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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실천, 사회적 가치 이끌어온 송경용 성공회 신부

사회적 가치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고 있지만 돈이 성공의 목표인 우리 사회에서 나누고 공유하는 삶의 방식은 여전히 낯설고 인색(?)하다. 시민이 주체가 되어 사회를 변화시킨 촛불의 위대한 힘을 경험했지만 사회적 불평등의 간극이 여전히 좁혀지지 않는 사회적 현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송경용 성공회 신부(57 나눔과 미래 이사장)를 만났다. 그는 40년 가깝게 나눔을 실천하며 진정한 사회적 가치를 우리 사회에 일깨워온 종교인이자 사회운동가다. 빈민운동으로 시작해 사회적 경제 운동까지, 대한민국 사회의 건강한 변화를 위한 그의 활동은 온전히 현장성을 기반으로 이어져 온 것이다. 덕분에 그는 학문과 이론의 틀 안에서 탐색되는 사회적 가치의 한계를 현장의 힘으로 극복해 현실적 대안으로 만들어 내고 발전시켰다. 오늘에 이르러 우리 사회 곳곳에서 빛을 내는 사회적 경제의 다양한 통로들이 그 결실이다. 인터뷰는 어렵게 이루어졌다. 하루를 시간 단위로 잘게 쪼개어도 부족한 그의 바쁜 일상에서 두세 시간 얻어내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 이루어진 인터뷰는 그가 공동의장을 맡고 있는 서울 불광동 서울혁신센터의 국제사회적경제협의체 사무국에서 있었다. 인터뷰 직전까지 공덕동 생명안전시민네트워크 사무실에서 회의를 하고 달려온 그는 직함이 어색할 정도로 젊고 열정적이었다. 덕분에 그 앞에 놓인 수많은 단체와 그 활동을 어떻게 그렇게 지치지 않고 해내는지 알게 됐다. -오랫동안 같은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노동자들과 함께 한 빈민운동부터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된 사회적 경제 운동까지 신부님을 줄곧 이끌어온 동력은 무엇이었습니까. 처음부터 대단한 목표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나눔을 공유하다보니 여기까지 왔지요. 그 시작은 야학이었고요. 상계동에 들어간 것이 79년 9월 28일이니 올해 39년째군요. 동력을 꼽자면 나눔의 가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작이 상계동에 있는 야학이었죠. 맞습니다. 적십자회관에 개설한 상계적십자 청소년 학교였어요. 그때 제가 다녔던 연세대 학생들이 돌멩이 반이라고 독서 모임을 따로 만들어 운영했는데 거기서 만난 친구들이 모두 제 인생의 스승이 됐어요. - 그 친구들이란 누굽니까. 상계동 일대에서 일했던 친구들이죠. 하루 12시간 13시간씩 일하면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던 열서너 살 청소년들인데 저보다 삶의 폭이 훨씬 넓었어요. 그래서 저는 그때 그곳을 제 인생의 시원 같은 곳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종교인이 되겠다는 생각도 그때 갖게 된 것인가요. 그렇진 않아요. 그즈음은 종교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사회운동의 현장에서 반복해 만나게 되는 종교인들을 보면서 온몸으로 이웃들과 함께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에 감동을 받았어요. 80년대 초는 이념으로 세상을 판단했던 때였는데 그 분들은 온몸으로 영성을 실천하는 분들이었거든요. 종교적 영성이 갖는 힘과 헌신성을 보았죠. 도대체 교회는 어떤 곳인가, 예수는 누구인가 알고 싶어지더군요. 야학에 나오는 친구들과 성경공부를 시작한 것도 그 물음 때문이었어요. -늦게 신학교를 다시 들어간 것도 그런 물음이 바탕이었겠습니다. 대학에서 전공했던 건축으로는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건축가는 예술적 재능이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이 저에게 힘쓰는 재능 밖에 안주셔서...... -야학은 계속하셨습니까. 제가 상계동에 처음 들어간 것이 79년 9월 28일인데 상계동에 나눔의 집을 연 날도 86년 9월 28일이예요. 저는 이 사람들과 어떻게 하면 함께 살 수 있을까를 계속 고민하고 있었는데, 84년에 군대 제대를 하고 상계동에 갔더니 노동자들이 살고 있던 오래된 주거공간들이 철거되고 있었어요. 깡패를 동원한 철거반 폭력에 여학생 반 아이들이 두려움에 떨면서 우는 모습을 보고 몸이 얼어붙더군요. 나도 모르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다시는 이 자리를 떠나지 않게 해주시라고. 그 기도를 안했으면 제가 오늘날 이 자리에 있지 않아도 됐을 텐데요. 그래서 제가 후배들에게 기도 함부로 하지 말라고 합니다.(웃음) -나눔의 집은 지금 여러 곳에서 운영되고 있지요. 상계동이 가장 먼저 문을 열었고 그 후에 봉천동 등 몇 군데에 생겨났어요. 저에게 보람이 있다면 나눔이란 말을 널리 나눈 것인데, 그때만 해도 보수 진보 진영 양쪽에서 비난을 받았어요. 한쪽에서는 혁명해야 하는 판에 무슨 나눔이냐, 또 한쪽에서는 부자들 것 뺏어가는 일 아니냐고. 온갖 오해와 억측을 다 했죠. -지금은 친숙하지만 그 당시는 낯설었던 말이군요. 제가 나눔을 앞세웠던 것은 이유가 있었어요. 저는 항상 삶의 현장에 있었는데 우리 현실과 관련된 다양한 사회운동에 참여하면서도 뭔지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더군요. 이념이 중시되던 때였지만 지금 당장 가장 약한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여기저기에서 일을 하면서 사회의 어둡고 이중적인 이면과 맞닥뜨려야 했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어떤 잘못이 있을 때 서로를 향해 네 탓이라고 손가락질만 하지 막상 내 탓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는 현실을 보면서 이념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그 무엇에 대한 궁금증이 깊어졌어요. 동료나 선후배들과 토론을 하면서도 삶이 밑받침 되지 않은 공허한 이론과 이념, 생활에 밀착되지 않는 그런 숱한 구호들이 공중에 붕붕 떠다닌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현실의 절박함에 대한 자각 이었겠습니다. 일상을 살면서 늘 현장의 삶이 얼마나 긴박하고 절실한가, 삶의 정황을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게 되었거든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그들의 구체적이고 긴박한 현실 같은 것이었죠. 가난이나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늘 긴박한 것이거든요. 그런데 혁명이나 사회변화를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긴박성을 모르는 탁상 담론들이 넘쳐나는 것에 화가 났어요. 삶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밀착되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됐죠. -종교인으로서의 고민도 같은 것이었습니까. 예수의 삶을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답을 찾고 싶었어요. 당시 오염된 교회가 너무 많았어요. 가난한 사람들에게 너무나 먼 당신 같은 존재가 교회라면 나는 그런 간판을 달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죠. 나는 진정한 삶을 이야기 하고 싶은데 교회라는 간판이 그것을 가로 막을 수도 있고, 또 이 공간이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 되어야 하는데 정작 그렇게 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교회를 갖지 않고 걷는 교회를 이어온 것이군요. 어느 날 미사를 드리고 있었는데 신부님이 성체를 쪼개는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처럼 들리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됐어요. 그런데 더 신비한 일은 신부님이 포도주를 잔을 들어 올리는데 성당 구석에 있던 제게 피 냄새가 몰려왔어요. 식은땀이 나더군요. 그때 깨달았어요. 예수님의 삶의 정수는 나눔이라는 것. 그래서 나눔의 집이란 이름을 붙였어요. -그 곳을 통해서 하신 일이 참 많더군요. 400만 원짜리 임대 사무실이었어요. 불도 잘 안 들어오는 허름한 공간이었죠. 그래도 밤이 되면 상계동 친구들이 모이죠. 어린 시절 성경을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이고 저 역시 신학생 신분이니 기도도 하고, 성경구절을 주제로 토론도 하면서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고 일을 만들었습니다. 상계동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일을 해야 한다는데 마음을 모아 설문지를 돌려 일을 찾았어요. 아이들 공부방, 야학, 다양한 계층을 위한 모임까지 많은 일이 생겨났어요. -모두 그들에게 절실한 것들이지만 꼭 돈이 있어서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군요. 돈이 아니어도 나눌 수 있는 것들이었네요. 그렇죠. 그래서 네 가지 원칙을 세웠어요. 하나는 이곳은 가난한 사람이 주인이 되는 교회, 단순히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주인이 되는 그런 교회죠. 두 번째는 실질적으로 삶에 도움이 되는 민중복지를 지향했어요. 세 번째가 지역 문제를 주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지역주민들의 센터가 된다는 것. 그 다음은 종교적으로나 이념적으로나 경계가 없는 집, 누구나 올 수 있는 그런 집이었죠. -경제적으로는 어땠습니까.시작도 그렇지만 경제적으로 늘 어려웠어요. 그래서 나눔의 집 후원회를 만들었는데 많은 분들이 나눔의 집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그럴 때 나눔의 집은 산동네의 산복도로 같은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산복도로는 산동네 가기 위해 오르거나 내려오는, 산동네를 가로지르는 길이예요. 밑에 있는 사람들이 올라가고 위에 있는 사람들이 내려와 함께 어깨 걸고 걸어갈 수 있는 길이죠. 그 길 같은 것이 곧 나눔이에요. 나눔의 집 후원회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진정한 애정과 사회적 책임을 지려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기적처럼 해결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분들의 힘이었죠. -팍팍한 사회인 것 같은데 신부님 말씀 들으면서 그래도 살만한 세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많은 분들이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벽 때문에 가로막혀있을 뿐 서로 조금만 더 존중하고 이해하고 배려하면 서로가 서로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서로에 대한 애정을 갖고 건강한 가치관과 새로운 세상을 위한 비전을 공유한다면 서로가 가진 작은 차이는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거든요. -지금까지 함께 해온 분들이 많이 있지요. 후원해주시는 분들이 수천 명, 수만 명이고요. 가장 고마운 분들은 저와 함께 했던 활동가들입니다. 제 꾐에 빠져서(?) 이 길에 들어선 사람들에 대한 빚이 큽니다. -대한민국에서 사회적 가치를 위해 일하는 활동가들의 삶은 정말 고단하지요. 구체적 현실을 들여다보면 참으로 막막하죠. 경제적 여건도 그렇지만 사회적 보장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외국에 있을 때 가장 부러웠던 것이 활동가들이 번듯한 직업으로 분류되고 있는 환경이었어요. 우리는 아직도 직업의 영역에서 기타 등등으로 분류되거든요. 몇 년 전에 공익활동가 사회적 협동조합 동행을 만든 것도 이러한 환경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은 1000명 정도의 활동가들이 참여하고 있는데 사회적 복지 지원과 공공의 선을 위한 활동가들의 연대를 이어내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나눔과 미래는 언제 설립되었습니까. 1998년 노숙인 무료급식소로 일이 시작되었는데 2004년 법인체로 설립된 이후 지금은 주거 복지 등 사회적 경제 활동을 확산하는 사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우리나라의 사회적 경제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근래 들어서죠. 맞습니다. 사실 나눔의 집을 통해서 해온 일들이 결국은 사회적 경제의 연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협동조합은 그동안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가 최근에 다시 살아나고 있는 분위기죠. -사회적 경제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환경을 어떻게 보십니까. 처음에는 사회적 경제라는 것이 먹고 살기 위한 방편으로 운용되었어요. 지금은 사회혁신이라는 가치가 더해졌죠. 사회적 경제는 사실 민주주의의 도장이기도 하고 자본주의의 대안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사회적 경제가 국가의 아젠더가 되고 주요 정책이 되었으니 격세지감이지요. -사회적 경제의 가치는 지속적으로 확산될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확산되는 것이 당연하고요. 사회적 경제는 150년 동안 전 세계적으로 지속되어온 가치입니다. 지속해온 힘의 근간은 이것이 풀뿌리 운동이라는데 있어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서로 협력해서 살고자 하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시작되면서 인간을 경쟁적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했지만 인간은 관계적 존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지요. 경제활동도 마찬가지예요. 사회적 경제는 경제적 대안일 뿐 아니라 사회적 대안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어떻게 존재해야하는가 어떻게 관계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을 때 구체적인 이론이나 관념적 철학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에서 그것을 증명해온 운동이 사회적 경제 운동입니다. 사회적 경제는 앞으로도 지속되어야 하는 우리 사회의 미래 가치예요. -사회적 가치를 공유하는 수많은 통로를 열고 확산시켜오셨는데, 나눔은 어떤 의미입니까. 나눔은 자기 자신에게 드리는 가장 거룩한 제사 같은 것입니다. 삶은 살아갈수록 참 어렵거든요. 삶은 살수록 비루해지고 작아집니다. 처음에는 내가 거룩한 사람도 될 수 있을 것 같지만 갈수록 존재가 작아지고 불안해지잖아요. 때로는 비루해지기도 하고. 그럴 때 남을 돕는 일은 결국 나를 이롭게 하는 일이 됩니다. 누군가와 관계하고 누군가와 접속한다는 것, 그래서 내가 거룩해지는 것이 나눔이지요. 나눔이 곧 자신에게 주는 또 하나의 선물임을 알게 되는 이야말로 더없이 행복한 일입니다. ■ 송경용 신부는 송경용 신부는 전주가 고향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족들은 서울로 이사를 갔으나 할머니와 전주에 남아 초등학교와 중학교(완산중)를 어렵게 마쳤다.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기 어려웠던 어린 시절의 가난은 그를 성장시킨 힘이 됐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온 이후부터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먹고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온갖 일을 직업으로 삼았다. 일을 한다는 것은 곧 생존의 문제였다.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 져야 할 짐은 그만큼 무거웠다. 대학은 사치다 싶어 취직시험을 봤다. 삼성 대림 한전 등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는 직장에 모두 합격했다. 그러나 대학입시의 유혹을 떨치지 못했다. 시험이나 한번 보자고 생각해 연세대 건축과를 지망했다. 면접날이 되자 갈등이 생겼으나 고생하시는 어머니께 합격증이라도 보여드리고 싶었다. 운 좋게 합격을 했다. 등록금을 내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 강남의 룸살롱까지도 일터가 되었다. 대학시절 선배의 권유로 야학을 알게 됐다. 민주화의 열망이 끓어오르던 시기, 상계동 노동자들을 만났다. 세상의 변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보였다. 대학 4학년 한 학기를 남겨놓고 신학교를 다시 들어갔다. 건축가보다 종교인으로서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을 찾은 것은 나눔을 실천하는 삶을 위한 선택이었다. 1993년 서품을 받고 성공회 신부가 된 이후 나눔을 실천하는 그의 삶은 더 깊어지고 넓어졌다. 빈민운동과 노동운동으로 시작된 그의 사회운동은 사회적 정의를 실천하고 확산하는 다양한 분야로 확대됐다. 나눔의 집을 열고 청소년 쉼터, 노숙 가정 쉼터, 자활후견기관, 푸드뱅크, 장애인 센터 등 사회적 가치를 나누고 실천하는 다양한 공간과 기구를 설립하고 발전시켰다. 2004년부터 2009년까지 영국 런던에서 생활하면서 사회적 경제 분야에 대한 폭을 넓힌 그는 귀국한 이후 한국의 사회적 경제 운동을 확산시키고 발전시키는 일에 더 열정적으로 뛰어 들었다. 지금은 나눔과 미래 이사장, 국제사회적경제협의체(GSEF) 공동의장, 도시재생협치포럼 상임대표 등을 맡아 사회적 가치를 공유하고 확산시키는 일을 주도적으로 꾸리고 있으며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의 복지를 위한 사회적 장치와 기구를 만들고 운영하는 일에 힘을 쏟고 있다. 교회란 이름을 달지 않고도 기도를 필요로 하는 모든 곳이 교회라고 생각하는 그는 걷는 교회라고 스스로 이름 붙인 이 교회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최근 새로운 사회적 금융 생태를 만드는 사회적 금융 추진단 단장을 맡게 돼 더 새로운 의지를 다지고 있다.

  • 기획
  • 김은정
  • 2018.10.11 19:19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43. 천년의 빛, 한반도를 밝히는 성화(聖火)

향 피우고 맑게 앉아 시 읊으며 머리를 갸우뚱하니, 한 방이 비고 밝은데, 작기가 배[舟] 같네. 가을빛을 가장 사랑하여 지게문 열어 들이고, 다시 산 그림자 맞아들여 온 뜰에 머물게 하네. 고려 말 문인 목은 이색(1328-1396)이 마니산 참성단(塹星壇)에 대하여 읊은 시구이다. 그곳 참성단에서 채화(菜火)한 전국체육대회의 성화(聖火)가 익산에서 타오르고 있다. 전라도 정도 천년이 되는 시기에 익산을 중심으로 전북 일대에서 열리는 전국체육대회는 그 의미가 크다. 전국체육대회는 매년 가을에 열리는 전국 규모의 종합경기대회로 큰 축제이다. 우리나라의 전국체육대회는 1920년 7월 조선체육회가 창립되고 그해 11월 열린 전 조선 야구대회를 기원으로 하고 있다. 초기에는 단일 종목별 경기를 개최하다가 1934년 조선체육회 창립 15주년을 기념하면서 종합대회의 형태로 열렸지만 1938년 7월 일본인 체육 단체인 조선체육협회에 조선체육회가 통합되면서 강제 해산되었다. 그러다 해방이 되면서 자유해방경축 전국종합경기대회란 주제로 1945년 제26회 전국체육대회로 부활하게 된다. 이후 1947년 조선올림픽위원회가 설립되면서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가입하고 이듬해 대한체육회 및 대한올림픽위원회(KOC)로 개칭하였고 자유롭게 참가했던 방식을 시도별 대항제로 바꾸면서 지금의 체제가 만들어졌다. 1920년 첫 경기가 치러진 이후 99회 차 전국체전이 우리 고장에서 개최되는 것은 경사스러운 일이다. 큰 행사인 만큼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아 주요 개최지인 익산은 분위기가 고조되고 흥이 넘치고 있다. 하지만 전국체전은 개최지뿐만이 아니라 참가하는 선수는 물론이고 올림픽의 정신으로 오랜 인류 역사를 잇는 큰 축제임을 상기해야 한다. 전국체육대회가 열리는 기간 내내 메인 경기장인 익산종합운동장을 밝히는 성화도 우리나라 전국체육대회의 역사를 이으며 전통을 따랐다. 전국체육대회는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에서 채화된 성화를 봉송하며 개최지의 성화대에 점화하는 의식으로 시작된다. 성화 채화의 전통은 1956년 제37회 대회 때부터 민족의 역사가 깃든 강화도 마니산에 있는 참성단의 채화로부터 시작되었다. 1872년 제작된 강화부의 지방지도를 살펴보면 마니산 정상에 단군시대 이래 제사를 지내왔다는 참성단과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이 있는 정족산성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이 보관되었던 정족산 사고 등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강화도호부에는 참성단과 단군에 제사를 지낸 기록이 있다. 사단 참성단은 마니산 꼭대기에 있다. 돌을 모아 쌓았는데, 단의 높이는 10척이며, 위는 모가 나고 아래는 둥근데, 위는 사면이 각각 6척 6촌이요, 아래 둥근 것은 각각 15척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단군이 하늘에 제사 지내던 곳이다.라고 하였다. 본조에서 전조(前朝)의 예전 방식대로 이 사단에서 별에 제사 지냈는데, 아래에 재궁(齋宮)이 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참성단의 역사는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속 단군신화에 다다른다. 이렇듯 오랜 세월 단군에게 제사를 올린 참성단에서 불꽃을 받아온 전국체육대회의 성화와 백제 문명이 융숭하게 깃든 미륵사지에서 채화된 전국장애인체육대회의 불꽃은 대회 기간 내내 성화대를 밝힌다. 전국체육대회의 성화는 올림픽의 성화와 맥락을 함께한다. 올림픽의 성화는 고대 올림픽 경기 기간 중, 제우스신에게 바치는 제사를 지낼 때 신성한 불꽃을 밝히며 경기를 한 것이 기원이 되었다. 경기를 신에게 봉납하는 의미로 고대 올림픽의 발상지인 그리스 엘리스 주의 헤라 신전에서 태양의 빛을 받아 채화한다. 그와 같은 전통을 지켜 성화를 밝힌다.는 것은 고대 올림픽 정신의 전통을 지킨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고대 그리스의 신화와 연관하여 하늘의 불을 훔쳐 인류에게 전달한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를 떠올리게도 한다. 프로메테우스는 신들의 왕 제우스 몰래 불을 훔쳐 인간에게 내어준 죄로 매일 새들에게 간을 쪼여 먹히는 형벌을 받은 그리스 신화 속의 신이다. 그로 인해 인간들은 문명을 밝히게 되었고, 프로메테우스 신화로부터 불은 인류의 이성, 계몽, 창조적 능력을 상징하게 되었다. 또한, 신성한 불꽃을 밝히며 경기를 하고 그 불이 전 인류를 비추는 올림픽의 정신과도 연결되었다. 올림픽은 신에게 제사를 올린 종교행사로 시작해 전쟁을 위한 훈련의 성격을 띠며 고대 그리스 여러 도시 국가의 대표선수들이 겨룬 올림피아 경기에서 유래했다. 기원전 776년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인 엘리스에서 헤라클레스가 처음 개최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실제로는 그보다도 1세기 전부터 올림피아에서 4년마다 한 번씩 열렸다고 한다. 당시 남자들이 모두 옷을 벗은 채 경기에 임했고, 여자는 참가는 물론 관전조차 금지됐었다고 한다. 최초의 경기 종목은 단거리 달리기만 있었지만 점차 중거리 달리기, 장거리 달리기가 포함되었고 이후 레슬링, 원반던지기, 창던지기, 마차경주, 권투 등이 더해졌다. 그 흔적은 그리스의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 안에서 겨루기 대회로 보이는 포즈를 취하고 경기를 벌이는 근육질의 모습으로 남아 그 시간으로 우리를 이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올림픽을 거슬러 올라가 서구의 문명과 정신의 밑거름이 될 만한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당시 그들이 남겨놓은 철학과 예술, 문학과 건축 등의 유산은 오늘날 서구문물 거의 모든 분야의 원형으로 손꼽히고 있고 그리스신들의 이야기는 그 특별함을 더해준다. 올해 열리는 전국체육대회와 전국장애인체육대회는 지금까지 개별 봉송되었던 방식과 달리 개천절인 10월 3일 같은 날 채화하여 동시에 봉송되었다. 전통적으로 채화를 해온 참성단은 우리 민족의 시원이 되는 단군신화와 민족의 염원을 담은 장소이고 익산 미륵사지는 백제 무왕 2년이 되던 601년에 창건되어 백제 문명을 찬란하게 꽃피우며 수많은 이야기를 품은 곳이다. 전국체육대회의 개폐회식이 열리는 익산종합운동장의 주 무대와 성화대도 어김없이 그 의미를 이어받아 미륵사지 석탑을 형상화했다. 성화대의 모습은 하늘을 받든 두 손이 모여져 미륵사지 선형을 나타내고 보석 같은 불꽃을 피워 내도록 디자인되었다. 아름다운 가을날 천년의 문을 활짝 열며 백제 무왕이 품었던 큰 꿈도 헤아려 본다. 그 미륵사지를 창건하며 안녕과 번영을 기원한 간절한 마음도 불꽃으로 화하여 새로운 천년을 준비하는 전북을 밝히고 한반도를 환히 비추기를 소망해본다.

  • 기획
  • 기고
  • 2018.10.11 19:19

[카드뉴스] 자영업자들의 위기

  • 기획
  • 전북일보
  • 2018.10.11 17:26

[참여&소통 2018 시민기자가 뛴다] 전주 ‘책방’ 골목을 가다

새내기 대학생이었을 때, 전공 강의를 수강하면서 이 길은 아니라는 깨달음과 함께 수강을 취소했다. 그리고 그 결단과 함께 손에 든 전공 서적은 쓰임새를 잃었다.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책이란 기껏 종이뭉치에 지나지 않는 법, 그렇게 전공서적은 귀하신 몸에서 종이뭉치로 신분이 바뀌었지만, 그 종이뭉치를 그냥 버릴 수는 없었다. 거금 4만 원 들인 전공 서적을 폐지 취급하기에는 주머니가 너무 가벼웠다. 그때 처음으로 전주 동문거리의 책방을 찾았다. 누군가의 종이뭉치를 모아 다른 이의 책으로 만들어 주는 이곳은 책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꽤 유명한 노다지요 동시에 책을 팔려는 사람에게는 한 줄기 빛과 같은 구원자였다. 그 구원자가 내게도 임하길 기대하며 전에 추천받은 책방에 들러 전공 서적을 내보일 때, 책방 주인아저씨가 무심결에 남긴 한마디가 꽤 아프게 다가왔다. 학생, 책이 정말 깨끗하네? 가게 주인의 말이다. 특별한 의도가 있는 말은 아니었겠지만, 자격지심으로 인한 창피함과 패배감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그래도 깨끗한 만큼 좋은 값을 치러주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를 해보지만 주인아저씨의 민머리 옆으로 보이는 책장에서 내가 들고 온 책과 똑같은 책을 보게 되면서 기대는 사라지고. 결국 동문거리 책방에서의 첫 거래는 손에 있던 두꺼운 책이 2000원으로 바뀌면서 그렇게 끝났다. 동문의 헌책방은 그런 곳이었다. △책방골목의 시작 그리고 지금 경원동 풍년제과 본점에서 한옥마을 방향으로 걷다 보면 동문거리를 마주한다. 옛 향취가 고르게 묻어나오는 이 거리는 전주사람들에게 홍지서림 골목으로 더 유명하다. 80년대 홍지서림이 뿌리를 내린 자리에 헌책방이 뒤이어 하나둘씩 자리를 잡으면서 이곳은 전북을 대표하는 책방골목이 됐다. 전성기 때는 30여 곳에 이르는 헌책방이 자리 잡고 있었고 2000년대 초반까지도 10여 곳의 책방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줄줄이 폐업이 이어지면서 이제는 딱 두 곳만이 남아 책방골목이라 부르기도 무색한 지경이 됐다. 길을 찾아주던 동문거리의 헌책방이 지금은 자신의 길을 잃은 것일까? 누군가에겐 추억이고 누군가에겐 역사였던 이곳의 헌책 냄새가 이제 조금씩 그 자리를 떠나가고 있다. 옛날에는 정말 많았었지. 근데 지금은 아니에요. 문닫고, 나가고 책방골목의 화려했던 시절을 기억하는 서점주인 A씨는 골목이 생기를 잃어가는 오늘이 아쉽기만 하다. 문을 닫아가는 책방과 줄어드는 손님,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예전과 달리 젊은이들이 헌책방을 찾아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학생에서부터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이곳을 찾던 청춘의 발길을 이제는 찾아보기 어렵다. 옛날에는 참고서나 서적을 구하는 학생들이 많이 왔었죠 요즘에는 젊은 사람들이 오는 경우가 없어요 대부분 손님이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죠. 이 거리에는 전주시에서 지정한 전주미래유산임을 증명하는 명판이 2개 달려있다. 전주의 어제가 만들어진 장소이며 동시에 오늘로 이어진 역사가 내일까지 존속해야 할 장소라는 의미다. 하지만 젊은이의 발길이 자취를 감추는 곳은 미래로 갈 길이 끊긴 단절된 장소일 뿐. 책방주인의 한 마디는 이 거리의 현 상황을 상징하는 듯했다. △아직 그 자리를 지키는 일신서림 꽤 오랫동안 첫째 집으로 불렸던 일신서림은 옛날 모습으로 남아있다. 당기시오라고 써진 문을 무심코 밀어서 열 때 들리는 그 소리가 여전하고 문 옆에 쌓여있는 철 지난 고등학교 참고서도 그대로다. 찾아오는 손님을 반기는 모든 풍경은 변함이 없지만, 예전 같은 인기척과 호기심은 사라졌다. 대신 한산하고 쓸쓸한 분위기, 그리고 인기척이 사라진 자리를 대신하는 라디오 소리가 차분함을 남기고 있다. 헌책방이 쇠퇴하고 있지만 일신서림에는 아직 2~3만 권의 서적이 남아있다. 참고서, 소설책, 전공 서적에서부터 관상, 풍수지리서에 이르기까지 손때 묻은 다양한 서적이 세월을 머금으며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물론 다양한 책 중에서도 그럴듯하고 매력있는 책은 곳곳에 숨겨져 있다. 그중에 하나가 영어원서다. 이곳에서 구하는 영어원서는 여러모로 완벽했다. 새 책을 파는 서점에서는 아예 원서를 취급하지 않거나 혹은 해외 배송료 때문에 구매하기 어려웠지만, 이곳에는 늘 원서가 있었다. 시기를 잘 맞추면 앵무새 죽이기, 시간여행자의 아내 등 이름만 들어도 아는 베스트셀러를 구할 수 있음은 물론 16달러짜리 책을 4000원에, 7달러짜리 책을 2000원에 파는 등 가격도 저렴했다. 그 저렴한 가격에 넘어가 좋은 원사가 보일 때마다 필요 이상으로 책을 사기도 했고 허세가 가득했던 시절에는 나 이정도로 교양 있는 사람이다는 의미로 책을 사서 책장에 고이 모셔두기도 했다. 물론 읽지는 않았지만. 오랜만에 찾은 일신서림에 이번에는 해리포터 원서가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해리포터 세트를 생일선물로 받는 때도 있었는데, 다음번에 찾아올 때는 또 누구의 어떤 추억을 보게 될까? 또 다른 양서를 접하는 행복한 상상을 해보지만, 한편으로는 30년째 일신서림을 운영하고 있는 기용석(65) 사장의 한마디가 무겁게만 다가온다. 손님도 옛날만큼 오지 않고 책방을 따로 물려주거나 이어받을 사람이 없어요. 내가 그만두게 되면 문 닫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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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0.09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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