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5-11-10 01:06 (Mon)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기획

[생활의 흔적, 역사가 되다] 전주지역 3.1운동과 민간 기록물

우리 민족의 독립은 연합국의 승리로만 얻어진 것이 아니다. 치열하고 지속적인 독립운동이 일본패망후 연합국측이 우리의 독립을 인정하는 큰 요인이 되었다. 1919년 3.1운동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를 대표하는 가장 거대한 거족적인 독립운동이다. 2019년 올해는 그 백주년이 되는 해이다. 또한 올해는 3.1운동으로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백주년이 되는 해이다. 3.1운동은 독립 쟁취에 관한 민족적 자신감과 함께 이후 독립운동을 전개해가는 강한 원동력이 되었으며,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만천하에 알린 거족적 운동이었다. 3.1운동 후 일본은 무단통치를 접고 문화정치로 전환하였다.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가졌으며, 학생들은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서 만세 시위를 펼쳤다. 동시에 평양 의주 원산 등 북쪽의 주요도시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후 중남부지역으로 만세운동이 확산되었다. 독립선언서는 천도교측에서 운영하는 보성사에서 2만 1천매 정도 인쇄되어 전국에 배포되었다. 전주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된 것은 천도교와 기독교 두가지 루트이다. 그 하나는 천도교측 인종익이 2월 28일 열차를 타고 다음날 3월 1일 이리에 이르러 전주행 경편철도를 타고 12시경 전주에 도착하여 천도교 전주교구로 가서 독립선언서 1천 8백매를 전달하였다. 3월 2일 전주교구는 관할인 임실, 진안, 장수, 김제, 고산 등의 천도교 교구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였고, 전주부내 상관, 소양 등 지역에도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또 한 루트는 기전학교 출신으로 천안 양대초등학교 교사로 있던 임영신이 기독교계 책임자인 함태영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아서 전주에 전달하였다. 임영신은 흰 상복을 입고 서문교회 이돈수장로집을 찾았고, 이돈수장로는 독립선언서를 서문교회 김인전목사와 청년의사 신일용에게 전달하였다. 서문교회 이돈수장로집, 천도교 박태련집, 신흥학교 등에서 태극기를 만들었다. 전주지역 만세운동은 3월 13일 정오경 남문시장에서 시작되었다. 첫 시위 날자를 12일로 보는 기록도 있다. 3월 2일에 독립선언서가 배포되었음에도 13일에 가서야 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은 3월 3일 아침에 독립선언서가 일경에 발견되어 감시가 심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3월 13일 장날 정오경 남문에서 일어난 첫 번째 만세운동은 신흥학교와 기전학교 학생, 공립보통학교 학생, 천도교도들을 주축으로 밤 11시까지 다섯차례 이어졌다. 참여인원은 기록에 따라 1만명에서 수천명, 150명까지 차이가 크다. 150명은 전라북도장관이 보고한 것으로 축소된 것으로 보인다. 이날 만세운동에 전주권번의 예기조합 기생들도 참여하였다. 이들 기생 중 4명이 검거되었다가 석방되었다. 3.1운동은 천대받던 머슴, 기생들의 사회적 인식을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이 3.1운동에 적극 참여했기 때문이다. 다음날인 3월 14일에 3시경에 다시 만세시위가 있었다. 완산다리 부근으로부터 다수의 학생들을 앞세우고 천여명의 군중이 손에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 시내 중심인 식산은행(산업은행)까지 진출하였다. 만세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용산의 일본군 사령부 1개 중대가 14일 전주에 도착하였다. 전주시내의 만세는 잦아들었지만 전주 외곽 초포, 봉동, 삼례 등에서 만세시위가 계속되었다. 전주의 만세운동은 4월초까지 이어졌다. 4월 3일 김봉근은 일장기를 달고 장사를 하고 있는 남준식의 가게로 찾아가 전 조선의 상인들이 독립을 부르짖고 철시 중임에도 일본의 국기를 달고 영업하다니 묵과할 수 없다고 힐난하고 일장기를 강제로 떼려고 하였다. 구금된 기전여학생들은 단식으로 저항하였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1920)에 의하면 전라북도의 3.1운동 시위 참가 연인원은 총 121회에 17만 5천명이다. 횟수가 가장 많은 곳은 전주와 군산 21회, 남원이 19회이다. 참여인원은 전주와 남원이 각각 5만명, 군산이 2만 5천 8백명, 정읍이 1만 8천명이다. 사망자는 남원이 34명, 옥구 32명, 군산 21명, 익산 16명이다. 전주는 사망자가 없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실종자는 남원이 가장 많아서 142명이고 그 다음이 익산으로 50명이며, 전주는 15명으로 적은 편에 든다. 피해 인원은 전주가 434명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군산으로 145명이다. 전주는 시위횟수와 참여인원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사망자는 없고 실종자도 적은 편이다. 이는 곧 전주 시위가 다소 평화적이고 과격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전주시는 출판과 기록의 도시로 매년 민간 기록물을 공모 수집하고 있다. 지역의 특성을 살리고 문화콘텐츠를 확보하는 의미 있는 일이다. 지난해 2018년에는 3.1운동 관련 기록물을 수집하였다. 3.1운동 기록물들이 귀해 많은 기록물들이 수집되지는 못했지만 나름의 수확이 있었다. 꽃심상을 받은 민족선언서는 족자 형태로 길이가 1m에 이른다. 1952년 한국전쟁 중에 3.1절을 맞아 선포한 것으로, 우리는 삼일정신을 계승하고 민족정기를 다시 진흥함으로써 남북통일을 맹서하고 이를 실천완수하기 위하여 이에 민족선언을 선포하노라.라고 시작된다. 삼일운동 정신으로 광복을 맞이하였듯이, 결연한 정신으로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자는 것으로 한국전쟁 중의 삼일절을 읽어볼 수 있다. 풍류상을 받은 『도왜실기(屠倭實記)』는 1932년 12월 중국 상하이에서 한인애국단의 투쟁상을 중국인에게 알리기 위해 김구 선생이 약술하고 1946년 엄항섭이 한글로 번역하여 간행한 책이다. 내용도 대단하지만 제일 뒤에 독립선언서를 싣고 거기에 부기한 내용이 눈에 들어온다. 역사적 공적을 남긴 기미운동 당시의 독립선언서라고 크게 쓰고, 작은 글씨로 이것이 28년후 조선해방의 원동력이 되었으니 씨앗은 반드시 뿌려야 할 것이요 뿌려진 씨앗은 결국에 결실이 되고만 다는 교훈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위대하도다 33인의 선열이여!라고 써놓았다. 대동상을 받은 31운동 태극기는 1980년대에 제작된 것으로 학교 앞 문방구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었던 것이지만 그날의 정취를 담아 삼일운동의 정신을 기억하게 해준다. 올곧음상을 수상한 유관순 표지 숙제장은 어렸을 때 많이 본 공책이다. 삼일운동의 상징으로서 유관순 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온 시대를 읽어 볼 수 있는 정겨운 노트이다. 사라지는 민간 소장 기록물을 수집 보존하는 것은 의미가 큰 일이다. 특히 기록문화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전주에서 민간 기록물을 수집해 보존해 간다는 것은 더욱 뜻있는 일이다. 『도왜실기』 에 3.1운동과 광복을 두고 씨는 뿌려야 하고 뿌려진 씨앗은 결실을 맺는다고 한 것처럼 전주에서 민간기록의 꽃이 피어나기를 기대한다.

  • 기획
  • 기고
  • 2019.02.28 20:19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전위예술 이끌어온 이건용 교수 "시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이해하려는 욕구, 예술로 승화"

2010년대 중반 즈음이다. 국내외 미술계의 뜨거운 관심을 그야말로 격렬하게 받기 시작한 작가가 있다. 언뜻 생각하면 어느 날 새롭게 등장한 청년작가인가 싶겠지만 그는 청년도 중견도 아닌, 원로의 반열에 선 70대 작가다. 전위예술가 이건용 전 군산대교수(77).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현대미술작가시리즈로 기획된 개인전 달팽이 걸음전 이후 불붙은 그의 활동은 국내외 갤러리를 이어가며 더 열정적이고 새롭게 미술 언어의 역사를 쌓아가고 있다. 초등학교시절부터 중고등학교까지 줄곧 미술반에 들어가 그림을 그렸고, 대학에서도 미술을 전공했으며 60년대부터 한국현대미술의 전위적 흐름을 줄곧 주도해온 그가 마치 어느 날 혜성처럼 나타난 존재인양 국제적인 미술평론가들의 주목을 받으며 해외 갤러리들을 열광케 하는 이 새삼스러운 흐름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를 만났다. 4~5년째 이어지는 이 특별한 환경이 어디서 온 것인지 궁금했다. 작업이 더 새롭게 변했을까. 그럴 일은 없어요.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거의 모든 작업은 70년대 초반부터 줄곧 해온 것들이어서 새삼스러울 것이 없거든요. 다만 이런 이유가 있을 것 같긴 합니다. 이를테면, 내 작업이 지향하는 개념적인 선명성인데, 미술을 어떤 분위기나 또 다른 무엇이나 잘 알 수 없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방법론, 그것도 복잡하지 않고 선명한 시스템으로 보여준다는 것이죠. 그래서 시점과 관계없이 소통이 가능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고 보니 개념의 선명성은 작업에서 뿐 아니라 그의 일상과 삶의 태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늘 그랬듯이 그는 인간적인 면모와 유머 넘치는 대화로 인터뷰 내내 웃음을 안겼다. 따뜻하면서도 유쾌한 그의 화법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유로움과 견고한 자기 확신의 경계 사이에서 더 빛나는 듯 했다. 인터뷰는 군산시 개정면 아산리에 있는 작업실에서 있었다. 그 작업실 문에는 직접 써놓은 글귀가 있다. 상황은 해석하라는 신호다.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견고한 규범과 제도적 장치에 맞서 자기만의 해석으로 시대를 읽고 문제를 제기해온 그의 언어가 무디어지지 않고 살아 숨 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작업실 공간이 큽니다. 천정도 꽤 높은데요. 이곳에서 줄곧 작업을 해오셨나요. 91년엔가 학교에 있을 때 마련했어요. 마땅한 작업실이 없어 큰 작품을 할 때는 학교 복도를 이용했거든요. 언젠가 친분이 있던 갤러리 대표가 왔었는데 복도에 놓인 작품을 보고 놀라는 거예요. 그때 작업실을 들일만한 공간을 구해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때 만난 공간이 양어양식장이었던 이 작업실입니다. -그동안의 작업이 다 이곳에 와있습니까. 그렇죠. 화랑에 나가 있는 작품을 제외하고는 다 있어요. 화랑에 나가 있는 작품도 100여점 되는데 여기도 꽉 찼어요. 그만큼 작품이 안 팔렸다는 증거겠죠.(웃음) -요즘은 미술시장에서 교수님 작품을 주목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사실은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하고 난 이후 작품이 꽤 팔려나갑니다. 물론 지금 여러 곳의 화랑에 나가 있는 작품은 위탁한 작품이지만, 근래 들어 제 작업에 쏟아지는 국내외 화랑들의 관심이 저 또한 새롭습니다.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마디 하자면 사실 우리나라 화랑은 역할이 애매합니다. 미술시장에서 화랑의 역할은 아주 중요하지요. 외국의 화랑들은 대개 주목하는 작가를 먼저 키웁니다. 투자를 하면서 그 작가를 성장시킨 다음에 결실(?)을 거두는 형식이죠.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런 풍토를 아직 갖고 있지 않습니다. 어느 날 눈에 띄는 작가를 끌어들이는 식이죠. 현실을 보자면 작가와 화랑의 작품 값 배분도 매우 불균형합니다. -어찌됐든 교수님 작품이 활발하게 판매된다는 사실이 반갑습니다. 살다보면 삶의 환경을 바꾸게 되는 계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가 바로 그 계기인 것 같아요. -그 전시는 교수님의 작업을 총정리 하는 의미가 있었죠. 그렇죠. 1979년 처음 발표한 이후 대표작이 된 <달팽이 걸음>이 전시 주제였어요. 달팽이 걸음은 빨리 빨리를 내세우는 현대문명의 속도에 맞서는 언어예요. 느리지만 그렇게 살아남는 생명력을 표현하는 퍼포먼스지요. 메시지가 강해서 아마도 많은 관객들이 더 호감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설치작품과 드로잉 작품의 거개가 다 보였던 그 전시를 기억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때 매체들의 보도도 폭발적이었어요. 한국의 현대미술사를 정리하는 기획전이었는데 제 전시는 시대의 주류와 관계없이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경향을 이끌었던 작업을 한곳에서 볼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관심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감사한 일이지요. -작업을 정리하는 의미의 전시지만 새롭게 보인 작업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그 점에서는 아쉬움이 있어요. 사실 저는 미술사적으로 회고하고 정리하는 전시의 취지를 제대로 살려내고 싶었습니다. 공간도 미술관 전관을 활용하고 싶었고, 기간도 1년은 할 수 있기를 바랐고요. 그런데 미술관측에서 공간을 어떻게 채우려고 하느냐에 대한 우려가 컸어요. 당초 구상했던 의자프로젝트가 그러한 우려를 해결해 줄 수 있는 퍼포먼스였는데 결국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의자프로젝트는 그 후 대구 전시에서 보였던 프로젝트 아닌가요. 퍼포먼스의 취지가 궁금합니다. 맞습니다. 2015년 대구 전시에서 화제를 모았던 그 작품이죠. 의자프로젝트는 관객들과의 예술적 커뮤니케이션을 적극적으로 이끌어내고자 하는 작업입니다. 의자는 매우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대상이잖아요.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쓰고 있는 의자를 전시장으로 들여오고 설치하는 과정을 영상으로 기록하고 관객들이 그 의자에 앉아 영상을 감상하는 퍼포먼스가 기본 골격인데,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기획은 그 의자를 일정한 시간에 한꺼번에 설치하는 것이 아니라 전시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의자를 더해지게 하는 방식이었어요. -관객과의 예술적 커뮤니케이션 성과는 어땠습니까. 대구 초대전이 있었던 미술관은 구청에서 운영하는 곳이었어요. 전시장 시설은 괜찮았는데, 큐레이터에게 전시장에 관객들이 많이 찾아 오냐고 물었더니 아주 적다는 거예요. 그때 의자프로젝트를 여기서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공간에서는 관객과의 커뮤니케이션이 가장 절실하니까요. 근처에 있는 음식점, 가게, 사무실 등을 찾아다니며 취지를 설명하고 의자를 빌렸어요. 처음에는 반응이 좋지 않았는데 나중에는 의자를 주겠다는 분들이 너무 많아져 전시장을 가득 채웠지요. 오프닝 때는 관객들이 몰려 퍼포먼스 공간이 비좁을 정도였어요. -예술적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통로로 왜 굳이 의자를 선택하셨습니까. 의자는 우리의 일상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도구입니다. 한편으로는 권력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저는 의자가 지닌 다층적인 의미 중에서도 커뮤니케이션의 지점을 보았습니다. 내 의자를 너에게 빌려주겠다는 것의 의미는 특별합니다. 내 권한과 권리를 빌려주겠다는 것도 되고 내 편리함을 빌려주겠다는 것도 되고. -교수님 작업의 근간은 행위예술로 대변되는데 행위예술은 유형으로 남아 있기 어렵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교수님의 대부분 전시는 행위예술로만 끝나지 않고 유형의 작품들로 오랜 시간 동안 관객과 소통합니다. 행위예술이 본류에 있지만 설치작품 종류가 워낙 많습니다. 드로잉 등 회화 작품도 많고요. 신체드로잉 처럼 퍼포먼스로 드로잉 작품을 이어내는 작업도 있지요. 행위예술로만 그치지 않는 다양한 작업이 가져온 결과일겁니다. -화제를 바꾸겠습니다. 행위예술을 시작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일찍부터 몸에 대한 관심이 깊었습니다. 그래서 신체에 대해 철학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다행히 내가 다닌 배재고등학교는 1학년 때부터 필수로 들어야 하는 논리학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철학 이론에 취미를 갖게 되었어요. 마침 고 1때 논리학 선생님이 독일에서 철학을 전공했던 분인데 수업 시간 짬짬이 2차 대전 이후의 현대철학에 대해서 강의를 했어요. 다른 친구들은 골치아파했는데 나는 정말 좋았어요. 그때 언어분석 철학 같은 이론도 공부하고 비트겐슈타인이나 촘스키 같은 학자들도 알게 되었어요. -교수님의 예술적 언어가 논리적인 선명성을 갖게 된 바탕을 알겠습니다. 그런 학문적 관심은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요. 아마도 아버님 영향이 아닐까 싶습니다. 목회자이자 교육자였던 아버님은 조금만 여력이 생겨도 책을 먼저 사셨어요. 어린 시절 집에 쌓아놓은 책이 만권 정도 되었는데 방 네 개 중 두 개가 책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늘 책을 옆에 끼고 살았던 아버님 덕분에 우리 형제들도 책을 많이 읽었죠. -미술은 취미가 있었습니까. 외삼촌이 그림을 그렸어요. 그렇다고 직접 배운 것은 아니고, 인간 활동 중에 그림 그리는 일이 있다는 것을 삼촌 덕분에 알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미술반에서 활동했으니 스스로 즐기는 취미도 있었던 모양이에요. 중학교 때는 미술교과서로만 충족되지 않는 정보에 대한 욕구가 생겼습니다. 광화문 근처에 있는 미국 문화원을 드나들기 시작했고, 프랑스문화원과 독일문화원을 다니면서 그 욕구를 채웠죠. 팝아트도 그 시절에 만났는데 당시에는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부모님도 아들의 재능을 눈여겨보셨던 모양이군요. 초등학교 때부터 여기저기 미술대회를 많이 나갔었는데 제법 많은 상을 탔어요. 월요일은 부모님께 상장 가져다 드리는 날이었죠. 그러나 직업을 그림 그리는 일로 삼는 것은 반대하셨어요. 중학교 3학년 때 예술고를 가고 싶다고 말씀 드렸더니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야 가난한 사람도 돕고 아픈 사람도 치료해 줄 수 있다고. 그러나 결국 아들의 고집을 꺾진 않으셨어요. -본격적으로는 언제부터 작품 발표활동을 하신 겁니까. 70년대 초반입니다. 그때 ST(Space and Time 미술학회)를 창립하고 AG(한국아방가르드협회)에 참여하기 시작했으며 신체향을 처음으로 발표한 것도 그 즈음이에요. -ST나 AG는 당대의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흐름을 주도했던 그룹인데 이러한 작업이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과는 무관했었나요. 그럴리 없지요. 현대미술의 실존적인 조건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한 작업은 결국 주류에 대한 반항, 기존 질서를 거스르는 도발적 행위나 설치로 이어지거든요. 71년 경복궁에서 열린 한국미술협회전에 신체향도 설치미술에 대한 이해가 워낙 부족했던 때이기도 했지만 수도경비사에서 나와 철수를 강요할 정도로 이슈가 됐었어요. 예술가로서 자신이 살고 있는 현 상황에 주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도 그것을 예술로서 이해받지 못하는 불행한 시대였죠. -전위예술의 시작이랄 수 있는 신체향은 어떤 작품인가요. 나무를 뿌리째 상자에 넣어 옮겨 놓는 작품인데 기존의 전시장에 대한 문제 제기로 시작된 작업입니다. 무엇인가를 만든다는 것에 대한 의문이기도 하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관계에 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관객들은 작가가 직접 만들지 않은 자연의 일부를 전시장에 옮겨놓는 행위를 통해 전시장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결국 작품이란 무엇인가, 미술이란 무엇인가를 묻게 되는 것이죠. -작업에 따라서는 정치적 발언으로도 읽혀질 수밖에 없겠습니다. 물론이죠. 예술은 시대를 외면할 수 없고, 외면해서도 안 됩니다. 작년 북경 전시 때도 저지당해 못 가져간 대작이 몇 점 있습니다. 정치성을 반영한 작품들이죠. 표현방식에 있어서도 시대적 환경을 끊임없이 고민하는데 요즈음은 포장박스나 한번 사용되고 나면 폐기되는 공공기관의 공문이나 엽서 봉투 등을 활용해 작은 드로잉을 남깁니다. 한 시대를 남기는 가장 선명한 흔적이 아닐까 싶어요. -교수님이 궁극적으로 찾고자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 궁금해집니다. 나의 행위는 예술가로서 당대를 절실하게 사는 한 방식이에요. 인간은 더불어 사는 존재죠. 삶의 과정은 당대를 함께 호흡하면서 그 안에서 절실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예술 작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행히 내 작업을 뒤돌아보면 모두 시대적으로 호흡하고 있습니다. 결국 내 작업은 시대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해하려는 욕구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터뷰 내내 그는 웃음 터지게 하는 화법으로 상대방을 무장해제(?)시켰다. 기존의 질서를 비틀고 뒤집어 새로운 질서를 제시해온 그의 50년 예술 행위의 양적 생산은 잠시 들여다본 것만으로도 놀라웠으나 더 놀라웠던 것은 그 바탕에 숨 쉬고 있는 개념의 선명성과 논리적 근거였다. 철학적 논리와 개념을 동반한 예술 행위로 관객들과 소통해온 그의 언어는 한국 현대미술사에 선명한 궤적을 남기며 시대를 건너왔다. 그 흔적이 새삼 더 빛나게 된 이유가 있을 터였다. 다시 들여다보니 거기, 그의 충만한 지적 사유의 결실이 있었다. ■ 이건용 교수는 - 캔버스 벗어난 행위예술, 해외서도 '주목' 한국 전위예술의 문을 열고 이끌며 발전시켜온 이건용 교수는 1942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태어났다. 남한으로 온 것은 해방 직전. 목회자이자 교육자였던 아버지와 간호사였던 어머니는 6남매 중 장남이었던 그에게 언제나 바른 생활 할 것을 가르쳤다. 가난했으나 청빈했던 아버지는 책읽기를 즐겼다. 그 덕분에 책속에 파묻혀 지냈으나 가뜩이나 비좁았던 집은 늘어나는 책으로 더 비좁아졌다. 초등학교 때부터 미술반에 들어가 그림을 그렸던 그는 중고등학교 시절 방학이 되면 경직된 집안 분위기를 견디기 어려워 가출을 했다. 휴지를 줍는 넝마주이들과 함께 지내다 개학을 앞두고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는 그의 옷을 벗기고 소독약부터 뿌렸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철학을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분석철학 현상학 등 같은 또래들이 눈을 돌리지 않는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그는 관련된 학회를 쫓아다니며 강의를 듣고 토론에 참여했다. 그때 쌓은 공력은 그의 예술세계 기저를 형성하는 바탕이 됐다. 부모님은 의사가 되기를 바랐지만 어머니를 설득해 홍익대 미대에 입학했다. 대학시절 국전에 출품, 입선을 하기도 했지만 공모전 출품은 그것으로 그쳤다. 기존의 질서 대신 새롭고 도발적인 방법으로 예술 언어를 표현하기 시작한 그는 ST(Space and Time 미술학회)를 창립하고 AG(한국아방가르드협회) 그룹에 참여하면서 캔버스를 벗어난 행위예술로 한국 현대미술의 새로운 문을 열었다. 한국 전위예술의 기수가 된 그는 신체를 활용한 다양한 퍼포먼스를 발표하기 시작, <건빵 먹기> <장소의 논리> <신체드로잉> <달팽이 걸음>등 시대를 해석하고 소통하는 언어로 관객들과 만났다. 1973년 파리비엔날레에 초대된 그는 설치미술 작품 <신체항>으로 호평을 받았으며 79년에는 지명공모로 참여했던 리스본국제미술제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한국현대미술사의 새로운 지평을 연 그를 2014년 한국현대미술작가시리즈>에 초대해 개인전을 열었다. 그 전시를 보게 된 해외의 미술평론가나 큐레이터들이 한국의 이건용을 주목하기 시작했으며 국내에서도 그의 작업과 작품에 더 새롭고 특별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화제를 모았던 지난해 북경의 화랑 페이스 초대전도 그 연상에서 이뤄진 것이다. 예술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물음으로 출발한 그의 작업은 50여 년 동안 신체와 다양한 매체의 조화를 통해 특별한 회화 언어를 만들어내면서 한국현대미술의 지평을 넓혔다. 퇴직 이후 더욱 왕성한 활동으로 주목받고 있는 그는 올해도 부산시립미술관과 서울 페이스, 대구 리안미술관 초대전이 예정되어 있다. 목원대를 거쳐 81년 군산대 교수로 직장을 옮기면서 군산 사람이 된 그는 퇴직 후 전업 작가로 살면서 더 활발한 창작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김은정 선임기자

  • 기획
  • 김은정
  • 2019.02.28 20:19

[전북의 재발견] 섬진강 - 전북 순창을 흐르는 생명의 강

전북 순창을 흐르는 생명의 강줄기, 섬진강 섬진강은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 원신암마을 상추막이골 데미샘에서 발원하여 전라남도 광양만에 이르기까지 3개도 11개 시군에 걸쳐 223.86km를 흐르는 생명의 강입니다. 특히 섬진강은 물길이 잔잔하고 강을 감싸고 있는 지역들은 아름다운 풍광을 간직해 사계절 나들이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습니다. 강 따라 길 따라 역주행해 도착한 곳은 섬진강의 발원지 데미샘입니다. 굽이굽이 거슬러 오르는 길의 풍경은 역시나 웅비함 그 자체였습니다. 드디어 섬진강 발원지의 마중길목에서 데미샘의 미세한 흐름에 귀 기울여 봅니다. 차량으로 진입하여 섬진강 발원지 인근에 주차할 수 있었으나 데미샘 자연 휴양림 마당에 주차하고 발품을 팔기로 합니다. 아직은 2월의 언 땅, 가문 겨울날이지만 봄 햇살이 수분을 토해내는 계곡은 섬진강 줄기의 제1 연못인 무지개 연못을 투명한 빛으로 가득 채웁니다. 포근한 오솔길을 따라 걸음을 재촉합니다. 데미샘의 데미는 더미(봉우리)의 전라도 사투리로 천상으로 올라가는 봉우리라는 뜻입니다. 섬진강의 발원지인 이곳은 금강의 발원지와 이웃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역태극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합니다. 본격적인 여정은 데미샘에서 출발합니다. - 단군시대 (모래내) 백제시대 (다사강) 고려 초 (두치강) 고려 말 (섬진강) 섬진강의 유래를 아시나요? 고려 말 전남 광양시 진성면 섬거에 왜구가 침입하자 수만 마리의 금두꺼비가 강변에 나가 울어대어 왜구를 물러가게 했다는 전설에서 유래하여 섬진강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굽은 강줄기를 유유히 흐르던 강물은 임실의 상운사 거리 교량 아래를 지나며 숨 고르기를 위한 장소로 옥정호를 택했다고 하네요. 임실군 운암면의 옥정호는 섬진강 다목적댐을 만들면서 생긴 거대한 인공호수로 호남평야를 기름지게 하는 다목적 댐으로 물안개길(13km)이 유명한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됐습니다. 오봉산(해발 513.2m)에서 바라보는 옥정호 안의 붕어섬! 오늘도 어제도 옥정호의 붕어는 남쪽을 바라보며 섬진강의 줄기찬 흐름을 응원합니다. 세상만사 모든 순리는 물 같다 하였던가요. 흐름, 지연, 마름, 넘침, 고임, 모임, 증발...... 섬진강은 많은 시인이 사랑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 씨는 섬진강에 자리 잡은 생가에서 글을 짓고 사람들을 만나며 섬진강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보이는 것으로도 유명하죠. 그가 서재에서 섬진강의 흐름을 바라보던 심경은 어떠하였을까요? 징검다리를 바라보며 섬진강을 가슴 가득 품어봅니다. 강물은 대부분을 계곡물이 채우는 듯합니다. 순창 산하의 물흐름은 강천 계곡물을 주류로 하여 섬진강에 보태어집니다. 1981년 대한민국 제1호 군립공원인 순창 강천산 군립공원. 강천 계곡물을 쉬게 하였던 강천 저수지는 현재 주차 공간 확보를 위해 매립을 통한 주차 공간 확보 공사 중입니다. 저 멀리 펜션촌이 보이시죠. 거기가 바로 순창 강천산 전원 마을입니다. 섬진강을 돌아다니다 하루 쉬시려면 그곳에서 행랑을 풀어 봄직도 좋을 것 같습니다. 강천산 군립공원은 5.5km의 맨발 산책로가 조성되어있는데요. 산책로를 따라 흐르는 맑고 부드러운 강천계곡을 보시면 가슴 속이 뻥 뚫릴 것 같습니다. 2020년부터는 강천 온천개발지구 사업에 따른 관광호수로 거듭난다고 하니 기대해보셔도 좋겠습니다. 한국물학회가 선정한 좋은 물 강천산 음용수 지하 791m에서 끌어 올리는 연중 26.5의 천연 암반수입니다. 그 유명세는 포털사이트에서 [강천산 음용수] 검색으로 대신 할게요. 이렇게 물이 좋다 보니 순창 장맛이 일품인가 봅니다. 고추장은 말할 것도 없고 된장, 간장 등 순창에서 만들어진 장류는 그야말로 음식을 더욱더 맛깔나게 해주죠. 물 좋은 순창의 농축산물이 모이는 곳, 섬진강 나들이에 식도락은 빠질 수 없겠죠? 순창에서 수확한 싱싱한 쌈 채소 위에 순창 고추장으로 밑간하고 순창 한우를 터억~ 놓아 한쌈 잡솨봐~ 이 맛에 순창에 온다니까요~! 순창의 용골산과 무량산 사이를 여행하던 섬진강물은 동계면 장군목유원지의 요강(돌개구멍)바위를 적신 후 강천산 계곡물이 보태어져 힘을 얻습니다. 기운찬 강물은 풍산면의 옥출산을 지나 오토캠핑장과 카누 체험장이 마련되어있는 향가 유원지에 다다릅니다. 일제 강점기 때 전라도의 곡물 운송을 위해 뚫린 향가터널을 지나 곧장 보였던 철로 교각은 흉물스러움을 리모델링하여 교량 상판을 인도교로 놓고 섬진강 종주 자전거 길로 재건하였습니다. 전북 진안에서 발원하여 순창에 머물며 노닐던 섬진강물! 섬진강물의 흐름에는 역사와 전통 속 전북민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습니다. 강줄기는 남쪽으로 남쪽으로 낮은 곳을 향합니다. 남원시의 강물과 합류하여 지리산의 수많은 계곡물과 보태어질 것 이며 구례군과 곡성군 사이를 유유히 흐를 것입니다. 종착지는 남쪽의 바다일 것이지만 증발하여 다시금, 전북의 산하를 적실 터이고 섬진강은 쉼 없이 흐를 것입니다. 따스한 봄바람이 기다려지는 2월, 가벼운 발걸음으로 섬진강 나들이 어떠세요? /글사진=전라북도 블로그 기자단 윤칠한

  • 기획
  • 기고
  • 2019.02.28 17:29

[찾아가는 군산이야기] 군산 초원사진관 - 추억 속으로 들어간다

초원사진관은 군산 근대문화거리가 있는 신창동 쪽에 있습니다. 신흥동 일본식 가옥을 비롯해 거리 일대가 군산의 과거로 떠나는 시간여행을 하듯 둘러볼 수 있는 곳입니다. 도착하자마자 초원사진관 앞에 늘어선 인파들로 인해 깜짝 놀랍니다. 차례차례 줄을 서서 사진관 앞에서 인증 사진 남기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다들 맞은편에서 초원사진관을 담기에 여념이 없는 때, 한쪽에서 심은하가 기대어 서 있던 나무를 발견합니다. 뒤편의 초원사진관의 모습이 제법 그대로 남아있었는데 도로가 걷기 좋게 바뀌고 그 옆의 주택이 카페로 바뀌었다는 것 정도가 다른 점입니다. 뒤편의 초원사진관의 모습이 제법 그대로 남아있었는데 도로가 걷기 좋게 바뀌고 그 옆의 주택이 카페로 바뀌었다는 것 정도가 다른 점입니다. 내부에는 영화 속의 장면들과 한석규가 앉아있던 소파 등이 남아있습니다. 영화 제작기록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안쪽엔 벽면엔 영화 속 장면들이, 그리고 가운데는 작은 2인용 의지가 있어 영화 속 심은하처럼 증명사진을 찍어볼 수 있었는데 삼각대를 가지고 온 이들은 삼각대로도 촬영하고 서로 찍어주기도 하며 추억을 남깁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 영화를 몇 번이나 보았지만, 또 봐도 기억에 남는 영화입니다. 1998년에 개봉해 벌써 2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언급되는 영화로 기억됩니다. 내 기억 속에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친다는 걸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돼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께 고맙단 말을 남깁니다.-한석규의 대사 중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없지만, 시계와 선풍기, 옷걸이와 투박한 액자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합니다. 과거의 초원사진관의 모습도 남아있네요. 당시엔 개인이 운영하던 사진관이었을 줄 알았는데 영화 촬영을 위한 세트장으로 지었던 곳이라고 합니다. 군산을 배경으로 한 영화의 여운을 남긴 채 골목 여행을 하러 떠나볼까 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많은 이들이 찾아오는 곳으로 세트장의 관광지화가 시작된 역사 같은 곳이 아닐까 합니다. 초원사진관 주변의 골목들엔 근대역사를 담아낸 시간여행을 콘셉트로도 하지만 다양한 볼거리와 포토존이 이어집니다. 봄을 앞둔 지금, 흙의 가슴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리며 군산의 골목골목을 여행하는 시간 여행자들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군산의 유명한 볼거리이자 필수 코스인 초원사진관을 찾아가는 길! 예전에 한 번 들렸던 기억이 있는데 철길이 있었나 싶어 확인해보니 잘못 찾아왔습니다. 많은 이들이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지 초원사진관을 초원사진관을 검색하고 오시는 듯, 같은 이름의 사진관이 있는 곳으로 와버린 겁니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지]로 검색하세요. 주소 : 전라북도 군산시 구영2길 12-1 / 전라북도 군산시 신창동 1-5 주차 : 인근 공영주차장 금액 : 관람 무료 휴관 : 매주 월요일 시간 : 겨울철(11~2월) 9시~17시, 여름철(3~10월) 9시~18시 /군산시 사이버기자단 강영훈

  • 기획
  • 기고
  • 2019.02.28 11:58

[전북의 독립현장] 전주 남문에서 만세 운동 울려 펴져

나는 대한 사람이다. 나라를 위해 독립만세를 부른 것도 죄가 된단 말인가(유관순 열사) 1919년 3월 1일 손병희 등 민족대표 33인은 서울 태화관에서 독립만세를 삼창함으로써 3.1독립만세운동의 불을 지폈다.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국내 뿐 아니라 대외적으로 알린 만세운동은 전국 주요 도시로 확산됐다. 3.1운동의 마중물로 재부각되는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로 꼽히는 전북 곳곳에서 일제에 맞서는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이에 전북일보는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광복회 전북지부와 함께 매주 한 차례에 걸쳐 도내 만세운동 근원지를 조명하고, 해당 자치단체의 기념사업 및 사적지 정비 계획을 소개한다. 두 번째 순서로 전주와 금산에서의 만세운동을 되짚어봤다. △채소가마니에 숨긴 태극기, 남문에서 만세 소리와 함께 펄럭이다. 1919년 3월 1일 전주군 천도교 교구실에서 은밀한 논의가 진행됐다. 서울에서 온 이종익으로부터 독립선언서 1000여장과 함께 서울에서의 상황이 전주로 전달됐다. 천도교구 배상근, 김진옥 등은 이러한 사실을 임실의 천도교 교구실과 익산, 이리, 함열, 김제, 옥구, 무주, 정읍, 태인, 순창, 고창, 금산, 부안 등 각 지방으로 전파했다. 또 교인 민영진, 김태경, 서호순 등을 통해 예수교회 측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는 등 교회 조직을 통해 만세운동을 도모했다. 쉽지 않았다. 일제는 종교 단체 관계자들에 대한 집중 감시를 벌였고 일부 인물들이 일경에 붙잡혀 운동이 시작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3월 13일. 전주 남문 일원에서 장날을 기해 대규모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신흥학교와 기전학교의 학생들은 학교 지하실 호롱불 밑에서 태극기 및 선언서 등을 준비하며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예정일인 13일 일경의 삼엄한 경계 속에서 채소가마니에 숨긴 태극기를 남문시장까지 옮겨왔다. 이날 정오께 남문에서 울린 인경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행동이 개시됐다. 천도교, 예수교인, 신흥학교 및 기전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150여명이 남문시장부터 태극기를 들고 일제히 대한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짖었다. 기전학교 여학생들은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나눠줬다. 이명수는 태극기를 양손으로 흔들며 대한사람으로서 만세를 부르지 않는 사람은 반역자!라고 독려했다. 대열은 삽시간에 불어났다. 남문에서 공립제2보통학교, 대화정을 지나 대정정, 우편국 앞까지 행진했다. 거리는 태극기와 독립 만세의 물결로 넘쳐났다. 독립만세운동은 자정을 넘겨 다음 날 새벽 2시까지도 독립만세와 검거된 애국 동포 석방을 외치며 곳곳에서 계속됐다. 이날 전주 읍내에서 검거된 인원만 300여명에 이르렀다. 당시 한 시민은 일본 헌병이 휘두른 칼에 태극기를 움켜쥔 팔이 잘려나가자 다른 손으로 태극기를 집어 올렸다. 그 팔도 잘리자 입에 태극기를 물고 만세를 외치는 등 독립을 향한 열망은 막을 수 없었다. 일경이 총칼을 들고 막아섰지만 해산하지 않는 대열에 총을 발사하기도 했다. 이날을 기점으로 전주에서 독립만세운동은 차츰 분산적이고 장기적인 운동으로 들어섰다. 일경은 군중을 향해 물을 끼얹고, 소방용 갈구리로 전진하는 대열을 마구 찍기도 했다. 거리에 만세운동이 벌어질 때마다 일경은 빨간 잉크를 참여자들에게 몰래 찍어 모조리 붙들어 가뒀다. 상황이 어렵게 전개되자 애국시민은 행동을 밤으로 옮겼다. 기전여학교의 김순실, 김나현 등 여학생과 도민은 도청 앞에서 대한독립 만세!. 구속한 애국동포를 석방하라고 외쳤다. 이렇게 이어진 만세운동으로 일경에 붙잡힌 인원은 300명이 넘었다. 붙잡힌 애국지사들은 일경의 갖은 고문을 받았지만 민족의 긍지와 의지를 굽히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법정투쟁을 전개했다. 전주시는 이를 기념하고자 지역 31운동 발상지인 남부시장 매곡교 인근에 31운동기념비 등을 조성했다. △도로공사 인부들까지 합세한 금산의 만세운동 1919년 3월 23일 금산면의 청년 김용술, 임승환은 만세운동을 계획한다. 이들은 방금 세계 강국은 단체적. 일진적 행동으로 인해 성립하게된다. 아 조선은 건국 4000여 년으로 문명의 자격과 인의의 인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강제정치하에서 신고하는 것은 안일, 우매의사상과 매국적자의 소치인 것이다. 동포 청년은 간교한 적자의 행동을 배우지 말고 인도를 주창하여 압박정치하에서의 금수생활을 면하고 독립적 자유활동을 해야 할 것이다. 이 정신을 가진 동포는 본일 오후 2시 우시장 상부에 집합하여 주동인물과 행동을 함께 할 것이다는 격문을 짓고 읍내의 장꾼들에게 배포한다. 읍내의 분위기가 무거워지고 요동쳤다. 김용술, 임승환이 20여명의 청년과 함께 대한민국독립만세를 외치자 주위의 수천 군중이 호응했다. 놀란 일경은 주동자인 김용술, 임승환을 체포하자 군중은 일시 해산했다. 25일 제원면 제원리의 청년 박영규는 23일에 있었던 읍내의 만세운동 소식을 듣고는 감연히 앞장설 것을 결심한다. 박영규는 집에서 한지에 크게 태극기를 그리고 한쪽에는 국문, 한문으로 대한독립만세라는 글귀를 쓴 큰 기를 들고 나와 종과 큰 북을 쳐서 사람들을 모아 만세를 외쳐 불렀다. 자유와 독립을 외치는 200여명의 대열은 승리를 구가하면서 마을을 돌고 돌았다. 다음날 오후에는 다시 도로 부역에서 돌아오는 주민들을 마을 앞에서 맞이하며 지금 한국은 독립하게 되었으니 일동은 다시 독립만세를 부르자 고 말한 뒤 만세를 불렀다. 28일 금산읍에서 또 한차례의 만세시위가 이어졌다. 이른 아침부터 헌병들의 경계가 펼쳐졌다. 일경은 이날 오후 상점은 문을 닫고 노점과 행상들이 짐을 싸니 무사히 장날을 넘겼다는 안도감을 보였다. 하지만 돌아갈 차비를 하려는 것처럼 서성대던 수 백명의 군중은 돌연 태극기를 휘날리고 만세를 부르며 질서도 정연하게 행진을 했다. 당황한 일경은 공포탄을 발사해 해산을 시도했지만 대열은 무너지지 않았다. 며칠 후 3월 31일. 복수면 곡남리 주민 김영호. 정재열. 오연구 등은 곡남리 앞길에서 인근주민 들과 함께 도로를 수리하다가 인부들에게 각 지방의 만세운동 상황을 설명했다. 우리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만세운동을 하자고 제의하기도 했다. 이들이 대한 독립만세를 소리 높혀 부르고 앞장서니 같이 도로수선 공사에 나왔던 수영리의 주민 약 200여명이 대열에 합세했다. 도로공사를 감독하러 나왔던 일경은 이를 제지하려 했지만 김영호. 오연구 등은 이를 모른 체 환호성을 올리며 동분서주로 만세를 지휘했다. 얼마 후 진산면 헌병주재소에서 응원대가 급파됐다. 응원대의 출동으로 군중은 해산되고 김영호. 정재철 등 7명이 붙잡혔다. 하지만 만세운동은 야간을 이용해 혹은 산상에서 산발적으로 두고두고 계속됐다.

  • 기획
  • 최정규
  • 2019.02.27 20:09

[한바탕 전주 즐기기] 생태 도시 전주, 동물과 사람이 모두 행복한 전주 생태동물원

어렸을 적 부모님의 손을 잡고 가봤던 동물원의 모습을 기억하시나요? 책에서 그림으로만 봤던 동물 친구들은 정말 신기했습니다. 조금이라도 잘 보기 위해서 까치발도 들고, 이쪽은 봐주지 않는 동물들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큰 소리로 부르고, 주변의 풀이나 심지어 돌멩이를 던지기도 했던 아이들. 설명해주시는 사육사는 안전한 공간에서 천적의 위험 없이 먹이가 공급되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과연 동물들은 이런 삶을 살게 만든 사람들이 고마웠을까요? 원래 살던 넓은 초원이나 열대우림과는 완전히 다른 칙칙한 콘크리트 안. 그 안에서 동물들은 어떤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살았을까요? 전주동물원은 1978년 문을 연 뒤로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아 왔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시설이 점점 노후화되면서 동물들이 지내기에는 어려움이 있던 환경이었는데요. 콘크리트와 철창으로 둘러싸여 있던 전주 동물원이 최근 들어 새롭게 태어나고 있습니다. 인공 시설물인 콘크리트를 제거하고 풀과 나무, 꽃을 심어 동물들의 서식 환경에 더 가깝게 만들었습니다. 친환경 에코 생태숲동물원이라는 이름으로 순차적으로 각각의 동물의 특성에 맞게 10개 구역으로 묶어 조성 중입니다. 동물들은 원래 행동반경이 매우 넓습니다. 호랑이는 50~400㎢, 표범은 33~280㎢, 늑대는 100㎢, 사자는 40~50㎢를 이동합니다. 동물원이 아무리 먹이를 충분히 준다고 해도 넓은 자연을 마음껏 뛰어다니던 동물 친구들에게 콘크리트와 철장 속은 가둬지는 것만으로도 큰 스트레스와 고통이었을 텐데요. 전주동물원에서는 동물들의 행복과 생태 도시라는 전주의 방향성에 부합하도록 많은 변화가 진행되었습니다. 멋진 늑대 그림을 지나면 기존의 방사장 지붕을 없앤 자연형 늑대의 보금자리를 볼 수 있습니다. 크고 작은 나무들과 잔디로 최대한 자연 서식지와 유사성은 높이고 면적 또한 기존의 50배가 넓게 확장되었습니다. 사진 저 멀리 누워있는 늑대 혹시 보이시나요? 좀 더 가까이 동물에게 다가갈 수 있지만, 동물에게도 편안함을 줄 수 있는 공간으로 바뀌어 나가고 있습니다. 주로 갇혀 있는 동물들에게 나타나는 증상으로 같은 장소를 왕복하거나 큰 의미 없는 행동을 반복하는 것을 정형행동이라고 합니다. 스트레스나 심리적 불안이 주요 원인으로 자폐증의 일반적인 증세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철창 때문에 시야를 가려 답답해 보이고, 콘크리트 방을 왔다 갔다 반복하는 곰 대신 서로 장난치며 놀고 있는 곰의 모습. 한결 편안해 보이지 않나요?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 많은 동물원의 스타 사자와 호랑이. 각자의 환경에 맞춰 조성된 공간에서 조금이나마 더 행복하게 생활해 주었으면 합니다. 가벼운 눈인사는 괜찮지만, 유리를 쾅쾅거리거나 큰소리로 동물을 놀라게 하는 행동은 삼가세요. 동물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아닌 동물에게도 인권에 비견되는 생명권을 가지고, 고통을 피하고 학대를 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동물을 전시하고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동물원의 동물들도 좀 더 편안한 환경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조성해나가는 것이 전주 생태동물원 계획입니다. 앞으로는 시베리아 호랑이, 원숭이사도 새로운 환경으로 신축된다고 하는데요. 동물들이 살기 좋은 전주 생태동물원의 앞으로 행보에 많은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 전주동물원 위치ㅣ전주시 덕진구 소리로 68 전주동물원 전화ㅣ063)281-6759 운영시간ㅣ매일 9:00~ 17:00 ※ 동물들의 안정을 위하여 2017년부터 동물원 야간개장은 폐지되었습니다. /글사진=전주시 블로그 기자단 박세연

  • 기획
  • 기고
  • 2019.02.26 18:30

이원택 전북도 정무부지사 “한국지엠 군산공장 해법 찾을 것”

전북도를 떠난지 1년 6개월여 만에 복귀한 이원택 신임 정무부지사. 2017년 8월 2023세계잼버리대회새만금 유치를 확정짓자마자 청와대 균형발전비서관실로 옮겨 새만금개발공사 설립과 재생에너지클러스터 조성 등 지역현안을 푸는데 앞장서다 지난 15일 현장으로 돌아왔다. 그는 임기중에 한국지엠 군산공장 재활용과 새만금개발이 속도를 낼 수 있도록 주춧돌을 놓겠다고 했다. 전북을 좀 더 단단하게 만드는 일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소개했다. △현안이 많습니다. 어떤 각오로 정무부지사 자리에 앉았습니까. 청와대에 있으면서 전북 사업을 다루기도 했고 풀기도 했는데, 도 공직자들이 정부 부처나 청와대, 정치권과의 관계를 제대로 만들지 못한다고 느꼈습니다. 업무적으로는 물론 인간적으로도 가까워져야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물 흘러가듯 협력을 끌어내는 것이 필요한데, 그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제가 어느정도 기여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정무부지사님이 청와대에 계시는 동안 새만금개발공사가 설립됐고, 재생에너지 클러스터 조성과 국제공항 건설 확정 등 굵직한 현안이 해결됐습니다. 그러나 중앙에서는 이들 사업에 대한 반감과 반발도 많았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수도권 중심으로 지역사업을 바라보는 것이 가장 큰 어려움이었습니다. 기금운용본부를 둘러싼 일부 보수언론 보도에서 드러났듯이 지역은 수도권에 비해 경쟁력이 없다는 편견이 강해 정부차원의 의지가 있어도 추진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도민들께 좋은 소식을 전해 굉장히 기뻤습니다. △경제문제와 새만금 개발 등 정무부지사 소관 업무가 산적합니다. 임기중에 반드시 해결하고 싶은 사안은 무엇입니까. 적어도 한국지엠 군산공장 재활용은 어떻게든 풀어보겠다는 각오입니다. 청와대나 산업부와 같이 해법은 찾겠습니다. 또, 속도감있는 새만금개발이 이뤄질 수 있도록 주춧돌을 놓을 생각입니다. 농생명용지 활용계획도 수립해야 합니다. 농생명식품산업 클러스터와 연계하는 비전을 만들어 전북발전을 이끄는 동력이 될 수 있도록 틀을 짜놓고 싶습니다. △한국지엠이 군산공장 매각을 위해 협상중이라는 소식이 들립니다. 정부에서는 상생형 일자리로 군산을 거론하는데요, 어떻게 전망합니까. 군산공장은 투트랙으로 가고 있습니다. 매각과 상생형 일자리 모델을 제시하고 운영하게 하는 방안입니다. 매각이 마무리되면 상생형 일자리와 관련한 사안들이 논의될 것으로 보입니다. 컨소시엄, 단일기업 모두 검토되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자동차업종이 될 것 같습니다. △정부가 언급하는 것처럼 상반기에 전북군산형일자리가 가시화될 것으로 보는지요. 공장 인수 절차와는 별개로 지역에서 미리 준비할 수 있는 것들은 마련해놓을 계획입니다. 상생형 일자리를 위한 로드맵을 만들고, 인센티브 등 지원제도나 노조지역사회와의 협의 등 제반 여건을 갖춰놓는 작업을 진행하려고 합니다. 관심있는 기업들이 오도록 매뉴얼을 갖춰나가겠다는 의미입니다. 잘되면 상반기중 가능하겠지만 하반기에라도 될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현대중공업이 대우조선인수를 추진하겠다고 밝힌 후 노조와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군산조선소 재가동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합니까. 군산조선소는 재가동이 원칙입니다. 이는 일자리와 조선생태계를 유지하려는, 지역균형발전을 위한 당위의 문제입니다. 재가동 시기를 앞당기기 위해 현대중공업은 물론 정부정치권에도 군산조선소에 대한 정책적 배려를 지속적으로 건의하고 있습니다. 현대중공업측과도 충분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신조선박 물량 배정이 어렵다면 선박블록물량 연 20만톤 배정을 요청하고 있는데요, 적절한 시기에 현대중공업과 만날 계획입니다. △속도감 있는 새만금 사업도 강조했습니다. 새만금개발청과 개발공사와의 관계, 어떻게 만들어나갈 계획입니까. 새만금개발공사 조직이 갖춰지면 새만금개발청은 지도감독, 개발공사가 실무를 맡게 됩니다. 새만금 개발이 완료되더라도 공사는 컨텐츠 운영과 유지관리 등 사업시행자로서 활동합니다. 도에서는 새만금사업이 제대로 추진될 수 있도록 이들 기관의 전문성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연대와 협력을 높이는데 노력하겠습니다. △새만금 농생명용지 비전 수립도 임기중에 풀고 싶다고 했습니다. 농생명용지가 중요하다는 의미로 들리는데,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농생명용지는 규모가 광활하기도 하지만 전북의 농생명식품산업의 미래를 설계하는데도 매우 중요합니다. 친환경농업, 첨단농업 등 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는 곳입니다. 농식품 수출전진기지로 활용해야 한다는 생각이고, 공항이나 항만 수요를 일으켜야 한다고 봅니다. 세계적인 농생명산업 클러스터로 조성하고 싶은 바람입니다. △취임하면서 강조한 시군과의 소통, 어떻게 강화할 계획입니까. 전북이 잘 되려면 일의 수행 주체인 시군이 잘돼야 합니다. 도와 시군의 주체가 협업하고 소통하지 않으면 전북이 발전할 수 없습니다. 도가 시군을 지원하는 시스템을 강화하고, 시장군수와 시군의회 의장을 자주 만나겠습니다. 전주시와는 풀어야할 문제가 있으니 방법을 찾겠습니다. ● [이원택 정무부지사는] 세계잼버리 유치새만금개발공사 설립 한 몫 이 정무부지사는 지난 2008년 당시 송하진 전주시장과 인연을 맺었다. 전주시의원으로 활동하다 시장 비서실장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자신을 선택해준 유권자들과의 약속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는 점을 지금까지 마음의 빚으로 안고 있다. 정무부지사 발탁과 동시에 총선 출마설이 나도는 점도 부담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는 출마제의가 많지만 아직 생각하고 있지 않다며, 도정에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참모로서의 역량을 높게 평가받는다. 세계잼버리대회 유치에 큰 역할을 했고, 청와대에 있으면서 중앙에 전북 목소리를 제대로 전달했다. 새만금개발공사 설립과 재생에너지클러스터 조성, 새만금 국제공항 예타면제 등에도 기여했다. 남성고등학교와 전북대를 졸업했으며, 시민운동가로 활동했다. 전주시의원, 전주시장 비서실장, 전북도지사 비서실장, 전북도 대외협력국장, 대통령 비서실 행정관 등을 지냈다.

  • 기획
  • 은수정
  • 2019.02.25 20:16

[전북의 재발견] ‘김제관아와 향교’ 한가한 겨울 여행 중에 만난 소박한 재미

전형적인 조선시대 지방 고을 관청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조선시대 김제군 관아> 김제 시내에는 소박한 볼거리가 있습니다. 조선시대 관아와 향교가 자리하고 있어 다른 볼거리를 구경하기 전에 들러보기로 했습니다. 김제 옛 관아는 조선시대 지방행정의 치소입니다. 현종 8년(1667)에 건립되었고, 그 후 32년 뒤인 숙종 25년(1699)과 숙종 38년(1712)에 중수되었습니다. 도시의 가장 중심에 되는 곳에 동헌과 내아가 보존되어 있어 매우 드문 사례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현재의 김제관아는 동헌과 내아, 피금각이 남아있는데 비교적 온전한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어 당시의 지방행정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답니다. 관아의 입구를 지나 관청 안으로 들아가니 김제군 수령의 공무집행 공간이었던 동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1667년 김제 군수 민도가 처음 세우고 이를 근민헌(近民軒)이라 칭했습니다. 숙종 25년에 동헌을 고쳐 지어 사칠헌(事七軒)으로 개명하였다가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 초까지 김제읍사무소로 사용되었답니다. 동헌에 사용된 부재나 꾸밈 등이 민가의 건축보다 장중하고 장식적인 면모가 많이 보였습니다.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형태로 기둥, 처마, 등 건물의 높은 품격과 관아의 위계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현재의 근민헌이라는 편액은 백성에게 가깝게 있는 관청이란 의미로 사적으로 지정되었을 때(2007년) 기념하여 제작한 것이랍니다. 고을의 수령들이 공적인 업무를 보던 건물인 동헌은 넓은 대청으로 많은 기둥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뒤로 돌아가 보니 아궁이도 있어서 집의 역할도 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동헌 앞마당 왼편에는 피금각이라는 작은 정자가 있습니다. 작지만 화려한 건물로 앞면 3칸, 옆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습니다. 인조 11년(1633)에 송강 정철의 아들 정홍명이 김제 군수로 있을 때 지은 건물이랍니다. 일반적인 정자처럼 넓은 대청마루 대신 1칸짜리 방을 만들었습니다. 피금각의 뜻은 옷깃을 풀어 젖힌다.로 동헌인 근민헌에서 종일 민원 판결에 시달린 군수가 이곳에서 옷을 벗고 쉬었다고 합니다. 정홍명은 업무를 마치면 이곳에서 가야금과 바둑을 즐기고 시책을 읽으며 지냈다고 합니다. 동헌 뒤편으로는 김제내아라는 돌비석이 있습니다. 고을의 수령이 기거하던 살림집을 내아라고 합니다. 외동헌과 내동헌으로 나뉘는데 외동헌은 사무처로 동헌이라 불렀으며 내동헌은 수령의 처소였답니다. 현재는 동쪽이 트인<ㄷ> 자형 안채 건물만 남았지만, 원래는 여러 부속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주춧돌이나 기둥, 처마에 쓰인 목재가 모두 질이 좋고 정성껏 다듬은 티가 났습니다. 안의 아기자기한 마당이 규모가 작게 보이게 했는데 한 바퀴 돌아보니 꽤 규모가 있었습니다. 가운데 마루가 다른 마루보다 한 칸 정도로 높이가 낮았습니다. 마루가 낮은 이유는 내아를 찾아온 사람들이 문턱이 낮아야 편하게 수시로 오간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고 합니다. 백성을 생각하는 목민관의 마음이 살림집에도 느껴져 마음이 숙여 해졌습니다. 동헌과 함께 남아있는 내아로서는 유일한 곳입니다. 내아는 조선시대 일반적인 중. 상류 계층의 주택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합니다. 뒤에 있는 공터는 지금은 텅 비어있지만 넓은 공터에 많은 건물이 있었을 모습을 상상해보았습니다. 김제관아에서 조금 위로 올라가면 김제향교가 있습니다. 조선 태종 4년(1404)에 세워져 정유재란(1597)으로 불탄 것을 인조 13년(1635)에 다시 지어진 것입니다. 그 뒤에도 몇 차례의 수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향교의 정문인 만화루는 2층 누각으로 되어있으며 5간짜리 문루입니다. 유생들이 시회를 열거나 학생들이 자치활동을 하던 공간이었답니다. 외삼문에 해당하는 만화루 오른쪽에는 충효관이 있는데 향교 사무실과 청소년 인성 교육장, 서, 화 지도실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정면으로 보이는 건물은 명륜당으로 옛 강학당입니다. 향교는 요즘으로 보면 지방 거점 국립학교인 셈이니 이곳에서 유교 경전을 공부했을 것입니다. 명륜당 왼쪽에 동제, 오른쪽에 서제가 있는데 옛 학생 기숙사입니다. 동재에는 양반계급이, 서재에는 평민이나 서얼 등이 생활했답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노비, 책 등을 지급받아 운영된 만큼 지역의 인재를 키우는 데 힘 쏟았겠지만, 신분의 차이는 배움은 같이 해도 먹고 자는 것은 같이 할 수 없었나 봅니다. 명륜당을 돌아 돌계단을 오르면 문묘 출입문인 내삼문이 나옵니다. 오른쪽 계단으로만 올라가야 합니다. 정면에 대성전이 있습니다. 대성전에는 5성위(공자, 안자, 증자, 자사자, 맹자)와 송조 4현(주돈이, 정이, 정호, 주희)의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대성전 왼쪽이 동무, 오른쪽에 서무가 있습니다. 동무와 서무는 우리나라 유학자 8현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향교의 목적은 교육에도 있지만, 유교의 성인들에 대한 정기적인 제사를 하여 학생들이 성현들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하고 배우게 하는 데 있었습니다. 대성전 앞에서 내려다본 마을이 아기자기해 보입니다. 현재 김제향교는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전통문화와 학문을 가르치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하니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의 역할을 현재도 하는 셈입니다. 향교에는 많은 학생이 드나들었던 만큼 상가도 번성하였을 거고 마을도 번화한 편이었을 것입니다. 지방 수령의 업무 중의 하나가 향교를 관리하고 지원하는 일이었다고 하니 향교와 김제관아가 가까이에 있었던 것은 당연했을 것입니다. 김제관아와 향교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지방 고을 관청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던 곳으로 한가로운 겨울 여행에 만난 소박한 재미였습니다. <동헌과 내아> 주소ㅣ김제시 동헌4길 46-1 문의ㅣ063) 543-3179 <김제향교> 주소ㅣ김제시 향교길 89-3 문의ㅣ063) 547-6477 /글사진=전라북도 블로그 기자단 이난희

  • 기획
  • 기고
  • 2019.02.25 13:43

[한바탕 전주 즐기기] '드론축구 상설체험장' 전주에서 즐기는 이색 스포츠

어느 마법 영화에서 선수들이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휙휙 날아다니며 총알처럼 빠른 공을 요리조리 다루어 골인시키는 장면, 혹시 그려지시나요? 이 신나는 장면은 몇 년 전 전주시의 한 드론 연구원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었나 봅니다. 드론이 공이라면 우리도 그렇게 날아다니는 축구를 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발상에서 탄생했다는 드론축구. 지금은 스포츠와 ICT(정보통신기술)를 융합한 신개념 레포츠로 알려지면서 전국에 그 동호인 수가 늘어나고 있다는데요. 오늘은 드론축구와 함께 이 스포츠를 직접 느낄 수 있는 장소인 드론축구 상설체험장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2016년 전주에서 세계최초로 탄생한 드론축구는 시와 협력 기관인 캠틱종합기술원이 개발하여 보급 중인 융합ICT콘텐츠입니다. 전주시는 드론축구 산업을 키워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고자 하는데요. 2018년에는 제1회 대한민국 지방정부 일자리 정책 박람회에서 전주시 드론축구가 일자리 창출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아 문화체육부장관상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2017년에는 전주시 드론축구단이 발족식을 했고, 그 뒤 약 2년 만에 전국에는 100개가 넘는 드론축구팀이 만들어졌습니다. 물론 전국대회도 있답니다. 2017년 제1회 전주시장배 드론축구대회가 열려 전주시 드론축구단을 비롯하여 국내 지자체 선수단과 전국 동호회 등 총 19개 팀이 참가하였다는군요. 이 대회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개최 예정이랍니다. 드론 축구의 대중화를 위한 협회 설립도 추진되었습니다. 그 결과 2018년 11월, 전국조직인 대한드론축구협회가 사단법인으로 공식 출범하였습니다. 또한 드론축구의 메카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는 전주시는 2025년에 드론축구 세계월드컵 대회를 개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답니다. 드론축구란, 드론볼(드론에 축구공모양의 보호프레임을 씌운 형태)을 하늘에 띄워 공중에 매달린 원형링에 골을 통과시키면 점수를 얻는 경기입니다. 대한드론축구협회에서 만든 드론축구규정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선수단의 수는 10명 이하로 하며, 양 팀 각각 5명 이하의 선수와 5개 이하의 드론볼들이 동시에 떠올라 경기를 펼칩니다. 팀 구성은 골잡이 1명, 길잡이와 길막이를 합해 4명으로 구성되어야 하며, 각 팀원 중 골잡이 역할을 하는 드론볼이 성공한 득점만 인정된다고 합니다. 경기장은 가로 14~20m, 세로 7~10m, 높이 4~5m의 직육면체 모양이고, 선수들은 경기장 밖에서 드론볼 조종기를 작동하여 경기에 참여합니다. 드론볼의 지름은 약 40cm, 무게는 1kg 이하여야 합니다. 골의 모양은 원형인데 드론볼이 통과하는 구멍의 지름은 60cm(테두리를 포함한 전체 지름은 80cm)입니다. 그리고 골은 3~3.5m 높이의 공중에 매달려 있습니다. 드론축구가 가능한 것은, 어떠한 충격에도 쉽게 부서지지 않고 잘 견디는 아주 강한 보호 프레임이 드론을 감싸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는데요.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드론볼은 크게, 회전날개가 4개인 드론과 그것을 바깥에서 둘러싸고 있는 공 모양의 골격으로 이루어집니다. 보호 프레임의 재료는 전주시 업체에서 만든 특별한 탄소복합소재와 카본인데요. 이것으로 제조된 5각형 또는 6각형의 골격들을 여러 개 이어 붙으면 축구공 모양이 됩니다. 여기에 LED 기술로 여러 가지 색깔의 빛을 내고 효과음이 더해져 플레이하는 각 드론볼의 개성이 살아납니다. 첨단소재인 탄소와 드론기술이 융합된 모든 제작과정은 전주지역에서 진행됩니다. 전주첨단벤처단지의 캠틱종합기술원이 설계와 연구를, 지역 5개 관련 기업체가 제조 생산을, 지역 유통 업체가 전국 드론매장과 온라인 판매를 맡고 있답니다. 드론축구 선수들의 주요 활동 장소인 체험장은 동시에 드론축구에 관심 있고 이것을 건강하게 즐기고 싶은 누구에게나 활짝 열린 장소입니다. 평소 이곳에서는 동호인들과 축구선수단 선수, 그리고 입단을 희망하는 예비선수들이 경기 연습을 합니다. 연습뿐만 아니라 자신의 장비를 직접 조립하고 수선도 하며, 여기에 필요한 교육까지 받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체험장은 드론과 관련된 교류 장소와 공방 역할을 동시에 한다고 하는데요. 지금부터는 드론축구 상설체험장 이용방법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드론축구 상설체험장의 위치와 운영 시간은 다음과 같습니다. 위치ㅣ전주시 덕진구 기린대로 1055(전주월드컵종합경기장 내 남문 쪽에 있습니다.) 전화ㅣ063-211-0437 운영시간ㅣ화~ 토(10:00~17:0), 휴무(일,월), 점심시간(12:00~13:00) 1) 예약하기 단체가 이용하고자 할 경우엔 사전 예약이 필요하며, 개인인 경우 예약 없이도 사용할 수 있지만, 방문 전 미리 전화하여 확인해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안내전화 063-211-0437, 대한드론축구협회 063-219-0437). 2) 방명록 작성 입구에서 방명록을 작성하고 안내를 받습니다. 3) 드론 시뮬레이션 연습 드론 조종 경험이 전혀 없는 경우, 바로 드론축구를 체험하기에 앞서, 드론 시뮬레이션 존에서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먼저 연습하도록 도움받습니다. 총 10단계까지 있는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으로 드론 작동법을 충분히 익혀야 실제 드론볼을 조작할 수 있다고 하는데요, 만약 드론 조종 경험이 있는 경우라면 진도가 조금 더 빠르겠죠. 기자가 처음 방문한 날, 청소년체험활동에서 드론 조종을 배우던 중학생 5명이 인솔자와 함께 와서 자체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었습니다. 학생들은 이미 드론을 다룬 경험이 있어서인지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금방 끝내고 실제 드론볼 체험 단계로 넘어가더군요. 4) 드론축구경기장 가로 14~20m, 세로 7~10m, 높이 4~5m의 직육면체 모양의 경기장입니다. 한 팀에 최대 5명씩 총 10명의 선수가 이용할 수 있습니다. 5) 유소년 드론축구 경기장 유소년 드론축구는 초등학생이 하는 경기로서, 소형 드론볼을 이용합니다. 전주시는 유소년용 소형 드론볼도 개발해 보급하고 있는데요. 2018년 캠틱종합기술원과 공동 제작하여 선보였습니다. 시는 소형 드론볼을 활용하여 전국 학교 체험학습 프로그램과 자유학기제에서 드론축구가 더욱 널리 보급되기를 기대한다고 합니다. 일반 드론볼은 지름 40cm, 무게 1kg, 가격 50~60만 원인데 비해, 소형 드론볼은 지름 20cm, 무게 100g(배터리 포함), 가격 10만 원대로 규격을 줄인 상품으로 비행시간도 기존 3분에서 6분으로 2배 늘려 가성비가 좋아진 상품입니다. 관계자의 설명에 따르면, 무엇보다 가장 큰 장점은 일반 드론볼에 비해 더욱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6) 장애물 경기장(드론축구 레이싱 존) 이곳은 축구경기가 아니라 레이싱 연습을 할 수 있는 시설입니다. 소형 드론볼을 이용합니다. 드론볼이 길게 늘어선 링 모양의 장애물을 모두 통과하는데 걸린 시간(랩 타임)을 측정하여 순위를 결정합니다. 축구경기가 아니어도 혼자 드론 연습을 하기에 좋은 장소인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드론축구상설 체험장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드론축구체험장 관계자 캠틱 윤태휘 선임 연구원은 드론축구를 배운다는 것은 드론을 띄우는 기술만이 아니라 그 원리를 교육받고 장비를 직접 다루는 공부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단순 놀이 이상의 의미 있는 과정입니다라고 이야기했는데요. 실제 선수를 희망하여 드론축구를 연습하고 있던 학생들은 다소 복잡해 보이는 드론을 스스로 관리하고 능숙하게 다루고 있었습니다. 전주 월드컵경기장의 시원하게 트인 공간 속에 있는 드론축구상설 체험장. 드론축구를 배우고 싶은 분은 물론이고, 드론 연습을 하고 싶은 분에게도 참 유익한 장소로 보이는데요. 그동안 드론에 대해 관심이 있었다거나 혹은 새로운 이색 스포츠를 찾고 계신 분들은 이번 주말을 이용하여 드론축구상설 체험장에서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유익한 드론축구를 즐겨보시길 추천해드립니다. /글사진=전주시 블로그 기자단 김애지

  • 기획
  • 기고
  • 2019.02.22 15:50

[전북의 재발견] 레트로 감성 충전 '전주 추억의 박물관'

시간아! 멈춰라! 그때 그 시절로의 회귀 요즘 인터넷에 많이 보이는 단어가 있습니다. 레트로 갬성(감성)! 과거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복고를 뜻하는데요. 드라마<응답하라>시리즈에서 본 것처럼 삐삐, 마다고치, PC통신, 이스트백, 더블코트 등 당시 사용했던 물건들은 보기만 해도 그 때 그 시절의 내가 떠올려 집니다. 추억의 박물관은 전북투어패스 자유이용시설로 전북투어패스를 이곳에서 바로 구입하실 수도 있는데요. 추억의 박물관 입장료 3,000원, 한옥마을권이 4,200원이니까, 전주한옥마을 관람을 효율적으로 즐기시려면 전북투어패스를 구입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2월 28일까지 전북투어패스 2주년 기념으로 1+1이벤트 진행중이여서 친구와 함께라면 더욱 저렴해 지니까 말이죠. 추억의 박물관에 들어서자, 1970년대 유행한 못난이 삼형제 인형, 하루 종일 오려야 예쁜 옷을 입혀 볼 수 있는 여자 어린이들의 필수 장난감 종이인형, 남자 어린이들이 많이 가지고 놀던 동그란 딱지 까지 보기만 해도 미소 지어지는 추억의 장난감들이 가득합니다. 빼곡하게 놓여있는 그때 그 시절의 물건들, 그때의 나로 돌아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데요. 추억에 빠져 있다 보면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움직이게 되어 시간가는 줄 모를 정도로 재미있습니다. 세발자전거, 회전목마도 없는 집이 없을 정도로 대중적인 어린이 놀이 수단이였는데 말이죠. 낙서 가득한 녹색 책상, 삐걱거리는 나무 의자, 네모난 책가방은 그 때의 교실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풍경입니다. 지금은 통합교과가 된 교과서 속 산수, 셈본 등의 책은 빛바랜 종이의 흔적만큼이나 세월의 흐름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기억나시나요? 집집마다 구입했던 주황색 두꺼운 표지의 동화책 전집. 다 읽은 사람이 몇 사람쯤 될까? 궁금해지는 그 시절의 책들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지금 다시 해 봐도 재미있는 다이아몬드 게임, 탈탈탈~ 소리나는 선풍기, 믹서기와 보온병, 양은 냄비,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휴대폰까지, 감성 충만해지는 소품들도 있습니다. 한 입 먹으면 입안에서 톡톡 튀는 과자부터 열심히 빨아먹어야 했던 아폴로, 고소한 맛 꾀돌이 쫀드기, 달달한 보석반지사탕 등 학교 앞에서 팔던 추억의 과자도 만날 수 있는데요. 그 때의 맛이 그리워지신다면 구입해서 먹어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2019년에 떠나는 레트로 감성여행, 그 때 그 시절의 나로 되돌아 가보는 시간을 갖게 해주는 추억의 박물관은 루이엘 모자박물관 1층에 있어 찾아가기도 쉬우니까요. 전주한옥마을에 가시면 꼭 방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 전주 추억의 박물관 주소 전북 전주시 완산구 전동성당길 8 전화번호 063-283-5454 관람시간 10:00-19:00 관람료 3,000원(모자박물관, 추억의 박물관 통합 입장권) /글사진=전라북도 블로그 기자단 권현아

  • 기획
  • 기고
  • 2019.02.22 14:40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51. 과거 시험의 풍경과 향교

최근 스카이 캐슬이란 드라마가 화제였다. 그 흥행의 가장 큰 이유는 현실적인 입시문제를 다룬 점에 있다. 입시나 교육열에 관한 것은 과거제도 하에 시험을 치르며 선조들도 겪었던 문제로 예나 지금이나 관심의 대상이다. 과거급제야말로 출세의 길이라 여기며 주경야독으로 공부를 했을 모습과 좋은 학교와 스승으로부터 배움을 받기 위해 제자로 들어가 노력했던 것은 드라마 속의 내용과 다른 듯 닮아있다. 조선 시대의 그림 <소과응시(小科應試)>와 김홍도의 <공원춘효도(貢院春曉圖)>란 작품에는 과거 시험장의 모습이 담겨 있다. 김홍도의 그림은 과거 시험을 치르기 직전 새벽부터 모여든 풍경을 그린 것이다. 스승 강세황이 봄날 새벽의 과거시험장 수많은 사람들이 과거 치르는 열기가 무르익어, 어떤 이는 종이를 펼쳐 붓을 휘두르며, 어떤 이는 서로 만나 짝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어떤 이는 행담에 기대어 피곤하여 졸고 있는데 등촉은 눈부시게 빛나고 사람들은 왁자지껄하다...반평생 넘게 이러한 곤란함을 겪어본 자가 이 그림을 대한다면 자신도 모르게 코끝이 시큰해질 것이다란 글을 더했는데 이를 통해서도 응시생의 어려움을 가늠해보고 과거 시험장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과거 시험장은 자리 선점이 중요한 것으로, 전날 밤에 시험장의 문이 열리면 선접군(先接軍)이라는 재빠르고 힘센 사람을 앞세워 좋은 자리를 다투어 선점했다. 그 모습은 조선 풍물 가사인 <한양가>에 건장한 선접군이...각색 글자표를 하여 등(燈)을 보고 모여 섰다 / 밤중에 문을 여니 각색 등이 들어 온다 / 줄불이 펼쳤는 듯 새벽 별이 흐르는 듯 기세는 백전(白戰)일세 빠르기도 살 같도다라는 대목으로 나온다. 그림에서 보이듯이 큰 양산인 일산(日傘)을 천막처럼 펴고 응시생을 중심으로 선접군과 시험을 도와주는 사람들과 심부름을 하는 노비가 접(接)이라는 한 팀이 되어 자리를 잡는다. 워낙 많은 응시생이 몰리는지라 시험문제를 빨리 보고 제출하는 응시생들이 합격에 유리했다. 그 때문에 자리다툼이 심해 무질서했고 사람들이 몰려 8명이 압사했다는 숙종 때 기록도 전해진다. 흔히들 엉망진창 뒤죽박죽일 때 난장판이란 말을 쓰는데, 이는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뒤엉켜 싸움판이 벌어지고 더러는 부정행위도 했던 난리 속의 과거 시험장에서 유래했다. 조선 시대 과거 시험의 결과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합격자의 평균 연령은 대략 30세이고 최연소 합격생은 13세, 최고령 합격생은 85세였다. 늦은 나이라도 뜻한 바를 이루고자 평생을 바쳐 과거 시험에 매달려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과거 시험에 관한 이야기는 <춘향전>의 주된 내용이기도 하다. 과거를 보기 위해 춘향이와 남원 오리정(五里停)에서 애달프게 이별하고 한양으로 가 장원 급제를 한 이몽룡이 춘향이를 다시 만나는 내용에서도 당시 과거제도에 대한 경쟁과 시험 합격 후 갖는 위력을 엿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치열한 경쟁을 치르고 과거 시험에 합격한 사람과 가문은 그야말로 고을의 자랑이었다. 순창 구미마을 남원양씨 종중에서 600년 동안 보관해오다 국립전주박물관에 기탁한 과거 합격증 홍패는 보물 제725호 이다. 고려 공민왕 4년(1355) 양이시가 과거에 합격해서 받은 홍패와 아들 양수생이 우왕 2년(1376년)에 받은 홍패로 다른 합격증과 교지 5매로 구성된 『남원양씨 종중 문서 일괄』에 포함되어 있다. 두 장의 홍패가 보물이 된 이유는 교지라 쓰인 조선 시대 합격증서와 달리 왕명이라 기록되었고 고려왕의 어보가 찍힌 점이 특별하기 때문이다. 그 합격증을 받기까지 주경야독하며 공부했을 선조들의 총총한 눈매와 글을 읽는 낭랑한 음성까지 가문의 영광이었을 것이다. 선조들이 공부했던 학교는 삼국시대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 시대 고등교육 기관이었던 성균관과 중등교육 기관으로 4학(四學)과 지방향교가 관학으로 있었고, 사립 중등교육 기관인 서원과 초등교육을 담당했던 서당이 있었다. 향교의 학생을 교생이라고 칭했는데 재학하는 동안 국역이 면제되는 특권을 지녔다. 교생은 각 군현에 따라 정원이 달랐으며 일정 교육을 받게 되면 초시(初試)인 생원진사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합격 후엔 성균관 입학을 허용했으며 대과인 문과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그리고 왕의 방문이 있을 시에 특별하게 치른 지역균형 선발제 격인 외방별시가 있었는데 우리 지역엔 전주별시가 있었다. 특정 지역민을 위한 응시이다 보니 해당 지역에 일정기간 거주를 하고 향교나 서원에 적을 두어야 응시할 수 있었다. 지방 인재양성의 요람인 향교는 교육공간과 배향공간으로 구성되어 공자를 비롯한 선현들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교육을 담당했다. 이에 따라 향교는 지역의 백성을 교화하고 유학의 소양을 지닌 관리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을 지녔다. 세종 시기 지리지를 살펴보면 당시 329개의 향교가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1407년 장수에 창건되어 본 모습이 잘 남겨진 장수향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향교는 임진왜란 등 풍파를 겪으며 훼손된 것을 조선 후기에 중건했다. 이후 갑오개혁(1894년) 때 학제 개편을 하며 교육을 기능을 상실했고, 현재 서울에는 성균관과 양천향교 1개, 전북 26개, 전남 28개, 경북 40개 등 남한에서만 234개의 향교가 전해지고 있다. 고려 때부터 이어온 우리 지역의 향교로는 고려 공민왕 때 학당사였다가 1512년에 개명한 고창향교와 고려 말 건립된 익산의 용안향교와 정읍의 고부향교 그리고 전라도의 수도향교로 칭해진 전주향교가 있다. 전주향교는 초기 경기전 근처에 건립되었다. 그러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하는 경기전이 세워졌는데 향교로부터 들리는 교생들의 소리가 소란하다 하여 1401년 전주성 서쪽에 향교를 이건 하였다가 1603년 현 위치인 완산구 교동에 자리 잡고 중수와 보수를 거듭했다. 향교의 주요공간인 명륜당의 명륜(明倫)은 『맹자』의 등문공편에 학교를 세워 교육을 행하는 것은 모두 인륜을 밝히는 것에서 유래했다. 지역사회를 밝혔던 향교는 교육기관으로 사회 교화의 기능은 물론, 지역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건축학적으로도 품은 가치가 높다. 입학과 새 학기가 다가오는 즈음 겨울의 정취가 어우러지는 향교를 찾아 그 가치를 살펴보고 선조들이 배움에 열과 성을 다했던 공간에서 힘을 받는 것도 좋으리라.

  • 기획
  • 기고
  • 2019.02.21 20:31

[전북 대표 독립운동가 10인] "대한독립만세!" 목숨이 다하는 순간에도 뜨거운 외침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주기 위해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소. (독립운동가 손병희) 1919년 3월 1일 손병희 등 민족대표 33인은 서울 태화관에서 독립만세를 삼창함으로써 3.1독립만세운동의 불을 지폈다.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국내 뿐 아니라 대외적으로 알린 만세운동은 전국 주요 도시로 확산됐다. 3.1운동의 마중물로 재부각되는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로 꼽히는 전북 곳곳에서 일제에 맞서는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이에 전북일보는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광복회 전북지부와 함께 매주 한 차례에 걸쳐 도내 만세운동 근원지를 조명하고, 해당 자치단체의 기념사업 및 사적지 정비 계획을 소개한다. 그 첫 순서로 도내 만세운동을 주도한 대표 독립운동가 10인의 행적을 되짚어 봤다. △3.1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박준승 임실 출신인 박준승(1866~1927년) 선생은 3.1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손병희 등과 함께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삼창을 외쳤다. 1890년 동학에 입교한 그는 1892년 삼례에서 있었던 교조신원운동과 이듬해 김제 원평에서 열린 척왜양창의 운동을 위한 대집회에 참여하면서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1903년 손병희의 일본 망명 후 전라도 책임을 맡아 박인호와 항일을 위한 포교에 매진했다. 3.1운동으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후에는 1926년 천도교 최고 예우직인 종법사에 추대됐다. △민족대표로 한국 불교 수호에 앞장선 백용성 백용성(장수1864~1940) 선생은 31독립만세운동의 민족 대표이자 어려운 불교 경전의 한글화를 처음으로 시도한 경전 번역인이었다. 31운동 당시 백용성은 한용운의 추천으로 민족 대표 33인이 됐다. 1919년 3월 1일에 백용성을 포함한 민족 대표들은 서울 종로의 태화관에서 민족 독립을 절규하는 만세삼창을 했다. 이 일로 구금돼 고초를 겪고 1921년 3월에 석방된 백용성이 제일 먼저 한 일은 <금강경>을 순 한글로 번역간행하는 일이었다. 이후 삼장역회를 설립해 수많은 경전을 한글로 번역간행했다. 1928년에 한글로 된 <화엄경>을 간행하는 기념비적인 일을 해냈다. △3.1운동의 정신적 지주 문용기 익산 출신인 문용기 선생(1878-1919)은 1919년 4월 4일 익산 장날에 일어난 31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박도현장경춘 등 기독교 계통의 인사들과 만나 31운동 계획을 세우고 장날을 맞아 300여 군중과 함께 거리를 행진했다. 일제가 시위 군중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하자 문용기는 군중 앞으로 나가 독립운동의 정당성과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연설을 했다. 이때 장에 나왔던 많은 장꾼이 그의 탁월한 연설에 이끌려 시위에 참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헌병이 휘두른 총검에 찔려 두 팔을 잃고 온몸이 난자당한 채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에도 그는 계속해서 독립 만세를 부르짖다가 순국했다. △자유를 꿈꾼 독립운동가 백정기 이봉창윤봉길과 함께 3의사로 불리는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인 백정기(부안1896~1934)는 국외에서 활발히 독립운동을 펼쳤다. 1923년 여름 일본 도쿄 조천 수력 발전소 공사장 노동자로 신분을 위장해 일왕 암살을 계획했다가 동경 대지진으로 실패하자 피난민 대열에 섞여 1924년 4월에 귀환했다. 같은 해 상하이로 넘어가 이회영, 정현섭, 유자명, 이을규, 이정규 등과 함께 재중국 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했다. 1932년 상하이에서 자유혁명자연맹을 조직한 다음 흑색공포단으로 이름을 바꾸고 조직을 강화해 대일투쟁을 전개했다 △독립에 향한 멈추지 않는 열정과 헌신을 보여준 정현섭 김제에서 태어난 정현섭(1896~1981) 선생은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으며 7월 미국의회사절단이 내한했을 당시 일본의 침략상을 알리는 활동을 하다가 일제의 추격을 받자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1930년에 남화한인청년연맹을 조직하는 동시에 백범 김구와 함께 서간단을 결성했다. 당시 서간단은 친일파 숙청을 감행하는 등 본격적인 무력 항쟁을 도모했다. 1931년 1월에는 각국의 무정부주의자들을 구성원으로 흑생공포단(BTP)을 조직해 일본 영사관과 병영에 폭탄을 던지는 등 무력 항쟁을 이어갔다.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참된 지성인 라용균 1918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재학 중이던 라용균(정읍1895~1984) 선생은 백관수, 김도연 등과 함께 대대적인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할 계획을 세우고 2.8 독립 선언에 나섰다. 2.8 독립 선언에서 재정 분야의 책임자였던 그는 거사 뒤 관련자가 체포되자 신변에 위협을 느껴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후 상하이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임돼 법제위원과 정무조사 특별위원 및 정치분과 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입법 활동과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국회에서는 백봉 라용균의 뜻을 기리기 위해 1999년부터 백봉 신사상을 제정해 매년 모범적인 의정 활동을 한 국회의원에게 이 상을 수여하고 있다. △민족의식의 계몽가 김승옥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더는 글방에서 책을 볼 수 없었던 김승옥(고창1889~1962)은 1916년 1월 은규선, 신기업 등 동지 혈서 동맹을 함께 주도한 이들과 고창청년회와 야학회를 조직해 민족의식을 키워 나갔다. 1919년 2월에 그는 고창청년회 동료들과 함께 고창 장날을 기해 만세 운동을 벌일 것을 계획했고 3월 21일 오전 11시 고창청년회 회원 및 학생 100여 명과 함께 태극기를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이후에도 고창청년회의 회장, 고창노동회 회장 및 노동학원장을 맡아 고창지역의 청년노동운동을 주도하는 등 민족사상의 고취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독립을 위한 투철한 희생정신 임규 익산 출신인 임규(1867-1948) 선생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에 가담했다. 이후 그는 1895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게이오 의숙중학교 특별과와 게이오 전수학교 경제과에서 학문을 길렀다. 그는 1919년에 최남선, 최린, 현상윤 등과 함께 3.1운동을 계획하고 독립선언서를 작성해 거사일 직전 일본으로 건너가 번역한 독립선언서와 통고문 등을 일본 정계와 학계, 언론계에 각각 배포했다. 1920년대 초에 보천교의 경성진정원 형평사장을 지내면서 보천교로부터 받은 5만 원을 라용균을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민족독립운동에 헌신한 목회자 김인전 김인전(1876-1923) 선생은 교회의 부흥을 위해 노력한 목사이자 교육 계몽운동가로 전주 3.1독립만세운동을 적극 후원했다. 전주의 3.1독립만세운동은 기독교와 천도교를 중심으로 진행됐는데, 그는 천도교 측과 연락해 만세운동에 참여할 교사와 학생들을 모아 3월 13일 정오 남문시장 광장을 중심으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3.1독립만세운동의 배후자로 체포될 상황이 되자 그는 상해로 망명해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이후 임시정부 의정원의 재무예산위원, 정무조사위원 등을 거쳐 1922년에 제4대 의정원 의장으로 선출됐다. △임실 오수 독립만세운동의 지도자 이기송 이기송(1888~1939) 선생은 1919년 3월 23일 임실 둔남면 오수리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당시 오수리에서는 이미 3월 10일에 보통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돼 임실군 내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그러나 일본인 교장의 압력으로 더 이상 학생들의 만세운동이 일어나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이기송은 오병용이만의 등과 연락해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이날 장터에 모인 군중 앞에서 독립운동의 당위성에 대해 호소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 기획
  • 최명국
  • 2019.02.20 21:25

[카드뉴스] 탄력근로 단위기간 확대

  • 기획
  • 전북일보
  • 2019.02.20 21:21

19일 취임한 김동원 전북대 총장 “아시아 중심 교류 강화·인재 유치로 대학 내실화”

김동원 전북대학교 신임 총장에게 대학 운영 핵심 가치를 묻자 오래된 미래를 언급했다. 환경운동가인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저서 <오래된 미래>에서 가져온 단어다. 난개발이 아닌 모두에게도 가능하고 앞으로도 지속될 수 있는 미래. 김 총장이 목표로 하는 대학 운영 방향과도 맞닿아 있다. 새로운 것만 취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인재와 자원을 토대로 알찬 대학을 구성해 세계로 나아가 따뜻한 동행을 하는 것이다. 19일 취임식을 가진 김동원 제18대 전북대 총장으로부터 구체적인 대학 운영방향을 들어봤다. - 취임 후 가장 먼저 조직개편을 했는데, 방향성이 궁금합니다. 조직개편은 분권과 내실화에 중점을 뒀습니다. 본부 조직을 축소하고, 시대 흐름과 구성원 요구에 맞춰 일부 조직을 폐지, 변경, 신설했습니다. 기존의 소통복지본부와 한스타일캠퍼스조성본부를 폐지하고, 옛 큰사람교육개발원을 혁신교육개발원으로 명칭을 바꿔 부속시설로 변경했습니다. 특히 연구 분야를 강화하기 위해 연구부총장을 신설했고 대학원 기능 강화를 위해 대학원 교학부도 새로 만들었습니다. 기존 교육부총장과 대외협력부총장에 연구부총장을 신설해 부총장을 세 분으로 늘렸습니다. 정보화시스템 개선을 위해 스마트정보화추진단과 대학혁신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혁신지원사업추진단도 신설합니다. - 현재 전북대 상황을 어떻게 진단하십니까. 매우 큰 위기입니다. 학령인구 급감이 몰고 온 대학 구조개혁, 재정 악화 등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2013년 이후 실시한 대학구조개혁과 대학특성화사업을 통해 약 5만6000 명의 대학 입학정원을 줄였습니다. 이러한 정원 감축은 대부분 지역 대학에서 이뤄진 것이어서 위기감이 더합니다. 이는 결국 지역 대학들에게 재정적 부담뿐만 아니라, 우수 학생들을 수도권으로 내보내는 이중의 고통을 안겨줬습니다. 이대로 가면 지역 중소대학뿐만 아니라 거점대학까지도 주저앉을 수 있다는 우려가 큽니다.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방안이 있습니까. 아시아 지역 대학을 중심으로 한 국제교류 활성화입니다. 아시아대학 교육연합체(가칭)을 구성해 학생과 교수들의 정기적인 상호 교류를 크게 늘릴 예정입니다. 일본중국과의 부분적인 학생 교류로는 앞으로의 수요를 맞출 수 없습니다. 동남아시아를 주목하고자 합니다. 이미 한국의 많은 기업들이 생산기지를 중국에서 베트남,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지로 옮기고 있고, 이에 발맞춰 아세안 국가들은 한국의 진출과 협력을 더 적극적으로 원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지난해 신남방정책을 선언한 것과 정치권에서 지역균형발전의 주요 수단으로 거점국립대 육성을 강조하고 있는 점도 분명한 호재입니다. 지역거점대학에 우수한 외국인 학생과 교수가 몰려오면, 우수한 국내 학생들의 지역대학 입학에도 청신호가 켜질 것이라고 봅니다. -우수 학생 유치도 강조하셨는데요. 앞서 언급한 아시아 대학 교육연합체 전략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인재들이 지역의 대학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 선행 과제입니다. 우수한 학생들이 지역을 외면하고 수도권으로 지속적으로 이탈하는 상황을 감안하면 이들의 물꼬를 돌리기 위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HS(Honor Student)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합니다. 우수 학생 유치를 위해 입학에서부터 학부, 대학원, 취업이라는 일련의 체계를 총괄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겁니다. 학생들에게 융복합이 살아 있는 교양교육과 내실 있는 전공교육을 시키고, 이들을 대학원에 진학시키거나 우수한 기업에 취업시킨다면 지역은 물론 국가 발전까지 견인할 수 있는 밑바탕이 갖춰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우수 학생을 어떻게 유치할 계획입니까. 지역대학의 인력양성 프로그램에 대기업을 파트너로 공동 참여시킬 계획입니다. 예를 들면, 현대자동차가 지역 대학의 부지 안에 자동차융합교육관(가칭)을 설치하고, 특화된 교육과 연구를 대학과 공동으로 실시하는 방식입니다. 자율주행, 빅데이터 분석, 스마트센터, 차세대 에너지 등과 관련한 학부 특화 교육과정, 실무 석박사과정 등을 개설하면 지역과 전국에서 재능있는 인재들이 몰려들 것으로 기대합니다. 지역의 WC기업 혹은 강소기업이 함께 참여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참여 기업은 기업의 유보금을 전문 인력양성과 지역 인재 양성을 위해 기부하는 것이죠. 물론 국가와 지방정부의 세제지원과 재정지원 사업을 통한 교육, 연구 프로그램 지원도 당연히 뒤따라야 합니다. -학생 교육부분에서는 교양 과목 내실화와 고전읽기 인증제를 강조하셨습니다. 융복합 학문이 대세인만큼 교양교육도 흐름을 따라가야 합니다. 기존의 큰사람교육개발원을 개편한 교양학부대학을 설치하고, 이공계열과 인문사회계열을 넘나드는 학문계열 간 교차 교양교육 등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고전읽기 인증제는 미국 시카고 대학의 시카고 플랜을 도입한 것인데, 학생들에게 기본적인 소양을 갖출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인문사회계열은 50권 이상, 이공계열은 25권 이상의 고전을 읽고 인증을 받을 수 있도록 할 예정입니다. - 포부 한말씀 해주신다면요. 전북대 발전을 염원하는 모든 분들과 만나 격의 없는 대화와 교감을 나누며, 구성원 모두가 행복한 전북대를 만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겠습니다. 연구와 교육이라는 대학 본연의 역할과 임무에 충실하고, 질적인 성장과 권한의 분권을 통해 다양성이 살아 있는 전북대를 만드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자 합니다. 획기적인 변혁보다는 점층적인 변화를 지향하고, 외형에 집중하기보다 내실에 충실하겠습니다. ● 김동원 총장은 분권과 공감융합 중시 광주광역시 출신인 김동원 전북대 총장은 광주일고와 서울대 산업공학과를 졸업하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석사, 일본 홋카이도 대학서 공학박사 학위를 각각 취득했다. 1988년 전북대에 임용돼 산업공학과 학과장과 공과대학 학장, 산학협력단장, 산업기술대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또 전북지역 산학협력단협의회장, 전국거점국립대학 산학협력단협의회 부회장, 대한산업공학회 호남지회장 등을 지냈다. 현재 전북자동차기술원 선임이사와 교육부 인정기관심의원회 위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주요 연구분야는 CAD/CAM/PLM, 지능생산시스템, 반도체 생산 및 일정계획, 기술경영 및 연구관리 등이다. 전북대 산학협력단 등을 이끌며 융합혁신을 중요하게 여겨온 김 총장은 대학을 이끄는 3가지 핵심 가치로 분권과 공감, 융합을 강조했다.

  • 기획
  • 김보현
  • 2019.02.19 20:27

[전북의 재발견] 전주 자만벽화마을 '한옥마을과 함께 둘러보기 좋은 곳'

한옥마을과 함께 전주 대표 관광명소 전주를 여행 와서 한옥마을만 둘러보셨다고요? 한옥마을 인근에 있어 한옥마을을 들르신 뒤 돌아보면 좋은 곳 바로 자만 벽화마을한옥마을과 더불어 전주 관광 명소로 꼽히는 곳 중 한 곳인 자만 벽화마을로 여행 가보실까요? 풍남문에서 출발해 한옥마을의 큰길인 태조로를 따라 오목대 방향으로 걸으며 전동성당, 경기전, 공예품전시관을 둘러보고 태조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오목대로 올라갑니다. 공예품 전시관이 있는 곳에서 올라가는 것보다 훨씬 수월하게 올라갈 수 있습니다. 오목대에서 내려오면 이렇게 자만 벽화마을과 이어지는 오목교가 보입니다.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가면 입구에 놀다 가는 곳이라는 카페가 알록달록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는데요. 이곳이 벽화마을의 시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놀다 가고 싶지만, 출발지인지라 우선 마을 구경부터 하려고 언덕을 올라갑니다. 언덕에 올라서면 마을 입구에 종합안내 표지가 세워져 있습니다. 여럿이 같이 다니다 보면 자세히 읽어보고 다니는 게 쉽지 않은데 혼자 나섰더니 차분하게 다 읽어보게 되더군요. 이렇게 마을 소개를 먼저 읽어보면 내가 이 마을을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돌아봐야 할지 그림이 그려지고 착한 소비도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이 마을이 처음이 아닌데도 안내표지를 꼼꼼히 읽어보며 아래에 깨알 소개한 마을 가게 중 어느 곳을 들어가 볼까도 생각하고 출발합니다. 방문자들에게 있어 마을의 첫인상이자 종합안내도인 이 간판은 다시 정비를 좀 하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다 돌아보고 나중에 알았는데 아래 소개한 가게 중 문을 닫고 영업을 하지 않는 곳도 있었거든요. 출발하면서 뒤돌아보니 조금 전 건너온 오목교가 보입니다. 골목길 여행의 매력은 굳이 동선을 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데 있지요. 발길 닿은 대로 혹은 마음이 끌리는 대로 다녀도 좋고 이렇게 벽화가 있는 마을은 벽화에 끌려 먼저 가보게 되는 골목도 있겠고요. 오르락내리락하며 다니는 좁은 골목들, 크게 가파르지 않기 때문에 특별히 힘들 정도는 아닙니다. 다시 내리막길 코너부터는 추억의 만화책 골목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추억의 벽화와 현실의 배달 오토바이가 나란히 있어서 함께 담아보았습니다. 벽화도 전부 새롭게 바뀌었고 마을 분위기도 전과 많이 달라졌습니다. 무엇보다도 조건 없이 열린 공간이 많아서 좋았습니다. 마을 주민들의 열린 마음을 읽을 수 있어서 예상했던 시간을 훌쩍 넘기며 마을 구석구석을 다녔습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이 전망 좋은 카페에서 시원하게 음료수 한 잔 마셨던 기억이 나네요. 미세먼지가 뿌옇게 뒤덮인 날이라서 서둘러 휘리릭 돌아보고 실내 가볼 만한 곳을 찾아갈까 했었는데 좁은 골목 따라 펼쳐지는 다양하고 화사한 벽화들에 미세먼지도 묻히더라고요. 특히나 추억의 만화벽화 골목은 채 마르지 않은 물감처럼 선명하고 깔끔해서 더 보기 좋았고요. 만화 벽화가 그려진 골목에는 주민들이 쌈짓돈을 모아 준비한 추억의 만화책도 있었습니다. 마을 입구 안내판에도 이곳 만화벽화가 그려진 곳에도 자만동 주민들의 당부 글이 있었습니다. "자만 달동네 깔끄막까지 올라오신 걸 환영합니다~"라는 환영 인사와 함께 벽화에 낙서하지 말아 달라는 당부, 자만 달동네에 수년째 숨길을 불어 넣어 주고 있는 마을 가게를 이용해 달라는 당부의 글도요. 깔끄막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 검색해보니 비탈길 언덕을 이르는 전라도 방언이었습니다. 자만 벽화마을은 한국전쟁 때 피난민들이 정착하면서 형성된 달동네입니다. 세월이 흘러 사람들이 하나둘 산동네를 떠나자 비어가는 골목에 숨길을 불어넣고자 주민들과 동사무소 그리고 지역 작가들이 힘을 모아 벽화 골목을 조성하게 되었습니다. 무더위와 모기의 습격을 이겨내며 다 같이 청소하고 다 같이 페인트칠하고 웃으며 몇 달을 보낸 결과물이라고 했습니다. 카페 식당 게스트하우스(민박) 옷 가게 등이 마을 골목마다 들어서 있지만, 프랜차이즈가 아닌 개인이 운영하는 곳들이고 마을 가게들의 수익금 일부가 마을에 재투자 된다고 하니 기왕이면 밥 한 끼 차 한 잔을 마셔도 마을 안에 있는 가게들을 이용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올겨울 눈이 많이 내리지 않아 겨울 가뭄에 미세먼지까지 참 힘든 겨울을 보내고 있는데요. 불타는 가을과 흰 눈이 펄펄 내리는 겨울 풍경까지 골목 벽화가 마음을 환하게 밝혀주었습니다. 골목 비탈길과 맞닿아 있던 작은 창에 숙박이라는 나무 간판, 아래로 내려오니 대문이 활짝 열려 있고 사진 무료 개방 그리고 전화번호가 적혀있었습니다. 마음 편하게 들어가 볼 수 있었고 마당에 서보니 위로도 집이 있고 아래로도 집들이 있는 위치였습니다.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키며 마을을 내려다봤음 직한 나무, 마당은 노천카페, 한옥 마루에 겨울 햇살이 스며든 모습을 보니 하룻밤 머물고 싶어졌습니다. 다음에 전주 오면 이 집에서 머물고 싶다고 SNS에 사진을 올렸더니 멀리 미국 사는 친구가 한국 가면 자기랑 같이 가자고 바로 댓글이 달렸습니다. 사실 많은 관광객이 좁은 골목골목을 다니다 보면 마을 주민들은 분명 생활에 불편함도 있을 텐데 골목에서 만나는 어르신들은 인사를 건네면 반갑게 받아 주셨고 이렇게 오픈된 공간이 많아 또다시 찾고 싶고 정감 갔던 마을이었습니다. 집에서 만든 김치로 김치부침개 맛있게 부친다는데 들어가고 싶었지만 국수 좋아하는 제가 마을 입구에 있는 안내표지 보고 점심 메뉴를 딱 결정해 놓은 상태라 이 집은 다음으로 미루었습니다. 골목을 내려오며 작업할 당시 관광객들이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는 한글길도 만나고 우모내모 달동네 옥상 쉼터도 올라보았습니다. 다 보여드리지 못한 곳들이 많습니다. 산동네 한쪽 끝에 서서 바라보면 동네 뒷산 절반 정도의 규모로 주택 40여 채가 있는 작은 마을이지만 벽화와 마을 이야기 사람 사는 따뜻한 이야기가 가득한 마을입니다. 예상보다 마을에서 보낸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구석구석 다닌다고 다녔는데 찾고자 하는 국숫집을 못 찾았습니다. 알고 보니 그 집은 문을 닫고 이제 영업을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물어물어 찾아간 곳은 그곳이 아니었지만 배고픔을 참고 찾아간 보람이 있었습니다. 도자기 그릇에 정성스럽게 담아낸 멸치국수 한 그릇의 맛과 가격에 반하고 한옥의 분위기에 반해 나만의 단골집 한곳이 생겼습니다. 다음 여행길은 자만 벽화마을 한옥에서 하룻밤 묵으며 전주 한옥마을 둘레길을 걸어볼 생각입니다. 그때가 여름이라면 이곳에 와서 시원한 열무국수 맛을 볼 테고 겨울이면 따듯한 멸치국수 한 그릇을 먹게 되겠지요. 전주를 여행한다면 전주 여행이 처음이라면 한옥마을과 이곳 자만 벽화마을을 연계해 슬로시티 전주 하루 코스 여행으로 즐겨 보시기 바랍니다. ▶여행 정보 ○ 추천코스: 풍남문(태조로 출발)-전동성당-경기전-전주공예품전시관-오목대 방향(태조로끝)-오목대-자만벽화마을. ○ 주변가볼만한곳: 한옥마을 오목대이목대 경기전 전주공예품전시관 전동성당 한벽문화원 남부시장 한벽루 등 ○ 주변버스정류장: 오목대한옥마을(101. 190. 429 일반버스) ○ 위치: 전북 전주시 완산구 교동 50-158 /글사진=전라북도 블로그 기자단 배인숙

  • 기획
  • 기고
  • 2019.02.18 12:37

특례시 지정 이끄는 행정수장 김양원 전주부시장 “지정 기준 인구 100만은 균형발전 해치고 지방소멸 부추겨”

정부가 30년 만에 지방자치법 전면 개정안을 통해 광역시가 아닌 대도시에 대한 특례시 지정을 추진하고 있다. 이번 특례시 지정은 문재인 정부 국정기조 철학인 균형발전의 성패가 달려있다. 그러나 문제는 현행의 특례시 지정 기준이 과거 정부의 모습을 답습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순 주민등록상 정주 인구를 기준으로 하다보니 잘사는 지자체에만 인구가 몰리고 못사는 지자체는 소멸론 위기를 부추킬 위험이 크다. 국가 균형이 아닌 불균형을 심화시킬 것으로 잠만자는 야간인구를 기준으로 한 이번 특례시 지정 기준을 과감하게 깨 부서야 한다. 전주시 특례시 지정의 대내적 행정수장을 맡고 있는 김양원 전주부시장에게 특례시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특례시 지정 기준은 어떻게 되는가? 행정안전부가 입법예고를 거쳐 국회에 넘긴 지방자치법 전면 개정안을 보면 자치행정과 재정 분야에서 폭넓은 재량권을 부여하는 특례시를 지정하되, 기준을 인구 100만명 이상 대도시로 특정했다. 하지만 실질적 행정수요보다 획일적 주민등록 인구를 기준으로 하는 바람에 수도권 쏠림 현상이 가속해 지역균형발전에 역행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현재 100만명 이상을 충족하는 도시는 수원용인고양 등 수도권 위성도시들이 대부분이다. 비수도권에서는 경남 창원밖에 없는 실정으로 100만 인구 기준을 적용하면 빈익빈부익부 도시만 양산해 국가 균형발전 전략이 실패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때문에 도 단위 광역도시에서 광역자치단체가 없는 전북 전주(66만)와 충북 청주(84만)의 반발이 거세다. -100만 인구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번 특례시 기준이 된 100만 인구는 지난 1980년때 이뤄졌던 직할시나 광역시 선정때의 기준일 뿐이다. 기준을 분별하기 쉽게 단순 100만의 수치에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본다. 산업화를 거쳐오며 그 도시들이 어떻게 인구 100만을 넘기게 됐는지를 깊이 따져봐야 한다. 잘사는 도시만 더욱 잘 살게 하고 못사는 도시는 더욱 빈곤해지는 그런 불균형 기준이 될것이 자명하다. 정부는 지금 100만 이상의 도시를 모두 광역시로 할 수없기 때문에 일반 50만 이상 대도시와는 다른 특례를 부여하려 하고 있다. 전주의 경우 실질적으로 생활인구는 100만이 넘고 전북의 행정수도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도 단위에서 광역시가 없는 전주와 청주 등 50만 이상 도시의 특례시 지정이 필요하다. -특례시가 되면 어떤 점이 달라지나? 일단 자치권한이 확대된다. 택지개발 지정, 사립박물관, 사립미술관 건립, 개발제한구역 해제 권한, 지방연구원 자체설립 등 도의 승인이 없어도 가능해진다. 그러나 가장 큰 권한은 국가 사업 배분시 몫을 전북과 전주특례시로 나눈 두개의 몫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전북도가 역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탈 호남, 전북 몫 찾기 운동과도 맥을 같이하고 있다. 혁신도시 공공기관 이전 사례나 이번 예타면제 사업 등을 보면 광역단위로 전북은 한몫을 받았지만 광주전남은 각각 하나씩 두개의 몫을 받았다. 국가예산 확보 차원이나 전북 전체적 발전 측면에서 우린 특례시 지정을 통해 광역시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자 하는 측면이 자치권한 확대보다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특례시가 되면 나머지 전북 13개 시군에 끼치는 영향은? 전주 특례시 지정은 비단 전주만의 일이 아니다. 전북 전체의 명운을 가를 하나의 목소리다. 광역시가 없는 전북의 경우 타시도 예산과 비교해 얼마나 큰 격차가 있는지는 수치만봐도 확연하다. 이번 특례시 저정을 통해 전북도 예산을 전주시로 더 가져오는 그런 일은 없다. 재정적으로 타시군에 손해를 끼치지 않는다. 오히려 더 큰 시너지를 낼 수 있다. 필요할 경우 균형측면에서 별도의 재정보전 연구용역을 추진할 것이다. 현재 100만 이상인 창원, 수원, 고양, 용인이 특례시에 포함될 확률이 100%다. 성남(95만) 등 부족한 도시와 연대를 강화시키겠다. -특례시 지정이 중앙과 지방의 불합리를 개선할 수 있나? 그렇다. 가장 중요한 건 지방분권과 재정분권이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재정격차를 완화시키는 장치 마련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국가재정과 지방재의 비율을 2:8에서 3:7로 변환이 추진되고 있다. 그래서 지방소비세, 부가가치세 등의 비중을 높이고 있다. 전북의 경우 부가가치 세원이 1% 정도다. 수도권 경우 많은 혜택을 보지만 전북은 그렇지 않다. 수도권과 지방의 지역재원 불균형 문제를 특례시 지정을 통해 (수도권의 재원을)특례시 일부재원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강력하게 요구할 것이다. 정치권과 청와대, 정부부처에 지속적 요청을 하겠지만 전북 도민 모두의 관심이 절실하다. 비단 전주의 일이 아닌 전북 미래가 걸린 일이기 때문에 큰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린다. ●특례시 지정 기준 왜 생활인구로 해야하나 전북의 행정수도인 전주지역 생활인구가 일일 최대 130만명에 육박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생활인구란 거주와 근로, 업무, 취업 등과 관련해 특정 시점지역에 존재하는 모든 인구를 뜻한다. 통신사 SKT가 지난해 전주지역의 생활인구에 대한 빅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하루 평균 93만6249명, 최대 125만774명이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주와 같은 생활권에 위치한 완주를 포함할 경우 하루 평균 109만1788명, 최대 163만3830명으로 집계됐다.또 다른 통신사인 KT 조사에서는 지난해 10월 전주완주 생활인구가 하루 최대 100만명을 넘어선다. 하지만 전주의 주민등록 인구는 66만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전주시가 생활인구를 위해 쓰는 행정예산은 수치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하다. 그렇기 때문에 거주인구가 아닌 생활인구를 특례시 지정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질적인 행정수요는 광역시와 비슷하지만 교통 및 주차, 생활쓰레기, 청소행정 등 이를 감당할 재정과 공공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해 각종 도시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정부 균형발전정책이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 해소에만 집중하다 보니 광역시가 있는 권역과, 없는 권역간의 차이가 크게 벌어져, 이번 특례시 기준을 50만 인구 이상으로 해야 지역 불균형을 완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양원 전주부시장은 과거 30년의 지역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선 이번 특례시 지정과 관련한 기준이 그 무엇보다도 절실하다며 전주시만 특례시로 지정해달라는 욕심이 아닌 국가 균형발전의 시작점인 특례시의 기준을 제대로 꾸려달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 기획
  • 이강모
  • 2019.02.17 18:56

[전북의 재발견] 통합권으로 즐기는 군산 여행 - 근대역사박물관과 주변관광지 한 번에 둘러보기

군산여행, 통합권으로 알차고 신나게 즐겨보세요 금강물이 장수군의 뜬붕샘을 출발하여 천리길을 달려 도착한다는 군산. 금강과 함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군산을 알아보겠습니다. 군산은 서해바다와 금강이 만나는 곳에 위치해 예로부터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특히 군산내항 일대는 대한제국 시기인 1899년 군산항 개항 초기 모습부터 일제강점기 경제 수탈의 아픈 역사와 근대 산업화 시기까지 총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여러 시설과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죠. 요즘에는 맛집에 관광명소까지 알려지면서 인기 있는 여행지로 꼽혀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있죠. 일제 강점기 국제 무역항이자 쌀 수탈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군산. 통합권 한 장으로 군산 역사를 만나볼 수 있는 군산근대역사박물관과 주변관광지를 소개합니다. 군산여행에서 맨 먼저 찾은 곳은 군산의 역사를 한자리에서 만나 볼 수 있는 군산근대역사박물관입니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은 전통적으로 물류, 유통 도시인 군산의 문화적 특징을 관광자원으로 홍보하기 위해 2011년 개관했으며 "역사는 미래가 된다."라는 모토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전북 군산시 해망로 240에 개관한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전국 5대 공립박물관 중 한 곳으로 선정되었을 만큼 시설이 잘 갖춰져 있습니다. 박물관 주변 7개 건물이 테마별로 집적화되어있어 전국적인 가족단위 체험공간으로 각광받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박물관은 지하 1층 지상 4층으로 만들어졌으며 박물관 안 전시물품은 군산시민들이 기증한 물품이라고 합니다. 관람안내 관람시간- 09:00~21:00 까지 이며 관람시간 30분 전까지 입장하셔야 합니다. 입장료- 성인 3000원 청소년 2000원 어린이 1000원 군산시민과 20인 이상 단체 관람객은 할인 됩니다. 통합권- 성인 3000원 청소년 2000원 어린이 1000원 이며 박물관, 진포해양테마공원, 근대건축관, 군산근대미술관을 입장 하실 수 있습니다. 군산여행이 처음이신 분들은 통합권을 구입하셔서 돌아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무료관람: 매월 마지막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은 무료관람입니다. 정기휴일: 1월 1일 / 매월 첫 번째, 세 번째 월요일은 휴무입니다. 문의 전화-063)454~5953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입장권 구입금액이 5,000원 이상인 경우 구입금액을 5,000원으로 나누어 산출된 개수로 군산사랑상품권으로 지급하니 1층 로비에서 신청해보세요. 군산사랑상품권을 받아서 주변에 다양한 군산 맛 집을 이용하시면 일석이조 일 것 같네요. 군산근대역사박물관에는 특히 어린학생들을 위한 시설이 잘 되어 있어 자녀를 동반한 관람을 추천합니다. 박물관 1층에 마련된 어린이체험관은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는 체험프로그램이 운영되어 아이들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키워주는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풀어 갈 현장학습 체험지를 준비해 두고 있어서 학교에 체험학습지를 내기도 편하게 되어 있습니다. 박물관에서 맨 먼저 찾은 곳은 국제 무역항이면서 군산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만날 수 있는 해양물류역사관입니다. 조선 시대 군산은 전국 최고의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의 세곡이 모이는 군산창과 이를 보호하기 위한 군산진이 설치돼 경제, 군사적 요충지였다고 합니다. 해상물류역사관에서는 삼한시대부터 시작된 군산항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국제 무역항인 군산의 바다와 문화를 엿볼 수 있습니다. 군산은 호남 최초 3.1 만세운동과 전국 최대 농민항쟁이 있었던 곳이라고 합니다. 독립영웅관은 군산에서 활동한 독립유공자들을 알아보고 그분들의 업적을 만나 보세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글귀가 마음에 와 닿는 독립 영웅관에서 군산의 독립운동가 74분을 만나 보세요. 박물관 3층으로 가시면 1930년 9월의 군산 거리를 재현한 근대생활관이 있습니다. 역사 수탈의 현장, 근대건축물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 관람객들에게 재미있는 추억을 선사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아픈 역사를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보기만 해도 아름다운 건물은 (구)군산세관입니다. 구) 군산세관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서양 고전주의 3대 건물 중 하나로 대한 제국(1908년/순종 2년 6월)시절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당시 전하는 말에 따르면 불란서 사람 혹은 독일 사람이 설계하고 벨기에에서 붉은 벽돌과 건축자재를 수입하여 건축했다고 하며 현재 도지정문화재 87호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박물관 안에는 군산세관의 역사와 세관이 어떤 일을 하는지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군산근대미술관의 본래 이름은 구) 18은행 군산지점입니다. 구) 18은행은 일본 나가사키에 본사를 두고 있던 은행으로 군산지점은 1907년 조선에서 일곱 번째로 설립되었으며 군산의 첫 은행이었다고 합니다. 구) 18은행 건물은 보수복원 과정을 거쳐 2008년 등록문화재 제372호로 등록 되었습니다. 군산미술관은 총 3개의 건물로 전라북도 출신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는 본관동과 안중근 의사 기념관으로 활용하고 있는 금고동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군산근대건축관은 과거 식민지 경제수탈을 위한 대표적인 금용기관의 조선은행 건물을 보수해서 문을 열었습니다. 이 건물은 한국에서 활동했던 대표적인 일본인 건축가 나카무라 요시헤이(中村資平)가 설계해 1922년에 신축한 은행 건물로 당시 일본 상인들에게 특혜를 제공하면서 군산과 강경의 상권을 장악하는데 초석을 쌓아, 일제강점기 침탈적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은행이었다고 합니다. 고려 말 최무선 장군이 최초로 화포를 이용해 왜구를 물리친 진포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해양 공원인 진포해양 테마공원입니다. 진포해양 테마공원에는 해군의 위봉함을 비롯해 육해공 퇴역 장비 13종 16대가 전시돼 있으며 직접 타볼 수 있어 아이들과 함께 하면 좋은 곳입니다 군산내항을 대표하는 부잔교는 일명 뜬다리로 불리며 서해안 특성상 물이 빠지는 간조 때도 배를 접안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설물입니다 일제 강점기인 1932년에 만들어 졌으며 현제는 일제의 쌀 수탈을 대표하는 시설물로써의 가치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등록문화제 제719-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통합권으로 볼 수 있는 군산의 근대역사 간단히 알아 봤습니다. 사진과 글로 모든 걸 다 알려 드리기가 쉽지 않을 만큼 많은 군산의 근대역사문화를 볼 수 있어서 좋았는데요.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외에도 군산 곳곳에 남아있는 근대문화유산도 많으니 함께 돌아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글사진=전라북도 블로그 기자단 박순배

  • 기획
  • 기고
  • 2019.02.15 12:02
기획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