리산에서 '제8회 문학 캠프'를 연다.이번 문학 캠프에는 소설가 박민규 김언수 공지영이 초청됐다. 25일에는 김민정 시인의 진행 아래 젊은 작가와의 만남이 준비된다. 예스 24의 '차세대 한국을 대표할 젊은 작가'로 꼽힌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의 소설가 박민규와 첫 장편소설 '캐비닛'에 이어 최근 신작 장편을 내놓은 소설가 김언수가 주인공. 26일에는 '지리산 행복학교'를 펴낸 소설가 공지영과 박남준·이원준 시인이 함께 한다. 27일에는 200여 명의 관람객들과 전주 최명희문학관을 둘러본다. 문의 010-2707-0865(홍보대행사 버네이스애플트리). www.atpr.co.kr
直聲留闕下, 秀句滿天東 -顧南雅先生文章風裁, 天下皆知之, 向爲湘浦一言, 尤爲東人所傳誦而盛道之. 萬里海外, 無緣梯接, 近閱復初齋集, 多有南疋(雅?)唱酬之什, 因是而敢託於墨緣之末, 集句寄呈, 以伸夙昔憬慕之微私. 海東秋史金正喜具草.곧은 소리(말)는 대궐에 남아 있고, 빼어난 글귀는 하늘 동쪽(조선)에 가득하다오. -고남아(顧南雅) 선생의 문장과 풍채는 천하가 다 압니다. 특히, 접때 상포(湘浦)를 위하여 한 말씀은 동쪽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전해져 많은 사람의 입에 무성하게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저는 만 리 밖 해외에 있는 몸이라서 다리를 놓아 접할 기회가 없었는데, 최근에 《복초재집》을 읽다보니 옹방강(翁方綱) 선생과 남아 선생 사이에 주고받은 시가 많이 있었습니다. 이에, 이것을 구실로 삼아 감히 옹방강 선생과 묵연을 맺은 사람들의 맨 끝자리라도 의탁해 보고자 이 구절을 써서 보냄으로써 오랜 동안 마음속으로만 해오던 동경과 우러러 추앙하는 마음을 펴 보입니다. 해동의 추사 김정희가 갖추어 썼습니다.直:곧을 직/ 聲:소리성/ 留:머무를 유, 남을 유/ 闕:집 궐/ 秀:빼어날 수/ 句:글귀 구/ 滿:가득할 만이 작품은 추사 김정희 선생이 중국의 학자 고남아(顧南雅)와 교유를 트기 위해 써 보낸 것이다. 顧南雅는 중국 청나라 가경(嘉慶)년간에 정무(政務)를 바르게 처리하기로 이름이 났던 관료이자 학자이고 시, 서, 화에 능했던 고순(顧?:1765-1832)이라는 사람이다. 南雅는 그의 호이다. 협서(脅書)에 나오는 '상포(湘浦)'라는 사람은 몽고족으로서 청나라 조정에 무관(武官)으로 벼슬하여 청렴결백하게 나랏일을 봤던 군기대신(軍機大臣) 송균(松筠:1744-1835)이다. 湘浦는 그의 자(字)이다. 가경 25년(1820), 청나라의 선종(宣宗)이 즉위한 후, 송균을 외직으로 내보내려하자 고순이 나서서 송균처럼 강직한 충신은 늘 주변에 두고서 바른 말을 하게 해야 한다고 직언한 바 있다. 추사는 고순이 행한 그런 직언을 들어 "直聲留闕下·秀句滿天東" 즉 "바른 말은 대궐에 남아 있고, 빼어난 글귀는 하늘 동쪽에 가득하다."고 칭찬하고 그것을 글로 써서 선물로 보낸 것이다. 이 때 추사의 나이는 35세였다. 추사는 24세에 사신으로 가는 생부 김노경을 따라 연경에 들어가 당시 중국 학계와 서예계의 거물이었던 옹방강(翁方綱:1733-1818)을 비롯한 많은 학자들을 접하고 돌아왔는데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후에도 추사는 여전히 청나라 인사와 새로운 교유를 트기 위해 이런 작품을 한 것이다. 이는 마치 오늘날 미국을 비롯한 해외 유학파들이 귀국한 후에도 현지의 인맥을 잘 관리함은 물론 끊임없이 인맥을 넓혀나가려는 노력을 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이 작품은 서울 성북동의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중국으로 건너가 고순에게 전해졌던 것이 어떤 경로를 타고 다시 한국으로 들어와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게 된 것인지 아니면 추사가 이 작품을 써놓고서도 어떤 사정으로 인해 고순에 보내지 않아 국내에 남아 있던 것이 간송으로 들어가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이 작품은 추사체의 형성과정을 가늠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추사는 연경에 다녀온 후 서예를 보는 안목이 크게 달라진 것은 사실이나 그의 작풍이 바로 변한 것은 아니다. 최소한 30세까지의 추사는 당시 조선에 명필로 활동하던 추사보다 19년 연상의 자하(紫霞) 신위(申緯) 글씨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30세 이후에야 비로소 해서에서부터 옹방강의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추사 나이 31세에 쓴 〈이위정기(以威亭記)〉나 33세에 쓴〈가야산 해인사 상량문〉의 해서는 옹방강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35세 경부터는 대련(對聯)이라는 새로운 형식의 큰 글씨에도 옹방강의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 〈直聲留闕下, 秀句滿天東〉작품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이다.상대방의 장점을 들어 극구 칭찬하는 글을 짓고 그것을 작품으로 쓴 다음, 다시 그런 작품을 쓰게 된 내력을 극존칭의 어사로 표현하여 협서(脅書)로 쓴 이 작품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교유를 트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겸양이 다소 지나치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더욱이 고순(顧?)이라는 사람은 당시에도 그랬거니와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중국 학계에서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인물이다. 굳이 "묵연의 말석에라도 끼고 싶다"는 표현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추사는 혹 중국의 학문이나 서예를 너무 신봉하는 모화주의(慕華主義)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추사의 문집인《완당선생전집》을 읽다보면 중국의 서예는 뭐든지 다 좋게 평하고 조선의 서예가나 서예에 대해서는 폄하가 지나치게 심함을 수시로 발견할 수 있기에 하는 말이다.
위(魏)ㆍ촉(蜀)ㆍ오(吳)는 중국 대륙을 삼분하며 쟁패했다. 우리는 흔히 이 시대 주인공으로 조조의 위, 유비ㆍ관우ㆍ장비ㆍ제갈공명의 촉을 생각하지만 삼국 중에서 가장 긴 생명을 자랑한 왕조는 오였다. 재일교포 인문학자로 일본 교토대학 인문과학연구소장을 역임한 이 연구소 김문경(金文京. 59) 교수는 이 시대의 주인공을 오와 손권(孫權)으로 본다. 최근 국내에 완역된 단행본 '삼국지의 세계'(사람의무늬 펴냄)에서 저자인 김교수는 위와 조조, 촉과 유비에게 억눌린 오와 손권의 '복권'을 시도한다. 사실 김 교수는 정사 삼국지보다는 소설 삼국지연의의 권위자로 통하기도 한다. 1993년 펴낸 '삼국지연의의 세계'라는 단행본이 그만큼 호평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번에 한국어로 번역된 '삼국지의 세계'는 1993년 단행본의 자매편이라고도 할수 있으며 삼국지에 대한 관심을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정사 '삼국지'로 확장한 성과물이기도 하다. 2005년 일본 고단샤에서 선보인 '중국의 역사 시리즈' 중 하나인 '삼국지의 세계'에서 저자는 손권이야말로 삼국시대를 연출하고 캐스팅 보트를 쥔 숨은 주역이라고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위와 촉은 한(漢) 왕실의 정통을 다퉜기 때문에 동맹이 불가능한 불구대천 원수였다. 손권은 이런 상황을 잘 이용해 때로 위에 신하 노릇을 자청하기도 하고, 이런 위에 대항하고자 촉과 동맹하기도 했다. 삼국시대는 이런 오와 손권이 어느 나라와 손을 잡느냐에 따라 상황이 변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손권은 촉과 동맹한 적벽대전(208)을 거쳐 촉의 관우가 번성을 공략(219)하자 위와 동맹했으며 223년 유비가 죽은 뒤에는 두 번째 '오촉동맹'을 한다. 저자는 황제에 즉위한 손권이 촉의 제갈공명에게 제안한 이제병존(二帝幷尊),즉, 두 황제가 대등한 지위에서 동맹하는 발상을 심상치 않게 평가한다. 전통적인중국의 세계관에서 황제는 오직 한 명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손권이야말로 '노회한 현실주의자'란 것이다. 더불어 저자는 이 책에서 삼국지연의가 덧씌운 이미지, 예컨대 간웅으로 각인된조조, 우국충정의 대명사 관우 등과 같은 틀에서 벗어나는 한편, 삼국시대를 중국역사상 가장 '화려했던 난세'로 간주한다. 유ㆍ불ㆍ도의 삼교가 정립하고, 문학이꽃핀 시대가 바로 삼국시대이기 때문이다. 송완범ㆍ신현승ㆍ전성곤 옮김. 544쪽. 2만5천원.
"배추를 통이 크고 좋은 것을 택하야 누렁잎을제치고 잘 다듬어서 물에 정하게 씻나니 씻을 때에 부서지지 않도록 조심해서 잎사귀 틈틈이에 모래가 없도록 정밀하게 씻어가지고 소금에 다시 저리나니 물 두 동이에 소금 석되만 풀어서…" 근대의 교육자 방신영(1890-1977)이 쓴 '조선요리제법'에 나오는 '통김치 담그는 법'이다. 최초의 근대식 요리책이자 스테디셀러였던 이 책이 원본 그대로의 모습으로 다시 출간됐다. 열화당이 1800년대 말에서 1950-1960년대 사이에 출간됐던 책과 기록문 가운데 재조명될 가치가 있는 책들을 엄선해 복각본(復刻本)으로 선보이는 '열화당 한국근현대서적 복각총서' 시리즈의 첫 권으로 나온 것이다. 최대한 원본의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해제도 별쇄 형식으로 제작돼 책 속에 삽입됐으며 각 권마다 고유번호가 찍혀있는 500부 한정판으로 출간됐다. 시리즈의 문을 여는 '조선요리제법(朝鮮料理製法)'은 1937년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나온 제8판을 복각한 것이다. 100년 전인 1911년 '요리제법'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세상에 나온 이 책은 1917년 '조선요리제법'으로 제목을 바꿔 정식 출간된 이후 꾸준히 판을 거듭해왔으며 최근에도 현대어로 바뀌어 출간되고 있다. 요리용어 해석과 중량 비고, 주의할 사항으로 시작해 젓갈류, 김치류, 장아찌, 조림, 찌개, 찜, 무침, 전유어 등 61개 항목 아래 500여 종의 음식 조리법이 상세하게 소개되고 있다. 제목 앞에 '主婦(주부)의 동무'라는 수식어를 붙여 나온 이 책은 '어머님 령 앞에'라는 헌사에 이어 여성 교육자 김활란과 국학자 정인보의 서문 등도 담고 있다. 조후종 전 명지대 교수는 해제에서 "이미 한 세기 전에 방신영은 우리 음식이 우수하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방대한 음식 재료와 조리법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후대에 교육하고 전하고자 했다"며 "이 책이 우리 전통음식문화의 세계화 및 그 발전방향을 세우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말했다. 524쪽. 5만원.1932년 초판이 간행된 성공회 세실 쿠퍼(한국명 구세실) 주교의 기도서 '사도문(私禱文)'도 복각본으로 소개됐다. '사도문'은 교회에서 하는 예배인 '공기도'와 달리 신앙 증진을 위해 개인적으로 바치는 '사기도' 때 사용하는 기도문이다. 김성수 대한성공회 대주교는 "'사도문'은 대한성공회의 출판활동이 한창일 때다른 여러 신앙서와 함께 발간된 것"이라며 "인간의 유한성을 넘어 무한한 존재인 하느님을 만나 자신의 내면을 돌이켜 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책"이라고 말했다. 184쪽. 2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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