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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소통] 대학생=취준생? 천만에!

지난달 청년 실업률이 10.9%를 기록했다. 고용시즌 역대 최대치이다. 청년실업자 수만 해도 48만 명에 육박한다. 수십만 명에 달하는 대학생들이, 취업을 위해 도서관과 고시원으로 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청년들이 취업만을 준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의 손에는 펜 대신 기타가 쥐어져 있고, 누군가는 취업 자기소개서 대신 자신이 만든 조직체를 홍보하기 위한 글에 매진한다. 아직은 청년이기에 이상에 대한 도전을 멈추지 않는, 멈추지 못하는 그들을 만나봤다.△이젠 어엿한 가수, 2인조 어쿠스틱밴드 이상한 계절 김은총 씨= 5년 전 전북대학교 캠퍼스 부근에서 쑥스럽게 거리공연을 시작했던 한 밴드는, 어느덧 세 개의 싱글앨범과 하나의 EP앨범을 낸 어엿한 가수가 되었다. 음악을 전공한 적이라고는 없는 한 사학생도 김은총 씨(29)와 그가 만든 2인조 어쿠스틱밴드 이상한 계절의 이야기다. 이상한 계절은 지난 2011년, 당시 전북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은총씨와 뜻이 맞는 학우들이 만나 결성된 밴드이다. 몇 차례의 멤버교체를 거쳐 현재는 박경재 씨와 함께 2인조 듀오를 구성해 호흡을 맞추고 있다.그룹명이 이상을 향한 계절의 줄임말이라고 말하는 은총씨는 그 말과 같이 이상을 좇아 음악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사학이 전공이었던 그에게 음악은 항상 도전, 그 자체였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전북대학교에서 활동하는 동아리 정도로 여겨졌지만, 이제 그들은 공연 횟수만 300회 이상을 넘긴 전주에서 제법 알아주는 밴드가 되었다. 그리고 그 실력을 인정받아 현재는 전주MBC 정오의 희망곡에서 이상한 라이브도 진행하고 있다.△취준생 아닌 대학언론협동조합이사장 정상석 씨=약 50여 페이지에 달하는 조그마한 잡지가 있다. 정상석 씨(26)는 이 조그마한 잡지에 자신의 꿈을 실었다. 그리고 그 꿈은 조금씩 실현돼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최초의 프랜차이즈 대학신문이 만들어졌다. 상석씨는 지난 2010년부터 2012년까지 3년간 전북대학교에서 학보사 기자 활동을 했다. 편집장까지 지냈다. 그러나 그가 대학신문에 느낀 것은 애착 보다는 한계였다.그는 대학신문의 재정권이 대학에 귀속되어 있어 자유로운 언론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데 무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대학신문도 광고와 구독료 등을 통해 수익을 창출해 독립된 재정권을 확보한 신문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의 생각은, 그를 취준생이 아닌 대학언론협동조합 이사장으로 만들었다. 3학년을 마친 이후 그는 다짜고짜 서울로 올라갔다. 자신과 뜻이 맞는 사람들을 찾아 헤맸고, 실질적인 계획도 세워나갔다. 그 결과 2013년 11월, 비로소 그가 구상했던 첫 독립언론 외대알리가 발간됐다. 무일푼으로 무작정 시작한 그의 도전은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명색이 이사장이었지만, 분식집에서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어가며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현재는 4개 대학에서 독립언론 알리를 발행하며 제법 구색을 갖춘 조합을 만들어 냈다.△청년들의 희망, 꿈을 이야기하는 사회운동가 김윤권 씨= 수많은 지식인과 전문가들이 의견을 공유하는 지상파TV의 한 토론방송에서, 아직 30대 초반의 젊은이가 당당히 자신의 생각을 전달한다. 더 좋은 사회를 만들고 싶다는, 그리고 그 속에서 청년들이 큰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는 김윤권 씨(33)는 그렇게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청년을 이야기한다.윤권씨는 사회에 청년들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다양한 단체에서 활동해 오고 있다. 민주평통 전주지역회의에서 2030 대표를 맡는가 하면, 직접 청년단체인 청년발전소와 청년들을 만들어 움직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대표 신분으로 TV 토론회에까지 나왔으니, 이제는 어엿한 사회운동가라 말할 수 있겠다. 대학시절부터 그는 2차례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도 3수 끝에 총학생회장에 당선되는 등 도전의 아이콘이었다. 남들보다 다소 늦은 나이에 대학을 졸업했지만, 그의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늘 주변에 함께 해주는 사람들 덕분에 좋은 활동을 해 나갈 수 있었다고 생각했고, 자신 역시 좋은 세상을 만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도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러한 생각에 최근에는 전주에 출마한 한 국회의원 후보의 선거를 함께하기도 했다.△경제적안정적 영역에서 딜레마 빠지기도= 사실 그들의 도전이 마냥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이상한 계절은 아직까지 음악활동을 통해 창출된 수익을 사적으로 배분하지 않고 음악에 다시 투자한다. 따라서 개인적인 생활을 위한 생활비를 따로 벌어야 하는 실정이다.김은총 씨는 나이가 차 가며 가족들에게도 눈치가 보인다며 남들처럼 안정적인 직장을 구직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한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털어놓았다. 사실, 그는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대학원 공부를 병행하는 등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의 딜레마를 겪고 있다.김윤권 씨 역시 각종 사회활동만으로 경제적인 영역을 챙길 수 없어 짬뽕집, 가맥집, 커피숍 등 다양한 자영업을 병행해 보기도 했다. 그 역시 자리를 잡길 바라는 가족들의 기대가 부담이 되거나 어려울 때가 많았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힘들 때도 있지만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일, 내가 더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해보면 힘들더라도 지금 가는 길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며 어려움을 극복한 마음가짐을 이야기했다.한편 정상석 씨의 경우 타인과 비교하는 것 자체를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대학졸업과 군 입대까지 모두 미룬 채 현재의 활동에 몰두하고 있는 그에게 이미 현실적인 영역은 포기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상석씨는 취업활동을 한 친구들보다 많은 돈을 벌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굶지는 않을 수준의 생활비는 마련할 수 있다며 내가 남들보다 나을 수 없는 부분보다, 지금 하는 일이 즐겁고 행복하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고 딜레마를 극복하는 자기만의 방법을 이야기했다.△청년들이 도전 안한다? 못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하는 도전이 남들과 조금 다를 뿐, 더 대단하지는 않다고 이야기한다.김은총 씨는 음악이 힘들고 가난하다고 하지만, 구직을 위해 고시원에서 배고프게 공부하는 청년들도 결코 우리보다 편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며 이러한 현실 속에 이들에게 도전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전했다. 정상석 씨 역시 구직이야 말로 최고의 도전이라며 청년들이 도전정신이 없다는 통념을 꼬집었다.은총씨는 구조적인 모순도 꼬집었다. 특히 예술분야의 경우 아직까지 그것을 너무 저렴하게 이용하려는 통념이 강해 영세 예술인들이 진입할 수 있는 장벽이 높다는 것이다. 그는 정말 어렵게 음악생활을 이어가는 주변 사람들을 보면 음악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그것을 시도하라고 감히 말할 수가 없다며 기성세대들이 우리가 마음 편히 이상을 좇을만한 환경을 만들어주지 않고서, 우리에게 도전정신이 없다고만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것 이라고 전했다.한편 김윤권 씨는 3포 세대 속에서 결혼과 출산까지 모두 성공한 경험자다. 윤권씨는 출산과 육아를 해 보니 저출산 문제의 이유를 정말 잘 알게 됐다면서도 사회가 출산과 육아에 대해 함께 고민해야 저출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청년들의 입장을 대변했다.△그들의 동력, 그것은 더 나은 사회를 꿈꾸는 가치= 이상한 계절은 활동의 저변을 넓혀 더 많은 사람과 음악적인 소통을 하기 위해 곧 서울로 떠날 예정이다. 김은총 씨는 그 곳에서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며 어느 정도 인정받은 전주에서와는 다를 것이라고 새로운 도전을 예견했다.언뜻 보기에 이들은 각자 활동 영역과 목적 등에 있어 어떠한 공통점도 없어 보이지만, 그렇지는 않다. 대학언론협동조합의 궁극적인 목적을 묻는 질문에 상석씨는 모든 대학생들의 알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라고 호기롭게 답한다.이상한 계절은 각종 추모행사 및 평화집회에 꾸준히 참석해 사람들을 위로하고 또 그들과 공감한다. 윤권씨 역시 더 나은 사회와 청년들의 삶을 위해 오늘도 공부하고, 또 목소리를 내고 있다.이렇듯 천편일률적인 목표 속에서 다른 도전을 선택한 이들은 현실보다 가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의 발전만큼이나, 사회와 공동체의 발전과 행복을 희망한다.그리고 그 점은, 조금 서툴고 미숙해도 우리가 그들을 응원해야 할 이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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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5.26 23:02

[전북일보 카드뉴스]떠나가요, 떠나지 마요 : 청년들의 탈 전북

<떠나가요, 떠나지 마요>#표지.떠나가요, 떠나지 마요#1.문제. 다음 중 해방 직후인 1949년보다 인구가 줄어든 곳은 어디일까요?(2016년 4월 기준)1) 제주도2) 경상남도3) 강원도4) 전라북도#2.두뇌 풀가동!A: 음어렵군요. 그래도 전라북도는 먹을 게 풍족하지 않나요?B: 전 일단 경남은 아니라고 봅니다. 공업지대가 있으니까요.C: 제주도 인구가 몇 명이죠?(웅성웅성)#3.정답은 60초 뒤에 공개됩니다!#4.답은 전라북도입니다.1) 제주도: 25만4589명 63만1061명2) 경상남도: 313만4829명 805만1557명(부산울산 포함)3) 강원도: 113만8785명 154만8170명4) 전라북도: 205만485명 186만6184명(자료=통계청)#5.인구 유출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올해 1/4분기(1월~3월)에 전북을 떠난 사람은 3014명이나 됐습니다. 익산시 용안면 인구가 3070명이니, 면 한 개가 통째로 전북을 떠난 셈입니다.(자료=통계청 1/4분기 지역경제동향)#6.그리고 그 중심에는 청년층의 탈전북이 있습니다. 올 1/4분기 전북을 떠난 3014명 중 2906명이 20대 청년이었습니다.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봐도 710명이나 늘어난 수입니다.(자료=통계청 1/4분기 지역경제동향)#7.전북의 청년(15~29세) 인구는 꾸준히 줄어서, 올 3월에는 34만 명 선까지 내려앉았습니다. 이는 전체 인구 대비 18.3%에 불과한 숫자입니다.(자료=전북도청)#8.이것은 최근의 문제가 아닌데요.1995년에는 전북을 떠난 청년이 13만2832명이었고, 그해의 청년 순 유출은 1만8517명이었습니다. 2002년에는 순 유출이 2만7725명에 달했습니다.(자료=전북도청)#9.일자리 문제에 그 원인이 있다고들 입을 모읍니다. 특히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진출을 시작하는 시점인 연초에 일자리를 찾아 타지로 나가는 청년이 많다는 분석인데요.#10.전북에선 일자리를 구하기도 힘들뿐더러, 그나마 있는 일자리도 노동조건이 열악하다고 청년들은 말합니다. 심지어 자치단체마저도 최저임금 기준을 위반하는 경우도 있다네요.나모 씨(28전주시 거주취업 준비) 혁신도시에 공공기관들이 많이 입주했지만 핵심인력은 서울에서 내려왔고 지방청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채용은 계약직 등이 대부분이다. 전주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친구 대부분 저축은 꿈도 못 꿀 정도로 낮은 임금을 받고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11.전북혁신도시 공공기관의 도내 인재 채용률은 2014년 10.7%, 지난해 14.6%에 불과했습니다.그래서 혁신도시 공공기관이 지역인재를 더 많이 채용해달라는 요구가 나오고 있습니다.김승수 전주시장: 청년 실업 문제 해소와 지역 일자리 창출, 지역균형발전 등을 고려해 혁신도시 이전 공공기관의 지역인재 35% 의무채용이 필요하다.#12.전북을 떠나는 청년을 붙잡을 방법이 없는 걸까요?송영남 전북지역인적자원개발위원회 선임위원: 우리 지역의 성장 동력이 끊어질 수도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다. 일선 공무원들이 직접 현장을 확인하고 청년들과 소통공감을 통해 청년정책을 마련해야 한다.#13.경기도 성남시는 청년배당을 실시하고 있고, 서울특별시도 청년수당 제도를 실시할 예정입니다. 전라북도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나요?기획 신재용, 구성 권혁일, 제작 이권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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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5.25 23:02

[문화&공감] 군산풍류악회

시작은 늦었지만 10년 후면 군산의 명물(문화재)이 되어 있을 겁니다.이곳저곳 여행을 하다 보면 문화라는 단어가 자주 눈에 보인다. 문화를 통한 지역 경쟁력 확보가 화두가 되어 있는 탓이다. 전국의 축제와 문화예술 담당자들의 공통적인 관심사도 문화자원으로 각 지역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이를 관광자원으로 발전시키려는 것이다. 지역뿐 아니라 나라도 전통과 문화를 강조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볼거리와 관심을 가질만한 거리, 먹을거리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누리고 즐기는 것 자체가 풍류우리나라 문화예술과 향유를 총체적으로 일컫는 말 중에 대표적인 것이 풍류다.특정계급과 특정인만이 누리던 특별한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누릴 수 있는 능력만 갖추면 풍류객이요 풍류인이 될 수 있었다. 풍류는 특별한 절차 없이 예술인의 경지로 올라버리는 말이었다. 지금은 한류라는 단어가 해외 수출용으로 쓰이고 있지만, 그 조상은 우리만의 풍류가 아닐까 한다.지금 우리에게 전해지는 풍류는 민간풍류, 향제풍류 등이 있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풍류는 문화를 향유하는 활동 자체였다.풍류는 듣는 이를 위한 음악이 아니라 그 당시, 그 지역의 풍류객이 모여 연주를 즐기며 다시 그 지역과 시대의 음악을 이끌어 간 것이다. 즉, 관객을 위한 예술 활동이 아니라 예술을 즐기는 이들을 위한 활동이었던 것이다.△ 군산풍류 복원 위해 모임 결성문헌상에는 정읍 이리 흥덕 성내 부안 김제 옥구 전주에 지역 풍류가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현재 연주되어지거나 접할 수 있는 향제(지역자체)풍류는 많지 않다.군산도 예외가 아니다. 군산풍류는 전해지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군산지역에 전해지던 군산풍류를 복원하기 위한 모임이 만들어졌다.군산 출신과 군산에서 활동하고 있는 구성원들이 수년전부터 마음을 모아오다가 올해 군산풍류악회를 결성했다.군산풍류악회는 원광대 국악과의 우종양(해금, 전북문화재위원회 위원장)교수와 홍종선(피리, 군산국악관현악단 지휘자)교수가 예술 고문을 맡고, 조보연(가야금, 아리울연주단 음악감독), 장윤미(해금, 전북도립국악원 관현악단 해금수석), 오승용(해금, 전주시립국악단 상임단원), 이정민(해금, 군산아리아해금연주단 단장), 유승열(피리, 군산청소년국악관현악단 지휘자), 정지웅(대금, 전주시립국악단 상임단원), 서정미(대금, 전북도립국악원 관현악단 대금부수석), 송진아(가야금, 군산청소년국악관현악단 지도강사), 장연숙(거문고, 전북도립국악원 관현악단 상임단원), 장은영(거문고, 군산 회현중 거문고 지도강사), 박태영(타악, 풍류지악 대표)씨가 참여하고 있다.회원 대부분 전주와 익산군산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군산청소년국악단과 군산전통예술원에서 오랫동안 활동 해온 인연들이기도 하다.△ 군산만의 음악 만들자 마음 모아군산풍류악회 조보연 회장은 군산만의 색을 보여줄 수 있는 음악을 찾고, 연주자들도 공부하며 즐기기 위해 풍류악회를 결성했다고 말했다.도내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이리향제줄풍류(중요무형문화재 제83-나호)와 전주삼현육각보존회(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46호, 2011년 지정)가 있으며, 정읍에는 풍류방 샘소리터에서 정읍풍류의 맥을 이끌어 가고 있고, 부안향제줄풍류보존회도 2009년도부터 활동하고 있다. 군산은 지역향제풍류가 사라졌다.조 회장은 연주자들이 군산과 인연이 닿아 오랫동안 활동해왔고, 이제는 중견 연주자들이 되었는데, 지역과 연주자 모두를 위한 음악활동을 모색하다가 군산풍류 활동이 해법이 됐다고 덧붙였다.회원들은 군산국악관현악단과 아리울 연주단, 군산전통예술원, 군산청소년국악관현악단, 군산아리아 해금연주단 등 다양한 지역 연주단체에서 활동해왔다.△ 정기 모임 갖고 연주활동군산풍류악회 포부는 크다.연주단체를 결성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전북에 크고 작은 단체들이 워낙 많다보니 새로운 단체를 만드는데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단체가 출범한 만큼 군산 대표 명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풍류악회는 매달 2~3회 모임을 갖고 있다. 군산시 지곡동의 군산전통예술원 공간을 빌려 연습을 하고 있다. 하반기에는 자체 연주회도 구상하고 있다.지금은 전해지지 않지만 군산만의 색을 가진 풍류악회를 통해 옛 군산지역 선비들이 즐기고 사랑했던 풍류의 역사를 다시 쓰고, 국악대중화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사회현상을 반영하듯이 국악계에도 크로스 오버를 통한 퓨전국악, 또 다른 형태의 콜라보레이션등에 국악걸그룹까지 등장하고 있다.대중성을 확보하고, 어렵게만 느껴지는 우리음악을 친숙하게 알리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지만 정체불명의 문화가 생길 것에 대한 우려의 시각도 많다.반면 지난 2010년을 기점으로 국악계는 사라져가는 향제(鄕制) 풍류를 연주하는 단체가 붐을 이루고 있다. 전통음악의 특색을 찾거나 원형을 찾아가는 또 다른 움직임이다.우리의 문화, 그중에서도 지역성을 담고 있는 향제풍류의 맥을 잇기 위해 노력하는 지역 연주자들을 보며 이러한 활동이 보다 활발해지기를 바란다. 10년후 지역을 대표하는 명물이 되겠다는 군산풍류악회의 소망이 이뤄지길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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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5.24 23:02

이승우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신임 이사장 "'사람이 우선' 동학농민혁명정신 선양에 온 힘"

지난달 19일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3대 이사장에 취임한 이승우 신임이사장. 이 이사장은 취임 한달 여 동안 재단 현안을 파악하느라 매우 분주하게 보냈다. 동학농민혁명에 대해서도 새롭게 탐구하고 있다. 그는 동학농민혁명은 우리나라 역사를 바꾼 매우 의미있는 사건이었는데, 역사적으로 왜곡축소된 데다 이제는 많은 이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어 매우 안타깝다고 말했다. 3년의 임기동안 관련단체들의 힘을 모아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선양하는데 온 힘을 쏟겠다고 밝혔다. 이 이사장을 만나 활동계획을 들어봤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은 어떤 인연으로 맡게 되셨는지요.훌륭하신 여러분들이 후보로 거론됐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제가 전북사람이어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더욱 각별했을 것으로 판단한 모양입니다. 대학과 전문대학교육협의회 회장 등 맡은 일이 여럿이어서 시간적으로 여유롭지는 못하지만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더욱 특별한 인연을 찾자면 2000년대 초반 정읍시 덕천면 황토현전적지에 동학농민혁명 교육관과 기념관 건립이 추진됐는데, 그때 전라북도 기획관리실장으로 일하면서 이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은 발원지였던 전라북도의 매우 소중한 역사적 전통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기억하고 되새겨야 할 자랑스러운 정신이자 거대한 변화였습니다. 그러한 일을 기리는 활동에 참여한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바르게 알고 있는 이들이 드뭅니다.동학농민군은 반봉건이라는 기치를 들고 전라도 고부에서 일어나 전라도 수부(首府)였던 전주성을 점령한 후 집강소를 설치하고 근대적인 폐정개혁을 추진했습니다. 그런데 조선을 대륙침략의 교두보로 삼고자 조선에 진출한 일본군은 1894년 6월 21일 경복궁을 무단으로 점령한 후 친일내각을 수립하고 청일전쟁을 도발했지요.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을 내쫓기 위해 반일항쟁의 기치를 들고 삼례에서 제2차 봉기를 단행해 서울을 향해 진군했습니다. 하지만 충남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의 신무기를 당해내지 못하고 쓰러졌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은 이렇게 미완의 혁명으로 막을 내렸고, 이후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 민족간 좌우대립, 분단, 한국전쟁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낡은 중세봉건사회를 극복하고 근대적인 평등을 지향함과 동시에 국권을 유린하던 일제에 맞서 나라와 민족의 안위를 지키고자 했던 동학농민군의 구국애민 정신은 반란사건으로 치부된 채 역사의 뒤안길에 묻혔습니다.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말씀하신대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데요.동학농민혁명은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추구한 혁명입니다. 중세문명과 근대문명, 서양문명과 동양문명이 충돌하던 19세기말 우리 전북에서 시작돼 전국으로 확대전개된 일대 사변이었죠. 동학농민혁명은 중세 신분제사회를 극복하고 근대 평등사회를 지향했다는 점과 일제를 비롯한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국권침탈에 맞서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 나아가 근대문명의 세계사적 확장 과정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한국사는 물론이고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사적 차원에서도 그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활동에 대해 소개해주십시오.기념재단은 지난 2004년 제정된 동학농민혁명참여자등의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에 따라 지난 2010년 문화체육관광부 특수법인으로 설립됐습니다. 특별법에서 규정한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기념시설물 건립과 학술연구 및 교류, 유적지 정비, 참여자 유족을 위한 명예회복 등의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와 정신을 알리는 기념, 홍보사업을 다양하게 벌이고 있습니다. 그동안 전국적으로 동학농민혁명에 관심이 있는 분들을 모아 동학농민혁명 포럼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전국화에 기여하는 기틀로 삼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연례사업으로 전국 동학농민혁명 기념대회를 열고 있고, 학생과 교사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유적지답사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관련 자료와 유물을 활용한 다양한 전시 프로그램도 준비돼 있습니다. 지금은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 조성과 기념일 제정, 기록물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현안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임기동안 해결해야 할 일입니다. -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제정과 관련해서 지역갈등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어떻게 풀어나갈 계획이십니까.국가기념일 제정은 지난 2004년 특별법 시행 이후 다양한 논의를 이어온 사안입니다만 아직까지 마무리짓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 정신의 전국화, 세계화, 미래화를 위해 반드시 매듭지어야 합니다. 지난 2014년에 기념재단 이사장과 전국유족회 회장, 천도교 교령, 역사학계 대표 4인으로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수차례 협의와 공론화 과정을 거쳐 동학농민혁명 전주화약일(6월 11일)을 국가기념일 추천일 단일안으로 확정해 문화체육관광부에 건의하기도 했습니다. 현재는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전국 19개 광역지자체와 역사학회, 기념사업단체 등으로부터 추천받은 전문가들로 국가기념일 학계자문단을 구성해 논의중입니다. 조만간 결론이 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 기념공원 조성과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어떻게 추진하고 계시는지요.기념공원은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일대 9만2000여평 부지에 조성될 예정인데요. 예산 확보에 터덕이고 있습니다. 제가 역량을 쏟아야 할 사안입니다. 동학농민혁명 기록물 세계기록유산 등재도 단계적으로 진행해야 할 현안입니다.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위해 기록물 발굴과 연구, 정리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일부 사료는 지역문화재로 등록했습니다. 앞으로 연차적으로 추진할 계획입니다.● [이승우 이사장은] 도청 이전 등 굵직한 현안 해결공직 퇴직후 교육자 활동이승우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은 공직자 출신의 교육자다.1956년 군산에서 태어나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1979년 제23회 행정고시에 합격하면서 공직에 입문했다. 내무부를 시작으로 두 차례의 대통령비서실 근무와 순창군수, 전북도 기획관리실장, 전북도 정무부지사를 지냈다.순창군수 재직시절에는 고추장마을을 조성했으며, 전북도 기획관리실장으로 일할 때는 도청 이전과 전북테크노파크 건립 등을 담당했다. 지난 2007년에는 중앙공무원교육원 원장으로 부임했다.공직 퇴직 후 지난 2008년부터 군장대학교 총장을 맡아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제30대 전라북도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제16대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 하버드대 케네디행정대학원에서 정책학 석사, 성균관대 대학원에서 행정학 박사학위도 받았다.

  • 기획
  • 은수정
  • 2016.05.23 23:02

[전북일보 카드뉴스]영세자영업과 웃지 않는 사장님 : 생계형 창업

영세자영업과 웃지 않는 사장님#표지.영세자영업과 웃지 않는 사장님#1.사장님이 늘었습니다.전북지역에서 임금노동자가 아닌 사람 중 자영업자는 27만5000명. 지난해 같은 시기에 비해 1만9000명이나 늘었습니다.사장님은 사장님인데, 직원이 없네요.올해 늘어난 자영업자 1만9000명 중 고용 없는 영세자영업자가 1만5000명이나 됩니다.#2.자영업자 27만5000명 중 영세자영업자가 22만 명. 8할입니다.임금을 받지 않고 집안 사업을 거드는 가족, 그러니까 무급가족종사자도 2000명 늘어나, 총 6만8000명이 됐습니다.#3.특이한 현상입니다. 왜냐하면 전국적으로는 자영업자가 지난해에 비해 9만8000명이 줄었고, 무급가족종사자도 5만6000명이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4.왜 이러는 걸까요?#5.전북지역은 최근(올 2월 기준) 생산이 5% 줄었고(전국은 2.4% 증가), 수출은 14.8%나 줄었습니다(전국은 14.6% 감소). 특히 자동차 수출이 53.1%, 정밀화학원료 수출이 89.1%, 건설광산기계 수출이 47.7%나 줄어들었습니다.#6.고용률은 55.7%. 이것도 전국 평균 수준(58.7%)에 못 미칩니다.#7.간신히 취직해도 노동조건이 좋지 않습니다. 지난해 한 해 동안 도내에서 6797명이 총 245억1800만원의 임금을 체불 당했습니다.#8.그렇다보니 도내 청년의 길은 두 가지뿐입니다. 공무원을 노리거나, 창업을 하거나.올해 전북도 지방공무원 89급 임용시험 경쟁률은 평균 19대 1.여기에 50대 지원자도 59명이었습니다.#9.직장에서 내몰린 40~50대나 퇴직한 60대에게는 자영업은 유일한 선택에 가깝습니다.정모 씨(41전주시 평화동)는 회사생활과 자영업 둘 다 경험해봤지만 중소기업에 다시 취직하면 박봉격무에 시달릴 것 같아요. 자영업이 힘들지만 당장 할 수 있는 일도 내 사업을 하는 것밖에 없네요.라고 말합니다.#10.이렇게 내몰려서 하게 된 생계형 창업은 성공과는 거리가 멉니다.지난해 도내 개인사업자 평균 소득은 2140만원. 전국 평균 2940만원에 비해 크게 낮을 뿐 아니라, 전국 17개 시도 중에서 뒤에서 두 번째 수준입니다.#11.지난 2003년~2012년 10년 동안 개인사업자 31만3684명 중 남아 있는 사업자는 4만7298명이었습니다.#12.이렇게 생계형 창업으로 내몰리지 않도록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자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대표적으로 영세자영업자와 비정규직10인 미만 사업장 종사 노동자 등에 대한 고용보험료 감면이 거론됩니다.#13.이와 함께 부동산 월세, 권리금 등에 대해 영세자영업자의 권리를 보호할 법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옵니다.김모 씨(41전주시 효자동 분식집 운영)는 대부분의 영세자영업자는 부동산 임차인인데 이들을 보호할 장치가 전무하다고 말했습니다.#14.불황과 고용절벽이 낳은 영세자영업 전성시대. 절박하지 않은 삶을 살 권리를 바라는 것은 정녕 사치인 걸까요.기획 신재용, 구성 권혁일, 제작 이권중

  • 기획
  • 전북일보
  • 2016.05.19 23:02

[참여&소통] 친정 아빠 병원비 마련 못해 애타는 레티휜씨

빨리 퇴원시켜 주세요. 마스크 많이 쓰고 비행기 타면 괜찮을 거예요.한국에 오자마자 결핵으로 인해 곧바로 병원에 입원할 수밖에 없었던 레반권씨가 눈물을 닦으면서 하는 말이다.레반권 씨(62세)는 결핵으로 인해 병원에 입원한 지 벌써 1개월을 넘겼다. 이제 겨우 1개월을 넘겼을 뿐인데, 레반권 씨의 병원비는 1000만원을 넘겨버렸다. 레반권 씨는 걱정이 태산 같다. 한국으로 시집 온 딸의 가사 일을 돕기 위해 한국에 왔는데, 가사에 도움이 되기는 커녕 오히려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는 딸에게 짐만 되고 있어 하루라도 빨리 베트남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그러나 결핵은 감염성 질병이고 완치될 때까지 외부인과의 접촉을 피해야 하기 때문에 베트남으로 돌아가는 것은 현재로써 많은 어려움이 있다.한국으로 시집온 지 10년이 된 그의 딸 레티휜 씨는 삼중, 사중고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아들(9세)은 청각장애와 언어장애를 갖고 있고 주위 집중력에도 문제가 있어 돌보기가 무척 어렵다. 남편은 정신질환으로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고 있어 혼자서 장애를 가진 자녀를 돌봐야 하고, 결핵에 걸린 친정 아빠도 간호해야 하기 때문에 힘든 날을 보내고 있다.레티휜 씨는 얼마 전 시아버지가 질병으로 병원에 입원해 오랫동안 치료를 받다가 돌아가셔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제는 친정 아빠의 질병과 병원비 문제로 하루 하루를 힘겹게 지내고 있다. 레티권 씨가 입원해 있는 전주 예수병원은 1000만원이 넘는 의료비용을 500만원 수준으로 감경하고 병원 내부의 사회사업실과 원목실을 통해 추가 지원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예수병원은 지금까지 병원 내부에 외국인 노동자 진료센터를 통해 외국인 노동자, 유학생, 결혼 이민자 등에 대한 진료비 감경 등 다양한 지원을 해왔다.예수병원 직원들은 의료적 사각지대에 있는 외국인을 지원하기 위해 급여의 일정 부분을 기부하는 등의 인도적 후원에 나서고 있다.그러나 외국인 환자가 많이 발생함에 따라 지원에도 한계를 맞고 있다. 결핵으로 입원해 있는 레티권 씨의 치료비로 그동안 모은 기금을 모두 지출할 경우 다른 외국인 환자를 지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수병원 이외에 사랑의 열매 등에서도 지원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는데, 진퇴양난에 놓여 있는 이들에게 지원이 잘 될 수 있도록 사회적 협력이 필요하다.△정부, 외국인 결핵관리 강화= 레반권 씨는 한국에 친척방문비자(C3-1)를 가지고 입국했다. 이 비자로 한국에 체류할 수 있는 기간은 90일이다. 이 비자는 단기체류 비자이기 때문에 91일 이상 장기체류를 하려할 경우에는 동거방문비자(F1비자)로 변경해야 한다. 그리고 동거방문비자를 받기 위해서는 건강검진을 받아야 한다. 91일 이상 국내에 장기체류해야 할 경우 건강진단서를 의무적으로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제출해야 한다.건강진단서 의무화는 2016년 3월 이전에는 실시되지 않았지만 법무부와 보건복지부의 건강진단서 의무화 조치로 지난 3월부터 시행되고 있다. 법무부의 건강진단서 제출 의무화는 외국인 결핵관리 강화 계획의 일환으로 보건복지부와 함께 실시하고 있다.△외국인 결핵 관리 대책 허점= 보건복지부와 법무부의 계획에는 허점이 있다. 결핵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 레반권 씨는 외국인 결핵관리 계획이 발표되고 시행된 지난 3월2일 이후인 3월 말에 입국했다. 정부의 계획대로라면 레반권 씨는 이미 베트남 재외공관에서 건강검진을 한 후 건강진단서를 제출했어야 했다. 베트남에서 결핵이 발견됐다면 한국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레반권 씨가 한국에 입국한 이후의 대책에 있어서도 미흡한 점이 있다. 정부의 계획대로라면 외국인이 건강검진을 신청할 때까지는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다. 외국인이 건강검진을 하는 이유는 건강검진서를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제출해야만 체류비자를 변경연장해 주기 때문이다.그런데 체류비자 변경연장은 한국에 입국한 지 90일 이내에만 하면 된다. 따라서 체류 변경을 목적으로 하는 건강검진을 하기 위해 출입국관리사무소를 방문하기 이전에는 정부의 외국인 결핵 관리 계획에 대한 어떠한 설명과 정보를 접할 수 없다. 레반권 씨의 경우 건강검진을 받기 이전에 감기에 걸려 병원에 갔는데 이때 결핵이 발견됐다.외국인에 대한 결핵 관리가 입국시 재외공관과 공항 출입국관리사무소 등을 통해 잘 홍보되고 관리됐다면 문제는 이보다 쉬워졌을 것이다. 입국후 보건소를 통해 검진이 빨리 이뤄지고 국립결핵병원에서 저가에 치료를 받을 기회가 충분히 있었음에도 정부의 정책적 대책 미흡과 홍보 등의 부족으로 외국인은 예측하지 못한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결핵으로 인해 병원에 입원중인 레반권 씨는 친정 아빠로서 한국에 와 딸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했는데 오히려 질병으로 인해 커다란 짐이 되고 있다고 눈물을 훔치면서 빨리 베트남에 가고 싶다. 도와주면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다고 연신 눈물을 흘렸다.외국인 결핵관리를 입국 전과 입국 후로 나누고 입국 후 거소신고를 하기 전 90일 이내의 대책 등이 좀 더 세밀하게 마련될 필요성에 제기된다. 향후 외국인 결핵관리 방안이 좀 더 세밀하고 면밀하게 개선돼 외국인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정책적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 방문 결혼이민자 친정 부모 등 입국뒤 3개월간 건강보험 사각지대결혼이민자 친정 부모의 방문이 점차 늘어가고 있다. 법무부 외국인정책본부의 통계(2016년 3월)에 의하면 방문동거비자(F-1)로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은 8만6297명으로 나타났다. 방문동거비자는 자녀 돌봄이나 가사 돌봄을 전제로 부여되는 비자다. 결혼이민자 친정 부모의 방문이 늘어나는 이유로는 다문화가정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직면함에 따라 맞벌이를 해야 하는데, 자녀와 가사를 돌볼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결혼이민자 친정 부모는 한국에서 취업활동도 할 수 없고, 입국 후 3개월 이내에 의료적인 문제가 발생해도 어떠한 혜택도 받을 수 없다. 결혼이민자 친정 부모가 의료적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3개월을 경과해야 한다.국민건강보험법 제109조(외국인 등에 대한 특례)에 따라 외국인도 건강보험 자격을 취득할 수 있다. 그러나 건강보험 자격을 취득하기 위해서는 외국인등록신고(국내거소신고)를 반드시 해야 하고 입국일로 부터 3개월이 경과해야만 취득이 가능하다. 다만 유학, 결혼의 사유로 3개월 이상 국내에 거주할 것이 명백한 경우 국내에 입국한 날로부터 건강보험 자격을 취득할 수 있다.따라서 유학, 결혼에 해당하지 않는 결혼이민자의 친정 부모는 건강보험 자격을 곧바로 취득할 수 없다. 그리고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별도의 동거방문비자(F-1)를 발급받아야 한다. 또 유학생과 결혼이민자는 건강보험자격을 취득하기 이전이라도 의료기관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다. 건강보험 취득자격의 요건이 발생했으나 건강보험을 가입하지 아니한 경우에도 건강보험료를 소급해서 납부할 경우 보험혜택도 소급적용 받을 수 있다.그러나 결혼이민자의 친정 부모는 한국에 입국 후 3개월이 경과돼야만 기본적인 건강보험의 취득 요건이 발생되기 시작하기 때문에 3개월 기간 동안은 의료적 사각지대에 놓이게 된다. 또한 건강보험의 소급혜택도 자격취득 요건이 발생되는 시점부터 적용되기 때문에 결혼이민자의 친정 부모는 3개월 동안은 건강보험의 사각지대에 놓여진다.세계보건기구(WHO)는 비정규 이주자에게 의료 서비스에의 접근을 허용하는 것을 정부 입장에서 자비나 시혜로 간주하는 경향도 있지만 국제 인권법에 따르면 정부는 관할권 내의 모든 사람에게 건강과 관련된 법적 의무를 지고 있다고 규정했다.이는 비정규 이주자의 건강권은 출신 국가의 정부가 보호할 수 없는 상황이 인정될 경우 체류자격 여부에 관계없이 체류국가의 정부가 보호 의무를 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결혼이민자의 친정 부모 등 외국인 등록신고가 안된 경우에라도 의료적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대책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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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5.19 23:02

[전북일보 카드뉴스]그 해, 1980년 : 전북의 5월 (5·18 민주화운동)

#표지.그 해, 1980년: 전북의 5월#1.1980년 봄. 신군부가 민주화 요구를 짓밟을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전국 대학가는 떠들썩했다. 전북지역도 마찬가지였다.- 1980년 5월 2일, 전북대 학생 수천 명이 연좌농성하는 모습.#2.- 1980년 5월 3일, 장소 불분명. 한 청년이 무장 경찰에게 쫓기고 있다.#3.- 1980년 5월 3일, 전주. 전북대 학생과 전경이 대치 중이다.#4.- 1980년 5월 3일, 전주. 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전북대 학생들.#5.전북대 학생들은 5월 3일과 4일에는 철야 농성에 나섰다. 비상계엄 해제와 어용 총장 퇴진 등이 그들의 요구였다.- 1980년 5월 5일, 전주. 전경과 대치 중인 전북대 학생들.#6.- 1980년 5월 5일, 전주. 뒤집힌 진압차량을 살펴보는 시민과 전경.#7.- 1980년 5월 5일, 전주 종합경기장 사거리.#8.익산에서는 원광대 학생들이 나섰다. 5월 8일, 이리역(지금의 익산역)에 모인 3천여 명의 학생들은 시국토론회를 열었다.- 1980년 5월 8일, 이리역 광장에 모인 원광대 학생들.#9.재야에 있던 김대중 선생은 5월 10일에 전북 정읍을 찾았다. 내장산, 황토현 등을 방문한 그는 국정자문위원회는 도움이 되지 못하며 근본적인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80년 5월 11일, 정읍에서 열린 갑오동학혁명제.#10.한편 이를 취재한 서흥석, 김종량, 김승일 당시 전북일보 기자는 그 해 8월 13일, 다른 동료 6명과 함께 강제 해직을 당했다.- 1980년 5월 10일. 기자회견 중인 김대중 씨(당시 재야인사).#11.전국 23개 대학 총학생회가 교내 시위로 전환하기로 하면서 잠시 소강상태던 정국은 14일부터 다시 요동쳤다.- 1980년 5월 14일, 당시 전북도청 앞.전북대 학생들이 계엄 철폐를 요구하며 연좌농성을 벌이고 있다.#12.전북지역에서는 전북대, 원광대, 군산대 등의 학생 6천여 명이 거리로 나섰다.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많은 학생이 다쳤다.- 1980년 5월 14일, 당시 전북도청 앞.전북대 학생들이 경찰의 페퍼포그에 밀리고 있는 모습.#13.- 1980년 5월 14일 당시 전북도청 앞, 시위대를 진압하는 경찰.이날 전북대생 34명이 연행됐다.#14.- 1980년 5월 14일. 당시 전북도청 앞.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전북대 학생들의 신발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15.- 1980년 5월 14일, 전북대 병원.시위 과정에서 다친 학생들이 치료를 받고 있다.#16.5월 15일, 서울역에는 8만여 명이 모여 민주화를 요구한 뒤 해산(서울역 회군)했다. 같은 날 전주역에는 전주, 군산, 익산 대학생 1만여 명이 운집했다.- 1980년 5월 15일, 전주역 광장에 모인 학생 시위대.#17.- 1980년 5월 15일, 전주 도심 인근. 가두행진을 벌이는 대학생들.#18.- 1980년 5월 15일, 전주 시가지로 진출한 시위대를 경찰이 진압 중.#19.- 1980년 5월 15일 전주 도심, 경찰이 시위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학생이 길에 쓰러졌다. 책가방, 소지품과 자전거가 널브러져 있다.#20.5월 16일에 도내 대학생들은 일단 시위를 멈추고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하지만 17일, 신군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기로 했다. 사태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1980년 5월 17일 추정, 시위대를 진압하는 경찰.#21.한편 학생 시위는 대학생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5월 27일, 전주 신흥고 학생들도 교내에서 계엄 철폐 등을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 사진 또한 당국의 검열로 보도되지 못했다.- 1980년 5월 27일, 전주 신흥고에서 시위를 벌이는 학생들.#22.5월 18일은 일요일이었다. 그날 새벽, 전북대 학생 이세종이 학생회관 앞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민중항쟁의 첫 사망자였다.- 전북대 제1학생회관 앞 표지석, 2016년 5월 12일 촬영.#23.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전북일보 기자가 광주에 가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필름이 남아 있다. 당시 상황을 어림짐작할 수 있다.- 1980년 5월 20일, 집결, 도청으로, 3시라고 쓰인 채 버려진 버스.#24.- 1980년 5월 20일, 피난길에 오른 광주시민들.#25.계엄군은 학살극을 벌이며 광주를 피로 물들였다. 결국 5월 27일, 항쟁은 끝이 났다.- 1980년 5월 29일, 광주의 당시 전남도청 광장에 진주한 계엄군.#26.하지만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1985년 5월 16일, 전북대 (구)정문 인근에서 벌어진 시위.#27.- 1985년 5월 16일, 사복경찰의 항쟁 5주기 시위 참가자 연행 모습.#28.- 1995년 9월 10일, 전주 코아백화점(지금의 세이브존) 인근에서 5.18 학살자를 규명하라는 내용의 시위가 진행되는 모습 .#29.전북지역에서 5.18 민중항쟁(민주화운동) 관련 유공자로 인정 받은 이는 총 116명이었다.- 자료: 전북동부보훈지청, 전북서부보훈지청기획 신재용, 구성/제작 권혁일, 취재 남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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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5.17 23:02

[문화&공감] 고창 상하면 송림마을 '활력'

산빛이 물빛 못지않게 맹렬하다. 묵은 초록에서 산벚꽃 흩날리는 연한 분홍을 넘어 기세등등 연두로, 생생한 초록으로 번지는 그 맹렬이 정점으로 치닫는다. 산 발치와 마을이 만나는 작은 호수, 송림제(松林堤)는 그 한없는 초록물을 빨아들이고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이 맹렬과 깊이가 번갈아 수만 번, 그렇게 키워놓은 고창군 상하면 송림마을. 공동체 사업으로 걸음마를 떼고 조금씩 활력을 찾아가는 마을을 찾았다.△ 조기산제 풍습 간직= 첫 고사리를 끊을 때면 마을사람들은 목욕재계를 하고 산에 올랐지요. 그때가마을 내력을 소상히 꿰고 있는 직전 마을이장 박영준씨는 그때가 곡우(穀雨) 무렵이었다고 한다. 마침 알이 차고 살이 연한 조기떼들이 칠산 앞바다로부터 북상을 시작하는 때였다. 마을사람들은 산 못지않게 바다로도 걸음을 재촉했다. 고창에서 서해에 닿아 있는 심원면, 해리면, 상하면까지 조기가 북상 채비를 시작하면 마을도 바빠지곤 했다. 갯가로 떠밀리다시피 올라오는 조기를 건져내기 위해서다. 그렇게 뭍에서 물에서 얻어다 차린 음식이 고사리조기매운탕이다. 집집마다 이른 봄 먹을거리를 챙겨주신 하늘과 땅과 바다에 올리는 작은 제사를 준비했다. 조기산제(조기심리라고도 했다)다. 보릿고개 어렵사리 허기를 견뎠던 송림마을 사람들이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는 그 봄 풍경이다.송림마을은 송림산과 장사산이 바닷바람으로부터 마을을 든든하게 감싸안은 작은 분지에 놓였다. 차분하고 고즈넉한 정경이다.△ 공동체사업 통해 함께 걸음= 모두 17세대 47명 주민 대부분이 밀양박씨. 그야말로 오순도순 한 모둠으로 살고 있는 송림마을이 조금씩 기지개를 켜고 꿈틀거리고 있다. 꿈틀거림이 어느덧 걸음마가 되었다. 벌써 몇 발자국 걸음을 내딛고 있다.그 첫 걸음이 메이플스톤공동체사업이었어요. 지난 2015년 공동체 창안대회에 참가한 것이 계기였죠.당시 마을이장으로 공동체사업을 이끌던 박영준 씨는 송림마을이 공동체창안학교를 마치고 뿌리단계에 선정되면서 받은 300만원이 종자돈 역할을 톡톡히 했다고 한다. 마을공동 고사리 밭을 일구고, 건고사리 포장재를 개발해 마을을 알리는 매개역할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는 무엇보다 우리도 무엇인가 함께 뜻을 모아서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의 씨앗을 발견한 것이 더없이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한다.△ 오쇼 프리마켓에 먹거리 선보여= 오쇼 프리마켓은 고창군(군수 박우정)과 고창공동체협의회, 고창식도락마을체험사업단이 함께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 고창읍성 앞 광장에서 여는 프리마켓이다. 고창의 여러 가지 색깔을 가진 공동체들이 땅을 빌어 키워낸 농산물, 여럿이 힘을 모아 가공한 농제품에, 체험거리, 만들거리, 볼거리, 먹을거리를 가지고 여는 작은 장터이다. 오쇼는 빨리빨리 오시오(싸게싸게 오쇼)라는 뜻에, 고창에서 찾는 다섯 가지 쇼(Show, 보러오쇼, 사러오쇼, 놀러오쇼, 먹으러오쇼, 만들러오쇼)라는 뜻도 함께 담고 있다. 오쇼 프리마켓은 쌀빵 만드는 공동체, 발효음료 만드는 공동체, 도자기 만드는 공동체, 동물체험하는 공동체, 농사체험하는 공동체, 마을음식 발굴하는 식도락공동체 같은 고창공동체협의회 소속 서른 개 남짓 공동체가 참여해, 3월부터 시작해 지난달 30일 두 번째 장마당을 열었다.송림마을은 고사리, 콩, 녹두, 깨, 호박, 복분자, 오디, 고추 같은 농산품을 장에 내놓았다. 고창에서 아직 낯설은 형식 프리마켓을 찾은 사람들의 반응이 눈에 띠게 살아나고 있다. 어차피 첫술에 배부를 리는 없는 것. 이것이 송림마을에게는 작지만 어느덧 두 번째 걸음이다.△ 마을 동굴 황금박쥐 서식= 송림마을은 다시 생생마을 기초단계 문을 두드리고 있다. 올해 초 이장이 새로 뽑히면서 마을에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었다. 세 번째 의미심장한 걸음이다.우리 마을에는 7년 전인가부터 황금박쥐가 살고 있어요. 마을 뒤편 송림산 기슭에는 서른 개 남짓한 인공동굴이 있다. 일제 말기 서해바다를 향해 대포를 설치하려 뚫은 것이라 한다. 식민지 마을사람들의 고된 노역도 욕된 역사와 함께 갇혀 있다. 그 동굴 가운데는 얼마 전까지도 한여름이면 음식을 보관하던 냉동동굴이 있다. 동굴이 만들어지면서 마을 냉장고 역할을 해온 것이다. 그리고 5미터가 넘는 깊이 동굴 하나에는 빨간박쥐라도고 불리는 멸종위기종 황금박쥐가 살고 있다.송림마을에 찾아와 이제는 한 식구가 된 소중한 이웃 황금박쥐를 생생마을의 대표선수로 내세우기로 한 것이다. 마을 출신으로 고창을 대표하는 진을주 시인 생가(진을주동산)와 물빛 고운 송림제 사이에 황금박쥐 포토존을 만드는 것을 필두로, 마을공동창고 벽면에 황금박쥐 테마 벽화, 마을 산품을 담는 황금박쥐 포장재 개발 등을 알차게 준비하고 있다.△ 지도자의 건강한 역할분담= 공동체사업도 다시 가다듬었어요. 그전에는 없던 마을사업이라는 새로운 시도를 하며 고생하신 박영준 전 이장님은 오쇼 프리마켓을 계속 책임지고요.고교 진학과 함께 고향을 떠났다가 30대 중반 결혼과 함께 다시 고향마을에 둥지를 튼 박재만 이장(50세) 자신은 생생마을 기초단계 도전과 진행을 맡기로 한 것이다. 직전 이장과 새 이장의 건강한 협력의 출발, 싱싱하다. 두 사람의 리더가 준비하는 송림마을의 미래, 황금박쥐 힘을 빌어 절대로 멸종하지 않을 건강한 마을의 꿈이, 마지막 봄 안개처럼 피어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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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5.17 23:02

[전북일보 만화뉴스]36년 : 5·18 민주화운동

#표지.36년#1.1980년 5월 17일 밤 10시가 넘은 시각, 전북대 제1학생회관.학생 40여 명이 비상계엄 해제를 요구하며 농성 중이었다.#2.한 남학생이 여학생회장실의 문을 두드리며 다급히 외쳤다.군인들이 들어온다! 어서 피해!#3.완전 무장한 공수부대원들은 군홧발로 문을 걷어차 열며 농성 중이던 학생들을 끌어냈다. 총여학생회장이었던 문희선 씨 등 35명이 이때 체포됐다.#4.그리고 일부는 한 남학생을 쫓았다.#5.학생회관 옥상으로 쫓긴 학생은 더 달아날 곳이 없었다.#6.5월 18일 오전 1시께, 그는 주검으로 발견됐다. 온몸에 심한 타박상을 입은, 처참한 몰골로.#7.군과 경찰은 추락사로 발표했지만, 부검의는 나중에 두개골은 광범위한 복합골절 양상을 보였고 안면부, 흉부, 복부, 사지 등에 많은 타박상이 존재했다. 이들 가운데 상당 부분은 추락 이전에 발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8.곤봉과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수차례 가격당해 쓰러졌다는 증언도 나왔다.#9.이 학생의 이름은 이세종. 김제 월촌 출신으로, 당시 전북대 농학과 2학년이었다.#10.그리고 518 민중항쟁의 첫 사망자였다.#11.1995년 2월, 전북대는 그에게 명예 학위를 수여했다.79학번인 그는 입학한 지 15년이 지나 비로소 졸업했다.그리고 1998년 518 사망자로 공식 인정됐고, 1999년 광주 망월동 신묘역(4-11)에 안치됐다.#12.그가 다녔던 전주 전라고와 전북대에는 각각 그를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13.항쟁 36년.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운 故 이세종 열사와 수많은 의인들을 기억합니다.#14.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임을 위한 행진곡 (작곡 김종률, 작사 황석영)기획 신재용, 구성 권혁일, 제작 이권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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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5.16 23:02

취임 1년 김영준 한국무역협회 전북지역본부장 "기업 CEO들 체면 내려놓고 발로 뛰어야 수출 는다"

손을 대지 않고 짜는 대걸레를 만들고 직접 홈쇼핑에 출연해 제품을 만들게 된 계기와 특징을 설명하면서 엄청난 매출을 올린 ‘조이 망가노’. 그는 이외에도 흘러내리지 않는 벨벳 옷걸이를 만들고 디자인 회사까지 운영하면서 1700억원이 넘는 재산을 가진 거부로 성장했다. 생계를 책임져야하는 이혼녀에서 1000억대 부자가 된 조이 망가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최근 개봉되기도 했다. 그의 성공의 원동력은 지치지 않는 끈기와 진정성이었다.기업의 대표가 직접 상품설명을 하며, 바이어를 만나고 구매자들의 요구를 들어준다면 그것보다 더한 신뢰 마케팅이 있을까. 김영준(52)한국무역협회 전북지역본부장은 수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도내 기업이 살려면 조이 망가노처럼 뛰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부임 1년을 맞은 김영준 본부장으로부터 동안의 소회와 전북 수출의 발전 방향, 향후 사업계획 등을 들어봤다.-전북 수출기업들을 위한 기관장으로서 취임하신지 1년이 넘었습니다. 생각나는 에피소드와 소회를 말씀해 주십시오.“지난해 4월 취임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1년이 지났습니다. 전북본부장으로 온 이후 전북 곳곳을 다니며 기업인, 공무원, 유관기관 관계자, 농축수산업 종사자 등을 만나며 그들의 애로사항을 파악하는데 힘썼습니다. 어림잡아 300여 분 정도 만나 뵌 것 같습니다. 정읍의 ‘BN(범농)’이라는 업체 대표님이 참 기억에 남습니다. 육묘판(모종틀)을 만드는 회사 대표이신데, 1년에 8개월이 넘게 해외출장을 다니며, 영업을 하십니다. 육묘판이라고 해야 얼마 되지 않을 것 같고 상품 설명이 필요하겠느냐 싶지만 그분은 직접 해외에 상품을 들고가셔서 바이어들을 만나고 그들의 요구를 수렴합니다. 해외 전시회참가는 물론이고 미국시장 공략중이신데, 지난해 매출이 100억원에 육박했습니다. 이 대표님 말고도 돌이켜 보면 재미있었고 저에게 유익했던 에피소드가 참 많은데요. 이렇게 1년이 금방 지났는데 앞으로 남은 2년도 이렇게 빨리 지나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섭니다. 전북과 도민 여러분이 정을 많이 주셨는데 더욱 자주 뵙도록 노력하겠습니다.”-무역협회 전북지역본부가 1년동안 주로 추진한 업무와 정책은 어떤 것이 있나요.“지난 1년간 우리지역 업체들을 위한 해외마케팅 사업에 집중했습니다. 특히 해외 진출 역량이 부족한 업체를 위해 17차례에 달하는 해외전시회 단체참가 지원사업을 시행했고 수출 초보기업을 위한 해외 시장개척단도 2차례에 걸쳐 30여개 업체를 파견했습니다. 이 외에도 각종 정보제공 세미나, 일반인과대학생 대상 무역교육, 다문화 가족 활용 무역업체 지원 사업을 실시했습니다.”-전북의 수출이 어렵고 전망이 어둡기만 합니다. 도내 기업들을 만나면서 느낀 그들의 애로는 무엇이었습니까.“우리지역에서 제조업을 하는 기업이 5000여개가 됩니다. 그 중 무역업을 하고자 하는 기업이 2000여개 정도입니다. 하지만 2015년 기준 실질적으로 수출을 한 업체는 약 400여개 정도 됩니다. 수출을 한다고 모두가 유의미한 수익을 올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무역에 뜻을 둔 2000여개 기업중 대부분이 아직 뚜렷한 수출 실적이 없는 영세기업이라 볼 수 있습니다. 제가 듣고 보고 느낀 우리지역 업체들의 애로는 대체로 3가지로 압축됩니다. 첫째가 운영자금(주로 인건비), 둘째가 인재확보, 셋째가 정보(수출 절차, 해외시장 정보 등) 인데요. 이는 저희 무역협회는 물론 모든 지원기관 및 정부가 풀어나가야 할 숙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남은 임기 중 역점적으로 추진할 사업이 있으시다면 설명해 주십시오.“다른 지역본부 기관장들과 달리 무역협회 지역본부장은 임기가 3년 정도입니다. 수출을 위해 1년은 지역과 기업을 알아야 하고 1년은 주요업무를 추진하며, 나머지 1년은 그 성과와 지도를 해야하기 때문이지요. 그런 임기 주기 차원에서 기업들의 애로 중 세 번째, 바로 정보 및 기회 제공을 중점적으로 추진할 계획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현재 수출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 우리지역 기업들이 내실 있게 성장하여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하도록 지원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이나 전문 정보 제공 세미나 등을 통해 업체 역량을 끌어올리고, 업체가 독자적으로 해외 판로 개척을 할 수 있도록 다양하고 풍부한 해외시장 경험을 제공해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무역협회에서 시행하는 각종 해외마케팅 사업을 통해 이미 많은 기업의 해외 판로개척 역량이 강화됐습니다. 그렇게 성장한 기업이 신생 또는 영세 기업을 돕는 모습을 보며 전북 경제의 미래가 참 밝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기업 대표들이 직접 마케팅에 나서야 할까요? 수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도내 기업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전 세계 상인을 한 자리에 모아 놓은 자리가 있다고 칩시다. 여기서 나를 돋보이게 하고 나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는 절대로 가만히 점잖게 있으면 안됩니다. 필요하다면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물구나무도 서야 합니다. 그리고 ‘혹시나 이 제안이 나를 우스꽝스럽게 보이게 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버리셔야 합니다. 우리나라, 특히 우리지역 기업인 많은 분들은 ‘제안’ 을 3~4차례 이상은 하지 않습니다. 너무 점잖으시다고나 할까요. 어지간하면 만난 그 자리에서 1시간 내에 거래를 성사시키려 합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내 조건 또는 품목군과 맞지 않으면 상담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앞으로는 좀 더 장기적인 관점을 가지고 더 뻔뻔스럽게 그리고 더 유연하게, 협상에 임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 제품을 수입할 바이어가 아니라 할지라도 주변 사람을 추천해 달라던지 현지 시장 상황을 물어본다던지 어떻게든 대화를 통해 정보를 얻어내고 네트워크를 쌓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해외 전시회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스에서 가만히 앉아 바이어가 와주기를 수줍게 기다려서는 안됩니다. 부스 밖으로 나가 밝게 웃으며 눈 마주치고, 전시회장을 돌아다니며 내 제품을 사줄 수 있을 만한 바이어를 찾아다녀야 합니다. 만약 전시회가 홍콩에서 열리면 전시회에 가기 전 일전에 만났던 잠재 바이어에게 연락하여 만나 식사를 대접하십시오. 사업 얘기는 접어두고 일단 식사하며 친구가 되십시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 한 마디입니다. ‘체면은 내려 놓으셔도 좋습니다’ 우리 전북 기업인 여러분이 체면을 내려놓고 수출을 올려놓는 한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응원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김영준 본부장은] 27년 근무, 요직 두루…협회내 '수출 전략통'지난해 4월 초 취임한 김영준 본부장은 서울 출신으로 인천 광성고, 한국외대 러시아어과를 졸업한 뒤 1989년 한국무역협회에 입사했다.이후 27년 동안 근무하면서 북방지역과와 해외시장과, 유럽·아프리카 팀, 유라시아실, 그리고 러시아 모스코바 상공회의소에 파견하는 등 주요 부처를 두루 거친 무역협회 내 ‘수출 전략통’으로 직원들 사이에서 평이 자자하다.퇴근후에는 자녀의 숙제를 직접 챙기고 매년 2차례 1주일 간 가족과 캠핑을 다니는 등 매우 가정적인 성품의 소유자 이다.부드럽고 가정적인 성격으로 직원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으면서도 1000cc대 대형 오토바이를 타고 국도를 달리고 기타 치기를 즐기는 자유로운 성격을 갖고 있다.김 본부장은 “전북에 1년 정도 살아보니 전통과 문화를 간직한 지역이며, 서울 등 수도권 과도 가까운 지역이다”며 “전북에 퇴직 후 집을 짓고 전원생활을 하고 싶다”는 소망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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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세종
  • 2016.05.16 23:02

[참여&소통] 농촌공동체 살리는 방법-②

귀농인이 급증하고 있다. 2011년 마침내 1만 가구를 돌파하더니 2014년까지 4년 동안 4.26배의 귀농인구 폭증세를 기록했다. 앞으로도 도시에서 농촌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는 귀농행렬은 이어질 전망이다.그런데 매사 급증하는 모든 현상의 이면에는 부작용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떠나려는 귀농인들은 다들 준비가 잘 되어 있나. 귀농이 무엇인지, 농촌이 어떤 곳인지 잘 알고 있나. 과연 귀농은 귀농인들이 기대하는 대로 새로운 삶의 대안이 될 수 있나. 국가와 도시의 삶에 지친 국민들에게 과연 제2의 인생이라는 돌파구를 열어줄 것인가.그렇다면 농촌공동체와 지역사회는 귀농인들은 기쁘게 맞이하고 따뜻하게 반겨줄 여유나 여력이 남아 있나. 연간 농업소득 1000만원으로 대변되는 평균적인 농민들은 자기 민생고 조차 해결하기 어렵다. 귀농한지 어느덧 14년차에 접어드는 처지에서 고백하건대, 어떤 물음에도 자신있게 조언하기 어렵다. 당장, 귀농하라. 그러면 삶이 달라질 것이라고 결코 권고할 수 없다. 그렇다고 그냥, 도시에서 더 참고 살아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사람이 너무 많이 사는 도시의 문제, 사람이 너무 없는 농촌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려면 귀농 말고 더 좋은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귀농의 진실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귀농의 기술을 고민하는 셈이다.△귀농인은 지역사회 재생에 필수적인 사회적 자본= 어쨌든 귀농은 정책적으로 권장되고 장려되어야 마땅하다. 귀농인은 사람이 없는 농촌과 지역사회에 필수적인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부는 귀농인이 잘 귀농해 농촌의 주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만큼의 효과와 가치가 있는 일이다. 물론 이미 귀농인은 지역마다 혁신적 연결망을 구축하는 인적 자본으로서 대우받고 환영받고 있다.하지만 이쯤에서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귀농인들이 지역의 소중한 사회적 자본으로 역할과 책임을 발휘할 준비가 되어있는지. 기대한대로 농촌과 지역사회를 활성화하고 재생할만한 자세와 역량은 갖추고 있는지. 지역에 기여하는 사회적 자본은 고사하고, 최소한 제 가족이나 제대로 먹여살릴 재주나 기술은 갖추고 있는지. 역시 그 대답도 자신이 없다. 안타깝지만 대다수 귀농인들은 지역에서 먹고 사는 기술이나 지역의 사회적 자본으로서 역량을 배운 적이 거의 없을 것이다. 오로지 도시의 각급 학교를 다니며 시험을 잘 보는 기술과 친구를 이기고 나만 살아남는 기술만 집중해서 배웠을 뿐이다. 각종 학원에서는 취직을 잘 하는 기술이나 자본의 월급쟁이로 사는 기술만 열심히 익혔다. 정작 생활현장에서는, 지역사회 공동체에서는 쓸 모가 거의 없는 죽은 지식과 정보를 암기하느라 좋은 시절을 다 보냈을 것이다.△현장에 지역사회 전문가가 보이지 않는다= 농사를 지으며 농촌과 지역을 지키고 산 원주민들도 귀농인의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농사 짓는 기술만으로는 먹고살기도 어렵고 지역사회를 되살리기도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농촌지역에는 공동체의 활성화와 재생을 능히 책임질만한 지역사회 전문가가 너무 부족하거나 빈약하다. 운동만 알고 사업을 모르거나, 행사와 과정에만 집중하고 생활현장과 결과는 책임지지 못하는 비전공자와 무경험자가 전문가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도 흔하다.농촌과 지역사회를 되살릴 적임자는 정책의 구호와 명분만 앞세운 경제학자도, 행정공무원도, 복지운동가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물리적 수지타산을 쫓아다니는 기업가, 토건기술자, 용역컨설턴트도 아니다. 커뮤니티 비즈니스(Community Business)의 커뮤니티(사회)와 비즈니스(경제)를 두루, 조화롭게 잘 공부하고 훈련한 현장 전문가라면 적합할 것이다. 하지만 농촌지역의 공동체사업 현장에는 그런 전문가나 인적 자원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농촌지역개발사업, 사회적 경제 같은 공동체사업을 벌이는 일 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건 그 일을 맡아할 전문가를 키우는 것이다.△더불어 먹고 사는 생활기술 직업학교를= 이 학교에서는 시험을 잘 보는 기술, 남을 이기는 기술, 자본의 노예로 조용히 살아가는 기술 따위는 가르치지 않는다. 오로지 남과 이웃과 더불어 먹고 살 수 있는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고 배운다. 농사 짓는 법, 집 짓는 법, 음식 조리하는 법, 옷 만드는 법, 가구를 짜는 법, 에너지를 자립하는 법, 술을 빚는 법, 장사하는 법, 책을 쓰는 법, 그림을 그리는 법, 아이들을 돌보고 가르치는 법, 노인과 장애인을 보살피는 법 등이다.이런 학교를 설립하려면, 각 광역 및 기초 지자체는 하드웨어(H/W : 부지, 건축물 등)와 예산을, 지역의 대학과 연구소는 소프트웨어(S/W : 교육프로그램, 지식정보컨텐츠, 교육멘토 등)와 청년인력, 교수요원 등 인적 자원(Humanware)를 투자하는 상호호혜적 공조협업 방식의 프로젝트가 바람직하다.이 학교에서 1년여쯤 공부하고 훈련한 졸업생들은 마을지역사회 공동체, 그리고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등 사회적경제조직을 관리하고 경영하는 유능하고 책임감 있는 지역사회전문가로 거듭 날 수 있을 것이다. 저마다 익힌 생활의 기술을 직업 삼아 농촌지역에 삶의 터전을 잡고 안정된 가계경제도 꾸릴 수 있음은 물론이다. 지역에서 먹고 사는 두려움과 불안감은 생활기술을 익히며 지역을 먹여살릴 지역사회전문가로 훈련받는 동안 거의 해소된다.■ '농촌형 일자리 구인구직센터' 열자 - 농업소득만으로는 한계 귀농인에 취업 알선귀농해서 농부로 살려고 해도 농사만 지어서는 먹고살기 어렵다. 우리 농가의 농업소득은 평균 1000만원 정도다. 60%의 농민은 그것도 못 번다. 농가소득에서 농업소득은 30%도 채 되지 않는다. 자기 노동력, 토지, 자본을 비용으로 친다면 만성적자다.통계청의 2014년 12월1일 기준 농림어업 조사결과를 봐도 농사에만 전념하는 전업농가는 53.4%에 불과하다. 46.6%인 52만2000가구가 겸업을 한다. 부업을 하거나 품을 팔아야 겨우 먹고 산다. 겸업농가 가운데 농업수입 보다 농업외 수입이 더 많은 이른바 2종 겸업농가가 35만8000가구로 전체의 69%를 차지한다.그래서 농사 일 말고도 귀농해서 먹고 살만한 일자리가 많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래야 귀농인들이 농촌에서 먹고 살 수 있다. 우선 도시에서 경험하고 체득한 다양한 지식과 기술을 재활용할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농장 말고도 다양한 농촌형 직장이 만들어지면 취업의 문호와 기회가 확장될 것이다. 가령 농촌 일자리 구인구직센터를 열고 그 책임을 맡기면 좋을 것이다.그러나 이런 과제는 돈도, 사람도, 추진력도 없는 농촌의 힘만으로 역부족이다. 도농교류, 도농상생 차원에서 기획력과 정책실행력이 더 강한 도시 지자체에서 먼저 나설 필요가 있다. 서울시의 도시농업교류 일자리 사업 이음은 참고할만한 선례다. 서울인생이모작지원센터에서 5060세대를 위해 농촌에는 건강한 일손을 지원하고 도시 이모작세대에게는 새로운 인생을 설계할 수 있도록 돕는 프로젝트다.구체적으로 농촌 일자리를 알선하고 농촌일터를 찾는 5060 인생이모작세대에게 숙박 및 출퇴근거점 공간인 도시농민경제하우스 유목민의 집을 제공한다. 농업경작과 축산, 화훼 등 다양한 분야의 농촌일자리, 귀농에 관심있는 서울시민이면 누구나 무료로 참여할 수 있다.지자체와 민간의 협력사업으로 2014년 개소한 구례 자연드림파크의 일자리 창출 사례도 단연 주목할만 하다. 아이쿱생협에서 조성한 국내 최초의 친환경유기식품 클러스터인 이곳에는 400여명의 직원들이 일하고 있다. 이 가운데 250여명은 구례 현지 주민을 채용했다. 10%의 직원이 구례로 시집온 결혼이주여성이다. 직원들 평균연령은 37세 정도이고 모두 정규직으로 정부 최저임금보다 25% 가량 더 많은 생활임금 시급을 지급하고 있다. 구례에는 이렇게 일자리가 창출되면서 청년들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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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5.12 23:02

[문화&공감] 군산 동국사길

이 도시에선 근대문화라 쓰고 예술 이라 부른다.지금 군산은 아스러지는 옛 근대역사문화 가치를 인정받고 생기를 얻고 있다. 흉물스러운 건물이 사람의 온기로 채워지는가 하면 역사의 뒤안길로 홀연히 사라져 버릴 건물이 문화재로 당당히 거듭나고 있다. 원도심 한복판을 거닐다 보면 마치 시간여행 하듯, 세월이 켜켜이 쌓인 빛바랜 근대문화와 마주하게 된다.국내 유일의 일본식 사찰인 동국사를 비롯해 신흥동 일본식가옥(구 히로쓰가옥), 구 군산세관 본관, 근대미술관(구 일본 제 18은행 군산지점), 근대건축관(구 조선은행 군산지점)등 20여 곳의 근대문화 흔적들이 마천루 사이에서 보석처럼 빛난다.△ 역사 간직한 낡고 허술한 골목길잰걸음으로 둘러본 근대문화투어는 월명동 골목에서 한없이 느려진다. 군산 개항후 일본인들이 살았던 동네로, 부자 동네로 알려졌으며, 해방 직후 군산 유지들이 일찍이 터를 잡고 살았던 곳이다. 한때 이곳도 다른 지역처럼 신도시 개발과 공공기관 이전으로 거리에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긴 낯선 거리로 변화했었다.하지만 지금은 후미진 뒷골목에선 알록달록한 벽화와 함께 최신 K팝의 노래가 귓전으로 울린다. 그 옛날 거리의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을 보는 순간 낯선 장소에 대한 경계심은 무장해제된다. 칙칙하고 흉물스러운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컬러풀하게 단장한 동국사길 골목은 호기심을 무한 자극한다. 이곳 동국사길 골목골목의 이런 과감한 변화는 2010년부터 시작되었다.△ 문화공간이 변화 단초여러 이웃이 모여 뜻을 이루다라는 그윽한 뜻이 있는 창작문화공간여인숙이 원동력이 되었다. 1960년에 지어져 2006년까지 실제로 상봉 여인숙으로 운영됐던 곳이지만 영업을 하지 않아 흉물스럽게 방치되었던 건물을 문화공동체 감 이상훈 대표가 새롭게 재생해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이다.창작문화공간여인숙은 복합문화 전시 공간이자, 레지던시 공간이다. 하지만 이곳에선 주민과의 교류사업도 활발히 펼쳐진다. 그 대표적인 것이 마을 가꾸기-동국사길사업이다. 2010년부터 여인숙 레지던시 입주 작가, 지역작가, 지역주민들이 낡고 허름하고 제각각이던 간판들을 특색을 갖춘 멋진 간판으로 바꾸었다. 동네 벽은 스토리텔링을 입힌 멋진 벽으로 바뀌었다. 빨래터, 아기 업은 소녀 등 박수근 화백의 그림을 모티브로, 옛 군산의 마을을 상상해 그려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거리엔 조그마한 이동식 화단도 조성돼 눈이 즐겁다.이러한 변화와 함께 창작문화공간여인숙은 군산을 대표하는 관광지로 주목받고 있다. 또한 지난 2012년에는 문화관광부와 (사)한국건축가협회가 제정한 대한민국 공간문화대상으로 선정돼 국무총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공간문화대상은 일상생활 공간을 사람과 문화가 주인이 되는 공간으로 만들어 나가기 위해 제정한 것으로, 전통문화와 유산을 문화공간으로 구체화해 지역사회의 정체성과 역사성을 새롭게 확립한 활동과 장소, 그리고 한국문화의 특성과 한국인의 정체성을 일상생활 속의 시민공간으로 재창조한 활동과 장소를 선정하고 있다. 창작문화공간여인숙의 활동이 지역의 환경과 조화를 이루고, 지역주민들에게 쉼터를 제공하며, 지역사회의 역사와 문화자원을 보존활용해 주민들의 공간 환경을 개선한 사례로 인정받은 것이다.△ 예술가와 일촌 맺은 주민들동국사길은 주말이면 수백 명의 관광객과 시민들이 다녀간다. 마을에는 안내 게시판도 생겨났고, 예술창작으로 정비된 깔끔함이 돋보이는 입간판과 빨강우체통도 시선을 끈다. 그리고 동국사길 의 다양의 정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이것저것연구소는 동국사길의 쉼터이자 햇살 좋은 소통의 공간으로 운영하고 있다. 또한 커뮤니티 공간으로 마련돼 젊은이들의 발길이 오고가고 있으며 지역 문화예술을 다양한 방향으로 토론해 볼 수 있는 대화의 창으로 활용되고 있다.호락호락 문을 열지 않을 것 같은 콧대 높은 작가들의 공방은 찾아볼 수 없다. 동국사길의 작가 갤러리와 공방들은 주민들에게 마치 사랑방 오가듯 장 보러 왔다가 방문하도록 문턱을 낮췄다. 일반인 대상으로 3D 프린팅 체험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는데, 상인들은 손님의 발길이 잦아지니 즐겁고 예술가들은 그들과의 소통으로 창작의욕이 불끈 솟는다.몰라보게 달라진 동국사길 골목골목을 둘러보노라면 우리네 할머니 같은 상인들을 만날 수 있고 개성 넘치는 예술가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도 있다. 예술가들은 칙칙한 후미진 골목에 색색의 그림으로 활기를 주었고, 상인들은 제 살던 공간을 기꺼이 내주었다. 상인과 예술가의 협업을 여실히 보여주는 동국사길은 지역문화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미묘한 공생관계로 엮인 동국사길 주민들과 예술가들은 대중과의 소통을 꿈꾸며 상생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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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5.10 23:02

[전북일보 카드뉴스]배반의 MOU : 삼성 새만금 투자

배반의 MOU #표지. 배반의 MOU #1. - 있잖아, 전라북도. 그거 해봐, 그거. - 어또? #2. - 해봐! 한 번만. - . #3. - 삼성의 이번 투자는 제조업 분야의 도내 최초의 투자임과 동시에 단일그룹 산업단지로 세계 최대규모다. 새만금개발에 가속도가 붙고 새만금의 꿈이 현실로 바뀔 것이다(김완주 전 도지사, 실제로 한 말) #4. 지난 2011년, 삼성그룹과 국무총리실은 총 23조원 규모의 투자 양해각서(MOU)를 체결합니다. 2021년부터 새만금에 그린 에너지 종합산업단지를 조성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5. 당연히 전라북도는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매년 15조원 이상의 생산유발효과, 1800억원의 세수 유발효과, 5만여명의 고용유발 효과가 발생할 거라는 분석이 이어졌습니다. #6. 이를 놓고 진실 여부를 검증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함께 나왔습니다. 불과 두어 달 뒤에 전북도의회에서는 MOU의 진정성이 의심된다는 발언이 나왔고, 이 해 국정감사에서는 대국민 사기극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했습니다. - 그래도 이 때까진 약속은 약속이라는 분위기였죠. #7. 그리고 2013년. 삼성은 그린 에너지를 담당하던 신사업추진단을 해체합니다. 그린 에너지 종합산업단지 개발 계획에도 먹구름이 드리워집니다. #8.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가 감지되면서, 삼성 새만금 투자 MOU의 진실과 이행 가능성을 놓고 공방이 벌어졌습니다. - [새만금MP 변경 놓고 삼성 투자 또 논란] 2014년 10월 2일자 - [전북도, 시원찮은 '새만금 투자 쇼' 해명] 2014년 10월 16일자 - [[국토위, 전북도개발청 국감] 삼성 투자의지 의심기업유치 미흡 뭇매] 2015년 10월 5일자 - ['믿고 기다린다' 송 지사, 삼성 우회 압박] 2015년 10월 7일 #9. MOU상 투자 시작은 2021년이지만, 투자를 어떻게 이행하겠다는 계획은 그 이전에 나와야 하지요. 전북도가 다그치자 삼성은 총선 끝난 뒤 상의하자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총선 뒤에도 아무 말이 없습니다. #10. 급기야 전북도의회 의원들이 행정사무조사특위를 만들어 진상을 조사하겠다고 나섰습니다. 특위는 본회의 의결을 거쳐 이르면 6월부터 활동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11. 국내 굴지의 대기업 삼성이 한 23조원 투자 약속은 이렇게 무산될 위기에 놓였습니다. #12. 앗, 설마 우리 정부가 이란과 체결했다고 하는 42조원 짜리 MOU도? #13. 지금껏 새만금사업과 관련해서 체결한 MOU가 10%만 제대로 추진됐어도 전북은 성공했다. 단체장들이 치적용으로 체결한 기업유치 MOU가 지금 와서는 폴란드 망명정부 지폐처럼 휴지조각이 돼 날린다.([오목대 칼럼-MOU 체결의 허실] 2013년 9월 11일자) 기획 신재용, 구성 권혁일, 제작 이권중 <삼성 새만금 투자 MOU 타임라인> 2006년 4월 21일 새만금 물막이 공사 완료 2007년 11월 22일 - 새만금사업 촉진을 위한 특별법 제정안 국회 본회의 통과 2007년 12월 18일 새만금 특별법 공포 2010년 4월 27일 새만금 방조제 준공 2011년 3월 16일 정부, 새만금 종합개발계획 확정 2011년 4월 27일 국무총리실-삼성그룹 새만금투자협력 양해각서(MOU) 체결 2011년 5월 26일 전라북도청, 삼성팀 조직 계획 발표 2011년 7월 5일 전북도의회 오은미 의원, 삼성 새만금 투자 MOU 진실 여부 의혹 제기 2011년 10월 6일 전라북도 국정감사에서 장세환 의원, 삼성 새만금 투자는 대국민 사기극 발언 2012년 12월 11일 새만금 특별법 개정, 새만금사업 추진과 지원을 위한 특별법 공포 2013년 7월 2일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산하 신사업추진단 해체 2013년 9월 12일 세종시에 새만금개발청 개청 2014년 5월 10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심근경색으로 쓰러짐 2014년 9월 25일 새만금 기본계획 변경 2014년 10월 1일 전북도의회 양용모 의원, 전북도에 삼성 새만금 투자 MOU 공개 요구 2014년 10월 8일 전북도, MOU 공개 불가 입장 2014년 10월 15일 전북도 긴급 회견삼성, 사업 포기한 적 없다고 답변했다 2015년 10월 2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전북도새만금개발청 국정감사삼성 새만금 투자 MOU 관련 문제 쟁점화 2015년 10월 6일 송하진 전북도지사 삼성 새만금 투자, 믿고 기다린다 발언 2016년 3월 2일 전북도, 새만금 투자협약 이행과 관련한 삼성 답변 요구 공문 발송 2016년 3월 4일 삼성, 총선 끝난 뒤 상의 답변 2016년 3월 15일 군산시에 새만금사업 관리본부 설치, 운영 시작 2016년 4월 13일 제20대 국회의원 총선거 2016년 5월 3일 - 양용모국주영은 전북도의원 삼성 새만금투자 무산 책임 묻겠다행정사무조사특위 구성 방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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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5.10 23:02

창조적 새만금 모델 구상 김민석 민주당 대표 "새만금이 국가의 새 성장동력,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김민석 민주당 대표는 새만금사업과 관련, “규제완화는 중앙에서 판단하지 말고, 사실상의 자치입법권을 지닌 특별자치단체 만들어야 한다"며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 KTX, 인천공항을 추진하던 때처럼 대통령이 직접 주도하고, 전담비서관을 둬야만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서울 마포에 있는 민주당 중앙당사에서 본보와 만난 그는 “지금은 국가적으로 새로운 성장동력이 필요하고, 혁신경제의 판을 만들어야 한다는데 새만금이 바로 그것"이라면서 “매각하는 방식을 임대하는 형식으로 바꿔야만 땅 투기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는 특히, 새만금사업의 성공 여부는 지금이라도 단기집중을 해야한다는 점 이라면서 내년 대선때 여야의 가장 핵심적인 공약으로 삼아, 미래비전을 담아내야 한다고 역설했다.-민주당 대표로서 새만금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나 배경은 무엇입니까.“제가 새만금에 관심을 가진 지 10여년 이상 됐습니다. 2007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서면서 ‘새만금 대특구’개발을 제1공약으로 내세웠는데, 이는 당시 70% 이상 농지방침을 바꿔 친환경적 지식문화특구로 단기집중개발해 신성장동력을 만들자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께도 퇴임 후 찾아 뵙고 제 견해를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중국유학 중이던 2006년, 중국에서 한반도를 바라보니 새만금을 키워야 대한민국의 살 길이 나오겠구나 싶었습니다. 올초 민주당 대표를 맡게 되면서, 다시 ‘새만금 신경제수도’를 민주당의 대표공약으로 내세웠고 그간 연구한 내용을 담아 한층 구체화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새만금을 대한민국의 일이 아닌 호남이나 전북의 일로 생각하는 분위기입니다. 국가필수전략과제라는 확신과 집중력 없이는 새만금도 여러 프로젝트 중 하나로 지지부진해질 것입니다.”-말씀하신대로 새만금 사업은 국가사업이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마치 전북의 사업으로 인식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70년대 1차 산업화를 이끈 영남 중공업벨트가 영남만의 사업이 아니고, 충청권의 행정수도가 충청권만의 지역사업이 아니듯, 새만금도 전북만의 사업이 아닙니다. 저는 박정희 전대통령이 살아있다면 반드시 새만금신경제수도 구상에 동의하리라 확신합니다. 저와 민주당은 구체적 행정, 재정추진 방안을 담은 새만금특별법 개정안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야 어느 당보다도 단단한 콘텐츠라고 자부합니다. 서울 3분의 2 규모의 새만금은 백지 위에서 창조적 경제실험을 할 전무후무한 기회의 땅입니다. 산업화 이후 혁신화를 추동할 한중일 경제협력시대의 중심이자, 새만금-세종시-포항과 대구를 잇는 신 중원벨트의 주춧돌로 만들어야 합니다. 규제 제로의 경제자유와 공공주거공공보육의 진보적 사회공동체를 동시에 실현해서 미래세대에게 주거와 자녀양육부담에서 해방된 첨단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새만금의 비전입니다. 백지 위에서 그러한 인프라를 실현할 규모, 위치, 재원조달이 가능한 곳은 새만금뿐입니다.”-그렇다면 전세계를 둘러볼때 새만금사업이 지향해야 할 곳은 어디라고 보십니까.“탈규제와 경제적 자유라는 점에서는 싱가폴이나 홍콩과 비슷하지만, 전면적인 공공보육, 공공임대주택의 진보적 공동체라는 점에서 창조적인 새만금 모델을 만들어야 합니다. 현행 토지매각-기업유치 방식을 중단하고, 새만금 내 토지를 전면 공유화하여 임대 방식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토지매각 방식이 지속되면 새만금은 또 하나의 투기장이 될 것입니다.”-도민들은 새만금사업이 착공한지 20년이 훌쩍 넘었지만, 지지부진하다고 불만이 많습니다. 해법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힘과 돈이 집중되지 않으면 성과를 낼 수 없습니다. 국무총리 소속 ‘새만금위원회’를 대통령 소속위원회로 격상 시키고, 대통령실에 전담 수석비서관을 두어 추진력을 담보해야 합니다. 또 새만금에 특별지방자치단체를 설치해 제주도처럼 자치입법권을 부여해야 합니다. 새만금 특별회계를 강행 규정화하고, 내국세 2% 정도를 법정률로 정해 안정적인 재원을 마련해야 합니다. 새만금 토지사용권 임대 수입과 임대수입담보 ABS(자산유동화증권) 도 재원에 기여할 것입니다.” -이미 발표했던 ‘새만금 신경제수도’의 핵심은 과연 무엇입니까.“새만금 신경제수도 건설은 대한민국 제2의 성장, 지역격차해소, 호남경제융성을 위한 새로운 도전으로 산업화 다음 과제인 혁신화의 상징, 한중일 경제협력시대의 중심, 새만금-세종시-포항·대구를 잇는 신 중원벨트의 주춧돌이 될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새만금 신경제수도는 결코 전북지역만의 과제가 아니고, 대한민국 전체의 명운이 걸린 국가과제이며 저성장시대 돌파와 새로운 성장을 위한 핵심전략 과제입니다.”● [김민석 대표는] 최연소 국회의원·시련의 정치행보김민석(53) 민주당 대표는 정치적 풍운아다. 5공정권 시절이던 1985년 서울대 총학생회장으로 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요구하다 3년간 옥고를 치렀고, 28세의 나이에 총선에 출마, 나웅배 전 부총리와 200여표 차이의 접전을 벌이다 패하면서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됐다.15대와 16대 총선에서 영등포에서 출마, 두번연속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원내에 진입했다. 임기 내내 동료의원과 언론이 평가하는 최우수 국회의원, 뉴스위크와 다보스포럼이 선정하는 21세기 세계지도자에 선정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고, 김대중 총재 비서실장을 거쳐 2002년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로 이명박 후보와 맞붙었으나 실패했다.이후 그에겐 시련의 시간이었다. 노무현-정몽준 단일화를 추진한 2002년 이후 호된 비판을 받았고, 정치를 떠난 이후 각종 시련이 계속됐다.그는 민주당으로 정치를 시작했기에, 2000년 새천년민주당 창당주역으로 민주당의 적자라는 책임감이 강하다. 안철수-김한길의 새정치연합 출범 이후 민주당이 사라질 위기에서 2014년 재창당한 민주당을 후원하다 2016년 초 대표에 취임했다. 이번 총선때는 민주당 비례대표로 나섰으나 원내 진입에 실패했다. 민주당 당사 대표실에는 신익희-조병옥-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진이 걸려있는데, 이는 민주당의 정통성을 지켜온 역대 지도자들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정치를 떠난 동안 국제변호사가 되었고 아마추어 다큐멘타리 감독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뿌리는 영호남에 걸쳐있다. 부친은 영남출신이고, 전남 진도에 초등학교를 설립한 외증조부를 통해 호남에 외가의 뿌리가 닿아있다. 개인적으로 마한백제문화에 큰 관심이 있어서 이번 총선을 앞두고 한때 익산 지역 출마설이 나돌기도 했다.서울 숭실고,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했으며, 이후 하버드케네디스쿨행정학석사, 뉴저지주립대법학박사, 중국칭화대법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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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병기
  • 2016.05.09 23:02

[참여&소통] 노인대학 활성화 시급

생활의 활력소가 되고 있죠. 다른 곳에서 듣지 못하는 강의를 통해 지식을 습득하고, 친구들도 만나니 좋구요.대한노인회 전주시지회(회장 오경남) 부설 노인대학(전주시 완산구 안행로 73)에 다니는 안용주 어르신(85)은 노인대학에서 지적(知的)인 도움을 많이 받는다고 말했다. 김제 중앙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직한 후 지금은 인근 양지노인복지관 자치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일주일에 두 번씩 노인사회활동지원사업(공익형)으로 어린이집에 나가 체조와 동화구연도 가르친다.안순열 어르신(84)은 2005년부터 노인대학에 개근하는 모범생이다. 친구도 사귀고, 점심도 따뜻하게 잘 해줘 좋다면서 금암노인복지관에 다니다 알게 돼, 어느덧 11년째가 되었다고 한다. 5년 전 영감님을 먼저 보냈지만 평소 복지관에 나가 한문과 영어, 민요(장구), 스포츠 댄스를 신나게 배우느라 외로울 틈이 없다.이들 학생(?)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11월 중순에 떠나는 졸업여행이다. 2013년 중국, 2014~2015년은 제주도를 다녀왔다. 부소산성,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영광원불교성지 등 현장학습도 인상에 남는다.△고령화로 80대가 주축= 노인회 부설 전주노인대학은 1983년 노인학교로 개설했다. 2001년까지 19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그러다 2002년 노인대학으로 개칭, 올해 4월7일 제15회 입학식을 가졌다. 현재 학생은 120명이며 여성이 76명으로 63%를 차지한다. 나이는 80대가 69명(58%)으로 중심을 이루고 70대가 50명(42%), 90대도 1명이 재학 중이다. 올해 입학한 어르신은 47명에 그치고 61%인 73명이 재입학생이다. 그만큼 노인대학의 인기가 높다는 증거다. 노인대학이 열리는 매주 목요일은 오전 10시께부터 정혜사 인근 전주시경로회관 1층 강당 일대가 부산해진다. 어르신들이 일찍 찾아와 삼삼오오 자리를 잡고 이야기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12시에 노인대학에서 제공하는 점심식사를 마치고 1시부터 노래교실이 열린다. 강사의 선창과 반주에 맞춰 내 나이가 어때서 묻지 마세요 등 흥겹게 노래를 따라 부른다. 이어 50분씩 2개의 강의를 듣는다. 강의는 저명인사나 기관장, 대학교수 등이 담당하며 건강이나 행복한 노후생활, 전통문화, 웃음치료 등 다양하게 펼쳐진다.△주 1회 강의 등 年 6~8개월 운영= 노인대학은 경로대학, 노인학교, 노인평생교육원, 노인교실 등 노인 대상 교육기관을 포괄해 부르는 이름이다. 법적으로 노인대학이라는 명칭은 없고, 노인여가시설(노인복지법 제36조) 중 노인교실이 여기에 해당한다. 노인대학은 복지와 평생교육이라는 두 축에서 접근할 수 있으며 대개는 무료한 시간을 보낸다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보건복지부 자료에 따르면 2015년 노인교실(노인대학)은 전국에 1361개, 이 중 전북에 66개가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대한노인회 소속이 15개, 한국노인대학복지협의회에 가입된 노인대학이 17개, 그밖에 교회와 성당, 사찰 등 종교기관과 복지관, 대학, 민간단체 등이 운영하고 있다.운영 주체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형태는 비슷하다. 운영일수는 주당 1회가 대부분이며 여름과 겨울방학을 제외하고 보통 6~8개월간 문을 연다. 프로그램은 특별활동이나 강의를 통한 교양강좌와 함께 경로식당, 미용봉사, 생신잔치, 건강검진 등의 복지 프로그램이 제공되는 경우가 많다. 1년에 2회 정도 졸업여행이나 효도관광, 견학, 야유회 등 나들이 행사도 갖는다. 강좌는 건강증진, 교양교육이 대부분이고 교회에서 운영하는 노인대학은 예배와 노래율동, 특강 등이 추가된다.△정부지자체 관심 가져야= 흔히 노인이 되면 4고(苦)에 시달린다고 한다. 질병과 빈곤, 무위, 고독이 그것이다. 또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노인 빈곤율과 자살률이 1위다. 경제성장과 급격한 고령화가 가져온 씁쓸한 결과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노인 일자리 마련과 함께 평생교육 차원의 노인교육체제 정비가 시급하다. 하지만 정부와 자치단체는 아직 여기까지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다.이와 관련, 강원발전연구원이 2014년에 펴낸 강원도 노인대학 활성화방안 연구는 경청할만하다. 우리나라 노인대학의 문제점을 5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재정 부족 및 외부강사 섭외의 한계, 프로그램 개발상의 어려움, 노인들의 욕구 다양성과 지적 수준 상이에 따른 어려움, 강사 확보 및 자질문제, 교육환경 등이다. 이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공통된 노인대학 프로그램 개발과 전담부서 설치 및 노인교육 정책 방향 수립 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이제 노인교육에 대해 정부가 손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노후생활에 적응하기 위해선 노인들도 학습에 참여해야 하고, 노인대학의 정비가 그 대안이 될 수 있다.● 전주시 노인대학 조희정 학장 "노인은 사회 책임지는 어른 이웃나라사랑 실천 앞장서야"노인은 사회를 함께 책임지는 어른이라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합니다. 물론 사회를 바르게 이끌겠다는 사명의식도 높아야겠지요. 그런 만큼 노인들은 자신을 지키는 노력과 더불어 이웃사랑, 나라사랑을 앞장서 실천해야 합니다.대한노인회 전주시지회부설 노인대학 조희정 학장(81)은 노인대학 학생들에게 뜨거운 애향심과 국가관을 강조했다. 공직과 경제계, 정계, 언론계 등을 두루 거쳐 지난해부터 노인대학을 맡고 있는 조 학장은 평소 급변하는 시대에 노인들도 정보와 지식을 습득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지론을 펴왔다. 노인들이 지역사회 원로로서 선도적 역할을 하기 위해선 덕성 함양과 함께 시대의 흐름을 읽는 안목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그 동안 쌓아온 지혜와 연륜을 바탕으로 가정과 사회로부터 존경받는 노인이 되어야 하고, 나아가 지역사회와 국가에 봉사하는 중심적 역할을 해야 하는데, 노인대학이 그 매개역할을 충실히 하겠다는 것이다.하지만 조 학장은 예산이 너무 적어 훌륭한 강사 초빙이 어렵다면서 자치단체가 관심을 더 가져주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인구 고령화로 인해 노인대학 재학생의 주축이 80대인데 비추어 보면 평생학습 교육기관으로서 노인대학의 중요성이 크다는 것이다. 앞으로 노인들이 직면한 죽음이나 심각한 노인의 성(性)문제 프로그램을 신설하고, 노인들의 시야를 넓히기 위해 졸업여행도 국내 뿐 아니라 중국 일본 등으로 다양화할 예정이다. 매일 출근해 일을 챙길 만큼 의욕이 넘치는 조 학장은 한국JC특우회장과 전북도민일보 부사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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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5.05 23:02

[전북일보 만화뉴스]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어린이날, 어린이의 자화상

#표지.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어린이날, 어린이의 자화상#1.초등학교 4학년 아영 양이 눈을 비비며 일어납니다. 책상 위에 놓인 알람시계가 가리키는 시각은 오전 7시.#2.밥 먹으라는 부모님의 말에 식탁에 앉아보지만, 잠이 덜 깨서 그런지 아침밥이 잘 넘어가지 않습니다.#3.아영 양이 집을 나선 것은 8시. 출근길의 차량들이 쌩쌩 지나가는 통학로를 걸어 학교로 향합니다.#4.교실은 이미 시끌벅적합니다. 칠판 위에 걸려 있는 시계는 8시 30분을 가리킵니다. 시계를 보며 아영 양은 왜 이렇게 빨리 와야 하는지 모르겠어 하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것도 2013년부터 전북교육청의 등교시간 늦추기로 10분 늦춰진 것입니다.#5.오후 3시 10분, 학교 수업은 끝났지만 아영 양은 학교에 남습니다. 방과후 학교 수업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영 양이 받는 수업은 영어 과목 수업입니다. 교육청에서는 교과 과목이 아닌 특기적성 교육을 중심으로 실시하라고 하지만, 여전히 전체 강좌의 4분의 1은 교과 과목으로 진행됩니다.#6.오후 6시 46분.피곤한 눈으로 부모님이 운전하는 차에 오른 아영 양. 이번 행선지는 수학학원입니다.#7.오후 8시.학원에서는 벌써 6학년 진도를 나가고 있군요. 법으로 선행학습은 금지돼 있지만 현실은 다른가봅니다. 부모님은 수포자가 되지 않으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8.오후 9시 49분, 집에 돌아오는 차 안. 눈꺼풀이 무겁습니다.#9.돌아온 집, 아영 양은 다시 책상에 앉습니다. 학원 숙제가 있으니까요. 문제지를 풀어야 합니다.#10.공부를 잘하는 모습을 기뻐하는 부모님 모습이 너무 좋아요. 부모님이 좋아하신다면야.#11.한국 초등학생 평균 등교시각 8시 22분. 등교시간 늦추기 정책을 시행 중인 전북에서도 9시를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정책이 실시되고 있다.평균 하교 시각은 오후 3시 1분.[자료: 청소년 인권행동 아수나로전국교직원노동조합 대한민국 초중고등학생 학습시간과 부담에 관한 실태조사]#12.2015년 전북지역 초등학생 사교육 참여율은 72.4%. 사교육비 규모는 2188억원, 1인당 18만2000원.[자료: 교육부통계청 2015년 초중고교 사교육비 조사 결과]#13.오늘은 제94회 어린이날. 어린이들이 행복할 수 있게 해줘야 하지 않을까요?기획 신재용, 구성 권혁일, 만화 이권중<전주 인후초등학교 학생들이 보내온 '꿈과 희망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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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5.04 23:02

진메마을 고향집으로 귀향한 김용택 시인 "어머니 삶처럼…문학으로 우리사회 경계 없애는 데 여생 보낼 것"

10년 전쯤의 일이지만 아직 생생한 풍경이 있다. 여름이 막 지나고 있던 9월 한낮이었다. 시인과 시인의 제자인 아이들이 길 위에 섰다. 임실군 장산리 진메마을부터 천담까지 이르는 십리길. 길 위의 아이들은 걷지 않았다. 넘어질라, 뛰지 말고 걸어. 선생님은 소리쳤으나 아이들은 서지도 걷지도 않았다. 그렇게 뛰어가면 들꽃을 볼 수 없다고 소리치자 그제야 아이들이 섰다.길 밑으로 강물이 조용히 흐르고, 반짝이는 나뭇잎과 온갖 풀숲으로 넉넉해진 나지막한 산들이 엎드려 있는 동안 들꽃들이 피고 지고 있었다.이렇게 예쁜 꽃들이 있고, 맑은 강물이 있고, 저기 산을 봐라. 나무들은 또 얼마나 예쁘냐. 아이들의 눈이 반짝였다.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아 세상으로부터 잊혀진 것처럼 놓여있던 그 길은 시인이 나고 자란 진메마을을 거쳐 천담으로 흐르는 섬진강 물을 끼고 구불구불 이어진 길이다. 강이 꺾어지는 지점이면 어김없이 길도 꺾어지지만, 길이 이어지는 동안 산도 물도 따로 가지 않으니 강길 이랄 수도, 산길 이랄 수도 없었다.가을로 가는 늦여름 들꽃들이 지천이었던 천담 가는 길에 시인은 오래전, 또 다른 시인들을 불렀었다. 앞서 세상을 떠난 김남주 이광웅 시인이다. 들꽃과 강물과 나무와 숲과 산중문답. 가진 것 없이 걷는 길을 시인들은 좋아했다. 김남주 시인은 이 길을 따라 걷는 행복을 별천지 비인간이라고 했었다던가.강물 흐르는 소리가 잦아들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더 환하게 울렸던 그 길은 이제 잘 다듬어진 산책길로 모습을 바꾸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로 가득 채워지는 길이 되었다.시인은 2008년 초등학교 교사로 퇴직을 한 그 해에 고향마을을 떠났다. 그리고 8년. 시인은 다시 돌아왔다. 산과 들, 다시 지천으로 꽃이 피어나는 봄날이었다.김용택시인(68)을 만나러 갔다. 시인이 돌아온 진메마을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가 살았던 오래된 기와집은 낮은 돌담을 거느리고 더 낮게 내려앉았다. 뒤편에 들어선 새로운 공간들을 배려한 조화다.시인을 찾아간 날, 진메마을 앞 낮은 산을 가득 채우고 있어야 할 산벚나무 꽃이 보이지 않았다.밤새 비바람이 세게 불었어요. 아침에 일어나보니 산벚꽃이 다 떨어졌네요. 산벚꽃이 피어나는 지금이 제일 좋을 때인데.전주살이 시간이 길었던 모양이다. 그는 들판에 벌거벗고 서있는 듯, 세차게 불어대는 바람소리에 밤새 뒤척이다 깼다고 했다.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처음 전주로 갔을 때의 낯설음을 이제는 바뀐 환경으로 다시 안게 되었으니. 곧 괜찮아지겠죠.환갑을 넘긴지 오래지만, 시인의 웃음은 여전히 아이 같다. 인터뷰 하는 내내 그의 웃음소리가 낯설다는 그의 새로운 공간 안에서 유쾌하게 떠다녔다.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괜한 걱정이다 싶었다.-몇 년 만인가요. 고향집에 다시 돌아오신 것이.아내와 두 아이가 96년엔가 전주로 이사를 했는데, 나는 한동안 어머니도 계시고 학교도 있어서 전주와 고향집을 오가며 살다가 2008년 퇴직한 해에 전주로 갔습니다. 가족들은 20년만이고, 나는 8년 만에 돌아온 셈이군요.-떠나는 것도 쉽지 않았겠지만, 다시 돌아오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생각이 많았어요. 전주의 아파트 생활이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이미 익숙해져버려 다시 시골생활로 돌아가는 것에 자신이 없었죠. 그래도 아이들이 다 커서 떠나고 아내와 단둘이 지내다 보니 고향집이 그리워지더군요. 어머니가 요양원에 계시니 빈집이지만, 인생의 마무리를 이곳에서 하고 싶었습니다. 아내가 또 원했고요.-계기는 따로 있었죠.사실 오랫동안 고민해온 일이었는데, 임실군이 섬진강 벨트 사업에 참여하면서 결정이 빨라졌어요. 예술가와 작업실을 지원하는 사업인데, 제가 고향 집과 뒤편 땅을 기부채납하고 농림축산부와 임실군이 예산을 지원해 공간을 마련하게 됐습니다.(진메마을 그의 고향집 뒤편에는 오른쪽과 왼쪽에 단층짜리 벽돌 슬래브 건물이 들어섰다. 왼쪽은 시인의 살림집이고 오른쪽은 그의 서재를 겸한 문학공간이다.)-문학관으로 활용하기에는 규모가 작아 보입니다.문학관으로 활용되기에는 어렵지요. 제가 아직 원하지 않고요. 제가 소장하고 있는 책과 자료를 정리해 보존하면서 서재로 사용할 생각입니다. 물론 찾아오는 독자도 이곳에서 만나고 동네 주민들과 아이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시간도 구상하고 있습니다.-이름을 김용택의 작은 학교라고 지었더군요.우리 동네에 열 두 가구가 살고 있습니다. 그 중 초등학생이 세 명, 유치원생이 한명 있어요. 이 아이들을 불러서 재미있게 놀 생각입니다. 인근 지역 아이들에게도 글쓰기와 책읽기를 가르치고 글을 써보게 할 생각이에요. 작은 학교에서 하게 될 가장 중요한 일이죠.(웃음) 그 아이들이 모두 자매인데, 아이들 엄마가 제 제자예요. 동네 할머니들을 위한 시간도 갖게 될 겁니다. 이따금씩 소리꾼이나 연주자들을 부르기도 하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들어드리고요.-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데, 그들을 위한 프로그램은 없나요.그동안에도 우리 마을에 문학기행을 오는 사람들이 꽤 많았어요. 게다가 우리 동네에서 천담까지 가는 길이 잘 다듬어지면서 관광객이 몰리게 되었죠. 마을 사람들의 불편이 큽니다. 제가 집에 있을 때는 그 분들과 만나 마을이야기며 산과 강이야기, 제 문학과 삶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이 공간이 찾아오는 분들에게 쉼터가 되고, 때로는 도서관이 될 수 있겠죠. 자치단체나 다른 단체의 힘을 얻지 않고 올해 1년은 자연스럽게 제 힘으로 꾸려가보려고 해요. 여건이 된다면 임실 순창 지역의 문인들과도 만나 책읽기도 하고 글쓰기도 나누고 싶습니다. 지역에 작은 도서관이나 독서동아리가 꽤 많더라고요.- 김용택의 작은 학교가 규모를 앞세워 지어진 적지 않은 문학관들의 역할에 새로운 모범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문학관을 먼저 내세웠다면 저 또한 그런 범주에서 자유롭지 못했겠지요. 그래서 군과 다소 갈등을 겪으면서도 제가 원하는 공간을 고집했습니다. 지어놓고 보니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래전부터 군에서 큰 예산을 들여 문학관을 짓자는 제안을 해왔었지만 제가 생각해보니 문학관을 지을 만큼 문학적인 성과가 있는지 스스로 판단이 서지 않아 응하지 않았었거든요. 이번에도 사실은 17억 원 정도의 예산이 마련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땅을 제가 내놓았으니 적은 예산으로 공간을 짓고 나머지는 마을을 위해 써달라고 했어요.-그동안 강연을 많이 다니셨는데 강연 요청은 지금도 많습니까.많이 줄었어요. 강연은 퇴직 한 이후 8년 동안 본격적으로(?) 다녔어요. 안 가본 자치단체가 별로 없죠. 주말을 제외한 평일은 거의 강연하는 일이 일상이었으니까요. 처음에는 40년 가깝게 아이들과 만나다가 퇴직을 하다 보니 허허로움이 커서 강연을 더 열심히 다녔던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일상이 되었고.-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실텐데 어떤 이야기를 하십니까.대상에 따라 다르죠. 강연하면서 소통이 가장 잘되는 분들은 학부모들과 교사들이예요. 일반 대중 강연도 재미있는데, 특히 나이 드신 분들이 좋아하죠. 가끔 할머니들을 대상으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는데, 강연을 정말 열심히 듣습니다. 할머니들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확인시켜드리니까요. 저는 어머니를 통해 할머니들이 살아온 삶의 시간들을 압니다. 강연이 끝나고 나면 제 손을 잡고 우시는 분들도 많아요. 당신들의 삶에 대한 회한이겠죠.-어떤 이야기에 가장 공감하시나요.어머니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어머니가 살았던 삶이, 어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내 시를 만들어주었다고 이야기 하죠. 어머니가 말하는 것을 받아썼더니 시가 되었으니 여기계신 어머니들이 모두 시인이시라고 말합니다. 때로는 요즘 며느리들이 얼마나 싸가지 없는가 흉도 봐요. 엄청 좋아하시죠.(웃음)-그분들로서는 마음 치유가 되는 시간이겠군요.사실 치유가 되는 것은 그 분들만이 아니라 저도 치유가 됩니다. 오히려 배움은 제가 더 크죠.-강연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하는 소리도 있습니다.알지요. 그런데 저는 강연이 정말 재미있어요. 말하는 것이 즐겁고요. 제가 워낙 말하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제 일상은 다른 사람들과 좀 다릅니다. 저녁 아홉시면 자고 새벽 세시나 네시에 일어나죠. 새벽 2-3시간이 글도 쓰고 책도 읽는 시간입니다. 아침이 되면 그때부터는 할일이 별로 없게 되죠. 제 경우에는 두 시간 정도 글을 쓰다 보면 지치더라고요. 창의성도 떨어지는 것 같고. 그래서 저는 강연이 없을 때는 그냥 놉니다.-그래도 강연을 다니다보면 시를 쓰는 시간이 아무래도 적어지지 않을까요.저는 전혀 별개의 일이라고 생각해요. 우선 강연을 하는 일이 즐거우니 문제 될 일이 전혀 없어요.-선생님의 시와 강연의 역할이 같다고 생각하시나요.물론이죠. 시가 곧 말이고 말이 곧 시예요. 저는 강연을 다니면서 많은 공부를 합니다. 지역을 알게 되고, 그곳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알게 되죠. 그렇다보면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거든요. 시인이 따로 있고, 강연자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저는 제 시와 삶이 강연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철학이란 삶을 정리해주는 것이죠. 제 철학이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만나 풀어졌다가 다시 내 삶으로 들어오는 과정을 저는 즐깁니다. 나를 끊임없이 변화시키는 것은 가만히 앉아서 시를 쓸 때가 아니고 삶을 살아갈 때거든요. 그래서 저는 삶의 현장에 함께 있다는 것을 매우 소중한 가치로 여깁니다.-화제를 좀 돌려보죠. 여러 해 전, 문화예술계의 지인들과 함께 고향집에 가끔씩 열리는 학교를 열 계획은 어떻게 되었습니까.다양한 영역의 문화예술인들이 만나 그 일을 도모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 또한 즐거운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죠. 그러다 결국 안 되겠다는 판단이 섰어요. 저는 무엇을 하든 지속성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데, 자신이 없더라고요. 몇 번 주목받는 행사로 그런 일을 꾸려가고 싶지는 않았습니다.-그때 구상했던 일들을 지금 담아낼 수도 있지 않을까요.맞아요. 앞으로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을 것 같아요. 공간이 생겼으니 어쨌든 마을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도모할 생각이죠. 시를 가지고 와서 이야기도 나누고, 그것들이 모여지면 그 시들을 예쁘게 마을 여기저기에 걸어두고 싶어요. 좋은 시를 읽으면서 마을길을 걷게 하는 시간을 나누는 거죠.-시를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사람들은 그렇게 문학을 동경하게 되는 것일까요맞아요. 어릴 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문학을 꿈꿉니다. 나이가 들면 시나 에세이를 쓰고 싶어 하죠. 그래서 문학을 공부하게 되고. 그런데 사실 시를 쓰겠다는 것을 목표로 세우는 것은 잘못된 일이예요. 시를 쓰려고 하면 안 되죠. 생각을 써야합니다. 생각을 쓰다보면 시를 쓰려는 사람은 시를 쓰게 되고, 소설을 쓰려는 사람들은 소설을 쓸 수 있게 되거든요. 돌이켜보면 저는 시를 쓰려고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무엇을 쓰겠다는 생각보다 책을 읽다보니 생각이 많아지고 그 생각들을 정리하다 보니 어느 날 시가 되었던 거죠.-그것이 마음처럼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좀 더 쉽게 시와 가까워지는 방법이 있을까요.시를 많이 만나는 것이겠죠. 제가 여러 해 동안 해온 일이 있습니다. 제 두 아이가 멀리 떠나 있을 때 매일 아침 한편씩 시를 써 보냈습니다. 그러다보니 천여 편 시를 보냈더군요. 저는 시가 사람을 잘 살도록 도와준다고 믿습니다. 잘사는 방법 중의 하나는 자기가 살고 있는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이거든요. 시는 자신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눈을 가질 수 있게 합니다. 그것은 곧 세상을 이해하는 일이기도 하죠. 저는 세상을 이해하는 일을 시로부터 배웠습니다. 그래서 시를 만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를 쓰고 싶다면 우선 자기 생각을 글로 쓸 것을 권하고 싶어요. 글을 쓴다는 것은 세상을 새롭게 보는 일이고, 내가 새로워질 수 있는 일이거든요. 저는 새로워지려고 글을 씁니다.시인은 어머니로부터 삶이 곧 공부라는 것을 배웠다. 그의 어머니는 세상 어느 것에도 경계를 짓지 않았다. 어머니의 삶이 그러했다. 나무처럼 다 받아들이는 어머니의 삶을 보며 그는 삶이란 받아들이는 힘을 키우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받아들여야 나를 새롭게 세상에 그려낼 수 있습니다. 받아들여야만 나를 바꾸고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를 보세요. 경계가 없는 곳이 없죠. 분단의 우리 역사가 그렇고, 좌파니 우파니 이념의 문제가 그렇고, 학연이니 지연이니 지역주의까지 패거리문화에 익숙해진 우리 삶은 황폐해져있습니다. 그 경계를 없애는 일을 나는 문학이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제 시가 많은 사람들에게 생각을 갖게 하고 받아들이는 힘을 키워내는 통로가 되었으면 좋겠어요.도시 생활에 익숙해진 시인의 일상이 다시 새롭게 바뀌어지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다. 시인의 귀향이 반갑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은] 1982년 詩 '섬진강' 발표삶의 아름다운 풍경 서정적으로 노래김용택 시인은 섬진강 시인으로 불린다. 창작과 비평사에서 펴낸 21인 신작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온 것이 1982년. 당시 발표작이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로 시작되는 〈섬진강〉이었다.그는 섬진강 줄기가 흐르는 강변, 임실군 덕치면 장산리 진메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농사꾼의 장남으로 아들로 태어난 그는 순창농고를 졸업했지만 직장을 얻기 보다는 농사짓는 삶을 꿈꾸었다. 그러다 우연히 보게 된 교원양성소 시험에 합격해 초등학교 교사가 됐다. 스물두 살, 모교인 덕치초등학교 교사가 되고 보니 아이들을 가르치고 함께 노는 일이 얼마나 행복하고 즐거운 일인가를 알게 됐다.교사를 하면서 시인이 되었지만 처음부터 시인이 되고자 시를 쓰지 않았다. 교사가 된 후 그는 책읽기에 빠졌는데, 책을 읽다보니 생각이 많아지고 깊어졌다. 생각을 글로 써보고 싶어졌다. 그렇게 쓰여진 글은 어느 날 시가 되어 독자들을 만나기 시작했다.그의 시가 맞닿아 있는 지점은 늘 자연과 어머니와 고향마을이다. 그가 쓰는 시와 산문과 동시는 어린 시절을 지나 어른이 되고,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해 아이를 낳아 키우고, 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만나고, 시인이 되어 세상을 바라보는 오랜 세월 삶의 흔적이 아름다운 풍경이다.작고 사소한 것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깨우쳐 주며 살아온 그의 시와 삶은 따로 가지 않는다. 수많은 독자들이 김용택의 시에 마음을 주는 이유다.2008년, 38년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마무리 했지만 일상은 더 분주해졌다. 전국 각지에서 그를 찾는 강연 요청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강연에 나서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더 넓어졌다. 계층이 따로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는 받아들이는 힘을 기르는 일이 곧 사는 것임을 깨닫게 됐다.아내와 아이들이 전주로 나간 지 20년, 그가 고향집을 떠난 지 8년. 다시 진메마을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이곳에 작고 예쁜 살림집과 김용택의 작은 학교라 이름 지은 문학공간을 새로 얻었다. 시인은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꿈꾸고 있다.〈섬진강〉 〈맑은 날〉 〈그 여자네 집〉을 비롯한 열권의 시집과 〈인생〉 〈오래된 마을〉 〈콩, 너는 죽었다〉 등 여러 권의 산문집과 동시집을 냈으며 김수영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윤동주문학대상 등을 수상했다.

  • 기획
  • 김은정
  • 2016.04.29 23:02

[참여&소통] 취업난 극복방안 '국가기술자격증'

토익 고득점자는 수두룩 하다는데저희는 전기기사 하나가 없어서 늘 일손이 모자랍니다.주택관리업에 종사하는 윤인종(55대전)씨는 산업현장에 젊은 세대들의 유입이 모자란다며 우려를 전했다. 지금까지 취득한 국가기술자격증의 개수만 총 7개에 이르는 그는 자격증 취득으로 IMF를 극복해 냈다며 취업난에 허덕이는 청년들에게 자격증 취득을 적극적으로 권했다.△자격증, 국가산업 현장의 핵심 스펙= 현재 국가기술자격증은 보건의료, 운전운송, 음식서비스, 건설, 기계, 화학, 인쇄목재가구공예, 농림어업 등 26개 직무분야로 구성돼 국가 산업분야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다. 국가기술자격증은 해당 직무분야에서 영업 및 근로를 할 수 있는 허가면허라 할 수 있다. 운전면허 없이는 운전을 할 수 없듯, 국가기술자격증 없이는 특정 산업현장에 투입될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자격증 취득은 취업에 대한 선택지의 확보로도 귀결된다.△정보전기건축위험물 HOT= 국내에 존재하는 국가기술자격증은 총 527종목으로 이 중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주관하는 자격증은 479종목이다. 그 수가 많다보니 모든 자격증이 호황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산업인력공단 측은 기사 등급에서는 정보처리(사무자동화), 전기, 건축, 위험물 관련 종목이, 기능사 등급에서는 한식조리, 지게차 운전, 미용사 등이 응시자가 많은 종목으로 나타난다고 밝혔다.국가기술자격증의 경우 사회문화 전반의 고정적 수요를 바탕으로 설계, 운영되고 있어 이 같은 응시수요의 추이를 통해 실제 현장에서의 산업수요 또한 예측 가능하다. 따라서 관련된 분야에서 응시수요가 많거나 최근 각광받는 자격증을 파악하는 것도 취득 후 자격증 활용에 도움이 될 것이다.△쉬운 자격증 없다= 한국산업인력공단은 지난 2013년부터 비관련학과의 대학졸업자 등 또는 그 졸업예정자와 같은 일부 응시자격 조항을 삭제하며 자격시험 응시자격의 문턱을 높였다.또한 최근 출제되는 자격시험 문항에 기존 기출문제 출제비율을 줄이고 신 유형을 늘려 수험자 입장에서 까다로운 시험도 많아지고 있다. 현재 수질환경기사 취득을 준비하고 있는 조재환(26전북대)씨는 시험 유형이 점점 까다로워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많이 들려 자격증을 준비하면서 부쩍 부담을 느낀다며 걱정을 전했다.사무자동화산업기사 필기시험의 경우, 그간 최고 78% 가량의 합격률을 기록할 만큼 수험자들 사이에서 효자종목으로 불렸지만 지난 3월 시행된 시험에서는 26%의 합격률로 해당 자격시험 역대 최저 합격률을 기록하는 등 자격증 취득이 예전보다 까다로워졌음을 여실히 증명하기도 했다.산업인력공단 측은 이 같은 현상과 관련해 자격의 현장성과 통용성 확보를 위해 다양한 산업계의 요구를 지속적으로 반영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문제를 출제하고 평가하고 있다고 이유를 밝혔다. 따라서 자격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은 단순히 자격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암기식 공부뿐만 아니라, 실제 현장에서 활용 가능한 실무능력과 이론의 이해 등을 병행하는 것이 중요하다.한편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는 수험자들을 위해 자격시험 홈페이지(http://www.q-net.or.k)를 통해 기술사를 제외한 전 자격종목의 출제기준을 공개하고 있다. 따라서 국가기술자격을 준비하는 수험생의 경우 공단이 공지하는 출제기준, 공개문제 등의 정보 등을 지속적으로 확인해야 한다.△실무능력 없는 자격증 빛 좋은 개살구= 자격증 취득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실제로 해당 기술을 얼마나 활용할 수 있는가이다. 윤인종 씨는 실제 현장에서도 2년 이상 관련된 단순 업무경력이 있는 사람에 한해서만 자격증을 선임해 주고 있다며 자격증 취득을 해도 말단에서 경력을 쌓으며 기술을 익힐 각오는 해야 한다고 전했다.한국산업인력공단 측도 자격증은 무조건적인 스펙 쌓기로 취득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본인이 관심 있는 분야에 적합한 자격종목을 검토해야 하며, 단순히 시험 합격을 목적으로 공부하기보다는 본인이 원하는 직무역량을 향상시키는 데 목적을 두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수험생들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격시험 응시제한 살펴보기] 주요 자격요건 '학력', 軍 경력도 활용 가능국가기술자격시험에 모든 사람이 응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는 산업기사급 이상의 자격시험에 대해 각각에 준하는 응시자격 요건을 운용하고 있다.우선 학력을 활용한 자격요건의 경우 산업기사는 응시하려는 종목과 관련된 학과의 2년제, 또는 3년제 전문대학의 졸업자이거나 관련 학과의 4년제 대학에 2년 이상을 수료한 사람에 한해 응시자격을 부여하고 있다. 기사의 경우에는 관련학과 4년제 대학 졸업자에 한해서만 학력을 활용한 응시자격이 부여된다.그렇다면 취득하려는 자격증과 관련된 학과를 졸업하지 않은 사람은 해당 자격시험에 응시할 수 없는 것일까?다행히도 그렇지는 않다. 산업기사의 경우 해당 자격종목과 관련된 실무경력이 2년 이상 있을 경우 비전공자에 대해서도 응시자격을 주고 있으며 실무경력이 4년 이상이면 기사시험에도 응시가 가능하다. 또한 관련학과 2~3년제 대학 졸업자들도 실무경력이 각각 2년, 1년씩만 있으면 기사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각각의 실무경력 햇수를 줄이기 위해서 기능사를 먼저 취득하는 방법도 있다. 기능사 자격시험의 경우 응시자격에 제한이 없어 누구나 응시가 가능하다. 해당 종목의 기능사 자격을 취득하면, 산업기사기사 자격시험 응시에 필요한 실무경력 햇수가 줄어든다. 만약 군필자라면 자신이 전역한 군병과를 이용해 실무경력을 대체할 수 있다. 이 경우 기초군사훈련기간을 제외한 약 1년7개월여의 기간이 실무경력으로 인정된다. 한국산업인력공단 자격시험 홈페이지 큐넷을 통해 자신의 병과가 어느 분야에서 실무경력으로 인정되는지 확인할 수 있다.한편 응시하려는 자격시험과 관련된 전공을 졸업하지도 않았고, 실무경력조차 없음에도 산업기사 자격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방법도 있다. 일부 전공제한이 없는 산업기사 자격증을 취득해 유사직무분야 산업기사 자격시험에 응시하는 것이 그 방법이다.현재 운용되는 국가기술자격증 중 정보전산 등 일부 분야에서는 2~3년제 대학을 졸업했거나 4년제 대학을 2년 이상 수료한 사람에 한해 전공의 제한 없이 취득할 수 있는 자격증이 존재한다. 이 경우 주로 사무자동화산업기사나 정보처리기사 등이 많이 이용된다. 해당 자격증을 취득했다면, 유사직무분야에 한해 다른 산업기사 자격시험에 곧바로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이를테면, 사무자동화산업기사 자격증이 있다면 전기관련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곧바로 유사직무분야인 전기산업기사에 응시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방법을 활용한다면 처음 목표했던 자격증에 추가로 다른 자격증을 취득할 기회도 주어져 경쟁력 향상에 일석이조의 효과를 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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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4.28 23:02

[문화&공감] 마을 이야기 콘텐츠化 고창 반암마을 사람들

옛날 옛적 신선이 놀러와 차일봉에서 잔치술을 마시다가. 고창 아산면의 반암마을 사람들은 마을 이야기를 그렇게 시작한다. 선운산 자락으로 굽이치는 인천강 모래톱 위에 기묘하게 우뚝솟은 병바위가 있어 그로부터 마을이 열리기 때문일까. 1750년에 제작된 <해동지도>에도 나타나 있는 병바위(壺岩)는 말 그대로 병 모양새를 닮았다. 신선이 마시던 술병이 거꾸로 꽂혀 병바위란다. 이웃에 호암(壺岩) 마을이 있다.△전북 8대 명당으로 알려져=마을을 둘러싼 산세나 들녘은 예사롭지 않은 자연지형으로 이방인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며, 거기에 더해 오래도록 살아온 인간의 흔적은 인문적, 풍수적 경관으로 흐르고 흘러 잊혀질 듯 말 듯 많은 이야기거리들을 제공해주고 있다. 인촌 김성수의 할머니 묘가 있어 전라북도 8대 명당으로도 알려졌다. 선비 김길중(1882-1949)은 병바위 위에서 주변의 일품 8경을 한시로 읊었다. 마을 이야기들을 최근 콘텐츠화한 것이 반암마을 풍수담론이다. 그 절정은 아무래도 정감록 십승지 이야기겠다. <정감록>에 십승지(十勝地)라 하여 전쟁, 흉년으로부터 피신해 살기 좋은 열 곳이 기록되어 전해지는 바, 그 한 곳이 바로 반암마을이라는 것이다. 원래는 부안군의 변산으로 지목되어 왔으나, 2012년 고창군의 연구용역 결과 고창의 반암으로 밝혀졌다는 것이다. 이는 도내 일간지들이 보도하여 알려졌고, 이 마을 출신의 풍수학자 김상휘 박사가 이전부터 주장했다.△농촌마을 개발사업 시행착오=명당의 땅이니 십승지니 하며 조명되는 것만으로도 반암마을은 복받은 동네다. 그 기세로 반암마을은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으로 54억원의 정부지원을 받는다. 2007년의 일이다. 테마파크가 조성되고 주민참여로 반암권역영농조합법인이 설립되었다. 풍천장어, 참게, 복분자, 자생녹차를 특산물로 내세우고 복분자 체험, 인천강 뗏목타기, 풍천장어와 참게 잡기, 경관 볼거리 등으로 농촌테마관광의 명소로 자리잡겠다는 의지가 컸고 주민들도 그렇게 기대했다.그러나 초기에만 잠깐 반짝였다. 생각대로 명소로 자리잡기는 커녕 주민간 불화와 갈등이 커지는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반암마을은 한국전쟁 때의 인민재판 후유증이 한 켠엔 아직도 남아 있다. 반암리 601번지는, 맑스주의의 역사유물론에 기반해 조선경제사를 연구한 역작 <조선사회경제사>와 <조선봉건사회경제사>로 유명한, 그리고 해방공간 시기에 좌파 정치가로 활동하다 월북하여 최고인민회의 의장까지 역임한 동암 백남운(1895-1979)이 태어난 곳이다. 백남운이야 전쟁 전에 북으로 갔으니 무관한 일이겠으나 학살 피해를 입은 집안의 원한은 그와도 연루시키는 모양이다.△역사문화자원 관심 가져=반암권역사업은 애초부터 방향을 잘 못 잡은 것일 수도 있다. 겉보기 성과와 소득증대사업에 치중했다. 먹고 살기 힘들어지는 농촌마을이다보니 주민소득사업에 집중한 것은 당연한 일일 터, 그러나 관광객 유치와 돈벌이를 앞세우기 전에 주민들 스스로 공동체적 연대감을 형성하도록 하고 이해관계에 얽혀 마을이 불신하고 분열되지 않도록 지속적인 프로그램 설계가 진행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마을의 풍부한 역사문화풍수 자원들을 콘텐츠화하는 것도 세심한 배려와 방식의 문제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백남운을 예로 들어보자. 그는 마을의 자랑으로 내세울만한 대단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태어난, 부친 한학자 백낙규가 운영한 초당은 백남운이라는 이름 석자도 없이 폐허로 방치되고 있다. 피해자 후손의 원한이 남아 있기 때문일까. 그 원한은 특히 이념적 비극에서 비롯된 바 크기에 마을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는 역사적 치유 프로그램을 통해서 풀어나가는 것도 한 방법일테다.반암마을 사람들은 올해 작은 사업 하나에 참여한다. 전북문화관광재단이 주최하고 고창학연구회가 주관하는 지역특성화 문화예술교육 사업이다. 고창학연구회의 오강석 대표가 작년에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주련(기둥이나 벽 따위에 써붙이는 글귀) 11점이 반암마을 김성수 조모 재실에 있음을 발견하였다. 여러 언론들이 보도했다. 반암마을의 역사문화적 콘텐츠에 김정희 주련이 추가되었다. 반암 역사문화의 새로운 상징이 발굴된 것이다.이 상징은 전문가들의 몫으로만 돌리지 않고 주민들의 문화적 의미망으로 가져가자는 게 오 대표의 생각이다. 교육 활동을 주민참여 방식으로 진행하면서 반암마을 사람들의 문화공동체적 관계를 새롭게 조성해보자는 취지다.△ 주련 계기 문화로 소통나서=이 마을에 김정희의 주련이 왜 있을까. 오 대표는 반암마을이 1840년 김정희의 제주도 귀양길 행적지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글을 남기지 않았을까 추정한다. 인천강 별빛을 보았을까. 주련 중에 하나는 귀양길 강 물결에 별빛도 따라 움이네라는 소동파 시구로 귀양길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한 주민은 마을에 김정희가 지나갔으면 전해질텐데 그런 이야기가 전혀 없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고창학연구회는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이번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추사의 길을 만들어나가게끔 할 계획이다. 김정희의 반암마을에서의 행적을 조사하여 스토리텔링하겠다는 것이다. 마침 선운사 성보박물관에 김정희가 직접 짓고 써준 백파율사비가 보관되어 있어 마을 사람들의 탁본 체험도 마련된다.교육이 시작된 4월,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어 제각기 관심을 표명하고 있지만 아직 간보고 있는 모양새다. 광역사업 후유증이 남아 있어 그런 걸까. 당시 그렸던 벽화 인물화도 지우고 새로 조성해야 할 판이다. 그 사이 세상을 뜬 어르신들이 있어 마치 영정사진같다는 공론이 돈다.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병바위 옆 두암초당에서 만정 김소희가 15살 때 득음을 했다고 한다. 이제 마을 사람들이 득음하려나 보다.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자기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반암마을 사람들에게 다시한번 기회가 왔다. 서로 신뢰를 쌓는 문화공동체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기회다. 그래서 교육 프로그램의 진행자나 마을 주민들의 마음이 더 소중해진다. 이 시대 민초로 살아왔을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가 직접 표현되고 소통되고 공감되는 스토리텔링, 풍부한 역사-문화-풍수 자원들과 함께 사람들의 감동과 향기가 울려 퍼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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