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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46. 춘향이의 옥(獄) - 남원 관아 터 복원해 춘향의 옥중가 들을 수 있기를

그때여, 춘향이는 옥방에 홀로 앉아 장탄식으로 울음을 우난디, 춘향 형상 가련하다. 쑥대머리 귀신형용 적막옥방의 찬자리여 생각나는 것은 임뿐이라 보고지고 보고지고 보고지고 한양낭군 보고지고...비만 와도 임의 생각 추오동엽락시에 잎만 떨어져도 임의 생각... 《춘향전(春香傳)》중 춘향이가 옥중에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이몽룡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대목이다. 세상에서 가장 절절한 사랑가이다. 명창 임방울(1905-1961)과 안숙선 그리고 오정해 박애리 이윤아에 이르기까지 춘향이의 아픈 마음을 토해내듯 전해줄때면 그 애절함에 절로 마음이 미어진다. 춘향이는 헝클어진 쑥대머리의 형상으로 목에 칼을 쓴 채 옥(獄)에 갇힌 모습으로 안타깝게 앉아있다. 대부분의 드라마 속 영상으로 그려진 옥중 춘향이의 모습이다. 갇힌 독방에는 짚풀이 놓여 있고 카메라의 동선을 따라가 보면 옥의 모습이 네모난 공간으로 확장이 된다. 하지만, 조선시대 옥의 형태는 원형으로 춘향이가 갇혀있던 남원의 옥도 원형옥(圓形獄)이었다. 원형옥은 북부여(기원전 200년쯤)에서 사용됐다고 전해지며 수차례의 왕조가 바뀌는 동안에도 2000년 이상 원형옥의 형태는 그대로 이어져 왔다. 우리나라의 전통옥은 둥근 모양으로 담장을 쳐 그 안에 옥사를 설치했고, 감옥이 아닌 옥(獄)이라는 용어로 불렸다. 하지만 갑오경장(1894)때 관제를 개혁하면서 기존의 전옥서(典獄署, 고려 초에 설치되어 조선에 이르기까지 옥에 갇힌 죄수에 관한 일을 담당하던 관청)를 감옥서라 개칭했고 이후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하면서 1907년 감옥서를 감옥이라고 개칭했다. 이후 감옥이란 명칭을 형무소로 바뀔 때까지 29년간 사용했다. 게다가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우리나라 전국 읍성과 관아가 철거되는 과정에서 고유의 원형옥도 함께 훼손돼 지금은 문헌과 그림 그리고 고지도에서만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전옥서에 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중 태조실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전옥서는 수도(囚徒)의 일을 관장하는데, 영(令) 2명 종7품이고, 승(丞) 2명 종8품이며, 사리(司吏) 2명이다. 전옥은 형조의 죄인들을 판결이 있기 전까지 수용하는 옥으로 칸마다 벽 위쪽에는 창살을 설치하고 바닥에는 판자를 깔아 두었으며 문은 두꺼운 판문에 자물쇠를 설치하고 여기에 구멍을 뚫어 음식을 넣어 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대부분 읍성 내 독립된 시설로 존재한 원형옥은 그 모습을 만든 선조들의 사상이 돋보이는 시설이다. 원형인 이유는 감시의 사각을 없애기 위함도 있다지만 사상적인 의미가 더 큰 것으로, 원형의 옥을 축조한 것은 원이 하늘이나 우주를 의미한 것으로 원형 안에 죄인을 수용하면 죄인들이 스스로 교화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단지 죄인을 가두는 것이 아닌 다시 세상에 나가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 있게 만든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이는 애민(愛民)사상과 집안 사정을 고려해 죄인의 형을 감하거나 면해 주는 휼형(恤刑)과 연관돼 이어진다. 단순히 죄인을 사회와 격리시키고 형벌만을 가하는 것이 아닌 교화와 재사회화에 중점을 둔 것으로 사람을 위한 형벌제도의 취지가 우리의 원형옥에 깃들어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중 세종이 승하했을 때 남긴 부고에는 크고 작은 형벌을 애써 삼가서 불쌍하게 할 것을 관리에게 경계하여, 비록 일태일장(一笞一杖)일지라도 모두 조정율문(朝廷律文)에 따라서 하고, 절대로 함부로 억울하게 하는 것을 금하여, 교령(敎令)에 기재하여 나라 안에 반포하고, 관청의 벽에 걸어 항상 경계하여 살피기를 더하게 하기를, 안옥(犴獄)에 이르기까지 하고, 도면을 그려서 안팎에 보여 그림에 따라 집을 짓게 하되, 추운 곳과 더운 곳을 다르게 하였으며, 구휼하기를 심히 완비하게 하여, 횡액에 걸려 여위고 병든 자가 없게 하였다.란 내용의 업적이 세종실록에 기록되어있다. 세종은 재위 8년(1426)에 만든 옥의 표준설계도인 안옥도(犴獄圖)에 옥을 지을 때 습기를 방지하기 위해 지반을 한자(30㎝) 이상 높여 짓도록 했다. 또 옥사를 남향으로 짓고, 옥담 위의 처마를 길게 빼 그늘을 드리워 여름에 온도를 낮출 수 있도록 했다. 계절의 특성을 고려하여 옥을 지을 때 죄인이 병들거나 죽는 것을 최대한 방지하려 하였고 죄의 과중에 따라 나누며 또한 남녀를 구분하여 남옥과 여옥으로 분리해 수용하였다. 1595년 서양의 네델란드에서 처음으로 남녀감옥의 분리가 실시되었다고 하니 조선이 서양보다 170여년이나 앞선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원형옥은 선조들의 애민사상이 담겨 있는 곳으로, 『조선왕조실록』 단종실록에서는 옥을 맡은 아전과 군졸들이 죄수를 괴롭히지 못하게 엄하게 다스리라고 명한 부분이 있다. 안옥(犴獄)은 원통하고 억울하게 되기 쉬우므로 중외의 옥을 맡은 관리에게 경계하여 이르기를, 안옥을 설치한 것은 본래 죄 있는 사람을 징계하자는 것이고 사람을 죽게 만들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여러 번 교조(敎條)를 내려서 힘써 긍휼하게 하였는데, 옥을 맡은 아전과 군졸들이 법도 아닌 것으로 죄수를 괴롭히고 침노하니, 이제부터는 갇힌 사람의 친속을 시켜서 하소연하게 하며 엄하게 다스려서 원통하고 억울한 것을 펴게 하라. 하였다. 하지만 선조들의 사상이 깃든 원형옥은 일제에 의해 해체돼 모두 사라지고 그 흔적만 남아 있다. 다행히 최근에 각 지자체마다 남아있는 역사의 흔적과 관아의 터를 복원하여 지역의 자산으로 만들어가는 추세이다. 바라건대 원형옥의 모습도 복원되어 당대의 사상과 이야기들도 함께 체험 할 수 있으면 한다. 사유지이거나 복원이 어려울 경우 관련 안내판이라도 해당 장소에 올곧이 세워야 할 것이다. 특별히 춘향이의 이야기가 담긴 남원에는 지역의 명창이 건네주는 춘향이의 옥중가를 그곳에서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하고 깊은 가을 춘향이의 애절한 사랑노래를 들어보며 그 흔적을 찾아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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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1.22 20:02

[최진석의 노장적 생각]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더 세다

고고학은 영국이 선진국이다. 고고학적 유물은 이집트가 더 많다. 촌스럽고 좀 억지스럽게 갖다 붙인다. 영국이 이집트보다 더 부유하고 강한 나라다. 이것을 고고학적 유물을 가진 것보다 고고학을 가진 것이 더 세다는 말로 바꿔볼까? 유물은 보이고 만져진다. 지식과 이론으로 체계화 된 고고학은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다. 보이고 만져지는 것보다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것을 가지는 것이 더 실속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학은 지식과 이론이 특정한 대상과 방법으로 묶인 것이다. 여기서 지식과 이론의 힘을 알 수 있다. 유물은 구체적이자 현상적이다. 지식과 이론은 구체적이고 현상적인 것들을 설명해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구체적이고 현상적인 것들을 갖는 것보다 그것들을 설명하는 능력을 갖는 것이 더 높다. 학을 가졌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높은 수준의 설명 능력을 가졌다는 말과 같다. 이해해야 설명할 수 있다. 설명하는 능력은 바로 통제 능력으로 연결된다. 통제 능력은 영향력으로 발휘된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접촉하는 세계를 둘로 나눠서 본다. 하나는 구체적인 세계고, 다른 하나는 구체적이고 현상적인 것들을 설명하는 세계다. 영향력과 통제력은 설명하는 것들에게 더 크게 있지 설명되어지는 것들에게 더 있지 않다. 설명을 기다리는 것들을 우리는 구체적이고 현상적인 것들이라고도 하는데, 그것들에 접촉할 때 인간은 감각을 사용한다. 설명하는 능력이 발휘되어 만들어진 세계, 즉 지식과 이론의 세계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다. 추상의 세계다. 이 세계를 접촉하는 인간의 능력을 사유라고 한다. 당연히 사유의 능력이 감각 능력보다 세다. 보이고 만져지는 세계를 다루는 능력보다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세계를 다루는 능력이 훨씬 더 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체적인 세계를 다루는 높이에서 감각을 사용하여 무엇인가 만드는 활동이 기능이다. 무엇인가 만드는 일이 사유의 높이에서 일어나는 활동은 기술이다. 여기서 과학적 사유가 개입한다. 그래서 기술과학이나 과학기술이라는 말은 성립해도 기능과학이나 과학기능이라는 말은 성립하기 어렵다. 당연히 기술을 가진 사람이 기능적인 높이에 있는 사람보다 더 세다. 기능적 삶은 과학(기술)적 삶을 이길 수 없다. 감각의 단계에서 쾌락을 만드는 일을 예능이라 하고, 사유의 높이에서 쾌락을 만드는 일을 예술이라 한다. 예술의 단계에서 즐거움을 생산하는 능력을 갖춘 사람은 예능에서 그러한 사람을 압도한다. 지식과 이론과 원리와 법칙들은 대개 예술과 친하고, 현상에 직접 접촉하는 감각의 능력은 예능과 친하다. 즐거움을 예술보다는 주로 예능에서 찾는 데에 습관이 된 사람이 원리나 법칙이나 이론적인 높이에서 일어나는 일을 할 수는 없다. 예능에 젖어서는 창의성이나 독립성이나 하는 것들을 가질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에게 창의성이 잘 발휘되지 않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똑같은 의미에서, 기능적인 삶의 태도로는 자유롭고 창의적인 삶을 구가할 수 없다고 말해도 된다.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세계만 진짜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눈에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세계를 없는 세계 취급하면 자유와 독립과 같은 높은 단계의 것들을 가질 수 없다. 바로 종속적 단계다. 이런 단계에서는 따라하기에 빠진다. 감각적이고 현상적인 단계에서 따라하기로 살던 우리가 지금 이 단계에서 가져야 할 사명이 한 단계 더 상승하는 일이라고 할 때, 그 말의 구체적인 의미는 기술(과학)과 예술과 사유의 단계로 상승한다는 말이다. 이제 그 단계에 있는 덕목들이 그 아래 단계의 덕목을 누르며 사는 도전에 나서야 한다. 진시황의 중국 통일은 변방의 작은 나라가 어떻게 발전하여 제국까지 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당시 혼란에 쌓여 있던 전국(戰國) 시기에는 모든 나라들이 다 개혁에 몰두한다. 철기의 발명을 계기로 새롭게 형성된 생산 방식의 변화가 야기한 사회의 급격한 변화에 어떻게 효율적으로 적응하느냐가 관건인 시대였다. 이것이 당시 개혁 바람의 진상이다. 그들은 이것을 변법이라고 불렀다. 당연히 변법에 누가 먼저 성공하느냐가 누가 먼저 패권을 갖느냐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진나라를 포함하여 거의 모든 나라들이 기존에 했던 일을 이리저리 바꿔보고, 또 더 열심히 해보고, 관리나 백성들을 다그쳐도 보고, 제도를 수선해보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도해보고 하는 것들로 그 시대에 반응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승부가 갈리는 일대 사건이 일어나는데, 바로 진나라에서 전혀 다른 차원으로 그 시대를 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상앙(商?)의 출현이다. 상앙은 개혁의 핵심을 신뢰의 회복에서 찾는다. 신뢰가 없이는 어떤 개혁도 이뤄질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그 이전에는 있어 본 적이 없는 이벤트를 한다. 성문 밖 남문에 나무를 박아 놓고, 그것을 북문으로 옮기는 사람에게는 적지 않은 상금을 준다고 말한다. 하지만, 백성들은 나라에서 하는 말이라면 이미 시큰둥해져서 어떤 말도 믿지를 않아 그것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자 상앙이 상금을 다섯 배로 올렸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한가한 사람이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장난삼아 그 나무를 옮겼고, 상앙은 정말로 거금을 상으로 주었다. 이렇게 되자 백성들은 상앙이 다른 재상들과는 다르게 본인이 말한 것은 그대로 지킨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그때부터 상앙의 변법은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매우 효율적으로 시행되어, 변방의 작은 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 대업을 이룰 수 있는 개혁의 길로 착실하게 나아갈 수 있었다. 나무를 옮겨 신뢰를 세운(徙木立信) 것이다. 신뢰는 동양에서 흔히 인(仁), 의(義), 예(禮), 지(智)등과 함께 거론되는 오덕(五德)이다. 신(信)을 포함한 이것들은 활을 쏘고, 창고를 살피고, 결재를 하고, 전투를 하는 등과 같은 구체적이고 기능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그런 기능들을 지배하는 상위의 힘이다. 구체적이고 기능적인 일이 신뢰와 같은 상위의 힘에 지배를 받을 때, 그 효율성은 그러지 않을 때보다 훨씬 크다. 기능적인 일들이 신뢰 등과 같은 상위의 힘에 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효율성도 떨어지고 혼란스럽다. 기능에 갇혀 있으면 신뢰를 좋은 말이라고 여기기는 하면서도, 실제로는 아직은 아닌 것 혹은 귀찮은 것 또는 현실적인 효율을 직접 생산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간주하곤 한다. 하지만, 진나라의 예나 그 이웃 나라들의 예에서 보듯이 눈에 보이지 않는 신뢰가 크고 작은 일의 성취나 나라의 부강에 근본적인 역할을 한다. 눈이 낮으면 기능에 빠지고, 눈이 높으면 근본이 발휘하는 실질적인 효용을 안다. 눈이 낮으면 효용성은 기능에만 있는 것으로 안다. 눈이 높으면 효용이 없어 보이는 것의 효용을 안다. 이것이 도가(道家) 류에서 말하는 무용지용(無用之用)의 한 경지다. 도나 맥락이나 신뢰나 독립이나 하는 것들은 보이지 않은 것들이다. 그래서 눈 낮은 사람들은 그것을 쉽게 무용(無用)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기능적인 거의 모든 것들은 다 이런 것들에 의존한다. 결국 대용(大用)을 이루게 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어떤 면에서는 한계에 갇혀 있고, 어떤 면에서는 혼란스럽다. 이런 상황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가진 번민과 지식과 사유 능력은 나를 그렇게 생각하도록 한다. 근본적으로 우선 해결되어야 할 몇 가지 가운데 가장 시급한 것은 신뢰의 회복이다. 지식인, 법관, 정치인, 식당주인, 운전기사, 농부, 어부 등등 사회 전반에 신뢰가 무너졌다. 이젠 신뢰 같은 것은 없이 사는 수밖에 없다고 여기는 것은 아닐까? 한가하게 철학 공부나 하며 사는 사람 눈에는 근본이 무너지고 있는 느낌이다. 최고 높은 단계의 정치에서도 너무 쉽게 자기가 한 말을 전혀 지키지 않는다. 말을 지키지 않는 것은 원칙을 무너뜨리는 일이다. 여기서부터 개혁의 동력은 크게 손상을 입는다. 원칙을 지키지 않은 것은 바로 기능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원칙보다 기능이 더 커 보이는 한 개혁은 흔들린다. 기능에 의존한 채, 개혁을 이룬 예는 없다. 기능적 정치, 즉 정치 공학을 운전하는 일은 가능해도 정치 자체의 복원은 힘들다. 정치 공학으로는 이 사람을 저 사람으로 바꾸고, 저 사람을 이 사람으로 바꾸는 일은 가능하다. 또 이 진영이 저 진영을 대체하거나 저 진영으로 이 진영을 대체하는 일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것이 새 세상처럼 보이지만, 새 세상이 아니다. 정치처럼 보이지만, 아직 진짜 정치는 아니다. 헌 세상의 다른 얼굴일 뿐이다.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은 신뢰를 가지고 보이고 만져지는 기능을 압도할 수 있는 성숙이 필요하다. 동양의 옛 선현들은 높은 단계의 삶을 지향할 때, 다 도(道)를 추구했다. 도는 보이고 만져지는 것들을 잠시 포기하며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은 세계로 쉼 없이 상승하고 또 상승하다가 어느 극점에서 마주칠 수 있다. 그래서 도는 이름도 없고(無名), 형태가 없다(無形).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보이기도 하고 만져지기도 하는 만사만물 가운데 도의 지배를 빗나가는 것은 없다.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은 단계의 최 극점에 있는 도에 접촉하면, 세계의 맥락과 흐름에 통달할 수밖에 없다. 세계의 맥락과 흐름에 통달하면, 이리저리 저울질을 제대로 해서 정확한 판단과 시의적절한 정책을 펼 수 있다. 그러면 누구도 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知道者必達於理,達於理者必明於權,明於權者不以物害己. 『장자 추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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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1.20 19:49

다음달 임기 마치는 김도종 원광대 총장 "위기 기회로 바꾼 4년"

원광대학교가 지난 4년간 정부 재정지원액만 1480억 원을 받아냈다. 2011년 재정지원 제한대학이라는 오명을 말끔히 씻어낸 결과이기도 하다. 7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원광대가 이룬 사상 최대의 성과로도 평가된다. 이런 성과의 뒤에는 원광대를 4년간 이끈 김도종 총장이 있다. 대학의 전문 경영인으로 평가받는 그는 최선을 다해 열정을 다 바쳤다며 재선 도전을 스스로 포기하며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다음달 임기를 마치는 그는 원광대가 4년간 걸어왔던 길을 앞으로 더욱 열심히 가야한다며 애정을 담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 원광대를 4년간 이끄셨습니다. 어떤 경영 철학을 가지고 임해왔는지요. 기(氣) 살리는 대학, 기(氣)가 충만한 대학, 격(格)이 다른 대학, 인구 절벽시대 생존의 다리 건너기. 제가 3년 동안 학교를 이끌면서 내세웠던 경영 철학입니다. 2015년도는 학교가 침체되어 있었던 때입니다. 기(氣)를 살려 학교의 활력을 이끌어야겠다는 생각에 내건 철학입니다. 이 덕분인지 몰라도 2015학년도 대학구조개혁평가에서 A등급을 맞았습니다. 2016년과 2017년도는 그 활력을 이어받아 격이 다른 대학을 만들기 위해 집중했습니다. 수많은 정부 재정지원사업에 도전했고 주요 재정지원사업 수주에 성공했습니다. 우리 대학이 2017년에 정부 재정지원사업 수주 전국 최상위를 차지했습니다. 고생해준 구성원들에게 정말 감사 했습니다. 기쁨에 들떠있는 것도 잠시, 또 한 번 마음을 다잡을 수 있도록 새로운 경영 철학을 내걸었습니다. 2018-2025년 인구 절벽시대, 생존의 다리 건너기입니다. 대한민국의 학령인구 감소는 심각한 수준입니다. 지금부터가 진짜 위기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리고 함께 이겨내자는 마음을 담은 경영철학입니다. - 학령인구 감소로 대학들이 어렵다고는 알고 있습니다. 원광대는 어떤 전략을 세우셨나요. 역시 정면 돌파입니다. 학령인구 감소로 대학이 어려운 이유는 재정 때문이죠. 재정을 튼튼히 하고 교육환경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은 정부 재정지원사업 수주입니다. 대한민국 교육의 큰 틀과 사회변화의 흐름, 그리고 우리 대학의 강점을 내세운 새로운 전략을 만들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프라임사업입니다. 우리 학교만의 강점인 농공(農工)병진을 목표로 삼아 4차 산업시대에 걸맞은 인재를 양성하고 있습니다. 국내 최초로 탄소융합공학과를 개설했고 식물육종연구소를 중심으로 중국, 베트남, 몽골, 카자흐스탄에 육종연구소 기반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이중 중국 연변대학교와는 중국 길림에 종자회사인 연원농업과학기술회사를 세워 북방지역에 적응할 종자 육성을 위해 노력 중입니다. 이렇듯 전국의 어떤 대학과도 비교해도 줏대(Identity) 있고 정체성 있는 길, 대한민국이 필요한 길을 걸어가고 있기 때문에 대학이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4년간 많은 정부 재정지원사업에 선정됐죠. 다들 놀라워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소프트웨어 중심대학 사업 선정부터 PRIME, HK+, CK-1, LINC+, 거점형 창업 선도대학 육성사업 등 주요 지원사업에 도전하여, 2016년, 2017년 기준 정부 재정지원사업 수주액 전국 최상위의 결과를 거두었습니다. 전적으로 구성원들이 대학의 혁신에 대해 가진 의지와 개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합심 합력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편함도 있었지만 같이 어려움을 감수했기에 이러한 결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대학도 기존 학문연구기관으로서의 고정된 틀을 과감히 벗어나 문화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산업적 수요에 맞게 탈바꿈해나가고 있는 것이 우리 원광대학교의 기본 생각이고 앞으로 나가야 할 방향입니다. - 원광대를 이끌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입니까. 창업에 대한 구성원들의 인식이 긍정적적으로 바뀐 점입니다. 수많은 대학들이 취업을 중요하게 생각할 때, 우리 대학은 창직(創職), 창업도 강조해 왔습니다. 우리 원광대학교는 대한민국의 신사업을 이끌 문화자본주의형 인재를 양성하는 도덕대학입니다. 문화자본주의형 인재란, 정신적인 진선미(眞善美) 문화산업이 주력산업이 되는 문화자본주의시대에 인문학적 통찰력과 상상력을 바탕으로 세상을 선도하는 인재입니다. 과거 산업자본주의시대, 금융자본주의시대에는 물질적 의식주산업, 즉 대량생산을 위해 조직의 일부로 일해 줄 인재가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톡톡 튀는 아이디어와 소프트웨어 기술로 무장한, 창업역량을 갖춘 인재가 사회에서 앞서나갈 수 있습니다. 창업정신은 대종사님의 정관평 정신과도 맥을 같이 합니다. 경제적 자립의 표본이죠. 창직, 창업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우리 대학은 학과를 넘나드는 융복합형 교육과 함께 전국 유일의 1학과 1기업 창업, 창업역량인증제, 삼합신사 교육, 그리고 인천 미추홀구 문화콘텐츠 산업지원센터를 수탁 운영해 대한민국 청년 창업자를 양성했습니다. 학생 개개인별 창업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이제는 직업능력입니다. - 앞으로 대학이 어떻게 변하고 전북지역과 원광대는 어떻게 변해야 할까요. 인구와 청년 일자리가 급감하고 있는 대학에서 입학 정원을 유지하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국 유학생들을 점차적으로 유치함과 동시에 대학 내 창업을 장려해 대학이 새로운 직업을 만드는 주체가 돼야 합니다. 즉 대학은 전통적인 학문연구기관으로서의 역할에서 벗어나 학과, 기업, 연구소가 삼위일체가 되는 국제적인 산단형 캠퍼스로 탈바꿈해야 생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학은 신기술과 시대 흐름을 선도하는 콘텐츠를 생산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저는 과거 여러 번 새만금창업단지와, 역사문화엑스포 조성을 건의하여 인구 유입과, 청년 일자리문제 해결을 제안해왔습니다. 이런 다양한 제안을 잘 활용해 대한민국과 각 지역 균형발전의 원동력으로 삼는 것 또한 검토해볼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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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진만
  • 2018.11.18 19:35

[이 사람의 풍경] 원불교 제15대 전산 김주원 종법사 "원망보다는 감사하는 마음 가지면 삶이 달라집니다"

익산의 원불교 중앙총부를 찾아간 날, 늦가을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중앙총부 정문을 지나 오른쪽에 있는 종법원에 이르는 동안 몇 채의 오래된 한옥과 낮게 엎드린 건물들은 서로 겨루지 않고 서로를 보듬듯이 놓여 있다. 몇몇 교무님들이 지나치며 목례를 했다. 성지 안에 온 듯 마음이 편안해졌다. 지난 11월 4일 취임한 전산(田山) 김주원(金主圓) 종법사(70)를 만났다. 물질이 정신을 앞선 지 이미 오래, 생활은 편리해졌으나 삶의 가치는 여전히 부유한다. 생명은 파괴되고 갈등과 반목이 세상의 모든 경계를 가로 지르는 시대에서 좋은 삶, 좋은 사회는 아직 낯설고 아득하다. 50여년 삶의 길에 수행의 시간이 온전히 놓여 있는 전산 종법사로부터 답을 구하고 싶었다. 전산은 종법사로 취임하는 대사식을 앞두고 삭발했다. 종법사는 원불교의 최고 지도자다. 삭발이 결기를 뜻하는 것은 아닐까 궁금했으나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특별한 큰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허투루 쓰이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단골 이발소에서 깎았습니다. 혼자서도 짧은 시간에 머리를 다룰 수 있으니 그만큼 간편해졌지요. 큰 뜻이 없다고는 하나 의미 없이 쓰이는 시간을 줄이기 위한 삭발이 예삿일은 아니다. 그의 취임 법문이 생각났다. 나를 새롭게, 교단을 새롭게, 세상을 새롭게. 교단을 새롭게 이끌 그의 철학과 소신이 더 궁금해졌다. 인터뷰는 종법사가 거처하고 근무하는 종법원 1층에서 있었다. -지난 주말에 대사식이 있었지요. 기존과는 달리 간소하게 대사식을 치렀다고 들었습니다. 작은 것에서부터의 변화가 눈에 띕니다. 식의 형식은 같습니다. 다만 실외에서 실내로 바꾼 것뿐이죠. 대사식은 교단의 큰 잔치지만 규모로 그 의미를 더 잘 세울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중이 많이 모였다고 해서 꼭 좋은 것도 아니고요. 지금은 미디어가 발달해 영상으로도 모든 과정을 다 볼 수 있으니 행사의 규모를 줄이는 것도 좋겠다 싶었습니다. -종법사님 말씀에도 불구하고 이 작은 변화로부터 시작되는 교단의 변화가 기대됩니다. 취임 기자회견에서 무아봉공을 강조하셨더군요. 원불교 창립정신이기도 한 무아봉공 정신이 궁금합니다. 원불교 정신은 일원상의 둥근 원 속에 담겨 있습니다. 세상은 다 차별로 나뉘어 있지 않습니까. 내나라 네나라, 동쪽 서쪽, 온갖 차별로 나뉘어 있는데 둥근 하나의 진리로 보면 이 모두가 하나라는 뜻이지요. 결국 모든 것이 하나라는 이치를 깨쳐 차별사회를 넘어서자는 것이 원불교 교조이신 소태산 대종사님께서 원불교를 세우신 뜻입니다. 무아봉공(無我奉公)은 나와 남, 나와 세상을 나누어 보지 않고 상생의 길을 여는 정신입니다. 원불교에서 바라보는 최고의 인격 표준이 무아봉공인데, 사실 그 이치를 깨쳐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아요. 훈련을 해야만 얻어지는 정신입니다.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겠습니다. 그렇죠. 대종사님께서는 그것을 사은으로 전해주셨는데, 네가 있게 된 것은 천지가 있어서 가능하다는 것이예요. 천지란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지요. 결국 나를 있게 하는 그 모든 것이 은혜인데 우리는 그 은혜를 잊고 살거든요. 그런데 그 은혜를 알게 되면 작은 나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관계성을 넓혀갈 수 있게 됩니다. -취임사에 담았던 말씀도 이런 취지였겠습니다. 대종사께서는 막연하게 진리의 경지를 설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의 삶을 구체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누구나 생활 속에서 진리를 신앙하고 수행하여 성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알려주셨지요. 일정 기간을 정해 마음공부에 전념하는 정기훈련법이나 이를 실제 생활에 적용하여 연마하는 상시훈련법 등이 그것입니다. 저는 취임사를 통해 우리가 진리와 교단과 법과 스승에 대한 믿음으로 하루하루 꾸준히 공을 들인다면 과거의 내가 새로운 나로, 나아가 새로운 교단, 새로운 세상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대종사님께서도 앞으로 오는 시대는 크게 열리고 밝아지고 활동하는 시대가 된다고 내다보셨지요. 저는 그런 시대를 우리 힘으로 열 수 있다고 믿습니다. 물론 그 힘은 마음공부, 훈련으로 얻을 수 있겠지요. - 마음공부나 훈련이란 표현이 새롭습니다. 대종사님께서는 교법을 쉽게 풀어 내놓으시면서도 그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하셨어요. 무엇을 안다는 것은 진리를 깨쳤다는 것인데, 중요한 것은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실천하는데 있다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실천은 더 쉽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대종사님은 훈련을 반복해야만 완전히 익숙해진다고 강조하셨어요. 사실 수행은 내가 아직 깨치지 못했어도 닦아 가면 이를 수 있는 것이지만 훈련은 원리를 모르면 안 되는 일이죠. 대종사님은 마음을 어떻게 쓰고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든지 알 수 있게 정리해놓으셨지만 그것을 실천으로 이어내려면 지속적인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신 거예요. -원불교가 문을 연지 100년이 지났는데 오늘날 교단의 위상은 어떻게 보십니까. 대종사님은 5만년 운수를 말씀하셨습니다. 그에 견주면 100년이 지났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걸음마를 뗀 수준이지요. 백주년 지나면서 교단 2세기를 맞았다하여 큰 변화가 올 것이란 기대들을 하지만 종교 역사 속에서는 일천합니다. 더 겸손하게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원불교의 오늘을 보자면 그런 짧은 역사로 이루어낸 양적 질적 성장이 놀라운 것 아닌가요. 물론입니다. 원불교는 한국의 4대종교이자 모든 대륙에 교화 거점을 가지고 있는 세계종교로 성장했습니다. 100년의 짧은 역사로 본다면 대체로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아직 갈 길이 멉니다. 물질문명은 급진적으로 발전했지만 현대는 불안과 혼돈의 시대입니다. 기존의 가치들은 부정당하면서도 그것을 대체할 윤리는 자리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요. 원불교가 새 시대 새 종교를 자처하고 있지만 과연 그러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면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교단 2세기를 여는 시점에서 원불교의 새로운 100년이 궁금합니다. 그 동안은 인적, 물적, 사회적 성장에 주력한 결실의 시기였다면, 앞으로는 그에 더하여 질적인 성숙과 주세교단으로서 역량을 확충하는 결복(結福)의 시기가 될 것입니다. 원불교에서는 바른 신앙과 수행을 증득한 공부인, 언제 어디서나 은혜를 깨닫고 감사를 전하는 교화인, 작은 나에서 벗어나 큰 나를 성취한 봉공인으로 면모를 일신하고 새 시대의 주인이 되기 위한 자격을 갖추는 변화를 정신개벽이라고 표현합니다. 정신개벽은 물질의 노예가 된 현대인들을 다시 주체적 삶으로 돌려놓는 계기가 되고, 원망과 적대의 세상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이끄는 근원적 힘이 될 것입니다. -화제를 바꾸겠습니다. 한국사회는 지금 매우 중요한 기점을 맞았습니다. 오늘의 상황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되돌아보면 한국사회는 늘 어렵지 않은 시절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러나 오늘날의 한국사회를 보세요 얼마나 크게 성장했습니까. 남북관계도 큰 변화를 맞고 있고요. 특히 우리나라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다른 어떤 사회보다도 큰 것 같습니다. 민심이 천심임을 그대로 증명한 사회지요. 다만 민주주의는 권리와 함께 책임을 중시 여기는 제도이자 이념입니다. 유례없는 사회적 진통을 생산적인 에너지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권리의 주장에 걸맞은 공동체에 대한 배려와 헌신이 뒤따라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하겠지요. -남북 관계를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진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시는지요. 원불교는 그동안 남북관계를 진보적인 입장에서 지지해오지 않았습니까. 지난 반세기 우리 민족은 분단의 고통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평화의 소중함을 절절히 깨달았지요. 현재 이뤄지고 있는 남북관계를 보면 70% 정도는 통일 됐다는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 더 진전이 되겠지요. 우리 교단에서는 통일을 늘 긍정적으로 기대해왔습니다. 선진들은 남북 간에 서로 미워하는 마음이 없어야 통일이 된다고 하셨어요. 관계는 항상 상대적인 것입니다. 상대를 적으로 보면 상대도 나를 적으로 봅니다. 저는 지금 통일의 기운이 거의 와 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더 노력해야하겠지요. -취임 기자회견에서 현 정부의 적폐청산에 대해 말씀을 하셨던데요. 제가 말한 것은 정치적인 관점에서가 아닌 종교적 관점에서의 입장을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정의와 불의를 이야기하죠. 우리가 재단한 정의와 불의는 대립적입니다. 여기에 정치적 입장이 더해지면 자칫 권모술수적인 것이 되어버리죠. 이를테면 자기가 필요한 정의를 가져다 쓰고 자기가 필요한 불의로 쳐버리는........ 그런데 종교에서 말하는 정의 불의는 조금 다릅니다. 불의를 그저 쳐버리는 정의는 종교적 정의가 아니에요. 저는 세상이 정말 잘되려면 종교적 정의가 퍼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불의도 건져줘야 할 대상이라는 것이죠. 불교적 진리로 보면 없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결국은 세상을 좋게 하려면 안 좋은 것일수록 보듬고 다듬어서 스스로 좋아지도록 하는 일이 필요해요. -오늘의 한국사회 현실은 종교적 정의만으로는 길을 찾을 수 없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러한 현실이니 적폐청산이 부상했겠지요. 물론 우리 사회의 잘못된 점들은 고쳐 나가야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이 설득력을 지닐 수 있으려면 자신에 대한 성찰을 게을리 해선 안 됩니다. 불의를 쳐서 세우는 정의는 오래가지 못하거든요.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건 쉽지만 자신이 바로 서는 것은 어려운 일이예요. 정의는 죽기로써 부당한 일을 하지 않으려는 각고의 노력입니다. 불의까지도 안고 펼치는 정의라야 생명력이 있습니다. 덧붙이자면 참다운 적폐청산은 지금 우리 사회를 이끌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적폐를 공유하지 않는 것, 과감히 그러한 적폐를 떨쳐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때보다도 화합이 필요한데 다양한 계층에서 갈등과 대립이 깊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종교도 예외가 아닌데요. 욕심이 앞서면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무아봉공 정신은 한 개인만이 아니라 한 사회 국가에도 필요한 정신입니다. 종교간 갈등은 외적인 것이니 제가 쉽게 이야기할 내용이 아니지만 적어도 원불교는 교단 내 갈등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본정신이 너와 나, 나와 전체를 나누지 않는 정신이니 갈등이 있을 리 없습니다. -경제가 어렵습니다. 청년실업이 특히 심각한데 오늘을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힘이 될 수 있는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지요. 마땅한 답을 쉽게 줄 수 없으니 더 안타깝습니다. 우리가 어른들로부터 들어온 말이 있습니다. 봄은 큰 추위가 지나고서야 온다는 것이지요.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그것이 지속되진 않습니다. 그러니 청년들도 희망의 끈을 놓지 말고 시대와 마주하면 좋겠어요. 내적으로는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자력을 기르고, 외적으로는 인간성을 파괴하는 관습과 제도에 단호하게 맞설 수 있는 정의심을 발휘해야 합니다. 냉정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청년들도 자신에게 주어진 문제는 결국 자신이 풀어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를 원망하면서 누군가 문제를 해결해주기 바라는 태도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어요. 어떤 경우에도 자기를 버리지 말고 바른 마음으로 노력하면 반드시 길이 열립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그 마음이 공심(公心)이면 좋겠어요. 다른 사람을 위하는 마음이죠. 자기만 생각하거나 한 가지 노력하고 열 가지를 바란다면 길은 더 막힐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에 둘 법문을 주신다면요. 원불교 교도가 아니라도 실천하면 좋은 말씀이 있습니다.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리자는 것이에요. 마음에 두고 실천해보면 삶이 달라질 거예요. 어른들이 선신 악신을 말씀하셨어요. 내가 착하게 살면 선신이 돕고 내가 마음을 나쁘게 쓰면 악신이 방해한다고. 저는 그것을 기운으로 표현합니다. 내가 어떤 마음을 갖고 사느냐에 따라 세상의 기운이 답합니다. 내가 어떤 마음을 갖느냐에 따라 주위의 기운을 얻게 되죠. 감사하는 기운을 갖고 있으면 묘하게 그런 기운이 나에게 모여 길이 열립니다. ● 전산 김주원 종법사는 원불교 제15대 전산 김주원 종법사 전산 김주원 종법사는 1948년 전주 교동에서 태어났다. 평범한 삶이었지만 남에게 베풀기 좋아했던 부모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식의 의지를 꺾는 말씀을 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자립심이 강했던 전산 종법사는 중고등학교(북중 전주고) 시절 수재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성적이 우수했지만 고등학교 2학년 때 입교한 원불교의 정신을 마음의 지주로 삼아 일반대학에 가지 않고 원불교학과가 있는 원광대에 들어갔다. 돌아보면 원불교 입교는 그에게 마치 정해져 있었던 삶의 과정과도 같았다. 그가 어린 시절 살았던 전주 교동 집 옆에는 원불교 교동교당이 있었다. 정갈한 분위기의 교당이나 들고 나는 교도들의 맑은 얼굴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종교를 갖는다면 원불교를 갖겠다고 그때 마음먹었다. 고 2때 친구로부터 입교를 권유받았을 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응한 것도 오래전부터 갖고 있던 마음 덕분이었다. 이미 고 3때 출가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된 그는 스스로 부족함이 많은 성정을 고쳐보겠다(?)는 마음으로 1967년 출가했다. 출가 이후에는 줄곧 수학에만 힘을 썼다. 20대부터 시작된 수학의 과정이 평탄치 많은 않았으나 대학 2학년 때 대산종사를 모시면서 접하게 된 수필법문을 시작으로 참다운 믿음은 싹을 틔워 깊어졌다. 가장 큰 신심의 변화는 군대를 제대한 직후 대산종사의 기도생활에 대한 법문을 직접 받들고 난 이후다. 1976년 원불교 중앙총부 기획실에 들어간 이후 10여년 총부에서 재직했으며 동전주교당 교무로 발령이 나면서 현장교화를 시작했다. 이후 종로교당과 중앙중도훈련원 교무, 법무실 법감, 교정원 교화부원장을 거쳐 경기 인천교구장, 중앙중도훈련원장, 교정원장을 지냈으며 최근까지 영산선학대학교 총장으로 일했다. 교직자로서의 활동은 교헌개정을 비롯한 교단의 실질적인 체계를 정비해낸 성과로 더 빛난다. 교정원 총무부장으로 일할 때는 법규를 정비하는 일과 함께 사장되어 있던 법규를 실행하는 일에 전념했으며 경기인천교구장으로 있으면서는 교구의 행정체계를 세우고 교화후원재단을 설립했다. 덕분에 원불교는 교구 내 개척 교당 지원, 청소년교화와 군종교화, 사회복지와 일반 교화 후원을 위한 재정적인 기반을 갖출 수 있게 됐다. <대산종사법어> 편찬에도 그의 역할이 컸다. 법어 편찬은 대산종사법어 편수위원회 편수위원장을 맡았던 5년 동안 이어낸 결실이었다. 교단의 모든 기관을 통괄하는 수위단회는 전산의 삶과 수행의 공덕을 기려 2006년 종사의 법훈을 서훈했으며, 지난 9월 18일 원불교 최고지도자인 제 15대 원불교 종법사로 그를 선출했다.

  • 기획
  • 김은정
  • 2018.11.15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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