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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한센인 마을 지키며 헌신해온 강칼라 수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고왔다. 순간 혹시 전화번호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제가 강칼라 수녀인데요. 일흔 여섯 살, 외국인 수녀님은 정확한 한국말과 고운 목소리로 선입견(?)을 깼다. 호암마을은 고창 읍내에서 자동차로 10여분 거리에 있다. 이정표가 알려주는 대로 따라간 길에서 살짝 들어가 만나는 호암마을은 낮은 산을 뒤로 편안하게 앉아 있는 풍경이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몇 년 전만 해도 동혜원이라 불렸던 이 마을은 1940년대 전국적으로 들어섰던 한센인 마을 중 하나다. 환자들이 하나둘 들어와 정착한 1952년, 마을에 공소가 문을 열렸다. 공소는 조선말기 천주교 박해 이후 100여 년의 시간 속에서 교우촌 공동체의 중심이 됐던 공간이다. 그중에서도 동혜원 공소는 차별과 편견으로 세상 가장 낮은 곳에 놓여있던 한센인들의 신앙공동체를 지키는 특별한 공간이었다. 50여년이 지난 지금도 건재하며 다시 또 수많은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는 이곳 공소를 지키며 한센인들과 더불어 평생을 헌신해온 사람. 이탈리아 출신의 강칼라 수녀를 만났다. 1968년에 들어와 50년을 이곳에서 살아온 그의 삶은 경이롭다. 한해를 마무리 하는 자리. 길고 험난했을 세월의 고난을 기꺼이 안아 세상의 빛으로 돌려놓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으나 그는 완곡하게 인터뷰를 사양했다. 너무 많은 매체들과의 인터뷰로 할 이야기를 다 한 처지라는 수녀님은 그러나 끝내 거절하지 못하고 시간을 내주었다. 수녀님의 거처는 좁고 오래된 집. 노트북 하나 놓이면 그만일 책상과 의자가 있는 거실(?), 입구 쪽의 좁디좁은 기도실과 안쪽의 방 두 개, 그리고 간소한 주방 하나. 군더더기 없는 단출한 삶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집이 아주 작습니다. 두 분 수녀님이 생활하시기 불편하지 않으신가요. 불편함은 전혀 없습니다. 두 명 함께 앉을 수 있는 기도실이 있으니 기도할 수 있고, 각자 한 몸 뉘일 방이 있으니 그것으로 족하지요. 딱 좋습니다.(웃음) -처음부터 여기서 생활하셨나요. 한국에 온 것이 68년인데 그때부터 여기 살았어요. 이 집은 제가 오기 1년 전에 우리 자매들이 처음 들어왔는데 그때 지어진 집이예요. 저보다 먼저 들어와 살았던 수녀님은 30년을 이곳에서 살다가 알바니아로 가셨는데 그곳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슬픔이 크고 아쉬워 공소 앞에 작은 공간을 만들었어요. 그 분의 삶과 정신을 기억했으면 하는 마음에서지요. -이 공간이 수녀님의 삶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겠습니다. 그렇지요. 한국에서 보낸 50년 시간이 모두 여기 담겨 있으니까요. 감사해야할 공간이죠. -호암마을에 들어오신 것이 1968년이면 꼭 50년이 되었군요. 제가 한국 나이로 스물여섯, 만으로 스물다섯 살에 이곳에 왔어요. 참 오래되었군요. -고국을 떠나 언어도 그렇고 모든 것이 낮선 한국으로 오실 때는 큰 용기가 필요했겠습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수녀원)에서는 언제든 어디든 우리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으면 가게 됩니다. 저는 당초 브라질에 가게 되어 있었는데 한국으로 파견 갔던 수녀님 중 한분이 몸이 아파 귀국해야만 하는 상황이 됐어요. 수녀님들의 자원을 받았는데 그때 이상하게 마음이 끌렸어요. 사실 언어가 가장 큰 문제였지만 망설이지 않고 자원했지요. 한 달 만에 한국 파견이 결정되어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용기는 많이 필요 없었죠.(웃음) -50년 전이니 한센인 정착촌이었던 호암마을도 환자들이 대부분이었을 텐데요. 지금은 환자들이 많이 줄었지요. 너무 오래된 일이라 확실치는 않지만 처음에는 그다지 많지 않았는데 어느 시기까지는 계속 늘어나 200명 가까이까지 함께 지냈던 것 같아요. 가족들이 함께 들어오니까요. 그러나 한센병을 앓고 있는 부모들을 따라 들어온 아이들이 크고 성장해 이곳을 나가 살게 되면서 주민들은 많이 줄었습니다. 그 사이 건강이 나빠진 환자들은 세상을 뜨고 더러는 치료가 되어 지금 한센병 환자들은 10여명 남았어요. -초창기에는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는 일이 일상이었을 텐데요. 정말 힘든 일이었을 것 같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을 기꺼이 선택했으니 힘들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언어 소통이 어려워 고생을 했지만 밤낮으로 배워 2년 정도 지난 후에는 한국어를 말하고 쓸 수 있게 되었어요. 환자들을 보살피기 위해 스페인의 병원에서 한센병을 공부하고 돌아와 간호보호사 자격을 얻었는데 덕분에 환자들을 치료하고 돌볼 수 있게 되었죠. 그때는 의료 수준도 그렇고 시설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황이어서 웬만한 치료는 자체적으로 해결 해야 했거든요.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환자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제게는 모두 의미 있었어요. -지금은 환자가 많이 줄었기도 했지만 한센인이 아닌 분들도 마을에 들어와 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지금은 그런 연고가 없는 분들도 들어와 살고 있습니다. 여느 농촌 마을처럼 노인들이 많은 것도 그렇고 큰 차이가 없습니다. -처음 한센인 마을로 시작했을 때는 마을 이름이 동혜원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지금은 호암마을로 바뀌어 부르고 있더군요. 이름이 바뀐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죽림리라는 행정구역만 있었고 동혜원 공소가 있어 동혜원이란 이름이 더 알려졌었죠. 초창기부터 여기에서 생활하시는 분들이 고생을 참 많이 했어요. 환자들을 경계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센병 환자가 아닌 아이들이 일반 학교에 다니는 것도 어려웠으니까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차별을 겪어야했지요. 지금은 한센병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지만 그래도 편견과 오해가 남아 있어서 한센인 정착촌을 떠올리게 하는 동혜원대신 호암마을로 부르기 시작했어요. 그 이름에는 물론 뜻이 있죠. 마을 뒤쪽으로 나지막한 산이 이어지는데 그 위쪽에 호랑이를 닮은 바위가 있거든요. 몸이 아주 편하게 놓여 있는데 그 광경이 아주 좋아요. -한센인 마을로 시작했으니 공동체적 성격이 강할 수밖에 없는데 생활환경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풍족하지는 못해도 함께 살 수 있는 여건을 스스로 만들어야 했어요. 초창기부터 닭이나 돼지를 키우고 한때는 정부에서 권장하는 엽연초 농사로 생업을 해결했죠. 마을에 젊은 사람들이 많이 남았을 때는 일을 많이 할 수 있었으니 풍족하진 않아도 자급자족할 수 있었어요. 그러나 문제가 있었죠. 축사에서 나오는 오폐수나 악취 문제가 심각했거든요. 마을 전체의 고민일 수밖에 없었는데 10여 년 전쯤 고창에 눈이 엄청 많이 내렸어요. 지붕이 무너지고 축사 대부분이 피해를 입었죠. 그때 마을 이장님이 이번 기회에 축사를 아예 없애자고 제안했어요. 자연스럽게 축사를 없애게 되었는데 덕분에 악취도 없어지고 마을의 환경이 달라졌죠. -대신 경제적인 여건은 어려워지게 되었겠습니다. 실상은 그렇죠. 그래도 마을 주민 대부분이 노인들이어서 기초수급 대상자들이예요. 더러는 얼마간의 농사를 지어 생활을 해결하기도 하고요. 마을 단위로 함께 할 수 있는 사업을 만들어 운영하기도 하고요. -예를 들면 어떤 일들인가요. 마을 주민들이 함께 하는 공동체 사업으로 도자기 만드는 일도 그 중 하나예요. 국회에서 전시회도 했는데, 호암마을 도자기는 꽤 알려져 있어요. 지금은 겨울철이 되어 잠시 중단하고 있지만 봄이 되면 다시 이어질 사업입니다. 가톨릭신자들의 피정도 좋은 사업이지요. 우리 마을이 잘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최근에는 이장님이 앞장서서 추진하는 일이 있는데 외지 사람들이 찾아와 체험이나 생태관광을 할 수 있는 마을만들기사업이예요. 우리 마을이 운곡습지와 가까운 곳에 있거든요. 외지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으니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호암마을의 이미지도 바꾸고 좋은 환경을 만들겠다는 뜻인 것 같아요. -마을 주민들과 모든 일상을 함께 하는 공동체 생활이 불편하진 않습니까. 불편함은 없어요. 다만 나이가 드니 일상이 조금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 개인보다 마을을 위해 필요한 것이 많거든요. 겨울이 되면 동네 분들이 경로당에서 하루를 함께 나는데 아무래도 점심과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일도 그렇고 일상의 어려움이 더 많아집니다. -노인분들이 대부분이니 그런 어려움이 더 크겠습니다. 수녀님도 경로당에서 식사를 모두 해결하십니까. 물론이지요. 먹을거리를 준비하는 것도 저희들 몫인걸요. 오늘도 장을 보러 시내에 가야해요. 환자들과 노인들이 마음대로 나다닐 수 없는 형편이니 아직은 여력이 있는 우리들이 그 일을 대신해줘야 하거든요. 사실 겨울철 경로당 공동체 생활이 시작되면 봉사자들의 손길이 가장 절실해집니다. 주민들이 함께 나서기는 하지만 모두 70-80대 노인들이니 식사 한끼 준비하는 것도 쉽지 않거든요. 몸이 불편한 노인도 적지 않고요. -봉사자들이 많이 찾아오지 않나요. 찾아오시는 분들이 있지만 정작 우리가 필요한 일에는 맞추기가 어려워요. 가장 좋은 것은 마을에 젊은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인데, 그게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마을에 빈집이 많이 있으니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들어와 살면서 보람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어요. -수녀님께서는 그리 힘든 길이 아니었다고 하시지만 그동안 겪어내신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있었겠지요. 그러나 아무리 어려운 일도 지나가기 마련이잖아요. 지나간 일은 기억하지 않으면 되고요.(웃음) -아무리 신앙의 힘으로 어려움을 극복하신다해도 늘 보람과 기쁨만 마주하실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것을 어려움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사실 늘 아쉽고 안타까운 일은 있어요. 누군가가 사랑을 받거나 누군가에게서 도움을 받으면 자신도 응답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될 텐데 그렇지 못한 상황을 만나게 되거든요. 그동안 환자들과 함께 살아오면서 저 자신은 감사하게도 그런 응답을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정작 자신들과 가까운 사람, 이를테면 가족들이나 이웃이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도움을 준다거나 아픔을 함께 나누는 데는 인색하더라고요. 내가 받았으면 그만큼 베풀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데 그렇지 않은 경우를 많이 보아왔거든요. 그럴 때는 마음이 아프죠. -그런 상황들로 가장 힘들었을 때는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그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꾸준히 노력했어요. 사실 한센병에 대한 인식을 깨는 것도 그 중 하나였는데 오히려 편견을 갖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더 경계하고 차별하는 상황이 많았거든요. 돌아보면 살아가면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편견이 아닌가 싶어요. -아까 응답하는 삶을 말씀하셨는데 수녀님처럼 신앙을 갖고 있지 않아도 좀 더 가치 있게 잘 살 수 있는 방법은 뭘까요. 신앙을 갖고 있으면 아무래도 응답할 수 있는 길을 갖게 되니 좋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잘 살 수 있는 방법은 있어요. 쉽지는 않겠지만 중요한 것은 나를 위해 사는가, 아니면 곁에 있는 사람을 위해 사는가를 돌아보면서 사는 일이예요. 내 가족 내 이웃을 생각하는 열린 마음으로 살게 되면 상대방의 존재를 보게 되고 응답하게 되면 자기 자신이 기쁨을 얻게 되거든요. 사실 모든 인간은 그런 존재로 만들어졌어요. 사랑하게 되면 그 만큼 채워지는 삶을 갖게 된다는 이야기예요. 자기 안에서 자기만을 위해 살게 되면 기쁨도 행복도 그만큼 좁아지고 적어지지요.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을 바라보게 되면 삶이 달라집니다.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일이 결국 나를 위한 일이라는 말씀이군요. 그렇죠. 내 앞에 온유한 사람이 있으면 나도 온유한 사람이 되거든요. -신자들에게도 그런 마음을 전달하려고 노력하시겠군요. 말로써 강조하기 보다는 그런 생활을 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되지 않을까요. 나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면 자연스럽게 옆에 있는 사람에게도 전달됩니다. -수녀님께서 50년 시간을 실천의 삶으로 이어오신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뒤돌아보니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많이 흘렀지만 지금도 부족함이 많아요. 그러나 마음을 급하게 갖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빨리 결과를 보려고 하는 조급한 마음이 있어요. 그것을 경계해야하죠. 꽃씨를 심어도 봄이 되어야 생명이 올라오잖아요. 욕심을 버리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건강은 어떻십니까. 나이가 드니 아무래도 예전만 못하죠. 양쪽 무릎에 인공관절 시술을 했는데 불편하긴 하지만 움직일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아직은 운전도 할 수 있으니 오가는데 큰 불편은 없어요. -수녀님의 일상이 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혹시 다른 계획이 있으신가요. 삶을 하나님께 맡겼으니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 순리지요. 저희야 선교회의 결정에 따라 움직이게 되지만 생각 같아서는 이곳에서 살고 싶습니다. 아직은 나를 필요로 하는 일이 많기도 하고 저 또한 이 안에서 응답할 수 있는 일이 많습니다.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상이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지요. 강칼라수녀가 기거하는 낮은 집 바로 옆에는 동혜원 공소가 있다. 일요일이면 마을 주민들 뿐 아니라 인근 마을의 신자들이 찾아와 예배를 드리는 성당이다. 인터뷰 말미, 자리를 함께 했던 호암마을 방부혁 이장이 수녀님 건강하시는 것이 마을 사람들의 가장 큰 바람이고 기쁨이라고 전하니 그는 그것도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건강을 주시면 그만큼 더 응답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지니 그 또한 기쁨이라고 말했다. 수녀님의 건강이 어디 마을 주민들만의 바람이겠는가. 차별을 극복하며 편견의 벽을 깨기 위해 그가 실천해온 귀한 자취가 깊고 길다. 우리에게는 더없이 아름다운 선물이다. ■ 강칼라 수녀는 강칼라 수녀 강칼라수녀는 1943년 이탈리아의 북부에 있는 마을 쿠네오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탈로네 리디아, 세례명은 카를라였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부모님은 어렸을 때부터 4남매를 바르게 사는 삶, 나누는 삶, 사랑하는 삶을 살라고 가르쳤다. 자연스럽게 종교적인 삶에 마음을 두었던 그는 열아홉 살에 작은 자매 관상 선교회에 들어가 수녀가 됐다. 그의 언니 역시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신학공부를 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으로 고아가 된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던 그는 1968년 한국에 왔다. 한국전쟁으로 고아도 많았고, 한센병 환자들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어려운 이웃과 함께 하는 길을 가고자 했던 그가 기꺼이 헌신의 삶을 바치고자 했던 곳은 고창군 죽림리에 있던 동혜원. 한센인 정착촌이었다. 강칼라란 이름은 세례명인 카를라를 마을 사람들이 편하게 부르다가 한국식으로 칼라가 됐고, 성은 아이를 갖지 못한 한 환자가 자기 성을 받아달라고 부탁해 강씨가 됐다. 2년 동안 밤낮으로 공부해 한국어를 배우고 익혔으며 한센병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 스페인으로 건너가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는 방법을 배웠다. 다시 돌아와서는 정부로부터 마을 간호보조사 자격을 얻어 환자들을 본격적으로 치료하고 보살피는 일에 전념했다. 스물여섯 살에 한국에 온 이후 50년. 동혜원 공소를 지키며 한센인들과 함께 지내면서도 서울 진주 등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기꺼이 도시빈민과 노약자들을 돌봐온 그는 마을 사람들의 손발이 되었다. 한국에 왔던 초창기, 동혜원에서 고창읍내까지 먼 길을 걸어 다니며 환자들이 필요한 물건을 가져오고 필요한 일을 해결했던 덕분에 아직도 근처 마을 사람들은 고무신을 신고 먼지 나는 흙길을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다니던 수녀님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6년 전 호암마을에 들어와 생활하고 있는 우을리 피에라수녀(66)는 보람과 고난을 나누는 동반자. 올해도 마을사람들과 겨울을 나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함께 살림살이를 준비하고 있다. 가장 낮은 곳에서 봉사와 기도로 평생을 살아온 그는 2016년 국민훈장모란장을 받았으며 올해 호암상을 수상했다.

  • 기획
  • 김은정
  • 2018.12.20 19:56

새만금개발 전기 마련한 이철우 새만금개발청장 “새만금 사업 도약 발판 마련…환황해권 경제거점으로”

새만금 사업이 시작된 지 27년여 만에 전기를 맞았다. 새만금개발청이 개청 5년여 만에 세종시에서 새만금 현장으로 청사를 이전했고, 새만금 사업 시행을 담당할 새만금개발공사도 설립됐다. 새만금 사업 예산이 1조 원을 돌파하면서 내부개발에도 속도를 낼 수 있게 됐다. 또, 정부는 새만금에 세계 최대의 태양광발전시설을 구축해 재생에너지 산업의 메카로 조성할 계획도 발표했다. 이철우 새만금개발청장을 만나 앞으로의 계획과 향후 새만금 사업의 방향과제 등에 대해 들어봤다. -새만금개발청이 새만금으로 청사를 이전했습니다. 앞으로 새만금 사업을 어떻게 이끌어 나갈 계획인가요. 새만금 사업지역으로 청사를 이전한 만큼 현장에 기반을 두고 보다 현실적인 정책과 사업계획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며, 지역과의 소통도 보다 원활하게 이루어 질 수 있다고 판단됩니다. 이러한 여건을 적극 활용해 국정과제의 조속한 실행과 전략사업인 재생에너지 클러스터 조성에 박차를 가할 계획입니다. 공공주도 매립 선도사업의 경우 현재 진행 중인 예비타당성조사를 내년 상반기까지 마무리해 2020년에는 첫 삽을 뜰 수 있도록 하고, 동서도로남북도로 등 주요 도로 건설을 위한 예산도 충분히 확보한 만큼 공사 추진에 박차를 가하겠습니다. 지난 10월 비전 선포식을 거행한 재생에너지 클러스터의 경우, 조속히 사업계획을 구체화해 가시적인 성과를 창출할 수 있도록 주력하겠습니다. - 새만금개발공사도 출범했습니다. 두 기관의 역할분담은 어떻게 됩니까. 새만금개발청은 다양하고 복합적 성격의 새만금 사업(6개 부처 관련)에 대해 총괄 관리 역할을 담당하며, 관련 정책 수립과 사업 인허가, 기반시설 조성 등의 업무를 수행합니다. 새만금개발공사는 사업시행자로서 용지 매립조성, 재생에너지관광 등 부대사업 등을 시행하게 됩니다. 유사한 사례로 행정중심복합도시의 경우에도 행정기관인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과 사업시행자인 LH가 역할을 분담해 사업을 추진해오고 있습니다. - 도로, 항만 등 SOC 인프라가 구축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보완해야할 부분은 무엇인가요. 현재 새만금지역 주요 간선도로는 2023년 8월 세계잼버리 개최 이전 개통을 목표로 정상 추진 중입니다. 동서도로는 2020년 상반기 완공, 남북도로와 새만금~전주 고속도로는 2023년 8월 이전에 개통할 예정입니다. 항만은 2016년 방파제 완공 이후 진입도로, 호안 등 기반시설 공사를 진행 중이며, 2023년까지 부두 구축을 위한 기반시설 공사를 마무리할 계획입니다. 다만 부두는 2023년까지 4선석을 구축할 예정이나, 민자사업으로 계획돼 건설 시기가 불확실한 측면이 있습니다. 사업이 적기에 추진될 수 있도록 해수부 등 관계기관과 긴밀히 협의해 나갈 것입니다. 공항의 경우도 전북도에서 균형위에 예타 면제를 신청했으며, 조속히 사업이 추진될 수 있도록 국토부 등 관계부처와 적극 협의하겠습니다. - 재생에너지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새만금에 재생에너지 사업을 추진하게 된 배경은. 신기후변화체제 출범에 따라 재생에너지로의 이행은 세계적 추세이며, 관련 시장규모도 지속 확대되고 있습니다. 지난 2015년 12월 195개국이 파리에서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자발적 노력을 결의(파리협약)했고, 우리나라도 2030년까지 37% 감축을 목표로 설정했습니다. 정부는 2030년까지 태양광풍력 중심으로 재생에너지 발전량 비중을 20%로 확대하기로 했습니다. 이에 새만금청도 재생에너지 사업을 통해 관련 기업과 연구기관을 유치, 새만금에 재생에너지 산업이라는 새로운 성장동력을 선제적으로 확보하고, 발전 수익의 일부를 새만금 내부개발에 활용해 새만금 개발의 속도를 높이기 위한 디딤돌로 재생에너지 사업을 추진하는 것입니다. - 재생에너지 사업을 하더라도 새만금 사업 추진에 영향은 없습니까. 새만금을 환황해권 경제거점과 글로벌 자유무역의 중심지로 개발한다는 정부의 의지는 변함이 없습니다. 정부는 새만금 개발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 지난 9월 새만금개발공사를 설립했으며, 개발공사는 선도사업으로 200만평 규모의 수변도시를 공공주도로 매립할 계획입니다. 또한 도로항만 등 새만금 SOC 예산도 대폭 증액해 새만금 개발을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새만금 재생에너지 사업은 공항과 인접하거나 비행경로 등에 위치해 개발수요가 낮은 일부 지역(전체 면적의 9.4%)에 태양광발전 등을 추진하는 것으로 발전 수익의 일부를 내부용지 매립 등에 활용, 오히려 개발을 촉진시킬 수 있게 되며 태양광발전 사업은 발전기간이 종료되는 20년 후에는 원상복구 하는 것을 조건으로 인허가를 하고 관리해 나갈 계획입니다. - 일각에서는 수상태양광이 환경문제를 유발할 수 있다고 우려합니다. 국내에 생산되는 태양광 패널은 크롬, 카드뮴 등의 중금속이 포함되어 있지 않고 재활용이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새만금에서는 안정성이 검증된 태양광 패널 제품만을 사용하도록 하고, 면밀한 관리를 통해 환경문제를 철저히 예방해 나갈 계획입니다. 또한 일부에서 태양광 패널 청소에 맹독성 세척제를 사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제기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태양광 패널에 맹독성 세척제를 사용하는 경우 오히려 태양광 패널 표면의 빛 흡수를 위한 코팅이 벗겨져 발전 효율이 떨어지기 때문에 이 같은 세척제는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수자원공사와 농어촌공사의 실제 운영사례를 확인해 본 결과, 패널은 빗물을 통해 자연적으로 세척하고 있고, 조류 배설물 등이 쌓일 경우에만 물과 브러시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 새만금개발청장에 취임하신지 1년4개월여가 지나셨습니다. 그동안 어려움도 많으셨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동안 성과를 내기 위해 열심히 뛰어오면서 큰 보람도 느꼈고, 아쉬운 점도 다소 있었습니다. 다행히 공공주도 개발 추진체계 마련, 사업예산 증액, 남북도로 착공, 1조 7000억 원 규모의 투자유치, 지역기업 우대기준 마련, 세계잼버리대회 유치 등 크고 작은 성과들이 있었습니다. 다만 투자협약이 실제 투자로 이어지는데 다소 시간이 걸리고 있는 부분은 아쉽게 생각합니다. 새만금 개발을 앞당기기 위해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청사 이전을 실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직원들에게 충분한 지원을 하지 못한 것이 많이 아쉽고, 불가피한 사정으로 새만금청을 떠나는 직원들이 생기게 된 점이 가슴 아팠습니다. 새만금의 비상을 위한 전략사업의 하나로 재생에너지 클러스터 조성 계획을 발표했으나, 아직도 그 취지가 충분히 전달되지 못한 느낌이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지속적으로 필요성을 설득해 나가는 한편 신속하게 진행해 꼭 성공시키도록 하겠습니다.

  • 기획
  • 강정원
  • 2018.12.16 19:43

[카드뉴스] 이게 일자리 인가요?

  • 기획
  • 전북일보
  • 2018.12.14 17:39

[전라도 정도 1000년, 창조와 대안의 땅 '전라북도'] 17. 조선사회의 변혁과 대안의 땅, 부안 변산

△생거부안(生居扶安)의 역설 변산반도가 위치한 부안지역은 지리적으로 바다와 산, 그리고 평야가 어우러진 천혜의 공간이었다. 즉, 전라북도 남서부에 위치한 부안군은 호남평야의 남서부, 변산반도, 서해상의 섬이라는 세가지 요소로 특징지어 진다. 이 같은 평야, 산, 바다의 세 가지 요소가 복합되어 관련 산물이 풍족해 땅과 바다가 기름져 인심이 너그럽고 생활이 윤택하니, 고려의 문인 이규보는 목재가 풍부해 부안을 일컬어 나라의 창고(천부)라 하여 찬양하였다. 또한 부안은 영조시절 암행어사 박문수로부터 어염시초(물고기와 소금과 땔나무)가 풍부하여 부모 봉양하기 좋으니 생거부안(生居扶安)이로다라는 말로 살기 좋은 곳, 부안이라는 호칭을 들어왔다. 즉, 부안은 평야가 넓을 뿐만 아니라 염전이 발달하여 소금을 통한 고수익을 얻었고 바다가 가까워 풍부한 수산자원도 누릴 수 있었던 풍요로운 고장이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러한 천혜의 공간은 실상은 변산의 도적떼와 연결되어 공존하였던 고장이란 특성을 보여준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특히 영조시기 변산적이라 하여 많은 도적이 변산속에 은거하여 나라의 골칫거리 지역이었다. 이 같이 부안의 풍요로움을 노리는 변산지역의 도적떼는 조선사회의 이중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조선사회는 후기로 갈수록 세금수취의 문란과 신분제 동요로 백성들이 유민화되고 결국 도적으로 전락하였다. 이들은 삶의 한계에 다다라 사회에 수용되지 못하고 도적으로 내몰려 피난처인 변산의 깊은 산속으로 모여들었고 백성이 도적으로 몰락하는 심각한 상황에 이르자 이러한 문제해결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조선 지식인들의 노력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조선사회 신분제문제와 대안을 제시한 홍길동전의 무대, 변산 가장 먼저 조선 양반사회가 갖는 문제점을 토로한 존재가 시대의 기린아 허균이었다. 허균은 부안 변산지역과 독특한 인연을 맺었는 데 공주목사 재임시 당시 부안 최고의 기생 이매창(계생)과 정분이 깊어 공주지역을 벗어나 그 일로 파직되었다고 한다. 이 때 부안에 온 허균이 변산 우반동 선계안골 즉, 현재의 선계폭포 근처의 정사암에 머물며 쓴 최초의 한글소설이 홍길동전이다. 홍길동전의 내용은 조선 양반사회의 희생자인 서얼출신 홍길동을 등장시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고 형을 형이라 말할 수 없었던 홍길동이 도둑으로 전락한 백성들을 모아 활빈당을 결성하고 어려운 백상들을 돕다가 조선사회에는 정착할 수 없어 결국 이들을 이끌고 새로운 삶의 터전 율도국으로 떠난다는 내용이다. 결국 홍길동전은 허균이 조선 양반 신분제 사회의 모순과 문제점 해결방식을 국가가 백성을 포용치 못하면 결국 백성은 국가를 떠난다는 엄중한 경고를 제시한 파격적인 소설이다. 또한 주목되는 것은 홍길동전의 집필지가 변산이며 소설에 등장하는 활빈당의 실체가 변산에 웅거한 도적들을 모델로 하였을 것이란 점에서 부안지역이 새로운 변혁을 꿈꾸는 터전이었음을 보여준다. △변산에서 조선의 빈부격차 해결 방안을 제기한 박지원 조선 영정조시대의 대표적 실학자인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실린 허생전은 변산반도를 무대로 빈부격차 해결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가난한 선비 허생은 최고의 갑부 변부자에게 돈을 빌려 양반들의 제사상에 꼭 필요한 과일을 매점매석하여 큰돈을 벌었다. 또 양반의 상징인 갓 만드는 말총을 매점하여 엄청난 돈을 벌었다. 이 때 주위에서 쌀을 매점하여 더 큰 돈을 벌자고 하자 정색하며 과일과 말총은 양반들이 귀신에 제사지내고 허울 좋은 신분을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이 모든 것이 양반들에게만 필요한 것이고 일반 백성들에게는 없어도 되는 것이기에 양반의 돈을 벌어도 되었지만 쌀은 모든 백성이 먹어야 되는 것으로 이것을 매점하면 절대 안된다고 호통을 쳤다. 그리고 허생은 벌은 돈을 가지고 당시 가장 많은 도적떼가 모여있는 변산으로 가 도적들에게 돈을 주어 가정을 이루고 소를 사서 모이게 해 새로운 이상향의 땅을 찾아 떠나는 내용이 허생전의 내용이었다. 이는 부자의 여유돈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호구책을 마련해 함께 살자는 박지원의 대안이었으며 그 강상의 현장을 변산지역으로 구성하였던 것이다. △부안에서 조선 개혁의 실체를 만든 반계 유형원 허균과 박지원 사이에 살았던 조선실학의 시조 유형원은 조선 사회가 왜호란이후 피폐화된 상황을 개혁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집안의 사패지인 부안 우반동지역에 우거하며 조선 토지제도와 신분 문제 등 전반에 걸친 개혁 정책을 제시하였다. 개혁의 핵심은 몰락한 농민을 살리기 위해 신분제적 균전제를 주장하였다. 이는 토지를 국가가 몰수해 신분에 따라 나눠주어 먹고 살 수 있는 방편을 마련해주자는 것이었다. 또한 양반신분제 사회의 문제인 노비종모법과 서얼제 철폐를 주장하였다. 이같은 파격적인 주장은 부안지역에 살면서 조선사회의 모순을 목도한 유형원이 대안을 제시한 것으로 개혁안이 수록된 반계수록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70년이 지난 뒤에야 영조에 의해 수용, 유포되어 18세기 조선의 실학사상으로 나타났다. 이 같이 부안 변산지역은 조선사회의 풍요로운 터전이자 한계에 몰린 존재들이 모이는 곳이었고 결국 이들을 포용하고 새로운 삶을 모색하는 변혁과 대안의 공간이었다. 이 같은 상황은 이들 지역에 존재한 사찰의 분위기와도 연결되었다. 즉, 변산의 내소사와 고창의 선운사 그리고 장성 백양사로 연결되는 공간은 이른바 땡초라는 중들의 거점으로도 유명하였다. 일반적으로 땡초라는 표현은 파계한 승려같은 부정적인 존재를 지칭하는 표현이었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못된 부자들을 혼내주고 불쌍한 백성을 도왔던 존재로도 나타나고 있다. 이는 조선사회에서 도적으로 전락되었던 백성 가운데 종교적으로 개심하였지만 과거 의적을 자임하던 기질이 남았던 존재들이 승려로서 의적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던 존재로 활동하였던 사실이 땡초라는 못된 양반들에게는 불한당같은 그러나 일반 백성에게는 도움을 주는 존재로 이 지역에서 나타났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를 역사적으로 되짚어보면 변산지역은 과거 백제부흥군의 마지막 거점인 주류성이 있었던 곳으로 이러한 백제의 부흥을 꿈꾸며 새로운 대안의 삶과 역사를 꾸려갔던 지역의 전통이 계승된 것으로도 파악된다. 변산반도지역은 현재 천혜의 공간으로 대표적인 관광명소로 부각되고 있다. 특히, 새만금의 배후공간으로 새로운 가능성이 넘치는 땅이다. 과거의 아픔과 좌절을 새로운 희망과 대안으로 바꾸길 꿈꾸었던 지역의 역사를 바탕으로 이제 같이 살기를 이루는 새로운 가치와 희망의 공간으로 바꾸어야 할 때가 되었다. 특히 2023세계잼버리대회의 개최지로서 부안은 새로운 미래비전의 터전으로 자리잡고 있다. 잼버리는 즐거운 놀이, 유쾌한 잔치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새로운 대동사회를 꿈꾸었던 허균, 유형원, 박지원 등 조선 지식인의 꿈이 세계 각지에서 모인 젊은 청년들의 잔치를 통해 부각되길 바란다. /조법종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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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2.13 19:59

[카드뉴스] 자사고 폐지 고삐 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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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18.12.10 20:36

[이슈&포커스] ‘지방자치박람회 석권’ 완주군의 경쟁력은

완주군은 지난 8월 농림수산식품부가 전국 123개 일반 농산어촌을 대상으로 실시한 농촌 신활력플러스사업 대상자로 최종 선정되면서 농업농촌 지자체로서의 우수한 경쟁력을 대내외에 알렸다. 완주군은 최종 10개 사업대상자 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고, 향후 4년간 국비 등 70억 원을 투입, 치유 농산품 활성화를 위한 W푸드테라피 시스템을 구축해 일자리와 소득 등 농촌 경제 기반을 다진다. 완주군이 신활력플러스 시범 사업자로 선정된 것은 로컬푸드 성공 등 그동안 민관이 협력해 다진 농업농촌정책 성과를 대한민국이 인정했다는 증거가 됐다. 이런 완주군의 행정력은 지방자치박람회에서 한층 빛났다. 대한민국 지방자치박람회에서 전 분야를 석권하고, 지방자치종합경쟁력 전국 4위를 기록한 것이다. 이에 완주군은 민선7기를 맞아 소득과 삶의 질 높은 15만 완주시 대도약을 기치로 내 건 완주군이 그 역량을 인정받고 있는 것이라며 고무된 분위기다. 으뜸도시 완주를 만방에 내건 완주의 경쟁력을 각 분야 수상을 통해 살펴본다. △대한민국 지방자치 박람회 전 분야 석권 완주군은 지난 10월 29일부터 31일까지 열린 제6회 대한민국 지방자치 박람회에서 전 분야에서 수상하는 기록을 세웠다. 대한민국 지방자치 박람회는 매년 전국의 모든 지방자치단체와 관련 기관 단체가 참여해 우수정책을 홍보하고, 지방자치의 미래를 논의하고 있는 자리다. 이번에는 제8회 지자체 생산성 대상, 지자체 상생협력갈등관리 우수시책 경진대회, 행정서비스 공동생산 우수사례, 공동체 우수사례, 주민자치센터 우수사례 시상발표에 대한 수상이 이뤄졌다. 완주군은 이들 5개 분야 모두 수상했다. 지자체 상생협력갈등관리 우수시책 경진대회, 행정서비스 공동생산 우수사례 시상발표, 주민자치센터 우수사례 발표 시상발표에서는 사례발표까지 맡았다. △생산성 대상, 전국 유일 2관왕 지자체 생산성 대상에서 완주군은 전국 유일 2관왕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생산성 대상은 행정안전부와 한국생산성본부가 각 지자체의 인적 역량, 건전재정 역량 등을 측정해 자치단체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지난 2011년부터 매년 시상하고 있다. 완주군은 생산성지수, 우수사례 분야에서 수상하며 자치단체 중 유일하게 2관왕을 차지했다. 특히, 사회적 경제 생태계 조성 정도, 경제활동 친화성, 평생교육 이용 수준, 보건복지시설 확충 수준, 지역주민 행복도 등에서 최고 등급을 받았다. △전북혁신도시 상생으로 풀다 2018 지자체간 상생협력갈등관리 우수시책 경진대회에서 완주-전주 혁신도시 정주여건 개선을 주제로 제출, 우수시책으로 선정됐다. 혁신도시 인구 급증에 따른 정주여건 개선 요구 대응과 두 개의 행정구역에 따른 행정상 중복투자 해소를 위한 완주-전주 상생사례 발표를 통해 혁신도시 정주여건 개선과, 지자체간 협조상생을 통한 시너지 효과, 동일생활권 중복투자 문제 해소 등에 호평을 받았다. △청년완주 JUMP, 행안부 장관상 완주표 청년정책인 청년완주 JUMP 프로젝트는 행정서비스 공동생산 우수사례 시상발표에서 행정안전부 장관상을 받았다. 청년완주 JUMP 프로젝트는 청년! 완주에서 놀고 먹고, 완주에서 살자라는 슬로건으로 전국 군 단위 최초로 청년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실태조사를 실시하는 등 청년 삶 전반을 지원하는 정책이다. 거주문화복지 등 청년층 삶의 다양한 문제를 일자리와 함께 해결함으로써 청년 실업률 등 청년문제 개선에 기여한 점이 높게 평가됐다. △공동체는 완주군이 으뜸 공동체 활동을 활력있게 펼치고 있는 용진읍 도계마을은 행정안전부에서 주관하는 2018년 공동체 우수사례 발표한마당에서 장관상을 수상했다. 용진읍 도계마을은 두부공장김치공장 운영을 통해 마을주민 9명의 고정일자리 창출, 연간 6억 원 이상의 매출액 증가 등으로 공동체 활성화 뿐만 아니라 지역경제에도 큰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주민자치박람회 지역활성화 4년 연속 수상 완주군 고산 주민자치회는 제17회 전국주민자치박람회에서 지역활성화 분야 우수상을 수상, 4년 연속 수상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고산면은 이번 박람회에서 고산 교육 공동체 활동 및 고산면지 발간 사례를 통해 고산군 이후 100년 만에 발간되는 고산면지와 지역주민들이 설립하고 청장년들의 교육길잡이가 될 미래의 대안학교 온누리살이사회적협동조합 및 여러 지역단체들과 업무협약에 따른 사회적 약자 지원에 대한 호평을 받았다. △지방자치경쟁력 전국 최상위 인증 한국공공자치연구원이 주관한 지방자치경쟁력에서도 전국 최우수기관으로 인증 받았다. 전국 지자체를 대상으로 한 제23회 한국지방자치경쟁력지수(KLCI) 모델 분석 결과, 완주군은 종합경쟁력 부분 전국 4위, 경영활동 2위를 기록하며 인증서를 받았다. 완주군은 전국 기초 군 평균점수(478.9점)를 크게 웃도는 총 531.95점으로 군 단위 전국 4위에 선정되며 전북도내에서 유일하게 전국 상위 10위권 내에 이름을 올렸다. 완주군의 이 같은 성과는 어떻게 얻어졌을까. 일자리, 삶의 질, 농업농촌 활성 등 주민들의 삶 전반에 걸친 정책들이 선순환 경제구조를 가지면서 인구 경쟁력, 재정 경쟁력이 높아졌다. 농업농촌을 잘 조직화, 일자리와 생산기반이 탄탄해지면서 각종 정책이 주민들 사이에 제대로 먹혀들었고, 차별화된 성과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 박성일 완주군수 인터뷰 완주군이 올해 얻은 각종 수상 성과는 직원들이 해 낸 것입니다. 박성일 완주군수는 지방자치박람회 전 분야 석권 등 최근 성과물의 공을 직원들에게 돌렸다. 박 군수는 민선7기에는 15만 자족도시 도약 기반 구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이 같은 비전에 직원들이 호응, 열심히 따라줬고 좋은 성과로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박 군수는 민선6기에 추진했던 사업들이 조금씩 열매를 맺고,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변화해 갈 완주군을 기대해 달라고 말했다. 한편 박 군수는 지난 10월 한국여성단체협의회가 주최한 제53회 전국여성대회에서 여성 지위 향상과 권익 신장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우수 지방자치단체장상을 수상했다.

  • 기획
  • 김재호
  • 2018.12.10 20:33

중소기업성장지원 협업체제 구축한 김광재 전북중기벤처기업청장

편집자 주=지난해 9월 취임한 김광재 전북중소벤처기업 청장은 정책설계 역량과 현장 감각이 뛰어난 정책통으로 평가받는다. 김 청장은 취임 당일에도 관례적으로 실시해오던 오던 취임식을 생략하고 추석명절을 대비한 전통시장 활성화 이용 캠페인을 첫 업무로 개시했다. 그는 집무실보다 현장을 선호하며, 권위보다 소통을 강조한다. 전북일보는 지난 3일 김광재 청장을 만나 그간의 업무 추진성과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들어봤다. -전북중기청장으로 취임하신지 벌써 1년을 훌쩍 넘겼습니다. 그간 업무를 추진하면서 느낀 점과 소회를 말씀해주신다면. 저는 원래 사무실보다 현장업무를 선호하는데 전북청장으로 온 이후에는 공직생활 중 가장 많이 현장을 찾았던 것 같아요. 중기부의 업무영역은 중소기업, 소상공인, 전통시장은 서민 생업의 중추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소위 탁상행정으로는 그들의 상황을 알 수가 없어요. 현장을 가지 않으면 이들의 고통을 파악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거든요. 전북중기청장으로서 방향성은 확고했습니다. 기관의 문턱을 낮추고, 먼저 이들에게 다가가고자 노력했습니다. -소통행보는 모든 정치인과 기관장이 강조하는 바이기도 한데요. 전북중기청장은 공직자이기 때문에 선출직의 소통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민에게 접근해야 한다고 봅니다. 특히 정부가 정책을 잘 수립할 수 있도록 지역의 상황을 잘 파악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저는 언변이 능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타인의 이야기는 잘 들어주는 편입니다. 기관장으로서 강연을 나가 철학을 이야기할 수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힘든 중소기업인과 소상공인의 이야기를 듣고자 했습니다. 들은 이야기는 반드시 개선하기 위해 정책반영방법을 유관기관과 상의해왔습니다. -우리나라 중소기업 상황이 다 어렵다지만, 전북은 유독 더 합니다. 그 원인을 무엇이라 보십니까. 전통적으로 농업기반 도시로 인식돼 산업화시대에 소외된 까닭이 가장 크다고 봅니다. 농업에서 제조업으로의 산업구조개편에서 뒤쳐진 것도 사실입니다. 전북은 가장 최근 기준으로도 지역 내 총생산(12위)과 재정자립도(16위)가 유감스럽게도 최하위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지역경기가 좋지 않으니 중소기업들의 사정도 열악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같은 상황은 통계에서도 드러납니다. 혁신형 기업으로 통칭되는 벤처기업이나 기술혁신형기업, 경영혁신형기업의 수는 1600개로 전국 6만7200개 대비 2.4%의 수준에 그치고 있어요. 자체적인 기술로 승부는 보는 기업이 적으니 대기업 의존도가 매우 높습니다.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 조업 중단과 GM군산공장 폐쇄 사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말입니다. 중소제조업 기반이 취약(전국평균 3.5%, 전북평균 2.3%)한 것도 문제입니다. 대기업의 공장폐쇄나 생산 감축 시 지역경제가 휘청거리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산업기반이 열악하니 소상공인이나 자영업자의 비중은 90%(11.6만개)로 전국평균86% 보다 높습니다. 지역경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소상공인?자영업자들이 이루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영업부진과 경기침체가 맞물리면서 중소기업과 지역경제의 어려움이 더욱 가중되고 있는 것이라 봅니다. -중기청장으로 부임하며 수행해왔던 핵심과제를 설명해 주시죠. 가장 역점을 둔 것은 수출활성화, 창업생태계 조성, 4차 산업혁명 대응이었습니다. 이는 현재진행형이기도 합니다. 창업과 벤처 기반이 취약한 전북지역에서 창업생태계 조성과 벤처투자 활성화를 위해 창업지원기관 공동으로 지역창업선도기업을 육성 중에 있습니다. 최근 전북청년창업사관학교 개소에도 힘을 보탰으며, 세 개의 메이커스페이스 신설, 16개 창업보육센터 운영 등을 통해 창업저변을 확대해 나가는 데에도 협력하고 있습니다. 전국대비 1% 수준인 전북수출도 끌어올리고자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전북은 전국최고 수준의 수출 성장세를 보였습니다. 수출기업 수를 늘리기 위해 중진공, 코트라 등 수출기관 합동으로 수출카라반을 운영하여 수출경험이 없었던 기업에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한 것도 주효했습니다. 그간 정부지원을 받고도 수출실적이 없는 300개 기업은 전문가가1:1밀착관리를 추진하며 해외시장 진출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4차 산업혁명 대응은 전북 스마트공장추진협의회를 구성하고, 지역 맞춤형 스마트공장 보급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소상공인 활성화도 빼놓을 수 없는 과제입니다. 이를 위해 5인 이상 소상공인으로 구성된 소상공인협동조합 공동사업 대상자에 27개 조합을 선정해 지원함으로써 행정공백을 줄였습니다. 지자체와 협업으로 온누리상품권 구매를 촉진하며 전통시장 활성화의 우수 모델로 자리매김 했다고 자부합니다. -재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전북지역에 선정된 백년가게 6곳에 대해 릴레이 현판식을 가지며 만났던 분들이 보며 희망을 가졌던 게 기억납니다. 선정된 백년가게 모두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30년 이상 투철한 경영 철학을 가지고 한 자리를 지켜온 소상공인입니다. 정읍의 혜화당한약방 같은 경우에는 지난 1982년부터 36년째 한약방을 운영하고 곳인데 많은 지인들과 손님들이 찾아왔어요. 지역역사의 산 증인들도 많았죠. 저는 백년가게 사업이 잘 된다면 1년을 채 못 버티는 많은 자영업자들이 지역과 함께 호흡하며 지역을 지킬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전북지역 중소기업을 살리기 위한 근본해결책이 있을까요. 군산의 사례에서 우리는 대기업에게 의존하는 경제구조가 이어진다면 이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지역경제 모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대기업 위주의 경제는 하나의 사이클에 문제가 생기면 즉시 지역경쟁력이 악화로 이어집니다. 골목상권 또한 생존 위협을 받죠. 지역경제를 근본적으로 살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일시적인 경영 지원책을 넘어 불확실한 경제상황을 대체하고, 보완할 수 있는 산업을 육성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지역의 든든한 뿌리가 되어줄 글로벌 강소기업들이 많이 배출되어야 하죠. 글로벌 강소기업이 육성하려면 그에 맞는 산업 생태계가 필수적으로 요구됩니다. 저는 내년이 전북이 승부수를 걸 최적기라고 봅니다. 그 이유는 중소벤처기업부에서가 추진하는 규제개혁인데요. 정부는 내년 4월부터 한국형 규제샌드박스 규제자유특구제도를 도입하고 시행할 방침입니다. 전북은 이를 잘 활용해야한다고 봐요. 특구 지정 시에는 재정지원과 세제 감면 혜택을 받을 수 있고, 규제특례가 적용되며, 법령이 없거나 기존 규제를 적용하는 것이 맞지 않는 경우에도 규제샌드박스를 활용해 경제를 활성화 시킬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 전북경제가 매우 어렵지만,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속담처럼 위기를 새로운 변화의 기회로 삼아 혁신을 위한 노력을 계속한다면 분명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북중기청은 지원기관의 컨트롤타워 이자 허브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겠습니다. ■ 김광재 전북중기청장은 지난 1986년 공업진흥청 국립공업시험원 강원지방공업시험소를 통해 공직에 입문한 그는 중소기업청 재래시장소기업과, 사업전환과, 기술협력과, 기획재정담당관실 등 주요 정책부서와 기획부서를 두루 거쳤다. 그는 중소벤처부내에서도 정책역량과 현장 감각이 뛰어난 정책통으로 신뢰가 두텁다. 과장되지 않은 언행과 맡은 일은 반드시 완수하는 성실성과 책임감이 강점이다. 탈권위적인 성격으로 후배들이 존경하는 선배공직자로 꼽히며, 민관협업체계를 마련하는 데에도 능하다는 평가다.

  • 기획
  • 김윤정
  • 2018.12.09 19:52

[카드뉴스] 학원 옆에 성인용품점이?

  • 기획
  • 전북일보
  • 2018.12.07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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