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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기행: 군산항선 편] (부록)군산 근대역사문화거리, 꼭 가봐야 할 6곳

시간여행의 기점은 역시 군산 근대역사박물관이다. 시간여행! 군산 근대항 스탬프 투어도 근대역사박물관에서 시작하고 말이다.군산시 관광진흥과가 배포하는 근대역사문화거리 관광안내도도 근대역사박물관을 중심으로 그려져 있고 이 박물관을 중심으로 도보 8분권, 15분권, 20분권 등 권역이 표시돼 있는 것을 보면 애초 군산시의 의도가 이것이었던 것 같다.이곳에서 출발해 발길 따라 20분 거리, 군산 근대역사문화거리에서 꼭 가봐야 할 곳을 (앞선 기사에서 소개한 곳은 빼고)여섯 곳 골라봤다. 마침 오는 30일부터 10월 2일까지 군산 시간여행 축제가 열린다.옛 군산 세관 본관앞선 기사에서 소개한 군산 근대건축관(옛 조선은행)이나 근대미술관(옛 제18은행) 등을 제외하면, 군산 근대역사박물관에서 출발하면 아마 가장 먼저 들르게 되는 곳이 이곳 아닐까. 박물관 바로 옆에 있으니 말이다. 특히 스탬프 투어에 욕심을 낸다면 근대역사박물관에 이어 두 번째로 들러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군산항이 열린 것은 1899년. 개항이라는 말은 항구가 열린다는 뜻인데, 이 항구는 무역항을 말하는 것이었다. 무역에는 통관 절차와 관세가 따르고, 이런 업무를 맡아 보는 기관도 필요했을 터다. 그래서 세워진 것이 이 군산 세관이다.1908년 지어진 옛 군산 세관 본관 건물은 지금은 호남관세전시관으로 쓰인다. 아담한 서양식 단층 건물인데, 석재와 벽돌이 적절한 비율로 쓰여 고풍스러우면서도 세련된 느낌을 준다.세관이라는 기관의 특성상 군산항을 통해 이뤄졌던 수탈의 기록을 담고 있다.또 군산 세관이 적발한 각종 신묘한 물건들을 전시해놓은 곳도 있는데, 석궁이나 총 같은 위험한 물건부터 호랑이 탈(...), 비아그라(...) 같은 물건들도 볼 수 있다.얼핏 보고 지나가면 모를 수도 있겠는데, 세관장실에서 제복을 입고 코스프레를 해볼 수도 있다. 인스타그램에 이런 인증샷 한 컷쯤 올리는 것도 재미지 않을까.빈해원과 이성당군산 맛집이라 하면 중화요리 전문점 이름이 여럿 나온다. 짬뽕 명가만 해도 벌써 복성루, 쌍용반점, 용해장, 수송반점 같은 이름들이 술술 나오는데, 역시 항구도시라 그런지 다들 해산물을 잘 쓰기로 정평이 나 있다.쟁쟁한 군산 중화요릿집 가운데서도 특별한 한 곳을 꼽자면 아무래도 빈해원을 꼽아야 할 것 같다. 1952년 개업, 엄연히 군산 역사의 한 축을 맡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지난 2010년 개항 111주년을 맞아 군산시청이 선정한 군산 기네스에서 가장 오래된 중국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군산 근대건축관(옛 조선은행)에서 길을 건너면 나오는 빈해원은 겉모습은 초라하다.아무리 봐도 그냥 평범하고 오래된 중국집 정도의 인상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얘기가 달라진다.2층 구조인 식당 안으로는 넓은 홀이 나오고, 옛날 여관을 연상시키는 작은 방이 좌우로 늘어서 있다. 그 양식이 마치 중국에 있는 건축물을 그대로 들어다 심어놓은 것처럼 돼 있어 인상적이다. 꽁시파차이라고 읽는 恭喜發財 글씨가 붙어 있고 붉은 등이 여럿 걸려 있는 것을 보면 영락없다.이곳의 대표 메뉴로는 역시 짬뽕을 꼽을 수 있다. 짜지 않으면서 칼칼한 것이 퍽 자연스러워 그릇째 들고 들이키게 된다. 물론 탕수육, 별미고추초면 역시 널리 입소문을 타고 알려진 주력 상품이다.카테고리는 조금 다르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인 이성당 또한 군산 여행에서 놓칠 수 없는 맛집이다.광복을 맞은 해인 1945년에 이성당이라는 이름으로 개업한 이 빵집은 군산은 물론 우리나라 전체를 놓고 봐도 가장 오래된 빵집이다.전주에서는 관광객들이 죄다 PNB의 주황색 종이봉투를 들고 다닌다고 하면, 군산에서는 이성당의 노란 종이봉투가 정확히 그 자리에 놓인다고 보면 된다.이성당을 찾을 때는 두 가지만 기억하면 된다. 팥, 야채. 팥 앙금빵과 야채빵이 워낙 유명하다 보니 이 두 가지를 찾는 손님을 위한 대기 장소가 따로 마련돼 있을 정도다.달달하면서 깊은 맛이 나는 팥 앙금은 여름에는 빙수에도 올라가는데, 이 역시 일품이다.물론 이성당 역시 군산 기네스에 등재돼 있다.고우당이 고우당께형용사 곱다는 고와 -ㅂ, 그리고 -다로 이뤄져 있다. 활용 때에는 고운, 고우니 등과 같이 우가 붙곤 하는데, 이는 -ㅂ이 변한 것이다.가끔 이것이 사람들 입에서 고우다, 고우당께 등으로 나오기도 한다. 추+우+ㅓ인 추워가 가끔 추+ㅂ+ㅓ, 추버로 나오기도 하는 것의 역에 해당한다고 하겠다.군산 근대역사문화거리 한가운데에 위치한 근대역사체험공간 고우당은 한자로 古友堂, 그러니까 옛 벗 집인데, 전라도 사투리 고우당께를 표현한 것이라고도 한다.지난 2012년 문을 연 고우당은 이듬해 제2회 군산시 건축문화상에서 아름다운 건축물 부문 금상을 받을 정도로 곱다.옛 가옥을 고쳐 다듬은 일본식 건물이 모여 있으니 꼭 일본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게스트하우스로 알려진 고우당의 핵심은 물론 숙박공간이다. 다다미가 깔려 있고 겨울에는 코타츠(일본식 탁자형 난방기구)가 놓이는 일본식 공간인데, 그 이국적인 모습이 신선하다.건물들 가운데 놓여 있는 정원은 정원을 둘러싼 일본식 건물과 연못, 징검다리와 나무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선사한다. 취재팀이 방문한 날은 구름이 많이 꼈지만, 하늘이 새파란 날이나 눈이 많이 쌓인 날이라면 더욱 아름답다.고은 시인의 동명의 시에서 이름을 따온 선술집 세노야와 편의점, 카페가 딸려 있다. 또 히로쓰 가옥이나 동국사, 창작문화공간 여인숙 등 주변 명소와도 가까워, 군산 시간여행의 거점으로 삼기에 손색이 없다.동국사의 아이러니담장 위, 분홍빛 꽃이 몽글몽글 달린 배롱나무 가지를 따라 시선을 움직이면 경사로 끝 대문을 지나게 된다. 이어 오른쪽으로 시선을 다시 옮기면, 작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웅장하게 아주 큰 것도 아닌, 그러면서 또 뭔가 지붕 모양이 이질적인 건물을 마주하게 된다.동국사는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일본식 사찰이다. 동국사의 모체는 1909년 일본 조동종 계열 승려 우치다(內田)가 세운 금강선사라고 하는데, 현재의 자리에 세워진 것은 1913년이다. 그러니까 동국사 대웅전이 지어진 지는 올해로 103년이 지난 셈이다.건축 당시 일본인 승려가 일본에서 건축자재를 들여와 지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듣고 보니 더욱 일본스러운 느낌이다.그러나 이 일본인이 일본산 자재를 가지고 지은 일본식 사찰의 모습을 완성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범종각 근처, 대문에서는 곧바로 정면에 위치한 참사비와 소녀상이다.지난 2012년, 일본 동국사를 지원하는 모임이 주관해 이 비석을 세웠다(관련기사 : 日 불교종단 동국사에 '참사비' 제막). 제막식이 열린 날은 9월 16일이었는데, 그날이 바로 동국사 창건 기념일이었다.참사비에는 그보다 20년 전인 1992년에 발표된 참사문의 일부가 적혔다. 참사문이란 참회와 사죄의 글이라는 뜻이다. 전쟁이 끝난 것이 1945년이었으니, 좀 늦은 감이 있다.우리 조동종은 명치유신 이후 태평양 전쟁 패전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아시아 전역에서 해외포교라는 미명 하에 당시의 정치권력이 자행한 아시아 지배 야욕에 가담하거나 영합하여 수많은 아시아인들의 인권을 침해해 왔다. (중략) 과거 일본의 억압 때문에 고통을 받은 아시아 사람들에게 깊이 사죄하면서 권력에 편승하여 가해자 입장에서 포교했던 조동종 해외 전도의 과오를 진심으로 사죄하는 바이다.2012년 참사비 제막식에 참석한 이치노헤 쇼코(一戶彰晃) 스님은 당시일본 불교계는 근대화를 추진하는 일본의 국가 권력에 협력하여 전쟁에 가담했다. 지울 수 없는 커다란 상처를 동아시아에 남긴 점을 참회하며 사죄드린다고 말했다(관련기사 : "일제 강점기 과오, 용서 빕니다" 군산 동국사 '참사문비' 건립 日 이치노혜 쇼고 스님). 또 과거 침탈 자료들을 군산시에 기증하기도 했다.참사비 앞에는 평화의 소녀상이 서 있다. 일본군이 강제로 동원한 이른바 위안부 문제를 상징하는 것이다.지난해 세워진 이 소녀상은 두 발로 땅을 딛고 서서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그 시선은 대웅전 옆 요사채에 가 닿는다. 대웅전과 연결돼 있는, 일본인이 일본산 자재로 지은 일본식 건물이다.제국주의와 국가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이 거대한 집단 성폭력 사건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아무도 일본 정부가 건네는 10억 엔을 참회와 사죄의 표시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한편 동국사는 그 자체도 많은 사람이 찾는 명소지만, 고우당에서 길 건너 올라오는 동국사길 전체가 또 훌륭한 문화예술 거리다. 1960년 개업해 2006년까지는 상봉여인숙이었던 문화창작공간 여인숙이 이 길에 있고, 발달장애 대안학교인 산돌학교가 있다. 같은 건물에 산돌갤러리와 고은 시화전시관이 있다.아수라발발타 신흥동 히로쓰 가옥어릴 적에는 주위 사람들이 히로쓰 가옥, 히로쓰 가옥 하니까 히로쓰라는 말이 어떤 건축 양식을 가리키는 말인 줄 알았다. 그게 아니라 이 집을 세운 히로쓰 게이샤부로라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지금은 신흥동 일본식 가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은 2층짜리 목조 건축물 두 채와 정원으로 구성돼 있다. 정원은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돌과 나무의 배치가 꽤 조화롭다. 조그만 석탑은 귀여운 느낌마저 든다.이 집을 지은 사람이 포목점과 농장을 운영하던 지주였으니, 이 건물과 정원도 결국 농민 수탈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겠다.눈썰미가 좋은 이들에게는 낯이 익을 수도 있다. 바로 영화 타짜에서 고니(조승우)가 평경장(백윤식)에게 도박을 배우던 곳이다. 아수라발발타 하는 소리가 문득 귀를 스친다.사실 이 일대에는 이런 일본식 가옥이 여럿 있다. 그냥 길을 걷다가도 뭐가 보여서 보면 그게 일본식 가옥이고 그렇다.이를테면 옛 조선주조 군산 분공장이 있던 건물은 지금 게스트하우스로 쓰이고 있다. 고우당 인근 사거리에 위치한 관광안내소나 동국사길 들어가는 입구 즈음에 위치한 군산항쟁관도 일본식 건물이다. 길 가다 마주친 조그만 상가 건물이 뭔가 평범하지 않은 것 같아서 보면 일본식 건물이다. 이런 것들이 거리 발 닿는 데마다 하나씩 있으니 묘한 기분이 든다.시간여행이라면 시간여행이랄 수 있지만, 그 기분을 조금 더 엄밀하게 말한다면 시간의 모자이크라고 할까. 1900년대의 조각과 1930년대의 조각과 1960년대의 조각과 2000년대의 조각이 무심한 듯 시크하게 붙어 있는 느낌이다.그 시대에 고정된, 어떤 잘 통제된 그런 박제된 것이 아니라, 한 블록을 걸어도 100년의 시간을 관통할 수 있는, 그런 살아있는 거리. 그것이 군산의 근대역사문화거리라 하겠다.<끝>

  • 기획
  • 권혁일
  • 2016.09.13 23:02

취임 한달 맞은 김승희 국립전주박물관장 "전북 역사문화자원 모으고 체계화해 위상 높이겠다"

지난달 8일 국립전주박물관 첫 공모직 관장으로 취임한 김승희 신임 관장. “고향을 선택할 수 있다면 전주 같은 곳이기를 바랐다”며 오랫동안 전주를 동경했다는 그는 토박이보다 지역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김 관장은 “재임하는 동안 전북의 역사문화자원을 모으고 정리하는 일에 주력하겠다”며 “무엇보다 박물관이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방안을 깊이 고민하겠다”고 밝혔다.-취임하신지 한 달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내셨습니까.“직원 면담 하고, 인사 다니고 있습니다. 지역 분들이 전북출신이 아닌 것에 대해 아쉬워 합니다. 외지인이 지역에 잘 흡수되는 모습을 보여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웃음) 박물관은 상대적으로 정체돼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성취감과 행복감을 높일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할 것 같습니다.”-올해 개방형 공모직으로 전환된 지역 국립박물관 13곳 가운데 전주가 가장 관심을 모았습니다. 왜 전주를 택하셨습니까.“어릴 때 덕진공원을 왔었는데요, 큰 나무가 있고 오래된 집들이 자리한 매우 안정되고 역사가 깊은 곳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당시 제가 살던 곳은 늘 공사가 이뤄지는 분주한 도시였거든요. 그때부터 막연하게 전주를 동경했습니다. 경기전도 그래요. 경복궁이나 창덕궁과는 다른 매력이 있습니다. 인위적이거나 고압적이지 않고 서민적이고 인간적입니다. 화려하지 않지만 품격있는 도시이죠. 역사와 문화가 풍요로운 점도 매력입니다. 박물관이 할 수 있는 역할이 많습니다. 전주에서 살아보고 싶었습니다.”-전주박물관은 그동안 후백제 관련 사업과 전북지역 도자역사 규명을 장기사업으로 추진해왔습니다. 이들 사업을 어떻게 이어가실 계획입니까.“후백제 관련사업은 장기과제입니다. 역사규명을 위해 콘텐츠를 발굴하고,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것은 미래세대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작업니다. 후백제 관련 전문인력을 양성하고, 연구센터를 구축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부안 유천리와 진안 도통리 발굴작업도 이어갑니다. 부안과 고창, 그리고 진안은 우리나라 도자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특히 유천리 청자는 전남 강진에 비해 덜 알려졌지만 매우 경쟁력 있는 곳이어서 관심을 더 기울여야 합니다.” -임기중에 특별히 챙기고 싶은 일이 있다면 무엇입니까.“전북의 역사문화자원을 정리하고 발전시키는데 박물관이 함께하고 싶습니다. 몇가지 검토중인데요, 우선 한옥과 관련된 콘텐츠를 모으고, 연구하는 작업을 추진할 계획입니다. 전주와 전북은 물론 우리나라의 한옥문화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사업을 구상중입니다. 물론 전주한옥마을이 매개가 될 수 있겠지요. 한옥의 부재와 결부방식 등 건축학적인 접근은 물론 생활문화적으로도 조망할 계획입니다. 유서있는 한옥이 사라지고 있어 서둘러야 합니다. 전주한지의 위상을 되찾는 작업도 할 계획입니다. 내년에 중국 소주박물관 전시가 계획됐는데요, 전주한지를 주제로 준비하려 합니다. 합죽선을 비롯해서 완판본 등 한지와 관련한 문화자원을 모아볼 계획입니다.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에 박물관이 힘을 실는 방안도 고려중입니다. 서예 또한 전북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인데요. 박물관은 중국서예사나 한국서예사 처럼 역사를 정리하며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그런 역할을 해볼 생각입니다.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행사는 당대를 중심으로 구성되니 조화를 이룰 것으로 기대합니다.” -관장실의 모악산 병풍이 눈에 띕니다. “오래전에 이철량 화가가 기증한 작품입니다. 모악산은 전주와 전북민들에게 각별하겠지만 외지인들이 느끼는 감흥도 남다릅니다. 산 이름에 ‘모(母)’자를 쓰는 곳이 드뭅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품는 것처럼 너그럽고 편안한 느낌을 주지요. 모악산은 전북의 지역적·문화적 특징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곳입니다. 전북인의 심성을 보여주는 산이기도 하고요. 모악산을 주제로 과거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생산된 콘텐츠를 모아보고 싶습니다. ‘모악산 전(展)’이 되겠지요. 역사와 종교 문화적으로 풍성한 기획이 될 것 같습니다.”-전북지역에만 50여곳의 박물관과 미술관이 있습니다. 이들과는 어떤 관계를 구축할 계획이신지요.“어머니처럼 품어야겠지요. 최근 익산보석박물관과 업무협약을 맺고, 어린이박물관에서 협업전시를 열고 있습니다. 지역의 박물관 및 미술관과 공동기획이나 지원사업을 활성화할 방침입니다. 유물 대여도 하고, 인적자원도 지원할 계획입니다. 전북은 콘텐츠는 많은데 이를 엮거나 포장하는 서사가 약하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효율적인 관리와 문화자원화를 위해서는 섬세하게 정리하고 체계화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박물관이 전북문화정보센터 역할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듭니다.” -오는 2020년이면 박물관 개관 30주년입니다. 준비를 하고 계신지요. “구상 중입니다. 기반구축면에서는 후백제연구센터와 한옥전시관을 구축하고 싶습니다. 많은 연구와 노력이 뒤따라야할 사업들입니다. 또 국립익산박물관 건립에 따른 후속대책도 강구해야 합니다. 조선왕조 본향으로서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사업들도 모색할 계획입니다. 우선 국립고궁박물관과의 적극적인 교류 등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김승희 관장은] 근대역사 박물관 방향 군산시에 제안한 인물김승희 관장의 전북지역 근무는 처음이지만 군산근대역사박물관과 남다른 인연이 있다. 지난 2007년 국립중앙박물관 박물관정책과(현 기획총괄과) 근무 당시 박물관 건립을 추진하는 군산시에 ‘근대역사박물관’이라는 방향성을 제안한 이가 바로 그이다. 산업유산을 재생해 지역 대표 문화자원으로 만든 안양의 김중업박물관 건립에도 관여했다. 인하대와 홍익대 대학원에서 미술교육과 미술사학을 전공했으며, 미술전문잡지 기자로 활동하다가 지난 1992년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 학예연구사로 박물관 사람이 됐다.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과 공주박물관장, 국립중앙박물관 교육과장·아시아부장을 지냈다. 강우방 전 국립경주박물관장과 함께 쓴 〈감로탱〉 등의 저서와 불교회화를 연구한 다수의 논문이 있다.

  • 기획
  • 은수정
  • 2016.09.12 23:02

[철도기행: 군산항선 편] 탁류 따라 덜컹덜컹, 100년을 관통하다

다른 도시보다 보존이 잘 돼 있는 게 매력인 것 같아요. 일본식 가옥이나 철길에서 옛날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요. 보통 관광지라고 하면 명소 한 군데만 꾸며놓는데, 군산은 그쪽(근대역사문화지구) 분위기가 다 그래서 좋아요.대전에서 온 백모 씨김모 씨(25) 커플은 군산에서 받은 느낌을 이렇게 정리했다. 군산시가 내세우는 시간여행이라는 말이 문자 그대로인 것이다.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100여 년 세월, 군산의 구도심 지역에는 켜켜이 쌓인 그 시간이 그대로 겹쳐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로 철길이 지나고 있었다.경암동을 지난 철길은 쭉쭉 대명동 옛 군산역(군산화물역)을 향해 뻗어 있었다.군산 화력발전소 방향으로 난 지선이 하나 보였는데, 골목을 채 다 빠져나가기도 전에 아스팔트에 묻혀 사라져 있었다. 이 선로는 군산 화력발전소 인입선으로, 지금의 화력발전소 자리에 있던 옛 화력발전소가 지어질 때 함께 건설된 것이다.풍경은 바둑이와 나비가 노는 여느 골목길과 다를 바 없었다. 가운데 철길이 지난다는 것만 빼면.철길은 경안천 다리와 주차장을 지나며 마침내 자취를 감춘다.도로는 철로를 간단히 밟고 넘어가 구시장로와 중앙로(전군도로라 불리던 번영로에서 곧장 이어지는 길)에 연이어 닿는다.신작로가 철로를 밟고 넘은 자리, 도로 좌우에는 녹색 철문이 걸려 있었다. 철문 너머로는 잡초가 무성한 가운데, 붉게 녹슨 레일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서쪽으로는 역전종합시장이라 쓰인 건물과 오래된 듯 보이는 상점 건물들과 널따란 주차장이, 동쪽으로는 굴러다니는 자갈과 웃자란 풀과 조그만 콘크리트 건물이 있었다.옛 군산역(군산화물역)이 있던 자리다.군산역은 1912년 3월 6일 문을 열었다. 전주역이 처음 개업한 것이 1914년이었으니 전북지역에서는 꽤 이른 것이다.물론 군산선 철도와 군산역이 먼저 개통된 것은 순전히 일본 측의 편의 때문이었다.군산은 개항장이었기 때문에 일본인이 많이 살았으므로 여객 수요도 충분했고, 군산항은 호남 지역에서 몇 안 되는 근대 항구였으므로 화물 수요도 충분했다. 그 화물 수요라는 것은 사실상 미곡 수탈과 등치 된다.군산선은 여기서 군산 내항 방향으로 다시 뻗어가고, 또 이곳에서 남쪽 옥구 방향으로도 뻗는다. 이 철도가 옥구선인데, 옥구는 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경영하던 대농장이 있던 곳이다.군산역은 한국전쟁 중에 소실됐다가 1960년에 흔한 콘크리트 상자 모양으로 다시 지어졌고, 그 뒤로 47년 더 이용되다가 2008년 1월 1일 여객 기능을 내흥동 새 역으로 넘기고 군산화물역이 됐다. 그리고 2010년 말에 마침내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열차가 다니지 않게 되면서 굳이 있을 필요가 없게 된 팔마고가차도도 사라졌다.9월 6일, 옛 군산역 자리를 다시 찾았다.어느 도시나 철도역 주변부터, 그러니까 역세권부터 상권이 형성되기 마련이다. 이른바 역전 그룹이라 불리는, 역전 ○○류 상호를 필두로 다양한 상점들이 들어서곤 하는데, 군산 역시 마찬가지였다.무성한 풀이 덮어버린 옛 군산역 플랫폼을 떠난 철길은 다시 단선으로 합쳐지며 역전종합시장과 군산 공설시장 곁을 스쳐 지나간다.작은 가열로를 갖춘 대장간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마치 큰 돔구장을 연상시키는 디자인을 한 군산 공설시장 건물이 뒤이어 눈에 띈다.구시장이라 불리는 역전종합시장과 군산 공설시장은 연속돼 있다. 그 사이에 양키시장도 있다. 더 나아가면 신영시장도 연속 선상에 있어, 군산선군산항선 철길과 구시장로를 따라 대명동과 흥남동, 신영동을 아우르는 거대한 상권이 형성돼 있다.철길을 계속 따라가면 째보선창 삼거리에 이른다.얼핏 보기엔 삼거리보다는 오거리 정도에 가까운 구조인데, 아스팔트에 파묻힌 철길이 유유히 도로를 가로지르고 있었다.째보선창이라는 말이 재미있는데, 여기서 째보의 어원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대중적인 설은 언청이, 그러니까 구순구개열을 가진 이를 가리키는 멸칭 째보에서 왔다는 설이다. 구순구개열을 가진 힘이 센 사람이 이곳 상인들에게 돈 상납을 요구하곤 해 이 일대를 째보선창이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혹은 강 물줄기가 옆으로 째져서 째보로 부르기 시작했다는 얘기도 있고, 옛 지명 진포가 찐포로 변하고 이것이 다시 째보로 변한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확실한 것은 없다.째보선창을 죽성포구라고도 하는데, 이 이름은 근처의 죽성동이라는 지명과도 연결된다. 정작 째보선창은 죽성동이 아니라 금암동에 있다.지금은 콘크리트로 덮였기 때문에 포구의 모습을 볼 수 없다. 바다를 보려면 조금 더 걸어가야 한다.바닷물은 쭉 밀려나 있었다.어선 몇 척이 넓게 펼쳐진 펄을 깔고 앉아 있었고, 드러난 갈색 내지는 고동색 육지 위를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게가 바삐 오가고 있었다. 그게 다 갈매기 뱃속으로 가는 것인지, 뒤뚱뒤뚱 움직이는 갈매기가 도심 닭둘기 뺨치도록 투실투실하다.철길은 해안과 나란히 달렸다. 왼쪽에는 일본식 창고 건물이 있었다. 이 건물은 일제 강점기에는 중본상점(中本商店)이었다고 한다. 아마 나카모토 쇼텐이라고 읽었을 것이다.철길은 이즈음에서 여러 갈래로 갈라져서, 오른쪽에 진포해양테마공원을 두고 널따란 공터로 진입한다. 여기는 군산부두역이 있던 자리다.군산부두역은 조선총독부 관보 고시에 따르면 1943년 12월 1일에 영업을 시작했는데, 군산항의 역사에 비교해 보면 개통이 너무 늦다. 사실 군산항역은 1931년 8월 1일에 먼저 개통됐다. 12년 동안 그렇게 활용되다가 이후 이곳에 기능을 넘긴 것이다.곽동근 군산시청 근대문화시설계장은 흔히 생각하는 것 같은 역사(驛舍)가 있었던 게 아니라, 쌀을 싣고 내릴 수 있는 시설(플랫폼)을 갖춘 곳으로 본다고 말했다.군산항역은 도선장 쪽에 있었습니다. 규모는 작지만 대합실도 갖추고 여객 업무를 포함한 기능을 했을 것으로 봅니다. 부두역은 쌀을 내리기 위해 부두 쪽에 만든 것이지요. 저 어렸을 적만 해도 해양공원 쪽에 큰 창고가 많이 있었거든요. 지금은 없어졌지만.공터는 지금은 주차장이 돼 있는데, 플랫폼 또는 화물 창고의 기능을 했던 곳이다. 그렇다면 이곳엔 과거에는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빠져나가는 쌀가마가 그득그득 쌓여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군산 근대역사박물관의 사진 자료(링크: http://museum.gunsan.go.kr/content/sub04/04_02.do?act=view&Id=181&tct=04&page=9)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군산부두역 터에서 바다 방향을 바라보면 함포가 사용된 최초의 해전이라 불리는 진포대첩을 기념하는 진포해양테마공원이 보인다.뜬 다리 부두, 그러니까 부잔교라 불리는 구조물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또 커다란 함선과 그보다는 좀 작은 해경 경비정이 놓여 있다.그리고 전차, 자주포, 전투기 등 병기들이 함께 이 테마공원을 장식하고 있다. 전쟁박물관도 아닌데 육해공을 아우르는 다양한 병기들이 전시된 것이 조금 생경했지만, 화약과 포를 연결고리로 묶어 보면 또 아주 이해를 못 할 바는 아니겠다. 물론 대체 이곳의 정체성이 뭐냐고 묻는다면 음, 대답하기가 쉽지는 않을 듯하다.전시된 함선은 미국과 한국 해군이 사용하던 LST(전차상륙함) 위봉 호다. 1945년 1월생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부터 두루두루 거쳐 온 역전의 용사다.함 내부에 들어가 볼 수 있고, 스탬프를 찍을 수도 있다. 군산 근대역사박물관을 먼저 들러 스탬프 투어 용지를 받아 와서 찍어보는 것이 좋겠다.교통이 편리한 곳에는 상권이 발달하고, 상권이 발달한 곳에는 돈이 모이며, 돈이 모이는 곳에는 금융기관이 들어선다.철길 바로 남쪽에는 일본식 건물이 여러 채 서 있는데, 그중 하나가 옛 조선은행 건물이다.지난 2013년 보수복원을 거쳐 지금은 군산 근대건축관으로 쓰이고 있는 이 건물은 1922년 지어진 건물인데, 지금 기준으로 보아도 꽤 세련된 외관을 하고 있다.벽돌과 석재로 구성된 이 2층짜리 건물 안에는 옛 군산역 등 근대 건축물 모형사진 등과 과거 일제 강점기의 수탈 상을 보여주는 자료가 전시돼 있다.특히 눈길이 가는 것은 옛 건물의 벽체를 그 자리 그대로 보존해 유리 벽을 둘러쳐 놓은 부분이다. 단지 단순한 벽체요 창틀일 뿐인데, 과거와 현재가 손을 맞잡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은행이라면 또 옛 일본 제18은행 건물을 빼놓을 수 없겠다.일본 제18은행은 나가사키에 본사를 두고 있던 은행으로, 나가사키 18은행 또는 나가사키의 한자 표기(長崎)를 따서 장기 18은행으로 부르기도 한다.왠지 기분이 나쁜 숫자 18은 일본에서 18번째로 설립 인가를 받은 은행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1907년 설립된 군산 지점은 제18은행의 7번째 지점이었다.이 건물은 1911년 준공됐는데, 1936년 지점 폐지 이후 조선식산은행에 팔렸고, 이후 다시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가 매입해 쓰기도 했다.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는 대한통운의 전신이다.지난 2008년 보수복원 후 군산 근대미술관으로 쓰이고 있는데, 건물 뒤쪽으로 나가면 금고를 볼 수 있다. 금고 위에 적힌 글귀가 인상적이다.이 금고가 채워지기까지 우리 민족은 헐벗고 굶주려야만 했다.전라북도는 1910년 기준 일본인 소유 경지면적 비율이 18.92%로 2위 전남의 세 배에 달했다. 군산항을 통해 유출된 미곡은 1926년 137만 석, 1933년 179만 석이었고, 1934년에는 200만 석에 이르렀다. 이는 조선 전체 쌀 생산량의 20%를 넘는 것이었다.근대미술관 주변으로 장미갤러리, 옛 미즈상사(현 미즈카페), 옛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 창고(현 장미공연장) 등 일제 강점기 건물들이 한 블록 안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이 모양만으로도 꽤 신선하다. 마치 군산이 아니라 어디 일본 나가사키에라도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그리고 그 중심에는 군산 시간여행의 기점인 근대역사박물관이 있다.지난 2011년 문을 연 근대역사박물관은 지난해 무려 81만5337명이 찾은 관광 명소이자 근대역사지구의 구심점이다.특히 3층 근대생활관은 1930년대 군산을 충실히 재현해 놓았기 때문에 이곳에서 시간여행 튜토리얼을 경험해 봐도 좋을 듯하다.군산부두역 터를 지나온 철길은 근대역사박물관 건물 뒤로도 몇 가닥 뻗어 있다.여기서 끝나는 레일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거의 파묻혀 있던 레일의 끝부분은 위로 들려 있다.그 바로 옆 목화밭 건너편에는 어디에 있던 것인지 걷힌 레일과 폐침목이 쌓여 있고, 그 뒤로 보일 듯 말듯 철길이 지나고 있다. 원래 해망동까지 이어져 있던 철길은 그러나 더는 나아가지 못하고 이내 자취를 감춘다.선로의 끝단이 가리키는 곳에 군산 세관이 서 있다. 1908년 지어진 세관 옛 본관 건물은 벽돌로 지어진 아담한 서양식 단층 건물로, 지금은 호남관세전시관이라는 문패를 달고 있다.철길을 따라온 쌀은 이곳을 거쳐 강철로 된 배에 실려 바다로 나갔다.쌀이 떠나고, 한국전쟁 이후 군산부두역이 기능을 잃으면서 기차도 떠나고, 1979년 군산 외항이 개항하면서 큰 배들도 떠나고, 그리고 그 모두가 지나야 했던 세관은 108년째 말없이 그 자리에 있다.

  • 기획
  • 권혁일
  • 2016.09.09 23:02

[참여&소통] 농촌공동체를 살리는 방법 ⑥

이른바 베이비부머 700만명이 직장에서 은퇴했거나 은퇴를 준비하고 있다. 평생 헌신한 자본과 조직으로부터 마침내 자유로운 해방을 맞이하고 있다. 하지만 은퇴 이후의 개인은 해방감을 느끼기 보다 막연하고 막막한 불안감이 앞선다. 사회는 해체되고 공동체는 붕괴되고 개인은 파편화된 오늘날, 은퇴 이후의 개인을 책임지고 돌봐줄 사회나 공동체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기감을 느낀 은퇴노동자들은 속속 자구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2013년,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은퇴 이후를 대비하는 현대차은퇴자협동조합을 만들었다. 대기업 노동자들의 은퇴자 협동조합으로는 국내 첫 사례다. 대기업 노동자들조차 은퇴 이후의 삶은 막막하다며 즐겁고 행복한 제2의 인생을 함께 도모하려는 목적이다.△은퇴노동자는 귀농협동조합으로 모이자2015년에는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 노동조합에서 은퇴자를 위한 전원주택단지 조성에 나섰다. 노조위원장이 조합원들을 위해 전원주택 4000가구(울산 2000가구)를 건립하겠다고 당선 공약을 내걸었던 것이다. 기아자동차 광주공장 노조도 은퇴조합원을 위해 지난 2012년부터 전남 담양군에 500여 가구의 전원주택을 조성하고 있다. 단일단지로는 국내 최대 규모라고 한다. 역시 노조가 10년 후 노조원의 희망을 조사한 결과 전원주택 생활이라는 응답이 많아 선거공약으로 추진된 것이다.특히 현대자동차가 자리잡은 울산지역에서는 이른바 베이비부머들의 무더기 퇴직과 귀농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원청과 하청 소속 노동자 각 4만여 명 중 원청노동자만 매년 약 1000명씩 퇴직하고 있다. 귀농하려는 퇴직자들의 수요로 울산 인근의 땅값이 대폭 상승했을 정도다. 지자체도 현대차와 현대중공업에서 운영하는 은퇴자 퇴직지원센터와 연계해 귀농교육을 실시하고 있다.진안군은 집단귀농 협동조합을 추진하고 있다. 2015년 10월 협동조합설립 및 운영과 집단귀농귀촌을 통한 진안군내 6차산업단지 조성사업에 관한 MOU를 재단법인 전북테크노파크, 한국창업정책연구원 등과 체결했다. 국내 유일, 최초의 대규모 집단귀농 협동조합 모델이다. 구체적으로 지자체의 지원으로 농업 융복합 사업(6차산업), 귀농어귀촌지원 사업 등 농식품부 정책사업을 집단귀농 협동조합에 결합하는 사업추진 방식이다.이러한 집단귀농 협동조합 방식의 공동귀농은 개별귀농의 한계와 불확정성을 극복하는 새로운 귀농 패러다임으로 평가할만 하다. 한마디로 귀농인들에게 적정한 소득을 보장해줄 수 있을 정도로 적정하고 안정된 일터는 규모의 경제를 전제로 한다는 경제논리에서 출발한다.올해 농식품부에서는 전북 남원, 경북 의성 등 전국 6개소에서 3년간 80억원의 사업비를 지원해 활기찬 농촌프로젝트 시범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은퇴자들의 집단귀농 또는 공동귀농 방식을 염두에 두고 설계된 귀농 지원사업이다. 기왕의 전원마을 신규조성 방식의 주거생활지원 차원을 뛰어넘어, 일자리를 위한 생산단지를 유기적으로 결합해 성공적 귀농 정착률을 높이려는 목적이다. 이처럼 은퇴노동자들의 집단귀농 협동조합은 생산수단인 사업장은 물론, 생활환경, 생활방식을 공유함으로써 지역사회 공동체 재생과 활성화에 기여하게 되리라는 기대가 크다.△농노 직거래와 교류부터 시작하자노동자들은 은퇴 이전이라도 농민들과 서로 협력하고 연대할 수 있는 일이 적지 않다. 평소 개인적으로는 매우 궁금하고 의아스러웠다. 100만명도 넘는 노동조합원들은 왜 몇 만명도 안 되는 농민회원들이 생산하는 농산물을 적극 구매하지 않는걸까. 특히 150만여 명에 달하는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노동조합원들은 도대체 왜, 농민회 회원인 농민들의 농산물을 조직적으로, 우선적으로 사주지 않는 것인가. 의식 있고 양식있는 노동조합원들이 왜 동지적인 농민회원들의 만성적이고 구조적인 민생고를 외면하는 것인가.무엇보다 불특정 다수의 도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도농교류 캠페인이나 1사 1촌 자매결연은 그 성과가 뚜렷하지 않다. 농가 생활 지원과 향상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선 농민회원 생산자와 그 수십 배 규모의 노동조합원 소비자간 사이에 동지적인 직거래 프로그램부터 가동할 필요가 있다.가령 농촌의 1개 농민회와 도시의 1개 이상 노동조합의 상호 호혜적인 결연 협약을 맺고 상시 직거래의 물꼬부터 트자. 농노 직거래 급식 및 꾸러미사업단도 조직하고 가동하자. 구체적으로 1개 산별연맹산별노조단위노조가 1개 시군읍면 농민회와 실정에 맞게 결연을 맺고 농산물 직거래사업을 벌이면 적당할 것이다. 농민회에서 생산한 농산물과 특산물을 조합원들에게 적극 홍보하고 구매 권유를 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상거래와 함께 도시와 농촌 사이의 협력과 연대의 교류프로그램도 가동할 필요가 있다. 가령 결연을 맺은 1노조와 1농민회가 체육대회와 농촌체험행사를 함께 열 수 있다. 특히 노조에서는 농가의 집 개량, 농기계 수리, 농촌 일손돕기, 의료봉사, 농촌자녀 방과후 활동 등 농촌봉사활동도 병행할 수 있다. 또 농촌마을에 조성되어 있는 다양한 시설들을 노동자들의 연수 및 교육 시설로 재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농민과 노동자가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농민과 노동자의 협동과 연대의 장이 다채롭게 펼쳐질 수 있다.이때, 노동부농식품부 등 중앙정부는 농민과 노동자가 서로 상생할 수 있도록 관련 예산 등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 동지적인 노동조합 조차 농민회의 농산물을 기꺼이 사 먹지 않는데, 일반 도시민과 국민에게 농민의 농산물을 좀 사 달라고 당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농민노동자 서로 돕는 '사회적 연대기금' 필요한국 현대사의 경제발전은 농민과 노동자의 희생을 담보로 이뤄졌다. 민족경제학자 박현채에 따르면 미국 잉여농산물의 도입으로 저농산물 가격정책을 견지하고, 저노임을 기초로 한 가공수출의 증대로 수입재원을 확보한 결과인 것이다. 그 과정에서 생산자인 농민과 소비자인 노동자는 서로 협동하고 연대하기는 커녕 상호 이해도 상충되고 생활현장마저 격리되고 말았다.최근 일부 노동자들은 사회적 연대로 파업기금을 조성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노동자 파업은 노동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이 사회의 문제라는 것이다. 파업의 사회적 의미를 이해할 때 사람들은 사회적 연대를 통해 사회적 문제를 함께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마찬가지로 농민의 문제는 오직 농민의 문제만이 아니다. 생산자이자 판매자인 농민의 문제는 곧 소비자이자 구매자인 노동자의 문제, 도시민의 문제, 국민의 문제로 귀결된다. 더욱이 고작 5% 정도의 존재감만 겨우 잔존한 우리 농촌의, 농민에 의한, 농업을 위한 한계농정, 고립농정으로 농정의 문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다. 노동자를 비롯한 나머지 95% 도시민, 국민들이 함께 협동하고 서로 연대해야 한다. 그래야 생산자로서 농민은 소비자인 노동자(도시민)의 생명을 책임지고 지킬 수 있다. 소비자로서 노동자(도시민)는 생산자 농민의 생활을 든든하게 지키게 된다. 비로소 농민과 노동자가 연대할 때, 국민 모두가 식량주권이나 국가주권을 함께 100% 지켜낼 수 있다.그래서 농민이 어려울 때 노동자들이 나서서 돕고, 노동자가 어려울 때 농민이 나서서 도울 수 있도록 농민노동자 사회적연대기금을 모을 명분과 필요는 충분하다. 이를테면, 농민의 농산물 값이 떨어지면 연대기금으로 제 값을 쳐서 사 주고, 노동자가 급여체불로 돈이 없어 배를 곯으면 연대기금을 풀어 싸고 좋은 먹거리를 사 먹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말도 많고 탈도 많은 무역이득공유제부터 노동자와 함께 힘을 모아 정상화해야 한다. 정부가 대안으로 내놓은 농어촌 상생기금은 목적의 본 궤도를 다소 벗어나 있다. 애초 의도했던 제도의 원형과는 거리가 있다. 일단 FTA(자유무역협정)로 인해 이익을 얻은 산업계가 의무적으로 기금을 납부한다는 원칙부터 무너졌다. 자발적으로 내는 것과 의무적으로 내는 것은 다르다. 마치 산업계가 농업계에 기부나 적선하듯 내고 싶은 만큼 기금을 내라는 게 아니다. 마땅히 산업계에 피해를 입은 농업계에 그 피해만큼 보상하라는 취지를 의도적으로 왜곡한 셈이다.농민은 산업계나 정부에게 부당한 요구를 하는 게 아니다. 자유무역협정으로 인해 입은 피해를 보상해달라는 합법적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자발적인 농어촌상생기금만으로는 농민과 농업계의 정신적물질적 피해를 온전히 보상할 수 없다. 부당한, 또는 초과 무역이득을 취한 산업계는 무역 피해를 당한 농민에게 의무적으로 보상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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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9.08 23:02

[문화&공감] 고창인문학강의

고창군립도서관 1층 세미나실. 여름내내 퍼부어댄 폭염 공습을 조롱이라도 하듯 청강생 4050명 정도의 고창 사람들은 금요일 저녁마다 열공했다. 때론 그 무더위에도 토요일이면 야외현장을 답사하는 일도 마다 하지 않았다. 고창 생활문화에서 인류의 삶을 엿보다라는, 마치 지역적으로 행동하고 지구적으로 상상하라는 말을 떠올리기라도 한 듯한, 강좌 대주제는 사람들을 그렇게 빨아들였다. 길 위의 인문학 강좌다.올해 길 위의 인문학은 조선시대 송사나 서간의 각종 고문서들, 이재 황윤석(17291791)의 저서 『이재만록』, 그리고 막사발, 판소리, 반닫이 등 고창에서 생성되어 온 문화와 문명의 흔적들을 통해 잊혀져 가는 고창의 생활사를 더듬어보자는 것이었다. 이 주제를 제안했던 이상훈 씨는 갈무리 강의를 통해 옛 고창의 생활사를 차지했던 것들의 깊이있는 세계를 알고 그 문화적 향유에서 삶의 질을 높여보자는 것이라고 밝혔다. 청강생이 없으면 어쩌나 하는 우려를 한 기획이었으나 기우였다.△왜, 고창에서?왜, 고창에서, 인문학 강의를 시작했을까. 처음 시작은 2011년 여름이었다. 강좌를 안내하는 초대의 글은 이렇게 적고 있다.고창에서 사는 것이 더 자랑스러웠으면 좋겠습니다. 아름다운 사람과 어울리고, 소외되어 고통 받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고, 서로의 관계로 하루하루가 즐겁고, 그리하여 삶의 수준도 더 높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지연이나 학연보다 합리적인 것이 더 존중받고, 사소한 차이로 차별받지 않으며, 오늘의 삶이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서로 격려하는 지역사회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바른 생명들의 우렁찬 함성이 어우러진 살기 좋은 곳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를 위해 작은 실천을 위한 작은 만남을 제안합니다. 여기엔 손님이나 또 다른 주인은 필요 없습니다. 누구나 주인됨을 연습하고 함께 머리 맞대며 희노애락을 공유하는 아름다운 만남이었으면 좋겠습니다.△인문학적 탐구와 비판적 성찰군 단위의 자그마한 지역은 공론장이 형성되기 어렵다. 지역신문이 공론장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를 포기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지역사회에서 정당하고 합리적인 비판적 발언이나 심지어는 양심적 발언마저 튄다, 싸가지 없다, 뭘 모른다는 식으로 폄하하는 처세술 분위기가 대세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나마 비판적 인사들마저 양심적 가치를 저버리고 권력의 성채로 들어가거나 이해관계에 얽혀 특정발언 자체의 회자를 금기시할 때는 공론장 자체가 무력화된다. 신문에서건, 공식 테이블에서건, 술자리에서건, 일상대화에서건 공론장이 위협받으면 민주주의의 기초가 무너진다.고창도 그런 때가 있었다. 충격에 휩싸인 몇몇의 사람들은 성찰했다. 그들은 알아야 할 것들에 대해 알고, 소통하고, 공감하며 대안을 이야기하는 공론장이 고창사회에서도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인문학적 탐구와 성찰을 매개로 작은 공론장이라도 형성시켜야 지역사회가 숨쉬며 산다는 결론으로 그들이 탄생시킨 것이 바로 고창인문학강의다. 그들은 고창의 인문학 강의를 준비하는 사람들이라는 이름으로 나섰다.△일하는 사람들이 의기투합4050대의 젊은 고창 사람들이고 하는 일들도 제각각이다. 김동환(농민), 문병무(자영업), 유성기(한의원장), 윤종호(출판편집인), 이상훈(농민), 정일(교사) 씨가 처음 의기투합했고, 해를 거듭하면서 안후상(교사), 이호근(도의원), 박종훈(목사), 박기전(목사), 최재일(자영업), 이대건(출판인) 씨 등이 합류했다. 이들은 여름과 겨울 강좌를 시작하기 전에 모여 기획하고 준비한다.대표는 없다. 총무인 김동환 씨가 사실상 대표일을 한다. 거의 대부분의 실무적인 일들을 도맡아 한다. 윤종호 씨가 일을 나누고는 있지만 전체 구성원들 사이의 역할 배분이 취약한 상태다. 각자의 일이 바빠서다. 그나마 몇몇이라도 모여서 논의하는 느슨한 구조에 치열한 문제의식이 이들을 지탱시키온 힘이다.고창군립도서관과 함께 하는 길 위의 인문학으로 강좌가 나가면서부터는 한국도서관협회의 예산 지원이 있어 넉넉해졌지만 그 이전 독립강좌일 때는 회원 회비와 청강생 참가비로 강사비를 충당했다. 길 위의 인문학이 정부 돈에 의존해 강좌가 이루어지다보니 아무래도 강좌 주제 선정에서 자기검열(?)되는 측면이 없지 않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이상훈씨는 말한다. 고창인문학강의는 할 말을 제대로 하자는 것이 초심이기 때문이다.△실천과 연결고창인문학강의의 초심은 실천과 연결되지 않는 인문학은 의미가 없다는 데서 시작한다. 그러다보니 지역의 환경이나 농업, 교육 문제부터 화두로 삼았다. 첫해 강좌에서는 먹거리의 패러다임을 바꾸자, 후쿠시마 핵사고와 한국의 핵발전 정책, 시골살이의 인문학, 지역자치와 풀뿌리민주주의, 조선후기 실학과 근대사상 등의 이슈로 고창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고등학생들의 꾸준한 참여도 돋보였다. 인생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하는 아이도 있었다.지역경제와 협동조합, 진정한 연대는 생명연대다, 역사와 정치외교, 지역과 지방, 종자까지 빼앗긴 한국-우루과이라운드에서 FTA까지, 지방자치와 지역정치, 마을의 민주주의, 통일을 보는 새로운 시각, 세월호 이후 우리의 삶, 실업, 불안정노동, 빈곤과 기본소득, 위기의 국가, 좋은 삶은 가능한가, 고창과 동학농민혁명 등이 지금까지의 강좌 주제들이다.△시대정신과 생활사의 대화김동환 씨는 인문학이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설명해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는 주로 해당주제의 전국적 명사(?)들이나 전문적 활동가들이 강사로 초빙되었다. 정일 씨의 말이다. 지역 안에서만 매몰되어 시야가 좁혀져 있는데, 다른 지역이나 중앙 담론을 직접 접할 수 있어서 시야를 넓히는 데도 도움이 되었지요. 온라인이나 책으로만 접하는 것과는 질감이 다르고 생생하니까요.우리가 살아가는 오늘날의 시대정신을 담아내는 거대담론의 지식과 고창이라는 지역학적인 미시담론의 생활사와 대화를 나누는 공론장의 역할이 앞으로의 과제로 등장하지 않을까 싶다. 이번 강좌의 주제 고창 생활문화에서 인류의 삶을 엿보다는 그 시도로 보인다. 고창이라는 생생한 지역학적 맥락과 문화에 근거한 삶-지식들의 생산과 소통은 결국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몫일 수밖에 없다. 생업에 바쁜 사람들의 인문학적 말걸기 고창인문학강의의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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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9.06 23:02

김용학 전북지방병무청장 "시대 흐름 맞춰 국민과 소통·공감하는 병무행정"

지난 7월 제41대 전북지방병무청 청장으로 취임한 김용학 청장(57)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해인 1979년 5월 병무청에 9급 공채로 입문, 지금까지 37년을 병무청에서만 근무해온 정통 병무인이다. 다양한 직무와 부서를 경험한 그는 병무청 업무 대부분을 꿰뚫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취임사에서 “모든 문제의 정답은 ‘현장’에 있다”고 밝힌 그는 실제 병역의무자를 만나기 위한 현장 행보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김용학 청장으로부터 취임 이후의 소회와 병무청 운영 방향 등을 들어봤다.- 지난 7월 취임사에서 “모든 문제의 정답은 ‘현장’에 있다”고 밝히셨는데 소회는 어떠십니까.“병무청은 특히나 관계기관이 많습니다. 사회복무요원 관련 업체만 500~600개 정도 되는데, 아무래도 현장에 가서 실무자들을 만나 대화를 해보면 생각지 못했던 문제나 답이 있는 것 같습니다. 현장에 가지 않고 책상에서 운영하면 정책이 국민이 원하는 대로 가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현장에서 만난 사회복무요원들의 상황은 어떻습니까.“전북병무청에서 관리하는 사회복무요원은 1704명이 있는데, 대부분 성실하게 근무합니다. 그러나 간혹 사건·사고도 발생하는데, 전북청은 올해부터 복무지도관 3명을 구성해 문제가 발생한 사회복무요원들을 등급화해서 조기에 부적합 심사를 거쳐 전역 조치 등을 통해 해소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습니다.”- 사전에 군 복무 부적합자를 선별해 내기는 어렵습니까.“대부분은 성장환경의 문제와 자실시도를 했는지, 가정폭력이 있었는지 등을 검사할 때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합니다. 그 문항에 체크를 안 하고 문제가 없다고 판정을 받아 입대합니다. 그러나 군의 특수한 환경과 선임의 괴롭힘 때문에 적응하지 못하고 심리적 취약요인이 폭발하게 되는 거죠. 전북지역에서는 입대한 장병 중에 군 부적합 판정 전역자가 최근 3년간 150여 명에 이릅니다. 그래서 올해는 특히 군에 가지 않아야 할 사람이 가는 일이 없도록 신체검사에서 부적합자 선별을 강화할 것입니다.”- 여러 경력이 있으신데, 병무행정기록전시관 추진단과 민원상담소장 때는 무엇을 중점으로 하셨습니까.“지난 2010년 맡았던 병무행정기록전시관 추진단은 2~3년간 10억을 투자해 전시관에 병역명문가에 대한 자료를 배치했고, 특히 과거 군사정권 당시 병역 비리와 관련한 아픈 역사와 병무청 발전 모습을 대비해서 보여주도록 구성했습니다. 또한, 민원상담소장 때는 1년에 100만 건 이상 민원처리를 했는데, 우리 직원들이 당시 하루에 6000통 이상의 전화를 소화한 셈입니다. 당시 직원들한테도 ‘전화나 민원이 오면 내 가족 동생에게 대하는 것처럼 따뜻하게 하라’고 말했는데, 사실 까다로운 민원도 많아 쉽지 않았습니다.”- 요즘 취업난이 심각한데, 병역을 앞둔 청년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은지.“우리 젊은이들은 심각한 취업난과 병역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긍정적인 자세로 앞에 닥친 어려움을 이겨낸다면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아울러 병무청에서는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병역이행이 부담으로 작용하기보다는 병역의무자들에게 순기능이 될 수 있는 취업맞춤특기병 등 다양한 정책·제도를 도입, 추진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사회적 현실을 반영한 병역의무자 중심의 다양한 병역정책 발굴을 통해 병역이 인생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도록 힘쓰겠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정책인지 설명해 주신다면.“전북 도내에도 올해 총 26명이 지원·선발했고 취업맞춤특기병으로 입영 후 첫 전역자가 나왔습니다. 지난 7월 취업맞춤특기병 전역예정자를 찾아 병역이행에 대한 감사와 함께 전역 후 취업지원 등, 진로상담을 하는 등 의미있는 만남을 가진 바 있습니다. 또한, 지난 8월에는 전북지역 중소기업중앙회 관계자와 만나 취업맞춤특기병 전역자들의 취업 지원을 위한 업무 현안을 논의하는 등 원활한 취업지원을 위해 다각적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도내 병역명문가는 얼마나 있고, 그들의 예우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병역명문가 선양사업은 3대 가족 모두가 현역병으로 성실하게 복무를 마친 가문을 찾아 선양하는 것입니다. 전북 관내에도 올해 18가문을 포함해 총 107가문이 명문가문으로 선정된 바 있습니다. 또한, 병역명문가로 선정된 가문에게는 인증서와 패를 수여하고, 각종 국·공립, 민간시설 이용료 할인 등 다양한 혜택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한편 우리 청은 2014년에 전주시, 지난해에는 전라북도의 협조로 ‘병역명문가 예우에 관한 조례’를 시행해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공영주차장 등 산하 시설물 이용 시 감면 혜택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향후 병무청에서 중점으로 추진하는 사업은.“모든 행정의 중심에는 국민이 있듯이 병무행정의 중심에는 병역의무자와 그 가족들이 있습니다. 병무청은 이 같은 원칙을 바탕으로 국민과 소통하며 공감하고 배려하는 행정을 펼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특히, 사회적 취약계층에 대한 배려행정과 고객의 불편·불만을 선제적으로 해소하고자 수요자 중심의 병무행정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추진하고 있습니다.”- 곧 청탁금지법(일명 김영란법)이 시행되는데, 병무청 운영에 어떤 영향을 줄 것으로 전망하십니까.“과거보다 공직사회도 많이 청렴해졌습니다. 그러나 김영란법을 통해서 사소한 부분까지도 청렴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청 내 물건을 하나 사던지, 교통법규를 지키는 것도 마찬가지로 공직자로서 지켜야 할 사명입니다. 김영란법에 찬성하는 입장이지만, 사실 병무청도 옛날의 아픔으로 인해 부정과 멀리하려고 직원들의 의식이 완전히 바뀌었고 실제 청렴해진 지 오래됐습니다. 경제 위축의 일정 부분도 있지만, 시행하고 나서 보완할 사안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도내 병역의무자 및 도민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전북병무청은 전북도민 여러분의 격려와 응원 속에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병무행정에 대해 도민 여러분께서 애정 어린 시선과 관심을 두고 지켜봐 주시길 당부드립니다. ‘우리는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라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처럼 세상은 늘 변화하고 있습니다. 전북병무청 전 직원은 새로운 변화의 흐름에 발맞춰 국민과 소통하고 공감하는 병무행정을 위해 일로매진(一路邁進)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김용학 청장은] 37년 동안 병무청 근무, '국민이 주인' 실천 최선1959년 전남 화순군에서 태어난 김용학 전북지방병무청장은 광주 숭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병무청에서 공직을 시작한 이후 주경야독으로 조선대학교 경제학과(무역학 전공)를 졸업하며 잠시나마 경제학도의 꿈을 키웠다. 김 청장의 책상 위에는 전북일보와 국방일보를 비롯해 매일경제신문이 놓여 있었다. 그는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도정소식은 물론, 경제 관련 현안과 정보를 들여다보고 있다고 한다.“국민이 주인이고 우리가 머슴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최선을 다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김 청장은 37년 공직자로서 우직스럽게 업무에 매진해 왔다. 특히 병무행정을 ‘철인 3종경기’로 비유한 김 청장은 직원들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달리기만 하는 마라톤과 달리, 철인 3종경기는 마라톤과 수영, 사이클 등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 줄 수 있는 스포츠”라며 “각자의 능력과 개성을 충분히 살려 화합을 이뤄달라”고 당부한다.특히 그는 “자신을 제외한 전북병무청 직원 80여 명의 연고가 모두 전북지역”이라며 “더 큰 물에서 배우고 노력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싶다”고 말했다. 직원들에게 전북을 떠나 중앙 무대에서 더 배우고 발전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싶다는 취지다.김 청장은 지난 1979년 병무청에 9급 공채로 임용된 이후 병무청 감사담당관실, 인천경기지방병무청 징집과장, 병무행정기록전시관 추진단, 병무청 민원상담소장·병역자원국 징병검사과장·운영지원과장 등을 지냈다.

  • 기획
  • 남승현
  • 2016.09.05 23:02

[철도기행: 군산역 편] 시간이 멈춘 곳, 금강 물은 흐르네(2)

1919년, 구암동산의 함성다시 금강을 따라 하류 방향으로 내려오는 길, 바람은 왠지 아까보다 더 세진 듯했다.원래 누워 있던 것인지 아니면 바람이 너무 세서 누워버린 것인지, 강변의 소나무 몇 그루가 피사의 사탑보다도 더 위태로운 모양새로 간신히 버티고 서 있었다.구암동 방향으로 나오면 건설 중인 동백대교(가칭 군장대교로 알려져 있지만 지난 3월 동백대교가 공식 명칭으로 결정됐다)의 아치형 구조물이 명확하게 보인다. 그 왼편, 그러니까 안쪽에 군산항을 비롯한 군산 구도심이 놓여 있는데, 이쯤 되면 아무래도 강이라기보단 바다에 가깝다고 하겠다.그래서 그런지 아니면 그냥 기분 탓이었는지, 구암동 쪽으로 접어들면서는 약간 비릿한 바다내음이 느껴지는 듯도 했다.구불길이 찻길과 만나는 지점에서 횡단보도를 건너서 다시 서쪽으로 100m쯤 걸어가면, 구불길 이정표가 묘한 곳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웬 아파트 단지 같은 곳으로 안내하는 이 푯말을 따라가면, 다시 웬 놀이터를 지나 웬 산길에 다다르게 된다.따라 올라가면 이번엔 널따란 잔디밭이 나오고, 다시 푯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어가면 조형물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이곳은 한강 이남 최초의 31운동이라고 하는 구암 35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구암동산이다. 구암 역사공원으로 조성돼 있는 이곳에는 이를 기리는 조형물과 관련 내용을 기록한 비석이 세워져 있다.1899년 군산항이 열림으로써 군산은 개항장이 됐다.대한제국이 확실한 주권을 행사하는 가운데 개항장이 됐다면 국제도시로서 우뚝 서고 좋았겠지만, 물론 우리는 역사를 통해 그런 것이 아니었음을 알고 있다. 애초 개항 자체가 일본의 압력에 의해 이뤄진 것이니 군산은 순식간에 수탈의 장이 되고 말았고, 이는 1910년 한일 병탄 이후 더욱 심해졌다.군산에 철도가 놓인 것부터가 원활한 수탈을 위한 것이었으니 더 무슨 말이 필요했을까.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군산의 인구는 1만3614명이었는데, 한국인은 6581명이었고 일본인은 6809명, 외국인이 214명이었다. 일본인이 한국인보다 228명 많았다.군산에서 한강 이남 최초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데에는 아무래도 이런 배경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구암 역사공원 인근에는 구암 31운동 기념관도 있으니 함께 찾아가 보는 것도 좋다.열차 대신 사람이 밟는 경암동 철길구암동에서 서쪽으로 계속 걸으면 더는 금강을 따라가지 못하는 지점이 나온다. 아직 연안도로가 공사 중이기 때문이다.공사장에서 날아오는 흙먼지를 적절한 움직임으로 피하며 구암31로라는 이름이 붙은 길을 따라 쭉 가다 보면 연안사거리를 만나게 된다. 그 오른쪽이 경암동 철길마을이다.바닥에 깔려 있는 철길은 원래 세풍제지선 또는 페이퍼코리아선이라 불리던, 군산선의 지선이다. 경암동 페이퍼코리아 공장으로 들어가는 철도로, 2008년 6월까지는 화물열차가 지나곤 했다.1944년 처음 이 선로가 깔릴 때만 해도 철길 주변은 군산이라는 도시의 외곽에 해당했겠으나, 이후 해방과 산업화를 거치며 도시 속으로 묻혔다.단선 철길에 겨우 중형 기관차와 화차 몇 량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간격으로 따닥따닥 집들이 붙어 있었는데, 위험한 것은 둘째 치더라도 열차 소음과 진동은 견디기 어려웠으리라.관광객이 여럿 보였다. 딱 평일 느낌으로, 붐비는 정도는 아니었다. 어떤 이는 셀카봉을 손에 쥐고 카메라 렌즈를 응시하며 지나갔다.당일치기 일정으로 군산에 왔다는 정모 씨(23)조모 씨(24) 일행은 개강 전 마지막 여유를 즐기는 중이었다.사진 찍기에 예쁜 곳이 많다고 해서 왔는데, 붐비지 않고 좋네요.그런가 하면 대전에서 온 백모 씨김모 씨(25) 커플은 교복을 입은 채 철길을 걷고 있었다. 버스로 군산에 와서 근대역사박물관을 들렀다가 경암동 철길마을로 왔다고 했다. 군산엔 초행이었는데, 역시 개강 전 마지막 여유를 즐기는 중이라고 했다.다른 도시보다 보존이 잘 돼 있는 게 매력인 것 같아요. 일본식 가옥이나 철길에서 옛날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요. 보통 관광지라고 하면 명소 한 군데만 꾸며놓는데, 군산은 그쪽(근대역사문화지구) 분위기가 다 그래서 좋아요.열차가 다니지 않는 지금은 공공디자인 활성화 사업 등을 거쳐 관광지가 됐다. 곳곳에 옛날 교복을 빌려주는 곳이 있고, 공방과 소품 가게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2014년께 자원봉사자들이 그려놓은 벽화와 곳곳에 있는 아기자기한 소품도 매력적이다.그리고 기능적인 용도를 잃은 레일은 문화적인 용도를 얻었다. 흰 수정펜으로 적힌 수많은 관광객의 낙서 조각들은 이곳의 현재를 압축해 보여주는 듯하다.페이퍼코리아선의 길이는 전체 2.5㎞로, 대명동 옛 군산역(군산화물역)까지 이어지지만, 실질적으로 관광지라 할 만한 부분은 진포사거리~연안사거리 간 약 500m 정도 구간이다. 진포사거리 너머로도 철길은 이어지지만, 그쪽은 평범한 철길이 지나는 동네의 모습을 하고 있다. 물론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는 이도 많을 것이다.철길은 화력발전소 방향으로 뻗다 만 지선 하나를 더해 서쪽으로 달린다.철길을 따라 걷는 사람도, 철길 위에 쌓인 시간도 따라 뻗는다.<계속>

  • 기획
  • 권혁일
  • 2016.09.03 23:02

[철도기행: 군산역 편] 시간이 멈춘 곳, 금강 물은 흐르네(1)

8월 30일, 전주역. 원래는 유로 스프린터(오이로 슈프린터)라는 이름으로 유럽을 달리도록 설계됐다는 전기기관차가 무궁화호 객차를 끌고 와 멈춰 섰다. 전라선 전철화 전에 그 시끄럽던 특대형 디젤기관차가 끄는 것만 보다가 전기기관차가 끄는 것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2호차 38번 좌석에 앉았다. 가만히 취재 동선을 점검하고 있는데, 옆자리 승객이 무화과를 하나 내민다.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당황했지만, 옆자리 승객은 태연했다.하나 드셔요, 학생. 씻어 왔으니까 아랫부분만 떼고 먹으면 돼요.한사코 사양했지만, 결국 이기지 못하고 하나 받아 들었다. 맛있었다.그는 또 한 개를 내민다. 이번에도 사양했지만 결국 이기지 못하고 받아 들었다. 역시 맛있었다.이번엔 그가 옥수수를 한 개 내민다. 역시 사양했지만 또 이기지 못하고 받았다.먹을 건 나눠 먹어야지.여전히 어색한 장항선 군산역한때 군산역이 군산선 철도의 종점이던 시절이 있었다. 2007년까지였는데, 그때만 해도 군산이라는 지명은 당당하게 한 철도 노선을 대표하는 이름이었다.그게 군산선 철도가 장항선과 연결 개통되고 군산역이 내흥동으로 옮겨가면서 군산역은 더는 종점이 아니게 됐고, 군산선도 더는 군산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게 됐다. 그러니까 이제 군산역은 장항선 군산역인 것인데, 아무래도 이렇게 부르는 건 여전히 어색하다.열차는 대야역에 잠시 멈춘 뒤, 북쪽으로 꺾어 내달렸다. 왼쪽으로는 옛 군산선 철로가 갈라지고, 새 철로는 콘크리트로 된 다리를 타고 번영로를 건너 뻗어 있었다. 이어 별로 더 뭘 보기도 생각하기도 할 새 없이, 그대로 군산역 구내로 접어들었다.한 무리의 여행객들이 역사 내 관광안내소에서 안내를 받는 모습이 보였다. 펼쳐놓은 지도를 가리키는 모습으로 보건대 근대역사문화지구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듯했다.2008년 1월 문을 연 군산역도 벌써 영업 8년 차다.개통 초기에는 옛 군산역(폐역 직전의 이름으로는 군산화물역)과 비교를 많이 당했다.2007년 군산역 승하차 인원이 42만7800명(2007년도 철도통계연보)이었는데, 신역 개장 첫해인 2008년에는 10만 명이나 줄어든 32만1634명(코레일 전북본부 통계)이었다.아무래도 새 역이 자리한 곳이 군산 시내에서 꽤 떨어져 있어 접근하기 어려웠던 것도 있고, 기존 승객 수송량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통근열차가 사라지고 그보다 운임이 비싼 무궁화호나 더 비싼 새마을호가 들어섰기 때문이기도 했다.그래도 시내버스 노선을 집중 배치하는 등의 노력으로 이용객 수는 꾸준히 늘어 2014년에는 40만5092명으로 40만 고지를 회복했고, 지난해에는 43만7266명으로 마침내 옛 군산역의 실적을 넘어섰으니 이제는 되었다. 올해는 7월 31일까지 총 26만184명이 이용했다고 한다.기자가 이곳을 찾은 8월 30일도, 아무래도 평일이라 붐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전반적으로 활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다.통유리로 된 건물은 2000년대 철도 역사 건축 트렌드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군산이라는 지역의 정체성을 투영하려는 시도는 느껴지지 않았다. 옛 콘크리트 건물보다야 예쁘긴 하지만, 정말 이것이 최선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다만 역사 내에 군산과 내흥동 지역의 유적유물을 보여주는 내흥동 유적전시관(2층)이 마련돼 있어, 그나마 체면치레는 되겠다.아담한 크기의 유적전시관 내부는 나름대로 충실하게 꾸며져 있다.내흥동 유적지에서 확인된 원형수혈유구(신석기 시대 집터)를 재현한 것이 전시관의 중앙에 있고, 주위를 둘러 그릇 조각과 같은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열차를 기다리며 간단히 둘러볼 만한데, 다만 내부 조명이 너무 어두워 제대로 관리되고 있는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을 준다.비단결 금강과 구불길역사 밖으로 나서면 정면에는 공사장 가림막이 서 있다.왼쪽에는 시내버스 승강장과 택시 승강장이 있다. 구불길로 걸어가려면 오른쪽으로 나가야 한다.군산역은 제1코스인 비단강길과 제4코스인 구슬뫼길, 그리고 제6코스인 달밝음길이 만나는 지점이다. 이렇게 되면 고민할 거리가 많이 줄어든다. 열차에서 내려서 무작정 걸어도 그게 훌륭한 여행 코스라 하니 말이다.군산역이나 그 인근에서 자전거를 빌릴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군산 시내 곳곳에 자전거 정류장을 만들어놓고 빌려 타고 반납할 수 있도록 말이다.약 500m 걸어나가면 곧바로 금강이 눈에 들어온다. 딱히 둔치라고 할 만한 것도 없이, 그대로 넘실대는 금강 물이 눈앞에 들어오는 구조다.금강은 이름에 비단 금(錦)자를 쓴다. 문자 그대로 비단을 펼쳐놓은 것처럼 굽이치는 물줄기가 잔잔하고 아름답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금강은 이름이 여러 개인데, 전라북도 쪽, 그러니까 대체로 하류 지점에서 부르는 이름은 금강이지만 충청남도 쪽, 그러니까 중류 지점에서는 백마강으로 부르곤 한다. 또 상류로 더 올라가면 충남 금산 즈음에서는 적벽강이라고도 한다.금강은 또 오래전에는 백강이라고도 불렀는데, 백제 충신 성충이 당나라 군사가 넘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지적했던 그 백강이다.한편으로는 탁류로 유명한 강이 또 금강이기도 하다. 어느 강이나 하류에 이르면 물이 탁해지기 마련이지만, 유독 금강이 탁류로 알려진 것은 아무래도 백릉 채만식의 공이 클 것이다.그의 표현대로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은 이날도 열심히 흐르고 있었다.하필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분명 눈앞에 있는 것은 강물인데, 마치 풍랑이 이는 바닷물처럼 크게 요동쳤다. 물결이 부서지며 구불길 위 기자에게도 몇 방울씩 튀었다.기상청 관측값을 보면 이날 풍속이 흔들바람 수준인 9m/s였다고 하는데, 금강 변 구불길에서 맞은 바람은 적어도 된바람 수준은 아니었나 싶다.바다와 가까운 곳이라 역시 갈매기가 많았는데, 바람이 세차니 얘들이 즐겁고 신나는지, 좀 활동적인 녀석들은 기자의 머리 위를 스치듯 지나가며 곡예비행을 한다. 어떤 새들은 수면에 둥둥 뜬 채로 밀려오는 물결을 타고 있었다. 꼭 리듬 타는 힙합 음악가 같다.바람이 세찬 탓에 구름도 빨리빨리 날아가, 수면은 양지와 음지가 매 순간 바뀌면서 마치 얼룩이 진 듯 보였는데, 구름 사이로 내려와 강물의 거친 표면에 반사된 빛이 신비로웠다.금강하굿둑 방향, 그러니까 상류 방향으로 발을 옮겼다. 곧바로 시가 적힌 비석 여럿이 모여 있는 공간이 나왔다. 진포 시비공원이었다.이육사, 윤동주, 김수영 등 친숙한 이름과 시를 볼 수 있었는데, 사실 그다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니었다.공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휴게 공간이 잘 꾸며져 있다면 머물며 사색하다 갈 만할 텐데, 기자의 눈에 보인 것은 잡초가 무성한 바닥과 그냥 서 있을 뿐인 시비뿐이어서 아쉬움이 남았다.진포 시비공원에서 상류 방향으로 1㎞쯤 걸어가면 리틀야구단이 사용한다는 푯말이 붙어 있는 작은 야구장이 나오고, 이어 진포대첩 기념탑이 나온다. 진포대첩은 최무선 장군이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화포를 이용해 왜구를 격퇴한 싸움인데, 이 진포라는 곳이 바로 군산이다.이 오른쪽에는 채만식 문학관이 놓여 있다.군산 출신 문인 백릉 채만식 선생의 유품과 작품세계, 그리고 그의 작품 속 배경이 된 군산지역 모습을 보여주는 곳인데, 금강물만 보고 따라가다 보면 자칫 놓치기 쉬운 위치에 있어 사전에 지도를 잘 살펴야 한다.공원을 지나면 이제 금강하굿둑이 나온다. 바람에 밀린 강물이 하굿둑의 철제 갑문에 부딪히며 기이한 소리를 낸다. 만약 어두울 때 들었다면 무섭다고 했겠다.한쪽에는 어도와 생태학습장이 마련돼 있다. 물론 인도도 있다. 하굿둑의 아래를 통과하는 인도는 자동차도 교행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은 꽤 널찍한 규모인데, 한강 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굴다리와 비슷한 느낌이다.통로를 나오면 금강호 휴게소다. 그리고 여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철새 조망대가 나온다. 겨울철 철새가 무리 지어 찾아올 때면 전국에서 애호가, 사진가들이 모여드는 곳으로 유명하다.취재팀은 휴게소에서 돌아 하류 방향으로 움직이기로 했다.구암동경암동에 멈춘 시간을 만나기 위해서.<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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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혁일
  • 2016.09.02 23:02

[참여&소통] 노인요양병원·요양원 - 노인들 치료·돌봄 주 역할…일부 돈벌이 급급하기도

온종일 TV 연속극이나 보고, 세끼 밥 먹고, 할 일이 별로 없어 하루하루가 지루해요.전주 시내 노인 요양병원에서 만난 김모 할머니(84)는 병원 생활이 5년째다. 비교적 건강한 김 할머니는 치료를 거의 받지 않고 지낸다. 한동안 물리치료를 받고 침도 맞았지만, 이제는 그것도 그만두었다. 처음에 자주 찾던 가족의 발걸음도 뜸해졌다. 명절과 어버이날, 생일에만 찾아온다고 했다.병원인가, 장기 숙소인가김 할머니 같은 분들이 입원해 지내는 노인 요양병원은 전국에 1372곳에 이른다. 입원 환자 수는 연간 33만2000명가량. 전북은 82개소에 허가 병상 수가 1만6812개다.의료법 제3조는 요양병원은 의사 또는 한의사가 의료를 행하는 곳으로서, 요양환자 3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주로 장기입원이 필요한 환자에게 의료를 행할 목적으로 개설하는 의료기관으로 정의하고 있다. 요양병원은 의사, 한의사와 간호사가 상주해 환자를 치료하는, 국민건강보험이 적용되는 의료기관이다. 반면 이름이 비슷한 요양원은 2008년부터 시행된 노인장기요양보험이 적용되고 일정 등급을 받아야 입소할 수 있다. 의사가 상주하지 않고 협약을 맺은 의료기관 소속 의사나 촉탁의가 한 달에 최소 2번 방문해 입소자들의 건강을 점검하도록 되어 있다. 치료보다는 돌봄서비스에 주안점을 둔다.요양병원이나 요양원 모두 급격한 고령화와 정부의 허술한 정책으로 우후죽순으로 늘어났다. 그중 요양병원은 상당수가 치료보다 갈 곳 없는 노인들이 적은 비용으로 장기간 거주하는 숙소로 변해 버렸다. 현대판 고려장이란 말이 나올 정도다. 소위 사회적 입원환자가 33%에 이르고 있다. 형편이 어려운 가정에서 의료처치가 불필요에도 요양병원에 입원시킨 뒤 사실상 내버려 두는 셈이다. 요양병원 입장에서도 중증환자보다 손이 덜 가는 환자들을 받아 치료 없이 입원시켜 놓는 게 이익이다.이 같은 요양병원의 질을 높이기 위해 정부는 2013년부터 의료기관 인증평가를 하고 있다. 2013년 전국 요양병원 1104곳을 대상으로 적정성을 평가한 결과 1등급 113곳(10.2%), 2등급 315곳(28.5%)으로 나타났다. 전북의 경우 82개의 요양병원 중 58곳이 인증평가를 받았고 그중 1등급은 4곳에 불과하다.돌봄 시설인가, 돈벌이 수단인가요양원은 재활과 돌봄이 주 역할이며 노인 요양시설과 공동생활가정을 합친 형태다. 2008년 1244개였던 전국의 요양원은 2015년 말 5083곳으로 늘었다. 연간 입소 인원은 13만2000명. 전북은 6월 말 현재 152개소(노인 요양 공동생활가정 69개 제외)에 5583명으로 집계되었다.요양원 설립은 진입장벽이 지나치게 낮아 자치단체에 신고 만 하면 된다. 이에 따라 개인 설립이 크게 늘어 서비스 품질이 낮아졌다는 게 중론이다. 돈벌이에 급급하다 보니 국공립요양원 설립 목소리가 높다. 요양원에는 치매 등 중증도가 높은 환자가 많은데 보험급여를 더 받을 수 있어 선호한다. 한 조사에 의하면 요양원 입소자의 30.3%가 지속적인 치료가 필요한 환자라는 것이다.또 이들 시설에서는 노인학대 등 인권침해 사례도 종종 일어난다. 지난해 전국 요양기관에서 발생한 노인학대는 344건으로 2010년보다 62%가 늘었다. 가해자는 시설종사자가 대부분이다. 지난해 8월 남원에서는 요양보호사가 80대 치매 노인을 폭행해 물의를 빚었다. 폭언, 감금, 노동력 착취 등도 없지 않다. 이러한 인권침해는 요양보호사에 대한 열악한 처우와도 관계가 깊다.이와 함께 안전사고 우려도 현실이 되곤 한다. 지난 8월 김제지역 요양원에서 사라진 90대 노인이 농수로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고, 7월에는 전주의 요양병원에서 실종된 60대 치매 환자를 찾기 위해 경찰 헬기까지 동원되었다.하지만 요양병원과 요양원은 의료진과 시설 등이 천차만별이다. 다양한 프로그램과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은 비용부담이 만만치 않다. 요양병원은 월 60~200만 원, 요양원은 40~100만 원 등 차이가 크다.환자의 존엄성을 중시하는 일본고령화가 우리보다 앞선 일본은 2000년에 우리나라 노인장기요양보험의 모태가 된 개호(介護)보험을 도입했다. 국가 의료보험과 별도로 40세 이상은 보험료를 내야 하며 고령 환자에게는 병원 치료와 별개로 목욕과 옷 갈아입기, 대소변 관리, 외부보행, 실내이동, 식사, 누워있는 자세 바꾸기 등 개호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또 일본은 요양병원과 요양시설, 재택서비스를 연결하는 노인 의료복지복합체를 운영하고 있다. 더불어 병원과 가정 간 중간 입소시설인 간호 노인 보건시설, 요양원과 비슷한 개호노인복지시설, 전문간호사가 필요한 특별양호노인홈 등을 운영한다. 또 가벼운 치매 환자를 24시간 돌보는 그룹홈, 낮 동안 통원 재활서비스를 제공하는 데이케어센터 등 다양한 형태가 있다.이들 시설의 특징은 환자의 존엄성을 중시한다는 점이다. 내 집같이 편안한 휴식공간을 제공한다. 이러한 배려 덕분에 일본 노인전문병원의 재택복귀율은 50~60%에 달한다.이와 함께 일본은 지역포괄지원센터를 중심으로 네트워크를 만들어 상담창구 기능과 케어예방 등 종합적이고 지속적인 케어활동을 벌이고 있다."요양병원 제 역할 해내려면 간호간병 통합서비스 필요"● 박진상 요양병원협 전북지부 회장예전에는 부모님을 요양병원에 모신다면 불효자라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요양병원이 양적으로 팽창한 감이 없지 않지만 질적으로 크게 개선되었으니까요.대한노인요양병원협회 전북지부 박진상 회장(50)은 자부심이 대단하다. 어르신은 물론 보호자들까지 위하는 병원시설을 갖췄고 자신이 운영하는 효사랑전주요양병원이 전국 최초로 요양병원 인증을 받았기 때문이다.박 회장은 요양병원이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선 간호간병통합서비스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정부에서는 급성기 병원에 우선적으로 이 서비스를 적용하고 있지만 만성기 환자가 장기입원하고 있는 요양병원이 오히려 더 절실하다는 것이다. 나아가 일당정액제의 수가체계도 문제라고 지적한다. 현재는 환자를 등급별로 구분해 하루 일정액의 치료비를 국민건강보험에서 지원하는데 이런 체계에서는 아무 치료도 하지 않는 게 수익이 많이 남는 구조여서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반병원과 같이 행위별 수가제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다.요양시설 내에서의 인권침해에 대해 묻자 근본적으로 요양보호사 인력이 달리고 일이 힘들어 일부 일어나는 것 같다며 오히려 아르신들이 손찌검과 욕설, 성추행 등 직원들을 함부로 대하는 경우가 많다고 상호적인 문제라는 시각을 보였다.임실 출신인 박 회장은 원광대 한의대를 나와 1995년 전주 중앙시장에 한의원을 개원했다. 이때 어머니가 병환 중인 할아버지를 모시는데 기존 병원의 한계를 느껴 요양병원을 세워야겠다고 결심했다.현재 효사랑가족요양병원과 효사랑전주요양병원, 가족사랑요양병원 등 750명의 직원과 1500병상을 갖춘 양한방 협진 효사랑 메디컬그룹을 일궜다. 대학동기인 부인 김정연 원장은 우석대 한의대 교수를 거쳐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최근 긴 병에도 효자 있다는 책을 펴냈으며 덕이 있으면 외롭지 않고 이웃이 있다(德不孤必有隣)는 게 경영철학.조상진 전주시노인취업지원센터장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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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9.01 23:02

[전북일보 만화뉴스]본격 해외봉사 동행 취재하는 만화: 캄보디아 아하 마을

본격 해외봉사 동행 취재하는 만화: 캄보디아 아하 마을#표지.본격 해외봉사 동행 취재하는 만화: 캄보디아 아하 마을#1.안녕하세요, 전북일보 최명국 기자입니다.얼마 전 Happy Friends 전북 봉사단의 모습을 취재하러 캄보디아에 다녀왔습니다.#2.캄보디아는 한국과 두 시간의 시차가 있어요.그래서 비행기 타고 5시간 반 날아갔는데 3시간 반밖에 안 지나 있더라고요.#3.씨엠립 공항에서 다시 차로 2시간쯤 서쪽으로 달리면 아하 마을이 나옵니다.#4.한 시간은 포장된 길, 한 시간은 비포장 길이었는데요.물소 끌고 다니는 목동도 만났습니다.#5.음 더웠어요.아 그런데 덥긴 더운데 한국의 더위완 좀 다르달까?#6.동남아의 여름 하면 덥고 습도 높고 비 많이 오고, 이런 거 생각하잖아요.그런데 아하 마을은 비도 별로 안 오고, 습도도 낮아서 한국의 여름보단 오히려 견딜 만하더라고요.#7.마을 넓이는 약 300㏊인데요. 대충 전북대 캠퍼스 면적의 두 배 정도 됩니다.그 마을에 50여 명이 살아요.(그래서 자전거가 필요하다고 하네요.)#8.전기수도가 안 돼서, 전기나 물이 필요할 때는 양수기를 겸한 발전기를 썼어요.이게 그다지 안정적이진 않더라고요. 머리 감다 물이 끊기기도 하고 말이죠.#9.통신은 교회 같은 특정 지역에서만 겨우 한 칸 정도 뜨더라고요.생각했던 만큼 답답하지는 않았습니다.(그래서 사진과 기사를 못 받았지요. - 디지털뉴스국)#10.봉사단은 오전에는 마을의 주 수입원인 망고 과수원을 돌봤습니다.오후에는 마을 아이들에게 칫솔질이나 말라리아 예방법 같은 보건 상식을 가르쳤어요.#11.그리고 밤늦게까지 교회에 모여 그날의 활동을 평가하고 다음 날 활동 계획을 짜는 회의를 했습니다.저는 취재하는 입장이었으니 회의에 끼지는 않았지요.#12.저게 데네브, 알타이르, 베가어? 별똥별 어? 소원 못 빌었는데?!#13.아! 사진도 많이 찍었습니다.그런데 그게#14.(떨어지는 휴대폰)(절망하는 모습)취재 최명국, 기획 신재용, 구성 권혁일, 그림 이권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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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9.01 23:02

[문화&공감]이희정 밴드 - 밴드 악기·판소리 결합…'생활형 소리'를 꿈꾸다

밴드는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다. 음악적 용어는 각종 악기로 음악을 합주하는 단체. 주로 경음악을 연주한다라고 나온다. 전주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희정밴드는 조금 색다르다. 일반적인 밴드 악기 구성에 판소리 소리꾼이 보컬로 참여하고 있다. 소리꾼의 이름을 내걸고 밴드를 만든 경우는 전주에서나 가능한 특색있는 구성이 아닐까.밴드와 소리꾼의 만남이희정밴드의 이희정(28)은 판소리꾼이다. 전주 출신으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판소리를 시작해서 익산에서 중학교에 다니면서 임화영 명창에게 소리를 배웠다. 남원국악예술고등학교와 전북대학교 한국음악학과를 졸업해서 현재는 전북대학교 대학원에서 판소리를 공부하고 있다. 대학졸업 후 사회적기업 문화포럼 나니레에 입사하면서부터 한옥마을에서 계속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판소리 공연을 주로 했던 이희정은 타악연희원 아퀴의 공연에 객원으로 초청받아 참여한 자리에서 작곡가 김휘상씨를 만나 의기투합해 밴드를 만들었다. 이희정밴드의 탄생이다.밴드에는 작곡과 프로듀서, 기타를 맡은 김휘상, 드럼과 음향을 맡은 윤태일, 베이스를 맡은 이영화, 건반을 맡은 최고은과 소리를 맡은 이희정 이렇게 5명이 참여하고 있다.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 밴드처럼 국악기는 하나 없이 밴드로만 구성되어 있고, 보컬인 이희정만이 판소리 소리꾼이다.공연하는데 불편하지 않으냐는 질문에 소리꾼은 전혀 불편하지 않다고 답한다. 대신에 반주를 해주는 밴드가 불편할 것이라고 말한다. 작곡가이자 밴드의 음악을 책임지고 있는 김휘상씨는 구성원들과 수시로 음악에 대해서 논의하며, 음악에 대한 고민을 항상 하고 있다고 한다.밴드는 2014년 11월 창단했다. 당시에는 밴드에 소리꾼이나 국악성악 전공자가 참여하는 비슷한 구성의 다른 단체들도 있었다. 하지만 음악적으로 명맥을 유지한 단체는 드물다.밴드는 작사 작곡 연출 등 음악적 활동에도 힘을 기울이지만 홍보와 마케팅에도 열심이다. 창단 때부터 지금까지 한옥마을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전통 캐릭터의 색다른 해석 이희정밴드는 처음에는 새로움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음악 하는 이들이 모두 그러하듯, 광고 음악처럼 한번 들으면 입가에서 흥얼거릴 수 있는 선율을 만들어 오래 기억에 남는 인상 깊은 음악을 하고 싶어 한다.밴드는 지난 6월 1집 앨범 만좌맹인이 눈을 뜨다를 정식으로 발매했다. 앨범을 내고 밴드는 음악에 대한 방향성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이희정이 말하는 밴드의 특색은 공감이 많이 간다.판소리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격은 고정되어 있다. 유파별로 대사나 음의 높고 낮음으로 약간의 변별성은 있으나, 캐릭터의 고정은 현대를 사는 젊은 세대에게 공감을 얻는 것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밴드는 박색에 성격이 못된 뺑파를 관능적이고 세련된 이미지로 노래하기도 했다. 이 씨는 캐릭터에게서 읽을 수 있는 표출 되지 않은 내면의 모습을 자유롭게 노래할 수 있어 좋다고 말한다. 충분히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어렸을 적 읽었던 흥부놀부전에서 흥부는 마냥 착하기만 하고 놀부는 그저 못되기만 했을까 하는 해석을 자주 접했기 때문이다.심청의 인간적인 고뇌, 춘향이의 현실적인 판단 등 경제적으로나 인문학적인 해석이 아닌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해석이 가능한 노래를 하고 있다.이희정은 시골 장터부터 큰 무대까지의 경험을 통해 판소리를 매개로 대중과 소통하는 방법을 익혔다. 다양한 공연경험은 대중들이 좋아하는 단어나 아니리(멘트)를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으며, 작사하는데도 참고하고 있다. 1집 앨범 발매 이후 활동 방향에 대한 고민도 깊어졌지만, 무언가를 조금 알아갈 때의 두려움이 더욱 맞는 표현이 아닐까 한다.판소리를 오래 한 선생들은 소리가 여물지 않은 상황에서 너무 다양한 활동을 하는 게 아니냐며 소리 공부에 더욱 매진하라는 말을 해준다고. 그러나 그는 여러 활동을 통해 정통 판소리의 중요성도 다시 깨우치며, 대중과 소통하는 방법적인 고민도 풀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쉽고 편한 생활형 음악 지향 이희정밴드 공연을 관람한 이들은 국악기가 빠진 밴드에 대한 생소함과 소리꾼과의 음정에 맞춰 진행되는 코드 진행, 장단을 풀어 연주하는 리듬감이 익숙하지 않아 어색하다는 평도 한다. 우리의 음악처럼 맛깔스러운 맛을 내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밴드로 판소리를 반주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틀에서 자유롭고 다양하게 표출되는 음악적 느낌이 신선한 것은 사실이다.밴드는 자체 공연활동 외에도 다양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 음악의 판의 구성을 직접 익히며, 대중들과 함께하는 판소리에 대한 이해를 직접 습득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전주에 또 다른 자랑거리인 한옥마을은 연간 수백만의 관광객이 찾는 성공한 공간으로 꼽힌다. 장소를 채우는 콘텐츠의 지속적인 개발이 필요한 시점에 이희정밴드는 예향에 걸맞은 콘텐츠의 한 부분이 아닐까 싶다.공연자로서 제작자로서 다양한 시도와 활동을 하는 소리꾼의 밴드 이희정밴드는 생활형 한옥이 문화의 중심지에 만나 빛을 발한 전주한옥마을처럼 우리의 판소리도 쉽고 편하게 입가에 맴돌 수 있는 생활형 소리가 되어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김정준 전북도립국악원 공연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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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8.30 23:02

종합업적평가 전국 1위 NH 농협은행 전북본부 최용구 본부장 "농생명산업 발전 위해 금융지원·기업육성 기여할 터"

NH농협은행 전북본부는 올 들어 도내에서 농촌일손돕기 활동 전개, 무료급식소 지원, 불우이웃돕기, 집고쳐주기, 복지시설 방문 및 위로, 지역문화축제 홍보 및 지원, 환경정화 등 사회공헌 활동을 의욕적으로 펼치고 있고, 지역 금융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도 추진 중이다. 특히 NH농협은행 전북본부는 올 상반기 처음으로 전국 1위를 달성하는 쾌거를 일궈내기도 했다. 이에 따라 전북일보는 지난 24일 최용구 NH 농협은행 전북본부장으로부터 현재 추진 중인 각종 사업과 향후 과제 등을 들어봤다.-올초 NH농협은행 전북본부장을 맡은 후 많은 변화가 있었어요.“본부장으로 명을 받고 내 고향 전라북도에서 농촌과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야 겠다는 결의를 다졌는데 그동안 많은 분들을 만나 고견을 듣고, 전북농협의 발전에 밑거름으로 삼으려고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미진한 부분이 더 많은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농협은행 전북본부를 고객을 지향하는 최상의 서비스조직으로 리모델링하기 위해 힘썼고, 대외적으로는 우리 농협은행이 농업·농촌·농업인의 삶의 질 향상, 전라북도의 발전방향에 발 맞추어 실질적이 도움이 될 수 있는 금융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자부합니다.취임과 더불어 도내 전 영업점을 방문했는데, 근무시작 전 아침시간에는 커피 한 잔과 빵을 가지고 직원들과 만나서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눴고, 오후 시간에는 치킨 등을 가지고 직원들과 허물없는 대화를 했습니다.대화를 통해서 ‘반걸음 앞서 나가자는 영선반보의 정신’, ‘금융인으로서 전문성을 제고해 줄 것’을 강력하게 주문했고, 이는 결국 농협은행전북본부가 처음으로 전국 1위를 달성하는 쾌거로 이어졌습니다.전북 금융환경이 열악한 상황에서 일궈낸 성과라 너무 가슴이 벅찬데 올 연말에는 전북농협의 저력을 반드시 보여드리겠습니다.”-갈수록 전북은 인구, 경제력 등 모든면에서 쇠퇴를 거듭하면서 농협은행 역시 많은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실제 어떻습니까.“호시절은 없습니다. 어느때나 봉착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있었습니다. 전북에는 농촌진흥청을 비롯한 많은 기관들이 전북혁신도시로 이주했고, 전북연구개발특구, 김제 시드밸리, 익산의 국가식품클러스터, 첨단 신소재 융복합산업, 새만금개발 등이 지역 발전을 선도해 갈 것으로 기대합니다.농협은행도 지역발전에 한 축이 되기 위해서 많은 고민과 준비를 하고 있는데, 특히 삼락농정과 농생명산업, 농업·농촌에 활력 불어 넣는 분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농협은행 전북본부는 전북혁신도시에 금융기관 최초로 지점을 개설해서 전북혁신도시 입주민들, 이전기관의 임직원들, 주변의 상인들에게 금융서비스를 제공했습니다.특화된 농업금융기관으로서 전북발전의 축이되는 농생명산업의 발전에 필요한 각종 금융지원과 농생명기업의 육성에 많은 기여를 하겠습니다.”-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농협이라고 하면 ‘농민을 위한 본연의 활동보다는 돈장사를 하는곳 ’이란 부정적 인식이 많은데 이에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지난 2012년 이전 중앙회구조에서 많이 받아오던 오해 중 하나입니다. 농협중앙회는 경제사업활성화, 농업인 실익지원강화를 위해 2012년 사업구조개편을 했습니다.사업구조개편을 통해 농업인과 중소상공인, 개인들에 대한 지원이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특히 전북지역은 수도권 및 타지역으로부터 각종 자금지원을 받고 있습니다.중소상공인을 위한자금지원, 서민금융 및 농업정책자금, 각종 영농자금지원을 위한 재원을 조달 받고 있습니다.(전북의 입장에서만 볼 경우) 농협은행이 지역에서 버는 것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액수를 경제사업 등을 통해 지역에 환원하고 있습니다.”-최근 들어 농협의 사회적 역할이 부쩍 늘어났습니다.“NH농협은행은 수익의 대부분을 농업인 실익과 소외계층 지원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올해 은행연합회의 공시자료에 따르면, 농협은행은 2위 은행의 2배 가까운 금액인 1014억원을 소외계층 및 사회적 약자를 위한 지출로 사용하여 사회공헌활동 1위 은행으로 선정된 바 있습니다.농협은행 전북본부도 직업체험교실, 진로체험의 날 행사, 일일교사지원, 찾아가는 금융교실 등의 ‘행복채움금융’ 프로그램을 활발하게 운영하고 있습니다.최근 인구의 감소 및 고령화 등으로 활력을 잃어가고 있는 우리 농촌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하여 ‘또 하나의 마을만들기운동’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습니다.”-지역 청년들의 채용현황과 도내 학생들의 채용 비중을 늘리기 위한 대책은 무엇입니까.“칠포세대, 팔포세대, 흙수저 등의 용어들이 우리 청년들의 고뇌와 처한 현실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NH농협은행 출범 이후 지역인재 육성과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기 위해 전북도내 출신을 대상으로 280명을 채용했고, 올 하반기에 신규 채용인원을 늘릴 것입니다.지난 6월말 현재 농협은행을 포함한 농협중앙회에 807명, 지역농협에는 5366명의 직원이 재직 중입니다.지역사회를 지탱하는 큰 일자리를 만들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져봅니다.퇴직자 재 채용 프로그램을 통해서 60여명을 채용하여 고령층 일자리 창출에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지역인재들의 관심도를 높이고, 기업을 알리기 위해 도내 대학교에서 채용설명회를 개최했고, 전북대 등 대학과 산학협력 현장실습협약을 통해 농협에서 일정기간동안 직장체험을 하고 소정의 학점을 취득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전북도민들께 희망을 안겨드리는 농협은행이 될 것이라는 점을 다시한번 강조하면서 많은 성원을 부탁합니다. ”● [최용구 본부장은] '만능 농협인' 정평, 업무 면에선 '덕장'최용구(55) NH농협은행 전북본부장은 순창 인계면 출신으로, 전주고와 전북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1988년 전북농협에 입사한 이래 순창군지부장, 경영지원부장, 경제본부장 등 주요 보직을 두루 거친 뒤 올초 NH농협은행 전북본부장에 임명됐다.평소 스스로를 잘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지만, 업무에 관해서는 분명한 태도를 취하는 편이다.어릴 때 순창에서 전주로 이사왔지만, 주위 사람들은 그를 ‘전형적인 시골사람’이라고 평한다.가식이 없는 데다 워낙 술도 좋아하기 때문이다.줄곧 전북에서 생활해서 자기만큼 전북을 잘아는 사람이 없을거라며 스스로를 ‘전북토종’이라고 거침없이 말한다.농협에서는 보기 드물게 전 분야에서 근무한 경력을 가지고 있어 만능 농협인으로도 통한다.직원들 사이에 덕장으로 알려진 최 본부장이 보여주는 친화력과 배려심은 농협 내에서도 정평이 나 있다. 특히 젊은 직원과 고객과의 스킨쉽을 위해 패션과 유머감각을 잃지 않도록 많은 투자와 유행에 신경을 쓴다고 한다.부인 임정은 여사와 사이에 1남1녀를 두고 있는데, 아내와 함께 시작한 사교댄스는 수준급이라는게 주변의 귀띔.최용구 본부장의 카톡 대문사진은 영선반보(領先半步).“다른 사람보다 반 발 먼저 생각하고, 반 발 먼저 실행하고, 반 발 먼저 앞서 나가자"는 의미라고 한다.올해 지역본부장을 맡아 영선반보 가치를 강조하면서 농협은행 전북본부의 경영방침으로도 반영됐는데 이는 결국, NH농협은행이 올 상반기 처음으로 1위를 차지하는 성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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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병기
  • 2016.08.29 23:02

[전북일보 카드뉴스] 반짝반짝 작은 반디: 제20회 무주반딧불축제

반짝반짝 작은 반디: 제20회 무주반딧불축제 #표지.반짝반짝 작은 반디: 제20회 무주반딧불축제#1.깜빡깜빡.#2.밤하늘을 수놓는 작은 불빛들.청정구역 무주가 자랑하는 반딧불이입니다.#3.반디반딧불이, 또는 개똥벌레라고도 하는 이 곤충은 맑은 물에서만 사는 환경 지표생물입니다.무주군 설천면 일원의 반딧불이는 그 서식지와 함께 지난 1982년 천연기념물 제322호로 지정됐어요.#4.무주반딧불축제가 돌아왔습니다.오는 27일부터 9월 4일까지, 무주읍 남대천, 지남공원 일원에서 펼쳐집니다.#5.축제 이름이 반딧불축제니까 당연히 반딧불이를 만나봐야겠죠?반딧불이와 풀벌레들을 만나러 떠나는 1박 2일 생태탐험이 첫날인 27일부터 3차례 진행됩니다.(27~28일, 9월 2~3일, 3~4일. 출발 2일 전까지 참가신청 접수)#6.1박 2일씩 투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반딧불이 신비탐사 프로그램이 축제 기간 매일 저녁 7시~9시 열립니다.(인터넷으로 참가 예약. 현장 추가 접수도 가능)#7.물론 반딧불축제지만 반딧불이반딧불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낮에는 남대천 맨손 송어잡기, 환경파괴범과의 물싸움 프로그램 등이 진행됩니다.#8.또 20주년을 기념하는 성년례 공연 무주 아리랑, 남대천을 가로지르는 섶다리에서 펼쳐지는 섶다리 밟기 등 볼거리도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어요.#9.무주읍과 설천면, 적상면, 부남면, 무풍면, 안성면이 각각 준비해 온 전통 공연들도 감상해볼까요?#10.성년을 맞은 무주반딧불축제. 폐막일인 9월 4일은 태권도의 날이기도 합니다.마침 2017년, 무주에서는 세계 태권도 선수권대회가 열릴 예정이네요.#11.기획 신재용, 구성 권혁일, 제작 이권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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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8.26 23:02

지리산문화자원연구소 김용근 소장 "판소리 자체가 '종합인문학'…사설부터 모든 것 정말 흥미로워"

남원은 판소리의 땅이다. 지리산의 강건한 울림을 그대로 안은 동편제 소리가 만들어지고 수많은 명창들이 시절을 보내며 그 울림을 생명의 소리로 다듬고 다스려 전해주었던 땅.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더러는 단절되고 더러는 묻혔으나 남원의 문화적 토양은 동편제 소리의 기반 위에서 성장해 오늘에 이른 것만은 틀림없다. 그래서인가. 남원 사람들이 갖고 있는 판소리에 관한 자긍심은 남다르다. 사실 소리를 생산해내고 또 그 소리를 판소리의 굵은 맥으로 지켜왔으니 자긍심의 근거는 충분하다.남원에서 판소리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해온 김용근 지리산문화자원연구소장(57)도 그 중 한사람이다. 남원에서 태어나 남원에서만 살아온 그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판소리 명창들의 삶을 추적하고 기록해 판소리사의 새로운 역사를 써온 살아있는 백과사전이다. 판소리 명창들의 삶을 찾아 찾아나선지 올해로 30여년. 누구도 범접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자료를 섭렵하고 기록으로 남겨둔 그의 일상이 궁금했다.여름 한 중간, 남원시 대산면사무소에서 그를 만났다. 1986년 공무원이 된 그는 지금 대산면사무소의 산업계장으로 근무하고 있다.드러낼 만한 이야기가 별로 없다던 그와의 인터뷰는 예상보다도 길어졌다. 그의 말대로 판소리 이론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연구를 위해 학자들과 긴밀한 교류를 해온 것도 아닌 그의 판소리 연구는 외롭고 험난했으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만의 질서이자 삶의 가치로 안겨 있었다.내가 수집해 놓은 자료들이 이제 좀 좋은 결실로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젊은 사람들의 직업을 만드는데도 그렇고, 옛사람들의 삶과 지혜를 오늘의 우리 삶으로 끌어들이는 통로로도 그렇고. 들여다보면 문화콘텐츠로 활용할 만한 자료가 아주 많거든요.고단했던 여정, 그러나 그가 돌아보는 30년 가까운 세월은 기쁨과 보람으로 빛났다. 생애를 이렇게 후회 없이 살아올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싶었다.-판소리와의 인연이 궁금합니다.86년에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는데 당시에는 유난히 일본 관광객들이 많았습니다. 남원에도 외국 손님들이 많았었죠. 그런데 정작 남원을 잘 소개할 수 있는 안내자가 없었어요. 단순하게 문화재를 설명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으나 그 안의 이야기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판소리부터 관심을 갖기 시작했죠.-판소리를 소리로만 접하지 않고 거의 종합인문지리서로 정리해놓으셨던데요.판소리를 공부하다 보니 그 자체가 종합인문학이었어요. 사설부터 모든 것이. 명창들의 삶을 추적하다보니 정말 흥미로운 일들이 줄줄이 이어졌어요. 그래서 판소리도 배우고 북도 배웠지요. 명창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으려면 그만한 노력이 있어야겠더라고요.-〈판소리 북〉이란 책도 내셨죠.북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많아요. 조선시대에는 남원이 북을 가장 잘 만드는 곳이었습니다. 우시장이 있었거든요. 궁중에서 쓰이는 판소리 북은 반드시 남원에서 만들어갈 정도로 남원을 인정했습니다. 그만큼 북만드는 기술이 빼어난 장인들이 많았던 거죠.-기록이 있습니까.제가 마을의 노인들께 들은 이야기예요. 실제로 저희 아버지도 북을 만드셨거든요. 남원 북은 소리꾼들 사이에서도 유명했어요. 판소리 소리꾼들은 제자가 소리를 어느 정도 배우고 분가를 하게 되면 그 징표로 북을 맞춰 주었어요. 북을 만들어주려면 남원으로 왔어요. 남원에 귀명창이 많았던 것도 그 덕분입니다. 사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북은 일본식 기법으로 만들어진 것이 많아요. 안타까운 일이죠.-한국의 전통 판소리를 일본식 기법으로 만들어진 북으로 장단을 맞춘다면 잘못된 것 아닌가요.북은 귀명창이 만드는 것이거든요. 보통 북을 주문하면 6개월 동안 여덟 번 정도 왔다 갔다 하면서 자기 소리와 맞추었답니다. 소리꾼이 가진 소리의 특성과 잘 맞게 만드는 것이죠. 그런 과정을 거치고 북이 완성되면 스승은 붓으로 써서 제자에게 그 북을 주었어요. 이제 내 소리가 너한테 간다는 뜻이었죠.-지금의 소리 물림과는 많이 달랐군요. 의미가 깊습니다.일본식 기법으로 만드는 북이라고 제가 단언하는 이유가 있어요. 원래 우리 북은 태극단청을 넣었었거든요. 1910년대의 판소리 자료를 보면 북에 태극 마크가 있습니다. 지금은 거의 없어요.-판소리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하면서 생활사 자료까지 수집하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처음에는 판소리가 그렇게 방대한 분야에 걸쳐있는 것인지 몰랐었어요. 그런데 들어가다 보니 판소리 사설만해도 모든 분야가 집적된 종합인문지리지와도 같더라고요. 이것을 제대로 알려면 풍수지리도 공부해야하고, 의학적인 지식도 있어야 하고. 예를 들어 사설에 약초이름이 나오면 일일이 찾아서 그 의미를 알아야 사설의 해석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보니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흥미도 있었겠지만 힘드셨겠습니다.학문의 경험이 짧으니 온전히 독학으로 해야 했죠. 전문가도 아닌데 모든 과정을 스스로 해야 하니 어쩔 수 없었어요. 지리산 일대의 마을은 다 찾아다녔어요.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씩.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들려준 이야기가 결국은 소리꾼들의 삶을 밝히는 종합서가 되었죠. 〈동편제로 지리산을 말하다〉 같은 책이 바로 그 결실입니다.-흥미로운 에피소드가 많더군요.사실 지리산을 중심으로 찾아다녔지만 판소리 명창과 관련된 지역은 강원도에서 제주도까지 안간 곳이 없어요. 왜냐면 소리꾼들이 한 곳에서 거주하는 기간이 평균 3.5년이거든요. 이름이 알려진 소리꾼의 후손들은 거의 다 찾았어요. 지금처럼 개인정보공개를 규제하지 않던 시절이어서 호적과 족보를 조사하면 거주지까지 알 수 있었거든요.-얼마 전에 보도됐던 송흥록 명창의 후손도 그렇게 찾으셨군요.그렇죠. 제가 밝혀내기 전까지는 송흥록 명창의 후손도 조상을 모르고 있었어요. 6대 장손이었는데, 집안 어른들이 그런 사실을 드러내고 싶지 않으셨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왜 개인정보를 공개하느냐고 원망도 들었어요. 법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적도 있죠. 그래도 결국은 후손들의 동의를 얻어서 남원 운봉에 송흥록 명창의 묘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과정은 힘들었지만 보람 있는 일이었죠.-이화중선 명창도 같은 경우일 것 같은데요. 그렇게 명창들의 가계를 밝혀낼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호적이나 족보가 가장 큰 통로예요. 왜냐면 소리꾼들은 대부분 통혼을 하거든요.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끼리. 그러니까 하나를 찾으면 줄줄이 연결이 돼요.-공무원 생활을 하시면서 이런 작업이 가능했습니까.직장 일을 제대로 안한 것 아니냐는 말씀 같은데, 그런 오해를 안 받으려고 업무를 미루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앞서서 맡았지요. 제가 이래 뵈도 국가가 인정한 모범 공무원입니다.(웃음) 담당 업무도 그렇지만 제가 판소리와 관련한 일을 하고 있으니 관광과의 업무도 자주 맡았거든요. 외부에서도 이런 저런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요청해오니 아무래도 일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죠.-표현이 적절치 않지만 잡일이 많으셨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일을 하실 시간에 좀 더 개인적인 역량을 높이는 공부를 했더라면 공무원으로서의 환경도 나아지지 않았을까요.그럴 수도 있었겠죠. 과장 국장 승진도 하고.그런데 그렇게 했으면 제가 해온 제 나름의 질서는 없었겠죠.-소장님만의 질서를 지키며 살아오셨다는 말씀이군요.저희 아버지의 가르침이었어요. 제가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을 때 아버지 반대가 심했습니다. 아버지가 일제 징용을 다녀오셨거든요. 그 과정에서 공무원들한테 엄청나게 당하셨다고 하더라고요. 내 아들은 절대 공무원 시키지 않겠다고 작심하신거지요. 그래도 아들이 공무원이 되니 두 가지를 말씀하셨어요.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면 첫째는 아침에 7시 이전에 출근할 것, 둘째는 월급의 30%는 네 것이 아니니 다른 목적으로 쓰라는 것이었어요. 제 경우는 판소리를 연구하는데 30%를 쓴 셈이지요.-아버님의 가르침이 대단하셨군요.저희 아버지는 글을 모르셨어요. 그래도 분명한 당신만의 철학을 갖고 계셨죠. 제게도 그 철학을 주셨는데, 자기가 세운 질서가 공심이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예를 들면 길을 건널 때 파란불이 들어오면 사람들이 건너가는 것은 내가 연구해서 세운 질서가 아니고 누군가 만들어놓은 규칙을 따라가는 거죠. 그런 것 말고 너 스스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어떤 질서를 만들라는 말씀이었죠.-옛 사람들도 소리나 북을 배우는 과정이 고단했겠죠.물론지요. 그런데 제가 만났던 명창이나 노인들은 판소리나 북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고 했어요. 배우는 것이 아니고 놀다가 저절로 되는 것이 소리라고요. 놀다가 따라서 하면 그것은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쳐주는 것, 그것이 소리를 배우고 가르치는 방식이었다는 것이죠. 놀이로 배우고 가르치는.-흥미롭습니다. 소장님도 소리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많았었을 텐데요.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저는 소리꾼이 되려는 것도 학자가 되려는 것도 아니었어요. 소리와 북을 익힌 것은 조사에 필요했기 때문이죠. 제가 북을 치고 소리를 안했으면 소리꾼들에게서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빤했을 겁니다.-어떤 사람이 가도 얻어내지 못하는 자료를 나는 얻을 수 있었다는 자부심이 느껴집니다.(웃음)그 이전에 나름대로 노력을 많이 했어요. 연구자들이 그동안 판소리와 지리산 문화를 조사한 논문만도 4백 권을 수집해 읽었습니다. 그 내용을 바탕으로 제가 허와 실을 검증해보았어요. 많은 부분이 잘못되었더라고요.-그렇게 바로 잡은 고증을 학계도 인정합니까.대부분 공식적으로는 인정하지 않아요. 판소리연구자들이 제가 발굴한 자료를 갖다 쓰면서도 출처 기명은 하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고요. 그러면서도 정작 연구에 필요하면 다 찾아오시죠. 그럴 때는 씁쓸하지만 그렇다고 일일이 신경을 쓰진 않습니다. 제가 발굴한 자료로 학술 연구를 진전시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니까요.-이런 작업을 본격적으로 일구신 것이 90년대인가요.판소리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북을 배우면서 명창들을 찾아다니다보니 자연스럽게 이어진 일입니다. 하다 보니 연구 분야가 커졌어요. 소리꾼들은 어떤 음식을 먹고 병이 나면 어떻게 치료를 하는가.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도대체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해지더라고요.-소리를 하는 분들의 건강은 일반인들과 달랐습니까.잔병치레를 하면서도 일반인들보다 건강하게 오래 살았죠. 1910년대까지 우리나라 평균수명이 43.5세였습니다. 그런데 소리꾼들은 62세였거든요. 그리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일반인들은 잔병치레를 15.5개 정도였는데, 소리꾼들은 4.7개. 그러니 병 없이 오래 살았단 말이잖아요.-그런 기록이 있습니까.제가 통계로 수명을 조사해보니 소리꾼들이 일반적으로 오래 사는 것이 흥미로웠어요. 한곳에 정착해서 사는 평균기간이 3.5년~4년인데, 그렇다면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살았다는 말이거든요. 그런데도 어떻게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었을까 궁금했습니다. 외국 학자들은 이 부분을 주목해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물론이고 독일 학자들도 이런 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남원을 찾아옵니다.-우리나라의 연구는 어떻습니까.아직은 연구자를 못 만났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이런 문제도 있습니다. 제가 분석하기로 소리는 음양오행이 기본이거든요. 사실 판소리는 노래가 아니라 오장육부에서 나오는 소리예요. 진양이네 자진모리네 중중모리네 하는 말은 판소리에 없습니다. 귀명창들은 소리를 권할 때 자진모리 한대목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쓴소리 한 대목 하라고 하죠. 간과 담은 한의학적으로 쓴맛으로 관여합니다. 중중모리는 신소리라 하는데, 신장과 소장, 신맛과 관련이 있어요. 쓴소리 신소리 매운소리 짠소리 이렇게 분류되는 것이죠. 아니리는 헛소리. 소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병이 나는 것은 영양이 모자라거나 기가 막히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영향이 불균형하거나 기가 막히거나. 옛날 속담에 기가 막히면 죽는다고 하잖아요. 그러니 기를 통하게 해야 합니다. 그 기운은 자연에서 오는 것이죠. 만약 신장과 콩팥이 아프면 신장과 콩팥의 기운을 높여줘야죠. 약으로 쓰는 방법, 호흡으로 하는 방법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선비들은 호흡법으로 치유했어요. 그 호흡과 소리를 합한 것이 판소리인겁니다. 소리를 짠다고 하잖아요. 옛날에는 어느 부잣집에서 가족의 누군가 기력이 약해지면 잔치를 벌였습니다. 소리꾼을 부르죠. 소리꾼은 진단을 합니다. 간이나 담의 기운이 약하다면 거기 맞는 장단의 소리를 짜서 부르는 것이죠.-이런 특성을 아직 연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아쉽군요.우리나라 판소리 연구는 아직도 사설의 어떤 부분이 틀렸네 맞았네 명창의 출생지가 목포네 남원이네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어요. 진전이 없죠. 저는 우리나라 판소리 연구가 일정한 한계를 못 벗어나는 이유가 융합하지 않는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학문과 학문의 융합과 교류가 있어야하는데, 특히 판소리 같은 경우는 학문 융합으로 연구해야할 과제가 많습니다.인터뷰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의 이야기는 영역과 영역을 넘나들면서 더 흥미롭고 풍요로워졌다. 깊은 바다에서 방금 낚아 올려 반짝이는 그물 안 물고기처럼 그로부터 듣는 지식과 진실은 생생하고 새로웠으며 깊이가 있었다. 어느 기관의 지원 한번 받지 않고도 판소리 연구에만 온전히 바쳐온 30년 삶의 궤적이 우리 판소리 연구의 중심에 놓여 있다. 이제 그의 오랜 소망처럼 전문적인 학술연구자들의 진지한 관심이 더해질 일만 남았다.● [김용근 소장은] 30년 가까이 소리꾼 삶 연구판소리 역사 살아있는 백과사전김용근 소장은 남원 주천면에서 태어났다. 농사짓는 부모님은 아이들에게 공부 잘하라고 강요는 하지 않으셨지만 가르침은 엄하셨다. 특히 아버지는 글을 쓰고 읽을 줄 모르셨지만 자신만의 철학과 질서를 만들어 자식들이 자연스럽게 보고 배울 수 있게 했다. 덕분에 그는 부모의 삶과 태도가 아이들에게는 곧 교과서라고 믿게 됐다. 어릴 적부터 공부보다는 농사짓는 일에 마음을 두었던 그는 남원농고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는 대신 군대를 다녀와 공무원이 됐다. 공무원 되는 것을 완강히 반대했던 아버지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아들을 마뜩치 않아 하셨지만 공무원으로서 지켜야 할 두 가지를 약속받고서야 상황을 받아들였다. 임실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지만 1년 만에 남원시로 전입한 이후 그는 줄곧 남원 안에서만 공무원생활을 했다.80년대 중후반, 남원을 찾아오는 외국인 손님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판소리에 관심을 가진 관광객들이 늘어나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남원의 판소리에 대해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판소리는 들어설수록 신비로운 영역이었다. 80년대 중반, 강도근 명창이 살고 있던 국악원 옆으로 이사를 해 매일 찾아다니며 소리를 배웠다. 판소리 명창들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 이후였다. 기존의 기록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진실을 밝혀내고 싶었다. 주말이면 지리산 일대의 마을들을 찾아 나섰다. 첫 월급부터 지금까지 월급의 30%가 온전히 이 작업에 쓰였다. 판소리는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종합인문지리서와 같았다. 판소리 사설은 풍수지리부터 한의학까지 온갖 서적을 읽어 알아야만 해석이 가능한 영역이었고, 소리꾼들의 삶은 신비로웠다. 조금씩 쌓여가는 자료의 가치와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발굴한 자료가 전공자들을 통해 우리 판소리 연구의 확장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랐다. 자료의 효율적인 활용과 좀 더 본격적인 연구를 위해 1989년 지리산판소리문화연구소를 냈다. 1인 연구소였다. 그러나 판소리를 통한 연구영역이 확대되면서 연구소 이름도 지리산문화자원연구소로 바꾸었다.30년 가깝게 발로 뛰며 찾아낸 자료와 기록들은 판소리 연구의 보고가 되었다. 호적이나 족보를 통해 밝혀낸 조선창극사 명창들의 생애 뿐 아니라 옛사람들의 생활사를 밝혀내는 온갖 자료들이 그의 손을 거쳐 정리되어 자료가 됐다. 이름만으로 판소리사에 남았던 명창들의 생애가 그를 통해 비로소 역사가 되었다. 국가공무원으로 30년 살아왔지만 그의 직급은 6급 계장이다. 지금은 남원시 대산면 산업계장으로 일하면서 여전히 판소리와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일에 주말을 바친다. 그동안 펴낸 책만도 10여권. 그것도 순전히 자비로 낸 것들이다. 그의 말처럼 이 책들에는 우리가 주목해야 할 문화콘텐츠들이 숨어 있다.

  • 기획
  • 김은정
  • 2016.08.26 23:02

[참여&소통] 위기의 대학로- (하) 전북대 대학로 조성

학생들과 상인들의 자생적 노력뿐만 아니라 지역 산학연정관에서도 대학로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를 대변하듯 현재 전북대학교 구정문 일대에서는 대학로 조성과 관련된 공사도 한창이다. 이 같은 사업의 배경, 그리고 앞으로의 과제와 전망을 짚어본다.△ 대학로 떠나는 대학생들대학로의 문화공간 부족은 고질적인 문제이지만, 전북대학교 대학로 상황이 본격적으로 쟁점화된 사건은 새날서점의 폐업이었다.지난 2002년에 사라진 새날서점은 당시 도내에 존재했던 유일한 사회과학전문서점이었다. 전북대 구정문 앞에 위치했던 새날서점은 학생운동과 관련된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그러나 변화한 시대와 학생들의 소비문화를 견뎌내지 못한 새날서점은 결국 폐업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비슷한 시기부터 지방에 위치한 대학의 학생들이 문화공간이 전무한 모교 대학로를 뒤로 하고 서울지역 대학로를 찾아다니는 일도 잦아졌다. 이 같은 일들이 겹치자 지역 내 싱크탱크들로부터 대학로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대학로 조성을 위한 과거의 시도, 소득은 전무이 같은 고민 속에 지난 2005년경, 대학로 문화공간 조성사업이 진행된 바 있다. 당시 전북대학교 신정문 앞에 위치한 한 건물에 영화관이 들어선 것을 필두로 해당 건물 곳곳에 각종 공연 및 청소년대회를 유치하겠다는 사업이 민간자본으로부터 이뤄진 것이다.결과적으로 영화관은 약 2년 만에 폐업했고 해당 건물은 현재 상가 건물로 변모했다. 기본적으로 전북대학교 신정문의 경우 차량통행이 많은 4차선 사거리, 즉 흘러가는 공간이라 할 수 있고 주된 대학로인 구정문 일대와도 동선상의 연결성이 없어 이곳을 필두로 한 대학로 조성은 환경적으로 한계가 컸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4개동으로 쪼개진 건물은 동선을 극도로 불편하게 만들어 학생들로부터 외면받고 말았다.△제도권에서의 시도, 전북대 놀이터지지부진하던 전북대 대학로 조성사업은 지난 2012년에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당시 덕진 지역구 국회의원이 덕진희망만들기 8+5사업을 공약으로 내걸며 그 일환으로 제시한 전북대 놀이터사업이 실현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전북대 대학로 문제는 제도권에서도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사업팀은 무엇보다 보행환경에 집중했다. 과거 신정문 일대에서의 실패 사례에서도 그렇듯이, 빠르게 흘러가는 공간이 아닌 천천히 머무르는 공간에서 문화가 조성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따라서 보행환경을 먼저 개선한 뒤에 구정문 일대에 비어있는 공간을 확보해 이를 문화공간으로 조성하고, 최종적으로는 해당 공간에서 진행될 문화 소프트웨어까지 창출할 것을 계획했다.이들이 초기 구상했던 보행환경 개선 사업안은 팔달로에서부터 전북대학교 구정문에 이르는 260m 가량의 공간상에 있는 도로를 전면 철거한 뒤 해당 공간 전체를 넓게 트인 인도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민들의 차량 출입이 불가해지고 상인들의 상품 입고에 어려움을 줄 수 있다는 현실적인 제한이 따르는 이유에서 일방통행의 좁은 도로를 트고 곳곳에 정차 가능한 블록을 설치한다는 조건으로 주민들 및 상인들과 협의하게 되었다.사업은 주민상인학생지역구의원전주시 등 당사자들이 협력체계를 구축한 형태로 약 2년간 합의점을 도출한 뒤 지난 2014년부터 본격적으로 실행됐다.전주시는 사업에 필요한 시비 5억에 교부세 5억을 추가로 확보해 (재)희망제작소에 용역을 맡겼다. 이후 기본계획 수립 등의 과정을 거쳐 올해 초 시공에 들어갔으며 오는 10월까지는 공사가 완료될 것으로 보인다.△ 하드웨어만 있고 소프트웨어는 없다반쪽사업 우려政官에 의해 대학로 조성 공사가 시행되었다는 자체만으로 그 의의를 둘 수 있겠지만, 공사 완료 이후의 사업은 불투명하다.해당 사업을 공약으로 진행하던 지역구 의원이 연임에 실패함에 따라, 애초 계획했던 보행환경개선사업 이후의 단계들을 추진할 공식적인 싱크탱크가 해산되었기 때문이다. 전주시 차원에서 계획한 사업과 이를 위해 확보한 예산 역시 현재 진행되고 있는 공사까지로, 이후의 어떠한 사업도 단언하기 어렵다.해산된 사업팀은 개별적인 싱크탱크를 구성해 지속적으로 의견을 제시해 나갈 계획이지만 이해 당사자들이 아닌 이상 큰 목소리를 내기에 제한이 따른다. 따라서 이들은 보행환경조성공사 과정에서 협력했던 당사자들이 앞으로도 해당 사업에 관심을 두고 지속적으로 이후 단계를 요구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고무적인 것은 지난해 출범한 전북대 대학로 상인연합회가 해당 사업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구정문 일대에서 진행되는 대학로 조성사업이 한풀 꺾인 대학로 상권에 활력을 불어넣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문제는 학생들의 관심부족이다. 정작 대학로를 활용할 가장 큰 주체인 학생들의 관심이 미온하고 해당 사업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항시적인 조직도 없어 아젠다를 형성하기에 쉽지 않아 보인다. 이 같은 조건 속에서 사업을 진행한 전주시가 다음 사업에 어느 정도의 적극성과 관심을 보일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할 듯하다.● '보행자 중심 대학로' 과제는 "교통 혼잡주차 문제 해결"전북대 구정문 앞에서 진행되고 있는 보행환경 개선공사 완공 이후 해당 지역에 주차가 통제될 것으로 계획돼 있어 인근 도로의 교통 혼잡이 우려된다.팔달로에서 전북대 구정문에 이르는 길인 명륜길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공사의 주요 목적은 보행환경 개선이다. 이에 따라 공사가 완료되면 명륜길 일대의 도로가 일방통행으로 변해 주차가 불가해질 것으로 보인다. 그간에도 명륜길은 1차선의 좁은 골목길로 주차가 금지된 지역이었으나 곳곳에 성행한 불법주차로 몸살을 앓았다.명륜길 바로 위에 맞닿은 권삼득로의 경우 2차선의 비교적 넓은 길이나 상황은 다르지 않다. 좌우로 난 차선은 주차된 차들로 인해 통행이 여의치 않아 차들은 중앙안전지대를 아슬아슬 넘어 지나다니기 일쑤다.이 같은 상황에서 명륜길에 주차가 불가해지면 그간 명륜길에 불법주차를 해 오던 주민들이 권삼득로 및 인근 골목길에 주차를 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 차량난이 가중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이번 사업에 참여했던 김인순 공간전문가는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은 상권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전주 종합경기장에 주차를 하는 것이며, 상권에서 주차권을 제공할 수 있도록 하는 식의 협의가 필요할 것이라면서도 다만, 종합경기장이 대학로와 큰 길을 끼고 건너야 하는 곳에 위치해 있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곳에 주차하고 대학로까지 넘어오는 수고를 할 것인지는 알 수 없다고 우려했다.그는 또 인근에 주차타워를 건설해 해당 지역의 고질적인 주차난을 해소하는 방안도 고민해봤지만 예산문제, 그리고 전북대학교 측과 전주시 측의 책임소재 문제로 기약은 없다고 전했다.한편 일부 차량들은 새로 만들어진 인도지역 위로 턱을 넘고 올라와 주차를 하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추후 공사가 완료되더라도 조성된 인도지역이 주차장처럼 활용될 가능성도 적지 않아 보인다.어렵사리 만들어 놓은 길이 제 역할을 할 수 있게끔 직면한 주차문제 해결이 시급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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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8.25 23:02

[전북일보 만화뉴스] 대학매일 2 : 그건 아마 전쟁 같은 개강

대학매일 2: 그건 아마 전쟁 같은 개강 #표지.대학매일 2: 그건 아마 전쟁 같은 개강#1.오전 7시 57분, 어두컴컴한 피시방. 이른 시각이지만 자리 곳곳이 차 있다. 밤을 새웠는지 이곳저곳에서 게임 소리가 들리는 이곳에서, 한 대학생이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2.수강신청도 이제 두 번짼데 적응이 안 되네. 앞으로도 계속할 텐데.성은 씨는 자리에 앉아 초조한 얼굴로 화면에 띄워놓은 수강신청 장바구니 창과 표준 시계 창을 바라본다. 마우스를 쥔 손에 자기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다. 냉방은 빵빵하지만 왠지 땀이 난다.#3.08시!#4.올림픽 육상 단거리 종목 선수처럼 빛의 속도로 반응하는 성은 씨.#5.전공과목, 성공!전공 또 하나, 성공!전공 어 실패다!다음 거!#6.최종 결과는 4성공, 3실패.아, 또 정정 기간을 노려야겠네.#7.한숨 쉬며 피시방을 나오는 성은 씨. 아무리 생각해도 분하다.이번에도 학자금 대출까지 받아서 등록한 건데 한 학기가 이런 식으로 결정되는 건 너무해. 이런 걸 4년을 해야 해?#8.길을 걷는 성은 씨. 그냥 걷고만 있는데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눈에는 눈그늘이 드리워 있다.이제 개강하면 알바 시간도 옮겨야겠지? 아예 야간으로 할까? 음 그건 좀 무섭긴 한데. 공부는 언제 하지?#9.고양이가 한 마리 지나간다.#10.앉아서 지그시 바라보니까 이쪽으로 온다. 먹을 것을 주는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다.#11.고양이를 쓰다듬는 성은 씨.근데 지금은 너무 졸려 이래가지고 아침 수업은 어떻게 듣지? 오후 강의가 밀리는 이유가 있다니까. 방학 중 평균 기상시각 12시#12.먹을 것을 주지 않으니 고양이는 가버린다.성은 씨 손에는 털만 남아 있다.#13.방학, 안녕.기획 신재용, 구성 권혁일, 만화 이권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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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8.24 23:02

[문화&공감] 익산 낭산 '간판 없는 자장면집'

소박하다. 꾸미거나 더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를 내는 가게. 그래서 더욱 정이 간다. 다른 자장면집처럼 메뉴가 다양하고 인테리어가 화려하진 않지만,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정겨움이 있다. 추억이 있다. 역사가 있다. 함열과 낭산, 용동을 잇는 고창삼거리 한편에 자리한 그곳 익산 낭산면. 자장면을 먹으러 왔다가 추억을 먹고 간다는 어느 손님의 말처럼 오늘도 주인장 김세경 씨는 한결같은 맛과 함께 추억을 판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비벼주신 자장면의 맛이 바로 여기 있다.△시끌벅적 사람이 끊이지 않아 시거리익산에는 간판도 메뉴판도 없이 배짱 장사를 하는 김세경(47, 경력 22년) 달인의 자장면집이 있다. 메뉴는 오로지 자장면과 우동뿐!어머니에게서 아들로, 35년간 굳건히 한 자리를 지켜온 간판 없는 자장면집. 지금이야 간판이 없는 자장면집으로 더욱 유명해졌지만, 처음부터 이 간판 없는 자장면집에 이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원 가게 이름은 시거리 식당이었어요. 가게 앞에 함열로 이어지는 삼거리가 있잖아요? 그래서 옛날엔 어르신들이 여기서 막걸리도 드시고 그랬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모이면 시끄럽잖아요. 그래서 붙은 이름이 시거리. 그 지명에서 가게 이름을 따온 거죠.시거리라는 지명의 유래가 제법 재미있다. 그 옛날 함열을 오가던 어르신들에게 이곳은 지친 몸을 풀어주는 쉼터였을 터. 오래 걸어 아픈 다리를 쭉 펴고 앉아 어이구, 여서(여기서) 또 보네하며 능청스레 농을 던지는 어르신들의 모습이 어렵지 않게 그려진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차를 타고 손쉽게 이곳저곳을 오갈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그래도 잊지 않고 이곳을 찾아주는 손님들이 있어 시거리 식당은 여전히 시끌벅적하다. 10년 전 큰 태풍이 불 때 간판을 내리고 그 이후 미처 다시 간판을 달지 못했고 그런 우연한 사연으로 현재까지 간판 없는 자장면집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그러나 수 십년 단골들에게는 이곳은 여전히 사람들로 복작거리는 시거리 식당으로 불리기도 한다.△35년을 한결같이 짜장 외길이 집의 맛의 비법은 다른 자장면집과 달리 자장면에 고기를 넣지 않는다는 것이다. 양파와 감자, 춘장만으로 맛을 내고, 대신 자장면 위에 송송 채 썬 파와 빨간 고춧가루를 듬뿍 뿌려 약간 매콤하면서도 담백한 맛을 낸다. 이것은 다른 메뉴인 우동도 마찬가지. 덕분에 이곳 자장면과 우동은 아무리 먹어도 느끼하거나 질리지 않는다.푸짐한 양에도 젓가락질 포기할 수 없는 손님들이 직접 곱빼기를 써서 붙일 정도로 그 인기가 대단하다고. 볶지 않고 끓여 내는 이곳만의 특별한 비법.우리 집 자장면은 35년 전 맛 그대로예요. 35년 전이면 정말 못 먹고 못 살 때인데, 그때 우리 집 자장면을 맛보신 분들은 지금도 그때 맛을 못 잊고 찾아오세요. 그 힘든 시절 먹은 자장면 맛이 평생 잊히지 않는 거예요.김세경 씨의 말처럼 어린 시절 먹었던 자장면의 맛은 평생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법이다. 누군가에겐 그것이 졸업식 날 먹은 자장면이고, 다른 누군가에겐 장을 보러나갔다가 시장에서 먹었던 자장면일 수 있다. 주변 어르신들에겐 시거리의 자장면이 그랬다.김세경 씨가 35년 전의 맛을 한결같이 고집하는 것도 그 추억의 맛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런 뚝심을 인정받아 유명 방송에서 달인으로 소개된 적이 있는 분이다. 자장면을 향한 그의 고집과 정성은 이미 장인이라 칭해도 부족하지 않다. 비록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진 젊은이 입맛엔 김세경 씨의 담백한 자장면이 입에 안 맞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는 괜찮단다. 힘들었던 그 시절을 추억하며 자신의 자장면을 계속 먹으러 와주시는 손님들이 있는 이상 가게를 그만둘 생각은 없다고.예전에 우리 가게에 무척 자주 와주시던 단골손님이 계셨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안 오시더라고요. 그래서 왜 그러실까, 하고 며칠 동안 궁금해 했는데, 갑자기 아들 내외를 데리고 가게를 찾아오시더라고요. 알고 보니 그분이 시한부인생을 선고받으셨대요. 죽기 전에 우리 집 자장면이 드시고 싶으셔서 찾아왔다는데, 그때 기분이 참.가게를 운영해온 35년간 숱한 손님들이 이 간판 없는 자장면집을 거쳐 갔다. 무수한 사연을 품고 가게를 찾아주는 손님들이 있기에 그는 오늘도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자장면에 추억을 담아 판다.간판 없는 자장면집. 그 곳에서 파는 맛과 추억이 오래도록 우리 곁을 지켜주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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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8.23 23:02

퇴임 앞둔 신효근 전북대 교수 "봉사에 정년이 있나요…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대학은 떠나지만, 봉사활동은 아직 정년이 아닙니다.”전북대 치의학전문대학원 신효근 교수(전 부총장)는 정년 퇴임을 앞두고 지난 16일 총장실을 찾아 대학발전기금을 전달했다. 대학과 후학들의 발전을 바라는 진솔한 마음이다. 신 교수는 베트남에서 ‘살아있는 슈바이처’로 불린다. 무려 22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베트남을 찾아 구순구개열(일명 언청이) 환자를 무료로 치료해 준 데 대한 현지인들의 칭송이다. 오는 30일 정년 퇴임식을 앞두고 있는 신 교수를 치의학전문대학원 연구실에서 만났다.- 36년 정든 강단을 떠나야 하는데, 소회가 많을 것 같습니다. “퇴임하면 시원섭섭하다고 하는데 솔직히 섭섭한 생각이 더 많습니다. 그래도 건강하게 연구와 봉사활동을 하면서 교수생활을 마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평생 열정을 쏟은 우리 대학이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후학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다면 그만한 기쁨도 없겠죠.”- 20년 넘게 지속해 온 베트남 의료 봉사활동으로 관심을 받으셨는데, 앞으로의 계획은.“우선 개인적으로는 9월부터 인근 병원(전주 대자인병원)에서 근무하기로 했습니다. 대학에 있을 때보다는 여건이 좀 어렵겠지만, 베트남 봉사활동은 계속할 생각입니다. 여름방학 때에는 전북대 학생들과 함께 베트남 중부에 있는 후에대학에서, 그리고 가을에는 대한악안면성형재건외과학회가 하노이에서 실시하는 의료봉사활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할 계획입니다. 또 현재 참여하고 있는 봉사단체 ‘러브인월드’와 함께 아동·청소년 장학사업과 노인 무료진료 등 지역사회 봉사활동에도 힘을 보탤 생각입니다.” - 처음 베트남 의료 봉사활동에 나서게 된 계기는. “베트남 전쟁 당시 파월 부대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했던 은사(민병일 서울대 명예교수)를 따라 지난 1995년 베트남 봉사활동에 참여한 게 인연이 됐습니다. 베트남은 전쟁 당시 고엽제의 영향으로 구순구개열 환자가 유달리 많습니다. 이제는 병환으로 나서지 못하시지만, 은사님이 77세 되던 해까지 함께 베트남 봉사활동에 다녀왔습니다. 올해까지 22년 동안 의료봉사활동을 위해 베트남에 머물렀던 날을 다 합치면 1년 3∼4개월은 되는 것 같습니다. 베트남 봉사활동은 은사님처럼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계속할 생각입니다.” - 해외 봉사활동에 어려움도 많았을 텐데, 한 해도 거르지 않게 한 동력이 있다면. “베트남 의료봉사에 나서면 보통 열흘 정도 머물면서 구순구개열 환자 35명 가량을 수술합니다. 그리고 지속적인 치료가 필요한 환자에 대해서는 다음 해에 다시 2차 수술을 하기도 합니다. 초창기에는 수술을 받지 못한 성인 환자들도 적지 않았는데 이제는 한국처럼 아동 환자가 대부분입니다. 수술을 마치고 회진을 할 때 말은 서로 통하지 않지만, 환자 가족들의 눈빛에서 감사의 마음을 그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하트 모양으로 돈을 접어서 건네주는 가족도 있었고, 정성스럽게 쓴 편지도 받았죠. 특히 마지막 날 고마워하는 환자와 가족들을 보면 보람과 함께 다시 와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이 생깁니다.”- 베트남 봉사활동을 통해 현지 대학과의 교류에도 성과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명문으로 꼽히는 베트남 중부 후에대학과 대학 차원의 교류협정을 맺고 해마다 여름방학 때 학생들과 함께 이 대학에서 의료 봉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또 지난해부터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 지원으로 후에대학에 언어청각치료사 양성과정을 개설·운영하고 있습니다. 전북대에서 의료 기자재를 지원해 주고, 현지 학생들을 대학에 초청해 실습도 진행합니다. 그리고 전북대로 유학을 오는 후에대학 학생들도 많아졌습니다.”- 베트남에서는 한국 의료봉사단을 위해 어떤 도움을 주는지. “우선 봉사단이 출발하기 두 달 전부터 현지 TV 광고를 통해 수술이 필요한 구순구개열 환자를 모집해 줍니다. 또 전북대와 교류대학인 후에대학에서는 봉사단에게 치료 장비와 시설 등을 제공하면서 적극 협조해주고 있습니다. 사실 봉사활동 초창기에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아픈 기억으로 현지인들의 반응이 좋지 않았습니다. 특히 봉사활동 지역이 베트남 전쟁 때 한국군이 격전을 치르던 곳이어서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식당에서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인식이 많이 좋아져서 한국에 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 보람을 느낍니다.”- 요즘 사회적으로 봉사활동을 적극 장려하고 있습니다. 대학에서 학점을 주기도 하는데, 봉사활동의 참 의미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봉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 나눠준다는 의미도 있지만, 활동을 통해 스스로 얻는 것도 참 많습니다. 자신이 세상의 누군가를 웃게 하고 행복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스스로도 만족스럽고 행복한 일입니다. 또 젊은 학생들은 현장에서 새로운 경험을 통해 인생의 소중한 자산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대학을 떠나면서 후학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전북대 치의학전문대학원 진료팀이 올해로 11년째 베트남 의료봉사활동을 다녀왔고, 여기에는 모두 110명의 학생이 참여했습니다. 이 중 한 명이라도 진정한 사명감을 갖고 지속해서 봉사활동을 이끌 수 있는 학생이 나왔으면 합니다. 또 경제적인 것만 추구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와 존중, 그리고 진정한 봉사 정신으로 사랑의 인술을 베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신효근 교수는] 베푸는 삶 실천…'살아있는 슈바이처' 칭송오는 30일 정년 퇴임하는 전북대 신효근 교수(65·치의학전문대학원)의 좌우명은 ‘시혜무념(施惠無念), 수은불망(受恩不望)’이다. ‘남에게 베푼 은혜는 생각하지 말고, 받은 은혜는 잊지 말자’는 뜻이다. 항상 ‘베푸는 삶’을 강조하고, 실천해 온 신 교수의 36년 강단 생활은 전북대 치과대학(치의학전문대학원)의 역사와 맞물려있다. 전주고와 서울대 치과대학을 나온 신 교수는 고교·대학 선배인 김오환 전 전북대 교수 등과 함께 지난 1981년 전북대 치과대학 창립 멤버로 참여했다. 대학 발전의 산증인인 셈이다. 그는 구순구개열을 비롯, 턱 교정 등 얼굴기형 수술의 국내 최고 권위자로 꼽힌다. 지난 1991년에는 국내 최초로 구순구개열 환자를 위한 언어치료실을 개설해 체계적인 진료체계를 갖추기도 했다.특히 신 교수는 지난 1995년부터 해마다 2∼3차례씩 베트남을 찾아 구순구개열 환자에게 무료 수술을 통해 새 삶을 선물하면서 현지인들에게 ‘살아있는 슈바이처’라는 칭송을 받고 있다. 올해까지 22년 동안 약 40회에 이르는 의료봉사를 통해 신 교수가 치료해 준 베트남 구순구개열 환자는 600여 명에 이른다. 여기에 학회를 포함해 신 교수가 참여한 의료봉사팀 전체로 따지면 수혜자는 약 1700명에 달한다.쉼 없는 연구와 봉사활동의 공로로 수상 경력도 남다르다. 그는 베트남 정부로부터 지난 2007년과 2013년, 2015년 세 차례에 걸쳐 ‘국민건강훈장’을 받았다. 외국인에게 세 차례씩이나 훈장을 수여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베트남 후에대학에서는 그를 명예교수로 임명했다. 또 2014년에는 국민추천 포상을 통해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2013년에는 전북일보가 전북발전에 공헌했거나 지역의 이미지를 높이는데 기여한 인물을 선정하는 ‘올해의 전북인’, 그리고 2015년에는 대한치과의사협회가 선정하는 ‘올해의 치과인 상’의 영예를 안았다. 대학에서는 치의학연구소장과 치과대학장에 이어 부총장을 지냈다. 또 활발한 연구활동으로 한국음성과학회와 대한구강악안면외과학회, 대한악안면성형재건외과학회, 대한구순구개열학회 등에서 회장을 역임했다.

  • 기획
  • 김종표
  • 2016.08.22 23:02

도심에서 건지는 피서지 건지산 : 편백 숲과 둘레길

바쁜 현대인을 위한 3줄 요약-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바로 뒤, 들어서면 서늘. 이거 리얼.- 덕진연못, 오송제 등 잇는 전북대 캠퍼스 둘레길 산책도 괜찮음.- 휴가 종료, 방학 종료힘내서 일상 복귀 준비합시다.휴가 일정 중에서 가장 행복한 날은 휴가가 시작되기 전날일 것이고, 방학 기간에서 가장 행복한 날은 방학하는 날일 것이다.휴식은 영원하지 않고, 언제나 여름은 그 휴식보다 길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우리의 행동반경은 이제 크게 좁아질 것이다.그렇다면 가까운 곳에 시나브로 찾아갈 수 있는 피서지가 있다면 좋지 않을까?다행히 전주에는 도심에서 건지는 피서지, 건지산 편백 숲이 있다.도심 속 선풍기 편백 숲편백 숲으로 들어서자마자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숲 속이 도심보다야 당연히 시원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차이가 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물론 기분 탓은 아니다.최근 전북녹색연합이 발표한 2016년 전주 열섬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 7월 30일 오후 2~3시에 전주 경기전은 섭씨 37.4도, 전북대가 37.2도 등 도심지 26곳이 평균 35.6도로 기록됐는데 건지산 편백 숲은 32.7도였다. 이것도 물론 더운 기온이긴 하나, 도심 평균 기온보다 섭씨 3도가 낮다면 이것은 분명 체감할 수 있는 차이다.또 앞서 발표된 형질별 지면 온도 변화 추이 조사 결과에 따르면, 도심의 아스팔트 지면은 한낮에 섭씨 50도 이상으로 치솟은 반면, 건지산 도시숲의 지면은 섭씨 27.6도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았다.온도 차이를 직접 확인해보기 위해 취재팀이 온도계를 들고 찾아간 19일 오후 2시 40분,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앞 삼거리에서 잰 기온은 섭씨 무려 40~41도. 숲으로 들어가기 직전 주차장 앞 온도도 섭씨 37도였다. 반면 편백 숲에서 잰 기온은 섭씨 32도로 큰 차이를 보였다.물론 백엽상 등 잘 통제된 조건에서 잰 것은 아니었지만, 실생활에서 체감하는 온도는 오히려 이쪽에 가깝다는 점을 고려하면 분명 의미 있는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건지산 편백 숲은 전북대가 조성운영하고 있는 학술림의 일부다.전북대 학술림은 지난 1964년 지정됐는데, 전체 면적은 133.6㏊다. 편백 숲은 이 중에서 5㏊ 정도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사실 전북대 캠퍼스 둘레길 상에 등장하는 건지산 편백 숲은 한 곳이 아니라 오송제한국소리문화의전당 쪽에 하나, 조경단 쪽에 하나, 이렇게 두 군데가 있다. 취재팀은 8월 17일과 19일 두 차례에 걸쳐 오송제 쪽 숲을 찾았다.전주시민, 특히 송천동이나 덕진동, 호성동 등 인근 지역 주민들에게는 친숙한 공간인데, 17일에도 평상에 앉아 부채질하며 쉬고 있는 주민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어머니 소모 씨와 함께 나와 있던 호성동 주민 정모 씨도 그 가운데 있었다.숲이 좋으니까 자주 오죠. 공기도 좋고. 집에 있는 것보다 훨씬 낫죠, 새 소리도 들리고.이 주민은 질문하는 기자의 온몸에 흐르던 땀을 보고는 세상에, 땀 좀 봐 하며 부채를 부쳐 주었다.아침부터 이 시각(오후 3시께)까지 와 있는 거예요. 너무 좋죠. 점수를 준다면 100점 만점에 95점? 좀 더 울창했으면 좋겠지만요.사실 건지산 편백 숲은 잘 알려진 다른 편백 숲과 비교하면 규모가 작은 편이다.도내 편백 숲의 대표주자로 널리 알려진 완주 상관면 공기마을 편백 숲은 무려 86㏊ 규모에 편백이 10만여 그루에 달하는데, 건지산 편백 숲은 이에 비하면 한참 작은 셈.서울에서 찾아온 손님과 함께 탁자에 앉아 있던 이모 씨는 이 점을 아쉬운 점으로 지적했다.좋다고 해서 와봤는데, 완주 상관보다는 좀 답답하네요. 규모도 작고. 거기가 에어컨이라면 여기는 선풍기 정도?그렇지만 건지산 편백 숲이 갖진 엄청난 강점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압도적인 접근성이다.시간이 넉넉하다면 전북대나 덕진공원에서 캠퍼스 둘레길을 따라 시나브로 걸어갈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면(특히 산길에서 마주칠 수 있는 날벌레가 싫다면) 165번 시내버스가 지나가는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뒷길로 곧장 들어갈 수도 있다.이 씨도 이 점은 인정했다.도심에 있다는 점에서는 좋죠. 거기(완주 상관 공기마을 숲)는 한참 들어가야 되는데 여긴 도심에 바로 있으니까 접근성이 아주.편백은 측백나뭇과에 속하는 침엽수로, 높이 40~50m까지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흔히 편백나무라고 하지만, 표준국어대사전에는 편백으로만 올라 있다. 그런데 편백과 친척뻘 되는 측백은 측백과 측백나무 모두 표준국어대사전에 올라 있다. 뭘까, 이것은.노송나무라고도 불리며, 원산지는 일본이다. 일본어 이름은 히노키로, 일본식 고급 욕탕인 히노끼 욕탕을 만드는 데 쓰이는 나무가 바로 이 나무다. 그 은은하게 퍼지는 나무 향이 편백의 향이었던 것이다.피톤치드라는 성분을 많이 방출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피톤치드는 나무가 해충이나 곰팡이 등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방출하는 천연 항균물질인데, 이것이 벌레에게는 독소지만 인간에게는 이로운 작용을 한다. 그래서 삼림욕이나 아토피 질환 치료에 이 편백이 널리 활용되고 있다.아마도 그래서 더 시원하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시나브로 걸어보는 전북대 캠퍼스 둘레길건지산은 전주시 덕진구에 솟아 있는, 해발고도 약 100m의 야트막한 산이다. 높이로 따지면 전북지역의 이름난 명산과는 비교할 수 없고, 완산칠봉(해발 163m)에 비해서도 한참 낮다.그래서 오히려 더 전주시민의 사랑을 받는, 친근한 산이 된 것일 터다.전북대의 북서쪽을 차지하고 있는 뒷산이 바로 이 산인데, 전북대가 자랑하는 캠퍼스 둘레길에 이 산을 관통하는 산책 코스가 포함돼 있다.캠퍼스 둘레길의 총 연장은 11.4㎞인데, 전북대는 이 가운데 탐방 구간으로 9.1㎞(소요시간 4시간)의 풀 코스와 6.2㎞(소요시간 2시간)의 하프 코스를 제시하고 있다.전북대 측이 제시하고 있는 풀 코스의 공식 시작점은 신정문에 조성된 전대 힐링 숲이지만, 굳이 거기서 출발할 필요는 없다.추천할 만한 시작점은 덕진공원인데, 호수를 한 바퀴 돌고 전북대 예술대학 방향으로 시나브로 걸으면 플라타너스 길이 꽤 걷기 괜찮다.물론 정석대로 신정문(하프 코스는 전북대 박물관)에서 출발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둘레길 코스가 아니라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길로 곧장 북문으로 나가는 것도 좋다. 캠퍼스 중앙 분수대를 지나 만나는 가로수 길도 그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단 방문객이 많이 머무는 일부 지점을 제외하면, 건지산 산길 곳곳에 위치한 벤치는 관리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어서 무용지물에 가까우니 참고. 일부 갈림길의 이정표 부재도 아쉽다.또 코스 전체를 통틀어 휴지통이 매우 귀하기 때문에 혹 쓰레기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면 이를 처리할 수 있는 가방이나 봉투를 미리 준비해야 하겠다.(당연한 이야기지만)음료 자동판매기 같은 것도 산길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므로, 코스 중간에 있는 전북대 생활관 카페나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시설을 이용하면 도움이 되겠다.

  • 기획
  • 권혁일
  • 2016.08.19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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