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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소통] 농촌공동체를 살리는 방법 ⑧

독일, 오스트리아 등 EU(유럽연합)의 3농 정책을 설계하고 지탱하는 핵심적 정책과 구체적 전략은 직불금, 가족농, 협동조합, 그리고 농업회의소이다. 그중 농업회의소야말로 우리 농정의 숙제를 풀 수 있는 유력한 해법이자 도구로서 배울 필요가 있다.농업회의소란 농업인의 대의기구로서 헌법 제123조 5항에 국가는 농어민과 중소기업의 자조조직을 육성해야 하며 자율적 활동과 발전을 보장해야 한다는 근거를 두고 있다한국농어촌복지포럼 공동대표인 정명채 박사는 자본이 정치를 지배하는 현실에서 농업이 살아남는 방법은 헌법에 보장된 농민대의기구인 농업회의소를 설립하는 것이라고 제안한다.정 박사는 흔히 농업회의소를 기업인들의 상공회의소에 빗대 설명한다. 기업인들이 기업의 이익을 대의하기 위해 상공회의소를 만들었듯, 농민들도 농업을 지키고 농촌에서 살기위해서 농업회의소를 농민들의 뜻을 대변하고 대의하기 위해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다국적 농기업으로부터 농민을 지켜주는 EU 농업회의소독일,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EU 각국의 농업회의소(landwirtschaftkammer)들은 농지와 농민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인 셈이다.주(州) 정부의 설치법에 근거해 설립된 농민자치기구로서 직업교육과 농업경영 지도상담이 고유업무이다. 아울러 주정부에게 위임, 수탁받은 농림사업을 집행한다.특히 농지의 감소를 막고 난개발을 규제하면서 농지관리를 책임진다. 품목별 생산상한제(쿼터제)를 통해 적정 생산자(농민) 규모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한다. 그래서 결국 모든 농민의 생계와 자존심을 지키는 믿음직한 비빌 언덕 노릇을 한다.카길을 비롯한 5대 곡물메이저, 델몬트, 몬산토 등 다국적 농기업들은 전세계의 농산물 유통부터 가공, 생산기반까지 독점하고 있다. 이에 맞서 EU는 그 대응전략이자 무기로 직불금이라는 혁신적인 카드를 꺼내들었다. 공공재로서 농업을 지키기 위해, 친환경 농산물을 생산하는 것은 물론 토양, 기후 등 환경을 보전하고 농촌의 전통, 문화, 경관을 보전하는 농업의 공익적 역할과 다원적 기능에 대한 국민적인 공감대부터 탄탄히 구축했다.이때 직불금 정책을 실행하는 핵심전략은 바로 시행주체가 누구인가에 달려있다. EU는 정부가 아니라 농업회의소를 직불금 제도의 시행주체로 결정했다. 겉으로는 정부와 협치(거버넌스)를 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속으로는 자국농업 보호정책 및 지원에 대한 규제라는 WTO의 감시와 시비를 피해가려는 고도의 전략적인 포석을 둔 것이다. UR과 WTO출범 이후에는 대외농정에 대응하는 자치기능을 한층 강화하고 있다.이같은 유럽의 농업회의소는 산업혁명 이후 농업 위축에 반발한 농민운동, 민주화운동의 성과물로서 법적, 제도적 농정참여기구이다.정명채 박사는 농업회의소 설립에 부정적이거나 비협조적인 정부와 기업, 농협중앙회 등의 방해도 이겨내 농업예산과 농업기관과 농지를 지키기 위해서 농업회의소를 반드시 설립하자고 늘 호소한다.△주인인 농민들이 농정을 책임지는 슈바츠 농업회의소바로 이런 EU 농업회의소의 모델이나 교과서 같은 사례를 알프스 자락의 산골마을에서 목격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 티롤주의 주도인 인스부르크에서 동쪽으로 백리쯤 떨어진 로트홀츠(rotholzt)마을이다. 농업과 농촌의 주인인 농민들끼리 자치하는 슈바츠(schwaz) 군단위 농업회의소이다. 티롤주 농업회의소 산하 3개 지역, 9개 시군단위 농업회의소의 하나다.오스트리아의 다른 농업회의소와 마찬가지로, 농민 기술 지도, 농업정책 지원, 교육, 인증 등 우리의 농업기술센터가 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래서 이 지역엔 농정과나 농업국 공무원을 따로 두지 않는다. 농업국이 하는 역할을 온전히 농업회의소가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농업회의소장은 지자체장의 통제나 간섭을 받지 않는다. 6년 임기의 농업회의소 소장 또는 회장은 정규 공무원이 아니라 농민들 손으로 직접 선출한 선출직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오직 농민만 출마할 수 있다. 관의 통제를 받고 지배당하기는 커녕, 오히려 지자체장보다 상위의 기관으로 권한을 행사하고 지역에서 대접받는다.농민은 모두 농업회의소에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한다. 물론 연 40~100유로의 회비도 납부해야 한다. 로트홀츠마을의 프리히너호프(prichnerhof) 제빵농가도 슈바츠 농업회의소의 회원으로 오스트리아 최고의 빵맛을 내기까지 농업회의소의 지도와 지원이 큰 도움이 됐다. 사소한 포장지마다 슈바츠 농업회의소 회원농가라는 자랑스러운 표식이 선명하다.헬무트 트락슬러 슈바츠군 농업회의소장은 당연히 농민출신으로 농민들이 투표로 선출한 직선 회장이다. 회의소의 직원은 명실공히 농업 각 분야 전문가로 구성된다. 정년이 보장되는 준 공무원 신분이다. 농업회의소의 인건비 등 예산은 전액 정부에서 지원한다. 행정은 필요한 예산만 지원하는 이른바 팔길이의 원칙(arms length principle)을 엄수한다.■ 국내 농어업회의소 추진, 시범사업형 아닌 유럽형 설립해야2016년 8월, 김현권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비례대표)은 농어업회의소의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발의했다. 농어업인의 경제적사회적 권익을 대변하는 농어업계의 대표기구로서 시급하다고 판단한 것이다.이전의 법안과는 전국농어업회의소 설립을 위한 동의기준을 30개 시군에서 20개 시군으로 낮춘 것, 그리고 직업능력개발과 교육훈련을 사업목적에 추가한 것이 큰 차별점이다.2016년 현재 진안, 나주, 거창 등 농식품부가 선정한 17개소의 농어업회의소가 설립되었거나 준비 중이다. 충남은 자체적으로 논산에 농어업회의소를 선정해 시범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시범사업 수준에 머물러 있다. 농식품부는 회원가입률이 저조하고 개선사안도 많아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다며 법제화 시기를 늦추고 있다.EU 등 농업선진국의 농업회의소는 공법에 의한 유일한 농업인 대의기구로서 확고한 위상을 확립하고 있다. 따라서 농정자문 등 농업회의소의 기능과 역할을 제도화하고 농업인 대의기구로서 대표성을 부여하자면 법제화가 필수적이다.돈도 문제다. 농업회의소의 고유사업을 안정적으로 수행하려면 재정기반이 안정되어야 한다. 지자체장의 개인적 의지와 취향에 따라 사업이 왜곡되는 파행적 사고도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 우선, EU처럼 농업회의소장의 신분과 지위는 지자체장으로부터 독립되어야 한다.그래서 가능하면 관의 물질적 지원에서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그러자면 회원들의 회비로 재정의 기초와 뼈대를 구축할 수 있어야 한다. 기존 농정기구와의 업무 중복과 상충요인을 최소화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따라서 사실상 농민 자치에 가까운 자생적, 자율적 사업모델 정립이 관건이다.농업회의소가 농업인 자조조직이자 대의기구로서 공익적 위상을 확보하기 위한 필수적인 선행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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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1.17 23:02

[문화&공감] 고창 학교-마을 진로교육박람회

온 마을사람이 아이 하나를 함께 키운다 고 한다. 아니, 했다가 맞다. 마을의 소멸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마을에서 키울 아이들의 흔적을 찾기 어려워진 세태에, 마을사람들이 어울려 아이를 키운다니, 요즘 세태에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다.배움을 매개로 학교와 마을공동체가 하나로 어울리던 시절이 아스라하다. 마을 사람 모두가 하나로 뛰어놀던 학교 운동회의 왁자지껄한 풍경, 마을 행사였던 학교 입학식이며 졸업식 풍경. 이제는 모두 옛 이야기 속에 남았다.△야단법석에서 세상을 배웠던 그 많던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 그림책으로도 동화책으로도 꽤 이름이 알려진 독일 옛 이야기이다. 어떤 마을에 쥐가 들끓어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대책을 찾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때 마을에 찾아온 남루한 차림의 사나이, 피리부는 사나이가 제안한다. 금화 천냥! 마을사람들은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이의 피리소리를 따라 쥐떼가 모두 사라진다. 간단히 문제가 해결되자 마을사람들은 약속을 뒷전으로 물리고 되레 사나이를 쫓아내고 만다. 그런데, 그이가 부는 피리소리를 따라 마을 아이들까지 모두 사라진다. 종적을 감춘 그 아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우리에게 하멜른의 피리소리는 수도권 집중, 경제적 불균형이 낳은 인문불평등, 교육불평등이다. 사라진 아이들, 점점 더 사라지는 아이들을 되찾아오는 길은 영영 없는 것일까.△마을과 학교가 어울려 부르는 화음, 방과후마을학교부터마을에서 학교에서 천천히 들려오는 피리소리. 다시 아이들을 불러 모으는 건강한 야단법석이 피어나고 있다. 학교와 마을이 함께 아이들을 키우는 그 방식이다. 전라북도교육청(교육감 김승환)에서 몇 해 전부터 진행하는 마을학교프로그램이, 대표적인 학교와 마을 협력사례다. 특히 초등학교에서 방과후마을학교라는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학교의 정규 교과시간이 끝나면, 그 뒤 방과후 프로그램을 마을사람들이 주체가 되어 책임지는 방식이다. 교사들은 교과 수업을 준비하거나 점검하는데 더 집중하고, 그 예산과 역할을 마을주체로 확장하는 것이다. 학교 교육의 일부를 마을이 나눠 갖는 방식, 그야말로 마을이 아이를 키우는 것이다. 이 추세는 마을이 교육의 한 주체로 자리잡아가는 만큼 확산하는 추세다. 마을에 누가 있어, 교육의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이 간단치 않은 문제를 해결해가는 사건이 고창에서 벌어지고 있다. 고창교육지원청(교육장 김국재)과 고창공동체협의회가 함께 준비해, 지난 11월 11일과 12일 이틀 동안 진행한 〈학교-마을진로교육박람회〉이다.△마을과 학교, 지역의 기관이 함께 여는 마을-학교진로교육박람회군단위 작은 커뮤니티에서 교육박람회를 진행하는 일이 흔한 일은 아니다. 게다가 진로와 연계한 교육박람회는 더욱 드물다. 중심이 되는 교육기관(지역교육지원청)만이 아니라 지역의 크고 작은 공동체들이 함께 준비하는 진로교육박람회는 더더욱 드물다. 학교 교육주체와 마을사람들이 함께 준비해, 지역 어린이청소년들에게 진로의 방향을 제시하는 진로교육박람회는 작년에 이어 두 번째다. 공간으로는 고창실내체육관이 군립체육관으로 대폭 넓어졌고, 기간도 하루가 더 늘어난 이틀이다. 참여 기관과 공동체가 차린 부스공간도 25개에서 50개로 배가 되었다. 그야말로 괄목상대(刮目相對)다.고창 학교-마을 진로교육박람회는 올 봄 기획을 시작했다. 기획의 시작은 학생들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바탕으로 꿈이 실현되도록 돕는 학교 밖 학교 역할(교육장 김국재)로 부터다. 학교 밖 학교란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옛말의 2016년 버전이다.△마을체험과 진로교육이 만나 무한 변신하는 현장스물여덟 개 크고 작은 지역공동체는 마을과 문화, 마을과 음식, 마을과 산업, 마을과 예술로 나뉘어, 각자 공동체가 가진 이야기와 체험거리를 진로와 연계해 배치되었다. 진로와 맥이 닿는 지역의 학교(항공, 원예 등 특성화 고교)와 기관(고창경찰서, 고창소방서, 고창문화원, 35보병사단고창대대, 국제티클럽, 고창청소년복지센터 등)이 함께 자리했다.지난 9월 27일 고창지역 초중고 교사들을 초대해 미니 박람회를 먼저 열었다. 40여학교 60여 교사들이 참여해 고창지역 생산, 가공, 유통, 문화, 예술, 교육 공동체들이 어떤 체험으로 진로와 만나는지 현장에 참여해 열띤 이야기꽃을 피웠다.11월 11일과 12일은 사전신청자 600여명과 현장신청 400여명의 학생, 모두 1000여명의 학생들에 학부모, 교사들이 참여해 대규모 진로체험의 장이 되었다. 고창의 어린이청소년들은 이 자리에서 색깔 있는 농부로, 유기농 우유로 만드는 치즈메이커로, 건강한 보리빵을 만드는 쉐프로, 흙과 물, 불의 감성을 배우는 도자기예술가로, 커피향 전하는 바리스타로, 식용부터 애완까지 다양한 빛깔 곤충연구가로, 지역에서 나는 재료로 천연 화장품을 만드는 아트메이커로, 지역의 소식을 세상에 알리는 기자로, 염색부터 목공까지 생활예술가로 무한 변신해보았다. 하멜른의 피리소리와 함께 사라질지도 모르는 1000명의 아이들이 그 무한변신을 체험하며 무엇을 보았을까? 무엇을 느꼈을까?△지역에서 자란 아이가 지역 일꾼이 되는 건강한 연쇄작용자유학기제 진로체험이 차차 정착되어가고 있다, 학교교육에서 체험교육의 비중이 커져가고 있다 할 때 그 체험교육 공간은 지역이 아니라 대도시 직업체험센터가 전부였다. 지역에서 자라는 어린이청소년들이, 우리에게는 없고 대도시에는 있는 것에 익숙해지는 첫 단추다. 결핍을 먼저 배우는 것이다. 우리 곁에도 이렇게 좋은 삶의 현장이 엄연히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깨우치는 계기가, 마을사람들과 마을의 기관이 학교와 함께 마련한 진로교육 공간으로부터다. 우리 어버이의 삶이 대한민국 전체를 고루 건강하게 하는 중요한 고리라는 사실을 깨우치는 자리다. 지역에서 나고 자라고 삶의 가치를 배운 아이가 제가 태어난 지역에서 튼실하게 자리잡고 살아가는 건강한 연쇄작용이 시작되는 자리다.마을이 아이를 키운다고? 아직은 아련한 추억 속 이야기다. 그 아스라한 안개가 천천히 걷히고 있다. 방과후마을학교, 어울림학교, 학교-마을진로교육박람회 같은 작은 힘들이 절대로 깨지지 않을 철옹성을 조금씩 허물어뜨리고 있다. 저 가까이에서 하멜른의 피리소리가 다시 들리고, 운동회 왁자지껄 사람들 사이로 아이들 웃음소리가 번지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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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1.15 23:02

고향서 농사 지으며 악기 만드는 현악기장 박경호 씨 "악기 만드는 건 새로운 소리 찾아가는 과정"

인터뷰 약속이 있던 날 아침, 도착하는 시간을 알리느라 문자를 보냈다. 곧바로 답이 왔다. 그 시간에는 고구마를 캐야 하니 오전에 도착하면 좋겠습니다.부안에서 악기를 만드는 박경호씨(47)의 삶이 더 궁금해졌다. 그는 이탈리아의 악기제작학교 굽비오에서 악기제작을 제대로 공부한 현악기장이다. 한국에서 서양악기를 만드는 사람, 그것도 고향 부안에 내려와 농사를 지으며 자기만의 현악기를 만드는 그의 존재는 특별하다. 1990년대 말 이탈리아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2002년부터 지금까지 그는 바이올린을 만드는 일에만 매달렸다. 서울에서 10여년을 보내면서 그는 적지 않은 악기장들이 걷는 평탄한 길 대신 외로운 자기만의 길을 선택했다. 새로운 소리를 찾아가는 고난의 길이었다. 유학에서 돌아와 주목받았던 그를 새악기에는 관심 없는 한국 연주자들은 금세 외면했다. 악기가 팔리지 않았지만 악기를 수리하는 일만으로도 먹고 사는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여건. 그러나 기존 악기의 소리를 복원하는 일에 자신의 열정을 쏟고 싶지 않았다.작업실 임대료도 내기 어려울 정도의 궁핍했던 시간이 찾아왔다. 악기를 만드는 일에 회의감이 들었지만 그럴수록 새로운 소리를 내는 나만의 악기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굳어졌다.2012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에 집을 짓고 정착했다. 더 외로운 싸움이 시작됐다. 새로운 모형과 새로운 소리를 지닌 바이올린이 두 평 남짓한 그의 작업실에서 태어났다. 지난해 여름 오스트리아 카린시안 국립음악원 교수가 작업실을 찾아왔다. 기존의 질서를 완전히 깨트린 파격의 바이올린과 현악기들을 주목한 그는 오스트리아 전시를 제안했다. 지난 5월 그의 악기들이 유럽의 연주자들을 만났다.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박씨의 바이올린이 생명을 얻는 시간이었다.자신이 만든 악기가 특정한 공연장에서만 연주되지 않고 누구나 함께 할 수 있는 광장에서 연주되는 악기가 되기를 바라는 그는 용기와 힘을 얻었다.인터뷰는 흥미로웠다. 한국에서 서양악기를 만든다는 것, 그것도 부안의 한 시골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악기를 만드는 그의 삶은 가난했으나 풍요로웠다.-농사를 많이 짓습니까.고구마 농사 400평 정도 짓는데 그것도 쉽지 않네요. 고구마를 캐야하는데 비가 많이 와서 기계로는 추진 흙을 털어내지 못하거든요. 사람 손으로 캐야하는 상황이어서 친구들이 날 잡아 도와주러 왔어요. 오후에는 고구마를 캐야 합니다.-농사일과 악기를 만드는 일을 함께 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나쁘지 않습니다. 악기 만드는 일에만 전념할 수 없지만 필요한 만큼 노동을 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으니 좋아요.-흙집의 구조가 독특하면서도 편안합니다. 직접 지으셨다고 하던데요.사실 집 짓는 것을 구경조차 한 적이 없었는데 그냥 할 수 있겠다싶더라고요. 눈으로 익히고 책으로 배우면서 했습니다. 마무리하면서 손을 좀 빌렸을 뿐 아주 천천히 제 손으로 지은 집이지요. 덕분에 대단한 시설을 하는 것도 아닌데 2년이나 걸렸습니다.(웃음)-경험에 기대지 않고 새로운 일을 하는 것에 대한 의욕이 남다른 것 같습니다.할 수 있겠다 싶으면 무조건 달려드는 습성이 있습니다. 무모하다 싶은데도 또 그렇게 나서면 일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고생은 하지만요.-악기 만드는 일도 그런 열정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여기 있는 바이올린은 기존 악기와 모양이 전혀 다르군요. 다 연주가 가능한 것들입니까.물론입니다. 제가 새로운 악기 만드는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새로운 모형과 새로운 소리를 찾는 일이죠. 악기마다 담고 있는 사연이 다르니 소리도 각각 다른 소리를 갖게 되는데, 기존 악기와 달라서 선뜻 연주하기가 쉽지는 않을 겁니다. 연주자에게도 새로운 시도가 되겠죠.-악기가 꽤 많은데 소장하고 있는 악기가 많은 것은 그만큼 판매가 잘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 아닌가요.그렇죠. 악기가 판매 되는 환경을 생각하면 새 악기를 제작할 명분이 없습니다. 그러나 악기가 팔리지 않는다고해서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지요. 작업을 꾸려 가는데 어려움이 많지만 팔리는 만큼만 만든다면 좋은 악기를 만들 수 있을까요. 마음을 비운지 오랩니다.-연주자 수적 규모로 보면 악기가 팔리지 않는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여러 가지 원인이 있는데 우선 연주자들이 새악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올드나 모던악기를 선호하죠. 그런데 연주자들이 잘 모르는 부분이 있습니다. 100년 이상 된 올드 악기나 100년 미만인 모던 악기가 모두 수제작은 아니거든요. 연주자들이 갖고 있는 악기 중에서 수제작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검증을 해보지는 않았지만 85프로 정도는 공장제일겁니다. 수제작이라해도 한사람이 전 과정을 도맡아 제작한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만들어서 조립하는 형식이지요. 18세기 19세기의 악기들 거개가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그런 악기들이 지금 전 세계를 올드나 모던이란 이름으로 휩쓸고 있거든요. 모두 수제로 둔갑해서요.-언뜻 생각하기에는 연주자들이 자기만의 악기로 자기만의 소리를 만들어가는 것을 지향할 것 같은데 의외입니다.새악기의 장점이 바로 거기 있죠. 연주자가 자기만의 소리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 올드나 모던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소리잖아요. 물론 장단점은 있겠죠.-연주자들에게는 새악기가 부담스러운 대상일 수도 있겠습니다.그렇겠죠. 새악기는 길들여지지 않는 그 자체의 소리를 갖고 있으니까요. 바이올린을 제대로 만들려면 나무를 10년 정도는 말려서 악기를 깎습니다. 그 과정이 또 2년 걸립니다. 제 경우는 그렇습니다. 좋은 연주자라면 악기장이 만들어가는 2년 동안의 과정의 의미와 가치를 잘들여다보아야 합니다.-나무를 깎고 줄을 걸고 색을 칠하는 과정이 2년이나 걸린다니 악기 하나를 만들어내는데 대단한 공력이 필요하군요.저는 악기를 만드는 과정을 소리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생각합니다. 소리를 찾다보면 계속 새로운 소리가 나오거든요. 연주자가 원하는 소리가 있다면 그런 소리를 찾아 악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죠. 예를 들면 강한 소리나 부드러운 소리가 똑같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니까요.-좋은 소리가 따로 있습니까.좋은 소리는 듣는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개인마다 좋아하는 소리가 다른데 어떤 소리가 좋은 소리인가를 규정하는 일은 옳지 않아요. 그런점에서 보면 아마티나 스트라디바리, 과르네리 등 세계적인 3대 바이올린 명장의 악기가 꼭 좋은 소리를 낸다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좋은 소리와 좋은 악기의 경계가 궁금해지는군요.누군가 좋아하는 소리를 내는 악기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이유도 거기 있어요. 왜 꼭 기존 악기소리를 닮은 악기를 만들어야하는가를 고민해봤는데 만들어진 소리를 따라다니면서 악기를 복원하는 일은 의미가 없더라고요. 그런 과정에서 새로운 소리를 가진 악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목표가 되었지요.-바이올린의 새로운 모형을 개발하신 이유겠습니다.새로운 소리에 관심을 갖게 되니 자연히 모형을 바꾸어보고 현도 바꾸어보면서 다양한 바이올린을 제작하게 되었죠. 개량악기가 된 셈인데, 따지고 보면 바이올린의 역사도 불과 400년이거든요. 그 과정에서 계속 발전해온 것인데, 지금까지의 바이올린은 오늘의 극장 조건에서는 수명을 다했다고봐요. 공간이 너무 크거든요. 바이올린의 역사를 돌아보면 극장 악기가 아니라 거실이나 살롱 같은 작은 공간용이었거든요. 지금 우리가 듣는 연주는 악기의 제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장치(스피커)를 거친 소리를 듣는 셈이지요.-바이올린 3대 명장 이후 새로운 소리로 독보적인 반열에 이른 악기장은 없었습니까.제작자는 많아요. 그 대부분이 기왕의 소리를 재현해내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악기 모양을 바꾸어 새로운 소리를 찾으려했던 제작자들도 있지만 빛을 못 봤어요.-팔리지 않는 악기를 만든다는 것, 외롭고 힘든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굳이 이 길을 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그동안 판매된 악기도 있지만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15년 동안 한결같은 상황이니 좌절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이겠죠.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와서는 자신감이 있었거든요. 내가 만들면 연주자들이 찾겠지 하는. 그런데 정직하게 만들어낸다고 팔리는 것이 아니었어요. 오히려 정직하게 하면 악기가 더 팔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죠. 안타까운 현실입니다.-현재 유통되는 바이올린 상당수가 수제작이 아니라고 말씀 하셨는데 기계로 만든 것과 수제작은 많은 차이가 있지 않을까요.소리의 오묘함, 그 차이가 크죠. 소리는 만들어지는 것인데 제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밀가루 반죽을 오래하면 쫄깃쫄깃해지듯 손으로 소리를 생각하며 만들어낸 악기의 소리는 쫄깃쫄깃해지는 특성이 있어요. 그런데 공장제는 한계가 있거든요. 더 이상의 발전이 없는 것이죠.-찍어내는 것의 한계일 것 같습니다. 그래도 공장제를 찾는 연주자들도 있을 것 같은데요. 가격의 차이 때문이겠지요.보급형 바이올린은 대량으로 생산해내는 것이 맞습니다. 제가 이야기 하는 것은 공장제가 무조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공장제가 수제작으로 바뀌어 판매되는 유통 현실이에요. 올드니 모던이니하며 연주자들이 가지고 다니는 악기만 해도 공장제가 많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수제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지요.-이런 환경에서 고집스럽게 이어오는 박경호식 바이올린의 특성이 궁금해집니다. 바이올린은 나무도 중요하겠죠.나무가 50%를 좌우한다고 봐요. 어느 환경에서 자라고 어떤 과정으로 거쳐 재목이 되었는가가 중요하죠. 나머지 50%가 목공(제작)을 하는 사람의 기술력입니다.-어떤 나무를 사용합니까.저는 알프스나 발칸반도 나무를 사용합니다. 기온의 차가 심하지 않은 지역이죠. 그런 환경에서 자란 나무는 순하고 온화(?)합니다. 겨울에도 영상 2-3도 정도에 머무르는 지역에서 자란 나무를 선호하죠.-소리도 그런 소리를 좋아하시는군요.강한 소리보다는 부드러운 소리를 좋아하는 편입니다. 젊었을 때는 힘 있고 강한소리를 좋아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달라지더라고요.(웃음)-만들어놓은 바이올린의 색상도 다 다른데 칠도 직접 하십니까.줄을 걸고 칠을 해 완성하기까지 모든 과정이 제 손에서 이루어집니다. 안료를 사다 색깔도 제가 내는데, 그 안료들이 대개 인도나 아프리카에서 생산되는 것들이에요. 그래서 저는 칠 자체가 동양으로부터 온 것이 아닌가 추정합니다.-그런 과정을 거쳐 색상도 다양하고 모양도 독특한 박경호 바이올린이 탄생하는 것이군요. 새로운 악기에 대한 도전 정신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개인적인 성격도 있고, 유학시절 스승의 영향이 컸습니다. 늘 정해진 길로만 가지말라며 네 것을 만들라고 하셨거든요. 한국에 돌아와 변형악기를 만들기 시작했던 것도 창의력을 살리라고 했던 스승의 가르침 때문이었을 겁니다.-모형도 독특하지만 바이올린이 모두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이 흥미롭습니다.악기마다 사연을 갖고 있으니까요. 한반도 아리랑으로 이름을 단 악기는 모든 악기의 중심인 밸런스를 깬 악기예요. 밸런스 자체를 깨면 소리가 달라지는데 새로운 소리를 추구해보고 싶은 욕망으로 제작한 것입니다. 일부러 좌우 밸런스를 깨버렸는데, 나름대로의 심오한 의미가 있어요. 아리랑 1,2호로 이름 붙인 바이올린은 하나는 북쪽지형을 하나는 남쪽 지형을 형상화해서 각각 고음과 저음을 갖게 된 두 녀석이 만나 연주를 했을 때 음의 조화를 융화의 소리로 만들어보고 싶었어요.-연주자들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대상일 것 같습니다.맞아요. 우리나라 연주자들은 거부감을 보입니다. 물론 연주를 해보려고 하지도 않죠. 그런데 지난 5월 오스트리아 전시회에서 유럽 연주자들은 큰 관심을 갖더라고요. 서로 연주를 해보기도 하고.-지금까지 만든 바이올린도 그렇거니와 앞으로도 판매는 한계가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악기는 연주자를 만나야 생명을 얻는 것일 텐데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악기 제작과 관련해 찾아오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악기제작 학교를 만들자는 제안도 있습니다. 때가 아니라고 답하죠. 지금은 열심히 내 악기를 만드는 일에만 전념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악기는 힘이 있을 때 만드는 것이 맞는 것 같아요. 힘이 떨어지면 소리도 떨어지거든요.-오히려 나이가 들면 악기 제작에 노련함을 더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스트라디바리나 과르넬리도 전성기 5~6년 동안 만든 악기소리가 좋습니다. 노련미도 그렇고 힘이 어느 정도 붙었을 때였겠죠. 제게는 지금이 그 시기가 아닌가 싶어요.-이야기를 듣다보니 고단한 삶에서도 악기를 만드는 일을 생업으로 삼지 않는 것이 박경호 바이올린을 만들어내는 힘인 것 같은 아닌가 싶습니다.주위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도 좋겠다 하지만 사실 고뇌가 큽니다. 악기를 만드는데도 경제력이 우선이니까요. 제가 시간나는대로 벌이를 위해 노동을 나가는 것도 그 이유에서입니다. 그렇게 일하고 벌어오는 돈으로 줄을 사고 나무를 사 악기 하나를 만드는 과정, 그 자체가 제게는 의미 있는 과정이고 삶의 의미입니다.● 악기장 박경호씨는 패션 디자이너 꿈꾸다 이탈리아서 만난 새 인생악기장 박경호씨는 부안군 동진면 봉황리가 고향이다. 9대째 살아온 집터에서 태어나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살았다.농사꾼이었던 아버지는 짚공예와 목공예에 조예가 깊었는데, 그는 지금도 아버지가 엮어냈던 다양한 짚공예 물건들의 맵시와 아름다움을 기억하고 있다.어린 시절 동네에 목수아재가 살았다. 나무 냄새를 좋아했던 그는 나무로 만드는 온갖 물건들이 흥미로웠다. 그는 어린 시절을 돌이켜 자신이 악기장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김제로 고등학교를 갔지만 공부와는 담을 쌓고 기타와 여행을 즐겼다. 대학은 당초부터 관심이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고가 없는 서울로 올라갔다. 어머니가 쥐어준 3만원이 전 재산이었다.신설동에 있는 복장학원에서 2년 동안 양장일을 배워 패션디자인회사에 취직했지만 안겨진 것은 디자인이 아닌 백화점 영업직이었다. 4년 동안 영업일을 하다 보니 디자인에 대한 욕망이 더 커졌다. 마침 디자인실에 자리가 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바꾸었다. 4년 만에 디자인실장을 넘볼 수 있는 직책까지 올라섰다.안정되었다 싶으니 개인 사업에 마음이 갔다. 어느 정도 성공궤도에 올라섰지만 아이엠에프 바람으로 부도가 났다.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유럽 여행을 떠났다. 1999년, 그의 나이 스물아홉이었다.무작정 떠나온 여행이었지만 미래를 위해 돌파구를 찾아야했다. 이태리 패션학교 유학을 고민하고 있던 그는 페루지아를 여행하던 중 악기 제작하는 곳을 들르게 됐다. 굽비오 현악기제작학교였다.마침 신입생을 모집하고 있던 굽비오에 원서를 냈다. 영어도 이탈리어도 못했던 그의 무모한 도전이었다. 뜻밖에도 굽비오는 그를 합격시켰다.한국인으로는 굽비오 1호 유학생이 되었다.아내에게는 패션학교에 합격했다고 숨기고 유학을 떠났다.후에 꼴찌로 합격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3년 수학과정에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았다.교수들은 언어가 통하지 않는 동양인 제자를 위해 그림까지 그려가며 가르쳤다.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언어를 공부하고 악기를 만드는 일로만 보낸 3년은 삶을 바꾸어놓았다.2002년 굽비오를 졸업하고 귀국한 그는 서울 방배동에 경호 Park 현악연구소를 열었다.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돈도 벌 수 있는 여건이었지만 부와 명성을 쫒는 대신 고행과 인내가 따르는 악기장의 길을 택했다.악기 수리에 눈을 돌리지 않으니 작업실 임대료도 못내는 처지가 되었다.새악기, 더구나 한국인이 만든 악기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 환경에서 그의 악기는 주인을 만나지 못한 채 소장품(?)으로 쌓여갔다.2007년 고향 부안에 내려가 흙집을 짓고 지내다 다시 올라왔으나 악기제작에만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은 더 어려워졌다.2012년 어머니가 작고하시자 아예 악기들을 챙겨 고향집으로 내려와 작업실을 열었다.2014년 서울숲 커뮤니티에서 그를 초대했다.오로지 자신의 손으로만 모든 과정을 거쳐 완성해내는 그의 악기들이 비로소 대중들과 만난 시간이었다.지난 여름, 그는 오스트리아 카린시안 콘서바토리에서 두번째 전시회를 가졌다. 악기마다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그의 악기들을 유럽의 연주자들은 주목했다. 앞으로 5~6년 악기제작에만 전념하겠다는 의지가 더 단단해졌다.

  • 기획
  • 김은정
  • 2016.11.11 23:02

[글Pic] 이리역 폭발사고 39주년…'달콤 씁쓸' 11월 11일

11월 11일은 연인들,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빼빼로데이다. 좋아하는 지인들끼리 달콤한 초콜릿을 선물하며 우정과 사랑을 확인한다. 달달함, 얼마나 낭만적인가.그러나 아쉽게도 어떤 이들에게는 11월 11일이 더는 낭만의 빼빼로데이가 아니다.11월 11일은 농업인의 날이다. 농민들의 자부심을 고취하고, 농업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정부가 만든 법정기념일이다. 2006년부터는 이날에 가래떡 데이란 이름이 붙었다. 11월 11일이 가래떡 데이가 된 것은 쌀 수입과 쌀 소비 감소 등 영향으로 침체기에 빠진 쌀산업 보호 필요성이 갈수록 커진 탓이다. 가래떡 데이 단 하루만이라도 쌀로 만든 제품을 많이 소비해 달라는 농부들의 염원이 담겨 있다. 안타깝고 우울한 날이다.11월 11일은 또 천지를 뒤흔든 이리역 폭발사고가 발생한 날이다. 이 사고 또한 성장우선주의 대한민국에 만연했던 안전불감증, 부정부패의 소산이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사회가 반성하고 나아가야 할 또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다.당시 참사를 직접 겪은 익산 시민들로서는 꿈에서도 떠올리기 싫을 만큼 충격적이었던 이리역 폭발사고 39주년을 맞아 당시 사고를 되짚어 본다.1977년 11월 11일 금요일 이리역(現 익산역)은 평온했다. 호남선과 전라선이 갈라서는 철도교통의 중심역으로 자리 잡은지라 여객열차와 화물열차가 전주역에 비해 훨씬 빈번했지만 역을 통과하는 열차들은 정해진 시간과 신호에 따라 목포로 가고, 서울로 갔다.한국-이란 축구경기이날 밤이다. 텔레비전에서는 월드컵 축구 한국과 이란 A매치가 생중계되고 있었다. 당시 한국축구는 이란에 크게 열세였다. 1974년 9월 테헤란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서 이란과 첫 대결을 벌인 한국축구는 2대 0으로 완패했다. 그 3년 뒤인 77년 이날, 아르헨티나 월드컵 최종 예선 경기에서 만난 한국과 이란의 경기는 온 국민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13만여 명의 이리 시민들도 상당수가 텔레비전 앞에서 축구경기를 보고 있었다. 이날 테헤란 원정경기에서 한국은 이영무 선수가 2골을 넣었지만 역시 2골을 허용하고 말았다.삼남극장 하춘화 리사이틀똑같은 시각, 이리역 코앞에 있는 이리시 창인동 삼남극장에서는 700여 명의 관객이 모인 가운데 인기 가수 하춘화 리사이틀이 열리고 있었다. 코미디언 이주일 사회로 진행된 이날 쇼에서 하춘화는 히트곡을 10분가량 부른 뒤 분장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주일 씨도 휴식하며 넥타이를 고쳐매고 있었다.세상은 그렇게 평온했다.밤 9시 15분 꽈광 꽝!!!테헤란 축구경기장, 한국과 이란팀이 멍군장군하며 골을 주고받는 치열한 접전이었다. TV 앞에서 응원하던 시민들의 손에는 땀이 배었다. 3년 전 분패를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한국팀이 이란 골문을 향해 강슛을 날리고, TV 앞 시민들이 골인을 염원하며 환호성을 울리는 그 순간이었다.꽈광! 꽝! 꽝!...천지를 뒤흔드는 요란한 폭음과 함께 천장과 벽이 무너지고 유리창이 깨져 파편이 튀었다. 평화롭게 축구경기를 시청하던 시민들은 안방에서, 가게에서, 사무실에서 아비규환에 빠졌다.가수 하춘화의 히트곡 열창으로 분위기가 한껏 달아오른 삼남극장 안.갑자기 꽈광하는 폭발음과 함께 2층 천장이 붕괴하면서 5명이 깔려 사망하고 100여 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다. 극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하춘화 씨도 벽돌 파편에 맞아 어깨 부상을 당했고, 함께 있던 이주일 씨도 벽돌에 머리를 크게 다쳤다. 이주일 씨는 느닷없는 재난 현장에서 하춘화를 등에 업고 극장 밖으로 대피했다. 훗날 하춘화 씨는 이주일 씨는 제 생명의 은인이라고 고마움을 표했다. 당시 이주일 씨는 무명이었지만, 이리역 폭발사고 이후 인기 코미디언으로 크게 성공했다.안전불감증1977년 11월 9일 인천에서 화약류를 잔뜩 싣도 광주로 향하던 한국화약(주)(이 회사는 훗날 '한화'가 된다. '한국화약'을 두 글자로 줄여보자)의 화약열차는 10일 오전 11시 31분 이리역에 도착했다. 곧이어 1605호 화물열차에 중계됐고, 이리역 구내 4번 입환대기선(入換待期線)에 섰다. 화약류 등 위험물을 적재한 화물열차는 역 내에 대기시키지 않고 곧바로 통과시켜야 하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이리역 측은 이를 지키지 않았다. 이른바 '급행료'와 연관돼 있다는 진술이 후에 나왔다.한국화약 호송직원인 신무일 씨(당시 35세)는 화약 수송이 늦춰지자 역 앞에 있는 식당에서 술을 잔뜩 마신 뒤 화약열차 안에 촛불을 켠 다음 닭털침낭 속에 들어가 잠을 잤다. 발끝이 뜨거웠을까. 어느 순간 신무일은 잠을 깼다. 일어나보니 촛불이 넘어졌는지 침낭과 화약상자에 불이 붙은 것을 보았다. 깜짝 놀란 그는 화약열차 밖으로 뛰쳐나와 불이야를 외치며 힘껏 달아났다.화약 호송 담당자인 그의 머릿속은 하얗게 변해 있었다. 화약열차 안에는 무려 30톤에 달하는 화약류가 실려 있다. 다이너마이트 상자가 914개나 실려 있다. 무려 22톤이다. 초산암모니아 상자도 200개(5톤)나 되고, 초안(硝安) 폭약 상자 100개(2톤), 뇌관상자 36개(1톤) 등을 합하면 모두 1250상자 30톤가량의 화약류다. 이게 한꺼번에 폭발하면. 끔찍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화재를 진압하기는커녕 불이야를 외치고선 달아났다.참혹한 현장9시 15분, 어둠 속으로 도주하는 신무일 뒤에서 엄청난 폭음과 함께 수많은 파편이 튀어 날았고, 폭발 충격과 파편 등으로 현장 반경 8㎞가 쑥대밭이 되다시피 파괴됐다. 이리역에서 불과 700m 떨어진 창인동의 한 가옥에는 10톤이 넘는 기관차 몸통이 날아와 집을 박살 냈을 정도였다. 사고 후 모습을 드러낸 폭발 현장도 참혹했다. 깊이 10m, 직경 30m가 넘는 거대한 웅덩이가 생겼고, 화약열차와 함께 입환대기선에 서 있던 열차들은 폭발 충격으로 뒤집혔다. 철로는 잘리고 엿가락처럼 휘었고, 그 엿가락들이 곳곳으로 날아가 모든 것을 파괴해버렸다. 이는 1945년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600분의 1 정도 폭발력으로 추정됐다.폭발과 함께 발생한 정전으로 갑자기 암흑천지가 되자 놀란 시민들은 손전등과 양초 등을 동원해 부상자를 응급조치했다. 시내 곳곳에서 경보 사이렌이 울렸고, 사람들은 건물 밖으로 대피했다. 625전쟁이 다시 터졌나, 지진이 일어났나 싶어 시민들은 공포에 떨며 밤을 지새웠다.이날 폭발사고 후 전라북도가 집계한 바에 따르면 사망 59명, 중상 185명, 경상 1158명 등으로 총 1402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이리역 근무 역무원과 열차 기관사는 물론 일반 시민들의 피해가 컸다. 가옥은 전파 811동, 반파 780동, 소파 6042동 피해로 집계됐다. 공공시설물을 포함한 재산피해 총액이 61억 원으로 파악됐다. 집을 잃고 모현동 일대에 마련된 천막생활을 하며 겨울을 나야 했던 이재민도 1674세대 7873명에 달했다.신속한 복구 조치폭발사고 후 당시 황인성 전북도지사는 전투복장으로 현장을 찾아 상황 파악 등 수습에 나섰고, 사고발생 1시간여 만인 10시 30분께 내무부에 상황 보고한 것으로 알려진다. 박정희 대통령도 이튿날 오전 육군 헬리콥터를 타고 이리에 도착, 도지사로부터 상황을 보고받았다. 정부의 복구 지원은 신속했다. 일요일인 11월 13일 최규하 국무총리 주재로 관계장관 회의를 개최했고, 청와대도 11월 19일 회의를 열어 신속한 복구지원을 결정했다. 육군 공병단이 투입되는 등 민관군이 신속한 복구에 힘을 모았다.아이러니하게도, 이리시는 폭발사고로 처참하게 파괴됐기 때문에 복구사업을 통해 신도시로 거듭날 수 있었다. 이리역이 신축됐고, 중앙동 간선도로가 4차선으로 뚫렸다. 모현동에는 1180세대 규모의 주공아파트가 들어섰다. 이 아파트는 2010년 재건축됐다. 사고 1년여 만에 140억 원이 투입돼 이리시는 그나마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다.솜방망이 처벌신무일은 도주했다가 시민들에게 붙잡혀 경찰에 인계됐다. 그는 1978년 2월 24일 전주지법 군산지원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화약열차를 역 구내에 대기시킨 철도 직원은 징역 8월을 선고받았다.이리역 폭발사고는 부안 위도 서해훼리호 사고, 전남 진도 앞바다 세월호 사고와 다를 바 없는 인재였다. 화약류는 통과시키고 역 구내에 두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 화약호송담당자가 만취상태에서 화약상자 위에 촛불을 켜둔 채 곯아떨어졌다. 실화 혐의 등으로 기소된 신무일은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냈음에도 불구, 징역 10년을 받았을 뿐이다.KTX 익산역으로 거듭나다이리역은 1912년 3월 6일, 대전~이리 간 호남선과 군산선 개통을 계기로 문을 열었다. 1929년 9월 준공된 역사는 이리역폭발사고로 무너졌고, 1978년 11월 10일 새 역사가 준공됐다.이리시와 익산군 통합으로 역명이 1995년 9월 1일부터 익산역으로 바뀌었다. 2008년 장항선 종착역이 군산역에서 익산역으로 바뀌면서 익산역은 충청 서부지역을 경유하는 상행선을 확보하게 됐다. 또 KTX 시대에 맞춰 진행된 신역사가 2015년 9월30일 준공됐다.2015년 4월 2일 고속열차(KTX) 호남선이 개통, 익산역은 초고속열차 시대를 맞았다. 익산역에서 출발한 KTX는 용산역까지 1시간6분만에 주파한다. 이어 오는 12월에는 수서발 고속열차(SRT)가 개통된다. 이에 따라 익산역은 용산발 23회, 수서발 20회 등 모두 43회의 호남선, 그리고 14회의 전라선 고속열차가 통과하는 중심역으로 우뚝 서게 됐다.국민의 고향역코스모스 피어있는/ 정든 고향역/ 이쁜이 꽃분이/ 모두 나와 반겨주겠지달려라 고향열차/ 설레는 가슴안고/ 눈 감아도 떠오르는/ 그리운 나의 고향역익산역은 순창 출신의 작곡가 임종수 선생이 학창시절에 황등역과 익산역을 오가며 통학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지은 대중가요 고향역에 얽힌 사연으로도 유명해졌다. 익산역 측은 수년 전부터 플랫폼에 고향역 노래를 흘려보내며 국민 애창곡이 된 고향역의 본향임을 알리고 있다. 역 광장에는 고향역 노래비도 건립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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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호
  • 2016.11.11 23:02

[참여&소통] 노인들의 성생활

요즘 노인들은 예전의 노인과 다르다. 의학의 발달과 급격한 고령화로 사랑에 대한 욕망도 젊은이 못지않다. 65세 이상 노인 3명 중 2명이 성생활을 하고 있고, 약물을 사용하는 경우도 크게 증가했다. 하지만 노인의 성(性)은 아직 사회적 편견이 존재하는 은밀한 화두다.△65세 이상 3명 중 2명이 성생활# 사례1 : 저는 올해 78세 남성노인입니다. 5살 연하 아내와 함께 50년 가까이 결혼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자식들 눈치도 있고 부모님을 모셨기 때문에 성생활이 그다지 원만한 편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자식들도 모두 출가시켰으며, 남들처럼 여행도 하고 취미활동도 하는 등 즐거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단지 아쉬운 점은 아내가 잠자리를 피하는 일입니다. 아내와 잠자리를 통해 성 욕구를 해결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을까요?# 사례2 : 영감이 하자는 대로 하는데 어떤 때는 많이 아파서하기 싫은데 영감이 하도 조르니까 어쩔 수 없어서 하지, 그러니 뭐 만족하겠어옆에 오는 것조차 싫을 때가 많아.#사례1은 전주 양지노인복지관이 운영하는 전주시노인성상담센터의 상담사례다. #사례2는 서울의 한 노인종합복지관에 나가면서 시간제 근로를 하는 66세 여성노인(남편은 70세)과의 면담사례다.보건복지부가 2012년 실시한 65세 이상 노인의 성생활 관련 설문조사에 따르면 노인 500명 가운데 성생활을 한다는 응답자는 66.2%(331명)로 나타났다. 또 다른 조사에서 남성노인의 67.0%, 여성노인의 39.5%가 성생활을 하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관계 횟수는 월평균 1.37회 정도. 반면 배우자 없는 노인은 72.4%가 성관계를 하지 않는다고 응답했다.이와 함께 한국소비자원 조사에 의하면 60대 이상 조사대상자의 56.1%가 배우자 외의 이성과 성관계 경험이 있고 36.9%가 발기부전치료제를, 61.9%가 비아그라를 구입했다고 답변했다.노년기의 성생활은 지나치지만 않으면 건강에 좋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삶의 만족도와 자신감을 높여주고 노년기의 고독감을 해소하는 윤활제라는 것이다. 치매예방과 면역력 향상은 물론 남성은 전립선, 여성은 자궁질환도 예방할 수 있다.△성범죄, 성병, 성매매 등 어두운 그늘하지만 노년기의 성은 남녀차이가 크다. 앞의 사례에서 보듯 남성은 육체적 관계에 치중하는데 반해 여성은 마음의 문이 열려야 가능하다. 더욱이 여성은 폐경기가 되면 질이 좁아지고 분비물도 바짝 말라 성교시에 통증과 출혈 등으로 성생활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남성은 신체접촉을 원하지만 여성은 스킨십이나 이야기를 나누는 등 심적 교감을 원한다. 상담센터에는 이 같은 차이를 호소하는 사례가 의외로 많다.한편 노인인구가 증가하고 성생활이 왕성해지면서 각종 어두운 그늘도 늘고 있다. 성범죄가 급증하고 성매매와 성병감염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보건복지부의 위 조사에서 35.4%가 성매매 경험이, 36.9%는 임질 요도염 등 성병에 걸린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박카스 아줌마로 대표되는 노인 성매매는 전주의 경우 한때 시청 뒤 선미촌이나 싸전다리 인근 선화촌이 유명했다.또 노인들의 성병 감염률도 급속도로 높아져 2011년에서 2015년 사이 80대 성병진료 환자수가 1507명에서 2410명으로 59.9% 늘어 20, 30대의 24.8%, 27.8% 증가와 대조를 이뤘다. 반면 노인들은 콘돔 등 성병예방기구에 대한 인식률이 낮았다.더불어 성생활에 대한 만족도는 낮아 성범죄로 이어지고 있다. 노인 성폭력 가해자수는 2011년 629명에서 2015년 1276명으로 2배 이상 늘었다. 강간과 강제추행이 대부분이다.△노인 부부관계 증진 프로그램 등 지원 있어야이러한 부작용을 극복할 대책은 무엇일까?경기도가족여성연구원의 안태윤 연구위원은 노년기 성문제 해결을 위한 지원 방안으로 △노인대상 성교육 지원 △노인전문 성상담 지원 및 노인전문 성상담사 양성 △노년기 부부관계 증진 프로그램 지원 등을 꼽았다.노인복지관을 중심으로 부부간 갈등을 해소하고 상호 존중하는 대화 및 관계증진 프로그램 등을 마련하고 노인들의 참여를 독려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노인복지관 등에서 실시하는 댄스스포츠가 인기를 끌고 있고 만남교실, 실버효도미팅 등도 운영되고 있다.일본의 경우는 자치단체에서 이성교제 주선에 나서기도 한다. 시청에 혼자 사는 노인을 대상으로 차(茶)동무 상담소를 설립해 신상정보를 등록해 뒀다가 쌍방 맞선을 주선해 준다. 또 혼자 사는 노인들을 찾아다니며 얼마나 외로운지, 우울하지는 않은지, 재혼의사가 있는지 등 설문조사도 하고 노인의 성고민 상담전화도 운영한다.우리의 경우 자치단체 중 유일하게 인천시가 2011년부터 인천노인종합문화회관에 위탁해 홀로된 노인들이 자연스럽게 사귈 수 있는 합독(合獨)사업을 벌여 17쌍을 맺어줬다. 하지만 지난해 하반기부터 남성노인의 신청이 없어 사업을 종료한 상태다.노인의 성은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늙어서 성욕이 없다고 말하는 건 내숭이라는 말처럼 노인의 성을 주책이나 남사스럽게 봐서는 안된다. 젊은 시절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성생활을 했다면 노년에는 은근한 잿불이나 반딧불 같은 사랑이 좋지 않을까 싶다.● [노인 성상담 실태] 男 28.6% 성기능 고민 女 18.7% 부부 성갈등전국적으로 노인 성상담실을 운영하는 곳은 인구보건복지협회와 노인복지관 등 다양하다. 하지만 체계가 잡혀있지 않고 전문성도 미흡한 편이다.오래된 통계이긴 하나 인구보건복지협회가 2010년 전국 노인을 대상으로 상담한 2515건을 분석해 보면 남성 76.5%(1931건), 여성 23.3%(584건)로 남성이 대부분을 차지한다.상담 내용은 남성의 경우 성기능 28.6%, 부부 성갈등 19.4%, 이성교제 10.5%, 자위행위 6.5%, 성충동 5.5% 순으로 나타났다. 여성은 부부 성갈등 18.7%, 이성교제 15.6%, 성기능 12.7%, 재혼 5.0%, 외도 3.4% 순이었다.남성노인이 성기능에 대한 고민이 많은데 비해 여성노인은 부부 성갈등이 높은 것을 알 수 있다.전주시의 경우 양지노인복지관과 안골노인복지관이 상담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2008년 문을 연 양지노인복지관 전주시노인성상담센터는 현재 전문교육을 받은 노년의 성상담사 5명이 번갈아 상담을 하고 있다.개인상담(전화 282-8899)와 공개강좌 뿐 아니라 부부관계 향상을 위한 황혼의 신혼부부학교, 노년기 남성의 건강을 위한 남성성공(性功)시대, 독거 여성노인의 내면 및 외모를 가꾸는 여(女)봐라 차밍스쿨, 운동회 형식의 실버미팅, 부부나들이 등의 집단상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또 2012년에 시작한 안골노인복지관 노인성(性)마음상담센터(전화 242-4377)는 노인 10~14명씩을 묶어 100분씩 10회에 걸쳐 부부프로그램, 홀로노인 친구만들기, 우울증 감소, 주관적 인지기능저하 방지, 명상프로그램 등 집단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두 상담센터를 이끌고 있는 이미선 씨와 남은정 씨는 부부사이의 갈등에 성문제가 도사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면서 대부분의 상담이 초기상담에 그쳐 아쉽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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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1.10 23:02

[전북일보 카드뉴스] 논에 웬 마시멜로? '곤포 사일리지'랍니다

논에 웬 마시멜로? 곤포 사일리지랍니다#표지.논에 웬 마시멜로가?곤포 사일리지랍니다#1.~마시멜로 이야기~#2.마시멜로는 전북지역의 대표적인 농산물입니다. 가을에 논에서 흔히 볼 수 있죠!#3.아, 저기 마시멜로 열매가 많이 열려 있네요! 껍질을 뜯으면 안에 조그만 마시멜로가 들어 있어요. 우리가 먹는 마시멜로는 바로 이것이랍니다.#4.는 농담!#5.저것의 이름은 곤포 사일리지입니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남은 볏짚을 돌돌돌 말아 만들죠.(지름 1.2~1.5m, 무게 400~500㎏)#6.왠지 쫄깃해 보이는 저 하얀 표면은 자외선 차단 코팅을 한 비닐인데, 이 비닐은 나중에 수거합니다.#7.그런데 이걸 만들어서 어디에 쓰는 걸까요?#8.(김원호 국립축산과학원 연구관)마치 김치를 담그는 것과 비슷하게, 이렇게 만들면 발효가 일어나서 소가 먹고 소화하기 좋게 됩니다.#9.이런 조사료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전체 볏짚의 약 80%를 차지한다고 해요. 축산 농가는 사룟값을 줄일 수 있어서, 벼 농가는 이윤을 더 많이 낼 수 있어 선호한다고 합니다.#10.하지만 볏짚 대부분이 마시멜로가 돼 버리면 부작용도 생긴다고 해요.#11.(농촌진흥청 관계자)볏짚에는 유기물이 들어 있고, 벼에 필요한 성분은 다 볏짚에 들어 있거든요. 그래서 볏짚은 2~3년에 한 번 정도는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12.(농촌진흥청 관계자)물론 그렇다고 조사료를 안 만들 수는 없죠. 상생이 필요한 겁니다.#13.볏짚에 모인 대지의 기운. 이것이 마시멜로의 정체였습니다.오늘의 탐구생활 끝!/기획 신재용, 취재 김윤정, 구성 권혁일, 제작 이권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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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1.09 23:02

[문화&공감] 완주 고산 '뮤직콘테이너'

일종의 대안예술학교이자 음악창작소입니다. 주체적인 음악인들이 맘껏 창작하고, 사람들과 함께 만나고, 하지만, 예술의 테크닉이 전부가 아니고, 음악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함께 느끼고, 성장하는. 이 컨테이너는 그것의 하나의 과정이라 할 수 있죠. 다시 한 번 그 길을 묵묵히 가는 정상현(44)대표의 말이 고산미소시장의 여유로운 휴일 날, 추운바람 가운데서 잠시 비치는 따뜻한 기운처럼 바람 속으로 스쳐갔다.전북지역의 음악인기획자로 지역밴드 음악인들에게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정 대표. 열악한 지역 인디음악시장의 한계 속에서, 스스로 밴드음악을 할 수 있는 공간과 음악인들의 주체적 활동을 통한 지역음악산업 선순환을 위해 노력해온 정 대표는 Made in Jeon-ju, Stayfoolish등으로 자신만의 음악 기획브랜드를 참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묵직하게 만들어왔다. 서울, 부산 등 인디밴드들과의 오랜 교류 속에서 다양한 연대활동을 해왔고, 아이엠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지역인디밴드 앨범제작 및 공연후원을 도와주고 있다.최근까지 전주 구도심에서 악기사를 하던 그는 작년에 완주 고산면으로 집을 옮겼다. 매번 그렇듯이 음악만 할 수 있게 해준다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누구든 만나러가는 그에게 2015년 희소식이 들렸던 것. 완주군에서 폐 컨테이너를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완주 군청 앞에서 컨테이너 미술관으로 쓰던 것을 내어준 것이라 했다. 음악인들 공간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정 대표는 단숨에 고산면에 자리를 잡게 되었고, 결국 전주의 악기사를 정리하고 집까지 옮겼다.지금 컨테이너를 가장 활발하게 이용하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완주군 아이들이다. 정대표가 청소년, 완주를 노래하다라는 프로그램을 완주군청에 신청하면서 전주에서 하고 있는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프로그램 Creative Project 전주를 그대로 완주에서도 진행하게 되었다. Creative Project 완주. 2015년 10명 정도였던 아이들은 2016년에는 18명, 4팀으로 늘었고, 누구보다 열심히 컨테이너를 들락날락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지역의 인디밴드들이 1:1 멘토로 청소년밴드를 육성하고 실제 가수들처럼 앨범 제작과 음원 등록까지 해주는 프로그램으로 참여한 중고등학교 친구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날 정도로 만족도가 아주 높은 프로그램이다.여느 프로그램이나 음악 학원처럼 한 달에 몇 번, 얼마씩의 돈으로 계산되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음악을 좋아하는 또래들의 고민이나 꿈도 충분히 나눌 수 있고, 실제 진로까지 지역의 음악선배들이 진정성 있는 멘토링을 통해 음악은 무엇을 고민하고, 무엇을 표현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들을 함께 한다. 1기들이 다시 2기들을 끌어주는 선순환 속에서 멘토로 참여하는 인디음악인들 또한 스스로 문화예술교육에 참가하고, 지역음악의 토대를 만드는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주체적인 인디음악인으로서의 자부심도 매우 높다.완주 고산면 컨테이너에는 정대표가 몸담고 있는 고산의 주민협동조합의 조합원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최근 주민들과 함께 진행한 타악 퍼포먼스 타키는 일요일마다 20명이 넘는 주민들이 참여해 발표회 날은 성황을 이루었다.현재 뮤직컨테이너는 5개의 컨테이너로 이루어져 있고, 2개의 악기 연습실과 주민 만화방, LP, CD등이 보관되어 있는 보관실, 악기와 앰프 창고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주민 만화방은, 주민들이 가져다 놓은 만화책뿐 아니라, 연습하다가 쉬는 쉼터이자 휴식공간으로 쓰이고 있다.고산미소시장에는 문화관광형시장사업의 일환으로 청소년문화공간 담벼락이 운영되고 있고, 시장 내의 다양한 프로그램들 또한 연결되어 진행되고 있다. 고산의 주민협동조합이 운영하는 커피숍에서는 다양한 공연들이 이루어지고, 매일매일 뮤지션들과 아이들과 주민들이 일상적으로 만나면서, 뮤직컨테이너와 다양한 활동가들이 고산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11월말이면 나온다는 완주아이들의 음반은 아이들의 창작곡이 담겨져 있다. 엊그제 끝난 완주 타악 퍼포먼스 타키에서도 주민들 하나하나의 두드림이 시장에 가득 퍼졌을 것이다. 사람 하나하나의 마음이 담긴 예술은 그래서 특별하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것이기에. 음악을 통해 자유로운 창작과 삶의 의미를 함께 누리고 싶은 정대표의 마음은 현재진행형이다. 그가 말하는 음악창작소와 대안예술학교의 꿈도 그렇게 한 발짝씩 가까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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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1.08 23:02

이종석 무주 태권도선수권대회 조직위 사무총장 "2017 세계선수권, 태권도원 활성화 끝 아닌 시작"

지난 2006년 2006-2007 ISU 쇼트트랙월드컵대회 이후 10년 만에 전북에서 대규모 국제 체육 행사가 개최된다. 전북 무주에서 열리는 2017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태권도 성지인 무주 태권도원이 2014년 개원한 뒤 세계 태권도인과 함께하는 ‘첫 집들이’이기도 하다.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조직위원회 이종석 사무총장은 집들이 준비로 분주하다. 특히 이번 집들이는 세계태권도연맹(WTF)에 가입한 전체 206개국을 초대할 계획이다. 지난 3월 22일 사무총장으로 정식 임명된 후 230일이 지났고, 2017년 6월 22일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개막 전까지 227일이 남았다. 정확히 중간 지점에 와있는 셈이다.그는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유치 이전에는 전북도 대외협력국장으로 유치 업무를 총괄하고, 유치 이후에는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조직위원회 사무총장으로 개최 준비 업무를 도맡고 있다. ‘박치기왕’ 김일(1929~2006)이 피나는 훈련을 통해 트레이드 마크인 박치기를 완성했듯, 그도 맨땅에 헤딩하면서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를 완성하고 있다.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조직위원회 이종석 사무총장으로부터 지금까지의 준비 현황과 향후 과제 등을 들어봤다.-태권도와의 인연이 깊다고 들었다.“요즘은 초등학생이 태권도를 배우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1960년대에는 태권도장 다니는 것이 흔치 않았다. 초등학교 때 태권도를 접하고, 고등학교 때 초단을 땄다. 당시 김일 선수가 유명했는데, 태권도장 시멘트 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열심히 이마를 단련했던 기억이 난다. 이후에는 전북도 대외협력국장으로 재직하면서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유치 실무를 담당했다. 이후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조직위원회 사무총장으로 부임하면서 유치 이후의 개최 준비까지 맡게 됐다.”-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유치 활동 막판에 터키 삼순과 경쟁이 치열했는데.“대회 유치 기간이 한두 달로 짧았다. 2월 말 유치 의향서를 제출했고, 5월 10일 개최지가 결정됐다. 그런데 2월 26일 아버지께서 작고하셨는데, 2월 28일 유치 의향서 제출 마감날 터키 삼순이 접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우리나라는 2011년 경주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에 이어 6년 만에 또 유치전에 뛰어든 반면 터키는 처음이었다. 태권도 세계화를 위해 외국에서 개최하는 것이 좋겠다는 분위기가 감지되면서 부담이 컸다. 유치 활동 당시 터키 한국영사관을 통해 터키의 유치 의지나 열기 등을 파악하려 했다. 그런데 이를 ‘종주국의 압력’으로 오해한 터키 측의 반발과 세계태권도 유럽연맹의 항의로 한때 위축된 적이 있다. 그러나 전북도지사가 러시아 현장에서 열정적으로 추진 의지를 호소하면서 유치 활동한 점이 주효했다. 터키 측은 태권도 관계자만 오고, 고위 관계자나 단체장이 방문하지 않아 대비가 됐다.”-당시 제안한 조건은 잘 이행하고 있나.“유치 활동 시 제안 조건은 경제 곤란국 선수를 위한 점심·저녁 식사 비용 등 지원 방안, 집행 위원 초청 비용, 세계태권도청소년캠프 개최 등이다. 현재는 약간 변형해 추진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경제 곤란국 선수 점심·저녁 식사 비용 지원을 태권도 기반 취약 국가 초청 및 연수 프로그램으로 변경했다. 통상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는 전체 206개국 가운데 140개국 내외가 참여했다. 2011·2013·2015년까지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에 한 번도 참석하지 않은 곳이 46개국, 2011·2013·2015년간 한 번 참석해 참석 여부가 불투명한 곳이 24개국이다. 이들 70개국을 초청해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에 참가·연수시키는 것이 목표다. 세계태권도선수권 조직위원회는 한시적인 조직이지만, 태권도 진흥·보급이라는 의미 있는 일을 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는 현재 어느 수준까지 준비됐나.“우리나라가 태권도 종주국이니 이번 대회를 역대 대회보다 알차고 짜임새 있게 치러야 한다는 중압감을 가지고 있다. 취임 후 6개월간은 조직·예산·사업 등 기본적인 틀을 확립한 기간이라 할 수 있다. 전북은 1997년 동계 U-대회와 2006-2007 ISU 쇼트트랙월드컵대회 이후 사실상 국제 대회 경험과 노하우가 없다. 조직위에 파견된 공무원도 경험이 부족해 타 지역 사례를 벤치마킹하고 관련 전문가와 토론하면서 대회 추진 방향을 모색했다. 또 WTF, 대한태권도협회, 전북태권도협회 등 태권도 단체와 교육청, 경찰청 등 유관기관과 협업 체계를 구축했다. 더 나아가 경기뿐만 아니라 한국과 전북의 문화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기회로 생각하고, 개·폐막 공연과 부대행사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준비 과정서 아쉬운 점은 없었나.“단일 종목 대회도 세계대회를 하려면 적어도 개최지를 3~4년 전에 선정한다. 그러나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는 기획재정부 승인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유치 의향서를 제출한 뒤 사후 승인을 받았다. 절차를 밟을 시간이 그만큼 부족했다는 뜻이다. 충분한 신청 기간을 주고 준비하도록 해야만 대회의 의미를 전달하고, 지역 예산 확보 등과 관련해 대회를 활용할 수 있다.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도 양적으로 질적으로 성장한 만큼 최소한 4년 전에 개최지를 결정할 필요가 있다. 2023년 열리는 세계잼버리는 지역 현안을 해결하는 7년간의 동력이 되는 셈이다. 무주 태권도원은 국비 등 2500억원이 투입됐다. 6년 만에 한국에서 개최되는 불리함을 안고 유치 활동에 뛰어든 이유는 무주 태권도원 활성화에 있다. 동쪽 태권도원, 서쪽 새만금, 가운데 전주한옥마을을 전북의 관광 거점으로 삼아 국가시설을 조속히 활성화해야 한다.”-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가 끝나도 상징시설 건립, 민자유치 등 과제가 산적해 있다.“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를 계기로 무주 태권도원이 안고 있는 미비점, 문제점을 계속 노출해 활성화의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대회를 유치한 것은 태권도원 활성화의 시작이지 끝이 아니다.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는 태권도원 개원 초기에 국내·외적인 관심을 갖게 하는 하나의 작업이다.”-전북도민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태권도가 스포츠 경기로 자리 잡은 시발점은 1963년 전주에서 열린 44회 전국체육대회다. 이 전국체전을 계기로 태권도가 혼자 하는 무도가 아닌 공식 경기가 된 것이다. 태권도가 무도에서 경기로 전환한 것은 오늘날 태권도가 세계화하는 데 가장 큰 전기로 평가된다. 또 전북 태권인에 의해 호구와 경기 기술 등이 개발됐다. 전북이 종주도인 셈이다. 태권도 성지인 무주 태권도원에서 열리는 대회는 여러모로 태권도 종주도인 전북에 큰 의미를 지닌다. 많은 도민들이 대회 기간 태권도원을 방문해 태권도 정신과 한국인의 자긍심을 현장에서 느끼길 바란다.”● [이종석 사무총장은] 문화·예술·체육·대외 홍보 분야 베테랑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조직위원회 이종석 사무총장은 문화·예술·체육, 대외 홍보 분야의 베테랑이다. 그의 주요 경력이 이를 뒷받침한다.그는 고창 출신으로 고창고와 전북대 행정대학원을 졸업했다. 이후 고창군 문화공보실장, 전북도 문화예술과장·문화체육관광국장, 익산시 부시장, 전북도 대외협력국장·의회사무처장 등을 역임했다. 지난 3월 22일에는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조직위원회 사무총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난 6월 명예퇴직했다.그는 전북도 간부로 재직하던 시절, 김완주 전 지사와 송하진 지사의 리더십 철학이 많은 도움이 됐다고 한다. 그는 “송 지사는 공심·균형 감각·조감 능력, 김 지사는 타이밍·홍보를 강조했다”며 “특히 김 지사는 타이밍과 관련해 ‘망건 쓰다 장 파한다’, 홍보 미흡과 관련해 ‘비단옷 입고 밤길 걷는 격’이라는 속담을 쓰면서 타이밍과 홍보의 중요성을 설파했다”고 회고했다.이에 더해 그는 수비적인 입장을 강조한다.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기준, 절차 이행, 사전 협의를 통해 행동의 정당성을 부여받으라는 뜻이다. 이러한 철학은 그의 공직 생활을 관통해왔다. 언론이나 의회의 지적도 늘 합리적인 기준에 따라 행동하면 된다고 믿어왔다.이 같은 신념으로 문화·예술·체육, 대외 홍보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의 유치부터 개최까지 총괄하게 됐다.1992년 정부 모범 공무원 표창, 2001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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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민주
  • 2016.11.07 23:02

[참여&소통] 평생교육 앞장서는 대학박물관

해방 직후 지역민과 함께해온 거점 국립대학들은 그 자체로 지역의 역사이다. 그러니 대학박물관은 지역과 대학의 역사를 한눈에 마주할 수 있는 지역 역사의 정수라 할 수 있겠다. 전북대학교 박물관에도 이 곳 전북의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지역민에 대한 다양한 교육으로 미래도 함께 그리고 있다.△ 교육 부각되는 대학 박물관대학 교육의 간접적 경험 제공전북대학교는 전라북도의 유물을 조사연구교육전시함으로써 전북의 역사와 문화를 계승보전하고, 지역민들에게 역사와 문화의 향수를 제공한다는 목적으로 지난 1961년 부속기관으로 전북대학교 박물관을 개관했다.전북대 박물관은 여러 건물을 거쳐 이관하던 끝에 지난 2011년 신축 박물관이 완공되며 보금자리를 찾게 됐다. 이전에 사용되던 박물관 건물은 지난해부터 자연사박물관으로 사용돼 전북대학교는 두 개의 건물을 박물관으로 사용하게 됐다.대학 박물관은 대학의 부속기관인 만큼 교육적인 부분이 특히 부각된다. 아울러 대학과 직접적으로 연계되어 있어 교수나 강사와 같은 지성인을 섭외해 프로그램을 진행하기에 유리하고 연구생 인력 수급에 용이한 이점이 있다. 이처럼 대학 박물관은 유물 전시나 다양한 교육을 함에 있어 대학의 연구력을 적극 활용하다 보니 대학 구성원이 아닌 이들에게도 대학의 교육과 연구수준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지역민과 소통하는 평생교육의 장본래 대학 박물관이 가지는 가장 큰 목적은 연구에 있다. 고고문화인류학과 문헌정보학과, 사학과 등과 같이 과거를 탐색하는 학문을 연구함에 있어 역사적 문헌이나 유물 등을 보존전시할 수 있는 박물관은 필수적이다.그러나 최근 박물관의 역할이 확장되며 전북대학교 박물관도 학술조사에만 포커스를 맞출 수만은 없게 됐다. 이에 따라 지역민들과 함께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평생교육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하고 있다.우선 문화프로그램으로는 목요시네마 뮤즈가 가장 대표적이다, 목요시네마 뮤즈는 매주 목요일마다 지정된 테마에 맞는 영화를 무료로 상영하는 프로그램이다. 누구라도 방문해 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목요시네마 뮤즈는 매 해 3월부터 12월까지 진행되며 1, 2월은 준비기간을 갖는다. 영화를 사랑하는 지역민이라면 올해가 가기 전 전북대학교 박물관을 방문해 부담 없이 영화 한 편 즐겨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매년 5월에서 10월까지는 청소년 창의체험 프로그램과 어르신 문화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다양한 연령층에게 문화교육을 제공하고 있다. 해당 프로그램들은 프로그램이 시작되기 전 사전 신청을 통해 참여 가능하며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중도에 신청이 불가능한 만큼 관심 있는 지역민들은 내년 프로그램이 시작되기 전에 알아보는 것이 좋다.한편 그 외에도 전문 민화 강사에게 민화 그리기를 강습 받는 민화 아카데미, 옛 글을 읽고 해석하는 기술을 배우는 고문 아카데미 등의 다양한 교육프로그램들도 진행되고 있다.△지역민의 과거 생활 엿볼 수 있는 상설전시기록유물은 전국 으뜸각종 프로그램들도 중요하지만, 전북대학교 박물관에도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돼 있어 박물관 본연의 역할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전북대 박물관은 고대생활예술기록 등을 모두 전시하는 종합박물관으로, 전북지역에서 출토된 생활유물을 소개하는 것을 주된 테마로 상설전시관을 운영하고 있다.1층에 위치한 홍보역사실에서는 전북대학교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학교의 과거 기념품, 교표와 같은 상징물과 더불어 과거 학생들의 학생증이나 수험표와 같은 사소한 물건들도 눈에 띈다. 과거의 사소한 생활들이 모두 역사가 될 수 있다는 전북대 박물관의 메시지를 홍보역사실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2층으로 올라가면 기증유물관을 마주 할 수 있다. 숭고한 뜻으로 유물을 전시한 기증자들을 헌액한 헌판을 지나 기증유물관으로 들어가면, 도자기나 그림을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유물들을 감상 할 수 있다.3층에는 고대문화실과 생활문화실, 그리고 예술문화실과 기록문화실이 줄지어 위치해 있다. 고대문화실에는 전북지역에서 출토된 선사시대 유물부터 고려시대 유물까지 전시돼있고, 이 전시관을 거쳐 도착한 생활문화실에는 조선시대의 다양한 일상용품과 생활상이 담겨있어 마치 수천 년의 역사를 흘러 걸어가는 느낌을 받는다.국악기나 도자, 서화 등 예향 전북의 혼을 담은 예술문화실을 거치면 전북대 박물관이 자랑하는 기록문화실에 당도한다. 전북대 박물관은 대학박물관 중 가장 많은 고문서를 보유하고 있고, 전북도 유형문화재 제204호로 지정된 완영책판이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는 등 기록유물에 있어 특화된 모습을 보인다.전북대학교 박물관 정미혜 조교는 박물관을 방문하는 지역민들이나 학생들도 우리 박물관의 기록유물 수준에 놀랄 때가 많다고 전북대 박물관의 자랑을 전했다.△대학 박물관 역할에 충실한 특별대관전시한편 상설전시 외에도 특별전시전이 주기적으로 열려 지역민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전북대의 다양한 풍경을 담은 사진전처럼 가벼운 주제의 특별전시부터, 산민 한승헌 변호사의 소장자료를 전시하며 근현대 민주화운동의 현장을 엿보는 기회를 제공하기까지 다채로운 주제의 특별전시가 진행돼 문화역사예술을 모두 아우르는 대학 박물관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전북대 박물관은 또 다양한 대관전시도 시행하고 있다. 이에 따라 건축공학과, 미술학과, 산업디자인학과, 고고문화인류학과 등 다양한 학과에서 자신들이 연구한 결과물을 지역민들에게 공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전북대 박물관을 방문하는 지역민들은 대학생들이 일궈낸 연구 성과와 지식을 함께 공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줄어드는 지원, 예산문제 타개 위해 노력이처럼 다양한 교육문화전시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대학 박물관이 가지는 가장 큰 어려움은 역시 예산문제이다. 대학 박물관은 지역민과 소통하는 것이 생명인 만큼 타 박물관에 비해 더 많은 프로그램을 운영해야 하면서도 진입장벽을 낮추기 위해 프로그램에 이윤을 추구하지 않아 예산확보가 더욱 어렵다. 온전히 학교 측의 예산지원에만 의존해야 하는 상황인데, 최근에는 이마저도 여의치 않은 실정이다.박물관 측은 최근 국립대의 재정상황이 어려워지며 박물관 예산이 거의 최우선적으로 삭감되는 실정이라며 보다 잦은 특별전시와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싶어도 부족한 예산으로 진행하지 못하는 상황이 안타깝다고 전했다.전북대 박물관은 외부기관으로부터 예산이 지원되는 외부사업을 받아오는 등 예산문제 타개를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벌이고 있다.박물관 측은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만큼, 많은 지역민들이 대학박물관을 더 많이 활용해주길 바란다고 뜻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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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1.03 23:02

[문화&공감] 군산 '아리아 해금연주단'

늦더위 기승에 여름이 길게 느껴지더니 어느새 겨울에 성큼 다가선 계절이다.사색이며 고독이며 수식어가 많이 붙는 계절. 가을에는 유독 많은 풍경이 느리게 흐르는 듯하다.이쯤이면, 추억을 끄집어 낼 수 있는 음악이나 노래 한 두 곡은 찾게 되지 않을까 싶다.이 가을에 정말 잘 어울리는 악기소리는 무엇이 있을까. 우리 악기 해금 소리가 제일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거친 듯 부드러운 듯 흥에 겨웠다 애절했다가 또 깊어지기도 하고 간지러웠다가 또 깊은 한숨에 서러움 털고 활기찬 희망을 노래하기도 하는 악기 해금의 소리는 가을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듯 하다.한때 유행처럼 해금이 많은 사람들에게 연주되던 시절이 있었다. 일반인에게 다가가기에 다소 어려움이 느껴지지만 우리 음악에 관심을 끌기도 쉬운게 해금이다.연주하는 모습을 한 번만 봐도 그 매력에 푸욱 빠져드는 악기가 해금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아쟁과 해금을 구별하기 어려워한다.소리를 들어보면 구별하는데 도움이 된다. 저음이 잘나는 아쟁에 비해 소리가 높은 편이며, 해학적이며 다양한 음색을 띈 악기이다. 깽깽이, 깡깽이 등 해금에는 별칭이 유독히 많다. 그만큼 사랑을 받는 악기임에 틀림없다.거지깡깽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보통은 일이 잘 안 풀리거나 기분이 좋은 쪽보다는 그 반대의 경우에 많이 쓰인다. 자세히 생각해보면 거지가 밥빌기도 바쁠텐데 깡깽이까지 들고다니면서 연주할 시간이나 여유가 진짜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서양에는 길거리의 전문악사(버스커)들이야 이해가 되지만. 여튼 해금(깡깽이)이라는 악기는 우리도 모르게 우리의 정서 한 켠에 자리를 잡은 악기임에 틀림없다.군산에 여러 악기의 합주모임이 아닌 오직 해금으로만 승부를 거는 연주단이 있다.아리아 해금연주단이다. 아리아 라는 말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는데 아리아의 뜻은 두 가지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첫 번째는 Artists RIsing above Ages(시대를 초월하는 예술가들) 의 약칭이며, 두 번째는 소리의 순 우리말인 아리와 한자 아리따울 아의 결합이다. 아리아 해금연주단은 현재와 과거를 연결하는 다리가 되고자 결성되었으며 사라져가는 우리의 것을 현대식에 맞춰 재해석하고 보존하며 한글과 한자의 결합처럼 옛 문화와 현대문화의 통합을 추구하며 전 세대를 아우르는 음악을 하는데 의의를 두고 있다고 연주단 대표는 강력하게 말하고 있다.2015년 10월에 창단했으며, 대표인 해금연주자 이정민(원광대 초빙교수-40세)과 이진(21원광대 재학), 이혜정(19전북대 재학), 최새솔(19원광대 재학), 이승미(18원광예고 재학), 김다슬(18원광예고 재학), 홍서영(16군산영광중 재학)로 구성되어 있다.군산에 거주하거나 군산 출신들로 구성, 해금이라는 악기를 일반시민들에게 알리고, 근대문화도시로 이미지를 굳혀나가고 있는 군산의 문화예술의 중심이 되고자 활동을 시작했다.아리아 해금연주단은 2015 원광대학교 해금콘서트 공연, 2016 군산시 청소년 전통문화예술제 공연, 2016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소담소리아트 공연, 2016 익산 차 없는 날 공연 등 각종 공연을 통해 아직 국악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보다 쉽게 다가설 수 있는 창작곡들을 시작으로 해금의 매력을 전하려 노력하고 있다.구성원들은 말한다.△이진=처음 국악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자연스럽게 판소리 가야금이 떠오르시지 않나요? 저는 아리아해금연주단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국악하면 해금을 떠올릴 수 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이혜=해금이라는 악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연주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낍니다.△최새솔=무대경험을 통해 연주자로써의 모든 면에 배울 수 있는 것이 많아서 하게 되었습니다.△이승미=해금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해금의 매력적인 소리를 들려주고 또한 무대에서 즐기는 연주자가 되고 싶습니다.△김다슬=해금의 아름다운소리를 많은 사람들한테 들려주고 해금에 대해 널리 알리고 싶습니다.△홍서영=해금의 숨겨진 매력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보여주고 싶습니다.아리아 해금연주단은 아리아의 뜻처럼 우리 음악을 보존하고 발전시켜, 옛 문화와 현대문화의 통합을 추구하려 노력하고 있다.또한 정악, 민속음악, 창작음악 등 전 부문에 걸쳐 시민들의 문화예술 향유 및 발전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각종 크고 작은 공연들을 통해 시민들과의 교류에 힘쓰고 국악의 저변확대 및 대중과 같이 호흡하는 연주단이 되고자 열과 성을 다하고자 한다.아직은 우리의 음악이 국악이라는 특별한 장르로 불리고 있다. 거기다가 우리 음악은 지루하고 대중성 없는 음악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많다. 때로는 그런 편견과 인식이 전문연주자들을 힘 빠지게 만들기도 한다.하지만 그럴수록 아리아 해금연주단은 우리의 것, 보다 한국다움을 대중들에게 더욱 내밀 것이고, 서서히 옷깃에 빗물이 스며들 듯 우리의 음악도 그렇게 그들에게 스며들도록 노력할 것이다. 또 아직은 비록 작은 시작이지만 이 작음이 후엔 새로운 국악의 열림의 시작점이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도 갖고 있다.젊은 연주자들답게도 연주단의 이름이 영어와 우리말의 의미를 동시에 담고 있다. 영어로 된 뜻은 아무리 봐도 어려우니 그저 우아함 정도로만 받아주고, 우리말의 의미로만 기억하고 이 가을 해금연주곡 한 번 찾아 들으면서 유독 더웠던 여름만큼이나 추울 것 같은 겨울을 기다려보자.△해금은해금(奚琴)은 당나라때 요하 상류 북쪽에 살던 호족들 중 해(奚) 부족에 속하는 유목민들이 즐기던 악기였다. 해금의 해(奚) 자는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것이 고려 예종 9년(1114)에 중국 송나라에서 들어온 이래 개량제작돼 지금은 우리나라의 전통 악기로 자리 잡았다.아쟁과 더불어 줄을 문질러 소리내는 찰현악기(擦絃樂器)에 속한다. 동양 문화권의 현악기 대부분이 줄을 뜯어 연주하는 발현악기(撥弦樂器)인 관계로 소리의 장시간 지속이 어려운 데 비하여, 해금은 그 소리를 길게 끌어 연주할 수 있다는 점에서 관악기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며, 호흡의 한계성을 지니고 있는 관악기들의 합주에 함께 섞여 숨쉬는 부분의 음향적 공백을 메워 줄 수 있다는 장점으로 인해 관악 합주에 반드시 편성되는 악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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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1.01 23:02

전북도립국악원 개원 30주년 맞는 곽승기 원장 "지난 30년 토대, 앞으로 300년 국악 꽃피우겠다"

△창극 ‘이성계, 해를 쏘다’ 공연 △학술세미나 ‘지나온 30년, 함께 할 300년’ 개최 △개원 30년사 <지나온 30년, 다가올 300년> 발간 △보존자료 복각음반 ‘풍류방의 명인들-송영석의 판소리와 신쾌동 거문고 산조’ 제작 △국악원 소식지 복간호 <국악이을> 발간. 전북도립국악원이 개원 30주년을 맞아 굵직하게 펼쳐내고 있는 사업들이다.지난 28일 전국 최대 규모의 예술단을 운영하고 있고 대통령상을 14번이나 수상한 단원을 배출한 도립국악원의 수장, 곽승기 원장을 찾았다. 곽 원장은 “지난 30년을 바탕으로 다가올 국악 300년을 꽃피우겠다”고 포부를 밝혔다.-먼저 도립국악원 개원 30주년을 맞아 펼친 주요 사업 가운데 가장 인상깊은 행사는 어떤 것인지요. 또 성과와 과제는 무엇인지요.“단연 개원 30주년 기념공연, 창극 ‘이성계, 해를 쏘다’ 공연입니다. 86명의 국악원 예술단원 및 스텝, 각 분야 50여명의 객원이 투입된 대형작품입니다. 도민들의 크나 큰 성원 덕분에 지난 15~16일 한국소리문화전당 모악당에서 1500여 명의 관객이 찾은 가운데 성황리에 마쳤습니다. 단원들이 뛰어난 맨 파워를 발휘했으며 무대 장치와 장면 전환 등도 돋보여 전북을 대표하는 대작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다만 갈등과 서사의 조화 부족으로 작품 전반부 지루함을 유발한 점, 공연내용과 영상의 불일치 등을 보완해 내년에 도내 순회공연을 할 예정이며 내후년에는 타시·도 공연도 추진할 계획입니다.”-다른 30주년 기념 행사도 평가해주시죠.“ ‘지나온 30년, 함께 할 300년’ 주제로 지난 6월 29일 전북대학교 건지아트홀에서 학술세미나를 개최, 도립국악원 30년의 활동과 과제, 예술단의 발전방안, 국악교육 중심기관의 위상과 역할 등을 제시하고자 했습니다.또 국악원 개원 30년사를 다룬 책 〈지나온 30년, 다가올 300년〉을 내달에 발간 예정입니다. 국악원 발자취와 이야기보따리, 사진으로 보는 30년 등이 수록됩니다.국악원 보존자료의 복각음반인 ‘풍류방의 명인들 - 송영석의 판소리와 신쾌동 거문고 산조’도 제작했습니다. 서봉 허순구 선생이 자신의 풍류방에 국악 명인들을 불러 직접 녹음한 릴테이프를 복각한 것으로 국악 학계에서 매우 뜻 깊은 자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아울러 국악원 소식지인 〈국악이을〉도 복간했습니다.” - 국악원의 가장 큰 과제가 우리의 음악인 국악의 활성화라고 생각됩니다. 국악을 쉽게 배우고 익힐 수 있는 분위기 조성을 위한 계획이 있는지요.“송하진 지사가 사철가 등 단가를 멋지게 부르는 모습을 보고 주위에서 ‘멋지다’, ‘품위 있다’, ‘나도 배워야겠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사실 도민들에게는 국악에 대한 친숙함이 배어있습니다. 어린이부터 어르신까지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국악은 오랜 세월 동안 우리 곁에 전해오면서 익숙함의 유전자가 우리 몸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어색하다가도 한 번 보고 두 번 접하다 보면 흥이 생기고 신명이 납니다.이러한 친숙함을 바탕으로 도민에게 다가가는 다양한 공연을 추진할 계획입니다. 시·군지역의 공연장 규모에 맞게 공연계획을 수립하고 지역 축제에 맞춰 다양한 공연을 추진하겠습니다. 접근성이 떨어지는 시·군에 대해서는 지역 실정에 맞게 찾아가는 공연을 진행할 계획입니다. 아울러 다문화가족, 노인복지시설 등 사회복지시설에도 출장 공연을 진행하겠습니다.”-청소년들에게 우리의 음악을 널리 알리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만.“국악은 한 번 접해본 사람이 친밀감을 갖고 공연장을 찾는다든지 소리나 악기를 배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려서부터 국악을 접할 기회를 확대하기 위해 매주 수요일에 운영하는 국악체험교실을 확대하고, 각종 공연에서 학생들이 관람할 수 있도록 교육청과도 협의해 나가겠습니다.”- 우리 소리나 악기를 배우는 것도 우리 음악의 활성화를 위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국악 교육 활성화 방안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요.“국악원에서는 현재 성악, 현악, 관악, 타악, 무용 등 13개 과목 90개 강좌를 진행, 매일 1543명이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이는 국립국악원에서도 하기 힘들 정도로 우리 지역만의 특화된 교육시스템입니다. 또한 지난 30년 동안 연수생 7만558명을 배출했으며 국악체험교육에는 145개 단체·9100명, 청소년 국악교실과 찾아가는 국악연수에는 1000여명이 참여했습니다. 그래도 시간이 많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국악원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사이버 국악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국악원 개원 30주년을 발판 삼아 향후 국악원이 중점 추진할 사업 계획은.“주위의 전통국악인의 소리를 찾아내고 보전하는데도 소홀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명인·명창들의 보존자료를 복각한다든지, 명인들의 삶을 구술을 통해 정리, 국악의 과거와 미래를 잇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단원 근무환경 개선과 질 높은 작품 제작 여건의 조성을 위해 연습실을 확대하는 한편 공연 홍보 및 마케팅 분야의 전문 인력을 확충, 우리나라 국악교육 중심기관으로서 위상과 역할을 강화해 나가겠습니다.”- 소중한 우리 음악이 널리 퍼질 수 있길 가장 간절히 원하고 있을 터인데 바람이 있다면.“무엇보다도 도민들이 국악을 배우고 공연장을 찾아주는 것입니다. 전북도립국악원이 전국 최고의 예술단체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국악인들의 노고와 열정도 있었지만, 그동안 국악원을 찾아 국악을 배우고, 공연장을 찾아주신 도민들의 덕이라 생각합니다. 명창들도 고수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1.고수 2.명창’ 이라고 말한 바 있으나 이제 관객이 없는 공연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도민들이 국악원을 찾아 국악을 배우고 일상에서 국악을 즐기는 한편 명인·명창 ‘명무들이 꾸미는 국악 공연장을 찾아 추임새도 넣어 주면서 격려해주길 당부 드립니다.”● [곽승기 원장은] 순창부군수 재직 때 메르스 원활히 극복올해 1월 부임한 곽승기 도립국악원장은 임실 출신이며 전북대 행정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온화한 성품으로 국악원 내외에서도 명망이 높다. 임실군에서 처음 공직을 시작, 서울사무소장, 순창부군수를 거쳤다. 전북도 예산과장으로 재직하면서 가용자원 확보를 위해 전국 최초로 재정사업자율평가를 실시했으며 순창부군수 재직 때에는 순창읍 장덕마을에서 발생한 메르스를 원활하게 극복했다는 평도 받았다. 온라인 강좌로 단소를 배웠다는 곽 원장은 즉석에서 한 소절을 불기도 했다.곽 원장은 앞으로 도립국악원장으로 있으면서 전통 국악을 이어가면서도 현대의 시류에 맞는 국악을 만드는데 일조하고 싶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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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0.31 23:02

[철도기행: 오산리역 편] 흐릿한 기억 속, 등잔 밑 간이역

동쪽으로 다시 달려 군산시와 익산시의 경계를 넘는다. 철길은 완전한 직선이 되어 내달리고, 자동차는 들판 한가운데를 미끄러진다.오산리역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 같은 것은 없다. 의지할 것은 지도뿐이다.황금빛으로 빛나는 들판과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들, 코스모스, 어린이 보호구역, 공사 현장 등이 나타났다 사라진다.역이 없어진 지는 오래됐어요. 예전에, 그러니까 제가 여기 부임할 때만 해도 열차가 서긴 했죠.- 김미영 오산 농협 하나로마트 점장(오산리역이 없어진 지)오래됐어요.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인근 식당 관계자(오산리역이)있었다는 말은 들었는데.- 오산면사무소 관계자존재감은 이미 희미해져 있었다.오산리역을 찾아가는 길은 생각보다 간단치 않았다. 대야역처럼 그래도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역도 아니고, 임피역처럼 문화재가 된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정표도 따로 없다.그냥 그렇게 조용히 있다가 조용히 사라지고 있다. 그것이 오산리역의 일생이다.임피에서 넘어가려면 북쪽으로 크게 돌아 서수교차로에서 27번 국도에 올라탄 뒤 장신교차로에서 내려오는 방법과 제희미곡종합처리장 남쪽 삼거리에서 왕복 2차선 길을 타고 동쪽으로 가는 방법이 있는데, 전자 쪽 길은 속도를 내기 좋고, 후자 쪽 길은 철도와 최대한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며 움직일 수 있다.북쪽에서 내려간다면 왼쪽에 오산초등학교가 나올 무렵, 남쪽에서 올라간다면 왼쪽에 농협이 나올 무렵이면 거의 다 왔다고 할 수 있겠다.그리고 철도와 나란히 서쪽을 향해 뻗은, 자동차 교행이 불가능한 좁은 길을 따라 200m쯤 들어가면 오산리역이라 쓰인 역명판을 만날 수 있다. 중간에 무인건널목이 하나 있다.오산리역이라는 이름은 물론 지명에서 비롯된 것이다.행정구역으로는 익산시 오산면 오산리인데, 여기서 오산은 한자로 五山인데, 오산면 측에 따르면 이것은 처음부터 다섯 개의 산을 가리키려던 이름이 아니고, 鰲山, 그러니까 자라산이 변한 것이라고 한다. 이는 이 지역의 주산 이름이다.오산역이 아니고 굳이 마을 리 자를 붙여 오산리역으로 지은 것은 물론 다른 지역에 오산역이 있기 때문이다. 경부선 오산(烏山)역이 그것인데, 이쪽은 무려 1905년에 문을 연 데다 규모도 훨씬 크고, 지명의 단위도 시급(경기도 오산시)이니 이쪽을 우대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보이는 것은 풀이 무성한 플랫폼(이었던 콘크리트 구조물)과 오산리역이라 쓰인 역명판, 그리고 이들을 지키려는 듯 빙 둘러 있는 철조망뿐이었다.철도산업정보센터 자료에 따르면 오산리역은 1931년 6월 15일 역원무배치간이역으로 처음 문을 열었다. 그냥 그랬다.이 역은 단 하루도 보통역이 된 적 없이 일생을 간이역으로만 살았다. 1964년부터 1972년까지는 역원이 배치돼 있었는데, 이 기간을 제외하면 등급은 쭉 역원무배치간이역이었다.역원이 배치된 적이 있으니 역사(驛舍)라고 할 만한 건물이 있던 시절도 있었지만, 대체로 시골 버스정류장 같은 조그만 시설물의 모습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점은 옛 군산선 동지인 개정역과 비슷하다.그러나 10월 18일 취재팀이 찾았을 때는 그 조그만 시설물조차도 사라지고 없었다. 이 시설물은 코레일 전북본부에 따르면 지난 2010년 철거됐다고 한다.플랫폼 방향으로 가서 보면 (오산리역과는 딱히 관련 없는)기록탑이라는 글자가 박혀 있는 조형물이 있고, 그 뒤로 조그만 공터를 남겨둔 채 민가가 자리하고 있다. 다만 꽃등에와 나방이 노란 돼지감자꽃 주위를 바쁘게 날아다닐 뿐이었다.철조망이 역을 감싸고 있었다. 그 철조망은 넝쿨이 감싸기 시작했다. 한때 사람과 작은 짐 보따리들이 오르내렸던 콘크리트 구조물은 이제는 아무도 밟을 수 없다. 사실 굳이 밟을 이유도 없다. 이곳에는 어떤 열차도 멈추지 않는다.2007년, 그러니까 군산선 통근열차가 다니던 마지막 해에 오산리역에서 열차를 탄 사람은 3128명, 여기서 내린 사람은 1724명이었다. 승하차 인원 합계가 4852명인데, 이는 개정역(3182명)보다는 조금 많고 임피역(8807명)에 비해선 절반 정도 수준이었다.승차 인원 대부분은 군산역으로 가는 사람이었고, 상행, 그러니까 익산 쪽으로 가는 열차를 이용한 이는 많지 않았다.그럴 만도 하다. 여기서 송학동 시가지까지의 직선거리가 2㎞를 조금 넘는 수준이고, 익산역은 3.4㎞, 익산 고속버스터미널시외버스터미널도 비슷한 거리에 있다. 익산시내 쪽으로 가고자 한다면 차라리 면사무소 쪽으로 조금 걸어나가면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25번이나 76번 시내버스를 타는 게 나을 수도 있다.등잔 밑이 어둡다는데, 이런 것이 도시 옆에 바짝 붙어 있는 간이역의 운명일까. 딛고 있는 땅이 서울이었다면 전철역으로라도 생을 이어갈 수 있었을 텐데. 사실 옛 통근열차를 대신할 전북권 광역전철이 제안된 적도 있지만, 아직까지는 꿈일 뿐이다.2008년 1월, 철도가 금강 건너 장항선과 연결되고 군산선 통근열차가 폐지되면서, 오산리역은 그날로 여객취급이 중지됐다. 임피역이 서천~익산 새마을호로 생명을 넉 달 연장한 것과도 또 다르고, 이런 점에선 오히려 군산화물선에 앉아 있는 개정역 쪽과 비슷하다.남쪽 삼거리에서 동쪽 오산면사무소 방향으로 나와 평동로를 따라 약 500m를 가면, 이제부터는 철도와 도로가 마지막으로 나란히 달리는 구간이다.여기서 들판 넘어 남쪽 지평선 위로 익산~대야 간 복선철도가 놓일 다리가 보인다. 열차는 훨씬 빨라질 것이고, 또 더 많은 수가 지나다닐 것이며, 철도는 도로와는 꽤 멀어질 것이다.철길 옆 코스모스가 흔들흔들 춤을 추는 그 광경 뒤로 익산 도심이 보이기 시작한다.전북제일고와 이리중학교를 옆구리에 끼고, 철도는 호남에서 가장 바쁜 역, 장항선의 종착역을 향해 마지막 커브를 그린다.

  • 기획
  • 권혁일
  • 2016.10.28 23:02

[글Pic] 유신의 절명

37년 전 10월26일, 그러니까 1979년 10월26일 서울 궁정동 비밀연회장에서 코드 원, 대통령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권총 두 발을 맞고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뒤 유신독재로 영구집권 기반을 확실히 다진 독재자가 집권 18년 만에 가장 가까이에 둔 부하의 총탄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사건 후 국군수도통합병원에 실려 온 그의 시신을 확인한 군의관은 피범벅이 된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고, 배꼽 아래의 흰 점을 보고서 사망자가 대통령인 것을 확인해야 했다. 대통령 피살 다음 날인 10월27일 새벽 4시, 나중에 허수아비 제10대 대통령이 된 최규하 국무총리가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그 뒤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는 1026사태부터 이듬해인 1980년 518까지를 일컫는 서울의 봄 비극, 그리고 1993년 2월 32년 군부통치의 마지막 실력자 노태우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총 13년에 걸쳐 56공 천하를 연 신군부독재시대가 막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1979년 10월 26일10월 26일 중앙정보부가 관리하는 밀실에서 열린 만찬장에는 대통령 박정희, 비서실장 김계원, 경호실장 차지철, 중정부장 김재규가 참석했고, 2명의 여성 연예인이 동석했다. 만찬은 6시5분 쯤에 시작됐다.당시 대통령 시해사건 수사를 주도한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의 수사발표 등에 따르면, 박정희는 식사를 하면서 바로 열흘 전인 10월15일 부산대에서 촉발된 부마민중항쟁사태를 중앙정보부의 정보 부재 탓으로 돌려 힐책했다. 이에 동석한 경호실장 차지철도 나서 김재규를 과격한 어조로 공격했다. 흥분한 김재규는 밖으로 나가 권총을 갖고 만찬장 안으로 들어가 박정희와 차지철에게 두 발씩 쏘았다. 두 사람은 절명했다.대통령 박정희의 급사에 대한 반응은 크게 엇갈렸다. 무려 20년 가까이 박정희와 공화당의 선전선동에 눈이 가린 채 살았던 상당수 국민은 슬픔을 감추지 않는 분위기였지만,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한 부류는 헌정파괴자, 독재자가 측근의 총탄을 맞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하지만 신은 얄밉게도 민주주의와 정반대, 독재자들의 편에 섰다. 김재규는 권총을 쏜 후 맨 처음 정승화 육참총장을 궁정동 안가로 불렀다. 대통령이 쓰러졌음을 알리고 비상사태인 만큼 안보상황을 점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중앙정보부 쪽으로 가던 중 정승화가 비상이니 육군본부 벙커로 가자고 하는 바람에 국방부장관실로 갔다. 이로써 그는 일만 저질렀을 뿐 사후 주도권을 쥐는 데 실패했다.26일 자정 무렵, 김재규는 김계원과 함께 국방부 장관실에 있었다.병원에서 박정희의 시신이 확인되자 국무위원들이 비상국무회의를 준비했고, 국방부장관실에는 최규하 국무총리, 노재현 국방부장관, 김계원 비서실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자리했다. 비상국무회의가 열리면 김재규는 대통령 사망과 관련한 설명을 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전개해 나갈 생각이었을 것이다.그런데 탈이 났다. 총격 현장에 있었던 비서실장 김계원이 김재규에게 비수를 겨눈 것이다. 김계원이 바로 옆방으로 노재현 국방장관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불러 내 각하를 시해한 범인은 김재규 부장이라고 밀고한 것이다.노재현과 정승화는 곧바로 김재규 체포작전에 들어갔다. 노재현은 직속기관장인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불러 정승화 육참총장을 도와 대통령 시해범 김재규 체포를 도우라고 명령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두환은 불과 47일 만에 정승화를 총격 체포하는 하극상을 저지른다.)김재규는 아무 눈치도 채지 못한 채 국방장관실 옆 회의실에 앉아 있다가 국방장관 보좌관 조익래로부터 육참총장님께서 뵙자고 한다는 전언을 듣고 따라나섰다가 헌병감 김진기 등에 의해 전격 체포됐다. 김재규는 부마사태의 참혹한 현장을 목도하고 박정희 정권에 회의를 품어 범행했다고 말하는 등 자신의 행동이 정당했음을 주장했지만 전두환 일파가 조정하는 재판부에 의해 1980년 5월21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 신군부는 불과 사흘만인 24일 광주민중항쟁으로 온 나라가 어수선한 틈을 타 그의 부관 박선호 등과 함께 사형을 집행했다. 전두환 신군부의 신속한 사형집행은 김재규가 신군부 독재에 부담이 될 것을 우려한 탓이다. 경북 구미 동향 선후배 사이인 박정희와 김재규는 신뢰가 깊었던 것 같다. 이후락, 김형욱 등 믿었던 중정부장들이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등 내심 불안감이 가중되자 76년 말 동향 후배 김재규를 중정부장에 임명한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박정희는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혔다. 이것은 불의는 결국 심판받고 만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1979년 12월 12일박정희는 516쿠데타 후 반혁명 사태 등을 통해 친위 측근 그룹을 한층 정예화하는 한편 전두환과 노태우 등 TK 중심의 육사 출신 젊은 장교들의 모임인 하나회를 육성했다.산 박정희는 전두환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생전의 박정희는 전두환이 자신의 뒤를 이어 군부독재를 이어갈 수 있는 결정적 사인을 하나 한다.전두환은 516쿠데타 때 박정희에게 확실한 눈도장을 찍었다. 육사생도들의 쿠데타 지지 시가행진을 이끌어낸 것이다. 이때부터 전두환은 중정과 보안사 등을 돌며 박정희의 신임을 받는 정치장교로 컸다. 그의 정치적 야심을 알아본 박정희가 쿠데타 이듬해 국회의원 출마를 권유했을 때는 군에 남아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하나회를 결성해 박정희를 든든하게 했다.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박정희는 항상 군부 속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불안했을 것이다. 자신에게 총을 겨누고 뒤엎어버릴 세력이 언제든 나타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밤잠 이루기조차 힘들었을 것이다. 쿠데타 직후인 1961년 김종필이 만든 중앙정보부 등 친위조직들이 샅샅이 감시하고 뒤지고 고문하고 설치긴 했지만 안도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두환의 하나회가 있기에 그는 다소 안심할 수 있었고, 그 중심에 전두환이 있었다.전두환은 운명의 해인 1979년 2월 1사단장에서 보안사령관으로 무려 2단계를 뛰어넘는 승진을 한다. 당시 영남 군벌 대표 격인 노재현 국방장관이 진종채가 떠나는 보안사령관 자리에 전두환을 단수 추천, 박정희 사인을 받아낸 것이다. 이는 관례가 없는 파격이었다.전두환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기회는 비상사태시 범죄수사 등을 총괄하는 자리인 합동수사본부장 자리를 꿰차게 된 결정이었다. 박정희는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 임명한 후 계엄령과 전시에 보안사령관이 합동수사본부장을 맡도록 하는 대통령령에 사인했다. 이 결정은 직전까지 보류 상태였다. 1026사태 당시 계엄령하에서 합수부장을 맡게 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검찰총장과 치안본부장, 중앙정보부 차장을 지휘하며 거리낌 없이 야욕을 채울 수 있었다. 신이 있다면 분명 전두환 편이었고,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두 번째 불행이었다.박정희 사후 계엄령하에서 보안사령관으로서 합수부장이란 막강한 권한을 손에 거머쥔 전두환은 노태우 박희도 장세동 등 하나회 핵심을 주축으로 음모를 꾸몄다. 전두환은 경복궁에 위치한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단장 장세동 대령)에 반란군 본부를 차린 다음 거사일인 1979년 12월12일 저녁 식사에 장태완 수경사령관과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육본 헌병감(이들은 하나회가 아니었다)을 서울 연희동의 고급 요정에 초청, 감시망을 흐리게 한 뒤 계엄사령관 정승화 육참총장을 체포했다. 최규하 대통령은 전두환 신군부에 압도당했고, 이날 밤 뒤늦게 반란군 대응에 나선 장태완 수경사령관 등은 치밀하게 계획한 반란군에 응대조차 못 한 채 체포되고 말았다.전두환 신군부의 쿠데타는 박정희의 그것을 대부분 답습했다. 내 편이 아니면 철저하게 응징했고, 일어설 수 없게 만들었다. 박정희는 자신을 두 번이나 구해준 은인 장도영을 배신했다. 김형욱 이후락 사례에서 보듯 측근이라도 배신할 것이 우려되면 잘라냈다. 전두환이 정승화 장태완 정병주 등을 총격 체포, 하나회 세상을 만든 것과 다를 바 없다. 두 독재자 공히 언론을 탄압, 국민의 눈과 귀를 막고 가렸다.1961년 5월 16일하지만 대한민국 국민은 군부 독재에 굴복하지 않았다. 회유당하지 않았다. 일제 36년의 치욕을 딛고 광복을 얻은 국민은 1948년 헌법에 기초한 민주국가의 이념, 자존심을 끝까지 지키고자 싸웠고, 전두환이 유신의 악령을 재현하려던 1987년 413 호헌조치 철폐 등 값진 승리를 이끌었다. 그 선봉에 젊은 학생이 있었고, 의기 넘치는 지식인층과 일반 시민이 있었다.1960년 3월15일 저질러진 이승만의 장기집권 야욕 315 부정선거는 국민을 분노케 했다. 남원 출신의 김주열 군(19세마산상고1년)이 마산지역 315부정선거 항의 데모에 참가했다가 행방불명된 뒤 참혹한 주검으로 발견되면서 국민의 분노는 더욱 거세졌고 위대한 419혁명으로 이어졌다.당시 이승만이 물러난 뒤 정권을 잡은 윤보선 대통령, 장면 총리의 정권이 정치 경제 사회 등 전반의 혼란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잘못은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군부에서는 부정부패와 승진적체 등으로 하극상이 일어나는 등 혼란도 컸다.그렇다고 박정희 등 정치군인 집단이 단지 권력욕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민주헌정을 뒤집은 것은 명백한 반란이다. 일제 앞잡이 황군 장교였고, 1948년 여순반란 사건 당시 남로당 끄나풀이었던 박정희가 일으킨 쿠데타는 어떠한 명분도 정통성도 인정될 수 없는 범죄행위일 뿐이었다. 이에 동조한 세력이 육사 5기와 8기 출신의 김종필 김형욱 등이었고, 전두환이 만든 하나회였다.박정희와 김종필은 1960년부터 쿠데타를 모의했지만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다가 1961년 5월15일 1군창설기념일 밤인 5월16일 0시를 기해 거사하기로 했다. 행사 후 국무총리는 서울로 귀환할 것이고, 야전군 지휘관들은 술을 마시고 잠들었을 시간을 틈탄 반란작전을 꾸몄다. 박치옥, 차지철 등이 이끄는 공수부대와 해병대, 경기도 일대의 야전군 등이 전격 작전에 동원돼 반도호텔에서 장면 총리를 체포하고 방송국 등을 장악, 정부를 전복했다. 어정쩡한 기회주의자였던 장도영은 박정희의 꾐에 빠졌다가 결국 토사구팽당했다.집권한 박정희는 공화당과 중앙정보부 등에 포진한 쿠데타 출신과 전두환 등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회의 군부 등 도움으로 장기집권 준비를 진행한다. 일제에서 벗어난 지 불과 15년 정도 지난 가난한 국민을 향해 경제개발계획을 내세우며 자신의 집권 당위성을 펼쳐나간다.그의 통치는 전적으로 군부에 의존됐다. 그는 독재권력이 위협받을 때 군과 중앙정보부 등을 동원, 국민을 짓눌렀다. 1961년 5월 군대를 동원해 정권을 찬탈한 그는 1964년 대학생과 종교인 등이 나서 한일외교 정상화를 반대하자 63계엄령으로 대중의 입을 틀어막았다. 1969년 3선개헌을 강압적으로 관철시킨 다음 1971년 4월27일 제7대 대통령에 당선된 후 대학생들이 장기집권 반대, 대학교련철폐, 중앙정보부 해체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자 1971년 10월15일 위수령을 선포하고 시위 대학생들을 잡아들이는 한편 군부대를 대학 캠퍼스에 주둔시켰다. 또 1972년 10월17일 비상조치를 내리고 개헌을 단행하면서 국회에 군병력을 투입했다. 국회에 탱크를 진주시켜 유신헌법 제정을 강제한 것이다.그는 죽기 직전까지 군대의 총칼로 민중을 탄압했다. 부마민주항쟁(1979년 10월15~20일)에 공수부대를 투입, 무참히 진압한 것이다. 부마민주항쟁은 10월 15일 부산대 학생들이 민주선언문을 배포하고 시위를 벌이다 시내버스 등을 타고 부산시내로 진출하면서 촉발됐다. 부산은 물론 마산까지 확산됐고 시민들도 가세, 학생들과 함께 정치탄압 중단, 유신정권 타도 등을 외치며 격렬히 시위했다. 이에 박정희는 비상계엄령과 위수령을 내리고 공수부대로 진압했다.1972년 10월 17일박정희의 18년 독재에서 압권은 1972년의 유신헌법을 강제한 것이다.1972년 10월 17일 독재자가 내린 비상조치 속에서 이뤄진 이 제7차 개정헌법(제4공화국 헌법)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한국적 민주주의 토착화를 목적으로 내세운 포장과 달리 대통령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보장하기 위한 치졸한 정치공작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가 총탄의 비명에 간 뒤 그를 쏙 빼닮은 전두환이 역시 장기집권을 획책하며 만든 1980년 10월 22일의 개정 헌법(제5공화국 헌법)으로 사라진 악법이었다.전두환은 1212 군사 반란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을 통해 집권한 뒤 제5공화국 헌법을 만들었는데 1980년 10월27일 발효됐다. 박정희 유신헌법을 그대로 답습, 대통령을 간접선거로 선출하고 그 임기를 7년으로 한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전두환은 이 헌법을 근거 삼아 1988년 3월3일 취임한 뒤 1987년 4월13일 국민의 직접선거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밝히며 장기집권 야욕을 숨기지 않았지만 결국 1987년 6월 국민항쟁에 굴복했다. 김영삼 정권시절 517 내란음모, 광주민중항쟁 발포 시민 학살 등 혐의로 기소된 전두환과 노태우는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사면받고 풀려났다. 권력은 부패하게 마련이고 정의는 언제나 멀다. 권력욕에 휩싸인 일부 정치군인들에 의해 유린된 과거 32년 간의 역사를 뒤돌아볼 때 1026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어떤 이유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김재규가 18년 동안 민중을 짓누르며 독재권력을 휘둘러온 대통령 박정희를 시해, 군부독재의 틀 속에서 꼼짝 못하던 대한민국 사회에 변화의 물꼬를 텄다는 사실이다. 전두환과 노태우의 신군부가 똑같은 수법으로 정권을 장악해 군부독재정권을 출범시켰지만 박정희 시해사건은 국민 사이의 민주화 열기를 한층 더 고조시켰다. 광복 후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했다. 일본 제국주의를 거치면서 자유와 독재가 뭔가를 뼈저리게 알았다. 서구의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한 교육이 계속 이어지면서 지식인층이 두터워졌고, 경제기반도 탄탄히 할 수 있었다. 이런 속에서 국민들의 의식은 한층 성숙해졌다. 권력욕에 두 눈이 뒤집힌 박정희와 전두환은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거스르고, 성숙해 가는 국민의식을 앝보았다. 북한을 통일의 대상으로 대하지 않고 집권 연장의 수단으로만 삼았다. 박정희가 1971년 미중간 핑퐁외교 등 탈냉전 데탕트 분위기를 역이용, 국지안보위기론을 내세운 것과 1986년 전두환의 하수인 장세동 안기부장이 나서 북한의 수공에 대비한 평화의 댐을 건설하자고 국민을 선동한 사건이 그것이다. 2016년 10월ing최근 박근혜 대통령은 이들의 유전자를 그대로 이어받은 듯한 행보 때문에 적잖은 비판을 사고 있다. 북한의 핵실험과 로켓발사 등 군사적 위협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국민의 안위와 국토 수호를 위해 일하는 대통령으로서 자세는 군사적 대치 상황을 피하면서 평화 분위기를 확산시키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의 대북정책은 그렇지 않은 모습이다. 박정희가 74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내면서도 끊임없이 남북긴장을 최고조로 높이며 집권에 이용했던, 그런 부류의 대북정책을 선호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또 박정희가 전두환 등 하나회 정치군인들을 권력 유지의 핵심으로 삼았던 것처럼 국정을 펴고 있지 않느냐는 의혹을 받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지난 25일 대통령 본인이 춘추관 기자회견장에 나서 국민 앞에 사과한 최순실 국정개입 의혹은 야당은 물론 여당의 분노를 하늘 끝까지 치솟게 했다.국민과 국가 앞에 정의롭지 못한 정권은 절대 오래 유지될 수 없다. 새누리당이 그동안의 청와대 비호 자세를 털고 나선 것은 그들의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의 집권 연장을 위협하는 작금의 상황 전개가 진실의 전모를 밝히는 데 큰 힘을 보탤 수 있을 것인가. 국민들은 빙산의 전모를 언제 다 볼 수 있을까.

  • 기획
  • 김재호
  • 2016.10.27 23:02

[참여&소통] 이주여성 인권피해

남편이 칼, 망치, 가위로 위협하면서 죽이겠다고 했어요.베트남 이주여성 띠엔씨는 남편 얘기를 하자 공포에 떨었다. 남편은 알콜릭으로 술만 마시면 칼과 가위로 위협을 가했다. 띠엔씨가 칼과 가위를 숨겨놓자 망치를 들고 위협했다. 띠엔씨 집에는 경찰이 수시로 출동했고, 이주여성쉼터 관계자도 수 차례 함께 동행했으나 남편은 변화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14년 다문화 유형별 이혼한 사람의 수는 1만2902명으로 나타났다. 2013년 1만3482명과 2012년 1만3701명에 비하면 다문화 이혼은 갈수록 감소하는 추세다. 2015년의 집계된 이혼현황 자료는 2016년 11월 발표를 앞두고 있다.현재까지는 다문화가족의 이혼이 점차적으로 줄어들면서 부부간의 갈등 등 여러 문제가 과거에 비해 비교적 잘 해결되고 있는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반면, 전북의 다문화가족의 이혼한 수는 2014년 514명, 2013년 545명, 2012년 501명으로 나타났다. 전국적인 수치에 비해 증감률에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전북지역의 이혼의 수가 2012년에 비해 2013년은 8%나 더 증가했다. 그런데 2014년에는 전년에 비해 다시 6% 감소했다. 전국적으로 감소추세이고 전라북도의 2014년도의 이혼율이 전년도에 비해 감소했다.2015년 전라북도의 연구용역사업으로 전북대학교 산합협력단에서 수행한 전북형 다문화가족 중장기 발전방안연구에 의하면 결혼이주여성이 배우자와 이혼별거하고 있는 이유로 성격차이(32%), 학대와 폭력(18.2%), 경제적 무능력(16.7%)이 주요한 것으로 나타났다.2009년 보건복지가족부법무부여성부 등에서 실시한 실태조사의 결과와 비교해보면 전북의 여성 결혼이민자들은 성격차이와 배우자의 학대와 폭력 등을 이유로 이혼별거하는 비율이 높고, 음주 및 도박과 배우자 가족과의 갈등이 이유인 비율도 다소 높게 나타났다.또한 2012년 전국 다문화가족실태조사의 결과와 비교하면 성격차이와 경제적 무능력은 감소했으나 배우자의 학대와 폭력이 크게 증가했다.가정폭력은 일반적으로 물리적인 압력과 해를 가하는 것만을 폭력으로 보는 경향이 많은데, 사실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지만 상대방에게 욕설과 폭언 등을 통해 큰소리로 위협을 가하고 괴롭히는 언어폭력과 상대방에게 심리적이고 정서적인 부분에 있어서 끊임없이 괴롭힘을 가하는 정서적 폭력 등 다양하게 나타난다.특히 정서적인 폭력은 다문화가족 일반에서 쉽게 발견된다.이런 가정폭력으로 인해 상대방은 자존감이 약화되고 철저히 무시당하는 존재가 된다. 폭력의 위기에 있는 결혼이주여성은 남편으로 인해 공포감에 휩싸이게 돼 우울증에 걸리거나 정신분열증 환자가 되는 경우도 있다.똑똑하고 일도 잘 하고 부지런했는데, 이제 사람이 완전히 달려져버렸어요.아시아이주여성쉼터 홍성란 원장의 말이다. 베트남 출신 이주여성 레티한씨는 한국인과 결혼해 두 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다. 레티한씨는 누가 보더라도 똑똑하고 총명하며 부지런하기로 잘 알려졌었다. 그런데 레티한씨는 이제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거나 혼자서 같은 말을 반복하며 중얼거리기도 하고 일에 대한 아무런 의욕이 없다.남편의 극심한 의처증으로 인해 오랫동안 심리적 불안감에 놓여있었던 레티한씨는 정신적 이상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법원은 남편의 귀책사유를 인정해 친권자와 양육권을 레티한씨에게 지정했으나, 이혼 후에도 계속된 괴롭힘으로 인해 이제는 조현병 증세를 보이는 등 문제가 발생해 아이들에 대한 친권과 양육권도 포기한 상태에 이르렀다.다문화가족의 위기상담과 피해상담 등을 전담하고 있는 다누리콜센터에 의하면 2015년 가정폭력, 성폭력, 성매매 등의 문제로 14만4616건의 상담이 이뤄졌다.이중에 가정폭력 1만5399건, 일반폭력 945건, 성폭력 1434건, 성매매 173건, 부부갈등 4559건, 가족갈등 1만7094건, 심리정서 2702건, 이혼문제 1만6159건, 일반법률 7841건, 체류 및 국적 1만3959건, 취업 및 노동 5350건, 쉼터 7722건, 의료 8391건 등으로 나타났다.전북지역의 상담을 전담하고 있는 다누리콜센터 전주센터에서도 2015년 가정폭력, 일반폭력, 성폭력, 부부갈등, 이혼문제 등에 있어서 7149건의 상담이 이뤄졌다. 2016년 상반기(1월~6월) 동안 이뤄진 전북지역 상담건수가 3619건이었는데, 전년도(2015년) 상반기(1월~6월) 통계가 2542명이었다. 올해 상반기와 전년도 상반기를 단순 비교해보더라도 1077건이나 늘어난 것이다.다누리콜센터(전주센터) 박미향 센터장은 피해상담의 건수가 증가하는 이유에 대해 우리 사회의 가정폭력 등 인권에 대한 상향된 인식변화로 인해 점차 피해상담 건수가 증가하고 있다고 말했다.또한 결혼이주여성들이 한국에 입국 전 피해 시 대처방법 등에 대한 교육을 대사관과 다문화가족지원센터 등을 통해 인지해 인권감수성이 향상된 것도 주요한 요인으로 볼 수 있다고 밝혔다.결혼이주여성은 초기 정착과정에서 한국어 구사능력의 빈약함과 문화적 차이로 인한 갈등, 시부모와 시누이 등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부장적 질서와 수직적 권위 속에서 물리적언어적정서적 폭력의 위기에 어렵지 않게 노출돼 있다.결혼이민자의 특수한 환경적 요인은 일반적 가족간 관계에서 나타나고 있는 요인 이외에도 국가와 민족, 인종과 종교, 그리고 문화적 가치관 등의 차이로 인한 문제 등이 추가적으로 발생해 갈등관계를 치유함에 있어서도 더 큰 어려움을 나타낸다.전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 김동준 팀장은 남편이 아내와 갈등이 발생하면 필리핀으로 가버려. 내가 너를 데려오기 위해 돈을 얼마나 들였는데라는 등 아내의 나라를 존중하지 않고 아내를 가난한 나라에서 비용을 들여 데려왔다며 소유적 존재로 여김으로써 부부간의 갈등의 골은 더욱 더 깊어진다면서 국가와 인종을 떠나 아내를 인간으로서 존중하고 소중한 삶의 동반자로 여기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다문화가족의 이혼과 별거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고 가정폭력으로 결혼이주여성의 권리가 지속적으로 침해받고 있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된 이후 가족이 해체되면 결혼이주여성은 자녀의 양육과 교육, 의료와 복지 등에 있어서 다양한 어려운 환경에 놓여진다. 폭력적 대응은 가족의 해체를 가속화시키는데, 문제 발생 시 대화와 인내함으로 서로를 존중하려는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주여성 긴급전화 다누리콜센터(1577-1366)- 13개국어 통역 상담원 배치, 24시간 연중무휴 운영가정폭력성폭력성매매 피해 이주여성 상담 및 긴급지원을 통해 결혼이주여성의 인권보호와 지역사회 속에서 건전한 통합을 이룰 수 있도록 돕는 기관이 있다.이 기관은 다누리콜센터로 여성가족부의 위탁을 받아 한국건강가정진흥원에서 운영하고 있다. 다누리콜센터는 이주여성긴급전화와 이원화된 체계로 운영되다 사업의 유사성과 중복성으로 2016년부터 통합돼 운영되고 있다.다누리콜센터는 중앙센터를 서울에 두고 수원, 대전, 광주, 부산, 경북 구미, 전북 전주 등에 지역센터를 두고 있다.가정폭력성폭력성매매 피해를 당한 이주여성은 누구나 이 곳을 통해 상담을 받고 쉼터 등 연계 기관을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다누리콜센터의 전화는 1577-1366이며 365일 24시간 무휴로 운영되고 있다.한국어, 영어, 중국어, 베트남어, 타갈로그어, 캄보디아어, 몽골어, 러시아어, 태국어, 라오어, 우즈베크어, 네팔어 등 13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통역상담원들을 배치해 지원하고 있다.다누리콜센터 전북전주센터는 전북도청 1층에 위치해 이주여성 등 다문화가족을 지원하고 있다. 다누리콜센터 전북전주센터에도 통번역 상담사 이주여성 5명이 각기 중국, 베트남, 우즈벡, 캄보디아, 한국어 등 5개 국어를 지원하며 피해를 입은 이주여성을 지원하고 있다.다누리콜센터는 이주여성폭력피해자에 대한 인권보호와 긴급지원업무 이외에도 초기 한국생활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결혼이민자에 대한 체계적인 적응지원과 다문화가족의 언어문화차이로 인해 생기는 갈등 극복을 위한 지원활동을 하고 있다.또한 이주여성 출신국가 언어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정보이해력을 높이고 정서적인 안정을 제공한다.다누리콜센터를 통해 도움을 받고 싶어하는 이주여성은 1577-1366으로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오후 6시 이후와 공휴일에는 서울 중앙센터로 전화상담이 자동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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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0.27 23:02

[전북일보 카드뉴스] 유신의 풍경

유신의 풍경#표지.유신의 풍경#1.비상계엄 선포!1971년 대선에서 신민당 김대중 후보를 불과 100만 표 차이로 힘겹게 따돌리며 재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은 장기 집권 체제를 완성하기 위해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그리고 10월 27일, 제왕적 대통령제와 대통령 간선제 등의 내용을 담은 새 헌법을 공고한다.이것이 유신의 시작이었다.#2.정권은 헌법 개정안을 국민투표에 부쳤다. 그러나 계엄으로 정치활동이 금지됐기 때문에 토론은 벌어질 수 없었다.1972년 11월 13일, 유신헌법 국민투표 참여를 독려하는 지도계몽회.#3.물론 이런 관제 집회는 열렸다.1972년 11월 18일, 전주고에서 열린 유신지지대회.#4.1972년 11월 21일은 국민투표일이었다. 유권자가 들것에 실린 채로 투표를 하는 모습.그리고 새 헌법은 91.5%의 압도적인 찬성률로 통과됐다.#5.새 헌법에 따라 주권은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행사되게 됐다.1972년 12월 8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벽보가 붙는 모습.#6.장발과 미니스커트가 금지된 때도 이때다.1973년 3월 9일, 경범죄처벌법의 개정을 알리는 전주 완산국민학교 학생들이 팔달로를 행진하고 있다. 멀리 전동성당의 첨탑이 보인다.#7.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교련. 당시는 고등학교에서 필수 과목으로 가르쳤다.1973년 5월 1일, 교련 시범공개 행사에서 전주여고 학생들이 시범을 보이고 있다. 본부석에 붙어 있는 표어를 보면 이 행사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8.남학생은 총을 들었다. 비록 실제 총알이 나가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1974년 6월 15일, 고등학교 교련 실기대회에서 총검술 시범을 보이는 학생들.#9.1974년 8월 15일, 문세광이라는 사람의 총에 영부인 육영수 씨가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최태민 목사는 이때 박근혜 현 대통령을 보살핀 사람으로, 이 인연은 최 목사의 딸 최순실(최서원)로 이어져 현재에 이른다.이튿날 전북도청에 마련된 빈소를 찾은 도민들.#10.1975년 2월 12일,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 정권에 대한 재신임 투표를 실시했다. 물론 73% 찬성으로 유신 체제는 지속됐다.#11.삼엄한 긴급조치의 가운데서도 학생들의 저항은 계속됐다. 이들 중 더러는 구속되기도 했다.1975년 2월 15일,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됐던 학생들이 전주교도소에서 석방되는 모습.#12.그날 석방된 학생 중 이런 사람도 있었다. 전남대 이학영 학생이 어머니를 업고 기뻐하는 모습. 이 사람은 지금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다.#13.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것은 당시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을까?1977년 7월 20일, 유신이념 구현 초중고 교장 연수회.#14.박정희 하면 새마을.1977년 12월 8일, 지금은 없어진 전주 미원탑에 전국 새마을 지도자 대회 환영 플래카드가 붙어 있다.#15.그런 유신 7년. 심복의 권총 몇 발에 허무하게 끝나게 될지 누가 알았을까.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사망했다.다음날 박 대통령 사망 소식이 실린 신문을 보는 전북도민들./기획 신재용, 구성 권혁일, 제작 이권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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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0.26 23:02

[문화&공감] 익산 솜리골 작은미술관에 가다

몇 해 전 프랑스 여행 중에 봤던 광경 중 하나를 잊을 수가 없다.철도역을 개조해 미술관으로 만들어 유명한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 긴 줄을 기다린 끝에 들어선 미술관 이곳저곳을 기울거리고 있을 때다.북적거리는 인파들 사이로 작은 무리의 어린아이들이 보였다. 알렉상드르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 그림 앞에 교복을 입은 채로 바닥에 주저앉아 각자의 노트에 열심히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그림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그걸 노트에 적고 아이들의 모습이 귀여워 한참을 지켜봤다. 한 시간 가량을 바닥에서 그림을 감상하던 아이들은 가방을 챙겨 다음 그림으로 가는 듯했다. 아이들의 표정은 전문 갤러리 못지않은 진지함이 묻어 있었다. 세계적인 미술관에서 유명 화가의 그림을 제대로 감상할 줄 아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그들에게 미술관은 놀이터처럼 보였다.그러나 우리나라의 현실은 그리 녹녹치 않다. 시립 미술관이 없는 도시들이 수두룩하고 평생 전시회를 가보지 못한 주민들도 많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 미술관, 음악관, 박물관 등 문화예술 시설을 쉽게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지난 21일 익산에 문턱을 낮춘 작은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대도시에 비해 문화예술의 기회가 적은 익산의 평화동(구도심)에 SomRiGol 작은 미술관이 생겼다.SomRiGol 작은 미술관은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작은 미술관 조성 운영사업에 전북에서 유일하게 선정돼 유휴공간인 창고 건물을 문화 공간인 작은 미술관으로 조성했다.작은 미술관 사업은 등록미술관이 없거나 미술문화 확산이 절실한 지역 내 주민 접근성이 높은 생활문화공간을 활용해 조성하여 운영하는 시각예술 공간이며, 전시와 부대 프로그램 등 콘텐츠 확보와 실행을 중심으로 운영하고 있다.특히 국민의 문화격차 해소 위해 생활문화공간, 주민자치센터 등을 작은 미술관으로 설치운영 유도해 미술관 없는 지역의 생활문화공간을 활용한 작은 미술관을 시범 조성해 생활 속 시각예술 체험 확대하는 것이 사업의 취지이자 목표다.SomRiGol 작은 미술관 큐레이터 김은미(41)씨는 5살 꼬마부터 80대 어르신까지 친근하게 찾아올 수 있는 미술관으로 운영하겠다. 미술관은 어려운 공간이 아닌 언제 어느 때나 쉽게 찾을 수 있는 친근한 공간으로 만들겠다 고 운영계획을 밝혔다.미술관으로 개조된 공간은 1930년 지어진 일본식 건물로 옛 익옥수리조합의 창고로 사용되었던 건물로 등록문화재 181로 지정되어 있는 곳이다. 적벽돌을 쌓아 만든 조적식 슬레이트 건축물로 일제 강점기 역사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공간이다. 문화재 지정 이후 보존 상태가 양호해 지역민을 위한 생활 문화공간으로 조성해 다양한 시각 예술 체험을 확대하고자 이번에 작은 미술관으로 리모델링하게 된 것이다.설계를 맡은 강미현 건축사는 등록문화재의 건축 양식을 존중하고 작은 공간이 가지는 한계를 넘는 확장을 시도했다고 한다.현재 SomRiGol 작은 미술관 개관전으로 그땐 그랬지 사진전이 10월 21일부터 11월 6일까지 개최되고 있다. 공모를 통해 선정된 37점이 전시되고 있다. 주민들이 추억의 앨범에서 꺼내 준 옛날 사진을 보며 과거 우리 부모 세대의 젊은 시절을 잠시 엿보는 것도 좋은 추억 여행이 될 것이다. SomRiGol 작은 미술관은 지역 어르신들이 자원봉사자로 돌아가며 도슨트 역할을 자처하며 관람객을 맞고 있다. 관람료는 무료이며, 누구나 관람할 수 있다. 작은 미술관은 개관 이후 하루 150여명의 관람객이 꾸준히 찾고 있다.우리 동네 미술관 SomRiGol 작은 미술관은 문화예술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문턱은 낮추고 지역민들의 눈높이에 맞춘 누구나 가고 찾고 싶은 우리 동네 미술관으로 만들어가기를 바란다.어려운 문화공간이 아닌 예술 활동을 통한 지역민들과 함께 할 수 있고, 누구나 마음껏 찾아올 수 있는 우리 동네 미술관 SomRiGol 작은 미술관.우리 동네 미술관으로 발길을 옮겨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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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0.25 23:02

[철도기행: 임피역 편] 멈춘 시간과 멈추지 않는 열차들

뿌옇게 흐린 공기의 저편, 서쪽 대야 방향에서 붉은 기관차가 달려오고 있었다.붉은 기관차가 푸른 화차를 끌고 노란 들판을 가로질러 내달리는 총천연색의 풍경이 퍽 인상적이었다. 하늘의 빛만 분명했다면 완벽했을 텐데.무당벌레를 닮은 7600호대 디젤기관차 두 대가 나란히 붙어(이를 중련이라고 한다) 힘을 합쳤다. 손가락으로는 다 셀 수 없을 정도 되는 수의 화차가 달달달 끌려 익산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열차가 지나가는 것은 금방이었다. 역은 다시 조용해졌다.미즈호와 이엽사그리고 농민들점심시간에 잠시 짬 내서 와봤는데, 그냥 신기해요.안내판을 들여다보던 방문객 일행은 이렇게 말했다. 혹시 과거 임피역을 이용해본 적이 있는지 묻자, 일행 중 한 명이 여기 열차가 서느냐, 안 서지 않냐고 반문했다.사실 와본 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어요.아는 사람은 알지만, 또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 역으로서의 삶이 사실상 끝난 간이역의 숙명일 것이다.1912년 3월 6일, 군산선이 개통되면서 군산역과 대야역이 개통 원년멤버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12년이 지나 1924년 6월 1일, 임피역이 역원배치간이역으로 영업을 개시했다.임피역이라는 간이역이 필요했던 것은 역시 쌀 수탈 때문이다. 지금 봐도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는 이 지역에는 일제 강점기 일본인 지주들의 농장이 있었다.그중에서도 잘 알려진 것으로는 지금도 서수라는 지명에 남아 있는 서수촌(瑞穗村), 그러니까 미즈호라고 읽는 농장이 있다.가와사키 토타로(川崎藤太郞)라는 일본인 상업가는 1904년, 충남 연산 지역과 전북 옥구임피 지역의 땅을 대규모로 매입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05년 4월에 농장을 개설했다. 미즈호는 윤이 나는 싱싱한 이삭을 의미한다.가와사키는 농장 설립 4년 뒤에 자신의 고향인 니가타(新潟)에서 흙을 가져와 신사를 짓기도 했다고 한다.이후 가와사키의 농장은 1927년 이엽사 농장으로 합병되는데, 쌀 수탈에 앞장섰던 이엽사 농장은 농민들에게 수확량의 무려 75%를 소작료로 내라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한다.참을 수 없던 농민들은 그해 11월 25일, 그러니까 농장 측이 정한 납부 기일에 소작료 납부 거부를 결의했다. 그러자 경찰이 다음날 농민조합 간부 장태성을 잡아 가뒀고, 이에 분개한 농민들이 임피역전 술산지서로 쳐들어가 장태성을 구출했다. 이어 서수지서이엽사를 연달아 격파했다. 그러나 이내 들이닥친 무장 경찰들은 농민들을 무더기로 잡아 가뒀다.이 사건은 옥구농민항일항쟁으로 역사에 기록된다.수탈의 실적은 꽤 쏠쏠했던 모양이다. 본래 간이역이었던 곳이 개업 12년 만인 1936년 11월에 보통역으로 승격하고 한 달 뒤에 번듯한 역사(그러니까 지금 서 있는 그 건물)도 들어섰으니 말이다. 이 건물은 2005년 11월에 국가 등록문화재(제208호)로 지정된다.통근열차와 새마을호 그리고그러나 보통역으로서의 삶은 반세기를 넘기지 못했다. 1985년에는 운전간이역으로 격하됨으로써 임피역은 간이역으로 돌아간다. 이후 1995년에는 역원배치간이역으로, 2006년에는 그나마 있던 역원도 철수해 역원무배치간이역으로 떨어졌다.그래도 군산~전주 간 통근열차가 운영되던 동안에는 다른 간이역들과 비교해볼 때 상황이 나쁜 편은 아니었다. 통근열차 운행 마지막 해인 2007년의 철도통계연보를 보면 임피역 승하차 승객 수는 8807명이었는데, 이는 군산선 역 중에서는 군산역(42만7800명)과 대야역(1만8801명) 다음으로 많은 수다.같은 해 군산~전주 구간의 역들을 보면 전라선 춘포역은 겨우 291명이 이용했을 뿐이고, 동산역은 7636명이 이용했다. 오산리개정역에서는 각각 4852명3182명이 타고 내렸다.2008년 1월 1일, 통근열차가 사라졌다. 그리고 동시에 아주 이상한 광경이 만들어졌다. 한국철도공사의 무인역 사상 최초로 정기편 새마을호(?!)가 서기 시작한 것이다.이것은 통근열차 폐지와 함께 코레일 측이 주민 편의를 위해 서천~익산 간 새마을호 열차를 대신 투입하면서 생긴 일인데, 그러나 이 희한한 상황은 채 그해 여름이 되기도 전에 끝나버리고 말았다.2008년 5월 1일, 서천~익산 새마을호 열차가 폐지됐다. 그리고 임피역도 오산리개정역의 뒤를 따라 여객 취급이 중지됐다. 2008년 철도통계연보에 따르면 그해 임피역의 승하차 인원은 47명. 마지막으로 태운 불꽃이라 하기엔 초라한 성적이었다.그리고 이곳의 시간은 멈췄다.이제 플랫폼에는 들어갈 수 없고, 열차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이곳을 통과한다. 반대쪽 플랫폼은 흔적만 남았다. 언젠가 그 플랫폼에 닿아 있었을 측선도 사라진 지 오래다.시실리 시간이 멈추다임피역은 이제 유적지이자 관광지인 공간으로 변모했다.군산 구불길 2-1코스 미소길이 호원대와 이곳을 거쳐 남쪽 만경강을 향해 뻗어간다. 대야 방향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미소길 탐방쉼터도 나온다. 다만 취재팀이 찾아간 날은 쉼터 건물의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군산시청에 따르면 이 쉼터는 2013년 개소 이후 식당 및 숙소 시설로 이용돼 오다, 구불길 탐방객이 줄면서 위탁 운영으로 전환된 뒤 계약이 만료된 상태라고 한다. 재입찰을 준비 중이라고.옛날 농민들이 이엽사 농장의 횡포에 항의하며 딛고 있었을 역 광장은 시실리 광장이 됐다. 시실리는 어쩐지 지중해의 어느 섬 이름 같다는 느낌적 느낌이지만, 여기서는 時失里, 시간을 잃어버린 마을이라는 뜻이란다. 이 이름표를 달고 있는 탑에는 거꾸로 가는 시계가 붙어 있다. 숫자가 시계 반대 방향으로 올라간다.광장 한쪽에 조그만 연못이 있는데, 이것은 연방죽이라 불리던 옛 방죽을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채만식의 소설을 모티브로 한 조형물도 군데군데 서 있다.이곳에서 가장 이질적인 것을 꼽자면 단연 주차장 뒤쪽에 세워져 있는 새마을호 객차 두 칸이 아닐까?어쨌거나 새마을호가 이곳에 서긴 했었고 또 사상 최초로 정기편 새마을호 열차가 서는 무인역이라는 타이틀도 있으니 그 나름대로 수긍은 가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기억 속 임피역은 동동동동 소리를 내며 굴러가던 통근열차와 더 어울리는 것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이 어색한 차량은 일종의 박물관처럼 꾸며져 있다. 군산선임피역과 군산, 일제의 수탈, 그리고 민중의 저항 등에 관한 것들을 볼 수 있다.역 주변, 노랗게 물든 논에서는 가을걷이가 한창이었다. 콤바인이 털털털 논바닥 위를 미끄러지는 풍경 뒤로, 이번엔 파랗게 칠해진 해랑 디젤기관차가 임피역에 서 있는 것과 비슷한 객차들을 등에 달고 지나간다.그 한참 뒤로는 새로 지어지고 있는 익산~대야 간 장항선 복선철도 구간이 보인다. 몇 년 뒤면 열차들은 논 옆이 아니라 땅에서 10m쯤 위, 곧게 뻗은 다리를 밟을 것이다.그렇게 되면 임피역은 정말로 역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조금은 서운해질 지도 모르겠다.

  • 기획
  • 권혁일
  • 2016.10.22 23:02

[참여&소통] 농촌공동체를 살리는 방법 ⑦ 농업은 공공재…공익·다원적 기능 보상 시행해야

최근 독일, 오스트리아 친환경농업 연수를 다녀왔다. 두 번째라서 더 많이, 더 정확히 보였다.특히, 독일 바이에른주의 켐텐(kempten)시 전 농업국장인 조제프 히머(Joseph Hiemer) 박사의 강의는 인상적이었다. 바이에른주 등 독일은 물론 EU(유럽연합)에서 전면적으로 시행하는 직불금이 주제였기 때문이다. 이름부터 농업직불금이나 농가 기본소득 보전 직불금이 아니라 문화경관(kulturlundschaft) 직불금이다.결론적으로 독일의 직불금제도는 강력하고 효과적이다. 농촌에서 농민의 생활을 거의 책임진다. 하지만 그러한 직불금 정책에도 불구하고, 광활하고 평탄하고 비옥한 우량농지(농가 평균 50~60㏊)에도 불구하고 독일 농가의 농업경영은 구조적 적자 상태에 빠져있다. 독일의 평균적인 또는 평범한 소농들은 일년 동안 쌔가 빠지게, 또는 뼈골 빠지게 농사를 지어 3만 유로쯤의 농업소득을 벌어들인다. 비용이나 세금을 다 공제하고 남은 순소득으로 직불금을 포함한 금액이다.겉으로만 본다면 한국의 평균적인 농가의 농업소득(약 1100만원)에 비해 3배가 넘는 소득이다. 하지만 농업소득의 80%를 보전하는 직불금이 없다면 오히려 평균농지 1.5㏊의 한국 소농들보다 농업소득이 적은 형편이다. 농가마다 가계지출은 4만 유로가 넘는다니 결국 1만 유로의 적자를 감수하면서 농촌을 지키며 농사를 짓는 셈이다. 농식품 가공, 농촌관광 등의 6차산업 농외 소득, 목수, 원예사 등 부업을 겸업하지 않는다면 빚을 내서 생활해야 하는 어려운 지경이라는 말이다.△적자 농가경영의 해법은 직불금밖에 없어무엇보다 2년 전에는 농업소득의 50%가 직불금이었는데 이제 80%에 달한다는 사실이 걱정스럽다. 그만큼 초지에서 낙농을 주로하는 독일 농부들의 농업소득 기반이 더욱 악화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 보다 싼 우유라는 말은 단지 자조나 넋두리가 아닌 사실인 것이다. 초지 1㏊당 우유를 7000리터 생산, 리터당 30센트에 판다. 그러면 고작 1㏊당 2100 유로에 불과한 저부가가치 성과물만 돌아온다평균 농지 40㏊의 낙농 농가일지라도 연간 농업매출은 1억원에 불과하다. 여기에 비용과 세금을 빼고나면 남는 게 없다. 그래서 낙농 농가마다 이농과 폐농의 위기에 시달리고 있다. 중국, 러시아 등의 해외판로가 위축된 악영향에서 비롯된 현상이지만 근본적으로 농사라는 고노동-저수익형 산업이라는 구조적 한계와 역부족 때문이다. 그렇다고 먹을거리로 타국의 목을 조르지 않는다는 녹색계획의 철칙을 60년째 고수하고 있는 독일로서는 해외로 물량을 밀어낼 수도 없다.그래서 선진농업국 독일조차 농업의 만성적이고 고질적인 저소득 구조를 해결하는 근본적 해결책은 직불금 밖에 없다. 무엇보다 1984년부터 시행된 독일의 문화경관 직불금 제도의 목적은 말 그대로 아름다운 농촌의 문화경관을 보전하자는 것이다. 농사 소득을 보존하려는 농업직불금이라는 오로지 농업경제학적 관점에 그치지 않는다.구체적으로 착하고 정의로운 사회적 농사를 농부들이 짓고도 얼마든지 농촌에서 먹고살 수 있도록 국가와 정부가 책임지고 나서서 지원하려는 농촌사회학적 철학, 농촌사회복지 관점의 농민생활보장 정책에 다름아니다.결국 공익적이고 공동체적인 농업이라는 이타적사회적 공무에 종사하는 농부들의 기본생활을 지켜주려는 목적이다. 심지어 독일은 헌법과 동등한 위상을 지니는 동물보호법에 동물도 인간처럼 신의 피조물이니 인간이 보호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래서 소는 고삐에 묶이지 않고 닭은 닭장(cage)에 갇히지 않는다. 그런 독일의 정부가 농민을 위하는 마음이 오죽할까 싶다. 과연 사회안전망이 강건하고, 사회적자본이 충만하고, 사회민주주의로 작동되는 사람 사는 선진국가, 행복사회답다.△농촌의 문화경관을 지키는 자부심의 보상독일의 직불금 예산지원 재원은 EU 50%, 독일 정부 30%, 주정부 20%로 분담한다. 독일의 16개 연방마다 특징과 지급방식의 차이가 있지만 대개 목적과 원칙은 거의 동일하다. 기후변화를 방지하고, 토양침식오염을 방지하고, 생태계 다양성을 유지하고, 문화경관을 보전하고, 동물애호적 사육을 지원한다는 것이다.결국 독일의 직불금은 한국처럼 땅을 많이 가진 대농의 농외소득만 늘려 소농영세농과 소득 양극화만 오히려 촉진강화하는 악법으로 작동하지 않는다.EU의 직불금 예산도 넉넉하다. 2003년 CAP(Common Agricultural Policy, 공동농업정책) 개혁을 계기로 전체 농정예산의 70%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이에 반해 한국의 직불금제도는 일단 규모도 왜소하고 운영도 형식적이고 실효성도 미미하다. 현재 운영되는 10개의 농업직불금 제도는 각각 목적, 예산, 법률, 지침, 운영기준 등이 다르다. 복잡한 시행체계로 한정된 예산을 나눠 쓰다 보니 제도당 예산규모도 작을 수밖에 없다. 독일 등 EU처럼 농업농촌이 공공재라는 인식 하에 공익적다원적 기능에 대한 대가로서 보상한다는 광의의 직접지불을 강조하고 시행영역을 확대해야 마땅하다.직불금으로 먹고사는 독일의 농부들은 자긍심으로 충만하다. 직불금은 농업에 종사하고 농촌에 거주하는 농민으로서 응분의 보상으로 여긴다. 식량은 물론 문화, 경관, 생태를 지키는 농부들은 우리가 아무 농사 일도 안 하면 (농촌의 문화경관이) 어떻게 망가지나 보라며 당당히 시위를 하는 경지에 이르렀다.다만, 직불금 수혜에 따른 농부의 책무를 어기면 그만큼 가혹한 징벌이 가해진다. 즉 적당히 제초제를 뿌리다 암행감시에 걸리는 등 단 1건, 한 농부의 위반사례라도 적발되면 재기 불능의 패가망신을 각오해야 한다. 정부와 연대한 공동책임징벌로 800만 유로의 무지막지한 벌금이 부과되는 것이다. 이처럼 독일 정부는 농정공무원이 농민을 철저히 감시하고 있으니 국민들은 안심하고 농민의 농산물농식품을 구매소비하라고 약속하고 있다. 농민은 국가를 믿고 국민은 농민을 믿을 수밖에 없다.● 면적 기준 직불금 불합리, 농가별 기본소득 보장을한국은 농업농촌 종합대책에서는 농식품부 예산 대비 직불사업 예산비중을 23%까지, 농가소득 대비 직불비 비중을 10%까지 확대하겠다고 제시한 바 있다.하지만 2013년 실적을 보면 직불사업 예산비중은 18%, 농가소득 대비 직불금 비중은 4.3%에 그치고 있다.특히 농가소득대비 직불금 비중은 미국 12.2%, 영국 19.5%, 일본 7.9% 등으로 오히려 선진국의 대규모 기업적 농가에 대한 직불금 지급률이 한국보다 더 높은 실정이다.무엇보다 기존의 농지 면적 기준(㏊당)으로 지급되는 방식의 직불금제도는 비합리적이다. 농지를 많이 소유한 일부 대농에게 이익이 편중될 뿐이다. 농지를 많이 보유하지 못한 대다수의 소농, 임차농 등은 해당사항이 없는 그림의 떡일 뿐이다. 실제 농사를 짓지 않는 위장농민들의 직불금 부당위장 수령의 폐해도 빈발하고 있다.그래서 김성훈 전 농림부장관은 농가 단위로 기본소득 직불금을 지급하자고 제안한다. 법정 최저임금소득의 50%를 농가에 보충 지원한다고 가정하면, 농가 호당 약 월 50만원, 연간 600만원을 지급하면 된다. 이 기본소득을 농가 직불금 개념으로 전국 농가 110만호에 일괄 지급한다면 연간 총 6.6조원 정도가 소요된다. 2013년 기준 농가 평균소득의 17.4%, 또는 총 농림생산액의 24.4%에 해당하는 규모다.최근 충남도는 벼 재배여부와 면적에 관계없이 전체 농가에 균등 지급하는 농가단위 직불금 제도를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전체 쌀 농가의 65%를 차지하는 1㏊미만 소농가에 대한 직불금이 평균 20만원인 반면 전체 7.6%에 불과한 3㏊이상의 대농가에게는 129만7000원이 지급되는 대농과 소농 간의 소득불균형을 해소하려는 정책목적이다.또 농업농촌 유지보전을 위해 주민 주도로 지역환경 및 생태개선활동을 벌이고 조건이행에 따라 생태경관직불금을 가산 지급하는 방식의 농업생태환경 프로그램 시범사업을 벌이고 있다. 이른바 유럽형 직불금 제도의 한국적 변형이다. 농가당 1년 최대 300만원까지 보상지원을 받을 수 있으며 기존의 직불금과는 별도다. 충남도가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인 한국형 농업직불금 제도를 혁신하는 물꼬를 튼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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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0.20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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